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  지은이:피에르 브리앙  출판사:시공사  봉사자:이지영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B. C. 4세기 그리스 전체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모두들 철천지원수 페르시아에게 '복수전'을 펼쳐야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로 2세기 이상 대치상태가 이어지다가 암울한 굴욕의 순간이 다가왔다.  사건의 시작, B. C.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레르크세스가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입했다.  페르시아인은 테르모필레 협로를 지키던 스파르타 별동대의 악착같은 저항을 물리치고 그리스 중심부까지 쳐들어가 주민들이 비우고 떠난 아티카를 점령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 연합군은 살라미스섬의 정박지에 해군력을 총집결시켜 처음으로 페르시아군을 무찔러 승리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고아기아로 돌아가 버렸다. 그가 그리스에 남겨 두고 온 군대는 B. C. 8세기 후반부터 소아시아 연안 여러곳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그무렵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다.  B. C. 5세기경 아테네는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월등히 앞섰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후 아테네는 군대와 함대의 전력을 바탕으로 해상제국을 건설하고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기세등등하던 페르시아의 기세를 꺾기도 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완성한 페리클레스의 공적과, 아크로폴리스의 수많은 유적들은 아테네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오늘날까지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시기에 새삼스럽게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웅변가들 - 이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다 - 이 열띤 연설로 이를 부추긴 것일까?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소아시아 도시들과 클라조메네스섬, 그리고 키프로스섬을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B. C. 386년 페르시아 왕은 정치, 군사적으로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 여러 도시들의 사절을 소아시아로 불러들여 '와의 평화조약'을 맺도록 강요했는데, 유럽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연안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에페수스, 밀레투스, 프리에나, 그리고 흑해와 알렉산드레트만 사이의 다른 도시들까지도 또다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소크라테스와 그 동조자들은 이런 사태에 맞서 일어났다. "야만인이 억누르는 굴욕에서 벗어나자! 그리스의 성소(聖所)들이 파괴된 데 대하여 복수를 하자! 페르시아 왕에게 속박당한 소아시아의 자매도지들을 해방시키러 가자!"  하지만 이런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럽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이 단합하는 동시에 그 도시들 중에서 하나가 주도권을, 즉 군사작전의 지휘권을 쥐어야 했다. 이소크라테스는 한때 아테네를 마음에 두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스는 여러 가지대안을 모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북쪽에 자리한, 밉지만 매력적인 한 왕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였다. B. C. 346년, 그는 필피포스에게 '아시아에 건설된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소아시아 전역을 정복하여 거기에 '그리스의 변경 역할을 해줄 그리스 식민지를 세우자' 고 설득했다.  B. C. 359년 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왕은, 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키거나 그 틈을 타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해 온 마케도니아의 말 많은 귀족계급이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판가이온산의 금광을 확보 한데다가 최근에 획득한 정복지에서 거둬들인 재정수입 덕분에 그는 잘 훈련된 병사들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케도니아는 아테네를 포함한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번번이 침범하면서 그리스 중앙뿐만 아니라 해협을 향해 끊임없이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집요하게 경계할 것을 호소했지만, 그리스 도시들은 마케도니아의 영토 확장을 저지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 B. C. 338년, 필리포스는 케로네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어 그리스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그리스도시들은 정치적 독립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는 이 승리를 계기로 그리스의 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 구상은 마케도니아의 이해와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는 코린트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코린트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의 내용은 전가입국들 간에 '공동의 평화'를 추구하고 각 나라는 자유로운 자주국임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말뿐인 자유였다. 왜냐하면 어떤 도시에서든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기도하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한편, 필리포스와 그 후계자들의 정권을 전복하려 드는 도시는 모두 징계한다는 조항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필리포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각 가입국에서 군대를 징집하기로 하고 그 요령은 조약에 명시했다. 주요 두시들 가운데서 스파르타만이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코린트 동맹이 내세운 공식적인 목표는 '야만인이 그리스 신전에 저지른 신성모독적인 만행에 대해 그리스인이 직접 복수하기 위해 페르시아인에게 선전포고룰 하자' 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필리포스는 B. C. 336년 봄 원정대를 파견했다. 원정대의 임무는 소아시아의 국가들을 해방시키고 전군을 상륙시킬 기지를 마련하느 것이었다.  B. C. 336년 여름, 거국적으로 페르시아원정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필리포스가 암살당했다.  마케도니아 왕궁에서는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의 딸이자, 알렉산더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축하연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특히 왕이 연극을 보러 자주 찾는 고도 아이가이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은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 마케도니아 귀족처녀의 습격을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처녀의 암살동기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스무 살 난 아들 알렉산더가 곧바로 왕위를 계승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집권이 정당한 것임을 알리고 안정된 정권을 과시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대중집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마케도니아의 왕권은 절대권력이 아니었고, 대중집회에서 새로운 왕을 추대할 수도 있었다. 왕은 선출된다기보다는 추인받았다. 하지만 왕위계승에 문제가 있을때에는 대중집회에서 후계자의 집권을 승인해 주는 관례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아이가이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손수 성대하게 치렀는데 이것이 마케도니아인의 눈에는 왕조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쳤다.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계승한 젊은 군주 알렉산더는 일찍이 뛰어난 역량을 입증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나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외할아버지인 레오디나스의 명령에 따라 왕자에게 문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치고 신체를 단련시켰다. 그는 또한 적게 먹는 습관을 들였다 . '점심을 먹기 위해는 새벽에 행보를, 저녁을 먹기 위해서는 가벼운 점심을'. 레오니다스는 올림피아스가 아들을 위해 요기거리를 넣어 두었을까 봐 어린 왕자의 궤짝 속까지 뒤질 정도였다! 이 미래의 왕은 나이 어린 소년시절에 부세팔로스란 말을 길들이기도 했다.  필리포스는 아들을 최고로 교육시키기 위해 높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 근방에 있는 미에자의 영지에서 수년 산 머무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과 정치를 배웠고, 호머와 에우리피데스의 문학을 음미했으며, 또래의 젊은 귀족들과 어울려 용맹한 군인과 위대한 제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B. C. 340년, 열여섯 살이 된 젊은 왕자는 원정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종의 섭정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즉, 원정기간 동안 옥새를 대신 맡고 왕권을 행사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마디아족을 정복했고 B. C. 338년에는 케로네아 전투에 참가하여 좌군을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는 전사한 아테네인의 유해를 넘겨주러 사는 임무를 맡았다. 그것이 그가 평소 찬란한 문화도시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던 도시, 아테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을 들여놓은 기회였다.  알렉산더는 왕위계승자로서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 선왕 필리포스가 벌여 놓은 일에서 열매를 거두는 일도 알렉산더의 몫으로 남았다.  그는 먼저 코린트로 가서 B. C. 338년에 필리포스가 체결한 협정을 갱신하고, 페르시아로 출정하기로 되어 있는 동맹징집병들의 총사령관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발칸반도의 몇몇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뒤로 미루어야 했다. 이 민족들은 주기적으로 마케도니아의 북진을 좌절시켰던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발칸 반도로 원정을 간 것이 실전을 통해 좋은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마케도니아가 오랜 젓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꼭 치러야 될 통과의례였다.  페르시아 원정은 그리스인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한번 연기되었다. 그리스 도시들은 필리포스 2세의 죽음으로 사기가 한층 고무되어, B. C. 338년에 받은 치욕을 복수하려고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왕은 지체하지 않고 반란을 진압했다. 알렉산더는 테베를 포위 공격했다. 잔인하게도 그는 이 도시의 운명을 다른 그리스 '동맹국들'의 손에 넘겼다. 이 동맹국들은 테베 시가를 파괴하고 살아 남은 테베 사람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아 버렸다. 이에 겁먹은 그리스 도시들은 공식적으로 사죄하기에 이르렀다. 아테네 역시 알렉산더의 승리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포스와 그뒤를 이은 알렉산더와 체결한 협정조항에 따라 그리스의 각 도시들은 할당받은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그리스 병사들은 페르시아 원정 동안 충성을 약속하는 불모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소크라테스가 대대로 내려오는 적이라 누누이 말한 페르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B. C. 334년 페르시아 제국 - 당시 지배왕조의 이름을 따서 아케메네스왕조하고도 한다 - 은 200년이 넘는 오랜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B. C. 6세기 중엽 페르시아인은 키루스 대왕의 지휘하에 중동의 왕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B. C. 550년부터 B. C. 525년경에 페르시아 군대는 메디아왕국(수도는 엑바타나), 리디아왕국(소아시아), 바빌로니아옹국(메소포타미아와 근동), 그리고 이집트까지 손을 뻗쳤다.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대왕(재위, B. C. 521∼4860시절에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왕은 스스로를 왕 중 왕, 즉 대왕으로 일컬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하나로 통일된 오리엔트는 지정학적으로 심한 변동을 겪었다.  대왕은 중요도시를 연결하는 왕도를 정비하여 물자의 교역로와 군수품의 수송로를 확보했으며 먼 지역과 신속한 정보교환을 할 수 있었다.  왕도(王道)는 서쪽의 소아시아(에페수스와 사르데스)로부터 앙카라, 카파도키아, 유프라데스강 상류, 바빌로니아, 수시아나를 거쳐 수도인 수사까지 뻗어 있었다. "왕도 곳곳에 왕의 역참과 근사한 숙소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안전한 지역만을 통과했다. 사르데스에서 수사의 왕궁까지 왕도의 총 길이는 1만 3, 500스타트(약 2, 300km)였다. 하룻동안 길 수 있는 거리가 150스타트(25km)이니까 90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는 기록에서 왕도의 규모와 잘 정비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같은 제국의 중심지들은 다른 왕도를 통해서 인도와 이집트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길은 잘 훈련된 도로순찰대의 호위 속에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그에서 참패하고( B. C. 480∼479) 아테네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다소 약해졌지만 B. C. 334년 페르시아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페르시아만의 종앙 아시아에서 홍해까지, 동서로는 에게해에서 인더스강까지 확장되었다.  B. C. 404년에서 B. C. 343년 사이에 독립했던 이집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재위,  B. C. 359∼338)때 다시 정복되었다. 반대로 인더스강 계곡은 실질적으로 독립을 누리고 있었던 것 같다. 페르시아는 전영토를 20여 개의 주로 나누고, 각주는 사트라프(satrap)하는 지사 - 페르시아어로 '권력의 수호자' 라는 의미 -를 두어 다스렸다.  지사들은 자기 주의 치안유지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비군과 많은 요새, 감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왕실창고와 금고로 들어오는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실의 어마어마한 재산에 대한 소문은 그리스인에게도 널리 퍼져있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차지한 왕실의 금고만 봐도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즉, 황금과 은덩어리 - 대개가 돈으로 주조되지 않은 곳이었다. - 만 해도 1만 8, 000 탈란트(4, 500톤 이상)나 괴었다. 알렉산더는 이것들을 페르시아의 주요 도시에서 탈취했다.  페르시아는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지닌 다양한 문화와 전통적인 관습을 말살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언어인 고페르시아어의 사용을 페르시아족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족이 전통과 풍습을 공유한 여러 이란족들 가운데 하나였듯이 페르시아어도 이란 고원지역에서 사용되는 여러 이란 어족가운에 하나였다 .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민족들은 자신들의 말과 글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집트인은 이집트어로 말했고, 서기들은 여전히 파피루스 위에 상형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한편, 바빌로니아에서는 설형문자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심지어 페르시아 권력의 심장부인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점토판 위에 새겨진 왕실의 여러 가지 기록조차 페르시아어가 아닌 엘람어로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주요언어에 불과하며 소수민족이 사용한 언어까지 살펴보면 독자적인 언어 사용은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들어 소아시아에서만도 약 10여 개의 언어와 방언이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또한 널리 애용되는 매개언어(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상호간의 의사전달에 시용하는 언어:역주)이자 외교어가 된 아람어의 사용이 페르시아 지배기에 유래 없이 증가했다.  이러한 언어 사용 실태는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이 그대로 보존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처럼 페르시아인이 피정복지역의 전통을 존중하여, 피정복민들이 고유문화를 고수할 수 있었던 까닭은, 피정복지역 지배계급의 협력 없이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인의 정확한 판단 때문이었다. 이정책은 종교에도 적용되었다.  페르시아인은 대체로 피정복민들이 그들 고유의 종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가끔 지역 성소에 특혜를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B. C. 538년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로 추방된 유대인에게 조상의 땅을 되찾고 거기에 야훼신의 신정을 다시 짓도록 허락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정책이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다음 캄비세스왕과 다리우스대왕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어 이집트의 신들을 숭상하는 제의를 물의 없이 치렀던 것처럼 키루스 대왕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그 지역의 종교전통에 기꺼이 따랐다.  페르시아 왕들은 그 지역의 신을 받드는 것이 그곳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 잘 알고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자신이 정복한 제국을 지배하는 데 이러한 덤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페르시아 왕은 자신을 통일의 상징으로 삼아 통일 제국을 유지했다.  이 점에서 페르시아 왕은 점령지에서 왕권의 척추구실을 한 페르시아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왕은 주요 궁정업무와 대규모 군통솔, 지사의 직무를 페르시아 대가문의 대표들에게 일임시켰다.  또한 페르시아인은 제국에서 땅을 얻는 대가로 지사들에게 기마병을 제공해 주었다. 페르시아인은 광할한 제국의 이곳저곳에 정착하면서도 고유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유지했다. B. C. 4세기에 페르시아인은 사르데스에 민족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를 기리는 신전을 세웠고, 지사가 통치하는 지역에는 여신 아나히타를 경배하는 곳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페르시아인의 정치적·문화적 일체감, 그리고 왕과 아케메네스 왕조에 다한 충성심 덕분이었다. 귀족들과 왕조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페르시아가 대가문들의 정치력과 경제력은 결국 페르시아가 다른 민족과 영토를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지배계급을 무마할 수 있는 정책을 세워야 했다.  B. C. 4세기 그리스 작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쇠퇴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군사력 약화를 신이 나서 마음껏 떠들어댔다. 그리스 곳곳에는, 페르시아인은 호사스런 생활과 하렘의 방탕한 쾌락에 빠져 파탄 직전이기 때문에 "페르시아인과 전쟁을 하면 싸움 한 번하지 않고 온 나라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 는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사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부터, 야만인에 대한 그리스인의 내적 - 도덕적·정치적·군사적 - 우월감은 더욱 부풀어올라 신화처럼 과장되었고, 이것은 그리스 역사가들이 사료를 편찬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르시아 왕은 언제든지 막강한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고 재정상태 또한 풍요로웠다. 가끔 피정복민들이나 지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견고하게 유지되었고, 그 시기에 페르시아 귀족계급은 충성을 다해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의 진정한 대리인인 대왕을 든든하게 보필했다.  B. C. 334년 초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전부 이끌고 마케도니아를 떠난다. 이로써 그의 앞에는 일대 모험이 펼쳐지게 된다.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B. C. 334년 봄, 마케도니아군은 아비도스 부근의 소아시아 연안에 상륙했다. 육지에 발을 디딘 알렉산더는 땅에다 창을 꽂아 페르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을 수호해 달라고 제식을 올렸다.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군사작전의 주요 임무는 마케도니아인이 수행했다.  신중한 알레산더는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비우지 않고 치안유지를 맡은 안티파트로스 휘하에 보병 1만 2, 000명과 기마병 1, 500명을 남겨놓았다.  기마병들은 그 수가 1, 800명을 넘지 않았는데 마케도니아 왕국각지의 귀족계급 출신이었다. 이들은 '헤타이로이(hetairoi)'라 불렀는데 이것은 '동료 기사들' 또는 '동료들' 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투구를 썼고, 주로 산수유나무로 만든 긴 투창으로 적을 찔러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마케도니아의 농민계급에서 차출된 3만명에서 4만 3, 000명에 이르는 보병은 각자가 5, 5km의 긴 창을 지닌 밀집부대로 구성되었다. 긴 창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은 천하무적이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인이외에도 코린트 동맹에 가입한 다른 그리스 국가에서도 군대를 징집해서, 보병 7, 000명과 기마병 600명을 모았다. 용맹스러운 테살리아인 기마부대는 1, 800명의 기마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칸반도의 민족들(트라키아족, 페오니아족, 일리리아족 등)은 알렉산더에게 보병과 기마병, 투창수로 구성된 우수한 징병들을 보내 주었다.  수백 대의 수레가 전사들 곁에서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고 군수품을 나르는 병참대가 있었다. 그들은 식량수공, 포위공격에 필요한 군수품 수송 등을 담당했는데, 수천 명의 군노(軍奴)를 거느린 일반장교 밑에 편성되어 들어갔다. 또한 병사들이 개별적으로 거느린 인원도 있었다. 부인을 데려가지 않은 마케도니아인은 점령에서 둘째 무인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정복과 행군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유지되어 B. C. 325년에는 야영지에서 태어난 아기만 해도 1만명에 육박했다. 부녀자등 외에도 물자가 부족할 경우에 한밑천 잡으려는 상인들이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전리품을 챙기면 챙길수록 짐수레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들은 전쟁이나 위험이 아니라 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통솔하고 움직이기 위해 일전경험이 풍부한 많은 장군들을 곁에 두었다. 이들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에 몇 명은 필리포스 2세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파르메이온도 그중 하나인데 왕은 종종 그의 정치적, 전략적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티고노스도 이 분류에 속했던 사람으로, 그는 알레산더가 죽은 뒤에 안티고노스 왕조를 열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차차 나이 든 사람들보다 자기 또래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헤페스티온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로서 왕이 온갖 비밀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자상 소중한 친구였으며 왕과 대화할 때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동갑이었지만 몸집은 훨씬 컸다.” 그리고 크라테레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페르이카스, 페우케스타스 등 마케도니아 최고 귀족계급 출신인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나서서 왕을 보필했다. 이들은 연대와 기마대대, 보병대대를 지휘했다.  