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비극의 연금술사 지은이 : 프랑수아 라로크 출판사 : (주)시공사 봉사자 : 숙명여자대학교 통계학과 9670617 박현희 셰익스피어는 전세계적으로 천재라고 인정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디서나 읽히고 공연된다. 그러나 장갑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남들보다 많은 교육을 받은 편이 아니었다. 주변 세계 에 강렬한 호기심을 갖고 있던 셰익스피어는 나중에 희곡을 쓸 때 어릴 적부터 기억하고 있던 장 면을 많이 이용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는 시골의 풍습과 미신, 시장, 대중적 오락행사 등이 그대 로 간직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만큼 드라마의 소중한 재료가 되었다. 제1장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 1550년경 존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에 자리잡은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웃 마을인 스니터필드에서 이사 왔는데 그의 아버지 리처드 셰익스피어는 그 마을의 부농 이었다. 스트래트퍼드에 정착한 존셰익스피어는 장갑제조업을 시작했고 양모와 소고기도 팔았다. 1557년 그는 로버트 아든의 여덟 딸 중 막내인 메리 아든과 결혼했다. 부유한 처가는 워윅셔 군 의 한 마을인 윌름코트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은 스니터필드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이었다. 스트래 트퍼드는 아름다운 삼림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특히 장이 자주 서는 것으로 유명했다. 런던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이틀, 걸어가면 나흘이 걸렸다. 그리고 중부지방의 대처인 우스터, 워윅,옥스퍼드가 모두 아주 가까이 있었다. 스트래트퍼드는 에이븐강에 위치하여 전략적 으로 요충지였다. 이 마을의 어원을 따져 보면 그 사실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스트래트퍼드 는 '로마인의 닦은 길이 강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중세에 우스터 주교의 영지였는데,12세기 말에 이르러 어느 정도 자율권을 획득했다. 13세기에 지어진 멋진 성 트리니티 교회와 길드 채플교회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길드 채플교회는 그래머 스쿨을 건립했 는데, 16세기에 이르러 에드워드 4세는 이 학교에 킹스 누 스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또 한, 스트래트퍼드에는 지방유지인 휴 클롭턴이 1490년에 축조한 석조다리가 있다. 클롭턴은 런던 에서 돈을 벌어 이곳에 뉴 플레이스라는 저택을 지었는데, 뒤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집을 사 들인다. 존 셰익스피어는 스트래트퍼드로 이사 와서 사업이 번창했다. 1556년에는 집을 두 채 구 입했고 그중 하나인 헨리 스트리트의 집에서 1552년 이후 죽살았다. 그는 곧 공직생활에도 뛰어 들어 1557년에는 읍의회에 들어갔고 1556년에는 부읍장, 1568년에는 읍장이 되었다.1569년에는 문 장을 수여받고 젠틀맨(gentleman,영국 역사에서 귀족과 자유민의 중간계층을 일컫는다:역주)이라 는 칭호를 얻어고 했으나 실패했다.그리고 여기서 그의 신분상승은 끝나고 만다. 1577년무거운 벌 금과 불어나는 빚 때문에 그는 아내의 부동산을 저당잡히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 문에 그는 읍의회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마침내 1586년에는 읍의회에서 축출되었다. 또 채 권자를 만날까 봐 교회에도 다니지 않게 되었다. 초기시절 교구 교적부의 1564년 4월26일자 기록 반대편 비고란에는 'Gulielmus filius Johannes Shakspere(존 셰익스피어의 아들 윌리엄)'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헨리 스트리트의 작은 집에서 태어난 윌리엄은 존 셰익스피어 부부의 첫아들이었고 8남매 중에서 셋째였다. 윌리엄 셰익스피 어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의 탄생 기념행사를 4월23일에 치른다. 윌리엄은 스트래트퍼드에 있는 지방 학교에 다녔다. 16세기의 아동들은 대여섯 살 때부터 학습을 시작했는데 'abecedarius'라는 학교선생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을 배웠다. 학생들은 혼 북(hombook, 알파벳을 적은 종이를 투명하고 얇은 판으로 덮고 손잡이를 붙인 18세기 중엽까 지의 어린이 교과서:역주)을 보고 알파벳을 익혔고<성서>로 읽기를 배웠다. 학생들은 또 라틴어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을 암송해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는 학교선 생이 희극적인 인물로묘사되곤 한다. <사랑의 헛수고>에 나오는 잰 체하는 홀로펀스난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4막1장)의 그들인데 에번스목사는 아주 우스꽝스럽게 라틴어강의를 진행하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또한 <좋으실 대로> (2막7장)에서는 제임스가 인간성장의 일곱 단계를 언급하게 하면서 학교시절을 회상하고 있다."책가방을 메고 징징 울고 있는 학생/아침처럼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달팽이처럼 기어가는구나/학교에 가기 싫어서"아침6시에 시작하여 오후5시까지 계속되는 학교생활은 너무나 지루했다. 아주짧은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 고작일 뿐이었다. 윌리 엄이 열한 살이되어 들어간 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은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을 배워야 했다. 또 라틴어 학습도 계속되었는데, 교재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헤로이데스>, 베르길리우스의 <아 네이드>, 그리고 키케로, 호라티우스, 살루스티우스등 주로 로마 시대의 고전이었다. 학생들은 그리스어도 배웠는데, 2세기경에 쓰인 루키안의 <대화>에서 시작하여 <신약성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학업은 느닷없이 끝나고 말았다. 런던에서 자라난 동시대의 '대학출신'극작 가들과 달리 그는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 당시는 호기심이 강한 재능 있는 중등학생이 독 학으로도 충분히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의 타고난 언어능력과 무대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은-여기에 놀라울 정도의 근면함과 비옥한 창조력이 덧붙어-그가 폭넓은 범위의 작품을 생산해 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농촌세계, 계절의 변화, 인생의 순환 농가출신인 셰익스피어는 농촌풍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동식물의 이름 등 자연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다. 오필리아의 죽음에 대한 여왕의 유명한 연설 <햄릿>(4막7장) 에서 식물과 꽃은 강력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오필리아가 미치광이 되어 풀과 꽃을 내미는 바로 그 장면에서 식물의 상징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밤의 꿈> <오 셀로> <겨울 이야기>, 그리고 14행시 등에서 장미, 약초, 낙엽 등은 계절의 순환을 상기시키고 피할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동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새들도 많이 나오는데 특히 아침의 전령인 종달새와 저녁에 우는 나이팅게일일 단골이다. <맥베스>에는 야행조와 육식조, 즉 올빼미·솔개·독수리·송골매·까마귀 등이 많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가 애용하는 다른 동물로는 박쥐, 뱀, 호저, 곤충 들이 있다. 곤충은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으로 등장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마브 여왕의 대화 속에서 나온다. 토끼, 야생뱀, 사슴은 사냥 감으로 등장하고 반드시 그들을 뒤쫓은 사냥개들도 함께 나온다. <좋으실 대로>에서 치명상을 입은 사슴은 극중의 신사인 제익스에게 한없는 동정을 받는다. 셰익스피어는 농촌지역에서 쉽게 보이는 동물들만 출현시킨 것이 아니라, 영국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동물이나 상상 속의 동물도 등장시켰다. 코뿔소, 호랑이, 코끼리, 곰뿐만 아니라 일각수, 불사조, 용 따위 신화적 동물도 작품 속에 널리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귀족들의 문장에 새겨진 동물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곰은 워윅가의 상징이고 야생뱀은 요크가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인 동물우화는 동물들간에 위계질서를 부여했다. 사자, 독수리, 돌고래 들은 신성한 왕권을 상징하고, 당나귀, 돼지, 염소, 쥐, 원숭이 들은 불결한 동물로서 탐욕을 상징했다. 악마학을 연 구한 신학자들의 주장과 중세의 여성혐오 풍토 때문에 뱀은 종종 여성을 상징했다. 뱀과 여자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뱀이 이브를 유혹한 탓도 있지만 당시 유행하던 민간 생리학에서 여자와 뱀을 둘다 차갑고 음습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동물세 계에 설정된 위계질서는 사람들의 식습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사순절 같은 때에는 육식을 금하고 그 대신 송어, 뱀장어, 굴 따위 생선을 먹었다. 말하자면 남자와 고기, 여자와 생선을 함께 묶어 생각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별자리와 행성의 움직임도 식습관형성에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12별자리나 행성이 사람의 기 질을 규정하고 인체의 각 부분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믿음을 극중 인물들이 그대로 실천하게 만들어 그런 믿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그것을 상징, 관습, 민속의 수 준으로 승화시켰다. 자연에서 빌려 온 이와 같은 이미지는 극의 호소력을 더욱 높여 극의 사실 성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이런 세부사항들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더욱 수준 높은 사 실적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의 극은 자연에 들이댄 거울 같은 작 용을 하여 자연을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부분을 풍성하게 비춰 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또한 설화, 전설, 민담 같은 구전문학을 절대로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가 그려 내는 시골풍경은 투박 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헨리4세>(제1부, 1막1장)에서 폴스타프 일행이 개즈힐에서 순례자들을 공격하기 직전의 장면에서 짐꾼들이 나누는 대화라든가, <겨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양털 깎는 장면(4막4장)등은 좋은 예이다. 시끌벅적한 시골장터나 가축 검사관의 모습, 또 양모의 값을 흥정 하는 풍경 등은 그의 극을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이면서 사실성을 부여하고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방문 시골에서는 휴일이나 축일 같은 때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축하잔치나 의식을 베풀곤 했는 데, 어린 셰익스피어는 그때마다 유랑극단의 연극을 볼 수 있었다. 스트래트퍼드는 사통팔달의 요 충지였기 때문에 유명한 극단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다. 1573년과 1576년에는 레스터 백작휘 하의 극단이 이곳을 방문했고, 1579년에는 스트레인지 경의 극단이 찾아왔으며, 1584년에는 에섹 스 백작의 극단이 들러 갔고, 1587년에는 퀸 극단이 다녀갔다. 그러나 여왕의 방문은 아주 이례적 인 것이었다. 1575년 7월, 엘리자베스 1세가 레스터 백작이 여왕을 위해 개최한 축제에 참석하느 라 스트래트퍼드 근처에 있는 케닐워드성을 방문했다. 축제는 여왕과 신하들을 현지에 초빙하여 3주 동안 화려하고 멋지게 진행되었다. 또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인근 농촌지역에서 모여 든 주민들을 위한 대규모 옥외행사도 개최되었다. 교묘하게 꾸며진 신화극이나 불꽃놀이 같은 오 락행사가 밤낮을 이어 진행되었는데, 그러한 행사들은 르네상스 축제의 전통을 걸맞게 대단히 화 려하게 진행되었다. 고향 근처에서 벌어진 이번 축제는 셰익스피어에게 화려한 연극을 접할 기회 를 주었고 연극이 갖는 마법에 일찌감치 눈뜨게 했을 것이다. 대중연극, 가장행렬, 신비극 종교개혁 동안에 교회의 휴일과 축일은 크게 줄어들어 단출해졌다. 청교도들은 시골의 관습과 계절의 순환에 바탕을 둔 옛 휴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가령 메이폴(maypole, 5월제를 축하 하기 위해 꽃이나 리본으로 장식한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서 모리스 춤을 추는 메이데이는 이교도와 악마 숭배를 부활시키는 방탕한 축제라고 여겨져 공개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583년에 발간된 <남용의 해부>라는 책에서 청교도적인 팜플렛의 저자인 필립 스타브스는 이 유서 깊은 봄날의 축제를 악마적 의식이라고 매도했다. 행정관리들은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앞뒤 가리지 않고 마을광장과 거리를 장식한 5월의 꽃들을 마구 떼어냈다. 또 국왕 소유의 수풀에서 나무나 나뭇가지를 꺽은 마을사람들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풍요를 기원 하는 오래된 의식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연면히 이어져 왔고, 셰익스피어의 극은 이 같은 대 중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오래된 전승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 상연하는 무언극 속에서 용감한 성 조지는 거인 또는 투르크 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지만 마법의 불로장생약 덕분에 다시 살아나서 적을 누르고 이기는 통쾌한 장면을 연출한다. 주인공의 희생적인 죽음과 그뒤의 부활이라는 모트프는 반이교도적인 축제행사에서 널리 쓰 였던 것인데, 이 모티프는 중세의 신비극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유랑극단이 많이 공연했던 신비 극에서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에서 빌려 온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었다. 이 같은 연극은 그리스도 성체성혈대축일에 공연되었다. 그리스도 성체성혈대축일은 1264년에 교황 우르반4세가 제정한 축일로 카톨릭력에서 해에 따라 날짜가 바뀌는 이동축일(a movable holy day)이었다. 이 축일은 5월21일과6월24일 사이의 하루를 정해 봉축한다. 5월과6월은 낮이 길기 때문에 비교적 긴 신비극을 상연하기에 알맞은 때이기도 했다. 헤롯과 같은 인물의 장엄한 웅변술 이외에도-햄릿은 웅변을 잘하는 배우를 '폭군헤롯왕에다 한술 더 뜬 격'(3막3장)이라고 말하고 있다-신비극은 노 아와 그의 아내 사이의 소란스런 싸움이나 악마의 등장에 따른 방탕한 유머를 소개하고 있다. 15세기에 이르러 도덕극은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한편, 더욱 세속적인 양태를 띠게 되었다. <에브리맨>이라는 도덕극은 죽음, 자비, 우둔, 쾌락 등을 의인화하여 극중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인내의 성>같은 극은 웅장한 개인저택, 마을공회당, 오늘날 대형 서커스가 펼쳐지는 무 대와 비슷한 장소에서 유랑극단이 공연했다. 도덕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터루드 (interlude)라는 짧은 극이 있었는데, 이것은 잔치를 벌이는 중간에 간단하게 상연되었다. 예를 들어 인터루드는 결혼이라는 주제를 놓고 길다란 토론을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극 중간에 '악한'으로 알려진 광대가 등장하여 음탕하고 외설적인 농담을 질펀하게 늘어놓곤 한다. 세례, 결혼, 그리고 장례 교구기록부에 등재되어 있는 세례일과 결혼일을 빼놓고는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증명해 주는 서명증거는 별로없다. 그렇지만 한 인간의 생애는 전통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 여지는 통과의례에 족적을 남기게 된다. 이 같은 통과의례는 그 기원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헨리 언턴 경이 탄생, 삶, 죽음의 세 단계를 기록한 그림 이다.(32-33페이지), 셰익스피어도 인생의 몇단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 특히 <좋으실 대로> 에서 그것을 7단계로 나누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들 여러 가지 행사에 따르는 의식은 그 중요성 때문에 손상되자 않고 보존되었다. 그러한 의 식은 악령을 물리치고 요정의 사악한 행동을 막아 내는 데 필요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요정을 섭섭하게 대하면 요정이 요람에 들어 있는 아기를 기형아나 업동이로 바 꿔치기 한다고 믿었다. 귀족의 결혼 피로연에는 매스크(masque)라는 가면극이 상영되었는데 이 극에는 하이멘(hymen, 결혼을 관장하는 로마의 여신)과 주노(Juno, 결혼을 관장하는 그리스의 여신)가 등장했다. 또한, 그 행사에는 음악과 무용이 곁들여져 한껏 흥을 돋우었다. 격식에 맞는 장례도 죽은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꼭 필요한 행사라고 여겼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장원제와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귀족들이 재정적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런 행사도 화련한 측면이 많이 사라져 단출하게 되었다. 요정, 마귀,초자연적 세계 꼬마요정, 요정, 퍽이나 로빈 굿 페로라고 알려진 작은 마귀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좋게 인 식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은 밤이면 나타나 꼬집거나, 화나게 하거나, 지하왕국으로 가자고 유 혹하거나, 악몽을 갖다 주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고향 근처를 방문한 여왕을 위해 공연한 연극에서 본 이들켈트의 전승 속의 요정을 극 속에 끌어들여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한여름밤의 꿈>에서 요정의 왕인 오베론과 요정의 여왕인 티타니아는 몸집이 인간만한데, 비 유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같은 극에서 나오는 티시어스 아테네 공작과 이 공작의 약혼녀인 히펄 리타라는 아마존 여왕과 대칭을 이루는 밤의 남녀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요정의 사악한 측면은 희석시키고 그 대신 비교적 악의 없는 장난기를 돋보이게 묘사했다. 티타니아의 궁정에는 콩꽃, 거미줄, 부나비, 겨자씨 따위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요정들이 나오는데, 이 역할은 노래와 무용에 재능이 있는 소년들이 맡는다. 이에 비해 마귀는 공포의 대상으로 나오고 있다. 영국은 유럽 대륙의마귀 안식일이나 밤의 악마 숭배 같은 마귀의 이미지에 익숙하지 않은 나 라이지만, 그래도 마귀는 무서운 존재였다. 영국에서 마귀는 주로 늙은 여자로 나타나는데 가축 들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신랑들에게 사악한 물약을 마시게 하는 나쁜 존재로 알려져 있다. <맥 베스>에 나오는 '마녀 세 사람'이 바로 그 마귀로 그들은 절대악의 화신이다. 동시에 이 마녀 들은 셰익스피어 당시에 마법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났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마귀에 대한 믿음은 농촌의 생활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종교개혁으로도 완전히 박멸 하지 못한 이교도주의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스튜어트 왕조는 신비하고 모호한 특성을 가진 옛 신화를 보존하는 데 열심이었고 특히 왕정복고기(청교도 공화정이 붕괴하고 군주제가 다시 들 어서는 시기)에는 작곡가 헨리퍼셀 경이 <아서왕>과 <요정의 여왕>이라는 세미 오페라(semi- opera)에서 옛날의 신화를 재현했다. 그중 <요정의 여왕>은 바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에서 그 아이디어를 빌린 것이다. 동시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초자연적인 소재는 셰익스피어의 극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에게 영향을 준 극작가로는 로마의 세네카와 <스페인의 비극>(1587)을 쓴 토머스 키드를 비롯한 엘리 자베스 시대의 다른 극작가들을 거론할 수 있다. 햄릿 아버지의 망령-이 망령은 연옥의 영혼이라 기보다는 이교도의 유령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다-이 등장할 때 관객들은 커다란 공포감에 휩싸이 면서 입을 딱 다물게 한다. 그리하여 완전한 정적 속에서 배우(아마도 망령 역은 셰익스피어 자 신이 맡았을 것이다)는 멋진 대사를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영계에서 온 인물의 등장은 시끄러운 관중들을 대번에 조용하게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수법이었다. 결혼과 '행방불명의 세월' 셰익스피어는 학교를 떠난 뒤에 한동안 가업인 장갑제조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1582년-이 해 열여덟이었다-11월28일이라고 날짜가 기록된 문서에는 셰익스피어와 앤 해서웨이의 이름이 나 란히적혀 있다. 이 문서는 우스터의 주교가 스트래트퍼드 인근 쇼터리 출신인 농부의 딸 앤과 결혼해도 좋다고 허락한 결혼허가서이다. 앤은 그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고 임신 3개월이었다. (아마 이 때문에 주교의 허가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1583년5월23일 큰딸 수산나가 태어났고, 2년 뒤에 주디스가와 햄닛이라는 쌍둥이가 태어나 1585년 2월 2일자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부터 약 8년동안 셰익스피어는 공식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다. 골동품 수집가 존 오브 라는 <인물약전>에서 그가 어느 귀족 집안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을 거라 추측한다. 한편, 시 인이며 극작가인 윌리엄 대브넌트는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연극계로 뛰어들어 극장 문 앞에서 말을 관리하거나 프롬프터(prompter,대사를 잊은 배우에게 대사를 알려 주는 사람:역주)로 일했을 것이로 보는데,이 추측이 더 현실성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퀸 극단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이 극단은 단원 한명이 싸움을 하다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필요했고, 당시 연기는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때우면서 배우는 것이었으니까 경력이 필요없었고 그래서 손쉽게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1592년, 셰익스피어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수도의 매력적인 모습에 사로잡혔다. 헨리8세치세기(1509∼1547)에는 인구가 5만밖에 되지 않던 작은 도시 런던은 농촌 인 구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엘리자베스 1 치세기(1558∼1603)에 인구 2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구가 넘쳐나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런던이었지만, 그곳에는 다양한 활동과 볼거리, 그리고 연극이 있었다. 제2장 런던 16세기 후반 영국의 수도 런던은 시티(City)라고 알려진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남쪽 으로는 템스강이 경계이고 시티 구역은 서쪽의 플리트 디치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런던탑을 연 결하는 반원형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좁은 곳에 미로 같은 좁은 길들이 실핏줄처럼 얼 기설기 연결되어 있었다. 큰길은 딱 두 개뿐이었는데, 하나는 동서를 연결하는 길이고 다른 하 나는 남북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동서대로는 동쪽의 뉴게이트에서 시작하여 알드게이트를 지나 치프사이드, 콘힐, 그리고 레든홀 등을 지나갔고, 남북대로는 북쪽의 비숍게이트에서 시작하여 남쪽에 있는 런던 브리지까지 뻗어 있었다. 시민들은 템스강을 건너기 위해서 유일한 다리였던 런던브리지를 이용하거나, 양쪽 강둑에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조그마한 거룻배들을 타야했다. 20만이라는 대인구는 주로 시티의 성벽 내에 갇혀 있었다. 러드게이트 동쪽에 있는 언덕 꼭 대기에는 성 바오로 대성당이 우뚝 솟아서 교회 첨탑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시티 구역을 굽어 보았다. 성 바오로 대성당 주위는 출판 지역이었고, 셰익스피어도 한때 이 지역에서 살았다. 가게 주인과 제조업자들은 시장이 통치하는 시티 구역에서 사업을 벌였다. 시장은 12개의 길드(guild, 동업조합)에서 뽑았는데, 길드는 자기 업종의 특권을 지키는 데 온힘을 다 기울이는 집단이었다. 귀족들의 저택과 궁전들은-서머싯 하우스, 사보이, 왕궁, 화이트홀 정원 등-모두 강둑을 따라 건축되어 웨스트민스터까지 뻗어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으로 이주했을 무렵 도시는 막 팽창하고 있었다. 제조업자들과 가게 주인 들은 영업활동에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그들과 숙식을 함께하곤 하는 종업원들을 잘 보살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작업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의 일은 대단히 고달펐다. 특히 시티 구역에서는 신부들이 일반대중의 도덕심을 엄격하게 감독했기 때문에 작 업장 분위기는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극장이나 오락장은 리버티스(liberties, 시티의 관할권이 미치지않은 자유구역)라는 시티 외곽 지역에 위치해야만 했다. 그중의 하나인 블랙프라이어스 지역은 종교개혁 이전에는 교회의 땅이었다. 가끔 시티 구역 내에서도 연극이 상연되곤 했는데, 요란한 간판을 내건 여관이나 술집이 무대로 제공되었다. 런던의 남쪽 경계인 템스강에는 고기가 많아서, 시민들은 이 강을 런던의 보고라고 생각했다. 템스강은 도시의 대동맥이었다. 많은 화 물이 운반되었는데, 왕실 소유의 대형 화물선부터 상인들의 조그마한 거룻배까지 수많은 배들이 강 위를 떠다니며 장관을 이루었다. 시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농촌지역이 자리잡고 있 었다. 첼시, 무어필즈, 양궁장으로 유명한 핀스베리 필즈, 런던 시민들이 일요일이면 자주 나가는 패딩턴 등을 들수 있다. 그리고 스트랜드를 따라 서쪽으로 화이트홀이라는 마을까지, 왕궁을 둘 러싸고 공원과 정원들이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흑사병 많은 농촌인구가 런던으로 몰려들자 시티 성벽 내의 들판과 정원들은 건물용지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도시 위생시설이 열악해져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전염병은 도시의 사악함을 심판 하는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극장은 곧 폐관 조치되었다. 이런 조치는 전 염병을 다루는 효과적인 예방책은 아니었지만,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흑사병은 1564년, 1592∼1593년, 1603년, 그리고 1623년에 런던을 휩쓸었는데, 전체 희 생자는 약 10만 명에 달했다. 흑사병은 도시 외곽에서 중심부로 퍼졌고, 시체를 운반하는 수레가 지나갈 때는 종이 울렸다. 시티 성벽 바깥에는 극장, 유곽, 동물원(여기서 닭싸움, 개싸움, 곰과 황소 괴롭히기 등 여러 가지 놀이가 벌어졌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이곳에는 거지, 소매치기, 방물장사들이 무사태평한 무정부적 분위기에서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야간에는 위험한 우범 지대로 알려지게 되었으나 런던 시내보다 범죄율이 더 높은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은 런던탑의 성벽 밑을 지나야만 갈 수가 있었다. 런던탑은 정치범을 가두는 곳이었는데, 사자와 미국에서 데려온 인디언을 구금해 둔 왕실 동물원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건물 사이로 난 보행자 및 수 레용 도로를 이용하여 런던 브리지-당시에는 이 다리의 아치가 20개나 되었다-를 건너가야 했다. 셰익스피어, 연극계를 주름잡다 1585년 쌍둥이가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긴 뒤로 흔적이 사라져 버린 셰익스피어는 1592년 소설가, 시인, 극작가인 로버트 그린의 소책자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린은 젊은 셰익스피어의 출세과정을 증명하는 유일한 자료를 남겼을 뿐만아니라 당시의 연극계를 다룬 자세한 정보도 적어 놓고 있다. 특히 배우와 극작가 사이의 경쟁의식, 또 배우조합들 사이의 경쟁의식 등을 자 세히 묘사한 대목은 무척 흥미로운 읽을 거리로 평가되고 있다. 사후 3개월 만에 발간된 <많은 후회로 매입한 서 푼어치의 기지>라는 책에서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아름다운 깃털로 장식한,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매도한 다음, 더욱 맹렬한 어조로 "배우라는 가죽에 둘러싸인 호랑이 같은 마음"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호랑이 같은 마음'이라는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6세> 제3부(1막4장)에서 요크 공작이 마거릿 왕비를 자칭하여,"아, 여자의 가죽을 쓴 호랑이의 마음"이라고 한 데서 빌려 온 말이다. 