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 세계의 기둥 - 지은이: 로베르 들로르 옮긴이: 이한헌 출판사: 시공 디스커버리 봉사자: 강은영 “매머드가 울하므르족을 가로막았다. 매머드는 부드러운 풀을 뜯어먹고 짓밟 으며 뿌리째 뽑아 버렸다. 세 사람의 눈에 비친 매머드들은 행복하고 위험을 모 르는 멋진 존재였다. 매머드의 거대한 발 밑에서는 큰 사자도 깨지기 쉬운 질그 릇이나 다름이 없었다. 매머드의 상아는 떡갈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화 강암처럼 단단한 머리는 나무를 산산조각 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부드러운 코를 가진 매머드를 보면서, 나오(Naoh)는 ‘매머드는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스니.(불을 찾 아서) 제1장 코끼리의 가계 모든 것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현재의 코끼리들은 약 4500만 년 전에 살 았던, 맥과 유사한 형태를 한 포유동물의 후예이다. 코끼리의 조상들은 그 화 석이 이집트의 모에리스 호수 부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모에리테리움 (Moeritherium)이란 학명이 붙여졌다. 이들 모에리테리움은 이미 앞니가 발달한 자그마한 상아를 가지고 있었다. 모에리테리움의 후손들 대부분이 사멸되었으 나, 많은 유골 덕분에 현재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프리멜레파스(Primelephas)보다 오래 생존해서,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엘레판 토이데아(Elephantoidea)만이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의 출현을 볼 수 있었 다. 이들은 진화과정을 통해 몰타코끼리(Maltese elephant)같은 ‘난쟁이 형태’ 에서 벗어났으며, 매머드(mammoth)종 들도 시베리아의 북극권에서 난쟁이 형 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매머드(학명 Mammuthus primigenius), 매머드와 아주 비슷한 아시아코끼리(학명 Elephas maximus), 좀더 뚜렷이 구별되는 아프 리카코끼리(학명 Loxodonta africana)만이 살아 남았다. 거대한 할아버지, 매머드. 매머드는 털 많은 코뿔소. 칼 같은 이빨을 가진 호 랑이, 동굴 속의 곰, 거대한 들소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선사시대의 동물 중에 서 가장 유명한 동물이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생김새가 유별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매머드는 현재의 아프리카코끼리만 한 체구지만, 돔 모 양의 매우 높은 머리 때문에 훨씬 더 커 보이며, 대단히 긴 털(70㎝)로 뒤덮인 둥글둥글한 체형 때문에 더 거대해 보인다. 또한 길이가 약 5㎝에 이르고, 각각 125㎏이나 나가는, 거의 완전한 원 모양의 상아 때문에 무게가 더 나간다(약 7 톤). 매머드는 예전부터 시베리아인(오스티아크족, 퉁구스족, 야쿠르족, 보굴족 등) 과 중국인에게 친숙한 존재이다. 아마도 시베리아인 에게 서 전해진 것이겠지 만, 중국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티엥수 라(Tien-shu rat)의 이빨’이라는 푸 르스름한 매머드의 상아를 이용해 왔다. B.C.5세기 중국인의 기록에 따르면, 황 소나 드소 크기의 게으른 짐승인 이 ‘쥐(rat)와 비슷한 동물’을 땅속에서 살 며 햇빛이나 달빛을 보면 곧 죽는다. 목은 짧고, 눈은 작으며, 꼬리는 다리의 길 이보다 더 길었다. 서양에서 동굴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매머드는, 1911년에 쓰인 "불을 찾아서" 같은 유명한 소설들을 통해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매머드는 왜 지상에서 사라졌는가? 구소련 학자들은 최근 연구를 통해 매머 드가 일반적 견해보다 오랫동안 생존했음을 밝히고 있다. 시베리아의 북동쪽과 알래스카에서 살았던 최후의 매머드는 1만여 년 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집 트의 초기 왕조인 5,000여 년 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매머드가 사라진 이유는 여러 가지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사라진 시기에 대한 견해 차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상당히 다른 멸종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구소련과 미국 학자들은 정확하게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그들에 따르 면, 추위에 완벽하게 적응했던 매머드들은 기후가 다시 더워진 시기에 죽었다. 물론 유라시아에서는 매머드를 허공에서 떨어뜨리거나 늪으로 몰아넣는 인간들 의 사냥이, 이 육중하고 번식주기가 매우 느린 짐승의 멸종에 일조를 했다. 빙 하지대가 북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매머드의 무리도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동시 에 타이가(taiga, 침엽수림지대)도 북상했고, 툰드라 지대도 북빙양 쪽으로 밀려 났다. 특히 풍부한 눈과 여름철의 폭넓은 해빙으로 목초지가 범람하게 되어, 매 머드의 무리는 약해지고, 어미는 새끼들을 보호하거나 양육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매머드는 타이가에 의해 꼼짝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목초 지가 너무 부족한데 목초지에 유해한 타이가까지 북상해, 궁지에 몰린 매머드들 은 쇠퇴하여 점차 그 수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멸종에 이르렀을 것이다. B.C.9000년쯤의 알래스카에서는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짧은 추위와 인간들의 포 식이 매머드의 멸종을 초래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점차 확장되고 매년 되풀이되는 큰 강들의 해빙은 강 하구에 수백 개씩 의 뼈와 상아를 쌓아 놓았다. 현재 북극권의 만에는 나중에 죽은 매머드들의 유 골들이 발굴을 기다리며 묻혀 있다. 이 유골 발굴지 중 한 곳에서는 10여 개의 상아와, 120마리 이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들이 발굴되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공동묘지가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에 200㎏의 풀을 먹어 치우는 매머드 들이 툰드라 주변부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 운 면이 많다. 사촌형제인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 매머드의 멸종 후, 아시아코끼리 와 아프리카코끼리만 살아 남았다. 아시아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보다 덩치가 작다. 몸길이가 3m를 넘는 경우가 드물고, 몸무게도 대부분 3톤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의 황제 바오 다이가 애지중지했던 코끼리들처럼 길이 잘 든 늙 은 코끼리들은 몸길이가 3m, 몸무게가 4톤이 넘기도 한다. 아시아코끼리는 귀가 작다. 상아는 간혹 긴 것도 있지만 대부분 아프리카코끼리보다 훨씬 짧고 가볍 다. 수컷의 40%와 모든 암컷은 상아가 없다. 코끝에는 손가락 모양의 돌기가 한 개 있고 등은 가운데가 불룩 솟았으며, 이마에는 혹이 두 개 있다. 어두운 빛깔의 피부는 나이가 들수록 점차 밝아져 연회색을 띠며, ‘흰’코끼리는 극히 드물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어금니는 평행선을 이룬 뼈들의 돌기로 구성 된 강판 형태이다. 아프리카코끼리는 아시아코끼리보다 크고(다 튼 수컷은 몸길이가 3.5m이상인 데, 4.1m를 기록한 경우도 있다), 무게도 많이 나간다. 보통 4~5톤 정도이며, 간 혹 10톤씩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귀는 거대하며, 열을 발산할 필요가 있거나, 적 에게 겁을 주고 무섭게 보이고자 할 때는 그 큰 귀를 활짝 펼친다. 특히 수컷은 상아가 길고 힘이 센데 킬리만자로의 한 코끼리의 상아는 102.7㎏을 기록한 경 우도 있다. 아시아코끼리보다 깊숙하게 갈라진 코끝에는 손가락 모양의 돌기가 두 개 있다. 둥근 엉덩이는 안장 모양의 등보다 높고 머리는 대단히 단단하다. 그리고 어금니는 마름모꼴의 뼈 돌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명 록소돈타도 이러 한 어금니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코끼리는 두 가지 하위 종으로 나누어진다. ‘록소돈타 아프리카나 아프리카나(Loxodonta africana)’라는 명칭이 붙은 코끼리는 더 크고, 피부는 회색이다. 전반신과 후반신의 높이가 같고, 위쪽으로 휜 상아는 상당히 길다. 반 면 숲 속에 사는 코끼리는 훨씬 땅딸막한데, 수컷은 2.1~2.4m정도이고, 암컷은 1.8~1.95m정도이다. 그러나 몸무게는 4톤 가량 나간다. 저의 일직선에 가깝거나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짧은 상아는 단단하고 무겁다. 머리는 록소돈타 아프리카 나 아프리카나보다 낮으며, 등은 덜 오목하고, 귀는 원형에 가깝다. ‘록소돈타 아프리카나 시클로티스(Loxodonta africana cyclotis)’라는 이들의 학명은 ‘원 형의 귀를 가진 코끼리’에서 따 왔다. 검은색을 띠는 몸통은 둥글고, 전반신이 후반신보다 약간 낮다. 코끼리의 강점이자 약점인 코. 코끼리의 중요한 특징은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코에 있다. 코의 끝은 콧구멍과, 한두 개의 손가락모양 돌기로 이루어져 있다. 코끼리의 코는 꽃잎을 따고, 동전을 줍고, 사물을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다듬을 수 있는 솜씨 있는 손이다. 동시에 그것은 적을 때려눕히거나 휘감아 들어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하고 강력한 근육덩어리이다. 한번 허리가 부러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발에 밟히거나 상아에 받혀 목숨을 잃기 쉽 다. 코끝은 매우 예민하다. 코로 만진 사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뇌로 전달되며, 그 정보는 몸에 나 있는 털이 전달하는 정보에 의해 보완된다. 코끼리 조련사는 민감한 -코에 상처를 입으면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며, 심하면 죽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이용한다. 코끼리의 코는 나무를 뿌리째 뽑고, 높은 곳에 있는 나뭇가지 를 끌어내려서 열매나 여린 나뭇잎을 따먹는데 쓰인다. 또한 음식물이나 물을 입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호흡을 하거나 진흙이나 모래를 뱉어내기도 한다. 트 럼펫과 비슷한 소리를 질러 부모나 친구에게 두려움, 위협, 분노를 알리는 데도 (소리를 전파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사용된다. 그러나 코끼리 코의 주요 기능은 매우 발달한 후각기관이라는 점에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코끼리의 눈은 작기 때문에 노출된 공간에서는 쉽게 눈부 셔한다. 그러나 숲 속의 미광 속에는 탁월한 시력을 겉귀는 주로 체온을 조절하 는 데 쓰인다. 눈과 귀 사이에는 측두골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측두골에는 몹 시 역겨운 냄새가 나는 액체인 머스트(musth)가 주기적으로 분비된다. 동물들에 서 쉽게 볼 수 잇는 공격성의 징표이기도 한 이 냄새는 반드시 발정기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니며, 스트레스나 애정의 표시일 수도 있다. 이빨은 앞니와 어금니 로 구분된다. 강판 모양의 커다란 앞어금니 세 개와 뒤어금니 세 개는 가죽처럼 질긴 식물의 섭취로 닳게 되지만, 닳아서 빠지면 새로 나온다. 여섯 번 째로 새 로 나온 어금니가 닳을 정도가 되면 코끼리의 수명은 쉰 살에서 예순 살을 넘 게 되고, 더 이상 음식물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된다. 자연상태의 코끼리가 예 순 살을 넘도록 사는 경우는 드물며, 인간의 수명보다 길게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생 동안 계속 자라는 앞니는 나이 많은 코끼리의 경우, 상당히 큰 상아가 된다. 너무 길거나 너무 무거운 상아는 땅에 끌릴 수도 있고, 많은 무기물과 에 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스러운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의 경우, 상아는 땅을 파거나, 축축한 모래 속에서 물을 찾아내거나, 무거운 코 나 어린 새끼코끼리를 운반하기 위한 도구로 유용하게 쓰인다. 다른 동물과 싸 울 때는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된다. 코끼리는 인간의 뇌보다 서너 배 무거운 상당히 발달된 뇌(5~6㎏)를 가지고 있다-물론 덩치나 몸무게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다. 특히 발은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 내딛을 때나 짓밟을 때는 늘어나고, 뒤로 물러날 때는 오그라드는 피하 지방을 갖춘 코끼리의 발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이 있지만, 겉으로는 드러난 발 굽의 수는 다양하다. 코끼리의 새끼. 수코끼리는 9~12세부터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암컷들이 무리에서 쫓아낸 수컷은 15세 이전, 심지어 20세 이전에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게다가 나이 많은 힘센 떠돌이 수컷에게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암컷의 발정기는 원칙적으로 거의 영 속적이지만 실질적으로 수컷과 교미하여 수태하는 것은 보통 우기가 한창일 때 이다. 사랑에 빠진 수컷은 발정기가 되면 2~3주간 따로 격리된다. 애무와 접촉 이 수반되기는 하지만 사랑의 행위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결합시간은 30초 정도이며, 암수가 공동생황을 하는 기간은 2~3일 정도이다. 간혹 나이 많은 힘 센 수컷이 일찍 암컷을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수태가 이루어진 뒤이다. 임신기간은 22개월이다. 분만은 다른 암컷들의 보호 아래 격리된 상태에서 이 루어진다. 다른 암컷들은 태반을 치우고, 포식동물이 나타나면 이들을 쫓는다. 갓 태어난 코끼리의 무게는 약 100㎏정도인데, 쌍둥이가 태어나는 경우는 드물 다. 새끼코끼리는 장난치고, 미역감고, 배우면서 길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다. 새끼코끼리가 위험을 겪는 유일한 경우는 어미코끼리가 죽었을 때와, 코끼 리떼가 뿔뿔이 흩어질 때이다. 그렇게 되면 새끼코끼리는 큰 포식동물에게 공격 당하거나 갈증 또는 굶주림으로 죽게 된다. 코끼리 가족의 구성과 무리 짓기, 그들은 강한 구속력을 지닌 사회 속에서 잘 보호받는다. 아시아에서건 아프리카에서건 코끼리들은 그들의 사회구조 속에서 놀라울 정 도로 잘 보호받고 있다. 보통 열 마리를 넘지 않는 코끼리떼는 우두머리인 나이 많은 암컷을 ‘모계사회의 여족장’처럼 맹목적으로 따르며, 도망갈 때나 공격 할 때 항상 우두머리와 함께 한다. 만약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그를 따랐던 무리 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쉽게 죽음을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진다. 무리를 이룬 코끼리들은 서로 돕고, 긴 코로 어루만지거나 다양한 소리나 몸 짓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상처를 입거나 병든 코끼리를 돌본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적인 특성은 베트남에서처럼 끔찍한 돌림병의 확산을 불러올 수도 있다. 병 든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리에게 버림받지만, 그때는 이미 많 은 동료들이 감염된 후이다. 코끼리들이 길과 물이 있는 곳을 알게 되고 주된 위험에 대한 소중한 경험들을 습득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집단생활을 통 해서이다. 이러한 긴밀한 사회 곁에서 무리를 떠난 10~12세의 독신 수컷 6~8마리 정도 로 구성되는 무리들이 형성된다. 이 무리들 내에서는 우정 어린 싸움을 통해 엄 격한 것은 아니나 서열이 정해진다. 나이 많은 암컷에게 거절당한 이 젊은 수컷 들은 코끼리떼 곁에 머물면서 새끼코끼리들과 장난을 친다. 그러나 25세가 넘은 수컷들은 두세 마리 이상 무리를 짓는 경우가 드물다. 코끼리는 죽을 때까지 성 장을 계속 하므로, 가장 큰 코끼리가 가장 나이 든 코끼리인 경우가 많다. 이 거대한 족장급 코끼리들은 오직 한 마리의 수컷이 지켜보는 가운데 또는 혼자 서 생을 마감한다. 수원지에서는 한가롭게 맛있는 풀을 즐기고 잇는 코끼리떼를 쉽게 볼 수 있 다. 게다가 그곳에서 목욕이나 샤워, 그리고 진흙을 몸에 바르는 즐거움을 누리 기도 한다. 가까운 친척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애정이 넘쳐흐른다. 예를 들어 새끼들을 거느린 암컷자매들이 무리 지어 다니다 자기를 낳아준 어미코끼리와 다른 자매의 무리를 만나면, 10여 마리, 심지어는 100여 마리의 코끼리들이 합 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정해진 장소에 모여 함께 풀을 뜯어먹는다. 그곳에서 대부분의 동물들과 평화롭게 지내지만, 호랑이나 사자가 나타나면 가차없이 쫓아 버린다. 가끔 식성이 같은 고집 센 코뿔소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코끼리의 식욕. 아프리카코끼리는 하루에 적어도 여섯 차례에 걸쳐 200kg의 먹이와 80~90L의 물을 먹어 치운다. 사로잡힌 동물원의 코끼리는 당근, 과일, 야채, 등 좋은 음식물을 먹기 때문에 사료는 거의 100kg을 넘지 않는다. 아시아 에서는 노역에 이용되는 코끼리에게 일반적으로 200kg의 사료와 풀을 준다. 가죽처럼 질긴 풀을 먹는 야생 코끼리는 절반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하고, 먹 는 양의 44~48%를 배설해 낸다. 이는 식물의 종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다는 점 에서 유익한 일이다. 그들의 엄청난 배설물 속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씨앗들이 돋아난다. 그러나 코끼리는 먹는 것 이상으로 망가뜨리고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 들어 버리기 때문에 때로는 큰 불편을 초래한다. 아시아의 논이나 아프리카의 호박밭이나 목화밭을 코끼리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그 결과는 끔찍하다. 코끼리 떼가 지나간 대초원이나 사바나에서 발견되는, 뿌리가 뽑혀서 죽은 나무(높은 곳에 있는 과일이나 여린 잎을 먹기 위한 것이다), 벗겨진 나무껍질, 부러진 나 뭇가지, 토막토막 잘린 나무줄기들은 삭막한 풍경을 연출해 낸다. 또한 코끼리는 많은 양의 무기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식물들 속에 무 기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 세대에 걸쳐 상아로 파헤쳐진, 함염지들이 생겨난다. 이런 곳에는 간혹 높이가 4m에 이르는 기둥들이 형성되는데, 이를 보 면 끊임없이 채굴되고 있는 진짜 광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필요한 막대한 양의 물과 먹이를 고려하면, 코끼리가 먹을 것을 찾 아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나 돌발적인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코끼리가 적지 않은 취약점이 있으면서도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동료들의 세 심한 보호 때문이다. 코끼리는 오래 전부터 인간을 제외하고는 그들을 잡아먹을 동물이 없으며,‘난공불락(이 낱말은 2세기의 한 수사학자가 처음 사용했다.)'으 로 간주되어 왔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25세에서 45 세 사이의 건강하고 힘센 수컷조차 다른 야생동물에게 공격을 받아 희생될 수 있다. 베트남의 왕코브라 같은 독사에게 코를 물려 희생당하기도 한다. 성미 급 한 코뿔소나 물소는 코끼리와 싸우다가 궁지에 몰리면 그들 조상이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끼리를 죽일 수 잇다. 맞서 싸우거나 코끼리에 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포식동물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 다. 수단의 남서부 지방에서는 코끼리가 심한 출혈로 죽을 만큼 악어가 코끼리 의 코를 짖어 버리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또한 성숙한 코끼리도 홀로 떨어져 있을 때는 맹수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험 이 있다. 게다가 사자나 호랑이는 싸움에서 궁지에 처하면 - 고대 로마나 인도 왕들이 코끼리를 앞세워 맹수 사냥을 했던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방어를 하 다가 결국 코끼리를 죽인다. 때로는 하이에나떼가 코끼리를 사냥하는 경우도 있 다. 여하튼 몸집이 불러일으키는 경외심이나 두려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나 이 많은 수코끼리조차, 간혹 무모하게 덤벼드는 포식동물을 만나면 무리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새끼코끼리가 더 이상 공격을 받지 않을 정도로 힘센 코끼리가 되기까지는 12년 혹은 더 오랜 동안 어미코끼리의 보호가 필요하다. 어미코끼리가 제때에 악어나 호랑이를 발견하지 못해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하면 새끼코끼리는 그들 에게 희생된다. 1950년에는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역주)의 새끼코끼리25%가 호 랑이에게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아프리카 사자들 역시 밀렵자들 에게 어미코끼리를 잃은 새끼코끼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 긴 유년시절과 청년시 절동안 힘센 포식동물을 두려워하며 자랐기 때문에, 살아 남아 성년의 나이에 도달한 코끼리들이 그런 포식동물에 대해 일종의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따라서 코끼리는 무리 중에 있거나 떼를 이루고 있을 때 사 자나 호랑이를 만나면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런 맹수들이 눈에 띄면, 즉각 힘센 암컷들이 공격을 가하며, 종종 몇몇 수컷들이 거기에 가세한다. 그러면 일반적 으로 호랑이나 사자들은 도망을 치고, 이렇게 해서 목초지나 강이 평화를 되찾 게 되면 공격은 끝난다. 간단히 말해서 코끼리의 막강한 힘은 무리를 형성하고 있을 때 발휘되며, 젊은 코끼리들과 장성한 코끼리들이 함께 무리지어 있을 때 그 힘은 배가된다. 인간에게는 온순한 거상. 무섭고 위험스러운 포식동물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오랜 동안 야생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코끼리들은 몹시 겁이 많고 언제나 신중 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보이고, 나이 많은 코끼리에게 소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는 무리 속에 머무는 것을 제1의 규율로 여긴다. 이러한 신중함은 먼 조상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린 매머드들은 마카이로두스(Machairodus, 한때 유럽에 살았던 칼 같은 이빨을 가진 호랑이)에 게 희생되었다. 그러나 매머드의 경우, 가장 무시무시한 포식동물은 바로 인간 이었다. 반켈과 마스카가 100여 년 전에 발견한 체코의 모라비아 지역 프레드모 스트 발굴지에서 900~1000마리에 상당하는 매머드 유골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뼈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중 다수가 부러져 있었다. 인간들이 골수를 빼먹기 위해 부러뜨린 것이다. 비록 구석기시대에는 인간의 수가 많지 않았지만, 매머드들이 점점 북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기온의 상승과 더불어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 오는 인간들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곳 에서 매머드들은 잠식되는 산림과 여름철에는 일어나는 툰드라 지대 목초지의 범람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인간의 행동은 다양한 형태로 코끼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목초 지에 불 놓기, 짐승들의 방목, 경작술의 진보, 대초원과 산림의 파괴, 늪지대의 축소 등은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제방의 건설, 수원의 개발, 관개사업의 진척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코끼리에게 견딜 수 없는 식수의 제 한과 결핍을 초래했다. 지역과 환경, 문명과 시대에 다라 인간과 코끼리 사이의 접촉은 다양하게 변모했다. 그러나 외견상 몹시 다른 인간과 코끼리가 설로 호 기심과 매력을 느껴 왔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수천 년 동안 아시아는 코끼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시아에서 코 끼리는 신성시되거나 신격화되었고, 우수한 투사로서, 사냥의 동반자로서 떼로 는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친구로서 인간과 공존해 왔다. 반면에 아프리카 문명 권에서는 코끼리를 동물의 왕으로 존중하면서도, 코끼리와 목숨을 격렬한 싸움 을 계속해 왔다. 제2장 아시아와 아프리카, 양면성을 띤 하나의 이미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코끼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까닭은? 흔히 이야기되 는 것과 달리 아프리카코끼리도 길들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와조, 카르타 고, 로마, 또는 근세의 아비시니아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새끼코끼 리는 완전하게 길들일 수 있고, 성숙한 야생 코끼리도 연구자나 관광객과 친숙 해질 수 있다. 코끼리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냥꾼이나 밀렵꾼을 식별할 줄 안다. 아프리카코끼리도 조련시킬 수 있다. 19세기 말 자이르의 레오폴트 2세는 코끼리를 작업에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코끼리도 애정에 민감하여, 사 촌 간인 아시아코끼리가 호랑이를 쫓는 것처럼 사자를 좇는다. 그리고 비록 대 단히 주관적인 비교이기는 하지만, 아시아코끼리보다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것 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코끼리도 여러 가지 조련기법을 갖춘 조련사가 꾸준히 훈 련시키면 이끄는 대로 따른다. 코끼리가 조상 대대로 인간과 함께 살아온 개나 돌고래처럼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해 친화력을 갖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 나 코끼리가 인간을 처음 대할 때 공격성을 띠지 않으며, 호기심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시아에서는 코끼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브라만교와 불교에서는 동물 이나 자연이 특별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서 어떤 결론을 끌 어내는 것은 무리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절충된 문화권에서도 자연과 동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끼리는 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특별 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연과 동물에 기반을 둔 아프리카 종교에서도 코끼리가 별로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코끼리는 아프리카 종교에서 흔히 묘사되는 동 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동물이 아니다. 마그레브, 누비아, 에티오피아 등의 주변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토착 코끼리를 이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 지역에서 마저 코끼리가 멸종위기에 놓이면서부터 코끼리를 길들여 이용하는 일은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차지하는 위상. 체체파리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흑 아프리카(Black Africa, 사하라 사막 남쪽의 여러 나라를 이르는 말:역주)대륙 숲 속에 사는 종족들을 단백질 함유 식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코끼리 는 산더미 같은 고기를 제공해 주는 사냥감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유제류(포유 류 중에서 각질의 발굽을 지니는 동물:역주)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부분적인 목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대초원 지대에서는 동물성 음식을 구하기 쉽다. 그래 서 아시아족이 그렇듯 그들은 고기를 많이 먹는다. 그러나 사자나 표범 같은 포 식동물들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기 때문에 굳이 코끼리를 사냥하는 경 우는 극히 드물다.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기 때문에, 이곳의 코끼리들은 다른 목초지에 불이 나 인간의 사냥감이 이동해 오는 경우말고는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환 경 속에서 자유롭고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특정 지역을 유린하여 황폐 하게 만들거나 가축을 공격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 거대한 동물의 힘과, 지 혜와, 인간에 대한 호감은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코끼리는 가공할 힘을 지니 고 있고, 성미가 급하고, 막강한 힘을 지닌 무리들로부터 따로 떼어놓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무리 중 하나가 위험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공격성을 보 이기 때문에 코끼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자 하거나, 개인적인 목적으로 이용하 고자 한다면 상당히 전문적인 조련과정이 필요하다. 이례적인 큰 싸움이 벌어졌 을 때 전투에 이용하거나, 도로나 길을 낼 수 없는 지역에서 작업에 활용할 수 있는 코끼리는 없을까? 뿌리를 뽑아 낼 수 없는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려 밭을 일구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살아 있는’ 코끼리를 어 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코끼리를 길들이고자 하는 동기는 무척 다양하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은 대초원의 코끼리는 완전히 길들이기 어렵다는 점 이다. 동물원이나 서커스단에서도 머스트가 발산될 때에는 가장 온순한 암컷들 에게조차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언제 변덕을 부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 다. 