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 장엄한 성벽 도시 지은이: 브뤼노 다강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문지성 제1장 발견? 이것이 진정 발견인가? 찬물을 끼얹은 선교사: 부유보의 이유있는 항변 1874년이 되면서 앙리 무오의 사후 영광은 확실히 정립되었다. 각종 논문과 저작들이 발견되면서 그는 캄보디아의 옛 수도를 '발견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당시 에르네스 두다르 드 라그레와 프랑시스 가르니에가 공동 저작한 여행담은 무오와 그 후예들의 여행기를 증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찬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샤를 에밀 부유보라는 프랑스 선교사로서 그러한 발견을 '가짜'라고 주장했다. 그 의 말에 따르면 앙코르는 실종되거나 망각된 적이 없기 때문에 '발견될'수가 없다는 것 이었다. 우선 부유보 자신이 무오가 유럽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앙코르를 방문하여 그 곳에 관한 간단한 여행기를 출간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부유보도 최초의 방문자는 아 니었다. 선교사들이 이미 여러번 앙코르를 언급했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 여행객들 이, 또 그 이전인 13세기에도 중국 기록자들이 관련 자료를 남겨 놓았다. 물론 부유보의 말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시대정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상을 '발견'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따라서 발견을 경시하는 주장에는 별 관심 이 없었다. 게다가 무오는 자기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부유보의 여행기를 인용하기도 했다. 두다르 드 라그레와 가르니에 역시 선배 여행자인 선교사 와 포르투갈 탐험가나 주달관의 저작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야만인'을 방문한 중국인 1296년, 주달관은 그보다 몇 년 전에 마르코폴로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베트남 해 안을 따라 항해했다. 그러나 그는 인도차이나까지 직접 항해하는 대신 메콩강을 거슬 러 올라가 캄보디아 평원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 톤레사프까지 들어갔다. 그리 고 그 호수를 건너 호수의 북동쪽 둑에 하선했는데 앙코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 다. 그는 캄보디아로부터 조공을 얻어내기 위해 파견된 원나라 황제의 사절로서 1296 년 4월부터 1297년 7월까지 앙코르에 머물렀다. 그의 여행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 첸라(진랍국)로 알려진 캄보디아와 외교를 체결하고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주달관이 봉행한 무역사절이 최초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당시의 앙코르에는 중국 상인들과 뱃사람들이 사는 중국인 촌이 벌써 오래전부터 번성하고 있었다. 여행객들을 위한 개괄적 안내서 주달관의 캄보디아 방문이 중요해진 이유는 그가 본국에 돌아와 쓴 여행기 때문이다. 그는 (진랍풍토기)를 쓰면서 성벽도시인 수도와 그 인근지역을 자세히 묘사했다. (진랍 풍토기)에는 성벽, 도시 내부와 그 외곽에 지어진 사원같은 영구 건물과 왕궁, 주민들 의 거주지, 그리고 그다지 단단하지 않은 자재로 지어진 건물 등이 소개되어 있다. 따 라서 이 책을 수도의 주요 지형지물과 그 인근에서 관찰된 몇몇 건축물을 다룬 개괄적 인 안내서인 셈이다. 성벽도시 캄보디아인들이 앙코르톰 ('위대한 앙코르', 혹은 '위대한 도시'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성벽도시는 거대한 장방형 단지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사방을 벽과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달관이 특히 감명을 받은 것은 다섯 개의 출입문이 있는 성벽 이었는데, 이것은 16세기의 포르투갈 여행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안에 있는 거대한 사원들도 성벽만큼 주달관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가 사원 의 복잡한 구도, 도금과 금속 장식으로 단장된 상층부, 황금 조상 등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썼다. "외국 상인들이 캄보디아가 부귀한 나라라고 보 는 이유는 아마도 이 사원 때문일 것이다." 왕궁의 경우, 주달관은 공식적인 장소만 돌아볼 수 있었다. 일반에 공개된 공식적인 장소 는 캄보디아 왕이 '황금의 창문' 앞에 나타나 신하나 사절들을 접견하는 곳이었다. 하 지만 주달관은 "왕궁에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긴 베란다와 익랑이 조 화를 이루며 사통팔달 연결되어 있다. "라고 썼다. 또한 산책로 뒤에 있는 왕궁 앞에 "12개의 조그마한 석탑이 있으며, 이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다. "고 기록하였 다. 오늘날 이 탑들은 '로프 댄서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 주달관은 도시 외곽에 있는 몇 가지 주요 지형지물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그중 '루 판의 묘'라고 이름한 것이 바로 앙코르와트였다. 또 그는 거대한 인공호수 한가운데 세운 두 개의 사원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동쪽 호수'에 있는 사원 (동쪽 메본)에는 "부 처 와상이 있는데 이 와상의 배꼽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 나온다. "라고 기술했다. 왕, 궁정, 신민 왕은 백성을 보호하는 마법을 부여받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왕은 왕국의 평화를 위해 여자로 변신한 머리 아홉 달린 뱀과 매일 밤 성교를 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왕이 왕궁 밖으로 행차할 때면, 그는 황금 칼을 차고 코끼리를 탔 으며, 수많은 수행원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시가행진을 벌였다. 캄보디 아 백성이 왕에게 보인 충성은 대단히 극진한 것이어서, 주달관은 "비록 그들이 야만 인이긴 하지만 왕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다. "라고 썼다. 그는 왕궁의 다섯 비빈들도- 이중 한 명이 정비이고 나머지는 동서남북의 이궁에서 기거했다- 다른 여자들처럼 맨발에 시뇽 (여자 뒷머리에 땋아 붙인 쪽)으로 머리를 틀 어 올리고 '우유처럼 하얀' 유방을 드러내고 다녔다고 전한다. 대다수 캄보디아 사람들 의 살색이 '아주 까만데도' 이들 비빈의 유방이 하얀 것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 문일 것이라고 한다. 정부 고관과 궁중 관리들은 황금 가마채가 달린 가마를 타고 다녔고, 신분의 고하에 따라 수가 다르게 정해진 수행자들이 황금 일산을 든 채 뒤를 따랐다. 종교는 다양했 으며, 궁정에는 교육받은 바라문과 노란 법의를 입은 불교 승려, 그리고 시바신의 추 종자들이 있었다. 주달관은, 일반 평민들은 대단히 소박하여 중국 사신이 거리에 나타 나면 땅에 납작 엎드려 절을 했다고 전한다. 주달관은 다양한 축제에 대해서도 기록해두었다. 새해의 첫 달을 기념하는 축제, 불상 을 목욕시키는 의식 등이 대표적인 축제였는데, 왕궁앞의 산책로에서 개최되는 아주 중요한 축제에는 외국 사절들도 초대되었다. 그 축제에 많은 예배자들이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도시는 버려졌는가? 주달관이 다녀가고 나서 1세기 반쯤 지났을 때인 1431년경, 캄보디아의 왕은 왕궁을 앙코르톰에서 거대한 호수 너머 남쪽으로 옮겼다. 이웃나라 타이의 침공을 피하기 위 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때 왕은 일부 기록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엄과 의식을 갖춘 채 점잖게 파천했을까, 아니면 타이 군대의 침공에 놀라 허겁지겁 퇴각했을까? 어느 쪽이 실상이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앙코르가 그후 약탈되어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앙코르는 16세기에 아주 잠깐 수도의 지위를 회 복했을 뿐, 영원히 수도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후 캄보디아의 수도는 프놈펜으로 굳어져 버렸다. 앙코르에 들어온 타이 사람들 캄보디아인이 남긴 후대의 기록은 (초기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 '크메르 고관 들'에게 각종 기념물의 기원, 역사, 목적에 대해 하문하는 타이의 왕을 설명하면서ㅡ 그가 정복자로서 앙코르에서 저지른 만행을 완곡하게 기술하고 있다. 도시에 초병을 설치한 왕은 "금, 음, 동으로 만든 불상과 보석, '8월 황소'같은 동물 조상을 마구 약탈 했으며, 승려들에게도 노략질을 부추겼다. "또한 함락된 도시에 사는 약 6만 가구를 타 이로 강제 이주시켰다. 앙코르의 조상을 타이로 가져간 타이 왕의 소행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을 노략 질하여 루브르 박물관을 풍성하게 만든 것과는 그 동기가 다르다. 타이 왕이 추구한 것은 예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상 속에 깃들여 있다고 믿어진 앙코르 왕의 위력이 었다. 100년 뒤 이번에는 미얀마 사람들이 이와 똑같은 짓을 했다. 그들은 타이를 정 복했을 때, 타이의 수도 아유타야를 노략질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앙코르 조상을 가져 갔다. 이렇게 하여 1734년 이들 앙코르 조상은 만달레이로 옮겨졌고 지금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중반경 캄보디아 왕은 캄보디아 북부에서 코끼리 사냥을 하던 중, 열대밀림에 뒤덮여 버려진 도시를 발견했다. 왕은 도시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곳을 도읍으로 정했 다. 17세기 초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여행담을 묶은 간행물을 통해 이 도시에 대한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다. 이 간행물은 조잡하고 황당한 기술로 가득 차 있었지만, 1550년이나 1570년에 재발견되고 선교사와 탐험가가 방문한 정글 속의 도시가 앙코 르톰(성벽도시, 혹은 위대한 도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었다. 이 도시는 앙코르와 트는 아니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풍부한 기명들은 그 당시 여러명의 시주들이 앙코르 와트에 많은 보시를 하였음을 증명한다. 원래 바라문교의 브라흐마를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이 사원은 그 무렵 불교 사원의 성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불교 사원으로 남아 있다. 캄보디아에 대한 서구의 관심 발견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서구는 캄보디아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나라는 황금이나 향료를 취급하는 무역로에 들어 있지도 않았고 강력하거나 부유하지도 않았 다. 상인이나 정복자를 끌어들일 만한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6세기 중반까 지 소수의 무역업자, 탐험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뿐이었으나, 16세기 말 캄보 디아의 왕들이 말라카의 포르투갈 사람과 마닐라의 스페인 사람들에게 원조를 요청하 면서ㅡ 방문객의 수가 늘어났다. 스페인 탐험대는 캄보디아 탐험에서 별 성과를 거두 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구의 이목을 캄보디아에 집중시켰다. 이 나라를 소개한 자료 와 책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당연히 앙코르톰이 거론되었다. 전문 문필가는 아니었으 나 돈벌이에 나선 군인이나 무역업자의 글이 널리 유통되었고, 선교사들도 상급자들에 게 자세한 사정을 적은 보고서를 보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편찬자들은 이런 자료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 서 성벽도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중 어떤 이는 그 도시를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을 만큼 경이적인 유적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이는 플라톤의 '공 화국'이나 '아틀란티스'같은 이 '환상의 도시'를 선뜻 소개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하지 만 그들도 선교사들이 제사한 확실한 증거 앞에서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아무 튼 이들 초기 간행물에는 경탄과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재발견된 도시 발견자들은 이 도시를 둘레가 4리그 (1리그는 약 4, 8㎞)에 달하는 아주 크고 아름다 운 요새라고 했다. 성채 축조술은 매우 뛰어나며, 돌들(어떤 이는 돌이 아닌 고급 대리 석이라고 했지만 실은 홍토이다. )은 모르타르를 쓰지 않고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 했다. 해자 외벽의 비스듬한 제방은 충실히 묘사되었으나, 성벽의 위쪽은 "유럽식 총안처럼 되어있고, 총안과 총안 사이의 돌출부에는 각종 동물의 조상이 세워져 있다. "고 설명했다. 그리고 성벽을 통해 들어오는 대문이 훌륭하다고 하면서도 그 대문에 새겨진 얼굴들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들 대문에서 해자를 넘어오는 연결로는 발견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는지, 그들은 캄보디아 사람이 신봉한 신과 악마 들-주달관은 '석장'이라고 표현했다-을 남상주로 묘사했다. 도시의 내부 묘사는 몇몇 건물에 한정되었는데, "돌로 만든 아름다운 집들이 질서정연 하게 늘어서 있다. ""대리석 석판을 깐 거리""설화석고와 벽옥으로 만든 기념물"같은 일반적인 표현이 고작이었다. 어떤 여행자는 "전에 왕궁이었던 곳"과 도시의 중심부에 "아주 멋진 미 완성 사원이 있다. ""우상이 가득 있는 훌륭한 사원"과 같은 표현을 썼다. 이것은 바욘 을 가르키는 것이 틀림없지만, 13세기의 주달관과 마찬가지로 탑위에 새겨진 얼굴을 언급하지 않고 무시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여행자들은 도시에 "다섯 개의 첨탑이 있는 사원이 있다. "고 말했는데, 이 다섯 개의 첨탑은 성벽 외곽에 있는 거대한 사원 앙코르와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도시 안에 경이로운 것들이 많았던 탓인지 주변 지대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당시 이미 번성한 사원이던 앙코르와트는 오직 두 자료를 통해서만 그 소재가 확실히 파악된다. 그중 하나는 1580년대의 앙코르와트를 묘사한 카푸친 수도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7세기 초의 포르투갈 연대기 작가인 디오고 도 코우토가 재작성한 것인데, 이것은 훨 씬 후대까지 발간되지 않았다. 앙코르톰 주위의 기념물에 대해 코우토는, "귀족들의 무 덤인 듯한 사원이 여러 개 있다. "고만 말했다. 또 앙코르와트를 '그것을 축조한 왕들 의 무덤'이라고 언급했다. 그럼 누가 이 도시를 지었다? 기념물의 성격과 목적을 설명하는 디오고 도 코우토의 이야기는 이 도시의 역사를 비 교적 직접적으로 들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성벽에는 인도어 기명이 있는데, 코우토 는 이 도시가 "20명에 달하는 왕의 명령에 따라 완공까지 700년이 걸렸다. "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여행자들은 그 기명의 뜻을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대와 구약시대의 역사에 근거하여, 그 기명을 알렉산더 대왕, 로마인, 혹은 중국계 유대인이 남겨 놓은 게 아닐 까 추측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주변에 사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앙코르를 건축했다 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19세기에 불거져 나온 것인데, 이로써 앙코 르의 신비감은 더욱 높아졌다. 위대한 유산에 대한 인식 외부인은 캄보디아인의 업적이 아니라고 했지만, 캄보디아인은 현 국왕의 선조들이 앙 코르톰과 앙코르와트를 지었다고 확신했다. 16세기에 앙코르와트는 이 건물을 건축한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경)의 이름을 따 수리야바르만이라 불렸다. 그리고 캄보 디아인은 1550년경에 이 왕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부조를 완성했다. 이것은 캄보디아 의 역사가 면면히 계승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이들 부조를 완성한 것은 중국 장인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양식의 유사성을 이 유로 예술사가들이 주장하고 나선 것인데, 앙코르 이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정교한 장인 정신을 잃어버렸으리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이교도의 로마, 인도인의 바벨탑 캄보디아 자료에는 후대의 캄보디아 왕이 이 도시를 '발견'하여 잠시 이곳으로 궁정을 옮겼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앙코르와트 지역'에 앙칸왕이 부임했다는 내용은 있다. 이는 이 지역의 중심부가 성벽도시 앙코르톰에서 성벽 외곽의 앙코르와 트로 옮겨 갔음을 증명한다. 기명에도 앙코르톰 이야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기명 에 언급된 행사들 또한 앙코르톰에서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제 조상이 세워지고 봉헌 물이 바쳐지는 곳은, '완전히' 복원된 앙코르와트였고, 캄보디아, 타이, 일본 등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곳도 앙코르와트였다. 이 도시는 더 이상 왕국의 수도가 아니었 지만 도시 부근의 앙코르와트 사원은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8세기에 드문드문 이곳을 찾아왔던 서방의 방문객들도 이 사실을 주목했다. 프랑 스 선교사 셰브뢰유 신부는 그의 편지에 "로마가 기독교도의 중심지였다면, 앙코르와 트는 대여섯 왕국에 사는 이교도의 중심지이다. "라고 썼다. 인근 국가의 왕들은 전쟁 중에도 앙코르와트를 순례했으며 타이 왕은 해마다 사절을 보냈다. 1783년경 앙코르 를 방문했던 또 다른 프랑스 선교사는 이곳을 가르켜 '미신의 본거지, 인도의 바벨탑' 이라고 편지에 썼다. 앙코르와트의 첫 번째 도면 1911년 일본 동경대학의 토목과 교수는 하노이로 가던 중, 프랑스 극동학교(극동지역 의 고고학을 연구하는 프랑스의 기관)에 들렀다. 그는 거기서 앙코르에 관련된 여러 가지 도면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십자형의 앙코르와트 도면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극동학교 관계자는 앙코르와트를 그린 '독특한 도면'이라고 설명해 주 었으나 일본인 교수는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오래된 도면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래 서 동경으로 돌아와 사방으로 수소문해 도면을 찾아냈다. 17세기 초에 앙코르를 방문 한 일본인 순례자가 그린 것으로 1715년에 복사본이 제작된 그 도면은, 다름 아닌 앙 코르와트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앙코르의 유적지를 그린 가장 오래된 도면이었다. 17세기 초 일본의 상인들이 캄보디아와 타이에 진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신심 깊은 일본인 불교 신자가 앙코르를 방문했다가 이 위대한 사원의 기초 도 면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불제 자가 앙코르와트를 붓다 생존 당시의 성지인 제타바나로 혼동했다는 것이다. 그 일본 인 불제자는 앙코르로 여행하면서 자신이 붓다의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17세기 초 만해도 인도는 아주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였으므로 그는 불교의 요람인 마가다(오늘날의 미하르)가 타이나 캄보디아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인 불제자는 마가다에 도착했다고 믿었고, 그토록 많이 들어 왔던 놀라운 사원을 참배 하면서 그곳을 한역 경전에서 본 제타바나로 착각했다. 천축국을 방문했던 중국 순례 자는 분명 제타바나가 퇴락했다고 경전에 기록했지만, 일본인 불제자는 파괴되었다던 제타바나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앙코르와트를 자세하게 묘사한 최초의 도면이 지리적 무지와 종교적 열성의 결 합으로 완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제2장 정열을 불사른 발견자들 방콕에서 본 앙코르 1819년 중국학 연구자 아벨 레뮈사가 주달관의 (진랍풍토기)를 번역했을 때만 해도 유럽인은 앙코르는 물론이고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다 수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앙코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바탐방주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 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종종 앙코르를 방문했고, 그 소감을 편 지로 써 보냈으나, 편지들은 개인의 서재에 파묻혀 유출되지 않았다. 타이는 182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방콕에는 외국인촌이 번 성했다. 1794년 타이가 캄보디아의 바탐방주와 앙코르주를 합병하자, 타이 왕실과 이 위대한 사원간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당시 타이에는 많은 유럽인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타이와 그 부속 영토를 다룬 방콕 발 보고서에도 당연히 앙코르에 대한 언급이 많을 법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 점은 타이를 다룬 서구의 저작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판단되는 (타이 왕국 또는 시암에 대한 기록)(1854)에서 잘 나타난다. 이 책의 저자인 몽시뇨르 장 밥티스트 팔르구아는 학자이며 선교사인데 타이 지역에서 여러 해를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사원의 기원에 얽힌 캄보디아의 전설과 '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을 소개하면서, '노코르바트(앙코르와트를 가 리키는 타이어)의 경이로운 폐허'에 관해서는 몇 줄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대리석 운운 한 부분은 그보다 앞선 편찬자들의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한 것인데, 팔르구아는 사실 을 직접 확인하기보다는 예전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듯하다. 그러나 앙코르에 많은 호기심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방콕의 영국인 거류지에 사는 몇몇 사람들은 앙코르까지 직접 여행을 했고, 그중 한 사람은 이 '경이로운 수수께끼' 를 푸는 일이 학계의 커다란 도정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유럽은 마침내 앙코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해방된 선교사 캄보디아에 도착한 샤를 에밀 부유보 신부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는 캄보디아에 오 기 전 2년동안 코친차이나(오늘날의 베트남)에서 박해를 피해 가며 선교활동을 벌이느 라 큰 어려움을 겪었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마음이 탁트인 캄보디아 국민들과 인자한 왕의 환대, 선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은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 나라 대중들이 포교에 무관심하여도 별로 상심하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도착하기 전, 그가 앙코르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는 앙코르를 직접 방문하여 둘러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바탐방 근처의 사원과 앙코르를 방문했을 때, 그가 보여 준 관심은 여느 관광객 수준이었으며 탐험가다운 경 이감은 느끼지도 않았다. 1850년 12월: 첫 번째 여행객 부유보는 1850년에 앙코르를 방문하여 보낸 이틀간의 짧은 여행담을 1858년 책으로 발간했다. 그리고 16년 뒤인 1874년, 그는 후배 여행객들(부유보는 이 여행객들은 앙 코르 발견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의 앙코르 방문 자료를 대폭 인용하면서 1858년의 짧은 여행담을 윤색해 다시 내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큰 호수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 오늘날의 시엠레아프라는 작은 마을과 정글을 통과하여 앙코르와트의 서쪽 제방 에 도착했다. 해자와 거대한 입구를 지나는 동안 부유보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참 으로 기괴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당하고 장엄한' 곳이란 인상이 더 강했다. 그는 불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불상옆에 힌두교 신상들이 함께 놓여 져 있는 것에도 주목했다. 이것은 그가 불교와 힌두교에 어느 정도 해박했으며, 또 훌 륭한 선교사답게 이교도의 신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려 준다. 