그린은 또한 "셰익스피어는 그 누구 못지않게 무운시를 써 낼 수 있고 또 뻔뻔스럽게도 능력을 과신하여 자기가 최고의 셰익신(Shake-scene)이라고 생각 하는 듯하다."라고 썼다. 그린은 그를 모욕하려고 셰익신이라는 조어를 썼겠지만 신통할 것도 없는 말장난이다. 동시대인, 친구, 스승 셰익스피어는 문학의 불모지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인물은 아니다. 16세기에 이르러 연극은 하나의 제도가 되었고, 교양 있는 젊은이들이 연극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진지하게 도전하고 나섰다. 이들 중 첫손 꼽히는 인물 존 릴리는 많은 풍속소설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의 소설의 주인공 유푸스(Euphues)는 말을 빙빙 돌려서 했기 때문에 완곡어법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유 피미즘(euphuism)의 어원이 되었다. 릴리의 극은 <엔디미온>(1591)이나 <갈라테아>(1592)같은 신화적 배경을 가진 것과 <봄비어머니>(1594)등처럼 민속적인 내용이 깃들인 희극들이 있다. 소년 배우들이 공연한 릴리의 극은 궁중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극작가 조지필은 가면극 형태의 전원희극 <파리의 탄핵>(1584)과 <되풀이하여 거듭되는 이야기>(15950등 두 작 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후자는 극 속의 극이라는 장치를 도입했고, 기사도적 분위기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이자 크게 성공하지 못한 극작가 로버트 그린은 역사적 이야기에 환상을 섞어 넣으면서 플롯과 보조 플롯을 짜 넣는 기법을 섰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에 연극이 활짝 꽃핀 것은 토머스 키드와 크리스토퍼 말로 덕택이었다. 이들은 고상한 감정을 묘사하는 수준 높은 본격 비극을 섰다. 말로의 대사는 에드워드 앨린 같은 수준 높은 배우의 입을 통해 로즈 극장의 객석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말로는 28세에-술집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상대의 칼에 눈을 찔러 죽었다-창창하던 문학적 장래를 뒤로 하고 생의 종지 부를 찍었다. 말로의 주인공, 예를 들어 정복자 탬벌레인 또는 예견자 파우스투스 박사는 지식의 경계를 넓히고 인간의 조건을 향상시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런 인물들 때문에 말로는 르 네상스적 인간의 화신으로 칭송받고 있다. 키드의 <스페인의 비극>은 최초의 복수극으로 셰익 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극작가들이 그것을 본받아 유사한 희곡을 썼다. 이 극의 주인공인 늙은 히에로니모는 미친 척 행동하면서 장대하고 유혈낭자한 복수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셰 익스피어가 런던의 연극계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말 로가 때 아니게 사망하자, 스트래트퍼드 출신 신진 극작가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정을 빗대어 로버트 그린은한 소책자에서 셰익스피어가 빛나는 선배 들의 깃털을 가지고 자기를 미화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빠른 출세 당시 가장 유명한 극단의 단원인데다 경쟁자가 없는 상황을 맞이한 셰익스피어는 아무런 방 해도 받지 않고 즉각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빠른 출세는 새로운 세대가 연극계를 평정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1590년과 1597년 사이에 셰익스피어는 주로 사극을 썼다. 사 극은 다시 두 개의 4부작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4부작은 <헨리6세>1∼3부, <리처드 3세>이며 두 번째 4부작은 <리처드 2세> <헨리4세>1∼2부, <헨리5세>이다. 그는 또한 12세기초를 배경 으로 하여 <존왕>이라는 단발 사극도 썼다. 이런 사극을 쓰기 위해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의 역 사가 라파엘 홀린셰드의 역사책,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연대기>를 탐독했고,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 역사책은 1577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0년 뒤인 1587년에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와 방주가 풍부하게 보태져 다시 출판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사극들을 쓰는 한편 1593년과 1600년 사이에는 10편의 희극을 무대에 올랐다. <실수연발>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헛소동> <좋으실 대로>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그리고 <12야>가 그것이다. 비극으로는 세네카와 키드의 영향을 받은 복수극인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 불행으로 막을 내리는 열정과 희극을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셰익스피어는 극중인물이나 플롯을 스스로 창조한 경우가 없다. 그는 민긴전승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주제를 취해 왔다. 그러나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빌려 온 줄거리를 크게 손질하기도 했고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창작태도 덕분에 당시의 관심 있는 문제들과 화젯거리가 되는 주제들, 말하자면 영국 역사, 낭만적인 음모, 복수, 광기, 마술 등을 용이하게 다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커다란 성공을 거둔 데에는 이러한 각색재능이 큰 몫을 했다. 배우, 작가, 주주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를 공격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로드 스트레인지스 극단 내 부에 퍼져 있던 경쟁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이 극단은 로즈 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극장주는 필립 헨슬로 였다. 헨슬로는 로즈 극장에서 상연한 연극과 수입을 자세하게 기록한 경리장부를 남겨 놓았는데, 그린이 쓴 두 편의 극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 편은 <베이컨 수사와 벙게이 수사의 명예로운 역사>라는 희극으로 1592년 2월 19일에 공연되었고, 다른 한 편은 <올란도 푸리오소> 라는 비극으로 그 직후에 공연되었다. 두 연극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이에 비해 3월 3일에 공연된 연극은 엄청난 수입을 올려서 커다간 성공을 거두었다고 헨슬로는 언급하 면서.'해리더 식스(harey the vi)'라고 적어 놓았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2부를 그 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성공을 거둔 출발 직후에 런던에 흑사병이 돌았다. 시당국은 또다시 공공극장을 폐쇄했다. 극단은 해체 되었고 배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연극을 공연할 수 없게 된 셰익스피어는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능욕>이라는 두 편의 설 화시(narrative poem)를 써서 셰익스피어 후원자인 사우 샘프턴 백작 헨리 로트슬리에게 헌정 했다. 1594년 극장이 문을 열고 공연이 재개되자 셰익스피어는 챔벌린 극단 소속으로 무대에 되돌아 왔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한 배우로는 윌리엄 켐프와 리처드 버비지 등이 있다. 이들은 크리스 마스 축제 동안 궁정에서 셰익스피어의 <실수연발>을 2회 공연했다. (로드 스트레인지는 1593년 4월 16일에 죽었고 1594년에 그의 극단은 궁내대신인 헨리 케어의 소유로 넘어갔다. 챔벌린 극 단은 성벽 북쪽지역인 비숍게이트에 위치한 제임스 버비지의 개인 소유 극장인 '시어터'에서 주 로 공연했다. 또한, 챔벌린 극단은 필립 헨슬로와 말로의 비극을 잘 소화해 낸 당대의 인기 배우 에드워드 앨린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리하여 헨슬로와 앨린은 당시 해군장관이던 하워드 어브 에핑험 경의 휘하로 들어가 로즈 극장에서 활약했다.) 챔벌린 극단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여섯 명의 주연 배우는 주주의 형태로 참 여했고 공연의 이익금을 직접 분배받았다. 배우들은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고 극장주에게는 임대료만 내면 되었다. 반면에 헨슬로가 장악한 애드미럴 극단은 헨슬로가 배우들에게 먼저 돈을 대주었기 때문에 배우들에 대한 감독권이 잘 확립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이때 이후 극단을 바꾸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배우와 극작가로서 자신의 지위를 굳건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는 작품 발표가 줄어드는 시기인 1608년까지 배우로 활동하면서 1년에 평균 두 편 꼴로 희곡을 썼다. 연극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때부터 한 극단에서만 일하기로 마음먹은 덕분에 그는 손쉽게 첫 성공을 거둘수 있었고,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시대와 재코비언 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가 될 수 있었다. 부유한 사람 셰익스피어 그린이 벼락출세했다고 매도한 셰익스피어는 이재의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수익성 있는 사업을 가려내는 안목을 갖추었고 돈을 갚지 않은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채근하여 돈을 받아 내는 집요함도 지녔다. 그의 이름은 세금기록부에도 나오고 또 이웃사람들과 벌인 각종 소송을 기록한 문서에서도 보인다. 바로 이런 문서 때문에 우리는 그가 1599년부터 한동안 템스강 건너편에 새 로 문을 연 글로브 극장 근처 사우스윅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윈체스터 주교의 세금기 록부를 보면, 그는 세금을 제때 안 내는 불성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02년 셰익스피어는 약 125에이커의 땅을 사들였고 1605년에는 거금 440파운드를 투자하여 스트래트퍼드 십일조 농토 (수확고위 1/10을 교회에 바치게 되어 있는 농토:역주)의 주식을 일부 사들였다. 이 투자로 그는 연간 60파운드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애호가 사우샘턴 백작은 설화시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능욕>을 헌정받은 보답으로 거금 1,000파운드를 내놓았다. 극장에서도 큰 수익이 따랐다. 고향을 떠날 때 무일푼이던 그는 25년 뒤에는 스트래트퍼드의 부호라는 명성 을 얻게 되었다. 젠틀맨이 된 배우 1596년 셰익스피어는 가문의 문장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25년 전 그의 아버지가 실패한 청원을 이제 아들이 다시 신청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인 인정을 받 고자하는 욕망은 그 당시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극단의 많은 배우들-버비지, 헤밍, 카울리, 포프 등-에게 문장이 허가되었고 스트래트퍼드 출신인 배우 리처드 퀴니에게도 허가되었다. 퀴니의 아들 토머스는 1616년에 셰익스피어의 딸 주디스와 결혼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셰익스피어가 가문에 문장이 허여되었다. 문장원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에는 이 가문의 조상들이 국왕에게 바친 '충성스럽고 가상한 헌신'을 감안하여 문장 제작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연극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 힘입어 농부의 손자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젠틀맨이 된 것이다. 젠틀맨, 극작가, 배우, 챔벌린 극단의 주주, 셰익스피어는 당시 연극계가 가지고 있던 자원을 최 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은 다양한 무대, 다양한 등장인물, 각양 각색의 관중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제3장 연극의 세계 시어터, 커튼, 로즈, 스완, 글로브, 포춘 따위 상설극장이 줄지어 세워진 런던은 신비극, 도덕극, 인터루드 등이 상연되던 시골에 비해 연극 분야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1584년까지 좋은 연극이 많이 상연되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연극 전통과의 결정적인 결별이 이루어졌다. 1584년과 1593년 사이의 걸작으로는 말로의 <절름발이 티무르>와 키드의 <스페인의 비극>을 들 수 있다. 런던에 있던 극장을 살펴보면, 시티 성벽 북쪽에 있던 시어터 극장과 커튼 극장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이들 두 극장은 모수인 제임스 버비지 소유였다. 템스강 건너편 사우스웍 서쪽에 필립 헨슬로가 1587년에 로즈 극장을 지었다. 헨슬로의 뒤를 이어 금세공업자인 프랜시스 랭리가 1595년에 스완 극자을 지었다. 이 극장에는 소속 극단이 없었기 때문에 애드미럴 극단이나 챔벌리 극단과 경재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 극장은 1597년 7월 로드 펨브록 극단이 토머스 내시의 선동 적인 작품 <개들의 섬>을 공연한 뒤에 문을 닫고 말았다. 글로브 극장 1596년 제임스 버비지는 시어터 극장 부지에 대한 임차계약을 갱신하려 했으나 난관에 부닥치 고 말았다. 여러 차례 땅주인과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버 비지가 죽었고 그 문제는 아들 커트버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커트버트는 결단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멋지게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해말 부지 임차 계약이 만료될 즈음인 1598년 12월 28일 커트버트 버비지는 피터 스트리트라는 목수와 인부 12명을 불러 극장건물을 해체하도록 지시했 다. 시어터 극장이 템스강 건너편인 사우스웍으로 옮겨 간 셈이었다. 로즈 극장에서 그리 멀지 않 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사한 후 8개월이 채 되지 않아 커트버트 버비지는 글로브 극장을 건립했 다. <헨리 5세>의 프롤로그에서 코러스가 "투구의 영혼들을 이 목조의 원형 속에 어이 몰아넣으 리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목조의 원형'은 바로 둥근 형태를 한 글로브 극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땅주인인 니콜라스 브렌드 경과 형제인 커트버트 버비지와 리처드 버비지(배우), 그리고 챔벌린 극단의 다섯 배우 사이에는 돈독한 공동체의식이 싹텄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이 극장의 주식을 가진 어엿한 주자가 되었다. 다음해인 1600년 글로브 극장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된 필립 헨슬로도 템스강 건너로 이사 왔는 데 그의 극장은 글로브 극장과 정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크리플게이트 북쪽, 핀스베리의 자유지에 포춘 극장을 세웠다. 헨슬로의 사위이며 배우인 에드워드 앨린이 1599년에 매입한 땅이 었다. 그후 1613년에 헨슬로는 또 다른 건축계획에 착수하여 뱅크사이드 서쪽의 곰 괴롭히기 경 기장을 개조하여 호프 극장으로 만들었다. 이 극장은 연극 공연장 이외에 동물 격투기장으로도 이용되었다. 공공극장의 구조 청교도 의회의 지시로 1640년대에 모든 극장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극장을 복원하려는 건축사 가들은 도면, 스케치, 공사 계약서, 여러 가지 기록물 등에서 당시 극장 구조에 관련된 정보를 추 출해 내야 한다. 극장들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두 기둥으로 떠받쳐진 이엉 을 두른 지붕은 무대 위를 부분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극장은 높이가 평균 12.2m였고 형태는 원 형이거나 8각형이었으며 지름은 약 14.4m였다. 이 가운데 3층 관람서(gallery)과 특성(box)에 피 요한 4m 정도의 공간을 빼고 나면 나머지 10.4m가지고 무대와 입석 관람석을 꾸며야 하는데, 약 12.3m 너비의 직사각형 무대가 지름의 7.6m를 차지한다. 이렇게 보면 배우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공간의 제약 때문에 한꺼번에 무대에 올 라올 수 있는 배우는 12명뿐이다. 그래도 포춘, 글로브, 시어터 같은 극장은 2,000-3,000명의 관객 을 수용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극단의 지붕은 원형으로 장식되었고 극장 앞면에는 "Totus mundus agit histrionem(이 세상 모두가 연극의 무대)"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무대는 지붕을 씌우지 않 은 중심부를 향하고 있고 중심부는 지붕을 씌운 3층으로 된 관람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뒤에 는 배우들의 분장실이 있었다. 무대 위의 관람석을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귀빈과 같은 관중 을 모실 수도 있었고 악단이 사용할 수도 있었고 무대의 확장공간으로 쓰일 수도 있었다(<로미오 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 배우들의 분장실에는 문이 두 개가 달려 있어 드나드는 문이 각각 달랐다. 무대바닥에는 치켜 올리는 자은 문이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 악마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 고 시체의 매장 등을 처리할 수 있었다. 바닥에 자갈을 깐 무대 바로 위의 발코니는 무대 소도구 를 놓아두는 곳이었다. 이곳을 통해 신이나 여신, 보조인물이나 효과장치 등이 무대 위로 내려졌 다. 연극이 상연중일 때는극장의 상징을 그려 넣은 깃발을 게양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무대 셰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인들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단순히 환상에 호소하기보다 한정된 숫자이지만 간단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소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헨슬로는 그 다양한 소도 구의 목록을 그의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탁자, 의자, 칼, 큐피드의 화살, 태양과 달 을 그린 캔버스... 캔버스에는 바위, 유적지, 마호메트의 머리, 무지개, 신들의 심부름꾼인 머큐리 의 지팡이,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 용들, 유대인을 집어 넣는 가마솥(말로의 작품 <말타의 유대 인>에서 유대인 바르바스는 기름이 펄플 끓는 가마솥에 던져진다) 등도 등장했다. 장면의 변화는 대사나 간단한 플래카드를 이용해 알려 주었다. 지붕이 없는 극장에서 야간 장면을 연출하기는 보통 곤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대 위로 촛부이나 횃불을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지금은 밤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헨리 5세>의 프롤로그에서 코러스가 말하는 것처럼 연극은 사실 적인 효과보다 관객의 '상상력'에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사는 충분히 연극에 사실감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리어왕>(4장 6막)에서 아들 에드거는 눈먼 아버지 글로스터가 지 금 절벽의 가장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절벽 아래 쪽에 보이는 풍경-까마귀가 벌레만하게 보이고 인간이 생쥐같이 보이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상기시켜 준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주 무섭고 어찔어찔합니다. 저 중간쯤 되는 공중에서 날고 있는 까마귀 나 다리 붉은 큰 까마귀도 크기가 딱정벌레만하게 보이는군요. ... 바닷가에서 걷고 있는 어부는 생쥐같이 보이고... " 이렇게 대사가 실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무대의 상징적 허공인 텅 빈 공간에서 화려한 의상이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기도 했다. 때로는 오케스트라를 곁들여 다양한 음 향효과를 냈다. 북소리와 트럼펫 소리는 전투장면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공연이 끝나면 배우들는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는 풍자극을 연출하면서 3박자의 지그 춤을 추기도 했다. 관객 당시의 극장 매표소는 다양한 가격의 입장권을 팔았기 때문에 연극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입석-무대 주위에 서서 보는 공간-입장권은 1페니밖에 하지 않았다. 휘장이 드리운 특성은 6펜스 씩이나 했다. 입석 입장권은 런던 노동자의 1주일치 급료의 1/12에 해당했으므로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살 수 있었다. 특석 입장권은 부유한 도시 상인이나 귀족들만이 살 수 있었다. (대본을 책자 화한 4절판 책도 6펜스였다.) 관객은 아주 다양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청교도들은 관객들 중에 깡패, 소매치기, 창녀들이 있다고 비난했고, 극장은 그 이웃에 있는 유관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곳이라고 몰아붙였다. 온갖 부류의 사람이 한데 섞여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관중은 연극 사이 사 이에 먹고 마시면서 감정을 자유롭게 분출시켰다. 그들은 기쁠 때는 큰 목소리로 너털거렸고 슬 플 때는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감쌌다. 그들은 언어의 마력에 도취되었고 로즈 극단과 글로브 극 단을 각각 대표하는 앨린과 버비지 같은 배우들이 운문으로 토해 내는 기나긴 대사를 들으며 커 다란 감동을 받았다. 배우들 16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전업배우는 아주 드문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 았다. 그 이전에 배우는 모두 길드의 회원으로 아마추어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 성체성혈대축 이에 공연되는 도덕극이나 신비극에서 활약했다. 또 시골장터나 마을광장 같은 데서 공연을 하는 떠돌이 마술사나 무언극 배우 등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여름밤의 꿈>에서 보텀과 그 일행은 '피라무스와 티스베'라는 연극을 연습하면서 극중인물인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 때 궁중에서 공 연하기를 바란다. 보텀 일행은 방직공, 목공, 양복장이, 풀무 수리공 등 모두 직업을 가진 사람들 이다. 그러나 유랑과 타락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가 조치를 취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1572년 전문직인 아닌 배우들을 잠정적인 범죄자로 간주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래서 배우행세를 하 다 잡히면 투옥되거나 뜨겁게 달군 쇠로 낙인 찍힐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배우들은 귀족이 설립한 극단에 가입하여 그 귀족의 문장이 박힌 제복을 입어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후인 1604년 챔벌린 극단의 주주는 12명으로 늘어났다. 이 극단은 새 군주인 제임스 1세를 후원자로 맞이하여 킨 극단이 되었다. 극단 소속 배우들은 새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기념행사에서 거리를 행진하는 영예를 얻었다. 배우 주주들의 소유 주식수는 소도구와 의상 등의 기본적인 장비를 사들이는 데 투자한 액수에 비례했다. 주주들은 3층 관람석 수입의 절반을 주식수에 비례해서 나누어 가졌다. 나머지 절반은 극장의 유지보수비에 사용되었다. 수입 의 크기는 해마다 달랐지만 아무튼 그것은 상당한 액수였음에 틀림없다. 극단의 핵심 구성원 이 외에도 주급을 받는 고용원이 있었다. 이들은 하찮은 역할을 도맡아 했으나, 극단에서 주급으로 지급하는 보수는 일반 도시 노동자의 평균임금보다 낮았다. 경비원, 의상 관리인, 부동산 관리인, 필경사, 악사, 프롬프터 따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사 망할 무렵, 킹 극단의 전속배우는 26명에 달하고 있었는데, 이 숫자는 당시 수준으로 볼 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여자 역할 각 극단은 대여섯 명의 소년을 데리고 있었다. 이들은 변성기가 올 때까지 여자 역할을 맡아서 했는데, 명배우들로부터 연기를 배웠고 극장의 수입이 좋으면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 의 앞날은 불안한 것이었다. 가발을 쓰지 못하고 드레스를 입을 수 없는 사춘기가 되면, 단원들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별 볼일 없는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진정한 전문 배우였다. 아주 어린 나이에서 시작하여 노래, 무용, 음악, 대사, 여성의 몸짓과 억양을 배웠던 것 이다. 당시의 관객들은 그들의 여자 역할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들이 수행해야 할 어려운 역할은 전문화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이 등장하는 것 은 소년배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게다가 극단에는 남성배우가 압 도적으로 많았다. 광대들 광대는 또 다른 전문적 역할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에서는 광대와 바보를 엄격하게 구 분했다. 주로 무식한 시골농부인 광대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나 실언은 다른 인물들의 영웅적이고 도 낭만적인 언어에 균형을 잡아 주었다. 한편, 바보의 이미지에 어울릴 법한 알록달록한 옷을 입 고 모자를 뒤집어쓰고서는 종을 울려대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바보의 주목적이다. 1588년에 광 대였던 리처드 탈턴이 죽었다. 볼품없는 몸집에다 납작코인 난쟁이 탈턴은 순발력 넘치는 재담과 우스꽝스러움으로 런던 전역에 이름을 떨치던 배우였다. 심지어 여왕도 그를 보면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챔벌린 극단에 입단한 윌리엄 켐프가 그뒤를 이었다. 켐프는 <베니스의 상인>에 서 론슬로 고보 역을 멋지게 해냈고 <헛소동>에서는 바보 같은 경관 도그베리 역을 잘해 냈다. 켐프가 1600년에 극단을 떠나자 셰익스피어는 키가 작고 머리가 영리한 로버트 아민을 고용했다. 셰익스피어는 아민을 위해 <좋으실 대로>에서 타치스톤 역, <리어왕>에서 곡예사의 기지를 발 휘하는 바보 등 웃기는 역을 써 주었다. 바보는 그 장난기와 말재주로써 리어왕에게 지혜라는 씁 쓸한 교훈을 가져다 준다. 배우라는 직업 배우에게는 재능뿐 아니라 직업에 대한 헌신이 동시에 요구되었다. 극단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공연하는 연극이 성공해야만 계속 공연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상업적인 고려가 우선시되었기 때문 이다. 게다가 극단 간의 경쟁도 치열했다. 시즌중에-극장이 폐관되는 사순절을 제외한 시기에-배 우들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오후 공연에 임해야 했다. 또 주기적으로 공연 레퍼토리를 바꿔야 했 는데, 일정이 항상 빡빡했기 때문에 새 드라마를 준비하는 데 2주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배우 들은 때때로 여러 역을 동시에 해내야 했는데 꼭 필요한 인원만으로 꾸려 자가는 지방 순회공연 때에는 그런 일이 더욱 자주 벌어졌다. 이렇게 하자면 열심히 연습을 해야 했고 기억력이 좋아야 했다. 1594-1595년 사이에 애드미럴 극단은 38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중 21개가 새로 준비한 작품이었다. 관중과 배우 극장에 자주 가는 사람들, 특히 입석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처럼 '두 시간의 무대 상연' 동안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짜릿한 감정과 넘쳐 흐르는 정서를 열망했다. 그들은 정열이 깃들인 웅장함, 은유, 극단적인 사태 반전을 좋아했다. 선 채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무식한 관중들을 상대로 맥없는 대사를 우물우물 말했다가는 흥행 에 실패하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일반 대중은 공포와 전율을 기대했다. 바로 이런 심리상태 때문에 기괴한 장면과 장대한 효과가 있는 복수극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데 따른 국가적 자 부심과 영국 역사에 대한 열광은-이것은 말로의 <에드워드 2세>가 성공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장면이 많은 역사극에 대한 요구를 급증시켰다. 당시 무대에 올랐던 역사극의 인기가 무척 높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전투의 소음과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강력한 정서를 환기시켰고 배우들은 백병전에서 영웅적 행동을 펼쳐 보였다. 성인배우 네 명과 소년배우 두 명이 나와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만담조 대사를 읊조리 던 시대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런던에 있는 두 개의 대형 공공극장과 여러 개의 사설극장-관 람석에 지붕을 씌운 극장-은 서로 다른 연극을 공연하면서 각자의 독특한 스타일과 '전속 배우' 를 선보였다. 로즈 극장에 전속되었다가 나중에 포춘 극장으로 옮긴 에드워드 앨린은 웅변조 대사로 유명했다. 한편,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버비지를 위해 복잡한 심리구조를 가진 인물을 만 들어 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햄릿'인데, 그는 극이 진행되면서 더욱 복잡한 성격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 자신의 단역배우로서 만족했다. <좋으실 대로>의 늙은 하인 존, <햄릿>에 나오는 선왕의 망령 등이 그의 배역이었다. 