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역사 지은이: 알프레드 바알 지음/지현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신안식 제1장 근대 축구의 요람, 영국 중세와 근세 유럽의 민속사를 살펴보면 민중들 사이에서 행해지곤 하던 격렬한 공놀이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문서로 정리된 규칙 없이 전통에 따라 이루어진 이러한 공놀이에는 수많은 유형이 존재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기: 술(soule) 19세기까지 브르타뉴와 피카르디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 경기는 공업화 이전에 농촌사회에서 행해지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아직 명백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이 경기가 카톨릭 교구와 관련된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경기에는 인접 마을의 젊은이들이나 같은 행정구의 젊은 기혼자들과 독신자들이 참여했다. 경기에 열중하는 귀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앙리 2세가 롱사르를 경기에 끌어들일 정도였다. 양진영은 밀기울이나 건초를 채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공인 술을 적진에 옮겨놓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조직이라고 할 것은 없었고, 기록으로 정리된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아 경기 진행은 오로지 전통에 따랐다. 참가자수, 경기시간, 경기장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신체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선수들은 술을 향해 돌진했고, 또한 그것을 적진에 옮겨다 놓기 위해 손과 발을 번갈아 사용하며 경기에 임했다. 선수들 간의 역할 구분이라 할 것은 전혀 없었고, 중요한 것은 힘과 정열뿐이었다. 중세의 전장터처럼 엎치락뒤치락 밀고 밀리거나 뛰고 달리다 마침내 어느 한 팀이 일정한 장소에 술을 내려놓으면 경기는 끝이 났다. 당국이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는 사실은 이 놀이가 얼마만큼 격렬한 것이었는지 증언해 준다. 경기를 치르다가 잘못해서 절름발이가 되는 이들도 있었고 때로는 죽는 이들도 있었다. 공차기: 전세계적인 전통의 놀이 중세 영국에도 대중이 즐겨 하던 공놀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이렇게 소리친다. "너, 이 추잡한 공차는 놈(footballer)!" 영국 남서 지방의 한 주인 콘월에서는 헐링(hurling)이 행해졌다. 헐링은 상대편 골에 공을 내려놓기 위해 때로는 산으로 골짜기로 격렬한 달리기를 벌이고 때로는 강물을 건너기도 해야 하는 경기였다. 점차로 이런 유형의 놀이에도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전술이 도입되었고, 선수들 간의 역할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각 팀의 양측면에는 혼전을 뚫고 나갈 주자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공을 빼앗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볼로냐와 피렌체에서는 공을 바로 모는 경기인 '퀴코 델 칼치오(quico del calcio)'가 행해졌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이나 부활절에 행해지던 칼치오는 뚜렷한 경계가 정해진 한정된 공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한결 세련된 경기였다. 물론 칼치오 선수들은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있었으나, 단순한 형태로나마 역할의 분배와 집단경기의 초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칼치오는 근대 축구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대륙에서도 구기를 즐겼다. 한국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이 그 예이다. 영국의 사립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사라져가던 경기를 선택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전통적 공동체들의 단결을 확고히 지탱해 주던 유대관계들이 점차 느슨해지면서 새로운 사회관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들은 옛 구기를 포용하지 않았고 그 결과 구기는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구기가 명맥을 유지했는데 이는 사립 중고등학교(public school)에 다니던 유복한 계층의 학생들이 구기를 선호한 덕분이었다. 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체계를 지닌 여가활동으로 구기를 정비했다. 한편 학부모들은 이런 격렬한 경기가 지니는 교육적 가치를 인정했고, 상급생들은 사회적으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던 교사들의 권위 부재를 이용하여 신입생들과 열등생들을 지배하지 위한 체벌수단으로 구기를 이용했다. 초기인 1830년경까지 구기는 그 최초의 특성을 사립 중고등학교들 내부에서 보전했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산만한 조직,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채 변화, 발전하던 규칙들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기. 학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관례를 고수했다. 여전히 경기장 규격, 경기시간, 참가선수수에 관한 규칙들은 마련되지 않았다. 경기에서 맡아야 할 역할들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경기의 제한사항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과 의욕이었다. 어찌 보면 공동체의 역할이란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감춰두는 데 있다. 구기들의 '스포츠화' 영국의 산업화에 영향을 받아 1830년부터, 사립 중고등학교들 내부에 다양한 변화가 잇달았는데 여기에는 구기 진행방식의 결정적인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정되어 있던 사회는 부르주아의 세력 증대로 동요를 겪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학교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교사들의 권위는 제자리를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지배방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비로소 신입생 길들이기는 사라져갔고 학생들 간의 관계는 교칙에 따라 체계화되었다. 이제 학교에 평화가 깃들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1828년부터 1840년까지 럭비 사립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토머스 아놀드는 조심스레 이러한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이처럼 긴장이 완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기록된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경기,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자제력을 포함하는 보다 덜 격렬한 경기가 출현했다. 하지만 두 형태(축구 association football의 초기 형태인 드리블링 게임 dribbling game과 럭비 rugby football)로 나타난 근대 축구의 탄생을 실제로 주재한 것은 아놀드 이후 세대의 사립학교 교장들이었다. 새로운 면모를 지닌 경기는 공 크기의 규격화, 경기장 범위의 확장, 선수수와 경기시간의 확정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후 개인적인 역할과 자제력이 더욱더 중시되었고, 난폭함보다는 동작의 민첩성이 더 높은 가치로 평가되었다. 축구협회의 창설 1845년경, 사립 중고등학교들은 경기의 규칙을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이제까지 정리된 규칙을 명문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튼과 해로 같은 유서 깊은 유명한 학교들은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거나 공을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는 따위 규칙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드리블링 게임이다. 1863년, 이튼, 웨스트민스터, 해로 같은 남부 클럽들의 소수 대표들이 런던의 프리메이슨스 태번에 모였다. 이들은 시합을 활성화하기 위해 현행의 다양한 규칙을 조정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케임브리지의 규칙들을 채택하기로 결정했고, 아울러 일종의 연맹인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F.A.)를 창설했다. 회합에 참여했던 럭비 사립학교의 대표는 그러한 결정에 따르지 않았고, 손을 사용하는 경기를 계속하고자 했다. 1871년, 이러한 경기방식을 옹호하는 이들이 회합을 가졌고, 럭비 풋볼 연합(Rugby Football Union)의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축구와 럭비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1850년대 말, 셰필드의 한 클럽을 중심으로 경기 규칙들이 다소 다른 또 하나의 연맹이 탄생했다. 1877년, 셰필드는 F.A.와 보조를 함께하게 되었다. 1871년, 컵(Cup), 다시 말해 영국 컵의 창설이 경기 규칙의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컵은 일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경기들을 포함했다.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축구 1860년대 말에 시작된 축구의 영역 확장은 지역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1860년부터 중산계층을 위해 마련된 토요일 오후의 휴무였다. 건강한 육체를 지닌 기독교 정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희망을 이야기하던 사제들이 주도를 하건 그렇지 않건, 이와는 상관없이 소교구를 중심으로 많은 클럽들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클럽들은 중부와 북동부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1880년에 활동하던 전체 클럽 중 25%가 이와 같은 유형에 속했다. 애스턴 빌라, 블랙풀, 볼턴 원더러즈와 같은 대형클럽들은 이같은 이유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클럽들을 결성하는 제2의 단체는 사교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던 퍼브(pub)였다. 퍼브는 선수들을 관리하기 위해 명부를 작성했고 대부분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1870년대부터 셰필드, 버밍엄 등지에서 창설된 기업 클럽들은 1870년대 말에는 약 20개 팀에 이르렀다. 웨스트 햄 클럽을 창설한 이는 철강 공장인 템스 아이언웍스의 소유주인 아놀드 힐스였다. 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클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이 철도 직원들로 이루어진 팀들이었다. 다른 클럽들은 노동자 주택단지의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어 창설하거나 크리켓 클럽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사립 중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이 발기를 주도했다. 축구의 영역 확장과 더불어 버밍엄주(1882년에 52개 클럽), 랭커셔주(1878년에 30개 클럽, 1886년에 114개 클럽), 노퍽주와 에섹스주(1882년) 등지에서 새로운 연맹들이 결성되었다. 모든 연맹들은 F.A.를 중심으로 삼았는데, F.A.는 1883년에 설립된 국제평의회(International Board)가 통일된 규칙을 채택하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1882년에 들어서면 1000개 가량을 헤아리는 클럽들이 F.A.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도입 축구 역사의 초기에 클럽의 관리자들과 클럽 소속 선수들은 아마추어 정신을 보존하려고 애를 썼다.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즐기기 위한 경기가 이루어졌으며, 자제력과 예의가 권장되었다. 경기는 '위험한' 계층들로 이루어진 관중을 위한 전시물이나 노동이 아니었다. 1880년까지 컵 결승에 진출한 모든 팀은 사립 중고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팀들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대에 랭커셔주에서부터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곧 보상금과 이적비의 형태로 금권이 개입되었다. 1883년, 컵의 결승전에서 블랙번의 노동자들이 이튼에 승리하면서 엘리트 계층의 지배는 상징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력 인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위원회들을 조종하는 것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력 인사들은 더 많은 보조금을 투입했다. 철강 사업자인 시드니 예이츠는 자신의 클럽인 웨스트 햄에 100파운드를 기증했다. 예산은 급등했다. 매표창구로 들어오는 수입은 1630파운드였지만 볼턴 원더러즈의 예산은 1949파운드에 달했다. 후원금과 복권 수입으로 부족분을 메워야 했다. 몇몇 클럽은 주식회사 형태로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했다. 1891년, 아스날은10파운드나 20파운드짜리 주식을 팔아 860명의 주주를 모았다. 1888년 12개의 클럽은 풋볼리그(Football League)를 창설하고 국가 선수권 쟁탈전을 주최했다. 그렇다고 F.A.의 권위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드리블링 게임에서 패싱 게임으로 경기 방법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컵의 경기들을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11명의 선수들 중 8명이 공격수를 맡았다. 1871년에 이르러서야 골키퍼는 손을 이용할 수 있었다. 1874년부터 공격수는 7명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셋이 센터 포워드를 맡았다. 케임브리지팀의 주도에 따라 공격수는 5명으로 제한되었다. 후방에 센터 하프백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기장에서의 선수 배치는 영국제도 전체로 파급되었고, 192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에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드리블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는 사립 중고등학교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사립 중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은 드리블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던 것이다. 공격수들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공을 몰고 다니며 세 명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수비망을 뚫으려 했다. 따라서 경기는 격렬한 질주를 통해 개인적인 묘기를 추구하는 양상을 띠었다. 사실 선수들과 그 소속 팀에게 명성을 가져온 것도 그런 묘기였다. 그러나 노동자 계층이 참여하면서 점점 늘어난 관객들이 개인의 묘기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를 원하게 되면서 경기의 성격은 스코틀랜드식 집단경기로 바뀌어갔다. 그리하여 1876년경, 패싱 게임(passing game)이 드릴블링 게임을 대체했고, 노동자들의 공동체 정신이 부르주아의 개인주의를 대신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의 영국 축구 1905년, 1만 개의 클럽들이 F.A.는 아마추어 선수 등록증 소지자들의 수를 30만으로 추산했다. 마침내 축구의 대중화가 완료되었고, 선택된 부르주아 계층의 선수들은 이미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F.A.는 대부분의 클럽 위원회들과 마찬가지로 중산계급의 손으로 관리되었다. 1890년과 1891년에는 아일랜드 리그(Irish League)와 스코틀랜드 리그(Scottish League)가 시작되었고, 1892년 이후 풋볼 리그의 남부 지역 경쟁자 역할을 하던 서던 리그(Southern League)가 1894년 발족했다. 알다시피 프로페셔널리즘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이 적용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일정한 규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적비용은 제한을 초과하는 일이 빈번했다. 1905년, 앨프 커먼이 선더랜드에서 미들버스로로 이적하며 1000파운드를 받은 것이 그 예이다. 1907년까지고 이적비의 총액이 350파운드를 초과할 수 없었다. 프로 축구 클럽들은 기업들과 결연했고 결연 기업의 운영방침을 받아들였다. 이제 축구는 더할 나위 없는 인기를 누리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컵의 첫 번째 결승전에 2000명에 지나지 않았던 관객수는, 1888년에는 1만 7천, 1893년에는 4만 5천, 1901년에는 11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전통을 자랑하는 다양한 대항전들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은 끊임없이 쇄도했고, 이에 따라 더욱 넓은 경기장을 건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경기장이 건축되는 동안에는 관객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잦았다. 축구는 3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가장 활발한 대중문화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노동자들은 수백 가지 신문들이 전하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의 화제로 삼았다. 경기 종료 30분 후면 런던의 신문들이 판매되었는데 이는 경기장에 훌륭하게 갖춰진 기자실과 전화 덕분이었다. 제2장 세계 정복에 나서다 축구의 외판원, 영국인 영국의 세계 경영이 확장된 이면에 숨은 주역이라면 전세계에 전파된 축구를 들 수 있다. 1874년에는 보타포고와 브라질의 해변에서, 10여 년 후에는 포르투갈과 마르세유에서, 그 고장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원들의 축구경기를 구경했다. 축구를 지속적으로 즐긴 이들은 선박회사의 현지 직원처럼 영구 정착한 영국인들이었다. 1872년 르아브르의 사우스 웨스턴 철도회사의 직원들이나 1890년 포르토나 빌바오 항구의 상사 직원들이 그들이다. 리스본의 전신 설비회사 직원들이나 1885년경 리오틴토 탄광에서 작업하던 이들과 같은 기술자들도 축구를 전파하는 선봉장이었다. 영국인들이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에 세운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영국 학생들 또한 그곳 주민들을 경기에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예들은 1860년대 스위스의 영국 기술학교, 1870년 이후의 부에노스아이레스, 1892년의 멀하우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 대륙 사람들 스스로 적극 나서서 축구를 도입하기도 했다. 연수를 마친 후 짐 속에 공을 챙겨 영불해협을 건넌 영어 교사, 훗날 도이처 푸스발분트(Deutscher Fussballbund)의 회장을 맡은 F.W. 노에, 벨테트 드 투르코앵, 데자뉴 다미앙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영국의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유럽 대륙의 학생들도 같은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직접 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한 경우도 있다. 