풍요롭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계절풍 지역 아시아에서의 코끼리 문명. 반면에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은 인간의 생활터전이 토착동물의 활동영역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코끼리와 그만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힘과 지혜 때문에 코끼리를 동물의 우두머리 또는 신들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마도 아프리카 사자 보다 더 공격적이고 무서운 호랑이의 직접적인 위험을 코끼리가 막아 줄 수 있 다는 점에서 더 경외심을 품었을 것이다. 코끼리는 호랑이를 쫓아 버리거나 죽 일 수 있고, 궁지로 몰아넣거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사냥꾼이 호랑이를 죽일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에서도 코끼리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위엄 있는 동물의 힘은 사냥할 때뿐 아니라 전쟁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 었다. 코끼리는 인도-유럽인이 도입한 말과 뛰어난 협동력을 보였으며, 전투에 서는 수많은 병력이 밀집된 곳으로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 그곳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었다. 전쟁터의 말이나 사냥견이 그러하듯, 크샤트리아(Kshatriyas, 고대 인도 사회의 네계급 가운데 둘째로, 왕족과 무사 계급을 이름:역주)를 위해 코 끼리는 여러 사람의 몫을 해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코끼리는 전투나 사냥에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타는 동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인기와 명성을 누렸을 것이다. 북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그리스-로마세계에서도 -이들 지역은 인도로부 터 영향을 받았다-고대 인도의 그림이나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많은 문헌들이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코끼리, 공격성을 띠고 있는 코끼리만을 보여 준다. 인도-유럽족 전사들이 인더스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수천 년 전에 찬란한 꽃 을 피웠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에 근거를 둔 다른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은 인간 60명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는 온순한 코끼리가 대역사에 이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코끼리가 실어 나르는 짐은 낙타의 세 배 정도밖에 되지 않 고, 낙타를 부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경비가 필요하다는 점, 하루에 여섯 시 간밖에 일하지 않는다는 점, 막대한 사료와 세심한 보살핌을 쏟아야 한다는 점 등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따랐음에도 말이다. 길들인 코끼리의 효용성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과 코끼리의 관계는 더욱 밀접 해졌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버마, 라오스,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에서 코끼리가 전투에 이용된 것은 인도 문화의 강력한 영향 탓이었다. 따 라서 자비, 생명경외사상, 윤회설, 동물애호사상도 인도에서 극동지역에 전파되 었지만,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어 간 것처럼, 호랑이와 코끼리 같은 많은 야생동 물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살육보다 더욱 잔인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살아 있는 코끼리가 특권을 누리는데 반해, 아프리카에서 는 죽은 코끼리가 떠받들어지는 이유가 아직까지 설득력 있게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아시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가장 오래된 인도 문명은 B.C. 2500 년경에서 B.C. 1700년경까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 번성한 인더스강 문명이 다. 이때부터 코끼리는 부족의 상징이나 토템(totem)으로 간주되어 왔다. 동석 (덩어리 모양의 활석:역주) 인장에는 등에 긴 천을 걸친-이로써 인간에게 길들 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코끼리가 등장한다.B.C. 2000년경의 문헌은 코끼리가 탈것으로 이용되었음은 물론 전투에도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B.C. 1600년경 현인도인의 선조인 아리아족의 인더스강 유역 이동이 시작되었다. 안 장 얹은 말을 타고, 큰 도끼를 휘두르는 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인도 북서 부 지역과 갠지스강 유역을 제압하고, 남쪽으로 데칸고원, 북쪽으로 히말라야 계곡까지 세력을 뻗쳤다. 아리아족은 가는 곳마다 코끼리를 만날 수 있었고, 코 끼리를 사로잡는 법, 길들이는 법, 전투에 활용하는 법을 배웠으며, 그 고귀한 품성과 충직성을 알게 되었다. 옛 인도의 성전 베다(Veda)는, 아리아인이 코끼 리와 금세 친숙해졌으며, 일상생활과 종교 속에 코끼리를 재빨리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인도 판테온에 자리잡은 코끼리. 그 유명한 삼위일체인 브라마(Brahma), 비슈 노(Vishnu), 시바(Siva)를 위해 곳곳에 건축된 호화로운 인도의 신전에서 코끼 리를 만날 수 있다. 비와 천둥과 전투를 주관하는 신 인드라(Indra)가 타는 아 이라바타(Airavata)란 코끼리는 브라마의 알을 맨 처음 깨고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마하파드마(Mahapadma, 거대한 숲)와사우마나사(Saumanasa, 성 주soma의 수호자) 같은 코끼리는 거대한 머리로 지구를 떠받치는 세계의 기둥 (pillars of the world)으로 생각되었다. 인도의 신 가운데 가장 널리 숭배되는 가네시(Ganesh)는, 파르바티(Parvati) 와 시바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며 시바를 섬기는 반신인 가나스(ganas) 들의 우두머리이다. 멋진 코와 외짝 상아를 뽐내는 코끼리 머리를 지닌 것으로 형상되는 가네시는, 난관의 제거자요 모든 출발의 주재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업, 문학, 교육 등 어떤 분야에서건 무언가 새로운 일은 시도하고자 할 때는 그에 앞서 가네시에게 기원을 올린다. 고대의 필사본은‘가네시 신을 기리며’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이 관행은 오늘날에고 지켜지고 있 다. 자비롭고 현명한 가네시 숭배는 B.C. 500년 경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중세 에는 모든 신 중 가장 위대한 신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에도 시험을 준비하는 학 생들 사이에서는 가네시의 지혜가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 다. 인두라의 코끼리와 시리마하마야 왕비. 불교는 아리아 문화가 널리 퍼지지 않 았던 카필라바스투(오늘날 네팔의 타라이지방) 근처 마가다 왕국의 한 전사 가 문에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에 전파되면서 중요한 변 화를 겪었고, 브라만교의 신화와 교리를 풍부하게 수용했다. 특히 말이나 다른 가축과 달리 덜 아리아적인 코끼리에 얽힌 신화는 더욱 쉽사리 받아들였다. 부처는 전생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신비로운 코끼리로부터 전 능한 힘을 부여받은 위대한 왕의 아들 베산타라였다. 그리스도가 사탄에게 유혹 을 받은 것처럼 부처도 아이라바타를 타고 온 인드라로부터 마지막으로 코다란 유혹을 받았다. 석가모니(고타마 싯타르타)로 환생한 부처는 순결한 동종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했었던 것과 달리 부처는 코끼리의 코에 의해 잉태되었다. 시리마하마야 왕비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 팔은 코끼리 코 보다 더 부 드럽고, 다리는 코끼리 코 보다 더 날씬”했다. 절제와 금욕 속에서 정숙하게 살아가던 마야 왕비는 보름달이 뜬 어느 여름날 밤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 녀는 히말라야 정상에 있는 한 웅장한 궁궐로 이끌어갔다. “은처럼 하얀 코끼 리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내 앞에 무릎은 꿇어 인사 했다. 코끼리는 연꽃 한 송이를 코에 들고 있었다. 새소리가 나를 깨웠다.”남근 이 상징하는 신성한 코끼리의 코에 의해 수태한 아름답고 정숙한 왕비는 아무 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룸비니 공원 나무 아래에서 그 아이를 낳았다. 자연히 부처에 관한 탱화들 속에는 코끼리(예를 들어 지혜의 나무 보리수 아 래에 서 있는 코끼리)가 자주 전면에 등장한다.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이나 다 른 이웃나라들로 전파되면서 코끼리에 얽힌 신화나 전설도 함께 전해졌다. 중국 의 경우, 은(B.C. 1750~1123)과 주(B.C.1122~256)나라 때 이미 코끼리를 길들이 고 있었다. 흰코끼리의 왕국, 희귀종이라 할 수 있는 흰코끼리(실제로 은빛이 도는 연회 색이다)는, 최근까지도 야생 코끼리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서인도차이나의 불교국가들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 다. 흰코끼리는 고대 타이의 시암 왕조 국기 중앙에 우아하게 등장했으며, 라오 스나 버마에서도 숭배대상이었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여러 차례 동물로 환생 하는 과정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가장 똑똑한 동물이 아니라, 가장 귀하고 아 름다운 코끼리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벌어진 입, 진홍색 머리, 은처럼 빛나는 상아,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는 몸, 금으로 짠 비단 같은 피부, 완벽하게 균 형 잡힌 다리, 그리고 위엄을 갖춘 코끼리”로 환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숲 속에서 흰코끼리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경외심을 갖고 사로잡는다. 잡 혀 온 코끼리는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다. 이 코끼리는 평생 동안 맛있고 풍성한 사료를 제공받고 행복하게 장수를 누린다. 코끼리가 죽으면, 왕에서부터 가장 비천한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움과 공포와 비 탄에 잠긴다. 따라서 그 코끼리를 대신할 다른 흰코끼리를 찾아야 한다. 이 신 성한 코끼리는 심판대에 끌려나가 죄인의 머리를 발로 짓밟는 재판과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세기 말까지 그러한 재판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자료들 이 있다. 그러나 신의 정의를 대신 집행하는 코끼리가 반드시 신성시되는 흰코 끼리일 필요는 없다. 전투용 코끼리,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베다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거의 전쟁과 관련된 모습으로 등장 하기 때문이다. 모휀조다로나 하라파에서는 코끼리의 이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 다. 베다의 군대는 언제나 코끼리부대, 기병대, 전차부대, 보병대 등 네 개의 부 대로 구성된다. 기본 전투단위인 파티(Patti)는 코끼리 한 마리, 전차 한 대, 말 세 마리, 보병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큰 전투단위인 아크샨히니 (akshanhini)는 코끼리 2만1,870마리, 동 수의 전차, 말6만5,610마리,보병10만 9,350명, 다시 말해 2만 1,870개의 파티로 구성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전투 대형은 코끼리45마리, 전차 45대, 말 220마리, 보병 675명으로 이루어진다. 코끼 리는 적의 전선을 절단하여 적을 교란시키고, 방책이나 성벽을 무너뜨리는 임무 를 맡는다. 미친 듯이 날뛰는 코끼리 한 마리는 6,000마리의 말과 맞먹는 힘을 발휘한다. 또한 코끼리는 짐을 나르거나 인간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만날 때, 이동식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코끼리 한 마리 한 마리는 각기 군 사장비를 갖춘 하나의 팀을 형성한다. 등에 조련사와 두세 명의 병사, 코끼리를 보호하는 소수의 병사, 수레,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비 전투요원들이 한 팀을 이룬다. 전투용 코끼리는 울타리가 쳐진 방목장에서 각별한 보호와 훈련을 받으 며, 주기적으로 감시와 검사를 받는다. 그곳에서 코끼리들은 복종하고 공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가끔씩 술을 먹여 흥분시키기도 한다). 코끼리는 가죽갑옷으 로 보호를 받으며, 등에 올라탄 전투요원이 사용할 수 있도록 창이나 화살 같은 투척용 무기들을 담은 전동을 매달고 다닌다. 챔피언 결정전, 인도의 왕들 간의 빈번한 전쟁에서는 일반적으로 쌍방이 갑옷 을 입힌 코끼리들을 대결시킨다. 따라서 전쟁은 강력한 상아를 가진 거대한 수 컷들의 육박전에서 시작되곤 했다. 코를 서로 감고 상아를 서로 맞부딪치는 격 렬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이러한 전투는, 평화시 ‘챔피언 선발전’에서 코 끼리들이 싸우는 모습과 연관이 있다. 로마 작가 아일리안의 기록(2세기)에 따 르면, 인도에서는 1년에 한 차례씩 특별히 훈련된 코끼리들 간에 챔피언을 가리 는 시합이 있었다.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도록 낮은 벽으로 양쪽을 갈라놓아, 승자가 그 벽을 넘어가 패자를 끝장내는 것을 막았다. 상아를 톱으로 켜놓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일 뿐 치명적인 상처를 일 으키는 수단은 아니었다. 머스트를 발산하고 있는 코끼리들을 싸움시킬 때에는 조련사를 태우지 않고 코끼리들끼리만 싸움을 시켰다. 두 조련사가 먼저 희생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 사냥에 동원된 코끼리, 가끔 코끼리 여러 마리를 경기장으로 밀어 넣 고 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야생코끼리를 길들인 코끼리들에게 도전시키 는 것인데, 이것은 길들인 코끼리로 하여금 야외에서 야생 코끼리떼를 몰게 하 여 잡곤 하던 사냥기법의 변형이다. 이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진짜 싸움이 벌어 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야생 코끼리가 자신의 열세를 깨닫고 도망치는 경우 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상아는 없지만 야생코끼리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암컷 우두머리조차 잘 사육되고 고도로 훈련되고 길들여진 거대한 코끼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코끼리를 이용한 사냥은 왕족이나 권력층의 전 유물이었다. 이 오락에는 상당한 재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코끼리 사냥의 사 냥감은 주로 물소나 들소였으며, 아무리 흥분하여 날뛴다고 하여도, 실질적으로 난공불락인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있는 사냥꾼이 공격당할 위험은 전혀 없었다. 또한 표범이나 호랑이로부터 농부나 가축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왕들은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고, 모험을 즐기기 위해 직접 표범이나 호랑이 사냥에 나 서기도 했는데, 이때도 코끼리가 이용되었다. 사냥은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개들이 먼저 호랑이를 발견하고 대 담하게 덤벼든다. 개를 쫓던 호랑이는 코끼리가 접근을 하면 도망친다. 그 순간 코끼리 조련사들이 사방에서 호랑이를 에워싸고 퇴로를 차단하면, 포수가 총으 로 호랑이를 잡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련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코끼리는 도 망칠 위험이 있고, 길들여진 코끼리는 너무 빨리 공격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 리고 코끼리에 탄 사람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코끼리에 포 위된 호랑이가 높은 나무 위에서 갑자기 덤벼들 수 있는데, 이때 즉각 호랑이를 퇴치하지 못하면 사냥꾼 자신이 커다란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또한 궁지에 몰 린 호랑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코끼리에게 덤벼들기도 한다. 코끼리의 약점인 코를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꼬리나 등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조련사 나 다른 사냥꾼들은 코끼리에 탄 사람이 맞을까 두려워 총을 쏘지 못하고 망설 이게 된다. 권세가의 상징. 기들인 코끼리의 가격은 베다 시대에 이미 금화 수천 니스카 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다. 더구나 조련비용이나 사육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전 투나 사냥에 사용할 수 있는 코끼리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이러한 코끼리는 특히 왕이나 귀족들의 행차 시 화려한 장비를 갖춘 가마를 싣고 길을 나섰다. 값비싼 천이나 금은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가죽안장, 진주 따위 보석 장신 구, 깃털장식, 특히 행사를 알리는 방울이나 종을 갖춘 코끼리는 보란 듯 이 타 고 다니는 일은 권세를 과시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키플링의《인도 정글에 관한 두 번 째 책》에 따르면, 코끼리를 모는 몰이꾼이 사용하는 안쿠스(ankus)조차 금이나 루비로 장식되었다. 권세가와 부자가 애용하는 코끼리로는 부인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상아를 갖춘 커다란 수컷이 선택된다. B.C. 4세기 마케도나아 장군 네아르쿠스 가 인도에 관해 말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처럼 멋진 코끼리는 가장 사랑하 는 애인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짐꾼 코끼리. 코끼리는 탈것으로 이용될 수는 있지만, 전쟁장비나 보급품을 실어 나르거나 대포를 끄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에 주 둔한 일본군이, 최근에는 베트남인이 코끼리를 그러한 목적에 이용했다. 또한 14세기 터키의 정복자 티무르도 전쟁에 코끼리를 동원하는 한편, 사마르칸트 사 원을 건축하는 전쟁에 코끼리를 동원하는 한편, 사마르칸트 사원을 건축하는데 95마리의 코끼리를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진흙탕에 불도저가 자꾸 빠져들어 꼼짝할 수 없는 동남아시아의 험한 작업현장에서는 코끼리가 이용된다. 코끼리는 짐은 운반하거나, 벌목이나 벌목 한 나무를 치우고 도로나 길을 내는 등의 힘든 작업에 이용된다. 발로 몸을 지 탱한 채 이마 같은 특정 신체 부위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코끼리는 견고한 발판을 갖춘 커가란 쿨도저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코끼리의 발은 수시로 적 당한 지점을 찾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불도저 보다 더 유리하다. 대부분의 경 우에는 온순하고 힘이 센 암컷이 접합하지만, 통나무를 운반하는 일에는 수컷이 더 유리하다. 수컷들은 코를 이용해 통나무를 상아 위로 올려 고정시킨 채 운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신분제도, 말과 마찬가지로, 코끼리를 수레 끄는 데 이용하는 것은 탈것으로 이용하는 것에 비해 부차적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문헌에서 이미 코 끼리를 나이, 형태, 원산지, 냄새뿐 아니라 직업, 성향, 혈통에 따라 구분하고 있 음은 시사하는 바 크다. 즉 꾸며 놓은 모습에 따라 전쟁용 코끼리와 장신구를 갖춘 과시용 코끼리를 구분하고, 성격에 따라 길들일 수 있는 코끼리와 길들일 수 없는 코끼리를 구분하기도 하며, 혈통에 따라 어덟 종의 코끼리로 구분하기 도 한다. 가장 혈통이 좋은 코끼리는 칼링가(Kalinga)와 벵가리(Bengali)로 세계 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는 코끼리이다. 또한 카스트(caste,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도)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19세기 말 시장에서는 쿠메리아(Koomeriah) 에서 드와살라(Dwasala)나 마르그(Meerg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등급의 코끼리 들이 팔렸다. ‘완벽한 종마’인 쿠메리아는 왕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거대하고 당당한 체구, 짧은 다리(특히 뒷다리가 더 짧다), 곧고 평평하며 어깨에서 꼬리 쪽으로 약간 경사진 널찍한 등, 넓은 이마, 크고 단단한 머리와 가슴팍, 짧고 두꺼운 목덜미, 미간이 돌출 된 두상, 길지만 땅에 끌리지는 않으 며 털이 많이 난 꼬리, 3m정도의 키 등 쿠메리아의 용모는 위엄이 넘쳤다. 게다 가 온순성, 순종성, 용맹성, 세련성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코끼리에 비해 탁월한 성품을 지녔다. 일반 코끼리 가격이 750달러 정도이고, 우수한 암컷의 가격이 약 1,000달러였던 1880년대에 이 코끼리의 가격은 1만 달러를 호가했다. 사육과 조련. 코끼리 길들이는 법을 다룬 가장 오래된 개요서인《히스티비디 아르나바》에는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는 방법들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800년 전에 이미 아일리안은 따뜻한 물과 버터 기름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법, 피가 섞인 사슴의 살로 염증을 다스리는 법, 우유로 안질을 치유하는 법, 붉은 포도주로 여러 가지 질병을 고치는 법 등을 기술해 놓았다. 이 책의 핵심은 야 생 코끼리 길들이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부분에 있다. 난폭한 코끼리의 경우는 까다로운 조련방법이 필요하지만, 우선 코끼리가 조 련사에게 신뢰와 애정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다. 독일 철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이슬람 철학자 아비세나의 책을 참고해 코끼리 길들이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이 같은 묘사는 후일 주르댕 드 세브라크 등이 재인용한다.) 먼저 ‘악인’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코 끼리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때린다. 그러면 그때마다 ‘선인’의 역을 맡은 사람 이 구덩이에서 코끼리를 구해 낸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 그 불쌍한 코끼리 는 마침내 자신을 구해 주는 사람에게 애정을 갖게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코끼 리를 계획적으로 굶기고, 꽹과리를 치거나 소란을 피워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힘을 빼놓아 피로하고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울타리 안의 야생 코끼리의 힘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 묶은 것을 풀어 주고 그 안에 두세 마리의 길들여진 코끼리를 들여보낸다. 이쯤 되면 야생 코끼리는 길들여진 코끼리들에 게 쉽게 굴복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야생 코끼리는 사람이 주는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데, 이것은 야생 코끼리가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는 증거이며, 길들여지고 조 련될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어떤 때는 곁에 길들여진 코끼리를 매어 놓아 야생 코끼리를 안심시키고, 인간이 가져다 주는 것을 먹어도 좋다는 것은 보여 주기도 한다(코끼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식을 거부한다). 모든 과정마다 조 련사는 인간과 코끼리 사이에서 대변인과 중개인의 역할을 담당한다. 인도에서 아프리카로. 아시아 문명은 코끼리를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아프리 카 문명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집트에서 코끼리를 전투에 이용하게 된 것도 동양에서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한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 푼트(에 티오피아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 지방에서 포획된 어린 코끼리들은 나일강의 델타 지대로 보내졌다. 또한 카르타고인도 로마와 싸우기 위해 코끼리를 조련 시켰는데 이 또한 동양에서 배운 것이다. 동양의 코끼리 이용법은 인도양과 홍 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티오피아의 북부 지방 악숨은 솔로몬의 후예들이 노력한 결과 기독교가 여 전히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있던 데 반해, 백아프리카(햄 . 셈족이 주로 분포 하는 북아프리카:역주)는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의 칼리프 시대(7~9세기)에 급 속히 이슬람화 되었다. 이들은 아리아인의 코끼리와 그 조련사들을 잘 알고 있 었으며, 코끼리가 전투나 평화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슬람교가 널리 세력을 넓혀 감에 따라 코끼리도 많은 곳에 전파되었다. <천일 야화>의 주인공 하룬알라시드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인도산 코끼리를 한 마리 선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슬람교는 중세 말엽 코끼리가 살고 있는 인도의 일 부 지역과 현재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지역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흑아프리 카에 까지 전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서 여전히 그 세력을 확장 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잔지바르에서 오만에 이르는 회교국 군주들은 인도나 서양으로 상아나 노예를 보내면서도, 반대로 코끼리 조련사나 길들여진 코끼리 를 들여와 아프리카 코끼리를 길들여 활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시아의 길들여진 코끼리와 접촉시켜 힘이 세고 감당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코 끼리를 길들인다는 것을 터무니없는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보다는 노예를 이용해 ‘백금(상아)'을 운반하는 일이 훨씬 더 수지가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프리카는 죽은 코끼리에게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다. 흑아프리카에서 코끼리 는 어떤 이유에서든 결국 죽여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수천 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야생 코끼리를 푸짐한 고기, 팔찌나 갑옷을 만들 수 있는 가죽, 목걸 이를 만드는 털, 무엇보다 상아를 제공해 주는 너그러운 동물로 간주해 왔다. 상아는 사냥이나 전쟁을 할 때, 혹은 서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뿔피리를 만드는데 쓰였고, 장신구로 사용되거나 수출품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아프리카에도 코끼리와 관련된 문명이 존재하리라는 추정 이 가능하다. 살아 있는 코끼리는 일반적으로 장수, 힘, 지혜, 정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이슬람화된 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했던 A.E. 브렘은 한 족장 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나일강 유역의 코끼리는 가만히 내버려두기 만 하면,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그들에 게서 피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추수철이 다가오면, 나는 높은 장대 위에 부적을 매달아 놓습니다. 대단히 정의로운 그 동물을 달래는 데는 그것으 로 족합니다. 코끼리들은 신이 보낸 예언자의 말을 숭상하고, 신을 모욕하는 자 들에게 내리는 벌을 두려워합니다.” 백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이 사는 지역의 수원지, 호수, 강 등에는 코끼리들이 떼지어 모여들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한노는 B.C.480년경 드라의 늪지대에 코끼리가 서식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중부아프리카는 자연과 초자연이 혼재해 있는 세계이다. 그곳 원주민들은 특 정한 동물, 식물, 바위 따위에 신비한 힘- 그것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 다- 을 부여한다. 이처럼 신성시되는 동물을 죽이거나 잡아먹거나 손대는 것을 금지하는 토템 숭배는 인간집단과 특정 동식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 다. 그 가운데 밤바라 지역 사마케, 은도부, 탕가니카(오늘날의 탄자니아)에 사는 바 핌브웨 같은 여러 부족들에게는 코끼리를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존재했다. 루웬 조리 산지- ‘달처럼 둥근 산들’이라는 뜻- 에 사는 부족들은 코끼리를 지상 에서 가장 거대한 짐승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코끼리를 산에다 비유한다. 그들은 코끼리가 쐐기풀이나 로벨리아 같은 식물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보고 짙은 안개 속에서 산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집트 신석 기 시대 부족들에게도 코끼리는 토템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 있는 동물을 괴상하고 익살스럽게 표현한 수많은 종족들의 민속예술품 은 코끼리를 사자나 하마나 표범보다 높이 자리매김 하고 있음을 엿보게 해준 다. 잡아먹히면서도 찬양 받는 코끼리. 