왜 셰익스피어는 대본을 출판하지 않았나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희곡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는 거은 놀라운 일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실제로 일반대중이 그의 작품을 무척 절 겼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프랜시스 미어스라는 목사는 1598년 저서<팔라디스 타미아:지식의 보고>에서 영국의 작가들을 이렇게 비평했다. "플라우투스와 세네카가 라틴 작가 가운데 희극과 비극 분야의 최고봉이었다면, 셰익스피어 또한 양부문 모두에서 영국 희곡작가 가운데 최고봉이 다." 셰익스피어가 출판한 작품은 <비너스와 아도니스>와 <루크리스의 능욕>뿐이었다. 미어스는 이들 설화시에 오비디우스의 '부드럽고 기지 넘치는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미어 스는 '달콤한 14행시'는 셰익스피어의 친구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다고 말했는데, 14행시는 1609 년에 가서야 발표되었다. 그 당시 연극은 아직 진정한 문학 장르로 생각되지 않았다. 극을 쓰는 것은 상당한 수입을 가 져다 주었지만 아직 시와 동일한 위치에 올라서지는 못했다. 극의 내용은 끊임없이 손질되었고 관중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독백은 삭제되거나 가필되기도 했다. 그리고 광대들은 관중을 웃기기 위해 즉석에서 대본에 없는 말을 만들어서 떠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햄릿은 엘시노어에 온 유랑 극단에게 "광대가 대본 이외의 대사를 지껄이지 못하게 해야 돼. 개중에는 뜨내기 손님을 웃기려 고 자기부터 먼저 웃어 보이는 패도 있어."(3막 3장)라고 말했다. 몇 번 공연을 해본 뒤, 관객들에 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한 부분에는 수정이 뒤따랐다. 첫 해적판 관객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작업을 거듭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는 출판업자에게 내용이 확정된 대본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희곡 중 일부가 셰익스 피어 생존시에 4절판으로 발간되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무대에서 거둔 성공을 등에 업고, 큰돈을 벌어 보자는 속셈으로 얄팍한 출판인들이 찍어 낸 조잡한 해적출판물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리처드 2세>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 <헨리 4세> 제1부와 같이 믿을 만 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는 것도 있었다. '국 쿼르토(good quarto, 텍스트가 양호한 4절판)'라 불리 는 이 책들은 자금이 부족할 때나 연극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을 때 극단이 출판업자에게 판매한 원고를 복사한 것이다. 극단들은 대본의 사본을 적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대본을 지키는 것이 공연을 독점할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대본이 출판되면 누구나 상연하여 이익을 올릴 수가 있었다. 따라서 동업조합이 사업상 비밀을 철저히 지키듯이 극단은 대본이 유출되지 않도록 대단히 신경 을 썼다. 새롭고 기이한 것을 좇는 관중의 욕구가 왕성한 시기라 자칫하면 다른 극단에게 관중을 빼앗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극작가의 원고는 의상, 무대장치, 소도구 못지않게 극단의 소중한 재산 이었다. 결국 대본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팔아 버리는 것은 우둔한 짓이었다. 게다가 극작가는 인쇄업자나 출판업자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인쇄나 출판업은 출판권을 전적으로 장악한 출판업자 동업조합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공식검열관이던 캔터베 리 대주교와 런던 주교의 검열이 끝나면 모든 새 작품은 출판업 협동조합 등록부에 기재되었고, 그 작품을 인쇄하고 판매할 권리가 출판업자에게 주어졌다. 당시에도 저작권의 개념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작가가 갖는 것이 아니라 출판업자가 갖도록 되어 있었다. 1623년, 두 명의 동 료 배우가 셰익스피어 작품 전집인 <퍼스트 폴리오(첫번째 2절판)>를 1,0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하 여 1부당 1파운드에 판매했다. 이 판은 현재 200부가 전해 오는데 완벽한 상태로 보관되 것은 14 부뿐이다. 신민이 자신을 처녀여왕으로 알아 주기를 바란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를 이용했다. 여왕은 로마 시대의 달의 여신이며 순결한 사냥꾼인 다이애나에, 정의와 순결의 여신인 아스트라이아에 비유되는 것을 좋아했다. 당대의 모든 작가들이 그랬듯이 셰익스피어도 여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 제4장 엘리자베스 1세, 신화와 과대선전 불사조와 펠리컨이 등장하는 상징적인 동물우화들은 예외 없이 엘리자베스 1세와 연관되었다. 처녀성의 상징인 불사조는 여왕의 유일성을 시사하고, 펠리컨은 신민에 대한 여왕의 헌신을 상징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대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여왕은 무지개를 잡고 있거나, 평화의 올리 브 가지를 들고 있거나, '지조'를 의미하는 기둥 옆에 서 있거나, 지구의나 천체도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경우이든 여왕은 소우주와 대우주 전체를 상징하는 장엄한 군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여왕을 둘러싸고 다양한 신화가 만들어졌다. 윌터 롤리와 존 데 이비스 같은 작가는 여왕과 관련하여 다양한 상징을 만들어 냈고, 이러한 상징은 그뒤에 여왕 행차를 묘사한 공식화, 환영행사, 마상시합, 심지어 당시의 건축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왕궁에 출입하는 신하들이 여왕의 이름 첫 자인 'E'를 본떠서 집을 짓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사항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여왕을 둘러싼 신화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에도 영향을 주었다. 1595년과 1600년 사이에 쓴 희극들에서 셰익스피어는 여자들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페미니스 트(feminist)'적인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여왕에게 간접적인 찬사를 바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예 를 들어, <좋으실 대로>에서 구혼자인 올란도를 장난스럽게 비난하는 로잘린드나, <헛소동>(1막 1장)에서 베네딕의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말에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느 니 차라리 까마귀를 보고 짖는 개소리를 듣겠다."라고 대답한 베아트리스가 좋은 예이다. 이상적 군주제의 이미지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축제행사는 잘 짜여진 달력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장엄한 행사가 벌어지는 세계를 시사하고 있다. 겨울은 떠들썩한 잔치의 시기였는데 해 마다 11월 17일이 되면 여왕은 화이트홀로 가서 자신이 등극한 이날을 자축했다. 화려한 마상시 합이 조직되었고 헨리 리, 로버트 래트클리프 같은 궁신들은 여왕의 총애를 받고 또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기 위해 마상시합에서 열심히 싸웠다. 무기, 성장을 한 말, 보병, 문장을 새겨 넣은 깃발, 여왕의 명예를 기리기 위한 라틴어 표어를 간직한 깃발 등이 엄청난 장관을 이 루며 도열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궁중의 연회 책임자가 조직한 크리스마스 축하행사가 이어졌 다. 오락행사는 음악, 무도회, 가면극, 공공극장 소속 극단의 공연,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소년극 단의 연극 따위가 포함되었다. 여름이 되면 여왕은 모든 궁신을 대동하고 궁정을 시골로 옮겼는 데, 이때에는 봉신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여왕을 대접하는 일은 돈이 많이 들었지만, 봉신들 은 서로 여왕을 모셔 가려고 경쟁했다. 여왕을 위한 멋진 야외행사가 정원이나 호수에서 벌어졌 는데, 특히 호수에서 행사가 열릴 때에는 뱃놀이 뒤에 으레 불꽃놀이가 뒤따르곤 했다. 궁전과 정원 엘리자베스 시대는 건축문화가 활짝 꽃핀 시기였다. 건물들은 이국적이다 못해 기괴한 외양을 가지게 되었고 높은 박공(마루머리나 합각머리에 팔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 역주), 돔, 붙임 기둥과 주랑(기둥이 여러개 있는 복도 : 역주), 거대한 여닫이창, 중간 문설주를 댄 창문, 높다란 굴뚝<헨리 4세> 제1부에서 볼 수 있다) 등으로 장식되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이탈리아 풍도 프 랑스 풍도 아닌 영국 특유의 르네상스 건축양식이었다. 건물 내부의 방은 크고 넓었으며, 행사를 치르곤 했던 거대한 홀에는 정교한 목재 지붕보를 댔다. 건물 바닥에는 골풀을 깔았고 벽에는 대 형 태피스트리를 걸었다. 태피스트리는 주로 식물과 동물을 주제로 하여 목가적이고 신화적인 장 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1580년에는 호화정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호화정원은 잘 단장된 생울타리, 기하학적이고 상징 적인 디자인에 따라 만들어진 화단, 미로, 분수 등이 특징이다. 또 이사항 조상을 많이 설치해 되 었고 생울타리는 정원을 꾸민 가문의 문장 속에 나오는 동물, 괴물, 야수 등의 형상을 따라 단장 했다. <한여름밤의 꿈>같은 희극의 배경으로 나오는 신기하고 놀라운 물건들은 이런 호화정원에 영향을 받았다. 정원사들은 새로운 '황금시대'를 건설한 여왕에게 바치는 찬사로서 순결을 상징하 는 꽃(장미와 데이지)을 화단에 많이 심었다. 귀족의 시골 저택이나 왕궁-케닐워스, 디오발즈, 햇 필드-의 정원은 생울타리를 잘 정돈하여 왕가의 문장이 뚜렷이 드러나게 했다. 정원사의 손을 거 쳐 만든 이 인공적인 자연 속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이 시대에 끼친 영향을 칭송하는 찬사를 보았다. 소우주와 대우주 엘리자베스 시대의 상징적인 자연관은 곧 별들과 행성에 대한 자연관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대 의 우주관은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프톨레마 이오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태양과 일곱 행성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 로 그 주위를 돈다. 달 아래의 공간에는 변화의 세계가 있고 달 위의 공간에는 불변의 세계가 있 다. 그리고 맨 꼭대기 천체에는 하늘과 불타는 공간이 있는데 별들은 황금의 못처럼 그곳에 붙박 이로 고정되어 있다."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대 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현대천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1609년 (요하네스 케플러)과 1610년(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가서야 겨우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렇기 때문 에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알고 있는 당시의 영구인은 별로 없었으며 그 가설은 시대정신의 일부 로 편입되지 않았다. 점성술은 계속하여 대학의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전통적인 의학은 인체의 리듬과 질병을 일 곱 행성의 움직임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그리고 12별자리가 인체의 각 부분을 관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양자리는 머리와 얼굴, 황소자리는 목, 쌍둥이자리는 어깨, 사자자리는 등과 심 장, 게자리는 가슴, 위, 허파를 관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게다가 별들의 움직임, 혜 성의 나타남, 일식과 월식 등은 재난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었다. 이런 믿음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라는 소우주를 이해하려면 천체라는 대우주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 하는 사고방식이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시대인은 비록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은 다양하지만 내적으로 자연은 통합된 전체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연은 비유와 '조짐'으로 보편적 해석을 제공 해 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조짐은 사물과 우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지는 외적 기호이거나 특별한 표지이며, 감추어진 세계를 드러내 주는 문장이나 상형문자인데, 현자나 견자 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 속에서 신의 섭리를 읽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널 리 퍼져 있던 상황이므로 수사적 잠언, 모토, 문장집, 사물의 관계와 인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미지와 문양 모음집 등이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광물에서부터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자리매김하는 하나의 통합적인 위계질서 체제가 만들어졌고, 그 연결고리가 되는 각 단계나 수준에서 동물과 식물의 수평적 관계도 확립되었다. 의학에서는 2세기에 활약한 그리스 의학자 갈레노스의 학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네 개 체질-흑담즙질, 점액질, 다혈질, 담즙질-이 있어서 이것이 심신의 기질을 결정 한다고 보았다. 흑담즙질은 땅처럼 차갑고 건조하며 많은 흑담즙을 만들어 낸다. 점액질은 물처럼 차갑고 음습하며 콩팥이나 허파에서 만들어진다. 다혈질은 공기처럼 따뜻하고 축축하며 정열의 본거지인 간에서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담즙질은 불처럼 뜨겁고 건조한 것이다. 갈레노스는 질 병이나 신경질은 이런 네 가지 체질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고, 반대로 네 가지 체 질 사이에 균형이 잘 이루어지면 '좋은 기분'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도덕주의자 제익스, 줄리엣 의 연인 로미오, 상중인 태자 햄릿 등 셰익스피어 극의 주인공들에게서 보이는 우울은 당대의 보 편적인 고통이었다. 의약품은 믿을 수 없었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의약품으로는 약초와 약재 같은 전통적인 처방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시작하여, 거미집, 토끼털, 달걀껍질 등으로 만든 알약과 연고 따위 끔 찍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런 의약품들은 주기적으로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는 흑사병 같은 무서운 전염병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네 가지 체질에 대한 믿음과 의약품의 부실함 때문에 사람들은 예언자, 점성술가, 사이먼 포먼이나 존 디 같은 연금술사들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특히 존 디는 철학자, 수학자이자 점성술가이기도 했으며, 역서를 제작하고 12별자리표를 만들었으며 예언서를 저술했다. 그는 궁중에서도 인기 있는 연금술사였고 또 여왕에게도 적지 않 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셰익스피어는 왕권에 직접 봉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극 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당시의 믿음과 관행을 묘사하고 세태를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봉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가 특정 이데올로기나 관점을 신봉하는 태도를 내비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의 극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모순들은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결 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1막 3장)에서 율리시스는 '단계(degree)'라는 전통적인 위계 질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대혼란이 온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는가 하면, 이에 반해 <리어왕>(1막 2장)에서 글로스터의 사생아인 에드먼드는 점성술의 모호한 예언을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은 지극히 어리석게도, 불행이 닥칠 때는 대개 우리의 행동이 몹시 방탕해서 그런 것인데, 마치 해, 달 또는 별 때문에 재앙을 만난 것처럼 그것들을 탓한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뒤를 이었다. 마키아벨리즘이 승리를 거두었고 반대의견 은 설 땅을 잃고 말았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더 이상 낙관주의자일 수 없었다. 불안, 불확실성, 환 멸이 연극계를 지배했다. 인생은 한낱 가면극에 지나지 않는다. 제5장 새로운 세계 제임스 1세의 등극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났다. 여왕에게는 직계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관 은 스튜어트 왕가의 사람이면서 여왕의 먼 사촌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게 넘어갔다. 영국 역사에서 제임스 1세가 된 그는 챔벌린 극단을 받아들여 킹 극단으로 바꾸었다. 이 극단은 1604년 11월에서 1605년 가을까지 열한 편을 상연했다. 극단은 새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곱 편의 셰익스피어 극을 골랐고, 그중에는 두 편의 신작<법에는 법으로>와 <오셀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셰익스피어의 명성은 절정에 올라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또 세력 있는 친구들의 비호를 받던 그는 '점잖은 셰익스피어' 또는 좀더 친숙하게 '사람 좋은 윌'이라고 불렸 다. 새로운 장르, 다크 코미디 엘리자베스 1세의 말년과 제임스 1세의 대관식 사이에 셰익스피어는 새로운 장르의 완성에 착 수했는데, 평론가들은 이 장르를 '문제극(problem play)'이나 '다크 코미디(dark comedy, black comedy라고도 하며 빈정대는 유머가 담긴 희극을 말한다.)'라 부른다. 이 장르의 첫작품들은 1601년에 시작되었는데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등의 냉소적이고 고통을 호소하는 작품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는 그 뒤 몇 년 동안 당시의 불확실한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끼면서 <법에는 법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아테네의 타이몬>같은 작 품을 썼다.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는 트로이 전쟁을 대단치 않게 그리고 있는데, 고대의 전 설과 광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편, 중세의 기사도정신에 대한 찬양이나 제프리 초서의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1380년경)에서 보이는 궁중연애에 대한 칭송도 눈에 띄지 않는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에서 헬레나는 루실론 백작 버트램을 어렸을 때부터 흠모해 왔는데 그 를 차지하기 위해 온힘을 쏟는다. 그러나 젊은 버트램은 프랑스왕의 명령에 따라 그녀와 결혼하 자마자 그녀를 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법에는 법으 로>는 무대가 빈이다. 빈첸시오 공작은 사직을 하면서 그의 후임자인 청교도 안젤로에게 고대의 법을 강력히 시행하여 간통은 사형으로 다스리고 최근 일고 있는 도덕적 타락을 도시에서 일소하 라는 지시를 내린다. 수도승으로 변장을 한 공작은 '절대 타락할 수 없는' 안젤로가 젊은 예비수 녀 이사벨라에게 반해서 그녀를 지저분하게 협박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 극에서 셰익스피어는 불 분명한 도덕심을 고발하고 권력의 부패를 풍자함으로써 인간 양심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한다. 1606년과 1608년 사이에 창작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아테네의 타이몬> <코리올라 누스>같은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그리스의 전기작가 플루 타르크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아이디어를 자여와서 전에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와 <줄 리어스 시저>에서 다루었던 고대 지중해 세계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집트, 아테네, 그 리고 로마 등을 어두운 재코비언 사회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극에는 제임스 1세의 반 제국주의적 야망과 당시 귀족사회의 내적 문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작품 속의 귀족사회 는 교만한데다 고립되어 있었고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국민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집단 이었다. 바로 이런 교만한 사회의 오판 때문에 로마의 영웅 코리올라누스가 로마의 가장 큰 적인 오피디어스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테네의 타이몬>이라는 어두운 우화에서 셰 익스피어는 상인과 금융가 세력의 부상으로 귀족들이 무력해지고 그들의 가치관이 타락하는 형국 을 묘사했다. 타이몬은 자신의 전성기에 관대하게 뒤를 밀어 준 친구들에게 배반당하고 사막으로 은퇴하여 세상을 혐오하면서 은자로 살아간다. 새 군주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제임스 6세였을 당시 제임스 스튜어트는 학문을 깊이 연마하는 한편, 신 비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쓰고 예술을 애호했던 그는 뛰어난 지성 이외에도 마술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조예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1597년에 발간된 <악마학> 에서 자기가 악령과 흑마술(black magic, 악마의 도움을 빌려 악행을 행하는 마술)을 믿는다고 주 장했다. 잉글랜드의 왕이 된 후 기이한 행동과 폭군적 성향은 더욱 심해졌고, 그는 공식적인 행사 를 피하고 궁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왕의 과식, 과음, 그리고 남색 경향이 곧 스캔들이 되었다. 궁정은 허식과 사치, 과도한 치장과 향연으로 흥청거렸는데, 그때 그후 수십 년 동안 인기를 끌 게 되는 화려한 연극인 가면극이 크게 발전했다. 이 극적이고도 음악적인 오락행사의 주관자는 무대장치를 만든 건축가 이니고 존스와 시인이자 극작가인 벤 존슨이었다. 그 가면극의 첫 번째 자굼인 <어둠의 마스크>는 1605년 주의 공현대축일(1월 6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상연되었다. 그 작품은 알비온(Blbion, 잉글랜드를 가리키는 고대 용어)에 에티오피아강의 신 나이저의 열두 딸이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무어인, 요정, 트리톤(Triton, 반인반어인 바다신 : 역주)과 인어, 괴물과 네 레이드(Nereid, 바다의 요정 : 역주) 등이 멋진 차림으로 반주와 무용에 맞추어 파도에서 일어나 는 것이다. 가면극은 대형 축제 쇼인데 무대기술자 이니고 존스와 시인 벤 존슨의 기술에 절대적 으로 의존했고 때로는 궁중사람들도 그 연극에 함께 참여했다. 왕, 왕비, 귀족들이 무대에 올라와 연기도 하고 춤도 추었고 그런 다음에는 무도회로 행사를 마무리지었다. 왕에 대한 찬사를 표현 하기 위해 극의 플롯은 늘 왕이 최종 중재자가 되는 질서와 화합을 노래했다. 사회와 정부 궁중의 화려한 행사는 귀족들을 시골에서 런던으로 불러 올렸다. 그래서 전에는 시골의 귀족 저택을 위주로 활발하게 움직이던 소규모 공동체들이 퇴락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심 각하게 위협받게 되어 주민들 사이의 친절한 태도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무라는 미덕은 서서히 사라졌다. 상류사회 인사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벼운 일을 시키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던 일,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같이 축제를 즐기던 일 따위 미풍양속을 차 츰 지키지 않게 되었다. 17세기 초의 귀족계급은 점점 더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고 선량 한 여왕 베스(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의 '명랑한 영국'을 특징으로 하는 생활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정치분야를 살펴보면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대영제국 수립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었다. 런던의 버지이나 회사는 새로 운 땅에서 식민지를 개척할 '자원자'를 모집했다. 궁정대신이며 항해사였던 윌터 롤리 경은 처녀 여왕의 명예를 빛내기 위해 신세계에다 버지니아(Virginia)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이에 신세계가 불러일으켰던 열광은 <템페스트>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는 문명의 전파자인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와 야만적이고 추악한 노예 캘리번 사이의 갈등을 극화하고 있다. 새로운 미학 이국적 취미가 유행했고 셰익스피어는 다른 동시대인과 마찬가지로 잠시 현실의 어두운 세계에 서 벗어나 꿈꿀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공상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 고 그 공상을 문화적 차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는 우 화적 측면으로만 인식되었다. 중세의 지도는 경이로운 일과 이상한 동물을 풍성하게 싣고 있었다. 개의 머리를 한 인간, 눈과 입이 가슴에 박힌 머리 없는 괴물, 발이 너무나 커서 드러누우면 그 발이 파라솔이 된다고 하는 스키아포데스라는 괴물 등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실존하는 것으로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전설적인 괴물들은 더 많은 땅이 발견되고 좀더 정확하고 믿을 만 한 세계지도가 제작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초서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중세적 세계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만 르네상스 작가들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발전해 나 갔고 신세계를 여행한 사람들의 놀라운 여행담을 듣고서 커다란 전율과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개신교가 꽃피게 되면서 영국 사람들은 이 세계가 다양하고 다면적이어서 더욱 해석하기가 어렵 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이 <오셀로>에 흐르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과감하게 무어인을 극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프리카 사람은 영국의 일반 시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고 런던 시장이 주관하 는 시가행진 같은 때나 특별 메뉴로 등장했다. 그러면 연도의 관중들은 아프리카인의 이국적인 모습에 매력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대중들은 아프리카인이 악마의 추종자 혹은 야만인이나 다 름없는 반 이교도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무어인이면서 귀족 장군인 오셀로는 관중들이 볼 때 악마적인 '타자'로서 공포와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했고 친숙하면서도 이질감을 주는 독특한 존 재였다. 이런 왕성한 활동-1607년 셰익스피어의 딸 수산나를 스트래트퍼드의 의사와 결혼시킨 것을 포함하여- 끝에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새로운 극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새로운 극장을 인 수함에 따라 새로운 연극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다시 한번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블래프라이어즈 극장 블랙프라이어즈는 옛날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영유지였는데 1538년 헨리 8세가 수도원을 해산해 버리자 국가에 몰수된 땅이었다. 그 땅은 시티 성벽의 서쪽 끝 바로 안쪽에 자리잡았는데 러드게 이트 바로 밑에 있었다. 이 땅은 약 5에이커에 해당하는 자유지였는데 시티의 관할을 받지 않았 기 때문에 연극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인기가 있었다. 킹 극단은 1608년 블랙프라이어 즈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 극장은 실내 홀이었고 가로 13.7m, 세로 19.8m인 직사각 형 형태였다. 객석은 입석 없는 좌석제였고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입장권은 꽤 비싼 편이 어서 6펜스에서 2실링까지 했다. 킹 극단은 여름에는 글로브 극장에서, 그리고 겨울에는 블랙프라 이어즈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어서 1년 내내 날씨에 관계없이 공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밤 배경 이 나오는 장면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양초를 마음껏 사용할 수도 있었다. 