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변신의 고통 지은이: 클로드 티에보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이수정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보헤미아의 이 고색 창연한 수도가 그의 '어머니'라고 고백했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이 도시를 닮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프카는 복잡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태어났다. 이 세계는 역사가 그 의미를 부여한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해석해야 했 다. 프라하가 '그의 어머니'라고 해도 이 어머니는 여러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제1장 카프카 이전의 카프카 기독교적인 도시 프라하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독일인들이 몰다우라 부르는 블타바강이 남북으로 흐른다. 이 강 의 다리 하나, 예를 들어 카를교 같은 다리를 하나 건너면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펼쳐 진다. 강의 오른편인 동쪽에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구 시가지인 스타레메스토가 자리하 고 있고, 서쪽으로는 급경사의 길이 말라스트라나의 교회와 성들을 넘어서 높은 언덕 에 자리한 흐라드차니 혹은 흐라드신이라 불리는 성까지 이어져 있다. 성의 수많은 창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그 안에서 어떤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더욱 이 오늘날에는 구 시가지만이 진정한 도시이다. 이곳은 골목길과 정원, 내부의 안뜰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뜰에서 보면 광장이나 골목길 등이 모두 같아 보인다. 구 시가지는 도시 속의 도시이다. 그 안으로는 생기 성당이 있다. 성은 왕이나 황제가 살기 전에는 통합과정에 있던 체크 공화국 교회조직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교회와 바실리카 성당, 그리고 수도원이 딸린 주교와 대주교의 교구, 신의 축제일에 행렬을 이루던 군중, 특 별한 일이 생길 때마다 치는 종, 프라하는 확실히 기독교적인 도시였다. 유태적인 도시 프라하 그러나 프라하는 유태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중앙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게 토중의 하나가 있었다. 965년 이후 성의 아래쪽에 살던 유태인 상인들은 도시 남쪽의 비제라트 박해의 희생자이면서도 면면히 살아남은 그들은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평등을 얻었다. 복잡한 도로, 앞뜰과 뒤뜰이 그물 망처럼 얽혀 있던 게토는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1892년부터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초에는 공동묘지와 대 여섯개 가량의 유태인 묘지, 시침이 거꾸로 도는 시계가 달린 낡은 시청만이 남게 되었다. 독일어로 생각하다. 기독교의 도시이자 유태인의 도시인 프라하는 또한 독일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300년 간 함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독일어는 행정, 교육, 상업, 예술의 언어가 되었다. 1890년 이 도시에 독일인은 약 4만 2천명(그 중 반은 유태인 혈통이다. )인데 비해서 체크인은 23만명이나 살고 있었다. 그들의 영웅은 얀 후스였다. 그는 루터보다 1세기나 먼저 로마교회와 독일 제국에 저항했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하벨의 독일인 지구, 유태인 지구, 체크 상인지구를 가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 장 관계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게토 의 경계지역에 자리한 낡은 집에서 태어났다. 넘어지면 코닿을 곳에 러시아 정교회의 성 니콜라스 교회가 있었다. 프란츠라는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가리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그의 집에서는 독일어만을 사용했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 카프카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 받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확실히 저항을 허용치 않는 집안의 독재자였던 듯하다. 몸집이 크고 기운찬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했고, 그 점을 크나큰 긍지로 여겼다. 그는 젊은 시절 시골에서 감내했던 고생을 자주 회상했다. 당시 그는 남부 보헤미아의 푸주한이었던 부친의 집에서 살았다. 부친 이나 조부, 장인과 마찬가지로 헤르만 카프카는 섬세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는 '천 둥 같은 목소리'로 마음대로 '모욕, 중상, 폄하하는'말들을 내뱉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서 '세계를 지배'했으며, 만사를 판정했고, 경우에 따라 체크인, 독일인, 유태인에게 욕 설을 퍼부었다. 마치 그는 '그 권리가 성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아에 기초 하고 있는 독재자'와 같았다. 그가 율리에 뢰비와 결혼해 프라하의 셀레트나 거리에 새 상점을 연 1년 뒤 첫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프란츠이다. 이 상점의 간판에는 카프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소매상점은 곧 도매상점으로 발전했다. 수차례의 이사 끝에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아 름다운 곳인 킨스키궁에 자리잡는데, 이는 그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머니, 율리에 뢰비 카프카의 친할아버지가 체트어밖에 못하는 거친 푸주한으로 시골에서 옹색하게 살았던 반면, 율리에 뢰비의 가계에는 학문이 높은 저명한 랍비나 거상이 여럿 있다. 하지만 그 중 광인이나 자살한 사람도 있다.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카프카의 어머니 는 남편을 아주 어려워하는 듯한 태도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 다. 카프카에 이어 낳은 두 아이가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아버지의 금기사항을 몰래 아 들에게 허락했으며, 아들을 남편으로부터 보호했다. 하지만 이러한 처방은 최악의 결 과를 가져왔다. 아버지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강박관념에 줄곧 시달리던 카프카는 '무 의식적으로 그녀는 사냥의 몰이꾼 역할을 즐겼다'라고 쓰고 있다. 또 그녀가 어떠한 방패막이도 되어주지 못했던 듯 이렇게도 썼다. "그녀의(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 덕분에 아버지는 마침내 아이들과의 갈등에서 독자적인 정신적 권력을 표상할 수 있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그러나 도움을 준 여동생들 어린 카프카는 부모를 자주 볼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한 것으로 보인다. 가게 일에 매 달려 있던 그의 부모는 집에 돌아올 즘이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최초의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너무 오랫동안 유모, 하녀, 심술궂은 식모, 슬픈 가정부와 다 투었다. '고 말했다. 복잡다단한 카프카의 어린 시절이 금방 지나간 것은 아니다. 여동생 엘리와 발리가 그 와 6년, 7년 차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오틀라가 태어났다. 이 소녀들은 그 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특히 둘째인 발리가 그랬다. 그러 나 카프카는 그 책임을 그의 방이 '온 아파트의 소음이 몰려드는 곳에 있었기'때문이라 고 생각했다. 아무튼 훗날 여동생들이 결혼해 집을 떠났을 때 카프카는 그들의 집을 전전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특히 나이차이가 많은데도 퍽 가까웠던 막내 오틀라의 집에 자주 머물렀 다. 공포의 대상인 학교 카프카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자 정육점 근처의 독일인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는 이후 모든 교육을 독일어로 받게 된다. 집을 나서서 학교로 가는 것은 지옥을 다른 지옥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매일 아침 같은 장면이 1년간 반복되었다. 집을 나서면 식모는 내가 얼마나 집을 지긋지긋해 하 는가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미 학교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식모는 이것 역시 심하게 과장했다. 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 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항상 자 문했다. '그녀가 그걸 말했을까?' 아니, 그녀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러나 그 녀는 언제든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년간 매일 똑같은 이야기가 학교에서 나 집에서나 아무 결론도 없이 반복되었다는 것일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카프카가 자 신이 공포를 절대적인 위협이 아닌 하나의 유희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시험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그가 학교를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영향을 설명하면서 언급할 때뿐이고 학교의 원칙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실수도 열정도 없는 교육과정 마찬가지로 카프카가 공부에 흥미를 잃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대학 예비 반에 서 그는 어떤 실수나 유급 없이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1906년 6월 그가 법학박사 학 위를 취득했을 때 그는 법학과 동료들에게 어떤 친근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지켜야 하는 조건들을 모두 신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계획적인 자기 폄하를 하면서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암송해야 한다는 점을 묵묵히 받아들였던 것일까? 더욱이 그는 하찮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학업이란 가업을 이어받지 않는 것, 즉 헤르만 카프 카의 외아들이라는 치명적인 운명을 거부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그 러나 카프카의 아버지는 '고등학교의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것과 법률을 공부하는 것을 허용했던 것처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상급반에서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 카프카는 많은 학과들, 예컨대 철학, 화학, 독문학, 예술사 등을 놓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법학을 선택했다. 노동을 통한 정상적인 생활 카프카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느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 에 속하기를 갈망했다. 예컨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부모와 떨어져 살며, 무엇보 다 생활비를 벌고 싶어했다. 그는 이것을 최소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아주 잘 해냈 다. 외삼촌인 변호사 리하르트 뢰비에게 연수를 받은 후, 이듬해 그는 프라하의 한 이 탈리아 보험회사 대리점인 '아시쿠라지오니 제네랄리'에 처음으로 취직했다. 이 최초의 경험은 퍽 실망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낯선 분야에 발을 늘여놓았으며 그나 마 트리에스트에서 수습을 거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급으로 지급되는 임금은 보잘것없었으며, 추가 노동시간에 대해서 는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고 휴가도 보장되지 않았다. 카프카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이란 단지 '묘지에 다다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강 을 향해 넓게 열려 있던, 자신이 살던 거리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자살 후보자들을 위한 도약대'라고. 법학자이자 공무원인 카프카는 노동재해 예방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1908년 7월 15일 카프카는 보헤미아 왕국의 노동재해 보험협회에 입사하기 위해 이 전의 직장을 사직했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관리직을 맡았다. (그는 1922년 해직될 때 까지 14년간 일했다. ) 보수도 더 많았고 하루에 6시간만 근무했으므로 오후 시간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일을 하게 된 카프카는 학교 다닐 때에 비해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체크인과 독일인의 다양한 공동체에 자주 접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는 유태인 직원의 채용 비율을 규약으로 정해 놓은 관공서에 근무하면서 막 중한 책임을 느꼈다. 수많은 문서를 작성하는 의무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고용 주와 계약을 맺는 일, 현장에서 업무를 보는 것, 기계의 배치에 대해 공부하고 기술적 인 개선에 대해 생각하는 일 등과 다를 바 없는 의무였다. 카프카가 쓴 '안전과학의 입장에서 고려한 모성의 보장' 혹은 '건설업에서 안전 의무의 확장'과 같은 책들은 자 신이 추진하는 일에 대한 관심과 추진하는 일에 대한 관심과 그의 투사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일과 글쓰기는 갈등관계인가, 그렇지 않은가? 카프카는 직장 선배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몇몇 사람과는 우정어린 관계를 유지 했다. 그가 임금인상과 승진을 요구했을 때에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대부분 관 철되었다. 몇 년 사이에 그는 여러 단계를 거쳐 서기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격렬한 두통과 불면증을 겪게 되며, 일 때문에 글쓰기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봉급생활(그는 이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 문학 사이에서 그는 오히려 만족스럽고도 견고한 삶의 양식을 발견했다. 그는 12시까지 자 다가 오후 2시까지 사무실로 가서 일하고, 저녁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모든 사람이 지는 밤에는 글을 썼다. 고용주가 추가 노동을 시키거나 아버지가 가게로 부르거나, 혹은 매부가 석면공장으로 불러내어 오후 시간을 빼앗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별로 압박을 느끼지 않았다. 우정, 길가로 난 창문우리들은 카프카가 모든 집단에서 완전히 배제된 외톨이였으며,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세계에 대해 이방인이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아프기 이전인 1917년에는 키가 182cm나 되는 멋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친구들 과 승마, 테니스, 수영 등의 운동을 즐겼다. 카프카가 과학 과목을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준 총명한 후고 베르크만, 그리 고 누구보다도 오스카 폴라크가 카프카의 첫째가는 친구들이다. 폴라크에 관해서 카프 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너는 나에게 창문과도 같은 존재야. 그 창문을 통해 나 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지.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나는 키가 큰데도 창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폴라크는 1903년 말레 프라하를 떠났다. 그를 대신하여 막스 브로트가 그런 역할을 했다. 카프카는 1902년 11월에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관한 발표회장에서 브로트를 처 음 만났다. 그후 그들은 펠릭스 벨치나 오스카 바움등과 더불어 매일같이 만났다. 이 새로운 집단은 특유의 활력이 넘쳤으며 이로 인해 카프카는 내성적인 성향으로부터 빠 져나올 수 있었다. 카페, 시위, 회의로 점철된 카프카의 도시생활 브로트와 함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카프카는 아르코 카페나 루브르 카페, 혹은 사보이 같은 프라하의 카페들을 부단히 들락거리며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정치적이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보다 철학적이었다. 1909년 그는 늘 그랬듯이 신중하게 여러 정당(민족민주당, 사회민주당, 민족사회주의 자당)의 화합과 무정부주의적인 색채를 띤 음라디치 클럽의 몇몇 모임에 참여했다. 그 리고 약사 부인인 베르타 판타를 만난 것처럼 폐쇄적인 서클의 구성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서클에 모여 니체에서 브렌타토, 다윈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알베르트 아이슈타인이라 는 한 젊은 교수로부터 최신 물리학 이론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는 프라하를 지배했던 심도 있는 문학활동에 대한 기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써두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소설가인 장 리세팽의 편지나 러시아 제국 발레단의 발레 광경 같은 것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 다.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독서 취향에서 알 수 있다. 도스토에프스 키, 톨스토이, 고골리, 키에르케고르, 함순, 안데르센 등 그는 늘 많은 작품을 읽었다. 프로이트도 읽었다.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찬사를 보낸 작가는 플로베르였다. 프라하에서 떨어져 살며 그러나 그는 한번도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청년 카프카는 자 신이 좋아하는 외삼촌이 살던 시골에서 여러 차례 머물곤 했다. 의사인 외삼촌 지크프 리트 뢰비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에 자리한 트레스트에서 살고 있었다. 카프카 는 이곳에서 젊은 누이들과 자연에 둘러싸여 완전한 행복의 순간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카프카는 여름 휴가를 프라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냈다. 8월에는 프라하와 그리 멀 지 않은 엘베 강가의 리보흐를 찾았다. 그러나 가끔씩 아주 먼 곳까지 갔다. 1901년에 는 북해의 앨고랑 섬과 노르데르니섬에서 홀로 머물렀다. 1902년부터 그는 마드리드에 사는 외삼촌 알프레트 뢰비에게 외국에 일자리를 구해달 라고 부탁했다. 1907년 카프카는 남아메리카나 아조레스 제도 혹은 마디라섬으로 가 기를 꿈꾸었다. 보험협회의 직무 때문에 카프카는 보헤미아와 비엔나 등으로 몇 번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출장을 결코 단순한 일거리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910년부터 막스 브로트를 만나려고 베를린을 다녀오곤 했다. 그와 동행하거나 아니면 혼자서 이곳저곳 여행을 했다. 가르드 호수의 리바, 브로트와 함께 공군 모임 에 참석했던 브레시아, 취리히, 루가노, 밀라노 등등. 파리에는 1910년 10월과 1911 년 9월 두 차례 머물렀다. 