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상처받은 여전사의 땅 지은이: 알랭 게르브랑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조윤정 제1장 천지에 널린 계피 빈센테 야네스 핀손(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 번째 항해 때 니냐호를 조종한 사람)이 아 마존 삼각주를 처음 본 것은 1500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후 400년 동안 '녹색의 지옥'으로 알려진 그 너머의 땅을 찾아 나서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대서양 쪽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라, 이주와 신기루의 꿈을 부르던 앙심 품은 땅, 안데스 고원에서 시작되었다. 1540년 12월 1일 곤살로 피사로는 위험천만한 여행을 마치고 키토에 도착했다. 무리 중 절반은 말 위에 올라타고서 200명의 스페인인이 피사로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곤살로 피사로는 자신의 형인 정복자(콩키스타도 르)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키토의 지배자(고베르나도르)로 임명받아, 페루의 수도인 쿠스코 를 떠나 북쪽으로 1,600km 떨어진 키토로 온 참이었다. 행렬은 긴 여행으로 몹시 지쳐있었 다. 그래서 뛰어난 장군이자 과야킬의 건설자였던 그의 사촌, 프란시스코 데 오레disk가 도 시의 정문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순순히 처분에 따르겠다고 하자, 기운이 난 곤살로 는 즉각 오레야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레야나는 이 행정적인 잔꾀-새 지사의 호칭 변경 -가 실은 그와 함께 하겠다고 요청한, 매우 야심적이고 스릴 넘치는 전혀 색다른 임무를 위 해 핑계로 내세운 조처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계약을 맺었다. 오레야나는 과야킬로 돌아가서 동원 가능한 인력과 장비를 모으기로 했다. 곤살로는 키토를 본거지로 삼고 다가올 원정을 준비하면서 사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은 둘 다 발보아, 코르테스, 또 다른 피사로들, 그리고 또 많은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에스트라마두 라의 트루히요 출신이었다. 30세 전후의 노련한 원정가였던 그들은 7년 전 페루 정복이 시 작된 이래로 많은 시련을 겪어 왔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앞으로 있을 모험에 뜻밖의 대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키토 동쪽에 아련히 모습을 드러낸 만년설의 거대한 장벽.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계피-너른 들판 가득히 계피가 융단처럼 깔려 있다! 이런 소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 다. 향료가 금만큼이나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던 당시로서 그런 말은 가히 마력이었다. 콜 럼버스 자신이 계피 길을 찾은 건 아닐까? 이 냄새가 엘도라도까지 풍겨왔을지 누가 알아? 피사로는 3개월이 채 못 돼 준비를 끝냈다. 1541년 2월 18일. 키토의 지사대리가 사무실을 열었다. 오레야나한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3일 후 피사로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기로 했다. 2월 21일, 행렬은 안데스 고원으로 출발하여 대산맥의 분수령을 향해 나아 갔다. 참으로 희한한 행렬이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350명의 하급귀족(히달고스)이 섰고-그중 200명은 말을 타고 있었다-그 뒤를 인디오 공격용으로 훈련받은 2,000마리의 사나운 개가 따랐다. 그 다음으로는 4,000명의 '자원한' 짐꾼들-징집된 인디오들-이 무기와 식량, 그리고 16세기의 연대기 작가 가르시알소 데 라 베가의 글에 따르면, "쇠와 손도끼, 삼으로 꼰 밧줄 과 못"을 지고 따라갔다. 이어서 비슷한 짐을 진 2,000마리의 돼지가 있었다. 스페인인은 칼 한 자루와 작은 방패, 간단한 지급품을 담은 배낭 하나씩만을 메고서 안데스 산맥으로 나아 갔다. 날씨가 몹시 좋지 않았다. 그들은 거세게 내리치는 비바람에 흠씬 젖었다. 말들이 눈 덮인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고, 대열의 속도가 늦어지면서 인디오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련으로 인디오 100명이 죽었다. 이어서 길이라고는 그들이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드는 통로뿐인 빽빽한 밀림 지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도끼와 칼로 나무를 쳐내면서 한 걸음씩 앞 으로 나아갔다. 한편, 조금 뒤에 출발한 오레야나는 피사로 일행을 쫓아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은 방해물이 적어진 탓에 빨리 기동할수 있었으나, 대신 인디오 무리들의 공격을 받았 다. 한달 뒤에 오레야나가 마침내 피사로와 합류했을 때, 그는 말과 장비를 모두 잃은 상태 였다. 21명밖에 살아남지 못한 그의 부하들은 칼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여행 은 더더욱 힘들고 험난해졌다. 피사로는 키토에서 60리그(약 290km) 정도는 왔다고 생각했 으나, 사실은 그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피사로는 오레야나에게 본대는 맡겨두고 소규모의 선발대를 뽑아 탐사를 가기로 했다. 70일 후 그는 마침내 '약속의 땅'이라고 기대한 곳에 다 다랐다. 거기엔 분명히 계피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아주 드문드문 조금 밖에 없어서 상업적 인 가치는 없었다. 피사로는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안내인의 절반은 개의 먹이로 던져 주고 나머지 절반은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그와 일행은 이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강'을 발견하고 평화롭게 사는 인디오들을 만났다. 일행은 카누 16척을 빼내서는 잽싸게 달아났다. 오레야나와 다른 사람들은 피사로를 따라 잡은 뒤, 지친 몸을 이끌며 강둑 을 따라 걸었다. 탐험대의 기록자였던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에 따르면, 100km쯤 가자 일행은 '강폭이 반 리그는 되는' 매우 큰 물길과 맞딱뜨렸다. 이 합류 지점에 서 피사로는 행렬을 멈추고 쌍돛 범선 하나를 만들었다. 승객은 20명 정도밖에 탈 수 없었 고, 배 안에는 무거운 장비 일체와 키토에서 4,000명의 '자원자' 중 앓는 사람들을 꽉꽉 채 워 넣었다. 에콰도르의 코카강과 나포강이 만나는 그 합류점 근처에 지금은 마을 하나가 들어서 있는데, 이름이 엘바르코이다. 그 쌍돛 범선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탐험대는 다 시 출발했다. 배라고는 그 작은 범선 하나와 카누 16척이 전부였기 때문에 대다수는 터벅 터벅 걸어야 했다. 게다가 또 새로운 역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늪을 가로지르고 다리 를 놓아야 했으며, 식량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남은 돼지들 마저 해치운 지 벌써 오래 였다. 그렇게 300km를 더 나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며칠만 더 가면 부유한 큰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오레야나가 범선과 카누에 60명만 태우고 가서 식 량을 구해 오겠노라고 제안했다. 피사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오레야나는 떠났다. 1541년 12월 26일의 일인데, 뒤에 피사로는 이 날을 크게 후회했다. 오레야나와 부하들을 다 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피사로와 부하들이 남은 개와 말 100마리를 다 먹어치우도록 오 레야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사로는 오레야나가 '배신'한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짓고 치를 떨면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고투 끝에 육로로 키토로 돌아오는 데는 6개월이나 걸렸다. 한편, 오레야나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강을 발견한 것은 그 조금 뒤였다. "바다의 신의 관례대로, 나는 미사를 올리고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신에게 의탁했다."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은 오레야나의 분견대로 함께 떠났는데 상세한 탐험일지를 계속해서 썼다. "물살이 하도 세서 우리는 처음엔 하루에 25리그(약 120km)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강 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있을 거라던 큰 마을은 아무리 가도 나타날 줄을 몰랐다. 그들은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긴 1주일 뒤에 스페인인의 귀에 마침내 정글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려 오고, 마을이 눈 앞에 나타났다. 오레야나는 추 장 아파리아에게 자줏빛 옷을 몇 점 선물하고는 재빨리 자신이 카를로스 5세 황제의 신하라 고 공표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추장의 영토를 공식 접수했다. 오레야나는 그곳을 '작은 아파 리야의 땅'이라고 명명했다. 강 아래쪽에 또 한 명의 아파리아가 살고 있는데 그가 훨씬 더 큰 세력가라는 얘기를 듣고는, 그를 '큰 아파리아'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분견대는 피사 로와의 약속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다. 그들은 이제 막 헤치고 온 1,200km에 이르는 급 류를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이대로 계속 나 아가 바다를 거쳐 페루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강폭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으 로 보아 바다가 멀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카누는 바다를 항해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 기 때문에 오레야나는 범선을 한 척 더 만들기로 했다. 거친 병사들이 즉석 벌목꾼과 숯쟁 이로 변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2,000개의 못을 벼리는 일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인디오 들과의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레야나는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 렸다. 강 아래쪽에서도 얼마든지 배를 만들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겁 많은 인솔자는 출 발하기 전에, 만장일치로 곤살로 피사로를 대신하여 자신을 탐험대의 대장 겸 스페인 황실 의 대리자로 선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것을 입증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모든 대원이 거기 에 서명한 후 정식으로 공증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 오레야나는 개인당 1,000카스티야노- 순금 약 9파운드 상당-를 주겠다며 피사로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할 사람 여섯 사람을 구 했다. 그러나 지원자가 셋 밖에 나오지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거쳐야 할 난관을 생 각하면 셋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그 생각은 각하되고 탐험대는 다시 출발했다. 1542년 2월 11일,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나포강을 나와 아마존 본류로 들어갔다 2주일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큰 아파리아'에 도착했다. 오레야나와 부하들이 '태양의 자 식들'을 칭했으니, 위엄에 눌린 주민들로부터 대단히 정중한 환영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다. 스페인인은 이곳이야말로 두 번째 쌍돛 범선을 만들기에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배를 만들고 케니폭나무의 솜과 물고기 기름 으로 널빤지의 틈새를 채운 뒤, 4월 24일에 배를 불에 띄웠다. 5월 12일, 스페인인이 북적거 리는 큰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일단의 카누들이 선대를 이루어 그들을 에워쌌다. 카누에 서 무장한 전사들이 방패 뒤에 숨어서 "마치 우리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노려보았다." 이 틀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스페인인은 한 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인 디오들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노획품 중에는 수천 개의 거북 알이 있었는데,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에 따르면 "탐험대의 1,000명이 1년 동안 먹어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지나 온 지역은 마치파로의 영토였는데, 그들이 이제껏 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다음에 그들은 오마과 땅에 도착했는데, 거기서는 100리 그 이상을 가는 동안 "마을에서 석궁 한번 쏠 일이 없었다." 지금의 브라질 땅으로 들어선 일행은 이제 자푸라강의 하구를 지나 잉크처럼 거무칙칙한 물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 강에 리오네그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에서는 훗날 마나우스의 전설적인 고무 산업이 일어나 게 된다. 아마존, 한낱 전설인가?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스페인인은 여러 개의 인디오 마을을 지났다. 그중 일부는 방비가 견고했다. 스페인인은, 대개의 경우 칼끝으로 싱싱한 먹을거리를 얻어냈다. 1542년 6월 5일, 그들은 카르바할이 아마존의 땅이라고 믿은 '중간 크기'의 한 마을에 상륙했다. 그는 그 마 을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환상 같은 에피소드가 마치 사실 같은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마을에는 매우 큰 공공 광장이 하나 있었다. 그 중앙에는 둘레가 3m나 되는 큰 나무가 하 나 쓰러져 있고, 그 위에 한 도시의 성벽과 문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문에는 탑이 두 개 있는데, 탑마다 서로 마주보는 문이 하나씩 나 있고 문마다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뒤쪽을 쳐다보는 사나운 사자 두 마리가 앞다리와 발톱으로 구조물 전체를 꽉 틀어쥐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둥그런 공간이 열려 있었다. 이 공간 중앙에 구멍이 하나 나 있고, 그들은 그곳을 통해 태양신에게 치차를 바쳤다. 치차는 그들이 마시는 술이다. 대장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한 인디오가 그들은... 아마존의 신하이고, 그들이 아마존에 제공하는 부역은 신전의 지붕을 이는 데 필요한 깃털을 바치는 일뿐인데, 아마존들이 사는 마을이 그렇게 되어 있다 고 대답했다." 6월 24일, "하도 격렬해서 우리가 거의 궤멸 직전에까지 이른" 싸움에서 '아 마존'과의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었다. 카르바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아마존들은 거의 나 체였으나, 은밀한 부분은 활과 손에 든 화살로 가리고 있었다. 그들 하나가 인디오 남자 10 명보다도 더 잘 싸웠다." 다음날 물가에서 또 한차례의 기습이 있었는데, 사상자는 수도사 카르바할 자신뿐이었다. "주께서 내 한쪽 눈에 화살을 맞히기로 결심하시어, 화살 하나가 내 눈을 뚫고 들어가 머리를 관통했다. 그 부상으로 나는 한쪽 눈을 잃었는데, 지금까지도 심한 통증을 느낀다." 스페인인은 환상의 땅과 적의를 품은 인디오 마을을 지났다 탐험대는 싱구강 하구를 지났다. 열대우림이 차츰 사바나에 자리를 내주었고, 들뜬 병사들 은 이 풍요로운 대 초원이 밀밭과 포도밭, 목장으로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머리를 깎 고 피부를 검게 물들인 키 큰 남자들"이 쏜 화살이 전원에 대한 꿈에 종지부를 찍었다. 살 작 스쳤을 뿐인데도 몇 시간만에 한 사람이 죽었다. 스페인인은 화살 끝에 묻은 독을 맛본 것이다. 갑자기 수백 척의 카누 선단이 나타나 항로를 막으려고 했다. 카누마다 20-50명의 전사들이 가득 타고 있었는데, 강둑에 선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을 했다. 화승총이 드럼 을 치듯이 불을 뿜고 트럼펫이 울리고 인디오 팬파이프가 흥겹게 노래를 불렀니, 참,d로 장 관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카르바할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요란 한 소리를 내면서 왔으나, 놀랍게도 강둑에 있는 전사들은 야자수 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고 았었다." 조수가 거세게 밀려드는 것을 보고, 스페인인은 아마존강의 어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탐험대는 7월 중순에 마라조섬에 다다랐다. 카르바할은 출발지에서 약 7,200km 왔다고 계산했다. 계산이 조금 과장되었다고 한들 어떤가! 중요한 것은 사실상 아 무도 그 존재를 몰랐던 이 강을 따라 내려오는 그런 여행을, 그때가지는 아무도 한 적이 없 다는 것이었다. 탐험대는 포르투갈인의 파라 정착지가 바로 우현 쪽에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방향을 틀어 작은 섬들 사이의 미로를 헤쳐 나갔다. 섬에 사는 무시무시한 카리브 인디오들 이 줄기차게 괴롭혔기 때문에 그들은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작은 범선 이 커다란 그루터기를 들이받고 침몰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인디오들과 사우면서 한편으로 는 숯을 만들고 쇠를 벼려 가며 배를 수리했다. 1542년 8월 26일, 마침내 강둑이 사라지고 널따란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원들에게는 지도도, 나침반도, 육분의도도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나아가면서 잘되기를 바랐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표 류하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며칠 후, 놀랍게도 두 배는 베네수엘라 해안의 작은 섬 쿠바과에 함께 닻을 내렸다. 브라질은 '뉴안달루시아'의 유적지일까? 아마존강을 따라 내려간 최초의 여행은 파란만장했다. 안데스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데 무 려 8개월이 걸렸다. (안데스 산맥에서 코카강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을 포함하면 열 달이 추가된다.) 도중에 11명이 죽었는데, 그중 싸우다가 죽은 사람은 세 명뿐이다. 350명의 정복 자와 말 200필, 개 2,000마리, 인디오 4,000명을 데리고 키토를 출발했던 곤살로 피사로는 80 명의 스페인인 동료들만 데리고 비척거리며 걸어서 돌아왔다. 인디오와 말, 개는 하나도 살 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키토로 돌아온 곤살로는 형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궁에서 암살 되고 그 자신도 황제 카를로스 5세의 명으로 봉직이 박탈되었음을 알았다. 크게 낙담한 곤 살로는 군사를 일으켜 공개적으로 총독에게 반기를 들었다. 1548년 4월 11일 쿠스코에서 곤 ㅅ6kf로 피사로가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정복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가스파르 데 카르바 할은 곤살로 피사로를 대신하여 리마로 돌아가 나중에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천수를 다한 뒤 1584년 82세로 죽었다.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새로운 꿈은, 전에 코르테스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발견한 땅으로 돌아가 식민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 본토로 달려가 카스티야 정부에 청원을 하여,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 황제의 칙허장을 얻어냈다. 1544년 그는, 지금은 공식적으로 뉴안달루 시아 지방이라고 알려진 아마존 땅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오레야나는 배 네 척과 부하 400 명을 데리고 스페인을 떠났으나, 신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대열이, 그리고 자신의 꿈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마존 삼각주에서, 전에 그랬듯이 두 차례나 범선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마치 역사가 반복을 거부라도 하는 듯이. 그는 한 때나마 자신으 이름으로 불리던 그 강의 본류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고, 마침내 열병에 걸 려 죽었다. 제2장 살아 있는 전설 아마존의 전설은 아메리카의 발견과 함께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B.C 9세기에 호머가 아마존을 얘기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들의 영토는 계 속 바뀌었다. 처음에는 카프카스 산맥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되었으나, 그 뒤에 스키타이 중 심부를 거쳐 점점 서쪽으로 옮겨 가 카파도키아, 칼데아, 아프리카를 지나서, 마침내 마르코 폴로가 들었다는 신비의 섬으로 갔다. 고전 문화에 심취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나 그 밖의 다른 대탐험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 근처 어딘가에서 이 섬을 발 견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마존의 섬은 정말 서쪽으 로 아주 멀리 이동하여 어느 날 대양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는 우리가 오늘날 아마조니아라고 부르는 열대우림 깊숙한 곳에 숨어 버렸다. 그러나 수도사 카르바할의 보고 서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신선하고도 그럴싸하게 그 전설에 불을 지폈다. 1542년, 사나운 여 자 전사가 최초로 실제 모습을 드러냈고 전투에까지 참가했다. 모험에 함께 했던 사람들도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스페인 궁정에서는 오레야나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 음에도, 적도 아프리카의 신비에 매혹된 모든 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 에 깊이 뿌리 박힌 상징연쇄반응이 일어났다. 그 폭풍은 그때까지의 아마존의 역사를 일소 해 버렸고, 폭풍이 가라앉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렸다. 아마존의 전설과 엘도라도는 곧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안데스 산맥이 엘도라도라는 대군주의 본거지라고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몸에 황금 가루를 자르고 의시에 따라 보석과 그릇 같은 제물들이 물 속에 던져지는 동안에 (보고타 부근의) 과타비타호로 알려진 곳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스페인인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고원 지대의 강력한 이웃이었던 치브차족이 그를 폐위시켰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스페인인은 안데스 산맥을 뒤로한 채 거기서 멀리 떨어 진 네그루강 북동쪽의 기아나 고지 서쪽 끝 부분에서 엘도라도-그리고 아마존-을 찾았다. 지도 제작자들이 거기에다 카스피해보다도 더 큰 전설의 호수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일단 상상이 지리적 사실로 둔갑하자, 파리마호는 오리노코강의 발원지인 파리마 산맥이 되었다. 이 전설의 호숫가에는 "전세계의 어느 도시보다도 큰, 적어도 스페인 국민들이 알고 있는 어떤 도시보다도 더 큰"돌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곳이 이제 '대황제'라고 기술되 는 엘도라도의 본거지요 수도인 마누아였다. 후안 마르티네스라는 사람은 거기서 일곱 달 동안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나라 안 어느 곳에도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 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마다 그는 언제나 눈을 가렸다... 마르티네스가 마누아에 온지 일 곱 달이 지나 그 나라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잉가(황제)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자기와 함께 있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던 마르티네스는 잉가에게 뜻을 전해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잉가는 그에게 오리노코강까지 그를 안내해 줄 기아나 잠수부들을 붙여 주었다. 잠수부들은 등에다 자신이 지닐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졌는데, 잉 가가 마르티네스에게 작별의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강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오 리노코포니라 불리던 변방 사람들이 그와 기아나인 안내인들에게서 보물을 몽땅 빼앗았다... 남은 거라고는 기묘하게 세공한 금구슬이 가득 든 커다란 호리병 두 개 뿐이었다. 오리노코 포니는 그게 술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오리노코 강에서 카누를 타고 트리니다드와 푸에르토리코를 거쳤고... 그는 자신이 도시에서 본 엄청난 황금과 신전과 접시, 전쟁할 때에 쓰는 금제 갑옷과 방패에서 본 황금의 영상에 사로잡혀 그 도시를 엘도라도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이것은 영국 엘리자베스의 총신이었던 월터 롤리 경이 자신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 트리니나드 총독의 서류에서 읽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아마존의 영토가 마 누아 근처라고 믿었다. 마르티네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여자들은... 가는 양털로 짠 기 다란 옷을 입고 매우 큰 금제 왕관을 쓴다. 그들은 1년에 단 한 차례 남자들과 함께 한다. 그들이 임신하여 아들을 나으면 아버지한테 돌려주고, 딸을 낳으면 자신이 기른다. 자신들의 종족을 불리고픈 열망에서 많은 딸들이 자식의 씨를 줄 남자들한테 선물하고... 자신들만이 아는 녹색 돌의 일종을 보낸다. 월터 롤리 경은 영국 황실의 화려함을 버리고 마누아를 찾아 항해를 떠났다 귀족이자 시인이며 해적은 아니지만 민간 무장선의 선장이었던 롤리는 결코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롤리는 자신의 보고서 (기아나 제국의 발견)에서 모든 것을 뒤에 두고 자신을 떠나게 만든 두 가지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존 땅에 대한 그의 묘사는 카르바할의 묘사를 증폭시키면서 더 아름답게 꾸며진다. "온통 돌로 지은 그들의 도시는 포 장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문들마다 사람들이 지키고 섰는데 통행료를 내는 사람들에게만 문을 열어 줍니다. 근교의 풍요로운 목장에서는 비쿠냐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습니다." 적도 지대를 묘사한 (시간의 책) 속의 세밀화처럼, 롤리의 그림 같은 묘사는 미래의 '녹색 지옥'을 지상 낙원으로 만든다. "일찍이 신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나라, 더 그럴듯한 풍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계곡 위 여기저기에 언덕이 솟아 있고, 강이 몇 개의 줄기로 나뉘어 휘돌아 들어가고, 덤불 숲이나 나무 그루터기도 없는 깔끔한 녹색 초지의 평원이 연이어 있고, 단단한 모래 땅은 말과 사람이 두루 걷기에 편하고, 오솔길마다 사슴이 가로지르고, 해질녘이면 온갖 나무에서 새들이 수천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강기슭에 는 흰색과 붉은색의 두루미며 백로가 까치발을 하고 앉아 있는 곳. 대기는 산들산들한 동풍 으로 상큼함을 머금고 있고, 허리를 숙여 주워올리는 돌마다 금이나 은임을 약속합니다. 폐 하께서는 다양한 돌들을 보게 될 텐데, 일부는 태양 아래 그보다 더 나은 게 없을 것입니 다." 그 지역에는 그런 돌이 매우 많았는데, 사람이 할 일이라고는 그저 허리를 숙여 집어올 리는 것뿐이었다. 롤리는 자세한 설명 없이 이렇게 덧붙인다. "스페인인은 그것을 '황금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뒤 얼마 안 가 죽었다. 롤리의 두 번째 항해 는 엔틸리스 제도로 불명예 퇴각하는 것으로 끝났다. '멋쟁이 공작'으로 불리던 이 모험가는 풍부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셰에라제드만큼 운이 좋지는 못했다. 그는 1618년 런던으로 돌 아온 후에 곤살로 피사로처럼 참수당하고 말았다. 