마르세유나 바르셀로나에 축구가 전해진 것은 이미 축구에 익숙한 스위스 상인들 덕분이었다. 스위스와 북서부 유럽의 정복 스위스가 오랜 축구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립 교육기관에 유달리 많은 영국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하다. 근대 축구가 태어나기 전인 1855년부터 제네바에 있는 랑시성 사립 교육기관에서 축구경기가 행해졌다지만, 1869년에 같은 도시에 있는 샤틀렌 사립 학교의 학생들이 몰두한 경기가 축구인가 럭비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로잔 풋볼(Lausanne Football)과 1880년에 영국인들이 설립한 크리켓 클럽(Cricket Club) 내분에서 축구는 오랫동안 영국인만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1879년 F.C. 생갈이 탄생했고, 이어 1886년 취리히에서 F.C. 그래스호퍼가 탄생했다.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축구의 기초를 가르치려 애쓰던 어느 영국인의 업적이었다. 영국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는 한편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덴마크는 일찍이 축구를 도입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최초의 클럽이 코펜하겐에 탄생했고, 덴마크 선수들 간의 정기전이 1878년부터 이루어졌다. 이는 스위스보다 앞선 것이다. 네덜란드 역시 다른 유럽 국가보다 먼저 축구를 받아들인 편에 속한다. 1870년 이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 빔 물리에는 하를렘셰 F.F.C.를 창설했다. 그때까지 통일된 규칙을 확정하진 못했지만 1860년대부터 브뤼주, 브뤼셀, 앙베르의 영국 사립 중고등학교에서 축구경기를 해왔던 벨기에도 사정은 같다. 최초의 축구 클럽은 1880년에 창설된 안트워프 F.C.이다. 곧이어 중부 유럽을 정복하다 1870년대 초, 독일에 거주하던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럭비와 비슷한 경기를 했다. 그들과 함께, 1874년에 브룬스비크의 어느 학교에 실질적으로 축구를 소개한 콘라트코흐가 독일 축구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독일 축구의 개화기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카셀에서는 영국인의 경기를 본 후 경기장을 빠져 나온 독일의 젊은이들이 공을 차며 즐겼고, 함부르크의 축구 선수들인 슈반트 형제는 1890년경 슈테틴으로 이주하여 클럽을 창설했으며, 남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던 젊은 교사 발터 벤제만은 1890년에는 카를스루헤와 스트라스부르의 김나지움(독일, 스위스의 중등교육기관: 역주)에 축구를 소개해 주었다. 1887년부터 영국인들이 로우잉 클럽(Rowing Club)에서 축구를 했지만 1892년 프라하에 도이처 푸스발 클럽(Deutscher Fussball Club)을 설립한 이는 어느 프랑크푸르트 사람이었다. 이듬해, 회원들 중 하나가 그라츠에 축구를 들여왔다. 최초로 크리켓 클럽에 가입한 오스트리아인 M.J.로이테의 말처럼, 빈 크리켓 클럽과 퍼스트 빈 F.C.의 영국인들, 로트실트의 정원사들이 1892년경부터 예주이텐비제에서 즐기던 축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장 소년들을 사로잡았다. 헝가리에 축구가 도입된 것은 이보다 조금 뒤인 1896년이라고 기록된다. 이해에 런던에서 돌아온 카롤리 로벤로젠이 성가대 대원들에게 축구를 권유했던 것이다. 보다 남부인 자그레브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것은 스웨덴에서 귀국한 어느 교사였다. 또한 벨그라드 시민들이 축구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1896년으로 여기에는 어느 독일인의 노력이 숨어 있다. 러시아가 그 뒤를 이었다. 188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인과 독일인이 경기를 벌였지만 러시아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1892년 세묘노보 경기장에서 자전거 경주가 열렸을 때 러시아인 간의 경기가 최초로 벌어졌다. 뒤늦은 출발: 프랑스 축구의 여명 독일이나 스위스에서도 그랬지만 영국인들이 벌이는 경기도 아직까지 일관된 원칙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르아브르의 사우스 웨스턴 철도회사 직원들만 해도, 1872년에는 모범적인 어소시에이션 축구를 선보였지만 1885년에는 손의 사용을 허용하는 '콤비네이션' 경기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북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럭비가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1888년 파리의 몽주 사립 학교에 축구가 등장했다. 이 학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튼 사립 학교에 미리 학생들을 파견해 놓았다. 1890년부터 축구는 노르, 노르망디, 파리의 상업학교들과 여러 중등 교육기관에 뿌리를 내렸다. 루앙(1892)과 카앵(1893)에 큰 장이 설 때와 프랑스의 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헌신한 유명한 선전활동가인 파샬 그루세가 주최한 학교 대항전을 이용해 이들은 선수권 쟁탈전을 벌였다. 학교와 무관한 클럽의 창단에는 영국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화이트 로버즈(1891)와 스탠다드(1892)는 영국인만 가입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샤프탈 중학교, 장송드사이 고등학교, 영국계 사립 학교인 베르나와 프레스의 졸업생들이 프랑스 클럽의 주춧돌이 되었다. 장밥티스트세이 고등학교의 몇몇 졸업생들은 뇌이의 스포츠 서클을 설립했다. 그중 제오 뒤아멜은 장차 프랑스 축구의 기념비적 인물이 된다. 프랑스 축구의 기원지인 세 지역과 세트 등 남부의 항구(1894)를 제외한다면, 다른 지역의 축구 보급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남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정복한 축구 영국인의 진출이 특히 활발한 포르투갈에서는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겠지만, 스페인, 특히 스위스인들이 활약을 했던 독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리스본에는 어느 전신회사의 직원들이, 포르토에는 포도주상사의 직원이 축구공을 전해 주었다. 처음에 스페인에서는 영국 거류민들 사이에서만 경기가 행해지다, 1894년 빌바오에 지역 선수들을 포함하는 클럽이 탄생했다. 바르셀로나의 동부에 축구를 들여온 이는 스위스인 곰퍼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역시 다르다. 남부의 항구들에서 영국 선원들 간의 경기가 이루어졌음을 주목하더라도 모든 것은 1895년 이후에야 뒤늦게 시작되었다. 축구 도입에 앞장선 것은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전통적 사회운동이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부와 중부 지방에는 체조단체들이, 남부에서는 나폴리의 항해 서클과 같은 엘리트 스포츠 서클들이 탄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영국 거류민들 사이에 일찍이 받아들여진 축구가 본토인들의 흥미를 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870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켓 클럽에서 경기를 했고, 1890년경에는 영국 사립 중고등학교에서 경기가 벌어졌다. 모든 시합에는 영국 클럽들만이 참여했다. 브라질도 사정은 같았다. 1890년부터 영국인 간의 대항전이 열렸지만 지역연합은 1900년에야 탄생했다. 엘리트주의: 초기 유럽 대륙 축구의 성격 한때 유럽에서는 영국의 스포츠를 선호한다는 것은 근대적이며 귀족적인 생활양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세기말의 사회에서 축구를 한다는 것은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독일인 선각자들이 배격하던 영국에 대한 동경심도 한몫을 했다. 축구는 드 라블리나 둘트르몽 같은 벨기에 귀족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프랑스의 귀족들은 영국에서 목격되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이유로 들어 축구를 배척했다. 어디서든 상류층 자제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1890년 무렵 프라하에서는 호화로운 차림을 한 부모들이 아들들의 경기장을 찾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1896년, 대영제국의 대사는 경기장 밖에 있었고 실업가 베른도르퍼는 경기장에 있었다. 1884년의 함부르크에서는 사업에 성공한 상류층은 의무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역 팀에 입단시켜야 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축구가 백인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규칙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자 축구를 계속한 졸업생들은 중년에 접어들었다. 선구자들은 저명한 기자들, 행정관들, 법학자들이 되었다. 세기말, 그라츠의 팀의 멤버는 대다수가 의사였다. 1910년경, 상업에 종사하는 독일인들이 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요일 휴무가 제도로 정착하면서 여유 시간이 생긴 독신자들-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은 사회 엘리트들과 교제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 사회 연합 운동의 발전스포츠가 보다 건전한 젊음을 양성하는데 기여한다는 견해가 일반화되면서 사회 스포츠 활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90년부터 빌헬름 2세는 프러시아 정부에서 경기 활성화를 위해 창설한 중앙위원회의 활동을 장려했다.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서는 위원회를 통한 민간 차원의 장려책이 고려되었다. 쿠베르탱의 위원회가 그 일례이다. 1901년 프랑스에서 제정된 것과 같은 협회들에 관한 한층 자유로운 법률들이 형식적 제약들을 보다 완화했고 클럽의 증설을 허용했다. 프랑스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을 참고하던 몇몇 선구자들의 주도로 하나둘 클럽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국인의 역할은 어디에서나 지배적이었다. 1904년부터 독일의 주요 도시들은 각각 축구 클럽을 갖게 되었는데 두 팀, 심지어 세 팀을 보유하는 도시도 있었다. 최대의 연맹인 도이처 푸스발분트에 가입한 협회들은 모두 합해 194개였다. 괄목한 만한 진일보가 이루어진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1914년, 협회수는 2000개가 넘었고 회원수는 20만에 가까웠다. 한편 벨기에의 클럽수는 1898년에 21개, 1906년에 61개였으며 스위스의 클럽수는 1900년에 20개, 1917년에 114개였다. 1896년, 파리의 인구 밀집 지역에만 25개의 팀들이 있었다. 1903년에서 1904년 사이에 프랑스의 축구는 럭비를 앞질렀다. 그러나 협회들 간에는 여전히 의견의 불일치가 지속되고 있었다. 끊임없는 분할과 기구 개편이 이를 증명해 준다. 시작된 대항전들, 영국의 절대적 우위 유럽 대륙의 클럽들에서는 다양한 운동경기들을 병행해 나가고 있었다. 흔하지 않던 대항전은 봄과 가을에 임시 경기장에서 벌어졌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선수들이 직접 골대를 세우기도 했다. 경기복은 인근 카페나 경기장에서 갈아입었는데, 비록 낡은 바지의 무릎단을 자른 것이긴 했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얼마 후 사라진 선수 모자는 경기 시작 전에 기념 촬영을 할 때에만 썼다. 정해진 일정 없이 벌어지던 시합은 우호관계를 다지려는 목적을 지녔다. 1894년, 오스트리아의 연례 대항전은 세 경기에 지나지 않았다. 퍼스트 빈은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 아홉 차례의 경기를,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열세 차례의 경기를 가졌다. 파리의 연례 토너먼트에서는 1893년 이전에 창설된 세 개 팀이 맞붙었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는 파리 토너먼트의 우승팀이 노르망디나 노르 지방의 우승팀과 대전했다. 프랑스 선수권 대회의 초기 형태이다. 국제 경기에서는 일찍부터 클럽들이 맞붙었다. 1888년, 카를스루헤는 리에주를 7대 0으로 꺾었고 프라하와 빈에게도 승리했다. 하지만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코펜하겐은 또 하나의 훌륭한 독일팀 함부르크에게서 두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에 프랑스의 선발팀을 17대0으로 완파한 덴마크 선발팀이 당시 유럽 대륙의 최강 팀이었다. 1905년, 벨기에에게 7대0으로 진 프랑스는 북서부 국가들보다도 한 수 아래에 있었다. 모두들 고대하던 영국과의 경기에서는 영국의 탁월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1899년, 옥스퍼드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던 퍼스트 빈을 15대 0, 13대 0으로 압도했다. 1906년, 프랑스도 영국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15대 0으로 패하는 마찬가지 시련을 겼었다. 1899년, 독일 역시 축구 종주국에 13대 2, 10대 0으로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했다. 여전히 거칠기만 한 축구 초창기의 축구 시합들은 이전부터 유럽 대륙에서 행해지던 럭비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같은 선수들이 뛰는 경우도 있었다. 골키퍼와 후위 수비수들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은 골로 드리블하기 위해 공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이유로 골 가까운 곳에서는, 수비수가 공을 빼앗아 걷어차기 전까지 복잡한 혼전이 벌어졌다. 로빙으로 떠오른 공은 몇 안 되는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패스는 무시되었다. 모두들 손의 사용 금지 규칙에 정신을 쏟았고 두 팔을 몸통에 붙이려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심판이 가장 세심하게 감시하는 사항이 그것이었다. 다음 시기인 1900년경에는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수비수들은 골 앞에 고정된 듯 머물렀고 다섯 명의 전위는 반드시 일렬로 늘어섰다. 경기는 격렬했다. 럭비처럼 어깨로 거칠게 태클하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1899년에는 퍼스트 빈과 크리켓의 경기가 부상자의 속출로 중단될 정도였다.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영불해협을 건너온 팀들의 경기를 보며 느끼는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들은 짧은 측면 패스를 구사하며 발의 안팎을 고루 사용했고 머리로 공을 정확하게 굴절시켰으며 움직임이 없는 상대편 선수의 주위를 자유롭게 선회했다. 유럽 대륙의 선수들은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축제 분위기 클럽들의 조직은 도시 엘리트의 사교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00년 라이프치히 클럽의 창설 3주년 행사처럼 일찍부터 창립기념일에는 리셉션이 함께 있었다. 초기에는 경기의 승패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축제나 다름없는 경기는 우호관계를 맺는 수단이었고, 경기 외적 주변사들이 최종 스코어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 1894년, 베를린 소재 한 클럽의 선수들과 후원자들은 다음날 그들과 대적할 브레메 진영을 역에서 환호로 맞이했다. 그들은 상대팀을 호텔로 안내했고 밤늦게까지 축하연을 베풀었다. 연회 시작 전과 연회중에는 축사가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에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피곤한 일이었다. 막상 경기에 출전하려니 겨우 복장을 갖출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가 끝나고 작별인사 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역을 통해 손님들이 돌아가기 전에 하루를 마감한 것은 요란한 축배였다. 모든 사회계층에 파급된 축구경기의 영향은 후에 산업도시의 소외계층 사이에서 새로운 공동체들이 형성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축구경기를 통해 참여자들은 연대의식과 축제의 기분, 다시 말해서 사회 편입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셈이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새로이 일구어내면서 축구는 근대 산업사회가 새로운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기여했다. 국가연맹들의 탄생 팀들 간의 시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상호 연결을 돕는 조직, 다시 말해 연맹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일었다. 1889년부터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영국의 본보기를 따랐다. 1895년에 탄생한 스위스의 연맹은 11개밖에 안 되는 클럽으로 대회를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F.A.에 허가를 청원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클럽들이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관장했고 축구가 도래하기도 전인 1899년에 이미 최초의 연맹인 U.S.F.S.A.(Union des Societes Francaises Sportives et Athletiques, 프랑스 스포츠, 운동 단체 연맹)가 탄생했다. 연맹은 영국의 클럽들이 별도로 조직을 갖추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인 1894년에야 축구를 용인했다. 곧이어 축구인들만을 위한 후원연맹과 리그(L.F.A.)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축구가 자율성과 단일성을 갖추게 된 것은 F.F.F.A.가 출범한 1919년에야 가능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프랑스처럼 갖가지 경기를 포괄하는 형태를 추구했다. 하지만 1912년부터 '벨기에 축구 단체 연맹(U.R.B.S.F.A)'이 축구의 자치권을 획득했다. 나치스 치하 독일의 정치구조적 문제로 독일의 연맹은 지역조직들의 융합이 실현된 후에야 뒤늦게 탄생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적 위기가 원인이 되어 단일 연맹의 구성이 늦게 이루어졌다(1904). 러시아는 1912년에야 연맹을 창설했다. 브라질은 국토의 광활함 때문에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까지 단일 연맹을 형성할 수 없었다. 중앙집권화와 행정화 많은 정기 대항전들을 주최하고 통일된 규칙을 채택하게 되면서 점차 관료주의화가 요구되었다. 그에 부응해 프랑스(1901)나 벨기에(1921)에서는 협회들에 관한 입법 요청에 부응하여 위원회들이 구성되었다. 연맹은 클럽의 내부 활동을 관장하는 법규를 마련하고 선수의 등급을 분류하는 한편, 신분증과 다름없는 허가증을 이용해 선수들을 관리했다. 그 결과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자기 지역의 경기를 관리하던 지역 리그들은 F.F.F.A.의 감독을 받았다. 연맹들의 수뇌에 생겨난 많은 위원회들은 위원회의 권한 확장을 상징한다. 1900년, U.R.B.S.F.A.는 집행위원회, 소환위원회, 스포츠위원회, 중재위원회를 각각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특별위원회들은 재무에 관여했고 아마추어주의, 보험, 선수 선발 등을 관리했으며 권리문제들을 해결했다. 연맹들은 상해를 초래한 경기장 폭력행위를 심판하고 그에 따른 징벌권과 사면권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는 사법부의 재판권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맹은 선수자격을 박탈할 권한도 쥐고 있었다. 