친위대를 지휘하는 영광은 B. C. 334 년 알렉산더의 젖먹이친구인 클레이토스에게 돌아갔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10여 명 남짓 되는 이 젊은이들은 보디가드라는 뜻의 소마토필라크라고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결정은 알렉산더가 직접 내렸다. 그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도록 '양옆에 흰 깃털장식이 꽂힌 투구'를 쓰고 자신의 명마 부세팔로스에 올라타 선두에 서서 싸웠다.  원정대에는 정복의 역사를 기록하는 연대기 작가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왕의 무관으로, 광이 죽은 뒤에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는 회상록 작가이기도 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하나도 없다. 네아르코스 제독의 항해록은 이보다 운이 좋아서 아리아누스의 책(인도지)에 재수록되어 전한다.  이 밖에도 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정복자 뒤를 따라다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레테스, 아낙시메네스, 오네시크리토스, 폴리크헤테스, 아히스토불로스, 마르시아스 등을 대표적으로 쏩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기록은 여기저기 흩어져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알렉산더의 군 문서관들이 남긴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증언들을 기초로 로마 시대에는 많은 종류의 '알레산더 이야기'가 나왔다. 라틴어로는 퀸투스 쿠르티우그. 우스티누스. 그리스어로는 아리아누스, 시칠리아 출신 지오도로스, 플루타르크가 쓴 것이 특히 유명하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가 다가오는데도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를 총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계획을 몇 년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이는 필리포스가 B. C. 337년 원정대를 파견했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 다리우스 3세는 멤논에게 군지휘권을 일임했는데, 그는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트로아드로 적군을 격퇴시켰다. 예전에도 그리스를 수차례 꺾은 페르시아인은 마케도니아 원정대를 격파했다는 승리감에 더욱 들떠 불행하게도 자국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디오도로스가, "페르시아의 지사들과 장군들이 마케도니아인의 행군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고 기술한 것을 봐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최소한 300척 이상으로 함대를 구성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180척 정도에 불과했던 알렉산더 함대에 비하면 월등한 전력이었다.  지사들은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젤레에서 대책회의를 열었고,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작전이 제기되었다.  원래는 로도스섬 출신이지만 오래 전부터 페르시아의 대가문과 결탁하고 있던 멤논은 초도화작전을 제안했다. 그는 알렉산더가 간신히 한 달 정도밖에 군대를 먹여 살리지 못할 만큼 자금과 식량이 부족하다는 걸 짐작했다. 다른 정복자들처럼 마케도니아인도 분명히 점령지에서 식량을 구하려고 할 테고, 그러려면 속전속결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승리를 거두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싸움에 응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이 적절한 대처방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다른 장군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력이 절대 우세하다는 확신, 국토가 황폐해지는 데 대한 염려, 다리우스 3세에게 승전보고를 올려 더 많은 총애를 받을 욕심으로 그들은 서둘러 무기를 손에 들고 유럽에서 온 앳된 군주에게 맞섰다.  B. C. 334년 5월, 페르시아 장군들은 그라나쿠스 강변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기마부대를 집결시켰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작전이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양국의 기마부대는 불꽃튀는 접전을 벌였다. 알렉산더는 직접 선두에서 싸우며 군사를 이끌었다. 이윽고 궁지에 몰린 수천 명의 페르시아 기마병이 전쟁터를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페르시아인 편에서 같이 싸우던 그리스 용병 수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고, 생포된 2, 000명은 마케도니아의 광산으로 보내져 강제노역에 처해졌다.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는 우선 점령지의 조직 정비에 몰두했다.  그는 아케네메스 왕조의 행정제도를 유지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지방을 다스리는 지사, 즉 사트라프 제도는 그대로 두었다. 프리지아-수도 다스킬레이온은 교전 없이 함락되었다-에는 마케도니아인 칼라스를 지사로 임명했고, 주민들은 전에 다리우스3세에게 바치던 공물을 이 새 주인에게 바쳐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는 소아시아 서부권에서 페르시아 지배의 중심지였던 사르데스를 싸움 한번 치르지 않고 차지했다. 리디아 왕국의 옛 수도인 이 도시는 방어체계가 잘 갖춰져 있었지만 그라니쿠스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기가 꺾인 페르시아인 지사 미트레네스가 알렉산더에게 성채와 모든 재물을 내주었던 것이다. 이는 페르시아 귀족으로서는 최초로 공개적으로 항복한 사례로서 이후 그는 알렉산더의 측근이 되어 다리우스3세 시절에 누렸던 영화를 변함없이 누리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런 식으로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간의 정치적 협력을 도모했다. 다스킬레이온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르데스에서도 행정기구를 재정비하여 공민권을 비롯한 군사, 재정 등 모든 권한을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이 차지했다.  B. C. 334년 봄과 여름 내내 정복자는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을 장악해 나갔다.  많은 도시들이 자진해서 알렉산더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이중 몇몇 도시들은 사실상 페르시아의 주둔부대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으로 유명한 에페수스의 경우가 그러했다. 반대로 밀레투스에서는 요새사령관인 그리스 사람 헤게시스트라테스가 방어태세에 들어가는 한편, 페르시아 함대와 군대의 지원이 있으리라 예상하면서 끝까지 저항할 것을 선포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보다 한발 앞서 도착했다.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봉쇄당한 밀레투스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대체로 알렉산더는 정복동과 병행해서 해방된 도시들에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이는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참주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와 정반대되는 방식이었다. 에페수스에서는 폭군들과 그 가족을 학살하는 풍조가 너무 확산되어 알렉산더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개입해야 할 정도였다.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리스 도시들이 완전한 독립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원정대에 재정지원을 계속해야 했고, 때로는 페르시아 주둔부대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부대가 주둔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특히 땅과 사람의 지배자로서 페르시아 대왕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그러니 그리스 도시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밀레투스가 함락된 후, 멤논과 페르시아인은 소아이아 남서쪽에 있는 할리카르나소스로 후퇴했다. 그 도시는 리키아에 합병된 카리아라는 주의 수도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카리아왕 마우솔로스의 영묘로 유명한 곳이다. 도시는 철통 같은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알렉산더는 무기를 대략으로 동원하고 공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장기전에 돌입해야 했다. 결국 대규모 공세와 실패를 거듭하는 탈출작전에 지쳐 버린 페르시아 장군들은 도시를 버리고 요새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요새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제 매듭이 풀렸도다.” 고르디온의 신전기둥에 매여 있는 매듭을 단칼에 자르며 알렉산더가 외쳤다.  카리아에 군대를 일부 남겨 두고 주력부대를 사르데스를 보낸 뒤 알렉산더는 일부 부대를 이끌고 고르디온에서 겨울을 나기위해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소아시아 남쪽의 연안지역, 즉 리키아와 팜필리아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군대를 보강하고 재정비했다.  그동안 페르시아인은 후방에서 열띤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다리우스3세는 멤논을 소아시아 전선과 함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멤논은 해상공격을 펼쳤다. 그는 알렉산더가 운송선을 제외한 대부분의 함대를 해산시킨 틈을 타서 B. C. 333년 봄과 여름에 키오스섬과 레스보스섬을 탈환했다.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그리스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반격으로 키클라데스섬을 비롯하여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이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B. C. 333년 늦은 봄에 멤논이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조카 파르나바제스가 에게해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진영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책을 깨달은 알렉산더는 섬을 재점령한 페르시아 주둔군을 몰아낼 작전을 세웠다.  B. C. 333년 초봄, 알렉산더는 고르디온을 떠나 대대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해상지배의 토대가 되어 온 실리시아의 연안지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의 수도인 타르수스에서 알렉산더는 중병을 앓게 되었다. 발병 원인은 키드노스에서 목욕할 때 냉수 쇼크를 받은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 때문에 진군이 수주일 간 지연되었다. 그러나 그는 주치의인 필리포스의 간병으로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리아로 떠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군이 진격해 오자 다리우스 3세는 왕실 소속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나섰다.  이 군대는 1년 전 알렉산더 군대에 맞섰던 때와 판이하게 다르게 구성되었다. 병력을 동원하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란 고원과 인도 고원을 제외한 제국의 전민족이 할당받은 병력을 파견했다. 병사들은 바빌론 근처로 집결했는데,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마병과 보병들이 모여들었다. 다 모이고 보니 실제 수보다도 훨씬 더 많아 보였다.”  실제로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총인원이 31만 6, 200명에 이르렀다고 보았으나, 다른 고대 작가들은 60만 명이었다고 자신 있게 기록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수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실 소속의 군대는 비전투 요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빌로니아의 한 문서를 보면 기마병 한 사람 당 열두 명의 하인이 따라다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페르시아 왕이 연대를 통솔하려면 왕궁 전체가 움직여야 했다. 왕실과 고관들의 가족, 관리들과 장교들, 특히 각기 다른 임무를 맡고 있는 하인 등 수천 명에 이르는 인원이 함께 이동했다.  다리우스 3세는 이 '짐' 의 대부분을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후방인 다마스쿠스에 남겨 두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메니온은 다마스쿠스에서 페르시아 왕의 비공식 수행원들을 778명 남짓 사로잡았는데 그중 319명은 요리사였고 329명은 군악대원의 첩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 다리우스 3세의 짐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을 보면 왕실 재산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군대를 위해 비축해 둔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은붙이, 귀족 남자들과 명문가의 여자들이 쓰던 호사스런 장신구, 순금 식기류, 금으로 만든 재갈,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으리으리하게 치장한 천막, 그들이 버려 두고 간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마차 등 왕실의 재산은 땅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두 왕실 군대 간의 첫번째 교전은 B. C. 333년 11월 실리시아의 이수스 부근에서 벌어졌다.  다리우스 3세로서는 너무도 불행한 선택이었다. 페르시아군과 기마대는 산과 바다로 가로막힌 좁은 평원에서 공격다운 공격 한번 제대로 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왕실 소속 군대의 정예군이자 자랑거리인 기마대가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마케도니아군의 전술이 한수 위라는 사실이 또다시 입증되었다, 다리우스 3세는 패색이 완연해지자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페르시아군이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그렇다고 저항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리우스 3세에게는 아직도 막대한 재물과 군대가 남아 있었다. 거기서 살아 남은 몇몇 장군들은 소아시아에서 반격을 펴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스 전투의 승리로 페니키아로 가는 길이 알렉산더 앞에 활짝 열리게 되었다.  다리우스 3세가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간 사실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자신의 비명에 최소의 기수, 최소의 사수, 최고의 투창수였다고 기록하게 한 바로 그 다리우스 3세가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왕권의 상징인 망토와 활, 그리고 전차를 버리고 달아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마케도니아인은 다리우스 3세의 품격을 깎아내릴 때마다 이 사건을 들먹였다. 그들의 눈에 다리우스 3세는 이미 정통성을 잃은 것으로 보였고, 알렉산더는 용맹의 화신으로 비쳤다.  사실 다리우스 3세는 도망치면서 어머니 시시감비스, 왕비 스타테이라와 두 공주, 어린 왕자까지 버리고 갔다. 이들 포로들은 정중한 대우를 받았는데 이는 정복자가 다리우스 3세의 후계자임을 과시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후 다리우스 3세가 협상을 제의해 왔으나 알렉산더는 이를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지금부터는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아시아의 왕에게 하듯이 하라. 대등한 어투로 편지를 쓰지 말라.  알렉산더는 이렇게 선언하고 나서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페니키아로 진군했다. 시돈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해 왔다.  반대로 티루스는 알렉산더가 멜카르트의 성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표명했다. 티루스는 섬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이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B. C. 332년 2월)에는 공격하는 쪽이 불리했다. 알렉산더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섬과 육지를 잇는 방파제를 만들게 했다. 그러고나서 키프로스섬과 페니키아 전역에서 기술자들을 모아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하게 하여 일부는 방파제 위에, 일부는 기마부대의 수송선 위에 배치시켜 놓았다.  티루스 사람들은 적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온갖 전략을 다 동원하여 악착같이 방어했다. 그들은 불화살을 쏘아 적의 선박을 불사르기도 하고, 성벽위에서 거대한 돌덩어리를 굴려 떨어뜨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닻줄을 자르는 임무를 띤 잠수부를 비밀리 침투시키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비블로스와 아라도스 같은 페니키아의 다른 도시들과 로도스섬과 키프로스섬에서 보유하고 있던 함대를 알렉산더에게 보내 왔다. 성안에 고립된 티루스 사람들은 계속되는 공세에도 오랫동안 버티다가 B. C. 332년 8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알렉산더에게는 뜻 깊은 승리였다. 이후 그의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고 육지에서도 완전히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향해 승리의 진군을 하는 길에 걸림돌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와 아랍 징집병들이 철통같이 지키던 가자가 유일하게 저항했지만 그나마 곧 무너지고 말았다.  B. C. 332년 가을,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펠루시움에 입성했다. 페르시아의 지사 마자케스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는 수도 멤피스를 장악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선임자들을 본받아 이집트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특히 멤피스의 수호신인 프타신의 살아있는 표상인 아피스라는 신성한 황소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집트인은 이 새로운 정복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알렉산더는 육지에서 승리를 거둔 데 이어 해상에서도 완승을 거두었다. 마케도니아 함대가 페르시아인을 에게해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연안 정복을 마무리짓는 의미에서 나일강 삼각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데, 이것이 장차 이집트의 수도가 될 안덱산드리아이다.  그는 또한 사막 한복판인 시와의 오아시스에 있는 아몬신전으로 신탁을 들으러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가는 길에 신의 가호가 있어, 제우스는 관대하게도 비를 내려 주었고 까마귀들이 사막에서 헤매는 소규모 군대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알렉산더는 신관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 보았다. "그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의 예언을 듣고 나서 멤피스로 돌아왔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떠난 뒤, 표면적으로는 이집트인 통치자인 돌로아스피스가 다스렸지만, 군사와 경제 문제에 관한 권한은 사실상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3년 간 알렉산더는 정복에 정복을 거듭했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달렸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굴복시켰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주지는 못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패한 이후로 바빌론에게 군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B. C. 331년 봄, 마케도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또다시 길을 떠난다.  다리우스 3세는 페르시아 제국 구석구석까지 동원령을 내려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해서 모인 병사들이 고대 작가들에 따르면 50만에서 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추정에 따르면 보병이 20만 명 이상, 기마병이 4만 5, 0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서 용감한 박트리아 출신 기마병들과 갑옷으로 무장한 스키타이 출신 기마병들은 중앙 아시아의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와서 부대에 합류했다. 게다가 낫달린전차 200대를 주력부대에 배치하였다. "끝이 철로 된 창들이 전차 채의 끝에서 위로 솟아 있었다. 멍에의 여기저기에 칼날 세 개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바퀴의 살 사이에는 칼머리가 여러 개 마주보고 있었다. 또한 바퀴 둘레에는 낫이 달려 있어서 말들이 달릴 때 바퀴에 닿는 것은 모조리 자를 수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왕도를 지나가는 길에 가우가멜라에 머물렀다.  그는 이수스 전투의 경험을 교훈삼아 기마부대가 움직이기 유리한 넓은 평원을 선택했다. 그는 땅을 편편하게 고르고 적군의 말들을 다치게 하려고 땅에 뾰족한 철못들을 박아 놓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티루스를 출발한 알렉산더는 B. C. 331년 7월 초 탑사쿠스 지방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다다랐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자신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지사 마자이오스가 좌안을 비운 틈을 타서 마음놓고 강을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군사들은 공병대가 세운 다리 두개를 통해 무사히 강을 건넜다. 기이하게도 페르시아인은 티그리스강을 건널 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전투는 10월 1일에서야 벌어졌다. 낫달린전차들은 다리우스 3세가 기대했던 만큼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병사들에게 전차가 다가오면 비켜났다가 전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 우익을 공격한 마자이오스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페르시아 진영의 패색은 완연했다. 그것은 다리우스 3세가 약 4, 000탈란트(75~100톤)나 되는 보물과 활, 화살, 전차를 버리고 또다시 달아나 버리자 더욱 확연해졌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뒤를 추적하지 않고 곧바로 바빌론으로 향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매력적인 고도 바빌론은 왕조가 수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번영을 이루었다. 이 도시는 키루스 대왕 이후 바빌로니아 지사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페르시아의 겨울왕궁이 있엇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대왕이 세운 궁에서 기거했다. 비빌론은 또한 관개시설이 잘 정비되는 등 개발이 잘 되어 있었고, 도시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행정관료들이 관리를 원활히 하는 위대한 큰 성지들이 그렇듯이 풍요로웠다. 마자이오스는 대항하기는커녕 아들과 시의 유력인사, 사제를 대동하고서 알렉산더를 마중 나왔다. 정복자를 그런 식으로 맞이하고 선물을 바치는 행위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는 꽃과 월계관으로 장식하고 은으로 테두리를 두른 제단이 설치된 길에 전차를 타고 당당하게 입성했다. 궁전과 성채를 장악한 뒤에는 페르시아인 바고파네스에게 금고열쇠를 받았다.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는 바빌론의 성소에서 공식적인 제를 올리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빌론이 가장 위대한 신 마르두크에게 제물을 바쳤다.  다리우스 3세가 임명한 지사 마자이오스가 바빌로니아 지사로 재임명되었고 사르데스의 옛 수비대장 미트레네스는 아르메니아 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행정조처들은 알렉산더의 정책에 일대 전환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에게 군사업무와 조세업무를 맡겨 왔으며, 페르시아인을 그런 고위직에 앉힌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페르시아인 마자이오스를 지사로 임명함으로써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하여 페르시아식으로 재창조한 제국에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책임을 맡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동시에 몇몇 페르시아인과 결속을 다졌다.  12월 말, 수사에서도 바빌론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사인 아블리테스와 그의 아들 옥사트레스가 알렉산더를 마중 나와 수사에도 역시 호화롭게 입성했으며 지사의 선물공세-인도산 단봉낙타 여러 마리와 코끼리 여러 마리-를 받았다. 아블리테스 역시 지사 자리에 계속 눌러앉게 되었다.  코아스케스 기슭에 자리 잡은 수사는 그리스인의 눈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헤로도토스는 이 도시를 사르데스에서 시작되는 왕도의 귀착지로 보았다. 여러 왕들의 손을 거쳐 건설된 수사의 궁안에는 페르시아 대왕들의 귀금속이 보관된 제국에서 가장 큰 보물창고가 있었다. 고대 작가들은 금이 4~5만 탈란트, 즉 1, 000~1, 250톤에다가 금화가 9, 000탈란트(225톤)나 있었다고 전한다.  이미 지사들의 수많은 보물들과 바빌론의 보물에 손을 댄 알렉산더는 이후에도 엄청난 귀금속을 보유하게 되었다. 