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대기근 지은이: 피터 그레이(장동현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장원영 제1장 거지의 나라? 1845년 이전의 아일랜드 당대의 인식이 관찰자 개인의 문화적 편견 때문에 변형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 도 진실은 담고 있다. 아일랜드는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가난한 사회였다. 1845-1850년의 대기근을 필연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대도, 세 가지 상호연관된 문제점이 없었다 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빈곤, 인구과잉, 그리고 감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라는 문제였다. 식민시대의 유산 12세기에 부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반란, 재산몰수가 잇따랐 고, 16-17세기에 영국의 지배력이 확대되면서 아일랜드 공동체의 발전은 중단될 수 밖에 없 었다. 아일랜드의 전지역은 파괴되었고,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땅 에는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17세기가 훨 씬 지난 뒤, 인구는 다시 늘기 시작했고, 1700년에야 겨우 200만이 되었다. 한편으로 카톨릭 지주들 대신 신교도 정복자들이 들어서면서 뿌리깊은 불신과 적대감이 쌓여갔다. 식민정책이 근대식 농업수단과 감자를 비롯한 새로운 작물을 소개해 어느 정도 혜택을 가 져다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복에 따른 무자비함은 그런 혜택과 상관없이 유해한 유 산을 남겨놓았다. 새로운 지주들이 일으킨 농업혁신은 환금성 작물과 수출용 가축의 생산 증가가 주목적이었고, 따라서 종종 소작인의 원망을 샀다. 문학과 대중문화 속에 살아 있는 게일어(아일랜드 언어)의 전통은 18세기 평온한 아일랜드의 표면 아래 감춰진 깊은 증오를 불태웠으며, 카톨릭 엘리트 계층의 박탈감과 하층민의 불만을 연결시켰다. 1691년 이후 영국은 몇 가지 형법 조항을 도입, 카톨릭 정신의 파괴와 개종을 유도했다. 카톨릭 교도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부정하는 이 법률은 그다지 실효를 보지 못했다. 교회 는 박해를 견뎌냈고, 신도들은 그 법률들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열악한 지위와 이방인 지주들의 본성을 깨닫게 되었다. 1741년의 기근 18세기의 아일랜드는 번영과 빈곤의 두 극단을 다 경험했다. 1690년 이후 번영을 누리다 가 172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흉년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은 감자에 더욱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739-1741년에 걸친 악천후로 감자농사 역시 망치고 말았다. 이것은 1845년 이전에 경험한 재앙 중 최악으로 약 240만 인구 가운데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1741년을 '블리아드하인 안 아이르(학살의 해)'라고 불렀다. 당대 사람들은 기근을 정치적 책임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기근구제는 국가의 의무라 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1741년 이후에는 오랜 기간 경제성장과 더불어 인구팽창이 따랐다. 경작지 혁명 1750년대 아일랜드의 농업경제는 대서양 횡단 식량무역의 개막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했 다. 소와 양 대시 낙농과 돼지사육이 번창했다. 인구도 꾸준히 증가했는데, 이것은 노동력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난 변화에 따른 반작용이기도 했다. 1770년대에는 경작지가 급속히 넓 어지면서 인구성장이 한층 빨라졌다. 인구팽창을 경험하던 영국이 곡물수입국이 되면서 곡 물가격이 상승했고, 이것은 아일랜드가 농업생산 증대에 박차를 가하는 한 가지 요소라 작 용했다. 더 많은 땅이 경작에 이용되었고, 감자의 이용 역시 많아졌다. 감자뿌리는 파종을 위해 땅을 갈아엎을 때 꼭 필요한 요소였고 소작인들의 식량으로도 요긴했다. 1792년과 1815년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곡물가격이 오르면서 이윤이 높아지자 농부와 지주 는 경작지를 더욱 넓혀 나갔고, 그 결과 건조하고 비옥한 동부에서 서부의 고지대까지 경작 지가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기계가 아닌 사람의 노동력이 주로 투입되었고, 임금보다는 토지 접근권이 주요 지불수단이었다. 신교의 기세와 반란 1760년대, 부유해진 영국계 아일랜드 엘리트층은 영국 지배자들에게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779-1783년 동안 여러 차례 헌법 개정이 있었으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 이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의 고집을 꺾고 그 조항을 관철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일 랜드 의회는 피트의 정책에 방해가 되었고, 피트는 완전한 정치적 통합이 필요하다고 확신 하게 되었다. 1790년대, 폭발 직전의 상황은 세 가지 흐름이 결합되어 일어났다. 첫째, 아일랜드인 연맹 급진주의자들이 의회 개혁을 요구했고, 이것이 거부되자 영국과 분리할 것을 주장했다. 둘 째, 카톨릭 교도들의 정치활동 재허가 요구가 날로 거세어졌다.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고무 된 탓이다. 1793년, 피트는 일부 카톨릭 소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의 기세'에 따른 반동으로 더 많은 양보를 할 수는 없었다. 셋째, 다양한 종교집단이 모인 얼스 터 지방에서 인구난과 정치적 소요가 일어나면서 종파분쟁이 발생했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 도 오렌지당과 카톨릭 수호당이 각각 정부와 아일랜드인 연맹에 통합되어 대립한 것이다. 1794년에 비밀결사를 이룬 아일랜드인 연맹은 프랑스와 연합을 맺고, 1798년 들어 봉기를 일으키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급진적인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망명을 떠나 아일랜드 의 정치문화에 낭만적 혁명전통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당파적 학살에 관한 과장된 소식들 은 카톨릭에 대하 반감을 더욱 부추겼고, 그 봉기지역 안에 사는 신교도 지주와 카톨릭 소 작농 사이에 놓여 있던 긴장은 더욱 높아갔다. 연합국가의 성립 1800년의 연합법에 따라 아일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가 통합되었으나, 연합국가 창설이 신 속한 해방-카톨릭 교도에게 의회의 구성과 공적 지위를 허용한다는-으로 이어지리라는 피 트의 약속은 왕과 영국 국내에 비등한 강한 반대여론에 부딪혀 이행될 수 없었다. 온건한 카톨릭 교도들의 탄원은 빈번히 거부당했고, 더블린 행정당국이 신교도 오렌지당과 연합하 면서 긴장은 더욱 팽팽해져 갔다. 급진적인 변호사 대니얼 오코넬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1823년 해방운동을 별이기 시작했 다. 그의 카톨릭 연합당은 공개집회를 열었고, 다달이 '카톨릭세'를 물고 있는 많은 사람을 결집했다. 오코넬은 시골 빈민들이 더 이상 농민과 작당하지 않고 전국적인 정치운동 세력 으로 통합되기를 바랐다. 항상 법을 준수하여 영국과 아일랜드 자유주의자들의 공감을 사고 자 노력한 오코넬은 이윽고 1826-1828년에 카톨릭 소작인들을 끌어들여 연이은 선거혁명을 이끌어냈다. 아일랜드에서의 정치위기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결국 항복하고 1829년 해방령 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해방령을 '카톨릭의 문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해결에는 데는 실패했고, 많은 빈민들이 그 해방령의 결과에 환멸을 표시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오코넬은 의회주의의 개 혁과 대중선동을 오가는 전략을 채택했다. 1830년대 초, 오코넬은 연합국가를 철회하고, 대 영제국의 틀 안에서 아일랜드인이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허용해 달라고 호소했다. 자 유주의 휘그당 정부가 들어선 1835-1841년 사이, 정부에서 친카톨릭적 개혁안을 제시하자 오코넬은 즉각 그 운동을 중지했다. 그러나 로버트 필이 이끄는 보수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휘그당이 제시한 화해책은 실현가능성을 잃게 되었고, 오코넬은 다시 철회운동을 시작했다. 1844년, 필 정부는 오코넬을 잠시 투옥했고, 카톨릭 성직자와 중간 계급을 달래기 위해 몇 가지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메이누스의 카톨릭 신학교 증설 허가와 카톨릭 교도가 입할 수 있는 3개 대학의 설립, 그리고 토지제도 조사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필은 임대료 인하나' 소작료 동결'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코넬은 정치소요가 진압되었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일랜드 대중의 열망이 얼마나 강열한 것인지는 이미 표현된 바이고, 또한 그는 1845년에 토지개혁을 중심 의제로 하여 휘그당과 벌여온 협약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부 낭만적인 성향을 지 닌 민족주의자들은 '행동'에 목말라 있었지만, 오코넬 자신은 모든 개혁이 궁극적으로는 자 치론의 입장을 강화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대기근 이전의 경제상황 민족주의자들은 19세기 초에 불어닥친 경제침체를 연합국가 탓으로 돌렸다. 연합국가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자유무역을 시작했고 경제제도를 통합했다. 1820년대에는 아일랜드 가내수공업자들을 보호하던 관세제도가 폐지되었다. 물론 아일랜드 의회가 있었으면 그 기 간의 경제혼란을 완화시켰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의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한들 어떻 게 공업화된 영국의 경제력과 지리적 근접성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북부의 벨파스트와 그 배후지역은 공장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영국과 이해를 같이했 다. 아일랜드가 국제시장에 경제를 개방한 것은 취약한 아일랜드를 잠재해 있던 재앙에 노 출시킨 셈이었다. 1851년 무렵 아일랜드 경제는 급속도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에 따 른 반짝경기가 끝난 데다, 1816-1817년과 1822년에는 흉년이 들어 일부 지역은 기아상태에 몰렸다. 물가하락과 1819년부터 시작된 통화감축은 지주들의 빚을 더욱 버겁게 했다. 그렇지 만 농민들에게 전후의 세월이 우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1830년대 들어 물가가 회복되고 일 부는 성장의 혜택을 보았다는 증거도 있다. 엄격한 사유지 관리 18세기는 지주들, 특히 '부재지주들'에게 행복한 세월이었다. 그들은 중간소작인들에게 토지를 장기 대여해 주고 안정적인 임대료를 챙길 수 있었다. 중간소작인이 영세소작인에 게 토지를 전대, 농업수익을 극대화하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사실 많은 중간소작인이 몰락한 카톨릭 지주의 후예였고, 그들이 고용된 이유는 그들 덕분에 웬만큼 사회적 안정이 보장되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물가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지주들 이 거둬들이는 고정임대료가 적어지면서부터는 이들의 효용가치 또한 줄어들었다. 1815년 이후로 대다수 지주들은 직접 관리를 시작했고, 임대기간이 끝나는 족족 중간소작인들은 설 땅을 잃었다. 그리고 지주들은 1년 단위로 계약을 맺어 땅을 더 잘게 쪼개어 임대했고, 이로써 소작인들을 더욱 쉽게 쫓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관행에 영향을 받아 지주들은 영농법을 개혁하려고 했고, 땅 한 뙈기 없는 날품팔 이 인부들을 고용해 대규모 농장을 세웠다. 그들은 영지에 남아 있는 소작농이나 입찰소작 인에게 털끝 만한 동정이나 의무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포 무역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일어난 가내공업은 인구성장에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아일 랜드의 아마포 수출은 연평균 80%씩 성장해 전략 수출상품이 되었다. 1780년대에는 아마포 생산이 아일랜드 북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집집마다 천을 짜고 실을 잣는 일에 열을 올 렸고, 완제품은 상인들을 거쳐 벨파스트와 더블린의 거대한 아마포 시장에서 팔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베틀 직조공들이 농사일을 제쳐둘 형편은 아니었다. 이들은 아마포 생산에 매달리는 한편으로 먹을 것을 위해 좁은 땅뙈기를 경작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 대료는 높아만 갔고, 높은 임대료를 받게 된 지주와 중간소작인들은 땅을 더욱 잘게 나눠 임대했고, 이 때문에 조혼과 대가족풍습이 촉진되었다. 1800년경 아마포 무역의 중심지인 아 르마는 아일랜드 제일의 인구조밀 지역이 되었고, 메이오, 슬리고, 레트림, 로스코몬 같은 가 난한 지역에도 아마포에 의존하는 인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1820년대에 들어서자 기술 진보에 뒤이어 영국으로 제조업이 집중되면서 가내공업 이 크게 위축되었다. 1826년에는 아일랜드의 목화산업이 도산하지만, 벨파스트는 그 시설들 을 아마포 방적으로 전환시켜 위기를 극복하였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전문성을 더해 갔 다. 아마포 생산이 기계화되면서 북서부 코노트와 렌스터, 남부 얼스터 지방에서는 날품팔이 인부들이 남아돌았다. 많은 가족들이 아주 작은 감자밭에 의지해야 했고, 생활수준이 심각하 게 떨어졌다. 이렇듯 이들 지역에서는 농업에는 물론 산업에도 대기근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농민들의 비밀결사 18세기 후반 아일랜드가 경험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긴장으로 이어진다. 1760년 대에 연이어 일어난 '백의당의 난(Whiteboyism)'은 자산가 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 운 동은 지주의 소유권을 박탈한다기보다는 시골의 '도덕적 경제'를 유지하고 세금과 임대료 를 인하하는 데 더 주력했다. 농민소요를 조직한 것은 비밀결사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대부분 어느 한 지역에 제한되 었으며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나, 1789년 북부에서 일어난 녹유회(Ribbon Society)의 봉기처럼 정치적 요소를 띤 것도 있었다. 시골주민들의 불만이 표출되어 농민운동으로 나타나는 경우 도 종종 있었다. 땅 한 뙈기 없는 날품팔이 인부나 입찰소작인(5에이커가 안 되는 땅을 가 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여 또 다른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다)이 힘을 합 쳐, 지역 사람을 고용하고, 임금을 올리며, 1에이커도 안 되는 작은 '공유지'의 이용권을 계 속 보장해 달라고 땅이 넉넉한 농민들에게 요구하곤 했던 것이다. 때로는 광범위한 농민연합체가 형성되어 지주, 중간소작인, 그리고 대규모 가축 농장주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특히 1820년대 임대료 인상과 토지통합 조짐이 보이자 이런 경향이 중 간소작인을 협박하고 상해를 입히며 살해까지 일삼는 농민결사의 온상으로 악명을 떨쳤다. 농민의 불문율을 어기는 가난한 '토지 강탈자들'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 '난폭함'과 지역공동체들의 암묵적 지지는 지주들의 분노와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인구와 가난 1800년에 약 500만이던 인구는 1821년 700만으로 꾸준히 늘어났고, 1845년에는 850만 명 이 되었다. 그러나 1821년 이후로는 달라진 경제상황에 따라서 그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다. 1830-1845년의 아일랜드 인구성장률은 유럽 평균보다 낮았다. 여기에는 이민의 영향도 있었지만, 신중한 상아제한과 농부들의 만혼이 한몫 했다. 이런 경향은 지리적으로 사회적으 로 다르게 나타났다. 1840년대 들어 아일랜드의 인구는 정점에 달했다. 경작지 내 평균인구는 1평방 마일당 약 700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조밀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극빈자 또한 늘어났다. 그러나 이 미 과잉고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농업부분 말고는 일자리를 찾을 곳이 없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저서를 살펴보면, 1798년 이후로 그의 관심은 인구와 가난의 상관관계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맬서스의 비관적인 가르침은 아일랜드의 현상황을 잘 설명해 주었다. 특히 1817년과 1822년의 기근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 상관관계 가 제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영국 관찰자들은 인구과잉보다 는 자본투자의 부족으로 아일랜드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를 위한 구빈법 정부는 아일랜드의 가난구제는 곧 경제발전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1831년, 정부는 기초 교육을 보급하고 도로 건설과 국내 항운 등 공공 사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막상 정부는 아일랜드 지주들이 그 부담을 같이 지기를 바랐고 대규모 공사와 이민 보조정책을 제안한 1836년의 보고서를 거부했다. 그 대신 정부는 영국의 새로운 구빈원 체계를 본딴 구 빈법을 도입했다. 이에 대해서 카톨릭 성직자들은 빈민을 위한 적절한 법이라며 지지했고, 관리들은 빈민들이 땅에 덜 도착할 수 있는 방도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가장 간섭주의적인 아일랜드 정부였지만, 전반의 구조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아일랜드의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행 돌력이 결여된 원인은 당국의 근시안적 태도,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압력과 당 파적 적대감 따위로 볼 수 있다. 1845년 아일랜드의 수출부문은 고도로 상업화되었지만, 그 한쪽에서 생계는 곤궁해져 갔 다. 이는 무제한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었다. 정부의 대책 마련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뎠고, 그 동안 나라는 감자마름병 같은 예기치 못한 사태만으로도 쓰러질 만큼 취약해져 갔다. 제2장 감자마름병의 출현, 1845-1846년 그래도 이번 사태를 비교적 잘 견뎌낸 지역도 있었다. 얼스터와 북부 렌스터 '오토밀 지 대'의 빈민들은 가내공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오트밀을 사서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남부와 서부에서는 오트밀조차 '기근구제용'으로 배급되는 것밖에 구할 수 없었다. 이 전에는 이 지역에도 감자의 열성 변종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럼퍼의 일종인 변종들은 열매 가 많은 대신 영양가는 별로 없었지만, 여름의 '보릿고개'를 그럭저럭 버티게 도와주곤 했 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감자소비량이 대단히 높았다 하루에 성인남자 날품팔이 인부 한 사람이 14파운드를 먹었고, 여자와 10세 이상의 아들 은 11파운드를, 어린이들은 약 5파운드를 먹었다. 이 양을 하루 세 끼에 소금과 양배추,어 쩌다 생기는 생선과 곁들여 먹었다. 물론 먹을 것이 없거나 연료가 없으면 한끼를 걸렀다. 어쨌든 1840년대에는 식용으로 매년 약 700만 톤의 감자가 필요했다. 감자에만 의존하는 식생활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까? 대기근 후에 해설자들은 나중에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아일랜드의 지나친 감자 의존을 비난하고, 일련의 조짐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기근 이전의 경작자들에게는 그런 점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 다.1845년 이전의 감자 흉년은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일이었고, 단기간에 끝났다. 또 필요에 따라 가축에게 주는 양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명피해가 적었다. 사실 감자에 대한 의전도가 점차로 높아가면서 작물파동의 위험을 분산시킨다는 초기의 이점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1845-1849년의 연속 흉작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은 있을 수 없다. 마름병이 도래하기 전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어느 작물보다도 믿을 수 있고 안정적인 것이 증명되고 있었다. 1845년만 해도 앞으로 5년간 닥칠 대재앙을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균의 침범 1845년에 출현한 마름병은 새로운 병이었다. 마름병이 감자의존도가 높은 유럽을 휩쓸고 간 뒤에는 혼란과 비정상적인 투기와 공포만이 남았다. 이 병은 근대사에 유례가 없는 환경 재앙을 낳았다. 이 식물전염병이 처음 관찰된 곳은 1843년 미국의 동부 해안지대였다. 이 병은 뉴욕을 거 쳐 1845년에는 중서부까지 급속도로 퍼졌다. 그리고 1845년 초여름에는 플랑드르 지방에 상 륙, 10월 중순경에는 아일랜드, 남부 프랑스, 스위스, 동부 독일, 그리고 남부 스칸디나비아 까지 잇달아 퍼졌다. 어떻게 마름병이 그토록 빨리 전파되었을까? 감자의 '퇴화'와 초기 질병을 막기 위해서감 자종자를 거래하는 국제무역의 발전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북미주는 감자를 개량했고 페 루에서 과노(비료용 조석)를 수입했는데, 아마도 그 과노가 감자마름병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이 병이 대서양을 건너 베네룩스 지역으로 전파된 것도 종자무역 탓 이었다. 일단 온난한 기후에 적응한 마름병은 주로 습한 곳에서 번식해 나갔다. 마름병은 아 일랜드에서 9월 초에 처음 발견되었으나 10월 둘째 주까지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해 8월에 이미 엄청난 수확을 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름병에 전염된 것은 10-11월에 수확 하는 주작물이었고, 마름병이 서쪽으로 움직이면서 일부 지역은 이른 서리 덕분에 심한 피 해를 피할 수 있었다. 1845년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부유한 동부 지역이었다. 그해에 만생종의 약 3분이 1이 유실되었으나, 수확 후 구덩이에 저장해 놓았던 감자마저 흙을 덮지 않은 상태에서 썩어버린 것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피해의 전모가 확인되지 않았다. 감자농사의 실패는 아일랜드가 1세기 동안 경험한 일 중 최악의 것이었다. 이제 기근의 진짜 망령이 등장한 것이다. 신의 방문 1840년대 유럽인들은 대다수가 신앙심이 독실해서 지리학, 식물학, 경제학 등의 신학문기 독교 교리와 일치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종교적 열광과 과학의 진보가 어우러져 자연과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틀이 되었다. 따라서 기근을 설명하는 성서적 견해가 덧붙여지고 감 자마름병 같은 재앙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보고서들이 아일랜드의 가난을 그들의 독실한 운명론과 연관시켰다. 이 자연재앙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들의 순종적인 태도는 관찰자들을 화나게 했다. 그들은 아일랜드인이 곡물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예견할 수 없던 새로운 질병 앞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1845년에 경고의 소리조차 없었던 것은 아일랜드가 그해 에도 그런 일을 겪었지만 손실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영국인들 역시 종교적인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신의 방문'을 사치와 자기 만족에 내리는 경고로 보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일부에서는 특별한 교훈을 끌어내기도 했다. 반 카톨릭 성향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극단적인 언사가 나돌았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재난 을 종교상의 '실수'와 연관시켰고, 영국이 카톨릭을 용인하면 이러한 '국가적인 죄'를 벌기 위해 가혹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해댔다. 그러나 대다수의 다른 관찰자들은 신성한 하느님의 섭리가 보상이 따르는 자비도 없이 그 러한 고통을 가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끄집어냈다 감자에만 의존하는 식생활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곡물에 기초한 '좀더 질이 높은 ' 식생활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식료품의 관세 철폐운동을 벌이던 곡 물조례 반대동맹의 급진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 당시 영국 수상이던 필은 지 난 몇 년간 외국과 자유무역을 행할 점진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마침 감자흉년으로 높아진 대중의 기대치와 기회를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 으로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개인적으로는 신의 섭리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밀, 감자, 그리고 옥수수 수입품에 관세를 붙여 영국 농업을 보호하고 있던 곡물조례를 개정하기로 한 필의 결정은 온 나라를 정치위기로 몰아넣었다. 그의 보수당 동료 대부분이 이 제안에 반대했고, 그의 지 도력에 도전했다. 이제 필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휘그당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개인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정치상황은 1845-1846년의 아일랜드 위기에 오히려 빠르고 효 율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인기 없는 구제정책을 채택하는 여유를 부리다가는 필은 정 치적 기반을 잃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의 정치생명은 아일랜드가 진짜 절박한 기근에 처해 있는가를 입증하는 데 달려 있었다.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감자흉작의 원인을 조사 했다. 위원회가 감자병의 원인에 관해서 내린 결론을 납득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감자의 덩이줄기에 공기를 공급해 주면 부패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방안 역시 실패로 돌아갔 다. 그러나 위원회는 피해상황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작물의 반 이상을 잃었다는 보고는 사실 수치가 너무 높은 것이었지만, 신속한 행동을 주장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은, 영국의 아일랜드의 오트밀 수출을 금지할 것과 곡물의 수입을 위해 즉시 개항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는 전자를 거부했고, 보호주의자들의 정치적 저항으로 후자 역시 지연되었다. 필은 궁여지책으로 정부에서 식량을 직접 구매하기로 했다. 그해 11 월 필은 베어링 브라더스사를 통한 10만 파운드 어치의 옥수수 비밀 구매를 승인했다(당시 영국 파운드의 가치는 1파운드에 4.86달러였다). 이 식량이면 하루에 1파운드의 죽을 배급할 경우 50만 명을 석 달 동안 먹일 수 있었다. 물론 1845-1846년 사이의 요구되는 아일랜드의 필요량에는 못 미쳤으나, 나라에서 모든 사 람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 필의 생각은 아니었다. 대신, 국가 저장소에 비축된 식량을 시장으로 방출하면 식료품 가격이 조절될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빈민구제위원회에 원가로 판매할 수 있었다. 필의 식량 정책과 아일랜드 사회 필은 의회에서 "이 재난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주민들에게 더 낫고 확실한 식문화를 도입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도 언제든지 당하기 쉬운, 이 엄청나고도 의문에 싸인 하느 님의 방문 가능성을 없애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며 자신의 소망을 밝혔다. 아일랜드의 사회구조와 관습을 재조직하는데 들인 이런 관심이 대기근의 역사에서 가장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정치가들에게 재난구제가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예산은 어떻게 짤 것이며, 어떤 변화가 바람직한가, 그리고 그 변화는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에 관해 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이번 기근이 뭔가 신의 섭리에서 발생 한 것이라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구제체계 필의 전략은 아일랜드 지주들과 협조체계를 세워 그들에게 각 지역의 구제책임을 떠맡기 는 것이었다. 1846년 향신층이 주관하는 약 650개의 지역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기구들이 빈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고, 그들이 모금한 자선기금과 똑같은 액수의 국가보조금이 분배되었다. 그런데 일부 고립지역에서 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는 점이 인정되면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이 각 지역의 저장소 에 주어졌다. 한편 더블린에는 전반적인 감독을 위해 중앙구제위원회가 세워졌다. 식량부 장관이자 이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랜돌프 루스경은 감자의 대체물로 옥수수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관공 계에 납득시켰다. 그러나 다른 조처들은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위원회는 정부가 지 주들의 선의를 신뢰하는지 의심했고, 지주들의 공공정신과 지출이 부적절하다고 비난했다. 관리들은 강제적이며 영구적 극빈구제기구가 필요하다고 보아, 이를 투표에 부쳤다. 그러나 필은 구제기구는 한시적이어야 하고, 지주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야 하며, 또 국가의 도움 또한 임시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공공 공사가 시작되다 정부는 건설부에게 엄청난 부담을 떠넘겼다. 배수관이나 항만 같은 영구적인 시설의 개량 사업뿐 아니라, 빈민들을 고용해 임금을 주는 것이 일차적 목표인 구제용 공공 공사를 조직 하는 일까지 떠맡은 건설부는 처음부터 혼란스러워했다. 두 경우 모두 지주들이 솔선해서 비용을 부담하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공공 공사를 위해 마련된 대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건설부에 모든 책임을 지우려 고 했다. 정부에서 도로건설비의 절반을 부담하는 정책이 그런 경향을 부추겼다. 드디어, 지 주들이 주관하는 '제안모임'들이 일을 시작했지만, 많은 이들이 내심 그 대부는 갚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다. 정부 관리들은 구제자금을 재무성이 관리하면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필요할 경우 규칙을 완화시키는 힘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소요가 있을 경우 그에 대응 해서 저장소에서의 식량 배분이 빨라졌고 또 공공 공사에서의 고용량도 증가되었다. 1845-1845년의 구제활동은 영국 내의 상당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비판의 상당 부분 이 이데올로기에 기인했으며, 아일랜드 농민의 게으름과 지주의 기회주의를 헐뜯는 진부한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적개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인 폐해 증거들을 이용했 다. 제일 많이 거론된 반대근거는 실업자의 구제사업 고용자 선정과 관련된 것이었고, 과연 그 일이 적절하게 분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1846년 필은 자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제사업에 대한 비판이 따랐지만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지역에 서 올라오는 보고서에서도 감사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 이제 옥수수가 널리 소비 되고 있었고, 1846년 여름에는 화물을 가득 실은 미국 배들이 연이어 입향하여 민간무역으 로도 아일랜드의 필수물자를 조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런데 6월 하순에 내각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일랜드 강압 정치법안이 부결된 것이다. 이 법안 역시 지금 당장 보다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필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실업 구제가 널리 이루어지면 범죄율이 떨어졌던 것이다. 대기근의 첫해? 1846년의 수확은 그 전망이 매우 불확실했다. 감자농사를 막으려는 것이 정부측 입장이었 지만 현실적인 아일랜드 총독은 빈민들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옥수수나 '노란 죽'을 먹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입에 맞는 음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큰 감자종자가 등장했고, 1845년 경작면적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 땅에 파종되었다. 아일랜드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으나, 지난해의 경험은 이미 모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면 1845-1846년에 정말로 기근이 있었을까? 식료품 공급이 모자랐던 것은 사실이지 만 대량 아사라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1845년의 수확으로 영국인 125만 명을 먹일 만큼 수출했고 더 값싼 수입품이 그 부족분을 채웠다. 