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사막을 넘은 모험자들 지은이: 장 피에르 드레주(이은국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장원영 제1장 중국에서 로마로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은 중국과 서양을 연결해 왔던 모든 교역로를 통칭하여 '비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곧 이 명칭은 널리 전파되었다. 사실 이 명칭의 기원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이 비단을 알게 된 B.C. 1세기부터 극동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생겼던 것이다. '비단길'은 향료, 종이, 도자기, 보석 등을 교역했던 통상로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학문, 종교, 기술이 상호 교류되던 통로이기도 했다. B.C. 1세기경, 파르티아인이 로마인에게 알려 준 동양의 신비한 옷감 비단이 로마에 처음 등장하자 로마인은 그것을 '세리카(serica)'라 불렀다. 비단을 지칭하는 동시에 값비싼 피륙이란 뜻을 지닌 한자어 '시'가 여러 중계상을 통하여 로마까지 전달되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로마인은 비단의 원산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다만 세계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세르(몽고말로 비단:역주)인의 나라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 나라와 자신들이 '티나이'라고 부르는 미지의 세계, 중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고 알고 있었다. 티나이의 어원은 B.C. 221년에 세워진 진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시기에 로마인은 중국인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 B.C. 64년 시리아 정복 후에야, 중앙아시아의 대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막강한 파르티아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면서 비단을 알게 되었다. 비단은 옷감의 특질도 신비하긴 하였지만, 신비에 싸여 있던 원산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로마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중국과 서양간에 교역된 산물은 많았지만, 비단은 기록에 남은 최초의 교역상품이다. 쇠락해 가는 로마에 사치풍조가 한창일 때 비단은 필수 불가결한 유행상품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비단은 염료나 유리잔과 마찬가지로 사치품의 하나였다. 비단은 처음에는 장식용이나 침구류에 사용되다가 곧 옷감으로 이용되었다. 비단은 아마포나 양모보다 가볍고 질긴데다 감촉이 좋아 호평을 받았다. 플리니우스와 세네카 같은 사람들은 비단의 수입으로 생긴 막대한 재정지출이 로마 제국의 쇠퇴를 재촉하는 요인이라고 비난했지만 시정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비단수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비단은 높은 제조비용, 먼 여행에 따르는 위험경비와 중간상인의 폭리, 그리고 여러 나라를 통과하면서 붙는 관세 등으로 값이 매우 비쌌다. 비단이 중국에서 서양을 전해진 경위 로마인들이 비단에 매료되기 이전에,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를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인 흉노족이 먼저 비단에 매료되었다. B.C. 3세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황하 유역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과 횡포를 일삼던 흉노족을 막기 위해, 중국 북쪽 지역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성벽을 확장하여 방어를 견고히 했다. 그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한편 진나라에 억눌려 오던 흉노족은 한왕조 초기인 2세기에 접어들면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몇 차례의 무력진압이 수포로 돌아가자, 정략결혼을 통해 그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수시로 그 내용을 갱신해야 했지만, 이런 식의 평화조약을 통해 한나라는 어느 정도 국경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나라는 흉노족에게 1년에도 여러 차례 비단이나 술, 쌀과 같은 많은 조공품을 보냈다. 조공품의 수량은 점점 많아져 각종 귀중품과 비단 보따리가 흘러 넘치게 되었다. 흉노족은 이렇게 쌓인 잉여물자를 이용해 서쪽의 다른 유목민족과 물물교환을 했다. 이 유목민족이 서양에 비단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장건의 업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중국 세력의 팽창 평화조약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은 계속 한나라를 위협했다. 결국 한나라는 흉노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과 동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한 동맹국 모색이 서쪽으로의 팽창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과 서양을 오가는 비단 상인들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편, 중국에 닥친 가장 시급한 일은 동맹을 맺을 유목민족을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B.C. 140년, 중국의 관리였던 장건은 박트리아(중앙아시아의 한 지방:역주)로 쫓겨간 유목민족인 대월지(大月氏)족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흉노족을 협공하기 위해 대월지족의 협력을 얻어내려 했던 장건의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13년 동안의 모험을 통해 그가 얻은 많은 정보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팽창정책과도 인도 및 서양을 향한 다방면의 교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장건은 오래 전부터 버마로 알려진 지역을 통해 남방에서 들여왔다는 대나무와 기와를 대월지족 세력 지역에서 볼 수 있었다는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두 번째 임무가 장건에게 부여되었다. 텐산 산맥 저지대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뛰어난 말 사육술로 평판이 자자한 오손족을 찾아 동맹을 맺는 일이었다. 이외에도 장건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왕국과 인도, 파르티아 제국에 밀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오손은 그에게 10여 필의 말을 증정하며 극진히 대우했으나, 중국과의 동맹관계는 원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의 두 번째 임무 또한 실패였다. 비록 그가 임무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두 번에 걸친 그의 외교활동은 정치적 외교통로와 더불어 장차 급속히 발달할 무역통로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르가나의 천마를 찾아서 각 방면으로 활발히 외교사절단을 파견하던 한나라 황제는 오손족의 말보다 훨씬 뛰어난 명마들이 페르가나(우즈베크 고원 지대의 대원국:역주) 지역에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이 한나라 사절단 일행의 눈에 띄지 않게 그 말들을 숨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초능력을 지닌 말들이 서북쪽에서 오게 될 것이란 예언을 상기하며 '천마'의 순수 혈통을 이어받은 말이 바로 그 말이라고 생각했다. 용과 암말 사이에 태어나 강물에서 솟았다는 전설에 나오는 용마의 환상을 떠올린 것이다. 불로장생을 갈망하던 한무제는승천하는 데 필요한 용마를 갖는 게 소원이었다. 결국 대원국을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원정이 계획되었다. 첫 번째 원정은 실패였지만, 2차 원정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수십 필의 최상급 준마와 3,000필의 종마가 중국으로 호송되었다. 그후 대원국은 매년 해마다 많은 명마를 중국에 헌납해야 했다.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황제의 사신 행렬과 그 속의 사이비 사신들 그때부터 사신들이 파르티아제국, 페르시아만 주변 국가들, 그리고 인도 등지로 파견되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되는 대규모 사절단도 있었고, 먼 지역으로 떠난 사절단은 8, 9년이 지나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신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사절단의 구성 또한 복잡해졌다. 황제의 표장이 새겨진 의관을 착용한 사신들 속에는 때때로 신분을 위장한 일행들이 끼여들곤 했다. 이 여행에는 곳곳에 무수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다. 방문국에 바칠 선물을 도적에게 강탈당한다든지, 황제의 분부를 저버리고 선물을 팔아 버리는 것 또한 드문 일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B.C. 100년경, 중앙앙시아 왕국들을 굴복시키려고 나선 두 차례의 군사원정으로 중국과 이들 국가 사이의 교류는 정치, 외교, 무역 등이 결합된 조공무역 형태로 발전했다. 중국의 세력팽창은 식민지 군대 주둔과 농업 지역 설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중국은 식민지에서 대상들의 신변보호와 식량공급 허가, 자국 농업 이주민 정착 등을 도모하는 정책을 폈다. 중국 조정에 바친 공물과 상인들이 외교사절 역할을 하게 된 유래 중국의 사신이 다른 나라에 파견될 때에는 흔히 금과 비단을 공물로 가져가고, 돌아올 때는 온갖 종류의 예물을 받아 왔다. 한서, 서역전에는 이런 묘사가 나온다. "오색 영롱한 광채를 발하는 진주와 보석 패물류, 코뿔소의 뿔이나 왕비들이 사용하는 연작류 깃털과 같은 진귀하고 신비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다양한 종류의 말들이 궁궐 문을 가득 메웠다. 또 큰 코끼리나 사자, 그리고 타조와 같은 야생동물들이 궁 밖에서 사육되었다. 그렇게 천지사방에서 희귀한 물건들이 모였들었다." 한편 음유시인이나 곡예사들도 사절단과 동행했다. 이러한 공물의 교류가 무역교류의 길을 터주었다. 중앙아시아의 각국 사절단에는 공식 외교관과 통역관은 물론이고 상인과 봇짐장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B.C. 1세기, 선제시대에 들어서면 카슈미르 지역에서 파견된 사절단에는 고관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상인들이 사절단의 중심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온 소상인이나 하층민들이었다. 바다에 공포를 느껴 로마 제국 방문의 임무를 포기한 중국 사신 기원 후로 접어들면서, 중국인들의 관심은 로마 제국까지 넓혀진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대해 알고 있던 그들의 지식은 주로 외국 상인이나 사절단의 구전(口傳)에 따른 막연한 것에 불과했다. 1세기말인 서기 97년에, 서역국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던 반초(班超) 장군의 휘하 장수인 감영(甘英)에게 대진국의 대진(大秦)까지 진출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대진국은 물론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감영은 파르티아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감영은 페르시아만의 타오케 영토인 티아오치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해상로를 이용해 대진국으로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서양의 교통요지를 독점하고 있던 파르티아인은 중국과 로마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감영의 로마 제국 방문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저 바다는 엄청나게 먼길입니다. 순풍이 분다 해도 되돌아오려면 세 달이나 걸립니다. 만약에 역풍이라도 불라치면 2년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뱃길을 떠나려면 3년치 식량을 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있으면 향수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병은 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 (후한서, 서역전) 파르티아인의 속임수에 넘어간 감영은 바다를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로마 제국을 목전에 두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해상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 항해사들은 계절풍인 히팔 덕분에 인도양을 건너갔다. 중국인은 로마 제국이 해상로를 이용하여 파르티아인, 인도인과 무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역에서 해상로가 육로를 대신하게 된 것은 해상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세기부터였다. B.C. 1세기부터 항해사들은 계절풍을 이용해 대양을 헤치고 다녔다. 1세기 말경 혹은 2세기 초에 쓰인 인도양 항해기록에 따르면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로를 발견했다고 전하는데, 이 계절풍이 히팔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초여름 베레니케(홍해의 아프리카 지역:역주)에서 출발한 배들은 홍해를 횡단하여 인도양가지 항해한 다음, 12월 상순경에 돌아오곤 했다. 바로 이 항로를 통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2세기 로마 최고의 번영을 가져왔던 황제:역주)의 사신을 자처하는 한 인물이 166년 중국에 도착했다. 그는 리난을 거쳐 통킹만에 도착했는데, 정말로 그가 로마 제국에서 왔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가져왔던 상아나 코뿔소 뿔, 거북 껍질 따위 선물은 로마 산이 아니라 인도산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과 로마 제국의 중간 기착지인 인도도 페르시아처럼 중국이 서양과 직접 교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던 것이다. 신비의 나라 중국과 수수께끼의 나라 로마 중국과 로마 제국이 갖고 있던 서로에 대한 지식은 어렴풋한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두 나라는 서로 상대국에 대해 불가사의한 나라라든가 전설 속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인은 비단을 솜털 같은 나무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고, 물을 즐겨 마시는 세르인(중국인)은 2,3백년까지 산다고 생각했다. 한편 중국인들은 로마인을 자기들과 같은 이름인 대진국으로 부르며 자신들의 변방 정도로 생각했고, 자기들처럼 뽕나무를 재배하며 누에를 친다고 추정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크고, 윤곽이 뚜렷한데 중국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이유에서 그 나라를 대진국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후한서, 서역전) 그래서 중국인은, 5세기 무렵에 호탄국(중국계 투르크족의 나라:역주)에 비단의 제조방법이 알려질 때만 해도 그것이 자기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비법임을 모르고 있었다. 비단의 제조방법이 6세기경에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시칠리아섬까지 퍼진 12세기가 되었을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2장 순례자의 시대 한나라가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이후, 비단길은 무역거래뿐 아니라 포교활동도 겸하는 외교사절단이 왕래하는 무역로로 발전했다. B.C. 5세기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도 비단길을 통해서 중국에 전파되었다. 불교는 상인들에 의해 퍼져 나갔고 신도는 점차 늘어났다. 이렇게 불교가 범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데에는 윤회하는 중생들의 업보를 씻어 주려는 사명아래 엄한 계율로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자들의 공이 컸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경로에 대한 전설과 현실적 추측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게 된 것은 B.C. 1세기 한나라 명제때였다는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밤 명제는 황금빛 광채에 싸인 한 신령이 침실을 떠나 다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신하를 불러 해몽을 해본 결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지닌 부처라는 사람이 인도에 있다는 풀이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부처의 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인도로 사신을 보냈고, 사신들은 스님들과 함께 많은 불경과 불상을 가져왔다. 다른 출전에 따르면, 불교전래에 관한 신화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부처의 법어를 상세히 담은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백마의 등에 실려 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불교 전래의 흔적은 명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불교의 실제 전래는 이와 시기에서 큰 차이가 난다. 도교나 유교와 상당히 다른 교리와 예식에 뿌리를 둔 이 종교가 중국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알맞은 시기가 필요했을 것이며, 토착화라는 전제가 따라야 했을 것이다. 처음에 불교는 도교에서 따온 어휘를 사용하면서 도교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를 제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중국어로 번역된 초기의 불경들을 보면 대부분 도덕과 명상에 관한 내용 일색이다. 이처럼 불교는 토착종교와 결합된 상태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체적으로 살펴본다면, 1세기 경에는 부처와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을 함께 섬겼는데, 태상노군은 도교에서 마술을 부린다는 황제와 신격화된 노자를 동일시하여 생겨났다. 65년 주나라 때에 이 두 신, 즉 부처와 태상노군을 함께 숭배하는 수도자 공동체가 있었고 두 신에 대해 각각 공양을 바쳤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불 때, 불교가 중국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교와의 결합을 통해서였다. 초기의 불교신도는 상인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불교 전래설화에 따르면, 한나라 명제의 사신이 인도와 세랭드(동투르키스탄)로부터 부처의 법어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하는 사람들도 데려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불교는 중국에 거주하던 외국인, 상인, 사신 또는 외국 포로나 망명자, 세랭드를 다녀온 중국인들 사이에 퍼졌다. 그러한 상인들 중에 파르티아 사람인 안현이 있었다. 안이란 성은 아르사케스 파르니(파르티아인의 왕조:역주)를 가리키던 안식, 아르사케스 왕조 창건자의 이름인 아르사케스:역주)의 약어이다. 그는 181년 중국의 뤼양에 도착하여 같은 파르티아인 안센고의 보호 아래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초기의 불경번역은 많든 적든 인도-스키타이, 혹은 소그디아나(현재의 우즈베크 지역) 태생의 유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 세랭드, 그리고 인도간의 초기 왕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불교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초기의 불경한 편전이나 번역 등으로는 채울 수 없는, 지식에 대한 갈증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부터 불경원전을 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인도로 성지순례 길에 오른 중국인 순례자들이 오아시스에서 대상들과 마주쳤다. 9세기까지 계속되는 인도 성지순례 행렬의 대부흥의 근원에는 불경원본을 구하려는 절실한 필요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인도로 가는 길은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던가, 그보다는 드물었지만 남중국과 현재의 쓰촨성을 지나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에는 바다를 자주 이용했다. 현재 그 행적이 완벽하게 전해지는 최초의 순례자는 고승 법현이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계율을 다른 불경원본을 구하려고 인도 방문을 결심했다. 399년, 그는 승려 네 명과 함께 대상들이 자주 이용하는 오아시스길을 따라 떠났다. 약 12년 간 인도 전역을 두루 돌아본 수 스리랑카에 들렀다가, 중국행 상선에 몸을 실었다. 후에 순례승들은 법현을 인도 항로를 개척한 선구자로 존경하게 되었다. 비록 그의 순례담은 무미건조하기는 했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다.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비밀리에 오아시스길을 떠난 현장 법사 6세기에 잠시 주춤했던 인도 성지순례는 당나라 때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당시의 순례승으로는 현장이 대표적이다. 그다지 박학다식하지 못했던 법현과는 달리, 현장은 12세 때 입도한 뒤 불경연구에 몰두해 불교교의에 정통한 승려였다. 그가 인도를 가려고 결심한 것은 각기 다른 주석을 달고 있는 불경의 진의를 명확히 구명하기 위한 학문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순례를 떠나기 위해 다른 승려 몇 명과 순례단을 결성하여 조정에 여행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이 얼마 전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상태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비밀리에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여행담은 그가 죽은 직후 쓰인 전기와 현장 자신이 수집한 체험기를 바탕으로 그의 제자 변기가 쓴 대당서역기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현장은 10년간 인도 성지순례를 하고 나서 많은 불경과 불상, 그리고 석가모니의 전신사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현장법사는 629년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 여행하는 동안 그는 사리탑과 불상, 성유물, 숭배물 등 불교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성지를 방문하여 석가모니의 전신사리를 순례하고, 석가모니의 생애에 얽힌 설화들을 채집하여 후일 생생한 이야기로 엮었다. 현장에 따르면, 간다라 지방에는 수많은 절이 폐허로 버려져 있었고, 불자들도 거의 흩어졌다고 하며, 석가모니가 중생에게 깨우침을 설파하던 스트라바스티(또는 사에미예)나 그가 태어났던 카필라바스투, 열반한 쿠시나가라 등은 폐허더미로 변해 있었다. 바라나시(또는 베나레스)에는 불교도들의 숫자가 힌두교 신자나 다른 종교 신자들에 비해 1/3밖에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현장은 특히 가야(또는 부다 가야)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에 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한편 현장은 그 당시 불경연구의 보고였던 날란다에 15개월 동안 체류했다. 그후 그는 벵골과 아삼 지방을 찾았는데, 이 지역은 쓰촨성을 거쳐 중국에서 오는 육로의 종착점이었다. 비록 이 길은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그는 남쪽을 향해 길을 따라 드라비다족의 나라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스리랑카로 가는 배를 타려다가 전쟁 때문에 포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쪽으로 가서, 아잔타를 거쳐 그리스와 인도 사이의 무역기지였던 바리가자(현재명은 브로치:역주)라는 북부 도시까지 올라갔다. 바라가자를 떠난 현장은 귀향길에 올랐다. 그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서 인더스강을 건넜는데, 그때 50여 권의 필사본 불경을 분실했다. 힌두쿠시 지방에 다다른 그는 길기트를 거쳐, 2세기경 프톨레마이우스의 지리학에서 언급되었던 고대 석탑이 있는 타슈쿠르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중국 대상과 서양 대상 사이에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상과 석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돌아온 현장은 대단한 환대를 받았으며, 여생을 이번 순례에서 가져온 657권의 불경을 번역하는 일에 바쳤다. 페르시아의 범선을 타고 바다의 비단길을 여행한 의정 대사 현장의 성스런 고행에 감명을 받아, 명승 의정이 671년, 광동에서 인도행 페르시아 범선에 몸을 실었다. 해상로를 통한 성지순례는 이미 새로운 모험이 아니었다. 법현이 귀국할 때 이 길을 통해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불교 성지순례자가 이 해상로를 이용한 예는없었다. 이 경로는 성지순례길이라기보다는 페르시아와 인도, 말레이군도, 그리고 중국 사이의 무역로였던 것이다. 많은 승려들이 인도를 향해 떠났지만 8세기의 인도 성지순례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불교활동 금지와 중앙아시아의 통로폐쇄 중국에서 불교는 9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843년과 845년 사이에 무종 황제는 불교활동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조치는 몇 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인도 성지순례와 불경원본연구는 이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150명 이상이나 되는 공식 성지순례단이 조직된 적도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소원한 상태였다. 이것은 중국의 국력이 쇠퇴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베트남이 독립했고, 서쪽과 북쪽에서도 강성해진 나라들이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국인의 사상에 끼치는 불교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11세기와 12세기에 융성해진 유교에도 깊이 배어 있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도래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중국에서 843년과 845년 사이에 내려진 외국 종교 금지령은 이미 몇 세기 전에 건너와 널리 퍼져 있던 다른 종교에도 충격을 주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이 대표적 외래 종교이다. 