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 화석 인류를 찾아서 지은이: 에르베르 토마 Herbert Thomas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김영임 천문학자들은 지금부터 6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수소를 다 연소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면 태양은 팽창하여 거대한 붉은 별이 되어 지구를 삼켜 버릴 것이다. 그전에 인 간이 우리 은하계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인간은 틀림없이 멸망할 것이다. 수십억 년이라는 세월에 비춰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제 시작인 셈이다. 제1장 태초의 인간 여섯 번째 날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에서 유일신 사상이 대두되면서 오랫동안 <창세기>에 나오는 성경말씀은 우주창 조에 대한 유일한 설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창 조주의 거대한 계획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사야 사람들 은 자연을 관찰한 자료를 종합하여 성경말씀과 다른 해석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물과 지구과학 분야에서 몇 차례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후, 인간은 창조 주가 단숨에 창조해 낸 창조물이 아니라, 다시말해 인간이라는 종은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처럼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인류와 오늘날의 커다란 유인원은 원래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것은 19세기 가 낳은 충격적인 개념이었다. 그때부터 근대 생물학은 "인류와 우리의 사촌 유인원은 조상이 같으므로 유사한 특성을 공휴하고 있다. "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와 침팬지의 유전인자가 99%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를 침팬지와 구분해 주는 나머지 1%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기원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인간과 유인원이 마주치다 B. C. 460년경 카르타고의 항해가 하논은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탐험하기 위해 50 명이 노를 젓는 갤리선 60척을 이끌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오늘날의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항해를 계속했다. 그 지역의 내륙을 통과하며 군인들은 인간의 머리를 지닌 이상 한 털북숭이 동물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고릴라라고 부른-아마도 침팬지였겠지만-이 동물들 가운데 세 마리를 사로잡아 그 가죽을 카르타고로 보냈다. 로마의 저술가인 플 리니우시가 전하는 대로,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했던 B. C. 146년에도 이 고릴라의 가죽이 아스타르테 여신의 신전에 모셔져서 숭배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3세기 후 그리스의 의사 이자 해부학자인 갈레노스는 최초로 원숭이를 해부했다고 한다. 그 원숭이들은 긴꼬리 원숭이와 비비였는데 그는 이것들을 인륭의 '코믹한 복사판'으로 생각했다. 하논의 '고 릴라' 외에는 꼬리가 긴 털북숭이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이것들은 이미 인기를 끌었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유인원과 인류가 같은 과에 속하는 동물처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인류가 인류가 유인원에서 유래되었는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 고, 유인원이 인류의 변형체가 아닐까 하는 점만 궁금하게 여겼다. 이런 생각은 18세 기 후반가지 이어져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루소는 그에 대한 장문의 논평을 했다. 그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와 우리가 친족관계라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발 견된 지 100년이 채 안 된 오랑우탄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렇게 썼다. "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것들이 사람인지 아닌지가 밝혀질 것이다." 그로 부터 몇 년 후인 1766년,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프랑스의 유명한 박물학자 조르주 뷔퐁은 이 '철학자의 백일몽'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그는 인류에 가장 가까운 유인 원이 오랑우탄과 유인원에 가장 가까운 인류인 아프리카 남부의 호텐토족을 해부하여 비교해 보았던 것이다.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초 최초로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론들이 논 리적인 연관성을 지니지 않은 채 중구난방으로 전개되엇다. 자유사상가와 철학자, 박 물학자, 고전학자, 유물애호가 들은 다양한 혁신적인 개념들을 도입했는데, 이러한 주 장들은 필연적으로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변적이었던 것이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는 <성서>의 연대기를 기준으로 세상은 B. C. 4004년 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해 내는가 하면,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제각기 다른 결론을 내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프랑스의 작가 시라노 드 베르즈라 크,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그리고 조르주 뷔퐁 같은 이들은 천지창조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비록 그 사실을 과 학적으로 증명해 내지는 못했지만 우주는 수십만, 혹은 수억 년 전에도 존재했을 가능 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616년 이탈리아의 철학자 루칠리오 바니니는 인류가 유인원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 을 폈다가 3년 후 툴루즈에서 산채로 화형당했다. 그다음 세기에 프랑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쥘리앙 오프루아 드 라 메트리는 인간과, 식물을 포함한 '하급생물'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사실상 인간이 유인원에서 유래되었다는 개념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에서 진화론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다윈은 종은 자연선택을 통해 다른 종에서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호모 딜루비이 테스티스' 이런 이론들이 전개되던 시기에 많은 화석골- 당시에는 '석화물'이라고 불렀음-들이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계몽시대 초기에 스위스의 의사이자 (성서)에 나오 는 '노아의 홍수'의 열렬한 신봉자인 카논 요한 야콥 쇼이히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는 콘스탄츠 호수 근처 외닝겐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편암 석판에서 '인류의 골격'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물에 휩쓸려 갔음에 틀림없는 가련한 인종의 희귀한 유물' 가 운데 하나라고 묘사된 이 발견물은 '호모 딜루비이 테스티스(Homo diluvii testis, 노아 의 홍수를 목격한 증인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쇼이히처는 1708년 취리 히에서 출간한 (물고기의한탄과 불평)이라는 흥미진진한 물고기 화석연구서에 이 발견 물을 소개했다. 교회는 노아의 홍수를 증명해 줄 쇼이히처의 주장에 열광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쇼 이히처는 두 번째 발견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독일의 알트도르프 근방의 교사대 아래 에서 검고 빛나는 척추뼈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에도 깊은 통찰력을 지닌 몇몇 박물학자들이 쇼이히처의 발견물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한 세기가 지난 뒤에야 마침내 이 화석들의 정체가 확인될 수 있었다. 1811년, 프랑스의 위대한 박물학자이자 고 척추동물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조르 주 퀴비에가 유명한 외닝겐의 골격이 보관되어 있는 네덜란드의 하를렘을 지나게 되었 다. 퀴비에는 등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아의 홍수'의 증인으로 추정되는 이 뼈들이 사실은 거대한 도룡뇽의 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의사인 쇼이히처가 사람의 뼈 와 거대한 도룡뇽의 뼈를 혼동했다니! 이것은 아무리 해도 믿어지지 않은 사실이다. 퀴비에가, 외닝겐에서 발견된 골격이 거대한 도룡뇽의 뼈라고 정확하게 판정을 내일 수 있었던 것은, 그전엔 토스카나 대공의 자연사 수집품을 구경하면서 그것과 비슷한 표본을 관찰한 경험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것들은 해양파충류의 어룡의 것으로, 어 룡의 존재는 얼마 전에 영국의 학자들이 증명해 보였다. "인류의 화석은 없다. "(퀴비에) 19세기 전반에 퀴비에는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 여러 가지 신기한 동물들-퀴비 에는 몽마르트를 의 석고 채석장에서 발견한 화석골을 조합하여 이 동물들을 원형대로 복원한 적이 있다-이 먼 옛날 파리 지역에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그는 파리의 대중과 동시대인의 눈에 신으로 비쳐졌다. 이 뛰어난 과학자가 죽기 직전인 1831년 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당대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서정적인 물 구로 퀴비에를 '금세기 최고의 시인'이라 칭송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는 19세기가 겨우 30년 경과했을 뿐인데... 퀴비에는 탁월한 과학적 통찰력을 지녔던 인물이었지만,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론에 집착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다라서 천변지이설과 종의 불변성을 내세우며 천변지이가 일어나면 전시대의 생물은 거의 절멸되고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총동원하여 고인류의 존재를 부정했지 만, 그들이 해결하려 했다. 그는 고인류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그들이 "적어도 우리나 라에서는 발생하지는 않았다. "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 퀴비에는 당시로서는 이치에 들어맞는다고 여겨진 논거를 들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이론의 근거로 몽마르트르의 석고 채석장에서 발견된 동물들의 뼈 가운데 인류 나 유인원의 것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 을 몰랐을 것이다. 이 동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석고의 퇴적물은 4, 000만년도 더 된 오랜 옛날의 것이다. 따라서 이 동물들이 살던 시대에는 당연히 인류와 유인원은 나타 나지 않았다. ) 둘째로 그에게 태초 인간의 것이라고 가져온 뼈들은 모두 코끼리나 거 북, 도룡뇽, 고래, 해양파충류 같은 다른 동물들의 것이었다. 린네의 대담한 생각:인류는 커다란 유인원과 비슷하다 한편에서는 동물의 분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1735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카를 린네는 <자연의 체계>를 발간했 다. 오늘날에도 쓰이는 이 체계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속의 이름과 그뒤에 오는 종의 이름, 이 두 가지 라틴어명을 갖는다. 예를 들면 지혜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 스'에서는 호모는 속이고 사피엔스는 종이다. 모든 사람들은 동종번식을 할 수 있으므 로 당연히 사람은 같은 종에 속한다. (물론 종을 결정하는 이른 기준이 화석에는 적용 될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인류의 유골을 분류하고 종을 결정하려면 다른 기 주을 사용해야 한다. )하나나 그 이상의 진화의 특성을 공유하는 비슷한 종 전체는 같 은 속에 속한다. 그러므로 개와 늑대, 여우, 자칼은 개속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속에 속 한다. 린네의 대담한 생각 가운데 하나 인류를 긴팔원숭이를 비롯한 커다란 유인원과 비슷하 다고 분률한 것이다. 그는 인류와 긴팔원숭이가 어떤 동족관계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 고 그 대신 창조주의 구상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 스웨덴 학자는 이 부류에 영장류 (primate)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연의 위계에서 제1군에 있다고 보았 기 때문이다. 제2군에는 다른 포유동물이, 제3군에는 파충류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그 명칭도 primate, secundate, tertiate가 되었다. 현대 분류학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첫 번째의 영장류로, 이 목에는 원원류(안경원 숭이, 늘보원숭이, 여우원숭이)와 유인원류(신구 대륙의 모든 원숭이와 유인원, 인류) 가 포함된다. 분류: 생물 사이의 관계의 역사 인류를 영장목에 놓고 인류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려면 먼저 현대의 생물 분류 용어에 관한 원리를 몇 가지 이해해야한다. 생물의 분류는 계통상의 유사성을 기초로하여 수많은 생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이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어떤 유사성 들은 아무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나비와 제비, 박쥐의 날개는 곤충류나 조류, 포유류에서 독립적으로 보이는 기관으로, 나는 데 적응하다 보니 생긴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유사성들은 처음 상태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특성에서 나온 것들이 다. 초생이라고 알려진 이러한 특징들은 서로 먼 관련만 있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다섯 손가락과 발가락은 네발 척추동물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 다른 특성들-초생에서 멀어짐에 따라 진화, 또는 퇴화로 알려진 특성들-은 영장목을 다른 포유류와 구분케 한다. 뇌의 발달과 그에 따른 비구부의 단축, 입체적인 시각, 다 른 손가락와 마주볼 수 있는 엄지 손가락, 가늘고 날카롭게 굽은 발톱을 대신하는 평 평한 손톱 등을 그런 예로 들 수 있다. 영장목의 진화된 특성의 단계를 높여가면 불가피하게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만나게 된 다. 예를 들어 두 발로 걷는 보행형태라든가 대뇌의 브로카중추와 같은 특정 부위의 발달이 그것이다. 대뇌의 발달과 함께 머리가 커지고 후두가 아래에 위치하게 되면서 우리는 음절로 이루어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된 특성은 과의 관계를 알려 주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원래의 특성은 기껏해야 먼 동적관계임을 알려 주고 최악의 경우 불분명한 유사성만을 나타낸다. '붉은 귀부인', 최초의 크로마뇽인 표본 1820년까지만 해도 진짜 인류의 유물은 드물어, 독일 남부 가일렌로이트에서 발굴된 유골 몇점, 영국의 골동품 수집가 존 프레어가 영국 서퍽에서 절멸된 동물의 뼈와 함 께 발견한 부싯돌로 만든 도끼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이것들도 주목받지 못하거 나 잘못 이해되어 관심을 끌지 모했다. 그러나 1820년 이후 동굴에서 발굴된 유물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822년 윌리엄 버클랜드 경은 웨일스의 파빌랜드라는 동굴을 파헤쳐 조사하다가 황토에 싸인 해골을 발견했다. 얼마 후 이 '붉은 귀부인'은 최초의 크로마뇽인 표본으로 밝혀졌다. 곧 뒤를 이어 많은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나르본 출신의 약제사 폴 투르날은 발굴 결과 프랑스 남부 몇 명 동굴에서 절멸된 동물의 뼈와 섞여 있는 인류의 유골을 발견했다. 1830년 벨기에의 박물학자 필리프 샤를 슈메를링은 네안데르탈인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증거물을 최초로 찾아 냈다. 그는 벨기에 동부 리에주 근방에서 어린이의 두개골 조각 을 발굴한 것이다. 이런 인류의 유골들은 정말 태고 때의 것인데도 현생 인류와 구분되는 특별한 해부학 적 특징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유골들이 지닌 심대한 의미를 간과하고 말았다. 고고학과 지질학이 여러 면에서 중첩되고 또한 인류의 화석과 절멸된 동물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이 확실한데도, 여기에서 인류가 출현한 시대에 대한 결론을 유추해 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퀴비에는 사실 인류가 유인원과 같은 시기에 출현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인원의 화석은 그때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유인원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이것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한 단계 높게 전개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플리오피테쿠스 안티쿠스 1820년경 파리 라탱가의 식물원에서 퀴비에가 개설한 공개 강습에 참가한 사람들 중 에는 에두아르 라르테라는 젊은이도 있었다. 그는 부친의 소원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 해 파리로 법학을 공부하러 왔지만, 결국 인류에 관한 고생물학 창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단 공부가 끝나자 그는 고향인 가스코뉴로 돌아가 오르네장성에 머물렀다. 이 오래 된 대저택의 창문 밖으로는 상상 언덕이 멀리 보였다. 19세기에 자주 있었던 우연이 이번에도 발단이 되어 이 언덕은 프랑스 고생물학의 요지가 되었다. 1834년, 한 양치기가 상상 언던의 비탈 아래에서 발견한 커다란 이빨을 가져와서 라 르테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그곳에 가면 삽을 들이대는 족족 이 같은 뼈들을 바구니 가득 모아 담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라르테는 이 이빨이 절멸된 마스토돈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대대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가 수많은 포유동물 의 화석골들을 발굴해냈다. 그 가운데 하악골 하나가 유난히 라르테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최초로 발견된 유인원의 화석이었다. 상상 언덕에서 있었던 발굴작업의 결과는 1837년에 발표되었다. 