그 추억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그는 대형자동차가 내뿜는 휘발유 냄새만 맡아도 파리의 추억에 젖곤 했다. '파리 냄새가 나는 공기'가 그를 그 도시 속으로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감성적인 각성 여행은 색다른 분위기를 경험하거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고, 문화적 소양을 높 이고,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를 활용해 보는 기회였던 한편으로 카프카가 감성적인 모 험을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카프카는 전혀 성불구자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과장된 소문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 우선 그는 여느 사람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심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코 병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부모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 해 로즈토크의 집을 빌렸을 때 17세의 카프카는 집주인이 딸인 셀마 콘과 사랑에 빠 졌다. 그는 아마도 처음으로 진실한 사랑에 빠지는 모험을 했을 것이다. 1903년 여름 내내 그는 친구인 오스카 폴라크의 영향을 받아 멋을 부리는 말을 구사했다. 어쩌면 희망을 현실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친구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친구의 영향을 받아 얼마나 바뀌었는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애썼다. "나는 더욱 강해졌 다네.... 여자들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어." 그렇다면 1907년 트레스트의 외삼촌 지 크프리트의 집에서 휴가를 보낼 때 장난삼아 사귀었던 아가테는 어떤 아가씨였을까? 이 해에 카프카는 빈의 여대생인 헤드비히 바일러와 자주 만났다. 두 해에 걸쳐 그들 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최초의 남녀 관계들 카프카는 그가 창녀라고 일컬었던 '게아샤들'의 집을 방문한 사실을 일기나 몇몇 편지 에 밝혔다. 이것은 그가 성적으로 타락한 것을 좋아했다는 점을 감히 고백한 것이다. 연애 사건에 관한 한 카프카는 매우 만족해했다. 카프카는 그가 쉽게 유혹할 수 있었 던 기성복 상점의 여점원 같은 여자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그녀는 자극적이고 도발 적이었지만 동시에 혐오스러웠다. "라고 쓰고 있다. 그는 프라하의 한 카바레 여급과 개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사진은 카프카의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지 만, 종종 일부를 잘라내어 스패니얼 개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카프카의 모습만 을 사용하고 있다.... 확실히 카프카는 자신이 생에 있어 성적인 욕망이 마비되는 기간을 알고 있었다. 우리 는 그의 일기를 통해 그러한 기질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원인도 규명하게 된다. 대체로 그것은 가족으로 인해 큰 걱정을 얻게 되는 시기였다. 거의 30세에 이르기까지 카프카의 생에 있어서 특별히 '카프카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 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되고, 비극은 그의 작품의 주요한 성 격을 이룬다. 절망적인 투쟁을 그리는 그의 글은 한마디로 조숙하고, 사실성을 부여하 는 천부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2장 작가의 탄생 카프카의 작가 성향이 나타난 것과 그 특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어린 시절의 일화가 한 가지 있다. 어린 카프카가 한동안 자랑스럽게 할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어떤 소설을 쓰고 있었다. "삼촌이 내가 매우 소중히 간직하던 원고뭉치를 손에 쥐고는 잠깐 시선 을 주었다. 그는 미소도 짓지 않고 그것을 나에게 던져주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 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습관적으로 하는 소일거리야'라고. 그는 나에게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으며, 가치를 상실해 버린 원고뭉치 위로 여전히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쫓기는 몸이 된 것이다. 삼촌의 판단은 거의 현실적인 의미로 규정되었으며, 나는 가족들의 애정에 숨은 냉담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나를 다시 북돋워줄 열정을 찾아내고자 했다." '은둔자로 산다는 것은 메스꺼운 일이다. ' 젊은 시절, 카프카는 가족의 생일 때마다 다양하고 유쾌한 내용의 소희극들을 썼다. 1903년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원고를 썼 던 것을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시원찮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것을 폴라크에게 읽으라고 주었다. 그는 '작품을 쓰려면' 다른 사람들처럼 '과장된 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에는 기획 중이었던 '어린이와 마을'이라는 책을 요약해 놓은 것도 있다. 카 프카가 이들 '냄새나는 오래된 종이'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편지에 옮겨 적은 몇몇 산 문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폴라크 덕분에 남은 이 원고들은 읽혀 지고 전해질 수 있었다. "은둔자로 산다는 것은 메스꺼운 일이다. 사람들이 온 세상에 알을 낳는다면 태양이 그 알들을 부화시키리라. 그래서 사람들이 혀를 깨물기보다는 삶을 물어뜯기를." 그의 첫 번째 소설이 될 뻔한 '어린이와 마을'이후에 그는 '어떤 싸움의 기록'이라는 긴 장문의 저술을 시작했다가 완전히 새로 쓰기 위해 1904년 가을에 중단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1906년 말에 시작한 또 다른 장편 '시골의 혼례 준비' 역시 같은 결과였다. 출판 폴라크의 자리를 이어 받은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글을 쓰고 출판하게끔 부추기는 재치 있는 역할을 숱하게 했다. 1907년에 프란츠 블라이, 토마스 만, 프랑크 베데킨트, 구스타프 마이링크 등과 함께 베를린의 잡지인 '현대'지에 인용된 카프카의 이름은 당 시 완전히 무명이었다.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에서 카프카는 이 부당한 유명세에 즐거 워하면서도 그에게 남은 일은 도전에 응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1908년부터 그가 여러 잡지에 보낸 글의 분량과 그 규칙성을 보면 그는 대중과 소통 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 여름 스위스를 여행하고 있던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소설의 모험('리하르트와 사무엘, 중부 유럽 여행')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글을 쓰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몇 개 의 장만 완성한 것으로 끝났다. '작품을 쓰다' 자신을 위해 쓴 글들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잡지에 게재하는 가운데 카프카는 작가가 되어갔다. 카프카는 점점 더 가족과 친구들이 범주 밖으로 물러났으며, 심지어 프라하 로부터도 벗어났다. 이제 카프카는 생생한 현실의 거장이 되었다. 동시에 자신과 친지 들 사이의 거리감을 글쓰기를 통해 파헤쳐 갔다. 이러한 거리감은 고통으로 표현되었 다. 일기(1909년부터 쓰기 시작했다)와 편지들, 그리고 소설들은 그가 안고 있는 문제 들을 변형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1911년 말, 그는 '자서전'을 쓰려는 욕구가 일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곧 중단되었고 다른 계획이 이를 대신했다. 1912년 초에 쓴 일기에서 우리는 그 소설의 탄생을 추적 해 볼 수 있다. "1912년 3월 16일. 나는 용기를 되찾았다. 공중에서 추락하다가 누군 가에게 잡힌 공처럼 다시 균형을 되찾은 것이다. 내일, 아니 어쩌면 오늘 나는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이 작업은 나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나는 힘이 남아 있는 한 이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5월까지 만족스럽게 작업을 진행해갔다. 그러나 200페이지에 이를 무렵 그는 이번에도 작업을 포기했다. 집중의 어려움 생활은 사방에서 카프카를 필요로 했다. 그는 주기적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야 했 으며 매부의 석면공장에 가야 했다. 또한 글을 써야 했다. 그는 두통이나 불면증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다.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한 그는 자살까지 생 각했다. 그러나 작품에서 눈을 돌리게 한 요소들은 동시에 새로운 자양분을 제공했다. 아버지 의 고용인들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낯선 가족들의 놀라운 개성에 흥미를 느꼈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냈다. 감독관에게 복종하는 작업복 차림의 이 노동자들은 이상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카프카라 집중력을 잃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다시어로 하는 연극과 남녀배우들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1911년 10월부터 그는 연극을 빼놓지 않고 보았다. 특히 카프 카는 극단장 인 이사크 뢰비와 자주 만났다. 그를 집으로 데려갈 정도로 친했지만 아 버지에게는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는 미신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동방의 유태주의를 자신의 아버지 같은 유태인들의 무의미한 종교의례와 비교해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다. 일기 그가 꿈꾸었던 '작품'을 쓰는 것을 방해한 또 하나의 요소는 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카프카가 끊임없이 편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일기를 출판하려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예컨대 막스 브로트조차도 카프카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일기 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지인들을 아이러니컬하게 묘사했으며, 실제로 자신 이 바라는 세계에 대한 몇몇 단편을 쓰기도 했다. 때때로 그는 일정한 양식의 간결한 표현을 넣기도 했다. '구경꾼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 꼼짝하지 않았다. ' '그 장중함 때문 에 미칠 것 같다. ' '숲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일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던 집 인 양, 나는 갈보집을 스쳐 지나갔다. ' 이렇게 일기는 카프카가 '가볍고 유쾌한 전율' 을 만끽하도록 해주면서 그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들은 그를 더욱 내향적이고 명상적인 경향으로 심화시켰다. "1910 년 7월 19일 일요일. 나는 잤다. 나는 일어나고 자고 일어났다. 비참한 삶이다." 이러 한 삶은 해방하기는커녕 그는 자신의 삶을 고통 속으로 가두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돌로 만들어졌다. 나는 마치 나의 묘비석과 같다." 최초의 책 1912년 6월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막스 브로트는 라이프치히에서 카프카에게 출판인 로볼트를 소개해 주었다. 로볼트는 카프카에게 출간을 제안했다. 카프카는 즉시 이 일 에 매달렸다. 이전에 발표한 몇몇 산문들을 다시 손질하고 추리고 주의 깊게 선별하는 작업을 거친후 '관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잡지 '히페리온'에 게재했던 8편의 글도 이 안에 포함시켰다. 카프카는 로볼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지를 쓰며, 목록 속에 자 신이 묘사되는 것을 기뻐한다거나 작품 중 하나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식자작업에 대해 말했다. 로볼트가 제안한 지 2개월이 채 못된 8월 14일, 카프 카는 19편의 작품을 막스 브로트의 마지막 교열을 거친 후 로볼트에게 보냈다. 얇고 작은 책에 불과했지만 카프카에게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관찰'은 1912년 12 월 10일 출간되었다. 이 책이 갖는 자서전적인 의미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책 을 통해 프라하 가족을 지배하던 분위기, 당시 편지와 일기를 포함한 모든 글 속에 등 장하는 인물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연결 시켜 주는 통일성을 유지하고 '과장된 말'을 삼간 이 글들에서 깊은 고통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정말 젊은 여자들을 글쓰기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까?" '관찰'은 카프카가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자신의 원고를 최종적으로 수정하는 날에 만 난 한 젊은 여자에게 헌정되었다. 카프카는 그녀가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지 라도 그녀가 자신의 책을 '밟고 지나가게 할'준비가 되었노라고 선언했다. 그 아가씨는 펠리체 바우어였다. 그녀는 베를린 여성이었다. 1912년 8월 13일 막스 브로트의 집에 그녀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막스 브로트의 우정 덕분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카프카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결혼만큼이나 독신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했다. 그는 어머니와도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카프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 다. "만약 제가 마드리드의 외삼촌처럼 독신으로 남는다 해도... 큰 불행은 아닐 거예요. 저는 지혜롭게 삶을 잘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죠." 문제의 외삼촌인 알프레트 뢰비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해석을 달았다. "나는 매우 우아하고 비싼 프랑 스의 작은 하숙집에서 자주 저녁을 먹었단다. 언제나 똑같은 명사들 사이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 다음에는 길거리에 혼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날 저녁에는 무얼 하는 게 좋을지 정말 알 수 없었어. 나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자연히, 이런 후회는 잊혀지지만... 그러나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 고개를 든단다." 독신자의 불행 카프카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이미 글로 옮겼다. '관찰'중 '독신자의 불행'은 이러한 주 제를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상인'과 '집으로 가는 길'역시 일만 하며 살다가 저녁이 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텅 빈 집의 문을 닫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 다. 참을 수 없는 불행인 것이다. 그로부터 이상한 공상이 생겨난다. 그는 '일기'에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 넣 었다. 그것은 석면공장과 관련된 한 변호사로부터 응접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그곳 에 있던 초면의 여성,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얼굴에 지나치게 길고 곧은 코를 가진 여 비서가 그의 여자였다면? 그의 새끼손가락으로 그녀의 옷을 만졌다면? 또한 이 커다란 의자와 작은 의자가 그들 두 사람과 그들의 아기를 위한 것이었다면... 여자와 아기를 갖는다는 것... 그는 결정을 해야했다. 그렇게 화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카프카는 29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30세에 결혼했다.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혼 문제가 어떤 극적인 면도 없이 그에게 닥쳐왔다. 그러나 어떻게 결혼과 글쓰기를 양립 시킬 것인가? 오래 전부터 문학은 카프카에게 더 이상 여가를 보내거나 사회에서 성공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 나는 그럴 수 없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일기 속에 카프카가 처음으로 펠리체를 언급한 것은 그녀를 만난 지 1주일이 지나서 였다. "F. B. 양 내가 브로트의 집에 간 8월 13일 그녀는 탁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녀가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울퉁불퉁하고 평범한 얼굴... 그녀는 주부 같은 차림 을 하고 있었다. 거의 뭉개진 듯한 코, 전혀 매력 없이 빳빳한 머리카락과 강한 턱." 그리고 그 이빨이라니! 금빛이 '이따금씩 야단스럽게 번득이는' 그녀의 의치에 익숙해 진다는 것은 카프카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그러해도 그녀는 카프카의 기대를 그런 대로 충족시켜주었다. 25세의 펠리체 바우어는 타이프라이터 속 기사로 일하다 1909년 베를린의 구술축음기 전문회사에 입사했다. 그녀는 아주 빠르 게 승진하여 1912년에는 중책을 맡는 지위까지 올라갔다. 그녀는 행운을 뒤쫓아 다니 기만 하는 부모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녀도 이제 결혼을 생각할 때였다. 그들의 교 제에 사랑이 우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분별한 행동도 아니고... 그렇다면 무분별한 행동이었을까?... 펠리체와 처음 만날 때부터 카프카는 '확고한 판 단'을 통해 그녀에게서 결혼의 가능성을 보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카프 카는 펠리체에게 팔레스타인에서 휴가를 같이 보내자고 제안했다. 9월 12일 그는 자신 이 브레슬라우의 어떤 사람에게 즐겁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로지 B. 양이 브레슬라우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카프카가 무엇 때문에 결심 을 굳혔는가는 다음날 막스 브로트에게 각별히 쓴 편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단편들의 배열을 정할 때... 그 아가씨의 영향권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 획은 달성되었다. 카프카의 삶에 등장한 한 여인이 그와 생각이 같다면, 그가 작품활 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고 카프카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다. 처음에는 조금, 다음으로는 많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말이다.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한참 후에 가족들의 축복 속에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 는 것. 이 같은 시나리오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혼까지 이르지는 않았 다. 펠리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9월 22일 밤부터 23일에 걸쳐 썼다. 거기서 그 는 모든 것을 말했다. '선고'가 말해주는 것 작품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벤데만이 헤르만 카프카가 아니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이 작품은 개인적인 기록을 결산하는 것에 가까웠다.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위기감이 폭발한다. '확고한 독신생활을 지향할 것'으로 보이던 아들 게오르크의 계획을 아버지가 알아챈 것이다. 이 작품에서 카프카 는 가족에게 펠리체의 이야기를 할 경우 아버지가 반대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카프 카는 이 점이 밝혀지기를 '원치'않았지만 누구든 대번에 그것을 눈치챌 수 있다. 예컨 대 약혼자인 프리다 브란덴펠트는 펠리체 바우어와 이니셜이 같으며, 게오르크와 프란 츠는 철자수가 같다. 