크노소스-그리스의 원형 미노아 문명 지은이:알렉상드르 파르누 출판사:(주)시공사 봉사자:박진선 제1장 미지의 땅 19세기 유럽인들은 크레타섬을 거의 잊고 있었다. 몇몇 탐험가들이 그곳을 탐험하기는 했다. 15세기의 피렌체 출신의 부온델몬티가 그곳을 탐험했고, 16세기에는 프랑수아 1 세가 박물학자 피에르 벨롱을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에 파견했으며, 18세기에는 포코 크와 사바리가 크레타섬을 탐사했다. 근대인들은 사실 고대 작가들이 쓴 글을 통해서 그 섬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 록에 나타난 크레타섬의 모습은 모호하다. 즉 그 섬은 제우스가 태어난 섬인 동시에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가 싸워 물리친 황소의 섬이며, 법률과 예술의 고향이다. 또한 해적과 위선자들의 고향이며 정의의 고향이자 당당하고 격렬한 힘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 제우스와 에우로파 사이에 태어난 전설적인 인물 미노 스이다. 미노스는 변덕스럽고 잔인하며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아테네인들로 하여 금 라비린토스에 갇혀 있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총각 7명과 처녀 7명을 바치게 했 다. 그는 또한 현명한 왕이었으며 제우스의 법을 지키는 입법자였다. 그리고 공정해서 죽은 다음에는 지옥의 심판관이 되었다. 고대에 크레타섬 사람들에 대한 견해는 크레 타 시인 에피메니드(BC 6세기)의 다음 표현처럼 매우 적나라했다. "영원한 위선자, 더러운 짐승, 게으른 배불뚝이." 별로 인기 없는 여행 크레타섬은 오랫동안 이러한 평판을 받고 있었으므로 19세기 초 그리스 본토를 여행 하는 부유한 유럽인에게는 별로 호감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부유한 유럽인들의 눈에 크레타섬은 아테네나 오리엔트로 가는 길목의 표지판에 불과했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 은 "오리엔트로의 여행"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오른쪽으로 크레타섬의 아득한 봉우리 들이 솟아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의 높다란 돛처럼 눈 덮인 이다 산괴가 보 였다." 몇몇 탐험가들은 크레타섬에 체류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817년 독일의 식물 학자 지버, 1834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로버트 패슐리, 1857년 아테네주재 프랑스 연구원인 조르주 페로와 레옹 트농, 1864년 영국의 시인이자 수채화가인 에드 워드 리어, 1865년 영국의 해군대장 스프랫 등이다. 그들은 그 여행에서 무엇을 찾아 냈을까? 크레타섬은 베네치아 시대의 칸디아(메갈로카스트로가 되었다가 독립 이후 이 라클리온이 됨)나 로마 시대의 고르틴을 제외하고 눈에 띄게 파괴된 곳은 없다. 탐험 가들은 동전과 입상 조각, 묘비명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고대 지리책과 비교해 파괴된 곳을 확인하고, 미노타 우로스가 갇혀 있던 라비린토스나 주크타스산 위에 있는 제우 스의 무덤처럼 민간설화로 명맥을 잇고 있는 고대 전설을 기록했다. 그들은 그리스나 로마의 고대 문명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7년에 크노소스를 방문한 페로는 이렇게 애석해 했다. "고대 크레타 최 고의 도시이며 로마에게 정복될 때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던 크노소스는 폐허조차 남아 있지 않다. 남동쪽으로는 칸디아가 위치한 작은 평야가 내려다보는 언덕 위로 가난한 마을 마크리티초가 고고학자에게 옛날 그곳에 거대한 건축물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작 형태조차 알 수 없는 벽돌 주춧돌의 파편 몇 개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 러한 애석함에서 어떤 이들은 다른 곳에서 발굴해낸 것을 크레타에 연결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프랫은 고대인들이 크레타가 그리스 조각의 본거지였다고 한 것을 근거로 1820년 밀로섬에서 발견한 '비너스'를 가상의 크레타파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오리엔트로 가는 길 그런가 하면 그 섬의 풍광은 그림처럼 정취가 있다. 즉 수많은 깊은 동굴들, 올라갈 수 없는 험한 산들, 상록수 플라터너스나 야생 염소 같은 원시 동식물군이 있었다. 이 러한 자연환경은 1845년 파리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관심을 끌어, 보르도 저연과학대 학 교수이며 ''크레타섬의 자연 안내''의 저자인 빅토르 롤랭을 그 섬에 파견하게 되었 다. 크레타섬의 생기 넘치는 모습 또한 주의를 끈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 정교도가 섞여 사는 마을들, 크레타섬의 붉은 토끼풀로 만든 의복이나 이국적인 수공예는 외국인을 열광 시켰다. 패슐리는 그의 여행기를 장식한 민요를 정성들여 수집했다. 크레타-오스 만 사회는 여행객들에게 낯선 느낌, 오리엔트적인 감각을 이렇게 제시해 주었다. "창문 도 없는 낮고 하얀 집과 마른 잎으로 덮은 납작한 지붕들, 그리고 얼굴을 베일로 가리 지도 않은 아랍계, 또는 누비아족의 이슬람 여자들이 집 앞에 앉아있고, 한편 여자들 은 아름다운 청동상 같은 모습으로 커다란 붉은 점토 항아리를 두 팔로 머리에 이고 우물가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다미에트나 알렉산드리아 근처의 델타 해변 어딘가 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페로) 혼란의 땅 그런데 이 오리엔트 지방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 정교도들은 터키어도 아랍어도 모르며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때로는 몰래 세례 를 받고 그리스식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금세기 초의 한 탐험가는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이 나라는 극히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미노스 궁전과 베네치 아 공화국이 설치한 보루, 카톨릭과 이슬람교, 페니키아 문제와 오리엔트 문제, 예술, 종교, 정치, 역사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 가난하고 예속된 상태 에 있던 크레타 사람들은 재빨리 외국인들의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투어 터키의 약탈을 고발하도록 했다. 크레타섬을 탐험하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었으며 거의 한 세기 동안 위헌한 모험으 로 여겨졌다. 말라리아가 몇몇 지역에서 풍토병으로 기승을 부렸고, 길을 확실치 않았 고, 도로상태도 엉망이었다. 1907년에도 말을 타고 칸디아에서 파이스토스까지 가는 데 여전히 11시간 반이나 걸렸다. 오스만 정부는 변덕스러워 예측할 수 없으며 크레타 섬 주민들은 거칠고 경계심이 많았다. 끓어오르는 섬 이 지역에 대한 서구 탐험가들의 관심이 유난히 줄어든 것은 19세기에 이 지역의 정 세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1830년 이후 독립을 이룩했지만 크레타섬은 자취 권을 획득한1821년부터 1898년까지 계속된 소요와 군중 봉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1867년 오스만 정권에 반대하는 크레타 사람들의 봉 기에 뒤따른 피의 탄압을 보고 빅토르 위고는 벨기에 신문 "오리엔트"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발표했다. "왜 크레타섬에는 혁명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신이 크레타섬을 세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고 터키를 가장 형편없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크레타는 생산물이 있으나 상업이 없고, 도시는 있으나 도로가 없고, 마을은 있으 나 오솔길이 없으며, 항구는 있으나 하역시설이 없고, 강은 있으나 다리가 없고, 어린 이는 있으나 학교가 없고, 권리는 있으나 법이 없고, 태양은 있으나 빛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며... 에테아르크와 미노스 나라에서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서투르게 하는 주인 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제2장 성급한 사람들 19세기 후반 정치적 혼란이 30년간 계속되었는데도 크레타섬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관 심은 여전했다. 사실 크레타섬을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기술하고 있 는 고대의 텍스트들과 크레타섬의 폐허가 된 초라한 겉모습과 철저한 발굴의 필요성을 역설한 초기 탐사기의 대조적인 내용이 고고학자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게다가 각기 다른 곳에서 행해진 몇몇 발굴작업을 통해 이 섬의 역사가 본토의 역사보다 더 복잡했 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프랫이 동쪽 끝에 있는 필라이카스트로 를 방문했을 때 이웃 마을인 안가티아의 주민들은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개방된 묘지 를 하나 보여주었다. "나는 최근에 개방된 석관의 파편을 보았다. 그 석관의 내벽은 조 잡하게 장식된 테라코타로 되어 있었다. 다른 조각들은 이 도시의 석관이나 관들이 이 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파편들 중 하나는 옆 마을 사제 로부터 얻은, 이상하게 생긴 테라코타 상이었다. 이 테라코타 상은 페니키아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였으며, 오리엔트 지역과 서방 사이의 무역에 이용된 기항지나 페니키아 도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것이 아닌 크레 타섬에서 발견된 유물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작업중인 고고학자들 1880년경 독자적으로 또는 학술기관을 대표하여 크레타섬을 탐사하는 고고학자의 수 가 점점 많아졌다. 사실 서구의 열강들은 19세기 후반에 아테네에 연구기관들이 창설 했다. 프랑스 연구원은 1846년에 창설되었고, 미국 연구원은 1882년, 영국 연구원은 1885년, 이탈리아 선교단은 1898년에 창설되었다. 그리스의 일부 지역들과 마찬가지 로 크레타섬은 유럽인들이 탐내는 땅이었으며, 유럽인들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탐사권을 신속하게 얻어내고 싶어했다. 이 시대의 탐사가들 중에는 특히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 타라멜리, 마리아니와 프랑 스 출신의 오술리에, 주뱅, 드마르뉴, 영국 출신의 마이어스와 에번스, 독일 출신의 파 브리시우스아 슐리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레타섬 출신으로는 미노스 캍리카이리 노스나 조제프 하치타키스가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의사이자 대학자인 히치타키스는 그 도시 최초의 고고 박물관의 기원인 된 학회(칸디아의 크레타 연구회)를 조직한 장 본인이다. 이 학회 연구원들은 크레타섬을 샅샅이 측량하고 고대의 유물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 찍고 기록하고 수집했다. 그들의 열성적인 활동은 다른 탐사자들이 내놓 은 무성의한 보고서와는 대조적이었다. 페로는 이렇게 감탄했다. "섬의 해변을 탐사하 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탐사자들의 주위로 항구의 흔적들, 바위를 깊게 파서 만들었 거나 많은 비용을 들여 단단한 시멘트로 만든 저수통의 흔적, 멀리 있는 수원에서 도 시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여기저기 뚫어놓은 구멍, 산허리에 있는 뾰족한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끊어져버린 수로의 잔재들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탐사들의 눈 앞에 크레타의 라비린토스란 이름으로 알려진 채석장으로부터 강대한 고르틴의 모든 건축자재들이 나온 것이다. 마침내 지배자로서 모든 주민을 노예로 삼은 그리스가 모 든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창조해낸 풍요롭고 멋들어진 다양한 유적들이 사방에서 모 습을 드러낸다." 1894년 페로와 시피에는 그들의 공저 "예술사"에서 크레타섬에서는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그 섬을 빠른 시일 내에 발굴하고자 하는 그들의 희망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1890년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오르시와 뜻을 같 이 하게 되었다. "고대에는 그렇게도 유명했던 크레타섬이 오늘날에는 고고학자들에게 미지의 땅이 되었다." 20세기 벽두에 크레타섬은 이처럼 고고학의 이상향이 되었다. 그때까지 버려져 있던 하나의 섬에 왜 이러한 관심과 이러한 조급함을 갖게 되었을까? 호메로스와 크레타섬의 100개 도시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1870)와 미케네(1870) 발굴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태 도를 바꾸어놓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 발굴은 유럽에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 다. 미케네의 보물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풍부하고 발달된 선사시대의 문명을 역사의 한 시대로 자리매김해 줌으로써 고대 문명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뒤엎 었다. 그러나 장시 슐리만이 훌륭하게 증명한 것처럼 미케네와 트로이에서 전실이 사 실대로 증명되었다면, 크레타에서도 그것을 증명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호메로스는 이렇게 기술했다. "포도줏빛 바다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물에 둘러싸인 크레타섬은 아름답고 비옥하다. 크레타섬 주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시는 90개 가 있다. 그곳에서는 아카이아족, 용감한 크레타섬 원주민, 키도니아족, 도리아족과 고 귀한 텔라스기족의 세 부족들 등 온갖 종족의 언어들을 들을 수 있다. 그 섬의 도시들 중에는 위대한 제우스의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고, 미노스가 9년 주기로 다스린 대도시 크노소스가 있다." 고고학자 호메로스가 "일리야드"에서 언급한 90개의 도시를 크레타섬에서 찾을 수 있 다고 생각했다. 이미 1857년에 아테네의 프랑스 연구원 회원인 트농은 그 섬에 두 차 례에 걸쳐 장기간 체류하고 나서 비명문학 아카데미에 '크레타의 100개 도시'라는 제 목의 논문을 제출했다. 게다가 슐리만이 발굴해낸 것들은 미케네 세계의 기원을 페니 키아나 이집트에서 찾을 것을 제안했다. 북유럽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 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에게해, 더 정확히 말해서 미케네 세 계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 그 이후로 고고학자들의 관심은 제우스의 섬으로 집중되었고, 이후 그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심은 호메로스가 그 섬의 수도라고 한 크노소스로 집중되었다. 그런데 케팔 라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고고학의 발굴지가 되기 전에 먼저 학자들간의 격렬한 정치 적, 외교적 싸움장이 되었다. 크노소스는 1878년 에스파냐의 영사이다. 크레타의 도매상인으로 미노스 칼로리노스 라는 숙명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주도한 첫 번째 발굴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커다란 항아리들과 피토스라 불리는 항아리들, 그리고 중요한 건축물의 잔해가 발견되 었다. 이 발굴은 1881년 이후 학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점령이 계속되 는 한 그 섬에서 발굴작업이 행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크레타섬 사람들의 적대감으로 인하여 작업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크레타 사람들은 민중봉기가 일어날 경우 그 유물들이 적군이 이스탄불로 가져가지 않을까 염려했다. 크테타섬의 총독 포티아데 스 파샤는 1881년 미국 정부의 발굴권 청원을 거절했다. 그 발굴작업의 대표자인 스 틸만 영사가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이어진 크레타 사람들의 봉기에 연루되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슐리만 역시 1886년에 빌헬름 되르펠트와 함께, 1889년네는 단독으로 탐사한 그 장소 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면서 제 연구를 끝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크레타섬에 있는 크노소스 왕들 의 선사시대 왕들의 선사시대 왕궁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해 3월 17일 자신 의 의지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저는 100명 정도의 인원을 동원하 면 1주일 내에 발굴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본토에서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슐리만은 오스만 정부의 무성의와 땅주인들 의 욕심에 부딪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시간을 갖지 못했다. 1890년 그가 사망한 후 이탈리아인 페데리코 알베르를 비롯하여 특히 프랑스인 알드레 주뱅과 영국인 존 에번스가 발굴허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1891년 크레타섬을 두 번 탐사한 주뱅은 아 테네의 프랑스 연구원 원장 오몰의 지원으로 토지 매입 협상을 벌였는데, 오몰은 그해 이런 편지를 썼다. "내 생각에 크레타섬은 가장 놀라운 유적과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 한 정보를 감추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독일 사람들이 크노소스에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만 한다." 