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제국-그 영광과 몰락- 지은이: 세르주 그뤼진스키/ 윤학로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이 진 제 1장 툴라 문명의 신기루 기원전부터 중앙 멕시코 고원지대 알티플라노(altiplano)에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들이 태 동하여 개화했다가 소멸했다. 그 화려한 문명들은 스케일 정복 시대까지 면면히 전승되었다. 그 문명과 관계깊은 두 도시가 있다. 하나는 '신의 도시' 테우티우아칸으로, 로마제국과 비 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다른 하나는 몇 세기 후에 발달한 툴라로 멕시코 시티 북 서쪽 약 90km지점에 지금도 그 폐허가 남아 있다. 1000년경 툴라는 테오티우아칸의 유산 을 물려받고 아울러 북쪽 평원지대에서 밀려 내려온 유목민과 수렵민을 흡수했다. 툴라의 톨텍족은 문명을 물질적으로, 기술적으로 또한 지성적으로 정제한 주인공으로서 알티플라 노 주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톨텍족은 회화, 벽화, 조각의 창안자로, 나무껍질이 나 용설란 종이에 홈을 파 나타낸 상형문자의 스승으로, 장엄한 왕궁의 건축가로,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모자이크하여 방패와 장신구를 멋지게 장식하는 걸출한 장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톨텍족은 많은 신을 섬겼다. 그중에서 케트살코아틀(Quetzalcoatl)이라는 신이 있는데 같은 이름의 사제가 예식을 주관했으며 툴라를 지배했다. 톨텍족의 세계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착민과 유목민이 이웃하여 살았고, 야만족이 북쪽에서 파도처럼 밀려 들 어왔다. 톨텍족은 문명화된 도시국가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농사 짓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으 며, 부족들마다 독특한 조직, 전통, 제례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관개에 필요한 댐을 건설하는 전문 기술자들과 사람들의 생존방식의 리듬을 조절하는 제 례달력을 만드는 전문가들은 도시국가 안에 거주했다. 사제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우주와 신들이 영원하고, 비가 적당히 내리며, 옥수수가 잘 자라 수확이 풍부하기를 기원하는 의식 을 거행했다. 12세기 중반, 툴라 시대는 막을 내리고 톨텍족의 이주와 분산이 시작되었다. 톨텍 시대의 툴라와 다른 위대한 중심지의 지배력이 쇠퇴일로를 치닫다가 12세기 중엽에 와 해되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아마도 톨텍족은 북쪽에서 몰려드는 야만족과 더 이상 융화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변화하자 새로 이주한 야만족들과 톨텍족 사이의균 형이 파괴되어 톨텍족은 툴라를 떠나기 시작할 것 같다. 전설에 따르면, 다툼과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제-왕(priest-king)또는 케트살코아틀신 또는 양자 모두-이것은 전설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신봉자들과 함께 967년경에 툴라를 떠났다. 일부는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톨텍족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새 로운 도시국가들을 세웠다. 또 다른 부류는 푸에블라 계꼭 촐룰라로 이주하거나, 마야 문명 의 세력권인 유카탄 반도의 치첸이트사까지 옮아갔다. 멕시코 계곡에 도착한 사람들이 모두 톨텍 문화의 후예들은 아니었다. 나우아틀어나 오토 미어를 사용하는 민족적 기원이 다양한 유목민과 반유목민이 북쪽 대평원지대에서 이주해 와 톨텍족에 합류하거나 땅을 차지하고 눌러앉았다. 간혹 몇몇부족들이 연합하는 경우도 있 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찰코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17세기의 역사가 치말파인은 이 도 시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톨텍족의 유산은 다양한 부족을 인도하는 신인통치를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영원한 이상이며 유토피아의 모델인 툴라는 가장 고귀한 문화유산으로 남 아있다. 1200년경, 유목민족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수호신과 융합되었을 만큼 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이들 신인들은 백성이 계속 전진해 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만 드는 신적 에너지를 육체에 받아들였다. 정착할 땅을 찾아 떠도는 혼돈의 시기에, 먼 곳으로 부터 온 사람들의 역사는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선 오디세우스의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열에서 시작되었다. 각 부족들이 끊임없이 이동한 것은 중앙 멕시코 지역이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스페인이 그곳을 정복하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중앙 멕시코에는 작은 영지들이 10여 개 존속하고 있었는데 도시 사이의 거리는 기껏해야 수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13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유목민들이 세운 새로운 도시국가들은 톨텍의 고대문화를 흡수 했다. 뒤늦게 도착한 새로운 이주민들은 땅 한 뙈기 얻지 못하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도시 변두리의 황무지에 정착해야 했다. 2세기동안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톨텍족의 후손이라고 자 처하고 나서 도시국가 간에 경쟁관계가 조성되었다. 새로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른 도시국가 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동맹을 맺거나 적대관계를 유지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그 들은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주 싸웠다. 텍스코코 호수 남쪽에 자리잡은 쿨우아칸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쿨우아칸은 톨텍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인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쿨우아칸의 뒤를 이어 호수 서안에 자리잡은 테파넥족의 도시국가 아스카포트살코 가 그 정통을 이어받았다. 도시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톨텍의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 했다. 톨텍,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톨텍족은 오랫동안 기품과 권위, 정통성의 상징이었 다. 이미 인구밀도가 높고 오랜 역사를 이어받은 멕시코 무대에 등장한 새로운 부족: 아즈텍, 멕시틴 또는 멕시카 13세기 중엽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현통을 가진 새로운 부족이 멕시코 계곡으로 들어왔다. 고대 톨텍족과 마찬가지로 이들 인디오들은 선조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정착하여 종족을 번식해 나갔다. 역사에 따르면, 그 부족은 다른 부족들과 달리 전설적인 치코모스톡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인디오들에게 치코모스톡은 드넓게 펼쳐진 북쪽 대평원과 그들이 태어난 모태를 의미하는 상징이며, 또한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해 온 여러 부족들의 신비에 싸인 출발지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부족의 경우에는 섬에 세워졌다는 수수께끼의 도시국가 아스틀란을 떠나면서부 터 시작되었다. 아스틀란은 이들이 후일 테노치티틀란(멕시코 시티)를 건설할 때 원형으로 삼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부족이 본래부터 아스텍족이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추정한 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톨텍족이 그들의 세력권안에 놓여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 스틀란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아스텍족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어쨌든 이주하는 동 안에 그들은 멕시틴이라는 이름과 이어 멕시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후 18세기에 아스텍이라는 이름이 다시 사용되었는데, 아스텍은 현재에는 삼국동맹 시기에 멕시코 계곡 에 살았던 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쟁과 태양의 신, 우이트실로포츠틀 리가 멕시카족의 수호신이 되었다. 멕시카족은 사자 네 명의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하는 신, 우이트실로포츠틀리의 인도를 받 으며 북쪽의 대평원지대를 통과하는 대장정에 올랐다. 멕시코의 역사가 에르난도 데 알바라 도 테소소목에 따르면, 반 문명화된 그들은 간간이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주로 사냥을 해 주식을 해결했다고 한다. 멕시카족은 나우아틀어를 사용했다. 이주도중에 그들은 분열과 불 화를 겪었고, 새로운 무리들이 그들에 합류했는가 하면 어떤 무리들은 분파되어 나갔다. 몇 가지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당시의 혼란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우이트실로포츠틀리가 멕시 카족의 최고 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다. 혼란은 대규모 살상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대규모 희생 제식으로 이어졌다. 멕시코 계곡에 도착한 멕시카족은 그곳에 영구히 정주하려고 했지만 왕 의 혈통을 받은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호수 근처 차풀테펙에 잠시 머물던 그들 은 아스카포트살코(오토미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나우아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왕조)사람들 이 적의를 보이자, 1299년경 호수 남쪽, 쿨우아칸의 세력권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쿨우아 칸에서 환대받은 그들은 티사판에 거주지를 분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쿨우아칸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따. 티사판에 창궐하던 독사들이 멕시카족을 남김없이 물어 죽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멕시카족은 뱀을 잡아 구워 먹었던 것이다. 몇 년 간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멕시카족은 톨텍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러나 1323년에 또다시 쫓겨난 그들은 호수의 늪지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마침내 그들의 기나긴 방랑에 종지부를 찍을 작은 섬에 도착했다. 멕시카족은 아나우악 고원에 지금의 멕 시코 시티의 터전인 테노치티틀란을 세웠다. 1325년에 멕시카족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징조 를 발견했다. 선인장에서 홰를 치고 있던 독수리가 그들의 정착지로 테노치티틀란을 가리켰 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섬에 틀라텔롤코를 건설했 다. 당시에는 사냥꾼과 어부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부족과 다른 이주민들을 구별지을 수 있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정착한 좁은 영토는 계곡을 굽어보는 거대한 영토들의 경계선 에 문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30년 동안 멕시카족은 자급자족하며 두 개의 촌락을 건설했다. 그들은 인공섬 치남파스를 건설하고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땅이 척박해서 경작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 나, 꾸준히 관개시설을 확충하여 수확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석재나 목재 따위 원 자재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립에서 벗어나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멕시카족 은 주변 부락의 군주인 아카마피츠틀리를 족장으로 받아들였다. 아카마피츠틀리는 툴라의 사제-신, 케트살코아틀의 후손으로 간주되었는데, 호수에 살던 어부들의 눈에는 지난날에 이루었던 톨텍의 권위를 구현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카마피츠틀리는 1372년부 터 1391년까지 약 20년동안 멕시카족의 부락을 이끌었으며,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테 파넥족의 도시국가 아스카포트살코의 압력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멕시카의 다른 도시국가인 틀라텔롤코는 테파넥족의 군주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멕 시카족은 계곡의 세력 중심지를 연합하는 동맹에 점차로 편입되었다. 더 나아가 테노치티틀 란에 왕조가 세워지고 아카마피츠틀리의 많은 아들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시조가 되어 멕 시카 사회에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했다. 테파넥족이 테소소목이라 부른 아스카포트살코의 군주는 당시 그 지역의 강자였다. 이웃 부락을 분할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텍스코코를 제외한 나머지 여러 도시국가 들을 굴복시켜 톨텍이 붕괴된 이후 중앙 멕시코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테 소소목의 통치는 '결혼정책과 공물 납부 제도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착취'라는 형태를 띠 었다. 테소소목의 비호를 받으며 멕시카족은 점차로 특권을 누리는 부족이 되었고, 그의 동 의를 받아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부차적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던 멕시카 족은 그 기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역량을 서서히 비축해 나갔다. 텍스코코는 테파넥족의 아스카포트살코에 대항하여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경쟁자였다. 연대기 작가 알바 익크틀릴소 치틀이 남긴 기록을 보면 텍스코코는 톨텍 시대에 세워졌으며 15세기초엽까지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도시국가였다. 멕시코 계곡의 북동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유목민들 이 밀려 들어왔는데 그들 중 한 족장이 텍스코코를 수도로 정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 지로 이곳에서도 미개한 유목민들은 톨텍의 유산을 수용했다. 그들은 나우아틀어를 사용했 고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화려한 옷을 입었다. '아메리카의 아테네'라고 역사에 기술되어 있 는-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 전에 멕시코 시티의 영광에 가려졌다-도시국가 텍스코코는 점차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금은세공술, 보석세공술, 깃털 모자이크 등은 아스텍 세계에서 중 요하고 존경받는 능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고귀한 군주들마저도 틈이 나면 그런 작업에 열심이었다. 이런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톨텍'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그 기술의 창조는 고 대 툴라 문명과 케트살코아틀의 몫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테노치티틀란, 텍스코코, 타 쿠바는 1428년 영구 동맹, 이른바 삼각동맹을 체결했다. 15세기 초 텍스코코가 막강한 군사 력을 보유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테파넥족의 테소소목은 텍스코코가 멕시코 계곡을 지배 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1418년 텍스코코의 지도자 익스틀릴소치 틀은 도시국가를 포기했다. 이로써 텍스코코 영토의 상당 부분이 테파텍의 수중으로 넘어 갔으며, 멕시카족은 텍스코코를 감독하고 그들의 공물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 았다. 그러나 테소소목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막스틀라가 1426년에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데다 야만적인 방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여 테파넥 왕조는 급속히 몰 락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틈타 테노치티틀란과 텍스코코가 연합해 막스틀라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합법적 상속자 네사우알코요틀이 텍스코코의 지배력을 회복했다. 테파텍족의 아 스카포트살코는 114일 동안 계속된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1428년에 멸 망했다. 멕시카인, 텍스코코인, 타쿠바인이 체결한 삼각동맹이 테파넥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 한 것이다. 이 삼각동맹이라는 정치적 기본 구도는 '아스텍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제 2장 제국의 건축가 최고 권좌에 오르자마자 목테수마1세는 멕시코 계곡의 남동쪽, 만년설로 덮인 높은 화산 에 숨어사는 찰카족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쟁은 무시무시한 흉년으로 중단되었다. 1446 년 메뚜기떼가 엄습해 농토가 쑥대맡이 되었던 것이다. 1449년에는 홍수가 나 도시가 물에 잠겼고 1450년부터 1454년까지는 한파와 흉년이 계속되었다.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멕시코 계곡에는 암담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몇 년 동안 기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역사가 치말파 인에 따르면 허공을 맴도는 독수리떼와 계곡을 떠도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15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멕시 코 계곡을 뒤흔들어 놓은 끊이지 않은 재앙은 조직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층이 얼 마나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쉴새없이 닥치는 재앙에 혼비백산한 지도자들은 곤경 에 빠진 일반대중을 저버렸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권력 의 본질이 아니던가? 아스텍 사회는 밑동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다행히 1455년에는 단비가 내려 옥수수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러나 그해는 52년의 순환주 기가 끝나는 해였다. 그것은 모두가 정성을 들여 제식을 올려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만약 바로 그날에 불이 별의 언덕위에서 다시 불타 오르지 않는다면 세상은 저주를 받아 사라지 게 될 터였다. 아스텍인은 이 세상이 언젠가 소멸될 것이고 시간은 마침내 종말로 이어질 순환고리로 구 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세계의 운명은 이를테면 탄생할 때에 각인되었던 날짜, 즉 태양이 운 동을 시작하는 날인 '나우이 올린'이 결정하며 때가 되면 서쪽 끝에서 운명의 시간을 기다 리는 황혼의 괴물들, 트시트시미메가 떼를 지어 몰려와 사람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이다. 그러 나 1455년에도 사원의 화로에서는 불길이 타올랐다. 사람들은 사원의 화로에서는 불길이 타올랐다. 사람들은 1450년부터 1454년 사이에 재앙이 계속 일어난 것은 신의 노여움 때문 이라고 믿었다.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신에게 공양물로 바칠 포로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잡아들이려면 정기적인 전쟁이 불가피했다. 이처럼 전쟁은 적을 정복하는 도구이자 한편으로는 제물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전쟁은 신명나는 놀이판이자, 다음 전쟁 에 대비한 정규 군사훈련이며 신들을 살게 하고 세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 하는 제식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꽃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멕시코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더욱 세 련되게 체계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스텍인이 벌인 전쟁이 모두 꽃의 전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제식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갈등이 종종 전략적이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삼각동맹과 푸에블라 계곡 종족들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 간 의 적대관계는 스페인인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스페인인은 이러한 갈등상황을 적극 적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적대관계는 풍요로운 열대계곡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아스텍인의 야욕과 맞아 떨어졌다. 아스텍인이 팽창정책을 펼치자 멕시코 계곡의 굶주린 피난민들이 열대 계곡 쪽으 로 모여들었다. 멕시코만 지방에는 깃털과 보석, 면과 화려한 직물이 넘쳐흘렀다. 멕시코 계 곡의 귀족은 바로 이 풍부한 물건을 노렸던 것이다. 목테수마는 남동쪽으로 압박해 들어가 1458년에는 시장으로 유명한 도시국가 코익스틀라우아카를 포위했다. 삽화를 곁들인 사본과 금공예품으로 유명한 고대문명이 찬란하게 개화했던 땅, 믹스텍 지방의 심장부인 코익스틀 라우아카는 과테말라로 가는 통로였다. 목테수마의 군대는 이어 멕시코만 동쪽 지역을 침략하고 우악스텍족과 토토낙족에게 공물 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1466년 목테수마는 화산너머에 펼쳐있는 계곡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 다. 이번에도 상업적인 목적에서 남쪽과 남동쪽으로 진출하는 교통요지에 자리잡고 있는 테 페아카를 공격했다. 꽃의 전쟁이 아니라 이처럼 상업적인 목적으로 전쟁을 벌여 공물을 징 수한 것을 보면 삼각동맹의 군사원정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었 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텍스코코에서와 마찬가지로 테노치티틀란에서도 군주와 귀족들의 일상을 규정짓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정비되었다. 권력의 집중화가 진행됨에 따라 목테수마와 그의 형제 틀라카엘렐(tlacaelel)은 귀족계급이 누리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장신구나 의복의 종류, 사치스러움과 세련된 정도가 달랐다. 예를 들면 팔지, 화려한 깃털, 황금 머리장식, 녹 옥은 귀족의 전유물이었으며 면의류의 착용과 망토의 길이는 엄격하게 통제되어 위반할 때 에는 가혹한 형벌을 감수해야 했다. 의복착용의 규칙은 우아함이라는 원칙과도 관계가 있었 으나 무엇보다도 평민과 세습귀족을 차별화하기 위한 계급사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가 닫힌 사회였던 것만은 아니다. 뛰어난 공훈을 쌓은 전사들은 권세 와 아울러 조개 목걸이나 뼈 목걸이, 독수리 깃털 따위를 수여받았다. 평민은 흑요석 귀걸이 와 토끼가죽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 차별정책에는 아스텍 문명의 주요한 국면이 깃들어 있다. 그 규약은 사회계급을 구분짓는다는 차원을 넘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키고 각 개인에게 하나의 역할과 하나의 외관, 즉 명확한 이 미지를 부여하여 개인적인 특성과 편차를 제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목테수마 1세와 그의 텍스코코 동맹자인 네사우알코요틀이 통치하던 시기에 간통죄와 주 정꾼과 도둑을 처벌하는 법률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권력자들이 나쁜 선례를 남기 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듯이 귀족이 죄를 지으면 훨씬 가혹하게 처벌받도록 규정했다. 사법관의 공명정대함을 보장하는 법률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사항은 테노치티틀란과 텍스코코 지역의 주민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머나먼 계곡에 마련해 놓은 정복지의 안전보장 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아스텍인은 정복지에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았고 총독도 임명하지 않았다. 다만 공물을 거두어들이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제대로 운송되고 있 는지 감시하는 공물징수원만 남겼을 뿐이다. 또한 아스텍인은 정복지 기득권층의 권리와 그들의 고유한 제도와 전통을 존중했다. 아스 텍인의 군대는 정규군이 없이 '표범기사'와 '독수리 기병'으로 구성된 정예부대로 편성되 어 있었는데 이들이 점령군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아스텍인은 이따금 그들의 수호신 우이트실로포츠틀리를 믿으라고 점령지에 강요하기도 했지만 결코 점령지의 고유한 토착신앙을 금하지는 않았다. 개종이란 개념은 고대 멕시코인 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멕시코에 들어운 카톨릭은 원주민에게 개종을 강요하 여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테노치티틀란의 군대와 공물을 실어 나르는 행력은 수백 킬로미 터를 걷고 산과 절벽을 넘고 종종 풀과 나무가 울창한 숲을 지나고 황량하고 한파가 몰아치 는 고원지대를 통과해야만 대서양이나 태평양으로 향하는 열대지방의 경사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노새나 말 또는 수레를 이용할 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모든 물품을 등에 지 고 날라야 했기 때문에 여행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지방정권이 간혹 아스텍의 통치에서 벗어나려 한다거나 더 이상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압 제에 맞서 들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상황때문이었다. 그러나 반간은 야만적인 보복을 불러왔고 보통 반란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으며 그 결과 반란정권은 더 많은 공물 을 바치라는 압력을 받아야 했다. 삼각동맹의 위상은 군사력에 바탕을 둔 억압적 권력이면 서 한편으로는 교묘한 회유와 협상정책을 병행하는 좀더 유연성있는 권위로 나타났다. 