지난날의 신비감이 꼬리를 물고 신세계탐사로 이어졌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항해일지에다가 간간이 신드바드의 모험처럼 읽히는 투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쿠바 섬에서 키클로페스(눈이 이마 한가운데에 하나뿐인 인간)를 찾을수 있으 리라고 몹시 기대했고, 또 '개의 주둥이를 하고 사람을 먹는' 또 하나의 신기한 생물이 그 근처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마조니아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신비를 간직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롤리는 '나무 위에 사는' 티비티바족에 대해 기술한 후에, 전 유럽에 형상 때 문에 널리 알려져 있던 추악한 생물, 아세팔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 아 프리카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블레미인 듯했다. 어쨌거나 그들 의 채출현 기간은 짧았다. 롤리의 2차 항해(1617년)에 참가했던 로렌스 케이미스 선장은 일 기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추장이 가슴 한가운데에 입이 달려 있다고 전해지는 머리 없 는 인간들에 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세팔리의 전설은 이 사람들이 양어깨를 치켜올린 채로 생활하는 사실에서 연유한 거이다. 그들은 그 볼품없는 모양을 우아하다고 생각했다."당시는 이미 역사와 전설, 사실과 허구간의 줄다리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 다. 1575년, 브라질에서 석 달을 보낸 프랑스인 앙드레 테베는 (적도 프랑스의 별난 것들)에 서 자신이 아마존에 관해서 한 말을 철회했다. "그들은 아마존이 아니다. 단지 남편들의 출 타중에 자신의 목숨과 아이들과 재산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운 나쁜 여인들일 뿐이다." 1560년 비천한 하급 장교, 로페 데 아기레가 자칭 아마조니아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엘도라도와 파리마 호수, 전설이 도시 마누아에 얽힌 이야기로 보아 그곳에는 정말 무엇 인가가 있지 않을까? 이 물음의 답을 오레야나의 탐사가 있은 지 20년이 채 안된 1560년에 페루 총독이 페드로 데 우르수아라는 한 스페인 장군에게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서 재량껏 찾아보라고 명했다. 급조된 우르수아의 병단이 아마존강에 도착하자마자, 로페 데 아기레라 는 이름의 바스크인이 폭동을 일으켜 장군을 처형하고 자신이 부대의 사령관이자 아마조니 아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악어 밥으로 만들어 버 리겠노라고 했다. 아기레는 기아나 고지를 찾아 북쪽으로 가다가 우연히 오리노코강과 네그 루강을 잇는 자연 수로인 카시키아레강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훔볼트가 그 수로를 발견하기 1세기도 더 전에? 어쨌거나 아기레는 트리니나드 건너편, 오리노코강 하구에 모습을 드러냈 다. 그리고 진주조개잡이들의 섬인 마르가리타를 장악한 두에 베네수엘라에서 온 왕당파 부 대에게 패했다. 사형 선고를 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수되기 전에 아기레는 다음과 같 은 짧은 탄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 중에서 유일 한 기록일 것이다. "페하, 폐하께서 제게 친절을 베푸시려거든 지금 베푸십시오. 폐하의 수 호성인들에게 영광을 돌리시기를." 그의 이야기에 딱 어울리는 종말이다. 곤살로 피사로, 로 페 데 아기레, 월터 롤리 경은 모두, 영웅이건 흉악범이건 불문하고, 각기 정황은 달라도 아 마조니아에 얽힌 일로 머리가 잘렸다. 탐욕 외에 이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었던 것은 오로 지 초인적인 것, 경이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아마조니아 우림 지대의 선교사들 17세기초에 아마조니아에 들어가려는 새로운 시도가 행해졌다. 몇몇 선교사들이, 강의 본 류에 도달하기도 전에 곤살로 피사로와 충돌했던, 같은 종족의 인디오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바햐흐로 선교사의 시대가 왔다. 예수회 교단의 사제들과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사들 이 정복자들의 발걸음을 따라 일시적이나마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고, 그러는 사이에 그들 은 민속학과 언어학 방면에서 귀중한 정보들을 수집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한 예로서 예 수회 사제 크리스토발 데 아쿠냐는, 선교사 두 명과 스페인 병사 여섯 명이 탄 카누가 아마 존강 하구 가까이에 있는 파라로 떠내려 왔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었던 것 은 자기네는 페루에서 왔고 수많은 인디오들을 만났으며 온길을 다시 되돌아 가고 싶지 않 다는 것이 전부였다."고 쓰고 있다. 파라와 키토 사이를 맨 처음으로 왕복 여행한 사람은 포르투갈 선장, 페드루 데 테이셰이 라였다. 오레야나의 발견이 세계-특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경쟁하던 두 궁정-를 뒤흔든 지 1세기 가까이 흐른 어느 날, 벨렘 새 도시에 살고 있던 파라 지사는 마침내 탐험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테이셰이라 선장에게 키토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동안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모두 기록하라고 명했다. 테이셰이라는 1637년 10월 28일, 46척의 카 누로 된 소형 선대에 포르투갈인 병사 60명, 인디오 1,200명, 잡역부와 안내인 등, 모두 합쳐 약 1,200명을 태우고서 파라의 변경을 넘었다. 그럼에도 아마존을 거슬러올라가는 첫 번째 여행은 8개월의 기록으로 완수되었다. 1638년 6월 24일, 테이셰이라는 키토 근교의 첫 번째 스페인인 정착지에 도착했다. 도미니크 수도사와 예수회 사제가 본 아마존 기민한 페루 총독은 포르투갈 인들을 정중히 환영한 후 테이셰이라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장비 일체를 제공하라고 신속히 지시했다. 크리스토발 데 아쿠냐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거 기에는 지금까지 발견한 모든 것과 귀로에 발견하게 될 모든 것에 대해 카스티야왕이 신탁 을 위임한다는 것을 보증할 두 사람을 지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키토의 법무총감이 친히 그 임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식민청의 관리들은 예수회 교단의 대학을 세우기 위해 최근에 스페인에 온 아쿠냐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100년을 사이에 두고 아마존강의 발 견을 기록한 최초의 두 문서가 나오게 되었다. 첫 번째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이 남긴 기록이다. 또 하나는 예수회 사제인 가스파르 데 아쿠냐가 남긴 기록이다. 1639년 12월에 아쿠냐는 벨렘에 도착했고, 지시받은 대로 곧 스페인을 떠났다. 그의 책 (대 아마존 강의 새로운 발견)은 1641년에 출판되었다. 아쿠냐와 카르바할의 아마존강 탐험 묘 사를 비교하는 것은 필수적이거니와 또 흥미롭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아쿠냐는, 몇몇 기록 은 "모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만큼 진실하지는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카르바할의 기록을 비웃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번 기록은 진실된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고개를 꼿꼿이 들고서 증언할 수 없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문제 가 제기될 경우에는 이 여행을 함께 할 40여명의 스페인인, 카스티야인, 포르투갈인들이 그 것이 맞는지 아니면 미심쩍은지 증언해줄 것이다." 하지만 아쿠냐는 제1장에서부터 아마존 족에 관해서 문제를 남긴다. 그는 가는 곳 어디에서나 들었다면서 "누구나가 동의하는 세부 묘사가 너무도 정확하며, 꾸며낸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 언어 속에 스며들고 그렇게 많은 원 주민들 사이에 유포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쿠냐 신부는 아마존 족의 특정 부분은 거듭 반복해서 묘사하였는데, 오로지 감정을 계속 과장하는 경향을 보일 뿐이다. "훌륭한 여인들은 대개 남자들과 아무런 교제도 하지 않는다. 성적 교섭을 갖기 위 해 남자들이 연례적인 방문을 할 때조차도 무기(활과 창)을 들고 있으면 환영하지 않고, 그 러고도 그들이 진정으로 평화적인 목적으로 왔다는 것이 충분히 확인될 때까지는 배에서 내 리지 못하게 한다. 확인이 끝난 후에야 여인들은 저마다 알맞은 그물 침대(남자가 자는 용 구)를 집어들고는 자기 오두막으로 가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달아맨다." 그러나 그는 모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 사실인지, 또 이들이 정말 그 유명한 아마존인지, 또 이 들의 땅에 온 세계를 풍요롭게 할 보물이 있는지는 시간이 밝혀 줄 것이다." 아쿠냐가 기록한 인디오들의 특이한 생활과 관습 아쿠냐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은 계몽주의 시각의 점근법을 보이는데, 우리는 거기서 그 의 기록과 카르바할의 기록사이의 1세기 동안에 있었던 진보를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아마 존 지역 고유의 동물과 식물 종뿐만 아니라 인디오들이 재배했던 식물과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 그들의 관습, 사냥과 어로 기술까지도 기록 속에 담았다. 이 언급들은 비록 엄밀한 과 학적 관찰을 통해 나온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근거 없는 공상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아쿠냐는 목재, 코코아(당시에는 강둑을 따라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다.), 담배, 사 탕수수가 아마존 지역의 네 가지 주요 자원이라고 지적한 뒤에, 그뒤를 이어 면화, 사르사 (약초의 일종), 고무, 수지, 약용 기름 등도 언급한다. 거기에다 매장 광물만 더하면 아마존 경제의 중추였고 지금도 중추인 완전한 자원의 리스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뒤로 가면 이 성실한 관찰자는 키가 '10-16뼘인'(3m가 넘는) 거인과, '귀여운 아기보다도 결코 크지 않은' 구야지라고 알려진 난쟁이와, '추적자들로 하여금 방향을 잘못 집게 하는 발이 거꾸로 달린 사람들'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17세기 말엽에 아마조니아는 브라질 제국으로 통합되었다 아쿠냐는 '강들의 모범'인 아마존의 강 기슭은 '옥토의 낙원'이며, '예술이 대지의 풍요로 움을 한껏 부풀리고자 한다면 이 강의 전장을 따라 펼쳐져 있는 평화로운 정원이야말로 그 유일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아쿠냐의 이야기는 아첨꾼의 냄새가 풀풀 난다. " 강은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모두에게 열려있다. 정말로, 강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든 거기서 이득을 취해 가라고 명한다. 가난한 이에게는 끼니 이을 양식을 제공하고, 일하는 이에게는 노동의 만족감을 주며, 장사꾼에게는 사업을, 병사에게는 영광의 길을, 부자에게는 새롭게 발견한 부를, 강자에게는 지배할 땅을, 왕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제 국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초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 던 아마조니아를 뺏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 유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200 만 평방마일은 브라질의 영유지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 거대한 평원은 오늘날에는 베네수 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로 이루어진 카스티야 아조니아에 빙 둘러싸여 있 다. 17세기 말엽, 아마조니아의 구획은 완결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외의 나라들은 사 실상 경쟁국이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의 항해자들은 북쪽, 즉 기아나 고지의 건너 편으로 방향을 틀어 거기에서 자신들의 영유지를 찾았다. 제3장 이성의 시대가 열대우림 속을 파고들다 아마존 탐사에 관한 첫 두 권의 책 사이에 꼭 1세기(1540-1640)의 간극이 있었던 것처럼, 아쿠냐의 기록이 나온지 100년이 지나서야 아마존 여행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왔다. 라콩다민, 근대를 내다보는 아마조니아의 창 1745년, 파리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샤를 마리 드 라콩다민은 (태평양 연안에서 브 라질과 기아나 연안까지 아마존강을 따라 내려간 남아메리카 내륙 횡단 여행기 초록)을 발 표했다. 라콩다민의 공식적인 탐사 목적은 순수한 과학상의 논쟁점 하나를 푸는 것이었다. 뉴턴이 말한 대로 지구가 적도는 불거져 나와 있고 극은 납작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식 물학자와 천문학자,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일군의 과학자들이 라콩다민과 함께 출발하여 키 토로 여행하면서 적도상에서 경도 1도의 정확한 길이를 쟀다. 라콩다민은 공식적인 임무를 완수한 후 그곳에 남아 아마존강을 따라 내려가는 탐사에 착수했다. 그의 기록은 공상에서 사실을 떼어 내기보다는, (영화 촬영술 용어를 빌리자면) 그 둘을 크로스 페이드 시켜 신화 의 빛을 흐릿하게 하면서 객관적인 묘사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라콩다민은 아마존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로, 그는 그 점을 빼고는 일말의 회의도 들지 않을 만큼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 에 전해 내려오는 세세한 이야기에 주목했다. 라콩다민은 모든 것들이 그 여인들이 남에서 북으로 이주해 가서 그 당시에 기아나의 심장부에 정착해 살고 있는 것으로 믿게끔 유도했 다고 썼다. 뒷날 1800년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거기엔 아마존은 없고... 남자들에게 억압 받는 노예 상태에 진력이 난, 아메리카 각지에서 온 여자들이 마치 탈주한 흑인들마냥 한 무리로 모여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라콩다민이나 홈볼트와 같은 결벽한 지식인들은 직접적으로 신화의 면을 벗기지는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 을지도 모른다. 아마존에 관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폭넓게 퍼져 있고 그 내용도 일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신세계 여인 공화국' 문제를 풀기에 충분하고도 확고한 증거를 확보 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렵에 이미 인디오 세계에 관한 일차 지 식을 가진 몇몇 박식한 관찰자들이 전설에 김을 빼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는 언급을 하 고 있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간의 공식적인 첫 분계선을 확인하고자 스페인 왕이 파견한 솔라노 선대의 선장은, 1756년에 귀 푸이나비족 여자들, 특히 신혼인 부인들이 자기 남편과 함께 서서 싸웠고 또 놀랄 만한 용 기를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그로 미루어 볼 때 그 여자들은 성질이 불같고 어려서부터 소 년들처럼 활과 방패를 다루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여자들이나 그와 유사한 다른 이들이 일찍이 오레야나가 남자들 사이에 서서 싸우는 것을 본 아마존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오리코노상 상류)에서 아마존강 사이 에 사는 여자들은 전투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과 강에 관한 정확한 정보들이 차츰 지도 속에 통합되기 시작했다 아마존족이 없어지고 나니, 아마조니아에서 상상력은 설자리를 잃어 갔다. 여인 전사들이 맨 먼저 사라졌다. 다음에 파리마 호수, 신화 속의 도시 마누아, 엘도라도의 궁전이 지도에 서 사라졌다. 기하학자와 측량기사들이 함께한 위원회에서는 아직까지도 탐사가 별로 진행 되지 않고 있던 지역을 가로지르며 경계를 구획짓기 시작했다. 엘도라도의 전설 탓에 오랫 동안 오류로 남아 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기아나 고지의 위치에 관련된 것이었다. 또 다른 한가지 오류 때문에 오래도록 오리노코강과 아마존강의 수계를 나누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엽 사람들은 마침내 푸투마요라고 불리던 콜롬비아의 강과 이사라고 불리던 브라 질의 강이 사실은 안데스 산맥에서 아마존강으로 흘러드는 똑같은 큰 지류임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자푸라와 카케타도 똑같은 물길을 가리키는 브라질과 콜롬비아 이름이었다. 이 두강 가운데 어느것도 오랫동안 여겨온 것처럼 오리노코강이나 네그루강으로 직접 흘러들지 는 않았다. 이사나 자푸라와 거의 평행으로 흐르는 그 부쪽의 메타, 비카다, 과비아레가 오 리노코 강의 지류인 것으로 드러났다. 홈볼트는 오리노코강과 아마존 강의 연결 수로를 발견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문제는 이 두 거대한 강을 잇는 수로가 과연 있는가-그에 관한 기록이 너무도 많아서 그 것을 의심하기는 힘들었다-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는가였다. 무엇보다도, 만일에 연 결 수로가 없다면 인디오의 선단이 어떻게 이 강에 나타났다가 곧 다른 강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었을까? 로페 데 아기레가 어떻게 아마존을 출발, 오리노코 삼각주를 지나 바다에 이를 수 있었을까? 1742년에는 어떤 여자가 베네수엘라에서 브라질로 왔는데, 오리노코강에 서 네그루강으로 흘러드는 강을 거쳐서 왔다고 주장했다. 2년 뒤에는 몇몇 예수회 사제가 네그루강에서 온 한 선교사가 강을 거슬러올라와 오리노코 지역의 선교 책임자를 방문했다 고 보고했다. 그들 둘은 같은 길을 거쳐서 함께 되돌아갔다. 이 지역을 그린 초기의 권위 있 는 지도는 그야말로 오류투성이였다. 상송은 아쿠냐 신부의 관찰을 토대로 지도를 제작했 다. 독일 예수회 소속 사무엘 프리츠 신부가 45년간에 걸쳐 현장 조사한 것을 반영하여 만 든 두 번째 지도(1707년)는 이제 측표에 가깝게 활용될 지경이었다. 빛을 보기까지는 100년 이 더 흘러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물길이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숱하게 갈라 져 흐르는 이 불균형의 땅에서, 어떻게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 문제가 풀릴 수 있었겠는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업적은 카시키아레이강의 흐름을 흑백으로 그려 낸 것이었다. 그는 1800년에 네그루강의 합류점에서부터 오리노코강의 상류의 발원지에 이르기까지 그 수로의 진로를 직접 추적했다.이를 기점으로 해서, 안데스 산맥과 기아나 고지는 제각기 자신의 물 길들을 정확히 배정받게 되었다. 카시키아레강이 진짜 존재하며 항행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정말 중차대한 뉴스였다. 산업혁명 전야에 들려 온 그 소식으로 세계의 얼굴이 바뀌었고, 대 서양 양편의 무역이 크게 늘어났다. 강의 원주민들은 떼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콩다민은 일찍이 병사와 선교사들의 도착으로 예고된 되돌릴 수 없는 대탈주에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1세기 전에는 강 기슭에...엄청난 수의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인들의 출현으로 그들은 내륙지방으로 철수해 들어갔다." "아마존 공략에 나선 이 헌신적인 노력파들은 파괴와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를 위 해 이곳에 왔다" 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이며 초창기 민속학자이기도 했던 알시드 도르비니는 19세기의 과 학자 겸 연구자들의 성격을 이렇게 말한다. 과학상의 대탐험 시대는 실제로 인디오 살육이 비교적 잠잠해진 시대와 일치한다. 대다수는 박물학자- 그 중에서도 대부분 식물학자-였지 만, 그들 모두는 또한 계몽 시대의 전통선상에 있는 '철학자'였고 홈볼트와 같은 만능 재주 꾼들이었다.(그 행복한 시절에는 전문화 추세가 동시에 몇 가지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막지 는 않았다.)그들은 자발적으로 아마존 지방의 민속을 탐구했다. 그들의 기록은 아직 엉클어 지지 않았던 때의 인디오 부족들의 삶을 보여주는 창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대다수 인디 오 부족들은 완전한 문화 침식하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작업은 더더욱 커다란 흥미 를 가진다. 이제 장기간의 잦은 여행이 대양을 건너는 많은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추세가 되 었다. 식물학자 오귀스트 드 샐틸레르는 브라질의 정글 속을 수천 킬로미터 헤집고 다니며 표본을 채집했다. 알시드 도르비니는 대륙횡단 여행 후 10만 종이 담긴 매우 진귀한 표본첩 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수집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요한 밥티스트 폰 스픽스와 카를 프리드리히 필리프 폰 마르티우스의 팀, 여러 나라에서 많은 학자들이 아마존을 탐사했다. 이들 과학자가 누린 인기는 새로운 발견을 외 치는 한 세기동안의 열정의 산물이었다. 유럽의 여론은 과학자들을 행동에 옮기도록 자극하 고 그들이 작업하는 데 필요로 하는 기금을 내놓도록 사람들을 부추겼다. 잡지 (세계 여행) 은 폴 마르코이가 페루 해안의 사막에서 벨렘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 여행하면서 기록한 것을 무려 3년간에 걸쳐 연재하는 것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페인인들의 정복 연대 기 이래로 그것만큼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이해를 증진시켜 준 것은 없었다. 그들이 갖고 돌아온 엄청난 양의 기록과 수집물과 표본들은 이후의 과학자와 역사가들에게 무진장의 자 료가 되었다. 보아뱀이 똬리를 틀고 낮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수련 이 시기에 아마조니아에서 이루어진 숱한 발견은 재미있는 것에서 죽음만큼 진지한 것까 지, 그림같은 것에서 획기적일 만큼 중차대한 것까지 다양한 범주에 걸쳐 있다. 1840년대에 식물학자 로버트 숌버크는 당시 영국령 기아나였던 곳을 탐사하던 중에 엄청나게 커다란 수 련하나를 보았다. 거대한 접시 모양을 한 너비 2m쯤 되는 잎은 거대한 수련꽂 그늘에서 졸 고 있는 똬리 튼 보아뱀을 가볍게 받치고 있었고, 꽃은 진주빛 나는 흰 꽃잎과 밝은 빨강의 꽃술 사이가 분홍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꽃부리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그 수련이 아마조니 아에 있기에는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도 정신을 가진 숌버크는 미래의 야망을 간 직한 이 식물정원에 대영제국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여 '빅토리아 지구'라고 이름 붙였다. 그 러나 그보다 덜 아름답기는 해도 더 중요한 발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존족의 강을 다 시 한번 신화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돌이키는 그러한 발견들이었다. 제4장 거대한 고무산업 파리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열린 모임에서 라콩다민이 자신의 여행기 초록을 낭독 할 때 모인 사람들은 이 대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파라 지방에 있는 포르투갈인은 오 마과족에게 한가지 물질로 시린지를 만드는 법, 피스톤이 필요 없는 펌프 만드는 법을 배웠 다. 시린지는 끝부분이 홀쭉한 목이 있는 배 모양으로 만들어지는데, 목 부분도 몸통 부분과 마찬가지로 속이 비어 있다. 이 목안으로 막대를 집어넣는다. ... 그런 다음 갑자기 커다란 압력을 가하면 안에 들어 있는 액체가 밀리면서 주사기 같은 효과를 낸다. 오마과족은 이 용기를 매우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어울려 놀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일 때면 집주인은 손임 들 모두에게 어김없이 이 병을 하나씩 준다. 대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그 속에 든 내용물은 계속해서 조금씩 비게 된다." 근대 산업기술사 최대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아나조니 아의 시린지와 노즐로 거슬러올라간다. 브라질 사람들은 야생 고무나무 숲을 세링게, 고무액 채취꾼을 세링게이루라고 부를 때마다 매번 이것을 떠올린다. 라콩다민이 오마과족에 대해 언급한 것에 관해서는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다. 그들은 관장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마취약 으로 시린지를 채웠는데, 약을 썼다는 것은 그들이 모임에서 그 장치를 공유했음을 말해준 다. 유럽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고무제품은 연필 지우개로,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 리가 고안했다. 그것은 '인도고무'였다. 인디오들은 태곳적부터 고무를 사용해왔다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족이 갖고 논 공은 고무로 만든 것이었다. 이 놀이를 한 것으로 알 려진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였다.(아이티의 타이노, 브라질 중앙부의 아피나예). 오리노코 강 상류의 인디오들은 북채를 고무로 감쌌다. 젖은 나무에 고무를 조금 넣으면 불이 쉽게 붙었고, 카누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데도 고무가 간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직이 18세기 초 엽부터 인디오들은 파라의 포르투갈인들에게 고무액으로 장화나 저장용기 만드는 법, 지붕 을 방수 코팅하는 법을 보여 주었다. 매킨토시, 핸콕, 굿이어, 미슐랭, 던롭: 상징이된 이름들 아마조니아의 고무 러시를 일으킨 데는 자전거와 자동차의 인기가 점점 높아져 1850년에 세계에서 수요 폭증 사태를 불러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수의 발명자와 이제는 전설이 된 그들의 발명에도 명예가 돌아가야 한다. 1823년, 찰스 매킨토시라는 스코틀랜드인은 고무 피 복을 입힌 직물을 만들어 벼락처럼 명성을 얻었다. 7년 후 토머스 핸콕은 생고무를 부드럽 게 만드는 처리법을 완성했다. 1839년, 찰스 굿이어는 가황법을 발견하여 최초의 공기 타이 어 생산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그 뒤로는 고무의 역사와 자동차의 역사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갔다. 1888년, 존 보이드 던롭이라는 아일랜드 수의사는 열 살짜리 아들의 자 전거를 만드는 과정에서 최초의 공기 타이어를 고안해서 나중에 특허를 받았다. 4년 뒤에는 에두아르 미슐랭이 최초의 분리식 고무 공기 타이어를 만들었다. 붐이 일었다. 고무 수요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야생 고무나무의 독점과 가격 설정의 자유로 아마조니아는 드넓은 적 도의 클론다이크(캐나다 유콘강 유역의 유명한 사금산지)가 되었다. 불가리아, 페루, 에콰도 르, 콜롬비아에서 발원한 마라뇬, 우카얄리, 아바리, 마데이라, 나포, 푸투마요, 카케타, 레그 루 강을 따라 귀중한 상품이 흘러 내려와 마나우스에서 합류했다. 대양을 다니는 배가 일년 내내 항행할 수 있는, 내륙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항구인 마나우스는 일약 세계의 고무수 도로 떠올랐다. 고무를 가득 싣고 있는 독특한 부유선거로 말미암아, 마나우스는 이내 금으 로 가득 차면서 고삐 풀린 사치의 시대를 열였다. 정복욕에 박차를 가하던 스토리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걸까? 신화 속의 마누아가 마나우스의 살아있는 전설에 자리를 내주다 19세기 초엽 지금의 마나우스는 바라였는데, 바라는 1669년에 포르투갈인이 역내 스페인 인의 움직임을 감시할 목적으로 세운 작은 성채가 성장하여 만들어진 요새 마을이었다. 식 물학자 도르비니는 1830년, 바라에서 발길을 멈추었는데, 그는 3,000남짓의 남루한 주민들이 이 지역에서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말린 물고기, 사르라, 브라질 콩, 거북알 기름 등을 팔면서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무액 저장술의 발달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고무가 이 제 수출 가능한 상품이 된 것이다. 1850년, 바라는 지방 정부의 수도가 되면서 마나우스로 개칭되었고, 처음으로 정부공채를 할당받았다. 그해에 마나우스는 파라로 1,000톤 가까이 되 는 고무를 실러 보냈다. 1870년에는 그 수치가 3,000으로 뛰었고 1880년에는 1만 2,000, 세기 가 바뀔 때에는 2만으로 뛰어 올랐다. 마나우스는 인구 5만의 대도시로 급성장했다. 무더기 옷은 비록 깨끗이 세탁은 못했지만, 런던이나 파리에서 서온 화려한 옷으로 바뀌었다. 거래 는 밀레이스 어음이 아니라 금화로, 옛날의 덜컹거리는 탁자에서가 아니라 유럽에서 데려온 잘 훈련된 종업원들이 상파뉴, 위스키, 코냑을 날라 오는 크고 우아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고무를 가득 실은 화물선이 뚜뚜소리를 내며 뉴욕이나 리버풀로 떠났다. 돌아오는 배 안에 는 은행가와 예쁜 여자들이 가득했다. 요컨대 아마존의 생활은 더 이상 단조롭지 않았다. 