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 원초적 열망의 서사시 지은이 : 아르노 메를랭, 프랑크 베르제로 출판사 : 시공사 봉사자 : 숙명여자대학교 통계학과 9670617 박현희 부분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불렀던 영가에서 발전한 재즈는 유일하게 미국에서 발생한 음악형식이 다. 그것은 흑인이 창조한, 흑인을 위한 음악이었다. 오랫동안 재즈는 단순한 오락거리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비밥의 출현과 함께 젊은 재즈 음악가들이 아방가르드에 합류했다. 밥이 모던 재즈의 문을 연 것이다. 이제 재즈의 기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아티스트들이 이 특별한 표현방식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제1장 비밥에서 무엇이 나올까? 맨해튼 52번가에 있는 클럽들에는 소규모 비밥(bebop) 그룹이 많았는데, 그 실험정신 투철한 그룹들이 재즈의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뉴욕은 전위예술의 본거지요, 지적 자극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의 거실들에서는 문학, 연극, 회화를 토론하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52번가 옆에 편곡가인 길 에번스가 살고 있었다. 비밥의 대의를 찾아 얼마 전에 뉴욕에 도착한 에번스가 사는 곳은 조그만 방 하나뿐, 거실도 없었다. 그러나 그 방에는 밤낮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흑인 음악의 리더들이 방 한구석에 있는 턴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레스터 영과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 음반뿐만 아니라 일반 베르크와 모리스 라벨 같은 유럽 작곡가들의 음반을 들었다. 그들은 그 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른 젊은 음악가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재즈는 더 이상 미국 흑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밥은 서구의 클래식 음악보다 더 자유롭고 좀더 구체적인 표현양식을 갈구하던 모든 음악가의 음악애호가에게 재즈를 한층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만들었다. 쿨의 탄생 쿨(cool)은 시원하고 상쾌한 상태를 뜻한다. 물론 긴장도 풀리고. 누군가 흥분해 있을 때 우리는 "침착해(Keep cool)"라고 말하지 않는가. 1940년대 후반에 백인 재즈 음악가들이 찰리 파커의 재즈를 새롭고 '쿨'한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그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런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쿨 재즈의 시작은 흑인 음악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대담함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49년에 나온 데이비스의 음반은 후일에 재발매되면서 <쿨의 탄생(Birth of the Cool)>이라는 제목으로 묶일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 시기의 또 다른 스타 트럼펫 연주자인 디지 길레스피와 비교할 때 대가다운 기교라든가 화려한 맛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박하고 경쾌하며 사려 깊은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조용한 울림이 특징이며, 고음을 피해 중간 음역을 선호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마치 디지 길레스피의 빠른 연주에 "침착해"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레스터 영이 성미 급한 콜맨 호킨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흉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비밥의 특징인 빠른 유니즌 프레이즈(unison phrases)와 자유분방한 솔로 연주에 만족하지 않았다. 1948년 앙상블을 조직할 때 데이비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했다. 비밥의 5중주단 대신 9중주단을 결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어 그는 편곡가 길 에번스와 제리 멀리건에게 전화했다. 그 밴드는 데이비스의 트럼펫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밖에 색소폰 두 대와 트롬본, 리듬 섹션 그리고 당시 거의 쓰이지 않던 프렌치 호른과 튜바가 가세했다. (튜바는 뉴올리언스의 초기 재즈 앙상블에서 리듬 섹션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는 대부분 리듬 섹션에 더블 베이스를 쓰고 있었다.) 에번스와 멀리건과 데이비스 트럼펫과 트롬본, 색소폰은 아주 분명하게 구분하는 밴드도 있지만 길 에번스는 편곡할 때 다양한 음색을 섞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농밀함과 풍부함을 선호했다. 그의 편곡법은 색채의 흔들림과 하늘거리는 옷감의 감촉을 일깨워 주었다. 소리의 유혹이 우위를 차지했고, 그의 <문 드림즈(Moon Dreams)>는 극적인 무감각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데이비스는 때로 다른 편곡가들과도 함께 일했다. 모두 에번스의 방에 모여드는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바리톤 색소폰의 제리 멀리건이 특히 창의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8마디 형식과 결별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성구조가 여전히 이 관례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때도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편곡법을 바꾸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제루(Jeru)>의 도입부에서 독립된 2/4박자와 3/4박자의 마디를 사용함으로써 4/4박자의 우월성과 리듬의 통일성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데이비스 9중주단은 재즈의 가벼운 측면을 논하는 당시의 평가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음악은 시끄러운 클럽에서가 아니라 마치 카네기 홀에서 들을 때처럼 주의력을 집중해야 했다. 1949년에 캐피틀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할 때 마일즈 데이비스는 알토 색소폰을 부는 리 코니츠를 솔로 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청했다. 코니츠는 그의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성공할 것 같지 않은 후보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비밥 색소폰에서 우디 알렌(최근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이 미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슷한 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비밥이 다양한 얼굴을 자랑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코니츠는 얼빠진 학생처럼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연주 또한 얼굴과 아주 흡사했다. 그는 레스터 영과 레니 트리스타노의 프레이즈의 영향을 받아 찰리 파커의 현란함을 약간 다소곳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한 트리스타노는 밥 음악가들의 발견에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했고, 발견들을 강의를 통해 전파시켰다. 그는 멜로디와 하모니와 리듬의 강조를 통해서 밥의 표현주의적 면모를 합리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는 젊은 백인 음악가들과도 어울렸는데, 특히 색소폰의 리코니츠, 원 마시와 잘 어울렸다. 이들은 비브라토가 없는 음색과 경쾌한 공명으로 밥의 현란한 언어를 순화시켰다.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푸가와 대위법을 참조하여 2성부의 즉흥연주(improvisation)를 즐겼다. 그럴 때면 레니트리스타노는 앞부분의 즉흥 연주를 책임졌다(정해진 주제나 하모니에 관한 사전 동의 없이). 웨스트코스트에서 쿨이 구체화되었다 1940년대에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 출신인 스탠 켄턴은 스윙을 20세기 유럽 작곡가들의 정신과 결합시켰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이 어떤 면에서는 허장성세로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켄턴의 가르침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용광로로 작용했다. 사실 아트 페퍼, 제리 멀리건, 주트 심스, 쇼티 로저스, 셸리 만, 프랭크 로솔리노 같은 중요한 연주가들이 만난 곳도 다름 아닌 캘리포니아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찰리 파커와 레스터 영에게 푹 빠져 있었다. 1947년, 우디 허먼 악단에는 뛰어난 색소폰 주자가 많았다. 특히 서로 독립된 네 사람의 색소폰 주자(테너 세 사람과 바리톤 한 사람)가 중심이 된 '포 브러더스(Four Brothers)'가 이름을 날렸다. 이 '형제' 가운데 후에 스탠 게츠가 가장 유명해졌다. 그는 1948년에 녹음한 <얼리 오텀(EanrlyAutumn)>으로 일약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특징인 덧없음과 낭만성의 사도로서 입지를 굳혔다.웨스트 코스트 연주자 대다수는 스탠 켄턴과 우디 허먼의 빅밴드 출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타일을 하나의 단순한 흐름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웨스트 코스트에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든 것은 뉴욕의 거친 환경보다는 여유 있는 캘리포니아의 라이프스타일에 끌려서였기 때문이었다. 능력이 있던 그들은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었고,마일즈 데이비스 9중주단의 영향력 아래 개발된 미묘함과 작곡 스타일에 대한 취향을 공유했다. 웨스트 코스트와 염세주의 뉴욕의 비밥이 생존과 인정을 위해 몸부림치던 집단의 표현방식이었듯이, 웨스트 코스트 재즈 음악가들은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과 결합된, 자기 반성과 실존주의적 고통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 숭배자든 비판자든 웨스트 코스트의 젊은 백인 중산계급 음악가들을 도시의 흑인 우 들과 동렬에 놓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매카시 선풍이 몰아치고, 냉전이 격화되면서 문화 생활도 전환점에 이르렀다. 비트 제너레이션 그룹의 반문화 작가들이 이따금 재즈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캘리포니아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과 문학을 결합시키는 실험에 동참했다. 로큰롤에 앞서, 웨스트 코스트 재즈는 자신의 출생지인 중산계급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젊은 세대의 표현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태평스럼과는 거리가 먼 알토 색소폰의 폴 데스먼드의 음아은 조용히 쓰라린 절망을 토로했다. 그에 반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아트 페퍼는 더욱 불안하고도 강렬한 음악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관능을 전파하고 있었다. 또 쳇베이커는 웨스트 코스트에서 가장 낭만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제리 멀리건이 이끄느, 피아노가 없는 4중주단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멀리건은 이 4중주단으로 50년대 캘리포니아 정신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멀리건 4중주단은 짜임새와 멜로디의 투명성에 관심을 보였고, 감미로운 분우기, 실내악의 느낌을 주는 대위 선율의 두 솔로는 후대 재즈가 탐험에 나설 세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피아노가 없고, 더블 베이스 혼자서 하모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음악은 솔로 주자에게 폭넓은 자유를 제공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9중주단이 만들어 낸 잊혀지지 않는 감동에도 불구하고 웨스트 코스트 음악은 캘리포니아 해변의 따사로운 햇빛과 자유분방한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 외양상의 평이함 뒤에는 근본적으로 절제된 창의성이 숨어 있었다. 캘리포니아 재즈 음악가 가운데는 트럼펫 주자인 쇼티로저스가 제일 유명했다. 로저스는 마일즈 데이비스 9중주단의 색채와 중년기의 카운트 베이시의 자연스럽고 '스윙하는(swinging)' 작품을 결합시킴과 아울러 클래식 음악의 복잡한 구조도 차용했다. 이러한 차용은 웨스트 코스트에서 당연히 인정되고 있었다. 데이브 브루벡 4중주단은 이런 방법으로 재즈에는 사용되지 않던 방법들을 대중화시켰고, 광범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순수주의자의 눈에 의심스러운 인물로 비치고 있다. 1950년대에 색소폰과 클라리넷 주자 지미 주프리가 행한 실험은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그는 흔치 않은 앙상블-클라리넷, 트럼펫, 드럼-로 1960년대의 '프리 재즈(free jazz)'가 이룩할 자유를 예고했다. 또한, 주프리는 실내악이 가져다 주는 친숙한 분위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이러한 성향은 1970년대에 화려하게 꽃핀 다양한 흐름의 선구자가 되게 해주었다. 웨스트 코스트와 쿨 재즈는 백인 음악가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1947년 6월에 할리우드에서 흑인 색소폰 주자인 덱스터 고든과 워델 그레이는 새 음반을 녹음했다. 백인 음악인들이 주축을 이루던 웨스트 코스트에서 흑인인 그들의 녹음은 가히 장엄한 결투라 부를 만했다. 두 사람은 레서트 영의 유산을 백인 동료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가 더 표현주의적이었고, 그들의 페레이즈의 흐름이 비밥의 요구에 더 잘 맞았으며, 그들의 의지가 더 공격적이었다. 그들이 온몸을 던져 '레스터처럼(like Lester)' 나른하게 프레이징할 때 훨씬 더 관능적이었다. 한편, 웨스트 코스트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흑인 음악가들은 소리를 죽인 정교한 톤에 대한 취향을 개발했다. 1950년대에 등장한 '하드 밥(hard bop)'이 절정에 있을 때에도 마일즈 데이비스는 여전히 절제된 쿨 스타일 연주기법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연주기법은 이완의 효과보다는 통제된 격렬함이란 인상을 주었는데, 그 격렬함은 듣는 이로 하여금 커다란 긴장감을 느끼게 하였다. 쿨이 웨스트 코스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이스트 코스트의 흑인 음악가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밥을 대규모 앙상블에 적합하게 만들었고, 형식을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을 마스터했고, 새로운 리듬을 실험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그들은 미국 흑인 음악의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 블루스와 흑인 영가에서 끌어낸 하드 톤(hardenedtone)을 개발해 냈다. 제2장 하드 밥과 모던 재즈를 향해서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는 연주 활동을 빅 밴드들에서 시작했고, 리더의 후광 속에서 비밥 스타일의 솔로를 연주하여 비밥을 빅 밴드에서 연주하도록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1946년에 자신의 빅 밴드를 만들었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연주자들 일부가 그 밴드에 참여했다. 길레스피는 자신의 음악에 쿠바 흑인 음악의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선풍을 일으켰다. 미국 재즈 음악가와 1930년대부터 뉴욕에 살고 있던 쿠바나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가들의 접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에 들어서였다. 재즈 음악가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리듬의 영역을 넓혀 갔고, 비트를 표현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갔다. 빅 밴드 비밥 디지 길레스피의 빅 밴드와 함께, 특히<쿠바나 비(Cubana Be)와 <쿠바나 밥(Cubana Bop)>에서 비밥 언어의 혁명성이 보다 확대된 편성인 빅 밴드 스타일로 작열해 나왔다. 디지기레스피는 현대성을 추구하면서 협력자를 조심스레 골랐다. 그 가운데 태드 다메론이 선풍을 일으켰다. 스윙 유파에서 훈련받은 작곡가 겸 편곡가인 다메론은 일찍부터 <핫 하우스(Hot House)>에서처럼 비밥의 심미안에 쉽게 빠져 들었다. 또 웨스트 코스트의 백인 동료들에게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라벨릉 기꺼이 인용한 그는 전체로서의 공명의 아름다움과 각 파트의 선율의 질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직 리드보이스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장 '왜곡된' 하모니에서조차 멜로디를 유지하는 다메론의 기술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트럼펫 주자 패츠 나바로에서도 볼 수 있다. 비밥의 하모니상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독특한 상상력을 이용한 솔로 주자 나바로는 밀도 있고, 적절한 선율을 구사했고, 그 선율은 후세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크의 갭 마일즈 데이비스의 영향은 195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사실 그는<쿨의 탄생>이래 끊임없이 자신을 비밥의 중요 연주가로 인식시켜 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자 즉흥연주의 대가인 셀로이어스 몽크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다. 1954년 12월 24일에 두 사람이 한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연주가 시작되고 한동안 몽크의 이상한 하모니에 고전하던 데이비스의 입에서 자신이 솔로를 하는 동안 피아노는 조용히 있으라는 마이 튀어나왔다. 데이비스는 차라리 더블 베이스 반주로 혼자 연주하는 것이 더 좋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맨 아이 러브(The Man I Love)>의 두 번째 녹음이 있었다. 과연 여기서 몽크의 낭패감이 어떤 작용을 했을까? 전에도 그러했듯이 몽크의 솔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조지 거슈윈의 주제를 죽죽 늘어뜨리며 해체해 나갔다. 이윽고 리듬의 변화와 예기치 못한 불협화음이 중첩되면서 듣는 사람은 발 밑의 계단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뭉크가 연주를 중단한 것이다. 참다 못한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으로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몽크가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피아노 건반 위에 몸을 던졌다. 몽크의 이 '갭(gap)'에 관해서 많은 말들이 있지만 아무도 두 사람 사이에 이어난 일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 사건은 두 비밥 거물의 기본저인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현대의 은둔자 셀로니어스 몽크는 마치 폭발물 속에 성냥을 던지듯 피아노에 자신의 하모니를 내던졌다. 각각의 새로운 화성적 조합이 그를 깊은 사색 속으로 몰아넣는 듯했고, 마치 거시서 깨어나듯 다음 화성이 솟아 나왔다. 한동안 아무 활동도 보이지 않던 몽크는 1982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목록 속에 들어가 있다. 몽크의 연주의 기발함은 새로운 세대가 당대의 관례와 결별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의 주거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셀로니어스 몽크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솔로 때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는 첫 번째 피아노 주자는 아니었다. 데이비스가 각 주자의 역할과 도입 순서를 정하는 방식은 극장에서 연주할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또 그가 LP 레코드의 시간 제한을 관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진짜 지휘자였다. 자신이 연주하지 않을 때는 다른 악기 부분을 증가시키거나 분위기를 바꿨다. 또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싶으면 서슴없이 스튜디오의 불도 꺼 버렸다. <쿨의 탄생>편곡자들이나 자신의 5중주단과 일할 때 데이비스는 언제나 위대한 극작가였다. 