프랑스는 그 지역을 얻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 다. 그런데 영국인 에번스는 1894년부터 프랑스 몰래 협상을 벌여 1899년 마침내 그 지역을 일부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게오르그왕이 개인적으로 영국 고고학자를 지 원했던 것 같다. 프랑스 연구원과 영국 연구원은 그 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편 1897년에는 1891년부터 1896년까지 여러 번의 소동으로 예고되었던 크레타 사 람들의 마지막 봉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봉기는 크노소스와 관련된 흥정들을 방해했 다. 유럽 열강들은 오리엔트와 아프리카로 가는 길목인 지중해에 위치한 전략 지역에 서 일어난 봉기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유럽 열강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조치를 취했 다. 즉 그 섬은 1898년에 신탁통치를 결정한 강대국들의 감독하에 자치권을 획득했다. 섬의 남부엔 이탈리아인, 중부는 영국인, 동부는 프랑스인, 그리고 서부는 러시아인이 분할, 통치했다. 그리스왕의 아들인 미래의 게오르그 2세는 임기 4년의 위원장이 되었 다. 크레타섬은 1913년 그리스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앞선 1900년에야 실제로 크노소스 발굴이 시작되었다. 제3장 그리핀의 나라 모든 방면에 두루 정통한 학자 에번스가 크레타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삶의 한 고비를 넘겼다. 1851년 부유하고 교 양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았다. 제지공장 주주인 그의 부친은 저명한 선사학자였으며 중요한 고고학 수집품을 소유한 권위 있는 고고학자였다. 그는 1859년 프랑스에서 선사학자인 부셰 드 페르트의 연구 결과를 평 가하는 위원회에 참여했다. 아서는 부친의 후광을 업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판에 박힌 대학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사업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이복 누이는 그를 이 렇게 평가했다.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프랑스-파리 코뮌 시기에 그는 파리에 체류했다-와 핀란드, 라플란드, 그리고 그가 1877년에서 1882년까지 "멘체스터 가디언"의 공식 통신원으로 발견되어 있던 중앙 유럽을 여행했 다. 그는 라구사(현재의 두브로브니크)에서 6년간 머물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알바니아를 탐사하는 등 이 지역의 민족학, 고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시장에서 구입하거나 영국에서 즉흥적으로 행한 발굴을 통해서 얻은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하여 그의 부모는 때로 순록 가죽 냄새로, 또 때로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꾸러 미들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열렬한 자유주의자인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의 노리개로 전락 한 소수 민족을 옹호했다. 그는 약탈이 행해진 곳을 조사하여 그 기록을 1878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발행했다. 그는 그 책에서 슬라브 민족의 문명에 관심을 갖자고 영 국에 호소했다. 그는 투르크나 오스트리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즉각 인도 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는 고고학은 하나의 구실에 불구하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 게 숨기지 않았다. 1882년 3월 7일 스파이 혐의로 오스트리아인에게 체포된 그는 사 형을 구형받고 라구사의 낡은 감옥에서 두 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추방당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884년 옥스퍼드 대학의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애슈말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8년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박물관 소장품에 관 한 한 이사회와는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술사에 종사되는 않고, 고대의 훌 륭한 예술품이기보다는 인간의 구체적 삶에 더욱 밀착된, 그리고 민족학과 선사학에 열려있는 고고학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의 취임 연설은 태초부터 최근까지의 인류에 관한 학문인 고고학을 위한 진정한 변호였다. 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사르디니아, 몰타섬, 그리스를 여행하여 거대 유물을 수집하고 민속학을 공부했으며, 다양한 정보 를 수집했다. 1900년 49세가 된 에번스는 벌써 여러 개의 학설을 발표했다. 그중에서 도 특히 시칠리아섬의 그리스 화폐와 일리리아의 유물에 관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는 무엇에 끌려 크레타섬으로 간 것일까? 호메로스 문체의 미스테리 그는 트로이와 미케네에서 행해진 슐리만의 발굴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1878 년 런던에서 열린 그곳의 유물 전시회를 참관했다. 1883년에는 아테네에서 그 걸출한 독일 고고학자들을 만났다. 탐사자들이 가장 놀란 것은 그와 같은 문명이 문자로 쓰여 진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에번스는 원시 문자가 존재했지만 아직 찾 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그는 박물관 소장용으로 기증된 '섬의 돌'이라는 작은 돌들에는 기하학적인 무 늬 또는 도안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부는 문자처럼 보였다. 에번스가 아테네에서 구입 한 고대 유물들이 진품이라면 이 돌들은 크레타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섬으로 갔 다. 그는 1894년부터 1899년 사이에 그 섬에서 여러 차례 체류하면서 그런 유형의 돌들을 많이 수집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돌이 아이 젖먹이기 를 쉽게 해준다고 믿는 크레타섬의 여자들이, 그리스에서는 '젖돌'이라는 속칭으로 불 리는 이 돌을 목에 걸고 다녔기 때문이다. 에번스는 크레타섬에 머무는 동안 미케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시대 유물이 풍 부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때부터 에번스는 우선적으로 발굴해야 하는 것 이 바로 크노소스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1894년과 1897년에 발간된 두 개의 논문에 그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논문에서 호메로스 이전의 시대에는 문자가 한 종류가 아니라 상형문자와 선문자,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페니키아 문자는 선 문자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이집트 문명도 아니고 오리엔트 문명도 아닌 지 중해 문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발견은 또 크레타섬, 특히 크노소스의 집중적인 발굴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기념비적인 탐사 1900년 3월 23일부터 에번스는 마침내 크노소스 지역 발굴에 착수하여 그곳에서 6년 에 걸쳐 대궁궐의 터(약 1만 3천 평방미터)를 찾아냈다. 그는 또 근처의 건물 몇 채를 제외하고도 북서쪽으로 230m가 넘는 미노스의 길과 소궁전, 북동쪽의 별궁, 북쪽의 공동묘지 일부와 중요한 묘지 사원을 탐사했다. 한편 아테네의 영국 연구원 원장 호거 스는 깁사데스에서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의 도시 일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신속하면서도 광대한 지역에 걸쳐 행해진 그런 발굴에는 십질과 곡갱이질, 목공, 석공, 깨진 파편 닦기와 같은 다양한 작업을 맡아서 할 일손이 필요했다. 해마다 15-20주 동안50-300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에 참여했다. 에번스는 같은 수의 기독교도와 회교도 를 고용하여 그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지난날의 활발한 탐방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03년 그 는 끝없이 확장되는 작업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궁전의 서쪽 측면에 망루를 짓게 했다. 1904년에는 중요한 작업수준에 가장 빠르게 도달한 작업팀에게 상여금이 주어졌다. 에번스 주위에는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들이 있었다. 스코트랜드 출신의 듬 직한 메켄지는 작업을 감독했고, 필라코피에서 멜로스에 이르는 지역을 발굴했다. 그 때의 발굴일지들은 꼼꼼하기 그지없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에번스는 이 발굴작업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05년부터 시작한 도면 작성, 설계, 복원 작업에는 아테네에 있는 영국 연구원의 건축가 시오도어 파이프와 크리스천 돌이 참여했다. 또 벽화의 그림과 복원은 그리스 왕실의 미술 교사직을 사임한 스위스 출신의 화가 에밀 질리에롱가 그의 아들 에두아르가 맡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에번스로는 큰 행운이었다. 에번스와 매켄지의 발굴일지, 크로키, 도면, 그리고 많은 사진 등 발굴에 관련된 많은 자료들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풍부하다(물론 현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에번스의 발굴작업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최 초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에번스의 층위학을 활용하고, 특정한 방에 증거물들 을 보존하고, 퇴적물의성질을 규명하기 위해 항아리의 내용물을 조사하고, 상아로 만 들어진 물건처럼 깨지기 쉬운 발견물들을 주의해서 다루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서 파낸 흙을 조심스럽게 체로 쳤다. 대부분의 발굴품들은 칸디아로 옮겨졌으며 몇몇은 그 자리에 그냥 두었다. 그러나 말썽이 생겼다. 칸디아의 영국 주둔군이 크레타섬의 작은 교회에서 의식용 기 물을 훔친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모든 것들이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크노소스의 발굴은 비록 불완전했지만, 그리스의 고고학 발굴사의 한 전환점이었다. "당신은 부잣집 아들입니다"(호거스) 이 작업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에번스는 영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원조도 받지 않았고, 전적으로 개인자산을 투자했다. 1899년 그는 신문 지면에 크레타섬 발굴 기부 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발굴이 알려질 즈음인 1907년에는 더 많은 기 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사실 크노소스 발굴에 드는 자금의 출자는 에번스의 개인자산 에 의한 셈이었다. 아서의 아버지 존 에번스는 다루기 힘든 아들로부터 특별한 발견을 알려주는 소식과 그 발굴작업에 필요한 돈을 보내 달라는 전보나 편지를 받는 데 익숙 해져 있었다. 이 유복한 남자는 또 한 사람을 돈 문제로 괴롭혔다. 그 사람은 영국 연구원 원장 호 거스였다. 이러한 자금 원조가 없었다면 에번스는 그같이 방대한 작업을 정부기관의 도움 없이 이루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00년 11월 이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에서 그에 대해이렇게 말했다. "크노소스 궁전은 제 아이디어이고 제 일입니다... 저는 정말로 그 일을 다른 사람들과 공동작업으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제가 단독으로 계획하는 일의 감독을 혼자 해야만 하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헤르쿨라네움이나 폼페이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에번 스) 그 지역은 처음에는 탐사자의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902년에 포티 에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발굴작업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성 채도 없고 언덕도 없고 첫눈에 그곳이 그렇게 유명한 장소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하천이 흐르는 협곡의 바닥까지 이어지는. 듬성듬성 풀들이 덮 인 헐벗은 언덕이 보이는 길 아래에 광활한 대지에서 빠져나온 암괴들이 하얗게 모습 을 드러낸 것이 보였으며, 뿌연 먼지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인부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미노스 궁전이었다." 1900년 3월 첫 곡갱이질이 시작되자마자 에번스는 깃털 관을 쓴 그리핀들이 그려져 있는 벽화와 양식화된 종이꽃으로 장식한 '옥좌의 방'을 발견했다. 그 방에 있는 왕좌 만을 보고, 그는 거기에 왕이 앉았는지 왕비가 앉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 리아드네를 그곳에 앉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그러나 결국 미케네 가면들 의 남성적 특성에 착안하여 왕과 2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자리로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발굴 초기에 크레타섬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선문자B'라고 부르게 된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100여개의 점토판이었다. 이어 서 상형문자와 선문자A로 쓰여진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에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문서들은 왕실의 기록, 법령집, 서신, 계약서, 법정 판결문이나 상품목록들이라고 한다. 그는 궁전에서 18개의 창고를 발견했는데, 그중에 몇몇 창고에는 아직도 저장용 항아리들이 남아 있었다. 1901년 그는 궁전에서 가장 발견하기 어렵고 가장 웅장한 부분인 동쪽 측면의 중앙 계단을 발굴했다. 운이 좋게도 에번스는 로리온에서 온 광부들을 작업에 투입할 수 있 었다. 그들은 8일 이상을 회랑을 나무로 보강해 가며 파헤쳤다. 그해에 에번스는 화장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도박대를 어렵사리 발굴해 냈다. 그 도박대는 상아와 금, 크리스 탈로 장식되어 있었다. 1902년 그는 같은 구역에서 창문이 있는 2층집과 나무, 동물들 을 나타내는 사기 조각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아킬레스 방패'와 비슷한 방법으로 제 작한 것 같았다. 1903년에 그는 서쪽 측면에서 두 개의 굴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많 은 양의 귀중품들, 금, 상아, 크리스탈을 비롯하여 특히 그가 크레타의 여신으로 인정 한 양손에 뱀을 든 유명한 여신상이 나왔다. 그는 또한 대벽화의 파편들을 많이 찾아 냈으며 매년 수백 개의 항아리를 찾아냈다. 크노소스의 발굴은 금세기의 가장 풍요로운 발굴 가운데 하나였던 만큼 수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에번스와 그의 작업장을 둘러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지역을 폼페이와 비 교하곤 했다. 사실 그 지역은 무궁무진하게 많은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거기에서 발굴해낸 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몇몇 발굴 품들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대 예술과 현대 예술 평론"에서 에드몽 포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그러한 사실을 증언했다. "사람들은 미노스의 방에서 (호메로스의)연극장면을 쉽사리 재현할 수 있었다. 전설에서는 잔인한 마법사 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미개한 유럽의 최초의 입법자였던 이 늙은 왕의 혼을 불러낸 것은 정말 극적이었다. 그는 다가와 이 왕좌에 앉아서 발을 이 판 위에 얹어놓는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고고학에는 감동적이고 시적인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몇 번의 곡갱이질로 전설은 역사로 바뀌고, 그 역사는 현대의 세계로 들어온다." 크레타섬은 방대한 발굴의 현장이 되었다. 