도 시가 늪지대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면서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산의 포장석과 그것을 깔 사람들 이 왔다. 보스턴 사람들이 마차를 이용하고 있던 때에 전장 16km의 가로에 전차가 내달렸 다. 매일 아침 전화 가입자들-1897년 첫 회선이 가설 될 때에 300명이 가입했다.-이 전세계 의 대규모증권거래소를 호출하여 고무 가격을 정했다. 도시의 지붕들 위로 황금기 마나우스 의 사치를 상징하는 오페라 하우스의 녹, 황, 청의 돔이 높이 솟았다. 같은 해에 대서양 횡 단 서비스를 빠르게 하고자, '부스라인'에서 마나우스와 리버풀을 잇는 정기 증기연락선을 띄웠다. 진짜 도시가 등장한 것이다. 붐이 가라앉다 마나우스가 권력의 정점에 있던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약 120평방마일의 숲에서 8,000만 그루의 고무나무가 개발하에 있었다. 마나우스는 매년 8만 톤의 생고무를 수출했다. 수출 관세만으로도 브라질 전 국채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붐이 한창이던 좋 은 시절은 금방 지나갔다. 3년 전 아마존에서 몰래 빼돌린 씨앗이 말레이시아의 고무 플렌 테이션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곧 수확량이나 생산비 면에서 모든 경쟁지역을 앞질렀다. 게다가 잔인한 채취로 고갈된 아마조니아의 고무나무들은 해가 갈수록 적은 양의 유액을 산출했다. 금융대란이 일어나면서 아마조니아는 이제 붕괴 국면으로 치달았다. 사람 들은 파산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1912년에 그들은 낙담하여 재산을 매각하고 있었다. 마치 요술로 세워진 것 같았던 제국이 판지로 만든 집처럼 무너졌다. 오페라 하우스라 문을 닫고 나이트 클럽과 사치품 가게가 셔터를 내렸다. 여전히 거래가 이루어 지는 곳은 경매소 뿐이 었다. 한때 거부였던 사람들이 보석이며 가구며, 미술품들을 팔아치웠다. 부스라인의 매표소 창문에는, 유럽행 배표를 사려는 사람들은 몇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하라는 공고가 나붙었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도시 구역 바깥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변함없는 무식함이었다. 종려나무 베란다 위에는 뚱뚱한 여인들이 빈둥거리고, 아이들은 맨발로 길 위 의 먼지를 차대며 떼를지어 뛰어다녔다. 벌겋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보이는 길에는 아 스팔트가 삐쭉삐죽 튀어올라와 있고, 길 위의 정글에서 뻗어내려온 짙은 녹색의 덤불이 길 을 반쯤 덮었다. 하지만 바로 그해에, 2,000km쯤 떨어진 곳에서는 총 연장 350km의 마데이 라-마모레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 철도는 볼리비아에서 아마존강의 화물선이 닿을 수 있는 브라질의 포르투벨류에 이르는 좀더 편리한 수송로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열대 우림속 을 가르는 이 철도를 뚫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들었고, 건설 기간 5년 동안에 6,000명이 목숨 을 잃었다. 그것은 부질없는 짓으로 드러났다. 볼리비아산 고무는 너무 비쌌던 것이다. 볼리미아의 수아레스, 고무업계의 록펠러 진짜 자수성가한 사람, 수아레스는 맨발로 시작해서 아마조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고무귀 족이 되었다. 그의 자산은 볼리비아의 약 3만 평방마일의 땅과 베니 강변의 두 읍내(리베랄 타와 비야베야), 자신의 보트 선단을 위한 '수아레스와 형제들'정박소의 완벽한 연계 체제에 다가 마데이라 강의 독점 해운권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수아레스 형제는 본디 일곱이었으나 그중 하나가 회사소속 경찰대를 이끌고 카리푸나족 영토를 침입하다가 살해당했다. 단 한 명의 수아레스의 목숨값으로 300명의 카리푸나 인디오가 살육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수아레스 형제는 이들 인디오가 훌륭한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른 인디오들과 마찬 가지로 게을렀고 충원하기도 어려웠다. 마드레데이도스 강변에 사는 친구하나가 참신한 해 결책 한 가지를 냈다. 그는 600명의 인디오 노예소녀들을 번식용으로 끌어 모아 자신의 하 렘에 두고 손님들의 처분에 맡겼다. 그 뒤에 그가 할 일은 그 자식들이 자라서 일을 할 수 있을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애러나, 미심쩍은 존경을 받은 신사 수아레스 보다는 훨씬 덜 야비했던 줄리오 애러나는 올리브빛 피부에도 불구하고 부인들 에게 교양있는 남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서재와 런던에 있는 그의 집, 그의 아이들이 진짜 영국인 유모, 가정 생활에 대한 그의 사랑 등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별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애러나는 잰체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이트 클럽을 헤집 고 다니는 자기 형제들과는 마치 거울의 이면과도 같았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그는 페 루 아마존 컴퍼니-그의 필생의 사업이었다.-의 사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서는, 온 종일 그곳에 처박혀 있었다. 빈틈없고 통찰력 있는 전략가였던 그는 자신의 부의 주춧돌인 볼리비아산 고무가 시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부설안을 지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그가 푸투마요강을 따라 형성된 더 북쪽 편 에 있는 1만 1,500평방마일에 이르는 숲을 장악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지역은 야생 고무나무가 풍부한 곳으로 콜롬비아와 페루의 영토 다툼이 첨예하고 마나우스와는 훨씬 가 까운 곳이었다. 이곳은 도한 보라족, 안도케족, 우이투투족, 오카이나족-정복자들의 시대 때 부터 알려진 평화스런 인디오 부족들-의 고향으로 모두 합해 약 5만명이 살고 있었다. 애러 나는 대영제국의 신민인 바베이도스 출신의흑인들로 민병대를 구성했다. 그러고는 영리한 머리를 굴려 런던에 본부를 두고서 시의 재무관이 자기회사의 채권을 일괄 인수 할 수 있게 끔 준비했다. 그 결과 회사는 어느 만큼 격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신성불가침의 민병대는 윈체스터 총으로 무장하고 정글로 들어가 인디오들을 끌어냈다. 3만명의 인디오가 회사 소 유의 마을에 갇혔다. 페루 아마존 컴퍼니의 망신 그러나 런던에 곧바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원주민 노동자들의 처우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 였다. 도시의 훌륭한 명성이 거론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5년 뒤 청문회는 열 대우림 지역이 킬링 필드로 변했다는 것을 폭로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지역에 살던 5 만명의 인디오 중에서 8,000명 가까이가 살해되었다. 고무 1톤마다 일곱명의 사람 목숨을 바 친 셈이었다. 제5장 인디오와 열대우림 인디오 문화는 서구 문화와 달리 자연에의 적응과정이다. 동물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 고 인디오들은 말한다. 나무나 산까지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들 도 필요한 경우 슬쩍 채가고 훔치고 죽이지만- 그 어떤 행동도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과다하게 쟁여놓는 일이 없다. 그들의 삶의 구조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생태학이 자 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다. 인디오와 자연의 조용한 공존 잘 깎아 멋진 균형을 이룬 인디오의 카누는 잔물결하나 일으키지 않고 강 위를 미끄러져 간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숲 속 길의 망을 따라 걷는 인디오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어 적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까 조심한다. 그러다가 다른 인디오나 페카리 떼에 몰래 접근해서 는- 필요한 만큼만 죽인다-갑자기 다른 부족들과 함께 사는 사냥개처럼 큰소리로 짖는다. 눈 깜작할 사이에 사방이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활로 사냥하는 것은 인디오들에게 공 통적인데, 그들에게는 몰라서 바꿔 끼울 수 있는 '주문 제작한'화살촉이 헤아릴 수 없을 만 큼 다양하다. 전투용으로 고안한 화살 끝에는 대나무를 창 모양으로 깎은 뒤에 불에 단련시 켜 면도날처럼 만든 화실촉을 끼운다. (야누마미족은 머리를 자르는 데도 그것을 사용한다.) 깃털은 몸치장에 쓰이는 매우 중요한 도구인데, 인디오들은 마치 펜싱용 칼처럼 날카롭게 한 특수한 깃털 끝은 이용하여 새도 잡고 상으로 받은 깃이 손상되지 않게 한다. 그러나 그 들의 가장 정교한 무기는 속이 빈 나무줄기를 갈고 닦아서 만든, 불어서 쏘는 화살총이다. 한 번만 훅 불면 커다란 바늘 크기의 화살이 20m이상을 날아가 표적에 그대로 꽂힌다. 3cm 깊이의 상처는 살 끝에 아무 것도 묻히지 않았을 때는 가벼운 것이지만, 쿠라레라는 독을 발랐을 때는 부드러운 근육조직이 차츰 마비되면서 조용히 죽는다. 활과 화살 중에는 길이 가 2m 나 되는 것도 있고, 창은 3m, 화살총은 8m 가까운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 라운 것은 아마도 인디오들이 빽빽한 정글 숲 한가운데서도 그렇게 긴 무기를 매우 민첩하 게 다룬다는 것이리라. 아마조니아의 발명품 건기가 되어 강들의 수위가 낮아지면, 인디오들은 갈대를 엮어 둒을 쌓는다. 그런 다음 상 류 쪽에서 풀다발을 으깨어 강물에 흘려 보낸다. 마취된 물고기들이 물위에 떠올라 물의 흐 름을 따라 둑 있는 곳으로 떠내려온다. 인디오들은 둑에 서서 양동이로 물고기들을 퍼올린 다. 이것이 '바르바스코 고기잡이'로 알려진 것으로, 으깨는 풀의 이름에서 떠온 말이다. 다 음 단계는 길고 연한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걸쳐놓고 뜨거운 숯으로 포획물을 굽는 것이다. 훈제 처리된 물고기는 사냥거리가 드문 우기를 대비해 저장해 둔다. 사냥 중에 잡은 페카리 와 맥도 도살하여 같은 방법으로 요리한다. 아이티의 인디오들은 이 시렁을 '바르바코아'라 고 불렀고 스페인인이 그들에게서 그 말을 가져왔다 따라서, 오늘날의 바비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다 아메리카식인 셈이다. 마법의 세계, 초자연적인 전지자 "아마조니아의 인디오는 흔히, 신기하거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든 자연현상에서 초자연 적인 존재의 실존을 느낀다."엘프레드 메트라우시의 기록이다. "폭포나 강물의 소용돌이, 괴 상하게 생긴 바위는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달래 주어야 할 심술궂은 정령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곌 건너가는 법을 모르는 한 초자연적인 존재를 쫓 아 낼 수 없다. 영혼의 안내자. 샤면을 보자. 그는 자신의 몸을 떠나 병마에 의해 쫓겨난 영 혼을 찾아간다. 그는 또한 자신의 부족원 모두를 도와 출생, 사망, 사춘기 등의 지난한 인생 의 전환기를 헤쳐 나가게 한다. 어떤 부족의 경우에는 이를 위해 다량의 술, 담배, 환각제나 최면제 등을 제공하는 위험한 시작 의식을 치른다. 매우 길고도 위태로운 수련을 통해 습득 한 샤면의 최면술은 그로 하여금 공동체를 집단무아의 경지로 안내하고 의식이 다시 제자리 로 안전하게 돌아와 적정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어떤 마약은 피우는가 하면, 어떤 것 은 달여서 마시거나 냄새를 맡고 심지어는 관장을 하는 것도 있다. 야누마미족 사냥꾼들은 감각을 예민하게 하기 위해 매일같이 '에베네'를 흡입한다. 그 밖에, 피아로라족과 그 지역 내의 모든 부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요포'도 쿠라레 만큼이나 유명하며, 그것과 마찬가지 로 선물 주는 의식이 행해질 때 서로 교환한다. 새와 깃,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물 잘 놀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외모를 중시하는 인디오들은 동료들 앞에서 뽐내기를 즐긴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도 더 열심히, 아나토 씨에서 뽑아 낸 빨간 물감으로 솜씨를 부리고 숯 검댕과 파란 식물성 염료로 여기저기 악센트를 주어 자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장식한다. 얼 굴 디자인은 검정, 빨강, 흰색에다 이따금씩 광택을 내어 마무리한다. 여자들이 치장하는 규 칙은 더 치밀하고 섬세하다. 이처럼 현란한 치장에 수많은 장신구를 단다. 귀에는 투칸새 깃 의 기다란 술이 달린 장식물을 꽂고, 목에는 커다란 이빨을 꿰어 만든 목걸이(사냥 능력의 증표)를 걸며, 씨앗을 이어 꿴 사슬, 털을 꼬아 만든 끈으로 팔과 다리의 근육을 불거지게 한 위에, 입술판, 가슴 장식, 길게 늘어뜨리는 각종 장식물을 단다. 축하 의식 때에는 미리 준비해 둔 야자 스커트와 깃털 꽂은 왕관이나 머리띠가 등장한다. 그때에는 남자들이 장중 한 행렬을 이루어 뾰족하게 다듬은 곤봉을 선보인다. 지금은 곤봉이 축제용으로만 쓰이지만, 투피족이나 카리브족 등등의 인디오들 사이에서는 한때 카니발 의식 중에 죄수들을 처형하 는 데 쓰였다. 공동의 집을 열 때는 축제가 벌어져, 흥분 속에 며칠 동안 의식이 이어진다. '공동의 집'은 기초적인 상징물이다. 100명이 들어갈 만한 규모를 갖춘 공동의 집은 일종 의 마을 광장 같은 역할을 한다. 대개 지붕을 이며, 가운데에 부채꼴 모양으로 거실들을 만 든다. 그곳에는 한 쌍의 남녀나 개인이 기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혈족집단이라 는 인디오 사회의 기본단위가 구현되어 있다. 남녀의 쌍과 자식들이 인정되고 존중은 되지 만, 나이에 따라 공공의 집 내의 모든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아이도 되고 부모도 되는 것이 다. 그러나 규모가 커진 몇몇의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 수 있다. 공동의 집은 그들 의 우주관과 창조관의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모두가 반드시 배워 읽어야만 하는 한 권의 '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과 주변 숲 사이에 넓게 펼쳐진 땅에는 마니오크(빵 과 술의 원료로, 카사바라고도 한다)와 바나나, 그리고 이따금 사탕수수나 파인애플, 파파야 를 조금씩 심는다. 몇 년이 지나 비 때문에 지붕이 손상을 입고 대지의 표층이 씻겨 내려가 면, 그 땅은 묵혀 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땅을 일구고 또 하나의 공동의 집을 짓는다. 새로운 축하연이 연달아 열린다. 가장 울창한 정글 속을 미끄러져 들어가면 야누마미족을 찾을 수 있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의 변경에 자신들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야누마미족 인디오들은 대체 로 인디오 문화의 초창기 생존단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이동하 면서 자연과 경쟁하지 않고 완전히 공생하며 살았다. 야누마미족 남자가 가지고 다니는 장 비는 활 하나와 자기 키보다도 더 긴 화살 세 개, 활을 반으로 잘라서 만든 곤봉하나가 전 부이다. 등에 둘러메고 다니는 작은 대나무 화살 통 속에는 흔히 여분의 화살촉 몇 개와 아 구티의 이빨 끝으로 만든 연필 크기만한 막대 하나가 들어 있다. 기본적으로 전사인 야누마 미족은 사냥과 채집으로 살며, 간혹 몇 가지 토종 과일나무를 기르기도 한다. (그들은 남의 것을 슬쩍 채가고 훔치고 꿀벌 통을 약탈하며, 심지어는 굴속에 들어 있는 아르마딜로를 잡 기도 한다.) 식사는 기초적인 수준이고, 고기를 제외하고는 보통 날것으로 먹는다. 잠은 나 무껍질을 벗겨 만든 작은 그물침대에서 잔다. 그들의 토속색 짙은 문화와 삶은 그들 주변의 싱싱하기 이르데 없는-그리고 유령이 출몰하는- 세계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남아메리카 최대의 문명화되지 않은 부족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매우 많은 수의 야누마미족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용케도 오늘날까 지 백인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을까? 지금 그 들이 복지와 위태로움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는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다. 어쨌거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야누마미족이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히 고립된 채로 살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에 서는 야누마미족이 물질 문명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세계'에서 빌려온 것은 아니 었다. 지난 25년 동안에 그들은 카누, 목화 솜으로 짠 해먹, 작은 바나나와 마니오크 나무 등, 분명히 진전된 기술들을 채택해 오고 있었다. 아마도 정주 농업 부족이었던 예콰나족과 교류한 결과인 것 같다. 싸움에 진력이 난 두 부족은 전통 이상의 것까지도 교류를 해오고 있었다. 심지어는 상호 결혼까지도 허용했다. 만일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는 백인들의 침입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무리 없이 계속 진전되었을 것이다. 아마조니아에 또 한차례 보물찾기꾼들이 몰려들고 있다. 1987년에 시작된 최후의 골드러시는 보물을 찾아 나선 투기꾼과 가림페이루-한 손에는 곡괭이, 한 손에는 윈체스터 총을 든 사람-들은 정글속으로 불러들였다. 브라질 쪽 야누마 미족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광부들이 가져온 질병-말라리아, 결핵, 성병-이 최소 한 1,500명의 브라질쪽 야누마미족을 죽였다. 1990년 (타임)지는 한 야누마미족 남자의 말을 인용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쌀과 밀을 주었지만, 그후 우리는 병이 들었습니다. 저들은 우 리의 친구인 척 하지만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야누마미족의 위기가 널리 얼려지면서 야 누마미족을 돕자는 함성이 나왔고, 몇 년 안 가서 브라질 정부는 야누마미 땅에서 투기꾼들 을 몰아내고 땅을 야누마미족에게 돌려주는 일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91년 4 월 브라질의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로 대통령은 인디오들에게 방대한 땅을 떼어주고 다른 사람들은 출입을 금지하는 여러 개의 법령과 포고령을 발포했다. 하지만 그 보호구역은 가 림페이루와 그 밖의 보물찾기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에 의해 여러 개로 조 각나 있어 여전히 야누마미족을 괴롭히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영토구획으로 말미암아, 사냥 과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야누마미족의 생존 능력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그러나 야누마미 족과 그 밖의 인디오 부족들이 그들의 건강과 문화에 대한 위협을 이겨내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백인 침입의 충격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 야누마미족이 영 원히 그대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인류학자 로베르토 리사달리는 말한다. "문 제는 그들의 방식으로 변화하는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방식으로 변화하느냐 하는 것이 다."최근의 침입자들은 최신 기술에 힘입어 자신들의 활동 무대를 아마존의 심장부에서부터 저 멀리 변방까지 아마존 유역 전체로 넓히고 있다. 전례 없는 양이 보석과 귀금속은 물론 그 밖의 광물을 찾는 탐사가 철, 석탄, 석유, 보크사이트, 우라늄, 구리, 납 등의 새로운 광산 을 찾아 내어 대규모의 개발 붐을 일으키고 있다. 하루하루 더 넓은 열대우림 지역이 매연으로 뒤덮이고 있다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열대우림 자체도 벌목, 광산 개발. 크고 작은 현대식 농장이 계속 들 어서는 바람에 토양이 갈수록 척박해지는 등 모든 측면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에 아마존 유역 전체의 숲이 간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책임은 (효율 적으로 관리되는 경우의)대규모의 사업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농경방법에 있다.(인디오들이 그런 것처럼)군데군데 숲의 매우 작은 부분에 한정되어 시행될 때는 별 위험이 없던 화전 농경법이 이제 광범한 토양파괴와 침식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오염으로 아마조니아의 거대한 물고기,피라루쿠가 희생되었다. 개발은 아마존 유역의 물의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 아마존의 물은 이 지역의 대체 불가능 한 수송망일 뿐만 아니라 만일 이것이 없었다면 숲 속에서 사냥을 해서 얻을 수밖에 없는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 다양한 종류의 토종 물고기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마존강 곳 곳에 늘어나는 많은 대형 댐과 주요 강들의 급속한 오염은, 보통200kg에 달하는 무게 때문 에 한때 이 지역에 상징으로 여겨지던, 덩치는 크지만 해는 입히지 않는 피라루쿠를 거의 쓸어 버리다시피했다. 20세기 초엽의 무역 거래 때까지만 해도 말리거나 절인 피라루쿠는 그 모습이 여전하여 흔히 민물대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강 상류의 계곡에서 금광업자들이 사용하는 수은은 수백 킬로미터를 흘러 내려가며 물고기들을 죽여 없앴다. 어떤 지역에서 는 사냥감이 들어지고 땅도 척박해져서 마니오크 뿌리의 무게가 다른 곳에서 나는 거의 1/4 밖에 안되기도 한다. 그 결과로, 또한 가지의 천벌-영양실조-이 마을 주민들의 희생을 요구 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양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많은 댐을 무차별적으로 건설하여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 남은 수천의 인디오들이 거 주하던 보호구역들이 물 속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인디오, 여행사들에의해 무자비하게 이용되는 원자재 어떤 경우에도 인디오들 자체-특히 머리에 깃을 꽂고 있는 경우-가 개발 가능한 자원이 되어 여행사들의 제물로 전락한다. 여행사는 그들을 부추겨 그들의 삶의 방식을 하향 "재정 립"시키게 한다. 이러한 행태는, 인디오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완벽하게 균형 을 이루며 사는 관계로 말미암아, 일부 찬탄하는 관찰자들에게, 이따끔씩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을 제외하고는, 개화된 것은 자신들이고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결론짓게 만든 이 사람들 의 뚜렷한 정체성에 훼손을 가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유토피아 같은 꿈이라고 말할 것이 다. 그렇다면 좋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브라질의 한 고위관리는 지난 몇 해 동안 태 연하게, 휴머니즘 차원에서건 아니건, 인디오들은 개발의 과정에 끼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 기해 왔다. 브라직의 현재 인구는 1억 5380만 명이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수치가 곧 2억, 그리고 3억 마침내는 5억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런 전망에 비추어 볼 때 숲 속 에 사는 20만 명의 인디오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는 갖지 않을 것 같다. 인디오를 논하는 인디오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위로, 세기말에 이르면서 새로운 조류가 일고 있다. 일부 인디오들 (오랜 전부터 백인들 가까이에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안데스 산맥 온화한 지역의 인디오들 대부분과 브라질령 아마조니아의 남서부에 사는 몇몇 대부족)은 활과 화살에만 토대를 둔 전략-때때로 의미 있는 억지력이라는 것이 입증되기는 하지만-이 아니라 백인의 언어를 쓰 고 그들의 체계 내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 그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방위전략을 개발하는 것 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합법적으로 단체를 만들고 헌법이 인정하는 권리로 자신 들을 무장했다. 그들의 사명은 자신들의 사명은 자신들의 물질적, 정신적 유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21세기로 나아가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친 가장 뜻깊은 사태의 전환이다. 두 세계간의 대화를 시작하는 문제 금세기 초두에는 아마존 유역에 있는 어떤 국가의 인디오도 헌법상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고무 스캔들이 물의를 일으키면서 브라질 정부는 1910년에 마침내 인디오 보호 부대를 만들게 되었다. 이런 종류로는 최초의 기관이었던 이 부대의 창설목적은 기와와 빈 곤, 백인에 의한 착취, 백인들에게서 흘러 들어온 질병으로부터 인디오들은 보호하는 것이었 다. 그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던 토착 브라질인, 캉디두 마리아누 다실바 룽둔 대령은 매우 인 기가 좋아서 1956년 90세로 죽기 몇 년 전에 장군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그가 인디오 보호 부대원들에게 남긴 경구-"필요하다면 죽을지언정 절대로 죽이지 말아라"-는 그와 더불어 사라졌다. 농업부 산하의 진짜 순수한 목적의 기관으로 설립된 부대는 일련의 추문에 휘말 려 들었다가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부대는 1972년에 행정 명령으로 FUNAI(Fundacao Nacional do Indio, 푼다사오 나시오날 도 인디오)로 대체되어, 내무부 관할 아래로 들어갔다. 옳은 방향으로 일보 전진한 것이다. 아마존 유역의 대다수 국가들이 브라질의 선례를 따랐다. 법적 규준은 저마다 매우 달랐지만, 그들도 내무부 산하에 인디오 문제를 관장하는 정부기관을 두었다. 어떤 나라는 인디오들을, 다른 동료 시민들과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누리는 완전한 국민으로 인정한다. 아마조니아 인디오 절반의 고향인 브라질 을 포함하는 그 밖의 나라들은 인디오들을, 투표권을 갖지 않고 그들의 보호 대리인인 FUNAI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중재받을 수 있는 사실상의 소수세력으로 간주한다. 브라질이 법을 강화한 것은 큰 진전이었다 1988년 6월에 제정된 헌법은 브라질 내에서 자칭 인디오의 대의 운동가들 사이에 불꽃튀 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는 인디오의 선거권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항도 달지 않 았다. 한편에서는 선거권 누락을 온정주의의 표현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백인 문화에 좀더 익숙해져 있고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며-이것이 핵심적인 차이이다-게다가 숲에 남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에게서 빠져 나온 인디오들에게까지 권리를 주지 않은 데 대해 정부에 항의했다. 그들은 모든 인디오에게는 호시탐탐 그들의 땅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못 된 모험꾼들로부터 동등하게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새 브라질 헌법이 인정한 것- 하찮은 양보는 아니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점유해온 땅에 대한 권리와 지하자원에서 얻 는 이득에 대한 배타적 권리이다. 그러나 국회는 여전히 회사들에게 지하자원의 개발면허를 승인 또는 부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인디오 자조 그룹의 조직자들은 아 마존 지역 대부분에 걸쳐서 인디오들의 땅과 언어,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가 적어도 문 자상으로는 공히 인정되어 왔음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인디오의 이해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서, 대개의 경우 상당히 벌어져 있는 법과 강제력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또 이 숭고한 원칙 이 열대의 뜨거운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리지 않도록 싸워 나가야만 한다. 숲에 사는 인디오들은 사라질 운명일까? 마을에서부터 부족, 민족, 국가에 이르기까지, 각기 수준이 다른 아마조니아 인디오 사회 에서 상호 부조 조직이 일어섰다. 인디오들은 자기네들도 백인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아 자신들의 언어와 땅에 대해서는 물론,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 는 것을 보여 왔다. 그것은 (모든 점쟁이들에게 당당하게) 근대 세계와의 통합이 반드시 인 간의 개성을 파괴시키는 문명화로 귀결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문화란 그것 없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중단되는 자기네 집단에 인디오 개개인을 접착시키 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하는 한 그들의 정체성은 안전하다. 따라서, 인디오들이 사라질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우리의 답은, 그들이 대표를 가진 채로 일부는 여 전히 숲에서 살면서 이따금씩 바깥 세상과 접촉할 뿐인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라면, 자신있 게 '아니오'이다. 