또한 게오르크가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죽은 카프카의 동생 이름 이라는 것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게오르크의 죽음이 카프카가 아버지와 갈 등을 빚게 된 숨겨진 원인이었다면? 사실 '선고'는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보다도 멀리 떨어져 사는 '러시아의 친구'를 더 좋아하는 가운데 아들이 겪는 고통을 다루고 있다. 이 친구 역시 어린 게오르크처럼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그는 펠리체에게 말했다. "선고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역설적인 고백 정신나간 이야기였을까? "사실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더 정확 히 말하면 악마적인 존재였지. 그러니까 잘 들어라. 나는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 한다." 아버지는 정신착란에 빠지듯이 이렇게 단언했다. 그러나 가장 부조리한 사실은 아들이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옳지 않고서야 또한 게으르코가 겉으 로 보이는 것처럼 착한 아들이 아니고서야.... 이 작품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성을 말해 주고 있다. 게오르크가 죽는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아마, 내가 너 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너를 낳은 내가 말이다." 그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몰랐으며, 혈연관계를 끊었던 것도 바로 그였다. 이 말은 그 후 너무 뒤늦게 나온 듯 하다. 그의 죽음만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줄 것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살 해'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그래도 당신들을 사랑했습니다." 게오르크는 물에 빠져 죽기 전에 이렇게 중얼거 린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들을 것인가? "그 순간 다리 위에는 끊임없이 사람과 차들 이 오가고 있었다." 이 작품이 펠리체와 직접 연관이 있는가의 문제는 분명한 편이다. 게오르크와 프리다 사이에는 거세가로서의 아버지의 신비적인 이미지가 우뚝 서 있다. "네 신부와 팔짱 끼고 나를 보러 오기만 해봐라!" 벤데만이 아들에게 소리쳤다. "넌 상상도 못하겠지만, 손등으로 그 여자를 두들겨주고 말겠다!" 카프카는 첫 번째 주석 대신에 막연한 반어 를 사용하여 '저절로 프로이트가 생각나다. '라고 쓰고 있다. 더욱 더 심각한 불안이 번 져나갔다. '선고'는 밤 10시부터 아침 6시 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그는 그런 상황을 다 시 못 만날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러한 영속성, 그리고 영혼과 몸이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 글을 쓴 것은 이 경우뿐이다." 첫 번째 장편소설의 잉태 맨 처음 나온 작업의 결과는 1912년에 시작한 장편소설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장편소 설을 쓰면서 내 자신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수준 낮은 문학에 머물러 있다는 확신이 들 었다. 그는 써두었던 것들을 폐기했다. 일기도 중단했다. 그러나 이는 신경을 덜 자극 하는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흥분된 상태로 글쓰기를 하며 밤을 샌다'고 쓰고 있다. 10월 6일 카프카는 그에게 새로운 장편소설 ' 실종자'의 1장을 읽어주었고, 곧이어 2장을 보내주었다. 그는 소설을 쓸 때 펠리체와 함께 하면서 그녀에게 주제를 요약해 주기도 하고 각 장 의 제목을 밝히기도 했다. 그녀와 만나면서 그는 안정감을 느낀 것이다. "모든 것이 진 정되고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 그녀 덕분이었다. "이 장편소설은 당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라고 카프카는 그녀에게 썼다. '당신 덕분'이 아니었더라면 카프카는 소설을 진전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그가 좌절을 맛보았 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가 결혼과 창작 사이에 화해가 가능하리라고 본 것이 오해였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1월 중순 그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실패의 역사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에 앞으로 결코 소설을 끝낼 수 없으리라는 불안에 대 해 토로했다. 젊은 여성과 그녀의 영향에 관해서 그는 '회의에 빠졌다. ' 이전의 다른 계획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만 이 작품은 '무거운 짐을 그의 가련한 어깨 에 지우게'되었고 그는 제 손으로 이를 찢어버리게 된다. 또 실패였을까? 그 자체로 보자면 '실종자'는 악당소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모든 것 이 행동과 몸짓 속에서 이루어지고, 독자는 작가와 공모관계에서 등장인물들과 거리를 유지한다. 주인공은 카를 로스만의 모험은 뉴욕항에 배가 정박하는 순간부터 아주 좋 은 전조들을 통해 예고된다. 미국은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로 보인다. 시작은 매우 좋 지만 습작 소설로 남는 이 이야기는 너무나 비정하다. 시종일관 순진하기만 한 카를 로스만은 온갖 시련에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호인인 그의 삼촌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내쫓아버린다. 카프카가 실패한 유일한 원인이 카를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떻게 카를은 비참한 죽음을 피하는가? '선고'를 탈고하고 난 뒤 시작한 '실종자'는 유사한 주제를 펼치는데 이는 펠리체와 관 련이 있다. '부루넬다'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7장에서 뚱보 창녀에게 사로잡힌 주인 공은 그녀의 변덕에 복종해야 하고 그녀가 돌아오면 커튼 뒤에 숨는다. 그는 그녀를 만질 권리가 없다. 성욕은 불쾌한 것이었을까? 브루넬다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 녀는 세상과 타락 속에서 살며, 밤에는 깨어있고 낮에는 잔다. 바로 직업으로부터 형 벌을 받은 카프카의 삶이 이런 것이 아닌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삶이다. 그래서 가수 였던 브루넬다는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는다. 또한 카프카도 소설을 포기한다. 1914년 그는 이 소설을 다시 쓰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일기에 씌어진 내용들은 카를 의 불가피한 타락을 연상케 한다. '선고'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며 영웅적인 연출을 통한 위로도 없이 '빈손만' 남은 것이다. 카프카와 아주 흡사한 이 주인공의 부조리한 죽음을 재현할 힘조차 카프카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을 포기하는 것은 펠리체와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되었다. 그에게는 젊은 여성의 '축복'이라는 가설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최후의 심판 첫 장에 대한 느낌만 이야기해보자. '화부'는 191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쿠르트 볼프 가 간행한 '최후의 심판'에 들어 있다. 작품모음집인 '최후의 심판'은 그 제목 때문에 카프카의 웃음을 자아냈다. '단편'이라는 부제는 그가 이 소설의 성격이 부자연스럽고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래도 그는 죽을 때까지 '좋은 시절이었던' 이 시기에 많은 애정을 느꼈다. 릴케가 ' 화부'에서 대단히 논리적인 일관성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주 행복해한 다. 릴케는 그의 발행인에게 말했다. "이것은 단편입니다. 그는 익서를 그대로 두겠지 요. 훗날 이로 인해서 그는 가장 큰 성취감을 얻을 것입니다." 프라하에는 '낡은-새로 운'이라는 유태교 회당이 있었다.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카프카는 이 작품과 겨우 시 작 단계였던 '실종자'만을 가지고 '완성-미완성'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개와 함께 자는 사람이 벼룩을 잡는다." 이 속담을 떠올리며 헤르만 카프카는 자신의 아들에게 아들의 삶의 방식이나 아들의 친구들, 이를테면 이사크 뢰비와 남녀 희극배우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 려 했다. 1년 뒤 카프카는 아버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새로운 결 판내기로 이해한 것이다. 이 속담은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는 이것을 새로운 창조주의 말씀으로 변형시 켰다. 즉 아버지가 나를 더러운 짐승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수용하겠다는 의미로. 그 리고 아버지의 것이기도 한 내 이름, 즉 체크어로 까마귀를 뜻하는 모든 프라하 사람 들, 즉 아버지의 고객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를 공적으로 고발하겠다고. 나는 갑충, 즉 풍뎅이보다 못한 바퀴벌레에 가까운 더러운 해충이지만, 아버지 당신은 까마귀라고. '선고'에 나타난 아버지의 이미지는 이미 설득력이 있었다. 반면 '실종자'의 서두는 명 백히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대양이 가져다주는 행운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다. 그러나 1912년 10월과 11월, 카프카의 고통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출구를 필요로 했다. 마침내 하나의 작품이 '변신'은 카프카가 당시까지 쓴 작품 중 가장 길고 구조적으로 견고하다. 이 작품은 3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장은 불확실한 시간대에 의해 나누어지고 같은 도식에 따라 전개된다. 처음에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가족들과 대화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그런데 매번 이해를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공격을 당한다. 각각의 장은 불행한 사 고로 끝나며 그는 의식을 잃게 된다. 그레고르가 바퀴벌레가 되는 육체적인 변신은 이야기의 발단부분보다 앞서 있다. 그러 나 우리는 이로부터 결과에 가장 근접하게 된다. 그레고르 잠자리는 점점 더 곤충류의 정신상태 속에 놓이게 되고, 머지않아 인간이 취향과 사고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병이 들어 약해진 그는 점차 문제의 관건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독자들은 내부적으로 그가 자격을 상실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레고르가 그 런 지경이 된 것보다도 더욱 끔찍한 사실로서, 그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난 이후부터 자식에 대해서 변해 가는 부모의 태도를 이해해야 했다. 그에 게는 그들에 대한 충만한 사랑이 있었다. 어머니나 여동생 그레테와 마찬가지로 아버 지에 대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아들이 자신들과 닮지 않았고 어떠한 지성이나 감성도 갖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보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는 안락함이 그 대가였다. 끔찍한 변신 제물에 앓는 아버지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아들에게 얹혀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아들은 자기 직업인 상업을 싫어하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일한다.... 하지만 아 버지는 재산을 탕진한다. 그런데도 그레고르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자신이 엎드려 있 던 바닥에서 그레고르가 아버지를 보았을 때 아버지는 거인처럼 보였다. 말을 하기 때 문에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는 이 기어 다니는 가려한 존재에게 아버지의 힘과 기력은 숭배의 대상이다. '변신'은 역설적인 고백이라는 점에서 '선고'와 유사점이 많다.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말해보자.... '변신'은 카프카로 하여금 허구리는 우 회장치를 통해 어머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받는 고통이 극렬해지면 증오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갈수록 그녀는 깊은 것에 자리한 비인간성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친절한 사 람으로 등장하는 그녀가 결국에는 그레고르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랑하는 부모님, 우리는 저걸 없애야 해요." 그 일은 하녀가 떠맡게 되는데, 그들은 후에 그녀도 해고 해 버린다. '변신'은 카프카의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데, 이 작품은 발표된 후 지속적으로 연극이나 영화, 텔레비젼용으로 재편집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을 통해 카프카는 마침내 작가로서 변신한 것이다. 글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프카에게 문학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아버지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 를 가지느냐, 아니면 뢰비 외삼촌처럼 독신으로 사느냐였다. 일기는 찬반양론을 검토 하는데, 선택해야할 순간을 늦추는데 아주 유용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제3장 독신자의 불행 신중함인가, 이중의 유희인가? 1912년 8월 중순부터 결혼과 독신의 문제는 단지 관찰과 창작을 위한 주제라는 초점 에서 벗어나 약혼의 문제가 되었다. 약혼은 또 다른 구속이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작 품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원고뭉치 사이에 버려둔 채 잊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약혼이 현실화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상황을 전과 같이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 는 그가 항상 고통의 시간을 살리라는 점이었다. 짧은 만남과 최초의 편지들이 오간 후, 카프카는 펠리체의 모습을 그렸지만 그녀와의 실제 만남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태 도를 분명히 했다. 처음 몇 주부터 바로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편지를 덜 써줄 것을 요 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내가 진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저는 진지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제가 진지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저는 진지하지 않습니다. 아주 대단히요!" 그의 사랑은 처음에는 상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그 의 소설들에서처럼 카프카는 여기에 현실을 부여했다. 이러한 사랑이 그의 문학창작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최소한 이 최초의 기간은 그러했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그는 프라하에 머무르면서 '실종자'를 진척시켰다. 1913년, 불운했던 해 1913년은 창작계획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해였다. 차츰차츰 카프카는 '실종자'를 포기했고 '일기'도 쓰지 않았다. 따라서 리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 다. 하지만 매일 '더 악화되고 더 혼란스럽고 더 불확실하다'고 느끼는 그를, 어떻게 그녀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의 주변에서 결혼한 여러 쌍들이 그에게 부부생활의 가 능성을 설득시키려 했다. 그의 누이동생 발리와 요세프 폴라크가 1월에, 2월에는 막스 브로트와 엘자 타우시크(그들은 1908년부터 동거하고 있었다)가 결혼했다. 그러나 카 프카는 언젠가는 고백해야 할 비밀이 있었다. 그는 몇 통의 편지에 그 내용을 여과하 여 밝히고 있다. 1912년 11월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건강이 대단히 좋다네. 그러 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상태이지." 이어서 12월말에 쓴 편지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네, 나는 이를 감당 할 준비를 해야만 하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내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버지가 되는 기회를 추구할 권리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네." 3월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펠레체가 '또다시 심각한 문제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중대고백... 서한 1913년 4월 1일 그는 마침내 '중대 고백'을 편지에 쓰게 된다.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우리가 말할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이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습 니다) 내가 결코 당신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최고의 경우라면, 마치 광적으로 맹종하는 개 처럼 내가 당신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만족하는 경우겠지요." 답장에서 펠리체는 자신의 마음이 진정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이 고백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속될 수 있었을까? 1913년 5월 11일과 12일, 성신강림 대축일에 카프카는 처음으로 펠리체의 부모를 만 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펠리체는 '따분한 무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서 편지 가 뜸해졌다. 그것으로 끝인가? 카프카는 운명을 밀어붙이고자 했다. 6월 16일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곧 일기에는 이렇게 고백했다. "결혼을 통해 존재를 확대하 고 고양한다는 것은 설교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7월 1일에는 펠리체에게 '그에 게서 벗어나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면서 '이러한 고난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는 곧 그들이 살 집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앞으로 도래할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편지를 교환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럽다. 만약 우리가 같이 살게 된다면 나는 화형시켜야 할 정도로 위험한 광인이 될 것이다." 함께 사는 행복에 대한 형벌로서의 성교 작가이자 지아비,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삶을 동시에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결혼과 성교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가 선결 과 제였다. 7월 23일 펠릭스 벨치와 함께 찾은 프라하 근처의 매음굴에서, 카프카는 '임신 한 여자의 다혈증과 지혜'까지도 포함해서 '여성의 폭발적인 성욕과 그들의 본성적인 불순함'을 문제삼았다. 8월 14일자 일기의 다음과 같은 경구만큼 결혼과 성교 사이의 심연을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성교는 함께 사는 행복에 대한 형벌이다. 가능한 한 최대한의 금욕주의를 지키며 사는 것, 독신자보다 더 금욕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나로서는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가?"