몇몇 피그미족이나 판족의 풍습을 보면 코 끼리를 상당히 깊이 있게 의인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족장 이나 힘있는 사람은 죽은 후에 무리를 이끄는 우두무리 코끼리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두머리 코끼리는 존중하고 공경해야 하며, 그가 이끄는 무리 에 속하는 코끼리를 죽이려면 그의 허락을 얻고 사냥이 용이하게 해 달라고 빌 어야 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환생은 죽음과 동일한 맥락 속에 위치 시켜 야 한다. 코끼리의 정령에게 가호를 비는 대부분의 주문은 주로 코끼리를 죽일 수 있 게 해 달라는 내용과, 코끼리의 복수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많은 주술적인 의식들도 코끼리 사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상아해안 기슭 카발리에 사는 크루족은 코끼리 사냥에 앞서 상아 모양 암술을 가진 라피아야 자수 꽃잎과 버섯을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그릇에 넣고 찧어서 반죽을 만든 다 음, 그 반죽을 몸에 바른다. 사냥에 나서는 사람들은 성관계를 삼가는 한편, 모 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춤은 며칠 밤 계속되기도 한다. 가봉과 콩고, 오고우에강에 분포하는 민다사족은 성을 통해, 죽이려는 동물의 정령을 진정시키려고 주술의식을 베푼다. 의식은 ‘응강가 디요코(Nganga djoko)’라고 하는 ‘코끼리에게 베푸는 의식의 대가’가 주관하는데, 흔히 마 을의 촌장이 그 역할을 맡는다. 이븐의 보고에 따르면, 의식은 대단히 복잡하다. 응강가 디요코는 목숨을 건 사냥이 있기 전날 밤 자신의 움막에서 아내와 정사 를 나눈다. 남편이 사냥한 코끼리의 코를 자르면, 사냥을 하는 동안 숨어 있던 아내가 튀어나와 남근의 상징이기도 한 그 코에서 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 고 코끼리의 죽음에 뒤이어 벌어지는 축제 동안 응강가 디요코는 커다란 비탄 에 잠긴 체하며, 고귀한 피조물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한 다. 이 너그러운 짐승의 자질과 품성을 잘 알고 있는, 흑아프리카인의 태도는 아 시아인의 태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코끼리에 관한 한 지중해 지역을 통해 서구에 깊이 영향을 준 것은 아시아이다. 중부아프리카 오지보다 3세기 이 상 앞서 인도의 오지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그 이유이겠지만, 인 간에게 호의를 베푸는 친구와 같은 코끼리는 아시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1886년 찰스F. 홀더의 뛰어난 저서 <상아의 왕>은, 오랜 옛날부터 중요한 상 아 공급원이었던 아프리카코끼리에게 25장 중 한 장만을 할애했다. 그 후 93년 뒤인 1979년 월트 디즈니는 너무도 진부한 다음과 같은 말을 편지에 적어 보냈 다.“모든 코끼리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도 역시 코끼 리가 있다.”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서구 문명은 코끼리 이야기가 나오 면 아시아를 ‘망각’한 채, 우선 흑아프리카를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다. 제3장 서구의 기억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하고 이로써 영원히 후세에 전해진 아시아 코끼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니발의 코끼리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누미디 아산인 이 코끼리들은 잠시나마 로마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카르타고의 항 해가 한노도 오늘날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에서 코끼리들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저술가들은 코끼리를 신들의 축복 속에서 장수를 누리다 가 아틀라스 산맥의 숲 속에서 경건하게 죽어가는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코끼리의 역사. 고대에는 아프리카코끼리가 아시아코끼리보다 작고, 힘도 약 하며, 전투에서는 겁이 많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프리카코끼리는 아 시아코끼리와 커다란 미케네 말의 중간 크기로 분류되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현재 코끼리들의 하위 종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후 멸종되어 현재는 사라진 이 하위 종 간 에는 원칙적으로 상호교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까지 푸밀리오(Pumilio)란 학명이 붙은 난장이 코끼리가 생존했다는 가설 은 수십 년 동안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2~2.4m 키의 둥근귀코끼리가 존 재했다는 것은 쉽게 입증할 수 있다. 이 코끼리는 에티오피아나 모리타니의 숲 속에서 사는 키 작은 코끼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키 작은 둥근 귀 코끼리는 19세기 말 에티오피아 사막에서 관측된 코끼리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집트와 사하라의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전됨에 따라 동료들로부터 격리된 채, 대서양과 지중해 쪽으로 밀려나게 된 마그레브의 코끼리들은 좀더 작은 형 태로 진화되었을 것이다. 너무나 코끼리 수가 적기 때문에 근친간에 짝짓기가 이루어진 것이 그 원인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코끼리들이 키가 3m에 달하고 전 쟁에 이용 될 수 있도록 고도로 훈련된 아시아 수코끼리들의 적수가 되지 못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 황소나 사자나 코뿔소와 코끼리를 싸움시킬 때, 항상 승리 를 거두는 대초원의 거대한 코끼리보다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이 작은 코끼 리들이 훨씬 더 관람객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지식의 근원지, 서남아시아. 파라오 시대 이전의 이집트에 존재했던 코끼리의 모습은 신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를 통해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코끼리들 은, 코뿔소나 기린과 마찬가지로, B.C.4000년 말부터 그 지역에서 사라졌으리라 추측된다. 그래서 이집트의 초기 왕조 시대에는 상아만 알려졌지, 실제 살아 있 는 코끼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몇몇 예외는 있었다. 세소스트리스 1세나 하트셉수트가 누비아나 푼트 지방(현재의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에 갔던 적이 있었고, 그의 후계자들이 코끼리 사냥을 위해 시리아에 가기도 했다. 투트 메스 3세는 그곳에서 120여 마리의 코끼리를 죽였으며- 그 당시에 벌써 상아를 얻기 위해서!- 그의 장교인 아메넴하브가 투트메스 3세를 위협하는 코끼리의 코를 잘라 그를 위험에서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투트메스 3세의 대신이었던 레크미레의 무덤에 는 코끼리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인간이나 다른 동물에 비해 대단히 작게 표 현되어 있다. B.C. 2000년경 초 메소포타미아에 코끼리가 존재했다는 것은 여러 증거들이 뒷받침해 준다. 바빌론에서는 뼈가, 메기도에서는 상아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페르시아나 인도 문명에서 수입한 소수의 길들여진 코끼리이다. B.C. 1200년에 아시리아의 왕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히타이트의 인근 지역에 서 코끼리 사냥을 했다고 한다. B.C. 879년에 아수르나지르팔 2세는 코끼리떼 를 모두 하나의 ‘동물원’에 모아 놓았다. 9세기 초에 세워진 기념돌기둥에는 굉장한 사냥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그림에는 30마리의 코끼리, 450마리의 힘 센 사자, 200마리의 타조가 그려져 있다. 이들 ‘시리아’ 코끼리는 8세기 무렵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기후 변동으로 약해지고 퇴화된 코끼리들은, 상아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인간 들에게 대량학살되었을 것이다. 전쟁터에 나선 코끼리, 포루스와 알렉산드의 대결. 서구의 전투용 코끼리의 모든 역사는 알렉산더 대왕과 더불어 시작된다. 알렉산드 대왕은 B.C.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15마리 코끼리와 대적한 바 있다. 그 리고 B.C. 326년에는 히다스페 강가에 200마리의 코끼리, 5만 명의 보병, 4,000 명의 기병, 300대의 전차를 집결시킨 인도 왕 포루스와 맞서 싸웠다. 마케도니 아군의 기병대는 적군의 기병대보다 우세했다. 페르시아의 전차들은 1,000명의 마케도니아 기병대원들 앞에서 무력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무시무시한 코끼리들 을 상대한 것은 보병밀집부대였다. 그들은 코끼리를 한 마리씩 에워싼 뒤 화살 과 투창과 긴 창으로 상처를 입혔으며, 낫 달린 창으로 코끼리 코를 절단하고, 코끼리 조련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녹초가 된 괴물 같은 코끼리들을 그 들의 본대 쪽으로 몰아 붙였다. 포루스가 직접 지휘한 마지막 공격이 실패한 뒤 코끼리들은 술 취한 배처럼 기우뚱거리며 퇴각했고, 그중 80마리가 사로잡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상을 당한 포루스가 죽을 때까지 그가 탔던 코끼리가 곁에서 포루스를 지켰으며, 한 편 알렉산더 대왕이 탔던 전설적인 명마 부세팔루스도 죽었다고 한다. 코끼리와 의 그 끔찍했던 백병전에서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따라서 살아 남은 병사 들은 또다시 코끼리떼를 거느린 군대와 마주칠까 두려워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 인도의 중심부로 진격해 가는 것을 거부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침내 200여 마리의 코끼리를 수중에 넣었지만, 어떠한 전투에서도 결 코 코끼리를 이용하지 않았다. 히다스페 전투는 인간의 역사에서는 벌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코끼리 의 역사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신무기의 막강한 힘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들과 그 계승자들은 자신들의 군대에 그 괴물 같은 짐승을 편입시켰으며,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에 뒤이어 벌어진 혈육 간의 골육 상쟁에 코끼리를 이용했다. 게다가 인도를 등에 업은 마케도니아의 장군 셀레우코스와 그의 동맹자들은 적의 수중에 코끼리가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프리카에서 코끼리를 들여왔으며, 이렇게 해서 에티오피아코끼리와 인도코끼 리가 대결하게 되었다. B.C.301년의 입소스 전투는 막대한 수의 코끼리 덕분에 동맹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안티고노스 1세는 이 전투에서 죽었다. 막강한 힘 을 가진 인도 왕 찬드라굽타는 안티고노스 1세에게 대항하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크와 피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셀레우코스에게 500마리의 코끼리를 제공 했던 것이다. 로마 군단과 맞서 싸운, 천재적인 전략가 피루스와 코끼리. 로마인은 B.C. 280년 코끼리와 조우했다. 로마로부터 위협을 받은 타렌툼인이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입소스 전투에서 승리한 영웅 피루스는 2 만 5,000명의 병사와 20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첫번째 대결은 헤라 클레아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단히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 전투는 그 유명한 마케도니아 보병밀집부대-알렉산드는 43년 전에 죽었다-와 장차 무 적의 군단으로 통하게 되는 로마 군단이 처음으로 대결을 벌인 전투였다. 쌍방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천재적인 전략가인 피 루스는 전투 막바지에 코끼리를 투입시켰다. 등위에 병사와 사수들을 태운 코끼 리들은 로마 기병과 보병과 말 모두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피루스 가 따로 남겨 두었던 테살리아의 기병들이 지리멸렬 도망치는 로마 병사들을 섬멸했다. 로마는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까지 당도한 피루스에게 항복하지 않 았다. 로마인은 두 번 째 전투에서도 역시 참패를 당했으며, 이 전투에서 네 개 의 군단 중 두 개 군단을 잃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카르타고인과 수 차례 교 전을 하고 난 후, 피루스는 베네벤토에서 또다시 로마인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피루스는 퇴각하려고 했지만, 미친 듯이 반격해 들어가는 자신의 코끼리들이 그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기묘한 운명의 장난처럼, 전쟁의 천재인 프루스의 패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의 코끼리였다. 아르고스 습격 당시, 자신 의 조련사가 부상을 입은 데 화가 난 코끼리 한 마리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주력부대가 제대로 진격을 할 수 없었다. 부상당한 피루스는 한 로마 병사의 손 에 생을 마쳤다. 포에니 전쟁. 시라쿠사가 그들을 위협했던 B.C.310년까지, 카르타고는 코끼리 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로 하여금 고성능 신병기(코끼리)를 이용할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아마도 헬레니즘 문화권의 군주들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시칠리아 섬에서 처음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B.C. 263년에, 한노는 50~60마리 의 훈련된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B.C. 250년 메텔루스 집정관이 재차 팔레르모(시칠리아의 옛 수도:역주)를 공 격해 갔을 때, 메텔루스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투창과 화살과 짧은 창으로 측 면에서 코끼리를 공격하도록 하고, 제일 먼저 조련사들을 죽였다. 작전은 성공 을 거두었다. 부상당한 코끼리들이 자신의 부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 다. 많은 코끼리들이 조련사와 함께 사로잡혔으며, 104마리의 코끼리가 로마로 보내졌다. 이 코끼리들은 원형경기장에 끌려가 집정관의 승리를 보여 주는 상징 으로 시민들에게 공개된 후,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코끼리를 공개적인 장소에 서 죽인 것은 복수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코끼리가 불사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로마 본토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한 한니 발은 B.C. 219년, 잘 훈련된 37마리의 코끼리와 함께 에스파냐 지방을 출발했 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원거리 원정에 나선 것 은 실로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페르투스 고개를 통해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넘 은 후 한니발은 론강이라는 첫 번 째 난관에 부딪혔다. 일부 코끼리들은 뗏목으 로 강을 건넜고, 나머지는 헤엄을 쳐 건넜다. 스키피오 장군은 에스파냐 지방으 로 진출해서 한니발의 후방을 차단하려 했고, 셈프로니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카 르타로를 공격하려고 했다. 따라서 한니발은 지리적 난관과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 겪었던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설,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질퍽한 계곡, 자꾸만 미끄러지는 비 탈, 식량과 사료의 결핍 등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지닌 코끼 리들이 짐을 운반하면서 바위를 치워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뚫었다. 이 별난 광경을 목격한 알프스산맥의 종족들은 감히 그들을 공격할 엄두를 못 냈다. 마침내 2만 6000명의 병사와 37마리의 코끼리는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B.C.218년 말에 전원이 함께 포강의 평원지대에 도착했다. 트레비아 전쟁. 란니발이 지친 자신의 군대를 재정비하고 있는 동안, 부랴부 랴 달려온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의 군대가 합류했다. 추위와 눈과 홍수가 한 데 어우러진 악조건 속에서, 트레비아 강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보병이 열세 인 한니발은 자신의 코끼리를 이용해서, 삼중으로 전선을 형성한 로마 군단이 격파했다. 그 결과 살아서 피아첸차로 돌아간 로마 병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 았다. 트레비아 전투가 끝난 후, 대부분의 코끼리가 죽었다. 아마도 알프스를 넘어 오는 과정에서 겪었던 추위와 영양실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한니발이 타 는 코끼리만 살아 남았는데, 이 코끼리도 그사이 안질로 한족 눈을 잃었다. ‘수루스’라는 그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에 비해 훨씬 눈이 더 크고 힘도 셌 는데, 아마도 인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수 루스는 애꾸눈에다 상아도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베날리스는 유명한 시, ‘게트리아의 코끼리에 올라탄 외눈박이 장수’에서 수루스를 노래했다. B.C. 202년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자마에서 패배당한 카르타고는 남 아 있던 코끼리를 넘겨주고 다시는 코끼리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세 번 째 포에니 전쟁 동안에는 전쟁터에서 코끼리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았다. 전투용 코끼리의 한계와 약점. 코끼리를 본적이 없는 군대와 싸웠던 초창기에 는 코끼리를 이용한 카르타고가 승리를 쟁취했다. 코끼리를 본 놀라움이 가져다 주는 효과가 지대했기 때문에 특별히 작전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인위적으로 흥분된 코끼리들은 곧장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 병사나 방책이나 말들을 닥치 는 대로 짓밟아 버렸다. 코끼리 등에 올라탄 병사들은 나무로 만든 망루로 보호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장치를 고안해 낸 사람은 아마도 피루스였을 것이다. 코 끼리를 탄 병사들은 그 위에서 화살과 독침을 쏘고 창을 던졌다. 그러나 완전히 노출된 조련사들은 코끼리를 마음대로 다루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방어하거나 되받아 공격하기는 비교적 수월했지만, 공격을 멈추거나 급히 뒤로 몸을 돌리기 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코끼리를 공격하는 다양한 전술들이 개발되었다. 다른 코끼리를 이용 하여 정면에서 이마로 들이받는 것, 도끼를 이용하여 복사뼈 관절 뒤의 건을 자 르는 법, 낫이 달린 창으로 코를 절단하는 법, 예리하고 긴 창으로 옆구리를 꿰 뚫는 법, 불화살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가하는 법(송진이나 타르를 바 른 화살에 불을 붙여 쏘면 코끼리의 피부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등. 경우에 따라서는 쇠뇌를 이용해서 코끼리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쏘기도 했다. 부상을 입거나 불화살을 맞은 코끼리가 겁에 질려 울부 짖으면서 날뛰면, 도리어 아군에 위협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코끼리는 희 생시켜야 했다. 그래서 메타우루스 전투 당시,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 장군은 끌이나 정으로 목관절 부분을 찔러서 코끼리를 단번에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사실 다루기 힘들고, 쉽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코끼리는 전투에서 별로 믿 을 만한 존재가 못 되었다. 코끼리는 쉽게 지치고, 엄청난 식용과 까다로운 식 성을 갖고 있다. 또한 운송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조련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 며, 값이 몹시 비싸고, 대체가 용이하지 않다는 등 수많은 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투에 이용된 코끼리는 서구세계에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심어 놓았 지만, 전투에 이용되었던 기간은 별로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코끼리가 전투에 이용된 기간은 알렉산더대왕에서 한니발과 카이사르에 이르는 3세기에 불과했 다. 피로 물든 원형경기장. 인도에서는 전투용 코끼리가 싸움용 코끼리로도 이용 되었다. 그러나 코끼리가 싸움 도중에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에 요구사항이 많은 관객 앞에 서야하는 서구의 코끼리들은 그 처지가 달랐다. 투우장의 황소처럼 상대를 죽이거나 상대에게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B.C. 275년 쿠리우스의 승리와 B.C. 250년 메텔루스의 승리로 로마는 코끼리 10여 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인은 코끼리들을 전쟁에 이용해야 할지, 사자나 곰 처럼 원형경기장에 집어넣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코끼리가 황소와 최초로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은 아마도 B.C. 99년이었을 것 이다. B.C. 55년에는 폼페이 원형경기장의 개장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경기에 서, 18마리의 코끼리가 창으로 무장한 게트리아인들을 맞아 싸웠다. 플리니우스 는 처절한 코끼리들의 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코끼리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서도 덤벼드는 인간들 을 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포위공격을 받은 불쌍한 코끼리의 모습은 마치 용 서를 비는 것 같았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울음소리는 배반감에 절규하는 것 같 았다.” 그러한 광경을 목격했던 키케로에 따르면 군중들은 그 싸움에서 아무런 기쁨 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세네카는 그 짐승들은 무언가 인 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로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코끼리와 병사의 싸움이 일종의 운동경기로 인식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와 네로 통치하에서는 코끼리와 1대1로 대결하는 것이 검투사들의 최고 영예였다. 코모 두스 황제는 1대1 대결에서 코끼리를 세 마리나 죽였다. 경건하고 종교적인 동물, 코끼리. 기독교 세계에서 코끼리에 대한 신앙심이 생겨남에 따라 다양한 전설이 출현했다. 어떤 사람들은 코끼리와 마주치면 성호 를 긋거나, 교회 앞을 지나칠 때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중세로 들어서자 코끼리를 경건하게 대하는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코끼리는 성모 마리아의 상 징이자, 아담과 이브의 표상이었다. 코끼리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뱀을 밟아 죽이는 모습은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보호하는 것에 비유되고, 악의 화신인 뱀을 죽이는 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확고히 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코끼리는 호기심을 끄는 동물이다. 전투용 코끼리, 원형경기장의 코끼리, 과시 용의 코끼리가 사라짐으로써,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는 동안 코끼리와 서구인이 실제적으로 접촉하는 경우도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공백기간에는 고대나 기독교의 문헌과 구전을 통해 코끼리가 수없이 언급되었지만, 실제적인 코끼리 의 모습이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았다. 삽화에는 평평하고 축 늘어진 귀를 가진 코끼리가 등장하기도 하고, 코가 돼지코처럼 그려지거나 상아가 송곳니처럼 그 려진, 실제 모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코끼리들이 등장했다. 코끼리는 점차 보 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연대기 편찬자들은 하룬 알라시드가 샤를마뉴 대제에 게 보냈던 코끼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코끼리는 포르토 피사노 항구에 내 렸고, 사람들이 경이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엑스라사펠에 당도했다. ‘아불 아바스’라는 그 코끼리는 오소트라지아(옛 프랑쿠 왕국의 한 지방:역 주)의 하늘 아래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1254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영국의 왕이자 자신의 처남인 헨리 3세에게 서 남아시아에서 데려온 멋진 코끼리를 선물했다. 그 코끼리의 모습에서 너무도 강 렬한 인상을 받은 역사가 마티외 파리스는‘크로니카 마조라’‘세인트 엘번 사제들의 생애’같은 자신이 쓴 주요 전기들 속에서 코끼리를 생생하게 그린 크로키들을 제시하고 있다. 포르투칼의 마누엘왕은 인도산 코끼리 한 마리를 교 황에게 바쳤다. 이 코끼리에 대해서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상세히 기록되 어 있다. 화가 나거나 장난기가 발동하면 코끼리가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서 물 을 빨아들여서는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퍼붓는 이야기가 익살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루이 14세도 코끼리를 한 마리 받았는데, 코끼리가 죽자 해부를 하도록 했다. 1803년 네덜란드는 자국의 동인도회사가 보내 온 한스와 파르키라는 장난스 럽고 다정스러운 코끼리 한 쌍을 동물원에 맞아들였다. 얼마 후 프랑스 군대가 그 코끼리 부부를 빼앗아 파리로 데려갔다. 파리로 데려오는 동안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지나치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에서는 점차 동물원이나 곡마단에서 자주 코끼리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시아로부터 배에 실려온 거대하고도 사랑스러운 코끼 리를 좀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말로만 들어 왔던 코끼리의 형태가 인간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곡마단 코끼리. 코끼리와 인간의 유사성은 무대 위에서 관람객을 흉내내는 우 스꽝스럽고 어릿광대 같은 모습을 통해 부각되었다. 그러한 온순하고 평화스러 운 코끼리의 모습은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하며, 피비린내 나는 원시시대의 잔 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플리니우스와 아일리안은 이미 로마 시대에 길들여진 코끼리들은 댄서나 고적대 아가씨들처럼 춤을 추거나 군대의 행진을 흉내낼 수 있고, 코로 손처럼 이용해서 솜씨 있게 음식물을 받아먹을 수 도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들은 코끼리가 굵은 밧줄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걸을 수 있고, 자갈과 창을 던지고, 아기를 낳고 있는 아내 주위를 서성거리는 초조 한 남편의 흉내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들의 기록은 현재 곡마단의 코끼리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19세기 프랑스의 프랑코니 곡마단의 바바 코끼리는 목 위에 올려놓은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거나 병마개를 다는 묘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바르넘 곡마 단의 코끼리 톰 푸스는 술을 마시고 취한 척하면서 독일인(코끼리가 사람 역할 을 하는 데 반해 극중의 독일인은 짐승 역할을 한다)을 등쳐먹는 연기를 해냈 다. 19세기의 코끼리들은 공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서고, 축구나 크리켓 경기 를 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서구인의 코끼리에 대한 시각.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코끼리를 대상으로 한 관용적인 표현들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관용어구들은 코끼리에 대한 우리의 시 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19세기부터 쓰인 것으로 보이는‘epaules delephant’(Gobineau)(자구적 의미는 ‘코끼리의 어깨’인데 흔히‘어깨가 딱 벌어진 거구’를 자칭:역주)‘pantalon a pattes delephant’(Goncourt)(자구적 의미는 ‘코끼리 발의 바지’인데 ‘가랑이 넓은 바지’를 뜻함:역주) 같은 어 법들은 코끼리의 크기와 무게에 초점을 맞추어 생겨난 표현들이다. 이외에도 코 끼리의 막강한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구들도 많은데, ‘elephants de la finance’(재계의 거물들)‘elephant de la politique’(정계의 거물들)등이 그러 한 예들이다. 관용구 내에서 ‘elephant’(코끼리)'이란 단어 대신‘pachydem e’(후피 동물) 이란 단어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사실‘코끼리에 대한 기억’이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는 전혀 없다. 대부 분의 경우, 그것은 경의와 감탄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코끼리는 최고의 성품 을 지닌 동물로 간주되어 왔다. 코끼리에게 부여된 그러한 성품들은 대부분 아 시아와 고대의 구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스위스의 자연과학자 콘라트 게 스너는 라틴어로 쓴 그의 책에서 코끼리의 덕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17세 기에 프리에 작은 불어로 쓴‘코끼리 역사’의 서문에서부터 “도덕적 미덕이 빛을 발하고, 정략이 지배하며,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밝힌다. 