당초에 부유보는 초판본에서 앙코르톰이 성벽을 말하면서 남쪽 대문의 상태가 아주 좋 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6년 뒤에 발간한 증보판 여행담에서는 초판본에서 나오지 않 은 '50개의 석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850년 부유보가 그곳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는 밀림이 석상들을 온통 뒤덮고있어 석상을 보는 일 자 체가 불가능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보다 10년 뒤에 앙코르를 방문했던 앙리 무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초판본과 증보판 사이의 차이는 바욘을 설명한 대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판본에 서는 부조만을 말하고 있지만, 증보판에서는 '거대한 붓다의 두상들'과 '이집트 양식을 연상시키는 정교한 건축물'을 새롭게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 양식 운운한 것은 앙리 무오가 앙코르톰의 출입문을 묘사하면서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부유보는 여행자의 향수와 공허가 깃들인 어조로 여행담을 마친다. (이런 어조도 무오 의 것을 흉내낸 것이다. ) "한때는 장엄과 영광으로 빛나던 위대한 유적이 밀림 속에 버려져 황폐해진 광경을 보는 일처럼, 여행객에게 피로와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으리." 최초의 그림들 일반 대중들은 그 낯설고 장엄한 유적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어도, 구체적인 이미지 를 떠올릴 수 없었다. 피라미드, 인도의 사원은 중국의 파고다 따위를 연상하면서 대 강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겠지 하고 막연하게 추측할 분이었다. 따라서 진상을 보다 정확하게 알리기 위한 그림이 필요했다. 앙리 무오가 이러한 그림을 제공했다. 정력적인 탐험가이며 박물학자인 무오는 데생과 채색화를 제작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시아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가 없었다. ) 무오의 일기는 1868년에는 비블리오테크 로즈 시리즈의 한권으로 출간되 었다. 프랑스의 출판업자들은 무오의 탐험에 관심을 가졌으나, 낭만적인 측면에만 국 한되어 여러 장의 그림을 곁들인 감상적 기행문만을 주문, 게재했다. 따라서 무오의 학술적인 기행은 오히려 1864년 영국에서 발간될 수 있었다. 앙코르를 보고 죽는 게 소원 앙리 무오는 1826년 동부 프랑스 몽벨리아르에서 재무성관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18 세에 이미 러시아 사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던 무오는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다가 크림 전쟁이 확산되자 귀국했다.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2년에 걸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은판사진법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1856년 두 형제는 영국으로 건너갔고,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뭉고 파크의 두 조카딸과 각각 결혼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이때 앙리 무오는 자연과학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영 국에서 최근에 발간된 타이 관련 서적을 보자 현지로 동식물 탐사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마땅한 재정 지원자를 만나지 못하자 무오는 런던의 왕립지리학회와 접촉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위임장뿐이었다. 그래서 무오는 사재를 털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858년 4월에 출발, 9월에 방 콕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네 차례에 걸쳐 탐사를 떠났다. 그리고 가 장 긴 두 번째 여행(1858년 12월~1860년 4월)중에 캄보디아와 앙코르를 방문했다. 마지막 여행은 라오스 행이었는데 무오는 이 여행을 하던 중 1861년 11월 10일 루앙 프라방의 동쪽 어딘가에서 과로로 사망했다. 겸손한 동식물학자 무오는 원래 동식물학자였지만, (무오티아 글로리오사라는 멋진 풍뎅이의 이름은 무오 라는 이름에서 따왔다. )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은 관심과 열정적인 탐구심을 갖고 있 었다. 그는 스스로 인정했듯 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우연이지만 선배 부유보의 여 행길을 따라 앙코르에 도착했다. 무오는 자기보다 먼저 앙코르에 도착했던 사람들이 행적을 언급했고 또한 부유보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무오가 자기 스스로 전인미답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는 자신이 앙코르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묘사하여 '과학의 지평을 넓히려고 애썼을 뿐', 건축학이나 고고학은 '잘 모른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서정성과 사실성 프랑스에서 발간된 일기는 무오에게 명성을 안겨 주었는데, (그러나 영국에서 간행된 학술적 단행본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 이는 사실적 세부묘사라기보다는 감상적 표현과 그림 재능 덕분이었다. 그러나 무오가 서정적으로 글을 썼다고 해서 사실적이 거나 기술적인 내용을 적당히 처리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부유보는 선배 여행자 들이 앙코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을 바로잡아 돌로 건축되었다고 말했지 만, 무오는 한발 더 나아가 사암과 홍토를 분명히 구분했다. 무오가 특히 칭찬한 것은 앙코르와트의 선과 색채의 조화로,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 록색, 건축물의 장엄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이 너무나 절묘한 어우러짐을 보인다고 지적 했다. 그는 이런 기념물을 만드는 데 들었을 수공을 찬양하면서 '구조물 곳곳에 도사 리고 있었을 모든 장애를 극복한' 놀라운 장인정신은 '동양의 미켈란젤로다운' 것이라 할 만하다고 치켜세웠다. 1862년 무오의, 편지들이 왕립지리학회에서 청중들에게 낭독되었을 때, 그는 이미 작 고한 상태였다. 그 편지에서 무오는 '앙코르의 장엄한 폐허'를 짧게 언급하고 추후에 폐허의 자세한 정보를 제출하겠다고 약속한 뒤, 다양한 식물군과 광석 따위 캄보디아 의 천연자원을 자세히 설명했다. 무오가 발견한 사항들은 1864년 영문 단행본으로 발 간되었고, 무오의 동생은 그 책의 서문에 '시암과 캄보디아의 오지에서 발견된 거대한 건물'에 대해 언급했다. 프랑스의 출판업자들은 무오의 자료와 단행본을 발간하면서 잡지나 단행본에 '발견'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는 계속 등장했고 그리하 여 무오가 앙코르를 '발견'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개인탐사 시대의 끝 부유보는 여행자 자격으로, 무오는 명목뿐인 학술단체의 위임을 받아 앙코르에 갔다. 그 이전이나 거의 같은 시기에 앙코르를 방문했던 몇몇 영국 사람들도 자비로 여행을 했다. 그러나 이들 이후에는 공식 단체에 소속된 개인이나 집단이 체계적인 탐사를 수 행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무오의 방식을 따라 단독 으로 앙코르를 방문하려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인도를 좋아한 지리학자 독일 출신 지리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은 엄밀히 말하자면 민속학자였다. 그는 앙코르 일대를 면밀히 탐사하면서 많은 기념물을 방문했고, 앙코르 남동쪽의 롤루오스 기념물 을 소개하는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바스티안은 사원산과 평지사원을 구분한 탐험가 중 하나로 평지사원을 궁전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공헌은 힌두교의 우주관으로 앙코르의 건축물과 조상들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사진기사 스코틀랜드 사람인 존 톰슨은 동아시아의 풍경, 기념물,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10년을 보냈고 방문지에 대한 해박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주달관의 책을 읽어 앙코르에 대 한 사전지식이 있었던 그는 앙코르와트를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본 사원들과 비교하 면서 크메르의 사원군이 인도 경전에 나온 우주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중앙에 있는 피라미드는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오는 메루산을 상징하고, 피라미드 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는 메루산을 둘렀나 대양을 상징한다. 나중에 전문가들은 톰슨 의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톰슨은 자신의 앙코르와트 기록과 도면을 영국의 저명한 건축사가인 제임스 파거슨에 게 보였다. 이미 무오와 두다르 드 라그레의 저작을 접한 퍼거슨은 , 세계의 건축사를 다룬 자신의 저서에 크메르 건축이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그림과 함께 설명을 실었다. 과거에 몇몇 아마추어에게만 알려졌던 크메르 건축물이 드디어 전문가의 주목을 받기 에 이른 것이다. 제3장 앙코르 탐험 여름별궁이 약탈되고 난 뒤 앙리 무오가 앙코를 방문했던 1860년경, 유럽은 이미 중국에 자유무역을 강요하여 중 국 연안에 조차항을 설치했다. 중국의 남부에 위치한 인도차이나는 여러 나라로 분할 되어 있었고 저마다 이해관계가 얽혀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인도차이나는 중국 대륙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벌써부터 안남(동부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곳에 진출한 선교사와 상인의 안전을 보호하던 프랑 스는 이제 코친차이나에 있는 메콩강 초입까지 군대를 진출시켰다. 그러나 강 북쪽에 는 캄보디아가 중국으로 진입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경쟁상대인 영국이 진출한 타이가 캄보디아의 서쪽 국경과 맞닿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의 다음 진 출목표는 자연스럽게 캄보디아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방문하고 보나르는 "오늘날 도탄에 빠져 있는 캄보디아이지만 한때는 예 술과 공업 분야에서 위대한 국가였고 또 지금도 그런 자질을 갖고 있었다. "는 점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래서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군 대를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의 진출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눈독을 들여온 유럽의 관심을 뜻하며, 캄보디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 는 식민사관의 대표적 상징이 곧 앙코르와트의 복원이라는 궤변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 다. 1864년 조약체결, 이에 캄보디아와 앙코르와트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다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1794년에 타이에 합병된 주들의 통치를 포기했지만, 이 주들은 1907년까 지는 캄보디아에 반환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앙코르는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지만, 프랑스는 앙코르를 연구하고 연구에 따른 저술을 펴냄으로써 유럽에서 인 기 없던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옹호하는 구실로 삼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타이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의 왕은 앙코르와 그 주위의 사원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프랑스군의 앙코르 진출은 아무런 충돌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때 프랑스군의 앙코르 진출은 아무런 충돌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때 프랑스의 오랜 숙적인 영국은 이미 그 이웃인 방콕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기사 존 톰슨이 영국 외교관을 대동하고 앙코르에 나타나 자, 프랑스 사람들은 당연히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프랑스의 가 장 큰 걱정은 숙적 영국이 앙코르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최종 목표인 중국에서까지 선 수를 치고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메콩강 탐험 계획 수립 메콩강에서 배를 운행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이 강을 이용한 중국 접근이 가능한 지 조사하기 위해 계획이 수립되었다. 1866년 메콩강 탐사대가 설립되었고 탐사대장 에 두다르 드 라그레가 임명되었다. 이 탐사대의 임무 중에는 '주요 폐허의 위치와 전 승에 따라 옛 캄보디아의 국경을 확인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두다르 드 라그레는 탐사대의 다른 대 원들에게 문제의 유적들을 소개하기로 하고, 강 상류 쪽으로 여행하기 전에 앙코를 통 해 우회하는 길을 여행일정으로 잡았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중국 남부의 윈난에서 사 망했고, 두다르의 차석인 프랑시스 가르니에가 탐사활동의 마무리를 지휘했다. 가르니 에는 1873년 탐사대의 활동을 묶어 보고서로 출간하는 일을 감독했다. 팀워크의 결실 두다르 드 라그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했다. 1863년 몇 척 의 배와 수병들을 이끌고 캄보디아에 도착한 그는 캄보디아의 노로돔왕을 설득하여 캄 보디아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에 서명하게 했고 조약의 집행을 감독했다. 라그레는 정력적이고 조직적인 사람이었다. 캄보디아 왕과 협상을 하지 않는 자유시간 에는 캄보디아의 문물을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했고, 고대의 전적을 수집하기 위해 수 병들과 캄보디아 전역을 샅샅이 탐험했다. 이런 여행은 타이가 합병한 주들에 대한 공 식적인 '탐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캄보디아 일대에 프랑스의 위력을 널리 알리고 또 새로 획득한 땅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자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그레는 크 림 전쟁 때, 소아시아에서 호메로스와 관련된 주요 유적지를 탐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을 되살린 그는 메콩강 탐사대가 캄보디아의 폐허와 유적들을 샅샅이 조사해 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탐사대는 여섯 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했을 때 찍은 유명한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진은 민간인 사진사 그셀이 찍은 것인데, 그는 앙코르 탐사를 위해 특별히 고용되어 사원의 사진을 찍었다. 위원들은 모두 다양 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었다. 라그레는 학식있는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너무 열심히 일을 해 1주일 만에 과로로 쓰러질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위원회를 구성할 것 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과학적 프로그램 1864년 12월, 사이공에 있던 한 고위 관리가 라그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앙코르로 가시오. 그리고 현지답사가 끝나면 멋진 에피소드로 가득한 여행담과 지금 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현지 그림, 생생한 현지 분위기를 담은 화보를 내게 보내 주시 오. 그렇게 해야 유럽에 있는 예술가나 호사가의 지원을 받아 낼 수 있습니다." 이 편 지는 메콩강 탐사대가 가진 고고학적이고 과학적인 프로그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여 실히 보여 준다. 또 라그레가 캄보디아 일대를 3년 동안 탐사하면서 본인의 말처럼 " 하루 종일 관찰하고, 측정하고, 실측하면서" 보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말이다 (프랑 스가 식민정책을 미화하기 위해 앙코르의 문화적 측면을 일부러 강조했다는 뜻) (인도차이나 탐사여행): 고대 캄보디아를 다방면으로 연구한 최초의 집단적 연구서 라 그레와 메콩강 탐사대가 앙코르에서 마주친 유적지는 이미 오래 전에 무오가 본 것이 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일반대중은 무오의 저술을 잘 몰랐고, 그래서 (인도차이나 탐사 여행)의 저자들이 '잊혀졌던' 사원들을 '발견"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오는 물론이고 라그레도 13세기에 주달관이 말한 바라이 인공호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인도차이나 탐사여행)이 언급한 것은 룰루오스에 있는 거대한 세 개의 사원인데, 이 사원들도 원래 독일 탐험가 바스티안이 보고한 적이 있다. 라그레 탐험대가 개척한 새로운 경지라면 그것은 앙코르의 외곽지대를 철저히 탐사했 다는 점이었다. 탐험 도중 라그레는 앙코르와 메콩강 사이에 있는 커다란 호수의 북쪽 광대한 지대를 횡단했고, 덕분에 그는 앙코르와 동부를 연결짓는 고대의 도로를 발견 했다. 이 도로를 따라 다수의 기념물들이 건립되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약 9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벵메알레아와 대 프레아칸이다. (앙코르톰 북쪽 에 또 다른 프레아칸이 있는데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대 프레아칸을 콤퐁스바이, 혹은 콤퐁톰의 프레아칸이라 한다. )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메콩강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트노코르라는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은 (인도차이나 탐사여행)에서 프놈 바체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었다. 탐사대는 마지막으로 강 북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라오스 남부의 산간지대에 건립된 와트푸 사원을 탐방할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이 사원을 화폭에 담았다. 라그레와 가르니에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이 발견한 사항을 잘 요약했고, 그 것을 (인도차이나 탐사여행)에서 고고학 분야의 서론으로 활용했다. 캄보디아에 대한 고고학 핸드북이 나온 것은 이로부터 1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지만, 탐사대는 이미 19 세기 중반에 믿을 만한 개관을 제시했던 셈이다. 예술가의 인상 (인도차이나 탐사여행)에서 텍스트를 보충하기 위해 쓰인 도면과 그림은 그 질이 고르 지 못하다. 예를 들어 앙코르 외곽에 위치한 기념물의 그림은 방문기간이 짧았던 탓인 지 정확성이 떨어진다. 이에 비해 라드리슈가 그린 앙코르 그림은 상태가 좋다. 전문 제도사인 라드리슈는 앙코르와트의 입면도와 바켕의 단면도를 남겼다. 반면 들라포르 트가 그린 '풍경'에서는 상상의 요소가 많이 엿보인다. 어쨌든 이 책에 수록된 도면과 그림, 이에 덧붙여, 세부장식을 묘사한 그림, 그섹의 사진 따위를 두루 참조하면 독자 들은 텍스트에 나온 기념물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연대기에 대한 첫 번째 시도 들라포르트의 그림에는 몇 가지 양식이 혼재되어 있지만, (인도차이나 탐험여행)의 저 자들은 크메르 예술의 진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도 무오처럼 미개하고 퇴폐한 캄보디아인이 어떻게 고전적 완성을 이루었는지, 역사적 상황에 근거한 미학적 반응을 보일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주달관은 앙코르와트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 기 때문에 (그는 '루판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 저자들은 이 위대한 사원이 13세기 말 이후에 건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실제 건축시기는 12세기로 확인되었다. )거 꾸로 그들은 주달관이 언급한 바욘은 앙코르와트보다 먼저 지어졌다고 확신했다. 바욘 은 1920년에 와서야 캄보디아 예술사에서 정확한 자리(1177년과 1230년 사이)를 찾 을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 탐험여행)의 저자들은 "특정 세부양식에 나타나는 완벽한 마감질과 성벽 을 조각품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원숙한 예술이 개화했다는 사실을 인 정해야 할 것 같다. "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캄보디아인이 '세계 건축사상 가장 독창적 이고 가장 역동적인 건축양식'을 만들어 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이렇 다. "그리스와 고딕 건축이 지닌 영감이 엿보인다 해도, 캄보디아 건축을 이 두 건축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양식 바로 다음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유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평가로 그들이 신봉해 온 예술의 위계질서가 지켜진 것이다. 식민지로 편입된 새 영토에도 위 대한 예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구의 예술과 어깨를 겨룰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순교자, 식민 감정, 과학적 흥미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탐사대의 업적은 실패작이었다. 프랑스는 메콩강을 통해 중국 시장에 프랑스 상품을 범람시킬 계획이었지만, 수심이 얕아 그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났다. 인적 손실도 컸다. 라그레가 과로로 사망한 뒤 카르네가 1871년에 사망했다. 가르니에는 1873년 통킹에서 중국의 배후지원을 받는 '흑기'해적에게 살해 당했다. 게다가 프랑스-프리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이제 인도차이나 사업에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3년에 출간된 (인도차이나 탐험여 행)은, 군사적이고 상업적인 이득이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지역에 진출하면 다른 면에서 충분한 소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탐사대에 참가하지 못했던 학자들도 행동에 돌입했다.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는 해군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프랑스 보호령 안에 있는 기념물을 보호하는 강력한 조치를 요 구했다. (인도차이나 탐험여행)이 발간되고 탐사대의 서류들이 검토되면서, 캄보디아를 유럽에 알리려는 무오의 소원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유럽 과학계에 새로운 관심 분야가 열렸다. 1865년 학술지인 (고고학 리뷰)는 사이공의 신문기사를 그대로 전재하기도 했 다. 그뿐만 아니었다. 가르니에와 카르네는 (고고학 리뷰)보다 더욱 대중적인 잡지에 앙코르에 대한 첫인상을 기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구가 시도한 앙코르의 신비 해체 작업은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위대한 앙코르의 진정한 창조자는 누구이며 어떤 민족인가?"라고 가르니에는 물었다. 카르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 능묘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 밑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는 믿기지 않을 만큼." 3차원의 재구성 앙코르의 세부사항에 대한 첫 그림은 두다르 드 라그레가 만들었고, 그후 탐험대의 다른 대원들도 많은 그림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들이 집단으로 제작한 그림들은 1867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데 이어 식민 지 전시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대중들은 전에 무오의 그림으로만 볼 수있었던 그 신비 한 폐허를 실제처럼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전시회는 많은 관중을 끌어들였다. 전시회 기획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앙코르 전시회를 개최할 때마다 전시품목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조상의 조각들이 전시되었으 나, 차츰 조각들을 조합해 완전한 조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 인도차이 나 박물관에 전시된 들라포르트의 재구성 작품들은 복원기술이 정교해졌음을 입증했고, 마침내 거대한 앙코르와트 모형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식민지 전시회에 여러 차례 선 보이기도 했다. 제4장 마지막 탐험가들 들라포르트의 원대한 목적 메콩강 탐사대의 일원으로서 캄보디아에 체재하던 시절, 루이들라코르트는 두다르 드 라그레의 숭배자가 되었고 평생 그를 존경했다. 또 크메를 예술에 흠뻑 빠져 평생을 그 연구에 바쳤다. 통킹(베트남 북부) 탐사대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들라포르트는 캄 보디아에서 탐사를 시작하겠다고 뜻을 밝혀 허가를 얻었으나, 그의 탐사활동은 캄보디 아 영토를 벗어나지 않았다. 탐사대는 앙코르 유적지를 방문하여 조상과 다른 조각품 들을 프랑스로 가져와 최초로 공식 크메르 예술품 컬렉션을 따로 만든다는 새로운 임 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들라포르트는, 라그레가 언급했던 유적지를 모두 방문해보 자는 야무진 꿈을 지니고 있었다. 들라포르트의 지시를 받은 대원들은 조상을 수집하 고, 도면을 그리고, (도안사 라드리슈도 합류했다. ) 실물을 측정해 축소모형을 제작했 다. 대프레아칸에서 들라포르트는 많은 자료를 발견했는데, 특히 프레아코라는 건물에 큰 감명을 받고 그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조각 같은 프레아코의 중앙에 우뚝 솟은 탑 을 온갖 부조로 뒤덮여 있었고 탑 모서리는 코끼리와 환상적인 새들을 묘사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들라포르트는 앙코르에서 다수의 석고주형을 제작했고, 그 일대와 특히 도시의 북쪽을 계속해서 탐험했다. 