1955년에 찰리 파커가 죽었다. 그러나 그 상실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든 백인이든 재즈 음악가들에게 기본 요소들이 풍요로워지면서 밥에는 일정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즉, 하드 밥(hard bop)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 1954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마녀 사냥'이 상원에서 거부되면서 미국은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비폭력을 호소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력 아래서 미국 흑인들은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인종차별 철폐 요구에 덧붙여 다르게 살 권리에 대한 요구도 생겨났다. '검은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할 구호 '검은 것이 아름답다'가 그때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에 활약한 트럼펫 주자 클리포드 브라운은 이 아름다움의 완벽한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패츠 나바로의 스타일을 이어받은 브라운은 작품 곳곳에 하모니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자신의 프레이즈를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표현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스타일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자기 반성적이고 경쾌하며 실험적인 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하드 밥의 기초를 놓은 클리포드 브라운은 자신이 기여한 바가 결실을 맺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드밥 : 블루스와 흑인 영가로 복귀하다 1950년대 초반에 음반 시장을 장악한 쿨 재즈는 세련됨과 억제력으로 흑인 음악가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새로운 물결인 하드 밥(hard bop)에 박차를 가했다. 하드 밥은 시끄럽고, 최대 음량까지 구사하는 악기 소리와 감성적인 연주가 특징이었다. 하드 밥은 미국 흑인 음악의 뿌리인 블루스와 흑인 영가로 돌아가는 기회였다. 동시에 모던 재즈의 전위적인면에 혼란을 느끼던 흑인 청중들과의 유대를 새롭게 다지는 기회이기도 했다. 리듬 앤드 블루스(rhythm and blues)가 대유행하여 그 절정에 달했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솔(soul) 음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을 통해서 흑인 사회는 자신들의 문화적, 정신적 차이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그들은 육체와 영혼, 춤과 종교적 열광, 성적인 황홀경과 신비의 경지를 일치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미국의 청교도들과 구별지었다. 솔 음악은 흑인 교회음악의 세속적인 화답(속화된 형태)이 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춤과 사랑의 언어를 표현했던 것이다. 블루스 마치 블루스나 흑인 영가의 형식으로 되돌아간 재즈는 '교회적'으로 변했다. <교훈(The Semaon)> <설교자(The Preacher)><기도자의 모임(Prayer Meeting)>등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있었다. 그리고 펑크(funk:몸의 체취를 암시하는 은어에서 나온 말)도 있었다. 육체적인 쾌락에 한발 다가선,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안하무인격에다가, 난잡할 정도로 시끄러운 하드 밥은 두 가지 흐름을 다 집어삼키며 투쟁의 결과를 확신하는 흑인 사회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배니 골슨이 아트 블래키를 위해 작곡한 <블루스 마치(Blues March)> <모우닌(Moanin')> <얼롱 캐임 베티(Along Came Betty)> 같은 작품이나 호레이스 실버의 테마들, 예를 들어 <송 포 마이 파더(Song for My Father)> <니카스 드림(Nica's Dream)>을 들어 보라. 그러면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흘러 넘치는 힘으로 중무장한 드럼 주자 아트 블래키는 하드 밥의 봉화를 올린 그룹 재즈 메신저스를 이끌었고, 많은 재주꾼을 발굴해 냈다. 웨인 쇼터, 프레디 허바드, 키스 자렛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블래키 밴드에서 컸고, 하드 밥의 훈련을 쌓았다. 그의 부정할 수 없는 메시지는 리듬 섹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밥에서 리듬 섹션은 단순히 코드를 연주하고 템포를 유지하는 것, 독주자에게 자극적인 대조를 제공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하드 밥에서 리듬 섹션은 영가와 솔에서 영감을 얻은 반복 공식에 따라 분위기를 잡는 역할을 맡았고, 리드미컬한 편곡에 무용수들이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리듬 앤드 블루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드 밥의 비트(beat)는 전통적인 4/4박자의 싱커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4/4박자(four-beat measure)는 1920년대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배타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3/4박자(three-part division)가 갈수록 빈번하게 사용된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미국 흑인 음악의 본지인 스윙(swing)의 정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2분할 프레이징과 라틴 재즈 스윙은 재즈에서 유연성과 박력과 풍부한 리듬을 보장하는 요소이다. 스윙은 규칙성에 기초한 예술에 감정과 주관성을 부여했다. 재즈 연주가들이 자신의 음표에 자유를 불어넣을 때 열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스윙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윙은 3분할 프레이징의 비대칭성과 관련이 있었다. 즉 마디의 3분할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박자의 3분할과도 관련된 용어이다. 클래식 음악가들이 두 개의 동등한 박자의 음을 연주하는 곳에서 재즈 연주가들은 첫 번째 음을 길게 늘인 다음 두 번째 음을 급히 연주함으로써 탄력감과 공명감을 창조했다. 2분할 프레이징은 쿠바 흑인 드럼의 대칭잡힌 드러밍과 함께 길레스피의 재즈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3분할법과 마찬가지로 2부날 프레이징도 '스윙감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후에는 재즈 음악가들이 점점더새로운 리듬 습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195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자메이카의 칼립소, 쿠바 흑인의 맘보, 브라질의 보사노바 같은 라틴 리듬은 이제 더 이상 이국적인 차용물이 아니라 재즈 암악가의 일상 언어의 일부분이 되었다. 라틴 재즈 역시 하드 밥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제 몇 개의 성부를 위한 간졀한 편곡으로 인해 주제의 효율적인 표현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주제에는 종종 블루스나 영가에서 영감을 얻은 전형성이 보다 강조되었다. 하드 밥 연주가들은 그때까지 밥 연주가들이 해오던 대로, 뮤지컬 코미디에 등장하는 스탠더드 곡들을 복잡하고 천편일률적인 즉흥연주로 변주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그것들을 피했다. 그리고 때로는 하모니와 리듬에서 더욱 엉성하고 어느 정도의 야만성이 특징인 자신의 작품을 선호했다. 비밥에서 급격한 코드 체인지는 솔로 주자에게 끊임없이 멜로디상의 일탈을 요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프레이즈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일반적인 전망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 겉으로 드러난 관계는 없었지만, 하드 밥은 여전히 코드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부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된 복잡한 전개로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같은 코드가 몇 마디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그동안 솔로 주자는 즉흥연주의 구조를 세워 나가고, 전례가 없는 리듬 공식을 세우며, 다음 코드의 시작을 준비하고, 전체 솔로의 극적인 윤곽을 통솔할 분위기를 생각해 내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 <피스 피스> 하드 밥 연주가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 빌 에번스라는 백인의 하얀 얼굴은 대조적으로 두드러진다.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손길 아래서 당대의 가장 뜨거운 열정 일부분이 구체화되었다. 1958년 12월 15일, 에번스는 <피스 피스(Peace Piece)>를 무반주 피아노 솔로로 녹음하면서 절제에 대한 취향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 때 그는 7분 가까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두 개의 코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했다. 그는 이러한 미니멀리즘에 집중하면서 이 코드들에 대응하는 음계를 탐색해 나갔다. 물론 다름 음계를 방랑하는 자유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빌 에번스는 작곡가인 조지 러셀을 따랐다. 러셀이 <음 조직의 리디안 선법에 입각한 반음계 개념>에서 확립한 이론은 재즈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했다. 1950년대의 재즈가 요구했던, 점점 정교해지는 코드 체인지 때문에 고민하기보다는 하나의 음계 안에 있는 음에 기초한 선법적 접근방식(modal approach)을 따라 소박하고 단아한 접근법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 유럽계 음악 형식에 고무된 모들 재즈(modal jazz)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모들 재즈와 함께 새로운 서정주의 하모니 위주의 음악이 태동했다. 그러나 그 음악은 이제 곧 다가올 프리 재즈(free jazz)의 폭발적인 등장과 함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될 터였다. 존 콜트레인은 1960년대 초반 모던 재즈의 주역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음악을 지배적인 백인 문화에서 해방시키려는, 분노한 젊은 흑인 음악가들의 리더였다. 흑인 인권운동을 배경으로, 재즈 음악가들은 미국 사회 주류의 심미안을 거부하고 프리 재즈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 제3장 자유로 가는 길 색소폰 주자인 존 콜트레인은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깊이 파고든 문제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풀고자 했던 철학적, 음악적 숙제였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콜트레인의 끝없는 질문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콜트레인에게 자신의 5중주단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마 데이비스는 콜트레인이 쏟아내는 질문을 통해 그가 위대한 재즈 음악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데이비스와 함께 시작한 후 콜트레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예술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자이언트 스텝스>와 함께 1957년, 뉴욕의 파이브 스폿에서 셀로니어스 몽크 4중주단과 함께 연주하던 콜트레인은 비범한 피아노 반주에서 영감을 얻었다. 몽크가 무대를 떠나 있을 때, 콜트레인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오랜 시간 즉흥연주를 하면서 새로운 하모니 진행법을 모색했다. 1958년에 콜트레인은 마일즈 데이비스가 새로 결성한 6중주단에 합류했다. 1년 후, 이 밴드는 그의 주요작인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를 녹음했다. 콜트레인의 연주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음의 격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콜트레인은 <자이언트 스텝스(Giant Steps)>를 녹음하는 동안 코드 진행법에 대한 심사숙고를 끝냈다. 이 작품은 그의 4중주단이 녹음했으며, 비밥의 하모니 체계가 낳은 최후의 결과물이었다. 그후 콜트레인은 모들 재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차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와 나란히 있을 때도 고립되어 갔고, 그의 긴 솔로 연주는 다른 우주에서 온 것같이 보였다. <더 어센션> 다양한 음악가의 음악을 접한 다음, 1961년 드디어 콜트레인은 그동안 꿈꾸어 왔던 자신의 4중주단을 결성했다. 주축은 견실한 더블 베이스 주자인 지미 개리슨이었다. 드러머 엘빈 존스는 템포를 지시한다기보다 함축하는 폴리리듬(polyrhythm)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이 요란한 급류 위에 매코이 타이너의 피아노가 솔로 주자를 열광으로 유혹하려는 듯 쉴새없이 모티프를 반복했다. 타이너가 의도적으로 하모니를 불확실하게 만들자 콜트레인은 멜로디 프레이즈를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모드에 이어 다른 모드가 나오면서 서로 섞이고, 억누르며, 스며든다. 이윽고 서로 중첩되면서 다중화성(multiphonic)의 효과를 낸다. <러브 수프림(Love Supreme)>의 마지막 악절에서처럼 긴 마법의 레치타티보 속에서 템포는 희미해지면서 함께 사라지기도 한다. 더욱이 콜트레인은 피아노와 더블 베이스를 잊고, 엘빈 존스가 전해 주는 격류에 자신을 내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프리 재즈의 아방가르드 가운데 콜트레인을 숭배하는 젊은 층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영향력 있는 앨범 <더 어센션(The Ascension)> 녹음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 가운데 테너 색소폰 주자인 파로아 샌더스는 그후에도 계속 같이 일했다. 얼마 안 있어 콜트레인은 피아니스트 매코이 타이너와 헤어졌다. 자신이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엘빈 존스 역시 드럼 주자 라시드 알리의 합류에 반발하여 떠났다. 알리의 프리 재즈 개념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콜트레인은 1967년 7월 17일 사망했다. 명성과 음악성, 그 모든 면에서 추구했던 목표를 다 이룬 뒤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이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음악가는 한 사람도 없다. 선지자 오네트 콜먼 195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오네트 콜먼이 존 콜트레인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웨스트 코스트에서 온 젊은 색소폰 연주자 콜먼은 찰리 파커가 남긴 하모니의 유산을 거부했다. 그는 오직 그 에센스만을 얻어내려고 했다. 콜먼은, "자, 그 배경이 아니라 그 음악을 연주합시다."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테크닉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콜먼의 눈에는 감정과 진정성의 표현만이 중요했다. 그의 아름다운 연주가 보여 주는 서정성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네트 콜먼이 그토록 개발하고자 노력했던 '화성적 선율 이론(harmolodic theory)'은 음악 이론가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술적인 관심에서가 아니라 철학, 아니 시학에서 온 것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노예들이 '벌판에서 외치는 소리'의 진정성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국외자가 유럽의 음악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오네트 콜먼이 빌려 온 형식들은 블루스나 뮤지컬 코미디에서 파생된 구조를 참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11개 반의 마디로 이루어진 그의 <블루스 코노테이션(Blues Connotation)>은 학구적인 12마디 블루스보다 오히려 초기 블루스 연주자들의 불확실성에 훨씬 가깝다. 많은 밥 음악가들이 콜먼의 아이디어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의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존 루이스와 일부 웨스트 코스트 음악가들의지지 덕분에 콜먼은 그의 첫 번째 음반을 녹음할 수 있었다. <섬싱 엘르!(Somthing Else!)> <토모로 이즈 더 퀘스천(Tomorrow Is the Question)> <더 셰이프 오브 재즈 투컴(The Shape of Jazz Come)> 등 그의 음반들은 차라리 하나의 선언이었다. 1960년대 12월 21일, 그는 더블 4중주단과 녹음했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앨범에는 <프리 재즈(Free Jazz)>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가 보여 준 외관상의 카오스에서 형식과 음악성을 끌어내려는 의도와 관련 있는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음악가들과 일반인에게 콜먼의 음악은 카오스의 소리였다. '새로운 것' 프리 재즈는 과연 진짜 재즈인가? 처음에 그들은 프리 재즈를 '새로운 것(the new thing)'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재즈는 처음의 즉흥연주가 자유롭다는 뜻에서 '자유로운(free)'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즈의 정의 그 자체, 또 비평가들이 처음부터 배인 문화에서 정형화시켜 놓은 음악어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오네트 콜먼의 앨범<디스 이즈 아워 뮤직(This Is Our Music)>은 "이것은 우리의 음악이다."라는 항변이었다. 또한, 백인들의 것도 아닌 음악에 대해 백인들이갖고 있던 권리에 도전하는 새로운 흑인 사상가들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음악을 정의하고 있는 기준들인 아름다움, 소리의 순수성, 대가다움, 논리적 형식 등이 전부 뒤로 물러났다.애초의 미국 흑인의 노래로 돌아감으로써 프리 재즈는 재즈의 정의인 리듬의 규칙성과 스윙을폐기시켜 버렸다. 프리 재즈가 담고 있는 것은 미국 흑인 음악을 구별해 주는 기본 요소들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 육체의 움직임, 거친소리, 즉흥성(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프리 재즈는 아랍, 동양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음악에까지 자신을 확장시켰다. 즉 전세계 음악에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프리 재즈는 흑인 인권운동의 거울이었다. 프리 재즈의 여가는 시민퀀 운동의 역사와 일치한다. 흑인 인권운동은 마틴 루터킹 목사와, 좀더 급진적인 맬컴X같은 지도자들의 주도 아래 일어났다. 이 운동은 흑인 거주 지역의 폭동과 '블랙팬서즈'가 이끄는 투쟁, 그리고 제3세대 해방 운동과의 연대의 산물이요, 그동안 누적된 억압, 무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런 정치운동 속에서 프리 재즈는 이 세상에 군림하려는 서구 예술의 야망에 물음표를 던졌다. 이런 배경 위에서 프리 재즈는 1960년대 후반의 대학가에서 자리를 잡았다. 백인들의 비판이 들끊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인 비평가들은 과거의 재즈 스타일 애호가로서 옹졸함과 예전스타일에 대한 고집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반란에서 나선 흑인 사회의 대변자, 테너 색소폰 존 콜트레인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흡인력으로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다. 그의 탁월한 악기인 테너 색소폰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950년대에는 리듬 앤드 블루스의 '악을 쓰는' 색소폰이 테너 색소폰의 남성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이미지 덕분에 테너 색소폰은 낮고, 격렬한 느낌의 음역에서 새된 소리의 과장된 표현까지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프리 재즈의 시대 동안, 특히 세 사람의 테너 색소폰 연주자가 각자의 계획에 따라 개성적인 연주활동을 했다. 파로아 샌더스는 계속해서 존 콜트레인의 작품을 연주했고, 이따금 콜트레인과 협력하기도 했다. 샌더스는 극단적으로 음악적이며 주술적인 접근법을 개발했고, 이국적인 음악 형식과 서구 외의 음악에서 쓰이는 악기들을 차용했다. 