출발 당시에 겪었던 재정적인 궁핍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정복자 마음대로 보물의 일부는 바빌론의 조폐소에서 돈으로 주조되었고 페르시아의 금화는 왕의 돈이 되었다.  그후 알렉산더는 갖가지 방법으로 유럽에서 새 군대를 모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고대 작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인명손실은 그라니쿠스강에서 기마병 85명,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100명이라는 식으로 축소한 반면, 페르시아의 인명피해는 '그라니쿠스강에서 기마병 1, 000명, 이수스 전투에서는 기마병 1만 명을 포함, 10만 명이 전사했으며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적군의 시체가 30만 명에 이른다'는 등 부풀려 놓았다. 그렇지만 수많은 부상자들-이중 많은 수가 죽었다-과 한여름 티루스와 티그리사강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힘겨운 행군 끝에 쓰러진 병사들까지 감안하면 이 숫자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는 영토를 점령하고 정복을 마무리짓기 위해서 수많은 병사들을 후방에 남겨 두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구원병이 필요했다.  B. C. 334년 가을 이후 그는 새로 결혼한 병사들을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전국에서 보병과 기마병들을 최대한 동원하라. "고 부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B. C. 332년 가을, 가자에서부터 그는 '군복무가 가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민타스를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 용병들로 구성된 원군은 이미 고르디온에 3, 350명, 티루스에 4, 000명이 도착해 있었다. 아민타스는 바빌론과 수사에 마케도니아인 6, 500명과 트라키아인 4, 100명, 용병 4, 380명으로 이루어진 보충병을 끌어들였다. 마자이오스 역시 용병을 최대한 많이 징집하라는 명령과 함께 은을 하사받았다.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막강해질수록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저항의 물결도 높아졌다. 반란은 제일 먼저 트라키아에서 일어났다. 주동자는 다름 아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었다. 스파르타가 반란을 지휘해 마케도니아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반란은 결국 무위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B. C. 331년 10월에 안티파트로스가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켜 바빌로니아 일로 골머리를 썩던 알렉산더를 안심시켰다.  병력이 보강된 군대는 페르시아로 향했다. 가자, 페르세폴리스로!  유럽 출신의 병사들은 바빌로니아의 뜨거운 여름 뙤약볕을 견뎐내자마자 이번에는 이란 고원의 살을 에는 추위와 폭설에 시달려야 했다. 수사에서 페르세폴리스에 이르는 대로에는 수많은 요새들이 줄지어 진을 치고 있었다. 다리우스 왕실의 동맹자인 마다테스가 팔리윤 근처에 있는 첫번째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그를 굴복시킨 뒤 파르메니온에게 주력부대를 맡겨 카제룬과 시라즈를 통과하는 대로를 따라 페르세폴리스까지 진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관문이라고 부르던 협곡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페르시아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보병 2~4만 명과 기마병 700명으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이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크시엔족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페르시아 왕에게 매년 서로의 화합을 다짐하는 선물을 받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 끝에 알렉산더가 승리했다. 그들은 해마다 말 100마리, 짐을 나르는 짐승 500마리, 양 3만 마리를 공물로 바치기로 다짐했다.  페르시아의 방어벽을 뚫고 지나가기가 어렵자 알렉산더는 좁고 험준한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계곡으로 닷 내려가서 아라크세를 지나 B. C. 330년 1월,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했다. 페르시아인 총독 티리다테스가 이미 편지를 보내 약속한 대로 알렉산더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가장 뜻깊은 승리였다.  다리우스 1세가 건설하기 시자하여 그 후계자들이 완성한 페르세폴리스는 유서 깊고 위엄 있는 도시였다.  화려한 왕궁과 상점들, 보물창고들과 예술품들은 제국의 전민족에 대한 페르시아 왕의 존재와 페르시아인의 지배를 상징하고 과시하는 듯했다.  병사들은 엄청난 재물을 털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인은 도시에 쳐들어가 남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했다. 당시 막대한 양의 돈과 금이 탈취당했고, 화려한 옷감들-어떤 것들은 왕실의 상징인 자줏빛이었고 또 어떤 것들에는 금으로 수를 놓았다-이 정복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약탈을 하며 지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온통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들이 강제로 끌려가 포로가 되었는데, 그들은 노예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알렉산더 역시 왕실의 어마어마한 보물-12만탈란트(약 3, 000톤)의 금-을 가로채어 그중 대부분을 수사로 옮겼다. 플루타르크는 망아지 1만 쌍과 낙타 5, 000마리를 동원해서 겨우 이 보물을 옮길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 다음으로 페르시아의 옛 수도인 파사르가다이로 쳐들어갔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약 40Km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키루스 대왕이 메디아인에게 승리를 거둔 뒤 세웠으며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여신 아나히타의 신전에서 대왕들의 취임식이 거행된 곳도 바로 이 파사르가다이였다. B. C. 330년 겨울 내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내륙 곳곳을 섭렵했고 고바레스 총독이 넘겨준 도시를 점령했으며 지나가는 길에 금고에서 발견한 6, 000탈란트를 예비비에 보탰다. 그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쏟아서 사람에게 필로쿠로스, 즉 '키루스 대왕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정치적 속셈이 있었다. 즉, 페르시아인에게는 자신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귀족들에게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도록 설득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일부 페르시아인은 벌써부터 알렉산더에게 협력하는 편이 낫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티리다테스가 그대로 재무관의 자리를 지키게 되었고 알렉산더라 임명한 지사도 페르시아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페르시아인은 자기들끼리 모이면 알렉산더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약탈자'는 자신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라고 내세울 수 없으며 위대한 페르시아의 신 아후라마즈다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자랑할 수도 없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B. C. 330년 4월,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온 왕은 난국 타개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축제와 주연이 벌어지는 동안 여러 왕궁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보복의 성격을 띤 이 파괴행위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페르시아인이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에게 그들이 건설한 제국은 사라졌고 자신이 그들의 새 주인임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다리우스 3세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금은으로 뒤덮인 휘황찬란한 왕궁과 신전 속에 파묻혀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알렉산더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이기를 기대하면서...  다리우스3세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에서 참패했어도 여전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징집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 징집병들은, 이란 동쪽의 통치지역에서 동원된 병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리우스 3세와 함께 달아났던 자들이었다.  엑바타나에서 다리우스 3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라코시아지사 바르사엔테스, 아리아 지사 사티바르자네스, 박트리아지사 베소스 등 여러 페르시아 귀족들이 그와 함께했다. 그중에서도 나바르자네스는 왕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대신으로 충복이 되어 주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정면대결을 벌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웃 민족들이 그에게 병사들을 파견하기를 망설이는 바람에 또다시 기마병 3, 000명과 수많은 보병들(1만~3만 명)을 끌고 동쪽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엑바타나의 금고에서 7, 000~8, 000탈란트(175~200톤)의 재물을 빼내 가는 일은 잊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목표는 뚜렷했다. 그것은 다리우스 3세를 물리쳐 아케네메스 왕조의 지배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비스타네스(선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아들)에게서 자신의 적이 도망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는 파르메니온과 짐들-그 속에는 자신의 금고도 들어 있었다-을 엑바타나로 보내고 자신은 다리우스 3세의 뒤를 쫓아 강행군에 나섰다. "그가 너무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졌고 죽어 간 말의 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카스피의 관문을 지나 계속 동쪽으로 갔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추격을 받으면서 혼비백산 도망만 가는 판국이 되자 그의 주위에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알렉산더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여자들과 짐을 버리고 최대한 빨리 이란까지 가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대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전의를 상실한 징집병 전원이 그의 곁을 떠났고 그를 추종하던 페르시아인마저 알렉산더 수하로 들어갔다.  그후 다리우스 3세는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부하들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이 음모의 주동자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가까운 사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박트리아 베소스였다. 그는 바르사엔테스와 나바르자네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통치구역에서 동원한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다리우스 3세를 체포했다.  음모자들은, "만일 알렉산더가 계속 뒤를 쫓아온다면 그에게 다리우스 3세를 넘겨주고-다리우스 3세는 협상에 유리한 조건이므로-반대로 그가 되돌아간다는 소문이 들리면 군사를 모아서 공동으로 권력을 잡자. "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임시로 베소스가 통치권을 행사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 B. C. 330년 7월, 알렉산더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음모자들은 그때까지 마차 속에 가두어 두었던 다리우스 3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달아나기 전에 다리우스 3세를 찌른 것은 바르사엔테스와 사티바르자네스였다.  다리우스 3세가 제거됨으로써 알렉산더는 정치적으로 큰 수확을 거두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왕위 찬탈자의 이미지를 벗고 페르시아 대왕의 원수를 갚은 사람으로 통하게 되었다.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소문이 뒤늦게 처졌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베소스를 치기 위해서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이상을 지키려는 전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사실 베소스는 왕을 시해했을 뿐 아니라 왕위를 찬탈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박트리아로 돌아가면서 그는 스스로 대왕을 참칭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유해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페르시아의 전통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의 죽음은 그의 측근으로 남아 있던 페르시아 귀족들이 일제히 알렉산더 진영에 가담하는 결과를 낳았다.  군 내부에서 원정이 너무 오래 간다는 불만이 높아 감에 따라 페르시아 엘리트층과 협력하는 일은 더욱 긴요해졌다. 메디아에서 테살리아인 기마병들과 그리스동맹군들(B. C. 334년에는 7, 000명이었다. )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이들 중 일부(테살리아인 130명)는용병으로 남았다. 이들이 떠났다는 사실은 그리스 본토에서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많은 병사들이 필요한 알렉산더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엑바타나의 금고를 지키는 데만 마케도니아인 6, 000명을 남겨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3세가 죽자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퀸투스 쿠르티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파르티아에서는 "지금까지의 성과에 만족한 왕이 곧 카메도니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는 소문이 나돌았고, 짐을 꾸리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병사들을 모아 놓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연설을 해야 했다. "이 연설은 벙사들을 몹시 들뜨게 했다.” 그렇지만 알렉산더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후 몇 년 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온 지원병들이 수시로 인도에까지 보충되기는 했지만 각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B. C. 330년 한여름, 알렉산더는 박트리아를 향해 쉬지 않고 동진했다.  그는 중세에 '호라산의 길'이라 불린 상업, 전략상의 대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때 아리아의 지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티바르자네스가 베소스와 뜻을 같이하고 봉기하는 바람에 왕은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이로써 여정에 차질이 생겼다. 박트리아로 가려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들인 아리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를 지나야 했는데 이것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사티바르자네스가 후방에서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는 진압군을 아리아로 보냈다. 정규전의 승패가 불투명한 가운데, 사티바르자네스는 좌충우돌 용감하게 대항했다. 그는 "대적해 오는 자는 누구든 상개했고 전투를 벌이는 동안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고 한다. 마케도니아 장군 에리기오스가 사티바르자네스와 맞붙었다. "야만인이 먼저 창을 던졌다. 에리기오스는 머리를 살짝 숙여 그것을 피한 뒤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야만인을 긴창으로 찔렀다. 그것은 야만인의 목을 관통하여 목뒤로 뚫고 나왔다.”  아라코시아 지사 바르사엔테스는 다리우스3세 살해 공모죄로 아렉선더의 손에 죽었다.  B. C. 330년 가을, 드랑기아나의 수도에서 왕과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사이에서 처음으로 갈등이 공개적으로 불거져 나왔다. 갈등의 표면적인 이유는 의식절차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알렉산더의 자문역을 해온 파르메니온의 아들이며 왕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필로타스가 음모죄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가 죽고 나자 아케메네스 왕실의 의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왕관을 쓰고 페르시아 왕의 예복과 흡사한 옷을 걸친 채 다리우스 3세의 봉인을 자신의 서찰에 그대로 썼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군주처럼 365명의 하렘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필로타스는 이것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전통적으로 왕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던 마케도니아인은 알렉산더가 전제군주가 되려는 것이 아닌가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헤페스티온 같은 이들은 이를 소재로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다.  사실, 누군가가 알렉산더에게 막강한 권력을 쥔 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고 밀고했을 모른다. 마케도니아의 왕과 귀족계급 간의 갈등의 역사가 여기서 다시 재현된 것이다. 필로타스는 '동료들'의 지휘관이자 기병대장으로 최고 귀족계급이었다. 그의 부친 파르메니온도 엑바타나에 있던 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잔인하게 매듭지어진 것을 보면 왕이 자신의 권력과 정책에 대한 반대가 확산되는 것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는 일부 귀족들이 사악한 의도를 지닌 군인들과 의기투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의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이러한 파국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말을 입에 담는 자들과 파르메니온의 죽음에 분개하는 자들, 마케도니아로 보내는 편지에 왕의 뜻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적은 자들을 '규율 위반자들의 대대'라고 부르던 부대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그들의 솔직하다 못해 당돌한 언사가 군 전체의 기강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굶주림, 추위, 쇠약, 절망감 속에서도 B. C. 329년 봄, 마케도니아군은 베소스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했다.  병사들은 최악의 상태에서 판시르 계곡을 지나 힌두쿠시 산맥을 기어 올라갔다. 식량이 모자라 짐을 싣고 가던 짐승들을 잡아먹어야 했다. 제일 긴요한 물품인 꿀, 깨즙, 포도주 가격이 폭등했다. 농부들이 은폐된 지하저장고에 남은 식량을 숨겨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베소스는 초토화작전을 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너무 빨리 접근해 오는 데 놀란 나머지 허겁지겁 박트리아를 떠나 오수스강(지금의 아무다리야강)까지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병사들 대부분이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알렉산더는 오아시스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박트리아 수도 박트라를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고 페르시아인 아르타바제를 지사로 임명했다.  베소스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알렉산더의 진군을 막기 위한 마지막 공격에서 그는 옥수스강의 다리와 나룻배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그렇지만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짚을 넣어 부풀린 가죽부대로 만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베소스의 무모한 행동은 소그디아나의 귀족인 스피타메네스의 배신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곧 알렉산더에게 넘겨졌다. '야만적으로'고문을 당한 베소스는 우선 코와 귀가 잘렸다. 그러고 나서 엑바타나에서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귀족회의가 열려 재판을 받았다. 드디어 다리우스 3세의 복수를 한 것이다.  "알렉산더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약탈한 말한 물건들을 몽땅 차지했다.”  반란과 진압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B. C. 329년과 328년 두 해 동안 알렉산더는 박트리아, 특히 소그디아나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첫번째 반란은 왕이 마라칸다(지금의 사마르칸드)에 있을 무렵 일어났다. 약사르테(지금의 사르다리야) 강가에 사는 주민들이 자기 도시가 막강한 요새인 점을 믿고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인근 농민들도 이 도시로 피신해 있었다. 알렉산더와 그의 '동료들'은 일곱 도시,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도시인 키로폴리스(키루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주민들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남자들은 살해되었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전락해 새 식민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를 보고 약사르테강의 우안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족은 미리 겁을 먹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 정복자의 등장으로 자신들이 조상대대로 정착민들과 물물교한을 하던 것이 봉쇄될까 봐 두려워했다. 알렉산더는 여론을 무시한 채 강을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징벌원정 앞에서 스키타이족의 족장은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이듬해인 B. C. 328년, 이 족장의 후계자가 알렉산더에게 혼인을 해 우정을 다지자는 제안을 했다. 제안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그후로도 스키타이족이 마케도니아인에게 싸움을 거는 일은 없었다.  여러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알렉산더를 공격해 왔다.  스키타이족이 알렉산더를 위협하던 시기에 스피타메네스가 마라칸다를 공격해 왔다. 알렉산더는 이에 맞서 기마병 1, 400명과 보병 1, 5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했는데, 지휘관들이 작전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이들을 무작정 공격에 투입시켰다. 정말로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 폴리티메토스(제라프샨)계곡에서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마케도니아인이 평지 전투에서 최초로 패배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스피타메네스가 정규전을 철저히 회피함에 따라 사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 패전으로 군의 사기가 꺾일까 봐 알렉산더는, "참사를 은폐하고, 거기서 살아 남은 자들이 사실을 발설할 때는 사형에 처하라. "는 임명을 내렸다.  소그디아나에서도 지방의 영주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 농부들 중에서 전발한 군대와 요새화된 성을 토대로 알렉산더에게 대항했다. 알렉산더가 이 혼란을 모두 아라앉힌 것은 B. C. 328년에 이르러서였다.  같은 시기에 스피타메네스는 공모자들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그 결과를 똑똑히 알게 된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저버리고 알렉산더에게 투하했던 것이다.  그후 절친한 친구인 클레이토스의 망령이 왕을 따라다녔다.  일부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인을 가까이하는 데 불만을 품었다. 마라칸다에서 주연이 베풀어지는 가운데 알렉산더의 죽마고우인 클레이토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왕이 페르시아식에 따라 전제군주 행세를 하고 있으며 마케도니아 왕실이 귀족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의례들을 무시하고 있지 않는냐고 비난했다.  알렉산더는 불같이 화를 내며 클레이토스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과 협력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 정책의 단적인 예가 B. C. 328~327년 겨울에 치른 알렉산더와 박트리아 귀족인 옥시아르테스의 딸 로크사네의 결혼식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저항세력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가 주동자였다. 발단은 알렉산더를 배알할때 마케도니아인이든 페르시아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페르시아식으로 꿇어앉아 절을 해야한다는 데 있었다. 