아직 삼각동맹에 굴복하지 않은 지도자들은 테노치티틀란에서 거행된 인간을 제물로 바치 는 의식에 정기적으로 초대되었다. 호화로운 대접을 받으며 그들은 느긋하게 제물-다시말하 면 전투에서 포획된 친족들-이 테노치티틀란의 신에게 봉헌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거절은 곧 선전포고로 간주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삼각동맹은 멕시코 계곡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자발적 협력을 유도 해 내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병력을 징집한 대가로 아스텍인은 그들에게 전리품을 나무어 주었고, 더 멀리 떨어진 도시국가들에게도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특별한 대우를 베풀었 다. 그리고 국경수비를 담당하는 도시국가들에게는 그 대가로 공물 납부를 면제시켜 주었다. 따라서 이 제국은 거대한 거미줄과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거미줄의 중심에는 삼각 동맹이 있고 수천 개의 거점은 결혼동맹이나 원조관계, 종속관계나 강탈관계로 연결되어 있 었다. 제국의 거미줄 구조는 대단히 유연해서 효율적인 운송수단이나 알파벳 체계와 같은 신속한 의사 소통 수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권력중심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아스텍 정권은 중앙집권화 되어 있지도 않았고 독재 권력도 아니었다. 동맹의 일 원인 텍스코코는 테노치티틀란과 동일하게 전체 공물의 2/5를 받았다. 또한 텍스코코는 전 쟁에 동참하여 인근 도시들과 계곡의 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멕시코만에 위치한 도시들에서 공물을 징수했다. 더욱이 텍스코코는 걸출한 군주 네사우알코요틀이 이룩한 여 러 가지 위업 덕분에 문화면에서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네사우알코요틀 은 톨텍의 선조 케트살코아틀이 제정해 놓은 법률을 다시 부흥시킨 탁월한 입법자요, 건축 가요, 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활기에 넘쳐 꿈틀대는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신의 후손이며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며 그의 협력자인 목테수마가 도저히 쫓아올 수 없는 많은 장점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손인 알바익스틀릴소치틀이라는 역 사가는 그가 하늘과 땅을 창조한 최고신의 직관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신대륙에 존재했 던 인물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용감하며 가장 현명한 군주'라고 열광적으로 칭송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짐꾼의 기나긴 행렬이 등짐으로 나르는 공물은 아스텍의 수도로 집결되었는데 이는 고대 멕시코가 생산하고 소비하던 모든 재화를 한데 모아 놓은 것과 같았다. 해마다 징수하는 공물의 목록을 보면 수만 톤에 달하는 식량과 10만 벌이 넘는 면의류, 3만 꾸러 미 이상 되는 깃털, 그리고 상당량의 귀금속과 희귀한 동물이 들어 있었다. 출발에 앞서 공물징수원은 공물의 수효를 철저히 파악했는데 이러한 공물징수원의 모습은 여러 권의 사본에서 볼 수 있다. 공물로 거두어들인 재화의 용도는 다양했다. 노동과 종교의 식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 1년 내내 행사와 제식을 거행하는 사회에서 공물의 상당량은 축 제를 호사스럽게 치르는 데 사용되었다. 다른 일정 부분은 행정 조직을 유지하고 도시 주민 의 생계를 지원하며 전쟁비용으로 사용했다. 다른 재화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틀라텔롤코의 부유한 상인들 수중으로 넘어가는 공물도 있었다. 공물에 더하여 종속 도시국가들은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이들은 테노치티틀란의 대규 모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1465년 목테수마는 찰코를 정복하고 20년간의 적대관계에 종지 부를 찍었다. 이것은 목테수마가 치른 마지막 전쟁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468년 경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스텍 제국의 정력적인 건축가로 기억될 것이다. 제 3장 세계를 정복한 아스텍인 가장 심각한 위기가 1473년에 몰아 닥쳤다. 이웃한 도시국가, 멕시카의 상업중심지 톨라텔 롤코가 테노치티틀란에 대항하고 나선 것이다. 이트스코아틀과 목테수마가 정복전쟁에서 획 득한 전리품을 이용해 막강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톨라텔롤코가 점차 테노치티틀란의 보 호자 역할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이 남는다. 어쨌든 화를 자초했다고나 할까, 목테수마의 후계자인 악사야카틀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톨라텔롤코는 파괴되고 자치권마저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라텔롤코는 스페 인이 제국을 정복할 때까지 멕시코 전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상인들을 보호하는 역할 을 꾸준히 수행했다. 또한 톨라텔롤코에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다. 반세기가 흐른뒤 시장을 둘러본 스페인인은 감탄어린 눈으로 풍요롭고 활기에 넘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을 기 록했다. 금, 은, 보석, 터키옥, 노예, 카카오, 살쾡이가죽, 사슴가죽, 짐승의 고기, 담배, 목 초..... 악사야카틀은 서부와 북서부 지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군사력 행사는 실패로 끝났다. 미초아칸의 타라스카족은 전에 틀락스칼라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만 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악사야틀의 후계자, 티속도 선왕보다 나은 면모를 보여 주지 못 했다. 그는 멕시코 계곡의 한 족장이 건 마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1486년에 권좌에 오른 아우이트소틀은 반란지와 전쟁을 벌였다. 마침 목테수마 1세 때 시작된 대신전 의 마무리 공사에 동원할 인력을 사제들이 요구하고 있었는데, 아우이트소틀은 승리의 대가 로 얻은 포로들을 제공할 수 있었다. 대신전의 개관식은 화려한 축제와 더불어 대규모 학살극으로 꾸며졌다. 어떤 기록에는 나 흘동안 제물로 바친 희생자의 숫자가 8만 400명이라고 남아 있다. 그 기록의 수치는 다소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1487년에 수천 명의 남자와 또한 수천 명의 여자가 테노치티틀란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은 거의 확실하다. 희생제식에 바칠 포로의 긴 행렬이 동서남북 각지에서 제식이 거행되는 수도 심장부로 이어졌다. 텍스코코와 타쿠바의 지도자들에 둘러싸여 대신전의 정상에 우뚝 선 아우이트소틀이 첫 번째 희생자의 가슴을 갈라 제식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이 가슴을 절개하고 아직도 팔딱팔 딱 뛰는 심장을 꺼내는 데 지칠 즈음이면 10여명의 사제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끊임없이 끔 찍한 대학살을 이행했다. 그 제식은 굉장한 장관이었다. 꽃으로 장식된 신전에서는 노래와 춤이 쉴새없이 이어졌다. 제식 집행자들과 희생자들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 들은 화려한 장신구를 통해 신의 현존을 표현했던 것이다. 피가 벽과 피라미드의 계단을 타 고 흘러내렸다. 시체와 튀어나온 내장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 다. 역사가 알바익스틀릴소치틀은 스페인 정복 이후 100년이 지난 뒤 이렇게 썼다. "그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간도살이었다." 이 끔찍한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 지 설명이 필요하다. 아스텍인은 제물의 숫자를 급격히 늘렸고, 무엇엔가 쫓기듯 서둘러 대 규모 희생제식을 거행했다. 그 동기는 다양했다. 제일 주요한 동기는 신과 우주의 질서와 관계된 것이었다. 아스텍인이 섬기는 신들은 불 명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신들에게 음식을 바쳐 먹여 살려야 했고 우주를 재생시켜야 했으며 태양의 일상적인 운행을 도와야 했다. 그래야만 소멸될 운명에 처한 세 계의 종말을 피할 수 있었으며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킬 수 있었 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기적으로 비를 부르고 토지를 비옥하게 해야 했다. 또한 희생제식은 공포정치를 지속시키기 위한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정복지의 지도자 와 전사인 위험인물을 제거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고대 멕시코 사회는 ' 구경거리의 사회'였다. 그곳에서 권력은 복잡다단하게 발전된 관료체제를 통해 표현된다기 보다 패자의 냉혹한 위대성으로 거창한 볼거리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살육은 생 명력의 원천 '성수'의 원천, 아시 말해 피의 원천을 생성했다. 피는 우주의 운행에 필수불 가결한 요소였다. 피를 공급하려는 노력은 세심하게 계획된 대규모 제식을 통해 계속되었 다. 제식이 진행될 때 사제들과 희생자들은 신의 형상을 하고 등장했다. 사실 그들은 신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신들은 문자 그대로 제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몸 속으로 들어왔기 때 문이다. 신과 인간이 한몸에 결합됨으로써 얼이 빠져 제식을 지켜보고 있는 군중앞에 신적 권능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제식의 희생자는 더 이상 사살해야 하 는 적이 아니었다. 관념과 실재가 상호 교환 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살아 남기 위해서 심연 깊숙 한 곳에 놓여 있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후의 파멸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사회의 모 든 에너지와 모든 자원을 기울여 스스로 구경거리가 되고자 하는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공물을 바치는 종속부족과 이웃 도시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줄 목적으로 부와 재산을 과시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제식의 주요한 특징 중 하 나인 무절제한 소비는 부유한 상인들의 향연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486년에 거행된 아우이 트소틀 황제의 대관식을 기리는 대축제 기간에는 1년동안 거두어들인 공물이 몽땅 소비, 아 니 투자되었다. 삼각동맹의 지배를 강화하고 신에게 바치는 재물을 끊임없이 두 가지 필요 성 때문에 아우이트소틀은 확장정책을 채택하고 그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전보다 더욱 격 렬해진 원정의 첫 목표는 남부 열대지방이었다. 이례적으로 테노치티틀란과 텍스코코의 인디오 식민지를 그곳에 설치하여 귀족이 소비하 는 귀한 식료품인 카카오 농장을 개발하고 만만찮은 상대인 타라스카족 도시국가와 맞대고 있는 국경을 수비하도록 했다. 텍스코코의 현명한 지배자 네사우알피이는 이 사업을 후원했 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테노치티틀란이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꾸준한 확장정책을 펼친 끝에 아우이트소틀은 1491년과 1495년 사이에 태평양 연안지방을 점령했다. 목테수마 1세 치세에 시작된 오악사카 지방 정복전쟁에서 승리하여 멕시코 계곡 에 금, 양홍 염료, 염색 면직물 같은 공물이 풍부히 흘러 들어왔다. 좀더 남쪽에 위치한 테 우안테팩의 도시국가 사포텍은 아스텍인의 다음 표적이었다. 이 중요한 상업거점을 점령할 야욕을 불태우며 아스텍인은 최장거리 원정대를 파견했는데 이번 원정에서는 병참, 군사 부 대간의 공조체제 등 여러 분야에서 전례없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1500년 테우안테펙은 멕시코에서 1000km이상 떨어진 현재 과테말라 국경지대에 위치한 소코투스코에 대항하기 위해 아우이트소틀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번 원정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엄청나게 먼 보급선을 따라 병사들에게 보급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 원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타쿠바와 텍스코코의 지배자들이 이러저러한 핑계를 둘러대며 아우이트소틀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우이트소틀은 단독으로 군대를 진 두지휘하여 소코누스코 지방을 점령했다. 그러나 삼각동맹의 연합군이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푸에블라 계곡, 우엑소트신고, 틀락스 칼라의 영지를 방어하기 위해-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은 그쯤에서 중단해 야 했다. 각 통치자의 정복지 목록에 흔히 같은 도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써 몇몇 지방의 정복은 일시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구증가에 따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산물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그래서 대 규모 관개공사를 벌여 신선한 물을 호수 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이 야심찬 계획은 곧 수 포로 돌아갔다. 1500년에 홍수가 져서 도시의 집과 정원이 파괴되자 귀족들이 그곳을 버리 고 떠났던 것이다. 아우이트소틀은 어쩔 수 없이 동맹자 텍스코코에게 조언을 구했다. 네사 우알코요틀의 아들인 네사우알피이는 아우이트소틀에게 수로를 파괴하고 제식을 거행하여 신의 노여움을 풀어 주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전략가는 현자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 었다. 이윽고 물이 빠졌고 도시를 재건축할 일이 남았다. 계곡의 도시들에서 파견된 노동자들이 귀족의 집에 배분되었다. 귀족들은 노동자들을 감 독하여 우아하고 화려하게 겉칠한 궁전과 화려한 정원과 안마당을 건축하도록 독려했다. 운 하 양쪽 둑에는 버드나무와 포플러를 심고 제방도 든든하게 쌓았다. 이제 수도 테노치티틀 란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어 제국의 부와 위대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JT다. 약 20년 후에 코르테스의 군대가 경이로움에 휩싸여 발견한 것은 새롭게 단장한 도시였다. 지난번 홍수는 멕시카족이 장악하고 있던 삼각동맹 내부의 긴장을 전면으로 부각시켰다. 아우이트소틀은 관개사업을 반대했던 영주 한 명을 암살했는데 이 무자비한 살인은 멕시코 계곡 전체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한편 텍스코코의 지배자 네사우알피이는 그 재난으로 덕을 보았다. 그는 아우이트소틀이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주었다. 네사우 알피이가 워낙 현명하고 외교, 정치적으로 뛰 어난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에 텍스코코는 삼각동맹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그는 지식이 풍부했고 여러 면에서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태양의 아들(스 페인인)'의 도래를 예언했다고도 전해지며 어떤 자료에 따르면 신비한 동굴에 은거하며 영 원한 생명을 얻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는 네사우알피이가 개인적으로는 아주 불운한 삶을 살았음을 들려주고 있다. 그는 본부인을 처형해야 했고 행실이 나쁜 두 아들도 죽여야 했다. 그는 첩을 2000명이나 거느렸고 그들로부터 자식을 144명이나 얻었으며 첩 중에서 지식과 교양이 풍부한 툴라출신 여인을 특히 총애했다. 아스텍 세계에서 일부다처주의는 사실 귀족들의 특권이었는데 특히 왕자들이 첩을 많이 거느렸다. 영토확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삼각동맹의 정복 지 통치는 정복지역 족장들의 충성과 선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통치수단과 인력이 부 족했언 탓에 정복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푸에블라 계곡에 있는 틀락스칼라와 우엑 소트신고같은 거대한 영토가 차츰차츰 삼각동맹의 통제권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서부와 남서부에서는 타라스카족이 그들의 팽창을 지연시키고 때로는 사사건건 삼각동맹 의 활동을 방해했다. 마침내 외래 부족들 간의 동질성이 약화되자 반란의 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정복전쟁으 로 축적한 부는 오히려 악덕을 조장하고 있었다. 계곡이 번영을 이루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욕구수준이 점점 높아졌던 것이다. 제국의 권력이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삼각동 맹에 속한 연합국의 귀족에게 공물을 재분배했기 때문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칠줄 모르는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희 생을 치르더라도 끊임없이 더 먼 곳으로 더 위험한 곳으로 원정을 나가야 했던 것이다. 목테수마 2세는 아스텍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전조와 제식의 세심 한 관찰자인 그는 권력 숭배자인 동시에 절대적인 신앙인이었다. 목테수마 2세는 행정관리 모집제도를 급진적으로 수정했다. 삼촌 아우이트소틀이 임명한 관리들을 모두 제거하고 엄 선된 명문 가문 출신 젊은이들로 대체했다. 이로써 귀족 계급의 권력독점이 더욱 강화되는 한편 군주에 대한 예의 또한 엄격해졌다. 목테수마 2세 치세에 아스텍의 정치체제는 절대군주제로 변모했으며 특권계급은 더욱 세 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변화에 편승하여 군부세력과 성직자 세력은 대상에 대항 할 수 있었다. 그 상인들은 삼각동맹의 확장정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그 영향력을 날 로 키우고 있었다. 대외 정책을 살펴보면 목테수마2세는 미정복지를 복종시키고 통제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 았음을 알 수 있다. 선조의 정복 원정이나 보복성 전쟁은 삼각 동맹의 연맹도시들과 공물을 바치는 종속 도시국가들 사이에 틈새를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나라 전체에서 공물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목테수마 2세의 과업은 그들을 종속시킬 뿐만 아니라 흡수하는 일이었다. 목테수마 2세는 오악사카 지방의 요피족을 굴복시키고 믹스텍의 옛 영지인 투투테펙 공국 을 정복하기 위해 남쪽과 태평양쪽으로 군대를 파견했으며 메트스티틀란을 제압하려는 목적 으로 북쪽으로 진출했다. 이번 원정에 따른 결과는 다양했다. 투투테펙공국은 아스텍의 공격에 부분적으로 저항했 고 요피족은 무릎을 꿇었으며 메트스티트란은 몇몇 중요 거점을 잃었다. 그렇게 해서 멕시 코만 지역에 위치한 도시국가들도 삼각동맹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목테수마 2세는 오악사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 로 그는 여러 도시를 짓밟았고 도시의 전체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 나친 자치의욕을 보이는 요새를 파괴할 수 있었고 테노치티틀란으로 공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도시국가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화산 저편에 위치한 적을 소탕하기 위해 목 테수마는 ' 꽃의 전쟁'이라는 제의적이고 균형 잡힌 행동을 포기했다. 오래전부터 틀락스칼라와 우엑소트신고의 도시국가들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 은 무역을 통하거나 멕시코만의 열대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틀락스칼라에는 소금이 절대 부족했다. 그래서 토착민들은 소금의 대체식품을 개 발해야 했다. 카카오와 금, 그리고 깃털도 진귀했다. 목테수마 1세 때부터 우엑소트신고와 틀락스칼라 영지에 대한 원정이 체계적으로 진행되 었지만 삼각동맹이 그 전쟁에 온힘을 쏟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504년 목테수마 2세는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한 가지 문제를 내세우며 1508년부터 1513년 사이에 우엑소트 신고와 전쟁을 벌이고 이어 1515년에는 틀락스칼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스페인인이 도착할 무렵 그에게 돌아온 것은 쓰라린 패배였고 원정에 따른 소득도 변변치 못했다. 장거 리 원정에서 가공할 위력을 나타내던 아스텍의 전쟁기계도 틀락스칼라인의 저항앞에서는 무 용지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코르테스는 삼각동맹의 전쟁기계를 충분히 활용했다. 그것 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삼각동맹은 세력을 거의 2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에 떨치고 있었고 수백만명이 그 세력에 복속되어 있었다.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해 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사는 도시국가만도 약 12개에 이르렀고 테노치티틀란의 인구는 15 만명 어쩌면 3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이로운 도시를 목격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 도시를 베네치아 와 중세의 무용담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도시에 비교했다. 이것은 전혀 놀랄일이 아니다. 두말할 것없이 멕시카족이 테노치티틀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들이 과연 그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던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데다 패권을 잡았다 하더라 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푸에블라 계곡의 영지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고 1504~1516 년에야 멕시카인의 헤게모니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보면 권력을 잡은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목테수마 2세가 그때까지는 텍스코코에 속해있었던 찰코를 점 령한 것이 1504년이었고 텍스코코인에게 조카 카카마트신을 지도자로 선출하도록 강요한 것 은 1516년이었다. 이처럼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곳곳에 지방정권이 들어서 있었고 제국의 행 정조직은 이들을 축출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 지방정권들은 결혼 동맹을 통해 지방정권 상 호간에 또는 테노치티틀란과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제국의 번영에 기여한 대가로 공 물의 일부를 나누어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삼각동맹이 영구히 존속할 수 있느냐 하는 관건은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테노치티틀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10여 명의 군주들이 동맹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물론 그들이 테노치티틀란을 떠날 때에는 마차에 호사스런 선물이 가득 차곤 했다. 그러한 정치지리적 상황은 삼각동맹이 왜 붕괴되었는지 스페인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도시국가들이 왜 삼각동맹에게 등을 돌렸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쿠에틀락스틀란의 폭동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쿠에틀락스틀란에서는 공물 납부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아스텍의 공물징수원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자신의 지 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자치에 익숙한 토착사회의 지도층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tm 5 세의 보호를 수락하게 되었다. 보호가 내포하고 있는 급진적인 변동의 숨은 뜻은 전혀 헤아 리지 못하고서 말이다. 제 4장 두 세계의 충돌 멕시코의 인디오들은 순환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관에 따르면 신들 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신의 힘이 정기적으로 인간의 존재에 흔적을 남 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마다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힘들의 연관과 과거의 사건들은 신이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되풀이될 수 있다. 결국 그들의 미래는 예견 가능한 것이며 미래를 예견하는 일은 달력을 관리하는 사제들의 임무이자 특권이었다. 아스텍의 사제들은 자연현상과 환각과 꿈을 면밀히 해석하여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멕시 코 사람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생혔다. 불길한 전조를 나타내는 초인간적인 힘들이 신들 과의 관계 영역 밖으로 떠올라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 10년 동안 불길한 징후들이 수없이 발견되었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도착하기 10년 전에 빛나는 혜성 하나가 나타났다. 예언자들이 그 현상을 해석할 수 없다고 밝히자 목테수마 2세는 그들을 굶겨 죽였다. 투시력을 갖고 있던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피이는 제 국을 괴멸시킬 재앙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515년에 그가 죽었을 때 목테수마2세는 몹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또 다른 불길한 징조들이 아스텍 황제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대여신 토시의 성소에 불 이 났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데도 호수에는 거대한 풍랑이 일었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여 인들의 목소리가 죽음과 파괴를 암시했다. 게다가 거대한 바위가 입을 열더니 목테수마 2세 의 몰락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바위를 수도로 옮겨놓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넋이 빠질 만큼 당황한 황제는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는 낙원, 신칼코에 잠시 몸을 숨기겠 다는 지시를 내렸다.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 측근들이 반대해 무산되었다. 