또 음악연주 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연시간이 될 때까지 오케스트라는 관중을 환영하는 음 악을 연주했고 막간에는 가벼운 음악과 가면극으로 관중들에게 서비스를 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셰익스피어가 이 새 극장의 모든 가능성을 완벽하게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장대하고 환상적이며 감동적인 것을 한데 묶어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관중들이 다양하고 심 오한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세계는 연극이 되고 연극은 또 세계가 되면서 예술과 인생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무대와 배우는 그 자체로 강력한 이미지가 되었다. 1609년과 1613년 사이에 쓰인 마지막 작품들-<페리클레스> <심벨린> <겨울이야기> <템페스트>-에서 셰 익스피어는 다시 희극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들에서는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람들의 재결합이 인상 적이다. <페리클레스>에서는 젊은 마리나가 해적과 매음굴에서 달아나 끝내 죽음의 손길을 떨치 고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이 너무나 기적적이고, <심벨린>에서는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노인의 아들들을 착실한 군인이 웨일스의 동굴에서 키우는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다. <겨울 이야기>에서 는 레온티스가 태어났을 때 사생아인 줄 알고 추방해 버렸던 딸 퍼디타와 재회하는 장면이 너무 나 놀랍다. 이것은 환상을 바로크적으로 해석한 세계이다. 인생이 하나의 꿈으로 제시되는 것이 다. 페르디난드와 미란다의 약혼 축하를 위해 공연된 가면극 끝부분에서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말 한다. "우리는 꿈으로 만들어진 존재, 우리늬 보잘것없는 인생은 잠으로 완성된다."(<템페스트>, 4막 2장) 글로브 극장 화재로 전소 1613년 6월 29일, 글로브 극장에서 <헨리 8세>가 공연되고 있던 도중 왕의 입장을 알리는 예 포의 불꽃이 이엉을 깐 지붕에 옮겨 붙었고 극장은 재가 되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지만 셰익스피어는 시기를 앞당겨 스트래트퍼드의 뉴 플레이스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는 뉴 플레이스 에서 전에 <헨리 8세>를 같이 쓴 적이 있는 존 플레처와 함께 <두 귀족 친척>을 썼다. 당시에 는 이런 합작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솜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작품은 아무런 감동을 일으키지 않고 수법도 감상적이다. '은퇴'와 개인적인 일들 셰익스피어의 만년은 그가 몰두했던 개인사업과 관련된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 1614년 그가 주 식을 갖고 있는 스트래트퍼드의 공동용지의 '울타리 두르기(enclosure)'와 관련된 소송문건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나온다. 2년 뒤인 1616년 2월 10일에는 당시 서른이 넘은 딸 주디스 가 그의 친구의 아들이며 주류상인 토머스 퀴니와 결혼했다. 그 결혼은 토머스의 '간통'을 덮어 버리기 위해 급히 올려진 것이었다. 그 간통의 상대인 마거릿 휠러와 사생아는 죽고 말았는데 사 생아의 아버지는 토머스 퀴니였다. 이 스캔들은 세익스피어의 건강을 악화시킨 한 가지 원인으로 알려진다. 1616년 3월 25일, 셰익스피어는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의 내용을 수정했는데, 악랄한 사위 토머 스 퀴니로부터 주디스를 보호하기 위한 내용을 추가해 넣었다. 서명이 들어 있는 석 장으로 된 유언서에서 셰익스피어는 부동산의 상당 부분을 딸 수산나에게 상속했고 '두번째로 좋은 침대' 를 아내 앤에게 물려주었다. 이 침대 건은 두고두고 셰익스피어 전기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주 피곤했던 런던 여행 탓으로, 또는 친구인 마이클 드레이턴, 벤 존슨과 저녁식사를 나누던 도중 과음한 탓으로, (이 이야기는 사후 50년 만에 스트래트퍼드의 목사인 존 워드가 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에 죽었다. 1623년에 발간된 <퍼스트 폴리오> 킹 극단에 소속된 두 배우, 로버트 헤밍과 헨리 콘델은 후손을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데 모은 첫 번째 전집을 편집했다. 이 전집을 <퍼스트 폴리오(First Folio, 초판 2절판본)>라고 하는 데, 1623년 11월 인쇄업자이며 출판업자인 윌리엄 재거드와 그의 아들 아이작 재거드에 의해 제 작되었다. 이 판본 첫 장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36편(<페리클레스>와 <두 귀족 친척>은 제외) 이 제시되어 있다. 작품은 희극, 사극, 비극으로 나뉘고 글로브 극장과 블랙프라이어즈 극장에서 상연될 때 주연급으로 등장한 배우들의 이름도 쓰여 있다. 마지막 작별 스트래트퍼드의 성 트리니티 교회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묘비에는 그가 직접 쓴 비명이 새겨져 있다. 선한 친구여, 제발 삼가 주오, 이 속에 들어 있는 시체를 파내는 것을. 이 묘비를 그대로 두는 자는 복이 있고 내 뼈를 움직이는 자는 저주가 있으라. 스트래트퍼드에 남아 있는 셰익스피어의 석조 흉상을 보면, 그는 오른손에 거위깃 펜을 들고 왼손에 종이를 쥐고 있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멍한 눈빛으로 앞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벤 존슨이 퍼스트 폴리오의 서문에서 썼듯이,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기념비는 그의 작품들 이다. 그대는 비석 없는 기념비니, 그대의 책이 살아 있는 한 예술은 영원히 살 것이다. 기록과 증언 셰익스피어라는 거목은 그 자체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해 주는 흥미진진한 자료들. 인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사생활은 알려 주는 관련자료는 빈약한 편이다.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었던 동 시대인들이 남긴 자료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스트래트퍼드 교구 기록부가 증언해 주는 셰익 스피어의 세례와 매장 시설, 그리고 자녀들의 세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중요 자 료로는 우스터 주교의 셰익스피어 결혼 허가서이다. 셰익스피어와 법 셰익스피어가 생애의 이런저런 시점에서 남긴 법률 관계 문서는 여러 건이 있다. 글로브 극 장의 주식 소유서, 세금 관계 자료, 문장 신청서, 런던과 스트래트퍼드에서 부동산을 매입한 관계 자료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서류 중에서 그의 인간성에 대해 많은 시사를 던지는 자료는 1909년에 발견 되었다. 1604년,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실버 스트리트에 사는 마운트조이 가문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집 주인 크리스토퍼 마운트조이는 가발과 머리장식을 만드는 프랑스계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 스티븐 벨롯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1604년 11월 스승의 딸인 메리와 결혼을 했다. 8년 뒤에 마운트조이가 딸에게 지참금으로 얼마를 주기로 했 는가를 둘러싸고 소송이 벌어졌다. 다음의 증언은 그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열린 법정의 재판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벨롯-마운트조이 소송의 판결문 전문은 현재 런던의 문서보관소에 보존 되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씨는 그에게 말했다. ... .피고인 마운트조이가 셰익스피어씨를 원 고인 벨롯에게 보내 그의 딸과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떠보라고 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씨는 이 선서공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고인 벨롯이 피고인 마운트조이의 딸과 결혼을 한다면 피고가 원고에게 지참금으로 얼마간의 돈을 주겠노라고, 마운트조이가 셰익스피어 씨에게 귀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고가 피고의 딸인 메리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마운트조이는 단 1그로트 (4펜스은화)도 내놓지 않겠다고 말했다.그래서 셰익스피어 씨는 그들에게 결혼을 하면 메리의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지참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 씨의 말을 듣고 확신이 서서 결혼에 동의했으며... 또 결혼을 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원고는 그에게 요구하기를... 그의 아내와 함께 셰익스피어에게 가서 피고의 딸과 결혼하면 피고가 돈을 얼마나 내놓겠다고 했는지 그리고 어떤 물건을 주겠다고 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원고는 실제로 피고의 딸과 결혼을 했다. 그래서 원고의 부탁을 받은 증인이 셰익 스피어에게 가서 그 사실에 대해서 물어 보니까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대답했다. 피고는 만약 벨롯이 피고의 외동딸 메리와 결혼하면 원고에게 지참금조로 50파운드와 특정 가구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트래트퍼드에 은퇴해 있던 셰익스피어는 증인으로 소환되었고 1612년 5월 11일 법 정에 출두했다. 벌써 오랜 전의 일인지라 셰익스피어는 지참금으로 약속된 액수가 얼마인지 기 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문서가 흥미를 끄는 점은 집안일에 얽혀 있는 셰익스피어를 볼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점이다.(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워윅주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으븐에서 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금년에 48세쯤된 제틀맨인데 위에 언급된 연월일에 본 법정에 출두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원고와 피고를 모두 알고 있으며 그들을 안 것이 약 10년 전쯤의 일이라고 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원고가 피고의 도제시절에 원고를 알게 되었으며, 증인이 알고 있는 한, 원고는 도제로 있으면서 피고에게 성실하게 봉사했으며 처신도 아주 잘 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 증인이 기억하는 한 피고가 원고의 봉사로 큰 이익이나 혜택을 보 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인이 보기에 원고는 피고 밑에 도제로 있으면서 매우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 대하여 이 증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원고가 피고와 함께 지 내는 동안 피고는 원고에 대하여 커다란 호감과 애정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피고와 피고의 아내가 원고는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증인은 또 이렇게 말했다. 즉, 피고가 원고에게 자신의 외동딸 메리를 주려고 하는데 원고가 그 딸을 좋게 생각한 다면 기꺼이 혼례식을 올려 줄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고의 아내는, 증인에게 원고를 만나서 그 결혼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증인은 원고를 접촉하여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네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피고가 원고에게 자기 딸 메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지참금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를 언제 건네기로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피고가 사망하면 딸 메리 앞으로 200파운드의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는지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혼 전에 원고는 피고의 집에 살고 있었고 결혼 준비에 대해 서 원고와 피고가 여러 번 얘기를 나누었고 그 뒤에 결혼은 엄숙하게 거행되었다고 말했다. 그리 고 네번째 질문에 대해 증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질문에 대하여 증인은 구체적인 품목을 증언할 형편이 아니라고 말했다. 피고가 원고에게 가구 중 어떤 품목을 자기 딸 메리와 결혼하면 건네주겠다고 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윌리엄 셰익스피어 채권자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쓴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스트래트퍼드의 동향인인 리처드 퀴니가 1598년 10월25일자로 셰익스피어에게 보낸 돈을 빌려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는 보존되어 있다. 그 18년 뒤인 1616년2월 리처드 퀴니의 아들 토머수는 셰익스피어의 딸 주디스와 결혼했다. 사랑하는 친구이며 고향사람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친애하는 고향친구, 나는 당신 친구 자격으로 30파운드을 빌려 달라고 감히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부셸 씨와 내가, 혹은 미튼 씨와 내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친구인 당신이 내가 런던에서 진 빚을 갚아 줄 수 있다면 무척 고마울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것이고, 다시는 빚을 지지 않으려는 내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법원에 제출한 일이 잘 처리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법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신용이나 돈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맹세코 제발 내 말을 믿어 주기 바랍니다. 부디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 하지 말기 바라며, 나는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내 친구로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거래조건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일을 보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모두 당신 뜻에 맡기면서 당신의 도움을 다시 한번 희망합니다. 오늘 밤 안으로는 법원에서 돌 아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하느님이 당신과 우리에게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1597년 10월25일 커터 레인에 있는 벨 여관에서 리처드 퀴니 스트래트퍼드, 셰익스피어 탄생지 기념사업회에 소장된 편지 셰익스피어의 유언장 현재까지 남아 있는 셰익스피어 관련 자료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정보가 많은 것은 유언장 이다. 1616년 1월에 작성되었다가 3월에 수정된 유언장은 셰익스피어의 가족 상황이라든지 친한 친구들에 관해 알려 준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질문에 답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를들어 그이 아내 앤에게 "두번째로 좋은 침대를 남긴다.:라고 적어 놓은 부분이 그것 이다. (당시의 법에서는 미망인이 상속인인 장녀보다 덜 중요했다. 따라서 제일 좋은 침대나 방은 상속자인 장녀에게 넘어가는 것이 당연했고 미망인에게는 그다음으로 좋은 침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 역주.) 신의 이름으로, 아멘! 워윅군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에 살고 있는 젠틀맨, 윌리엄 셰익스피 어는 하느님의 가호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에서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하노라, 먼저 나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손에 내 영혼을 바치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능으로 영 원한 삶의 동참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믿으며 또 내 육체가 원래의 고향인 흙으로 되돌아 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 나는 딸 주디스에게 영국돈 150파운드를 물려주노라. 그 지불방법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은 후 1년 이내에 결혼 지참금으로 우선 100파운드를 지불하고... 일, 나는 또 딸 주디스에게 추가로 150파운드를 물려주노라. 단, 그녀나 그녀의 자식이 이 유 언장의 작성일부터 3년 후까지 살아 있을 때에 한한다. ... 일, 나는 누이 존에게 20파운드와 내 옷 전부를 물려주노라, 그 지불 및 전달은 사후 1년 이 내에 하도록 하라. 또 내 누이 동생에게 스트래트퍼드의 집을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연간 12 펜스의 임대료를 내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노라. 일, 나는 누이 존의 세 아들 윌림엄 하드, (이름불명) 하트, 그리고 미첼 하트에게 각기 5파운 드를 물려주노라. 나의 사후 1년 안에 지불하도록 하라... 일, 나는 앞에서 말한 스트래트퍼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10파운드를 주노라. 토머스 콤 씨에 게는 내 칼을, 향사(esquier를 말하며, 기사 바로밑의 신분을 일컫는다 : 역주) 토머스 러셀에게는 5파운드를, 워윅군에 사는 프랜시스 콜린스에게는 13파운드 6실링 8펜스를 나의 사후 1년 이내에 주기 바란다. 일, 나는 햄릿 새들러에게 반지를 살 수 있도록 26실링 8펜스, 젠틀맨 윌리엄 레이놀즈에게 기념반지를 살 수 있도록 26실링 8펜스를, ... 그리고 나의 대자 윌리엄 워커에게 금 20실링을, 젠틀맨 앤터니 내시에게 26실링 8펜스를, 존 내시 씨에게 금 26실링 8펜스를, 그리고 동료 존 헤밍, 리처드 버비지, 헨리 콘델에게 기념반지를 살 수 있도록 26실링 8펜스를 남기노라. 일, 나는 이 유언장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딸 수산나 홀에게, 지금 살고 있는 뉴 플레이스라는 스트래트퍼드의 집과 그에 딸린 부동산, 또한 스트래트퍼드의 헨리 스트리트에 있는 집과 그에 딸린 부동산을 물려주노라. 또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 올드 스 트래트퍼드, 부숍턴, 웰콤, 그리고 워윅군의 다른 곳 등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헛간, 마 구간, 과수원, 정원, 토지, 들판 등을 수산나 홀에게 넘겨 주노라. 런던 워드로브 부근의 블랙프라 이어즈에 있는, 현재 존 로빈슨이 살고 있는 집과 그에 딸린 부동산도 함께 넘겨주노라. 아울러 여기 명기되지 않은 내 소유의 모든 토지와 건물을 수산나 홀이 살아 있는 동안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주노라... 일, 나는 아내에게 가구가 딸린 두번째로 좋은 침대를 넘겨주노라. 일, 나는 딸 주디스에게 은도금된 넓은 사발을 남기노라. 그리고 나의 다른 물건들, 가축, 접시, 보석, 집기 등은 내 부채와 공과금과 장례식 비용을 제하고 난 다음에 내 사위 존 홀에게 물려 주노라. 그리고 존 홀의 아내이며 내 딸인 수산나 홀을 이 유언장의 공식 집행인으로 지명하노라. 그리고 앞에서 말한 토머스 러셀과 프랜시스 콜린스를 유언 집행 감독인으로 지명하노라. 나는 이것을 마지막 유언장으로 확정하며 이로써 앞서 작성한 유언장을 모두 취소하노라. 이를 증명 하면서 나는 앞에 나온 연월일로 서명하노라. 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본 유언장의 입회인-프랜시스 콜린스, 줄리어스 쇼, 존 로빈슨, 햄릿 새들러, 로버트 와트콧 이 유언장은 런던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음 극장 그리고 관람 런던의 극장에 직접가서 공연을 관람하는 일은 런던을 방문하는 여행각의 한곁같은 소망이 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공연관람기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고, 그나마 그 내용이 무척 모호하다. 1596년에 스완 극장을 스케치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 사람 요하네스 드 위트(68페이지참조)는 그 극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런던에는 각기 다른 이름과 깃발을 내걸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반원형 극장이 네 개 있다. 각 극장은 서로 다른 연극을 매일 공연하고 있다. 이중 템스강 남쪽 기슭에는 로즈와 스완이라는 이름을 새긴 깃발이 휘날리는 로즈 극장과 스완극장이 있다. 한편 시의 북쪽 외곽에는 흔히 비숍 게이트라고 불리는 에피스코펄 게이트를 통해 북쪽으로 뻗은 대로에 다른 두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비어 가든이라고 불리는 극장도 있는데, 겉보기에는 다른 극장과 유사하지만 주로 동물 괴롭히기 행사를 벌이곤 한다. 이 극장은 따로 만들어 놓은 담장과 우리 안에 여러 마리 곰과 덩치 큰 개들을 가두어 놓고, 곰과 개를 싸움시키는 구경거리로 많은 관중들에게 한없는 즐거 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가장 크고 가장 멋진 것은 스완 극장이다. 관중을 3,000명이나 수용할 수 있고 거대한 부싯돌(영국에는 이 돌이 흔하다)로 축조한 석조건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 벽에다 정교하게 색칠하여 마치 대리석 기둥처럼 보이게 했는데 전문 가도 속아 넘어갈 정도이다. 이 극장 건물은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많이 닮았기 때문에 나는 스케치(138∼139페이지)를 해두었다. 1599년, 스위스 바젤에서 온 토머스 플라터라느 여행자가 <줄리어스 시저>를 관람했다. 9월21일, 점심을 먹고 나는 오후 2시쯤 친구들과 함께 강을 건너 지붕에 이엉을 얹은 극장에서 로마 초대 황제 줄리어스에 관한 비극을 보았다. 15명의 배우가 나와서 하는 연극이었는데 아주 잘 짜여 있었다. 연극이 끝난 다음에 남자옷을 입은 배우 둘과 여자옷을 입은 배우 둘이 나와 그들의 관습대로 아주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그들은 서로 썩 잘 어울렸다. 다른 날 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 희극을 보았다. 내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교외에서였다. 그곳은 비솝 게이트였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등장하는 희극에서 영국인이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외 국인들과 맞서 일대일로 싸웠다. 영국인은 모든 사람을 이겼지만 독일인에게는 져서, 결국은 독 일인이 영국인의 딸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인은 독일인과 그의 하인에게 독주를 주어서 취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하인이 주인의 머리에 구두를 집어던졌고 그다음에 둘은 곯아떨어졌다. 한편, 영국인은 천막으로 들어가 독일인에게서 그 여자를 데려왔다. 그러니 결국은 영국인이 독일인을 이긴 것 이다. 극이 끝나자 그들은 영국식과 아일랜드식으로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이렇게 런던 시내에 서는 매일 오후 2시면 두세 개의 희극이 각기 다른 극장에서 상연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희극을 마음껏 즐기고 또 가장 재미있는 희극을 공연하는 극장에 가장 많은 관객의 모이게 된다. 극장의 무대는 바닥보다 높아서 누구에게나 잘 보인다. 그러나 더 편안하게 서서 볼 수 있고 원하면 앉을 수도 있는 특석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들어가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그런데 바닥의 입석은 1페니만 내면 된다. 그러나 앉아서 관람하고 싶으면 다른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1페니를 더 내야 한다. 그러나 아주 편안한 쿠션을 댄 자리이면서 다른 관객들에게 자기 모습이 보이는 특석에 앉으려면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서 1페니를 더 내야 한다. 그리고 극의 막간에 사람들은 돈을 내고 음식과 술을 마실 수 있다. 물론 이 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희극배우들은 아주 값비싸고 우아한 옷을 입고 있다. 영국에서는 유명한 기사나 귀족이 죽으면 그들이 생전에 입던 가장 좋은 옷을 수선해서 하인들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하 인은 그런 옷을 받아도 입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싼값에 희극배우들에게 판다. 런던 시민들은 어느 극장에서 어떤 희극을 상연하는지, 또 어떤 배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소상하게 알고 있다. ... 영국인은 이 같은 연극과 오락행사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희극을 보면서 다른 나라 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배운다고 하는데,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실제로 영국인은 부부 동반하여 단골 극장에서 연극을 자주 보면서 해외사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인은 여행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국내에서 해외사정을 파악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 내는 것에 만족해한다. 1613년 6월29일, 글로브 극장은 <헨리 8세>를 공연하던 중 불이 나서 극장 전체가 타 버렸다. 존 스토가 출판한 <런던 서베이>(1598년에 최초로 발간되었으나 그 뒤 존 스토가 죽자 1605년에 에드먼드 하우스에 의해 개정되었음)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지난 성 베드로 대축일에 런던 근처 뱅크사이드에 있는 글로브 극장에서 불이 났다. 연극 공연 중 국왕 입장을 알리는 예포를 쏘다가 지붕의 남쪽 이엉에 불씨가 옮겨 붙었는데,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불이 삽시간에 퍼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극장은 몽땅 불타 버렸다. 당시 극장에는 <헨리 8세>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음 해 봄 이 극장은 전 보다 더 멋지게 복원되었다. 헨리 워턴 경이 조카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화재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 이번 주 뱅크사이드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마, 킹 극단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다룬 <모 든 것이 진실>이라는 사극을 공연했는데 실감나게 하느라 화려하게 무대를 꾸몄어. 심지어 무 대에다 매트를 깔기까지 했단다. 갑옷에 조지 문장을 그리고 가터 훈장을 단 기사들과 화려한 문장이 그려진 옷을 입은 경비병도 볼 만 했지. 사람들이 과거의 위대함에 한동안 친숙해질(혹은 우스꽝스럽다고 여길)기회였지. 그래, 헨리왕이 월지 추기경 집에서 가면극을 벌이는 장면인데 왕이 입장하자 예포를 쏘았지, 그런데 그 불꽃이 이엉 지붕에 옮겨 붙었나봐. 관객들은 처음에는 지붕에서 웬 연기가 날까 하고 생각했을 뿐 무대에 얼이 빠져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거대한 극장이 폭삭 무너져 버렸지. 이게 그 멋진 건축물이 사라지게 된 경 위야. 그렇지만 나무와 볏짚만 타 버리고 다친 사람은 없었어. 그리고 극장 안에는 외투가 몇 벌 남아 있었어. 아참, 한 관중의 바지에 불이 옮겨 붙었어. 그래서 그 사람은 재빨리 들고 있던 맥주를 끼얹어 불을 꺼 버렸지. 1613년 7월 1일의 편지 로즈극장 최근까지 엘리자베스 극장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1988년 서더크 브리지 근처에서 사 무실 빌딩을 짓기 위해 지하굴착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로즈 극장의 기초를 발견했다. 1587년에 지어진 로즈 극장은 버비지의 경쟁자인 필립 헨슬로가 소유, 관리해 왔으므로 셰익스피어의 극이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을 가능성은 없다.(<헨리 6세>는 공연되었을 수도 있다.) 이 흔적은 엘리 자베스 시대의 극장의 크기, 형태, 설계 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정보가 되었다. 로즈 극장은 각이 일정하지 않은 다각형 건물로 남쪽에 입구가, 북쪽에 무대가 있었다. 내벽과 외벽의 간격 으로 보아 복도의 넓이는 3.7m쯤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공간은 무대 쪽으로 경사져 있 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연극사가들의 의견이 한결같이 일치해 왔다. 무대 쪽은 파편만 남아 있 지만 뒤쪽으로 물려서 넓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헨슬로의 1592년 회계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 위로 대형 사무실 빌딩이 들어서 있다. 극작가 셰익스피어 1623년에 출판된 <퍼스트 폴리오>는 셰익스피어의 극을 사극, 희극, 비극 등 세 범주로 나 눈다. 희극은 다시 네 개의 범주로 나뉘는데, 초기 희극, 낭만적 희극, 문제희극, 그리고 로망스 또는 희비극으로 불리는 말기 희극이 그것이다. 비극도 세분한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우 스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스>는 로마 사극, <로미오와 줄리엣> <오셀로>는 열정 비극, <햄릿>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는 복수 비극, 그리고 <리어왕>이나 <맥베스>는 역사 비극 으로 부른다. 