아키 셰프는 존 콜트레인,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는 물론이고, 솔, 블루스, 흑인 영가를 감성적으로 재해석해서 미국 흑인 음악의 역사가로 위치를 굳혔다. 앨버트 아일러는 과감히 소리를 높였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부르는 가장 나긋나긋한 멜로디를 조밀한 공명 구조로 짬으로써 전통적인 표현을 넘어섰다. 그것은 감정의 즉자성에 대한 선호였다. 여러 악기의 이용과 격정 프리 재즈의 특징은 어떤 아기도 배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 프리 재즈 연주가들은 자신의 전문이 아닌 악기도 즐겨 연주했다. 예를 들어, 오네트 콜먼은 형편없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과 트럼펫으로 오리 따위가 내는 꺼억꺼억 하는 소리며, 뭔가 터지는 소리 찍찍대는 소리, 꼴록꼴록 하는 소리, 꽝 하는 소리 등 우발적인 소리를 집어 넣었다. 서니 머레이 같은 드럼 주자는 박자를 유지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을 버리는 대신 떨고, 중얼거리며, 살랑거렸다.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졌다는 점에서 프리 재즈는 흑인 사회의 이해, 좀더 넓게는 위기에 빠진 모든 세대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비틀스가 등장하고 록(rock)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모든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이제 재즈는 외곽으로 밀려났다. '통합을 위한 명상' "연주를 하고 싶다면 흑인 악기를 연주하라. 베이스를 배워라." 찰스 밍거스는 바로 이 충고 때문에 클래식 첼로 주자의 길을 포기하고 위대한 밥 더블 베이스 주자가 되었다. 그 결심의 대가로 밍거스는 엄청난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다른 연주자들과 연주할 때 파괴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밍거스는 자신에게 인종차별 반대정신을 불어넣어 주었고, 자신의 모든 작품의 모태가 된 블루스와 흑인 영가의 현실적인 리얼리즘을 주장해다. 또 벨라 바르토크와 낭만주의 작품을 연구할 때 만났던 학구적인 체계에 심취해 있었다. 밍거스는 레니 트리스타노와 제3의 물결을 주도하는 인물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자신의 미적 아이덴티티 위기를 그대로 방치했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는 단지 베이스 연주자로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재즈 워크숍(Jazz Workshop)을 이끌며, 듀크 엘링턴 이래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이자 밴드 리더로 자리를 잡아갔다. 밍거스는 프리 재즈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는 클래식의 대위법과 '우발적인 다성음악'(spontaneous polyphony)을 교대로 이용했다. 그리고 템포와 비트를 쉴새없이 변화시켰고,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1950년부터 밍거스는 공포의 선동가로서, 에릭 돌피를 자신의 뒤로 끌어들였다. 돌피는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를 연주했다. 돌피는 프리 재즈의 극단적인 해법을 완벽하게 받아들인 적은 한번도 없지만 격렬한 휴지가 이어지는 불연속성의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멜로디가 그의 통제를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1964년 돌피가 죽은 후에도 찰스 밍거스는 오랫동안 환상을 쫓던 동반자를 그리워했다. 그는 이 동반자에게서 작곡자로서, 편곡가로서 악기의 이상적인 울림을 발견했던 것이다. 밍거스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도록 자신의 관심사를 추구했다. 프리 재즈 : 두 번째 오네트 콜먼의 더블 4중주단 이래, 새로이 확립된 자유를 조직화하고 집단적인 즉흥연주의 힘을 대규모 그룹의 한 가운데에서 되살리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앨런 실바가 개별 소리의 중첩을 통해서 밀도 있는 공명을 시도하는 가운데 선 라(Sun Ra)는 이국정서와 환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전통에 매달렸다. 그것은 1930년대 주류였던 빅 밴드들의 뒤를 잇는 연주였다. 더욱이 수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레코드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데 공동전선을 폈다. 팔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이 있던 차였다. 그 가운데 시카고에 기반을 둔 '창조적인 음악가들의 진보를 위한 연합(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reative Musicians, AACM)'은 프리 재즈 운동이 막 주춤거리기 시작하던 순간에 프리 재즈의 역동성을 재출범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 단체는1965년에 피아노의 무할 리처드 에이브럼즈가 시카고에서 출범시켰는데, 1970년대 프리 재즈로두각을 나타낼 다양한 인재들을 끌어들였다. 시카고 아트 앙상블(Chicago Art Ensemble)이 빛과 어둠위에서, 그리고 박자의 극적인 구성 위에서 연주했다면, AACM의 일원이었던 앤서니 브랙스턴은 에릭 돌피를 직접 인용해을 뿐만 아니라 니 코니츠와 폴 데스먼드 같은 백인 음악가는 물론 20세기의 클래식 작곡가도 참고했다. 1960년대 내내 특히 인기를 끌었던 브랙스턴은 트롬본의 대가 조지 루이스, 피아노의 앤서니 데이비스 등 많은 재주꾼을 발굴해 냈다. 다락방 세대 이 시기에 많은 음악가들은 뉴욕에 있는 스튜디오를 떠났다. 그들은 뉴욕의 스튜디오 대신 창고 같은 허름한 건물을 빌려 거처로 삼았다. 그들의 거처는 작업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레코드를 배급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음악가들은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클럽의 상업적 이해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이웃을 방해할 염려도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프리 재즈의 선배들과 서로 의존하면서 이 자유로운 운동에 전념했다. 즉 이해하기 쉬운 리듬과 멜로디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앨버트 아일러나 데이비드 머레이를 들을 때면 그들 음악에서 서정성을 끌어내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프리 재즈와 밥의 후계자들 사이에서는 모든 예슬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비슷한 새로운 흥분이 쉽게 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트 콜먼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화성적 선율(hamolodic)'의 우주를 열었다. 콜먼의 펑크 4중주단은 제임스 브라운에서부터 물려받은, 흑인 대중음악의 격렬함을 직접적으로 노래했다. 유럽의 재즈는 미국의 모델과 다른 길을 개척했다. 재즈가 미국 특유의 형식인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밖에도 재즈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토기부터 재즈를 포용했다. 프랑스의 재즈는 1930년대의 장고 라이하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프랑스에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이 상륙했다. 얼마 안 있어 초기의 비밥 레코드들이 미구의 뒤를 이어 상륙했다. 그러나 그후 15년 이상이나 비밥이나 뉴올리언스 정통파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없었다. 마르샬 솔랄이나 앙드레 오데르 같은 특별한 예외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프리 재즈가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프리 재즈가 등장하면서 유럽에서는 '구식 재즈'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 유행했다. 동시에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유럽을 통틀어 비록 그 수가드물기는 했지만, 활발하게 활동한 빅 밴드들은 정장을 버리고 블루진을 입었다. 그리고 근거지를 떠나 자유롭게 어울렸는데, 그들은 때로 청중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밴드 속에서의 역할은 의문시되었다. 일부 작은 그룹은 리듭 섹션도 없이 연주하고, 또 2중주단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그런 변화가 프리 재즈의 경제적 어려움-유럽에서는 시장성이 별로 없었다-을 반영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좀더 친숙하고 극적인 예술 속에서 특별한 친근감을 공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마이크 웨스트브룩이나 빌렘 브로이커 같은 음악가와 함께할 때면 그 '무대'는 때로 정말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향수와 거부 그것을 과연 재즈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즉흥음악'에서는 역설적이면서도 서로 보완적인 접근방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즈의 본질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기억을 따라간다는 것을 의문시했다. 그들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고 또 그것이 즉흥연주의 격렬함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즉흥연주를 서투르게 모방하는 결과가 되었는지 아니면 과장하는 결과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많은 유럽 즉흥연주가들은 자신들의 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드럼주자 한 베닝크와 독이의 색소폰 주자 페터브뢰츠만이 행한 조롱의 대상이 자신들의 문화적 기반 자체-즉, 유럽문화-이긴 하지만, 바로 그 문화적 기반은 미셸 포르탈의 부드러운 격정을 유발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프로탈은 반도네온(남아메리카의 아코디언)으로 연주를 했고, 바스크 지방의 음악을 전파했다. 자유, 즉흥연주의 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세계적으로 실제든, 상상이든, 아니면 비려 온 것이든 민속음악이 즉흥연주가들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프리 재즈의 자유로운 표현법이, 위협받고 있는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문화적인 도구로서 이용된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가 뽑힌 채 서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 즉흥연주가 전달하는, 세계 방방곡곡, 그리고 모든 시대의 음악 메시지를 대중매체를 통해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프리 재즈가 이런 진보를 전해주는 유이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60년대는 다른 형식의 음악과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그 길을 열어 가고 있었다. 1960년대와 그 이후에 프리 재즈의 선구자들이 거부했던 것들을 흡수하려는 음악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테크닉을 감정의 방해물로 보는 대신 포용했다. 재즈는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록,클래식, 기타 전통음악 형식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지평을 넓혀 갔다. 제4장 변화로 가는 길 재즈 비평가, 역사가, 이론가들은 과거를 들여다보다가 스위에서 나와 밥의 진화 언저리에서 독자저인 그룹을 형성했던 음악가들(냇 킹 콜, 에롤 가너)이나 현대적인 음악가들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었던 음악가들(허비 니콜스, 폴 곤잘베스)을 놓치는 수가 종종 있다. 그외에도 프리 재즈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자신들만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마르샬 솔랄, 소니 롤린스)이나 장애물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더욱 파고들기 위해서 멈추어 버린 사람들(오스카 피터슨, 조지 셰어링)도 있다. 프리 재즈의 언저리에서 재즈의 역사를 설명할 때, 들뜬 재즈 비평가들은 프리 재즈의 폭발과 즉흥연주 작품 자체에 대한 우월성을 1960년대의 유일하고 의미 있는 발전으로 설명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가 지난 후 재즈의 역사는 더 이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프리 재즈의 언저리에서 여러 경향이 대두된 것이다. 게다가 찰스 밍거스와 에릭 돌피 스스로는 물론이고, 호레이스 실버, 존 콜트레인, 마일즈 데이비스, 오네트 콜먼(블루 노트사와 캔디드사 레이블로 녹음된 일부 음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음악 언어의 발전은 즉흥연주가의 자율성과 리듬의 해방에 기여했다. 이 '새로운 것'의 연주가들은 정치적인 투쟁에 몸을 던지는가 하면,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감싸안았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당대의 많은 연주가드은 클래식 음악에서 프리 재즈까지의 모든 문화적 환경에서 원하는 것을 통제하고, 동화시키고,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다. 바 피아노 연주가 '바 피아노 연주가(Barroom Piano Player)'라는 말은 프리 재즈가 폭발을 일으켰을 때 빌 에번스가 받은 평가이다. 후일, 비평가들은 빌 에번스가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어느 특정한 흐름의 리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존 콜트레인이나 오네트 콜먼과 마차간지로 심오한 혁명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번스는 모들 재즈가 빛을 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들 재즈의 공과를 체계화하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끌어냈다. 그는 작곡할 때 자신이 좋아한 이전의 스탠더드 작품이 가진 매력을 차용했다. 에번스는 또한 제한된 하모니 체계를 완화시켰고, 멜로디의 가능성을 넓혔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의 고품위 터치 덕분에 재즈 피아노에 있어 새로운 접근방식이 개척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즈 피아노는 기본적으로 퍼커션(percussion) 도구로만 쓰였다. 그는 자신의 트리오(피아노, 더블베이스, 드럼)를 실내악단으로 이용했는데, 에번스 트리오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60년에서 1961년 사이, 베이스의 스콧 라파로와 드럼의 폴 모션은 단순한 반주자의 역할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피아노와 똑같은 솔로 주자가 되었다. 세 사람이 사이에 삼각 대화가 이루어졌다. 집단적이고 상호적인 즉흥연주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연주를 존중하면서 행하는 것을 넘어 그 어느 때보다 더 '같이 듣기'와 '자신의 자리 찾기'의 문제가 되었다. 존 콜트레인이 소리와 격정으로 이끈 혁명을 빌 에번스 트리오가 섬세하게 수행했다. 그 엄청난 섬세함은 클로드 드뷔시의 내명성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관심사를 공유했던 짐 홀 같은 당대의 연주가들과 함께 빌 에번스는 피아노 주자(키스 자렛, 폴 블레이, 칙 코리아)뿐만 아니라 드럼 주자(잭 디조넷), 베이스 주자(개리 피콕), 기타 주자(팻 메시니), 비브라폰 주자(개리 버턴), 색소폰 주자, 트럼펫 주자, 밴드 리더 등에게 당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음악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끝없는 노력 마일즈 데이비스가 한창 날리던 1950년대 말 짧은 기간(1958-1959년) 동안 빌 에번스와 존 콜트레인이 데이비스 그룹에 있었다. 데이비스는 빌 에번스 이후 피아노 주자를 두 번 바꾸었는데 처음에는 윈턴 켈리, 두 번째는 허비 행콕이었다. 행콕은 빌 에번스의 세련미에다 펑크 피아노의좀더 격렬한 연주를 결합시켰다. 그에 비해 데이비스는 존 콜트레인을 대신할 만한 웨인 쇼터를 찾기까지 몇 년을 보내야 했다. 웨인 쇼터를 찾은 뒤로 데이비스 앞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오늘날 소규모 그룹을 위한 모던 재즈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레코드들이 속속 탄생한 것이다. <이에스피(E.S.P)> <마일즈 스마일즈(Miles Smiles)> <네페르티티(Nefertiti)>, <마일즈 인 더 스카이(Miles In the Sky)>가 일련의 음악적 의문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이듬해에 해답을 던지는 식으로 나왔다. 당시, 데이비스 5중주단은 진정으로 실험적인 그룹이었다. 녹음하러 갈 때마다 새로운 발전을 보인 것이다. 여기서, 리듬 섹션은 빌 에번스 트리오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허비 행콕(피아노)은 암시적이었고, 론 카터(베이스)는 더 이상 템포를 기계적으로 지시하는 거이 아니라 강력한 약동감을 자아냈다. 토니 윌리엄스(드럼)는 정교하고도 과감하게 반주자의 역할에서 탈출했다. 윌리엄스는 2박자로 쪼개진 리듬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엘빈 존스의 폴리리듬을 전파, 다양화했다. 녹음을 거듭할수록 데이비스 5중주단은 웨인 쇼터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의존한 레퍼토리들을 탐구해 들어갔다. 즉흥연주의 대가인 쇼터는 데이비스에게 심화된 모들 연주를 통해 더욱 자유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무대에 섰을 때 데이비스는 전통적인 프로그램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슈디오에 들어갔을 때는 대중의 귀에 다르게 들렸다. 20년 전 찰리 파커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비스의 방법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 소규모 재즈 그룹의 관례가 되고 있다. 록의 폭발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자신의 5중주단의 실험에 고무된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을 록과 그 엄청난 관중 앞에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곡(rock)은 컨트리 뮤직과, 부기로부터 유래한 흑인 로큰롤(rock and roll)의 혼합물인데 1950년대 중반 백인 음악가들에 의해 태어났다. 그후 10년 동안 록은 리듬 앤드 블루스의 효과적인 리듬 섹션을 채택했으며 솔과 다른 미국 음악형식의 진보에서 혜택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녹음시설과 생산시설이 뒷받침되었고, 어번 블루스(urban blues)와 함께 등장한 전자악기를 이용했다. 록-'기타 영웅'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뿐만 아니라 음악 형식의 변모에서도 악기 연주실력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로커(rocker)'들은 클래식, 재즈, 비유럽 전통음악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이 시점 이후, 록은 거대한 사운드 시스템의 설치와 함께 대규모 야외공연도 가능해졌다. 히피의 시대 영국 음악계에서는 록과 재즈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두 형식 모두 블루스의 부활뿐만 아니라 리듬 앤드 블루스에도 아주 근접해 갔다. 미래의 재주 연주가들과 록 스타들이 알레시스 코너나 그레이엄 본드 그룹에서 훈련을 쌓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과 아방가르드 재즈가 나란히 달렸다. 그리고 '소프트 머신' 같은 그룹들이 모든 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에서는 '블러드, 스왯 앤드 티어스' '시카고' 같은 백인 록 그룹이 리듬 앤드블루스의 브라스 섹션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록의 상승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찰스 로이드는 키스 자렛의 반주로 콜트레인 류의 감정을 '포크의 부활(folk revival)'과 비틀스의 멜로디의 정교함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리듬 앤드 블루스의 흑인 음악 뿌리쪽으로 훨씬 더 나아간 캐논볼 애덜리와 함께, 일부 음악가들은 해럴드 로즈와 레오 펜더가 발명한 전자 피아노로 실험에 나섰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에 전기를 꽂았다 이제 프리 재즈의 엘리트주의와 록(그의 표현을 따르면 록은 리듬 앤드 블루스를 약화시켰다)에 싫증을 느낀 마일즈 데이비스는 관심을 완전히 흑인 대중음악으로 돌려 버렸다. 특히 '슬라이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펑크에 흠뻑 빠졌다. 