나중에 플리오피테쿠스 안티쿠스(Pliopithecus antiquus)라고 명명된 이것은 오늘날 동 남아시아에 사는 긴팔원숭이와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저명한 프랑스의 동물학자 에테 엔 조프루아 생틸레르는 이번 발견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이것이 '인류의 발생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라르 테와 생틸레르는 유인원의 화석이 발견되었으므로 인류의 화석도 틀림없이 발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약20년이 지난 2856년 라르테는 또 한 번 행운과 마주치게 된다. 한 아무추 어 박물학자가 프라스 서남부 생고당의 교외에서 발견한 다른 유인원의 하악골을 가져 온 것이다. 나중에 라르테가 드리오피테쿠스(Driopithecus)라고 명명한 이 새로운 화 석의 이빨은 오늘날 커다란 유인원이나 심지어 인류의 이와도 유사하게 생겼다. 이처 럼 유인원의 화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인류의 화석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 성은 더욱 높아졌다. 고대 켈트족에서 노아의 대홍수 이전 사람가지 투르날과 슈메르링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인류가 선사시대 때부터 존재했다고 확신 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학계의 견해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엇다. 당시 학계의 인정 을 받게 된 것은 뜻밖에도 아마추어인 자크 부셰 드 크레브쾨르 드 페르트가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여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덕분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부셰 드 페르트는 프랑스 북부 아브빌에서 세관원장을 지내며 문 학적인 재능을 다방면에서 발휘했다. 게다가 페르트는 고대 유물에 깊은 애정을 지니 고 있었다. (당시가 낭만주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 ) 페르트는 석기를 찾 아 솜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피카르디 지방의 백악질 고원을 힘든 줄도 모르고 부지런 히 돌아 다녔다. 1835년에서 1846년 사이에 그는 그 지역에 있는 단구의 오래된 충적 층에서 1, 000여 점의 부싯돌류 석기를 발견했다. 1847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여<켈트족과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인류의 유물>이라는 저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저서에서 특히 인류가 남부 지역에 서 살던 코끼리의 조상 매머드와 에트루리아 황소, 고대의 들소와 코뿔소 등 커다란 고대 동물들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었다는 주장을 폈다. 페르트는 당시의 전통적인 시대 분류대로 노아의 홍수에 따른 지구의 대격변을 기준으 로하여 세계의 역사를 두 시대로 구분하여 이것을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면서, 그의 위대한 저서의 첫 권에서 선사시대를 구석기시대(타제석기 문화)와 신석기 시대(마제 석기 문화)로 세분하였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그후로부터 20년 후 존 러보크가 만들 어 낸 것이다. 페르트의 저서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번득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예술의 기원에 대 한 잘못된 인식도 담겨있다. 예를 들면 그는 자연의 힘에 의해 이상한 모습을 지니게 된 돌을 보고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는 무신론자들에게는 대환영을 방았지만, 프랑스 과학원과 비명문학원 (프랑스 5대 아키데미의 하나로, 주 로 사학, 고고학, 문헌학의 학자들로 구성됨:역주)에서 철저히 배척당했다. 그는 이런 결과에 실망하기는커녕 10년 후에 <켈트족과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인류의 유물>의 제2권을 펴냈다. 페르트는 제2권에서 제1권에 쏟아진 여러 가지 반대의견들 을 다뤘다. 인류의 화석이 절멸된 종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라는 의견이 마침내 받아들여지다 많은 과학자들이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새로운 생각은 점차 지지자들을 확보하 게 되었고, 그중에는 에두아르 라르테나 에테엔 조프루아 생틸레를 같은 명망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상황은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부셰 드 페르트가 유물을 발굴한 바로 그해인 1859년 파리의 문화인류학회에서는 유물의 감정을 위해 몇 차례 회의를 열었다. 같은 해 영궉의 과학자들은 이 해로운 의견에 지지를 표했다. 그들의 저숙은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스코틀랜드의 고생물학자 휴 팔코너와 영국의 고고학자 존 에번스, 영국의 지질학자 조지프 프레스트위치, 찰스 라이엘은 박편석기가 절멸된 동물들과 같은 시대에 살던 이류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대격변설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자들-퀴비에의 시대에 뒤진 견해에 공감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영향력을 잃어 갔다. 19세기 다위의 진화론과 같은 새로운 이론이 대두딤에 따라 선사시대 인류의 유골과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했졌다. 인류가 커다란 유인원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제2장 인류: 털없는 원숭이인가, 아니면 작은 신인가? 19세기가 지나며 <성서>에 기반을 둔 노아의 대홍수 이론은 인류의 기원에 관한 더욱 과학적인 접근에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300년이 넘는 동안, 이단자로 여겨진 사 람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치를 전개해도 화형에 처해져 왔다. 그러나 교의의 권위 가 약해짐에 따라 인류가 선사시대에 출현했다는 설이 주의를 끌게 되었다.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에 다한 반동으로 신학에 기반을 둔 옛 이론이 다시 부상하기도 했 다. 실제로 인류의 커다란 유인원이 밀접한 친족관계에 있다고 해서 인류가 동물을 똑같이 닮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같은 조상에서 유래한다는 이러한 진족관RP는 동물을 분류 하다 보면 나타나곤 하는데, 이런 분류는 단지 우리의 계통을 반영한 것일 따름이다. 인류는 진화해 오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성인 문화 를 전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왔다. 노벨상을 수상한 세포유전학자인 프랑수아 자코 브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는 점차 '학습할 수 있게 프로그래밍'되었다. 따라서 이 프로 그램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전이는 물론 내적 행동약식을 거의 전부 복사해 한 세대에 세 그 다음 새대로 전해 준다. 인류는 동물계에 속하는가? 인류가 동물계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프랑스 제2제정기(1852~1870) 동안 프랑스 고고학회 회의의 격렬한 토론주제가 되어 회원들을 흥분시켰다. 자연사박물관의 고고 학 교수이자 고고학회 회장인 장 루이 아르망 드 카트르파주는 프랑스의 다른 박물학 자들과 함께 동물계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인류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의 근거로 인간만이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고, 내세와 잘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는 점을 들었다. 카트르파주는 진화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 종이 다른 종에서 유래될 수 있다는 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생물의 분류가 생물 발생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햇 던 것이다. 그에게 생물의 분류는 용어를 쉽게 하고 추리를 가능케하는 편리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동물계와 분리하여 인류만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트르파주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인류학자의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도 이런 인간 중심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블루멘바흐는 이미 1791년에 두 손을 쓰는 동물(인류) 과 다른 네발동물들을 비교 연구했다. 독일의 동물학자 요한 크를 일리거 같은 다른 학자들도 '에엑타(Erecta, 직립보행에서 온말)'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영국의 고생물학 자인 리처드 오언은 고등 두뇌를 지닌 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가 동물계에 속한다 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라지 않은 조상 1809년 프랑스의 과학자 장 밥티스트 드 모네 드 라마르크는 <동물철학>을 출간했다. 그는 이 예언서적인 저서에서 진화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상세히 기술하여 새로 형질 의 획득을 설명해 주는 이론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론이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을 들을까봐 조심스럽게 진화론을 전 개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당시 프랑스의 hgkd제는 퀴비에가 주창하여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특수창 조설(종의 기원이나 물질의 발생은 진화에 따른 것이 아니고 조물주의 특후한 창조에 따른 것이라는 설:역주)을 옹호하는 데에 자신의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860년 영국의 행물학자로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지닌 토머스 헉슬리는 그의 유명한 동료인 다윈의 견해를 옹호하는 명강연을하여 옥스퍼드 의 주교 윌버포스의 분노를 샀다. 주교가 그에게 그의 조부와 조모 가운데 어느 쪽이 원숭이의 혈통을 타고났냐고 물었다. 이에 헉슬리는 통렬하게 반박했다. 그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과학적인 문제의 논점을 흐려 놓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시끄럽고 경박한 지식인보다는 정직한 원숭이가 할아버지인 편이 낫다고 대꾸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주교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원숭이에서 유 래되었다는 견해에 모욕감을 느꼈다. 동굴의 보물 1856년에는 최초로 유인원의 화석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최초로 인류의 것으로 인 정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해 8월 뒤셀도르프 부근의 네안더 계곡에서 대리석을 캐던 광부들은 20m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조그만 동굴을 발견했다. 그들의 발 밑 에는 놀랍게도 진흙으로 두텁게 싸인 사람의 뼈가 머리를 동굴 입구 쪽으로 두고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광부들은 전에도 몇 차레 근처 동굴에서 동굴에서 곰의 뼈를 발견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곰의 뼈이겠거니 생각하고 이 뼈에 특별히 주의를 기월이지 않고 내다 벼렸 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채석장의 소장은 인근의 엘버펠트 마을에서 자연사를 강 의 하는 친구인 풀로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풀로트는 이 뼈가 인류의 화석골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냈다. 그는 완전히 부서진 이 뼈무더기에서 정수리와 대퇴골, 상환골, 척골, 쇄골, 견갑골과 골반 반쪽, 늑골 몇 개를 찾아냇다. 풀로트는 낮은 두 개관, 숙 들어간 이마와 특히 두드러진 돌출된 눈썹뼈등 두개골의 원시적인 모습에 놀랐다. 그는 또한 뼈의 내벽이 대단히 두꺼운 것에 흥미를 갖고 이 뼈의 주인은 근육이 대단히 발달했다고 결론 내렸다. 풀로트는, 1848년 영국의 과학자 오언이 가봉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보내 온 두 개의 머리를 조사한 결과 발표한, 돌출된 눈썹뼈는 고릴라의 특징이라고 지적했던 것 을 기억해냈다. 풀로트는 자신이 커다란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단계인 인간의 먼 조상 의 화석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네안데르탈인: 수십 년간 이어진 논쟁 화석이 노동자들의 손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진위 여부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원시 네안데르탈인의 문제는 온갖 상상력이 난무한 1857년의 카셀 회의에서 격력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지능이 낮은 독거성 동물의 뼈라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과학자 프란츠 프뤼너베이는 그것이 틀림없이 켈트족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은 그 것이 1814년 그곳에서 죽은 러시아의 코사크족과 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사실 체르니 체프장군이 지휘한 코사크 대가 그 근방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본에서 온 해부학자 헤르만 샤프하우젠만이 풀로트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는 이 인류 의 두개골을 손에 들고 바라보면서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가슴 벅찬 흥분을 느꼈다. 그 가 보기에는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누가 뭐래도 유인원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오 래 전부터 진화론을 지지해 온 샤프하우젠은 이 화석이 인간이 동물에서 유래했다는 증건물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한 병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루돌프 피르호의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드디어 피르호가 발표를 했다. 그는 거것이 정상인이 아닌, 구루병과 관절염에 시달려 기형이 된 백치 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화석뿐 아니라 동굴가지 세밀하게 조사한 찰스 라이엘은 이것이 호모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류의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조수인 윌리엄 킹은 1864년 그것 에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실 제로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거의 30년간이나 뜨겁게 이어졌다. 1866년 벨기에 디낭 부근의 라놀레트에서 네안데르탈인의 하악골이 발견되자 네안데 르탈인은 비정상적인 사례에 불과하단느 가설이 신뢰를 잃게 되었다. 라놀레트에서 발 견된 하악골에는 하악융기가 없다는 사실- 당시 그것은 유인원의 특징으로 간주되었 다-은 즉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에르네스트 T. 아미는 라놀레트와 지브롤터(1848년), 네안데르탈 계곡에서 발견된 것들이 모두 동일한 종일 뿐만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동일한 인종에 속하며, 이들이 최초의 화석인류라고 주장했다. 1886년 벨기에의 스피에서 앞의 것들과 동일한 특징을 지난 두 구의 화석-하나는 거 의 완벽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그 이후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들도 네안 데르탈인이 백치이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며, 우리 이전에 다른 종류의 인류가 정말로 지구 위에서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른바 '크로마뇽 인종' 1868년 프라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바의 레제이지 마을 근처 크로마뇽 바위뒤에서 다 섯 구의 화서골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인류가 존재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고생물학자안 에두아르 라르테의 아들로, 문교부 장관의 위임을 받아 크로마뇽의 탐사 에 참가한 루이 라르테의 말에 따르면 유골의 위치와 유물의 배치로 보아 이들은 매장 된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인의 특징을 지닌 이 화석골들은 발견된 지 6년만인 1874년에 이른바 '크로마뇽 인종(Co-Magnon race)'이라는 새로운 인종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구석기 시대-구석기시대는 2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 지 이른다-의 도구들과 함께 발견되었지만, 이 크로마뇽인들-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 인의 뒤를 잇는다-의 유물은 학자들의 의심을 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프랏의 선사 연구가 가브리엘 드 모르티예로, 그는 구석기시대에 사람을 매장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1870-18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으로 독일을 혐오하게 된 프랑스인들은, 원인의 흔적이 많은 미개한 네안데르탈인이 독일에서 발견된 데 반해 훨씬 달달한 얼굴 모양에 세련되고 우아한 특징을 지닌 인종이 자기 나라에서 발견되 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주로 부셰 드 페르트가 수집해 간 이 오래된 부싯돌류의 석기는 과연 누가 만든 것인 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 석기의 제작자를 추적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아직 확보되지 못했다. '사라진 연결고리'가 아시아에 살았는가? 인류가 유인원에서 유래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커다란 유인원과 인류 사이에 존재했을 사라진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1868년 에른스트 헤케은 그의 인류계보에 파푸아인을 가장 아래에 놓았다. 그는 파푸 아인과 멜라네시아인을 자신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설정한 호모 프리미게니우스(Homo primigenius)에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했다. 인류의 태아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긴 팔원숭이의 태아가 닮았다는 사실에 집착한 헤켈은 오늘날 그 일부가 인도양 아래로 가라앉은 대륙에 '에덴 동산'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지역은 영국의 학자 필립 리틀리 스클래터가 제시한 '레무리아'에 해당한다. 