들라포르트는 앙코르톰 근처의 프레아칸에서 '다섯 개의 머리와 열 개의 팔을 가진 거한'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북호에 있는 호도 사원인 네아크레안 의 멋진 입면도도 작성했다. 박물관의 앙코르 들라포르트는 약 70점의 조각품과 건축물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 작품 들을 돈을 주고 샀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초 캄보디아로 출발 했을 때, 캄보디아 왕과 고관들에게 선물로 줄 조상, 그림, 판화 등을 여러 점 가지고 갔다. 그는 이런 물건들을 노로돔왕에게 선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중하게 설명했 다. "프랑스 정부는 귀중하다고 사료되는 몇 가지 예술품을 폐하의 나라에서 반출하고 자 합니다. 그 대신 프랑스에서 가져온 예술품을 바치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루브르 행을 바라는 들라포르트의 희망과는 달리 그의 수집품은 공화국 세대에는 사용 되지 않고 있던 옛 왕궁인 샤토 드 콩피에뉴에 소장되었다. 이 수집품 중 몇 점이 1878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로 옮겨졌고, 2년 뒤에 크메르 예술품은 새로 지은 인 도차이나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기념품 캄보디아 방문객이라 해서 예외 없이 공식 임무를 띠고 있던 것은 아니다. 휴일을 즐 기는 행정관, 휴가중인 선원,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은 관광객 들도 있었다. 그러나 앙 코르나 대프레아칸을 관광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 앙코르는 타이의 영토였고, 대프 레아칸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이 남부 캄보디아나 코친차이나를 주로 찾았다. 이들 관광객은 많은 기념품을 가지고 갔 다. 프랑스에 반입된 이들 유품은 트로카데로나 기메 같은 큰 박물관에 소장되기도 했 고 더러는 로슈포르 같은 덜 알려진 박물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많은 유품이 개인소장으로 묻혀졌다. 이로써 일반대중의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이들 크메르 예술 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 애호가들이나 골동품 수집가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살롱의 앙코르 들라포르트의 그림들은 프랑스 건축가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였다. 크 메르의 건물들은 고전적 장엄함을 갖춘 전체적 구도, 정교한 장식, 외부 형태와 내부 디자인의 완벽한 2분법 등 두 개의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잘 결합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정통적인 예술은 많은 유럽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또 충격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경악과 감탄이 뒤섞인 존경, 바로 그것이었다. 뤼시앵 푸르느 로 등 소수의 건축가들은 앙코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1차 자료를 수집하여 프랑스 로 돌아와 크메르 건축의 기분원칙을 설명하는 논문과 책자를 발간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유럽 사람들은 서구의 기호나 인식과는 다른 예술을 알게 되었고 또 앙코르의 놀 라운 건축적 업적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유물에 번호 매기기 들라포르트가 일반 대중에게 크메르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파리의 인도학 학자들이 고대 기명을 판독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탁본을 계속 연구하는 동안 캄보디아에서는 리스트가 작성되고 있었다. 고대 앙코르 제국을 완벽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남아있는 유물을 모두 문서에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시작한 사람은 해 군 요원이자 서지학자인 에티엔 에모니에였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먼 지방으로 여행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옛 제국은 현지인의 생활 속에 남아 있었고, 마을 사람과 숲 속 사람들에게 친숙한 지 형지물은 고유한 이름과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망고 나무 옆에 고대 사원이 있다면 그 사원의 이름은 '프라사트 스바이' 즉 '망고의 사원'이 되었고, 마을 근처 숲 에 세워진 사원은 '프라사트 프레이', '숲의 사원'이 되었고, 사원 옆의 성벽은 '반테아 이 프레이', '숲의 성채'가 되었다. 만약 그 성벽에 젊은 미녀가 조각되어 있으면, '반테 아이 스레이', '여자의 성채', 멋진 사자상이 부조되어 있으면 '프라사트 싱', '사자의 사 원'이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캄보디아에는 망고 나무, 숲, 아름다운 여신, 사자 석상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곤란한 문제를 프랑스 군인이었던 에티엔 에 드몽 뤼네 드라종키에르가 해결했다. 에모니에의 작업을 돕기 위해 프랑스 극동학원이 파견한 라종키에르는 크고 작은 유물에 빠짐없이 번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그 번호 는 총 910번까지 나갔다. 497이라는 분류번호를 가진 앙코르와트는 그후에도 계속 앙 코르와트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365번 사자 사원과 410번 사자 사원을 구분하는 데 에는 이 분류번호가 퍽 유용하게 쓰였다. 또 앙코르톰에 있는 한 작은 사원은 특별히 붙일 이름이 마땅치 않아 '유물 486'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욘에 대한 공격 앙코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프랑스 극동학교는 건축가 앙리 뒤푸르와 사진사 샤를 카르포(그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무용'을 묘사한 유명 그룹에 소속된 조각가 의 아들이었다. )에게 앙코르의 중요한 사원인 바욘에 대해 연구자료를 작성해 달라고 위촉했다.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소장된 캄보디아 유물을 본 적이 있는 카르포는 두 번 에 걸쳐 앙코르를 방문하였는데, 1904년 두 번째 방문에서 돌아오던 길에 사이공에서 사망했다. 그들은 도면을 작성하고 석고상을 만들고 사원의 두 회랑에 있는 부조들을 사진 찍기 전에, 유적지 주위를 깨끗이 청소해야 되었다. 노무자들은 지렛대와 밧줄을 이용하여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거진 밀림이 큰 골칫거리였다. 반얀 나무같은 거 목들이 폐허가 된 유적지를 휘감아 돌고, 잡초와 잡목 또한 함부로 우거져 있었다. 그 래서 청소작업을 3년이나 했는데도 밀림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카르포가 시작 한 청소작업, 해독작업, 사진작업 등은 그후에도 여러 해동안 계속되었다. 앙코르를 찾아오는 순례자들 카르포는 앙코르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해군 제독, 유명작가, 무명 조각가, 주교, 의사 부부, 수병과 군인, 세계 일주에 나선 미국의 여행자.... 위에서 말한 유명 작가란 피에르 로티를 이른다. 그는 1912년 (앙코르의 순례자)라는 책을 펴냈는데, 앙코르가 문학세계에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로티는 앙코르 를 방문하면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카르포를 만났다. 그러나 그가 앙코르를 방문한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앙코르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 을 받았고 그후로 늘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 왔던 것이다. 그는 (앙코르의 순례자)에서 앙코르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경험을 자세하게 써놓았다. 그는 식민지 관련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앙코르는 시암의 정글 깊숙한 곳에 있으며... 그 신비한 앙코르 의 폐허 뒤에 떠오르는 저녁볕은 아름답다. "하고 쓴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그림과 함 께 실린 그 기사가 어린 로티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로티는 1901년 11 월의 사흘간 앙코르와트와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사원 중 하나'인 바욘을 순례하면서, 그 도시를 수의처럼 둘러싼 숲, 시간과 기상상태에 따라 바귀는 조명효과에 깊이 매료 되었다. 로티는 당시의 인도차이나 총독인 폴 두메에게 (앙코르의 순례자)를 헌정했지만 프랑 스가 캄보디아 일대를 정복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러한 정복은 장엄하지도 않 고 오래가지도 못할 거싱다. 우리는 곧 이 지역을 어슬렁거리는 백인을 단 한 명도 모 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백은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아시아를 정복하려고 또한 아시 아의 전진을 방해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다." 로티는 서구 제국의 간섭은 고대의 캄보디아와 노로돔왕이 통치하는 현재의 캄보디아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연속성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로티는 도처에서 그 런 연속성을 발견했다. 앙코르톰의 흩어진 유물에서, 앙코르와트의 조각품에서, 앙코르 의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현왕조의 능묘 건축에서, 그리고 왕립무용단의 공연에서 그 연속성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로티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라마야나(산스크리트 어로 쓰인 고대 인도의 서사시. 여기서는 그 내용을 담은 캄보디아의 춤)의 한가운데 에 있다..... 까마득히 오래 전 앙코르톰에서도 사람들은 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태고 에 있었을 시간이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정신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왕궁의 심장부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제5장 복원된 앙코르 이제 공식적으로 캄보디아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앙코르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통제 아 래 놓이게 되었다. 당시 이 학교는 캄보디아 식민지의 과학분야를 효과적으로 관리, 담당하고 있었다. 이제 프랑스 극동학교 교장의 말마따나, '새로운 의무사항'이 발생하 게 되었다. 이 하굑와 관련을 맺고 있던 고고학자와 금석학자들은 재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얻게 되었고, 임시기구이던 탐험대는 이제 상설조직이 되었다. 이같은 정보의 독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아무튼 새로 조직된 팀은 근 60년 동안 앙코르의 옛 영광을 복원시키는 과학적, 기술적 노력에 지속적인 일관성을 부여해 주었다. 관광객들의 도착 앙코르를 방문한 것은 고고학자들만이 아니었다. 1907년 가을 3개월 동안 2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앙코르를 찾았는데, 대부분 프놈펜이나 사이공에서 온 식민지 관리들이 었다. 당시 앙코르 방문은 당일치기 여행으로는 불가능했다. 우선 증기선을 타고 커다란 호 수를 건너서 프놈크롬의 산기슭까지 가서, 다시 삼판(동남아의 작은 목재 평저선)을 타고 강 상류의 시엠레아프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면 이번에는 삼판 대신 물 소가 끄는 수레에 올라타는데, 이 수레는 가볍고 날렵하지만 안락한 교통수단이 되지 는 못했다. 특히 형편없는 앙코르와트 진입로에서는 심하게 털털거렸음은 물론, 때로 는 물소가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티는가 하면 수레바퀴가 모래에 빠지기도 했다. 이 렇게 되면 한 시간 반이면 여행이 여섯 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다. 사원 경내에서는 초가집이 호텔처럼 쓰였으나, 투숙객들은 각자 이부자리, 취사장비, 음식 등을 가지고 와야 했다. 앙코르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아주 빠듯했다. 커다란 호수를 건네 주는 증기선이 이틀 반 뒤에는 되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1주일이 지나도 증기선이 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앙코르와트를 방문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테라스를 무성한 잡초가 뒤덮고 있었지만, 회랑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계단도 보존 상태가 좋았다. 그러나 앙코르톰은 사정이 달랐다. 밀림이 우거지고 도로상태도 나빴으며 성채처럼 완 강하게 내리뻗은 나무뿌리들을 돌아가야 했다. 거대한 석두가 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 고 있는 바욘은 잡초가 뒤엉킨 돌산과 같아서 거기서 새겨진 부조를 구경하려면 곡예 에 가까운 기술을 발휘해야 했다. 코끼리 테라스의 바닥은 습지였으며, (들라포르트의 복원도를 보면 사람들은 카누를 타고 테라스에 접근했다. ) 유명한 문둥이 왕 석상에 접근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한가로운 관광을 즐기기에는 터무니없이 환경이 나빴다. 그러니 관광객들에게 앙리 무오와 같은 열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비록 유물 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좀더 나은 관광시설이 아쉬웠다. 프랑스 극동학교는 진입로와 숙박시설의 개선을 제안하며, 건축물의 보수와 유지에 완 벽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앙코르 접근로를 개선하고 프놈크롬과 앙코르와트 사이에 길을 닦는 것은 공공건설부 에서 할 일이지, 고고학자가 관여할 사업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앙코르와트 인근(앙 코르와트내에는 유물 보존 차원에서 숙박시설을 지을 수가 없었다. )에 관광객용 방갈 로를 짓는 것은 현지 관청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 계획을 간단히 요약하면 앙코 르와트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당시에 이미 '앙코르 공원'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 다. ) 프랑스 극동학교의 고고학 전문가를 현지에 큐레이터로 상주시키자는 것이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 앙코르의 역대 큐레이터는 모두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마지막 큐레이터를 빼고 는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첫 번째 큐레이터였던 장 코마유는 화가로서 프랑스 외인부 대를 따라 인도차이나로 건너온 사람이었다. 1898년 앙코르를 방문하여 그림을 그리 다가 공공건설부에 채용되어 일을 하던 그는 1908년 앙코르의 큐레이터가 되었다. 코 마유는 개척자적인 업무와 낭만적인 생활방식-앙코르와트의 연결로 옆에 초가집을 짓 고 사는 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피 아노가 없는 생활을 힘겨워하던 그의 아내는 결국 짐을 싸들고 앙코르를 떠났다. 코마 유는 1916년 앙코르와트로 가던 길에 살해되었다. 그의 후임자들은 대부분 건축가였고 인도차이나에서 여러 해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하다 가 큐레이터가 된 사람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앙리 마르샬, 조르주 트루베, 그리고 모리스 클레즈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큐레이터는 앙코르 유적지의 관리를 책임졌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임무 는 행정, 유적지 청소, 발굴, 유물 복원, 탐사, 연구, 도면 작성, 도둑질 예방, 무단 침 입자 퇴치, 고위 방문객 안내, 동료 고고학자들의 탐사작업 조력 등이었다. 게다가 큐 레이터는 안내문, 논문과 단행본을 집필하고, 정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탐사일지도 기록해야 했는데, 종종 고고학과 관계없는 얘기도 써 넣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방문객들 시엠레아프에 있는 큐레이터의 외로운 관사는 이따금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활기를 띄 었다. 그렇지만 그 방문객이 프랑스 극동학교의 교장이나 루이 피노, 조르주 코에데스 같은 금석학자일 때에는 방문이 단순한 시찰 이상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큐레이터도 바빠지게 되었다. 조르주 코에데스는 평생을 캄보디아의 비문 해독에 바친 사람이다. 따라서 코에데스에 게 앙코르 방문은 텍스트 연구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었으며, 실제 탐사를 통해 단서 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고, 현지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의 발견사항을 큐레이터에 게 전달하는 기회도 되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런 탐사작업이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 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까지 프랑스 극동학교의 고고학 분야 책임자는 건축가 앙리 파르망티에였 는데 그는 앙코르 큐레이터의 직속 상관이기도 했다. 파르망티에는 앙코르를 자주 방 문하면서 큐레이터의 활동을 감독했다. 그는 때로 큐레이터의 대리인이 되기도 했으며 발굴일지를 가필하기도 하고, 또 자기 자신을 위한 발굴과 조사작업도 병행했다. 파르 망티에는 캄보디아 전국을 누비면서 라종키에르의 목록작업을 보완했는데, 이 작업은 그가 퇴임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런 작업이 있은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북서쪽 오지 의 마을사람들은 땅을 측정하고, 그림을 그리고, 돌을 들어내 그 밑을 들여다보던 파 르망티에 팀의 활동과 그의 근엄한 모습을 기억했다. 빅토르 골루베프도 프랑스 극동학교 소속의 고고학자였는데 파르망티에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부유한 귀족이던 골루베픈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전에 파리로 망명, 상류사회에 출입하면서 조각가 로댕을 알게 되었다. 귀족 출신인 골루베프는 호화로운 생활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높은 교양을 쌓고 여 기저기 여행도 많이 했으며 세상사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1936년 그는 찰리 채플린 과 폴레트 고다르를 대동하고 앙코르 방문길에 올랐다. 골루베프는 이보다 몇 해 전에 앙코르 유적지 상공을 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일대의 최초 도시인 야소다라푸라 의 유적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9세기 말 야소바르만이 프놈바켕(중앙의 산) 근처에 건 설한 도시였다. 골루베프의 친구들은 그 도시에 '골루푸라'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프놈펜의 예술가 앙코르에서 공식적인 보존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프놈펜에 살고 있던 프랑스 화가 조 르주 그로슬리에는 나름대로 캄보디아 예술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로댕이 그러했듯, 그로슬리에 역시 노로돔왕 수행원들이 펼쳐 보인 아름다운 무용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앙코르 성벽에서 그 무용수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부조를 발견했 다. 무용수들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면 그 무용수들을 묘사한 조각의 전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프놈펜의 식민지 상류사회는 캄보디아를 '영원히 잃어버린 나라' 라고, 또 그 국민들을 '타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슬레에와 몇몇 사람 들은 캄보디아의 사정을 그것 이상으로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로슬리에는, 서구는 캄보디아의 옛 영화를 복원시킨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일상생활 에 나타난 예술의 전통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 예술은 "정형적이고 지속 적인 미학을 갖고 있다. 그 미학의 연속성은 십중팔구 고대의 부조나 유물을 참고함으 로써 입증할 수 있다. "고 갈파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캄보디아 예술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학교는 장인들에게 앙코르의 장식예술을 정성스 럽게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교육받은 장인들은 고대의 전통에 따라 일할 수 있게 되었 다. 크메르의 수공예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예술학교를 설립한 그로슬레에의 노력은 나름대 로 현실적인 보상을 받았다. 이제 관광객들은 훔쳐 온 조각품이나 조잡하게 제작된 싸 구려도 아닌 값진 기념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글에서 공원으로 장 코마유는 먼저 앙코르와트를 청소하고 이어 앙코르톰 청소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앙코르톰의 다섯 대문에 이르는 커다란 길을 만들었고 바욘의 산더미 같은 쓰레기-주 로 돌더미들인데, 그의 선배 탐험가들은 이 돌더미에서 부조의 사라진 조각들을 찾아 보곤 했다-를 치웠으며, 왕의 테라스 앞 광장의 잡목들을 베어 냈다. 청소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우기가 지나면 어김없이 잡초가 무성히 자라났다. 정글을 통제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제압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잡목들을 선별적으로 잘라 낼 수 밖에 없었고, 삼림위원회는 필요한 곳을 골라 다시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덤불은 제거 해 나갔다. 유적 중에서 타프롬은 청소를 하지 않고 원래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폐허가 된 앙코르를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은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정글로 뒤덮인 폐허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관광객들은 앙리 무오, 피에르 로티, 폴 클로델 같은 이들이 처음 앙코르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황량함을 맛볼 수 있었다. 1908년에 새로 제작된 지도는 큐레이터의 관할지역을 명확하게 해주어 큐레이터는 연 구를 더 많이 해야 하는 폐허를 족집게처럼 집어 낼 수 있었다. 이미 알려진 건물들도 실물을 축소 재구성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정확한 모습이 파악되고 재평가작업이 이 루어졌다. 떨어져 나간 돌조각을 새 돌로 대체하거나 취약한 구조물을 콘크리트 기둥 으로 보강하는 간단한 보수작업이 따랐지만, 모든 유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 대상을 최소 한도로 억제해야 했다. 그리하여 앙코르는 1925년경에 공원으로 개장되 었다. 큐레이터와 관광객 1920년대 초가 되자 앙코르는 관광회사의 주요 관광상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이광 과 프놈펜으로 직접 이어지는 도로는 아직 건설중이었지만, 밑이 평평한 모터 보트를 이용하면 수심이 낮을 때도 큰 호수를 횡단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년 내내 앙코 르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차를 타고 앙코르와트 정문 바로 앞까지 오면 관광객은 편안한 방갈로와 안내원을 만날 수 있었다. 자동차, 코끼리(가마에는 두 사람만 탈 수 있음), 말, 수레(도로 사정이 좋아졌으나 수레여행은 여전히 불편했다. ) 등 수송수단도 다양하게 갖추어졌다. 관광객들은 주로 식민정부의 관리들이었으나, 앙코르 방문을 필수로 여기는 세계일주 여행객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큐레이터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발굴일지에 이름이 오르려면 사원에 자기 이름을 새기거나 조각품 도둑이 되어야 했다. 도난감시는 엄중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도난품을 지체 높은 관광객의 호텔 방에 서 회수하는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난건수는 자꾸만 늘었고, 외따로 떨어 진 유적지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큐레이터를 더욱 짜증나게 하는 일은 인도차이나 상류층에 속하는 고관대작들의 추천 장을 휴대한 방문객이었다. 추천자의 신분 고하에 따라 방문객들이 받는 대접의 정도 도 달라졌다. 아무튼 큐레이터는 추천장을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는 예의상 조각품 창 고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 창고는 청소작업중에 거두어들인 유물들을 모아 놓을 곳 인데, 한 방문객은 그곳을 '경이의 집'이라고 불렀다. '경이의 집'에는 최고 수준의 조각 예술품과 형체조차 알수 없는 돌조각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었다. 큐레이터는 아주 지위가 높은 방문객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프랑스 군대의 영웅인 마르샬 조르프도 있었다. 감각, 파인애플, 그리고 저주 카톨릭 작가이자 외교관인 폴 클로델은 1912년 일본으로 가는 길에 잠시 앙코르에 들 른다. 