이것이 20세기 초반 크레타섬에서 행한 유일한 발굴은 아니었다. 1900년부터 이탈리 아인인 알베르, 페르니에르, 사비뇨니와 파리베니는 메사라에서 파이스토스의 궁전과 하기아트리아다의 대규모 별장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인 보이드와 홀, 그리고 시거는 크레타섬 동부에 있는 카부시, 구르니아, 바실리키, 프세이라와 모글로스를 발 굴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시 전체와 지하묘가 나왔다. 그리고 영국인 호거스, 도킨스와 보전켓은 제우스가 자란 프시크로 동굴, 페초파 정상의 지성소와 크노소스의 도시인 팔라이카스트로와 자크로를 탐사했다. 크레타섬 출신인 하치다키스와 크산투디디스는 틸리소스의 저택들과 니루카니의 별장, 쿠마사와 물리아나의 묘지들을 발굴했다. 프랑 스인들은 굴라스(현재의 라토)에서 헛수고하고 크노소스에서 실패한 이후 말리아 지역 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 지역은 1915년 하치다기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크레타섬에서의 고고학은 순식간에 선사시대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인들만 이 고르틴을 탐사하여 고전시대의 고고학 연구-사실은 로마 시대의 연구였다!-의 명 맥을 유지했으며, 그 섬에서 최초로 베네치아 유물 목록을 작성했다. 모험을 찾는 사람들 크레타섬의 발굴에는 특이한 인물들이 북적댔다. 전설에 따르면 이탈리아인 알베르는 백마 또는 검은 말을 타고 크레타섬을 누볐다고 한다. 미국 여성인 해리엇 보이드는 다른 2명의 여성인 블랑슈 윌리엄스, 에디스 홀과 함께 구르니아라는 미노스의 도시를 탐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말리아만에 도착한 '라페를레트'라 는 소형 돛단배에서 마르트 울리에와 에르민 드 소쉬르라는 아가씨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들은 도전심과 호기심에서 지중해와 그리스 섬들을 돌아다녔다. 그 녀들은 미노스의 도시 한 구역을 발굴하는 권한을 획득했고, '말리아의 작은 소녀들'로 전설에 기록되었다. 크레타섬에 대한 이러한 열정 속에는 전략적인 면도 숨어있었다. 특히 영국인의 경우 가 그랬다. 예를 들면 존 펜들베리는 1929년부터 에번스의 크레타섬 마지막 발굴에 참여했는데, 그때 익힌 섬의 지리에 대한 지식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을 도울 수 있었다. 그는 1941년 독일 침입군에 대항하는 크레타섬의 항쟁에서 결정적인 역할 을 했다. 제4장 크노소의 마법사 크노소스 발굴을 시작하면서 에번스는 미케네 궁전을 발견하여 호메로스 시대의 크레 타섬을 알리는 데 공헌하리라고 생각했다. "크레타섬의 화려한 전성기는 아직도 호메 로스의 시에서 그 메아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아카데미". 1896년 6월 20일자) 1900년에서 1901년까지의 에번스의 발굴 보고서는 그 궁전의 이른바 '메가론 양식'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는 북쪽에서 요새화된 입구를 찾았다고 믿었고, 몇 년 전에 슐 리만이 그리스 본토에서 찾아낸 궁전과 자주 비교를 했다. 그 역시 자신이 찾아낸 유 적지를 복원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시구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서쪽 광 장의 발굴을 들 수 있다. "미케네 시대의 왕은 왕궁 문 가까이에 있는 정의의 옥좌에 앉아 있었던 반면에 원로원이 이곳에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크레타섬이 '미케네'의 중심지로 생각한 것이다. 완전히 다른 문명 그런데 에번스는 곧 자신이 발견한 것들이 미케네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즉 궁전은 요새의 성격을 지니지 않고 있었고, 발굴해낸 수백 개의 요새 가운 데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은 도자기가 본토에서 발견 된 도자기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에번스는 점차 이 라비린토스 궁전의 주인 이 미케네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월이 더 흐른 후에 미케네인들이 그곳에 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문명을 상대하고 있 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에번스는 첫째로 그것이 미케네 문명의 지역적 변종이 아닐 까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미케네인들이 순식간에 정복당한 토착문명, 즉 그 유명한 에테오크레타문명일 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 문명과의 유사점이 없 는 숱한 유물들을 보면서 그는 마침내 이것이 미케네 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문명일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번스는 그가 발굴해낸 것들이 슐리만이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05년에 열린 제13회 선사시대 고고학 및 인류학 국제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계승한 후계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상 고시대에 대한 연구에서 진전을 이룬 바이다. 슐리만의 발굴 이후 미케네 문명의 기원 을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되었다. 에번스는 더욱 오랜 옛날 문명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북유럽 기원과 근동 기원론을 일축해 버렸다. 기원:신화와 고고학 사이에서 일단 이 문명의 독창성이 인정되자 남은 일은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슐리만은 미 케네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대의 원전들과 호메로스의 작품에 의존했다. 하지만 에번스는 고대의 어떤 원전도 활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발견한 세계는 사람들 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매우 변질되고 전설과 뒤섞여버려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와 같은 입장이었 다. 1866년 우연히 테라 화산의 잿더미 속에서 선사시대의 도시의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부터 고고학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보충작업으로는 아주 오랜 옛날의 도시, 틀림 없이 미케네의 도시들보다 앞선 시대의 도시가 확인되었지만, 발견된 유물들이 당시 알려져 있던 어떤 문명의 것과도 유사성이 없었으므로 그 연대를 정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웠다. 지질학자가 겨우 신뢰할 만한 연대인 BC 2000년을 제안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렇게 신중한 결론을 내렸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선사시대의 미개한 폼페이가 여기 있 습니다." 그곳을 전설에 나오는 아틀란티스로 믿고 싶어하는 학자도 있었다. 게다가 1896년에서 1899년까지 영국인들은 멜로스(밀로)섬의 필라코피에서 테라의 유적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선사시대의 또 다른 도시의 폐허를 발굴했다. 수년 전부 터 이집트와 아시아의 거대한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미케네 문명보다 앞선 지중해 의 고유의 문명의 존재를 보여주는 일련의 징후가 많이 발견되었다. 1893년 이집트학 의 권위자인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파이윰의 카운에서 에게해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집 트 12왕조와 동시대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으로 테라와 멜로스에 상고시 대의 도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1900-1905년 사이에 크레타섬에서 많은 발견-특히 동시에 진행된 크노소스 궁정과 파이스토스 궁전의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에게해의 선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노아 문명의 세계 에번스에게 닥친 첫 번째 문제는 이 문명의 이름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미케네 문명 의 선례에 따라서 크노소스 문명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독일식으로 크레타-미케 네 문명이라고 부를 것인가? 에번스는 미노스에서 파생된 '미노아 문명'을 선택했다. 즉 고대 전설에 의하면 미노스는 크레타섬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망받던 왕의 이름이었 다. 그리고 미노아 문명에 대하여 묘사할 때는 에번스는 발굴에서 나온 풍부한 출토품 들을 활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유물들을 정리해서 논리적인 견해를 제사해야 했 다. 에번스는 이 작업을 잘 해냈다. 그는 미노아 문명을 발명한 것이다. 에번스는 1935년까지 계속 실시한 발굴 이외에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미노스 궁 전"이라는 6권으로 된 불후의 총서를 발행했다. 이 총서는 신속한 제작으로 유명하다. 에번스는 그 총서에서 연대표, 크레타섬의 의복, 건축물, 대벽화, 비문, 예술품이나 간 단한 토기 항아리, 지진, 크레타섬의 농산물에 대하여 우수한 고증학적 지식을 동원하 여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발굴에서 찾아낸 것들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말리아의 화려 한 무기들처럼 크레타의 다른 발굴에서 찾아낸 주요 발굴품들을 소개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분류하고 통합했다. 그는 이집트, 말트, 이탈리아에서의 발굴들을 언 급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그림, 크로키, 수채화, 도면, 사진들이 실려 있는 이 책은 미노아 문명에 관한 백과사전이나 다름없었다. 그 총서의 방대함은 현대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것은 활용 가능한 모든 문헌들을 파악할 수 있었던 선구자의 작품이었다. 에 번스는 미노아 문명의 고고학적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이 총서는 그 분야의 최고의 걸 작이었다. 그러나 에번스는 미노아 문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미케네 문명을 단 순한 식민 문명으로 격하시키면서 에게해의 선사학 연구 분야, 특히 선문자 B로 쓰여 진 고문서 해독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발명의 내막:건축술의 지층학 에번스는 참고할 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에 미노스 문명세계를 부활시키기 위해 발굴 자료들과 유물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확실히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걱정하던 그가 현대적인 방법으로 발굴을 하도록 자극했다. 건축가가 항상 작업현장을 지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는데, 그 덕분에 정확한 스케치와 도면을 기록 하는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에번스는 당시 이른바 '건축적인 층위학'을 실천한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이것은 특히 에번스가 그 궁전 상태에 대한 연대표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즉 그는 제1궁전시대와 제2궁전시대로 구분하고 미케네의 점령기를 그 궁전이 유지되기 시작한 결정적으로 유기되기 직전의 짧은 기간으로 축소시켰다. 그는 계속 조사를 하여 층위학을 확립했는데, 층위학에서는 각 층의 물질이 그 단계의 양식 을 결정한다. 마침내 그 궁전에서 이집트 유물이 발견되자 에번스는 미노아 문명세계 를 고대 이집트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으로 에번스는 1905년부터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연대학을 확립하게 되었 다. 그것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되는 미노아 문명 시대의 크레타섬에 유익한 것이었다. 세 시기란 초기, 중기, 후기 미노아 시대를 말하며 그것들은 다시 각각 세 시기로 나 누어진다. 에번스의 작업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3년 귀스타브 글로츠는 "에게 문명"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에번스는 확실히 성충 자료들을 진화의 보편적 법칙과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결합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대표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고고학자를 돕는 예술사 에번스는 유물을 연구하기 위하여 고고학의 영원한 원칙에 따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을 기준으로 연구했다. 에번스는 자주 비교를 했는데 반복하다 보면 완벽하 게 진실이 드러났다. 이집트 유물, 시리아 유물, 에트루리아 유물, 로마 유물들이 차례 로 증거로 쓰였고, 또한 일본의 유물, 르네상스 예술이나 중세 예술까지도 거론되었다. 그 유물들 덕분에 에번스는 이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대강 그릴 수 있었다. 1903년 도기로 된 우상들을 발굴하고 그는 이렇게 썼다. "크노소스 궁전에 자리잡은 도기 제 작소는 뱅센과 세브르 도자기, 메디치 가의 피렌체 도자기, 우르비노 또는 마이센 도 자기, 그리고 많은 왕실 도자기의 조상이다." 이 비교연구는 1930년대까지의 미노아 문명을 다룬 모든 고고학자들의 저서에서 빈번히 볼 수 있는데, 고대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문명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난감함을 잘 보여준다. 에번스는 비교 요소들 을 찾으러 인도까지 갔다. 이것은 영국인으로서는 놀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에번스는 그가 찾아낸 유적의 배치도를 로마군의 주둔지와 비교했고, 그 유적의 전설을 이탈리 아 르네상스 시대의 궁전 건설과 비교했다. 그 발굴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 양식이 현 대 가구와 같았다. 미노스의 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에번스는 옥스퍼드에 있는 집에 놓기 위하여, 그리고 친구들에게 주기 위하여 미노스의 왕좌를 나무로 다시 만들 게 하였다. "둘레가 물결모양으로 된 등받이와 의자의 널빤지 밑에 설치된 고딕식 장 식이 보이는 이 나무의자는 전 그리스 시대의 가구보다는 고딕식 기도대를 연상시켰 다." 몇몇 열광적인 고고학자들의 필치로 미노아 문명의 예술은 예술사의 요약판이 되 었다! 미숙한 고고학자 에번스 에번스는 민족학 조사를 통해 그가 발견한 유물들이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 알아내려 했다. 그는 크레타섬이나 중앙 유럽에서 행해지는 전통적인 관습이, 그가 찾아낸 유물 들의 쓰임새를, 특히 종교적 차원에서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시 널 리 퍼져 있던 개념으로, 에번스는 보스니아를 여행하고 아버지와 토론을 한 이후에 그 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북마케도니아의 이슬람교 이전의 신앙에 관심을 갖고 그곳을 여행할 때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보기에 그 신앙은 기둥을 숭배하는 미노아 문명 제례의식의 핵심 요소인 것 같았다. 또한 에번스는 크레타의 전 통춤을 연구하면서 그 전통춤을 테세우스의 학춤이나 미노스의 그와 비슷한 그림과 비 교했다. 그는 도기 제조공들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 도기 제조공들은 궁전의 창고에 서 발견한 피토스와 똑같은 피토스를 여전히 만들고 있었다. 민족 고고학이라는 학문 은 이렇게 고안되었던 것이다! 글이 없는 그림책 에번스는 근거로 삼을 만한 고대 문헌은 없었지만 많은 초상화를 참고할 수 있었다. 그는 크노소스 대벽화 예술은 역사의 기록이라는 원칙을 신속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미노아 문명사회와 궁전생활의 호사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발굴 현장에서 나온 그 그림들을 활용했다. 1903년에 이탈리아인들이 발견한 하기아트리아다의 석관과 수많 은 도장과 봉인 위의 그림들은 에번스에게 미노아의 종교와 그 의식들을 재현할 수 있 는 요소들을 제공했다. 그 그림들에는 맹수들의 지배자이며 생산의 여신인 어머니-여 신이 중앙에 있는 그림과 지상의 대표자로서의 미노스를 표현한 남성적인 젊은 대부의 그림이 있다. 에번스는 이렇게 미노스왕을 왕-제사장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의 주요 특 성은 이집트와 파라오와 중세의 교황으로부터 따왔다. 에번스는 왕과 어린 왕자의 초 상화가 있다고 믿었다. 에번스는 그 왕들이 강력한 함대를 가지고 본토의 미케네와 멜 로스섬, 에게해를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에번스는 또한 주저하지 않고 그림의 유실된 부분을 복원했다. 유명한 '백합꽃 왕자'는 여러 개의 다른 벽화 조각들을 가지고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는 도장 위의 그림으로 알려진 것까지 벽화로 옮기게 되는데 나중에 그 도장은 가짜로 의심받았다. 에번스는 이와 병행해서 궁전의 복원도를 많이 제작했다. 이 방법은 널리 확산되어 피에 드 종 이 미국인들을 위해 1939년 필로스를 발굴할 때 이 방법을 다시 활용했다 에번스는 이렇게 조금씩조금씩 지중해를 넓게 비추었던 평화롭고 번창한 문명의 이미지를 만들 어갔다. 복구자 에번스 그 그림들은 종위 위에 미노아 문명을 부활시켜 줄 뿐만 아니라 대지 위에서 복원작업 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에번스는 궁전을 복원하기 위해 벽화의 파편들에서 무엇을 얻 어야 하는지 곧 깨달았다. 1902년부터 파이프는 왕립 건축학회에 미노스 궁전 복원 원칙들을 제출했으며, 그 작업은 첫 번째 발굴작업 때 시작되었다. 