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지은이: 질 베갱. 도미니크 모렐 지음/김주경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박주희 1919년 3월 3일, 나는 오문을 통해 처음으로 자금성에 발을 들여놓았다. 성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 앞에 드넓은 공간과 새로운 시간이 펼쳐졌다. 그 문턱을 넘으면서 나는 공화국에서 군주국으로 들어섰고, 20세기의 중국에서 고대의 중국으로 되돌아간 것이 다. 궁궐 안에는 많은 고관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정복 모자에 공작의 깃털을 꽂고 있었다. 입고 있는 긴 비단옷에는 루비와 산호 단추가 반짝거렸고, 금빛의 꿩과 하얀 학이 수놓인 장식이 붙어 있었다. 그날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간결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나를 맞아준 13세의 소년이었다. 그가 바로 세 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좌를 차지하고 있는 천자,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제국의 군주 였다.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지 4년째 되던 해에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 징으로 옮기고, 새로운 수도의 중심에 거대한 궁전을 짓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자색의 금지된 성, 자금성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가 열기며(1644), 이곳은 이후 5 세기 동안 중화제국의 성스러운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 제1장 명나라 황제의 걸작품, 자금성 원나라에서 명나라까지 1276년부터 중국을 통치한 원 나라의 몰고 왕조는 전쟁과 인플레, 행정력의 붕괴, 지 도층의 부정부패 등으로 급속히 몰락해 갔다. 그 과정에서 1350년대 들어 한족의 민 족애가 눈데 띄게 심화되었다. 여기에는 불교도의 비밀결사대인 홍건적의 선동이 무엇 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홍건적을 이끈 한산동은 미래의 붓다로 알려진 미륵의 화신 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농민 반란이 여러 지방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란한 상황속에서, 농민 출신으로 특출한 카리스마를 지닌 한 인물이 뛰어난 정치감각으로 반란이 주동자들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주원장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백성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부하 들을 단단히 주의시키는 지혜를 가진 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고을을 정복할 때마다 주 민들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연전연승하여 마침내 1368년 민병 대를 이끌고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몽고인들이 모두 도주한 뒤였다. 바로 그해 주원장은 난징에 새로운 왕조, 곧 명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올라 홍무제라 칭했다. 명제국의 발전과 절정기 홍무제는 전투력뿐만 아니라 탁월한 행정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경제부흥이라는 야 심 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되, 특히 농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식목을 하고 대대적 으로 관개공사를 벌여 땅을 비옥하게 만든 것은 그의 30년 통치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이다. 그것은 15세기 들어 중국이 맞게 되는 놀라운 번영과 중홍의 예비작업이었 다. 이같은 그의 눈부신 활동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중 한 사람인 명나라 3 대 황제, 영락제(1402~1424)가 잇는다. 역락제는 항상 명제국을 위협하는 몽고족의 기습에 신속히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 했다. 그가 명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를 북부 변격으로 옮기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베이 징을 수도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한족과 '야만족' 셋P의 접경에 세워진 이 도시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던 곳이다. B. C. 5세기에는 양나라가 세워졌던 장소였고, 요 나라(907~1125)와 금나라(1125~1234)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다 1267년에 쿠빌라 이 칸이 이 도시를 칸의 도시(칸발리크)로 만들었고, 이후로 제국의 수도로서 대도라 고 불리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도 대도 베이징의 모습이 묘사되 어 있다. 영락제는 몽고인의 옛 수도 바로 남쪽에 새도시를 건설했다. 수백만 명의 농민이 이 웅대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 작업에 동원 되였다고 한다. 북쪽으로 천도함에 따라 명왕 조는 당시 북부보다 더 부유하고 활기 찬 남부지방의 귀족사회로부터 다소 멀어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명 왕조의 독재적이고 은밀한 정치체제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었 다. 자금성의 건축 영락제는 수도 베이징의 한 중심에다 길이 960m, 폭 750m의 거대한 부지를 마련하 고, 그곳에 또 하나의 진정한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도시 안의 도시를 만듦으로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군주에 걸맞은 궁궐이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자색의 금 지된 성, '자금성'이다.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자색은 중국의 우주관에 따르면 온 우 주의 중심인 북극성의빛깔이기도 하다. 중국의 국가와 행정을 이루는 온갖 요소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황제를 주축으로 하여 돌아갔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 곧 천자로 서, 인간 세계와 자연세계 사이의 조화를 유지할 책임을 맡고 있는 자였다. 중국의 모든 건물이 그렇듯이, 자금성 역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긴축을 중심 으로 건축되었다. 건축물들은 남쪽 양기의 혜택을 듬뿍 받고, 찬바람이나 악신, 호전적 인 유목민과 같은 북쪽 음기의 불길한 요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두 남향으로 지 어졌다. 흙을 다져 굳힌 벽돌로 만든 이 엄청난 성은 성벽의 높이가 무려 10m인데다 바로 옆에는 폭 50m의 도랑까지 흐르고 있는 셈이다. 사방에 하나씩 있는 4개의 문만 이 자금성과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1407~1420년까지 약 20만 명에 가까 운 사람들이 72만m 이곳 작업장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건축에 필요한 돌은 베이징에 서 멀지 않은 팡산의채석장에서 대리석은 장쑤성의 쉬저우에서 가져왔다. 벽돌은 수도 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산둥 반도의 룽커우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골조용 목재는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등 베이징에서 직선거리로 무려 2000km나 떨어진 곳에서 운반되였다. 그중 4/1가량이 황제의 운하라고 부르는 대운하를 통해 이루어졌 다. 수세기 전부터 중국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수로였던 이 운하는 1411~1415년 사 이에 재건되였다. 1421년, 드디어 역락제는 황제의 새 거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하 는 바에 의하면 자금성은 9999칸9실제로는 8886칸)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9란 숫 자는 상징적으로 양기의 힘이 회고조임을 나타낸다. 영락제는 14세기초에 중국 중국이 아시아에서 누렸던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고 싶어했 다. 그는 군대들은 남쪽의 안난 지방과 북쪽의 아무르강 하구에 이르는 만주 지역마저 점령했다. 그는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와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더군다나 11세기가지 거슬러 올라가는 해군의 전통을 이용하여 해군을 강화하고, 에스파냐나 포르투갈도 그 런 모험을 감행해 보지 못했던 시기에 벌써 해외원정에 나섰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와 인도뿐 아니라 메카 근처의 지다항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에서도 중국의 선박을 볼 수 있었다. 명제국이 어떻게 소멸되어 갔는가 명제국은 16세기 말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북서쪽에 있는 몽고와의 국경지대가 위태로워진 시점에서, 일본의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가 한반도를 침략(1592)하는 바 람에 조선에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황족은 점점 더 불어나 그들에게 부여하는 연금과 토지, 호화사치로 일관한 궁궐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은 다시 농촌이 피폐 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농민 중에는 땅을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도적떼에 합류 하는 이들도 많았다. 황제들은 지나치게 의시과된 궁궐 생활로 인해 결국 국정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만력 제(1572~1620)의 통치 말기와 천계제(1620~1627) 재위중에 동림당을 중심으로 모 인 유교 관리들과 위충현을 필두로하는 환관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위충현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밀경찰까지 이용했다. 경제 위기가 악화되자 조정은 상인들의 세금을 과다하게 증가시켰고, 이로 이해 도시 마다. 소요사태로 들끓었다. 백련교같은 종교 분파가 국가 전복이라는 목표를 드러내 는가 하면, 한편에선 월급은 물론 군수품과 식량마저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던 외국인 용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1627). 1636년경에는 두 지역이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 하나는 이자 성이 이끄는 북쪽(산시성과 허난성) 지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헌충이 이끌던 양쯔강 유역과 쓰촨성이었다. 1644년, 오삼계 장군을 마침내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숭 정제(1627~1644)를 자결하게 만들고 감히 왕좌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라를 찬 탈한 강도들을 베이징에서 내몰기 위해 만주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그러 나 구원 요청에 응한다는 명목으로 조금도 저항받지 않고 쉽사리 명나라의 수도에 입 성한 만주인들은 기실 자신들이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 리하여 만주인들이 베이징에 들어섬 1644년은 3세기 가깝게 중국을 통치한 명 왕조가 멸망한 해로 기록되고 말았다. 중국의 새로운 주인 만주족 그렇다면 이 자부심 강하고 오만한 만주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퉁구스족의 일 족인 그들은 아주 오랜 옛적에 남부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와, 1115년 중국 북동쪽 변 경에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예이다. 금나라는 1125년에 또 다른 오랑캐 왕조인 요나라를 내쫓은 뒤, 이듬해 중국 전체로 통치영역을 넓혔다. 따라서 복송의 뒤를 이 은 남송은 남쪽의 항저우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북송의 뒤를 이은 남송 은 남쪽의 항저우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1234년에 원나라의 몽고 군대에게 쫓 겨났던 여진족은 16세기 말에 조선에서 일본인과 싸우기 위해서 명나라와 동맹을 맺 었다. 훗날 만주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여진족의 전설적인 대서사시가 펼쳐지기 시 작한 것은 17세기초이다. 1601년에 누르하치라는 한 족장이 제홀 지방(베이징 북쪽에 자리한 곳으로 1955년 랴오님성과 허베이성, 내몽고 자치구로 분할 편입)에 정착하고 있던 부족들을 팔기군으로 조직한 것이 그 서곡이었다. 팔기는 각 우두머리가 입는 제 복의 색깔에 따라 8개로 구분한 군대 편제의 단위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해 스스로 왕에 오르고, 국호를 금이라고 칭했다. 그가 북쪽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옛 동맹국을 배반하기 전까가지의 왕조를 후금 왕조라 한다. 1625년에 그는 선양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묵덴이라고 했다. 그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1635년에 여진이 라는 호칭을 만주로, 다음해에는 국호를 매우 순결하다는 뜻의 대청으로 바꾸었다. 그 가 실시한 정책은 모두 중국의 여러 민족의 다양한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로 했 다. 묵덴에다 베이징의 자금성을 본떠서 성을 건축산 것도 그한 예이다. 선양고궁으로 불리는 이 성은 자금성보다 규모가 훨씬 작고 조촐하다. 그의 자문의원들이 한족의 장 군들로 구성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청제국이 기틀을 다진 후 로는 만주 땅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보면서 한족 언어와 만주족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부이족들이 행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 청 극심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 북부지방은 차츰 정복자들에게 항거하기 시작했 다. 정복자들은 홍타이지의 뒤를 이어 순치제를 왕위에 올리고, 1644년 제이징을 점령 해 중국 지배의 막을 연다. 명 왕조의 명맥을 이으려는 사람들은 난징에 모여서 만주인에게 대항했으나 곧 대패한 다. 남명정권은 1644년 양저우와 난징에서 대패한 후, 푸젠성에서 광둥성으로, 광시성 에서 원난성으로 장기간 우왕좌왕하다가, 청 왕조가 지방 총독으로 임명한 오삼계에 의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만주인은 집권 후 수십년 동안 13세기 원제국의 몽고인처럼 혹심한 불평등제도를 실 시했다. 한족을 비롯한 원주민은 인종차별에 의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종족간의 혼인 금지, 대도시의 거주구역 분리, 사형을 내세운 변발의 강요(변발을 '오랑캐'의 습속으로 생각했던 한인에게 이것은 몹시 불명예스러운 조치였다), 많은 양 의 봉토를 만주 왕족에게 하사하기 위해 북쪽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과다한 세금, 만주 지방을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668년에 실시한 만주 땅으로의 이주 금지 등 이 그것이다. 게다가 전쟁포로와 농민들은 끝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다. 베이징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현재의 내성인 북쪽은 훨씬 더 넓고 호화로운 곳으로서, 한인들은 이곳에 거주할 수 없었다. 쫓겨난 주민들은 모두 남쪽의 외성으로 모여들었 다. 천신을 모시는 유명한 천단사원과 베이징의 회교사원 등 수많은 성소들을 보호하 기 위해 철저한 방어설비가 되어 있는 이 성 외곽지역은 활기가 넘치는 시장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몰락으로 여러 요소들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한가지만은 그대로 지켜졌다. 새로운 황제들이 여전히 베이징을 수도로 삼고서, 계속해서 제국의 북쪽 변방에 머물 고자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 왕조의 자취가 남아 있는 궁궐의 건축물을 그 대로 고수하려고 했던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전 왕조가 사용 하던 궁궐을 버리고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만주인은 궁궐을 복구하여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으나, 이 궁궐을 건축했던 영락제의 흔적은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 다. 위대한 만주인 두 황제, 강희제와 옹정제는 명제국 군주들이 지켜오던 엄격한 공싱의 례와 의식화된 생활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권력을 행사하고, 겨울 생활의 리듬 을 유지시켜 주는 공적, 사적인 의식들이 치러지는 장소는 여전히 남북을 축으로 길게 이어진 화려한 자금성의 궁전들이었다. 제2장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에 사는 황제들 인간적인 전제군주, 강희제 만주족의 첫 황제인 순치제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당시 7살이었던 셋째 아들 현 엽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훗날 강희제가 되는 이 어린 소년을 그때 벌써 대군 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열정, 변함없이 침착한 성품과 아울러 자기 통제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1669년 강희제는 할머니 효장 태후의 권유를 받아들여 섭정자였던 보정대신들을 추방 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통치 초기에 어린 황제는 광둥성, 푸젠성, 윈난성의 총 독들이 이탈하여 삼번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무사히 진압, 큰 위기를 해결하는 능 력을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평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수많은 폭동이 산발 적으로 일어나면서 남서부의 첩첩산중에서조차 동요가 일긴 했지만, 1683년부터 질서 가 잡히면서 안정된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만주인들의 통치가 시작된 지 수십년이 지나자, 황제들은 그 동안 실시해 왔던 일방적 이고 야만적인 착취정책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거대한 중국 대륙 안에서 소수민족에 불과한 만주족으로서는 여러 민족과 화해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강희제는 이때부터 그 동안 주도해 왔던 인종분리 정책 중에서 극단적 인 것들을 완화시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들이 농촌에 조금씩 번영을 가져왔다. 이전보다 자유로워진 농민 들은 1609년에는 농토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1685년부터는 농민의 소유지를 몰수 하는 일이 전면 금지되었다. 또한 강희제는 이전의 지도자 계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전 왕조의 국가기구에거 중책을 맡았던 자들의 행정력을 높이 사서 새 왕조의 국 정에 참여시켰다. 더욱이 고관의 처우를 개선해 더 좋은 보수를 지급하자, 고관들이 고질적인 병폐였던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강희제는 신 유교적 도덕정신으로 황제에 대한 복종과 존중의 덕을 제국 전역에 설라 하는 한편 자신이 만주족 출신임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천자로서의 임무와 한 국가의 어버이이자 전통의 수호자로서의 역할 또한 신중하게 이행했다. 그는 중국 문화, 특히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보게 한다. 후에 건륭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전의 연구를 널리 장려했다. 명나라의 역사서이인 ''명사''와 백과사전, 그 밖의 다양한 사전 들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수십 세기 동안 수많은 학자에게 고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날카로운 정치감각을 겸한 실용적 지식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황제는 중국 문화의 요람인 양쯔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남방지역을 6차례나 순회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청제국의 제2대 황제로서, 화합하는 저책을 실시했다. 특히 그는 서 방의 몽고인들(호쇼트, 토르구트, 중가리아등)의 종교였던 티베트 불교, 또는 라마교의 훌륭한 보전자로 자처했다. 라마교는 제5대 달라이라마에게 병합되어 그 이름으로 티 베트를 통일했던 종교이다. 중가리아 부족은 1670년부터 중앙 아시아의 광활한 지역과 실크로드로 권력을 장을 조금씩 넓혀갔다. 하지만 강희제는 그들의 세력을 부수고, 북쪽 몽고(1691)와 티베트 (1720)를 확실하게 종속시키기에 이른다. 궁권에 들어온 예수회 서방세계로부터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인 재능으로 강희제의 특 별한 보호와 존중을 받았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들과 만주족의 초대 황제인 순치제 역 시 그 지식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각별히 그들을 총애했다. 천자로서의 황제는 역법을 주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성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풍성한 수확을 보장하기 위해서 계절 의 순환 시기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종교 축일과 농사 기일을 정해 놓은 공식적인 달력을 해마다 편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마침 예수회 선교사들은 요하네스 케플러와 같은 서방 천문학자들의 발견에 힘입어, 그 동안 중국에서 사용해온 역법 추산방식보다 훨 씬 더 정확한 계산법을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645년에는 독일인 아담 샬 폰 벨(1592~16666)이 베이징의 황제 천문대인 흠천감의 우드머리인 감정에 임명되었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논문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아담 샬 신부는 1650년 순치제로부터 베이징 최초의 카톨릭 교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훗날 강희제의 스승의 반열에 들게 된다. 1668~1669년까지는 수학을 관장하는 부서에 있던 벨기에 출신의 신부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1628~1688)와 이슬람교로 개종한 중국인 양광선이 사이에 갈등을 빚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양광선이 아담 샬을 내쫓고 흠천감 감정이 되지만, 그는 역법 추 산에 실패하는 바람에추방당하고, 그 뒤를 이어 페르비스트가 흠천감 감정에 오른다. 1688년에 포르투갈인 토마스 페레이라(1645~1703)가 페르비스트의 뒤를 이었다. 프 랑스인 장 프랑수아 제프비용(1654~1707) 역시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선교사이다. 황제는 그의 충고를 따라 전국 지도 일람표를 제작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1718년에 강희제의 지도서라고도 불리는 '황여전람도'와 같이 당시로서는 아주 정확한 작품들을 동판에 새길 수 있었다. 이 두 예수회 신부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선 분쟁이 생겼을 때 전권사절로 협상에 임하기도 했다. 