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지은이: 카에망 베르낭 출판사: 시공사 최정예 1511년, 파나마에서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파나마 지협 남쪽으로 며칠만 항해하면 광대한 왕국,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유한 나라에 닿는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의 발견자인 에스파냐의 탐험가 누녜스 데 발보아는 이 소식을 듣고 도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1장 엘도라도를 찾아서 발보아의 지휘 아래 파나마에 정착한 이방인들의 탐욕에 분개한 원주민 추장은 그렇게도 황 금이 탐나면 남쪽으로 내려가 보라고 그들을 부추겼다. 그는 신비의 남쪽 왕국에서는 황금 이 너무나 흔해 말 그대로 황금 보기를 돌처럼 한다고 주장했다.(이렇게 해서 '황금으로 번 쩍이는 나라'라는 뜻의 에스파냐어 엘도라도가 그 신비의 땅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발보 아는 여러 차례 그 가상의 나라에 가려고 했다. 그가 1513년에 태평양을 목격한 것도 바로 그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이 탐험가는 라이벌 정복자 페드라리아스 다빌라의 모함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엘도라도에 대한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522년, 에스파냐의 탐험가 파스쿠알 데 안다고야가 남쪽으로 탐험 에 나섰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약간의 소득이 있었다. 한 원주민 상인을 만나, 남쪽으 로 수백 킬로미터 내려가면 엄청나게 부유한 제국이 있다는 증언을 상세하게 들은 것이다. 안다고야의 보고서에 흥미를 느낀 두 명의 정복자가 엘도라도를 찾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 했다 1513년 발보아와 함께 탐험에 나섰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또다른 정복자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지만, 그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불확실한 이 탐험을 개인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파나마 출신의 카톨릭 사제 에르난도 데 루케와 손을 잡았다. 발보아가 죽은 뒤 파나마의 총독이 된 다빌라의 충고를 어기고 루 케는 이 정복에 재정적인 후원을 하기로 동의했다. 두 사람은 1524년에 드디어 두 척의 배를 빌려 탐험에 나섰다. 두 척의 배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대 특유의 홍수림으로 뒤덮인 남아메리카의 해안을 탐사했지만 모기떼에 시달리기 만 했을 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안다고야가 칭송한 엘도라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땅 이었다. 이따금 번쩍이는 보석으로 치장한 원주민들을 만나 남쪽으로 가면 강대한 왕국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의 콜롬비아 해변에서 식인 부족을 발견한 에스파냐 인들은 공포에 휩싸여 그만 항해를 포기하고, 파나마로 뱃머리를 돌렸다. 에스파냐인과 안데스 주민의 첫 만남 1526-1527년의 두 번째 탐험은 훨씬 더 희망적이었다. 피사로가 현재의 산후안 강어귀에 정 박하고 있는 동안, 그의 항해사 바르톨로메 루이스는 남쪽으로 항해했다. 오늘날의 에콰도르 근처에 가까이 갔을 때, 루이스는 뗏목처럼 생긴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 항해에서 에스파냐인들이 처음 만난 배였다. 그 뗏목에는 여러 명의 남녀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화려하고, 멋진 수가 놓여 있어 유럽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루 이스는 데리고 다니던 통역관을 통해 그들의 배가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국경선에 위치한 툼베스라는 항구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입은 옷은 낙타와 비슷하게 생긴 라마라는 동물의 털로 짠 것인 데, 자기 나라에는 무진장 많다는 설명과 아울러 금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온세상의 지배자로 통하는 '위대한 잉카(줄여서 '잉카'라고도 함)'의 이름 이 우아이나 카팍이라고 알려 주었다. 루이스는 몇 명의 원주민을 배에 태운 다음 피사로와 합류했다. 산악지대에서 무력 시위를 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복자들은 증원군을 요청 하기 위해 일부 인원을 파나마로 보냈다. 피사로와 동료들은 이슬라델가요에서 그들을 기다 렸다. 그런데 막상 배가 돌아오자 피사로와 함께 남아 있던 사람들은 길고도 힘든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더 이상의 탐험을 포기하고 파나마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러 나 피사로의 결심은 확고했다. 의기소침해진 동료들 앞에서 피사로는 땅바닥에 선을 하나 그어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동지이자 친구인 여러분, 이쪽에는 가난과 굶주림, 고생, 억수 같은 비, 그리고 박탈이 기다리고 있다. 저쪽에는 쾌락이 있다. 이쪽에 서면 파나마와 가난 으로 돌아간다. 저쪽에 서면 부자가 된다." 동료 가운데 12명이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훗날, 이 탐험가들은 역사에 '이슬라델가요의 13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 에스파냐인들은, 처음에는 안데스 산악지대를 통과하지 못해, 엘도라도라고 여겨지는 곳을 바다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침보라소산의 멋진 모습을 겨우 분간할 수 있었다. 에콰도르 중앙부에 있는 높이 6,267m의 이 화산은 날 씨가 좋으면 바다에서도 볼 수 있다. 이윽고 남쪽으로 더 내려감에 따라 눈 덮인 안데스 산 봉우리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봉우리들은 위대한 잉카의 땅을 향한 이방인의 접근 을 가로막고 선,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처럼 여겨졌다. 드디어 원양 항구인 툼베스에 도착하자 그들은 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정복자 가운 데 한 사람인 알론소데 몰리나는 원주민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곳에 남기로 했다. 훗날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목격한 엄청난 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웃음과 선물의 교환: 정복이 유쾌한 축제처럼 진행되다 웃고 있는 군중 사이로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느긋한 태도와 는 대조적으로 그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바로 위대한 잉카의 '오레혼(큰 귀를 가진 사 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잉카의 사절들은 모두 무거운 장식 때문에 귀가 기형적으로 커 졌으므로 에스파냐인들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 고관은 에스파냐인들의 의도가 무엇인 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먼 땅에서 이곳까지 왔는가?" 하고 말이다. 피사로가 에 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에 대해 '이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황제'라고 이야기하자 그 고관 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제 도끼를 선물로 받았다.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듯이)은 난생 처음 보는 쇠붙이를 구경했 다. 이어 그는 키토(잉카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를 방문중이던 우아이나 카팍에게 전 령을 파견했다. 말썽쟁이들에 관해 보고해야겠다는 신중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원주민들의 환영에 들뜬 에스파냐인들은 지금의 페루 남부 해안에 있는 친차까지 항해했 다. 친차에서 그들은 한때 묘지로 사용되었던 황폐한 해안을 발견했다. 그 지역을 잠시 탐사 한 그들은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툼베스로 돌아간 그들은 에스파냐어를 가르칠 생각으 로 세 명의 소년을 배에 태웠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이 바로 훗날의 정복사에서 중요한 역할 을 수행한 인물, 펠리피요였다. 에스파냐인들은 이 항구 저항구를 항해하던 중에, 위대한 잉카가 다양한 종족들을 통치하 고 있으며, 개중에는 아주 최근에야 복속시킨 종족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때 잉카 제국은 건설된 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잉카 제국 의 영토는 북으로 파스토(지금의 콜롬비아 남부)에서, 남으로 칠레 중앙부의 마울레강까지 이르렀다. 이 광대한 지역에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통합되 어 있었다. 잉카인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왕조의 역사와 그들의 승리가 때로는 전설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에 이 수수께끼는 더더욱 풀리지 않는다. 잉카의 지위를 이어 간 강력한 가문들이 애당초 안데스 산맥의 중심인 쿠스 코(이윽고 잉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주변에서 형성된 것은 분명하지만, 쿠스코 연합에서 잉카 제국으로 이어지는 전환기를 정확하게 추적하기는 어렵다. 유럽인이 잉카 우아스카르 (우아이나 카팍의 후예) 가문의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에스파냐인을 탄복시킨 광대 한 제국을 15세기에 건설한 사람은 잉카 황제 파차쿠티이다. 쿠스코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제국을 타우안틴수유, 즉 '4방위의 땅'이라 불렀다. 이는 상 징성과 행정상의 의미를 동시에 지녔다. 제국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네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북쪽은 지금의 에콰도르와 페루의 대부분을 포함한 친차이수유이다. 남쪽의 코야수유는 가장 큰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티티카카호를 넘어 태평양으로 내려갔다. 쿤티수유는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지역인 안티수유는 동쪽으로 뻗어 나가 아마존 산록지대로 이어졌다. 아마존 산록지대는 잉카 제국이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 했으나 끝내 복속시키지 못했다. 잉카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사는 광대한 지역을 정치적 조직으 로 통합했다 잉카가 지배한 영토는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그것은 안데스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었다. 수세기 동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든 지역을 정복한 문명이 안데스 산맥을 따라 일 어나고 있었다. 그런 문명 가운데 하나인 차빈 문화는 적어도 2,500여 년 전에 중부 안데스(페루의 북부) 에서 발생, 해안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 7세기에는 모치카족이 또 다른 독창적인 문화-화 려한 무늬의 도자기가 그 증거이다-를 꽃피웠고, 그 덕에 북부 안데스의 다양한 종족이 통 합되었다. 10세기에는 두 개의 문화가 발생했다. 하나는 티티카카 호수변에 있는 티와나쿠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였고, 다른 하나는 쿠스코의 북서부에 있는 와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였다. 그리고 잉카족이 권력을 장악하기 얼마 전, 페루 북부 해안의 개별 부족들이 하나 의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치모르라고 불린 이 왕국은 찬찬이라는 도시를 기반으로 하였다. 한편, 남쪽에서는(북쪽에서 차빈 문화가 발생한 것과 거의 동시에) 파라카스 문명이 발생, 세련된 채색 도자기, 화려한 모직물, 그리고 후일 피사로 일행이 감탄한 공동묘지를 남겼다. 그후 B. C. 600년에서 A. D. 500년 사이에 잉카 이전의 문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나스카 문 명이 번성했다. 채색 도자기와 직물로도 유명하지만 나스카인들은 땅에 기하학적 도형과 동 물의 형상을 새긴 거대한 그림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오글립스, 즉 지상회화라고 하는 이 그 림들은 하늘에서 봐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며, 아직도 고고학자들은 그 해석을 위해 머 리를 짜내고 있다. 적대적인 잡다한 종족을 통치한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예술에는 세 가지 기본요소가 있다. 첫째, 권력의 집중, 둘째, 정복지역을 다스릴 효율적인 관료기구, 셋 째는 영토 전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언어이다. 잉카의 경우, 중앙정권은 쿠스코에 사는 위 대한 잉카로 인격화되었다. 관료체계는 잉카의 대리인인 '오레혼'으로 구성되었고, 케추아어 의 사용을 강요했다. 그러나 통합이라는 것이 아무 걸림돌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특히 치 모르의 마지막 군주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용감히 잉카에 대항했다. 피사로가 툼베스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바로 이 강력한 왕국 출신의 사람들로, 오래 전부터 잉카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에콰도르의 안데스 산지 북부 지역 역시 16세기 초에 잉카에 정복당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만찮은 저항을 보였고, 공공연히 중앙정권에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잉카는 여러 차례 효과가 입증된 정책을 취했다. 즉, 지역적인 단결을 깨기 위해 전주민을 이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쿠스코 또는 '믿을 수 있는' 다른 지역의 가족들을 키토 또는 투쿠만(지금의 아르헨티 나) 근처의 계곡 같은 수천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켜 이방인들 속에 정착시켰다. 이와는 반대로 각지의 족장에 속한 그룹은 문화적으로 쿠스코의 권위에 복속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 주시켰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각지에서 이어졌다. 심지어 피사로 일행이 태평양 연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을 때도 키토 주변의 지역에서 잉카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 어났다. 그러나 그 반란은 즉각 진압되고 말았다. 위대한 잉카 우아이나 카팍이 직접 그곳으 로 가서 진압한 것이다. 당시의 잔악성은 그 지역 주민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키토 에서 북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오타발로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반란군을 전부 학살해서 그 시체를 호수에 던졌다. 그러자 그 호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그 호수는 야 와르코차 즉 '피의 호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쿠스코인이 잉카인의 정복을 그린 서정적인 전원풍 그림이나 에스파냐인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 내용(잉카인이 성문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그것들이 유일한 정보원이었다.)과는 매우 다르다. 특히 잉카와 에스파냐 혼혈인 연대기 작가 가르시 랄소 데 라베가는 사실을 왜곡하여 잉카 군주들을 지혜와 관용이 넘치는 위대한 군주라고 묘사했다. 제국의 안정을 점검하여 여행중이던 우아이나 카팍이 제국 제2의 도시 키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곧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들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지진이 발 생하여 끔찍한 광경을 자아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차에 툼베스의 '오레혼'이 보낸 사자가 도착하여 백인이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불운은 미지의 질병, 천연두를 동반하고 다가왔다 1526년, 이 무서운 질병을 자신의 제국에 퍼뜨린 이방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건만 우 아이나 카팍은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그의 시체가 미라로 만들어져 쿠스코로 옮겨지는 동 안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가 고조되었다. 적자인 우아스카르에게 적자가 아닌 아타우알 파가 도전한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키토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에스파냐인들이 정복을 준비 하는 동안, 키토와 쿠스코 사이의 분쟁이 제국을 흔들고 있었다. 1528년, 피사로는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왕에게 페루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얻기 위해서였 다. 이렇듯 계획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5년 후 정복에 나섰을 때, 그는 잉카 제국을 분열시킨 골육상쟁을 이용, 잉카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1532년, 피사로가 페루로 돌아왔을 때는 기회가 아주 좋았다. 그는 63명의 기병과 2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수였지만 그는 자신의 운과 능력을 믿었다. 툼베스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과거에 보았던 활기찬 항구 대신, 전쟁과 질병으로 황폐해진 마을을 목격 하게 되었다. 제2장 아타우알파의 열정 그 황폐해진 지역을 신속하게 벗어난 정복자들은 카하마르카를 향해 달렸다. 권력 투쟁을 벌이는 두 형제 가운데 하나인 아타우알파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 들은 고대 로마의 길과 유사한 포장도로를 따라 달렸다. 가파른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서 만든 그 간선도로는 광대한 도로망의 일부로서 우아이나 카팍의 아버지가 건설한 것이 며, 수십 년에 걸쳐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세로축(하나는 해안을 따라, 또 하나는 산악지대의 산마루를 따라 이루어졌다.)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선이 두 세로축을 긴밀히 연결하고 있는 이 놀라운 도로망은, 험준한 안 데스 산악지대가 가로막은 지형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지역간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효율적인 연결망 구실을 하고 있었다. '차스키'라고 하는 전령들이 몇 마일 간격으로 배치되어 도보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이 이루어졌는지, 해변에서 갓 잡은 생 선이 '차스키'들의 손을 거쳐 쿠스코의 위대한 잉카의 아침 식탁에 오를 수 있었다. 칵사스에 도착한 정복자들은, 그 도시의 주민들이 아타우알파의 잔인성에 치를 떨며 잉카 가 부과하는 중과세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정권은 그들이 생산한 것의 대 부분을 강탈해 갈 뿐만 아니라 매년 의식에 바칠 아이들까지 요구했다. 대부분 세도가 당당한 가문 출신의 잘생긴 어린이들 중에서 뽑은 미래의 희생자들에게는 온갖 영예가 주어졌다 선발된 어린이들은 쿠스코로 보내져 잉카로부터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져 동굴에 갇히거나 산골짜기에 버려졌다. 어린이들을 바침으로써 잉 카를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들 가족에게 엄청난 명성을 갖다 주 었다. 그래서 공동체 스스로 아이를 바치기로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관습은 에스 파냐의 식민지가 된 직후 금지되었지만 20세기 초엽까지도 간간이 이어졌다. 한편, 동물을 바치는 일은 훨씬 더 성행했다. 여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물의 가죽에 무늬가 없어야 하며, 털이 은색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쿠스코에서는 단 한 번의 의식에 1만 마리가 넘는 라마를 제물로 바친 적도 있다고 기록한 연대기 작가들도 있 다. 과장된 수치가 틀림없겠지만 어쨌든 그 의식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다. 칵사스에 도착한 에스파냐인들은 세 구의 시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유 를 물은즉, 그들이 '아크야'의 여인으로서 각 종족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가운데서 뽑혔 다. '태양신의 처녀' 아크야는 잉카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할 수 없고, 성관계도 맺을 수 없 었다. 그들의 거처를 침범한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해졌고, 그 가족은 불명예를 당했다. 아크야는 그들을 위해 지어진 집에서 잉카의 옷을 짜며 일생을 보내야 했다. 사실, 직물은 잉카 문명의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이 모든 거래의 기본이라는 사 실을 깨달은 피사로와 일행은 칵사스의 주민들에게 에스파냐의 카스티야에서 만든 셔츠를 열심히 나누어 주었다. 안데스 지방에서 산출되는 직물의 품질에 놀란 에스파냐인들은 곧 평민이 입는 '아우아스카'와, 귀족계급의 특전인 '쿰비'를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귀족들은 알파카와 라마 대신 라마의 일종인 비쿠냐의 부드러운 털을 선호했다. 정복자들은 안데스 사회에서 직물이 실용성 이상의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잉카는 동조자를 받아들일 때 관용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호사스러운 '쿰비' 직물 을 이용했다. 한 족장이 충성을 맹세하면 잉카는 그 귀족에게 '쿰비'를 주어 그의 충성심을 확고히 했다. 한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을 때, 아 타우알파가 우아스카르에게 최고급 직물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우아스카르가 그것 을 불 속에 집어 넣으며 소리쳤다. "아니, 그자는 우리에게는 이 정도도 아름다운 것이 없다 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이 따위 선물로 반역을 숨기려고 하는 건가?" 안데스 지역의 풍습에 대해 간신히 파악하기 시작한 피사로는 이 직물이 지닌 의미를 아 직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정복자들은 원주민 정보원들을 통해 직물에 수놓은 문양이 일종의 기록양식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잉카들이 왕조의 역사를 자수(켈카) 위에 기록했다는 증거가 있다. 사실, 켈카라는 말 자체가 식민시대에는 문자를 의미했다. 1570년, 최고급 켈카라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바쳐져 마드리드의 왕궁 벽 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직물들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것 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는 불가사의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칵사스를 떠난 피사로는 얼어붙은 툰드라 지역을 지나 카하마르카로 향했다. 해발 5,000m 정도 되는 지역에 도달하자 매서운 추위가 그들을 덮쳤고, 말들은 병에 걸렸다. 그들은 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식 요새와 저장고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저장고 안에는 잉카의 군대 가 몇 주간 사용할 만한 직물과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강을 건너면서 그들은 또다시 뗏 목뿐이고, 산악의 급류는 밧줄로 만든 다리나 줄로 연결된 바구니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건널목은 물 샐 틈 없이 철저히 감시되어 통행료를 내지 않고는 짐 하나도 옮 길 수 없었다. 다리와 도로의 이용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카하마르카에 도착하기도 전에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이 북부 지역에서 목격한 혼란 상과는 정반대로 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되는 문화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타 우알파의 거점도시에 도착한 정복자들은 이 강력한 문화에 대항하려면 잔꾀를 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잉카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말과 화승총에 대한 공포심에서 곧 벗어 났고, 백인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타우알파가 이 이 방인들을 약탈하거나 또는 최소한 우아스카르와의 싸움에 이용하려 한 것은 확실했다. 카하 마르카의 하늘 아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에스파냐인들에게 칵사스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에스파냐의 가장 넓은 광 장보다도 넓은 중앙 광장 주위에는 돌을 쌓아 건축한, 균형 잡힌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 입구에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장엄한 신전이 서 있었다. 에스파냐인과 잉카인은 협상을 시작했다. 그 협상을 통해 이 이방인들과 자칭 황제의 회 담이 주선되었다. 처음에는 전령이 나와 아타우알파가 단식중이라고 전했다. 이어 사절이 교 환되고, 각기 상대를 엄중하게 감시했다. 드디어 피사로는 동생 에르난도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냈다. 정복자들은 잉카가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주위에는 고관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었고, 그의 누이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부인이 보였다 에르난도가 보기에 그 군주는 30세 가량 되어 보였고, 매우 정교하게 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 왕권의 상징을 쓰고 있었다. 머리를 다섯 번 감은 뒤 이마를 덮은 모 직 장식끈이 바로 왕권의 상지이었다. 그 끈에는 금을 엮어 넣은 빨간색 술이 달려 있었다. 그의 귓불에는 황금 원반이 끼워져 있었다. 아타우알파의 얼굴에는 아주 고운 베일이 드리 워져 있었다. 태양의 아들인 그를 인간이 직접 볼 수는 없다는 거였다. 에스파냐인들은 그 베일을 걷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베일을 걷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어 그는 그동안 빼앗은 직물을 전부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약간 냉 랭한 대화가 오간 후,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의 중앙 광장에서 피사로를 만나는 데 동의 했다. 그리고 나서 아타우알파는 에스파냐인들에게 커다란 황금 술잔에 담은 옥수수술을 제 공했다. 정복자들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러나 잉카의 위협에 가까운 강권에 어쩔 수 없었 다. 사실, 협상을 시작하는 자리에서는 강자 측에서 마실 것을 내놓는 것이 그곳의 관습이었 다. 그 다음날,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피사로는 부하들에게 수멍 있다가 사도 야고보라 는 말이 떨어지는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잉카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잉카는 앵무 새 깃털로 호사스럽게 장식한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행렬 앞 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잉카가 지나갈 땅을 조심조심 쓸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렬 좌우에서 소라고둥과 피리를 불었다. 카하마르카 주민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 밑에 몽둥이와 투석기를 감추고 있었다 한 시간도 채 못되어 제국의 운명은 완전히 기울어졌다. 피사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도미니 크회 신부인 빈센테 데 발베르데가 잉카 앞으로 나가 한 손으로는 성호를 긋고 다른 손으로 성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대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 아타우알파는 성서 를 빼앗아 귀에 대보고는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 불경에 피사로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는 태양의 아들의 팔 을 잡아 가마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이어, 화승총의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한바탕 혼란이 휩쓸고 간 후 광장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 몇 명과 이제는 권위가 땅에 떨어진 황제만이 살아 남았다. 그의 옷은 갈기갈 기 찢기고, 팔은 묶여 있었다. 아타우알파는 목숨을 살려 주면 왕궁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울만큼 왕국의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몸값인 셈이다. 곧바로 해안지방, 산악지대 등 사방에서 귀금속들이 속 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아타우알파는 에르난도와 친교를 맺었다. 두 사 람은 주사위 놀이도 함께 했다. 