각 장마다 코끼리의 뛰어난 성품들을 하나씩 다루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리스 - 로마의 문헌들이나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에 의해 ‘입증’된 다. 절제, 경건, 신중, 고고함, 재치, 새끼에 대한 사랑, 연장자에 대한 존경, 예 의 바름, 순결, 자비심, 침착, 충성, 정의감 등이 프리에작이 열거한 코끼리의 뛰 어난 품성이다. 한편 때늦은 감이 없지 않은 20세기에, 어떤 저자는 아프리카코 끼리에 대해서 그의 ‘탁월한 지혜, 뛰어난 기억력, 자신을 사랑해 주는 자에 대한 한결같은 헌신과 충실성, 굳은 정의감' 뿐만 '자신을 해친 자에 대한 양심 과 민감한 감수성'에 대해서 까지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인도의 전통에서 비롯 된 이러한 자질들은 모두 인간, 특히 착한 여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성품들은 다소 의식적으로 인지된 것들로서, 바바르왕의 모험담 속에 서 어린이들이 기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힘이 세고 사랑스러 운 이 거대한 짐승에게는 이러한 성품들 외에도 대단히 유순하고 사람에 대한 정이 깊다는 특성을 덧붙일 수 있다. 최근에는 본질적이고 감성적인 이러한 이미지 외에도 환경보호 정책과 관련 하여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특성들이 덧붙여지고 있다. 살아 있는 코 끼리가 밀렵군의 총에 맞아 죽은 코끼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그 하나이 다. 이 장면에서 죽은 코끼리의 모습은 어머니로 상징되는 자연의 파괴를 대 변한다. 따라서 자연파괴는 곧 존속살해를 의미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코끼리의 수를 조사하는 일은 끈기 있는 노력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작업이다. 생식 가능 기간이 대단히 길기 때문에 코끼리 암컷 한 마리 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포식동물로부터 잘 보호된 어린 코끼리는 다수가 성년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남획과 자연의 황폐화 로, 현재 코끼리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제4장 사냥에서 살육으로 코끼리의 포획, 코끼리를 산 채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무리 가운데 몇 마리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게다가 사로잡힌 코끼리들은 간혹 상처를 입기도 하며,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흔히 자유로운 삶에 대한 기억을 단념 하지 못한다. 포로가 된 코끼리는 음식을 잘 먹지 않으며, 여행에서 오는 피로 나 질병이 주는 고통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 스트레스 나 '상심'이 원인이 되어 사로잡힌 지 몇 주일만에 50% 정도가 죽는 것으로 추 산된다(원형경기장에 끌려온 코끼리도 그곳에서 죽는다). 따라서 북아프리카의 사막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차 수효가 줄어들던 그 지역 코끼리들이 3세기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코끼리를 사로잡는 기법들은 시대가 변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기법들 은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이다. 20세기 중엽, 인도차이나의 모이 지방에서 실행되 었던 포획기법들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몰이꾼을 이용한 사냥과, 작살을 이용한 사냥은 비파괴적이다, 몰이꾼을 이용 한 사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된다. 몰이꾼들은 코끼리 떼를 놀라게 하여 숲에서 쫓아낸 다음, 거대한 울타리 쪽으로 몰고 가 그곳에 가둔다. 그 과정에 서 코끼리 떼가 공격해 오면 맨 앞에 선 나이 많은 코끼리를 죽여야 하는 경우 가 가끔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두머리인 암컷은 도망을 친다. 자신을 보호해 주던 우두머리들이 도망쳐 버리고 나면, 나머지 코끼리들은 겁에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며 10여 마리씩 옹기종기 한곳에 모인다. 그러면 둘 레에 말뚝을 둘러쳐 가둔다. 그리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코끼리들이 말뚝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뚝을 지킨다. 말뚝을 지키는 일은 위험이 따 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총검이나 끝이 뾰족한 몽둥이를 들고 코끼리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나서 한 마리씩 선별해서 분리시킨다. 너무 나이가 많거 나, 너무 성미가 급하거나, 길들이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반항적인' 코끼리 들은 죽이지 않고 놓아준다. 나머지 코끼리들은 금식을 통해 '진정'케 되고, 길 들여진 코끼리들에게 에워싸인 채 점차 얌전해진 뒤 그곳을 나온다. 작살을 이용한 사냥은 이름이 주는 느낌과 달리 파괴적이지 않다. 이러한 사 냥에도 많은 몰이꾼과 길들여진 코끼리가 필요하다. 몰이꾼들은 야단법석을 피 우고, 불붙은 횃불 등을 이용해 코끼리들을 저지대로 몬다. 사냥은 비가 많이 와서 수심이 깊은 계절을 의도적으로 택해 이루어진다. 점차 수심이 깊어지면 코끼리들은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인근 부락에서 끌어 모은 코끼리들이 장막을 치고 있기 때문에 점점 밀려나 마침내 큰 나무도 잠길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 으로 내몰린다. 야생 코끼리와 거의 같은 수의 길들여진 코끼리들이 대오를 형 성하여, 야생 코끼리들을 호수 쪽으로 내몬다. 점점 수심이 깊어져 발을 딛고 설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헤엄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작살잡이가 쪽배를 타고 다가가 귀의 가장 두툼한 부분에 갈고리를 건 다음 커다란 나무에 단단히 묶는다. 코끼리는 나무 둘레를 계속 헤엄치다가 마침내 지치게 된다. 이 는 야생 코끼리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 흘러 탈진한 코끼리 배 아래 를 등바구니로 바쳐서 익사하는 것을 막는다. 던지는 올가미를 이용한 포획은 훨씬 더 동적이고 위험하다, 던지는 올가미를 이용한 사냥은 세심하게 길들여진 코끼리들과 밀접한 공조체계를 이루어야 한 다. 코끼리는 역할에 따라 세 개조로 편성된다. '몰이조'는 숲에서 튀어나온 코끼리가 다시 숲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는다. 그 리고 좀더 특별히 훈련된 '포획조'는 널찍한 이마로 점찍은 야생 코끼리의 엉덩 이를 떠민다. 이때 조련사는 잡아당기면 죄어지게 되어 있는 올가미로 코끼리 뒷발을 묶고, 사로잡힌 코끼리를 큰 나무에 붙들어맨다. 그러나 야생 코끼리가 몸을 돌려 공격해오면 '전투조'가 나선다. 거대한 수컷들로 구성된 전투조는 야 생 코끼리의 공격의지를 분쇄하고 진정시킨다. 간혹 코끼리 떼가 몰려와 사로잡 힌 동료와 힘을 합해 싸움이 길어질 때도 있다.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는 대비가 필요하다. 길들여진 코끼리의 세력을 강화하고 수적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코끼리들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전투조에 속하는 거 대한 수컷들은 힘도 세지만 싸움 기술도 능란하다. 그들은 코, 이마, 상아(보통 끝이 둥그렇고 무디다)로 공격적인 어린 수컷을 때려눕히고, 암컷의 공격을 중 단시키며, 공격의 주동자와 맞선다. 유혈사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은 전투조 덕분이다. 유혹하는 암컷을 이용한 포획, 또 다른 기법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꼬리치는 암컷을 이용해서 멋진 수컷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19세기 말에 행해진 이 수법 은 대단히 평화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도덕가들로부터 분노를 샀다. 고상한 동 물에게 가장 저속한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더구나 길들여진 암 코 끼리는 직접 '손님'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때 등 위에서 몸을 웅크린 조련 사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담요 속에 몸을 감춘다. '유혹하는' 암컷에게 며칠 동 안 밤낮으로 시달린 수컷은 녹초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 인간들이 가세하여 수 컷이 잠을 자지 못해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소란을 피워댄다. 이렇게 유혹에 넘어간 '마초(macho, 빼어난 정력을 뽐내는 남성을 상징하는 인물:역주)' 는 마 침내 피곤에 지쳐 쓰러지게 되고, 잠에서 깨어날 때는 이미 뒷발에 족쇄가 단단 히 채어지고 난 다음이다. 조련사들은 즉각 조련에 착수하고, 유혹하는 코끼리 들은 '부도덕' 하게도 유혹할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천박한 사냥기법에 분개하는 독자들의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서, 코끼 리 사냥을 소재로 다룬 저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덜 충격적인 해결 가능성을 생 각해 냈다. 일단 길들여진 수컷은 부정한 델릴라(Delilah, 성서에 나오는 블레셋 인으로 삼손의 힘이 머리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의 머리칼을 잘라 버렸던 여인:역주)와 재회한다. 이때 수컷은 자신을 유혹했던 암컷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는커녕 또다시 프로포즈를 한다. 그러면 암컷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건강한 새끼들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후일담이 덧붙여진다. 역사가 아리안은 인도에서 행해졌던 또 다른 사냥법을 언급하고 있다. 발정기 에 접어든 암컷이 좁은 다리 한쪽에서 수컷을 유혹하고 사냥꾼이 뒤를 막는 것 이다. 살생에 가까운 다른 기법들, 마이소르(인도 남부의 주:역주) 지방에서는 길이 가 3~4m이고, 폭이 2.2~2.5m에 이르는 함정을 이용해서 짐승을 산 채로 사로잡 았다. 그러나 함정에 빠진 코끼리는 흔히 상처를 입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자 신을 구하려다 역시 함정에 빠지는 어미 코끼리나 동료 코끼리의 밑에 깔린다. 더구나 함정에 빠진 코끼리는 배가 고파 구출되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함정에 서 코끼리를 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함정을 이용한 사냥법은 인도나 아프리카의 방법이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아프리카에서는 궁극적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함정 속에 날카로운 죽창이나 독을 발라 놓은 말뚝을 설치해 놓았다. 죽여서 잡는 사냥, 죽은 코끼리보다 살아 있는 코끼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동양문명권에서 일부러 코끼리를 죽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 문명권 에서도 수많은 코끼리들이 전쟁터나 투기장에 끌려 나가 죽음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무리 속의 일부'반항적인' 코끼리(길들인 후에도 다루기 힘든 사나운 코 끼리) 가 너무 공격적이거나, 닥치는 대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유 해하다고 판단되면 코끼리는 제거된다.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도 코끼리를 제거하는 방법들이 널리 알려졌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덫을 이용한 사냥은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거의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코끼리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끝이 뾰족한 무거운 통나무 를 떨어뜨려 코끼리 목을 부러뜨린다. 커다란 석궁을 이용해 독화살을 쏘기도 하며, 때로는 끝에 독을 바른 징들을 박아 놓은 널빤지 위로 코끼리 떼를 몰아 발에 징이 관통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발목에 거는 올가미는 한쪽은 크 고 무거운 통나무에 연결시키고, 다른 쪽은 얇은 상자 모양의 덫에 연결한다. 덫의 안쪽에는 뾰족한 대나무들이 부착되어 있다. 덫에 발목이 걸린 코끼리는 결코 덫에서 발을 빼낼 수 없으며, 무거운 통나무를 끌고 다니느라 녹초가 된 다. 그 코끼리는 창날이 30~40cm정도로 넓고, 면도날처럼 예리한 투창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냄새를 은폐하기 위해 코끼리의 똥을 바른 피그미족들은 코끼리에게 접근하 여 창으로 배를 가르기도 하는데, 남자다움을 시험하거나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 한 통과의례로 이런 위험스러운 모험이 행해진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의 국경 지방에서는 코끼리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사냥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독을 바른 창으로 귀 아래나 사지의 안쪽, 혹은 복부를 찌르기도 한다. 디기탈 리스잎(말린 잎을 강심제나 이뇨제로 쓰는 현삼과의 다년초:역주)을 사용한 독 약은 즉각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흑아프리카 특유의 소총인 '푸푸(pupu)'는 총구를 통해 다량의 화약을 장전하 여, 못이나 나사못이나 납덩이나 총알 같은 괴상한 쇠붙이들을 흩뿌리듯 쓴다. 이 총으로는 코끼리에게 단지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이지 죽이기는 어려우며, 총이 폭발해서 사람이 부상을 입기도 한다. 총에 맞은 코끼리는 난폭해지거나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멀리 가서 죽기 때문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경 우가 많다. 이러한 사냥기법들 중의 일부는 극히 파괴적이고, 전적으로 무익한 살상으로 귀결된다. 고상한 스포츠에서 잔혹한 살상으로, 위험한 동물과 대결하는 사냥꾼은 생명 의 위험에 직면한다. 특히 반항적인 코끼리와 대결하다가 희생을 당하는 것은 고결한 행동이다. 그러한 희생은 부족공동체를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으 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에게 몇 주 동안 먹을 수 있는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창으로 코끼리의 배를 찌르려고 단독으로 코끼리의 발 사이로 뛰어드는 피그미족의 행위는 특출한 용기를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다 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몰이꾼들은 사냥은 제쳐 두고 코끼리 를 에워싸고서 희생자를 코끼리로부터 격리시킨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아프리 카에서의 백인 사냥꾼들이나 인도나 인도차이나의 귀족들은 뛰어난 무기를 갖 추고, 여러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방심한 사이에 코 끼리들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코끼리 사냥은 엄격하게 제한 받지만, 몇몇 국가에서는 아직도 이를 허용하고 있다.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힘센 동물을 죽이려 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사냥할 때 따르는 사소한 위험조차 두려워하면 서, 거짓용기에 대해 찬사를 듣고자 한다. 많은 총과 폭약을 사용하는 사냥은 계획적인 범죄행위에 속한다. 더구나 헬리콥터를 타고 기관총으로 사냥을 하는 도살업자들이나, 하는 일 없이 빈둥대기 좋아하는 한량들의 수렵여행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체들이 태양 아래서 썩어가고, 어미를 잃은 새끼들은 며 칠 안으로 죽게 된다. 그들은 착륙에 위험이 따를 때에는, 전리품인 상아마저도 단념해 버리는 그런 인간들이다. 상아는 코끼리의 숙명적인 불행이다, 상아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코끼리를 잔 인하게 죽이거나 학살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화석화 된 매머드의 상아가 있고, 천수를 누리는 자연스러운 임종을 맞이한 코끼리의 상아도 있다. 그런 코끼리의 소유주나 코끼리를 보호해 온 사람은 폭력을 쓰거 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도, 코끼리가 죽고 난 뒤 상아를 거두어들일 수 있 다. 아시아의 길들여진 거대한 수컷들에게 행해지는 그러한 방법은 철저한 감시 가 이루어지는 아프리카의 자연동물원에서도 자주 실행된다. 많은 아시아코끼리들의 상아 끝이 톱으로 잘리워져 무디게 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머스트가 발산되는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는 돌발적인 사고나 싸움 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상아의 몸통을 굵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또한 아주 간단한 외과수술을 통해 살아있는 동물에게서 상아를 미 리 잘라내기도 한다. 이것은 밀렵꾼들로부터 코끼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 편일 수도 있고,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때로는 살아 있는 코끼리의 상아를 놓고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코끼리들끼리 싸움을 벌인 곳이나, 코끼리가 굵은 나무와 한동안 이마로 실랑이를 벌인 곳에 가 보면 부러진 상아를 주울 수도 있다. 19세기만 해도 고기를 얻기 위해서(이것이 코끼리 사냥의 주된 이유이다), 또 는 전쟁 따위 다른 이유로 코끼리가 유해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코끼리를 죽였다. 오직 상아를 얻을 목적으로 코끼리를 죽이지는 않았다. 요컨대 상아는 부산물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세기까지 코끼리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단지 상아 때문이 아니다. 벌써 지상에서 사라졌지만, 새롭게 각광받는 매머드, 예를 들어 상아 때문에 매머드가 멸종 된 것은 분명 아니다. 인간들은 단지 커다란 조상이나 손잡이나 단검을 만들고, 무기나 다양한 연장들을 만들기 위해, 자연사하거나 사냥한 코 끼리의 상아를 이용했다. 그것은 순록의 뿔이나 단단한 뼈를 이용한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최근의 멋진 중국산 상아세공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흔히 북 아시아 툰드라 지대의 주변부에서 가져온 화석화된 상아에서 잘라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아의 이용은 토착 코끼리의 상아를 이용하는 관습을 유포시 키는 데 일조를 했다. 상아의 수요가 증대되었다. 사람들은 길들여진 코끼리에 게서 상아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아를 얻기 위해서라면 야생 코끼리 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뒤따르게 미련이다. 화석화된 상아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야생 코끼리뿐만 아니라 아 프리카의 야생 코끼리에게까지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이는 다시 일본과 중국에 서 초과수요를 유발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초과수요는 1990년 1월 18일부터 야생 코끼리나 길들여진 코끼리의 상아 거래를 금지하게 하는 계 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화석화된 상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 다. 순진한 코끼리. 수세기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여러 문명권에서 계속적 으로 상아가 이용되어 왔는데, 그중 상아를 가장 적게 이용한 지역은 아프리카 리고 할 수 있다. 플리니우스에 다르면, B.C. 2세기경의 역사가 플리비오스는 에티오피아의 경계지역에서 코끼리의 상아가 울타리나 문설주로 사용된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 실제로 상아는 대단히 견고하며, 흰개미떼조차도 침식시키 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상아가 코끼리가 남긴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상아를 이용하여 장신구를 만들거나, 사냥터나 전쟁터에서 신호 용으로 쓰이는 상아를 가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상아를 가공하려고 하지 않았다. 15세기 말부터 포르투칼인은 베냉 왕국의 상아세공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 다. 그렇지만 사냥한 코끼리로부터 상아를 거두어들인 베냉 왕국의 왕은 그것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팔아 치우곤 했다. 그러나 어쨌든 죽은 코끼리에게만 관 심을 가졌던 아프리카인은 상아를 가장 적게 이용했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그들 이 코끼리를 죽이려고 발벗고 나서게 된 것은 외부 문명권들의 사주 때문이었 다. 아프리카에서는 예부터 상가가 널리 이용되었다. 여기서5000여년 전에 인도나 고대 중국의 문명에서부터 비롯된 상아세공술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곳에서는 왕좌나 세력가들의 의지에서부터 단검이나 칼의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상아가 널리 사용되었다. 1960년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는 상아 수요가 폭증했다. 이곳에서는 악기, 혁 대의 버클, 피아노 건반, 특히 도장(1988년, 일본에서만 200만개의 상아 도장이 만들어 졌다.) 등을 만드는데 상아가 사용된다. 이를 위해 연간 10만 마리의 코 끼리가 학살당하고 있다. 상아는 점차 가늘고 가벼워지고 있으며, 커다란 상아 를 지닌 거대한 코끼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고대의 상아세공품부터 현대의 피아노 건반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가구에 상아를 곁들였다. B.C.2000~1000년경 가나안 지방과 아시리아에서는 서판(고대 사람들이 종이 대신 쓴 나무, 돌, 상아 따위의 작은 판 : 역주) 위에 종교적인 장면을 새기거나 자그마한 문갑에 무늬를 넣는 데 상아를 이용했다. 그 지역에 도 코끼리가 있었지만, 아마도 상아는 이집트나 홍해를 통해 인도나 흑아프리카 로부터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상아로 된 옥좌나 침대를 호머가 묘사해 놓은 상 아가 쓰인 옥좌나 침대, 투탄카멘의 의자, 금과 상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솔 로몬의 옥좌,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조각술을 선보인 피디아 스의 제우스 상과 아테네 파르테논 조상등은 당시 상아가 애용되었음을 보여주 는 증거물이다. 로마나 비잔티움이나 기독교화된 서구는 특히 종교적인 주제를 몰두해 있었지만, 식물이나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한 물품들이 많다. 이들 지 역에서도 책의 가죽 장정, 사냥용 뿔피리, 문갑이나 보석상자, 주교의 지팡이, 빗, 체스의 말 등을 만드는데 상아가 사용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사원의 문 이나 설교단에 상아를 상감해 넣었다. 서양에서는 18세기에 중국이나 인도로부터 들여온 골동품들의 영향을 받아 상아에 대한 선호가 더욱 증가했다. 수많은 중국산 골동품 말고도 실제생활에 쓰이는 물건들이 상아로 만들어 졌다. 담배 케이스, 단검 손잡이, 총의 개머리 판, 바늘구멍이 큰 바늘, 바느질 도구나 화장품 그릇들, 도미노 놀이패, 과자그 릇, 부채 등이 그 예이다. 종교적인 조상이나 세속적인 조상을 제작하는 데도 상아가 이용되었다. 그 밖에도 피아노 건반을 만드는 데 다량의 상아가 사용되 었다. 상아 건반에서 더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동물 의 뼈로도 충분히 대체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굳이 피아노 건반에 상아를 사용 한 것은 상아를 잘못 이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당구공을 만드 는 데에도 상아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즐겼던 당구는 귀족이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나 프랑스대혁명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부와 거짓 용기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아를 이용한 것도 상아를 잘못 사용한 예로 지적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아시아의 코끼리들이 급속히 쇠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이 점차 협소해진 것에서 그 이유의 많은 부분을 찾을 수 있는 반면, 아프리카코끼리들이 학살당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비아프리카 국가에서 촉발된 상아 수요의 급증과 거대한 상아 거래 조직들 때문이다. 오랜 옛날부터 성행했던 상아의 거래. 대규모 상아 거래 조직을 처음 형성한 것은 페니키아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카르타고를 통해 지중해 전역 으로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중세에서 근세 초기까지, 대상을 통해 사하라 사막 일대와 사하라 사막 남부 지망의 상아가 렙티스 마그나(현재 트리폴리타이나 지방)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카이로, 튀니스 둥지로 반출되었다. 15세기에 바다를 통해 최초로 베냉만에 도착했던 포르투칼인은 현재 상아해 안과 노예해안으로 불리는 지역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상아와 노예는 당시에 이미 금과 함께 상품 구실을 했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 사람들은 아프리카 중심부까지 들어가 상아와 노예를 포획했다. 그리고 잔지바르와 오만사이의 해 안에서 배에 실어 아라비아, 이집트, 페르시아, 심지어 인도, 중국에까지 이들을 팔아 넘겼다. 아프리카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에서 자행된 약탈적인 교역으로 흑아프리카의 흑인과 코끼리가 대수난을 당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코끼리들에게는 한동안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공급이 다시 급증함에 따라 덩달아 수요도 증가했다. 아프리카에서 민족 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게릴라들은 막대한 재원 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코끼리를 희생양으로 하여 독립자금을 마련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신생국가들은 남아프리카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탄자 니아-잠비아 철도를 건설하기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상아를 현물로 지급하 고자 했다. 그러나 상아를 이용한 것은 자본주의 국가인 타이완과 홍콩이었다. 뛰어난 상아세공기술과 완벽한 무역조직을 갖춘 타이완과 홍콩은 부자들에게 상아세공품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특히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한 일본에서의 상아세공품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오늘날의 밀렵, 1960년대의 상아공급자들(이들은 국제규격에 아랑곳하지 않는 밀렵꾼이다)은 사냥기법을 전반적으로 수정했다. 그들은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높고 두꺼운 가시장벽으로 아프리카의 대초원을 둘러쳤으며, 그곳으로 통하는 통로들을 무수한 함정으로 차단했다. 함정에는 기린, 코끼리, 표범, 얼룩말 같은 수많은 동물들이 걸려들었다. 동물들은 그 속에서 오랜 고통 끝에 죽어 가거나 하이에나, 사자, 독수리들의 먹이가 되었다. 밀렵꾼은 함정에 빠진 코끼리들에게 서 팔 수 있는 것을 모두 채취했다. 약탈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물 론 상아였다. 꼬리와 털은 파리채나, 삼부루(Samburu) 같은 멋쟁이들이 선호하 는 팔찌나 장신구나 두툼한 목도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뿔 모양의 다리뼈는 우 산꽂이나 배 고리장식에 사용된다. 귀는 탁자나 북을 만드는 데 쓰이고, 가죽은 피혁제품이나 카우보이 장화를만드는 데 사용된다. 더구나 코끼리 속눈썹이 수 태능력을 증대시켜 아이들을 많이 낳게 해준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는 인도 에서는 심지어 코끼리 속눈썹까지 주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점차 감시와 추적이 심해지자, 밀렵꾼은 상아를 탈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근 주민들은 식량이 부족한 형편인데도 코끼리 고기는 해골과 함께 방치된 채, 동료 코끼리들이 동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썩어가거나 포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있다. 전문적인 밀렵꾼은 큰 수컷이나 임신한 암컷, 심지어 상아가 아주 작은 어린 코끼리까지 죽인다. 밀렵꾼이 설령 코끼리 사냥이 끝나고 새끼코끼리를 그냥 내 버려둔다 해도, 지도자와 보호자를 잃은 새끼코끼리는 흔히 목초지나 물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죽는다. 밀렵으로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코끼리떼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동물 이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만약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이 없다면, 이러한 살육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근 아프리카코끼리들이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부유한 나라들의 사치와 탐욕과 유행 때문이다. 1년에 10만 마리의 코끼리들이 학살되 고 있으며, 연간 감소율이 이미 9%를 넘어섰다. 