결국 그는 죽음을 맞아야 할 보통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몹시 당황한 목테수마 2세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고 마구 괴롭혀대는 신호와 전조의 뜻을 알기 위하여 모든 신하들에게 나타나는 꿈과 환 각에 대한 즉각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이러한 전조는 아직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주권에 도전하는 세력의 존재와 전제군주에게 학대받고 있는 백성의 항의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492년 서인도 제도에 상륙하여 히스파니올라와 쿠바에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중에는 베네 수엘라와 파나마 해안에도 상륙해 자리를 잡은 스페인인이 원주민의 눈에 전혀 띄지 않았을 리는 없다. 20년 전부터 유럽의 함대들은 섬과 대륙사이를 왕래하고 있었다. 1517년 스페인 원정대가 유카탄 반도와 캄페체 지역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이듬해 5월 두번째 원정대가 쿠바를 떠나 코수멜섬에 도착했고 이어서 멕시코만 해안선을 따라 이때 물 물교환과 전투가 있었고 암중모색이 이루어졌다. 처음 본 그들은 그야말로 이방인이었다. 인디오들은 그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유가 궁금했다. 스페인 배를 보고서 그들은 목텍수마에레 달려와 산이 멕시코만 연안으로 이동하 고 있다고 아뢰었다. 예언대로 케트살코아틀과 다른 신들이 돌아오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툴라는 깃털 달린 뱀, 즉 케트살코아틀이 떠날때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 사제-신 은 시간의 순환주기에 맞추어 그리고 아무리 역사가 새로운 질서에 따라 구축된다고 해도 멀리 동쪽에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톨텍족의 정복의 그림자가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이미지는 세력을 잃지 않고 있다가 서양이 아스텍 문명을 몰락시 키려고 하는 바로 그 때에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만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돌아와 권력 의 반환을 요구한다면 케트살코아틀로부터 물려받은 권력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몇 년 전부터 목테수마는 케트살코아틀이 인도하는 신들이 되돌아오는지 정찰하기 위해 해 안을 따라 망루를 세웠다. 그는 깃털 달린 뱀이 우이트실로포츠틀리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깃털 달린 뱀의 귀환을 예고하 는 백인들이 동쪽 바다로부터 밀려드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그들이 신이 보낸 밀사라고 한 다면 신에게 합당한 봉헌물을 그들에게 바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1519년 4월 베라크 루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박들이 정박했다는 기별이 왔다. 목테수마는 이방인들이 보급품을 보충하도록 내버려두고 척후조를 파견해 그들의 의향이 무엇인지 탐문했다. 이방 인에게 금은보화와 깃털, 게다가 인간제물을 헌납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스페인 병사들은 공물을 받고 혐오감을 느꼈지만 해안 가까운 곳에 정착했다. 목테수마는 생각을 바꾸어 가장 뛰어난 마술사들을 파견하여 침입자들에게 마술을 걸었다. 그것은 ' 신들'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었다. 황제는 사실 코르테스를 신으로 영접해야 할 것인지 아 니면 사악한 적으로 규정해야 할지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타협하는 자세로 나가 호의를 베풀어야 할까? 아니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스페인 병사들의 계획을 와해시켜야 할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종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체념했는지도 모른다. 물러서는 듯 하다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공격적인 자세로 나오곤 하던 변덕스러움은 그의 정신상태 를 어느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체념은 스페인 병사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황제로 하 여금 서서히 권력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스페인 병사들은 강건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파견한 마술사의 사악한 주문에 걸려들지 않았따. 병사들은 해안지역을 짓 밟고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그들은 만사를 끝장내기로 결심한 듯한 기세였다. 그들은 고원지대에 도착하여 틀락스칼라가 지배하는 영토로 들어갔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그들을 목테수마의 새로운 동맹군이라고 믿고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자 스페인병사들은 무 자비한 공격을 퍼부었고 틀락스칼라 족은 이방인을 지원해 삼각동맹에 대항하기로 결정했 다. 코르테스는 아스텍인에 대항하는 이들 세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 단하고 동맹을 체결했다. 진군을 계속한 스페인 병사들은 촐롤라에 도착했다. 촐룰라는 삼 각동맹의 연맹국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토착민들은 매복작전을 준비했다고 의심을 받은 그 지역 귀족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스페인 병사들은 이어 찰코 지방을 접수했다. 병사들은 찰카족에게 굉장한 선물을 받았으며 목테수마 1세이래 자신들을 지배해 오던 아스 텍인을 공격할 때 협조하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다. 테노치티틀란의 관문 코요아칸 지역에서 는 테파넥족이 코르테스 일행을 환영했다. 그들도 코르테스의 연합군이 되겠다며 충성을 바 쳤다. 제국의 균열지대 찰코, 테파넥, 틀락스칼라는 모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스페인 인은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아스텍인의 약점이 노출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간파했다. 아 스텍 병사들의 무기는 보잘것없었고 목테수마는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으며 정복지 주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있었다. 코르테스가 인디오 동맹을 형성해 삼각동맹을 공략하는 데 이용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베라크루스에 신대륙 최초 의 스페인 도시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선출된 관리들 - 사실상 스페인 병사들 - 로부터 정 복과 식민지화에 필요한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모두 위임받았다. 물론 이러한 권능의 집 행에는 스페인 국왕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대원들이 도주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선박에 구멍을 내 침몰 시켰다. 이제 남은 일 은 적의 영토 안에 정착하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갈 피를 잡지 못한 채 목테수마는 텍스코코와 타쿠바의 군주들과 회합을 갖고 스페인인을 성대 하게 맞아들일 것을 의논했다. 모든 귀족들과 군주들이 스페인 병사들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속속 몰려들었다. 행군 도중 기증받은 선물 꾸러미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다리를 휘 청거리는 원주민 일꾼들을 앞세우고 스페인 병사들이 등장했다. 두 사회 완전히 다른 두 문 화의 만남은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했음이 분명하다. '우이트실로포츠틀리의 현현'인 목테수마가 호사스런 가마를 타고 고관대작들과 신들에 게 바치는 봉헌물을 둘러멘 수많은 노예들에 둘러싸여 코르테스 앞으로 나아갔다. 아스텍인과 스페인 병사들은 곧 얼굴을 마주 했다. 황제는 코르테스의 목에 금과 보석으 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 주며 화려한 깃털 화환을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스페인 병사들은근 처에 이쓴ㄴ 사원으로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텍스코코와 타쿠바 군주들의 영접을 받았다. 귀족들과 영주들은 우이트실로포츠틀리를 숭배하듯 코르테스를 떠받들었다. 목테수마는 ' 아버지'인 케트살코아틀에게서 물려받은 권력을 이제는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코르테스는 세계의 넓은 부분을 통치하는 위대한 군주와 유일신을 대표하여 이곳에 왔노라 고 설명했다. 이 만남은 스페인인과 아스텍인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행렬은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서는 소라고동과 사냥나팔 소리 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제들이 성대한 환영행사를 베풀어 주었다. 코르테스와 병하들은 악사야카틀 궁전에 여장을 풀었다. 한편 스페인 병사들에게 체포된 황제와 영주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아직은 상황이 아스텍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 인인 가운데 일부가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병력을 보충한 스 페인측은 우이트실로포츠틀리 축제 때 거행되는 무도 의식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행사는 아스텍 귀족사회의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좋 은 기회였다. 결국 그때 약 1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뒤이어 군주들도 제거되었 다. 목테수마는 포로가 되었는데 후에 자기 백성의 손에 치명상을 입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그를 처형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목테수마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의혹 이 남아있다.)텍스코코의 군주 카카마트신과 틀라텔롤코의 통치자는 스페인 병사들에게 목 이 졸려 죽음을 당했다. 학살을 모면한 아스텍의 귀족들은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침입자 들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목테수마에 이어 쿠이틀라우악이 잠깐 아스텍 세력 을 영도한 후에 젊은 쿠아우테목이 작전권을 이양받았다. 아스텍인은 침략자를 몰살하기 위 해 그들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포위공격했다. 1520년 6월 30일 다행인지 달빛 한 조각 없는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린데다 비마저 억수같 이 퍼부었다. 아스텍인은 적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되었다고 믿었다. 동이 틀 무렵 막대한 피 해상황을 보고받은 코르테스는 땅을 치며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날 밤은 역사는 '슬픈 밤 '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툼바에서 아스텍 군대의 총사령관을 손수 처형하고 그곳에서 틀락스칼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그곳에서 그는 원주 민 세계를 분열시키고 있는 내분을 이용하여 아스텍 수도에 대한 총공격을 준비했다. 쿠아 우테목은 스페인 병사에 맞서 싸울 영주들을 규합하는 데 실패한 반면 코르테스는 텍스코 코와 찰코, 테파넥-테노치티틀란에게 정복당했거나 굴욕을 받았던 도시들-을 스페인 진영에 끌어들였다. 삼각동맹의 와해는 도시국가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졌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계산착오가 낳은 산물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적들, 특히 틀락스칼라인은 스페인 병사들이 그들을 도와 아스텍인을 제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침략자의 다음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스페인인의 능력과 야망을 너무나 얕잡 아 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코르테스는 세 달 동안 수도를 포위했다. 그는 원주민 수천 명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호수의 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쌍돛배 범선을 건조해 함대를 구 성했다. 계속되는 공격, 굶주림, 그리고 스페인인이 몰고 온 전염병 앞에 아스텍인의 격렬한 저항은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도는 마침내 1521년 8월 13일에 함락되었다. 알바 익스틀릴소치틀에 따르면 "거의 모든 귀족들이 처형되었고 아주 어린아이들만이 살아 남았다."고 하며 포로로 잡힌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은 얼마간 목숨을 부지했으나 결국 반역음모에 가담한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 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몰락했다. 코르테스는 수도를 재건하고 이웃지역을 계속 정복해 나갈 계획을 세웠다. 1년 뒤인 1522년 그는 신스페인의 통치자이자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대양 저 너머에서 유럽의 일부인 스페인을 다스리는 미지의 통치자 카를로스 5세의 간접적인 권 위가 삼각동맹의 권위를 대체했다. 주도권을 두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변덕스러 운 동맹관계는 이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병사들의 무기와 전술과 에너지는 의심 할 바 없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승리는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부 족들의 연합이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5장 투쟁에서 협력으로 코르테스는 스페인왕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인디오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인간희생제식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으며 토착민의 신전에 새로운 신 인 성모 마리아와 예수와 성인의 그림을 걸도록 명령했다. 또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인디오 들이 떠받들던 신들의 조상을 우상이라며 파괴해 버렸는데, 정복자들의 폭력과 종교적 열정 에 인디오들은 겁먹지 않을 수 없었다. 코르테스는 물욕과 권력욕에 고무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보급이라는 사명에 자극받았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사업을 정당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정신에서 보자면 그것만이 그의 사업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25년부터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강한 믿음으로 무장한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도착하면 서 아스텍의 성직자들은 신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그후 그들의 제식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스페인 병사들은 사원을 약탈하고 아스텍 성직자들을 학살했으며 피라미드를 불태우고 조상 을 파괴하고 상형문자로 기록된 사본들을 불살랐다. 우상파괴라는 폭력이 희생제식이라는 폭력을 대체한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럽의 수도사들은 일부 엘리트 세력을 포섭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겉보기에는 화려했지만 -당대의 편년사가들이 집계한 세례자의 수가 수만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입증해 주는 것과 같이 -사실은 피상적 인 것이었다. 1539~1540년대 혼돈스러웠던 시대에 수도사들은 허울뿐이기는 하지만 질서를 구축해 놓았 다. 교회와 수도원주변에서 자유재량권을 가진 그들은 삶을 재조직할 수 있었다. 이제 새로 운 의식이 금지된 축제를 대신했고 새로운 권력이 정복자에게 타도된 권력을 대신해 들어섰 다. 수도사들은 스페인 병사들과 토착민 협력자들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다. 상황이 이처럼 전개되자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으며 자신들의 합법성이 의문시 되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던 우상숭배자들은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 다. '반스페인당'은 새로운 체제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질서 다시 말해 기독교 가 가져온 '혁명'을 거부했다.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는 귀족계급을 떠받쳐 주던 원칙들 대부 분을 부정함으로써 과거와 단절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아스텍의 선조인 고귀한 톨텍족을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불에서 불 타 버려야 할 우상숭배자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귀족계급이 옛 지식을 습 득하는 학교를 패쇄시켰으며 인간 희생제식과 희생자들의 인육을 먹는 행위(제의적인 식인 풍습)을 금지했고 일부다처제를 폐지시켰다. 환각제가 포함된 식물을 복용하는 일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데 금지대상이 된 이러한 행위와 특권은 권력층과 평민을 구별하는 기준 이었으며 권력층이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였던 것이다. 개종은 특히 가족의 유대를 위태롭게 했다. 일부일처제가 강요됨에 따라 수천 명에 이른 소실들과 그 자식들-그후 그들은 미래도 이름도 없는 사생아가 되었다.-이 거리로 나앉아야 했고 선교사들에게 설득되어 기독교로 개종한 귀족계급의 자제들은 정복자에게 반항하는 자 신의 부모들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이용되었다. 자연층의 저항을 잘 알고 있는 선교사들은 학교에서 교리교육과 읽기 쓰기 교육을 통해 그들의 자녀들을 포섭하는 방편을 취했던 것이 다.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 개종한 아이들은 그들의 행동책이자 밀사가 되었다. 기독교가 아스텍 귀족계급에게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 교리가 신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한편 권력자들에게 영적 책임과 백성의 복지를 책임지게 한 것이었다. 자신들과 평민들은 육체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확연하게 구별된다고 믿고 있던 귀족계급이 이런 교리 를 수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기독교화가 고유한 가치체계를 전복시킬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우상숭배자들은 스페인 침략자에 맞서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인이 구축한 새 질서를 막아 보려던 시도는 조직력의 부족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저항세력은 지하로 잠적해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 지만 결국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권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용을 과시하던 시대에 어떻게 비밀결사가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즉결처분을 통해 또는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희생되어 반대자들은 점차 스러져 갔다. 텍스코코에 머물며 비밀결사의 대변자 노릇을 하던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잇는 사실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539년에 화형당했다. 아예 체념했거나 능력이 없거나 기 회주의적인 귀족들은 정복자에게 부역하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멕시코의 인간사와 지형에 관련한 지식이나 정보를 정복자에게 제공하는 대가로 권력의 핵심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거대한 영토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고 자원분포를 파악하여 자원을 활용하려면 토착귀족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어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스페인인이 마주친 주요 난제 중 하나는 언어의 장벽이었다. 나우아틀어말고도 신스페인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100가지도 넘었다. 선교사들이 귀족계급의 선례가 나머지 백성들 에게 모범이 되지 않을까 하여 우선 귀족계급을 기독교화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실 제로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전략에 가장 잘 호응했언 계층은 귀족들이었다. 처음 몇 해 동 안 정복자들에게 혐력하여 얻은 열매는 달콤했다. 세례를 받고 부역을 시작했던 틀락스칼라 영주들은 16세기 말까지 상대적인 자치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텍스코코에서도 지배계급 이 스페인의 앞잡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제국의 멸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프란체 스코회 수도사들이 선교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귀족들의 야망은 하찮은 지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복자와 원주민을 잇는 중개자 역할 을 더맡은 대가문은 점차로 부유한 지역 유지라는 위치에 자족하는 신세가 되었다. 예를 들 어 텍스코코는 코르테스가 신스페인의 수도로 지명한 멕시코시티의 빛에 가려 역사의 뒤안 길로 물러나야 했다. 스페인의 통치조직 정비과정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토착귀족의 딸이 정 복자의 소실이 되는 경우가 잦았고 간혹 본처가 될 때도 있었다. 목테수마의 딸 테쿠이츠포 트신이 좋은 본보기이다. 멕시코의 마지막 군주들인 쿠이틀라우악과 쿠아우테목의 부인이었 던 그녀는 스페인 정복후 이자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6세에 쿠아우테목을 겨읜 이 과 부는 여전히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상징이었고 새로운 정치판도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 는 인물이었다. 코르테스는 도시국가인 타쿠바의 수입을 영원히 소유할 권리를 그녀에게 주 었고 스페인 사람 알론소 데 그라도와 맺어 주었다. 이 인디오 여인은 곧 스페인화한 독실 한 기독교 신앙인의 모델이 되었다. 그라도가 죽자 그녀는 잠시 코르테스의 '규방'에서 살며 딸 하나를 낳았고 이후 스페인인과 두 번 재혼했다. 그녀의 마지막 남편은 재산증식에 열심 이었고 목테수마 2세의 상속녀로서 그녀가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유럽식으로 사 치스런 생활을 누리던 그녀는 유언장을 작성해 놓은 뒤 1550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딸 레오 노르는 사카테카스 은광의 발굴자와 결혼했으며 몇몇후손은 스페인으로 이주해 미라발레 백 작, 아브란테스 공작, 리나레스 공작 따위의 작위를 받았다. 다른 가문들의 예는 이보다는 덜 눈부시지만 아마도 더욱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텍스코코 통치자의 적자인 알바 익스틀릴소치틀의 어머니와 할머니 역시 스페인인과 결혼해 그들의 권리를 지 키기 위해 노력했다. 토착귀족 여인들과 스페인 사람의 결혼 그리고 뒤따르는 혼혈인의 등 장은 두 세계의 접근을 쉽게 해주었다. 새로운 지배계급이 떠오르면서 그들은 옛 귀족계급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군소귀 족과 평민은 정복자와 교회의 지원을 받아 지배계층으로 끼여들 수 있었다. 정복자들은 그 들에게 협력하는 군소귀족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주었고 그 결과 전통적인 귀족계급은 스페인 정권에게 위임받은 지역의 지방관으로서의 기능은 물론 추장으로의 지위마저 신참자들과 나 누어야 했다. 지방관으로 선출되거나 임명된 토착민은 푸에블로 데 인디오-이베리아 반도에 서 사용하던 제도를 1530년 이후 그대로 식민지에 적용했다-라는 지역공동체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은 새로운 엘리트의 양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6세기 중엽에 들어서 자 국왕은 옛 영주들의 자식들에게 고유한 권리를 되돌려 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스페인의 종주권만 인정된다면 권력상속이 토착민의 계급제도 존중과 양립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국왕은 원주민 공동체와 스페인인 공동체 그 당시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두 개의 '공화국'을 분리시킴으로써 '인디오'의 정체성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 해서는 원주민 공동체를 통치하는 권력은 토착귀족들의 손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로써 전 통 귀족가문 출신자 또는 새로이 지도계층으로 편입된 자로 충당되는 필연적이라고도 할 두 사회의 매개자들의 역할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디오라는 표현이 정식으 로 공인받게 되었고 그후 인디오는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토착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제국의 몰락이 아스텍 전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페인 정복자의 군사작전에 동원되었다. 1520년대에 멕시코 중부 지역 즉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를 정복할 때 는 멕시코 계곡의 귀족들과 그 휘하 부대가 동원되었다. 그 병력은 또한 치치멕족의 공격을 물리쳤고 북부 멕시코 은광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541~1542년에는 수만 명의 멕시카족, 틀락스칼라족, 오토미족 전사들이 테노치티틀란에서 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멕시코 북서부 믹스톤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수훈을 세운 가장 용감한 인디오 전사들은 훈장과 직위를 수여받았음은 물론 승진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16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인디오 부대들은 몇 가지 특 권을 누리며 현장에 주둔했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은 방향을 바꾸었다. 