잉카는 그 황금 감방에서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있었고, 경비 병들이 감탄한 박쥐 털로 만든 우아한 망토를 비롯하여 자기 옷을 입고 있을 수 있었다. 이윽고, 몸값이 다 거두어지자 피사로는 그 1/5은 에스파냐 국왕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사들이 그렇게 빨리, 그 렇게 부유해진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재물을 그렇게 빨리 날린 경우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 주사위를 잘못 던진 바람에. 아타우알파의 죽음 아타우알파의 유일한 친구인 에르난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키토에서 날아온 소식에 피사로는 깜짝 놀란다. 아타우알파에게 충성하는 장군 몇 명이 우 아스카르를 암살했다. 그가 에스파냐인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것이다. 아타우알파의 장 군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군주를 구하기 위해 카하마르카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피사로 가 반란을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이런 소문들을 자신의 약속을 깨기 위한 핑계로 이용했는지 는 확실치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대역죄로 화형에 처한다 고 선고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가장 잔인한 처벌이었다. 잉카인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화장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타우알파는 화형 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 로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로 했다. (아타우알파는 만약 목이 잘린다면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지금도 페루 산악지방에는 머리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잉카리 (일종의 메시아)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다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알타우알파가 처형되던 날,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의 아내 몇 명과 누이는 내세에서 그를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군주의 죽음을 따르는 자살은 북부 안데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이었다. 피사로는 서둘러 아타우알파의 동생 하나를 권좌에 앉혔다. 나약해서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금방 독살되었다. 이번에도 피사로의 뜻대로 역 시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망코가 왕위에 올랐다. 피사로의 사촌인 페드로는 아타우알파의 종말에 관해 전혀 다르게 설명했다. 그는 황제가 펠리피요의 음모로 죽었다고 했다. 펠리피요는 에스파냐인들이 처음으로 해변을 따라 여행 할 때 툼베스에서 데려가 통역자로 키운 원주민 소년이었다. 그는 잉카를 증오할 만한 이유 가 있었다. 아타우알파의 선왕인 우아이나 카팍에게 치모르에 있는 그의 마을이 점령당했다. 게다가 아타우알파가 감금되어 있을 때 잉카의 아내 가운데 하나와 사랑에 빠져 그를 배신 할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그는 통역을 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일부러 엉뚱한 내용으로 바꿔 통역했고, 결국 황제는 그 대가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타우알파의 죽음으로 4방위의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533년 에스파냐인들은 쿠스코에 입성, 태양의 사원을 약탈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는 초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에스파냐인 사이의 분쟁이었다. 피사로가 이끄는 패와 알마그로가 이끄는 패가 주도권을 놓고 싸웠다. 다른 문제는 원주민 들이 정복자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인들에게 수모를 겪은 꼭두각시 군주 망코는 군대를 이끌고 안데스 고원지대(비트코스와 빌카밤바에 있는 전설상의 요새들) 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망코는 원주민들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망코의 아들인 티투 쿠시와 토파 아마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저항을 계속했다. 1572년, 결국 토파 아마루는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고, 40년 전 큰아버지인 아타우알파가 당했던 것처럼 목이 잘렸다. 그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는 안데스 산맥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정복자들은 '엥코미엔다'라는 제도를 확립시켰다. 이 제도는 그 지역의 사 회와 경제 질서를 파탄시켰고, 에스파냐 왕실과 식민지 개척자 사이에 피의 분쟁을 가져왔 다. 제3장 일상생활과 노동 1542년, 카를로스 5세는 페루에 부왕청을 설치하여 남아메리카와 파나마의 모든 에스파냐령 을 관할하게 했다. 한편, 정복자들에게는 정복한 원주민들로부터 공물을 거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 대신, 본국의 대리인인 '엥코멘데로'는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지역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킬 책임을 맡았다. 이것을 '엥코멘다' 체제라고 한다. 주세의 봉건제와 비슷 한 체제로 영토의 실질적인 소유권보다는 복종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에스파냐 왕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강력한 파벌이 형성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도대체 통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체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그 지역에서 학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왕은 그 점에 대해 충분히 보고받고 있었 다.)을 구실로 그 특권의 무기한 소유를 금지시켜 버렸다. 이 조치는 곧바로 위기를 불러일 으켰다. 정복자들이 복종을 거부하고 왕의 대리인에게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인명을 앗아간 투쟁 후에 비로소 왕의 권위가 세워졌다 '엥코미엔다'는 2대까지 정복자의 것이되 그후에는 '원래의' 소유자 즉 왕에게 돌아간다는 칙령이 나왔다. 어쨌든, 이 조치가 언제나 지켜진 것은 아니었고, 일부 '엥코멘데로'들은 자 신들의 특권을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와 사익 추구에 이용했다. 원주민들은 이런 음모를 계 속해서 왕실에 고발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복된 원주민들은 왕의 가신으로 간주되었고, 특별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카하마르카에서의 사건이 일어나고 40년이 지나자 원주민이 처한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되 었다. 전쟁과 전염병이 만연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엥코미엔다' 체제는 지 역 농업공동체의 전통적인 조직을 파괴시켰다. 많은 원주민이 정복자들이 강요하는 강제노 동을 피해 달아나,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식민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좀먹는 노동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영토의 재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광범위한 행정개편을 추진하기로 구상했다. 그는 1569년에 페루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접근하기 쉬운 지역에 마을이 세워지고 원주민이 재배치되었 다. 관청과 교회로 둘러싸인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일반인이 사는 집이 바둑판식으로 배치되 었다. 이런 재배치로 다양한 종족집단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점차 한 수호서인의 보호를 받 는 교구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16세기 후반 이후, 에스파냐 관리들은 산악지대를 여행하면서 인구와 자원에 관한 통계를 수집했다. 원주민들은 언제나 농업, 인구, 그리고 공물에 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므 로 이일은 쉽게 처리되었다. 이 이방인들은 '키푸카마욕(키푸의 보관자)'이라는 관리에게 물어 보기만 하면 됐다. '키푸'란 원주민들이 매듭을 매어 놓은 끈을 이용해서 기록해 놓은 정보를 말한다. 키푸라고 불리는 이 정보 저장장치는 인구와 곡물, 기타 물건의 다양한 분류를 표시하고, 그 수량을 계산한다. 이 키푸의 의미가 완벽하게 해독되지는 않았지만 수량에 관한 것이 아 닌, 노래나 왕조사 등의 정보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잉카는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였고, 파종과 수확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위대한 잉카가 직접 옥수수 재배기의 개막을 선언했다. 잉카는 특별한 의식을 통해 그것을 알렸는데, 인간과 작물 모두의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가 때맞춰 열렸다. 잉카인들은 농지개간 에 불리한 토양을 갖고 있어서 노동력의 집중과 고도의 관리체계가 필요했다. 암석질의 척 박한 토양에 가파른 경사면, 관개시설의 어려움 등의 문제를 그들은 계단식 밭과 수로 건설 로 극복했다. 메마른 땅에 물을 대기 위해서 강의 흐름을 바꾸고 암석에 구멍을 뚫었다. 당 시 그곳에 철제 도구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술상의 업적이다. 그런 기술은 잉 카 이전의 문명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쿠스코의 군주는 전국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어서, 예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개간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나무로 만든 '타크야'라는 가래를 중요한 농기구로 사용했다. 안데스 지역의 농민들에게 쟁기는 생소한 도구였다. 16세기에 정복자들이 전해 준 쟁기와 농사용 일소는 척박한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농사 방법을 완전히 대치하지 못했다. 잉카의 지배 아래서 농업은 주로 옥수수와 키노아, 코카, 감자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감자는 해발 4,000m의 고지대에서도 잘 자랐다. 이와 같은 주식용 작물이 없었다면 안데스 고원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감자의 원산지인 티티카카호 지역에는 수백 가지의 감자 변종이 있다고 한다. 그 지역은 특이한 기후조건 덕분에 감자를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서리가 내리는 밤과 적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의 극심한 일교차로 감자는 수분이 빠져 '추뇨'라는 형태로 바뀐다. '추뇨' 는 지금도 고지대 사람들의 주식이다. 비교적 따뜻한 계곡에서 자라는 옥수수는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제사용으로 상징적인 의 미를 지니고 있었다. 옥수수는 땅과 우주의 신들, 그리고 선조에게 바쳐졌다 잉카의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잉카의 아내이자 누이인 마마우아코가 옥수수의 기원과 관련 이 있다고 한다. 잉카를 세운 여덟 명의 선조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설을 지닌 파카리탐보 동굴에서 그녀가 옥수수 알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옥수수를 '동굴의 씨앗'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설은 지금도 에콰도르 남부에 전해져 내려온다. 그곳 사람들은, 산의 여신이자 수확의 전령사인 마마우아카가 황금 옥수수 알이 담긴 바구니를 가지고 동굴 속에 숨어 있다고 믿고 있다. 코카나무는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되고 있었다. 잉카의 통치 기간에는 귀족계급만이 코카 잎을 씹을 권리가 있었으며, 일반인들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서만 허용되었다. 제국 말기에 그런 제한이 폐지되면서 이 나무가 엄청나게 소비되었다. 코 카는 배고픔과 피로를 잊게 해주는 흥분제로 쓰였기 때문이다. 곧 곡물 교역이 성행하여 정 복자들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코카 역시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코카는 신에게 바치는 제 물로, 또한 예언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마법사와 무당은 맨땅에 그 나무를 던져 나뭇잎의 모 양을 보고 미래를 점쳤다. 이런 곡물 외에도 잉카인들은 비쿠냐와 라마를 키웠다. 특히 티티카카호 주변에서 많이 키운 이 동물들은 귀중한 털을 얻을 수 있어 중요하게 여겨졌다. 짐을 옮길 때 이용하기도 했지만 가벼운 것들만 실었고, 무거운 짐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사람이 등에 지고 옮겼다. 잉카인들이 단체로 사냐을 하는 것은 실용적인 목적이나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종 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에스파냐인들이 오기 전부터 토지는 집단적으로 경작되었다. 각 가족은 엄격한 호혜 규칙 에 따라 서로 도왔다. 그리고 파종이나 수확시에는 대규모 축제가 열려 어디에서나 옥수수 술(치차)이 강처럼 넘쳐났다.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의 사기를 북돋고 강한 일체감을 갖게 해주는 이런 음주문화를 경계했다.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와 열대지대, 적도지대는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의 경우, 아주 조밀한 삼림이 해발 2,800m에서 3,000m 사이의 경사면을 덮고 있다. 고대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3,000m 이상의 지역이 영구 정착에 가장 적합한 지 역으로 꼽혔다. 잉카인이 마을을 세운 곳은 옥수수 지대에 가까운 바로 이런 지역이다. 4,000m 이상의 지역에는 '푸나'라고 하는 신선한 황야가 펼쳐져 있어 가축 방목과 감자로 재배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2,000m 아래에서는 코카와 면화 재배가 성행했다. 원주민들이 이 세 가지 지형의 특성을 다 이용할 수만 있다면 필요한 자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때로는 각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들-미티마에-은 계절에 따라 몇 달 간격으로 고지대와 저지대를 오가며 경작을 해야 했다. ('미티마에'라는 말은 잉카가 합병한 영토에 설치한 군사요새라는 뜻과 함께 이처럼 경작 을 위해 이동하는 주민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런 토지 이용체계는,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농지에서 영구적으로 경작을 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하나의 지역을 각기 다른 인종집단이 경작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다. 토지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은, 농지의 경작권은 한 사람이 독점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유럽인의 사고와 사뭇 다르다. 또한 이것은 토지에서 나는 산물의 분배방식이 다르다는 것 을 전제로 하고 있고, 한 지역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데 종족의 차이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페루 정복의 특징은 정복자와 원주민 사이에 식물과 동물, 사육기술이 교환되었다는 데 있다. 에스파냐인들은 토착식물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그것들을 식용하고 의약으로 이용하 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감자를 유럽으로 전해 농민들을 기근에서 구했다. 이와는 반대로 정복자들에 의해 페루로 수입된 본국의 동물들, 즉 소, 말, 노새, 돼지, 닭, 염소, 양은 생태 계의 균형과 식생활 습관은 물론 사회적 관계를 변형시키기까지 했다. 말은 평민에게는 금 지되고, 잉카 귀족의 후예만이 탈 수 있어 우월한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라마는 곧 양으로 교체되었고, 에스파냐인들이 공동 경작기 주변에서는 목축을 금지했음에도 돼지와 소는 많 은 밭을 망가뜨렸다. 다른 문명도 그렇지만 잉카의 페루는 기본적으로 농민들이 내는 공물에 재정을 의존했다. '키푸카마욕'이 그 계산을 담당했고, '카시케'라고 불리는 관리들이 공물 징수 작업을 감시 했다. 가정('아이유')을 기본단위로 하여 구성된 공동체의 우두머리인 '카시케'는 매년 각 가정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따라 경작지를 다시 배분해 주었다. 잉카 이전의 시대 부터 이어져 온 이 관습은 잉카 시대에 일차적으로 재정비되었다. 당시 각 '아이유'가 이용할 수 있는 땅은 각기 다른 크기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가장 큰 부분은 공동체의 경작용이었고, 다른 두 부분은 각기 태양신과 국가에 봉헌하기 위한 몫 이었다. 공동체들은 직물을 공물로 바쳤다.(공물은 국가 창고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정기적 으로 '미타'라고 하는 강제 노역과 의무가 있었다. '미타'는 도로, 대건축물, 관개수로 등 공 공사업을 할 때 부과되었다.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4방위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지역은 다시 복잡한 납세 단위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납세자를 10명, 50명, 100명 또는 1,000명씩 묶은 것이다. 18세에서 50세 까지의 모든 남자는 어떤 형태로든 공물을 내야 했다. 집단 작업을 통하여 대가족을 통솔하는 가장은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각각 1,000개의 납세 단위로 이루어진 '와랑가' 네 개가 모여 하나의 주요 경제 단위를 이루 었다. 이것은 쿠스코에서 파견된 대표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왕실의 일원이었 다. 이러한 4분 원칙은 단순한 양적 분할 이상의 미묘한 상징적 공간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잉카는 공물을 내는 주체자를 정하는 사회적 범주를 결정하는 데 신중을 기했다. 온전한 납세 단위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인 결혼은 군주 또는 군주의 대리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 능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는 여러 명의 부인(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잉카의 선물'로서 본부인으로 간주되었다.)을 둘 수 있었고, 이들은 모두 같은 집에서 살았다. 이런 중혼제는 납세 단위에게 직물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고, 특히 많은 자손을 남겨 주었다. 케추아어에 인간의 화동을 묘사하는 말이 400개 이상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노동의 찬미-그리고 공물을 바쳐 온 전통- 때문에 원주민들은 에스파냐인에게 공물을 바치 라는 새로운 규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원주민들은 부왕 톨레도의 대리인에게 과중한 노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평했다. 정 복자들은 원주민들이 지쳐 쓰러질 뿐만 아니라 수확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부담을 주고 있 었다.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정교한 공물납부 체계와 작업규칙이 정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그것을 활용하여 이득을 취했다 1545년,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한 원주민 일꾼이 제공한 정보 덕분에 볼리비아의 포토시산 에서 광산을 발견했다. 에스파냐인들은 즉시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16세기 후반 무렵부 터 엄청난 양의 은이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파내고 파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은을 계속해서 토해 내는 포토시산은 이윽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5,000m나 되는 고지에도 터널이 뚫렸고, 진주색 경사면에는 그 유령 소굴 같은 풍경을 삼켜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아가리를 벌린 구멍들이 뻥뻥 뚫렸다. 광맥을 발견한 사람, 즉 '미네로'는 직접 광산을 개발하거나 아니면 대여할 수도 있었다. 단 그 수익의 1/5은 에스파냐 국왕의 것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 지역이 식민시대에 비정상적인 팽창을 이룩하게 된 배경에는 가난과 일확천금의 꿈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험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람들, 사인, 벼락부자, 자본가의 대열에 합류한 귀족들, 은행가, 요리사, 그리고 창녀들이 이 음습한 지역을 무려 25개의 교회가 세워진 활기찬 도시로 바꾸 어 놓았다. 그리고 이 도시는 서부 지역으로의 경제적 팽창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미네로'가 될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광산 개발은 원주민이 하기 에는 비용 부담이 과중했다 광산에서의 작업은 일부는 강제노동이었고, 일부는 '자유'노동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 에게는 돈이 아니라 현물로 보수가 지급되었다. 그러므로 봉급생활자라고 할 수 있는 계층 은 없었다. 게다가 이들 광부의 자유라는 것도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광부들 은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을 해결하는 데에도 광산의 소유자에게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갱도에서의 작업환경은 비인간적이었다.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탈진, 신선한 공기를 쐬기도 전에 죽는 광부도 있었다. 바위 틈새가 너무 좁아 아이들만 접근할 수 있는 광산도 있었다. 일부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다리를 못쓰게 만들기도 했다. 불 구나 돼야 이 지독한 강제노역에서 면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개발로 에스파냐인들이 200년 동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나는 광물의 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혹한 압제에 복종한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 이다. 17세기의 에스파냐인들은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 구사하며 원주민의 신앙과 의식을 파괴해 나갔다. 원주민들을 그들의 뿌리인 선조들과 분리시킴으로써, 정복자들은 잉카의 관습과 전 통을 완전히 단절시켜 버렸다. 제4장 우상숭배의 근절 16세기 중반, 노련한 법률가인 폴로 데 온데가르도가 안데스 지역을 찾아왔다. 아직 '엥코 멘데로'들의 반란으로 전지역이 시끄러울 때였다. 부왕의 통치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두 도시인 쿠스코와 포토시에서 차례로 '코레히도르(행정관)'를 지낸 폴로 데 온데가르도는 원주민의 민간신앙 추방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폴로 데 온데가르도가 그곳에 도 착하기 이전부터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잉카인들이 조상의 시신을 공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천으로 감싸고 보석으로 장식한 다음 귀한 물건들과 함께 매장된 미라들 은 정복자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무덤을 막 파헤쳐 그 안에 들어 있던 값진 부장품들을 약탈해 가는 비열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폴로 데 온데가르도는 모험가가 아니라 정치가였다. 그는 쿠스코의 원주민 귀족을 심문하 면서 그들에게 비밀을 보장해 주겠다고 회유하여 잉카의 미라가 묻혀 있는 장소를 알아냈 다. 그는 미라를 영원한 안식처에서 꺼낸 다음 그곳에 불을 질러 버렸다. 안데스 사회에서 죽은 자에 대한 숭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잉카인들은 선조의 자비심이 있어야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었다. 시신은 영매를 통해서 산 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며, 선조의 시신이나 그들의 손길이 닿았던 것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잉카와 귀족계급만이 미라로 만들어졌고 통찰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내장들은 용기에 담아 매장했고, 시신은 타르를 채운 후 감자와 고기를 저장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말렸다. 즉, 밤의 서리와 한낮의 태양에 번갈아 노출시켰던 것이다. 태아처럼 구부 린 자세를 하고 있는 미라는 매장하지 않고 움푹 팬 곳이나 구멍, 동굴에 안치했다. 농사력이나 전승 기념과 연관된 중요한 축제를 벌일 때에는 잉카의 미라를 안치된 장소에 서 꺼내 화려한 행렬을 따라 쿠스코의 태양의 사원이나 중앙광장으로 운반했다. 호사스러운 의상을 입고, 황금의자에 앉은 미라들은 신성의 서열에 다라 자리가 정해졌다. 음식이 공양 되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이 선조 숭배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라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농사 일을 맡아 할 노동력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타우알파의 이복형제이자 적수였던 잉카 우아스카르는 통치 말년에 이와 같은 문 제점을 지닌 미라 숭배를 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귀족계급의 반발을 샀고, 결국 불 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안다카르카강에 수장 됨으로써 불멸성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정복 초기,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의무적으로 기독교식 매장을 하게 했지만 별 성 과가 없었다. 원주민들은 죽은 자가 흙의 무게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라고 믿고, 몰래 미라로 처리한 다음 그들의 전통방식대로 묘지에 안치했다. 그러나 카톨릭 사제들은 점차 사후의 세계와 망령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방식대로 원주민에게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즉, 무 덤이 없이 방황하는 망령은 산 사람에게 질병을 퍼뜨리거나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결국 카톨릭식 장례풍습이 성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금도 일부 산악지 대에는 친척이나 이웃이 죽었을 때, 죽은 자의 소지품을 모두 가지고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풍습이 남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의 그림자에서 자신은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폴로 데 온데가르도는 숭배의 장소인 '우아카'가 천문학적인 요인과 사회학적인 요 인을 모두 고려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아카'라는 용어는 성스러운 장소, 기념 물, 대기의 정령, 작은 상 등 실로 다양한 사물을 지칭한다. 잉카인들은 우아카를 수도인 쿠스코를 기점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세케'라는 상상의 축 위에 배치했다. 이와 유사한 체계가 다른 도시에도 존재했다. 일단 이 신성한 지역의 분포도를 파악하자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많은 '우아카'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연석이나 돌을 다듬어 만든 대부분의 '우아카'를 파괴했으며, 산이 나 샘처럼 파괴할 수 없는 것들은 엄중하게 감시했다. 각 지방이나 가문이 각자의 '우아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우아카'의 수는 상 당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자기의 별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별을 숭배하는 지 역도 있었다. 달은 여자로 인식했다. 월식은 재규어나 뱀이 달을 삼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 재앙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한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천재뿐만 아니라 유성 현상, 자연이나 지형상의 특징 역시 '우아카'로 간주했다. 또한 가 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돌을 다듬은 것이나 작은 상은 가문의 구성원과 땅의 다산을 돌 봐 주는 것으로 믿었다. '우아카'라는 용어는 지금도 쌍둥이나 언청이의 출생, 또는 사산 같은 이상한 일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타키 온코이: 질병의 춤 '엥코멘데로'와 사제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한편으로, 침략자와 타협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시의 상황을 이용한 '카시케'에게 버림받고, 아울러 비트코스에 있던 망코가 이끈 저 항운동에 실망한 중부 페루의 주민들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스파냐인 들은 당황했다. 