중국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던 네프치스크 조약(1689)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692년 황제는 아메리카에서 수입한 키니네를 사용하여 말라리아 전염되는 심각한 위 기를 수습할 수 있도록 해준 예수회 신부들에게 중국에서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있는 선교 자유의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국의 카톨릭교는 제례식 논쟁(1693~1715)에서 바티칸 측이 강경일변도로 나가는 바람에 성장이 주춤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의 제사의식(조상과 공자. 천신에 대한제사)을 관용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교황 특사, 샤를 메그로와 샤를 드투르농은 그것을 단호하게 '미신' 행위로 규정 했다. 그러자 교황은 곧 예수회 신부들로 하여금 제사의식 금지조치를 받아들이도록 명령했다. 중국측에서는 당연히 반발했다. 그렇기 해도 강희제는 '하늘의 구세주를 찬 양하는 서양의 이론은(우리의 성스러운 책들이 말하고 있는) 정통성과 분명히 반대된 다. 하지만 국가가 카톨릭 사제들을 고용하는 것은 그들을 수학 학문이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기 때문이다. ' 라고 하면서 그들을 계속 두둔했다. 제사의식에 대한 논쟁은 1720년 교황의 또 다른 특사인 장앙브루아즈 메자바르바가 좀더 타협적이 태도를 보 여줌으로써 가라앉게 되었다. 옹정제의 통치 오랜 세월 동안 눈부셨던 강희제의 통치는 말기에 들어서 추정 상속인들이 반기를 들 고 음모를 꾸미는 바람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황제는 마침내 열한번째 아들인 윤진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윤진은 1722년 정의와 화합을 뜻하는 옹정제라는 이름으로 취임하자마자 서둘러 자신 의 잠재적인 적, 곧 이복형제들과 그들의 무리를 모두 제거하거나 추방했다. 1727년에 는 역법 추산을 비롯하여 다른 기관에서도 더 이상 유용하지 않게 된 선교사들을 모두 마카오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같은 해에 캬흐타에서 이후 1세기 동안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에 기초가 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일에 있어서 절대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황제라는 직무에 높은 이상을 품고 있 었던 옹정젠는 특히 농업을 장려했다. 흉년에는 농민에게 쌀을 분배했고, 황폐함을 몰 고 온 1730년에 대혼란 이후에는 베이징과 주변 도시의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 적극적 인 조치들을 취했다. 1732년 옹정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엘리트들을 화합시키기 시키기 위해 정부구조 를 개편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자문을 구했던 만주인 고문들을 파하고, 국가 기밀과 군정대사를 처리하는 군기처를 설립했다. 군기처는 고위대신 중 관직과 인격에 따라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들로 구성했다. 그는 자신이 즉위하기 직전에 일어냤던 왕위계 승 분쟁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군주가 아무도 모르게 황태자를 선택 한 뒤 그 이름을 비밀에 부쳐두었다가, 군주가 죽을 때 비로소 공개하여 가능한 한 이 의 없이 그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훗날 그는 건륭제가 되는 홍력을 후계로 정한 뒤,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여 죽는 날까지 황태자의 이름을 비밀 로 남겨두었다. 천자를 위한 겨울 궁전 강희제와 옹정제는 11월부터 2월까지 겨울 기간을 자금성에 머물렀다 자금성은 설계 도면상 완전히 대칭이면서 동시에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전통적인 중국 거주지를 대규모로 확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뜰 주변에 여러 개 의 누각이 배치되어 있고, 뜰의 정면에는 남쪽을 향한 궁전, 북쪽에는 개인 처소들, 그 리고 동쪽과 서쪽에는 부속건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궁월의 전면부는 외조하고 하며, 이곳에는 여러 개의 문과 뜰, 공무를 집행하는 3개의 웅대한 궁전이 남북을 잇는 중앙의 축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궁궐의 뒷부분은 내정이라고 부르는데, 외조의 규모보다 약간 작으며 배열의 형태는 똑같다. 중앙의 축을 중심으로 황제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세 개의 궁전이 차례로 이 어져 있으며, 그 뒤에 커다란 정원이 있고, 동서양쪽에는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와 부속건물들이 있다. 자금성 안에서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보수와 재건축이 행 해졌는데도 이 같은 전체적인 배치는 15세기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경이로운 배치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남쪽 입구인 천안문과 자금성의 입구인 오문 사이에는 드넓은 광장이 있다. 그 중앙에 곧고 올바르다는 뜻의 단문이 있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이 광장은 군사들의 열병식이 행해지던 곳이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 리잡은 두 개의 공원에는 황제들의 조상을 모신 오래된 사원인 태묘와, 수확의 신인 오곡의 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오색사 사직단이 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은 말발굽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중앙의 성벽 위에는 10개 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누각이 지붕처럼 덮여 있는데, 그곳에서 해마다 황제 가 새역법을 공표하기도 하고, 군사 열병식을 받기도 했다. 오문의 양옆에는 마치 날 개처럼 사각형의 측면 누각들이 각각 2개씩 세워져 있다. 그 4개의 누각 중2개의 누 각 안에는 커다란 북이, 다른 2개의 누각 안에는 대형 종이 들어있다. 황제가 조상을 보신 사원에 갈 때면 북을 울리고, 제단에 제사를 드리러 갈 때는 종을 울렸다고 한다. 오문의 정면에는 아치형으로 된 3개의 통로가 있고, 양 옆의 측면 누각 밑에도 각각 1 개씩의 문이 있어서 모두 5개의 출입구가 있다. 중앙의 통로는 황제가 출입하는 문인 데, 황제의 결혼식 때 황후가 이 문으로 들어오며, 과거에 급제한 3명의 수상자들이 임관하는 날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가 관직을 받은 후 이 문으로 퇴장했다. 장엄한 행사가 거행될 때는 고위관리들이 오문 앞에서 첫번째 울리는 북소리에 맞추어 관직의 서열에 따라 줄을 선다. 두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의식을 주관하는 관리들이 성 안으로 그들을 들여보내기 위해서 측면의 문을 연다. 세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군주가 연단에 나타나 왕좌에 앉는다. 황제에게 반역한 고위관리가 태형을 받는 곳도 바로 이 오문의 동쪽 측면 문앞이다. 오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200m, 폭 130m의 뜰이 펼쳐진다. 이 뜰을 가로질러 금수하라는 하천이 흐르며, 하천에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다섯 가지 덕을 상 징하는 다섯 개의 다리, '내금수교'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서 뜰 안으로 들어가면 태 화문이 3단의 흰 대리석 기단 위에 있는 널찍한 테리스에 우뚝 솟아 있다. 태화문 중 심으로 궁궐의 동서 양끝에는 궁궐의 측면 문인 동화문, 서화문이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과식 궁전 태화문 뒤에는 다시 넓은 뜰이 펼쳐진다. 길이 200m, 폭 190m로 자금성 내에서 가장 넓은 뜰이다. 양옆에는 여러 도서관과 황제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있다. 그 곳 에는 33개로 나누어진 방마다 무기와 도자기, 모피, 견직물, 진주, 보석 등 황제가 신 하에게 포상하는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명나라 때에는 동쪽에 있는 한 누각에 11199편으로 된 ''영락대전''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거대한 뜰의 중앙에는 3단의 흰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7m의 거대한 장방형 테라 스가 있다. 3단의 기단은 각각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고, 난간의 모서리마다 용머리 조 작의 배구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면에서 테라스로 올라가는 안정된 규모의 두 계단 사이에는 긴 중앙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에는 용틀임을 하는 거대한 용들의 모습 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모습은 일정한 간격으로서 있 는 난간의 돌말뚝들 위에도 새겨져 있다. 이 통로의 일직선상에 자금성에서 가장 웅장 하고 화려한 전면의 궁전 3개가 줄지어서 있다. 태화전 첫번째 건물인 태화전 앞에는 황제의 공명정대한 정치를 뜻하는 2개의 상징물이 보인 다. 그 하나는 테라스의 왼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건축물 안에 보관된 됫박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해시계이다. 첫 번째 공식 궁전이 태화전은 정면이 약 64m에다 측면 37m, 높이 27m의 건물이다. 24개의 기둥이 이중으로 된 지붕을 떠받 치고 있으며, 둥근 지붕은 유약을 바른 노란색 기와로 덮여 있다. 황제의 생활에서 기념이 될 만한 사건들, 즉 천자의 즉위식, 황제의 결혼식, 10년마다 한번씩 거행하는 황제의 대탄생일, 음력 정월 초하루 축하식, 음력 동지 기념식, 황제 가 주관한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급제가 발표식, 중요한 법령 낭독식, 출정 전날의 장 군 임명식 등등의 큰 행사들이 거행되는 곳이 바로 이 궁전이다. 이때 돌과 금으로 만 든 관악기, 타악기들로 구성된 악대가 이 장엄한 예식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었다. 궁전 안의 중앙(우주의 중앙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에는 7단의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연단이 있고, 그 위에 용상이 놓여 있다. 군주는 그 위에 앉아서 여러 가지 예식 을 주관하거나 고위관리와 외국 사신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문화의 혜택을 베푸는 군 주로서의 미덕을 중국을 위시한 전세계에 뻗어나가게 했다. 황제의 보좌 바로 위에는 장식이 풍성한 중앙의 격자천장에 2마리의 금빛 용이 거대한 진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황제의 결혼식과 그 밖의 다른 성대한 공식 연회 때에는 궁전안 에 108개, 밖에 176개의 식탁을 차려놓을 수 있었다. 중화전 중화전은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터의 중앙에 세워진 가로 세로 각각 16m인 정방형의 궁전이다. 1645년까지 중도를 따른다는 뜻의 이름으로 불렸던 이 궁전의 현재 명칭은 ''통서''라는 고서에서 따온 것으로, '극단을 멀리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으면 조화를 가져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황제는 태화전의 옥좌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와서 준비를 하며, 대신들이나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남 때도 이곳을 이용했다. 계절맞이 예식을 거행할 때나 사원에서 조상과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낭독하는 황 제의 조서들도 모두 이곳에서 작성되었다. 1년에 한 번씩, 농업의식을 행할 때 필요한 농기구들과 새로운 종자들을 군주와 왕자들과 고위대신들에게 소개하는 일도 중화전에 서 행해졌다. 마지막으로 청의 황제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이곳에서 황족혈통의 족보를 검토하는 일을 거창하게 벌이곤 했다. 보화전 세번째 공식 궁전인 보화전은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 이 궁전은 처음엔 신 중하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리다가 1562년에 최고의 지배권을 갖고 있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현재의 보화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였는데, 이 이름 역 시 ''통서''에서 따왔다. 만주의 군주들은 이곳에서 새 사위를 맞아들이는 성대한 잔치 를 베풀었다. 음력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터키와 몽고의 봉신 왕족들을 영접하기 위해 벌이는 연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1903년에는 그 행사를 위해서 양 1마리를 잡 았을 정도이다. 황제의 도서관에 보관하기로 되어 있는 황제 칙령의 편집물들도 이 궁전에 소개되었다. 1789년부터는 관료를 모집하기 의해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임시회시인 은과의입상자 들을 이곳에 불러들여서, 고위 행정직에 임명하기 전 마지막 구두시험을 보았다. 황제가 집무를 보는 이 외조의 궁전들에는 결혼식날의 황후를 제외하고는 어떤 여인도 들어올 수 없었다. 황제는 이 세 개의 공식 궁전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황제가 국정업 무를 집행하는 궁전들과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전들은 건청문을 중심으로 해서 나누 어진다. 내정의 공식 궁전들 내정에 있는 3개의 궁전은 외조에 있는 3개의 웅대한 건축물과 짝을 이루며, 후자들과 똑같이 테라스 위에 세워져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앞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궁전인 건청궁은 명나라 황제들과 청나라의 초기 황제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옹정제 때부터 이 궁전은 황제의 서재와 고관 및 사신들, 공국의 왕족들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 었다. 정월 초하루와 그밖의 다른 기념일에는 이곳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 그래서 건 륭제는 1785년에 이곳에서 '노인들 1만명'을 위한 유명한 잔치를 열었는데, 중국 대륙 의 사방에서 60세 이상의 노인 30000명이 모여 들여들었다고 한다. 장례식을 치르기 전까지 군주의 시신을 모셔놓았던 곳도 이곳이다. 특히 옹정제는 이 궁전 홀에 특별한 기능을 부여했다. 다름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왕자의 이름을 문서에 적은 뒤, 봉인한 상자 속에 넣어서 거실의 병풍뒤에 감춰둔 것이다. 그 리고는 상자 속 문서와 똑같은 문서를 한 장 더 만들어서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 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는 두 장의 문서를 대조해 이름을 확인한 뒤 새로운 천자의 이 름을 선포했다. 내정의 공식 궁전들 중 두 번째 건물은 외조의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정사각형으로 건 설되었다. 교태전이라 불리는 이 궁전을 우선 황후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황제의 정 실인 황후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알현하고, 정월 초하루와 자신의 생일을 축하했다. 다 양한 재질로 다듬어진 25개의 옥새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가 공표한 엄격한 법령에 따라 다양한 행정문서들에 황제의 인장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곤녕궁은 명나라 황제들이 거처로 사용했던 궁전이다. 하지만 만주인들은 이곳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독특한 두 가지 기능을 부여했다. 작을 부분 인 동난각은 황제 부부의 신혼방으로 사용했고, 다름 한 부분은 만주의 신들을 모신 성소로 사용했다. 이 신들에게는 바로 옆에 있는 부엌에서 준비한 육류 제물을 하루도 빠짐없이 봉헌했다. 어화원 내정 뒤에는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정원인 어화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15세기에 정비되었다. 중국의 모든 정원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제한된 공간 안에 자연의 리듬 과 다양한 면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이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노 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나무들과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기괴한 형태의 바위들, 그리고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의 받침 위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지붕 을 하고 있는 만춘정과 천추정은 우주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직사각형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흠안전이라는 궁전이 있다. 황제 는 정월 초하루에 이곳에 와서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 준다고 여겼던 도교의 수신 에게 제사를 드렸다. 정월의 동북쪽 한 귀퉁이에는 자금성 전체에서 유일하게 비대칭 적인 요소로 존재하면서, 매우 높은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 있다. 바위 무더 기들이 모여 우뚝 솟아 있는 인공 언덕이 그것이다. 부모에게 절을 올리는 쌍구절(음 력 9월 9일) 축제 때마다 황제의 가족은 이 퇴수산 정상에 자리한 정자에 모이곤 했 다. 이 언덕은 자금성의 높은 벽을 넘어 귈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고 중 의 한 곳이다. 사월들 자금성 안에는 여러 개의 다양한 종교사월들이 있어서 각각의 성직자들이 의식을 주재 하는 가운데 제사를 올렸다. 명나라 때에 세워진 도교 사월들과 라마교 사원들에다, 만주인들이 새로 건축한 여러 개의 라마교 성소들이 덧붙여졌다. 청나라 사람들은 원 나라를 본받아서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로 자처했다. 이들뿐 아니라 여승과 무녀들이 궁전 안에서 만주의 애니미즘 신앙의 제식을 거행하기 도 했다. 그녀들은 북소리와 함께 최면상태에 들어가서 점을 치거나 푸닥거리를 행했 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했던 중국의 황제 건륭제는 거의 18세기 내내 중국을 지배했다. 그는 자금성을 여러 차례 손질했으며, 특히 황제와 황후들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정을 새롭게 꾸미거나 보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 지만 그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에는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닥치면서 청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 3장 건륭제의 통치 청 왕조의 전성기 옹정제는 자신의 아들 가운데 만주인 어머니를 가진 유일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가 바로 홍력 왕자였다. 1711년생인 그가 1736년 청제국의 권력을 한 손에 쥐에 되 었을 때, 그는 이미 당당하고 늠름한 용모에다 섬세한 성품과 박식함까지 갖춘 젊은이 로 성장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이라는 뜻을 지닌 건륭을 군주의 이름으로 택했다. 건륭제는 성군으로 명성을 떨친 두 선왕을 본받아 전제적이고도 온정주의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변경을 넓혀 나갔다. 우선 그는 한-만주인 군대를 동원해 일리 강 유역 을 손에 넣고, 그곳의 중가리아 주민들을 내쫓았다. 그리고는 타림강 유역 의이슬람권 의 오아시스 지역을 정복했다. '새로운 땅'인 이곳 신장지역을 차지함으로써 1759년 중국은 무려 1150만km(현재 970만km)라는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외곽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의 봉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청제국은 오랜 기간 동안 평 화를 누렸다. 수수, 옥수수, 고구마 등과 같은 새로운 작물이 도입되고 농사법이 개량 된데다, 세제도 농촌에 유리하게 개정된 덕분에 자연히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직물이나 도자기 등과 같은 특정 분야가 공업화되면서 수공업도 눈부시게 성장했고, 아시아뿐만 아니라 필리핀을 경유하는 유럽, 미 대륙 등으로 차제지, 견직물, 도자기, 칠기 등의 수출이 증가한 덕분에 부유한 상인 계층이 출현했다. 이로써 청제국은 유례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같은 경제적 성장으로 눈에 뜨게 인구가 증가했다. 물 론 천연두 같은 질병이 줄어들었다는 사실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인구수는 1740년에 1억 4300만 명에서 1790년에 3억 13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학자이자 예술가이며 중상주의자였던 건륭제 총명한 학자였던 건륭제는 예술을 보호했고, 특히 회화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 다. 그는 할아버지를 본받아서 광대한 편찬사업을 펼치도록 명령했다. 가장 중요한 것 으로 꼽히는 ''사고전서''는 당시에 알려졌던 중국 문인들의 글을 집대성한 선집이다. 1772년부터 360명의 학자들이 중국의 이름난 작품들을 검토하여 선정한 뒤, 3만 6천 개의 작품(7만 9천권)을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현인들의 교훈서, 역사서, 철학사, 문학 서등 4개 분야로 분류했다. 그리고 1만 5천 명의 서기관들이 이 책들의 필사본을 책 임 맡아 1782년에는 7부의 ''사고전서'' 사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륭제는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취미가 선임 황제들보다 각별했다. 그래서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 구월관 안에 만든 작업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그는 수집품을 모 으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끊임없이 소장품들을 늘려갔다. 이리하여 1743년부터 는 애장품에 대한 특별한 목록을 여러 편 작성하게 했다. 가장 아끼는 것은 회화와 서 예 작품 목록으로서, 1744년에 완성되었고, 1만 점의 그림과 서예품을 검토했다. 그는 또한 옥세공품을 특히 사랑해 1741년 한 해에만 무려 376점이 그의 인장을 받았을 정도이다. 조부 강희제를 본받아서, 건륭제 역시 6차례에 걸쳐 남방순시를 시행했다. 중국남부의 목가적인 경치에 반한 황제는 여름 궁전의 정원들 안에 장쑤 지방과 저장 지방의 유명 한 건축물과 장엄한 경관들을 그대로 재현하게 했다. 반면 중국에서의 카톨릭 선교활 동에 대해서는 옹정제보다 휠씬 더 강력하게 반대하여, 1742년에는 선교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강희제처럼 예수회 신부들의 예술적인 재능과 과학적 이식만은 아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들 서양의 '조언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건륭제로부터 회 화와 건축술의 재능을 높이 인정받았던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였다. 건 륭제는 1747년부터 1759년까지 완벽함과 밝음을 뜻하는 여름 궁전을 세우기로 결정 하고, 그 설계도를 이 밀라노인 수학자이자 수리학에 정통한 천문학자인 프랑스인 미 셸 브누아, 두 사람에게 맡겼다. 카스틸리오네 신부는 1766년에 임종할 때까지 이 궁 전에 머물렀으며, 황제의 총리로서의 직무를 다했다. 