그는 이 짧은 방문을 일기에 자세히 기록했고, 이것은 나중에 (시인과 향료단지) 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클로델의 시적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기록은 역순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짤막하게 반테아이 크데이를 언급하고 타프롬, 타케오, 승리의 문, 바욘 을 묘사했으며, 마지막으로 앙코르와트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앙코르와트의 탑 다섯 기를 파인애플에 비유했다. 피에르 로티가 바욘의 탑을 솔방울에 비유한 적이 있었지 만, 클로델의 신성모독적인 '파인애플론'은 그보다 더 선풍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이켰 다. 그러나 클로델의 눈에 비친 앙코르와트야말로 '신성모독의 행진'이었다. 그곳이 사 악한 기운으로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클로델은 또다시 인도차 이나에 오게 되는데 그때 코마유의 살해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은 클로델의 편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앙코르는 저주받아 마땅한 사악한 곳이다. 나 는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와 나의 여행기를 불에 집어 던졌다." 1920년대 초반 앙코르 보존 계획은 본궤도에 올라 있었고 연구조사도 착착 진행되었 다. 한편 1922년 마르세유에서는 식민지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실물 크기에 가까운 앙코르와트 석고상은 한결 정확한 크메르 기념물의 면모를 제공해 주었 다. 잠자는 미인 깨우기 1920년대에 접어들어 앙코르톰에서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정글 한복판 에 있는 반테아이 스레이 사원을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벌어졌다. 첫 번째 논쟁은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가 시끌벅적한 법정소송에 휘말린 사건(1923)이고, 두 번째는 한 프랑스 예술사가가 앙코르톰의 연대에 대한 통설을 뒤집어 놓은 일이고(1927), 세 번 째는 네덜란드의 고고학자가 앙코르의 큐레이터가 사용하는 탐사방법은 1880년대의 낡은 방식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일이다. (1929). 여인의 성채라고 알려진 반테아이 스레이는 에티엔 에모니에나 귀네 드 라종키에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1914년 지리청 소속의 한 장교가 발견했다. 그는 이 사원에서 아 름다운 시바 조각과 파르바티 조각을 수습해 와서 프놈펜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직후 앙리 파르망티에는 이 사원을 방문했으며, 이 사원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논문을 발 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앙코르가 중심 화두였고, 반테아이 스레이는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다른 유물과 함께 정글에 방치되었다. 공개된 사건: 말로 추문 프랑스의 전위작가 앙드레 말로는 애술애호가이면서 동시에 예술품 거래꾼이었다. (그 는 나중에 예술비평가, 프랑스 문화부 장관으로 국제적 인사가 된다. 반테아이 스레이 사원에 대한 파르망티에의 논문을 읽은 말로는 이 사원의 유물을 보호하는 법이 없다 는 것을 알고도 자기 돈을 들여 타이와 앙코르를 잇는 도로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를 나서기로 결심했다. 1923년 앙드레 말로와 그의 젊은 아내 클라라는 마르세유에서 배 를 타고 앙코르로 향했다. 말로 부부는 한 친구와 함께 일단 앙코르로 갔다가 다시 수레를 타고 반테아이 스레이 로 찾아갔다. 그들은 그 사원의 핵심 조각품인 여상의 중요 조각 몇 점을 밀반출했다. 그러나 프놈펜에 도착하는 즉시 그들은 체포되었고 골동품 불법 반출 혐의로 기소되었 으나 구속되지는 않았다. 6개월 뒤 말로와 친구는 실형을 선고받고, 클라라 말로는 프 랑스로 돌아와 남편의 문인 친구들에게 사태를 알렸다. 친구들의 운동 덕분에 말로와 그의 친구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라나 압수된 유품은 다시 국가로 귀속되었다. 말 로는 몇 주 동안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다시 인도차이나로 건너와, 이번에는 식민정부 의 착취행위를 통렬히 비난하고 돌아다녔다. 클라라는 말로가 1930년에 발표한 (왕도 의 길)은 그이 조각품 밀반출 사건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회고록에 썼다. 말로 사건을 계기로 또 다른 책이 발간되었다. 프랑스 극동학교가 전 직원을 동원하여 반테아이 스레이의 연구 실적을 책자로 발간한 것이었다. (1925). 회화 장정을 좋아하 는 골루베프가 그 책의 발간 책임을 맡았고 도상학에 대한 기사를 썼다. 아울러 멋진 대형 사진을 여러 장 수록해 언론에 많이 오르내렸던 사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 었다. 루이 피노는 사원의 기명에 대한 논물을 썼고, 파르망티에는 건축에 대한 기사 를 썼다. 몇 년 뒤, 피노의 기명 해석과 파르망티에의 건축물 재구성은 약간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학계: 파리의 예술사가들이 제기한 문제들 크메르 예술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분야가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각 분야마다 고유 영역을 갖고 있었는데, 가령 금석학자는 연대를 측정했고 고고학자는 자신의 '예 술적 직감'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그 측정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분화된 연구의 허점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반테아이 스레이 연구이다. 현재는 이 사원이 967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 있으나, 일부 세부 장식물은 그보 다 후대에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사원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건립시기를 10세기 초로 잡은 파르망티에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한 것이었다. 당시 그 는 이 사원의 유물이 앙코르 근처에 있는 룰루오스 유물(9세기 말 제작)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그렇게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노는 기명을 연구한 끝에 1925년에 발 간한 책자에 반테아이 스레이 사원은 14세기경에 건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반테아이 스레이는 초기 앙코르의 예술적 진수가 아니라 말기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1929년 조르주 코에데스가 마침내 잘못된 연대를 바로잡았다. 1927년 필리프 스테른이 (앙코르의 바욘과 크메르예술의 진화)에서 크메르 예술의 연대와 그 연대를 확정하는 데 채택된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에서 스테른은 "이러한 진화는...... 작품 자체를 면밀하게 연구한 끝에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결론이 내려진 다음에야 동일 대상에 대한 다른 학문의 결론과 비교된 수 있다. "고 적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 다른 학문'은 금석학이다. 스테른의 주장에 입각하여 앙코르의 기명들을 모두 재검토 한 끝에 코에데스는 바욘의 주인공은 자야바르만 7세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야바르만 7세는 12세기 말에 앙코르를 개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연대 측정에는 예술사가와 금석학자의 공동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합의 점이 도축되어쏙, 그 결과 학자들은 그후 여러 해에 걸쳐 앙코르의 역사와 유물에 대 한 결정적 연대를 확립하게 된다. 이웃들 사이에서: 앙코르의 네덜란드 사람 앙코르 보존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고고학청을 모델로 하여 세 워졌다. 1929년 고고학청의 청장인 P. V. 반 스타인 칼렌펠스 박사가 앙코르로 초청되 었다. 당시 큐레이터인 앙리 마르샬이 칼렌펠스를 복원작업이 한창인 유적으로 안내했 다. 그날의 발굴일지는 이렇게 읽힌다." 그는 우리의 작업방식을, 예를 들어 떨어져 나 간 돌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네덜란드인의 보 존방식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르샬은 그들의 보존방식을 배우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고, 그가 돌아오자 보 존청은 반테아이 스레이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최초의 전면적 재건축작업이 었는데, 반테아이 스레이가 선택된 이유는 우선 예술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고 둘째 로는 건물에서 떨어진 돌들이 주위에 그대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말로가 훔쳤던 조 각들도 프놈펜 박물관에서 되찾아왔다. 마르샬은 물론 노무자들이 보기에도 그것은 통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방식이었 다. 이제 그들의 업무는 단순히 앙코르를 정글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아니라 앙코르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반테아이 스레이는 앙코르에서 가장 매 력적인 유물이 되었다. 재건축작업은 이제까지의 작업을 반성할 기회도 주었다. 파르 망티에의 복원도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우주의 도시 위기의 10년이 지나갔고 앙코르와트는 그 위엄을 되찾았다. 1931년, 파리 식민지 전시 회의 스타는 당연 앙코르였다. 그리고 마침내 골루베프는 앙코르 상공을 비행하면서 야소바르만이 지은 초기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다. 이대 '중앙의 산'은 천연의 산임이 밝혀졌고 프놈바켕은 그 산에 탑이 가득한 피라미드를 장식한 것임도 알려졌다. 신비한 삼녀탑이 있는 바욘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1933년 조르 주 트루베라는 젊은 큐레이터가 바욘의 중앙 탑 아래에서 우물을 발견했는데, 우물 안 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건립한 거대한 불상의 조각-13세기 우상파괴자들이 처넣은 것-이 발굴되었다. 불상은 보수되었고 1935년 모니보왕은 그 불상을 제자리에 안치하 는 의식을 장엄하게 집전했다. 다른 '사원산'들과 마찬가지로 바욘도 그 건물의 건립자인 자야바르만 7세의 능묘로 쓰였다. 그러나 바욘의 중요성은 그 상징에 있다. '유액의 바다 휘젓기'라는 힌두 신화 를 그림으로 나타낸 이 사원은 그 휘젓기의 중심축이다. 앙코르톰의 출입문 옆에 서 있는 거인은 손에 뱀을 쥐고 휘젓기를 한다. 앙코르톰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데, 그 중심은 먼저 네 개의 산(성벽)으로 둘러싸이며 바다(성벽 주위의 해자)가 중심을 보호한다. 폴 뮈는 한걸음 더 나아가 캄보디아 기명과 인도 전승에 바탕을 둔 멋진 해 석을 내놓았다. 그는 그 바다(해자)를 건너가지 못하는 경계로 보지 않았다. 그는 거인 이 들고 있는 뱀을 무지개로 해석하여 그 무지개가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해 준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제6장 앙코르, 국가의 영광 부활을 향하여 주요 프로젝트의 주요 조치 앙코르 보존청은 크메르 고고학자들이 인수할 때까지 프랑스 극동학교가 운영했다. 프 랑스와 크메르 간의 협력에 힘입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고학 유적지인 앙코르 는 그 지위에 걸맞는 지원을 받게 되었다. 건축가 J. P. 로르와 1960년 로르의 뒤를 이은 고고학자 베르나르 필리프 그로슬리에- 캄보디아 예술학교의 설립자인 조르주 그로슬리에의 아들-를 위해 많은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프놈펜에 있 는 고고학 학교의 재학생들이 앙코르에서 고고학 탐사실습을 하기위해 자발적으로 지 원팀에 가담해 지원자는 더욱 불어났다.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하게 유입되자 앙코르의 고고학 탐사작업은 이전과는 전혀 다 른 차원에서 대규모로 수행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프라사트 크라반에서 그로슬리에 는 내벽에 부조로 장식된 벽돌 탑의 복원을 실시했다. 이 작업을 하려면 탑의 원래 크 기에 걸맞는 대형 벽돌을 현장에서 제작해야 했다. 최초로 시도된 벽돌 제작 작업은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 한편 바푸온의 보수작업은 유물 보존작업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사원이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축대를 쌓았는데도 1920년 부터 '사원산'의 한 부분(주달관은 이 부분을 청동탑이라고 했다. )이 자구 허물어져 내 렸다. 결국 그로슬리에는 근복적인 보수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천근 콘크리트 로 바닥을 완전하게 다진 뒤 그 위에 유물을 재구축했다. 그로슬리에는 이 방법을 '외 과수술'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최후의 방법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앙코르의 대규모 프로젝트에도 도입되었고 마침내 앙코르와트에도 사용되었 다. 새로운 역사 이때까지의 발굴은 모두 국지적으로만 이루어졌다. 고고학자였던 그로슬리에는 현대적 고고학 탐사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큐레이터로 임명되기 전에 광범위한 탐사작 업을 했는데, 특히 스라스 스랑왕궁과 그 인근을 샅샅이 조사했다. 또한 그는 유물에 만 관심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새로운 지형조사 작업에 힘입 어 그로슬리에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온 앙코르의 수로체계를 파악할 수 있었 다. 또 사원의 전체 모습을 수정하고 그와 관련된 작업을 해 나가면서 건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20세기 초부터 발굴된 조각, 청동, 도자기 등은 잘 보 존되었고, 이들을 사진으로 찍어 연구한 결과 사원의 전체 실상을 확정지을 수도 있었 다. 앙코르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서쪽의 바탐방 지역에 있는 사원, 동쪽의 방메알레아의 대프레아칸, 동서를 잇는 도로에 산재해 있는 사원들에 대한 고고학 작 업도 병행 되었다. 삼보르 프레이 쿠크에서도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콤퐁톰으로 가는 길에 있 는 콤퐁 크데이 대교도 복원되었다. 1960년대에 시작된 고고학 탐사작업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자주 중단되었다. 특히 1970년 캄보디아 내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철수시키려던 협상이 결렬되면서 노로돔 시 아누크 공이 폐위도자 복원작업은 큰 장애물에 부딪치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도 간행물이 계속 발간되었으나. 그로슬리에의 발굴보고서 중 지금까지 발간된 것은 스라스스랑에 대한 보고서(1988)뿐이다. 한편 앙코르 보존청 소속이 아닌 사람들도 작 업을 계속하여, 1965년에는 스테른이 바욘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에 대한 연구서 를 냈으며, 1966년에는 장 부아슬리에의 캄보디아 고고학 안내서가 나왔다. 마지막 탐험가 장 불베는 프놈쿨렌에 살았던 프랑스 극동학교 소속의 민속학자이다. 불베는 산책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마을사람들은 그가 하이킹을 가면 함께 따라 나서서 캄보디아의 역사가 어려 있는 '경이로운 유물들'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 '장발의 도사'라 불리는 한 은자가 강 상류에 있는 '흥미로운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돌들이 있었는데, 고대인들은 그 돌 위에 개구리, 황소, 그리고 각종 문자를 새겨 놓았다." 그 곳은 불베와 그의 친구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은자가 알려 준 장소에 있는 강은 폭포로 흐름이 막혀 있었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은 크발 스페안(교두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강바닥에는 개구리, 황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린 감(시바신을 상징하는 남근 형태의 조각), 뱀위에 잠들어 있는 비슈누 석상 등이 햇빛 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상들 중에는 거대한 도마뱀을 들고 주랑 밑에 서 있는 신상도 있었는데 그옆에는 은자가 언급한 기명도 있었다. '1000린감의 강'은 본류에 편입되는 위쪽의 두 지류 중의 하나로 밝혀졌는데, 이 두 지류를 받아들이는 본류는 완벽한 치수작업을 거쳐 앙코르의 관개수로 쓰였다. 시아누크 공과 그의 친구들 시아누크 공은 외국 원수들의 캄보디아 방문이 캄보디아에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그는 외국 원수들에게 앙코르 시찰을 권함으로써 캄보디아에는 절대 파괴되어서는 안 될 문화유산이 있음을 납득시킬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캄보디아 가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이유가 단순히 안락한 삶을 향유하기 위한 차원이 아님을 이 해시킬 수 있었다. 1966년, 드골 대통령의 캄보디아 방문은 가장 영광스러운 경축행사가 되었다. 드골은 프놈펜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명한 '프놈펜 연설'을 하였다. 앙코르의 축제 1967년 반테아이 스레이 건립 1000주년을 맞이했을 때에도 정글은 여전히 사방에서 이 사원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닦은 도로 덕분에 앙코르에서 반테아이 스레 이 사원까지는 차고 25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 축제에 참가하 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보다 더 상징적인 공식축제가 앙코르톰에서 거행되었다. 이 축 제의 정점은 앙코르톰에 고대 캄보디아 왕국의 수도 지위를 잠시 부여하는 것이었다. 왕궁의 앞뜰에는 첫 번째 쟁기질을 상징하는 '신성한 밭고랑'이 만들어졌으며, 쟁기질 행사가 끝나자 '8월의 쟁기'를 끈 황소를 여러 개의 은쟁반이 놓여진 곳으로 끌고 갔 다. 은쟁반에는 각각 오곡, 금방 베어 낸 풀, 물, 술 등이 담겨 있는데, 황소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해의 추수가 좋을지, 가축이 병들지는 않을지,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을지, 평화로운 시대가 올지 혹은 불길한 시대가 닥칠지 등등을 점칠 수 있었다. 1967년에는 쌀 작황이 좋을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이 에언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캄보디아에서는 성인의 다비식이 또 다른 축제의식이 된다. 메루산을 상징한다고 해서 '멘'이라고 불리는 대나무로 만든 가건물을 짓고, 그 안에 장작을 가득 채운다. 1960년 대 후반 시엠레아프 불교 사원의 주지가 죽었을 때, 앙코르 보존청 직원들은 여가를 이용하여 멘을 만들었다. 마르세유 전시회나 파리 전시회에 출품된 멘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주었다. 멘의 벽에는 하얀 종이를 대고 그 위에 원숭이 신인 하누만과 그 밖의 다른 신들의 부조를 그려 놓았다. 스타들의 도시 앙코르는 영화제작자들에게도 매력적인 도시였다. 앙코르의 사원은 (로드 짐)같은 영 화의 배경이 되었고, 시아누크 공이 만든 여러 영화의 무대가 되었다. 어떤 때는 시아 누크 공이 직접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1950년대에 시엠레아프주를 파괴시킨 유혈사태를 다룬 (앙코르의 그림자)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또 다른 경우로 는 앙코르 군대가 전투용 코끼리와 교전하는 것을 앙코르와트에서 찍은 것을 들 수 있 다. 그럴 때마다 촬영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시아누크 공을 보고 싶어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랑하는 앙코르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는 사실에 좋아 했다. 1979년에 촬영된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크메르 사원은 종이 세트이며 촬영 장소도 캄보디아가 아니다. 성공의 대가 앙코르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캄보디아의 축복이면서 한편으로는 재앙이었다. 관광객 들이 뿌리는 돈이 캄보디아 경제에 상승요소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크메르 예술품 수집가들도 늘어나 고질적인 도난사건 발생 건수가 자꾸 증가했다. 멀 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원은 물론, 경계가 엄중한 관광명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 느 날 밤에는 반테아이 스레이의 수호잡신인 동물의 머리가 사라졌으며, 또 어느 날 밤에는 문둥이 왕의 머리 일부분이 톱으로 절단되었다. 이러한 도난사건에 대처하는 길은 딱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상들을 원위치에서 떼어 내 조각물 보간창 고에 간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품 대신에 모조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는 받침대와 벽감만 있을 뿐 조상은 아예 전시되지도 않았다. 1970년 4월: 앙코르의 큐레이터였던 앙리 마르샬의 장례행렬에는 시엠레아프의 모든 주민이 뒤를 따랐다. 1970년 6월 앙코르는 전쟁의 여파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시엠레아프 외곽에 위치해 있던 앙코르 보존청은 가장 귀중한 소장품들을 프놈펜으로 보내 박물관 보관실에 보관 했다. 너무 무거워서 공수할 수 없는 유물들은 형장에 그대로 둔 채 모래주머니와 콘 크리트 덩어리로 보호시설을 마련했다. 시엠레아프와 앙코르와트 사이에서 포화소리가 계속 들려 왔지만 두 곳에서 벌어지던 복원작업은 근 2년 동안 변합없이 계속되었다. 약 3000명에 이르는 북쪽 마을의 주민들이 전화를 피해 앙코르와트로 피신했는데 그 중에는 앙코르의 노무자들도 많이 있었다.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앙코르에서 보존청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들은 전쟁의 검은 구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멘트 자루, 철근 덩어리, 기중기 연료 등을 싣고 다시 앙코르로 내려왔다. 2주 일에 한 번씩 그로슬리에와 불베도 자전거를 타고 보관청에서 앙코르 현지로 내려와 작업상황을 점검하고 노무자의 봉급을 지불했다. 프놈펜 정부는 현지의 실정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임에도 노무자들의 봉급만을 제때 지불했다. 치열한 내전속에서 도 교전 양측은 앙코르를 보존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처럼 너그러운 상황은 너무나 꿈같은 것이었고 결국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2년 뒤 보존작업은 중단되었다. 바푸온은 잘 보존되었지만, 앙코르와트를 완벽하게 지 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유액의 바다 휘젓기'부조들이 들어있는 회랑은 계 속된 무관심 속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캄보디아가 양분되 는 바람에 광범위한 보존작업 재개하기 위한 국내외의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왕이 된 시아누크 공은 1994년 첫 번째 왕령으로 쓸데없는 보수작 업과 상업적인 압력으로부터 앙코르를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제 주권국가가 된 캄보디아는 국제사회와 힘을 합쳐 1992년 세계문화유적지로 지정된 앙코르의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기록과 증언 앙코르를 방문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앙코르의 전모. 앙코르 여행 세계 곳곳을 샅샅이 살핀 사람에게조차 앙코르는 아주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방 문객들이 그 경이를 이해하고자 애쓰면서 겪은 자신들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인 관찰자 주달관은 1296년 8월 중국 황제의 사신 자격으로 앙코르에 도착하여 1297년 7월까지 머물렀다. 주달관이 기록한 내용 나는 이 나라의 지리와 습속을 완전히 다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기술할 수 있다.... 캄보디아 외국 상인들이 캄보디아를 부귀한 나라라고 보고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 유물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을마다 사원이나 탑이 있다.... 대로에는 우리의 역참과 비슷한 휴식 처가 있다. 캄보디아의 왕 오직 왕만이 나뭇잎이 그려진 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 그는 황금 왕관을 썼으며, .... 어떤 때는 왕관 대신에 재스민 나뭇잎 비슷한 잎사귀를 머리에 둘렀다. 목에는 약 1, 3킬로그램 무게의 진주 목걸이를, 손목과 발목 그리고 팔에는 금팔찌와 호랑이 눈을 박은 고리를 둘렀다. 발바닥과 손바닥에는 붉은색 물을 들였다..... 왕은 외출할 때 손 에 황금 칼을 들었다. 캄보디아 사람의 단순성 일반적으로 이들은 대단히 단순하다. 중국인을 만나면 대단히 수줍어하면서 공손한 태 도를 취했으며, 중국인을 '붓다'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국인을 보자 얼른 땅바닥에 엎 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요사이는 중국인을 속이고 학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는 데, 이것은 이 나라 안에 중국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이것은 왕에게도 적용된다- 머리를 시뇽으로 들고 어깨의 맨 살을 드러낸 채 돌아다닌다. 옷은 허리춤을 간신히 가리는 작은 천조각이 전부이다. 