헤켈과는 대조적으로 토머스 헉슬리와 찰스 다윈은 각각 그들의 명저 (자연에서 차지 하는 인류의 위치)(1863)와 (인류의 유래)(1871)에서 그들이 보기에는 침팬지와 고릴 라가 인류와 가장 닮았으므로 우리의 선조는 아시아보다는 아프리카에 살았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당시는 자바에서 화석인류가 발견되기 얼마 전이므로 헤켈의 견해가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발견을 고대하던 헤켈은 이 사라진 연결고리의 명칭을 -평소의 대담함을 발휘하 여-말없는 원인이라는 뜻을 지닌 '피테칸트로푸스 알랄루스(Pithecanthropus alalus)' 라고 붙였다. 외젠뒤부아, 원인의 추적에 착수하다 그 시기에 헤켈의 열렬한 독자이며 숭배자인 네덜란드의 젊은 해부학자 외젠 뒤부아가 의료부대에 지원하여 1887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수마트라와 자바를 항해했 다. 그는 인류의 조상이 긴팔원숭이에서 유래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이런 원인의 흔 적을 찾겠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수마트라섬에는 뒤부아가 알고 있었듯이 긴팔원숭이와 오랑우탄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바에는 긴팔원숭이만이 있었다. 수개월에 걸친 철저한 조사 끝에 뒤부아가 호미니드(hominid:시대나 종에 장관없이 인 류를 지칭하는 중립적인 용어)의 유물을, 더욱이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예상치도 못했 던 자바섬에서 그렇게 많이 찾아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몇 달 동안 그 가 1만 2, 000점이 넘는 화석뼈를 수집한 것은 사실이다. 1891년 이미 하악골 조각과 그와는 별도로 이빨을 찾아낸 그는 자바 중남부 솔로강 연안의 트리닐 마을에서 이빨 과 함RP 희미하게나마 인류의 그것과 같은 형태를 지닌 두개골을 발견했다. 그 두개골의 이마는 낮고 푹 들어갔으며, 돌출한 눈썹뼈가 두드러졌다. 그것을 위에서 보면 안와 뒤에서 폭이 현저히 좁아졌다. 이에 놀란 뒤부아는 이상하게도 이 유골을 침팬지와 연결시키려 했다. 당신 침팬지는 아트로포피테쿠스 알랄루스 (Anthropopithecuc alalus)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중에 트리닐에서 탐사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는 직립보행에 적합한 형태인 대 퇴골을 발견했다. 이 해골의 두뇌용랼이 놀랍게도 인류와 유인원의 중간정도-어쨌든 유인원보다는 용량이 크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인류와 유인원을 연결 하는, 그 유명한 헤켈의 사라진 연결고리를 찾아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그 것의 이름을 직립원인 이라는 뜻을 지닌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아고 다시 지어 주었 다. 자바 원인의 발견으로 인류를 대상으로 한 고생물학이 탄생하다. 이 발견물의 중요성 이 널리 인식되고 발견자인 뒤부아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 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자바에서 발견한 화석을 인류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 었지만, 유인원의 화석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르호의 견해를 따르 면 안와 뒤에서 두개골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인류에게는 찾아볼 수 없고 유인원에게 만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뒤부아는 자바 서 발견된 이상한 형태의 황석뼈는 분명히 유인원에서 인류로 넘어가는 자장에 쏟아지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의기소침해지고 비탄에 빠진 그는 몇 몇 방문객에게만 자신의 발견물을 살펴볼 수 있게 허용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자바에서 발굴작업이 계속되었지만, 새로운 발견은 더 이상 없었다. 논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뒤부아는 사람들과 의견충돌을 벌이며 제대로 이해받지 못 하는 상황에 지쳐 나중에는 아무도 자신의 화석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1929년 중국 베이징 근처의 주구접동굴에서 화석뼈가 발견되었다. 베이 징 원인이라고 달려진 이것은 자바의피테칸트로푸스의 유골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1930년대에 her일의 고생물학자 랄프 폰 쾨니히스발트는 자바에 피테칸트로푸스의 유 물이 더 있다고 발표했다. 트리닐에서 가까운 지접에서 처음으로 발견했고, 뒤에 상기 란에서도 발견이 잇따랐다. 새로운 연구 결과 베이징과 자바의 화석인류는 ndjs인이 아니라 진짜 인류인 호모에렉투스임이 밝혀졌다. 오늘날 이 두 유형은 각각 다른 것으 로 여겨진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은 호모 에렉투스 에렉투스(Homo erctus erctus), 중 국에서 발견된 것은 호모 에렉투스 페키네시스 (Homo erctus pekinesis)로 분류된다. 인류고생물학이 탄생한 것이다. 인류가 유인원의 자손인가? 물론, 우리가 우리 사촌의 자손이 아니듯이 인류가 현재 유인원의 자손은 아니다. 그러나 고생물학과 생물학에서는 인간과 오늘날의 유인원은 수백만 년 전에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말한다. 제3장 우리조상의 조상 단백질시계 1970년대 초 영장목의 혈중 단백질의 구조 변경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얼마나 오래 전에 커다란 유인원(침팬지와 고릴랄)으로 진화한 계통과, 인류로 진화한 계통이 분리 되었는지 계산해 냈다. 나중에 '단백질 시계'라고 불리게 된 이것은 영장목의 역사에서 꾸준히 이어진 단백질의 진화속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온도를 잴 때 0도는 임의로 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켈빈, 섭씨, 화씨, 열 씨 등 온동의 단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백질시계의 경우, 구세계의 원숭이가 사람상과(긴팔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사람)와 긴꼬리 원숭이과로 분류된 시 기를 0도로 한다. 이 시기는 3, 0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런 수치를 근거로 계산해 보면 인류는 6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의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사촌들 유전학과 세포유전학, 혈청학, 면역학에서 나온 자료를 근거로 계산해 낸 다른 연대들 이 제세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인류와 유인원이 분리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그들이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 해 주는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그들의 염색체는99%동일하다. 이 1%의 차이로도 충분히 다음 세대로 내려가면서 해부학적이로나 행동 양식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겨, 마침내 인류의 탄생을 낳게 되었다. 정확히 얼마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이론이 분분하지만-지금도 고생물학 자와 분자생물학자 모두 정확한 연대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잇다- 중요한 점은 유인원 과 인류가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침팬지 의 사회에서 모자간의 근친상간이 금기시되고, 대뇌의 용량이 기본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며, 발달된 사회조직이 있고, 수컷들 사이에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 고, 심지어 자의식까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침내 밝혀졌다. 초기 영장류의 지역적 분포 인류의 초기 역사는 모든 영장류-안경원숭이, 늘보 원숭이, 여우원숭이, 그리고 그 후 에 출현한 원숭이와 유인원-의 역사에 포함된다. 6, 000만 년이라는 세월 속이서 가장 나중에 나타난 영자류인 인류가 처음에 알려진 영장류에서 분리되게 되었다. 가장 초기의 영장류도 마지막 공룡과 같은 시대에 살지는 못했다. 원시적인 영장류들 은 특유의 앞니 모양 때문에 작은 영운원숭이보다는 설치류에 더 가까운 형태를 지녔 다. 제3기 초기(6, 500만 년 전에 시작된 파레오세)인 그 시대에는 원시적인 영장류들 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분포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북극권의 캐나다와 그린란드, 유 럽이 한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500만 년 후 이 대륙에는 두 종류의 다른 원원류가 서식하게 되었다. 그들 은 안경원숭이과의 형태를 지닌 동물들과 아다피스과의 형태를 지닌 동물들로, 이 원 원류들은 보다 현대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1822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석고 채석장에서 이들의 tgms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19세기에는 이들이 유인원의 기 원으로, 모든 유인원과 원숭이, 인류를 포함한 아목으로 여겨졌다. 그러난 유인원의 기 원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음에도 풀리지 않았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갑자기 이 두 종류의 동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가 사의한 현상이지만, 또 다른 문제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북아프리카는 대륙 이 생성된 지 6, 000만 년 이상이 넘어 북북의 대륙보다 생성년대가 엎서는데도 최근 가지도 원원류의 화석골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예기치 못한 발겨능로 원원류는 물 론 모든 영장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가설의 타당성 여부가 어떻든 간에 거의 모든 원원류-안경원숭이과와 아다 피스과의 형태를 지닌 두 종 모두-가 약 3, 500만 년 전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 들의 갑작스런 절멸이 기후의 급격한 변화 때문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가 쥐고 있는 열쇠 그후 영장류는 역사의 무대를 옮겨 훨씬 남쪽에 위치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열대지 방에서 등장한다. 4, 000만 년 전에서 3, 000만 년 전 사이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 려진 유인원이 등장한 곳도 이곳이다. 아프리카의 유인원 화석이 주로 이집트의 카이 로 서남부 파이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 데 반해 아라비아의 화석유인원은 페르시아만 과 오마에 연한 홍해 사이의 도파르 산악지대에세 최근에 발견되었다. 유인원과 사람 과의 먼 조상인 이들은 각 턱의 중간에 나 있던 전구치가 없어진 후 우리와 마찬가지 로 32개의 이빠을 갖고 된 최초의 주이녹이다. 나무 위에서 살며 나무에 잘 기어오르 는 이 네발동물은, 크기는 마카크 속의 작은 원숭이 정도가 되고 강가난 하구의 삼각 주까지 QJedj 있는 열대 숲에서 살았을 것이다. 기이하게도 3, 000만 년 전에서 2, 200만 년 전 사이 이후 구세계에서 화석유인원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시대 이후 그 들은 갑자기 동아프리카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기에 구세계에서는 격심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알프스와 히말라야 산계가 솟 아올랐고 동아프리카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 리가 거대한 단층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 며 홍해가 열렸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사실은 대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분리되었 다는 것이다. 두 대륙의 분리는 심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숲에서 사바나까지 1, 500만 년 전쯤에 지구 기후의 일대 변화로 동아프리카에는 새로운 유형의 풍격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바나로, 많은 동물들이 그곳으로 재빨리 이주해 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살던 숲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된 일부 유인원들은 구세계의 구석구석 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분리된 후에도 두 대륙을 연결한 육교 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아시아에서는 서식지의 변화로 인해 수백만 년 후에 일부 유인원이 오랑우탄으로 진화 하게 된 반면에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먹이와 특히 새로운 보행방법에 적응하게 되었 다. 나무가 거의 없는 사바나에서는 나무에서 살던 동물들이 땅으로 내로올 수밖에 없엇다. 땅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은 점차 새로운 보행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500만 년 wjsWMa에는 두 다리로 걷는 형태가 원시적인 초기 호미니드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주요 보행방법이 되었다. 이렇게 행동약식에 변화가 온 것은 아프리카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동부 지역의 심각한 가뭄이 주요 요인이다.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 들지 않는 고릴라와 침팬지는 보다 습한 지역을 찾아 아프리카 서부 지역으로 떠났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해부학자로 요하네스버그에서 연구를 하던 레이먼드 다트 교수 는 1925년 2월7일 <네이처>라는 잡지에 남아프리카 타웅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발견 한 화석뼈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유골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Australopithecuc africanus,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남쪽 원숭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것이야말로 유인원과 인류를 연결하는 사라진 연결고리라는 견해를 폈다. 제4장 타웅 어린이에서 루시까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와 인류 이론의 여지가 있는 다트의결론은 즉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의 사라진 연결고리 이론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지만, 이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 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 화석이라는 그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까지 인류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서 논외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 대륙이 이를 계기로 고생물학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the는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실제로 오스트랄로키테쿠스라고 알려진 최초의 원 인은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이미 찰스 다윈이 (인류의 유래)에서 밝혔듯이 아프리카 대륙은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모습을 더러낸 곳임에 분명했다. 오늘날 동아프리카에서 500만 년 이상 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오스타랄로피테 쿠스는 두 발로 걷는 작은 동물로, 100만 년 전쯤에 절멸했다. 이것은 타웅 동굴에 쌓 여 있는 퇴적물의 연대를 90만 년 이하로 잡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엘도라도 그로부터 30년쯤 흐른 뒤 이번에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에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이곳은 중동지방에서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거대한 단층지대이다. 아프리카 동부 지역 으로 곧 수많은 장비와 학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거의 2, 000만 년 전에 형성된 그 레이트 리프트 밸리는 거대한 호수들이 띠처럼 둘러싸고 있다. 거기에는 수천 미터의 퇴적층이 쌓여 있어 화석 형성에 최적의 지질구조를 이룬다. 이런 특별한 상황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화석인류가 발견된 고대 유적지는 남아프리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지구대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던 이 퇴적층은 시간이 흐르고 지각이 상상함에 따라 마치 펼쳐 놓은 책의 책장처럼 넘어가기도 한다. '펼쳐 놓은 책장'의 가장 좋은 예로는 에키 오피아의 오모강 유역의 유명한 유적지를 들 수 있다. 이곳에는 우리 조상들의 화석골 과 그들이 사용한 많은 도구들의 땅바닥에 그냥 널려 있다. 이런 지층의 사이사이에 낀 화산퇴적물에 함유된 방사성원소를 이용하면 우리의 오래 전 역사의 연대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호리호리하거나 건장한 두 부류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키의 유적지에서는 서로 구분되는 두 부류의 오스트랄로피테크스가 발견되었다. 먼저 '호리호리한'부류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Austalopithecus ramidus)로, 인류의 조상 가 운데 가장 유인원을 닮았고, 33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루시라는 별명이 붙은 화석뼈로 대표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sis)와 오스 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있다. 두 번WO 부류는 '건장한(robust)' 형태를 지니 고 있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이티오피쿠스(Austalopithecus aethiopicus), 오스트랄 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alopithecus robustus), 오스타랄로피테쿠스보이세이). 그들은 푹 꺼졌다가 앞으로 돌출한 얼굴에 이마는 별로 발달하지 못했고, 눈 위가 다 소 튀어나왔으며, 커다란 어금니와 앞어금니(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의 경우는 예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턱이 없었다. 그들의 뇌용적(약 450~550cm2)은 현대인(1, 400cm2)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아무튼 그들은 아미 두 발로 직립보행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나무를 타는 능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건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개골 꼭대기에 능이 또렷하여 '호리호리한' 것들과 구 별되는데, 이상하게도 강력한 턱에 의해 움직이는 커다란 어금니가 있었다. 뇌의 용적 은 550cm2였다. 오로지 채식만하여 나무 뿌리와 열매, 씨 따위가 주식이었다. 