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미술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33] 지은이: 미셸 오 / 이종인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세잔-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제1장 유년시절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기록과 증언 세잔-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나는 당신에게 회화의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평생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독창적인 천재 세잔은 회화의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침내 세잔은 색채의 논리를 규정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의 작업은 곧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지은이: 미셸 오 지음 / 이종인 옮김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김봄 미셸 오(Michel Hoog) - 파리 로랑제리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미셸 오는 '로베르 들로네'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리얼리즘과 시정' '르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주최한 바 있다. 1971년부터 파리에 있는 에콜 드루브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펴낸 수많은 미술 서적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종인 -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문자의 역사」, 23번「셰익스피어」, 28번「붓다」, 32번「미라」가 있으며, 그외「절망이 아닌 선택」「증발」「때로는 낯선 타인처럼」등이 있다. 제1장 유년시절 엑상프로방스에서 조용히 보낸 청소년 시절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에 태어났고, 마리와 로즈라는 두 누이가 있었다.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는 모자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1848년 엑상프로방스에 유일한 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세잔이 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한사코 반대했으나, 자녀들에게 그리 엄격한 아버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세잔의 어머니 안 엘리사베트(처녀 때 성은 오베르)는 총명하고 활발한 여자였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세잔의 어머니는 화가가 되려는 아들의 뜻을 이해한 듯하고 그문제로 부자간에 언쟁이 벌어질 때면 세잔편을 들어주었다. 세잔은 초등학교에서 글쓰기를 익히고 에콜 생조세프에서 2년을 수학했다. 그리고 1852년에 엑스(엑상프로방스의 약어)에 있는 콜레주 부르봉(중학과정)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후 1858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을 따낸 세잔은, 중학을 졸업할 무렵, 라틴어, 그리스어, 고대 문학 및 프랑스 문학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시와 극을 지을 줄도 알았는데, 당시에 쓴 과장되고 약간은 외설적인 습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평생 동안 세잔은 그가 받은 인문주의적 교육에 충실했다. 회화에 모든 전통을 철저하게 거부했던 세잔이었지만 문학만큼은 고전적 취미를 즐겼으며, 늘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문학풍조도 폭 넓게 받아들였다. 에밀 졸라와 우정을 쌓아가다 에밀졸라도 콜레부 부르봉의 학생이었다. 졸라는 아버지가 없는데다 병약했고 지독한 근시여서 동급생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 그때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세잔이 나타나 그를 구출해 주곤 했다. 세잔이 처음으로 개구쟁이들을 물리쳐 준 다음날 졸라는 사과를 선물했다. 이렇게 해서 두 소년은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들의 우정은 1886년까지 계속된다. 콜레주 부르봉에는 나중에 건축가가 된 밥티스탱 바이유도 있었는데, 세잔, 졸라, 바이유는 3총사가 되었다. 그들은 엑스 인근 교외로 놀러 나가기도 했고, 여름이면 아르크강에서 수영을 하면서 지냈다. 에밀 졸라는 파리에서 세잔에게 보낸 1861년 2월 5일자 편지에서 이때의 일을 그리운 마음으로 회고했다. "아, 이제는 우리 고향 시골들판을 돌아다닐수 없겠지. 르톨로네의 바위 틈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일 생각나나. 그리고 놀이가방에 병을 넣고 바이유의 작은 별장으로 헐레벌떡 달려가던 일, 포도주 냄새가 진동하던, 잊지 못할 사냥숙고여. " 자연과 음악을 사랑한 도시인 세잔은 엑스 근교의 한적하고 외진곳을 더 좋아했다. 집에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비밀놓이'를 즐길 때면 그는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들판의 냄새'라고 대답했고, 가장 좋아하는 여가활동은'수영'이라고 말했다. 1858년 4월 9일에 졸라에게 쓴 편지에서 세잔은 이렇게 향수를 달랜다. "자네, 아르크 강변에 우뚝 서 있던 소나무를 기억하나?자기 발밑의 깎아지른 벼랑을 향해 더벅머리를 숙이던 그 소나무를 말일세. 소나무의 날카로운 침엽은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었지. 아, 나무꾼의 도끼가 그 나무를 베어 버리지 않도록 신께서 보호해 주셨으면. . " 세잔은 고향과 자연-식물, 숲, 아르크강에서 즐기던 수영-을 사랑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 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이 점에서 미래의 동료인 인상파 화가들과도 달랐다. 그들은 도시인으로 남기를 바랐고, 그들이 알고 있는 자연은 파리의 공원과 일드프랑스의 과수원 정도였다. 세잔과 친구들은 심심풀이로 음악도 연주했다. 소년 에밀 졸라라 조직한 밴드'즐거운 친구들' 에서 세잔은 코넷을 불었고, 졸라는 클라리넷을 불었더. 세잔은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에도 코넷을 가지고 갈 정도였으나, 졸라는 곧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세잔은-동료화가들인 에두아르 마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앙리 팡탱 라투르, 폴 고갱 들과 마찬가지로-음악에 깊이 심취했다. 문제 많은 독일의 작곡가 라하르트 바그너가 프랑스에서 별 인기를 못 얻던 시절, 세잔은 리하르트 바르너를 숭배한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말년에 세잔은 저녁기도에 나가기를 한사코 거부했는데, 그이유는 그곳 성당 부제의 오르간 연주 솜씨 가 형편없다는 거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스 대학교 법학과에 등록한 세잔, 그러나 마음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근면과 총명을 바탕으로 독학을하고 부자가 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는 아들이 공부를 더 하여 판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이 엑스프로방스의 법원에서 근무하는 어엿한 판사가 된다면, 엑스의 귀족사회에서 경멸을 당해 온-본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원이었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두 아이(폴과 마리)가 결혼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루이 오귀스트로서는 얼마나 멋진 신분상승이 될 것인가. 젊은 폴 세잔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무튼 그것이 19세기에는 가장 빠른 신분상승의 길이었으니까. 그러나 금융업이나 법학은 도무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한걸음 또 한걸음 당시 부르조아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던 직업인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학교육을 마치기 전인 1857년 세잔은 엑스의 시립개방미술학교에 등록했다미술학교에서 세잔을 가르친 미술선생은 조제프 질베르교수였다. 그는 19세기 관습에 따라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현지 박물관인 뮤제 그라네의 관장으로 근무했다. 중학교 미술수업을 약간 보충하는 정도에 불과한 그의 수업은 그다지 독창적ㅇ니 것은 아니었다. 질베르가 세잔에게 가르쳐 준 것은 당시 유행하던 방법, 예를 들어 고대 조각을 본 뜬 석고상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살이 있는 모델을 그리는 것등이었다. 질베르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나 낡아빠진 예술관이 세잔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을켰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세잔은 질베르와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경의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세잔은 언제나 일정한 권위를 갖춘 사람에게 존경을 표했다. '는 사실로, 아니면'세잔은 자신에게 미술의 기초를 가르쳐 준 은사에게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세잔은 1859년에서 1860년까지 법률공부와 미술학교에서의 그림공부를 병행했다. 1859년, 그는 구상화 부문에서 2 등을 차지했고, 아버지는 화가수업을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청년 세잔의 첫 작품은 아버지가 1859년에 사들인 집 자 드 부팡에 그린 장식화이다. 자 드 부팡은 액스 중심부에서 1,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공원에 있는 18세기풍 대저택이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이 이 대 저택을 사들인 배경에는, 당시 엑스의 부유층에서 유행하던 관습대로 여름 저택과 겨울 저택을 따로따로 소유하여 엑스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자 드 부팡을 좋아한 청년 세잔은 그곳에 자주 머물면서 작업을 했다. 그 당당한 저택과 공원의 나무들은 그의 유화와 수채화에 여러 번 등장한다. 자 드 부팡의 거실 벽에 그린 벽화는 저택 구입 직후 아버지의 승낙 아래 진행되었다. 벽화는 '4계절의 알데고리'를 그 주제로 하고 있는데, 나중에 아버지의 초상화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덧붙였다. 아버지는 이 ( 4계절)벽화를 보고 아들의 '파리 상경'을 허락해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1860년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승낙을 취소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파리행을 승낙받은 것은 이듬해인 1861년이었다. 파리 유학은 19세기의 야심찬 젊은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것이었다. 파리는 행정부의 소재지이고 좋은 학교와 문화기관이 몰려 있는 문화중심지라는 사실이 이러한 동경을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게다가 그곳에는,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시골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특히 자유는 청년 세잔이 뜻을 둔 예술세계의 필수요소가 아닌가. 리옹에 있는 어떤 학교는 예외라 치고 지방 학교들은 이렇다 할 특색을 갖추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니 위대한 예술적 투쟁은 모두 파리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살롱과 작품 선발을 둘러싼 잡음, 제2제정의 성립, 쿠베트 특별전시회등 굵직굵직한 사건도 지방에서는 먼 산 불구경일 뿐이었다. 젊은 예술가가 수련을 받고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곳, 그곳은 오직 파리였다. 그래서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하지 않는가. 전세계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선망하고 결국에는 이 도시로 옮겨 와 무명시절을 힘겹게 견디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미술과 법학이라는 생판 다른 두 분야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 자신의 천직이 미술가라고 믿었던 세잔은, 말할 것도 없이 파리 유학을 열망했다.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 이외에도 가정과 그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한편, 1858년부터 파리에 있던 졸라는 세잔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해서 천직을 따라야 한다고 권유했다. 1860년 7월 졸라는 이렇게 써 보냈다. "그림은 자네가 심심할 때 느닷없이 대드는 그런 변덕스런 취미에 불과한가?심심풀이, 화젯거리, 아니면 법률공부를 피하려는 핑계인가?만약 그렇다면 자네가 왜 그리 꾸물거리는지 잘 알 것 같네. 정말 그렇다면 너무 무리할 필요도 없고 또 집안 식구들을 괴롭힐 것도 없네. 하지만 그림이 자네의 천직이라고 믿는다면-나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믿네-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난 자네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는 내게 수수께끼, 스핑크스, 불가해한 인물, 혹은 알 수 없는 신비로 여겨질 뿐이네. "졸라는 1860년 여름 엑스를 방문했고 이것은 세잔의 파리행 결심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차분히 일하고 있고,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 " 1862년 11월, 한 번 실패한 끝에, 세잔은 드디어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소박하고 근면한 생활을 했다. 아틀리에 쉬스(한 달치 수업료를 내면 모델을 스케치하거나 그릴 수 있는 스튜디오)나 집에서 작업을 했고 종종 박물관을 찾아가 거장들의 그림을 구경했다. 그는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살롱에 참가했다. 1863년부터 세잔은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아가 거장들의 그림을 즐겨 복사했다. 그는 또 생존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뤽상부르 박물관에도 자주 갔다. 세잔은 그곳에서 가장 존경하는 화가 가운데 하나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을 보았다. ( 키오스의 학살), ( 지옥의 단테와 비르길리우스) 등의 그림이 앵그르의 제자들이 그린 작품 옆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화구와 서책을 뒤적거리면서 소년시절의 우정을 지속하던 세잔과 졸라는 일없는 날에는 교외로 같이 산책을 나갔다. 세잔은 동료 화가들과는 달리, 카페에 나가는 일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고, 그 대신 엑스의 친구들-졸라, 시골 미술학교에서 만난 누마 코스트, 아실 앙프레드 같은 화가지망생들-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즐겼다. 궁핍은 당시 화가들의 공통적인 업보였다. 그러나 세잔은 운이 좋았다. 세잔은 아버지가 매달 부쳐 주는 돈과 어머니가 몰래 보내 주는 돈으로 생활할 수가 있었다. "우리 집안은 여러 모로 훌륭했다 할 수 있지만, 갈피를 못 잡는 이 화가지망생에게는 좀 인색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골 집안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는데, 아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때에도 그런 생활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세잔의 아버지는 아들이 미술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이왕 계속하려거든 성공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을 택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에콜데보자르(미술대학)에 입학하고, 로마상(이 상을 타면 1년간 로마 유학 특전이 주어졌음)에 도전해 보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콜데보자르에서는 미역국을 마셨고, 살롱 출품은 거듭된 낙선만을 확인해 주었다. 세잔은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화가로 계속 작업을 했다. 고향 엑스로 내려가면 먹고 자는 것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의 잦은 낙향에는 고향의 분위기를 맛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겠지만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인 의도도 담겨 있었다. 세잔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너무 의존한다는 사실과 자기 작품에 쏟아지는 비난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깍듯한 존경의 태도를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꺾지도 않았다. "나는 동료화가들이 자기들 멋대로 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내가 언제 그들에게 평가해 달라고 요구했던가. " 1863년 살롱전에서 다시 한 번 낙선하자 세잔은 처음으로 살롱의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그해의 심사위원들은 너무나 까다롭게 심사를 했다고 알려졌다. 항의가 거세어지자 나폴레옹 3세는 낙선한 화가들의 작품만을 모아 낙선전을 열어 일반 대중의 평가를 받도록 조처했다. 낙선전에는 세잔의 작품을 포함하여, 세잔과 가까이 교류하던 인상파 화가들인 카미유 피사로, 아르망, 기요맹, 앙리 팡탱 라투르, 제임스 휘슬러,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특히 마네는 (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림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세잔은 1866년 4월 19일 살롱의 미술담당 책임자인 니외베르케르케 백작에게 거만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살롱의 심사위원들을 믿을 수 없으며 예술가는 자기 작품을 직접 관중들에게 보일 권리가 있다고 썼다. "그러므로 이렇게 요구합니다. 비록, 낙선작이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작품을 보여 주고 호소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소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백작께서 제 입장에 있는 화가들의 의견을 물어 보신다면, 그들은 예외 없이 심사위원을 의심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의 노작이 일반 대중에게 관람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잔의 항의편지에도 아랑곳없이 낙선전은 그뒤로는 몇 년 동안 다시 열리지 않았다. 1870년 이전의 세잔의 작품은 그 스타일이 너무나 다양하여 분류하기가 어렵다세잔은 자기 작품을 많이 버렸다. 남아 있는 것들도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 미술사가들조차 제작년도와 작품 속의 내용에 대해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스타일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대가다운 면모가 돋보이는가 하면 어떤 것은 어색함을 지니고 있어 형편없어 보인다. 졸작들은 기술이 부족했거나, 너무 급히 제작되었거나, 일부러 조잡하게 그린 것들이다. 세잔은 늘 자신이 본 것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개탄했다고 한다. 이미 경력 초기부터 세잔의 테마는 다양했다. 1870년 이전에도 평범한 소재의 정물화, 인물화(대부분 남자), 풍경화, 우화적 인물화 등을 제작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적인 테마와는 아주 대비가 되는 기괴한 장면, 가령( 부검), ( 대주연), ( 나폴리의 오후), ( 성 앙투안의 유혹)같은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한두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데 비해 그는 온갖 스타일을 두루 시도했다. 세잔은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두 번 그렸다. 아버지가 정말 포즈를 취해 주었던 것일까?아니면 아버지가 조용히 않아 있는 틈을 타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세잔이 첫 번째로 그린 아버지 초상화는 자 드 부팡의 거실벽화인( 4계절)중 ( 여름)과 ( 겨울)사이에 걸리는 영광을 누렸다. 그 초상화보다 3-4년 뒤에 그려진 두 번째 초상화는 세잔이 파리에서 상당한 미술실력을 쌓았음을 잘 보여 준다. 이번에는 소재들이 공간 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얼굴과 안락의자(이 의자는 다른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부분의 명암처리도 훌륭하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면 모네나 르누아르의 작품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 시절의 세잔이 인상주의자들과 가까워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세잔의 독창성은 그의 작업방식-아버지의 초상화는 주로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찍어 발랐다-과 순백색, 회색, 흑색 사이의 강렬한 대비가 있다. 세잔은 정물화에서도 색조의 대비를 실험했다. 아버지의 초상화 못지 않게 인상적인 이 시절의 또 다른 초상화는 아실 앙프레르를 그린 것이다. 