외출을 할 때에는 그 작은 천조각 위에 좀더 큰 조각을 하나 더 두른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는 늘 왼손(용변을 닦아내는 손)을 물로 씻는다. 오른손은 식사 를 하는 손이기 때문에 용변을 볼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인이 화장실을 갈 때면 늘 비웃는다. 그들은 중국인에게 자기들 옆을 지나가지 말라는 시늉을 한다 (중국인이 용변시 오른손을 사용하는 것을 비웃는다는 뜻). 캄보디아의 중국인 이 나라를 방문한 중국 선원들은 옷을 대충 입고 다녀도 되는 점을 마음에 들어한다. 쌀을 살 정도의 돈은 쉽게 벌 수 있는 데다가 여자를 얻고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하기 가 비교적 수월하기 때문에 다시 배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는 중국 선원이 늘 어나고 있다. ... 중국인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를 얻고 그 여자가 장사를 해서번 돈을 함께 나눠 쓴다. 도시에 대한 묘사: 성벽과 대문 도시의 성벽은 둘레가 약 20펄롱(4킬로미터, 1펄롱은 200m)에 이른다. 다섯 개의 출 입문이 있는데 모두 이중문이다. 동쪽에만 문이 두 개 있고 나머지 세곳에는 각각 하 나씩 있다. 성벽 바깥에는 커다란 해자가 있고 그 해자 위에는 다리가 놓여있다. 그 다리의 양쪽에는 '돌장군'같은 54개의 돌 신이 있는데 크기가 거대하여 쳐다보면 두려 운 마음이 든다. 다섯 대문은 모습이 다 똑같다. 돌로 만들어진 다리의 난간에는 머리가 아홉달린 뱀이 새겨져 있다. 54신은 그 뱀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꼭 붙잡고 있다.... 성벽의 출입문 위에는 다섯 개의 거대한 붓다 두상이 붙어 있다. 네 개의 얼굴은 동서 남북 4방위를 바라보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다섯 번째 붓다 두상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벽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것이며 높이는 약 2패돔(3. 65m)에 이르고 총안 시설은 없다. 성벽을 따라 여기저기에 사고야자 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성벽 사이사이 에는 빈 공간이 있다. 성벽의 내면은 너비가 약 10패돔(18. 3m)에 이르는 제방이다. 제방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문들은 밤이면 잠갔다가 아침에 다시 여는데, 출입문마다 경비병이 지키고 있다. 이 출입문은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지만 개는 통행할 수 없다. 성벽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각 면에는 석탑이 있다. 발가락을 잘린 죄수들은 이 출입문으로 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도시의 내부 왕국의 한가운데에는 황금 탑이 있고 그 주위는 20개의 석탑과 수백 개의 석실이 둘 러싸고 있다. 동쪽에 있는 황금 다리의 좌우에는 두 개의 황금 사자가 지키고 있으며, 석실 바닥에는 여덟 개의 황금 붓다가 있다.... 황금 탑에서 북쪽으로 1펄롱(약 220m)정도 가면 청동 탑이 있는데, 황금 탑보다 더 놀고 웅장하다. 청동 탑 바닥에도 역시 10개 이상의 석식이 있다... (바푸온에서) 북쪽으로 1펄롱 정도 가면 왕의 거처가 나온다. 이곳 왕이 기거하는 궁 에는 또 다른 황금 탑이 있다. 왕궁 왕궁, 왕족의 집무실, 거실 등은 모두 동향이다..... 주요 건물의 타일은 납으로 되어 있고..... 긴 베란다와 익랑은 조화롭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왕은 황금의 창문에서 집 무를 본다..... 왕궁에는 보물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경비가 엄중하여 그 보물을 직 접보지는 못했다. 내가 왕궁에 갈 때마다 왕은 왕비와 함께 왕궁의 황금 창문에 나와 앉아 있었다. 왕궁 안에는 황금의 탑이 있는데, 왕은 밤마다 그 탑의 꼭대기에서 취침한다.... 왕궁 맞은편에는 12개의 작은 석탑(프라사트 수오르 프라트 또는 로프 댄서의탑)이 있 다... 왕자들과 고관들의 저택은 평민의 것과 아주 다르다.... 평민은 집을 지을 때 타일을 사용할 수 업고 그 대신 이엉을 쓴다. 도시의 주변 지역 석탑(바크세이 참크롱?)은 남쪽 대문에서 반 럴롱 정도 뻗어 있는데, 루판(중국의 전설 적인 건축가)이 하룻밤 사이에 건설했다고 한다. 루판의 무덤(앙코르와트)은 남쪽 대문 으로부터 약 1펄롱 떨어진 곳에 있으며, 둘레가 약 10펄롱에 이른다고 한다. 그 안에 는 수백 개의 석실이 있다... 동쪽의 호수 (사실 주달관은 서쪽 바라이를 언급하고 있다. )는 성벽 도시에서 동쪽으 로 약 10펄롱 떨어진 곳에 있으며 둘레가 수백 펄롱이나 된다. 그 가운데에는 한 기의 석탑과 여러 개의 석실이 있고, 석탑 안에는 와불이 있는데, 그 와불의 배꼽에서 끊임 없이 물이 흘러 나온다.... 북쪽의 호수(프레아칸 바라이)는 성벽도시에서 북쪽으로 5펄롱 떨어진 곳에 있다. 호 수 가운데에는 수십개의 석실이 딸린 네모꼴의 황금 탑(네아크페안)이 있으며, 황금 사자, 황금 붓다, 청동 코끼리, 청동 황소, 청동 말 등등이 모두 여기에 있다... 왕궁 전정의 축제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열번째 달을 기념한다... 왕궁 앞에 1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 대한 플랫폼을 세우고 등불과 꽃들로 장식을 한다. 또 그 맞은편 약 20패돈(약 36. 6m)떨어진 곳에... 높은 플랫폼을 세운다... 이 플랫폼에는 폭죽발사대와 폭죽을 설치 하는데, 폭죽 비용은 각 지방의 행정관청이나 귀족들이 내놓는다. 밤이 되면 왕이 축 제에 초대되고 이어 폭죽이 발사되어 밤하늘을 찬란히 수놓는다. 폭죽발사대는 100펄 롱(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인다. 모르타르만큼 커다란 폭죽이 터지면 그 소리 에 온 도시가 뒤흔들린다. 고관과 귀족들은 양초와 빈랑야자 나무를 내놓는데, 그 비 용이 엄청나다. 왕은 외국의 사절들도 이 축제에 초대한다. -주달관 (진랍풍토기), 1297년경 앙코르와트의 포르투갈 여행객 17세기 초 포르투갈령 동남아시아 식민지의 공식 편집관인 디오고 도 코우토는 앙코 르 관련 기사를 남겼다. 이 기사는 1585~1588년 경에 앙코르를 방문했던 카푸친 수 도사의 관찰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1614년에 발간된 책자에 당연히 들어갔어야 할 이 자료는 우여곡절 긑에 누락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54년 찰스 랠프 박 서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자료에 의한 16세기 앙코르와 캄보디아)(1958, 파리)에 포르투갈 원본 및 프랑스어 번역본과 실려 빛을 보았다. 이 도시 (앙코르톰)에서 반 리그(2.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앙가르(앙코르와트)라는 이름의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아름답고 탁 트인 평지에 세워져 있다. 길이 160걸음 에 달하는 이 사원은 그 모습이 너무나 독특하여 도저히 필설로는 묘사할가 없고 기존 의 다른 유적과도 비교할 수 없다. 건물의 본체는 네 개의 회랑으로 되어 있고 아치형 천장은 높이 솟아 있다. 화려하게 단정된 이 천장은 높고 뾰족한 돔을 이루고 있었는 데, 이 돔은 인간의 재주를 모두 동원한 듯한 교묘한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었다. (사원 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돌로 만든 아주 넓은 플랫폼 뒤에 세워져 있다. 이 플랫폼은 사방에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플랫폼의 네 귀퉁이에 는 중앙의 거대한 사원과 형태는 똑같고 규모만 더 작은 사원이 건립되어 있다. 이 소 규모 사원의 천장도 돔으로 되어 있으며, 돔의 맨 꼭대기 부분은 전부 황금으로 칠해 져 있다. 이 첨탑들은 4리그(19.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잘 보인다. 사원에는 해 자가 둘러져 있는데 이 해자는 너비가 화승총의 사격거리에 이르고 깊이는 7패돔(12. 8미터)정도이다. 해자 위에는 중정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과 연결된 다리가 하나 놓 여 있다. 이 다리의 양쪽 입구에 하나씩 놓인 호랑이 석상은 너무나 거대한 데다 모습 이 끔찍해서 통행인들을 벌벌 떨게 만든다. 연석으로 만든 아치형 다리는 정말 아름다 운 외관을 자랑한다. 사원은 셀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건물로 둘러쌓여 있다. 그리고 회랑을 떠받치는 기둥은 창문 기둥과 마찬가지로 연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너무나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어서 마치 선반 위에 올려놓고 연마한 듯하다. -디오고 도 코우 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자료에 의한 16세기 앙코르와 캄보디아). 17세기 초 앙코르 를 방문하지 않았던 선교사 노코르바트의 장엄한 폐허가 위치한 곳은 이 호수의 둑 근처이다. 폐허는 거대한 왕궁, 돌기둥, 피라미드, 사원 혹은 파고다 등 모두 대리석으로 축조된 건물이 무너져 내린 곳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돔과 아치형의 천장인데 그 세공이 너무나 교묘하여 캄보디 아 사람들은 그것을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천사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곳은 캄보디 아의 유명한 왕인 프라 파툼 수리봉의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또 이왕의 치세시 에 스리랑카의 승려가 불교 경전을 가져와 이 나라에 불교를 소개했다고 한다. -장 밥 티스트 파예구아 (타이 왕국 또는 시암에 대한 기록), 1854년 앙코르를 방문했던 선교사 샤를 에밀 부유보는 인도차이나에서 선교사로 활양하던 시절인 1850년 12월, 앙코르 를 잠깐 방문했다. 그때의 여행기가 1858년 파리에서 발표되었다. (아래의 글은 그 여 행기에서 발췌했다. ) 그는 1865~1867년에 프랑스에 있다가 1873년에는 영구 귀국했 다. 그는 1874년에 펴낸 (안남과 캄보디아)라는 책에서 앙코르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 고 있으며, 자기가 그 유적지를 '발견'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고대 캄보디아 문명의 진수를 맛보고 싶으면 대호 건너편에 있는 앙코르를 방문해야 한다. 이곳은 바탐방에서 이틀 정도 걸린다. 앙코르에 가야만 마하노코르 크메르의 옛 문명이 어떠했는지 그 본바탕을 알 수가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 동양의 문명은 더 이 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맥없고 나약한 문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대의 동양은 사제적 신비와 거인적 폐허가 가득 찬 이상하고 경이로운 영토이다. 앙코르 인근에 있는 현대적인 도시에서 출발해 뜨거운 모래 위를 약 1리그 정도 걸었 다. 맨발이 쓰려왔다. 그러다가 숲을 빠져 나오니 갑자기 연석의 연결로가 나타났고 그 입구를 멋진 사자 석상이 지키고 있었다. 그 연결로는 연못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결로 아래 연못에서는 한 떼의 물소들이 유유히 멱을 감으며 수초를 뜯어먹고 있었 다. 그 연결로를 따라가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에서 반쯤 퇴락한 별채들을 보았다. 그 건물들은 몹시 허물어진 상태였으나 예전의 우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서 좀더 가자 두 개의 비좁은 사각형 회랑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회랑의 벽에는 온갖 조 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 회랑을 마저 지나니 드디어 탑이 나왔다. 비교적 보존이 잘된 앙코르 사원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보물로서, 서구의 가장 아름다 운 건축물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물론 이 불교 사운과 유럽의 교회 사이에는 유사성 이 없다. 건물의 본채는 정사각형이고, 사각형의 각 귀퉁이에는 돔형의 아름다운 탑이 있다. 그리고 사각형의 한가운데에는 나머지 네 기의 탑을 제압하는 중앙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들은 많은 조각들로 장식된 회랑 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자체의 고유한 건축양식을 갖고 있는 앙코르 사원을 감식하기 위해서는 예술가적인 안목을 갖 추어야만 한다. 그 건물들은 비록 몹시 낯설기는 했으나, 장엄하고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앞에서 이미 앙코르를 찾는 경배자들은 설교를 듣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파 고다는 경배자들이 가르침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 아니다. 앙코르 파고다는 스리 랑카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을 간수하기 위해 지어진 듯하다. 중앙 탑 아래에는 아주 평범한 불상이 하나 있는데, 타이 왕이 봉헌한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인 도에서 유래된 여러 명의 신들을 숭배하는데, 이들의 신상 역시 파손되어 있었다. 이 한심한 사람들은 축일이면 이 괴물 신 앞에 와 오체투지를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들의 발 아래 향을 피운다. 한편 불교 승려들은 팔리어로 기도를 올린다. 불교 승려들은 앙코르 사원의 회랑에서 살지 않고 그들의 조상들이 건립한 영예로운 유물 옆에 초가집을 짓고 산다. 내가 캄보디아의 옛 영화를 웅변해 주는 이 유물을 보 고 감탄하는 동안, 불교 승려들의 집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불교 승려들은 그 소리를 듣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모두 한데 모여 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팔리 어 기도를 열심히 외운다. 파고다를 방문한 다음에는 캄보디아 왕들이 거처했다는 옛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잔해가 남아있는 성벽을 넘어가 비교적 보존이 잘된 대문을 지나 도시 안 으로 들어섰다. 외벽에서 약 반 리그쯤 걸어 들어가니 한때 왕궁이었던 거대한 폐허를 만났다. 그 폐허의 건축양식은 파고다와 비슷하다. 바깥 성벽을 장식한 조가에는 싸우 는 코끼리, 몽둥이와 창으로 싸우는 남자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겨 한번에 화살을 세 개씩 쏘는 남자들도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폐허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옛 도시 안은 어디를 가나 폐허였다. 내가 앙코르에 와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은, 캄보디아가 한 대 부강한 문명국이었으며, 또 지금보다 사람이 더 많이 살았던 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다. 그러나 모든 국부는 사라졌고 문명도 따라서 소멸하였다. 한 때 장엄과 영광이 깃 들였던 위대한 유적이 지금은 밀림 속에 버려져 황폐하게 된 광경을 쳐다보는 것처럼, 여행객에게 동경과 피곤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샤를 에밀 부유보 (인도 차이나 여행) 1848~1856년, 1858년 '공식적인' 발견자 앙리 무오가 1861년 라오스에 서 아까운 나이에 주었다는 소식은 이듬해 봄까지 친구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영국 은 1856년 이래 무오의 제2의 조국이었기에, 고고학과 탐사학에 많은 관심을 쏟는 간 행물인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다음과 같이 그의 부고를 실었다. 앙리 무오 씨의 사망소식이 접수됨으로써 과학을 위해 순교한 사람의 명단이 한 줄 더 늘어나게 되었다. 박물학자이며 탐험가인 앙리 무오 씨는 해박한 지식, 지칠 줄 모르 는 정열, 불굴의 용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무오 씨는 태생으로는 프랑스인이지만, 아프리카 여행가인 고 뭉고 파크의 조카와 결혼함으로써 영국 국적을 취득했고 또 자 신의 발견사항들로 영국 고학학회의 지식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는 1858년 영국을 떠나 시암으로 가서 시암과 인근의 캄보디아를 여러 해 동안 탐사한 끝에, 중국 남서 부 주의 경계지역으로 탐사를 나섰다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내륙 오지 깊숙 이 들어갔던 그는 그 지방의 열병에 감염되었으며, 22일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고 말았 다. ... 왕립지리학회 모임에서 R. 머치슨 경은 동물학 수집가로서, 또 지리탐사가로서 이루어 낸 무어 씨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그가 캄보디아 지리에 관련해 보내온 편지 를 낭독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영국 과학계의 커다란 손실이다. 무오 씨처럼 집, 건강, 목숨마저 희생해가며 정글과 열병의 나라로 탐사행위를 나설 모험가는 당분간 없을 듯하다.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62년8월2일 무오의 사후 그의 발 굴내용은 책으로 발간되었다. 1862년 말 영국 학계에 헌정될 두권의 영문 단행본의 출판이 준비되고 있었다. 편집을 맡은 무오의 남동생은 무오의 개인적인편지. 기록, 스 케치, 도면, 미완성 논문, 그리고(흥미진진한 앙코르의 폐허, 영국고고학회 제출용)이라 는 논문 등에서 자료를 뽑았다고 밝혔다. 무오의 일기에 바탕을 둔 비학술적인 이야기 는 1863년 프랑스 잡지에 연재물로 실렸다. 영문 단행본은 1864년에 출간되었는데, 다음은 그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노크호르 또는 앙코르는 고대 캄보디아 왕국, 혹은 크메르의 수도였다. 크메르는 당시 인도차이나 국가들 중에 가장 강성했다. 캄보디아 의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은 20여 명의 왕들에 의해 연면히 이어졌으며, 왕들은 앙코르의 건설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국은 500∼600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으며 왕실 의 국고 보관소의 면적만 해도 300마일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앙코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주가 있다. 대호 툴리 사프 동쪽에 위치한 이 주는 북위14도, 동경 104도에 해당된다. 메콩강의 양쪽 둑과 고대 치암포이스 왕 국(코친차이나)에는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투입하여 지은 구조물의 잔해가 있다. 그 구조물을 처음 보는 순간 누구나 존경심을 품게 된다. 이처럼 강성한 민족, 문명이 발 달한 개화된 민족, 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민족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앙코르 사원 중의 하나-솔로몬의 성전이나 미킬란젤로의 건축물에 필적하는-는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 갖다 놓아도 당당히 한 자리를 할 것이다. 이 사원은 그리스나 로마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장엄하다. 그런 데 이런 문명을 개화시켰던 나라가 지금은 야만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비애감마저 느껴진다. 전쟁의 폐해, 위대한 파괴자인 시간의 손길, 지진 등으로 다른 유적들도 대부분 황폐 해졌다. 주위의 폐허를 굽어보며 장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유물들조차 파괴와 퇴 락의 손길을 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하 노코르 크메르의 강대한 제국을 다스렸던 그 많은 왕들의 역사적 흔적 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이 위대한 사원의 건축을 시작한 사람이 문둥이 왕이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것은 잊혀졌다. 돌기둥 에 새겨진 기명은 읽을 수가 없다. 만약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와트의 건설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음 네 가지 중 한 가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건 천사들의 왕인 프라 에운의 작품이다." "그건 저절로 지어졌다." 나는 유물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앙코르와트부터 설명해 나가겠다. 가장 먼저 여행객의 눈에 띄는 이 사원은 앙코르를 힘겹게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그때 까지의 온갖 노고를 모두 잊게 하고 감탄과 환희의 느낌을 안겨준다. 그 기분은 뭐라 고 할까, 사막을 헤매다가 푸른 풀들이 있는 신선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까.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여행객은 갑작스럽게 야만에서 문명,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 앙코르와트에서 두 시간 정도 걸어가면 산책로가 나온다. 그곳에 이르려면 먼지 풀썩 이는 정글 속의 모랫길을 걸어가야 하고 또 사행하는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러면 마침 내 건물과 나란히 있는 너비 9미터, 길이 27미터의 산책로를 만나게 된다. 산책로의 양끝에는 바위 한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 만든 사자 석상이 있는데, 석상의 받침대도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것이다. 이어 네 걔의 넓은 계단을 올라가면 플랫폼이 나온다. 북쪽 계단에서 너비 9미터, 길이 230미터의 연결로를 곧장 걸어가면 주 출입문에 이 르게 된다. 이 연결로는 바닥에 판석이 깔려 있으며 아주 두꺼운 벽으로 받쳐져 있다. 이 연결로는 성벽 주위에 파놓은 너비 220미터의 해자를 건너기 위한 것이다. 한편 높이3미터, 두게 1미터의 옹벽은 철분암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맨 윗줄은 연암으로 되 어 있다. 옹벽은 성벽만큼이나 두텁고 튼튼하다. (이어 원문에는 사원의 건축재료와 조 각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 방문객은 먼저 이 장엄한 건축물의 웅장함, 균형미, 예술미 등에 압도되지만, 그에 못 지않게 그 거대한 규모와 건축에 쓰인 돌덩어리의 숫자에도 놀라게 된다. 이 사원만 해도 돌기둥이 총 1532개가 들어갔다. 이 돌을 캐낸 석산이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운송장비를 어떤 것을 썼는지, 도 얼마만큼의 운송인력을 투 입했는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앙코르와트에서 북쪽으로 4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마을 어귀에는 높이가 100미터나 되는 사원이 있다. 석회암으로 지어진 이 사원은 바켕산의 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다. 산기슭에서는 나무들 사이로 두 개의 거대한 사자 석상(높이 2. 2 미터)과 받침대가 보이는데 통째로 된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부분적으로 파손되기는 했지만 산꼭대 기까지 이르는 계단도 있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광대무변하고 아름답다. 이처 럼 멋진 건물을 건축한 민족이니 이런 멋진 장소를 사원의 부지로 정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전에는 생기와 활기가 넘쳤을 이 지대가 지금은 퇴락하여 쓸쓸하기 짝 이 없다. 가끔 동물들이 짖어대는 소리와 야생 조류의 울부짖느 소리가 주변의 정적을 깨뜨릴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만든 것이란 얼마나 취약한가!.... 바켕에서 800미터 정도 더 가면 앙코르톰의 폐허가 나온다. 먼지와 흙으로 뒤덮인 채 반쯤 파괴된 길을 지나고, 돌덩어리와 돌기둥과 사자나 코끼리 석상의 파편 조각들로 뒤덮인 커다란 고랑을 건너면 개선문처럼 아치형으로 지어진 이 도시의 출입문이 나온 다. 이 유물의 보존상태는 그래도 다른 유물들에 비해 나은 편이다. 가운데에는 18미터의 중앙 탑이 있고 네 귀퉁이에 작은 탑이 있으며 또 다른 두 기의 탑이 회랑으로 연결되 어 있다. 맨 곡대기에는 이집트 양식을 연상시키는 네 개의 거대한 두상이 있다... 손상되지 않은 벽에는 부조들이 네 줄로 조각되어 있다. 부조에 등장하는 왕은 깨어진 단검에 손을 얹은 채 동양식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시중을 들 고 있다. 모든 인물들은 긴 귀고리, 목걸이, 팔지 등을 차고 있다. 그들의 의상은 꼭 여며져 있고 모두 뾰족한 머리장식을 쓰고 있다. 아마도 뾰족한 부분에는 보석, 진주, 금은 장식으로 치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벽에 있는 부조들은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은 동양 의 야만인답게 긴 머리를 묶어서 매고 있다. 하지만 이 부조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테라스 끝에 있는 문둥이 왕의 석상을 치장하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고상함이 느 껴지는 머리, 단정한 이목구비,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표정 등은 당시 최고의 장 인이 만든 조각품임을 보여준다. 그 당시에는 이처럼 수준 높은 장인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윗입술 위로 콧수염이 약간 아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흘러 넘친다. 전신은 나체이고 장식을 전혀 없으며, 한쪽 발과 한쪽 손이 파손되었다.... 긴 탐사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호랑이 가죽 위에 앉아 횃불의 도움을 받으며 이 들을 쓴다. 내 왼쪽에는 금방 벗겨 낸 원숭이 가죽이 있고 오른쪽에는 분류와 포장을 기다리는 곤충상자가 있다. 또 모기와 거머리가 자꾸 달려들어 나의 작업이 한결 더뎌 지고 있다. 나는 지금 막 보고 돌아온 그 멋진 건축물에 대한 황홀한 인상을 다른 사 람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주 웅장한 유물이 존재한다는 것, 서양의 고대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 이상으로 완벽한 예술적 감각을 갖춘 유물이 여기 동양에 도 존재한다는 사실 등은 어서 빨리 알리고 싶다. 또 앞으로 이들 나라에 대한 사실과 전승을 보다 완벽하게 수집하여 나보다 재능이 뛰어나고 운이 좋은 탐사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나는 내 뒤를 이어 이 작업에 뛰어들 사람이 분명이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 치 않는다. 