모두 페르시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세 종교는 중국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명확히 그 교리가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에서 발생하여 이슬람교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였다. 6세기에 조로아스터교는 배화교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화북 지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7세기에는 많은 사원이 대도시 장안과 뤼양, 둔황과 비단길의 여러 오아시스 지역에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종교는 '오랑캐들'이 만든 이방인의 종교로만 인식되었다. 게다가 중국인이 사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교리와 계율 때문에 중국인을 동화시키기는 어려웠다. 이란을 발상지로 하는 마니교는 7세기 말경에 중국에 들어왔다. 중국의 사상에는 낯선 이원론임에도 불교와 도교의 요소를 취하여 광명교라는 이름으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석가모니와 노자를 창시자 마니의 스승으로 삼은 이 종교가 중국에 널리 퍼진 사실은 731년에 황제 칙령으로 장안에서 편찬된 마니광불교법의략을 보면 알 수 있다. 더욱이 마니교는 중국령 투르키스탄 지역의 위구르 왕국의 국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종교박해로 큰 타격을 받아 그 역시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중원에 오래도록 존속했다. 네스토리우스교가 중국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431년 에페소스(소아시아의 예 도시) 종교회의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을 구분하는 네스토리우스 주교의 교리가 이단을 파문당한 후, 이 교리는 페르시아와 인도 및 중국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중국의 옛 수도 장안 근처의 시안에서 781년이란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비석의 비문으로 네스토리우스교의 유입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대진국에서 태종에게 빛의 교리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이 비석에는, 635년에 알루벵이란 사람이 많은 복음서를 갖고 장안에 도착한 경위와 황제가 그를 맞아 선교활동을 허락한 사연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복음서가 번역되어 있고, 지방 관리들에 의해 수도원이 건축되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전설의 사도 요한 왕국 중국에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된 것은 소그디아나인과 터키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845년 외래 종교에 대한 박해로, 배화교와 비슷하게 3,000명 이상의 신자를 확보했던 이 교파 역시 수도원이 폐쇄 당하고 말았다. 그후, 중국에서는 더 이상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에서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고, 후에 몽고까지 전파되었다. 그래서 13세기 몽고가 중국을 점령했을 때, 중국 북부에서 다시 이 종교가 성행했다. 이는 몽고의 대칸일족 중의 일부가 그들의 자문관이나 스승처럼 네스토리우스교도였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교 전파에 얽힌 사연으로 사도 요한의 신화적 왕국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이 전설 때문에 수많은 중세 유럽의 여행가들이 이슬람교도와 싸워 기독교를 수호하고 그들을 개종시켰다는 기독교도 왕의 나라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상의 세 종교들과 달리 8세기에 이르러 중국에 들어온 이슬람교는 비록 그 신도수가 소수이기는 했지만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종교는 처음 이슬람의 정복활동 기간에는 중앙아시아로 전해졌지만, 그후 중국과 중동 사이의 해상무역이 활발해지자 동남아시아와 남중국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제3장 상인의 시대 아랍인이 예전의 파르티아인처럼 동서양의 중계자 역할을 하면서 해상무역권을 독점했던 시대는 몽고 제국의 발흥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광대한 초원을 목초지로 삼으면서 침략을 계속하던 몽고는 한때 서양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대상무역로를 부활시키고 그것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에 아랍 상인들이 상거래만을 목적으로 한 반면, 서양의 기독교 상인들은 포교라는 사명까지 띠고 위험한 비단길을 왕래했다. 이슬람의 지리학자들은 해상로에 관한 귀중한 고증자료를 남겨 놓았다. 페르시아만, 인도양, 그리고 중국해 사이의 해상로에 관련된 많은 자료는 아랍 지리학자들과 그들이 참고했던 여행견문담 등으로 잘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들의 여행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851년 많은 상인들의 여행담을 토대로 한 중국과 인도 견문록이란 연재물이다. 그 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여행가들로부터 전해들은 갖가지 정보를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슬람의 많은 지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자주 인용, 묘사되었으며, 표절되기까지 했다. 호화로운 바그다드궁과 활발한 해상무역 아바스 제국의 부흥과 762년 바그다드 건설 등으로 중동과 동북아시아간의 해상무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옴미아드 왕조는 왕족들을 시리아 전역에서 살도록 했지만 아바스 왕조는 모든 칼리프 왕족들을 바그다드의 왕궁으로 모이게 했다. 그래서 바그다드는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그다드 왕궁의 사치스런 풍조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막대한 무역거래를 유발했다. 상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중국의 큰 항구도시 광둥이었다. 페르시아만을 출항한 상선들은 중국과 인도 견문록에 기록된 여행로를 따라 항해했는데, 인도양의 라케다이브 제도와 몰디브 군도, 그리고 퀼론을 거쳐, 스리랑카와 니코바 제도, 안다만 군도 등을 통과해서 인도양을 빠져나갔다. 2세기 전 의정 대사가 기술했듯이, 이들 섬에서는 원주민이 옷을 입지 않고 생활했다. 이곳에 도착한 아랍 상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간 철을 코코넛 열매나 호박 같은 보석과 맞바꾸었다. 그런 뒤 말라카 해협을 지나, 참파(오늘날 베트남의 중부 해안에 있던 옛 항구:역주)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서 광둥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품을 모두 팔고 다른 물품을 실은 다음에 계절풍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기를 기다려야 했다. 결국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에 이르는 항해는 1년 이상이나 걸렸다. 광둥에 있는 아랍 상인들은 중국에 살고 있는 우두머리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이슬람교도였다. 세관원들이 과중한 관세 법규를 적용해서, 상품가격의 30%나 되는 관세가 부과될 정도였다. 광둥의 무역구조에 대해서는 아부 자이드가 잘 전해주고 있다. 모든 상품들은 계절풍을 타고 오는 배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중국 세관원의 감시 아래 보관창고에 적재된다. 반년 동안이나 고스란히 쌓여 있을 때도 있었다. 중국인들이 부과하는 세금은 상품가격에 30%에 달했다. 해상무역의 발달은 무역거래에 대한 통제법규가 증가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11세기와 12세기 사이에는 광둥, 항저우, 명주 그리고 칭저우 등지에 해상무역청이 설치되었다. 이 관청들은 특정 상품에 대해 전매권을 행사하고 관세징수의 임무를 담당했다. 상품별로 세율이 달라 진주, 장뇌, 소화물은 10%, 거북이 등껍질, 목재나 대형 화물은 30%이었는데, 관세는 모두 현물로 납부되었다. 중국 배들도 인도나 페르시아 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진출했다. 아랍인이 해상무역을 독점했던 것은 아니다. 751년 탈라스강 전투는, 이슬람 세력의 동방팽창을 종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도 쇠퇴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인도 견문록은 사라프와 광둥 사이를 왕래하는 중국 범선들의 상품 운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중국 범선들은 암초에 대한 두려움과 배의 육중한 흘수량 때문에 페르시아만 깊숙한 바소라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다. 많은 적재용량으로 보다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만큼, 중국 범선들이 퀼론에 기항할 때에는 과중한 관세가 부과되기도 했다. 마침내 중국 지리학자 가탐이 8세기 말경에 작성한 광둥에서 페르시아 만까지의 여행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중국과 인도 견문록을 보완시켰던 것이다. 지도에서는 항해거리가 여행 날수로 계산되었다. 말라카 해협까지의 항해기간은, 8세기 말경의 의정(義淨)이 해상여행을 위해 산정한 기간고 일치했다. 그러나 인도의 말라바르 제도와 쾰른 해안부터는 그 행로가 정확하지 않은데, 그것은 중국 범선들이 페르시아 만까지는 자주 가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인의 상품들은 대부분 쾰론에서 교환되었고, 오만의 무스카트 해안과 호르무즈 해협간에는 소형 선박만이 항해했다. 선원들은 현재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밤에는 북극성을 낮에는 태양을, 그리고 날씨가 나쁜 날에는 나침반을 이용했다. 항해술 분야의 발달은 당시 중국의 세력확장에 큰 몫을 했다. 나침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한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항해에 나침반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의 항해에서는 5세기의 성지순례자 법현이 전하는 바와 같이 선원들은 동서를 구별할 줄 몰랐고, 단지 해와 달과 별을 보고서 진로를 잡았으며, 날씨가 흐를 때에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갔다. 나침반을 처음으로 이용한 민족이 중국인이었는지 아니면 아랍인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랍 문헌에 나침반이 나타난 것은 13세기 이후인 반면, 중국에서는 12세기에 이미 항해에서 나침반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12세기 중국 고서에 '남쪽을 가리키는 바늘'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침반은, 물이 들어 있는 둥근 용기에 자침 하나를 띄워 놓은 것이었다. 나침반이 완벽하게 개량되어 가면서 항해의 안정성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취안저우 해양청 소속 관리의 회고록 (제번지) 상업활동에 대한 생생한 모습은 12세기 취안저웅 해양청 관리였던 조여괄의 제번지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상권에는 송왕조가 교역하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한국, 일본, 오만뿐 아니라, 그 접촉이 추측으로만 남아 있는 이집트, 소말리아, 잔지바르 같은 아주 먼 나라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하권에는 중국에 수입된 산물과 상품들의 목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로 향나무와 향신료, 약품에 쓰이는 나무 진, 마약 또는 향수들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캄보디아산.안남산 혹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산 알로에, 자바산 백단, 그리고 오만과 도파르산 유향 등 13종이다. 또한 인도산 후추, 몰루카 제도산 정향 또는 캄보디아산의 콩류 등과 같은 향수와 향신료도 수입되고 있었다. 그밖에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산 상아, 그리고 말라카 군도산의 코뿔소 뿔과 같은 수제품도 들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13세기부터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는데, 이 목록을 통해 그 이전까지는 면직물은 동남아시아,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 등지에서 들여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산 비단은 여전히 중요한 교역품의 하나였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자기 제조업이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점차 중국의 도자기류가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9세기에 광둥을 방문한 아랍 상인들은 중국 도자기를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그들은 최상품의 토기를 갖고 있는데, 그 중에는 유리 그릇처럼 투명한 잔도 있다. 그 잔이 비록 토기류이긴 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물의 반짝임까지 볼 수 있다."(중국과 인도 견문록) 십자군 원정과 대상행렬의 재개 아랍과 중국간의 해상무역이 날로 발전하고 있을 때, 유라시아를 누비고 있던 대상무역은 그때까지만 해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지는 않았다. 십자군 원정이 대상무역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원정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제노바 상인들에게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 그들은 성지를 향한 식량운반뿐 아니라 인력운송까지 도맡고 있었다. 코르푸섬, 살로니카, 네그로폰 같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항구에 상인들의 동업조합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베네치아의 상인들 그 도시의 주인으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마르코 폴로의 숙부가 상점을 개점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중세의 기업가 탄생 두 가지 이유로 쫓긴 상인들은 동양을 향해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천번째 이유는, 중국의 비단이나 향신료 같은 물품들이 이슬람교도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서 거래될 때 부과되는 관세와 이윤으로 가격등귀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값비싼 수입품과, 주로 모직과 아마류를 수출하던 유럽의 수출품간에는 가격불균형이 나타났다. 이에 상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서로 결속하여 이익을 분배하는 길을 택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활발했던 연합체는 길드라는 동업조합이었는데, 자본가가 대부분의 자본을 출자하고 상인은 그 외의 자본 출자와 판매를 담당하는 형태로 결합된 조직이었다. 이윤은 상인과 자본가가 각각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또 다른 이유는, 몽고 제국이 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함으로써 잠정적인 평화가 정착되어, 중앙아시아의 대초원 지방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칭기스칸과 그의 아들 오고파이가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투르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여 몽고 제국을 세웠다. 또한 몽고인들이 헝가리의 대평원을 침입하였을 때 유럽인은 공포심을 느꼈으며, 동이슬람을 공격했을 때에는 두려움과 함께 이해관계가 따르는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슬람을 견제하는 연합전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편 1279년 동쪽에서는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고가 중국 화남 지역까지 정복했다 베네치아의 두 상인 마페오 폴로와 그의 동생 니콜로가 길을 떠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1260년, 각종 값진 상품을 실은 범선에 오른 두 형제는 콘스탄티노풀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지고 간 물건들을 팔고 값비싸고 아름다운 금은과 보석을 산더미처럼 사 모은 후, 더 많은 수익과 이윤을 남기기 위해 베네치아 동업조합 지부가 있는 흑해의 크림 반도 솔다이아로 향했다. 솔다이아에서 만족스런 성과를 얻지 못한 그들은 더욱 멀리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그들이 작은 무리를 지어서 말을 타고 떠났다는 사실과 버크칸이 지배하고 있던 볼가강 유역에 도착하여 금은보화를 기부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며, 다른 패물들은 팔아 두 배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는 것만 기술하고 있다. 두 여행자가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칸을 만나게 된 경위 얼마 후 그들은 물건을 가득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이 전쟁으로 막혀 있었다. 결국 돌아가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인 동쪽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부하라에 도착했다. 타타르인 사이에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그곳에서 3년을 머물러야 했다. '모든 타타르인의 폐하'였던 쿠빌라이칸의 신하들이 그들을 황제의 숙소가 있는 카라코룸으로 데려갔다. 폴로 형제의 신분이 상인으로 밝혀지자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쿠빌라이 궁에서 두 형제는 자신들의 나라와 특히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쿠빌라이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서 기독교의 교의에 정통한 학자를 100여 명 보내 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교황에게 보내기로 작정했고, 친서를 전달할 임무를 마페오와 니콜로 형제에게 맡겼다. 형제는 통행증을 갖추고, 타타르의 한 귀족과 동행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동행한 타타르의 한 귀족은 도중에 병에 걸려 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동행인 없이 가던 길을 계속한 이 두 형제는 알렉산드레트만의 라이야에서 배를 탄 다음1296년 4월, 아크르에 도착했다. 이는 카라코룸을 떠나 약 3년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교황이 죽은 후였기 때문에 차기 교황이 임명되기를 기다리기 위해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거기서 마페오는 이미 15세가 된 아들 마르코와 재회했다. 제4장 마르코 폴로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는 다시 대칸의 곁으로 떠날 채비를 했단. 이번에는 젊은 마르코도 데려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마르코 폴로는 1271년부터 25년 간이나 계속될 대여행을 시작했으며, 이 여행을 토대로 그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로 가득 찬 동방견문록을 내 놓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2년이나 기다려도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자, 그들은 아르크에 들른 다음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쿠빌라이칸이 기독교도인 어머니를 위해 부탁했던 '그리스도 무덤에 있는 성유를 조금' 얻었다. 그리고 그곳 교황 특사로부터, 자신들이 칸에게서 부여받은 임무를 달성할 수 없었던 사정을 증명해 주는 서한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 특사가 칸한테 전할 이야기를 듣고 라이야로 갔다. 그곳에서 이제 막 그레고리 10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 교황의 지시로 그들은 다시 아크르로 되돌아가 교황을 알현했다. 교황은 그의 권한을 대행하고 주교와 사제 임명의 자격을 부여받은 두 명의 도미니크파 수도사와 동행했다. 일행이 다시 라이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휩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수도사가 겁에 질려 성다크르(아크르의 다른 이름:역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세 여행자는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수많은 겨울과 여름이 교차하는 먼 길을 떠났다. 대칸에게 돌아가는 그들의 여행길은 몇 줄로 언급되고 있다. "수많은 날에 걸쳐 사막 한가운데를 지난 그들은 대칸을 향해 오로지 북동 방향으로 전진해 갔다." 그러나 이 여정은 3년 반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 여행경로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동방견문록에는 경험한 것이나 전해들은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두 경우가 구분되지 않은 채 적혀 있기 때문에 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육로를 사용했다. 마르코가 언급한 지역으로 추정해 보면 그들은 몽고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와 레바논을 지나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호로므즈 해안까지 내려왔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남동쪽을 지나 발하슈 호수 쪽으로 갔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서 파미르고원을 통해 카슈가르로 빠져 나와 타클라마칸의 남쪽을 따라가다가 야르칸드, 호탄, 로브노르, 그리고 마르코가 사주라고 불렀던 둔황을 지나 마침내 북중국에 도착했다. 대칸은 그들을 정중하게 맞아들여 그들의 생활과 여행길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 세 여행자는 쿠빌라이에게 그들의 여행담을 들려주고 또한 그들이 맡았던 임무의 성과를 내놓았지만 신학자를 한 명도 데려오지 못했기에 그리 대단한 성과는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쿠빌라이에게 '그리스도 무덤의 성유'와 함께 교황의 신임장, 친서, 그리고 선물을 쳤다. 그 다음부터,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숙부는 마르코의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다. 과연 그들은 무역업을 다시 시작했을까? 마르코 폴로는 그 점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알려진 것은 사업상 1년간 함께 간저우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간저우는 둔황이나 랑저우 같은 간쑤의 다른 도시들처럼 무역 거래를 위해 대상들이 밀접해 있는 지역의 하나였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젊은 마르코는 대칸의 신임을 받았다.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상당히 총명하다는 것을 안 대칸이 내심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을 틀림없이 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아래 그의 용의주도함을 시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도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특사로서 각지에 파견되었다. 대칸의 특사로서 마르코 폴로는 중국 관리들을 관리, 감독하고 감찰하는 식으로 몽고 제국의 통치에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몽고 제국에서는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외국인을 많이 활동했다. 특히 중국의 남쪽 지방에서는 중국인 관리들이 거란족이나 여진족의 지휘하에 배치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몽고 제국의 수도에는 티베트인이나 헝가리인, 페르시아인, 아랍인, 러시아인 또는 아르메이나인 등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 역시 다양하여 금세공업자였단 러시아인 콤, 파리 출신 기욤 부세 같은 사람도 있었고, 러시아인과 결혼한 프랑스 출신, 파케트 드 메츠 같은 강제 징용자도 많이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4개국 글과 문자'를 터득한 재인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어와 몽고어에 매우 능통했고, 터키어와 아랍어도 훌륭했지만, 몽고 제국의 관리들처럼 중국어에는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마르코 폴로의 초기 임무는 행정 감시였다. 그는 1253년에 쿠빌라이가 정복한 원난성 대리국에 최초로 파견되었다. 당시 대리국의 왕은 몽고 총독의 정치 간섭 아래 그대로 왕위에 남아 있었다. 그는 17년 동안 대칸의 신하로 일하면서 특사의 임무를 수행했다 마르코 폴로는 대칸의 사절로서 자신의 임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대칸은 징수한 세금의 관리를 위해 캄보디아와 항저우, 그리고 인도까지 파견했다. 그 외에도 마르코 폴로는 양저우의 총독이란 중책을 받아 3년 간 봉직하기도 했다. 그밖에 그의 임무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들렀던 지역들에 관해서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과연 자신이 직접 그 지역들을 모두 방문했을까? 그가 황궁이 있던 칸발리크 다시 말해 북경과 중국의 옛 수도 장안, 쓰촨성의 청두, 그리고 티베트, 원난성에 갔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반면에 버마, 벵갈, 통킹만 그리고 안남에 관해서는 직접 목격하고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장쑤성, 그리고 양쯔강 유역도 마찬가지이다. 