주민들이 광란과 발작에 사로잡힌 것이다. 농사일을 내팽개친 이들은 기독교 가 유입된 후 버림받아 공중을 떠돌던 '우아카'들이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말하 자면 자신들이 신들린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여위고 목마른 '우아카'들이 살아 있는 존재 안 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리다가 드디어 그들의 몸에 들어와 그들의 입을 빌려 말을 한다는 것 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살아 있는 '우아카'라고 생각하고 신도들에게 헌납을 받았다. 그들은 미래 의 점치고 잉카의 재림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에스파냐인은 그들이 들여온 동 물과 밀, 무기, 종교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런 움직임은 비트코스의 잉카 제국이 무너지면서 점차 시들어 갔다. 그러나 갖가지 이 단적이 s행동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불행에 빠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관습을 기독교 의식으로 위장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 에스파냐 종교당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 들은 교묘한 위장술로 억압을 이겨 냈다. 예를 들어, 성체축일 축제는 태양의 축제와 날짜가 같았다. 그래서 전통 숭배자들은 그날 성인이나 예수의 표상 뒤에 '우아카'를 숨겨 '우아카' 에 대한 숭배의식을 올렸다. 에스파냐인들도 성 야고보를 천둥과 함께 묘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그 를 천둥과 번개의 신의 에스파냐 판으로 보았다. 이 초자연적인 존재는 오래 전부터 원주민 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다 안데스 주민들은 옛날 이름을 버리고 세례받은 아이들에게 기독교식 이름인 하고보(야고보 의 에스파냐어 이름: 역주)를 지어 주기 시작했다. 사제들은 그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으므 로 하고보 대신 아무 해도 없는 디에고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강요했다. 라 시투아 같은 일부 고대 의식이 오지에서는 여전히 행해졌다. 잉카가 지배할 당시 이 멋진 의식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8월 초에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잉카나 '우아카'를 잘 모시지 않은 벌로 얻었다고 믿는 질병과 불운을 몰아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때 부정 행위를 했거나 죄의 뚜렷한 표시인 신체적 기형을 지닌 사람, 그리고 이방인을 마을 밖으로 추방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전사의 복장을 입고 모여 악령들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간곡 히 권했다. 그리고 네 패로 나누어, 눈에 안 보이는 적을 물리치면서 네 방향으로 전진했다. 일단 쿠스코의 경계선에 다다르면 강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정화한다. 저녁에는 짚으로 횃 불을 만들어 흔든다. 이 의식은 여러 날 계속되었다. 수많은 종류의 정화의식이 거행되지만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멀리 몰아내는 것이었다. 의식 자체의 목적 역시 악을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경계너머로 밀어내는 것이다. 에스파냐 교회당국은 효과적으로 이 '우상숭배'와 싸우기 위해 엄격한 규칙을 세웠다. 이 '우상숭배'라는 말(신학자들이 고대의 이교와 비교하기 우해 만들어 낸 말이다.)은 토착 신 앙과 의식, 관습, 숭배, 제례를 가리켰다. 이것은 악마가 속아넘어가기 잘하는 원주민들을 끌 어들이는 탈선의 다양한 표식들이었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에게 우상숭배-고대 세계의 문명 권에서 행해진-는 퇴화가 아니라 영혼의 타락이었다.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원주민들이 티티카카호에서 솟아나온 신비의 존재인 비라 코차의 모습을 통해서 신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비라 코차는 진흙으로 모형을 빚어 최초의 인간들을 만들었다. 그 모형은 다 름 아닌 비라 코차의 모습이었다. 비라코차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 배은망덕한 짓을 해 산 자의 세상에서 추방된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서, 이 문명의 영웅은 사도의 모습을 지니게 된 다. 심지어 추방당한 안데스 산맥의 사라진 계곡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타나는 신의 모 습까지 띠게 된다. 우상숭배의 신전에서는 잉카의 선조인 태양신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 지하고 있었다. 쿠스코 왕조들은 피정복민들에게 자기네 문화를 강요했고, 쿠스코에는 오로 지 태양신만을 숭배하는 사원을 지었다. 코리칸차로 알려진 쿠스코의 태양의 사원은 문이 황금으로 도금돼 있었다는데, 다른 성소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침략자들의 손에 모독당하 고 약탈당했다. 이 사원들에서 나온 귀금속의 일부가 바로 아타우알파의 몸값이었고, 나머지 는 전리품이 되고 말았다. 군인들이 그런 약탈을 저지르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교의 건 물들을 교회로 바꾸는 것을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코리칸차를 개조한 산토도밍고 성당이 그 좋은 예로, 지금도 코리칸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직자들은 우상숭배의 잔재이거나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성직자들은 깃털, 의식에 이용되는 천, 고둥껍데기(축제 때의 악기), 심지어 요람까지 정화의 대상으로 불길 속에 던졌다. 찬미의 노래를 금했으며, 수호석은 물 속에 버리거나 산산조각 냈다. 원주민들이 '우아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봉헌물을 모아 두는 산 속의 일정 장소에는 십자가를 세웠다. 그러나 성직자 자신들도, 고지대에서 돌연 아주 강한 폭풍이 몰아쳐 그 표 시들을 부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이 그것들을 보아 줄 수 없다는 점을 과 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원주민의 장례풍습과 싸우고 있던 성직자들은 출생, 사춘기, 결혼 등 다른 통과의례까지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을 급속하게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과거와 단절시켜야 했다. 그래서 교회당국은 원주민들에게 전통적인 이름 대신 유럽식 이름을 쓰도 록 강요-물론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했다. 그리고 귀족계급 소년들의 사춘기 의 식을 억압했고, 중혼을 금지시켰다. 이런 문화적인 개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사제들은 교훈적인 이야기, 지옥의 무서움과 연옥의 처벌을 묘사한 그림을 이용했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파괴한 우상 대신 치유의 힘을 가진 성인의 그림과 묵주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사제들은 개종자들이 한 성인의 보호를 받는 단체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 그러 나 원주민들은 그럭저럭 기독교 의식과 자신들의 토착 산악문화를 조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한때 에스파냐인의 사회 재조직으로 파괴되었던 이전의 친족관계를 그 종교단체의 틀 안에 서 다시 복원시켜 나갔다. 교회는 상당수의 우상을 파괴하기는 했지만, 결국 20세기까지 계 승된 혼합식 카톨릭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카톨릭 사제의 눈에는 '악마의 대리인'들이 우상숭배용 물건들보다 더 위험했다. 그 런 범주에서 카톨릭 사제들은 '우아카'가 깃들인 사람, 마술로 병을 고치는 사람, 예언가, 큰 사원에 부속된 사제, 무당, 그리고 마법사들을, 각각의 역할은 달라도 똑같이 취급했다. 예를 들어, 마법사는 쓸모없는 식충이, 독이 든 음식을 이용하거나 사악한 힘으로 물건을 조종해 서 죽음을 부르거나 무서운 질병을 일으키는 존재로 간주했다. 사실, 그것은 잉카인 스스로 가 비난하던 습관이었고, 사형선고를 받을 행동이었다. 물론 낡은 종교를 뿌리 뽑으려는 사 제들은 약초상, 미라 지키는 사람, 제사를 올리는 사제와 마법사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 러나 그들은 옹졸하게도 이들을 똑같이 대했다. 성직자들이 몹시 증오한 인물 가운데는 '우아카'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 자연의 신호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언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과 인간 사이의 이런 중개자들 가운데는 유별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번개를 맞고도 살아난 사람은 투시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식이었다 예언가들 은 '우아카'와 교통하기 위해서 환각성분을 가진 식물인 '빌카'같은 흥분제를 사용했다. 그 들은 아주 특이한 음색으로 예언을 중얼거렸다. 이것은 '우아카'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전하 는 소리로 간주되었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기독교식 '우아카'라고 여기는 성인들이 아무 말 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특히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성인들의 그 림이나 조각이 제시될 때는 더욱 그랬다. 그외에도 원주민들의 신앙체계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우아카'를 몸에 지닌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공개 고백식을 조직했다. 의식을 숭상하 지 않는다든지, '우아카'나 태양신에게 봉헌하지 않는다든지, 잉카에게 바친 여인의 순결을 더럽힌다든지, 살인을 저지르든가 도둑질을 하는 것, 그리고 잉카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것들이 고백의 대상이었다. 잉카와 쿠스코의 귀족은 비밀리에 고백할 수 있었다.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식은 카톨릭의 고해성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안데스 주민이 예전 의 노동 훈련 덕택에 식민체제에 쉽사리 복종한 것처럼, 고백식과 같이 도덕적으로 엄격했 던 전통이 그들을 쉽게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일반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우해서 잉카의 치료사들은 서로 다른 생태계에서 얻은 식물뿐 만 아니라 동물, 광물까지도 약재로 사용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병을 치료하는 책임을 진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그 점에서 안데스의 치 료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는 케추아 어휘들을 볼 땐 안데스 사람들 이 알고 있는 해부 지식은 극히 제한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 개 개구술을 시술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아주 예리한 구리 칼로 두개골을 천공해 수술하 기도 했다. 이 수술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지만, 최소한 일부 환자는 생존한 것으로 보인다. 절개 부위가 부분적으로 다시 아문 두개골이 발견된 것이다. 순회 치료사들은 귀한 약초와 약을 가지고 안데스 지역을 돌아다녔다. 에스파냐인들은 곧 장 이 약용 식물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 역시 약초에서 뽑은 강장제를 치료제로 쓰고 있었 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에 들어, 유럽의 식물들이 토착 종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농부들 역시 새로운 종들을 점점 자신들의 필요에 맞추어 나갔다. 그러나 기존의 약물에 대한 선호 는 여전했고, 유럽인까지도 약물에 관한 한 토착 치료법 쪽을 선호했다. 사제들은 약체 치료 법에 관한 잉카인의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세기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치료법들을 글로 옮긴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당시 리마에는 좋은 평판을 받 는 대학이 설립되어 있었는데도 사제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런 치료 행위와 대조되는 것이 마법이었다. 특히 경쟁자들의 목숨을 노리는 의식이 그 랬다. 식민시대, 잉카의 마법술에는 에스파냐인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인의 흑인 노예들이 전 해 준 기술들이 더해졌다. 그 가운데는 적의 모습을 한 인형에게 화살을 쏘아서 그를 죽이 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주문에 관한 책을 퍼뜨렸고, 안데스의 농부들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우아카'가 무덤에 침입하는 자들을 오싹하게 무서운 기운을 발산한다고 하는 믿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안데스 지역 에 공존하는 다양한 종족들이 16세기 이후에 하나의 고용어를 발전시킨 것이 부분적으로는 의술과 마법의 공유를 통해서라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피사로가 도착한 지 200년이 흐른 후, 안데스 세계는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극도의 비참함 을 맛보아야 했고, 에스파탸인의 오만함 앞에 분노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반란이 속출했 다. 시간이 지나자 식민주의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잉카 왕국이 재건되었다. 제5장 잉카의 재림 안데스 지역에 도착한 에스파냐인들은 고된 노역과 훈련이 지배하는 사회를 발견했다. 이 사회는 엄숙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지배계급은 전에는 독립적인 지역들을 책 임지던 족장들로 이루어졌는데, 잉카 제국이 확장됨에 따라 잉카의 가신들도 지배계급에 포 함되었다. 치모르, 친차, 키토의 족장들은 중요한 귀족계급의 우두머리였다. 북부 안데스에서 는 이런 귀족들이 산악과 저지대 사이의 무역로를 통제했다. 그들은 티티카카호 주변에서 엄청난 수의 비쿠냐와 라마를 소유하고 있었다. 해안지방에서는 해상무역의 지배자로 군림 하면서 신에게 바치는 어류와 조개류의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 권한을 가지는 대신에 각 족장, '카시케'는 백성에게 아량을 베푼다거나 지위를 이용 해 얻은 물자의 일부를 재배분하는 등의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었다. 세습이 인정되기는 했 지만 반드시 장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뒷날 에스파냐가 이 원칙을 강요했다.) 귀족 의 특권은 조카, 예를 들어 '카시케'의 누이의 아들에게도 상속될 수 있었다. 땅에 대한 사적 소유권 개념은 식민시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시케의 부는 집, 부 인, 하인, 그리고 가축의 수로 측정되었다. 아울러 직물은 물론이고, 지금 우리의 눈에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장식물, 유리구슬 목걸이, '케로'(의식에서 술을 올릴 때 사용된 잔), 깃 털, 작은 종, 조개껍데기 등 의식용 물건의 수 또한 부의 측정 수단이었다. '카시케'의 하인, '야나' 역시 하인이나 노예라는 신분이 세습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야나'들은 잉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잉카의 본부인인 코야에 게 사면받는 대신 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티티카카호의 아이마라족 왕국들에서 '야나'는 2만 마리도 넘는 가축을 돌보았다. 하인이든 농노든 양치기든 '야나'는 공물 납부의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특히 잉카나 잉카의 가까운 친 척의 근거지에서 사는 일부 '야나'들은 훨씬 더 많은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야나'는 계속 열등한 계층에 머물렀다. 원래의 공동체에서 분리되면서 특정한 영토나 친족 범주에 소속되지 않아 신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정복 후에도 '야나'는 예전의 특권을 계속 유지해 모든 강제노동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공동경작지에 접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인의 영지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 고, 노예노도의 핵을 형성했다. '야나'를 중심으로 한 노예노동은 수세기에 걸쳐 가난에 몰 린 농민들이 흘러들면서 계속 팽창했다. 에스파냐인들 자체가 계급 차별에 바탕을 둔 사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잉카 귀 족과 '카시케'의 지위를 존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치적 자치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였 다. 피사로는 아타우아라의 부인 가운데 두 여자와 결혼했다. 처음에는 도냐 이네스, 이어 도 냐 앙헬리나와 결혼했다. 앙헬리나는 세 아이를 낳았고, 그 가운데 한 아이에게 프란시스코 피사로 유판키라는 복합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다른 정복자들 역시 쿠스코 왕조나 지역 귀족 출신의 여성들을 아내로 맞았다. 어느 정도 토착 지배계급과 그런 결합을 한 것이 사실이지 만, 그것이 결코 일반적인 현상이 되지는 않았다. 16세기 이후 '카시케' 자손들의 문화가 변 용된 형태를 잡아 가자 종교학교를 설립해 거기서 에스파냐 귀족의 쓰기, 언어, 예절을 가르 쳤다. 카시케와 그의 가족들은 에스파냐식 옷을 입고, 유창한 에스파냐어를 구사했으며, 카톨릭 을 믿었다. 카시케의 의무는 공물을 수집하고 자신이 권위를 행사하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 당국에서 볼 때 그들은 노동력을 소집할 수 있는 필요불가결한 매개자 였다. 그들이 내통자 역할을 함으로써 잉카에서는 더욱 신속하고 효율적인 식민지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땅과 가축을 손에 넣었다. 사유재산을 보 호해 주는 에스파냐의 법률 또한 그들에게는 혜택이었다. 남부 페루와 볼리비아의 포토시 지역에서는 이 관리들 가운데 많은 수가 유력한 상인이 되었다. 그러나 카시케는 두 문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지난 시대의 특성 가운데 위대한 군 주에게 어울리는 거만한 자부심 같은 일부 특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술을 즐겨 마셨지만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고, 언제라도 엄청난 관대함을 베풀 자세를 갖추고 있 었다. 그들은 남에게 과시하는 관대함을 베풀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남에게 과시하 는 듯한 사치품과 갑옷, 음악을 비정상적일 만큼 좋아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영세 때 대부가 되어 주어 영적인 친족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카시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 식민 당국은 재래의 마을 안에 권력기구를 만들어 놓았 다. 에스파냐의 도시평의회를 본딴 것이었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시장(알칼데)으로서, 그 는 땅의 분배를 통제하고 원주민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또한 카시케와 함께 공물을 수집하 는 책임도 졌으며, 두 명의 '레히도르', 즉 자치도시 행정관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알과실'이 경찰의 역할을 맡았다. 도시평의회의 위원들은 매년 선거로 선출되었다. ' 평민'-즉 농민-도 후보자가 될 수 있었으나 선량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에스파냐 다국과 협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평의회는 지역 식민 당국의 행정관인 '코레히도르' 의 통제하에 있었다. 행정권과 종교상의 권위가 중첩되었다 식민지의 시골지역의 특징인 이런 현상은 마을 관리와 사제를 단단히 묶어 주는 결과를 낳 았다. 자치위원회 구성원과 위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그들이 서인드의 숭배의식 에 얼마나 참여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프리오스테'(성인으로 '지명된' 사람)가 그 서인의 축제에 필요한 경비를 모으는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축제가 화려할수록 그것을 조직한 사람 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17세기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우아카'의 전통을 지우기 위해 전래의 축제를 억압하려고 노력했다. 그 대신 과거의 관습과 유럽에 기원을 둔 의식을 혼합한 축제가 벌어졌다. 예를 들어, 분명히 이교의 풍습인 카니발이 시골 농민들 속으로 매우 빠르게 파고 들어갔다. 다른 축제들 역시 바로크 양식이 풍미하던 당시의 에스 파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던 무대예술과 공통점이 많았지만 지방의 풍습으로 자리잡았 다. 투우와 경마 역시 인기가 높았다. 예전의 의식들은 은밀히 전해지거나 아니면 점차 이 구경거리 겸 축제에게 밀려났고, 새로운 오락이 민간전승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축제의 흥겨움도 전국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목소리를 자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제노동의 짐이 원주민에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뿐만 아니라 고유지를 사유 지로 편입시키는 대규모 농장 개발은 원주민을 궁핍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에스파냐의 억압에 대한 반란이 에콰도르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안데 스 전지역에서 터져 나왔다 페루의 타르마와 하우하 삼림지대에서 후안 산토스 아타우알파라고 하는 인물이 1742년부터 1761년까지 근 20년 동안 에스파냐에 맞서 싸웠다. 그는 원주민, 혼혈인, 흑인의 자손과 함 께 잉카 왕국을 재건하려 왔다고 선언했다. 그는 당시 정치와 상업상의 긴장으로 에스파냐 와 불화를 빚고 있던 영국에 크게 의지했다. 영국은 에스파냐가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남아메리카 대륙과 무역을 트고자 안간힘을 쓰는 주이었다. 우아로치리 지역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이 '코레히도르'와 그의 의형제를 절벽 꼭대기에서 밀어 버렸다. 키토에서 일어난 소요는 그때까지 평온하던 교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부왕제의 기초를 뒤흔든 폭동이 일어난 것은 남부 페루와 볼리비아의 포토시 지역 에서였다. 그곳의 주민들은 '코레히도르'와 사제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당하고 있었다. 한편, 잉카의 가신들로 이루어진 '카시케'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던 세련된 교육은 언뜻 보기에 혜 택 이었지만 결국은 압제자를 향한 화살이 되었다. 그 수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반에스파냐 폭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콘도르칸키는 틴타의 '카시케'로, 모계 쪽으로 볼 때 1572년에 톨레도 부왕의 손에 처형당한 마지막 잉카 펠리페 토파 아마루 의 직계 후손이었다.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라틴어를 능숙하게 읽고, 진짜 에스 파냐 사람처럼 에스파냐어를 구사했다. 콘도르칸키는 틴타 지역을 자신이 선조에게 물려받은 것이므로 자신이 그 지역의 군주라 고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어 살해된 선조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도 토파 아마루 2세라고 바꿨다. 노새떼의 소유자이자 상인인 토파 아마루 2세는 에스파냐 당국의 의심을 사지 않고 남부 안데스 지역을 돌아다녔다. 차얀타의 '카시케'인 토마스 카타리를 동맹자로 얻은 토파 아마 루는 용의주도하게 총궐기를 준비했다. 1780년 시작된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 다. 혼혈 동조자와 함께 원주민이 주축을 이룬 반란군은 한때 8만 명을 헤아렸다. 토파 아 마루의 계획이 에스파냐 왕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는 에스파냐 국왕이 잉 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인간적인 광산노동 관습과 강제노동을 폐지하도록 하 는 계획을 세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 토파 아마루는 에스파냐의 자치적 정당성에 도전했다. 그가 보기에 에스파냐는 강탈자일 뿐이었다. 그는 악질 '코레히도르'들을 '신의 적, 무신론자, 카랭주의자, 루터파, 금은을 숭배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악행이 그들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농민들은 도시인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도시인들이 에스파냐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너무나 급진적인, 그리고 토착적인-사실은 이 점이 더 문제였다- 운동에 합류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1781년, 토파 아마루는 에스파냐 군대에 체 포돼 고문을 당했다. 이 마지막 잉카는 그의 선조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죽음을 맞았다. 아내, 아들, 동료들이 처형되는 것을 지켜본 후, 혀를 뽑히고 네 마리의 마레 사지가 묶였다. 그러나 말이 제대로 그의 사지를 찢지 못하자, 처형자들은 그의 머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의 찢겨진 사지가 반란에 참여했던 네 본거지로 보내졌다. 결국 그 처형은 이 땅이 '4방위의 제국'이라 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에스파냐인은 잉카를 죽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12촌 칙척까지 추적, 살해했다 원주민들의 경험 가운데 가장 잔인했던 18세기가 저물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승리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몇십 년 후, 크레올(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의 후손들, 마드리드 의 동포들은 그들을 2등 계급으로 취급했다.)이 에스파냐에 맞서는 혁명을 조직했다. 혁명 영웅 프란시스코 데 산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가 지휘한 이 봉기는 구식민지의 해방으로 이 어졌다. 1822년과 1824년 사이, 몇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콜롬비아와 페루, 볼리비 아가 독립을 획득했다. 애국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고무되어 원주민들을 시민으로 만 들고자 했다. '페루의 보호자' 산마르틴은 최후의 승리를 얻기도 전인 1821년에 이미 강제노 동을 폐지했다. 그러나 토지의 사유권 개념-시민들을 토지에 묶는 최고의 수단으로 간주되 었다-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화국 체제는 토착 고동체에 조종을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토착 공동체는 점차 법적인 지위를 잃었고, 결국 강력한 대지주들과의 경쟁을 포기해야 했 다. 고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이제 '콩세르타헤' 체제 아래서 폭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것은 농민들을 평생 빚에 시달리게 만드는 체제였다. 고용 주에게 선금을 받은 토착 '콩시에르토'는 밑에 이자까지 더한 돈을 갚을 때까지 고용주의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갓 해방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이른바 경제자유주의는 결국 토 착 아메리카인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어 놓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전세계에서 몰려든 모험가와 탐험가, 금광업자들이 비트코스와 빌카밤 바를 발견하려고 페루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16세기의 잉카 저항의 본거지였던 이 두 전 설적인 요새는 신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1911년, 미국의 역사가 히람 빙엄이 환상의 도시들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 제6장 잉카의 유산 혁명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 연구의 권위자인 히람 빙엄은 라틴 아메리카에 열정을 갖고 노새 등에 앉아 리마를 출발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면 잉카 영토의 상당 부분을 밟 게 될 터였다. 쿠스코 인근 지역인 아푸리막의 지사는 그에게 산악지대에 원주민들이 초케 키라우, 즉 '황금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고 알려 주었다. 아푸리막강에 다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폐허가 된 그곳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대 부분의 지역이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모험심에 불타는 빙엄은 비트코스 와 빌카밤바를 발견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탐험을 준비했다. 