이 과정은 다소 효율적이었고, 이에 힘입어 1846년에는 더 많은 경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음 감자수확에 달 려 있었다. 1845-1846년에 최악의 피해를 본 지역은 유럽이었다 프랑스 일부, 독일과 스위스가 궁핍에 허덕이고 있었으나, 1845년 감자수확량의 4분의 3일 잃은 베네룩스 지역이 처한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폴랑드르 지역 아일랜드 서부처럼 아 마포 산업이 위축되어 취약해졌고, 그중에서도 특히 네덜란드는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데가 1840년대에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크게 고통받고 있었다. 1845년의 곡물수확량이 양호했음에도 베네룩스 빈민들의 비축량은 이내 소진되었고, 그들 의 삶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1847년까지 감자마름병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만 수만명 의 목숨을 앗아간다. 제3장 대기아, 1846-1847년 감자마름병이 다시 등장한 곳은 기후조건이 아주 좋은 지역으로, 온난 다습한 서부 아일 랜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시작한 감자마름병은 바람을 타고 1주일에 80Km라는 놀라운 속 도로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이어 스코틀랜드 고지대가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1846년의 건조 한 여름 덕분에 남부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은 이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8월 초에는 아일랜드 전역이 유린당했다. 목격자들은 '무성한 감자밭'이 하룻밤 사이에 썩 어가는 것들 천지'로 변해 갔다고 적고 있다. 감자마름병의 기세는 인력으로 꺾을 수 없었 고 어디를 가든 절망과 공포뿐이었다. 수출의 문제 일반 가정의 소비를 위해서 평소보다 많은 오트밀이 국내에 저장됨에 따라 1846년의 곡물 수출은 1840년대 초의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감자 약 100만 톤과 맞먹는 양이 었으나, 마름병으로 파괴된 양의 10분의 1에도 못미쳤다. 이는 곡물의 영국 수출을 금했다 하더라도 아일랜드가 1846-1847년의 기아를 면하기에는 식량이 모자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재앙이 덮친 지역의 입장으로서는 곡물수출이라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또한 많 은 양을 수입하여 부분적으로 이를 보상할 수는 있었다. 12846-1847년 동안 수출량의 두 배 에 이르는 식량이 수입되었는데, 수입 옥수수와 쌀은 영국으로 수출한 곡물보다 훨씬 쌌다. 또한 상인과 지주들은, 수출금지가 올바른 상거래에 필요한 신용을 파괴할 뿐이라고 주장했 다. 누가 다음해 농사를 짓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미국으로부터 생명을 살렸을 수도 있는 겨 울이 '기아'가 끝난 1847년 봄이다. 빈민 구제 담당관리들은 1846년 가을부터 이 문제를 제 기했지만 재무성의 규제가 너무 심했다. 곡물조례 논쟁 후 정부는 자유무역에 강한 집착을 보인 것이다. 필은 정부의 개입 시기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새로 들어선 존 러셀의 휘그당 정부는 곡물상인들에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식량가격 의 규제를 거부했다. 트레블리언이 보기에도 수요와 공급으로 형성되는 시장에 관여하는 것은 비생산적이었다. 그러나 소매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거나 아예 없는 광활한 아일랜드 서부 지역민들에게 는 국가가 주도하는 공급외에는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었다. 새로운 정부 1845-1846년에 필이 주도한 구제사업으로 사람들은 정부의 능력에 한껏 기대를 걸었으나, 새로 들어선 휘그당 정부는 아일랜드의 절대적 식량 부족과 유럽의 보편적인 식량 부족이라 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부도 대량아사를 막을 도리가 없었을 것 이다. 그러나 러셀 내각의 결정은 사망자수를 더 증가시켰다. 새 내각에는 찰스 우드와 헨리 조지 그레이가 이끄는 강력한 '도덕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무역주의자의 낙관적 경제론을 신봉했다. 그들이 보기에 아일랜드는 인구과밀국 이 아니라 저개발국이었다. 아일랜드에 부족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부를 창출하겠다는 의지 였다. 따라서 정부는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일을 하여 임금을 벌도록 압력을 가하고, 지주들에 게는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여 일자리를 제공하고 빈곤을 줄이는 데 전심케 해야 한다고 이 들을 믿었다. 드레블리언과 구제사업 1846년 8월, 공공 공사가 중지되고 수많은 날품팔이 인부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정부의 의 도는 추수작업을 독려하려는 것이었으나, 이전에 임금으로 감자를 받거나 감자 밭뙈기를 받 던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편 정부는 트레블리언이 권고한 대로 공공 공사의 체계 를 개혁했다. 신설 법률은 재무성의 통제 아래 있는 건설부의 책임을 강화했고, 공사비 전액 은 현지에서 지불하도록 했다. 이런 변화들은 남용을 막기 위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 트레블리언의 목표는 날품팔이 인부와 지주들 모두 그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의존이라는 암적 존재'를 뿌리뽑고, '아일랜드의 재산으로 아일랜드의 빈곤을 책임지는'데 재무성의 힘을 사용했다. 다른 각료들이 이 가혹한 교리를 꺾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도덕주 의자들은 모든 것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무성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이 주장하는 '건전한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고용 압력이 높아졌다. 9월에 다시 시작된 구제사업은 관료적인 절차 대문에 10월까지 지연되었다. 그러다 10월 말이 되자 매일 평균 11만 4천 명이 고용되었고, 연말에는 44만 1천 명으로 올라갔다. 기술 자, 감독관, 조사관등 직원을 계속 늘렸지만 건설부는 일에 치이고 있었다. 1847년 3월이 되 자 총공사비는 약 50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지금의 체계로는 기아 해결이 거의 불가능했다. 식료품 가격은 급상승했지만 임금은 각지 의 '정상적인'수준 아래로 억제되었다. 날품팡이 인부들이 '게으르다'는 불만과 좀더 엄격 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쏟아지면서 임금을 개개인의 성과와 연결시키는 혹독한 체 계가 도입되었다. 고된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루 8펜스도 안되는 임금으로는 굶고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그해 겨울은 혹독했고, 굶주림에 지친 많은 사람들은 연료로 쓸 토탄조차 살 수 없었다. 건설부는 날씨가 나쁠 때는 일을 나오지 않아도 반나절치의 임금을 주지로 결정했다. 그 러나 이미 기아 수준인 수입이 더 이상 내려가기를 원치 않는 빈민들은 계속 일하겠다고 고 집했다. 이런 물질적인 문제 말고도 이번 공사들이 목적이 없다는 사실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아 일랜드에 필요한 진짜 '공공'공사는 오래 전에 완성되었지만 실업 구제의 필요성은 날로 커져갔다. 재무성은 개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를테면 배수구)에 대한 지출을 차단했 다. 12월, 이제 공공 공사의 실패는 더 이상 논란거리도 되지 못했다. 떼죽음 알리는 보고서와 사인을 건설부의 나태함에 돌리는 검시보고서가 흔해졌다. 빈민 구제국의 토머스 라콤은 런 던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런 체계는 지속될 수 없다고 섰다. 비용은 엄청나도 가치 있는 일 은 별로 없었고, 경작에 쓰일 노동력만 허비되고 있었으며, 시골 빈민들은 죽어가거나 병들 어갔다. 뭔가 새로운 계획이 나와야 했다. 스키버린 1847년 초, 코크주의 작은 마을 스키버린은 아일랜드 대기근이 낳은 그 모든 참사의 상징 이 되었다. 이 마을이 다른 지역과 다를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초 의 사망자는 10월 24일에 나왔고, 12월에는 이곳의 구제위원회가 와해되었고, 사람들이 한꺼 번에 수십 명씩 죽기 시작했다. 민간자선 아일랜드의 고통이 알려지면서 민간 자선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1847년 1월 정부의 격려하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빈 구제를 위한 영국연합'이 런던에서 설립되었다. 빅 토리아 여왕이 2000파운드를 기부했고 43만 5천 파운드의 기금이 모였다. 많은 시사 평론가 들이 당장의 도움도 긴요하지만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임 을 지적했다. 트레블리언은 곧 영국연합의 기금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쓰기 시작했지만,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자선단체로 많았다. 영국 전체에서 자선금 모금이 이루어졌고, 인도 등 먼 곳에서 근무하는 아일랜드 군인들도 능력것 기부했다. 해외와 극내의 신교와 카톨릭 교회 역시 별 도의 기금을 모았다. 미국 역시 많은 원조를 했다 보스턴의 '새로운 영국 구제우원회'와 같은 박애단체들이 기금과 식량을 모아 직접 수송 에 나섰다. 1847년 54만 5천 145달러어치의 구제품을 실은 100척이 넘는 배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향해 떠났다. 의회는 아일랜드에 직접 원조를 주는 것은 거부했지만 전함을 식량 수송에 쓰는 것은 허용했다. 대기근 수십 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온 수만 명의 아일랜드 이민들은 친척과 친구들의 기 아와 고통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일반적인 구제를 위해서 또는 이민을 권장하기 위해서 돈을 보냈다. 열병과 질병 만족할 만한 원조의 손길이 아일랜드 오지까지 닿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굶주림 이 직접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굶주림에 따른 영양실조는 치명적인 질병을 동반했다. 먼저 '사회성 전염병'이 등장했다. 발진이 동반되는 '검은 열병' 인 발진티푸스와 황달이 동반되는 '노란 열병'인 재귀열이었다. 후자의 경우 치사율이 낮았 지만 그 증상 매우 심각했고 발생빈도 또한 높았다. 둘 다 이를 통해서 전염되었는데, 수입 의 감소로 위생상태가 나빠지면서 이가 더욱 번성했던 것이다. 유행성 전염병이 돌게 된 것은 바로 기근 탔이었다. 기근은 사람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렸 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을 것, 일자리 또는 피난처를 찾아서 도시와 일터 주변으로 몰려들게 내몰았던 것이다. '기근으로 인한 열병'은 빈민들뿐 아니라 그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의 사, 성직자, 구제위원회 관리들도 희생시켰다. 150만 명이 열병에 감염되었고, 그 중 최소한 25만명이 대기근 동안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염성 질병들 역시 주범이었다. '피가 섞여 나오는 설사'인 세균성 이질이 확산되고 있었다. 제대로 조리하지 않은 옥수수 가 종종 이질의 원인이 되었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러지면서 설사, 홍역, 결핵이 만연했 고 사망원인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괴혈병, 안구건조증, 니코틴산 결핍 증후군 등 비타민 결핍증 역시 흔했다. 극도의 영양결 핍은 '기근에 의한 수종', 즉 부종와 소모성 전신쇠약을 일으켰고, 이 역시 주요 사망원이 되었다. 아일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의료시설의 수를 살펴보면 당시 유럽의 최고 수준이었다. 1845 년만 해도 병원과 의원을 연결해 주는 조직망이 존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석들 중 일 부는 초보 수준인데다 그 분포도 고르지 않았고, 대기근이 이태째 접어들자 병자들로 넘쳐 나게 되었다. 1847년 초 베스보로는 중앙위생부를 다시 세웠고, 열병 치료를 위해 임시 병원 을 개설하는 한편 의술진을 충원했다. 그러나 열병이나 이질을 다스릴 치료법은 전무한 형 편이었고, 검역 또한 불가능했다. 무료식당 1847년 1월 정부가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러셀은 '현재 가장 급선무는 사람들을 살리 는 일'이며, '무료식당이 가장 적합한 구제방법'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무료식당 운동을 제 일 먼저 시작한 것은 퀘이커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선례를 따르도록 정부에 강력한 압력을 넣었다. 트레블리언과 우드 역시 방향을 바꿨다. 그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공공 공사가 사람들을 격려하지 못하자 두 사람은 지방세로 더욱 직접적인 구제활동을 펴고 자 헸고, 따뜻한 음식을 배급하여 문제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도덕주의자들이 구빈법을 확장하여 아일랜드에 영구적인 구제기구를 설립하고자 한 것이다. 존 버고인 경의 감독에 따라 새로운 구제위원회가 세워졌으나, 금방 활동을 개시하지는 않았다. 러셀은 무료식당이 세워지기 전에 공공 공사를 중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용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3월 초 그 수는 71만 4천 명에 달한다), 지출을 삭감하고 고용 노동자들을 경적으로 돌리라는 압력은 거세기만 했다. 3월 20일, 노동력의 5분이 1을 해고하면서 작업장 폐쇄가 시작되었다. 5월 1일까지 모든 공공 공사를 중단하려 했으나, 많은 날품팔이 인부들이 반발했고 다른 대안이 없는 곳도 많 았다. 어쨌든 6월 말까지 2만 8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고되었다. 일부 인부는 사람을 초 라하게 만드는 무료식당에 반발하여 공공 공사를 계속하려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식당은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스키버린처럼 최악의 사태에 몰린 곳 중에는 무료식당이 6월 중순에야 가동된 곳도 있었 다. 그런데 문제는 식당문을 연후였다. 발행된 배급표 수가 극빈자 수와 맞지 않았고, 더구 나 음식이 형편없었을 뿐만 아니라 양마저 적었기에 대중의 분노를 더할 뿐이었다. 7월 첫주 무렵 매일 300만명 이상에게 죽이 배급되었다. 한 사람이 먹을 죽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약2펜스로, 일부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주민을 국가가 먹여 살렸다. 모든 면에 서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이 놀라운 행정조처는 기근의 피해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무료식당 운영에는 공공 공사에서 보다 적은 비용이 들었다. 여 기에는 170만 파운드가 지출되었으며, 그중 약100만 파운드의 부채는 상환되지 않았다. 무료식당은 초창기의 빅토리아 체제가 최악의 조건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해 보였다. 1847년 여름, 필요한 곳에 음식이 공급되면서 사망률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부와 영 국 여론은 무료식당을 한시적인 수단으로 간주했다. 8월 중순부터 무료식당이 단계적으로 없어져 9월 말에는 모든 곳이 폐쇄되었다. 포괄적인 수단 1847년, 의회는 영국적인 차원에서 아일랜드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한 강경한 단체는 구빈법의 확대적용을 요구하며, 지역사회가 그곳의 '건강이 괜찮은' 빈민들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근이 지주들의 무책임과 빈 민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라고 믿었던 것이다. 영국인의 세금으로 공공 공사와 무료식당을 운영했음으로, 아일랜드 지주들이 구제사업의 짐을 떠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우드와 그레이 같은 각료들은 이 견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총선거가 다가오고 있었고, 중간계급이 급성장하고 있었으므로 휘그당은 그 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 일부 정치가들은 구빈법으로만 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600만 파운드 로 아일랜드에 철도를 놓자는 조지 벤팅크 경의 제안은 그 돈의 대부분이 부지구입비로 나 가야 했기에 부력되고 말았다. 그러나 러셀은 훗날 기존의 철도계획에 따른 62만 파운드의 지출을 승인했다. 아일랜드 지주들은 국가가 지원하여 식민지로 이민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아일랜드 내에서 고용이 안정되면 아일랜드가 지금의 인구를 부 양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단지, 국토개발법이 제한적으로 통과되어 구빈법을 보충했을 뿐이다. 이 법으로 지주들이 영농 '개량'을 위해 대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영국의 자원에 줄을 댈 수 있 는 일부 부유한 지주들만이 혜택을 받았다. 1847년 6월 구빈법 확대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건강한 빈민들에게 구빈원 바깥에서 '구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따라서 빈민구제 책임을 지역사회가 지게 되었다. 몬티글 경이 이끄는 아일랜드 지주들이 이 법안 에 격렬히 반대했으나, 오히려 이것은 많은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에게 이 법이 바람직한 것 이라는 생각을 품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지주들에게 중대한 양보를 했다. 윌리엄 그레고리의 수정안을 받아들여 4분의 1에이커 이상의 땅을 가진 소작인에게는 구제조치를 하지 않는다 는 최악의 양보였다. 땅 없는 날품팔이 인부만이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소작인이라는 데 합의한 것이다. 대기근에 따른 위기를 보는 자신들의 해법을 확신하는 한편, 영국 내 여론에 민감해야 했 던 각료들은 정치일정 마련에 들어갔다. 우드가 보기에 이제 아일랜드는 '비참과 기아의 연옥'에서 재탄생해야 했다. 제4장 '회복'에서 반란으로, 1847-1848년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많은 영국인들(그리고 아일랜드의 일부 부자들도)이 이제는 사 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믿었다. 마름병이 '이빨은 보이되 그리 세게 물지 않았을 때'부터 지 켜본 트레블리언은 1847-1848년에는 특별한 신의 방문이 없으므로 추가원조는 타당성이 없 다고 확신했다. 아일랜드의 올해 수확이 알찼다는 사실을 알리는 보고서들이 나오고, 미국에 서 식량이 계속 수입되면서 이 여론은 더욱 높아갔다. 10월 들어 원조금을 늘리려는 시도가 있자, 사람들은 무관심을 보이거나 적의를 나타냈다. 이제 정치적 균형이 트레블리언, 우드, 그리고 '도덕주의적' 몽상가들 쪽으로 확연히 기 울었다. 1847년 7월 총선거에서는 영국 납세자의 돈을 아일랜드에 '낭비'하고 있다는 비난 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의회의 세력도 비용삭감에 열심인 중간계급의 급진주의자들에 게로 넘어갔다. 안 그래도 허약해진 휘그당 정부는 1847년 가을의 재정위기 이후 이러한 요구에 더욱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일랜드가 어느 정도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는 믿음은 현실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이번 수확으로 동부와 북부의 농민들의 상황은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대다수 땅 없는 날품팔이 인부와 영세 자작농에게는 일시적인 유예를 제공한 것에 불과했다. 특히 서부 지 역이 심각했는데, 감자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일거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소규모 자작 농은 감자 외에 달리 현실적인 대안이 없었고, 다른 종자를 구입할 수단도 없었다. 정부는 '녹색작물'의 재배를 장려했지만, 실제로 1847년에 정부에서 배급한 무와 양배추 종자의 양 은 너무 적어서 명분 세우기용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정부는 지주나 퀘이커교도들이 어떻 게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수확기의 일시적 고용 증대와 이민 덕분에 무료식당의 폐쇄는 큰 소요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구빈법에 아일랜드를 온통 떠넘긴 잔인함과 어리석음은 곧 대가를 치르게 된다. 구빈법의 위기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구빈원으로 모여들었다. '빈민의 바스티유 감옥' 은 여전히 대중들의 혐오대상이었다. 그러나 굶주림과 그래도 버젓하게 장례를 치러주지 않 느냐는 안도감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엄격한 체제에 대한 증오심과 구빈원 내에 급속히 돌 고 있던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1846년 10월, 많은 구빈원이 이미 만원이었지만 사람들을 계속 받아들여야 했다. 빈민구제 위원회는 긴급한 용품을 임대해서 사용했으나, 수요량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었 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외부' 구제(구빈원 바깥에서의 구제)허용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 각했고, 이를 금지하는 공식 조치들을 무시했다. 1847년 10월, 구빈법에 구제사업의 무게가 더해졌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구빈원에 감금해 '빈곤겪기시험'을 치르게 하려는 시도가 따 랐다. 빈민들을 이렇게 '훈련'시키기 위해 구빈원은 계속 세워졌다. 1848년 9월에는 이 시 설이 15만 개가 넘었고 1년 후에는 25만 개로 늘어났다. 그래도 가장 좋지 않은 계절인 겨울과 봄이면 시설은 턱없이 모자랐다. 피수용자의 대다수가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 고, 버려지는 아이도 수천 명에 달했다. 빈민구제위원회가 이 난관을 헤쳐 나가려면 세금을 올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주와 농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고 또 자기 구역의 납부 능력에 비관적 전망을 가지게 되면서 많은 구제위원들이 그 명령에 따르기를 주저했다. 그러면 이들은 지명된 대 리 구제위원들로 대체되었고, 이들은 군대와 경찰의 보조를 받아 징세에 나섰다. 1847-1848 년 사이에 39개 위원회의 활동이 정지되었고, 지명된 관리들은 엄격하고 전문가다운 솜씨로 일을 처리했다. 그런데 1847년 말이 가까워지면서 이 체계도 심각한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12월, 아일랜 드 구빈위원회 위원들은 비교적 건강한 빈민들의 외부 구제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48년 6월, 건강한 사람의 40%에 달하는 약 80만 명이 외부 구제를 받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줄 일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외부구 제는 힘든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사람들에게조차 가혹한 조건을 요구하곤 했다. 그래도 위원들은 음식만은 경제적인 면에서나 위생적인 면에서나 조리된 정량이 배급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만약 1847년 여름의 무료식당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것 이다. 그러나 각지의 위원회들은 행정조직과 돈이 없었고, 무료식당 역시 수가 훨씬 줄어들 어 있었다. 따라서 빈민들은 도심과 교회에서 웅크린 채 유행병에 희생되거나 음식을 찾아 멀리 돌아 나녀야 했다. 그나마도 구한 음식은 돌아오는 길에 상하기 십상이었다. 피로와 혹독한 겨울 날씨도 그 힘든 여정에 나선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북서부 메이오주의 에리스 같은 오 지에서는 그 결과가 너무나 뻔했다. 가장 가까운 구빈원이 발리나에 있었는데 그 거리는 무 려 64Km가 넘었다. 이곳에서는 1만 명의 빈민들이 "양조차 충분하지 않은 무순, 까나리, 그 리고 해초를 먹으며 아사해 갔다." 행정가와 정치가들 구빈법 관련 관리들-최고 책임자 에드워드 트위슬레턴과 현장 감독관, 대리 구제위원들- 은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성실했지만 당시의 관료적 사고방식에 철두철미했다. 그들은 지금 의 체계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문제의 원인은 부족한 자금이라고 주 장했다. 그러나 더 이상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부에서는 지방세가 토지시가의 4분의 1을 넘었고, 광범위한 조세저항에 부딛히고 있었다. 신임 아일랜드 총독 클래런든 경은 취임 후 얼마 안 있어, 만약 추가지원이 없으면 고통 이 사람들을 반란으로 내몰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일정 수 이상'을 굶어 죽게 할 수 는 없다며 재무성에 탄원했다. 트레블리언은 영국엽한의 남은 기금을 받아야 할 정도로 ' 빈곤한' 지역으로 인정된 코노트와 서부 연안을 따라 22개의 구빈구 연합을 설치하는 계획 을 제시했다. 이 원조 역시 너무나도 불충분했고 아일랜드 당국의 잇따른 호소는 무시되었 다. 재앙을 당하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어떻게 그리도 냉담할 수 있을까? 이는 기근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퍼뜨리지 않으려는 바람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이유 로 설명된다. 도덕주의적 정치가들과 영국의 여론은 아일랜드는 자원이 풍부하므로 기업가 정신과 산업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구빈법의 목적도 바로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 경직된 사고방식이 초래한 무서운 결과는 무시되거나 아일랜드인 탓 으로 돌려졌다. 축출 고용과 빈민구제를 지주들에 의존한 정부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었다. 자산가들은 아일랜 드의 인구가 과중하며, 인구감소와 엄격한 사회통제만이 농업발전에 필요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라는 맬서스식 원칙을 믿었다. 자신이 인도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 다수 사람들은 대량 이민이 해결책이라 여겼고, 국가만이 대량 이민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 고 믿었다. 그런데 지주들이 빈민구제로 늘어난 빚과 세금을 부담할 것이 확실할 때에만 국 가가 개입하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많은 지주들이 소작인 축출을 스스로 정당화시켰다. 중소 농민들은 이전에 감자밭의 이용권으로 대신 지불하던 임금을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지불할 수 없게 되었고, 1847년 여름 이후에는 빈민구제세를 내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그 압력이 점점 거세어지면서 임대료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사회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경시풍조가 점차 확산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이민자금을 비축하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자수성가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농민들은 자신이 '정리'되기 에 먼저 소작농들을 축출하기도 했다. 겨우 몇 에이커밖에 가지지 못한 빈농들은 살기가 더욱 어려웠다. 지주들은 연수입 4파운 드 이하의 소작농에 대해서 구빈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이들을 기생충처럼 경멸했 다. 1846년 이래 지주들이 앞장서서 임대료를 삭감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847년, 축출의 극성기 '정리' 다시 말해 대량 축출의 거센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고, 클레어와 메이오 등 서부가 특히 심했다. 1849-1854년 사이거의 5만에 가가운 가구(약 25만 명)가 고향에서 영구 축출 되었다. 축출된 사람들은 병이 들끓는 구빈원을 몹시 꺼렸고, 길가의 임시 피난처에서 기거했다. 공권력, 절망, 죽음이 그들을 여기서 다시 내몰기 전까지, 에리스의 월시 가문의 소유지에서 축출된 150가구의 생존자들이 1847년 '산 해골'로 벨멀렛에 도착, 구걸에 나선 경우처럼 정 리는 곧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축출에 관한 기록은 사실의 일부만을 담고 있었다. 많은 수가 악명 높은 '4분의 1에이커' 조항 때문에 구빈구제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작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많은 자산가들 이 이 조항을 악용, 구제신청자들에게 구제를 받으려면 먼저 오두막집을 무너뜨리라고 (불 법적으로) 강요했고, 그런 사람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주었다. 그래도 많은 소자작농은 땅 을 포기하느니 굶어 죽기를 선택했다. 트위슬레턴은 소작인의 가족이 구빈원의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청했으나 양보받은 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소요 지주의 야만성은 이따금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1847년 말, 농민들의 불만으로 야기된 '폭력사태'가 급속히 퍼져 나갔고, 많은 지주와 소작인이 살해되었다. 그러자 지주들은 특 별 진압권을 요구했다. 식량보다는 땅이 최우선 관심사였던 서부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는 살인이 드물었지만 소요사태는 1847-1848년 동안 아일랜드 중부까지 확산되었다. 클래런든은 당시의 상황을 경 고했고, 정부는 경찰과 치안판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범죄와 소요에 관한 법'으로 대응했 다. 1848년 이후 폭력사태는 공권력의 진압으로 가라앉았다. 농민들이게 더 이상 기력이 남 아 있지 않았다는 것과 계속된 이민도 소요가 잠잠해진 한 원인이었다. 한편 많은 지주들은 소작인이 임대료를 못 낼 경우 '압류'를 용이하게 한 새로운 권한을 남용했다. 동부와 북구의 아일랜드에서는 소작인들이 덜 폭력적 전술로 돌아섰다. 소작인 단체가 생 겨나 임대료 삭감과 '보유권의 고정(공정한 임대료를 내는 한 땅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권 리)'을 요구했다. 러셀과 클래런든은 이 '존경스러운' 소작인들에게 양보할 생각이었고 '소 작권'을 인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국에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고 이 제안들은 거부되었다. 지주들은 부유한 농민들이 1849년에 이민을 시작 하자 그때서야 임대료 삭감을 고려했다. 청년 아일랜드당 1847년 오코넬이 사망하자 그가 이끌던 운동은 경쟁 분파들의 손에서 분열되었고, 정치적 지도력은 카톨릭 성직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주교들은 수시로 국가의 정책을 비난했으나, 앞으로의 향방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사실, 신부들도 빈곤의 벼랑에 몰려 있어 서 자신의 교구만으로도 벅찼다. 1846년 청년 아일랜드당의 민족주의자들은 오코넬과 휘그당의 화해를 반대했는데,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그들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아일랜드에 품고 있는 뿌리깊은 적대감은 그들의 예언대로였고, 대량 사망이라는 사태는 유혈을 혐오하는 오 코넬의 태도가 그릇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라나 청년 아일랜드당은 1848년 전까지는 아일 랜드 정치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오코넬파와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카톨릭 역시 이들에게 적대적이었다. 1847년 제임스 핀턴 랄로는 소작인의 사회혁명을 호소하는 일련의 기사를 썼다. '정복 의 폐지'만이 아일랜드에 자유를 가져온다는 내용이었다. 랄로는 선동가로서 그리 성공하지 못했으나, 당시 영웅적 존재이던 존 미첼과 급진파들의 지지를 얻었다. 1847년 후반 미첼은 임대료와 세금에 반대하는 파업을 호소했고, 이로써 급진파와 온건파는 공공연히 분열되었 다. 1848년 초 아일랜드 동맹으로 개명한 청년 아일랜드당은 반란을 모의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클래런든에게 무한권력이 부여되었고, 그는 미첼을 체포, 그해 5월 반역죄로 기소했다. 준비가 덜 되었지만 아일랜드 동맹을 약속한 봉기를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7월에 인신보 호 영장제도가 중지되었고, 이로써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군대가 더블린에 진주했고, 체포가 시작되었다. 윌리엄 스미스 오브라이언과 추종자들은 티페러리로 가 남부에서 대중 봉기를 기도했다. 봉기의 결과 정부는 반역죄로 기소된 지도자들을 반디멘스랜드(태즈메니아)로 보냈다. 미국이나 프랑스 로 도망간 청년 아일랜드 당원들은 자신들이 품은 대의의 정당성에 확신을 지니고 있었고, 이내 해외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많았으므로 아일랜드인 사회는 이미 성숙해 있었다. 많 은 사람들이 열정만으로 군사봉기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옛 청년 아일랜드 당원들이 모두 혁명전선에 남은 것은 아니었다. 찰스 가번 더피는 1849 년 (더 네이션)지를 복간했고, 1855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토지개혁을 위한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정치적 출세를 지향한 그는 1871년 기사작위를 받고 빅토리아주의 주 지사를 지냈다. 한편, 1856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스미스 오브라이언은 아이랜드 만족주의 진영에서 온건 파의 거두가 되었고, 존 블리에크 딜런은 1865년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가 W.E. 글래드스톤 이 주창한 아일랜드 개혁에 협조했다. 1848년의 봉기는 맹목적인 혁명 낙관주의와 아일랜드의 상황이 낳은 절망의 결합물이었 다. 이 봉기로 대다수 빈민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고, 오히려 아일랜드인은 감사할 줄 모르며 폭력적이라는 영국인의 확신만 더 굳어졌다. 일기 작가 찰스 그레빌은 1848년 여름, 당시 런던의 지배적인 감정을 "아일랜드의 상태와 아일랜드 대중들의 치유할 수 없는 광기에 대한... 협오"라고 표현했다. 제5장 재발, 1848-1851년 1848년 7월 마름병이 다시 나타났다. 관리들은 감자 총수확량이 반을 잃었다고 추산했고, 서부 지역의 재앙은 1846년과 맞먹었다. 클래런든은 그 지역이 빈민들에게 닥친 무서운 결 과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력이 너무나 떨어져 이제까지 겪은 일로도 이미 반이상 망가진 상태'였고, '식량보다는 희망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떼죽음을 당하는' 일뿐이었다. 