건륭제 통치 말기의 위기 그러나 건륭제 통치 말기의 몇 해는 1770년에 나타난 경제적 위기로 그 빛이 퇴색하 고 말았다. 인구수가 식량의 증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한편, 건축물을 끊임 없이 보수, 개축하는 황제의 변덕스러운 취향과 절개를 모르는 궁궐 안의 사치스러운 생활방식, 결코만족할 줄 모르고 점점 더 많은 공금을 요구하는 국가기관들, 군대의 월정 등은 국고를 점점 더 고갈시켜 갔다. 이런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 부의 세제개혁과 농촌의 번영에 제동을 거는 정책은 소작농들이 빚을 지지 않을 수 없 게 만들었다. 그 결과 중국 대륙의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동시에 행정부는 부정부패로 계속 타락해 갔다. 황제는 1775년부터 당당한 풍채를 지 닌 만주족 출신의 젊은 장군, 화신(1750~1799)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는 우를 범 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이 장수는 여러 고관직을 독점하면서 요직마다 자 신의 추종자들을 배치했다. 그의 독직행위와, 행정이나 황제에게 행사하는 그의 영향 력이 황제의 전제정치의 문제점들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결국 건륭제의 긴 통치기간 중에 자금성 안에서 보수와 재건이 그의 취향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특별히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장소가 한 군데 있다. 영수궁이 그곳이다. 건륭제는 할아 버지에 대한 존경심에서, 61년간 통치를 했던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60년간의 통치기간이 끝나면 영수궁에 칩거하겠다는 뜻을 오래 전 부터 밝혀왔다. 그에 따라, 1689년 내정의 동북쪽에 건설되었던 영수궁은 1772년에서 1776년 사이에 그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게끔 성대하게 보수되었다. 89세에 아들 가경제(1795~1820)에게 양위한 후, 그는 이 궁전에 머무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이곳 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국정의 특정 부분에 계속 관여했다. 만주 황제들의 일상생활 사실 자금성은 만주족 황제들이 겨울 동안만 머무는 곳이었다. 그들은 공식행사가 가 장 많은 기간인 11월부터 2월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나머지 가간은 여름 궁전 이나 그외 의 다른 휴양지에서 보냈다. 황제들이 거처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수많은 신하들이 배속되었다. 강희제는 말년에 건청궁의 서쪽에 있는 양심전을 보수하도록 지시했다, 정작 본인은 생전에 그곳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아들 옹정제와 이후의 승계자들은 그들의 거처를 그곳으로정했다. 황제들은 보통 매우 이른 시각인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첫 번째 업무 회의를 한 후에 간단한 식사를 하고, 그때부터 대신들과의 면담이나 회의가 시작된다. 천자는 오전 11시까지 고관들의 알현을 받거나 귀빈들을 영접했다. 그리고 나서 점심 을 먹는데, 궁중 법도에 따라 황제의 식탁에 혼자 앉아서 그릇에 담긴 수많은 요리들 을 조금씩 맛보듯이 식사를 한다. 자금성에는 대규모의 부엌들이 있었지만 한결같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식탁에 오를 때면 요리들은 이미 식어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대단한 미식가인 건륭제는 양심전 남쪽, 자신의 거처에서 아주 가 까운 곳에 황제의 전용 부엌인 어선방을 만들었다. 황제는 식사 후에 산책을 하고, 여러 가지 소일거리와 자문, 행정보고서 검토 등으로 오후 5시까지 보낸다. 강희제는 저년식사 후에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과 다양한 주제를 놓고 환담하기를 좋아했다. 그중 예수회 신부들이 자주 초대되어 학구적인 대화를 나 누었다. 황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황후와 후궁들 양심전 뒤에는 여섯 개의 궁인 서육궁이 바둑판처점 배열되어 있다. 이 서육궁은 내정 의 공실 궁전들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있는 여섯 개의 궁전인 동육궁과 대칭을 이룬다. 황제의 정실과 후실들에게 할당된 이 12개의 궁전에는 각각 두 개의 거실을 중심으로 22개씩의 방들이 있다. 첫 번째 거실 주변의 방들은 접견실로 사용하고, 두 번째 거실 주변의 방들은 거처하는 곳이다. 화분과 그림, 그 외의 장식품들로 인해 각 방은 저마 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두 그룹의 방들 뒤편에 있는 방들에서 아직 어린 왕자들이 양육되었다. 그들보다 조금 큰 소년들은 궁궐의 동남쪽에 그들을 위해서 건축한 녹색 지붕의 별채에서 생활 했다. 황제의 가족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은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였는데, 그녀들은 비교적 검소한 편인 이런 구역에 머물지 않고, 양심전의 서쪽에 있는 자녕궁 에 머물렀다. 만일 황태후가 국사에 참여하게 되면 며느리인 황후가 그녀를 대신해서 내정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된다. 여성들만의 세계인 자금성의 하렘에서 서열상 이들의 뒤를 잇는 사람은 후궁들이다. 명나라 군주들이 대체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 강제는 그 들의 선례를 따르지 않기 위해서, 그 해결책으로 후궁의 등급을 12급에서 7급으로 줄 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1급에서 4급까지의 후궁의 숫자를 고정시켰다. 거처지의 규모와 가정사에서의 중요도, 그리고 화려한 복장의 색깔과 소재 등은 그들의 서열에 따라 달랐다. 황제의 아내 숫자는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강희제는 3명의 황후와 19명 의 후궁을 두었고, 건륭제는 2명의 정실과 29명의 후실을 두었다. 19세기에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불행한 삶을 산 광서제는 1명의 황후와 2명의 후궁을 두었을 뿐이다. 만주, 몽공, 혹은 한족의 명문 출신인 이 여성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에 궁궐 안 으로 들어오지만, 오직 만주 출신의 젊은 여성만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 자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어야 했다. 황제가 거처하는 방에는 옥으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 있는데, 그 테이블 위에는 황제의 정실과 후실들의 이름을 새긴 작은 패가 있었다. 밤이 되면 황제는 그날 밤을 함께 보낼 아내의 이름은 새겨진 작은 패를 뒤집어놓아 자신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 환관이 그 행운을 잡은 여 성에게 가서, 혹여라도 무기를 지니고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옷을 모두 벗긴 후에 목욕을 시키고, 탈모를 시켰다. 그런 다음 알몸에 가운을 입혀서 황제의 방 까지 업어서 데려갔다. 천자의 성은을 입기 위해서 수개월, 때로는 수년을 기다리는 여성들도 있었다. 황제의 하렘 안에서 승진을 하고 못하고는 황제의 침실에서 몇 밤을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따 라서 환관들은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왕자의 출생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대단한 특권이 주어지는 근거가 된다. 왕자를 낳는 순간 그녀는 곧 승진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의 아내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이 여성들은 자수나 화장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는 일에 열중하면서, 본가의 가족들과 떨어져 궁궐 깊은 곳에 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갔다. 황제의 많은 아내들이 출산한 왕자들 중에서 만주족 어 머니를 둔 왕자만이 옥좌에 오를 날은 기대할 수 있었다. 권력을 장자에게만 양위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자를 출산한 어머니들은 군주가 자신의 아들을 선택하게 하 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술책을 꾸미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에 따라 왕위계승에 이의 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매우 과격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군주가 죽고 나면, 그의 정실과 후실들은 모두 내정의 서쪽에 있는 넓은 방이나 자녕궁, 혹은 성 한의 서쪽에 있는 다른 두 개의 궁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황실에서의 가족관계는 매우 공식적인 선에 그쳤다. 황제가 그나마 다정한 모습을 보 여줄때는 아들들과 함께 있을 때뿐이다. 나라에서 가장 박식하다는 고관대작들에게 맡 겨진 어린 왕자들은 다양한 학식을 고루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한족, 만주족, 몽고족의 언어와 문자를 공부했고, 무기를 다루는 훈련도 함께 받아야 했다. 환관들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전쟁포로들을 거세한 후 궁궐 안에서 하인으로 고용하던 관습 의 기원은 주나라(B. C. 6~3세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정실과 후실들의 정조를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궁궐 안에서 일하는 남성들을 환관으로 대치해야 한다 고 제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후한의 광부제(A. D. 25~57)였다. 궁궐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직까지 맡게 된 하층계급 출신의 이 하인들이 황제 측근이 학자를 대신 하여 고관직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왕족과 그의 신하 사이 에서 필요불가결한 중개자가 된 이들 중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총애를 이용하여 재산을 긁어모았으며, 때때로 국사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당나 라(618~907)와 명나라(1368~1644) 시대에 특히 그런 경향이 심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와 황실을 보살피는 책임을 낱은 이들이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대신이나 관리를 임명하고 면직시키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재정마저 관리하며 횡령을 일삼아서 국고를 고갈시켰다. 그래서 만주의 초대 황제는 고급 환관들을 국정으로부터 떼어놓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다시 그들에게 공직을 맡겼고, 귀족의 호칭까지 부여했다. 그리하여 권력과 돈에 대한 그들의 집착이 다시 한번 전제군주 체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데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자금성 안에서 일하는 환관의 숫자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랐다. 명나라 조정은 2만 명 이 넘는 환관을 부렸다고 하는데, 그 숫자는 약간 과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 는 그들의 인원수를 9000명으로 축소시켰고, 건룽제는 3000명 이하고 줄였다. 청 왕 조가 몰락할 무렵에 환관의 수는 1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거세된 남자라는 수치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비참한 가난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이 길을 택 한 자들이었다. 자원을 해서 들어왔거나, 아니면 자신의 부모나 아동 밀매자들에 의해 팔려들어온 이들을 거세한 사람들은 1900년까지 베이징에서 거세하는 일을 맡고 있던 비씨와 림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환관을 1년에 세 차례 모집했는데, 이들이 거세를 했다는 증명서를 지참하고 궁궐에 들어오면, 우선 심사관들 앞에서 검사를 받은 후 궁 정 법도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고 나면 이들은 궁궐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 요한 부서 중 한 곳에 배치되었다. 당시의 대중적인 육체를 입고 다시 남자로 환생하려면 반드시 '완전한' 남성의 모습으 로 죽어야 했다. 그래서 환관들은 어느 정도의 돈을 모으면 미라로 보관되었던 자신들 이 은밀한 부분을 거세하는 자들에게 다시 사들였다. 그리고 그 부분의 장례식을 거행 한 후에 자기들 몸에 지니고 다녔다. 비록 그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단 하나 의 꿈을 가지고 기나긴 고통을 잊어버린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권력과 부귀를 손에 넣 을 수 있는 자들은 황실 가족의 사생활에만 얽매여 있어야 했다. 18세기에는 황후가 한 사람의 환관 감독자와, 그가 지휘하는 12명의 환관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 후 밑으로 3급까지의 후궁들은 각기 8명씩의 환관을 부렸고, 후궁의 서열이 아래로 내 려갈수록 시중드는 환관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환관 중에는 자금성 밖에서 봉사하는 자들도 있었다. 황성 안에 살고 있는 황제의 형제들에게는 일반적으로 각각 20명씩의 환관이 배속되었다. 환관 중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자들은 비서직이나 교사의 직책 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관은 부엌일이라든가 청소, 정원사, 심부름꾼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해야만 했다. 극히 소수의 환관들이 분명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경 우도 있었지만, 이들 소수를 제외한 환관들은 모두 노예처럼 취급되었다. 대부분 극히 사소한 일에도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기 일쑤였으며, 주인의 하찮은 변덕 때문에 어이 없이 죽임을 당하는 수도 있었다. 요직을 맡을 수 있었던 환관들은 고관의 자리로 오 르는 계단을 차츰차츰 밟아갔다. 1678년에 처음으로 그들 중 4명이 5급 관직에, 2명이 6급 관리직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광서 제가 재임할 때였다. 서태후가 총애했던 이안영이라는 환관이 2급의 관직까지 승격했 던 것이다. 환관들은 자신들의 신체적 특징으로 인한 모욕감과 온갖 종류의 욕구불만,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비참한 대우에 대해서, 주인 몰래 재산을 모으는 것으로 앙갚음을 했다.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일을 해주면서 돈을 챙기는 일을 마 다하지 않았다. 환관들의 부패는 19세기에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더욱 극심해졌다. 서태후가 궁궐과 황실 가족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일에 그들의 손발을 사용했던 것 이다. 궁정에서 환관과 시녀들을 떼어놓을 목적으로 계속 시행했던 금지조항에도 불구하고, 환관들은 궁궐의 시녀들과 애정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많았다. '궁궐 안의 여인들' 궁궐에서는 수많은 젊은 궁녀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명나라 때에는 궁녀의 수가 9000 명을 헤아렸다. 가장 암울했던 시절의 명 왕조는 이 궁궐 속의 여인들, 곧 궁녀들을 먹이고 유지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그래서 뒤를 이은 만주인들은 궁녀의 숫자와 자유 를 제안했다. 1710년에 500명 정도로 제한했으며, 19세기 말에는 궁녀 수가 200명에 불과했다. 3년에 한 번씩 시행한 궁녀 모집시험은 3개월 전에 공고되었다. 시험장에 나타난 13살의 소녀들은 대개 극빈한 만주인 가정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만일 환관중 어느 하나라도 인척관계에 있을 경우엔 궁궐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자리에서 뽑힌 소녀들은 1개월 동안 궁궐의 법도를 익힌 다음에 능력에 따라서 다 양한 부서로 배정 받았다. 운이 아주 좋은 소녀들은 황제의 측근에서 수종을 들 수 있 었다. 광서제 통치 때에는 황태후가 거처하는 궁전에 12명, 황후의 처소에 10명의 궁 녀가 있었다. 1급 후궁은 8명의 궁녀가 시종들었고, 서열이 내려가면서 시중 드는 궁 녀의 수도 줄어들었다. 만주인 왕자 밑에서 일하게 된 궁녀들도 있었다. 이 여성들은 자금성의 북서쪽에 있는 북해 공원 근처의 안르탕 세탁장에서 빨래하는 일, 바느질, 지수일 등과 같이 의복이나 보석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궁녀들은 군주의 관심을 끌어 후궁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예허나라라 는 궁녀는 도광제의 눈에 들어 왕자를 낳은 후에 후궁으로 격상됐다. 이 여인이 바로 훗날의 서태후이다. 그러나 궁녀들은 대부분 7, 8년 일한 후에 소액의 급료를 받고 궁 궐을 떠났다. 그녀들이 궁궐 내에서 맡았던 하찮은 공직은 성 밖 사람들의 눈에 큰 특 권처럼 비쳤기에 이들이 궐 밖에서 남편감을 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자 금성을 떠나면 다시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궁궐 '밖'의 사람들 청 왕조의 전성기였던 18세기 말 자금성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숫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니만 성내에서는 다양한 위상의 궐 '밖' 인력도 필요로 했다. 예를 들면 번역이라는 중요한 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행정일을 맡은 외조의 행정기관에서 는 다양한 계급습의 수많은 관리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궐 밖에서 살 았다. 궐밖에 있는 황제의 영토와 개인 재산은 내무부에서 관리했다. 만주인들은 이 행정부 에서 세습적인 직무를 담당했다. 자금성 안에서 일하는 환관이나 궁녀와는 반대로, 궐 밖에서 일하는 자들의 숫자는 계속 증가해서, 1620년에는 402명이였던 것이 20세기 초에는 3000명으로 늘었다. 건륭제때에는 내무부의 재정이 국가 재정의 4/1에 해당했 다. 내무부는 독립적인 자원 출처가 있어서, 그 수입의 일부를 국고에 넣었다. 하지만 1875년부터 국가 전체가 재정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그 과정이 거꾸로 전도되었다. 이들 외에도 자금성을 지키는 약 1000명 이상의 호위병과 부속건물에 머물면서 가혹 한 환경조건에서 가장 천한 일에 고용되었던 일꾼들도 있었다. 19세기 말, 마침내 만주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건륭제의 후계자들도, 서태후도 어떻게 하면 내부 위기에 제동을 걸고 서구 열강의 탐욕에 맞설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지 전혀 알지 못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자금성을 제국의 상징이자 주축으로 삼아 1000년의 역사를 지탱해 왔지만, 드디어 제국은 쇠락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제4장 청왕조의 황혼 건륭제가 퇴위한 이후, 청 왕조의 권좌에는 약하거나 무능력한 황제들, 그리고 서태후 에 의해 꼭두각시 역할을 한 어린 황제들만이 등극했을 뿐이다. 군주 통치의 전제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청조의 행정은 황제의 권력이 조금만 약화되어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급진 보수당의 지배, 지방 관리들의 주도권을 구속하는 옹 졸한 법규의 증가, 엘리트 계층의 과도한 우월감 등등이 모든 개혁의 의지를 꺾어버렸 다. 게다가 금의 가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화폐들에 비해서 계속 가치가 떨어지고 있 는 은을 주조로 한 중국 황폐의 취약성과, 만주족의 지배에 점점 더 강력하게 반발하 고 나서는 한족의 저항 등이 청 왕조를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밀어넣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선조들의 뒤를 이어서 중앙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을 전개하 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거세져만 가고 있던 유럽 열강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제대로 보 지 못했다. 1793년에 건륭제는 영국 대사인 매카트니 경에게 단언하기를, 중화제국에 는 '야만족'의 물품이 전혀 필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자체 생산하거나, 아니면 주변의 조공국들로부터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경제 때에는 외국 선박들에게 광저우 항 구 하나만을 개항했고, 무역도 매우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이렇듯 중국이 외국 상인들에게 개방을 저항하자, 서구 열강은 무력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했다. 아편전쟁과 서구와의 갈등 영국인들은 중국에 수출은 하지 못하고 그들의 상품만 일방적으로 수입하게 된 무역의 불균형을 보상받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밀매하기 시작했다. 사회 전체 가 마약이라는 재앙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본 중국의 지방 당국이 계속해서 이에 대한 금지정책을 폈는데도 불구하고, 아편 밀매는 점점 더 성행해 갔다. 그 와중에 1839년 광저우항의 총독이 2만개의 아편상자를 가로채서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써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했다. 도관제(1820~1850)는 난징 조약의 협약사 항에 따라서 영국인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홍콩을 양도할 뿐 아니라, 5개 항을 국제항구로 개방하고 자금성의 동남쪽을 치외법권을 누리는 '공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주민들에게 손해배상금을 물렸고, 따라서 중국 내의 사회위기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이어 함풍제(1850~1861) 치하에서는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태평천국의 난 이었다. 만주인들을 몰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이 메 이아적인 운동은 중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다. 서구 열강들은 중국 정부가 쇠 약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거듭 새로운 이권을 주장하며, 1856년 제2차 아 편 전쟁을 일으켰다. 1858년에 체결된 텐진 조약으로 중국은 그들에게 다른 항구들마 저 개방해야 했다. 1860년에는 프랑스-영국의 원정군이 유럽전권대사의 피습을 복수 하기 위해 베이징을 짓밟고, 베이징에서 가까운 원명원과 이화원의 여름 궁전들을 약 탈하고 불태웠다. 중국은 다시 '불평등 조약'들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결 정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서태후 함풍제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 동치제(1861~1874)가 왕위에 올랐다. 그에 따라 서태 후와 동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섭정제는 1873년까지 계속되었다. 정실인 동 태후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었던 서태 후(1835~1908)의 손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동치제가 죽은 해인 1874년까지 황제의 정치적 생활을 지배했다. 17세의 나이 5급 후궁의 자격으로 자금성에 들어온 이 아름다운 만주 여인은 여성으 로서의 완전한 교육을 받은데다, 보기 드물게 활달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1856년 함풍제에게서 아들을 낳은 후 황실 여인들의 서열에 올랐다. 