이 범주에는 아마존 유역에 사는 80-90만 인디오들의 절반이 포함된다. 하 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 500년 뒤에 아마존의 전설은 엘도라도의 살해로 끝을 맺을까? 아마조니아 문제의 전반적인 인식이 변화의 단초를 만들어 왔다.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증 대되는 열대우림('지구의 허파')과 그 원주민들을 보존하려는 국제적인 노력 덕택에, 희망이 지평선 위에 놓여 있다. 지역적인 차원은 물론이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무분별한 벌채와 오염을 막으려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고, '자연에 대한 부채' 교환-지역 내 환경보호 프로그 램과 새로운 보호구역 설정의 대가로 산업화된 국가들이 채무국의 재정분담 일부를 덜어 주 는 교환-과 같은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 력들은 현지의 당국들이 모든 차원의 행정에서 생태계와 원주민 보존의 원칙을 두루 강화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미래의 희망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국경을 지킨다거나 게릴라 운동 이나 마약거래를 막는다는 명목 하에 아마존에 주둔하는 무장 병력이 지나치게 자신의 무력 을 남용하고 나아가 환경과 인디오 공동체를 제물로 삼는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브 라질의 인류학자이자 정치활동가인, 다르시 리베이루가 1979년에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브라질의 인디오들을 구한다는 인류학자로서의 나의 목표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 렇다. 단지 구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것을 위해 나는 지난 30년을 보냈다. 그러나 나 는 실패했다. 나는 그토록 많은 인디오들을 절멸시킨 그 잔인한 행위들로부터 그들을 구하 고 싶었다. ... 선교사 보호관리국, 과학자, 그 밖에서 그러는 거나 선교사와 보호 관리들 보 호 과학자, 그 밖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권리 즉 생존 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있을 권리를 박탈해 간 거의 모든 토지 소유자들이 그들의 마을에 뿌린 분노와 낙담으로부터 인디오들을 구하라." 기록과 증언 리오 데 오레야나 1543년 6월 7일,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서인도 제도 의회에 나타나 곤살로 피사로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세비야 당국은 그의 '반역'을 눈감아 주고 그를 아마조니아 영토의 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왕의 훈령:귀공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가 짐을 섬기고 스페인 왕실의 영토를 확장하며 전술한 강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성한 카톨릭 신앙을 알리겠다는 바람에서, 그 땅으로 돌아가 탐사를 마치고 그곳을 식민지로 만들겠다고 청원해 온 사실에 비추어... 그리고 귀공이 그 강의 기슭들 중 어느 쪽을 선택하여 탐사하건 간에 그 개척한 모든 땅에 대해 지사의 칭호와 권한을 귀공에게 부여해 달라고 짐에게 요청해온 건에 관하여, 짐은 귀 공의 청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계약서와 협약 문안을 작성하였노라. 첫째, 귀공은... 우리 가 뉴안달루시아라고 명명한 그 땅의 탐사와 식민지화를 위해 이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기 병 100명과 보병 200명, 모두 합해서 스페인 국적을 가진 300명의 부하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식민사업을 진취적으로 추진하면서 귀공과 귀공의 부하들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병력일 것이다. ... 또한, 귀공은 전술한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교육시키고 개종 사업을 추진 하게 하기 위하여 서인도 제도 의회 의원들이 지명하여 귀공에게 제시하게 될, 8명에 달하 는 성직자를 대동해야만 한다. ... 귀공은 도한 전술한 탐사와 식민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귀공이 빠져 나온 강의 하구에 다다른 뒤에 짐의 왕국으로부터 한 척씩 차례로 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갈 두 척의 배를 인수하게 될 것이다. 하구에 들어가는 즉시 귀공은 닻을 내리 고 장비들을 점검할 것이며, 강을 올라갈 두 척의 배에는 맹세코, 온유한 기질을 가진 소수 의 사람들과 필요한 절차를 밟아 그 땅에 살고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원주민들을 설득하여 화평한 자세를 갖게 하는 임무를 띤 몇몇의 성직자를 태워야 한다. ... 우리 주 하느님의 사 업을 완수하는 에 필수적인 믿음으로, 또한 귀공의 부하들에게 권위를 더해 주고자, 우리는 귀공에게 귀공이 그 강의 언덕 위에 개척할 모든 땅의 지사이자 총사령관이라는 칭호를 부 여하는데 동의하고 ... 매년 5,000두카트의 봉급을 줄 것이며 ... 짐은 또한 귀공에게 이 협약 에 따라 귀공이 개척하고 식민지로 삼을 땅에서 짐이 매년 거두어들일 도든 세수와 이익금 의 이십분의 일의 은사를 내린다. 짐이 귀공에게 주는 이 은사는 세세토록 귀공과 귀공의 상속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귀공은 귀공이 세우게 될 정착지를 마련함에 있 어, 그 땅에 사는 인디오들의 권리와 바람을 침해할 일이 전혀 없는 장소와 지역을 조심스 럽게 물색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전술한 인디오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아니면 규정된 사항들이 잘 준수되는지 지켜보고자 귀공과 동행하게 될 감독관과 전술한 성직자들의 추천을 받는 등 신중히 고려한 연후에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또한 귀공 과 귀공의 일행 어느 누구도 인디오들에게서 결혼한 부인이나 딸, 그 밖의 어떤 여자도 빼 앗지 말 것이며, 교환을 통하거나 그에 값할 만한 다른 물건의 형태로 지불을 하지 않고서 는 그들에게서 금이나 은, 솜, 깃털, 돌, 그 밖에 그들이 가진 어떤 물건도 가져와서는 아니 된다. 교환할 물건과 지불랴은 생명과 재산을 걸고 감독관과 성직자들의 의견에 따라야 한 다. 단, 우리는 귀공 일행이 가져가는 식량이 다 떨어졌을 경우 귀공이 전술한 인디오들에게 교환 조건으로 약간의 식량을 요청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어디가지나 간절하게 식량을 요청해야 한다. 이 모든 수단과 감독관이나 성직자들, 또는 귀공이 추천하는 다른 모든 수단을 다 써본 연후, 귀공 일행이 그야말로 극도의 곤경 에 처하여 먹을 것이 보이는 족족 그것을 움켜쥘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때도 그들에게서 힘으로 식량을 빼앗아 올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전술한 인디오들과 전쟁을 하지 말 것이며, 상황에 맞게 적절한 자제심을 발휘하여 자신들 을 방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명분도 싸움을 정당화할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에게, 우리가 귀공 일행을 보낸 것이 그들을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과 싸 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의 신성한 카톨릭 신앙에 관한 지식을 전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임을 이해시킬 것을 명한다. 그리고 만일 인 디오들이 매우 오만한 태도로 나와, 귀공 일행이 진보와 화평을 권유하며 그들에게 접근하 는데도 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여전히 호전적인 태도로 귀공 일행을 공격해 오며, 귀공 일행이 이를 달리 회피할 수단이 없어 그들과 부딪치지 않고서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 는 경우, 귀공 일행은 최대의 절제를 발휘하여 가능한 한 최소한의 사상자를 내면서 후자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귀공이나 귀공 일행이 탈취하게 될 모든 종류의 옷가지나 각종 장식물에 대해서는, 귀공이 그것을 모아 전술한 인디오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귀공은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귀공 일행을 빋으려고 하 지 않은 그들의 잘못 탓이며 본래 그들 것인 그 물건은 도로 돌려줄 것이니, 이에 귀공 일 행이 그들을 죽이거나 학대하거나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을 의사가 전혀 없고 오로지 그들과 우의 속에 이해를 나누며 하느님과 국왕폐하의 사업으로 그들을 구원할 생각뿐이기 때문이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인디오라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스페인인은 그가 누구 라 해도, 범한자가 스페인인이고 당한자가 인디오라는 사실에 구애됨이 없이, 이 왕국의 법 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전술한 법에서 보듯이, 모든 인디오는 우리의 신성한 카톨릭 신앙 고유의 절차에 따라 속죄받고 훈육받기 위하여 우리의 보호하에 들어와야 한다 는 것이 짐의 뜻이다. 그러므로 귀공은 어떤 경우에도 스페인인이 인디오들을 포획하거나 학대하거나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막거나 규정된 방식에 따라 교환하는 경우 외에 그들에게서 어떤 물건을 빼앗을 수 있게 하는 변명이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차 탐사를 떠나는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에게 주는 칙허장 고상한 야인? 인디오 문화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는 라콩다민부터 자크 라조에 이르는 먼 길을 오는 동 안 이따금씩 상당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이성의 시대와 라콩다민 아메리카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거의 그 종속 수만큼이나 많은 묘 사들이 필요하다. 각기 고유의 언어와 예절, 관습을 갖고 있음에도, 주의 깊게 그들을 조사 하는 아시아인의 눈에는 유럽의 모든 민족들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비치듯이, 내가 여행중에 알게 된 여러 나라의 모든 아메리카인은 서로간에(스쳐 지나가는 관찰자들에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차이들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거의 비슷한 기반을 가진 것으 로 여겨지는 유사한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의 무신경함은 보편적이다. 그것을 무관심 이라고 이름 붙일지 아니면 우둔함이라고 이름으로 비하시킬지는 다른 이들의 결정에 맡긴 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욕구충족이상으로는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식할 것이 있을 때는 탐욕스런 대식가인 반 면에, 결핍이 절제를 강요할 때는 금욕을 감수하고 끈질기게 참으면서 그것을 대수롭게 여 기지 않는 듯이 보인다. 만취한 경우가 아니고는 극도로 겁 많고 소심하며, 노고와는 담을 쌓고, 영광이나 명예나 감사를 표할 모든 일에는 무심하며, 미래에 대한 관심 없이 순간의 목표에만 전적으로 집착하고, 예측이나 반성은 없으며, 방해물이 없을 경우에는 길길이 날뛰 며 유치한 기쁨에 빠져들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생각 없이 삶을 보내고, 나이 먹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시절에서 떠나지 않고 그 모든 실수들을 그대로 간직한다. 이 것이 흔히 노예로 간주되는 폐루의 몇몇 지방에 사는 인디오들만의 광경이라면, 그들의 문 명의 결핍을, 그들을 노예 상태로 퇴화하게 만든 사건 탓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교가 이루어진 나라의 아메리카인이나 유럽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야 만인들도, 비록 우둔하지는 않다 해도 꼭 같이 좁은 삶을 살아가는 것 따위를 보고 있노라 면, 이성의 마음은, 자연상태에서 교육과 사회가 결여된 채 살아가는 인간이 조건 면에서 금 수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샤를 마리 드 라콩 다민(남아메리카 내륙황단 여행기 초록) 1747 인디오 생활의 행복 1986년 이 기사가 쓰일 당시, 인종학자 자크 리조는 19년째 야누마미족과 살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같은 걸음걸이로 겉는다. 사냥꾼의 침착하고도 단호한 큰걸음이다. 그들과 함 께 웃으며 그들을 웃길 줄도 안다. 그들처럼 입술 사이에 씹는담배를 물고 있다. 심지어 배 도 자신의 동료들과 독같이 불룩 튀어나온 올챙이배이다. 그리고 그들처럼 사실상 벌거벗고 산다. 다만, 몸에 착 붙는 내복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 그는 qord인이기 때문이다. 오리노코 강 발원지를 보듬고 있는 베네수엘라 외딴 지역의 호전적인 야누마미 인디오들 사이에서 사 는 오직 하나뿐인 백인이다. 그의 야윈 얼굴, 또랑또랑한 눈, 멋대로 난 수염을 보면, 그를 아마조니아 밀림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탐험가로 오해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드넓은 우림의 볼모도 아니다. 그는 제발로 도망쳐서 지난 19년 동안 또 하나의 삶을 살아왔다. 콜럼버스 시대 이전의 인디오의 삶을. 1968년, 당시 30세의 그는 이슬람을 연구 하고 있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인류학 연구소에서 1년간의 야누마미족 의료 탐사에 동행 할 인종학자를 찾았다. 리조는 뜻을 세운다. 모슬렘 문명에서 아메리카 인디오로의 전환은 이 애숭이 학자에게 놓칠 수 없는 도전의 기회였다. "나는 1년간 떠나 있기로 작정했지요. 예정된 기간이 지나자, 매우 복잡하면서도 우리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 문화를 이해 하려면 현장 연구가 1년은 더 필요함을 깨달았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당신도 알 지요. 내가 야누마미 사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야자잎을 엮어 덮은 천막 밑에서 우리를 맞았다. 야자 천막이 그의 방 세 칸자리(부엌, 침실, 사무실) '아파트'의 흙벽 둘레를 스커트처럼 두르고 있었다. 카로이테리 야누마미족-그가 함께 사는 40명의 작은 공동체-이 희귀한 것을 본 듯이 그를 에워쌌다. 호칭은 간단했다. 그들에게 백 인은 모두 '리조테리(리조의 형제들)'였다. 그는 어떻게, 망가지지 않은 삶이 있는 지구 최 후의 미발굴 안식처의 하나이며 우리 사회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회 속에 융합될 수 있었을 까? 그 물음은 리조를 즐겁게 한다. "사실, 문제는 야누마미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야지에 순응시키는 일이지요.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는 인디오들은 언제나 당신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일컫는 '야누마미'라는 말은 '인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어요. 그 말 속에는, 그들에게 외부인인 백인은 인간에 준하는 모호한 종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것은 맞지만, 열등한 인간, 즉 훔치고 빼앗고 장난쳐도 좋은 그런 존재인 거죠. 따라서 문제는 당신들도 그들과 동등함을 입증시키는 겁니다." 정글 의 시련, 사냥과 어획의 난관, 인내를 시험하는 도보행군, 피할 수 없는 좌절등을 극복해 내 야 한다는 것이다. 연약한 인종학자의 피부는 얽어갔고, 마음도 드세어졌다. 프라이디도 없 는 상태로 샤바노(공동 움막 역할을 하는 커다란 원형의열린 움막)에 격리된 로빈슨 크루소 는 빨리 일어섰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자 그에게 난로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집이 주어졌고, 가족들을 얻었다. 이제 '불의 둘레'-야누마미 사회에 관한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에 들어오도록 허용된 것이다. (불의 둘레)는 1976년 인류학 연구의 한 이정표로서 대 단한 환영 속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현장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쇠가 달구어져 있는 동안에. 이 책은 온기를 간직한 상태로 우리를 야누마미의 일상 세계로 데 리고 들어간다. 그것은 독특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의 기록이다. 장례식(그들은 바나나에다 죽 은 자의 뼛가루를 섞어서 끓인 스튜를 함께 먹는다.), 자유분방한 사랑놀이(기쁨을 증진시키 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라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는 질투의 고통, 이러한 원초적인 성적 자유의 값으로 치르는 대가. 사나운 아이들-그들은 응 석을 부리며 자라는 작은 군주로, 성인이 벌을 주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샤먼이 인도하는 중요한 시작 의식. (나무껍질에서 추출한)-환각제의사용-이것은 그들에게 '달 귀신', '소용 돌이 귀신', '수리 귀신' 따위와 교통 할 수 있게 해준다. 약용식물, 최음식물의 채집, 전사 의 사회에서 여자들이 처한 곤경, 멧돼지사냥, 춤, 몸칠하기, 자기치장. 리조는 야누마미족 사회 생활의 내막, 금기 없는 도덕, 복잡한 종교세계를 공정하게, 그리고 문명의 잔인함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공동체 안에는 마찰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을 두고도 사람들은 주먹을 날리지요. 그러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즐겁게! 그것이 바로 이 ' 반 소비자사회의' 기조이지요. 삶의 즐거움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사유재산이나 권력(추 장이 없다)이 나 우리가 아는 그런 일(그들은 기껏해야 하루에 2-3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다)의 의미를 모르는 공동체가 있다. 불안정한 삶의 조건에서도 그들은 오락 사회를 만들어 왔다. "예컨대, 그들은 매우 단단한 흙덩이를 던지는 거창한 싸움이나 촉을 끼우지 않은 화 살을 날리는 전투를 조직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오리노코강 건너편에 낙원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리조는 고상한 야인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야누마미족과의 대화는 가슴을 따 뜻하게 해주는 한편, 화가 솟게도 합니다. 그럴 의사 없이도 그들은 정말로 당신의 신경을 돋울 수 있어요! 그들은 거친 친구들로, 늘 당신을 건드리고 슬쩍 끼여들며 당신의 집에 침입하고 좋건 싫 건 말을 겁니다. 당신이 짜증을 내면 그들은 부루퉁해져 불평을 하지요."천성적으로 호전적 인 그들은 이웃집단과 자주 싸움을 한다. 그러나 싸움은 그들의 삶의 일부이다. "이 경우에 그들의 목적은 사냥터의 정복이 아니라 도발을 벌주고 죽음을 복수하며 피의 빚을 갚는 데 있습니다. 나는 물론 내부 싸움에는 끼지 않지요(나한테도 자신이 속한 가족이 있긴 하지 만) 그러나 집단 내에서는 나는 자제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들과 같은 언어로 말하고 그들처 럼 사냥함으로써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대부분 주어지는 존경과 현명한 자의 신분을 얻었지요. 야누마미족은 오래 전부터 나하고 상의하면서 내가 그들 문화의 특정한 분야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한테 듣고 배워 많은 것을 알고 있었 고 지식이 바로 내 장사 밑천이었으니까요." 리조의 '사무실'은 수도사의 방 같다. 문짝용 널빤지에 네 기둥을 세워 만든 테이블과 긴 의자. 그러나 벽에는 1,000권은 좋이 됨직한 책 이 꽂힌 책꽂이가 있다.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 리조는 심지어 발전기를 연결한 애플 컴퓨터 도 한 대 활용한다. 또 하나의 사치품은 망원경이다. 그는 열성적인 별보기광으로 야누마미 족과 이 즐거움을 공유해왔다. 리조는 침범 당하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이 마지막 구역의 장래에 대하여 환상 같은 것은 거의 품고 있지 않다. 최근까지도 불법적인 광산개발 허용 으로 인디오 따윈 계속 잠식되어 왔다. 푸에르토아야초(우림에서 약 450km떨어진 곳에 세 운 최초의 계획도시)에서는 인디오 부족들이 이미 빈곤상태로 떨어졌고, 브라질 야누마미 족은 정착자들에게 압도당하고 있다. "원시사회를 우리 사회로 통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충 격을 가져옵니다. 문화에 의한 강간이지요. 싸움에 진다 해도 나는 부락피한 침투를 지연시 키고자 노력할겁니다. 야누마미족에게 자신들의 방어 방법을 터득할 시간을 줘야지요.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계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기꺼이 교환 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벌거벗은 인종학자, 리조는 자신의 그물침대에서 나와 바나 나, 마니오크, 파파야, 파인애플을 심은 자신의 뜰을 돌보러 간다. "나한테는 닭도 몇 마리 있는데, 오믈렛이 먹고 싶다면........" 이따금씩 리조는 캠프를 빠져나와 아무도 모르게 맥 스 테이크를 해먹는다- 매우 드물게! "야누마미는 바삭바삭해질 정도로 탄 고기만을 먹거든 요!" 알랭 케르장, 장 폴 지비아 (이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1986년 1월호 괴아리보족과의 첫 만남 마키리타레족 안내인 에밀리아누와 함께 시에라파리마에서 길을 잃은 알랭 게르브랑과 피 에르 게소는 잠옷 차림으로 과아리보(야누마미)를 만났다. 갑작스런 만남에 흥분한 인디오가 부족원들에게 경보를 보낸다.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적의 섞인 몸짓을 했더라면, 화살이 강 위를 조용히 미끄러져 날아와 피에르의 가슴에 꽃혔을 것이다. 다음 순간은 정말 길었다. 우리는 애써 웃으며 사절을 상냥하게 맞이했다. 카누를 탄 남자가 노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마키리타레족과 같은 심장 모양의 노치고는 볼품없이, 한쪽 끝에다 납작한 나뭇조각을 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노려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팔을 흔들며 흥분한 목소리로 칠면조 울음소리를 내면서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는 정신이 없어 자기가 뭣하러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 다. 잠시 후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열띤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물론 한마디 도 알아듣지 못했다. 피에르는 잠옷 주머니에 담배가 있었다. 강 건너편의 전사에게 조금의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그 사내는 아직도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천천히 조심스럽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카누에 탄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우! 우!" 야만인이 소리를 내면서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서툰 동작으로 담배를 피우려다가 그만 부러뜨려 강물 속으로 빠뜨렸 다. 그는 흥분하여 벌떡 일어섰다 앉았다 하다가는, 순박하게 웃으며 빈손으로 신호를 보냈 다. "우! 우!" 그가 소리질렀다. "뭐라고 하는 거지?" 내가 에밀리아누에게 물었다. "담배를 갑째 달라는 거에요. 저 멍청이, 피울 줄도 모르면서." 에밀리아누가 분개했지만 피에르는 담뱃갑을 건네주었다. "우! 우!" 과아리보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성냥갑을 건넸다. "우! 우!" 그가 다시 소리쳤다. 그는 이제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담뱃갑과 성냥을 젖은 카누 바닥에 내던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다소 불안했다. 그는 쭈뼛거리면서 전보 다 더 길길이 뛰기 시작한다. 그는 우리가 자기 말을 이해 못했다는 데 대해 성을 내며 우 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피에르의 다리 쪽을 가리켰다. 마침내 우리는 그가 잠옷을 원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에르가 웃옷을 벗어 건 네주었다. 사내의 얼굴에서 금세 화가 사라지면서 다시 웃기 시작했다. "우! 우!" 내가 웃옷 을 벗어 그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바지를 벗었다. 강 건너편의 전사가 그제서야 활 시위를 늦췄다. 카누 위의 사내가 잠옷을 뭉쳐 들고는 순박하게 계속 웃었다. 그는 매우 흡 족한 눈치였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손을 펼쳐 더 이상은 줄 게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인정하는 것 같았다. 이제 식탁을 바꿀 때가 왔다. 피에르와 나는 열심히 신호를 보냈 다. 우리는 카누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우! 우!"를 합창했다. 사내가 뜻을 알아차리고는 몸 을 숙여 뱃전에서 활을 집어서는 우리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우! 우!"우리는 계속했다. 그 는 화살 세 개를 집어 건네주었다. 가장 큰 화살은 대나무 촉을 끼웠다. 전투용 화살촉이다. 두 번째도 거의 같은 것으로 큰 동물 사냥용 화살이다. 세 번째는 뼈촉을 끼운 작은 것으로 작은 동물 사냥용이다. "우! 우!" 우리는 계속 소리쳤다. 그가 팔을 치켜들어 우리가 앞서 쓴 것과 같은 신호를 보냈다. 우리 잠옷을 빼고는 그에게도 줄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때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카티레가 남은 식량을 갖고 사라진 것이다. 우리 는 배를 움푹 꺼지게 하고는 텅텅 두드리며 소리쳤다. "미암! 미암!" 그가 이해하는 것 같다. "'바나나'라고 말해요" 에밀리아누가 거들었다. 그러자 야만인이 손으로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한 뒤 숲을 가리키며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다시 우리에게로 향했다. 그런 다음 다시 해를 가리키고 이어 동쪽을 가리킨다. 마침내 그가 이 기념할 만한 만남의 맨 처음부터 손에 쥐 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고는 카누를 밀며 동료가 기다리고 있는 바위쪽으로 갔다. "한데, 뭐 라고 한 거지?" 내가 에밀리아누에게 물었다. "저들이 우리한테 먹을 것을 갖다 줄까?" "좋 은 기회죠!"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자기네 부족 전체를 데리고 돌아오겠대 요. 하지만 우리한테 바나나를 갖다주기 위해서는 아니지요. 그들은 우리 캠프에서 찾아내는 건 몽땅 다 가져갈 겁니다. 우린 알거지가 되는 거지요.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는 벌채용 칼과 우리가 며칠 전에 준 담요를 숨기러 갔다. 알랭 게르브랑 (먼 아마존 여행) 카야포인디언들의 전문기술 여러 분야의 학자들로 이루어진 연구팀은 카야포족에게 5년간의 교육을 받은 후 내과의, 농학자, 식물학자들이 아마존의 특정 인디오들에게 배울 게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브라질의 아마조니아 우림 속에 사는 인디오들이 종자를 고르고 곤충을 길들이며 다양한 형 태의 의술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알기 시작했다. 대럴 포지 박사는 가이아나 국경에 가까운 파라의 들판에서 5년을 보냈다. 카야포 인디오들(그들 말로는 메벵그로케)의 지도하에 수행된 그의 연구는 이전의 탐사들이 간과한 방대한 지식의 실체를 보여 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국립과학재단, 세계야생동물기금의 자금지원을 받은 프로젝트는 카야 포의 전문기술을 지역개발에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이 기술의 기원을 보자. 아마조니아의 가축농경은 점점 토질을 떨어뜨리는 데 비해, 메벵그로케의 기술은 토지를 더 기름지게 한 다. 전에 인디오들이 점유하고 있던 땅은 수요가 엄청나다. 카야포족은 다양한 미생물들을 만들어내며, 수십 가지 다양한 식물의 재를 배합하여 각 곡물의 뿌리덮개를 만든다. 카야포 족은 그들이 기르는 식물들의 유전형(표현형)을 면밀히 관찰하고 유전적 특질(맛, 병에 대한 내성 등)에 따라 종자를 고른다.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소에서 그와 똑같은 일을 한다. 그 러나 카야포족은 각 혈족집단마다 한 종의 곡물을 경작, 개량하는 책임을 진다. 게다가 지금 까지도 거의 이해하지 못한 뿌리가 뻗는 부분의 토양 층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중시한 다. 어떤 식물을 땅속에서 독을 분비해 옆에 있는 식물의 성장을 막는다. 반면에 유연 관계 가 있는 종들은 가까이에 있을 때 더 잘 자란다. 카야포족은 수십 가지의 식물을 조합하여 '옴비콰 오토로' 즉, '함께 어울려 자라는 친구들'을 만드는 방법을 안다. 이것은 우리 농학 자들이 사실상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인디오의 우림 관리는 정말 뛰어나다. 아마조니아의 '브 라질넛' 나무는 자생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렇지 않다. 