그는 그 두 곳이 마지막 잉카 망코와 그의 아들들이 1572년까지 에스파냐에 저항하던 최후의 피난지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적은데다가 그나마도 모순투성이였다. 망코의 아들이자 불운 한 잉카, 토파 아마루의 기록들이 있기는 했다. 티투 쿠시는 아마존 산록지대로 후퇴한 마지 막 잉카들의 투쟁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자료원인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이자 연대기 작가인 아토니오 데 칼란차 신부는 태양의 사원 근처 샘이 솟아나는 하얀 바위 옆에 비트코스가 있다고 했다. 어쨌든, 열대식물 아래 묻혀 있는 잉카 도시의 흔적을 발견할 단서 로는 너무도 미약했다. 빙엄이 망코의 수도를 찾기 위해 탐험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 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일 행운아였다 20세기 초, 오얀타이탐보라는 마을의 주민들은 우루밤바강 옆에 세운 잉카의 가옥들에 살고 있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던 빙엄은 그것들 외에도 수많은 잉카 유적들을 발견했다. 계곡 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묻고 다니던 어느 날, 빙엄은 드디어 로사스파 타라고 불리는 지점에서 시커먼 물이 흐르는 샘이 있는 하얀 바위를 발견했다. 바로 옆에 태양의 사원 하나가 있었다. 칼란차의 묘사와 딱 들어맞는 장소였다. 빙엄이 비트코스를 발 견한 것이다. 이에 힘을 얻은 빙엄은 더 어려운 동쪽 계곡을 탐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로사스파타의 유적이 망코의 수도였던 '고대의 빌카바바'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토착 농장 노동자 들에게 얻은 더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빙엄은 드디어 초케키라우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모르타르도 없이 놀라운 기술로 서로 딱 들어맞게 지은 돌건물들과 포자도로가 있는 진짜 요새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다녀간 다른 방문자들이 있었다. 빙엄은 벽에 새겨 진 서명들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는 유진 드 사르티크라는 프랑스인이 1834년에 지나갔다는 기록도 있었다. 빙엄으로서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탐험에서 돌아간 그가 아푸리막의 지사에게 황 금이 없다는 사실을 토로했을 때 일반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당시 잉카에 대한 관심은 그 무덤에 있을 황금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의 탐 욕은 정복자들의 그것과 맞먹었다 빙엄은 끈덕졌다. 그는 빌카밤바를 발견하고 싶었다. 16세기의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곳 은 좀더 먼 곳에 있었다. 현지 안내인은 "조금 더 가야 한다."고만 말했다. 아무리 하찮은 소문이라도 귀담아들은 빙엄은 길을 만들어 가며 질식할 듯한 협곡을 뚫고 나아갔다. 빙하 를 기어올라가면 이번에는 아마존의 용광로 같은 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잃기도 했 던 그는 드디어 아푸리막의 계곡에서 우루밤바의 계곡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목표를 향해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현지인들의 묘사가 더욱 정확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빙엄은 현지인들이 유적들에 무관심해 보이는 데 깜짝 놀랐다. 그의 생각으로는 현지인들 이 그 유적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안데스 주민들은 그 고고학적 유물 에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16세기의 선교사들의 교육의 결과, 현지인들은 특히 사람의 뼈를 두려워했다. 뼈가 무서운 질병을 옮긴다고 믿어 버리게 된 것이다. 한 고고학자 는 발굴작업에 고용한 노동자들이 옛 무덤을 파기를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시페에서 나오 는 증기에 쏘이면 불구가 된다."는 두려움에서였다. 쓰러질 것만 같은 걸음걸이로 힘겹게 등반한 끝에 빙엄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1911년 7월 어느 날, 그의 눈에 들어오는 장관은 이제까지의 고생을 충분히 보상하고 남는 것이었다. 바로 마추픽추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독수리 둥지처럼 산꼭대기 위 에 건설된 장엄한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와 계단, 기념물, 사원, 집들이 멋진 장관을 이 루고 있었다. 반대쪽에는 역시 유적으로 뒤덮인 우아이나픽추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마추픽추가 정말 망코의 수도 빌카밤바일까? 빙엄은 그렇게 믿었다. 건축술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덤들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추픽추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망코의 보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황금 시굴자들이 약탈햇는지, 아니면 마지 막 잉카 토파 아마루가 선조들의 재산 일부를 가지고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보물은 없었지만 빙엄은 매혹적인 것들을 발견했다. 유적지의 웅장함 외에도 빙엄은 유달 리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석조 기념물들의 아름다운 건축술에 매혹되었다.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그렇게 거대한 바위들을 그토록 완벽하게 조립한 것은 없었다. 청동이나 돌 도 구로 절단한 바위들이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큰 바위를 바퀴나 도르 래 없이 어떻게 옮기고 들어올렸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빙엄은 사다리꼴 문들이 달려 있는 이층 집들을 발견했는데 놀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 았다. 그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이상한 기념물은 둥그런 사원이었다. 아마 태양신에게 바 쳐진 듯했다. 넓은 광장 옆에 '세 개의 창이 달린 사원'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티우아타나' (케추아어로 문자 그대로 '태양을 끌어당기는 자리')가 있었다. '인티우아타나'는 일조의 해 시계이다. 태양이 기울면서 인간을 버리려고 하는 것 같은 동지 때, 사제가 천체의 사라짐을 막기 위해서 돌에 붙들어 매는 의식을 거행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장소가 장소 인지라 마 추픽추의 '인티우아타나'만이 에스파냐인의 광포스런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유적지의 발견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페루의 지식인 사회에 퍼져 나가던 네오 잉카 열풍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는 페루가 독립국이 된 지 한 세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신생 라틴 독립국 들과 마찬가지로 페루도 여전히 정체성을 찾는 중이었다. 왜 잉카 제국이 다양한 주민들 전 체를 위한 상징적 가치를 가지게 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빙엄의 발 견과 함께 잉카 제국은 페루의 상징이라는 긍정적인 지위를 얻었다. 1532년 에스파냐에 정복당한 안데스 사회와 지금의 토착 농민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연 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이고 인종적인 연속성을 의미하는 질문이라면 그 대답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정복자들이 원했건, 아니면 단순히 용인했건 간에 인종적인 혼혈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화적인 연속성을 의미한다해도 그 대답 역시 고대의 웅장함에 매혹된 낭만주의자를 실망시킬 뿐이다. 기독교로의 개종과 토지체제의 변혁, 가족구조의 변화, 토착 정치조직에 대한 탄압이 맞물 리면서 안데스 지역의 주민은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내기를 강요당해 왔 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대격변에도 불구하고 안데스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것 은 아주 독특하다. 그러므로 과거의 유산 가운데 변하지 않은 것을 찾겠다는 것이 아무 소 득 없는 일이긴 해도, 정복자나 선교사들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는 점만은 인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안데스의 문화는 결코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지 않다. 쉴새없이 새로 운 요소들을 통합하면서 그것들을 재창조, 재정형화하고 잇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어떤 사회와도 비슷하지 않은 사회를 가꾸어 내고 있다. 잉카인은 화석인류가 아니다. 그들의 이미지는 지금도 모든 정치권력에서 배재당하고 잇 는 이 시대 농민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잉카 이미지가 여가에 진실할까, 아 니면 단지 비유적인 목적으로만 작용하고 있을까? 그건 주용하지 않다. 그것은 현대 세계가 잊어버리고 있거나 주변부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망코에서 호세 가브리엘 토파 아마루에 이르는 잉카 저항이 역사가 지금도 반역의 꿈을 키우고 있을지 모 른다. 기록과 증언 정복자들의 증언 : 최초의 연대기 작가들은 주로 에스파나인의 페루 정복과 정복자들 사이의 내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관찰을 원주민의 증언과 비교해 가면서 읽어보면, 우리는 잉카 제국의 웅장함과 그 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프란시스코 데 세레스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비서였다. 그가 '페루 정복', 그리고 피사 로와 잉카 아타우알파(아타발리바)가 만나는 유명한 장면을 묘사한 아래의 글을 쓴 것은 1534년 카하마르카(칵사말카)에 있을 때였다.- 해가 질 무렵, 병사들이 막사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아타발리바가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총독은 한 에스파냐인을 보내 어두워지 기 전에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했다. 아타발리바 앞에 나간 전령은 얼른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총독이 기다리는 곳으로 와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즉각 그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령이 도아와서 그들이 오고 있다고 보 고했다. 아울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질긴 면으로 된 겉옷 밑에 돌과 자루, 그리고 화살 같은 무기를 숨기고 있으며, 그런 점으로 볼 때 그들이 딴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 했다. 이윽고 적의 선두가 빈터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록달록한 다양한 색깔의 제복 을 입은 원주민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닥의 지푸라기들을 치우고 길을 쓸면서 전진했다. 이어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무리가 춤추고 노래하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무기, 커다란 금 속판, 금과 은으로 만든 앙관을 든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에 앵무새 깃털로 장식한 가마를 탄 아타발리바가 있었다. 원주민들이 그 가마를 어깨 높이로 들고 옮겼다. 이어 다른 두 개의 가마와 두 개의 그물침대가 따랐다. 중요한 고관 몇 명이 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몇 무리의 원주민들이 금과 은으로 만든 왕관들을 들고 들어섰다. 앞의 무리는 빈터에 들어서자마자 옆으로 움직여 다른 무리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빈터 중앙에 도착한 아타발리바는 가마에 탄 채 그대로 있었고, 옆의 가마에서도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여전히 몰려 들어왔다. 얼마 후 한 대장이 앞으로 나와 빈터 옆의 대포가 있는 요새로 올라갔다. 그가 창을 두 번 들어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본 총독이 비센테 수도사에게 통역을 데리고 아타발리바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겠냐고 물었다. 수도사는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는 한 손에 십자가, 다른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앞으로 나 아갔다. 병사들 사이를 지나 아타발리바가 있는 곳으로 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느 님의 사제로서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의 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온 것도 당신 에게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이 이 책 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기독교인들을 대신해서 저들과 친구가 되라고 간청하는 바입 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또 그것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총독에게 가서 이야기하십시오." 아타발리바는 '성경'을 보고 싶었는지 달라고 말했다. 수도사는 '성경'을 덮어 건네주 었다. 아타발리바가 어떻게 여는지 몰라 수도사가 팔을 뻗어 펼쳐 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타 발리바가 화를 벌컥 내며 그의 팔을 내리쳤다. 수도사가 열지 못하게 하려는 동작이었다. 이 윽고 아타발리바가 스스로 '성경'을 펼쳤다. 다른 원주민들에게 보여 주었을 때도 그랬듯 이 그는 글과 종이에 놀라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대여섯 발자국 앞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수도사가 한 말에 대한 대답으로 통역을 통해 사뭇 경멸조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 이 이리로 오면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내 족장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내 창고에서 옷감들을 꺼내 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인들이 그 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디오 일부가 총독 모르게 옷감을 가져가서 총독이 돌려놓 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아타발리바가 말했다. "그것들을 전부 내 앞에 가져오기 전까지는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 수도사는 이 대답을 총독에게 전했다. 아타발리바는 가마 위에 서서 병사들을 배치하고 준비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수도사는 총독에게 아타발리바와 주고받 은 이야기와 그가 '성경'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는 것을 전했다. 그러자 총독은 면 겉옷을 입고 칼과 단검을 찼다. 그리고 인디오 사이를 뚫고 돌진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총독은 아타발리바의 가마에 접근해 대담무쌍하 게 그의 팔을 잡으면서 "산티아고!"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총들이 불을 뿜고, 나팔소리가 드 높이 울리고, 기병과 보병이 물밀 듯 전진했다. 말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빈터에 있던 인디 오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넘어져 말굽에 밟히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기병들은 그들을 마구 짓밟으며 죽이고 베었다. 그리고 계속 추적했다. 보병은 남아 있는 자들을 보기 좋게 살육, 대부분이 칼날에 쓰러졌다. 총독은 여전히 아타 발리바의 팔을 잡고 있었지만 너무 높이 있는 바람에 끌어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에 스파냐인들이 가마를 메고 있는 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속속 바닥에 쓰러졌다. 만약 총독이 아타발리바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 거만한 인간은 자신이 촉발한 잔인함의 대가를 그 자리에서 치렀을 것이다. 그 와중에 그를 보호하던 총독이 손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에스파냐인에게 무기를 겨눈 원주민은 하나도 없었다. 총독이 그들을 뚫고 돌진하는 모습이며 포대에서 나는 총소리, 그리고 말의 돌진은 그들이 듣도 보도 못하 던 일들이었고,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이다. 아타발리바의 가마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중요한 족장들로 보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가마와 그물침대들을 메고 있던 사람들도 전부 살해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타발리바의 시동과 대군주 한 명, 많은 가신을 거느린 군주, 그리고 고문관들이 있었다. 칵사말카의 족 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족장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많고, 또 아타발리바 앞에 나타나는 사람은 전부 족장들이기 때문에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었다. 총독은 포로로 잡은 아타발리바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왔다. 그의 옷은 좀 전에 에스파냐 인들이 그를 가마에서 끌어내릴 때 갈기갈기 찢겼다. 그토록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위 대한 왕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포로로 잡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총독은 원주민의 옷을 가져오라고 해서 아타발리바에게 입힌 후 그를 옆자리에 앉혔다. 그 리고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그 높은 지위에서 추락해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를 위무했다. 많은 말을 했지만, 특히 총독은 이런 말들을 했다. "당신이 져서 포로가 된 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나와 함께 온 기독교인들과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당신의 왕 국보다 더 큰 왕국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보다 더 강한 군주들도 굴복시켜 우리 황제의 지배를 받게 한 사람이다. 나는 우리 황제의 신하이며, 그분은 에스파냐의 왕이시고 또 전세계의 왕이시다." "우리는 황제의 명에 따라 이 땅을 정복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신성한 카톨릭의 믿음을 알리기 위해 왔다. 우리의 목적이 선량하므로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그분을 알게 되고, 또 짐승 같고 악마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 셨다. 수로는 적은 우리가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을 이기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당 신은 당신이 저지른 과오를 알게 될 때 우리가 폐하의 명에 따라 이 땅에 와서 선을 행했다 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네들처럼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잔인한 사람들 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행운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포로와 적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오직 우리를 공격할 때만 전쟁을 한다. 완전히 섬멸할 능력이 있어도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삼가며 오히려 용서한다. 전에 한 섬을 다 스리는 추장을 포로로 잡았을 때 나는 그를 풀어 주어 충성을 다하게 만들었다. 툼베스와 칠리마사, 그리고 다른 곳의 군주들이 내 손에 잡혔을 때도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지만 나는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당신이 사로잡히고 당신네 사람이 공격을 받고 살해된 것은 당신이 평화롭게 오겠다고 말을 전해 놓고도 너무 많은 병사를 끌고 왔기 때문이며, 또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땅바닥에 던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시고 그 어느 원주민도 기독교도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총독의 가르침이 끝나자 아타발리바가 대답했다. "나는 내 대장들에게 속았다. 그들은 에 스파냐인을 무시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평화롭게 오고 싶었지만 그들이 막았다. 하지만 그런 충고를 한 자들은 전부 죽었다. 이제는 에스파냐인의 선의와 용기를 보았다. 저 말사빌 리카가 기독교인들을 건드리라고 보낸 그 소식 전부가 거짓이었다." 벌써 밤이 되었다. 총독은 원주민들 추격에 나선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 을 알고, 퇴각 신호로 총을 쏘고 나팔을 불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그들이 막사로 돌아왔는 데, 생포한 원주민이 3,000명이 넘었다. 총독은 모두 다 무사하냐고 물었다 그들과 함께 갔 던 총독의 총사령관이 대답하기를 말 한 마리만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프란시스코 데 세레스 '페루 정복', 1534년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사촌인 페드로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 갔을 때는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는 1571년에 아래의 글을 썼는데, 세레스의 것보다는 정확하지 않다.- 나는 많은 원주민과 이 땅의 중요한 왕들이 내게 들려 준 아타발리바와 과스카르(우아스카 르) 사이의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스파냐인이 도착하기 전, 이 왕국에는 다섯 명의 잉카 왕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 땅을 정복하기 전, 몇 명의 군주가 작은 부족들을 자신 의 통치하에 두기는 했지만 전지역이 베에트리아스(독립적인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 서 베에트리아스들은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 원주민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한 잉 카가 나타나 최초의 왕이 되었다. 잉카가 티티카카의 섬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티티 카카는 코야오에 있는 호수로, 둘레가 70리그(약 4.8km)가 넘는다. 호수에서는 가끔 바다처 럼 폭풍이 일어난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물고기가 자라고 있고, 물은 약간 소금기가 있 다. 이 호수의 물은 카랑가스와 키야카스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다른 호수로 흘러간다. 두 호수의 크기는 거의 같다. 그런데 다른 배출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을뿐더러 어떤 식으로 배 출되는 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호수로 흘러드는 엄청난 양으로 볼 때 땅 밑으로 해서 바다 와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다른 원주민들은 이 최초의 군주가 탐보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탐보는 쿠스코에서 약 6리그 떨어진 콘데수 이오스에 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최초의 잉카는 비라 코차라고 불렸다. 그는 제일 먼저 쿠스코에서 입신한 다음, 주변 30리그를 정복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 지역을 자신의 지배하 에 복속시켰다. 이 잉카 비라 코차는 토파 잉카 유판키 파차쿠티라고 불리는 아들을 두었는 데, 이 잉카는 주변 100리그를 정복했다. 토파 외에도 과이나 잉카와 아마루 잉카 두 아들이 있었다. 이 두 후계자들은 칵사말카까지 정복했다. 이들의 다섯 번째 후계자인 과이나 카파 는 키토까지 정복길을 나섰고, 그의 대장들은 다른 방향, 즉 칠레와 산마테오만까지 원정했 다. 서로 1,000리그나 떨어져 있는 거리이다. 이 왕들은 누이를 아내로 맞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그들 자신만큼 고귀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누이들 도 왕과 같은 혈통이었고, 이 여인들의 아들들이 왕국을 계승했는데 언제나 장자가 뒤를 이 었다. 이 누이들 외에도 왕들은 왕국의 '카시케'들의 딸을 전부 첩으로 삼았다. 이 여인들 은 위대한 누이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수가 4,000명을 넘었다. 반반하게 생긴 모든 원 주민 여인들이 누이들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물론 누이들의 수도 많았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이나 카파가 키토 주변을 정복할 당시, 그는 10년 이상 머뭇거렸다 고 한다. 그리고 키토 군주의 딸에게서 아타발리바를 얻었다. 정복을 끝낸 과이나 카파는 승 리를 기념하는 요새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후 모든 점령지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습이 되 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던 중 처음 보는 병인 천연두가 번지면서 많은 원주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과이나 카파는 늘 하던 대로 단식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방에 혼자 있으면서 절 대 여자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또 소금이나 양념의 일종인 아히도 먹지 않고 '치차'도 마시 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과이나 카파가 그렇게 단식에 들어가 있는 중에 처음 보는 세 명의 원주민이 들어왔다. (아흐레 동안 그렇게 있었다. 다른 때는 사흘 동안 했다.) 난쟁이처 럼 아주 작은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잉카여, 우리는 당신을 데려가기 위 해 왔습니다." 그가 이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소리를 질러 하인들을 불렀다. 그들이 들어왔 을 때 이 세 명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과이나 카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온 이 난쟁이들은 누구냐? 하인들은 대답했다. "우 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과이나 카파가 말했다. "이제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는 곧 천연두에 걸렸다. 그 가 몸져누워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파차카막에 전령들을 보냈다.... 신령은 인형을 통해서, 그를 햇빛 속으로 데리고 나오라. 그러면 곧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했지만 사태는 영 딴판으로 흘러갔고, 햇빛을 쐰 과이나 카파는 곧 죽었다.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그 는 가난한 자들의 좋은 친구였으며, 게다가 그들을 잘 돌보라고 전국에 명령을 내렸다고 한 다. 그리고 그는 하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무척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세 명 이상의 원주민과 함께 술을 마시기를 즐겼다. 하지만 절대 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대장들 이나 원주민 추장들이 그렇게 많이 마시면서 취하지 않는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돌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에스파냐인들 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과이나 카파가 살아 있었다면 모든 신하들이 그를 너무나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에스파냐가 이 땅에 도착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였다. 마찬가지로 만약 과스카르와 아타발리바 사이의 전쟁으 로 이 땅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1,000명의 에스파냐인이 침입해 들어오지 않는 한 에스파냐 가 들어오지도, 승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당시에 이 땅에 대한 나 쁜 평파노가 안 그래도 모자라는 수를 생각할 때 500명의 에스파냐인을 모으는 것도 불가능 했다. 과이나 카파가 죽자 사람들은 그의 아들인 과스카르를 왕에 옹립했다. 이 왕국은 합법적 으로 그에게 돌아갔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남겨 놓은 쿠스코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 아타발리바가 성장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낳아 주 곳이 키토에 있었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아주 남자답고 용맹스러웠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과스카르에 게 그를 불러다 곁에 두라고 충고했다. 