서부 지역의 고통 예전보다 준비상황이 엉망인 구민법 체제로 새로운 위기를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섞 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외부 구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 1849년 7월에 는 78만 4천명에 이르렀다. 25만 명 이상이 구빈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인파가 한가닥 기대를 품은 채 구빈원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감자흉 작과 끔찍한 구빈세로 몰락한 소자작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구제조치로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혜택마저 받지 못하는 사람 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을 알려줄 수는 없다. 죽음이 망령이 다시 온 땅을 활보하고 있었다. 구빈원의 주당 평균 사망자수는 1848년 9월 1000명당 2.5명에서 1849년 5월에는 12.4명으로 올라갔다. 이 말은 1849년 초에는 전국에서 매주 2500명이 죽어 나갔다는 뜻이다. 1848년 12월, 클레어주 에니스티먼 구빈구의 주당 사망자수가 1000명당 62명이라는 놀라 운 수치를 보였다. 구빈원에 들어온지 두 달도 안 되어 반 이상이 죽었는데, 이는 바깥 세상 에서의 기근가 질병보다 구빈원의 여건이 더 큰 문제였음을 시사해 주었다. 부빈원 바깥의 사망자수를 집계하기는 불가능했다. 특히 서부의 상황은 1846-1847년의 참상을 뛰어넘었다. 가난이 지역 자원을 갉아먹음에 따라 구빈구 연합의 채무는 늘어만 갔다. 1849년 1월, 스 키버린 구빈구의 8만 주민 중 1만 9200명이 턱없이 낮은 원가로 공급되는 구제조치에 의존 했다. 1848-1849년에는 정부의 구제비 지출이 220만 파운드로 치솟았고, 이제 구빈세 증액 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재정파탄에 직면한 구빈관리들은 런던에 도움을 청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령의 땅': 정리는 계속되었다 1848-1849년, 서부 클레어의 킬러시 구빈구는 악질 지주들의 가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아 져 의회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그 지역 구빈감독관인 아서 케네디 대위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의 보고서는 1849년 2월 이전에 이미 7000명 가량이 축출되었고, 그후로도 매주 약150명이 계속 축출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클레어 지방에서는 감자마름병과 대량 축출이 동시에 계속되었고 1852-1853년까지 기근의 고통은 아예 풍토병으로 자리잡았다. 드러난 타락상 서부 지역 구빈원의 상황은 봉급을 받는 대리 구제위원들이 선출직위원들로 대체되면서 1849년 봄까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일부 동정심을 지닌 위원들은 저들의 책임을 다하 기 위해 노력했으나, 권한을 남용해 결과적으로 빈민들을 희생시키는 위원들이 너무 많았다. 1849-1850년에 서부 지역을 방문한 자선사업가 시드니 고돌핀 오스본은 부패의 실상을 밝 혀냈다. 오스본은 리머릭과 클리프덴 구빈구에서 '생명과 품위에 대한 방자한 경멸'이 자행되고, 구빈원의 규칙서인 <푸른 책>에 규정되어 있는 규칙이 함부로 무시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는 상인들이 공급물자에서 남겨 먹을 수 있는 이윤을 노리고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구제위 원이 되더니, 그후에는 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도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휴머니즘이 너무나 메말라 부담이 될 만한 것에는 무조건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에 이런 행위가 용인되 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러는 동안 수용자의 대부분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게으름과 절망 속에서 시들어갔다. 수퍼리즘(souperism) 대기근 당시에 구제는 종교적 개종의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카톨릭 개종자들은 '뜀뛰기 선수' 또는 '국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수퍼(souper)'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개종을 유도하는 것은 국가 구제에서는 금지되어 있었고. 퀘이커교 같은 이타적 그룹에서는 금기시하여 그리흔하지 않았다. 신교도와 장로교 성직자들 역시 이를 거부했고 때로는 사심 없이 카톨릭과 협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퍼리즘'은 실제로 있었고 국가 구제가 중지된 대기근 후반에는 기승을 부렸다. 신교도 복음주의 단체들은 대기근 이전에는 이미 아일랜드 오지에 종교적인 '식민지'를 세 웠는데, 그중 제일 유명한 것들이 메이오의 에이칠 아일랜드와 케리의 딩글에 있는 것이었 다. 1840년대 후반 영국의 복음주의 교파들은 이들 지역에 자금을 보냈다. 대량 아사 속에서 그런 풍요로운 땅은 극빈자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구제사업의 실패 1848년 말에는 개인 자선사업가들의 원조가 중단되었다. 그해 겨울 아일랜드는 어디서건 실질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비들거렸다. 1849년 6월, 마침내 퀘이커교가 구제사업 에서 손을 뗐다. 그들은 "오직 정부만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 고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더 많은 자금이 긴급히 필요해지자 정부 내의 불화가 더 심각해졌다. 우드와 그레이는 ' 순리대로'라며 최소한의 보조금 외에는 더 이상 내놓기를 거부했다. 러셀은 1849년 초 일 종의 원조세를 도입, 아일랜드의 북부와 동부에서 세금을 걷어 굶주리고 있는 서부를 도 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서부의 '게으른' 가난뱅이를 동정하지 않는 얼스터 지방에서는 그 결정에 분개했다. 많은 지주들 역시 연합국가가 부담을 나누지 않는다며 비난했다. 대다수 구제관리들은 대기근이 대영제국 전체의 재앙이며, 더 이상 아일랜드에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트위슬레턴은 '이곳의 참상이 너무나 끔찍한데다 하원은 무 관심하니, 본인은 (구제책이 아니라) 멸종책이 틀림없는 이 정책에는 맞지 않는 대리인'이라 며 1849년 3월 사임하고 만다. 1849년에 구빈법 개정이 있었다. 변화를 바라는 지주들의 요구에 웬만한 양보를 했음이 인정되었으나, 빈민들을 위한 변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트레블리언은 자신의 이데올로 기적 아집에 매달리면서 개입을 거부했다. "지금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마련된 구제책이 효 과를 볼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휴식, 안정이다."라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1850년 러셀이 얻어낸 것은 30만 파운드 추가 대출과 기존 빚의 상환 연기뿐이었다. 러셀 역시 때 로는 숙명론이나 아일랜드인에 대한 비난 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에는 "비 판에 빠진 사람들이 마치 인간 감자처럼 보인다. '뿌리'에서 나온다는 감자. 그들은 뿌리 를 먹고살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그 뿌리를 지킬 것이다."라고 말한 클래런든의 절망적인 논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 자유거래 1849년 많은 영국인들은 '토지자유거래'를 아일랜드를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했다. 토 지소유권을 공개하여 시장의 조절능력에 맡기자는 생각은 자유주의적 상상과 맞아떨어졌고 지주들에 대한 비판과도 잘 어울렸다. 중간 계급의 급진주의자들과 정치가들은 아일랜드에 는 그 자산가들에 대한 '정리', 즉 대규모 축출이 필요하다며 그들을 영국의 중간 계급인 ' 자작농(yeoman)'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유무역 신봉자였던 찰스 우드가 그 대표였 는데, 그들은 영국의 자작농들이 자본과 기업가적 가치를 아일랜드에 도입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대기근 이전에도 많은 사유지가 파산상태였다. 복잡한 법적 제한과 상속문제로 토지거래 는 뜸했고, 저당권자들은 꾸준한 소작료 수입에 만족하고 있었다. 중개인들이 소작료를 대신 받아주었고, 소잔인들은 과도한 소작료에 시달렸다. 대기근은 더 많은 지주들을 파산시켰으 나, 낮은 토지가격 때문에 땅에 집착하는 지주들이 많았다. 1847년과 1848년에 토지개혁을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법적장애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 1849년 드디어 '저당 잡힌 토지에 관한 법'이 제정됨에 따라 토지판매에 강제력을 행사 할 특별법원이 세워졌다. 특별 법원은 1853년까지 917건의 부동산을 팔았으나 기대했던 효 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매자의 불과 4%만이 외국인이었다. 중간 계급의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가 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존의 영구계 아일랜드 지주 사이에서 재분배되고 말았 다. 대량 축출로 생긴 대규모 농장을 임대 또는 관리하겠다고 온 영국인 농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왕의 방문 클래런든은 빅토리아 여왕의 '사적인' 방문을 희망했다. 여왕의 방문은 정치상황을 안정시 키고, 아일랜드 토지에 대한 투자를 촉진시키며 나아가 대기근의 '끝'을 상징하였다. 이번 의 방문은 1821년 이래 처음 있는 왕가의 방문이었다. 왕가 일행은 1849년 8월에 코크, 더블 린, 벨파스트를 방문했고 킬데어에는 아주 잠깐 들렀다. 이때 여왕이 둘러본 지역은 회복 중인 곳이었고 기근에 찌든 서부는 다시 한번 무시되었다. 대기근이 초래한 손실 1851년에 실시된 조사 결과는 아일랜드의 인구가 약6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확 인해 주었다. 자연성장률을 감안한다고 해도 행방불명자수는 약24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 분의 1에 해당했다. 사망자수와 이민자수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해도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의 결과는 대기근으로 희생된 사망자가 약 11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대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장 고통받기 쉬운 위치에 있던 빈민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그리고 의사, 성직자, 그리고 구제관리들 역 시 전염병에 걸려 많은 희생자를 냈다. 작은 수치이지만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죽었고, 아주 어린아이들(5세 이하)과 장노년층(40세 이상)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아일랜드의 재앙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은 정말 한심했다. 1845-1850까지 재무성이 지 출한 구제사업비는 810만 파운드였으나, 그중 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가 되갚아야 할 차관 형 식으로 제공되었다가 1853년 당시까지 남아 있던 부채를 전부 무효로 한다는 조치가 발표되 었을 때, 계산한 순수 지출은 700만 파운드였다. 그것은 영국의 5년간 국민총생산의 0.5%도 안 되는 액수였다. 당대 사람들은 그 액수가 1830년대 서인도 제도의 노예소유주에게 지급 한 200만 파운드의 보상액과 엄청난 대조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1854-1856년의 크림 전쟁에 쏟아부은 7000만 달러의 전쟁비용과도 비교가 안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대기근의 손실 만회를 위해 영국보다는 아일랜드에서 더 많은 돈이 모금되 었다. 구빈세와 지주들의 차입금이 850만 파운드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이 나라의 자원을 최 대한 짜낸 액수였다. 1847년 여름, 정부는 사망률을 줄일 수 있는 행정구조를 만들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 다. 이때부터 수입식품의 가격이 하락하면서 정부의 개입이 더욱 쉬워졌다. 1849년 에드워드 트위슬레턴은 영국이 '불쌍한 동포를 굶어 죽게 만드는 무거운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액수'가 필요하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리는데 그 이상의 돈이 지출되지 않았던 것은 이데올로기의 강박이 인도주의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제6장 대이동, 1846-1855년의 이민 대기근 이전의 이민 18세기에는 수천 명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착했다. 이 초기 이민자들은 아일랜드 북쪽에서 건너간 장로교도들이 많았고, 신교도와 카톨릭도 일부 있었다.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대이동이 1815년에 다시 시작되면서 그 숫자도 늘어났고, 카톨릭의 비율도 높아졌다. 1845년 전까지 약 10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주로 캐나다와 미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공업도시로 진출하는 예도 많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경비가 비싸서 재정적인 도움 을 받는 소수민이 이민을 갈 수 있다. 이민자의 대다수는 아일랜드의 영어 사용 지역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 출신이었다. 미국 이민자들은 '착실한' 농민과 그 가족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신대륙에 가면 상황이 더욱 나빠 지고 있는 아일랜드에서와 달리 자립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소자작농, 입찰소작인들도 갔다. 그들은 지주의 도움을 받거나 먼저 간 사람들이 보낸 돈으로 떠났다. 극빈층에서 일단 '리버플이나 그래스고로 가는 싸구려 기선을 타고 거기서 대서양을 건널 돈을 버는 단계적 이민'을 택하기 시작했다. 신대륙으로 가려는 아일랜드인은 늘어갔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미국행 운임은 여전히 비싼데다 농장을 세울 만한 돈을 가진 농부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 횡단 자체도 위험했고, 도착한 뒤에는 강도, 사기꾼, 곱지 않은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 구나 친척이 이민의 고통을 담아 편지를 띄우기도 했는데, 이 편지 한 통에 온 가족이 이민 을 포기하기도 했다. 사제와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원칙적으로 이민을 반대했고 심지어 적대 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기근으로 인한 이동 1846년, 두 번째 감자흉작을 맞았고, 이 일은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렸다. 보통 때라면 겨 울 폭풍을 맞으며 대서양을 횡단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겠지만 1846-1847년을 휩쓴 기아 의 공포는 수천 명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내몰았다. 문화적인 금제가 무너지고 목가적인 아 일랜드의 사회구조가 붕괴되면서 공포가 가족들을 뿔뿔이 찢어 항구로 내몬 것이다. 이제 '이민자를 보내는 밤샘' 같은 전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향에서 축출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떠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 다. 그러나 그 첫 삽을 뜬 사람들은 추수철의 일거리를 위해 영국으로 영구 이민이나 계절 성 이민을 가는 전통이 있는 지역 사람들이었다. 그런 전통이 없는 남서부 코크 같은 곳의 빈민들은 이민을 주저하다 기력과 가진 것이 다 소진되면 마을에서 죽었다. 1847년 말,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는 23만에 이르렀고, 영국행도 수만 명에 달했 다. 이 수치는 평소보다 훨씬 많았던 전년도 수치의 배를 넘는 것이었다. 1847년 후반이 되 면 이민자수가 급격하게 떨어지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먼저 가 있던 친구 나 가족이 뒤따라오고 실어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냈는데, 1849년에는 이 돈이 50만 파운 드를 넘었고 1851년에는 배로 늘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돈은 가족과 마을 전체의 '연쇄 이민'을 촉진시켰고, 이것은 대기근 이후의 아일랜드 이민의 특징이 된다. 1848년에 불어닥친 감자흉작은 또 한차례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불러일으킨다. 1848-1849 년 겨울과 1849-1850년 겨울, 사람들은 겨울 항해에 나섰고 이로써 마을 전체가 내버려지는 일도 있었다. 부유한 농부들마저 손실을 줄이기 위해 떠나자, 이제 소작인을 내쫓던 지주들 이 아일랜드의 '인구감소'를 우려하게 된다. 1849년과 1850년에 미국 이민자수는 각각 20만 명을 넘었다. 이런 추세는 1851년의 25만 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게 된다. 지주의 이민 보조 모든 이민자가 자비로 배삯을 내고 이민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대기근 이전에도 적지 않 은 지주들이 소작인 이민을 보조하곤 했는데, 감자흉작 뒤에는 이 일에 동참하는 지주들이 늘어났다. 대다수 지주들은 영농개선을 위해서는 자기 영지 내 인구를 줄일 조치가 필요하 다는 데는 모두 공감했지만, 대부분 국가의 도움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보조를 한 지주들 중 몇몇은 해외의 신용대부나 자금을 얻을 수 있어 형편이 썩 좋았던 자들이다. 그 중에는 정부관리였던 랜스다운 경과 파머스턴이 있다. 이민을 보조하는 지주들 은 '자발적인' 이민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이민자들의 유일한 대안은 축출이었기 에 1846-1847년에는 아일랜드 항구에서 마을 사람이 모두 배를 타기도 했다. 지주가 후원하 는 배는 형편이 나았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1846-1850년까지 지주들의 보조를 받은 이민자는 2만 2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자산가들 은 손익을 따져서 보조를 했지만, 온정적인 차원에서 보조를 한 지주도 있었다. 로버트 고어 부스경은 슬리고주에서 1340명의 '잉여' 소작인을 위해 1만5천 파운드를 지출했다. 소작인들 에게 보조 이민은 대기근 탈출이며 이웃, 친척과 함께 떠날 수 있는 기회였다. 식민개척과 정부 정부관리들은 지주들이 이민을 도울 위무가 있다고 믿었고, 1847년 이래의 자발적 대이동 에 관여하기를 꺼렸다.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은 아일랜드인에게 일자리를 준다면 아일랜드는 인구과잉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며 '식민개척'을 위한 세금인상 에 반대했다. 한편 영국의 식민지들은 '위험한' 카톨릭계 아일랜드 빈민들의 유입을 제한해 달라고 본국 정부에 탄원했다. 그들이 질병과 불평을 옮겨온다고 믿은 탓이다. 식민성 장관 그레이경은 트레블리언의 도덕주의에 공감하던 사람이었다. 1846년 후반, 식 민 개척안을 검토하던 그는 이 계획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848년, 러셀은 무언 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핼리팩스와 퀘벡을 잇는 철도 건설사업의 노무 자에게라도 이민보조금을 주고자 했다. 클래런든의 지지가 있었지만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당시의 유일한 국가 보조 이민은 구빈법에 따른 것이었다. 구제위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민을 보조할 용도로 세금을 전용할 수 있었지만, 1849년 이전에는 쓸 돈이 별로 없었다. 1850년대 초에 들어와서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 그곳도 주로 여자와 어린이들이 구빈원을 떠나 캐나다로 향했다. 대서양 횡단 당시 리버풀은 영국 제2의 도시로서 활기에 넘치는 상업항이었다. 또한 이곳은 폭증하는 이민자의 물결에 맞추어 많은 이민선을 댈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영국의 공업제품과 미 국의 농산품의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리버풀-뉴욕 항로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가장 싼 배편은 캐나다의 목재선이었다. 한편, 목재를 내려놓은 선주들은 빈 배로 가지 않고 대신 인간화물을 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해했다. 세인트로렌스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영국령 북미주(캐나다)로 항해해 가기가 어려웠음에 도 1847년 약 11만 명이 퀘벡, 세인트존, 그리고 다른 항구를 향해 떠났다. 1847년에 제정된 미국의 승객법이 이민 수송에 엄격한 규제를 가하자 배삯이 1인당 7파운드 이상으로 올랐 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더 싸고 규제도 덜한 캐나다로 항로를 이용했다. 물론 그들의 최 종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선주와 투기군은 아일랜드인의 대이동을 이용,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중개인은 이용 가능 한 배는 모조리 임차했고, 아일랜드에 판매대리인을 두고 표를 팔기도 했다. 항해에 부적합 한 소형 배들은 검문을 피해 서부의 작은 항구에서 사람들을 태웠다. 사람들로 끓어 넘치고 시설조차 형편없는 이런 배들은 '송장 배'나 다름없었다. 사망률이 끔찍이 높았던 탓이다. 중개인들은 아일랜드 빈민의 무지와 절망감을 교묘히 이용했다. 아일랜드 빈민들은 미국이 얼마나 먼지, 항해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도 못 했다. 그로스아일에 도착한 이민들 대기근 이민이 겪어야 했던 육체적 고통은 캐나다에 닿는 순간 분명해졌다. 퀘벡행 배는 세인트로렌스강 아래 40Km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인 그로스아일의 검역소에 들르게 되어 있 었다. 대기근이 시작된 후 도착한 첫 배인 시리아호는 1847년 5월 14일에 검역소에 들렀는 데, 승객 총 241명 중 84명이 발진티푸스 환자였고 9명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이어 나흘 동안 8척의 배가 430명의 환자를 더 데려와 병원용으로 많은 건물들이 징발되 었지만 이작도 수많은 환자가 배에 방치될 지경이었다. 5월말이 되자 40척의 배가 세인트로 렌스강을 떠돌았고 섬에는 1100명의 환자가 지독한 조건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더 이상 건강한 사람과 환자를 격리시키기가 불가능했고, 건강한 사람은 섬에서 질병을 가지고 나갔 다. 급기야 병이 내륙으로 퍼지면서 몬트리올과 토론토의 주민 가운데에서도 사망자가 속출 했다. 1947년 항해가 일단락 되고 그로스아일 검역소가 폐쇄될 무렵까지 5300명 이상이 섬 에서 죽었고, 최소한 1만 5천 명이 영국령 북미주에서 이내 죽음을 맞았다. 항해 중에 얼마 나 수장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대기근 기간에 대서양 횡단에 나선 사람 중 최소한 5% 는 항해중 죽었을 것이다. 캐나다의 아일랜드인 1848년이 되자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영국이 캐나다의 항의에 따라 새로운 승객법을 제정하여 한 척의 배가 수송할 수 있는 승객의 수를 제한했던 것이다. 이 법과 혹독한 이민 세, 목재 무역의 퇴보로 배삯이 오르자 1848년의 캐나다행 이민은 2만 5천명으로 줄어들었 다. '역병의 해'인 1847년을 견뎌낸 생존자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 떤 배들은 보스턴이나 뉴욕에 가지전에 핼리팩스, 세인트존, 뉴브룬스윅에 잠시 정박했는데, 영국 식민지에 머무른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계속 미국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 나 캐나다의 목재 무역의 퇴보와 미국에 있는 가족 또한 미국행이 줄 이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에 정착했다. 19세기를 통틀어 미국보다 캐나다에 아알랜드 출신 정착민이 더 많이 분포했고, 1880년대까지는 비프랑스계로서는 아일랜드인이 최대 집 단을 이루었다. 개중에는 작은 농장을 사서 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었다. 캐나다의 비차별적 인 태도는 통합을 촉진시켰고, 생활수준을 급속히 향상시켰다. 뉴욕과 보스턴 1848년 아일랜드 이민자의 대다수가 뉴욕으로 직행했다. 미국행 항해에서 전개되는 상황 은 1847년의 캐나다행보다는 나았지만, 제일 큰 이민선이나 정기선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불 편하고 피곤하며 위험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미국의 선박 역시 승객을 상대로 하여 사기를 치는 따위 야만적 행동은 여전했고, 이러한 사태에 대처할 만한 능력이 없던 영국과 미국 당국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대기근 이민자들은 미국행을 매우 선호했지만 미국에 도착한 뒤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미국 당국은 아일랜드 이민을 제한하기 위해 1847년에는 선박중개인이나 이민알선 자에게 이민자의 복지를 책임지게 하는 일종의 조증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요리조리 법망을 빠져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캐나다 국경을 넘는 이민의 물결을 막아보려는 시도도 실 패로 끝나고 말았다. 1847년 보스턴에는 3만 7천 명이 넘는 아일랜드 이민의 유입으로 인구 가 3분의 1 가량 증가되어 주택, 의료시설, 그리고 자선비용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뉴 욕의 사정은 이와 달랐다. 1847년 5월-12월 사이에 들어온 5만 3천 명의 아일랜드인을 수용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스테이튼아일랜드 검역병원에서 나온 아일랜드인이 병 을 퍼뜨렸지만 그 또한 손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장애를 이기고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들 앞에 풍요의 길은 열려 있었지만, 대기근 세대에게 풍요란 돈을 가져온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다. 아일랜드를 떠난 모두가 대서양을 건넌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아일랜드 날품팔이 인부들은 영국 노동력의 일부였으나, 대기근 이민자들은 영국 에서 적대적 시선과 마주쳤다. 가장 가난한 계층인 그들은 도착지에서 더 나아갈 체력도, 돈 도 없었다. 1847년 이들의 대량 입국으로 아일랜드의 붕괴 대한 영국인들의 편견이 더욱 굳 어졌고, 도덕적인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주로 랭카셔의 발전한 도시들, 클라이드사이 드, 그리고 웨일스와 브리스톨 남주에 도착했다. 1847년 리버풀은 넘치는 아일랜드 이민들로 발진티푸스가 유행했고, 구빈세로 연명하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영국의 구빈법에는 일종의 정착지 규정이 있어서 빈민을 출생지로 돌려보낼 수 있었는데,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1847년 리버풀에서만 1만 5천 명이 더블린과 코크 로 돌려보내졌고, 이들은 항구에 내동댕이쳐졌다. 리버풀에 오래 살았던 아일랜드인 가운데 일부도 이때 송환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 이때 송환된 수는 당시 도착한 수십만 명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런던을 비롯한 여러 대도시로 갔지만 대부분 잉글랜드 북서부와 클라이드사이드에 남았다. 1851년에는 리버풀의 인구 중 5분의 1 이상을 아일랜드 대기근 이민이 차지하게 된다. 아일랜드인이 영국에 동화되기는 쉽지 않았다. 노동계급 카톨릭 교도들은 영국식 생활에 젖어 있지 않았으나, 미국으로 가거나 아일랜드 로 돌아가고자 하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습관상 또는 필요에 따라 눌러앉았다. 1852년의 저 악명 높은 스톡포트 폭동처럼 인종-종교적 갈등은 많은 아일랜드 공동체가 방어적인 정치자세를 취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호전적인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카톨릭 교회가 사회중심체로 등장하며서 아일랜드인의 동화에 매개체로 작용했고, 영국 노동당의 등장도 아일랜드인의 통합을 촉진시켰다. 정치, 사회 그 리고 운동경기에서 나타나는 분파적 경쟁의식은 최근까지도 리버풀과 글래스고를 갈라놓았 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전의 적대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적어도 1969년 얼스터 '분쟁 '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미국의 아일랜드인 아일랜드 이민들은 돈이 별로 없어도 살 수 있는 도시 빈민가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 다. 대기근 이민 대다수가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로 위험도가 높은 일에 몰렸다. 감옥, 보호 시설, 구빈원에 수감된 아일랜드인의 수는 다음 수십년 동안 언제나 평균 이상을 차지했다. 아일랜드인은 자주 이동했지만, 어디를 가든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실망과 후회가 지배적 인 감정이었고, 조기사망은 그들의 유일한 운명이었다. 미국 사회의 반카톨릭 분위기 또한 많은 아일랜드인을 소외시켰으며, 대기근 이민의 물결 로 반카톨릭 분위기는 한껏 과장되어 있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는 아일랜드 오렌지당 과 미국의 원주민 우선주의가 결합되면서 모든 계층의 카톨릭교도 차별이 조장되었다. 일부 이민자들은 개종하거나 '미국식' 이름과 습관을 받아들였지만, 대부분은 아일랜드 카톨릭 곧 동체의 상대적인 안전함 안으로 물러나 버렸다. 또 아일랜드인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기 구들인 카톨릭 교회, 뉴욕의 태머니 홀 같은 민주당의 정치기구, 아일랜드인의 민족주의 운 동등도 기대기 좋은 곳이었다. 이민자의 증가, 차별대우, 고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으로 아일랜드 공동체는 자의식이 강하며 활기찬 사회로 유지될 수 있었다. 재미 아일랜드 인은 재영 아일랜드인과 비슷한 문 제에 부딪혔지만, 미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점진적 진보를 성취할 수 있 었다. 그러나 대기근 기간이나 이후 수십년 동안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그곳 또한 확실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이민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국의 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기 근 당시 도착한 사람과 그 직계 후손들이 가지 고 있는 이 상은 너무나도 반영국적인 것이 었다. 망명한 청년 아일랜드 당원들은 이러한 반영감정을 분명하게 표출시켰다. 청년 아일랜 드 당원들은 1850년대에 아일랜드계 미국인 정치사회의 상층부로 진출했다. 변호사와 저널 리스트로 이루어진 이 엘리트 그룹은 대중의 신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중들은 도시 이 '지도자들'과 이웃들의 영향을 받으며 실생활 면에서 자신들의 삶을 조직해 갔다. 영국을 증오하는 감정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민족주의의 특징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된 '스키머린의 복수' 이야기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적 강박의 무게를 잘 보여주었다.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자금을 마련했고, 대기근 당시의 '범죄상'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 다. 카톨릭 교회: 아일랜드계 미국인 기구 19세기 중반 이후, 아일랜드계의 정력적인 주교들은 미국 카톨릭을 이끌었고, 다른 카톨릭 계 이민들도 아일랜드계의 지배를 당연시했다. 19세기 말 카톨릭 교회는 다른 나라에서 그 랬듯이 교육, 운동경이,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시킨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일 랜드인의 지위가 상승한 것은 그들이 부를 쌓고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한 덕이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행동과 개개인의 인내는 카톨릭계 아일랜드인에 게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1900년이 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 중 15%민이 미숙련 날품팔이 인부로 남게 된다. 그리고 경제 피라미드의 제일 밑바닥에는 그들을 대신해서 다른 나라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리를 채웠다. 1920년대에는 아일랜드인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로 편 입되기 시작했고, 1960년대가 되면 카톨릭계 아일랜드 출신들이 미국의 최고 소득자 대열에 오른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회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갈망으로 똘똘 뭉쳐 독특한 위상 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국'을 바라보는 감상적인 관념은 변화된 아일랜드의 실상과 거리가 멀었고, 1960년대가 되면서 결국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일랜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야 되살아나 새롭고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혈통에 대한 관심의 증가, 1980년대에 시작된 젊은 아일랜드 이민의 새로운 물결-이들 대부 분이 처음에는 불법 이민자이자만-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재탄생에 기여하지 있는 것이다. 제7장 에필로그: 대기근이 남긴 유산 경제회복 지주와 부농에게 대기근 이후의 수십 년은 향상과 번영의 세월이었다. 정리와 통합은 이 들 자산가들에게 땅을 재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대부분이 목초지 농업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었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곳일수록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1861년에는 아일랜드 땅의 5분의 2 가 100에이커 이상의 대규모 목초지로 바뀌었다. 가축 수출이 성장함에 따라 상업의 근대화 가 이루어졌고, 도시 특유의 전문 직종과 상업에 종사하는 중간 계급이 등장해 그 일을 맡 았다. 대기근 생존자가 모두 빅토리아 시대의 혜택을 본 것은 아니었다. 생활수준의 향상이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부랑인이 되었고 최저 한도의 아일랜드식 생활로 목숨을 부지했다. 