에번스는 건축 장 식이 있는 벽화들을참고해 가면서 복원도를 그리고 설계도를 만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작업을 했다. 유적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는 작업을 해나갔다. 미노아 문명의 건축물은 흙과 나무,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새로 발굴된 궁전에서 비와 기온 변화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1905년 에번스와 매켄지는 작업을 재개하여 겨울비로 많이 망가 진 궁전을 찾아냈다. 그 궁전을 다시 복원하고 보강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어 야 했다. 이러한 복원작업은 발굴 직후 붕괴의 위협을 받았던 중앙 계단의 복원작업과 같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하기 쉽다. 1905년 10월 31일자 "타임스"지에 실린 기사에서 에번스는 아래에 있는 기초를 튼튼히 하고 궁전을 파괴한 화재로 숯덩이가 되어버린 기둥과 상인방을 벽돌, 금속들보와 시멘트로 바꾸기 위해서 위에 있는 층들을 분해해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에번스는 당시에 새로운 재료였 던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1926년 런던에서 열린 고대 유물협회 회의에서 에번스는 콘크리트의 가소성과 내진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해에 지진이 일어 나자 에번스의 선택이 부분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콘크리 트의 질과 특히 삭아버린 철골이 그 궁전 보존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몽상가 에번스 이 작업은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유적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와 한 부유한 영국인의 변 덕스러운 생각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대중여론 속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07년 르네뒤소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에번스가 실행한 대담한 작업들은 매우 격렬 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에번스가 사람들이 고고학자 한 사람이 미노스 궁전 을 완전히 다시 세운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리하게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 궁전 을 다시 찾아온 사람들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는 듯한 거북한 인상을 주지 않도 록 그 복원을 지나치게 하지 않은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그것 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데-사람들은 그 궁전이 진짜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프랑스의 한 기자는 심지어 에번스에게 '유적 건설자'라는 별명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에번스는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유적을 좋아하는 사람은 크노소스 궁전을 보고 충격 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우리는 에번스가 어떤 생각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는 지 이해해야만 한다. 궁전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다. 즉, 그는 복구 원칙을 채택하기 전에 '옥좌의 방'을 임시로 세 번이나 덧칠했다. 에번 스는 충분한 고증을 통해 찬란한 왕의 거성을 재현하리라 생각했다. 유적들을 매일 보 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미노스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에번스가 했던 작업 전체의 전망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에서 발췌한 몇 줄의 글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열 이 나던 어느 날 밤 나는 신선한 공기를 찾아서 궁전 한복판에 세워진 감시탑 밑에 있 는 유물을 정리해놓은 방에 들어갔다. 중앙 계단을 흘끗 쳐다보았을 때, 나는 한순간 그 유적들이 깨어나서 달빛 아래 활기를 띠는 것을 보았다. 그 환영이 얼마나 강렬했 는지, 나는 백합으로 장식한 왕-제사장과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치마 아래에 장식 이 달린 의상을 입은 귀부인들, 어깨에 주름잡힌 천을 두른 사제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계단 위를 오르내리는 힘차고 우아한 젊은이들을 보았다. 마치 항아리를 든 사 람이 그의 일행과 함께 벽에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우리는 에번스를 부추겼던 이 꿈이 그의 모든 강연과 "타임스"지에 발표된 기사들에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일부 인사가 하잘것없는 것으로 판단하는-유적들을 더욱 인상 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에번스가 그렇게 한 것이 확실하다. 복원작업이 끝난 해인 1930년 이전인 1922년에 크노소스를 방문한 이 부유한 영국인 에번스는 일기장에 이 렇게 기록했다. "많은 돌로 된 계단들이 각각 다른 방들로 이어지는데, 그 중에 어떤 방도 정말로 궁전 같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도기로 된 많은 항아리들이 있 었는데, 그 항아리들은 보석들과 미노스왕의 작은 옥좌를 창고에 보관하는데 사용했다. 바로 그것들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마침내 1905년 에번스가 고전시대 고고학 국제회의 참가자들의 방문을 대비하여 복원 작업에 박차를 가했을 때 에번스는 그 참가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찰스 피커드가 에번스의 작업을 옹호하기 위하여 쓴 기사에서 "우리가 보기에 크노소 스는 미노스의 궁전인 동시에 에번스의 궁전이다. "라고 기술했다. 그의 표현처럼 그 궁전은 그 시대에 에번스가 꿈꾸었던 궁전임과 동시에 그와 함께 모든 시대의 고고학 자들과 호사가들이 꿈꾸었던 궁전이다. 1909년 이후 에번스는 훈장을 받고 1911년에는 작위를 수여받았다. 1941년 생을 마 감하는 날까지도 에번스는 자신의 삶을 고고학에 바쳤다. 즉, 죽기 바로 3일 전에 그 는 옥스퍼드 주변에서 새로운 로마 시대의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5장 미노아 문명의 현대적 양식 에번스의 발굴은 학자들을 동요시켰다. 1907년 이후 뒤소는 "가제트 데 보자르"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크레타섬의 발굴이 그 발견된 유물들만큼이나 그것이 이루어진 방법과 신속함으로 인하여 만인의 찬사를 얻었음을 안다... 크레타섬의 발굴은 20세기 초에 가장 주목할 만한 고고학상의 사건이다." 에번스의 발굴 소식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물론 에번스 자신이 그것에 크게 기 여했다. 해마다 에번스는 3월에서 6월까지 발굴작업을 했고, 역사학자, 고고학자, 등 많은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는데, 그는 그들을 '감정가'라고 불렀다. 그는 관대하게도 그 들에게 최근에 발견한 유물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수십 명의 유명, 무명의 사 람들 중에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작업을 이어받은 빌헬름 되르펠트도 끼여 있었다. 1903년 에번스는 되르펠트를 위하여 얼마 전에 새롭게 단장을 마친 노천극장에서 크 레타섬 축전을 마련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오리엔트 고대 유물 박물관 부관장인 포티 에는 1901년 1월애 크노소스를 방문하고 돌아가서 미노아 문명의 역사적 분석이 담겨 있는 생생한 글을 발표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특파원인 라그랑주 신부는 1906년 10 월에 "라 르뷔 비블리크"지의 기사를 취재하기 위하여 크노소스 궁전을 방문했다. 에번스는 해마다 여름이면 영국에 돌아와 다양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학술지에 발표했 다. 에번스는 인류학 협회, 에슈몰 박물관 등에서 연속적으로 강연을 했다. 프랑스에서 는 정기 학술지들이 살로몽 레나크나 르네뒤소 또는 샤를 피카르 같은 유명한 고고학 자들의 서명과 삽화가 실린 기사를 통하여 그 발굴을 가까이서 추적했다. 당시 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슐리만의 발굴 이래 그리스 선사시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 다. 모두들 40세기를 지나온 문명의 발견 앞에서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현했다. 1면 머릿기사로 실린 크레타 에번스의 발견은 많은 대중을 열광시켰다. 에번스는 영국의 신문, 특히 "타임스"지나 " 가디건"지를 위하여 자신의 발굴작업에 관한 많은 보고서들을 다시 실었다. 고대문명 의 보고자로서 그는 발굴의 경이로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발굴 현장에서의 생활을 세부적으로 묘사했으며, 크레타섬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리고 지진의 타격을 일 깨워주었다. 에번스의 탁월한 감각은 그가 그 궁전의 각각의 방들에 일반적인 관례대 로 번호를 매기기보다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선호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중 도끼의 방, 행진의 복도, 검을 올려놓는 선반이 있는 복도, 성인식을 거행하는 방, 왕비의 화장실, 왕실 창고, 그리고 궁전 밖에 있는 것에는 무너진 벽돌 건물, 대사제의 집 또는 대상 숙박소 같은 것들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일루스트라치오네 이탈리아나" "르 투르 뒤 몽드" "일뤼 스트라시옹" "라 가제트 데 보자르"와 같은 유럽의 교양지나 대중지들은 리포터를 파 견하여 에번스의 발견과 발굴작업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실었다. 이렇게 1900-1910 년 사이에 프랑스의 신문, 잡지들은 계속해서 '크레타섬의 혁명적 발견물들'에 대한 소 식을 대서특필했다. 잡지들은 미노스 옥좌의 발견, 항아리를 든 사람이 그려진 대벽화 의 발견, 하기아트리아디의 석관 발견, 동쪽 측면 중앙 계단의 발견, 뱀을 든 여신의 발견 등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타임스"지는 1909년에 '잃어버린 대륙'이란 제목의 기 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서 기자는 크레타섬을 아틀란티스로 보았다! 크레타섬의 고문화재에 대한 많은 저서들이 발간되었고 대중들은 엽서로 발행된 크레 타섬의 고문화재 모습에 반했다. 크레타섬은 유람여행의 코스에 포함되었다. 1902년 포티에는 이렇게 말했다. "3년 전부터 봄이면 관광객들이 몰려오는데 조금 있으면 여 행광들은 자신의 베데커 여행안내서나 조안 안내서 위에 십자표로 크노소스 유적과 칸 디아 박물관을 표시할 것이다." 1888년 베데커 여행안내서 발행본에는 크레타섬이 빠 져 있었는데 1904년 발행본에는 약 15체이지 정도가 크레타섬에 할애되었다. 영광의 시간 에번스 일행은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나 시인 앙리 드 레니에 같은 저명인사가 방문 하면 옥좌의 방에서 차를 대접하거나 기둥이 서 있는 왕궁에서 차를 대접하며 맞이했 다. 칸디아에서 박물관이 문을 열었는데 한 방문객은 그곳을 창고라고 했다. 그곳에는 땅에서 막 나와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유물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또한 수세기 동안 매장되었다가 빛을 보고 천천히 다시 눈을 뜨는 사자들의 부활을 의미했다. 프랑스인 가스통 아르노 장티는 칸디아의 새 박물관 건축 비용을 댔다. 에번스는 크레타섬 정부 의 승인을 얻어서 발굴할 유물 몇 점을 영국으로 가져가고 다른 것들은 복제품을 만들 었다. 그 유물들 덕분에 옥스퍼드 애슈몰 박물관은 소장품이 풍부해졌다. 유럽의 박물 관과 대학들, 특히 독일에서는 하기아트리아다에서 발견한 수확용 항아리처럼 중요한 유물들의 복제품을 신속하게 입수했다. 1936년 영국 연구원 개원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에번스가 발굴한 유물 전시회는 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유럽인의 열광을 증명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1910-1940 년 사이에 골동품 시장에 일찌감치 위조품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특히 도장 과 작은 상들의 위조품이 많았다. 친근한 미노아 문명 고고학사에서 그 정도로 영광의 대상이 된 사건은 없었다. 대중의 호기심과 발견된 유 물의 놀랄 만한 특징만으로 그러한 열광을 일으킬 수 없었다. 에번스를 선두로 한 고 고학자들은 그 잊혀졌던 예술품들의 현대적이고 친근한 특징에 충격을 받았다. 1903 년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전의 대벽화 조각을 영국 아르 누보의 창시자 중의 하나인 윌 리암 모리스의 공예품에 비유했다. 또한 라그랑주 신부는 그 대벽화에 대하여 "라 파 리지엔"지에 이렇게 기술했다. "고전 예술을 뛰어넘어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우리는 더 친근하고 인상적인 우아함을 지닌 현대 세계를 발견했다." 1904년 점잖은 레나크는 벽 화의 미노아 여인들이 입은 의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BC 1600년의 크노소 스 여인들은 오늘날의 파리 여인들처럼 원피스의 허리는 꼭 끼어야 하고 밑단은 나팔 꽃처럼 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소사 날씬해 보이려고 코르셋으로 조이는 현대 여 성과 미노아 여성을 동일시하며 똑같이 비난하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선사시대의 위생에서 배울 점 에번스와 그의 동료들은 특히 주택의 안락함에서 미노아 문명이 지닌 현대성을 확인했 다. 고고학자들은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궁전 안에서 방의 환기와 밝기를 책임지는 체광시설과 물길을 끌어온 인공 수도관 시설, 빗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 시설을 발견했 고, 미노스 궁전의 동쪽 측면에 있는 현대식 화장실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틸리소스나 팔라이카스트로에 살던 미노아 문명이의 소박한 주거지에도 현대 부르주아 계층의 편리함과 호화로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에번스와 그의 동료 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했다. 막심 콜리뇽은 발들의 장식과 안락함, 특히 가변식 벽이 있는 거실, 욕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물 저장 탱크, 전망이 좋은 베란다 등 세심하게 갖춰놓은 설비에 대하여 언급했다. 아돌프 레나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노스는 궁전 회랑 위로 복잡하게 얽힌 모든 계단과 모든 복도로 통하는 3 층을 올렸다. 그리고 무용과 투우를 위하여 계단석으로 둘러싸인 포장된 마당이 있었 다. 옥좌가 있는 넓은 알현실 옆에 는 우리가 보기에도 위생에 전혀 문제가 없는 욕실 과 심지어 세면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안락함과 세련됨은 유럽의 중산계층도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므로 매우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노아 문명세계는 확실히 현대적 인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에번스는 크레타섬에 관한 두 가지 전설을 환기시켰다. 두 가지 전설이란, 바로 미노아의 왕국에서 다이달로스와 아키로스 날개 를 달고 인류 최초의 비행을 시도했다는 것과 최초의 로봇이 움직이는 청동사의 형태 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고고학도 거의 소설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예술인가 아니면 아르 누보 예술인가? 이러한 친밀감은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미노아 예술을 아르 누보 예술과 연결시키게 한 다. 그래서 코랄뇽은 1909년 선사시대 벽의 장식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붉은 바 탕에 흰색으로 백합꽃을 그려넣은 프리즈는 현대의 '모던 스타일' 벽지와 썩 잘 어울릴 것이다." 1932년 피카르는 망각의 세계에서 건져올린 이 예술을 '고고학에서의 전 현 대 양식'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규정했다. 이 놀랄 만한 미의 일치 현상은 부분적으로 는 기술적인 면의 관찰을 통해 설명된다. 아르 누보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미노아 사 람들은 재료의 혼합과 표현양식을 보면 그것이 목적한 기능에 따라 외양으로 귀결되었 던 것은 아니다. 미노아 문명의 항아리들은 대부분 아르 누보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나 점토액으로 만들어 붙인 장식들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티브가 자연에서 취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즉 해상과 식물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두드러지게 자연을 선호하는 경향은 마치 고전 예술에 대한 비난처럼 느껴진다. 