많은 마케도니아인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칼리스테네스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현명하게도 이 의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정복지의 치안을 유지하고 새로운 병사를 모집하기 위한 온갖 조처들이 취해졌다.  알렉산더는 정복지 곳곳에 정치적, 군사적 용도를 지닌 도시들과 군사를 주둔시킬 목적으로 군사적인 식민도시들을 건설하여 지사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에게 다스리게 했다. 한편으로는 페르시아 전국에서 3만 명의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무장시켰는데, 이 젊은이들은 병사이면서,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볼모이기도 했다. 그는 1만 5, 000명을 마케도니아인 아민타스에게 맡겨 박트리아의 통치지역 위쪽에 주둔시켰다.  인도로 출정하기 전에 그는 새로운 병사들을 더 모집해야 했다. 이제까지 힘겨운 원정을 치르는 동안 알렉산더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탈영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수많은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을 새 도시와 군사식민지에 정착시키고 부상당하거나 너무 늙어서 싸울 수 없는 병사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징집병들의 결집력은 나날이 약해졌다. 남은 인원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B. C. 329~328년 겨울에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모집한 2만 명을 충원받았는데도 모자라는 인원을 메우지 못했고, 인도 원정에 필요한 군대를 조직하지도 못했다. 각 지방에서 징집병을 보충해야 했다.  이에 못지 않게 겨울을 날 일도 걱정이어서 알렉산더는 병사들을 부추겨 규정대로 아시아계 여인들을 후실로 맞게 했다. 이는 그들의 향수를 달래는 동시에 그들의 뒤를 이어 입대할 수 있는 사내아이들을 낳게 하려는 묘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로 떠난 군대는 7년 전 소아시아를 향해 떠났던 군대와 사뭇 다른 양상을 띠었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 이외에 스키타이인도 있었고, 박트리가,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파라파미사드에서 뽑아 온 기마병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알렉산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즉, 마케도니아인에게는 정복민다운 자긍심을 잃지 않게 하면서 이란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제 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B. C. 516~515년, 다리우스 1세가 간다라와 신드를 정복했다. 그러나 2세기 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B. C. 326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인더스강 유역과 그 지류의 영토를 되차지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인도 원정에 앞서 탁실레스와의 협력관계를 확실히 해두었다. 탁실레스는 아비사레스, 포로스와 더불어 펀자브 지역의 정치를 좌우하는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포로스와 탁실레스 사이의 적대관계, 앞으로 정복해야 하는 도시들과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 같은, 인도를 분열시키는 여러 갈등의 가닥을 잡아 나갔다.  니케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그곳을 떠나면서 마케도니아군은 둘로 갈라졌다. 탁실레스를 대동한 페르디카스와 헤페스티온은 카불루드(코펜)로 거슬러 올라가서 간다라 지방을 '평정'한 뒤 오늘날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으로 가는 길목이 되고 있는 오래된 대상로를 따라 인더스강 계곡까지 가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알렉산더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히말라야 산맥 아래쪽 계곡을 기습했다.  대대로 '알프스식 원정'으로 알려진 이 원정은 코펜 우안의 계곡들(알링가르, 코우나르, 스와트, 펜즈코라)에 사는 산속의 부족들(아스파시엔족, 구우라이엔족, 아사센족)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끝까지 버티기로 작정한 산악민들-고대 인도의 책에는 이들을 진짜 '야만인'이라 기술했다-이 악착같이 지키는 험준한 산꼭대기에 서 있는 성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결국, 대부분의 마을들이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칼에 맞아 죽었으며, 주요 지점에는 주둔군이 남아 그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원정이 끝날 무렵,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오르노스(피르사르)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제압한 뒤 그곳은 이미 몇 년째 알렉산더를 수행한 인도의 왕자 시시코토스에게 맡겼다.  전쟁이 한창일 때도 알렉산더는 자국의 이익과 모두가 희구하고 있는 그리스에서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에 대해 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리아누스는, "마케도니아인은 23만 마리가 넘는 수를 정복지에서 가로챘는데, 알렉산더는 그중에서 가장 실한 놈들을 고르게 했다. 고슬이 너무 좋아서 경작할 때 쓰도록 마케도니아에 보내려 했던 것이다. "라고 기록해 두었다.  전설의 탄생, '왕이 되고자 한 사람'의 나라에서...  알렉산더는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와 헤페스티온과 페르니카스가 기다리고 있는 합류지점에 이르렀다. 그는 부관들이 설치해 놓은 다리로 강을 건너기 전에 정복한 땅의 지배권을 정리하여 마케도니아인 니카노르에게 '인더스강 이편의 땅' 을 맡겼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의 지배는 너무 허술해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인도의 왕들이 여전히 실을 쥐고 있었다.  니카노르는 도처에 남겨놓은 다른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인도의 첩첩산중에 남겨진 이 그리스인들로부터 푸른 눈에 금발인 사람들에 관한 전설이 찬생했다. 후애에 키플링은 이들을 소재로<왕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란 멋진 소설을 썼다.  탁실레스의 후계자인 옴피스는 약속한 대로 '인더그상과 히다스페스강 사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막강하며 번창한 도시'인 수도 탁실라(비르) 근처에서 알레산더를 맞이했다. 알렉산더는 필리포스를 그곳의 지사로 임명하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그기로 옴피스에게 5, 000명의 병력을 할당하고 다음 원정에 참가한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그의 왕위를 인정해 주었다.  이번에는 인도의 왕 포로스를 치기 위해 한여름에 히다그페스강을 건넜다.  포로스는 탁실레스와 달리 알렉산더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공물을 바티지도 않았고 왕국의 국경으로 정복자를 마중 나오지도 않았다.  원정은 갈수록 힘들었고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포로스가 좌안 여기저기에 초소를 설치해 두었지만 알렉산더는 보병 6, 000명과 기마병 5, 000명 - 이중 대다수가 이란 동부출신이었다. - 을 이끌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인 다족 출신 기마사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코끼리의 코에 붙들려 공중으로 들어올려진 병사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코끼리의 엄니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목숨을 잃었다"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포로스는 전차 300대와 선두에 배치한 전투용 코끼리 200마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전차는 이내 싸움터의 진창 속에 처박혀 마케도니아군을 무찌르는데 아무 쓸모가 없었다. 반면에 알렉산더의 투창수들과 사수들이 코끼리 조련사들을 명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코끼리에 깔려 죽었다.  전투가 한창일 때 포로스는 몸소 거대한 코끼리 위에 올라 탔다. 그러나 화살을 몇 대 맞고 마침내 항복했다. 고대 작가들은 알렉산더가 관대하게도 포로스에가 왕의 칭호와 왕권을 인정해 주었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 관대한 태도는 단순한 아량을 넘어서 정치적인 행위였다. 알렉산더에게는 포로스의 왕국을 점령하여 분할통치할 방안도, 그럴 야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새 동맹국에서 인도인 병사 5, 000명과 코끼리 수십마리를 지원받아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그는 포로스가 들려준 낙관적인 정보에 고무되어 여러 도시와 사람들, 군주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거기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아케시네스(세나브)강과 히드라오테스(라비)강을 선너는 데 성공했다. 그는 히파시스(베아스)강 근처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진입하려는 지역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 강을 건너 12일 간 타르 사막을 지나야 또 하나의 강, 즉 갠지스강(길이 32스타드, 약 5. 5km)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한다 해도 엄청난 전력 - 전차 2. 000대와 무장시킨 코끼리 4. 000마리 - 을 자랑하는 난다 왕조의 마가다라는 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페제왕이 가져온 이같은 불안스러운 정보를 듣고도 알렉산더는 히파시스강을 건너기로 작정했다.  8년 간의 원정으로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이 처음으로 정복자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군 내부에서 암암리에 불만이 퍼지는 것을 눈치챈 알렉산더는 병사들을 한자리에 집결시켰다. 열변을 토하면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이용하여 병사들의 요기를 북돋아 주고 새로운 정복욕을 불어넣어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사들은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떠밀려 앞으로 나온 나이 많은 코에누스가 대표로 병사들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우선 전사들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고, 나아가 부상과 질병으로 쓰러진 병사들의 수를 언급했다. 길에 버려진 수천 명의 병사들에 비하면 살아 남은 병사들은 소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알렉산더를 둘러싸고 있는 이 334명의 병사들은 트로아드를 출발하여 2만km이상을 달려왔고, "예외 없이 모두들 처자식과 생존해 계신 부모님을 만나고 싶었고 물론 조국땅을 다시 밟아 보고 싶었다.”  아울러 코에누스는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식민지에 정착해야만 했던 병사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더군다나 왕은 인도에서 '요새를 지키라는 분부를 받았으나 거기에 남기를 거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료들'가운데 하나인 메난드레스를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병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코에누스는 연설을 마쳤다.  이튿날 알렉산더는 이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질렀고 많은 병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일부 병사들은 왕의 천막으로 가서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뜻을 꺾은 알렉산더에게 신의 은총이 내리길 빌었다.”  그후 알렉산더는 히파시스강 기슭에 거대한 제단을 12개 세워 정복이 그 지점에서 끝났음을 알렸다.  그리하여 군은 안정을 되찾았고 알렉산더는 양편에 건설한 두 도시-하나는 승리의 신 니케아에게 바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30세의 노령으로 죽은 자신의 애마 부세팔로스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근처, 히다스페스강 기슭에 진을 쳤다.  포로스만이 이 원정에서 이득을 보았다. '이미 정복된 전인도의 왕'으로 임명된 그는, 간다라와 히파시스강 사이에 위치한 전지역을 총괄하는 마케도니아 출신 지사 필리포스에게 공물을 바치는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수로를 따라 대양, 다시 말해 인더스강의 삼각주와 인도양까지 진출하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 가운데 출신상 배를 만들고 다룰 줄 아는 자들을 선발했다. 그들은 주로 페니키아인, 키프로스인, 이집트인, 인도인, 헬레스폰틴인이었다. 소형배 1, 000여 척-이들의 모선 80척은 각각 30명이 노를 저었다-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병사들과 말을 실어 날랐다. 그동안 군대는 서쪽에서 동원한 병사들로 충원되었고 인도에서 보내 온 보병용 장비 2만 5, 000벌 덕분에 재무장할 수 있었다.  군의 일부는 알렉산더와 함께 출발했고 크라테레스와 헤페스티온, 그리고 필리포스 지사가 이끄는 나머지 분견대는 육로로 히다스페스강과 아케시네스강의 합류지점에 재집결했다. 알렉산더 일행은 바다와 강의 신들에게 의례적인 제의를 올린 다음 B. C. 326년 11월 드디어 출항했다.  인더스강을 내려오는 길은 위험했고 힘들었다. 사람들과 소형배들 모두 급류와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단순한 순항이 아니라 군사원정이어서 더욱 문제가 컸다. 알렉산더는 도중에 만나는 주민들을 모두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는 기항할 강기슭을 발견하면 그곳 인도인의 항복을 받아 냈고 그들은 평화협정을 맺고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대규모 함대에 기가 꺾여 모든 지역에서 싸우기도 전에 항복해 온 것은 아니었다.  히드라오테스강 중류 지역에 살고 있던 말리족과, 아케시네스강과 헤시드루스강 하류 사이에 살던 옥시드라크족은 알렉산더에게 맹렬하게 대항했다. 무자비한 정복전쟁이 불가피했다. 그는 몇 개 부대를 보내 말리족의 영토를 포위했다. 요새 밖에 있던 말리족은 기습을 받고 전멸했다. 성채 안에 남아 저항하던 말리족 2, 000명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히드라오테스강을 건너려다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알렉산더의 부관인 페이톤은 다른 도시로 피신한 말리족도 모두 노예로 삼았다. 성채 안에 남아 방어하던 한떼의 말리족도 전멸되었다. 그 가운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었다.  유격대가 도망치는 자들을 쫓아 들판을 달려갔다. 마지막 마을을 점령한 후에-알렉산더는 그곳을 포위 공격하다가 중상을 입었다-병사들은 "인도인을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겨우 탈출한 말리족들은 대표를 파견해 항복할 의사를 전했다. 이에 겁을 먹은 옥시드라크족도 항복했다.  신드, 즉 인더스강 하류에 있는 계곡을 정복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벌써부터 주로 승격되어 필리포스와, 알렉산더의 장인인 옥시아르테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출항에 앞서 알렉산더는 인더스강과 아케시네스강의 합류지점에 알렉산드리아시를 건설했다. 또 다른 알렉산드리아시는 얼마 후 식만지 1, 000개를 합쳐 소그드족의 땅 위에 건설했다. 그리고 무시카노스왕이 사는 수도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는데, 그 후 무시카노스가 승려계급인 브라만의 사주를 받아 들고일어났다. 알렉산더는 곧바로 그의 왕국을 징벌할 원정대를 보내고 거기에 새로운 수비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무시카노스는 결국 죽었다.  강 좌안에는 강을 따라 도시들을 건설했다. B. C. 325년 1월, 알렉산더는 마침내 인더스강 삼각주의 수도인 파탈라에 자리를 잡고 거기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로 되돌아갈 여행준비에 돌입했다. 첫번째 식민지는 크라테레스에게 맡겼는데, 그의 임무는 군대 일부와 코끼리들을 아라코시아와 드랑기아나를 거쳐 카르마니아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볼란 고개를 지나 아라코시아 수도인 칸다하르 요새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알렉산더는 자기의 병사들을 이끌고 약속지점에서 그와 합류하기로 했다. 나머지 군대는 파탈라를 기점으로 연안을 거슬러 올라가 페르시아만을 거쳐 수로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조선소에서는 낡은 배를 수리하고 새 배를 건조하는 망치소리가 드높았다.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올 때 이미 제독자리에 오른 네아르코스가 수로를 따라 귀환길에 오른 부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네아르코스는 크레타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마케도니아로 '귀화'한 인물이었다. 알렉산더의 오랜 친구로서 B. C. 334년 이키아 지사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회고록-아리아누스의 <인도지>에 인용되어 있다-에서 네아르코스는 겸손을 가장한 문테로 자신이 배에 오른 병사들과 수부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알렉산더가 자신을 선택했노라고 기록했다. 정말로 그는 항해 도중 겁에 질린 병사들을 여러 차례 안심시켰을 것이다. 몇 달 후에는 페르시아만 한가운데서 함대가 지중해의 귀여운 돌고래와 판이하게 다른 고래떼와 마주치자 병사들은 또다시 공포에 떨었다.  장서리 항해에는 물자 보급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생필품을 확보하고 물을 비축해야 했다.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병사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행군이었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는 연안에서 네아르코스 뒤를 따라가면서 물자를 보급해 주기로 했다.  B. C. 325년 8월 말에 출발한 그는 '바다 위에서 애타게 물을 찾을 군대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서' 삼각주 근처의 해안에 우물을 파게 했다. 그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우물을 판다든가 교역장소와 정박지를 미리 알아보면서 항구가 어디에 있는지, 지나가는 길에 네아르코스 함대에 제공해 줄 수 있는 물품들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서' 해안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함대 외에도 알렉산더가 먹여 살려야 할 자신의 병사만 해도 1만 명에서 1만 2, 000명에 이르렀고 거기에 딸린 부녀자들의 수도 수백 명에 달했다.  게드로시아에서 알렉산더 일행을 별로 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을 참지 못한 병사들이 네아르코스 함대에게 제공할 생필품을 훔치는 말썽까지 생겼다. 이 같은 물자 부족으로 알렉산더는 그동안 수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물자가 풍족한 카르마니아-크라테레스와 합류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해서야 살아 남은 병사들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네아르코스는 해안, 정박지, 작은 섬들을 답사하고 해안가의 모든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물자가 풍부한 고장이 어디인지를 탐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계절풍을 이용하기 위해 10월이 되기를 기다렸다.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한 것이 아니라 매일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항구에 들렀다. 수병들은 그곳에서 알렉산더가 남겨 놓은 물과 물고기, 때로는 밀저장소를 발견하고서 행복에 겨워했다. 대개 그들은 '생선을 먿는 사람들'의 가난한 나라에서 특별요리로 치는, 이크티오파게스라는 생선사료로 키운 양고기를 꾸역꾸역 삼키며 지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끔 약탈도 했지만 수확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기껏해야 생선가루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영양섭취도 제대로 못하고 피로에 찌든 네아르코스 함대는 토착민들과 싸워야 했다. 알렉산더에게 끈질기게 저항한 전력이 있는 오리트족을 만나 그들이 해안에 구축한 방어진지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카르마니아의 호르무즈에서부터는 다시 물자가 풍족해졌다. 함대는 그곳에서 알렉산더 군대와 합류한 뒤 유프라테스강까지 가기 위해서 또다시 출항했다. 그때부터 항해는 항해서의 손에 맡겨진 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페르시아만의 페르시아 쪽 연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잘 정비된 항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제 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정복전쟁에서 자리를 비운 지 6년, 알렉산더는 제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임명한 지사들과 관료들 중 대다수가 직무태만에 빠져 잇거나 직위를 남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탓이었다. 이제 알렉산더의 최우선 목표는 정복한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보물창고와 금고관리를 맡았던 마케도니아인 하르팔레스는 왕의 노여움이 무서워 서둘러 바빌로니아를 떠나 버렸다. 그는 용병 6, 000명을 거느린 채 실리시아로 갔다가 후에는 그리스까지 피신했다. 그는 5, 000탈란트를 가져갔는데 그중 일부는 2년 뒤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항거할 때 사용되었다.  알렉산더는 반마케도니아 폭동을 응징하는 의미에서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왕으로 자처하던 메디아인 바리아크세스를 처형시켰다. 한편, 크라테레스는 폭동혐의가 있는 오르다네스란 자를 체포했다.  지사들과 점령군 지휘관들 가운데서 메디아 장군인 클레안드로스, 시탈케스, 헤라클론이 신전 약탈, 옛 묘지 도굴, 메디아 귀족여인들에 대한 폭행 등 만행을 저지른 사실이 메디아 주민들과 그 병사들의 입을 통해 낱낱이 고발되었다. 그들 중 헤라클론은 수사의 신전을 약탈한 죄로 고발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알렉산더로서는 일벌백계로 본보기를 보여 주어, 지방귀족들이나 다른 모든 지사들-그는 아직도 이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에게 자신의 위상과 의도를 충분히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피정복국가의 세도가들이 집단으로 들고일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왕이 상호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다시 펴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또다시 알렉산더는 파사르가다이와 페르세폴리스에서 잠시 머물렀다.  아리아누스의 기록을 보면 이때 알렉산더는 B. C. 330년에 페르세폴리스 왕궁을 불태운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B. C. 325년 왕은 페르시아 귀족과 백성들에 대하여 매우 상징적인 일련의 조처를 취했다. 파사르가다이에서 신성모독자들이 파헤친 키루스 대왕의 무덤과 석관을 보고는 그것들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묘지를 지키는 일을 맡았던 승려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자백을 하지 않아 결국 풀려났다. 알렉산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페르시아 대왕의 후계자로 보이려고 애썼다. 심지어는 임신한 페르시아 여인들에게 금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는 풍습까지 부활시켰다.  B. C. 331년 임명된 페르시아 지사가 죽은 이후 이 지역은 왕이 위임하지 않았는데도 자의적으로 뒤를 이은 페르시아인 오르크시네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갑부인 오르크시네스는 자신이 키루스 대왕의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하지만 그는 '신전과 왕의 무덤을 털고 수많은 페르시아인을 멋대로 처형시켰다'는 죄목으로 페르시아인에게 고발당하여 처형되었다.  B. C. 334년 1월, 네아르코스와 알렉산더는 수사에서 다시 만났다. 바로 거기서 왕은 페르시아만을 향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B. C. 324년 2월 수사, 알렉산더의 결혼피로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 풍습에 따라 왕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주 두 명과 혼인을 했고 그의 측근 수십 명도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최고 귀족 출신 여인들과 결혼했다.  페르시아의 관습에 따라 결혼식은 합동으로 거행되었다. 화려한 피로연이 베풀어졌고 호화롭게 치장된 천막 안에 모인 신혼부부들은 일체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과 페르시아, 메디아 귀족계급 간의 긴밀한 결합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란 귀족들과 협력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알렉산더의 측근들과 병사들 대부분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를 다스리기 위해서 오르크시네스 대신에 자신의 '동료들'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리족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적이 있는 페우케스타스를 지사로 임명했다. 