앙프레르는 아틀리에 쉬스에서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고 세잔이 대단히 좋아한 엑스 출신의 화가였다. 난쟁이 같이 작은 몸집의 이 남자는 반 다이크 기사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머리를 갖고 있다. 세잔은 이 초상화의 밑그림을 그릴 때 풍자정신을 완전 배제한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그림은 이 인물의 우스꽝스럽고 불쌍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당시 세잔은 자 드 부팡의 벽에다(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1907년 벽에서 뜯겨진 이 그림은 두 개로 나위어 별도의 작품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사진을 참조해 보면 원래 한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그림, ( 림보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는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 막달라 마리아)는 더욱 구도가 큰 입묘장면(결국에는 그려지지 않는)의 한 부분이 아닌가 추정된다. "실내나 스튜디오에서 그린 그림은 결코 야외에서 그린 것보다 좋을 수가 없다" 1866년 10월 19일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잔은 야외작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면 인물과 땅의 대비가 선명해지고 풍경도 멋있어진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야외작업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이 시기의 풍경화는 인상주의를 예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쿠르베나 바르비종파(19세기 초 파리 근처 바르비종에서 작업한 화가들로서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북부 바로크 방식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를 연상시킨다. 세잔은 짙은 청색과 흑색을 사용하면서 평행한 면을 구사하여 부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화면을 창조했다. 이는 당시의 관학적인 방식과 부합하는 것이다. 환락, 대주연, 납치 등 세잔의 초기 화폭은 강한 육욕적 분위기를 드러낸다. 젊은 세잔의 정서적 분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의 편지에는 학생시절의 연애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그건 단지 정신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의 가장 인상적인 그림의 하나인( 대주연)은 사람들이 나체나 환상적인 옷을 입은 상태로 엎어진 테이블 주위를 뒹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인물들은 대광란에 빠져 있다. 화폭 위에 매스(일반적인 형태나 꼴을 그러내는 컬러 혹은 색조의 덩어리, 이하'앙괴'로 씀)와 공간을 적절히 배치하는 기술을 터득한 세잔이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의도적으로 혼돈스런 광란의 느낌이 오도록 구성하고 있다. 색깔도 대단히 밝은 쪽으로 구사하고 있어 당시로는 충격적인 것이다. 연녹색, 적색, 하늘의 청색등은 진녹색, 흑색, 프러시안 블루등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어, '대주연의 광란'이라는 전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그림 이외에도 여러 개의 소품이 있는데 만약 전시가 되었다면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춘화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아내인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 직후인 1870년부터 성애를 다룬 주제는 자취를 감춘다. 세잔은 당시 무시받던 분야인 정물화에도 손을 댔다. 18섹시만 해도 정물화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신고전주의 화가와 낭만주의 화가들은 정물화를 천대했다. 그러다가 1860년경에 와서 유명한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작품이 널리 전시되면서 쿠르베, 마네, 팡탱 라투르 같은 개성적인 화가들이 정물화를 실험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세잔의 정물화는 흑색, 회색, 흰색을 즐겨 사용하는 점과 정물의 앞쪽에서 빛을 주는 비전통적인 방법 등에서 마네와 유사했다.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처럼 세잔의 정물화는 주로 팔레트 나이프로 제작되었다. 거친 붓질, 명암의 강렬한 대비, 구도의단순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들 정물화는 세잔이 자신의 난폭한 성질을 과감하게 표현한 몇 점의 초상화와 함께 동일한 작품군에 들어간다. 한층 절제된 손놀림과 야심적인 구도를 가진 다른 그림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그림들은 제작년도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서 보다 완숙한 시대의 그림인지 어쩐지는 불확실하다. 이 작품들의 구성은 가끔( 검은 시계가 있는 정물)에서처럼 네모꼴을 취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테이블보의 접힌 부분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세잔의 최초 정물화들은 오로지 과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점차 다른 소재들이 도입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형태와 분명한 표면을 가진, 의미심장한 소재들이었다. 바늘 없는 시계, 조개껍데기, 거의 다 타 버린초, 해골 등을 말할 수 있는데, 이들은 분명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소재들이다. 이러한 소도구들은 '바니타스(허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불리는 17세기의 음울한 정물화를 연상케 해준다. 세잔은 인물화에서도 조형이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세잔은 대가들조차 어렵게 여겨 온 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의 구성도 시도했다. 르누아르 같은 이는 두 인물 간의 사랑, 우정, 동정, 덧없는 관계 등을 주로 그렸고, 마네(약간의 예외도 있다), 드가, 팡탱 라투르 들은 아무리 장면이 복잡한 그림일지라도 두 사람을 통해 언제나 소외감을 표현하고 있다. 음악을 좋아했던 세잔은 피아노를 치는 젊은 여자가 등장하는 실내장면을 세 번이나 그렸다. 1866년에 제작된 이 세 그림에는 모두 ( 탄호이저 서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바그너의 ( 탄호이저)는 파리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었으나 그 혁명적인 오페라 형식에 반감을 느낀 청중들의 거센 항의로 공연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1866년은 공연중단 사건이 벌어진지 한참 뒤였다. 1869년의 만남:19세의 모델 오르탕스 피케는 훗날 세잔 부인이 된다. 피케의 달걀형 미인 얼굴이 세잔의 그림에 등장한 것은 1871년 이후이다. 그녀는 세잔을 위해 참을성 많은 모델이 되어 준다. 세잔은 집에다 알리지 않은 채, 아니 아버지에게만은 숨긴 채 피케와 여러 해 동거했다. 1870년 봄 살롱에 제출한 그림은 다시 낙선했다. 세잔은 그해 5월31일 파리에서 벌어진 에밀 졸라와 가브리엘 멜레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엑스로 낙향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붕괴시킨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터졌을 때 세잔은 자원 입대하지 않았다. 그는 미술을 중단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에스타크에 임대해 주 집으로 가서 오르탕스와 살았다. 경찰은 엑스에서 병역기피자 세잔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세잔의 비애국적인 행동은 참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잔이 미술에만 몰두한 나머지 주변의 일에 무심했으며, 평생 정치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엑스에서 28. 8킬로미터 떨어진 에스타크는 그 당시 지중해에 면한 한촌이었다. 세잔은 산이 바다를 향해 직각으로 떨어지는 것같은 그 마을의 서정적 풍경을 즐겨 그렸다. 몇 달간의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세잔과 오르탕스는 파리로 돌아갔다. 에스타크 풍경화 중 남아있는 것은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 그가 처음 에스타크로 간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바다를 오래 관찰한 덕분에 세잔의 팔레트는 한결 밝아졌고, 그의 관심이 반사광에도 쏠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 같은 문제가 세잔을 심각하게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료화가인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는 벌써 몇 년째 그것과 씨름하고 있었다. 세잔의 그림에서 이러한 변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71년에서 1872년 무렵이었다. 제2장 인상주의 시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등이 그린 풍경화는 선배 화가들의 그림과 판이했다. 이들은 햇빛이 자연, 인물, 구름, 그리고 물 등에 미치는 효과에 점점 더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들은 그늘으 늘 갈색이나 흑색이 아니고 햇빛이 사물의 색깔을 바꾼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문학적, 역사적, 서사적 주제를 포기하고 야외풍경을 주제로 삼았다. 이들 중 모네는 특히 물에 몰두했다. 이러한 실험은 그에 상응하는 기법을 구사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짧은 붓질을 한 위에 색칠을 하거나, 서로 다른 여러 색깔을 화폭 위에 뒤섞거나, 갈색과 흑색을 배제하는 기법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야외에 나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을 신속하게 그렸다. 이런 혁명적 수법을 사용하는 화가들은(그들은 아직 인상파 화가라고 불리지 않았다. )비평가와 일반 대중에게 조롱을 받았다. 세잔은 스타일 면에서 이들 개혁파 그룹에 뒤늦게(1873)합류했다. 1872년 퐁투아즈로 살러 왔을 때 세잔은 이미 피사로와는 7-8년전부터 알아 온 사이였고 피사로 그룹에 있던 아르망 기요맹과는 더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그런 만큼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세잔을 잘 알았다. 기요맹은 세잔이 마네보다 더 위대한 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개성적인 화가로서 당시 살롱을 주도하던 관학적이고 무겁고 보수적인 분위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세잔은 오랫동안 친구들의 실험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 혹은 알데고리가 있는 주제들을 골라잡아, 어두운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동료 화가들은 자신들이 관찰한 것만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 열중했다. 세잔이 인상파 화가의 새수법을 채택했음을 보여 주는 첫 그림들은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풍경화와 정물화였다. 그는 1873년 초 퐁투아즈에서 약간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 와 가족과 살고 있었다. 회녹색과 갈색이 아직도 우세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넓적하게 바르던 경향은 사라졌고, 구도도 단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세잔의 태도 변화는 일반적으로 피사로의 영향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피사로는 의심할 나위없이 대단히 재주가 많은 선생이었다. 그는 나중에 고갱과 반고흐를 인상파 화가 대열에 합류시킨 정본인이었다. 그러나 피사로의 영향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인상파 수법이 그에게 알려진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였는데, 왜 세잔은 몇 달 사이에 옛날 수법을 버리고 이 수법을 채택했을까?1870-1871년의 겨울 동안 에스타크의 해변에서 깊은 명상을 했던 때문일까?자신의 어두운 스타일이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엄청난 적개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제1회 인상파 전시회19세기의 젊은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또 이름을 얻을 기회가 살롱전밖에 없었다. 세잔과 그의 동료들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살롱의 보수적 심사위원들 때문에 늘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고루한 살롱전에 구차하게 매달리지 말고 대중들 앞에 직접 작품을 내보이는 별도의 전시회를 열자는 혁명적 제안을 모네가 내놓았다. 그래서 인상파 전시회가 1874년 4월 15일에서 5월 15일까지 한달 동안 열리게 되었다. 에드가 드가, 기요맹, 모네, 베르테, 모리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그리고 세잔등 약 30여명의 화가가 이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훗날 이들은 미술사에서 인상파 화가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미술비평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관학적인 화풍의 세련된 장식에만 익숙하던 비평가들은 그 새로운 기법에 혐오감을 느꼈고, 그림의 소재나 제재가 논평할 만한 사건이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은 것도 불만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지적인 정직함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고 심한 경우에는 제정신이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특히 모네에게 맹렬한 비난이 퍼부어졌다. 그는 여덟 점을 출품했고 그중 하나가 르아브르 항구를 그린 ( 인상, 해돋이)(1872-1873)였는데, 그림의 제목부터가 조롱의 대상이었다. 루이 르루아라는 비평가는 냉소적인 어조로 이들 화가를 '인상파'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명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류 언론가인 마르크 드 몽티포는 세잔을'치매에 빠진 상태에서 그리는 백치'라고 표현했다세잔은 1874년 전시회에 석 점을 선보였다. 그 가운데 두 점은 (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1872-1873)과( 현대판 올랭피아)(1873경)로 확인되었는데, 나머지 한 점은 ( 오베르 풍경)인지 아닌지 아직 불확실하다. ( 목매 죽은 사람의 집)은 세잔의 생존 당시에도 여러 번 전시되었고 또 일반적으로 세잔의 인상파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범한 시골길, 일드프랑스의 흐린 햇빛, 그림자 부분에서도 구사되는 은회색, 물감을 잔뜩 묻힌 거친 붓질 등은 모네, 피사로, 시슬레의 그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료화가들이 순간적인 즉발성을 발휘하여 그림을 그렸다면 세잔은 어떤 원칙을 찾아내려고 고심하면서 힘들게 그렸다는 차별성을 지적할 수 있다. ( 현대판 올랭피아)는 에두아르 마네의 유명한 그림( 올랭피아)(1863)-이그림은 1865년의 살롱에서 굉장한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를 패러디한 것인지, 아니면 그 그림에 대한 경의를 표시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신화나 우화에서 인용해 온 것도 아닌 누워 있는 여자 나체-이 여자가 현대 인물이라는 것은 그 옆에 꽃병, 흑인 하녀, 고양이 등이 알려 주고 있다-는 창녀나 다름없이 보인다. 세잔은 마네를 알고 있었고 또 존경했지만 파리지앵인 마네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만난 적은 별로 없었다, 세잔은 ( 현대판 올랭피아)를 두 점 그렸다. 첫번째 것(1867경)을 그리면서 세잔은 자기가 마네보다 더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마네가 슬쩍 암시한 것을 세잔은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세잔처럼 보이는 넋나간 손님, 정물, 대형 푸른색 바로크풍 화병, 초록색 식물, 석상처럼 보이는 흑인 하녀, 두터운 커튼 등은 그 풍경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1874년 전시회에 제출한 것은 세잔이 첫 번째보다 4-5년뒤에 그린 것으로서 내용이 아주 달랐다. 구성은 휠씬 균형이 잡혀 있고, 모티프는 첫째 것과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한층 순화되고 세련되었다. 예를 들어 초록색 식물은 화분으로 대치되었고 테이블과 정물은 완성되었으며, 석상 같던 하녀는 살아있는 인물로 바뀌었고 침대 위에 모자와 강아지는 그림의 전체 구도에 어울리게 유머러스한 면을 띠었다. 이 그림은 소시에테(제1차 인상파) 전시회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다. 마르크 드 몽티포는( 라르티스트)(1874년 5월)에 이렇게 썼다. "분홍빛 맨살을 드러낸 여자가 색욕에 흘린 몽마 같은 악마에 의해 최고천의 구름 속으로 떠올려지는 듯한 이 인공적 낙원을 본다면, 아무리 강심장일지라도 숨이 막힐 것이다. " 세잔은 오베르쉬르우아즈를 떠난 뒤 몇 해 동안 파리, 에스타크, 엑스를 번갈아 오갔다. 비평가들에게 환멸을 느낀 세잔은 1876년 두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퇴한 세관 관리이며 18세기 미술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는 들라크루아를 좋아하는 세잔의 열정을 이해했고 세잔의 그림을 몇 점 사주었다. 그런 수준 높은 애호가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했다는 사실에 세잔은 퍽이나 고무되었다. (쇼케는 르누아르의 그림도 몇 점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최초로 르누아르를 인정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세잔은 1877년의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는 참가했다. 그는 17점의 그림을 출품했는데, 그중에는 쇼케의 초상화도 들어 있었다. 이 초상화는 ( 르 샤리바리)의 미술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임신부와 함께 그 전시회에 가신다면 세잔 씨의 남자 초상화는 재빨리 지나치세요. . . 그머리와 구두색깔은 너무 기괴하여 임신부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태아는 태어나기도 전에 황열병에 걸릴 테니까요.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세 번째 전시회에서 몇몇 지지자를 얻는데 성공했다. 드가의 친구인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루이 에밀 에드몽 뒤랑티, 마네의 친구인 테오도르 뒤레, 미술비평가인 조르주 리비에르 등은 인상파 화가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다. 특히 리비에르는 세잔의 작품을 극찬해 주었다. "가령 세잔의 ( 수욕도)를 비웃는 사람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멋대가리 없다고 비판하는 야만인과도 같다. " 변함없이 다양한 주제를 그리다 이 시기에 구체적 사건(문학적 내용)을 담은 그림은 사라졌다. 또 주제를 취급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농촌사람들은 갈등이나 무관심을 드러내는 태도가 아니라 어떤 일치감을 보이는 것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에서는 남자 누드나 여자 누드들이 나뭇가지나 풍경의 선과 조화를 보이면 연결된다. 세잔은 또 어떤 때 인물들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설정했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 속에서 어떤 리듬을 찾아내려고 했고, 이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물화에서도 두 개골이나 다 타 버린 초는 사라졌다. 그의 구도에는 친숙하고 단순한 형태를 가진 대상이 등장했다. 꽃과 과일 등이 과일 그릇, 소반, 접시, 원추형 우유 깡통과 나란히 놓였다. 세잔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등한시 했던 정물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는 새로운 선의 배치를 시도했다.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세잔은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완전히 탈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작은 정물화에서 보다 편안하게 실험을 할 수 있다고 느꼈는지 이런 그림들 속에서 대담하게 원근법의 파괴를 시도했다. (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화)(1877경)같은 큰 그림 속에서도 대담한 반사광 처리를 시도했고 또한 양괴와 색채의 조형도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일탈한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세잔의 이 시기 그림은 폴 고갱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고갱은 아마추어 화가로서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수집하고 있었다. 세잔과 고갱은 1881년 피사로의 소개로 서로 만나게 된다. 세잔의 풍경화 대부분은 나무와 집들을 연결시키고 있고, 집들의 벽과 지붕은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무대가 파리 근교이든 혹은 프로방스이든 세잔의 풍경화는 단일 원칙에 따라서 그려지는 법이 없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세잔의 풍경화에도 사람의 흔적이 드러나긴 하지만, 직접 인물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시점은 지면과 동일한 수준이거나 아니면 그 위에 놓이기도 한다. 