황제 폐하를 위한 품이 있고 웅장하고 화려한 그 도시에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뜻의 진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의 항저우, 즉 진사이는 1132년부터 송나라가 무너지기까지의 수도였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황홀경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150만 가구의 거대한 인구 밀집 도시이기도 하며(중국 자료에 따르면 실제 거주민 수는 약 100만명이었다), 1만 2,000개의 다리가 있는 이 물의 도시는 마르코 폴로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길거리와 운하는 길고 넓어서 나룻배들이 한가롭게 지나다니고, 주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운반해 주는 짐수레들도 지나갈 수 있었다." 송왕조 초기인 11세기 초엽부터는 항저우는 해변 지역과 북중국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최종 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해로와 하천을 이용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상인정신에 입각하여 그 도시를 묘사하고 있다. 시장에는 식료품이 흘러 넘쳤고, 상점에서는 향신료, 진주, 패물 등 모든 물품들을 팔았다. "상인들이 무척 많았는데, 그들은 대단히 큰 거래를 하는 부호들로, 자신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마르코는 기생, 의사, 점성가, 장인이 모여 사는 거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공직자로서 기울인 관심은 그 도시의 행정제도, 방위 조직체계, 화재를 대비한 소방시설, 조선소, 공중 위생시설, 세제 등에 관해서였는데, 특히 소금, 설탕과 수입이나 수출상품에 부과하는 세금제도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두 길을 발견했는데, 화북 지방을 횡단하는 포낭길과 화남 지방을 향해 가는 시로코 길이었다. 중국에 관한 서술에서 마르코 폴로는 화북과 화남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화북이란 요나라(960∼1129)를 창건한 거란족의 거주지를 말하며, 화남이란 지나라고도 부르는데, 몽고인이 북경 정복 후 60년 이상이나 걸려 정복하게 된 넓은 지역이다. 중국을 이렇게 달리 구분하는 것은 로마 시대에 중국을 세로와 지나로 구분한 것과 같은 것이다. 북쪽을 통해서, 혹은 남쪽을 통해서 같은 나라인 중국 내지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여행자들은 두 갈래가 다 같은 나라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인식은 17세기 초엽까지 계속되었다. 세계 어디에도 그렇게 많은 상인이 그토록 값비싸고 귀중한 물품을 거래하는 곳은 없었다. 마르코는 대칸의 동계 수도인 칸발리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는 특히 쿠빌라이의 궁궐과 미래의 왕위 계승자인 손자 티무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대칸의 생일과 새해 첫날에 벌어지는 축제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또 외곽에 숙박하고 있던 상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상인과 업무를 보러 온 외지인이 이 도시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그들은 궁정을 방문하러 온 사람들이거나 큰 시장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대상 숙박소가 이 다양한 사람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곳에는 많은 상인이 들끓었고, 각종 산물이 즐비했다. "매일같이 비단을 실은 수레가 1,000대 이상이나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비단과 금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놀랄 것은 없다. 그 주변 지방에서는 린네르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단으로 모든 것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무명이나 삼을 생산하는 곳이 있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명이나 린네르보다 훨씬 질이 좋으면서도 값싼 비단을 많이 생산하려고 무명이나 삼을 많이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칸이 지폐를 발행한 경위 모르코 폴로는 몇몇 도시에서 지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을 수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지폐 사용을 서술하기 위해 한 장을 할애하기까지 했다. 그는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에 대칸의 옥세가 찍힌, 금은과 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 주조'를 극찬하고 있다. "지폐는 순금이나 은에 필적하도록 그만한 보증과 행정절차를 거쳐 제조되었다. 지폐 발행을 맡은 관리들은 액수가 적힌 각 지폐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고, 필요한 절차가 다 이루어지면, 왕이 임명한 화폐 발행국장은 지폐에 옥새를 찍었다. 그렇게 해서 옥새의 인주 자국이 지폐에 인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치면 이 지폐는 가치를 갖고 통용될 수 있었다. 만약 지폐를 위조하다 적발되면 3대까지 교수형에 처해졌다." 진주, 금, 은을 모두 지폐와 교환토록 한 대칸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마르코 폴로는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지폐 날인이 가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다시 말해 인쇄술, 더 정확히 말매 목판인쇄에 의한 서적출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눈을 돌리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 유럽에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목판인쇄가 이루어지려면 2세기나 더 기다려야 했던 때에, 중국에서는 목판인쇄가 행해진 지 벌써 3세기가 넘었던 것이다. 칸발리크에서 각지로 향하는 도로가 완비되어 있었다. 지폐 다음으로 마르코 폴로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문서발송을 담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행자나 사신, 감찰관, 혹은 상인의 숙박지로 이용되기도 한 '1만여 곳 이상'의 역참에 묵게한 것이었다. "각 역참에서 전령들은 그들이 묵을 수 있는 아름답고, 부유하고, 웅장한 성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숙소에는 비단 이불과 호화롭게 옻칠한 침대가 있을 뿐 아니라, 귀한 전령들이 편하게 묵을 수 있는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왕족이 그곳에 행차한다 하더라도 아주 편히 묵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역참에서 대칸의 전령들이 말을 바꾸어 탈 수 있다는 것이다. 각 역참에는 400여 필의 말이 있었다. 그것은 대왕 폐하가 국무상 각지에 보낸 사신이나 전령이 지친 말을 그곳에 두고 새 말을 갈아 탈 수 있게 하고, 또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배치해 둔 것이다. 이러한 역참은 각 지방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마다 40내지 56Km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값비싼 패물과 금을 지닌 채 대단히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세 여행자의 마음속에는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대칸에게 여러 번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인도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지중해 연안의 타타르국 칸이었던 아르군의 사절 세 명이 쿠빌라이에게 '죽은 왕비의 동족 중에서 여인 한 명을 보내 달라는 간청을 하기 위해' 중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육로를 따라왔지만 전쟁 때문에 타타르로 가는 길이 막혀서 도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는 사신들과 공주를 해상로로 데려다 주겠다고 자청했다. 그의 해결책은 받아들여졌다. 범선이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세 명의 사신과 공주, 니콜로, 마페오, 마르코 등은 대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의 귀향길은 올 때의 길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일행은 취안저우에서 14척의 범선에 승선했다. 이 범선은 각각 네 개의 돛대와 12개의 돛을 달았다. 석 달 간의 항해 끝에 일행은 소자바섬(현재의 수마트라섬)에 이르렀고, 거기서 아르군의 나라까지 18개월을 항해했다. 동방견문록에서 마르코 폴로는 그가 기착했던 해안지역뿐만 아니라, 가 보지도 않은 마다가스카르섬, 잔지바르, 아비시니아, 아덴만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체험뿐 아니라 구전과 글로 된 자료에도 근거를 두었던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서 호르무즈에 내렸다. 거기서, 아르군왕이 죽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주는 그 왕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아홉 달을 머문 후에,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숙부와 함께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번에는 터키를 통과하는 육로를 택해서,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가지고 간 물품의 일부분을 빼앗겼다. 그곳에서는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여, 1295년, 3년간의 여행 끝에 마침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 그가 정직하고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경이로운 인생역정은 귀국한 때부터 신화속으로 잠겨든다. 베네치아에 돌아온 후의 행적은 주로 폴로 가문의 여러 가지 유서로 알게 된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41세에 부인을 얻고 세 명의 딸을 두게 되었다. 그는 베네치아 사람들로부터 켤코 영광스런 환대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아버지, 숙부들과 함께 상업활동에 몰두했으며, 트라브존에서 빼앗긴 재산을 되돌려 받으려 하기도 하고, 다양한 사업 특히 향신료 매매사업에도 손을 댔다. 베네치아에서 영예로운 입지를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생활태도는 겸손하여 시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백만장자의 성' 혹은 '폴로의 집'이라 불리는 대저택에 살았다. 그리고 1324년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다. 마르코 폴로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상당히 빈약하여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설과 상상에 기대는 부분이 크다. 그의 생애에는 중세기 여행가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에 의해 가장 명쾌하게 밝혀졌다. 라무시오는 1553년 그의 역작 항해와 여행에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편, 마르코 폴로에 관한 전설은 이미 14새기 초부터 자코포 다퀴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의 이모저모에서 마르코에게 백만장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백만장자'라는 수식어는 마르코 폴로가 가져온 보석과 부에서 비롯되다. 그런 이유에서 자코포 다퀴는 동방견문록을 백만장자 이야기로 이름붙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 책의 경이로운 일들은 허풍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코포 다퀴에 따르면, 마르코는 생전에 허풍 떨지 말라는 당부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마르코는 자기가 본 것 중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답했다는 것이다. '백만장자'라는 영어 단어는 코르트 델 밀리온느(백만장자의 성)라는 마르코의 옛 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가로이 지내기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1298년, 마르코 폴로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어 제노바로 이송되었다. 아마 인질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제노바에서 루스티첼로 드 피세를 만나게 되었다. 1284년부터 포로로 옥중생활을 한 루스티첼로는 궁정 작가로서, 그의 작품 중 불어로 쓴 무훈소설 두 편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는 영국의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 곁에서 일을 했던 뛰어난 작가였다. 그때까지 무엇을 기록해 본 적이 없던 마르코 폴로는 기억을 더듬어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바로 이곳에서 동방견문록이 시작되었다. 이 책은 대단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애초에는 프랑스어로 쓰였으리라 추측되지만 라틴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어, 베네치아어,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서의 사본면 해도 143권이다. 또한 알려져 있는 제목만 해도 동방견문록, 불가사의한 이야기,백만장자 이야기등 다양하다. 이 모험담은 민속지이면서 우화집인 동시에 꿈과 현실이 뒤엉킨 불가사의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으로 분류되는데, 이런 종류로는 제인 드 맨드빌의 동방여행기가 최고로 꼽힌다. 프랑스인 의사로서 영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371년, 그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시아 여행의 체험 없이 다른 여행기에서 뽑아 내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필사책은 동방견문록을 능가하는 평가를 받아 왔고, 필사본만도 250편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는 기억나는 사실만 아주 조금 기록해 두었다. 마르코 폴로는 로스티첼로의 도움으로 쓰인 그의 책을 통해 자신을 아시아 여행에서 얻은 체험을 제공하는 이야기꾼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중세에 대단히 유행하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와 같은 신화나 동물 우화집과 세계의 이모저모같은 백과사전적 작품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책의 여러 곳에서 이미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다시 묘사하고 있다. 그곳은 주로 중세인의 상상 속에 자리잡고 있던 전설적 동물이나 환상적인 토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카라지안의 나라(중국의 원난성)에 있다는 거대한 구렁이에 대해 "크기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구렁이는 무시무시하다."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묘사는 동물 우화집에서 따 온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실제 동물의 묘사로도 볼 수 있다. 가령 발톱 달린 다리나 '술통같이 굵은 몸통, 어마어마한 이빨과 너무 커서 사람을 통째로 삼키는 큰 아가리' 등과 같은 표현은 분명 악어를 연상시킨다. 마르코 폴로가 인도양의 안다만 제도에서 보았다고 하는 개의 머리를 한 비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도의 괴기스런 이야기에 등장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힌트를 얻고 상상에 의한 세부묘사를 곁들여 당시 유행하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를 모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의 머리를 한 인간의 모습은 베즐레이 성당 건물의 정면 지붕 합각머리에도 새겨져 있다. 이 책에는 틀림없이 직접 보지 못한 일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역시 믿고 인용해도 될 만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신빙성 있는 이야기이다. 마르코 폴로는 때때로 맹목적으로 불가사의를 소개하고 구전되는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의 신선한 개인적 관점을 보여 주기도 하면서, 현실과 우화세계를 계속해서 넘나든다. 하나의 예로 불도롱뇽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그는 그것이 동물이 아니라 석면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불도롱뇽은 짐승도 뱀도 아니다. 일종의 면직물에 불과하다. 타지 않는 이 석면을 불 속에 사는 동물의 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거쳐갔던 많은 나라들의 다양한 상업활동과 거래물품들에 대해서도 많이 써 놓았지만 신빙성은 별로 없다. 한편, 그는 유럽 상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특히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해상무역이었다. 그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상품운송을 맡은 범선들에 대해서 특별히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여행을 많이 하고 견문을 넓힐 기회가 있던 사람은 없다. 마르코 폴로가 경험한 모험이 그 시대의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13세기에는 교황이나 프랑스 왕의 사절이 아시아 여행을 했다. 그 중에서 마르코 일행은 상인으로서 여행의 첫걸음을 뗀 사람들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를 통과할 때 대상의 일원이 되거나, 추천장을 갖춘 소그룹으로 무리 지어 원나라가 설치한 역참을 이용하며 왕래했다. 유럽이나 지중해 연안 등지에서 상인의 왕래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너머까지의 왕래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14세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상인들이 중국에서 체류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양저우에서 1342에서 1344년의 날짜가 새겨져 있는 그들의 묘비가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 정착해 있던 제노바 출신의 상인 안달로 드 사비노네는 유명하다. 그는 1336년에 중국 황제의 명으로 말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 파견되었다. 마페오와 니콜로 폴로는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나 마르코를 동반한 그들의 두번째 여행은 장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외교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교황이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코파나 도미니크파 선교사들이 교화의 사절이나 성 루이 대왕의 사절로 그들보다 먼저 중국에 갔는데, 이들 선교사들도 풍부한 선교담을 남겨 놓았다. 이 이야기 중에도 꾸며 낸 것이 있긴 하지만 비교적 자료가 풍성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마르코 폴로에 비견할 만한 명성은 얻지 못했다. 마르코의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크게 성공했던 것은, 16세기부터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에 의해 발달하기 시작한 설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라무시오는 자신의 여행 대전집을 통해 새로운 오디세이를 만들고, 마르코 폴로를 또 다른 율리시스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제5장 선교사의 시대 비단길은 13세기와 14세기에 서양 상인에게 열려진 통상로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사절도 자주 이용하는 길이 되었다. 불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기독교 또한 이 교역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전파되었다. 13세기 중엽부터 몽고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비단길을 나선 선교사절단은 우선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와의 접근을 시도하고 이교도인 아시아 민족을 개종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동방개척에 나선 로마 교회 1241년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다뉴브강까지 휩쓸던 몽고의 대군은 일단 침공을 멈추고 일부가 동쪽으로 철수했다. 기독교인은 그들에 대한 공포감으로 유대 선지자 에스켈의 "모두가 말을 탄 수많은 무장대군이 온 천지를 구름처럼 뒤덮고"라는 예언에 나타나는 고와 마고 민족을 이들 몽고와 동일시했다. 그들에 대한 공포는 유대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으로 바뀌어 갔다. 1245년, 인노켄티우스 4세는 그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선발된 자세 중 한 사람은 프란체스코파의 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 신부이고, 다른 두 사람은 도미니크파의 이슬랭 드 크레몬과 앙드레 드 롱쥐모 신부였다. 도미니크파의 두 사제는 몽고 전초부대에 교황의 편지를 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아슬랭 사제는 배주칸 앞에서 무릎을 끓지 않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난 배주는 교황이 직접 대칸을 방문하라고 요구했다. 인노켄티우스 4세의 사신이 몽고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육십 살 가까운 카르피니 신부가 1245년 4월 다른 사제 한 명과 함께 리옹을 출발했다. 부레슬라우에서는 통역을 해줄 이교도 한 명을 추가하여 여행을 계속했다. 몽고 영토에서는 역참을 이용해서 하루에도 5-7번씩 말을 바꾸어 탈 수 있었다. 1246년 7월, 카라코룸에 도착한 그는 구유크칸의 대관식에 참관한 뒤 교황의 친서에 대한 답신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성과는 앞의 두 도미니크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다. 대칸인 구유크가 교황에게 복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카르피니 신부는 11월에 같은 경로로 귀국길에 올라 1년 후 리옹에 도착했다. 포교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몽고 제국 여행은 서양에 많은 지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의 여행 견문기인 <몽고의 역사>는 일종의 정보수집록이었다. 카르피니 신부는 널리 퍼져 있던 환상적인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몽고인에 대한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전쟁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했다. 그는 몽고를 개종시키기보다는 쳐부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험에 처해 있는 기독교 국가를 방어하자는 그의 호소는 아무런 지지도 얻지 못했다. 기욤 드 뤼브록이 몽고인에게서 희소식을 가져왔다. 카르피니 신부의 뒤를 이어, 성 루이 대왕은 몽고와의 우의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사절단을 계속 파견했다. 첫 사절은 중동 지역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대사 앙드레 드 롱쥐모로서, 그는 1249년 성 루이 대왕이 있던 니코시아에서 두 명의 다른 도미니크 사제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대칸 구유크가 사망했기 때문에 대신 권력을 잡은 왕비는 카라코룸에 있지 않고 발하슈 호수 근처에 있었다. 회답은 준엄했다. 그는 프랑스 왕이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냉담한 전문을 받아 왔다. 성 루이 대왕은 그의 측근 중에서 플랑드르 출신의 프란체스코파 신부 기욤 드뤼브록을 새 사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신부는 몽고인에게서 긍정적인 희소식을 얻어 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기욤은 1253년 5월, 거친 모직 수도복을 입고 맨발로 콘스탄티노플에서 크림 반도의 솔다이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그는 사르타크에게 보내는 루이 대왕의 친서를 갖고 갔다. 그는 바투의 아들이자 황금 부대의 칸으로서, 몽고의 서방팽창 정책의 우두머리로 볼가강 유역에 진을 치고 있던 사르타크를 방문했다. 사르타크는 이교도 교단이었던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던 듯하다.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인 아르메이아인에 의해 잘못 번역된 루이 대왕의 편지는 질레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혀졌다. 원래 기독교 인정에 대한 요지만을 담았던 그 서한은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군사동맹을 맺자는 요청의 내용으로 바뀐 것이다. 아버지 바투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결정을 할 수 없었던 사르타크는 기욤 사제를 바투에게 보냈으며, 바투는 그를 다시 구유크의 왕위를 계승하여 카라코룸에 있던 몽고 칸에게 보냈다. 기욤 사제는 조반니와 거의 같은 경로를 따라 1253년 12월, 가라코룸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는 동안 성 루이 대왕의 서한을 분실하여, 몽고인은 그의 사절 목적에 대해 의아해했다. 그를 왕의 전령인 사절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파견 동기를 변호하면서 선교사임을 주장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희망은 이루어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성 루이 대왕에게 굴복을 종용하는 몽케의 공식적인 사절처럼 귀국했다. 