구직경쟁이 줄어들면서 날품팔이 인부들의 생활도 약간은 나아졌지만, 서부 해안지방에서는 소규모 영농과 감자에 의존하는 생활방식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계절성 이주노동과 해외에서 들어오는 돈에 의존하는 곳이 많았다. 서부의 좀더 나은 지역에서는 대규모 목축장을 영국인이 운영했다. 그런 목장은 분도의 대상이자, 대기근 당신의 불공평을 상기시키는 존재였다. 더구나 대기근 이후의 부가 엄격한 사회질서 유지라 전제하에서 분배되고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재산을 한 명에게만 상속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결혼은 장자만 하고, 다른 형제들은 이민을 가거나 날품팔이 인부로서 독신생활을 하는 편 을 선택해야 했다. 대기근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복잡하다. 마름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노동력 수요는 꾸 준히 증가했을 것이고, 가축가격이 오르면서 사료용 감자 생산도 자극받았을 터였다. 그러나 감자와 20만이 넘는 수자작농 가구의 상실은 곡물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고, 이제 농업은 대다수 농민을 이민길로 내몰고 소수를 부자로 만들고 말았다. 깊은 상처를 간직한 사회 대기근의 심리적 유산을 측량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구의 대량 감소는 깊은 감정적 상흔을 남겼다. 대기근의 영향과 기억은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달랐다. 동부와 북부는 급 속한 회복을 보였지만 수부의 아일랜드어권에서는 그 기억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구전은 시골의 분위기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보여준다. 대기근 이전 사회의 문화적 활기는 수그러들었고, 민속이 쇠퇴했으며 전에는 떠들썩하던 시장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친절의 미 덕이 좀더 계산적인 행동으로 대체되었다. 이 변화는 품위와 '자립'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 는 '든든한' 농민들이 인구통계상 우위를 점한 현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대기근 최대 피해자중 하나는 바로 아일랜드어였다. 18세기에도 영어 사용층이 꾸준히 늘 어났지만 1845년까지 400만 명이 아일랜드어를 썼다. 그런데 죽거나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주로 아일랜드어 사용층이기에, 1851년에는 아일랜드어 사용자수가 반으로 줄어든다. 대기근 은 아일랜드어와 가난 또는 후진성을 더욱 강하게 연관시켰고, 아일랜드어를 버릴 것을 더 욱 종용했다. 신앙혁명 1850년대가 되면 종교는 더욱 형식적인 틀을 갖추고 신비적 성향이 일반화된다. 컬트 성 인들의 축제를 축하하는 토속축제와 계절의식은 대기근으로 중단되었고 불신의 대상이 되었 다. 대기근에서 살아남은 것은 불과 몇 개 되지 않았고, 더욱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변해갔 다. 인구가 감소하면서 주민 대 사제의 비율이 1840-1900년 사이에 세 배로 뛰었고, 사제와 수도사의 총수도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이들 모두 농민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농민의 관 습과 소망에 공감하고 있었다. 신교와 카톨릭은 서로 비슷한 도덕적 엄정주의를 갖고 있었으며, 또한 상대방에 대해서 서로 적대감을 가졌다. 펠파스트는 신교와 카톨릭 양쪽의 시골 빈민들을 다 흡수했고, 자연 히 종교적 긴장이 제일 팽팽해졌다. 민족주의의 부활 대기근 이후의 정치적 공백상태에서 지주들은 지역통제권을 재장악했다. 농민의 사회적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소작인들의 조직체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과거 오코넬 시대를 특정 지웠던 이민주의의 정치적 활기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혁명의 전통은 많은 대기근 생존자 속에 그대로 남아 페니아회라는 조직으로 다시 태어났 다. 이 단체는 미국과 영국에서 일차적으로 아일랜드인의 민족적 감정을 표현했으나, 정작 아일랜드에서는 교회가 이들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이들과 거리를 두 었다. 1867년 페니아회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의 성공은 봉기가 있고 난 뒤였다. 투옥된 죄수들의 구출운동에 대중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심지어 성직자들까 지도 세 명의 '맨체스터 순교자' 처형에 분노했다. 이 사형수들은 구출운동을 벌이던 중 우 발적으로 경찰관을 죽이는 바람에 처형되고 말았다. 민족주의적 대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 에 대한 지지표명은 대기근 이후의 아일랜드 정치에서 조직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토지전쟁 1879년에는 코노트에 다시 감자흉작이 들었고, 아일랜드는 새로운 기근과 직면해야 했다. 이때 페니아회의 지원을 받은 토지동맹이 농민과 노동자 계급의 전국적 결사체로서 등장했 고,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이들을 이끌었다. 1880-1881년 축출이 다시 시작되자 토지동맹에서는 축출 방해운동과 지주와 지주들의 동 맹에 대한 거부운동을 펼쳤다. 파넬은 정치적 실용파임에도 자신의 웅변을 청중들에게 맞춰 조율하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대중의 기억력을 잘 이용한 그는 동맹의 궁극 목표가 '대 기근을 없던 일로 하는 것'임을 되풀이 주장했다. 1882년에 끝난 토지전쟁은 지주측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지주들은 소작인고 소유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으며, 1885년과 1903년의 토지구입법은 소작인에게 농장 구입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이 상황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소농과 날품팔이 인부에게는 돌아 간 것이 거의 없었다. 1920년경 대부분의 아일랜드 농민이 땅을 소유하지만 대기근은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현대의 아일랜드와 대기근 대기근이 오늘날 아일랜드에 남겨놓은 의미는 복잡다기한 무엇이고 또한 아직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특히 폭력적 적대행위로 얼룩진 북부 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대기근 이란, 과거 존 미첼이 대기근에 부여한 의미와 같은 것이다. 즉 대기근은 영국인의 아일랜드 인 탄압의 최종 단계이다. 1960년 이후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아일랜드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대기근의 이미 지가 차츰 흐려지고 있다. 아일랜드 대중을 과거의 신화에서 떼어놓고자 열심인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대기근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 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서면서 이 견해는 그 재앙에 대한 진지한 연구들의 도 전을 받고 있다. 지금의 연구들은 존 미첼 식의 거친 주장이나 자기만족적 상투어를 배제하 고 있다. 대기근의 기억은 아일랜드인의 정신 깊은 곳에 흐르고 있으며, 1995년의 150주년을 계기 로 이 기억은 긍정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표현된다. 그 예가 바로 1994년 로스코면주의 스트록스타운에 세워진 대기근 박물관이다. 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저택'에 딸린 별채들을 개조한 이 박물관은 대기근에 관한 그림, 문헌, 기록들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현대의 기 근들을 보여주는 실례들은 대량 기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기근들의 추악하고도 공포스런 실체를 일깨운다. 오늘날 아일랜드는 국제 구 호기관들에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지원 비율이 어느 유럽 국가보다도 높다. 여러 민간 구호단체들은 1840년대의 아일랜드와 현재의 개발도상국의 유 사성을 강조하면서, 대기근의 기억을 국제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재앙을 가능하게 만드 는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 전념하고 있다. 기록과 증언 대기근 이전에 아일랜드를 여행한 사람들 영국의 농업학자이자 작가인 아서 영은 웨스트미스주의 실상을 설명해 두었다. 롱포드 1세 결과 대화하면서 나는 하층계급의 상태에 관해서 많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던 중 나는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좋은 환경 속에 있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 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감자라면 언제나 배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갖고 있으며, 아마포 역시 충분하고, 대부분이 소 한두 마리를 키우고 있고 양모도 넉넉하게 잣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소, 송아지, 돼지, 가금류, 어린이로 이루어진 완벽한 가정들이다. 돼지는 오두막 안에서 같이 살고, 연료는 무진장하게 있으며, 대다수의 가정이 인근의 호수에서 물 을 얻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물고기 또한 풍부하다. 그런데 그 이면을 보면 주민들의 옷은 누추하고 그 외양 또한 초라하다. 더 큰 문제는, 그 들이 소, 말 따위를 키우는 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은 농 부나 지주의 일을 해주는데 그 임금은 대체로 외상으로 처리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1 년 노동의 대가로 손에 들어오는 현금은 거의 없다. 이러한 거래야말로 진정한 억압이다. 아 서 영(1776~1779년의 아일랜드 여행), 1780년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아일랜드에 이민 온 슈발리에 드 라 토크네유는 웩스포드에서 발생 한 '백의당의 난'에 관해서 글을 남겼다. 1793년 7월, 이곳의 백의당원들은 완전한 패배를 맛보았고, 그후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 다. 그들에 관해서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와 글이 있지만, 나 나름대로 그들에 관해 상세하 게 적어두면 후일 흥미를 끌 것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농부들은 마지못해 십일조를 낸다. 십일조는 성가신 부과금이고, 경작의 확산에 방해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일해서 얻은 것에 비례 해서 내야 할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십일조가 더욱 성가신 존재로 보였다. 왜냐하면 주민의 절대다수가 카톨릭인데 교구 성직자는 신교도인 경우가 종종 있고, 또 그 성직자가 자신의 권리에 관한 한 아주 엄격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십일조 외에도 성직자는 아일랜드의 거의 전역에서 우유의 10분의 1, 달걀의 10 분의 1, 텃밭에서 나는 채소의 10분의 1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성직자가 자신의 직분을 다 한다 해도 이런 조건들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성직자들의 생계까지 그대로 떠맡아야 한다. 이 문 제와 관련해서 주민들은 부지런히 불평도 하고 탄원도 해보고 있다. 그러나 국교법을 고치 지 않는 한 그들의 탄원이 먹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의 종교는 국가에서 법으로 정한 국교이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불평과 탄원에서 위협으로 나아가고, 그 위협은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들 은 밤이면 모였고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서 옷 위에 셔츠를 입었다. 거기서 백의당이라는 이 름이 나온 것이다. 그들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 성직자들 집의 대문과 현관을 부셨고, 가축 의 꼬리와 귀를 잘라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고 그 외 또 다른 폭력적인 행동이 있지 는 않았다. 낯선 여행자는 안전하게 이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웩스포드의 치안판사들이 위의 것과는 다른 유의 범죄혐의로 20여 명의 범죄자 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의 동지들은 석방을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거절되었다. 그들은 힘으로 석방시키겠다고 위협했고, 2000~3000명이 시내를 행진했다. 웩스포드 시장은 백의당원들과 이야기하겠다고 군대 앞으로 나아갔다. 치열한 논쟁이 벌 어졌고, 흥분한 당원들이 낫으로 시장을 공격해 그 자리에서 숨지게 만들었다. 순간 군인들 이 발포하기 시작했고 2~3분만에 백의당원들은 수백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뿔뿔이 흩어져 도 망쳤다. 운 나쁜 부상자들은 잡힐 경우 처벌이 두려워 사력을 다해 옥수수 밭과 울타리 속 으로 숨었으나 결국 그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이 싸움 후 농부들의 반역에 관한 이야기는 없으며, 온 나라가 조용하다. 내가 보기에 이 번의 반란은 프랑스 대혁명과 그 시작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슈발리에 드 라 토크네유(한 프랑스인의 아일랜드 주유기), 1796~1797년 1806년, 영국의 여행기 작가 존 카가 아일랜드의 감자의존도가 너무 높다고 지적하는 글 을 출판했다. 그는 짐짓 걱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오두막은 대홍수 때의 노아의 방주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 아이 들, 소, 돼지, 가금류, 개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이좋게 잠을 자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양 이도 같이 있을 때가 많다. 87채의 오두막에서만 120마리의 돼지와 47마리의 개가 확인되었 다. 위클로주에서는 오두막과 감자밭의 임대료가 1기니에서 2기니까지 한다. 사람들은 1주일 에 엿새는 감자와 버터밀크를 먹고, 안식일은 '푸딩'대신 베이컨과 야채를 내놓는다........노동 의 대가는 하루에 6펜스이다. 영국에서는 살림살이 준비가 부족하면 결혼에 큰 장애가 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거나 아예 그런 것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시골뜨기들은 주거시설이 보잘 것 없다 해도 불평하는 법이 없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이러 저리 헤매다가 마른 언덕이 나 타나면 나뭇가지 몇 개를 집어들고 가시금작화와 잔디를 그러모은다. 그리고 진흙과 볏짚으 로 높이가 1.8m정도 되는 오두막을 짓는다. 햇빛이 들고 연기가 나갈 수 있게 문도 하나 낸 다. 집이 완성되면 신부가 맺어준 행복한 한 쌍은 숲 속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토실토 실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을 쑥쑥 낳는다. 그것을 보면 그처럼 형편없는 살림살이만으로 도 생명을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되는 셈이다. 남편과 아내, 네 아이면 하루 평균 37파운드의 감자를 먹는다. 아일랜드 감자와 관련된 재 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 영국인이 어떤 오두막에 갔는데 혈색 좋은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 아버지에게 물었다. "당신네 시골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건강한 아이들을 키 울 수 있소?" 그러자 아이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 예, 전부가 다 감자 덕분입죠. 나으리." 좋은 감잣가루 3파운드는 1파운드가 넘는 빵 만한 가치가 있다. 신께서 당신의 은총을 넉 넉히 베풀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잘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 려줄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데, 빵과 고기를 먹고사는 한 사람의 소비량이면 빵만 먹고사는 사람 다섯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감자를 먹고사는 사람 열둘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이다. 가을에 감자를 캐기 직전에 이랑에 보리씨를 뿌리고 수확한 것을 구덩이에 파묻고 흙을 덮는데, 모양이 마치 경사진 지붕 같다. 감자는 생산성이 아주 좋다고 한다. 경제학자들 중 에는 감자의 다산성에 매료되어 이것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으며, 아일랜드에 서는 감자를 일차적인 식량자원으로 '카드모스(테베를 만든 영웅)의 이빨'처럼 귀중한 사 람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감자의 수가 일정하다고 할 때, 지난 해 사회구성원을 증가시킨 어린아이들의 평균숫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감자수확량에 관한 적절한 보고서만 있으면 될 것이다. 나는 감자의 질 높은 영양을 인정한다. 또한 아일랜드 시골뜨기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감자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은 할 일도 별로 없고, 실제로도 별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이 개화되고 경험이 많은 의료계 친구가 나에게 확인해준 대로 감자는 격렬한 운동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는 데는 부적합하다. 제철소에서 일하는 직공은 감자 외에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서는 세 시간 이상 일할 수 없을 것이다. 존 카(아일랜드의 이방일: 또는 이 나라의 남부와 서부 지역 여행기, 1805년), 1806년 스코틀랜드의 여행기 작가 헨리 잉글리스가 아일랜드 가내공업의 쇠퇴를 설명하고 있다. 웨스트포트는 한때 크게 번영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아모포 무역이 무척 활발해서, 8년 전만 해도 하루에 900덩어리나 되는 아마포가 거래되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서 거래 되는 아마포는 100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는 생활필수품 외에 가외용품은 전 부 이 아마포 무역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구입한다. 경지의 임대는 아주 작은 단위로 이루어 진다. 한 번의 임대계약에 보통 7~8에이커 정도가 대상이 된다. 이때 감자는 가족이 먹을 것 으로, 다른 곡물은 임대료를 물기 위해, 그리고 아마포는 옷 따위 다른 가외용품의 구입을 위해 쓴다. 그런데 아마포 무역의 쇠퇴로 일자리의 수요가 폭증했고, 이 지역 전체의 농지상 태가 매우 악화되고 있다. 매번 힘든 추수일 이나마 하겠다고 오지에서 먼 길을 떠나온 수천 명을 볼 때 아일랜드 농부들이 일할 의지가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누더기가 된 코트 소매를 기워 입 은 채 머나먼 곳에서 힘들게 번 돈을 들고 돌아간다. 오두막과 한 뙈기 감자밭의 임대료를 내기 위해서 헨리 잉글리스(아일랜드 주유기), 1835년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메이오주의 뉴포트를 방문했다. 우리는 뉴포트 프랫의 신부인 휴즈 씨가 쓴 기사를 보았다. 자기 교구의 주민들이 굶고 있으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직접 그곳에 가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아일 랜드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와 선창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맨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무리 지어 웅성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내리자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거리로 나서자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따라온다. 두세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 그들은 우리를 재난구제를 위해 파견된 정 부관리로 알았던 것이다. 기사를 쓴 신부가 우리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50대 남다, 정직해 보이면서 활기 에 찬 얼굴, 약간 뚱뚱하다. 강한 악센트가 있는 말씨에 약간은 서민적인 인상이다. 승마용 부츠에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우리는 신부에게 신문기사를 읽었으며 그 참상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 확인하고자 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의도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는 우리가 그의 글이 사실임을 확인할 때까지는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면서 우리를 저녁식 사에 초대했다. 한편 우리가 거리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신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알고는 문 앞에 모여 들었다. 저들이 왜 모여있느냐고 묻자, 신부는 그 기사를 쓴 덕분에 300파운드 정도 모았고 지금도 40파운드 넘게 받았다면서 주머니에서 그 돈을 꺼내 보였다. 의기양양하고 만족해하 는 얼굴이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는 그 돈으로 오트밀을 구입했고, 오트밀은 이틀 전에 여기 도착했으며, 저들은 오토밀을 분배받을 수 있을까 해서 모인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 하면서 거는 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 하지만 저 사람들이 다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신부: 저 사람들 대부분이 어제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오늘 아침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저 사람들은 소자작농인데 작년 감자농사가 부분적으로 흉작이어 서 지난 3월부터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더구나 소나 양, 돼지를 다 팔아버려서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들만 도와야 합니다. 저 불운한 사람들은 벌써 몇 달째 아사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대부분이 심은 지 얼마 안 되어 서 겨우 호두 만한 것이라도 캐먹으려 하지요. 그걸 먹으로 병에 걸리는데도 말입니다. 신부가 창문을 열자 순간 바깥에 있던 사람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조용, 조용' 하는 나지막한 소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신부가 강단 위에 올라섰다. 그는 영어와 아일랜 드어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우리의 밀가루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하지만 위원회 위원들 중에는 그 가운데 일부는 그냥 내주는 것보다 파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밀가루를 반 가격에 판다 이겁니다 .내 생각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해 보고 돈을 가지고 오십시오. 밀가루를 반 가격에 팔고, 거기 서 나오는 돈으로 밀가루를 더 사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이 일에 협조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을 굶어 죽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지금 위원 몇 사람이 없는 데다가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명단을 작성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는 배급을 하지 못합니다. 참고 기다 려주십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먹을 게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신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오늘 저 녁 여러분의 이웃과 친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십시오. 내일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자 한쪽을 나눠주지 않아 이웃을 굶어 죽게 하는 사람이 바로 살인자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 우렁찬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신부의 연설은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연설에 열중하는 그의 얼굴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기울이는 열성과 동시에 단호함과 좌중을 지배하는 힘이 배 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보다는 애정이 깃들여 있었다. 누구 하나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입은 멍하니 벌린 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불쌍한 사 람들의 창백한 볼과 피곤한 모습이 그들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군중들 가운데 는 가끔 큰 목소리로 발언하는 사람이 있었고 신부는 잠시 그와 논쟁을 벌인 다음 연설을 계속했다. 신부의 연설이 끝났을 때 일부 군중들은 체념한 얼굴로 조용히 돌아갔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문가에 도로 앉았다. 신부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오늘 저녁에 뭔가 도움의 손길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문을 연 신부가 계단 맨 위에서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자기는 도와줄 게 하나도 없으면 여러분들 중에서 일부만 선택하고 싶지 않다 고 말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테니 여러분의 고통도 곧 끝날 것이라고 덧 붙였다. 또 우리를 가리키며, 이 두 사람은 여러분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자기네 나라에 알리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신 부는 이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 같은 카톨릭교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신교도에게 감정 상할 것 없다고 말했다. "여러분도 이것은 자선의 문제요, 내가 카톨릭과 신교도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손하게 길을 비켜주었다. 신부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비참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나는 그가 몇 사람의 손에 몰래 동 전을 쥐어 주는 것을 보았다. 우리: 그런데 모든 교구가 소수의 대지주 영지라면서요? 슬리고 후작, 오도넬 경..... 이 사 람들도 자선사업에 참여하고 있겠지요? 세 신부: (이구동성으로 열을 올리며, 그러나 비통한 목소리로)신사분들, 그건 잘못된 이야 기입니다. 저 대지주들은 이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내놓지 않습니다. 아무것도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돕고 있는 겁니다. 우리: 그렇데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 신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대지주들 대부분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데다 대지주들과 주민 사이에 뿌리깊은 증오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 나라의 대가문들은 모두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신교로 개종한 카톨릭이거나 카톨릭교도의 재산을 빼앗은 신교 도들입니다. 주민들은 그들을 배고자나 정복자로 생각해서 아주 싫어합니다. 그 사람들도 주 민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조금 만 구실이 있을라치면 그들을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마저 쫓아내고 맙니다. 우리: 주민들의 체념이 대단해 보이던데요? 신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200명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아사 직전 에 놓여 있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슬리고 후작은 이 일대의 풀밭에서 1000마리나 되는 양을 키우고 있습니다. 창고도 가득 차 있고요. 그렇지만 주민들은 그것들을 강탈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냥 죽겠다는 겁니 다. 우리: 정말 대단한 미덕입니다. 신부: 신사분들,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물론 종교가 이 인내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 지만, 실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 불쌍한 주민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 폭정을 받아왔습니다. 열 명 중 한 명은 교수대에 오르거나 추방당한 겁니다. 이제 주민들은 어찌해볼 힘이 하나 도 남지 않았습니다. 저항하느니 그냥 죽는 편이 낫다고 단념한 것입니다. 대륙에서라면 이 런 상황에서 '영광의 사흘(프랑스의 1830년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 다. 고백컨대,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그리고 열렬한 신앙심만 아니라면 이 폭정과 귀족을 쳐부수기 위해 거리낌없이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마지막 말에는 쓰라디쓰린 회환이 담겨 있었고, 다른 두 명의 신부 역시 그의 말에 진심 으로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반란을 장려하지는 않지만, 만약 사 람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조금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너무도 명백했다. 그만큼 상류계급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분개심은 깊고도 격렬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아일랜드 여행기, 1835년 7월~8월)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드 보몽이 드 토크빌과 함께 뉴포트를 여행한 다음 아일랜드 빈민의 상태를 묘사해 두었다. 나는 숲 속에 사는 인디언도 보았고, 쇠사슬을 몸에 감은 흑인도 보았다. 나는 그들의 가 련한 상황을 자세히 조사했고,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는 불운에 빠진 아일랜드의 상황을 몰랐다. 가난하고 헐벗은 것은 인디언이나 아일랜드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사치와 부를 추구하고 숭상하는 사회 한가운데에 살고 있다. 아일랜드인은 마치 인디언처럼 인간의 산업과 국가의 부가 제공하는 물질적 안락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안락함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 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인디언은 그 엄청난 궁핍 속에서도 자주성만큼은 지키고 있다. 그 나름대로 인간 으로서의 위엄과 매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족하고 굶주렸을지라도 인디언은 사막에 서나마 자유를 누리고 있다. 바로 이 자유가 많은 고통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 일랜드인은 같은 궁핍을 겪되 이 자유만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온갖 규칙과 제한에 얽매여 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도 법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슬픈 일이다. 문명의 모 든 악습이 저 야만스런 생활과 얽혀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슬을 깨고자 하며, 미래를 믿는 아일랜드인은 분명 인디언이나 노예처럼 비탄에 빠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야 만의 자유도, 노예의 빵도 없다. 나는 아일랜드 참상의 그 모든 상황을 다 묘사할 생각이 없다. 아이들을 위해 굶는 농부 에서부터, 의지할 데가 없어 거지로 나서야 하기에 훨씬 더 비참한 날품팔이 인부들, 고통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체념한 빈민들, 폭력적인 항거로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제물들. 그 모 든 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다 아일랜드의 가난은 특별하고도 예외적이어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아일랜드의 참상 은 그 스스로 하나의 유형을 만들고 있으며 그 비슷한 것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 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극빈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다 거지인 나라는 아일 랜드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런 나라의 사회상태를 설명하는 데는 그 참상과 고통을 열거하 기만 하면 된다. 빈곤의 역사가 바로 아일랜드의 역사이다. 귀스타브 드 보몽<아일랜드의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 1839년 영국의 소설가 월리엄 메익피스 새커레이가 스키버린을 방문했다. 스키버린에 들어서기 전에 여행객의 눈길을 끄는 새 건물은 구빈원이다. 고딕 양식으로 다소 사치스러워 보인다. 별장 같은 지붕, 뽀족탑, 그리고 오만하게 서 있는 굴뚝들, 900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아직 400명밖에 살고 있지 않다. 거지들은 벽으로 둘러싸인 우울한 확실 성보다는 불확실한 구걸의 자유를 더 선호한다. 그 다음으로 눈길이 머무는 곳은 성당이다. 진회색 돌로 지은 멋지고 넓은 건물이다. 