풍경은 어떤 때는 파노라마의 형태를 취하고 어떤 때는 초점이 좁혀지기도 한다. 세잔은 늘 현장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가 이젤을 놓은 지점까지 확인이 가능할 정도이다. 세잔의 풍경화에서는 지평선이 전통적인 높이(화폭의 3/5배 높이)보다 훨씬 더 위에 있다. 엑스의 미술학교에서 질베르 선생이 가르쳐 준 신고전주의 풍경화의 고정된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세잔은 교과서적 원칙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바르비종파의 원칙을 채택했다. 이런 선택에는 그의 성격이 크게 작용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출발점으로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각의 출발점이 아니라 해석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1878년 12월 19일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자연을 관찰하는 법을 좀 늦게 배웠네.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점에 알았다고 해서 흥미가 반감되지는 않았다네. " 이 인상파 시대에 그는 자연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고, 그래서 모네와 피사로가 그랬듯이 작고 가는 붓질로 햇빛을 표현했다. "바다를 주제로 한두 가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세잔은 이런 내용을 담아 1876년 7월 2일 피사로에게 편지를 보냈다. 적어도 세잔 이전에 바다를 그린 인상파 화가는 별로 없었다. 세잔은 다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고 피사로에게 진경을 함께 개척하자고 권유하고 있다. "에스타크의 해변을 묘사한 당신의 글은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 . 이곳이 당신의 취향에 꼭 맞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 푸른 바다와 빨간 지붕, 이건 포커 테이블 위의 카드와 같습니다. " 세잔은 자신의 정서를 완벽하게 표현해 줄 풍경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에스타크 해변의 반사광 효과와 아름다운 풍경은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색채로 자연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자연을 통해 다시 한 번 고전적으로 되는 거야. 그러니까 감각을 통해서 말이야. "세잔은 푸생이 200년전 풍경화에서 시도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믿었다. 세잔은 푸생의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제와 스타일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아니면 루브르에 있는 40점의 푸생을 되풀이해서 보면서 직관적으로 푸생의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영웅적 풍경화와 목가적 풍경화를 구분짓는 것은 그 주제만이 아니라 그 표현방법도 포함된다. 하늘은 조그마한 밝은 표면으로 축소되거나 반투명한 초록에 완전히 가려졌다. 세잔의 인상파 시기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작품 두 점, ( 라크루아 신부의 집)(1873)과 ( 멩시의 다리)(1879)에서 하늘은 이러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첫번째 것은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수법은 ( 목매 죽은 사람의 집)과 비슷하다. ( 목매 죽은 사람의 집)에서는 지붕이나 벽의 모서리가 햇빛 속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낸다면, 라크루아 신부의 집은 온통 그늘을 드리우는 녹음속에 묻혀 있다. ( 멩시의 다리)는 사생현장이 발견됨으로써 제작년도가 정확하게 파악될수 있었다. 이 그림은 그 당시 이미 유명해져 있었는데, 멩시 근처로 학교 소풍을 따라간 한 학생이 이 다리를 발견할 때까지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세잔은 멩시 지방에 1879년 5월부터 1880년 2월까지 머물렀고 1892년에 다시 멩시를 찾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이 짙은 숲에 둘러싸인 구도를 지닌 이 그림은 1878-1890년에 제작된 다른 풍경화보다는 1900년을 전후하여 그려진 샤토 누아르 시리즈에 가까운 힘에 넘치는 시적 풍경화이다. 이 그림은 세잔의 생존시에 복제되고 판매된 몇 안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 멩시의 다리)와( 라크루아 신부의 집)에서 보이는 녹음은 바르비종파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8년간 그린 20점의 초상화 중 절반이 자화상이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처럼 세잔도 초상화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인상파는 표면의 색채에 많은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인물의 성격을 강조하는 초상화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잔이 자화상을 통한 실험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화상에서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다. 단정한 모자를 쓰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에 이상한 모자-목면 터번, 짐꾼의 모자, 정원사의 모자 등-를 눌러쓴 모습을 표현하여, 반사회적 기질을 드러냈다. 미술평론가 루이 복셀은 이렇게 말했다. "세잔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뻣뻣한 수염이 가득 난 거친 얼굴에 짐꾼이 입은 볼품없는 모직 외투를 입었다. 하지만 외양과 상관없이 세잔은 대가이다. " 1878년과 1879년 세잔은 엑스와 에스타크에 여러 차레 머물렀다. 그전의 여러 해 동안 파리에만 죽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도시생활과 파리 예술계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적하게 보낸 이시기에 세잔의 창작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그려진 에스타크 그림은 이제 인상주의에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인상주의의 한계를 돌파하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세잔은, 야외작업, 색채로 그림자를 표현하는 기법 등 인상파의 원칙 몇 가지는 끝까지 고수했다. 대상-사과이든산이든-을 비추는 햇빛을 이용해 대상의 색채를 조절하는 방법(인상파의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은 1880년 이후 세잔의 유화나 수채화에서 튼튼한 기초가 되었고, 이 방법은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파적인 그림에서조차 세잔은 형태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구성은 세심한 사색의 결과이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혁신의 필요성을 느꼈다 세잔의 화법이 발전해 가는 것을 지켜본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절제된 형태나 터치를 쓰기 시작했다. 르누아르는 솜을 넣은 듯한 다채로운 무늬 속에서 형태를 드러내던 방법(그는 이 방법을 쓰던 시기를'앵그르 시대'라고 불렀다. )을 완전히 포기했다. 르누아르의 윤곽은 좀더 명확해지고 색채는 한결 밝고 날카로워졌다. 그보다 조금 뒤에 모네도 밝은 옷을 입은 여자가 보트에 앉아 있는 대형 그림을 여러 점 그렸는데, 거기에는 새로운 공간개념이 도입되어 있었다. 피사로도 절제된 후기 인상파 수법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세잔이 독자적 발전을 거두었다고 해서 인상파 화가들과의 관계가 냉각되지는 않았다. 엑스나 에스타크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파리에 오면 늘 피사로를 찾았다. 1882년 봄, 피사로는 에스타크를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세잔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르누아르가 모네와 함께 세잔을 찾아왔고, 세잔은 1885년 여름을 파리 인근 라로슈귀용에 있는 르누아르의 집에서 보냈다. 네모난 혹은 세모난 붓질 인상파 시대에 제작된 세잔의 그림은 물감을 짙게 바르는 수법(이것을 임파스토라고 함)을 자주 썼는데, 물감이 너무 진하고 뻑뻑해서 샤르댕의 작품과 자주 비교되었다. 그러나 다른 그림에서는 부드럽고 유동적이면서, 가늘고 긴 콤마(쉼표)같은 붓질을 했다. 1880년 이후 세잔의 기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감은 부드럽고 유동적이었으며 캔버스의 백면을 완전히 메우지도 않았다. 에스타크 풍경화에서는 원근법의 파괴와 화면의 평면화가 특히 눈에 띈다. 바다는 반들거리는 거대한 표면으로 처리되었고 바위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나는 보고 느끼는 대로 그립니다. 나는 강렬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세잔이 일구어 낸 심오한 개혁과 외관상 전통적으로 보이는 작업방식 사이에는 모순이 놓여 있었다. 세잔은 정물화이건 인물화이건 또는 풍경화이건 자연에서 직접 작업을 했다. 그는 늘 아름다운 소재를 찾아다닌다고 말하고 했는데, 평론가들은 세잔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떠들어댔고, 그의 그림이 갖는 '사실적 '특징을 깎아내렸다. 이 '사실적'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서, 후세 미술사가들 사이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세잔이 1895년 이후에야 비로소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형태의 공간구성은, 끈덕지게 개성을 고집한 끝에 결실을 이룬 것이었다. 리얼리티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극히 주관적인 회화의 한 형태를 구축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1880년 이후의 세잔, 시대의 이단아 과일 그릇과 병은 수직으로 그려지지 않았고 테이블 모서리는 테이블을 부분적으로 덮고 있는 테이블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기울어진 궤짝 뚜껑 위의 사과는 균형을 잡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이란 현실(리얼리티)의 한 조각(움직이는 것이든 정적인 것이든)을 움직이지 않는 화가-관찰자가 한 방향에서 본 대로 그리는 것이 통설이었다. (단일시점에 따른 대상 포착:역주), 마네, 드가, 르누아르등은 단일시점의 기준에서 조심스럽게 일탈했다. 그러나 이들은, 복수시점은 대상의 분석을 더 정확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세잔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노골적으로 시점을 복수화했다. 컵과 과일 그릇은 두 서너 방향-옆에서,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에서 포착된 것을 그렸다. 이처럼 대상이나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잡아 화면 위에 그리는 방식을 구성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그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잔은 더욱 많은 '이단'을 감행한다. 축적의 무시, 형태의 파편화, 데생과 색채의 분리, 구성을 메우기 위한 추상 소재의 도입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세잔의 세잔의 형식상의 실험은 정물화에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모든 분야의 작품에서 이단이 구사되었다. 세잔은 조화로운 정물들을 그리기 위한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다구성주의 시대에 세잔의 정물화는 초기의 어둡고 극적인 정물화나 1875년경의 시도된 윤기나는 정물화와 전혀 다르다. 세잔은 조화로운 전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대상 하나하나와, 각각의 색채에 저마다 다름 위치를 배정했고, 그리하여 유화와 수채화에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견했다. 이 작품들에는 교묘하게 꾸민 흔적이 전혀 없고 천의무봉한 데가 있다. 그들은 감각과 정신을 만족스럽게 해주며 또한 완벽한 형태분석과 주제분석을 제공한다. 모든 영향으로부터 해방되다 세잔은 르네상스 이후 확립되어 온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는 놀라운 시도를 함으로써 선구적 화가가 되었다. 물론 다른 화가들도 이런 시도를 했지만 세잔은 누구보다도 더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과연 누구의 영향을 받아 이런 개혁에 착수했을까? 그러나 그 영향을 딱 꼬집어 낼수가 없다. 세잔은 엑스, 파리, 혹은 당시 유행하던 미술잡지에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림을 보았을 수도 있다. 고갱이나 반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그림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전통적인 원근법의 파괴나 대상 뒤에 플랑(일정한 넓이를 갖고 공간의 방향과 위치를 보여 주는 2차원 평면, 이하면)을 설정하는 수법등은 로마네스트 양식의 프레스코 벽화나 일본 회화(히로시게를 가리킨다. 그의 목판화는 세잔, 고갱, 반 고흐, 로트레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의 공간구성 체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연 세잔이 그런 그림들에 관심이 있었는지, 또 그쪽으로 경도되어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1879년 뮈제 드 스퀼튀르 콩파레(나중에 뮈제 데 모뉘망 프랑세로 개명)박물관이 파리에서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고대 프랑스의 조각과 다른 나라의 조각을 많이 전시했다. 세잔은 이 박물관에 자주 갔다. 그러나 뮈제 데트노그라피(지금의 뮈제 드 롬)에는 가지 않은 듯하다. 만약 이 박물관에 갔더라면 세잔은 아프리카 미술과 신대륙 발견 이외의 아메리카 미술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세잔은 평생 루브르 박물관을 즐겨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작품에 심취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나 중세의 조각을 등한시했던 것은 아니다. 회화에 관한 세잔의 관심분야가 방대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화가는 루벤스와 들라크루아였다. 세잔이 갖고 있던 데생(유화는 별로 없다. )중 약1/3이 미술작품을 모사한 것이었다. 에스타크와 그 일대는 구성주의 시대의 주요 모델이었다. 1883년 5월 24일 졸라에게 보낸한 편지에서 세잔은 자기 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산기슭에 자리한 역사 바로 위에 정원 딸린 작은 집을 하나 마련했네. 우리 집 뒤로는 가파른 암벽과 키큰 소나무가 잘 보이네. 나는 그림을 그리느라고 늘 바쁘다네. 여기 경관이 일품이라서 말이야. "그는 바다, 산, 집, 녹음, 자주는 아니지만 공장굴뚝-이 같은 이례적인 대상을 그림에 도입한 것은 세잔이 처음이었다-이 어우러진 풍경화를 그렸다. 바다는 생기 없는 파란 색면으로 축소되었다. 평면 처리된 바다는 기하학적 형태로 잘라 입체감을 표현한 그 주변의 녹음이나 집들과 강렬한 대비효과를 보여 준다. 에스타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린 풍경화에는 녹색과 황색이 결합된 녹음이 무성하고 활기차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후기의 에스타크 풍경화는 녹음보다는 그 주변환경을 보여 주는데 주력하고 있다. 에스타크에서의 생활을 사랑한 세잔은 르누아르를 에스타크로 초청하기로 했다. 그전에는 에스타크와 그 일대에서 작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던 르누아르는 이 아름다운 고장에 한껏 매료되었다고 전한다. 나무와 건물이 뚜렷한 윤곽선을 갖게 되다 입체파 화가가 등장한 1920년대에 진행된 세잔 연구는 주로 세잔 그림의 골격형태인 기하학적 선과 격자무늬에 집중되어 있었다. 자 드 부팡의 날카로운 직선 모서리나, 엑스 근처의 마을인 가르단의 엇갈리게 배치된 지붕등은 입체파의 그런 해석에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1885년과 1886년 세잔은그 일대의 집에서 그런 기하학적 영감을 받았다. 그는 졸라에게 보낸 1885년 8월 25일자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아무런 걱정도 없기 때문에 마음놓고 그림을 그릴수 있다네. 매일 가르단에 갔다가 저녁때면 엑스로 돌아온다네. "세잔은 이 편지에서 작품제작에 필요한 두 가지 조건, 즉 마음의 평온과 자극적인 풍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인상파 시기의 그림에 나타난 나무와 집의 윤곽에는 작은 진동 혹은 떨림이 있었다. 그러나 1880년 이후 세잔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햇빛은 완전히 바뀌었다. 햇빛은 견고성과 균질성을 띠게 되었고, 인상파의 햇빛과 달리 체계적 방법으로 분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 그림에 나타난 햇빛으로는 그림 속의 시간이 하루 중 언제인지, 어느 계절인지 알 수가 없다. 세잔의 아버지는 쇼케가 세잔에게 보낸 편지를 가로채어 아들이 모델과 동거하고 있고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음을 알아냈다. 1878년, 세잔은 오르탕스 피케와 아들 폴의 거처를 찾아보기 위해 다시 에스타크로 왔다. 그는 그때까지 피케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숨겼기 때문에 저녁마다 엑스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아내어 세잔을 닥달했을 때, 세잔은 딱 잡아뎼다. 그러자 거짓말을 하는 세잔은 꽤심하게 여긴 아버지는 용돈을 절반으로 줄였다. 그래서 세잔은 여러 달 동안, ( 목로주점)의 성공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던 에밀 졸라에게 돈을 빌려 살아 나가야 했다. 세잔의 가족은 냉전상태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들의 동거사실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모르는 척했다. "파리에 내 손자가 사는가 봐. 언제 한 번 가서 봐야겠는걸. "세잔의 아버지는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잔의 원군은 어머니와 누이 마리(마리가 도움을 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였다. 하지만 그 두사람은 모두 오르탕스를 싫어했다. 마침내 1885년, 세잔의 가족은 세잔이 동거녀를 떼어 버리기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세잔은 1886년 4월 28일 오르탕스와 결혼했다. 당시 그는 47세였고 아들 폴은 14세였다. 아버지는 결국 결혼식을 허락했고, 식을 치른 몇 달 후 사망했다. 세잔은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생트빅투아르산 시리즈에 제작을 시작했다. 1881년 5월에 보낸 편지에서 세잔은 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을 그리기 시작했네. 흐린 날에 그린 것 몇 점과 햇빛 쨍쨍한 날에 그린 몇 점. . . "10년 뒤 모네는 이 방법을 채택해 건 초더미 시리즈(1890-1891), 루앙 대성당 시리즈(1892-1894), 런던의 템스강 시리즈(1900-1904), 수련시리즈(20세기초)를 제작했다. 엑스 지방을 굽어보는 생트빅투아르산은 1877년에 제작된( 영원한 여성)(혹은 ( 여성의 승리)로 알려져 있음)의 배경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세잔이 이산에 열광적으로 몰두하게 되는 것은 1880년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에 제작된 그림 속에서 이 산은 주로 잘 짜여진 구도를 갖춘 풍경화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당시 풍경화의 특징으로는 여러 겹의 면, 전경의 나무를 도입한 공간감 제시, 일련의 평행선과 사선등을 들수 있다. 빛은 분명하고 평탄하며 분위기는 투명하다. 세잔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그 웅대한 파노라마 속에 평온한 세계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다. 생트빅투아르산은 세잔이 주변환경을 잘 제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엑스 일대의 풍경에 영감을 받은 세잔은 파노라마 풍경화를 가끔씩 그렸다. 세잔이 파리에머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엑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시각각 색깔이 바뀌는 생트빅투아르산이 자주 캔버스에 등장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지면서 돈걱정도 해결되었고, 오르탕스와 정식으로 결혼해 가정문제도 진정시킨 상태였다. 평온한 풍경화들은 세잔의 가정에 찾아온 평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우뚝 솟은 산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엑스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영역을 지켜 가는 세잔을 닮은 점도 있다. 19세기에 엑상프로방스는 인구 3만의 소읍에 불과했다. 중세시대에는 프로방스 지방의 주도였으나, 1789년 경쟁도시인 마르세유에게 주도 지위를 넘겨준 뒤로는 오로지 지방법원, 주교구, 엑상프로방스 대학만이 예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생시절에는 엑스의 조용한 분위기에 잘 적응하면서 졸라, 바이유 등과 교외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른이었다. 세잔은 자신의 미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고향사람들이 몹시 섭섭했다. 그렇지만 엑스 지방의 조용한 분위기가 외로운 예술가에게 정신적 안정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평생을 사귀어 온 에밀 졸라도 세잔의 아버지처럼 세잔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했다세잔이 볼 때, 졸라는 여러 유형의 사람을 한데 모아 놓은 인물이었다. 