슬라이 스톤은 제임스 브라운에게 물려받은 격렬하고 노골적인 미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1968년, 데이비스는 록 기타의 영웅 지미 헨드릭스를 만났다. 핸드릭스는 블루스의 힘을 팝의 보편성에 결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데이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요시되지 않던 기타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 악기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키보드, 베이스는 물론 관악기까지 기타의 뒤를 이어 전자화되기 시작했다. 음량이 커지고, 새로운 유형의 소리가 나타났다. 1969년데 영국 무대에서 건너온 젊은 기타리스트 존 매클러플린과 함께 <인 어 사일런트 웨이(Ina Silent Way)>를 녹음한 후, 데이비스의 세계에서는 전자악기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후 몇 개의 암시적인 소절로만 작품을 쓰고, 트럼펫에 와우와우 페달을 단 데이비스는 이어 나올 음반들에서 진정한 전자악기의 향연을 벌이게 된다. 그 음반들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다양한 키보드, 세계 각지의 퍼커션 악기가 새롭게 조합되고, 토니 윌리엄스로부터 물려받은 2박자 헤머링이 나타난다. 마일즈 데이비스 사단의 재즈 록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서 일했던 수많은 음악가들은 밴드에 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작업하려 했고, 또 거기서 얻은 팬을 그대로 붙잡고 싶어했다. 그들은 록의 에너지를 자신들의 밴드에 전이시킴으로써 재즈 음악가로서의 기술을 재즈록(jazz-rock)의 연주에 이용했다. 예를 들어, 존 매클러플린은 1971년에 시작한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매클러플린은 존 콜트레인에게서 물려받은 거장다운 연주법과 마법들을 록의 청중들을 열광시키는 기교적인 연주와 결합시켰다. 콜트레인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인도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인도 음악의 운율적이고 선법 위주의 정교함을 리듬 앤드 블루스의 하모니와 리듬의 효율성과 혼합시켰다. 피아노의 얀 해머는 초기의 전자 키보드가 제공하는 프레이징의 가능성을 탐구한 선구자였다. 바이올린 주자 제리 굿맨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드럼의 빌리 코햄은 박자가 일정치 않은 음악에서도 테크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증명해 보였다. 드럼 주자들은 박력과 빠른 연주솜씨, 그리고 인상적인 장비로 엄청난 흥분을 자아냈다. 이제, 토니 윌리암스나 빌리 코햄 같은 리더들은 밴드 앞에 나서서 다른 연주자들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칙 코리아의 그룹 '리턴 투 포에버'에서 연주한 레니 화이트(드럼)와 스탠리 클라크(최초의 위대한 전자 베이스 독주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칙 코리아 자신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첫 번째 전자악기 실험에 동참한 바 있었고, 그의 키보드를 다루는 놀라운 기교와 뛰어난 작품은 자못 매력적이었다. 기타 주자인 알 디메올라의 반주로 스페인 음악으로 다가간 칙 코리아의 강력한 라틴 음악적 감동은 청중을 열광시켰다. 역시 마일즈 데이비스의 세계에서 나타난 허비 행콕은 미국 흑인 대중음악의 전통에 훨씬 더 깊이 뿌리를 내린 그룹을 만들었다. 드럼의 하비 메이슨의 깊은 '타법'에 의존한 행콕의 음악은 데이비스의 음악보다 더 펑키해졌다. 일반대중이 더욱 접근하기 쉬운 그의 음악은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그룹의 이름을 그대로 딴 앨범 <헤드 헌터스(Head Hunters)>는 엄청난 성공작이었다. 이제 어쿠스틱과 전자음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칙 코리아와 마찬가지로 행콕은 1960년대의 마일즈 데이비스 5중주단의 정신에 근접한 형식으로 돌아감으로써 성공적으로 '일렉트로 펑크(electro-funk)'의 길에 들어섰다. '웨더 리포트' 이런 타입으로 가장 오래 지속된 그룹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를 결성한 것도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서 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1970년 후반 웨인 쇼터, 조 자비눌(피아노), 미로슬라프 비터우스(베이스)가 알폰스 무즌(드럼)과 에어토 모레이라(퍼커션)를 초대해서 변화무쌍한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 때로 그들의 레포토리는 클래식의 표제음악과 비슷했다. 즉, 19세기의 유럽 클래식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향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식이었다. 이어 웨더 리포트의 음악은 퓨전(fusion)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록과 라틴 음악이 더욱더 중요해진 것이다. 1974년에 베이스의 비터우스는 전자 베이스의 알폰소 존슨을 위해 길을 비켜 주었고, 조 자비눌은 신시사이저의 위력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제이코 파스토리어스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파스토리어스는 1987년 죽을 때까지 전자 베이스의 가장 독창적인 거장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1976년에 발표한 <블랙 마켓(Black Market)>과 1977년에 발표한 <헤비 웨더(Heavy Weather)>는 그 장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헤비 웨더> 앨범에 수록된 곡인 <버드랜드(Birdland)>는 1930년대의 빅 밴드 전통에 경의를 표한 곡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폭넙은 대중들의 사랑과 제이코 파스토리어스(전자 베이스)와 피터 어스카인(드럼)의 뛰어난 리듬에도 불구하고 웨더 리포트는 태어난 지 15년 만인 1985년 해산하고 말았다. 쇼터와 자비눌의 불화 때문이었다. 스튜디오에서의 퓨전 음악적 교배에 대한 취향은 차츰 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너무나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재즈 록 대신에 '퓨전'이라는 말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브레커 브러더스'가 선풍을 일으켰다.브레커 브러더스는 처음에는 존 에이버크롬비와 빌리 코햄과 함께 그룹 '드림스'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콜트레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떤 내용도 소화시킬 수 있었고, 2분할, 3분할프레이징을 완벽하게 주물렀다. 트럼펫의 랜디 브레커와 색소폰의 마이클 브레커는 미래의 연주자들이 피해 갈 수 없는 참고표가 되었고, 즉흥연주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작업에 대한 기여역시 엄청났다. 알토 색소폰 주자인 데이비드 샌본 역시 스튜디오의 단골 초청자였다. 그는 스티비 원더의 흔적과 한때 같이 일했던 길 에번스 밴드의 흔적이 남아 있는 흥겨운 퓨전을 연주했다. 공간에 대한 욕구 재즈록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젊은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숭배자, 언론, 심지어 음악가들조차 그런 현상을 걱정하고 있었다. 1970년대가 끝날 무렵, 존 매클러플린과 여러 사람이 어쿠스틱 기타로 돌아섰다. 악기에 의한 스테레오타입과 재즈 록 기타 연주가들의 다소 허황된 기교가 특히 의문시되었다. 이런 경향에 대한 반동은 음악가 스스로에게 시작되었다. 웨스 몽고메리, 짐 홀, 빌 에번스 등 선배 음악가들의 음악을 다시 들은 음악가들이 부드러운 톤, 좀더 함축적인 멜로디, 좀더 가벼운 오케스트라의 내용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가 이러한 것에 팝송이나 컨트리 음악,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혼합하고 싶어했다. 기타의 존 에이버크롬비와 팻 메시니는 ECM이라는 레코드사에서 자신들의 영감에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을 발견했다. ECM의 미학 '현대음악총서(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 재즈의 아이덴티티 위기가 바로 그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 제목이 대표하는 음악에 감히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에 베이스를 연주했던 독일인 만프레드 아이허가 1969년 ECM사를 설립했다. 처음에 아이허는 담배연기 자욱한 클럽의 소리가 아니라 콘서트 홀의 어쿠스틱한 소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ECM은 여러 가지 향상된 기술들을 받아들였다. 스테레오 사운드의 정확성, 에코의 재구성, 피아노, 비르라폰과 전자 기타, 어쿠스틱 기타 등 악기의 수정처럼 맑은 소리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이 든 음반수집가들은 이런 식으로 제작한 음반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편안하게 듣는데(진정성은 다소 희생되더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젊은 층에게는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혁명 이데올로기의 와해와 아방가르드의 소모성에 실망한 젊은 세대는 관심을 바꾸어 환경보호와 클래식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경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ECM과 수많은 레이블들은 레코딩과 콘서트에서 새로운 '생태학'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때가지만 해도 모던 재즈에서는 상당히 예외적이었던 독주 형식은 어쿠스틱 피아노로의 희귀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제 재즈 음악가들은 콘서트 예술가가 되었고, 재즈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만큼이나 엄숙하게 들어야 할 차원으로 올라섰다. 1970년대 말의 재즈의 상황 1970년대의 재즈는 신고전주의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아키 셰프에서 마르샬 솔랄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레퍼토리를 다시 읽는 이이 유행했다. 동시에 젊은 대중들은 리 코니츠, 덱스터 고든, 아트 페퍼 등과 함께 프리 재즈의 특성을 재발견했다. 갈수록 클래식 음악을 참고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도 젊은 음악가드이 백과사전식 음악을 주창했고, 그 음악속에서는 고전, 록 그리고 세계 각지의 음악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들은 외부의 요소들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인상적인 능력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탄생한 재즈의 현재 위치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흐름들은 과연 재즈의 숨이 끊어져 가고 있다는 신호일까 아니면 전통이 확대된다는 신호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재즈가 전세계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난 다양한 음악 유형들에 영감을 주어 왔다는 사실, 즉 그것들이 이제 마감하려 하고 있는 세기를 위해 팡파르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제5장 조각조각 찢어진 재즈 열정적인 30대 사이에서 재즈가 유행하고 있다. 또 패션 디자인과 흑백 광고사진에도 재즈가 등장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재즈 천재들을 판에 찍은 듯 만들어 내고 있다. 로큰롤에서도 재즈의 영향이 느껴진다. 다른 말로 해서, 오늘날 즉흥 음악이 재즈에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재즈의 이미지와 전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재즈 음반 재발행이 유행하고 있다. 재즈는 이제 충분히 인식되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음악 형식이 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서가에서 클래식 음악과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콤팩트 디스크가 도입된 1983년 이후 레코드 회사들은 훨씬 싼 비용으로 이제는 명작이 된 유명한 재즈 앨범들을 다시 발행하고, 선집으로 내기 시작했다. 물론, 1980년대 재즈의 주된 관심사가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시대에도 새로운 발전은 있었다. 주로 네오 밥(neo-bop)과 광고 제작 분야로 한정되기도 하지만. 네오 밥의 등장 네오 밥은 아트 블래키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훈련을 쌓은, 젊은 엘리트 그룹이 개척한 분야로 브랜포드 마살리스와 윈턴 마살리스 형제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들은 하드 밥의 상속자로서 1960년대의 마일스 데이비스 5중주단의 음악을 들은 후 하드 밥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그러나 이 젊은 음악가들은 복사판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놀랍도록 진보한 테크닉을 구사하고 흠잡을 데 없는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선배들의 커다란 매력이었던 과함함이 사라졌다고 평하는 비평가도 있었다. 별로 섬세하지 못한 이와 같은 관찰은 미국 흑인 음악에서 전통의 요소가 가지는 중요성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재즈가 불과 몇십 년 안 되는 짧은 세월 동안 놀라운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혁신가보다는 추종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50년대 내내 찰리 파커의 메시지를 자기 거으로 만들었던 '작은 대가들(small masters)'에 대한 숭배는 30년 후에 뉴욕의 네오 밥 음악가들이 보여 주는 존경심과 그리 다르지 않다. 교회에서 거리로 미국 흑인 재즈는 언제나 그것이 태어난 사회적 실체에 뿌리를 내리려고 노력해 왔다. 1990년에 나온 퀸시 존스의 <백 온 더 블록(Back on the Block)>이 가지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퀸시 존스는 그 당시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카운트 베이시의 편곡가로 일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마감을 얼마 앞두고 있지 않은 이 세기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조사를 하듯 엘라 피츠제럴드와 디지길레스피를 포함해서 레이 찰스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에 이르는 미국 흑인 음악의 대가들 여러 명을 조합했다. 재즈가 흑인 교회와 거리에서 같이 자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이, 솔 음악과 랩은 재즈를 환영했다. 색소폰의 케니카렛(게리 알렌과 마찬가지로 트럼펫의 마커스 벨그레이브와 함께 디트로이트에서 훈련을 쌓았다.)이나 개리토머스(잭 디조넷과 마일즈 데이비스와 공연할 때 발굴되었다.)와 함께, 섬세한 신고전주의 손길의 소유자 피아노의 게리 알렌에서부터 시카고 아트 앙상블의 환호받는 트럼펫 주자 레스터 보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뿌리에 대한 관심, 펑크의 발전에 대한 주목, 1960년대 음악가들의 선택을 확인해 주는 영혼의 개방성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윈턴 마살리스의 세 개의 모음곡, 외설스런 랩 그룹 '투 라이브 크루', 프리 재즈가 이룩한 것과 밥의 확실성을 혼합한 1960년대의 재즈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점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소외,1980년대에 나타난 소수민족의 인구증가가 특징인 사회에서 이 모든 것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공동 소유인 재즈 이 시대 즉흥음악의 여러 형태들-편의상 여전히 재즈라는 이름이 붙은-은 흑인 음악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백인 음악가들 역시 재즈의 유산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데이비드 리브맨과 리처드 바이라크는 존 콜트레인과 빌 에번스의 유산을 깊이 파고들었다. 키스 자렛 역시 빌 에번스의 혈관 속에 들어 있는 전통적인 리듬 섹션과 과거의 스탠더드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팻 메시니는 오네트 콜먼과 웨스 몽고메리의 영감을 받아 팝, 브라질 음악, 컨트리 뮤직의 맛이 나는 작품을 만들었다. 퀸시 존스에서 마커스 밀러에 이르는 흑인 프로듀서들은 1980년대에도 부인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 백인 음악가들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마이클 브레커, 데이비드 샌본 그리고 기타의 래리 칼턴 같은 사람의 개성 덕분에 백인 재즈 음악가들은 소리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스튜디오 작업은 재즈 록이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재즈는 그런 차용으로부터 상업적인 혜택을 누렸다. 라틴 음악의 폭발과 함께 태양과 건강함을 상징하는 새로운 '퓨전'은 톤 위주의 음악에 대한 대중의 취향과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청중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빅 밴드의 재탄생 1940년대 이래, 빅 밴드는 갈수록 백인 음악가의 영역이 되어 왔다. 그러다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돈 엘리스가 재즈 록의 운율상의 문제를 뛰어넘었다. 찰스 아이브스, 에릭 사티, 쿠르트 바일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내세운 칼라 블레이는 패러디의 영역을 도입했다. 길 에번스와 조지 러셀의 경우, 그들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작품은 빅 밴드의 구조를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관악부의 축소, 리듬 섹션의 강조, 프리 재즈에서 물려받은 자유의 채택이 주된 흐름이었다. 1989년의 <오라(Aura)>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1962년 길 에번스와 함께 녹음한 <콰이엇 나이츠(Quiet Nights)> 이후 대규모 그룹과 같이 녹음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모두를 위한 재즈 과거에는 재즈 사회를 집안 싸움으로 갈린 하나의 커다란 가족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가족이 완전히 해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현대의 재즈 음악가들이 예전 재즈의 스탠더드 곡들로 돌아가 자신들이 스타일을 연마하고 전통에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다 해도, 현대 재즈의 레퍼토리와 연주가 너무나 달라져 과거와 현대의 재즈 음악가들은 만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재즈 팬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초기 재즈 팬은 자신들을 재즈로 이끌었던 뉴올리언스의 전설과 그 이후의 재즈 사이에 별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가 있다. 웨스트 코스트 음악 애호가와 급진적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회상하는 사람들. 이 세 부류 모두 ECM을 싫어한다. 스윙이 결여되어 있고, 메마른 느낌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재즈의 새로운 소리들 콤팩트 디스크에 반기를 들고 78회전 음반을 수집하려고 애를 쓰는 팬들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재즈의 소리와 스튜디오 작업의 성격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녹음이 한 번에 끝나거나 또는 여러 번 녹음한 것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골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멀티트랙 테이프 리코더 덕분에 몇 번 녹음한 것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을 골라 편집한다. 특히, 일렉트릭 퓨전 그룹에서는 연주자들이 제각기 연주를 하고, 그것을 모아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한번도 만나지 않고도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어쿠스틱 음악가도 포함해서 모든 교정 작업이 멀티트랙믹싱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품의 내용에 관한 동의를 다시 이끌어 낼 필요가 있을 때도 트랙 작업을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이런 양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컴퓨터로 소리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신시사이저 역시 이 기술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새로운 전자 도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양한 키보드, 시퀀서, 리듬 박스, 전자 관악기 등등.