그들은 100만 년 전쯤에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호리호리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운데 일부는 숲을 떠나 강을 따라가다가 사바나에 도착했다. 그들은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규모로 사냥을하 여 가끔 고기를 먹기도 한 그들은 대단히 잡식성이었다. 건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보다 몸빕이 작았다. 호리호리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키 는 1~1. 3cm 정도, 몸무게는 30~40kg 정도 외었고, 뇌용적도 작아 450cm2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호모 하빌리스를 쫓아서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므로 그들은 진화에서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다고 여기지만, 다른 학작들은 그들이 최초의 인류를 발생시켜싿고 믿는다. 최초의 인류는 몇 가지 점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구별된다. 그들은 몸집에 더 크 고, 눈 위에 융기된 부분이 없어 얼굴이 평평하고, 어금니와 앞어금니가 더 작고, 뇌의 용적이 800cm2나 되어뇌가 훨씬 더 크다. 1964년 루이스 리키는 이 새로운 유형의 원인에게 '호모 하빌리스(재주있는 사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들의 손가락을 연구한 결과 이들은 물건을 쥐는 능력이 있어 석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기 때문이다.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발견된 이 새로운 종의 화석골은 180만 년 전의 것이 었다. 리키의 발표 이후 이 화석골이 인류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격력한 반론이 즉각 제기되었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류에 관한 정의가 잇달아 나왔따. 이런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자들은 인류에게 고유한 해보학적 특징을 발표했다. 특히 고 생물학자들- 이들은 부서진 두개골 몇 조각만을 연구했을 뿐이다- 이 선정한 인류의 특징에는 인류의 행동과 문화적 특징은 물론 생물학적 특징도 간과되고 있다. 도구를 사용하면 인류인가? 동아프리카 유적지레서 대규모 탐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거의 자연 상태 그대로인 작은 돌멩이와 자갈, 부서진 석영 박편 으로 만들어졌다. 제작 연대는 30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것으 로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이 도구들은, 아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들이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지닌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화석 인류에 대한 상반된 견해에 직면한 선산학자들은 도구-인위적으로 변형시키 자 연물-을 보면 그것의 제작자의 '사람화(사람이 진화되어 온 과정)'을 알 수 있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이 석기의 제작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이 시기에 동아프리카에는 2~3종의 원인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싱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 가운데 둘 이상이 각각 이도구를 고안해 냈다. 사실 도구를 사용 했다고 해서 인류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로 고생물학자들은 문화적인 행 동 양식보다는 생물학적인 용어로 사람에 관한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아무리 원시적 인 것이라 해도 도구를 만들려면 사고력에서 나온 논리적인 일련의 행동을 할 수 있어 야 한다. 가장 원시적인 원인이 나무나 뼈, 이빨 같은 유기물을 손질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었는 지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돌로 만든 도구는 약 300만 년 전에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프리카의 몇몇 유적지가 최초의 도구의 발생지라 는 며예로운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중 두 군데는 에티오피아에 위치한 아파르와 오모이다. 아파르에서는 250만 년 이상 전의 화산재 속에 묻혀 있던 역석기 와 석핵, 박편 석기가 나왔다. 이 돌들이 우연히 다듬어진 것은 아니다. 돌의 한 면이 나 양면을 다듬어 썼고 때로는 돌을 깊이 깎기도 했다. 아직은 조잡한 도구들이었지만, 가죽을 자르거나 나무껍질이나 가죽을 문지르고 동물의 뼈나 조개 껍데기를 부수는 대 쓰였다. 석핵은 대개 화산암으로 된 돌덩어리로, 석기를 만들 때 이것에서 박편을 떼 어 낸다. 가공방법은 역석기오 비슷하지만, 역석기와는 달리 날카로운 박편 자체를 얻 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모에서는 자갈이나 석영 조각에서 떼어 낸 작은 박편 석기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원인은 똑바로 설 수 있으므로 손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고 여 겨졌다. 하지만, 현재는 인간이 두 발로 걷는 것(그 결과 손이 자유로워짐)과 최초로 도구가 쓰인 것 사이에는 200~300만 년 이상의 시간차가 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 다. 그러므로 석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그에 필요한 정신적인 능력이 발달되었어야만 할 것 같 다. 직립보행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뇌가 크다는 것은 인류를 독특하게 만든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해 준다. 실제로 어떤 과학자 들은 유인원이 인류가 된 것은 용적이 700~800cm2가 되었을 때라고 주장한다. 두개 골의 용적이 이것을 초과하게 되면 '뇌의 루비콘강'(일을 결정하는 마지만 일선. B. C. 49년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고 말하며 이 강을 건너 포페이우스와 일전 을 벌여 로마의 대권을 잡게 된 고사에서 유래함:역주)을 건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진화 과정에서 다소의 편차가 생기므로 이렇게 수치를 단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별 의 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의 학자들은 증거는 없지만 직립보행이 뇌의 발달 보다 먼저 이루어 졌으리라 믿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타웅의 어린이의 뼈를 본 다트 교수는 이 뼈의 어린 주인 은 항상 똑바로 서서 생활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이 이론은 뚜렷한 물증을 제 시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 손발의 뼈와 골반뼈가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다트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의사 겸 고생물학자인 의사 겸 고생 물학자인 로버트 브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 후 남아프리카의 두 지점-스터크폰테인과 스와르트크란스-에서 척추골 하나와 몇 점의 골반뼈를 찾아냈다. 이 뼈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똑바로 서서 생활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다르에서 도널드 효한슨과 그가 속한 탐사단은, 아주 오랜 선 사시대부터 직립보행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그것은 놀랄 정도로 완벽한 유골로, 루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로부터 2년 후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360만 년 전의 화산재에서 발견되었다. 라에톨리에서 몇 달 동안 연구를 거듭한 고생물학자 들은 모두 직립보행 인류가 존재했음을 확신했다. 그러던 1976년 9월의 어느 날 저녁, 그곳에서 연구를 하던 영국의 과학자 앤드루 힐은 새와 코기리, 코뿔소, 기타 다른 포 유류들의 수많은 발자국 속에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1978년 메리 리키는 평행하게 이어지는 두 줄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 발자국을 분 석해 본 결과 이것은 두 사람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으며 그중 한 사 람은 키가 155cm 정도이고 다른 한 사람은 훨씬 작아서 120cm 이하였을 것으로 추 정된다. 발자국의 보존샃태가 상당히 양호하여 두 사람이 완벽하게 직립보행을 했음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것은 인류가 500만 년 이상 전부터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는 확 실한 증거가 되었다. 호모 하빌리스의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사람속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또한 몇 종의 화석인류의 발견으로 17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수십만 년간 살던 사하라 이남 지역을 떠나 마침내 북아메리카와 아 시아, 그리고 유럽지역에서도 살게 되었다. 제5장 호모 에렉투스의 기나긴 여정 호모에렉투스: 우리와 가까운 일가 호모 에렉투스는 때로는 피테칸트로프스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명칭은 정확하게는 자비의 호모 에렉투스- 점차 구세계의 온난화 지역으로 퍼져나감-를 지칭하는 말이다. 최초의 호모 에렉투스들은 호모 하빌리스의 후손이 확실하지만, 그들보다 진화된 특성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약 170만 년 전에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지역에서 출현했다. 10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의 일부는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자바가 확실함-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그들이 아시아와 유럽이께지 도달했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이 있다. 자바에서 1936년에 발견된 어린의 두개골과 1974년 상긱란에서 발견 된 인류의 뼛조각들을 조사해 본 결과 이것들은 각각 160만 년 전과 180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지만, 동이랗ㄴ 외형저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같 은 종에 속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일부 인류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 실존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존재라고 생각 한다. 이렇게 해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호모 에렉투스는 오늘날의 인류와 키가 비슷하여 170cm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의 용량은 775~1250cm2에 그쳐 오늘날의 우리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들은 튼튼한 턱과 커다란 이빨을 지녔으며, 두개골의 용골돌기나 챙과 같은 안와 위의 두터운 융기 등 특별한 뼈의 상부 구조물을 지니고 있었다. 거의 150만 년 동안 구세계의 전역에 자리잡은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정보갷T다. 그 들은 점차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었고 동시에 최초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더욱 정교한 도구인 양면 석기를 개발했다. 이 도구는 고른 날을 지니고 있어 문지르거나 땅을 파거나 물건을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두려움을 극복하다: 불의 정복 불을 사용햇다는 확실한 흔적은 45만 년 전 것이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불을 사용한 기원은 스와르트크란스 우적지에서 볼 수가 있드싱 그보다 훨씬 전인 150만 년 전으 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인류학자들은 모든 동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불에 대한 두려움을 인류가 극복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불을 제어할 수 있게 됨으로써 행동 양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불을 피워 사용하는 능력은 빠른 속도로 발달했을 것이다. 우리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연적인 산불에서 얻어진 불씨를 거듭해서 사용했다는 사실 은 비교적 확실히 알고 있지만, 인류가 어떤 방법으로 불을 피우고 불씨를 간직했는지 는 알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간단한 방법들 , 가령 부싯돌을 맞부딪친다거나 양손바닥으로 두 개의 막대기를 마구 문질러서 불을 피우는 방법을 호모 에렉투스도 금방 터득했을 것이다. 불이 사람을 한데 모으다: 공동 생활의 시작 불을 사용하게 된 것 차제는 대단한 발명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하여 인간은 세계를 지 배하게 되었다. 불의 사용으로 다양한 혜댁을 입게 되었다. 첫째, 불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불은 빛의 근원으 로서 인간을 자연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예를 들면 인간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불은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준다. 끝으로, 불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 요리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요리 를 한다는 것은 식사를 공동으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모여식사를 함으로써 오 늘날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가족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졌다. 그러므로 불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인류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불을 갖고 서로 싸우지는 않았을까? 그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호모 에 렉투스는 사냥과 채짐 생활을 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것 같다. 이 시대의 것으로 밝혀 진 화석골 중에서 그들이 사나웠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하나도 없다. 문화가 점차 정착 된 신석기시대(약8, 000년 전)에서야 비로소 폭력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원시인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을 했을까? 그들은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되었을까? 선사학 자들이 이 문제의 답을 찾는 데 골몰하기 훨씬 전부터 사상가와 철학자 들은 이에 대 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말을 못해도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 도 있는 반명에 <성서>의 주해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헤브루어로 말해따고 확신했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선사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어느 정도 능숙하게 말을하여 의사소통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불을 사용하고 사 냥과 채집 생활을 하며 도구를 사용하므로 그들의 문화는 상당히 복잡해졌을 서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물과 식물, 동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장소를 구별하고, 생각을 교환해 야만 했다. 그들의 행동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유인원보다는 훨씬 더 발달한 의사 소통 수단이 필 요해졌다.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몇몇 화석인류의 발성기관을 복원시 켜 보면 언어를 습득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여 기에도 학들마다 많은 이견이 있다. 아무튼 최초로 사용된 언어는 천천히 발음되는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된 초보적인 것이 었겠지만, 고함이나 휘파람, 얼굴표정 등 다른 청각적, 시각적 신호를 함께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벙어리나 뉴기니의 일부 종족, 부시맨처럼 수화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 다. 베이징 원인의 불운 중국에서 화석인류가 존재했다는 최초의 단서가 발견된 것은 금세기 초로 거슬로 올라 간다. 당시 중국의 약재상들은 특이하게 생긴 이빨을 만병 통치약인 '용의 뼈'라고 하 며 팔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베이징에서 그리 멀지않은 석회석 채석장에서 발견된 이빨 가운데 하나가 원시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곳의 동굴 가운데 가장 큰 동굴에서 발굴 작압이 이루어져 1926년에 이빨 두 개를 찾아냈고 그 다음해 에 또하나를 찾아냈다. 캐나다 출신의 베이징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인 데이빗슨 블랙 은 이 이빨에 대해 연구를 하고 이 화석인류의 이름을 시난트로 푸스 페키넨시스라고 지었다. 이말은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호모 에렉투스 페키 넨시스라고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이 l역에 대한 고고인류학적 탐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주된 발굴 작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중국의 정국이 극도로 불안해진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 전 에는 이곳에서 49구의 유골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1941년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하자 중국은 베이징 원인의 유골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조심스럽게 포장하여, 며칠 수 미국으로 떠날 예정인 미 국 해병파견대에 넘겨 주었다. 그러나 미군이 승선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함을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따라서 시난트로푸스의 유골응 해병들의 시체와 함게 200m가 넘는 황해 바닷속에 수장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최초의 인류의 자취 유럽 최고의 화석인류는 하이델베르크 부근의 마우어에서 발견되 하악골로, 60만 년 이내의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아시아보다 훨씬 나중에 아프리 카에서 사람이 들어와 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역석기 와 박편 석기 들이 발견 되면서 이렇나 주장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실라크의 유적지가 유럽에서의 인류의 등장을 증명해 주는 가장 오래된 증거로 여겨졌다. 