어릴 적 친구, 젊은 예술평론가이면서 새 스타일의 그림에 대한 지지자, . 아버지가 용돈을 줄였을 때 돈을 빌려 준 성공한 소설가, 늘 귀중한 충고를 해주는 좋은 친구, 자신의 그림이 지닌 가치를 이해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할 만한 사람, 세잔은 종종 졸라에게 부탁을 했고 졸라는 언제나 기꺼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1886년 30년 지기인 세잔과 졸라는 돌이킬수 없는 심각한 불화에 빠지고 만다. 졸라는 마네와 그 동료 화가들을 옹호하는 평론을 종종 기고했다. 그러나 인상파의 그림이나 세잔의 후기 인상파 그림에 대한 졸라의 이해는 그들의 현대성을 인식하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듯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상파 그림에 대한 그의 논조는 차츰 변화를 보였고, 세잔을 포함한 인상파 그룹의 새 기법을 추구하려는 노력에 쏟던 지원도 자꾸 시들해졌다. 이것은 작가이자 비평가인 조리스 칼 위스망이 1883년에 피사로의 물음-"왜 당신은 세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거요?우리들은 모두 그가 당대의 기인이면서 동시에 현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알고 있는데. "-에 답해 보낸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위스망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에 세잔은 기인이 아니라 온순한 사람인 것 같더군요. 그사람 얘기는 졸라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세잔은 그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분노와 패배감을 느끼고 있다더군요. " 졸라가 스스로 말한 미학, 장식적이고 중후한 가구에 대한 기호, 집안에 걸려 있던 친구들의 그림을 모두 떼어 냈다는 사실등은 졸라가 인상파 그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졸라는 ( 작품)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소설 속에서 세잔은 클로드 랑티에라는 '실패한 천재'로 묘사된다. 이제 두 친구는 3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1886년, 졸라는 자신의 소설( 작품)이 나오자 습관-졸라는 소설이 나올 때마다 세잔에게 한 권씩 부쳐 주었다-대로 그 소설을 세잔에게 보냈다. 졸라의 지지자들은 졸라가 절대로 세잔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은 소설속의 실패한 화가가 바로 세잔이라고 생각했다. 졸라가 묘사한 인물이 세잔이 아닐지라도 그 내용은 졸라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졸라가 볼 때, 세잔은 화가로서 실패했고 친구로서도 곤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처지를 공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세잔이 메당에 있는 졸라의 집에 묵을 때(세잔은 1878년 이래 그집에서 자주 묵었다. )졸라와 다른 방문객들에게 버릇없이 굴었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1886년 4월 4일, 세잔은 졸라에게 예의바른 짤막한 감사편지를 보냈다. 30여년 우정의 종지부였다. 두 사람은 그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세잔의 아내와 아들 폴 1890년대부터는 오르탕스 피케를 그린 그림이 많이 나타난다. 피케의 얼굴은 흐릿하여 표정이 없거나 아니면 엄숙하여 생각에 잠긴 것이 대부분이다. 강한 구도를 가진 그녀의 초상화들은, 여자의 몸과 다른 대상이 기하학적인 선으로 단순화되어 있는( 커피포트와 여자)(1890-1895)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가정부 브레몽 부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1880년 이후 아들 폴의 얼굴도 몇몇 그림에 등장한다. 1888년, 아들 폴은 엑상프로방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전통적인 축제를 담은( 마르디 그라)라는 커다란 그림의 모델이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아주 좋아했으며 세잔의 말년에 정신적 위안이 되어 주었다. ( 수욕도)시리즈 관학적인 동시대 화가들이나 인상파 화가들과 비교해 볼 때 세잔의 작품은 그 풍성하고 다양한 주제로 눈길을 끈다. 그중에 어떤 분야는 갑작스럽게 개화했다기보다 고통스럽고 완만한 성숙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잔이 1870년대부터 손댄 수욕도 시리즈가 그 좋은 예이다. 1870년대의 수욕도 그림은 대부분 스케치이거나 밑그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세잔은 나중에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들이 모두 실험적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예술가들(가령 모네,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헨리 무어등)이 나중에 이 그림들을 얻지 못해 안달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야외에서 목욕하는 누드의 테마는 세잔을 무려 30년 동안,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사로잡은 주제였다. 그가 초기 밑그림에서 씨름했던 구성과 리듬에 얽힌 수수께끼는 후기에 많이 해결되었으며, 세잔은 수욕도를 그리면서 획득한 지혜를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에까지 확대했다.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아버지는 큰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엑스에서의 검소한 생활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부자가 된 세잔은 루브르에서 그토록 즐겨 보았던 대가들의 그림을 더 많이 보기 위해 이탈리아나 벨기에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었다. 또는 모네나 드가처럼 미술품을 수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비시에 있는 온천장(그는 당뇨로 고생했다. )에 다녀온것,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스위스를 여행한 것 -"아내는 스위스와 레몬수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몇 번인가 파리를 짧은 동안 여행한 것을 빼놓고는, 거의 엑스 일대를 떠나지 않았다. 엑스에서 세잔은 아내나 아들(처자는 파리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보다 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성당에 주기적으로 나가 기도를 올렸다. 그 이외에는 마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거나 집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1902년, 그는 엑스 인근 레로브에 새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곳에서는 마을이 내려다보였고 생트빅투아르산을 잘 볼수 있었다. 제1회 세잔 전시회 단체전시회에는 세잔의 작품이 출품되곤 했지만 개인전시회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오로지 쥘리앙 탕기 화방-몽마르트 근처에 있는 화방으로서 화가의 그림을 받고 돈 대신 물감과 화구를 제공하던 집-에서만 구경할 수가 있었다. 1900년에 ( 세잔에게 경의를)이라는 그림을 제작한 모리스 드니는 1890년경 탕기 가게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세잔 그림을 보았다. 그는 세잔을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면서 이름 밝히기를 꺼려 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최근에 파리에 화상을 차린 루이지애나 태생 프랑스계 미국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도 탕기 가게에서 처음으로 세잔의 그림을 보았다. 젊지만 진품을 보는 안목을 가진 이 신참 화상은 1895년 11월 세잔의 개인전시회를 조직했다. 그때부터 볼라르는 세잔의 그림을 알리는데 온 힘을 다했고 개인적으로 세잔의 작품을 상당수 사들였다. 1895년 어려운 교섭 끝에 세잔의 두 작품( 오베르의 농가)(1879경)와 (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이 뤽상부르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는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공로가 컸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폭넓게 성원해 주었고 모네, 드가, 르누아르, 고갱 등이 그랬듯이, 세잔을 대단히 존경했다. 엑스는 젊은 화가, 평론가 순례지가 되었다 사교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과, 누가 자기의 몸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세잔은 누군가가 우연히 팔이나 등을 건드리면 발끈 화를 냈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세잔은 찾아오는 숭배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그들 중 몇몇과는 편지도 주고받았다. 이들 중에 샤를 카무앵과 에밀 베르나르라는 젊은 두 화가가 있었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1904년 4월 15일자 편지에서 세잔은 너무나도 유명한 회화관을 피력했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사물을 적절히 배열하면, 물체나 면의 각변은 하나의 중심점을 지향하게 됩니다. 지평선에 평행한 여러 선은 넓이를 줍니다. 그것은 자연의 단면, 다시 말해 전지전능한 아버지 영원의 신이 우리들 눈앞에 펼쳐 놓은 광경의 단면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연은 넓이보다는 깊이로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빨강과 노랑으로 재현되는 빛의 진동속에서 공기를 느끼게 하려면 충분할 만큼 파랑을 칠해 넣어야 합니다. " 세잔의 이 말은 20세기 미술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룰 만큼 중요한 언명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연을 원통, 공, 원추로 파악한다는 것은 바로 후대의 중요한 화파인 입체파의 회화론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이 말의 뜻을 너무 깊이 해석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잔은 마음이 온화해서 듣는 대상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가감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잔이 1906년 9월 26일 아들 폴에게 보낸 편지에는 베르나르를 '박물관의 기억이 가득한 지식인 청년'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고, 베르나르에게 지나치게 단순화된 회화관을 들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완성되다 (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세잔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주제는 17세기 이래 여러 화가들이 즐겨 다룬 것으로, 르냉 형제가 그린 17세기 초의 그림이 엑스의 뮈제 그라네에 소장되어 있었으므로, 세잔은 틀림없이 르냉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시리즈는 모두 다섯 편이고 각 등장인물을 그린 습작도 남아 있다. 이 다섯 편의 제작순서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도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스타일상의 이유로, 인물 두 사람만 나오는 세 편이 다른 두 편(구성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밝은 배경 때문에 인물들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보다 후대에 제작되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다섯 편 모두 고도로 균형을 이룬 배열을 보인다. 처음 두 편에서는 관람자를 향한 등장인물이 중간 축을 이루고, 다른 세 편에서는 술병이 중간 축을 형성한다. 전혀 다른 새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초기 작품의 숭배자가 조금씩 생겨나는 시점에서 세잔은 급격한 변화를 시도한다. 그의 새로운 기법은 앞선 작품들에게서 논리적으로 얻어진 귀결이 결코 아니다. 이런 갑작스런 변신은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하다.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소재는 전처럼 다양했다. 그러나 1890-1895년 사이에 스타일과 처리방법에 급격한 변화가 왔다. 공간과 여백을 평온한 구도 속에 처리하던 것을 버리고 불명료한 구성을 취했고, 기존의 따뜻한 빛과 밝은 색조를 포기하고, 흑갈색과 진청색을 자주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점부터 세잔은 전통적 원근법과 음영을 동원한 모델링 기법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어떤 때는 공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의 모든 소재들은 깊이가 전혀 없는 하나의 평탄한 면 위에 배열되는 것이다. ( 숲), ( 목욕하는 여자들).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화면에 비스듬한 각도로 면을 배열하여 새로운 유형의 공간구조를 만들어 냈다. 새로운 실험은 정물화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약속의 땅이 보인다. "고 말한 편지에서 보인 자신감보다 더 큰 자신감을 얻은 세잔은 대형 캔버스를 선택했고 한층 복잡한 구성을 시도했다. ( 사과와 오렌지)( 양파가 있는 정물)등에서 평범한 형태와 반들거리는 표면을 가진 사과와 도자기는, 움직이듯 울퉁불퉁하게 접힌 식탁보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 대상의 묘사와 면의 배열은 전체 구도 속에서 하나하나의 색채 처리가 결정되는 수미일관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모든 회화의 법칙에 도전하고 있다. ( 큐피드 석고가 있는 정물)에서 세잔은 통통하고 보조개가 팬 17세기 큐피드-피에르 퓌제작으로 알려졌으나 프랑수아 뒤케스투아 작으로 밝혀짐-를 과일과 식탁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사과나 석고는 모두 상징적 가치를 갖는 강렬한 이미지를 지니는데, 통통한 미소년은 분명 건강과 젊음을 상징한다. 세잔은 강렬한 대조효과를 내기 위해 말년에는 두개골 모티프를 다시 도입했다. 이 두개골은 1860년대 말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급격한 단순화 세잔은 아내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리고 야외나 온실 등 배경을 바꾸어 가며 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게 했다, 세잔 부인은 초연한 혹은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고, 세잔의 요청에 따라 일부러 답답한 자세를 취하거나 빛이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지 알수 없도록 포즈를 잡았다. 다른 사람의 초상화들도 있다. 제프루아의 초상화는 모델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또 모델의 주변환경과 그의 작업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인문주의적 초상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제프루아는 모네의 친한 친구이자 미술 비평가였는데, 1894년, 모네는 제프루아에게 세잔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어찌 되었건 제프루아는 세잔이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세잔을 칭찬하는 글을 두 편 쓴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뜻으로 그의 초상화를 ㄱ려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사이가 틀어졌다. 제프루아가 세잔의 그림이나 인품을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탓이다. 세잔과 시인 조아생 가스케의 관계도 결국은 틀어지고 말았다. 엑스 출신이면 세잔의 어릴 적 친구의 아들인 이 은 시인은 나중에 자기가 지어낸 말을 많이 덧붙인 ( 세잔)이라는 책을 펴냈다. 189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세잔은 곧 자 드 부팡을 매각했다. 이것은 그가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아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와 아들은 죽 파리에서 생활했다. )새 집을 구하러 다니던 이 시기에 세잔은 샤토 누아르-나중에 세잔이 사들이려 했던 집-의 광경과 그 옆 비베뮈 석산을 여러 번 그렸다. 거대한 암벽과 울창한 수목을 담은 풍경화 세잔의 과거 풍경화는 열린 지평선과 여러 층의 면을 중심으로 구성이 이루어지곤 했다. 이는 사람의 흔적도 지평선도 없는 야생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는데, 모네의 수련 시리즈 역시 이런 구성으로 전개된다. ( 숲)에서는 붓놀림이 수채화처럼 가볍고 운필도 자신감에 넘쳐 있어 거의 덧칠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세잔은 푸생이 그렸던 것처럼 대상을 구별하기 위해 기법을 바꾸어 가며 작업했다. 예를 들어 암벽을 그릴 때는 임파스토를 멋지게 구사했고 잎새를 그릴 때는 중간중간 붓질이 끊어졌으며, 나무에 부는 바람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약간 떨리는 듯한 붓질을 구사했다. ( 아느시호)라는 탁월한 작품에서는 화폭 전체가 푸른 색조를 가진 얼음판처럼 보인다. 자신의 표현수단을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바꾸어 가며 작업한 화가는 미술사상 몇 명 되지 않는다. 세잔은 샤토 누아를 위해서, 옆에서, 앞에서 무려 열 번이나 그렸다. 그는 황토색의 건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한 진녹색 잎새들을 대비시켜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생트빅투아르산은 계속 세잔을 매료시켰고 그에 따라 그림 속의 시점과 무대가 쉬지 않고 바뀌었다. 그는 종종 르톨로네로 가는 길위에 이젤을 세워 놓고서 생트빅투아르와 대화했다. "여자의 곡선과 야산의 둔탁함을 결합시킬 수 있을까?" 말년에 세잔은 목욕하는 여자들이라는 주제를 화폭에 담는 중요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주제는 수십 년동안 세잔을 사로잡아 왔으나 그때까지는 작은 화폭으로 만족했다. 1900년경 그는 1미터가 넘는 그림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세잔의 그림 중 제일 큰 작품도 있는데, 캔버스를 위해 벽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세잔은 ( 대수욕도)를 적어도 세 편 이상 제작했다. 목욕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포즈는 그림마다 크게 달랐다. 프리즈(띠 모양의 조각)구도의 두 그림은 강력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이 시기의 다른 그림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중요한 작품인데, 세잔은 이 그림에 오랫동안 매달렸다가 잠시 치워 두었다가 또다시 매달렸다. 이중 하나는 파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엑스에 두어 번갈어 가며 그렸던 것 같다. 세번째 그림이 제일 규모가 큰, 다른 두 점이 조각의 부조 같은 효과를 노렸다면 이것은 고딕 건축의 아치형 구성을 보여 준다. 세번째 그림은 청회색이 주조를 이루며 수채화 같은 미묘함을 내보인다. 세잔은 다시 한 번 인물과 자연의 결합이라는 이상적 조화를 표현해 냈다. 푸생의 시적, 인문주의적 전통으로 돌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강력한 리리시즘을 구현해 낸 것이다. 세잔이 푸생에 대해서 한 말은 종종 잘못 인용되고 있다. 세잔은"푸생을 자연 위에서 생생하게 만들고 싶다. "고 했지, '자연을 푸생식으로 재현하고 싶다. '고 하지는 않았다. 이말은 자연에서 느끼는 자신의 정서를 푸생의 절제된 풍경화 속에 되살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세잔은 풍경화 속의 인물(목욕하는 여자들)이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그리하여 장엄과 질서가 동시에 갖춰진 풍경화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만년작: 자유와 비전 ( 묵주를 든 노파)(1895-1896)와 세잔의 정원사 발리에를 그린 초상화들은 세잔의 세계에서 근 20년동안 사라졌던 연민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짙은색(프러시안 블루, 진록색, 갈색 등), 두터운 임파스토, 노년의 비극적인 표정, 모든 것이 전시대의 초상화와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갖춘다. 1906년 9월 8일,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썼다. "강둑에는 볼거리가 널려 있어.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 달 동안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관찰해야겠어. 오른쪽으로 쳐다보면 전에 못 본 것이 나오고, 왼쪽을 쳐다보면 또 전에 놓친 것이 나오곤 하니까 말이야. "그가 선택한 소재는 숲과 생트빅투아르산이었는데, 1900년 이후에는 이들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섬, 분출, 빙하: 만년에 그린 생트빅투아르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생트빅투아르 그림들에서는 얇거나 두터운 색점의 집적으로 채색이 이루어지는 인상파의 기법이 동원되었다. 보통 지면, 땅, 식물이라고 부르는 화폭의 전경은 거기에 뭐가 있는지 읽어 내기 어렵다. 그러니까 아주 예외적인 경우말고는 기존의 세잔 풍경화와 달리 집, 나무, 다리 등을 발견할 수가 없다. 분명하게 눈에 띄는 수평의 선이 표면의 아랫부분-녹청색, 프러시안 블루, 작은 갈색 색점 등-과 산을 갈라 놓고 있다. 산은 청색, 담자색, 진녹색의 실루엣 속에서 거의 고립되어 있는 듯하다. 