그 앞을 지나니 일단의 부랑자들이 우리를 기다리 고 있다. '스키버린 구제 모임'이 드디어 그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반대편의 '호텔 로 안내된다.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수백 명씩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거리에 사람들의 파란 망토가 점점 이 보이고 헐벗은 평원에서도 보였다. 남자들은 오늘만큼은 구두와 양말을 신었지만, 여자들 은 전부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그중 많은 여자들이 성당에 들어서기 전 냇가에서 발을 씻 었다. 거리 양쪽으로 파나 망토들이 줄지어 서 있고, 현관 앞에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게 그들의 관습이다. 도심 바깥의 오두막 거리를 지나면 1.6km정도 길이에 펼쳐져 있는 농촌지대가 나온다. 나 무는 찾아볼 수 없지만 곡식은 풍성히 자라고 있다. 이어 습지가 많고 황량한 지역을 지나 이따금 풀밭이 있는 바위투성이 바다로 들어서게 된다. 초라한 마을이 하나 길을 따라 있었 다. 이곳에는 주민이 넘쳤다. 마차가 지나가자 누추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두막에서 쏟아 져 나왔다. 그런데 다들 길 한쪽으로만 앉는다. 이 집단휴식은 영국에서는 절대 보지 못할 풍경이다. 일종의 지치고 게으른 민족이라고나 할까. 내가 킬데어에서 본 깔끔한 오두막과는 전혀 달랐다. 이 비참한 몰골은 정말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다. 많은 감자밭이 반은 파헤쳐져 있었다. 이제 겨우 8월의 첫 주인데. 그리고 감자가 다 크려면 3개월이나 남아 있고, 겨울이 되려면 6개월은 남아 있는데. 월리엄 메익피스 새커레이(아일랜드 스케치북), 1843년 대기근 목격담 W. 스튜어트 트렌치는 아일랜드 중간소작인이자 경험 많은 농부로서 대기근이 시작될 무 렵 퀸스주(라오이스)에 살고 있었다. 이 글은 감자마름병의 두 번째 내습을 그리고 있다. 1846년 8월1일, 나는 우리 마을 감자밭의 감자가 전부 마름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듣고 깜 짝 놀랐다. 썩어 가는 줄기에서 악취가 났다는 것이다. 나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러 즉시 밭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감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싱싱하게 넘실거리며 잘 자라라고 있 었다. 줄기들은 서로 얽힘녀서 무성하게 뻗어 나가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고 있었다. 불쾌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나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아랫마을로 가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내가 지나온 길 가운데 많은 밭의 감자들이 잎이 완전히 시들었고, 전에 는 맡아보지 못한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감자밭의 공기를 꽉 메우고 있는 그 냄새 는 바로 앞으로 몇 년간 닥쳐올 '마름병'의 특징으로 널리 알려진다. 다음날 나는 더 자세히 알아보았고, 그 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 들어버린 줄기 아래로 감자구근을 파보니 이내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감자가 빠른 속도로 검게 변하면서 흐믈흐믈해졌다. 무성하게 자란 밭에 그 냄새가 나는 것 이 마름병의 첫 번째 신호였다. 그 냄새가 나고 하루나 이틀 뒤에 잎이 시들었다. 불안한 공 기가 마을 전체를 휩쓸었다. 서로에게 이 새롭고 무서운 병을 본 적이 있는지를 물어볼 때 는 다들 얼이 빠져 있었다. 나처럼 많은 자본을 감자에 투자한 사람들은 극도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밀이나 무 또는 다른 작물이나마 수확할 수 있는 사람도 그러한데, 하물며 더 가난한 농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식량으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 그저 질려 있을 뿐이었다. 1846년 8월6일 날짜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산자락에 일궈놓은 밭 으로 나갔다. 그 순간 감자를 살펴보면서 그 공포의 냄새를 맡았을 때의 기분이란, 이제는 모두 알려진 감자의 죽음의 신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 냄새... 그 무성한 줄기들이 이내 시들었고, 잎은 썩어 들어갔다. 병은 구근으로 퍼졌고, 영양이 풍부한 식물이 썩는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만의 손해와 실망을 이내 마을 전에의 비통함, 고통, 그리고 굶주림 속에 합쳐졌 다. 내 주위의 더 가난한 사람들과 아일랜드 전체가 그 물결에 휩쓸렸다. 물론 퀸스주에서도 좀더 기름진 지역이나 내륙에서는 아사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 해서, 갑자기 먹을 것이 떨어져 사람들이 거리나 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뜻 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결하고 영양이 부족한 음식밖에 얻을 수 없었기에 서서히 침몰해 갔다. 그리고 열병, 이질, 구빈원의 혼잡, 그리고 난관에 부딪쳐 구제사업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수천 명을 무덤으로 끌고 갔다. 먹거리가 갑자가 사라졌고, 이 재난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끔찍해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견한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 들이 손쓸 새도 없이 사라져갔다. W. 스튜어트 트렌치(아일랜드인의 삶의 실체), 1868 미국의 평화주의자 엘리후 버릿이 1847년 2월 스키버린을 방문했다. 더 이상 자선을 베풀지 않는 이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희미해진 유령처럼 말라버린 사람들 사이로 금방 눈에 띌 만큼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중 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에 살았다. 일곱 아이가 딸린 그의 가족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순간까지도 노력해볼 가치가 잇는 법. 비참한 해골로 변한 아버지는 제일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또 다른 네 아이는 옆에 끼고 이제 이 문 앞까지 비틀거리며 온 참이다. 얼굴에 난 수 염을 머리카락만큼 길었고, 두 볼은 푹 꺼졌고, 툭은 잔뜩 부어 한마디 말조차 뱉어내지 못 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깔려 있는 이 지역의 여느 아 이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창백한 얼굴은 여느 병자의 것 과 달랐다. 병자에게 있는 황달기조차 없었다. 지금 당장 묘지에서 시체를 꺼내 새로이 피를 혈관에 돌게 만들어 되살려낸다 해도 저렇게 창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가 물이 될 때까지 얼음 속에 가두었다가 꺼내면 저렇게 될까 싶다. 엘리후 버릿(시키버린과 인근 지역을 사흘 동안 돌아본 소감), 1874년 영국의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버넷은 1874년 3월 메이오주의 에리스를 방문해서 종자를 나 눠주었다. 다음은 벨멜렛에 있는 오두막에 사는 주민들을 묘사한 글이다. 이 불쌍한 주민들에 관해 말을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 이 이야기했듯이, 저 괴롭디 괴로운 이야기들에 또 하나 지엽적인 것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 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부 실제 경험에서 나온 '사실'이고, 또한 우리는 설명 할 책임이 있다. 나는 가장 오지이며 가장 가난한 지역 가운데 하나를 찾았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 기독 교 정부가 다스리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의 책임을 일깨우고 있으며, 개인으로 서든 인간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든 어느 누구도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손이 떨리고 있다. 우리가 목격한 인간의 비극과 비참함은 언 제까지고 내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것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환상으로 내 상상을 언제고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한 오두막에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에는 연기와 아이들이 덮고 있는 누더기 때 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한쪽 구석에 아이들 세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너무 허약해져 일어날 기력조차 없기 때문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송장 같은 몰골이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걷자 병적으로 여윈 팔다리 가 보였다. 눈은 푹 꺼지고,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사 직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으로 깜부기를 태우다 남은 것 위에 웅크리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 고,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짚을 조금 깔았지만 맨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 한 노파가 신 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뭐든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살가죽과 뼈만 남아 있었다. 선반 비슷한 것 위에는 볼이 푹 들어간 젊은 여성이 있었다. 아이들의 어 머니 같았다. 그녀는 우리가 무언가를 묻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다만 이마를 짚으면 서 고뇌와 절망의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다. 대체로 과부들이 많았다. 남편들은 최근 열병으로 죽었고, 이리하여 빈민구제용 공공 사업 에서 얻을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조차 완전히 끊겨버렸다. 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 들들이 장기간 계속된 기근과 형편없는 생활로 무서운 병에 걸린 상태였다. 이 병은 먼저 사지가, 이어 몸뚱아리가 잔뜩 부풀어올라 결국 터져버리는 병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열 다섯 집을 둘러보았다. 한결같았다. 집안 구석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고통받는 사람 또는 무리들의 수만 다를 뿐.... 어린이들이 가장 불상하고 가슴 찢어지는 장 면을 보여주었다. 너무 쇠약해져 일어서지도 못했고, 여린 사지는 너무도 앙상했다. 전에는 여위었을 배가 놀랄 정도로 부풀어올라 있었다. 이 어린이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의지를 넘어선'차원이었다. 어린이다운 표정이 없었고, 이성과 지적 능력 또한 상당 부분 사라졌다. 한 오두막에 '남은 가족들'이 모야 있는 경우도 상당했다.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고아가 된 친척을 집안으로 들여놓은 것이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서로 끝 까지 친절하다. 어느 오두막에서는 한 소녀가 막 죽은 남동생 옆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보다 더 나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런 것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쓸모 없고 부질없는 일일뿐이다. 그들은 거의 불평을 하지 않 았다. 어떠냐고 물어보니 대답은 한결같았다. "배가 고파요" 우리는 '굶주림'이라는 슬픈 단어의 진짜 의미를 배운 것이다. 윌리엄 버넷(최근 6주간 아일랜드를 여행한 이야기), 1847년 요크주의 퀘이커교도인 제임스 핵 튜크가 코노트에서 벌어진 대량 축출을 비난했다. 코노트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메이오의 지주들은 필경 이 전반적인 참상과 가난을 더 욱 증폭시키고 있다(물론 이 과정의 졸책과 죄악을 보고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긴 하다). 농 작물이 풍작이어도 지주들의 임대료 요구에는 못 미치고 또 지난 2년간 기근으로 연체된 것 을 갚을 수가 없다. 소작인이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놓으면 틀림 없이 죽을 테니까. 그런데 지주의 대리인들이 법률의 힘으로 무장하고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딜 가든 토지관리인이 작은 오트밀 밭이나 감자밭을 검사하고 있고, 밭지기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밭지기의 임금마저도 다 저 불쌍한 소작인이 대야 한다. 자선단체가 분배한 종 자에서 나온 소출도 전부 쓸어가 버렸다. 이 강탈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빈곤에 더해, 축출까지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상당수의 지붕 없는 집들이 지주들의 요구로 파괴되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 정처 없이 쫓 겨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의 자선 단체들이 이 굶주린 농민들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는 지금도 그런 일이 쉬지 않고 자행되고 있다. 에이칠섬에 있을 때 나는 이 일을 목격했다. 킬이라는 가난한 어촌마을이었다. 내가 도착 하기 며칠 전에도 지주인 오도넬스 경의 토지관리인은 약 스무 가구를 축출했으며 그전에는 마흔 가구를 축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축출된 사람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들어 쓰라린 목소 리로 모진 운명을 한탄했다. 한 백발의 노인이 비틀거리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가는 꼼짝 도 하지 못하는 아내를 팔에 안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우리 발치에 내려놓고는 아무런 말 도 없이 고통스런 몸짓으로 아내를, 이어 자신의 지붕 없는 집을 가리켰다. 까맣게 탄 목재 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은 1년치 임대료밖에 밀리지 않았으며, 이 마을은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향이라고 했다. 엄마 없는 아이들 다섯 명을 데리고 온 남자 역시 축 출 당했고, 그의 '물끓이는 솥'이 3실이 6디나르에 팔렸다. 네 명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한 과부는 유일한 재산인 '어린 양 한 마리'를 빼앗겼고 그곳은 5실링 6디나르에 팔렸 다! 굳이 이러한 사례를 자꾸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어려움과 비참함을 보여주는 사 례는 이미 충분히 밝혀져 있다. 이 마을에서만도 1년치 또는 반년치 임대료를 못 내서 최소 한 150명이 축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물론, 저 비참한 오두막의 가구들도 에이칠 소유자의 청구권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부 팔리고 말았다. 쫓겨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일부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이웃들 역 시 그들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이 무청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중이고, 웨스트포트 구빈구의 구빈원은 6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다가 길옆의 밭에서 얻을 무, 아니 훔칠 무가 유일한 식량일 것이다. 죽음만이 그들에게서 고통을, 지중에게서는 부담을 덜어줄 것이다. 제임스 핵 튜크(코노트 방문기, 1847년 가을), 1847 미국의 전도사 애스너스 니컬슨은 대기근이 시작될 당시 3년간 아일랜드에 머물렀다. 1848년 봄, 그는 메이오주의 루이스버그를 방문했다. 올드헤드에서 3.2Km 떨어진 작은 마을 루이스버그는 이미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활동 적인 신부 한 분과 독실한 신교도 부목사가 최선을 다했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 격이었다. '죽고 또 죽는'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 치료한 사람이 내일이면 쓰러진다. 그 엄청난 노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 신교도 부목사와 그의 아내의 무덤이 교 회 앞뜰에 있다. 기근이 찾아온 후로 계속된 과로에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만 분들이다. 그 후임으로 온 지금의 부목사와 그의 감탄스러운 아내도 초인적인 체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저 무시무시한 몸부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길러리 산악지대로 가는)길은 무척 험했다. 우리는 창백하고, 쇠약한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쳤다. 그들은 산에서 돌을 깨서는 그 돌을 다시 찬처럼 높이 쌓는 일을 하고 하루 1파 운드라는 보잘것없는 대가를 받았다. 그들은 씨를 모두 뿌렸는데 이제 와서 오두막을 포기 하면 수확도 전부 지주 것이 된다. 그리고 구빈원이나 거리를 택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 말로 아일랜드의 가장 쓰라린 비극이리라! 왜? 감자밭에 덮을 해초를 끌고 가는 농부를 만 났을 때 물어보았다. "당신은 구빈원에 들어가고 농작물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생각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신께서 조금이라도 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을 주시리라고 기대하 면서 여기서 버티고 있겠소." 우리는 여기저기 무리 지어 학교로 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은 '빵조각'을 얻기 위해서 학교에 가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배가 고파서 울었고, 다른 아이들은 수업료가 없지만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들 가난하고 여윈 아이들은 울면서 사라졌다. 그 중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어제 하루종일 1페니라도 구하려고 애썼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간 의사는 구제관리와 교사의 잔인성에 대해서 신부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썼 다. 그러나 보고서가 저 강심장들을 놀라게 하거나 부드럽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곳은 한쪽은 산으로 막혀 있고 다른 한쪽은 바다로 막혀있다. 길이라고 해야 다리 하나 없고 돌 밭 어디선가 없어지고 마는 일이 허다해 오직 사람들만이 내왕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고통의 절정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날은 아무도 자선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 려 우리가 물을 부탁하자, 그들은 물 대신 우유를 내밀며 천성이라 할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그날 나는 충분히 보았고, 웃음은 너무나 아팠다. 애스너스 니컬슨(아일랜드의 빛과 어둠), 1850년 S. 고돌핀 오스본은 성공회 성직자로서 자선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아래의 글은 리머릭 구빈원의 상황에대해서 1850년 여름에 쓴 글이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구빈원은 리머릭에 있었다. 지난해 내가 그곳에 들렀을 때, 나는 아주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그 반대였다. 부모와 보조자용 집에는 8000명이 넘는 부랑자가 있었다. 그대로 방치되고 있음이 분명했 다. 나는 부모용 집에 있는 커다란 두 방에서 목격한 수용자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는 많은 수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대부분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도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다. 몇 주째 씻지 못해 먼지를 푹 뒤집어쓰 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흔적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 었다. 아이들이 내 앞에 두 명씩 섰다. 그들의 비참한 몰골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손발과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많은 아이들이 안구건조증에 고 통받았으며, 최악이 상태에서 몹시 괴로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또 아이들은 기생충에 시달리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해골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기근에 시달리 는 아이들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너무나도 잘 안다. 물론 집에 시체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방치'라는 말에 그대로 들어맞을 완벽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S. 고돌핀 오스본(서부 아일랜드에 관한 단편들), 1850년 이민 중간 계층의 이민자인 로버트 화이트는 1847년 퀘벡을 떠난 '송장 배'에 관해 이야기하 고 있었다. 1847년 6월 15일: 오늘 아침의 보고서들은 매우 괴로운 내용이었다. 나는 내 불쌍한 동료 승객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선장은 여주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며 뭐든지 선장 자신의 창고에서 꺼내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 선장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전염병 열병-가장 좋은 환경과 가장 숙련된 의사들의 주의 깊은 눈길이 있어도 최고의 능력이 요구되는 병-이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배의 사람들은 저 무서운 병에 제물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일단 이 병이 110마리의 도움을 싣고 있는 작은 쌍돛대번선에 있는 환 기가 되지 않은 창고에서 나타난 이상, 적절한 약과 의료기술, 그리고 환자의 타는 듯한 갈 증을 식힐 깨끗한 물이 없는 현상태에서는 그것을 진정시킬 도리가 없다. 지금 우리 앞에 등장한 전망을 실로 무서운 것이었고, 신의 자비밖에는 달리 기댈 곳도 없었다. 6월 16일: 지난밤은 아주 힘들었고, 덕분에 나는 쉴 틈이 별로 없었다. 병자가 추가로 발 생했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아픈 아내와 아이들에게 물을 달라고, 또 배가 고프다고 불평하 는 건강한 남자들 사이에서 반항의 징조가 있었다. 선장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알리겠다고 대표단이 왔지만 선장은 해산을 명령했고, 그들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선장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주동자들은 식량저장소에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선장은 이 를 저지하기 위해 구식 나팔총을 한 방 쏘았다. 그 소리는 조그만 대포에서 나는 소리와 맞 먹었다. 그러자 그들은 투덜대며 해산했다. 만약 그들이 결심만 했다면 창고를 쉽게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굶주린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과 아이들의 고통을 어찌 그 리고 쉽게 참을 수 있는지 놀랐다. 그들이 고통을 구제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선 장은 기꺼이 그들의 하소연에 귀기울였으리라. 6월 24일: 성 요한 축제일이자 카톨릭 휴일이었다. 저녁에는 열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남녀 몇 명이 춤을 추었다. 항해사가 지금 상황 에서는 그런 행동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자, 그들은 뱃머리 쪽으로 가서 밤새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R속 불러대는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처량한 상황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황량하도록 넓은 저 바다와도. 6월 25일: 오늘 아침에는 병자 명부에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갔다. 어떻게 사람들 이 갑자기 아프게 되는 것인지 놀라울 뿐이었다. 친구들과 놀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쓰러졌 다. 아이는 한동안 죽은 것처럼 마비상태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서는 자지러지듯이 비명을 질러대면서 발작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남편을 위해 불가에서 따뜻한 물을 데우던 한 부인 도 갑자기 쓰러져서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이 병의 증상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추측컨 대, 최초의 증상은 대개 현기증이고 이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다음으로 뼈마디가 고문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다리부터 시작해서 사지가 부어오른다. 때로는 몸 전체 가 붓기도 하고 그리고 이 증상이 머리를 향해 올라가다가 목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간다. 그런데 이 기간은 환자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온몸에 노랗고 물기 가 잡히는 여드름 같은 것이 났고, 다른 사람들은 빨간색과 자주색의 발진이 났다가 악취를 풍기는 염증으로 발전했다. 6월 27일: '물, 제발 물 좀'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 무서운 병 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것이 예방약이라도 되는 것 일까. 혹시 신의 자비로운 섭리 덕분일까. 7월 28일: 아침 6시, 우리는 검역소 앞에 새로 자리잡았다. 모두 다 검사 받을 것으로 기 대한 가난한 승객들이 기록 여위고 병약하지만 제일 좋고 깨끗한 옷을 차려 입었다. 사람들 이 차례를 기다리던 중,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건강한 사람은 일단 이 섬에서 기다리다 가 나주에 오는 증기선을 타고 퀘벡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에 대단히 실망했다. 나는 여 기서, 도움의 손길이 닿는 바로 이곳에서,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내팽개쳐지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두 달 동안의 항해의 끝에 다시 역병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니. 환자에게 약 도 의술도 음식도 게다가 신선한 물도 주지 않으면서, 염기가 없는 강물은 배에서 버린 온 갖 오물로 완전히 오염되어 있었다. 8월 1일: 선장이 보트를 타고 떠나자 증기선이 이민선 옆으로 다가와 승객들을 옮겨 태우 기 시작했다.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승객을 옮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많은 승객들이 몬드리올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실망했다. 친척을 그로스아일에 남겨둔 사 람들은 여기가 퀘벡에서 그리 멀리 않으므로 퀘벡에 있다 보면 그럭저럭 친척들 소식을 들 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승객들중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시 보지 못했다. 둘 다 머친 운하 공사장에 취직 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질병뿐인 채로 온 나라를 떠돌았다. 그리고 체력 이 몹시 떨어져 있던 상황에서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고 나는 확신한다. 로버트 화이트(바다의 질병: 퀘벡 아일랜드 이민선 여행기), 1848 식민위원회 호바트 경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영국 외교관 베어 포스터는 사회개혁가로 변 모했다. 그는 리버풀에서 뉴욕을 오가는, 특별히 건조된 미국 이민선 위싱턴호의 소름 끼치 는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11월17일 : 오늘 저녁 의사가 침실용 변기들을 위로 올려와서는 앞으로 여자들에게 절대 아래서 일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자들도 갑판으로 올라와 불결한 일 을 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배에는 100명의 이질 환자가 있습 니다. 이들은 모두 콜레라 환자로 변할 것입니다. 맹세코 나는 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 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약을 타고 싶은 사람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야 합니다." 오늘 아침 이 지시에 충실한 일등항해사가 그 말을 명심하고는 화장실을 쓰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호스를 들이대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을 퍼부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사등항해사가 그렇게 했는데 말입니다. 11월 21일: 오늘 저녁에는 강풍이 한차례 불었습니다. 11월 22일 : 강풍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몇 분 동안 우리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 닌가 걱정했습니다. 바다가 시커면 거품을 일으키며 사납게 요동쳤습니다. 갑판을 때리는 파 도가 너무나도 사나워 다들 배 어딘가 구멍일 낫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래 갑판에도 파 도가 들이쳤고, 그럴 때마다 배가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신에 게 기도를 올리는 승객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폭풍 속에서 정상 항로를 가려고 시도하는 것 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돛대의 중간 돛을 내리고 앞돛대 톱슬의 삼각 돛으로만 뒷바람을 받으며 항해해 나갔습니다. 갑판을 덮친 바닷물이 선창에 들어차 몇 피트나 고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의 보루에 구멍을 뚫어 물을 빼냈습니다. 바다에는 시커먼 거품이 일 고 있었습니다. 아침 9시가 되자 폭풍이 잦아들었고, 밤이 되면서 점점 약해졌습니다. 11월 25일: 열두 살 먹은 또 다른 아이 하나가 이질로 죽었습니다. 영양결핍이 죽음의 원 인이었습니다. 아이는 커다란 돌을 매단 옷에 싸여 잔잔한 바다로 던졌습니다. 지금까지 장 례식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의사 말이, 항해중 배 위에서 죽은 사람에게는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다는데, 카톨릭교도들인지라 평신도가 식을 올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정식 의 식이 없기 때문에 그가 지명한 승객들이 참가했고, 선원들이 로프를 잡아당길 때 부르는 노 래를 마치 장송가처럼 불렀습니다. "당기세, 줄을 당기세, 당기세, 줄을 당기세." 그리고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 아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12월 3일: 상당수 승객이 배에서 내려 스테이튼아일랜드의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는 오후에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승객 900명은 언제나처럼 양털 까까는 집들 사이로 흩어져갔 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공할 가망도 거의 없이 일자리를 찾아 여정을 계속할 것입니다. 베어 포스터가 호바트 경에게 보낸 편지, 1850년 12월 1일 그로스아일의 의료감독관 퀘벡의 이민관리가 보낸 이 편지들은 캐나다의 그로스아일 검역 소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일랜드 승객들은 태우고 있는 배(특히 리버풀과 고트에서 출발한 배일수록)라는 배는 전부 항해중에 많은 승객을 열병과 이질로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도착했을 때도 상당 수가 병에 걸려 심하게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17척의 배가 아일랜드를 떠난 승객들을 싣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코크에서 다 섯 척, 리버풀에서 네 척, 그리고 나머지는 슬리고, 리머릭, 벨파스트, 런던데리, 그리고 뉴로 스에서 온 이민선들입니다. 처음 항구를 떠나올 때 이 배의 승객들은 전부 합해서 5607명이 었지만, 그 가운데 260명이 항해중 죽었습니다. 또한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원에 이송되 거나 배 위에서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며 치료받고 있습니다. 지금 치료중인 사람은 965명이 고, 리버풀에서 온 애버딘호와 에이칠스호, 코크에서 온 비호, 그리고 슬리고에서 온 울프빌 호에 남아 있는 환자는 164명입니다. 이제 승객용 시설을 병원으로 바꾸게 되면 그들도 상 륙시킬 것입니다. 나는 자크 선생과 맥그레이스 선생의 보조를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두 명의 조수 가 더 있어야 합니다. 두 분이 벌써 300명이 환자를 책임지고 있고, 상륙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의 수룰 생각할 때 두 분으로느 불가능합니다. 도착 예정인 수천 명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G. M. 더글라스 박사가 H. 데일리에게 보낸 편지, 1847-1848년 일요일 이후로 (그로스아일) 떠난 4000에서 5000명 가운데 최소한 2000명은 3주 내에 어 디선가 발병할 것입니다. 몬트리올이나 퀘벡은 최소한 2000명의 환자를 맞을 수 있는 시설 을 갖추어야 합니다. 