영국에서처럼 축구는 대중화되었다 1900년까지만 해도 축구는 영국 제도를 제외한 여러 지역에서 중산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곧 사회적 전이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레이싱 클럽과 같은 몇몇 클럽들은 여전히 폐쇄적이었지만 다른 클럽들은 기꺼이 하층계급 출신의 선수들을 받아들였다. 출신계급보다 자질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연맹들과 별도로 '소바주(sauvage)'라 불리던 경기를 벌이는 서민 거주지역의 팀들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이런 팀에 참여하는 젊은 노동자들은 드물었다. 고된 노동일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경기장에서의 부상이란 실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부 지역에서 사회법이 가결되자 노동자들의 입단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1903년과 1913년 사이에 루르의 F.C.샬케 04에는 22명의 광부, 15명의 노동자, 5명의 봉급생활자, 2명의 자영업자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의 북부 지방에서는 양모 도매상 레몽 뒤블리가 1918년 이후에는 경기장에서 계층 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걸출한 선수들이 서민계층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몇의 인생 역정은 거의 신화에 가깝다. 탄광의 견습 갱부였던 코파, 리오의 변두리 공터에서 맨발로 축구를 했던 브라질의 가린차 들이 그들이다. 축구의 확산에 기여한 요소들 지도자들의 의지와 별도로 축구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요인을 몇 가지 짚어볼 수 있다. 그중 하나로 20세기에 이루어진 교통수단의 비약적인 발달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로써 축구경기는 더욱 많은 관중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경기가 벌어지는 지역은 철도망과 연계된 지역과 일치했고, 역이 있는 곳에는 축구경기장이 들어서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자동차의 출현과 함께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축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선수들은 자전거로 이동을 하곤 했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영국에서 축구 확산의 주역이라면 학교를 꼽을 수 있다. 1928년, 6000개 학교가 '잉글리시 스쿨F.B.'에 소속되어 있었다. 1948년에는 학교수가 8000이 되었다. 1930년, 셰필드에서만 160개 학교 클럽이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한편 기업 축구, 노동자 축구, 교회 축구의 발전은 새로운 사회계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1920년대부터 급격히 발전한 스포츠 언론은 기독교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축구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벨기에에는 1910년에 121개, 1940년에 1600개의 클럽이 있었다. 프랑스의 선수는 1922년에만 해도 이전의 20배가 넘는 3만 명이었고 1987년에는 18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20년 이후 축구는 세계화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축구를 도입한 것은 식민자들이었다. 따라서 영국령의 식민지에서는 일찍부터 축구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가나인 황금해안에서는 1903년부터, 이집트에서는 1918년 이후 축구가 일반화되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1912년에 최초의 클럽들이 탄생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에는 이보다 뒤늦게 전해져 마그레브 지방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1924년 이집트에서 최초로 축구를 한 이들은 아르메니아인과 이탈리아인이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20개 클럽의 유럽인끼리 경기를 가졌다. 인종 차별이 예외 없이 적용됐지만 교사들, 특히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결성한 팀 간에 경기가 벌어질 때에는 종족 간의 오래된 경쟁의식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그후, 토착민들의 연맹들이 창설되어 그들만의 선수권 대회가 마련되었다. 축구의 보급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1919년에 네 개에 불과하던 레오폴드빌의 클럽이 1945년에는 60개로 증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선수들은 대도시로 진출했다. 식민지 제국이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가연맹들이 F.I.F.A.에 가입했다. 아프리카 축구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모로코는 1970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카메룬과 이집트는 1990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한때 유럽의 감독들은 아프리카 축구의 독특한 스타일을 교정하려 했는데 이는 잘못된 시도였음이 판명났다. 중국과 필리핀에는 1914년 이전에, 타이에는 1918년 직후에 축구가 전해졌지만 아시아 축구 도입은 다른 지역에 비해 대체로 뒤늦은 감이 있다. 한편 한국과 아랍 국가들의 성장은 주목할 만하다. 국제축구연맹 1904년, 영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F.I.F.A.를 창설한 것은 유럽 대륙인들이었다. 네덜란드인 히르슈만과 프랑스인 로베르 게랭이 공동으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F.I.F.A.는 각국에 단 하나의 연맹만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국가연맹들이 F.I.F.A에 가입한 것은 무엇보다 자국 축구경기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F.I.F.A에 가입하지 않고는 외국의 클럽과 경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쥘 리메가 회장을 맡았던 1921년부터 1954년 사이에 F.I.F.A.는 U.N.의 발전에 비견할 만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취리히에 설립된 F.I.F.A.는 1984년에 150개의 국가연맹, 다시 말해 5200만에 달하는 선수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동안 망설임이 있었으나, F.I.F.A.는 국가들의 합의에 따라 적용되던 원칙들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등 독립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국가들의 가입자격을 박탈했다. 로베르 게랭은 F.I.F.A.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 선수권 대회의 창설을 계획했다. 처음에 이 대회는 올림픽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는데, 머지않아 F.I.F.A.가 올림픽의 축구 토너먼트를 관장하게 되었고, 후에는 협회 고유의 대회를 창설했다. 이로써 1930년 제1회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제3장 근대 축구를 향하여 축구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그 규칙들의 단순함으로 이해된다. 경기의 규칙과 그 변천 1885년 이전에 대영제국 밖으로 축구를 수출한 영국인들은 자국에서 규정된 규칙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규칙들이 통일성을 지녔다거나 완성된 체계를 갖췄던 것은 아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영국을 추종하는 경향을 저지하고 경기를 자국화하려 시도했지만,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영국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벨기에와 스위스 연맹들은 1886년 국제평의회가 제시한 영국 규칙을 주저 없이 자신들의 정관에 도입하려 애썼다. 프랑스에서는 1893년부터 U.S.F.S.A.가 영국의 규칙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영국과의 경기를 열망했으므로 이러한 해결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F.I.F.A.도 이러한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 초기의 심판들은 규칙조차 잘 모르는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었다. 경기장 위에서 그들의 행동은 우유부단했고 자장들과 설전을 벌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축구와 럭비를 혼동하여 난폭하게 상대를 향해 돌격하거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는 선수들이 경기에 참가한 때라면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1925년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정해지면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옛 규정에서는 공격수와 골키퍼 사이에 두 명이 있을 때 적용되었지만, 새 규정에서는 한 명만 있어도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축구, 덕성의 수련장? 사회의 지배층은 축구경기장을 이상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특별한 장소로 생각했다. 그런 만큼 축구선수는 신중함과 고귀함으로 가득한 품행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에 관련해 언론은 영국의 대학팀인 코린티언스가 선보인 고상한 경기 자세를 칭찬했다. 코린티언스 선수들은 심판의 판정에 불복한다거나 난폭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세기 초의 스포츠 관련 인쇄물을 읽어보면 교육이 축구경기의 지상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축구는 도덕적 행동의 전파수단이어야 했고, 의지, 용기, 연대의식, 품성을 단련시키는 학과목이었다. 그들은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 또한 이러한 덕성을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영국의 페어 플레이 정신을 강조하던 언론인들과 연맹의 책임자들은, 경기장에서 예절과 공명정대함을 존중하고 그러한 미덕을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젊은이들에게 역설했다. 이런 면에서 스포츠와 실생활이 동일시되어야만 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축구가 실생활의 규칙을 외면한 채 발전할 수는 없었다. 승부에 걸린 이득이 늘어나면서 이제 본연의 정신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전투 축구와 특공대를 격찬하는 상황에서 페어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훈련의 발전 유럽 대륙의 축구는 재빨리 영국 축구의 특성을 받아들였다. 승패 여부에 달린 이득의 증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에서 이기려는 의지, 결국 정예 멤버를 양성하여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팀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감독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부분 영국인이던 감독은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았고 주장의 지위를 빼앗았다. 감독은 신체단련을 강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프로 선수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다. 초기에는, 경험론에 따른 건강 관리와 폭음폭식 금지에 기초하는 단순한 영양관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기에 대비한 훈련은 점차 과학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선수 하나하나의 근육조직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미쳤다. 1920년대부터 정신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지식 수준에 비추어 뒤처진 것임에 틀림없다. 감독들은 선수들이 각자가 맡은 위치와 역할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다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주요 팀들은 최소한의 결함이라도 간파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유능한 심리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아프리카에서는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주술사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다. 회교 국가들에서는 경기장에서 기도를 올리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선수들은 후원자들이 양초를 밝히는 가운데 성호를 긋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적이고 전술적인 훈련이다. 거친 경기에서 기교의 경기로 같은 슬로건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었다. 발전할 것, 종주국인 영국의 기술적 수준에 접근할 것. 경기 자세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도해와 사진을 통해 그것을 분석하는 교본이 널리 읽혀졌다. 이러한 지침서들은 슛을 정확하게 하는 법, 상대를 제치고 드리블하는 법, 공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설명해 준다. 프랑스의 어느 축구 전문가는 헤딩을 이용한 플레이를 만류하기도 했다. 이 방면에서 영국이 너무도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왕년의 위대한 선수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축구에 관한 국가적 명성에 따라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되었고, 그다음이 헝가리인들이었다. 점차 경기방식이 진보했고 힘보다는 기교가 우위를 점했다. 이제는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을 세워놓고 그사이를 헤치고 나가며 드리블 기술을 연마한다. 그리고 마네킹을 세워놓고 끊임없는 연습을 한 결과, 프로 선수들은 수비벽 너머로 프리킥을 성공시킬 수 있다. 축구는 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었다. 오늘날, 공터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차며 축구 인생을 시작한 스타들의 신화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직업이자 확고한 사업으로 자리잡은 축구는 학교와 스포츠 연구 집단을 통해서 교육된다. 수비 위주 경기로의 변화 전술적 차원에서 각 선수의 위치 배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유수한 팀들은 연습을 통해 여러 조합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수정해 나갔다. 상대의 수비벽을 돌파하고 공격을 차단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결과, 선수들의 특별한 경기장 배치 형태를 얻어냈고 모든 팀들이 그 형태로 적응하게 되었다. 1925년의 오프사이드 규칙 개정으로 'W.M.'이라 불리던 시스템이 두각을 나타내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경기 결과에 내걸린 보상이 늘어나자 수비에 치중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무엇보다 골을 주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다양한 전술적 배치들이 창안되었다. 스위스인 감독 라팡의 '빗장(verrou)' 에레라의 이탈리아식 '카테나치오(catenaccio)'는 프랑스의 철저한 방어 위주 전략의 기초를 이룬다. 이러한 시스템들 아래에서 두 번째 중앙 후위, 리베로가 출현했다. 1952년,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두 명의 센터 포워드와 네 명의 후위를 배치하고 경기를 했다. 이것이, 한 수 위로 평가되던 공포의 대상 영국 팀을 상대로 두 차례나 승리를 일궈낸 4-2-4 시스템이다. 이런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감독들은 지역방어를 선호했던 반면, 다른 감독들은 공격수의 오프사이드를 유발할 수 있는 일자형 수비를 선택했다. 수비 강화는 계속되었고 1970년대 초에는 4-3-3, 심지어 4-4-2까지 출현했다. 오늘날, 몇몇 팀들은 최전방 공격수 한 명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새로운 축구는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볼 만한 구경거리는 끝났나? 중요한 것은 단지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감독들과 선수들의 신조였다. 골을 주지 않으려면 미드필드를 철저히 장악하고 상대의 위협을 원천봉쇄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전략이었다. 공격에 나설 때에는 미드필드는 물론 후위의 선수들까지 공격에 가담했다. 이후, 팀은 공격과 수비의 매순간에 전체가 참여했다. 1960년대까지 한 명의 풀백이 골을 지킨다는 것은 괴상한 광경이었지만 오늘날은 평범한 전술로 여겨진다. 1970년대 초, 토털 사커라는 이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팀은 암스테르담 아약스이다. 관객의 측면에서 이러한 경기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득점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클럽 챔피언을 가리는 유럽컵 결승에서의 득점은 1956년에서 1965년 사이에는 4.7골, 1966년에서 1975년 사이에는 3골,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는 고작 1.4골로 줄어들었다. 프랑스 선수권전의 1부 리그에 기록된 골의 평균은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4.5골이었지만 1965년 이후에는 3골 이하로 떨어졌다. 1984년∼1985년 시즌 이탈리아의 평균 득점은 2.1골이었다. 수비망이 단단해지면서 경기는 더욱 격화되었고, 심판들은 무기력증에 빠진 공격수를 위해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최종 승부의 결정에서 심판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프랑스는 공격축구를 부활하기 위해 세 골 득점시 보너스를 주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입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전문 선수에서 만능 선수로 세기 전환기에는 경기장에서의 역할 전문화가 공장에서처럼 엄격히 이루어졌다. 맡은 포지션에 따라 부여되는 가치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가장 거친 선수들이 풀백으로 포진했고, 그런 탓인지 이들은 도급노동자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다. 1939년 이전의 에티엔 마틀러와 1950년대의 로제 마르슈가 그러한 선수들이었다. 중앙 후위의 이미지는 한층 돋보였다. 중앙 후위는 위치감각을 지닌 수비의 관제탑이었다. 세 명의 최전위는 섬세함, 창의력, 민첩함을 오랫동안 독점했다. 영사기들은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향했다. 이러한 부류의 선수들 중에서, 1954년 월드컵에 등장한 오스트리아의 축구 대가 스토야스팔, 포수 퐁텐, 페인트 모션을 하고 슛을 날렸던 드리블러 펠레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W.M.진형의 시대가 끝나면서 그때까지 불분명한 역할을 했던 하프백과 이너(제일선의 다섯 사람의 공격수 중, 중간의 센터 포워드와 양쪽 윙의 중간에 있는 공격수: 역주)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크루이프, 플라티니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인데, 그들은 게임을 이끌어가며 득점까지 올리는 수훈자들이었다. 