새 지사는 '전 백성이 매사에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 알렉산더의 지시에 따라 페르시아말을 쓰고 페르시아옷을 입게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원주민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페우케스타스는 이런 원칙에 너무나도 충실했기 때문에 B. C. 316년 알렉산더의 후계자가 그를 파면시키려 하자 페르시아 귀족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대변자를 통해 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복종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많은 마케도니아인은 수사에서의 강제결혼에 충격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페우케스타스의 이 같은 결단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란의 기마병들이 '동료들'이란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고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 친위대와 페르시아 친위대를 똑같이 거느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알렉산더가 박트리아에서 선발하여 마케도니아식으로 훈련시킨 3만 명의 이란 청년들이 수사에 도착했다. 게다가 이 젊은 징집병들은 열병식에서 숙련된 자질을 보임으로써 당당하게 왕에게 포상을 받았던 것이다.  알렉산더의 신봉자들은 이를 지나친 처사로 간주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마케도니아인은 페르시아인, 이란인과 동화되는 과정에서 결국 승리자인 자신들의 특수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의기소침해졌다. 사실상 이 위기감은 실제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널리 확산되어 나갔던 것 같다. 그 시기에 현직에 있던 이란 출신 지사는 겨우 세 명에 불과했지만 오해는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몇 주일 후에 위기가 닥쳤다.  티그리스강 유역의 오피스에 군대가 집결하자 알렉산더는 고참병들과 부상병들을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자기들을 버리고 동양에서 뽑아 온 병사들에게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속단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병사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경우 늘 그랬듯이 왕은 자신의 천막으로 물러 나와서 페르시아인에게 더 큰 호의를 보였다.  그 효력은 곧바로 나타났다. 마케도니아인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자신들을 굽어 살펴 달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사와 축제를 한판 벌이며 다시금 화합을 다졌다. "알렉산더는 무엇보다도 페르시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서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마케도니아인이었다. 페르시아인과 정치적 협력을 추진하면서도 마케도니아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군대와 화해한 알렉산더는 아라비아 원정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가 실행에 옮길 일은 아라비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이집트를 출발하여 카르타고와 로마를 공략한 뒤, 서쪽으로 해서 그리스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이 죽은 뒤에 발견된 문서를 통해 사실임이 밝혀졌다. 어쨌든 그가 아라비아, 다시 말해서 페르시아만의 아라비아 쪽 연안을 점령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B. C. 324년 초, 그는 바빌로니아로 돌아오자마자 실제로 페니키아에서 배를 건조시켜서 그것들을 분해시킨 채로 유프라테스강에 있는 탑사쿠스까지 옮기고 바빌론에 계획적으로 건설한 항구까지 실어 나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천 명의 수부들과 사공들이 페니키아와 에게해 연안지방에서 동원되었다.  아리아누스는 알렉산더의 목표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왕은 페르시아만 연안 지역과 그 주변 섬들을 모두 식민지로 삼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지역도 페니키아만큼 번창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항해준비는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만의 양쪽 해안을 통제하면서 바빌로니아의 저지대와 아라비아, 인도를 잇는 수송망을 장악하려는 경제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원정에 앞서 그 나라의 지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야 했다. 첫번째 정찰대는 아르키아스가 지휘했는데 그는 티로스섬에서 더 이상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드로스테네스가 이끈 두번째 원정대는 아라비아 반도의 일부를 돌아갔다.  세번째 원정대의 선봉에 선 히에론은, B. C. 512년 다리우스1세의 함대가 홍해에 있는 나일 운하를 통해 페르시아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일강부터 수사까지 항해하며 개척해 놓은 길을 이용해서 아라비아를 한 바퀴 돌아 이집트까지 가는 임무를 맡았다. 히에론은 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네아르코스 함대가 귀환길에 발견했던 갑, 즉 페르시아만 입구에 있는 오만 반도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함대 전체의 출항일은 B. C. 323년 6월로 정해졌다.  이 수도에서 저 수도로, 수사에서 바빌론으로, 바빌론에서 엑바타나로 옮겨 다니면서 알렉산더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는 온갖 분야에 개입해야 했다. 세무관들에게 지시를 하고, 함대가 순항할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흐름을 조절하고, 도처에서 밀려드는 대사들을 접견하고, 판결을 내리고, 공문서를 보내는 일을 감시하고, 성가실 정도로 자주 벌어지는 연회와 축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했다.  B. C. 324년 가을, 그는 엑바타나로 갔는데 거기서 가장 절친한 친구 헤페스티온이 죽었다. 왕은 슬픔을 가눌 수 없었지만 원정을 생각하면 출발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는 복종을 거부하는 루리스탄의 코센족을 급습했다.  B. C. 323년 초봄, 그는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그리스 사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복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알렉산더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테네를 필두로 여러 도시들이, 지사가 해산시켜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된 용병들을 스스럼없이 끌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해에 알렉산더가 올림피아에서 선포한 칙령 때문에 그리스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 칙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알렉산더왕이 추방당한 그리스인에게 고하노라. 우리는 그대들이 추방당한 데 대하여 책임이 없지만 그대들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책임지겠노라.” 이 칙령은 망명자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은 반면 그리스 도시들, 특히 아테네에서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데모스테네스의 부추김을 받은 아테네인은 호시탐탐 마케도니아에 저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B. C. 323년 6월 3일, 연회장을 나서던 알렉산더는 고열로 쓰러졌다.  6월 22일과 23일을 아라비아 원정 출발일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그는 일단 누워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열기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 했다. 총지휘를 맡은 네아르코스가 최종 준비상태에 관해 보고를 하러 왔다. 왕은 계속해서 정사를 돌보았다. 그의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은 나흘 간 궁에서 끙끙 앓다가 6월 13일 저녁, 절망에 빠진 병사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자연사한 것 같다.  곧바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졌다. 알렉산더에게는 간질병이 있는 이복형제 이외에는 다른 직계후손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절친한 측근들이 왕위를 놓고 싸우게 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왕이 숨을 거두면서 자신에게 왕의 봉인이 들어 있는 반지를 건네주었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하지만 우선 장례를 치르는 일이 급선무였다. 페르시아 관습에 따라 제국 전역에 복상령이 내려졌다. 왕의 유해를 마케도니아의 옛 수도인 아이가이까지 옮기기 위해 상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은 마지막 길을 떠나는 자신들의 왕에게 경의를 표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대로 정복자는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묻혔기 때문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10년 동안 페르시아 대왕과 그의 군대들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들이 잡아 놓은 틀 안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업을 달성했어도 빈틈은 있었다.  정복자가 죽자 왕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체제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왕위는 표면적으로는 정신박약아인 알렉산더의 이복동생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알렉산더와 로크사네의 유복자에게 공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늙은 안티고노스가 왕의 칭호를 얻은 것을 시작으로 B. C. 306년 이후 그의 경쟁자들이 잇달아 왕위를 차지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단일성이라는 신화는 붕괴된 지 오래였다.  중동에서는 B. C. 3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왕들이 등장하여 알렉산더의 대이란 정책을 폐기했고 이란 고원의 대부분 지역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셀리우코스 왕조는 비록 이란과 마케도니아와 두 이민족 간의 결혼으로 성립된 왕조였지만 다른 이웃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왕국이었다.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이 권력의 상층부와 공식어를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스 문명은 박트리아와 인도까지 전해졌지만 이러한 문화 확산은 그곳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비교적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서부, 더 정확히 말해서 페르시아에서는 이미 이란 제국의 부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란 제국은 사산 왕조와 더불어 대왕의 새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기록과 증언  알렉산더를 다룬 역사가들  코린트 조약 원문  알렉산더의 문서 관리인인 에우메네스가 보관한 대부분의 문서들은 소실되었다. 알렉산더의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편지들과 연설문들은 가짜거나 제멋대로 본인에게 유리하게 재구성된 것들이다. 진품으로 보이는 옛 기록은 아시아와 유럽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돌에 새겨진 채 발견된 것들밖에 없다. B. C. 338년 코린트 동맹에 가입한 민족들과 도시들에 부과된 조항들을 새긴 비문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제우스, 게(가이아), 헬리오스, 포세이돈, 아테네, 아레스 등 모든 신들과 여신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나는 평화를 수호할 것이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와 맺은 조약들을 파기하지 않을 것이다.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살상을 목적으로 무기를 들지 않을 것이며 맹세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어떤 농간이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않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도시라면 그것이 주둔지이든 항구이든 간에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필리포스와 그 후송들의 왕권을 전복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가입국들이 평화를 맹세하는 한 그곳의 법질서를 뒤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약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면 다른 사람이 조약을 위반할 때는 무력을 써서라도 응징할 것이다.    알렉산더가 키오스 주민에게 보낸 편지  소아시아의 키오스에서 발견된 또 다른 비문에는 페르시아에 다항 반격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 뒤에 섬을 마케도니아령으로 귀속시킬 조건을 정하기 위해서 B. C. 332년 키오스섬에 보낸 편지가 새겨져 있다.  키오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은 모두 돌아오게 될 것이며 키오스에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다. 법령집편찬자를 선발해 법을 제정하고 또 수정하여 민주주의와 망명자들의 귀환에 걸림돌이 되는 사례가 없도록 할 것이다. 법안의 수정은 알렉산더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키오스인들은 3단노선 20척의 비용과 장비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이 3단노선들은 그리스 함대가 우리를 위해 항해하는 동안 이용될 것이다. 야만인들에게 도시를 내어 준 사람들과 도망간 자들은 평화조약을 맺은 모든 도시들에서 추방당할 것이며 헬라스 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체포할 것이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헬라스사람들의 시네드리온(동맹에 속한 여러 도시국가들의 협의회:역주)에 나와 평사를 받을 것이다. 옛날에 추방당한 사람들과 현 도시거주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우리가 판결을 내릴 것이다. 키오스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 때까지 알렉산더 군대가 주둔하게 될 것이다. 이 주둔군은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존재로서 키오스 사람들 송으로 유지될 것이다.    아리아누스 <그리스 용병대의 원정기>  로마 시대에는 장군들과 황제들이 알렉산더의 영광을 끌어다. 자신을 피장하려 들었으므로 몇몇 작가들을 오늘날에는 소실된 기초자료들을 토대로 정복이야기를 썼다. 기원후 2세기 니코메디아 출신 아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고급관리였다. - 는 알렉산더에 관해 소상하게 썼다. 그는 자신이 알렉산더에관한 책을 쓰기로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렉산더는 아킬레스가 호머를 통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알렉산더는 어떤 분야에서는 운이 좋았지만 그렇지 못한 분야도 확실히 있었다. 그의 공적이 산문으로든 운문으로든 그에 걸맞은 판사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히에론, 켈론, 테론을 비롯하여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들을 찬양한 시들은 수두룩했지만 알렉산더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알렉산더의 영웅담은 과거의 하찮은 사실보다도 더 알려지지 못했다. 키루스대왕과 함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을 치러 아시아 내륙으로 1만 대군이 원정을 간 사실, 클레아르크와 함께 포로가 왼 병사들이 겪은 고통 따위를 예로 들 수 있다. 알렉산더는 원정대를 그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았고 페르시아 대왕앞에서 도망친 적도 없으며, 단순히 바다로 내려가는 길에 방해가 된 적들을 이긴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리스인이나 야만인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횟수나 규모면에서 그처럼 혁혁한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쓰게된 동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알렉산더의 행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내가 적당하지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에게 이런 평가를 내리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내 이름을 밝힐 필요도 없다. 가람들이 내 이름을 모를 리도 없지만 내 조국과 가문, 고향에서 애가 맡을 수 있었던 관직을 굳이 언급할 이유도 없다. 성장한 이후로는 내 저술들이 나의 조국이었고, 가문이었고, 관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들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하나인 알렉산더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리아누스는 자신의 저술원칙을 이렇게 설명했다.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가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에 관해 쓴 그들의 저술에서 의견이 일치되는 구절들이 있다. 나는 이 구절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견을 보이는 곳에서는 가장 믿을 만하고 수록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해석을 택할 것이다. 알렉산더에 관한 책은 이미 여러 종이 있고, 그리고 알렉산더만큼 서로 상반되는 증언들과 역사가들의 상이한 평가를 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는 사실의 기록이라는 면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다. 알리스토불로스는 원정기간 동안 알렉산더를 수행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원정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왕으로서 거짓말을 최대의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모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 책을 썼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할 필요도, 그렇게 해서 이득을 볼 것도 없었다. 수록할 만한 가치도 있고 근거도 있다고 판단되는 다른 역사가들의 주장도 더러 채택했지만 이것들은 단지 알렉산더에 관한 일반적인 소문 정도로만 참작하였다. 그토록 많은 역사가들의 뒤를 이어 나까지 이 책을 쓰려고 한다는 사실에 놀랄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기 전에 먼저 그 역사가들의 저술을 낱낱이 읽어보고 나서 내 책을 숙독하기 바란다.    플루타르크 <알렉산더의 생애>  보이오티아 태생으로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동시대인인 플루타르크는 자신이 심리주의 역사학을 택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알렉산더 대왕과, 폼페이우스를 무찌른 카이사르의 생애를 이 책에 기술하면서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된 사실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서문을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이 두 사람의 널리 알려진 행적들을 하나하나 소상하게 기술하는 대신 간추려 쓴다고 해서 독자 여러분은 트집을 잡지 말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는 역사가 아닌 전기를 쓰고 있으며 위대한 행동에서 미덕이나 악덕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소한 사건, 말 한마디, 농담 한마디가 수천 명이 전사한 전투나 조직적인 전쟁, 포위 공격보다도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화가들이 다른 신체부위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드러나는 표정과 얼굴생김새를 보고 실물에 가깝게 그려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사적인 사건들과 전쟁 같은 거창한 부분은 다른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 인간의 내면의 특징을 포착, 이 특징을 기준으로 개개인의 삶을 재현해야 할 것이다.    디오도로스 <역사총서>, 제 17권 서문  카이사르, 아우수스투스 황제와 동시대인인 디오도로스는 알렉산더의 정복을 다룬 그의 <역사총서> 제 17권 서문에서 자신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전권인 제 16권에는 아민타스의 아들인 필리포스가 즉위하여 운명할 때까지의 일생이, 24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의 다른 왕들, 민족들, 도시들의 이야기와 함께 담겨 있다. 이 책은 알렉산더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사건들을 중심으로 왕의 행적 전체를 담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그 시기에 사람이 사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두 다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시종일관 연속성을 갖고 요약된 형식으로 제시하면 사람들이 더욱 쉽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왕은 위업을 완수했다. 뛰어난 지성과 불굴의 용맹을 갖춘 그는 유사이래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느 왕보다도 훨씬 뛰어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12년 만에 그는 유럽 여러 지경과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이는 옛날의 영웅들과 반신들이 누렸던 영예를 그에게 돌려도 좋을 만큼 대단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왕이 이룩한 성공적인 업적 가운데 어떤 특정한 것을 서문에서 먼저 다루지 않을 것이다. 사실들을 조목조목 다루기만 해도 그의 위대함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부계로는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고 모계로는 에아시드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렉산더는 그의 조상들의 명성에 걸맞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이 책의 연대기적인 짜임새를 제시한 다음 우리 역사의 주제인 사건들도 넘어가려 한다.    이븐 할둔 <세계사>  14세기 아랍의 지배를 받던 안달루시아의 역사가 이븐 할둔은 역사기술 방식에 대해 반문했다. '무카디마'라고도 불리는 <프롤레고메네스>라는 저서에서 그는 알렉산더가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사실에 대하 선배역사가가 비사실적인 이야기를 기술한 방식을 문제삼았다.  보고자의 말만 듣고서 비현실적인 일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알마스우디는 바다괴물이 알렉산더 대왕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큰 나무궤짝을 만들고 왕은 그 안에 유리로 만든 상자를 넣은 다음 그 속에 들어가 바다 밑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바닷속에서 왕은 이 악독한 괴물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뭍으로 올라와 괴물의 모형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앞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울 주요 건물들의 정면에 세우게 했다. 바다 위로 나온 괴물은 제 모습과 똑같은 구조물을 보고는 도망쳤다. 그리하여 무사히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전모이다! 황당무계하다고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알렉산더가 유리로 만든 궤짝에 직접 들어가 파도 치는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왕은 그런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지 않는 접이다. 만일 그같은 미친 짓에 뛰어드는 왕이 있다면 제 무덤을 파는 격이 될 것이다.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정령의 형태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다. 정령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정령의 수많은 머리에 대해 묘사해 놓은 것을 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제는 알마스우디의 이야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뿐 아니다.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임을 증명해 주는 구체적인 사실이 있다. 즉, 궤짝 속이라 하더라도 물 속에 잠수한 사람이 호흡하기에는 공기가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적기'가 곧바로 뜨거워지고 폐액과 심장박동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신선한 공기가 부족해서 곧 죽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공기가 통하지 않는 목욕탕에서 질식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물이나 땅속 깊이 내려간 사람들은 독한 냄새가 나며 공기가 뜨거워지고 환기가 불가능할 때는 곧 질식사하게 된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물고기가 폐 속의 균형을 유지하기에는 공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열이 나기 때문에 물고기 체액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물은 차갑게 마련이다. 그런데 물 밖에서는 대기가 덥기 때문에 대기가 동물들의 정기를 압도해 물고기는 곧 죽는다. 급사도 그런 연유로 일어난다.    