아들인 동치제가 죽자, 그녀는 3살밖에 되지 않은 조카 재첨을 광서제(1874~1908)라는 이름으로 황제 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는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이론적으로는 절대로 여인들이 공무를 집행할 수 없는 제국에서 서태후는 40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자신의 궁전 안에만 몸을 감추고 살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었던 이 여인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사회 속에 있었다. 권력에 대 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식민 열강의 탐욕 앞에서도 전통적인 중국의 가치관을 고수할 검나 역설했던 그녀는 중국 대륙을 잠식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서태후는 태평천국의 난에서 교훈을 얻은 후 한 한때 '서구식 경영' 운동인' 양무운동 (1860~1885)'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중국의 조선소, 광산, 철도와 직물 공장 등이 세워지면서 공업화가 시작되었고, 반면 유교식 행정의 복구는 그리 성공을 거두 지 못했다. 1894년에 일본인들에게 끔찍한 참패를 당하고, 1895년에 시모노세키에서 모욕적인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은 그러한 노력이 불충분했다는 것을 보여주엇다. 성년이 되어 섭정을 벗어나 완전한 권력을 갖게 된 광서제는 경제적 현대 화에 접근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본받아 교육의 장에까지 현대화를 도입하기 위해서 1898년에 캉 유웨이(1858~1927)를 필두로 한 개혁자들을 적극 지지했다. 그리하여 '100일 변볍'과 함께 상당수의 개혁적인 칙령들이 공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 운동이 끝날 무렵 국보수파들의 힘을 빌려서 다시 수렴청저을 재개했다. 따라서 개 혁자들은 비참하게 쫒겨났으며 칙령들도 폐지되었다. 이일로 해서 광서제는 죽는 날까 지 유폐되었고, 서태후는 이후로 직접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 작했다. 의화단의 난 이 무렵, 일본이 대만과 그 부속 도서 및 펑후 열도를 할양받자, 서구 열강들도 이에 질세라 청나라에게 새로운 조계를 요구했고, 이어서 중국 땅에서 경제적, 군사적 점령 을 확고히 했다. 이처럼 청국이 조금씩 분열되어 가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모욕적인 일 련의 조치들이 행해지자, '코쟁이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증오심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그러나 이들의 골 깊은 감정은 서구식의 모든 현대화 정책을 방해했을 뿐이다. 농촌의 생활이 점점 피폐해지고 증기선과 철도의 발전으로 실업이 증가하자, 1898년 부터 거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의화단'이라는 민병대가 외국인의 소유물과 선교사뿐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까지 공격했다(대중들은 이들에 대해 돼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900년에 의화단(의화단의 단원들이 모두 중국 권법을 구사했으므로 서양에서는 이들을 복서라고 불렀다)은 결국 수도 베이징까 지 들어오게 되었다. 조정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은 그들은 외국인들이 피신해 있는 공 사관 구역을 50일간이나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급히 중국의 수도에 들어온 국제 원 정군이 이들의 반란을 단숨에 제압하고는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서태후는 황급히 시안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쇠약해진 만주 정부는 열강들에게 더 많은 전쟁 배상금을 물고, 그들에게 새로운 특권을 내주는데 동의해야만 했다. 1901~1903년 사이에 중국의 조정은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마, 캉 유웨이가 적극 주장 한 바 있던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만주인들은 중국을 외국인들에게 팔아먹은 것에 대해 점차 더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70년에 쑨 원 (1866~1925)박사가 국민당을 창당했다. 1908S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겨우 3살짜리 어린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어린 황제는 선통제 (1908~1912)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는데, 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드디어 청 왕조를 쓸어버리고 만다. 1912년 2월 위 안 스카이 총독은 어린 푸이로 하여금 양위하지 않을 수 없게 몰고 갔고, 이듬해 스스 로 공화제의 대총통에 취임했다. 하루 아침에 몰락한 황제는 1924년까지 자금성에 머 무르게 되지만,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왔던 자금성이 용상에 앉은 천자들의 긴 통치는 이로써 막을 내린다. 자금성의 마지막 보수 서태후는 해군을 현대화하는 데 들이기로 했던 비용으로 1888S년 이화원의 여름 궁 을 복구했다. 이화원과 마찬가지로 자금성의 여러 건물에도 서태후의 흔적이 남아 있 다. 위엄 있던 그녀의 남편인 함풍제가 1861년 세상을 떴을 때 황태후는 전통에 따라 북쪽에 있는 외궁들 중 하나로 칩거해야 했다. 하니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해 서 서육궁 중의 하나인 장춘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50세 되던 1885년에 서육궁 외의 한 궁전을 완전히 새로 보수하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자녕궁이다. 이 궁과 다른 두 건물을 보수하기 위해서 황제의 국고에서 은화 63만 테일이 빠져나갔다. 자녕궁의 뜰에는 길운의 상징이라고 해서 청동으로 용과 사슴들을 만들어놓았으며, 궁 의 담벽에는 박식한 신하들이 지은 칭송의 글들을 새겨놓았다. 궁전 내부는 매우 섬세 하게 꾸며져 있다. 균형이 잘 잡힌 중앙의 거실이 특히 아름다운데, 서태후는 그곳의 옥좌에 앉아 아침마다 측근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다. 이곳에는 50세 탄신일에 받은 선 물들(특히 그녀의 장수를 기원하여 칠보자기로 만든 두 개의 커다란 복숭아가 눈에 띈 다)이 멋스럽게 진열 돼 있다. '노불야'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서태후는 경국에 대한 애 착이 아주 대단해서, 자녕궁의 한쪽켠에 작은 극장까지 꾸며놓았을 정도이다. 384명의 환관 음악가와 배우들로 구성고니 훌륭한 극단이 이 궁궐 안에 속해 있었으며, 자금성 안에는 무려 12개의 극장이 있었다. 서태후는 이 궁전 안에서 10년간 머물면서 180명 의환관과 궁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1894년 60세 생일에 그녀는 자금성의 동북쪽에 있 는 영수궁 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건륭제가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 에 머물던 곳이다. 지금은 값진 양탄자와 실내장식이며 기구들이 모두 없어졌지만, 여전히 황태후의 취향 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자녕궁에는 그녀가 지나치게 장식을 좋아했고 극도로 안락함 을 추구했다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궁전 안에 있던 어떤 집기 나 어떤 도자기도 17~18게시에 만들어진, 다른 방들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예술적인 기술과 아름다움을 갖추지는 못했다.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 후 자금성 안에 들어왔던 서구인들의 말에 의하면, 청제국은 국 고가 바닥나서 1900년에는 궁궐을 유지할 수조차 없을 지경게 이르러 있었다고 한다. 청 왕조가 몰락한 후에 어린 푸이는 자금성의 동북쪽에 있는 양심전으로 물러나, 텐진 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25년 10월 10일에는 궁궐 전체가 공식적으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15세기 이후로 수차례에 걸쳐 격동을 겪었다. 하지만 영락제가 건설한 궁궐만 큼은 커다란 손상 없이 그 격동의 세월을 견뎌냈다. 자금성은 청일전쟁(1937~1945) 때에도 잘 보존되었고, 문화혁명91966~1969)중에도 국가의 재산으로 보호되었다. 세 계의 가장 큰 박물관 중에도 국가의 재산으로 보호되었다. 세계의 가장 큰 박물관 중 하나가 된 이 오래된 '고궁'은 1987년 이래로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 여 역사기념물 목록 안에 들어가 있다. 황제의 수집품들은 대부분 타이완으로 이전되었는데 불구하고, 자금성에는 아직도 100만 점의 미술품이 소장돼있다. 예식이 거행되었던 커다란 궁전들은 1980년대 초에 정성스럽게 복원되었다. 황제의 사생활이 이루어졌던 몇몇 궁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거처들 중 몇 개는 아직도 19세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다른 곳들은 더 오래 전에 복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외의 다른 궁전들은 돌아가면서 교대로 소장된 예술품들을 공개하고 있으며, 임시 전시회들을 열고 있다. 특별히 귀중품으로 꼽히는 예술품들은 수녕궁 안에 전시되어, ' 보물'로 취급되고 있다. 부속건물인 사원과 누각들도 훗날에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고궁은 해마 다 600만에서 800만 명의 방문객들을 맞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인들이다. 이 고궁은 앞으로도 영원토록 태고의 중국의 상징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아마 이 궁궐을 건축했던 당사자인 영락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리라.... 기록과 증언 동쪽의 야만인들 마르코 풀로의 뒤를 이어 유럽의 선교사들과 외교사절들이 중국을 찾기 시작했다. 놀 라운 모습을 보고 돌아온 그들은, 그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머나먼 별나라'라고만 생 각해 왔던 그 나라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앞다투어 사람들에게 풀어놓았다. 마르코 폴로는 1271~1295년까지 아시아 대륙을 돌아다녔으며,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의 총애를 받았다. 베네치아로 돌아온 후 제노바 전쟁에 휘말려 투옥된 그는 같은 감 방에 있는피사 사람 루스티켈로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며 기록하게 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쿠빌라이 칸의 궁전은 지금의 자금성을 미리 엿보는 것 같다. 거의 같은 장소에 건축된 칸의 궁전은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자금성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배치되었고, 끝없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칸발리크는 카타이의 수도로서 '칸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쿠빌라이 칸은 바로 그 칸발리크에서 1년 중 석 달, 12월, 1월, 2월을 지낸다. 그는 이 도시 남쪽에 웅장한 궁전을 갖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부터 그 궁전을 묘사하려고 한다. 그 궁전은 내가 이 제껏 본 것들 중 가장 광대하고 경이로운 건축물로, 궁전의 벽이 남쪽에서 트라몬탄까 지 이어져 있다. 궁전의 남쪽에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고관들과 병사들이 거 니는 모습이 보인다. 궁전은 단층으로 되어 있으나, 지면에서 약 10피트 정도 높이에 있는 테라스 위에 세워져 지붕이 매우 높다. 테라스가 복도처럼 궁정은 사방을 둘러싸 고 있고, 그 테라스를 대리석 담장이 받치고 있다. 담장의 폭은 2피트 정도이다. 이 테 라스는 산책로처럼 이리저리 거닐거나, 그곳에서 궁정 밖을 바라볼 수도 있다. 테라스 가장자리에는 작은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난간이 있어서 그곳에 기댈 수도 있다. 궁전의 홀과 방들의 내벽은 모두 금박과 은박으로 덮여 있고, 사자, 용, 각종, 동물과 새, 그리고 귀부인과 기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전쟁 이야기들은 매우 섬세하게 조각 되어 있다. 지붕 역시 온통 금, 은,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다, 궁전의 사병에는 거대한 대리서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궁전을 둘러싼 대리석 테라스로 올 라갈 수 있다. 궁전의 홀은 6000명 이상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궁전 에는 400의 방이 있는데, 이는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궁전은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호화롭고 균형 있게 배치돼, 단언컨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결코 이 보다 더 멋있고 훌륭하게 설계하고 건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벽 밖에서도 보일 만 큼 높이 치솟은 지붕들은 진홍빛, 초록빛, 푸른빛, 공작새의 빛깔, 노란색 등 갖가지 색으로 래커칠이 되어 있어서 마치 수정이 빛나는 것 같고, 사방 어디에서나 그 지붕 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붕은 튼튼하게 짜여져 있어서 긴 세월을 얼마든지 끄떡없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궁전 뒤에는 군주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아주 큰 집 들과 방, 거실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군주의 보물과 금, 은, 보석, 진주, 금식기, 은식 기들이 즐비하다. 그곳은 군주의 부인들과 첩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다른 이들은 들어 갈 수 없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파리, 페뷔스, 1996년 베이징의 한 수도회 사제 루이 르봉트(1655~1728)는 1685년 루이 14세가 시암으로 보냈던 프랑스 사절에 소 속돼 있었다. 그는 1686년 동료 5명과 함께 중국으로 향해 마침내 2년 후인 1688년 베이징에 도착한다. 특별히 강희제를 알현하고 돌아온 그는 프랑스에 있는 고관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자신의 여행기를 발간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제를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를 뵙기 전 에 의식을 담당하는 예부에서 공식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부 판서 가 예수회 신부님들에게 우리 일을 알리자 환관 두 명이, 내일 동료들과 함께 지정된 궁전의 한 장소로 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거행될 예식과 우리가 지켜야 할 법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중국인이 다 되어 있었기 에, 인사 절차를 가르쳐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답니다. 첫 번째 문까지는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문앞에서 내린 후 꽤 긴 거리를 걸었는데, 무려8개의 궁전 뜰을 지났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궁전 뜰 주위엔 다양한 건축 양 식으로 지은 숙소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들은 한결같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통행문들만은 예외였지요. 문 위에 건축된 정방형의 커다란 누각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하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뜰에서 뜰로 건너갈 때마다 통행로 같은 이런 문들을 지났습니다. 무척 두텁고 넓고 높은 데다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이 문들은 모두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대리석의 윤기와 아름 다움은 조금 퇴색해 있었습니다. 8개의 뜰 중 한 곳에서는 맑은 냇물이 가로질러 흐르 고 있더군요. 냇물 위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구요. 다리의 대리석은 문을 만든 대리석보다 더 하얀 색이었으며, 섬세한 수공도 훨씬 돋보 였습니다. 부인, 당신이 이 궁전을 직접 보셨으면 분명 좋아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궁전 을상세하게 묘사히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궁전의 아름다움은 궁전을 구성하 는 다양한 형식의 건축물들에 있지 않고, 경이로운 건물군과 끝없이 이어지는 뜰, 그 리고 규칙적으로 배치된 정원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정말로 장엄하기 짝 이 없어서, 한결같이 그곳에 사는 주인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나 를 감동시킨 것은 바로 황제의 보좌였습니다. ... 거대한 뜰 한가운데 토대가 되는 대 형 주춧돌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받침돌이지요. 뜰 한복판에 덩그마 니 놓여 있는 이 주춧돌은 정방형이었습니다. 가장자리에는 죽 돌아가면서 난간이 둘 려 있습니다. 세련된 솜씨로 다듬어진 난간은 우리 취향에도 잘 맞는 듯합니다. 제일 밑에 있는 주춧돌 위에, 그보다 약간 작은 또 하나의 큰 받침돌이 놓여 있고, 이 돌 가장자리에도 첫 번째 것과 같이 아름다운 난간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무 려 5단이 계속되지요. 각 기단의 크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지고, 제일 윗단 에 정방형의 큰 홀을 세워놓았습니다. 홀의 지붕은 황금빛 기와로 덮여 있고, 사면에 는 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은, 박짝이는 래커칠을 한 굵은기둥 들이 서까래를 받치고 있지요. 바로 그 안에 황제의 보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주춧돌들과 하얀 대리석으로 깎아서 만든 다섯 기단의 난간들은 태양이 빛 날 때면 마치 금빛과 오색빛으로 빛나는 궁전을 머리에 쓰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모 습은 퍽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주변에 숙소로 쓰이는 작은 건물군이 둘러싸고 있는 거대하나 뜰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돋보입니다. 이런 독특한 설계에다 우리 건축술의 장식과 돋을새김의 단순한 멋만 첨가한다면, 아 마도 위대한 군주들의 영광에 걸맞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제의 보좌가 될 것입 니다. 루이 르통트, '제이지의 예수회 신부' ''1687~1692년 당시의 중국 회상기'' 파리, 페뷔스, 19990년 '중국 황제가 평상시와 예식시에 궁궐을 출입하는 모습' 황제가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사냥이나 산책을 위한 사적인 행차이다. 이때 호위병과 왕자. 고관들은 직급과 권세에 따라 황제의 전 후좌우에서 호위하면 따라간다. 이 행차에는 무려 2000명의 수행원이 뒤따르는데, 모 두 말을 타고 화려한 복장을 한 채 무기를 들고 있다. 말들을 장식한 마구들도 금실과 은실, 보석으로 장식한 비단 천으로 덮여 있다. 두 번째는 공적인 행차로, 황제가 제사를 지내거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외출하는 일 이다. 그때의 행렬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커다란 북을 든 24명의 남자들이 12명씩 두 줄로 나아간다. 두 번째, 24명의 나팔수가 12명씩 두 줄로 그 뒤를 따른다. 나팔 길이는 3피트가 넘고, 취구는 직경이 한 뼘 정도이다. 세 번째, 곤봉을 든 24명의 남자들이 12명씩 두 줄로 뒤따른다. 길이가 7~8피트 정도인 곤봉은 붉은색의 유약을 발라 광택이 나고, 끝을 금테로 장식했다. 네 번째, 끝이 초승달처럼 생긴 미늘창을 든 남자 100명이 50 명씩 두 줄로 뒤따른다. 다섯번째, 금색을 칠한 나무망치를 든 100명의 남자가 50명 씩 두 줄로 행진한다. 여섯 번째, 카시라고 불리는 장대를 든 두 명의 남자가 행진한 다. 붉은 유약을 칠한 장대에는 꽃장식을 달았고, 끝에 금테를 둘렀다. 일곱번째, 등불 을 든 400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등불은 공교하게 장식된 세공품이다. 여덟번째, 다 양하게 장식한 횃불을 든 100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불을 오래 보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아주 맑은 빛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나무에다 횃불을 붙였다. 아홉번째, 밑 둥을 철로 장식한 창을 든 200명의 남자들이 뒤를 잇는다. 다양한 색깔의 비단 실뭉 치를 단 창도 있고, 표범, 늑대, 여우, 그밖의 다른 동물의 꼬리를 달고 있는 창들도 있다. 열번째, 깃발을 든 24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깃발에는 각기 다른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는데, 중국인들은 별자리를 우리처럼 12개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2개로 구분한다. 열한번째, 54개의 성단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56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중국인들은 전세계의 별들이 모두 54개의 성단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열두번째, 금빛의 긴 장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부채를 든 200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부채에는 용, 새, 태양, 그 밖의 다른 동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열세번째, 화려한 장식이 달린 양 산을 들고 24명의 남자들이 뒤따른다. 행진은 여전히 두 줄로 이어진다. 열네번째, 평 소에 왕이 자주 사용하는 8종류의 집기를 든 사람들이 뒤따른다. 즉 테이블보, 금식기, 금물병 등등. 열다섯번째, 눈처럼 새하얀 10마리의 말이 뒤따른다. 말의 안장과 고삐 는 금과 진주, 보석으로 치장했다. 열여섯번째, 100명의 창기병들이 두 줄로 뒤따른다. 두 줄 사이에 황제의 시종들이 역시 두 줄로 호위하고, 그 가운데 마침내 황제가 있다. 멋진 말을 타고, 무척 아름답고 화려한 양산을 쓴 황제의 표정은 엄숙하고 장엄하다. 양산이 아주 크기 때문에 왕과 말까지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열일곱번째, 화려한 복장을 한 왕자들과 왕의 친지들, 수많은 귀족들이 지위의 고하에 따라 열을 지어 두 줄로 뒤따른다. 열여덟번째, 500명의 내관들이 역시 화려한 옷차림으로 뒤따른다. 열아 홉번째, 하이오게라고 불리는 황제의 시종 1000명이 두 줄로 뒤따른다. 이들은 붉은 바탕에 금실과 은실로 꽃을 수놓은 긴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긴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 스무번째, 36명이 덮개 없는 큰 의자 하나를 들고 뒤따른다. 이어서 덮개 의자가 뒤 따른는데, 이 의자는 무려 방 하나의 크기여서 120명이 들어야 할 정도이다. 스물 한번째, 거대한 두 대의 수레를 각각 두 마리씩의 코끼리가 끌고 온다. 스물두번째, 8 필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 한 대와 4필의 말이 끄는 이보다 조금 작은 마차 한 대 가 뒤따른다. 마차, 코끼리,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 말과 마부들 모두 매우 화려한 차 림을 하고 있다. 의자와 수레마다 각각 50명씩의 군인과 장군이 따른다. 스물세번째, 2000명의 문관들이 한 줄에 1000명씩 두 줄로 뒤따른다. 스물네번째, 2000명의 무관들이 한 줄에 1000명씩 두 줄로 따르는데, 모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다. 