이러한 추세로 나가면 록소돈 타는 몇 해 만에 전멸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로지 비참한 코끼리의 잔해만 남게 될 것이며, 나머지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 짐승들은 인간이 그들에게 남겨 놓은 제한된 환경에 맞추어 적정 수만큼만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경우에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떠밀려 고작해야 5만 마리의 코끼 리들만 보존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끼리 보호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학살을 멈추게 하는 일도 시급하지만, 코끼 리 문제는 아프리카 환경문제와 직결 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된다면, 코끼리떼는 원상을 회복할 것 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수억의 인구가 증가할 것이고, 수십만 마리의 코끼 리가 새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코끼리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폐를 끼 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코끼리를 길들여 실용화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로서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고, 별로 효용성이 없으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코끼리를 길들인다는 것은 별 실용성이 없다. 그보다는 코끼리에 대한 우리 의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구조된 코끼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시아의 경우를 들어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케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관광객이 야생 코끼리를 구경하려고 몰려들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관광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코끼리떼들이 자유롭게 살수 있 도록 보호하고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성장한 수컷 일부를 정기적으로 제거한다 해도 코끼리 조직을 파괴하지는 않 을 것이며, 오히려 체체파리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에 산더미 같은 고기를 제공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격한 통제가 필요할 것이고, 장성한 수컷이 지닌 상아 때문에 또다시 상아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코끼리와 상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매우 가난한 나라들이다. 그 러므로 그들이 코끼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며, 전인류의 공동 자 산을 보호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그들 소득의 결손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 리고 유행을 좇아 상아를 애용해 코끼리 자산을 보호에 기여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많은 수렵감시인들을 고용할 수 있는 경비를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사실 코끼리 살해는 궁극적으로 형제살해에 해당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코끼 리는 인간의 사랑을 받아 왔다. 또한 코끼리는 서구의 전통이 아프리카코끼리에 게 투영했던 거대함, 막강한 힘, 자비심, 정의, 인간에 대한 친숙성 등을 떠올리 게 한다. 하지만 코끼리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성장 과정에 대응하는 긴 유년 기, 청춘기, 성년기, 노년기를 가치면서 인간과 친밀하게 공존해 온 인류의 형제 이다. 아니 코끼리는 그 이상이다. 코끼리문제는 실속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영하는 본보기 그 자 체이다. 따라서 코끼리는 자연의 불안정한 운명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불안을 집 약해 놓은 셈이다. 코끼리가 무너지면 하늘도 무너질지 모른다. 과거 브라만 세 계의 기둥이던 코끼리는 과도한 소비사회를 지향하는 오늘날에도 영원한, 그리 고 진정한 '하늘의 뿌리' 이다. 기록과 증언, 하늘을 떠받치는 신령스러운 존재,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희생물, 곡마단과 동물원의 귀염둥이, 그리고 보잘것없는 인 간의 사치로 멸종 위기에 처한 가여운 영웅에 관한 이야기들. 시베리아의 매머드, 기술동물학의 최고 권위자인 알프레드 에드먼드 브렘은 동물의 생애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쓰기에 앞서, 19세기 후반에 아프리카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여행했다. "이러한 코끼리 무덤들은 오스티아 크족, 퉁구스족, 샤모예드족, 부르야트족 등이 사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곳 은 북위 58도에서 북극해 사이에 위치한 오브강유역, 예니세이강 유역, 레나강 유역이다. 모래가 많은 해변의 얼음이 풀리자, 산더미처럼 쌓인 엄청나게 큰 상 아들이 발견되었으며, 거기에는 거대한 뼈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혹 상아가 턱 뼈 속에 견고하게 박혀 있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피가 묻어 나는 살점과 가죽과 털이 주위에 널려 있는 경우도 있다. 원주민은 이 짐승을 마몬트(mammont)라 불렀다. 원주민의 말에 따르면, 이 짐승은 몸집이 거대하고 키는 2~3m 정도이 다. 머리는 크고 길며, 발은 곰의 발과 유사하다. 땅속을 돌아다니다가 간혹 머 리를 내밀지만, 햇빛은 해롭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 짐승은 진흙을 먹고살며, 모래가 많은 땅위로 나오게 되면 발이 모래 속에 빠져 곧 죽는다. 또한 공기 중에 노출되어도 즉시 죽는다." 이상은 1692년 중국의 대사관에서 한 원주민이 이 짐승뼈의 퇴적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아이데스가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19세기 말, 저명한 자연과학자인 팔라스는 매머드의 화석화된 잔해를 대단히 정확하게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매머드 유해의 대대적인 발굴은 레나강 하구 에서 애덤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죽과 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매머드가 발견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애덤스는 즉각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잔해 를 발견한 퉁구스족 족장을 만났다. 족장은 노인들로부터 그 괴물과 마주친 사 람은 가족이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매머드 잔해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1804년 3월, 별로 값이 나가지도 않 는 물품을 받고 상아 두 개를 팔아 버렸다. 애덤스는 2년 후 다시 여행을 했고, 같은 장소에서 그 짐승의 유해를 찾아냈 다. 그러나 그 유해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야쿠트족이 개의 먹이로 쓰기 위해 그 살을 잘라냈고, 여우와 늑대, 오소리들이 그 살을 뜯어먹었던 것이다. 뼈대는 앞발 중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마른 가죽이 머리를 덮고 있었고, 눈과 뇌는 그대로 있었다. 다리에는 경결이 남아 있었고, 비단결처 럼 부드러운 털이 덮인 한쪽 귀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가죽의 3/4이 남아 있었 다. 피부는 진한 회색이고, 몸에 난 털은 갈색이며, 검은색의 꼬리털은 말총보다 훨씬 굵었다. 애덤스는 가죽을 벗겨냈는데, 벗겨 낸 가죽은 사람 열 명이 겨우 운반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털을 모두 주워 모으 도록 했는데, 그 털의 무게가 17kg에 달했다. 그 모든 것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로 보내졌다. 그 과정에서 가죽에 붙어 있던 털이 모두 빠졌지만, 이 자연과학 자의 세심한 정성과 끈기 있는 노력 덕분에 실제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가장 긴 털은 목털로, 길이가 70cm 이상이었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도 모두 많 은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는 매머드가 추운 지방에서 살았다는 확고부동한 증거이다. 그 상아는 현존하는 코끼리의 상아보다 훨씬 더 휘어 있었다(그중 어떤 것은 원의 3/4정도까지 휘어 있는 모습이다). 애덤스가 확인한 바에 따르 면, 그 길이는 7m였다. 이 동물의 발견은 오랫동안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살았던 매머드가 갑자기 멸종해 버린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식물성 잔존물 에 주의를 기울인 과학자들은 지구의 자전축이 갑자기 변했으리라는 설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또 다른 과학자들은 대홍수가 발생하여 시베리아가 물에 잠겼으 리라고 추정한다. A.E. 브렘 <삽화가 곁들여진 동물의 생애> <포유동물> 제2 권, 파리, 1960 코끼리의 언어, 킬리만자로 산 앞을 이동하는 코끼리들의 장중한 발소리만큼 조 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공중에는 인간의 가청 한계보다 낮은 코끼 리들의 호출 신호가 메아리를 치면서 울려 퍼지고 있다.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 에 있는 동료와 교신하기 위해, 코끼리들이 초저주파 불가청음을 이용한다는 것 (지상의 포유동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코끼리만 이러한 불가청음을 이용하는 것 으로 보인다)을 입증하려는 연구들이 케냐와 나미비아와 짐바브웨 등지에서 진 행되고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코끼리들이 갑자기 동시에 행동을 한다.... 1984년 5월 미국 포틀랜드 시 메트로 워싱턴 파크 동물원을 방문하는 도중에 나는 우연히 그러한 신비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세 마리의 아시아코끼리와 그 새끼들을 관찰하고 있던 나는 멀리서 울려오는, 천둥 소리와도 흡사한 공기의 진동을 여러차례 느꼈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순간적으로 한 가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나는 가장 저음을 내는 파이프오르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이 바흐의 성가 중 저음부를 연주할 때면, 동물원의 코끼리사육장이 그랬 던 것처럼, 성당 전체가 진동했다. 파이프오르간이 성당을 진동시켰던 것처럼, 코끼리들이 이러한 진동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너무 낮아서 인간의 귀에는 들 리지 않는 초저주파로 코끼리들이 서로 의사 전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둥처럼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연구의 핵심이다, 여섯 달 후, 나와 빌 랑그바 우어와 리즈 토마스는 동물원으로 다시 가서 이러한 가설을 검증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코끼리들이 내는 소리를 녹음했고, 뒤이어 그것을 이용해서 음향그 래프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400여 종의 신호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우리가 들었던 신호음의 수보다 세 배 이상이었다. 코끼리들이 낸 소리들 중에는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 코 킁킁거리는 소리, 우 는소리, 노호하는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듯한 소리 등 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연구에 핵심이 된 것은 바로 천둥이 우 르릉거리는 듯한 소리이다. 왜냐하면 코끼리들은 그 소리를 지각하지만 인간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청 한계보다 아래에 위치한 소리들 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소리들을 불가청음이라 한다. 세상은 지진, 바람, 우레, 화산, 폭풍우 등에 의해 생겨난 불가청음들로 가득 차 있다. 땅과 공기와 물과 불의 거대한 움직임이 그러한 소리들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단히 낮은 주파수의 소리가 동물들의 생활 속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불가청음의 신호음은 큰고 래에게서도 기록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소리들이 실제로 의사 소통을 위해 사 용되는지는 알 수 없다. 코끼리는 왜 불가청음을 사용하는가? 코끼리가 내는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듯 한 초저주파의 소리(14~35헤르츠)는 사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소리는 숲이 가로막고 있거나 넓은 들판이 가로놓여 있어도 멀리까지 전달된다. 따라서 불가청음이 멀리 떨어진 동료 코끼리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야생 코끼리들이 불가청음을 사용하는 것이 입증된다면, 그토록 수 없이 연구 되어온 코끼리의 사회생활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이 풀릴 수 있다. 이앤 더글러 스 해밀턴과 오리아 더글러스 해밀턴 부부, 신시아 모스와 조이스 풀은 탄자니 아와 케냐의 코끼리들을 심층 연구하는 과정에서, 3km 이상 떨어진 무리들 사 이에서 불가사의하게도 동시에 일어나는 행동을 많이 보고했다. 예를 들어 수컷 과 암컷은 번식기간에 어떻게 다시 만나는가? 이것은 조이스가 수컷의 생애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제기했던 의문이다. 성장한 수컷들과 암컷들은 각기 독 자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특정한 생식기간이 따로 없는 그들은 광막한 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1년 중 대부분의 기간이 발정기에 해당하는 수컷은 발정 기에 이른 암컷을 찾아서 끊임없이 드넓은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수태를 기다리 는 암컷이 드물기 때문에 수컷의 조급한 마음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임 신기간이 2년 정도이고 뒤이어 2년 동안 새끼를 기르는 데 헌신해야 하므로, 암 컷이 짝을 구하는 기간은 4~5년에 며칠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암컷과 수컷은 결국 만난다. 실제로 암컷이 암내를 풍기자마자 사방에서 수컷들이 몰려든다..... 발정기의 암컷들은 어떻게 사방에 흩어져 있는 수컷들에게 자신이 짝을 구하 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가? 암컷들이 발정기 동안 내보내는 독특하고 강렬한 초저주파의 신호음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호음은 언제 나 동일한 형태를 띠며, 따라서 기술적으로는 노랫소리와 같다. 느리고 장중한 신호음은 부드럽게 시작되어 강하고 날카로워졌다가 침묵 속 으로 잦아든다. 이러한 신호음은 30분 가량 지속되기도 하는데, '노래를 한' 암 컷은 날이 저물기도 전에 수컷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캐서린 페인 <코끼리는 말을 한다> <국제 지질 학회지> 1989년 8월호 인간의 친구. 사로잡힌 코끼리들을 통해 인간은 코끼리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잇고, 코끼리가 온순하고 지혜로우며 인간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플루타르크나 아일리안이 이야기한 다정다감한 코끼리들은 서커스단의 코끼리나 키플링이 소개한 코끼리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코끼리의 친밀성. 플루타르크의 책 속에는 수많은 고대 일화들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꽃 파는 아가씨의 일화는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코끼리는 온순하고 상냥한 동물이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꽃 파는 아가씨를 사랑했던 코끼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코끼리의 애정 표현은 인간 못지 않았다. 코끼리는 시장을 산책하다가 과일가게에서 가져다 주곤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 앞에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목 아래로 해서 그녀는 가슴속으로 코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사람이 손으로 젖가슴을 더듬는 것 같았다. 플루타르크 <윤라론집> 로마의 숙련된 코끼리들. 2세기 말에 태어난, 그리스-로마 시대의 마지막 저술가 중의 하나인 C.E. 아일리안은 자신이 쓴 <동물들의 자연사>의 세세한 이야기 대부분을 선인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플루타르크에 이르기까지)에게서 빌려 왔다. 그리고 거기에다 자신의 개인적인 관찰내용과 당대의 사건들을 덧붙여 놓았다. 아일리안이 기록해 놓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저술가들에 의해 폭넓게 인용되었다. 나는 여기서 코끼리의 음악적 본능에 대해서, 그의 온순한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들도 어렵게 배우는 것을 쉽게 습득하는 그의 재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맹수나 야생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길들여진 코끼리는 여럿이, 혹은 혼자서 춤을 출 수 있다.그리고 박자에 맞추어 걸을 수도 있다. 플루트의 멜로디에 민감한 귀는 음의 차이를 식별해 낸다. 박자가 느려지면 그에 맞추어 발걸음도 늦춰지고 박자가 빨라지면 발걸음도 빨라지는데, 대단히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고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코끼리는 자연으로부터 거대한 육체뿐만 아니라 쉽게 배울 수 있는 재능을 함께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나는 에티오피아나 리비아에 사는 코끼리의 온순한 성격과 쉽게 배우는 천부적 재능을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칫 이 동물의 탁월한 성질을 찬양하기 위해 내가 꾸며 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거짓된 내용을 지껄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짓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철학자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부끄럽고 비열한 짓이다. 따라서 나는 내 두 눈으로 보았던 것, 로마에서 실제로 있었던 것, 다른 저자들이 나보다 앞서 기술해 놓은 것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길들여진 코끼리는 가장 유순한 동물이며, 사람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동물이다.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가 로마인에게 구경거리로 코끼리를 보여 주었던 당시, 이미 로마에는 다 자란 암 수 코끼리들이 있었고, 이 코끼리들이 그 후 이 지방 코끼리들의 조상이 되었다. 어린 코끼리들이 자라서 점차 다리에 힘이 붙으면, 이 거대한 짐승을 다루는 솜씨가 있는 사람이 조련사가 되어 사육을 맡았다. 조련사는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경이감과 공포감을 이용했다. 조련사는 먼저 온화한 모습으로 코끼리들에게 접근했다. 훈련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코끼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코끼리를 훈련시키는 목적은 코끼리가 플루트 곡조에 화를 내지 않으며, 요란한 북소리에 놀라지 않고, 갈대피리 소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조련사들은 코끼리가 입장객들의 발자국 소리나 뒤죽박죽 된 노랫소리 같은 불협화음을 인내를 갖고 참아 내고,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을 코끼리가 매질을 당한다고 느꼈을 때에도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한족 다리를 구부리도록 강요받았을 때나, 몸을 돌려 도약을 하거나, 우아하게 춤을 주도록 강요를 받았을 때조차도 그 막강한 힘을 이용해 반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순종하도록 조련사들은 코끼리를 훈련시켰다. 마침내 조련사가 무대에서 재주가 뛰어난, 숙달된 코끼리들을 소개하면 코끼리들은 그동안 배운 내용을 사소한 실수도 없이 그대로 되풀이했다. 게다가 의무감과 분위기가 코끼리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도록 부추겼다. 코끼리 가무단은 12마리로 구성되었다. 코끼리들은 무대양면에서 느릿느릿한 걸음거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무대 의상은 꽃으로 장식된 무도복이다. 춤을 지휘하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코끼리들은 조련사에게서 배운 대로 열을 지어 행진했다. 그리고 다음 신호에 다라 원을 만들기도 하고, 다시 흩어져 대오를 형성하기도 했다. 때로는 박자에 맞추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관람석 앞자리에 꽃을 뿌리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보조를 맞추어 춤을 추면서 쿵쿵 소리가 나도록 발을 구르기도 했다. C.E. 아일리안 <동물들의 자연사> 코끼리 각하. 동물의 왕인 코끼리는 그루터기를 제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대농장주는 코끼리를 두세 마리씩 세내어 작업에 착수한다. 코끼리들 중 가장 뛰어난 코끼리는 '모티 구이(Moti Guj)'라는 코끼리였는데, 그 코끼리의 주인은 몰이꾼들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인 디자였다. 모티 구이는 전적으로 그의 소유였는데, 왕처럼 당당하고, 기품 있는 코끼리가 별 볼일 없는 몰이꾼의 소유라는 것은 그 지방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인 경우였다. '모티 구이'라는 이름은 힌두어로 '코끼리들의 중의 진주 ' 라는 뜻이다. 디자는 기분 내키는 데로 방탕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코끼리와 함께 일을 해서 많은 돈을 받으면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모티 구이의 민감한 앞발굽을 천막용 말뚝으로 때리곤 했다. 그러나 모티 구이는 결코 디자를 발로 짓밟아 죽이려 하지 않았다. 때리고 나면 디자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면서 코를 어루만져 주고, 모티 구이를 '내 사랑, 내 생명, 내 영혼' 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술을 주기도 한다. 모티 구이는 술을 몹시 좋아하는데, 특히 아락주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종려나무 열매로 담근 술을 탄 토디(위스키나 브렌디 같은 독한 술에 설탕, 레몬, 더운물을 섞어서 만든 음료수: 역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고 나면 디자는 모티 구이 앞발 사이에서 잠이 들곤 했다. 디자가 술에 취해서 도로 한가운데에서 잠이 들면 모티 구이는 그를 감사 보호하면서 보행자나 차가 그 도로를 지나가는 것을 막았다. 결국 디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교통이 막히곤 했다. 농장주의 개간지에서 작업할 때는 하루 중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다. 급료가 비싼 만큼 그만큼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모티 구이가 그루터기를 뽑아 내는 동안, 디자는 모티 구이의 목 위에 앉아서 지시를 내렸다. 모티 구이는 멋진 한 쌍의 상아를 이용해서, 혹은 강한 어깨로 밧줄을 끌어 당겨서 나무 밑동을 뿌리째 뽑아냈다. 디자는 '너는 코끼리의 왕이야' 라고 치켜세우면서 모티 구이의 귀 뒷부분을 찔러주곤 했다. 저녁이 되면, 모티 구이는 140kg의 싱싱한 꼴과 1L의 아락주를 단숨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 디자는 잠자러 갈 때까지 모티 구이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1주일에 한 번씩 디자는 모티 구이를 강가로 데려갔다. 모티 구이는 물이 별로 깊지 않은 곳에서 기분 좋게 옆으로 드러누웠고, 그러면 디자는 모티 구이의 몸을 씻어 주기 위해 삼베 뭉치와 벽돌 한 장을 들고 그 위로 올라갔다. 모티 구이는 벽돌로 둔탁하게 두드리는 것과 젖은 삼베로 철썩 때리는 것을 혼동한 적이 없었다. 젖은 삼베로 때리는 것은 일어나서 반대편으로 돌아 누으라는 신호였다. 뒤이어 디자는 모티 구이의 발을 살펴보고, 눈을 검사하고, 커다란 귀를 안팎으로 뒤집어 가면서 살펴봤다. 상처가 나지는 않았는지, 혹은 안질에 걸릴 기미는 없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몸단장이 끝나면 까맣게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모티 구이는 나무에서 꺾은 나뭇가지를 코로 흔들면서, 그리고 디자는 젖은 긴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묶고서, 함께 그들의 야영지로 돌아왔다. 러드야드 키플링 <코끼리 각하> 그럴싸한 이야기, "당신들도 오늘 아침 포병대를 보았죠?"하고 오르테리스가 말했다. 그는 방금 도착한, 코끼리들이 대포를 끄는 부대를 포병대라고 했다. 각 대포에는 마구를 갖춘 코끼리들이 세 마리씩 매여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코끼리들이 끄는 이동식 대포를 여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경탄을 자아낼 만한 광경이었다. 선두에 선 코끼리가 훈련 도중 말을 잘 듣지 않자, 그 코끼리를 끌러 낸 다음 가차없이 주둔지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열의 맨 끝에 있는 코끼리가 울부짖으면서 코를 사방으로 내둘러댔다. 그러자 그 코끼리의 몰이꾼은 코에 가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몇 발짝 물러선 채 코끼리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손가락으로 말썽 피우고 있는 코끼리를 가리키면서 오르테리스가 말했다. "훈련을 받기 싫어 난동을 피우는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머스트가 발산될 때 나타나는 발작현상인 모양이야. 머지않아 주둔지에서 한바탕 일이 벌어지겠군. 저 코끼리는 어쩌면 도망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총으로 쏴서 죽여야 할지도 모르지." 그러자 몰바네이가 쏘아 붙였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 코끼리는 자신에 대한 대접에 몹시 화가 나 있는 거야 저 코끼리는 포병대에 새로 들어온 코끼리인데, 천성적으로 짐을 끄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어. 선생님, 몰이꾼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나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코끼리를 달래고 있는 몰이꾼에게 물었다. 그러자 몰이꾼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지금 이 코끼리는 머스트를 발산하는 게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했던 거죠. 줄을 묶어 짐을 끌도록 하다니, 코끼리가 뭐 소나 노샙니까? 코끼리의 힘은 머릿속에 있어요. 자자, 진정해. 오늘 아침 너에게 굴레를 씌운 것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대포를 끄는 일은 가장 신분이 낮은 코끼리들이나 하는 일이죠. 이 코끼리는 둔의 쿠메리아 혈통이란 말입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잃어 가면서 1년 동안 길들였는데 짐이나 나르게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대포를 끄는 신분이 낮은 코끼리 한 마리가 부상을 당하자 포병들이 이 코끼리를 자기 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이 녀석이 이토록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죠!" "신기하군! 정말 신기해! 코끼리가 몹시 화가 나 있다니! 그렇다면 말뚝에 매어 놓으면 될 텐데." 오르테리스의 말을 듣고, 몰바네이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중단하고 몰이꾼에게 코끼리가 묶인 사슬을 끊어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건 코끼리를 창조하신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죠 당신들 세 사람을 모두 죽일 수도 있고, 분노가 진정될 때까지 멀리 도망칠 수도 있죠. 그러나 갑작스럽게 머스트를 발산해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발작을 하게 되면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죽일 겁니다. 코끼리가 히스테리를 일으키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먼저 죽이죠. 그것이 코끼리들의 습성입니다. 러드야드 키플링 <코끼리 각하> 자유의지를 가진 코끼리, 케릴라(Kerala, 인도 남서부에 있는 주:역주) 지방 숲에는 야생 코끼리떼가 많이 살고 있다. 때때로 코끼리가 함정에 빠져 사로잡히기도 한다. 코끼리가 사로잡히면, 오랜 시간과 꾸준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힘든 조련작업이 시작된다. 보통 길들여진 코끼리는 사원이나 왕에게 팔려간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칸다코란은 트라방코르에 위치한 수브라마니아 사원으로 팔려 갔다. 이 거대한 코끼리는 케랄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코끼리들 중의 하나였는데, 큰 키는 육중한 체구와 멋진 조화를 이루었으며,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혔다. 구부러진 긴 상아는 좌우로 비뚤어지지 않고 아주 곧게 앞으로 뻗어 있었다. 머리 모양은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특이할 정도로 커다란 두 귀는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온 이마의 양쪽에 드리워져 있었다. 체구는 거대했지만 칸다코란은 대단히 온순했다. 그 긴 생애 동안 발정기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조차 결코 인간을 해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코끼리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는데, 칸다코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하려 했다. 