멕시코 중부 지역의 '문명화된'인디오들이 유목민에게 정착민의 풍속을 가르쳐 주기 위해 북쪽으 로 이주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개 유목민의 퇴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들은 19세기 말까지도 계속 혈전을 벌이며 북쪽으로 후퇴했다. 1540년대부터 토착민의 새로운 지배계층이나 전통적인 지배계층은 막 태동하고 있는 세계 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그들은 승마와 무기 사용법을 금방 익혔을 뿐만 아니라 회계 를 배우고 목축이나 상업에 뛰어들었으며 스페인이 식민지로 수출하는 상품을 구입해 소비 했고 술을 마시고 비단옷을 입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을만큼 스페인의 법률을 숙지하고 있었다. 이제 인디오 재판관, 관리, 상인, 통역자들이 정복자의 비 호를 받으며 토착민의 머리 위에서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교육활동과 인디오의 재빠른 동화 능력은 전혀 예기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 다. 두 문화의 만남으로 유럽 르네상스가 뒤늦게 멕시코에서 개화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르 네상스를 논할 수도 있다. 이 진정한 르네상스의 면모는 멕시코전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 공 동묘지, 수도원 등의 건축에 참여했던 인디오 화가와 조각가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스페 인 시대 이전의 뛰어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돌과 붓을 다루는 이들 장인 이외의 뛰어난 음악가와 가수도 있었다. 그들은 중세 유럽의 악기도 다룰 줄 알았으며 그중 몇몇은 매우 정열적으로 작곡을 하여 스페인인을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혁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럽 알파벳이 도입되어 문자체계를 습득 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상형문자와 구전전통에 의존해 문화를 가꾸어 왔던 인디오들이 수 도사들의 지도를 받아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능이 탁월한 인디오들은 틀라텔롤코에 위치한 산타크루스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키케로의 언 어사용법을 익히고 라틴시대의 고전을 독파했으며 유럽의 위대한 작품들을 나우아틀어로 번역했다. 활판술이나 인쇄술을 습득하는 이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 귀중한 정보제공자가 되었는데 그들 덕분에 수도사들은 정복 이전 사회에 대한 인종학적 조사를 성공적으로 수행 할 수 있었다. 역사학의 발전에도 인디오의 도움이 컸다. 16세기의 위대한 편년사가들은 두 사회와 두 문화의 행복한 융합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 다. 인디오들이 알파벳 문타체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상형문자체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 따. 치말파인, 익스틀릴소치틀, 테소소목 같은 역사가는 상형문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 을 뿐만 아니라 학식이 있는 인디오들은 상형문자의 전통과 유럽문자를 결합하는 방법을 터 득했다. 그들은 당대의 찬란한 풍요로움과 넉넉한 환경을 증거하는 창의력과 예지로 두 가 지 표현방법을 최대한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찬탄할만한 르네상스는 식민지의 메커니즘 때문에 태동기에 벌써 사그라들고 말았다. 한편, 16세기는 토착민이 황폐화되던 시기였다. 전염병과 무분별한 개발, 가치체계의 전복 등 정복에 따른 부산물이 흘러 넘쳤다. 혼돈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계급과 출생의 차이 를 나타내던 조상 전래의 지표들이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지위를 상징하는 많은 기호, 화 려한 복장, 엄숙한 축제가 자취를 감추었고 귀족을 위한 희생제물의 신성한 육체, 카카오, 환각식품과 같은 음식물과 관계된 특권 또한 사라졌다. 권력의 공백은 대중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1521년 귀족계급과 지도층은 침략자들에 맞 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비극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들의 죽 음이었다. 1520년대 말부터 총체적인 혼란이 몰아 닥친 가운데 오래 전부터 시간의 순환에 리듬을 부여하고 우주의 섭리를 보장해 주던 희생제식과 종교의식이 선교사들의 압력을 받 아 중단되거나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처럼 구체제를 지탱해 주던 제도적 장치들이 모두 의문시되거나 파괴당하고 말았다. 몇 몇 도시에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도 했지만 처음 몇 십 년 동안에는 옛 제도를 대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아TEk. 1540년대까지 전제적인 통치가 계속되었다. 정복자들은 탐욕스럽게 전리품을 챙겼고 인디 오들을 노예로 삼아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을 찍어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다. 토착민 중간지배 층의 수탈도 지독하기는 정복자들의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인은 옛 사제들과 일부 귀 족계급을 제거하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성직자의 지위를 가로채 아스텍인의 종교세계 다시 말해 존재의 의미까지도 독점했다. 그런데 다른 언어를 구사함으로써-대부분의 인디오들이 그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기독교와 교회는 계임의 규칙뿐만 아 니라 게임 자체도 파괴해 버렸다. 혼란은 극에 달했다. 토착민중 한 사람은 그 상황을 이렇 게 증언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 상, 존경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국왕과 교회는 외형적이기는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 나 인디오는 정복자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창궐하는 최악의 사태를 극복하고 살아남아야 했 다. 재앙은 인간의 목숨이라는 공물을 정기적으로 거두어 갔다.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인디오의 목숨을 앗아 간 질병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테노치티틀란이 포위되었을 때 티푸스와 천연두로 보이는 전염병이 극성을 부린 이래 전염병은 모든 지방으로 퍼져 나 가면서 끊임없는 고통을 주었다. 1545~1546년, 1581~1585년, 1629~1631년에 불어 닥친 재앙 은 특히 끔찍했다. 효과적인 치료수단의 미비,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침체 면역과 예방체계의 부재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귀중한 노동력과 공물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 로 스페인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디오는 재앙의 원인을 고유한 생 활방식의 파괴와 스페인인의 잔혹성 그리고 옛 신들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 탓으 로 돌렸다. 어쨋든 인디오는 계속되는 불행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죽음의 공포와 전통적인 제도의 붕괴가 잇따르자 인디오는 알코올에 의지하게 되었다. 알 코올은 다른 여러 품목과 함께 정복시대 이후에 금지목록에서 해제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 아 살해, 낙태, 자살이 급증했는데, 이것은 멕시코의 여러 민족이 끌어안고 있던 견딜 수 없 는 비극의 분출이었다. 과거와의 단절은 스페인의 정복에서 비롯되었다. 단절은 16세기를 소용돌이치며 17세기 초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말마의 고통이 휘몰아친다고 해서 우주가 끝장나 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세계를 재건하는 일은 살아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제 6장 정복 이후 토착귀족은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 결혼하는 사례가 급증함 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중간세계라고 할 혼혈세계가 형성되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소멸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17세기에 딜레마가 제기되었다. 새 세계에 적응하면서 토착세계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 할 수 있는가? 이제 귀족계급은 전통 일반을 보존하고 스페인에게 부여받은 직위의 상속을 보장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간혹 직위를 둘러싸고 대대손손 물려가며 소송 을 벌이기도 했으며 야바위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이전투구에 타격을 받은 명문가문들은 패가망신했고 그와 더불어 고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럼 에도 18세기 중반 멕시코와 틀락스칼라에는 비중있는 압력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귀족들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혈통과 민족적 기 원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귀족들은 재산과 권력과 문화를 꾸준히 집중해 나갔다. 그들의 대변인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원주민 지도층의 입장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했으므로 자연이 제시하는 것만을 합리적인 원리로 생 각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며 원주민을 교육시켜 그들을 '무지의 암흑'에서 벗어나게 해 달 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들 귀족들은 카톨릭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화의 기치를 들어올릴 정도로, 16세기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자기 시대의 편견을 멋지게 소화해 냈다. 과거에 집착하는 귀족들이 쇠망의 길을 걷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농촌 원주민의 삶은 푸에블로를 중심으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식민시대의 푸에블로는 마을, 토지, 공동체를 지칭한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유한 민족적, 정치적, 집합체가 파괴되고 과거에 대한 기억이 무너져 내리며 전염병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인디오들은 16세기 말에 들어서자 촌락을 다스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공간으로 모여들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촌락의 유력자들은 식민 지 생활을 통해 왜곡되어 온 멕시코 사회에서 정체성과 근거지를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의 권 한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푸에블로의 역사를 기록한 권리증서를 작성하여 물려주곤 했다. 기독교화는 푸에블로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로 등장했다. 이제 문자체계는 더 이상 귀족 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스텍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백성들도 문자를 이용해 그들 공동체의 역사를 전할 수 있었다. 권리증서는 1세기 전에 시작된 인디오의 기독교화를 야만적인 압제 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권리증서에서 교회는 공동체의 새로운 중심지로 제시되어싿. 왜 냐하면 인디오의 존재에 시간의 순환주기를 제시하는 여러 가지 제식(세례, 결혼, 장례식 등)이 교회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수호성인을 선택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는데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어떤 성인이 어떻게 하여 푸에블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게 되 었는가 하는 내용을 담은 전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푸에블로 당국은 자신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공동체의 삶을 간섭하려는 사람들에게 악 착같이 대항했다. 스페인의 대지주들인 아센다도스와 교구청의 사제들은 푸에블로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 17세기와 18세기의 역사는 인디오와 아센다도스의 투쟁이 빚 어 놓은 소송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염병이 덮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미경작 지가 많이 발생하자 스페인인이 그곳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나 18세기에 원주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18세기 후반부터는 지방마다 격렬 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격렬한 양상을 띠었지만 사제들과 빚어지는 충돌은 그 성격이 달랐다. 인디오 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공동체의 종교적인 삶을 꾸려 나갈 틈을 제공해 주는 현상태를 어 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적이 누구이든 간에 푸에블로는 원주민 들이 권리와 신앙이라는 상속재산, 다시 말해 토착적 요소와 유럽적 요소를 뒤섞어 놓은 상 속재산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공간이었다. 유력자들이 공동체의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동안 일반 대중은 식민사회에서 근근히 삶을 유지했다. 스페인 지배가 시작된 지 1세기가 지났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생활여건, 노동조건, 공물, 식료품, 언어 등 여러 가지 문제에서 전혀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토지, 집, 옥수수밭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화해시키려 노력했던 조상 전래의 힘'을 그대로 보존하 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기 무서운 전염병이 채 고개를 숙이기 전 생존자들은 전통적 인 숭배대상을 생활속에 끄어들여 균형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것은 불, 물, '산의 거주자들', 바람 따위 전통적인 권능에 대한 숭배와 그때 이후로 그들의 촌락과 가정을 보호해 주는 성 자들의 숭배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인디오들은 오늘날 토착문화 속에 면면히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의례와 신앙형 태를 창안해 냈다. 17세기에는 진한 가족애, 종교적 모임의 결성, 다양한 축제를 통해 인디 오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기독교의 꽃을 피웠다. 예배당, 그리스도가 못박힌 십자가상, 기적을 표현한 그림, 투우, 카니발, 행력 및 성지순례 등은 멕 시코 계곡이나 톨루카 또는 푸에블라를 지중해 연안의 촌락과 흡사하게 만들었다. 식민지, 식민지 문화 속에서 새로운 기독교가 발생했던 것이다. 17세기부터 과달루페의 성모 숭배가 널리 퍼졌다. 18세기에 기독교는 백인과 유색인의 혼 혈아인 뮬라토와 농촌공동체를 해체시키려는 스페인인의 접촉에서 새로운 진보를 경험하게 된다. 그때 모든 종류의 신앙과 예배의식을 뒤섞은 공동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근 대 멕시코의 대중문화를 예고한 것으로 원주민의 문화유산은 점차 대중문화 속에 흡수되었 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의 물결이 밀어 닥친 곳은 도회지, 특히 신스페인의 수도였다. 16세 기 이후 그곳에서 인디오들은 스페인어를 배웠고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교배가 이루어졌 다. 인디오들은 두 세계, 즉 그들이 섬기는 스페인 주인들의 세계와 이따금 가혹한 제재를 가해 오는 공동체 사회 사이를 왕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두 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 당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라디노스, 또는 '에스파뇰라도 스'가 많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장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었 으며 동화와 익명성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전통 적인 머리형이나의상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을 스페인 사람들과 구별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치 자석처럼 도시는 심하게 착취당하거나 공동체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농촌의 인디오들을 유혹했다. 수세기 전에 문명의 파편이라도 향유하기 위해 톨텍의 도시국가 주변 을 맴돌던 유목민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 왔던 매혹이라 하겠다. 도시는 서양인이 설치해 놓은 함정이었다. 손쉬운 돈벌이, 쾌락, 알코올의 매력, 민족적 기 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 도시에서 인디오는 스페인인이 전파한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쉽게 동화되었다. 그 양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술 취한 상태이며 더 정확하게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원주민의 상당수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던 것이다. 주점 또는 '풀케리아'는 치졸한 장면들이 연출되곤하는 무대였다. 그곳에서 남편들은 쥐꼬 리만한 생활비를 탕진했고 그곳에서 부인네들은 의식을 잃고 낙태를 했으며 그곳에서 피나 는 싸움이 벌어졌고 또한 그곳에서 더러운 매춘이 이루어졌다. 1784년 수도에는 100명 가량 이 모여 술을 마실 수 있는 풀케리아가 600개 이상 있었다. 교구와 공동체에서 떨어진 풀케 리아에서 인디오들은 혼혈사회를 배웠고, 흑인과 뮬라토, 다른 모든 혼혈인들과 순응하며 공 존하는 법을 배웠다. 풀케리아가 범죄와 타락과 불륜의 사랑이 꽃피웠던 소굴이었다면 그것 은 또한 삶과 여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종과 재산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닫힌 사회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근대 멕시코의 대중문화와 '빈자의 문화'의 중요요소를 탄생시킨 용광로이기도 했다. 16세기 후반부터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던 영락한 원주민들이 고정직이나 전문직으 로 은광산에 취직해 봉급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수세기에 걸쳐 경험할 수 있을 법한 문화축적의 다양한 단계를 이 은광 노동자들은 한 세대만에 체험할 수 있었다. 광산에서의 노동만큼이나 오브라예라는 감옥과 같은 작업장에서 이루어진 강제노동도 노동자의 영혼과 육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그것은 노 동자들로부터 가정생활을 빼앗은 한편 그들을 낯설고 비정상적이며 꽉 막힌 생활 속으로 몰 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장인이나 식료품장수 또는 하인과 같은 인디오들은 비교적 덜 고통 스러운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으며 혼혈세계에 융합하여 비천한 생활에서 탈출할 수도 있 었다. 인디오는 전염병과 이종교배 그리고 식민지 지배세력의 착취를 견뎌 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근대 세계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어렵게 되찾은 원주민 공동체 의 균형을 난폭하게 뒤흔들어 인디오의 생존방식에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한 것은 계몽주의 와 독립의 이상이었다. 실제로 18세기 말 이후로는 문명화-16세기처럼 기독교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를 목 표로 정부가 개입해 모든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교육하도록 강요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1780년을 전후하여 경제발전에 눈을 돌린 정부는 원주민문화의 가장 적극적인 표출형태인 종교 연극, 종교단체 , 행렬, 축제 등을 철저하게 제한하거나 철폐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 국왕도 공동체에 대한 정책을 수정하여 19세기에는 인디오와 스페인 사람간에 모든 법적인 차이를 폐지시켰다. 인디오를 교육하고 그들의 물질적 생활조 건을 개선하기를 바라는 계몽권력의 온정주의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복시 대의 유산과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유산을 간신히 동화해 낸 인디오 문화에 가해진 충격을 부각시켜야 하는 것일까? 멕시코는 1821년 독립을 쟁취했다. 신생 멕시코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멕시코 정부는 인디오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 민으로 인정하고 푸에블로가 자원을 채취할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던 공유지를 민영화하기 로 다시 말해 개인들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조치는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사형선고 나 다름없었다.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의 유산을 물려받은 원주민 구역은 근대 도시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제 인디오에게는 투기꾼들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옆으로 비켜 서거나 혼혈인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것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세기 내내 다른 재난이 농촌 공동체를 파괴했다. 대토지 소유제도의 확 장형태인 아시엔다스가 토착농부들을 소작인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빚에 허덕이며 온갖 횡포에 시달리면서도 주인의 토지에 빌붙어 살아야 했다. 그후 1910년 에 발발한 이 혁명은 이 새로운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혁명은 스페인 통치하 에서 인디오들이 고통스럽게 구축해 놓았던 사회구조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결과를 낳았다. 톨텍의 유산은 미술책의 그림으로 풍자만화의 실루엣으로 혁명을 그린 서사시의 등장인물 로만 남아있는 것일까? 몇몇 마을들과 고립지역은 오랫동안 근대화의 물결에 저항했다. 그 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화가 비약적으로 진전되자, 대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는 '땅'을 등진 사람들이 도시를 향해 대 이동을 했다. 산업화된 거대도시는 멕시코 계곡에서 수천 년 안 둥지를 틀어 온 동물과 식물, 조상의 숨결을 가득 담은 풍물을 삼켜 버렸다. 스 페인 정복 이전 시대와 스페인 식민지 시대, 그리고 19세기의 유산이 혼재된 말없는 수공 업자, 그것 이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톨텍의 후손은 누구인가? 인디오는 지금도 존재하 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판자촌 마을 어귀를 기웃거리는 소비시대의 기적, 산업사회가 부과 해 오는 익명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톨텍족과 툴라가 멸망한 지 1000년의 세월이 흘렀고 멕시카족과 테노치티틀란이 멸망한지 500년이 지난 오늘 20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살고 있는 멕시코 시티는 삶에 찌들어 도시에 희망을 품고 찾아오는 이주자들에게 굳게 문을 닫 아 걸고 있다. 기록과 증언 세계와 인간의 기원-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신들이 빛의 불꽃 앞에 모여들었다. 가장 보 잘 것 없는 신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 태양이 되었다...... 아스텍의 천지개벽은 그렇게 시작되 었다. 다섯 개의 태양 이것은 아주 오래 전에 지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 려오는 이야기이다. 이제 단계별로 하나씩 이야기해 본다. 어떻게 시작되었든 각각의 태양의 시초가 어떠했든 1558년 5월 22일 현재를 기준으로 2513년이 흘렀다고 한다. 첫 번째 태양의 이름은 4-호랑이로 676년 동안 지속되었다. 태양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이때가 4-호랑이 태양의 시대였다. 그들은 우리처럼 영양을 섭 취했으며 676년을 살았다. 그들은 13의 시대에 잡아먹혔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멸망했고 모든 것이 끝났다. 이때 태양이 파괴되었다. 그들은 1-갈대의 해 4-호랑이의 날에 잡아먹혔 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났고 모든 생명체가 사라졌다. 두 번째 태양의 이름은 4-바람이었다. 두 번째 태양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바람에 실 려갔다. 4-바람 태양의 시대에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바람에 실려 가 원숭이가 되었 다. 그들의 집과 나무와 모든 것이 바람에 날아갔다. 그 태양도 또한 바람에 실려 갔다. 그 들은 우리처럼 영양을 섭취했다. 그때는 12-뱀의 시대였다. 그들은 364년을 살았다.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단 하루만에 바람에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1-부싯돌의 해 4-바람의 날에 모두 사라졌다. 4-비 태양이 세 번째 태양이었다. 4-비 태양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역시 멸망했다. 그들은 화우를 맞고 칠면조가 되었다. 태양이 불탔고 모든 집들도 불타 올랐다. 그들은 이 태양의 시대에서 312년을 살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화우가 내린 날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 처럼 영양을 섭취했다. 그때는 7-부싯돌의 시대였다. 1-부싯돌의 해4-비의 날에 그들은 멸 망하여 칠면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칠면조새끼들을 '피필 피필'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태양의 이름은 4-불이며, 물 태양은 52년 동안 계속되었다. 네 번째 태양의 시 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4-물 태양에 속한다. 그들은 676년 동안 살았다. 그들도 역시 사라졌 다. 물이 그들을 삼켜 버렸고 그들은 물고기가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고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처럼 영양을 섭취했다. 