황제가 공적인 행차를 할 때 황제를 수행하는 장엄한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가므이엘 마제란, ''중화제국의 신기한 특징을 묘사한 새로운 이 야기'' 파리, 1688년 황제의 궁전에서 열린 연회(1727년 10월 8일자 편지) 1727년 1월 26일, 황제께서 우리 유럽인들을 궁전에 초대했습니다. 잊지 못할 영광이 었지요. 시종이, 황제께서 당신의 궁전에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하신다고 알 려주었죠. 모두 20명을 초대했는데, 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자, 황제 를 모시는 환관이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연회장에서 보니, 높고 멋진 보좌에 황제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우리 중 10명은 황제의 왼쪽, 다른 10명은 오른쪽에 앉아 무릎을 끓 고 황제께 중국식으로 절을 올렸습니다. 황제께서는 아직 한번도 우리를 대접한 일이 없기에 올해엔 꼭 우리를 초청하고 싶었으며, 그 자리에 당신도 참석하기로 결심했노 라는 인사말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 말씀에 우리는 이마를 땅바닥에 찧어 황송함을 표 하면서 감사를 드렸지요. 시종들이 두 사람 앞에 식탁 하나씩, 모두 10개의 상을 차려 내놓았고, 황제 앞에는 따로 상을 차렸습니다. 식사는 정말 훌륭했어요. 황제께서는 우 리에게 많이 들것을 권했고, 몇 번씩 술잔도 권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와 함께 술잔을 드는 영광도 베풀어 주셨지요. 황제께서 예수회 수사이자 이탈리아 화가인 카스틸론 형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파르냉 신부에게는 스웬덴과 모스크바의 전쟁에 대해 말해 달라는 부탁도 하셨구요. 또 유럽인과 모스크바인 사이의 종교의 차이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도 하셨지요. 죽은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 때문에 자국민이 우리를 비난하고 있다는 말씀도 덧불이면서 말입니다. 그 말에 파르냉 신부는 부모님과 어른을 공경하 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지요. 황제께서는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주인이신 분을 믿고 있다 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황제 당신이 예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포'라는 남 자를 신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의 오해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 다. ... 황제께서는 연회가 끝나갈 무렵 우리들 각자에게 돈주머니 두 개씩과 검은담비 모피 두벌씩을 나눠주셨고, 시종들에게 과일상 세 개를 예수회 교회 세 곳에 갖다주라 고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머리를 땅바닥에 찧어서 감사를 표하고 물러났습니다. 밖으 로 나오자 시종들이 황제께서 하사한 오렌지와 각종 과일들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의 만찬은 정말 성대하고 굉장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유렵인은 배고파 죽 을 뻔한 잔치였다면 믿으실 수 있겠는지요? 땅바닥에 깔아놓은 방석 위에 책상다리를 한 채 긴 시간을 견뎌야 한 것은 그야말로 큰 곤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중 에도 시종들이 황제의 시종을 드는 의식을 모두 볼 수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시종들 이 황제의 시종을 드는 의식은 모두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위엄과 질서 속에서 진행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중국의 황제들이야말로 온 백성의 섬김을 받 는 위대한 군주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상에 오른 요리 접시들과 식기들은 어찌나 깨끗하고 정갈한지 일찍이 본 적이 없었지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리신 그 본 적이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 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리신 그 분이 한 나라의 왕이기라기보다는 모든 이들이 제 사를 올려 경배하는 우상처럼 보였다는 점입니다. 니네트 부트로, 뮈리엘 데트리 '중국 여행', ''서구인들의 여행 선집-중세기에서 중화제 국의 몰락까지'' 파리, 로베느 라퐁, 1992년 베이징의 영국 사절들 나는 대사를 동반한 이번 여행중에는 중국의 황궁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많지 않 은 지식이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황제의 궁궐은 도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 20피트 높이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성벽은 온통 붉 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녹색의 래커칠을 한 기와지붕이 덮여 있다. 이 성벽은 11km 남짓 되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이 성벽을 따라 모래가 깔린 산책로가 둘러싸고 있 다. 성벽 안에는 상당수의 정원이 있다. 그 정원들 역시 중국식 정원답게 세심하게 손 질하고 장식한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했던 입구는 견고한 돌로 만든 아치형 관문으로서, 아치 위에 2층짜리 누각을 이 고 있다. 통로를 통과하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뜰이 펼쳐진다. 뜰 양편에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4층짜리 거물들마다 발코니나 불쑥 튀어나온회랑들이 있으며, 그곳의 난 간, 덧문, 기둥들은 모두 금빛으로 칠해져 있다. 지붕 역시 래커 칠을 한 노란색 기와 로 덮여 있지만, 건물 몸체는 여러 가지 색깔들로 칠해져 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유 일한 궁전이 이 건축물은 중국식 건축술로 지어진 아름다운 궁전이다. 수많은 보초병 들이 밤낮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고, 이들 보초병을 고관들이 가까이서 감시하며 명령 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궁궐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궁궐 안에 있는 공식 접견실들 과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실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지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 는 말은 하나도 없다. ... 그러나 내가 보았던 건물들만큼은 주변에 있는 시내의 건물 들과 비교할 때, 당당하고 화려하면 장엄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분명 하게 고백할 수 있다. 이니어스 앤더슨, ''1792~1794년에 걸친 매카트니 경의 중국여 행 이야기'' 파리, 오비에 몽테뉴, 1978년 중국 황제들의 운명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표하기 위해서 통치기간을 줄인 황 제들이 있다. 숭정제와 건륭제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일화를 전해 주고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최후 숭정제(1627-1644)는 명 왕조(1368-1644)의 마지막 황제였다. 자신의 군사가 대패 함에 따라 궁지에 몰려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숭정제는 충실한 환관 왕승은 마저 죽음의 길을 택하게 만들었다. 매산, 곧 경산 언덕의 꼭대기에서 목을 매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자금성을 조용히 응시했다. 새벽 5시경이 되자 날이 밝았다. 황제는 의복을 갈아입고 긴 외투도 벗었다. 궁전의 종소리가 조례시간을 알렸으나, 신하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용 들이 수놓인 짧은 윗옷을 입고서 망토를 걸쳤다. 왼발은 맨발이었다. 평생 충실한 환 관 왕승은을 동반한 채, 그는 신무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와서 경산 공원 안으로 들 어갔다. 슬픔에 찬 시선으로 도시 전경을 바라보다가, 망토를 벗어 안쪽에다 고별의 말을 적었다. "짐은 덕이 없어 하늘의 뜻을 거슬렀노라. 짐이 믿었던 대신들의 배반으 로 집의 도시가 온통 폭동에 휩싸였도다. 차마 선조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 짐은 죽 은 길을 택한다. 황제의 관을 벗고 헝클어진 머리로 수치스런 얼굴을 덮노라. 폭도들 아, 짐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도 좋다. 하나 백성만은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할지어다!" 그는 '황제의 관과 허리띠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던 누각 앞의 나무에 목을 맸다. 그 러자 충실한 환관 왕승은도 똑같이 주인의 뒤를 따랐다. T. O. 시랭, ''베이징의 황궁'' 파리, 부뤼셀, G, 바노에스트, 1926년 스스로 옥좌를 거부한 건륭제 건륭제는 1735년 25세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명군으로서 60년간 통치를 마친 후, 그는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위대한 황제였던 강희제(1661-1722)의 61년에 걸친 통치기간을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까지 짐은 59년간 제국을 다스렸다. 하늘의 은혜와 조상님의 보호로, 짐이 다스리 는 영토에 평화가 있었고, 새로운 영토들이 속속 이 나라 문화에 동조했다. 그 긴 시 간 동안 짐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의 멍에를 가볍게 하고, 하늘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 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짐은 기근이 일어났을 때 여러 번 세금을 면제해 주 었고, 짐의 금고를 열고 수천만 테일(옛 중국의 화폐 단위 : 역주)을 풀어 이재민들에 게 나눠주었다. 내년에는 짐이 옥좌에 오른 지 60년째가 되는 해이다. 짐의 선조들이나 다른 왕조의 선조들 중에서 즉위 60년째를 맞은 분은 드물다. 어쩌다 60년을 넘긴 이들도, 대부분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분들이다. 그럼 비해 짐, 25세 젊은 나이에 옥좌에 앉았다. 이 제 오늘 짐은 84세가 되었다. 짐은 지금도 완벽한 건강을 누리고 있고, 자손들도 4대 손까지 늘었다. 이같은 오늘이 있게 해주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짐은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 없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사람들은 짐은 즉위 예순 해를 맞는 내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을 볼 수 있을 것이 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고 정월 보름에는 월식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은 마치 경고처 럼 이런 징조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군주라면 반드시 양심에 따라서 인도받고, 끊 임없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깨닫기 위해 굳이 일식과 같은 자연의 징조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황제는 하늘로부 터 은혜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태도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문이나 쓸데없는 말로 자연의 현상을 기원할 필요가 없다. E. 박하우스, J. O. P. 블랜드'만주의 황제들', ''베이징 궁전에 대한 회상기'' 파리, 파요, 1934년 천자의 시중을 드는 환관과 비빈들 자금성 안에는 황제와 황후, 비빈들이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궁녀, 내시, 시종들이 있었고, 이들의 숫자는 모두 수천 명에 이르렀다. 자금성에 첫발을 내디덨을 때 유천화는 광서제의 아내인 효정 황후의 시중을 들던 내시였다. 그는 18년간 자금성에 서 살다가, 청제국의 최후를 목격했다. 자금성 안의 생활에 대해서 그가 기억하고 있 는 것들을 역사가인 단 시가 모아서 기록했다. 자금성에 첫발을 딛던 1898년 가을, 그때 나는 막 17살이 된 소년이었다. 그날 나는 궁전읜 내무부실에서 내 또래의 소년 15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해 준 사람은 나이든 환관이었다. 그는 내무부 옆에 있는 한 별채 거실에 우리를 집합시 킨 뒤, 보름간 훈련을 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가 바로 궁전의 규칙과 관습들, 우리 임무의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주실 스승님이셨다. 제일 처음 배운 것은 호칭에 관한 것이었다. 스승님은 황제를 폐하 혹은 주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야 하며, 황제의 숙모님이시자 양모님이신 자희 태후는 존경하올 선조님, 혹은 노불야라고 불러야 하고, 비빈마마들은 이름 앞에 반드시 부인이란 말을 붙여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내시들 사이에도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 끼리 서로를 부를때는 절대로 내시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내시는 사부, 동급은 사형이라고 불렀다. 호칭교육이 끝나자, 인사법과 절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무릎을 끓는 방법이 그렇게 다양하고, 또 무릎을 꿇는 경우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스 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내시는 무릎을 꿇고서 일생을 보내는 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 면, 비빈 한 분이 말을 걸면, 내시는 먼저 왼쪽 무릎을 꿇고 그 다음에 오른쪽 무릎을 꿇어야 한다. 두 무릎을 꿇고 나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공손하게 모자를 벗어서 오른 쪽에 내려놓는다. 내시의 감독이나 하급관리 앞에서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 하지만 황 제나 황후들께 인사를 하려면, 세 번 무릎을 끓은 다음에 이마로 바닥을 아홉 번 두드 려야 한다. 이마를 바닥에 살짝 스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바닥에 이마를 찧어서 내는 소리는 고마워하는 마음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같은 방에 있 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빈 한 분이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우리는 스승님의 엄격한 눈초리를 받으며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이마를 땅바닥에 찧었 다. 그 바람에 살갗이 다 벗겨지고 말았지만, 스승님은 우리 이마의 혹에 대해서는 전 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고마워할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 라면서 계속 이마 찧는 법을 연습해야 했다. 드디어 우리는 윗사람의 시중을 드는 법에 익숙해졌다. 차나 술을 따르는 일, 담뱃대 에 담배를 채우는 일,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 식사 시중을 드는 일 등등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 나중에 들어온 내시들은 황의 시종들을 섬겨야 했고, 궁전에 있는 왕족들에 게 결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내시들 사회에서는 서열의식이 매우 엄격했고 , 등급이 올라가면 전용 시종들을 부릴 수 있었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부리는 시종의 숫자도 늘 어났다. 그래서 태후가 계시는 궁전의 환관 감독인 이안영은 전용 내시를 12명이나 거 느렸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권력자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을 섬기는 법을 또 배웠다. 내시를 섬기는 일은 황족을 섬기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았다. 윗사람의 시중을 드는 몸동작 하나하나마다 엄격한 규칙이 있고, 절도 있는 동작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예 를 들면 아주 사소한 물건을 전달할 때도 매우 까다로운 규칙과 순서를 지켜야 했다. 사부가 차를 요구할 경우에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려서 바쳐야 했다. 그 러기 위해 두 손을 붙인 채 손바닥을 쪽 펴고 찻잔을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받친 다. 이어 사부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스승의 가슴 높이까지 찻잔을 공손하게 올린다. 윗사람이 찻잔을 받아들기 쉽도록, 너무 높이 올려서도 안되고 너무 낮게 올려서도 안 된다. 반드시 우리의 눈썹 높이로 올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복종의 표시로 머리를 공 손히 숙여야 한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단 시, ''자금성의 한 내시의 추억담'' 아를, 필리프 피키에 출판사, 1991년 저수궁으로 황롱어는 청 말기의 궁녀였다. 그녀는 13살에 궁전에 들어가서 서태후의 시중을 들었 다. 그녀가 맡은 일은 담배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환관 류와의 결혼이 불행하 게 끝난 뒤 황궁은 떠나, 가정부 일을 하면서 살았다. 만주인으로 태어나면 인사를 담당하는 종인부로부터 한 가지 특혜를 받는다. 그것은 황제께서 베푸시는 은총 중 하나였는데, 만주인 가정의 딸이 13~14살이 되면 내무부 에서 그 소녀들의 명단을 조정에 린다는 것이다. 나는 아주 가난한 만주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내가 궁전에서 일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급료를 받을 수 있고, 우리 가족도 여러 가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궁궐에서 베푸 는 몇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가 궁궐 법도와 예절을 다 배우고 나면, 그리고 궁궐 안에서 좋은 평판을 얻으면, 이후에 좋은 신랑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 혹시 운이 좋으면 황제의 위병이나 나를 아껴주는 고관을 만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삶은 앞날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13살이 되던 해 여름, 5월의 축제가 열리기 전날 내무부에서 우리 집에 사람을 보냈다. 내가 궁녀로 뽑힌 사실을 우리 부모님께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궁궐에 들어가 지 전, 나는 궁궐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배웠다. 어느날 부모님은 나를 궁궐로 데리 고 가셨다. 그리고 정오쯤 다시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것이 내무부 에서 세운 전략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우리 같은 소녀들이 조금씩 궁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집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가족과 떨어지는 것 이 덜 고통스러웠다. 며칠 후에 부모님과 오빠들이 나만 혼자 남겨둔 채 모두 집을 나 가셨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가마한 대가 와서 나를 신무문 앞까지 태우고 갔다. 그곳에는 내 또래의 소녀들이 30명 가량 모여 있었다. 동갑내기 소녀 3명과 함께 나 는 나이든 내시의 안내로 저수궁으로 갔다. 우리는 태후께서 거처하시는 궁전에 가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저수궁의 궁녀들이었다. 고참 궁녀들 앞에서 궁궐의 전통을 따르면 내시들은 모두 한인, 즉 본토 중국인이다, 반면 궁녀들의 경우 에는, 다소 중요한 구역에 배치되는 여인은 반드시 만주족 출신이어야한 했다. 궁녀로 뽑힌 한족 출신의 여인은 결코 황후나 태후, 비빈, 혹은 왕자비의 시중을 들 수가 없 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수궁의 궁년들은 모두가 순순한 만주족 출신의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저수궁의 궁녀들은 다른 곳의 궁녀들보다 훨씬 까다롭고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다. 우리는 우선 태후마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다음, 신참 궁년들이 숙모님 이라고부르는 고참 궁녀들 앞으로 인도되었다. 황후를 모시는 것보다 고참 궁녀들을 모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누군가가 일러주었다. 궁궐의 규칙에 따르면, 궁녀로 일한 지 4~5년이 되어 18~19살에 이르면 궁녀일을 그 만두고 궁궐을 떠나 남편감을 구할 수 있었다. 궁궐을 아직 떠나지 않은 고참 궁녀들 은 신참 궁녀들에게 숙모님이라 불렸는데, 신참인 우리들에겐 숙모 궁녀가 한 사람씩 정해졌다. 우리는 숙모 궁녀를 매우 깍듯하게 모셔야만 했고, 그녀들은 우리 위에 군 림했다. 그래서 우리를 때릴수도, 벌을 줄 수도 있었고, 힘들고 비천한 일을 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우리를 무능한 자로 취급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대개 숙모 궁녀들은 한시라도 빨리 궁궐을 떠나려 했기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할 수 있는 새 궁녀 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전해 주려고 열심히 노력했 다. 그들이 하는일을 하루 속히 우리가 습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란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보아와서 이미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나의 숙모 궁녀님 은 모시 신경질적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멍터구리로 취급해 걸핏하면 때렸다. 하지만 얻어맞는 것이 가 장 참기 쉬운 벌이었다.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받게 되면, 언제 일어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면서 "숙모님, 차라리 나를 때리시고, 이 벌만은 거둬 주세요. "라고 호소하곤 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숙모 궁녀들의 시중을 들면서 몸단장을 해주는 일도 우리가 할 일이었다. 우리는 그녀 들의 발을 씻어주고, 심지어 목욕까지 시켜주었다. 그래서 매일 뜨거운 물이 든 물통 을 적어도 12통씩은 날라야 했다. 그녀들의 의복을 짓는 바느질도 우리 몫이었다. 숙 모 궁녀들은 아름답게 보이려했고, 때로 태후께서 그렇게 지시하기도 하셨다. 그녀들 은 의복이나 버선, 신발 등에 대해 자기들끼리 시샘을 하고 경쟁도 했다. 우리는 그녀 들의 세탁물도 처리했다. 이처럼 우리는 날마다 숙모 궁녀를 위해 산더미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고, 아주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 리에 들 수 있었다. 궁궐에서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진이, ''자금성 궁녀의 회상기'' 아를, 필리프 피키에 출판사, 1993년 황제와 비빈들 어떤 비빈들은 교묘한 술책을 쓰거나 음모를 꾸며 황제의 애첩이 되곤 했다. 황제의 애첩은 모든 비빈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황제는 비빈인 진비만 가까이 두고 싶어하셨다. 황제에게 불려가는 비빈은 황제의 신 변안전을 위해서, 알몸에다 검은색의 커다란 가운만 걸친 해 황제의 방으로 인도되었 다. 