내게는 주어지지 않은 정부나 단체의 도움, 또는 시암 정부의 지원을 업고 서, 내가 막 땅을 갈고 씨를 뿌린 이곳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사람이 나올 것이다. -앙리 무오 (인도차이나 중부 지방(샴), 캄보디아, 라오스의 여행기). 1864년 학자 겸 사진사 고향 에든버러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존 톰슨은 졸업 후 사진에 취미를 붙였고 급기야 1862년에는 극동으로 떠났다. 그는 두다르 드 라그레 탐험대가 발진한 첫해인 1866 년에 앙코르를 탐사했다. 그의 관찰력과 추리력은 대단히 날카로웠다. 그가 펴낸 책들 과 그 뒤 회원자격으로 참가한 런던의 왕립지리학회 모임에서 그가 한 연설 등은 그의 탐사작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 준다. 많은 중요 유적들이 석재 열결로로 이어져 있다. 연결로의 높이는 가을철 홍수 때의 수위보다 높게 고안되어 홍수를 예방하게 되어있다. 고대 캄보디아인은 연결로를 이용,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연결시켰던 것 같다. 연결로 인근에는 물이 부족한 건기에 사용하 기 위해 돌로 만들어 놓은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돌을 캐낸 석산은 앙코르와트에서 4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어떻게 그 거대한 돌들을 험한 산간을 뚫고 도성에까 지 옮겨 올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시암의 왕은 나에게 특별 사절을 보 내 앙코르 유적지 전역의 사진 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난 그 부탁을 들어줄 수 가 없었다. 당시에는 코닥 사진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콜로디온 습판 사진술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이 낙후된 기술 때문에 장비를 옮기는 데에만 8~10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했다. -(왕립 지리학회의 일지), 1893년 우리가 타고 다닐 코끼리 두 마리와 짐을 수송할 다섯 대의 들소 마차를 보내 주신 총 독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코끼리 등에 설치한 가마는 돔형으 로, 아주 지체 높은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것이다.... (코끼리는 ) 인근의 지리를 잘 알 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아주 안정되게 걸어간다. 코끼리는 연못이나 습지를 지나갈 때 도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잘 피하는데, 가마의 높이를 잘 알고 있어서 나뭇가지가 가 마를 막을 것 같으면 바로 걸음을 멈춰 코로 그 가지를 쳐낸 다음 걸어가곤 한다... 우리는 정글 근처, 멋진 삼림 속에 있는 폐허도시 나크혼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그곳 에서는 여러 종류의 장엄한 폐허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한 건물(바 욘)이 엄청나게 넓은 땅을 차지했고, 그 주위에는 51개의 석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도시의 바깥 문에서는 '원숭이와의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출입문 훨씬 위쪽에는 일련의 작은 탑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중앙 탑은 고대 신의 인자한 네 얼굴 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방치된 그 얼굴은 나무뿌리에 휘감겨 잘 보이지 않았 다. 내가 그 얼굴을 사진 찍으려 하자 수염이 흰 검은 원숭이 한 떼가 내 머리위에 있 는 나무줄기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며 가지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래서 사진촬영은 불가능했다. 그때 라그레 대위의 캄보디아 유적 탐사 작업을 돕던 프랑스 해병들이 나 타나 공포를 쏘아댔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숲으로 도망가 버렸고 마침 내 원숭이들의 휘파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말라카 해협, 인도차이나, 그리고 중국), 1875년 꼼꼼한 조사 계획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는 메콘 탐사위원회를 위해 다음과 같은 고고학적 프로그 램을 만들어 놓았다. 전승과 주요 유적지의 위치에 따라 고대 캄보디아의 경계를 설정할 것. 앙코르, 또는 다른 고대 유적이나 도시가 있는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탐사방법을 채택 할 것. 1. 그 도시의 일반 도면을 작성하고 어느 건물이 정밀조사를 필요로 하는지 결정할 것. 2. 고대 기명은 '예외 없이' 탁본을 뜨고 그 위치를 명기할 것. 3. 주요 건물의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 등을 작성하고 각 건물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 할 것. 4. 아주 힘든 것은 제외하고 모든 부조의 석고를 뜰 것. 석고를 이용하든 그림으로 그 리든 간에 인물, 의복, 무기, 장식 등 부조에 그려진 모든 사항들을 두루 수집할 것. 5. 각 유물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연대를 드러내 주는 사항이 있으면 잘 기록해 둘 것. 6. 일반적인 건축방법을 살펴볼 것. 특히 교량, 천장, 도로 등에 사용된 방법을 자세히 연구할 것. 기초공사, 건물의 채색, 도금, 정면배치 등에 대한 기계적 측면도 살펴볼 것. 7. 건물의 배치와 각 건물의 용도, 개인 주거지의 유적을 조사하고 필요하다면 땅을 팔 볼 것. 8. 사용된 건축자재의 출처를 조사할 것. 가능하다면 석산의 위치를 알아낼 것. 두다르 드 라그레의 원고를 편집한 빌므레유는 다음과 같은 노트를 덧붙였다. 이 조사계획은 아주 광범위한 것이어서 우리 의견으로는 다른 고고학적 탐사의 모델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드 라그레 자신도 이 계획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사항, 즉 '유물을 종교적 관점에서 연구할 것'이 빠졌다. 이것은 이 계 획의 맨 마지막 항목이었으나 삭제되었다. 저자나 또 그 동료들이 그러한 연구를 하기 에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느낀 듯하다. -A. EM 빌므레유 편집 (두다르 드 라그 레 탐험대), 1883년 앙코르에서 작업하기 1901년 11월, 앙코르톰에서 띄우는 다섯 번째 편지. 프놈펜에서 떠나온 여행은 꿈만 같았다. 루틴을 떠난 후 우리는 삼판을 타고 홍수가 난 숲을 헤쳐 왔다. 환상적인 달 빛 아래 펼쳐진 숲은 은을 녹인 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그리고 이따금 수초가 물 깊숙 한 곳에서 떠올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거대한 벵골보리수에서 우아하게 살랑거 리는 대나무에 이르기까지 온갖 나무들이 초록빛과 보라색을 나부끼며 흔들거렸다. 우 리는 높이 50미터의 빈랑야자 나무에 반쯤 가려진 마을을 지나갔다. 호기심 많은 마을 의 아낙네들이 신기하다는 듯 우리들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받침대 위에 떠 있는 초가는 새로 나온 달에 경의를 표하며 밝게 빛났다. 달빛이 대낮같이 환했고, 그 창백 한 푸른색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11시 30분, 시엠레아프 도착, 취침, 제독은 정크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들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앙코르로 향했다. 이 얼마나 장관인가! 35대의 수레가 단 하나 뿐인 길 위를 길게 늘어서서 천천히 행진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일출. 우리는 각자 자기 수레로 달려가 가능한 한 많은 쿠션을 대려고 애썼다. 그 수레에는 스프링이 엇 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든지 너끈히 갈 수가 있다. 우리는 한 줄로 열지어 떠났다. 들소들은 제독을 모시고 있는 영광을 알기라도 하는 듯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앙코르톰 도착. 경이! 특히 바욘(바욘은 캄보디아어로 '왕의 방'이라는 뜻)의 사원이 인 상적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발 아래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엄청난 돌더미를 건 너야 한다. 그리고 커다란 박쥐떼가 서식하는 회랑들을 지나쳐야 한다. 불교 승려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이 박쥐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원은 서로 겹쳐 있는 멋지게 장 식된 삼중 테라스로 지탱된다. 두 번 째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 다. 그리고 모든 돌에는 멋진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예술정신과 매력적이고도 순수한 표현양식을 자랑한다. 벽의 4면에 각각 네 개의 거대 한 브라흐마 두상이 새겨진 52개 탑은 덩굴과 나무뿌리에 침범을 당해 마치 머리장식 을 쓴 모습이다. 앙코르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사각형의 외측 벽은 각 변의 길이가 4킬로미터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풍상에 닦여 온 브라흐마 두상. 지의류와 덩 굴에 뒤덮인 그 얼굴. 햇빛이 그 머리장식을 뚫고 들어와 비출 때면 형형색색으로 서 로 다르게 빛나는 그 얼굴, 어떤 것은 웃고, 어떤 것은 슬퍼하고, 어떤 것은 무표정한 그 얼굴... 그 수백 개의 얼굴이 동시에 빚어 내는 그 표정의 교향악은 악보로 기록하 기가 불가능하다. 노란 법의를 입은 불교 승려들은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때로는 사 원에서 기도를 올리고 때로는 나뭇가지를 쳐내 추사용 땔감을 만들기도 한다. 수레를 몰고 앙코르톰을 내려오는 우리들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수 레는 미친 듯이 덜컹거렸다! 우리는 마치 프라이팬 위에서 구워지는 팬케이크 같았 다.... 아무튼 즐거운 한때였다. 그런 공중제비를 넘어보다니! 한 선장은 다리를 공중 높이 쳐든채 계단 바닥에 도착했다. 또 어느 뚱뚱한 건축가는 수레에 들을 대고 밀려 내려가더니 결국 배를 땅에 처박은 채 도착했다. 제독은 얼굴 근육 하나 씰룩이지 않 았다. 그는 정말 비범한 사람인 것 같다. 천장에 구멍이 난 회랑 앞과, 허물어진 석주 위에 잔뜩 쌓여져 있는 돌더미를 치워 내 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러나 사원의 도면을 작성하려면 그 돌더미를 치워야 했다. 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조각들을 주워 모아야만 이 나라의 신성한 역사를 묘사했다는 그 부조들을 완전한 상태로 보존할 수가 있다. 쿨리(중국, 인도의 인부)들은 이제 롤러 나 받침목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조그만 롤러를 그 밑에 밀어 넣고 거대한 석 판을 10미터 정도 들어올렸을 때, 쿨리들의 얼굴에 떠오르던 그 놀라는 듯한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불교 승려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신상을 훔치려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안 뒤로는 더 이상 감시하지 않았다. 한 승 려는 우리가 무거운 석상을 옮길 때 몹시 힘들어 하자 도와 주기까지 했다. 우리가 정 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그는 노라면서도 기뻐했다. 나는 승려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 다. 배가 아픈 승려를 고쳐 주었고 또 뱀에 물린 승려도 치료해 주었다. 그들은 바나 나와 신선한 코코넛을 내게 가져다 주며 자꾸 먹으라고 권했다... 1901년 12월 6일. 앙코르톰에서 하루를 보냈다. 여러 명의 현지 노부자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바욘의 부조와 씨름했다. 이 부조들은 종교의식, 전투, 사냥, 그리고 (마하바라 타)(고대 인도 문화의 총체라 할 수 있는 대서사시)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조상에다 로프의 양끝을 묶어 코끼리로 하여금 잡아당기게 하여 조각된 돌들을 뜯어내 는 데 성공했다. 목이 부러진 각오로 중앙 탑의 브라흐마 두상까지 기어 올라갔다. 통 역을 하는 이가 이런 안 좋은 날씨에는 제발 살라(대나무 집)를 떠나지 말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근처의 초가들은 모두 내버려졌고 몇몇 승려들은 몸에 열이 난다며 병석 에 드러누웠다. 우리는 승려들에게 밤마다 앙코르와트에서 자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병이 난 승려들을 찾아가 내일 키니네를 가져와 열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했 다. 프랑스 극동학교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시엠레아프에 다녀왔다. 거기 서 멋진 독수리 한 마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요리사가 없었다. 아마 노름을 하러 갔거나 어디 으슥한 곳에서 아편을 맞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닭 열 마리, 빵 다섯 덩어리, 달걀 수식 개를 등에 짊어지고시엠레아프에서 여기까지 걸어왔 다. F가 우리에게 전보로 곧 도착한다고 알려 왔다. 그는 초저녁에 젊은 친구를 한 명 데 리고 나타났다. 젊은 친구는 종교, 시, 목욕에 대해 지껄였는데, 나쁜 친구는 아닌 것 같다... 1904년 4월 15일. 한 시간 동안 앙코르와트 축제에 참가했다. 거기서 아주 진기한 풍 경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캄보디아 남녀들이 목에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평소에는 아주 한적한 폐허 사이를 요란하게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 다. 십자형의 회랑에서는 숫사슴 춤을 춘다며 한 남자가 한쪽 끝에 뿔이 달린 사슴 머 리를 꽂은 막대기를 든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빽빽하게 늘어서서 천천히 노래를 부르며 한 발을 앞으로 내놨다가 또 한발을 뒤로 물리면서 춤을 췄다. 원숭이 가면을 쓴 다른 두 남자가 숫사슴을 든 남자를 유혹했는데, 숫사슴의 남자는 이따금씩 그들에게 대들었다. -샤를 카르포 (앙코르의 폐허), 1908년 앙코르톰의 신비한 조각품 비오기 전의 바욘 어둑어둑한 가운데 가까이 가보니 '승리의 문'은 언뜻 동굴 입구처럼 보였다. 사실 문 의 윗부분은 브라흐마의 괴물 같은 얼굴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나무뿌 리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입새들에 가려져 벽감처럼 보이는 문의 각면에는 머리가 셋 달린 이상한 형태의 코끼리가 조각되어있었다. 우리는 그 음울한 얼굴들이 새겨진 문을 지나 한때 광대했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건축물의 파편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그 위를 양치류, 소철 류, 난초류, 그리고 커다란 나무뿌리에 기생하는 각종 식물들이 뒤덮고 있었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다양한 크기의 여러 가지 불상들이 허공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한때 여기에 왕궁이 서 있었다. 한때 왕들은 이곳에서 엄청나게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왕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석상의 표면이나 인 간의 기억 속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 거대한 돌들은 이제 수천 개의 나무뿌리와 뒤섞여 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이 조각품 들이 낙지발 같은 수천 개의 풀뿌리에 꽁꽁 사로잡힌 것이다. 식물의 세계에도 파괴를 향한 완강한 의지가 있는 듯하다. 브라만이 시바라 부르는 죽 음의 신은 모든 동물들에게 천적이라는 막강한 적수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미생물 은 모든 생물체의 본질을 갉아먹으므로 생물체의 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신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속하는 구조물을 지어 자신들의 짧은 삶을 연장 하리라고 태곳적부터 내다본 듯하다. 그래서 인간의 그 영속적인 구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시바는 수천 가지 파괴요인을 만들어 냈는데, 그중에서도 벽우에 자라는 식물,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무적의 무화과 나무' 따위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 오늘날 앙코르를 지배하는 것은 이 무화과나무이다. 왕궁이든 사원이든 무화과의 위력 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창백하고 부드러운 가지를 쭉 뻗어 그 뱀같은 반점과 넓은 돔형의 잎사귀를 펼치는 무화과는 처음에는 작은 씨앗으로 시작한다. 바람을 타고 날 아와 프리즈(소벽 벽화)나 탑의 꼭대기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러나 싹을 틔우는 순 간부터 뿌리는 강한 철사줄이 되어 돌틈을 뚫고 아래로 아래로 본능으로 인도된 부리 가 마침내 땅속을 뚫고 들어가면, 생명을 주는 수액을 공급받게 되고 마침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거목으로 자라나면서 모든 결속된 것을 흩어지게 한다. 구조물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성벽을 가른다. 그 순간부터 건 물은 사라지고 얼굴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갑자기 잎새가 후드득하더니 양동이로 들어붓는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나무 위의 하늘은 갑자기 어둑해졌는데 우리가 그만 보지 못했던 것이다. 빗물은 급류가 되어 우리 머리 위로 퍼붓기 시작했다. 유일한 대안은 꿈꾸는 얼굴의 불상을 가린 이엉 지붕 밑에 잠시 몸을 피하는 것뿐. 마침내 비가 그치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정글에 갖히지 않 으려면 철수를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앙코르의 가장 오랜 사원이며 '네 개의 두상을 가진 탑'으로 유명한 바욘에 거의 다 도착한 상태였다. 어두워진 숲 속 저 너 머로 혼란스러운 돌덩어리 같은 바욘이 우리의 눈에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서 어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번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원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사방에 퍼져 있는 가시나무 덤불, 나무뿌리, 그리고 덩굴 등으로 얼크러진 길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그 길은 사방에서 정글의 협공을 받 고 있었다. 정글은 그 길의 목을 졸라 아예 숨을 끊어 놓을 기세였다. 거대한 무화과 나무들은 완벽하게 파괴작업을 수행했고 뿌리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뿌 리가 올라갈 수 없을 성싶은 탑의 꼭대기까지 군림했다. 그러다 보니 탑이 오히려 그 나무뿌리를 떠받치는 받침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원의 출입문에 도착했다. 마녀의 머리카락 같은 나무뿌리가 그 출입문을 마 구 뒤덮고 있었다. 나무 우듬지와 물먹은 하늘에서 어둠이 내리는 이 늦은 시간, 출입 문 앞에 얼크러진 나무뿌리들은 깊고 어두운 구멍이 되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그 안으 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가까운 출입문 근처에서는 원숭이 한떼가 둘러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원숭이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에 서는 마치 침묵이 행동의 원칙인 것 같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아까 비올 때 고였던 빗방울들이 잎새와 석편에서 똑똑 떨어지는 소리뿐... 떠나기 전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더 나무뿌리에 뒤덮인 탑들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나는 독특한 공포감에 휩싸여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두상의 얼어붙은 미소를 보았 다... 그리고 또 다른 미소를 또 다른 벽면에서 보았다.... 그런 미소가 셋, 다섯, 열, 아 니 지천으로 있었다. 거대한 눈이 사방에서 나를 쏘아보았다... '네 얼굴의 탑' 이야기 를 들었음에도 이처럼 많은 얼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 높이 새겨져 있는 저 신비한 얼굴들. 그것은 너무나 초자연적인 차원의 일이어서 그게 무엇 인지 알아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 펑퍼짐한 코 아래 미소짓고 있는 입. 수줍은 여자처럼 반쯤 감고 있는 눈. 차가운 미소를 엷게 짓는 노파 같은 표정.... 고대사가 산 실된 이 나라 사람들의 조상은 오래 전 이런 표정의 신상들을 경배했다. 그 뒤 수세기 동안, 정글의 완만한 파괴작업과 풍우의 우협적인 용해력이 저 신비한 ' 표정'을 없애려 했으나 결국 지우지 못했다. 중국 괴물들의 벌어진 입보다 더 이해하 기 힘든, 냉소적인 자비의 저 표정... 비온 뒤의 바욘 돌아다보는 곳마다 다시 그 거대한 브라흐마의 얼굴이 보였다. 지난밤 석양에 보았던 그 교활한 듯하면서 불가해한 '상냥한 노파'같은 얼굴이 다시 양치류와 나무뿌리 사이 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얼굴이 있었다. 아 주 멀리 떨어져 있는 탑에도 그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에는 잡초로 된 왕관을 쓰 고 목에도 잡초로 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대낮에 보니 그렇게 무섭지는 않 았다. 오늘 아침 그 얼굴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봐요. 우리는 죽었으니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어요. 우리의 미소나 감겨진 눈에는 냉소적인 구석도 없어요. 우린 마음이 평화롭고 꿈 없는 잠을 자기 때문에 이처럼 미소짓고 있는 거예요. ".... 마침내 바욘이여 잡초의 왕관을 쓰고 실루엣 속에 납작 엎드린 그 탑들은 하늘을 향해 뻗친 거대한 솔 방울같이 보였다. 갑자기 땅속에서 돌로 된 잡초들이 비쭉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강력 하고 빽빽하게 뻗은 것 같았다. 서로 다른 크기의 50여개의 탑들이 여러 층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고 50여개의 환상적인 솔방울들이 마을 크기의 널찍한 기단 위에 한데 뭉쳐있다. 이 탑들은 서로 밀치고 당기며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그 중위에 포진하고 있다. 주변의 어떤 탑보다 규모가 큰 높이 60~70미터의 중앙 탑은 그 탑들을 부감하 며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활짝 핀 황금 연꽃과 비슷하다. 그리고 탑의 네 벽에 새겨 진 네 얼굴들은 그 높은 지점에서 각각 동서남북을 쳐다보고 있다. 그 얼굴들은 반쯤 감은 눈, 불가해한 미소와 자비의 표정을 내보이며 마주보고 있다. 이 얼굴들은 앙코 르 신의 편재를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도시에 들어서면 어디를 가나 그 얼굴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측면에서, 때로는 정면에서, 때로는 사각에서... 대로는 비를 머금어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때로는 뜨거운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작열하는 무더위 속에서, 때로는 깊고 푸른 달 밤에... 어느 때 어느 경우이든 이 얼굴들은 늘 거기 있어 도시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러나 오늘은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얼굴을 읽어 내려면 얼굴 전면을 뒤덮고 있는 잡초의 푸른색을 잘 분간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방치해 둔 다면 언젠가는 그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욘으 성벽을 장식한 부조와 소용돌이 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투입 되었다. 부조에는 전쟁의 장면, 대혼란, 전차, 코끼리의 끊임없는 행렬, 정교한 왕관을 슨 아프사라와 테바다의 행렬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끼에 뒤덮 인 채 서서히 망각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들 조각품은 앙코르와트의 것들에 비해 제 작방법이 유치하고 원시적이지만, 그 영감만은 훨씬 더 강력하고 폭발적이다. 이처럼 넘치는 정열은 보는 이를 당황하게 만든다. 지금처럼 옹색한 마음의 시대에는 이 잃어 버린 나라에 영감을 주었던 인내, 풍요로움, 믿음, 장엄과 영원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 기가 어렵다. 황금의 연꽃을 갖춘 중앙 탑 아래, 평야에서 약 20미터 올라간 곳에는 두꺼운 성벽을 파내고 만든 벽감처럼 깊고 아늑한 지성소가 있다. 한때 이곳은 석실처럼 어둡고 음침 한 회랑들이 사방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회랑들이 무너져 퇴락한 돌더미가 되었기 때문에 이 지성소에 접근하기가 어렵고도 위험하게 되었다. 그 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으면 얼기설기한 나무뿌리들 때문에 마치 정글의 한가운데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 이 든다. 하기는 정글이 중앙 탑마저 침식해 오고 있으니까 지성소라고 예외가 될 수 는 없다. 지성소 안은 칠흑처럼 어둡다. 벽에서는 따뜻한 물이 흘러내려 그 안에 있는 신상 위로 똑똑 떨어졌다. 어떤 신상은 팔이 없고 어떤 것은 머리가 없고 또 어떤 것 은 그림자처럼 음침하다. 그 어둠속에 뱀이 스쳐 지나가고 이름 없는 생물들이 기어 지나간다. 잠자던 박쥐가 깨어나 연신 날개를 퍼덕거리며 무단침입자를 가격하려는 듯 날아온다. 브라흐만 시대의 사람들은 고대 신화의 집합처인 지성소에 들어서면 공포에 휩싸여 온몸을 떨었다. 무심과 태만의 시대가 몇 세기 지났어도 그 공포는 여전히 남 아 있다. 그 안에서 침입자가 가만히 서 있으면 지성소의 은밀한 거주자들 역시 가만 히 있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그 형언하기 어려운, '기다리는 듯한' 공포 속으로 빠져 든다. 