오베르뉴에 위치한 실라크에선 150만 년 전의 동물사오가 함께 석기가 몇 점 발견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동굴 속이나 노천에 위치한 90만 년 전의 원시인 거주지 가 알려져 있으며(블라사크, 솔레일라크. 발로네 동굴 등) 그 밖의 다른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도 이런 유적지가 발견 되었다. 그렇지만 유럽에는 민델 빙기(45, 40만년 전에서 30만 년 전까지)라는 기나긴 빙하시 대 동안 드문드문 인류가 이곳에 들어와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 10만 년간 이어 진 민델-리스 간빙기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인류의 분포는 좀더 밀집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가 유럽에 들어와 산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들이 현재 유럽인의 조상인지 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20만 년 전에 일어난 주요한 기상 변화로 인류의 진화과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개로운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정신적인 관심사도 생겼고, 사회는 점차 의식화 되었 으며, 미적인 감각도 생기기 시작했다. 문화적인 진화가 생물학적인 진화를 앞선 것이 다. 제6장 네안데프탈에서 라스코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전환기: 우리의 가장 가까운 조상을 둘러싼 모순 언제, 어떻게 그리 고 어디에서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했는가? 사피엔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느 인류에 관한 고생물학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60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 사이에 유럽은 두 차례빙하로 덮였는데(민델 빙기와 리스 빙기), 이 기간은 이류의 진화에서 암흑기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머나먼 예 조상인 오스트랄 로피테쿠스가 상대적으로 더 잘 알려진 데 반해-1, 000점 이상의 표존과 수십 점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보다가까운 시기의 조상의 유물은 드문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의 유물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도 그 시기를 놓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에 서는 대개 빙기와 보다 온난한 시기인 간빙기가 교대로 나타나는 것을 토대로 화석의 생성년대를 추정한다. 인류의 유물이 대부분 셔유럽과 다른 지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지구상의 광대한 화석층이 아직 탐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유적(예를 들면 잠비아의 브로큰 힐이나 남아프리카의 호프필드)들은 아직 그 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아프리카의 북서부에서 중국까지 흩어져 있는 이 시기의 많은 유적들은 그들의 석기 인더스트리로 미루어 보아 마지막 호모 에렉투스인 이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밝 혀졌다. 유럽에서는 인류의 화석이 나온 십여 군데의 유적이 아지도 선산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곳으로는 아직도 선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곳으로 는 빌징스레벤, 페트랄로나, 마우어, 슈타인하임, 아라고 등을 들 수 있다. 그 유적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줄까? 두 종류의 인종, 완전히 다른 두 종족 이 유적들에 관한 결론이 명쾌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고인류학자들은 여전히 인류 진화의 두 가지 단계를 놓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최근까지도 유럽에서는 두 가지 유 형의 인류의 진화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하나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발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 발전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라고 표현한 이뉴는 네안데르탈인도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지만, 이는 아종이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학면은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 렌시스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 서유럽에스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발전한 진화만 이루어 진 것으로 밝혀졌다. 네안데르탈인의 해부학적인 특성은 23만 년 전에 유럽에 거주하 던 인류에게서 잠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7만 년 전쯤에 유럽대륙에 널리 퍼졌 고, 점차 근동 지역과 중안 아시아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약 3만 5, 000년 전에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 현생 인류오 발전한 다른 종족은 유럽 이외의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 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해부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는 인류는 북부에서 근동 지역에 이른 아피리카에서 10만 년 전에 발생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뼈가 발견된 곳은 바로 이 지역으로, 갈리리 지방의 나자렛 근처의 카프제이다. 뷔름 빙기: 수세기에 걸쳐 극한의 추위가 계속되다. 현생 인류에 이르는 진화에 관한 이론이 어떻던 간에, 네안데르탈인 같은 현생 인류는 뷔름 빙기라는 마지막 대빙기가 시작될 무렵에 모습을 드러냈다. 11만 년 전에 바다, 대기, 천체의 여러 현상르로 인하 여 기후가 한랭해졌다. 이 빙기는 1만 년 전에서야 막을 내렸다. 기후가 한랭해진 원인으로는 태양을 도는 지구 궤도의 변화, 극지방의 해류의 변화로 심화된 지축의 기월기의 변화, 대기주으이 이산화탄소의 함유량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지구의 북반구에서는 이런 현상으로 인하여 육지와 바다의 풍경과 외형이 완전히 바뀌 었다. 가장 추웠던 기간인 1만 8, 000년 전에는 얼음의 두께가 3km에 이르는 곳도 있 었고, 빙판의 확대로 해수면이 120m로 낮아지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알래스카와 시베 리아를 연결하는 대륙간의 육교가 1, 000km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은 다양한 환경을 경험했다. 기후는 때로는 춥고 건조했으며, 때로는 온화하고 습도가 높았다. 어떤 때에는 극지방의 혹한이 덮쳐 1년 내내 땅 이 얼음으로 뒤덮이기도 했다. 네안데르탈인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야외에서 지내 기도 하고 바위 틈이나 동굴 속에서 살기도 했다. 순록이나 매머드, 털이난 코뿔소 등 이 풀을 뜯어먹고 사는 스텝 지대나 거대한 빙하 근처에서 사는 무리도 있었으며, 툰 드라 지대나 북유럽에서 사는 무리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의 완벽한 유골이 몇 구 발견되어 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 게 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몸집이 작고 뚱뚱하며 다리가 짧았다. 머리는 앞이 움푹 들어가고 뒤로 갈수록 좁아졌다. 얼굴을 보면, 코는 오똑하며 턱뼈는 안으로 들어가고 안와 위로 융기된 뼈에 눈썹이 바싹 붙어 있었다. 물론 입술의 모양이나 피부색, 얼굴 과 머리에 털은 얼마나 있었난 하는것처럼 세부적인 특징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강인한 근육과 튼튼한 골격, 그리고 특히 머리의 크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은 선사시 대의 인간이 지녔을 것으로 여겨지는 야수성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 적인 면, 발달된 도구(이것은 언어의 도움이 없으면 제작 기술을 배울 수 없다), 사냥 술을 보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재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뇌의 크기도 커 서 현대인의 뇌용량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무스티에 문화라고 알려진 도구 인더스트리를 꽃피웠다. 네안데르탈인은 박편 석기를 다듬어 바늘과 깎는 도구를 만들 었으며, 이것을 다시 변형시켜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인육을 먹는 의식이 행해졌는가? 최초의 현생 인류와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보여 주 는 매장 풍습을 남겼다. 그들이 최초로 시체를 매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이다. 고생물학자들은 이런 매장지를 발견하면 대단히 기뻐한다. 골격의 40%가 발견 되 에티오피아의 하다르에서 발굴된 루시와 최근에 이탈리아의 알타무라에서 발굴된 선네안데르탈인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매장지를 통해서만 그들은 완벽 한 골격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유골들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에게 먹히지 않 도록 안전하게 매장되었으므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구부린 자세로 발견된 유골도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라페라시의 바 위 틈에서 발굴된 한 가족의 무덤에는 부모를 비롯하여 태아와 갓난아이 둘을 포함한 여섯아이가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매장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으며, 그외의 지역으로는 이탈리 아, 중동 지역, 그리고 더 동쪽으로가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들 수 있다. 이라크 샤니다 르의 유명한 동굴에선는 각각 다른 깊이에서 아홉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7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다양한 도구와 생활용품이 시체와 함께 매장된 경우도 있다. 샤니다르에서는 약초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들국화와 엉겅퀴, 접시꽃 등 여러 종류의 꽃이 무덤에서 발견 되었다. 이것은 고인돌의 병이 나으라고 놓여진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장식용일 수도 있다. 이런 매장 풍습은 그들이 어떤 의식을 행했으며 또한 사후 세계에도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인육을 먹는 풍습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무덤도 있다. 프랑스 남부 에로 지방의 오르 튀 동굴에서는 인간의 뼈 몇점이 음식 찌꺼기 속에 섞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크로 아티아의 크라피나에서는 인간의 많은 뼈가 부서지고 쪼개진 채 발견되었다. 명백한 증거는 아직 없지만, 이 두 가지 예에서 당시 인육을 먹는 의식이 있었다는 결 론을 유추할 수도 있다. 이런 풍습은 지금도 아프리카나 멜라네시아 지역에 남아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동쪽에서 침략자가 나타나다 아직도 그 이유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아무튼 네안데르탈인은 샤텔펠롱 인더스트리라는 유물을 남긴 것을 끝으 로 3만 5, 000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들의 뒤를 이어 더 이상네안데르 탈인의 외형상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에 속하는 인류가 등장 했다. 현재 많은 고생물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한편 선사학자들은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이 제작한 샤텔 펠롱의 석기와 오리냐크문화에서 볼 수 있는 이후의 석기 사이에, 돌을 다듬는 기술에 서 서로 단절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이런 단절의 다른 증거로는 조형 예술의 출현과, 날카로은 창끝의 등장에서 볼 수 있는 뼈의 세공 기술, 순록의 뿔로 만들어진 흰 도구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발전으로 미루어 네안데르탈인은 동쪽에서 서유럽으로 침 략해 들어온 형생 인류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종족 사이 에 혼혈이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침략자는 누구인가? 이마가 높은 진화된 두개골, 턱뼈가 두드러지고 턱이 튀어나온 얼굴 등 외형상의 특징으로 판단해 보면, 그들은 분명히 최초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크로마뇽인의 직 접적인 조상일 것이다. 3만 5, 000년 전 유럽에 등장하여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한 크로마뇽인들은 현생 인류 와 아주 근접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만일 그들이 양복을 입고 런던 거리를 활보한 다 해도 크로마뇽인이 나타난 걸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크로마뇽: 동굴 예술 크로마뇽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적 감각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종교 행사난 마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새겨 넣은 그림과 회화, 조각, 장신구 등에서 크로 마뇽인들의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다. 붉은색부터 노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내는 황 토가 당시 널리 쓰였다. 크로마뇽인들은 묽은 황토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 다. 때로는 시체에 이것을 칠하기도 했다. 동물들이 숨어 사는 곳에 색칠을 해놓았을 수도 있고 자신들의 몸에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 틀림없이 동물의 뼈와 상아, 조개 를 세공하여 장신구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최초의 그림은 회화는 거의 없고 대부분 새겨 넣은 것으로, 아직은 서툴고 거 칠었다. 차츰차츰 더욱 세련된 그림들이 나타났다. 조형 예술은 아무렇게나 낙서한 것 같은 형태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우럽 전역에서 진정한 예술가들이 등장하여 자 그마한 여인상을 조작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우아한 곡선의 소녀상도 있고, 뚱뚱한 부 인상도 있는데 비너스라고 알려진 것처럼 극단적으로 유형화된 것도 있다. 순록시대(마지막 빙기)라고 알려진 이 시기에 인류는 사냥과 낚시, 채집에 의존하여 살았으며, 1만 7, 000년 전에서 9, 000년 전 사이의 절정기에 동굴 예술을 남겼다. 그 들의 예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는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을 들 수 있다. 예술가들 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동굴에서 작업을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때로는 아리에지 지방의 니오 동굴처럼 위험한 길로 한참들어가야 하는 지하에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었 다. 사냥에 관한 마법과 비법을 전수하는 주술행사가 이루어지는 이 지하 성소들은, 몇몇 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만 발견된다. 동굴 예술은 마지막 빙기가 끝나면서 1만 년 전에 갑자기 사라졋다. 그로부 터 불과 수천 년 후에 인류는 식물과 동물을 wlo하고, 도기를 제조하며, 야금술을 발 견하게 된다. 그럼 내일은? 새벽일까, 황혼일까? 이론적으로 미래에는 어떤 식물이나 동물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다. 지화는 오늘날가지 이어지는 진행중인 과정이다. 그러나 인류는 특별한 동물이다. 수천 년간 인류의 문명이 놀라운 속도로 발달해 온 것에 비해 인류의 생물학적인 진화는 서서히 이루어져 왔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후에는 인류는 자신의 진화를 지배한 생물학적 인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를 유인원에서 인류로 이끈 생물학적인 진화가 이루어져 온 과정은, 문명이 발달 해 온 과정에 비하면 극히 느리게 진행되어 왔다. 사실,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것은 개인의 성공에 달려있다)은 획득된 특성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줄 수는 없 다. 생물학적인 전이는 단기간 내에 인지될 수 없는 미세한 변화만 가져온다. 그러나 집단의 성공에 의존하는 문명의 진화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전 달 과정이 누대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세대가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자신이 획득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수만 년에 걸쳐 뇌의 용량이 커진 결과 지니게 된 높은 지능 덕분에 인류는 명확한 의 식을 갖고 미래를 창출해 낼 수 있다. 동물계에서는 인류만이 유일하게 이것이 가능하 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는 스스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 다. 미래에는 다음 두 가지 힘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우세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하나는 문명의 진화를 이끌어 가는 힘으로, 이거은 인류를 새로운 호모 사피엔스로 인도할 것 이다. 다른 하나는 무서운 파괴력으로, 수십억 년 후에 자연이 그 자신이 거대한 불구 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균형을 잡기 위하여 우리 인류를 제거할 것이다. 기록과 증언 인류의 유래 1859년 다윈은 그의 혁신적인 저서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 선 택에 기반한 진화론을 전개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871년, 그는 이 이론을 인류 에 적용한 <인류의 유래>라는 저서를 펴냈다. 자연 선택 우리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이들은 직3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동일한 일반적인 원인에서 유래되는 것이고, 하등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ldT다. 