오늘날, 선수들의 모습은 점점 더 획일화되는 경향이다. 오랫동안 골키퍼들은 구경거리가 될 만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곡예사와 같은 플레이로 박수갈채를 받은 몇몇 골키퍼들은 저명 인사의 반열에 올랐다. 1918년 이후 프랑스의 샤리게와 스페인의 사모라, 1950년대에 활약한 소련의 야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후에는 엄격하고 절도 있는 플레이가 각광을 받았다. 감독, 위태로운 직책 축구 감독이 단지 축구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엄청난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감독은 팀 관리자들이 클럽에 할당한 목표를 어떻게 해서든 달성해야 한다. 그렇지만 축구라는 것은 막대한 투자와 시장조사가 결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축구의 결과에는 팀의 응집력, 다시 말해 팀의 능률을 좌우하는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와 무엇보다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후원자와 구단주는 걸핏하면 감독의 경질을 들고 나온다. 자신만의 직감, 신념, 고지식함에 따라 팀 관리자들은 축구에 정통한 전문가, 전제적이라 소문난 트레이너, 기적을 일궈낸 마술사라 평가받는 특별한 인물들―남아메리카의 몇몇 인물들이나 루마니아의 스테판 코바치스 같은 인물들―을 영입한다. 한 국가의 축구에 바쳐지는 명성은 그 대표팀 감독에게도 파급되었다. 영국인의 뒤를 이은 아르헨티나인과 브라질인, 1970년 이후의 네덜란드인, 그리고 유고인과 서부 유럽인이 그러한 경우이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독일에서나 프랑스에서나 1년 내내 감독의 경질이 계속된다. 영국 패권 이후, 서열의 변동 1910년까지는 영국의 아마추어 팀들이 유럽 대륙의 모든 팀들을 격파했다. 1906년과 1910년 사이에 프랑스는 15대 0, 12대 0, 10대 1로 영국에 졌다. 1908년에 2대 0으로 진 덴마크만 그런대로 체면을 살릴 수 있었다. 191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영국이 국외 경기에서 몇 차례 패배를 맛본 적도 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에게 졌고 1921년에는 프랑스에게도 2대 1로 졌다. F.A.는 프로 선수들을 투입했고 영국의 무적행진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에 열린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올림픽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1930년의 제1회 월드컵을 차지하며 훌륭한 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영국은 그 경기들이나 이후의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최고가 어떤 팀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1934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월드컵을 차지한 이탈리아와 명성을 날렸던 오스트리아의 대표팀인 분더팀(Wunderteam)도 훌륭한 팀들이었다. 1953년, 영국의 홈경기에서 영국의 무적행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환상의 플레이를 보여준 헝가리 팀이었다. 푸스카스와 코치시스를 비롯한 뛰어난 선수들이 영국을 6대 3으로 격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헝가리 팀은 이듬해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더 많은 점수차로 영국을 제압했다(7대 1). 1958년부터 1970년까지 헝가리 팀의 뒤를 이은 것은 펠레가 있는 브라질 팀이었다. 그 이후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군림했고 마라도나와켐페스를 지닌 아르헨티나가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루메니게를 앞세운 독일도 그런 팀들에 만만치 않게 대항할 수 있었다. 제4장 스포츠 외적인 목적 최초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직접 협회 관련 사무를 수행했다. 그후 축구화를 벗은 제1세대 선수들이 클럽에 남아 사무를 보게 되면서 본격적인 팀 관리자가 탄생했다. 협회들의 관리를 맡은 유력 인사들 이제 축구 클럽 위원회 안에 존재하는 서열구조는 클럽 자체를 포함하는 사회구조 자체의 서열구조와 일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작용하는 총체적 변천에 발맞추어 변화해 나갔다. 1920년을 전후해서만 해도 상당한 고위직을 점하고 있던 교사들은 이제 소규모 사업주들과 자유 직업인들에게 밀려 보다 하급 지위로 떨어지거나 완전히 도태되었다. 1930년대부터 대도시 축구 클럽의 관리는 사업가나 대규모 도매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의사나 보험회사 간부 같은 자유업 종사자들은 제2선으로 물러났다. 모두 축구를 사랑한 이들이었지만 저마다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보다 하급의 실무들은 고용인이나 육체노동자가 맡았다. 오늘날, 유럽의 대규모 클럽들의 지도부에는 실업계의 거물들과 다국적 기업들(아인트호벤의 필립스, 튜린 유벤투스의 피아트)이 군림하고 있다. 스타디움 건설에 대한 열정 축구에 후원자들이 개입한 것은 유력인사들의 경기장 양도를 통해서였다. 프랑스 북부와 보주 지방의 섬유사업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독일에서는 겔젠키르히엔의 한 기업이 샬케 04 클럽에게 기업 소유 경기장 중 하나를 99년 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양도했다. 1928년, 클럽은 4만 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을 건설했다. 기업가들의 뒤를 이어 경기장 부지를 내준 것은 자치단체들이었다. 이처럼 축구는 광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좁은 국토를 지니고 있는 스위스만 보아도 이미 1951년에 경작 가능한 평지에 400개가 넘는 스타디움을 지니고 있었다. 대규모 관중석을 갖춘 스타디움 건설에 대한 열정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휘몰아쳤다. 1924년의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콜롱브의 스타디움은 당시 4만 5천밖에 수용하지 못했지만 우루과이 월드컵의 결승전은 10만 명을 수용하는 신설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브라질은 이를 능가했다. 20만의 관중석을 지닌 리오의 마라카나 스타디움은 글래스고와 런던의 초대형 경기장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거대화의 시기가 지나자 쾌적한 설비, 특히 지붕이 덮인 관중석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런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관중들은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쾌적함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옛날의 관중들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견뎌내야 했는지! 서부 유럽에서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규제에 부응하여 신축 스타디움의 관중석을 모두 좌석으로 메웠다. 카이로(13만 석), 라고스(7만 석), 알제(8만 석)등 아프리카의 대지에서도 근대성을 상징하는 축구의 성소들이 솟아올랐다. 카톨릭 축구와 노동자 축구 세기 전환기, 젊은이들의 교육을 소명으로 삼는 기관들은 예외 없이 축구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카톨릭 교회가 축구를 장려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900년 이후, '프랑스 체육 운동경기 선도 연맹(F.G.S.P.F.,Federation de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은 자체의 대항전을 창설했다. 덕성과 신앙심의 교육장이 되고자 했던 선도회의 팀들은 애타주의와 박애주의를 가르쳤다. 1905년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F.G.S.P.F.와 U.S.F.S.A.(프랑스 스포츠·운동단체 연맹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종말을 고했다. F.I.F.A.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단체였던 U.S.F.S.A.는 카톨릭계의 경쟁상대인 F.G.S.P.F.로부터 외국 팀과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박탈했다. 또 하나의 연맹, 세속 학교 졸업생들의 협회(petites A)도 카톨릭 축구와 대립했다. 이를 통해 세기 초의 프랑스 축구에 미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많은 선도 팀들은 1919년의 F.F.F.A.와 신설 카톨릭 연맹에 가입했다. 1955년, 카톨릭 선수들의 수는 6만 5천에 달했다. F.G.S.P.F.는 축구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 뒤를 이은 노동자 축구 역시 자체적인 연맹들의 내부에서 발전했다. 연맹들은 노동당, 노동조합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세 축을 구성했다. 그 본보기가 된 것은 세기 말엽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이었다. 프랑스는 1905년경에야 이러한 동향을 뒤따랐다. 독일에서 노동자 축구 선수로 활약한 이는 1920년에 5만명, 1930년에는 14만 명에 이르렀다. 함부르크나 베를린과 마찬가지로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도 훌륭한 팀들이 즐비했다. 드레스덴의 팀은 노동자 계급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1924년 파리에서 원정경기를 가졌다. 프랑스의 노동자 축구는 독일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소박한 형태로 머물러 있었다. 노동자 축구는 주로 북프랑스와 파리 지역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꾸려 나가던 노동자 축구는 1933년 이후에 독일에서마저 쇠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축구는 민중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스파르타키아드는 노동자 축구에 국제 경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축구: 이데올로기의 매개체 결국 축구계는 이데올로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F.G.S.P.F.의 사무총장 샤를 시몽은 '프티트 아'와의 투쟁을 행동노선으로 정했다. 1914년 이전까지 남프랑스에서는 축구를 카톨릭 행사로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 학교들은 럭비를 채택했고 럭비는 종교와 무관한 경기로 받아들여졌다. 1921년, 쿠베르탱은 사회 평화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마을마다 하나씩 축구 클럽을 창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노동자 운동의 창설자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적대계급들과 같은 선수복을 입기를 바라지 않았다. 평등이란 요원한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공장에서 강요되는 작업 리듬을 연상시키는 치열한 경쟁의 규칙들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공고히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급선무였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 노동계가 분열하고 모스크바에서 제2의 국제연맹이 탄생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 스포츠는 루체른의 사회주의 연맹을 고수했다. 갈등은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소련 팀이 독일 순회 경기를 가졌을 때에는 양측의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이로써 1928년에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탈아마추어리즘의 확산 유럽 대륙과 남아메리카의 중산계급은 축구의 대중화를 경계하는 듯했다. 아마추어 윤리에 물들어 있던 이들은 영국의 전철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전쟁 전까지 러시아의 클럽들이 육체노동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흑인, 메스티조, 빈곤층이 클럽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브라질 역시 이러한 본보기를 철저히 따랐다. 이러한 엄격함은 전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이유에서 팀 운영자들은, 운동장비 구입비, 회비, 교통비를 선수 자신이 책임지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경기 승패에 걸린 이득, 이동 기간, 특히 부족분에 대해서, 지원금을 지급해야 했다. 1920년경부터, 대부분의 국가연맹들은 자금의 투입을 제한하기 위한 세세한 규정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920년, 벨기에는 조정위원회를 창설했고 독립 선수에 관한 규약을 명시했다. 이 규약은 독립 선수에 대한 일종의 추가급 지불을 허용했다. 선수들의 이적에는 일반적으로 잇속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F.F.F.A.는 일단 전속한 선수가 원래 팀에서 뛸 수 없게 규제하는 라이센스를 만들어 이적을 억제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탈아마추어리즘은 1920년대 전반을 관류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힘겨운 정착 영국 선수들과, 그후의 체코, 유고 선수들이 프랑스에서 활동한 목적은 돈이었음을 모두들 알고 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파리를 떠나 세트로 향한 평범한 선수가 보다 한가로운 일자리를 얻고 축구선수로서 후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것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영국이 경험한 과정이 시작되었다. 두 부류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준엄한 금지조치들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전적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스포츠가 직업이 될 경우 그것이 사회에 미칠 혼란을 염려하며 스포츠의 직업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예축구를 옹호했던 이들은 축구를 바로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제 순환에서처럼 고용주인 운영자와 봉급생활자인 선수들이 생겨나면 상황이 명확해진다는 것이었다. 1930년 이전에,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며 오스트리아(1924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가 결단을 내렸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각각 1931년과 1933년에 그 뒤를 이었다. 프랑스는 1932년에 이러한 대세를 받아들였다. 사실상, 프로페셔널리즘은 아무것도 명확히 하지 못했다. 공적인 기관에서 결정한 봉급이란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더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규정들은 끊임없이 왜곡되었다. 오늘날에는 하부 리그의 지역 선수권전에서조차 보상금이 규정화되어 있다. 새로운 차원: 쇼비니즘과 국가주의 축구는 인근 마을들 사이의 케케묵은 경쟁의식을 되살렸다. 마을들 간의 경기들은 대부분 비이성적인, 조상 전래의 반감을 해소하고 패권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편으로 전통적 대항전들은 지나친 감정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으므로 만일에 대비해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우발적 폭력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쇼비니즘은 '훌리가니즘(hooliganism)'이 아니다. 하나의 도시에 여러 개의 클럽이 있을 경우―이를테면 튜린의 유벤투스와 토리노, 밀란의 A.C.와 인터―처럼 경쟁의식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대립에 기인한 것일 때, 개신교인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카톨릭교인 셀틱의 경우처럼 경쟁의식이 종교적 갈등에 기인한 것일 때, 그 격정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쇼비니즘은 국제경기에서는 국가주의를 자극했다. 응원하는 사람들은 자국의 국가를 들으며 벅찬 가슴을 느꼈던 것이다. 관중들은 국가를 따라 합창하기도 했다. 독일 연방 팀과 같은 몇몇 팀들은 선수들까지도 국가를 따라 불렀다. 남아메리카 사람들과 그들 대표 팀의 일체감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195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게 겪은 패배는 브라질 국민에게 국가적 비극이었다. 반대로 1970년의 대멕시코전 승리는 축구를 중심으로 한 유례 없는 국민적 단결을 이끌어냈다. 리오에서 범국민적 행사를 개최해 축하한 이 승리는 가난한 나라의 복수처럼 여겨졌다. 경기장에서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1964년,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320명의 사망자를 초래하는 폭동으로 끝났다. 정치의 개입 가장 작은 마을 단위에서도 스포츠 협회는 명사들의 대결장이 되었다. 스포츠 협회가 권력에 이르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공식 표명을 통해 팀의 소속 도시, 팀의 대표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려 노력하던 명사들은 컵과 같은 주요 대회에서 팀이 승리할 때 비롯되는 이득을 거두려고 애썼다. 왕, 여왕, 대통령 들은 컵의 결승전에 참석해 유명 선수나 팀 운영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스탠리 매튜스는 엘리자베스 2세의 후의를 입어 스탠리 경이 되었다. 시장들 또한 시의 축구보조금을 결정할 때 선거에 미칠 영향을 검토해야 했다. 축구의 정치화는 한층 더 직접적인 양상을 띠기도 했다.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는 지역의 경쟁 클럽인 에스파뇰과 레알 마드리드에 대항해 오랫동안 반프랑코주의를 표방했다. 그들의 경기는 당시 체제가 가두에서 벌어지는 것을 막았던 정치적인 경쟁을 대리하였던 것이다. 카탈루냐인은 수상 카레고 블랑코의 암살보다 1974년 레알에게서 거둔 5대 0의 승리를 진정한 정치적 전환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혁명세력은 선수들의 명성을 이용했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세력은 자신들을 알리고 집권체제를 와해시키기 위해 디 스테파노를 납치, 감금했다. 축구, 갈등의 원인인가 평화의 전달자인가? 초창기의 F.I.F.A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국제 경기들은 국가들 간의 관계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정치적 관계가 스포츠 관계를 결정했고 그 역도 성립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1월 11일에 프랑스와 벨기에의 기념 경기가 벌어졌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이는 두 국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을 기리는 경기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기들은 오랫동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펼쳐졌다. 