그리고 그 공포 속에서는 너무나 무거운 침묵이 느껴진다. -피에르 로티 (앙코르 의 순례자), 1912년 무용수들, 그리고 '악마의 사원' 10월2일 월요일. 차를 타고 캄보디아로 떠났다. 대평원은 홍수가 났다. 프놈펜에서 보 두앵 씨와 그로슬리에 씨를 만나다. 뾰족한 지붕과 다양한 배경처리를 한 예술학교가 인상적이다. 시소와트왕을 방문하다. 그는 은빛 타일을 바른 파고다에 기거하고 있었 다. 다음날 오전 9시 메사제리 배를 타고 앙코르로 떠나다. 다음날 오전 3시 잠에서 깨어 거대한 강을 보다. 흐린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 위에 부레옥잠이 떠 있다. 홍 수가 난 숲을 거쳐 앙코르에 도착. 벤크다이와 타프롬은 모두 잡초더미에 묻혀 있었다. 열기와 퇴락의 분위기가 풍겨왔다. 백색의 거대한 카폭 나무가 문어발처럼 돌 위로 뻗어 있고 나무뿌리가 모든 주랑을 덮쳐 뿌리 자체가 하나의 기둥이 되었다. 타케오의 돌더미는 수평이라기보다는 수직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이다. 앙코르톰의 다리 양쪽에는 54개의 신상이 있는데, 일곱 개의 머 리를 가진 신상은 나가 뱀을 잡아당기고 있다. 바욘의 사면탑은 네 벽에 네 개의 브라 흐마 두상이 새겨져 있는데, 각기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있다. 오후에는 앙코르와트를 돌아보다. 갈색의 쓰레기더미(갈철광)에 회색 사암이 뒤덮여 있다. 그 모습이 퐁텐블뢰 와 비슷하다. 지의류로 뒤덮인 안뜰에는 이 사암이 은빛을 띠고 있다. 수평의 불규칙 한 선형의 정면은 작은 출입문이 뚫려 있다. 이 거대한 사원은 중앙의 궁에서 작고 검 은 구멍을 통해 이어진다. 그 주위에는 커다란 네모꼴 호수가 있고 각 별채를 연결하 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네모꼴 안마당이 겹쳐 있다. 맨 마지막의 두 별채는 가 귀퉁이 에 파인애플이 있다. 모든 별채는 십자꼴로 되어 있다...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파인애 플 밑에는 사랑과 파괴의 신인 시바의신상이 서 있다. 또 네 귀퉁이에는 네 개의 파인 애플이 중앙의 파인애플을 둘러싸고 서 있다. 아침에 멀리에서 보니 앙코르와트는 대 단히 취약해 곧 부서질 것 같았고 그 불규칙한 외곽선은 날개 혹은 불꽃의 인상을 주 었다. 날개 달린 계란, 불타는 보석. 즉, 사원 둘레에 호수가 있고 그 가운데의 중앙 탑이 연꽃을 상징하는 구도인 것 같다. 이 첫 번째 테두리 다음에 두 번째 테두리(대 좌 위에 올려져 있는데 선형이 무너져서 쿠션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가 있고 이어서 세 번째와 네 번째 테두리 안에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는 십자꼴로 동서남 북을 바라보고 있으며,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 세 개의 천장이 있는 주랑으로 받쳐져 있다. 이것은 미리 정해진 비밀통로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실제로 일련의 호수(물은 고여 썩어 있었다. )는 쟁반 위에 얹어 놓은 것처럼 중첩되어 있는 형상이다. 참호처럼 중첩된 테두리는 방벽 역할을 한다. 검은 구멍처럼 보이는 단 하 나뿐인 검은 문은 신비한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 마치 밤의 액자 같은 모습이다. 인공 적으로 약간 높게 올려진 대좌는 똬리를 튼 뱀 같다.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케루빔을 연상시키는) 탑이 있고 다시 중앙에 큰 탑이 있다. 박쥐들이 들락날락하는 (내가 보고 있을 때도 날아다녔다. ) 이 밤의 사원은 썩은 듯하면서도 약간 달콤한 냄새가 났다. (아마도 박쥐똥에서 나는 냄새이리라. ) 이 사원은 멀리서 보면 보석처럼 보이지만, 실 제로 그 중앙의 지성소에는 박쥐가 들락거린다. 둥근 공처럼 허공에 우뚝 솟아 있는 그 지성소안에 밤(어둠)과 박쥐똥이 가득한 것이다. 내가 본 것이 대지가 내뱉은 악마 의 사원일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침략자들은 엄청난 분노를 터트리면서 신상과 조 상들을 파괴하고 또 어떤 때는 가루가 되어 버릴 정도로 파괴했던 것이 아닐까? 사원 의 어디에나 에티오피아풍의 미소를 짓는 아프사라(지옥의 여신)들이 폐허 위에서 미 친 듯이 캉캉 춤을 추고 있었다. 거기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호색녀의 이미지뿐이다. 첫 번째 회랑 벽의 부조는 전투장면과 신화적인 주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주제 중 의 하나가 (라마야나)에 바탕을 둔 '유액의 바다 휘젓기'이다. 힌두교의 모든 신들이 여기에 일렬로 도열해 있다. 브라흐마, 시바, 원숭이 신 하누만 등은 다른 신들보다 더 위대한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신들은 커다란 뱀을 잡아당기고 있다. (머리가 일곱 달린 이 뱀은 캄보디아의 상징적인 동물인데 그 앞에 앵무새 머리를 한 가루다가 새겨 져 있다. ) 이 밑에는 진흙, 잡초, 고기, 거북, 악어 등의 세계가 있다. 그 위에는 수없 이 많은 아프사라가 춤을 추며 모기처럼 혹은 물방울처럼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다. 이 저주받은 사원의 꼭대기에서 혼자 보낸 오후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망감과 혐오감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 느껴진다. 멀리 처녀림의 윤곽이 보이고,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 가 들리고, 서로 뒤쫓는 원숭이(아프사라)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노란 법의를 입은 승 려들의 염불소리도 들려 왔다. 그 승려 중 한 사람은 큰 칼을 들고 내 뒤에 서 있었다. 다음날 앙코르톰에서 문둥이 왕을 봤다. 원숭이들이 숲의 우듬지를 스프링삼아 서로 뒤쫓는 모습도 보았다.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가는 원숭이들에게는 중력 따위는 문제 도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탄력성과 향상의 삶이었다. 어떻게 우리의 무용수가 저들 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폴 클로델 (일기) 제4권, 1912년 10월 2월21일. 왕자와 탐험대 대원이 앙코르를 향해 떠나갔다. 사이공에서 죽은 저널리스트인 튀데는 죽기 몇 시간 전에 이런 얘기를 남겼다. 그는 4 년전 코마유, 모리스 롱, 노스클리프 경과 사우너지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앙코르의 사원에 들어갔다. 사원지기는 그들에게 앞으로 4년 안에 모두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원지기의 말은 맞았다. 앙코르는 저주받아 마땅한 사악한 곳이다. 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와 나의 여행기를 불에 집어 던졌다. -폴 클로델 (일기) 제5권, 1925년 2월 석상을 밀반출하는 방법 "그 대신 돈 얘기를 합시다." "아, 아주 간단해요, 작은 부조나 작은 석상은 개당 3만 프랑 정도 받아요." "금화 프 랑으로요?" "그건 너무 부르는 것 같은데요." 클로드가 웃으며 말했다. "뭘요, 그렇지도 않아요. 내가 10개 하고 당신도 10개 해야죠. 그러려면 20개는 확보 해야 돼요." "20개라." "어렵기는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부조 하나에 예를 들면 춤추는 여자 부조 하나만 해도 20만 프랑은 받는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런 부조는 돌이 몇 조각이나 들어 있어요?" "서너 갭니다." "정말 그걸 팔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럼요. 런던과 파리의 대규모 중간거래상을 알고 있어요. 또 경매를 조직하는 것도 쉬운 일이에요." "쉽긴 하겠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을까요?" "당신이 직접 팔 수도 있어요. 경매과정을 안 거치고 말입니다. 이런 조각품은 아주 희귀해요. 대전이 끝나면서 동양 골동품 수집붐이 일었어요. 그런데 막상 물건은 나오 지 않는 겁니다." 클로드가 설명했다. "아 참, 한가지 더 있어요. 가령 우리가 그 사원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클로드는 '우리 '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다해도 어떻게 그석상을 떼어내죠?" "그게 문제예요. 내 생각으로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상당히 큰 돌덩어리일 텐데." "예, 하지만 크메르 사원은 기초 나 시멘트 없이 지어졌어요. 그러니까 도미노로 ASKEMS 성이나 비슷해요." "그 도미 노는 길이 1미터, 깊이와 너비는 46센티미터, 무게는 약 680킬로그램이에요. 그래서 운반하기에는 좀 무겁죠." "그래서 내릴톱을 이용해 조각된 표면 즉 석판만 떼어 내는 방식을 생각해 봤어요. 근 데 그건 불가능해요. 차라리 쇠톱이 더 빨라요. 그래서 여기 쇠톱을 갖고 왔어요. 또 오랜 풍상으로 인해 석상이 저절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어요. 갈라진 바위 틈에서 잡 목이 솟아나고 또 시암의 방화꾼들이 불을 질러서 상당히 파괴된 상태니가요." "나는 사원이라기보다 돌더미를 헤치고 다녔어요. 보물도굴꾼도 이런 식으로 움직였다는 것 을 잊지 마세요. 지금까지 나 역시 사원을 그런 측면에서 보아 왔어요." 안내인이 가 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식지는 여전히 대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클로드는 주먹을 들어 안내인의 얼굴을 세게 갈겨 주고 싶었다. 그는 주먹을 꼭 쥐면서 페르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켄 역시 웃고 있었다. 페르켄을 향한 클로드의 우정은 갑자기 증 오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한곳만 보고 있으나 클로드도 할 수 없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주 출입문은 대단히 컸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벽에서 멀리 떨어 져 있었다. 숲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친구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벽의 받침대 였다. 그것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피라미드처럼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받침대 꼭대 기 부분에는 훌륭하게 세공괸 왕관을 쓴, 비교적 상태가 완전한 사암 조각이 있었다. 또 나뭇잎 사이로 앵무새 부리를 하고 날개를 활짝 편 새의 석상도 보였다. 석양이 그 새의 앞발을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 석상을 보는 순간 그의 모든 분노는 햇빛에 눈 녹 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슴에는 환희가 넘쳐 흘렀다. 까닭 모를 감사의 마음을 느꼈고 너무 기분이 좋아 감상적인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는 오로지 그 석상만 의식하면서 앞으로 무작정 걸어가다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의 상인방은 허물어졌 고 그 위에 있던 것들도 모두 붕괴되었다.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부분은 나뭇가지에 가려져 햇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빽빽한 아치가 되었다. 길을 가로막는 거무튀튀 한 돌더미를 넘어 앞으로 나가니까 가느다란 담쟁이와 가녀린 잡초들이 터널을 가리고 있었다. 페르켄이 잡초를 옆으로 제치면서 터널을 지나가자, 안뜰까지 뚫고 들어온 GOT빛이 알로에 잎사귀에 가려지는 혼돈스런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클로드는 돌 과 돌 사이로 간신히 걸어가면서 벽에 몸을 기댔다. 그는 이끼를 만질 때마다 축축함 이 느껴져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는 순간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성벽을 생각해 냈다. 그곳에서도 햇빛의 밝음과 잎사귀의 어두움이 묘하게 어우러져 반투명한 밝은 색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퇴락의 왕국 위에 잠시 머무는 장엄한 광명 같았다. 그의 앞에는 굴러 떨어진 돌들이 대혼란을 이루고 있었다. 평평하게 누운 돌들도 있었 으나 대부분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석공의 작업장에 정글이 침입한 꼴이었다. 그곳에는 자주색 사암으로 만든 긴 성벽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벽면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어떤 벽면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모두 양치류 식물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어떤 벽면은 화재 때문에 생긴 붉은 녹청이 얼룩덜룩 끼어 있었다. 그 는 인도의 영향이 강하게 스며 있는 고대의 멋진 부조를 몇 개 보았다. 그는 이제 그 아름다운 작품을 바로 지척에 두고 있었다. 그 부조들은 가슴 높이까지 오는 퇴락한 돌들 뒤에 반쯤 가려진 낡은 사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부조에서 눈을 떼는 것은 참 으로 힘든 일이었다. 부조 뒤에는 파괴도어 버린 지상 1. 8미터 높이의 탑이 세 기 보 였다. 탑 덩어리가 너무 육중하여 그 주위에서는 잡풀도 자라지 않았다. 그것들은 쓰 레기더미에 내던져진 촛대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림자가 짧아졌다. 보이지 않는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한편 클로드는 돌 주위의 쓰레기더미를 치웠다. 그래야 부조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 깨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 떨어진 조각을 치우는 동안, 그는 그 인물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유럽 배의 표면에 끼는 가루처럼, 연한 회청색 이끼가 부조 의 머리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크메르 조상이 그렇듯이 이것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명의 노무자가 그 앞의 돌에다 어깨를 들이대고 함께 밀었다. 그러나 순간 균형이 맞지 않아 돌이 땅위로 푹 쓰러졌다. 너무 세게 쓰러져 땅이 움푹 패였고 돌은 좌우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돌을 들어내니 받침대인 돌에 두 줄의 흠이 나 있는 것이 보 였다. 그리고 그 흠을 따라 칙칙한 색깔의 개미들이 개미알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달 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하는 두 번째 돌은 첫 번째 돌과 다른 방 식으로 놓여 있었다. 그것은 벽의 두 돌덩어리 사이에 끼여 있었고 돌덩어리는 각각 무게가 수톤은 될 것 같았다. 그 돌을 꺼내려면 벽 전체를 없애야 할 판인데 물론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각 앞에 있는 돌들을 치우는 것도 이처럼 힘든데, 다른 덩 치 큰 돌들은 인력으로는 치울 수가 없었다. 폐허 속의 보리수가 크게 자라 그들을 뒤 덮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 시암이 침략자들은 그 많은 사원을 파괴할 수 있었을까? 클로 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끼리를 여러 마리 함께 묶어서 사원의 벽을 향해 돌진하 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껏 할 수 있 는 것은 돌을 깨뜨리거나 치워서 조각된 얼굴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이제 그 조각이 붙어 있는 벽에서는 개미들이 철수하고 있었다. 즉흥적으로 만든 받침대에 기대어서 운전수들은 기다렸다. 페르켄은 해머와 끌을 내왔 다. 돌을 떼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돌 속에 난 가느다란 홈에 대고 끌질을 하는 것 이다. 그는 해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끌을 서투르게 다룬 것인지, 아니면 사암이 너무 단단했는지 조그마한 돌조각 몇 개를 떼어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 러니 노무자는 훨씬 더 서투를 것이다. 클로드는 그 돌을 계속 쳐다보았다. 살랑거리는 잎새와 햇빛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그돌은 아주 단단해 보였다. 제 존재를 거만하게 주장하며 엄청난 증오심으로 그 공격 을 견뎌 내는 것 같았다. 돌가루가 그의 눈앞에 난무했다. 이제 개미들은 알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 완전히 사라졌다. 오로지 돌만이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수동적 인 그 존재는 나름대로 완강한 의지를 가지고 "절대 안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분노의 감정이 클로드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두 발로 땅을 단단히 다지면서 온몸으 로 그 돌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화가 나서 분노를 풀어 버릴 대상을 찾는 것이었다. 페르켄은 입을 딱 벌리고 해머를 공중에 든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 페르켄은 숲 은 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여기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에게 이 돌들은 읽을 수 없는 닫혀진 책이었다. 아, 닥 6개월만이라도 석공으로 일 한 경험이있었더라면! 그는 어떻게 할까 궁리했다.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로프를 감 고 잡아당겨 보라고할까? 아니면 손톱으로 직접 긁어 볼까? 로프를 이용한다면 어떻게 석상 주위에 로프를 두를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위험에 빠져 있음을 느꼈 다. 그의 끈덕짐과 집요한 결단, 정글도 마다 않고 달려온 집념이 이런 장애물을 만나 물거품이 될 지경이었다. 그와 시암 사이에 놓인 꿈쩍도 않는 돌 때문에!... 그는 다시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어 클로드는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다. 만 약 그 가 조금만 더 허약했더람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에 살아난 사람처럼 세상이 그의 의식속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떼 어 낸 조각 인물상을 보는 순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느낌이 다시 솟구쳤다. 떨어진 돌로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숲, 사원,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 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로 포개어져 있던 원래 상태의 그 세 조각의 돌덩어리를 생각 해 보았다. 두명의 춤추는 소녀는 그가 본 예술품 중 가장 순수한 것이었다. 이제 그 것들을 수레에 싣는 일만이 남았다. -앙드레 말로 (왕도의 길), 1935년 우주적 상징 스코틀랜드 사진사 존 톰슨은 크메르 건축의 상징적인 측면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조 르주 코에데스와 폴 뮈가 추가로 설명한 그 복잡한 체계는 항공 사진의 도움으로 더욱 잘 이해된 수 있었다. 앙코르와트, 우주의 산 이 건축물은.... 층층이 쌓아 놓은 세 겹의 테라스로 되어 있고 중앙의 커다란 탑은 이 세 테라스 중 가장 높은 테라스에 우뚝 솟아 있다. 그 주위에는 약간 작은 네 개의 테 라스가 역시 둘러싸듯 세워져 있다. 전체 건축물ㅇ느 불교적 우주관에서 제일 중심지 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것 같다. 메루산이 일곱 겹의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을 감 안하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실제로 중앙 탑 주위에는 일곱 겹의 바위가 있다. 메 루 성산은 세 개의 대 위에 떠받쳐져 있는데 (앙코르와트이 세 테라스는 이 세 개의 대를 상징), 땅의 대, 물의 대, 바람의 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징은 앙코 르와트 사원이 해자로 빙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써 상징되고 있다. 실제로 우기가 되어 앙코르와트 주위에 펼쳐져 있는 평야가 침수되면 이 사원은 물위에 우뚝 솟은 놀라운 구조물처럼 보인다. (마치 메루산이 대양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처럼) -존 톰슨 (말라카 해협, 인도차이나, 중국), 1875년 앙코르톰의 성벽 과 대문 왕도의 중심에 있는 사원산이 '세계의 중심인 메루산을 인간적인 규모로 재현한 것'임 을 입증한 조르주 코에데스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해자의 의미를 해석하 였다. 그외에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인 대양과 우주를 둘러싼 석벽은 해자와 그것을 둘러싼 성벽으로 재현된다. 산스크리트 시에 이런 것이 있다. "험준한 산맥이 위대한 세계의 울타리가 된 것처럼 엄청나게 큰 성벽이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그곳에서 금과 은 으로 단장된 테라스를 봄녀서 주민들은 메루산이나 카일라사산을 따로 보아야 할 필요 를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를 복원하던 당시에도 강 하게 남아 있었다. 왕이 도성의 네 귀퉁이에 남겨 놓은 기명에 따르면 왕도의 성벽은 우주를 둘러싼 산맥에 해자는 대양에 비유되었다. "첫번째 것은 그 첨탑으로 밝은 하 늘에 치솟아올랐고, 두 번째 것은 깊이 모를 지하의 세계를 꿰뚫었다. 왕이 지은 이 승리의 산과 승리의 바다는 왕의 커다란 영광의 아치와 겨루노니..." 힌두교의 우주관에서는 무지개가 인간과 신들을 잇는 다리로 상징된다. 폴 뮈는 여러 가지 단서를 발견함으로써, 나가(뱀) 난간이 있는 다리, 즉 인가 세계에서 해자를 넘어 왕도로 들어가는 연결로가 실은 무지개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입증했다. 앙코르톰, 프레아칸, 반테아이 크마르 등에서처럼, 나가 난간이 있는 다리는 .... 그것 이 바로 무지개임을 강조하는 여러 가지 요소로 장식되어 있으며, 더욱 기이한 두 번 째 상징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 다리는 도성의 대문으로 이어진다. 또 그 대문에는 축 소된 사원의 모습이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재현되어 있다. 이것들은 사원에서 솟아나 는 왕군의 힘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뻗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상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가'를 쥐고 있는 신들과 거인들의 긴 행렬 은 조각가의 변덕으로 새겨진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유액의 바다를 휘젓는 행동을 상 징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단정할 수 있는 세가지 요소가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첫째, 도성의 해자는 대양을 상징한다. 둘째, 대문 위에 솟구친 탑은 우주에 우뚝 솟은 메루산을 상징한다. 셋째, '나가' 난간은 신들이 바다에서 메루산을 뽑아 올린 우주의 뱀을 상징한다. 즉, 밧줄(나가)을 잡아당겨 영원불사의 유액에서 이 세상을 뽑아 내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두 줄로 늘어선 신들과 거인들, 그리고 해자- 대문- 나가의 이미지를 결합해 보면, '유액의 바다에서 휘젓기' 신화가 명백하게 의도되고 있을을 알 수 있다. 도성의 대문에다 휘젓기의 상징을 창조함으로써,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의 신성을 더 욱 굳건히 했던 것이다. 이 휘젓기 신화를 문학작품에도 많이 인용되어, 궁중의 시인 들은 이 휘젓기 신화를 위대한 전투에서 행운과 승전을 낚아채는 왕들의 위엄에 비교 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징을 종합해 볼 때, 회전하며 솟아오른 메루산이 바다 를 휘젓는 신화는 국가의 승리와 번영을 기원하는 마법적 기원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르주 코에데스 (앙코르 입문), 1963년 크메르 역사의 연대기 예술사가, 금석학자, 고고학자 등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앙코르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복잡한 역사의 연대가 확정되었다. 크메르 예술 앙코르 지역의 남쪽에서 나온 가장 오래된 기명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로 소급된 다. 이 기명은 이미 사라져 버린 건물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고 또 어떤 경우(예를 들 어 네아크 타 담방 데크)에는 조상을 건립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다. 최초의 조상은 6세기 초 푸난의 왕 자격으로 통치했던 루드라바르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피에 를 뒤퐁의 저서를 참조할 것). 그러나 7세기 초. 첸라시대의 조상은 전해져 오는 것이 없다. 초기 출현 시대에서 앙코르 시대에 이르기까지 앙코르 건축 및 조상의 역사는, 그 건축과 조상들의 발전상황을 파악하고(필리프 스테른의 저작 참고), 금석학자들이 연대를 확정한 비문을 연구해 확정지을 수 있다. 앙코르 이전 시대와 앙코르 시대의 양식 푸난의 수도인 오크에오의 문화를 살펴보면 내구재로 지어진 건축물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앙코르 보레이에서 발견된 벽돌로 된 하부구조는 초기의 기명과 같은 시대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대를 확정지을 수 있는 건축물은 7세기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리프 스테른, 조금 지난 후 그의 뒤에 이은 질베르트 드 코랄 레뮈사, 피에르 뒤퐁, 장 부아슬리에 등의 작업으로 앙코르 이전 예술과 앙코르 예술을 여러가지 양식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양식의 이름은 특징적인 유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건 축물의 연대는 금석학과 비교학문의 도움으로 점차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아래에 적어 놓은 양식들은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고 대강 구분해 놓은 것이다. 