포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하늘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흐르는 물을 그리는 물을 그리는 것,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 형식에 맹목적으로 매달린 그리스인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칼데아, 아시리아와 함께 크레타의 예술은 자연에 푹 빠 져있었다. 크테타예술은 자연의 시를 이해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해했다. 바로 그 런 점 때문에 크레타 예술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노아 예술은 고전주의 규 범이 예술창작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었다는 현대 예술가들의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에서조차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문명은 비대칭에 의한 아름다움, 선에 의해 분할된 장식적인 모티브와 장식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노아 문명에서 이미 현대 예술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역으로 받은 영향 이렇게 미노아 문명이 발견되었을 무렵, 그 문명의 세계는 장식예술의 세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사성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20세기 초에 미노아 문명의 예술이 유럽 예술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아르 누보가 영국에서 등장했지만, 미노아 예술은 1900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게다가 그 이름이 말해 주는 것처럼 아르 누보는 이전의 예술 형태와 확실히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역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추상예술이 고대 그리스 조 각을 재발견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존 러스킨과 모리스에 의해 형성된 아르 누보 이론이 미노아 예술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글로츠의 "에게 문명"(1923)의 서문에 나온 베르의 글과 모리스의 글을 비교 해볼 수 있다. "모든 것에 예술을 적용한 에게해 사람들은 또한 순수예술도 가꿔나갔 다. 그들은 여가활동을 즐겼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을 여가활동으로 즐겼다. "(베 르)"장식 예술은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람들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것들을 사용하는 기쁨을 찾게 해주고, 반드시 만들어야만 하는 물건들을 만드는 기쁨 을 찾게 해 주는 것이다. "(모리스) 1900년 이전의 아르 누보는 일상적인 생활작품을 만드는 데 예술적인 기교를 발휘하 도록 했다. 그리고 전문가들, 고고학자들보다는 특히 예술사가들이 보기에 미노아 문 명의 장인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20세기의 기념물, 크노소스 에번스가 방대한 복원작업에 뛰어든 이래 사람들은 미노아를 더 잘 이해했다. 미노아 문명의 예술은 현대적이고 현대 예술과 비슷해서 복원시키는 데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미노아 문명의 예술이 가진 현대와의 이러한 유사성은 선사시대의 고 문서의 부재를 보충해 주고 고대 작가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미노아 왕국을 되살려줄 수 있었다. 줄지어 있는 창고들과 중앙 마당, 원주들과 콘크리트 바닥,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 그 리고 조금은 위조된 것처럼 보이는 측면을 지닌 크노소스 궁전은 오늘날 BC 18세기에 꽃핀 미노아 문명의 화려한 건축물을 증명할 뿐 아니라 20세기 초의 고고학 수준도 증명한다. 아르 누보의 기념물인 크노소스 궁전은 바르셀로나의 구엘 궁전 또는 브뤼 셀의 스토클레트 궁전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의 건축 유산에 속한다. 수년 전부터 의 제로 상정된 크노소스 중전의 복원 문제는 그것이 이중적 예술의 유산임을 고려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록과 증언 라비린토스에서 미노스, 오만하고 잔인한 왕 제우스는 태어나자마자 이다 산맥, 또는 디크티 산맥에 있는 동굴에 숨겨졌다. 제우스 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자식에게 왕위를 뺏길까 두려워 아내인 레아와의 사이에서 낳 은 자식들을 모두 먹어버렸다. 레아는 남편을 속이고 막내인 제우스를 대지의 아들인 쿠레테스에게 맡겨 몰래 키웠다. 레아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쿠레테스 에게 방패를 시끄럽게 두드리면서 춤을 추게 했다. 제우스는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다. 제우스는 황소로 변신하여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를 납치, 크레타섬으로 데려왔다. 에우로파는 제우스의 세 아들, 미노스, 라다만터스, 사르페돈을 낳았다. 미노스는 두 동생을 제치고 크레타섬을 독차지했으며 왕국의 연역을 넓혔다. 미노스는 완벽한 법률을 갖추고, 훌륭한 예술가들을 불렀다. 그중에는 유명안 건축가이자 발명 가인 디아달로스도 있었다. 제우스는 해적들로부터 크레타섬을 지키라고 탈로스라는 청동 인간을 미노스에게 주었다. 이 괴물은 전신에 신들이 마시는 물이 흐르고 있어 힘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미노스왕은 황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라는 포세이돈의 요 구를 거절했다. 그는 그 황소가 너무 잘 생겨서 죽이지 못했다. 포세이돈 은 미노스에게 벌을 주기 위해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를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에게 그녀가 들어갈 수 있는 암소의 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파에는 방은 잠승이고 반은 사람인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된다. 이에 화가 난 미노스왕은 다이달로스에게 이 괴물을 가두어둘 라비린토스 를 지으라고 명령한다. 이 미궁은 미노스왕이 에게해 연안의 주민들에게 가한 멍에의 상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아테네에서는 해마다 그곳에 갇힌 괴물에게 7명의 청년과 7 명의 처녀를 바쳐야만 했다. 이 끔찍한 조공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로 바칠 젊은이들과 함께 크레타섬으 로 떠날 때까지 이루어졌다. 테세우스는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 아리아드네를 유혹 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라비린토스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실뭉치 와 미노타우로스를 쳐죽이는 데 쓸 마법의 검을 주었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잡혀갔던 아테네 젊은이들을 풀어주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함께 도망쳤다가 낙소스에서 그녀를 버렸다. 속은 것을 깨닫고 격노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 들 이카루스를 라비린토스에 가금하지만 그들은 날개를 만드렁 달고서 도망쳤다. 시칠 리아까지 다이달로스를 추격한 미노스왕은 거기에서 코칼로스왕에게 떠밀려 끓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미노스의 유골은 BC 5세기에 폭군 아브라가스에 의해 발견되어 크레 타섬으로 보내졌다. 어늘날 고고학자들은 이 전설 속에서 크레타섬의 부와 권력의 증거를 보지만 그 섬을 스쳐간 역사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이런 전설은 호메로스 세 대부타 한 도시나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비난하기 위하 여 등장하곤 했다. 알렉산드르 파르누 미노타우로스의 부활 라비린토스의 재발견 1910-1920년까지의 문학작품 속에 이따금 미노아 왕국의 부활이 언급되면서 이 소재 가 환영을 받았다. 1918년에 발표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 에"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여러 지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우리를 칼립소의 섬으로 이끌고, 미노스 궁전으로 이끈다. 이제 더 이상 칼립소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며, 미노 스는 신성하지 못한 왕이다." 프루스트는 소설 "게르망트가 쪽으로"(1920)에서 크노소 스 궁전에 대해 더 명확한 암시를 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09년 "가제트 드 보자 르"지에 실린 막심 콜리뇽의 글에서 연유한 곳 같다. 이처럼 명백한 사실에 기반한 이 야기들 외에도 우리는 라이더 해거드의 작품이나 러브크레프트의 작품에서처럼 크레타 섬의 문명과 그 문명의 발견이 탐험과 모험 이야기들에서 부활한 것임을 알고 있다. 폴 브누아의 "아틀란티스"(1919)의 몇몇 구절은 "타임스"지가 보도한 최근의 크레타섬 발굴 기사에서 그대로 착상을 얻은 것 같다. 즉 아틀란티스의 마지막 왕비인 안티네아 의 고대의 궁전은 미로식 건축양식이 뛰어나며, 채광시설, 욕실, 포석이 깔린 바닥, 안 락의자 등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왕비의 사실은 에번스가 복원한 왕비의 커다란 직사각형 방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안티네아 자신이 크노소스의 대벽화에 그려 진 여자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매처럼 생긴 작은 얼굴에 초록색 눈을 가진 날 씬한 소녀..." 그녀는 어린 시바의 여왕 같지만 동양인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미소와 눈길을 지니고 있으며 가는 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 크레타섬을 배경으 로 많은 역사 소설이 나왔다. 왈타리의 "이집트의 시누에"(1945), 마리 르노의 "바다의 황소"(1962), 또 크레타섬 출신의 작가인 키잔차키스의 "미노스 궁전"이 대표적인 작 품이다. 1957년 그 이야기들은 제이콥스에 의해 만화로 제작되었고, 마침내 '아틀란스 를 정복한 헤라클레스'(1961)나 에어턴의 '미로 만드는 사람'(1968) 같은 사극영화로 서 당당히 영화사에 자리매김을 한다. 영화제작자들은 '이아고와 아르고선 탐험대'에서 의 탈로스 상처럼 '사진을 잘 받는' 괴물들을 찾으러 크레타섬으로' 가기도 했다. 미노타우로스의 환생 그런데 놀라운 일은 크레타섬의 신화가 이미 오랜 전부터 부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라신과 (페드르) 덕분에 아리아드네, 테세우스, 미노타우로스가 머리 속 에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작품은 19세기 말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매년 공 연되었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는 1898년 빈 전시회 포스터에 나타나듯이 아르 누보 의 레파토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빈 전시회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희망의 전달자인 젊고 똑똑한 테세우스에게 공격받는 창의적이지 못하고 잡다한 관변예술인 고전주의를 상징 했다. 이 전설들을 새롭게 조명한 에번스의 발견 이후, "르 미노토르"라는 민족학, 고 고학, 예술 관련 잡지를 발행하면서 미노타우로스를 그룹의 상징으로 삼는다. 그 괴물 은 피카소의(미노타우로마키)로부터 메이슨의 (미노타우로스)에 이르기까지 현대 세계 에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또한 크레타섬 의 신화는 현대 문학에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즉 라비린토스와 그 안에 사는 괴물 은 뒤렐로부터 카뮈, 또는 뷔토르를 거쳐서 보르주에 이르기까지 위기에 처해 있는 양 심의 거울로 여겨졌다. 반면에 테세우스나 다이달로스는 시켈리아노스나 앙드레 지드 의 작품, 또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속에서 행동적인 인간이나 창조자 같은 긍정적인 주인공으로 재현된다. 1939년 "레 카에 뒤 시드"지가 그리스 신화 특집호를 발간했을 때 별책 부록의 반 이상이 마르그리트 유르세나르가 쓴 연작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거기에는 한 가지 명백한 일치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크레타 문명이 20세기 유럽의 정신사에 미친 알려지지 않은 공헌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파르누 유럽과 미노스 역사는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미노아 문명세계는 새로운 유럽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라서 미노아 문명에 개한 기술을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통합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수십 세기 전의 세련되고 현대적인 문명의 발견은 처음에는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했다. 발굴작업은 예상 외로 길어졌다. "르 투르 드 몽 드"지는 1905년의 사설에서 한 스위스 리포터의 기사를 이렇게 평했다. "그 지역의 땅 속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없는 것 같고, 땅속의 깊이는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무한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소감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내포되어 있다. 크레타섬에서의 발굴작업으 로 그리스 문명의 기원이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지만, 동시에 역사의 무 대에서 완전한 모습을 감춘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한 예를 제시해 주었다. 이 점에 대 해서 발레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다른 문명인 우리들도 머지않아 영원히 사라져버릴 존재라는 골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밝혀지지 않은 재앙으로 파견 된 아틀란티스의 신화나 전설이 아니다. 그것은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말리아, 구르 나아 그리고 팔라이카스트로의 폐허 속에서 발굴해낸 실제 세계의 것이었다. 기자드은 흔히 크노소스 궁전을 파괴시킨 재앙의 흔적들-검게 탄 들보, 불에 그을린 벽돌, 무너 져버린 돌담-에 중점을 둔다. 또 많은 기자들이 BC 20세기라는 미노아 문명의 연대와 AD 20세기라는 그것이 발견된 연대가 일치하는 사실에 주목한다. 역사는 더 이상 진 보의 연속, 발전을 향한 행진이 아니다. 역사는 탄생과 소멸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팍스 미노이카... 그러나 아러한 불안한 반응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특히 에번스와 르네 뒤소, 귀스타브 글로츠는 미노아 문명을 밝혀줄 열정적이면서도 목가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평화로우면서도 막강한 힘을 지닌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을 제시했다. 첫 발굴 때부터 고고학자들은 미노아 문명이 거칠고 과격한 미케네 문명과는 달리 성 벽도 무기도 없는 점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미노아 문명이 남긴 벽화에는 자연의 풍경, 왕궁의 모습을 비롯하여 평화와 풍요를 나타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글로츠는 에게해 연안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빵 한 조각이나 걸 쭉한 보리죽, 올리브와 무화과 열매 몇 알, 양파와 마늘 몇 쪽-에게해 연안 주민들은 그것들만 먹으면 충분했다. 그들은 타고난 채식주의자들이었다... 무엇 때문에 늘 고생 하며 지냈겠는가? 손만 뻗으면 사방에 널려있는 쾌락을 잡을 수 있거늘, 도처에 즐거 운 일이 퍼져 있었고, 각자 취향대로 즐길 수 있었다." 미노아 사람들은 미노아 사람 들과 그 계승자들의 자비로운 지배 아래서 일종의 이교도 천국을 경험했다. 오늘날 우 리는 미노아의 유토피아와 19세기 유럽인의 유토피아 운동, 특히 1877년 "이름 모를 곳에서의 평화로운 시기의 소식"을 발행한 윌리암 모리스의 사회적 이론 사이에 유사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노아의 세계와 카톨릭의 천국도 유사점이 없지 않았 다. 그 유사점은 카톨릭 정통파의 십자가와 비둘기처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종 교적 상징으로 뒷받침된다. 살로몽 레나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카톨릭의 비둘기 는 크노소의 비둘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크노소스의 사람들은 BC 1500년경 팔레 스티나에 가자를 세우러 와서 그곳에 미노스의 궁(별자리)에 대한 숭배를 전파했다." 우리는 또한 미노아 문명에서 기원한 이러한 평화에 대한 비전을 20세기 초 서양 열 강의 역사,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국제연맹을 설립함으로써 유럽에 평화를 세우고 자 한 그들의 노력에 연결할 수 있다. 미노아 사람들은 이렇게 황폐화되고 어려웠던 유럽에 평화를 기원하는 이상적인모습을 제공했다. ... 또는 팍스 브리타니카? 