예를 들어 1952년 콜롱브의 스타디움에는 프랑스를 응원하는 한 관중이 수용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1969년의 월드컵 예선 경기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외교관계 단절을 초래했다. 1930년, 우루과이는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자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축구대회를 창설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이 월드컵을 통해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 하자 민주국가들은 대회 참가 거부 캠페인을 벌였다. 프랑스의 좌익은 경기 참가를 극구 고집하는 극우파와 대립했다. 네덜란드의 선수들은 비델라 장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 제5장 근대 축구의 모순 축구의 역사에서 최초의 세계 선수권 쟁탈전은 올림픽의 일환으로 치러졌다. 최초의 불완전한 경쟁: 올림픽 더할 바 없이 소규모로 시작된 1900년의 파리 대회를 시작으로 하여 1914년에 이르기까지 올림픽 토너먼트에 참가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영국은 두 차례에 걸쳐 덴마크를 압도했다. 그리고 1920년, 14개 팀이 앙베르에 모였고 벨기에가 우승했다. 4년 후에 거행된 파리 올림픽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로 특징지을 수 있다. 먼저, 아마추어리즘을 둘러싼 문제가 불러온 혼란이었는데, 영국이 자격 없는 아마추어들을 비난하며 참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우루과이 선수들의 멋진 활약과 우승으로 그들은 명실공히 세계적 수준의 축구를 보여주었다. 1928년, 우루과이가 또 한 차례 우승한 후 F.I.F.A.는 자체의 축구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아마추어로 출전자격을 제한하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축구의 선양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규정이 제대로 준수되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규정을 준수해야 할 연맹들이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팀을 출전시켰던 까닭이다. 이러한 경향은 민중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들이 출전시킨 선수들이야말로 사실상 프로 선수들이었다. 1952년, 우승을 차지한 헝가리는 당시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마침내 I.O.C.는 위선에서 벗어나 젊은 프로 선수들을 포함하는 팀들을 허용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1984년에 챔피언이 되었다. 월드컵의 부상 1930년의 토너먼트는 유럽 최고의 팀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치러졌고 주최국이 영광 없는 우승을 차지했다. 1934년,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에게 유리하도록 규칙을 조정할 정도로 경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8년, 나치 정권은 그때까지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분더팀의 참가를 방해했다. 당시 유럽 전체에 팽배해 있던 긴장을 반영하는 이러한 어려운 국제상황을 경험한 후 월드컵은 세계 축구의 대축제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50년, 브라질은 20만 석의 스타디움을 건립했다. 4년 후, 명성이 자자했던 헝가리 팀의 예기치 못한 패배는 1950년 브라질의 패배와 마찬가지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958년 대회는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로 특징지워진다. 뛰어난 팀이었던 프랑스 대표 팀을 압도한 브라질은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선수들로 구성된 것처럼 환상적인 축구를 선보였다. 브라질이 우승하자 브라질 대통령은 국가적 경축일을 공포했다. 1962년과 1966년에는 지나친 폭력이 대회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1970년, 아프리카의 참가로 월드컵의 세계화가 강조되었다. 1954년처럼 1974년의 결승전에서도 최고의 팀이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주최국인 독일이 네덜란드를 꺾은 것이다. 1930년 이후 열린 11개 대회 중 5개 대회는 개최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1982년과 1986년, 월드컵은 수억에 이르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중 3000만을 차지했던 프랑스인들은 자국 팀과 독일의 준결승전 경기를 긴장 속에 지켜보았다. 유럽 국가 컵 그때마다 당시 사회의 관심사가 축구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영웅적인 시대를 살던 관중들은 더 이상 친선경기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실질적인 쟁취대상을 둔 쟁탈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으로 매년 11월 11일에 열려왔던 프랑스와 벨기에의 친선경기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사라졌다. 1916년, 라틴 아메리카는 대륙 컵을 창설함으로써 혁신에 앞장섰다. 1927년부터 중부 유럽의 몇몇 국가들도 쟁탈전을 창설했다. 1955년, 유럽 연맹은 1958년부터 유럽 국가 컵을 조직해 나갈 U.E.F.A.를 창설했다. 유럽 국가 컵은 동부 유럽 국가들과 협력한 프랑스의 주도하에 17개국이 참여하는 소규모 대회로 시작되었다. 처음에 영국, 서독, 이탈리아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2년에는 참가국수가 29개국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으므로 일단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후 모든 국가들이 이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1984년 대회를 주최한 프랑스는 1968년 이후 유럽 국가 선수권전으로 명칭이 바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말에 창설된 아프리카 컵은 현재 이집트, 세네갈 등지에서 상당수의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퇴조하는 국내 선수권전과 컵 거의 모든 국가연맹들은 영국에서 행해지던 두 가지의 시합 형태, 컵과 선수권전을 채택했다. 프랑스 컵은 1917년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와 같은 방식의 선수권전은 1932년∼1933년 시즌에 생겼다. 여러 지역 선수권전에 관중들이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에 프로페셔널리즘과 함께 현재의 방식을 도입해야만 했던 것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경기장을 찾는 관중의 발길이 다시 뜸해지기 시작하자, 축구의 열기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의 1∼2위 팀들이 참가하는 대항전을 창설한 중부 유럽은 이러한 발상에 본보기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1949년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선수권전의 우승자들이 격돌하는 라틴 컵이 창설되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각 국가연맹들은 국내 경기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부적 수단들을 강구하는 데에도 주력했다. 이러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독일의 클럽들은 토요일 오후에 경기를 벌인다는 대책을 들고 나왔다. 프랑스는 야간경기를 실험적으로 운영했고 중립 경기장에서 치르던 컵 경기를 중단했으며, 동절기에는 경기를 벌이지 않았다. 또한 아마추어 팀들을 포함한 하부 리그 소속 팀들의 편성을 수시로 재조정했다. 되살아난 흥미: 유럽 클럽컵 몇 년 지나지 않아 클럽컵 쟁탈전은 월드컵에 필적할 만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더욱이 항공 교통의 일반화로 경기 구역의 꾸준한 지리적 확장이 가능했다. 클럽 챔피언들이 경기를 벌이는 유럽 클럽컵 이후로 쟁탈 목표가 없는 국제 경기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텔레비전의 덕택으로, 자국 국민의 염원을 짊어진 각 대표 팀들은 축구 팬들의 가슴에 국가대표 팀으로서 자리잡았다. 랭스와 이후의 생테티엔이 그러한 팀들이었다. 유럽 클럽컵은 막대한 관중들을 끌어들였고 유수의 클럽들은 유럽 클럽컵을 목표로 끊임없는 투자를 했다. 축구경기 관람의 국제화가 이루어졌다. 밀란, 튜린, 리스본, 레알, 암스테르담 아약스, 바이에른 뮌헨, 리버풀의 선수들은 전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처럼 대단한 성공에 영향을 받은 U.E.F.A.는 유럽 클럽컵말고도 두 개의 대회, 즉 컵 우승팀 대항 컵과 UEFA컵을 서둘러 마련했다. 1960년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 형태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몇몇 상위 클럽과 이들을 제외한 다수 클럽의 격차와 관중수로 표명되는 국가 선수권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하락은 새로운 방식의 창안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금권의 침입 축구는 유희적 성격을 그대로 보존하는 한편, 또 하나의 경제주체로 새로이 자리매김을 했다. 경비 충당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했던 경기수익금은 선수들을 고가에 사들이고 봉급과 보상금을 지급하는 데에도 쓰였다. 경쟁의 법칙으로 프로 선수들의 몸값은 천장부지로 치솟았다. 예를 들어 1928년, 잭 드 볼턴은 10890프랑이라는 기록적인 액수를 조건으로 이적했다. 1960년 이후, 무한한 재력을 지닌 이탈리아와 스페인 클럽들 때문에 선수들의 몸값이 급등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클럽들은 유럽 최고의 선수들(크루이프, 플라티니, 루메니게…)과 마라도나와 같은 남아메리카의 스타들을 끌어들였다. 1987년에서 1988년 사이 마라도나의 수입은 1000만 프랑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록 나폴리의 관중수가 늘었다 하더라도 클럽의 예산은 그같은 경제적 충격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도 1986년 당시 가장 좋은 대우를 받던 선수는 한 달에 70만 프랑까지 벌어들였음을 감안하면 가장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나라는 프랑스라 할 수 있다. 1989년에 시행된 재정 감사에 따르면 스트라스부르 레이싱 클럽의 부채는 8000만 프랑에 가까웠던 것이다. 유명 선수의 이적을 주선하는 중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엄청난 수수료도 이에 한몫 했다. 브라질 선수 피타가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을 때, 세 명의 중개인이 챙긴 금액만 무려 77만 프랑이었다. 오늘날 광고, 스폰서, 후원자의 개입, 도박사업의 지원, 시보조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존재한다 해도 재정은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다수 국가에서 축구는 재력을 바탕으로 존속하는 것이다. 경기의 중계: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축구와 그 바로 뒤를 이어 탄생한 스포츠 신문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었다. F.I.F.A.를 창설했을 당시의 로베르 게랭은(르마탱)의 기자였다. 1919년, 독일에서 벤제만의 발기하에 창간된 (키커)는 오직 축구 관련 기사만을 다뤘다. 프랑스에서는, (레코 데 스포르)나(르 미루아르 데 스포르)의 주요 기자들이 독일어 교수 자격자였던 가브리엘 아노처럼 왕년의 선수들이었다. 1925년경, 럭비와의 오랜 경쟁 끝에 축구는 주도권을 차지했다. 노동자들이 읽던 몇몇 격주간지들은 모든 지면을 축구에 관한 것으로 메웠다. 노동자들의 문화는 축구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양식으로 삼았다. 1920년부터 대중지들의 지면 위에 자리를 잡은 축구는 1960년부터는 보다 덜 대중적인 기관지들의 지면 위에도 입지를 마련했다. 1920년대 말에서 1950년대 말까지는 라디오 중계방송의 황금기였다. 1958년까지도 스웨덴에는 독창성과 과감성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18명의 브라질 라디오 리포터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라디오는 '다중(multiplex)'보도를 통해 그 역할을 연장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컬러 텔레비전의 출현은 텔레비전의 승리를 고했다. 이후, 여러 방송 채널들은 상당한 금액을 지급하고 경기중계권을 구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여섯 개의 방송 채널이 매주 일요일에 총 18개의 경기, 즉 1년에 1500시간이나 축구경기 중계에 매달리고 있다. 1990년 월드컵의 경우 150개국이 R.A.I.(이탈리아의 방송사: 역주)가 생방송하는 104시간의 경기내용을 전파에 실었다. 변화하는 축구 클럽의 역할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 축구 클럽은 오랫동안 초창기의 특징을 보전해 왔다. 최소한으로 제한된 조직, 한정된 코칭 스태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지역 후원자나 축제 준비 자금에서 끌어들인 재정자원, 그렇지만 클럽은 음악, 성악, 9주희(방망이 모양의 기둥 9개를 공으로 쓰러뜨리는 놀이: 역주)등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모임을 대체하며 가장 활발한 사교형태로 자리잡았다. 축구는 경기의 결과에 따라 한 지역에 소속한 여러 마을 사이의 서열을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 지역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축구 덕분에 마을의 평판이 뒤바뀌곤 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군소 클럽들까지도 소모임적 특성을 버리고 경영의 시대에 진입했다. 선수복 위에는 광고가 등장했다. 최고 결정기관에서는 유급 코치의 고용을 의무화했다. 선수들이 보상금을 받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 유대가 점차로 느슨해져 갔던 클럽의 전통적 정신을 희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오래된 추억을 되씹던 초창기 축구인에게는 절망적인 일이었지만 지역 축구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하나의 거대한 기업: 플루미넨세 클럽 오늘날의 몇몇 클럽들은 축구와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조직과 자본을 지니고 있다. 리오의 플루미넨세 클럽은 축구 클럽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무와 내부적 결합을 공고히 하고 자본을 흡수하거나 투자하는 것이 목적인 대다수 직원의 업무를 구분해야 했다. 플루미넨세 클럽은 코치, 심판, 의사, 영양사, 안마사, 요리사 들에 이르는 대규모 군단의 봉급을 지급하고 있다. 리오에 있는 본부의 직원들은 클럽 소유인 다른 재산의 관리도 책임진다. 대형 체육 센터, 공원, 고급 무도장, 식당, 사우나, 이미용실 등이 이에 속한다. 클럽은 서점과 다른 스포츠 시설들도 소유하고 있다. 2만 5천 석의 미식 축구 경기장, 테니스 코트, 세 개의 수영장, 사격장 등등. 클럽 멤버들은 패션쇼, 영화,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는 혜택도 제공받는다. 클럽 체육관에는 보울링, 탁구 등을 즐길 수 있는 실내 스포츠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다. 플루미넨세는 부유층끼리 만남을 갖는 클럽이다. 엄격한 조건에 따라 가입자격이 제한되는데 선수들에 대해서도 예외는 없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일지라도 한낱 직원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교차로에 선 유럽 축구 몇 년 전부터 퇴조를 예고하는 징후들이 유럽에 나타났다. 축구를 둘러싼 고유의 열기가 사라진 것이다. 선수들과 지지자들의 밀접한 관계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지자들은 성공한 그들의 친구들 중 하나로 선수를 인식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게 하는 축구의 기능을 축소시켰다. 1950년대까지도 마을의 작은 팀들도 수백 명의 관중을 끌어모았지만 그러한 시대는 끝나버렸다. 영국의 경우, 열광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양차 대전 사이였다. 1923년의 컵 결승전만 해도 20만 관중이 경기장에 몰려들었다. 그후, 독일에서는 일요일에 경기장을 찾는 이들의 수가 급락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5년 평균 38871명이었던 1부 리그 경기 관객의 수가 1989년에는 3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거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많은 관중과 경기장 시절의 노후와 쇼비니즘이 원인이 되어 많은 폭력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훌리간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용의주도한 폭력이 출현하고 있다. 그들에게 행동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단지 축구만이 아니다. 사회·정치적 문제도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이 경기장을 찾는 인구의 감소를 초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다양한 여가활동과 한결 개인적인 스포츠를 제공해 준다. 아직까지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축구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경기장 축구가 커다란 피해를 입는 이유는 대중들이 바로 이러한 활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록과 증언 축구를 예찬한 지식인들 "왜 럭비에 열정을 표하는 지식인들이 대중이 즐기는 축구에 멸시를 보내는가?"축구 전문 기고가들은 이미 1920년대부터 이 점에 의문부호를 제기하고 있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지로두나 모루아처럼, 축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털어놓은 지식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경쟁으로서의 전쟁과 축구 1933년, 모든 국가들이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죽의 장막보다 견고한 관세와 증오의 장벽을 두르고 있는 이 세계에서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는 단체는 오직 둘, 군대와 경기팀이다. 비록 군대가 남성 편향적이긴 하지만 이 두 단체는 젊은이라는 동일 계층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둘은 젊은이들이 최고의 건강상태에 이르도록 이끈다. 군대가 젊은이에게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제복을 착용시키는 데 반해, 경기팀은 젊은이에게 확연한 빛깔의 복장을 입힌다. 또한 군대는 보호를 위해 젊은이의 신체를 감싸지만 경기팀은 그것을 노출시킨다. 이러한 등가성에는 축구의 명예에 바쳐진 이 책의 서두에서 부각되어야만 할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인류 자체와 혼동되지 않는 축구팀은 인간성을 수호하며 군대의 역할을 보충한다. 오늘날 한 국가의 평가가 군사력만큼이나 체력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만큼 축구팀은 국가 평가의 한 자료로서 역할을 맡는다. 한 국가의 정신적 건강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국가의 예술과 활동으로 표현되지만 육체적 건강은 그 국가의 군대뿐만 아니라 스포츠로도 표현된다. 요직의 정치가는 더 이상 무력을 내세우지 않고 본연의 인간을 앞세워 마찬가지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다른 어떤 선전보다 올림픽 축구에서 성과를 거둔 덕분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의 활력을 널리 알렸고 그 혜택을 누렸다... 