그 나무들은 카야포족의 조상들 이 심은 것으로 그 전통이 계속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벌꿀을 수확하기 위해 커다란 나무를 벌채하는 것은, 수백가지 약초를 얻고 또 사냥할 동물을 유인하는 식물들을 심어 미 래의 예비 사냥터를 만드는 한 방법이다. 카야포족은 마을 주위의 개간지에서 우리가 보는 120가지 식물의 98%에서 한가지 이상의 용도를 얻는다. 실제로 그들은 250가지 유형의 이 질을 구분, 각각의 증상에 대하여 특수한 요법을 갖고 있어 연구팀의 약학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벌을 분류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진 메벵그로케족의 삶에서 벌꿀은 중요한 역할을 한 다.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곤충학자들은 아홉 개의 침없는 종을 '발견'했다. 인디오들은 심 지어 생물학적인 해충 제어까지 한다. 카야포족은 자기네 뜰 둘레에다 나뭇잎을 갉아먹는 개미의 천적인 말벌을 끌어들이는 특수한 종류의 바나나나무 울타리를 친다. 일반적으로 기 생생물은 그것을 먹고사는 생물체에 의해 제어된다. 고기잡이 터를 정할 때, 그들은 '므리칵 '의 영토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깊숙한 산란지에 숨어사는 몸길이 20m의 이 뱀장어는 500m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전기충격을 발한다. 카야포족은 이 괴물이 잡아먹고 사는 것으로 알려진 새끼 물고기들이 사는 물 가까이에는 가지 않는다. 이 모든 지식이 왜 누락된 채 알려지지 않은 걸까? 포지 박사는 말한다. "조사자들은 대체로 정보제공자들이 스스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방법으로 또 인디오들 자신이 선택한 지역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안내하는 것을 꺼리지요. 연구자들은 인디오 연구의 단 한가지 범주 내에서 타당성을 검토 한 뒤에 별 의미 없는 인디오 어휘들을 나열해 가며 발표를 하는 것으로 작업을 끝냅니다. 뜻깊은 현장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인디오 말을 배울 기회를 얻은 생물학자가 거의 없 어요." 이것은 진행중인 프로젝트이다. 1986년 연구팀은 600종의 동물과 185종의 식물, 그 용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20년을 주기로 하는 전통적인 인디오들의 곡물 윤작 연구의 일환으로 200가지의 토양표본을 분석했다. 그 후 연구자들은 우기에 초점을 맞추고 밤에 활 동하는 기생 곤충을 수집했으며 한때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여겼으나 인디오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밝혀진 다양한 식생대를 연구하고 있다. 마리 폴 누가레 (해방) 1987년 12월 21일 공포 녹색의 지옥 역시 젊은 탐험가, 사교계의 부인, 여행하는 식물학자를 괴롭혔다. 우림 속에서 길을 잃은 귀부인 1976년 고댕 데 오도네 부인은 카옌에 있는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페루를 떠났다. 그녀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아마존을 따라 내려갔다가 일행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인디오 둘이 사라졌습니다. 불운한 일행은 안내인 없이 다시 배에 올랐지요. 첫날은 사고 없이 지났습니다. 다음날 정오쯤 잎을 엮어 만든 원주민 움막 근처의 작은 부두에 매 여있는 작은 보트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동행하겠다는 건강한 인디오 하나를 찾아 키잡이로 삼았지요. 셋째날, 그 인디오가 물에 빠진 R씨의 모자를 꺼내려고 물에 뛰어들었 다가 힘이 빠져 익사했어요. 배나 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키잡이 없는 배를 몰게 되었지요. 곧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올라 움막을 지었지요. 안 도아스가 5~6일 이내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R씨가 선발대를 자원하고 나서 동료 프랑스인 하나와 아내의 충실한 흑인 하인을 대동하고 떠났습니다. R씨는 가족들을 함께 데려가기로 했지요. 나는 그때 이래로, 안도아스에 도움을 구하러 가는데 아내의 동생을 왜 R씨와 동행 시키지 않았느냐고 아내를 나무랐습니다. 아내는 사고가 난 후로는 아무도 그 배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R씨는 떠나면서 아내와 아내의 형제들에게 2주일 내로 배 한 척 과 인디오 몇 명을 받게 될 거라고 약속했지요. 2주일이 지나 25일 되도록 그들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그들은 똇목을 만들어서는 약간의 식량과 소지 품을 갖고서 뗏목에 올랐지요. 그들은 뗏목을 젓는데도 문외한들이었습니다. 뗏목이 그만 물 속의 큰 나뭇가지에 걸려 뒤집혔지요. 소지품이 물 속에 가라앉고 모두가 물위에 떴습니다. 그 지점의 강폭이 좁았던 덕택에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 아내는 물 속에 두 번 잠겼 으나, 동생이 구해냈지요. 전보다 더 불행한 조건에 처한 그들은 이제 강둑을 따라 걷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다시피, 이 강둑은 푸과 열대 덩굴식물, 관목들이 무성한 숲에 닿아 있어, 그것을 뚫고 길을 내려면 덤불 칼이 있어야하고 시간도 엄청나게 걸리지요. 그들은 움막으로 되돌아와 남겨 둔 식량을 모아 가지고는, 걸어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강둑을 따라가다가 그들은 강의 굴곡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알게 됐 지요. 그들은 지름길을 차장 숲으로 들어섰다 며칠만에 길을 잃었습니다. 숙달된 사람에게도 거칠고 까다로운 숲속을 오래도록 걷다보니 지칠 대로 지치고 발은 찔레와 가시덤불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식량은 떨어지고 극심한 갈증이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씨앗 과 야생열매와 맛없는 야자로 허기를 채우는 수밖에 없었지요. 굶주림과 목마름, 피로로 힘 이 다하여, 그들은 마침내 탈진했어요. 그들은 땅에 쓰러진 채 일어설 줄을 몰랐지요. 거기 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사나흘 안에 하나둘씩 차례로 숨이 끊어졌어요. 아내 는 동생들과 다른 시체들 옆에 길게 드러누운 채로 이틀을 보냈습니다. 아득하고 당혹스럽 고 거의 실신한 가운데서도 타는 목마름이 아내를 괴롭혔지요. 마침내, 아내를 구하려는 신 의 섭리가 기어서라도 구원의 손길을 찾아갈 의지와 힘을 주었습니다. 아내는 맨발에 반나 체였지요. 가시덤불에 찢겨 누더기가 된 두겹의 망토와 나이트 드레스로 겨우 알몸신세를 면했어요. 아내는 동생의 발에서 신발을 잘라내어 자기 발에다 묶었어요. ... 태어나면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여자가 이제 가장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 굶주리고 탈진한 상태로 어떻게 며칠씩이나 생명의 끈을 붙들고 있었을까요? 아내는 숲속에서 혼자 열흘을 보냈다고 주장하 더군요. 그중 이틀은 죽은 동생들 옆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일어서서 걷기 시 작한지 이틀째 되던 날, 물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며칠 동안에는 생소한 야 생열매며 녹색 알들을 발견했지요...... 음식을 먹지 못한 탓에 식도가 졸아들어서 그것들을 삼키기가 몹시 힘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우연히 눈에 띈 그런 것들이 목숨을 지탱해 주었 지요. 이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날 때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안락한 생활에 익숙한 한 연약 한 여자가 강물에 빠졌다가 반익사한채로 구조되어 길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 몇 주일을 걷다가 길을 잃고 굶주림과 목마름 피로를 견디다가 마침내 탈진하고 자기보다 더 건장한 두 형제와 자기를 돌보아주던 젊은 세 여자와 앞서 간 의사의 젊은 시종들이 차례로 죽어가 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이런 재앙 속에서 살아남아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호랑이며 무서 운 뱀들이 득시글거리는 땅, 시체들 속에 홀로 남아 이틀 밤낮을 보내고 다시 일어서서 누 더기 차림으로 8일 동안 숲속을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보보나파 강둑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 했다는 소설을 읽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썼다고 그 작가를 비난하겠 지요. 고댕 데 오도네씨가 라콩다민에게 쓴 편지 시에라파리마 산맥 "시에라파리마는 들어갈 수 없는 녹색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파리에서 처음 이 말을 들었 고, 다음은 카라카스에서 그리고 보고타에서도 들었다. "시에라파리마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녹색의 지옥이지요" 우리는 푸에르토아야쿠초의 관리, 식민자들, 고무채취꾼, 다이아몬 드와 금찾는 이, 벌채꾼들한테서도 재확인을 받았다. 기후부터가 사람들을 낙담시키기에 충 분하다. 그것을 참아 낼 각오가 돼 있는 사람들은 오리노코강 상류 지방의 엄청난 모기와 야수들과 맞설 수 없다. 기후도 야수도 겁내지 않고 모기에 맞서서도 자신을 지킬 방법을 아는 나머지 사람들은 산사람의 얼굴에 포기한다. '과아리보' 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안경 을 벗어 탁자 위에 놓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하는 말은 지극히 열성적인 탐험가들의 기까지도 꺾어놓기에 충분했지만, 우리는 첫 번째로 안데스 산맥을 내려온 이래 지난 6개월 동안 아니 사실은 유럽을 처음 떠난 이래로 지난 1년동안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면 역이 되어 있었다. '녹색의 지옥'에 산다고 알려진 두 부족은 마키리타레족과 과아리보족이 다. 후자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인데 반해서 전자는 푸에르토아야쿠초는 물론 우리가 지나온 오리노코 전역을 통틀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용감하고 부지런하며 모 든 일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만난 과이보, 피아피코, 피아로아족 등 그 어떤 인디오 부족보다 도 진보된 문명을 자랑한다고 들었다. 오리노코강 상류쪽 지류 연변에 사는 마키리타레족의 몇몇 부족은 식민자나 숲에서 고무를 찾는 이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피아로아족처 럼 이따금씩 그들에게 고용되어 일도 하는데, 마키리타레족은 그들 사이에서 만장일치의 찬 사를 듣는다. 그 족속의 나머지 대다수는 여전히 파리마에서 흘러내리는 강들의 원류 주위 에 사는데, 서의 벌거벗은채로 온몸을 야하게 칠하며 오랜 관습에 따라 깃을 꽂고 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도, 여행중에 길을 잃고 그들 땅에 낙오된 희귀한 백인들에게 적의를 보 인 적이 없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만난 인디오는 가난하고 뒤처진 종족들입니다. 가서 마키 리타레족을 봐야만해요. 그들은 전혀 달라요. 그들은 섬세한 그물 침대를 짤 줄 알며, 잔가 지 세공품에다 동물이나 사람의 무늬를 넣고 아라베스크와 가장자리 꾸밈을 넣는 법도 압니 다. 그들은 춤을 추고 아름다운 깃털 장식을 합니다. 남자들은 활과 화살, 불어쏘는 화살 총, 인상적인 곤봉으로 무장합니다. 여자들은 스페인인 시대에 도입된 색유리 구슬세공으로 장 식한 밑가리개를 만듭니다. 그들은 알맞은 문과 창문이 달린 커다란 흙집을 지으며 아메리 카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없는 게 없고, 그들은 밀빵에 조 금도 뒤지지않는 최고 품질의 카사바 빵을 만듭니다." 시에라파리마는 탐사된 적이 없음에 도, 모든 사람이 이처럼 마키리타레족을 알고 있었다. 시에라파리마는 녹색의 지옥이었지만 마키리타레족의 땅은 우리에게 야생의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대모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푸 에르토아야쿠초에서 지낸 며칠동안, 우리는 함께 식사하고 맥주를 마신 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최소한 두 번 이상 자문했다. 우리가 마키리타레 족에 관해서 들은 얘기는 매번 인지했던 반면, 그 이웃인 과아리보족에 관해서 들은 얘기는 그렇지 않았다. 이 종족은 파리마의 심장부에 살며, 세계 구석구석에서 온 탐험대가 여러차 례 시도했음에도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오리노코강 원류 지역의 주인이었따. 과 아리보족은 식인종으로 아직도 사람을 죽이고 사람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인류학상의 시대 착오적인 존재로 지구상에 남은 유인원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모험가들 사이에서조차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긴 침묵이 따랐다. 알랭 게르브랑 (먼 아마존 여 행) 파라 지방에의 짧은 여행 식물학자 C.F.P 폰 마르티우스와 동물학자 J.B 폰 스픽스는 브라질에서 1817~1820년을 보 냈다. 그들 이전의 어느 누구도 아마조니아의 자연사를 그렇게 면밀하게 조사한 사람이 없 었다. 폰 마르티우스는 돌아와 뮌헨 식물원장에 임명되었다. 나는 강둑을 떠나 안쪽으로 향 했다. 먼저, 전혀 호의를 품지 않은 것 같고 엄청난 홍수의 조짐을 보이는 빽빽한 숲을 통과 해야만 했다. 척척 달라붙는 진흙창속에서 갑자기 커다란 나무둥치가 나타나더니 이내 불규 칙하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하늘 높이 활짝 펼쳐졌다. 이끼와 열대 덩굴식물들이 덮고 있는 두꺼운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쉼없이 떨어지고, 대기 속에는 푸롸 관목이 거의 벗겨져 나간 미끈미끈한 땅 위에 들러붙은 물질에서 뿜어 나오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브라질 사람들 은 이 숲을 '알라가디소'라고 부르고, '제'언어로는 '가보'라고 부른다. 이곳은 카카오나무의 원산지인데, 그중 몇종은 야생으로 자라고 나머지는 '카카올'에 줄 맞춰 심어져 있었다. 이 나무는 그다지 높이 자라지도 않고 가지도 그리 넓게 뻗지 않는다. 줄기와 큰 가지에만 크 고 무거운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카오숲을 멀리서 보면 마치, 무성하지만 조심 스럽게 가지를 쳐낸 보리수가 열지어있는 것 같다. 알라가디소에서 벗어나, 나는 건조하고 나무가 없는 약간 높은 지대, 풀들이 요란한 융단처럼 깔린 땅에 이르렀다. 그 어느것도 사 람을 잡아끄는 이 초원에 깔린 고요와는 비교할 수 없다. 산들거리는 바람도 소리없이 슬픔 에 잠겨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잇는 주변의 숲을 떨게하지 않고 따사로운 햇살이 온갖 꽃들에 그 찬란한 광채를 뿌려 셀 수 없이 많은 나비며 잠자리며 벌새들을 유인해서는 아무 근심 걱정없는 희롱속으로 빠뜨린다.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한동안 그 속에 몰입해 있었다. 갑자 기 간간이 솟아 있는 이나자야자나무(막시밀리아나 레지아)가 초원에 긴 그림자를 드리워 곧 밤이 올것이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각임을 상기시켰다. 그 전에 나는 근처에 있는 웅덩 이, 이따금씩 물새며 오리 떼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 곳에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물이 있 는 얕은 도랑을 따라가보니 얼마 안가서 잎이 넓은 골풀과 커다란 아름 줄기들에 둘러싸인 수정처럼 맑은 물이 담긴 작은 연못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이 리오데샌프란시스코 연변의 잊을 수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새의 못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크기가 작고 덜 소란스러울 뿐 여기에 또 하나의 새의 왕국이 그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 다. 이제 강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굽이치는 물길, 빽빽한 덤불 숲,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간 원시림 사이의 비좁은 통로 속에서 곧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찾으려고 애쓸수 록 주위의 모든 것들이 더더욱 적의를 띄고 혼돈스러워져 가는 것 같았다. 자연 감상의 기 쁨이 공포로 변했다. 습지에 이르자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가시투성이의 야자나무(박트리스 마라자)숲이 에워쌌다. 끈끈한 칡덩굴이 더욱 세게 나를 옭아맸다. 발판을 삼으려고 한 잎이 넓은 헬리코니아스 밑에는 깊은 물줄기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귀 를 쫑긋 세웠다. 악어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이런 곳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는 그놈 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순간, 나는 인디오들도 피해간다는 그 위험한 연못(몬도고) 가운 데 한 곳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미로 로 위험한 동물들이 산다는 연못이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손에는 무기도 없었따. 가만히 이 자리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느 ㄴ소리를 치면서 식물채집용 양철깡통을 계속 두드려댔다. 한동안 계속 그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주바 티 야자나무(사구사타이디제라)줄기 위로 기어올라갔다. 줄기 꼭지들이 계단 역할을 했다. 이나무의 굵은 가지들 속에 있으면 야생동물로부터는 안전했으나 내가 의지하고 있는 수직 줄기의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밤의 장막이 차츰 내려오고 머리 위 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날은 별을 보면서 마음을 붇돋거나 달래고 있을 처지가 못되었다. 나는 이 시각까지 돌아가지 못했으니 내 동료들이 나를 찾기 시작할거라는 기대에 몰두했다. 실제로 스픽스 박사는 인디오들을 보내 나를 추적하게 했다. 오래 안가서 총소리가 몇 방 들렸다. 나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두 개의 움직이는 불 빛이 비록 정확히는 아니어도 내쪽을 비추었다. 얼마 후 엥겡오족의 두 사내가 이 끔찍한 공포 속에서 나를 구해내서는 이 지역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선보이며 불안해하는 동료들에 게 데려갔다. 그들이 잡은 길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들고 온 주바티 야자나무 줄기로 만든 횃불이 길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희미했던데다가 길위에 가대며 부들이며 늪지 대의 과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온몸이 야자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 다. 다음날 아침 로싱아로 돌아와 보니, 기쁘게도 조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노라는 편지 가 몇 통 와 있었따. 우리의 절친한 친구, R. 헤스케스가 마랑아웅에서 보낸 편지였다. 우체 부가 편지를 들고서 2주일간의 고되고도 위험한 여행을 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에게 1820년 여름에 유럽으로 돌아오라는 지침서도 들어 있었다. 계획이 이미 그렇게 확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정에 맞추려면 아마존 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갈 시간이 없었다. 항해준비를 할 시간을 감안하면 파라에 좀 더 머물러 있을 정도의 여유밖에는 없었던 것이 다. J.B. 폰 스픽스, C.F.P 폰 마르티우스 (브라질 여행) 꿈의 세계 인디오들에게는 실제 세계와 꿈의 세계, 낮과 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 극도 차이도 없다. 눈을 뜨고 있건 감고있건, 모든 것이 똑같은 실제이다. 인디오들은 마치 앨리스처럼 표면현상의 거울 너머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물론 모든 길이 언제나 평화롭지는 않다. 상상의 세계에서 배울 게 많지만 거기엔 어두운 면도 있다. 코기 인디오들이 이야기하는 세계의 기원 태초에 바다가 있었다. 사방은 어두웠다. 해도 달도 없었고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하나 없 었다. 어디에나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사람도 물건도 아니고 어떤 종 류의 어느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앞으로 올 것의 영혼이었다. 그녀는 생각이고 기억이었다. 알랭 게르브랑 기록 아웨나, 치무 인디오의 우주신화 콜롬비아의 치무 인디오는 안데스 산맥의 서쪽 사면에 사는 초코족 인디오의 하위부족이 다. 첫 번째 시기가 지나자 그들은 소녀를 오두막에 가두었다. 두달 뒤 그들이 보러 왔을 때 소녀는 매우 크게 자라있어 그들이 들어올릴 수 없었다. 1주일 뒤 다시 와보니 소녀는 이제 무지무지하게 커져서 오두막에 더 이상 가둘 수가 없어서 오두막을 뜯어내야만 했다. 그녀 는 날이 갈수록 더 커졌다. 그녀는 쓰러졌고 몸무게 때문에 땅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녀는 계속 가라앉아 마침내 다른 세계에 이르렀다. 그녀는 땅속 그곳에 머물고 있는데, 그녀 가 몸을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지구가 흔들린다. 만일 그녀가 몸을 크게 움직이면 세계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웨나이다. 아웨나의 여동생은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첫 번째는 한시간동안 목욕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두 번째는 두시간동안 목 욕을 했다. 그녀의 부모가 무엇 대문에 그렇게 오래걸리는지 보러 갔다가 연못이 전에 본 적이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했다. "왜 이렇게 물고기가 많니?" 그들이 딸에게 물었다. 그녀는 연못 속의 물고기를 만지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어느날 그녀는 목욕을 하러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그녀를 찾 았다. 이틀 뒤 그들의 눈앞에 허리 아래가 물고기로 변한 그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그녀를 끌어내려고 했다. "저를 물에서 끌어낼 수 없어요. 영원히 불가능할거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물고기들의 어머니, 베네테나베거든요." 그렇게해서 물고기가 생겨났다. 이 일이 없었 더라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언니가 땅속에 살고있고 그녀가 움직일 때 면 지구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그녀였다. 두자매는 영원히 돌아오 지 않았다. 그리고 월경하는 여자를 더 이상 가두어놓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치무신 화, 밀시아데스 차베스기록 치밀라 샤면 치밀라 인디오는 마그달레나 강 하류와 시에라네바데 산타마르타강 사이의 콜롬비아 우림 속 외딴 지역에 산다. 1944년에 그들은 찾아간 인종학자, 제라르도 레이셸 톨마도프는 그들 이 아마존의 기원이라고 믿었다. 좋은 샤먼과 나쁜 샤먼이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그건 사실이다. 좋은 샤면은 병자를 돌보고 비를 내리게 하며, 죽을 때는 우리가 죽을 때 모습과 똑같다. 나쁜 샤면은 다 르게 행동한다. 죽을 때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되돌아와 해를 끼친다. 그리고 인 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그러면 사람들이 알아볼 것이다.- 호랑이로 돌아온다. 사 람들이 숲 속에 들어가 호랑이와 마주칠 때면 이게 호랑이 일까 샤면일까 자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느 날, 몇 사람이 숲에 들어갔다. 밤이 되었을 때, 그들은 크고 둥근 움막에 이 르렀다. "이 집에서 잡시다."한 사람이 말했다. "여기서 잘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이 집에는 한 남자가 묻혀 있거든." 처음 말한 사람이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문 밖에서 머물렀다. 한밤중이 되자 터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집 안에서 잠자던 사람을 죽였다. "여기 묻힌 사람은 나쁜 샤면이야." 다른 사람 들이 말했다. 그러고는 모두 도망쳤다. 제라르도 레이셸 돌마토프 기록 노호페티를 찾아서 네그루강의 한 지류에 사는 가난한 농민의 딸, 헬레나 발레루가 11세 때 인디오들에게 유 괴되었다. 소녀는 야누마미족으로 알려진 여러 부족들 속에서 20년을 살았다. 1962년 그녀는 브라질 탐사중이던 에토레 비오카에게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샤푸노에 병든 여자가 하나 있었다. 늙은 샤포리(신화 속의 뱀)가 그녀를 핥고 노래를 불 러주며 그녀의 병을 고치고자 했다. 그들은 여자의 노호페티(영혼)가 도망쳐서 그녀가 아픈 거라고 했다. 그 병은 '노레시' 였다. 여자는 늘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샤프노의 울안에 높이가 1m나 되는 커다란 새장 비슷한 것을 만든 뒤 당에 굵은 막대를 몇 개 세우 고는 그 위에다 새장을 얹었다. 큰수리의 둥지였다. 남자 몇이서 눈 주위와 입 둘레, 가슴을 검게 칠한 뒤 머리카락에 기다란 아사이 잎을 엮어 달아서는 타래처럼 머리 뒤로 늘어뜨렸 다. 그들은 커다란 새, 큰수리를 흉내낸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입과 눈 주위, 다리를 검게 칠했다. 그들은 원숭이었다. 오후 3시가 지나자 그들 거의 모두가 노호페티를 찾아 밖 으로 나섰다. 큰수리들이 피오피오 울고... 그것이 날개라도 되는 양, 팔 아래까지 내려온 나 뭇잎 가지로 팔을 두드려 댔다. 병든 여자는 남자 몇과 함께 남아 있었다. 샤푸노의 커다란 입구에서 여자가 영혼을 찾아 숲으로 간 사람들이 멀리서 외치는 소리에 응답했다. "여길 봐, 여기가 우리 집이야." 원숭이를 흉내낸 사람들이 소리치고 뛰면서 손에 들고 있는 나뭇 가지를 흔들어댔다. 수달처럼 칠한 사람들이 수달의 울음소리를 되풀이했다. 아이들가지도 작을 송골매처럼 칠하고서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했다. 투샤우야가 말했다. "너희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송골매이며 이제가지 있던 것 중서 가장 영리한 것이니라. 너희 원숭이들을 아 뭇가지 사이를 보아라," 여자들은 마치 빗자루라도 되는 양, 나뭇가지로 땅을 쓸었다. 그들 은 노호티페를 찾아서 샤푸노로 몰고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많은 여자들이 자기 아이 들을 목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그애들은 샤푸노에 남겨 두면 그애들도 역시 노호 티페를 잃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영혼이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곳을 한 바퀴 돈 뒤 그들은 다시 샤푸노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든 화로를 빙 돈 뒤에 나뭇가지로 그물침대 밑과 구석구석을 쓸고는 불을 흩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빆으로 나가, 다시 주의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다음에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진중한 샤포리가 말했다. "그 때 우리가 간 그곳에서 영혼이 울고 있다."그들은 모두 그쪽으로 달려갔다. 병든 여자는 차도 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어깨에 그녀를 들쳐메고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영혼을 찾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마침내 그들은 샤푸노 안으로 돌아왔고, 한 남자가 그들이 만든 커다 란 새장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어서 또 한 명이 그 위로 뛰어 올랐고, 이어서 또 한 명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큰수리와 원숭이었다. 그들은 또 병든 여자를 한 가운데 놓고서는 나뭇 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노호티페가 더 쉽게 몸속에 들어간다고 생 각했다. 원숭이들이 새장 끝에 앉아 날뛰며 에이에이하고, 큰수리는 피오피오하며... 날개를 쳤다. 여자는 소년들과 다시 돌아온 모두가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커다란 새장위로 던진다. 그들은 나뭇가지을을 이고 있는 커다란 새장이 큰수리의 둥지라고 말했다. 그들 모 두가 드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들이 병든 여자를 빙글 돌려 들쳐멨다. 큰수리가 탁탁 하 며 ... 마치 개미를 죽이듯이 병든 여자의 몸을 쳤다. 그들에 따르면 개미들이 숲에서 길을 잃고 노호티페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 여자가 쿠이아에 물을 길어 오고 매 우 강한 내음을 풍기는 이파리 몇 장을 가져왔다. 그것은 쿠나쿠나라고 부르는 독특한 개미 의 집 위에서 자라는 잎이다. 그들은 이파리들을 물속에다 세게 비벼서는 벼읃ㄴ 여자의 몸 과 머리 위에 따랐다. 천천히 여자가 낫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제 침이 나오지 않 고 더 이상 신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또 남자의 영혼이 그 커다란 새, 큰수리라고 믿 었다. 난자가 아플 때 그들은 말했다. "그가 둥지에서 떨어져서 날 수 없는 걸 거야. 그러니 까 아프지." 