또한 전설과 고책자들이 전하는 이러한 평화는 미노스의 막강한 해상 지배권을 행사했 기 때문에 가능했다. "크레타섬의 군주는 건축가에게 자신의 궁전을 성벽으로 둘러싸 는 일보다는 사람들이 살 집을 비롯하여 다양한 건물들을 평지에 짓게 했다. 이것은 그가 평화를 사랑하고, 외부의 적을 두려워해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왕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막강한 왕이었음을 보여준다." 해상 지배권은 1900- 1920년 사이에도 국제정치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노린 것 가운데 하나였다. 1900년 파리 국제박람회 때 프랑스 함대를 트로카데로에는 있는 8000평방 미터 넓이의 분수 위에 소형으로 재현할 정도로 함대는 유럽 각국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노스 궁전"의 저자가 당시 가장 큰 함대 가운데 하나를 보유하고 이집트, 인도, 수단과 남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히던, 역시 섬이 조국인 영국 사람이었 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미노스 궁전"의 제1권에는 아테네 사람들이 잔인하 다고 부당하게 비난한 미노스에 대한 놀라 만한 옹호가 들어 있다. "가장 문명화된 군 주의 지배도 예속된 자들에게는 그토록 힘들게 여겨지는 것,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 이었다." 미노스를 옹호하는 이 글은 문명화된 제국주의의 이상형이 되었다. 그 문명 화된 제국주의는 평화를 위해 힘을 사용한다고 했다. 에번스는 미노스 옥좌의 복제품 을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증했다! 유럽의 기원 요컨대 유럽은 크레타섬에서 40세기를 살아온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동양의 거대한 문 명과 겨를 수 있는 유럽의 기원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전문서적뿐 아 니라 그밖의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크레타섬은 유럽의 문명이라는 길의 시발점이자 첫 단계이다." 콜리뇽과 같이 전문가들은 대벽화들에 그려져 있는 인물들이 확연히 그려져 유럽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포티에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항아리를 든 사람'이 그려진 대벽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적으로 유럽인의 특징을 지닌 그 얼 굴을 보고 놀랐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 커다랗게 뜬 눈, 곧게 선 코의 윤곽과 단단한 턱은 특히 그리스 사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옷에 있는 여러 색깔의 장미꽃 무늬는 이국적인 특이함을 더해준다. 이 상반신상은 걸음을 걷는 자세를 표현한 것 같은데, 어딘가 야성적인 당당함이 풍기고 있다. 이것은 오리엔트의 정서가 스며 있는 작품이 지만, '새로운 정신(에스프리 누보)'울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유럽인의 등장을 예고한다. 미노아 세계는 이렇게 20세기초의 유럽인들에게 유럽 대륙의 땅 속에 묻혀 있던 지역 에서 파낸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제공해준 기원보다 훨씬 화려하고 과시할 만한 기원 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1984년 이후, 그리고 자바원인을 발견했을 때부터 선사학자 들은 인류의 기원을 실망스럽게도 유럽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레타섬에서 발견한 것들 덕분에 문명의 기원만큼은 유럽 대륙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발견은 서양 열강의 지배권을 합법화할 수 있도록 때맞춰 나타났다. 포티에는 항아리를 든 남자에 대한 그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지었다. "그는 곧 동양과 겨루어 동양을 굴복시키고 동양을 지배하게 될 서양 인종의 원조이다. 그의 단 단한 가슴속에는 현대 세계가 숨쉬고 있다." 특히 그 발견으로 문명의 지속성이 확립 하게 되었다. 유럽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 지속적인 문명의 무대였던 것이다. 식민주의 제국들과 자치령 시대를 맞아 그것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미노스의 어머니, 에우로파(유럽) 고대의 많은 고고학서나 역사서의 마찬가지로 에번스의 저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 리의 지식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표현양식을 갖추고 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그 표현양식들을 통하여 한 사회 전체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 덕분에 크레타섬은 유럽사람들에게 하나의 이미지, 즉 과거에는 주위에 영향력을 미치는 유럽의 이미지를, 현재에는 승리하는 유럽의 이미지를 스스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상드르 파르누 프랑스인의 크레타섬 발굴작업 굴라스에서의 미케네 환상 프랑스인들은 일찌감치 크레타섬에 관심이 있었다 1857년에 페로와 트농, 그리고 1878년에 오술리에. 1891년에 주뱅 등 아테네의 프랑스 연구원 회원들은 그 섬의 재 발견에 참여했다. 프랑스 연구원은 크노소스 지역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레타 섬 동부의 굴라스 지역에 노력을 집중시켰다. 굴라스 지역은 현재 라토 지역으로서 에 번스를 포함한 당시의 고고학자들이 슐리만이 발견한 본토의 성채와 비견할 만한 성채 가 있는 미케네의 도시로 여기고 있었다. 굴라스 지역의 탐사는 프랑스인에게 크노소 스와 마찬가지로 희망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 작업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조재프 데마르뉴가 맡았다. 그는 그것이 사실은 역사시대의 도시였음을 신속히 밝혀냈고 그 발굴작업은 1900년에 중단되었다. 프랑스의 궁전 영국인들은 크노소스를, 이탈리아인들이 파이스토스를 그리고 미국인들이 구르니아를 차지하고 있는 미노아 문명의 고고학 연구에 프랑스인들이 참여한 것은 1920년이다. 이라클리온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말리아 지역의 우연히 무덤으로부터 발 견된 뒤 탐지되었다. 이라클리온 박물관 관장인 하치다키스는 1915년 5월에 첫 번째 탐사를 했고 미노아의 새로운 궁전에 속해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창고 잔해들을 찾아냈다. 그는 관대하게도 1920년에 프랑스 연구원에 그 탐사를 계속할 기회를 넘겨 주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의 차세대 고고학자들이 주도한 그 탐사는 1922부터 최근까지 궁전과 도시의 여러 지역들, 공동묘지를 발굴했다. 그 발굴은 이렇게 청동기 시대의 도시 환경, 즉 도로의 모습, 주택, 광장과 궁전 주위에서 각 시대에 따라 더소 엉성하게 배치된 건물들의 모습을 아려주었다. 주로 실내에서 발견된 가구는 고고학자 들에게 미노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궁전을 장식 하는 무기들이나 무 지역에서 나온 황금 손잡이가 달린 단검, 그리고 점토판에 새겨진 비문 등 중요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동쪽에 있는 산에서 크레타섬에서의 프랑스인들의 발굴은 말리아와 미노아 시대로 한정되지 않았다. 제독 통치하에서 프랑스인들은 크레타섬 동쪽의 감독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쪽에서는 탐 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랑스인들이 1950년에 크레타섬 동쪽 끝에 있는 바이의 미노아 지역을 파헤쳤다. 그전의 프랑스인들은 탐사작업을 통해 1936년에는 드레로스 에서 지질시대와 초기 시대에 이르렀으며 1937-1938년에는 올론트의 고대도시에 이 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BC 2세기의 신전과 공동묘지, 원시 기독교 성당이 발굴되었 다. 이타노스는 1950년에 발굴대상 지역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점령되어 있었던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를 발굴했다. 그리고 1968년-1971년에 재개된 라토에서의 발굴작업을 통하여 BC 3, 4세기에 이 도시의 도시공학과 건축에 대한 정 확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르 파르누 상상력에서 고고학까지 이제는 상당히 위험할 t도 있다는 것, 상상은 오류를 낳을 수도 있고 그 오류를 바로 잡기란 늘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미노아 문명에 관한 고고학이 그 대 표적인 예이다. 그것들을 한번 검토해 보자.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크노소스 궁전의 보물창고에서 발견된 인영으로 알려진 미노아의 도장은 이상한 그림을 담고 있다. 에번스와 당대의 미노아와 미케네 보석 조각술 전문가인 빅터 케너 경은 그 그림에서 바람에 흔들이는 포플러 나무 3그 루를 식별했다. 그리고 이 인영을 보면서 우리는 한번 더 미노아 사람들의 자연에 대 하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는 돌 낭만적인 전문가인 존 베츠는, 그 그 림을 90도 돌려놓으면 포플러들이 선박의 복제품에서 알아볼 수 있듯이 단순히 3개의 세워진 뱃머리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 인영들이 만들어진 시기에 미노아 사람들이 그런 유형의 배를 사용했을까?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가 그리 단순하 지 않은 것이다. 유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러한 망설임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에번스가 한 대벽 화에서 꽃이 만발한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면서 샤프란을 따는 소년이 왕자임에 틀림없 다고 소개한 예가 그런 것이다. 그림의 복원은 질리에롱 부자 중 화가이며 지나치게 유능한 에번스의 협조자인 두 사람은 미노아의 예술을 너무나 잘 소화해서 거리낌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그 그림들을 구성하고 재창조했다... 그런데 나중에 플라톤은 자신이 관장으로 있는 박물관에서 '샤프란 수확인'이 있는 대벽화를 자세히 검토한 후, 실제로 는 꽃줄기는 푸른 원숭이의 꼬리이고 꽃부리는 크노소스 왕실 농장에서 뛰노는 이국적 인 동물의 주둥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학자들이 헤라클리온관장이 관찰한 바를 실험하고 확인했을 때는-그것은 물론 에번스의 사후이고 질리에롱(아들)의 은퇴 이후 임-그 대벽화를 고고학적 사실에 더 가까운 상태로 복원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말하 자면 젊은 왕자가 푸른 원숭이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다. 내친 김에 플라톤은 크노소의 대벽화들 중에 가장 유명한 대벽화 에번스와 그의 뒤를 이어 모든 사람들이 '파리의 여인'이라고 부른 대벽화에 대한 재검증을 시도했다. 그것 은 이마 위로 갈색 머리칼이 매력적으로 내려와 있고, 하얗고 가는 목과 붉은 색을 칠 한 입술을 지닌, 우리가 이미 본 적이 있는 아름다운 미노아의 여인이었다. 소형 벽화 보다 조금 더 큰 이 그림은 '파란 옷의 귀부인'을 모델로 해서 복원된 그림과 소형 벽 화들의 중간 크기인 것 같았다. 이 그림은 정교하게 수가 놓인 비치는 옷을 딱 맞게 입은 상반신만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 여 이 우아한 미노아 여인을 호시절(1910년경)의 가장 매력적인 멋쟁이로 바꿔놓았다. 파리의 여인과 같은 시기에 수집된 그림 조각들을 세심하게 연구한 플라톤은 더욱 정 확한 특징들을 재구성했다. 그 젊은 여인은 에번스의 예상대로 앉아있었다. 그 여인은 귀부인도 아니고 단순히 우아한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여신과 함께 한 무리의 청년과 처녀들로부터 인사와 제물을 받고 있는 여신이었다. 첫 번째 복원 때는 없었던 작은 조각들이 그녀의 초상화에 보충되자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그림에서처럼 두 가지 모티프가 펼쳐지는 전체 배경은 파리 여인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가진 얼굴 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엄숙하고 딱딱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번 경우에 그 박물관 관장은 현명하게도 에번스 이후 널리 알려진 이미지를 손상시 키지 않았다. 그는 그 그림 옆의 내벽 위에다가 미노아 사람들 눈에 보이던 대로 복원 한 작은 그림을 걸어놓았다. 조작된 이미지를 좋아하는 대중이 인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작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은 조작된 것을 밝혀내기는 하지만 그것을 버리지는 않는다! 유명한 '백합꽃 왕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크노소스 궁전의 남쪽 입구에서 이 당당한 인물을 두 가지 모티프 위에서 행진의 복도로 봉원물을 든 사람들의 행렬을 인도하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백합 목걸이를 걸고 무거운 깃털관을 쓰고 간편한 옷 을 걸친 이 왕자의 귀족적인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애완동물-그리핀?-을 묶은 끈을 쥐 고 꽃들 사이로 나아가고 있었다. 1901년에 그림 조각들이 발견되어 아버지 질리에롱 이 재구성한 이 벽화는 헤라클리온 박물관에서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은 크노소스 궁전의 남쪽 입구 회랑 아래에서 에번스가 제작한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의심을 불러일으킨 지는 오래되었다. 아들 질리에롱은 아버지가 '궁전양식' 의 커다란 항아리를 참고로 하여 그림에서 상당한 백합 꽃밭을 일찌감치 거부했다. 처 음에 에번스는 그것이 여러 그림의 조각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왕관은 왕의 것 으로, 상반신은 권투선수의 것으로,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제3의 인물의 것으로 생각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질리에롱 부자가 그리고 싶어한 대로 긴 행렬의 선두에서 승리 의 자세를 취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들을 합치는 데 동의했다. 그 벽화에 대한 여 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해석들에는 언제나 백합 왕관을 쓴 왕자가 등장했 다. 에번스는 복원한 그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세부적인 기술에 대한 기술과 상세한 설명, 그리고 분석을 되풀이했다. 비평가들은 많은 세부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라도 극적인 자세의 진위 여부와 줄에 매인 동물이 상징하는 것과 그 종류에, 그리고 머리에 쓴 관의 소유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사실 질리에롱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대의 그림 조각들을 맞췄다. 그리고 그가 보충해 넣은 부분(얼굴, 머리칼, 미노아 시 대의 허리띠, 오른쪽 다리)의 건조 상태와 고대 그림의 금이 간 상태를 비교해 보면 그것이 진짜일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1960년 아테네 국립박물관에서 미케네의 상아를 연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드레 데 센은 미케네에서 발굴하긴 했지만 전시하지 않은 물건들의 목록에서 간단히 언급한 물 건들 중 백합꽃 왕자를 연상시키는 부조로 장식된 둥글고 작은 상자, 즉 픽시드 조각 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줄에 매달린 동물은 그리핀이 아니라 스핑크스였 고, 아름다운 관은 그 동물이 쓰고 있었다! 고고학에 푹 빠진 마르세유의 의사 장 쿨 롱은 크노소스 벽화에 표현된 근육조직들을 분석함으로써 너무나도 유명한 부조의 용 납할 수 없는 오류를 밝힐 단서를 제고해 주었다. 예를 들어 그는 상반신과 어색하게 연결된 목의 접합부를 지적했다. 그리고 복원 그림과 같은 배치는 해부학적으로 불가 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상반신을 권투성수의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질리에롱 부자 의 환상에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공인받은 그 모습에 대한 조심스러운 비판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의 길을연 것에 불과했다! 이 학자들 중에 최근에 가설을 내놓은 크노소스 전문가인 독일의 고고학자 볼프 디트 리히 니마이어는 플라톤의 '파리의 여인'의 선례를 따랐다. 즉, 그는 백합꽃 왕자를 영 원한 젊음의 신이며 궁전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크노소스 긴 행렬이 그를 향하여 전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왕자가 백합과 깃털로 만든 관을 두 마리의 스핑크스를 동반 했건, 또는 이 관이 크레타섬의 다른 그림들에서처럼 여제관의 것, 여기서는 행렬의 선두자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영원히 젊은 제우스이건 그의 아들 미노스 이건 간에 크레타섬의 신성한 군주를 그린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상상은 자유로운 것이니까! 고고학자들을 비난하지 말자. 미노아 문명 에 관한 일반적인 고고학도 비난하지 말자. 고고학이란 어렵고 치밀한 학문이며,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더욱 힘든 학문이며, 해독할 수 있는 텍스트를 기다리는 학문이다. 그 학문의 가설에서 가설로만 진보할 수 있다. 