그는 생잔다크르에 도착했으나 수도원장에 의해 성 루이 대왕과의 면담이 금지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같은 몽고 제국 여행기라는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책보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기욤 드 뤼브룩의 이야기는 흥미 진진하다 기욤 드 뤼브룩의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처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민족 학술로서, 정확하고 올바른 관찰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가는 카타이와 세르가 동일한 나라임을 밝힌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여러 민족들의 풍습, 의상, 명절, 종교적 관습 등에 대해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탈라스에서 증가리아 분지로 끌려와 철광에서 노동하고 있는 유럽인의 운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금은세공사인 파리 출신의 기욤 부세와도 알게 되고, 부세의 아들이 통역을 맡아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 부인회'에서 일하고 있던 파케트 드 메츠라는 프랑스 출신의 여인과 헝가리에서 태어난 영국계 사람 바실과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설파하려는 그의 희망으로 인해 말뜻도 몰느 채 시리아어로 미사를 하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술주정꾼에다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대칸과도 아주 밀착해 있었다. 사실, 고관이었던 볼가이와 아들의 스승도 네스토리우스파 신자였다. 기욤 신부는 기독교 사제인 자신을 계속해서 네스토리우스교 목사로 대하는 것이 불쾌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제 세르기우스의 계속되는 적대행위로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선교 사절단의 포교는 소수만을 개종시켰을 뿐이다. 대칸의 궁에서는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보다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대칸 몽케는 그러한 점을 기욤에게 이야기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에 여려 개의 손가락을 주셨듯이, 그분은 인간에게 여러 갈래의 길을 주신 것이오." 몽고인은 지역에 따라 여러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령 남러시아나 페르시아 지역의 어떤 칸은 이슬람교를 섬겼던 반면에, 중국에 있던 대칸 쿠빌라이는 불교 신자가 되었다. 기욤 드 뤼브록의 여행 이후, 마르코 폴로 가문의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선교사의 발길이 이어졌다. 기욤과 다른 자세 두 명이 대칸을 방문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페르시아인 주베니는 아르군의 한 대신의 아들이었으며, 호라산과 이라크 지역의 총독이기도 했다. 그는 1252년과 1253년 사이에 기욤보다 한발 앞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약간 뒤늦게, 1254년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등극한 헤툼 1세가 대관식을 마치고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몽고로 떠났다가 1255년에 되돌아왔다. 몽고로 가는 도중에 기욤과는 기이 엇갈려서 만나지는 못했다. 북경 주재 주교였던 조반니 데 몬테체르비노 신부는 수많은 몽고인에게 세레를 주었다. 몽고인은 여러 선교사를 많이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종교사절단을 기대하고 있었다. 교황 니콜라스 4세는 프란체스코파의 조반니 데 몬테체르비노 신부를 새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신부는 몽고인에게 기독교 신자가 되도록 당부하는 교황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몬테체르비노는 중국에 살면서 진정한 기독교 교구를 세웠다는 짐에서 전임자들과 달랐다. 1289년에 출발하여 타브리즈에 도착한 그는 몽고인 간에 일어난 싸움 때문에 대상로를 포기하고 페르시아만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배를 타고 인도로 건너가 석 달을 머문 뒤 1293년 중국을 향해 떠났는데, 대칸 쿠빌라이가 사망하기 직전에 칸발리크에 도착했다. 그의 선교행적은 1305년과 1306년에 보낸 편지를 통해 잘 알려졌다. 그는 황하 유역 어귀에서 살면서 전도활동을 폈다. 수도 칸발리크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여 수천 명의 몽고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첫 편지에서 그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대로 파견된 선교사 중 한 사람만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은 몬테체르비노 신부의 탁월한 공로를 치하하면서 그를 칸발리크의 대주교로 봉헌하고, 다시 여섯 명의 주교를 파견했다. 그러나 세 명의 주교만이 1313년 중국에 도착했다. 그동안 몬테체르비노 주교는 몽고인뿐 아니라 알라니인,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유형수를 신자로 만들었다. 새로 온 주교들은 정식으로 배속되지는 않았지만 취안저우에는 하나의 주교구가 세워졌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선교사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330년 몬테치르비노가 죽은 후 후임자가 곧바로 임명되지 않았다. 이에 대칸은 직접 교황에게 후임자를 요청했다. 그의 요청에 감명 받은 교황은 1339년 조반니 데 마리놀리 신부가 인솔하는 네 명의 사제단을 파견했다. 일행은 많은 선물과 큰 말 한 필을 끌고 1342년에야 몽고에 도착했다. 뒷다리가 흰색인 흑마를 보고 대칸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그 말을 그리게 했으며, 말을 소재로 하여 시를 짓도록 했다. 한무제는 서양말을 얻으려고 군대를 파견했는데, 대칸은 슬기와 지혜로 병사를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고 한 필의 천마를 얻게 되었다는 얘기가 항간에 널리 퍼졌다. 한편 마리놀리 신부는 선교사가 아닌 교황의 특사였기 때문에 3,4년 간 칸발리크에서 체류하다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왔다. 복음전파와 교구설립은 중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으며, 페르시아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이루어졌다.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기독교가 이룬 여러 가지 노력은 수많은 선교자의 발자취였다. 14세기, 중국과 기독교 세계의 관계가 갑자기 단절되었다. 13세기 중엽부터 비단길을 이용한 상인과 선교사에 의해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양측의 관계가 14세기 후에는 단절되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1348년, 유럽을 휩쓴 페스트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페르시아와 중국에서의 몽고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몽고 제국은 영토가 분할되면서 새로운 국경선이 세워졌고, 중국 내에서는 14세기 중엽부터 봉기가 늘어나 새 왕조인 명나라가 태동했다 1368년에 개국한 명나라는 1387년, 중국의 전 영토를 완전히 정복했다. 명나라는 청외정책을 내세워 외국과의 관계를 폐쇄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책이었으며, 선교사와 상인의 발길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러나 유럽인에 관한 기록은 페르시아인에 관한 기록만큼 남아 있지 않다. 1419년과 1423년 사이에 중국에서 사흐로크의 대사를 지낸 기야트 에드 딘의 여행일지와 1500년경 중국을 수차례 방문했던 상인 사이드 알리 아크버 키타이의 중국론등이 있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대상행로였던 육로가 쇠퇴하고 해상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6장 항해사의 시대 카타이(중국)를 찾아 나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5세기 해양왕자라고 불린 앙리케의 지휘 아래 포르투갈인은 신세계발견에 나섰다. 그들은 1419년 마데이라와 1427년에 아소르를 발견한 뒤 1487년에 희망봉에 도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은 카타이를 찾아 나섰다. 이런 시대적 조류 속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마르코 폴로와 13,14세기의 여러 여행기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1492년 쿠바에 도착했을 때 중국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15세기에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는 지구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지구 자체를 변화시켰는데, 당시 서양에선 아직 낯설던 미지의 세계를 해상원정을 나섬으로써 시작되었다. 15세기 초, 해상 대원정이 명나라 왕에 의해 시작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남쪽에 상륙했을 때, 그들은 80년 전 그곳에 '백인들'이 상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백인들은 다름 아닌 중국 명나라의 황제들이 15세기 초엽부터 아랍과 아프리카 해안국에 보낸 해상원정대의 선원이었다.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중국은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 영락제로부터 수대에 걸쳐 일곱 차례 해상원정을 했다. 수세기 전부터 중국범선들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랍세계 간의 무역에 큰 몫을 담당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원정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해상원정에 오른 중국 함대는 규모가 엄청났으며 국가 차원의 공적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항해술이 유럽보다 한수 위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항해술에서 중국이 우위를 가져왔던 것은 조선술 분야에서의 진보였다. 지도, 나침반, 컴퍼스, 그리고 시간이나 위치의 측정법 같은 항해술의 보조수단들은 15세기 초반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유럽인은 속도가 아주 느리고 돛이 하나 달린 갤리선이나 그보다는 빠르지만 튼튼하지 못한 범선들을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형 원양선은 선체의 길이가 60m, 너비가 30m나 되었으며, 50여 개 이상의 선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얇은 오리나무판을 붙인 돛을 다는 3~6개의 돛대, 사프란색의 키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중국 배는 오만과 인도양 항해에서 폭이 좁은 선박보다 안정적이었다. 환관 정화가 이끌던 중국 선박은 동남아시아 해상과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배를 앞질렀다 이슬람 교도였던 정화는 바로 이러한 배들로 근동아시아를 일곱 번 원정했다. 원정의 목적이 외교적이었는지 상업적이었는지 혹은 군사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각 원정은 약 2년 간 지속되었으며, 수만 명을 실은 100여 척의 배로 수십 개의 선단을 이루었다. 1405년과 1407년 사이의 첫 원정은 317척의 범선과 2만 8,0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적 함대의 면모를 갖춘 중국 함대는 베트남의 해안을 통과한 다음 자바섬, 수마트라섬, 실론섬을 거쳐 인도의 캘리컷에 이르렀다. 항구에 기항할 때마다 중국에 조공은 바친다고 서약한 제휴에게는 많은 예물을 헌사 했지만, 요구를 거절하는 제후들은 무력으로 복종시켰다. 원정대들은 거의 비슷한 항로를 지나다녔지만, 4차 원정 때에는 함대의 일부가 호르쿠즈 해협이나 벵골만까지 갔다. 5차 원정이후로는 아덴과 소말리아 및 현재의 케냐가 있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다 이 원저에 의해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외교와 무역교류도 빈번하게 되었다. 15세기 중엽 중국의 주도권이 쇠퇴한 후에도 외교와 무역 교류는 계속되었다. 중국의 해상원정의 발전에 힘입어 차례로 다른 나라들도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최초의 중국 외교사절은 그곳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포르투갈인이 중국을 '발견'한 것은 1513년이었다. 바스토 다 가마가 1497~1499년과 1505~ 1503년 두 차례에 걸쳐 인도까지 항해한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인을 분쇄하기 위해 16세기에 코친과 고아에 인도 총독을 설치했다. 그것은 동북아시아를 향한 무역활동과 식민지건설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1511년에는 말레이시아 서남 지역, 얼마 후에는 중국의 마타오와 일본까지 그 활로를 펼쳐 나갔다. 최초로 중국에 살육했던 포르투갈인 조르지 알바레스는 광둥 근처의 조그만 섬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 진출이 그다지 용이하지만은 않았다. 먼저 뛰어난 항해사이자 약제사였던 투메 피레스 대사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치레스는 1517년 광둥에 상륙하여 3년을 기다린 후 북경 출입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그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서거했기 때문에 광둥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그의 신임장에 대한 잘못된 번역, 중국 풍속을 거스르는 그의 행동, 그리고 말레이시아 서남부 지역 정복 이후의 포르투갈에 대한 나쁜 평판 때문에 피레스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체포, 구금되어 사슬에 묶인 피레스는 1524년 갖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두었고, 많은 부하들 또한 처형되었다 이러한 힘든 경험 때문에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사비에르의 친구이자, 해적이었던 페르나오 멘데스 핀토의 동양편력기 포르투갈인의 해상원정에 관한 기이하고도 허구적인 여행담 중의 하나가 페르나오 멘데스 핀토의 동양편력기이다. 리스본에서 하인으로 있던 핀토는 도망쳐서 1537년에 인도행 배를 탔다. 그는 한때 해적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노예로 팔리고 다시 양민이 되었다. 그후 말레이시아의 한 선장을 보좌했다. 그는 중국에 상륙했다가 체포되어, 강제 노동형을 받고 만리장성 축조 공사장으로 끌려갔다. 풀려난 그는 다시 배를 탔는데, 일본 근해에서 난파당하고 말았다. 그후 그는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 일본 등지를 두루 다녔다. 일본에서는 사비에르 신부를 만나 그의 친구가 되고 돈을 대주기도 했다. 1554년 신부가 죽은 뒤 그는 예수회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나, 1556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13번 노예가 되었고, 16번이나 팔렸다고 주장하는 핀토의 이야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런 이유로 그의 이야기는 부인되었고, 아직도 역사가들은 그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를 비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회 신부라는 점에서 그가 예수회 신부들과 단절할 때, 모종의 원한을 심어 놓았던 것 같다. 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양편력기>는 동북아시아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정복활동에 고나한 유일한 자료이다. 더욱 실제적인 지리학으로 발전 16t;기 초엽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지리상 발견은 아시아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발달시켜 놓았다. 당시까지의 지식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지리학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론에서 끌어내는 게 고작이었으며, 1375년에 만들어진 샤를 5세의 카탈루냐 지도와 1460년 프라 모로의 지구도가 참고되었던 정도였다. 말레이시아 선원에게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던 해도가 포르투갈인의 아시아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서양인의 지리학적 지식은 피상적이었다. 바다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중국은 일본처럼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큰 섬나라이며,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카타이와는 다른 나라로 생각했다. 16세기 말경 예수회 사제들이 북경에 정착할 무렵,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인의 자료와 새로운 척도법을 이용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카타이가 중국과 동일한 나라라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고즈 신부는 카타이와 중국은 동일한 나라라고 단언한다. 0563년 아소르에서 태어난 예수회 소속의 벤토 데 고즈 신부는 카타이 내에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는 이슬람 상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1602년 고아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14세기 중엽부터 카타이에 이르는 육로는 폐쇄되어 있어서 남아 있는 길이었던 라호르, 카슈미르, 라다크, 카슈가르를 거쳐 카타이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여행을 위해 '신의 종'이란 뜻의 반다 압둘라란 이름으로 바꾸고 아르메니아 상인으로 변장했다. 라호르에서 1년에 한 번 카슈가르로 가는 말, 낙타, 짐수레를 갖춘 대상 행렬과 합세했다. 육로여행은 대단히 위험했다. 지형이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가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특히 산적을 조심해야했기 때문이다. 카불에서 3개월 머문 후, 대상 행렬은 다시 떠났다. 중간기착지에서 몇몇 상인이 행렬을 떠나기도 하고, 또 다른 상인이 합류하기도 했다. 도중에 한 번은 도적떼가 행렬을 기습해서 물품을 약탈해 갔다. 우여곡절 끝에 벤토 데 고즈 신부는 파미르 고원을 지나 야르칸드를 거쳐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1년에 한 번도 대상 행렬이 조직되지 않을 경우도 있었지만 카타이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상황에 필요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새로운 대상행렬이 조직되기를 기다렸다. 상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 지방 산물로 정평이 나 있는 경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공식 사절단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했다. 그는 1년을 기다려 타클라마칸의 북쪽 길을 따라 카라샤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타이를 돌아 나오는 이슬람 상인을 만나 북경의 마테오 리치 신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즈 신부는 북경을 보지도 못하고 여행 도중에 죽고 말았다 바로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 벤토 데 고즈 신부는 카타이란 나라가 곧 중국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북경에 도착하지 못했다. 도중에 병에 걸려 1607년 초, 수저우에서 숨을 거두게 됨으로써 카타이의 심장부인 수도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덕택으로 카타이와 중국이 같은 나라임이 증명되었고,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미지의 땅'에 대한 서양인의 탐험원정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후에도 유럽과 동북아시아 사이의 상호 몰이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 나타난 새로운 탐험가는 19세기 말의 고고학자였다. 그의 조사에 의해, 단순히 비단길이라고만 불리던 실크 로드가 실제로는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여 서로 영향을 주었던 역사적인 길임이 증명되었다. 기록과 증언 여행길에 관해서 타타르 지방을 향해 출발 키예프에서 우리 일행은 앞으로의 여행길에 관해 촌장과 몇몇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들다. 이들은 우리가 타고 온 말이 타타르의 말처럼 두껍게 쌓인 눈밭을 헤치고 먹을 잡초를 찾아낼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말에게 다른 먹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충고했다. 그 지방에는 짚이나 건초, 꼴 따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말은 모두 굶어 죽고 만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우리는 타고 온 말을 두 명의 아이에게 맡겨야만했다. 그리고 촌장이 우리에게 몽고의 말과 안내자를 주선해 주었으므로, 우리는 그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주었다. 키예프에 도착하기 전, 다닐론이란 마을에서는 우리 모두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로 인해 엄동설한 속을 마차에 실려 가야만 했다. 러시아의 대도시 키예프에서는 기독교 전도사업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해서 우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2월 2일, 성모 취결례날 이틀 후, 우리는 야만의 나라를 향해 몽고의 말을 타고 몽고의 관청 소속 안내원들과 함꼐 길을 떠났다.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몽고의 역사) 짐을 운반하는 방법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장비 운반을 할 수 있도록 소달구지와 짐바리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상인들이 소달구지를 선택하라고 귀띔을 해주면서, 러시아인들이 피혁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포장마차를 별도로 몇 대 사라고 했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그리고 매일같이 짐을 내려놓을 일이 귀찮다는 생각도 들어서, 포장마차를 구해 짐을 계속 실어 놓기로 했다. 짐바리말을 선택한다면 숙박지에 도착할 때마다 그 짐을 내렸다가 떠날 때 또다시 실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 걸음걸이에 맞춰 달구지를 타고 간다면, 보다 여유있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권고를 따랐던 나는 결국 아주 심한 고생을 해야했다. 말을 이용했다면 사르타치까지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두 달이나 걸려 도착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상인들의 조언에 따라, 타타르의 군사 장교들에게 주기 위해 말린 과일과 사향 포도주, 그리고 맛있는 과자를 준비했다. 좀더 수월히 길을 가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빈손으로 온 사람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그것들을 모두 마차에 그대로 실어 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 도시의 책임 장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르타치에서는 이 뇌물을 책임장교에게 주게 되면 대단히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드디어 6월 1일, 우리가 가지고 간 네 대의 포장마차와 그곳 장교들이 우리에게 배려해 준 두 대의 마차에 침구를 싣고 길을 떠났다. 그 장교들은 우리에게 안장있는 말 다섯 필도 내주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다섯 명으로, 나 이외에 크레몬 출신의 동료 신부 바르텔레미, 이 편지의 전달 임무를 맡은 고세, 통역관 호모데이, 그리고 성금을 모아 콘스탄티노플에서 산 젊은 노예 니콜라스 들이었다. 한편 장교들은 이 밖에도 소달구지를 몰고 갈 사람과 말과 소를 관리할 사람을 덧붙여 주었다.기욤 드 뤼브록(몽고 제국 여행기) 여행객들에 대한 중국인의 세심한 배려 이븐 바투타(1304-1369년)는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행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30년동안 해상로와 육로를 통해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고 그 견문담을 실은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중국을 전부 돌아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여러 가지 풍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행가에게 중국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 중에 가장 좋은 나라임에 분명하다. 이 나라에서는 보물을 잔뜩 지니고도 혼자서 도보를 아홉 달 동안을 아무런 걱정 없이 다닐 수가 있다. 그 이유는 각 숙박지마다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기병대와 보병대의 지휘관이 감시해 주는 여행객 숙소가 있기 때문이다. 해가 진 후나 이슥한 밤이면, 그 지역 지휘관은 부관을 대동하고 여행객 숙소에 들러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여행객들의 이름을 적어 명단을 봉한 다음 여행객들의 외출을 금지시킨다. 다음날 아침 부관과 함께 숙소에 다시 나타난 그는 명단에 적힌 모든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들의 신상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다. 그런 후, 다음 숙박지까지 여행객들을 안내해 주고 부하 한 사람을 그곳의 지휘관에게서 모든 여행객의 무사한 도착을 확인하는 편지를 받아 오는 임무를 맡겨 여행객들에게 딸려 보낸다. 만약 여행객들의 신상에 이상이 발생하면, 전숙박지의 부대장이 책임진다. 