자살 을 했다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은 그에게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유일한 해결 책처럼 보였다. 21일, 그는 한 번 더 '펠리체와의 결합이 자기 존재에 대한 거부에 힘 을 보태줄 것'이라는 점을 믿고 싶어한다. 권태는 점점 두 사람 모두에게 찾아왔다. 8월 30일과 9월 2일 '나를 내쫓아버려'라고 그녀에게 요구하며 그는 서신교환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다. 펠리체는 북해의 섬으로, 카프카는 남쪽의 빈으로 떠났다. 9월 16일 그는 절교 편지를 썼지만("우리는 서로 작 별인사를 해야만 하오. ")4일후 베로나에서 그녀에게 엽서를 보낸다. 삶은 계속되다 1913년 초반 이래로 카프카는 문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3월에 막스 브로트에게 '변신' 을 읽어주고("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많이도 웃었지. ")쿠프트 볼프에게 자신의 소설인 '화부', '선고', '변신'을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묶어 달라고 쓸데없이 요구한 것 이 전부였다. 6월에는 프라하에서 이사크 뢰비를 위해 두 번째 낭송 회합을 가졌다. 그는 노동재해방지 국제협회의 관리자와 함께 빈에 가 그곳에서 열리고 있던 몇몇 시 오니즘 회합에 무덤덤하게 따라다녔다. 곧이어 그는 이탈리아로 갔다. 트리에스테, 베 네치아, 베로나, 리바를 돌아다닌 그는 하르퉁엔 박사의 요양소로 갔다. 심각한 병에 걸리기 전부터 카프카는 요양원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다. 아주 유복한 고 객들, 숱한 아름다운 유한 부인들이 그들의 일가와 연락을 끊은 채 순간적인 사랑을 즐기는 속된 삶을 카프카는 빈정대며 지켜보았다. 게르티 바스너 리바에서 카프카는 자신이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몇 가지 연애사건 가운데 하나를 경험한다. "처음으로 나는 기독교도 소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 반경 속에 서 거의 파묻혀 살았다." 그는 30세였고 신비에 싸인 'G. W'는 아직 '반은 어린아이였 다'. 다른 여자와 가졌던 정사와는 반대로, 또한 그가 지난 1년간 느꼈던 모순된 긴장상태 와 달리 카프카는 이 소녀를 미성년에 맞는 방식으로 사랑했다. "방의 천장을 두드리 며(그녀는 내 방 위층에서 살았다)우리가 한번도 명확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할 암호 같은 공간을 관찰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그녀 에게 인사를 했다. 때때로 그녀로부터 축복에 찬 인사를 받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방 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 하나하나를 은밀한 신호로 해석했다. 나 는 그녀가 자기 전에 기침을 하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필경 존재한다는 행복에 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어떤 종류의 형벌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레테 블로흐 펠리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카프카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는 분 실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카프카는 12월 29일자 편지에서 그녀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하는 삶에서 지속적으로 진실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나는 진실 없는 우리의 삶을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날 그는 펠리체의 친구인 그레테 블로흐라는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는 펠리 체와의 결별을 막기 위해 카프카의 곁으로 파견된다. 지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상 큼한 외양을 지닌 21세의 그레테는 헌신적인 동료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1913년 11월부터 1914년 7월에 걸쳐, 카프카와 그녀는 펠리체의 문제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녀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상황을 분석하고, 직접적인 서신교환보다는 덜 난폭한 방식으로 자신의 친구와 카프카가 의사소통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가 왜 돌 아갔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 관한 카프카의 편지 '믿을 수 없는 편지'에 비추어 볼 때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배신했으며 이들 커플에게 해가 되었다고 비난했 다. 불길한 재회 그녀의 중재가 첫 번째 결심을 맺었다. 펠리체와 카프카가 1913년 9월 9일 일요일에 베를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끔찍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오전 내내 겨우 몇 번만 서로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제 몇 달간이나 주고받던 편지도 끊어지게 된다. " 나는 내 스스로 자진하여 당신을 저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라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선언했다. 그는 다시 결혼을 요구했다. 펠리체는 거의 편지를 쓰지 않았다. 카프카는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2월 14일자 일기에서 그는 자살 시도에 대해 쓰고 있다. 카프카의 요구로, 2월의 마지막 날에 베를린의 동물원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더 나빠질 수도 없습니다. 지금 꼬챙이로 사람을 꿰는 형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 다." 그는 곧장 그레테 블르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막판승부 그는 헛되이 다시 만나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펠리체로부터 약혼 승낙을 얻어냈다. 약혼식은 1914년 4월 12일과 13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열렸고, 4월 21일자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와 24일자 '프라거 탁블라트'에 광고가 나갔다. 결혼은 9월에 예 정되어 있었다. 왜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다시 마음을 되돌린 것일까? 고통만을 겪었던, 카프카에 대한 그녀의 애정 때문이라는 이유는 차치해 놓자. 카프카가 점점 내용을 잃어 가는 열정의 논리에 몸을 맡겼다는 것은 명백하다. 가족의 방문, 가구의 선택 등 카프카는 그가 싫 어하는 모든 것을 과감히 수용했다. 그의 희망?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문학창작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일기에 서 그가 써놓은 이야기체의 단편들은 '이것은 감각적이긴 하지만 별 가치가 없다' '내 가 혼동하고 있든지, 아니면 내가 막 접근중이든지' 심지어 '지난해에 내가 쓴 것들보 다는 이것이 사실에 가깝다'와 같은 단서들을 달고 있다. 꿈의 종말 약간의 진척을 보였지만 완성에 이르지는 못한, 당시의 유일한 작품인 '마을의 유혹'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미간행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마을에 도착한 한 여행자가 수상한 농가에 마음이 끌려 들어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잠을 청하지만은, 작은 개 때문에 금방 깨어 일어난다. 아이들은 그와 함께 개를 주인인 크루스터 부인에게 데리 고 간다. 예민한 성격의 부인은 탁자에 앉아 막 글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간 후, 아이들은 땅바닥과 하나뿐인 침대 위에서 되는대로 잠이 들고... 이 작품은 부인이 여행자를 주목하기 전에 중단된다. 마침내 평온을 찾는 행복한 꿈일까, 아니면 꿈의 종말일까? 현실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914년 7월 12일 베를린에서 펠리체와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몇몇 친구들, 그레테는 물론 펠리체의 언니인 에르나 바우 어, 그리고 에른스트 바이스가 동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모임은 카프카의 성토장이 되어 버렸다(사람들은 이를 '아스카니 궁정의 재판'이라고 말하게 되는데, 아스카니 궁 정은 사건이 일어났던 호텔의 이름이다. ) 약혼의 파기라는 선고에 대해 모두가 수긍 했다. 카프카는 한 통의 편지를 보내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혼란을 느낀 아버지 는 한참 후에야 편지를 개봉했고 어머니는 파국이 찾아왔다고 중얼거렸다. 카프카의 부모는 이 젊은 남녀를 위해 집을 얻고 집세를 내면서 또다시 6개월을 기다렸던 사실 에 울화가 치밀었다. 요제프 K의 탄생 편지가 뜸해지고 내용도 짧아졌지만, 극단적인 언사가 없이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기에 는 좋은 기간이 시작되고, 이는 2년간 계속된다.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이 시기에 카프 카는 삶에서 일종의 평화를 느꼈다. 그는 창작을 다시 포기했다. 그러나 펠리체와 서 신교환을 하며 새로운 작품을 위한 자극을 얻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한편 펠리체는 ' 관찰'의 제작에 참여한 채 '변신'과 '실종자', 그리고 '선고'의 편집을 독려하고 있었다. 1914년 8월부터 카프카는 빌렉가세에 있는 누이동생 엘리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남편 이 징집되는 바람에 그녀는 부모와 '심판'의 첫 장을 막스 브로트에게 읽어줄 수 있었 다. 처음에 카프카는 주인공이 고용주의 금고에서 돈을 훔치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 지만, 중죄든 경범죄든 간에 어떤 범죄로도 요제프K를 비난할 수 없게끔 설정하면서 부터 소설은 더욱 탄탄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제는 통상적인 사법기구에 맞서 죄를 씻어내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제프K에게 부과된 잘못된 판 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법정의 판결이 어떻게 나든 그는 법을 따라야만 한다. 카프카가 패소했던 아시카니 궁전의 재판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소설을 진척시키기 위해 그는 10월초에 휴가를 청해서 얻어냈다. 공백을 향해 열린 문 이 소설의 날카로움은 그 형벌이 매우 잔인하며 법정의 하수인들이 아주 수상쩍고, 또 법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상당히 모호한데도 주인공이 사형선고를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실제의 삶과 소설에서 카프카와 K. 는 모두 사랑이 없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형 벌을 받는다. 그들의 판결자는 어떤 권리로 법의 문지기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 그들 이 아는 것은 무엇일까? 이 소설은 대답 없는 질문을 허공에 던지는 것으로 난다. "허 위가 세계의 질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카프카의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으로 생각한다. 카프카는 자신을 펠리체로부터 갈라놓은 난관들, 허위이지만 극복할 수 없는 성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묻는 문제도 아니다.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그는 최 후의 문까지 가려는 탈선을 경험한다.... 허공을 향해 열린 문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11월 초 그는 펠리체로부터 결별 이후 처음으 로 편지를 받았다. "우리 사이에는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군요. "라고 그는 답장을 했 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르나 바 우어와 함께. 그래서 그녀와 가족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그녀는 나를 믿는다. 동시에 나는 이러한 믿음이 나에게 끼칠 또 다른 영향을 느낀다. "라고 그는 일기에 고백하고 있다. 여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것은 카프카가 1월달 일기에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1915 년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는 막스 브로트에게 '제자'인 '렘베르크 출신의 젊은 아가씨' 는 누구일까? 펠리체와의 관계는 끝이 난 것일까? 마리엔바트에서 보낸 행복한 2주일 카프카와 펠리체는 항상 편지를 주고받았고 만나기까지 했다. 1915년 1월의 마지막날, 베를린-프라하 노선 중 보헤미아의 첫 번째 역인 보덴바흐에서 그들은 결별 이후 처 음 만났다. "그녀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문제에 흥미가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전처럼 공허한 만남이 3월의 마지막날, 그레테 블로흐와 에르나, 벨치까지 동석한 가운데 '스위스 보헤미아'에서 이루어졌다. 1915년 6월 카를스바트, 여름에 아우시히에 서도 이런식의 만남이 있었다. '진정 혐오스러운 여행'이었다. 1916년 5월의 마지막날 카프카는 마리엔바트에서 여름을 같이 보내자고 펠리체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3일부터 13일까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작은 아주 어설 펐다. 고뇌의 밤들이 이어졌다. 9일에는 4년만에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 졌다. 카프카는 펠리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 세대 사이의 한 독신자'를 읽어주 었다. 13일 그들은 카프카의 어머니와 발리가 요양을 하고 있던 프란첸바트로 떠났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8월 27일 그는 마침내 결별의 편지를 띄 우게 된다. 훨씬 뒤까지도 그는 그에게 닥친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나에게는 풀 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왜 내가 마리엔바트에서 2주일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박식한 원숭이의 자화상 편지들은 다시 일상적이고 낙관적인 내용으로 채워졌지만 열정은 없었다. 카프카는 펠 리체에게 '유디세스 폴크스하임'에서 일하기를 종용했다. 이곳은 러시아의 진출로 갈리 시아에서 쫓겨난 유태인 난민들을 받아주고 교육도 시키는 베를린의 시설이었다. 편지 들을 통해 그는 시오니즘과 유태교, 그리고 어린이들의 교육에 대한 성찰을 되풀이해 서 언급했다. 1916년 9월 '최후의 심판'안에 '선고'가 실려서 간행되었다. '유형지에서'의 대중 낭독 회를 기회로 그들은 11월에 뮌헨에서 만났다. 1914년 11월로 기록된 이 작품에서, 약 혼과 관련하여 '선고'에 나온 부분과 동일한 이야기를 좀더 소름끼치면서도 은폐된 방 법으로 말하고 있다. 1917년 4월에 쓰여진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펠리체 와 카프카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변신'과는 반 대로 짐승이 점점 의지를 발휘, 인간으로 변모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는 과정 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이 박식한 원숭이의 이야기를 카프카가 자신의 본서로부터 완전 히 단절되는 변화의 지점에 서 있는 것으로 읽는다면, 이 '의사소통'은 그리 행복한 것 만은 아니다. 이 원숭이는 자신의 기원과 젊은 시절의 기억을 거부하는 것이 '탈출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약혼처럼 말이다. "5년에 가까운 기간이 나를 원숭이의 상태로부 터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라고 원숭이는 말한다. 펠리체가 카프카의 삶 속으로 들어가 는 데에도 5년의 세월이 걸렸다. 불행 중 다행 1917년은 문학적으로 큰 결실을 거둔 해였다. 특히 전반기가 그러했다. '시골의사', '다 리', '사냥꾼 그라쿠스', '석탄 양동이를 탄 사나이', 그리고 '만리장성 축조시'의 상당부 분, '마당문 두드리는 소리', '이웃', '튀기', '일상의 혼란', '산초판자에 관한 진실', '사이렌 의 침묵'등 카프카는 14편의 이야기를 썼고 이들은 1919년에 모음집으로 출간된다.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편지를 교환한 흔적이 전혀 없다. 카프카의 사고에 어떤 변화가 생김으로써, 그는 펠리체와의 재약혼은 간청했거나 혹은 받아들이게 된다. 이 두 번째 약혼식은 7월에 프라하에서 거행되었다. 첫 번째 약혼식이 열린 지 꼭 3년만 이었다. 카프카는 펠리체와 함께 그녀의 언니인 엘제 브라운이 살고 있는 부다페스트 로 갔다. 하지만 그는 홀로 프라하로 돌아온다.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른다. 1917년 8월 9일 밤부터 10일까지 카프카는 각혈을 했다. 9월 4일 그에게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내 려졌다. 이로 인해 쌍방 모두 확신할 수 있던 결별이 결국 이루어졌다. 1917년 크리스마스에 프라하에서 최후의 만남이 있었다. 이 만남에 대해 우리는 카프 카가 일기에 써놓은 이야기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12월 25, 26, 27일. F. 가 떠남. 나는 울었다. 모든 것이 힘들고 거짓이지만 제대로 된 일이다." 1919년 3월 베를린에 서 펠리체는 한 상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1931년 미국으로 이민간 그녀의 가족들은 마음속에 카프카를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카프카는 어떠했는지... 그는 막스 브로트에게 고백했다. "불행 중 다행이지." "문학이 주는 묘하고 불가사의한 위안, 어쩌면 해로울 수도, 해방을 안겨줄 수도 있는 위안, 그것은 살인자의 대열에서 뛰쳐나가는 일이며 행위를 관찰하는 일이다.... 관찰이 독립적이 될수록 더 한층 고유의 운동법칙을 따르게 되고, 그 길은 더욱 예측할 수 없 는 것, 기뻐할 만한 것, 오르막이 되는 법이다. "-프란츠 카프카, 일기, 1922년 1월 27 일 제4장 생존 '5년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카프카는 좀더 가벼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유, 그 무엇보 다도 자유'라고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썼다. 그는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난 듯했다. 오히려 부부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브로트와 바움을 측은하게 여겼다. 9월 12일 오틀라는 보헤미아 북서쪽에 자리한 마을인 취라우에서 카프카를 맞아들였다. 그녀와 더불어 카프카는 '즐거운 결혼놀이'를 '습관적으로 격렬하게 부딪치는 일도 없이' 완전 한 생활로 이끌었다. 이 8개월간의 체류는 그의 기억에 '삶의 최고의 시간'으로 남게 된다. "정신적인 질병" 병은 그에게 유죄선고를 내렸지만 먼저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다른 이유로 인해 그는 당분간 병을 견딜 만했다. 병 때문에 오랫동안 프라하를 떠날 수 있었고, 사무실에 나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핵이 '휴가를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고 빈정댔다. 각혈을 한 후로 그는 훨씬 잠을 잘 잘 수 있었고, 몸무게도 늘었다. "달 리 말해, 결정적인 변화라면 내 몸무게가 상당히 늘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쓰는 편지는 물론 자신에게 쓰는 일기에서도 그는 항상 유머 있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려 했 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즉 상당한 시련을 겪고 있던 그의 두뇌가 폐와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처럼 힘들 수는 없다고 뇌가 말하자. 5년만에 폐가 그를 돕겠 다고 나선 것이다." 결핵은 특이한 병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일반적인 죽 음의 싹'이 뻗어 나오는 것에 불과했다. 약에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그가 '폐라는 상 징에 불과한 상처'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카프카는 자신의 번민과 육체적 상태의 연관성을 놓고 자신을 관찰했다. 