과스카르가 그를 소환하려고 사람을 보냈을 때, 아타 발리바는 형의 전령들에게 자기는 키토에서 지배자로서 잉카족을 거느려야 하기 때문에 이 곳에 있을 것이라고 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친척들의 자문을 받은 과스카르는 아타발리바가 반역을 일으키지 않도록 두 번째 소환 전령을 보냈지만, 그는 역 시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세 번째 전령을 보내면서는 즉각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키토에서 어머니의 가족들을 통해서 아타발리바의 신 하들은 그가 바로 왕이므로 봉기하라고 충고했다. 또 만약 그가 쿠스코에 간다면, 비록 서자 이긴 하지만 그도 역시 과스카르처럼 과이나 카파의 아들이므로, 그의 형제를 죽이고 그것 을 소유하고 있는 이에게서 왕국을 상속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들이 그를 도울 것 이며, 그를 왕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키토의 사람들이 이 왕국에서 가장 용맹스런 원주민 이라는 사실이야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또 사실이 그랬다. 신하들의 의지를 본 아타발리바는 그들과 또 그를 도운 카냐레스 위에 왕으로 올랐다. 과스카르가 동생 아타발리바의 봉기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전사들과 함께 대장들을 보냈 다. 토메밤바에서 두 세력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아타발 리바를 집에 가두고 감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가 탈출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태양 신이 자기를 풀어 주었으며, 또 모든 선언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그곳을 탈출했다. 경비병들이 한밤중까지는 감시를 잘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 점은 에스파냐인들이 이 나라를 정복하면서 익히 경험한 바이며, 특히 쿠스코 지 역에서 심했다. 도망친 아타발리바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승리를 향해 돌진했다.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왜 과스카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는 매우 엄하고 결코 자 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광장에서 나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 라고 한다. 이전의 왕들은 이따금 밖으로 나와 원주민들과 같이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하나 의 관습이었다. 그가 몰락하게 된 주된 이유를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부터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왕들은 죽은 왕을 미라로 만들어 좋은 옷을 입힌 후, 그들이 살 아 생전에 받던 대로 죽어서도 대우받을 수 있도록 모든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올린 금은은 손도 대지 않았고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살던 집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며, 그 집들을 가꾸는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 지역은 따로 떼어 두었다.... 다시 과스카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느날 이 죽은 사람들에게 화가 난 그는 그들을 전부 다 땅에 묻고 그들이 차지한 것들을 다 빼앗을 것이며, 또 이제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위해서만 쓰겠노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들이 자기 왕국에서 최고인 것들을 다 차지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듯이 족장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자기들이 그곳에서 저지른 숱한 악 행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편이어서, 그들은 과스카르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또 사람들이 말 하기를 그가 아타발리바와 싸우라고 보냈던 대장들이 오히려 자진해서 무릎을 꿇었고, 일부 사람들은 탈주해서 그에게 넘어가 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아타발리바가 정복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나 그의 사람들이 전 왕국은커녕 마을 하나도 점령할 수 없 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스카르는 아타발리바의 대장들에게 포로가 되어 살해당한 것이 다. 페드로 피사로 '페루 왕국의 발견과 정복 이야기', 1571년 정복의 서사시 : 윌리엄 H. 프레스콧의 '페루 정복사'는 이야기체 역사서의 걸작이다. 소설가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던 프레스콧은 성문 기록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피사로의 모험을 독자들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해변에서 카하마르카까지 그의 묘사를 따라 같이 여행해 보자. 이른 새벽, 에스파냐 장군과 그의 부대는 무장을 했다. 앞 을 가로막고 잇는 험준한 산맥을 넘을 준비가 된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장애물이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길은 바위투성이에 가파르기 그지없는 산세를 따라 절묘하게 놓여 있었다. 대지를 가로막는 자연적인 방해물을 기막히게 잘 피한 길이었 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곳이 몹시 가팔랐고,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말의 고삐를 잡고 올라가야 했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잇는 곳도 많아 바윗덩어리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야 했다. 또 이 여행자들은 절벽 중간중간에 나 있는 좁다란 길을 따라 곡예를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기어가야 했다. 말 한 마리도 제대 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그 길에서 발 한 번 헛디디면 그대로 수백, 아니 수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이었다. 이 산악의 통로들은 반벌거숭이 원주민이나 지날 수 있을 뿐 든든하고도 튼튼한 노새-이 같은 동물-도 거추장스럽게 갑옷을 입은 무장 병사 하나 감당 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산악지대에서 무서운 것 또 하나는, 뭔가 무시무시한 폭발이 안 데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듯 온통 쩍쩍 갈라진 아가리를 벌리고 잇다는 것이다. 태고의 암석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 있는가 하면, 부분 부분 오랜 세월의 식생대로 뒤덮인 곳도 있 다. 한편 이 산맥의 가슴에서 솟아난 급류들이 끝모를 절벽의 바닥을 휩쓸다가 점차 빛 속 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급류들은 푸른 계곡과 사바나로 퍼져 나갔다가 이윽고 넓디 넓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통로들 가운데 많은 곳이 방어 거점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 바위투성이의 좁은 길에 들어설 때부터 에스파냐인들은 혹시라도 매복해 있는 적을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불안감은 가파르고도 좁은 어느 골짜기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더욱 커졌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는 침입자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마음이 상한 듯 거부의 몸짓으 로 용트림하는 단단한 건물이 보였다. 요새라고나 할까, 단단한 돌로 지은 건물이 길을 굽어 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전사들이 뛰쳐나와 덮칠 것만 같았고, 방패에 화살의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 위치가 좋았고, 불굴의 전사 몇 명만으로도 일개 부대를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사뭇 만족해했다. 원주민 왕이 그들 의 통과를 저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더욱 커졌다. 막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피사로는 동생에게 지체 없이 뒤따르라는 명령을 보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힘겨운 등정을 계속했다. 밤이 오기 전, 또 다른 요새 하나가 올라서 잇는 언 덕에 도착했다. 앞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요새였다. 단단한 돌로 지은데 다가 아래쪽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에서 잘라 낸 것들이었다. 유럽의 기술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기술로 지은 건물이었다. 여기서 피사로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더 깊은 곳을 향해 출발했다. 기후는 이미 변했다. 사람과 말 모두 추위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아열대의 뜨거운 날씨에 익숙해 있던 말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했다. 식생 또 한 변해서, 아래쪽을 뒤덮고 있던 우아한 나무들은 어느새인가 사라지고 음울한 소나무숲뿐 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고원지대의 얼음장 같은 대기가 마음에 드는지 왜소한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이 메마르고 쓸쓸한 곳은 태초 이래 한 번도 사람이 찾지 않은 것처 럼 보였다. 야생 상태 그대로의 비쿠냐들이 이따금 하늘 높이 솟은 절벽에서 아래를 굽어보 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모험은 열대삼림의 깊은 그림자 속에서 화려한 깃털을 달고 날아 다니는 새들 대신, 안데스의 거대한 새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징그러운 콘도르 한 마리가 시 체와 피에 대한 본능의 인도를 받는 듯,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면서 구름 저 높이서 부대를 따라 날고 있었다. 드디어 안데스 산맥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넓고 황량한 대지가 펼쳐졌다. 식물이라고는 말 라 버린 노란 풀인 '파호날'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눈 덮인 봉우리들의 바닥을 감싸고 있는 '파호날'을 밑에서 보면, 타오르는 햇살 속에서 담황색 빛을 뿜는 것이 마치 번쩍이는 은 뾰 족탑 주위에 칠해 놓은 금처럼 보인다. 광산지대는 그렇듯이 땅이 메말랐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카하마르카로 이어지는 길 도중에 있는 한때 유명했던 금광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피사로는 후미를 기다리기로 했다. 살을 에는 듯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 다. 병사들은 불 주위에 모여 앉아, 이 힘든 행군이 끝나고 나면 어떤 보상이 주어질까에 대 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윌리엄 H. 프레스콧 '페루 정복사', 1847년 일상생활에 대한 한 잉카인의 설명 : '잉카인에 관한 왕가의 회고록'의 저자인 가르실 라소 데 라 베가(1539-1616)는 잉카의 공주와 에스파냐 대장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카 시대 의 정의에 대한 관점이 약간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회고는 잉카의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증언이다. '엘 잉카'라고도 알려진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페루에서 태어났지만 21살 때 에스파냐로 건너갔다. 그의 아버지인 세바스티안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이 바르가스는 한때 쿠스코의 총독으로 있었다. 21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복 전후 페루의 일상생활에 대한,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정보원이다. -잉카의 어린이들은 보호도 없이 어떻게 양육되었는가- 어린이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커야 했다. 이상한 양육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는 잉카의 아이건 일반 백성의 아이건, 아니면 부자든 가난뱅이든 아무 차이가 없었 다. 아기가 태어나면 즉시 이 여린 생명체를 찬물로 씻어 준 다음 담요에 쌌는데, 바깥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찬물을 입에 머금었다가 뿜으며 아기의 전신을 씻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유별난 애정의 표현방식이었다. 아기의 몸을 씻을 때 머리는 절대 감기지 않았다. 특히 정수리는 만지지도 않았다. 아기들이 추위와 힘든 일을 이 겨낼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래야 아기의 팔다리가 건강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기의 파은 포대기 끈에 꼭 묶어 두었는데, 3개월이 지나기 전에 풀면 팔이 약해진 다고 했다. 아기들은 언제나 요람에 묶여 있었다. 어설프게 만든 나무의자인 요람은 길이가 1.2m였고, 다리 하나는 다른 것들보다 짧았다. 아기들이 요람을 흔들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아기들을 앉히는 자리나 깔개는 두꺼운 그물로 만들었다. 그것은 나무판자만큼이나 튼튼했 다. 그리고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같은 그물로 요람의 사방을 둘러쳤다. 젖을 먹일 때도 물론이고 그 어떤 경우에도 아기를 안는 법은 없었다. 아기를 안아 주기 시작하면 엄마의 품만 찾으며 울 뿐 요람에는 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기 쪽으로 몸을 숙여 젖을 내밀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먹였다. 그외에는 아 무리 울어도 젖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하루종일 젖을 빨려고 들 것이고, 토한 것 들로 옷이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는 식충이가 된다고 말했다. 동물의 경우도 새끼들에게 하루종일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에만 준다고 했다. 아기를 키우 는 것은 물론 어머니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여자라도 보모에게 아기를 맡기는 것은 허용되 지 않았다. 다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는 예외였다. 여자들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는 남 편과 성관계를 삼갔다. 그랬다가는 모유가 나빠지고 아기가 야위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 은 야윈 아기를 '아유스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며 '요정이 남기고 간 못생긴 어린이'가 맞을 것이다... 만약 아기에게 줄 젖이 충분히 나오면 어머니는 젖이 마를 때까지 절대 다른 음식을 주지 않았다. 음식이 젖을 상하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아기를 더럽고 단정치 못하게 키 웠다. 아기를 요람에서 꺼낼 때가 되면, 아기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못하도록 땅바닥에 아이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구덩이를 파고 더러운 수건으로 싼 아기를 그 속에 놓았다. 아이 들이 가지고 놀 수 있게 몇 가지 장난감도 함께 집어넣었다. 아기는 그 안에서 뛰고 발길질 도 했다. 그러나 절대 팔에 안고 옮기지는 않았다. 왕국에서 최고의 '쿠라카'의 아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기어 다닐 수 있게 되면, 아기는 어머니의 젖 가운데 한쪽으로 기어가 바닥에 무 릎을 꿇고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무릎에 올라앉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쪽 젖을 더 먹고 싶으면 이번에도 역시 기어가야 했다. 어머니가 팔에 안아 옮 겨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분만보다 양육에 더 신경을 썼다. 아이를 나으면 어머니는 그대로 계곡에 가거나, 아니면 집 안으로 들어가 찬물에 몸을 씻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 었던 것처럼 곧장 집안일에 전념했다. 해산할 때 산파의 도움은 없었다. 그런 여자가 있었다 면 산파라기보다는 여자 마법사에 가까웠다. 이것이 페루의 원주민 여자들의 출사노가 양육 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이 점에서는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다 똑같았다. -잉카인들은 줄과 매듭으로 어떻게 수를 세었는가- '키푸'는 매듭을 맨다. 또는 매듭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계산을 의미하기도 했다. 매 듭으로 모든 계산을 대신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색의 끈을 만들었다. 같은 색으 로 만든 것, 두 가지 색을 섞어서 만든 것, 그 이상의 색을 섞어서 만든 것 등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색깔들은 한 가지 색이든 아니면 섞인 것이든 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 고 쇠 굴대를 이용해 끈을 세 개 또는 네 개의 가닥으로 총총하게 꼬았는데, 그 길이는 3/4 바라(약 60cm)였다. 그 끈들은 더 두꺼운 줄에 매달아 장식처럼 늘어뜨렸다. 색깔에 따라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달랐다. 노란 끈은 황금이요, 하얀 것은 은, 빨간 것은 병사 하는 식 이었다. 색깔이 없는 것은 중요도에 따라 배열했다. 처음의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고, 순서대로 가장 의미가 없는 것까지 배열했다. 일반적인 머릿줄 아래로 여러 곡물류를, 그리 고 콩류를 같은 방법으로 기록했다. 예를 들어 지금 에스파냐의 곡물들을 순서대로 놓는다 면, 밀이 첫째고, 그 다음이 보리, 콩, 기장이 될 것이다. 무기의 양을 기록할 때도 같은 방 법을 사용했다. 먼저 가장 귀한 것은 창, 그 다음이 던지는 화살, 활, 화살, 방패, 도끼, 투석 기의 순서였다. 신하의 수를 셀 때는 먼저 각 마을의 주민 수를 놓고 이어 전지역의 수를 묶었다. 첫째 끈에는 60세 이상의 남자, 다음 끈에는 50세, 셋째 끈에는 40세 하는 식으로 가다가 마지막으로 갓난아기를 기록했다. 여자들 역시 같은 순서로 세었다. 이 끈 가운데 일부는 같은 색의 덧줄이 붙어 있기도 했다. 바로 주기록에 대한 보충, 또는 예외를 의미하는 실이었다. 어떤 연령의 남자 끈이 결혼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덧줄 은 같은 연령대의 홀아비를 의미했다. 해마다 계산을 했기 때문에 이 끈들은 한 해의 상황 만을 알려 줄 뿐이었다. 매듭은 단위, 즉 10, 100, 1,000, 1만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 이상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아니면 아예 없었다. 각 마을이 저마다 따로 기록했고, 각 구역 역 시 10만 이상의 수에 해당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만 단위 이상의 수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면 능히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의 언어가 산수에서 알려진 어떤 수도 다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만 단위 이상의 수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면 능히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의 언어가 산수에서 알려진 어떤 수도 다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런 수를 사용할 경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수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 수 치는 각 실에 만들어진 매듭의 수로 세고, 각 수치는 다음 수치와 분리되었다. 그러나 각 수 치의 매듭은 성프란시스코의 허리띠 위에 표시되는 매듭처럼 하나의 군으로 묶여 있다. 한 단위의 수가 9를 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다. 제일 위의 매듭은 가장 높은 수치, 즉 만 단위, 그리고 다음은 그 아래, 즉 천 단위, 그리고 다음은 그 아래, 즉 천 단위, 백 단위 식으로 기록했다. 각 수치의 매듭들과 각각의 실은 각기 짝을 맞추어 하나의 선에 배열해 두었다. 그렇게 하면 훌륭한 회계원은 수치를 추가 계산할 수 있었다. 이런 매듭 또 는 '키푸'는 '계산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의 '키푸카마유'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책임졌 다. 당시에는 원주민 사이에 성격의 차이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성품들이 모두 온화하고 우 수한 통제기구 덕택에 다 좋은 사람, 아니 최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의 적합 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사람이 이 자리와 다른 자리에 선출되었다. 그들은 정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판매라든가 대여라는 것 자체를 몰랐고 또 돈도 없었다. 그들은 먹 을 것 하나와 다른 것 하나를 바꾸었고, 그외에 옷이나 집, 땅을 파는 일도 없었다. '키푸카마유'들은 이미 설명했듯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다. 그들의 수는 각 마을의 인 구에 따라 정해졌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네 명의 회계가 있었고, 스무 명에서 서른 명 까지 늘어났다. 사람은 여럿이어도 모두 다 하나의 기록을 사용하면서 오직 한 개의 장부만 을 보존했다. 따라서 한 명의 회계가 있어도 충분했다. 그러나 잉카인들은 서로 감시할 수 있게 각 마을에 여러 명이 있기를 바랐다. 여러 명이 있으면 전부 다 틀리거나 아니면 다 맞든가 둘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파차쿠텍 잉카는 학교의 수를 늘리고 학교행정의 규칙을 정했다- 블라스 발레라 신부는 잉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이라코차 잉카는 죽어서 원주 민들에게 신으로 존경받았고, 그의 아들 위대한 티투가 망코 카팍이라는 별명으로 그의 뒤 를 이었다. 티투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파차쿠텍, 즉 '세상의 개혁자'라는 이름을 줄 때까 지 이 별명으로 불렸다. 이 이름은 훗날 뛰어난 행동과 말로 입증되었고, 그의 처음 이름은 완벽하게 잊혀졌다. 그는 정말 열심히, 빈틈없이, 그리고 확고부동하게 제국을 다스렸다. 이 는 전쟁시나 평화시나 차이가 없었다. 그는 '타우안틴수유'라고 불리는 사방 전체의 경계선 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법률을 만들었다. 그 법률들은 우상숭배와 결혼 허용 범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카톨릭 왕들이 정하고 있는 바와 같다. 무엇보다도 이 잉카는 로카 잉카 가 쿠스코에 세운 학교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는 동시에 그 수를 늘리고 위신을 올려 주었 다. 그는 교사의 수를 늘리고 모든 귀족과 그 자제들, 그리고 어떤 자리든 책임을 맡고 있는 원주민은 쿠스코의 언어를 쓰도록 명령했다. 그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직위나 칭호 도 받을 수 없게 했다. 이 유용한 법률이 충분한 효과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학식 높은 교사를 쿠스 코뿐만 아니라 모든 왕국의 왕자와 귀족의 자제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했다. 또한 국가 업 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쿠스코의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배치했다. 페루의 전제국이 하 나의 언어를 쓰던 때가 바로 이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게으른 탓에 대다수 지역에서 완벽하 게 잊혀져 버렸고, 성경 설교에 많은 애로사항이 되었다. 어쨌든, 이 법을 지킴으로써 쿠스 코어를 알고 있는 원주민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문명화되고 지적인 교양을 갖춘 이로 통했다. "파카쿠텍은 왕자와 그들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금, 은, 보석, 여러 가지 색깔의 깃 털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아울러 훌륭한 솜씨로 짜는 비쿠냐의 털도 입지 못하게 했다. 그는 매월 초하루와 축제 때는 약간의 장식을 허용했다...." -파차쿠텍 잉카의 다른 법률들- "요컨대 왕은 자문회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많은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위해 많은 법, 규칙, 조례, 관례를 제정했다. 그리고 공공의 안녕이나 그의 주권에 해로운 것들은 폐지했다. 아울러 신성모독, 존속살해, 형제살해, 자살, 반역, 간통, 아동유괴, 부녀유괴, 절도, 방화에 관한 많은 법령을 제정했고, 게다가 사원의 의식을 정하는 법령도 제정했다. 그는 선조 잉카 들이 제정한 것들을 다시 확인했다. 예를 들어, 아들은 25살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하며, 부모와 여자쪽 부모의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이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그 자식은 사생아가 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동의를 얻으면 아이들은 도로 적자가 되었다. 잉카는 또 귀족의 지위를 상속하는 법을 각 지역의 전래 관습에 따라 확정했다. 그 리고 재판관이 소송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 덜 주용한 법령도 많이 정했 다. 그것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생략하기로 한다. 조금더 부연하자면 재판관의 참조를 위 한 것, 결혼 계약에 관한 것, 유언을 하는 법, 군대를 위한 법, 그리고 역법에 관해서도 정했 다. 지금, 돈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부왕은 이 잉카가 정한 많은 법령을 바꾸거나 폐지했다. 그의 절대적인 권력을 존경하는 원주민들은 그를 두 번째 파차쿠텍이라고 부른다. 그가 첫 번째 개혁자의 개혁자이기 때문이다. 이 잉카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숭상이 너무나 컸기에 지금도 그들은 그를 잊을 수가 없다." -'쿠카'라고 부르는 달콤한 나뭇잎과 담배에 관하여- 원주민들은 '쿠카'라고 부르고 에스파냐인들은 '코카'라고 부르는 식물을 빠뜨리면 안 된다. 이 식물은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페루의 원초적인 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 로 이 식물에 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원주민 사회에서 오래 전부터 그 효능이 다양하고도 대단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에스파냐인들은 의약상의 쓰임새에 관해 많은 것을 발견했다. 세밀한 관찰자이자 페루에서 오랜 기간 살다가 내가 떠 나고 30년이 훨씬 지난 후 떠난 블라스 발레라 신부는 그것의 두 가지 용도 모두에 관한 글 을 남겼다. 그는 몸소 효능을 실험하기도 했다. 먼저 신부님이 말한 것을 쓰고 이어서 말할 것이 있으면 부연하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쿠카'는 포도나무만한 높이와 두께를 가진 자그마한 관목이다. 가지는 적으며, 손바닥 만한 넓이에 손가락만한 길이의 고운 나뭇잎이 많이 달린다. 달콤한 냄새가 나지만 은은하 지는 않다. 이 나뭇잎은 원주민이나 에스파냐인 모두 '쿠카'라고 부르고 있다. 원주민들은 ' 쿠카'를 너무 좋아해서 금은보석보다 더 좋아할 정도이다. 그들은 이것을 매우 조심스레 부지런히 재배한다. 수확할 때는 더욱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들은 잎을 하나하나씩 손으로 따서 햇볕에 말린다. 이 잎은 삼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향취를 즐길 뿐이며, 액체는 내 뱉는다. 이것을 사용하는 원주민들이 더 강해지고 더 만족스러워하며, 하루종일 먹지 않고도 일한다는 사실을 볼 때 '쿠카'가 일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을 것 이다. '쿠카'는 질병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해 주며 의사들은 그것을 빻아서 상처나 뼈가 부러진 데 처방한다. 그리고 한기가 드는 것을 막을 때, 또는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상처를 치료할 때도 사용한다. 만약 이것이 그토록 효과가 좋고 외상의 치료에 확실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면, 그것을 먹는 사람의 내장도 확실히 효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또 다른 중요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쿠스코 성당의 주교와 수사신부의 수입의 많은 부분이 바로 '쿠카' 잎 의 십일조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그 잎사귀는 그것을 거래하는 많은 에스파냐 사람들을 부 유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효능을 무시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 작은 식물에 대해 부정적인 말과 글을 남기고 있다. 그 이유는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일부 이교도 마법사와 점쟁이가 우상에게 '쿠카'를 바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그런 근거에서 그들은 이것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이 블라스 발레라의 말이다. 