이러한 성격을 잘 아는 칸다코란의 조련사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데로 내버려두었으며, 다른 코끼리들과 달리 칸다코란은 매어 놓지 않았다. 칸다코란은 사원의 북쪽을 흐르는, 근처의 강가에서 목욕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 코끼리는 가능한 한 더위를 피하려 했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가장 깊은 물 속에서 무더운 낮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강가를 따라가며 풀을 뜯거나, 근처 웅덩이 속에서 흙탕물을 튀기며 장난치는 물소들의 충실한 친구가 되었다. 간혹 가뭄이 들어 물소들이 뜯어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칸다코란은 친구들이 굶주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특히 강을 따라 나 있는 사탕수수 밭이 눈에 띄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사탕수수 밭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기 때문에 물소들은 사탕수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칸다코란에게는 그런 울타리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 코끼리는 물소떼를 이끌고 사탕수수 밭으로 가서 즉각 울타리에 구멍을 냈다. 그런 다음, 친구들이 배를 다 채우기를 기다렸다. 밭주인들이 겁을 주어 물소떼를 쫓으려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칸다코란은 밭주인들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칸다코란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지만, 겁에 질린 농부들은 도망쳐 버렸다. 물소들이 마음껏 배를 채우고 나자 칸다코란은 그들을 강가까지 호위한 다음, 잠시 중단했던 목욕을 다시 즐겼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칸다코란은 자신을 위해서는 사탕수수 줄기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칸다코란이 강물 속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생강과 코코야자 열매와 바나나를 실은 배가 물살을 타고 빠른 속도로 하류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자그마한 그 배는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금세라도 물이 배 안으로 넘칠 것 같았다. 칸다코란은 배를 보았지만, 뱃사공들은 칸다코란은 즉시 코를 들어 올려 배를 붙들었다. 공포에 질린 뱃사공들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강둑으로 헤엄쳐 나왔다. 칸다코란은 그 배를 산산조각 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 뱃사람들은 칸다코란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반감은 반감을 낳는 법이므로, 남은 일생 동안 칸다코란은 자신이 강물 속에 있을 동안에는 결코 배들이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배가 우연히 나타나면 그 코끼리는 악착같이 쫓아가서 박살을 내 버렸다. 강을 오르내리며 장사하는 배들은 칸다코란을 피하기 위해 수킬로미터를 우회해야 했다. 뱃사공들이 장사를 위해 먼 길을 떠날 때는, 출발에 앞서 강까지 걸어와서 칸다코란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칸다코란이 물 속에 있으면 출발을 연기해야만 했다. 많은 뱃사공들이 수브라마니아 사원에 제물을 바치면서 자신들이 강을 지나갈 때 칸다코란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원했다. 그 사원에는 오늘날까지도 당시 뱃사람들이 봉헌한 연등이 줄지어 걸려 있다. 칸다코란은 사원에서 제일가는 코끼리로 꼽혔기 때문에, 축제날 행진 때 신상을 운반하는 코끼리로 선발되었다. 축제날 칸다코란은 행진할 시간이 되자 강에서 나와 자진해서 사원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날에도 조련사들은 별다른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사원에 도착한 칸다코란은 금박을 입힌 정자의 커다란 지주 아래에 서서, 사원의 하인들이 와서 전통적인 머리장식을 해줄 때까지 참을성 잇게 기다렸다. 칸다코란은 뒷발을 들어올려 하인 한 사람이 등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그 하인은 기어서 등 위로 올라가 신상을 단단히 붙들어맨 다음, 올라갈 때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내려왔다. 칸다코란은 어느 누구도 앞으로 해서 등 위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자그마한 비단양산을 받쳐든 사람,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흔드는 사람, 그리고 야크 고리로 만든 파리채를 빙빙 돌리는 사람도 뒷발을 타고 등 위로 올라갔다. 행진은 사원 경내에서 정해진 경로를 따라, 정해진 시간에 펼쳐졌기 때문에 따로 칸다코란에게 길을 안내할 필요가 없었다. 이 코끼리는 적절한 걸음걸이로, 적당한 장소에 멈추어 서기도 하면서 행진했다. 이 코끼리를 이용하면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어떤 이유가 생겨서 행사 주관자들이 행진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해도, 칸다코란은 그 결정에 잘 협조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어떠한 강제력을 동원하더라도 그가 가려고 하는 코스를 변경 시킬 수는 없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칸다코란이 행렬을 이끌 때는 행진에 소요되는 시간이 언제나 정확했기 때문에 연등에 사용되는 기름의 양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행사 마지막 날, 밤늦게까지 의식이 연장 될 때에도 칸다코란이 다른 코끼리들과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칸다코란은 다른 짐승처럼 뛰어다니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워 군중을 불안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 코끼리는 오락을 즐기듯이 커다란 귀를 흔들면서, 언제나 침착하고 조용하게 행동했다. 축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칸다코란은 평소 습관처럼 잠잘 곳을 찾아 홀로 걷고 있었다. 그가 불빛이 별로 없는 외딴 도로 위를 걷고 있을 때, 반장님인 한 노부인이 그를 보지 못하여 부딪치고 말았다. 겨우 코끼리를 알아본 노부인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더니 의식을 잃고 그의 발 앞에 쓰러졌다. 노부인을 뒤따르던 하인들은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쳐 버렸다. 길이 너무 좁아서 칸다코란은 노부인을 피해 우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침내 노부인이 의식을 되찾고, 기어서 길가로 비켜났다. 그러자 칸다코란은 노부인이 길바닥에 떨어뜨린 양산을 뛰어넘어 가던 길을 계속해 갔다. 이처럼 지혜로운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 보다 더 훌륭한 코끼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케랄라에는 상당히 큰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지만, 칸다코란은 아무리 무거운 나무라도 거뜬히 운반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막대기 하나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칸다코란을 작업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가가 정해져야 했다. 대가의 일부는 사원의 몫이었고, 나머지는 칸다코란의 차지였다. 조련사들이 코끼리에게 운반해야 할 나무의 크기와 옮겨 놓아야 할 장소, 그리고 작업의 대가로 받게 될 품삯을 알려 주었다. 흥정의 결과가 마음에 들면, 그 코끼리는 승낙의 표시로 울음소리를 낸 다음, 통나무 있는 곳으로 가서 그것을 지정된 장소로 옮겼다. 그러나 작업이 끝난 뒤 즉각 자신의 몫인 바나나나 코코야자나 사탕을 주지 않으면, 통나무를 다시 들어다가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사원으로 찾아와 거대한 통나무를 운반하는 데 그 코끼리를 이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품삯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지고 난 뒤, 조련사들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칸다코란에게는 무엇을 주실 생각입니까?" 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바나나 10송이, 코코야자 열매 10개, 당밀 10kg을 주겠소." 그러한 제안을 전해들은 칸다코란은 만족의 표시로 큰 울음소리를 냈고, 열심히 맞은 일을 끝마쳤다. 그런데 일을 맡겼던 사람이 칸다코란에게 줄 음식은 며칠 후에 주겠다고 했다. 칸다코란은 즉시 옮겨 놓은 통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통나무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도로 가져다 놓았다. 별수 없이 그 사람은 여러 마리의 다른 코끼리들을 고용했지만, 여러 마리가 힘을 합쳐도 소용이 없었다. 통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혹해 하던 그 사람은 결국 다시 수브라마니아 사원을 찾아왔다. 다시 품삯이 결정되었고, 평소처럼 강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던 칸다코란도 다시 불려왔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아무리 후한 대가를 약속해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케랄라의 코끼리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코끼리들은 저마다 독특한 특성과 개성을 갖고 있지만, 칸다코란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코끼리는 없었다. <남인도 전설집> 음악이 박물관의 두 코끼리 한스와 마거리트에게 미친 영향, 시민 여러분은 목월(프랑스 혁명력 아홉 번 째 달로 태양력으로 치면 5월 20일부터 6월 18일까지에 해당된다:역주) 10일 개최되었던 코끼리들을 위한 음악회의 상세한 내용을 나에게 문의해 왔다. 여러분은 이 코끼리들을 위한 음악이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먼저 음악가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먼저 음악가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메스나 고문도구가 아니라 오보에. 플루트,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을 들고 와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두 마리 코끼리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매혹시켰다. 그리고 속박상태에서 억눌려 있던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일깨워 주었다. 때로는 흥분시켰다 진정시켰다 하기도 하고, 숲 속에서 살던 때의 야생적 본능을 일깨우기도 했다. 결국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 코끼리에게 애정과 기쁨을 느끼게 했고, 마침내 사랑의 환상으로까지 이끌었다. 사랑의 환상에 빠지면, 상대의 애정 표시가 없어도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법이다. 콘서트는 삼중주로 시작되었다. 두 개의 바이올린과 하나의 첼로가 나장조의 다양한 소곡들을 연주했다. 음아고리가 울리자 한스와 마거리트(두 코끼리의 이름임)는 먹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더니, 이윽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으나, 주위가 평온하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진정되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음악에 넋을 빼앗겼다. 이러한 상태의 변화는 삼중주가 끝날 무렵에 특히 두드러졌다. 연주자들은 글루크의 무곡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로 연주를 끝냈다. 야성적이고 대단히 강렬한 이 곡의 모든 박자 변화가 두 코끼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걸음을 빨리했다 느리게했다 하다가는 갑자기 몸을 흔들어대기도 하고, 점잖게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음악의 리듬과 박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사육장 울타리의 창살을 물어뜯기도 하고, 그 창살을 코로 껴안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 육중한 몸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휘파람소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조련사에게 이유를 묻자, "화가 난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반주 없이, 다단조의 <오, 나의 사랑 아코디언>이 바순 독주로 연주되자, 코끼리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감미로우면서도 애조 띤 연가, 처량한 바순의 음색으로 더욱 애처롭게 들리는 연가가 두 코끼리를 매혹시켰다. 코끼리들은 몇 발짝 걷다가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이더니, 관현악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그 감미로운 음악소리를 호흡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코를 부드럽게 휘저었다. .... 그러나 음악의 효과가 두 코끼리에게 똑같이 전달 된 것은 아니었다. 한스가 평소대로 신중하고 수줍은 듯이 뒤로 물러서려 한 반면, 마거리트는 정열적으로 길고 부드러운 코를 이용해 한스의 등과 목을 쓰다듬기도 하고, 때로는 코끝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누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마거리트가 간절하고 열정적인 감정에 사로 잡혀 있음을 역력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마거리트는 자신의 입 속으로 가져갔던 손가락으로 한스의 귓속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거리트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또다시 음악이 바뀌자 무대는 갑자기 흥분과 무질서 속에 빠져들었다. 관현악단이 라 장조의 쾌활하고 발랄한 곡조의 <잘될 거야>를 연주했는데, 특히 플루트의 날카로운 소리가 효과를 증폭시켰다. 두 코끼리는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희의 소리를 외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낮아졌다가 갑자기 높아지는 변화무쌍한 곡조가 끊임없이 두 코끼리에게 감정을 고조시켜 주는 듯 했다. 역시 암컷이 훨씬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그의 애무는 자신의 감정을 좀더 직선적으로 드러냈다. 암컷의 교태가 점차 자극적으로 되었다. 마거리트는 갑자기 수컷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뒷걸음질로 접근하면서 뒷발로 한스를 툭툭 쳤다. 마거리트는 온갖 아양을 떨었으나 가엾게도 마거리트의 노력은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음악소리는 그녀를 진정시키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마거리트는 여전히 그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관현악단 쪽에서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려 왔고, 신기하게도 그 노랫소리는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빗줄기처럼 마거리트의 흥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흥분이 절정에 달해 있던 마거리트는 갑자기 감정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점차 욕정에서 깨어난 마거리트는 코를 땅에 떨어뜨린 채,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마거리트를 진정시킨, 내림 나장조의 그 노래는 다르다쉬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다지오였다. J. B. 우엘 <박물관의 두 코끼리의 자연사> 신성한 코끼리, 신격화된 코끼리, 시암이 타이로 바뀌면서 국기의 중앙에 있던 흰코끼리의 상이 국기에서 빠졌다. 대단히 희귀한 흰코끼리는 시암 왕국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미얀마와 라오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85년에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살았던 한 흰코끼리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약 1년 전부터 미얀마 황제의 흰코끼리는 황족들에게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였다. 그 코끼리는 식욕을 잃고, 점차 성마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느리게 진행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노쇠현상 때문에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세 차례에 걸쳐 축성된 이 코끼리는 80여 년 전부터 종교, 군대, 시민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숙명적인 노쇠현상으로부터 이 신성한 코끼리를 구해 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그 코끼리는 왕족들처럼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영지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은 그 코끼리를 돌보는 데 충당되었다. 그의 룬(roon, 그 코끼리의 대리인, 즉 집사를 이렇게 부름)은 조금이라도 속임수를 쓰거나 조그마한 실수라도 저지르면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비리가 발각되면, 스헨- 음행(s`hen-Mheng, 그 영주 코끼리의 이름)은 코끝으로 경멸하듯 냄새 맡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코로 룬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거대한 발로 룬의 머리를 반숙한 달걀을 으깨듯이 바스러뜨렸다. 그 코끼리에게는 보석들이 박힌 금안장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루비와 사파이어가 빙 둘러 박힌 목장식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날 언제나 그에게 후한 대접을 내려 주는 황제가 그와 비슷한 안장을 또 하나 하사했다. 커다란 루비와 멋진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주홍빛 머리장식 천도 더 멋진 것으로 교체되었다. 황제는 손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새 머리장식을 그 코끼리 머리에 씌워 주었다.... 불행을 쫓는 '아홉 개의 보석이 박힌 둥근 테 장식'은 한시도 그의 이마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양쪽 상아에도 그러한 장식물이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매일 화려한 장신구들로 그 코끼리를 치장시켰다. 머리에는 황제나 귀족들을 본떠서, 신분을 표시하는 휘장을 달았다. 양 눈 사이에는 귀금속으로 만든, 초생달 모양의 장신구가 타오르는 불처럼 빛을 발했으며, 양쪽 귀에는 금으로 된 커다란 귀고리가 흔들렸다. 비단과 금이 한데 어우러진 주홍빛의 띠로 이루어진 멋진 의상에는 진주와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태양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몰이꾼들이 위에 올라타 금으로 된 네 개의 자그마한 양산을 받쳐들었다. 또한 코끼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자신의 부를 만끽할 수 있도록, 금으로 만든 사료통 뒤에 특별히 주문해 온 커다란 거울을 설치했다. 거울의 구입뿐 아니라 운반에도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었다. 금으로 만든 사료통에는 언제나 부드럽고 맛있는 풀과, 갓 돋아난 감미로운 여린 새싹과 맛있는 과일이 가득했다. 게다가 황제는 그 사료 위에다 보석들을 뿌려 주도록 했는데, 이는 동양의 한 군주가 누렸던 광적인 사치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많은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키가 4m가 넘는 스헨-음헹의 거대한 몸통은 기력을 상실한 채, 서 있던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긴 코는 커다란 상아 사이에서 애처롭게 흔들거렸다. 예전에 그토록 강렬하고 매서웠던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고 보기 흉하게 변해, 굳어버린 듯 멍하니 한곳만을 응시했다. 요컨대 모든 감각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하인, 사육사, 코끼리의 녹봉으로 살아온 신하, 심지어 황제까지 나서서 갖가지 진기한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코끼리는 기운 없이 이따금씩 찔끔찔끔 먹는 시늉만 할 뿐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큰 불행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스헨-음행 전하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버마에서 이 코끼리가 갖는 중요성이나 영향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코끼리를 대체할 다른 흰코끼리를 미리 찾아 놓지 못한 상태에서 그 코끼리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히 끔찍한 대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다. 황제나 그의 가족들이 엄청난 불행과 끔찍한 재앙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고, 미얀마 제국전체가 페스트나 지진이나 홍수나 기아에 휩쓸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에서부터 가장 최하층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중 이러한 일련의 끔찍한 재난들을 예방하기 위해서, 모든 관료들은 서둘러 스헨-음행의 뒤를 이을 흰코끼리를 찾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그들은 황제와 그의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흰코끼리를 찾아낸 사람에게 주어질 막대한 재산을 얻는 행운을 잡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흰코끼리를 찾았다. 그래서 흰코끼리가 있을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는 곳이 알려지면 막대한 경비를 들여가며 수색대를 파견했다. L. 부세나르 <한 파리 청년이 호랑이들이 사는 지역에서 체험한 모험담> <여행신문> 1885년 11월 1일 세계의 기둥, 인도의 종교적인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는 몇 세기에 걸쳐 여러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이 서사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B.C. 5세기경에 살았던 위대한 시인 발미키에 의해 쓰였다. 이서사시는 라마(비슈누신의 일곱 번 째 화신:역주)의 모험담을 주로 다루고 있다. 서사시의 첫머리에 에이요디아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불처럼 열정적인 코끼리들, 태산처럼 크고 막강한 힘을 지닌 코끼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 사르가(Sarga, 찬가) 12.사가라(왕)의 6만 아들들은 라사탈라(지옥)을 향해 달려갔네. 13.그곳에 구멍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들은 광대한 지면을 떠받치고 있는, 태산과도 같은, 그 지역 코끼리 비루파크샤를 보았네. 14. 오, 라구(라마의 아버지)의 기쁨이여! 거대한 코끼리 비루파크샤는 산과 숲을 비롯한 지구 전체를 머리로 떠받치고 있었네. 15. 오, 카쿠트샤여! 피로에 지친 거대한 코끼리가 한순간 피곤한 머리를 흔들자, 지진이 일어났네. 16. 오, 라마여! 사가라의 아들들은 그 지역 수호신인 거대한 코끼리에게 프라다크시나를 한 다음, 구멍을 뚫고 라사탈라에 이르렀네. 17. 동쪽지역을 파헤친 뒤, 그들은 남쪽을 탐험하였네. 남쪽지역에서도 또다시 거대한 코끼리를 발견하였네. 18. 그것은 머리로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높은 산과도 같은, 고결한 마하파드마였네. 그들의 놀라움은 극도에 달했네. 19. 프라다크쉬나를 한 후에, 영웅들은 용기를 내서 서쪽지역을 파 들어갔네. 20. 서쪽지역에서도 태산처럼 거대한 코끼리 소마나사가 영웅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네. 21. 영웅들은 그에게 프라다크시나를 하고 행운을 물은 다음, 구멍을 뚫고 소마가 있는 지역에 도달했네. 22. 북쪽에서도 영웅들은 그곳을 떠받치는 거대한 코끼리 힘판두라를 보았네. 발미키<라마야나> 아프리카의 전설. 아프리카의 수많은 전설들은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동물을 묘사하고 있다. 표범은 잔인하고 교활하며, 하마는 우둔하고 덤벙대는 동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현명하고 힘센 동물의 왕으로 간주되는 코끼리는 때때로 교활한 짐승들에게 희생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온순하고 착한 성격, 희생을 감수하는 '페어플레이'정신, 교활한 짐승들은 코끼리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다. 흔히 토끼가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코끼리에 대한 노래. 이 노래에서 느낄 수 있는 이미지는 실제로 아프리카 구전가요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불안의 창조자인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무거운 발자국 소리, 기필코 획득해야하는 고기에 대한 매력... 저녁바람에 울어대는 숲.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칠흑의 밤. 하늘에는 별들이 떨면서 사라지고, 창백한 달빛은 구름에 가려 사라지고 정령들이 떠돌고 있네.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합창)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불안에 떠는 숲 속에서 나무는 잠이 들고, 나뭇잎은 움직이지 않는다.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원숭이들은 못 본 체 눈을 감는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싱싱한 풀을 뜯던 영양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머리를 치켜 든 채. 겁에 질린 모습으로 귀를 기울인다. 독수리는 울음소리를 삼킨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합창)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세찬 빗줄기가 몰아치는 숲 속에서 코끼리 아저씨가 굼뜬 발걸음으로 걷고 있다. 바우! 바우! 힘에는 자신 있어 근심걱정 없고. 두려움을 모르는 코끼리 아저씨, 아무도 당할 자가 없네. 커다란 나무를 꺾어 놓은 채, 멈추어 섰던 걸음을 다시 옮기네. 먹고, 울고, 나무를 쓰러뜨리고, 짝을 찾는 코끼리 아저씨. 멀리 코끼리 아저씨 소리가 들려 온다.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합창)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숲 속에서 너를 당할 자 누가 있을쏘냐. 사냥꾼이여, 용기를 내라, 슬그머니 다가가라. 뛰어라. 덤벼들어라. 고기가 앞에 있다. 거대한 고깃덩이가. 움직이는 산 같은 고깃덩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고깃덩이. 너의 집 화로에서 굽게 될 고깃덩이. 너의 이빨 사이에 끼이게 될 고깃덩이. 붉은빛의 맛있는 고깃덩이와 따끈할 때 마실 수 있는 피.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합창) 요요! 코끼리 사냥꾼이여, 활을 들어라! 오고우에강 지류인 아방가 유역에서 R.P. 트리예가 수집한 노래 A. 자냉 <아프리카코끼리> 꾀와 힘의 대결. 아프리카의 동화 속에서 토끼와 코끼리는 흔히 적대관계로 묘사된다. 토끼는 동물의 왕인 코끼리에게 거침없이 도전장을 내밀기도 하는데, 지는 쪽은 언제나 코끼리이다. 모시족의 한 동화에는 코끼리가 자기를 '꼬마'라고 부른 것에 화가 난, 튀르 라와라는 토끼가 등장한다. "왜 자꾸만 내가 작다는 것을 환기시키려는 거지? 더구나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도 센데 말이야. 원한다면 그걸 증명해 보일 수도 있어.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널 때려눕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둬!" 그러자 숲 속의 현자인 코끼리는 대단히 재미있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뭐, 뭐라고? 방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해 봐. 잘 듣지 못했거든." "넌 분명하게 알아들었어! 네가 원한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널 때려눕히겠다고 했어." "나를 때려눕힌다고? 나를? 나는 발바닥으로 토마토 짓이기듯 너를 묵사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석궁으로 돌멩이를 쏘는 것처럼 코로 너를 숲 너머로 날려보낼 수도 있어." "좋아, 그럼 일요일에 근처에 있는 숲 속의 빈터에서 만나자. 그곳에 오면, 케이폭나무 숲에서 내가 고함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모든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너에게 도전하겠어." 결전의 날이 오자, 마을사람들은 꾀와 힘의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서둘렀다. 토끼는 코끼리 음바 오그보가 거대한 케이폭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접근해 오도록 조처를 취해 두었다. 토끼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케이폭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접근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케이폭나무의 도깨비가 음바오그보의코를 붙잡고서 쥐어짜듯 비틀었다. 그러자 코끼리는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M.콜라르델 디아라수바 <아프리카 동화속에 나오는 토끼와 거미> (1975) 음그보티강의 요정, 음그보티강을 창조하면서, 그 강에게 제물을 받을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 것은 위대한 하늘신이 있는 권능을 부여한 것은 위대한 하늘신이 아닐까? 아그니족은 이암라보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죽이고 숲으로 떠났다. 