코크와 리버풀에서 떠난 승객들은 굶주림과 영양결핍으로 승선 전에 이미 반쯤 죽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음식의 변화 때문에 하찮은 소화불량도 그들을 죽음으 로 내몰고 있습니다. 나는 이토록 생명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본 적인 없습니다. 아마도 선원 이나 선장이 갈고리로 시체를 꺼내가기 전까지는 죽은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그들이 내릴 도시에 어떤 악운이 내리 덮칠지 걱 정스럽습니다. 더운 날씨라 그 지독한 질별이 더욱 번성할 테니 말입니다. A. C. 부캐넌이 퀘벡 시장 캠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6월9일. 하원문서 1847-1848년 캐나다 의회는 이민 제한을 영국에 호소했다. 폐하의 가장 충성되고 충직한 신하인 저는 감히 작금에 저희를 내리누르고 있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걱정거리를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그곳은 빈곤과 기아의 질병에 허 덕이며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에서 몰려든 이민의 물결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로스아일에 병자들을 수용할 시설로 사용할 검역소를 엄청난 규모 로 지었지만 현재의 예기치 못한 비상사태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검역소 내에 일반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들도 전부 병원으로 개조했건만 나날이 그 수가 늘어나 는 환자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제는 길이 4.8Km, 폭2.4Km에 이르는 섬 자체가 검역소 관리들의 규정에 따라 검역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전부 수용하기에 충분 하지 않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입니다. 외관상 건강해 보이는 사람은 정상적인 조치를 받 지 않은 채 그대로 나가고 있는 실정인데도 말입니다. 저희로서는 이렇게 선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입법의회와 지역주민들은 고국을 떠 나 이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모든 동료 시민들을 환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 지만, 아울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민과 비슷한 성격의 이민이 계속될 경우 뭔가 체계적인 원칙 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희의 번영에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으로 사료된 다는 것입니다. 감히 청컨대 폐하께서는 이 땅에 닥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더욱 큰 위협이 될 고통에 조치를 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무력하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들, 이곳에 정착하려 했을 때 부딪쳐야 할 난관을 이겨내지도 못할 사람들이 이곳 캐나다의 해변으로 떠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들 대부분이 이곳에 도착하는 대로 죽음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히 폐하께 청원합니다. 이민선이 크고 쾌적해지도록, 이민자들에게 충분한 공간이 제공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한 의료 지원과 지금보다 더 나은 식량이 언제나 더 많이 제공되 도록 폐하의 정부가 여러 방도를 강구해 주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캐나다 입법의회 청원, 1847년 6월 25일. 하원문서, 1847-1848년 살아남은 이민 일부는 아일랜드의 친척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의 편지 모음은 로버트 고어 부스 경이 의회에 제출했던 것이다. 고어 부스가 자신의 소작인들을 태우고 올 배의 선장으로 고용한 마이클 드리스콜의 낙관적인 보고서와, 그가 1847년에 뉴브룬스윅에 내려 놓은 슬리고 주민의 보다 복잡한 감정이 실린 편지를 감상할 수 있다. 존경하는 로버트 경께 먼저 제가 승객을 전부 안전하게 하선시켰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 항해 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시면 경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친절하신 경께서 기근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신다는 사실은 슬리고에서도 그렇지만 이 곳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경의 소작인들은 이곳에 상륙하면서 매우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곳 시장은 그들에게 공회당에 붙은 커다란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 집을 숙소로 삼았고, 이곳 주민들의 친절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정말 최고 의 친절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 28파운드의 밀가루를 보냈고 제가 항구에 있는 한 계속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내 제각각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던 소녀들은 전부 훌륭한 부인들에게 보내졌고 그곳에서 친절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모든 선실 승객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주어졌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속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검역소 관리는 총독에 게 보낸 보고서에서, 로버트 경의 승객 또는 소작인은 낡고 더러운 고용선으로 온 일반적인 이민으로 분류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배가 청결한데다 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었기에 승객 들이 건강과 청결을 유지했고, 또한 좋은 식사와 약, 깨끗한 침구, 그리고 환기시설, 이 모든 것이 다른 배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이얼러스호의 선장 마이클 드리스콜이 로버트 고어 부스 경에게 보낸 편지 뉴브룬스윅, 1847년 6월 13일 보고 실은 어미니와 동생에게 잠시 짬을 내 몇 자 씁니다. 모두 건강하신지요. 저와 여동생은 이 모든 것이 신의 자비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희는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에 온다는 것을 매우 걱정했습니다. 항해 동안 바다에서는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페비 는 선장의 부인이 선실로 데려가 거기서 있었습니다. 검역소에 닿기 전에 1주일 동안 심한 파도를 만났고 배 위에서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의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승객은 전부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페비는 선장 부인의 보살핌 덕분 에 항해중에 있었던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루에 1달러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좋지 않고, 새로 온 승객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며 하룻밤 묵을 곳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앤 디 케리건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서 한 달 동안 묵었습니다. 메리는 심한 열병에 걸렸다가 금방 나았고 앤디가 같은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비디 클랜시와 캐서린 맥고완 그리고 많 은 친구들이 병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려니 마음이 아픕니다. 다가올 겨울이 매우 혹 독할 거라 합니다. 가끔은 집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 무도 다 같은 마음 입니다. 성 요한의 날 축제를 다시는 못 볼까 걱정입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하루빨리 어머니와 우리 불쌍한 동생들이 모두 다 건강하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머니께 조그만 도움도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정말 슬픕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가 집에서 생각하던 곳하고는 다릅니다. 친구가 여기에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새로 온 사람들은 다들 고생입니다. 이곳에서는 고정직을 찾는 사람 말고는 일자리 얻기가 매우 힘듭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파밋타운(파머스터) 경 과 로버트 경의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도 이번 겨울에는 다들 죽을 거라네요. 보고 싶은 어머니 그곳 식구들 전부 다 잘 있다는 소식을 빨리 보내주세요. 전 캐서린이 이곳에 오지 않아서 너무나 기쁩니다. 이곳에서는 이웃사람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 가는 어떻고, 구제공사는 잘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떠난 뒤 원조는 있었는지 궁금합 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갔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도시가 시골보다는 더 좋습니다. 브라이언 클랜시와 여동생, 세인트존 뉴브룬스윅, 1847년 11월 17일 보고 싶은 아빠, 엄마 저는 건강히 잘 있어요.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들도 모두 다 잘 있기를 빕니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편지를 썼는데 아직 답장을 못 받아 마음에 결려요. 두 분과 친구들 모 두 잘 있다는 소식이 올 때까지는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 사랑하는 아빠, 항해는 상당히 좋았어요. 우리는 떠난 지 5주만에 패트리지 아일랜드에 닻을 내렸어요. 항해 도중에 네 사 람이 죽었지만 우리가 여기 도착한 이틀째 되는 날 의사가 배에 올라온 다음에는 병이 진정 되었어요. 그때 우리는 3주 동안 섬에 있었고, 그 끝 무렵에 귀여운 리틀 비디가 죽었어요. 사랑하는 아빠, 이곳에 도착한 아일랜드 승객들이 겪은 병, 죽음, 그리고 온갖 고통은 글로 다 쓰지 못할 정도예요. 제가 아는 아일랜드인들만 해도 무척 고생했고 지금도 고생하고 있 어요. 하지만 그 무서운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황도 정말 한탄스럽답니다. 그 섬에는 수천 명이 묻혀 있고, 미국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구빈원에 들어가거나 세인트존의 길 러리에서 구걸하고 있어요. 아빠도 이곳에 오고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이곳 사정이 조금 나아진 다음에 오시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아빠, 돈을 조금이나마 곧 보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삼촌하고 같이 시골에 갔다 왔어요. 하지만 삼촌은 금방 미국으로 떠났어요. 패디 삼촌한테 도스가 자가 삼촌하고 같이 보스턴으로 갔다는 걸 알려주세요.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죽을 때까지 언제나 아빠의 사 랑스런 딸이에요. 케서린 헤너건, 세인트존, 뉴브룬스윅 1848년 2월 15일 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께서 편히 지내시길 빌면서 몇 자 적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우리는 4주 동안 항해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는 하루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저는 상륙한 바로 그날 병에 걸렸고, 2주 동 안 침대 신세를 졌습니다. 그리고 금방 좋은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영국 돈으로 일당 4실링 을 받는 자리입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여동생 엘론은 우리가 세인트존에 들어간 다음날 취직했고, 여동생 마 깃은 우리가 상륙한 날 세인트존을 떠나 보스턴으로 갔습니다. 그 뒤로 마깃을 보지못해 얼 마나 슬픈지 모릅니다. 엘론도 마깃을 따라 보스턴으로 갔고, 여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 니다. 저는 지금 메인주의 리얼 로드 농장에서 농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올 여름 내내 임금 은 일당 4실링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이면 3실링이 됩니다. 겨울에는 서리와 눈 그리고 습 기가 많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고 몸도 건강합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감 사드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튼튼한 남자한테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여자들한테도. 똑똑하고 일 잘하는 여자는 숙소 제공에 1주일에 6실링 받습니다. 편지를 보내실 때는 메인주 오거스타의 원 보일 앞으로 하시면 안됩니다 원 보일, 오거스타, 메인 1847년 12월 13일 대기근에 대한 해석 1846년, 찰스 트레블리언은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연설문을 복사해서 배포했다. 이것은 식량난의 시기에도 자유방임주의에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소비와 생산의 균형이 가격을 결정하고, 시장만이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 소장은 '소비 자'와 '생산자'의 만남의 장이자 협상장으로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곳이다. 구 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시장은 쌍방이 주장하는 욕구의 균형을 잡아주는 정확성, 민첩성, 그 리고 보편적인 공평성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균형의 파괴를 원하는 사람들 그 리고 기꺼이 인위적인 규제조치를 가하려고 하는 사람들, 생산의 부족이 가격상승으로 보상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생산에 '도끼질'을 하는 셈이다. 나는 정부에 간청한다. 흉년이든 풍년이든 번갈아 오지 않는다는 점과 짧은 간격을 두고 오지 않는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한다. 그곳은 상당히 긴 주기를 두고 불규칙하게 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못된 수단을 택할 때 한 계절의 일시적인 수요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 만약 흉작이 계속되면 그런 정책을 지속시켜야 할 것이고, 따라서 이 불운이 농업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또 농업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내적인 상업 부문도 파괴되고 나아가 정부의 안전과 존재까지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론상으로 실질적으로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제공할 능력이 정부 또는 부자에게 있다는 그 생각을 과단성 있게 거부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잠시 보류시키는 것이 곧 신의 섭리를 만족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이 해해야 한다. 우리가 직접 당하고 있거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신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희망을 갖더라도 그것이 상업법칙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법칙은 자연의 법칙이며, 따라서 신의 법칙이다. 에드먼드 버크(결핍에 관한 고찰), 1800년 1847년 후반, 찰스 트레블리언은 그때까지 실천된 구제정책을 옹호하는 해명서를 작성했 다. 아일랜드가 '공공 자금'을 '제멋대로' 끌어다가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잃은 유일한 나는 아니다. 이 잘못된 원칙은 주민의 건전한 정신과 물질적 번영을 좀먹는 원칙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지금 모든 계층이 앓는 소리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리한 점은 숨기 고, 어려움은 과장하면서 노력을 등한시하고 있다. 농부들은 밭에 씨를 뿌리지 않으며, 자산 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구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방탕한 소비와 생산의 감소 때문에 국부가 위태롭다. 벌꿀통의 꿀벌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 짐이 무겁다면, 꿀벌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이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 렇겠지만, 전반적인 복지와 균형을 맞추는 빈민 구제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각 지역 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각기 다른 구제 요청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지식을 바르게 사용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바로 '자기 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재생작업에 사람들을 고용할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그들에게 부여해 주어야 한다. 이제 빈민율을 낮추려는 노력이 시작될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노동의 대가로 식량구입비를 벌 수 있게만 된다면, 이 정책은 그들을 그냥 놀리는 경우보다 훨씬 적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소박하지만 진지한 확신은 아일랜드의 재생을 위한 약속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 이다. 수세기 동안 우리는 아일랜드인들과 공공연한 전쟁상태에 있었고, 그들을 적으로 간주 했으며, 영국의 법률이 허용하는 특권과 문명의 혜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원 할지라도..... 이제 신의 은총으로 상황을 달라졌다. 물론 저 사나운 바다가 완전히 잠들기 전 까지 많은 방해의 파도가 우리를 지나갈 것이고, 병적인 습관이 좀더 건전한 행동으로 대치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영국과 아일랜드는 한가지 중대한 예외를 제 외하고는 똑같은 법률의 적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병폐들이 정치적인 원인에 기인한 것이므로 거의 모든 정치적 치유책이 적용되고 있다. 깊고도 상습적인 사회악의 뿌 리가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남아 있지만, 그것도 전지전능하신 신의 손길이 한 번 닿자 그대로 드러났다. 그간 인간의 간지로 수많은 해결책들이 고안되어 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말 효과적 이고도 예리한 처방을 내린 적이 없다. 신의 뜻대로, 이 위대한 기회를 부여받은 세대는 정 확히 제 역할을 다 하여야 할 것이며, 아일랜드가 대영제국의 사회적 건전성과 물질적 번영 에 완전히 동참할 때까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을 완 수하는 것이다. 찰스 트레블리언(아일랜드의 위기), 1848년 더 타임즈는 트레블리언의 노선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다음은 '노동하지 않고 구제만 기 다리는 아일랜드인의 나태함'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지금, 하늘이 내린 재앙을 인간의 힘이 더해지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그것은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이 아니고, 바로 정부에 대한 불평이다. 감자는 저 높은 곳의 뜻에 따라 마 름병이 들었다. 그런데 땅의 권력자들의 책략으로 노동이 속임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부가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혜택을 부여해서 엄청난 재앙을 완화시키고 또 그에 따르는 요 구를 만족시켜 보겠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주변 지역의 평균 기준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방 주민들 사이에 경각심이 일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임금을 기준 이하로 삭감하려 한다는 보고서 때문에 주민들이 공포에 싸여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불평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들 이 과연 얼마나 진실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것은 저들의 상투적 불만이다. 만성적 병폐이다. 이것은 저들의 사려 없고 게으른 민족성이다. 정부, 애국자, 자선사업가가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은 감자마름병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정부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을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사업이 절대적 으로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사람들이 땀을 흘리느니 언제까지 놀 것이라는 사실 을 알고 있었고, 전국민의 반 이상이 고매한 구호품에 흡족해하며 의지하리라는 예상을 분 명히 하고 있었다. 이제 비하면 감자마름병은 차라리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재앙을 피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즉 농민들에게 일-정부에서 제공하는 일이 그랬듯이-을 해서 생계를 꾸리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게으른 자들의 응석을 받아줄 것이 아니라 굶주림을 물리치라고 요구해야 했다. 정부의 의무는 근면을 장려하는 것이지 질식사 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자극하는 일이었지, 더 비싼 임금을 부르거나 그들을 노동시장에서 내몰아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곧잘 일어나는 일이 아일랜드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동기도 그렇고, 그 과정도 전도되어 있다. 노력의 배가와 일신된 근면 대신 수동적인 복종과 밀려드는 나태가 기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도다! 아일랜드 농민은 기근의 맛을 보았고 그것이 달콤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들은 저 멀리 밀려드는 구름을 반겼다. 그들에게는 구름은 맛좋은 만나와 생수가 가득한 그 무엇이었다. 그들은 느릿한 기대라는 넝마로 자신을 감싸면서 신의 섭리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다름 아닌 정부였다. 그들의 희망의 만나는 의회의 보조금이었다. 그들 은 자식의 복종을 경건한 복종이라고 불렀고 또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지만 실 질적인 변화로 태고의 계율을 전도시켜 버린 종교에 대한 복종이었다. "사람등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면 '안 되느니라'." 개인이든 정부든 아일랜드 국민의 일반적인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기 전에 아일랜드인에 게 무엇보다도 먼저 개조, 교정시켜야 할 성격들이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지주들과 소지주 들이 노력하기까지는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아일랜드에 사는 하급 향신층이 소작인 과 하인에 대한 저들의 의무를 다했던들..... 그들의 재산관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토질향상을 위해 노력했던들 아일랜드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감자와 절연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게을리 했고 그들 자신도 게을리 했다. 그래서 반쯤은 자기 만족적 가난과 불평 없는 불만 이라는 보편적인 의기소침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좋은 음식의 장점에 관해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머리보다도 위장이 한결 쉽 게 길들여진다. 위장을 부추나 감자에 길들이면 그것은 기름진 음식에 무관심해진다. 그 결 과는 자명하다. 그리고 게으른 탓에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은 빵과 고기에 덧붙여 흑 맥주를 먹기 위해서 한번 더 몸부림을 칠 것이다. 우리는 감자마름병을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한다. 과거 컬트인들은 감자쟁이 노릇을 그만 두자 육식동물이 되어버렸다. 고기의 향과 함께 그들의 욕구가 점점 커졌던 것이다. 이 과정 에서 끈기, 질서, 인내심이 나타난다. 사실, 아일랜드인의 맹목적인 애국심, 소지주들의 근시 안적 무관심 또는 마구잡이식의 무모한 정부 자선이 끈기와 질서, 인내심의 성장을 방해하 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그 어느 것도 아일랜드인의 존엄한 특성과 아일랜드 번영의 요소들에 대해서 이토록 정확 한 일격은 가하지 못할 것이다. 부유한 자산가들의 동맹이 응당 자신들이 제공해야 할 일자 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라고 재무성을 귀찮게 조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최악의 일 격이다. 의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바로 자신들의 수입이 나오는 땅이므로 그것은 그들의 의무인 것이다. 영국에 대한 수출이 그 어느 해보다도 컸던 해에 아일랜드 지주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구에 자선을 요구한다는 것도 역시 어불성설이 다. 그러나 의무를 잊는 사람은 수치도 잊는 것 같다. (더 타임즈),1846년 9월 22일 아일랜드 지주들은 대기근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넘기려는 이런 시도에 격분했다. 아일랜 드 보수당의 지도자인 아이삭 버트는 더 많은 원조와 그 지출에 대한 지주들의 더욱 강력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필의) 조치들은 제국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한도까지 국민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부의 의무를 인식한 것이었다. 노력이 더 필요한 올해, 로버트 필 경이 그 의무를 다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를 위해서 많은 비 용을 지출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영국의 수입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사소한 비용을 들이고 있으므로, 그는 지난해와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856년 여름, 우리는 로버트 필 경이 물러나고 존 러셀 경이 취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는 의회의 정회에 앞서 (휘그당) 각료들이 빈곤의 전체상을 충분히 예상했다고 믿을 수 없 다. 그들은 응당 완벽한 예상을 했어야 했다. 그들의 공공 공사법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구빈법의 원천인 기근구제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 방법은 영국이 시도할 수 있는 최악의 것 이었다. 국가의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한 것이었다. 국가의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한 것이다. 우리는 식량공급을 전적으로 사기업에 맡긴 것을 중대하고도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자초지종을 살펴보면 의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큰길에서 발견된 남자 시체들 을 놓고 아일랜드에서 배심원 심리가 열렸을 때, 구제공사에서 시달리다가 지친 나머지 손 에 도구를 그대로 쥔 채 '쓰러져 죽은 한 남자에 대하여, 배심원은 정부의 일차적인 책임 을 다하지 않는 각료들에게 살인의 평결을 내린 바 있다. 우리는 이 평결을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이제까지 죽어간 목숨들 그리고 앞으로도 죽어갈 목숨들이 영국 상인들을 위한 교묘 한 계약 때문에 희생된다는 사실을 아일랜드 주민들이 믿고 있는지-'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아닌지 감히 의심을 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믿음이 모든 계급에게 각료뿐만 아 이라 영국의 지배에 대해서도 깊은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던질 수 있을까? 제국 헌법에 애정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아일랜드의 유례없는 곤경에 국가의 도 움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대해서 아일랜드는 '영국' 국고가 빠져나가는 배출구라고 대답한 다면, 이보다 더 불합리하고 이보다 더 사악한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연합국가 가 가짜가 아니라면 '영국의' 재무부라고 하는 말은 나올 수 없다. 재무부는 바로 대영제 국의 재무부인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기대들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제국 의 모든 짐은 나눠 가지면서도, 일단 재앙이 덮쳤을 때는 원조국가에서 응당 받아야 하는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고 우리더러 하나의 독립적 국가로 서야 한다고 한다면? 과연 사람들 은 이번 재앙이 바로 제국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제국이 충분히 이 짐을 나눠져야 한 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만약 이 점이 인정되지 않는다면-'우리의' 정부가 아니라면- 이런 경우에 정부가 해야 할 원조를 받을 수 없다면, 아일랜드인은 오직 연합의회가 아일 랜드에 대해서는 정부의 기능을 포기했음을 인식하고, 아일랜드게 독립된 입법기구를 요구 할 뿐이다. 그때는 독립된 입법기구의 필요성이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아이삭 버트(이 땅의 기근)(더블린 대학교 매거진) 제29호, 1847년 4월 지주들의 의견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스토틀랜드 출신으로 위클로주 소지주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스미스는 휘그당에 저주를 보내고 있지만 오래된 귀족가문들을 중간 계급의 전 문가들로 대체하자는 생각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녀의 구제노력과 다 른 지주들의 무관심이 잘 대비된다. 1847년 1월 21일: 다른 지주들은 낡은 방식, 최저 임금, 하찮은 일, 충고나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들은 거지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면 몇 푼 던져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수고는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정의를' 행하려 하 지 않는다. 부랑자들이 가득 찬 부재지주들의 땅이 엄청나게 많건만 그들에게 한푼도 나 가지 않는다. 게으른 지주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은 전부 우리에게 넘어온다. 우리야 기꺼이 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영국이 도와주리라고 기대할 권리가 없다. 또 우리 의 사적인 문제를 정부가 맡아 주리라고 기대할 권리도 없다. 우리는 이 재난을 우리 스 스로 만들어왔다. 장기간에 걸친 계획 없는 농사관리가 파멸을 초래한 것이다. 원래는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가혹한 시련을 받아야 하는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선조들이 묵인한 악의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 지금 자라나는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 에게 지워진 이 도덕적인 응보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고 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나라가 한 세기 후에는 저 놀라운 무관심에서 깨어날 것이 다. 지금은 모든 계급이 이 무관심 안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온 나라가 깊은 고통을 받 아야 한다면 지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작은 집단에서나마 이 비극을 진정시키려 고 노력하는 것이다. 1848년 10월30일: 이번에는 아주 조금밖에 경작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영세민들은 구 빈원으로 들어갔거나 미국으로 가버렸다. 농부들 역시 만찬가지다. 그리고 자산가들은 파산 했다. 구빈법은 부분적으로 잘못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 감자흉작이 결정 적인 요인이지만 사람들의 특성이 이 고통의 뿌리에 있다.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해 왔고 지금도 우리를 문명의 물결 저 뒤로 뒤쳐지게 하고 있는 영국의 지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새로이 정의해야 한다. 그들은 하층민들에게 좀더 훌륭한 모델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세대의 가난과 기근의 고통은 우리의 개탄스러운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제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사회계급들은 좀더 훌륭한 사람들에 의해서 대체 될 것이다. 1848년 11월 19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금의 자산가들을 근절시키는 것이 정 부의 의도이다. 