소위 정확하다고 하는 학문들도 마찬가 지다, 고고학자에게는 이성을 지킬 만한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특히 자신의 가설이 오랜 기 간 철근 콘크리트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할 때는 그 가설을 다른 사람에게 쓸데없이 강 요하지 말아야 한다. 백합꽃 왕자는 헤라클리온 박물관의 아름다운 대벽화실에서와 마 찬가지로 크레타의 철제 벽난로 장식 위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판 에펜테레, 마스토라키스 "미노아 사람들", 1991년 오늘날의 미노아 문명세계 오늘날의 탐사는 땅속의 발굴뿐 아니라 지표면의 조사와 해저 발굴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쿠스토는 고고학자팀이 그때까지 탐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던 크레타섬의 동부와 서부를 탐사하는 동안 자신의 탐사단과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은 지역의 발굴을 위하여 그 섬의 해변을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그 지역에 대한 이러한 밀도 있는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건축물이 몇 개 발견되었다. 즉 1960년에는 자크로에서 제4궁 전이 발견되었다. 몇몇 지역에 대한 조직적인 탐사 덕분에 팔라이카스트로나 말리아의 도시 같은 도시들이 오늘날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아르카네스에서 발굴 된 공동묘지에서는 왕실의 화려한 묘들이 발견되었다. 아르메니에서는 100개가 넘는 묘지가 발굴되었으며 코모스에서는 미노아 왕국의 무기창고가 발견되었고, 파이스토스 에서는 왕궁의 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86년부터 사람들은 미노아 왕국의 도로망 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에번스의 사후 이렇게 참고자료들이 풍부해졌음에도 불구 하고 에번스가 정립해 놓은 미노아 문명의 역사의 개요는 변하지 않았다. 지방의 공동체들 오늘날에는 크레타섬이 BC 3000년대 초에 에게해 북동쪽 해안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초기 미노아 시대(BC 3200-2200)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장인들의 활동(도기 제조, 베짜기)의 중심지이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거처로 쓰이 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이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생계는 근방의 토지 를 경작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예를 들면 금으로 된 뛰어난 장신구가 발견된 모클로스 처럼 부를 과시하는 묘지들을 보면 고대에 이 크레타섬 동부가 어느 정도 번영했는지 알 수 있다. 미노스의 궁전들 우리는 크레타섬에 있는 궁전들이 지어진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한다. 지역적인 현상 인지외부의 영향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궁전들은 중기 미노아 시대(BC 2100∼1800)의 초반 거의 같은 시기에 크레타섬의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또한 말리아 와 같은 도시의 출현도 주목한다. 이 궁전들은 다음 두 시기에 걸쳐서 발달한다. 두 시기란 전(前) 궁전시대(BC1800∼1700년으로 추정되는 중기 미노아 시대Ⅱ)와 후(後) 궁전시대(BC 1600∼1450년으로 추정되는 후기 미노아 시대Ⅰ)를 말한다. 이 두 시기 는 모두 파괴되면서 종말을 맞았다. 전 궁전시대는 자연적인 원인-지진 같은 것-으로, 후 궁전시대는 인위적인 원인으로 끝이 났다. 즉 미케네인들이 크레타섬을 침공하여 그 풍요로운 평원과 계곡을 정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 궁전시대와 후 궁전시대에는 궁전들이 있는 중심 지역(크노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 자크로)에서 미노아 문명의 꽃이 활짝 피었다. 그 궁전들은 왕권과 종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고문서 보관소가 이 를 증명한다). 화려한 방들과 지성소들, 화려한 기구들과 사치품들을 만들던 장인이 작 업한 흔적들은 그 궁전들이 왕들의 주거지였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크레타섬이 전 궁전시대에 독립 왕국들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크노소스 왕궁은 후 궁전시대에 그 섬 전체를 지배한 왕국의 수도였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은 현재 널리 인정받고 있다. 크레 타섬은 고대의 다른 나라들, 특히 이집트와 근동제국과 교역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있 었다. 현재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를 미노아 문명의 강력한 모델로 볼 수 있다는 에번스 의 주장을 소홀히 하면서 근동제국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에서 발견된 미노아 문명 양식의 대벽화들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미노 아 문명의 종교 문제도 흥미닜는 토론 거리로 남아있다. 미노아 문명의 종교는 지성소 들의 확인과 그림들에 대한 연구에 참고자료가 되어왔고 현재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크레타섬의 산봉우리들과 동굴들은 청동과 테라코타로 된 작은 상들, 항아리들, 이중 도끼나 이중 뿔과 같이 그곳에서 잘견된 많은 봉헌물들로 인하여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지역으로 여겨졌고, 고고학자들이 이를 증명해 냈다. 궁전이나 주택의 몇몇 방 은 예배의 장소로 꾸며졌다. 그 장들에서는 향로, 각배(角杯), 긴 의자들과 소형 제단 들이 발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난간과 계단, 반지하로 이루어진 특별한 양식의 방을 보고 신자들이 예 식을 준비하며 정결 의식을 치르는 목욕탕으로 생각했다. 미노아의 판테온에는 한편으 로는 고대의 상징적인 물체의 숭배(여기서는 기둥의 숭배)가 남아 있었고, 다른 한편 으로는 항상 뱀이나 맹수로 상징되는 주신(主神)인 여신(어머니 여신)이 자리잡고 있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노아의 왕은 예배를 담당하는 대제사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 다. 미노아 사람들은 하기아트리아다의 석관 대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피를 흘리 는 제물을 자주 바치고 했다. 황소는 특별한 제물이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황소의 뿔은 자주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상징이었다. 투우 경기에서는 곡예 경주(미국의 로데 오나 프랑스의 암송아지 달리기 경주에 비견할만한)가 펼쳐졌고, 어김없이 황소의 희 생으로 막이 내렸다. 다양한 그림들을 통해 확인된 권투처럼 투우는 종교적인 축제나 서민들의 잔치에서 행해졌음이 틀림없다. 사자의 머리에다가 딱딱한 껍질로 덮여 있는 요정과 비둘기 같은 새들이 미노아 종교의 이 투사(황소)를 보조해 주었다. 1900년 이후 증가한 고고학 자료들은 고고학자들이 미노아 시대, 특히 중기 미노아 시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정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건물의 벽은 주로 받 침돌 위에 벽돌을 쌓거나 석회질의 돌을 섞은 흙을 도리에 쌓아서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크레타섬에서 자주 일어났던 지진에 버틸 수 있었다. 또 바닥은 다져진 흙이 나 화장 회반죽, 또는 돌을 깔았다. 2층 이상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드물게 있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테라스가 갖춰져 있었다. 채광은 천장에 구멍을 뚫어 빛이 들어오게 함 으로써 해결했다. 천장으로 들어온 빛은 주랑을 통해 방 쪽으로 향한 작은 마당을 비 추고 있었다. 일부 벽에는 일종의 간막이 역할을 하는 몇 개의 문이 달려 있었다. 그 문들은 온도와 빛을 조절하기 위하여 자유자재로 열고 닫을 수 있었다. 후기 미노아 시대에는 별장건물이 있었다. 그 별장들은 커다란 돌로 호화롭게 지어졌으며, 대벽화 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땅바닥이나 무너진 2층 바닥에서 방들의 기능을 분명히 해주는 물건들, 이를테면 도가니, 주물공이 사용하던 주형,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돌림판, 전문적인 장인이 돌항아리나 도장을 만들 때 떨어진 파편들, 베틀의 추문서 보관실의 점토판, 곡물창고의 피토스, 목수의 도끼와 톱, 기름 압축기, 포도주 압축기, 흑요석 박편, 테라 코타로 만든 벌통, 농사일과 가축을 사육하는 데 쓰인 돌절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이 렇게 해서 당시 사용된 비품들을 연구하여 각 시대 기술의 발전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이것이 순수하게 역사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것보다 정확했다. 어떤 물건들은 장인들이 어느 정도의 기량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은 돌로 만든 항아리, 그리고 각 조각들을 별도로 만들어 갈고리와 동물성풀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상아를 발견했다. 금은 세공사들은 말리아의 꿀벌 펜덴티브가 보여주듯이 테두리를 오톨도톨하게 만드는 기술이 완벽했다. 도기공들은 두께가 몇 밀리미터밖에 안되는 잔들을 만들기 위해 돌 림판을 빠른 속도로 돌렸고, 상감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카마레스 양식의 울긋불긋한 그림과 풀, 주형을 사용했다. 한 세계의 종말 현재의 고고학 연구가 에번스와 명백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미노아 문명의 소실에 대한 부분이다. 에번스는 미노아 문명이 후기 미노아 시대Ⅱ(BC 1450)까지 계속되었 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전 폐허 속에서 선문자 B로 쓰여진 점토 판 조각 수백 개를 발견했다. 그는 그 판들이 선문자A와 상형문자로 쓰여진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미노스왕의 재판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마이클 벤트리스와 존 셰드윅은 이 문서를 해독한 후 이 글자들이 사실은 그리스어를 적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것은 침력자인 미케네인들의 언어로, 미케네인들의 감독하에 크노소 스의 공식적인 언어로 쓰이게 되었다. 미케네인들은 후기 미노아 시대ⅠB에 미노아 문 명을 파멸로 몰아놓은 장본인으로 그 시대 이후 크레타섬을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했다. 크레타섬에서 미케네 왕국이 존속했던 기간은 고고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발굴작업으로 해마다 새로운 정보가 나온다. 에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케네 인들은 어쩌면 단순한 침입자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미노아 왕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파괴해 버린 도시의 폐허를 재점령한 것이다. 선문자 B로 쓰여진 미케네인들의 고대 공문서를 해독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 고증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고문서 점토판들은 당시 크레타섬이 주요 중심지가 되었 던 듯싶은 베짜기나 가축 사육과 같이 땅 위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활동이나 제 조술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고학자들이 크노소스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 로 추정하는 세토이자 도시권에서 사람들은 양털을 얻기 위해 양떼를 길렀으며 특히 크노소스는 왕국의 다른 마을들에 부족한 짐을 나르는데 쓰는 동물을 대치하고 재생산 하기 위해 암양과 숫양을 길렀다. 또한 몇몇 고고학자의주장에 따르면 크레타섬의 주 둔군이 장비로 쓸 수레를 만드는 작업장이 있었다고 한다. 미노아의 섬은 이렇게 미케 네의 한 지역이 되었고, 수세기가 지난 후에는 그리스 세계의 요람이 되었다. 알렉상드로 파르누 1면에 실린 미노아 문명 미노아 문명에 관한 고고학은 언제나 신문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미노아 고고학은 이목을집중시킨 발굴을 통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꿈꾸게 하였다. 그리고 발굴된 유물들 은 에번스가 꿈꾸었던 바와 일치했다. 미노아의 천국에서의 식인 풍습 크레타섬에서 사람들이 최근에 발견한 것들로 인해 평화적인 문화라는 신화는 깨어져 버렸다. 1979년 크레타섬의 중앙에 위치한 아르카네스에서 사켈라라키스 형제는 미노 아 왕국의 성소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친 흔적을 찾아냈다. 다음해에 워렌이 크노소스 에서 발견해낸 것은 더욱 더욱 으스스한 것이었다. 그는 11살 난 어린이돠 8살난 어 린이의 유골을 발굴했는데 아이들은 제물로 바쳐져 사람들이 먹을 수 잇게끔 잘려 있 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언론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고대의 신탁에는 영국인들이 크레타의 중요한 비밀을 캐낼 것이라도 정해져 있었을까/ 파에스토스의 원반 위에 이런 예언이 새겨져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이 지나치게 낭만적 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미신을 조금만 믿는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갖춘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전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냈다. 에번스오 같 은 영국인인 피터 워렌 교수는 지난해와 올해에 미노아 왕국 건물의 지하를 발굴하면 서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기존 지식을 변화시켜 놓을 만한 것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직은 조금 성급할 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징표들을 가지고 있다. 워렌 교수는…그 자신 이 발견한 것들로 인해 말 그대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놀란 것은 그의 발견으로 알려진 사실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발견에 대한 반응들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종족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감을 지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 리 조상들이 식인종이었다고? 말도 안돼. …"워렌 교수는 작년에 크노소스에서 세 번 째 발굴을 했다. 첫 번째 발굴은 1978년에, 두 번째 발굴은 1979년에 행해졌다. 건물 의 지하에서 인간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바로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굴 때였다. 당 시 유골이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자들은 미노아 시대에 식인 풍습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워렌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그 유골들은 재단된 돌 로 정교하게 지어진 저택의 지하실 두 곳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동쪽에 위치한 지하 실에서는 지금까지 방패와 식물무늬로 장식된 제례용 항아리 37개와 다른 미노아 물 건들이 발견되었다. …두 번째 지하실에서는 아름답게 장식된 향로와 함께 다른 많은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발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 것들 외에도 두 번째 지하실에서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8살 내지 11살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뼈 76개와 두 개의 두개골이 나왔다. 이 뼈들 중에 25∼30개에는 칼로 낸 흠집이 있 었다." 그렇다면 이 칼자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고고학자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 았지만 지금까지 확실하게 정립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칼자국들은 싸우다가 난 것일 수도 있으며 전쟁 때 무기에 찔려 그 칼자국은 살짝 난 것으로,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것임이 드러났다. 그 칼자국들은 결렬한 싸움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골들은 이어져 있지 않고 부서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워렌 교수 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마치 고기 요리를 준비할 때처럼 살은 뼈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작업은 미노아 시대의 요리사나 백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 같 지 않았다. 가장 그럴듯한 다설은 이런 것이다. 