플루타르크 <알렉산더의 운명에 관하여>  알렉산더가 죽자 후계자들은 왕궁과 군에서 예술가들과 역사가들을 동원, 미담으로 치장된 알렉산더 신화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로마시대 플루타르크가 저술한 작은 책을 보면 이 신화가 로마군의 정복활동에 맞게 재편되어 인기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더는 야만인들과 미개인들에게 진보와 문명을 가져다 준 위대한 정복자의 전형이 되었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아르케실라스, 카르네아드 같은 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끊임없이 힘겨운 전쟁을 치르며 야만족의 군주들에게 문명을 전해 주고 미개인들의 나라데 그리스식 도시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법도 없고 법과 평화의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교화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알렉산더의 말과 행동, 그리고 교화정책을 통해 진정한 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알렉산더가 편 교화정책의 결과를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히르카니아인은 결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라코시아인은 땅을 경작하는 법을 배웠으며, 소그디아인은 부모를 죽이지 않고 공격하는 법을, 페르시아인은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고 어른으로 모시는 법을 배웠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철학의 힘이라 하겠다. 이것 덕분에 인도인은 그리스의 신들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고 스키타이인은 시체를 먹지 않고 매장하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문명을 전하자 그곳에서는 호머가 널리 읽혔고, 페르시아인, 수시아나인, 게드로시아인의 자녀들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낭송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야만인들의 나라에 70개가 넘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시아에는 그리스의 법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거의 야생동물에 가까운 그들의 미개한 생활약식을 타파해 나갔다...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민족들이 그의 지배를 받지 않은 민족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전자가 정복자의 손에 의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데 반해 후자는 비참한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민족들은 무력으로 굴복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리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메소포타미아는 셀레우키아를, 소그디아나는 프로프타시아를, 인도는 부세팔리아를, 카프카스는 그리스풍의 도시들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는 동시에 악습도 몰아내었다. 최악의 인간들이 최고의 인간을 만남으로써 그의 영향을 받아 새로 태어난 것이다...  원정의 제일목표는 철학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일신상의 부귀와 영광을 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화해와 평화, 공동의 이해를 심어 주자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는 강도떼처럼 아시아를 휩쓸고 다니지 않았다. 후에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그랬듯이, 그 이전에 이오니아에서 트레레족이 그랬듯이 피정복국을 약탈한 욕심이 없었다. 반대로 알렉산더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정부밑에 있기를 바랐으며 모두가 한 나라의 국민임을 일깨워 주려 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과거의 알렉산더와 현재의 알렉산더  19세기 중엽 이래 프랑스의 중등부 학생들은 알렉산더가 오리엔트에서 쌓은 업적을 배우게 되었다. 모든 개론서는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문명의 혜택을 피정복국가들에게 나눠준다는 식의 식민지 개척을 합리화하는 긍정적인 측면들, 이를테면 평화, 민족들 간의 화해, 도시화의 무역을 발달, 정복자들의 선진문화의 확산 등을 강조했다. 우리는 거기서 플루타르크를 비롯하여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서술했던 판에 박힌 듯한 설명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빅토르 뒤뤼 <그리스사 개론>  고대사 전문가이자 나폴레옹 3세 때 교육부 장관을 지낸 뒤로는 1858년 자신이 쓴 <그리스사 개론>에서 알렉산더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알렉산더의 죽음(B. C. 323)  얼마 전부터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어 알렉산더는 정신적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불안을 쫓기 위해 자제심을 잃고 연회의 쾌락에 탐닉하였다.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도 연회에서 수차례 정신을 잃었다. 바빌론 같은 풍토에서 그런 무절제한 생활은 사형선고나 진배없었다. 마침내 장시간에 걸쳐 진탕마시고 노는 대향연에 여러 차례 참석한 끝에 그는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마도 팔라코파스늪의 답답한 공기 때문에 병을 얻었던 것 같다. 열흘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가 열하루째 되는 날인 B. C. 323년 6월 13일 그는 숨을 거뒀다. 몇 주전에 그리스 대표들이 와서 그를 신으로 추켜세우며 찬미했는데도 말이다.  알렉산더는 33세가 채 못 되어 죽었다. 그때까지 무력으로 업적을 쌓아 왔다면 이제는 성군으로서 예지를 발휘할 차례였는데 두번째 임무가 너무 벅찼던 것일까? 하지만 그가 정책을 세우면서 보여 준 몇 가지 사실들만으로도 그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 짐작이 간다.  패배자들은 정복자의 배려로 그의 계획에 동참한다.  국가들을 서로 연결하는 무역이 대규모로 발달한다. 알렉산더가 새로 개통시켰거나 반듯하게 닦은 도로들, 그리고 항구와 조선소, 알렉산더가 갖추러 놓은 야영지들과 숙박소들이 바탕이 된다.  옛날에는 금고 속에서 쓸모 없이 낮잠을 자던 어마어마한 재화가 정복자의 손에 들어가 건전하게 유통되면서 산업이 활기를 띤다.  그리스 문명이 수많은 식민지들을 통해 제국 곳곳에 전파되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중 알렉산드리아만이 유일하게 부와 사사의 거대한 물결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냈다.  다양한 민족, 사상, 종교가 한데 뒤섞이고 어우러져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게 될 것이다.  알렉산더는 바로 이런 것들을 준비해 놓았고 그런 연유로 2, 000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 젊은 승리자의 이름 앞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페르 <고대사>  후대의 개론서들에서도 똑같은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저자들은 고대 작가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알렉산더라는 인물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부정적인 측면들은 제외시키거나 부정하였다. 근대의 정치가들과 작가들(나폴레옹과 몽테스키외)이 내린 평가 역시 대개 그를 지지하는 내용이다.    알렉산더의 원정 결과  알렉산더는 매우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그는 말년에 저지른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들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절대권력의 무절제한 행사와 그에 수반된 추종세력의 아첨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구자들의 서열에 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전술면에서 그가 한니발, 나폴레옹,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세보다 뒤떨어졌다고 해도 그의 원정에 역대 이름난 원정들과 비교해 못한 점도 없었고, 그리스군 같은 불굴의 군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러한 원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그가 무력한 적들만 상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나라와 산과 강, 그리고 사막을 지나 행군할 때 자연의 온갖 장애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장애물이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나 전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이 장애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는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별 이득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왕이 죽은 뒤에는 장군들끼리의 불화로 분열되고 말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리스 문명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박트리아에도 그리스 왕국에 있었고, 사막의 경계지점에 있는 에티오피아 메로웨에도 그랬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을 접목시키려고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헬레니즘이 소실된다 해도 인류에는 남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정복한 모든 민족들에게 애도를 받은 정복자는 모든 민족들에게 애도를 받은 정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 왕권을 뺏긴 왕족이 그가 죽자 눈물을 쏟을 정도라면 그 약탈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마치 오로지 각 나라의 성군이 되기 위해서 정복을 한 것처럼 보인다. 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지배를 받은 민족들은 옛날에 그에게 적대감을 품었던 사실이나 자신들의 무능함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플루타르크는 기록했다. 바로 그것이 그가 편 새 정치의 위상과 알렉산더가 고도의 통찰력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서 자신의 종족, 그때까지 받았던 교육, 그 시대와 군대의 편견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원정은 특히 무역과 자연과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리학에 한 획을 그었다. 알렉산더는 세심하게도 군대가 지나가는 나라들에서 그때까지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동물류의 표본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다. 이로써 이 위대한 철학자는 오늘날에도 과학관찰서의 걸작으로 꼽는 <동물사>를 쓸 수 있었다. 알렉산더의 원정으로 복숭아나무, 레몬나무, 배나무 같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식물들이 유럽에 전해져 곧바로 이식되었다. 또한 알렉산더의 지시에 따라 히에론은 아라비아를 둘러보았으며 헤라클리데스는 카스피해의 일부를, 오네시크리테스는 인도 일부를 탐험했다.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네아르코스의 여행기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가뇰 신부 <고대사>  식민지 개척주의에 좀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가뇰 신부는 그렇다고 해서 알렉산더의 업적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수많은 작가들이 서슴지 않고 '탐험원정' 이라고 바꿔 말한 알렉산더의 정복이 지닌 '과학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독특한 관점을 토대로 드망종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리학>을 썼다.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알렉산더는 소년기를 지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을 이끌고 지구상의 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에게는 그런 행위가 단순한 침략, 돌발적인 결단에 불과했을까? 그렇지 않다. 매사를 치밀하게 계산하였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으며 현명하게 처리하였다. 알렉산더는 위대한 전사인 동시에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입법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영광의 절정에 올랐을 때 머리가 돌아 버렸거나 타락해 버렸다. 처음에는 트라야누스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으나 끝에 가서는 네로 같은 심성에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평가는 인간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 말은 너무 심한 것 같다. 알렉산더가 네로 같은 심성에 엘라가발루스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가 자존심과 분노 때문에 저지른 숱한 잔혹행위들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으며 또한 그의 명예를 훼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의 선량함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가 죽자 그의 병사들은 물론 그들 못지 않게 비탄에 잠긴 피정복자들이 그를 애도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는 결코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명망이 높은 다리우스 3세의 모친 시시감비스는 그의 포로였음에도 그가 죽자 더 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 정도로 선량했던 군주였다. 시시감비스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머리에 베일을 쓰고 먹지도 않고 빛을 보려고도 하지 않다가 닷새만에 숨을 거두었다.  또한 알렉산더는 전혀 엘라가발루스 같은 품행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특히 그가 무절제하게 연회와 향연을 베풀었다고 비난하는데 사실 그런 것들은 병사들의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 열었기 때문에 더 흥청거렸다고 하겠다. 그는 미풍양속을 지키고 예의를 숭상한 위대하고도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고대의 영웅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32세게 세계를 누비며 정복한 사람이 어찌 향락적일 수 있었겠는가.    업적  알렉산더의 업적은 그가 의도했던 일과 이루어 놓은 일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의도했던 일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도 다른 민족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정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정복한 뒤에는 그들의 복지에 무관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의 행동의 이면에는 모든 민족들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합병하고, 그리고 그들 고유의 풍습을 폭넓게 수용하고 토착종교와 국가적인 기념물들에 깊은 경의를 표함으로써 모든 이들을 포용하려는 의도가 깃들여 있었다. 그리하여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제국에서 무역과 산업을 발달시킴으로써 복지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런 목적에서 그는 정복이 끝나면 매번 도시와 항구를 건설하고 운하를 파는 등 대규모사업을 벌였다. 이런 일들을 추진하면서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루어 놓은 일  32세에 죽음으로써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들을 통합하지도 정리하지도 못했고 그가 세운 원대한 계획도 대체로 초안단계에 그쳤다. 하지만 그가 세계를 무대로 남긴 행적은 발길 닿는 곳마다 도처에 파괴와 죽음을 뿌리면서 한순간 흘러가 버리는 그런 격류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이다. 그의 주요 업적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알렉산더가 새로 개척했거나 닦아 놓은 도로, 항구, 야영지들 덕분에 유럽과 오리엔트 간에 무역이 크게 발달했다.  둘째, 정금이 풍족하게 유통되면서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알렉산더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실금고안에서 잠자고 있던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유통시켰다.  셋째, 가는 곳마다 수천 군데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그리스어와 그리스문명이 인더스강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스라는 틀을 깨고 그 속에 담겨 있던 사상들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넷째, 과학, 특히 천문학, 지리학, 자연사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알렉산더는 원정기간 동안 자연과학자, 기하학자, 역사가, 철학가, 예술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과학발전에 기여를 했다. 아시아의 오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희귀한 동식물 표본들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의 제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역사에 흥미있고 명예로운 페이지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리스가 단결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끔찍한 파벌싸움과 내분에 휘말린 상태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업적이었다.    사령관 레이노 <위대한 식민지 경영자 알렉산더> 주간지 23권 제 3호 1914년 4월 11일  사령관 레이노는 독일과의 전쟁을 앞두고 자신이 위대한 프랑스의 모범으로 삼은 알렉산더의 행적에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자고 국민들에게 당부했다.  물론 알렉산더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군인이요 지도자였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곧 마케도니아의 서사시에 나오는 빛나는 등대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알렉산더에게는 전쟁이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는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알렉산더는 아시아와 유럽을 화해시키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오리엔트 문제를 해결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파괴한 도시보다 건설한 도시의 수가 더 많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서 헤라트, 칸다하르 등은 오늘날까지도 아시아의 주요도시로 꼽힌다.  알렉산더는 탐험가였으며 오늘날처럼 정부의 업무효율을 높여 주는 통신망이 없던 시대에 살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만큼 뛰어난 위정자였다고 하겠다. 그는 아드리아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자신의 과업을 원수하고 공고히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는 알렉산더의 원정이 지닌 이런 특성을 좀더 자세히 살피면서 2, 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식민지개척의 교훈을 이 마케도니아 영웅에게 물어 보자.  그는 페르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을 화해시켜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남의 권리를 존중해 주었고 나아가 여자들에게 300년 동안 기독교가 설교해 온 기사도다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시행한 보호령제도는 알렉산더의 식민지 경영방식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  유사이래 문명화된 강대국들은 늘 약소국들을 희생시켜 가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 왔다. 식민지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그것을 둘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패배한 민족을 예속시키고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짓밟고 파괴하는 야만적인 방법이 있다. 이 같은 야만적인 방법은 투르크족이 피정복국가들에서, 스페인인이 멕시코에서, 미국인이 인디언에게 사용했다.  둘째, 첫째 방법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식민지의 주민들을 협력자로 끌어들여 그들 자신의 영토를 개척하는데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꾸준히 시행해 왔고 숱한 시행착오 끝에 가장 현명하고 항구적인 식민지문제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 바로 이 두번째 방식이다.  알렉산더는 사전경험이 없었음에도 처음부터 이 원칙을 적용했다. 피정복민족들을 직접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그들의 행정기구를 개편하지 않고 자신이 오기 전에 책임자로 있었던 사람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그들 곁에 감독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고문을 배치해 두었다.  이렇게 해서 그 지역주민들은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겪지 않았고 새로운 행정관습과 법에 적응할 필요도 없었다. 알렉산더가 지배하기 전에는 관리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그런 자들은 최고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모두에게환영을 받았고 다리우스이든 알렉산더이든 상관없이 복종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다.  알렉산더는 공권력을 확보해 두었다. 그에게는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수많은 병력들이 있었다. 또한 그가 닦은 도로망은 경제적인 수익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치안유지를 맡은 군대의 임무수행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이 군대는 마케도니아 장교들의 지휘하에 페르시아 출신 장군들이 통솔하는 토착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제국 내의 국가들에 포로스처럼 왕의 자리에 그대로 앉혀 두고 옛날에 누리던 권한과 특혜를 똑같이 인정해 주면서 자신은 그를 지도하고 통제하기만 했다.  알렉산더가 구상한 보호령제도는 이처럼 지도층을 가능한 한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피정복민족의 사회조직과 행정기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B. C. 4세기의 행정관습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성실한 근무자세를 요구하면서 그렇지 못한 관리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이민족에게 관대한 전통과 기독교의 유산인 교화를 유산으로 이어받은 우리는 수많은 단계와 모색을 거쳐 가장 공정한 식민지 경영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우리가 그 방식을 모로코에서 시행하게 될 것이다.    자크 베노이스트 메생 '드로이젠의 <알렉선더 대왕>' 불어판 서문  국가원수 숭배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을 찬미했던 자크 베노이스트 메생은 1935년 프랑스에 소개된 J. G. 드로이젠의 <알렉산더 대왕> 번역본 서문에서 알렉산더의 통치방식이 주는 교훈을 적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고대의 서사시처럼, 그리고 인간의 가장 고귀한 열정인 희생정신과 모험심이 충만한 전설적인 인물의 이야기처럼 읽을 수 있다. 또한 19세기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권위 있는 역사의 집대성으로서 몸젠, 부르케르트, 칼라일 혹은 미슐레의 저서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만한 우수한 저술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을 가장 효과적으로 읽는 법은, 기진맥진한 역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시기에, 한 비범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위업의 표본을 이 책속에서 찾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알렉산더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개인숭배' 의 요소가 드러날 것이다. 코린트 회의는 이에 대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협정과 제도를 과신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민중을 단 한 사람의 개인이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강력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원한다면 국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영도자를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 영도자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물이지 역사가 인물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진실을 일깨워 줄 것이다.    그루세 <뱃머리에 선 인물들>  1949년 역사철학자 르네 그루세는 오늘날 제3세계 지역에서 반식민지 운동이 처음 일어난 사실에 주목하여 알렉산더의 원정이 주는 교훈을 찾았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무대로 정복활동을 현 최초의 영도자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콥트족이 살던 나일강 계곡, 아람족이 살던 시리아와 메소코타미아, 이란족이 살던 이란을 완전히 그리스화 하지는 못했다. 