왜냐하면 축구는 최고의 스포츠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한 모든 위대한 놀이들은 공을 이용하는 놀이들이다. 테니스, 시스테라, 당구 등이 그 예이다. 공은 생명의 법칙과 전혀 무관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공은 가장 유용한 것이다. 공은 일시적으로 지구에 떨어진 운석처럼 지상에서 일종의 치외법권을 지니다. 공은 축구화가 지닌 것과 같은 동물적 존재개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구의 법칙에 열의 없이 복종하지만 급격한 위반행위들을 범하는 지구의 가벼운 위성으로서, 공은 이 세계에서 공 아닌 다른 어떤 것도 되기를 거부하는 마술적 덕성을 지니고 있다. 축구의 보편화가 가능했던 것은 축구가 공이 지닌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팀은 지능을 지닌 시스테라의 벽이고 천재를 타고난 당구의 쿠션이다. 축구팀은 열한명 각각이 지닌 전력과 상상력으로 자립과 반동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지닌 공에 원동력을 부여한다. 손의 사용이 금지된 것은 손을 사용할 경우 공은 더 이상 공이 아니고 축구선수는 더 이상 축구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은 속임수를 뜻한다.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속을 줄 아는 두 동물, 인간과 원숭이뿐이다. 공은 속임수를 용인하지 않는다. 별들과 같은 자전만을 허용할 뿐이다. 장 지로두 (축구의 명예)서문, 1933년 194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프랑스 축구 50주년 기념 행사중 앙드레 모루아의 강연 신사 여러분, 60주년을 기념하는 날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축하행사가 열리기를 희망합니다. 뜻 깊고 바람직한 일일 겁니다. 지성의 중심지들 중 하나인 이곳은 선수들을 환영하며 받아들입니다. 철학자들은 화관을 쓴 축구선수들을 그들의 공화국 입구로 돌려보내기는커녕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아들이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작가들은, 장 지로두처럼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작가들 중의 몇몇이 옛 그리스의 시인들처럼 스타디움의 영웅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적어도 일부는 나이라는 제약 때문에 여러분들의 경기에 참여하는 기쁨을 박탈당했지만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롱사르와 그의 친구들이 사랑했던 행위를 담은 시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발길로 고운 모래를 나리고, 풀밭으로 부푼 공을 튀어 올리며... 모랄리스트들은 여러분들의 스포츠에 찬사를 보내야만 합니다. 축구는 매순간 육체와 정신의 일치를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문외한들조차도 여러분들이 경기장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이 단순한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팀의 구성원들이 힘에 넘치고, 발재주가 있고, 재빨라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성의 역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선수는 자신의 신체를 마음대로 제어하고, 기회가 오면 짧은 순간에 정확히 계산된 각도로 공을 찰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하며 한눈에 자신의 팀과 상대팀 선수들의 위치와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의 훌륭한 학습장이지요! 모든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명백히 알면서도 감정과 행동을 마음대로 지배하지 못하는 까닭에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올바르게 훈련되지 못한 신체 때문에 지성은 얼마나 많은 과오를 범하는가!"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생각과 일치하는 행동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선수는 자신의 신체와 함께 생각하며 그러한 까닭으로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보다 명확히 말해서 그의 생각이 곧 그의 행동인 것입니다. 축구경기장에서 잘 훈련된 팀이 적진을 향해 공격하는 모습을 보는 관객은 그 전진방식의 기하학에 찬사를 보냅니다. 훌륭한 형태들, 정교한 설계도들이 에티엔 랄루가 말한 것과 같은 '녹색 마술 양탄자 위에' 공으로 그려집니다. 한없이 복잡한 수학 문제들이 매순간 이루어지는 활발한 사고의 섬광 속에서 제기되었다가 해결됩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수학적 조합이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결과들을 산출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활동하는 지성, 구현된 지성입니다. 정신은 이 순종적인 탄력 있는 육체를 도구로 삼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이 있습니다. 삶이라는 찬란하고도 비참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경기장에 내던져진 채 이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을 골에 넣을 때까지, 다시 말해서 달성할 때까지 몰고 가야 하는 어려운 작업에 참여하는 것 아닙니까? 삶이라는 경기에서의 승리는 각도를 측량하고 가능성을 계산하는 지성과 아무것도 멈출 수 없고 아무것에도 겁내지 않는 신체에 달려 있는 것 아닙니까? 축구와 삶이라는 두 경기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원동력은 모두 '의지'라는 마찬가지 힘이 아닙니까? 앞서 '행동의 훌륭한 학습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그뿐만 아닙니다. 축구는 '품성의 훌륭한 학습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스포츠는 아무리 가파른 비탈이더라도 오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가 경기의 최종적인 순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키플링의 아름다운 시구를 아실 겁니다. 만일 네가 패배 후에 승리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두 위선자들을 같은 표정으로 맞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용기와 분별을 잃었을 때에도 너만은 용기와 분별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제왕, 제신, 행운과 승리가 네게 영원히 복종하는 노예가 될 것이며 제왕과 영광보다 가치 있는 결과를 얻을 것이니, 너는 하나의 인간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이 시구는 우리들 스포츠의 도덕적 가치를 이루는 미덕 중 하나를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끈기, 공격적 태도가 배제된 강인함입니다. 경쟁이 극한에 다다를지라도 규칙과 예절을 존중하는 강인함이지요. 물론 진정한 스포츠맨은 승리를 원합니다만 승리를 위해 경기를 하지는 않지요. 그는 경기의 명예를 위해 경기를 합니다. 확고한 목적을 가진 행위이자 무상의 행위라는 양면성, 이러한 스포츠의 유일무이한 특수성 때문에 사람들은 스포츠를 귀중한 교육수단으로 여깁니다. 선수들만이 스포츠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관중들에게도 축구경기는 인류가 이루어낸 위대한 광경들 중 하나이지요. 무엇보다 운집한 군중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타디움 주위를 에워싼 1만 명의 남녀, 그들이 이루는 고귀한 타원형은 서구세계의 가장 오래된 전통과 결부됩니다. 군중들 자신들이 보여주는 것부터가 대단한 광경이지요. 정치집회 역시 이처럼 민중의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기장을 메운 관중들에게는 그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호의적이며 즐거움에 가득하다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관중들은 웃고 노래하고 먹습니다. 가끔은 고함을 치기도 하고 격려를 보내기도 합니다. 슛이 빗나갔을 때에는 더없이 인간적인 탄식을 내뱉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의 열정은 결코 공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지자로 구성되고 또 대립되는 바람에 구분되는 관중들은 운명의 결정에 승복합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중세의 기마시합에서 그러했듯이 적이 곧 친구입니다. 스포츠 정신이란 기사도 정신의 근대적 변형이지요. 관객에게 스포츠 정신에 입각한다는 것은 상대편을 존중하고 상대편의 훌륭한 플레이에 갈채를 보내며 패배했을 경우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문명의 기반이 되는 미덕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영국이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이룩한 것은 스포츠 경기장의 젊은이들이 축구와 크리켓을 통해 자기 함양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스포츠가 베푸는 이러한 혜택은 반세기 전부터 우리 프랑스 관중들에게도 널리 전해졌습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격렬한 감정을 자극하는 몇몇 경기들의 심판을 보는 일이 무모한 영웅적 행위로 받아들여졌던 시기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중은 관용 있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관중의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멋진 패스, 주장의 전술, 심판의 공정함 등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시대에 스포츠는 여전히 품위와 정의, 단체행동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습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고질적으로 위험스럽기만 한 국가들 간의 반목도 스포츠의 형태를 닮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의 발전이 원인이 되어 인류가 화합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하나의 세계, 또는 구분 없는 세계'를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국가들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전히 여러 국가들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수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인류에게 선사하는 데 기여한 지역적인 긍지를, 다양한 문화를 보전해야 합니다. 선의의 경쟁이 없었다면 인류의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국제적인 경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이러한 대립이 파괴적인 전쟁의 성격을 띠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하지요. 인류의 생존이란 숙제에 대한 해답들 중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입니다. 올림픽을 보십시오.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승리를 거두고자 승리의 깃대 위에 자국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자 열망하지만, 또한 다른 국가 선수들의 훌륭한 기량에 찬사를 보내고 인체의 완벽함에 감탄하며 행복감에 젖지 않습니까. 프랑스 팀과 다른 나라 팀의 경기는 승리를 추구하는 경쟁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우의를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경기에 쏟는 비슷한 열정은 양국 국민들로 하여금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동일한 감정과 형제애를 맛보게 하지요. 결론적으로 여러분들의 스포츠를 높이 평가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팀 스포츠라는 것입니다. 괴테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겠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쉽고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단체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먼 옛날의 인간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개인이 되면서 단체행동의 법칙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국가가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국민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특정한 개인이 자신만의 광채로 빛을 내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기적인 목적만 추구한 나머지 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스포츠는 팀에 의해, 팀을 위해, 팀과 함께 경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승리를 위해 필요한 규율, 자만보다 커다란 기쁨을 주는 헌신, 집단의 우정인 동지애, 여러분의 스포츠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해서 축구는 설교도 훈계도 없이 여러분을 훌륭한 시민으로 변화시킵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선수들이 매주 녹색 마술 화폭 위에서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교훈은 바로 그것이지요. 아무도 혼자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기에 역사적인 큰 경기에서 우리는 모두 프랑스 팀의 일원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경기가 이러한 단순한, 하지만 참된 생각을 모든 프랑스인의 머릿속에 샛길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에 큰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앙드레 모루아 (강연 1888년∼1949년) (프랑스 축구 반세기) 프랑스 축구연맹 축구, 현대 문학의 테마 앙리 드 몽테를랑, 장 지로두, 알베르 카뮈를 제외하면 축구라는 테마를 자신들의 작품에 도입한 프랑스 작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진정한 스포츠 옹호자들이었다. 이와 달리 영국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축구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 자신들의 인물들을 구축했다. 축구화에 관하여 젊은 건각을 받치는 토대, 가벼움만을 접촉하는 육체 위의 유일한 두터움, 대충 손질한 소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신발. 나는, 더러운 반바지 아래 네가 잠들어 있는 뒤죽박죽이 된 가방 안에서, 너를 꺼낸다. 날카로운 대기를 가르는 심판의 호각소리, 딱딱한 경기장...나는 온 겨울을 힘겹게 보낸다. 가까이에서 보면, 약간 줄어든, 기력이 없는, 승리의 도구. 너는 내 양손 사이에 놓여 있다. 나는 듯이 달리다간 타격을 가하며 내 정신의 명령에 따라 살아 있었던 너. 째진 눈에 눈물이 맺힌 어린 용병처럼 억세지만 동시에 어린아이 같은, 위대하지만 귀여운, 위대하지만 귀여운 너! 아직까지도 기름기로 끈적거리는, 굳은 흙덩이가 붙어 있는 너. 바닷풀 냄새와 함께 솟아오르는 너의 힘, 거칠음에서 비롯되는 너의 우아함, 너의 묵직함, 너의 긁힌 자국, 너의 구리 도금, 너의 신비, 너는 그토록 고귀하기에 흙과 생명이 너를 떠나지 않았다. 복숭아뼈는 방패 중앙의 돌기처럼 팽팽한 둥근 선을 네게 남겼고, 발목은 너를 구부러뜨렸다. 너는 단 하나의 원형에 따라 주조되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네가 누구의 소유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의 뒤축 가죽을 만지는 나의 손은 존경과 다정함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감정들이 밀려들며 나는 심장 저 아래까지 불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앙리 드 몽테를랑 (올림픽), 1954년 케임브리지 골키퍼의 회상 케임브리지에서 내가 해본 모든 스포츠들 중에서, 혼란스럽기만 했던 시기의 내게 바람이 쓸고 간 빈터처럼 다가왔던 것은 축구였다. 나는 골문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와 라틴계 국가들에서 이 고귀한 기술은 항상 대단한 인기를 후광으로 누려왔다. 격리된, 외로운, 냉정한 그 역할 때문에, 일류 골키퍼는 흥분에 휩싸인 거리의 꼬마들이 추종하는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골키퍼는 가슴 설레게 하는 찬미의 대상으로서 투우사, 공군 조종사와 경쟁을 벌인다. 그의 두툼한 스웨터, 모자, 무릎 보호대, 쇼트 팬츠 뒷주머니에 꽂힌 장갑들, 이러한 것들이 그를 팀의 다른 선수들과 구분한다. 그는 외로운 독수리이고 신비의 사나이이며 최후의 수비수이다. 골키퍼가 골포스트 사이로 멋지게 몸을 날려 손끝으로,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깔려 들어오는 슛을 빗나가도록 하는 순간의 스냅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사진사들은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기다린다. 몸을 던진 그 자리에 골키퍼가 온몸을 쭉 뻗은 자세 그대로 머무는 1∼2분 동안 스타디움은 환호로 휩싸인다. 골대는 무사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 적어도 내가 젊었던 시절의 영국에서는 실력 과시에 관한 국가적 염려와 조직적인 팀 플레이에 대한 관심이 골키퍼라는 예외적인 포지션의 기량 향상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케임브리지의 축구경기장에서 내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핑계로 끄집어냈던 것이 그것이다. 아! 물론, 나는 명예롭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향긋한 잔디의 내음, 재빠른 발놀림으로 나를 향해 엷은 황갈색 축구공을 몰며 다가오던 유명한 센터 포워드, 이어지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슛, 성공적인 방어,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격, 하지만 보다 기억에 남는, 보다 신비로운 날이 있었다. 음산한 하늘 아래 골문전이 검은 진창을 이루고 축구공은 푸딩처럼 미끄러웠던 날, 시를 쓰느라 전날 밤을 꼬박 새웠던 까닭에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던 날이었다. 나는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골 네트에서 공을 꺼냈다. 고맙게도 경기는 물에 잠긴 경기장의 저편에서 속개되었다. 가는 이슬비가 그쳤다간 내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헐벗은 느릅나무 주위에서 날갯짓을 하며 울어대는 늙은 까마귀들의 소리 속에 속삭이는 비둘기 소리처럼 부드러운 비였다. 안개가 짙어졌다. 나는 우리와 경기를 벌이던 세인트 존? 크리스트? 또는 어느 다른 중고등학교의 골문 가까이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머리들만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혼란스런 소음들. 고함, 호각소리, 공을 차는 탁한 소리,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나는 골문의 수호자라기보다는 비밀의 수호자였다. 팔짱을 끼고 왼편 골포스트에 등을 기댄 채 나는 눈을 감는 쾌감을 만끽했다. 나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내 얼굴 위에 닿는 보이지 않는 비를 느꼈다. 멀리서 경기의 불연속적인 소음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내가 영국의 축구 선수로 변장한 먼 나라의 전설적인 존재라고 믿었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에 관한 시들을 창작했다. 