그림의 맨 윗부분은 청색과 녹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후기 생트빅투아르 그림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훨씬 전에 세잔이 그렸던 생트빅투아르산의 모습을 기억한 상태로 후기 그림 속에서 산과 하늘을 구분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샤토 누아르 그림과 비베뮈 석산 그림은 물론이고 후기 생트빅투아르 그림에서, 진녹색 양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구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절대로 나뭇가지를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세잔이 임의적으로 채색한 전형적인 예로서, 실제 리얼리티의 재현(구상화의 전통)에서 일탈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잔의 전작품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늘 가시적 리얼리티였음에도 세잔은 이미 추상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라울 뒤피나 페르낭 레제르,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현대 화가들은 데생과 색채의 불일치를 그들의 화폭에서 즐겨 다루고 있고 그래서, 일반 미술 애호가들도 이제 색채와 형태는 별개라는 주장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추상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데생과 색채의 분리를 시도한 사람은 세잔이 처음이었다. 세잔의 시대에(구상적 내용이 없는)형태와 색채만으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겠다는 방식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죽을 때까지 모티프를. . . 자신의 정서를 구상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옮겨 가면서 표현해 보려던 그의 노력은 결국 세잔의 목숨을 앗아 갔다. 1906년 10월 15일, 그림을 그리던 도중, 강한 비바람이 갑자기 몰려왔다.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세탁물 배달 마차에 태워져 집으로 실려 왔다. 세잔은 1906년 10월 22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기록과 증언 예술가들 사이의 우정 세잔 자신의 목소리 말년에 세잔은 시인이며 소설가인 소아생 가스케(1873-1921)와 친분을 나누었다. 훗날 가스케는 둘의 대화를 책으로 출판했다. 가스케는 세잔이 그림을 통해 성취하려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한 번 해보자구. (세잔은 두 손을 벌리고 손가락을 쫙 폈다가 양손을 깎지 끼는 동작을 반복했다. )내가 그림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걸세. 한 손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으면 전체는 엉망이 되고 말지. 조금이라고 벌어진 틈새나 구멍이 있어서는 안 되지. 그렇게 되면 정서, 빛, 진실이 그대로 새어 나가고 만다네. 난 캔버스 위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진행시키네. 그리고 동일한 동작,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캔버스 위에 흩어진 소재에 접근하지. . .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흩어지고 사라지지. 자연은 항상 그래로이지만 그 외양은 늘 바뀐단 말일세. 그러니까 우리 예술가들의 임무는 다양한 요소와 늘 바뀌는 외양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그대로인 자연의 영원함, 그 신비로움을 꽉 붙잡는 것이네. 그림이란 모름지기 그 자연의 영원함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야 해. 내 말 알아듣겠나?난 자연이라는 쫙 벌어진 손가락들을 꽉 잡아서 흩어지지 못하게 꽉 잡아 묶지. . . 여기, 저기,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말이야. 그런 다음 색채와 색조와 음영을 선택해서 화면 위에 늘어놓고 연결해 나가지. . . 그러면 그게 선이 되고, 바위나 나무 같은 대상이 되는 걸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그리고 양감과 색기를 갖는데, 양감과 색기는 내가 자연에서 보는 색면과 색점에 상응하게 되고, 내 캔버스는 깍지를 끼게 되지. 단단하게 느슨해지면, 가령 너무 깊이 해석하거나, 어제의 생각과 모순되는 새 생각에 몰두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딴 생각을 하거나, 내가 개입하면, 휫. 하고 일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다네. 조아생 가스케( 세잔), 1921년 천재의 친구들 화가 세잔과 소설가 졸라는 죽마고우였다. 졸라는 세잔을 잘 알고 있었으나, 예술가 세잔이나 그의 미술세계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에밀 졸라가 세잔에게 보낸 편지 1860년 7월, 파리 자네는 내게 수수께끼, 스핑크스, 불가해한 인물, 알 수 없는 신비일 뿐이네. 자네가 목표를 달성할 생각이 없다면 자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할 생각이라면 정말 자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워. 어떤 때 자네 편지는 내게 희망을 주네. 그렇지만 어떤 때는 그 희망을 여지없이 박살내 버리고 말아. 지난번 편지가 그래. 자네는 그 편지에서 그토록 손쉽게 현실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꿈을 포기한다는 듯이 말했네. 그 편지에는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구절이 있었네. "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싶네. 왜냐하면 내 행동이 내 말과 모순되니까. "나는 이말을 이해하려고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워 봤네만 도저히 마땅치 않네. 도대체 자네의 행동이란 뭔가?영락없이 게으름뱅이의 모습이 아니고 뭔가?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네. 자네는 지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에게 파리 유학을 보내 달라고 말할 생각이지. 아버지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고 자네의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 같네. 법률공부는 뒷전이고 박물관에 자주 가니까. 그림이야 말로 자네가 유일하게 취미 있어하는 것이야. 이러한 자네의 소원과 행동에는 어떤 일치감이 있는 것 같네. 내가 까놓고 말할 테니, 제발 화를 내지는 말게. 내가 보기에 자네는 강단이 없는 것같아. 생각이나 행동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거야. 자네는 그저 시간과 우연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우유부단한데가 있어. 난 자네가 완전히 틀렸다고 얘기하는 건 아닐세. 사람은 제 눈에 안경이고 저마다 자기 일이 옳다고 믿으니까. 자네는 벌써 사랑문제에서 이런 길을 걸었어. 자네는 적당한 시기와 상황을 기다린다고 말했지. 그렇지만 자네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시기도 상황도 나타난게 없다는 걸 말이야. . . 저번에도 말했지만 되풀이해야겠네. 그게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여러 면에서 우리는 서로 성격이 비슷하네. 그런데 만약 내가 자네 입장이라며, 난 결말을 내고 말겠네.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네. 예술과 법률 사이에서 더 이상 우왕좌왕하지 않겠네. 자네가 이런 어정쩡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 잘 아네. 그래서 자네가 안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두 눈 똑바로 뜨기를 바라네. 화가가 되든지 법률가가 되든지 양자택일하게. 자네는 좀 게으른 데가 있어.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지는 말게)이 편지 조차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어 자네 부모님께서 읽게 될지나 몰라. 자네에게 잘못된 충고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그러나 누구나 다 내가 보는 것처럼 본다고 할 수는 없겠지. 내가 자네에게 조언한 것이 옳다고 할지라도 자네 가족은 나를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어. 나쁜 친구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겠지만, 이미 자네에게도 말했듯이, 이제까지 많은 오해를 받아 왔으니 오해 하나가 더 는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겠네. 부디 내 친구로 남아 주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일세. 자네 편지 중에서 또 다른 문구가 나를 슬프게 하네.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온다면서 붓을 천장에 집어 던졌다지?왜 그토록 조급하고 왜 그토록 변덕이 죽끓듯 하지?자네가 여러 해 동안 그림을 공부하고 , 또 수천 번 그림을 그렸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면, 그건 이해하겠네.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데도 잘할 수 없었다면, 팔레트와 캔버스와 붓을 마구 짓밟아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여태까지 자네는 미술이나 한 번 해볼까 하면서 우물쭈물한 것이 전부였지 않나. 자네는 아직 진지하게 해보겠다고 대들지도 않았고, 작업도 정기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하고 자시고 할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용기를 가지게.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려면 여러 해 동안 참으면서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자네와 같은 처지일세. 나도 좋은 소설을 써 내려 하지만 내 손가락 안에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하지만 우린 꿈이 있어. 그러니 당당하게 진군해 보세. 그러면 신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게야. -에밀졸라 에밀 졸라가 밥티스탱 바이유에게 보낸 편지 요즈음은 세잔을 통 보질 못한다네. 열여덟 살 때 아무 걱정 없이 엑스에서 뛰돌던 그때와는 아무래도 같지를 않아. 먹고 살기 바쁘고 일도 서로 다르니 자주 얼굴을 대하기가 어려워. 아침에 폴은 아틀리에 쉬스로 가고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글을 쓰네. 오전 11시에 각자 점심을 먹네. 가끔 이른 오후에 세잔의 작업실로 가지. 그가 내 초상화를 그리거든. 그리고 그는 조제프 빌비에유의 집에서 오후 내내 스케치를 하네. 그러고는 저녁을 먹자마자 잠을 자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를 볼수가 없어. 이게 내가 기대했던 것일까?폴은 지금도 학창시절 그대로 기인행세를 하고 있어. 그는 자기가 독창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곳에 오자마자 엑스로 다시 내려가겠다고 우겼어. 파리 유학을 하려고 3년이나 싸우고서는 말이야.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괴짜이다 보니 나는 아예 입을 다물고 세잔에게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을 그만두어 버렸네. 세잔에게 뭘 입증해 보이려고 하느니. 차라리 노트르담 성당의 탑더러 춤을 추라고 하는게 더 나을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해주면 옳다고 시인하면서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아. 나이가 들수록 그는 점점 더 고집스러워지는 것 같아. . . 정말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란 말일세. 그의 뜻은 꺾을 수가 없고 그에게서 양보를 받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 놓고 토론하느냐. 하면 그것고 아니야. 그는 토론을 두려워해. 첫째 얘기하는 것이 피곤하다는 것이고, 둘째 상대의 말이 맞으면 자기의 견해를 고쳐야 할 텐데, 그게 두렵기 때문이지. -에밀 졸라 새잔이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 세잔은 종종 졸라에게서 돈을 꾸었다. 1878년 8월 27일, 에스타크 친애하는 에밀. 이번 달에도 자네의 신세를 좀 져야겠네. 오르탕스에게 60프랑만 보내주면 고맙겠네. 그녀는 9월 12일까지 비외 슈맹 드 롬에 있을 예정이네. 마르세유에서는 아직 숙소를 정하지 못했네. 너무 비싸지 않은 방을 고르다 보니 말이야. 아버지가 내게 돈을 준다면 올 겨울 내내 이곳에서 보낼 생각이네. 이렇게 하다 보면 에스타크에서 했던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네. 아무튼 마지막 순간까지 에스타크는 떠나지 않겠네. 늘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며 자네와 자네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네 -세잔 작품 졸라는 세잔의 작품은 물론이고 인상파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졸라는 1886년에 발표한 소설( 작품)에서 세잔을 모델로 하여 실패한 화가 클로드랑티에를 그렸고, 이로써 세잔과 졸라의 30년 우정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림을 그리는 데 이렇게 창조의 고통이 따르다니. 마치 살아서 숨쉬는 것 같은 인물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피와 눈물을 바쳐야만 했다. 리얼리티를 포착하기 위해 늘 투쟁했지만, 언제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하여 캔버스 위에 자연의 모든 것을 옮기려 했지만, 끝내는 그 천재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근육통만 느낀 채 완전히 소진되고 말았다. 다른 화가들을 만족시키는 적당한 방법이나 기술은 그에게 희한한 분노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그는 그따위 방법이나 기술은 허약하고 비겁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 시작했고 현재의 좋은 것을 버리고 미래의 불확실한 것을 찾아 나섰다. 그의 그림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여자를 두고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림 속의 여자가 캔버스 바깥으로 튀어나와 그와 동침해 주지 않기 때문에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그림을 사실적으로 만들지 못한는 것일까?그는 고민에 잠겼다. 아마도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뭔가 이런저런 미세한 사항이 약간 빗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날 '준 천재'라는 칭호가 붙여지자,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겁도 났다. 그래 그게 설명이 될지도 몰라. 신경계통에 약간 이상이 있어서, 아니면 유전적으로 약간 잘못되어서 표적을 정확하게 못 맞추는 것인지도 몰라. 뭔가 1-2g 모자라 위대한 인물이 될 사람이 광인이 되어 버린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깊은 절망감 때문에 화실에서 뛰쳐나온 그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도 결국에는 실패할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장송곡처럼 끈덕지게 그의 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 . 동료 화가인 클로드에 대한 동정심은 점점 더 커졌다. 클로드가 발판을 잃어버리고, 예술에 관한 한 점점 더 깊은 영웅적 광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당황했다. 학생시절부터 클로드가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는 클로드가 예술사의 흐름을 바꿀거장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자 실패한 천재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쥐어짰다. 곧 놀람은 사라지고 엄청난 고통을 겪는 클로드에 대한 한없는 동정이 밀려왔다. 예술에서 광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을까?그는 생각했다. 실패는 늘 그를 눈물짓게 했다. 어떤 책이나 그림이 비정상이 될 수록, 또 어떤 예술가의 노력이 점점 기괴하고 비탄스러운 것이 될 수록,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얼토당토않은 모든 꿈을 털어 버리라고 권유하고 싶은 충동이 강해지는 것이었다. . . 그는 후년에 들어와 그들이 함께 일했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는 곡 승리하리라고 확신했고, 성공하고 말겠다는 열망에 차 있었고, 파리를 한입에 삼켜 버릴 것 같은 패기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클로드를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뛰어난 천재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저멀리 제쳐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들이 꿈꾸었던 '위대한 캔버스''루브르를 진동시킬'위대한 계획을 회상했다. 하루 열 시간씩 일하며 열과 성을 다해 예술에 임하던 그 치열하던 젊은 날을 회상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던가?20년 동안 정열적으로 노력해 왔으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지 않았는가.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문둥이처럼 소외당하는 사람, 이 얼마나 우울하고 처량한 광경인가. 이 세상에서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과 희망을 반복하면서 견디어 온 것이 겨우 이거라니. 오. 하나님. -에밀 졸라( 작품), 1886년 세잔이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 1886년 4월 4일, 가르단 친애하는 에밀. 친절하게도 보내 준 ( 작품)을 지금 막 받았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저자가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에 감사드리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면서 저자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하는 바이네. -세잔 세잔의 색채, 공간, 조형 "데생과 색채는 별개가 아니다. 색을 칠함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진다. . "세잔의 이 말은 색채의 조직방식을 특징적으로 설명한다. 화가는 형태를 데생하고 그 형태에 따라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다. 세잔의 말은 형태가 색채의 조건에 종속되며, 따라서 색채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림이란 3차원의 오브제를 구성하기 위해 색면을 구축하는 것도 아니고, 색채 속에 형태를 그려 내는 것도 아니고, 색점이나 글레이즈(얇은 광택의 막)의 반투명한 효과로 형태를 그려 내는 것도 아니다. 세잔이"데생과 색채는 별개가 아니다. "라는 대전제를 내세우고, "색을 칠함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진다. "고 강조한 본뜻은 , 형태를 만드는 데생된 대상들의 상호관계를 고려해야만 비로소 색채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은 색채가 형태에 종속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색채가 그 역동적인 효과를 통해 형태를 연결시키고, 형태에 영향을 주고, 형태의 의미를 정한다는 뜻이다. 색채는 실제 그림 속에서 움직일 때 그 역할이 뚜렷해진다. 그렇다고 색채가 그림의 구성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색채는, 여러 형태를 캔버스에 서로 관계시키는(화가의)정서적 긴장과 잘 어울려 합일 될 때 , 최고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구성에 대한 고려 없이 색채에만 의존하는 그림은 느슨한 그림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원근법, 기울어지는면, 공간에 음영주기 등은 공간의 힘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동세를 만들어 내는가?캔버스에 놓인 여러 면의 관계가 동세를 창출해 낸다. 그러니까 공간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면들이 공간의 존재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면을 움직이는 듯한 힘을 준다. 면이 수평 혹은 수직의 축을 따라 반대로 움직일 때, 캔버스상에서는 동세가 느껴진다. 세잔의 그림( 생트빅투아르산)에서는 산과 하늘의 경계가 하나의 면을 형성하며 오른쪽으로 도는 동세를 형성한다. 바로 이 동세가 화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정서적 긴장의 강도를ㄹ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공간이 관람자 쪽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관찰하기는 어렵다. 3차원의 풍경이 2차원의 캔버스 위에서 재현될 때, 공간은 늘 뒤쪽으로 깊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움직임은'느낌'에 따라 조성된다. 화가는 사실적 공간-즉, 뒤로 물러서는 듯한 공간-을 구성하기보다는 캔버스 위의 면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대치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경험적'공간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폴 세잔은 인상파 화가로 출발했으나, 자기의 구성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한층 창조적인 방법으로 경험을 재현할 길을 찾아 나섰다. 인상파 화가들이 개인의 경험과 자연회귀라는 방법론으로 작업하는 동안, 세잔은 경험과 자연을 더 강렬히 연결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림속에서 창조행위의 핵심을 찾으려 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캔버스 화면을 중시하고 빛과 공간의 효과를 살리려 노력한 반면, 세잔은 그것과는 다른 원칙으로 독특한 회화를 창출했다. 