그때는 4-꽃의 시대였다. 1-집의 해 4-물의 날 에 그들이 사라지고 모든 산도 사라져 버렸다. 물은 52년 동안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고 그 들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다섯 번째 태양의 이름은 4-운동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태양이다. 다섯 번째 태양 이 불 속으로 다시 말해 테오티우아칸에 있는 신의 화덕으로 뛰어들었음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 태양은 우리의 툴라의 왕자 다시 말해 케트살코아틀의 태양이었다. 4-운 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번째 태양은 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운동의 태 양이라 불린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처럼 언젠가 지진과 기근이 발생할 것이며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레온 포르티야 (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현재의 세 계 이전에 대이변으로 멸망한 네 가지 세계 또는 네 가지 태양의 시대가 있었다는 믿음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필사본들과 몇몇 기념물의 저부조뿐만 아니라 스페 인 정복 이후에 작성된 전승물과 연대기에서도 발견된다. 그 사라진 세계들의 이름은 호랑 이의 태양, 바람의 태양, 비의 태양, 물의 태양이다. 비의 태양은 불의 태양이라고도 불린 다. 그것은 그 세기 말에 화우가 세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네 시대들의 순서가 항상 똑같이 기술되지는 않는다. ((쿠아우티틀란애널스))에는 첫 번 째 태양은 물의 태양이었고 그뒤를 호랑이의 태양, 비의 태양, 바람의 태양이 잇고 있다. ((그림으로 본 멕시코인의 역사))에서 소개되는 순서도 다르다. 호랑이의 태양-바람의 태양- 비의 태양-물의 태양으로 이어지는 ((그림으로 본 멕시코인의 역사))의 순서는 '아스텍의 달력'으로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기념물에 새겨져 있는 순서와 일치한다. 이 유명한 저 부조에는 '태양석'의 저부조와 마찬가지로 ((그림으로 본 멕시코의 역사))와 같은 순서로 네 시대가 열거되어 있으며, 각 시대는 그 시대를 멸망시킨 대 이변의 날짜로 나타냈다. 그 날짜는 다음과 같다. 4-오셀로틀, 호랑이의 태양의 종말 4-에카틀, 바람의 태양의 종말 4-키아우이틀, 비의 태양의 종말 4-아틀, 물의 태양의 종말. 마지막으로 '아스텍의 달력' 은 현재 우리의 세계를 4-올린 즉 우리의 태양이 태어난 지 4일에 운동을 시작했다는 날 짜로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제의 달력에서는 태양과 영주들의 축제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세계가 지진이 일어나 멸망하게 될 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올린'이란 기 호는 태양의 운동과 지진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이다. 토날라마틀 또는 미래를 예견하는 달력에서는 4가 들어간 날짜는 불길한 것으로 본다. 호 랑이의 태양이 죽은 4-오셀로틀은 테스카틀리포카신의 지배를 받는 불길한 날이다. 북극의 신, 추위와 밤의 신인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림으로 본 멕시코인의 역사))를 보면 태양을 물 리치기 위해 호랑이로 변신했다. ((쿠아우티틀란 애널스))를 보면 첫 번째 태양의 시대는 일 식에 뒤이은 어둠과 추위 속에서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바람의 태양이 죽은 4-에카틀이란 날은 마술과 주술의 날이다. 1-에카틀은 마법사의 날이다. 두 번째 태양의 시대가 끝난 것 은 거대한 마술의 힘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모두 원숭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람 의 신 에카틀의 상징인 광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케트살코아틀의 현현이다. 사라진 세계의 인간들이 원숭이로 변했다는 생각은 마야족의 성서에 나온다. 고대 멕시코인에게 그 생각 은 케트살코아틀신이 마법사들의 수호자인 바람의 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비의 태양이 죽은 4-키아우이틀이라는 날은 비의 신 틀랄록의 보호를 받는다. 비의 기호 로 사용된 것은 기다란 이빨과 거대한 눈을 가진 신의 얼굴이다. 세 번째 세계는 화우를 맞 아 멸망했다. 틀랄록이 비의 세계만 관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역할 이기는 하지만 그는 번개와 벼락을 치게 하고 화산의 분출까지도 관장하는 불의 신이기도 하다. 즉, 그는 화우인 것이다. 물의 태양이 죽은 4-아틀이란 날은 4라는 숫자로 표시된 기념물에서 복 수 있다. 그 숫자 4는 틀랄록의 아내이자 물의 신인 '진귀한 돌치마를 입은 여신' 찰치우틀리쿠에의 얼굴과 함꼐 그려져 있다. 그녀는 그릇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물이다. 왜냐하면 네 번째 세계는 홍수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는 네 번에 걸쳐 탄생 되었다가 큰 재앙이 닥쳐 사라졌다. 오늘날의 세계도 언젠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고대 멕시코인은 우주의 역사를 탄생과 소멸이 순환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 원칙들은 번 갈아 가며 모든 것을 지배하다가 쫓겨나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첫 번째 태양은 북쪽의 신인 테스카틀리포카이며, 추위와 밤의 시대이다. 서쪽의 신인 케트살코아틀의 영향 을 받은 두 번째 태양은 마법과 서쪽의 시대이다. 세 번째 채양은 불의 신으로 남쪽의 신인 틀랄록의 지배를 받았다. 네 번째 태양인 물과 찰치추틀리쿠에신은 동쪽의 시대이다. 왜냐하 면 물과 그 여신은 동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인 오늘날의 태양은 중심의 시대 이다. 왜냐하면 다섯은 중심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중심은 불의 신 시우테쿠틀리이다. 그 러므로 우리의 태양은 불의 태양이며 이따금 불과 동일한 상징인 나비로 표현되기도 한다. 네 개의 태양이라는 고대 멕시코의 전승은 모든 지역에서 흔히 목격되는 사고방식의 한 가지일 따름이다. 그들은 실재의 근본적인 측면이 변화하는 양상을 통해 세계의 모든 현상 을 해석했던 것이다. 그 현상들은 서로 연관되기도 하고 상치되기도 하며, 떄로는 어느 한쪽 이 강성하거나 쇠퇴하며 공각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천지개벽 신화에는 사라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정보가 거 의 담겨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당대에는 거인들이 살았으며 인간들은 야생초를 뜯어먹으 며 살았으리라고 추정할 뿐이다. 고대 멕시코인은 유목민들 즉, 북쪽의 준 사막지대를 유랑 하는 치치멕족의 문화보다 자신들의 농경문화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도 중앙 고원지대에 정착하기 전에는 선인장이 자라는 북부 대 초원지대에서 그날그날 생 계를 꾸렸다. 그들은 옥수수 농사를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죽은 태양들의 시대에 살던 선조들을 농사 지을줄도 모르는 야만인으로 그렸다. 사실 그들도 그런 생활을 청산한 것은 몇 세기 전에 불과했는데도..... 네 번째 태양의 종말과 우리 시대의 시작 사이에는 일시적인 과도기가 설정되어 있는데 그 시기는 두 번씩 13년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해는 13을 축으로 분할하며, 각각의 축은 사방위의 한 축과 다시 연결된다. 4가 13번 모인 해만에 토착민의 세기인 52년의 순환주기 가 완결된다. 하늘의 추락, 물의 태양에 종말을 가져온 대 홍수는 남쪽의 해인 1-토츠틀리 의 해에 일어났던 것 같다. 케트살코아틀과 테스카틀리포카신은 하늘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 일이 끝나자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름을 바꾸고 2-아카틀의 해에 북쪽의 신인 믹스코아틀 이 되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달력에서 2-아카틀의 날은 테스카틀리포카에 바쳐져 있다. 여 덟 번째 해에 일하는 인간, 마세우알틴이 창조되었다. 미래의 태양을 위해 자신의 피를 바쳐 태양에 양분을 공급해 줄 인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아카틀의 해에 시작된 두 번째 13의 해와 함께 우리는 동쪽의 지배로 들어간다. 아카틀 은 동쪽의 신이며 새벽별의 신이자 부활의 신인 케트살코아틀의 순환이다. 다섯 번째 태양 은 죽음과 재 탄생, 별과 우주의 생명에 필수적인 희생을 필요로 한다. 1-아카틀의 해에 신 들은 태양을 창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쏟아붓고 생명력을 방출해야만 했 다. 그런데 생명력을 방출하는 방법은 전쟁이나 희생을 통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신들은 전 쟁을 시작했으며 때로는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두 번째 순환의 마지막 해인 13-아 카틀은 태양이 탄생한 해이다. 자크 수스텔(아스텍의 세계) 인간의 창조 신들은 테오티우아칸에 모여 태양을 창조했다. 그리고 자문해 보았다. "그런데 이 땅에 누 가 살지?" 그러고 나서 케트살코아틀은 밀틀란으로 떠났다. 그는 믹틀란테쿠틀리와 믹틀란 시우아틀에게 말했다. " 나는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진귀한 뼈를 찾으러 왔소. 어서 주시 오." 그러자 믹틀란테쿠틀 리가 말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시오?" "신들은 누군 가 땅에 사는 것을 보고 싶어하오." "좋소 내 소라고동을 부시오 그리고 나의 진귀한 원을 네 번 도시오." 그런데 그의 소라고동에는 구멍이 나있지 않았다. 케트살코아틀이 구멍을 뚫 을 곤충을 부르자 벌들이 그 안으로 들어와 소라고동이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믹 틀란테쿠틀 리가 말했다. "좋소 가져가시오." 그러나 믹틀란테쿠틀리는 종복에게 명령했다. "믹틀란의 사람이여 신께서 케트살코아틀에게 그 뼈를 놓고 가라고 말하시오!" 케트살코아 틀이 응답했다."그렇게는 못하오. 내가 영원히 그것을 간수할 것이오." 그는 자신의 나우아 이에게 말했다. "가서 말하라 뼈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다고." 나우아이가 외쳤다. "뼈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소." 그러나 케트살코아틀은 진귀한 뼈를 집었다. 한켠에는 남자들의 뼈가 다른 한켠에는 여자들의 뼈가 모여 있었다. 케트살코아틀은 그것들을 꾸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믹틀란테쿠틀 리가 종복에게 말했다. "신이시어 진정 케트살코아틀이 진귀한 뼈 들을 가져가야 합니까? 신이시여 구멍을 뚫어 주십시오." 그러자 그들은 케트살코아틀보다 앞서가 구멍을 팠고 그는 그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메추라기를 보고 공 포에 질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죽었고 진귀한 뼈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메추라기가 뼈를 부리로 쪼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케트살코아틀은 부활했다. 그는 비탄에 젖어 그의 나우아 이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러자 나우아이가 대답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 니 그냥 놔두는 수밖에 ....." 케트살코아틀은 뼈를 모아서 타모안찬에게 가져갔다. 그가 도착 하자마자 바로 시우아코아틀인 킬라스틀리라는 이름의 여인이 뼈를 가루로 만들어 보물 항 아리에 담았다. 케트살코아틀은 사지에서 피를 뽑아 항아리에 흘려 넣었다. 케트살코아틀신 과 다른 여러 신들은 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신이시여 마세우알틴(징벌을 받 아 마땅한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신들은 인간을 위해 고행을 했기 때문이다. 레온 포르티야 ((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인간의 의무 땅위의 사물들을 정성껏 보살펴라. 일손을 쉬지 말라. 나무를 자르고 땅을 경작해라. 무화 과 나무와 용설란을 심어라 그리하면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너 는 똑바로 서게 되고 살아 남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인구에 회자될 것이고 칭송받을 것이며 너의 참모습을 부모와 친지들이 알게 되리라. 어느날 너는 치마와 블라우스와 합일하게 되 리라. 그녀는 무엇을 마실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녀는 공기로 살아갈 것인가? 꿋 꿋하게 서서 그녀를 보살펴야 할 사람은 바로 독수리, 호랑이인 너이다. 이 말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라. 네가 우리의 구세주(우리 가까이, 우리 옆에 있는 주)를 따르면 좋으련만! 너는 땅에서 살아가야 하고 짧은 기간일지 몰라도 생명을 유지할 것이다. 네가 아는 것은 무엇이냐? 사물들을 침착하고 사려 깊게 바라보아가. 이곳은 난관과 추잡함과 혼란이 가득 한 세상. 쾌락이 부재하는 무섭고 어두운 곳이다. 참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 이젠 홀로 감금당한 땅에서 감시를 받는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노인들이 우리에게 그 일을 남겨 놓고 떠났다. 백발에 얼굴에는 주름이 잡힌 우 리의 조상들이 말이다. 그들이 나타나서 자랑하고 탐욕스럽게 욕망하고 용맹성을 증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우리가 평가하는 그대로였다. 그들은 독수리와 호랑이에 다름없었다. 개가 개밥을 허둥대며 먹듯이, 여인에게 덤벼들지 말라. 나이도 차기 전에 여인 을 탐한다는 것은 주는 것마다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는 개를 닮는 것이다. 여인을 범하고 싶더라도 자제하고 네가 강하고 완벽한 남자로 성장할 때까지 마음을 다스려라. 수액을 얻 기 위해 어린 용설란을 절개하지 말라. 용설란은 더 이상 수액도 주지 못하고 썩어갈 것이 다. 용설란이 생장하여 완전하게 될 때를 기다려 절개하여 수액을 채취하라. 그때 채취한 수 액이 제일 맛이 좋은 법이다. 여인을 알기 전에는 그렇게 행동하라. 나이를 먹어 건장해지면 결혼할 준비를 하라. 건장하고 강인하며 날쌔고 아름다운 아이를 얻게 되리라. 재판관들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 일찍 왕궁에서 보내 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약간 휴식을 취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말 을 경청했다. 그들은 해가 떨어지기 두 시간 전까지 앉아 있었다. 항소심이 열릴 경우 그들 은 일반 재판관보다 서열이 높은 12명의 재판관들 앞에 출두했다. 영주의 의견과 함께 판결 을 내렸다. 영주는 12일마다 회의를 주재하여 중요한 범법사건이나 어려운 사건에 관해 모 든 재판관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 앞에서 처리된 것은 무엇이든 아주 세심하게 검토되고 확 인되었다. 증인들은 진실만을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서를 했고 재판관들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능수능란하게 심문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교묘한 말솜씨로 줄기차게 질문을 던지고 위증을 하면 아주 혹독하게 벌을 주었다. 재판관들은 뇌 물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힘이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했 다. 그들은 언제나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사법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 가지였다. 만일 재판관이 선물을 받았거나 술을 대접받았거나 근무를 태만하게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중죄는 아니라는 전제하에 다른 재판관들이 그를 부드럽게 꾸짖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세 번 경고를 하고 머리를 삭발했다. 그런 수치 와 모욕을 받음과 동시에 그는 재판관 자리를 잃고 기아에 허덕여야 했다. 귀족과 평민이 제기한 소송에서 한 재판관이 귀족편을 들어 텍스코코영주에게 허위보고서를 제출했다. 텍 스코코 영주는 그 재판관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 소송을 재심리하라고 명했다. 그 결과 평민 이 승소했다. 레온 포르티야 ((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케트살코아틀의 신화 케트살코아틀은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툴라에서 숭배의 대상이었 다. 우뚝 솟은 사원은 층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층계참은 너무 비좁아 한 발로도 설 수 없 을 정도였다. 그의 조상은 언제나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다. 그는 너무나 못생겼으며 수염이 덥수룩했고 얼굴이 길쭉했다. 종복들이나 신하들은 누구나 찰치우이틀이라는 초록돌을 능수 능란하게 세공하며 은을 녹이는 등 솜씨 좋은 공예 장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케트살코아 틀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찰치우이틀이라는 진귀한 돌이나 은, 희고 붉은 진주모, 판자, 터키옥, 윤이 흐르는 깃털로 만든 집들에서 살았다. 신하들은 민첩해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트사트시테페틀이라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나우악으로부터 천리나 떨어진 마을과 촌락에 포고문을 알리는 관원이 한 사람 거주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관 원의 목소리를 듣고 케트살코아틀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보려고 모여들었다. 케트살코아 틀은 큰 부자여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없는 것 없이 갖고 있었으며 옥수수는 넘쳐날 정도 였고 둘레가 한 발이나 나가는 거대한 호리병박을 갖고 있었다. 옥수수 이삭은 어찌나 긴지 한 발이나 되었다. 근대 줄기도 통통하고 쭉 뻗은 것이 나무보다 높이 치솟은 것처럼 보였 다. 농부들은 목화씨를 뿌려 천연색 무명을 수확했다. 붉은색, 진홍색, 노란색, 갈색, 희끄무 레한 색, 초록색, 하늘색, 검정색, 칙칙한 색, 오렌지색, 담황색 등 예쁜 자연색을 띠고 있었 으며 목화는 자랄때부터 그 고운 빛깔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툴라에서는 시우토토틀, 케 트살토토틀, 사칸, 타우케촐이라는 깃털이 알록달록한 새와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새들을 많 이 길렀다고 한다. 케트살코아틀은 세상에서 값진 것은 무엇이든 갖고 있었다. 금과 은, 찰 치우이틀과 다른 진귀한 보석에다 카카오나무를 수만 그루나 갖고 있었다. 케트살코아틀의 가신들도 매우 부유했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다. 궁핌이나 옥수수의 품귀현상은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옥수수를 목욕물 데우는데 썼다. 케트살코아틀은 다리에서 피를 뽑아 마게이 가시들을 물들이는 것으로 속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정에 시카포얀이 라는 샘에서 몸을 씻었다. 케트살코아틀이 툴라에서 했던대로 멕시코 성직자들과 우상숭배 자들은 그 관습을 물려받았다. 케트살코아틀과 톨텍족의 운명을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 툴라 에서 수많은 사기를 쳤던 우이트실로포츠틀리, 티틀라카우안, 틀라카우에판이라는 세 명의 강신술사들이 케트살코아틀과 톨텍족에 대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티틀라카우안이 백발 노인으로 변장하여 그 일을 시작했다. 그는 변장한 채로 케트살코아틀의 왕궁을 방문하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왕을 만나 왕궁에서 나가라고 말하려 하오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이 노인네가 노망이 났군 썩 물러가시오. 폐하는 지금 병중이시라서 만날 수가 없소. 만나 봤자 성가시고 소란스러울 뿐이잖소."그러나 노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왕을 꼭 만나야 하오."신하는 하는 수 없었다. "기다리시오." 신하는 케트살코아틀에게 한 노인이 알 현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폐하 성문에서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만 그는 한사코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케트살코아틀이 대답했다. "들여보내라. 며칠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노인은 왕궁으로 들어와 케트살코아 틀과 마주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소인이 약을 가져왔으니 드시지요." 케트살코아틀이 대 답했다. " 어서오시오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오." 노인이 물었다. "요즘 어떠십니까?" 케트살코아틀이 대답했다.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오. 온몸이 욱씬욱씬 쑤셔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지경이라오." 노인이 말했다. "폐하 제가 가져온 약은 약효가 뛰어나서 건강 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 약을 마시면 취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 약을 마시면 폐하는 건강 이 회복되고 마음이 가벼워지고 죽거나 떠나는 것의 고통스러움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케트살코아틀이 물었다. "노인장 나는 어디로 가야 하오?" 노인이 대답했다. "툴란틀라팔란 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가면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가슴속에 있는 말을 속시원하 게 털어놓으십시오. 그러면 돌아오실 때는 청년이 되어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젊음을 되찾 게 될 겁니다. " 그 말을 듣자 케트살코아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노인이 말을 이었 다. "폐하 이 약을 드시지요." "그 약을 먹고 싶지 않구려."그런데도 노인은 줄기차게 강요했 다. "폐하 어서 이 약을 받아 드십시오 지금 이 약을 드시지 않으신다면 후일 크게 후회하 실 겁니다. 약을 한 방울만 입에 넣으십시오." 케트살코아틀은 약을 훌쩍 들이마시고는 소리 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약이오? 향기도 좋고 맛이 기막히구려. 병이 다 나은 것 같소 이젠 아프지 않구려. 한모금만 더 마시십시오, 약의 효험이 뛰어나 몸이 한결 좋아질 겁니다. 케 트살코아틀은 약을 더 마셨고 약에 취했다. 그리고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이 약 해져서 온통 떠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강신술사의 속임수에 빠져 약을 마신 케트살코아 틀은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케트살코아틀이 마셨던 약은 테 오메틀이라는 용설란으로 만든 그 고장에 특유한 백포도주였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토착사회-아스텍 문명은 잘 짜여진 조직체였다. 하늘은 틀라토아니, 즉 '말을 하는자'가 지배했다. 그는 왕자들인 테쿠틀리 가운데서 선출된 사람이었다. 땅에서는 마세우알틴이라 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 중간에 포츠테카가 황제를 위하여 중재 하고 염탐했다. 장인들은 옛 선조들의 영광스런 호칭인 톨테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톨텍의 모델 16세기 스페인 정복 이후 사아군이 고용한 정보제공자들은 아스텍의 장로들로부터 번영을 누렸던 신비로운 툴라에 관한 기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곳에서 집단적 으로 모여 살았다. 그곳에는 그들이 만들고 남겨 놓은 문화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중 에서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도 남아있다. 완성되지 않은채 남아있는 것으로는 뱀이 감아 올 라가는 모양의 원주가 있다. 뱀의 머리는 땅을 향하고 꼬리와 방울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톨텍족의 산과 피라미드, 흙과 돌로 만든 건축물, 회반죽 벽들도 남아 있다. 톨텍족이 사용 했던 도자기 잔해들도 전해지고 있다. 땅에서는 꽃병과 항아리, 톨텍족의 목걸이, 팔지, 초록 돌, 터키옥, 에메랄드가 발굴되고 있다. 톨텍족은 솜씨가 뛰어난 민족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유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정밀하며 훌륭하고 멋진 것이다. 터키옥의 모자이크로 상감된 그들의 집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회반죽으로 칠한 벽은 깨끗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톨텍 족의 집은 탄탄하게 지었을 뿐 아니라, 어느 한 구석도 흠잡을 데가 없는 멋진 작품이다. 화 가, 조각가, 석공, 깃털 세공인, 도공, 실잣는 여인, 방직공 들은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 그들 은 초록돌과 터키옥을 찾아내어 그것을 아름답게 세공할 줄 알았다. 그들은 터키옥과 광맥 을 식별할 수 있었으며 여러 금속을 발굴했다. 톨텍족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북과 방울을 연주했다. 그들은 또한 노래 를 좋아해서 작곡을 해 널리 퍼뜨렸으며 마음 속에 그들이 만든 멋진 노래들을 간직했다. 레온 포르티야 ((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전쟁 목테수마 1세의 동생인 틀라카엘렐이 케트살코아틀을 제압한 후 우이트실로포츠틀리의 영 광을 노래하고 있다.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아스텍인에게 전쟁을 부추기며 '꽃의 전쟁'을 통 해 피의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청년 전사 천상에서 행동하는 신,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자신의 길을 가도다! 나는 노란 깃털의 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소용없었다. 왜냐하면 태양을 뜨게 한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당신, 구름에 있는 불길한 신이여, 당신의 발은 하나 니라! 날개 돋친 차가운 곳에 거주하는 자여, 당신의 손은 열려 있도다! 그 열대지역의 벽 옆에서 깃털을 던져주니 순식간에 흩어지도다, 이제 전쟁의 소리가 들린다. 에아, 에아, 호, 호! 나의 신은 인간의 수호자이다. 열대지역에 거주하는 그는 종이옷을 입고 자신의 길을 간다. 먼지 속에서 먼지 속에서 그는 빙빙 돌 뿐이다. 아만틀라의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 내 편을 들어라! 피피틀란의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 내 편을 들어라! 전쟁을 한다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다. 내 편을 들어라! 틀라카엘렐은 목테수마 1세에게 대신전의 봉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양의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라. 왜냐하면 신전이 완공될 때 제막식을 거행할 남자가 부족하지는 않을테니까. 