팀의 동료들이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다른 나라들), 1988년 시합 조금 전, 브리스톨 시티는 낫츠 카운티와 경기를 가졌고 승리를 거두었다. 킥 오프가 되면서부터 레녹스는 낫츠가 질 것을 예감했다. 클럽 선수들 각각의 능력을 파악하여 예측했던 것이 아니라 관객인 그 자신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집스레 완강한 비관론은 그로 하여금 그의 옆에서 시합을 구경하던 그의 친구, 수리공 프레드 아이언망거에게 그의 예측을 알리도록 부추겼다. "처음부터 저것들이 이길 꼴상이 아니란 걸 알았어." 시합이 끝날 무렵 브리스톨이 결승골을 넣었을 때, 선수들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고 축구공은 경기장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차 날리는 안개뭉치에 지나지 않았다. 관람석 위편에 있던, 껍질이 딱딱한 돼지고기 파이, 맥주, 위스키, 담배와 같은 주말 야회의 즐거움들을 선전하는 간판들도 오후가 되자 희미해졌다. 그들은 1실링 3펜스짜리 입석에 앉아있었다. 레녹스는 공을 시야에서 잃지 않으려고, 선수들의 발에 제대로 채여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공의 행로를 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 선수들 사이로 공이 패스되는 것을 10분 동안이나 지켜보던 끝에, 그의 시선은 계단석에 빼곡히 들어찬 관객들 위에 주저앉았다. 계단석은 경기장의 양끝에 두 개의 커다란 아치형을 이루었고, 그 둘의 끝부분들은 어수선하게 서로 합쳐졌다. 보다 명확히 보기 위해서 그는 희미한 두눈을 꼭 쥔 주먹으로 힘껏 누르며 비볐다. 마치 고통이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저 열린 그의 눈꺼풀 앞에 춤추는 듯한 일련의 회색 사각형들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의 눈은 그전보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결함 때문에 축구시합이 벌어지는 동안의 그는 프레드나 주변의 다른 관객들보다 침착하게 보였다. 다른 이들은 따르라기(나무조각으로 만든 바람개비 모양의 장난감:역주)를 돌려 소리를 냈고 모자와 스카프를 흔들었으며, 경기의 판세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댔다. 그가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던 동안 낫츠의 전위 공격수들이 공세를 펼쳤고 브리스톨의 문전으로 쇄도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멋들어진 슛을 날려 관중들이 헛된 희망을 품도록 했기에 무거운 회색 하늘 아래 일제히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간 곧 멈추었다. 레녹스가 프레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가 넣은 거야? 골이 들어간 거야?" 프레드는 그의 친구보다 나이가 적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그가 가진 것들 가운데 가장 멋진 나들이용 상의와 개버딘 바지, 레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뒤로 빗어 넘긴 그의 갈색 머리는 어찌나 정성들여 머릿기름을 발라댔든지 매끈매끈했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지만 최선을 다했어.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레녹스가 다시 선수들을 눈으로 쫓을 수 있었을 때, 공다툼은 이미 낫츠의 골문 쪽으로 옮겨져 있었고, 브리스톨은 득점을 올릴 기회를 맞고 있었다. 그는 온통 짓밟힌 젖은 잔디 위를 내닫는 희미한 망치질 소리와 같은 축구화 소리를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들으며 경기장을 뛰어 누비는 선수들 중의 하나를 분명히 알아보았다. 한 무리의 상대편 선수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갑자기 공을 몰던 선수가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고 다른 선수들을 멀리 따돌렸다. 마치 관중들과 다른 선수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1초라는 시간 동안 아무도 그를 방해할 수 없는 골포스트 앞의 불가침 지역에 그가 내던져진 듯했다. 레녹스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 떡 벌어진 두 어깨 사이로 경기를 보기 위해 애써야 했다. 화가 난 그의 생각에는 그들이 자신의 경기 관람을 방해하기 위해 명백히 의도적으로 자신의 앞에 자리잡은 것 같았다. 그는 상대편 센터 포워드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낮게 깔린 구름 위에서 누군가가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슛을 하기 위하여 무거운 축구화를 신은 그의 다리를 뒤편으로 들어올렸다. 그 짧은 시간에 레녹스는 말했다. "어서 달려들어서 막지 않고 뭘 기다리는 거야, 이 무기력한 것들아! 공을 차넣게 내버려두지 마!" 자신의 영역 안에서 서성거리는 짐승처럼 수비를 맡은 골포스트 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골키퍼는 팔다리를 쫙 펴고 펄쩍펄쩍 뛰는 원숭이로 변했다간 한 바퀴를 돌며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그의 옆을 쏜살처럼 스쳐 지난 공은 골 네트에 꽂혔다. 모두들 야단법석을 떨고 난 후 진정을 되찾자 경기장 주위에 빽빽히 들어찬 관중들이 침묵에 빠진 것처럼 여겨졌다. 모두들 졸렬한 경기가 무승부로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후부터는 지역팀인 낫츠가 패배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브리스톨 시티가 그토록 쉽게 승리를 차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들, 자신들이 응원하는 선수들이 마지막 순간에 기적을 이뤄주길 바랐던 이들, 약 3만 명의 관중들은 실망과 기쁨으로 울부짖었다. 꽉찬 관중석을 넘어 그들이 쏟아져 나간 바깥 거리에서는 스타디움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흥분한 사람들이 어느 팀이 승리했는지를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펄쩍 뛰며, 폭소로 표현되는 분노인지 환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프레드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마치 무승부로 끝나는 경기를 보는 것보다는 상대편이 득점하는 경기를 보는 것이 낫다는 주의를 받아들여 적어도 돈은 아깝지 않다는 뜻을 전하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알랑 실리토 (시합),(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 1963년 경기 스타일의 모든 것 역사, 경기장의 상태를 포함한 자연조건, 고유의 문화에 따라 지역과 나라마다 특정한 경기 스타일을 지니게 되었다. 스포츠 기자들은 유명 스타의 스타일과 더불어 이러한 특색을 즐겨 다룬다. 영국의 축구 스타일: 투기적이고 거친 축구 영국 축구를 특징짓는 강력함은 경기의 성격과 전술의 사용에서 드러난다. 영국 프로 선수들의 축구는 거칠고 투기적이다. 선수들의 몸싸움은 치열하다. 차징과 태클은 거의 무자비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공을 차고 패스하는 방식 역시 강력함을 특징으로 한다. 상대편을 따돌리기 위해서 교묘한 기술, 능숙한 전진술로 기습하는 방식은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재빨리 상대의 마크를 따돌릴 수 있게 하는 전체적인 기동성, 긴 패스로 상대가 갈피를 못 잡도록 하는 방식이 더욱 중요시된다. 이렇듯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축구 고유의 기술을 그 경기가 발전을 이룩한 터전이 된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하는 남아메리카의 기술이 배우, 예술가의 기술이라 한다면 영국의 기술은 노동자, 장인의 기술이다. 예를 들어 상대편이 몰고 가는 공을 막거나 빼앗는 기술인 태클을 살펴본다면 영국의 축구선수들은 선 채로 위엄 있고 단호하게 태클을 한다. 반면 남아메리카의 선수들은 어떻게 보면 정당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인 슬라이딩으로 태클을 건다. 이러한 비교를 좀더 과장하면 남아메리카는 소매치기와 같은 간교함을 쓰는 반면 영국은, 선 채로 행하는 태클이 보여주듯, 정면으로 맞서는 공격자로서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축구 스타일: 우아함과 기품 스코틀랜드의 전통이 가장 충실하게 수용된 곳으로 빈을 거론할 수 있다. 실추된 자존심과 향수를 느끼며 오스트리아인들이 그토록 자주 거론하는 '비너 슐레(Wiener Schule, 빈 유파)', 이 유명한 빈의 축구 스타일은 화려했던 과거가 남긴 최고의 유품이다. 오늘날, 빈 축구의 스타일과 전술을 혼동하는 국외자들은 빈 축구 유파를 맹렬히 비난할 것이다. 빈은 아버지격인 스코틀랜드로부터 고상한 동작과 정확한 전술을 전수받았다. 이러한 고상함과 정확함은 섬세함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더 이상 당대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축구에 고급 문화의 품격을 부여했다. 드리블, 페인팅, 발재간, 빈 선수들은 이러한 기술들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발전시켰다. 이 경쾌한 왈츠의 고장에서 축구가 이토록 우아한, 격식 있는 양식을 지니게 된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설로 여겨진다. 오늘날은 시대의 험악함이 그러한 가벼움을 배제시키지 않았을까? 정작 스코틀랜드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에 관한 관심을 이토록 멀리까지 이끌어 나가지 않았고, 필요 없이 멋을 내는 지엽적인 동작들을 이토록 풍부하게 늘리지도 않았다. 빈의 축구가 작품을 완성하여 서명으로 끝을 맺는 일을 잊고 눈길을 끄는 전개로 늑장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빈 축구는 축구에 조예가 깊은 관객, 전술의 존재이유인 득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수준 높은 전술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관객의 눈에는 매력적이다. 이러한 과시와 전시의 양상은 오스트리아 축구에 '겉멋 부리는'이라는 형용어구를 붙여주었다. 오스트리아 축구가 이런 형용어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로 한정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축구가 유럽 최상위에서 탁월함을 발휘했던 것을 모두들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경기방식뿐만 아니라 그 방식이 일구어낸 승리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팀을 정복했고 영국 팀이 홈경기에서조차 경계하는 1순위의 팀이었던 '분더팀(Wunderteam, 경이로운 팀)'역시 겉멋을 부린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모두들 '비너 슐레'는 시대에 뒤졌고 더 이상 근대 축구의 동향과 보조를 함께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 오스트리아의 축구가 부진한 것은 과거의 전술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W.M. 진영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보이는 것은 비난받을 수 있는 태도이다. 하지만 공격축구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한다고 끊임없이 공언해온 오스트리아인들이 국가대표 팀의 수비조직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공격영역보다는 수비영역에 더 많은 선수들을 배분하는 빗장배치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빈 축구 유파와는 전혀 무관하다. 기술 숭배를 끊임없이 전파하는 빈 유파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인들이 불평하는 무미건조한 축구를 결코 권고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의 축구 스타일: 기교와 묘기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 개념의 축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지역의 축구는 여러 부차적인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유럽 최고의 선수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최고 수준에 이른 개인기, 완벽한 기교의 활용, 축구가 연출할 수 있는 멋진 광경과 축구 자체에 대한 사랑, 작전과 전술에 그다지 의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민한 전반적인 기동력, 브라질 선수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곡예에 가까운 극적인 묘기에 대한 의욕(이는 라틴계 민족의 전형적 특성이다), 공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 패스의 신속함과 정확함, 교묘한 드리블과 페인트, 경기의 순수함, 고귀함, 품위를 저해한다고 여기는 차징과 같은 기술 사용의 자제, 이러한 남아메리카 고유의 특성들이 남아메리카 축구 유파를 구분하여 거론할 수 있게 한다. 유럽 최고 선수들의 축구와 남아메리카 대륙의 축구가 다르다는 사실은 누구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브라질의 축구 스타일: 극적인 묘기의 추구 브리질 축구를 통해 우리는 기교의 정점에 달한 축구를 볼 수 있다. 브라질 팀에는 많은 유색인종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본능적인 축구라 일컫는 자연스러운 축구를 펼친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 동작, 이동은 거침이 없고 자연스럽다. 사실 우리가 기교라고 부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천부적인 재능, 공다루기에 관한 타고난 소질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유연성은 그들 인종이 공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야에서 그들과 경쟁을 벌이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들과 겨루기 위해서는 보다 직접적인 행동, 보다 객관적인 판단력, 보다 현실적인 사고와 같은 차별적인 자질에 의존해야 한다. 과시하려 애쓰며 극적인 묘기를 추구하는 브라질인들이 경기의 본질, 다시 말해서 경기의 결과인 득점을 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시선을 끌며 경기장을 누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득점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브라질인들에게는 이러한 목적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순회 경기를 대부분 승리로 장식하는 그들의 축구기술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 페퍼코른 (축구의 유파들), 1954년 아프리카의 축구 스타일: 공격 취향 같은 유럽 대륙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선수들과 영국 선수들의 스타일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도 아주 다양한 축구 스타일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대륙의 광활함을 감안할 때, 기니,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의 경기 스타일이 동일할 리 없을 것이다.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도 각각의 축구가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축구나 유럽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아프리카 축구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각 대륙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축구양식에서 공통되는 특징들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아프리카 축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공통분모는 분명히 공격적인 경기에 대한 타고난 취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유럽은 프랑스 팀의 기대에 보답했던 한 천재적인 공격수를 통해서 이러한 특성을 발견했다. 마드리드의 아틀레티코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계속한 그는 모로코의 라르비 벤 바레크였다. 전쟁이 끝난 후, 모로코에서 온 또 한 명의 위대한 공격수 아미리가 수개월 동안 그의 뒤를 이어 활약했다. 대형 사고로 그의 짧은 경력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대단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알제리 선수들이었다. 천재적인 게임 메이커였던 메클루피는, 로슈토에 대한 찬사에 가려졌을지라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기억을 생테티엔에 남겼고, 벤 티푸르는 즉시 프랑스 대표 팀에 선발되었다. 나는 마그레브(모로코, 튀니지, 알제리를 포함하는 북아프라카:역주)출신으로 유럽의 스타디움에서 이름을 날린 축구선수들 전원의 목록을 작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파우지 마주브가 그의 저서에서 몇 장을 할애했다. 유의해야 할 것은 다른 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마그레브 출신 선수들의 뒤를 뒤따랐다는 것이다. 이론의 여지 없이 말리 출신인 살리프 케이타가 그들 중 가장 명성을 날린 대표적인 선수이다. 생테티엔의 유니폼을 입고 프랑스 선수권전의 스타로 떠오른 그는 모든 아프리카인들이 혹독한 겨울날씨가 존재하는 나라에서도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서 밝혔듯이 아프리카 축구 선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공격적인 경기, 다시 말해서 유희와 창조를 기쁨으로 삼는 진정한 축구에 대한 타고난 취향이다. 하지만 월드컵은 물론이고 대륙 내의 대항전을 지켜보아도, 현재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팀들의 경기 태도에서 이러한 취향이 탈색되어 버린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천성적으로 공격으로 향하는 선수들의 자질을 반전시켜 주기는커녕, 아프리카의 축구지도자들은 그들이 지닌 가장 훌륭한 선수들과 가장 훌륭한 팀들의 지도를 유럽의 감독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아프리카인들로 하여금 본능의 명령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역할임을 이해했던 유럽 대륙의 축구전문가는 드물었다. 지적 결핍과 터무니없는 허영에 따라, 유럽의 순응주의에 길들여진 이들은 스포츠 분야의 진보과정에서 자신들이 최고로 여겼던 것―수비 위주의 경기와 역습 기회의 탐색―을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것이다. 본성에 반하는 경기를 펼치도록 강요받았던 아프리카 선수들은 월드컵에서 보잘것없는 성적을 올렸고 이로써 유럽 감독들의 지도 아래 심어진 그들의 열등의식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연맹들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방침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프리카 축구의 현재와 미래에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이론을 아무렇게나 뇌까리며 주입시키는 트레이너들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다. 축구 분야에서도 아프리카는 해방되어야 한다. 아프리카를 어둠 속에서 구해 냈던 그것, 언젠가는 그 위대함을 드러낼 그것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공격적인 경기에 대한 취향이다. 프랑수아 테보 파우지 마주브의 (아프리카 축구)서문 1988년 '국민의 기쁨'가린차, 그의 드리블 가린차의 효과적인 드리블은 뛰어난 몸동작뿐만 아니라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대단한 속도 변화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기술은 놀라웠다. 