아나톨리 왕조나 파르티아 왕조의 화폐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리스화가 진행되었다는 과장된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여러 세기가 흐르자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사라지며 토착문화가 전면적으로 재등장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조, 쿠샨조, 사산조의 화폐들은 점차 다시 '야만화'되어 갔다. 시리아와 메소코타미아에서도 셈어 계통의 명사들, 산이나 강, 도시의 옛 이름들이 '식민지'에 유입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식 지명들을 물리치고 다시 사용되었다.  물론 우리가 마케도니아의 정복이 가져온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개혁에 속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최초로 대제국이 저지른 총체적인 식민지화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식민지화란 결국 모든 가능성을 모색한 식민지 개척자의 노고에서 피식민지국가가 이득을 다 취한 뒤에 언젠가는(철학자에게 수세기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 )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우울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식민지 개척자가 원주민들을 모두 없앰으로써(진지하게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말을 입에 담은 민족들도 이런 일을 가끔 저질렀다. )그런 후퇴를 막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알렉산더처럼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은 결코 허용할 수 없는 방식이다. 이란과 이집트에서 그는 그것과는 정반대 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페르세폴리스에 방화한 것은 예외적인 경우로, 유목민들이 지나가며 문명에 대하여 저지른 숱한 범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지스카르 데스탱 <르 몽드>지, 1979년 3월 4~5일  1979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멕시코의 지식인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자신이 알렉산더 대왕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알렉산더를 '개념론적인' 국가지도자 계열의 창시자로 꼽았다.  정치가들, 국가지도자들과 지식인들 사이의 관계는 늘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였으며 나는 이것을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꼽고 있다. 정치가들이나 국가지도자들은 사실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그룹은 내가 모험가라고 부르는 부류이다. 이는 그들을 경멸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토대로 정치행위를 구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내가 만들어 낸 용어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아주 명예로운 모험가들이 있다. 이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직관하며 상황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행동을 해 나간다.  두번째로 개념론적인 정치가들이 있다. 이들은 정치행위를 통해서 자국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과 그 시대의 국제사회에 대한 구상을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 후자의 범주에는 수많은 명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행동하기에 앞서 심사숙고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이 계열의 창시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결합을 꿈꾸었던 알렉산더를 꼽는다.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시대에 자신들의 정치행위가 정치, 사회생활을 체계화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범주에 속하고싶다. 어쨌든-이것은 고무적인 징조인데-이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국가지도자들, 즉 성찰과 행동의 변증법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기분이 더 좋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시대의 지성인들과 대화와 만남을 자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알렉산더의 후계  바빌론에서 알렉산더가 갑작스럽게 운명함으로써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감도는 어려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분명한 후계자가 없었던 탓에 작고한 왕의 주요부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야심을 드러내었다.    유스티누스 <필리포스 이야기>  첫번째 방안으로 페르티카스에게 권한을 넘겨주었다.  알렉산더의 장군들은 왕위에 오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용맹스러웠고 왕처럼 존경받고 있었다. 그들은 용모가 수려했고 키가 컸으며 힘과 지혜가 넘쳐 그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선발된 사람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유사 이래로 마케도니아만큼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는 없었다. 필리포스와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는 그들을 뽑을 때 전사라기보다는 그들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선발하는 것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지휘관들이 고만고만한 장군이 아니라 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으므로 그런 부관을 거느린 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 하겠다. 그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운명의 신이 그들로 하여금 용맹을 겨루게 하여 서로를 파멸시키지 않았더라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수많은 제2의 알렉산더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죽음은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동시에 마음의 평화를 앗아갔다. 그들은 모두 한 자리를 열망했고 서로를 두려워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거느린 병사들도 두려워했다. 병사들은 거침없이 행동했고 그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는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장군들은 그들끼리 권한이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에 알력이 심해졌다. 아무도 만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월등히 뛰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정을 논의하기 위해서 무장한 채로 궁에 모였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의 왕비인 로크사네가 출산할 때까지 회의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임신 8개월이 넘었으니 분만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를 아버지의 후계자로 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멜레아그레스는 언제일지도 모를 출산때까지 결정을 유보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태어난 자손들도 있으므로 사람들이 굳이 왕자의 탄생을 기다리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원한다면 바르시나의 몸에서 태어난 헤르쿨레스란 아들이 페르가몬에 있고, 젊은이를 원한다면 군영에 알렉산더의 이복 아우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가 있지 않은가. 아리다이오스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필리포스의 얼굴을 봐서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왕자이다. 게다가 로크사네는 페르시아 출신이므로 마케도니아인들의 손에 망한 페르시아 혈통을 왕좌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유복자에 대해 별 언급이 없었던 걸로 보아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 주장의 요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아리다이오스의 어머니가 라리사라는 천한 궁녀 출신인데다가 그가 간질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름만 왕이지 실제 권력은 다른 사람이 잡을 까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왕일 뿐인 자격미달의 사람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선왕과 같은 자질을 갖추고 있어 손수 전투를 지휘하고 지방을 통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페르디카스가 내놓은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로크사네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후계자결정을 유보하기로 하고 그 아기가 아들일 경우에는 레오나테스, 페르디카스, 크라테레스, 안테파트로스를 왕자의 스승으로 임명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노라고 맹세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국의 중심역할을 유지하려는 보병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이탈했다. 이 첫번재 내분으로 알렉산더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가 권력을 잡았다.  기마병들이 이 결정에 승복하자 의결과정에서 자신들만 제외된 데 격분한 보병들이 알렉산더의 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왕의 직속 친위대를 구성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아버지 필리포스의 이름을 따르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마부대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탈레스와 멜레아그레스, 두 장군을 대표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두 장군은 그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병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바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병사들 편만 들었다. 지도자가 생기고 방향이 정립되자 반란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보병들은 기마병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무장한 채로 궁으로 몰려갔다. 이들의 의도를 눈치챈 기마병들은 재빨리 도시를 빠져 나와 진을 치고 이번에는 그들이 보병을 위협했다. 장군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아탈레스는 반대파의 우두머리인 페르디카스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무장을 하고 있었고 직접 암살자들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페르디카스는 대담하게도 직접 보병들을 찾아가 회의를 열어 그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말해 주었다. "그대들이 누구에게 적대행위를 하는지 생각해 보시오. 페르시아인이 아닌 마케도니아인에게, 적이 아닌 동족의 가슴에 무기를 들이댄 것 아니오.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대들과 피를 나눈 혈족, 그대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온갖 위험을 같이했던 전우가 아니오. 그대들은 적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오. 자기들을 굴복시키고 모욕한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고소해하겠소. 이것은 그대들이 죽인 적들의 제단에 피를 바치는 격이 아니오.”  페르디카스는 뛰어난 웅변술을 발휘하여 이렇게 연설을 마쳤다. 보병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충고에 따르기로 하고 만장일치로 그를 지도자로 삼기로 했다. 그리하여 보병들과 화해하기 위해 소환된 기마병들은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동의했고 로크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에게는 왕국의 일부를 넘겨주기로 했다. 그들은 위대한 알렉산더를 자신들의 결정의 증인으로 삼기라도 하듯 회담장 한가운데에 그의 시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디오도로스 <역사총서>  이 일이 수습되자 페르디카스는 지사들의 통치구역을 재편하는 일에 착수했다. 후계자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인사들은 요직을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최고통치권을 부여받은 페르디카스는 장군들과 회의를 했다. 그는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이집트를, 라오메돈에게 시리아를, 필로타스에게 실리시아를, 페이톤에게 메디아를 넘겨 주었다. 에우메네스는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를 거기에 딸린 땅과 함께 할당받았다. 그곳은 알렉산더가 다리우스3세와 전쟁을 치를 때 상황이 여의치 못해 복속시키지 못한 땅이었다. 안티고노스는 팜필리아와 리키아, 그리고 현재 '대프리지아' 라고 하는 곳을 차지하게 되었고 아산드로스는 카리아를, 메난드레스는 리디아를, 레오나테스는 프리지아를 차지했다. 지사들의 영지도 마찬가지로 재편되었다. 유럽에서는 리시마크가 트라키아와 에욱신 다리 부근의 토작민들의 땅을 받았고 안티파트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근방의 식민지들을 차지했다. 할당이 유보되었던 아시아의 지사들이 지배하던 지역은 그대로 기존의 통치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탁실레스와 포로스도 알렉산더가 정해 준 대로 그들의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왕국들에 인접한 지사의 영지는 탁실레사왕에게 맡겼다. 카프카스 근방 지역은 박트리아 사람인 옥시아르테스-알렉산더는 그의 딸 로크사네와 결혼했다-에게 주었다. 또한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는 시비르티오스에게, 아리아와 드랑기아나는 스타사노로에게 넘어갔다.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는 필리포스에게,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는 프라타페르네스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페르시다는 페우케스타스에게, 카르마니아는 트레폴레메스에게, 메디아는 아트로파테스에게, 바빌로니아는 아르콘에게. 메소포타미아는 아르케실라오스에게 넘어갔다. 한편, 셀리우코스는 '동료들' 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가장 영향력 있는 군지휘관으로서 헤페스티온이 맨처음에, 그 뒤를 이어 페르디카스가 역임한 바 있다.  알렉산더가 세운 마지막 계획-그의 사후 기록이 발견되었다-은 실현 불가능했다.  페르디카스는 왕의 서류들을 넘겨받았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것으로 보이는 헤페스티온의 화장용 분서대의 완공을 비롯하여 박대한 예산이 필요한 거창한 사업계획들이 들어 있었고 터무니없는 예산지출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알렉산더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인의 총회에 안건을 회부했다.  주요계획은 다음과 같다. 카르타고인과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연안에 사는 민족들, 그리고 이베리아의 경계에서 시칠리아섬 사이의 연안지방들을 치기 위해서 페니키아, 시리아, 실리시아, 키프로스섬에서 3단노선들보다도 무거운 전함 1, 000여 대를 건조시킨다. 또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연안에서 지브롤터 해협의 커다른 바위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다. 이 원대한 해상원정이 끝나면 적당한 곳에 항구와 무기고를 건설하고 각각 1, 500탈란트의 비용을 들여 호화로운 신전을 여섯 개 짓는다. 그리고 도시들을 여러 단위로 묶고, 주민들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주시킨다. 민족들 간에 혼인을 장려하고 이웃하여 사는 풍토를 마련함으로써 두 대륙간에 전반적인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고 혈연관계를 맺도록 장려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전들은 마케도니아를 비롯하여 델로스, 델피, 도도네에 새운다. 디온에는 제우스 신전을, 키로스에는 아테네 신전을 세운다. 또한 일리온(트로이)에도 아테네 여신을 기리는 세계 최고의 신전을 세운다. 그리고 부왕 필리포스를 위해 세계 7대 건출물로 꼽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가운데가 가장 훌륭한 것을 본떠 무덤을 짓는다.  이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마케도니아인은 여전히 알렉산더를 존경했지만 무리한 계획이라고 평가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알렉산더의 후계자들 앞에는 숱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박트리아로 이주한 시민들은 지중해를 다시 보고 싶다고 호소했다, 유럽에서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단결한 그리스 주요 도시들이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제국의 가장 큰 적은 장군들 간의 불화였다. 왕의 유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페르디카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분쟁은 이를 여실히 보여 준다. 왕의 시신은 바빌론에서 방부처리가 되었다.  왕의 시신을 석관 속에 모신 지도 엿새가 지났다. 하지만 정치문제에만 온통 관심일 쏠려 있어서 정작 장례의식은 뒷전이었다. 메소포타미아만큼 태양이 뜨거운 곳도 없을 것이다. 그 폭염 속에서 전혀 그늘이 없는 들판에 서 있으면 어떤 생명체라도 살아 남기 힘들 것이다. 태양과 하늘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모든 것을 녹여 버릴 정도니 말이다. 우물이 워낙 드문데다가 그나마 있는 것도 주민들이 약삭빠르게 감춰 놓았다. 누구든 우물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우물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마침내 왕의 친구들이 시신에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가 생겨 관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시신은 전혀 부패하지 않았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기 나라의 관습대로 시신을 방부처리하는 일을 맡은 이집트인과 칼데아인들은 처음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왕의 시신에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이윽고 이토록 미천한 인간들이 신과 같이 훌륭한 분의 몸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라고 신과 사람들에게 기도를 올린 다음에야 비로소 시신을 닦을 수 있었다. 황금을 씌운 석관에는 향기가 감돌았고 알렉산더의 머리 위에는 행운을 갖다 주는 부적들을 놓았다.    디오도로스<역사총서>  그런뒤 페르디카스의 부관은 아리다이오스를 대신하여 이 호화로운 장의수레를 마케도니아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다이오스를 설득하여 정복자를 이집트땅에 묻는 데 성공했다.  거의 2년을 소모한 끝에 아리다이오스는 왕의 시신을 바빌론에서 이집트로옮겼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에 대한 조의의 표시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까지 마중나왔다. 시신을 넘겨받자 그는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시신을 곧바로 아몬 신전에 있는 오아시스로 옳기지 않고 알렉산더가 건설한 최고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안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규모로 보나 건축미로 보나 알렉산더의 명예에 손색이 없는 묘지를 만들게 했다. 시신을 땅에 안치시키고 왕을 기리는 장엄한 제사를 올린 다음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신들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덕을 입게 되었다. 사실 그는 너그럽고 쾌활한 성품이어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고,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려했던 왕실군대라 할지라도 다음 원정 때 그를 기꺼이 도와주곤 했다.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모두들 기꺼이 그를 구해 주려 했다. 신들도 그의 됨됨이와 친구들을 생각하는 우정에 탄복한 나머지 어떤 위험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그를 살려냈다.    아리아누스<변천사>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죽는 바람에 주피터의 아들로 일컬어지던 그의 시신은 장군들이 그의 제국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동안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당연히 누리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죽은 자에게 베풀어 주도록 명령받은 의무인 매장의 예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알렉산더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지 30일이 지났을 때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에선지 텔미소스 출신의 아리스탄드레스가 마케도니아인들이 모인 한가운데로 나와 이렇게 연설했다. 신들이 자기에게 계시를 내리기를, 알렉산더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똑같이 가장 행운이 따르는 왕이니 그의 영혼이 살던 집인 그의 육체를 받아들이는 땅은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며 결코 황폐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쟁이 벌어졌다. 굳건하고 영속적인 권세를 보장할 이 보물단지를 각자 자기 왕국으로 가져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몇몇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의 시신을 몰래 훔쳐서 서둘러 이집트로 옮기게 했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그 도시로 말이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이 납치사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페르이카스는 곧바로 약탈자를 추적하였다. 알렉산더를 추모해서라거나 그의 시신에 대한 중요적인 경외심 때문이 아니라 아리스탄드헤스의 예언을 듣고 몸이 달았던 것이다.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따라잡자 두 사람 사이에 시신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옛날 트로이에서 에네의 모형을 놓고 성벽 밑에서 벌어진 전쟁의 재판이었다. 호머가 그에 대해 읊조리기를 아폴론이 그것을 에네 대신 영웅들 사이로 보냈다고 했던 것이다. 페르디카스를 물리친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본뜬 모형을 만들어 왕의 복장을 입히고 호화로운 장례용 장식품들로 치장한 뒤 금, 은, 상아를 채운 관속에 넣어 페르시아의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한편, 진자 시신은 아무도 모르는 실로 은밀히 옮겼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의 가짜 시체와 관을 실은 수레를 손에 넣자 전쟁을 치른 대가를 얻었다고 믿고 추격을 그만두었다. 지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프톨레마이오스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해진 뒤였다.    디오도로스<역사총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알렉산더의 문서관리인인 에우메네스가 취한 조치를 보면 모두들 작고한 왕의 권세를 차지하려는 데 여념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러한 세상물정을 꿰뚫어본 에우메네스는 현명하게 처신했다. 정세가 곧 대 변동을 일으킬 것임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기 자신은 왕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방인인데 자기의 명령을 받던 마케도니아인들이 과거사를 들먹이며 이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 상태였다. 또한 군대를 계속 통솔할 자들은 큰일을 꾸미고 싶어하는 오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간파했고 머지않아 지신이 멸시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리라는 것과 결국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우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의 명령에 복종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주인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그는 "왕의 유언장에 적힌 대로 자신의 몫인 500탈란트를 받지 않겠다. "고 선언했다. 그로서는 어떤 종류의 지시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금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그런 상황에서 그가 그런 지위에 있었던 것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왕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원정대를 따라다니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방랑생활을 견딜 지신이 없었다. 