한 내시가 황제의 침실까지 그녀를 업어서 데려다 주었는데, 그처럼 등에 업혀 황 제의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배공'이라고 한다.... 황제가 부르는 여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황제 앞에 나아갔다. 하지만 진비만은 예외 였다. 그녀는 업혀가는 배공 대신에 궁전 안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주공'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가장 아끼는 여인이었다. 가끔 황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부르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비빈들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비는 남자처럼 변장을 하고서 당당하게 집무실로 들어갔다. 만주식 의 외투를 걸치고, 굵게 딴 머리를 등뒤의 옷 속에다 감추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머리 장식 대신에 진주를 박은 모자를 쓰고, 밑창이 아주 두툼한 높은 신발을 신었다. 그래 서 그 모습이 마치 젊은 학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런 차림새를 하고 황제의 집무실 에 들어가서, 감히 황제의 붓을 들어 글을 쓰기도 하고 황제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 이야기만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다. 다만 시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뿐이었고, 황제와 장기를 두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위치를 궁궐 안의 모든 여인들이 부러워했다. 진비만이 그런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궁마 님이신 롱유 부인도 그녀의 그런 특권을 질투했다. 환관 류의 친구인 씨유기에 의하면, 태후께서 그녀를 우물에 던져넣어 죽인 것도, 그녀가 황제를 독점하려고 했고 나아가 감히 황제와 정치 이야기까지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의 책 기이하고 특별한 여행 이국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낯선 고장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쥘 베른과 폴디부아는 주인공들이 동방의 아주 머나먼 나라, 중국에서 활약하는 소설 을 썼다. 그들을 따라가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자금성을 방문할 수 있다. 쥘 베른은 스스로 즐긴 것이 아닐까? 쥘 베른은 그의 작품 ''어느 중국인의 중국 체험''에서, 자금성 안의 수많은 궁전과 건 축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록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형용사와 숫자를 읽고 있노 라면, 이 저명한 소설가가 과연 그 이름들을 단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런 작업을 스스로 즐기려 했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금지된 도시의 남쪽에 있는 문, 곧 황제와 황후들 앞에만 열리는 '대청문'을 통해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도시는 붉은색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담 장 위에는 황금빛 기와가 덮여 있다. 도시 안에는 타타르 왕조의 조상들을 기리는 사 원과 천신을 모시는 천단, 땅의 신을 모시는 지단 등이 우뚝 세워져 있다. 조상신을 모신 사원의 지붕은 가지각색의 기와로 덮인 이중지붕이다. 여러 궁전 중에 대표적으 로 다음과 같은 궁전들이 있다. 우선 장엄한 공식행사와 경축 의식들이 베풀어지는 ' 태화전' 천자의 조상들의 모습을 그린그림들이 걸려 있는 '중화전' 중앙 거실에 황제의 옥좌가 있는 '보화전', 마지막 황제의 숙부인 외무부 장관, 공 대군이 주재하는 국의가 상주하고 있는 '내각대당', 황제가 1년에 한번씩 성으런운 책들을 해석하는 '문화전', 공자를 기리기 위한 제사를 드리는 '전심전', 황제의 도서관 '문연각', 사료 편찬관 '실 록고', 책을 인쇄하는 동판과 목판을 보관하는 '본인전', 궁중 사람들의 의복을 제작하 는 공장들, 황제가 가정사를 토의하는 장소인 '건청궁', 젊은 황후가 머무는 '곤녕궁', 군주가 퇴위하거나 병환중일 때 머무는 궁전인 '명상군', 죽은 황족들의 넋을 모시는 사원, 1861년에 타계한 함풍제의 아내들이 과부가 된 뒤에 머물렀던 네 개의 궁전, 황 제의 비빈들의 처소인 '저수궁' 궁녀들의 공식 모임 장소, 고관 자녀들의 학교, 어린왕 자들이 거처하는 '남삼소', 궁궐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원 '흠안전', 티테트 건축술로 만 들어진 라마교 사원, 황관을 보관하는 창고, 궁전의 식량을 관리하는 곳, 내시들의 거 처인 '태감직방'-이 붉은 성벽 안에서 일하는 내시들의 수는 5000명을 넘으면 넘었지 그보다 적지는 않다- 등의 건물에다. 그밖의 여러 궁전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이 황 궁 안에는 무려 모두 48개의 궁전이 있다. 이 황금색 도시의 호숫가에 자리잡은 '자광 각'은 숫자에 넣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이다. 자광각은 바로 1873년 6년 19일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5개국의 장관들이 황제와 대면했던 곳이다. 고대의 어떤 대광장에, 그처럼 진귀하고 호화찬라한 보물들이 꽉차 있는, 그처럼 다양 한 건축물들이 모여 있단 말인가? 유럽 국가의 어떤 도시, 어떤 수도가 이런 구조를 갖고 있었던가? 쥘 베른, ''어느 중국인의 중국 체험'' 파리, 헤첼 출판사, 1879년 중국에 간 시갈 폴 디부아는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된 한 '파리 토박이'의 모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 태후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시갈은 급기야 감옥에 투옥된다. 그는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외교관 친구인 르네 로레를 만난다. 르네 로레는 로조 플뢰리 공주가 연모하고 있는 자였다. 두 죄인은 죄인 호송용 가마를 타고 자금성 안에 들어 가게 된다. 우리가 탄 가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의 도시 베이징 안에 있는 두번째 성벽 을 따라가다, 마침내 서쪽에 있는 문에 이르렀고 그 문을 지나서 드디어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임광전과 영안사 그리고 북해 공원을 왼쪽으로 두고서, 가마꾼들은 북해와 중해 사이에 있는 흰 대리석 다리를 건넜다. 한순간 푸른 물이 포로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푸른물 위로 향기를 뿜는 커다란 돛단배들과 수련꽃잎들, 연꽃들, 인공섬 들이 마치 둥실 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인공섬들은 오룡정, 미도의 정자, 동선승로 반이 있는 성소를 비롯한 여러 개의 정자와 누각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미풍에 찰랑이 며 떨리는 물결은 이윽고 둥근 지붕의 건축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호송병들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 마침내 서쪽에 있는 서화문 쪽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도시 안에 있는 세 번째 성벽의 서쪽문인 서화문은 황금색 지붕으로 덮여 있는 서쪽 벽의 중앙에서 훨씬 더 남쪽으로 내려온 곳에 있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드디어 황제 의 가족들과 그의 시종들, 고관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금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갈은 수많은 궁전들이 모여 있는 이곳을 들어올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그는 두 눈 을 크게 뜨고 열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궁전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 이 붉은 성벽 안은, 유럽인뿐 아니라 중국인 백성들에게도 굳게 닫힌 세계였다.... 로레는 동료에게 앞에 보이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것 좀 봐, 저게 서태후 의 궁전일세." 그 궁전의 환상적인 모습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궁전을 단장하 라는 명령을 받은 예술가들은 그곳이 서태후를 위한 궁임을 알고 나서 온갖 기이하고 복잡하고 환상적인 묘안을 다 동원했다. 그렇기에 그 궁전에는 중국인들의 온갖 재능 이 다 동원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전에는 끝이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지붕, 종루, 첨탑, 구불구불한 용마루 등이 넘쳐 났고, 셀 수 없이 많은 형상들이 뒤얽혀 조각되어 있는 궁전의 벽들은 다양한 색깔로 래커칠을 한 나무와 대리석, 화장회반죽 등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 의 궁전이 독특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궁전의 1층으로 들어 가려면 낮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그 계단의 가장가리에는 금빛의 난간이 둘러쳐 져 있고, 난간에는 입을 쩍 벌리고 방문객을 위협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 용의 비늘 달린 꼬리는 차일처럼 테라스 쪽으로 비스듬히 드리워진 지붕을 받치고 있 는 기둥까지 휘감고 올라가 있었다. 몇 분 후, 우리를 실은 움직이는 감옥은 마침내 서태후의 궁전과 그녀의 시종들이 거 처하는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린 두 포로는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곧장 궁전의 동쪽에 있는 별채에 감금되었다. 감방 안에 있는 십자가형의 유리창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었고, 초록빛 용들이 몸을 뒤트는 모습이 그 발 위에 그 려져 있었다. 우리는 발을 걷고 유리창을 열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창문은 궁전 뒤편 에 가꿔놓은 화단 쪽으로 나 있었다. 화단 너머로 도로가 보였다. 도로 건너편에는 중앙의 대로가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대 로위에 붉은빛,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서태후가 거처하는 저 수궁의문, 신무문, 순정문 등등...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석탄을 쌓아 만든 매산, 또는 경산이라고도 부르는 인공산의 원추형 꼭대기가 시선을 붙들었다. 궁전의 한구석을 가리고 있는, 시종과 내시들의 숙소도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살피며 탐색을 마친 시갈이 투덜거렸다. "여기로 왔다고 해서 나아진 것도 없군. 이 감옥이 저 번보다 더 단단히 감시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로레가 피곤하다는 몸짓으로 동의 했다. 파리 토박이인 시갈이 파리인 특유의 침착한 위엄을 보이며 결론을 내렸다. "하 기야 고관들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기는 할 거야." 그 말에 로 레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자네, 도망칠 생각을 하는 건가?" "아니,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방법만 찾으면 그렇게할 거야. 반드시 그 방법을 찾고 말 테니, 두고 보게나. 파리 토박이가 얼굴 노란 중국 원숭이들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은가, 안 그래?" 외교관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고 생각했다. 폴 디부아, ''중국에 간 시갈'' 파리, 부아뱅 출판사, 1927년 꾸며낸 이야기'한 세기의 종말' 쥘 베른이나 폴 디부아와 달리 스갈랭과 카프카는 우리를 내면세계로 안내한다. 그들 이전해 주는 자금성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의미한다. '자금성' 빅토르 스갈랭은 모음시집 ''석비''에서 발췌한 다음의 시 속에서 자금성을 아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묘사하는 것은 자금성 그 자체가 아니다. 은유적으로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절은 서태후의 명에 따라 우물에 빠져 죽은 광서 제의 애첩 진비의 죽음을 빗대어 표현했다. 그곳은 베이징을 생각나게 한다. 열대의 땅보다 덥고 극지방보다 추운 북방의 나라, 그곳의 수도인 베이징을, 주위에는, 상점이 보이고 누구라도 드나드는 주막집도 보인 다. 나그네가 묵을 침대가 있고, 식탁이 있으며, 끽연실까지 갖춘 주막집이, 더 들어가 면, 오만한 성이 버티고 있다. 거친 성벽, 적의 공격을 막을 철각의 보루들, 그리고 나 의 성실한 경비병들이 보초 서는 네 귀퉁이의 각루들, 이 모든 것이 견고하게 지키는 정복자의 성이, 그 붉은 성 한 가운데 사각 터가 있다. 특별한 이들을 위한, 아무것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우정의 친구들만을 위한 터가, 하자 만 그 은밀하고도 찬란한 곳엔, 수많은 궁전이 있고, 연꽃과 고인 물과 내시와 도자기 가 가득하다- 그곳이 바로 금지된 자줏빛 성, 나의 자금성. 나는 그 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성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길을 통해 오직 나만이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시종들에 파묻힌 채, 그곳에 존재하는 오직 하나 뿐인 고독한 남성, 나는 나의은신처를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만일 나의 사랑 하는 친구가 그런 제국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런데 이제 나는 그 문을 열려고 한다. 그 문으로, 내가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그녀가 들어올 것이다. 전능한 여인, 악을 모르 는 그녀가, 이제 그녀는 나의 궁전들과 나의연꽃들과 나의 호수들과 나의 내시들과 나 의 도자기들 가운데서 군림하고 웃고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깨닫게 될 어느 날 밤에- 그녀는 우물 속에 조용히 가라않을 것이다. 빅토르 스갈랭, '자금성'(1911), ''석비'' 중에서, 피리, 로베르 라퐁, 1995년 르네 레이 ''르네 레이''는 절망적인 자기 탐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는 시종 자금성 안으 로 들어가려는 화자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는 황궁에 출입 가능한 한 젊은 유럽인의 중개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르네 레이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동시에 자금성의 비밀과 신비도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 는다. 베이징이라는 도시는 신비로움을 지닌 걸작품이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도 시의 삼중 설계가 토지대장에 등록된 주민들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거주 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하늘 아래 가장 큰 제국의 수도인 이곳은 오직 자신을 위하여 설계되었을 뿐이다. 이 도시는 황금색 평원의 북쪽에 마치 바둑판처럼 구성되 어 기하학적인 배치를 자랑하고 있다. 대로가 씨실처럼 나 있고, 수없이 많은 좁은 길 들이 날실이 되어 대로와 직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도시 중앙에 있는 정방형의 성, 곧 타타르인과 만주인들의 성은 여전히 이들 정복자들에게 좋은 은신처이다. 그 성은 내게 이런 꿈을 꾸게 만든다. 궁궐 한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에 한 사람의 얼굴 이 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남자의 얼굴, 황제이며 이 땅의 주인이자 천신의 아들 인 천자의 얼굴이다. (신문기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분의 이름이 광서라고 주장한다. 그분이 통치했던 1875~1908년 사이의 연호가 바로 광서이기 때문이 다. ) .... 그분은 그 어떤 사람도 결코 따를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일 걸릴 수 있는 자연적인 질병 중 무려 10가지의 병을 앓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일반인들은 전혀 걸릴 수 없는 또 한가지 질병, 황제라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은 4000 년 전부터 이 땅의 백성과 하늘을 중개하는 제물로 지명되어 왔다. 그리고 그분이 제 물로 바쳐진 이곳, 사람들이 붉은 벽으로 가둬놓은 폐쇄된 이 공간, 자금성- 그 성벽 들이 지금은 나를 가둬두고 있다- 은 이 비극, 이 역사, 이 책(그분이 없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책)에서 가능한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빅토르 스갈랭, ''르네 레이'' 파리, 갈리마르, 1971년 황제의 메시지 카프카는 권력의 고독을 말해 주는 이 이야기에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중국 황제를 등 장시킨다. 황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성 중 한 사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애 쓴다. 황제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황제의 사절은 황궁에 있는 수많은 궁전과 통 로의 미로를빠져나갈 수가 없다. 황제의 메시지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 다. 황제는 너에게, 특별히 너에게, 멀고 먼 곳에 숨어 있는, 황제의 태양 앞에서 언제나 초라한 그늘일 수밖에 없는 너, 불쌍한 백성에게, 정확히 바로 너에게 메시지를 보냈 다. 죽음의 침상 위에서, 황제는 사절에게 손짓으로, 침대 옆에 무릎을 끓고 자신의 입 에다 귀를 갖다대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그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이번에 는 자신의 귀에다 그것을 되풀이하도록 시켰다.... 황제는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은 곧 장 길을 나섰다.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씩씩하 게 헤치고 나아간다. 길을 저지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태양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그는 쉽게 나아간다. 하지만 군중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북적댄다. ... 그래도 그는 계속중앙의 건물들을 뚫고 지나간다. 그러 나 그는 결코 그 건물들을 다 뚫고 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어찌어찌해서 장애물들을 다 극복했다고 해도, 거기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여전히 싸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밑까지 다 내려간다고 해도, 그는 또 수많은 뜰을 건너가야 한다. 그 많은 뜰을 다 지났다고 해도, 새로운 계단들을 만나게 되고, 다시 뜰을 지나고, 또다시 다른 궁전을 만나야만 한다. 그렇게 끝없이 몇백 년, 몇천 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설령 마지막 문까지 이르렀다 해도, 이번에는 그 앞에 황제의 도 시가 버티고 서 있을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황제의 도시가. ... 사절은 결코 그곳 을 빠져나갈 수 없다. 설사 죽은 황제의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자만 너, 너는 네 집 창문에 걸터앉아 기다릴 것이다. 밤이 오면 늘 꿈속에서 그 메 시지가 당도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황제의 메시지', ''카프카 전집 I'' 라 플레이야드, 갈리마르, 1980년 중국 왕조의 황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들은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중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하는 쇄국정책과 서구 문물은 받아들이는 개방정책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자금성은 이 제 약탈과 파괴의 먹이가 되어, 텅 빈 무대가 되기 일보직전에 와 있었다. 공동묘지의 침묵 1990년도에 피에프 로티는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원정 군에참가했다. 그는 ''피가로''지에 당시의 중국에 대한 여러 편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 기사들은 '이제 막 문을 연 경이로운 베이징'의 매혹적인 모습을 저해 주었다. 자금성 을 방문했을 때 목격했던, '공동묘지의 침묵'이 지매하는 버려진 한 궁전을 그는 그렇 게 묘사했다. 먼저 검은색의 웅장한 성벽이 나타났다. 사방 10리가 넘는 도시를 감싼 웅장한 성채가 지금은 파괴되어 군데군데 잔해만 남기고 있다. 성 안의 도시는 거의 비어 있었고, 시 체만이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어 나타난 두 번째 성벽은 검붉은 핏빛이었다. 첫 번 째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에 또 하나의 견고한 도시를 이루고 있는 성벽이다. 세 번 째 성벽은 훨씬 더 웅장하고 당당했다. 하지만 빛깔은 여전히 검붉었다. 전쟁이 일어 나 위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어는 유럽인도 그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오늘 우리 는 그 벽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권한을 갖게 되었는데도, 한 시간 넘게 성문에서 기다 려야 했다. 병사들이 성문을 둘렀고, 두꺼운 널빤지로 단단히 바리케이드를 쳐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성문을 열게 하기 위해,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는 성 안의 보초병들과 열쇠구명을 통해 교섭을 벌이기도 하고 위협도 했다. 한참 뒤 마침내 육중한 문이 열 렸다. 하지만 문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성벽이 나타났다. 밖에서 본 성벽과 길을 사이 에 두고 있는 성벽이었다. 길 위에는 옷조각들이 넝마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개들이 죽은 자들의 뼈를 입에 물고 끌고 가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벽 역시 붉은색이 었지만 좀더 화려했다. 끝도 없이 길게 계속되는 벽 위에는 황금색의 도자기로 만든 괴물 형상과 뿔 모양의 돌기가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지막 성벽을 지나가자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수염이 없는 기이하게 생긴 모습들이었 다. 그들은 경계하는 태도로 우리를 맞이한 뒤 안내를 하기 위해 앞장서 걸어갔다. 수 없이 나타나는 작은 뜰과 화단마다 모두 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벽과 벽, 뜰과 뜰, 화단과 화단을 지나가고 있는 우리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았 다. 화단과 뜰 안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고, 대형 도자기 장식물과 돌조각상, 수백 년씩 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각각 떨어져서 마치 각자의 자리 에 숨어서 불안에 떨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전설 속의 수많은 괴물들, 잔혹함과 증오심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수많은 형상들, 알 수 없는 수천의 상징물들이 그것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있었다. 노란 도자기로 만 들어진 용마루가 있는 붉은 벽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뒤에서 문들이 닫히면 우리들을 가두는 것 같았다.... 