에토레 비오카(야노아마) 문학작품 속에 비친 아마조니아의 이미지 신비롭고 불가사의하며 침범할 수 없는 우림 아마조니아는 강렬한 서정과 더불어 향수와 환멸마저도 불러일으킨다. "기록되지 않는 창세기의 마지막 페이지는..."에우클리스 다쿵아는 1900년대 초에 이렇게 썼다. 문학은 매혹과 동시에 대로는 낙담을 주는 곳을 향한 우리의 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격양된 상상에 희생물이 된 침입자이다. 마쿠나이마의 탄생지, 아마조니아 초현실주의 운동 시대에 시인과 작가들은 브라질의 신비로운 심장부, 아마조니아에 눈을 돌렸다. 그들에게는 그 곳이 진짜 브라질이었다. 1928년 마리오 데 앙드라데는 브라질 영웅 의 원형같은 존재인 마쿠나이마와 정글 속에서의 그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그의 책 은 마쿠나이마의 어린시절의 묘사로 시작한다. 깊고 깊은 고요가 원시림을 덮어 우라리코에라강의 물소리가 들리는 시각, 북브라질의 한 외딴 구석에서 타팡후마족 인디오 여자 하나가 못생긴 아들을 낳았다. '밤의 공포'의 씨를 받은 자식이었다. 아이는 별나서 피부가 구운 상아처럼 까맷다. 그들은 아기 이름을 마쿠나 이마라고 지었는데, 이 아기가 자라 장차 유명한 영웅이 된다. 어일 때부터 아이는 당혹스러 운 짓을 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6년 동안 말을 않고 지냈다. 누군가가 아이에게 말을 시키려 고 하면, "아우! 참 ...한 인생."하고 외쳐대고는 다시 입을 다물곤 했다. 아이는 늘 공동움막 의 한 구석을 차지한 채, 단단한 야자나무 줄기로 만든 침상에 올라가서는 다른 사람들, 특 히 자신의 두 형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곤했다. 마나페 형은 이미 어른이 되어있었 고 지게형은 한창 자라는 때였다. 아이가 즐겨 하는 유희는 잎을 갉아먹는 개미의 머리를 잘라내는 일이었다. 아이는 대부분을 드러누어 지냈으나 동전을 발견하면 재빨리 걸어가 움 켜쥐곤 했다. 아이는 또한 온 가족이 벌거벗고 목욕을 하러 강에 달 때면 재빨리 일어나 따 라나서곤 했다. 아이는 잠수해서 물 밑으로 사라지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들이 이따금씩 게 에 깨물렸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곤 했다. 물이 이렇게 깨끗하니 게가 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면서. 움막에서 여자아이들이 귀엽다며 안아주려고 하면, 아이는 손을 내밀어 어루 먼져 주었다. 여자아이는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남자가 그러면 뺨을 올려붙였다. 그러나 그 는 연장자들을 존경했으며, 부족의 의식때 추는 춤이며, 출생과 죽음, 나이가 듦에 따라 거 치는 통과 의례, 풍농제와 수확제. 그리고 오락과 전쟁 때 부르고 추는 모든 노래와 춤을 진 지하게 따라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아이는 자기의 작은 그물 바구니에 올라가기 전에 오줌 을 싸야 한다는 것을 늘 잊어버렸다. 어머니의 그불침대가 아이의 요람 밑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영웅은 매일 밤... 어머니에게 오줌세례를 했다. 그러고는 잠이 들면 발을 공중에 내 뻗고는 더러운 말과 별난 장난이 난무하는 꿈을 꾸었다. 여자들이 한낮 잡담시간의 화제는 늘 영웅의 괴팍한 장난이었다. 여자들은 다 안다는 듯이 척 웃으며 말했다. "쬐그만 놈의 뾰 족한 가시 끝에 벌써 침이 돋았어!" 부족회의에서 나고 족장은 영웅의 목을 당장 비틀어 버 리겠노라고 공언했다. ... 어느 날 셋이서 개울도 연못도 멀리 떨어진 숲속 깅르 가다가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일이 생겼다. 근처에는 물기 많은 야생 열매조차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따가운 햇살이 나뭇잎마저도 뚫고 내리쬐어 헤메는 이들을 쉬지도 못하도록 내몰았다. 땀이 줄줄 흘러 마치 온몸을 호두기름으로 마사지 한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마쿠나이마가 멈춰 서더니 커다란 손짓으로 그들의 지친 걸음을 제지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마쿠 나이마가 속삭였다. "저기 뭔가 있어!" 그들은 멋을 낸 채로 커다란 나무를 버팀벽 삼아 앉 아 있는 아름다운 이리키를 보고는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태양도 이젠 흠씬 두들 겨 주는 데 만족했는지, 세 형제의 등뒤로 햇살을 거두었다. 마쿠나이마는 1리그 반 앞을 살 피고 나서 잠자는 여자 위에 드리워진 어슴푸레함 속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는 여자의 말라비틀어진 오른쪽 가슴을 보고는 대번에 그녀가 아마존임을 알아차렸다. 나뭉다강이 흘 러드는 '달의 거울'이라는 이름의 호수 연변에서 남자 없이 사는 여인 종족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숲의 어머니, '시'였다. 여자는 비록 방황에 지치고 제니파포 물감으로 검은 무늬를 그려 놓기는 했으나, 아름다운 용모를 하고 있었다. 영웅은 그녀의 위로 몸을 던져 사랑을 구했다. 여자가 그를 밀쳐냈다. 그가 단검을 뽑아드는 사이 여자가 삼지창으로 그를 찔렀다.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싸우는 두 사람의 외침이 숲의 하늘에 메아리치고, 새들이 놀라 오그라들었다. 마쿠나이마는 고전하고 있었다 . 코를 얻어맞아 피가 흐르고, 여자가 휘 두르는 삼지창이 엉덩이에 깊은 상처를 냈다. 아마존은 아주 작은 상처하나 없었다. 그녀의 일격 일격은 갈수록 영웅에게서 많은 피를 짜내었다. 영웅이 필사의 고함을 내지르니 새들 이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이 여자 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게 분명해 지자 영 웅은 돌아서서 도망치며 형들에게 소리쳤다. "도와줘! 저 여자를 죽여야겠어!" 형들이 달려 와 시를 붙잡았다. 마나페가 그녀의 등뒤에서 팔을 붙드는 사이에 지게가 삼나무 곤봉으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여자가 숲 바닥의 두엄 위에서 자라난 고사리들 사이로 맥없이 쓰러졌다. 그녀가 싸움을 포기하자 마쿠나이마가 다가가 숲의 어머니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것은 잉꼬와 사랑앵무새와 아마존 앵무새와 그밖의 모든 종류의 앵무새들에게 어서 와서 원 시림의 새로운 황제,마나쿠이마에게 인사를 올리라는 신호였다. 세 형제는 새로 얻은 애인을 데리고 계속 길을 갔다. 그들은 브라질의 로맨스와 동화 속에 나오는 가장 축복받은 땅들을 여행했다. 꽃의 고장을 지나고 쓰라림의 강은 피해 갔으며, 행복의 폭포 밑을 지나고 기쁨의 길을 걸어 마침내 베네수엘라 산록의 련인의 숲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마쿠나이마가 신비의 숲 전체를 지배하고 시가 삼지창을 들고서 공격에 나서는 여자 전사들을 호령하게 되었다. 영웅은 그물침대에 편안히 누워 빈들거리면서 개미를 잡아 죽이고 거품이는 카사바 맥주잔 을 두드리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원숭이 창자로 만든 현을 단, 자고 촌스러운 깽깽이를 내키는 대로 동당일 때면, 숲이 기쁨의 메아리를 보내고 뱀과 진드 기와 모기와 개미와 심술궂은 숲의 정령들이 동작을 멈추고 잠에 빠져들었다. 밤이 되면 시 가 몸에 피를 흘리며 돌아와서는 상처에 발삼을 바른 뒤 짙은 향내를 풍기며 영웅이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그녀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서 손수 빤 그물 침대로 기어들곤 했다. 둘은 킬킬거리고 서로를 놀려 대며 사랑을 나누고 또 나누었다. 그들은 오래도록 한데 붙어 계속 킬킬거렸다. 마리오 데 앙드라데(마쿠나이마) 역사책에 도전하다 마르시우 소자는 자기 고향(마나우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아마조니아 역사에서 영광과 몰락의 시기들에 재주목하는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두 권의 책 을 썼다. (아마존의 황제)와 (미친 마리아)가 그것이다. (미친 마리아)는 1912년에 시작된 마 데이라-마모레 철도건설을 다룬다. 프로젝트를 책임진 엔지니어는 콜리어라는 미국인이었 다. 그녀의 몸뚱이를 만든 금속보다도 더 촘촘한 밤의 어둠 속에서, 콜리어는 기관차를 사람 으로 시각화했다. 미친 마리아, 그것은 사람들이 이 기계에 붙이기로 한 이름이다. 이 이름 은 뭔가 조화롭지 못한 데가 있었다. 그것은 기관차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다. 남아메리 카 사람들이 쓰는 라틴계 언어에서 '기관차'는 여성명사이다. 따라서 기계를 여성에 비유하 기 쉽다. 그러나 영어에서 그것은 중성명사이다. 처음에 콜리어는 미국인들이 흔히 허리케인 이나 태풍에 여자 이름을 붙인다는 사실에서 이런 이름이 연유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기관차는 주위에 재난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불변의 증거가 있다.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그녀가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몸으로 그녀는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무릎을 꿇은 곳도 용감하게 견뎌 냈다. 이 세상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그 녀에게도 부조화스러운 면이 많이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변덕과 멸시로 이 기관차는 건설현장의 모든 남자들을 지배했다. 그녀는 영락하고 낙심한 벌들이 사는 벌집의 여왕이었 다. 그녀는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일 같이 높다란 기계 위에서 남자 들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강철 이빨로 레일을 핥았다. 그녀는 미친 마리아요, 철의 여왕이 었으며, 그를 위해 진 대신 엔진 오일을 마시고 자신의 진흙 침대에서 모든 남자들에게 사 랑을 베푸는 콜리어의 가까이 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 물건을 시각화하지는 못했다. 감시 받는 기숙사의 그물침대에 발뻗고 누운 남자들 중 어느 하나도 그녀의 존재가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콜리어를 빼고는. 그들 모두가 그녀 앞에 카 펫을 깔면서 헛된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월터 롤리 경의 구두를 자처하며, 그녀가 오만 하고도 고결한 자세로 금속 발을 내디디며 지나가도록 진흙창 위에다 소매 없는 외투를 까 는, 똑같은 품삯을 받는 한 떼의 떠돌이들. 살아 돌아온 월터 롤리와 같은 해적과 악당들만 이 그런 동작을 거둘 수 있었다. 또, 지구의 네 귀퉁이에서 온 이 빈털터리들만이 자신의 삶 을 희생해 가며 미친 마리아를 위해 카펫을 깔 수 있었다. 그녀는 잠이 든 듯 거기에 있었 고, 그녀의 가장 고지식한 노예, 토머스가 그녀의 몸 속 깊이 잠겨 있었다. 콜리어는 이따금 씩 이 여왕이 왜 자기의 부하들에게 사랑을 받는지 궁금했다.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여왕벌은 일벌들에게 진정으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무심함이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게 틀림없다. 미움도 사랑도 아니다. 그녀의 부하들 역시 그저 무심한 마음으로 그녀의 카펫을 깔뿐이다. 매일 매일 한 조가 한 조각씩,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혹 낭만적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미친 마리아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버섯구름을 내뿜었다. 멀리서도 가르랑거리는 그녀의 금속성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르시우 소자 (미친 마리아) 신화의 보존, 인디오와 문학 아마조니아 종족들을 전공한 브라질의 인종학자, 다르시 리베이루는 인디오의 삶을 연구 하고 인디오의 신화와 전설에 관한 책을 썼다 그의 소설 (마이라)는 인디오 세계의 점차적 인 종말을 다룬다. 젊은 인디오 남자, 이샤야스가 로마에서 여러 해를 지낸 후 자기 마을로 돌아온다. 날개를 서쪽으로 접으면, 여기 이렇게 위에서도 내가 태어난 작은 마을이 보이다. 숲에서 떨어져 작은 개활지로 둘러싸인 마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여전히 푸르고 유연한 나무 줄 기로 지어 짚으로 지붕을 인 집이 마치 커다랗게 짠 바구니 같다. 가장 큰 집인 바이토는 그 뒤 그가 그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짓기 전까지 여러 해 동안 파드레 벡시오의 걸작품으로 꼽혔다. 그러나 십자가는 바이토의 왕관장식의 상대가 못되었다. 뿌리째 잘 말린 나무줄기 두 개를 지붕 꼭대기에다 두드려박아 세운 장식물이었다. 지금 우리 마을은 한치 앞도 안보 이는 깜깜한 밤일 것이다. 모두들 집 안으로 들어가 작은 가족 단위로 벽과 기둥에 매어 놓 은 그물 침대 위에서 자고있을 것이다. 남자의 그물침대가 맨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아내, 맨 위에 아이들 것이 있다. 바닥에는 새벽공기가 몰고오는 한기를 쫓아 내기 위해 불지핀 장작 을 몇 개 둔다. 희미한 불빛에 바닥만이 어슴푸레하다. ... 우리의 숲은 크고 날렵한 나무줄 기들이 땅에서 똑바로 치솟아 올라간 세계이다. 오르고 또 올라가도 맨 꼭대기는 아직도 저 만치 있다. 벼락이 나무를 내리칠 때에나 빛이 흘러들지만, 숲이 곧장 상처를 아물게 한다. 자연상태는 초록의 침울한 어슴푸레함이다. 거기에 하루 두 차례씩 활기가 돈다. 동틀녘과 해질녁. 그때가 되면 원숭이들이 떼지어 가지 사이로 뛰어다니며 목청껏 소리지르고, 새들이 노래하고 구구거리며 다가오는 밤의 공포와 새벽의 기쁨을 속삭인다. 아침에 한 차례, 원시 림 속에서 성대한 미사가 열리는 것이다. 우리 마이라 부족은 우림에 밤이 오는 것을 두려 워한다.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그물침대들을 바짝 붙여 맨 뒤에 불을 지피고 공포에 떨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항시 누군가가, 숲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영혼을 잃고는 동물로 변해 살고 있다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산다. 숲 이 아니라 나의 심장부를 응시하노라면 여기 이렇게 위에서도 우리의 세계가 보인다. 우리 마을, 마이라가 오래 전에 내가 본 그 모습으로 눈에 선하게 돌아온다. 나는 수시로 속속들 이 그 모습을 본다. 심지어는 유래가 오랜 편가르기나 씨족단위의 배열처럼 사람들이 흔히 보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 모습을 본다. 보이지 않는 금이 마을을 동편과 서편으로 가른다. 각편이 각기 하나의 씨족으로, 반대편에서 아내나 남편을 찾는다. 이러한 마을의 분할은 낮 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 불과 물, 빨강과 파랑 암컷과 수컷, 선과 악, 추함과 아름다움 등 등, 항상 둘로 갈라진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마을의 한쪽 편은 낮 빛, 해, 불, 노랑을 나타낸다. 그곳이 나의 가족인 재규어 가문과 그밖의 많은 가문들의 터전 이다. 다른 편은 밤, 어둠, 달, 물, 남빛이다 그곳은 나의 매형들의 가족인 작은 새매 가문과 그 밖의 많은 가문 등 혼인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이 산다. 한 쪽은 다른 한쪽이 여자같고 추하며 악하다고 말한다. 나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쪽 사람들이 남자 같지 않고 악하며 추하다고 느낀다. 나는 내 입장을 뒷받침할 많은 자료를 제시할 수도 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우리 동편 사람들은 하나같이 최고로 멋지고 최고로 세며 모든 일을 가장 잘한다. -나만 빼놓고. 다르시 리베이루(마이라) 검은 황금과 그 몰락 콜롬비아의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와 포르투갈의 페레이라 데 카스트로의 자전적 소설 들은 아마조니아의 자연의 찬란함과 잔인함, 그리고 고무의 노예가 된 카우셰루와 세링게이 루의 안쓰러운 처지를 상기시킨다. (라 보라히네)에 담긴 리베라(1888-1928)의 서정적이면서 도 열정이 넘치는 글을 통해서, 우리는 고무 노예와 그들을 착취했던 거간꾼들의 시절을 다 시 체험한다. 나는 카우셰루였고, 지금도 카우셰루이다! 나는 외딴 산중 진흙창 속에서, 마찬가지로 외 로운 처지인 나와 독기 품은 내 동료들 속에서, 마치 신이기나 한 것처럼 하얀 피를 흘리는 나무의 껍질들을 찌르면 살아왔다. 내가 태어난 집에서 1,000리그나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그저 고통스러울 뿐인 기억들을 저주해 왔다. 가난 속에서 늙어 가면서 하나밖에 없는 멍한 아들놈한테 부양받기를 바라는 늙은 부모, 운명이 바뀌리라는 어떤 기대도 없이, 운명을 바 꿀 황금을 가져다 줄 남자 형제도 없이, 힘없이 미소짓는 혼기가 된 예쁜 누이들! 살아있는 나무줄기에 도끼를 내리칠 때면 나는 이따금씩 이제껏 돈을 쥐어 보지도 못한 내 손을 찍어 버릴까하는 충동에 빠진다. 훔치지도 보상받지도 못하는 불행하고도 비생산적인 이 손을, 언 젠가는 하마터면 목숨을 끊을 뻔했다. 생각해 보면 이 숲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병 을 앓고 있다. 현실과 영원한 동경 사이의 이러한 불균형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왜 허공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고 있는가? 가난은 우리의 잔인한 계모요 희망은 우리의 폭군이 었다. 우리는 하늘로 눈길을 돌리지만 그것은 여기 이 땅 위를 기어다닐 수밖에 없음을 뜻 한다. 우리의 비참한 식욕으로 우리의 영혼은 슬픔에 빠져든다. 평범은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평범한 영웅들, 우리는 오로지 그것이었다! 가까스로 행복한 생활을 흘끗 본 사람들은 그것을 살 여유가 없다. 짝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멸시를 만난다. 아내가 되기를 꿈꾼 사람들은 첩이나 정부로 머무른다. 기를 쓰고 비상해 보려고 한 사람들은 우리가 열병 으로 쓰러지고 거머리와 개미들 속에서 굶주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이 나무들만큼이나 무심하고 까닥 않는 힘센 이들 앞에서 꺾여 다시금 가라앉는다. 환상을 없애려고 애를 쓰 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현실 너머로 몰고 간다. 표적에서 빗나간 화살처럼 나는 너무 멀리 행복을 쏘았다. 넘치는 기세를 꺾기는 전혀 불가능하여 화살의 운명은 다시 지상에 떨 어지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미래'였다! 실현 불가능한 꿈! 버려진 승리! 너는 왜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느냐! 꿈꾸는 자가 고작 한 짓을 보아라! 생기 없는 나무에 상처를 내 꿈 꾸지 않는 자들의 주머니 속에 보내고, 멸시와 좌절을 참아낸 대가로 상한 빵 한 조각을 저녁거리로 얻는 이 짓을! 노예야 불평 말고 고난을 참아라! 죄수야, 너의 감방을 지켜라! 너는 우림 속으로 풀려나 배회하는 고통을 조금도 모른다. 너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피 안의 빛나는 햇살을 바라보는 우울한 고뇌를 조금도 모른다! 너의 발목을 긁어 대는 사슬은 이 늪 속의 거머리들 보다 자비롭다. 너를 괴롭히는 간수는 우리의 머리 위에서 말없이 감 시하는 이 나무들보다는 덜 무정하다! 네 에스트라다에는 나무가 300그루 있는데, 그것을 다 고문하는 데는 9일이 걸린다. 나는 열대의 덩굴식물들을 걷어내어 나무로 가는 길을 치 운다. 나무들 사이를 다니면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다가, 가끔씩 나무들 을 훼손하거나 고무액을 훔치는 사람들을 붙잡는다. 우리는 이빨과 손톱과 칼을 꺼내들고 싸운다. 수액 속에 빨간 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 수액 속에 우리의 피가 조금 섞이면 어떤 가! 그들은 하루 10리터를 요구하고, 채찍은 용서를 모르는 고리대금업자이다! 옆 골짜기에 서 동료 일꾼이 열병에 걸려 죽어 가는 게 무슨 상관인가! 그가 나뭇잎 위에 드러누운 채 안절부절못하며, 평화롭게 죽지도 못하게 하는 파리들을 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일이면 악취에 쫓겨 이 자리를 떠야 하지만 그가 받아둔 고무액은 갖고 갈 것이다. 그것으로 일을 조금 덜해도 될테니!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똑같은 짓을 할 것이다. 나는 부모를 위해 훔친 게 아니다. 내 사형집행인을 위해 모든 것을 훔칠 따름이다. 흠집을 낸 카라나로 수액이 나 오는 줄기를 동그랗게 도려내고는 그 비극의 눈물을 컵 속에 담고 있자니, 나무를 지키는 모기 떼가 내 피를 빨고 우림의 더운 습기가 눈을 가득 채운다. 나무와 나, 우리는 각기 고 통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죽을 때까지 손을 잡고 싸운 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선 채로 항의도 하지 않는 나무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가지의 떨림이 나무의 반항이지만 나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숲 전체가 왜 우리에게 호통을 치며 마 치 뱀과도 같은 우리들을 짓이겨 우리의 근원적인 착취를 벌주지 않는 걸까? 나는 슬픔이 아니라, 절망을 느낀다! 공모자인 동료에게 그 무엇인들 주지 않겠는가! 나는 종 사이의 전 투에 참가하여 대변동의 와중에서 사멸해 가면서 우주의 힘이 작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카우셰루였고, 지금도 카우셰루이다! 그리고 내 손이 나무에게 한 짓을 나무도 인간에 게 할 수 있다!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 (라 보라히네) 정글의 힘 젊은 포르투갈인 알베르투가 벨렘 두 파라에 도착하여 비꼬는 듯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 은 한 고무농장과 계약을 한다. 그것은 딴 세계,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계였다. 엄청난 놀라 움을 자아 내는 세계, 그러나 전제자의, 폭군의 세계였다. 나무들 중 어느 하나도 아름답거 나 친근한 즐거움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았다. 나무가 나무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미치고 무질서하고 탐욕스러우며 굶주린 야수의 영혼과 발톱을 가진, 뒤엉킨 식물군이 었다. 거기에는 말없는 잠복 파수꾼이 있어, 그의 걸음 걸음을 붙잡고 모든 길을 따라 내 려오며 언제든지 그를 가두어 노예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거대한 녹색벽과 전위대인 관 목들과 그 둘레에서 뻗어나온 덤불들이 베어 낸 뒤에도 다시 미친 듯이 자란다. 10년, 20년, 50년이 지나-얼마나 오래 걸리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어는 날엔가 그들이 만든 개활지가 다시 닫히고 덤불이 다시 오두막을 삼키도록, 정글은 쉬는 법이 없다. 고무나무의 수명이 다 하거나 식물들을 모조리 깎아 내는 야만인들이 침입하거나 다른 이유로 얼마간의 공간이 생 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여지없이 정글이 다시 그곳을 뒤덮는다. 숨쉬는 공기 속, 딛고 걷 는 땅속, 마시는 물 속, 그 어디에고 정글의 위협이 숨어 있고, 이따금씩 무자비하게 실체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전제의 권력을 가진 것은 정글뿐이다.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손 바닥 안에 든 인형일 따름이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야망의 방패에 가려 그 힘을 정복했다고 생각한다. 페레이라 데 카스트로 (정글) 아름다움을 찾아서 1929년, 앙리 미쇼는 안데스 산맥을 넘은 뒤 에콰도르의 산들과 브라질의 숲을 지나 마침 내 아마존강의 하구에 이른 한 젊은이의 이야기, <에콰도르(를 출판했다. 아마존강의 한 포구인, 페루의 이키토스 11월 15일 일상적인 일들이 평범한 삶을 엮어 낸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 상사가 다른 일상사에 익숙한 다른 사람들, 즉 이방인들에게는 놀라움을 일으킬 수 있다. 토 착민은 비록 그것을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하며 단조로운 일로 여긴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이상'은 일상생활의 일부이다. 당신은 습지대의 풀밭을 얼마 안 가 가려움을 느낄 것이다. 다음 순간 핏빛보다는 분홍색에 가까운, 돋보기 없이는 보기 힘든 작은 반점이 발 여기저기 에 나 있음을 알게 된다. 3주 뒤 20여 개의 반점이 지름 1.5cm 정도로 커지면서 무릎까지 심한 통증을 느낀다. 당신은 절망감에 빠져 욕설을 퍼붓고 열에 들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일상사일 뿐이다. 일상생활의 또 한 부분은 작은 모기들이다. 그 것들은 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다른 데도 아니고 눈꺼풀에다 수백 개의 불을 밝힌다. 괴 로워 미치겠지만, 그것은 그저 일상사일 뿐이다. 또, 물 속에는 양모를 꼬아 만든 실 한 가 닥만한 굵기의 귀엽고 작은 물고기들이 있다. 예쁘고 투명한 아교질의 물고기이다. 당신이 물 속에 들어가면 그것들은 당신의 몸 속으로 파고들려고 한다. 그 물고기는 당신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따끔하게 찌른다.(그것들은 그저 자연의 구멍을 좋아할 뿐이다.) 밖으로 뛰쳐 나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물고기가 따라 올라온다. 바늘같은 지느러미 한 쌍이 자동으로 펼쳐지며 기어오르는 걸 돕는다. 활짝 편 우산 모양의 물고기가 신경이 날카 로워져 안절부절못하며 당신 몸의 갈라진 틈 속으로 도망치려고 기를 쓴다. 피가 콸콸 흐른 다. 물고기를 독살할 방법을 찾거나 당신이 죽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 장 평범한 최후는 이것이다. 피가 조금이라도 물 속에 퍼지는 순간 카네로가 떼지어 당신한 테로 몰려온다. 크기는 정어리만하지만 게걸스럽고 힘센 물고기이다. 그것은 단 한 입에 손 가락 하나를 물어뜯을 수 있다. 60kg인 사람이 카네로 떼한테 걸리면 10분이면 끝장이다. 아마존에서는 시체가 발견되는 일이 없다. 12월 15일 아마존강 하구, 파라. 너비 1-2km의 무수히 많은 수로들, 그것뿐이다. 아마존강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스스로에 게 질문을 던진다. 아마존 같은 강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야 한다. 비 행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아마존강을 보지 못했다. 내가 아마존에 대 해서 얘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패에 끼어 있던 한 젊은 여자는 마나우스 출신이었다. 그날 아침 그녀는 우리와 함께 읍내로 들어와 나무를 멋지게 심어 놓은 그레이 트 파크를 걸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마침내 자연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 는 숲에서 왔는데.... 강 기슭의 적도의 숲이 무시무시하리만큼 음산한 탓이다....앙리 미쇼 (에콰도르) 아마존강의 진짜 규모가 제대로 인식된 것은 20세기가 되고 나서였다 블레즈 상드라르는 '대양선을 타고 원시림 속을' 여행했다. 여기서도 역시 실체는 파악하 기 힘든 것으로 드러났다. 숲은 여전히 물결치고 있다. 연락선이 강 한가운데를 따라 거슬러올르다가 이따금씩 강둑 을 끌어안는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나무들 아래에 가득 찬 초록빛 어슴푸레함은 커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대 덩굴식물들의 꽃으로도 거의 가시지 않는다. 강 굽이굽이의 어두운 물에 마치 보석처럼 박혀 있는 황토색이나 노란색, 흰색의 모래사장은 하나같이 초승달 모 양이고, 종종 악어가 몸을 길게 뻗은 채 가만히 있기도 한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가끔씩 화려한 새매와 현란한 큰부리새, 재잘거리는 앵무새가 이쪽 둑에서 강 건너 저쪽의 푸른 둑 으로 쏜살같이 날아간다. 아니면 놀란 새끼원숭이가 은신처에서 뛰어나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와서는 바스락거리며 나뭇잎 속으로 달아나지만 그 모든 것이 눈깜짝 할 새이다. 이따 금씩 팜플로네라라고 부르는 커다란 파랑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며 배 주위를 날아다닌다. 고 도의 훈련을 받은 눈은, 여기저기서 한 무리의 벌새 떼가 두 곳의 대나무 숲을 잇는 햇살마 냥 길게 늘어서 있거나 거대한 수련꽃 위를 빙빙 도는 모습, 다이아몬드 무늬를 그리며 오 르내리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때로는 벌새 떼가 침침한 물 속에 비치기도 하고, 좀처럼 그 모습을 포착하기 어려운 '매너티'가 물 속으로 뛰어들면 만든 소용돌이 속에 흘끗 비치 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일상적인 유령들이 출몰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강과 숲, 식물들이 눈 깜짝할 새에 야생 생물들을 덮어 숨기고 그 비밀을 지켜 생명을 보호한다. 목소리 하나 없다. 울음소리도 없다. 아무 소리도 없다. 흐르는 물, 숲이 가까이에서 열기 속 에 아른거린다. 텅 빈 하늘, 물 위의 작은 파문, 멀리 있는 나무 꼭대기의 떨림, 나뭇잎의 흔 들림,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다. 당신은 유럽 사람과 유럽제 짐과 물건들을 싣고 강물을 거슬 러 올라가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는 이 1만 2,000톤의 대양 연락선, 아마존강의 황색 물결을 휘저어 가르는 프로펠러와 거대한 이물, 휘휘 돌며 날아가 야자수 줄기에 가 들러붙는 검은 연기가 아마존을 조금도 침해하거나 흩뜨려 놓지 못하며, 그 장엄한 원시의 자연 속에서 그 야말로 하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모기나 하루살이처럼 눈치채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그런 존재일 따름이다. 블레즈 상드라르 (실화:대양 연락선을 타고 원시림 속으로) 엷은 대기 속으로 사라지다 "백인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요? 그 뒤로 가을이 몇 번이나 지났습니까? 기억해 보 세요.... 누군가가 포셋, 레드펀, 모프레 같은 이름일 들먹이는 걸 들은 적이 없나요?" 