여기에 특이한 점을 약간 덧붙이자면, 먼저 이 작은 식물 들은 어른의 키 정도되며, 그것을 심을 때는 정원수를 키우듯이 씨를 온상에 뿌린다. 그냥 뿌리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를 심을 때처럼 구멍을 뚫어 거기다 씨를 뿌린다. 그리고 포도 나무처럼 휘묻이를 한다. 이때,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뿌리가 절대 겹치지 않도록 온갖 조 심을 다해야 한다. 자칫 겹쳤다가는 말라 죽기 때문이다. 잎을 모을 때는 손가락으로 가지를 잡고 마지막 싹 바로 직전까지 딴다. 그 마지막 싹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만일 그랬다가 는 그대로 시들어 버린다. 잎은 위 아래 모두 모양과 푸르름이 아르부투스(히스속의 상록 관목)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잎이 하도 얇아서 서너 장을 겹쳐야 아르부투스 한 장의 두께 와 비슷하다는 점이 다르다. 나는 서로 비교할 수 있고 또 양쪽 사람이 하나씩 알고 있는 것을 에스파냐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쁘다. 잎을 따 모은 후, 그것을 햇볕에 말린다. 그러면 녹색을 잃게되는데, 그래야만 좋은 품질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아주 얇기 때문에 습기를 먹으면 가루가 되어 버릴 정도이다. 이 잎을 '세스토'나 바구니에 담아 이리저리 옮 겨 곰팡이가 슬거나 썩지 않게 한다. 등나무 줄기를 쪼개어 만든 바구니는 안데스 지역에 가면 갖가지 크기의 것을 볼 수 있다. 습기를 막기 위해 바구니 겉을 커다란 등나무 잎사귀 로 감싼다. 넓이는 한 '테르시아'가 넘고, 길이는 반 바라 정도이다. 이어 바구니를 일종의 실로 만든 그물로 싼다. '쿠카'의 생산에 드는 물건의 수를 생각할 때, 필요로 하는 곳에 모 든 것을 제공하는 신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필 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쿠카' 잎을 넉 달마다 딴다. 즉 1년에 세 번 수확하는 것이다. 그 런데 기후가 온난하고 습기가 많은 탓에 끊임없이 쑥쑥 자라나는 잡초들을 잘 뽑아 주기만 하면, 수확 한 번 하는 데 2주 이상을 앞당길 수 있고, 그러면 1년에 네 번도 수확할 수 있 다.... 에스파냐인은 담배라고 부르고, 원주민들은 '사이리'라고 부르는 식물에 관해서는 다음 장 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것의 경이로움에 관해서는 의사인 모나르도 선생의 글이 있다. '사르사파리야'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서혜 임파선종과 기타 심각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효능 을 구세계나 신세계에서 공히 인정하고 있는 바이니 새삼스럽게 내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 다. 블라스 발레라 신부가 말하듯이 페루에는 약으로서 그 정도의 효능을 보이는 약초가 많 이 있다. 만약 다 알려지기만 하면 에스파냐나 다른 곳에서 의약품을 가져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파냐 의사들은 그것들을 아주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전에는 원주민들 이 잘 알고 있던 것들이 지금은 거의 대부분 잊혀지고 말았다. 가르시랄소 데 라 베가 '잉카인에 관한 왕가의 회고록', 1609년 구세계의 의식과 종교 : 잉카의 달력은 일련의 축제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그 축제는 대부분 농사와 관련된 중요 사건, 김매기, 첫 비, 추수 등을 축하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춘분 이나 하지 등 천문상의 현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아래의 글은 '잉카인의 이야기와 의식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크리스토발 데 몰리나가 쓴 이 책은 1573년에 출판되었다. 몰리나가 케추아어에 상당히 능통했고, 따라서 원주민 족장들 과 다른 중요 인물들로부터 정복 이전의 잉카의 종교관습에 대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중 요한 의미를 가지는 책이다. 이 책에서 몰리나는 8월에 벌어지는 시투아(라 시투아) 축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8월을 코야 라이미라고 불렀다. 이 달에 '시투아' 축제가 벌어졌다. 이 축제의식을 치르기 위해서 사람들은 키토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아카'의 상을 가지고 와서 쿠스코의 이집 저집에 두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차후에 설명하기로 하자. ' 시투아' 축제를 벌이는 이유는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인데 그 시기에 내리는 첫 비와 함게 많은 질병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올해도 쿠스코뿐만 아니라 잉카인이 정복한 모든 땅에서 질병이 발생하지 않게 해 달라고 조물주에게 기원했다. 그믐날 정오, 잉카가 자문회의의 고위직과 쿠스코에 있는 다른 주요 귀족들을 거느리고 코리칸차에 갔다. 태양의 사원에 모 인 사람들은 축제를 어떤 식으로 치를 것인지 의견을 모은다. 상황에 따라 어떤 해는 의식 의 수가 늘어나고 어떤 해는 줄어들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최고 사제가 회중에게 조물주가 모든 질병과 악귀를 이 땅에서 몰아 낼 수 있도록 '시투아'의 의식을 거행하라고 말한다. 엄청난 수의 무장병사들이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창을 꼬나들고 사원 앞의 광장으로 들어온다. '추키야'와 우이라코차'라고 불리는 상이 각자의 특별한 사원에서 태양의 사원으로 옮겨진다. ... '우아카'의 사제들도 회중 사이에 합류하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태양의 사제가 축 제를 선언한다. 먼저, 귀의 살갗을 벗긴 이방인들과 불구자들을 시내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 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의식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불행한 사람 역시 참가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의 불행이 자칫 행운을 몰아낼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개도 몰아냈다. 그런 다음 전쟁터에 나가 는 사람처럼 무장한 사람들이 "병과 재앙, 불운, 위험은 이 땅에서 썩 꺼져라." 하고 소리지 르며 쿠스코의 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앙에는 분수처럼 생긴 황금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치차'의 제물의식에 쓰 일 것이었다. 그 항아리 주변에는 400명의 전사가 집합해 있었다. 100명은 해가 떠오르는 방 향인 코야수유 쪽을 향하고 있고, 또 100명은 서쪽인 친차수유 쪽을 향하고 있다. 다른 100 명은 북쪽인 안타수유 쪽을, 나머지 100명은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쓰는 무기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태양의 사원에서 온 사람들이 광장에 도착하는 순간,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이렇게 소리 쳤다. "악귀들은 나가라." 우빈쿠스코 사람들이 이 소리를 받아서 우아이파리아의 '미티마에 '들에게 전하고, 그들은 다시 그것을 아타우아야의 '미티마에'들에게 전하고, 우아라이파차 의 '미티마에'가 그것을 받아 키키사나에 있는 강까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그리고 그 강에서 목욕하고 팔을 씻었다. 그렇게 해서 소리지르기가 끝난다. ... 쿠스코에서 병을 몰아내는 의식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강에 들어가 몸을 씻는 이유는 이 강들이 크기가 엄청나고, 또 바다로 흘러들어가므로 악귀가 강물과 함께 흘러가 버릴 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쿠스코에서 의식이 시작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문 앞으로 나와 망토와 '이시아'를 흔들며 이렇게 소리질렀다. "악귀들아, 썩 꺼져라. 우리가 이 축제를 얼마나 기다 렸는지 아느냐. 오, 만물의 조물주이시여! 우리가 다음해까지 살 수 있고, 그리하여 다음 축 제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잉카까지 포함해서 모두 춤을 추었고, 다음날 여명이 되면 강과 분수로 가 몸을 씻으면서 병이 몸에서 나가라고 빌었다. 목욕을 마친 후, 사람들 은 짚으로 커다란 횃불을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놀았다. 그들은 이 횃불을 '팡쿠르쿠'라고 불렀다. 축제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준비해 놓은 거친 옥수수죽을 얼굴과 문 상인방(문, 창 등 의 위로 가로지른 나무:역주), 음식과 옷을 보관하는 곳에 발랐다. 이 옥수수죽을 그들은 '상 쿠'와 '엘바'라고 불렀다. 이어 '상쿠'를 가지고 분수로 가서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이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이라고 말하면서 분수 안으로 던졌다. 또한 '상쿠'를 친척과 친구들에게 보냈으며, 죽은 사람들도 축제의 혜택을 즐길 수 있도록 죽은 자의 몸에도 발랐 다. 그러고 나서 여자들은 준비한 음식을 마시고 먹으면서 즐겼다. 이날만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먹고 마셨다. 한 해의 남은 날들을 아무리 힘들고 슬 프게 보낸다 해도 이날만큼은 즐겨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날은 아무도 이웃 을 비난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축제가 벌어지는 날, 조 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1년 내내 싸움과 문제에 시달린다고 했다. 밤이 되면 태양신과 조물주, 천둥의 상을 밖으로 운반했다. 각 상의 사제들은 앞에서 말한 '상쿠'로 그것들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침이 되면 사람들은 마련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들을 장만해서 조물주와 태양신, 천둥 의 신의 사원으로 가져갔다. 그 음식들은 '우아카'의 사제들이 받아서 음복했다. 또한 사람들은 미라로 만들어 놓았던 죽은 귀족과 귀부인들의 시체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것을 책임지는 일은 그들 혈족의 몫이었다. 그들은 밤 사이에 시체를 살아 생전에 쓰던 목욕통 안에서 씻었다. 그런 다음 다시 집 안으로 운반해 '상쿠'또는 '식'이라고 부르는 거 친 죽으로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들이 생전에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 그들 앞에 놓이고 각 시체들을 책임진 사람이 그 음식을 음복했다. '과나 카우시케'-그것은 커다란 남자상이다-로 불리는 '우아카'를 책임진 사람들은 그것 을 씻은 다음 '상쿠'로 데웠다. 잉카 왕과 그의 부인은 목욕을 끝내고 자신의 집에 '상쿠'를 뿌리고 손에도 뿌렸다. 그러 고 나서 머리 위에 '피알코'라고 부르는 새의 깃털을 꽂았다. 이 새는 몸의 색을 바꾸는 새 이다. 조물주의 상에도 이와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의 식을 '필코야쿠'라고 불렀다. 아침 8시나 9시경에 잉카 왕과 부인은 그의 집에 같이 사는 자문회의 귀족들과 함께 성장 을 하고 쿠스코의 중앙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아푸풍차우'라고 하는 태양신의 성상을 가 지고 나왔다. 그것이 사원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상이었다. 태양신의 사제들 이 두 개의 황금상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잉카 오요와 파야오요라고 불리는 그들의 부인 도 뒤를 따랐다. 태양신에게 바쳐진 코야파크사라고 하는 여자도 나왔다. 그녀는 왕의 누이 이거나 딸이었다. 사제들은 광장 안에 준비해 놓은 의자에 태양신의 성상을 올려놓았다. 조물주의 사제들 역시 그 성상을 준비된 자리에 놓았고, 추키야라고 하는 천둥신의 사제들 역시 그렇게 했다. 각 성상은 황금의자에 있었고, 그것들 앞에는 황금 홀 비슷한 '야우리'가 각기 놓였다. 이 '우아카'들의 사제들은 매우 화려한 옷을 입고 축제를 빛냈다. 우아나카우리라는 '우아카'를 책임진 사제들 역시 상을 가지고 광장으로 나왔다. 조물주의 '우아카'로 여자가 지명되는 경 우는 절대 없었다고 한다. 조물주는 여자가 필요 없는데, 바로 조물주가 여자를 만들었으므 로 모든 여자가 조물주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든 제물 가운데 제일 먼저 바쳐지는 것은 주물주의 차지였다. 이때 사람들은 귀족과 귀부인의 미라를 아주 화려하게 치장해서 가지고 들고 나왔다. 혈족의 후예들이 들고 나온 미라들은 그들이 살았던 순서에 따라 광장 의 황금의자에 앉혔다. 쿠스코의 모든 주민이 부족과 혈연에 따라 등장했다. 한껏 성장을 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조물주와 태양신, 잉카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자기 자리에 앉아 하루종일 먹고 마시면서 즐겼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오는 빨간 셔츠를 입고 머리에는 '필코카사'라고 하는 화관을 쓰고, '알란시투아 사키'라고 하는 '타우키'를 공연했다. 크기가 다른 등나무 관으로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티카티카'라는 음악도 함께 연주되었다. 사람들은 조물주에게 이날을 볼 수 있게 살려 주어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면서 올해도 병에 걸리지 않고 지낼 수 잇게 해 달라고 빌었다. 태양신과 천둥신에게도 같은 소원을 빌었다. 잉카는 사람들과 함께 태양신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치차'를 담는 커다란 황금항아리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사제에게서 넘겨 받은 것이었다. 사제는 치차를 항아리 안으로 쏟아 부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수처 럼 생긴 이 황금항아리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치차'는 구멍에 연결된 광장 아래의 관 또 는 하수구를 통해서 각기 태양신과 천둥신, 조물주의 사원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모든 사람이 같은 순서대로 광장에 등장했다. '우아카' 역시 제자리에 놓였다. 잉카와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짐승을 데리고 왔다. 이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의 말에 따르 면, 그 동물의 수가 10만 마리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때 데리고 오는 짐승은 반점이나 얼룩 이 전혀 없어야 하고 또 털 한 번 깎은 적이 없어야 했다. 태양신의 사제들이 그 완벽한 짐 승들 가운데서도 네 마리를 골라 제물로 바쳤다. 먼저 조물주에게 바치고, 이어 천둥신, 태 양신, 우아나카우리 순이었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사제는 커다란 황금쟁반 위에 담은 '상쿠'를 양의 피와 함께 뿌렸다. 그리고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상쿠'를 어떻게 먹는지 주 의할지어다. 죄악 속에서 먹는 자, 표리부동한 의자와 마음으로 먹는 자는 우리의 아버지 태 양신께서 보고 계시다가 가혹한 벌을 내리실 것이니, 그러나 한 가지 마음으로 먹는 자, 그 에게는 태양신과 천둥신이 호의를 보이시어 자식들과 행복한 한 해와 풍성한 수확과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로다." 그러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하게 절 을 먼저 올리고 나서 '야우아르상쿠'를 먹는다. 그러면서 조물주와 태양신과 천둥신에게 절대 불평하지 않고 왕 잉카에게 반역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비난과 벌 도 달게 받겠다고 약속했다. 태양의 사제는 세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만큼 집어 들어 입 에 넣고는 자기 자리에 앉는다. 이 순서와 맹세를 하는 방식에 따라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하고, 이어 어린아이들도 똑같이 했다. 사람들은 지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몫을 남기고,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그 사 람 몫을 보낸다. 그날 '야우아르상쿠'를 먹지 못하는 사람은 몹시 불행해진다고 믿었기 때문 이다. 사람들은 단 한 점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먹었다. 만약 땅에 떨어뜨 리면 그것은 엄청난 죄로 여겼다. 제물로 바칠 양을 죽일 때는 폐를 꺼내서 부풀린 다음, 사 제들이 그것들 위에 나타난 어떤 무늬를 보고 한 해의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될지 여부를 판 단했다. 그러고 나서 조물주와 태양신과 천둥신 앞에서 그것들을 태웠다. 양의 시체는 신성 한 것이니만큼 각자에게 조금씩 분배했다. 나머지는 쿠스코 주민 모두가 나누어 먹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태양신에게 바친 양의 털을 조금씩 뜯어 나누어 가졌다. 크리스토발 데 몰리나 '잉카인의 이야기와 의식들' 1573년 "고고학자들은 잉카의 성소를 발굴하고 싶어한다" : 최후의 잉카가 죽은 후 많은 전통 의식들이 그 존재의 타당성을 잃었다. 그렇지만 페루에 뿌리를 내린 카톨릭 의식은 여러 가 지 면에서 고대 잉카의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정복 이후 페루 역사는 여러 분야에서 카톨릭 교회와 안데스 전통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집 약된다. 쿠스코의 산토도밍고 설탕은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식민시대의 성당은 잉카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코리칸차로 알려진 태양의 사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래의 신문보도대로 고고학자들은 카톨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잉카 의 건축물을 발굴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쿠스코, 페루-고고학자인 라이문도 베하르 나바로 씨가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한 산토도밍 고 수도원 마다에 세워져 있는 아도비 벽돌 벽을 기어 오른다. 그는 수도원에 사는 네 명의 수도사가 탐사 팀이 그 지역을 발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고 불평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350년 묵은 에스파냐식 건물을 올려다보며 내뱉는 말이 사뭇 시비조이다. "이건 허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토로하는 이유는 바로 산토도밍고 성당과 수도원이 이카 문화의 지성소 위 에 서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사원, 케추아어로는 코리칸차가 바로 그것이다. 베하르씨는 그 사원을 복원하기 위한 3개년 계획의 책임자이다. -두개의 상반되는 문화- 이 성당은 실로 상반되는 두 문화의 복합물이다. 건물의 토대와 지지벽은 안산암을 절묘하 게 자른 잉카 돌로 만들었다. 몇 마일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도구로 돌을 잘라다가 모르타르 도 없이 건물 부지를 멋지게 닦고 벽을 쌓은 것이다. 지금도 그 이음새에는 칼날 하나 들어 가지 않는다. 거칠게 다듬어 아도비 모르타르로 접합한 에스파냐식 건축물을 잉카의 석조물 위에 올린 이 성당의 내부는 잉카 사원의 석조 방 네 개를 살리기 위해서 수도원의 상당 부 분을 없애 버렸다. 최근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정복자와 피정복민들 사이에, 또 카톨릭 교회와 1532년 프란 시스코 피사로에게 항복한 잉카의 후예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베하르씨는 말한다. "그들은 페루 전역에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잉카 의 지성소 바로 위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나는 교회가 과거의 학대에 대해 사과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학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잉카인들입니다." 카톨릭 교도인 베하르씨는 교회체계에 순응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고방식 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파문의 위협을 받고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쿠스코시를 상대로 '교회 재산을 강탈하는 행위'를 막기 위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수도원의 책임자 도밍고 가마라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변덕스러운 베하르씨는 유네스코 가 세계 기념물로 선언한 성당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 성당은 두 문화의 만남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의 해위는 반기독교적이며, 우리는 성당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에스파냐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까지, 태양의 사원은 북부 베네수엘라에서 남부 아르헨티 나의 파타고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잉카 제국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왕국의 황금보물의 창고 였으며, 뛰어난 석조기술과 중앙집권제의 집약체였다. 에스파냐인은 잉카인에게 카톨릭을 강요하고 통례적으로 코리칸차 건물을 성당으로 사용 했다. 1650년의 지진으로 사원 일부가 파손되자, 그들은 나머지 부분을 부수어 정교하게 다 듬은 돌들을 성당과 수도원을 짓는 데 사용했다. 1953년에 다시 지진이 엄습했다. 에스파냐인이 세운 산토도밍고 성당 벽돌 가운데 많은 부분이 무너지면서 수세기 동안 감춰져 있던 원래의 건축물이 일부 드러났다. 그것을 재건 축하면서 교회 관리들은 현존하는 잉카 사원의 일부 벽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동의했다. 발굴 팀에서 일하는 케추아 원주민인 헤수스 체케는 잉카 사원의 꼭대기에 산토도밍고 성 당이 서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당을 헐어 내기를 발나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억압이자 안데스의 과거를 악용한 상징입니다. 우리 사원 에서 돌을 훔친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그런 문화적인 감수성을 부추겼다. 쿠스코의 시장으로 세 번째 연임하는 다니 엘 에스트라다는 쿠스코의 주민, 즉 쿠스케뇨스들의 뿌리찾기에 호소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감수성에 호소하는 시장- 에스트라다씨의 말이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억압받아 온 기만당한 사회입니다. 우리는 안 데스의 믿음으로 회귀,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그 믿음 속에서 쿠스코는 신성한 도시 입니다." 최근, 에스트라다씨는 음료수와 다른 품목들에게 거둬들인 세금을 쿠스코 부흥을 위해 투 자하고 있다. 분수를 세우고 구시가지의 좁은 기를 재건하며, 위대한 잉카 황제 파차쿠테그 이 동상을 세우고 있다. 33m의 돌기단 위에 12m짜리 도상을 세우는 이 일은 100만 달러 이 상의 돈이 들어가는 계획이다. 그러나 코리칸차야말로 그의 야심 찬 계획의 대표작이다. 시장은 200만 달러의 시 기금으 로 사원 주변의 땅을 매입했고, 현존하는 집들을 부수고 외부 정원이었던 곳을 발굴하기 시 작했다. 잉카 문화의 복원은 상업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감동적인 맞추픽추 등 쿠스코 주변의 이 카 유적은 페루의 관광자원이다. 그러나 게릴라의 폭력과 1991년 초 콜레라의 발생으로 관 광객의 수가 1980년대 초보다 15%감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쿠스케뇨스의 40%가 실업 상태 로 있고 20%가 반실업상태로 남아 있다. -회복세로 돌아선 관광산업- 1991년 초의 콜레라 창궐 이후 2년 반 동안 관광객 수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과거 수준의 40%에도 미치지 못한다. 코리칸차를 복원할 경우, 이것이 쿠스코 관광산업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 로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위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는 한, 식민시대의 성당 옆에 유적이 있 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코리칸차에서 과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사원의 가운데 방-에는 결코 고고학자들의 손길이 미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성당의 지성소가 바로 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버클리 대학교의 고고학 교수이자 코리칸차 계획의 자문위원인 존 로위 교수의 말이다. "유적 발굴을 바라는 수도사는 없습니다. 해여 재산을 잃을까 두려운 겁니다. 그들은 거대 한 재산에 매달려 있는 수도사일 뿐 교회에 귀속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너새니얼 C. 내시 '뉴욕 타임스', 1993년 8월 31일 두 세계의 충돌 : 에스파냐 정복은 신세계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새로운 질병의 유입으 로 인한 인구 붕괴와 주민의 혼합, 유럽 동, 식물의 도래로 인한 생태학적 격변 등등.... 구세 계는 야만적으로 신세계를 침략했다. -질병- 페루와 볼리비아 토착민의 9할을 휩쓸어 간 엄청난 전염병은 정복의 역사에서 간과되는 경 향을 보여 왔다. 이것은 원주민의 인구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외에도 생존자가 저항하 고자 하는 의지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아메리카 원주민은 에스파냐인과 오래 전에 아프리 카인이 바다 건너에서 가지고 온 질병에 취약해지고 말았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그 복합적 인 재앙의 강도가 밝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 를 체계적으로 과소평가,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에 상륙하던 당시의 인구 800마네서 1,400만 명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공물대장의 표본 추출에 근거를 둔 최근의 추산으로는 초창기의 통계보다 열 배 이상 많다. 즉, 정복 전야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약 1억이었 고, 그 가운데 2,500만에서 3,000만은 멕시코 주민, 그와 비슷한 수를 안데스의 주민으로 보 고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조밀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수준에서 볼 때 인구의 감소는 가히 재앙이었다. 1568년경 코르테스가 다른 것들뿐 만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 전염병 교환의 시대를 연 후 50년도 채 되지 않아서 멕시코의 인구는 약 300만, 코르테스가 상륙할 당시와 비교해서 약 1/10로 줄어들었 다. 비록 그 비율은 감소했지만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다시 50년이 흐른 뒤인 1620년에는 인구가 160만이라는 최악의 상태에 도달한다. 다시 30년이 흐른 뒤에도 인구는 증가세를 보 이지 않았고, 18세기가 되도록 극도로 미미한 성장률을 보일 뿐이었다. 이저네 존재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전에는 고립되고 격리되어 있던 부족이 외부 세계와 저촉하면서 파괴적이고 사기를 꺾는 유행병들을 만날 때 재앙은 벌어지게 되어 있 다. 그 과정이 얼마나 가혹하고 외견상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로, 상대적으로 최근에 일어난 사건 하나를 들어 보자. 1903년, 카야포라고 하는 남아메 리카의부족이 한 선교사를 받아들였다. 선교사는 자신의 양떼를 문명의 악과 위험에서 지켜 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부족 수는 6,000에서 8,000명 사이로, 건강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918년이 되자 불과 500명만이 살아 있었다. 1927년에는 27명만이 살아 남았고, 1950년에는 고작 두세 명만이 남아 그 부족의 흔적을 전할 뿐, 카야포 부족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원주민들을 외부 접촉의 다른 위험성뿐만 아니라 질병에서 막아내려 는 최선의 노력과 사려 깊은 시도가 있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만약 천연두가 퍼지지 않았다면, 에스파냐가 멕시코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피사로가 점령했을 때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멕시코에서 발병한 천연 두는 아스텍의 영역만 침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520년 과테말라를 덮친 천연두는 남쪽으로 내려가 1525년이나 1526년에 잉카 제국을 관통했다. 결과는 아스텍만큼이나 극적 이었다. 다시의 잉카는 수도에서 벗어나 북부지역을 공략하던 중 이 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후계자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역시 죽었다. 이어 내전이 일어났다. 잉카의 정치구조가 와 해되는 와주에 피사로와 난폭자들이 쿠스코로 진격, 보물을 약탈한 것이다. 이렇다 할 군사 적인 저항도 전혀 없었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에스파냐인과 원주민 둘 다 이 전 염병은 신의 처벌이 특히나 무섭고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점이다. 페스트를 신이 불쾌한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에스파냐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구약성서와 모든 기독교 전통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치명적인 병들을 전혀 경험한 바 없 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에 동의했다. 