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샘플러(sampler)'이다. 샘플러는 하나의 소리의 특성을 전자적으로 표준화하는 장치로서 그 소리를 꼭 그대로 재생하거나 아니면 변형시키는 데 이용된다. 벌레와 피그미족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벌레 소리와 피그미족이 합창하는 소리까지 도용, 도입되고 있다. 이런 하이테크를 통해서 재즈가 문화적 전용이라는 기본 기능을 재발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사실, 1980년대 말이 되면서 문화적 전용은 어쿠스틱이나 일렉트릭 재즈 양쪽 모두에서 전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재즈 음악가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동화시켜 왔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퓨전 뮤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고전적인 재즈의 내용과 기준과 관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지금은 더 넓은 범위의 유산-클래식 음악, 도시와 시골의 전통음악, 학구적인 음악과 거리의 음악, 록과 컨트리 뮤직, 프리 재즈 그리고 그외 다양한 소리들-을 둘러보고 있으며 거기서 차용하고 그리고 대개는 그것들을 뒤섞고 있다. 스윙의 힘 과연 재즈는 1980년대에 죽었는가? 아니면 그보다 더 일찍 오네트 콜먼, 길 에번스, 찰리 파커와 함께 죽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뉴올리언스를 떠나는 그 순간에 죽었는가? 이것은 다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미국의 흑인 음악이 폭발하면서 음악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뉴올리언스에서 출발한 거대한 음악의 강이 엄청난 지류를 낳으면서 이제 삼각주에 도달했다. 주류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사라지기도 했다. 각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코스모폴리탄적이며, 다인종적인 공간 속에서 재즈의 주창자들은 사라지고 있다. 1930년대에 스윙이라는 이름이 붙은 충동에 의해 그들은 관용과, 다양한 개인적인 스타일이 숨쉴 수 있는 여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남겼다. 그리고 스윙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기록과 증언 폭발과 전복, 우상 파괴와 방황, 밥 이후의 재즈는 모든 풍요로움과 모든 대담성 그 자체이다. 전환점 1940년대 말, 재즈의 모습이 바뀌었다. 디지 길레스피는 퓨전 재즈와 라틴 리듬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길 에번스의 방에 모인 음악가들은 서로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에서 새로운 개념을 키워 나갔다. 그 개념을 가지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밥의 '낡은 함정'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길 에번의 방. 조지 러셀, 마일즈 데이비스, 길 에번의 회상. 1948년, 맨해튼 웨스트 55번가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 회색 벽돌 건물의 지하로 내려간다. 그리고 도대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몸짓으로 문을 두드린 후 길 에번스의 세계로 통하는, 언제나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선다. 조명도 시원치 않는 방안에서는 축음기가 쉴새없이 알반 베르크, 라벨, 레스터 영, 엘링턴의 음악을 토해 내고 있다. 이따금 찰리 파커의 음악도 흐른다. 수백 개의 레코드 너머로 헤르만 헤세의 책, 딜런 토머스의 시집도 보인다. 드나들던 방문객이 놓고 간 추상화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베키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다. 뉴욕은 창조의 에너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셀로니어스 몽크는 이따금 빌리 홀리데이도 등장하던 다운비트 클럽에서 멋진 음악으로 혁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모턴 펠드먼, 존 케이지, 라몬테 영, 스테판 울프, 군터 슐러는 열광하는 수많은 청중 앞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폴록, 클라인, 콜더는 시각예술을 탐험하고 있었다. 오픈 시어터는 극자의 전통주의에 막을 내리고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브란도, 클리프트, 딘어 스트라스베르그의 <메소드(Method)> 공연을 통해 연기에 대한 일반상식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찰리 파커는 매일 저녁 스리 듀시스에서 미국 음악의 미학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딜런 토머스의 그것과 비교될 만하다. 문화적으로 비상했던 이 시기에 길 에번스의 방은 스승과 추종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나는 그가 문제를 가진 음악가라고 해서 거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잘못을 자신이 떠맡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또 불가능한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불어넣는 재능 또한 놀라웠다. 그는 차리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조지 러셀. 길 에번스의 뉴잉글랜드 예술학교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1985년 5월 19일 그때 나는 길 에번스의 집에 들르곤 했다. 그가 그 음악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길과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음악 아이디어를 그는 나의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길과 함께 있으면 인종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음악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는 피부색에 개의치 않았다. 내가 만난 백인 가운데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가 캐나다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쿨의 탄생>을 만들면서 길과 나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길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런 친구였다. 그는 아무도 못 보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좋아해서 본적도 없는 것을 보여 주곤 했다. 또 어떤 때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다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일즈, 여기 첼로를 들어 봐. 저 부분을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언제나 음악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음악 안으로 성큼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듣지 못하는 것들을 끄집어 내곤 했다. 새벽 3시에 전화를 해서는 "마일즈, 기분이 울적하면 스프링빌(Springsville)을 듣게." 하고는 전화를 끊는 사람이 그였다. (그곡은 <마일즈 어헤드(Miles Ahead)>에 들어 있었다.) 길은 사색가였고, 나는 그런 점을 사랑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다. 그는 내가 연주를 하고 있을 때 버드를 들으러 오곤 했다. 그는 양고추냉이를 한 봉투 가득 들고 들어와서는 소금을 쳐서 먹었다. 키 크고, 여윈 백인 남자인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멋있는 친구였다. 나는 그 같은 백인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의 흑인들에 익숙했다. 바비큐한 돼지코 샌드위치를 한아름 들고 들어와서는 그곳이 어디든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는 사람들만 보아 왔다. 그런데 나이트클럽에 양고추냉이를 들고 들어와서는 소금을 쳐서 먹는 사람? 그것도 백인이? 이스트 52번가에 길이 있었다. 한창 유행하던 구두와 신사복을 입은 흑인 멋쟁이 음악가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모자를 눌러쓴 길이 있었다. 정말, 그는 뭔가 다른 사람이었다. 55번가에 있는 길의 지하실 방은 음악가들이 빈둥거리는 곳이었다. 너무나 어두워 밤낮이 따로 없는 그곳에 가면 맥스, 디즈, 버드, 제리 멀리건, 조지 러셀, 블라섬 디어리, 존 루이스, 리 코니츠, 조 카리시를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침대 위에는 언제나 모든 것에 끼여드는 고양이가 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음악에 대해서, 아니면 뭔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 길은 우리 모두에게 어미닭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언제나 모든 것을 진정시켰다. 그는 그냥 음악가들 옆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을 배려하는 법과 음악에 대해서, 특히 음악을 편곡하는 법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자서전> 나는 언제나 다른 음악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 나는 음악의 동반자를 갈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그런 동반자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론에 관한 자유토론 같은 것. 나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길 에번스. 잭 체임버스의 <마일스톤스 원> 마일즈 데이비스의 '나인 피스 밴드'. 마일즈 데이비스와 프로듀서 밥 와인스톡이 <쿨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 하다. 길과 나는 이미 같이 일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내가 듣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솔로를 할 수 있는 수단을 찾고 있었다. 내 음악은 조금 느리고 버드의 것보다 긴장도도 덜했다. 길과 좀더 미묘한 보이싱을 실험해 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흥분되었다. 제리 멀리건, 길과 함께 그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9중주단이 알맞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길과 제리는 내가 미처 토론에 참여하기도 전에 어떤 악기들을 넣을 것인지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론, 음악 해석, 곡 선정은 내 아이디어였다. 나는 리허설 홀들을 계약하고, 연락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1948년 여름부터 길, 제리와 함께 나는 이 일을 하고 있었다. 1949년 1월과 4월에 녹음을 했고, 1950년 3월에 다시 녹음을 했다. 나는 일거리를 물어 왔고, 캐피틀 레코드사와 계약했다. 그러나 길과 같이 일하려면 작곡에 신경을 써야 했고, 또 길의 아파트에서 피아노로 연주해 주어야 했다. 9중주단을 시작하려고 할 때 나는 알토색소폰으로 소니 스팃을 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소니의 소리는 버드와 매우 비슷했다. 그래서 그를 제외했다. 제리 멀리건은 리 코니츠의 소리가 하드비밥의 소리보다 경쾌하다며 그를 넣자고 했다. 그는 코니츠의 소리가 우리의 앨범과 밴드를 뭔가 다르게 만들어 줄 거이라고 생각했다. 제리는 나나 알 맥키번, 맥스 로치, 존 루이스 등 구성원 모두가 비밥 출신이라 아무래도 옛날의 빅 밴드를 흉내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리 코니츠를 채용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연주하는 방식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메트로놈> 지의 배리 울라노프가 우리 음악에 대해서 약간 어리둥절해하던 것이 생각난다. 카운트 베이시는 매일 저녁, 우리 음악을 들으러 왔는데, 아주 좋아했다. 그는 내게 "느리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좋아. 아주 좋아."라고 말했다. 버드를 비롯해서 많은 음악가들이 우리 음악을 들으러 왔고, 다들 좋아했다. 특히 캐피틀 레코드사의 피트 루골로는 아주좋아했고, 자기 회사에서 녹음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 ... <쿨의 탄생>은 흑인 음악의 뿌리에서 나왔다. 튜크 엘링턴의 음악이 그 뿌리이다. 우리는 클로드 손힐처럼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듀크 엘링턴과 플레처 헨더슨으로부터 가져온 사람이었다. 길 에번스는 듀크 엘링턴과 빌리 스트레이혼의 열렬한 팬으로 <쿨의 탄생>을 편곡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자서전> 길 에번스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적 사고의 형성에 너무나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마일즈 데이비스는 나만 보면 "길 에번스를 잡아, 그 친구한테 앨범을 만들라고 해. 멋진 친구라고."라고 말했다. 마일즈가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거기서였다. 버드의 야만성, 불 같은 열정과 감장과 비교해서 그의 감수성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마일즈는버드와 같은 무대에서 연주할 때 그의 감수성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의 감수성을 토해 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밥 와인스톡. 잭 체임버스의 <마일스톤스 윈> 라이트하우스 카페 '라이트하우스 올 스타스(lightbouse All Stars)'의 리더였던 베이스 주자 하워드 럼시가 웨스트 코스트 쿨의 탄생에 대해 회상하다. 하워드 럼시 : 허모사 해변에 있는 라이트하우스는 유일하게 무대를 갖춘 곳이었다. 나는 존 레빈을 만나 일요일 오후에 즉흥연주회를 조직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가 당황하길래 내가 큰소리쳤다. "어차피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데, 잃을 것도 없지 않나?" "일요일은 음료수 한 잔도 제대로 팔기 어려운 날이라는 걸 알고나 있나?" "한번 해보세, 까짓 거!" 나는 연주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았다. 다음 일요일, 우리는 문 앞에 앉았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1주일 내내 모이던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였다. 쇼티 로저스 :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요일이면 오후 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했다. 힘들었지만 우리는 젊었고, 장소가 좋았다. 음료수도 그리 비싸지 않았고, 추가로 받는 돈도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몇 미터만 가면 해변이어서 때로는 수영복을 입츤 채 듣는 사람도 있고 그 차림으로 새벽 2시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던 당신네 젊은 음악가들에게 라이트하우스는 하나의 실험실이었는가? 그렇다. 특히 지미와 나에게는.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썼고, 거기로 가 무대 위에서 읽곤 했다. 우리는 작품을 쓰자마자 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중에는 나중에 녹음된 작품이 많다. 지미는 자기 그룹과 함께, 나는 '자이언츠'와 함께 많은 라이트하우스 그룹들이그때 작품을 녹음했다. 하워드 럼시. <재즈 매거진>과의 인터뷰, 1986년 3월 프레빈, 노보, 베이시 트럼페의 쇼티 로저스가 라이트하우스에서의 일요일에 관해 회상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에 관해 토론하다. 나는 앙드레 프레빈의 음악을 듣고 음열주의적(serialistic)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자이언츠'에는 나, 지미, 셸 리가 있었다. 우리는 실험적인 것을 좋아했고, 아직 적용된 적이 없던 모든 구성법을 다 동원했다. 분명 그것들은 음열주의적 작곡가들도 시도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체계를 재즈에 적용시켰을 때 어떤 하모니가 나오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프리 재즈'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악보에 적었다는 점에서는 완벽한 '프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간에 가면 완벽하게 자유로운 연주를 위해서 눈을 감고 악보를 보지 않아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레드 노보) 그룹에는 언제나 뭔가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부드럽고, 섬세하게 연주했다. 결국 그들의 연주는 내가 약음기를 사용하게 된 시점에서 내 일부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르는 채 '자이언츠'와 함께 아주 부드러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베이시의 '캔저스 시티 세븐' 스타일이었다. 피아노에서는 변주를 거의 하지 않고, 워킹 베이스를 많이 하는것, 그 소리는 ... '웨스트 코스트 소리'와 동일시되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서 자문해 본다. "그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그건 아마 내가 레드와 함께 있던 경험과 '캔저스 시티 세븐'에 대한사랑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 가끔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아버지'라는 말도 듣는다. 그러나 그건 노보와 카운트 베이시가 들어야 할 말이었다. 내 유일한 목표는 연주하고 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었다. '즐거운 재즈'라고 불렀어야 했다. 쇼티 로저스. <재즈 매거진>과의 인터뷰. 1986년 4월 라틴 재즈 가수 겸 퍼커션의 마치토, 트럼펫의 마리오 보자와 디지 길레스피, 베이스의 알 매키번, 편곡가 길 풀러와 조지 러셀은 쿠바 흑인 음악과 재즈 음악가들의 만남에서 수반되는 감격과 어려움을 증언했다. 차리 파커와 함께 <엘 마니세로(El Manicero)>를 연주하고 녹음하자는 아이디어에 모두 흥분했다. 그러나 그 곡은 악보로 쓸 수 없고 느껴야 했다. 처음에 재즈 음악가들은 우리 리듬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4/4박자를 평범하게 연주하지 않기 때문에 다운비트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건 느껴야만 하는 것이었다. 즉 봉고케로와 팀발레로가 폴리리듬을 연주한 것이다. 내 귀에는 다운비트가 들렸다. 그러나 그걸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라틴계 가운데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찰리 파커가 라틴 감정으로 연주할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풍부한 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한테 맞추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맞추면서 기꺼이 우리 자신을 제한했다. 그를 욕보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좋게 느끼기를 바랐고, 결국 <엘 마니세로>를 녹음하지 않았다. 마치토. <재즈 매거진>과의 인터뷰, 1979년 1월 통합을 주장한 것은 나였다. 그때 디지가 캘로웨이를 떠나면서 뭔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문제로 밴드 멤버들과도 이야기 했다. 디지가 물었다.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해 잡아 놓았소." 나는 친구인 차노 포조와 다른 봉고 주자를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그들이 디지와 연스발 수 있도록 일정을 맞추었다. 디지는 아주 열심이었고 차노를 놓치지 않았다. 디지가 차노, 맥스 로치와 밴드를 조직했을 때도 차노는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콩가 주자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한참 후 두 나라 사이의 올바른 접근법을 발견할 때까지는. 