바로 그러한 제도가 신아신에서 수도 칸발리크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모든 여행자 휴게소에서 실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휴게소에서는 여행객에게 필요한 식량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는데, 달과 거위가 많고 양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우리의 여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하도록 하겠다. 우리가 행상여정을 마치고 배에서 내려선 중국의 척 도시는 제이툰이란 곳이었다. 제이툰은 아랍어로 올리브란 뜻이긴 하지만, 그 도시의 어느 곳이나 인도, 중국의 다른 어느 도시에도 올리부나무는 없다. 그곳은 단지 그곳의 지명일 뿐이다. 그곳은 대단히 웅장하고 번화한 도시이며, 그 지명을 본떠 제이투니아라는 무늬 있는 비로드와 수자천을 생산한다. 이 천은 칸사와 칸발리크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질이 훨씬 좋다. 제이툰의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에서 나는 100여 척의 대형 선박을 보았고, 소형 선박은 수도 없이 보았다.이븐 바투타(3대푹 주유기) 인도 범선의 취약점 이 도시에서는 범선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범선들은 대단히 결함이 많고 불안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난파를 당하고 있다. 우리 나라와는 달리 쇠못질이 전혀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도자기처럼 잘 깨지는 종류의 목재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못을 박으면 마치 원래 깨져 있기라도 하듯이 부스러진다. 그들이 배를 만드는 방법은 우선 그 단단한 목재판에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쇠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작은 나무 쐐기로 이 판들을 고정시켜 배의 모형을 만든다. 그리고 나서 인도산 호두나무 껍질을 꼬아서 만든 굵은 동아줄로 이 모형을 얽어맨다. 호두나무 껍질을 오랫동안 풀무질한 후 물에 담가 놓으면, 깨끗해지면서 말총가닥처럼 되는데, 그것에서 명주실 뽑듯 실을 뽑아 낸다. 그런 과정을 거쳐 뽑아 낸 실로 동아줄을 만들어 범선을 바느질하듯 누비는 것이다. 이 밧줄은 바다의 짠물에서 부패하지 않고 쇠처럼 견고해지지만, 돌풍을 견뎌 내지 못했다. 쇠못으로 보강하지 않은 배는 위험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 많은 인도인들이 난파당해 목숨을 잃는다. 이 범선에는 돛대와 돛, 그리고 키가 하나씩 있지만 지붕은 없다. 인도인이 이 배에 짐을 실을 때에는 삶은 가죽으로 물품을 덮고, 팔려고 인도로 가져가는 말들을 그 위에다 싣는다. 못질할 곳에는 쇠가 아닌, 나무쐐기를 사용해서 범선 형태를 갖추고, 밧줄로 얽어맨다. 그리고 닻도 쇠로 된 것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도르래가 달린 닻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돌풍이 불어도 파선하게 된다. 인도양은 물결이 매우 거세며 태풍이 자주 불기 때문에, 난파당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상인들의 해상여행 실상 배에는 네 개의 갑판이 있다. 그리고 침실과 선실, 상인을 위한 공동 거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부분의 선실은 독방과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선실에는 주인이 문을 잠가 둘 수 있도록 잠금 장치가 되어 있다. 상인들은 애인이나 부인을 동반하기도 한다. 가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선실에만 있는 사람도 있다. 선원들은 자식을 선실에서 기거토록 하는데, 그 아이들은 나무통에다 야채, 생강 등의 씨를 뿌려 키우기도 한다. 선장은 이슬람의 태수와도 같다. 그가 뭍에 내리게 되며, 현지의 의장대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용병들의 긴 창과 칼, 북, 뿔피리, 트럼펫 등을 연주하며 그를 맞는다. 선장이 전용 숙소에 도착하며, 그들은 그의 방문 사방에 보초를 세워서 그가 체류할 동안 계속 신변보호를 해준다. 중국 사람들 중에는 여러 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는 선주가 많은데, 이들은 배 위에까지 자기 짐꾼을 보내 외국 선장에게 예의를 표시하기도 한다. 세계 어느 곳에도 중국인보다 더 부유한 민족은 없다.이븐 바투타(3대륙 주유기) 불교 승려 감진의 동방 여행기 8세기. 중국의 유명한 고승 감진(688-763)은 여섯 차례의 도항 실패를 딛고 일본으로 는 배를 탔다. 753년 일본에 도착한 그는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불교의 교리 보급에 힘썼다. 다음의 목록은 743년 그가 두 번째 항해 때 가지고 간 물품들이다. 식료품 항해 기간에 먹을 쌀 리치 열매(호두알 크기의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 현미 100섬 콩30섬 버터 180근 밀가루 50섬 말린 호병(제과류) 마차 한 대분 말린 연병(만두의 일종)마차 두 대분 말린 전병 1만 개 쌀과자(양과자 일종)마차 반 대분 불료 관련 물품 옻칠한 목탁 30구 키엔창이 그린 머리 다섯 개를 가진 부처상 보석 액자에 끼운 부처상1점 황금 불상1점 부처와 보살들의 모습이 담긴 6폭짜리 병풍 1점 불경 금자화엄경 금자대품경 금자대집경 금자대열반경 그 밖의 경전, 주해서, 개론서 100부 불구 대중 예불식 세부도를 묘사한 병풍 1점 여러 신선들의 모습을 담은 병풍 1점 불상을 모실 닫집 1개 보석 장식의 불기 14개 경옥 고리 장식의 양산 8개 경전 보관용 자개함 50개 청동 항아리 20개 꽃무늬 장식 담요 24장 가사 1,000벌 반팔 소매 옷 1,000벌 방석 1,000개 대형 청동 뚜껑 4개 야채 쟁반 40개 큰 구리 공기 20개 중간 크기의 구리 공기 20개 작은 구리 공기 144개 네모난 외다리 청동 반상 80개 소형 구리 쟁반 200개 백색 등나무 돗자리 16개 오색 등나무 돗자리 6개 향신료와 의약품 사향 20편 침향 감향 감송향 용뇌향 적어도 600근 담당향 안식향 잔향 영릉향 청목향 훈육향 필발 아리륵 푸 지방산 후추 아의 최소한 500근 석밀 설탕 벌꿀 10근 사탕수수 80다발 금전 청동 주화 1만 꾸러미 정로 주화 1만 꾸러미 자주빛 테두리 주화 5,000 꾸러미 옷가지 비단 고깔 2,000개 마 신발 30켤래 끈 달린 삿갓모 30개 함께 배를 탔던 승려는 중국 승려 상언, 도흥, 탁정과 일본 승려 등을 합해 모두 17명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명의 경옥 세공사, 탱화가, 조각가, 나무. 금속 판각가, 용광 주조공, 불경 탁본공, 수예가, 문인, 비문담당 석공, 그 밖의 다른 분야 장인들을 합해 총 인원은 모두 185명이었다.원개(감진 큰스님의 동방여행록) 카타이 왕국을 여행하고자 하는 상인들에게 필요한 사항 플로랑스 동업조합회 소속의 프란시스코 발두치 페골로티가, 1340년경 (실무무역서)란 무역개로서를 썼다. 이 책은 중국을 여행하려는 상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여행로와 휴에고, 여행기간, 그리고 화물운송에 따른 여러 가지 여건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우선, 수염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면도질을 해선 안 된다. 그리고 타나에서는 통역안내원을 물색해야 한다. 자칫하면 나쁜 통역관을 만날 수도 있으므로 이 일에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 좋은 안내원을 구하는 데드는 비용은, 결국 그 안내원 덕분에 얻게 되는 비용절감을 고려해 본다면 결코 아까운 돈이 아니다. 그런 안내원 이외에도 쿠메어를 하는 성실한남자 하인을 두 명쯤 구하는 것이 좋다. 만약 여자 하인을 데려가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은 아니므로 꼭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여자를 데려가게 되면 여행길이 좀더 쾌적해질 거라는 것이다. 어쨌든 여자를 데려가기로 했다면, 다른 남자 하인들처럼 쿠메어의 기초 정도는 말할 줄 아는 여자가 좋을 것이다. 타아에서 지타르찬까지 갈 때에는 25일분의 식량을 가져가야 한다. 식량으로는 밀가루나 건어물이 좋으며, 그 밖의 육류는 여행 도중에도 충분히 구할 수가 있다. 지방을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여정표에 표시되어 있는 중간 숙박지에서 지정된 날짜만큼의 밀가루와 건어물을 보급 받아야 한다. 타나에서 카타이에 이르는 길을 다녀온 많은 상인의 말에 따르면 그 길은 밤낮없이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상인이 여행 도중에 사망하며, 그가 지닌 모든 재산은 그 토지의 영주 소유물이 되어, 영주의 관리들이 나눠 갖게 된다. 카타이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형제나 형제 못지 않은 절친한 동료가 동행하고 있는 경우라며, 관리는 동행인에게 고인의 재산을 돌려준다. 물론 죽은 상인의 시신도 돌려 받을 수 있다.프란시스코 발두치 페골로티(실무무역서) 파미르 고원 답사기 낙타몰이꾼 한 명과 낙타 세 마리 그리고 뒤따르는 말 한 마리가 대상행렬의 기본적인 편성형태이다. 라만 쿨의 낙타들은 이른바 박트리아의 낙타이다. 이 낙타들은 중국, 신장, 몽고, 티베트 등지 반사막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이 낙타들은 키가 2m가 넘고, 몸무게가 최고 500Kg이나 나가며 힘이 좋고 몸집이 크다. 이들의 발걸음은 비록 느리지만, 앞 등의 혹을 가볍게 출렁이며 정확하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혹은 양분저장소이다. 두 개의 양분저장소에는 100Kg까지 지방질을 저장할 수 있다. 이 혹들은 아주 단단해지기도 하고 다시 물렁해지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낙타의 건강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 낙타가 기진맥진하거나 병이 들면 혹의 크기가 줄어들거나 완전히 없어진다. 낙타는 값이 대단히 비싸 여덟 마리의 야크 또는 아홉 마리의 말이나 양 45마리의 값이 나간다. 그도 그럴 것이 낙타는 280Kg이나 되는 짐을 운반하며, 젖과 고기, 그리고 모피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털의 광택과 감촉은 낙타마다 차이가 있지만, 머리부터 목을 따라 다리까지 무성하게 뒤덮인 수북한 털로 낙타는 중앙아시아고원의 혹한에도 잘 적응한다. 낙타의 털은 아름답고 값이 비싸다. "낙타 털은 아주 비싸기 때문에, 그것을 훔치러 오는 박키인들을 막기 위해 밤마다 낙타를 지켜야 합니다." 동행한 낙타몰이꾼은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우리 일행은 사르하드 사막을 벗어나 바칸강 유역으로 접어들었다. 이 강은 폭이 500m인데, 곧바로 협곡이 되면서 폭이 좁아졌다. 우리 일행은 말을 타고 꽁꽁 언 강 위를 건너갔다. 키르기스인은 얼음판 위에서도 통과하기게 적합한 길을 직감적으로 정확하게 가려냈다. 그리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재나 모래 같은 것을 간간이 뿌렸다. 사람, 낙타, 말의 순서로 일렬을 지어 얼음판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압둘 바킬은 여러 차례 바닥에 엎드려 얼음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씩 잔걸음을 걸어 얼음 위로 성깃하게 균열이 간 곳을 살펴보았다. 균열 즘으로 하얀 거품을 머금고 쏟아져 흐르는 물이 역력하게 보였다. 때로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금이 여러 개 생겼다. 강 주위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수직으로 높다랗게 솟아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떠야만 겨우 햇빛을 받을 수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비좁아진 강을 포기하고 고개를 넘기로 했다. 아이바스는 낙타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빙판길 위에 모래를 뿌렸다. 고개가 매우 가팔랐기 때문에 짐승들은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고, 사람들은 열심히 채찍질을 가다듬기 위해 50m마다 행렬을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맨 뒤에 있던 낙타가 절벽 가장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낙타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온 힘을 다해 몇 미터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상에 닥친 위험을 직감하고서는 낙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짐을 풀어 주었다. 어스름한 황혼이 깔리자 산들은 엄청나게 커지는 듯했고, 엄습해 오는 추위에 모두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이 너무 높아서 새조차 넘기 힘들겠군." 사람도 짐승도 모두 가파른 산허리에 꼭 달라붙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순간, '구름의 아들'이라 불리는 땅을 향해 굽이굽이 펼쳐진 검고 위풍당당한 산의 윤곽이 창백한 납빛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드러났다.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춘 나는 일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너무나 고요했다. 그것은 일종의 완전한 침묵 같았다. 일행은 쥐가 들끓는 동굴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계곡에는 동굴이 많았다. 그리고 동굴의 바깥에는 혹시 들를지 모르는 나그네를 위해 나뭇단이나 나뭇가지 묶음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파미르고원을 왕래하는 여행객끼리 서로를 배려해 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곳에서 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성냥이 등장하기 전, 대상들에게 가장 귀중했던 물건은 말 한 마리 값에 해당하는 차크마크라고 부르는 부싯돌이었다. 오후에 일행은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좁고, 바라만 보아도 현기증이 나는 바위 절벽이 즐비하게 늘어선 고갯길로 들어섰다.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여정을 마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던 만큼 두려움은 곧 뇌리에서 사라졌다.롤랑, 사브리나 미소(타타르의 대상) 갖가기 위험 타는 목마름 현장법사는 네 번째 망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옛 사람들이 사해 또는 모래 강이라고 부르던 모지아양 사막으로 들어섰다. 사막은 끝없이 넓었을 뿐 아니라 새나 짐승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물이나 목축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가는 방향을 정했고, 독실한 신심으로<반야심경>을 암송하면서 걸어갔다. 100여 리쯤 갔을 때 그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을 구하기 위해 샘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참기 힘든 갈증으로 허겁지겁 가죽 물주머니를 입 가까이 끌어올렸다. 그런데 주머니가 너무 무거워 땅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주머니의 물이 모두 쏟아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천리를 가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양의 식수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길은 이리 휘고 저리 휘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기준 점으로 정해 두었던 네 번째 망루를 향해 동쪽을 되돌아가려고 생각했다. 10여 리쯤 되돌아가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애초에, 인도에 도착하지 못하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해 놓고 이렇게 되돌아가다니,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서역을 향해 가다 죽는 편을 택하자!" 그는 다시 말고삐를 돌렸다. 그리고 관음보살에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북서쪽을 향해 갔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인적이나 짐승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황무지뿐이었다. 밤에는 별만큼이나 많은 악령들의 불씨가 반짝반짝 빛을 내었으며, 낮에는 무시무시한 바라밍 모래를 뒤엎으며 폭우처럼 모래비를 내렸다.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법사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갈증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극심한 갈증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완전히 탈진상태였다. 4일 밤과 5일 낮 동안 목과 입술을 적실 물 한 방울도 구하지 못했다. 내장이 불타는 듯했고, 고통을 참다못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는 모래 위에 쓰러졌다. 그렇지만 죽음이 닥쳐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닷새 되던 날 한밤중이었다. 그날도 열성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들바람아 팔다리로 스며들더니 전신이 시원한 물 속에 잠긴 듯 부드럽고 상쾌해졌다. 그리고 옆에 쓰러져 있던 말도 힘을 되찾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그는 잠깐 동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데 꿈에 관세움보살이 나타나서는 창과 깃발을 들고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꾸짖는 것이었다. "어째서 열심히 길을 가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느냐?" 법사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길을 떠났다. 10여 리쯤 갔을 때 그의 말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쏜살같이 달렸다. 그렇게 몇 리쯤 가자 수백 평에 달하는 푸른 초목지가 펼쳐졌다. 말이 마음껏 풀을 뜯어먹도록 했다. 그런 뒤 초원을 떠나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연못이 나타났다. 그는 말에서 내려 마음껏 물을 마셨다. 법사와 말은 이처럼 기적 같은 도움으로 힘과 생기를 되찾았다.혜립, 언종(현장전) 해적을 만나다 현장법사는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마친 다음 아유투 왕국을 떠나 갠지스강 하류를 따라가기로 했다. 84명을 태운 배를 타고, 아예무키 왕국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내려갔다. 100리쯤 갔을 때 강 양쪽으로 울창한 아소카나무 숲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우거진 숲 그늘에는 10여 척의 해적선이 숨어 있었다. 도적들은 강 가운데로 달려오더니 현장이 타고 있던 배로 올라섰다. 많은 승객이 공포에 질려 강물로 뛰어들었다. 배를 점령한 해적들은 배를 강가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해적은 승객에게 옷을 벗으라고 위협을 한 뒤 귀중품을 약탈했다. 이 해적들은 두르가(힌두교의 힘을 상징하는 여싱:역주)여신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가을철마다 신체가 아주 건장하고 용모가 수려한 남자 한 명을 찾아내서, 그를 죽인 다음 살과 피를 받아 그 여신의 제단에 받치곤 했다. 그들은 현장법사의 몸을 뒤지다가 그의 고상한 자태와 수려한 용모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희색이 만면하여 이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여신의 마음에 드는 제물을 구하지 못해 제사 지낼 시기를 놓칠 뻔했는데, 때마침 건장하고 잘생긴 승려 하나가 나타나 주었군. 저 승려를 죽여 우리들의 복을 빌자." 그러자 현장법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 비천한 소승의 몸뚱아리가 성스런 제물로 바쳐져 당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야, 정말로 이 몸뚱이를 아끼지 않겠소. 허나 소승은 보리수와 영취산(석가가 법화경을 설법한 곳:역주)에서 경배하고 불경을 얻으러 먼 나라에서 왔는데,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했소. 이런 비천한 소승의 목숨을 바쳤다고, 오히려 대인들에게 크나큰 재앙을 드릴까 염려되오." 그 배에 탄 모든 승객이 해적에게 법사를 해치지 말라고 애원했다. 심지어 그 중에는 그를 대신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러나 해적은 이러한 요청은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는 사이 해적 두목은 꽃이 만발한 아소카나무 숲으로 부하를 보내어 제사 지낸 물을 길어 오게 하는 한편, 강의 진흙을 빚어 제단을 쌓도록 했다. 그리고 두 명의 부하에게 현장법사를 제단 꼭대기로 끌고 올라가 즉시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법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해적은 그의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은 법사는 해적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잠깐 여유를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소승이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에 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미륵보살의 말씀을 경건히 되새기면서, 재세의 환생을 간절히 빌었다. 내세에는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을 공양하고,<유가사지론>의 불법을 들어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과 중생들이 대자대비의 교리를 실천해서 비루한 짓을 못하도록 불법을 전파할 수 있게 환생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불법이 멀리 퍼져 모든 중생들이 평화와 가호 속에 살도록 빌었다. 또한 그는 10여 개 나라 부처들에게 예불을 드리는 한편,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티끌 만한 잡념도 없이 정성을 다해 미륵보살의 말씀을 되새겼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환희가 솟아나면서 몸이 수메르산 꼭대기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천상을 향해 날아오르던 그의 눈앞에 극락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거기서 미륵보살이 호화찬란한 비칭 피어나는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천신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제단에 끌려와 있다는 생각도, 피에 굶주린 해적에 대한 생각도 까맣게 잊고, 육신은 온통 환희로 젖었다. 그러나 함께 배를 탔던 승객들은 비통한 신음소릴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갑자기 일진광품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소용돌이가 일고 모래기둥이 사방에서 맴돌았으며 거센 파도가 굉음을 내며 해적선들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해적의 우두머리가 현장법사와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스님은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그러자 일행이 그에게 답했다. "그분은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서 오신 훌륭한 스님이십니다. 만약 대인께서 그 분을 주기이신다면 천벌을 받으실 겁니다. 이미 대인께서는 천신들의 분노로 광풍과 성난 파도가 일어남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서둘러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십시오." 겁에 질린 해적들은 법사를 살해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회개하며 땅에 엎드렸다. 그때 해적 중 한 명이 현장법사를 손으로 건드리자, 법사가 눈을 뜨며 말했다. "소승이 죽을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까?" 그러자 해적들이 한결같이 대답했다. "스님, 어찌 저희가 감히 스님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깊이 회개하는 마음을 스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현장법사는 그들의 경의와 사죄를 받아들이고 살인과 해적질과 불경한 미신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내세에서 영겁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섬광이나 아침 이슬처럼 한 찰나며 사라져 버릴 이 비천한 몸뚱이 때문에 감히 영겁의 고통을 받으려 하오?" 해적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공손히 사죄했다. "저희들이 그간 맹목적인 광신에 빠져서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만일 천신도 감복시킨 자비심을 지닌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그런 지고하신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부터 당장 이 못된 짓을 그만둘 것을 맹세합니다. 스님께서 저희들의 뉘우침을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런 말을 한 뒤 서로 선행을 쌓자고 다짐한 해적들은 살인도구를 모두 강물에 내던졌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옷가지와 소지품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불교의 오계를 경건히 받아들였다. 곧이어 바람과 파도가 가라앉았다. 환희에 젖은 해적들은 현장법사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혜립, 언종(현장정) 난파 위도 41도 3분 2초에 위치한 콘시나코산맥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을 때 돌연 투파오라고 부르는 남푸잉 불어 닥쳤다. 이 바람은 자연현상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강했다. 우리 배들은 갑판이 낮고 조그만 노 젓는 배인데다가 사공마저 없었기 때문에, 물길 가는 대로 해안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람에 배가 뒤집혀 바닷물에 빠지기보다는 암초에 걸려 주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를 물길에 맡기는 것이 가장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우리 뜻대로 그 위기 벗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저녁이 되면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어,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진 정도의 높은 파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파도는 우리를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거렸다.