그의 인물은 투박하고, 형태와 윤곽이 단절되어 있으며, 원근법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창조적 발견의 외양일 뿐이다. 그는 재현된 형태보다는 창조적 형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원근법을 파괴하는 것은 세잔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보여 주려는 목적, 혹은 관람자가 화폭을 바라보는 시각의 높낮이를 조절하려는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 혁명이었다. 그는 이같은 원근법의 파괴를 통해 자유로운 공간구성을 창출할 수 있었고, 바로 이것이 후대의 입체파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단초가 되었다. -알렌 리파 ( 현대 미술의 도전), 1957년 인상파 화가들과의 만남 뒤랑티의 찬사 채색에 관한 한, 인상파 화가들은 정말 독창적인 발견을 했다. 예전 그림에서는 채색에서 그 같은 영감을 발견할 수 가 없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화파의 그림, 밝은 색조의 프레스코 그림, 환한 색조의 18세기 그림에서도 그런 채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상파 화가들의 업적은 상치 혹은 상보 관계에 있는 미묘한 색조와 색가를 면밀히 관찰하여, 색채를 멋지게 변조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한 발견은, 강한 빛이 색조를 '변색시킨다'는 것. 물체에서 반사된 햇빛은 일곱 빛깔의 프리즘 광선이 하나로 뒤섞인 무색 광휘라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직관을 동원해 태양광선을 일곱 빛깔로 분해하고 캔버스 위에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재현시켜 놓았다. 시각을 세련되게 하고 색채를 교묘하게 파헤쳤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인상파의 수법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노련한 물리학자라도 이들의 색채분석을 흠잡지 못할 것이다. 루이 에밀 에드몽 뒤랑티( 새로운 그림), 1876년 버나드 덴버가 편집한( 가까이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1987)에서 인용 강렬한 열정을 재압한 색채의 구조 선배 화가들의 영향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화가들의 스타일을 거부했던 까닭에 세잔은 화가의 길로 들어선 이래 자신만의 강렬한 독창성을 선보일 수 있었다. 선배 대가들의 교훈에 조금씩 젖어드는 동안 젊은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표현수단을 개발할 여지를 조금씩 빼앗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잔이 인상파 화가를 만났다는 것은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는 피사로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세잔보다 열 살이나 많은 피사로는 겸손하고 관대했기 때문에 세잔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잔이 피사로 곁에서 이젤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피사로를 알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난 1872년에 들어서였다. 피사로와 그를 추종하는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작업과 자연관찰에 역점을 두면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라 빛의 힘으로 파편화된 공간이었다. 피사로의 영향으로 세잔은 그때까지 심혈을 기울였으나 별 소득이 없던 열정의 표현(과장된 낭만주의)이라는, 작업을 포기했다. 이제 그는(지성을 통해)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자연 앞에 나가면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하라는 피사로의 가르침은 세잔이 평생 신봉한 원칙이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고 자신만의 고유한 재현방식을 찾는 자유, 피사로는 그 자유의 전범이었다. 피사로는, 세잔이 모든 정열을 퍼부어 전념했으나 실패로 끝난 형태에 대한 집착에서 세잔을 해방시켰다. 1871년, 그때까지 아마추어에 불과하던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피사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부터 일에 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피사로의 교훈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을 통해 자연을 재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윽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다른 방식이란 바로 색채이다. "형태는 더 이상 윤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색채가 재현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형태는 색채의 대비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선은 없다. 단지 색채의 대비가 있을 뿐이다. " 탁월한 색채의 마술사로서 지닌 재능이 펼쳐지면서 세잔의 감각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격렬한 열정이 제거되자 감각이 되살아났고 어둡고 침침한 색조 대신 밝고 안온한 색조가 들어섰다. 거칠고 격력한 붓질로 이끌던 열정은 정밀한 붓질로 캔버스를 조직화해 나가는 끈기 있는 작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미셸 아르티에르( 대상의 위협과 모티프의 파악), 1984년 9월 5일 사물의 구조를 찾아서 그래서 세잔은 빛과 공기의 효과를 연구했고 색채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는 사물이 저마다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서로 빛을 반사하며, 관찰자의 눈과 대상사이에 공기가 개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잔은 이런한 자연관찰을 정물화로 표현했다. 오베르에서 그린 정물화에는 아직도 마네의 영향이 남아 있는지 어두운 색조가 지배한다. 아주 검은 배경에 또렷하지 않은 노란색과 붉은색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다. 세잔은 그 그림들을 닥터 가세의 스튜디오에서 그렸고, 안경, 병, 칼 따위의 화려하지 않은 대상을 사용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세잔은 이 그림들 속에 구성을 지배하는 밝은 갈색과 회색의 한정된 범위에 싫증을 느끼고 가세 부인이 꺾어다 준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린 정물화에는 밝고 환한 색깔들이 많이 등장한다. 청색, 적색, 강한 황색 등은 풍부한 색조를 사용할 때 느꼈을 세잔의 즐거움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세잔은 자신의 기법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점점 더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에서 일탈한다. 그는 풍경의 인상과 진동하는 대기를 잡으려고 매달리지 않았으며, 그것의 형태, 색채, 면, 빛을 그리려고 애썼다. 또한 그는 햇빛의 강도에 따라 산출되는 여러 가지 모양과 색조를 보여 주려고 같은 사물을 서로 다른 시간에 그리곤 했던 모네의 방법도 추종하지 않았다. '겸손하고 위대한'-세잔은 그렇게 불렀다. -피사로가 당싱 조르주쇠라의 점묘법에 매혹되어 쇠라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세잔은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솜뭉치 같다'면서 싫어했다. 그는 동료화가들이 과도하게 실험을 하고, 그러면서 화려한 외양에만 집중할 뿐, 그 외양밑에 숨어 있는 본질적 구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박물관에 소장된 대가들의 그림들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인상주의로부터 만들어 내려는' 과업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는지도 모른다. 존 리월드 ( 세잔:전기), 1986년 세잔의 회화관 세잔은 그가 경멸하는 살롱 심사위원이나 미술 평론가의 평가를 원하지 않았다. 세잔이 바란 것은 일반 대중의 평가였다. 순수에술 감독관이신 드 니외베르케르케 백작에게 1866년 4월 19일, 파리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최근에 살롱 심사위원들이 낙선시킨 제 작품 두점에 대해 편지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회신이 없으니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야 했던 이유가 더 명확해지는군요. 게다가 선생님이 최근에 부친 제 편지를 받았을 것이므로 제 주장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한 말씀만 여쭙고자 합니다. 저는 동료 화가들이 제 작품을 제멋대로 평가해대는 일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평가를 요구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요구합니다. 비록 낙선작이지만 일반 대중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호소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소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백작께서 제 입장에 있는 화가들의 의견들을 물어 보신다면, 그들은 예외 없이 심사위원을 의심하며, 어떤 방식으로 든 자신들의 노작이 일반 대중에게 관람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선전을 개최해 주십시오. 설혹 그 낙선전에 출품 하는 자가 저 혼자라고 하더라도, 일반 대중에게 저와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서로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백작께서 계속 침묵만 지키지는 않을것으로 봅니다. 이런 공손한 편지는 회신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세잔 벨기에의 미술비평가이며 큐레이터인 옥타브 마우스에게 1889년 11월 27일, 파리 친애하는 선생님. 호의 넘치는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고 기꺼이 당신의 초대에 응하렵니다. 전람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 저에게 전람회를 우습게 본다며 비난을 퍼부으셨다는데, 우선 그 점에 대해 한마디 해명을 할까 합니다. 저는 많은 연구를 거듭해 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고, 날카로운 평론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으므로, 제 작품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침묵 속에서 작업하기로 결심한것입니다. 그렇지만 훌륭한 화가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하니, 저도 주저 없이 결심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 저의 감사와 호의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세잔 시인이며 소설가인 조아생 가스케에게 1896년 4월 30일, 엑스 50프랑 짜리 원고를 쓰려고 대중의 관심을 내게 돌려 놓은 제프루아같은 인물들은 정말 밥맛 떨어지네. 나는 평생 밥벌이를 하려고 노력해 왔네. 그리고 내 사생활이 일반대중들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어. 물론 예술가는 자기의 지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지. 하지만 자연인 세잔은 평범한 채로 있는 게 좋단 말이야. 즐거움은 오로지 일에서만 찾아야 하네. 가끔 술이나 한잔씩 하는 스튜디오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고향에 그냥 머무를 생각이네. 내게는 아직도 그 시절의 좋은 친구(아마도 아실 앙프레르인 듯)가 있지. 물론 그는 화가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구역질나는 메달과 장식을 자랑하는 3류 화가보다는 몇 배나 더 훌륭한 화가일세. 자네는 이 정도로 나이를 먹은 내가 그 따위에 혹하리라고 생각하나? 조아생 가스케는 자기 아버지 앙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세잔이 한말을 기록해 두었다. 사람마다 고민이 있지. . . . 내가 자네를 잘 알지. 자네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 . . 앙리, 화가는 말일세, 확신을 가져야 해. 그게 나의 최고 목표야. 그럼, 그렇고 말고 난 캠퍼스를 대할 때마다 어떤 확신을 느껴. 뭔가 이루어질 거라는 느낌이 오는 거야. . . . 그렇지만 언제나 실패했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거야. 그러면 아주 죽을 맛이지. . . . 가령 자네를 두고 한번 말해 보자고. 자네는 인생에서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알고 있어. 그래서 자네 나름대로 길을 가는 거야. . . . 그런데 나는 말이야, 이놈의 직업이라는 게 묘해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통 모르겠다는 거야. 온갖 이론이 무성해서 사람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단 말이야. . . . 내가 너무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크게 봐서 말이야, 품성이 좋으면 재주가 있게 마련이야. 물론 품성이 다라는 얘기나, 선량하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가 아니야. . . . 그러면 그림 그리기가 아주 수월하겠지. 물론 악당이 천재일 수도 없다고 봐 조아생 가스케 ( ( 세잔)), 1921년 젊은 예술가에게 1896년 나는 너무 빨리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소. 나는 이 시대의 화가라기보다 당신 세대에 속하는 화가인 것 같소. 당신은 젊고 힘이 있어요. 당신은 자기만의 정서를 가지고 있고, 또 그 정서에서 나오는 충동을 그림에서 이룰거요. 난 이제 점점 늙어 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 자 우리 일합시다. 모델을 잘 인식하고 그것을 캔버스 위에 재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오. - 세잔 화가 샤를 카무엥에게 1903년 9월 13일, 엑스 쿠튀르는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어요. "좋은 친구들과 사귀도록 해. 루브르에 자주 가란 말이야. 대가의 그림을 보고는 재빨리 나와야만 해. 그러고는 자연과 접촉해. 우리 내부의 본능,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예술감각을 되살리도록 해. " -세잔 에밀 베르나르에게 1904년 4월 15일, 엑스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원추를 봅니다. 사물을 적절히 배열하면, 물체나 면의 각변은 하나의 중심선을 지향하게 됩니다. 지평선에 평행한 여러 선은 넓이를 줍니다. 그것은 자연의 단면, 다기 우리들 눈앞에 펼쳐 광경의 단면을 줍니다. 반면 지평선에 수직으로 걸친 선은 길이를 줍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연은 넓이보다는 깊이로 다가섭니다. 그러므로 빨강과 노랑으로 재현되는 빛의 진동 속에서 공기를 느끼게 하려면 충분한 만큼 파랑을 칠해 넣어야 합니다. -세잔 1904년 5월 12일, 엑스 나는 아주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잠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모델을 오래 쳐다보고 아주 정확하게 느껴야 합니다. . 예술가는 본질에 대한 지적 관찰이 뒷받침되지 않은 모든 판단을 경멸해야 합니다. 또 예술가로 하여금 진정한 길―자연을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에서 일탈하게 만드는 문학정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는 허황된 생각에 빠져 길을 잃게 됩니다. 루브르는 좋은 참고서이지만 매개 이상의 역할은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학습은 자연이라는 그림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 세잔 아들에게 1906년 9월 8일, 엑스 마지막으로 내가 자연 앞에서 전보다 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을 말해야겠구나. 그렇지만 그런 감각을 캔버스 위에다 실행시키는 것은 늘 어렵단다. 자연에 생기를 주는 그 풍성한 색체를 만들 수가 없구나. 강둑에는 볼거리가 널려 있어.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 달 동안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관찰해야겠어. 나는 요즘 젊은 화가들이 훨씬 더 지적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늙은 화가들은 나를 끔찍스러운 경쟁자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 세잔 1906년 9월 26일, 엑스 샤를 카무앵이 에밀 베르나르가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어. 우리는 그가 박물관의 기억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지식인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어. 그렇지만 그 친구는 자연을 관찰하지 않아. 그러나 무엇보다도 훌륭한 점은 그가 온갖 학파로부터, 그야말로 모든 학파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야. 그래야 피사로의 말을 오해하지 않지. 물론 그가 말을 좀 심하게 했지만, 아무튼 그는 예술의 공동묘지는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그건 맞는 말이야. 자칭 예술가라는 자들이 내놓은 온갖 학설을 모두 진열하면 훌륭한 동물원이 될 거야. - 세잔 비평가들의 견해 제1회 인상파 전시회, 파리, 1874년 세잔 얘기를 해볼까?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꿈속에서라도 세잔의 그림을 추천할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예수가 십자가를 등에 메듯, 자기 그림을 등에 메고 살롱에 나타난 이 사나이를, 세잔은 노란색을 너무 좋아해서 앞길을 망쳤다는 군. 에르네 데르빌 (르 라셀), 1874년 4월 17일 그는 폴 세잔의 (목매단 사람의 짐)을 보더니 갑자기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어. 이 작은 그림에 구사된 임파스토 수법은 (카퓌신가)에서 시작된 거야. 뱅상 아저씨(보통 사람, 여기서는 일반적인 관람자를 지칭: 역주)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어."(현대판 올랭피아) 얘기는 제발 하지 말게. 흑인 하녀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베일을 걷어 내는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는가? 그 작품은 이 세잔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마침내 뱅상 아저씨의 고전적인 정신은 온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파리의 풍습을 그림 이 그림 앞에 멈춰 서더니 그것을 초상화라고 생각하고는 마구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어, "야, 저 친구 참 못생겼군. "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앞에서 보니 눈이 두 개 있고, 코에다. 입도 있구먼. 인상파 화가들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런 쓸데없는 것을 그리는데 그토록 시간을 많이 들였다니, 모네라면 같은 시간에 스무 장은 그렸을 거야." "어디 다른 데로 가 보세요. "그림 속의 '초상화'가 말했다. "어, 말도 하네. 이 친구 혹시 어디서 거지를 데려와서 그리게 한 거 아니야?" 루이 르루아 (인상파 화가의 전시회)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제 3회 인상파 전시회, 파리, 1877년 지난 15년 동안 언론과 대중에게 공격을 당하고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는 화가는 세잔이다.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늘 비방하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의 작품만 보면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그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잔의 작품은 황금시대의 그리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캔버스에는 고대 그림이나 테라코타의 평온함과 영웅적 관조가 엿보인다. 그래서 세잔의(수욕도)를 비웃는 사람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멋대가리 없다고 비판하는 야만인과도 같았다. 세잔은 일가를 이룬 위대한 화가이다. 붓이나 연필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데생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림이 부정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함이 아니라 뛰어난 기술이 낳은 세련됨이다. 나는 이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세잔이 현재 유행하는 작가들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잔의 그림에는 성서적, 그리스적 고풍을 연상시키는 굉장한 매력이 있다. 인물의 움직임은 고대 조각에서처럼 단순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풍경화에는 감동적인 장엄함이 흘러 넘친다. 색조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물화에는 엄숙한 진실성이 깃들여 있다. 그의 모든 그림에는 감동적인 데가 있다. 그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격렬한 정서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된 정서를 캔버스 위에다 교묘하게 실현시키는 것이다. 조르주 리비에르(래프레니스트), 1877년 4월 14일 샬롱 도톤, 파리, 1904년 세잔의 그림이 준 첫 인상은 데생이 투박하고 색채가 촌스럽다는 느낌이었다. 