나라는 달랐지만 결국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모든 리듬은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고, 모든 흑인은 그곳이 고향이니까. 마리오 보자, 디지 길레스피의 <투 비 오어 낫 투 밥>에서 인용. 차노는 우리에게 멀티리듬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면 그는 나와 알 매키번에게 드럼을 주고 자신도 드럼을 잡았다. 다른 친구는 방울을 잡았다. 이제 그가 모두에게 리듬하나를 제시한다. 우리는 모두의 리듬이 서로 연결되는 법, 모든 사람이 뭔가 다른 것을 연주하는 법을 배원다. 버스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며 길을 달린다. 그는 우리에게 쿠바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일부나마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나는 콩가를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그 노래를 들으면 나는 서로 구분이 잘 안된다. 그러나 어차피 다 같은 것들이다. 나니고, 아라라 산토 외에도 많은 악기들이 제각기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나니고를 연주해 보라고 하면 그는 그 특이한 리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모든 것은 아프리카에서 유래했다. 디지 길레스피, 디지 길레스피의 <투 비 오어 낫 투 밥>에서 인용 내가 그 밴드에 합류한 것은 1947년 후반이었다. 그때 디지와 그의 음악에 대한 견해, 그가 아프리카와 쿠바 흑인의 영향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서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일종의 혁명아였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지만 그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아프리카와 쿠바 흑인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음악에서 아무리 독창적이라 해도 다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다. 디지가 차노 포조를 합류시켰을 때 정말 기뻤다. 나는 언제나 드럼에 매혹되어 있었고, 특히 손으로 연주하는 드럼은 새로운 소리였다. 차노는 멋진 드럼을 손으로 연주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디지는 그를 밴드 속에서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카운트 베이시의 리듬 섹션이 전부였다! 지미 블랜턴 덕분에 내 머리가 돌아가기는 했다. 그러나 리듬 섹션에 관한 한 베이시가 전부였다. 디지는 멀리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밴드에서 차노가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차노는 우리 밴드에 들어와 다른 차원을 열었다. 그는 재즈 밴드에서 콩가 드럼을 연주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자,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 보자. 알 매키번, 디지 길레스피의 <투 비 오어 낫 투 밥>에서 인용 나는 우리가 연주한 최초의 진정한 라틴 음악은 <만테카(Manteca)>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라살레가 94번지에 있는 내 아파트에서 만테카를 작곡했다. 디지, 나, 차노, 빌 그레이엄밖에 없었다. 차노는 모든 것을 노래로 옮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물으면서 밤을 지샜다. "베이스는 어떻게 할까?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트럼펫은 어떻게 하면 될까? "피-디-도! 피-다-도! 피-다-도!" 차노는 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이렇게 말했다. "이봐, 좋다구, 알았어. 계속해 봐.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두 시간을 헤맸다. 디지가 말했듯이 차노는 끝까지 파고드는 형이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떻게든 구성을 해야 했다. 디지가 피아노를 치면서 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는 디지의 하모니를 듣고 말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해볼게. 걱정마!" 디지가 차노에게 색소폰을 불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차노는 우리가 원하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선유을 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피-도-도! 피-디-디! 피-디-도." 차노 나름대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 좋은 예가 <과라치 과로(Guarachi Guaro)>이다. 무한정 같은 멜로디가 되풀이되는 그 노래를 듣다 보면 아마 돌아 버릴 것이다. 도대체 진척이라고는 없다. 바로 형식적인 면에서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월터 길버트 풀러, 다지 길레스피의 <투 비 오어 낫 투 밥>에서 인용 1947년 디지와 함께 <쿠바나 비 쿠바나 밥>을 녹음했다. 디지는 벌써 <쿠바나 밥>의 스케치를 거의 끝내 놓고 있었다. 그 스케치가 <쿠바나 비>의 일부였다는 점은 나중에 밝혀졌다. 그 당시 모들 재즈였던 내 긴 전주곡이 붙었다는 점말고는 그것은 <쿠바나 비>였다. 그것은 어떤 코드에도 기초하지 않았다. 1959년 마일즈가 대중화시키기 전이라 아직은 모들시대가 시작되기 전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내 전주곡의 전체 개념은 모들이었으며, 1947년에 쓴 그 작품은 거기에 디지의 테마가 곁들여진 상태에서 연주됐다. 그런 다음 나는 두 번째 부분인 <쿠바나 밥>을 썼다. 보스턴 심포니 홀로 연주하러 가는 버스에서 나는 차노가 나니고를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쿠바 음악은 흑인 신비주의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디지에게 그날 밤 연주에서 차노에게 솔로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날 밤 밴드는 차노에 이어 노래를 불렀고, 그 작품은 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빅터사에서 녹음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실제로 디지와 내가 작고했지만 차노는 자신도 작곡가로 올라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말도 옳았다. 중간 부분의 즉흥연주는 그의 것이었다. 우리는 경의의 표시로 그의 이름을 세 번째로 올리는 것에 동의했다. 디지는 코드 진행에 독특한 감각이 있었다. 그의 <쿠바나 비 쿠바나 밥>은 정말 멋있었고, 그 당시 하모니로는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차노의 개념은 아프리카에서 온 것이었다. 표준적인 미국 드럼에 쿠바 흑인의 것을 섞은 그의 소리를 들었을 때 불에 덴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 우리는 세계의 호흡, 일종의 보편성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작품에는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나 주된 것은 쿠바 흑인 음악과 전통적인 재즈였다. 전통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당대의 재즈 드럼이 들어 있었다. 악센트는 리듬에 있었다. 조지 러셀, 디지 길레스피의 <투 비 오어 낫 투 밥>에서 인용 위대한 인물들 현대의 재즈 애호가들은 때로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과거의 예언자들을 그리워한다. 1950년대는 재즈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위한 마지막 토양이었다. 다양한 스타일이 폭발하고 있는 오늘은 그때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들의 질문과 반박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이 걸은 길 속에. 몽크의 길 "실수는 몽크의 체계 가운데 일부이다."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소설가이며 음악학자인 앙드레 오데르는 셀로니어스 몽크를 이렇게 말했다. 몽크는 자신의 머릿속에 갖고 있는 코드를 찾아 탐색하다가 우연히 하나와 마주치면 그것에 만족한다. 몽크에게 무슨 걱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걸까? 그가 21마디의 마지막을 연주할 때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그는 '마주침'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과연 어디일까? 혹시 목적지를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닐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제일까? 그는 자신의 의지를 굽힌다. 여기다! 스포르찬도! 극적인 강세! 아아아아! 문제는 몽크가 코드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다른 조합이 이루어졌다. 그의 손가락과 그 자신, 오직 하나의 추진력. 너무나 아름다운 조합. 프레이즈의 강세에 완벽하게 호응하는 조합은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즉 몽크가 발견하고자 하는 다른 코드가 예비적인 단계, 막 놀라운 진실 속에서 발견한 것의 거친 초벌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몽크가 입을 열자 울부짖음과 승리의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찾았어! 찾았다고!" ... 몽크는 좀전에 세웠던 목표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그까짓 목표! 갑자기 솟아오른,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스러운 코드가 이제까지 그가 맴돌고 있던 풍경을 저 멀리 날려 버린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신세계가 유전적인 돌연변이로 그를 압도한다. 그는 형질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달린다. 뛰어오른다. 가끔은 손가락이 그를 앞서 나간다. 때로는 그가 손가락을 이끈다.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행복에 겨울 뿐이다. 동시에, 이제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땀방울 하나가 피아노 위에 있는 손가락 바로 옆에 떨어진다.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연주가 끝난 것이다. 단 하나의 음표, 목 잘린 B플랫만이 침묵 속에서 길게 울린다. 그리고 테이프 리코더의 공허한 소리로는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 침묵이 이어진다. 앙드레 오데르 <재즈의 세계> '고독한 사람, 소니'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알랭 제르베르가 <더 브리지(The Bridge)> 재킷에 쓴 이글을 읽고 나면 소니 롤린스라는 위대한 음악가가 재즈 역사에서 얼마나 예외적인 인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말에 소니 롤린스가 재즈 무대에 몇 가지 철학적이고, 음악적인 문제들을 숙고하고 해결하기 위해 은퇴한 것은 콜트레인의 상승세에 마음이 상한데다 그에 맞설 세계를 다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설의 시기이다. '현인 소니'가 세상을 굽어보던... '신비한 소니'는 연금술로 돌아가고 있고, '고독한 소니'는 안개에 싸인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다. 그 다리. <더 브리지>. 1961년 말, 그는 재즈 갤러리와 계약하고 활동을 재개한다. 1962년 1월과 2월, 그는 짐 홀, 보브 크랜쇼, 벤 릴레이(<갓 블레스 더 차일드(God Bless the Child)>에서는 H.T.샌더스)와 녹음했다. 후일 그 앨범에는 전문잡지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보면, 소니는 결코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았고 또 다른 해변을 다시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는 그어떤 분명한 몸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레코드를 통틀어 그런 몸짓이 계속되고 있다. 소니, 아니 그의 스타일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그가 선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소니라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내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음악이 인간적 차원의 내 존재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브리지>가 발매된 몇 달 후, 그는 내면의 다양함이 자신의 접근방식의 약점이 아니라 본질적인 요인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나는 내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신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점에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서 배어 나오는 풍부한 다양성은 자신의 다양성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므로. 알래 제르베르 <더 브리지> 레코드 재킷 '불의 재즈, 안개의 재즈' 알랭 제르베르는 리 코니츠와 아트 불래키를 각각 쿨과 하드 밥의 상징으로 비교하고 있다. 아트는 토속적인 춤, 밀림의 소리, 부랑배의 행복한 반란에 맞추어 연주하기를 즐긴다. 리는 안경을 썼다고 해서 지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든, 레니 트리스타노와 함께 지적인 음악가로 제일 첫머리에 올라가든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마르샬 솔랄식의 미묘한 기하학 속에 빠진 물고기이다. 블래키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린다. 반면, 코니츠는 바른 위에라도 그 모든 것을 다시 세울 수 있다. 역할 분담만 잘 이루어진다면. 압둘라 이븐 부하이나가 반 세기 가까이 시끄러운 심벌즈로 구세주를 찬양하고 있지만 그의 머리는 아랍에 가해진 습격으로 약간 금이 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부엌에서 마녀의 가마솥 속에 밥(bop)을 넣고 요리를 하고 있을 때도 그는 누가 얼마나 기묘하고 놀라운 것을 아는지 밝히려고 고집스레 지하창고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아무 경고도 없이 석탄 양동이를 들고 달려가 계단에 부어 버린다. 부르으으으으응! 아트는 종다리처럼 행복하다. 그는 불과 대장간의 신 불카누스처럼 다리를 절뚝거린다. 그리고 무책임한 기관차 차장처럼 입을 벌리고, 눈알을 굴리며, 사납게 뛰어다니지만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친 적이 없다. 대나무 오두막에서 뛰쳐나온 탈옥수, 아트 블래키는 재즈의 역사에서 가장 확실한 사람이다. 퍼프킵시역 화장실에서 잃어버린 스윙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언제나 겸손하고 창백한 리의 입에서는 안개가 흐른다. 그는 재즈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꿈의 세계로 떠난 사람이다. 이 세상의 부재자,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 존재하지 않고, 그림자와 신비로만 남아 있으며, 희미한 불빛만 흐르는 나라로 간 방문자.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재즈의 아름다움은 범죄일 뿐이다. 아무런 변명도 주어지지 않는, 사전에 계획된 타락일 뿐이다. 알랭 제르베르 <르 마탱>, 1982년 5월 14일 혁신자들 : 빌 에번스와 존 콜트레인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이 모들 재즈를 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두 음악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트레인은 내가 들어 본 색소폰 주자 가운데 소리가 가장 크고 빨랐다. 그렇게 동시에 큰소리로 빠르게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연주가가 큰소리를 낼 때는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하려다가 낭패를 당하는 색소폰 주자를 많이 봐 왔다. 그러나 트레인은 정말 굉장했다. 악기를 입에 문 그는 마치 신들린 것 같았다. 연주할 때는 한없이 정열적-격렬한-이지만 평상시에는 너무나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멋진 친구였다. 캘리포니아에 같이 있을 때였다. 트레인이 치과에 가서 이를 넣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한번에 두 음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가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겁에 질렸다. 이제 막 리허설을 할 참이데다 모두 연락해 둔 터였다. 나는 치과 약속을 미룰 수 없느냐고 물었다. "안 돼요. 리허설에 빠지겠어요." 나는 어떤 종류로 끼워 넣을 거냐고 물었다. "이왕 박는 거, 죽을 때까지 가는 걸로 해야지요." 그래서 나는 연주하기 전에 뺐다가 다시 낄 수 있는 걸로 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나를 미친 사람 구경하듯 쳐다보았다. 그는 치과에 갔다 오더니 표정이 피아노 같아졌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날 밤의 연주회-블랙호크에서였던 것 같다.-에서 나는 먼저 내 솔로를 불고 피릴 조의 뒤로 들어가 트레인이 불기를 기다렸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트레인의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여느 때처럼 부는 게 아닌가. 아이고, 살았구나! 레드 갈런드가 나간 후 빌 에번스를 발견했다. 모들을 아는 피아노 주자가 필요했던 때에 빌은 적임자였다. 빌과 함께 공부했던 조지 러셀이 소개했다. 나는 55번가 길의 집에서 세월을 보내던 때부터 러셀을 알고 있었다. 모들에 깊이 빠져 들면서 조지에게 내가 원하는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자를 아느냐고 물었고, 조지는 빌을 추천했다. 빌은 라흐마니노프나 라벨 같은 클래식 음악가에 관해서 굉장히 많이 알았다.... 빌은 내가 피아노에 대해서 바라던 차분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접근하는 방식, 그가 가진 소리는 수정의 소리, 아니 깨끗한 폭포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물소리 같았다. 나는 빌의 스타일에 맞추어 밴드의 소리를 바꾸어야 했다. 빌은 리듬을 받고 연주했고, 나는 그가 밴드와 함께 음계를 연주하는 방식이 좋았다. 레드의 연주는 리듬을 지탱했으나 빌은 리듬을 깔고 연주했다. 그것은 바로 모들에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빌이 훨씬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 흡족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자서전> 프리재즈에서 제3세계 음악으로 프리 재즈와 함께 미국 흑인 음악은 백인문화가 제시한 모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모험이 끝나 버린 막다른 길 너며, 1960년대 흑인 아방가르드의 재탄생 너머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들이 일으킨 반향이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퍼져 나갔다. 프리 재즈와 블래 파워 즉흥연주가의 역할, 위치, 위상은 더 이상 전대미문의 전통과 별 상관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한 그룹 안의 모든 음악가들이 함께 또는 각자 즉흥연주를 하고 있다. 이렇게 집단적 즉흥연주라는 원칙이 되살아남으로써 미국 흑인 음악은 다시 비평가들의 표현대로 '뉴올리언스 다성부 음악'이 되고 있다. 앨버트 아일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음악이 집단적이고, 자유롭게 연주될 수 있도록 뉴올리언스 시절의 감정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더욱이 시간상 뒤를 이어 연주할 때도 프리 재즈 연주가들은 다른 사람의 음악에 자신의 음악을 더하고, 대치시키고, 울림의 네트워크와 층을 구성하고 있다. 여러 연주가가 같은 선율을 길게 늘여 연주하지 않는 거이다. 따라서 내용상으로는 작품 전체가 즉흥연주가 되면서 전체의 구조와 형식은 다소 예측가능한 개별 선율의 교환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중심이 여러 곳이고, 자유로운 집단적 즉흥연주는 사실 뉴올리언스 재즈의 다성부 음악체계의 단순한 재활성화 이상이다....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즉 도발적이고 위험이 뒤따르며 장난스럽다. 많은 프리재즈 음악가들은 미국 흑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라면 학구적인 서구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악기를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서구의 기준이 부과한 악기의 한계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우연이나 에외라는 것에서 새로운 반향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즉, 리드가 떨리는 소리(과거 찰리 파커의 레코드에서는 실수라고 다 제거했다.)