셰익스피어 극의 다양성 두 개의 산발적인 작품 <존왕>(1596∼1597)과 <헨리 8세>를 제외하고 셰익스피어 사극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4부작, 즉 연이은 여덟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퍼스트 폴리오에서는 이들 여덟 작품을 제작 연대순이 아니라 역사적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사극의 제재는 영 국의 역사가 존 홀과 레이플 홀린셰드가 쓴 연대기에서 빌려 왔다. 이 사극은 운명의 덧없음- 변덕스러운 운명의 수레바퀴는 왕자들을 정점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리곤 한다-을 그리는 한편, 거룩한 신성의 다양한 현현을 보여 주기도 한다. 사극은 왕들의 운명을 보여 주는데 그 운명은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왕관은 매혹적인 물건이긴 하지만 그 주인을 넘어뜨린다. 왕관의 주인은 아첨이라는 가면을 쓴 배신이나 노골적인 반란을 감당해야 한다. 군주는 겉으로는 신적인 합법성을 자랑하지만 속 으로는 늘 왕위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한다. 반란의 조짐이 있으면 싹 부터 잘라 내어 왕권을 확립해야 한다. 때때로 왕은 무능하며 어떤 때는 왕권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기도 한다. 가령 리처드 2세는 기생충 같은 고문관들에게 둘러싸여 눈이 멀어, 국가를 제 멋대로 황폐하게 만든다. 다른 경우에 왕은 악한이거나 리처드 3세처럼 잔인무도한 지독한 폭 군으로서 신민들을 괴롭힌다. 역사와 왕권을 다룬 사극들은 군주의 장엄과 성격적 결함이라는 주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군주의 의상과 왕권의 상징을 박탈당한 왕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허약하며 죽음 앞에서는 공포에 벌벌 떤다. 사극에서 정치는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경쟁이 불꽃 튀는 장이면서 인간의 야심과 거만이 소용돌이치는 장이기도 하다. 사극에서는 전장의 충돌음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무대 위에서는 과시적인 무공이 숨막히는 전투로 이어진다. 희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평생 동안 희극을 썼고 그런 만큼 희극이 그의 전작품 중 절반을 차지한다. 최초의 희극은 1593-1596년 사이에 쓰였는데, <실 수연발>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로나의 두 신사> <사라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등 다섯 편이 이 초기작품에 속한다. 이들 희극은 성격이 서로 다른데 환상, 잘못된 정체성, 사랑의 경쟁, 양성간의 전쟁 등 여러 주제를 다루는 스타일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원숙기에 쓰인 희극은 낭만 적 희극이라고도 하는데 1596-1600년 5년 사이에 쓰였으며, <베니스의 상인> <헛소동> <좋으 실 대로> 그리고 <12야>등이 포함된다.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은 그 자체 하나의 커테고리 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폴스타프가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희망에 부응하여 1599-1600년경에 2, 3주만에 완성된 것이다. 낭만적 희극에서는 사이 가장 큰 주제를 이룬다. 젊은 주인공의 주관심사는 사랑인데, 그런 사랑의 열정은 부모의 반대나 사악한 인물이 음모 때문에 좌절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가혹한 시련의 시기가 지난 다음 이상한, 또는 회복의 힘을 주는 환경(예를 들어 <한여름밤의 꿈>에서 아테네 근처의 숲이거나 <베니스의 상인>에서 벨몬트에 있는 포샤의 집등)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사랑의 고통은 끝나고 주인공들은 서로 결혼하는 것으로 끝난다. 셰익스피어는 그다음에 어두운 희극을 썼는데 철학적이면서도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문제희극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트로 일로스와 크레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법에는 법으로>등이 있는데 <트로일로스와 크 레시다>는 비극으로 분류되기도한다. 이상하게도 셰익스피어는 초기에 비극을 별로 쓰지 않았다. 세네카와 오비디우스의 신화에 영향을 받은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잔학한 살육과 끔찍한 식인장면 때문에 상연할 수 없다고 평가된 적도 있었다-를 쓰고 나서 3년 뒤에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 을 썼다. 이 작품은 열정 비극이지만 운명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극은 마지막까지 치명적인 결과는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관객에게 안겨 주고 있다. 그러나 사 악한 인물탓이라기보다는 불운한 우연이 겹쳐 일어났기 때문에 두 젊은 주인공은 죽고만다. 마 음을 움직이는 서정성, 강렬한 이미지, 밤과 낮, 젊음과 노년, 사랑과 죽음 등의 강렬한 대비를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훨씬 분류하기가 쉬운 것으로는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 스>등 로마 사극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제1기에 쓰인 역사극의 뒤를 잇는다. 셰익스피어는 홀린 셰드의 <연대기>에서 소재를 찾지 않고 1세기의 전기작가 플루타르크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서 아이디어를 따 왔다. 이 영웅전은 1579년에 토머스 노스가 영어로 번역했다. <줄리어스 시저>와 <코리올라누스>는 정치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이상(브루투스) 혹은 야망(코리올라누스)과 현실 사이의 잔인한 갈등을 다룬 것이기도 하다. <안토니우스와 클 레오파트라>는 성적 열정을 다룬 유일무이한 비극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극단이 글로브 극 장으로 옮겨 가면서 시작되는 셰익스피어의 제2기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등 4대 비극이다. <햄릿>은 토머스 키드의 <스페인의 비극>(1592)과 다 른 <햄릿>이전 연극들-현재는 전해 오지 않는다-을 모델로 한 복수극이다. 그러나 <햄릿>은 문제극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자기 아버지의 망령이 정말로 있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다른 복수자들과 달리, 그 망령이 부과한 임무의 수행을 자꾸만 미루기 때문이다. 정치적 비극, 철학적인 극, 연극 속의 연극록(극 중에 배우가 나오고 또 연극이 상연된다)등 다양한 이 름에 이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의 풍요함과 복잡성 때문에 대표작으로 꼽힌다. <오셀로>는 가정비극이며 환상이 빚어 낸 비극이기도 하다. 이 극에서는 겉모습과 실제가 다른 조종자의 간계에 넘어간 우둔한 외국인의 어리석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리어왕>은 영 국의 전설에서 그 플롯을 빌려 왔지만 환상이 만든 비극이다. 온갖 아첨 섞인 말로 아양을 떠는 두 딸에게 속아 넘어간 우둔한 왕의 비극인 것이다. 리어왕은 그 두 딸에게 왕국을 나눠 주고 셋째 딸은 유배를 보내 버린다. 셋째 딸은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지만 왕이 요구하는 거짓된 애 정을 보이지 않는다. 리어왕은 광기와 결핍이라는 시련을 겪고 난 뒤에 바보를 만나 지혜를 얻고 유배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거지로 변장한 에드가를 만난 뒤에야 인간의 존재조 건이 얼마나 취약하며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가를 깨닫는다. <맥베스>는 <햄릿>에 잠깐 나온 망령 및 초자연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다. 세 마녀는 반도들을 무찌르고 돌아온 전사를 저주와 음모로써 유혹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과 야망의 씨앗을 뿌린다. 아내의 권력욕에 내몰려 시역을 한 맥베스는 손에 피를 묻힌 군주가 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악의 세력과 타협한다. 정치적 비극이면서 형이상학적인 <맥베스>는 선과 악의 갈등을 우주적 주제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강력한 언어로 어둠의 왕국과, 정직과 생명의 원천을 말살하는 그 왕국의 잔악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말기의 셰익스피어는 로망스라는 새로운 유형의 연극에 몰두한다. 감상적인 내용을 바라는 일반대중의 기호에 맞추고 블랙프라이어즈에 있는 개인 실내극장의 놀라운 무대효과를 살리고자 한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1608-1613년에 쓰였는데 <페리클레스> <심벨린> <겨울이야기> <템페스트> <두 귀족 친척>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제외된다. 이 작품은 더 가깝기 때문이다. W.H.씨의 신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4행시)는 1609년에 발간되었지만 그가 직접 출판하지는 않았다. 이 시 들은 대부분 10년 전 혹은 20년 전에 완성되었다. 시인은 127번까지의 소네트를 잘생긴 청년에게 바치며 어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고 있다. 나머지 154번까지의 27편은 시인의 정부 였던 '검은 여인(dark lady)'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편에는 헌정사가 없고 대신 첫장에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신비한 메모가 들어 있다. 이 메모를 셰익스피어가 쓴 것인지 어쩐지는 분명치 않지만(맨 밑의 T.T.는 인쇄업자 토머스 소프를 가리킨다.) 'W.H.씨'는 누구일까? 한때 이 사람은 셰익스피어의 후원인인 헨리 로트슬리(H.W.)라고 추정되었다. 초기작품 셰익스피어는 극작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1593년에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1594년에 <루크 리스의 능욕>이 발간되었다. 이 시편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직접 출판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이 두 시편에는 사우샘턴 백작 헨리 로트슬리에게 바치는 열렬한 헌정사가 들어 있다. 젊은 시인은 이 백작을 자신의 후원인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이 헌정사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언급한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그리고 로트슬리의 후원이 구체적으로 어떤것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로트슬리 백작이 셰익스피어에게 1,000 파운드를 빌려 주었다는 후대의 이야기에는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글은 <비너스와 아도 니스>의 헌정사이다. 각하, 각하께 이런 졸렬한 시행을 드리게 되니, 얼마나 무엄한 일인지, 이런 미약한 것을 이토록 보 살펴 주신, 세인이 얼마나 비난할 것인지 알 길 없사오나, 각하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소생에게는 다시 없는 영광이옵고, 더 나은 작품을 힘써 이루어, 각하께 영광을 드리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소생이 낳은 이 창작의 첫아들이 신통치 못하다면 존귀한 양부를 모시게 됨이 황송할 따름이고, 다시는 흉작이 되지 않도록 메마른 땅을 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소품을 각하께 바치오니, 일독 하시고 만족 있으소서, 그것이 높으신 뜻일 것이옵고, 세상이 염원하는 것인 줄로 언제나 생각 하는 바입니다. 각하의 충복, 윌리엄 셰익스피어 올림 셰익스피어 원고? 1592-1593년경 극작가 앤터니 먼데이와 헨리 체틀은 <토머스 모어 경>이라는 희곡을 궁정의 행사실장인 에드먼드 틸니에게 제출했다. 틸니의 직무는 원고를 접수하고, 대중을 상대로 공연 해도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토하여 허가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 극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런던 시민들이 시티 지역에서 외국 상인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을 때 토 머스 모어경이 시민을 달래는 장면이었다.(이것은 1517년에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틸니는 당시 외국인 혐오감정이 시티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 렸다. 그래서 틸니는 이런 지시를 내렸다. "폭동장면과 폭동의 원인을 설명한 지문을 모두 빼 버리시오. 토머스 모어 경이 시의회에 참석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시오. 모어 경이 런던 보안관이 었을 때 롬바르드인을 목표로 발생했던 폭동에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만 간단히 보고하도록 하시오. 그 보고는 아주 간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이 모두 책임져야 할 것입 니다." 그 지시는 연극을 공연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먼데이와 채틀은 다른 극작가의 도움을 받아 그 장면을 전면 수정했다. 그리고 치안유지를 주장하는 토머스 모어의 모습을 새 로이 묘사해 넣었다. 그러나 결국 틸니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공연되거나 출판되지 못한 채 폐 기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 원고는 런던의 대영도서관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원고는 혼란스럽고 또 읽을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게다가 서로 다른 필치가 다섯 개나 된다. 그러나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끄는 부분은 모어 경과 폭동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를 고쳐 쓴 처음 세 페이지이다. 이 부분은 다른 부분과 달리 뛰어나다. 혹시 이 부분을 고쳐 쓴 사람이 셰 익스피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친필원고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 아닐까? 기법, 내용, 철자법, 필치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타협을 하면서 법의 권위에 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어 경의 말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타나는 다른 연설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표현기법은 직접적이지만 이미지의 사용이 풍부하고 철자법도 셰익스피어의 것과 비슷하다-셰익스피어는'silence'를silene' 라고 쓰는데 이 원고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원고가 나타날 때까지-그럴 일은 아마도 없으 리라 여겨진다-이러한 추리는 그저 추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여기 발췌한 부분에서 모어는 성난 대중들에게 치안의식을 고취하면서 그들이 쫓아내려는 외국인의 입장에 서서 사태를 판단해 볼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그는 폭동 주동자에게 왕의 사면을 얻어내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모어 : 영국이 아닌 독일,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로 보내라고? 당신들은 우선 외국인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외국인이 된 당신들이 이처럼 야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보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갑자기 난폭하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기거할 곳을 마련해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게다가 그 끔찍한 칼을 당신들의 목에다 들이대고 또 당신들을 개처럼 마구 걷어찬다면? 그리고 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또 겁내지 않는다면?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불순한 날씨가 마치 외국인의 잘못인 것처럼 둘러댄다면? 그렇게 당신들을 대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렇게 학대를 당한다면? 바로 이것이 외 국인의 신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들의 끔찍한 잔인성입니다. 일동 : 맞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가 시킨 대로 하자. 링컨 : 모어 보안관님,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친구가 되어 우리의 사면을 도와 주신다면 말입니다. 모어 : 우선 당신들이 여기 있는 젠틀맨들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들이 폐하에게 잘 말씀 올리기를 청원하십시오. 법에 당신 자신을 맡기고 시장의 지시를 따르십시오. 그렇게 하면 사면이 내릴 것입니다. 당 신들이 그토록 간청하고 있으니. 셰익스피어에 대한 여론 극작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 언급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1592년에 발간된 <많은 후회로 매입한 서 푼어치의 기지>에서 로버트 그린은 다른 세 명의 극작가(크리스토퍼 말로, 조지필, 토머스 내시)에게 대학교육도 받지 않은 무식한 신참이 연극업계에서 부상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나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당신 셋은 한심한 사람들이 틀림없을 것입니 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지껄이는 인형 같은 자. 우리의 깃발을 장식한 색채를 그 대로 옮겨다 쓰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러러보던 내가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지금껏 그들에게 숭상받아 온 당신들도 나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의 아름다운 깃털로 장식한 벼락출세한 까마귀가 나타났기 때문입 니다. 그는 배우라는 가죽에 둘러싸인 호랑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인데 그 누구 못지 않게 무 운시를 쓸 수 있고 자기가 이 나라 최고의 셰이크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더 신경을 써서 현명하게 처신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과거 공적을 그대로 흉내내는 저 원숭이 같은 자들이 당신들의 놀라운 기교를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관리를 잘해 나가면 뻔뻔스럽게 빼앗아 가는 자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들 중에 가장 친절한 자가 반드시 친절한 보호자가 아 니라는 것도 알아 두십시오. 하여튼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당신들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들이 이런 무례한 자들에게 희생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죽기 직전에 그린이 쓴 이같이 야비한 비방 편지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그런 공격이 다른 작가. 즉 헨리 체틀에게 어떤 반응을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체틀은 <친절한 마음의 꿈>(1592) 서문에서 그린의 비방 편지를 읽고 두 사람이 화를 냈다고 했다. 그 둘은 무신론자이면서 마키 아벨리 주의자 크리스토퍼 말로와 셰익스피어였음이 분명하다. 로버트 그린 씨가 사망하고 3개월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린 씨가 남긴 많은 문서가 서적 상의 손에 들어갔는데, <많은 후회로 매입한 서푼어치의 기지>도 들어 있었다. 그중에 여러 극 작가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발견되었다. 내가 듣기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 두 사람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복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생존 작가라는 공연한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런 얘기가 이리저리 흘러다니더니 어쩔 수 없이 그 얘기가 내 귀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극작가들을 상대로 한 비난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출판한 경위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 편지를 받고 화를 냈다는 두 사람과 나는 일면식도 없다. 그리고 그중 한 명과는 아직까지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머지 한 사람과도 역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다. 나는 생존 작가들의 열정을 잘 이해하고 또 이런 문제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나서지 않았다. 특히 이번 경우에는 편지의 작성자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쨌든 그린 씨의 잘못이 마치 나의 잘못인 양 그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분이 대단히 정중한 사람임을 알았고 또 배우로서도 뛰어남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을 보면 그분의 처신이 대단히 방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분의 우아한 글은 그가 뛰어난 예술가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지지해 줄 강력한 친구들이 분명 있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프랜시스 미어스라는 학자풍 목사는 <팔라디스 타미아 : 지식의 보고>에서 영국 시인을 그리스, 로마, 이탈리아 시인과 비교하면서 당시까지 발표되었던 셰익스피어의 가장 우수한 극들을 열거하고 있다. 플라우투스와 세네카가 로마 희극과 비극의 대가라고 여겨지듯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희극과 비극 양면에서 대가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희극의 경우에는 그의 <베로나의 두 신사> <실수연 발> <사라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이 상인>을 보라. 비극은 <리처드 2세> <리 처드 3세> <헨리 4세> <존왕> <타이투스 안드로니쿠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라. 에피우스 스톨로는 음악의 신 뮤즈가 라틴어로 말하고자 할 때는 플라우투스의 혀를 빌린다고 했다. 그 말을 빌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뮤즈가 영어로 말한다면 셰익스피어의 멋진 대사를 통해 말할 것이라고. 친구와적들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셰익스피어의 극을 한데 묶어 1623년에 <퍼스트 폴리오>로 냈을 때, 그들은 셰익스피어를 칭송했을 뿐 아니라 그의 천의무봉한 문장에 찬사를 보냈다. 이 극의 저자가 오래 살아 이 전집을 직접 묶으면서 자신의 저작을 되돌아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우리 편집자는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의 친구들인 우리가 그를 대신하여 그의 저작을 한데 묶어 출판하고자 하니 강호의 제현들은 우리의 이런 노력을 비웃지 말기 바란다. 전에는 저자의 원고들이 도난되고, 은밀히 복사되고, 또 사기꾼들의 사기와 절도 행위로 일부 내용이 제멋대로 일탈되어 독자들은 완전한 원고를 읽기가 어려웠다. 이제 저자가 당초 쓴 그대로의 완전한 원고를 독자들 앞에 내놓게 되어 기쁘게 생각 한다. 저자는 자연을 즐거이 모사 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가장 부드럽게 표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마음과 그의 손은 늘 함께 움직였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아주 손쉽게 표현할 수 있 었고 그의 원고에는 수정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 편집자들은 그의 작품을 한데 모아 독자 들에게 바치는 것이 맡은 바 소임일 뿐 저자를 칭찬하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일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전집의 독자의 다양한 기호에 충분히 호소하 리라 믿는다. 저자의 놀라운 기지는 감추어질 수도 잊혀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작품을 읽고 또 읽기 바란다. 그러고도 저자를 좋아할 수 없다면 그건 이해 불능에 빠진 것이므로 그런 독자는 대단히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독자를 저자의 다른 친구들에게로 넘긴다. 그 친구들은 독자에게 길 안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안내가 필요 없다면 독자 혼자서 읽어 나가시기 바란다. 저자도 그런 독자를 더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영국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벤 존슨은 동료이며 친구인 셰익스피어를 존경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삼간 것은 아니었다. 헤밍과 콘델이 쓴 서문을 읽고서 그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은 그의 <목재>에서 뽑은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원고를 수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우들은 대단한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 으나 내 생각은 그와 정반대이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원고를 수없이 수정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내가 셰익스피어에게 악담을 퍼붓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후손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지고 그를 칭찬하려 드는 배우들의 무지를 깨우 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나의 사심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나도 그를 사랑했고 또 그의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 두고 싶다. 그는 정말 정직했고 또 활짝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였고 대담한 생각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 글이 막힌 데 없이 술술 잘 나와서 어떤 때는 멈추라고 말해야 할 정도 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하테리우스에게 "이제 그만 붓을 놓게"라고 말해야 했던 것처럼. 그의 기지는 힘이 넘쳐흘렀다. 또 그것을 적절히 억제할 줄도 알았다. 그는 자주 기발한 생각을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일 례를 들면, 시저의 입을 통해서 말한 것인데, 어떤 사람이 시저에게 "시저, 당신은 내게 잘못했습 니다."라고 말하자, 시저는 대답으로 "시저는 잘못하는 적이 없어, 잘못했다면 거긴 다 이유가 있 는 법이야."라는 부분이다. 나는 그 대답이 대단히 우습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에게는 비난받아 야 할 점보다 칭찬받아야 할 점이 훨씬 더 많다. 존슨이 셰익스피어를 가볍게 꼬집은 것은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존슨은 스코틀랜드의 시인 윌리엄 드러먼드를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셰익스피어는 극 중에서 여러 사람을 등장시켜 보헤미아에서 배가 난파되었다고 떠벌리게 하고 있어. 그렇지만 말이야, 보헤미아 인근 160km내에는 도대체 바다라고는 없거든. 연극 관람자의 증언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이 셰익스피어 극을 보았지만 그들의 관람기는 아주 적은 편이다. 1602년 2월, 존 매닝햄이라는 법대생이 미들 템플 홀에서 <12야>를 보고 와서 일기에 이렇게 써 놓았다. (이 기록은 런던의 대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2야>를 보았다. <실수연발>, 플라우투스의 <메네치미>같은 희극이었다. 아니, <속은 자들> 이라고 하는 이탈리아 희극과 아주 흡사했다. 극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집사의 매력적인 점이 무엇이고 또 웃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따위 내용을 적은 가짜 편지를 과부 여주인이 보낸 것처럼 꾸며서 집시가 과부의 사랑을 잘못 믿게 만드는 부분, 그가 그 사실을 과시하자 모두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더욱 열성적인 관람자는 의사요 마법사이며 아마추어 정신분석가인 사이먼 포먼이었다. 1611년 4월(본문에 나오는 1610년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맥베스>를 보고 와서 아주 자세하게 사려 깊은 관람기를 남겼다. (대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10년 4월 20일(토요일), 글로브 극장에서 <맥베스>를 보았다. 먼저 스코틀랜드 귀족 맥베 스와 뱅코가 나온다. 그들이 말을 타고 함께 숲 속을 달려가는데 세 명의 마녀가 나타나 맥베 스에게 말한다."코돈의 왕 맥베스, 안녕하신가. 당신은 곧 왕이 되겠지만 왕을 낳지는 못하실 분." 그러자 뱅코가 맥베스 얘기만 하고 자기 얘기는 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세 마녀는 뱅코에게 왕을 낳겠지만 왕이 되지는 못할 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녀와 헤어져 스코틀랜드의 왕 던컨의 궁정으로 온다. 