인류는 지구에 널리 펴져, 끊임없이 이주해 가며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어 왔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활 능력 이상으로 번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때로 는 생존 경쟁을 벌여야 했고, 그 결과 자연 선택이라는 엄격한 법칙에 지배되었을 것 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의 유리한 변이가 경우레 따라, 도는 늘 살아 남았고, 그 환경 에 부적합한 것은 제거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구조상의 변이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 다만 개별적인 차이를 놓고 말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야만적인 인간도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어떤 동물보다도 우수한 동 물이다. 인간은 고등 동물 가운데 분포 지역이 가장 넓다. 또한 다른 동물들은 모두 인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인간은 특히 지적인 능력과 사회성에서 가장 우세하여 같 은 인간을 도와 주거나 지켜 주며, 신체 구조에서도 가장 우세하다. 이와 같은 특성의 중요성은 생존을 둘러싼 싸움의 마지막 조정에서 잘 드러난다. 인류의 발생지와 유적 우리 조상이 협비원유의 원숭이 부류에서 갈라져 나온 진화 단계에서 인류으ㅟ 발생지 는 어디일가 한는 점이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이 부류에 속한다는 사 실은, 지리적인 분포론에서 추론을 내린 것처럼 오스트레일리아나 바다의 섬이 아니라 구셰계에서 그들이 살았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각 지대에서 살고 있는 포유류들은 동일한 지대에 서 절멸한 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 아프 리카에는 예전에 침팬지와 고릴라와 동류인 유인원이 살았으며, 이 두 종은 현재 인류 의 가장 가까운 동류이므로,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다른 곳보다는 아프리카 대륙에 살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진화의 원리 현재 실력 있는 많은 생물학자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는 이 연구의 결론은, 인류는 덜 고등한 동물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근거 는 확고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보다 열등한 동물의 태아의 발달 과정이 서로 유사하다 는 점, 또한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이루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구 조와 조직이 있다는 점-인간이 지닌 최화기관, 때때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과거로의 복귀-은 재론의 비정상적인 과거로의 복귀-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점들은 옛날 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서야 인류의 기원과 관련되어 논의되게 되었다. 전 생물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런 요소들을 같은 군의 구성원간의 상호 유사성, 그것들의 과거와 현재의 지리적 분포, 지질학적 연속성 등 다른 요소들과 관련지어 살펴보면 진화의 원리는 문명하고 확실해 진다. 이런 요소들이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야만인처럼 자연 현상을 단 속적인 것으로 보는 데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인류가 창조라는 독립된 행위 의 산물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는 인간의 태아와 다른 동물, 예를 들면 개의 태아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과 사지, 전체적인 골격은 다른 포유류의 그것과 쓰임새와는 관계없이 유사하다. 일반적 르로 인간에게는 없지만 사수류(손 모양의 발이 있는 거싱 특징인 인간 이외의 영장 류:역주)에게는 공통적으로 있는 몇몇 근육과 같은 다양한 구조가 다시 나타나는 경우 도 있다. 그밖에도 많은 유사성이 있는데, 이런 모든 요소들은 인류와 다른 포유류가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결론으로 확실하게 이끌어 준다. 변이 우리는 인간이 신체의 일부나 정신적인 기능에서 끊임없이 개인적인 차이나 변이를 보 이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차이나 변이는 보다 열등한 동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일반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나거나,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유사한 유전 법칙이 우세하다. 인간은 생활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비율로 번식하는 편이다. 따라서 인간은 때로는 가혹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한다. 자 연 선택이라는 엄격한 법칙은 자연에 속하는 모든 것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유사 한 성질을 지닌 변이가 반드시 연속될 필요는 없다. 자연 선택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개체간에 다소 간의 차이만 나도 충분하다. 오랫동안 사용하였거나 사용하지 않은 부 분에 대한 유전은 자연 선택과 같은 방향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이전에 행해진 중요한 변이는, 더 이상 특별한 용도가 없다 해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유전될 것이다. 어느 일부가 변이되면, 다른 일부도 사관 작용의 원리에 의해 변화하게 된다. 상관 작용에 의해 기형이 된 이상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생존 환경의 조건에 직접적이 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도 있다. 충분한 먹을 것, 온가, 습도 등이 그런 것 들이다. ㄱ리고 끝으로 생이랗겆ㄱ으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개중에는 정말 중효한 것들이 포함된 특성들은 자웅 선택에 의해 획득된다. 인류의 기원 인류의 발생학적인 구조-인류가 보다 열등한 동물과 공유하는 상등 관계, 인류가 지닌 퇴화기관, 때때로 일어날 수 있는 인류의 과거의 모습으로의 복귀-를 고려해 보면, 예 전에 최초의 조상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고 동물의 계보에서 그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ㅆ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의 조상이 꼬리와 뾰족 한 귀가 있고, 야마 나무 위에서 살았으며, 구세께에서 산, 털이 많은 네발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적인 능력 인류의 기원에 대해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릴 때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지닌 고도의 지적인 능력과 도덕적인 기질이다. 그러나 진화의 일반적인 이론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보다 고등한 동물들의 지적인 능력- 질적인 차이는 있어도 인류의 것과 같은 종류임-은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보다 고등한 유인원 과 물고기의 지적인 능력의 차이와, 개미와 개각충 사이의 지적인 능력의 차이는 엄청 나게 다르다 동물들에게 이런 능력이 발달하는 테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우리가 키우는 가축을 보면, 지적인 능력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이런 변이가 유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이런 기능이 절대적으로 쥬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 선택을 통해 환경은 그것들의 발달에 유리하게 된다. 동일한 결 론이 인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사고 능력은 인류로 하여근 말을 할 수 있게 하고, 무기와 도구, 덫을 발명하게 하는 등 오랜 옛날부터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런 사고 능력과 함께 군거 습관 덕분에 인류는 모든 생물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반은 기술이고 반은 본능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자마자 지적인 능력은 빠른 속도 로 발달하게 되었다. 언어의 제속적인 사용은 두뇌에도 영향을 미체게 되었고, 이것은 다름 세대에 유전되었다. 이것은 다시 언어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도덕과 종교 신에 대한 믿음은 종종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해 주는 가장 커다랗고도 완벽한 차이 점으로 여기지기도 한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듯이 이런 믿음이 인간에게 타고난 것이 라거나 본능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반면에 모든 것에 고루 미치는 영적인 힘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인 것 같다. 또한 이런 믿음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발달 하고 상상력, 호기심, 두려움 등이 더욱 발달하면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본능적이라는 가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논거 로 이용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것ㄷ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인간보다 좀도 많은 능력을 지나, 잔인하고 악의에 찬 영적인 존재들을 모두 믿어야 한다.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은 은혜로운 신에 대한 믿음보다 훨씬 더 일반적 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창조한 자비로운 만유의 창조주라는 개념은 인류가 오랜 기간 문명을 발전시킨 이휴에 갖게 된 것이다. 인류가 덜 고등한 동물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설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이것이 영혼 의 불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인간이 추생하기 전이나 후, 티끌만큼 미새한 포배에서부터 아이가 될 때까지 정확하 게 개체의 발달에서 어느 시게에 불멸의 존재가 되는지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계통적인 단계 를 거슬러 올라가 시기를 결정하는 겋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연구에서 얻어진 결론이 매우 비 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그러나 이 결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변이와 자연 선택의 법칙에 의해 인류 라는 독특한 종이 덜 고등한 동물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번식의 법 칙에 의해 개체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보다 왜 더 비난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 히 설명해야만 한다. 종의 발생과 개체의 발생 모두 우리가 마음속으로 순전히 우연의 결과로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거대한 일련의 연속된 과정의 한 부분에 속한다. 대수 롭지 않은 변이나 기타 다른 일들이 모두 어떤 특별한 의도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믿든 말든 간에 이런 결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결론 이 연구의 주요 결론, 즉 인류는 덜 고등한 동물을 조상으로 한다는 주장은, 유감스럽 게도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야만적인 형태에서 유래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류는 비록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석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또한, 원래 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올랐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먼 훗날 더 높은 곳에 자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 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서 희망이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성적으로 진실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증거들을 제시했다..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비천한 것들을 동정하며, 다른 사람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생물 에게가지 관용을 베풀고, 태양계의 운동과 구조를 꿰뚫어 보는 신과 같은 지성을 지니 고 있는 등, 이런 모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류가 아직도 여전히 그 욱체의 틀 안에 지울 수 없는 열등한 기원에 대한 낙인이 찍혀 있음을 우리 모두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찰스 다윈 (인류의 유래), 1871년 스콥스 재판 1925년 미국인들은 예날과 현대, 근본 주의자와 진화론자 사이의 극적인 대결을 지켜 보았다. 테네시의 학교 교사인 존 토머스 스콥스를 상대로 한 재판은 인규가 <성서> 에 나온 대로 창조의 산물인가, 아니면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조지 W. 래플리어(탄광기술자)는 채터누가시에세ㅓ 버틀러법을 검토하기 위한 소송을 시작하기로 한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 지역 약사 QUA 군 교육위원회장인 F. E. 로빈슨과 군 학교 관리감독인 윌터 화이 트에세 건화를 걸어 그들과 진진하게 토론했다. 그들은 존 토머스 스콥스에게 사람을 보내 로빈슨의 약국으로 오라고 청했다.... 존 스콥스 생각이 깊어 보이는 푸른 눈을 지닌 순진한 청년이었다. 24세밖에 않 도니 젊은 그는 지낸해에 켄터기 대학을 졸업하고 데이턴 공학교에 과학교사 켬 축구부 코 치로 부임해 왔다. 그 지역에서 그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스콥스는 토론에 빠져 들 었고, 곧이어 아무도 진화를 지지하지 않고는 생물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 다. 래플리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법을 어겼어." 스콥스가 대꾸했다. "다른 교사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교과서거 그렇게 되어 있단 말입 니다. ""... 3월 7일, 존 스콥스는 구속되엇다. 4월 24일, 그는 수업중에 진화론을 가프쳤다는 이 유로 기소되었다. 미국 자연사박묽관 관장인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은 이 재판은 쟁점을 명백하게 판결하 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리라고 예측했다. ... '진짜 문제는 과연 신이 진화론에 입각하 여 창조를 했냐 하는 것이다. ' 이 문제 외의 다른 문제들, 가령 개인의 권리, 자기 의 견을 가질 권리,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권리와 같은 헌법에 인정된 권리들, 교육의 자 유 등은 별 의미가 없었다. ... 피고측 주임 변호사인 클래런스 대로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신을 언급하는 것은 불 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진화론의 진실 여부가 이 재판의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화론이 진실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방식으로 이 재판에 접근해 갔다. 다른 변호사인 말로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피고를 변호했다. 주에서 스콥스가 진화론 을 가르쳤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에서는 그 뿐아니라 '스콥 사가 그와 동시에 (성서)에 나온 창조론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는 논리였다. 그건 바로 버틀러법을 어겼다는 뜻이다. 즉, 인류의 조상은 열등한 동물 이라고 가르치거나, 인루의 기원에 대해 (창세기)에 위배되게 가르치거나, 또는 이 두 가지 모두 가르치는 것이다. 주에서는 이 법의 첫 번째 해석을 적용하려 했고, 변호사 측은 세 번째 것을 적용하려 앴다.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 재판기간 내내 언쟁을 벌였 다. 대로는 브라이언(원고측 고문, 근본주의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잇음. 지금은 증인 석에 서 있다. )에게 그가 '(성서)를 상당한 수준으로 연구' 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 하며 포문을 열었다. 브라이언은 그 점을 시인했다. 그러자 대로는 (성서)를 언제나 문 구에 얽매어 해석하려 하면 안된다. (성서)에는 애매한 구절도 가끔 나온다, 버틀러법 에는 막연하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성경 말씀을 부정하는 이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을 브라이언에게 설득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다. ... 대로은 어셔 주교가 여러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를 기준으로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의 연대를 계산해 낸 것을 근거로 증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주교는 천지 창조의 시기를 B. C. 4004년 이라고 주장했다. 주교는 더욱 상세하게 시간을 계산하여, 이 행 복한 사건이 10월 23일 오전 9시에 일어났다고 했다. 브라이언은 안절부절 모하여 몸을 비비 꼬았지만, 대로는 계속 그를 몰아 붙였다. 마 침내 브라이언이 대답을 했다. 브라이언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이 주교의 계산대로 4, 200년 전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 예날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몰랐을까?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다. 나 는 인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거나 인간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면서 성격 구절에 의심 을 품는 행위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자 브라이언은 자존심이 상하면서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그는 (성서)를 본문의 문 구대로 믿으려 하진 않는 모든 이에게 불신받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의 사람들 에게도 신뢰를 잃었다. 대로가 능숙하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여섯 마디로 대답했다. 대로의 질문. "당신은 지구가 6일 만에 만들어졌다고 믿습니까?" 