널리 칭송받는 그의 정물화는 조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생기가 없다. 그의 정물화가 언젠가는 루브르에 들어가 샤르댕의 옆자리에 놓일 것이라고들 말하는데, 지금이 그때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M. 푸키에 (르 주르날), 1904년 10월 14일 아. 세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을 받을지니, 예술의 천당이 그들의 것이라! 비록 우리가 타락하긴 했지만 왜 구성을 하고 데생을 하고 채색을 하는가? 육감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알려고 애쓸 필요가 무엇인가? 예술이 즉발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의미하고 광기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면 교육, 지도, 박식 따위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M. 부예(라 르뤼 블뤼), 1904년 11월 5일 샬롱 도톤, 파리, 1905년 도대체 그들이 더 이상 세잔에게서 바라는 게 무엇인가? 그의 주장은 충분히 들어 보지 않았는가? 그의 작품을 본 사람마다 실패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졸라의 신념 때문에 앞으로 세잔의 작품이 평가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화상들은 참 안되었다. 볼라르는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까미유 모클레르(라 랑테른), 1905년 10월 19일 세잔은 앞으로 15년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웃음거리로 남을 것이다. 이 평범한 늙은 화가를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러스킨이 말한'런던식 뻔뻔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잔은 시골에서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면서 노력은 많이 하지만 구성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둔탁한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낸다. 그는 또 그런대로 예쁜 과일이 그려진 정물화도 그린다. 그러나 채색은 조잡하고 풍경화의 분위기는 납처럼 무겁다. 그리고 그의 인물화는 최근의 한 언론가가 "미켈란젤로 같다"고 칭찬했지만, 실은 형체없는 실험작에 불과하다. 좋은 그림을 그려 보겠다는 의욕은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기술은 없는 그런 화가이다. 카미유 모클레르(라 드뷔), 1905년 12월 15일 샬롱 도톤, 파리, 1906년: 세잔 회고전 세잔이 당대의 가장 진지하고 가장 의식적인 대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객관적 증거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를 '똑똑한 석공', 괴상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 자연적 '왜곡된 모습'을 그리는 사람으로만 몰아부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얘기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이 너무 오랫동안 허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그의 결점을 부인하지도 않겠다. 왜곡되어 울퉁불퉁하고, 촌스럽고, 비칠거리는 듯한 형태,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배경, 일부러 도착되어 있는 면 균형이 안 잡힌 인물 등등.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루벤스가 세련되었다고 평가 받았던가? 르누아르도 멋진 아이디어를 개진했다고 칭찬받았던가? 루이 복셀(질 블라), 1906년 10월 5일 그래프턴 화랑, 런던, 1905년 "어렵소. 이건 뭐지? 인상파 전시회에 나온 갈색과 올리브색이 뒤범벅된 저 웃기는 풍경화는 뭐지? 갈색이라고? 세상에. 갈색을 잔뜩 쳐발라 놓고 '난 인상파 화가요'라고 말하면다인가? 도대체 저 작품은 누가 그린 거야? 아, 세잔. 그 사람이라면 정물화가 아닌가? 그래, 이건 좀 마음에 드는군. 저기 저 사과 그림은 정말 좋군. 그리고 여기 이 ( 디저트)라는 것도 괜찮아. 저 사과는 멋지지 않아? 그리고 저 칼도. 그런데 저 오른쪽에 있는 물병은 좀 이상하군. 그리고 저 물컵은 뭐 저렇게 생겼어? 세잔이란 사람은 좀 데생이 약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저 베일, 커튼, 탁상보 등은 멋지군. 잘 그렸어. 그래 뭔가 있는게 같아. 하지만 너무 어둡고 갈색이 많아. 세잔의 색채는 영 별론데. 자, 저기 가서 모네 그림이나 보자구. " 이것이 1905년에 보여 준 인상파 그림 애호가들의 일반적인 세잔 평이었다. 프랭크 러터 (우리시대의 미술), 1933년 세잔에게 경의를 동시대 화가들의 칭송 세잔이 동시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의 스승적인 피사로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받은 동시대 화가로는 고갱을 들 수 있다. 고갱은 최초의 세잔 작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중 '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은 그가 아끼는 소장품 가운데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 이 정물화를 너무 좋아한 고갱은 여인 초상화를 그리면서 배경으로 이것을 사용했는데, 그 여인조차도 세잔이 1880년대에 그린 세잔부인의 포즈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 세잔에 경의를 표하며 고갱은 그 여자 초상화에서 '구성적'붓질을 체택했지만, 자신의 2차원적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도 평면처리했다. 고갱은 이처럼 세잔 그림의 장식적 특징에 주목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곧 1890년대에 등장할 상징파 화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상징파는 초기에 고갱의 표현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 상징파 화가로는 에밀 베르나르와 모리스 드니를 들 수 있는데, 드니는 '세잔에게 경의를'이라는 그림을 제작하여 세잔이 상징파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스스로 시인했다. 1901년 파리에서 공개된 이 그림은 세잔을 존경하는 사람들과 제자들-르동, 보나르, 뷔야르, 세뤼지에, 드니 등-이 '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주위에 둘러서 있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드니의 세잔 예찬은 일찍이 세잔이 ' 들라크루아 숭배'를 그려 들라크루아를 예찬한 것과 비교될수 있다. 세잔은 후배 화가의 이러한 경의 표시에 깊은 감동을 받아 1901년 6월 드니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드니는 이렇게 답장을 냈다. "이것은 선생님이 우리 시대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지 잘 보여 줄 것입니다. 제가 속한 젊은 화가 그룹은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또 열광적으로 사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모두 선생님에게 나온 것이니까요." 드니가 이 편지를 쓸 무렵에도 일반 대중이 세잔의 그림을 쉽게 관람할 수 있는 실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1904~1906년 파리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자주 개최되자, 젊은 화가들이 끼친 그의 영향이 점점 분명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잔이 사망한 다음해인 1907년 두 번의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세잔 열기가 고조되었다. 1907년 6월에는 79점의 수채화가 베르낭죈 화랑에서 전시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56점의 유화와 수채화가 살롱도톤에서 전시되었다. (독일의 대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0월의 전시회에 참석하여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그전에도 세잔은 20세기 초의 세 대가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의 주목을 받았다. 세잔 스타일의 장식적 측면에 주로 관심이 있었던 선배 상징파 화가들과는 달리, 이들 세 대가는 세잔 미술의 건축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1899년 세잔의 '세명의 목욕하는 여자'를 사들인 마티스에게 세잔은 회화적 질서와 명석성의 모범이 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마티스는 1900년경에 자신의 그림에서 견고성과 부조성의 효과를 탐구했다. 마티스와 동시대 화가들도 세잔의 그림에서 다양한 결론을 얻어냈지만, 마티스만이 평생 세잔에 대한 관심을 견지했으며, 그만이 세잔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될 자격이 있다. 그는 자연에서 직접 그리라는 세잔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그림의 틀을 구축할 때 형태와 색채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세잔의 철학을 잘 받아들였다. 세잔 스타일의 가장 과격한 측면을 철저히 탐구한 화가는 입체파인 피카소와 브라크였다. 그 과격한 측면이란, 형태의 분석적 접근과 전체 화면의 역동적 구성이었다. 세잔은 화면의 자율성을강조하면서도 형태와 색채의 관계를 교모하게 대응시켜, 전체 화면에 율동적인 동세를 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그림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논리적 귀결'-이 말은 그림의 구성을 위해 시각적 감각을 정신적으로 변형할 수 있다는 뜻이다.-이라고 말했을 때, 세잔은 입체파의 전개양상을 예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잔의 변형은 여전히 자연에 모티브를 둔 채,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진행된다. 그러나 입체파는 가시적 세계와 상관없이 변형을 계속 밀고 나갔으며, 조토에서 세잔에 이르는 모든 화가들을 공통으로 묶어 주던 '지각되는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현대 추상미술로 가는 길을 열었다. 리처드 베르디 "세잔", 1992년 폴 고갱(1848~1903) 고갱은 겉으로는 세잔을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를 마오리 신화로 대치해 보라. 1885년 1월 14일, 코펜하겐 에밀 슈페네케에게. 세잔은오해받고 있어.본질적으로 그는 신비한 동양적 기질을 지닌 사람이야. 그느 드러누워 꿈꾸는 사람의 신비와 평온을 드러내는 형태를 좋아해.그의 짙은 색채는 동양의 정신과 통하지. 남프랑스 사람인 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베르길리우스를 읽고 하늘을 응시하면서 하루를 보내. 그래서 그의 지평선은 매우 높고, 그의 청색은 대단히 강렬하며, 그의 적색은 놀라울 정도로 진동하는 거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읽는 니 마음대로 해석되는 베르길리우스처럼, 그의 그림은 우화적이고 다중적 의미를 지니지. 그래서 그의 배경은 실제적인 한편 상상의 무대가 되는 것이지. -폴 고갱 클로드 모네(1840~1926) 1894년 11월 23일, 지베르니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수요일로 하자고 뜻을 모았네. (모네는 1894년 11월 28일 제프루아를 지베르니로 초대했다. 그 목적은 세잔과 만나 점심이나 먹자는 것이었다.) 세잔이 여기 와서 파티에 참석할 걸세. 그렇지만 그는 아주 괴짜인데다 또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해. 그래서 자네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도 혹시 안 올지도 모르겠네. 이 친구가 평생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은 정말 안된 일일세. 그는 진정한 예술가인데 자기 자신의 능력에 너무 회의를 갖고 있네. 그러니 사기를 좀 복돋아 줘야 해. 바로 그 때문에 세잔이 자네의 기사를 읽고 그렇게 고마워 한 게 아니겠나.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1830~1903) 1895년 11월 21일. 파리 내 아들 루시앙에게. 세잔의 전시회에는 멋진 그림이 참 많았다. 완벽한 정물화, 열심히 공을 들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그리고 특히 아름다운 풍경화, 누드, 미완성 두상. 이런 것들은 아주 당당하고 대단히 예술적이고 유연하구나. 왜냐고? 거기에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지. 1895년 12월 4일. 파리 루시앙에게 정말 믿을 수 없는 얘기구나. 에망이 뻔뻔스럽게도 세잔이 그동안 늘 아르망 기요맹의 영향을 받았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단다. 일반 대중들이 그런 헛소문을 받아들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말 웃기는 얘기지. 그 소문이 시작된 곳은 볼라르의 화랑이라는구나. 볼라르는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단다. 이런 소문이 퍼지다니 정말 가관이다. 자칭 인상파 화가들의 애호가요 친구들이라는 사람들에게도 세잔의 위대한 점과 특징을 제데로 이해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몇세기가 흘러야 할지 몰라. 드가와 르누아르는 세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볼라르가 세잔의 과일 스케치를 보여 주었는데, 그들은 누가 그 그림을 소유할 것인가를 두고 동전을 던졌지. 드가는 특히 세잔의 데생을 좋아하는데, 너느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니? 1861년의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때 나는 프란체스초 올러와 아틀리에 쉬스로 가서 세잔의 누드 스케치를 보았고 그의 진가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당시 세잔은 전통적인 화풍에 젖어 있는 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 그들 중에는 모리스 자케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자는 그후 예쁜 그림만 그려서 톡톡히 돈을 챙겼단다 그 옛날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구나. 후계자들이 내놓은 논평 폴 시냐크(1863~1935), 신인상파 화가이며 이론가 세잔의 붓질은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원칙을 그대로 결합시킨 것이다. 복수 시점의 원칙-양파가 공동으로 신봉하는 것이지만 실제 적용방식은 조금씩 다른-은 색채주의자 세 세대를 공동으로 묶고 있는데, 이들은 유사한 기법을 구사하며 빛, 색채, 조화를 추구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 폴 세뤼지에(1865~1927), 나비파의 창시자 세잔은 회화예술에서 전세대가 쌓아올린 모든 형태를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방은 수단일 뿐이며, 모방의 유일한 목표는 선과 색채를 주어진 평면위에 배치하여, 눈을 시원하게 하고, 정신에 말을 걸고-순수 조형 수단을 통해-보편적 언어를 창조해 내려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거칠고 냉담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것은 그의 창조력이 바깥으로 드러날 때의 외양, 외적 결점에 불과하다. 그의 생각은 마음속에서 너무나 분명했다. 표현하려는 그의 욕망은 너무나강력한 것이었다. 하나의 전통이 우리 시대에 생겨난다면-나는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그 시작은 세잔일 것이다. 세잔의 미술은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고 순수하고 고전적인'모든 예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잔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메르퀴드 드 프랑스", 1905년 파울 클레(1879~1940), 화가 나는 빈 전시회에서 세잔의 그림을 여덟 점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여기에 위대한 대가, 나를 가르쳐 줄 바로 그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 반 고흐보다 더 강한 감동을 주었다. "일기", 1908년 조르주 루오(1871~1958),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 내게 가까이 오지 마. 나를 만지지도 마. 내 안에느 온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혹은 깨닫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있어. 내게 가까이 오지 마. 내게 말을 걸지도 마. 말과 행동이란 덧없는 거야. 나는 말이 없고, 힘이 없고, 나이 들었어. 내 모든 노력은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하고 있어. 바로 이겄 때문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살기를 강요당했어. 나는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힘들게 명상하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어. '세잔에게 말을 걸기' "메르퀴르 드 프랑스", 1910년 로저 프라이(1866~1934), 영국의 화가이며 비평가 나는 늘 세잔을 존경했다. 그러나 런던의 그래프턴 갤러리에서 그의 그림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보니,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위대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작품은 무릇 위대한 창시적 예술가의 작품이 그렇듯,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마치 세잔 자신이 어떤 위대한 힘의 영매가 되어 그림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형태와 색채를 되는 대로 그려모아 놓은 것같이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살펴보면 그 비밀스런 뜻이 조금씩 파악된다. 세잔은 커다란 운동을 주도한 위대한 천재였다. 자연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던 예술이 봉착한 막다른 골목에서, 신비한 방법에 따라 탈출구를 찾아낸 것도 바로 그였다. 세잔은 인상주의로부터 사물의 외양은 순수한 시각적 파편이라는 대원칙을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색조와 색채의 대치에 몰두하여 사물의 내부에서 형태를 재창조해 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그는 재창조해 낸 사물에 색채, 빛, 분위기를 입힘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꿰뚫었다. 바로 이런 놀라운 종합력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의 구성은 얼핏 보기에 자연의 후미진 구석에 앉아 그린 것처럼 엉성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그 안의 사물이 서로 교묘하게 조응하고 그렇게 하여 그 미묘한 외양 밑에 정교한 건축학적 구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 에스타크만'을 보면, 에스타크만의 멋진 구도를 상상력 풍부하게 파악한 그 재주를 높이 사야 할지, 아니면 에스타크만의 햇빛 반짝거리는 분위기를 지적으로 파악한 그 감각을 높이 사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다. 그는 자연의 여러 측면을 수정의 잘려 나간 단면으로 파악했다. 이 단면들은 각기 다르나 상호 의존적이다. 한편, 인물화를 그릴 때면, 고전적 품성을 가진 세잔은 대상의 심리적 측면을 포착하려고 하기보다는 인물의 정적이면서도 폭넓은 윤곽을 통해 인물의 본질을 파악해 내려 애썼다. 내 생각에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 할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냐 만테냐를 연상시킨다. 그 초상화에는 내적으로 충실한 삶이 그려져 있으며, 진짜 이미지에서나 볼 수 있는 저항과 확신이 느껴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의 정물화가 탁월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것 한 가지는 말해 두고자 한다. 샤르댕 이후 세잔처럼 일상생활 속의 평범한 오브제를 소재로하여 그처럼 날카로운 상상력이 발휘된 정물화를 그린 사람은 없었다.또한 그의 정물에는 통상적인 연상이나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새로운 언어가 구사되고 있다. '후기 인상파 화가-2' "네이션", 1910년 12월 3일 알베르 글레즈(1881~1953)와 장 메칭거(1883~1956), 프랑스 입체파 화가들세잔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가이다. 그를 반 고흐나 폴 고갱에 견주는 일은 격에 맞지 않는다. 세잔의 업적을 생각하면 17세기의 거장 렘브란트가 연상된다. ' 엠마오의 순례자들'을 그린 렘브란트처럼, 그는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혜의 눈으로써 리얼리티의 심연에 뛰어들었다. 설혹 심오한 리얼리즘이 어느새 반투명한 정신적 상태로 뒤바뀌는 그 경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잔은 적어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후배들을 위해 분명하면서도 멋진 방법론을 하나 남겨 놓았다. 그는 우리에게 우주의 약동하는 힘을 터득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생명이 없는 낯선 물체들이 서로에게변화를 주는 그 미묘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세잔에게 대상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그 대상의 구조를바꾸는 것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채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채로자연의 형태에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잔에 대한 이해는 곧 입체파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다. 