그들의 종교 교리는 신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 때로 인간에게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는 점을 인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례 없는 일은 자 연스럽게 초자연적인 것으로 원인을 돌렸다. 그것은 이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사기가 꺾인 개종자들에게 자기들과 똑같은 해석을 가요한 에스파냐 선교사들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둘째,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이 무서운 병이 에스파냐인들에게는 거의 발병하 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병원균에 노출되어 있어서 효과적인 면역체 계를 가지고 있었다. 양쪽 다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침략 자를 편애하는 신의 의지가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뿐만 아니라 아 스텍의 신들조차도 이 하얀 난입자들이 하는 일을 다 인정한다는 뜨시었다. 백인들의 도덕 성이나 경건함, 또는 그것들의 결핍과 아무 상관 없이, 신이 그들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신의 분노가 무자비하게 원주민들을 덮쳤다.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영토의 최전선을 따라 개종자들의 도덕적, 종교적 삶을 책임진 기독교 선교사들조차 그 참상에는 이따금 혼 란스럽고 우울할 정도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에스파냐의 우월성에 대해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유 일한 대응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수가 아무리 적고 그 행동이 아무리 야만적이고 비열하다 해도 에스파냐인이 우월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권위구조가 무너졌다. 옛날의 신 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기록한 대량 개종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사제, 부왕, 지주, 과산 기업가, 세금 징수원 은 말할 것도 없이, 큰 목소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하나의 필 연적인 결과였다. 신과 자연의 질서 둘 다 토착 전통과 믿음의 패배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마다에 저하할 근거가 뭐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는 불과 몇백 명이 그 넓은 지역을 그토록 쉽게 정복하고 수백만 명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달리 해석할 길이 없 다. 윌리엄 H. 맥닐 '전염병과 사람들', 1976년 -소수 인종들- 1988년, 일단의 라틴 아메리카 정치지도자들이 라틴 아메리카가 당면한 사회, 정치, 경제 문 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옥스퍼드 어낼리티카에 의뢰했다. 이 회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뿌리를 둔, 국제적인 기업과 정부 자문회사이다. 지난 세기 이래,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소수 인조들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학교에서는 소수 인종에게 공화민주 제의 장점을 믿도록 가르쳐 왔다. 농업을 근대화시키고 농민을 국가경제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사회적인 계층의 분화는 인조간의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표출시키며 출신 인종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소수 인종 에게 그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과 가치를 세우라고 하는 지식인 또는 국가의 격려 또한 기 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소수 인종들 스스로 자신의 '인종성'을 되살리고 이따금 제1세계의 시끄러운 압력 그룹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이른바 제4세계의 권리를 획득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는 갈수록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인종적인 자각은 일시적일지도 모른다. 소수 인종들이 지방에서 도시 사회로 이동하면서, 인종적 동질성의 상징이 당대의 믿음의 양식에 서가 아니라 민간전승의 기억만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질병의 확산과 정착 양식의 붕괴, 학살, 에스파냐인과 기타 인종에 의한 강제노동으로 말 미암아,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정복 이후 지금까지 급격하게 감소했다. 원주민이 대규모 로 저항한 지역이거나 그 문화와 언어가 살아 남은 곳, 무엇보다 토착사회가 특히 강력하고 탄력성이 있는 곳은 외떨어져 있거나 정복하기 힘든 곳이었다. 이런 지역은 지금도 아메리 카 원주민, 다시 말해 정복 이전 문화의 직계자손들이 살아 있다. 인종 수는 정확하게 헤아릴 수가 없다. 소수 인종에 관한 글에서 인종의 동질성을 가름하 는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주민의 인구학에 관한 최신의 포괄적인 분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수치가 나왔다. 즉, 남북 아메리카 전지역에 사는 원주민의 총인구 가 1978년에는 약 2,850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2,790만 명이 라틴 아메리카에 있었다. 그것 은 라틴 아메리카에 있었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 전인구의 6.5%에 근접한 수치였다. 1962 년에 발표된 추정치는 1,300만을 약간 상회했다. 인구조사 방법의 부정확성과 모순을 감안한 다하더라도 원주민의 수가 감소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위에서 제시된 추정치들 을 볼 때, 원주민은 16년 사이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라틴 아메리카의 고지대 원주민 사회를 점진적으로 국가경제에 통합시킨 결과, 그들은 의 미심장한 변화를 겪고 있다. 도시로 이주하고 전통적인 공동체 새산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 이는 것은 인종적 자각이 희박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특히 페루의 고 지대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주는 지방생활과 도시생활 사이의 단 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겨우 그런 단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 가운 데 하나는, 대개 영구적인 이주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주한 사람이 도 시와 시골을 오가며 그전의 공동체와 연결고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버스 회사가 번성하는 데는 그들의 이동이 한몫을 한다. 갑작스런 단저리 없는 도 다른 이유는 문화형태가 다르다 해도 인종적 자각이 도시의 환 경에서도 살아 남기 때문이다. 페루는 도시지역에도 원주민이 엄청난 집중현상을 보이는 나 라이다. 이 나라의 총원주민 가운데 약 30%가 도시에, 그것도 주로 리마에 살고 있다. 리마 에서는 인종의 새로운 문화적 표현법이 발견되고 있는바, 그 표현법에는 안데스의 시골과 해변의 도시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치차 음악'이 대표적인 예이다. 과테말라와 볼리비아에 서는 원주민의 25%가 도시에 살고 있으며, 멕시코와 에콰도르의 비율은 약 10%이다. 페루에서는 고지대의 시골생활의 원형을 변형시키는 두 개의 특이한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 코카 재배의 증가와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 게릴라 조직의 영향이 바로 그것이 다. 코카인을 원하는 세계 수요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늘 어난 코카 재배가 페루와 볼리비아에 집중되고 있다.... 코카 재배의 수익성 때문에... 그리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 때문에 코카 재배는 두 나라의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부는 땅을 얻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임금 노동자이다. 코카인이 부패와 폭력을 일으킨다는 점과 식량 대신 코카에게 땅을 빼앗긴다는 점에서, 마약 농업과 늘어나는 불법 거래로 코카를 재배하는 시골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페루의 게릴라 운동인 센데로 루미노소 역시 혼란스러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릴라들은 특히 남부와 중부의 산악지대에서 아주 끈질긴 활동을 보이고 있다. 센데로와 보안군 사이 의 교전으로 희생을 보는 이들은 죄없는 농민이 대부분이다. 그 지역 주민들이 시골 공동체 에서 도시와 대도시로 이주한 결과 인구감소를 가져왔다. 농민운동과 지역갈등의 특징을 정의하는 데 인종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의심이 여지가 없다. 사실, 끈끈한 인종 동질성이 게릴라전을 유리하게 만드는 조건 가운데 하나이 다. 센데로 루미노소는 교조적인 마오쩌둥주의에도 불구하고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의 관습과 믿음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반면, 페루의 정통 좌익은 계급을 인종 개념에 조속시키 기가 어려웠다. 이와는 반대로 볼리비아의 농민조합에서 '인디헤니스모'(토착문화와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주장하는 주의)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은 계급과 인종 의식을 성공적으로 혼합한 데서 오는 바가 크다. 볼리비아와 페루 같은 나라,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에콰도 르, 콜롬비아, 멕시코에서 인종성은 지역 정치에서 계속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옥스퍼드 어낼리티카 '라틴 아메리카 전망', 1991년 -칼이냐 보습이냐?- 에스파냐인들은 고의적으로 식민지에 올리브나무를 심지 않았다. 올리브 오일 교역의 독점 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해안의 계곡이나 강둑 등, 이 왕국에는 매우 비옥한 땅이 많다.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밀 과 옥수수, 귀리를 생산했다. 산미겔과 트루히요, 왕의 도시인 쿠스코, 과망가에는 적지 않은 포도밭이 있으며, 다른 곳에도 포도를 심기 시작했다. 포도 재배가 수익성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다. 오렌지와 석류나무도 있으며, 원래 있던 것들 외에 에스파냐에서 전 래된 다른 나무들도 있고, 온갖 종류의 콩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페루는 위대한 나라이다. 그리고 거대한 도시들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강대해질 것이다. 우리 세대가 지나고 나면 페루는 다른 나라에 밀, 고기, 양털 을 수출하고 있을 것이다. 아울러 뽕나무가 자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비단 도 수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전래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올리브나 무이다. 올리브는 빵과 포도 다음으로 중요한 생산물이다. 내가 보기에는 에스파냐에서 이런 묘목을 가져다 해안의 계곡과 강둑에 옮겨 심으면 얼마 안 있어 악사라페데세비야의 것과 같은 커다란 올리브나무가 자랄 것 같다. 이곳에는 그것들이 요구하는 따뜻한 기후가 있고, 많은 물이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여기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페루의 일부 지역에서는 천 둥도 없고 번개도 보이지 않으며, 해안의 계곡에는 눈도 내리지 않는다. 그것들이 올리브나 무의 열매에 위협을 가하는 것들이다. 일단 올리브나무를 옮겨 심기만 하면 페루가 다른 모 든 것들을 물론 기름을 충분히 공급받을 때가 올 것이다. 오크나무 역시 페루에서는 발견되 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카야오와 쿠스코, 그 밖의 다른 지역에 심기만 하면 해안 계곡에 심은 올리브나무와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믿는다. 내 의견인즉, 이 지역의 정복자와 정착민들이 서로 싸우는 데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는 것이 훨씬 더 이로울 것이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 '페루 연대기', 1553년 -잉카의 공물- 에스파냐인이 원주민에게 강요한 공물체계는 잉카 특유의 공물체계에서 영향을 받아 그것 을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잉카의 지배 아래서 그것을 정당화했던 호혜주의 원칙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잉카 경제에서는 돈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제한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전제 국을 통해 물품이 유통되었다. 일단 물물교환이 먼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물체계를 통 해 모든 것이 유통되었다. 고도에 따라 수확물이 다르기 때문에 산악지대 농민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낮은 계곡의 산 물과 교환했다. 고지대와 저지대의 상호 보완적 생산체계가 '수직 경제'의 기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티티카카호 근방의 추쿠이토인은 라마의 털과 차르키, 추뇨 를 사마와 모케하의 해안지역에서 난 옥수수와 교환했다. 또한 라레카하와 카피노타, 내륙의 열대 계곡에서는 코카를 내놓았다. 상당히 먼 거리까지도 이와 같은 거래가 이루어졌다. 좀더 일반적으로는, 전제국에 유통되는 물품들은 잉카에게 바치는 공물에 곁들여 안전하 게 통로를 확보했다. 잉카 땅에서 얻은 생산물은 직접 쿠스코로 보내기도 하고, 잉카가 자신 의 창고에 저장해 놓은 물품들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기에 가능했다. 그 러나 이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유통이었다. 먼저, 각 지역에서 소비하는 양을 감안하면 그 정 도로는 부족하고, 또 잉카에게만 공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쿠라카' 계급에도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25-50세(기혼자는 25세 이하도 해당)의 모든 남자는 납세의무자, 즉 공물납부자(아툰루나) 였다. 기본적으로 농민은 '아이유' 구역의 생산물이 아니라 노동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양자는 연결되어 있었다. 즉, 호혜주의 원칙에 따라 공물을 낼 의무는 공유의 한몫 을 차지할 권리와 결부되어 있었다.) 한 지역 총독에서 100명의 남자를 책임진 대장까지 모 든 '쿠라카'는 노역에서 면제되었고, 따라서 공물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공물납부자 중 특 이한 부류가 있었다. 바로 장인이다. 장인들(도공, 금세공인 등)은 자신의 생산물만 내면 그 만이고, 다른 의무는 면제되었다. 잉카에게 바친 공물은 쿠라카에게 바치는 공물과 맞먹었다. 실제로 농민의 의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1. '집단 농토작업' : 잉카와 '쿠라카'의 땅은 그 소유자들이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만 생산성이 있다. 이 노동력은 한 공동체의 최우선 의무였다. '아이유'의 구성원들은 잉카 의 땅에 가서 공동으로 농토를 돌보았다. 그들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노래와 춤에 맞추어 일했고, 그 일은 종합적인 세계관 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또 '쿠라카'의 땅에서도 일했다. 따라서 '아이유'구성원들의 유대의 끈은 국가와 행정기구에 대한 봉사로 표현되었 다. 잉카의 땅에서 난 생산물은 구역 또는 지역이 창고에 저장했다. '쿠라카' 역시 지위고하 를 막론하고 자신의 창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미타' : 개별적이고 주기적인 노역을 말한다. 군사적인 목적이나 대규모 공사(도로, 교 량, 사원 등의 건설)를 위해 국가가 공물납부자 가운데 일부를 필요한 수만큼 제한된 기간 동안 징발했다. 아이유의 구성원들은 연대의 규칙에 순응하여 징발자의 땅 대신 경작해 주 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공사는 연대기 작가들을 감탄시켰고, 역사가들은 잉카를 위해 수행하는 '미타'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쿠라카' 역시 지역의 필요성이나 자신의 땅 경 작, 또는 자기 가축의 사육을 위해 이 형태의 공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가령 추쿠이토에 서는 마르틴 카리가 매년 60명의 원주민을 부렸고, 마르틴 쿠시는 30명을 부렸다. 그리고 공동체 작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타요'들은 잉카나 '쿠라카'에게 음식을 제공받고 보 상을 받았다. 3. '직물 납부' : 털로 짠 직물과 옷은 잉카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고고학자 V. 무라는 그것들이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마법상 중요했다는 점을 증명해 보였다. 즉 원주민들은 '우아카'와 신에게 봉헌하는 의식에서 그것들을 태우거나 매장했던 것이다. 에스파냐인들은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국가 창고에 엄청난 양의 직물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든 가정은 잉카를 위해 할당된 양의 옷감을 짜야 했다. 그 양은 공급되는 재료에 따라 달 랐다. 그러나 잉카가 그 재료를 제공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공물납부자는 공동창고 에서 재료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이 의무 역시 노동력 제공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북쪽지역인 우아누코에는 라마가 별로 없는 대신 농민들이 면화를 재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티스 데 주니하의 정보제공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을들은 잉카가 제공하는 털로 직물을 짜야 했다. 농민과 '쿠라카' 사이에도 같은 일이 벌어져, '쿠라카'는 재료를 내놓으 면서 직물을 징수했다. 이 공물이 마을 전체에 부과된 세금인지, 아니면 '쿠라카'에게 연례 봉사를 제공하는 '미타요'에게만 부과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마르틴 카리의 예로 볼 때 양자가 다 가능성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공물은 호혜주의 체제의 핵심이었다. 농민은 공유지를 사용하는 권리와 교 환 조건으로 잉카의 땅을 경작해 주었던 것이다. 공동체의 털(또는 목화)을 이용할 권리를 가지는 대신 잉카의 직물을 짰던 것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농민의 의무가 잉카의 보편적 소 유권 개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태양신의 아들인 잉카는 자신의 신민에게 신의 가호 를 내려 줘야 했고, 사회질서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은전과 보상을 수여했다. 특히 잉카는 병자나 노인, 일할 수 없는 사람을 부양하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기근이 들면 잉카는 창고에 저장한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남부한 공물을 소비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쿠라카'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역할을 했다. 사실, 제국이 기존에 존재하던 제도를 기본으로 세워진 만큼 잉카에 대한 의무는 '쿠라카'에 대한 의무의 확대판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아래의 표에 나타나듯이 그것은 기부와 반대 급부의 이중체계로 요약된다. 이 이중체계는 잉카에 의한 물품의 중앙 집중과 그 물품의 재분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잉카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공물은 주로 한 지역의 문제였다. 지역행정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장품의 대부분은 지역에서 소비했고, '미타요'의 대부분이 지 역에서 일했다. 따라서 잉카가 왜 신민들이 그의 허락 없이는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공물은 각 '아이유'에게 집단적으로 부과하고 '쿠라카'의 감독하에 징수했 다. 결과적으로 공물을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납부할 주민이 필요했다. 여기서 놀랄 정도로 변증법적인 과정이 나온다. 즉, 공물은 물품이 전제국을 통해 유통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사회를 좀더 고착시켰다. 먼저, 공동체제는 안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혈연과 토 지의 재분배가 이 체제의 기초였으며, '아이유'구성원들이 스스로 호혜주의의 끈을 끊어 버 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사회생활의 정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또 하나, 잉 카의 땅에서 집단으로 일하는 '미타'의 순번이 각 토지에 불변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공물 납부자는 태어나는 대로 '아이유'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물은 공동체를 더 큰 단위 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공동체를 그 지역구조 안에 고립시키고 전통적 구조를 강화시키는 이 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식민시대의 공물- 여기서 기본적인 문제는 에스파냐의 공물을 잉카의 공물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이다. 그 양에 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별로 없다. 어쨌든 우아누코와 추쿠이토, 우아우라에서 중대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에스파냐인이 잉카와 태양신의 토지를 침탈한 것이다. 그것은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따로 떼어 둔 땅이었다. 그 결과 공물납부의 부담이 원주민의 고유지로 넘어왔다. 톨레도 부왕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스카 치하에서는 공물납부자 가 옥수수와 밀을 자신의 토지에서 수확할 것을 명시적으로 추인하는 세금에 관한 법도 있 었다. 당시 원주민은 그 수가 많지 않았고 또 일반적으로... 땅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바로 수가 적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따라서 에스파냐의 공물이 잉카의 것보다 훨씬 더 부담스러웠으리라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엥코멘 데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소비한 시간의 양을 계산해 놓은 수치를 보면, 그것이 원주 민에 대한 엄청난 착취였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세금 수익자, 즉 에스파냐인들이 법을 문 자 그대로 지켰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수많은 기록들이 착취, 불법 부과, 폭력을 증언하고 있다. 우아우라를 지배한 사악한 폭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우아누 코의 세바스티안 누녜스 데 프라도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이전에는 80바구니씩 납부하던 코가 잎을 9년 동안 300바구니씩 강요했다. 그리고 직물 공물을 받아내기 위해 원주민들을 우리에 가두고 휴식도 없이 일하게 했다. 그와 인접한 마을의 가르시아 오르티스 데 에스 피노사는 1,000페소를 공물납부자에게 돌려 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원주민을 혹사한 죄로 감옥에까지 갇혔다. 그러나 '에코멘데로'들이 악행으로 처벌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잉카 체제를 정당화했던 이데올로기가 파괴된 것이다. 에스파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호혜주의와 재분배의 개념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스파냐 체제는 구체제의 단편들을 이용한 것이다. 즉, '아이유'와 '쿠라카' 사이 의 관계에서는 호혜주의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후자는 여전히 원주민과 새로운 주인 사이 의 매개자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호혜주의가 '아이유', '쿠라카', 잉카 사 이의 부의 순환(허구이거나 불평등한 것이었다 해도)을 유지했지만, 에스파냐의 규칙은 원 주민에게서 에스파냐로 이전되는 일방통행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점들 을 사기하기로 하자. 즉, 우아우라에서 공물납부자는 일한 대가로 음식이나 도구를 받지 못 했다. 또 우아누코에서는 추파초 원주민들이 직물 공물을 만들기 위해 면화를 자신들이 내 놓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했다는 점이다. 추쿠이토에서는 '쿠라카'가 옷을 짤 양털 을 제공했지만 에스파냐 왕은 수천벌의 '로파'의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1만 8,000페소를 바친 대가로 원주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스파냐 왕이 잉카의 자리에 앉아 중앙집권제를 계승했지만, 그는 모두를 위한 부의 재분배를 하지 않았다. 잉카의 공물은 경제구조에서 균형과 순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 파냐의 공물이 갖는 불균형과 일방통행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탕 왁텔 '피정복민들에 대한 이해', 1971년 -돈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를 고발한 마르틴 야파- 1750년의 이 기록은 안데스 원주민이 에스파냐 지주의 착취에 항의하기 이해 에스파냐 법 정에 제기한 수많은 고발건 가운데 하나이다. 마르틴 야파, 로스아소게스 출신의 원주민으로, 그 마을에서 마헤오라고 부르는 원주민 신 하 집단의 우두머리 카시케인 돈 마티아스 테넴파과이의 부하입니다.. 저는 마을 이웃인 돈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가 아무 직함이나 권리도 없이 원주민들을 그의 농자인 타르케에 배 치했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위에서 말한 저의 '카시케'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그는 오로 지 자신의 권위와 우악스런 손으로 부당하게 저를 잡아다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몇 년이고 강제로 부릴 권위가 있다고 하면서, 참기 힘든 치욕을 주고 포악을 떨면서 저를 앞에서 말 한 그의 농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저에게 자기 양떼를 돌보게 했습니다. 저는 제 집을 보살필 수도 없었고, 많진 않았지만 씨를 뿌려둔 작물이 다 익었는데도 돌볼 수 없었으며, 제 과일을 딸 수도 없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그것을 만회하는 것이 제 의무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원 주민이고 또 제 '카시케'가 저를 봉사하게 배치했다는 말을 믿었기에 그를 따랐으며, 그를 위해서 1년 2개월 동안 봉사했습니다. 그는 저의 '카시케'의 권리를 침해했고, 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하게 함으로써 저의 권리를 침해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한 해의 공물 가운 데 1/3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물수집관에게 딱 그만큼 빚을 졌는데, 제가 그 사람을 위해 서 일하고 있는 동안 진 빚이므로 반드시 그 사람이 갚아야 합니다. 심지어 그는 첫 달에 2.5 '파네하'의 보리를 주었을 뿐 저에게 월급도 주지 않았습니다. 1년하고도 두 달 동안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 외에는 아무 보상도 없었습니다. 제가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그는 가혹하게 거절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배치된 원주민 하인은 급료나 옷을 요구할 수 없다며 제가 받을 권리가 있는 어깨 망토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저항감과 궁핍한 사정 을 고려해 볼 때,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원주민에게 급료를 빌려 살 수밖에 없었 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빚을 졌는데, 제 집이 걸어서 하루 이상 걸리는 곳에 있 어서 살아 남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욱 잘못된 점은 돈 프란시스 코가 저에게 양떼를 맡겼을 때, 그는 집사장으로 하여금 저에게 매일 씨뿌리기, 풀뽑기 등 농장의 잡일을 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푼도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일 역시 별도로 급료를 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거부하면 즉각 매질과 채찍질이 이 어졌습니다. 그동안 그 농장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제 양떼를, 여러 가지 집안일을 하는 불쌍한 저의 아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 역시 돈 프란스시코 페르난데스의 합법적인 아내인 도냐 페트로나 아바드가 시키는, 털과 면화 잣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집의 여주인으로서 그녀는 제 아내에게 자기가 주는 모든 것을 잣게 할 권 한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맡긴 일은 8일 안에 끝내야 했는데, 만약 마치지 못하면 제 아내에게 처벌 명령이 떨어지고, 집사장은 잔인하게 매질과 채찍질을 해댔습니다. 