마케도니아인이 누리는 국민적 특권이 없는 외국인이라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그는 꿈속에서 기이한 환영을 보았는데 그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실 그것이 화합과 전체 이익에 폭넓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알렉산더대왕이 상전의 모습 그대로 왕의 의상을 걸치고 업무를 보며 장군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정력적으로 정사를 돌보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했다. "그런 까닭에 왕실금고에서 금을 꺼내 황금옥좌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요. 거기에다가 왕관과 왕홀, 그밖에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놓아둡니다. 그리고 새벽에 장군들이 모두 모여 왕을 기리면서 향을 피우고, 왕이 살아서 왕국을 다스리는 것처럼 옥좌를 둘러싸고 앉아 회의를 열었으면 합니다.”  그의 말은 대체로 호응을 얻어 곧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왕실금고에는 황금이 넘칠 만큼 많았다. 호화로운 천막이 완성되자 그 안에 왕관과 왕홀, 알렉산더가 늘 사용하던 무기들을 들여놓았다. 거기에 향로를 설치하고, 장군들은 모두 금으로 만든 상자 속에서 최고급 향을 꺼내 피우며 알렉산더를 신처럼 경배했다. 이 의식을 위해 많은 자리를 배치했는데 그곳에느 장교들이 자리잡고 앉았다. 그들은 회의를 열어 잇달아 발생하는 긴급한 문제들을 논의했다. 에우메네스는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자신이 다른 장군들보다 나을게 없다며 겸손을 보였고 진정한 우애를 표시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질투하지 않았고 장군들도 호감을 갖게되었다. 한편, 사람들은 알렉산더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마쳤고 마치 신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모두들 희망으로 가득 찼다.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의 '은으로 된 방패'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정책의 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고 왕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실가족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바빌론에 있는 공인된 두 왕- 필리포스 3세와 어린 알렉산더 4세 -이 가장 위험한 처지였다. 필리포스 3세는 B. C 317년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에게 살해되었고 그녀 또한 이듬해 마케도니아의 주인인 카산드로스에게 암살당했다.  올림피아스는 도망치기는커녕 전 마케도니아인 앞에 당당히 나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카산드로스는 그녀가 왕비의 신분을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고 알렉산더와 필리포스가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을 상시킨다면 백성들도 거기에 현혹될까 우려했다. 그래서 잘 훈련시킨 병사 200명을 올림피아스의 집으로 보내 왕비를 암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왕비의 집으로 쳐들어가긴 했지만 막상 올림피아스를 보자 고귀한 혈통을 지닌 왕비 앞에서 주눅이 들어 아무런 위해행위도 하지 않고 도망치고 말았다. 왕비를 암살한 것은 그녀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무모들이었다. 그들은 왕비를 암살함으로써 카산드로스의 환심을 샀고 복수에도 성공했다. 왕비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혹은 자신이 여성임을 내세워 애원 한마디 하지 낳았다. 이렇게 해서 그 당시 누구보다도 위세당당했고, 에페이로스왕 내오프톨레마이오스의 딸이자,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던 알렉산더의 누이이며, 앞서 유럽을 통치했던 그 어떤 왕보다도 막강한 권력을지닌 필리포스의 아내이자, 빛나는 공적을 수없이 나긴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B. C 311년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더와 로크사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처치하려고 한다.  로크사네의 아들 알렉산더가 성장해감에 따라 마케도니아 내에서 완자를 풀어 주어 아버지의 왕국을 넘겨주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겁을 먹고 왕자를 감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글라우키아스에게 로크사네와 어린왕자르 ㄹ암살하고 시신을 아무도 오르게 매장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이제 카산드로스, 리시마크,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는 왕위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이상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각자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과 도시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다스릴 영토는 그들로서는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플루타르크<데메트리오스>  알렉산더가 죽은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은 B. C 306년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칭한 장군들 중의 하나인 안티고노스가 왕의 칭호를 쓰자 그의 주요 경쟁자들도 그를 까라했다. 이 '왕들의 해'를 맞아 이름뿐인 단일제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관용과 인정을 베풀어 키프로스에서 거둔 빛나는 대승리의 전과를 더욱 드높였다. 적의 시체를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고 포로들을 석방했으며 약 1, 200벌에 달하는 갑옷들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여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부친에게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그는 종신 가운데 가장 아첨에 능한 밀레투스 출신 아리스토데모스를 파견했다. 그는 키프로스에 도착하자 배를 육지 가까이 대지 못하게 하고 닻을 내리게 한 뒤 모두 꼼짝 말고 배에 남아 있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자기혼자 보트에 올라타고 안티고노스에세 갔다. 안티고노스는 전황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아리스토에모스가 온다는 소식에 더욱 안절부절 못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하인들과 친구들을 여러 차례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아리스토데모스는 그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고 굳은 얼굴로 입을 꼭 다문 채 천천히 걸을 뿐이었다. 초조한 나머지 안티고노스가 그를 맞으러 궁 입구까지 나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곳까지 아리스토데모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최고통치자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안티고노스왕 만세! 우리는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이겼나이다. 키프로스섬을 차지하고 적군 1만 6, 800명을 포로로 잡았나이다. "이에 안티고노스가 대답했다  "그대에게도 만세를 불러 줘야겠군. 하지만 그동안 우리를 괴롭힌 벌은 면치 못할 것이오, 이 낭보를 전해 준 보상을 받으려면 좀 기다려야 할 것이오.”  군중이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를 왕이라 부르며 경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안티고노스의 친구들은 당장 그를 왕위에 앉혔고 안테고노스도 자신의 아들에게 왕이란 호칭을 써 가며 편지를 쓰고 왕관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집트인도 질세라 프톨레아마이오스를 왕이라 불렀다. 전쟁에서 졌다 해서 자신들의 긍지마저 꺾이는 게 싫었던 것이다. 이 돌발적인 사건은 이를 시기한 다른 알렉산더의 후계자 지망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리시마크가 왕관을 썼고 셀레우코스 또한 이전에는 야만인들 앞에서만 왕 행세를 하더니 그리스인들과 면담한 후에는 리시마크를 따라했다. 카산드로스만이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이 문서에서나 구두로 자신을 왕이라 불러도 그들을 상대할 때 예전과 같은 형식을 고수했다. 이 새로운 호칭으로 그들의 지위가 격상되었음은 물론 의복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더욱 당당했고 자긍심도 높아졌다. 마치 무대의상을 걸치면 목소리, 거동, 말씨까지 변하는 비극배우들처럼 그들은 왕이라는 호칭으로 그들의 생활양식과 타자와의 관계에 무게와 권위를 더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더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펴게 되었고 예전처럼 자신들의 권한을 자의적으로 제한해 가며 신하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다루는 일이 없어졌다. 한 아첨꾼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가 세상을 뒤바꿀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전략가 알렉산더, 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더가 페르시아군과 치른 정규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가우가멜라 전투이다. 고대 작가들은 모두 이 전투 직전의 양편 군대의 배치상태와 군단의 이동에 대해 정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상세한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알렉산더를 수행한 역사가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불로스가 번역한 페르시아 원문서를 참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 사이에 고대의 '도상연습'이라는 논쟁의 빌미가 되는 모순점들과 모호한 부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우가멜라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알렉산더가 '우익 쪽으로 움직임에 따라'(혹은 '우익으로 움직이는 척했기 때문에', 그리스어는 그가 어떤 전략을 선택했는지 모호하게 표현한다. ) 전투가 가열되었다. 이를 보자 다리우스3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카메도니아군이 페르시아인이 편편하게 고르지 않은 땅 쪽으로 몰려가 낫달린전차라는 우세한 전투장비가 쓸모 없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그는 좌익-박트리아인 1, 000명으로 구성된 기마대와 퀸투스 쿠르티우스가 언급한 스키타이인 2, 000명으로 추측된다-의 전위부대에게 알렉산더가 직접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포위하여 전전하지 못하게 길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방어태세를 갖추고 공격을 재개하기 위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페르시아군을 격퇴시키라는 임무를 맡겨 메니다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겨우 기마병 400명으로 구성된 메디나스의 연대는 우세한 적의 기마병을 맞아 오합지졸처럼 후퇴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아레체스의 척후병들과 아리스톤의 보병대에게 베테랑 용병들로 구성된 클레안드로스의 보병대와 합동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전략을 보강한 마케도니아 연대가 별인 두번째 반격이 첫번째와는 달리 성공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의 좌익을 지휘하던 메소스는 8, 000명에 이르는 나머지 박트리아인을 모두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격퇴당했고 치열한 격전 끝에 전투대형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이때 마케도니아군의 측면연대가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 들어오자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는 동안 페르시아군의 낫달린전차는 마케도니아군 우익을 공격하는데 별 쓸모가 없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발라크로스 출신 투층수들과, '동료들' 을 비호하기 위해 앞쪽에 포진해 있던 아그리아족 출신 병사들 중 반쯤 남은 병사들에게 참패당했다.  이로써 전투는 결판이 났다. 알렉산더는 측면 공격을 멈추고 곧장 페르시아 진영으로 돌진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려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다리우스 3세가 파견한 일부 기마병들이 움직이면서 페르시아군의 좌익 중앙에 틈이 생겼다. 바로 이 틈을 이용, 알렉산더는 전술을 바꿔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동료들' 로 구성된 기마부대와 보병 밀집부대의 일부를 쐐기대형으로 배치한 뒤 다리우스 3세 쪽으로 돌진했다. 상황이 역전되자 다리우스 3세는 도망쳐 버렸다.    A. M. 디바인 <가우가멜라 전투, 전략과 원전에 관한 비판> '고대세계'지 1986년 8월  나는,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실전에 사용된 이 쐐기대형식 진군을 보고 퀸투스 쿠르티우스와 디오도로스는 마케도니아군이 전투 조반부터 비스듬히 진군한 것으로 기술했으리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투를 기록하는 데 이 두 역사가가 동일한 원전을 참조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바와는 관련이 없다. 퀸투스 쿠르티우스와 디오도로스 자신이 보고서를 작성할 때 혼동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들이 이미 왜곡된 자료를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오류가 처음에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처음의 대형이 어떠했든 마케도니아군의 초기대형은 실제로 비스듬한 모양이었다. 아리아누스가 말한 '쐐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두 개의 비스듬한 대열이 '사다리꼴로 배치'된 연대들의복잡한 대형을 가리키고 있다는 건 중요한 사실이다. 이 거대한 쐐기대형에서 좌익은 폴리페르손 대대에까지 미치는 히파스피스테스와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로 구성된 '페제타이로이'라는 보병들로 구성되었고 '동료들' 로 구성된 귀족중심의 기마부대는 훨씬 길이가 짧은 우익과 정점부분에 배치되어 있었다. 알렉산더는 왕실기병대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지휘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기 위해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마케도니아 우익의 측면수비대-마찬가지로 비스듬한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가 베소스가 지휘하는 박트리아 출신 기마대와 접전을 벌이기 위해서 바깥쪽, 즉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군사지식이 전혀 없고, 특히 실전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토록 복잡한 전술상황을 기술할 때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혼동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난 번에 전투를 논의하던 중 나는 알렉산더가 쐐기대형에 의존했다는 결정적인 자료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얻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알렉산더에 관하여 칼리스테네스가 정리한 정사가 더 신뢰할 만한 원전이다. 물론 그는 알렉산더의 행적을 직접 지켜보았지만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을 낱낱이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마케도니아군 좌익의 움직임에 대해 그가 달아놓은 주석은 확실히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비스듬한 대형' 전술과 나아가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덕분이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아누스는 그의 보고서를, 적어도 그것의 전체적인 내용을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중앙에서는 쐐기대형을 이룬 알렉산더의 우익이 페르시아군 선두에 생긴 틈을 향해 돌격함에 따라 마케도니아군의 제 1열에도 틈이 벌어졌다. 폴리페르손 대대 전체가 페르시아군 중앙의 틈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동안 그렇게 빨리 진군할 수 없었던 시미아스는 좌익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주러 갔다. 적군의 중앙에서 빠져 나온 인도와 페르시아 출신 기마대가 이런 군사들의 이동으로 생겨난 틈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 기마대는 마케도니아의 창고에 이르자 그곳의 수비대를 습격하여, 갇혀 있던 포로들을 풀어 주었다. 이를 본 제 열의 마케도니아 보병대는 전에 받은 명령대로 약탈자들을 격퇴시켰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좌익 쪽으로,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마자이오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이 우익에서 전면공격과 포위공격을 동시에 감행했다. 파르메니온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자 알렉산더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기마병들을 보냈다. 우리가 가진 자료의 기록과는 반대로 이 전갈은 전해지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파르메니온의 사자들이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에 이르렀을 때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데 전념했기 때문에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편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파르메니온은 원군 없이도 자신의 테살리아 기마대 덕분에 페르시아의 공격을 꺾을 수 있었다. 곧 이어 다리우스3세가 전쟁터에서 달아났다는 소문이 지칠대로 지친 페르시아군 우익에 전해지자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쳐 버렸다.  파르메니온 원조요청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알렉산더는 돌아왔다. 리코스강에서 다리우스세를 놓친데다가 해도 저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도중에 알렉산더는, 후퇴하면서 싸우고 있던 페르시아의 기마부대(파르티아인과 인도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와 마주쳐 혈전을 벌였다. 아리아누스에 따르면 전체 전투 중 바로 그곳에서 기마대가 가장 악착스럽게 공격해 왔다고 한다. 알렉산더의 기병대 소속 '동료들' 을 60명이나 죽이고 알렉산더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헤페스티온에게 부상을 입힌 뒤 살아 남은 페르시아 기마대는 마케도니아 기병대 사이를 돌파하여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군대가 완승한 것이 확실해지고, 그리하여 전쟁터에서 더 이상 얻을 영광이 없었으므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뒤를 다시 추격했다. 그사이 파르메니온은 계속 진군하여 페르시아 진영을 점령한 다음 적의 짐과 코끼리들을 차지했다. 알렉산더는 리코스강을 건너가 맞은편 강가에서 야영을 했고 자신의 기마병들을 자정까지 쉬게 했다. 자정이 되자 그곳에서 60km가량 떨어진 아르벨라를 향해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다리우스 3세를 붙잡아 전리품을 손에 넣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튿날 아르벨라에서 그는 실제로 페르시아인의 재물과 적의 전차를 발견했지만 그 안에 다리우스 3세는 없었다. 다리우스 3세는 결국 계속 도주하다가 자기 신하들의 손에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베르기나:필리포스 2세의 무덤인가, 필리포스 3세의 무덤인가  그리스의 고고학자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가 최초로 확인한 이후 베르기나의 세 무덤(1, 2, 3호)에 매장된 주인공들이 누구일까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N. G. L. 해먼드 <베르기나에 있는 왕묘를 확인해 주는 증거> '필리포스2세, 알렉산더 대왕과 마케도니아의 유산>에서  오늘날 유용한 자료들을 토대로 사실을 재구성해 보면 이러하다.  B. C. 370년 알렉산더1세는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후 왕으로 추존된 자기 혈통의 시조 아민타스3세의 유해를 묻기 위해 제 1호 무덤을 꾸몄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2세는 선왕들이 묻혀 있는 무덤들과 다른 자리를 택했다. 무덤근처에 피드나에서처럼 아민타에움이라는 성소를 세우고 거기서 신격화시킨 아민타스의 제사를 올렸다. 지금으로서는 아민타스가 화장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기록에 나오는 '수많은 뼈들'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화장되지 않았고 나중에 다른 인물들이 거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B. C.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알렉산더3세(알렉산더 대왕)는 여러가지 일을 정리하고 암살사건의 정황을 조사하느라 여러 주일을 마케도니아에서 지냈다. 그동안 필리포스의 무덤건설은 진척을 보았다. 알렉산더는 부왕의 무덤을 나중에 마케도니아에 건설될 어떤 무덤보다 더 큰 규모로 세울 계획이었다. 재판이 열리고 범인들이 가려졌다. 그런뒤 알렉산더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엄청난 부장품을 무덤 속에 넣어 "아버지의 장례에 심혈을 기울였다(디오도로스<역사총서>).” 왕을 모시는 내실은 내부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입구를 막았다. 알렉산더가 그리스의 정세를 신속하게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부속실을 완성하고 왕비의 유해를 안치할 자리를 마련하고 수많은 부장품들을 배치하는 일은 그의 부관이 맡았다. 암살자와 두 '공범' 의 창병과 말들은 화형당했다. 철, 청동, 상아, 금조각들로 둥근 천장을 장식했다. 암살자가 교수형에 처해졌다가 화형당한 곳에는 간소하게 정화의 불을 피웠다. 알렉산더는 신격화된 필리포스의 제사를 성소에서 올릴 수 있게 무덤을 제 1호 무덤 근처에 자리잡았다. 작은 봉분으로 제 2호, 제 3호 무덤을 만든 다음 그 위를 붉은 흙으로 큰 봉분을 만들어 뒤덮었다.  B. C. 321년, 알렉산더 3세의 시신이 이집트로 향하다가 방향을 돌렸을 때 마케도니아인들은 페르시아에서 거둔 전리품들과, 알렉산더와 그의 주요부관들의 조상들을 붉은 흙으로 만든 큰 봉분 근처에 세운 주랑 속에 넣어 두었던 것 같다. B. C. 316년,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3세), 에우리디케, 키나가 암살되자 카산드로스는 이들의 시신을 큰 봉분 바깥쪽 무덤에 묻었다. B. C. 310년, 알렉산더의 혈통으로서는 마지막 남자였던 알렉산더 4세가 죽자 붉은 흙으로 만든 큰 봉분의 안쪽에 있는 무덤에 매장했다. B. C. 336년과 310년 사이에 화장되지 않은 두 사람의 시신과 묘석이 이 봉분의 윗부분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이 아민타스 왕조에 합류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B. C. 310년 이후 성소의 불탄 곳에서 제사를 올리던 것이 중단되었다. 그 즈음, 아니면 그 이후에(연도는 발굴이 끝나야 확실해질 것 같다) 알렉산더가 필리포스를 기리기 위해 계획했던 것과 비견될 만한 큰 둔덕이 세워졌다. 이것은 이제껏 세력을 뻗쳤던 왕조, 즉 테메노스 가문 출신의 아민타스 왕조의 분파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P. 그린 <베르기나의 왕묘, 역사적 분석> '필리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과 마케도니아 유산' 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도자기, 유골, 건축양식의 연대가 불확실하고 글로 남아 있는 증언들을 서로 대조해 보는 가운데 미심쩍은 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P. 그린은 이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이다.  1981년 9월 현재까지 베르기나에서 발굴된 세 무덤에 매장된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는 잠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실 결정적인 새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이러저러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지금으로서는 유골과 도자기, 두 가지 중요한 소재들에 대해서 외부의 독자적인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불확실한 고증만 가지고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가설을 세우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마지막 발굴에 대한 보고와 외부의 기술적 확인이 없는 한 역사가가 이런 류의 알쏭달쏭한 고증사실을 놓고 단정적인 가설을 세우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더군다나 제 2호 무덤의 주인으로 너무 일찍부터 필리포스 2세가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었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럴 가능성이 너무 높아 사실상 대부분의 작업을 이러한 전제를 굳히는 쪽으로 고증하는 데 그쳤다. 필리포스 2세는 가설이 필리포스 3세라는 가설보다 유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일종의 기적이 일어나 필리포스의 이름이 명시된 비문이 나타나서 의문시되고 있는 필리포스의 신원에 대해 어떤 의혹도 남지 않게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