도 이제는 받아들여지고 있고, 어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이제까지 반향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되던 호흡의 효과인 잡음들이 이용, 편입되고 있다. 그 소리(고음역, '어울리지 않는'소리, 색소폰 키 두드리기 등)는 연주의 '어디에서든' 지속적으로 이끌려 나오고 있다. 아일러는 그런 소리들이 음표보다 중요해지다 보니 연주가들이 음들이 '좋게' 또는 '나쁘게' 받아들여지는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확신하고 있다. 비명소리, 신음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등 모든 음악 이전의 효과들이 즉흥연주가의연주에 참여하고 있다. 필리프 샤를, 장 루이 코몰리 <프리 재즈와 블랙 파워> 앨버트 아일러의 울부짖음 프랑스의 시인 겸 비평가 분석. 어떻게 끝낼까? 아무도 모른다. 진정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환희, 뭔가를 이룩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보다는 털썩 주저앉아 조용히 있기로 결심하지 않을까? 아니면 숨을 가다듬으며 여기가 어디라고 자신을 납득시키고 그것을 사실로 믿으려고 애쓸까?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출구를 찾아 왔던 길을 다시 갈 수도 있다. 아니면 기억 속에서 피난처를 찾거나 벽에 머리를 찧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둘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아니면 훨훨 날아오르는 상상을 할까?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사정을 알렸으므로 이것이 끝이 아니길 빌까? 아니면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손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이 끝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뭔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악을 쓸 수도 있다. 앨버트 아일러는 재즈의 끝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악을 쓸 뿐만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고, 기도하고, 벽에 머리를 찧고, 사방으로 달려 보지만 결국 꾸밈없는 환희로 끝을 서두른다. 그는 어는 누구보다 열렬하고 진지하게 이 시험을 거쳐 끝을 맞는다. 그는 빗나간 서정성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모든 끝에는 존재를 위한 이중의 이유가 있으며,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없는 끝은 없다는 점을 생각하고 빗나간 서정성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머리를 찧은 곳은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끝이 있을 수도 있는 불활성의 끝없는 공간, 환영만이 움직이는 공간, 악마와 마법사, 영혼과 진동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공포에 질리 그는 그것들을 모두 밀쳤다. 그리고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찬송가를 읊고, 행진곡을 두드리고, 술주정꾼의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사랑 노래를 딸꾹질처럼 해댔다.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섞어 휘저음으로써 끝이 기침을 하고, 질식하고, 의기소침해지고, 텅빈 곳에서 일말의 진실의 소리를 토해 내도록 만들었다. 자크 레다 <즉흥연주, 재즈 강의? 목소리에 가까운 악기 테너 색소폰이 재즈의 악기 가운데 왕이 되다. 색소폰은 매우 유연한 악기이며, 사람의 목소리와 정말 비슷하다. 또한 역사가 길지 않은 악기이기도 하다. 나는 색소폰이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내 몸을 확대시킨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고, 아우성을 지르게 만들 수 있다. ... 나에게 프리 재즈는 색소폰 왕구, 그중에서도 테너 색소폰 왕국의 시작이다. 미셸 포르탈 <재즈 핫> 1968년 5-6월호 다락방 세대 다락방에서 산다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생활방식이다. 버려진 스튜디어, 공장, 가게를 침대 하나, 하얀 가구, 화분이 몇 개 있는 싱글 룸으로 개조한다. 아니면 콘서트 리허설 홀에 사는 것도... 그러나 소호에서는 생명을 느끼는 방법으로 다락방에서 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것은 거대한 도시에서 조금은 덜 고립되고,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다.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고 있는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대중과 언론이 참여하는 진정한 흥분과 움직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좋든 나쁘든 그 움직임이 존재하며, 리브베아에서 만들어진 레코드들이 기적은 아니었다. 어느 날 리브베아(샘과 베아트리체 리버스)에서, 아티스트 하우스(오네트 콜먼)에서, 아니면 스튜디오 위에서 시작된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것은 갑자기 증식하고 조직을 이루고 가지를 뻗고 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음악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통일성은 오히려 준거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프랜시스 마먼드, <아메리카 횡단 급행열차>, <재즈 매거진 1977년 10월호 '새로운 것'의 베테랑 드럼 주자 서니 머레이는 유럽에 오래 산 다음에야 다락방 세대 속에서프리 재즈의 유산을 발견했다. 비방의 혁명이나 모든 음악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아방가르드의 혁명은 과장되고 요란스러운 행사였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한 고려 없이 체력과 재능을 낭비하면서 본질과 씨름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때 아키, 나, 라시드 알리 등 아방가르드에 나온 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파괴적 경쟁의 분위기가 아니다. 여기서 나는 새롭고, 신성하며, 살아 있는 음악을 발견했다. 재즈가 10년 전에 멈추어 버린 것이 절대 아니었다. 서니 머레이 <재즈 메거진> 1977년 6월호 퓨전 재즈로 널리 알려진 트럼펫의 랜디 브레커는 다락방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내 나이 21세였다. 맨해튼에서 보낸 다락방 시절은 의욕에 넘쳤다. 주로 세 개의 빌딩에 몰려 있었다. 나는 데이브 홀랜드, 존 에이버크롬비, 랄프 타우너, 스탠리 클라크, 레니 화이트 등과 함께 나만의 다락방을 기지고 있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카세트를 녹음했다. 베이스의 진 펄라의 다락방에는 보스턴에서 온 돈 에일리어스, 얀 해머 같은 친구가 모였다. 칙 코리아는 내 동생 마이클과 같은 층에 살았다. 세 개의 빌딩에서는 언제나 즉흥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사는 건물에서는 여러 층에서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코리아, 데이브 홀랜드, 배리 알트슐의 영향 아래서 기본적으로 프리 재즈였다. 나는 사전에 듣지 않아도 아무 음악이나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들렀다. 나는 트럼펫 주자지 이론가는 아니니까!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저녁, 나는 코리아와 그의 그룹과 함께 자유롭게 연주하다가 다음날은 래리 코리엘과 퓨전을 연주했다. 돈을 좀 벌 생각이 있으면 빅 밴드와 함께 '스탠더드'를 연주하기도 했다. 랜디 브레커 <재즈 핫> 1982년 9-10월호 프리 재즈의 언저리에서 비록 프리 재즈에 문외한이었지만 마일즈의 동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추측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허비 행콕은 에릭 돌피와 마주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런 음악은 연주할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도대체 내가 뭘 연주해야 하지? 이 음악에 멜로디는 있나? 코드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물론 있지. 우리 나름대로 멜로디하고 코드가 있다구." 그러나 나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너무나 제멋대로였다. 그가 느낀 대로 연주해 보라고 말했다. 첫 번째 정식 연주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접근방식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정상적으로 따르던 규칙을 버리고 내 연주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새 규칙을 따르기로 했다. 내가 경계를 넘어가는 바람에 완전히 내 음을 잃어버리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연주에 주의를 기울이고, 곡의 기본구조를 걱정할 것 없이 내용에서 통합될 수 있는 뭔가를 창조해 내면 그만이었다. 토니 윌리엄스와는 여러 아방가르드 그룹에서 같이 일했다. 그는 14세인가 15세 때 벌써 보스턴에서 샘 리버스와 연주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그들이 연주하던 것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는 <스프링(Spring)>과 <라이프 타임(Life Time)>을 작곡할 때 나에게 써달라고 부택했다. 악보를 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언제 들어도 놀라운 멜로디, 묘한 리듬이었다. 그는 음표나 코드를 말하지 않았다.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었다. 형식, 색채 등의 용어로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발견한 아방가르드 개념이다. 허비 행콕 <재즈 핫> 1979년 7-8월 토니 윌리엄스의 관점 한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하이햇 심벌을 연주하는 드럼 주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 템포는 머릿속에 있다. (바라건대 내 심벌즈 속에도 있기를 바란다.) 나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드럼 주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유'라는 말에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연주하는 드럼 주자는 머뭇거리지 않는 법이다. ... 나는 리듬에 따라 연주할 때 확실한 느낌, 심벌증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소리의 질을 느낀다. 그 템포는 내 안에 있고, 내 스틱 끝에도 있다.나는 그 템포를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것에 주목하길 바란다. 토니 윌리엄스 <재즈 매거진> 1865년 6월호 마일즈 데이비스를 연주하는 웨인 쇼터 공연 때는 들린다. (마일즈는 자유롭게 연주한다.) 레코드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뭔가 자유를 찾아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그러나 공연 때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연주하곤 했다. 특히 잭 디조넷과 칙 코리아가 있는 그룹과 함께 연주할 때나, 토니 윌리엄스와 허비 행콕과 함께 할 때는. 웨인 쇼터 <재즈 매거진> 1971년 11월 정체성의 위기 프리 재즈는 전세계 재즈 음악가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 헤매게 만든 것이다. 프랑스 음악가 미셸 포르탈도 그런 의문을 품었다. 극적이게도 우리는 훔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재즈는 특별한 정치, 이데올로기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태어난 흑인 음악이다. 바로 거기에 문화의 뿌리에 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14세에 기타를 들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블루스를 부르지도 않는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 앨버트 아일러와 상응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어떤 것인지 찾을 수 없다. 미셸 포르탈 <재즈 핫> 1968년 5-6월호 개발도상국의 음악 자산 색소폰의 가토 바르비에리의 해답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위기에 빠졌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브라질 지휘자 글라우버로하를 다시 만났다. 글라우버는 제3세계 문제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저개발국가 출신이야. 하위문화에 속한다는 거지, 자네는 자네가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된 것을 히야 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 또 식민주의를 통해서 배운 것을 하려고 노력하면 안 돼. 자네 안에서 제일 진실된 것 위에서 일해야 해. 라틴 아메리카에 뿌리를 둔 것 위에서 말이야." 나는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민속음악가들과 즐겨 연주하던 것을 레코드로 만들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나 어릴 때 자주 듣던 멜로디들... 거기서 내 뿌리를 다시 발견했다. 복잡한 지적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뿌리. 재즈와 나의 관계가 더욱 추상적이고 이지적으로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왜 브라질에는 재즈가 없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곳의 대중음악 자체가 너무나 환상적이고 풍요롭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와 비슷한 것, 그것이 바로 재즈였다. 가토 바르비에리 <재즈 매거진> 1972년 2월호 플러그드 인 재즈 1960년대 후반, 마일즈 데이비스를 비롯한 재즈 음악가들은 로큰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이 만남에서 교훈을 끌어낸 최초의 재즈 연주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재즈 록과 함께 새로운 소리, 새로운 연주 스타일, 새로운 녹음방법들이 나타났다. 록이 가미된 소리 1969년 2월, 마일즈 데이비스는<인 어 사일런트 웨이>와 함께 방향을 전환한다. 내가 지미 헨드릭스를 만난 것은 그의 매니저가 전화로 내 연주방식을 그에게 소개하고, 나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을 때였다. 지미는 내가 <카인드 오브 블루>에서 시도한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연주에 재즈 요소를 더 넣고 싶어했다. 그는 모든 소리를 이용해 연주하는 콜트레인의 방식을 좋아했고, 기타를 그와 비슷하게 연주했다. 게다가 내가 트럼펫으로 연주할 때 이용하는 기타 보이싱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멋진 친구였다. 조용하지만 열정적이고, 남들이 보는 것하고는 전혀 달랐다. 무대에서 보여 주는 야성적이고 열광적인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같이 일하기로 하고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존경하고 같이 연주한 음악가 가운데 악보를 읽을 줄 모르지만 뛰어난 음악가-흑인이든 백인이든-는 많다. 그러므로 지미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해서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지미는 능숙하고, 타고난 음악가였다-스스로 깨우친. (후일, 어떤 녹음 때)우리는 조 자비눌이 <인 어 사일런트 웨이> 위에 쓴 것을 바꾸었다. 코드를 전부 삭제하고, 멜로디만 살려서 연주한 것이다. 나는 좀더 록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 싶었다. 연습 때 조가 쓴 것과 비슷하게 연주했지만 코드가 전부 엉켜서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조가 작곡한 멜로디를 들을 수는 있었다. 녹음을 시작할 때 나는 악보를 내던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멜로디만 연주하라고 말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해 몇 개의 간단한 코드 체인지를 작곡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곡할 때 스타라빈스키가 어떻게 단순한 형식으로 돌아갔는지 생각하고 있던 터라 흥미로웠다. 그래서 하나의 비트 코드에 하나의 베이스 라인 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연주하면 할수록 언제나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하나의 코드, 하나의 휴지부, 또 다른 코드, 이런 식이었다. 연주할수록 더욱더 달라진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1968년 칙, 조, 허비와 함께 연주를 할 때부터였다. <인 어 사일런트 웨이>를 위해 연주를 하면 할수록 그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때 나는 뭔가 좀더 큰 것, 한 작품의 뼈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두 박자에 하나의 코드를 작곡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두 박자를 그대로 연주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셋, 다-덤(da-dum)으로 할까? 나는 네 번째 박자에 강세를 주었다. 첫 마디에는 세 개의 코드를 넣었던 것 같다. 어째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들은 대로 연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단 하나의 코드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렇게 했다. 앞서 생략했던 코드를 다시 연주하고 나니 마치 전체의 소리처럼 들렸다. 리허설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했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악상들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카인드 오브 블루>와 <인 어 사일런트 웨이>에서 시도한 방법이다. 8월의 그날, 우리는 52번가의 컬럼비아 스튜디오에서 일찍 작업에 들어가 꼬박 사흘을 일했다. 나는 레코드 제작을 하고 있던 테오마체로에게 테이프를 그대로 돌리고 우리가 연주한 것을 전부 담으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담되 중단하지도, 질문하지도 말라고...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나는 지휘자처럼 지휘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몇 가지 쓰기도 하고,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내 귀에 들려 오는 소리와 다른 소리를 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들 그 음악속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때로는 테이프가 그냥 돌아가게 놔 두는 대신 나는 테오에게 우리 작업결과를 들을 수 있게 복사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어떤 지점에서 뭔가 다른 것을 넣고 싶으면 그 음악가를 집어 넣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자서전> 웨어 리포트의 스케치 웨인 쇼터는 인터뷰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의 작업기법을 초기의 웨더 리포트의 그것과 이렇게 비교했다. 마일즈의 밴드를 위해서 새로운 작품을 썼는데 녹음할 때는 어땠는가? 우리는 진짜로 연습한 적이 없다. 내가 악보를 들고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주했다. 편곡은 애당초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구두점, 쉼표, 의문부호를 쓰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전통적인 '노래형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중심 안에서 가장 폭넓은 움직임을 허용했다. 웨어 리포트와는 어떤가? 우리는 몇 개의 스케치를 그리고,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연습을 한다. 우리는 그 아이디어들을 연주했고, 각자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살핀다. 조지프, 미로슬라프와 내가 작곡을 담당하는데 각자 하거나 같이 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는 집단 작업이다. 각자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그가 연주하는 방식을 들어 본다. 즉흥연주를 위해서 언제나 일정한 패턴의 코드를 이용하는가? 아니다. 