두통이나 불면증, 호흡장애, 위 장병, 결핵은 하나의 '정신적인 질병'에 다름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위중함을 통해 질 병은 삶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한 것이다. 진정한 삶 그는 체크 어와 프랑스어로 된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중에는 자기 자신과 반대의 입장 에 서게끔 이끌었던 키에르케고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프카에게 종교운동이란 세계 를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받아들여 현세의 삶과 연관을 맺게 하는 것이었다. 취라우에 서 그는 지난날 자신의 작품을 실었던 여러 잡지를 정기적으로 받아보았다. 예컨대 '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자칼과 아랍인'을 '동물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 로 게재한 '유태인'같은 잡지가 그것이다. 카프카는 볼프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볼프는 '유형지에서'외에 14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그 중 한 작품의 제목인 '시골 의사' 를 제목으로 한 작품집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발행인이다. 종교적인 명상이 카프카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반면, 문학은 그를 삶과 연결시켜 주 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세계의 차가운 공간'을 이해해 왔고, 문학은 그러한 세계를 다시 따뜻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아주 일찍부터 가져왔다. 그 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속에서 자신의 천직을 확신하도 록 해주고 있다. "나는 나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작은 온기로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다른 방법은 불가능하다. " 프라하로 돌아가다 1918년 5월 2일 카프카의 고용주들은 그에게 새로운 휴가를 주기를 거절하고, 그는 그럭저럭 다시 일을 하게된다. 그리고 긴 침묵의 기간이 시작된다. 일기는 1920년 1 월이 될 때까지 한번도 손을 대지 않았으며, 창작활동은 같은 해 9월에야 재개한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이 변하게 되는데, 일하는 시간은 잠시뿐이고 요양소에 머무르는 시 간이 늘어난다. 치료가 더욱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1918년 가을부터 그는 모든 것 을 중단하고 북부 보헤미아에 자리한 룸부르크의 프랑켄슈타인 치료소로 가야 했으며, 이후에는 투르나우 호텔에서 머물렀다.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스페인 감기로 침 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다. 전쟁이 끝나는 것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탄생하는 것은 그로서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12월부터 이듬해인 1919년 3월까지, 그는 리보흐 근처에 자리한 슐레젠으로 가서 슈튈이라는 하숙집에서 살았다. 젊은 여자와 진지한 거짓말쟁이 율리에 보리체크는 같은 하숙집에 머물렀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1919년 2월 6일자 편지에서 그녀를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 여자, 병들었지만, 내가 바라듯이 심하진 않아." 확실히 그는 결혼 생각은 포기했지만 '폐병환자가 아기를 갖는 것이 범 죄만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율리에 보리체크라고 해서 안 될 것 은 무엇인가? "유태인도 아니고 비유태인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니고 비독일인도 아니 다." 그는 여름에 율리에가 여성복점을 열고 있던 프라하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와 함께 웃 었던 순간만큼 웃어본 적이 없다고 느꼈다. 그녀의 생기는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는 그녀에게서 사랑보다는 연민을, 그리고 그녀의 소박함에서 일종의 흥분을 느꼈다. 결혼을 먼저 이야기한 사람은 그였다. 그는 망설이던 율리에를 설득했다. 결혼식은 11 월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나치게 신중한 계획이 문제였다. 일거에 일소하다 "나는 프라하의 유태인들처럼 그녀가 멋을 부리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너는 그 녀와 결혼하기로 작정했겠지. 1주일 내로,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말이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너는 성인이고 도시에서 살고 있는 데다가 네게는 처음 만 나는 여자와 당장 결혼하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구나. 정말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것이냐?" 이 새로운 여자를 알게 되었을 때 헤르만 카프카는 이렇게 반응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아들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을 돕게 된다. 카프카는 오래 전부터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 아연실 색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7년 전 '선고'에서 늙은 벤데만이 아들의 약혼을 두고 내뱉 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야비한 말들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징글맞은 암거위 같은 년, 그년이 치마를 걷어올렸기 때문에 넌 그년에게 달라붙은 거야...."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카프카의 아버지는 신분이 낮은 여자와의 결혼을 불평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율리에는 유태교를 믿는 제화공의 딸이었다. ) 하지만 카프카는 그것을 심한 모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상처는 도덕이라는 또 다른 질서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즉 시 장문의 편지를 통해(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의 관계를 특징지었던, 이해력 결핍의 문제를 상세하게 떠올리면서) 좌절된 약혼 문제에 대한 답에 이르려 했다. 그것은 무 자비한 논고였다. 아들이 느꼈던 고통 때문인지 이 독설은 우울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아버지에 대한 이 소송에서 카프카는 '변호사적인 간계'를 이용할 줄 알았다. "물론 나 는 당신이 나에게 저지른 행위가 오늘날의 나를 만든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하지는 않 겠습니다. 그건 지나친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고백함에 있어서 그가 더 잘해낼 수 있었을까? 1912년부터 그는 '선고', '변신'등 소설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 렇게 하려고 해 보았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그는 "내 소설들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입니다. 나는, 내가 당신 가슴 위에서 불평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괴로웠던 것입 니다"라고 썼다.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닌, 쓰여지기 위한 작업 그러나 아버지에게 자신의 책을 읽기를 권하는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더욱이 헤 르만 카프카가 그것을 읽기나 하겠는가? 당신에게 헌정된 것이 명백했던 '시골 의사'를 받았을 때처럼 단지 책장에 꽂아두기만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가 그것을 이해하고 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켰을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카프카는 이 편지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이 '좀 더 가벼운 삶 과 죽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쓰는 과정에서, 그는 어 떤 말로도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대한 오해를 허물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삶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유희를 넘어'서고 '실제의 사정들은 내 편지 들이 내세우는 증거처럼 수집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를 씀으로써 게오르크 벤데만의 경우와 달리 카프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카프카는 머잖아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두고 한 말을 이 편지를 보고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쓰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율리에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와의 이별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결정적인 결별은 1920년 7월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그의 존재에 빛을 던져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이별은 가능한 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밀레나 예젠스카 "나는 당신에게 갔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당신에게. 당신 곁에 숨고자 당신에게 갔습 니다. 당신의 두 손 사이에 얼굴을 묻습니다. 너무나 행복했고, 자랑스러웠으며, 자유 로웠고, 강해졌습니다." 카프카는 37세였다. 그들이 편지 교환이 시작될 무렵 그는 메라노의 하숙집에 살고 있 었다.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밀레니 예젠스카는 23세의 비유태계 체크 인이었다. 그녀는 독일어가 서툴렀다. 아마 그들은 어느 날 저녁 빈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화부'의 체크어 번역을 허락한 것을 구실 삼아 처음으 로 편지들이 오갔다. 이 번역본은 1920년 무정부주의 경향을 띠고 있던 아방가르드 계열의 잡지인 '크멘'에 실렸다. 프라하에서는 이 젊은 여자에 대한 추문이 일고 있었다. 그녀가 마약과 동성애에 빠졌 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종교기숙사에 머물던 밀레나는 그 도시의 저명한 구 강병과 의사인 아버지 예젠스카 박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세에 그녀는 생을 함께 하기로 한, 은행원이자 방종한 끼가 있는 에른스크 폴라크와 같이 자주 문학계에 모습 을 드러냈다. 예젠스카 박사는 이를 죄악으로 간주,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지만, 1917년 성인이 된 그녀는 9개월만에 그것을 빠져나왔다. 빈에서 폴라크와 결혼한 그 녀는 반쯤 불행한 상태로 생계를 위해 체크 어를 가르치며 프라하의 잡지들에 기사를 쓰고, 또 보수가 좋지 않은 번역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빛" 카프카는 오랫동안 그녀와 재회하기를 망설였다. 펠리체에게서 경험한 것처럼 자신이 만들어낸 밀레나의 상상적인 이미지가 현실에서 무참하게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들은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빈에서 재회했다. 그들은 똑같이 황홀한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카프카는 한번도 기침을 하지 않았다. 이어 8월 중순 오스트리아와 체크의 접경지역인 그뮌트에서 단 몇 시간뿐이지만 한 번 더 만난 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행한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 갖가지 세세한 문제들, 특히 카프카나 브로트가 그녀를 위해서 애쓰는 문제 (그녀는 아버지와 화해하려 했다) 때문에 서신이 뜸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멀어져 갔 다. 사랑은 남아 있었지만 고통의 원천이 되었다. 카프카는 더 이상 편지를 뜯어보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카프카는 그녀에게 일기 노트를 주기 위해 1921년 10월을 비롯해 몇 차례 그녀를 프라하에서 만났다.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 재로 남는다. 그녀의 여러 가지 특징은 카프카가 머잖아 쓰게 되는 '성'의 여주인공인 프리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지 위에 앉은 검은 새 아포리즘과 종교적인 명상이 들어 있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쓰고도 1971년부터 카프카의 문학활동은 침체되었다. 밀레나를 만난 뒤인 1920년 가을부터 문학활동을 재개하지만, 이 당시에 쓴 수많은 초고들은 그 어느 것도 출판할 만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12월에는 건강 때문에 타트라스의 마틀리아리 요양소로 가서 10달 동안 머물러 있어 야 했다. 그는 브로트와 당시에 새로 사귄 친구인 로베르트 클롭스토크 박사와 주고받 은 편지에서 종교, 특히 유태교 문제에 대해 많은 성찰을 남겼다. 이럭저럭 8월에 다 시 시작한 보험협회일 때문에 그의 창작활동은 지연되었다. 이 당시에 쓴 유일한 작품 은 '최초의 고통'이다. 이것은 줄 위에서 완벽함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공중곡예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통 속에서 사는 그 역시 카프카의 자 화상이다. 카프카는 12월 25일자 '프라거프레세'에 나름대로의 비관적인 시각으로 쓴, 크리스마스에 대한 짧은 이야기 '석탄 양동이를 탄 사나이'를 발표했다. 눈이 쌓인 풍경 카프카는 당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는 절망과 고독의 끝에 도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무릅쓰고, 그는 분명한 사실들 을 정리해 둘 요량으로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모든 면에 걸쳐 자신의 실패에 대한 목록을 일기 속에 작성해 놓았다. 1922년 1월말부터 카프카는 제앙산에 자리한 슈핀델뮐레에서 의사와 함께 3주를 보 낸다. 도시에서 떨어진 그는 '인간들로의 회귀'를 시작한다. 밀레나에 대한 생각은 머 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눈 덮인 풍경이 있는 그곳에서 세 번째 장편소설 '성'을 집 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봄에 프라하로 돌아가서도, 또 9월에 누이동생과 머무른 플라나안데르루슈니츠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동시에 '단식광대'를 썼다. 이것은 '최초 의 고통'에 등장한 공중곡예사에 이어 또다시 서커스단의 광대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습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는 '개를 찾아서'처럼 매우 긴 것도 있다. 측량사와 성채 흐라드신이 통치하는 프라하와 카프카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소설인 '성'의 관계는 작가와 등장인물의 관계만큼이나 자명하다. 소설의 분신 가운데 실제와 가장 유사한 K. 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프리다는 밀레나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인 에른스트 폴라크(그는 빈의 카페인 헤렌호프('성'에 나오는 여 관)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클람(그는 세뇌르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다)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게 했다. K. 는 측량사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측량사라고 말한다. 그는 온갖 노력을 동원해, 가 까운 곳에 있지만 접근할 수 없는 행정권의 정체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로부터 그 의 고유한 인식이 생겨난다. "나는 외곽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미 이 새로운 세계의 시 민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세계와 일상의 세계는 사막과 농경지역(40년 전 가나안을 나와 떠돌았던 땅)이 맺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낯선 곳에 와서야 나는 뒤 를 돌아보게 된다." 카프카는 '성'에 착수할 당시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다. 공상적인 단편들로 보이긴 하지만 이 소설은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 에서 매력적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짜임새에 있어 크레티앵 드 트루아예의 '그랄의 소설'에 비견될만한 간결성과 신비스러운 힘, 그리고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인식은 영원한 삶으로 다가가는 척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삶 앞에 우뚝 서 있 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종교적인 인식에 관련하여 한 이 말은 특히 '성'의 주인공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발 한발 의미를 구성해 가는 소설의 독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미로 속의 두더지처럼 "나는 행복하지 않다. 대신 행복의 문턱에 있다." 1923년 7월 카프카는 친구인 후고 베르크만에 이렇게 썼다. 당시 카프카는 몇 주간을 발틱 해안에 위치한 뮈리츠에서 여 동생 엘리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19세의 폴란드계 유태인 여성인 도라 디만트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디세스 폴크스하임'의 여름학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카프카의 삶에 동반자가 되었다. 프라하에서 잠깐 머문 뒤 9월말에 슐레젠에 있는 오틀라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카프 카는 도라와 함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던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그들은 그 곳에서 6개월간 머물렀다. 건강 걱정에 돈걱정까지 더해졌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특히 집세 문제로 카프카는 곧 이사를 하게 된다. 도라 덕분에 카프카는 유태교에 대한 완벽한 인식에 이를 수 있었고 동방의 유태인 집 단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이때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갈 생각을 심각하게 된다. 인 색한 여주인에게 복수하는 의미로 그는 '작은 여인'을 썼다. 곧이어 좀 묵직한 내용을 담은 '땅굴', 그리고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을 썼다. 이것은 미로에 갇힌 두더 지처럼 자신의 예술로부터 소외당한 예술가와 목소리 대신 휘파람 소리를 내는 새앙쥐 처럼 존경스럽지만 이해되지 않는 예술가의 이야기로,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카프카가 처한 상황을 연상시켜 준다. 그는 말할 때 가장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과 의사 소통할 때는 '파페롤'을 이용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돈이 필요했던 그는 '단 식 광대'라는 제목이 붙게 되는 마지막 작품집 출판을 준비했다. 여기에는 4편의 작품 이 수록된다. 태어나느냐 죽느냐 시골의사인 외삼촌 지크프리트가 급히 베를린에 찾아와서 3월 14일 카프카를 프라하 로 데려갔다. 카프카는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남부의 빈 발트라는 요양소를 찾을 때까 지 프라하에 머물렀다. 그 요양소에서 카프카는 다시 빈의 한 병원으로 가게 된다. 