그 코끼리는 음그보티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그 위로 총을 쏘았고, 뒤이어 물 속으로 들어가 코끼리를 해체하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100여 명 정도였다. 맨 먼저 강물 속으로 들어갔던 사람이 들을 내밀며, 솟아올라 피를 뿌리고 다시 강물 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거기 있니?"라는 물음과 함께 같은 상황이 계속 되풀이되었고, 99명이 사라졌다. 한 사람만 더하면 100명이 될 참이었다. 바로 그 100번째 사람이 주저앉아 속으로 생각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이 떠났지만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마을로 돌아가야겠어.' 마을사람들은 사람들이 죽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점쟁이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때부터 점쟁이의 말을 따라 음그보티강에 제물을 바쳤다. 이것은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일요일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강에서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들려 온다. 테오필 오벵가 <음보치족의 구전 문학><아프리카의 현재> 어떻게 토끼가 동물의 왕인 음웨느(mwene)에 임명되었는가?, 동물들에게는 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 중의 하나를 왕으로 뽑기를 결정했다. 왕을 뽑기 위해 동물들은 사자의 집 뜰에서 집회를 열었다. 몇몇 동물들은 표범을 지목했다. 그러나 표범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고 살기떄문에 두터운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 다른 몇몇 동물들은 무서움을 줄 수도 있고 위엄도 있으니까 사자를 왕으로 뽑자고 했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만장일치로 코끼리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대관식 날은 공휴일로 공포되었다. 대관식은 모든 동물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자 마을에서 거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코끼리는 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코끼리는 길을 가던 도중 토끼와 마주쳤다. 퀭한 눈을 한 채, 배를 움켜쥐고,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토끼의 모습은 단단히 병이 난 것처럼 보였다. 죽는시늉을 하던 토끼가 코끼리에게 말했다. "내 상태가 어떤지 알겠지. 그런데 아무도 날 데려가려 하지를 않았어. 그래서 집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자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코끼리가 대꾸했다. "내 사랑하는 친구 토끼야, 너도 알다시피 난 언제나 널 믿어. 난 지금 모든 동물들의 왕이 되기 위해 가는 길인데 네가 혼자 여기 남아 있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야. 자. 가자. 내가 너를 등위에 태우고 갈게. " 이렇게 해서 토끼는 코끼리 등에 올라탔고, 산과 계곡을 건너 이윽고 사자의 마을에 당도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환자 흉내를 내고 있던 토끼가 코끼리에게 말했다. "이제 좀 폼을 잡고 천천히 걸어." 코끼리가 마을에 들어서자 모든 동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도 토끼는 여전히 코끼리의 등위에 있었다. 이제 병이 다 나았는지, 토끼는 모든 동물들이 충성을 맹세할 때마다 코끼리등 위에서 미소지으면서 그 맹세에 화답했다. 이윽고 왕을 상징하는 기장이 공식적으로 수여되려는 순간, 토끼가 코끼리에게 말했다. "그걸 받아야 할 동물은 바로 나야. 네가 나를 등 에에 태우고 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난 네 등위에 있는 동안 모든 동물들과 인사를 나눴어. 네 말이 틀렸어? 다른 동물들에게 물어 봐!" 모든 동물들이 토끼의 말이 맞다고 선언했다. 코끼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코끼리는 자격을 잃고 말았고, 코끼리를 속인 토끼가 음웨느에 임명되었다. 테오필 오벵가 <음보치족의 구전문학> <아프리카의 현재> 전쟁터에서. 19세기와 20세기 서구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코끼리의 모습은 한니발의 돌격대 역할을 했던 전쟁터의 코끼리이다. 이 코끼리들은 한니발을 통해 후세에까지 길이 이름은 날리게 되었다. 242년 카르타고는 용병들의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폴로베르의 소설을 통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밀카르 바르카 <카르타고의 유능한 장군이자 한니발의 아버지>가 반란을 진압하고 카르타고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천재적인 전략 때문이었다기보다는 그가 갖고 있던 70마리의 코끼리 덕분이었다. 용병들이 결국 패하게 된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는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로가 된 많은 용병들은 코끼리 앞에 끌려와 승리에 취한 그 짐승들의 발에 짓밟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 되돌아온 하밀카드는 자신의 코끼리 사육장이 끔찍스러울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을 확인해야 했다. 코끼리는 카르타고 귀족가문의 자랑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메가라 가문의 코끼리들이 가장 힘에 셌다. 하밀카르는 출발에 앞서, 압달로님에게 코끼리들을 잘 돌보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 코끼리들은 다리가 잘린 채 모두 죽었고, 단 세 마리만이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코끼리들은 안뜰 중앙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고, 사료통에는 먹다 남은 찌꺼기들이 널려 있었다. 코끼리들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한 마리는 끔찍할 정도로 양쪽 귀가 찢겨져 있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무릎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으며, 또 한 마리는 코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그 코끼리들은 이성을 지닌 인간처럼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코가 잘려 나간 코끼리는 거대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서, 잘려 나가고 남은 그 흉측스러운 코끝으로 부드럽게 그를 쓰다듬으려고 애섰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하밀카르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쏟아졌다. 히말카르의 포위공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일부 용병부대는 하밀카르의 동맹군인 나르 하바스가 이Rm는 누미디아의 코끼리들에게 걸려들었다. 굴곡을 이룬 언덕 사이로 은빛 다발들이 반짝였다. 용병들은 다발들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들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들을 모았다. 꽃잎이 피어나듯 다발들이 일어섰다. 그것은 코끼리 위에 설치된 망루 속의 창들이었다. 코끼리들은 가공스러울 정도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미늘창이 달려 있고, 상아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옆구리에는 청동판이 씌워져 있었고, 갑옷의 정강이받이에는 단검들이 수없이 꽂혀 있었다. 코끝에 끼워진 팔찌 모양의 구리 고리에는 날이 넓은 칼자루가 달려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용병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들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코끼리들은 밀집된 적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쇠가 달린 가슴팍으로 적진을 갈라놓고, 땅을 쟁기질하듯 상아로 적진을 휘저어 놓았다. 그리고 코에 달린 낫처럼 생긴 칼로 난도질을 했다. 창을 가득 꽂은 망루는 걸어다니는 화산 같았다. 모든 것이 한데 뒤얽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흰 얼룩 같았으며, 회색 청동 조각이 번쩍일 때마다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그런 아수라장의 한복판을 그 무시무시한 짐승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는 밭고랑 같은 검은 자국이 생겼다. 용병들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고, 기력을 상실한 그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이윽고 코끼리들을 벌판의 중앙에 집결했다. 그들에게는 공간이 부족했다. 상아가 서로 맞부딪칠 정도로 좁은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그들은 앞발을 들고 뒷발로서야 했다. 한편, 두 무리의 용병들이 오른쪽 습곡지대에 피신해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카르타고 진영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들고서 용서를 빌었다. 카르타고 병사들은 그들의 팔다리를 묶고, 땅바닥에 나란히 눕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코끼리들을 데려왔다. 코끼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용병들의 가슴은 상자갑이 부서지듯 뿌드득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고, 한꺼번에 두 사람씩 발아래 짓밟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살람보> 샤나메.(Shab-Nameb,페르시아의 피르다우시가 35년에 걸쳐 지은 장편 서사시로 <왕자의 서>로 번역됨: 역주)에서 인용된 것으로 터키 군대를 이끄는 사웨흐왕이 페르시아왕 바흐람과 전투를 시작하기 앞서 바흐람에게 보낸 전갈. "나의 군대가 진격하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거요. 난 갑옷을 입힌 코끼리를 수천 마리나 보유하고 있소. 기병대의 말들은 코끼리 냄새만 맡아도 도망칠 거요. 싸움을 단념하고, 나에게 오시오. 당신을 내 앞에다 오랫동안 세워 두지는 않겠소. 당신에게 권력과 함께 내 딸을 주겠소." 바흐람의 거뷰 의사가 전달되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처음에는 페르시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사웨호왕은 휘하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군대의 맨 앞에 코끼리들을 배치시켜라.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일제히 코끼리떼를 진격시켜라. " 멀리서 코끼리떼를 본 바흐람왕은 불안해졌다. 그가 칼을 빼어 들고 장수들을 호령했다. "오. 용맹스런 전사들이여! 머리에 투구를 쓰고, 활을 쏘아라! 원로들에게 선출되었고, 선인들에게 왕관을 수여받은 나는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다. 내 목과 생명을 걸고 명하느니, 활을 가진 자들은 당장 활시위를 당겨라! 포플러나무로 만든 화살로 저 피에 굶주린 코끼리들의 코를 쏘아라! 적들을 몰살시켜라! "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들이 코끼리 코를 꿰뚫었고, 벌판과 계곡이 피로 강물을 이루었다. 상처를 입은 코끼리들은 등을 돌려 자신의 군대를 짓밟고, 전쟁터를 가로질러 도망쳤다. 병사들도 그뒤를 따라 도주했다. 이렇게 뿔뿔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병사들이 거대한 코끼리발에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 그들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도 해 되지 않았다. 피르다우시 <왕자의 서> 아프리카 여행. 프랑수아 르바이양은 1781년에서 1794년 사이 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했다. 그는 특히 국왕의 정원에 처음으로 기린을 데려왔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박길 닿는 대로 대모험을 하면서 그는 틈틈이 코끼리 사냥에 몰두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우리가 추적하는 동물들이 남긴 자취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사방이 완전히 트인 숲 속의 빈터에 도착했다. 제법 넓은 그 공간 안에는 몇 그루의 관목과 덤불밖에 없었다. 우리는 멈추어 섰다. 내가 고용한 호텐토트족 중의 한 명이 주위를 살피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사방을 둘러본 후, 그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여러 차례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발견한 코끼리들의 수를 우리에게 알렸다. 그가 나무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회의를 했다. 코끼리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우리는 바짝 몸을 웅크린 채 접근해 갔다. 호텐토트족은 덤불을 가로질러, 거대한 짐승들 중 한 마리가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우리는 서로 더듬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것은 코끼리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다는 신호이다. 나는 그 코끼리 너머의 자그마한 언덕에 있었다. 그 용감한 호텐토트족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나는 코끼리를 보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소리쳤다. "저기 좀 보세여~ 저기, 저기 있어요!" 나는 여전히 코끼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시선은 훨씬 멀리서 코끼리를 찾고 있었는데, 스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코끼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결국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나는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거대한 머리통과 상아를 내가 있는 쪽으로 돌린, 불안한 모습의 코끼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아마 한가운데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코끼리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총소리에 놀란 30여 마리의 코끼리들이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나는 코끼리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기쁨을 맛보았다. 그중 한 마리가 우리 곁을 지나가다가 우리 중 한사람이 쏜 총에 맞았다. 그 코끼리가 여기저기 피를 뿌려 놓은 것을 살펴본 후, 나는 그 코끼리가 치명상을 입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코끼리를 추적했다. 그 코끼리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그러다가 다시 쓰러지곤 했다. 총소리에 놀라 다시 일어선 그 코끼리는 높게 자란 덤불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였다. 그곳에는 뿌리째 뽑혀 말라 죽은 나무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14발째 총을 맞은 그 코끼리는 격노해서 호텐토트족에게 덤벼들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15발째 총을 쏘았지만. 그것은 코끼리의 화를 더욱 돋우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그 사람은 옆으로 피하면서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나와 코끼리 사이는 스물다섯 걸음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14kg이나 나가는 총을 들고 있었고, 게다가 탄약통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몸을 날려 위험에서 벗어났다. 나는 도망쳤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줄기차게 나를 쫓아왔다. 꼭 죽을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나는 쓰러져 있는 거대한 나무 뒤에 엎드려 몸을 웅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책이 없었다. 거기에 당도하여 그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거기에 엎드리자마자 코끼리가 그곳에 당도하여 그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앞에서 들려 오는 내 일행들의 고함소리에 그 코끼리도 역시 겁을 집어먹고 멈추고 서서 귀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숨어 있는 곳에서 그 코끼리에를 향해 총을 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총에는 장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짐승은 그렇게 총알을 많이 맞고도 끄떡이 없었다. 나에게 잔득 적의를 품었을 그 코끼리를 한 방에 쓰러뜨리지 못한 것에 나는 낙담했다. 그리고 닥쳐올 운명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자신의 우두머리의 안부가 걱정된 고용인들이 사방에서 나를 불렀다. 그러자 고함소리에 겁을 먹은 코끼리는 즉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순식간에 내가 숨어 있는 나무를 뛰어넘었다. 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그러자 나는 호텐토트족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다시 일어서서, 반바지 속에 넣어 두었던 총을 꺼내 코끼리에게 총알을 한 방 날렸다. 코끼리는 완전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길에는 우리에게 입은 상처의 핏자국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밤이 다가왔고, 우리는 내가 운 좋게 단 한방으로 죽였던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되돌아갔다.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가 나타나자 독수리와 자그마한 육식동물들이 도망쳤다.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이들이 벌써 그 코끼리를 먹어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총을 쏘았다. 우리에게는 식량이 부족했다. 고용인들이 여러 사람 몫의 불고기를 만들기 위해 코끼리의 살을 잘라 냈다. 나에게는 코에서 잘라 낸 몇 토막의 고기를 요리해서 가져왔다. 코끼리 코를 먹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내가 먹어 본 요리 중 가장 맛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아스는 다리 요리를 먹고 나면, 코 요리는 잊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다음날 대단히 맛있는 점심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즉각 준비를 시켰다. 코끼리의 네 다리를 잘라내고, 정방형으로 약 1m 가량 땅을 팠다. 그리고 거기에다 불이 붙은 숯을 채우고, 잘 마른 장작으로 그 위를 덮었다. 상당시간 동안 크게 불을 피운 다음. 구덩이가 충분히 달구어 졌다고 판단되자 구덩이를 비워 냈다. 그리고 클라아스는 그곳에 코끼리의 네 다리를 넣은 뒤 따뜻한 재를 다시 덮고, 숯과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날이 밝을 때까지 다시 불을 지폈다. 그 날 밤 내내 잠을 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내 고용인들은 밤샘을 했다. 밤새 많은 물소와 코끼리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다. 숲에는 항상 그런 동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밤새 피운 그 큰 불 때문에 짐승들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했다. 코끼리 다리 요리, 불에 구운 고기는 놀라우리만큼 부풀어올랐으나,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감미로운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맛을 보았다. 임금님의 식사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곰 발바닥 요리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코끼리처럼 크고 육중한 짐승의 요리가 어떻게 그토록 섬세하고 감미로운 맛을 낼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최고급 식당들도 결코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고기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 나는 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코끼리 다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많은 독자들이 이러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다녔던 신기한 나라들에 대해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과, 엉터리로 지어낸 이야기만 접해 온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는 꼭 해둘 필요가 있다. 오전 중 나머지 시간에는 상아를 뽑았다. 그 코끼리는 암컷이었기 때문에, 상아의 무게는 10kg밖에 나가지 않았고, 키는 약 2.5m 정도였다. 우리는 나를 살려두고 떠났던,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잔인하게 못 살게 굴었던 코끼리의 종적을 뒤쫓기로 했다. 그러나 밤 동안 새로 생겨난 자취와 뒤섞여 그 코끼리의 자취를 식별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몹시 지쳐 있었고, 이 가엾은 사람들이 짜증을 낼까 봐 걱정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희망봉을 거쳐 아프리카 내륙을 편력한 F.르바이양의 여행> 제 1권 바스티유의 코끼리, 몽파르나스가 다시 물었다. "지금 도대체 어디 가니?" 가브로슈는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두 아이를 가리키며 대꾸했다. "아이들을 재우러 가는 중이야." "어디에다 재울 거야?" "우리 집에." "우리 집이라니?" "우리 집에." "거처를 구한 거야?" "응, 그래." "그래! 그곳이 어디야?" "코끼리 안이야." 가브로슈가 대꾸했다. 가브로슈의 확고한 눈길을 바라보자, 마침내 몽파르나스는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가브로슈가 자기 집이라고 한 데가 어떤 곳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옳아, 그 코끼리 말이지... 그래, 그곳은 지낼 만 하니?" 몽파르나스가 물었다. "아주 좋아. 정말로 최고야. 다리 밑처럼 외풍이 불지도 않아." 가브로슈가 대꾸했다. "그곳에는 어떻게 들어가니?" "그냥 들어가지." "그러면 구멍이 있니?" "물론이지.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면 안 돼. 그 구멍은 앞다리 사이에 있어. 개새끼(경찰을 가르킴:역주)들도 그 구멍이 있는지 모르고 있어." "그러면 기어서 올라가니? 그래, 그렇겠지?"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우지끈뚝딱, 그걸로 끝이야. 사람들이 하나도 없거든."... 비록 모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은 기념물이다. 이 모형의 설계 자체는 대단히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거창한 계획은 연이은 두세 차례의 거센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그때마다 이 모형은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 갔으나, 그 자체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일시적 건조물처럼 보였으면서도 그 어떤 영원성을 지니게 되었다. 목재와 돌로 제작된 이 코끼리는 높이가 13m 정도이며, 등 위에는 집과 흡사한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예전에는 칠장이가 그 망루를 초록색으로 칠해 놓았지만, 지금은 비바람과 세월에 씻겨 망루는 검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방치된 채 광장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이 거상의 넓은 이마, 코, 상아, 망루, 거대한 엉덩이, 기둥 같은 네 다리는 밤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위에 놀랍고도 끔찍한 윤곽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이 건조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민중의 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어둡고 불가사의하며 거대하다. 그것은 바스티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곁에 서 있는, 눈에 보이는 강력한 힘을 지닌 유령이었다. 이 건조물을 보러 오는 외국인은 거의 없으며, 지나가는 행인들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건조물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철이 바뀔 때마다 옆구리에서 회반죽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내려 흉측한 흉터를 남기고 있었다. 시청의 토목 담당관들도 1814년 이후로 이 건조물을 망각한 채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 코끼리는 방치 된 채, 활기를 잃고 병들어 쓰러져 가고 있었다. 이 코끼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도 부스러지고, 술 취한 마부들에 의해 끊임없이 더럽혀지고 있었다. 배에는 균열이 생겼고, 꼬리에는 가느다란 나무뼈가 드러나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30년 전부터 대도시의 지면이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상승하고 있고, 광장의 지면도 높아졌기 때문에, 지금은 이 건조물이 움푹 들어간 곳에 세워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마치 그 지대가 코끼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움푹 꺼진 것처럼, 불결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거대한 모습의 이 코끼리는 부르주아의 눈에는 추한 몰골로 비추어졌으며, 사색가에게는 애조 띤 서글픈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것은 쓸어 내야 할 쓰레기나 참수형에 처해야 할 국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밤이 되면 코끼리의 모습은 변했다. 밤은 정말 모든 그림자들의 세계이다. 황혼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그 낡은 코끼리는 변모했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그 코끼리는 조용하지만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변했다. 과거는 어둠의 세계이다. 그래서 어둠이 그에게 웅장한 모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투박하고 뚱뚱하고 육중하며 거칠고 눈에 거슬리는, 거의 기형적인 모습의 이 기념물, 그러나 분명 위풍당당하고 야생적인 당당한 기품이 깃들여 있는 이 기념물은 사라졌다. 그 대신 아홉 개의 탑이 달린 성채를 대체하여, 굴뚝이 달린 거대한 난로와 같은 모습의 그것이 평화롭게 그 지역에 군림했다. 마치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제도를 대체했던 것처럼... 거대한 코끼리 근처에 이르자 가브로슈가 말했다. 그는 무한히 큰 것이 무한히 작은 것에 어떤 인상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꼬마야, 무서워하지 마라." 코끼리 안에서, 그곳은 모든 문이 닫혀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열려 있는 은신처였다. 해충에게 침해를 당하고, 망각 속에 버려진 이 가련한 늙은 코끼리. 무사마귀와 곰팡이가 뒤덮여 있고, 병들고 벌레 먹고 버림받은 코끼리. 광장의 한가운데서 호의로운 시선을 구걸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쳐다봐 주는 사람이 없는 불쌍한, 거대한 걸인 같은 이 코끼리. 그러나 코끼리는 신발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잠을 자며, 누더기를 걸치고, 손가락을 호호 불어 가며 사람들이 던져 준 것으로 먹고 살아가는 걸인들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바스티유 코끼리의 역할이다. 인간들에게 멸시 당했던 나폴레옹의 구상이 신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다. 단지 유명한 데 불과했을 것이 숭엄해진 것이다.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실현하기 위해 반암, 청동, 철, 금, 대리석이 필요했을 테지만, 신은 널빤지와 들보와 회반죽의 낡은 구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는 천재의 꿈을 품고 있었다. 무장을 하고 코를 들어 올리고 망루를 싣고 있는 코끼리, 즐겁고 생기를 불어넣는 물줄기를 사방으로 내뿜는 이 코끼리 속에, 나폴레옹은 민중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은 그 코끼리를 한결 대단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 소년에게 그곳을 거처로 제공했던 것이다. 가브로슈가 드나드는 구멍은 밖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갈라진 틈이었다. 코끼리의 배아래 숨겨진 그 구멍은 고양이나 어린애들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좁았다. 가브로슈가 말했다. "문지기에게는 아무도 없다고 일러두자." 그는 자기 집에 들어서는 사람처럼 자신 있게 성큼 어둠 속으로 들어서더니, 판자를 집어 들고서 그 구멍을 막았다. ... 