브라이언의 대답. "하 루가 24시간으로 된 6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브라이언은 "피고측 변호인이 성경 의 말씀을 믿는 모든 그독교도를 조롱하려는 불손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대로는 브라이언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편협하고 무식한 인간들이 미합중국 의 교육을 통제하려 드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고, 이것은 당신도 잘 알 것 입니다. 이상입니다. " 레이진저 (6일간인가 아니면 영원히인가?) 1958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남아프리카의 남쪽 원숭이 1925년 레이먼드 다트 (137페이지)는 남아프리카 타웅(또는 타웅그스)에서 발굴한 화석골에 관한 연구 결과 를 책으로 묶어 펴냈다. 그는 이 어린이의 두개골을 근거로 인류의 진화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견해를 과감하게 제시했다. 그는 이 어린이가 속한 종의 이름을 오스트랄로피 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고 짓고, 이것을 유인원과 인류를 연결하는 사라진 연결고릴로 보았다. 그의 이론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1974SIS 루시가 발견될 때까지 이 종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1924년이 저물어 갈 무렵,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의 해부학 실습 조교인 조지핀 샐먼 스 양이 나에게 긴꼬리 원숭이 류에 속하는 원숭이의 화석 두개골을 가져왔다. 그것은 랜드 광산회사의 E. G. 이조드 씨의 소유로 그의 양해를 얻어 학과에서 빌려 온 것이 었다. 나는 이 귀중한 화석골이 석회암 채석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그 채석장은 타우그스에 있는 깊이 15. 2m, 폭 61m인 암석층으로, 로디지아로 가는 간선도로를 타고 가다 킴벌리에서 129km 북쪽에 위치한 베추아날란드에 있으며, 노던 라임사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 직역에서 남아프리카 석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층학적 단서가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 로디지아의 브로큰 힐과 마찬가지로 이 삭회암 퇴적층에서 원시 인류의 화석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 이 들었다. 나는 직시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의 지질학 교수인 r. b. 영 박사에게 이것의 발굴을 의뢰했다. 우연의 일치로 그는 비슷한 시기에 타웅그스를 방문하여 인접한 농장에서 석회암 퇴적층에 관함 지질학적 조사를 벌였다. 타웅그스를 방문한 동안 영 교수는 캠 벨씨의 도움으로 노던 라임사의 총지배인에게 화석골이 발견되 장소를 조사하고, 같은 채석장에서 나에게 갖다 줄 다른 화석골을 가져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그가 나에게 자겨다 준 것들 중에는 긴꼬리원숭이과의 뇌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는 두 개강 의 틀과 뼈의 일부로 밝혀진 돌조각이 포함되어있었다. 마침내 해부학과의 주임 강사 인 고든d. 랭 박사는 자신의 친구인 리들리 헨드리 씨를 통해 같은 계곡에서 다른 원 시인의 두개골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긴꼬리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 의 두개골은 랑글라그트 디프 광산의 드 웨트 시가 소유하고 있으며, 그는 이것을 학 문적으로 연구하라고 우리 과에 맡기는 관용을 베풀었다. 영 교수가 가져온 암석 조각을 이리저리 맞춰 보면서 나는 상대적으로 큰 두 개강의 틀이 골절된 전두의 끝부분에 의해 다른 돌조각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돌조각들에는 하악골의 윈쪽 뒷부분과 아래 부분이 들어 있었다. 돌을 깨끗이 씻고 나니 얼굴 뼈의 뒤쪽과 아래 부분의 윤곽이 드러났다. 상대적으로 큰 두 개강의 틀을 처음 보았을 때, 극서의 크기와 모양이 침팬지나 고릴 라와 상당히 유사해서 이것이 긴 꼬리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이 아니라 유인원의 것 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화석 유인원에 대한 기록은 아직가지 이집트의 파이 움 남부에서는 전해진 것이 없었고, 최근까지 현존하는 유인원이 벨기에령 콩고의 키 부 호수 지역 skaqjn에서 물줄기를 다라 북쪽으로 3, 200km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발 견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화석 유인원은 두개골에 관한 한 하악골이나 상악골의 파편밖에 는 발견되지 않아서 그것들의 전체적인 모습은 알여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로 전 체 얼굴과 이빨이 다 달린 아래턱, 뇌의 주요 부분이 들어 있는 표본의 발견은 화석 유인원의 발견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남아프리카는 호모 로데시엔시스처럼 고등한 영장류의 진화에 관한 완벽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와 같은 자료로서의 완벽성 이외에도 이 표본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현존하는 유인원과 사람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유인원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 이다. ...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의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유 인유 보다는 헐시 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얼굴과 치아가 튀어나오 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발달된 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피테칸트로 푸스와는 달리 이것은 사람을 닮은 유인원이 아니락, 위에서 언급한 얼굴과 뇌에서 발 달한 특성을 지닌, 현존하는 유인원보다는 훨씬 발달한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는 이것이 사람과 유인원을 닮은 사람의 조상 사이의 사라진 연결고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것은 뇌의 용적이 유인원 수준에 지나지 않고 , 사람 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도 부수적이라 할 수 있는 측두부의 발달이 뚜렷하지 않 으므로 분명히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론적르오는 사람을 닮은 유인원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 몇 가지 점을 제안하는 바이다. 우선 호모 시미아다이 라는 새로운 과를 만들어서 이것이 나타내는 개체가 속한 무리를 소속사켜야 한다. 그 리고 이 무리 가운데 최초로 알려진 종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로 정해야 한다. 이것은 첫째로 이것이 발견된저 아래 남쪽 지방을 기념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류의 초기 역사와 관련된 중요하고 수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이 대륙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는 아프리카가 인류 발생의 요람이아는 다윈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을 기념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다트 교수 (네이처) 1925년 2월 7일 새로운 사라진 연결고리 레이먼드 다트 교수가 남아프리카에서 '사라진 연결고리'를 발견했다는 충격적인 사실 이 영국의 해부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J. T. 윌슨 교수의 영향으로 해부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인 많은 젊은 의학도 가운데 하나로, 시드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조 국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왔다. 학위를 취득한 이후 다트 교수 는 엘리어트 스미스 교수와 함께 런던의 왕림 의과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미국의 대학 에서도 강단에 섰다. 그는 3년 전에 비트바테르스란트 애학의 해부학 교수직을 수락하 고 요하네스버그로 갔다. 남아프리카에서 그는 인류의 초기사 연구에 신기원을 연 열 성적인 연구자들을 만났다. 강바닥에서는 유럽의 것만큼 오랜 엤날의 석기들이 출토되 었다. 화석 인류의 뼈가 보스코프에서 발견되었고, 다트 고수가 그곳에 도착하고 얼마 니자지 않아 케이프 식민지의 남부 해안의 암석층 속에서 다른 인류의 뼈가 발견되었 다. 다트 교수는 이것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보스코프 인종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그리고 나서 로디지아의 석회암 언덕 땅속 깊은 곳에서 로디지아인이 별견되었다. 이 것은 보스코프인보다 훨씬 더 오랜 예날에 존재한, 더 원시적인 인종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트 교수의 명쾌한 이론과 적극정 덕분에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지난해 11월 한 여자 실습조수가 그에게 비비속 원숭이의 두개골을 가져왔다. 그것은 킴벌리에서 북쪽으로 12. 9 km 떨어진 타웅그스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 곳에서 광부들은 주변의 건조한 초원에서 15. 2m 정도 돌출한 석회암 절벽의 지하 61m 지점에서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원숭이의 두개골은 부서진 채 부위에서 발견 되었다. 그는 동료인 지질학과 교수 R. B. 영 박사가 타웅그스로 탐사를 떠난다는 것 을 알고 영 박사에게 화석골이 나온 좃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 박사는 채석장 에 도착하자 마침 채석장 바닥에서 나온 많은 뼛조각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 조각들 을 모아 두었다가 돌아와서 다트 교수에게 넘겨 주엇다. 석회암 덩이 속에서 다트 교수는 두개골에서 뇌의 모양을 나타내는 두개강의 틀을 발 견했고, 뼛조각을 맡추다가 뇌의 모양과 관계가 있는 전두와 얼굴의 전체 윤곽을 만들 어 냈다. 뼈는 산산 조각이 나 있었고, 두개골은 거의 다 파손되어 있었다. 이조각들을 맞추어 다트 교수는 자신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고 명명한 인류룰 복원 시켰다. 그의 그림과 기술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명쾌해서 그가 전에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 문을 연구한 사람이라면 거기에 실린 자료들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독자적인 결론을 내 릴 수도 있다. L 또한 다트 교수보다 참고할 유인원류와 인류의 두개골을 더 많이 갖 고 있는 사람들은 부당하게 그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확고한 결로능ㄹ 내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존재를 현존하는 유인원류와 인류의 중간쯤 되는 존재인 ' 유인원'이라고 불렀다.. 비록 그가 이런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의 논문을 잘 살펴보면 그가 과학계에 소개한 동물은 꼬리없는 원숭이나 유인원을 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자시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의 뇌의 크기와 대뇌 표면의 주름 모양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고등한 유인원의 화석골 조각이 이전에 유럽과 인도에서 많 이 발견되었지만, 그것의 얼굴의 전체 모습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어린 동물의 것이다. 첫 영구치 어금니가 나오고 있었는데, LDRJT은 고릴라와 침팬지의 경우 인간보다 두 살 어린 네 살 정도에서 일어나느 현 상이다. 이것은 유인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침팬지나 고릴라를 닮은 데가 있는가 하 면 이 두로가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인류를 닮은 데는 딱 한 군데가 있다. 턱이 작 고 같은 나이의 침팬지에 비해 안와상 융기가 덜 발달해 있다. 턱의 발달이 덜 되어 있다는 것은 인류로 진화하면서 생긴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게다가 침팬지보다 송곳 니가 덜 뾰족하며 위 송곳니 앞의 치간이 더 작다. 아서 케이스 경 (영국 의학 저널) 1925년 2월 14일 호모 하빌리스의 두개골인 ER-1470의 발견 972년 리처드 E. 리키는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근처의 쿠비 포라에서 두개골을 하나 발견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케내 자연사박물관의 분류 번호인 ER-1470으로 널 리 알려진 이것은 당시 발견된 호모 하빌리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벽한 모 습을 지니고 있어 중요하게 여겨졌다. 1972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3월 21일 미브는 우리의 첫달인 루이즈를 출산했다. 7 월에는 쿠비 포라에서 그 유명한 '1470' 두개골을 발견했다. 10월에는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쿠비포아에서 나온, 호모(사람속)의 최초의 증거인 '1470' 두개골은 버나드 응게네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지난해에 탐사단에 합류한 신참이지만, 노련한 화석 사냥꾼 역 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것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다른 호미니드를 발견했을 때와 마찬가지 로 기분이 좋은 정도 이상의 특별한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나이로비 에 가 있다가 처음 발견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7월 27일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 버나드가 처음 발견한 상태대로 보존 되어 있었다. 표본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고, 연한 빛깔의 화석골 조각이 가파른 계곡 에 널려 LDTDJt다. 뼛조각은 모두 길이가 1인치 이하였지만, 어떤 것들은 확실히 호 미니드의 두개골 조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것은 명백히 두개골 뒷부분의 것이었고, 두개골의 위쪽, 옆쪽의 것들도 있었고, 부서지기 쉬운 얼굴 까지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침내 완전한 두개골의 모양을 복원할 수 있다는 의미였 다 그러나 계곡정상의 흙 속에 파묻혀 있거나, 계곡으로 쓸려 내려간 나머지 조각들을 찾아내는 세심한 분류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 분류 작업은 부름 후에야 시작되어 수주일간 계속되었다. 작업에 들어간 처음 며칠간은 많은 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닷새째 되는 날 미브와 버나드 우드(지난 몇 차례의 탐사에서 나를 도와 주었던 친구), 나는 이 작업을 돕기 위해 합류했다. 점심 시간에 우리는 많은 뼛조각을 갖고 쿠비 포라로 돌아왔다. 우리 는 식사와 수영을 마친 후 집에 있는 시원한 베란다로 돌아와 뼛조삭들을 조사했다. 미브는 그 조각들을 햇볕에 말렸다. 잠시 후 우리는 조각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는 커다란 조각들이 서로 들어맞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두개골은 상당히 커다란 것으로, 우리가 1969년과 1970년에 발견한, 뇌의 용량이 작은 오스트랄로피테 쿠스의 두개골보다 더 컸다 우리를 흥분에 빠뜨린 이날 오후, 우리는 분류 작업이 진 행되어 더 많은 뼛조각을 찾아내어야 우리의 조사도 진전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 다. 수주간에 걸친 분류작업을 통해 더 많은 뼛조각들을 찾아냈고, 미브는 이것들을 서서 히 맞춰 나갔다. 두개골은 차츰 형태를 이뤄 갔고, 우리는 그것의 크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전에 본 호미니드의 어떤 화석골보다 큰 두개골이었지만, 문제 는 뇌의크기가 어는 정도 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우리는 불확실하나마 그 크기를 측정 해 보기로 했다. 두 개에 난 틈을 점토와 접착력이 뛰어난 테이프로 정교하게 메우고 그 안에 바다 모래를 채운 다음 우래를 우량계에 넣어 부피를 측정했다. 복잡한 계산 을 거쳐 우리는 뇌의 용적이 800cm2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한 '1470'의 뇌의 용적이 775cm2이므로, 우리는 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이것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화석인류보다 훨신 더 뇌의 용량 이 큰 두개골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팔다리뼈도 발견했다. 당시 우리는 이 두 개골이 260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것은 응회암의 연대와, 케임브리지 대학 의 지구물리학자 hws 밀러와 그의 동료 프랭크 피치가 확인해 준 바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50만 년 정도의 오차가 나는데, 우리는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어떤 두개골을 호모라고 부를 것인가, 다르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의하기 나름 이다. 우리는 발견한 화석에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에게 우리가 편한 대로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X'가 'Y'보다 'Z'에 더 가까운지 여부함 판단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X'와 'Y' , 'Z'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특별한 두개골을 '호모'라고 불렀다. 이것이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불 렸던 것들보다는 호모라고 불렸던 것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 유는 '1470'은 지금가지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뇌의 용량이 현저하게 크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지능은 문화, 과학 기술과 함게 오랜 예날에 큰 뇌를 지니고 있는 것이 유리한 시기에 어떤 사거느로 인하여 발달하게 되었다. 초기 호모에 대한 나의 HRKSTLA은 바로 뇌의 용적이 정확히 언제부터 커졌는지 알고 잎다는 데에 있고, '1470'은 비록 연대 추정에 수정이 있었지만 비교적 큰 뇌를 지니 호모니ㅣ드의 초기 유형 가운데 하 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생: 리처드 E. 리키의 자서전) 1983년 루시의 발견 1974년 11월 30일 에티오피아의 하다르에 있는 한 골자기에서 도널드 요한슨 은 호 미니드의 화석골 수집사에 일대 사건이 될 만한 발견을 했다. 그는 이글에서 그가 처 음 루시( 이 화석골은 돋 이런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상 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약 310만 년 전의 호미니드를 자 신이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과 감격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인류 조상의 화석골을 연구하는 고인류학자로서 나는 미신을 믿는다. 