솔직히 아예 없애버리고 실어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 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의 임무 완수에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왜 다수의 잘못 때문에 소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아야 할까. 영국의 자본가들은 시장의 공급과잉으로 토지가격이 더욱더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귀족들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롭고도 활기찬 모습으로 일어설 것이 다. 하지만 과연 몇이나 일어설 것이며 또 그때까지 얼마나 고통을 감내해야할가. (엘리바베스 스미스의 일기) 1840-1850년 1847년 카톨릭 대수도 원장은 아일랜드 총독에게 더 많은 원조와 토지체계의 개혁을 요구 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 청원소의 강도는 더블린에 있는 머레이 대주교의 온건한 화해책 과 투암의 대주교 맥헤일의 노골적인 민족주의를 절묘하게 타협시키고 있다. 본 청원서의 작성자들은 가장 공손한 존경심을 가지고 기근에 대해서 비탄과 경각심으로 각하께 진언하는 바입니다. 서주 일부 지역은 기근이 이미 시작되었고, 아일랜드의 다른 지 역도 지난번의 공포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 충분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불안이 온 나라를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청원의 작성자들은 각하를 역사적 사실의 인용에 오랫동안 붙들어두고자 하지 않습니 다만, 효과적인 치유책을 제공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불공평한 형법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과거 그 법률은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재산권을 박탈했고 따라서 근면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근면하고자 하 는 마음을 좌절시켰습니다. 여왕 폐하와 선대왕들의 치세에 그 법률중 몇 개가 폐지되었지 만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만들어낸 사기저하와 사회혼란 속에서 감 지되고 있습니다. 그 법률을 정의의 원칙과 기독교 도독 속에서 태어났으나 오히려 그것들을 어지럽히고 있 으며, 사람들의 타고난 나태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금 주민들의 침체된 사회여건에서도 이 법률의 악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상태는 점점 더 비참해져 지난해 감자흉작에 서 비롯된 엄청난 기근 속에서 최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무서운 것이 다시 찾 아오고 있습니다. 만약 노동자에게 고용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계시종교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원리인 기독교 도덕의 황금률로 우리가 대우받아야 한다면, 농부에게 그 땅을 일구는 데 든 노동이나 종자를 보상해 주지도 않고 수확물 전체를 가져가 버리는 것은 저 신성한 원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법률은 그런 부자연스러운 불공평을 인정함으로써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으며, 또 그런 법률들이 단순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고도 잔인하게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신성하고도 파괴할 수 없는 생명권은 재산권이라는 부차적 권리의 끊임없는 확장 속 에서 망각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재산권을 숭배한다 해도 생명권이 훨씬 더 신성한 법이며, 인간의 상대적인 소유 물들을 올바른 척도로 재볼 때, 역시 그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합니다. 만약 이 척도가 자주 전도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소작인의 축출이라는 가슴 아픈 장면을 그토록 자주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태양 아래 저질러지는 압제이고, 아무 위안거리도 없는 무 고한 사람들의 눈물입니다. 그들은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항거조차 할 수 없습니 다." 바로 현명한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를 찬양'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생명이 참혹하게 파괴되는데 이 무서운 위기 속에서 본 청원의 작성자들은 범죄에서 양떼 의 영혼을 구하고, 사회를 해체의 위험서 구하고자 하는 일념에서 감히 청원합니다. 부디 여 왕 폐하의 정부에 미치는 각하의 영향력을 이용하셔서 재난의 중차대함에 걸맞는 구제정책 이 마련되도록 해주십시오. 상호 공평에 기초하여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새로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는 빈민들이 충분히 고용되고 보호받으며, 땅이 충분히 경작되고, 또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이 확고한 기초 위해 서 있는 것을 볼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경작이 가능한 땅이 그대로 놀고 있으며, 해안에도 물고기가 풍부합니다. 온 나라에 풍부한 이 같은 부의 보고를 개발하는 것 이 바로 여왕 폐하의 정부가 바라는 일일 겁니다. 빈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오 랫동안 견디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왕 폐하의 정부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고대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들의 빈곤에 인간적인 주의만을 기울인다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뿐더러 여왕 폐하의 가장 충직한 신민들의 칭송을 영원히 받게 될 것입니다.클래런든 백작 각하에게 보 내는 청원서(프리맨스 저널), 1847년 10월 26일 토지개혁가 제임스 핀턴 랄로는 대기근을 계시록적인 시각으로 바라봤고, 대기근이 아일 랜드 사회를 해체했다고 믿었다. 그는 지주들에 맞서는 사회혁명을 부르짖었고, 청년 아일랜 드당이 그 투쟁을 이끌 것을 기대했다. 감자흉작과 이에 따른 기근은 몇 세기에 걸칠 작업을 하루만에 해치웠고 온 나라를 단숨 에 변화시켰다. 대기근은 사회를 근본부터 뒤흔들었으며, 모든 이해관계, 모든 계급, 모든 가 정에 혼란에 빠뜨렸다. 노동은 그 궤도를 이탈했고, 삶은 그 형식을 잃어버렸다. 아일랜드에 서 제일 수가 많고 중요한 계급이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10에이커 이하를 경작하는 소작 농이 '독립적인 인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사회적 혼란 또는 계급혜체 그 이상이다. 마치 대기근이 우리가 이 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이 섬에 퍼져 있던 사회구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것 은 이미 수세기 동안 시험받아 왔으며, 지금 충분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험받았다. 이제 그 시험의 결과는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껏 불합리하고 허약했던 이 사회구조는 최 초로 혹독한 시험을 받고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하늘도, 인간의 본성도 이제 더 이상 그것 이 다시 세워지거나 유지되는 것을 참지 못할 것이다. 만약 땅과 그 위의 모든 것들이 오로 지 소수를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다수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구조는 계속될 것이다. 만약 다소가 기근과 열병으로 죽을 때까지 참아야만 한다면 그때는 이 구조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살 권리가 있고, 자기 땅에서 가족친지들과 함께 살 권리가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권리가 있다면,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구 빈원의 혐오스럽고 거지같은 삶이 아니라, 안전하고 정직하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 가 있다면 저 구조는 다시는 세울 수도, 세워질 수도 없다. 사회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구성원에게 제공해야 할 것을 제대로 제공해 주지 못한다 면 보다 효율적인 다른 형태를 취하던가 아니면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그 구성원 이 궁핍 아래 죽어가기 시작하고, 수십만 명이 죽음과도 같은 기근의 공포와 위세에 밀려 고향을 등지기 시작할 때, 그때가 바로 신의 뜻대로 그 사회가 해체될 때이며 다른 모습로 로 사회를 재건해야 할 때이다. 인간의 손과 자연의 힘을 통해 신이 의지를 펴는 것이다. 바 로 지금 아일랜드가 그렇다. 감자는 우리의 유일한 자본이다. 그것이 있어야 살고, 일하고, 뭐든 한다. 그리고 감자야말로 이 땅의 경제를 밑받침했고, 만들었으며, 지탱했다. 이런 체제 와 상태가 다시 시작되거나 회복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마찬가지로, 다시는 감자에만 의지 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사회질서가 만들어져야 하며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 다면 우리는 절멸하고 말 것이다. 옛 질서가 소멸하고 새 질서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조건에서나 특성에 서나 행동에서나, 오랜 세월 지상의 오점이요, 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명예요, 자연에게는 부 끄러움이며 하늘의 불평거리였다. 태양이 지나는 길에 있는 검은 점이었다. 이제 자연과 하 늘은 이러한 상태를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든 혹은 자연의 안 정된 질서를 믿는 사람이든 이 섬이 새로운 조건 아래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연은 새로운 천명-이제까지 바로 같은 죄에 대해서 여러 국가 와 인종에게 가끔씩 내려졌던- 즉, 하나의 우둔하고 비겁한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말 것이며, 대지에 폐가 되지 말라는 천명을 내릴 것이다. 제임스 핀턴 랄로(새로운 국가)(더 네이션), 1847년 4월 24일 연합국가가 아니라 정복을 무효화하자는 것이다. 82년도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 라 48년도의 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자유민을 양성하자는 것 이다. 자유롭고 강하고 확고하며, 저 대지의 바위처럼 농민에게 굳게 뿌리를 박은 나라, 이 것이 나의 목표이다. 내가 천명하고 끝까지 지키려는 원칙은 저 하늘에서부터 이 땅의 중심까지 아일랜드의 모 든 도덕적, 물질적 소유권은 바로 아일랜드인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이 섬의 수유권자이자 법률 제정자라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지 않은 법은 전부 무효이다. 그리고 그 들이 부여하지 않고 확인하지 않은 권리는 그 어떤 것도 무효이다. 또한 이 모든 소유권은 신께서 인간에게 하사한 권능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을 통해 확고히 주장되고 실행 에 옮겨지며 또 그래야만 한다. 제임스 피턴 랄로(아일랜드의 중죄인), 1848년 6월2 24일 당대의 문학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불려지고 있는 아일랜드어 노래들은 빈민들의 느낌을 가장 진솔하 게 담고 있다. 워터포드주 링에 살던 마이르 니 드로마의 <검은 감자들의 노래>는 깊은 신 앙심과 아울러 대기근이 야기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를 산산이 흩어놓은 것은 검은 감자입니다. 우리는 빈민원에 들어가거나 외국으로 이 민을 갔고, 저 산의 묘지에 수백 명씩 누워 신의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 영광의 신이 시여, 저희의 기도를 들으사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이 굴레를 벗겨주시고, 저희를 도와주소 서. 그리고 울부짖고 있는 저희에게 빵을 내려주시고 저 구빈원을 재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죄가 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면 우리의 가슴을 열어 깨끗이 씻어 주소서! 당신의 피 한 방울을 보내셔서 저희의 위안으로 삼게 하소서. 저희는 비탄과 굶주림 속에서 절망하 고 있나이다. 당신께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의 사악함을 한탄하나이다. 오, 자비의 왕 이시여, 이 구름을 거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느 한순간도 당신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일랜드의 빈자들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걱정하고, 아,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 나이다. 어린아이들은 오랫동안 있나이다. 어린아이들은 오랫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신음 하고 흐느끼고 있나이다. 이 일은 신의 계획이 아니었을 터. 빈자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구빈원의 문이 등뒤로 닫히는 소리 울리고, 부부가 살기 위해서 헤어지고.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살던 아이들이건만 구원빈은 아이들의 눈물을 가혹하게 짜 내는 곳.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나이다. 옆에 있어도 굶주림에 지친 어머니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나이다. 오 자비의 신, 축복 받은 사랑의 어린양이시여, 저희 의 고통을 하늘에서 굽어보시옵소서. 오, 목자시여, 저희를 방황케 하지 마옵소서. 당신의 쓰 라린 고통을 잊어 유다의 언덕을 오르고 있는 저희를. 오호통재라. 이 땅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저 거만한 사람들에게 이 고통이 돌아가야 하건만. 불쌍하도다. 빈자의 운명이여, 그 신음소리로 나날이 부유해지는 저들, 빈자들은 그 들을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땀흘리건만 그 고된 일은 힘들고도 꾸준하건만 집으로 돌아가 면 무너진 폐허뿐. 영어로 된 민요 역시 대중적인 감상을 잘 표현했다. 다음에 수록된 <이민의 노래>는 1847년경에 등장했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내가 부르나니 이제부터 듣게 될 이야기에 귀기울여라. 나는 이제 내 사랑하는 친척들과 헤어져야 할 터, 슬픔에 겨워 울다 보니 잠도 빼앗기고 말았다네. 이곳의 어려움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 이곳에는 노예생활밖에 없다네. 나는 이제 운명을 걸고 이곳을 떠나 자유의 당으로 가려 한다네 안녕, 내 사랑 어린, 그대에게 작별을 고하노라. 성인들의 섬이라고 불렸던('아일랜드'는 '성인들의 섬'이라는 뜻:역주) 이 땅이여. 이곳에서는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어 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려 한다네. 노예생활밖에 없는 이곳의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네. 가슴은 답답하건만 이곳은 평온을 찾을 수 없는 곳. 나는 이제 자유의 땅으로 가려 한다네. 내 아버지는 5에이커의 땅을 부치셨지만 그걸로는 우리 모두가 먹고 살 수 없지. 그래서 나는 고향에서 쫓겨나는 신세, 정든 아일랜드여, 이제 나는 작별을 고하노라. 이곳에서의 어 려움은 견딜 수 없는 것.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다네. 이제 나는 운명을 걸로 그곳을 떠나 자 유의 땅으로 가노라. 내 사랑, 임금은 낮고 먹을 것이 왜 그리 비싼지. 가난한 사람들이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것을 간청하는 모습. 그들의 신음소리, 그들의 한숨소리, 그들의 한 탄이 들리누나. 아이들의 헐벗음 모습이 눈에 선하누나. 도움을 간청하지만 나누어줄 것이 하나도 없기에 내 비통함만 더하누나. 자, 내 사랑하는 그대여, 노한 바다의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오. 그대 마음이 나에 게 기울어져 있거들랑 지금 준비하여 이리로 오라. 내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가 나와 결혼하 기로 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준비하고 있으리라. 우리 결혼 축가에 맞추어 손을 맞잡게 되리 라.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으리라. 내가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은 46년의 일, 나는 정 든 아일랜드와 사랑하는 친척 모두에게 작별을 고했다네. 하지만 지금 나는 미국에 있다네. 우리가 내야 했던 저 온갖 임대료도 세금도 없는 곳. 그래서 나는 내 고국 그리고 정든 도 네갈에 작별을 고했다네. 작자 미상( 민자가 도네갈에 보낸 작별인사)1874년경 아일랜드의 신교도 변호사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새뮤얼 퍼거슨 경은 딘 스위프트와 새뮤 얼 존슨의 풍자정신을 빌려서 '정치경제학'을 공격하는 운문을 썼다. 이것은 '극빈자'를 어 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서 무자비한 영국의 '경제학자'와 아일랜드 지주 '상속자'가 나 누는 가상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지금 우리가 성인이나 은둔자의 시절이 아닌 19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19세기입니다! 이 나라에 만연한 구 걸행위를 바로 우리가 과학적으로 분석할 것이 요구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겁니다. 저 부랑자는 지금 온 나라에 게으른 습성과 온갖 새소식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고 있습니 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지는 유해한 이야기들, 출생, 사망, 결혼, 운동경기들-선동적인 소쿤과 협박 그리고 녹유회니 하는 것의 게시물, 대장장이가 만들어내는 것 같은 잡지들 저 부랑자의 속임수로 학생들은 게을러지고, 일하는 어른들은 정치이야기로 일을 안하며, 그래 서 공공의 책임으로 별 고통 없이 그 자신, 그의 몸에 붙은 해충들, 그리고 그의 개가 살아 갑니다. 자, 귀하의 아일랜드 빈민 개혁을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금방 보게 될 것입니 다(그의 개는 달아매고). 과학이 어떤 방법으로 귀하의 부랑자를 경제적으로 이용하는지, 그 리고 사회를 개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지. 선생님, 그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 거지는 아마도 자기 피를 빨아먹는 해충 대신 돈을 받는 공식 흡혈귀들을 한 무리 키우고 있을지도 모릅니 다. 그 엄청난 것들이 몸 구석구석 교묘하게 우글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소염제나 정 맥 절개 같은 구조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아니면 환자가 더욱 고귀한 필수품을 찾아 한숨을 내쉬거나 반대로 자극제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귀하의 공과국의 모든 구성원들이 필 르 흘리고 완벽한 건강에 물집이 생길 때까지 말입니다. 자, 이제 더 이상은 귀하의 땅의 치 유를 미룰 수 없습니다. 서두르십시오, 먼저 위원장을 한 명 지명하십시오. 이 거지나라의 일을 모조리 감독하는 겁니다. 그리고 감독관, 책임자, 부관을 50명 임명하십시오. 확실한 보 증이 있는 징세관을 50명 임명해서 세금을 거두는 겁니다. 거기다, 500명의 구제위원과 대리 위원 그리고 자원자를 추가하십시오. 1년에 50파운드 주는 서기가 500명, 500명의 지배인, 500명의 숙녀, 500명의 유명한 보건성 의사, 500명의 건설성 기술자, 500명의 목사, 그리고 500명이 서기." 상속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급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치유법은 돈 이 얼마나 들까요?" "그리 많이 들지 않습니다." 경제학자가 대답했다. "지금 극빈자들을 호 사시키고 있는 돈에 비하면 말입니다." 오 영국의 관대한 사람들이여, 우리의 침몰해 가는 섬을 구하기 위해 고귀한 원조를 준 사람들이여, 이 땅의 불화로 비록 감정이 격해졌으나 이런 마음이 당신을 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그대에게는 온전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나니. 그대 가정에서 아낀 접시 하 나 분의 음식, 알뜰한 저금통에서 나온 동전 하나, 연기한 축제와 팔린 보석, 신께서 당신이 창고를 백 배로 늘려주시기를.....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구호품을 보내준 모든 이들에게는 감사해도 당신네 의회에는 감사하지 않나니 그들은 준 것은 결국 우리들의 보물에서 꺼낸 것이니, 그것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받는 사람으로서는 반은 선물이요, 반은 대부인 이것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반은 선물이요, 반은 대부인 이것을. 받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수백만 개 가운데 열 개는 열두 개에 불과한 것을. 당신의 것이나 우리의 것이나 마찬가지 인 것을. 우리 아일랜드인이 얼마나 땀흘려 모은 것인데. 그런데도 당신의 하원은 당신이 진 4억의 빚을 잊어버렸다네. 처음 우리들이 상호 협조할 때 진 그 빚을. 그대 우리의(당신네는 가난한 사람이 두배는 많았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영국의 금이라고 불렀지. 아니, 우 리의 연합 은행에 어음이 있기에 우리는 감사할 마음도 없고, 감사도 표하지 않는다네. 당신 네가 우리에게 준 것 이상으로는, 도세트셔나 요크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해도. 당신네가 우 리에게 준 것 이상으로는, 당신네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해 주기 위해서 당신네는 우리에게 두배의 짐을 지웠지. 그래, 우리는 차라리 우리의 저주를 보내겠네.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럴 거라네. 저 치명적이고 맹목적인 자만에 그리고 자부심에. 우리가 청한 도움을 그대는 그릇 된 방법으로 이용했기에..... 새뮤얼 퍼거슨 경( 속자와 경제학자에 관한 시) 1849년 당시에 쓰인 시 가운데서도 제임스 클라렌스 맨건이 대기근의 공포를 가장 가깝게 표현하 고 있다. <시베리아>는 죽음을 맞이한 그 자신의 공포, 그리고 주변 고립감과 절망을 잘 나 타내고 있다. 시베리아의 황무지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톱니처럼 할퀴고 있다. 꿈을 잃어버린 시베리아는 마름병과 죽음만을 드러낼 뿐이다. 마름병과 죽음만이, 여름 햇살도 없다. 밤 사 이사이로 낮이 있을 뿐이다. 시베리아의 황무지에서는 언제나 피가 검어지고 심장이 마를 뿐이다. 시베리아의 황무지에서는 눈물로 흐르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몽롱 한 고통뿐, 격렬한 통증은 없어진 지 오래. 고통도 꿈에서나 있을 뿐이다. 세월이 장례식 행 렬과 함께 덧없이 지나갈 때는. 사람이 살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닐 때는. 사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닐 때는. 시베리아와 황무지에는 모래와 바위뿐이다. 녹색의 것, 부드러운 것은 하나도 피지 않는다. 다만 저기 눈덥인 봉우리와 쓸쓸한 얼음덩이만 있을 뿐. 그곳으로 추방 되는 것은 그것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일부는 저 모래와 바위이며 일부는 그 자신이다. 그 의 가슴속에 모래가 있고, 죽음의 눈이 있는 한. 그러므로 저 황무지에서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모두의 혀는 북풍에 갈라져 있다. 밤이면 살을 에는 저 북풍에. 다들 그 운명을 참 아낸다. 굶주림에 그리고 살인적 추위에 드디어 거기서 침몰할 때까지. 그의 마지막 숨이 거 두어질 때 또 하나의 시체가 늘어나는 것일 뿐이다. 제임스 클라렌스 맨건( 베리아) 1846년 와일드 부인(제인 프란체스카 엘지. 유명한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어머니)은 더 네이션에 정기적으로 기고한 낭만적 민족주의 시인들과 예언자적인 비전과 천년왕국의 환상을 공유하 고 있었다. 지친 사람들아, 무엇을 거두었는가?-이방인들을 위한 황금 옥수수. 그대들은 무엇을 뿌렸 는가-복수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시체들. 여위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아, 앞바다에서 무엇 을 보았는가? 나라의 배들은 이방인들의 비웃음 속에 우리의 식량을 가져가누나. 군인들이 자랑스레 서 있구나-그들은 당신 문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 주인의 곡식 창고를 지키고 있다네. 가난한 사람들의 가벼운 손에서, 수척한 사람들의 가여운 손에서. 수 척한 어머니들은 흐느끼누나-신이시여, 우리는 죽어야 합니까? 우리 아이들이 눈앞에서 쓰 러지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빵을 줄 수 없는데. 어린아이들아, 너희의 앳된 얼굴에는 눈물이 낯선 법. 신은 너희가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에서 웃음만 지으라고 했는데. 아! 우리는 미소 가 뭔지, 죽는다는 게 뭔지 몰라요. 그냥 배가 고파요. 너무 배가 고파서 울음을 멈출 수 없 어요. 우리 가운데 크긴 컸는데 차디차고 창백한 아이들이 있다고 그래요.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 애들이 우리 옆에 누우면 우리는 꿈속에서 덜덜 떨어요. 큰 길에 말라빠진 사람들이 한가득 있어요. 어디 구걸하러 가는 걸까요? 눈물도 나오지 않는 그 눈으로, 핏기 없는 그 얼굴로? 아니다. 우리 혈관 속에서는 피가 이미 죽어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도랑에 숨어 죽어야지. 아이들하고 아내가 보지 못하게. 더 이상 그 굶주림에 지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빵을 달라! 빵을! 저들의 분노를 어루만져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나니, 우리는 죽은 어 머니의 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기 곁을 떠났다. 우리는 열병에 시달리다 미쳐버린 소녀들 곁을 떠났다. 소녀들아, 제 검은 머릿단에 목졸린 너희는 더 나으리라. 아가들아, 제 어미의 첫 번째 애무에 질식한 너희는 더 나으리라.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숨기고 있었지만 신께서는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실 터이니. 그렇 다. 이웃사람들은 우리를 버렸어도 그분은 옥좌에서 다 들으시리라. 제 땅에서 저주받은 우 리,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일하고 또 일한다. 낯선 사람들이 우리의 곡식을 거두고 있구나. 외계인이 우리의 땅을 차지하고 있구나. 오 신이시여! 저희가 얼마나 죄를 지었기에, 고향 땅에서 집 없이, 헐벗은 채 굶어 죽어야 합니까? 카인처럼 낙인이 찍힌 채. 고통 속에서 확 실하게 그리고 천천히 죽어가는구나. 길가의 개처럼 그렇게 죽어가는구나. 창백한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하나씩 하나씩 옆에 쓰러지고 있다네. 그들은 들어 파묻을 힘도 없는 우리. 그렇게 죽도록 놓아두세나. 야생의 새도 쓰러지면 옆의 것들이 슬퍼해 주는 데 우리는-그리스도의 땅 안에서- 우리 형제들 속에서 죽는구나. 신이 주신 땅에서, 맹수가 동굴에서 죽듯이. 눈물도, 기도도, 비명도, 관도, 무덤도 없이. 아! 저기 보이는 살아 있는 얼 굴들은 잔뜩 일그러져 있고, 심판의 날이 정녕 이를진가! 우리는 당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인간제물, 내쫓기고 굶주리고 멸시를 받는구나. 하지만 그 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그 영혼들의 복수를 신께서 해주실 것이니. 지금은 당신들이 즐거움을 누릴 시간. 이 세상의 보살핌 속에서 따뜻한 불을 쬐어라.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백골이 일어나 증언을 할 것이니, 오두막 속에서, 도랑 속에서 관도 없이 쓰러져 있던 저 많은 사람 들이 승리를 알리는 나팔의 천사가 지나가면서 그들에게 알릴 것이니. 우리가 세울 위대한 신 앞에 유령의 부대가 나타날 것이니. 당신들은 우리의 살인자, 우리 땅을 망친자로 심문받 을 것이니. 와일드 부인(스페란차)( 기근의 해) 1847년 1840년 아일랜드에서 제일 유명한 산문작가인 윌리엄 칼레턴은 <검은 예언자>에서 대기 근 초기의 기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책은 1847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좀더 관대한 반응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쓴 책이다. 아래의 글은 한 '곰벤만' 즉 고리대금업자의 실상과 열병의 파괴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도 철면치한 악당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기근을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시기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을 괴롭히는 질병과 굶주 림 더 나아가 총체적 비참함을 이용하여, 냉혹하고도 극악무도한 방식을 동원하여 이들을 수탈하고 막대한 이익을 손에 넣고자 음모를 꾸민다. 바로 시골의 구두쇠, 고리대금업자들은 흉년, 또는 더운 여름이 올 때까지는 식량을 저장하는데 그쪽 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 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엄청난 가격으로 내다 판다. 설리반스 가족이 사는 곳에서 800m거리에 고리대금업자가 한 사람 살았다. 그 비범한 재 주의 소유자의 이름은 다비스키네이더였다. 호리호리한 몸집을 한 그의 안색은 누르께했다. 얼굴은 길고도 바싹 말랐으며, 노란 턱수염이 짧게 나 있었다. 어느 날, 스키네이더가 불행에 빠진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자기 집 아래층에서 그는 저을 앞에 서 있었다. 그 부정하고도 인색한 손으로 저 불쌍한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그에게서 살수밖에 없는 빈약한 물건을 저울질했다. 그는 마치 기근의 수호신 처럼 고통, 남루함, 허약함, 굶주림 그리고 비틀거리는 질병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련한 고 통, 절망적인 슬픔의 온갖 모습이 다 있었다. 절망적인 슬픔의 온갖 모습이 다 있었다. 그 핏기 없는 볼에 야만의 낙인을 찍는 저 깊은 통증 때문에 눈은 멍하고 동시에 여기를 띤다. 입은 바싹 마르고 신음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공허하게 들린다. 그는 거기에 서 있었다. 위안 에 협잡을 섞으면서, 그리고 저 절망한 사람들에게 종교와 자선의 이름으로 사기와 착취를 강요하면서, 그의 주위에는 갈수록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는 비참함만 있다. 아버지들도 거기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그늘과 절망을 읽는다. 그 절망에 마는 더욱 검어지고 가슴은 더욱 뒤틀렸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편안한 농부였던 장정도 이제는 낙심한 모습, 곧 쓰러질 것만 같다. 이제는 한 줄기 희망도, 버틸 힘도 없으리라. 너무나 말 라버려 헐거워진 옷차림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인가, 그렇게도 힘이 넘치던 사람, 그 강인한 체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바로 그 사람인가 의심을 품게 된다. 그렇지만 스키네이더의 집에 나타난 사람들의 온갖 모습과 요구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간다. 지치고 병들고, 조용히, 그리고 맥없이 낙담한 채, 때로 는 두세 명씩 우르르, 때로는 혼자, 열심히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나 힘은 하나도 없다. 사랑 하는 자식 또는 부모, 남편 또는 아내, 온 가족의 생명이 그가 가지고 가는 먹을 것에 달려 있는 양..... 그 기간 동안, 이곳의 상태는 믿고 안 믿고 차원을 넘어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때의 사망 률이 콜레라가 최악의 맹위를 떨치던 때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 다. 사실 콜레라는 발진티푸스처럼 그렇게 환자를 흉측한 몰골로 만들면서 고통을 오래 질 질 끌지는 않는다. 콜레라의 발병은 순간적이며, 한번 걸리면 이내 죽음에 이른다. 비록 그 래서 콜레라가 열 배나 더 무섭다고는 하지만, 콜레라 환자들은 발진티프스로 죽어 가는 사 람들의 고통과 비탄에 댈 것이 아니고, 그처럼 애처롭게 도움의 손길과 동정심을 불러일으 키지 않는다. 굶주림의 열병에 걸린 사람은 도발적인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환자와 이 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정신이 멍해지거나 도덕적 마비상태에 이른다. 그 고통마저도 없애고 말 정도로..... 한편 고통의 진행은 너무나 느리고 단계적이어서 그 모든 동정과 괴로움이 극 한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런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사실, 아일랜드는 지금 우리가 서술하고 있는 시기 동안에는 기근,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 찬, 하나의 거대한 나병동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묘지의 검은 휘장이 늘어뜨려져 있고 구름은 구름은 침울한 장례의 형상을 나타내니, 이제껏 인간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저 아래 지상에서 벌어지는 역병과 기근의 공포가 하늘에 방영되어 하늘은 영 구차, 관, 장례행렬 등 온 죽음의 검은 상징뿐이다. 영국의 소설가 앤서니 트롤롭은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의 우체국 관리였다. 당시 그는 정 부 정책의 강력한 옹호자였지만 몇 년 후 그 일을 소설로 묘사할 때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완화시켰다. 허버트가 다시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그들은 남부 아일랜드에서 몇 년 동안 흔치 않았 던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놀라울 정도로 흔하게 눈에 띄는 장면과 마주쳤다. 문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누더기로 몸뚱아리를 가린다고 가렸지만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없는 모습 이었다.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아 거칠고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흘러내려 있었다. 그 녀의 등에는 약간은 이상한 모습으로 누더기를 뒤집어쓴 어린아이 두 명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이 주변에 서 있었다. 그중 두 아이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섯 명의 아이 가운데 제일 큰 아이도 일곱 살을 넘지 않아 보였다. 