가브로슈의 두 손님들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이델베르크의 커다란 맥주통 속에 갇힌 사람이나, 성서에 나오는 고래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느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하늘의 뿌리, 1980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직전, 로맹 가리는 자신의 책 <하늘의 뿌리> 결정판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제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이 책에서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코끼리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렐이나, 투쟁자금을 얻기 위해 상아를 지닌 거대한 짐승을 대량학살 하려고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우두머리인 와이타리에 대해 저자가 한 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차드에서 희망봉에 이르기까지, 항상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고기에 대한 열망은 대단히 강렬하다. 이는 대륙 전체에 공통된 것이다. 고기는 그들의 꿈이자 향수이고, 끊임없는 갈망의 대상이었다. 생명체의 생리적 욕구는 성적 본능보다도 더 강렬한 것이다. 고기 그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실제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갈망의 대상이다. 그는 모렐을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백인에게 코끼리는 오랫동안 단지 상아를 제공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흑인에게 코끼리는 오로지 고기, 그것도 운이 좋으면 독을 바른 투창 하나로 가장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코끼리에 대한 '미'나 '귀족적 기품'의 개념은 배부른 인간들, 고급 식당의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사람들, 박물관에서 추상적인 예술품이나 즐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사람들은 추악한 사회현실에 맞서지 못한다. 그리고 '미'라는 뜬구름 속으로 도피하면서, '아름답다' 거나 '고상하다' 거나 '우정어리다' 거나 하는 막연하고 모호한 관념들에 도취해 버린다. 역사가 그들에게 허용해 준 것은 순전히 시적인 태도뿐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타락해 가는 자신들의 사회에 코끼리를 떠맡으라고 요구했다. 파멸을 피하자는 것이 그 유일한 이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이 짐승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고 성가신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동정에 호소하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모렐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보기 드물 정도로 전형적인 경우였다. 실제적인 내용을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정치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보다는, 코끼리들을 자유와 인간존엄성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로 편리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코끼리 사냥의 금지를 요구했고, 멀리서 코끼리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실질적 행동은 회피하고, 그저 시늉만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구의 관념론이 취해온 전형적인 태도이며, 모렐이 완벽한 본보기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코끼리 고기가 중요할 뿐이지 코끼리의 '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도 배가 채워지고 난 다음의 문제였다. 아프리카인도 배가 부르게 되면, 코끼리의 미적 측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곰곰이 생각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지금 당장에 그들에게 코끼리 배를 가르고, 그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도록 충고했다. 언제 다시 고기를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먹으라고,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코끼리 보호운동과 코끼리에 대한 '경외심'과 모렐의 활동 등을 하나로 연결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서구 대중의 감상주의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했다. 따라서 와이타리는 세계의 이목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감추기 위해 취했던 모호한 태도를 이제 끝내야 했다. 그리고 좀더 강력한 조직체를 조직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자금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는 무기와 장비를 갖춘 20명의 부하를 세 대의 트럭에 나눠 태웠다. 그들 중 임금을 받고 고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맹 가리<하늘의 뿌리> 보호를 향한 움직임, 1905년 12월 6일, 코끼리 애호인 협회가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자연사 박물관장을 위시해서,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카미유 생상 같은,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이 단체에 참여했다. 본 협회는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끔찍한 코끼리의 대량학살을 막고, 상아의 거래를 규제하며, 아프리카 내 우리 영토에서 코끼리 길들이기 작업을 확대할 것을 기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짐승들에게도 도도새(17세기까지 모리셔스 제도 등지에서 살았던 새, 너무 살이 쪄서 날 수 없었던 비둘기과의 새이다:역주)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최근 멸종된 몇몇 종들처럼 코끼리도 머지 않아 멸종되고 말 것입니다. 페리에, 코끼리 애호인 협회 회장 1906년경 아프리카 코끼리의 문제, 먼저 폴 이포 씨가 본협회의 첫 번째 축하연의 흥을 돋울 수 있는 노래를 하나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코끼리의 친구>라는 노래인데, 서투른 시처럼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이 노래가사에는 우리의 목표와 생각과 의도가 대단히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식민지주의자와 자본가들이 시대의 주도세력인 지금, 우리 모임의 중요한 논지는 코끼리를 위한 캠페인의 효용성과 수익성 부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유력인사들과 정치인들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다행히 현재 서구는 우리가 제시한 논거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상아 거래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점차 고치고 있습니다. 코끼리의 친구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게다가 서두르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막을 것인가? 코끼리는 인간의 친구, 개 보다 훨씬 더 변함이 없네. 결국 이제는 인간들이 코끼리의 친구가 될 차례라네.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에서, 코끼리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네. 콩고에서 모잠비크에 이르기까지 흑인들은 코끼리에 대항해서 뭉쳤다네. 상아를 밀매하기 위해서라면 잔인하게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네. 이제는 프랑스의 우리가 코끼리의 친구가 되어야 할 때라네. 광포한 흑인들이 코끼리들을 잔인하게 다루고 있는 반면, 인도제국에서는 코끼리들의 힘과 온순성을 높이 평가한다네. 옛날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는 전투에서 정말 뛰어났다지. 로마인 죽음을 당했다네. 이 코끼리들의 충실한 벗에게. 지혜로운 이 후피동물을 잘 활용할 수도 있다네. 밭을 가는 황소처럼 코끼리를 이용할 수도 있다네. 무게가 어마어마한 이 코끼리는 어린아이를 즐겁게 할 수도 있고, 하인들의 역할을 대신 할 수도 있네. 우리 모두 코끼리의 친구가 되세. 지식이 풍부한 지성인들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고했네.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했네. 그리고 마침내 해결책을 찾았네. 여러분들에게 제안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된 것 같네. 이 식탁을 떠나면서 수락하라고, 코끼리의 친구가 될 것을. 우리 함께 코끼리의 운명을 지켜나가세.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세. 그렇지 않으면 기니에서 더 이상 코끼리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네. 자연의 왕들 중의 하나인 이 흥미로운 짐승의 미래는 당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네. 당신들은 코끼리의 친구. 키미유 생상의 보호활동, 여기에 제시된 글에는 당시의 말투나, 코끼리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잘 드러나 있다. 비전문가 회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인, 학사원 회원 카미유 생상의 발언(1909)내용에서도 당시의 그러한 특색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상아로 순식간에 많은 돈을 벌었고,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과일을 얻기 위해 과일 나무를 쓰러뜨리는 야만인처럼 행동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흥미로운 동물의 멸종은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제 미천한 생각으로는 지성인이라면 온 힘을 다해 그 멸종을 막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활기를 띠는 매머드의 사용,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 거래 금지 후, 제조업자들은 매머드의 상아를 수입하려 하고 있다. 1989년 10월 로잔에 모인 103개국 대표들은 회원 2/3의 찬성을 얻고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3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효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여러 해를 끌다가 간신히 채택된 이 역사적 결의안은 세계시장에 즉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어 파리에는 상아제품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가게가 드문 편인데, 이들 가게의 총 매상고가 급속도로 상승했다. 파리 제6구에서 3대 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피에르 에크만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상아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상아를 가져와 고쳐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손님들은 심지어 상아에다 자신의 흉상을 새겨달라고 주문합니다. 저는 주당 60시간씩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골동품 가게에서도 상아 가격이 급등했다. 1년 전에 8,000달러 하던 오래된 상아 장기알이 런던의 소더비에서 최근 8만 달러에 팔렸다. 반면에 아프리카에서의 상아 시세는 폭락했다. 예전에 kg당 240달러 하던 가공하지 않은 상아의 가격이 지금은 자이르에서 80달러도 채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특히 홍콩에서 수십 혹은 수백 톤의 상아를 보유하고 있는 상인들은 앞으로 그 많은 상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 하고 있다. 타이완과 코트디부아르처럼 로잔 협정의 '103 회원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며, 이들의 상아 거래는 각별한 감시를 받게 될 것이다. 수 만 명의 전세계 상아세공인들이나 상아거래상들은 자신들의 장래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상아의 대용물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대용물들 중 몇 가지는 대단히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몇 십 년 전부터 갈랄리트와 셀룰로이드 같은 합성수지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일본 사슴의 뼈나 뿔, 그리고 아마존강의 종려마무에서 추출한 '식물성 상아'인 코로조(상아종려의 열매에서 추출한 단단한 백색 물질:역주) 등이 상아 대용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용품들로는 약간 흰 코끼리 상아의 뛰어난 재질을 대신할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화석화된 매머드의 상아이다. 2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의 레스퓌그에서 발견된 비너스 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머드의 상아는 그때부터 이미 자그마한 상들을 조각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귀한 후피동물이 기원전 1만 년경에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굴벽을 장식하는 벽화, 혹은 땅 속에 묻힌 유해들뿐이다. 시베리아의 영구 결빙지대의 얼어붙은 진흙 속에서는 수십 마리의 매머드 유해가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기도 한다. 발굴된 매머드 중 가장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앉은 자세로 동결된 매머드인데, 이 매머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의 자랑거리이다. 파리 박물관도 쭈글쭈글해진 매머드 머리 조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를 본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베리아 매머드의 무덤들, 매머드의 잔해 중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은 뼈들이며, 물론 그 속에는 상아도 포함된다. 시베리아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발굴이 행해졌다. 선사시대의 우크라이나인은 매우 단단한 이 유골들을 움막을 짓는 데 다량으로 이용했다. 그보다 훨씬 뒤, 알렉산드 대왕은 당시 코끼리의 상아와 구별하기 위해 매머드의 상아를 '흙 속에서 뽑아낸 상아' 라고 불렀다. 시베리아 부족들에게는 이 '천연자원'의 채굴과 가공과 거래가 수세기 전부터 그들 경제활동의 일부였다. 타타르족의 한 황제의 옥좌는 전체가 매머드 상아로 조각되기도 했다. 17세기 카자흐인의 시베리아 정복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상아거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파리의 장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러시아의 상아를 가지고 작업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 매머드 상아는 아프리카 상인의 값싼 대용물이었다. 영구 동결된 상태로 보존된 매머드 상아는 수천 년을 거치는 동안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매머드 상아를 습기가 많은 장소에 보관하면, '껍질'이 좀 두껍고, 결이 약간 더 거칠며,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코끼리 상아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전문가가 아니면 이 둘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피에르 에크만의 설명이다. 오늘날 구소련 땅에 묻혀 있는 화석화된 상아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 수가 없다. 소련(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의 기사에서 발췌:역주)도 그 양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벌써부터 터무니없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몇 달 이내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머드 상아 값이 kg당 300달러에서 800달러로 치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련은 그 엄청난 보물을 현금으로 바꾸려는 유혹을 더 느낄 것이며, 경제가 비틀거리고 있는 만큼 상아 가격을 더 높이려 할 것이라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다. 가공하지 않은 상아의 수출을 금지하는 그들의 정책은 일대 전환을 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3년 전, 그들은 핀란드인을 중개인으로 내세워 몇몇 프랑스 상인들에게 수 톤의 상아를 제시했다. 그리고 몇 달 전, 폐업 위기에 직면한 독일 오덴발트 지역의 상아세공인들에게 매년 다량의 상아를 공급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거래를 제안했다. 일본인은 즉각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실 일본은 1988년 106톤의 아프리카 상아를 수입하여, 피아노건반과 도장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상아 도장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만 200만 개의 상아도장이 만들어졌다. 통상적인 상아 거래가 침체된 상황에서,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량을 어떻게 확보 할 것인가? 시베리아의 매머드 상아를 대량으로 구입해야만 하지 않는가? 시세가 오르기 전에 물량을 확보하려는 일본인의 주문이 쇄도하자, 소련인은 생각을 바꾼 것 같다. 그들은 도쿄를 출발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일본 대표단에게 상아도장을 만드는 합작회사의 설립을 제안하게 될 것이다. 공장은 소련 야쿠트 지방에 설립하여 그 지역의 장인들을 고용하도록 하고, 설립자본만 부분적으로 일본인이 출자하도록 한다는 것이 그들의 복안이다. 벌써부터 코끼리 보호론자들은 분개하고 있다. 화석화된 상아는 어떤 국제협약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아거래는 실제로 아프리카 상아의 불법적인 거래를 은폐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류의 공동자산인 고대 동물의 상아 남용이 현재 살아있는 동물의 상아 남용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1950년 3월 12일 발표되었고, 그 후 완전히 잊혀졌던 농업장관의 시행령을 다시 들추어냈다. 프랑스에서는 코끼리 상아만이 상아제품이란 사표를 붙인 채 판매될 수 있으며, 매머드 상아에는 그와 같은 상표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이 시행령의 내용이다. 마르크암브루아즈 랑뒤 <르 몽드> , 1990년 1월 10일 아웃 오브 아프리카, 지난 10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어떻게 하면 코끼리들의 학살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나라들은 모든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짐바브웨는 거래를 조직화하여 그에 맞서고 있다. 홀로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코끼리 수컷이 근처의 강으로부터 불러오는 습한 바람에 커다란 귀를 부채질하듯 나풀거리면서, 긴 코를 이용해서 능숙한 솜씨로 자신이 좋아하는 열매를 따고 있다.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아프리카의 한 단면이다. 그렇지만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대규모 옥수수농장들이 있고, 거대한 소떼들이 풀을 뜯고 있다. 짐바브웨가 유럽공동체에 질 좋은 고기를 제공하고 있는 나라임을 환기시켜준다. 아프리카의 또 다른 일면이다. 짐바브웨는 이 두 모습을 함께 지켜 나가조가 하는 것 같다. 전세계가 발벗고 나섰고, 아프리카는 코끼리들리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슬퍼하고 있으며, 상아를 탐내는 밀렵꾼들에 의해 학살되고 있다. 그러나 짐바브웨는 예외이다. 그곳에는 10년 전 3만여 마리의 코끼리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그 수가 5만 2,000마리에 달한다. 마나 풀 국립 공원 안에서 수렵여행 주최자들의 자문에 응하고 있는 35세의 구트는 평생을 수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구증가와 새 농장주에게 농토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동물들은 제한된 구역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 그는 인공적으로 생태계 균형을 복원시키기 위해서도,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가능한 한 빨리 적정량을 초과한 짐승들을 도살해야 한다는 '가축선별작업'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서구의 동물애호가들은 그러한 작업을 언제나 야만적인 행위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구트는 관광과 사냥으로 벌어들이는 외화수입이 자기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끈기 있게 되풀이해서 서명했다. 사냥도 세심하게 통제를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감상적인 태도와 환경보호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영국 식민주의의 유산인 국립공원들이 짐바브웨 전체 면적의 1/10을 차지하고 있다. 짐바르웨는 국립공원들이 짐바르웨는 국립공원들을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지면상 경계가 그어진 제한된 인공낙원 속에서 동물의 왕인 코끼리들을 법률과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수렵여행의 주최자들, 윤택한 삶을 누리는 대농장주들, 전현직 사냥꾼들 같은 짐바르웨의 다른 백인들처럼 구트도 자기 나라에 산재해 있는 국립공원과 광대한 수렵지구, 그리고 코끼리드레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상아가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 코끼리들이 아프리카에서 살아 남지 못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보츠와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에서는 코끼리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1979년에서 1989년 사이에 코끼리의 수는 134만여 마리에서 62만 5000여 마리로 줄어들었다. 번식기에 이른 수컷들의 수가 줄어들어서 - 수컷들은 커다란 상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특히 밀렵꾼들의 표적이 된다. - 코끼리의 번식 자체가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암컷 한 마리를 죽이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두 살 이하의 새끼코끼리도 함께 죽이는 셈이 된다. 학살의 원인이 되는 상아. 인간들은 수천 년 전부터 조각을 했고,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소재로 알려져 신화적인 것이 되어 버린 상아, 준보석처럼 간주되는 이 상아에 대한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인의 탐욕이 매년 수천 마리의 코끼리를 죽이고 있다. 1976년 워싱턴 협정에 서명한 나라들은 코끼리를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로 규정했다. 그 협회에서는 코끼리의 수에 따라 각 나라에 할당량을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할당량이 준수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협회의 사무국인 시트(CTTES)는 밀렵을 제어할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다. 국제적인 거래망을 갖고 있는 상아 거래조직은 통제를 조직적으로 피하고 있다. 상아의 판매경로는 계속 바뀌고 있다. 타이완과 싱가포르와 마카오를 거쳐, 이제는 두바이가 중간 경유지로 이용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부패한 고위관료와 군대장교와 경찰 간부들이 가짜 서류를 발급 받아 상아의 반출을 돕고 있다. 상아 수출을 장려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의 경우는 국가의 방조하에 공공연하게 상아의 반출이 이루어진다. 다른 몇몇 국가들의 경우는, 정치투쟁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코끼리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오늘날 앙골라에는 코끼리가 불과 1600여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 상아 가격은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다. 1979년 kg당 63달러였던 상아 가격이 1986년에는 260달러에 달했다.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상아 거래액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아프리카가 얻은 것은 그 수입금의 극히 일부인 10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한줌도 안 되는 수출업자들, 즉 홍콩과 도쿄의 사업가들 주머니 속에로 들어갔다. 지난 봄 대량학살에 위험을 느낀 서구 국가들은 그것이 가공된 것이든 가공되지 않은 거시든, 혹은 땅속에서 나온 것이든 가리지 않고 상아의 거래를 전면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결정은 국제야생생물기금 같은 많은 민간 환경보호 단체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코끼리가 격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없어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못한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지난 6월 케냐, 탄자니아, 소말리아를 포함한 7개국들은 모든 상아 거래를 금지시켜 달라고 시트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 일로 아프리카 대륙이 둘로 분열되었다. 케냐와 탄자니아가 앞장선 동아프리카는 코끼리의 완전한 보호를 위해 싸웠으며, 이들은 유럽공동체와 미국, 대부분의 자연환경 보호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수량을 속이는 것으로 의심을 받아 왔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임으로 난처한 입장에 빠진 남아프리카는 예외적인 조항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남아프리카의 선봉장 역할을 한 짐바브웨는 서구 환경보호론자들의 논거를 반박했다. 관광과 야생동물을 관장하는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케냐나 탄자니아가 그들의 동물을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을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짐바르웨는 결국 이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워싱턴 협정에 서명한 103개 회원국들을 10월 17일 로잔에서 상아 거래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최종적인 희망사항은 조만간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남아프리카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다. 코끼리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패와 밀렵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국제자연보존연맹의 판단이다. 그러나 짐바르웨에서는 농부의 지지를 얻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시골 농부들에게 코끼리는 밤사이에 자신들의 수수밭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한낱 골칫거리에 불과하다. "코끼리들이 여기서 자리를 차지하고 살려면 공물을 바쳐야 하오." 잠베지강 유역의 구루브 지역 족장인 에프라임 사페수카의 말은 단호했다. 짐바르웨는 국립공원의 인근 마을에 야생동물의 관리를 맡기고, 그곳에서 나는 수익도 전적으로 그들에게 일임했다. 풀어놓은 짐승들이 해를 입히는 것도 바로 그들의 경작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년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적정량을 초과한 동물의 수를 산정했다. 그리고 직업적인 사냥꾼들을 고용하여 초과분의 짐승을 죽이고, 그 고기는 마을사람들이 나눠 갖는다. 상아는 경매에 붙여 팔고, 고기는 지역주민들에게 나눠주고, 가죽은 무두질을 해서 수익을 올린다. 특히 외국인 사냥꾼들을 위해 사냥여행을 알선하는 일을 통해서 - 한 여행객이 사냥이 금지되어 있는 코끼리 한 마리를 죽이고자 한다면, 3만 달러 정도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 그 지역주민들은 1988년 15만 달러의 소득을 올렸다. 그것은 반성적인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거액이다. "예전에 우리 마을사람들은 밀렵을 했고, 야생동물한 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동물들이 국가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은 우리의 공유재산입니다. 이 지역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죽으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압니다. 밀렵은 불가능해졌습니다. " 이렇게 사페수카는 단언했다. 생태환경 보호론자들은 짐바르웨를 그대로 두면 큰 재난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항의한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나머지 국가들에게도 금지되어 있는 상아의 유통을 허용하는 틈을 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동물보호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마쿠티에서 카리바에 이르는 도로 위에, 잠베지강 유역에 드넓은 초원지대에 거대한 코끼리들리 남겨 놓은 파괴의 흔적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상아가 가치를 상실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곳 사람들이 코끼리들이 번식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 둘까? 코린드니 <렉스프레스> 1989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