우리들 앞에서 걸어가는 이들은 밑창을 종이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전혀 발소리 가 나지 않았다. 악몽같이 계속되는 긴 행진 끝에, 우리는 한 단아한 방 앞에 멈추었 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산 나는 소리 없이 걷던 이들의 불안 에 휩싸인 눈길들과 흘깃 마주쳤다. 그러자 우리가 닫힌 방안에 들어섬으로 해서, 글 들이 보는 앞에서 결코해서는 안 될 모독행위를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안에는 비 단옷을 입은 음흉한 얼굴의내시들과 모자에 까마귀의 검은 깃털을 꽂은 마른 몸집의 고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서기 전부터 문구멍을 통해서, 길게 찢어진 눈매 로 우리의 아주 작은 손짓, 몸짓까지도 훔쳐보고 있었다. 우리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간교하게도 이거대한 미로 같은 궁궐 속에서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든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 애셨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호화롭고 웅장한 내전들, 넓은 뜰, 우리가 나중 에 보게 되는 거대한 대리석 난가들, 묘지의 잡초에 묻혀 까마귀 울음 외에는 아무것 도 들리지 않는 멀리 떨어진 또 하나의 웅장한 베르사유 같은 궁전 등으로... 도대체 서양의 형무소 벽보다 수천 배 더 소름끼치고 끔찍한, 이처럼 많은 벽 위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자일까? 바로 이 침대 위에서, 밤하늘의 푸른빛을 띠 고 있는 이 비단 이불 속에서 잠자던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어둠이 내려않 았을 때, 혹은 어느 겨울 추운 날 새벽에 깨어났을 때, 검은 상자들 위에 조화를 이루 며 배열되는 있는 저 작은 꽃무늬들을 응시하며 몽상에 잠기곤 했을 그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허약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사람, 보이지 않는 황제, 천자였다. 그 는 우리 유럽도다도 더 광대한땅을 다스리고, 4억, 5억 백성들 위에 유령처럼 군림하는 자였다. 그의 선조들은 긴긴 세월 동안 그 어느 신성한 사원보다 더 신성하게 여겨진 이 구중 궁궐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처럼 떠받들어졌다. 그 선조들의 정기가 이 제 황제의혈관 속에서 다 말라버리고 만 듯했다. 마찬가지로 황제가 생활하는 이 장소 역시 점점 더 축소되고 쇠퇴하며 황혼기로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예전의 황제들이 영 화를 누리던 이 거대한 배경이 그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 그리하여 이제 그는 그 모 든 것을 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거대한 흰 대리석 난간 위에도 웅장한 뜰 안에도 지 금은 잡초와 야생의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옥좌가 있던 궁전의 황금빛 궁 륭형 지붕 위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와 비둘기가 집을 짓는 바람에, 궁전 계단에 깔 아놓은 양탄자가 새의 분뇨와 흙으로 뒤덮인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한번 도 본 일이 없었기에 전혀 알 수 없었고, 추측조차 해볼 수 없었던 사방10리의 이 무 적의 궁전은 마치 공동묘지의 침묵과 장례식 같은 황폐함을 갖고있어서, 처음 이곳에 들어온 유럽인들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피에르 로티,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날들', ''여행''(1872-1913) 파리 , 로베르 라퐁, 1971년 광서제를 진찰한 드테브 박사 1898년 11월 18일. 베이징의 프랑스 공사관의 의사 드테브 박사는 통역을 할 비시에 르 영사와 함께 황궁에 갔다. 그는 황제 광서제를 진찰하는 영광을 안았다. 황제는 장식이 없는 좁고 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있었고, 의자 는 황금빛 공단으로 만든 방석으로 덮여 있었다. 황제가 쓰고 있는 겨울 모자에는 고 관의 방울이나 단추역할을 대신하는 붉은 비단의 술장식과 매듭이 달려 있었다. 짙은 자줏빛, 혹은 흑보랏빛인지, 아무튼 그런 빛깔의 호박을 단 외투에는 흔히 보이는 용 의 자수가 없었다. 황제의 숙모님이자 양모님이기도 한 태후는 푸른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장자리는 횐 바탕 위에 꽃수가 놓여 있었다. 머리는 전형적인 타타르 여 인처럼 앞에 꽃이 달리고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한 아주 커다란 비녀 같은 것을 꽂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지도, 그렇다고 혈색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표정은 매우 단호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 평온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코는 만주인들이 그렇듯이 힘있게 생겼고, 매부리코에 가까웠다. 비시에르는 오래 전에 그녀가 온통 유리로 덮인 가마를 타고서 여름궁으로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본 얼굴은 완전히 횐색으로 분칠한 모습이었고, 옷과 머리 모양은 지금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시선도 그때는 더 황족다웠다. 방석이 깔린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태후 앞에는 황제 앞에 놓인 탁자보다 더 큰 탁자가 놓여 있었고, 황금빛 공단 테이블보가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비시에르 씨가 드디어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황제는 부드럽지만 병 색이 완연했다. 매끈하게 면도된 수척한 얼굴에 검고 깊은 눈은 황제가 제 나이인 스 물여덟이 아니라, 나이의 절반을 갓 넘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시에르 써는 병에 대 한 소식을 듣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는 것과, 그나마 드테브 박사가 돌볼 수 있 어서 매우 다행이라는 것, 그리고 병의 성격과 원인을 자신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는 것 등등을 이야기했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동안 황제는 대답하기가 거북 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제의 말소리를 잘 듣기 위해 옆 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대군에게 눈짓을 하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 했다. "우선 내 맥박부터 보게 하라." 그래서 드테브 박사는 황제의 오른편에서 오른쪽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면담은 약 50분 정도 걸렸다. 환자는 태후에게 동의를 구한 다음에 옷을 벗어 가슴을 내놓고 청진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장화 안에서 꺼내더니 비시에 르 씨에게 건넸다. 그 종이에는 자신의 병의 기원과 여러 가지 징후들이 상세하게 적 혀 있었다. 면담이 이루어지는 동안 태후는 양아들이 요청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몇 번씩이나 끼여들어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했다. 양아들의 목소리와는 매우 대조 적으로 높고 약간 떨리는 음색이었다. 대군과 몇몇 다른 시종들은 황제와 태후 사이에 서 중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비시에르 씨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그때 마다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비시에르 씨가 드테브 박사와 함께 물 러가려는 순간에, 태후는 그에게 황제의 병환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황제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 다는 소망도 이야기했다. 또한 수고한 두 프랑스인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세르주 프랑지니, '드테브 박사와 광서제', ''중국 연구서'' 14권 1호, 1995년 봄 왕좌에 오르던 날 광서제는 1908년 겨우 36살에 세상을 떴다. 그를 계승한 사람은 다름아닌 2살짜리 그 의 조칸 푸인(1906-1967)였다. 1964년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푸이는 자신이 황제 자 리에 오르던 그날의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1908년 12월 2일, 나는 태어난 지 2년 10개월 만에 선통제라는 공식 이름으로 용상 에 을랐다. 참으로 장엄하게 거행된 의식이었다. -황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는 바람에 황제의 위엄이 다 깎이긴 했지만.... 소위 황제 즉위식이 있기 전, 이미 나는 중화전의 왕좌에 앉아서 궁궐 호위병의 사령관들과 행정부의 고관들의 인사를 받았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오랜 시간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터라, 나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마침내 '대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태화전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나를 용상에 올려놓지 못하도록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을 치고 주먹질을 해댔다. 나의 아버지는 예법에 따라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어떻 게 해서든 나를 용상에 앉히려고 두 팔로 꼭 잡고서 갖은 애를 다 쓰고 계셨다. 나는 계속 흐느끼면서 울부짖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싫어!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겉으 로 보기에는 결국 아버지의 완력이 승리한 것 같았다. 드디어 문무 고관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차례로 내 앞에 와서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로 땅바닥을 찧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했다. 예식이 끝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벌써 수시간이 지 났다-나의 항의도 점점 더 격렬해졌다. 마침내 나는 악동처럼 길길이 뛰며 소란을 벌 였고,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오듯 땀을 흘리는 아버지는 절망적인 어조로 내게 큰소리를 내셨다! "조용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나이다. 곧 끝납니다!" '황제 즉위식'이 끝나자, 고관들이 수근거리며 한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어떻게 섭정왕 이 "곧 끝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제는 또 어떤가? 그는 계속해 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라고 하지 않았던가? 미래를 생각하면 이 얼마나 불길한 징조인가! 좀더 후에, 실제로 청왕조의 '모든 것이 끝나게' 되자, 그리고 어린 황제가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 시절에 대한 수많은 회고담마다 나의 아버지께서 하신 불길한 말이 '불행을 예고하는 전조'였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푸이 ''나는 중국의 황제였다'' 파리, 제뤼 출판산, 1994년 황제의 교사로 들어가던 날 1919년 3월 3일은 렌진널드 존스턴인 잔금성엔들어간 날이다. 그는 황제 푸이를 만나 기로되어 있었다. 자신의 학생이 될 황제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3일, 나는 오문을 통해 처음으로 자금성에 발을 들여놓았다. 성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내 앞에 드넓은 공간과 새로운 시간이 펼쳐졌다. 그 문턱을 통해서 나 는 공화국에서 군주국 안으로 들어섰을 뿐 아니라, 새로운 20세기의 중국에서 로마가 세워지기도 전의 고대 중국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밖에는 새 이상과 소망을 품은 채 가슴 벅차하는 1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있었다. 그곳은 시대의 취 향에 발맞추기 위해 민주주의 도시로서의 기능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곳이었으며, 활발 한 대학생들이 초조함 속에서 과학과 철학, 에스페란토어, 마르크스를 닥치는 대로 받 아들이는 대학이 존재하는 도시였고, 또한 정복을 입고 높은 모자를 쓴 채, 대총통, 고 관들와 차를 준비하는 다부의 장관들이 존재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피 트나글래드스턴 같은 자들을 배출해야 할 의회가 있는 도시였으며, 언젠가는 규정에 따라서 정식으로 선출한 대표자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품고 있는 도시였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니 가마를 타고 가는 고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정복 모자에 공작의 깃털을 꽂고 있었다. 입고 있는 긴 비단옷에는 루비와 산호단추가 반짝 거렸고, 금빛의 꿩과 하얀 학이 수놓인 장식이 붙어 있었다. 궁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 이 오가고 있었다. 군주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표시로 하얀 모피술 장식을 단 검은담 비 모피옷을 입고 있는 고관들이며, 타고 있는 말의 안장과 등가까지 가릴 정도로 넓 고 긴데다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한 예복을 입은 젊은 귀족들이 보였다.... 그날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간결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나를 맞아 준 13살의 소년이었다.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좌를 차지하고 있는 천자,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제국의 군주였다. 자금성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에겐 공화국이 바 로 몇백 미터 옆이 아니라 수만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의 시대를 사는 것 같았다. '궁궐 안' 사람들은 보통 황제를 지칭할 때 '황상'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없는 곳에서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 호칭을 사용했다. 황제의 교사들이나 황제가 거처하 는 곳을 지키는 장교들 사이에는 '상두' (위에 계신 분, 혹은 용상 위에 계신 분)라는 또 다른 용어 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환관들은 만세야(아주 긴 세월 동안 혹은 만년 동안 의 주인)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호칭은 시종들이 황제와 명령에 따라 황제의 교사 나 궁전의 장교들에게 황제의 선물이나 서신을 전할 때 그들에게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자금성 안에서는 고대 중국의 수많은 전통과 함께 아직까지 음력을 사용하고있었다. 게다가 자금성 밖에서의 1919년은 중국 공화국력으로 8년이었지만 오문을 통과할 특 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해는 선통 11년이었다. 래지널드 존스턴 ''자금성의 한가운데에서''파리, 메르퀴르 드 프랑스, 1995년 마지막 황제 1986년에 촬영된'마지막 황제'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중 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자서전을 읽고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촬영일지의 발췌 문과 감독과의 인터뷰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 한 황제의 독특한 이야기가 어떻게 세계의 주목을 끈 영화로 완성될 수 일었는지 이해 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따라 베이징, 1986년 8월 9일, 토요일, 스튜틱오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촬영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미용사, 소품 담당의상 담당, 분장사, 주연 배우, 단역배우들은 벌써 두 시간 전부터 촬영에 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드디어 베르나 르도 감독이 서태후의 죽음의 무대가 될 세트에 나타났다. 그는 곧 첫 장면의 전반적 인 움직임을 설명하며 몇 가지 지시를 했다. 육중한 여닫이문 두 쪽이 무겁게 열린다. 푸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 있다. 우리는 두 사람을 따라 내전으로 들어간다. 안쪽 깊숙한 곳에는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고 있는 늙은 태후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비단 이불과 향불의 연기 가운데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는 마치 공중에 떠 있 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업은 특히 전기기사들에게 매우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다. 서태후의 궁전에 있는 창문을 똑같이 모방한, 가로지른 창살의 높은 창문 너머로 방의 가장자리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의상의 부피와 무게 때문에 연기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베이징, 1986년 8월 11일, 월요일, 스튜디오 푸이와 그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곳의 반 대쪽, 그러니까 서태후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전의 다른 쪽 끝에서는 서른명의 엑 스트라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베르티노는 반짝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닥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발연기구 담당자'는 연기를 내기 위해 발 연기구의 꼭지를 틀었다. 어린 푸이는 장방형의 긴 방을 대각선으로 급히 가로질러 가 더니, 잔뜩 겁먹은 모습으로 시종과 고관들의 엄숙하고 딱딱한 실루엣을 따라 걷는다. 점성술사, 점술가, 박사들이 그를 심각한 시선으로 좇고 있다. 우리는 고야와 오토딕스 (1891-1969, 독일의 화가 : 역주)의 중간쯤, 그리고 밀랍인형 박물관과 공포영화의 중간쯤에 있는 셈이다. 베이징, 1986년 8월 22일, 금요일, 자금성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키가 훌쩍 큰사람 이 슬그머니 끼여든다. 오페라 모자를 쓰고 있는 검은 실루엣의 그가 우아한 태도로 촬영현장에 나타나자 제작진이 열렬한 박수로 맞이한다. 레지널드존스턴, 푸이의 새로 운 스코틀랜드인 교사가 등장한 것이다.... 브란도, 숀코네리, 월리엄 허트 등이 이 배 역에 거론되었다. 하지만 교사다운 품위와 투명한 금발, 깊은 샘물 같은 푸른 눈으로 그 역을 따낸 자는 피터 오툴 이었다. 베이징, 1986월 8월 23일, 토요일, 자금성 푸이가 망루 꼭대기에 있는 장면을 다시찍 다. 목요일 저녁에 우리는 푸이가 중국의 새 주인의 존재를 발견하는 바로 그 장면에 서 멈췄다. 천자가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 시종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발 밑에 모 여든다. 카메라는 화면의 범위를 점점 좁혀가면서, 정문 위로초점을 맞춰간다.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 벽의 비계는 진행중인 공사와 비교할 때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 다. 게다가 어린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공사인부들이 어떤 행동에 열중하도록 해야 할 지 대안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사용한 방법이 너무나도 그럴듯 했다. 어차피 우리는 영화를 찍는 거니까. 파비앙 S. 제라르, '노란 그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재' 찰영일지'', 파리 , 시 네마 노트, 1987년 황제와감독 언제부터 중국이라는 나라와 마지막 황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까? 저의 지인 중에 중국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중국으로 데려갈 생각 을 갖고 있었어요. 내게 중국에 관한 대작을 만들게 할 꿈까지 꾸고 있었죠. 그가 어 느날 내게 푸이의 자서전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황제에서 시민으로''라는 책이었어요.... 나는 그 책을 읽지는 않고 오랫동안 간직하고만 있었죠. 그러다가 1983 년 말쯤에 이르러, 그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붉은 수확'을 촬영할 희망을 잃 고있었을 때였습니다. 처음에 그 책을 읽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나는 생의 마지막을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보낸 한 황제의 이야기가 그저 교훈적인 이야기쯤 될 거라 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책 을 읽고 난 뒤 주저하게 된 거죠 '중국'이라는 말은 여전히 내게 매력적인 말이었으니 까요. 하지만 결국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습니다. "안 돼, 그곳은 내가 다를 수 있는 세계가 아니야. "라고. 배우들은 어떻게 선정하셨습니까? 처음 중국을 여행했을 때,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곳에서 본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비로 물든 현대사회 앞에서 아직도 순진 한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부자연스럽게 꾸미는 태도라든가 아주 오래된 부패 같은 것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4000년의 문화를 통해 그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처신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그들의 얼굴이 순진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맥도날드나 '콜라 식 민지화'에 잠식당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바로 그들 의 참되고 순수한 모습이었죠. 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군중들의 얼굴은 바로 이 기 준에 따라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자금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약간 연보랏빛이 도는 노란색이 바로 그 유 명한 황제의 노란색이라는 것을 촬영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황금색 지붕 의 세계 안에서 볼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의 열쇠는 어디 있는 것일까를 이해하려 수차 례 자금성을 방문했어요. 자금성은 1400년경에 건축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 는 건축물 중에는 당시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는 단지 한 사람의 건축자, 한사람의 조각가의 이름만 남아 있는 법이 아니죠. 당신에게는 중국인들이 이 영화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이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보다 더 중요한가요? 나는 중국인 들 모두의 동의를 받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 구인의 관점도 갖고싶었죠. 