나는 그 이후로 해야 할 바에 대해 오랫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먼 훗날 할 것이라면 지금 당장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은 우리가 전쟁 을 치를 기회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이 군사를 이끌고 식사에 필요한 제 물들을 사러 가기에 편리한 시장을 찾자 우리 민족이 배가 고플 때 따끈따끈한 옥수수빵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면 우리의 시민들도 적들의 피와 머리 와 심장과 생명, 그리고 보석과 비취와 화려한 깃털을 구입하여 그것들을 존경하는 우이트 실로포츠틀리신에게 봉헌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틀라카엘렐이 말하노니 이 시장을 틀락스칼 라, 우엑소트신고, 촐롤라, 아틀릭스코, 틀릴루키테펙, 테코악에 세우거라, 요피트신코, 미초 아칸, 우악스텍, 기타 우리의 지배 아래 있는 바닷가처럼 먼 곳에 시장을 두려면 우리의 병 사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그 고장들은 아주 먼데다가 우리의 신은 그 야만인들의 육체 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들은 야만인들의 육체를 희고 딱딱하고 맛없는 빵으로 생각한다. 야 만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장과 장터를 앞서 말한 여섯 도시국가에 위치시킨 것은 앞을 내다본 생각이라 하겠다. 그 도시의 주민들은 우리의 신에 게는 화덕에서 막 꺼낸 말랑말랑하고 맛좋은 따끈한 빵과 같다. 그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벌 인다면 그 도시들을 파괴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신이 맛 있는 음식을 원할 때 그것을 구하러 시장에 갈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레온 포르티야((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공물 테노치티틀란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무기 등 온갖 종류의 공물을 멕 시카족에게 바쳤다. 일용할 양식마저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은 아들과 딸이라도 헌상해 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초록색,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 혼합색 등 다채롭고 종류가 다양한 상당량의 깃털들을 공물로 바쳤다. 그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카오 와 흰색과 노란색의 거대한 면직류 다발을 공물로 진상했다. 모포는 흘러 넘쳤다. 지역 사정 에 따라 두서너발에서 스무 발까지 크기는 천양지차였다. 부유한 제후들의 모포는 색다른 방식과 공정으로 아주 화려하고 멋지게 만들었다. 가장자리를 다른 색깔과 깃털로 장식한 것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문장이 있는 모포, 뱀의 머리, 사자의 머리, 태양을 그린 모포도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머리나 취관, 우상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었다. 모두 다 천연색 실과 아주 가늘고 폭신폭신하며 멋지고 이국적인 오리와 거위 깃털을 섞어 제작했다. 그 지방에 는 비단이 나지 않았지만 면의류에서는 호기심과 아름다움, 정성과 기품이 물씬 배어 나오 고 있었다. 또한 치치멕족이 바친 용설란실로 짠 모포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부드럽게 색칠 을 하고 금빛 독수리와 갖가지 무기와 기호가 그려진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수량도 풍 부했다. 그 민족들은 멕시카족에게 진귀하고 깃털이 많은 새를 산 채로 공물로 바쳤다. 그중 에는 초록색 깃털이 달린 새가 있는가 하면 붉은색, 파란색의 깃털이 달린 새도 있었다. 공 물로 바친 새를 살펴보면 앵무새, 독수리, 커다란 오리, 매, 황조롱이, 까마귀, 왜가리, 거위, 커다란 거위 새끼 등 기품있고 깃이 아름다운 새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들짐승들과 사 자 호랑이 살쾡이 같은 맹수들도 우리에 넣어 공물로 바쳤다. 아울러 독사든 아니든, 야생뱀 이든 집뱀이든 뱀도 공물로 바쳤다. 공물로 바친 뱀과 작은 동물들이 솥에 들어 있는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군주들이 지네나 전갈, 거미를 공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생명체의 주인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그들의 소 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공물로 바쳤을까? 그들은 바다 에서 나는 온갖 종류의 조가비를 공물로 바쳤다. 국자가리비, 달팽이 요상한 모양의 물고기 뼈, 민물거북과 바다거북의 껍데기, 진주, 호박, 화강암 같은 바닷돌, 황토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연초록색 돌, 염료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나카스콜로틀, 사 틀락스칼리 같 은 해초, 유산염, 소방에서 추출한 온갖 염료..... 어떤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컵을 공물로 바 쳤다. 어떤 것은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은 세공을 했고 어떤 것은 금박을 입혀 희한 한 그림을 곳곳에 그려 넣기도 했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중에는 세 공술이 뛰어난 것들도 있다. 그들은 주발도 공물로 바쳤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오늘날 식 탁으로 음식을 나르거나 손을 씻는 데 사용하는 커다란 접시나 은접시처럼 커다랗고 장식이 없다. 놀랍게도 자그마한 냄비처럼 손잡이가 달린 잔도 공물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지 방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의류, 속옷, 속치마를 공물로 바쳤다. 그들은 옷을 만드는 솜씨 가 뛰어나서 화려하고 모양이 다르게 수를 놓는다거나, 어깨 부분에 깃털을 꼽는다거나, 색 실로 커다란 문장을 그린다거나 했다. 등 부분에는 장미나 독수리 또는 깃털을 섞어 꽃문양 을 그려 넣었는데 그 모습은 보는 이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뛰어난 솜씨로 화려하게 만든 속치마는 비쌌기 때문에 영주나 귀족부인들이 주로 입었다. 신전에서 일하는 젊은 여인들과 노파들이 입는 흰색 옷도 공물로 바쳤다. 또한 하인들이 입는 용설란 실로 짠 여성의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물은 지방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종류와 디자인이 다양한 돗자리도 공 물로 바쳤다. 종려나무로 짠 것도 있었고 해초로 짠 것도 있었으며 반짝거리는 짚으로 짠 것도 있었고 등나무로 짠 것, 늪에서 나는 풀로 짠 것 등 각양각색이었다. 돗자리를 짜는 재 료로 만든 의자와 세공된 등받이도 공물로 바쳤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그 고장에서 경작하 는 옥수수와 강낭콩, 치아, 우아우틀리, 피멘토를 공물로 바쳤다. 그것들은 스튜요리를 할 때 썼는데 요리 방식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맛도 달랐다. 그들은 많은 양의 호박도 공물로 바쳤다. 다른 부족들은 집과 신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돌, 석회 , 나무, 판자 및 대들보를 공물로 바쳤다. 다른 지방에서는 사슴과 토끼, 메추라기를 공물로 바쳤다. 그중 어떤 것ㅇ느 익히지 않은 것도 있었고 구운 것도 있었다. 그들은 산에서 자라는 커다란 들쥐, 두더지, 족 제비를 공물로 바쳤다. 어떤 사람들은 석쇠에 구운 대하, 개미, 날개가 달린 커다란 개미, 매 미, 땅에 사는 작은 짐승들을 공물로 바쳤다. 또한 석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석호 주변에 서 자라는 모든 것들을 공물로 카였다. 심지어는 진흙과 호수 위를 날아 다니는 파리, 옴벌 레와 유충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에라 칼리엔테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경우처럼 과일을 수확하는 부족들은 그 지역에서 나는 모든 과일, 즉 파인애플, 바나나, 번려지 열매를 공물 로 바쳤다. 다른 지역에서는 온갖종류의 사포딜라 열매, 노랗고 까맣고 하얀 오얏나무에서 나는 열매, 아보카도, 두세 가지 종류의 감자를 공물로 바쳤다. 그 지역에서는 또한 날마다 수천 가지 장미를 공물로 바쳤다. 티에가 칼리엔테에서는 향이 강한 장미, 그윽한 향기가 나 는 장미 등 수천 가지 종류에 달하는 장미를 경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미를 뿌리째 옮겨 와 영주의 집에 심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아스텍의 영광과 권위를 과시하고 군주 자신이 물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에 이름을 주고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 금까지 이야기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관계된 것 이외에도 솜을 두텁고 촘촘하게 넣어 화살 과 창을 맞아도 끄떡없는 갑옷을 공물로 바치는 지역도 있었다. 그들은 검으로 뚫을 수 없 는 단단하고 두터운 막대기로 만든 방패를 공물로 바쳤다. 방패의 앞면은 온갖 색깔의 깃털 로 아름답게 장식을 했다. 아름답게 장식한 갑옷과 과거의 사적과 군주들과 우상을 재현한 것들은 유물과 과거의 행적 및 군주들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 들은 커다랗고 두꺼운 활과 크고 작은 화살을 공물로 바쳤다. 또한 투석기용으로 정교하게 간 둥근 돌과 투석기, 칼을 만들 수 있는 검고 흰 금속판, 화살촉과 투창용 부싯돌을 공물 로 바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스텍에 공물로 바쳤던 것은 그 땅에서 날 수 있는 것이라 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꿀과 벌집, 흰 꿀단지와 갈색 꿀, 등잔용 불씨와 나무진, 검정과 황적색을 몸에 바르기 위한 그을음 등도 공물에 포함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것이 나 지 않는 지역에서는 젊은 부인과 소년, 소녀를 공물로 바쳤고 군주들은 그들을 식솔로 거느 렸다. 그들은 노예가 되었다. 여자 노예들은 거의 모두 첩으로 간주되었고 노예의 자식들도 노예가 되었다. 권리를 주장하는 싸움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꽁무니 를 빼며 이렇게 말한다. 저녀석은 노예의 자식이란 말이야. 이것은 그 사람이 예전에 공물로 바쳤던 첩이 낳은 자식들이라는 의미이다. 디에고 두란((신스페인 인디오의 역사)) 틀라텔롤코 사망 멕시코에 상륙한 진 사흘이 지난 뒤 코르테스는 어떻게 하면 목테수마를 만날 수 있는지 수소문 했다.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리고 그는 도시를 질주하면서 도시의 풍요로움에 연방 감탄을 늘어놓았다. 코르테스 곁을 떠나지 않았던 베르날 디아서 델 카스티요는 다음과 같 이 기록했다. 그때까지는 꿈에도 본 적이 없었던 광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과 산 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물건 들은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었고 통제도 훌륭했다. 우리와 동행했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 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물건들은 종류에 따라 지정해 준 곳에 쌓여 있었다. 금, 은, 보석, 깃 털, 피륙, 자수품이 맨 앞에 진열되어 있었고 이어 노예시장이 있었다. 포르투칼인이 기니에 서 끌고 온 노예 숫자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노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에 고리를 달아 묶어 놓았다. 그중에는 목에 사슬을 차지 않아 자유롭 게 행동할 수 있는 노예들도 섞여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건너온 상인들이 면직물과 털실로 짠 의류를 팔고 있었는데 초콜릿을 파는 상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에는 신스페 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상인들은 다 있는 셈이었고 모든 상품이 질서정연하게 구비되어 있 었다. 그곳은 장이 설 때 지정된 장소에서 상품을 파는 나의 고향 메디나 델 캄포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사이잘삼으로 만든 피룩과 밧줄 그 고장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사이잘삼으로 만든 샌들, 푹 삶으면 단 맛을 내는 식물 뿌리 식물에서 추출해 낸 여러 가지 양념들을 파 는 사람들이 시장의 다른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호랑이 사자 수달 표범 노루 오소리 가죽을 팔고 있었다. 그중에는 무두질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전혀 가공되 지 않은채로 팔리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지방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이를 테면 강낭콩, 치아, 채소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또 닭 오리 등을 파는 상인들도 시장에서 한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내장요리 등 익힌 음식을 파는 아주머니들과 과일장수도 있었다. 그들도 역시 지정된 장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조그만 단지에서부터 아주 커다란 항아리 까지 구색 을 갖춘 독 장사 구역도 있었다. 꿀, 사탕, 누가처럼 생긴 엿을 파는 장사치도 눈에 띄었다. 어떤 구역에는 목재, 널빤지 낡은침구, 도마와 식칼, 걸상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불쏘시개로 좋은 소나무 장작 등을 파는 장수도 물론 한족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 의 배설물을 가득 실은 보트도 팔고 있었다는 것도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은 보트를 강 어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워 두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짐승의 가죽을 무두질 하는 데 거름을 사용해야 하며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가죽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 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읽으며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짐승가죽 은 정말로 인간의 배설물을 이용하여 무두질 되었다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그 고장에서는 용변을 보고픈 사람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용변을 볼 수 있도록 길가에 갈대와 짚 또는 풀 로 화장실을 만들어 배설물이 한 곳에 모이도록 조치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나는 그곳에서 파는 모든 물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열하고 싶었다. 사실 물품의 숫자와 종류 가 너무 많아 그것들을 다 둘러보고 자세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 여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해 끝내 아쉬울 뿐이다. 더군다나 그 거대한 장소에는 사람들이 북 적거렸고 천막이 빼곡했다. 그래서 단 하루만에 모든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 리는 신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전의 안마당에 거의 다다랐을 때 우리는 광산에서 캐낸 그대로 금 원석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다. 금 원석은 그 고장에서 나는 거위깃털로 만든 조 그만 튜브속에 들어 있었는데 내벽을 통해 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튜브가 투명했다. 튜브 의 길이와 두께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값으로 따지자면 상당량의 피륙 카카오 수만 개 수많은 노예와 시장에서 파는 다른 물건을 합친 가격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마지막 으로 그 시장을 떠나야 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아스텍 사회의 예술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아스텍 사회에서는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사아군의 정보제 공자들은 그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노래를 수집했다. 여기에 그중 네 가지를 소개한다. 깃털 세공인 -그는 완벽하다 그는 얼굴과 마음의 주인이다. 뛰어난 깃털 세공인은 능수능 란하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사람들의 욕망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그는 깃털을 제공한다. 깃털을 고르고 다듬고 색칠하여 하나의 예술품으로 묶는다. 서투른 깃털세 공인은 부주의하다. 그는 사물의 외양을 무시하며 탐욕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을 깔본다. 수 의에 싸인 심장을 가진 칠면조처럼 활기 없고 거칠고 허약하다. 그가 만든 것은 형편 없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은 모두 망가뜨리기만 할 뿐..... 화가- 뛰어난 화가는 톨텍의 예술가이다. 그는 붉고 검은 잉크, 검은 물로 모든 것을 창조 한다. 뛰어난 화가는 현명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신이 살아 있다. 그는 마음으로 사물들을 예찬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색깔들을 알고 있다. 색을 응용할 줄 알 며 사물의 모습을 변화시켜 어렴풋한 형체를 만든다. 그는 발과 얼굴을 그리며 음영을 주어 완벽하게 마무리 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색을 칠한다. 마치 톨텍족인 것처럼 도 공-그는 찰흙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그는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다. 그는 모형을 만든 다 음 찰흙을 반죽한다. 뛰어난 도공 그는 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다. 그는 찰흙을 속이는 방법 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찰흙에 생명을 부여하고 창조한 다. 그는 톨텍족인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손은 날래다. 서투른 도공 그는 서툴 다. 그의 기술은 절름발이마냥 신통하지 못하다. 대장장이-여기서는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진귀한 금속들을 주조했는지 들려줄 것이다. 그들 은 석탄과 밀랍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노란색으로든 흰색으로든 무언가를 소묘하고 창조했 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들은 예술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들이 생물의 모습을 주조할 때 그들 이 동물의 모습을 주조할 대 유사점을 찾아냈다. 그들은 삶을 모방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상 을 금속으로 표현했다. 이웃 부족인 우악스텍족이 코걸이를 하거나 얼굴에 투창모양의 장식 을 하거나 흑요석 바늘로 몸에 문신을 새겼을 때 그들은 석탄으로 주조하고 세공하여 다양 한 모습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만들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실체와 외관에 걸맞게 만들 어 냈다. 만약 그가 거북을 만들려고 한다면 석탄으로 세공하고 다듬는다. 거북의 등껍데기 는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삐죽내민 머리, 목과 발은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다. 만약 그 가 진귀한 금속으로 새를 만들려고 한다면 석탄으로 깃털과 날개와 꼬리깃과 발모양을 다듬 어 낼 것이다. 만약 그가 물고기를 만들려고 한다면 석탄을 세공하여 비늘과 지느러미를 달 고 꼬리 지느러미를 조각할 것이다. 만약 그가 메뚜기는 도마뱀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의 손 은 그 모습들을 궁리하여 그에 따라 석탄을 세공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석탄을 조 각했다. 조그만 동물이다 씨앗만한 크기의 낱알이 춤을 추듯 부드럽게 흔들리는 금 목걸이 일지라도 아름답게 채색하고 꽃들로 장식한 경이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레온 포르티야((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인간 희생 의식-아스텍의 그림문자 멕시코의 구전 스페인 정복자들의 연대기 등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아스텍인에게 인간의 대량 희생 은 관례화되어 있었다. 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을까? 당대의 기록 한 가지와 두 명의 현대 작가들의 해석을 소개한다. 아스텍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대규모 인신공양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아들들을 제물로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피루 사람들은 멕시코 사람들 보다는 나았다. 왜냐하면 나는 멕시코인이 그런 짓을 습관적으로 저질렀다고 씌여있는 문서 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형한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이 행한 끔찍한 방법을 비교해 보자면 피루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으며 그 방법도 훨씬 잔인했다. 그들은 아마도 세계 어떤 민족보다 많은 사람을 잔인하 게 처형했을 것이다. 악마에 사로잡혀 그 맹목적인 사람들이 저지른 불행한 사건을 보고하 기 위해 나는 그 지역의 비인간적인 관습을 폭넓게 조사할 것이다. 먼저 그들이 처형한 사 람들은 전쟁포로들이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없었더라면 태양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리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그들은 포로제물이라 불렸고 전쟁의 승리로 얻은 제물이었기 때문에 거의 적에 속하는 희생제물이라고 불렸다. 두 용어 모두 제물을 가리키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멕시코인은 포로들을 우상에게만 봉헌했다. 그 들은 일반적으로 제물에 쓸 포로들을 포획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 따라서 적과 전쟁을 치를 때에도 그들은 적을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죽이지 않고 생포하려고 애썼다. 이것이 마르키스 델 바예 후작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목테수마의 답변 내용이었다. 후작은 왕 에게 그처럼 막강한 힘이 있으며 수많은 지역을 점령하고도 지척에 있는 틀락스칼라 지방을 점령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목테수마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틀락스칼라를 합병하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멕시코의 젊은이들이 게으르고 흥청망청한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멕시코 젊은이들이 해야할 일을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중요한 이유인데 신에게 바칠 제물을 포로로 데려오기 위해 그 지방을 점령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제물을 바쳤던 방 식은 죽은 사람들의 머리로 만든 울타리 위에 제물로 바칠 사람들을 집결시키고 울타리 아 래에서 수많은 근위병들이 지키는 가운데 그들을 일렬로 늘어 세워 놓고 제식을 행하는 것 이었다. 가장자리에 술을 단 장백의를 입은 사제가 꿀로 반죽한 근대와 옥수수나무로 만든 우상을 들고 신전 꼭대기에서 내려왔다. 우상의 눈은 진주를 박아 만들었고 이는 옥수수를 박았다. 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신전의 계단을 내려와선 마당 한 가운데 있는 거대한 십자 가 위에 고정된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 바위는 독수리의 돌을 의미하는 카욱시카이 라고 불렀다. 사제는 십자가 앞으로 난 조그만 층계위로 올라갔다가 다른 쪽에 위치한 층계 를 이용하여 내려왔다. 그는 우상을 팔로 감싸안고는 제물로 바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 로 올라갔다. 그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오가면서 모두에게 우상을 보여 주면서 말 했다. 이것이 그대의 신이오 그가 우상을 보여주고 나서 다른 쪽 층계로 내려오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열을 맞추어 그들이 제물로 바쳐질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그곳에는 제 사 의식을 집행할 집행자들이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처형방식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앞가슴을 칼로 자르고 살아숨쉬는 심장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 은 제물을 신전 계단으로 굴려 떨어뜨렸고 제물의 몸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제식 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여섯명의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기 위 해 제물대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네 명은 제물로 바치는 사람의 사지를 붙들고 한 사람은 목을 나머지 한 사람은 칼로 흉부를 가르고 제물의 심장을 꺼내는 일을 맡았다. 그 들은 차찰무아라고 불렸는데 성스러운 일을 집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성스러운 일을 집행하는 사람은 최고위직에 속했다. 그들은 높은 존경을 받았으며 귀족처럼 그 직을 세습 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 중 여섯 번째로 제물을 죽이는 집행자는 사제나 교황 같은 존재 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제물을 바치는 시기나 의식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그 들이 어떤 시기에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나오느냐에 따라 의상도 달랐다. 그 직을 맡고 이 쓴ㄴ 사람은 파파와 토필신이었다. 그는 가장자리에 술이 달리고 로마 황제나 귀족이 입었 던 백의 처럼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긴 옷을 입었다. 머리에는 초록색과 노란색 깃털 로 장식한 왕관을 썼고 귀에는 초록색 돌을 박은 금 귀걸이를 했고 입술아래 턱 한가운데에 는 파란색 돌 조각을 달고 있었다. 여섯명의 제물을 마치는 사람들은 얼굴과 손을 새까맣게 칠하고 나타났다. 다섯 사람의 머리는 곱슬곱슬하고 헝클어졌으며 머리에는 가죽띠를 두르 고 이마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칠한 조그만 종이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검정실로 세공 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장신구로 치장하고 악마처럼 옷을 입었다. 