미리 정해진 코드는 없다. 우리는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을 표현한다. 너무 논리적인 것을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웨이 쇼터 <재즈 매거진> 1971년 11월호 존 스코필드가 회고하다 1980년대 마일즈 데이비스를 위해 기타를 연주했던 존 스코필드가 <디코이(Decoy)> 녹음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는 같은 해에 녹음한 자신의 앨범 <일렉트릭 아웃렛(Electric Outlet)>과 비교해서 스튜디오 녹음 작업의 발전을 논하고 있다. 이번 작품 <왓 잇 이즈(What It Is)>는 스튜디어에서 태어났다. 마일즈는 언제나 모든 작업을 혼자 시작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약 10개를 느린 블루스 감정으로 해야 했다. 물론 레코드 작업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솔로 전주 덕분에 우리는 <로봇415(Robot 415)>를 얻었다. 후일 다시 선정되어 재작업에 들어간 작품이었다. 그랄 길 에번스가 작품을 몇 개 가지고 왔다. "이것 알겠나? 어젯밤에 마일즈하고 같이 연주한 건데." 마일즈는 우리에게 코드 패시지를 하게 했다. 7화음의 도에서 7화음의 파로, 이어 작은 간주 악절과 함께 7화음의 미에서 7화음의 B플렛 미로, 7화음의 레에서 7화음의 솔로. 그른 나 모르게 테이프를 길에게 주고 부탁했다. "존이 확실한 패시지로 연주한 부분을 옮겨 줘." 우리는 그 악보로 2시간 가까이 작업했다. 내가 독주를 하면 마일즈가 받았고, 이어 브랜포드 마살리스가 독주를 하고 다시 마일즈가 받고, 함께 멜로디를 연주했다. 그런 다음 중했다. 마일즈가 그 부분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았어, 저렇게 해보자구." 당신 방식은 마일즈와 어떻게 다른가? 마일즈는 그룹과 함께 연주하고 이어 몇 개의 새로운 터치를 추가한다. <일렉트릭 아웃렛>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녹음했다. 나는 작업을 집에서 시작했다. 리듬 박스로 기타와 베이스를 녹음한 뒤 스튜디오에 가서 다시 연주했다. 그런 다음 진짜 드럼, 진짜 신시사이저, 진짜 관악기를 추가했다. 데이비드 샌본과 레이 앤더슨과 함께. 그래서 스티브 조던이 연주했는가? 테이프가 이미 녹음되었는데도? 맞다. 그 테이프에는 스티브의 리듬 박스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것들에는 백비트를 깊이 있게 넣기 위해서 베이스 드럼과 스네어 드럼 자리를 남겨 두었다. 그 일은 기계적이고, 아주 냉정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될 수 있는한 느슨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녹음 중간에라도 악상이 떠오르면 그걸 연주한다. 스티브는 내가 그 전날밤에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따라 연주한다. 그러면 색소폰 주자가 스티브가 연주하고 있는 것에 반응을 보인다. 이 녹음작업의 50%는 연주자들이 서로의 음악에 보이는 반응에 좌우된다. 라이브 공연에서는 그게 100%이지만 녹음일 때는 테이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테이프든 그룹이든 같다. 나는 지금 이순간을 연주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연주한다. 그들이 사전에 녹음되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스튜디오에서 눈을 감고 헤드폰을 썻을 때는 드럼 주자가 거기 있건 없건 아무 차이도 없다. 존 스코필드 <재즈 매거진> 1991년 5월호 펜더 피아노 마일즈와 허비 행콕이 자신들의 음악에 팬더 피아노를 도입할 때를 이야기한다. 내 머릿속에는 길 에번스가 빅 밴드에서 이용하던 보이싱이 베이스 라인과 함께 들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내 그룹 속에 전자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전자음악을 넣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피아노가 아니라 팬더 로즈가 줄 수 있는 보이싱을 찾고 있었다. 베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음악가는 자신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악기, 듣고자 하는 것을 들려줄 수 있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핫> 1983년 여름호 마일즈와 같이 연주를 할 때 키보드는 펜더 로즈 한 대부분이었다. 나는 마일즈에게 물었다. "나보고 뭘 연주하라는 거요?" 그러자 쉰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걸로 연주하라고." 나는 그걸 한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해보는 수밖에. 나는 하나의 코드를 연주해 보았다. 와! 너무나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풍부해서 그 즉시 내 것으로 만들었다. 와우와우 페달에도 익숙해졌고, 플로그를 꽂을 자리를 찾기 위해 펜더의 뚜껑을 벗겨 에코플렉스 에코 체임버를 이용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는 아직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가 만들던 음악은 아방가르드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스타일을 조합한 것이어서 훨씬 넓은 분야의 음악을 포괄하고 있었다. 나는 더 많은 소리를 내기 위해, 가끔은 드럼 스틱으로 로즈의 공명기를 두드리곤 했다. 해럴드 로즈가 몇 번이가 우리를 보러 왔다. 그는 기묘한 연결선들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장치를 단 거요?" 그 이후 로즈 피아노에 그런 효과들을 내는 잭들이 붙어 나오기 시작했다. 허비 행콕 <재즈 핫> 1983년 여름호 더블 베이스에서 일렉트릭 베이스로 일부 연주자들에게는 일렉트릭 베이스가 새로운 음악을 개척할 기회였다. 나는 폴 체임버스, 퍼시 히스 등의 음악만을 들었다. 그러다 일레트릭 베이스를 연주한 뒤로 다른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재즈가 아니라 솔 음악을 듣는다. 먼저 제이머슨을 듣기 위해 마빈 가예를 들었다. 이어 그의 베이스 주자보다 마빈 가예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재즈말고도 좋아하는 음악이 여러 가지이다.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베이스 주자인 래리 그레이엄도 그중 하나다. 스티브 스왈로 <재즈 매거진> 1986년 9월호 브레커 형제의 길 랜디 브레커 : 마이크와 나는 래리 코리엘이 보브 모제스, 짐 페퍼와 함께 첫 번째 만든 <프리 스피리츠(Free Sprinits)>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정성이 풍부한 그 레코드는 일종의 재즈화된 컨트리 록으로 정말 뛰어나다. 그 무렵 '드림스'를 결성했다. 마이클과 그의 연주가들은 즉흥연주를 했고 이어 빌리코햄이 합류했다. 괜찮았다. 정식 그룹으로 나서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바로 직후 존 에이버크롬비가합류했다. 마이클 브레커 : 짐 페퍼는 녹음을 한 적이 거의 없는 크리크족 인디언이다. 그는 멋진 소리를 내며 정말 자유롭게 연주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 로큰롤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레코드를 듣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페퍼의 아이디어와 프레이징을 듣고 있노라니 문득 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너 로큰롤 1960년대 말, 기타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이클 브레커는 일차적으로 기타 주자와 가수에게 영향을 받았다. 나는 '테너 로큰롤(tenor rock'n roll)'을 연주하는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넓디넓은 광야였다. 나는 순수한 밥과는 다른 것을 연주하는 것이 즐거웠다. 밥을 로큰롤로 바꾸는 것이 좋았다. 로큰롤을 들으며 자란 세대라서. 집에 가면 언제나 재즈와 로큰롤이 있었다. 당시 나는 B.B.킹, 앨버트 킹, 에릭 클랩턴 같은 기타 연주자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헨드릭스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코행, 에이버크롬비, 다른 사람들과 '드림스'를 결성한 때는 약동의 시기였다. 재즈와 로큰롤이 뒤섞이는 시대에 색소폰 주자에게는 넓은 길이 열려 있었다. 그 덕분에 재즈를 연주할 때 단순히 콜트레인의 아류에 불과했던 내가 독창적인 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A.C. 리드 같은 블루스 색소폰 주자의 음악도 들었을 텐데? 아니, 나는 기타 연주자들의 음악을 들었다. 그들은 당시 진정으로 그 음악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비밥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전부 기타 연주자와 가수의 프레이징 속에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내 무의식 속에 녹아들었다. 나는 절대 비밥 음악가 같은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마이클 브레커 <재즈 핫> 1982년 9-10월호 미국 바깥의 재즈 미국 밖에서는 프랑스 이상으로 재즈를 열렬히 환영하는 나라가 없었다. 프랑스 재즈의 역사는 대서양 건너편만큼이나 길고 내용도 풍부하다. 스윙 왈츠와 핫 재즈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군인들이 프랑스에 들어갔다. 그들의 배낭 안에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 레코드들이 들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파이의 무대는 흑인 음악가와 접촉하려고 손을 뻗쳤다. 뮤직혹에서 연주가 있었고, 위그 파나시에와샤를 들로네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1935년, 들로네가 <재즈 핫>을 창간했는데 그것이 세계 최초의 재즈 잡지였다. 동시에 장 사블롱과 샤를 트레네가 스윙을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 뮤직 홀 전체가 변한 것이기도 했다. 진정한 재즈 음악가들이, 때로는 지휘자 자리까지 포함해서 오케스트라석 전체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여러 밴드들이 태어났다. 녹음실에서는 프랑스 연주가들이 여행중이던 미국 흑인 음악가들과 재능을 겨루어 볼 기회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기타 주자 장고 라인하르트가 오기 전까지 프랑스 재즈는 최전선에 있지 못했다. 댄스 홀에서 집시 스타일로 훈련을 받은 라인하르트는 미국 흑인 음악의 어법을 독창적인 음악 언어로 이용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의 스테판 그라펠리와 함께 금관아기와 드럼이 없는 그룹 '프랑스 핫 클럼 5중주단(Quintette 여 Hot Club de France)"을 결성했다. 그런 점에서 라이하르트(추종자인 마텔로 형제, 사랑, 바로 페레와 함께)와 그라펠리(당새의 경쟁자 미셸 와롭과 함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관악기를 위한 재즈'라는 프랑스 전통의 뿌리에 있는 인물이다. 생제르맹드 프레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고립 후, 프랑스는 돌아오는 미국 재즈 음악가를 열렬히 환영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로운 스타일이 나타났다. '진짜' 재즈(뉴올리언스 스타일의 부활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 밥 스타일(샤를 들로네, 보리스 비앙, 작고가인 앙드레 오데르가 <재즈 하>에서 옹호론을 펼쳤다.) 사이의 열띤 논쟁이, 그래도 전통적인 미국 모델에 충실한 프랑스에서 1960년데 내내 벌어졌다. 미국 음악가 가운데에는 파리의 생제르맹 드 프레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는 사람(레스터 영, 버드 파웰)도 있고, 프랑스에 정착하는 사람(시드니 베세,케니 클라크)도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재즈 연주가 가운데 뛰어난 반주자 몇 명을 발견했다.반주자 가운데 몇은 미국 재즈의 정통 구조 안에서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스스로 그것과 결별해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앙드레 오데르와 피아노의 마르샬 솔랄은 완벽하게 독창적인 스타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패밀리 속의 프리 재즈 1960년대, 로큰롤의 폭발과 함께 재즈는 젊은 세대의 유행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리 재느는 낡은 규칙과 지나간 우상을 거부했다. 그게 반역의 세대의 구미에 맞아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다른 형태의 자유를 추구하는 움직임도 부추겼다. 즉 미국에 있는 빅 브러더스들과의 결별을 부추긴 것이다. 젊은 프랑스 음악가들은 제프 길슨의 빅 밴드 '뉴 싱(New Thing)'에 끌렸으며, 이어 마일즈 데이비스의 일렉트릭 밴드에도 끌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흥미가 있는 것은 정확한 어휘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혼이었다. 1968년 이후, 즉흥연주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그룹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연주의 다양성과 규칙이 사라지면서 재즈는 갖가지 패밀리로 갈라지고 말았다. 즉흥연주회를 가능하게 했던 뼈대들이 사라진 이상 즉석연주는 강렬하기는 해도 드문 일이 되었다. 집단 즉흥연주는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거나 상상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이따금 극예술쪽에서 요구할 뿐이었다. 진정한 '영혼의 향연'인 즉흥연주가 이제는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그 극적인 성격을 구체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경향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특히'콩파뉴 루바'와 함께 체계화된다. 갈림길 프랑스 재즈의 다양화 1970년대 말이 되자 모든 것이 변했다. 재즈조차도 펑크 세대와 '자율 추구'움직임 속에서 자극을 구할 정도였다. 다른 음악가들은 프리 재즈와 다양한 유형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클래식음악에 가까운 길을 추구했다. 장 루크 퐁티는 1960년대에 쓰이기 시작한 바이올린의 쓰임새를 새로이 했다. 바이올린에 전기 장치를 붙이고, 자신의 연주를 콜트레인의 유산에 적용시킨 것이다. 얼마 안 있어, 그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서 새로이 시작했다. 그러나 재즈에서 현악부의 전통이 되살아나면서 그의 바이올린은 '스윙스트링즈 시스템 오브 디디에 르발레'에서 제2의 생명을 발견했다. 아코디언이 다시 한 번 프랑스 무대 위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마르셸 아졸라,리처드 갈리아노, 프랜시스 바리스). 역시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 에디루이스가 해먼드 오르간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고향인 카리브해의 색깔이 물씬 묻어 나는 음악이었다. 프랑스 무대의 질에 관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다니엘 위메르는 선배 음악가(미국이나 프랑스 모두)나 프리 재즈 음악가와 함께 드럼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그는 프리 재즈 음악가들의 선택을 공유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들과의 정면대립을 즐겼다. 위메르는 색소폰 주자 프랑수아 자노, 베이스 주자 앙리 텍시에와 함께 즉흥연주의 영원한 부활과 프리 재즈에 자주 빠져 있던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많은 외국 프리 재즈 음악가들-장 프랑수아 제니 클라크, 알도 로마노, 또는 독일의 피아노 주자 요아힘 퀸-이 그 관심사들을 공유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피아노의 르네위르트레저 등 1960년대에 사라졌던 위대한 인물들이 무대로 돌아왔다. 그 복귀는 정통도 아니요, 아방가르드도 아닌 신고전주의의 도래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신고전주의 재즈는 종종 캄보(듀엣이나 트리오)로 늦은 밤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도록 드럼이 금지되어 있는 작은 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베이스 기타(파트리세 카라티니와 마르크 포세)와 피아노 베이스(프랑수아 쿠튀리에와 장 폴 셀레아)의 2중주단, 기타의 크리스티앙 에스쿠데와 피아노의 미셸 그라예의 다양한 앙상블이 있었다. 1980년대에 나타난 젊은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대륙을 오가며 연주하기 위해서 그런 친근함을 얼른 포기했다. 그러나 밥의 후계자들은 부단히 파리의 클럽들을 다시 찾고 있었다. 사부아 세대 1980년대가 저물어 가던 시절, 빅 밴드들이 다시 탄생했다. 동시에 작고에 대한 다양한 취향이 르네상스를 맞았다. 1986년에 프랑스 정부가 국립 재즈 오케스트라(ONJ)를 설립했다. 1981년 이래 재즈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프리 재즈의 쇠락에 고통을 받은 적이 있는 전문가들이 갑작스레 기구화된 재즈에 호기심을 가져 많은 학교에서 재즈를 가르쳤다. 장르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음악가들이 음악 학교의 테두리에서 나와 무진장한 테크닉과 문화적 인습을 가지고 즉흥연주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인습은 재즈보다는 록에 가까웠다. 새로운 세대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얼굴들이 클럽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고 있다. 사부아 극장 같은 경쟁적인 클럽들에서 1980년대 초에 훈련을 받은 사람들, 특히 파리지앵이 도약하고 있다. 그 방향은 프리 재즈나 밥보다는 마일즈 데이비스나 웨인 쇼터의 예술, 팝, 아니면 ECM 프로덕션 쪽을 향하고 있다. 기타의 마르크 뒤크레, 말로 발루아, 세르게 나자레비치, 리오넬 벵아무, 피아노의 줄플레셰르, 안토니 에르베, 안디 에밀레, 색소폰의 에리크 바레, 트럼펫의 프랑수아 샤사그니트와 안토니 일루, 트롬본의 데니스 를루프, 드럼의 피터 그리츠와 토니 라브송, 베이스의 미셸 베니타와 마르크 미셸, 퍼커션의 프랑수아 베를리. 프랑스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학구적인 비평은 ONJ에 투자한 이 음악가들에게 짐짓 겸손한 체했다. 어떤 비평은 그들이 너무 매끈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파리의 클럽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리 재즈 운동 후계자들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즘 1980년대를 거치면서 크리에이터와 테크니션을 가르던 구별이 의미를 잃었다. 프리 재즈 연주가들도 이 상투적인 구분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ONJ에 클라리넷의 루이 스클라비가 온 후로는 진정한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기타의 클로드 바르텔레미(1989년 ONJ의 책임자가 되었다.)와 필리프 드셰페, 트롬본의 이브 로베르, 드럼의 제라르 시라쿠사, 베이스의 브루노 셰비용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많은 경우, 두 세대의 구성원들이 서로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집단적인 노력으로 이끈 영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멀티 재즈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온 음악가들이 파리의 크럽에서 만나고 있다. 파리에는 언제나 미국의 재즈 음악가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오늘날에는 파리 무대의 생동감에 끌려 세계 각지에서 연주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탈리아인(더블베이스의 리카르도 델프라), 덴마크인(색소폰의 시몬 스팡 한센), 유고슬라비아인(피아노의 보얀 즐피카르파시크), 브라질인, 아프리카인(색소폰의 마누 디방고), 서인도 제도인(피아노의 미셸 사르다비), 아르헨티나인(모살리니 베이텔만 카라티니 트리오, 구비츠 칼로 셀레아 트리오), 터키인(세넴 디이치) 등 모두 프랑스의 음악적 지평선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동안 이런 교환은 일방통행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도미니크 피파렐리와 장 폴 셀레아, 비엔나 아트 오케스트라의 음악가들은 프랑스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협력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최근 트리오 마샤도, 트리오 아 붐, 파트리크 프라데 4중주단이 부상하고, 그 단체들과 함께 기타의 노엘 악토테, 에리크 뢰러, 다비드 셰발리에나 색소폰의 줄리앙 루로, 로랑 페오르 등 젊은 음악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프랑스의 재즈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프랑크 베르게로, 아르노 메를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