압축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화의 의무는 사실 큰 위험을 안고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도 있고요. 내가 분명하 게 세운 목표는 그 나라와 역사, 그리고 심리적, 문화적, 역사적인 신드롬을 가능한 한 제대로 정확하게 많이 알자는 것이에요.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경우도,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지 정말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도록 말입니다. 중국은 10 억 인구의 잠재력을 가진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작 업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만일 그것을 머릿속에 넣고있으면, 마비가 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에요. '베르톨루치가 말하는 베르톨루치' 엔조 운간킥, 도날드 랑보아의 대담 파리, 칼망 레비, 1987런 작가들의 여행기 1930년대에는 많은 작가들이 자금성을 방문했다. 카잔차키스에서 말로에이르기까지, 또 식몬 드보부아르를 지나 말라파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천자들의 옛 거처의 매 혹적인 면을 각기 자기방식대로 표현했다. "나의 두 눈은 기적을 목격했다" 어느 봄날,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자금성을 방문했다. 성을 둘러본 첫날, 그는 이 장엄한 광경에 대한 인상을 밤을 꼬박 새워 기록하고, 그 감동을 표현했다. 마치 요술쟁이의 시선 아래서 하나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썩어가는 것처럼, 오늘 나는 하얗게 반짝이는 대리석 마당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인간의 승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았다. 두 눈 속에 그 장엄한 모습을 모두 간직하 고 돌아온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가 않아서, 오늘밤 도저히 잠들 수가 없다. 또 잠들 고 싶지도 않다.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만발한 베이징은 마치 노란 꿀벌떼가 가득 찬 벌통처럼 떠들썩했다. 자금성의 철벽 같은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위에는 금빛의 사나운 뿔을 세우고 있는 두 마리의 황소가 이 신성한 성벽 안에 악령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년 전에 이 미 황제의 조정은 이슬처럼 스러졌고, 견고한 자물쇠들도 부숴지고 말았으며, 악령인 ' 하얀 악마들'이 황폐해진 궁전과 뜰을 헤집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는 것이 다. 가마가 입구에 멈추자, 나는 가마에서 내렸다. 신화에서 솟아난 듯한 장엄한 광경이 순식간에 내 앞에 펼쳐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넓은 계단들, 가슴에 무거운 종을 달고 서 궁궐의 익살광대처럼 땅딸막한 몸매를 하고 크게 웃고 있는 커다란 청동 사자들,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히 황금색으로 덮여 있는 궁전들... 지금은 무너져버린 거대한 문에는 큰 복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의 대수문이라는 세 글자가 황금색의 우 아한 표의문자 형태로 새겨졌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입구에는 가마솥 크기의 거대한 청동 향로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군주들에게 향냄새를 피우기 위해 향을 태우던 향로들이었지만, 지금은 숯불도, 향도 없이 텅 비어 있다.... 피같이 붉은 높은 성벽이 황제의 여인들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벽 위에는 해독하기 힘든 커다란 글씨들이 보인다. 이 글자들은 마치 인간의 뼈대, 갈비뼈, 잘린 손과 발들처럼 처참해 보인다. 방이 란 방은 텅 비어 있고, 퇴락한 벽들은 바스라지며, 지붕들은 금이 갈라지 고, 황 녹 청색의 기와들도 깨졌다. 여러 개의 현관들은 박물관으로 변했다. 그곳에는 비단에 그린 그림, 동으로 만든 팔찌, 귀고리, 부채, 버드나무아래서 울고 있는 여인들 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 받침대 등 귀한 유물들이 쌓여있다. 선반들 위에는 여인들의 가슴선, 허리선, 목선처럼 멋진 윤곽을 가진 이국적 형태의 화병들이 놓여 있다. 색이 바랜 은거울들, 화장품들, 녹색의 목걸이들, 그리고 어느 비극의 날 밤에 영원히 꺼져 버렸을 수많은 등잔들.... 나는 대리석 바닥에 솟아난 들꽃과 노란 양국화를 땄다. 그리고 궁전의 텅 빈 방들 안 에서 내 발자국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의 정신은 초월적인 기쁨으로 가득 차 오 른다. 그 순간 어느 봄날에 크레타의 메사라 평야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광경이 떠올랐 다. 그날 태양빛이 아직 우리의 발끝을 간지럽히기 전인 새벽에, 우리는 반쯤 어둠에 잠겨 있는 평원의 구릉에 줄지어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들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고 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행진하는, 걸음 빠른 군대처럼 보였다. 그런데 태양이 솟아오르 는 순간, 그 군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슬(드로술라)에 의해만들어졌다가, 이슬 과 함께 사라져버린 이 인간들을 크레타 주민들은 드로술리트라고 불렀다. 중국의 황 제들은 마치 그 드로술리트처럼 이 지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져버 린 존재들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중국-일본 여행'' 파리, 플룽, 1971년 '폐허라는 감동적인 언어'로 말하는 궁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자금성의 건축술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중국 여 행이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너무나 자주 복구되어 과거의 위대한 그림자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던 궁전 성벽 옆의 작은 길들을 산책하다가, 그때 비로소 궁전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치형 통로를 지나 황성의 외조에 들어왔다. 수많은 서구의 방문객들은 '금지된 도시'라는 이름을 들으며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그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기를 거부하고, 그냥 외조라고 부른다. 그들이 옳 다. 금지된 도시라는 개념이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것의 모순적인 성격 때문이다. 시민들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면서도 도시라고 부르는 것은 도시로 서의 자격을 부당하게 얻어낸 것이다. 황제들이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 히 도시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의 오만일 뿐이다. 사실 그들의 도시는 하나의 궁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 궁궐에 '자줏빛 보라색의성'이란 또 하나의 멋진 이름을 붙였다. 순진한 여행자는 이것에서도 속게 된다. 성벽과 내부의 벽들은 벽돌색 을 띠는, 퇴색했다고 할 수 있는 황갈색에 가까운 붉은색인 것이다. 사실 '자줏빛 보라 '라는 형용사는 눈에 보이는 색감이 아니라, 상징적인 색깔을 뜻한다. 자줏빛 보라색은 북극성의 상징이다. 북극성은 하늘의 최고궁전이 있는 곳이고, 황제의 거처는 그 하늘 궁전에 상응하여 이 땅 위에 있는 최고 궁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북극성이 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베이징의 황성은 이 세상의 절대적인 중심이다.... 누구든 이 성을 보면 세련되고도 우아한 놀라운 건축술과, 광물질의 빛깔을 사용해 이뤄낸 조화의 아름다움 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회반죽과 나무로 만든 궁전보다는 돌로 만든 집이 더 아 름답게 느껴진다. 돌은 오랜 시간을 견뎌낸다. 시간은 차츰차츰 돌을 부식시킬 뿐이다. 시간의 역사는 돌의 외부가 아닌 돌 속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돌은 영원히 존속할 수 있다. 반면 회반죽이나 나무 같은 재료들은 바스라지고 불에 타버릴 뿐 녹청으로 고색 창연해지는 법이 없다. 이 재료들은 새 것이든 낡은 것이든, 그 연대를 알 수가 없다. 황제의 궁궐은 새로 복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금성의 궁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처럼, 실물을 복사한 것처 림 보인다.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건물들이 아니라 이 건물들이 정해준 공간, 즉 뜰, 테라스, 계 단들이다. 별장이나 현대적인 도시처럼 이곳에도 양면적인 개념이 있다. 밖이 있고 안 이 있으며, 단지 통과하는 장소일 뿐인 문이 있고, 수시간씩 머무는 연회장소인 뜰이 있다. 그러므로 궁전 앞의 뜰이나 여러 층으로 된 기단들을 단지 주된 건물을 돋보이 게 하기 위한 단순한 부속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각기 하나하나의 건축물들 이다. 그 비율과 규모, 대칭과 비대칭의 섬세함, 계단의 웅장함, 난간의'우아함 등은 감 탄스럽다. 나는 그 점이 황제들의 건축가들이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공이었다고 생각 한다. 이공간들 안에서는 의식의 엄격한 법과질서에 따라서 언제 느리게 걸어야 할지, 어디서 멈춰서고, 어디서 올라가야 할지가 모두 자연스럽게 지시된다. 그리고 성벽의 옆길과 비밀스러운 뒤뜰에서는 산책을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은 내게는 왠지 차갑게 느껴진다. 비영속적인 건축자재를 사용한 점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며, 당황스러운 한 가지 사 실을 그대로 표현해 준다. 즉, 이 궁궐 안에 과거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 에 나는 이 궁귈을 역사적인 기념물로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중국의 왕조들은 베이징 과 함께 이 궁귈에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왕조도 이 궁궐에 뚜렷한 흔적 을 남기지 못했다. 베르사유 궁전 하면 곧 루이 14세를 가리키며, 에스코리알 궁전은 단박에 펠리페 2세를 떠오르게 한다 어쨌든 독특한 기억들이 이처럼 유럽의 각 성에 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어느 것도, 쿠빌라이라든가 영락제, 건릉제를 떠 올리지 못한다. 이는 이 성이 진정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또한 그 들 역시 이 성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 역시 자기 자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사적인 삶의 방탕함과 공무에 헌신적인 태도 사이에는 개성을 살릴 만한 여지가 없었다. 개성을 갖고 있던 자들도 자신의 직무를 위해 자신 을 희생하고, 쾌락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잊었기 때문에 결국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개 성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바로 그 때문에 활기 찬 유목민의 피를 지닌 만주인 정복자 들은 베이징에서 그처럼 지루함을 느꼈던 것이다. 유일하게 아직도 자취를 남기고 있 는 것은 불사조와 용들로 장식된, 서태후의 거처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상상력 이 란 것이 없었다. 날짜를 알 수 있게 할 만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의 궁전은 내게는 전혀 살아 있는 사람의 거처였다고 보이질 않고, 마치 불변의 관습에 따른 불변의 장소처럼 보일 뿐이다.... 이제 빗장이 모두 풀렸다. 자금성은 공공의 장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이 궁전의 뜰을 거닐며 문 아래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붉은 넥타이를 맨 소년단원들이 전시회들을 둘러보고 다. 어떤 궁전들은 문화관이나 도서관으로 바뀌기도 했다. 어떤 구역에는 정부의 행정부서가 자리잡고 있다. 황제의 궁궐을 점령해 버린 이 새로운 삶 속에서, 궁궐이 지닌 본래의 의미는 고대로 보존되고 있다. 나는 그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도 오래된 신화도 잊은 채 아무 생각 없이 성벽 옆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잡초들이 마구 자라고 짙은 색의 키 작은 나무들이 소박하게 심어진, 너무나 황량하고 쓸쓸한 안뜰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기쁨을 느꼈다. 한구석에서는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뜰을 따라 금빛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불그스름한 빛깔의 벽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풍경은 자연스럽게 부 르고뉴 지방의 농가들을 떠오르게 했다. 너무나 자주 복구된 이 궁전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이제시골 농가의 냄새를 풍기면서 폐허라는 감동적인 언어로 옛날을 말 해 주고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 ''길고 긴 행진, 중국에 관한 에세이'' 파리, 갈리마르, 1957년 말라파르트, 통역자를 대동하고 자금성을 방문하다 이탈리아 작가인 쿠르초 말라파르트는 사후에 발표된 기록에 황성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는 황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궁궐을 건축하고 유지하는 데 들 었을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 모든 웅장함과 화려함이 '중국 인 민들의 끔찍한 가난'의 보상물이었다는 점을 통탄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황성인 자금성을 방문했다. 나는 홍싱을 따라서 경이로운 뜰들을 건너가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궁전들을 둘러보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베이징에 있 는 황제의 궁귈만큼 왕의 절대적인 권력과 지상에서의 권력, 부유함, 호사스러움을 새 삼 느끼게 하는 곳은 이 세상에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베르사유조차도 그 런 느낌을 주지한다. 독자들은 나의 황성 묘사에 대해기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성을 묘사하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이처럼 경 이롭고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을 감히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경솔하지 도 않으며, 건방진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단지 높고 거대한 벽들 때문에, 그리고 우람하 고 당당한 청동의 수많은 사자상들 때문에, 금빛의 지붕과 진흥색의 기등들과 녹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채색된 그 궁전들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고 눈이 부셨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황제가 잠을 잤고, 여기서는 황후가 잠들었고, 이것은 애첩이 기거하던 방 이고, 저것은 비빈들의 거처였다. "고 홍싱이 말해 주었다. 나는 명신의 커다란 도자기 화병들과 옥 세공품, 상아 세공품, 금도금을 한 동제 세발 받침 화병, 알이 큰 터키석 으로 만든 목걸이들, 금과 은으로 상감한 가구들, 금식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기 증이 났다. 하루종일 자금성을 가득 채운 수많은 방문객들, 노동자들, 학생들, 군인들 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나 역시 느꼈다. 즉 이런 부유함과 화려함, 생각도 못 할 낭비가 수세기 동안중국 인민들의 끔찍한 가난의 보상물이었다는 생각에 반항심이 솟았던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와 낭비의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서 수억의 농부 들이 끊임없이 노동하고, 굶주려야만 했다. 쿠르초 말라파르트, ''러시아와 중국에서'' 파리, 드노엘, 1959년 '훌륭하고 멋진 궁전 뜰이 텅 비어 있다' 중국 정부와의 회담인 끝간 뒤, 앙드렌 말로는 자금성을 찾았다. 그는 우리에게 멋진 그림을 펼쳐 보이며 몰락한 제국의 영광에 대해 싱각해 보게 한다. 육중한 문을 통해 프랑스 대사와 나는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시베리아인들의 고난을 담고 있는 궁전들(인민궁전, 혁명박물관)이 우리 뒤에 있었고, 눈앞에는 황성이 보였다. 황성은 청회색에 뿔 모양의 돌기가 달린 나지막한 지붕을 한 수많은 집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누구도 황제가 사는 성의 뜰을 내려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성은 당당하게 그 나지막한 집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궁궐 안의 훌륭하고 멋진 뜰들 은 텅 비어 있었다. 때는 정오였다. 박물관이 된 많은 방들 안에는 자질구레한 수많은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매우 독특한 작품들도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 가자 마지막 황후가 거처하던 방이 나왔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들은 눈 오는 날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했다.... 퐁텐블로의 중국 박물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자금성은 버려지지 않았다. 유럽의 군인들이 이성을 정복한 첫날, 조 상의 넋을 위해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어치우고 찌꺼기만 남겨놓은 것을, 원정군에 참 가했던 로티가 발견했던 곳이 바로 이 궁전이었다. 황후는 망령들을 위해서 악기들도 배열해 놓았다. 그녀는 황급히 자금성을 빠져나가면서 평소에 아꼈던 관음보살상 앞에 꽃다발을 놓고, 그 목에다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걸어놓았다. 관음보살상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신의 조각상들은 뜰 밖에 버려진 채 홑어져 있었다 고 한다. 군인들이 제단 위에서 잠을 자기 위해 그 위에 던 신상들을 밖으로 치운 것 이다. 공자를 모신 사원에 걸려 있는 두루마리 족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 다고 한다. "미래의 문학은 자비의 문학이 될 것이다." 그때는 폭동을 일으킨 서양야만 인들을 이방의 세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때이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미사라 불리는 피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믿고 있던 때였다. 앙드레 말로, '' 반회상''파리, 갈리마르, 1967년 가이드를따라서 오늘날자금성은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뵈었다. 그 사실을 통탄해야 히 는 것일까, 아니면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궁궐의 놀라운 영속성을 축하해야 할 것인가? '감각적인 행복' 벨기에 출신의 작가 겸 중국 연구가인 피에르의망은 ''르네 레이''를 집필했던 스갈랭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의 필명을 시몽 레이로 택했다. 중국에 관해서 여러 편의 뛰어 난 에세이를 썼던 그는 자금성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자금성의 조화와 균 형미를 기쁘게 찬양했다. 자금성은 지금껏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 혹시 마오 쩌등이 때때로 천안문의 발코니꼭 대기에서 황제의 역할을 해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일까? 수많은 궁전과 뜰이 모여 있는 이 거대한 건축물군은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탁월한 건축물중 하나일 것이 다. 건축사를 살펴볼 때, 황제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대부분의 기 념물들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있다. 동시에 그곳에서 살고 있는 자들 을 개미처럼 작고 초라하게 보이도록 하지 않고서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 런데 그와는 반대로, 이 성이 갖고 있는 웅장함은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범주를 벗 어나지 않는다. 그 웅장함이란 건물과 사람 사이의 불균형에서 불가피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조화로운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 화를 주는 채광 덕분에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지붕과 뜰들은 완벽하게 적 절한 규모를 지니고있다. 그것은 그곳을 산책하는 자들에게, 때때로 음악만이 전해줄 수 있는 감각적인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물에 잠긴 육체가 그 무게에서 해방되는 것 처럼,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완벽함 속을 헤엄치편서 문득문득 자신의 존재로 부터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느낌은 당국이 각 뜰과 건물 입구에 붙여놓은 간단한 설명과 기이한 모순을 이룬다. 중국의 황제 체제를 묘사한 이 안내문 들은, 어느 때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아시리아의 어느 전제정치 시대의 어둡고 끔찍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용어들만 골라서 사용했다. -바로 이 때문에 자금성에 나타나는 균형미의 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시몽 레이, ''중국의 그림자들'' 파리 , 로베르 라퐁, 1974년 '탐미주의자의 멋부림?' 작가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평범한 관광객'으로 남으러 한진 않았다. 시몽 레이가 비난한 것처럼 '탐미주의자의 멋부림' 때문이었는지, 혹은 정통성에 대한 목마름 때문 이었는지, 그는 자금성 방문을 거부했다. 그의 저서 ''아시아에 대한 인상''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태도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아시아에 대한 인상''은 관광 안내서 같은 책이 아니다. 항상 그렇듯이, 한 도시의 겉모습을 보고 그 도시의 큰 특징이나 사람들 이 가장 많이 인정하는 상징물 몇 가지를 둘러보는 식의 여행 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의 삶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장소들, 혹은 이제 본래의 역할을 잃어버린 기념물을 열심히 찾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이나 명나라 왕들의 고분, 자금성 같은 것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서, 나의 안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여행 안내서들이 상세하게 진실을 알려주는 그런 고전적인 장소들 을 찾아다니기보다는, 나는 한 도시에서 주로 소비하는 곡물,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 색깔과 냄새에 대해서 내가 직접 알아보는 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아시아에 대한 인상'', 파리, 센/그라세,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