사 람들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4월 19일 그는 빈 근처의 키어링 요양원으 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6월 3일 도라와 로베르트 클롭스토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죽었다. 1986년 프라하의 헌 책방에서 카프카가 그의 마지막 시기에 아버지에게 보낸 감동적인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6월 2일자 편지에서 그는 아버지와 마셨던 맛있 는 맥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항상 술이 잘 깨지 않았지요. "라고 그는 말하 고 있다. 이 편지는 끝을 맺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는 도시의 동쪽에 있는 새로운 유태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탄생을 앞둔 긴 망설임'이라고 정의 내렸다. 우리 시대의 잘못된 확실성 에 맞선 그의 작품은 나날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기록과 증언 아버지와 아들1912년까지 카프카는 아버지라는 주제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후 이 주 제는 사라지고 일기와 편지들 속에 자주 나타나 있다. ) 실수와 죄의식 같은 상관된 주제가 이를 대신한다. 가게나 집에서 법의 화신 역할을 했던 아버지와 온갖 종류의 법의 근거와 고유의 고지식함에 대해 불안을 느꼈던 카프카의 관계는 명백했던 것이다. 1919년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썼다. 한 번의 변화가 '선고'와 '변신'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로 카프카의 작품들 은 초기에 집중적으로 파고든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지 않는다. 그가 감정 표현을 좀 더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히 침체되어 있던 이른바 도약을 기다리던 시기에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보면 갈등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 다. 이것은 정중한 설명일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접근하기 위한 시도였을까? "제가 보기에 너무도 권위적이셨던 바로 당신이..." 어린아이였던 카프카는 아버지가 가게의 점원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보고 들었으며, 이를 통해 가족 구성원들을 이해했다. 그의 '편지'의 초반부는 어린시절의 갈등에 관련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집에서는 가족들을 규범 앞에 복종시켰던 아버지 자신이 아 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어떻게 규범을 어겼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주로 식사시간에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훈육은 대개 식사법과 예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차려놓은 것은 모두 먹어라. 음식 투정은 말아라 하는 식 으로. 그런데도 종종 당신은 음식이 형편없다고 투정했습니다. 식탁을 감도는 침울한 고요는 번번이 훈계에 의해 깨졌지요. "먼저 먹어라.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빨리 먹 어라, 더 빨리, 더 빨리 먹어." 이런 식이었습니다. 뼈는 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당신 도 그렇게 했습니다. 잔을 입으로 빨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문제는 빵을 똑바로 써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나이프로 빵을 썰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음식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가장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은 당신의 자리였습니다. 식탁에서는 먹는 데만 전념해야 될 터인데 당신은 손톱을 깎고 연필을 깎거나 이쑤시개로 귀를 후볐습 니다. 아버지, 부디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사소한 일은 그 자체만 으로는 실로 무가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저에게 괴로움을 준 것은, 제가 보 기에 너무도 권위적이셨던 바로 당신이 저에게 강요하시던 계율을 당신 자신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의 세계가 세 부분으로 갈라졌습니다. 첫 번째 세계는 '나'라는 노예가 살고 있습니다. 저 하나만을 위해 고안된 법률의 지배를 받으 면서도, 저는 웬일인지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세계는 아주 먼 곳 으로, 거기엔 당신이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스리고 명령하고 불복종에 대해 분노하 면서 바쁘게 지내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세계는 명령이나 복종 따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곳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굴욕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굴욕이었습니다. 그러한 명령은 저만을 상대로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항해 보았지요. 하지만 역시 굴욕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감히 당신께 반항할 수 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를 힘도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만큼 체력이나 식욕이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저에게 그대로 따 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최대의 굴욕이었습니다. 다만 이는 분별 력을 갖고 골똘히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의 느낌이었을 뿐입니다. '아버 지께 드리는 편지' 누구의 잘못인가?카프카가 사실을 과장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짐승 샅은 인간이었 는지 아닌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카프카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독자들은 어린 프란츠가 목이 말라 밤에 부모를 깨우자 부모가 그를 추운 테라스에 가두어두었다며 이야기를 과장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였는데, 저는 한 사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기억하고 계실 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물이 먹고 싶다고 계속 울어댔습니다. 특별히 목 이 마른 것은 아니었고, 단지 누군가를 화나게 만들고 싶기도 하고 제 기분을 달래고 싶은 생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몇 번인가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소용이 없자, 당신은 저를 마루로 끌어내 문을 닫고 속내의 차림으로 세워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식으로는 밤의 고요를 되찾을 수 없었을는지 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당신의 교육방식과 그것들이 제게 미 친 영향을 규정짓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그 후로 아주 고분고분해진 모양입니다만, 그로 인해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에도 거인 같은 남자가, 즉 아버지가 이유 없이 밤중에 나타나 나를 침대에서 마루로 끌어낼지 모른다 는 무서운 생각에 괴로워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카프카는 '편지'에서 여러 번에 걸쳐, 자신이 만들어낸 아버지의 외모나 표상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비정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일깨우려 하신 것이지만 당신 잘못은 아닌, 그런 것입니다.... 우리 사이의 반목에 대해 당신은 전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지 당신에게 영향을 받은 어린아이의 눈에 당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쳤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유태교 안에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의 두 번째 부분은 유태교에 대한 것이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위선 을 고발하고 있다. 제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 어떤 유태교였을까요?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와 똑같이 교회에 충실하게 다니지 않거나 단식일을 지키지 않 았다는 이유로 제 자신을 꾸짖엇습니다. 그 일로 제 자신에게가 아니라 아버지께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랫듯이 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당신이 그토록 마음대로 이용하시던 유태교를 두고 저에 게 똑같이 그 헛된 짓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어찌나 비난하시던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낱 무였습니다. 아버지는 1년에 나흘 정도 교회에 나가셨습니 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진지한 사람들 쪽보다는 무관심한 사람들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기도도 참을성있게 형식에 맞춰서 끝내셨습니다. 기도서 안에서 방금 영창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셔서 저는 깜짝 놀란 일도 있습니다. 저로서는 일단 교회 안에 있기만 하면 그 후에는 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기어들어가도 괜찮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그곳에서 하품을 하거나 졸면서 기나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에도 될 수 있으면 기쁨을 느끼려고 애썼습니다. 예를 들면 '계약의 궤(유 태교 교회당의 십계의 석판을 넣은 상자)'가 열리면, 저는 항상 장터의 사격장을 연상 했습니다. 과녁의 중심을 명중시키면 상자 문이 열립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정해 놓 고 재미있는 것들이 튀어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목이 없는 낡은 인형들 뿐입니다. 순결에서 오욕으로 카프카는, 결혼에 관련된 한 가지 관념인 순결을 어떠한 종류의 성적인 관념에도 연결 시킬 수 없었다. 어느 날 헤르만 카프카는 그에게, 그의 어머니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아무 위험도 없이 이것들을 연습해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카프카가 이러한 대화를 상기시키는 제목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의 클 라이막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아버지의 태도는 섹스와 더러움의 필연적인 관계를 확실 히 하는 것이었다. 제 기억에 어느 날 저녁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연방은행이 들어선 자리 부근의 요제프 광장이었습니다. 그 '흥미로운 문제'에 대해 제 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바보처럼 허풍 떠는 투로 말했죠. 잘난 체하고 거만한 태도로, 무심하게, 침착하게, 그리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할 때면 대개 그랬듯이 더듬거 리면서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 문에 동급생들이 책임지고 저를 교육시켜야 했다는 것과 제가 큰 위험을 안게 되었다 고요. 다행히도 이제 저는 무슨 일이든 알고 있으며, 더이상 충고도 필요 없고, 만사가 해결되었다며 당신들에게 이해를 구했습니다. 어쨌든 특별히 제가 이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는 호기심과 뭔지 모를 복수심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그것을 극히 단순하게 받아들이시고, 어떻게 하면 제가 걱정 없이 이러한 일들을 처리해 나갈 수 있을지 제게 충고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때 제가 아버지로부터 끄집어내 고자 했던 대답은 다분히 고기나 온갖 맛있는 것들을 마구 먹인 탓에 육체적으로 활발 하지 못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려고 하는 소년의 색정과도 비슷한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의 표면적인 정숙함이 이로 인해서 심하게 모욕을 당했다고 믿 었기 때문인지, 저는 그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느껴 오만하고 불손하게 아버지 와의 대화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가 쓰여진 지 3년, 그리고 '선고'와 '변신'이 쓰여진 지 10년 지 난 1922년 가을에 카프카는 '부부'라는 소설을 통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어려 운 관계를 다루었다. (이것은 1931년 막스 브로트가 출판했다. ) 아버지는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카프카는 사랑과 근심이 가득 찬 심정으로 요양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쫓기는 심정으로 노여움과 증오를 안고 되돌아갔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것은 앞서 올라갔던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올라가 는 것도 결코 쉬운 적이 없었는데 아아, 어찌 이런 쓸데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부부' 단편들 그의 첫작품인 '관찰'에서 마지막 작품인 '단식 광대'에 이르기까지 시기나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상황이나 등장인물이 어떤 모습으로 제시되든 간에, 출판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 중 가장 짧은 글에서 카프카가 면면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 낀다. 왜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 심지어 발표하지도 않은 작품까지도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카프카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 즉 '진정한 삶'인 문학을 이끌어 가는 특질과 순결성의 엄청난 요구에 매료되었다. "우리의 작은 그네에 앉아" 애매한 병을 앓고 있는 고독하고 과민한 한 어린아이는 집을 감싸고 있는 울타리의 반 대쪽에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국도의 어린아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 부터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카프카는 편집자에게 이 어린 시절의 꿈과 같은 작품 을 '관찰'의 맨 앞에 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 산문시는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카프카의 초기 작품 경향을 반영한 것 중 하나이다. 우리들의 작은 그네에 앉아, 나는 그곳 부모님의 정원에 있는 나무 사이에서 쉬고 있 었다. 울타리 밖에서는 쉬지 않고 소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아이들이 막 스쳐 지나갔다. 볏 단 위에 여러 남자와 여자를 태운 곡식 마차가 지나가자 주의에 빙 둘러 있던 화단이 한순간 그늘에 잠겼다. 저녁 무렵, 나는 지팡이를 든 신사가 천천히 산책하는 것을 보 았다. 팔짱을 낀 두 소녀가 걸어오다가 그와 마주치자 인사를 하며 길 옆 풀밭으로 비 켜섰다. 잠시 후 새들이 마치 튕기듯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눈으로 새들을 좇았다. 새 들은 단숨에 하늘로 사라졌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운이 빠져 그넷줄에 꼭 매달려 그네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날아가는 새들 대신 떨고 있는 별들 이 나타났다. 나는 더욱 세차게 그네를 굴렀다. '국도의 아이들' "처음으로 그의 흉측한 모습이 그에게 쓸모가 있을 터였다" '사람들이 경솔하게 그레고르의 방문을 열어두었다. 식당에서는 여동생인 그레테가 바 이올린을 들고 아버지와 어머니, 세 명의 하숙인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레 고르의 음악에 대한 사랑, 누이에 대한 사랑은 말 그대로 그를 화나게 했다. 그는 자 신의 혐오스러운 외모를 잊고 꿈을 좇아간다. 이로써 추문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 이것은 '변신'의 세 번째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야기로, 사랑에 빠진 괴물의 죽음(이 것은 형벌일까?)을 맞이하기 직전의 이야기이다. 동생은 그래도 아주 멋있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조심스럽고 슬픈 눈길로 악보를 좇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좀더 앞으로 기어가 동생의 눈길을 마주 하려 했다. 이런데도 그가 동물이란 말인가?이렇게 음악에 감동하는데도.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미지의 정신적 양식에 이르는 길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동생 앞 까지 가서 스커트를 잡아당기며 바이올린을 들고 자기 방으로 와 달라는 암시를 할 작 정이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큼 열렬히 연주를 감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동생을 억지로 자기 곁에 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이 자발적으로 자기 옆 에 앉아 자기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분명히 자기가 동생을 음악 학교에 보내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과, 그 동안에 이런 불상사만 없었어도 지난 크리 스마스 때(벌써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나?)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모두에게 그것을 발표했을 것이라는 이야기 등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나면 동생은 감 동의 울음을 터뜨릴 것이고 그레고르는 그녀의 어깨까지 기어올라가서 그녀의 목에 키 스할 것이다. 그녀가 깃이나 리본이 없는 옷을 입을수록 키스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직장에 다닌 후부터 그녀는 목을 드러내놓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변신' "아마 제 말뜻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심판'의 첫 부분을 보면 두 형사가 요제프 K. 에게 그의 체포 사실을 알린다. 왜요? 대답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진다. 그는 체포된 것인가 아닌가? 그들은 잠시 후 경찰 반장이 그를 보고 싶어한다고 전한다. 그들은 마치 그를 초대하는 투로 말할 것 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요제프 K. 가 '일을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는 점이다. 그는 경찰 반장 앞에서도 이것이 실수나 장난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매 대목이 중요성을 띠고 있다. 오손 웰스는 '심판'을 영화화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사람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들었을 법한 영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K. 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사건으로 꽤 놀랐지요?" 경찰 반장이 물었다. 그는 조그마한 탁자 위에 있 던 초, 성냥, 책 등 몇 가지 물건을 마치 심리에 필요한 것이라도 되는 양 두손으로 옮겨놓았다. "그렇습니다." K. 는 기뻤다. 