고인류학자들 가 운데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하는 일이 운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연구하는 화석골은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유명한 고인류 학자 들 조차 그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삶을 마친 경우가 있다. 나는 운이 좋은 편 이다. 나느 하다르 현장에서 작업한지 불과 3년 만에 여러 점의 화석골을 발굴한 것이 다. 나는 일기에도 "느낌이 좋다. "라고 써 놓았다 그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그날 이 운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은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암석과 자갈, 모래로 뒤덮인 황무지인 하다르에서 발견되는 화석골은 거의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아르피카 사막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느 하다르는 예전에는 호수의 바닥이었지만 지금은 건조하고 퇴적물이 쌓여 있어 과거의 지질학적 변화의 역사를 말 해준다. 그곳에는 화산재와 진흙 속의 퇴적물, 먼 산에서 쓸려 내오룬 고운 모래, 화산 진, 진흙 등이 쌓여있다. 하다르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데 일단 비가 내리기 시작 하면 집중호우의 양상을 띠어 하룻밤에 6개월치 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는 이곳의 표토는 이 강우량을 모두 흡수하지 못한다. 그래서 물은 골자기로 흘러 내리면서 골짜기의 측면을 깍아 내고, 따라서 더 많은 화석골이 드러나게 된다. 톰 그레이는 현장의 위치를 지도에 기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소에서 벗어나 탐사단 원들이 작업시간 주엥 주로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기저기 천천히 도랑다 니며 화석골이 있난 찾아보는 일이다. 톰과 나는 두 시간 정도 돌아다녔다. 거의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고, 기온은 무려 110 도에 육박했따. 우리는 별로 많이 찾아내지는 못했다. 히파리온이라는 절멸한 작은 말 의 이빨 몇 개, 절멸한 돼지의 두개골 조각 영양의 어금니 몇 개, 원숭이의 턱뼈 일부 등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들을 많이 수집해 놓았는데도 톰은 이것들을 어디에 못 엇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퍼즐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톰이 말했다. "내가 가져갈게. 언제 캐프로 돌아가지?" "지금. 그런데 잠깐 이 길로 돌아가서 저기 작은 골짜기의 바닥 좀 더 살펴보자." 내가 말한 그 골짜기는 우리가 아침 내내 작업을 한 언덕의 정상에 잇었다. 그곳은 이미 다 른 대원들이 적어도 두 번 이상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별다른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느낀 '행운'을 믿으며 그 곳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이 골짜기에는 실제로 뼈는 없었다. 그러나 막 돌아가려는 순 간 나는 뭔가 경사면 위로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말했다. "저것은 호미니드의 팔의 일부야." "그럴 리가 없어. 너무 작잖아. 원숭이류의 것일 거야."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톰이 다시 말했다. "너무 작은데." "아냐, 호미니드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내 손의 오른편에 있는 조각. 그것도 호미니드 것이야." 톰이 말했다. "맙소사!" 그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작은 두개골의 뒷부분이었다. 몇 피트 떨어진 곳에 대퇴 골 조각이 있었다. 톰은 다시 중얼거렸다. "맙소사!" 우리는 일어서서 경사면에 다른 뼛조각이 있나 찾아보았다. 우리는 다시 호미니드의 척추뼈 두 개, 골반 일부를 찾아 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 믿기지 않은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들이 모두 들어 맞는다면 어떨까? 이것들이 오랜 예낫의 한 삶의 호미니드 뼈라며? 그런 뼈는 어디에 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톰이 외쳤다. "저기 좀 봐. 늑골이야." 한 사람의?... 그날 오후 모든 대원들은 그 계곡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구역을 나눠 대대적인 수 집작업을 3주일간 계속했다. 그 작업을 통하여 우리느 한 사람 골격의 40%에 해당하 는 뼈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부서진 조각이었다)를 수백 점 발굴해 냈다. 톰과 나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중복되는 뼈는 없었다. 그런데 과연 이 뼈의 소유자느 어떤 사람인가? 예비 조사만 마친 사랑와에서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엇다. 우리도 이런 걸 처음 발견했으므로. 캠프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발굴 첫날 밤 우리는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았다 우리는 끝없이 얘기를 이어갔고, 계속 맥주를 마셨다. 캠프에 있는 카세트에서 흘러 나오는 비틀스의 (다이아몬드와 함께 공 중에 떠 있는 루시)라는 노래가 밤하늘에 울료 퍼지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 발견한 이 화석골은 루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엄연히 하 다르에서 수집했을 때 붙은 AL 288-1이라는 명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널드 요한슨과 메이틀런드 에디 (루시: 최초의 인류), 1981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 지금까지 발견된 호미니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92년 에티오피아의 아리미스에 서 캘리포니아 대학의 팀 화이트 교수 팀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44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17개의 화석골은, 지금가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에 속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종은 원숭이와 인 류의 계통수를 연결하는, 사라진 연결고리일지도 모른다. 인류의 가장 오랜 조상으로 알려진 것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어싿. 그것은 440만 년 전에 살던 호미니드로, 인류의 조상 가운데 가장 원숭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팀 화이트 교수와 동격 다핵의 rps 수와 교수, 에티오피아 고인류 학 연구소의 베르하네 아스파우 연구원은 이테오피아 북부 아파르 지구의 중앙 아와시 라는 황무지에서 호미니드의 hgktjrrhf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것의 명칭을 뿌리라는 뜻 을 지닌 아파르어에서 따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라고 붙였다. 이 새로운 종은 아프리카 유인원과 인류,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진 호미니드의 가장 가까운 공통의 조 상 사이의 격차를 줄여 주었다. 화이트와 그의 동료들은 이 새로운 종이 널리 알려진 루시와 그의 종족(오스트랄로피 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 오래 전의 호미니드)과는 다른 것이라고 확신했다. 최근의 발 견이 있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 렌시스로 이들은 390만~29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2~1993년 겨울, 아와시강에서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아리미스 아을 근처를 잠사하던 화이트와 그의 동료들은 17면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을 발견했다. 이 뼈들은 두개골 조각, 어 린이의 하악골, 많은 이빨과 부러진 팔벼,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팔다리뼈 세 개 등이었다. 이 지점은 루시와 다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가 발견된 하다 르에서 남서쪽으로75km 떨어진 곳이다. 400만 년 이상된 호미니드를 발굴 했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석골 수집가들은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에서 이것을 표본을 찾았었 다. 인류와 아프이카 유인원류는 800만~600만 년 전에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그 시 기에 아프리카에서 서식한 유인원이나 인류의 것으로 보이는 화석골은 발견되지 않았 다. 새로 발견된 화석골은 600만 년 전에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케냐의 네 지역에서 발견되, 분류되지 않은 뼈들은 550~40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 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족보행을 했는지 여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오스트랄로피테쿠 스 라미두스의 엉덩이 뼈나 다리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네발짐스인지 두 발짐승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는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 스의 대호두공(두개저에 있는 큰 구멍으로 이곳을 통해 뇌와 척수가 연결됨)은 유인원 의 것보다 훨씬 앞쪽에 있다. 이것은 머리가 등뼈와 평형을 유지했음을 암시한다. 화 이트와 그의 동료들은, 이것의 이빨의 모양과 크기를 비롯하여 몇 자기 특징으로 미루 어 보아 아라미스 호미니드는 절멸했거나 현존하는 아프리카 유인원과는 분명히 다른 종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라미스의 생긴 모습이나 생활 양식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업 삳. 팔뼈의 생김새로 보아 호미니드는 키가105cm에 불과한 루시보다는 키가 크지만, 150cm 정도 되는 다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보다는 키가 작다. 아라미스 호미니드가 살던 환경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나무와 풀 이 우거진 평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는 콜로부스속 원숭 이와 쿠두라는 영양, 기타 나무를 좋아하는 동물들과 함께 살았다. 숲이라는 환경은 이 호미니드들이 호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시와 마찬가지로 나무에 기어오르며 많 은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라미스 호미니드의 직립자세는 넓은 숲과 삼림지대에서 나무에 열린 열매를 다기 위 해 서서히 달달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특히 두개골과 다리뼈를 비롯하여 더 많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의 뼈가 발견 되기 전에는 이 종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펱시스, 더 후에 출현한 인류 사이의 관 계를 규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첫째는 오스트랄로피 테쿠스 라미두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조상이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렡시스는 파란트로수스(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이세이와 같은, 턱이 크고 '건 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와 현생 인류의 마지막 공동 조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가 호모류와 강건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 의 마지막 동동 조상일수 있다는 서이다. 이런 가정하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 렌시슨느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일 수 없다. 세 번재 가능성은, 리ㅓ풀 대학의 버너드 우드 교수가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는 건장한 오스 트랄로피테쿠스류의 조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 가 아니라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사라 버니 (뉴 사이언티스트)지, 1994년 10월 1일 인류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현생 인류의 기원을 놓고 정반대의 의견을 가진 두 진영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이싿. 동일한 화석골을 증거로하여 다지역 발생설, 도는 지역적 연속 이론과 이주 교체설, 이 두 이론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립되는 과학계의 양대 진영이 서로 자신의 읜견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다. 양 측 모두 100만 년 정도 전부터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설을 인정한다. (흔히 이것을 '1차 아프리카 탈출'이라고 한다. ) 그러나 한쪽에서는 10 만년 정도 전에 또 한 번 주요한 이주 ('2차 아프리카 탈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 아프리카에서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진화학,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 스)인 무리가 진출하여 결과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당시 전 세게의 모든 주민 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주교체설에 대항하여 반대 진영에서는 지역적 연속 이론을 내놓았다. 후자의 추종자들은 2차 아르피카 탈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현생 인류는 구인류(유라시아에서는 네안데르탈인, 중국과 자바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독립적인 다양한 주거지에서 반 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연속적인 유전자 화 산이 일어났고 지리상으로 인접한 지역의 무리들 사이에 서 이종 교배가 이루어져 인종적으로 다양하지만 한 종인 현생 인류가 생겨났다고 주 장한다. 여기에서는 네안데르탈인에 관해서는 화석인류 가운데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에 관해서는 화석 인류 가운데 가장 많은 자료를 갖ㄱ4h 있다. 네안데르 탈인은 다지역 발생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진화했을까, 아니면 이주 교체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진화 과정에서 절멸했을까? ... 현대 과학 이론에 의하면 종형성-새로운 종이 형성되는 과정- 은 주로 이종 교배된 무리들의 지리적 격리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다. 에르스트 마이어에 의해 확립된 이러 한 지리적 요인에 의한 종형성 이론은 이지역성 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류 진화의 경 우 이데 대한 유전학적, 해부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다. 격리는 산의 생 성이나 해면의 상승 등 지리적 장벽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고 새로운 행동이나 형태적 인 장애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다. 종형성에 관해 다지역설과 교체설은 예전의 인류의 서식지를 광범위하게 분산시킨 현재의 격리에 대해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다지역 진화설은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격리는 종형성의 이 지역성이 일어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하다고 한다. 플리스토세의 모든 인류 사이에서 유전자(유전의 기본 단위)가 순환하고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의 1만 년 동아넹는 인류는 호모 사피엣느라는 한 종 밖에 앖었기 때문에 종형성이라 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선 1만 년 전이나 혹은 그 이전에 호미니 드가 최초로 아프리카를 떠나 퍼진 이래 이 한 종에서 모든 변이를 관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다 지역 발생론자들은 변화의 구조는 주로 행동에 따르 기 위해 해부학적인 진화가 이루어지고, 행동 변화는 l술 발달을 가져오게 된다. 유전 자와 마치 가지로 이런 변화는 사람들 사이를 순환한다. 각기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 보편적인 강력한 자극에 유사함 장식르로 반응하게 되고, 전체적으로 현생 인류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몇몇 지역적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정한 환경레서 갖게된 특이한 특성의 선택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현생 인류로 점차 진화해 오면서도 계속 유지되어 왔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의 커다란 코는 유럽의 기후에 걱응하기 위해 현대 유럽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현대 유럽인에게 전이되었고, 자바의 호모 에 렉투스의 두드러진 광대뼈는 행동이나 식습관의 요인에 의해 현대의 오스트레일이라 원주민에게 전이 되었다. 지역간의 유전자 확산이라늠 메커니즘은 다지역 진화론에서 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지역적 선택에 의해 작용하는 새로운 특성을 끊임없 이 받아들이고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분기를 증대시키는 지역적 분화 를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역 교체설 지영에서는 진화에 의한 변화에 대응할 만한 일로는 정림하지 못했다. ...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 사이의 차이는 해부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요인도 있다. ... 이 두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의사 소통 능력-언어, 시각적 요소, 기호-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고... 이것은 다시 그들 주거지의 형성, 지형의 개발, 새로운 서식지로의 이주 등에 영향을 미친다. 네안데르탈인은 유인원도 아니고 사라진 연결고 리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다만 그들은 원시성과 진화된 특성모두 지닌, 우리와는 다른 인류에 속한다. 현생 인류가 승리를 거둔 것이 필연적인 일은 아 니며, 플레이스토세에 유럽을 차지하고 살던 네안데르탈인은 예기치 못하게 그곳에서 떠나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는 3만 년이라는 기간은 빙기의 시계로 보자면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스티링거와 클라이브 갬블 (네안데르탈인을 찾아서)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