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배에 실은 모든 것을, 하다못해 돈이 가득 든 금고까지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나서 두 개의 돛대마저 잘라 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배들을 조금이라도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은 상태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돛대도 돛도 없이 한나절을 떠내려갔다. 자정 무렵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안토니오 드 파리아 호에서 "신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쳐대는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를 들었다. 그 배는 난파당한 듯했다. 고함을 치며 그들을 불러 보았지만, 승선한 사람들이 모두 불 속에 빠져 버렸는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려움과 슬픔에 빠진 우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극심한 비탄에 잠겨 밤을 밝혔다. 용골에 구멍이 뚫려 순식간에 여덟 뼘 정도의 높이까지 물이 차 올랐다.더 이상 손을 써 볼 희망마저 잃어버린 우리는 배가 침몰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망연자실한 채 우리의 생과 고통이 끝나게 되는 이 순간을 모두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날이 밝자마자 우리는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안토니오 드 파리아의 자취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완전히 자포자기했다. 우리는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공포를 실감하면서, 10시경까지 버텼다. 결국 거의 물이 찬 우리 배는 해안 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거센 파도는 암초가 있는 곳까지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배는 암초에 닿자마자 부서졌다 그 수간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여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 지르며 서로서로 부둥켜안았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날 25명의 포르투갈인 중에서 14명만이 구조되고, 그 나머지는 익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18명의 기독교인 하인들과 7명의 중국인 뱃사공들도 함께 실종되었다. 바로 이것이 1542년 8월 5번째 월요일에 일어난 비극적인 재난이었다. 그 재난 속에서 살아 남게 된 데 대해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페르나오 멘데스 핀토(동양편력기) 괴물과 불가사의 괴물개와의 싸움 본국으로 귀환하던 몽고인은 사막을 지나서 어떤 나라에 도착했다. 몽고 제국에 오래 살았던 러시아인 신부들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인했듯이, 그 나라에는 여자의 형상을 한 많은 괴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통역관을 통해서 그 괴상한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 지 물어 보았다. 그들은 여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남자는 개 형상을 하고 있는 곳에 남자들이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고향을 몽고군이 너무 오래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물개들은 강가의 한곳에 집합해서 몽고군을 물리칠 계략을 짰다고 한다. 괴물개들은 겨울을 이용하여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나와서 흙먼지 속에 몸을 굴렸다. 물과 흙이 범벅이 되어 그들의 몸에 얼어붙었다. 몇 번에 걸쳐 그 짓을 되풀이하다 보니 그들의 몸은 두꺼운 얼음을 뒤덮였다. 그런 다음 괴물개들은 떼를 지어 몽고군에게 달려들었다. 몽고군은 활을 물 붓 듯이 쏘아댔지만, 화살은 돌에 부딪히듯 괴물들의 등에서 튕겨났다. 다른 무기로도 그들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그러자 괴물들은 몽고군을 마구 물어뜯어 상당수의 몽고군을 살해하고, 생존자들을 영토 밖으로 쫓아냈다. 이후 몽고인 사이에서는 '애비나 형이 개에게 물려 죽은 놈'이란 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패배한 몽고군은 그 나라에서 몇 명의 부녀자를 생포하여 자기들의 진지로 데려왔는데, 그 부녀자들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괴물개 몽구군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사모예드에 도착했다. 그곳에 사는 부족은 오로지 수렵만 하면서 짐승의 가죽으로 간이 천막과 옷을 만들어 입고 살았다. 계속하여 몽고군은 북극 해안까지 세력을 넓혀 갔는데, 그 지방 주민들은 소 발굽 같은 발을 가지고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머리는 인간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얼굴은 개와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괴상한 족속은 첫 두어 마디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개처럼 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해서 짖는 것을 잘 들으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곳을 거친 몽고군은 계속해서 코만인의 나라로 밀고 들어갔다. 이 지방에는 지금도 몽고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 외눈박이들 몽고군은 시르카스인에게 대패한 뒤 남쪽 아르메니아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사막을 통과하면서, 모습은 인간이지만 가슴 가운데 팔이 달려 있고 다리도 하나뿐인 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활 하나를 둘이 같이 쏘고, 너무 빨리 달려서 말을 타고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괴물은 보통 때는 다리로 껑충껑충 뛰어다니지만, 피로할 때는 손발을 교차하면서 마차바퀴와 같은 자세로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쎄비야의 이시도르는 이 괴물을 외눈박이라고 불렀다. 괴물은 바퀴처럼 굴러다니다가 지치면 다시 다리로 뛰었다고 한다. 몽고군은 그 괴물의 일부를 살해했다.. 대칸 궁에 있는 러시아인 신부의 말에 따르면, 괴물의 대표가 평화조약을 체결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몽고군은 계속 정복길에 나서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의 일부를 정복했다. 그루지야는 나머지 영토마저 끝내 정복당했는데. 이들 나라들은 매년 4만 냥의 비잔틴 금화를 조공으로 바쳤다.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몽고의 역사) 개처럼 생긴 비비 앞에서 이야기한 두 섬을 떠나 서쪽을 140리 쯤 갔을 때 안가만이라는 상당히 크고 풍요로운 섬을 발견했다. 우상이 숭배되는 그곳에는 통치자도 업속 법과 질서도 없었으며, 사람들도 집도 없이 야생동물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와 이빨, 그리고 눈이 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머리는 모두 매스티프종과 흡사했다. 그들은 잡식성이었는데 성질이 무척 난폭해 사람을 산채로 잡아먹었다. 그러나 자기 종족만을 절대로 먹지 않았다. 그들의 음식은 종류가 다양했다. 주식은 쌀. 수수. 우유였고, 갖가지 고기를 다 먹었다. 또한 그들은 호두와 천도복숭아,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여러 종류의 과일을 재배하기도 하고 자연산을 채취하기도 했다. 이 섬 주변은 물살이 세고 수심이 깊어서, 범선이 그곳에 닻을 내리거나 항해할 수 없었다. 그곳의 해류는 범선이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만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난 파도는 땅을 모두 침식시키고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그 만으로 밀어 넣었다. 따라서 만에는 나무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는데, 한번 그곳에 들어간 나무는 다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선박들도 그 만으로 흘러 들어가면 많은 나무들에 얽혀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내가 이 기이한 부족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흥미 있을 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인도양에 서식하는 기이한 물고기 이 바다에는 때때로 해초와 조개를 잔뜩 붙이고 등으로 호흡하는 동물이 나타나곤 했다. 간혹 그것을 섬으로 착각한 사공들이 닻을 내리기도 했다. 섬이 아님을 깨달은 사공들은 전속력으로 달아나곤 했다. 그 동물이 허리 부근에 있는 지느러미 하나를 펼치면, 웬만한 범선의 돛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면, 마치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또한 그것이 입으로 물을 뿜어댈 때면, 마치 회교 사원의 대형 첩탑을 보는 듯했다. 바다가 잔잔할 때면 각종 어류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때 그것이 나타나 꼬리로 고기들을 몰면서 입을 한껏 벌리면, 마치 고기떼들이 우물 속에 모여드는 것이 그 동물의 입안으로 빨려 들었다. 이 바다를 다니는 배들은 이 동물을 두려워했다. 밤중에는 배가 그것에 부딪혀 파선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딱딱이를 쳐대곤 했다. 이 바닷속에는 또 다른 동물도 살았다. 우리가 그것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길이가 10m나 되었다. 배를 갈라보니까 그 속에서 똑같이 생긴 다른 동물이 나왔다. 이번에는 두 번째 것의 배를 갈라보니,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동물이 나왔다. 뱃속에서 나온 것들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살아서 펄펄 뛰고 있었다. 발이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동물에는 50cm정도밖에 안 되는 라흐크라는 생선이 붙어살았다. 발이 포악해져 바닷속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면, 대단한 힘을 가진 이 작은 물고기가 달려와 그것의 아가미 밑에 착 달라붙어 그것이 죽을 때까지 물어뜯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이 작은 물고기는 선박에도 달라붙곤 했는데. 그러면 큰 물고기들이 그 작은 생선을 피하려고 절대 선박에 다가오지 않았다.(중국과 인도 견문) 도딘섬의 불가사의한 주민 식인풍습에 관한 얘기는 14세기의 오도리크 데포르데노네 같은 많은 여행가들을 놀라게 했던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돈딘이라고 부르는 안다만섬 주민은 잔인한 풍습으로 유명하다. 이 섬을 정오경에 떠나 돈딘이라는 큰 섬에 도착했다. 이 섬에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불가사의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잔인 무도한 방법으로 날고리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그곳에서는 아비가 아들을 잡아먹고, 또 아들이 아비를 잡아먹었으며, 남편이 부인을, 부인이 남편을 잡아먹었다. 아비나 어미가 병들면, 아들은 그들의 법을 지배하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한다. "제사잠님, 신께 물어 보셔서 내 아버지가 이번 병에서 나을 것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제사장과 그 아들은 금은으로 만들어진 우상을 찾아가서 경배를 올렸다. 그리고 우상에서 환자가 병으로 죽을 것인지 아닌지 물어 보면 악령이 우상의 입을 통해 답했다. 만약 아비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면 아비를 정성들여 간호하지만, 반대로 아비가 죽을 것이라고 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의 입에 사과 한 개를 넣은 뒤 그를 일으켜 세워 놓고 죽였다.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와서 시체를 조각 내어 자르고, 모든 친지들과 그 지역 사람들을 불러서 큰 축제를 벌이고 즐겁게 시신을 먹으며 노래고 춤췄다.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들 가운데 이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우리는 이 엄청나게 끔찍한 풍습을 두고, 그것은 세상의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개나 늑대들도 동족의 고기는 먹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러자 그들은 벌레들이 그 시신을 파먹으면 사자의 영혼이 큰 고통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벌레들이 시신을 파먹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섬에는 그밖에도 다른 많은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어디든지 이해할 수 없는 고유한 일이 있게 마련이라면서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풍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섬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이곳에는 풍요롭고 살지 좋은 24개의 섬이 있으며 54대째 왕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다.오도리크 데 포르데노네(동양여행기) 노아의 방주 아르메니아 중부의 큰 산 위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 이 산은 높고 웅장한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노아의 방주가 얹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을 그 산을 '노아의 방주'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산은 너무 넓고 높아서 한 바퀴 도는데 이틀이 더 걸린다고 한다. 눈은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점점 양이 불어나며, 산 정상에는 언제나 많은 눈이 1년 내내 쌓여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노아의 방주는 아주 멀리서나 볼 수 있는데. 노아의 방주산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보는 장소에 따라서는 산 정상의 만년설 가운데 커다란 검은 형체가 보이기도 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에는 크고 높은 산들이 많은데, 그 중에 바리스산 혹은 올림포스산이라 불리는 산은 너무 높아서 하늘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홍수시절에 그 산으로 피신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만인의 배'라고 부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여행객들이 묻지 않는 한 방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평야로 향한 산비탈로 눈이 녹아 내려 흐르는 습기 때문에 풀이 많고 땅이 기름지다. 그래서 여름에는 주변의 양떼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무척 풍요로운 곳이다. 게다가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산에는 두꺼운 진흙충이 쌓여 있다. 이제 아르베니아의 남쪽 국경 부근에 있는 모습, 무스, 그리고 메리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아르메니아의 남동쪽에 있는 것이 모술 왕국이다. 모술 주민은 야곱파와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 왕국의 북부는 그루지야국과 인접하고 있는데, 이 나마에 대해서도 나중에 말하기로 하겠다. 그루지야와의 국경 지역에는 기름과 같은 액체가 나오는 샘이 있는데, 큰 범선 100척을 동시에 채울 수 있을 만큼 양이 대단히 많다. 여기서 나오는 액체는 마시기에는 적당치 않지만, 불을 붙이기에는 매우 좋다. 그리고 이 액체는 옴 걸린 사람들이나 동물 그리고 두드거리나 궤양 걸린 낙타를 치료하는 데에도 효과가 좋다. 그래서 아주 먼 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기름을 구하러 오며, 주변 사람들에서는 불을 붙이는 데 이 기름을 쓴다.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 꿈의 수평선 "인동양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이국적 향취를 주는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중세 유럽이 인도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은 무엇보다 풍용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알랭 드 릴의 말에 따르면, '빈곤한 라틴시대'의 서양 기독교 국가들은 인도를 풍요로움이 흘러 넘치고 화려한 생활이 샘솟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섬과 관련된 환상이 많았는데, 수많은 섬들이 가득 널려 있는 인도양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행복과 물질적 향락이 가득한 '풍요의 섬'이란 환상을 갖고 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인도양에는 1만 2,700개의 섬이 있다. 이 모든 섬에 대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얘기할 수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인도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대단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또한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기독교적 상징주의가 그 섬들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신비주의는 개인적 욕망으로 각지를 떠돌다가 허무하게 쓰러져 간 사람조차도 선행의 본보기로 미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비에 싸여 있던 인도양 역시 귀금속이나 각종 보석, 귀중한 나무, 향신료 등을 생산하는 섬들로 상징화되었다. 풍요로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남서쪽의 말라바르해안에 있는 쿠왈룸 왕궁에서는 5월부터 7월까지 후추를 수확했는데, 마르코 폴로는 이 수확의 풍요로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나라에서 말을 싣듯이 이곳에서는 후추를 그대로 범선에다 싣는다." 말라바르 왕국은 바다에서 엄청난 양의 진주를 채취하는 나라로, 그곳의 왕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진주로만 치장하는데, 목에만 104개의 크고 아름다운 진주가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크리스와 아르지르처럼 순금이나 순은으로 된 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섬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섬은 지금의 스리랑카인 타프로반이었다. 이렇게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것은 먼 이국에서 귀중품들을 수입하던 무역구조와 연관된 그들의 심리적 반향으로서, 반현실적인 유럽인의 사고의 수평선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부에 대한 이러한 꿈은 환상적인 것이 풍성할 것이란 기대와 연계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도양에는 환상적인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많다고 생각했다. 유럽인은 호노리우스 오귀스토두넨시가 "그곳의 괴물은 인간으로 분류되는 것과 동물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고 말했듯이, 인도양은 두 유형의 괴물로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했다. 한편 서양은 그런 괴물들의 얘기를 통해서 그들 원래의 괴물인 목신을 탈피하여 자연과 신에 의한 무수한 가공물을 만들어 냈다. 뒤꿈치가 반대편으로 달린 인간, 인간보다 오래 살고 늙어 갈수록 털이 검게 변하면서 개처럼 짖는 비비, 긴 다리를 이용해 재빨리 피신하는 외발 괴물이나 외눈박이 괴물, 눈이 어깨에 있고 코와 입 대신 가슴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머리 없는 인가, 한 가지 과일 향만 맡으며 살고 만약 그것을 맡지 못하면 죽는 인간 등, 그들이 꾸며 낸 괴물은 막스 에른스트의 인류학와 비슷한 초현실적인 인류학인 셈이다. 이러한 괴물과 더불어 환상적인 동물에 대한 이야기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것은 여러 동물의 특징적인 신체 부위를 합성해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몸은 당나귀, 하반신은 사슴, 가슴과 엉덩이는 사자기오 말발굽에 갈퀴 같은 뿔을 가지고 거의 사람 말소리를 내는 귀밑까지 찢어진 큰 입을 가진 짐승이나, 인간의 얼굴에다 이빨은 세 개, 사자의 몸에 전갈의 꼬리를 갖고 푸른 눈에 흑자주색의 피부, 음석은 뱀의 휘파람 소리 같고 공중을 나는 새보다도 더 빨리 달리는 식인동물 등이 있다. 그러한 것은 빈곤하고 협소한 어떤 세계를 대상으로 기이하고도 과장하고 합성해서 꾸며 낸 꿈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 괴물들은 종종 인간이 어렴풋이 꿈꾸고 갈망하는 부와 인간 사이의 방해물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한 예로 인도의 용들은 보물과 금은을 인간의 접근으로부터 지켜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꿈은 생활풍습이 상이한 세계를 통해 자신의 관점을 넓히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른 생활 풍습 속에서 자신들의 금기사항들을 파괴하거나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는 의지이며, 비밀에 쌓인 이국적인 낯선 풍습은 현실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강한 소원을 나타내기도 한다. 기독교의 엄격한 윤리의식에 맞서 원시시대와 식인종들이 보이는 기상천외한 식생활세계와 인간이 옷으로 부끄러움을 가지는 수치심을 떨쳐 버리고 신체에 대한 본능만으로 나체주의가 되는 순진한 세상, 일부일처제를 가련하고 생각하며 가족의 굴레를 벗어 던진 인간의 모습, 일부다처제, 근친상간, 관능의 향락에 몰입하는 성해방의 세상 등 자극적인 유혹에 손을 뻗치려 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미지의 세계 대한 무한한 상상력과 공포에 대한 환영이 암시되고 있다. 인도양은 끝없는 늪이며 단체의 연옥과 같은 돌풍지대의 출입구이다. 그러나 이런 꿈을 통해 유럽인의 상상력은 결국 그들 자신의 폐쇄된 세계가 지닌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인의 꿈이 반그리스도와 세계종말의 표상인 고와 마고 부족에 대한 저주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 계시록의 종말을 잊으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이상세계를 찾으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럽인은 자신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 대한 전형을 몽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지구 반대편의 신비의 세계를 그리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원형을 창출하려 했던 것이다.쟈크 르 고프(또 하나의 중세) 베네치아 상인 베네치아 상인은 어려서부터 상업교육을 받고 자라나기 때문에, 상인으로서 대를 이어 가게 된다는 것은 아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베네치아인은 대개 상업관행이나 계산법과 회계를 배우고, 그런 후 바다의 위험과 해상의 거친 생활을 체득하기 위해 선원의 조수가 된다. 그리고 얼마쯤의 상품을 배에 선적하고 물품을 관리하며 상품 파는 훈련을 통해 이익 남기는 법을 배운다. 그런 뒤 부모의 상점이나 먼 도시의 동업조합원 상점에 배치된다. 외지에 나갔다가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기 가계나 조합 소유의 물품을 호송, 운반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베네치아 상인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 두루 뻗어 있는 가계의 동업조합이나 다른 많은 조합의 대리점주가 된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면과 향신료를 주로 거래했고, 캔디에서는 술과 노예를 취급받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익이 많은 금융거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런 거래를 통해 재산을 웬만큼 모으고 유산을 상속받으면, 그들은 베네치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만약 결혼을 안 했으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자식이 생기면 상업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베네치아인 문화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숫자와 체험, 그리고 외국어와 외국의 풍습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탈리아어 이외에도 불어와 카탈루냐어, 독일어, 그리스어 등 중요한 거래 지역의 언어를 배운다. 물론 성직자와 공증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쓸모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5세기 전까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서나 법학서들을 서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자이든 중산층이든 간에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상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동업조합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거래인 들에게 주문품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본의 일부를 밀 수확과 과일 산출을 위한 경작지와 부동산 등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대저택을 그 시대의 유행에 맞게 화려하게 꾸몄는데,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체면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편, 이러한 상업귀족들의 활발한 문예활동은, 조화로운 예술양식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게 됨에 따라, 영향력 있는 가문의 상인들은 공적인 생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정 장관이나 대사, 군대 지휘관 등을 맡기도 하고, 의회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함대의 제독이나 생마르크의 총독이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의 전통 있는 가문들은 상업활동과 공직생활을 밀접한 연관하에 병행했다. 