사앇한 표정을 지 으며 나타나는 그들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최고 집행자는 규석으로 만 든 RMx이 뾰족하고 넓적한 커다란 칼을 들고 있었다. 다른 사제는 뱀모양으로 세공한 나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여섯 명 모두 우상앞에 무릎을 꿇고 앞에서 우상의 침실문앞에 놓인 것으로 기술했던 피라미드 모양의 돌 앞에 도열했다. 그 돌은 끝이 아주 뾰족해서 제물로 바칠 사람의 등을 찔러 돌에 고정시킨다음 칼로 손쉽게 제물의 가슴을 절개할 수 있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모두 나타나면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 즉 그 제식에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을 감옥에서 데려왔다. 근위병의 엄호 속에 그들은 긴 계단을 올라가 발가벗 긴 채 한 줄로 늘어섰다. 의식 집행자들앞에 한 사람씩 지나가면 여섯 명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다. 한 명은 오른쪽 다리를 다른 한 사람은 왼족 다리를 두 사람은 한 손씩을 붙들었고 그를 뾰족한 돌에 찔러 등을 고정시킨다음 다섯 번째 집행자는 그의 목에 목걸이를 던졌고 최고 집행자는 칼로 민첩하게 가슴을 절개하고 손으로 심장을 꺼냈다. 그 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심장을 태양을 향해 들어 보이고 그 온기와 훈김을 태양에게 바쳤다. 그러고 나서 그는 우상쪽으로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향해 심장을 집어던졌다. 의식이 끝나 면 그들은 제물의 몸을 층계로 굴려 버렸다. 돌과 층계사이의 간격은 두 걸음도 채 되지 못 해서 그 일은 간단히 끝났다. 한 걸음만 옮기면 그들은 시체를 층계바닥으로 굴려 버릴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늘어선 사람 모두를 제물로 바쳤다. 그들이 죽으 면 층계바닥으로 내팽개쳤고 그들을 생포한 사람들이 시체들을 모아다가 균등하게 분배한 다음 태양신을 한양하면서 먹어 치웠다. 포로를 잡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물로 바치는 사람의 수는 아무리 적을 때라도 사오십명을 넘었다. 인근 부족들도 모두 멕 시코인의 제식과 의식을 모방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호세 데 아코스타((인디오의 자연사와 정신사)) 아스텍인의 제식을 보는 두 가지 현대적인 시각 수스텔의 목적론적인 관점은 제식행동과 이념적 표상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전제한다. 태양신의 자양분인 인간의 피는 우주의 동력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멕시코에서의 제식 의 확장은 생래적인 잔혹성이 유래되고 갈수록 악화되기는커녕 반대로 풍속의 완화로 특징 지워지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발전과 일치한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역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역설이라고 해서 회피할 수는 없다. 공인된 사실들이 그 점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바에야 고대 멕시코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문명의 중력의 장에서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을 성싶다. 그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과 사물에 대한 개념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세계 태 양의 운동 계절의 변화는 성스러운 물, 즉 인간의 피를 바쳐 생명에너지를 공급해야 유지되 고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미 네 개의 세상 네 개의 태양이 대 재앙이 일어나 소멸 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재앙을 받아 소멸할 것이다. 인간, 특히 태양의 종족 아 스텍 부족은 우주적 사명을 완수해야 하며 이 세상이 소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새벽에 태양이 다시 뜨는 것은 전사들과 사제들이 자양분, 즉 제물들의 피와 심장을 바쳤기 때문이 다. 이런 생각은 빈틈없이 완벽한 논리로 무장하고 가장 극단적이고 끔찍한 결론인 피비린 내 나는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이 다른 우주관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더 잔 인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분석하기 어려운 부분은 자연현상의 연속성과 피의 헌납간의 관 계이다. 우리는 그 개념을 하나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문화를 특징짓는 집 이나 장신구 또는 의복의 형태나 특정한 언어에서의 음소 사용을 하나의 주어진 것으로 인 정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필연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운명의 불가사의에 직면 사여 운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방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시대의 어떤 민족이 여러 가지 세계관 중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세계관을 선택 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다른 종족들 테오티우아칸과 팔렝케 사람들은 다른 세계관을 선택했 다. 마르크스의 방법에 EK라 사회경제적인 하부구조로써 문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상부구 조를 설명하고자 함은 분명 하황된 일이리라. 자크 수스텔 ((네 개의 태양))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은 수많은 전문가들을 당혹스럽게 만 들었다. 혹시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인구통계학적인 다른 원인들 때문에 그런 살육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 대해 허황된 계획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 분명한 일원론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멕시코 중앙 고원 지대에서 희생의식들이 거행되어야 했던 일반적이 배경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이고 고고학 적인 자료들을 토대로 볼 때 그 시기는 두 가지 동요가 일어난 시기와 일치한 다. 먼저 툴라 근처에 도착한 멕시카 족은 오래 전부터 농경행활을 영위해 왔던 그곳 원주 민들의 농토를 넘보게 되었다. 자신들의 목초지를 빼앗기고 남하해 온 옛 수렵민들은 어쩔 수 없이 토착 토지 소유민들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북쪽 대 평원의 접 경지대인 멕시코 계곡 주변 지역은 병목지대였던 까닭에 토지 부족 현상이 발생했으며 인구 밀도가 증가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주와 분산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치치멕의 부족들 사이에 상재하던 불화가 여러 종족이 뒤섞여 살아가야 하는 혼돈 속에서 악화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북쪽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은 생활터전 을 차지하기 위해 한 편으로는 서로 싸워야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토착민과 투쟁해야 했 다. 멕시코 중앙 고원지대에 팍스 아스테카가 이루어지기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조직적으 로 수행된 전쟁의 부수물인 인간 희생의식은 자연스레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게 되었고 이념전 전제로 작용했다. 크리스티앙 뒤베르제((아스텍의 기원)) 정복의 행복과 불행-1519년 3월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의 해안에 상륙했다. 1519년 11월 8일 전쟁에 이긴 스페인 병사들이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다. 1520년 6월30일에 쫓겨난 그들 은 1521년 5월 30일 그곳을 다시 포위했다. 8월 13일 방어군이 항복한다. 비전 꿈 그리고 만남 스페인인이 도착하기 직전에 아스텍 제국은 목테수마 통치의 종말을 알리는 수많은 소문 들에 휩싸여 있었다. 불길한 전조 중에서 희생제식에 쓰이는 거대한 바위가 입을 열었던 일 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아프카포트살코왕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이 굴림대와 연장을 챙 겨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돌은 조금도 움직일 기 미를 보이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 가엾은 인간들아 왜 너희들은 쓸데없는 짓을 하느 냐? 멕시코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목테수마에게 이르거라 더 이 상 시간이 없으며 결정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나를 옮기려 했다면 이전에 그렇게 했어야만 했고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것이므로 내가 더 이상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목테수마여 운명에 거역하지 말아라 내가 왜 그곳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곳에 가서 파멸과 멸시를 겪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목테수마의 권력과 통치는 끝났으 며 세상만사를 결정하시는 신보다 더 위대해지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에게 곧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이르거라. 내가 움직인다면 너희들 모두 불행에 처하게 될 터이니 나를 가만 놔두 어라. 목테수마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그 이야기를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 나 곧 의혹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모두 다 심지어 노인들의 꿈에서까지라도 이방인들이 쇄 도하고 목테수마가 죽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예언자들과 주술가들이 그 불길한 전조를 확인시켜 줄 것인가? 통치자들과 마을의 지도자들은 예언자, 주술가, 점쟁이, 마법사들을 불 러 모았다. 왕이시어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 저희들을 부르셨는지요? 왕이 말했 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내가 왜 그대들을 불렀는지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그대들이 나 의 왕국과 신하들에 대하여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꿈꾸었는지 알고 싶소 그대들은 어두운 공간을 조사하고 산맥을 질주하고 물의 수수께끼를 통찰하고 하늘의 움직임과 별의 운행을 살피는 능력이 있지 않소 부디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잇는 그대로 말해 주시오 그들이 대답했다. 왕이시여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왕께서 묻는 것 에 대해 전혀 본 바도 들은 바도 꿈꾼바도 없습니다. 목테수마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들 의 직업은 그렇다면 협잡과 거짓말을 일삼고 과학자인것처럼 꾸미고 미래를 아는 것처럼 너 스레를 떨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으며 산 속 깊은 곳과 지구 중심에 감추 어져 있는 것에 접근할 수 있고 물밑, 동굴 속, 지층의 갈라진틈과 구멍 및 샘의 분출안에 잇는 것을 본다고 주장함으로써 세상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란 말이오? 그대들은 스스로 밤 의 자식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소?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단 말이오? 그는 격분 하여 병사를 불러 그들을 포박하여 투옥시키고 그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건장한 병사에 게 감시하도록 시켰다. 감옥에 갇힌 점쟁이와 주술가들은 절망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희열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늘 싱글벙글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목테수마는 부하들을 보내 아는 것을 털어놓으면 자유롭게 풀어주겠노라고 했다. 목테수마 가 자신에게 닥칠 불행한 운명을 알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하늘의 별과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알아낸 것을 알려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해석은 이제껏 아무도 겪어 보지 못한 운명을 목테수마가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울분과 노여움을 터뜨리면서 가장 연로한 죄수가 세상사람들 앞에서 소리쳤다. 나는 목테수마에게 일어날 일을 단 한 마디로 말하고자 한다. 그가 우리에게 가한 모욕과 고통을 복수해 줄 사람들이 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곧 닥칠 일이니까. 코르테스의 소규모 군대가 상륙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자 목테수마는 그들이 바로 예언에 등장했던 사람들이라고 서둘러 그들을 영접하러 나갔다. 코르테스의 도착이 임박했다고 알리자 그는 가마를 타고 코르테스를 맞으러 나갔다. 멀리서 코르테스가 보이자 그는 그물 침대 밖으로 내려와 땅바 닥에 엎드렸다. 그것을 보고 돈 에르난 코르테스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시하며 왕을 포옹 했다. 목테수마도 똑같이 행동했고 머리를 조아리며 비굴하게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는 귀 족에게서 훈장 비슷한 모양을 한 금에 진귀한 돌을 박아 만든 화려한 금목걸이를 건네 받 아 코르테스의 목에 걸어 주고 장미모양으로 세공한 특이한 깃털장식을 건넸다. 뿐만 아 니라 장미꽃다발을 목에 걸어 주고 머리에는 장미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큰길가에 위치한 토시 여신의 신전으로 갔다. 거기서 왕과 코르테스는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넥스코코의 왕과 타쿠바의 왕이 소개되었다. 그들은 코 르테스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들의 지위에 맞는 목걸이와 장미를 헌사했다. 그들에 이어 왕국의 귀족들이 코르테스를 알현하고 우이트실로포츠틀리 신에게 바치는 의식과 경의를 목 테수마와 코르테스에게 바쳤다. 기나긴 문안인사가 끝나자 목테수마는 마리나의 통역으 로 코르테스에게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는 코르테스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기뻤다. 그는 코르테스가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 썩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정권을 잡고 신 하들의 충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 케트살코아틀신이 남겨준 왕국을 통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만약 지금이라도 신이 왕위를 되찾으러 온다면 그는 신을 섬기고 기꺼이 권좌에서 물러날 작정이었다. 코르테스가 원해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한다면 목테수마는 권좌를 내놓을 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저 목테수마를 만나기 위해 왔을 뿐이라면 그는 충 심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마음 가득히 기쁨과 희열을 느꼈다고 말하리라. 만약 그가 휴식을 원하고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면 신하들이 정성껏 그를 보살피리라. 목테수마는 그 순간부터 폐하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며 충성을 바쳤다. 그는 카톨릭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자그마한 신전에서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 후에 코르테스는 말을 타고 왕은 올 때처럼 귀족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멕시코 시티로 떠났다. 디에고 두란((신스페인에서 있었던 몇가지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에르난 코르테스가 말하는 멕시코 점령기 신처럼 환대를 받은 코르테스는 대신전의 우상들을 파괴했다. 목테수마가 그에게 충성을 우상들을 파괴했다. 목테수마가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무력으로 멕시코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왕 카를로스 5 세에게 보고한 모험담을 보자.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는 석호와 단단한 대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정 박할 계획을 세운 연안에서 도시까지의 거리는 8km였습니다. 그 도시에서는 네 개의 문이 있었는데 창 두 개를 잇대 놓은 것만큼 넓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제방이 나 있었습니다. 스 페인의 세비야나 코르도바만한 대도시였습니다. 주요 도로는 아주 넓고 곧았습니다. 그중 몇 몇 도로와 간선도로는 카누가 다닐 수 있는 수로와 육로를 나란히 만든 운하였습니다. 모든 도로에는 운하가 흐를 수 있도록 통로가 있었습니다. 몇몇 통로 위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열 명의 기사가 나란히 줄지어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 다. 도시의 주민들이 저희를 배반하려 한다면 그들은 도시구조를 이용하여 쉽게 전쟁준비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곤궁에 빠뜨리기 위하여 틀림없이 다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저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병사 300명과 기사를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쌍돛대 범선 네 척을 단시간 내에 건조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도 시에는 아름답게 건축된 사원들과 신전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혀로는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높 은 성벽 안에다 1500명이 거주하는 도시를 세워도 될 성싶었습니다. 넓은 홀과 회랑이 있는 그 아름다운 건물의 성벽안에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40개 가량의 종 로가 우뚝 솟아 잇었는데 그중 제일 큰 것은 5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꼭대기에 이를 수 있 을 정도였습니다. 세비야에서 제일 높은 종루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사원에는 우상을 안치해 놓은 홀이 세 개 있었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나무와 벽에는 수많은 형상들이 부조되어 있었습니다. 조그만 문을 따라 홀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예배당이 있었습 니다. 예배당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사제들만이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예배당안에는 밖과 마 찬가지로 우상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부하들에게 제단을 뜯어내고 그들이 가장 경건하게 모시는 우상들을 계단으로 집어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희생제물이 흘린 피로 얼룩진 예배 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그 자리에 성모 마리아상과 성인들의 상을 놓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 일로 목테수마와 그 종족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 일을 중단하라고 탄원했습니다. 만약 그 소문이 다른 지역에 퍼지면 그 우상들이 재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 인디오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우상들을 파괴하면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다고 믿는 인디오들이 모든 경작물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저는 통역관을 시 켜 그들이 불경한 것으로 만든 우상에 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렸습니 다. 그들에게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고 저희처럼 그들을 또한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 으며 그 신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믿고 경배해야 할 대상은 우상이나 다른 창조물이 아니라 바로 그 신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엇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때까지 행해오던 인간희생제식 을 금지시켰습니다. 그것은 신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며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 한 폐하의 법에 위배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이후 그들은 그 제식을 중지했으며 제가 머무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을 살해하거나 제물로 바치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 자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커다란 통나무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전날, 페드로 데 알바라 도에게 시장에서 저를 기다리고 제가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 다. 군대가 한자리에 집결하고 배가 적들의 집 뒤로 쳐들어갈 준비를 마쳤을 때 소총소리를 신호로 집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 아스텍인을 몰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이 집 뒤로 뛰 어 내릴 것에 대비해 그곳에다 미리 배를 댓습니다. 그리고 타쿠바의 왕 과티모신의 이동을 감시하고 가급적이면 생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를 생포한다면 전쟁이 끝날 것이기 때문 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지붕 위에 올라가 알고 지내던 몇몇 영주들과 이야기를 나누 었는데 그때 저는 왜 황제가 오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무모하게 승산없는 전투 를 벌여 수많은 인명을 죽게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니 당신들이 가서 그를 모셔와라. 겁내 지 말고 그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이 황제를 찾아 나섰는데 잠시 후에 군 총사령관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열렬한 전쟁 옹호론자로 시과코아신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앞으로 일어날 상황들을 조목조목 설명했으나 그는 황제는 결코 백 기를 들지 않을 것이고 차라리 전쟁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 점이 가슴 저리도록 안타 깝지만 자신은 황제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그를 그의 부대로 돌려보내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는 전투를 치러 대량살육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성과없는 협상을 하느라고 다섯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죽은 시체들을 짓밟으며 도망치고 있었 습니다. 물속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습니다. 헤엄을 쳐 목숨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카누가 있는 깊은 물속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그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어 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줄을 서서 저희 쪽으로 넘어왔습 니다. 한시라도 빨리 위험을 모면하겠다는 생각에 물로 뛰어든 사람들은 시체더미 가운데서 질식해서 죽었습니다. 물에 빠져 익사하거나 기아와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는 5만명을 넘었습니다. 생존자들도 기력이 다 빠진 상태였고 시체를 물에 던질 여유조차 없는 듯했습 니다. 시체들은 거리 한 쪽에 쌓여 있었고 시체를 밟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 었습니다. 수많은 주민들이 저희 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저는 그들이 지나는 길목에 병사 들을 배치시켜 그들이 종족의 슬픈 잔해에 더 이상 집착을 보이지 못하도록 감시했습니다. 또한 인디오 대장들이 나서서 그들 부족들이 더 이상 아무도 살해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감 시해줄 것을 분명하게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바로 그날 그들은 1만 5000명 이상을 살해했던 것입니다. 주요 지휘관들은 애써 태연자약한체 했습니다. 그들 은 저희에게 비겁하고 구차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집 안 후미진 구석이나 심지어 물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그들이 투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포차 두 대를 전진 배치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차보다는 인디오의 잔혹함을 더 두려워하고 있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공격나팔을 불고 얼마 안 되어 그곳을 함락시켰 습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물에 수장되엇고 어떤 사람들은 저항 없이 투항해 왔 으며 배는 협로를 따라 카누 선단 한복판으로 치고 들어갔습니다. 카누 선단에 승선해 있던 전사들은 전투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다행스럽게도 가르시올긴선장 이 유력자들이 승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카누를 발견했습니다. 배 앞에서 두 세명의 사수 가 카누 위의 전사들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들은 저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 다. 