도, 그 양 식이 전성기에 올라선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해 놓았으며, 제시한 연대도 개별 양 식의 유행 연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 개략적인 연대이며 한 양식과 다른 양식이 시기적으로 중복되기도 한다. 앙코르 이전 시대 프놈 다 양식(조상에만 적용). 540년(?)~600년 삼보르 프레이 쿠크 양식, 600년 이후 ~650년 프레이 크멩 양식, 635~700년 콤퐁 프레아 양식, 706~800년(?)이후 과도기 쿨렌 양식, 825년~875년 앙코르 시대 프레아코 양식, 875년~893년 이후. 바켕 양식, 893년 이후~925년. 코 케르 양식, 921 년~945년. 프레 루프 양식(과도기), 947년~965년. 반테아이 스레이 양식, 967년 ~1000년. 클레앙 양식, 965년~1010년. 바푸온 양식, 1010년~1080년 혹은 그 이후. 앙코르와트 양식, 1100년~1175년. 바욘 양식, 1177년 이후~1230년. 앙코르 시대의 종말과 앙코르 이후 시대 바욘 양식의 종말과 앙코르 시대의 밝혀진 것이 없다. 또 앙코르 이후 시대에도 양식 을 밝혀 낼 수가 없다. 이 시대의 전통 건축물은 남아 있는게 거의 없기 때문에 연구 에 특히 어려움이 많다. 바욘 양식이 전통적 양식으로부터 급격하게 일탈했다는 것과 그 뒤 건축이 퇴락했다는 사실은, 건축재가 내구재에서 보다 유연한 혼합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조상제작술의 경우에는 이 같은 퇴락과정이 생각하기 천천히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에서 내구재를 사용 하자 않게 된 경위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말기에 사암 석산은 더 이상 석재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덜 단단한 혼 합 건축재가 소승불교 건축의 요구샇ㅇ을 더 잘 수용할 수 있었다. (소승불교에서는 내부가 넓은 사원을 요구했는데, 전통적인 아치 형식으로 이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 다. ) 아직도 기초 부분에서는 혼합 건축재가 사용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기 초는 잘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문양을 다양하게 새길수 있는 몰딩은 없다 (앙리 마르샬, '앙코르톰의 불교식 테라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크메르 예술은 새로운 건축물(스레이 산토르)에 서 그 생명력을 간직했다. 또 1431년 이후 아유타야가 캄보디아를 잠시 점령하여 타 이 양식이 조상 분야에서 널리 퍼졌지만 크메르 예술은 독자성을 유지했다. 16세기 후 반 앙 찬이 잠시 앙코르를 재점령하는 동안 일어난 크메르 예술의 르네상스는 위대한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여러유물(예를 들어 유물번호 486인 와트 노코르)에 대한 복원작업과 개선작업은 토목 장식에서 진정한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고, 건축분야도 비록 퇴락하기는 했지만 장식과 구도 등에 서 꾸준히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장 부아슬리에 '캄보디아', '극동 곡학 매뉴얼' 1966년 앙코르 점령 앙코르에 크메르 와조가 '공식적으로 '들어선 것은 서기 802년이었다. 이때 자야바르 만 2세(801~835)가 앙코르에서 북서쪽에 소재한, 이 지방의 주요 수원인 프놈쿨렌산 에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고 선포했다. 여러개의 유물들이 오래 전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가령 조르주트루베가 발견한 사원인산 아크 욤은 서쪽 바 라이의 둑에 매몰되었다가 발견되었다. 자야바르만 2세와 그 후계자들은 프놈쿨렌과 롤루오스(앙코르 동남쪽) 지역에 여러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인드라바르만 1세는 롤 루오스에 프레아코 사원, 바콩, 피라미드, 그리고 롤레이 바라이를 건축했다. 롤레이 바라이 안에 지어진 롤레이 사원은 야소바르만 1세(889~910경)가 지은 것이 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야소바르만이 도읍을 앙코르로 정하면서 그곳을 자신 의 이름을 따 야소다라푸라라고 지은 것이다. 커다란 제방(이 제방의 잔해는 빅토르 골루베프가 발견했다. )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다시 프놈바켕을 두러싸고 있는데, 왕 은 프놈바켕의 꼭대기에 그 자신의 사원산을 지었다. 야소바르만은 동쪽 바라이, (시엠 레아프강 하구에 있는) 프놈 크롬 사원, (프놈 쿨렌과 앙코르 사이에 있는) 프놈 보크 등을 건설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바크세이 참크롱 피라미드와 프라사트 크라반 사원 (베르나를 필리프 그로슬리에가 복원한 것)을 지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4세 (928~942)는 도읍을 앙코르에서 북동쪽으로 악 80㎞ 덜어진 코케르로 옮겼다. 라젠드라바르만 1세의 통치(944~967경)는 앙코르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작업의 시 초가 되었다. 동쪽 메본(동쪽 바라이의 한가운데), 바트춤, 프레 루프의 사원산 스라스 스랑 호수 등이 그의 재위시절에 지어졌다. 반테아이 스레이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0)에 의해 지어졌고, 역시 이 왕의 시대 에 건설되기 시작한 타케오 사원산은 결국 완성하지 못 했다. 수르야바르만 1세(1005~1049)는 왕궁의 성벽(이 성벽 안에 피메아나카스 사원산이 있음)을 지었도 서쪽 바라이를 축조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1050~1066) 바푸온 사원산을 축조했는데, 그의 재위때에 서 쪽 메본이 완성되었고 그 안에 비슈누 청동상이 안치되었다. (주달관은 이 청동상이 동쪽 바라이에 있다고 잘못 기록했다. ) 수르야바르만 2세(1113~1150?)는 1177년 앙코르 약탈이 시작될 때까지 일련의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 공사에는 그를 받드는 사원산인 앙코르와트, 토마논 사원, 차우 사 이 테보다 사원, 앙코르의 반테아이 삼레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앙코르 바깥에는 벵 메알레아 사원, 콤퐁 스바이의 프레아칸 중심부 건물, 앙코르에서 콤퐁 스바이 연 결 도로변에 세워진 사원들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8?) 재위시에 도성은 전면적인 재건축에 들어간다. 사상 처 음으로 도성을 에워싸는 석조 성벽 앙코르톰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앙코르톰 안에는 전무후무한 사원산인 바욘이 축조되었다. 타프롬, 프레아칸, 반테아이 크데이, 네아크 페안 등의 새로운 사원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자야바르만 7세는 앙코르톰 해자, 프레 아칸 바라이, 도성 바깥의 주요 토목공사들이 앙코르의 마지막 사업이였다. 자야바르 만 7세 사후에는 도성 내에서 일상적인 건축사업만 시행되었고 돌들은 불교 사원의 하부구조용으로 비축되었다. 그러나 불교 사원은 대부분 돌이 아닌 가벼운 건축재료 지어졌다. 보수작업과 해체복원작업 앙코르와트에는 1579년경에 제작된 기명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도 성을 에워싼 성벽의 돌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보수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9개의 첨탑을 가진 지붕을 재축조했다." 역사적 유물인가, 살아있는 유물인가? 16세기에 앙코르와트의 보수작업을 했던 캄보디아 왕들은 오래 전 선왕들이 그 사원 을 지었다고 말했다. 후대 왕들의 주된 관심사는 앙코르와트를 역사적 유물로 보존하 기보다는 실제 사람이 거주하는 사원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이 왕의 권유 에 따라 지어진 몇가지 건축물들은 그런 실용적인 관점에서 축조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1907년 유럽이 앙코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태는 일변했다. 앙 코르와트에서 벌인 첫번째 작업은 중앙 탑의 성상 안치소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 중 앙 탑의 문들은 거대한 불교 조각들로 막혀 있었다. 작업은 캄보디아가 소승불교를 받 아 들이기 이전의 '원래' 상태로 앙코르와트를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유적에 배어 있는 종교생활의 흔적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불교의 흔적을 남기 는 것은 1천 불의 회랑에만 국한시키도록 했다. 앙코르의 다른 유적들은 20세기 초에 종교적 의미를 대부분 상실했다. 후대에 추가된 유물 주 어떤 것은 상당히 덩치가 큰 것도 있었지만, 축조 도중 포기 되었다. 바푸온의 서쪽 정문에 있는 커다란 와불이나 프놈바켕의 동쪽 정면을 모두 가린 커다란 좌불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역사 대 신비 후대 유물의 경우에는 유럽적 접근방식이 취해졌다. 그래서 구조적이든 건축적이든 후 대에 덧붙여진 것은 '원래'의 구조가 아니므로 제거하자는 쪽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앙코르르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은 무 식한 '원주민'이 유물에 덧붙여진 것을 제거하는 작업에는 찬성했으나, 유물들을 신비 하게 만드는 나무뿌리마저 제거하는 것은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관계당국은 신비를 찾아온 낭만적 관광객의 취향과 앙코르의 본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절묘한 절충안을 도출해 냈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과학적인' 방식에 따라 복원작업이 진행되지만, 폐허와 나무 뿌리가 신비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유물들-가령 타프롬, 타솜, 네아크페안 등-은 그냥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앙코르 정글은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래된 돌의 처리 문제 복원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문제투성이였다. 나무들은 우기에는 유적을 훼손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벽을 단단하게 고정해 주었다. 또 나무나 나무뿌리를 잘라 내면 더욱 질긴 나무뿌리가 다시 살아나 그나마 나뭇잎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던 유적들이 완전히 가려졌다. 그래서 복원작업은 원래의 취지와 달리 유적을 더 훼손시키고 전에 는 부분적으로 허물어져 있던 것을 전면적으로 파괴시켰다. 또 나무뿌리를 제거하는 작업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과학적' 방법은 아주 소극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우기가 끝나면 보수요원들은 복원작업을 마친 유적들을 깨끗이 청소하려 했으나 늘 인력이 부족했다. 1925년경에는 제초제를 살포하여 나무뿌리의 성장을 억제해 보려 했으나 돈만 많이 들었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다른 보존노력은 유적을 견고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집 중되었다. 그러나 유적의 역사성 보호 차원에서 구조를 바꾸는 문제는 엄격하게 금지 되었다. 모리스 글레즈는 1942년에 이렇게 썼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고고학적 탐사 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지시는..... 청소작업으로 드러난 유적의 현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청소작업을 할 때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주 구조물을 변경시키지 말 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 상태에다 새로운 어떤 것을 끼워 넣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하면 ' 진짜' 폐허가 어떤 상태였는지 헷갈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 유물의 여러 부분이 아 예 없어졌거나 회복 불능 상태인 것도 있었다. 사암은 원래 결정구조가 취약한 데다가 일단 땅에 떨어지면 축축한 땅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삭아 버렸다. 박쥐똥도 암석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더욱이 앙코르 인근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돌이 필요할 때마다 앙코르 폐허에서 가져다가 사용하곤 했다. 폐허의 구조를 보강하기 위한 소규모 작업은 전적으로 외부 지지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콘크리트 기둥으로 허물어지려는 돌을 받쳤고 건물 한쪽이 무너지면 그 기둥 을 빼 버렸다. 흔들거리는 상인방은 콘크리트나 나무 버팀목으로 괴었다. 이러한 땜질식 보수작업은 효과도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지도 않았다. 조각들이 지지물 뒤에 가려 보 이지 않았고 어떤때는 유물의 일부가 허물어져 그 유물을 받쳤던 기둥만 앙상하게 드 러나는 보기 흉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 근본적인 보수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땜질식 보수작업은 계속되었다. 이로써 나무뿌리와 잎새가 무성했을 때의 그 신비한 분위기를 유적에서 제거했기 때문 에, 일반 관광객들은 보수작업의 결과를 납득하지 못했고 또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 지도 않았다. 해결안: 자바식 해체복원 앙코르 복원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가 흘러 들어오지 않는 외진곳에 있었 다는 것, 경험도 없으면서 즉흥적으로 보수작업에 임했다는 것 등의 이유로 1920년대 말까지 복원작업에 대해서 결정적인 해결안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유물을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 존중한다는 원칙이 유럽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허물어진 유물을 '재건' 하고 없어진 부분을 새로 만들어 대치하는 것이 널 리 행해지는 방식이었다. 이 복원방식은 해체복원으로 불렸는데, 그리스어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기둥'을 의미 하는 stylos와 '재건' 혹은 '시간을 역행하다' 의 뜻을 가진 ana 가 합성된 것이다. 이 해체복원 방식은 전혀 기둥을 사용하지 않는 캄보디아 건축물에도 적용되었다. 해체복원의 이론은 그리스 건축하 발라노스가 제창한 것으로 널리 인용되는 그의 주장 은 다음과 같다. "해체복원 방식은 원래의 자재와 원래의 건축방식에 따라 유물을 재건하는 것이며, 재 건과정에서 새로운 부분을 끼워 넣어야만 할 때에는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그 요령이 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20세기 초부터 인도네시아 유물을 복원할 때 이 방식을 사용했다. 인도네시아 유물 보로브두르는 이 방식으로 1907 ~ 1911 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반 스타인 칼렌펠스 박사가 앙코르를 방문했을 무렵에는 이 해체복원 방식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앙리 마르샬은 1930 년의 보고서에서 그 방식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 고 있다. 복원의 주요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유적 주위를 청소하고 발굴하면서 사라진 돌들을 찾는다. 기존에 있는 것만으로 형 체를 잡아 본다. 그런 다음 허물어지지 않은 유물을 하나씩 해체한다. 2. 유적을 세울 땅을 다진다. (콘크리트 플랫폼을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다. ) 필요한 곳에는 새로운 돌을 넣어서 유물을 복원한다. (새로운 부품은 조각품이 아니라 대강 만든 것이며 새부품이라고 표시를 한다. ) 그리고 유물 정면에는 모르타르를 쓰 지 않는다. (유물에 들어가는 돌들은 유물 뒤에서 걸쇠를 걸어 고정시킨다. ) 기술적인 유보사항 마르샬은 해체복원 방식을 선호했으나, 앙코르 유적 복원작업에 그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앙코르에는 그 방식을 잘아는 전문가 가 없었고 알맞은 장비도 없을뿐만 아니라 자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시행착오가 발생하리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크메르 유물은 자바의 유물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러 니 필요한 작업을 할 만한 공간을 찾아내기가 더 어려웠다. 특히 중요한 점은 앙코르 건축물에 쓰인 사암이 자바의 건축물에 이용된 안산암보다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크메르 건축물의 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자바의 경우보다 유물의 파손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마르샬은 헤체복원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자바에서 쓴 방식을 우리가 채용한다면 시멘트를 조심스럽게 쓸 수가 있다." 자바에서와 마찬가지로 방문객들에게는 가능한 한 시멘트를 쓴 흔적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 그럼 신비는? 반테아이 스레이는 누가 봐도 성공작이었다. 복원된 유물은 완전한 모습을 회복했다. 유물이 일부 소실된 부분에는 라테라이트(홍토)를 대신 넣어 원래의 노란 핑크빛 사암 과 어우러지게 했다. 그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정글이 한껏 유물의 분위기를 높여 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해체복원 방식이 앙코르에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 에서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모리스 글레즈는 이 방법을 적용해 네아크페안 과 반테아이 삼레의 보수에 성공하여 그런 반론을 일소했다. 그리고 1942 년 해체복 원을 설명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종.. 고고학자의 노력은 일반 '관광객' 에게는 못마땅한 무엇으로 다가선다. 관광객 들은 좋은 그림만 원한다. 20세기 중반에 살고 있는 그들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동원, 편안하고 한가하게 앙코르까지 영행 와서, 1860 년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앙리 무오가 느겼을 그 감탄과 경이로움을 체험하고자 한다. 이들은 시대착오적인 개인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보고 싶어하는 것은 장쾌한 효과가 있는 낭만적인 풍경, 거대 한 나무뿌리가 유적을 반쯤 삼키고 있는 그런 폐허이다. 이렇게 볼 때 앙코르 유적지 의 큐레이터는 녹색의 파괴를 연출하는 무대감독일 뿐이다." 해체복원, 고대 유물의 재건방식, 크메르 예술에 대한 그 방식의 적용, 프랑스 극동학교의 노트, 29호. 1942년 하노이, 글레즈는 '그런 황폐한 상태로 유적을 보존하는 것' 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과학자가 예술가나 시인이 느끼는 정서 이상의 것(과학)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된다. ' 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일 궈 내기 위해 폐허가 된 사원의 허물어진 돌 사이에 씨를 뿌리는 것이다. ' 라고 주장 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보기에 해체복원 방식은 앙코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해체복원의 모토가 고고학자의 모토, 즉 시간, 인 내, 반성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면 이 방식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 새로운 해체복원방식 앙코르의 재건축이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물들이 시멘트 땜질로 보기 흉하게 되었다. 지반의 침하는 더욱 심각했다. 복원작업을 할 때 원래의 돌들이 대부 분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부과된 하중을 제대로 견뎌 내지 못했던 탓이다. 베르나르 필리프 그로슬리에는 해체복원 방식의 한계를 재빨리 파악했다. 그리고 쟈크 뒤마르세는 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암의 구조변화를 막아 줄 수 있는 보강장치나 보호장치가 없다면 해체복원도 한계가 있다. ' 사암에 가장 치명적 인 해를 주는 것은 습기이다. 그래서 복원된 유물을 새로운 시멘트 기초위에 올려놓는 것이 유일한 해결안으로 대두 되었다. 또 시멘트 보강장치를 유물의 정면 뒤에 설치함으로써 오래된 돌에 대한 하중 을 줄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근본적인 해체복원 방식은 커다란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완성된 상 태는 보기가 좋다. 또 그 작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물의 건축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해체복원 기술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되어 야 한다. 그로슬리에는 1976 년 앙코르를 떠나면서 이렇게 썼다. '처음부터 우리는 유물을 보존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해체복원 방식을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또 당시로서는 이 방식 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물의 외관을 좋게 하기 위해서 이 방식을 쓰지 는 않았다. 물론 외관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작업을 계 속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나 작업진행에 자신이 서지 않을 때는 미래 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성급한 조치는 유보했다. 한마디로 해체복원 방식 은 외과수술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이 방식은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되어야 하며 또 수술 뒤에는 흉터가 남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 프랑스 극동학교의 작업결과와 그 전망, 학교 설립 75주년 기념호, 파리, 1976 년 앙코르의 관광객 1925 년 앙코르를 둘러본 롤랑 도르젤레는 이렇게 회고했다. "프론펜에 도착하면서, 우리는 거대한 입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간판에는 이렇 게 씌어 있었다. '앙코르에 온 순례자여, 오른쪽으로 도시오. ' " 1920 연대의 앙코르: 관광 코스 앙코르의 주요 유적은 대부분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 1920 연대 초부터 관광객은 긴 코스와 짧은 코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 었다. 긴 코스는 짧은 코스를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짧은 코스 이 코스는 앙코르와트에서 시작하여 바욘으로 가는 코스이다. 그 과정에서 프놈바켕 기슭(여기서 코끼리를 타게 된다. ) 과 남문(이 문에 있는 일부 거대한 석상은 앙코르 유물 중 초기에 재건축되었다. )을 거쳐 가게 된다. 바욘에서 관광객은 왕궁의 전정과 필수 코스인 문둥이 왕의 테라스로 가게된다. 다음에는 동쪽으로 향한다. 관광객은 승리의 문 너머에서 숲 속 길옆에 있는 토마논과 차우 사이 테보다를 보게 된다. 거기서 강을 건너면 타케오인데, 이곳은 과도한 장식을 피하면서 기하학적 아름 다움을 보여 준다. 관광 코스는 다시 타프롬을 따라 달린다. 타프롬은 그 당시 내려진 당국의 결정에 따 라 정글로 뒤덮인 폐허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관광객은 이곳에서 관광로를 벗어나 정 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앙코르의 초기 방문객, 예를 들어 앙리 무오가 느꼈던 그 런 황량함을 맛볼 수 있다. 폴 클로델은 1921 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타프롬은 모두 잡초더미에 묻혀 있었다. 열기와 퇴락의 분위기가 풍겨 왔다." 타프롬 다음에는 반테아이 크데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아주 시원한 풍경인 스라스 스랑 호수를 보게 된다. 앙코르와트로 돌아오는 길은 정글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프라사트 크라반의 황폐한 벽돌 탑을 볼 수 있다. 이 코스는 사원 해자 앞에서 끝난다. 1920 년에도 부레옥잠이 너무 많이 번식해 해자가 매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 뒤 두고두고 앙코르 큐레이터 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긴 코스 이 코스는 짧은 코스처럼 왕궁 전정에서 곧바로 북문으로 갔다가 방향을 틀어 (앙코르 톰의 연결로와 같은) 연결로가 있는 프레아칸을 끼고 달린다. 연결로 주위에는 대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길은 다시 동으로 이어져 주달관이 '북해' 라고 명명했던 프레아칸 바라이의 북쪽 도랑을 지난다. 도랑은 말라 있고 잡초가 무성 하지만 그 가운데에 있는 멋진 섬(네아크페안) 은 예전의 영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 다. 조그맣고 둥근 호수 가운데 솟아 있는 중앙 탑은 커다란 벵골보리수로 둘러싸여 있다. 호수물은 배수구를 통해 그 옆의 호수로 흘러 나온다. 루이 피노와 빅토르 골루 베프는 최근 그 호수가 아나바타프타 호수의 상징임을 밝혀 냈다. 불교의 전승에 따르 면 이 호수는 우주에 물을 대는 4대 강의 수원이라고 한다. 호수의 동쪽 끝에 있는 정면 탑(대문의 기능을 함) 타솜은 벵골보리수로 둘러싸여 있 다. 이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벵골보리수일 것이다. 이어 관광로는 남 행하면서 보다 큰 호수인 동쪽 바라이(바닥이 드러난 인공호수) 로 들어가 중앙 섬인 동쪽 메본을 스쳐 지나간다. 메본은 다섯 기의 벽돌 탑을 갖춘 거대한 홍토더미이다. 이어 긴 코스가 짧은 코스와 합류하는 지점인 스라스 스랑 바로 앞에 프레 루프가 있다. 다섯 기의 벽돌 탑을 가진 이 유적은 여전히 돌 틈이 회반죽으로 단장되어 있다. 이 관광 코스를 다 돌려면 나흘 반이 걸린다. 만약 시간이 남으면 관광객은 롤루오스 로 가서 앙코르 시대 이전의 사원을 볼 수도 있고, 또는 앙코르톰에서 서쪽으로 나가 서쪽 바라이를 둘러볼 수 있다. 동쪽 끝에 있는 벵메알레아와 대프레아칸은 삼림꾼과 사냥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