그는 마침내 사정을 아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자신의 일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놀랐어요. 하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요?" 반장은 탁자 한가운데에 초를 세우고 그 주위에 다른 물 건들을 늘어놓았다. K. 는 급히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아마 제 말뜻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제 말은..." K. 는 말을 끊고 의자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통례상 그건 안 됩니다." K. 는 더 이상 말을 중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매우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사람이 세상살이를 30년쯤 하면 놀라움에 익숙해져 그런 것쯤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특히 오늘의 사건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왜 특히 오늘의 사건 같은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모든 것을 장난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장난치고는 준비된 일의 규모가 너무 컸으니까요. 만일 장난이었다면 하숙집의 모든 입주자들과 당신들도 사건에 가담해야 했을 거고, 그건 장난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니까요. 따라서 장난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반장은 대꾸하면서 성냥갑 속에 들어있는 성냥개비를 세고 있었다. K. 는 말을 계속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건은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 는 것은, 내가 고발을 당하기는 했으나 그럴 만한 죄가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 나 그것도 부차적인 것이고, 문제는 누구에게 고발당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기관 이 수속을 밟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관리입니까? 어느 분도 제복을 입고 있지 않은데, 당신들의 복장은..." 그는 프란츠 쪽을 바라보았다. "제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행복이라 해야겠군요. 이같은 의문점들을 밝혀주기 바랍 니다. 해명이 되면 서로 기분좋게 헤어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심판' 제 1장 요제프 K. 의 체포, 1914년 "별의 중간에 횡으로 작은 막대가 돌출해 있고" '오드라데크'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상상적인 여타의 문학보다 월등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카프카가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작품의 개성은 물 론 유언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카프카가 이미 폐결핵의 징후를 느끼기 시작한 1916부터 1917년까지 겨울에 쓴 것으로, 몇 개월 후 그는 폐결핵 판정을 받 는다. "(마르트 로베르, '세계백과사전', 1985) 어떤 이들은 '오드라데크'라는 말이 슬라브어에서 왔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말이 독일어에서 온 것이고, 다만 슬라브어 방언의 영향을 받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해석이 애매한 탓에, 그 어떤 해석으로도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물론 '오드라데크'라 불리는 존재가 실제로 없다면 그 누구도 그런 연구에 몰두하지 않 을 것이다. 처음에는 우선 그것이 납작한 별 모양의 실패라고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실이 감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인 날은 실 타래 조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실패가 아니라, 별의 중간에 횡으 로 작은 막대가 돌출해 있고 이 막대기에 맞닿아 오른쪽 모서리에 또 하나의 막대기가 있는, 마치 두 개의 다리로 곧추서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형상의 물체가 예 전에는 어떤 목적에 알맞은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부서졌을 뿐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닌 듯하다. 적어도 그런 표시가 보이 지 않는다. 어는 곳에서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말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전체는 의미 없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완성된 것으로는 보인다. 하기야 이와 관련해서 더 상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오드라데크'는 유난히 움직임이 많아서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 장의 근심' "누군가에게 단식기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보라!" "1921년 말이나 1922년 초에 쓰여진 '단식광대'는 카프카가 1924년에 준비하고 있던 작품집에 붙인 제목이기도 하다. 이 해에 그는 죽게 되며 작품집도 곧 출간된다. '최초 의 고통'(1922년에 쓰여져 같은 작품집에 수록)에 등장하는 곡예사처럼 '단식광대' 역 시 카프카의 비장한 자화상이다. 광대는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카프카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었다?), 그 스스로도 '나의 최고 기록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라 고 말했다. 단지 그는 정직하게 자신의 일만 꾸준히 해나갈뿐이다. 사람들은 서커스단의 기묘한 행동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젼히 대중의 관 심을 직업적인 단식가에게 집중시키려 애썼다. 손님들의 무반응은 사형선고나 마찬가 지였다.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단식을 하고 싶어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러나 더 이 상 그를 구제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곁을 그냥 지나쳤다. '누군가에게 단식기 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보라! 만일 여러분이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그 누구도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 아름답던 광고 글자들은 더러워지 고 아무도 그것을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매일 세심하게 작은 게시판에 단식 을 한 날짜의 숫자를 바꾸어 적었지만, 이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언제나 같은 날짜가 박혀 있었다. 처음 몇 주가 지난 다음에는 단원조차도 이 작은 일거리를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단식 광대는 그가 예전에 꿈꾼 대로 계속해서 단식을 하게 되었 다. 그리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가 예고한 만큼의 단식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날짜를 세지 않았다. 아무도, 심지어 광대 자신조차도 성과가 어느 정도 큰지 알지 못했다. 그는 슬펐다. 어느 날 한 행인이 날짜의 합계를 보고 사기라고 말한 적 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무관심과 천성적인 악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거짓이었다.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 것은 단식 광대가 아니었다. 그는 정직하 게 일했다. 그를 속여서 일삯을 횡령한 것은 세상사람들이었다. '단식광대'(소설의 마지 막 부분) 1922년 "읽지 말고 모든 것을 완전히 불태워야 하네" 카프카가 죽은 후 막스 브로트가 서랍에서 찾아낸 이 두 개의 유언장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그중 하나는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메모, 편지, 비밀스러운 내용이나 스케치를 포함한 일기를 불태워 달라고 요 구하고 있다. 크레용으로 지저분하게 흘려쓴 두 번째 편지는 문학작품도 똑같이 처분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가 유언장에서 포기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실 패한 것으로 보이는 개인적인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후대의 사람들은 브로트가 이 유 언을 지키지 않은 점을 용서했다. 가장 친애하는 막스, 나의 유언일세. 내 유품 중에(즉 책꽂이, 옷장, 집이나 사무실 책 상, 그런 것들 속 혹은 그외에 무엇인가 넣어둘 만한 곳이라든지 자네가 발견한 장소 등에서) 일기, 원고, 다른 사람 것이든 내 것이든 간에 편지들, 그림 등등, 모든 것을 읽지 말고 완전히 태워주게. 자네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글이나 스케치들도 마 찬가지로 태워주게. 그 사람들에게는 자네가 내 이름으로 부탁해 주기를 바라네. 자네 에게 건네주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지는, 적어도 그들 자신이 직접 태우도록 해야만 하네. 자네의 프란츠 카프카 친애하는 막스,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네. 한 달 동안이나 폐의 열이 계 속된 후에 폐렴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비록 약간의 영향력은 미 칠지언정 내가 이런 것을 썼다고 해서 결코 병을 막을 수는 없겠지. 그렇기 때문에 만일에 대비해서, 내가 쓴 모든 것들에 관해 분명히 유언을 해두네. 내가 쓴 작품 중에서 남겨두어도 상관없는 것은 다음 책일세. '심판', '화부', '변신', '유 형지에서', '시골의사' 그리고 단편집 '단식 광대'. 몇 권 안 되는 '관찰'은 남겨두어도 상관없네. 누구에게든 그것들을 일부러 파기해 달라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네. 하지만 한 권이라도 더 인쇄되는 것은 원하지 않네. 이상 다섯 권의 작품집과 단편집을 남겨 두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거듭 인쇄해서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생각에서가 아 니라네. 오히려 이 책들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진짜 소원일세. 다만 나는 그 책들이 이미 세상에 나와버렸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것을 갖고 있기를 원한다 면 굳이 막지 않겠다는 것뿐이네. 그와 반대로, 그외에 내가 쓴 것은 모두(잡지에 게재된 것, 원고나 편지) 발견하는 대 로, 혹은 수신인(수신인에 대해서는 대개 자네도 알고 있는 그대로인데, 문제는 밀레나 야. 특히 밀레나가 갖고 있는 2, 3권의 노트에 대해서는 잊지 말기 바라네)에게 얻을 수 있는 한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없애야하네. 될 수 있는 대로 읽지 않기를 바라며 (자네가 잠깐 훑어보는 정도는 막지 않겠네만, 물론 그러지 않으면 제일 고맙겠고, 하 여튼 자네말고는 들여다보아서도 안 됨) 이것들을 전부 빠짐 없이 소각할 것, 그리고 이 일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해주기를 부탁하네. 프란츠 밀레나 막스 브로트는 밀레나로부터 받았던 편지들 가운데 특히 카프카 문제가 대두되는 부분 을 일부 출간했다. 두 사나이의 우정을 알고 있던 밀레나는 출간을 허락해 주었다. 이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생에 불쑥 개입하기 전까지는 카프카가 전혀 몰랐던 사랑과 이해 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지나친 명민함 때문에 금욕주의에 구속되었습니다" 1920년 8월에 쓴 세 번째 편지에서 말레나는 사람에는 공포를 느끼지만 삶에는 공포 를 느끼지 않는 '프랑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묻는 브로트에게 답을 한다. 그녀는 카프카가 매우 복잡하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즉 그가 돈 문제에 대한 부자유스러움을 여자나 사무실에 대해 동일하게 느꼈으며, 이는 실존에 대한 그의 허약함을 말해 준다 는 것이다. 프랑크는 살 수 없습니다. 프랑크는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프랑크는 결코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프랑크는 곧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망상과 맹목성, 열광, 낙관주의, 이런저런 확신, 염세주의 등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술취할 능력이 없듯이 거 짓말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최소한의 피난처나 안식처도 없습니다. 바로 이 것이 우리가 보호를 받는 곳에서 그가 무방비 상태인 이유입니다. 그는 마치 정장을 한 사람들 속에 벌거벗고 서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나 그가 존재하 는 것, 그가 살아가는 것조차 진실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결정되어 독자적으로 되어 버린 존재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들, 예컨대 아름다움이나 불행 등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의 금욕주의에는 영웅주의가 전 혀 없습니다. 그를 더 위대하고 더 고상하게 만들어줄 영웅주의 말입니다. 모든 '영웅 주의'는 착각이자 비열한 것입니다. 그는 목표점에 오르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친 명민함과 순결함, 타협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금욕주의에 구속된 사람입니다.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편지 1920년 8월 "나는 그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밀레나의 다섯 번째 편지는 카프카의 공포와 수치심뿐 아니라 그를 구제할 방법(빈에 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안 그녀는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구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그가 자신을 방기했다는 가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카프카는 당시 타 트라스의 마틀리아리 요양원에 있었다. 제가 그를 돕지 않으려는 걸까요? 그를 알기 전에 저에게도 그런 공포가 있었기에 저 는 그의 공포를 압니다. 저는 공포를 이해함으로써 제 자신을 지켰습니다. 프랑크가 제 곁에 머문 4일간 그는 공포를 잊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조롱했지요. 저는 어떤 요양소도 공포를 이겨내게 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건 강이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막스, 앞으로도 그는 공포를 지닐 겁니다. 어떠한 정신적 인 위안도 이러한 공포를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공포는 위안을 금지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공포가 자아하고만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사는 것들, 예컨대 육신하고도 관련됩니다. 육신은 전혀 숨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육 신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합니다. 나는 그의 곁에 몸을 두는 데 성공했지요. 그가 다시 이러한 공포를 느꼈을 때 그는 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한순간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무언가를 잘못 밟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자 저절로 모든 것이 명료해졌습니다. 저는 그를 빈의 한 언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가 느릿느릿 걸었기 때문에 제가 앞서 걸었습니다. 그는 내 뒤를 따라오 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을 감고도 저는 그의 하얀 셔츠와 그을린 목, 그가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걷고, 언덕을 오르내리고, 햇빛을 받 으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한번도 기침을 하지 않았고, 엄청나게 많이 먹었으며, 깊이 잠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그즈음 그의 병은 코감기에 불 과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와 프라하로 갔다면 저는 그를 위해서 당시처럼 머물렀겠지 요. 그러나 저는 두 걸음도 못 가서 멈추어 섰을 것입니다. 저는 남편을 버릴 수 없습 니다. 아마도 그러한 삶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기에는 제가 너무 여성적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제가 아는 삶이란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뿐이니까요.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는 편지 1921년 1월에서 2월 사이 "진실하고 적나라하며 고통스러운 저작들"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빈 근처에서 사망해 10일 프라하 슈트라슈니츠의 유태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7일부터 밀레나는 '나도르니 리스티'에 카프카의 사망을 알리 는 동시에 경쾌하면서도 밀도 높은 문체를 지닌 그의 작품에 대한 기사를 썼다. 빈에서 가까운 클로스터노이부르크 근처의 키어링 요양소에서 그저께 프란츠 카프카가 사망했다.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한 작가로서 프라하에서 살았다.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실하지만 세상에 낙담한 채 자신의 길만을 외롭게 걸었기 때문이다. 수 년전부터 그는 폐병을 앓았다. 그가 병을 치료하려 했다면 그는 영양분을 섭취하고 건 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과 영혼이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 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폐병에게 집을 반쯤 덜어 공평하게 분산했다. 그의 병은 이 러한 여지에서 비롯되었다. 병은 감당할 수 없는 허약함과 두려우리만치 타협을 거부 하는 지적 세련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는 소심하고 불안해했으나 부드럽고 선량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잔인하고 고통스럽다. 그는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절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마로 가득 찬 세계를 보았다. 그는 살아가기에 너무 예민했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가 그렇듯이 투쟁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이들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들은 몰이해와 무례함, 지적인 거짓말에 대한 두 려움으로 인해 싸움에 참여할 수가 없다. 싸움이 헛된 것이며 패자가 다시 승자를 치 욕으로 뒤덮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을 알 수 있는 위대한 감식 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유별나고도 심오한 방법으로 세계를 파알했던 그는 그 자신이 유별나고도 심오한 하나의 세계였다. 그는 독일이 청년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 한 책들을 저술했다. 전세계에서 오늘날의 세대가 벌이는 투쟁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물론 교리 같은 성격은 띠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주 진실하고 적나라하며 고통 스러운 저작들이므로,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때조차도 자연주의에 가깝다. 