황제는 그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카누로 뛰어들어 타쿠바의 왕 과티모신과 권 력자들을 생포했습니다. 올긴 선장은 항구 근처에 있는 제가 쉬고 있는 집으로 젊은 황제와 측근들을 데려왔습니다 제가 최대한의 호의를 보이며 앉을 것을 권하자 그는 저에게로 다가 와 자신과 측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저의 검을 잡으며 애원했습니다. "죽여주시오." 나는 해치지 않을 테니 겁내지 말라고 그를 위로 했습니다. 황제를 생포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전쟁은 1521년 8월 13일 화요일 성 이폴리투스 축일에 끝났습니다 .꼬박 75일만에 그 도시를 점령한 셈이었습니다. 그동안 병사 들이 겪은 고통과 위험과 불운을 폐하께서는 능히 헤아려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업적이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을 확신합니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에서 보낸 편지)) 정복되었지만 노예가 되지 않은 인디오 존경하옵는 각하, 먼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여기 당신 앞에선 우 리는 무지하지만 당신에 관해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 우리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누구 입니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통역을 시켜 우리는 대답하고 주변 사물에 대 한 우리 성스러운 신의 숨결과 말을 전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위기를 겪었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결국 죽어 사라질 존재입니다. 우리가 섬기던 신 이 이미 죽은 마당이니 우리도 죽여 없애 주십시오 당신은 우리가 만물의 주인이자 하늘과 땅의 주인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신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당황했소 심한 마음의 고통 을 겪었습니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우리 에게 생활규범들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을 진짜로 여겼고 예배와 존경을 바쳤 습니다. 바로 그 선조들이 우리에게 예배의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우 리는 입을 다물고 그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맹세를 하고 향을 피우고 희생제식을 올렸던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 온 원칙은 윌가 신을 통하여 살아가야 하고 신이 우리 를 지켜 주며 희생 제식을 통해 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 아직 캄캄한 밤입니다. 조상들은 신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마실 것과 먹을 것 옥수수, 강낭콩, 명아주, 샐비어 등 생명을 유지시키는 모든 것을 말입니 다. 우리는 신에게 땅에서 식물을 자랄 수 있게 하는 물과 비를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신들 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에는 언제나 신 록이 푸릇푸릇 돋아납니다.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틀랄로칸에는 기아도 질병도 빈궁도 없 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권위를 부여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신에 게 기원하고 빌었느냐고요? 그들은 권위와 권력과 영광과 명예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삶의 방식을 버리라는 말입니까? 치치멕과 톨텍 아콜우아 테파넥의 방식을 말입니까? 우리는 생명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 덕분에 지금껏 자손을 낳고 종족을 보존하며 살 수 있었는지 알고 있 습니다. 신께 어떻게 기도를 드리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 우리 민족을 불행에 빠 뜨리고 그들을 죽일 일일랑 아예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각하 부디 침착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필요한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우리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아직 평화 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평화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감 정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우리를 통치하고 전세계를 손아귀에 넣었습니 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정부를 빼앗아 간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곳 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들은 포로 신세입니다.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대 로 처형해 주십시오. 레온 포르티야 ((아스텍의 사상과 문화)) 기독교에 대한 저항은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었다. 이를테면 1537년 9월 14일 성오피스 법 정에서 안드레스 믹스코아틀이 한 진술이 그 증거이다. 내 이름은 안드레스입니다. 나는 기독교도입니다. 텍스코코에서 5년 전에 한 수도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성함을 모릅니다. 텍스코코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사들과 그 사도 들의 집에서 1주일 동안 교리문답 강의를 들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우상과 우상숭배 및 희생제식을 버리고 그들의 신을 믿으라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고백하거 니와 그들이 말했던 바를 실천하는 대신 나는 3년 전부터 그들의 설교가 거짓되며 내가 신 이고 인디오들은 나에게 희생제식을 바쳐야만 하고 우상숭배돠 희생제식으로 돌아가야만 한 다고 설교했습니다. 나는 대낮에 툴란신고 투투테펙 아판과 몇몇 다른 장소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테페우알코에서 나는 약 4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나는 밤새도록 향과 다른 물건들을 바치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 이튿날 비가 내리자 그들은 나를 신으로 받아들였 습니다. 추추멕족은 사제 한 명을 처형했습니다.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신과 주술의식을 바칠 때면 나는 선언했습니 다. 악마가 내게 다가와 "이런 저런 일을 하라."고 시킨다고 말입니다. 테페틀라오스톡에서 도 그런 일을 벌였습니다. 나는 의식을 집행했소 향을 바쳤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 다. 그 일이 있는 3년 전부터 그들은 나를 신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모든 지역에서 나는 마 세우알족에게 "만약 나를 신으로 받들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죽을 것이며 우박과 얼음으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 수도사들의 말을 믿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을 믿어야 만 한다. 다른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과거에 흠모하던 신들이 여러분을 구원했고 여러분이 필요로 했던 것을 주엇는데 왜 여러분은 과거를 포기하고 과거 를 잊으려 합니까? 수도사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기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구원해 줄 것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 의 선조들,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수도사들을 알았습니까? 우리의 조상들이 수도사들이 설교하는 것, 그들이 말하는 신을 보았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들이 준 것으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우리의 신입니다. 희생물을 바치십시오 단언하거니와 나는 수도사들 때문에 희생제식을 포 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S.그루신스키((멕시코의 인간신들)) 스페인 정복하에서의 마법과 융합-군대의 승리가 영혼의 지배를 보장해 준 것은 아니었 다. 16세기와 17세기에 수호신에게 바치는 봉헌과 신앙은 기묘하게도 기독교의 유일신 숭배 와 공존했다. 심령술사와 마법사 도밍고 에르난데스는 야우테펙강 좌안에 위치한 틀랄티사판 출신이었다. 하늘로부터 '질 병을 치료하는 권능'을 부여받은 이후로 그는 그곳에서 성자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17세기 초의 일이다. 그가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을 때 흰옷을 걸친 두 사람이 나타나 그를 먼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다른 병자도 한 명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러고 나서 그들은 그를 다른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고 또다시 그에게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너의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들은 벌써 네가 죽은 줄로 알고 슬퍼하고 있다. 이제는 편히 쉬거라. 모레, 다시 너를 찾아갈 것이다."바로 그 순간 정신을 차린 그는 가족들이 마 치 그의 숨이 벌써 끊어진 것처럼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3 일 후에 다시 나타났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를 데려가 환자 두 명을 보여 주고 는 예전처럼 그들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모아 조부모 네 식구들을 보고 싶으면 서두르 거라 그러나 그들이 너를 보더라도 절대로 그들의 말에 대답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그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될 것이며 생명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두 갈래 길 이 나타났다. 하나는 아주 넓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길 이었다. 다른 하나는 덤불과 등나무와 가시로 뒤덮인 좁고 험난한 길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우리 구세주의 길이라고 말해 주었다. 소수만이 좁은 길로 가고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을 택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들을 쫓아가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불가사의한 집에 도착했 다. 거기서 그들이 말했다. 시틀라마우이코야 주위를 잘 살펴보아라 취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여라 마음을 다잡고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저 들처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용설란 술을 포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3일후에 너는 이곳으 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네 집으로 돌아가라 그들은 벌써 너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 는데 너를 매장하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이어 이렇게 당부했다. 잘 들어라 가난하고 비천한 자여 세상에 돌아가면 너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말 을 가르쳐 주었고 그후로 그는 그 말로 아무리 위독한 환자라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러고 나서 그들은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정신이 들어 깨어 보니 사람들은 마치 그가 죽은 듯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 바로 그날 밤에 흰옷을 입은 세 명의 여자가 그를 찾 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 여인들과 주고 받은 말 중 몇마디를 털어놓았다.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자면 그 세 여인은 성모 마리아와 베로니카 그리고 한 명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 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의 주 예수가 그 환자를 체포했지만 자신은 그를 구해주고 싶다고 그러자 베로니카가 천조각을 이용하여 그에게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살아났고 아침부터 건강을 회복했다. 루이스 데 알라르콘((미신론)) 스페인 사람과 마법사 1665년 푸에블라 우상을 숭배하는 인디오의 재판에서 우아만틀라라는 스페인인이 진술한 증언 지금부터 6년전 산후안 익스텡고 마은의 후안코아틀 이라는 인디오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 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틀락스칼라의 시에라로 그를 따라갔다. 예 수 승천 이틀 전에 여인을 물리치고 금식을 한다면 많은 금과 은을 준다고 하길래 욕심이 생긴데다 그 인디오가 사악하고 미신적인 행동을 하지나 않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에 스페인 사람 한 명을 데리고 후안 코아틀과 함께 그 산으로 올라갔다. 암자처럼 보이는 오두막집에 도착하자 인디오는 오두막집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그러더니 나를 그곳에 남겨 두고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혼자 나갔다. 그는 금방 돌아오더니 깨끗한 마음으로 오지 않았다며 책망했다. 그 이유는 내가 약속한 금식을 어겼고 동생이 성당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약속했던 은을 주지 않았고 그곳의 주인은 노발대발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후일 나에게 상당한 재산을 주었다. 그 모든 것이 어리석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 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 인디오의 곁을 떠났다. 나는 넉 달 후에 그를 만나 왜 나를 부 자로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따졌다. 그는 내 동생이 성직자이기 때문에 산 이 노했다고 대답했다. 산의 노염을 풀기 위해 그는 칼데라라는 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수호신이 나타나서 우아만틀라와 산후안 주민들에게 화가 다 풀렸으며 더 이상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알리라고 했다. 그날 폭우가 내리면 그것을 신호로 알라고 했다. 인 디오의 말을 믿는다면 분명히 폭우가 내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사제로 여기고 있고 그는 결혼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달력을 보고 태어난 날에 다라 이름으 선잭함으로써 세례를준다고 말하는 것을 들엇다. 그는 남녀 인디오를 이끌고 틀락스칼라의 시에라로 올라 갔다. 푸에블라 주교구의 종교재판소에서 실시한 심문에서 밝혀진 진실 산후안에서 시행되던 옛 공물제도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서인지 그는 양초, 코펄향, 닭 을 거두어들여.....시에라 또는 틀락스칼라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카누를 이용하여 산 후안 익 스텡고로 내려올 수 있는 호수 옆의 동굴에 거처를 정했다. 그는 동굴 주변에 십자가 두 개를 세워 성소임을 표시했다. 동굴 입구에 초를 켜놓고 안쪽에 우상들을 모셨다. 거기에는 인디오 여인의 발 밑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는 젊은 토착민들을 그린 그림, 틸마를 입고 손 에는 막대기를 든 토착민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것말고도 그림이 두 장 더 있었는데 하나는 뱀 네 마리를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또아리를 튼 커다란 뱀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들은 후안 코아틀의 성소에 바쳤던 의류와 다른 우상들 옆에 있었다.....그는 다른 두 사 람과 함께 초와 코펄향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꼬박 하루 동안 우상에 게 기도를 올렸다..... 후안 코아틀이 저분이 생명을 주고 풍성한 수확과 재화를 주는 참신이 니 저 신을 빋어야만 한다. 저 신에게 당신이 성모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숭배해야한다고 말 했기 때문이다. (동굴에)올 때는 반드시 금욕을 하라고 다시 말해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 지 말라고 했다 만약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아무 때나 덤벼드는 개'로 취급당할 것이 라고 말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금욕을 하지 않았을 때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후안이 너는 아무 때나 덤벼드는 '정신나간 더러운 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가 자신들이 한 일을 알고 잇는지 깜짝 놀랐다. 코아틀의 부인에 다르면 산에 올라가야 할 때는 전날 밤 잠자리를 따로 한다는 것이었다. 인디오들은 신부 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후안이 자신을 만나러 온 아이들과 어른들을 책망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신부보다 더 권능이 있고 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 는데 신부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들을 믿는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S.그루신스키((멕시코의 인간신들)) 심령술사와 성녀 1761년 9월 11일 아우테펙에서 거행된 에카트신고 푸에블로 구역의 틀라콕스칼코마을에 사는 목동 안토니오 페레스(40세 가량)의 재판기록 지금부터 4년 전 아틀라틀라우칸의 관할에 속하는 테티시카약의 고메스 농장에 살고 있었 을 때 일이다. 나는 그 지역 도미니크회 수도사를 따라 예카픽스틀라 마을을 방문했다. 수도 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는 악마일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도중에 도미니크회 수도사가 내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미 저주가 내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 다. 증세에 따라 달걀, 비누 식용유 박하 토마토 껍질 등을 처방해야 한다고 했다. 심한 치 통을 포함해 모든 질병의 치료법을 알려 주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모양이 비슷한 테손 틀 여섯 개를 골라 쑥과 운향을 다린 물에 적셔 김이 날 때 테손틀을 꺼내 환자의 다리 사 이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치료하는 동안 나는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사도신경)을 외우고 -실제로 그는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끝에는 이렇게 기도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믿는 것은 첫째가 하느님이었고 두 번째는 초목이었다. 병세가 회복 되면 환자는 회개의 주문을 외웠다. 나는 그 모든 일을 했다. 왜냐하면 도미니크회 수도사가 그렇게 하라고 말했으니까. 그런 식을 나는 장티푸스 환자 막달레를 구했고 복통을 호소하 는 내 아내 아나 마리아를 치료했으며 다리에 외상을 입은 도밍고를 완치시켰다. 나는 벤투 라라는 화가에게서 6레알을 주고 예수그리스도를 그린 반자짜리 아주 오래된 그림 한 장 을 샀다. 그림을 집에 가져와 정성을 다해 깨끗이 닦았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 와서 꽃과 큰 양초 를 바쳤다. 그랬더니 아틀라틀라우칸의 신부인 돈 하신토 바렐라가 나를 체포했다. 신부는 나를 풀어주고는 집을 같이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달라고 했다. 그럴 준비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내가 그 그림과 함께 아틀라틀라우칸 해안가 협곡에 위치한 동굴에 있는 것이었 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중을 날아 옮겨졌던 것이다. 나는 잠시 동굴에 머 물다가 치말우아칸으로 가서 그 그림을 신부에게 넘겼고 신부는 그 그림을 교회 유리창 알 에 걸었다. 그런데 내가 봉헌물로 초와 돈을 받았다고 신부는 나를 꾸짖으며 교회 출입을 금지시켰다. 1주일 후 나는 사발레타에서 디에구이노를 만났다. 그는 함께 푸에블라로 가자 고애원했다. 그의 제안을 수락하자 갑자기 내가 화산 한가운데 수도사 옆에 있었다. 수도사 는 내게 예수 그리스도상을 빼앗겼다고해서 슬퍼하지 말라 다른 그림을 한 장 주겠다고 했다. 그는 유리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 얼굴을 주면서 그에게 노송나무로 몸을 만들어 주라고 명령했다. 이름을 모르는 화가의 도움을 받아 몸을 만들고 산토 엔티에로라 이름붙 였다. 그 예수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사도신경)과 신의 축복입니다를 암송했다. 체포당시 집에는 그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수도사는 또한 화산에서 무 지개를 찾으면 성모 마리아가 있으며 새로운 물방울 두 개가 치말우아칸에 나타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고지를 무시하고 1년 반동안 죽은 듯이 있었다. 시 간이 흘렀다. 나는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고 깨닫고 미겔 아파리시오, 파우스티노, 안토니오 데 라 크루 스와 파스칼 데 산타 마리아를 증인으로 동굴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화려한 망토를 입은 한 여인과 죽은 사람처럼 수의에 덮여 있는 시신을 보았다. 우리는 시신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사도신경을 10 번 외었다. 그 뒤로 아야카우이트상을 제작해 빛, 종려나무, 올리브, 백합 등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수도사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동굴안에 있는 여인과 죽은 것처 럼 보이는 시체를 모델로 해 상을 만들라고 했다. 우리는 그 상을 아우테펙 교회로 잠시 옮겼다가 다시 동굴로 가져갔다. 동굴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도구들이 있었다. 나 는 37명과 함께 그 일을 처리했다. 나는 그 상을 에카트신고의 다섯 사람과 동굴로 옮겼다. 내 아들 마테오와 펠리페 마리아 테레사 디에고와 이사마티틀란 출신 25명이 일을 거들었 다. 그중에는 세무원 페드로 파스칼 데 산타 마리아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 다. 그곳에 도착해서 나는 구덩이를 파 점토로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모든 도 구들을 꺼내 집으로 옮겼다. 파스칼 데 산타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 앞에서 우리는 묵주신공 을 드리고 신의 축복입니다를 암송했다. 우리는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바로 그때 신 부가 들어와 우리를 체포했다. S.그루신스키((멕시코의 인간신들)) 인간-신의 후손들 그 위대함과 비참함 4세기 동안 계속된 식민지 통치를 받아 사방으로 흩어지고 강탈당한 20세기의 인디오와 그 혼혈인들은 멕시코 시티의 경계선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오늘날 그들의 장래는 황량한 땅에서 죽어 가느냐 아니면 금지된 메갈로 폴리스로 이주하느냐에 달려있다. 멕시 코 인종학자가 수집한 인디오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전에는 멕시코 시티로 들어간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후스티노 에스키벨은 말한다."지금 멕시코 시티에서는 우리들이 일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장사를 한다든가 심지어는 우리 과 일나무에 석유를 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일자리를 주지 앟 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멕시코 시티로 들어가야만 한다. ""(도시에서는)우리를 몰아내고 벌을 가하고 옥살이를 시킨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도 그럴 것이다. 우르추르투(가혹한 조치를 하기로 소문난 시장)의 명령에 따라 거리를 배히 하거나 공원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쫓겨난다. '꺼져 똥강아지 같은 녀석들아!' 신분증명서가 없는 한 우리는 똥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언제 신분증을 발급해 줄 것인가? 우 리의 차림새 자체가 신분증이다. 다 떨어진 낡은 옷이 그 증거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라 우리가 풍요롭다고 말할 것인가? 이곳에는 아무런 생계 수 단이 없다. 그러니 멕시코 시티로 갈 수 밖에." 마을에서는 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사일이 얼마나 힘들며 비위생적인가를 항변한 다. 한 청년은 농사일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곳에는 일이 없습니다. 먹고 살길도 없고요 우 리는 십장과 아침9시부터 저녁9시까지 12시간을 일합니다. 비오듯 땀을 쏟으며 일한 대가로 10페소를 받습니다. 사카톤 뿌리(멕시코 사료의 일종)를 캐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입니다. 새벽6시에 시작해서 저녁6시에 마치고 집에 돌아갑니다. 몸은 먼지 투성이지요 뭐라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일이죠......그래서 우리는 멕시코 시티로 갑니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멕시코 시티로 갈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요." 혼 혈인 농부들에게는 다른 걱정이 있다. "20년 후면 아무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내 자식들이 우리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이죠. 그들은 농사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멕시코 시티로 갑니다. 그들은 공부를 해야겠지요. 정신으로 일자리다. 셍求?윌 기둬장뼉? 하굽 우리"쿡 대ㅍ탔막?읒┥휼링♣見?파 점ゎ끌 년뒷痢?캉 그父 예? 죕다뀝냇矗,리를 른다.낯颯팁?.駕윱면 악行8??綏? 육??도밍2.그거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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