미천한 원주민이라 해서 이토록 처참하게 다루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우리가 얼마나 시달리는가를 생각한 저는 그 농장에서 도망친 데 대한 복수로 저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양떼를 잃어버린 것을 부당하게 고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 바, 양을 조금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저와 제 아내에게 애 당초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은 이상, 제가 그에게 한푼의 '레알'도 지불할 하등의 의무가 없 습니다. 제가 그의 땅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실, 그리고 원주민이 가축을 돌볼 때 일어 날 수 있는 손실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려면 그외의 어떤 일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양떼가 제 아내의 책임 아래 있었음은 사실이나, 실 잣는 일 도 해야 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또 도와 줄 아들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것들을 안전하 게 돌볼 수 없고, 위험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제가 벌금을 물게 하려고 저의 불쌍한 어머니를 잡아간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가 재판관에게 알리지도 않고 제 어머니를 농자에 죄수처럼 가두어 두었고 확신합니다.... 키토 국립 역사문서 보관소 토착문화관 고대의 잉카를 찾아서 : 안데스에 관한 초창기 고고학 연구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후반 미국의 고고학자 에프라임 조지 스콰이어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측량기사였던 스콰이어 는 고대 유적을 상세히 조사해 정밀한 도면과 측량치를 내놓았다. 그의 여행기에서 발췌한 아래 글에서 그는 고대의 잉카 도로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 유카이의 매혹적인 계곡과 쿠스코 사이에는 고대 도로의 흔적이 수없이 많고 부분부분 완벽 한 모습을 갖춘 곳도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은 키토 방향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과 동일한 특성을 보인다. 이 통로는 폭이 3-3.5m에 가운데가 약간 높고 돌이 깔려 있다. 가장자리는 땅에 단단하게 박인 좀더 커다란 돌들이 경계를 짓고 있다. '푸나'-유카이 계곡 속으로 거 의 1,200m 가까이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를 내려갈 때는 그 내리막길에 팬 좁은 암 붕을 지그재그로 휘감으면서 내려가고 있다. 도저히 발판으로 삼을 것이 없는 곳에는 다듬 은 돌로 높은 지지벽을 쌓았는데, 지은 지 수세기가 지났는데도 온전할 분더러 단단해 보인 다. 높다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늘어선 고산지대와 차고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 가는 넓고 냉랭한 사막지대가 페루의 알토스 지역과 눈덮인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 사이의 상호 연락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아니다. 산악 사이사이에는 깊은 계곡과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으며, 그것들과 번갈아 나타나는 평원은 굽이치는 강과 급류로 뚝뚝 잘리고 있다. 건기에는 눈 녹은 물이 물줄기를 잇고, 우기에는 빗물이 넘친다. 이따금 도저히 건널 수 없 을 것 같은 곳도 있다. 그러나 여행자들은 반드시 건너야 하는 곳이다. 에스파냐인들이 세운 돌다리가 몇 개 있고, 정복 후에 세워진 것도 있다. 그러나 대개 지금도 잉카인들이 설치한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이 택한 길로 건너야 한다. 만약 세계 최고의 석조기술 가운데 몇 개를 남긴 이 고대의 주민들이 아치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 규모나 아름다 움에서 로마의 것들과 쌍벽을 이룰 만한 다리를 숱하게 남겼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주로 현수교에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목재가 없는 나라를 점령하 면서 그들의 후예와 계승자들이 건설한 다리들, 실가지를 꼬아 만든 밧줄로 이 둑에서 저 둑을 연결한 '푸엔테스 데 밈브레스'(실가지들의 다리들)와 거의 같았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둑이 높거나 급류가 절벽과 가파른 바위 사이로 꼬불꼬불하게 흐르는 곳에는 돌기둥을 세운 다음 밧줄을 묶었다. 흙을 쌓아 비탈진 둑길을 만들어 그곳에 접근한 다음 필요한 높이만큼 물위로 들어올려 다리를 세운 곳도 있다. 서너 개의 밧줄로 바닥과 주 지 지선을 엮었고, 그 위에 막대기, 때로는 등나무나 대나무 몇 토막을 가로로 놓은 다음 포도 나무 덩굴이나 생가죽 끈으로 밧줄에 고정시켰다. 더러 두 개의 더 가는 밧줄을 난간 대으 로 양쪽에 설치했다. 이 허약하고 흔들리는 구조물 위로 사람과 동물이 지나다녔다. 더군다 나 동물은 등에 짐을 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고.... 아푸리막은 아마존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서, 높고도 가파른 산악지대를 휘감으며 깊은 계 곡, 아니 거대한 협곡 사이를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 긴 강은 딱 한 군데서만 건널 수 있 다. 엄청난 절벽이 마주보며 서 있는 곳, 그 꼭대기에서 보면 시커먼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 는 곳이다. 둔중한 신음소리가 울리는 바닥에서는 하얀 물줄기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신음소리에서 바로 이 강의 이름 '아푸리막'이 탄생했다. 이것은 케추아어로 '큰 소리로 말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보면 실처럼 가늘게 보이는 이 다리가 길로 이어지는데, 그 길은 산의 얼굴에 가늘고 하얀 선을 남기고 있다. 아무리 대담한 여행자라도 그 길로 내려갈 때는 잠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자는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아침 전에 이 다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여정을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람은 낮 동안 내내 엄청난 기세로 불어대면서 아푸리막 협곡을 쓸고 지나간다. 그 러면 다리가 그물침대처럼 흔들리기 때문에, 이때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에프라임 조지 스콰이어 '페루, 잉카 땅의 여행과 탐험에서 생긴 일들', 1877년 맞추픽추의 발견 : 고고학자인 히람 빙엄(1875-1956년)은 남아메리카의 골동품에 뜨거 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을 탐독한 빙엄은 이 이야기들을 '사 라진 도시'로까지 발전시켰고, 그때까지만 해도 오직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지역에 역 사의 실재성 부여했다. 우리는 풀을 얹어 만든 지붕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오두막을 지났다. 길에서 벗어나 작은 개척지를 지난 다음 강변으로 가 모래더미 위에 천막을 쳤다. 급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거대한 옥돌이 솟아 있는 강 건너편에는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산이 가파르게 서 있었다. 길 옆이기는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자리여서 캠 프를 치기에 아주 적당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오두막 주인인 멜초르 아르테아가 의 의심을 샀다. 그는 만도르 팜파의 땅을 임대해서 사는데, 왜 다른 존경스런 여행자들처럼 우리가 자기의 '오두막'에 머물지 않는지 그 이유가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오랜 친구이자 쿠스코의 지사인 J.J. 누녜스가 붙여 준 한 무장 호위병이 케추아어를 할 줄 알았다. 무장병사 카라스코 상사가 그 여관주인을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이 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우리가 잉카의 유적에 관심이 있으며 마지막 잉카의 궁전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르테아가는 바로 이 옆에 아주 멋진 유적들이 있다고 말했다. 반대편 산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우아이나픽추, 산등서이에 있는 것은 맞추픽추라고 부른다 는 설명을 덧붙였다. 7월 24일 아침, 차가운 이슬비 속에서 새벽이 밝아 왔다. 아르테아가는 찬바람에 몸을 떨 고 있었다. 오두막 안에 박혀 있을 심산인 것 같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올라가기가 힘들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내가 1'솔'(페루의 은화, 50센트)을 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는 결국 가기로 동의했다. 그 돈이면 이 근처에서는 사나흘치 일당이었다. 유적들이 어디 있 느냐고 묻자, 그는 똑바로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그런데 아무도 그 유적들이 특별히 흥미로 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같이 가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박물학자는 "강 근처에 나 비들이 엄청 많은걸."이라고 말했다. 하긴, 새로운 변종들을 수집할 수 있을 게 확실했다. 외 과의사는 옷을 빨고 수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유적에 관한 소문을 조사하고 잉카의 수도를 찾는 것은 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라스코 상사만을 대동하고 10시에 캠프를 떠났다. 아르테아가는 제법 먼 상류로 우리를 안내했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방금 전에 죽은 뱀을 발견했다. 아르테아가는 이 지역이 '독사 천지'라고 말했다.... 45분 가량 걸었을 때 아르테아가가 주 도로를 벗어나 정글로 들어갔다. 강둑이 나타났다. 굉음을 내며 흐르는 급류가 두 개의 돌덩이 사이를 빠져 나가면서 가장 강폭이 좁아 보이는 지점이었다. 그 위로 원시적인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는 여섯 개의 아주 가는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몇 개는 길이가 짧아 등나무 줄기를 맞대어 이어 놓은 것이었다. 아르테아가와 상사는 신을 벗고 아주 조심스럽게 건넜다.... 자칫하다가는 얼음처럼 차가운 급류에 빠져 즉사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네 발로 기면서 한 번에 15cm씩 나아갔다. 반대편에 도착했지만, 만약에 위에서 거대한 물살이 라도 내려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밤새 비가 내렸기 때문 에 강물이 불어나 다리가 금방이라도 물에 잠길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비가 오면 완전히 쓸 려 내려갈 지경이었다. 낮 동안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사실, 며 칠 후에 그렇게 되었고, 다음 방문객이 도착했을 때는 가느다란 통나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급류를 뒤로 하고 밀림이 우거진 정글을 헤치며 강 언덕을 기어올라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가파른 절벽이 눈앞을 막고 섰다. 거기서부터 1시간 20분 동안 우리는 힘겨운 절 벽타기를 계속했다. 네 발로 기어오르는 일이 태반이었고, 어떤 때는 손톱에 온몸을 의지해 야 했다. 여기저기 가는 나무줄기를 적당히 얽어 놓은 사다리가 있었다. 그것 아니고는 도저 히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미끄러운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손으로 잡기도, 발을 딛기도 어려운 곳이 많았다. 아르테아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뱀들이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카라스코 상사는 좋은 군화를 신고 와서 다행이라는 말만 했을 뿐 이럴 말이 없었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때,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드디어 풀로 지붕을 얹은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강에서 2,000피트 높이에 있는 이 오두막에는 몇 명의 마음씨 좋은 원주 민이 살고 있었고, 예상치 못한 우리 일행의 출현에 깜짝 놀라면서도 환영해 주었다. 그들은 조롱박 가득히 시원하고도 맛있는 물을 떠 주었다. 그리고 삶은 감자를 내놓았는데 정말 맛 있었다. 두 원주민 농부인 리차르테와 알바레스가 이 오두막을 자기네 집으로 삼은 것이 최 근의 일인 것 같았다. 그들은 계단식 대지가 많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 곡식을 심 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갑지 않은 방문자들, 군대 '자원자'를 모으거나 세금 걷으러 나 타나는 관리들을 피할 수 있어서 좋다며 웃었다. 리차르테는 자신들이 여기서 수년째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워낙 접근이 어려운 곳 이라 몇 세기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국도가 완공된 뒤에는 정착 민들이 다시 한 번 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두 개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이미 우리가 맛본 그 길이었 다. 다른 길은 '더 힘든' 길로서, 산등성이 반대쪽의 바위투성이 절벽에 있는 위험한 길이었 다. 우리가 건넌 그 원시적인 다리가 제대로 남아나지 않는 우기에는 그 길이 유일한 출구 였다. 나는 그들이 고향에서 '한 달이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 왔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았 다. 나는 카라스코 상사를 통해서, 그 유적들이 '조금만 더 가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 나 이 나라에서는 그런 말을 믿을 만한지 아닌지 절대 구별할 수 없다. '거짓말일 수도 있 다'는 것이 모든 풍문에 따라붙는 각주이다. 따라서 나는 괜히 흥분하지도 않고 행동을 서 두르지도 않았다. 바깥은 열기가 대단했고, 원주민들이 샘에서 떠온 물은 시원하고도 달았 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대접한다며 급히 소박한 나무의자에 깐 부드러운 털인 '폰초' 는 아주 편안했다. 더구나 바깥 전망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거대한 녹색의 절벽이 아래 우루밤바강의 하얀 급류까지 떨어지듯 펼쳐져 있었다. 바로 앞, 계곡의 북쪽면에는 엄청난 화강암 절벽이 2,000피트나 솟아 있었다. 왼쪽으로는 우아이나픽추의 외로운 봉우리가 접근 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절벽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온통 바위투성이 절벽이었다. 그 절벽들 위로는 눈덮인 산들이 구름을 거느리며 수천 피트 위로 솟아 있었다. 우리는 경치를 감상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 시원한 피난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몇 개 의 계단식 대지뿐이었다. 기껏해야 이미 오얀타이탐보와 토론토이 사이의 길에서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는, 몇 채 의 석조가옥이 있는 유적지나 발견하겠지 하는 것 이상의 기대는 품지도 않았다. 드디어 나 는 시원한 오두막의 그늘에서 벗어나 야트막한 산등성이 하나를 돌았다. 멜초르 아르테아가 는 "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며, 자기는 남아서 리차르테, 알바레스와 놀겠다고 했다. 대신 한 어린 소년을 '안내인'으로 붙여 주었다. 물론 상사는 따라 나서는 것이 의무였다. 그로서도 뭐가 나타날지 약간의 호기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오두막을 벗어나 산등성이를 돌자마자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광경과 마주쳤다. 돌로 아름 답게 축조된 계단식 대지들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각각 길이가 수백 피트에 10피트 높이의 계단식 대지가 100개는 되어 보였다. 원주민들도 정글 때문에 최근에야 발견한 듯 싶었다. 그 대지들 위에서 수세기 동안 엄청난 숲을 이루었던 나무들이 베어져 있었고, 한쪽에서는 농사용 개활지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불에 태웠다. 두 원주민의 힘만으로는 너무 엄청난 일이었던지, 나무들이 그대로 넘어져 있고 작은 가지들만 잘려 있었다. 그러나 주의 깊게 파 헤쳐진 태고의 흙은 옥수수와 감자를 넉넉하게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리 흥분할 일은 없었다. 그런 벽들은 우루밤바강 상류의 파삭이나오얀타이탐보 나 반대편의 토론토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어린 안내인 을 따라 가장 넓은 계단식 대지 위를 걸었다. 작은 관개용 수로의 흔적이 있었다. 우리는 사 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숲 쪽으로 길을 잡아 들어갔다. 숲으로 들어간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폐허가 된 집들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잉카 최고의 석조기술로 지은 집들이었다. 수 백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무와 이끼로 뒤덮여 그것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짙은 그림자와 대나무숲, 이리저리 뒤엉킨 덩굴 속에서도 하얀 화강암 벽이 여기저기 드러 나 있었다. 정교하게 다듬은 마름돌들이 정화하게 맞물린 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우 리는 빽빽한 덤불을 헤치고 계단식 대지의 벽을 기어올랐다. 대나무숲이 나타났다. 안내인은 나보다 쉽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하게 돌출한 암붕 아래에서 소년이 불쑥 동굴 하 나를 가리켰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안을 댄 동굴이었다. 그것은 분명 왕가의 묘였다. 이 특이한 암붕 위에는 반원형 건물이 있었다. 부드럽게 경사지고 약간 둥근 외벽은 쿠스 코의 유명한 태양의 사원과 놀랄 정도로 유사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태양의 사원일 가능 성이 있었다. 바위의 자연스러운 만곡을 따른 점하며, 내가 이제까지 본 최고의 석조기술 가 운데 하나와 딱 맞아떨어지는 외벽이었다. 더구나 이 외벽은 또 하나의 벽으로 이어져 있었 다. 특별히 결이 고운 순백색의 화강암 마름돌만을 골라 매우 정성들여 맞춘 벽이었다. 분명 이것은 최고 장인의 작품이었다. 벽의 내부 표면은 네모난 돌쐐기로 깨진 곳도 있었다. 외부 표면은 아주 단순하고 아무 장식도 없었다. 특히 커다란 마름돌로 만들어진 아래쪽의 가로 줄들은 보기에도 견고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 위쪽의 가로줄들은 이 건축물 에 우아함과 섬세함을 주고 있었다. 물 흐르는 듯한 선, 마름돌의 균형잡힌 배열, 가로줄의 점진적인 변화가 결합되면서 놀라운 효과를 내고 있었는데, 구세계의 대리석 사원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보기가 좋았다. 모르타르를 쓰지 않은 덕분에 마름돌 사이에 보기 흉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서로 맞물리기 위해 자란 돌들 같았다. 이 하얀 화강암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이 구조물은 지난 4세기 동안 방문자들을 놀라게 만든 쿠스코 최고의 벽의 매력 을 훨씬 능가했다. 어렴풋이나마 나는 이 벽과 동굴 위의 반원형 사원이 세계 최고의 석조 건축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장소는 무엇일까? 왜 이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 약간의 언질도 준 사람이 없을까? 멜초르 아르테아가조차 관심만 조금 있을 뿐, 리차르테와 알바레스가 농사를 짓고 있는 이 유적지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관심을 끌지 않는 고립된 지역이었으리라. 이어 아이는 돌계단처럼 보이는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경이의 연속이었 다. 우리는 커다란 화강암 벽돌로 만들어진 좁은 계단에 다다랐다. 통로를 따라 걸으니 두 원주민이 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어 놓은 개척지가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고대 아메 리카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흥미를 끄는 두 개의 유적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했 다. 아름다운 백색 화강암 벽들은 어른 키보다 더 큰 거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마법 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말았다. 각 건물은 벽이 세 개만 있을 뿐 한쪽은 완전히 트여 있었다. 주 사원의 벽들은 3.6m 높 이였고, 정교학 판 벽감이 있는데, 다섯 개는 가장자리 벽에 높이, 일곱 개는 안쪽 벽에 있 었다. 가장자리 벽은 마름돌이 일곱 줄로 쌓여 있었다. 안쪽의 일곱 벽감 아래에는 4.2m 길 이의 직사각형 돌이 놓여 있었다. 제사용 제단인 것도 같고, 그보다는 죽은 잉카의 미라를 경배할 때 꺼내 놓던 왕좌인 듯싶기도 했다. 지붕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아름답게 다듬은 마름돌 맨 윗줄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제와 미라가 햇빛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아 래쪽의 커다란 벽돌들을 조사하면서 무게가 10톤에서 15톤은 나갈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을 때, 나는 내 머리를 믿을 수 없었다. 누가 내 발견을 믿어 줄까? 그러나 여행자가 자기가 본 것을 보고할 때 정확성은 별로 중요한 요소로 치지 않는 이 땅에서 다행히도 나는 좋은 카 메라를 가지고 있었고, 마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주 사원의 남쪽에는 작은 광장, 또는 정원이 있다. 광장 동쪽에는 또 다른 놀라운 건축물 이 있었다. 계곡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내다보고 있는 세 개의 커다란 창이 있는 사원의 유 적이다. 이것 역시 잉카의 유적 가운데 독특한 것이다. 디자인과 솜씨에서 이것들과 비슷한 것들이 발견된 적이 없다. 세 개의 유별나게 큰 창은 매우 아름답게 만든 것이었다. 너무나 커서 실용성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고,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의식용 구조물임이 분명했다. 내 가 아는 한 페루 그 어느 곳에도 '세 개의 창을 가진 석조 벽'을 가진 건축물도, 이와 비슷 한 것도 없다. 1620년 페루의 고사에 관한 글을 쓴 페루인 살카마이우아에 의하면 최초의 잉카인 위대한 망코가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 다고 한다. 내가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일까? 그렇다면 이곳은 마지막 잉카의 수도가 아니 라 최초의 잉카의 탄생지가 된다. 양쪽 다일 가능성은 생각할 수도 없다. 또 이 유적지가 탐 푸토코의 필요조건에 맞을 수도 있었다. 탐푸토코는 라라야의 전투에서 패한 후 남부의 야 만 인종으로부터 도망친 문명화한 인종의 피난처로서, 그들은 화살에 맞아 죽은 자신들의 왕 파차쿠티 6세의 시체도 가지고 도망쳤다. 그 시체가 이 반원형 사원 밑의, 돌로 안벽을 쌓은 동굴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히람 빙엄 '잉카의 사라진 도시', 1948년 나스카의 신비 : 페루 남부 해안의 세 계곡-나스카, 이카, 피스코-에 살던 사람들이 이 룬 나스카 문화는 B.C.359년에서 A.D.650년 사이에 그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잉카 이전 사 람들의 역사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자기와 직물도 유명하지만, 나스카는 역 시 지오글립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평원 위에 새겨진 이 거대한 그림들은 지금도 인류학자 에게 갖가지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팬아메라카 고속도로를 따라 리마에서 남쪽으로 가다 보면 페루의 해안을 따라 강 유역이 펼쳐지고, 이윽고 나른한 기운이 돌고 있는 나스카에 닿는다....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농업 의 중심지로서 에스파냐인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리고 이카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있던 오 래 된 도시이다. 그 넓은 유역은 면화와 옥수수, 다른 곡물들이 녹색의 평원을 이루고 있다. 그 끝에 장엄한 안데스 산맥에 줄을 맞추듯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나스카가 세계지도에 오른 것은 생산물 때문이 아니다. 마을 북서쪽으로 폭 15km 에 이르는 다소 평평한 대초원이 있는데, 이 삼각형의 지형에 놀라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 그림과 선, 길, 사다리꼴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이 시간을 초월한 표면에 새겨져 있는 것 이다.... 지상회화라 불리는 이것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동물'의 그림이다. 원숭이, 거 미, 여우 등의 환상적인 그림들이 대초원 북동쪽의 작은 구역에 집중되어 있다.... 땅에서 보면 그 크기가 수십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하늘에서 봐야만 그 경이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대초원 위나 주변의 낮은 언덕에는 수많은 선(간격이 좁고 곧은 선), 사다리꼴(넓어졌다가 네모로 끝나는 대로)이 뻗어 나가고 있다. 이것들이 동물그림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스카 연구자들은 이 두 종류가 같은 문화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북쪽과 남쪽 먼곳에서도 선이 발견되고 있지만, 나스카처럼 섞여 있지는 않다. 동물 그림은 종교적, 또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40년 가까이 이 그림들을 연구하고 있는 마리아 라이시는 그것들 가운데 최소한 몇 개는 별자리를 나타낸다고(예를 들자면, 거미는 오리온자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단서는 없다. 이 그림들이 영적인 의식에서 그 선을 따라 걷거나 특정한 가문과 연관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그림들을 전체적으로 다 보려면 하늘로 올라가야 하다는 점에서 원주민들 이 기구를 탈 줄 알았다느니, 또는 고대에 나타난 우주인들이 그린 것이라느니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든 사람들이 전체를 다 보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은 의외의 다른 방식으로 이것들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동물그림들의 의미와 제작법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안데스와 해안의 문화는 정교한 직물 디자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형태를 확대하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다. 무늬를 만드는 방식 역시 간단했다. 사막의 한 지역에서 바위들을 제거하고, 그것들을 경계 선을 이루게 쌓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형태를 밟거나 없애지 못하게 사막의 니스라고 불리는 갈색의 물질을 얇게 발라 놓았다. 이렇게 해서 아래쪽에는 크림색이 도는 분홍색 토양이 드러났다.... 이 선들은 천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유망하다.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사다리꼴은 월 출과 월몰의 양 극단을 나타낸다고 한다. 반대로, 그것들을 토착 가문이나 대초원을 가로지 르는 물의 흐름과 연관짓기도 한다. 그것은 사막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인류학자인 퍼시스 B. 클라크슨은 그 선들을 따라 걸으면서 어느 거시 다른 것 위를 지나 는지 확인하면서 제작 순서를 찾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물그림 지역에서는 라이시가 모든 그림들을 다 쓸어 버리는 바람에 연대를 측정할 단서가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 동물 그림들이 나스카 시대(대략 B.C. 600년-A.D. 500년)로 추정된다는 단서가 그 문화의 항아리 에 그려진 동물그림과의 유사성 속에서 발견될 따름이다. 그녀의 연구가 끝날 때, 그녀가 이 지오글립스들이 언제 만들어졌고 그 창조의 문화적 기반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기를 바란 다. 페루 원주민의 천문관은 북반구의 중동부 유럽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 매우 중요 한 점은... 적도 남쪽에서 보이는 은하수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페루 의 천문학에서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기본방위가 아예 북동, 남동, 남서, 북서이 다. 바로 은하수가 지평선과 교차하는 선이 기본바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밝은 별로 구 분되는 일반적인 별자리 외에도 은하수의 어두운 지역에 의해 구분되는 별자리가 또 있다. 역법상으로는 태야 외에도 태양과 출몰 시간이 같은 특정한 별자리(특히, '창고'라고 불린 플레이아데스 성단) 역시 중요했다. 나스카 선의 천문학적 배치를 연구할 때는 이 모든 사 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들의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그 선들은 안데스 세계 최고의 신비 가 운데 하나이다. 운이 좋아서 하늘에서 내려다보게 된 사람에게는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윌리엄 E. 쇼크로스 (사막의 신비-나스카의 선) '하늘과 망원경(Sky&Telescope)' , 1984 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