아마조 니아의 원시림(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은)을 탐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토박이 인디오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포셋의 죽음도, 레드펀의 죽음도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 있을까? 그들은 인디오 종족들의 백인 신이 되었을까? 영국인 대령 퍼시 H. 포셋, 21세인 아들 잭, 역시 21세인 잭의 친구이자 학생이던 레이저 리멜이 페허가 된 전설 의 도시와, 아마도 보물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했던 브라질의 마트그로수 정글로 '사라진'지 25년이 되었다. 23년전, 젊은 비행사 폴 레드펀이 비행기에서 같은 숲 속으로 추락했다. 그 도 비행기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 몇 달 전, 경험이 일천한 23세의 프랑스 탐험가, 레 이몽 모프레가 프랑스령 기안 마로니 고지의 산 속으로 사라졌다. 연금생활자였던 늙은 아 버지가 파리로 가서 자기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여행자들을 찾아 탐문했다. 그는 아직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전설의 도시를 찾을 겁니다." 포셋 대령과 그의 아들의 모험은 전설적이다. 1901년 퍼시 포셋은 지리학과 사랑에 빠진 신비주의자 학생이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그는 집을 떠나 볼리비아와 브라질의 유적 지를 발굴했다. 멤피스의 유적만큼이나 훌륭한 매우 가치있는 부조 조각품을 발견한 뒤, 그 는 타파조스강과 싱구강 상류의 아직 망가지지 않은 지역에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문명의 유적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마존의 신비에 사로잡힌 포셋은 프랑스 전장에 서 대령으로 승진한 뒤 1920년에 다시 원시림 속으로 돌아왔다. 말라리아가 그를 쫓아 냈지 만, 1925년 그는 마투그로수의 금과 다이아몬드 광부들의 야영지였던 쿠이아바에 다시 나타 났다. 이번에는 아들 잭과 함께였다. 포셋은 인디오 주술사의 예언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당신은 전설의 도시를 찾을 겁니다."샤먼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 아들이 커서 당신과 함께 왔을 때 말입니다. 당신은 포로가 되겠지만, 결혼하면 그가 당신을 풀어 줄 겁니다!" 콜럼버 스가 신세계를 발견한 것은 그가 전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포셋과 아들 잭, 잭의 친구 리멜 은 셰파다의 정글로 들어왔다. 300Km를 걸었을 때, 한 브라질인 탐험가가 그들에게 인디오 안내인 둘을 붙여 주고 애지중지 돌보겠다는 약속하에 작은 개 한 마리를 주었다. 얼마 동 안은 온후한 인디오 부족들이 사는 시에라아줄에서 매일 밤 구들의 캠프파이어를 볼 수 있 었다. 1925년 6월 포셋이 잘 간수해 달라고 맡긴 멋진 편지와 필름을 가지고 안내인들이 돌 아왔다. 퍼시는 정글이 점점 빽빽해져 도끼로 길을 뚫기는 불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카누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들과 리멜과 함께 리오콜로세우를 거슬러 올라가 원주민 칼리팔로 인디오들의 정착지를 향해 나아갔다. 며칠 뒤 상처를 입고 공포에 떠는 작은 갬나 이 벌목꾼의 농원으로 홀로 기어들어와 죽었다. 야생아 잔인한 인디오들은 없고-그 점에서는 모든 탐험가들이 지지할 것이다-어딜가든 겁먹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맨 먼저 세 탐험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프랑스 인 탐험가 쿠르트뷰가 1925년에 상라파엘강 근처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괴로워하고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백인 남자하나-퍼시 포셋일 것이다-를 만났다고 보고했다. 또, 한 스위스인 탐험가도 퍼시 포셋이 야만족을 사이에 있는 걸 보았노라고 주장했다. 그는 흰수염을 기르 고 영어를 했으며, 건강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유럽인이 가까이 가려고하자 인디오들이 가 로막았다. 그들이 그를 포로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이 지역을 탐사한 이탈리아인 과학 자 미슐레 트루키에 따르면, 잭 포셋과 리멜은 죽었으나, 퍼시는 나병에 걸려 절망감과 고통 에 빠진 채로 인디오들과 함께 있는데 다시는 문명세계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브라질인 인종학자 윌리 아우렐리 또한, 유일한 생존자 퍼시 포셋이 지금 한 식인부족 을 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몇몇 모험가와 여행자들-다이어트, 페트롤료, 플레임, 그리고 UP 통신 리우데자네이루 지국장인 오라니오 푸자니 등-이 포셋을 찾으러 갔다가 숲 속에서 죽었다. 1934년 또 한 명의 저널리스트, 윈턴 후작이 탐험가의 여행일지와 카메라 장비 몇 가지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실은 알 수 없었다. 그 역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는 칼라팔로 인디오들에게 독살되었다. 1936년 레흐터스 목사가, 그의 조수 툴라가 1926년에 보내 온 정보를 확인한 뒤, 칼라팔라족 옆에 사는 야낭하쿠아족 인디오들이 잭 포 셋의 아들인 푸른 눈의 백인 소년 하나와 부족의 처녀였던 그의 아내 알카를 돌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1945년, 저널리스트 에드마르 모렐이 이끄는 탐사대가 그곳으로 가 둥페라는 이름 의 아이를 찾아냈다. 그는 퍼시 포셋의 아내에게 입양되었는데, 지금은 25세로 브라질에서 공부하고 있다. 인디오들이 모렐에게 한 이야기에 따르면, 리멜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도, 퍼시와 잭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믿기를 거부하고 있다!... 레이몽 모프레의 마지막 모험 그후 젊은 프랑스 탐험대가 레이몽 모프레의 이름이 포셋과 레드펀의 이름에 더해졌다. 낙하산병 출신으로 일찍이 군훈장을 받은 레이몽 모프레는 모험을 동경하는 젊은 저널리스 트였다. 1946년, 그는 브라질 탐험대에 참가했다. 1949년 11월, 그는 30Kg에 달하는 장비를 짊어지고 혼자 걸어서 프랑스령 기아나의 외진 투무크 후마크 산맥에 도달하는, 위업을 달 성했다. 지난 4세기 동안 많은 사람의 목숨을 집어삼킨 전설에 따르면, 그곳에 순금옷을 입 은 왕이 금으로 덮은 집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을 통치하며 사는 꿈의 왕국이 있다고 한다. 레이몽은 황금왕 '엘도라도'에 관해서는 환상을 품고 있지 않았으나, 모험을 즐기는 한편 으로 아마도 그 지역에 있다고 알려진 금맥을 찾는 데 열심이지 않았나 싶다. 그는 자신의 미번 여행기를 <과학과 여행(지에 <투무크 후마크 산맥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다섯 달 뒤 10여명의 인디오가 타무리강을 거슬러오르다가 그의 장비와 특수 소총, 여행일지를 발견했다. 그들이 프랑스 당국이 수색대를 출동시켰다. 수색결과는 좋지 않은 징후를 드러냈다. 그들은 모프레와 그의 재가 11월15일 발라타고무 채취자들의 마을이 있던 곳에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1월 15일 그는 아무로 뗏목을 확인했다. 1월 15일 그는 나 무로 뗏목을 만들어 급류 지점으로 저어 갔다. 거기서 45Km쯤 떨어진 비엥브뉘 광산에 갈 생각이었다. 그 뒤 곧, 그가 마지막으로 묵은 것으로 보이는 움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가 만든 뗏목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그의 그물침대가 나무탁자 옆에 그대로 걸려 있고, 탁자 위에는 종이 몇 장, 잉크병, 펜, 반쯤 썩은 배낭이 놓여 있었다. 인디오들과 경찰은 불운한 탐험가의 발자취를 좇아 우림 속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시체는 찾지 못했다. 프랑스령 기아 나에는 인디오 원주민이 전혀 없으므로, 수색대는 모프레가 야수들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 이 가장 크다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나는 그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장한다. 점쟁이들이 그에게, 아들이 아직도 투무크 하마크 산중을 헤매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셋, 레드펀에이어 레이몽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 세 유령이 모험의 길에 출몰하여 아직까지도 많은 탐험가들을 아마존으로 유인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도드라지는 이들로는, 최근에 거대한 강의 발원지를 발견한 버트 랜드 플로이노와, 라콩다민, 도르비니, 크레보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있는 게르브랑, 피히터, 마터, 게소, 바깥 세상과 단절된 20만 인디오들에게 과학을 제공하는 콩드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앙리 당주 <프랑스 수아르(1951년 1월8일 전설속의 동물우화 인디오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동물이나 식물의 영혼과 그들 자신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는다. 19세기의 박물학자들이 유럽의 소장품으로 미래의 자부심이 될 만한 희귀한 종 하나를 발견했는데, 인디오들은 그것을 자기 종족 한 사람의 영혼을 잃어버 린 것으로 여겼다. 새들이 어떻게 원색 깃털을 갖게되었는가 모든 생물을 자기 굴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거대한 물뱀을 격퇴하기 위해 사람과 새들이 힘 을 합했다. 그러나 하나둘 차례로 겁을 집어먹은 공격자들은 자기는 마른 땅 에서 밖에 싸 우지 못한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꽁무니를 뺐다. 마지막으로 가마우지가 용감하게 물 속 으로 들어가서는 괴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사람들이 뱀을 물 밖으로 끌어내서 죽 인 다음 껍질을 벗겼다. 가마우지가 그 껍질은 자신의 승리의 대가라고 주장했다. 인디오 추 장들이 비꼬아 말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당장 가져가게나!" "기꺼이!" 가마우지가 대꾸하 고는 다른 새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모드 달려들어서는 껍질 한 조각씩을 부리로 물 고갔다. 인디오들은 화가 나서... 새들의 적이 되었다. 새들은 조용한 곳으로 가서 껍질을 분 배했다. 각자 자기 부리로 물고 온 부분을 갖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껍질은 빨강, 노랑, 초 록, 까망, 하양 등, 화려한 색깔로 되어 있었고, 이제껏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무늬를 갖고 있 었다. 새들이 각기 자기 몫을 배당받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거무칙칙하던 그들의 깃이 갑자기 하양, 노랑, 까망 등등으로 변했다. ...앵무새는 초록과 빨강 깃을, 새매는 빨강 과 보라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깃을 갖게 되었다. 영예의 주인공인 가마두지는 대가리 부분 의 검은 껍질을 받았다. 그러나 가마우지는 늙은 새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말했다. 클로 드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날것과 구운 것( 악어 꿈을 꾼 남자 "악어 꿈을 꾸었어." 어느 날 일어나면서 한 남자가 말했다. "꿈속에서 물가를 걷고 있는 데, 커다란 악어 알이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 먹었지. 이제 악어가 와서 날 잡아먹지 않을 까 걱정이야!" "바보 같은 소리." 형이 말했다." 악어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야. 그는 널 잡아 먹지 않을 거야!" 저녁이 되었을 때 형이 말했다. "물고기 잡으러 가자." "싫어." 동생이 말 했다. "악어가 무서워." 그러나 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강으로 가서 는 물가에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 물 속에서 커다란 악어 하나가 나타나더니 동생을 집어삼켰다. 활과 화살까지도. 동생이 악어 뱃속에서 말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구나. 목이 마른데 마실것도 없고. 빛을 보고 싶은데 여긴 너무나 깜깜해." 그때 원숭이 소리가 들 렸다. "원숭이가 소리지르는 걸로 보아 밝은 낮인 게 틀림없어!"그는 화살을 집어들고 안에 서 악어의 배를 찌르기 시작했다. 악어가 굴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느 놈이 이렇게 찔러대 는 거지?" 남자는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 악어가 이리저리 뛰며 강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 했다. 기침이 크게 나와 악어는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입에다 화살을 가로질러 꽂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반쯤 죽은 몸이 되어 물가에 쓰러졌다. 그날 밤, 그는 깨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보 니 사람들은 치차를 마시느라 바빴다. 형이 그를 맞았다. 남자가 말했다. "악어 꿈을 꾸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런데 형은 내 말을 곧이들으려고 하지 않았지!"제라르도 레이셀 돌마토프의 이야기 아나콘다 어느날 잭이 왼쪽 강둑을 따라 천천히 삿대를 저어가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기 악어가 죽어 있다. 여기서 나갑시다."나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순간 나는 그가 잘못 보 았음을 알았다. 거기, 파리며 나비며 온갖 종류의 곤충들로 뒤덮인 진흙과 물 속에, 꿈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아나콘다가 있었던 것이다. 강둑 진흙창 속에 3m 남짓이 뻗 어 있고 나머지 몸뚱어리는 맑고 얕은 물 속에 있는데, 똬리 하나가 우리 카누 아래에 있고, 몸통은 허리만큼이나 굵었다. 그후로 나는 그놈의 길이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 믿 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총 길이는 15m는 넘고 어마도 18m는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놈 이 누워 있는 위치로 알 수 있었다. 우리 카누는 7m짜리였다. 뱀의 대가리 쪽이 이물 너머 로 3m 남짓 뻗어 있고 고물 밖으로 비어져 나온 꼬리는 1.2m는 족히 되었다. 가운데 몸통 은 커다란 S자를 그리며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카누보다 길었고 너비는 1.5m가 넘었다... 나는 고물 쪽에 있어 총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잭한테 쏘라고 소리쳤다. 그는 총 있는 데로 가 상자 속을 더듬다가 그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그 놈은 물을 한바탕 휘저어 우리를 난파 직전 상태로 몰아넣고는 사라졌다. 그 덩치에 그 민 첩함이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전에 우리가 껍질을 벗긴 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 르기였다. 목 잘린 그놈의 몸통이 내 다리를 휘감고 죽어 가는 근육으로 마지막 발악을 하 며 다리를 거의 부스러뜨릴 뻔했던 일을 생각할 때, 이 거대한 괴물이 방향을 바꿔 카누를 덮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다.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그 괴물의 똬리 속에서는 완 전히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프리츠 W. 우프 데 그라프 <아마종의 인간 사냥꾼( 과학자의 눈길 1848년 5월 28일, 헨리 월터 베이츠와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파라에 도착했다. 베이츠는 11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다윈을 만났고, 다윈의 격려를 받아 그를 유 명하게 만든책 <아마존강의 박물학자(를 썼다. 자정쯤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리던 바람이 일었다. 우리는 닻을 올리고 곧 아마존강에 배를 띄웠다. 나는 달빛 아래 거대한 강을 보려 고 해뜨기 오래 전에 일어나 있었다. 미풍이 솔솔 불어 배는 경쾌하게 물위를 질주했다. 우 리가 지금 가고 있는 물길은 너비가 23Km쯤 되는 강의 좁은 목부분이었다. 이 지점의 전체 강폭은 30Km가 넘었으나, 커다란 섬들로 물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좁은 폭에도 불 구하고 강은 매우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은 파라강이나 토캉팅스강처럼 호수 같은 외양을 띠지는 않았으나, 강물이 도도한 흐름을 이루어 자유롭게 흐르기에는 충분한 폭이었 다. ....6일째 되는 날 낮에, 시에라데알메이림 산맥의 푸른 산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북쪽 강둑 너머 멀리에 나타났다. 줄곧 평평한 대지에 머무르다가 오랜만에 그런 광경을 보니 한 결 기운이 솟는다. ...폰 마르티우스에 따르면, 이곳에 자리잡은 산들은 높이가 강 수면에서 250Km쯤으로, 꼭대기까지 숲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고 한다. 산맥은 동쪽에서는 낮고 둥근 언덕들이 점점이 솟은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마을 서쪽으로 가면 길게 늘어진 능선이 마치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하여 일정한 높이로 깎인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 우리는 개미들을 피할 수 있고 물에서 가까운 작은 개활지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거기서 우리는 숲 속 사 방으로 흩어져 고된 아침 사냥을 해서는 땅 위에서 푸짐한 식사를 한 뒤에 -널따란 바나나 잎 두 장이 우리의 식탁보였다-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두 시간 동안을 쉬었다. ...한낮의 그 조용한 시간에, 원주민들이 자쿠아루(테이투스 테겐심)라고 부르는 몸길이 60cm의 크고 살찐 도마뱀들이 서로 뒤꽁무니를 좇으면서 마른 나뭇잎 위를 바스락거리며 뛰어 다니는 모 습을 항상 보루 수 있었다. ...검푸른 빛의 커다란 모르포 나비가 높이 떠서 날개를 파닥이며 천천히 날아다니는 모습, 곤충들의 윙윙거림, 그 밖의 생기 없는 많은 소리들이 이기이한 고 적함이 자아내는 전체적인 인상에 한몫을 했다. 머리 위로 아찔할 만큼 놓은 곳에서 서로 뒤엉켜 있는 나뭇가지들에서 이따금씩 묵직한 과일들이 '텀벙' 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떨어 졌다. 아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산들어대는 소리가 매우 다양한 음높이로 들려 왔다. 카메타 에서 나는 우연히 미갈레 종의 커다란 털거미의 습관에 관련된,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 실 하나를 확인했다. ...거미의 몸길이는 5cm 가까웠으나, 다리는 뻗으면 17cm였고 몸통 전 체와 다리가 붉은빛을 띤 회색 털로 덮여 있었다. 나는 나무줄기에 붙은 그 괴물의 움직임 에 정신이 팔렸다. 거미는 나무의 갈라진 큼 아래쪽에 있었는데, 큼을 가로질러 조밀한 흰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거미줄 아래쪽이 망가져 있고, 그곳에 작은 핀치새 두 마리가 걸려 있었다. 영국의 검은방울새만한 새로서, 두 마리가 각기 암컷과 수컷인 듯했다. 그중 하나는 이미 죽었고, 거미의 몸통 밑에 깔린 다른 한 마리는 완전히 죽지는 않은 채 괴물이 뿜어내 는 더러운 액과 침을 덮어쓰고 있었다. 내가 거미를 쫓고 새들을 꺼냈으나. 그 두 번째 새도 곧 죽었다. ...어느 날, 나를 위해 채집을 해주는 인디오 가문의 아이들이 이 괴물의 허리를 끈으로 묶어서 마치 개나되는 것처럼 집 주위로 끌고 다니는 것은 모았다.... 10월 6일 우리 는 에가를 떠나 두 번째 여행에 나섰다. 이번의 일차적인 목표는 숲 속의 몇몇 연못을 뒤져 젊은 거북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거북이 숨어 있는 정확한 위치는 숙련된 몇몇 사냥꾼만이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에가에서 그중 한 사람인 페드루라는 전사를 데려오고, 도중에 시무니 에 들러 다니엘이라는 안내인 하나를 더 붙였다. ...그물이 쫙펴지고,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그물에 악어가 한 마리 걸려 있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유일한 두려움은 야수가 그물을 찢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사람이 소리쳤다. "내가 저놈의 대갈통을 쳤어." 또, 하 나가 말했다. "저 녀석이 내 다리를 할퀴었어." 인부 중 한 사람인 삐쩍 마른 미라냐가 그놈 을 거꾸러뜨렸다. 떠들썩하게 웃고 외치느니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내가 강둑에 서 불러 온 14세 가량 된 소년이 파충류의 꼬리를 잡았다. 소년은 악어의 저항이 그칠 때까 지 꼬리를 꽉 붙들고 있다가 그놈을 물가로 끌어냈다. 그물이 펼쳐지고, 소년이 100야드쯤 되는 거리의 흙탕물 속을 걸어, 위험하지만 겁먹은 그 야수를 천천히 끌고 나왔다. 그런는 사이에 나는 나무에서 튼튼한 가지 하나를 잘라 두었다가 악어가 단단한 땅에 끌어올려지자 마자 그놈의 대갈통을 잽싸게 후려쳤다. 녀석은 즉사했다. 그것은 꽤 큰 악어였다. 턱길이가 30cm는 족히 되니까 사람의 다리는 두 번이면 능히 작살을 낼 수 있겠다. 종류는 거대한 카이만악어로, 아마조니아 인디오들이 자카레 우아수라 부르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그 거 대한 카이만을 한편으로는 경멸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나는 에가에서 서쪽으로 32Km쯤 떨어진, 반은 개화된 인디오 마을, 카이카라에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었다.... 거기 서는 강이 배우 낮은 곳은 흐르기 때문에 비탈진 강둑을 한참 내려가야만 마을의 포구와 목 욕터에 닿을 수 있었고, 그 얕은 진흙탕 물 속에 커다란 카이만이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우 리 모두는 목욕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물가에 선 채로 호리 병박으로 물을 떠서는 몸 위에 들이부었다. 이때 수아레스라는 바라상인의 소유인 무역 카 누 한 척이 도착했다. 인디오 승무원들은 보통 포구에 들어온 뒤 하루나 이틀 밤을 묵으면 서 물가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는 주정을 부리곤 했다. 날이 푹푹 찌던 어는 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후의 낮잠을 즐기고 있을 때 그중 한 사람이 술이 올라 얼근히 취한 상태로 혼 자서 목욕을 하러 내려갔다. 그를 본 사람은 딱 한 명, 강둑 위 자기 집 뒤편의 베란다에 쳐 놓은 그물침대에 누워 있던 무기력한 노인네, 주이시 데 파시뿐이었다. 그는 술 취한 인디오 에게 악어를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그가 두 번째로 소리를 치기도 전에 인디오는 퍽 쓰러졌 고, 그와 동시에 물위로 쩍 벌어진 한 쌍의 턱이 불쑥 나타나더니 그의 허리춤을 덥석 물고 는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으악!" 하는 단말마의 외침이 그 비참한 희생자가 남긴 최후 의 말이었다. 헨리 원터 베이츠 <아마존상의 박물학자( 아마조니아 열병 위대한 브라질의 꿈. 세계의 허파. 지구의 빵바구니. 기름진배, 모든 브라질 낙관론의 원 천, 브라질의 '추이 관망' 정책의 변명. 바르가스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저 너머에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람 없는 땅이 있다." 브라질 사람들은 '아마존 열병'에 걸려 있다. 국민 전체를 사로잡은 이상한 병이다. 그 병 은 사람들을 흥분시켜, 아누아리오 제오그라피시 도술이 펴낸 지도에서 나라의 윗부분에 있 는 습하고 이끼 낀 녹색의 땅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로 내몬다. 대도시에서 실패한 이들, 마 구 뻗어 사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빠져나온 알거지들, 교파나 피부색으로 인해 쫓겨난 이들, 또 브라질리아에서 온 기업의 후원자들, 상파울루에서 온 정치사들, 바이아에서 온 지식인 들, 심지어는 '신은 바로 아마존 사람'이라고 믿는 레시페의 사제들까지, 모든 이들이 그 병 에 걸려 아마조니아로 왔다. "미래는 아마조니아에 있다." 경제학자 파울 라무스는 이렇게 외쳤다. "왜? 국토로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에 이어 세계 제7위국 아니가. 만인 우림의 나무를 모두 베어 낸다면 지구상의 숲의 1/3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아마존강과 그 지류의 물들을 모두 뺀다면 전세계 지표수의 1/5이 없어질 것이다. 만일...." 희망과 꿈이 흔히 이 '만일'이라는 말에 걸려 있다. <내일이 오면, 친구여(라는 노래가 리우의 슬럼에서 널리 불 린다. "내일이 오면 너는 지치고 목마르고 굶주린 구세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 거야. 그들 에게 아마조니아의 풍요를 나눠주는 거지. 내일이 오면... 내일이 여기에 있다 1960년, 숲을 짓이기는 괴물들이 시속 6Km의 속도로 정글을 꿰뚫으며 폭 8m의 넓은 도 로를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브라질리아와 벨렘을 잇는 브라질의 척추가 놓이고, 그 길을 따 라 새로운 농부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약속받은 '녹색의 황금'을 열심히 찾았다. 얼마 안 가 서 그들은 숲의 무덤 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져 자연의 내장에 의해 소화되었다. 파파야나 바나나 같은 빈약한 식사로 연명하며 강둑 위의 기울어 사는 움막 앞에 멍청히 앉아 있는 비참한 이 카보클로들이 이따금씩 눈에 띈다. 이 맥 빠진 외톨이들의 얼굴에는 인디오의 슬 픔과 초창기 방데이란테들의 거만함을 즉각 상기시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 1966년, '아마조니아 작전'의 개시와 더불어 널리 공표된 두 번째 시도가 시작 되었다. 아마조니아 개발국(SUDAM)에서 투자자(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폭넓은 인센티 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입안했다. 개발국은 신뢰를 주기 위해 '침투 계획'이라는 것 을 고안하여 기록적인 시간내에 계획을 완수했다. 다음 15년 동안에 1만 5,000Km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3,000Km의 포장도로와 1만 4,000Km의 비포장도로가 건설되었으며, 브라질을 관통하여 서쪽의 크루제이루술과 동쪽의 주앙페소아를 잇는 4,300Km의 유명한 아마존 횡단 고속도로도 뚫렸다. '큰길'의 건설은 대역사였다. 브라질인들은 극도의 흥분 속에서 1m씩 길이 뻗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리고 원숭이들을 내쫓으며 고 속도로의 축대로 인디오 원주민들-전에는 백인 세계와 아무런 접촉이 없었으나 이제 병들 고 삶의 뿌리가 뽑힌 알코올 중독자가 된 석기시대의 부족들-을 고립시켜 가는 불도저의 성능은 평가했다. 가이아나에서 페루까지, 포르트벨류에서 마나우스까지, 쿠이아바에서 산타 렘까지, 땅들이 불타고 파헤쳐지고 망가졌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제로였다. 1966년 SUDAM에 철해진 1만 여 계획 중 100에도 채 못 미치는 계획만이 실행에 옮겨졌고 그중 극히 일부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파헤쳐진 숲 12만㎢중 남은 것이라고는 미몽에서 깨어난 카보클로들이 근근이 일군 땅뙈기 몇 군데뿐이었다. 1976년 정부는 작전의 실패를 공식선언 했다. 신개발지 조성을 위한 조세경감 조치는 해제되었다. 정부가 이민 수입이 아니라 해외 이민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아마조니아의 우림은 이제 사람들이 예전에 생각하던 곳이 아니 다. 그것은 흙발을 가진 우상이다. 우림을 무성하게 키우는 것은 비옥한 토양이 아니라 기후 이다. 부식토가 빈약한 그 척박한 땅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농법인 순회 화전 농경은 기껏 해야 소량의 마니오크와 곡물, 쌀, 담배를 산출할 뿐이다. 수명이 다한 땅은 계절이 두 번 바뀌기도 전에 비와 홍수에 씻겨 내려 황무지로 변해 버린다. 그것을 생산력 있는 땅으로 바꾸는 데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성공담'은 믿을 수 없다. 속임수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적절한 사례로, 최근에 한 일분인 팀이 실험한 산타렘 북부의 고추나무 농장을 들 수 있 다. 거기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미리 흙은 준비해 넣은 용기에다 심어야만 했다. 가 축의 먹이로 알맞은 사료 작물의 씨를 뿌린 마투그로수의 드넓은 땅. 지역 양축업자들을 위 한 것, 10년만에 1,000만두. 그들은 정부에 성공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실제 로는 어디에도 없는 이 말뿐인 수치 꾸러미를 사서는 인위적으로 부풀려 벼락경기를 일으킨 투기꾼들에게나 성공일 뿐입니다." 현실주의자인 울리베라스 두 상투스 교수는 상파울루 대 학의 학생들에게 아마조니아는 매력적인 봉이라고 지적한다. 당국자들이 국가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병, 즉 빈곤과 기아를 일시적으로 미봉하는 데 쓰는 연막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기아는 수지 맞는 것이지요. 기아는 사기적인 경제 계획, 실패한 성장 프로젝트, 투자를 부추기는 거짓 인센티브, 사리에 맞지 않는 공상적인 개발 계획에 좋은 구실을 줍니다. 여기서 기아는 이윤, 생산 장려금, 각 종 세, 이익 배당금, 이자, 대부 수수료, 주식 투기의 원천이 되지요. 금, 다이아몬드, 커피, 코코아, 사탕수수, 황마 면화는 캐거나 수확하기도 전에 몇 번이고 팔립니다. 