그는 느릿느릿 공을 몰다가 상대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균형을 잃은 듯한 자세에서 그의 놀랄 만한 추진력을 이용해 질주를 시작함으로써 상대편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공에 발을 얹고 멈춰 서면 상대는 관성에 이끌려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다른 선수들이 수비 위치로 돌아왔더라도 가린차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수비망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을 알았다. 스포츠 기자들은 군사 전법과의 유사성에 빗대어 그의 스타일을 '게리에로'(스페인어로 게릴라:역주)스타일이라 불렀다. 그는 완전히 정지한 상태에서 공을 받았다.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공간 속을 헤쳐 나가도록 하는 폭발적인 근육의 힘으로 그는 순식간에 1m 앞으로 나섰다. 그런 후, 측면 후위 선수들 전반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갑자기 멈추어 선 후 다시 우측으로 꺾어 달리기만 하면 족했다. 대부분의 경우, 넘어지는 듯한 몸속임을 할 때의 그는 무게중심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폭포수가 흐르듯이 우측으로 전진을 계속하는 그의 모습은 물리학자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드리블은 그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는 바람 속에서 우스꽝스런 몸짓들의 경이로운 연속을 보여주는 채플린이었고 관중들이 '올레'를 외치며 경의를 표하는 투우사였으며 절망적인 상태의 태클을 감수할 때의 겸허함으로 위대함을 더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골라인에 다다렀고 후위 수비수들이 그의 전면을 포위하여 공간을 좁혀 들어왔다. 1m, 50cm... "이제 공간이 없어. 내가 그를 막을게."상대편 선수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드리블하는 가린차에게는 손수건 한 장의 면적이 '라티푼디움'(고대 로마의 광대한 소유지:역주)이었다. 호세 세르지오 레이테 로페스와 실뱅 마레스카 (사라진 '국민의 기쁨') (사회과학 연구 기록)79호, 1989년 9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경이로움 축구선수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경력! 원숭이처럼 다재다능하다면 사자가 될 수 없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하지만 디 스테파노는 사자인 동시에 원숭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축구선수로 꼽히기에 어느 누구와 비겨도 손색이 없다. 그의 삶과 축구 스타일은 두 시기로 나뉜다.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첫 번째 시기의 젊은 알프레도는 국가대표 팀과 리버플레이트의 번개처럼 빠른 센터 포워드였다.…그는 놀라울 만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콜럼비아에서 체류한 후)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두 번째 시기, 스타일의 향상을 보인 알프레도는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5회 연속 유럽 클럽컵을 차지했다. 오로지 상대편 골만을 전담하던 선수였던 알프레도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 팀에 기여하는 패스와 페인팅 기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기에 대한 통찰력, 경기장 어디에나 있는 듯한 비상한 천재성을 지닌 전천후 선수로 탈바꿈했다. 디 스테파노는 팀 내에서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포지션을 맡았다. 명목상 센터 포워드였던 그는 팀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미드필더나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환했던 것이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경기중에 항상 적재적소에 자신을 위치하도록 하는 그의 본능이었다. 상대편 골 앞에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이 축구의 귀재는 축구사의 한 위대한 시기를 지배했다. 펠레에게 그 통치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J. Ph. 르타케 (축구), 1963년 훌리가니즘이란 무엇인가? 스코틀랜드에서 행하던 의식의 일종이던 훌리가니즘은 1960년대에 영국에 전해지면서 비행화되었고, 1980년부터는 그 야만성과 미개함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훌리가니즘이 가져오는 사회적 병폐를 막기 위해 고심하던 정부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기에 대한 분석 우리가 꿈꾸는 민주사회의 필수적 요소인 '평등'을 만인이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도록 구체화시키는 스포츠 경기는 대규모의 강력한 주의 집중을 이끌어낸다. (오직 대규모 록 콘서트에서만 이와 유사한 주의 집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토크빌이 민주사회의 필수 원동력이라고 여겼던 평등을 향한 열망의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스포츠 경기만큼 이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활동은 결코 없을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경험에 평등이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스포츠 경기는 존재한다. 사실상 스포츠는 우리 사회가 사회관계의 이상으로 삼는 것을 실현한다. 다시 말해서 스포츠는 인간들의 천부적 평등성과 대립에서 기인하는 필연적인 계급성을 가장 조화로운 방식으로 결합시킨다. 개인이 전통이라는 질곡에 갇힐 이유도, 미리 예정된 신분을 감수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민주사회에는 토크빌의 말처럼 정해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경쟁, 대항, 투쟁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하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마치 사회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경쟁, 대항, 투쟁은 우리 각자의 가치와 서로에 대한 의미를 결정한다. 대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매우 근대적인 생각 또는 착각을 밑받침한다. 하지만 평등과 차별을 동시에 감지하며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사회적 형태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팀 내의 위치가 명백히 팀과 자기 자신의 뜻으로 결정되는 스포츠는 '훌륭하게' 계층화된 민주주의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불평등이나 계급의 분화는 미리 예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스포츠는 평등한 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가장 명확하고 가장 순수하게-사회학적으로 말해서 진정한 본래의 모습 그대로-구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는 극도의 강렬한 감정을 유발한다. 적어도 2세기 전부터 우리가 사회생활을 통해 경험해온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모순-천부적, 정치적 평등과 실제적 불평등 사이의 모순-을 경기는 끊임없이 풀어헤친다(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를 논하는 것이기에 그 방식의 하찮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승리를 목표로 하는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두들 중요한 것은 참여가 아니라 승리임을 잘 알고 있다. 진정으로 우월해지는 길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고려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대표와 마찬가지로 지역이나 국가를 '대표하는'선수들이 존재하는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서만 이러한 첨예한 대립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대립은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폭력은, 팀에 대한 응원이라는 직접적인 형태의 행위-홈경기가 유리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한다-를 과대화시켜 대표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흔히들 거론하는 전쟁보다는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로서의 경합에 가까운 스포츠는 경쟁을 통하여, 수용할 수 있는 불평등성을 확립한다. 스포츠는 우월한 자가 고지를 점령한다는 전투적 표현을 그 층위들 내부에서의 위치가 계속적으로 재조정된다는 사실로 보완하며 구체화한다. 이를 통해 스포츠 경기가 지닌 원동력들 가운데 하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스포츠 경기는, 마치 사회관계의 전형이 대립관계인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사회의 질서에 내재해 있는 일상적인 불평등을 중화시키는, 사실처럼 여겨지는 또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훌리가니즘의 이해는 무엇보다 스포츠가 일상 내부에 존재하는 가공의 상황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훌리가니즘은 직업적인 장래가 제한된, 폐쇄된 피지배계층이 지닌 동등함을 부각시킨다. 훌리가니즘은 두 가지 현실-사회적 지위 향상과 기득 계층으로서의 개인적 편입에 대한 체험적 불가능성, 스포츠에서 발견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의 급격한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훌리가니즘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불평등주의의 과정들을 재검토하려는 전적으로 공상적인 시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자신을 차별적으로 배격하는 불평등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훌리가니즘은 개인적인 해결방안을 지니고 있지 못한 이들-또는 지니고 있지 않다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을 인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집단적 전술로서 표명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평등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규범, 주관적 세계관이 사회계층에 따라 상이하게 분포한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적 불의를 보다 절실히 경험하는 피지배계층에 속할 때보다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때 보다 더 '스포츠적'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름도 없는 하급 지위에 자신을 귀착시키는 집단적 운명을 감내해야 할 때보다는 성공적인 사회경력을 쌓으며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때 페어 플레이가 이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일부에게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구경거리가 나머지 일부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참여의 기회가 된다. 비록 관중들에 관한 정보는 충분하지 않지만, 사회적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이 가장 부족한 이들이 스포츠 경기에 가장 깊게 빠져드는, 모든 의미에서 가장 '적극적인' 이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시합의 승부가 개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폭력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사항은, 축구를 잘 알고 사랑하며 직접 즐기기도 하는 진정한 응원 관중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스포츠 지도부는 이러한 난봉꾼들이 축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며 스스로를, 또는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이유가 뻔한 이러한 술책은 명백히 지장을 초래하는 관중들과는 무관함을 주장하며 스포츠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시도이다. 폭력사태의 주동자들이 일반적으로 서민계층 출신이라는 것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브뤼셀까지의 여행경비와 경기입장료가 1500프랑 가까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실업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발상에서 비롯된다. 경기장에 난입하는 관중들은 경기의 규범을 파괴할 정도로 관중으로서의 행동논리를 확대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관중들의 난입을 많은 사람들이 결집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19세기의 구습을 청산한 군중이라는 개념을 재차용하는 몇몇 평자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은 군중역학의 결과가 아니다. 알랭 에렌베르그 (훌리간, 평등을 향한 정열) (에스프리), 1985년 8월∼9월호 상실의 결과 전통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는 첫 번째 세대에게 축구는, 싸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독한 맥주, 육체적 힘의 숭배, 남자다움 등과 같은 무산계급 고유의 가치들을 되살리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 세대는, 어린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주려고 그 판매기를 발로 차 깨고, 한겨울에 웃통을 벗고 이두박근과 그 위의 문신을 실룩이며 뽐내는 순진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뉴캐슬이나 선더랜드와 같은 북부 클럽들을 지지하는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었다. 이 세대는 지방 또는 지역의 전통적 반감을 되살리는 여러 노동자 축구 문화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체포되는 것은 대부분 지나친 음주 때문이었다. 그들이 선호하는 팀을 응원한다기보다 조직적으로 싸움판을 벌이고 경찰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을 낙으로 삼는 두 번째 세대는 범죄단체에 가깝다. 맨체스터의 산업도시적 모습과 거리가 먼 케임브리지에서 최근에 열린 재판은, 80명이 넘는 '병사들'을 통솔했던 '대장' 한 명을 상대편 응원자들에게 계획적으로 폭행을 가한 혐의로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스킨헤드족으로 대표되는 세 번째 세대는 노동자들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적극적 행동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토 수호와 남성다움의 찬양을 계승한 그들은 축구와 관중석을 그들의 요구를 널리 알릴 최상의 장소로 여긴다. 이전 세대에 비해 보다 젊고, 보다 정형화된(짧게 깎은 머리, 끝을 접어 올린 청바지, 멜빵)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공동체를 획득하고자 한다. 아버지가 잡역부이고 자신들 역시 사회 하층민으로 운명지워진 그들은 부모들, 자신들을 돌보기에 급급한 가족들에게 런던 토박이들과 런던 동부 빈민가의 영광을 다시 내건다... 스타디움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자메이카 출신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배지와 상징물을 과시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 격하에 반대하며 투쟁한다. 점차 직업화되고 그 범위 또한 국제화함에 따라, 축구는 관중석과 텔레비전의 화면을 새로운 목표물로 삼았다. 사실 상당 기간 축구팀의 활동범위는 지역적으로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가 차원의 경기가 가능해지면서 팀들 간의 접촉범위가 확대되었고, 특히 우승컵 쟁탈전이나 선수권전에서 승산을 높이기 위해 클럽들 사이의 선수 이적이 활발해졌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 클럽들이 유럽 대항전에 합류하면서 축구팀과 관중 사이의 단절은 가속화되었다. 그에 따라 입장수입이 줄면서 늘어난 지출을 감당할 수 없는 몇몇 클럽들은 슬그머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국 리그에서 뛰는 외국 선수들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리그에서 활약하는 외국 선수들보다 적은 수였지만, 대다수 클럽들은 지역적인 기반을 상실했다. 더욱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북부 또는 런던 지역에서 클럽은 더 이상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클럽을 운영하는 조직 역시 유급 전문직으로 채워지면서 경영의 합리화를 꾀했지만, 이러한 축구의 '사무화'는 클럽 활동에 미칠 수 있었던 지지자들의 영향력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써 지지자들은 점차 지원이라는 단 하나의 기능만을 맡게 되었고, 그들 중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관중석에 고립되었다. 한편 축구가 맞이한 새로운 상황은, 그들이 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한 권리와 자신들의 정통성을 널리 알릴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그들은, 상대편 팀의 지지자들, 클럽의 지배층, 존중받는 지지자들, 텔레비전의 시청자들, 전영국, 그리고 월드컵 대회가 열릴 때에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삼았다. 지역적 정통성(밀월 지방)에서 출발한 그들은 사회적 정통성(진정한 무산계급), 국가적 정통성(영국인), 인종적 정통성(백인)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표방하는 기치의 다양함은 여러 형태의 지지자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들 중에는 연고지가 없는 지지자들, 후원자들의 세력이 가장 막강하고 가장 넓은 지역에서 경기를 벌이는 팀을 지지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내포하는 경제위기는 그들의 단합을 확인할 수 있는 알맞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역설적이지만, 실업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직업과 수완이 발전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노동문화에서는 축구를 비롯한 여가활동이 노동에 반하는 행위로서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에게 강요되는 여가가 규정으로 적용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축구는, 언론의 보도, 빈번한 원정, 후원자들의 열성적인 경기장 출입 등을 요구하는 시합들을 증가시킴으로써, 축구의 흡인력에 필적할 상대가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그 세력과 소명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지자들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스타디움에는 여러 세대의 축구와 여러 세대의 노동공동체가 공존한다. 다시 말해 앞세대의 발전과 뒷세대의 쇠락이 함께하는 것이다. 파트리크 미뇽, (신앙 고백:응원) (에스프리), 1985년 8월∼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