즉, 고대부터 동물들을 가지고 해왔던 것처럼 두 어린이가 신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고 그 어린이들의 살은 사람들이 나 누어 먹었다." 인류학자인 바인포드 교수는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뼈들의 사진을 보고 난 후 이와 같은 가설에 동의를 표했다. 이 가설을 어린이들의 유골과 함께 목이 잘려 진 암양의 뼈가 발견됨으로써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묵이 벤 자국은 제물의 표 시였다, 그러므로 식인 풍습이라는 가설을 배제시킬 수 없다. 여기서 식인풍습이라함은 물론 제례의식으로 행해진 것을 말한다. 크레타섬에는 원시민족의 식인풍습 행위나, 침략 또는 재앙에 따른 식량의 결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강요된' 식인풍습이 존 재했다고 가정할 어떤 단서도 없다. 레나 테올로이두, <타키드로모스> 팔라이카스트로에 있는 젊음의 신 1986년 크레타섬의 동쪽 끝에 있는 필라이카스트로에서 제개된 발굴작업은 고고학자 새킷과 맥질리브리에게 이례적인 발견을 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후기 미노아 시대 초 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0. 5미터의 상아와 금으로 된 작은 입상을 찾아냈다. 크레타섬 동부 지역인 팔라이카스트로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결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1986년 팔라이카스트로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그런 결과를 전혀 예 상치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발견된 주목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후기 미노아 시대의 이 지역이 그리스의 제우스 신이 어린 시저를 보낸 곳이었다는 상상에 빠지게 된다. …아서 에번스 경이 처음으로 크노소스 궁전의 잔해를 발견한 20세기초부터 100곳이 넘는 지역에서 행해진 국제적 발굴작업들은 크레타섬 사람들의 과거를 재정립하는 데 공헌했다. 우리는 묘지와 수공예품, 그리고 건척물에 대 한 연구를 통하여 청동기시대 크레타섬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많은 부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노아의 종교는 민아 문명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에서 가장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우리가 팔라이카스트로 에서 행한 발굴작업은 이 문제에 뜻밖의 공헌을 했다. 즉, 미노아 사람 들은 제우스 쿠로스의 옛 조상인 젊은 신 혹은 '젊은 남자'를 숭상했던 듯싶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그 비법이 밝혀지지 않은 정교한 제작법과 재단법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아상을 찾아냈다. 그것은 젊은 남자 상으로, 미노아 사람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재료인 상아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 다. … 이 작은 상은 1987년 발굴작업 마지막날에 발견되었다. 그때는 크레타섬에거 보통 날 씨가 좋은 시기인 5월 초였지만, 그 전날 밤에 심한 폭풍우가 내려 집들이 진흙물에 잠겼다. 우리는 그 물을 퍼내고 작은 광장 옆의 무너진 돌 밑을 파냈다. 이 거대한 돌 더미에서 돌을 하나 들어올리도 있을 때 감독관인 니코스 다스칼라키스가 꼼짝 않고 섰다가 사람들을 불렀다. 그는 상아로 된 팔과 상반신, 그리고 금으로 된 얇은 판 조 각들을 발견한 것이다. 1988년에 우리는 그 작은 광장의 나머지 잔해들을 치워버렸다. 우리는 상아 상반신상 을 찾아냈던 장소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것에서 푸른빛이 도는 회색 사반암으로 조각 된 머리 윗부분을 찾아냈다. 그것은 두개골 꼭대기에서 땋아내린 머리칼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옆은 세밀하게 조각되어 면도한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에 이 두상이 다른 입상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상아로 된 목을 발견하여 그 상반신에 붙여보고 나서는 따로따로 발견된 그 부분들이 하나의 입상을 이룬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그 두상은 3부분으로 잘라져 있었는데 그것은 건물이 파괴될 때 몸체 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을 찾 아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눈을 고정시키는 장붓구멍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부분에서 나온 6톤의 흙을 체로 거르는 작업을 하던 팀이 크리스 탈로 만들어진 두 개의 눈을 발견했다. 그 크리스탈 눈은 2개의 장붓구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 팀은 또한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상아로 된 발 두 개를 찾아냈다. … 이 작은 상이 표현한 인체구조의 상세함과 정확성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핏줄, 힘 줄, 그리고 손톱까지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것처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러 한 사실적 묘사는 그로부터 천년 이상이 지난 후의 고대 고전주의 이전의 그리스 예술 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가슴 위에 꽉 쥔 주먹을 올려놓은 자세는 미노아 인물화 전문가들에게는 익숙한 것이 었다. 즉, 페초파 인근의 산꼭대기 지성소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테라코타 상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 테라코타 상들을 기도하는 신자를 표현한 봉헌물로 생 각했으나 사실은 미노아의 도장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그림들을 통해서 알려진 젊음 의 신의 모습이었다. 미노스 시대의 젊은 신자들이 그들과 같은 모습의 -그리고 그들과 같은 나이의-신을 좋아했다면 최근까지도 크레타섬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했던 것처럼 그 젊은 신자들 은 틀림없이 이 작은 입상 앞에 서서 제우스 쿠로스를 기리는 찬가와 비슷한 찬가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은 상은 젊음의 신인 제우스에 대한 숭배를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상이었을 것이다. 새킷과 맥질리브리 <고고학자>(1989) 미노아 문명의 모조품들 미노아 문명의 모조품들은 크레타섬 고고학의 인기를 증명한다. 특히 1910년에서 1939년까지의 모조품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그 모조품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에번스 자신도 여러 번 속았는데, 특히 유명했던 것이 티스베의 보 물이다. 그 모조품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어서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에번스를 찾아온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 경의 증언은 이 중요한 문제를 언급한 소수의 증언들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 초엽에 나는 크레타섬에서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고 있던 에번스의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칸디아의 경찰로부터 경찰서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에번스와 그의 조수인 덩컨 매켄지와 함께 나는 경찰서로 갔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 다. 에번스는 자신이 찾아낸 유적들을 복원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그리스인을 두 명 고용했다. 그 두 사람은 에번스가 교육시킨 숙련된 사람들로서 한 사람은 늙고 한사람 은 젊다. 그 두 사람 에번스가 현장에서 고용한 예술가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했다. 그들은 복원작업을 훌륭하게 마쳤다. 그런데 늙은 사람이 병에 걸렸다. 의사는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확실한가요?"노인이 물었다. "예, 안됐지만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경찰을 불러주시오." "신부님을 불러달라는 말씀이죠?" "아니오. 정말 경찰을 불러주오." 노인이 고집을 부리자 결국 경찰이 불려왔다. 경찰이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나는 곧 죽을 테니 이제 당신에게 말해도 괜찮겠지. 여러 해 동안 나는 에번스를 위 해 나와함께 일한 젊은 게오르그 안토니우와 짜고 가짜 유물을 만들었소." 노인이 말 했다. "그래서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경찰이 말했다. "상관이 있지요. 우리는 크레타섬의 것으로 보이는 금과 상아로 된 작은 상을 칸디아 박물관에 팔았소. 그건 불법이오. 게오르그는 사기꾼이라오. 나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 오. 나는 그를 고발할 이 순간을 기다려왔소. 그의 집으로 직접 가보시오. 거기에서 모 조품들과 우리의 작업장을 모두 발견하게 될 거요." 경찰은 안토니우의 집에서 현장조사를 했도 거기에서 노인이 말한 것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경찰이 에번스에게 그것들을 보러오라고 한 것이다. 나는 그것들처럼 멋진 모조품을 본 적이 없다. 그곳에는 각각 다른 제단 단계에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상아 와 금으로 만든 크레타섬의 작은 상들이라도 불리는 것들도 그 곳에 있었다. 우리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들은 칸디아와 케임브리지, 보스턴 박물관의 작은 상들과 똑같이 금으로 장식된 상아로 만든 작은 상이었다. 그 두사람은 이 양식의 작은 상들 을 만들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거친 초벌 단계의 것에서부터 정교 하게 조각하고 완성한 것까지, 코끼리의 상아에서부터 금장식이 된 작은 상까지 모든 것이 있었다. 그 작은 상은 수세기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산성용액에 담겨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진품과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너드 울리 <내가 기억하는 대로>, 1962년 크레타섬의 문자들 미노아 왕국에는 문자가 있었다. 즉 BC18세기부터 미노아 사람들은 거친 점토판 위에 다가 궁전에 쌓아놓은 물건들의 출납을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에번스에게 크레타 섬에서 발견한 것들의 역사적 의미를 확인시켜 주었다. 에반스를 크레타섬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호메로스 시대의 왕국들에 나오는 문자에 관한 문제였다. 에번스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그는 3종류의 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파이스토스의 원반 위에 새겨진 문자 외에도 상형문자, 선문자 A와 선문자 B가 있었 다. 이 문자들의 발견은 고고학자들을 열광시키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중학게 만들 기도 했다. 1902년 살로몽 레나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데서나 튀어나와서 핀란드어로 쓰여진 글자판, 히브리어로 쓰여 진 글자판, 저지 브르타뉴로 쓰여진 글자판이나 심지어 호메로스가 쓴 그리스어로 쓰 여진 판까지도 읽었다고 주장하는 돌팔이 학자들을 경계합시다." <미노스 궁전>의 출 판에 몰두하던 에번스는 이 해독작업을 주도해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수법 체계와 몇몇 표의문자의 가치를 정립시켰다. 오늘날에는 선문자 B는 그리스어의 예 형 태인 미케네어를 베껴쓰기 위하여 미케네인들이 발명한 문자였던 반면에 상형문자와 선문자 A만이 미노스 사람들의 한가지 또는 여러 가지 언어를 표기하는 데 가용되었 던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상형문자와 선문자 A 상형문자는 90개의 기호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수의 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포도 주나 무화과처럼 다른 문자들과 같이 표의 문자들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상형문자는 여러 종류의 관공서 서류에 사용되었으며 도장 위에 장식용으로 새겨지기도 했다. 선 문자 A는 70개의 기호와 적어도 164개의 표의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선문자 A는 ' 페이지' 구분이 된 판 위나 삼각형 막대기 위, 사각형 막대기 위, 그리고 금속으로 만 든 물건 위에 새겨져 있었다. 미노아 사람들은 선문자 A와 상형문자를 동시에 사용하 기도 했다. 선문자 A는 음절 문자였는데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언어를 표기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문서들은 아직도 해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2000개미만의 상형문자의 용례ㅗ아 1 만 개미만의 선문자 A의 용례를 갖고 있을 뿐이다. 1923년 베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크레타섬이 그토록 기다렸던 것은 샹폴리옹(프랑스 출신의 이집트학의 권위자: 역주) 이 아니라 새로운 문서의 발견이었다. 마이클 벤트리스가 1953년 선문자 B를 해독했 을 때 그는 3만 개의 용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추론과 비교를 통해서 몇몇 문서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즉 파이스토스에서 나온 상형문자판(위 그 림)은 불규칠한 두 개의 줄 위에 숫자와 함께 표의문자로 적은 밀, 볏과 식물, 올리브 와 무화과, 이 4개의 생산물 목록이 들어있다. 하기아트리아다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같은 유형이지만 선문자 A로(147페이지 아래 그 림) 쓰여져 있는데, 그 첫째 줄은 지명임에 틀림없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 두 번째 줄은 포도주의 표의문자로 시작된다. 그리고 6개의 단어 목록(인명인듯함)과 숫 자들이 뒤를 잇는다. 마지막 줄은 앞줄에 표시된 양의 총합을 포함하며 총계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왕국의 한 지역에서 포도주의 정확한 양의 분배를 정해 놓은 문서이 다. 선문자 B 선문자 B도 역시 음절문자이며 87개의 음절문자와 약 100여 개의 표의 문자로 구성 되어 있다. 선문자 B는 에번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 언어를 표기한다. 이 문자는 또한 미케네, 테베, 필로스 같은 후대의 그리스 본토 왕궁의 문서에 쓰인 문자 였다. 이 문서들은 장방형(종려나무 잎으로 된)이나 직사각형('페이지형')으로 돈 점토 판으로 되어 있다. 이 점토판들은 보존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궁전들이 파 괴될 때 우연히 구워지게 되었다. 그것은 왕국의 관리들이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목판 위에 기록한 정보들을 적어넣은 초안들이었다. 이 관리들이 작업한 내용은 아주 정확하게 연구될 수 있었다. 에번스가 크노소스 궁전 에서 발견하여 조심스럽게 끄집어낸 한 묶음의 판들(149페이지)은 궁전이 파괴될 때 그것들이 색인표라고 확언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한 가지 주제를 다룬 7개의 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관리는 지명에 따른 생산량 목록을 만들었고, 아래에 있는 판은 다른 6개의 판에 들어 있는 정보 전체를 다시 요약해 놓았다. 필적 연구와 그 판의 질 료 연구 덕분에 미케네 사람들이 크노소스 점령을 결산하기 위하여 이 자료들을 작성 할 때 동원된 관리들의 수가 약 100명쯤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에는 명령에 따라 그 판들을 제작한 보조자들을 첨가해야만 한다. 손가락 자국을 보면 어린이들과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크레타섬에서 문자으 기능 점토 위에 쓰여진 문서들은 근본적으로 궁전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작성된 고문서들 이었다. 에번스는 그것들을 모두 해독하기 이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선문자 B로 쓰여진 자료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그 왕국의 행정조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 것은 기본적으로 징세에 관련된 것이었다. 즉 궁전 관리들은 왕실 창고로 되돌아와야 만 하는 생산자의 이익분을 계산하고, 실제로 징수된 것들을 계산했다. 이렇게 징수된 물건들은 저장했다가 관리들이 노예와 장인들의 식량 배급이나 신에게 바치는 제물, 또는 군대 장비들과 같이 여러 명목으로 분배하여 꺼내 쓸 수 있었다. 비록 그 문자의 암시적 성격으로 인한 한계가 있도, 특수한 분야에 관한 것이라 할지 라도 그 문자는 역사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의 보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왕국의 소 의 이름은 몇 개 알고 있지만 왕의 이름은 하나도 알지 못한다! 알렉상드로 파르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