이때는 잉글랜드로 따지면 에드워드 참회왕 시절이다. 던컨은 두 장군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리고 맥베스를 노덤벌랜드 공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맥 베스를 귀가시키면서 다음날 밤 맥베스의 저택에서 저녁식사를 하겠으니 준비하라고 이른다. 맥베스는 아내가 강요하는 바람에 그날 밤 자기 집에 손님으로 온 덩컨을 살해한다. 맥베스가 왕 을 죽였을 때 손에 묻은 피는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또 감추려고 피 묻은 칼을 쥐었던 맥베스 부인의 손에 묻은 피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몹시 놀라고 또 화를 낸다. 시역 사실이 알려지자 던컨왕의 두 아들은 잉글랜 드와 웨일스로 도피한다. 처음에는 왕자들이 시역을 한 게 아닐까 의심을 받으나 곧 그렇지 않음 이 밝혀진다. 한편, 왕이 된 맥베스는 왕을 낳는다는 뱅코가 자기를 해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뱅코가 말을 타고 가는 동안에 살해한다. 그리고 다음날 밤 궁중에서 귀족들이 참석하는 연회가 열린다. 연회에는 뱅코도 초청되어 있었다. 맥베스는 고상한 뱅코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연회에 참석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말한다. 맥베스가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나서 뱅코의 기억을 위해 술잔을 들어올리자 뱅코의 망령이 나타나 그의 뒤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맥베스는 의자에 앉으면서 또다시 뱅코의 망령을 본다. 이번에는 뱅코의 망령이 빤히 노려보고 있다. 맥베스는 강한 공포와 분노를 느낀다. 맥베스가 그의 죽음에 대해서 횡설수설하자 귀족들은 뱅코가 살해 되었음을 알고 맥베스를 의심한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맥다프는 군사를 일으켜 스코틀랜드로 쳐들어와 맥베스를 무찌른다. 한편, 맥다프가 영국으로 도피중이었을 때 맥베스는 맥다프 부인과 아이들을 죽여 버린다. 그리고 전투에서 맥다프는 맥베스를 죽인다. 왕비가 된 맥베스 부인이 잠이 든 상태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다니면서 모든 것을 고백하는데, 의사가 그 말을 기록한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셰익스피어 비평 영국의 셰익스피어 비평은 신고전주의 작가 알렉산더 포프와 새뮤얼 존슨에서 시작되었다. 이 들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시한 비극의 구조와 목적에 관련 된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장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세기의 독일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요한 루트비히 티크는 셰익 스피어 작품에 열광적으로 몰두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워즈워스가 세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그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했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셰익스피어 극에 대해서 많은 논문을 쓰면서 특히 여주인공의 놀라운 성격을 언급했다. 콜리지가 볼 때 셰익스피어는 바다와 변신의 신인 프로테우스만큼이나 신비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에서는 스탕달이 셰익스피어를 산문 극의 대가라고 치켜 세웠다. 빅토르 위고도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1864 년에 저술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서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천재성을 인정했다. 20세기 초반 A. C. 브래들리는 1904년에 4개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집중 조명한 강의를 <셰익스피어 비극>으로 묶어 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L. C. 나 이츠가 <맥베스 부인은 자녀를 도대체 몇 명이나 두었을까?>(1933)라는 논문에서 셰익스피어 극이 허구적인 인물을 실제 인물처럼 취급하는 경향을 꼬집었다. 나이츠는 셰익스피어가 극작 가적 기질을 가진 시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미지와 어휘를 통해 분석되어야 마 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 뒤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었고, 캐롤라인 스퍼전의 <셰익스피어의 이미지와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1935)과 조지 윌슨 나이트의 여러 논문 (1933)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623년에 발간된 <퍼스트 폴리오>에 들어 있는 노트(왼쪽) 1930년대와 40년대의 학계동향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흘러 갔는데, 유스테이스M. 틸리어드의 <엘리자베스 시대의 세계관>의 대표적인 연구결과이다. 틸 리어드는, 셰익스피어가 사극을 쓸 때에는 튜더 왕조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서 리치먼드 공(헨리 7세)을 내전의 참화에 갈갈이 찢겨지고 나라를 구한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오늘날 많은 반론을 받고 있다. 특히 문화적 유물주의의 관점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반론이 아주 거세다. 이들은 셰익스피어가 통치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압박받는 사람들(여자와 빈자)을 동정하는 입장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대담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셰익스피어 비평은 앙리 플뤼셰르의 <엘리자베스시대의 극작가 셰익스피어>(1947) 가 독보적이다. 나이츠와 프랭크 R. 리비스가 이끄는 케임브리지 학파의 제자이며 T. S. 엘리엇의 논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플뤼셰르는 저자의 생애나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보다는 작품속의 시적 분위기를 분석하는 데 더 집중했다.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저자의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라 저자의 작품이다. ... 저자와 저자를 둘러싼 신비 때문에 정작 중요한 작품은 오랫동안 뒷전으로 밀려야만 했다. "한편, 앨러다이스 니콜과 글린 위컴은 극장과 극단의 구조를 깊이 있게 연구 했다. 케네스 뮤어와 제프리 벌로는 셰익스피어 극의 원사료를 연구하여 전통적인 셰익스피어 작품 연구의 폭을 넓혔고, 역사적 도상학적 정보를 새롭게 제공하여 셰익스피어가 당시의 연극 계에 끼친 공헌을 새롭게 조명했다. 냉전의 시기와 다가오고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붐을 이루면서 유물론적 분석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폴란드 학자 얀 코트의 <우리의 동시대인 셰익스피어>(1964)이다. 코트의 이론은 1960년대 연극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특히 연출가 피터 브룩이 연출한 연극들 은 코트의 학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코트가 볼 때 통치자인 왕을 명군 과 암군으로 구분하는 것인 부질없는 일이고 단지 역사라는 돌이킬 수 없는 증기 롤러가 무자비한 기계처럼 개인을 깔 아뭉갠다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런 유물론적인 비평태도는 1967년 독일에서 발간된 로베르트 바이만의 <셰익스피어와 연극의 대중적 전통>에서 더욱 발전되었고, 이 저술은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분야에서 미하일 바흐친의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대중문화>(1970)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정신분학적파들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커다란 흥미를 표시했다. 정신분석학의 시조인 지크문 트 프로이트 자신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침대맡에다 둘 정도로 애독자였고, 또 셰익스피어의 대 사를 종종 인용했으며 나아가 논문을 쓰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슨는 햄릿이 아버지의 망령이 요구하는 복수를 자꾸 미루는 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 다.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미워하지만 햄릿 자신이 은밀히 원하는 거투르드 왕비의 옆자리를 차지 한 것을 부러워한다는 주장이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이 논문의 뒤를 이어 정신분석학적 관 점에서 쓰인 논문들이 꾸준히 발표되었다. 가장 최근 것으로는 자크 라캉이 햄릿을 분석한 논문, 베르나르 시셰르의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정신분석가인 다니엘 시보니의 <셰익스피어와 함 께>등이 유명하다. 최근 15년 동안 셰익스피어 학계는 페미니즘, 해체주의(특히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신 역사주의 등 다양한 학파가 시도한 새로운 해석 때문에 시끄럽기도 했지만, 대국적으로 보면 셰익스피어 비평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의 움직임으로는 스티븐 그린블라트의 <르네상스의 자기현현>(198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동시대인과 관련짓는 역사적 문맥속에 자리매김으로써, 셰익스피어가 유럽 르 네상스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세 가지 새로운 연구흐름은 새로운 논문과 저작을 양산시켰고, 셰익스피어 작품을 새롭게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비록 눈에 잘 띄는 것은 아니 지만 그래도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서로 다른 판본들을 연구, 비교하여 정본을 확정하려는 텍스트 비평 분야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스탠리 웰스와 게 리 테일러가 편집한 <새 옥스퍼드 셰익스피어>가 나오게 되었는데, 전집은 1986년에, <텍스트 비평>은 1987년에 나왔다. 이 두 학자의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두 학자가 온 갖 정성을 기울여 펴낸 노작인 새 판본은 셰익스피어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참고서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셰익스피어 학자 르네지라르는 <셰익스피어, 욕망의 불>(1990)에서, 자신의 이전 저작에서 주장했던 모방의 욕망과 원시사회의 폭력의례라는 원칙에 입각해 셰익스피어 작 품을 분석하고 있다. 지라르의 책은 대학사회에서 전폭적인 평판을 받지는 못했다. 제임스 조이 스는 <율리시스>에서 셰익스피어가 이념적인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라 르의 책을 보는 이런 반응은 바로 그런 배경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장 최근의 영미 비평계는 전문적인 용어를 구사하면서 셰익스피어 비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독자들로서는 이해가 어려운 형편이다. 가장 급진적인 학파는 '진리'의 추구를 아예 포기하고 '의미'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셰익스피어 극은 반드시 오늘날에 통하 는 이데올로기적 전략의 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일레로 테렌스 호크스 같은 학자 는 <셰익스피어에 의한 의미>에서 햄릿이 '곤자고의 살해'(<햄릿>에 나오는 연극:역주)를 이용 했다기보다 우리가 햄릿을 이용하여 현세의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햄릿>에서처럼 극 속의 극은 예술과 사회생활의 관계, 그리고 무대의 연기와 사회에서의 연기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이러한 극 속의 극은 너무나 강력하게 우 리에게 호소해 오기 때문에 유리의 구체적인 경험 중의 중요한 부분을 탁월하게 해명해 주고 있 다. 극 속의 극은 바로 이렇게 해명해 주는 순간 그 소임이 끝난다. 바꾸어 말하면 <햄릿>은 우 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문 제에 중대한 답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수아 라로크 셰익스피어 비평사 모든시대는 그 스스로의 모습을 닮은 셰익스피어를 재창조했다. 한 시대가 셰익스피어의 위대 한 모습을 규명하면 다른 시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 나섰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인데,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도 그만이 이같이 상반되는 여러 유형의 비평의 시 련을 견뎌 냈다. 고전시대의 셰익스피어 17세기 후반과 18세기 동안에 셰익스피어 비평은 그의 보편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유형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힘과 모든 종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높이 평가했 던 것이다. 그들에게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걸작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 서 꾸준히 걸작을 써 낸 학력도 별로 높지 않은 자연의 아들이었다. 존 드라이든은 셰익스피어를 논한 영국 최초의 문학 비평가였다. 셰익스피어 사후 50년에 쓰인 드라이든의 비평은 놀라운 균 형감각과 객관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셰익스피어로부터 시작해 보자. 그는 가장 포용력 있는 영혼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자 연의 모든 이미지가 그에게 제시된다. 그는 그 이미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가 자연 속의 어떤 것을 묘사하면 우리는 그것을 볼 뿐만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서 그것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가 무식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그를 칭찬하는게 된다.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자연을 읽기 위해 책이라는 안경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연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경우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는 어떤 때는 범용하고 무미건조하다. 재치 있는 말이라고 한 것이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끝난 경 우도 있다. 또 심각한 연설이 허세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위대하다. 반드시 위대함을 드러내야 할 경우에는 언제나 위대했다.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극시에 대하여>(1668) 니콜라스 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최초편집자였고 전기작가였다. 셰익스피어의 극은 희극과 비극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사극이라 불리는 작품들이나 희극 중 일부는 사실비극이다. 본질적으로는 비극인데 그 안에 희극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희비극은 셰익스피어 생존 당시의 잘못된 관행이었다. 그러나 관람객들은 희비극을 무척 사랑했다. 비판 의식이 준엄한 비평가들은 희비극을 폄하했지만 관중들은 비극보다는 희극이 약간 섞인 희비극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실수연발> <말괄량이 길들이기>등은 순수 희극이지만 그 나머지 것들은 희극과 비극이 서로 섞여 있다. 그가 희극과 비극 중 어떤 쪽에 더 뛰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희극적 기질에는 사람을 웃기는 구석이 많이 있었다. 비록 셰익 스피어의 작중인물들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요즈음에 술의 신 사티로스가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준다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인물에 게는 매력적이고 독특한 다양성이 있다. 폴스타프는 모든 사람들에게 걸물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3부작이기니 하지만 이 인물은 극중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의 하숙집 여주인인 퀵클리 부인이 <헨리 5세>의 1막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도 그럴듯해 보인다. 이런 모든 장면은 대단히 자연스러우면서도 폴스타프의 다양했던 인생 중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기까지 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씨의 일생에 대한 에피소드>(1709)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알렉산더 포프는 1725년에 발간된 셰익스피어 전집을 편집했다. 다음글은 1725년 전집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의 작중인물들은 너무나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자연의 모사하고 한다면 마치 실물을 자연의 모사라고 하는 것처럼 실례가 될 것이다. 다른 시인들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유 사점이 많아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래서 그 인물들이 동일 이미지를 가 지고 변형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극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생 명을 지닌 독특한 개성이다. 서로 비슷한 두 인물을 찾아낸다는 일은 불가능한데, 관계나 행동 양식이 쌍둥이처럼 보이는 인물들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다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 극은 인물의 사실성과 다양성이 뛰어나다. 여기에 또 한가지 놀라운 특징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것은 대사의 정확성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빼고 대사만 출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각 대 사가 어느 인물의 대사인가를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 전집>(1725) 새뮤얼 존슨도 셰익스피어 전집에서 신고전주의적 견해를 밝혔다. 존슨은 포프와 달리 셰익스 피어의 시적 자질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 인간성을 일반화하는 능력과 도덕적 선택을 극화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극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제시해야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즐겁게 할 수 있다. 특 별한 풍습은 소수에게만 알려질 수 있고, 그 풍습의 모사성 또한 소수에게만 판단될 수 있다. 환상적인 장치를 느닷없이 동원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잠시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경이가 가져다 주는 즐거움은 곧 사라져 버리고 사람들이 마음은 진리의 안정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현대적인 작가였으며 자연의 시인이 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인생을 충실하게 비추는 거울을 들이댄 시인이었다. 그의 인물들은 특정 장소의 풍습으로 수정된 인물이 아니고 세계의 외진 곳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인물도 아니다. 특정 전문직에 소속된 인물도 아니며, 일시적인 유행이나 잠시 반짝하는 의견을 좇아서 만들어진 인물도 아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후예이다. 그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정열과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그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서는 인생의 전반적인 체제가 연면하게 이어진다. 다른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인물은 그저 한 개인일 뿐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인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이다. <셰익스피어의 극>(1765) 낭만시대의 셰익스피어 19세기에 들어와 신고전주의는 퇴조하고 그 자리에 낭만 주의가 들어섰다. 고전주의 원칙에서 이탈, 극단적 정서의 즉발적 표현, 그리고 놀라운 시어 등의 낭만주의를 주창하는 세대들에게 셰 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표가 되었다. 이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극장에 가서 감상 해야 할 극작이라기보다는, 세심하게 읽어야 할 시편으로 간주되었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문학비 평가인 찰스 램은 셰익스피어의 인기를 부활시킨 공로를 크게 인정받고 있다. 역설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극은 다른 극작가의 극들과 비교해 볼 때 무대 공연을 덜 의식한 것같이 느껴진다. 셰익스피어 극이 갖고 있는 놀라운 시어 때문에 더욱 그러 하다. 그의 작품에는 눈빛, 어조, 동작 등 연기만으로도 표출해 낼 수 없는 것이 수도 없이 많다. ... 그의 시어들이 갖고 있는 장엄한 이미지는 그의 극을 읽을 때에만 드러난다. 리어왕의 경우를 보자. 지팡이를 든 노인이 비 내리는 밤, 딸들에게 집 밖으로 쫓겨나는 광경은 쳐다보기가 고통 스럽고 혐오스러울 뿐이다. 우리는 그를 따뜻한 안식처로 인도하고 싶어진다. 리어왕은 무대에서 볼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어왕은 연기만으로는 그 전부를 표 출해 낼 수 없다. 비바람치는 밤의 폭풍우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가 실제 폭풍우 소리를 흉내낼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배우도 비오는 황야에 선 리어왕을 있는 그대로 연기하지 못한다. 리 어왕의 위대성은 구체적인 형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심상에 있다. 리어왕의 정열은 화 산처럼 폭발한다. 그 폭발은 거대한 폭풍우와도 같아서 그의 마음이라는 바다를 바닥까지 드러 내며 그 신비를 들춰 낸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하여>(1811) 찰스 램의 친구이며 철학자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셰익스피어가 고상하고 위대한 사상가라 고 믿었고, 셰익스피어의 모호성은 바로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징표하고 생각했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정확하게 언어로 재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시인의 특성을 결정짓지는 않는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이미지에 압도적인 정열이 스며 있고 관련된 사상이 함축되어 있고 정열이 일으키는 이미지가 병치되어 있을 때, 또 그 이미지가 무수하게 많은 것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효과가 있고 순간적인 계기를 제공할 때,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그 이미지에 인간적, 지적 생명력을 부여할 때, 비로소 이미지는 시인의 특성을 결정짓는다. <문학평전>(1817) 셰익스피어는 시인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갖추었다. 특히 그는 깊은 느낌과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을 가졌다. 그 느낌과 아름다움은 시력에 호소하는 형체로 드 러날 수도 있고 청력에 호소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 낌은 그의 완전한 지배 아래에 있다. 느낌을 표출할 때 그는 자신의 특별한 존재를 통해 마음을 바깥으로 투사한다. 그리고 저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제를 먼저 느끼고, 그런 다음 다 른 사람들에게 저자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명상과 사색이라는 숭고한 능력을 통해 저자의 위대한 마음은 그 마음이 머무는 것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강연집>(1818) 셰익스피어는 특정 시대에 소속된 작가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그만의 것이었고 후대의 극작가 는 끊임없이 그를 모방하려고 애써 왔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운문이든 산문이든 그의 독특한 사고를 전달하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문장이 곧 그의 사상이었다. ... 나는 셰익스피어가 그의 동시대에 더 잘 이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사소하면 서도 독특한 표현 몇 가지 이외에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이 이해되고 있다. 또 그 어떤 종교, 그 어떤 단체, 그 어떤 직업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은 그 형식이나 내 용에서, 수심을 잴 수 없는 대양 같은 그의 마음에서 창출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마음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읽어 내어 멋진 비유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재헌담>(1836) 낭만파의 대표시인 존 키츠는 편지나 읽고 있던 셰익스피어 극의 페이지 여백에다 이런저런 논 평을 남겨 놓았다. 키츠는 다른 존재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릴 수 있었던 셰익스피 어의 능력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그런 능력이야말로 시의 뿌리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가 내 마음속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면 어떤 재능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능력을 '소극적 능력'이라고 하는데 특히 셰익스피어가 그것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나 이성을 굳이 갖다 대지 않으면서도 불확실성, 신비, 회의 속에서 편안하게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1817년 12월 21일의 편지 아름다움과 진실의 결합체에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는 강력한 열정이야말로 모든 예 술의 탁월함입니다. 예를 들어 <리어왕>을 보십시오. 이 작품에는 그런 예술적 탁월함이 충만해 있습니다. 1817년 12월 28일의 편지 (리어왕을 다시 읽기 전에 쓴 시) 오, 고요한 피리가 불어 내는 황금의 혀를 가진 로맨스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사이렌이여! 머나먼 곳이 여왕이여! 이 어두운 겨울날 그대의 가락을 잠시 멈추고 또한 그대의 낡은 책을 덮고 잠시 침묵하라. 아듀! 왜냐하면 나는 다시 한번 저주와 정열의 치열한 논전 속에서 불타오르려고 하노니 위대한 시인이여! 알비온의 구름이여, 심오하고도 영원한 주제를 제시하는 분이여, 내가 황금의 참나무 숲으로 갔을 때 불모의 꿈속에서 헤매지 말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몸이 완전히 불타오를 때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는 새로운 불사조의 날개를 내게 내려 주소서. 1818년 1월 22일 셰익스피어 극의 심리적 측면을 최초로 진지하게 탐구한 비평가는 영국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 릿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현대에까지도 셰익스피어 비평계를 사로잡고 있 다. 그의 극중인물은 다른 극중인물들과도 구분되고 저자와도 구분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개성이 다. 즉 저자의 마음이 빚어 낸 허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가 재현하 고 싶은 인물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영혼이 서로 다른 육체에 깃들일 수 있듯이 시인의 혼은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옮겨 다닌다. 복화술사의 기술처럼 시인은 그의 상상력을 수단으로 극중인물 의 대사가 마치 그 인물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만든다. 셰익스피어가의 극은 열정의 표현이지, 여 정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실존인물 들처럼 말할 뿐, 저자처럼 말하지 않는다. 이때의 저자는 잠깐 옆에 비켜 서서 그 인물들이 하는 말을 엿듣는 사람인 것 같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꿈을 꾸는 것과 유사하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대로 말을 하고 정보를 교환하지만, 실제로 그 얘기를 듣기 전 까지는 어떤 대답을 들을지 또 뭐라고 말할지 알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극의 대 화는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개되고 사전지식이나 예감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열정은 바람에 따라 흩어지는 음악처럼 오고갈 뿐이다. 모든 것이 자연에서 온다. 