모 두다 사납게 생긴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도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엄마도, 아이들도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키가 작았고, 여위긴 했지만 어깨가 벌어 진 체형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무릅가지 굵기가 같아 보였고, 아이들의 팔다리 역시 얇은 막 대기 같았다. 허버트와 클라라가 문 앞으로 갔을 때 그 어머니와 다섯 아이들은 한겨울임에도 도랑가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고 앉아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가난한 자들이 그렇듯이 인 내심을 가지고 그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가씨를 보호해 주실 거예요." 불쑥 그녀가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클 라라는 깜짝 놀랐다. "허버트 나으리게두요. 하늘의 사랑을 생각하셔서 이 불쌍한 것에게 조 금만 적선해 주세요. 아이들이 지난주부터 아무 것도 입에 넣지 못하고 있답니다요." 그러나 허버트는 경제학에 관해서 깊이 배운 바 있고 또 길거리에서 마구잡이 자선을 베 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줄 돈이 없어. 칸터크 구빈원에 들 어가도록 해." "구빈원이라고요?" "아니 신부한테 가서 표를 받으면 1주일에 두 번 배급을 받을 수 있어. 당신도 잘 알면서 왜 커넬런 신부에게 가지 않지?" "제가 거기 가보지 않은 것 같으세요? 지난달에 벌서 가보았습니다만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었어요. 한 달 가까이 우 유 한 방울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저 아이들을 좀 보세요. 아가씨, 저 아이들 좀 봐주세 요. 그냥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등 옷가지를 풀어 두 아기를 길게 내려놓았다. 그 중에 좀더 큰 아이는 굶어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두 살 가까이 된 아기였다. 하지만 그 작은 팔들은 말라빠진 작대기나 다름없었다. 핏기 없는 노란 볼은 움푹 패어 들 어가 있었고, 벌써 삭아버린 이 두 개가 마른 입술 사이로 흉하게 내비쳤다. 머리와 이마는 염중투성이였다. 그 여인은 누더기를 뒤집어 등과 다리 역시 같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었 다. "이걸 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경멸조였다. "이게 다 이번 재난 때문이죠. 저주하 고 또 저주한답니다. 우리 땅에 가까이 다가온 첫날부터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누더기로 다시 아이들을 뒤 등에 업었다. "허버트, 저 사람한테 뭐든지 좀 주어요, 제발요." 그렇게 애원하는 클라라의 얼굴에 눈물 이 뒤덮여 있었다. 물론 허버트 피츠제럴드는 그 여인에게 묻는 그 순간부터 뭔가 그녀에게 주게 될 것이라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경제이론에도 불구하고 동정심 때문에 그의 빈약한 주머 니가 비워지지 않는 날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은 그러라고 허용하고 있 지만 자신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호품 신 청자에게 절대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구제위원회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이렇게 각자가 주는 돈을 기금으로 모아 신중하고 분별 있게 쓰면 두 배의 효과를 얻을 터였다. 그것이 모 두가 바라는 체계였고, 아일랜드 남부에 사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바였다. 하 지만 그것은 철의 마음과 금강석의 심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자선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버트, 제발!" 그 여인이 떠나려고 하자 클라라가 애원했다. "브리짓, 이리 와. 아이가 몹시 아프군. 이걸 받아." 그리고 허버트는 1실링 6펜스를 주었다. "지금 당장 아이들을 어 디 따뜻한 곳으로 데리고 가도록. 칸터크의 구빈원으로 가는 게 좋을거야." 그러자 그 여인은 축복의 말을 남기며 갔다. 지금 당장 구빈원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었 다. 그 건물은 준비가 되자마자 만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최악의 기근이 오지 않았다. 허 버트는 리치먼드 성으로 말을 돌렸다. 앤서니 트롤롭( 치먼드 성) 1860년 현대의 문학 리암 오플래허티의 1737년 작 <대기근>은 역사적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따름 에도 불구하고 그 재앙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감동적인 글로 남아 있다. 아래의 발췌에서 여주인공은 미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한다. 메리는 도랑을 따라 눈길을 던졌다. 상당히 밝아지고 있었다. 바퀴와 말발굽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아주 가까이 들렸다. 바다에도 환하게 빛이 퍼져 있었다. "동이 텄어요." 메리는 놀란 얼굴로 옆의 주부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기 올 때쯤이면....." 그녀는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아 말을 끓고 입술을 깨물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부인이 화를 냈다. "이런 곳에서 웃다니 아무래도 정신이 없는 아가씨로군." "아 아니예요. 무슨 이유가 있어서 웃은 게 아니에요. 그냥 무슨 생각이 나서, 내가 살아서 여기 올 줄은 몰랐어요. 블랙밸리에는 브라이언과 매기만 살아 있어요. 떠나올 때 이들에게 먹을 걸 조금 남겨두었어요. 마을에는 아무도 없고, 개들 싸우는 소리만 요란했죠. 죽음의 땅 같았어요. 길런 신부님 말씀이 조니 하인즈(고리대금업자)도 가버렸대요." "그놈한테 저주가 있기를." 그 부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돈이 있다고 뭐든 살수 있는게 아니지. 이번 기근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있어. 오늘 미국으로 갈 배만 해도 그놈한테 가는 필라텔피아산 옥수수를 가지고 왔으니까." "오늘 가는 배가 있을까요?" 메리는 부인의 팔을 잡으며 외치다시피 물었다. "있어. 요즘은 며칠 간격으로 있으니까. 나는 벌써 가 있어 야 했는데 병 때문에 늦었어. 돈은 하숙비로 다 써버렸고....." 메리는 이제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근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길에서 죽은 사람을 봤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약간은 큰 목소리였다. "듣자니 주지사인 보드킨 대령이 식량을 풀고 있는데 자기 소작인한테만 준대요. 그리고 로치 신부님은 매일 저녁거리를 거 지한테 줘서 유령처럼 말랐대요. 보드킨 대령은 자기 집 문 앞에 보초를 세우고 있어요. 정 부에서 공사를 다시 시작할 거래요. 정부에서 공사를 다시 시작할 거래요. 하지만 그 일을 할 만큼 튼튼한 사람이 없을 거라더군요. " 이제는 마차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말발굽소리에 섞여 채찍질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 도랑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잠을 깼다. 그래도 움직이는 사 람은 몇 되지 않았다. 어린 소녀 하나가 어머니를 흔들며 애처롭게 불렀다. "주여, 저희를 구해 구세요!" 게리모어에서 온 여인이 말했다. "동이트면 죽었던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듯이. 아니 저 말등에 있는 빨간 코트들 좀 봐요." 기병 셋이 키 큰 해안가 풀숲 가장자리를 따라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마차 대가 따랐고, 마차 양쪽으로는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말 탄 사람들은 칼을 찼고, 보병 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의 기병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차에는 포대가 실려 있 었다. 갑자기 해안길 옆 도랑 끝에서 한 키 큰 남자가 일어섰다. 반쯤 벗은 몰골의 그가 주먹을 꽉 쥔 오른손을 쳐들었다. 팔목께에 소맷자락이 헐렁거렸다. "이 강도들아!" 그는 주먹을 호 송대를 향해 흔들며 소리질렀다. "네놈들은 이 땅에서 우리의 곡식을 가져가고 있다. 네놈들 이 우리 식량을 훔쳐 가는 바람에 우리는 굶어 죽고 있단 말이다. 우리가 지금은 비참하게 엎드려 있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설 거다.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폭군들을 쳐부수고 말 것이 다.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러자 도랑을 다라 도전의 함성인 양 분노에 찬 불평이 터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호송대 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웅성거림에 흥분한 그가 앞으로 달려가며 소 리를 질렀다. 군인 하나가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 다. 호송대는 속도를 냈고, 이제는 많은 군인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한 여인이 도랑에서 달려나와 쓰러진 남자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리암 오플래허티( 기근) 1937년 대기근은 많은 아일랜드의 현대의 시인들에게 아일랜드의 육체적 그리고 심리적 풍경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다. 바다 저 높은 곳, 얕은 땅을 건너면 새들도 쉬지 않는 곳, 불행한 발이 지나가는 곳 경험 의 밝은 무사함에서 배고픈 풀의 공포 속으로 허공에서 쏟아져 나온 독이 절망 속에서 봄의 성장을 가로막는 해 쐐기풀도 구원할 수 없는, 해골 같은 몰골의 가련한 사람이 네 뼈로 기 면서 마지막 뿌리기를 하던 해. 기었다. 그리고 쪼그라든 심장은 적선접시들을 향해 그의 생 각을 몰아가다가 휘둥그래진 눈들이 그 거리를 측정하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 현기증 나는 벽으로 출입을 막고 있는 저 먼 시가지처럼 멀기만 한 접시들. 땅은 비참한 몸뚱아리로부터 이용할 것일 없을 터, 하지만 그곳이 그가 황홀하게 자란 곳이라는 기억을 심어주었고 그가 거름을 주는 저 마른풀은 굶주림으로 그를 고문하고, 뼈에서 골수를 빼먹는다. 도나 맥도나(굶주린 풀) 1947년 1. 자동인형처럼 땅을 파는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뿌리와 흙의 검은 세례를 흩뿌린다. 인 부들은 뒤에서 우글거리고, 몸을 구부려 버들고리 바구니를 채운다. 손가락은 냉기에 죽어간 다. 까마귀들이 새까만 벌판을 공격하듯, 그들은 울타리에서 두렁까지 뒤죽박죽인 줄을 똑바 로 선다. 어떤 쌍들은 끊임없이 초라한 줄에서 빠져 나와 가득 찬 바구니를 구덩이에 넣고 몸을 편다. 잠시 허리를 펴보지만 비틀거리며 돌아선다. 부서지는 파도에서 새로운 짐을 낚기 위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허리를 굽혀 시커먼 손을 더듭는다. 잔디를 지나는 행렬의 구부림이 가을 이면 무심하게 떠오른다. 가근의 신에 대한 공포와 복종의 세월이 꿇은 무릎 뒤의 근육을 강인하게 만들고 계절이 올 때마다 잔디 제단을 만든다. 2. 시리도록 희고, 자줏빛이 돈다. 부푼 조약돌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애당초 시커먼 진 흙통 속에 있었나니, 반으로 나누어진 종자가 싹트고 굳는 그곳에 저 혹이 생기고 쭉 찢어 진 줄기가 행렬의 무감각한 마음들 같구나. 삽이 가르면 크림처럼 하얀색을 보인다. 비수어진 흙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난다. 부식토의 거친 살갗에서 감자덩어리들이 나온다 (정결한 탄생). 그 단단한 느낌, 그 젖은 속내는 땅과 뿌리의 향을 약속한다. 구덩이에 묻힐 것이니, 살아 있는 두개골로, 감긴 눈으로 3. 눈 감긴, 살아 있는 두개골들이 마구 흩뿌려진 해골들 위해서 균형을 잡으며 45년의 땅 을 헤집었고, 마름병에 걸린 뿌리를 게걸스레 먹어치웠고, 죽어갔다. 돌처럼 단단한, 그 새로 운 감자가 긴 진흙구덩이 속에 사흘 동안 누워 있다가 썩어갔다. 수백만이 같이 썩어 같다. 입들은 굳게 닫히고 눈들을 멀었다. 얼굴들은 한 마리 용기 있는 새에게도 오싹했다. 무사한 버들가지 오두막 속에서는 기근의 부리가 창자을 싹둑 잘랐다. 태어날 때부터 굶주린 사람 들, 망할 놈의 땅에서 마치 나무처럼 뿌리째 뽑혀 처절한 슬픔에 접목되었다. 희망은 저절로 잘도 썩어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감자들은 땅을 더럽혔고, 구덩이들은 고름으로 더러운 둔덕을 만들 었다. 감자파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지금도 그 슬픔을 냄새 맡을 수 있나니. 4. 한떼의 갈매기가 즐겁게 나는데 문득 동작을 몸추면서 일군들이 손을 놓는다. 갈색의 빵 과 밝은 색 통에 가득 들은 차가 점심으로 나온다. 녹초가 된 그들은 어슬렁어슬렁 도랑으 로 내려가 휴식을 취한다. 영원하기만 한 단식을 그친 것에 감사하면서. 그리곤 믿지 못할 땅에 몸을 뻗으며 차가운 차를 제주처럼 붓는다. 빵껍질을 뿌린다. 시머스 히니(감자 캐기), (한 자연주의자의 죽음)에서 1966년 이제 내게는 그 아픈 사람이 했던 말을 단 한마디도 되살릴 기회가 없다. 내 증조모의 창 문을 두드리며 빵 한 조각을 구걸하며 했다는 말. 병에 걸린 숨결에 전염될까봐 고통받는 서부의 오두막들에서 날아온 지독한 병, 검은 감자줄기의 포자들, 그르렁거리는 가슴에 든 독으로 얼룩진 침. 그러나 증조모는 천성이 그러셨듯이 얼른 대답했고, 대가로 기근의 열병 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그 짧은 대면이 나에게는 내가 아일랜드인임을 영원 히 기억시킨다. 내가 간직하는 많은 것들이 그들의 환상과 달라도, 그들이 상찬하는 많은 것들을 같이 나 눌 자격이 없어도. 그 여인의 죽음에서 나는 내 조국을 본다. 그 오래된 상처에서 또 다른 상처를 본다. 존 휴잇(상처), (존 휴잇 시 모음집), 1991년 지도 작성이라는 과학은 한계가 뚜렷하다. 숲의 음영 처리가 봉선화의 향기를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이프러스의 그늘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코노트 변두리로 차를 몰았지. 그리고 어느 숲으로 들어갔지. 그때 당신이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지. 이곳이 그 옛날 기근의 길이었다고. 나는 담쟁이덩굴과 솜풀을 내려다보았지. 당신이 내게 말했듯이 거칠게 다듬은 돌은 그 시련의 두 번째 겨울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 두 번째로 흉작이 있던 그해, 그제 위원회는 굶 주린 아일랜드인들에게 그런 길을 닦으라고 했지. 사람들이 죽은 곳, 그곳이 그 길의 끝. 지금도 그대로 끝난 길, 이 섬의 지도를 펼 때면 이토록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든 것은 없 다고, 이토록 납작하고도 둥글게 어우러진 것은 없다고, 이토록 평면에 곡선을 교묘하게 디 자인한 것은 없다고 말하지. 하지만 내 스스로 말하곤 한다네. 저 숲과 굶주림의 비명을 말 해 주는 선 그리고 향기로운 소나무와 사이프러스를 말해 주는 선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성은 거기 없을 거라고. 이반 볼란드(지도과학은 한계가 뚜렷하다), 1994년 역사적 논쟁 대기근은 저자에 따라 민족주의적 분노의 원천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신비화해서는 안 될 역사적 문제로, 그리고 현대의 기아와 가난의 각성물로서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 다. 존 미첼은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150만 명의 남녀노소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평화로운 가운데 영국 정부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들은 풍요 속에서 굶주려 죽었다. 바로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풍요였다. 기근의 고통 속에서 스러져간 사람과 발진티푸스 열병으로 죽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아무 런 의미가 없다. 아일랜드에서 발진티푸스가 발병하는 것은 언제나 기근 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그것을 인위적인 기근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아일랜드인은 물 론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 해마다 풍부한 양을 생산해 내는 이 풍요롭고도 비옥한 섬을 황폐화시킨 기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국인들은 그 기근을 '신의 섭리'라며 오 로지 감자마름병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전역이 비슷한 흉작을 보였지만 아 일랜드에만 기근이 들었다. 영국이;s의 생각은 기만이고, 신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신이 감자 마름병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근을 만든 것은 영국인이었다. 지금은 아일랜드가 영국에 종속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어떤 외부적인 충격이 저 괴물 회사 대영제국을 무너뜨리는 날이 올 것이다. 이 회사는 사실상 파산한 회사이며, 거짓 신용으로 거래하고 있고, 다른 나라의 상품을 착복하고 큰길에서 강도짓을 서슴지 않는 등, 지구 곳곳 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그 혐오스런 운명은 아직 뒤 집히지 않았다. 이 글을 읽은 미국인이라면 앞으로는 아일랜드인이 대영제국에 퍼붓는 저주 를 들어도 절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증오와 혐오가 계속되는 한, 우리의 섬이 스코틀랜 드처럼 적국의 흡족한 한 주로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한, 아일랜드는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민족의 뜨거운 염원은 저 영국인의 제국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존 미첼(최후의 아일랜드 정복9글세), 1860년 (대기근: 아일랜드 역사 연구, 1845~1852년) 서문에서 인용된 다음 글을 통해 수정주의자 의 반응을 살펴본다. 1845~1852년의 기근 동안 아일랜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알아내기는 어렵 다. 중요한 점은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대기근은 아일랜드 역사에서 엄청난 고통이 찾아든 처음도 마지막 시대도 아니었다. 대기근은 고통이 계속되어 더욱 심한 참상 을 낳은 기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기근은 그 오랜 기간과 참혹함으로 대중의 기 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대기근을 많은 재앙의 원인, 압제자의 착취의 상징으 로 바라보는 시가도 있다. 그것이 아일랜드인의 민족적 사고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 점만으로도 대기근은 충분히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상징 이상이었 다. 1848년 청년 아일랜드 당원인 찰스 가번더피는 분노와 굴욕에 젖어 외쳤다. 대기근이 일 반 대중에게 가해진 무서운 살인'이라고 그 선언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 닿았고 존 미첼의 저작들은 우리를 가히 압도하고 있다. 입찰소작인 계급의 파멸을 가져왔고, 1847년 300만 명 을 자선에 의지하게 만들었던 이 기근은 아일랜드 사회의 기초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한 세 기가 지난 지금, 미첼과 가번 더피 같은 사람들이 기근에 대해서 과장된 글을 썼다고, 그리 고 존 미첼의 전기작가인 P.A 실라드가 클래런든경 같은 존경할 만한 휘그당 각료를 적의 곡식을 모조리 파괴한 마운트조이 경과 비교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하기는 쉽다. 물론 미 첼과 가번 더피, 그리고 실라드가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아일랜드인의 사고에 미친 영향력과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기근 기간에 대한 현존 기록들 가운데 서로 관련성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구분되는 두 가지 사고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민족주의에 더욱 상기된 작자일수록 당시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가차없이 영국 정부와 그 대리인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운 다는 점이다. 가번 더피와 후일의 아서 그리피트가 이에 속하는데, 그들은 영국정부가 '기근 과 이민을 통해 켈트 인구를 줄일 목적을 감자흉작이라는 핑계'를 이용했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 접근과 대조되는 부류로, 핀턴 랄로의 후계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대기 근에 아일랜드를 희생시키려는 의도적인 음모가 있다는 생각을 꺼린다. 그들이 보기에 이 재앙은 좀더 근본적인 그러나 덜 교묘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책임은 정부가 아니라 사회체제였다. 제임스 코놀리는 아일랜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 회와 그 법률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논리상 그 무서운 시기의 영국 정치가들의 행동에서 잘못을 찾아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놀리의 전제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대 기근은 하나의 사회현상이요, 19세기 국가의 시련기로서 현대 역사가들이 면밀히 연구할 만 한 대상이다. 정치해설자, 민요가수 모두가 이 대기근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더 말할 것 이 있을까? 대기근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19세기 후반 그리고 그 이후의 아일랜드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가 온갖 형태의 전통적 주장들을 실증할 수 없다면, 좀더 냉정한 관점이 나타난다. 이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막론하고 모 든 세대, 모든 인간을 따라 다니는 문제들을 인식하기 위한 좀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다. 시간의 포로인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관습에 준거하여 행동한다고 할 때, 인간을 다 시는 번복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 점은 대기근 당시의 사람들에게 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한계와 소심함이 대기근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높은 직책의 사람들에게 일부러 과중한 악을 씌우는 것은 별 근거가 없다. 진정 큰 죄악은, 그런 기근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또 감자흉작이 낳은 고통과 어려움을 묵인해 버린 그런 사 회질서 전체에 있었다. (대기근: 아일랜드 역사 연구, 1845~1852년), 1956년 수정주의가 다시 수정되었다. 코르막 오그라디의 견해를 들어본다. 대기근에 관한 사료 편찬은 흥미로운 일이다. 19세기 아일랜드 역사의 핵심 사건인 이 재 앙에 관해 정작 아일랜드에서는 신중한 학문적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의미 있는 점은, '정치해설자, 민요가구, 그리고 이름 없는 전승이야기 작가들'이 남겨놓은 설명의 정체를 밝히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보다 수준이 낮은 학자들의 정 통이론 역시 이와 마찬가지 문제를 지닌다. 아일랜드해 건너편에서 온 범죄자와 악당들의 탓으로 돌리는 전통주의자들이 평가는 가차없이 무시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반민중주의 적 관점과 비교해 보자면 현재의 정통 학설은 더더욱 신뢰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대기근은 또 하나의 인종학살이 아니라, 과거 존 미첼과 오도노반 로사 같은 '감성적'민족주의 선전가 들에 의해서 그 피해지역이나 사망률이 모두 과장되어 왔으며, 또한 죽음이 대개 불가피했 다거나 또는 경제불황의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 과거에 대한 위험한 신화를 깨뜨리는 것이 역사가의 사회적 책무이다. 대중에게 널리퍼 진 역사가 신화의 실재의 이상한 혼합물인 아일랜드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대기근을 '영국 의 음로'라고 보는 단순하면서도 신경질적인 견해를 가진 주민들을 정화하자면 냉정한 수 정주의라는 처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중에게 널리 퍼진 역사와 민족주의적 저항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16년 봉기에 관해서 글을 쓴 것은 IRA(아일랜드 공화국 군)의지도자 어니 오말리였다. "그날 저녁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어떤 노래 한 구절을 듣는 순간 내 머리는 경제사의 한 페이지로 비약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역사적 고통에 대한 민족주의적 오해를 바로잡는 일이 수정주의적 아일랜드 경제사의 통일된 주제였다. 그러나 대기근에 관해서는 아일랜드 역사들은 '관대함과 절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앞으 로 다루어야 할 논쟁거리임이 분명하다. 비교를 위해 다른 기근현상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아일랜드인이 덜 감정적이고 난폭한 행위에 덜 휩쓸렸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일반 기근시에서는 핵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제들이 아일랜드에서는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관대함과 절제'의 좋은 예가 저 유명한 논문모음집(대기근 : 아일랜드 역사 연구)이다. 이 책은 1956년 더블린의 역사학자 더들리 에드워즈와 더스먼드 윌리엄스가 편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설화식 접근법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대신 역사에 깊이 박힌 대기근의 뿌리를강 조했다.' 대기근에 대처하는 데 들인 지출의 규모'를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각료와 정치가들의 태고에 대한 변명이 그 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대기근에 대한 학문적 소개로 볼 때 에드워즈와 윌리엄스의 책은 통일성과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에 대적하는 것은 무엇일까? 에드워즈와 윌리엄스는 총체적인 역사서술을 시도하지 않 고 그 일을 '대중적인' 역사가 세실 우드햄스미스에게 넘겼고, 그가 몇 년 후 그 공백을 메 웠다. 우드헴스미스의 베스트셀러는 세부사항에서 많은 실수가 있고, 경제적 맥락에 대한 이 해가 부족하며, 동기와 사건에 대하 해석이 때로 거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책은 F.S.L. 리온스가 준 냉담하고도 뒤늦은 대접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리온스는)<대 기아>를 순진한 민중주의와 겸손의 결핍을 들어 비웃었다. 그는 우드햄스미스가 당대의 현 실과 전혀 상관없이 정부를 비판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 비극에 대한 묘사는 매우 뛰어나지만 '그 이유'를 찾자면 다른 책을 봐야 한다는 비판이었다. 또 그는 학생들에게 우 드햄스미스를 비난하는 장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63년 칼리지 대학교의 역사 강좌를 들은 학생등은 '<대기아>는 엄청난 소설이다'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써야 했다. 정통 학설은 로버트 키의 생생하고도 '감성적인' 텔레비젼 사극이 우드햄스미스보다 더한 운명 에 처한 다음에야 변한다. 당시 더블린의 주요학자 한 사람은 그 사극을 두고 테러리즘을 지원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왜 아일랜드 역사가들은 기근연구를 멀리했을까? 왜 외부의 역사가들이 인색한 평가를 내렸을까? 바로 정치가 그 대답 중 하나이다. 아일랜드 역사가들은 대체적으로 보수 적이다. 아일랜드에는 E. P 톰슨스나 유진 제노비제가 없다. 그러나 '감성적인' 평가들이 주 장하는 웅변적인 도전 또한 방해물이다. 균형을 잡고자 하는 시도는 변명으로 해석될 위험 을 감수해야 한다. 대기근은 민감한 문제를 남겼다. 아마도 그것이 경제사와 사회사가 쓰여 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현재의 정통 학설은 대기근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세 가지 요인이 낳은 비극적 결과물로 본다. 예견할 수 없었던 생태학적 우연, 그리고 희생자를 구원할 태세를 갖추지 않은 이데올로기, 마지막으로 대중의 빈곤이다. 불운의 역할 또는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감자흉작에 대처하는 아일랜드의 능력이 몇 세기 후보다 훨씬 더 컸어 야 했다. 그리고 생명을 위해서라면 더 많은 돈을 쓰겠다는 정치적 의지와 압력 또한 마찬 가지이다. 만약 1840년대의 사건에 대한 후기 수정주의적 해석이 전통적인 이론에 더욱 접 근해 간다면, 그것은 또한 앞에서 언급한 민중주의적 해석과도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분명 한 것은 식량의 이용 가능성이라는 문제였다. 하나의 인종으로서 아일랜드인의 절멸을 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르막 오 그라다(대기근 전후의 아일랜드: 경제사적 관점으로, 1800-1925년), 1988년 대기근과 오늘의 아일랜드, 그리고 메리 로빈슨 대령의 그로스아일 방문을 알아본다. 추억과 회한의 이 자리에 선 우리는 1840년대의 엄청난 재앙으로 이곳에 왔다가 무력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그 당시의 엄청난 무력함을 보면서, 우리는 조정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과거에 대해 우리의 태도 역시 무기력하다고 믿어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전개되어온 저 고통 으로 가득 찬 광대한 현장에서 방관자가 되느냐 참여하느냐를 놓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 방관자가 되겠다면 우리는 역사의 필연적인 희생자와 필연적인 생존자가 있다는 견 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바로 그 견해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비도덕적인 거 리두기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만약 참여자가 된다면 필연적인 희생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 리는 우리 자신을 주변의 고통과 거리를 두려는 유혹을 거부합니다. 그것이 역사책에서 나 오든 지금의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든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시계를 돌려놓을 수 없어 도, 이곳에서의 죽음을 돌일 킬 수 없어도, 최소한 그들의 고통을 받다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열정과 헌신에 도전하는 오늘날의 고통과 연결시킴으로써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진실을 정당하게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방관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통계와 기억의 감옥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 감옥 속에서 그들은 감히 탈출하지 못하고 우 리의 양심과 열정에 의문을 던지기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여기서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을 기억할 때 나는 특별히 아일랜드적인 점은 단지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의 국적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단순히 1847년 이곳에서 최초로 죽은 네 살바기 엘렌 케인을 기억할 것이 아 니라, 기근과 퇴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어린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엘 렌이라는 이름은, 지금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저 르완다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들 그리 고 소말리아의 난민 캠프에서 보고 온 어린이등에 대해서,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생각하라 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아일랜드를 황폐화시킨 기근이 있은 지 150주년이 됩니다. 당시 그 누구도 강력 한 동질성과 확실한 문화를 가진 한 근대적 유럽 국가의 탄생을 예상하지 못했고, 바라지도 못했습니다. 이 문화 속에서 그로스아일 같은 곳에서 맞은 쓸쓸한 죽음이 기억되고 기려진 다는 사실이 제게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물결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은 용 감하고 단호한 행동에 대한 사랑과 존경만큼 운명의 손에 당한 그들의 굴욕에도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명의 맑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을 다 본 사람으로서 우리는 한때 우 리가 그랬듯이 기근과 질병에 고통받고 잇는 사람들에 대한 열정 어린 행도에 앞장설 뿐만 아니라 그런 고통에 대한 당대의 태도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엄청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갇혔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편안 함과 확대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거실 속에 있는 죽음의 존재, 공포의 영상은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감과 운명론을 받아들이 게 만듭니다. 우리가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과 기근 당시 죽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량과 물 같은 일용품의 공급과 배급에 관해서 단호 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로스아일은 단지, 과거를 가리고 여기 묻힌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이야말로 현대 세계의 무서운 현실들과 우리에게 필연적인 희생자라는 관념을 거부하라 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거부의 결과와 용감히 맞서라고 요구하고 있 습니다.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로빈슨의 연설 그로스아일, 캐나다, 1994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