베네치아는 상업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정부, 상인들을 위한 정부였다. 변화하는 정치환경 속에서도 이곳 정부는 상인 개인의 이익과 상인 전체의 권익을 보호해 주었다. 따라서 정부는 상선을 건조하고 무장시키고 보호했으며, 상품의 운송을 계획하고 상선의 수를 정하고 선장을 임명하고 운송할 상품의 종류도 지정했다. 대단히 엄격하게 짜여진 선박의 발착예정표로 매년 이 지역 선박의 운행을 통제하였는데, 안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조치가 마련되어야 운항이 허락되었다. 정부는 자국 상인들이 외국 상인들과 흥정을 벌이는 경우에, 알렉산드리아 같은 먼 나라에서 온 외국 상인들은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먼 나라에서 구입한 물건은 모두 베네치아 선박에만 선적하고 베네치아에만 짐을 하역하도록 정부가 요구했는데, 그것은 정부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기 대문이다. 예를 들어 통관세는 항해제도를 개선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것은 결국 상인 개개인에게도 짭짤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필리프 브론스탱, 호베르 들로르(베네치아, 도시의 발전사) 상인인가 아니면 종교사절인가? 선구자적 상인 1295년 베네치아인은 24년 전에 중국으로 떠났던 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들이라며 돌연히 나타난 두 명의 노인과 40대의 한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친지들은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하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 가졌던 터였다. 이 세 명의 여행자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친지들과 친구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로 한 것이다. 이 연회가 끝나 갈 무렵, 그들은 서둘러 시종들은 내보내고 나서, 그중 제일 젊은 남자인 마르코 폴로가 자신이 귀향할 때 입었던 옷들을 뜯어내더니, 동양에서만 가져올 수 있는 진주와 다이아몬드 등 많은 보석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 매혹적인 입증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신뢰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351년에 작성된 그때의 관련서류를 보면, 마르코는 그 보석들은 친지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총독에게도 자신이 서명한 많은 물건들을 선물로 주었다. 선물에 매혹된 사람들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오래 체류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고, 특히 열 다섯 살에 떠났던 마르코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지만, 니콜로, 마페오, 그리고 마르코는 분명 '귀환자'로 확인됐다. 귀향 3년 후 마르코는 베네치아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제노바와 벌였던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아이야스 해전중 포로가 되어 소설가이자 문인이었던 피사 출신의 루스티첼로와 함께 감금되었다. 여기서 그는 루스티첼로에게 아시아에서의 체험담을 이야기하고 루스티첼로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문은 하나하나 번호가 매겨져있어 매우 정확하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중국 문헌들과 비교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프랑스어로 작성된 <동방견문록>의 서문에서, 루스티첼로는 기록문이 모두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광범위한 무역시장에 대한 연구서로, 페골로티의 실무무역서와 함께 14세기에 상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사실 동방견문록의 대부분은 도시 간 거리나. 이동 소요시간, 여행에 관한 실리적인 조언, 거래물품들의 무게와 양, 가격, 지불방법, 그리고 통화와 지폐 등에 관한 서술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특별한 의미가 그런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단순한 여행기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은 행로의 순서를 가리기가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 작가는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툭하면 여담을 길게 늘어놓거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 서술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생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손색없는 현지 보고문이다. 중국에 관한 기록은 거의 오류 없이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고증자료와의 대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특히 항저우(마르코 폴로는 긴자라고 했다 : 역주)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뛰어나다. 몇몇 부분은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우화나 사실과 다른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그의 체험의 진실성을 유명한 의사이자 천문학자인 피에트로 다바노 교수와 나눈 얘기를 들 수 있다. 이 교수는 1310년 이전에 작성한 철학과 의학의 상반된 요소의 절충이란 제목의 글 속에서, 마르코가 자신에게 "목격했던 많은 일들을 소개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 교훈이 담긴 말도 해주었으며, '남반구의 성좌'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에트로 디바노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진정한 학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언급은 단순히 형식적인 찬양이 아니라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탐험가이며 정열적인 발견자라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증언이었다.미셸 몰라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탐험가들) 마르코 폴로는 상인이었나? 오래 전부터 마르코 폴로를 상인으로만 소개해 왔던 기존의 논문들을 과연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회. 역사 분야의 많은 연구활동을 마비시키고 있는 단순화 또는 도식화의 사고방식으로, 그를 이윤만을 추구하며 새로운 시장개발을 위해 뛰어든 시업가로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폴로 가문은 해상무역을 발전시키면서 동양까지 진출하여 온갖 과일과 향신료, 비단 들을 들여왔던 베네치아의 상인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시각은 19세기 말 이후, 과거의 사실을 단순화시켜 보려고 했던 시대적 경향이 강하게 작용했다. 각종 정치제도나 사회. 문명의 역사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공화국'의 가치를 앙양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항상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은 공화제의 특징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험심이나 부, '현대적인' 교양으로 무장한 평민, 부르주아, 상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이었다. 귀족이나 봉건적 세계의 영주에 대비되는 이러한 계급은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가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인류사에서 모든 위대한 '진보'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들 덕택에 인도주의가 탄생하고, 예술이 개화했으며, 지리상의 대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베네치아인 이면서 동양에 정착했던 상인의 아들이자 조카인 마르코 폴로는 이러한 도식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마르코가 새로운 논거로 다루어졌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편견들은 뛰어넘으려면, 마르코가 경험상 그 직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고 출생신분과 젊은 시절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업가 집단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는 것보다 중국과 인도에서 그의 모험이 정말 상인으로 활동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기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는 과연 무엇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완전히 생소한 세계와 국가, 사람들을 대하고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르코는 자신의 이름이나 두 어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을 상업활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공증증서라든가 재판기록, 재산목록, 결산서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상업활동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아시아 체류는 아직도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자크 히어스(마르코 폴로) 재조명되고 수정된 마르코 폴로 신이 알고 있는 도시들은 모두 말씀 드렸습니다.1923년 산레모에서 태어난 이탈로 갈비노는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이탈리아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마르코 폴로는 우울한 대칸의 친구이면서 가장 가까운 말동무 역을 맡은 시하로 나오는데, 그는 대칸에게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여러 상상의 도시들에 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경은 정녕 그런 도시를 본 일이 없었단 말이요?" 쿠빌라이가 마르코 폴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반지 낀 손으로 황제 전용 호화 여객선의 비단 막사 밖을 가리켰다. 그는 운하 위의 무지개 모양 다리들, 대리석문 입구가 물에 잠겨 있는 왕족들의 구, 긴 노를 저을 때마다 기우뚱거리며 오락가락 하는 폭이 좁은 배들, 건물의 발코니, 옥상, 성당의 뾰족한 종탑, 회색빛 담소호를 초록빛으로 채색한 성의 정원을 하나한 가리켰다. 황제는 그 외국인 대신을 대동하고 항저우를 시찰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패망한 왕조(송나라 : 역주)의 수도로서, 대칸이 마지막으로 정복한 진주와도 같은 도시였다. "보지 못했습니다, 전하. 신은 이와 같은 도시가 존재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황제가 그의 눈을 보려고 했지만, 외국인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날 쿠빌라이는 온종일 말이 없었다. 해가 진 다음 마르코 폴로는 황궁의 테라스에서 황제에게 그의 사절 여행에 대해 보고했다. 보통 때 같으면, 대칸은 눈을 반쯤 감고서 그의 말을 깊이 음미하며 초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뒤 하품을 하며, 별채로 가는 횃불을 밝히라는 신호를 시중들에게 보내고는 침실로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이 흘러도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도시에 대해 얘기해 주시오." 황제는 그렇게 명령했다. 마르코는 많은 지역의 이름과 풍습, 무역품들을 열거하면서 끝없이 이야기했다. 오히려 마르코 자신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벌써 새벽이었다. "페하, 이제 신이 알고 있는 도시들은 모두 다 말씀드렸습니다." "경이 한 번도 얘기하지 않은 곳이 하나 남아 있지요." "베네치아 말입니까?" 마르코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다른 도시를 설명 드리는 가운데 이미 베네치아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으리라 사료됩니다." "짐이 경에게 다른 여러 도시들에 관해 물었을 때는 그 도시들의 얘기를 알고 싶었던 것이고, 또 베네치아에 대해 묻는 것은 베네치아 자체의 얘기만을 듣고 싶은 것이오." "다른 도시들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도시가 필요합니다. 그 도시가 베네치아입니다." "그러니까 경이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베네치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서, 원점에서 경의 여행담을 다시 들려주시오." 궁의 나뭇가지들이 물위에 드리워져, 나뭇잎처럼 반짝이는 물결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한번 말을 뱉어 버리면, 응고된 기억 속의 영상들이 희미하게 지워지게 마련입니다." 마르코는 대칸의 주장을 반박하려고 애를 썼다. "신이 그것을 모두 말하고 나면 베네치아를 한순간 완전히 잊어버릴까 염려됩니다. 게다가 이미 말씀드린 다른 도시들은 벌써 조금씩 잊어버렸습니다."이탈로 갈비노(보이지 않는 도시들) 백반장자 마르코 유진 오닐은 백만장자 마르코에 대해 희곡 한 편을 썼다. 그는 창작동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여행가로 활동했으면서도 부당하게 거짓말쟁이로 알려졌고, 사후에도 어처구니없게 냉대를 받은, 인간으로서도 시민으로서도 응당 받아양 할 명성을 박탈당했던 한 인물의 공적을 인정해 주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베네치아 시민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이다." 마르코는 여행 가방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입을 벌린 채 경탄의 눈으로 주의를 둘러본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머리를 조아리고 다가가서 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마르코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마르코는 얼이 빠져 그 신호를 보지 못한다.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르코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칸은 근엄한 표정으로 두 폴로 형제를 응시하고 있다, 시종무관한 사람이 마르코에게 다가와서 그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손짓한다. 마르코: (손짓의 의미를 오해하여 인사의 뜻 인줄 알고) 고맙습니다, 노인장.(그는 궁중 사람 들의 노기 서린 눈빛을 받으면서 여행 가방 위에 앉는다. 칸은 폴로 형제가 가져온 교황의 회신내용을 들으면서,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마페오와 니콜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코의 행동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다. 노기 띤 시종이 황급히 다가와서 마르코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한다. 얼이 빠진 그가 속으로 말한다.) 지금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지? 쿠빌라이: (보고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폴로 형제에게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당신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런데 노자, 공자, 서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한 교리에 관해 나의 학자들과 토론하기로 했던 100명의 서양 학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소? 마페오: (박력 있게) 새 교황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막..... 니콜로: 그리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그분은 마땅한 학자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칸이 마르코를 쳐다보자, 마르코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쿠빌라이: 저 사람도 동행이오? 니콜로: (주저하는 음성으로) 제 아들 마르코이옵니다, 페하. 아직 어리고 버릇이 없습니다. 쿠빌라이: 가까이 오너라, 마르코 폴로.(마르코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간다.) 마페오: (작지만 엄한 음성으로) 무릎을 꿇어. 당나귀 같은 녀석아!(마르코는 아무렇게나 무릎을 꿇는다.) 쿠빌라이: (미소를 지으며) 마르코, 진심으로 환영하오. 마르코: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영주님, 아니 저 (갑자기)어떻게 말해야 할지 교황께서 전하께 드리는 전갈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쿠빌라이: (미소를 머금고) 하면 네가, 짐이 교황한테 청했던 100명의 학자인가 보구나. 마르코: (떳떳이) 맹세하여 그런 셈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 대신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폐하를 위해 100명의 학자 못지 않은 구실을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니콜로: (활기차게)교황님께서는 독실한 신앙생활과 실질적인 역량을 고려하여, 마르코가 많은 현인의 말씀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명확히 설명드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쿠빌라이: (미소를 머금고) 이런 인물이 받을 수 있는 찬사를 짐이 한번 배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려. 마르코: (갑자기 대담한 태도로) 폐하께서 100명의 학자들을 요청하셨던 것은 단순히 우롱하려 하셨던 게 아니었군요? 교황님께서는 폐하께서 해학적인 감각을 지니셨거나 낙관론 자이실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쿠빌라이: (동감한다는 미소를 머금고) 그대의 고귀하신 교황님이 불경건한 견유주의자는 아닌지 심히 염려되는 바이오, (마치 수수께끼를 풀려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서양인에게는 사후에도 살아 있는 영혼이란 것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영혼이란 것을 이 젊은이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나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갑자기 마르코에게) 네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느냐? 마르코: (깜짝 놀라며) 물론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우매한 자라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쿠빌라이: (겸손한 목소리로) 물론 짐은 그런 바보는 아니다. 네가 짐에게 그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겠느냐? 마르코: 만약 폐하께서 영혼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면, 승하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쿠빌라이: 그래, 네 생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마르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폐하께서는 동물이나 다름없이 승하하시는 것이지요. 쿠빌라이: 너의 논리를 부정할 수가 없구나. 마르코: 네, 그렇습니다. 소인은 동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인에게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만만하게) 폐하! 소인은 전능하신 진께서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입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쿠빌라이: (상념에 잠겨 오랫동안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래, 네가 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확실히 너에게는 어떤 완벽하고 항변의 여지가 없는 그 무엇 인가가 있구나 그러면 잠깐 너를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황제의 지시로 칸이 손뼉을 치자 병사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나와 마르코의 두 손을 등뒤로 묶는다) 마페오: (애원하며) 불쌍히 여겨 주소서!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니콜로: (똑같은 식으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 아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쿠빌라이: (준엄하게) 조용히들 하시오! (마르코에게 나즈막하고 냉랭한 음성으로) 네가 영혼불멸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네 목을 자른다 해도 네게는 고통이 없을것이다.(병사에게 칼을 배도록 신호한다.) 마르코: (별로 자신 없는 농담조로 두려움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소.... 소인이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쿠빌라이: 네가 농담을 하고 있다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숨길 수가 없구나! 불멸의 젊은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자, 네 영혼이 어리석게도 두려움을 감추고 있음을 인정하고, 너 또한 죽을 때 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마르코: (별안간 격분해서) 폐하는 허풍쟁이 사이비 신자입니다! (그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칸을 바라보고 있고, 그의 숙부는 두려움에 싸여 신음을 토해 낸다. 칸이 소리내어 웃으면서 손뼉을 친다. 그러자 병사들이 마르코를 풀어 준다.) 쿠빌라이: (풀려난 마르코의 뾰로통한 얼굴을 흥미롭게 뜯어보면서) 마르코, 미안하다! 짐이 너의 약점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너는 완벽하다. 너는 죽음이란 걸 믿지 않는구나. 너에게는 영웅의 기질이 다분하다. 이제 너를 내 곁에 두어야겠다. 짐에게 너의 영혼에 대한 얘기를 해 다오. 그러면 짐은 서양에서 온 100명의 현인의 이야기로 알고, 네 이야기를 듣겠노라! 알겠느냐? 마르코: (우물거리는 음성으로) 소인에게는 큰 영광이옵니다. 폐하, 하지만 소인은 다른 영혼과 달리 먹어야만 합니다. 쿠빌라이: (놀라며) 무억을 먹는다는 것인가? 마르코: 소인이 야심가란 뜻입니다. 저는 성공해야만 합니다. (갑자기 단도직입적으로) 폐하께서는 소인에게 무엇을 하사하실 것인지요? 쿠빌라이: 아하! 너는 짐 또한 실리적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네가 원하는 직책을 주도록 하마. 어떤 직책을 원하느냐? 마페오: (재빨리 끼여들면서) 소인이 저 아이에게 특별히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소인의 하찮은 소견을 저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소인의 하찮은 소견을 저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이 아이는 아직 어려서(마페오와 니콜로가 급히 마르코를 입구 쪽으로 끌고 간다.) 칸의 마음을 꽉 잡은 거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쇠는 달궈졌을 때 두드려야 된다! 2급 행정 감찰직을 요청해라. 마르코: (화가 나서) 싫어요! 저는 1급 감찰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마페오: 얼간이 같은 소리 마라! 1급 감찰사는 명예직일 뿐이어서 유명무실하다. 2급 감찰는는 여행할 때 모든 비용이 지불되고, 출입 상인들과 친분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어느 정도 압력을 행사하며 쥐고 흔들수도 있다. 그 직책은 모든 일에서 정당한 수수료를 받기도 한단 말이다! (팔꿈치로 마르코를 찌르면 협잡꾼과 같은 표정을 짓는다.) 더구나 항상 비밀을 대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이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우리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 마르코: (무뚝뚝한 투로) 몰라요. 칸은 나를 정직하게 대해 주었는데..... 마페오: (그를 힐난하듯 훑어본다.)너보고 도둑질이라도 시킨 것 같구나. 나, 마페오의 원칙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마르코: (깊이 생각에 잠기다가)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마페오: (엄숙하게)칸이 폭군이라 생각하느냐? 마르코: 아니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재빨리 눈을 깜빡해 보이며 마페오를 쳐다본다.) 제가 두 분께 정보를 드리면, 폴로 형제 상회는 무슨 이익을 얻게 되죠? 마페오: (놀라기도 하고 감복해하면서) 아하! 어느새 많이 컸구나. 벌써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너를 상회의 동업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래, 니콜로? 상호를 '폴로 형제와 아들'로 하면, 그것 참 잘 어울린다. 안 그래?유진 오닐(백만장자 마르코) 고고학자의 시대 카슈가르 지역의 영사관 설치는 초창기 과학 탐사대의 작업을 편리하게 해누었다. 탐사대는 고고학 뿐만 아니라 지리학Ⅵ예건奎광물학Ⅹ适렷隙 연구도 탐사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 1890년대에 영국인과 러시아인이 탐사작업에 뛰어들었다. 탐사에서 오렐 스타인, 폴 펠리오, 피오트르 코즐로프, 알베르트 폰 르 콕, 스벤 헤딘, 타치바나 추이차 등이 가장 알찬 결실을 거두었다. 이러한 작업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폴 펠리오는 20세기 초에 중국 투르키스탄 지역에서 고고학 탐사를 했던 유일한 학자이다. 그는 단 한 번의 탐사에서 진귀한 수확을 거두었다. 둔황어ㅣ 모가오 동굴의 고문서 비밀저장소는 이미 수년 전에 발견되어 오렐 스타인의 지휘 아래 조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스타인은 이곳에서 발견된 5만 개에 달하는 고문서 뭉치와 다른 잡다한 문헌들 가운데서 정말 가치 있는 자료를 가펴냈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 역사 연구의 대단한 진전이었다. 