아니 오는 것처 럼 보인다. 모든 사물과 상황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저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생각의 흐름이나 느낌의 흐름은 혼란이나 조탁의 흔적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영국 시인에 대한 강연집>(1818) 영국의 문학비평가 앤드루 세실 브래들리는 셰익스피어 인물분석의 최고봉이었다. 그는 셰익스 피어 비극의 성격을 정의하면서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함'이 바로 비극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라 는 이론을 제시했다. 원천적으로 낭만주의에 바탕을 둔 이 이론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도 다소 동떨어지게 느껴진다. 그의 비극적 인물들은 우리들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성질들로 이루어져 있 다. 그러나 그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강렬한 삶 때문에 실제의 그들 자신보다 더 높게 치켜세워진다. 이들 인물의 마음속에는 욕망, 열정, 의지 등이 너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에게서는 일방적 태도, 어떤 한 방향으로의 지나친 경사를 엿 볼수 있다. 자기의 존재 전체를 하나의 이해, 목적, 열정, 혹은 심리적 습관과 동일시하려는 치명적 경향이 발견된다. 이 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볼 때 가장 근본적인 비극적 성격이었던 것이다. ...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주인공의 위대함이기도 한 비극적 성격이 발동하면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상황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일은 주인공과는 달리 소인배가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상황에 적절히(혹은 현실적으로)대처할 수가 없다. 주인공은 그 경우 충동적인 행동을 취하거나 부작위에 의해 실수를 저지른다. 이런 실수는 다른 원인과 함께 작용 해 그에게 파멸을 가져온다. 바로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 비극은 다른 비극과 달리 우울함을 주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다 읽은 독자는 인간은 한심하고 불쌍한 존재라는 느낌을 절대로 갖 지 않는다. 주인공은 비참해질 수도 있고 끔찍해질 수도 있으나 절대로 소인배가 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운명은 가슴을 찢어 놓을 정도로 아프거나 신비하지만 경멸스럽지는 않다. 아무리 냉소 적이라고 소문난 사람도 셰익스피어 극을 읽는 동안에는 냉소적이 될 수 없다. 비극적 주인공(반 드시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의 이러한 위대성에서 내가 비극적 인상의 핵심이라고 부 르는 것이 유해하다. 이 핵심적인 느낌은 바로 낭비(waste)라는 인상이다. 바로 이런 낭비란 인상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극에는 비극적 스토리가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 이외에도 깊은 슬픔과 신비가 감돌게 된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물건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또 더 끔찍하니! 이 같은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소모시키는 지경으로 이끌고 가다니. 왜 주인공 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사의 신 비를 제시하는 한 유형을 마주하며, 비극의 경계를 벗어나는 비극적 사실의 원형과 대면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1904) 반대 의견들 셰익스피어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유럽 문학의 두 거봉 볼테르와 톨스토이가 있다. 볼테리는 셰익스피어를 야만인으로 보았다. 그의 재능은 의심하지 않 았지만, 고전주의 원칙을 제멋대로 깨뜨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강력하고 유용한 천재성을 자랑한다. 그는 자연스럽고 장엄하다. 그러나 세련됨 과는 거리가 멀었고 극의 원칙을 모조리 무시했다. <철학적 서한>(1733) 어디서나 보통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들은 변화 많은 장면, 대관식, 가두행렬, 싸움, 살인, 마술, 행사, 결혼식, 장례식 등을 보고 싶어한다. 그들은 떼를 지어 이런 광경이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가고, 착한 점이 있건 없건 자기들의 커다란 잘못을 선선히 용서해 버리는 다른 사람들도 데려간다. <프랑스 한림원에 보내는 편지>(1776) <햄릿>,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최하층민도 이 속되고 야만스러운 극을 거부할 것이다. 햄릿은 2막에서 미쳐 버리고 그의 정부는 3막에서 돌아버린다. 왕자는 정부의 아버지를 쥐새끼로 잘못 알고 죽인다. 여주인공은 강물에 빠져서 죽는다. 그녀의 무덤을 파는 장면이 무대 위에서 연출 된다. 도굴꾼은 해골바가지를 손에 들고 도굴꾼다운 농짓거리를 한다. 햄릿은 그들의 불경스러운 농짓거리에(우리가 보기에 역시) 혐오스럽고 바보스러운 말로 대답한다. 한편, 극중인물 한 명이 폴란드를 정복한다. 햄릿, 그의 어머니, 의붓아버지가 무대 위에서 함께 술을 마신다. 그들은 식 탁에서 노래를 부르고 언쟁을 하고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 이 작품은 술취한 야만인에게 영감을 받아 쓰였으리라 생각된다. <유럽의 모든 국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1761)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그의 언어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러나 더 큰 이유는 도덕적 메시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를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강력한 미적 즐거움을 경험하리라는 기대했으나, 그의 대표작들에서 기쁨은커녕 형언할 수 없는 혐오감과 권태로움을 느꼈다. 전세계가 완성의 극치라고 여기는 작품들이 별 볼일 없고 조잡하다고 느끼는 내가 무 감각한 것인지, 아니면 전세계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극도로 숭상하는 태도가 잘못된 것인지 분간이 되지를 않았다. 나는 어떤 형태든지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늘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나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전세계가 천재라고 숭앙하는 셰익스피어의 예술적 작품들이 내게는 하나도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 모든 인물들은 자기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투의 가식이 많고 부자연스런 언 어로 말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실존인물이라면 그렇게 말할까?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 대사의 처음부터 과장이 엿보인다. 사건의 과장, 정서의 과장. 효과의 과 장, 극중인물은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다. 저자는 그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극중인물에 대해 무관심하 기까지 하다. 그는 무대만을 의식하여 극중인물을 만들어 냈고 극중인물들에게 관중들의 관심을 끌 만 시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 또는 고통을 믿지 않게 된다. 셰익스피 어만이 인간에게 뭔가 말해 주는 극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인간에게 말한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과 영원 또는 무한과의 관계 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객관적 예술에 대한 독일의 이론 덕분에 극이 반드시 그런 것을 노려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정립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종교적 신념을 마음속에서 발 전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니 그런 신념이 아예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사건, 공포, 우 둔, 논의, 효과 등을 뒤죽박죽 섞어 넣은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어떻게 가장 위대한 천재성을 가진 극작가로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외부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셰익스피어를 따라다니는 명성의 근본적이고도 내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그의 극이 ... 그의 생존 당시, 그리고 우리 시대의 상류층의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한 심리상태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드라마>(1906) 영국의 극작가이며 <새터데이 리뷰》의 연극평론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도 톨스토이처럼 셰 익스피어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쇼는(헨릭 입센이나 쇼 자신과 비교해 볼 때) 셰익스피어에게 사상성이 부족하고 그의 사회문제를 보는 태도가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두 번은 우리는 여성문제에 대하여 입센이 제기한 날카로운 논쟁을 셰익스피어 극에서도 기대할 수 있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에서 현명한 여의사인 부인 옆에 이기적인 모습을 하고 나오는 남편은 바로 입센 극의 노라와 헬머를 연상시킨다. 또 <심벨린>에서 비람난 아내를 자기가 죽였다고 착각하는 남편이 잠시 아내에게 요구되는 정절의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어떻게 될까하고 공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육욕적인 가질과 그 음탕한 마음이 만들어 내는 가짜 영웅주의를 아무리 다른 데서 찾는다고 해도, 아미 <안토니우스와 클 레오파트라>에 나와 있는 것 이상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저자에게 가짜 마음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쇼는 작품과 저자를 분리하여 작품에 나와 있는 내용만 거론하겠다는 뜻임 : 역주) 그런데 그런 것말고 정치가 의식, 시민정신, 또는 공화국 정신(추상 적이든 구체적이든)을 찾는다면,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교구위원이나 성직자 재목은 단 한명도 찾아볼 수가 없다. 신앙, 희망, 용기, 확신, 또는 영웅적인 기질을 찾으려 나선다면, 화젯거리가 된 죽음, 무대 위 에서 멋지게 꾸며진 절망, 낭만으로 포장된 섹스, 감상과 기계적 무운시로 버무려진 불모성밖에는 찾지 못할 것이다. 셰익스피어에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버니언에게서 풍부히 찾을 수 있다. 그 에게는 영웅적인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명백히 흘러 나온다. 버니언에게 이 세상은 셰익스피어 에게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의 끝에 하늘의 도시가 있다는 것을 보았고, 자기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금의 이 자리에 도달했으나 여기에 도착하기 위해 치른 그 고난의 대가를 후회하지 않는다. 내 뒤를 이어 순례에 나설 사 람에게 이 칼을 주노라. 그리고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내 용기와 기술을 물려주겠노라." 이와 같은 말에는 따뜻한 마음이 종처럼 울려 퍼진다. 반면에 :꺼져라, 꺼져라, 잠시 동안 불 타는 촛불이여."나 "그 나머지는 침묵이니." 또는 "우리는 꿈으로 만들어진 존재,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잠으로 완성된다."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어떤가? 그것은 생명, 힘, 결단, 아 침공기, 영원한 젊음 같은 것을 술에 취한 악몽 속의 공포로 바꾸어 놓고 있지 않는가? <세터데이 리뷰> 1896년 1월 터치스톤(셰익스피어 극 <좋으실 대로>에 나오는 인물 : 역주)은 어떤가? 그는 자신들이 선 량한 사람이라고 터치스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 기사들을 상대로 농담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유머를 받아들일 사람은 셰익스피어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현대 극작가가 이런 웃기는 얘기를 했다면 에스키모조차도 극장표 값을 반환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느긋한 늙은 공작은 또 어떤가? 그는 영국의 도시 거주민을 대표하는 인물로, "돌에서도 설교를 찾아낼 수 있고 모든 것에 선량함이 깃들여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풍성한 저녁을 차려 놓고 먹 다니! 말은 번드레하게 하지만 식사는 사슴고기로 하는 겉다르고 속다른 이 불경스러운 사기꾼을 쳐다보면 나는 구역질이 올라온다. 셰익스피어는 사회적 사상가인 체할 때는 5류도 못 되고 6 류쯤 되는 킹슬리의 수준인데, 그 잘난체하는 자만은 차마 눈뜨고 봐 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은 너무나 훌륭하여 참아 줄 수 없는 것과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올란도 (<좋으실 대로>의 극중인물 : 역주)는 한순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무엇이든 간에 이 접근할 수 없는 사막에서 고독이라는 나뭇가지의 그늘 아래 서면 기어가는 듯한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거나 무시하게 도리니, 이것은 대단히 불건강한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지만, 초서 같은 시인에게서는 얻기 어려운 마 법의 이미지를 가진 셰익스피어 특유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란도는 그다음 순간에 펙스니프 씨라도 구역질이 날 말을 한다. 당신이 한때 좋은 시절이 있었던 양방이라면 교회의 조종이 울려 퍼지는 곳에 서있어 보았더 라면(이 구절은 황폐해지 교회 신도석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 좋은 양반의 잔치에 가서 안자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본 적이 있다면. 이 부분을 더 이상 인용하다가는 병이 날 지경이다. 이처럼 위선적이고 감상적이면서 느끼하 기까지 한 대사를 지껄이는 배우가 과연 전문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대사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 과연 사생활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새터데이 리뷰> 1896년 12월 현대에 들어와서도 셰익스피어는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자들은 비록 셰익스피어를 존경하지 만(벤 존슨의 말을 빌리면) '우상숭배는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 학자이며 편집자인 게리 테일러도 셰익스피어는 도덕적인 문제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법에는 법으로>는 빈의 성적 타락을 일소하려는 청교도 지사 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지사의 야망을 거듭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다. 지사인 안젤로 자신도 육욕의 제물이 된다. 안젤로가 벌이는 개혁작업의 가장 큰 희생자 는 매력적인 젊은 연인들인데, 이들은 혼례를 올리기 전에 육욕의 죄를 범한 것 이외에는 죄가 없다. 위선적인 지사와 불운한 연인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성적 타락의 초점인 빈 사회의 매춘이란 문제에서 일탈한다. 셰익스피어는 유곽의 고객과 관리자는 보여 주지만 섹스업계의 주력이며, 매춘이라는 탄광 속 으로 수레를 타고 드나드는 창녀들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극의 끝부분에서 루치오에게 내리는 최 악의 징벌은 그가 임신시킨 매춘부와 결혼하라는 것인데, 많은 현대 비평가들은 이 징벌을 정신 병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다(공작이나 셰익스피어나)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정이 <페 리클레스>에서도 보인다. 논다니집을 경영하는 부부가 창녀의 숫자가 부족하다고 농담하는 장면 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열성적인 부하인 볼트의 모습은 볼 수 있지만 정작 창녀는 한 명도 보 이지 않는다. 포주는 마리나를 사서 다시 팔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멋진 극적 상황 속에서 고 객들의 탐욕을 꾸짖는다. 그래서 고객들은 섹스가 아닌 설교 때문에 돈을 네게 된다. 그리고 그 고객들 중에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총각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국 청혼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매춘부가 된 여자들에게 전혀 동정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극에 나오는 창녀들은 손님들을 즉각 죽여 버리거나(<헨리 4세> 2부에 나오는 돌티어시트) 또는 병으로 서서히 죽어 가게 만든다(<아테네의 타이몬>에 나오는 피리니아와 티만드라). 어떤 경우든 충동적인 행동은 결코 아니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인 토머스 미들턴은 '바느질하 는 여자와 창녀들'에게 동정을 느꼈고 그들이 불쌍한 영혼이고 할 수 없이 생활전선에 나선 자매 들이고 배고픈 사람들이며 도시의 질 나쁜 포주의 유혹에 어쩔 수 없이 걸려든 가엾은 사람이라 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또 관객들에게 그런 여 성들의 외적 상황과 내적 동기를 한번 생각해 보라고 유도하지도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남성, 다 시 말해 고객과 포주의 입장에서 창녀를 본다. 여자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경멸의 대상으로 비쳐진다. 그리고 비현실적이면서도 이상스럽게도 극 중의 여자들은 젊지도 아름답지도 매력적이 지도 않다. 그들을 매력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은 그들의 위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테니까. <셰익스피어의 재발명> (1990) 현대의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산업이 20세기에 들어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그의 작품을 보는 새로운 해석도 크게 늘어났다. 프로이트 학파, 마르크스주의 학파, 인류학파, 언어학파, 페미니스트, 철학자, 그리 고 다양한 문학이론파들이 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했다. 폴란드의 학자인 얀 코트는 폴란드 지 하운동 조직에 들어가 나치를 상대로 싸웠고 그 다음에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고통을 받았다. 그 의 셰익스피어 해석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다. 모든 역사적 시대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그 시대가 찾고 있는 것, 그 시대가 보고 싶은 것을 발견한다. 20세기 중반의 독자나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리처드 3세>를 해석한다. 그는 다 른 방법으로는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없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셰익스피어 극의 잔인성에 놀라거 나 겁을 먹지 않는다. 그는 19세기의 독자나 관객보다 더 침착하게 어느 의미에서는 더 합릭적으 로 권력투쟁이나 등장인물들 간의 살육을 쳐다볼 수 있다. 오늘날 극중인물이 겪는 잔인한 죽음 은 미적 필수사항이거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비극의 필수원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또 셰익스피어 천재성을 입증하는 구체적 특징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이제 주요 인물의 비참한 죽음은 역사적 필연 또는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3세>를 쓴 해에 틈을 내어 여러 번 가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에 서조차 현대의 관객들은 19세기의 관객들이 발견했던 필요 이상의 끔찍스런 사건들에서 뭔가 새 로운 것을 본다. 그리고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를 피터 브룩이 연출했을 때 현대의 관중들은 5막에서 나오는 끔찍한 살육을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장장이, 양복장이, 푸줏간 주인, 군인들만큼 이나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 극은 커다란 성공을 거둔 연극의 하나였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지금 이 시대와 관련된 문제들을 발견해 현대의 관객들은 우연찮게 자기들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람들과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당시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런 이해방법은 역사의 이해에도 원용할 수 있다. <우리의 동시대인 셰익스피어> (1964) 연극의 관행 독일의 비평가 레빈 L. 쉬킹은 셰익스피어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극중인물을 실존인물처 럼 다루었던 점을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극은 인공적 구조물이고 그 스스로 관 행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연극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우리의 극은 관객이 참가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 아래서 제작된다. 관객을 향해 있는 한쪽 벽만 공개되어 있을 뿐 나머지 세 면의 벽을 닫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셰익스피어 시대의 무 대는 3면이 관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니까 배우는 관객들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었 다. 그는 연기를 하면서 그런 상황을 늘 의식해야만 했고 많은 경우에 관객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연기를 펼쳤다. 이 같은 배우와 관객의 일체감은 독백에 나타나는데 배우는 이 장치를 통하여 관 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극적 구성과 환상은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극의 독백은 전형적인 의미의 독백이라고 할 수가 없다. 독백은 통상적으로 극중인물이 느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극의 독백 은 어떤가. 그것은 저자가 관중들에게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극중인물의 계획과 성격을 설 명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사전양해와 설명행위는 독백을 하는 극중인물이 독백을 시작 하기 전에, "이 독백이 다음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기억해 두십시오." "진실을 말씀드리자 면... " "이제 내 말씀을 자 들으세요... " 등으로 서두를 떼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현대극의 관 점에서 볼 때 독백을 전형적인 의미의 독백으로 구사하지 않는 이런 수법은 셰익스피어 극의 주 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고 후기 작품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뚜렸함. <셰익스피어 극의 인물 문제> (1922) 페미니즘과 셰익스피어 지난 몇십 년 동안 페미니즘 비평의 대두는 가장 알찬 수확의 하나였다. 일부 고전주의 작가들 의 작품에는 페미니즘 경향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 새로운 테스트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다음은 페미니즘 작가들의 글이다. 가부장적인 질서는... 셰익스피어의 정전 속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아버지나 통치자의 힘은 숲으로 상징되는 초자연적 세계에서 회피할 수 있거나 여주인공의 행동으로 반경을 받는다. 그러 나 희극의 결말에 가면 케이트나 다른 인물들은 남편들에게 충성을 맹세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춘 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가부장제가 굉장히 전제적인 것으로 나온다. 그 제도의 치명적 결함은 강간이나 강간미수를 묘사한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공격적이고 치명적인 반목, <오셀로>에서 비극을 일으키는 헛된 남성다움의 과시와 공허한 명예, <트로일로 스와 크레시다>에서 보이는 그리스인의 군사적, 상업적 가치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서 보이는 로마 사람들의 군사적, 상업적 가치관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많은 극들도 가부장 제의 심각한 폐해를 잘 드러내 준다. 가부장제도의 가치관을 신봉하는 남자들은 그 지위가 위축되고, 그 제도에 반항하거나 순응하 는 여자들, 또는 무관한 여자들도 그 폐해 때문에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여자들은 가부장 제의 변태적인 측면에 저항하고 그것을 고쳐 보려고 하지만 그 질서를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코 델리아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에게 맞설 수 있으며 아버지의 '권리'를 위해 군대를 지휘한다. 그녀는 남성우월주의가 빚어 내는 기구한 사연으로 희생자가 된다. ... <리어왕>에서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 셰익스피어가 가부장제를 적극 옹호했는지, 아니면 그냥 묘사만 했는지 또 는 의식적으로 그 제도를 비판했는지는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페미니즘 비평은 이런 문제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비평이라 생각한다. 캐롤라인 루스 스위프트 렌츠, 게일 그린, 캐롤 토머스 닐리 <여자 역할> (1980) 정숙하고 지조 있는 여자는 그 여자와 관련 있는 남자의 도덕심을 보장하는 상징적 인물이었 다. 아버지, 남편, 연인, 오빠, 정숙한 여주인공과 관련된 것을 명예롭게 여기는 남자 등은 상징적 으로 '여성적' 목적을 고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며 이렇게 하여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한다. ... 정절 은 셰익스피어의 도덕심에서 중핵이 된다. 그것은 조화, 공통성, 관용,(일정한 한도가 있는) 도덕 적 유연성, 동정, 연민, 용서, 사랑 있는 관심 등 '여자다운' 성질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여성에게 만 발견될 수 있는 반쯤 신성한 성질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질은 궁극적인 도덕적 선으로 간주되며, 인간이라면 또 눈멀지 않았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극에 나타난 경험의 분업에서 남자들은 이러한 성질을 높이 평가하도록 강요되지 않는다. 정절은 <베로나의 두 신사> <12야> 및 <헛소동>에 이르기까지 희극에서 다양한 기능을 발휘 한다. 첫째, 그것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믿음직스럽고 변함없는 도덕적 선을 보여 준다. 이리 하여 그것은 남성적 합법성과 대조를 이룬다. 남성의 합법성은 도덕적 선을 표상한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고 기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둘째, 그것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위상을 제공해 준 다. 남성은 자유와 현세적 권력을 소유한다. 정절을 지키는 여자는 당연히 여성의 목적과 양식에 구속을 당하지만 남자에 비해 도덕적 우월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우월성은 남성최고주의와 배치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정절을 지키는 여주인공들은 남성의 세계 또는 한 남자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그녀의 중심에 위치하며 그녀의 욕망이 구현되는 유일하고 완전한 대상물이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녀의 전존재는 그를 향해 기울어진다. 그녀의 도덕적 우월성은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움, 지혜, 기지처럼 하나의 탁월한 성질이며 남자 주인공에게 바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매릴린 프렌치, <셰익스피어 극에서 경험의 분업> (1982) 셰익스피어 극의 연출과 해석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적 재건에 뒤를 이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단순한 무 대구성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적 연출도 셰익스피어 극이 계속하여 성공 을 거두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명연출 셰익스피어 생존시의 엘리자베스식 무대는 간단했고 무대장치도 상징적이거나 암시적이었다. 궁중에서 공연하던 가면극의 바로크 풍 세트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스타일의 채색 무대구성은 아 주 드물었다. 