반면에 들판에 서는 가족농들이 한 조각 숲을 벌채하여 자신들의 끼니를 겨우 해결하고, 굶주리는 미네이 로들은 손톱으로 산을 갉아 내며 글자 그대로 뼈가 빠지도록 일합니다." 그는 환멸스럽다는 듯이 덧붙인다. "아마조니아가 자본주의화가 될지 그러지 않을지 주목해 보세요." 경제학자 피루 델 라상테는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단기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해 관계에 입각하여 사고해서는 안됩니다. 아마조니아를 우리의 미래로 만들려면, 우리는 현실적인 형태로 그것 을 구축해야만 함지다." 그러나 울리베라스 두 상투 교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아 마조니아 개발은 이주해 오는 정착자 1인당 1만 달러의 경비를 부과합니다. 국민총생상의 3%도 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지역에 인구의 겨우 5%만이 살고 있지요. 이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마누엘라는 20세이다. 리우의 빈민가 베자 플로레 출신의 물라토이 다. 발코니-거의 다듬지 않은 두 개의 나무 기둥에 얇은 금속 패널 조각을 얹어 놓은 것-에 서 그녀는 자기 앞에 펼쳐진 풍경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다. 비탈지고 더러운 판자촌에 1 제곱킬로미터당 3만의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다. 휘발유통 안에서 마리화나가 자라는 것이 유일한 '도시공원'이다. 그녀의 눈은 그녀가 이미 딴 곳에 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저 너머 에. 그녀는 내일 떠날 것이다. 새벽이 되면 그녀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파우데아라라('앵무 새 둥지')에 실을 것이다. 덜컹거리고 후끈후끈한 그 대중버스는 1주일을 족히 달려 브라질 을 횡단할 것이다. 여행 종착지, 이름 없는 강의 둑 위에서 그녀는 숲을 개간하여 작은 '하 제인데'를 일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옥타비오는 주석 광산에서 일할 것이다. 그 감춰진 부에 손을 댈 수 있다는 희망에 녹색의 지옥을 자기 집으로 삼는 두 명의 공상가가 더 늘어나는 것이다. 신화의 깊이는 측량할 길이 없다. 기 피에르 베네 <디나스퇴르( 1987 년 11월 엘프 아키텐 사건 1980년대 초, 브라질 정부는 엘프 아키텐사의 자회사인 브라젤파 사에, FUNAI의 성원하 에 아마조나스 주의 사테레 마웨와 몽두루쿠 지역을 채굴할 권리를 주었다. FUNAI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본연의 임무와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채굴자들은 숲을 뚫어 300Km남 짓의 길을 내면서 길가 곳곳에 다이너마이트 장약을 설치했다. 장약의 폭발로 원주민들의 작물이 훼손되고 사냥감들이 놀라 달아났다. 게다가 인디오들이 남은 약간의 장약과 신관 따위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들은 인부들의 작업광경을 지켜본 것을 흉내내어 물고기잡이 에 이용하고자 했다. 그 결과 네 건의 치명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캠프 속의 인부들은 술을 나눠 주고 여자들을 자극하여 매춘을 하게 하는 등, 자기네의 황폐한 습속을 인디오들에게 그대로 전가했다. 그런 행위들은 인디오들의 공동체 생활을 심각하게 교란시켰다. 브라질 인 류학협회의 후원하에 인디오들이 당국에 항의했다. 엘프 아키텐, 브라젤파.k 페트루브라스, FUNAI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었다. 상원에서 공식서한이 낭독되었다. 마침내, 브라질 인류 학협회에서 프랑스 고등학원의 수석연구관, 시몬 드레퓌스 가멜롱과 아마조니아 전공 인종 학자 하나를 초청하여 현장조사를 수행하게 했다. 1984년, 시몬 드레퓌스의 요청으로 마나우 스에서 회합이 열렸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석유회사와 관련 정부기관(FUNA 포함), 인디 오 부족, 그들의 결연자와 후원자(브라질 민주법학자협회의장 포함)의 대표들이 마주앉았다. 브라젤파 사가 압력에 굴복하여 작업장을 폐쇄했고, 인디오들은 상당한 보상금을 받았다. 그 들은 그 돈으로 동력선을 사서는 마나우스에다 수예품들을 내다팔 수 있게 되었다.거기서는 그들의 중개자 역할을 해온 FUNAI의 지역사업소가 그들한테서 양심적으로 도둑질을 했다. 브라질 언론이 '1급 특보'라고 외친 이 사건이 하나의 선례가 외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통 적인 원주민 사회의 취약성과 아울러 그 자조 집단과 그들을 후원하는 과학단체들의 유효성 을 적절하게 보여 준 예라 할 것이다. 알랭 게르브랑 미래 현대가 아마조니아 원주민에게 지운 위협은 개발에 따른 '유감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집 단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일체성을 포괄하는, 진행중인 과정으로 보아야만 한다. 인디오의 기 억이 우리의 기억이고 그들의 유산이 우리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 역시 인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인디오, 시간의 전선에서 다르시 리베이루는 인디오들을 연구 주제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는 그들을 현미경 아래 에 놓아 둔 적이 없다. 그는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자 이곳에 와서 그들과 함께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느 정도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거울처럼 그대로 반사시킬 수 없는 능력을 얻었다. 앙리 레야르:인디오 문제가 마치 백인들에 의해 해결된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 그들 은 여전히 식민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르시 리베이루: 맞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처음부터 똑바로 놔둘 필요가 있어요. '원주민 문제'니 '인디오 문제'니 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지요. 그것은 에둘러가는 또 다른 길입니다. 문제는 문명사회에 있어요. 인디오들이 만일 수세기 도안 침략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은 훨 씬 나아졌을 겁니다. 레야르:식민화가 인종 집단을 안으로부터 분열시키는 원인이었나요? 리베이루: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종족의 문제로 귀결되니까요. 문명이 왔을 때, 그것을 전 염병과도 같았습니다. 인디오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서서 걸어 다니는 한 종족을 만났다고 생각했지요. 다만 그들이 숫적으로 열세라는 것을 알아냈을 뿐입니다. 어느 날 나와 함께 도 시를 방문한 한 인디오가 말하더군요. "놀라워요. 꼭 개미들 같아요!" 백인의 등장은 그들의 가치를 거꾸로 돌려놓았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라고 여겼는데, 갑자 기 자기네보다 더 크고 힘쎈 종족이 나타난 거지여. 이 때문에 그들의 신, 종족의 의술사와 말다툼이 벌어졌어요. 자신들이 이제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된 거지요. 비행기도 그래요. 적이 딱딱한 날개를 가진 새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완전히 빙 돌 아 버렸지요. 백인들이 오자 그들은 스스로에게 사물의 변화되는 틀 속에서 자신들의 자리 가 어딘지 많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레야르:새로운 질병 역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지요? 리베이루:정규 세균전이 벌어졌지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아무런 저항을 받 지 않은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가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병사들이 재빨리 인구 전체를 감염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순식간에 도시에는 시체가 널렸어요. 한 마디 통고로 100만 병사가 움직인 거지요. 의술사는 이 질병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의문속으로 빨려들어 갈 수 밖에요. 인디오 신화 자체에도 의문에 제기되었지요. 그것은 중 대한 일이었어요. 레아르:기독교인이 이들 탐험대를 선도했다는 사실에도 무슨 중요한 점이 있나요? 리베이루:물론 있지요! 선교사들의 태도는 십자군의 유산이었어요. 우리는 서양문명이 진 정으로 기독교적이고 자비롭다는 신화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합니다.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있었던 문명 중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문명이었지요. 그 점에서는 신교와 카톨 릭이 다를 바 없습니다. 레야르:선교사들은 어땠나요? 리베이루:선교사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단자들이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데서, 인디오들이 가장 존중하는 토템들을 모독하는 데서 심술궂은 즐 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선교사의 최상의 기쁨은 인디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지요. 그의 관심사는 인디오가 아니라, 신 오로지 신과의 관계뿐이었으니까요. 인디오들은 신성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지요. 레야르:인디오들과 백인들이 얼굴을 마주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요? 리베이루:백인들은 자기들에게 자기네 식대로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그런 느낌을 갖 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합당한가 하는 자기네 관점을 갖고 와서는 인디오의 권리를 주 절주절 읊지요. 그들은 또한, 자기네 준거를 들이면서 인디오들에게 땅을 떼어 주고 또 뺏아 갑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땅 문제는 얼마 안 되니까요. 전에는 600만이었는데, 지금은 겨 우 20만이지요. 인디오와 외부인들의 수가 비슷하다면 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 상 문제가 아닙니다. 브라질에서건 페루에서건 불리비아에서건, 공개적인 저항이 일어날 때, 그 상대가 국민 전체가 아니라 땅에 굶주린 근처의 삼류농민들인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 다. 브라질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만 인디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레야르:그렇다면, 그들은 브라질에 대해서 어떤 의사 표현을 합니까? 리베이루:도전,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명예의 문제지요. 국가는 남은 인디오들의 살 해를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여론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국가로 하여 금그러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습니다. 브라질에서 인디오들의 방위나 공격은 다양한 양상 으로 행해져 왔지요. 인디오들의 방위가 처음 실행된 것은 1910년 확신가였던 룽둔 장군에 의해서였습니다. 엄청난 변호가 있었지요. 선교사들의 관심은 오로지 개종뿐이었는데, 룽둔 은 인디오들에게 인디오로 남을 권리를 주고 땅을 주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주었어요. 그러나 근래에 그 모든 것이 상당히 변했지요. FUNAI(브라질 정부의 인디오 국)는 인디오 들에게 극히 폭력적인 대령들의 손에 장악되어 왔습니다. 군부독제가 국가 전체에 지독한 압제 정책을 취한 거지요. 그와 더불어, 인디오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현 상이 있습니다. 이주자들, 주로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제이젤 장군이 완벽한 본보기죠-인 디오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거지요. 대통령이던 제이젤이 그 자신 독 일인의 아들로 12세가 되도록 독일말 밖에 몰랐으면서도 스스로 속속들이 브라질인임을 자 처하고,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인디오들이 다른 이들과 달리 브라질인이 되지 않 으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결국 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인디 오의 권리는 조롱당하게 되었지요. 동화라는 개념 자체가 문명세계에서 온 것이지만... 레야르:하지만, 인종간의 혼혈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레베이루:물라토 공동체는 인디오 여자들이 백인이나 흑인들에게 끌려가 강간당한 결과 생겨난 겁니다. 처음에는 혼혈 인구가 무시할 만한 정도지만, 그 뒤 점점 늘기 시작합니다. 그에 따라서 토종 인구는 줄지요. 가끔씩 인디오들이 스스로 문명의 저편으로 넘어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지 문명을 따라가는 일종의 경계 이동일 따름입니다. 경계에서 땅을 얻을 경우 스스로 자신들의 사냥터와 고기잡이터에서 떨어져 나오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레야르:인디오들이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기를 원하시지요? 리베이루:물론 원하지요.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인디오들의 브라질 정치계에 대표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 접근 방법이 내가 아니라 인디오들 스스로에게서 나오고 있 지요. 정치무대는 언제나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만으로 채워져 왔습니다. 이제 그러지 못하 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때입니다. 레야르:결국에 가서는, 인디오가 문명권간의 관계가 흔히 인구 비례의 문제로 좁혀지는 데... 리베이루:물론,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문제를 똑같은 방법으로 바라볼 수는 없지 요. 케추아(600만)나 아이마라(1000만)처럼 상당한 무게가 있는 인종 집단도 있고... 그러나 모든 라틴아메리카 인디오의 90%는 작은 인종집단에 속해 있어요. 그렇다 해도 그들이 결 국에는 동화될 운명이라고 받을 만한 근거는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문명에 보조를 맞춰 나가겠지만(의학 분야 만이라면), '문명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1세기 동안 자기네 땅 이 계속 벗겨져 나갔음에도 결코 동화된 적이 없는 몇몇 종족도 있지요. 레야르:인디오들에 대한 현재 교회의 태도는 어떤지요? 리베이루:교황 요한 23세 이후로 큰 변화가 있었지요.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그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지난날에 행해진 잘못을 인정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선교사들 보다 인디오를 보호하는 일에 더 열심인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예를 들어, 타피라페 족 속에서 사는 푸카울드 수도사 같은 이는 훌륭한 일을 하면서 그들이 자기네 전통의 일부 를 재발견하는 것을 도와 왔습니다. 30년 전에 타피라페족은 100명이었는데, 지금은 500명이 넘지요. 하지만 일부 선교사들은 여전히 인디오들을 개화시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 면 살레지오회 회원이나 프로텐스탄트 같은 사람들이지요. 레야르:아메리카와 유럽의 인류학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리베이루:둘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유럽의 인류학이 인종 주의적이었다는 것은 머리에 새겨둘 필요가 있지요. 그 목표는 백인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어요.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인 식민주의 정책의 일부였고, 약탈의 인류학이었지요. 그 것은 인디오의 삶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데다가, 전후 보아도 오류인 신화 에만 관심을 가졌지요. 마치 1945년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독일 가정의 구조나 당시 베 를린에서 출판된 시를 연구하는 격입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훨씬 나은 경향의 새로운 운동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인디오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주고 그들 의 조상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특히 19세기의 사진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이런 유형의 인류학이 훨씬 과학적입니다. 모든 요인을 두루 고려하니까요. 훨씬 책임 있는 연구 이기도 하지요. 인디오들과 함께 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니까요. 물론 인디오들은 돈을 들이지 않지요. 레야르:브라질인은 자신이 인디오나 흑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리베이루:브라질인의 일각에는 늘 자신들이 인디오나 흑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둘 다 불가피한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유럽계가 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유럽인이 라고 느끼는 것은 좋고 흑인은 매우 나쁘며 인디오라고 느끼는 것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 습니다. 흑인들이 자신의 몸 속에 인디오의 피가 조금 흐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자신의 검음을 씻어내리는 방법이 되는 것은 그럼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에서는 한때, 인 디오의 뿌리를 섞어 넣음으로써 자신의 검은 뿌리를 잊으려는 거대하지만 매우 관념적인 고 유의 운동이-주로 물라토들 사이에서-일어난 적도 있지요. 레야르:하지만 그 뒤로 검은 것이 좋다는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나요? 리베이루:예. 1960년대에 흑인운동이 있었지요. 미국의 흑인운동과 유사한 것이었어요. 쿠 데타 후 브라질에 돌아와서 그 영향을 보았지요. 하지만 브라질의 흑인운동은 조금 옆길로 새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삼바나 그 밖의 세속적인 면들 속에 자신을 가두고 브라질 흑인들의 별난 민속적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에서 한발 비 켜 가려는 것 같아요. 리우에서 미국 국기를 그린 셔츠를 입고 카리브 음악이나 레게에 관 심을 보이는 흑인을 볼 텐데, 그것이 진짜 검음의 표현이지요.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걸 당혹스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레야르:오늘날의 인디오 방위운동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까? 리베이루: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젊은이들에게 인디오가 좋다는 운동은 더 이상 백인이 유죄라는 표현이 아니라, 문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지요. 우 리는 동화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브라질은 미국과 다릅니다. 우리는 인종간의 혼인을 통한 검지 않은 브라질이라는 관점에서, 브라질은 미국과 다릅니다. 우리는 인종간의 혼인을 통한 검지 않은 브라질이라는 관점에서 흑인들을 수용합니다. 브라질 '희게 만들기'라는 뿌리 이 데올로기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지요.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인디오들에게는 적용되지 않 습니다. 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지요. 브라질에서 인디오는 아무런 비중이 없는 까닭에 그들 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브라질) (오트르망)1982년 11월 아마조니아에서 폭력이 는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진 한 지역에서 금 캐는 이들가 인디오, 인디오의 대의를 믿는 이들 사이의 대결에 관한 1987년도 보고서. 아마조니아에서 점점 늘고 있는 폭력이 근래에 유난히 첨예해지고 있다. 광물과 회토류 원소 채굴량이 많아지는 중에 브라질 신헌법이 작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헌법의 채택은 올해의 대사건으로서 인플레이션과 외채 문제를 덮어버리다시피 하고 있다. 다른 소수자들 과 마찬가지로 인디오들 역시 헌법 초안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노 동조합이나 전문직업인조합과 같은 이유에서다. 인디오들은 분명히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 들의 요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외롭지 않다. 그들의 대의에 공감하는 카톨릭 청년회, 선교단체, 인종학자, 생태학자들과 연대한 인디오 방위자들의 로비가 국제적인 규모 에서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느슨하게 묶인 이 지원 단체들이 취한 행동이 지난 주 상파 울루의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아마조니아에 대한 주권의 일부를 브라질에게서 빼앗으려는 국제적 '음모'를 폭로하는 기사였다. 이 사건의 중심 피고는, CIMI(토착민선교회의)로, 인디 오의 권리 옹호에 매우 적극적인,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이다. 다른 단체들은 현장에 서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인데, 그 중에는 리히텐슈타인에 본부를 둔, 카톨릭 단체도 있다. 상 파울루 일간지에 따르면, CIMI는 아마조니아 전역-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 페루, 가이야 나까지-이 '세계재산'의 일부로 인정되어야 하고, 따로 떼어 현지 토착민들만 사용할 수 있 게 해야 하며, 토지의 개간과 광물 발굴 작업은 전면 추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CIMI는 자기네가 브라질의 영토권을 공격했다는 비난을 일축하고 계속해서 인디오의 땅과 권리의 보호를 포함하는 핵심요구들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현행 브라질법 아래에서 인디오들은 시 민신분도 아니고 시민권도 없는 반금치산자로 간주되는데, 그에 따라 한편으로는 연방의 영 구적인 지원, 특히 진료지원을 받는다. 지원을 관장하는 곳은 FUNAI로, 그들은 매우 열악 한 상황에서, 드넓은 지역에 고립되거나 반쯤 통합된 채로 흩어서 살아가는 수말은 부족들, 모두 합해서 약 22만 명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이들 인디오가 살아가는 조건 은 통합 정도에 따라 꽤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고립되어 사는 몇몇 부족은 점차 특별한 관 심을 끌고 있다. 문명과 접촉할 경우 불안해하는데다가, 원시 부족으로서, 국가 유산의 일부 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6,000~9,000명으로 추정되는 브라질의 야누마미족 이 그렇다. 그리고 불운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금과 회토류원소(우 라늄, 몰리브덴, 백금 등)의 광산이 네그루강 상류 인근의 그들 땅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 에서 광물 채취와 채굴을 하고 있는 것은 라콤베 씨의 파라나파네마사나 엘턴 뢰넬트가 총 수로 있는 콘체른, 골드메이즌 같은 그룹이다. 뢰넬트는 목재사업으로 돈을 번 뒤, 1982년 광물채굴에 자신과 자신의 인상적인 병참창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아마조니아 를 뛰어다니면서 많은 광업소를 세워 왔다. 이제 그는 자선단체와 선교단체까지 장악해, 인 디오들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그들이 실패한 과업까지도 수행하게 하고 있다. '음 모'문제에 관해서, 그는 브라질인들이 그들 자신의 전략적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국제조직들을 비난한다. 그에게 인디오 문 제의 불가피한 해결책은 통합-널리 흩어져 있는 고립된 부족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부분적 으로는 달성되었다-과 광산 개발 이익 배분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가 본대로, 반통합되어 농업에 부적합한 땅에 살면서 궁핍에 빠져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는 인디오들에게는 그것이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뢰넬트의 좋은 의도는 신도 인간도 두려워 하지 않는 가림페이루나 사금 채취자들의 통제 불가능한 유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들은 수천 씩 떼지어 공식적으로 금지된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장 루이 페타뱅 (르 피가 로)1987년 8월 23일 인디오의 힘 대륙이 그 개성을 찾아가고 있다. 중간계급의 힘이 성장하면서 라틴 아메리카는 자기네가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라틴인은 물론 인디오도 마찬가지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자신들 을 세계 한데 모인 얼굴로 묘사한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새로운 물결의 연구자 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숲 속에서까지, 이제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살아 있는 고고학 자는 없다. 대신, 자신과 똑같은 국민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요구를 열린 마음으로 듣고 그들 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려는 바람이 있다. 아마조니아 게토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 한 것이다. 다양한 신문과 잡지들이, 진행중인 현장 연구에 관한 새 소식을 포함하여, 인디 오들의 실정에 관한 정기 보고서를 싣고 있다. 문화 서바이벌(보스턴), 서바이벌 인터내셔널 (런던, 파리0같은 과학자와 인도주의자 단체들이 세계도처에 있고, 코펜하겐에 본부를 둔 토 착민 문제 인터내셔널 세계그룹(IWGIA)도 있다. 특권을 가진 대화자, 선교사들 공의회 후에 떨어져 나온 교회의 한 분파가 선계를 따라 지난날의 인종우월주의를 타파했 다. 필요할 때면 FUNAI와의 협약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행동하는 브라질의 토착민 선교회의(CIMI)나, 수도사 같은 끈기로 원주민 공동체의 완벽한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4권 이 간행되었고 18권이 준비중에 있다.-토착민연구 공의회(CEDIC)를 보라. 현지에서는, 오리 노코강 상류에서 야누마미족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불가피하게 문명과 충돌했을 경 우에 대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는 살레지오회 회원들이 있다. 그밖에 카푸치노 수도회와 다 른 선교 단체들은 지난날의 온정주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 디오 학살자들의 자연스런 동맹군인 하계 언어학연구소나 뉴스 미션은 가는 곳마다 혐오감 을 일으켜 왔다. 추문이 계속 이어지자 그들은 각국에서 추방당했다. 인디오들은 승리할 수 있는 카드와 더불어 피해야 할 위험까지도 인식하고서, 많은 곳에서 문제를 스스로 풀어 왔 다. 마을 수준에서 전국 수준까지, 아마조니아에 상호부조협회들이 생겨났다. 국제연합과 연 계하고 있는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페루에 본부를 둔 남아메리카 인디오회의(CISA)가 있 는데, 이는 볼리비아의 WCIP, 즉 세계 토착민회의의 회원단체이기도 하다. 그밖에, 에콰도 르 아마조니아 토착민회의의 회원단체이기도 하다. 그 밖에, 에콰도르 아마조니아 토착민족 연합(ONIC), 페루 적도삼림개발 다종족협의회(AIDESEP), 콜롬비아 전국토착민조직(ONIC), 브라질 인디오민족연맹(UNI)등이 있다. 이들 인디오는 백인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을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면서 자신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은 현대 세계와 의 통합의 반드시 문명화와 빈곤화로 연결될 필요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성공여부는 조직의 분열을 막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아마조니아에 사는 90만 인디오(1987) 중 절반 이상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 야누마 미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들은 육체나 영혼의 파괴 없이 관습의 굴레 너머로, 시간이 정지 된 세계 너머로 자신들을 인도해줄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찾을 수도 없는 불안정한 사 회적 조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알랭 게르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