이 책 들은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인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파악하기 때 문에 그는 이 세계를 감당할 수가 없으며, 이성적인 사고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단편 '화부'를 썼다. 이는 미간행된 훌륭한 소설인 '실종자'의 1장에 해당된다. 또한 두 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선고', 형대 독일문학 중 가장 탁월한 작품 인 '변신', 그리고 '유형지에서'를 썼으며, 이외에 '관찰'이나 '시골 의사'같은 습작도 있 다. 그의 마지막 소설인 '법 앞에서'는 수년전부터 원고 상태로 대기하고 있다. 이 책 은 우리가 어떤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 완전히 이해되어 최소한의 주석도 필요 없을 만큼 한 세계에 대해 감동을 갖게 하는 책이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인간들 사이의 몰이 해와 순진한 과오에 대한 공포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는 귀머거리의 오류를 이해할 정도로 민감한 의식을 소유한 예술가이자 인간이었다. 밀레 나 예젠스카, 1924년 6월 7일 '나도르니 리스티'에 실린 기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나 자신의 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마르트 로베르):카프카의 국제적인 수용 카프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주목을 받았던 그의 작품들은 처음에는 매우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다. 막스 브로트 덕분에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들은 때로 단순한 논 리로 금지되기도 하고, 때로 그와 이질적인 사상 안에 통합되기도 했다. 독일인에게는 체크인, 체크인에게는 독일인, 모두에게는 유태인이었던 카프카는 오랫동안 자신의 시 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정치적 사건(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는)에 그는 복권되고 재발견될 수 있었다. 로베르트 무질:"겸손히 선택된 무" 카프카가 생전에 출간한 총 6권의 책은 그저 스쳐지나가지 않았다. 문학과 비평계의 여러 인물들이 프라하와 빈, 베를린의 신문과 잡지에서 그를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막 스 브로트는 물론 알베르트 에렘슈타인, 로베르트 무질,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란츠 베르펠 등이 그들이다. 카프카는 신중하게 이 기사들을 검토했다. 50년 전에 한 작가가 확신을 가지고 '비누도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유의 공간을 들 여다보자. 이곳은 다른 곳과 특별히 차이가 있는데, 즐겁게 울려퍼지는 창조의 공간(스 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카프카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쳤다)이 이곳에서는 슬픈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일종의 바로크적인 신선함이 이곳에서는 자의적으로 늘어난 문장들이 고독한 의식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스케이트 주자는 회전과 피겨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위대한 예술적 대 가가 자리하고 있지만, 허공 속에 있는 작은 무한의 울림, 겸손히 선택된 무, 자살자가 시간을 선택하는 고통은 아마도 이곳에만 있을 것이다. 로베르트 무질 '문학연대기', 1914년 8월 막스 브로트와 종교적인 독법 카프카는 1924년 사망했다. 막스 브로트는 1925년 '심판', '1926년 '성', 1927년 '아메 리카'와 여러 산문들이 담긴 '만리장성 축조시'를 출간했다. 1935년 베를린에서 그는 최초의 카프카 전집(이미 검열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다)의 편집에 전념한다. 1937년 그는 프라하에서 최초의 카프카 전기를 출간한다. 브로트는 1968년 죽을 때까지 카프 카의 작품과 카프카에 대한 책들을 출간했다. 카프카의 진실한 친구라는 사실과 다른 어떤 비평가들보다도 카프카의 원고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었다. 몇 개국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카프카에 대한 연구는 우선적으로 그의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브로트는 전작품에 걸쳐 알레고리적이고 종교적인 독법을 체계적으로 특성화했다. 특히 '심판'과 '성'이 그러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해석은 '중국의 조각물 내부의 껍질이 모두 그 제일 바깥쪽 껍질에 의해 둘러싸여 있 는 것처럼'다른 모든 해석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심판'의 주인공이 수수께끼의 비밀 관청으로부터 기소되어 법정에 소환되는데 반해 ' 성'의 주인공은 그와 같은 법정으로부터 무시당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제프 K. 는 몸을 숨기고 도주한다. 반면 K. 는 나타나서 버티어나간다.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 근 본은 완전히 동일하다. 기묘한 서류며 관리들의 헤아리기 어려운 계급제도, 변덕과 술 책, 무한한 존경과 맹목적인 복종의 요구가 표현된 '성'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K. 가 무슨 수를 써도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지 못하며, 접근할 수조차 없는 이 '성'이 란 바로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총'이며 인간의 운명 지배하는 신의이며, 우리들을 굽어 보고 있는 불가해한 우연과 숙고의 미덕인 것이다. 그래서 '심파'과 '성'에 있어서는 신 성(카빌라의 의미에서)의 두가지 현상형식(심판과 은총)이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스 브로트 '성' 1판 후기, 1926년 프랑스에서의 환대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감독에서 벗어난 체크인들은 오랫동안,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명한 독일인 작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그의 책들이 배포가 금지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2차 대전을 앞둔 시기 에 프랑스에서 카프카를 후하게 수용한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프랑스에서 후하게 대접('자기 것으로 만들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한 것은 장시간에 걸쳐 세계적인 수용에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독일어판과 거의 동시에 나왔다. 1928년 '변신'이 알렉상드르 비아라트에 의해, 1930년 '선고'가 피에르 클로소브스티와 피에르 레이리스에 의해, 1933년 '심판'과 1938년 '성'이 비아라트에 의해 번역되었다. 반면 영국에서 '선고'는 1954년에, '변신'은 1961년이 되어서야 번역되었다. 카뮈. '심판', '성' 그리고 '소설가, 철학자' 카뮈가 '시지포스의 신화'에 게재한 '심판'과 '성'은 전후에 카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카프카는 '소설가, 철학자'로 불리게 되었다. 카뮈의 독법은 막스 브로트의 종교적인 독법과 상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쉽게 받아들여졌다. '심판'이 문제를 제기했다면 '성'은 이 문제를 풀었다. '심판'은 진단을 하고 '성'은 치료 책을 생각한다. 이 미묘한 약은 우리가 짓밟은 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출구 없는 세계 에 희망이 생기도록 한다. 갑작스러운 도약에 의해 우리 모두가 변하게 되는 것, 이것 이 존재의 혁명과 '성'에 담긴 비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컨대 키에르케고르가 표 현한 것과 같은 존재의 사유에 관한 역설이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 세속적인 희망에 노크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한 희망을 통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이해하기 위해 '심판'을 써야만했다"고.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의 저작에 담긴 희망과 부조리', '아르발레테', 1943년 "카프카를 불태워야 할 것인가?" 전후에, 카프카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중요한 문제로 대 두되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카프카는 '검은 문학'의 상징이었다. 즉 '도덕적으로 순진하고 사회적으로 반동적'이었다. 그로부터 "카프카를 불태워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되었다. 1946년 주간지 '악시옹'에 게재된 이 글 은 긍정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소외의 변증법이자 실체의 전락에 의한 파괴의 뱐증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독창적인 카프카의 변증법은 외부에서 안쪽으로 들어오기만 할 뿐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즉 이 것은 무한소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 삶의 변증법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다가 되 돌아오고 다시 출발하는 가운데 총체성을 획득한다. (레닌은 이것을 나선형 구조라고 했다. ) 카프카의 운동에 대해 우리는 경제적 세계와 죽음에 대해 무기력에 빠져 있는 타자에 의해 소유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대상화된 사람들에게 역사는 더 이상의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니엘 비젤 '카프카를 불태워야 할 것인가?', '악시옹' 99호, 1946년 7월 26일 루카치: "갑작스럽고 기본적이며 플라토닉한 불안"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게오르크 루카치는 스탈린주의가 공식적으 로 종말을 고한 후에도 카프카에 대해 준엄한 태도를 유지하며 카프카가 현실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비난했다. 즉 자본주의의 소외에 대한 공모자라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까지 격상된 이 무기력한 인상이 카프카에게는 세계가 형성될 때 부터 내재되어 있는 불안이었다. 모더니즘 예술의 상징인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설 명할 수도, 파악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포와 마주한 인간의 총체적인 고독을 본다. 다른 예술가에게서도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이러한 경향이 여기서는 인간의 불안으로 표출된다. 이 불안은 영원히 생소하며, 적대적인 실재를 마주할 때 생기는 갑작스럽고 기본적이며 플라토닉한 불안이다. 그 놀라움과 혼란, 망연자실이 정도는 문학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카프카가 경험한 것과 같은 불안을 근본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예술의 근대적인 퇴폐로 요약된다. 게오르크 루카치, '비판적 리얼리즘의 현재적 의미', 1957년 이오네스코, 한 여가수에서 다른 여가수로 그는 작품 '대머리 여가수'(1950)를 카프카의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 접근시 키려 했다. 또한 '코뿔소'는 '변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아메데 혹은 어떻게'는 그로부터 벗어나 있다(1954). 자신의 아파에 기괴한 괴물 송장이 있는 것을 본 아메데의 부모는 그레고르와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이오네스코는 카프카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막스 브로트를 연상시키는 투로 말했다. 왜 카프카적인 인간은 고통을 받는가? 그가 물질적인 안락이 아닌 다른 것으로 존재하 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로서 말이다. 그가 등을 돌린 그의 진정한 천직은 타락하지 않 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카프카가 말하고자 한 것은 탈신성화된 세계이다. 그러나 목 적을 상실한 세계이다. 세계의 어두운 미로에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사라진 차원을 갖게 된다. 그것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외젠 이오네스코, '도 시의 군대에서', 르노 바로 노트 20호, 1957년 10월 카프카에 대한 오해와 비아라트 카프카라는 이름은 문예지, 신문, 대담등을 통한 자주 언급된다. '카프카적'이라는 형용 사는 사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1965년 그의 첫 번째 프랑스어 번역자인 알렉상드르 비아라트는, 이것이 농담삼아 말하는 유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오해라 고 밝혔다. "마프마는 절망과 삶의 허무를 가르친 스승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1926년 카프카 번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유머의 왕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에게서 어둠의 왕을 본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촉수가 뻗친 불길한 왕 말이다. 신성 한 괴물의 반열에까지 오른 유령. 그것은 더 이상 '카프카적'으로 될 상황이 아니다. 마요네즈가 발린 새앙쥐가 있다면, 이는 카프카의 오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를 철학교수 자격자로 만들어냈다. 우리는 그를 고문서에 짓눌러두고 있다. 알렉상드르 비아라트, '이것이 카프카적인 것이다', '르 피가로 문학', 1965년 3월 18일 부자티, 우연인가?우리는 종종 부자티를 '이탈리아의 카프카'라고 부른다. '타타르 사막 '(1940)에는 '성'과 정반대의 상황이 나온다. 하지만 부자티는 소설을 쓸 당시에는 카 프카의 '성'을 아직 읽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5년 후 이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집 제목 을 'K'(1966)라고 붙인 것은 분명 우연만은 아니다. 카프카가 부자티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자명한 만큼, 부자티는 이에 대한 질문이 자주 제기되자 이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내가 포,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서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카프카에 대해 말 한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 부자티, '나의 사막들', 이브 파나피외 와의 대화, 로베르 라퐁, 1973년 프라하로 회귀한 카프카 우리는 이로 인해 1963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리블리츠에서 열린 제 1차 카프카 학 회의 중요성을 더욱 잘 가늠해 볼 수 있다. 곧이어 카프카 사망 40주기를 맞아 제 2 차 학회가 열렸다. 그해에 카프카의 생애에 훈장이 수여되었다. 카프카 학회는 그러부 터 4년 후에 두브체크로 상징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변화를 반영하고 촉진시켰다. 오늘날 벌루르 혁명 후의 프라하에서는 카프카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카프카 학회는 회의와 출판, 전시회, 방문등을 시작으로 평화롭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 음, 다양한 장소에서 특히 그랑궁에 있는 밀레나 카페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클라우스 바겐바흐의 역사적이고 초상학적인 연구 덕택에 카프카의 전기작가들은 이러 한 존재를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있다. 쿤데라, 브로트와 카프카학의 시대 브로트에 의해 시작된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종교적인 독법은 오랜 기간 매혹적인 것 이었다. 적어도 1990년 쿤데라가 이에 대해 격렬한 선언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로 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브로트는 남다는 정력을 지닌 훌륭한 지식인이었다. 남을 위해 싸움을 불사하는 의협 심 강한 사람으로서 카프카에 대한 집착은 열정적이고 사심이 없었다. 다만 불행이라 면 예술적 소양에 문제가 있었다. 관념가로서 그는 형태에 대한 열정이 무엇인지를 알 지 못했다. 그의 소설(그는 20권 가량 썼다)은 한심스럽게도 관례적이다. 특히 그는 현대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엉처리 시를 쓰는 자는 시인인 친구의 작품 을 간행하려는 순간부터 위험한 존재가 된다. 피카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설가가 입체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화가라고 상상해보자. 그가 피카소의 작품에 대해 뭐 라 말하겠는가? 아마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했던 바로 그 말과 똑같을 것이 다. 즉 그의 작품들은 '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마련된 끔찍한 형벌들'을 묘사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와 카프카 작품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동시에 그는 카프카학을 창조했다. 비록 카프카 연구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떠들썩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들은 아버지가 한정시킨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저서 들의 천문학적인 양에도 불구하고 카프카학은 점점 카프카 작품으로부터 독립되어, 자 기 자신만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 언제나 똑같은 담론, 똑같은 추론을 끊임없이 형태 만 달리해서 전개할 따름이다. 밀란 쿤데라, '성 가르타의 거세적 그림자', '무한'32호, 1990년 오늘날의 카프카, 인터넷에서 '정치적 정정'까지 사실 카프카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수많은 익명자들이 들르는 은밀하고 미로 같은 문학 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의 하나인 '건설'에서 카프카는 이러한 공간을 꿈꾸었다. 신비롭고, 불법적이며, 비밀스러운 한 잠재적인 전집이 나름대로의 법칙과 곤례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영원히 발전해 나가는 공간 말이다. 마치 카프카 와도 같이. 오늘날 카프카가 차지하는 위치를 자리매김하면서 움베르로 에코는 전문적 인 독자들이 설정한 기록을 통해 편집자들이 작가들의 원고를 채택하느냐 마느냐를 결 정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여기에서 '심판'은 거절당하며 성경도 거절당하고, '오디세이' 와 '신의 섭리', '돈키호테'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거절당한다. 프란츠 카프카, '심판'이라는 이 짧은 책은 나쁘지 않다. 히치콕적인 모멘트를 가지고 있는 탐정소설이다. 예컨대 최후의 죽음 장면은 인기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가가 검열의 위협 속에서 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 애매한 암시들하 며 이름 없는 인물과 장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주인공은 왜 법정으로 끌려가는가? 이러한 모든 점들을 좀더 명확히 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사 건들을 제시한다면, 그들의 행위가 명료함과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동시에 얻을 수 있 었을텐데 말이다. 이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시'를 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모 시간과 모 장소의 모 씨'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하고 있으니. 좀 손질을 하면 좋아질 것이 다.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움베르트 에코, '당신의 책을 출간할 수 없어 서 유감입니다',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