시각적인 사실성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장면, 팬터마임, 인공적인 천둥소 리, 폭죽 사용, 학살장면을 나타내는 소의 피를 담은 주머니 등을 동원하여 극적이고도 장엄한 효 과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일으켜 관객의 상상력에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 보다도 대사와 배우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햄릿은 엘시노어에 온 배우들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 럽게'(<햄릿>, 3막 2장) 대사를 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연극은 영국의 마을들에서 공연되 었고 가끔은 바다에서, 즉 배 위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 공연하는 적도 있 었다. 예를 들면 영국 배우들은 1611년에 독일에 가서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하기도 했다. 1642년, 의회의 결정에 따라 많은 극장이 철거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 동안에 극장을 재건축 하는 사람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무대기술을 도입했다. 또 다른 개혁조치로는 여자 역할 을 소년이 아닌 진짜 여자배우가 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왕정복고기에 셰익스피어 극은 당시 관중의 취향에 맞게 윌리엄 대브넌트 경, 존 드라이든, 나훔 테이트 등의 손을 빌려 각색되었다. 18세기에 영국의 무대는 데이비드 개릭이 주름잡았다. 개릭은 1747년에서 1776년까지 런던에 있 는 드루리 레인 극장의 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개릭은 비록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많이 개작 하기도 했지만 셰익스피어를 국가적 전통으로 만들기 위해 커다란 노력을 했다. 이 시기에 무대의 '스타'가 되는 위대한 배우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셰익스피어 극에 힘입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의 배우 찰스 매클린은 1741년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 역할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1789년 아흔 살이었을 때에도 그는 같은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찰스 켐블은 셰익스피어 극에 많이 출연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1823년 코벤트 가 든에서 공연한 존왕의 역이었다. 이 공연으로 그는 극의 시대에 걸맞는 옷을 도입하고 역사적 고 증을 강조하는 유행을 몰고 왔다. 그의 형 존 필립 킴블은 드루리 레인 극장과 코벤트 가든 극장 의 매니저였으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로마 사극에서 명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배우는 뭐니 뭐니 해도 애드먼드 킨이다. 그는 1814년에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샤일록 역을 맡아 첫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리처드 3세 역을 맡아 주가를 올렸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 햄릿> <오셸로> <리어왕> <맥베스>의 주연을 차례로 맡아 그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윌리엄 맥레디는 코벤트 가든 극장과 이어서 드루리 레인 극장의 매니저를 지냈는데, 거의 전 비극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의 주된 공로는 당시 유행하던 각색을 거부하고 셰익스피어의 원 작을 있는 그대로 상연했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연극은 역사적 고증과 시각적인 무대장치의 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유행 은 1878-1902년에 리시움 극장의 매니저를 지냈던 헨리 어빙 경과 1887-1897년 한 해 동안 헤이 마켓 극장의 매니저를 지낸 허버트 비어봄 트리 경이 도입했다. 이처럼 웅장한 것을 강조하다 보 니 연극의 진행이 대단히 무겁게 변했다. 이런 흐름에 반발하여 윌리엄 폴은 엘리자베스 시대 당 시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첫 4절판의 원고를 바탕으로 광경이나 막간 없 이 <햄릿>을 짧은 시간 안에 공연했다. 그는 할리 그랜빌 바커 같은 배우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 었다. 그랜빌 바커는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겨울 이야기> <12야> <한여름밤의 꿈> 같은 희극을 상연하여 대단히 유명해졌다. 이것은 유럽 전체에 급속히 확산된 대규모적인 연극 부흥의 단초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몇 가지 중요한 개혁이 도입되었다. 배리 잭슨 경은 <햄릿>을 연출할 때 주인공에게 현대 복장을 입게 해 셰익스피어 극의 현실이 바로 현대의 모습임을 강조하려고 했 다. 타이론 가트리 경은 1953년 <끝이 좋으면 다 좋다>를 연출하면서 현대 복장을 도입하는 실 험을 되풀이 했다. 이 극은 당시까지만 해도 잘 연출되지 않던 것인데 그가 과감히 무대에 올림 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모더니즘 덕분에 셰익스피어 극을 새로운 문맥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20세기 연극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성공작으로 꼽히 는 것은 피터 브룩이 연출한 <한여름밤의 꿈> (1970)이다. 이 연출에서 그는 작품의 젊은 애인들 이 도피하는 아테네의 숲이라는 마법과 요정의 세계는 현대적으로 볼 때 서커스단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피터 브룩 극단의 코스모폴리탄적이고 다인종적이며 다문화적인 성격은 피터 브룩의 연출에 독창성을 더해 주었다. 영국, 아프리카, 일본, 인도 등 여러 나라 출신의 다양한 배우들이 보여 주는 몸짓과 억양은 셰익스피어의 대사에 때로는 예기치 않은 멜로디를 실어 주었다. 프랑스 연출자 아리안 음누슈킨은 전혀 다른 연극정신을 발휘하여, 일본의 연극(가부키와 노)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1981년 뱅센의 쇠여 극장에서 아주 새로운 <리처드 2세>를 연출했다. 이 극은 20세기 연극 연출에 한 획을 그었고 그 이후 전세계의 많은 극단에게 영향을 주었다. 1970 년대 중반 영국의 연출자 테리 핸즈(그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단원이기도 하다)가 파리의 코 미디 프랑세즈로 건너가 셰익스피어 극을 다수 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베니스의 상 인>이 있고, 인상적인 것으로는 <12야>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의 피콜로 세아트르 극장 에서 조르조 스트렐러가 연출한 <리어왕> <템페스트>가 훌륭하고 또 모범이 된다는 평가를 받 았다. 위대한 배우들 배우는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할 수가 없다. 아주 뛰어난 배우만 추려 보았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극은 위대한 배우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되었다. 셰익스 피어 극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위대한 <햄릿> 하나만 놓고 볼 때도 이 우울한 덴마크의 왕자 역을 한 배우들의 명단은 길고도 길다. 낭만시대의 위대한 배우는 존 필립 켐블, 에드먼드 킨, 윌리엄 맥레디 등이었다. 헨리 어빙 경은 1874년에 리시엄 극장에서 맥레디의 뒤를 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화려한 연출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존스턴 포브스 로버트슨 경도 1987년에 햄릿을 맡았고 1913년에는 무성영화에도 출연했다. 1899년에는 사라 번하트라는 여우가 햄릿을 연기하기 도 했다. 프랭크 로버트 벤슨 경은 1899년에 리시엄 극장에서 원래 대본 그대로 햄릿을 연기했다. 미국에서는 1922년에 존 베리모어가 햄릿 역을 처음 한 이래 환호하는 관중 앞에서 1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배리 잭슨이 1925년에 현대복장을 하고서 햄릿 역을 한 것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 다. 그리고 5년 뒤인 1930년 존 길거드가 런던의 올드 빅 극장에서 햄릿 역을 했다. 길거드는 햄릿 을 환멸에 빠지 세대의 상징인물로 해석했는데, 금세기의 가장 훌륭한 햄릿이라고 많은 비평가들 이 입을 모은다. 1937년에는 타이론 가트리의 연출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햄릿 역을 맡았고 그 10 년 뒤에은 영화에도 같은 역으로 출연했다. 알렉 기네스도 1938년 올드빅에서 햄릿 역을 맡아 열 연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폴 스코필드가 1948년에, 그리고 마이클 레드그레이브가 1950년에 각 각 올드빅에서 햄릿 역을 맡았고 레드그레이브는 8년 뒤 스트래트퍼드 공연에서도 역시 햄릿 역 을 맡았다. 1963년, 런던 국립극장 개관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출한 햄릿에서 는 피터 오툴이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1964년에는 영화에서 이름을 날렸고 로열 셰익스피어 극 단에서 수업을 쌓은 리처드 버튼이 뉴욕에서 햄릿을 열연했다. 1965-1966년에는 데이비드 위너가 스트래트퍼드와 런던에서 햄릿 역을 맡아 했고 1970년에는 알란 하워드가 같은 역을 맡았다. 벤 킹슬리는 버즈 굿바디가 스트래트퍼드 소극장인 디 아더 플 레이스 극장에서 연출한 햄릿에서 현대복장을 하고 출연했다. 그다음에 데랙 자코비의 새로운 해 석이 나왔다. 먼저 1978년에 새로운 해석의 햄릿이 선보였고, 이어 조나단 프라이스와 마이클 페 닝턴이 1980년 영국 텔레비전 방송국을 위해 제작한 영화에서 또 다른 햄릿이 선보였다. 또 1982 년 안톤 레서가 햄릿을 영화로 제작했다. 최근에는 마크 라일랜스라는 아주 젊은 배우가 햄릿으 로 나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채 완전한 정신병자 햄릿을 보여 주고 있다. 마치 덴마크가 거대 한 정신병동이나 되는 것처럼. 셰익스피어와 오페라 오페라는 셰익스피어의 극중 특정 장면이나 특정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작 곡가 베르디는 폴스타프를 주인공으로 1893년 오페라를 작곡했다. 17세기에 음악가나 오페라 대본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은 희극이었다. 그래서 매슈 로크와 펠렘 험프리는 1674년에 <템페스트>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헨리 퍼셀은 <한여름밤의 꿈>을 바 탕으로 <요정여왕>을 작곡했는데, 노래와 대사가 교대로 나오는 방식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도 오페라 각색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희극이었다. 1716년, 영국의 가수이며 작곡가인 리처 드 레버리지는 <한여름밤의 꿈>의 발췌본을 이용하여 <피라무스와 티스베>라는 오페라를 만들 었다. 1744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베라치니가 <좋으실 대로>를 각색하여 <로 잘린드>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18세기 말에 비극의 각색도 이루어졌는데, 그중 1776년에 나온 벤다와 스와넨버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오페라계를 사로잡은 것은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이었다. <로미오와 줄리 엣>은 낭만시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두 편의 위대한 오페라가 나왔다. 하나는 1830년 에 빈첸초 벨리니가 작곡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867년에 샤를 구노가 작곡한 것이다. 조아치노 로시니의 <오셀로>는 1816년에 작곡되었는데 그 버들 노래가 아직도 유명하다. 베르디는 1847년 에 <맥베스>를 작곡했고 1865년에 개정판을 내놓았다. 이 오페라는 인간의 내면세계(맥베스의 죄 악, 여왕의 몽유병)를 다룰 뿐만 아니라 마녀, 동물의 외침, 학정에 시달리는 인민의 합창 등 외적 행동도 다루고 있다. 1887년, 베르디는 자신의 개성이 가득 담겨 있는 <오셀로>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에서는 갈등의 핵심사항만 다루었는데, 아리고 보이토가 음악적인 표현에 맞게 멋지게 각 색한 대본을 가지고 작곡되었다고 한다. 가장 위대한 것은 베르디의 <폴스타프>(1893)이다. 이것 은 보이토가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을 주로 각색하고, 헨리 4세의 내용을 일부 가져다가('명 예'에 대한 아리아) 만든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베르디는 만년에 <리어왕>에 바탕을 둔 오페라도 써 볼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바그너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일 을 딱 한 번 시도했다. 그의 초기 오페라 <사랑의 금지>(1836)는 <법에는 법으로>를 대본으로 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오페라계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희극으로 돌아가고 있다. 베드리치 스메타나의 <비올라>(1924)는 <12야>에 바탕을 둔 것이고, 벤자민 브리튼은 <한여름밤의 꿈>을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1960년에 작곡했다. 그의 오페라에서는 숲으로 상징되는 초자연 적 세계가 인간의 세계에 대항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목소리가 사용되고 있다. 브리튼은 또 친숙한 대중적 가락을 포함시킴으로써 이 극의 유머가 갖는 효과를 성공적으로 살려 내고 있다. 프랑수아 아로크 셰익스피어와 영화 셰익스피어의 극이 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르주 멜리에, 오 슨 웰스, 프랑코 제피렐리, 구로사와 아키라, 피터 그리너웨이, 케네스 브라나그 등 영화감독들은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받아 다양한 영화적 해석법을 창출해 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셰익스피어 관련 영화가 많이 나왔다. 20세기 초엽 30년 동안 17편의 <햄릿 >, 10편의 <줄리어스 시저>, 8편의 <맥베스>, 10편의 <베니스의 상인>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들 영호나느 조르주 멜리에나 데이비드 률린 워크 그리피스 등 쟁쟁한 영화감독이 제작한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 각색판이거나 연극을 영화로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1913년에 존스턴 포브스 로버 트슨과 세실헵워드가 제작한 <햄릿>은 그렇지 않다. 1920년대부터는 몇 편의 우수한 독일 영화 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한스 노이만 감독이 제작한, 소란스런 이미지의 <한여름밤의 꿈 >(1925)이 인상에 남는다. '토키(talkies)'가 제작되기 시작하자 할리우드가 유성영화의 메카로 등장했고 막스 라인하트와 윌리엄 디털 리가 <한여름밤의 꿈>(1935)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키치 효과(kitsch effects, 요정 들이 레이스 달린 투투 스커트를 입고 춤추는 것)와 정신 어지러운 환상을 도입했다. 1936년에는 조지 쿠커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말론 브란도가 조지프 맨 케위츠 감독의 <줄리어스 시저>(1953)에 나와서 마크 앤터니 역으로 열연했다. 맨케위츠 감독이 클레오파트라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손을 잡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겉만 번드 레했지 실속은 없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전쟁중인 1944년에 제작 한 <헨리 5세>이다. 이 영화에는 애국심이 전편에 넘쳐 흐르는데 영화의 시작 장면과 끝 장면에 는 글로브 극장이 잠깐 비쳐져 엘리자베스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된다. 그가 1948 년에 제작한 <햄릿>은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턴은 나오지 않는 축소판인데 햄릿은 처음부터 아무 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젊은 사람으로 나온다. 뒤이어 <리처드 3세>(1955)와 <오셀로>(1965)가 제작되었다. 특히 올리비에가 까만 피부의 주인공으로 나온 <오셀로>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오슨 웰스도 <맥베스>(1948), <오셀로>(1952), <한밤의 차임벨 소리>(1965), <리처드 2세> < 헨리 4세 1-2부>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헨리 5세>의 인상적인 장면을 모은 것)를 제작했 다. <한밤의 차임벨 소리>는 이 세 편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이탈리아 감독 레나토 카스텔라니 와 프랑코 제피렐리는 극 중 실제 장소에 영국 배우들을 등장시켜 <로미오와 줄리엣>(베로나, 카 스텔라니, 1954 ; 제피렐리, 1968)와 <말괄량이 길들이기>(파두아, 제피렐리, 1967)를 제작했다. 후 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을 등장시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제 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는데, 아주 어린 배우들을 등장시켜 완고한 부모의 몰이해 때문에 비극의 희생양이 된 청소년들의 낭만적 사랑을 잘 영상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셰익스피어 영화화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감독들이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 감독 그리고리 코신체프는 1964년에 <햄릿>을, 1970년에 <리어왕>을 제작해 영화평론가들로부 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 영화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더 독창적인 것은 구로시와 아키라 감독이 제작한 일본 영화이다. 구로사와가 첫 번째로 셰익스피어 극을 영 화화한 것은 <피의 왕좌>(1957)인데, 맥베스를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로 바꾸어 등장시키고 있다. 구로사와는 1985년에 <란>을 제작하면서 셰익스피어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영화는 리어왕을 부 족 간쟁투의 중심에 놓고서, 봉건제가 붕괴되어 가는 세계에 처한 늙은 왕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치열한 전투장면을 화려한 색깔로 처리하여 발레장면처럼 영화화시킨 것이 특색이다. 최근에도 셰익스피어 영화가 자주 제작되어 셰익스피어가 젊은 감독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 배우인 케네스 브라나그는 스트래트퍼드와 런던에서 헨리 5세의 역할을 맡아서 하다가 르네상스 시어터 극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1990년에 <헨리 5세>를 영화화했다. 케 네스 자신이 젊은 왕의 역할을 맡았고 데렉 자코비가 코러스, 주디 덴치가 주막의 마누라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헨리 5세>와 전혀 다른 이 영화는 제작솜씨가 로렌스 올리 비에 못지않다는 평을 받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피렐리 감독은 1991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멜 깁슨을 기용하여 스코틀랜드의 여러 성을 돌면서 <햄릿>을 제작 했다. 같은 해 영국의 피터 그리너웨이는 <템페스트>를 각색하여 <프로스페로의 책>이라는 영 화를 만들었는데 밀도 높은 장면이 시각적으로 대단히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에는 83 년의 경험을 가진 노배우 존 길거드 경이 프로스페로 역을 맡았고 그의 목소리를 컴퓨터로 조작 하여 극중의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로 삼았다. 영화에서 프로스페로는 지고한 조종자이다. 그가 쓰 는 극(그는 또한 셰익스피어로 등장한다)은 그의 모든 환상을 육화하는 동시에 그 환상에서 악령 을 제거한다. 프랑수아 라로크 셰익스피어 극 영화화의 역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앙리 안드레아니 감독, 1910(프랑스) <클레오파트라>, 조지프 맨케위츠 감독,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주연, 1972(미국) 좋으실 대로 폴지너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1936(영국) 햄릿 클레망 모리스 감독, 사라 번하트 주연, 1900(프랑스) 조르주 멜리에 감독, 1907(프랑스) E.헤이 플럼 감독, 1913(영국)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1948(영국) 그리고리 코신체프 감독, 1964(러시아) 토니 리처드슨 감독, 1969(영국)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 1991(이탈리아)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주연, 1944(영국) 케네스 브라나그 감독, 주연, 1990(영국) 줄리어스 시저 <줄리어스 시저의 죽음>, 멜리에 감독, 1907(프랑스) 데이비드 브래들리 감독, 찰턴 헤스턴 주연, 1950(미국) 맨케위츠 감독, 말론 브란도 주연, 1953(미국) 스튜어트 버지 감독, 찰턴 헤스턴, 존 길거드 주연, 1969(영국) 리어왕 그리고리 코신체프 감독, 1970(러시아) 피터 브룩 감독, 폴 스코필드 주연, 1971(덴마크) <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1985(일본) 맥베스 앙드레 칼메트 감독, 1910(프랑스) <피의 왕좌>, 구로사와 감독, 1957(일본) 조지 셰퍼 감독, 1960(영국)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앙리 데폰테인, 1913(프랑스) 피터 폴 펠너 감독, 1923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게오르그 빌트하겐 감독, 1950(독일) 한여름밤의 꿈 막스 라인하트, 윌리엄 디털리 감독, 제임스 캐그니 주연, 1935(미국) 피터 홀 감독, 1969(영국) 헛소동 브라나 감독, 주연, 1993(영국) 오셀로 웰스 감독, 주연, 1952(미국) 세로게이 유케비치 감독, 1955(러시아) 스튜어트 버지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1965(영국) 리처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1955(영국) 로미오와 줄리엣 조지 쿠커 감독, 1936(미국) 레나토 카스텔라니 감독, 1954(이탈리아, 영국) 제피렐리 감독, 1968(이탈리아, 영국) 말괄량이 길들이기 데폰테인 감독, 1911(프랑스) 제피렐리 감독,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 1967(이탈리아) 템페스트 데렉 자만 감독, 1980(영국) 폴 마저스키 감독, 1982(영국) <프로스페로의 책>,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 1991(영국) 12야 얀 프리드 감독, 1955(러시아) 겨울이야기 프랭크 던롭, 1966(영국) 셰익스피어 산업 해마다 약 5,000종의 셰익스피어 관련 자료가 발간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저작, 논문, 연극에 관련된 기사 등의 발행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대학에 서 시작되어, 이제 그 물결이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저작은 그 규모에서 영국과 미국의 그 어떤 작가보다도 방대하다. 전기, 용 어색인, 논문, 요약집, 발췌본 등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서적이 계속 나오 고 있어서 최신 자료들을 유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평 관련 자료는 너무나 많이 나와 있 어서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려는 학생이나 학자를 낙담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열기는 영어권이나 독어권에서 식을 줄 모른다. 특히 독어권에서는 셰익스피어 연구열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프랑스나 라틴 국가들에서는 셰익스피어 극에 사용된 어려운 16세기 영어가 문제되어 사정 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번역판과 판본이 계속 나오고 있고 연극과 영화에 서 셰익스피어 각색본이 성공을 거두어 셰익스피어 연구가 진작될 상황에 있다. 대학의 연구활동 못지않게 연극계나 배우들의 활동도 다양하다. 스트래트퍼드어펀 에이븐에는 세 개의 영구극장이 있다. 그 첫째가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Rst)인데 이 극장은 1879년 이 지방의 부유한 양조장 주인인 찰스 에드워드 플라워의 도움으로 지어졌고 1933년 화재 후에 재건축되었 다. 두 번째는 디 아더 플레이스라는 극장인데 전에는 리허설 장으로 쓰이던 것을 개비하여 1974 년 극장으로 문을 열었고 최근 현대적 안전설비를 갖추기 위해 재건축되었다. 세 번째는 스완 극 장인데 17세기의 개인극장을 본떠 만든 목조건물로서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 바로 옆에 있다. 이 극장은 1986년에 문을 열었다. 연극 시즌은 사실상 1년 내내이고(4월 23일 셰익스피어 탄생 기념 행사를 한 다음 문을 열어 다음해 1월에 끝난다.) 15개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운영한다. 그리고 공연된 것 중에 가장 인기 있는 것만 모아서 런던의 바비칸 극장에서 재공연을 한다. 이들 극장 이외에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직전에 건립되어 오랫동안 로렌스 올리비에가 관리 해 온 내셔널 시어터 극장, 영 빅 극장, 올디치 극장, 리젠트 파크에 있는 야외극장 등이 있으며, 이 극장들은 모두 활발하게 셰익스피어 극을 공연한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로열 셰익스피어 극장과 바비칸 극장에 상주하는 극단) 이외에 최근에 여러 극단이 새로 생겼다. 특히 마거릿 대처 정권 아래서 각 극단에 지급되던 보조금이 대폭 삭감된 상황하에서도 신규 극단이 생겨난 것은 가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극단 중 대표적인 것은 마이클 보그다노프가 관리하는 잉글리시 셰익스피어 극단과 케네스 브라나그가 관리하는 르네상스 시어터 극단인데 두 극단은 이름에 걸 맞게 수준 높은 연극을 내놓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극장(최근에 그 기초터가 발견되었다. 바로 옆에 새 글로브 극장을 짓는 계획은, 건축에 따르는 법적, 재정적 장애가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에 곧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미국 배우 샘 워너메이커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여름에는 전세계 각구에서 셰익스피어 출생지를 구경하고 스트래트퍼드의 세 개 극장에서 공연 하는 연극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특히 일본인은 서양문화의 보고라 할 셰익스피 어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1년 일본의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 셰익스피어 대회는 1,000 여 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셰익스피어 연구는 여러 유수한 기관이 그 원동력이 되고 있다. 먼저 셰익스피어 전문 대형 도서관이 그것인 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셰익스피어 센터 도서관,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의 셰익스피어 인스티 튜트 도서관, 워싱턴 D.C.의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 캘리포니아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도서관 등을 들 수 있다. 논문, 보고서, 서지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연구실적은 여러 정기간행물에 발 표되고 있다. 이 간행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셰익스피어 연감>인데 1865년 베를린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가장 권위 있는 저널인 <셰익스피어 서베이>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다. 미국 의 대표적인 저널은 1950년 뉴욕에서 처음 발간된 <계간 셰익스피어>이고 그 뒤 1972년에 폴저 도서관에서 이 저널의 발간을 맡아 계속 펴내고 있다. 또 1965년 신시내티에서 처음 발간된 <셰익스피어 스타디즈>도 저명하다. 프랑스에서는 몽펠 리에 소재의 폴 발레리 대학에서 1972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노트북>을 창간했는데 셰익스피 어와 엘리자베스 시대에 관한 국내 논문과 해외논문을 싣는다. 이 간행물은 반년마다 출간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셰익스피어 연구학회를 두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865년 바이마르에서 발 족된 독일 셰익스피어 학회이다. 프랑스의 셰익스피어 학회는 1975년에 발족되었다. 셰익스피어 학자가 제일 많은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일본 셰익스피어 학회 이다. 이 학회에는 정회원만도 800명이 넘는다. 이것은 일본에서 셰익스피어가 얼마나 인기 있는가를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각국의 셰익스피어 학회는 모두 국제 셰익스피어 연합회에 소속되는 데, 이 단체는 1972년에 발족되었고 4년마다 한 번씩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첫 번째 대회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있는 밴쿠버에서 열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세익스피어 연구의 메카는 스트 래트퍼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곳에서 셰익스피어 학술회의가 2년마다 8월 중에 1주일 동안 열 린다. 회의장소는 셰익스피어 인스티튜트인데 이때가 되면 전세계의 내로라 하는 셰익스피어 학 자가 한자리에 모인다. 프랑수아 라로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