1907년 12월 우룸치를 출발한 일행은 2월 초에 간쑤성 서쪽 변경 둔황에 도착했다. 파리를 출발할 때부터 둔황은 탐사의 주요 기착지 중의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프르제발스키, 크레이트너, 보닌 등이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지점에 천불동이라는 동굴단지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 동굴들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의 손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었다. 그래로 벽화는 이슬람교도의 파괴를 면한 채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아직까지 어떤 고고학자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동굴의 탐사에 전념하기로 작정했다. 우리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둔황의 동굴 단지에는 6세기와 10세기 사이의 중국 불교예술의 진수라고 불릴 만한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룸치에서 또 다른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00년에 있었던 둔황 동굴의 고문서 발굴작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전해 준 인물은 타타르족 장군이었다. 재란이라는 왕족의 일원임을 주장하는 장군은 나에게 그곳에서 나왔다는 고문서를 한 부 내밀었다. 8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서였다. 그리고 몇 가지 정보를 통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왕원록이라는 도인이 큰 동굴의 한곳을 치우다가 우연히 옆으로 뚫려 있는 작은 동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곳에 고문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둔황을 지나간 고고학자가 있었지만, 나는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둔황에 도착하자마자 왕원록 도인을 수소문했고 뜻밖에 그를 수월하게 만났다. 게다가 그는 직접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고문서가 무진장으로 쌓여 있다는 작은 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사방에 3m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 안에 두세 겹으로 쌓인 고문서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그 고문서들은 대부분 두루마리였지만 그 중에는 낱장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고문서에는 중국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양한 종류의 언어가 담겨 있었다. 간 내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는 지금도 형언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의 고문서 중에서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가장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고문서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대강 훑어보고 보물을 파손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냥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천만다행인지 완단록 도인은 사원의 건축을 담당하는 건축승려였다. 그가 사원을 지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고문서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왕단록 도인은 정부의 문책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문서 전부를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굴에 쭈그리고 앉아 3주 동안 열심히 목록을 작성했다. 내 손끝을 거쳐간 1만 5,000개의 두루마리 중에서 작성 연대나 내용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모두 손에 넣었는데, 대략 전체의 1/3정도였다. 산스크리트어나 위구르어, 티베트어로 된 문서도 많이 챙겼지만, 특히 중국어로 된 문서들에 보다 신경을 썼다. 거기에는 중국 역사에 관한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불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에 관한 많은 기록들, 그리고 대차계약, 회계, 일기, 장부 등은 중국 연구가에게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11세기 전의 것이었다. 1035년 동쪽에서부터 침략자들이 밀어달치자, 승려들은 벽돌을 쌓아 회벽을 칠하고 입구를 다듬어 놓은, 비밀장소에 서적과 그림을 급히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 승려들은 모두 학살당하거나 역사의 무대를 떠나 버렸기 때문에 비밀장소에 대한 기록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1900년에 이 지상 최고의 재산은 우연히 빛을 보았지만 8년간이나 어느 누구도 이 고문서들을 검토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이 고문서들의 중요성, 그것은 우리에게 핵심적이다. 중국에는 중국의 고문서가 대단히 드물다. 더욱 에는 유럽에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을 서적으로만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원재료에 의거해서 연구를 하지 못했다. 이제 이 고문서 발견 덕분에 중국학자들은 처음으로 유럽사학자들처럼 고문서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동굴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그것은 고문서와 같은 시대에 제작된 그림들로서 비단이나 대마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제 그 그림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빈약한 중국 전시관 첫머리를 장식할 것이다. 또한 그곳에는 구텐베르크보다 5세기나 7세기 앞선 8세기와 10세기의 목판인쇄물들도 몇점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인쇄물들이다.폴 펠리오(중앙아시아에서의 3년) 알베르트 폰 르 콕과 알베르트 그륀베델의 지휘 아래 1902년과 1914년 사이에 중국의 투르키스탄에 파견된 독일 탐사대는 투르판 분지, 특히 베제클리크의 '천불동'과 고창 고성에 탐사의 초점을 맞췄다. 베를린으로 가져간 수많은 그림과 조각품 가운데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중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고 추정된다.시내 중심가에서 우리는 한 무리의 폐허더미와 마주쳤다. 여러 개의 원형천장으로 덮여 있는 폐허는 세 개의 거대한 장방형 구조를 갖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은 그륀베델 탐사 계획도에 있는 K단지였다. 북쪽 내실의 높다란 서양식 벽에는 인물화가 한 점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세워진 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흰옷을 입은 사제단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제복 차림의 마니교 대사제를 묘사하고 있다. 하급 사제들의 가슴에 쓰여 있는 위구르어와 마니교 문자는 사제들의 이란식 이름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하급 사제들의 모습은 달에 가려진 태양빛같은 후광을 가지고 있는 마니(사산조 페르시아 출신으로 마니교의 창시자, 216~277 : 역주)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의 그림보다 휠씬 작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마니의 인물상은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마니교의 벽화 중 유일한 대형 벽화이며, 상태가 아주 나쁘기는 하지만 나의 소장품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발굴작업을 통해, 위구르의 옛 수도에서는 불교와 마니교와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했고, 그것은 위구르의 강대한 국력과 그에 따른 문화적 포용력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마니교가 가장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니교는 왕가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언제나 정치Ⅰ姸╂岵 이유로 외국 종교의 포교를 배척했다. 당나라 말경에 중국인들은 고창에서 외국 종파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취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바로 그 박해읭 자취를 발견했다. K단지 내의 파괴된 큰 방 중 하나에서 옷을 입은 채 미라가 된 시체들이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던 것이다. 파괴자들의 분노는 특히 불교도를 겨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마니교 경전은 그런 대로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불경들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찢어진 서적의 조각들은 그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이나 나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우리 탐사반은 고창에서 많은 청동 불상과 나무 불상들은 찾아냈고, 마니교와 불교의 봉헌 그림들, 찰흙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 조각장식이 있는 목제 대들보, 간다라 미술양식으로 세공된 나무판 조각들, 여러 개의 중국 화폐들(특히 원나라 시대), 이란 화폐와 국적을 알 수 없는 화폐들도 발굴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켤레의 신발과 모자, 각종 옷감과 도자기도 찾아냈다. 그러나 세 달 동안 아침 5시부터 저년 6시까지 작업했던 것에 비해 발굴성과는 아주 빈약했다.알베르트 폰 르 콕(투르판 고고학 탐사) 오렐 스타인은 중아아시아에서 네 차례에 걸쳐 중요한 탐사를 지휘했다. 1900년과 1901년 사이에 행해졌던 첫 탐사는 호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에서 한자와 사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상당히 많은 고문서를 발견했고, 그밖에도 알 수 없는 언어와 해독할 수 없는 글자로 된 서적을 발견하여 그 연구에 몰두했다. 결국 오렐 스타인은 그 고문서들이 가짜임을 밝혔다. 이쿤의 변명은 거짓임이 쉽게 탄로 났다. 그 첫 번째 증거는 비밀장소에서 고서를 제작하는 세 사람을 목격했다고 시인한 것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제작한 고서들을 내다 팔려고 했다는 말이었다. 스타인이 고문서들이 거짓임을 눈치채자, 그는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1894연 가니 근교 호탄 주변의 촌락에서 구입한 화폐와 도장, 그리고 골동품들을 매매했다고 했다. 바로 그 즈음 고는 아프카니그탄 상인에게서 사히브인이 투르디와 그 동업자들에 의해 단단우일리크에서 발굴되는 고서들을 아주 비싸게 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매매에 뛰어들기로 했다. 스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엄청난 시련에 직면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발견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막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이슬람인인 아쿤같이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에게는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쿤은 자신이 손수 고문서를 위조해야겠다고 착상하게 된 것이다. 곧 아쿤과 그의 동업자들은 작은 밀실에서 고문서들을 만들기 시작했다.그들의 최고 고객은, 경쟁적 관계에 있던 매커트니와 페트로프스키였다. 두 사람 모두 광적인 고객이었다. 특히 매커트니가 더 열렬했는데, 그는 중앙아시아에 파견된 영국 대표단에게 부여되었던 골동품을 획득하라는 캘커타의 훈령을 따르고 있었다. 이리하여 아쿤이 그 영국인을 맡는 한편 그의 동업자 이브라힘 물라는 러시아인에게 접근했다. 이브라힘은 러시아어 기초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조그만 신중했더라면. 이 사기집단이 만들어 낸 '알 수 없는 엉터리 글자'의 조합이 러시아어와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 방면의 전문가들잉 그런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키릴 자모(슬라브계 언어의 모체 : 역주)에 가까운 이 글자들은 고대 그리스어의 변형문자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스타인은 아쿤을 이브라임 물라와 대질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그의 동업자가 체포된 것을 알고 호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위조된 첫 고문서는 1895년에 만들어져 팔렸다. 아쿤이 스타인에게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맨 처음에는 단단 우일리크에서 나온 진본 고문서를 기초로 해서 사스크리트어의 초시체를 모방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쿤과 그 무리의 모사작업은 전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위조고문서가 유럽의 대형 박물관에 전시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문자 앞에서 계속 어리둥절해 있었다. 한편 위조 사업은 순조롭게 번창해 갔고, 동업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스타인은 그의 저서(사막 속에 묻힌 호탄의 폐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슬람 아쿤은 자신의 가짜 고문서에 대한 구매자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과, 유럽인들 중 어는 누구도 그 문자의 특징을 판독할 수 없고 또 진본 고문서와 구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챘다. 그는 진본의 글씨체를 애써 모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업자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나들기 위해 각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런 이유로 이 이상한 문자들이 놀랄 만큼 다양하게 발전된 것이다. 그래서 영국 박물관의 고서에 대한 분석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만 해도 최소한 12종류의 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해독하려고 노력했던 동양어 전문가들은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쿤과 동업자들은 가짜 고문서를 제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다가는 수요를 맞출 수 없다고 간파했다. 그래서 목판인쇄를 이용해서 제작량을 늘리기로 작정했다. 1896년, 목판인쇄에 의한 최초의 위조 고문서가 제작되었다. 이렇게 목판 인쇄된 45권의 위조 고문서들은 1899년 회르늘 교수의 저명한 학술논문에서까지 상세히 묘사되고 설명되었다. 스타인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들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여러 개의 필적이 결합된 가운데 이상하리 만치 다양한 글씨체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책의 부피와 권수도 대단하다." 아쿤은 끝까지 발뺌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시인하고 말았다. 그는 스타인에게 중국 벽지의 어느 자그마한 장소에서 고문서 위조작업을 해왔던 사실과 회르늘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오랫동안 기사 차게 속여 왔던 일을 적나라하게 털어놓았다. 웃음을 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타인은 이렇게 술회한다. "사실상 내가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쿤은 그 지역에서 구입한 종이를 사용했다고 밝혔는데, 그 종이를 현지의 나무에서 추출해 낸 염료인 투그루가로 노랗게 혹은 엷은 갈색으로 채색했다고 위조의 비밀 공법을 밝혔다. 그러나 그 작업은 때로 세심하지 못하게 이루어졌다. 거기에 손이나 목판인쇄로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정말 오래된 것처럼 그을린 자국을 얻어내기 위해' 불 위에 놓아두었다. 스타인은 캘커타 발물관에 소장된 고문서 중에서 가볍게 불탄 흔적이 있는 몇 권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조의 자국도 회르늘 교수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제본방법 또한 고서의 진실성 여부를 의심해 볼 만한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본방식을 모방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특히 최근에 발굴된 고문서들의 제본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매커트니, 페트로프스키, 회르늘과 그의 동료 교수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쿤과 그의 동업자들은 마지막으로 이 가짜 고문서들을 카슈가르로 옮겨 가 사막의 모래언덕에 묻혀 있다가 막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가져운 고운 모래로 조심스럽게 덮어놓았다. 스타인은 이렇게 전한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1898년 봄, 이 가짜 목판인쇄 서적 중 카슈미르의 한 골동품 수집상에게서 가져온 것을 검토하기 위해 우선 솔로 모래를 털어 내야 했다."피터 홉키르크(석가와 비단길의 나그네들) 미국인 랭던 워너는 투르크족에 대한 탐사를 조직한 최근의 탐험가 중 한 사람이다. 1923년, 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발굴 후 30년이 경과한 때였다. 그전의 여러 고고학 발굴단의 왕래로 인해 탐사 대상 지점은 희미해져 있었으며 거기에 정치적 문제까지 개입되어 탐사를 성공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둔황의 동굴에서 미국으로 가져갈 벽화 몇 점을 채취하기롤 작정했다. 나는 처음에, 고대 중국의 유일한 보물들 - 수세기가 지난 뒤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 벽화들 위에다 자신들의 이름과 군번을 휘갈겨 놓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식한 군인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한 짓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훼손되지 않은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많은 부분들이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느니께 감사드릴 뿐이었다. 문화, 예술 파괴자들로부터 벽화를 보호하고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벽화들에 대한 안전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몇달간 나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다. 독일인과 영국인들은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는 황토벽 뒷면을 깊숙이 파 놓았는데, 그것은 그 벽화를 잘라 내어 채색된 표면을 가져가려고 한 짓이었다. 그러나 암벽 위로 깊숙이 파 놓은 동굴들에는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 동굴들에는 1.25cm에서 5cm정도 두께로 흙과 짚의 혼합물이 바위의 거친 표면에 발라져 있었고, 그 위에 다시 흰색 석회가 곱게 덧칠해져 있었는데 벽화는 바로 이 벽 위에 대부분 수채화로 그려져 있었다. '하버드 대학 박물관 전문가들의 기술'을 차마 이 귀중한 걸작품들에 시험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분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북경을 떠나기 전, 나는 화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백묵가루처럼 부서지기 쉬운 오래된 색소를 견고히 하기위해 정착약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색이 안착되면 그림 위에 칠할 유약의 제조에 필요한 약품들도 가져갔다. 나는 화학자도 그림복원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고고학에 마음을 쏟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일종의 모독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세 병의 안짱다리 몽고인의 태도를 보고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들은 참배를 드리기 위해서 숙연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진홍색의 양복과 짙푸른 머리카락의 무시무시하게 생긴 점토 인물상 앞에 꿇어앉아서 경건하게 합장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9세기의 벽화 위에 두툼한 손을 올려놓고 수다를 떨다가 그 벽화에 몸을 기댔다. 또 다른 사람은 벽을 따라 호기심을 가지고 오락가락하다가, 비늘처럼 일어난 그림의 표면을 손톱으로 탁탁 뜯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입구의 좁은 통로를 돌아 나올 때는 입구에 그려진 여러 성자들의 그림이 그들의 지저분한 양가죽 옷에 마구 쓸렸다. 얼마나 자주 그랬던지 그림들은 거의 희미하게 지워져 형체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수백 명의 양가죽 어깨와 팔꿈치에 지워져 간 것이다. 그것으로 용기를 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경외심을 갖고 시도하려고 하는 모든 시험은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엄숙한 기분을 느끼며, 북경의 한 화학자가 말라 버린 색소들을 정착시키는 데 쓰라고 내게 주었던 무색의 액체풀과 비슷한 뜨거운 염료를 그림 위에 칠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들이 계속 따랐다. 동굴의 온도가 빙점 아래였기 때문에, 정착액이 얼어붙지 않고 석교벽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끓인 젤리 상태의 정착약이 미처 굳기 전에 수직의 벽면 위에 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왕씨와 다른 인부가 장착액을 데우는 화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그 동안에 나는 정착약을 칠할 채비를 갖추었다. 뜨거운 조청 같은 정착액 덩어리들이 내 얼굴과 머리, 옷에 떨어졌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뭉클뭉클한 덩어리를 손가락에 묻혀서 순간적으로 아주 민첩하고 꼼꼼하게 처리해야 했다. 먼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그림의 표면 위에 시험해 보았지만 성공의 여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가치가 있는 부분에 정착약 처리를 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져가서는 포그 미술관의 동료에게 희미하게 바래진 색채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해 달라고 맡겨야만 했다,랭던 위너(중국의 오래되고 긴 길) 대화의 통로, 비단길 유네스코의 새로운 기획 그것은 1,500년 이상이나 동서양을 잇는 대동맥 구실을 했던 육로와 해상로를 5년 동안 답사하고 연구하는 장대한 기획이다. 그 길들은 무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풍성하게 해준 사상, 문화, 그리고 종교의 교역로이자 전파의 통로였다. 유네스코가 1,00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비단길에 새롭운 조명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 계획은 민족간에 문화전파와 상호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해줄 것이며, 동서결합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제1차 모임을 파리에서 가졌는데, 러시아, 중국, 파키스탄, 이란, 인도, 프랑스, 이집트 등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참가했다. 이 모임은 이 역사적인 기획의 큰 골격을 정하기 위해서 개최되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비단길의 두 축인 육로와 해상로를 실제로 답사하고, 그것을 세계 최초로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이 그 모임에서 결정된 목적이었다. 36개국이 모여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기획에는 1,000여 명에 가까운 세계 가국의 학자들이 참여할 것이다. 또 비단길과 관련된 주요 국들은 각자 주요 관련 지역에서 열릴 세미나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의 허미티지 박물관이나 알렉산드리아, 베네치아, 아수하바트, 이스탄불, 우룸치, 서안, 택실라 등지에서 세미나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계획을 가장 매력적인 구상으로 만드는 것은 탐사여행이다. 파키스탄의 아마드하산 다니 교수가개인자격으로 1988년 8월과 9월에 이미 소위 '중국 피키스탄 하이웨이' 탐사계획을 제안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칠라스, 훈자 지역, 인더스 질기트와 같은 파키스탄의 주요 지점과 카슈가르, 고묵, 귀현, 우룸치 등의 중국 쪽 주요 지점들을 잇는 여행이 전개될 것이다. 1989년에는 레닌그라드의 유명한 허미티지 박물관이 북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중국으로 가는 여행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1990년에는 해상로 탐사대가 마르코 폴로의 고행 베네치아에서 출발할 것이다. 해상로의 여정은 알렉산드리아, 오만의 무스카트, 카라치, 콜롬보, 수마트라섬의 팔렘방, 광둥, 그리고 8세기 때 중국으로 가는 일본 사신들의 출발지였던 오사카 등으로 예정되어 있다. 1991년 이스탄불에서 서안에 이르는 마지막 탐사여행로에는 서안에 이르는 마지막 탐사여행로에는 시리아, 이라크 그리고 이란이 포함된다. 계획에 따라 비단길을 여행하고 탐사하는 데에는 5년이 걸린다. 이 기획은 1992년 파리에서 대학술회의와 국제전람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총예산은 300만 달러 이상이 든다. 그 비용은 회원국들의 기부금과 이 장대한 탐구와 여행사업에 동참하게 될 해운회사, 항공회사, 자동차 회사 등의 성금으로 충당될 것이다.미셀 랑동.(르 파가로1987년 12월 17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