로버트로스(1869~1918), 미술 비평가 이 기사는 세잔의 수채화가 약 30점 포함된 후기인상파 전시회(그래프턴 갤러리에서 열림)에 대해서 쓴 것으로, "더 타임스"에 실렸다. 기명기사는 아니었지만 로버트 로스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상파 화가와 마찬가지로 세잔은 리얼리티에 관심이 많았고 늘 예술가적 편견 없이 그것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리얼리티 속에서 추상적 디자인을 발견해 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필요 없는 요소를 모두 배척했듯이, 그도 추상적 디자인과 관계없는 요소는 과감하게 무시했다. 세잔과 인상파 화가 모두 예술적 자유를 확보했으나, 세잔은 그 자유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했다. 그는 사물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사물 속에서 눈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음악을 찾아내 모든 사물을 그 음악에 종속시켰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가 장식적이라고 부르는 화가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잔은 이들과도 다르다. 대부분의 장식적 화가들은 모든 사물을 2차원으로 축소한다.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페르시아 양탄자이다. 이 양탄자에는 눈을 즐겁게 하는 추상적 음악이 있을 뿐 사물의 재현은 없다. 그러나 세잔의 디자인은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해도 늘 3차원에서 구성된다. 그의 음악은 양괴의 음악이지, 선이나 평면의 음악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예술을 독창적이고도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괴를 재현하는 모든 수단은 환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늬를 만들어 낼 때 일정한 요소를 희생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니 세잔의 ' 암벽' 같은 그림은 의미도 없고 아름답지도 못하다. 이 그림은 압벽이나 페르시아 양탄자의 무늬를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시각적 환상도 눈을 즐겁게 하는 음악도 없다. 그러나 세잔은 치마부에가 선과 평면으로 구성을 할 줄 알았듯이, 추상적 양괴로 구성을 하는 법을 배웠다. 결국 그는 3차원의 환상을 일으키는 디자인을 쓰지 않고, 그가 양괴에서 발견한 새로운 음악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세잔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평면적인 무늬를 찾거나 평면적인 무늬와 함께 이루어지는 추상적 디자인을 살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견 낯설어 보이는 3차원의 추상, 그리고 새로운 양괴의 음악에 익숙해져야 한다. '세잔과 후기인상주의' "더 타임스", 1913년 1월 8일 앙드레 로트(1885~1962), 프랑스 입체파 화가 지난 20년간 미술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의 출발점은 세잔이라는 사실을 시인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때 그 해결점도 세잔에게서 찾아야 한다. 우리들 중에 가장 독창적인 예술혼을 지니고 있는 화가들을 세잔의 가장 은밀한 의도를 다시금 강조하면서, 그의 예술행위에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의 예술행위는 종종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회화, 그 혼과 정신", 1920년 모리스 드니(1870~1943), 나비파의 지도자 세잔의 명성에는 역설적인 데가 있다. 세잔 자신도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잔 애호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진다. 그림 자체를 사랑하는 그룹, 그림보다는 그림과 관련된 문학적 즐거움 따위를 사랑하는 그룹.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이 대가는 평생을 신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논평에는 늘 모호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모호함은 차례로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수줍음 많고 독립심 강한 은자였다. 늘 자기자신의 미흡함을 안타까워하고 불만에 차서 예술에만 몰두했던 이 화가는 말년까지도 철저히 세인의 이목을 피했다. 그의 기법에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들조차도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예술가의 감각이 예술작품의 유일한 근거이던 시절, 그리고 즉흥적 기법-'감각의 고양에서 나오는 정신적 어지러움증'-이 낡아빠진 아카데믹한 전통과 기법을 몰아내던 시절에, 세잔의 미술은 감각의 본질적 역할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으며, 이성적 반성을 감각적 경험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현상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지나칠 정도로 암중모색 심사숙고하여, 자연을 탐구하는 순간의 느낌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느 의도적으로 선과 양괴를 변형시키고, 미리 짜여진 리듬에 따라 테이블 보를 배치하고, 우연을 배제하면서, 조형미를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정한 모티프를 잃지 않고 정물화를 '구성'했다. 최초의 모티프는 데생과 수채화에서 곧잘 드러났다. 이는 세잔의 눈이 즉각적으로 발견하고, 그의 지성이 논리적 구성과 건축학적 설계를 통해 보완하는 연속되는 빛과 그림자의 정교한 교향악이다. "이론", 1920년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 러시아 화가 세잔은 힘이 넘치는 화가이면서, 회화적 요소를 정밀하게 감지한 화가이다. 그렇지만 인상파 화가들에게 던져진 비난이 그에게도 던져지고 있다. 가령 세잔은 같은 형태의 데생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델의 스케치 솜씨도 형편없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또한 세잔의 그림과 인상파의 그림에는 공히 작품의 형태와 색채, 모델의 형태와 색채가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세잔의 그림과 '새 그림'을 표방하는 동료 화가들의 그림은 대상의 기호만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들의 예술을 위해 대상을 심하게 변형했다는 말이다. 일부 몰지각한 비평가들은 그런 변형이 데생과 색채능력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만약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보는 이러저러한 태도라는 요점을 놓치고 마는 셈이 된다. 실제로 사물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세잔은 순수한 형태로 감각을 표현할 수 있었기에 위대한 대가잉 것이다. 화가적 세계관을 온전히 정의한 점에서 세자니즘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이다. 세잔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술사는 발전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었다. 세잔이 자신의 화가적 감각을 멋지게 표출해 낸 자화상이 있다. 그러나 이 자화상은 실제의 해부학적 비례와는 맞지 않으므로 자화상이라고 부를 수 없다. 모델의 실제 형태와 캔버스 위에 재현된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남은 것은 특징이거나 개별 부위들의 기호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색채라는 측면에서 그런 상위를 더욱 확실히 엿볼 수 있다. ' 형태, 색채, 그리고 감각' ≪현대 건축≫ 제 5호, 1928년 파블로피카소(1881~1973) 세잔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물론 나는 그의 그림을 보았다. 아니,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조르주 브라시에게, 1943년 피에르 보나르(1867~1947), 프랑스 화가 그리고자 하는 소재 앞에 선 세잔은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이디어와 관계있는 것만 자연에서 가져왔다. 그는 붓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도마뱀처럼 햇볕을 쬐면서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사물이 머리속에 들어와 명확한 개념을 형성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자연 앞에 선 그는 어떤 화가보다 더 강력하고 더 단단하고 더 진지했다. 앙젤르 라모트 ≪재치≫ (1947)에서 막스 웨버(1881~1961), 미국 화가 웨버는 세잔의 공간실험과 색채실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아카데미시즘을 종식시킨 이 화가의 그림 열 점을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나는 몇 번씩 그 그림들 앞으로 되돌아와 혼자 중얼거렸어요. "그림은 모름지기 이렇게 그려야 해. 이거야말로 예술과 자연이 재구성된 훌륭한 그림이야." 그러니까 세잔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기하학적 미학의 엔지니어였던 셈입니다. 나는 충격을 받은 상태로 전시회장을 나왔어요. 그다음부터는 그림을 그릴 때 붓질부터 달라지더군요. 작업중 구상이 막혀 망설여질 때마다 세잔의 수법을 생각했지요. 창작을 위한 그 끈덕진 태도, 조각을 연상시키는 안료의 사용, 또 형태를 조형하기 위한 세심한 색채 등등 말입니다. 그는 정말 대가였어요. 1959년의 인터뷰, 존 리월드의 ≪세잔과 미국≫ (1989)에서 회화의 진실 세잔의 회의 그는 하나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회를 작업했고, 초상화를 그릴때는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혔다. 우리가 세잔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그 자신에게는 하나의 실험이었고 그림을 향한 접근이었다. 1906년 67세 되던 해 9월-그러니까 죽기 한 달 전-그는 이렇게 썼다. "너무나 격렬한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있어. 한동안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젠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내 목표를 좀더 면밀히 궁리해 보고 있다. 과연 나는 그렇게 강렬하게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있으면 서서히 진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그의 세계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혼자서 작업했다. 제자도 없었고, 가족의 응원이나 살롱 심사위원의 격려도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죽던 날 오후에도 작업을 했고, 1870년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도 에스타크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해 여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터져서 징병이 실시되었는데 세잔은 병역을 기피했다.) 그런 그였지만 자신의 작업에 회의를 가질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그림의 독창성이 시각장애의 결과가 아닌지, 그렇다면 자신의 전 생애가 신체적 이상에 근거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역설 그의 그림은 역설이다. 리얼리티의 추구, 그러면서도 그는 감각을 신봉했고, 자연이 주는 직접적 인상을 최상의 길잡이로 삼았고, 윤곽선을 포기했고, 데생 뒤에 색채를 채워 넣지 않았으며, 원근법을 무시했다. 에밀 베르나르는 이를 세잔의 자살행위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세잔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면서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완전히 거부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세잔의 고통과 특히 1870년에서 1890년에 시도한 대상의 왜곡을 설명해 준다. 데생을 포기하면서 세잔은 혼돈상태로 빠져들었고, 감각의 혼돈은 대상을 왜곡시켰으며, 이성이 끊임없이 현상에 대한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종종 그러하듯이 환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머리를 흔들면 대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환영이 나타나지 않는가, 베르나르는 세잔이 "그림을 무지 속으로 그의 정신을 암흑속으로 던져 넣었다."고 말했다. 예술과 자연의 결합, 감각과 지성의 통합 세잔과 베르나르의 대화는 세잔이 감성과 지성, 보는 화가와 생각하는 화가, 자연과 구성, 원시와 전통이라는 진부한 2분법을 거부하려고 애썼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화가라면 뚜렷한 시점을 갖고 있어야 하네. 그 시점이란 불합리한 것을 완전히 배제한 논리적 비전이어야 해." "선생님, 그건 자연을 바라보는 시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연과 예술, 모두가 적용되지." "그 둘은 서로 다른 것 아닙니까?" "나는 그 두 가지를 결합시키려 하네. 예술이란 개인적 이해라고 할 수 있어. 난 그 이해를 감각에 맡기고, 지성으로 하여금 그 이해를 예술작품으로 구성하게 하려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회화관은 '감각'과 '지성' 따위 일상언어로는 적절히 표현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말 대신 그림으로 직접 그려 보였던 것이다. 논란을 좋아하는 학계에나 어울릴 법하지, 막상 그 학풍을 일으킨 사람들-철학자나 예술가-과는 별 상관없는 2분법을 그의 작품에 적용하느니, 그의 그림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귀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진정한 의미는 2분법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세잔은 혼돈과 질서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듯, 감각과 지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시각 밑에 도사리고 있는 변화하지 않는 대상 그 자체와 끝없이 변화하는 현상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형태를 취하는 순간의 사물과 자동적인 구성을 통해 탄생하는 질서를 그리고자 했다. 그는 '감성'과 '지성'을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지각되는 사물의 자동적 질서와 인간의 관념과 지식이 부여하는 질서를 구분했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수용한다. 우리가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자연이라는 바탕에서이다. 세잔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이 원초적(지각)세계이며, 이것은 동일한 풍광을 촬영한 사진이 인간의 손길, 인간의 편의주의, 인간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반면에, 어째서 그의 작품이 근원적인 자연을 보여 준다는 인상을 주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준다. 그렇다고 세잔이 '야만인처럼 그리기를'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지성, 관념, 지식, 원근법, 그리고 전통을 자연에 융합하고자 했던 것이며, 세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을 자연 그 자체와 대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현상에 충실했던 세잔의 원근법 파괴는 최근의 심리학적 업적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원근경험, 다시 말해 지각의 원근법은 기하학적인 것도, 사진기의 원근법도 아니다. 우리가 가까이서 보는 사물들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작게 나타나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들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린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기차는 굉장히 크게 보이나, 실제로 플랫폼에 가서 기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스크린에서처럼 그렇게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천재 세잔은 그림 전체를 재배열하여, 전체적으로 볼 때 원근법의 왜곡을 느낄수 없게 했으며, 그림은 정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탄생하는 새 질서, 현상하는 순간의 대상, 우리 눈앞에서 통합되는 순간의 대상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선이라고 생각되는 윤곽선이라는 것도 눈에 실제로 보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에 속해 있다. 만약 선으로 사과의 윤곽선을 그려 넣으면 사과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윤곽선이라는 것은 사과의 가장자리가 '깊이'로 침투해 들어가는 관념적인 경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윤곽선을 그려 넣지 않는다면 사과의 정체성은 소멸되고 만다. 반면에 만약 윤곽선을 그려 넣는다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사과가 아니라, 유보를 가득 담고 고갈되지 않을 리얼리티를 지닌 사과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깊이를 희생하게 된다. 이것이 세잔이 색채의 변조를 통해 대상을 왜곡시키고, 푸른색으로 '여러 개'의 윤곽선을 표시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한 윤곽선에서 다른 윤곽선으로 시선을 옮겨 다니는 우리의 눈은, 지각작용에서 그러하듯이 그 '여러 개'의 윤곽선 사이에서 발생하는 윤곽선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까 세잔이 더 이상 색채로 화면을 채우거나 정물화를 제작하지 않게 된 1890년 이전에 구사한 형태왜곡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색채가 풍부할 때 형태는 풍만해진다." 세계를 밀도 있게 그리려면, 당연히 데생이 색채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빈틈없는 하나의 덩어리이며, 색채의 유기체로서 원근과 윤곽선, 직선과 곡선이 자력선처럼 흐르고 있는 공간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물체는 색채를 지니므로, 데생과 색채는 별개가 아니다. 색을 칠함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진다. 색채가 풍부하게 될 때 형태는 가장 풍만해진다." 세잔이 색채를 사용해 촉각을 일으키고, 그렇게 하여 형태와 깊이를 만들어 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원초적 지각에서는 촉각과 시각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체험은 감각자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각자료를 발생시키는 사물 자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의 깊이, 벨벳의 부드러움, 오브제의 딱딱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잔은 이런 모든 느낌이 구분 될 수 없는 전체로 느껴질 수 있도록 색채를 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이런 철학이 없었다면 그의 그림은 사물들을 피상적으로 그려 놓은 것에 불과할 것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리얼리티의 본 모습을 파악한 그 놀라운 통일성, 그 탁월한 완전성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세잔은 세심한 붓질을 준비했던 것이며 또 한 번의 붓질을 하기까지 몇 시간을 고뇌했던 것이다. 에밀 베르나르가 말했듯이 그 붓질은 '공기, 빛, 대상, 면, 특성, 데생, 스타일'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처럼 끝없는 작업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 센스와 넌센스' 1966년 세잔의 사과 우정의 사과 어린 시절 세잔에게 사과는 사랑의 표시였기 때문에, 그런 고전적이고 전원풍인 소재에 좀더 쉽게 반응할 수 있었다. 만년에 세잔은 사과를 선물로 받고 졸라와의 숭고한 우정이 더욱 굳건해졌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엑스에서의 학창시절에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졸라에게 동정심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세잔은, 친구들에게 도전을 했다는 것과 졸라에게 말을 건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주먹질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 졸라가 내게 사과를 선물했더라구. 그러니 말이야. 이 세잔의 사과라는 건 인연이 깊은 물건이라구." 사랑의 사과 사랑을 소재로 한 그림에 사과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에서 세잔이 사과를 자주 그린 정서적 배경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과와 누드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니 세잔이 사과를 즐겨 그렸다는 것은 혹시 에로틱한 관심이 사과로 대치되어 나타난 것은 아닐까? 사과를 그리는 것과 섹스의 환상사이에서 분명 연관이 있다. 서구의 민담, 시, 신화, 언어나 종교를 보면 사과는 늘 에로틱한 함축을 갖고 있었다.... 과일을 뜻하는 라틴어 프룩투스는 만족, 향수, 희열을 뜻하는 동사 프루오르가 그 어원이다. 사과란 과일은 그 매력적인 몸통과 아름다운 색깔로 인간의 오감에 두루 호소력을 발휘하고 그렇게 하여 육체적 희열을 약속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의 몸매를 연상케하는 과일이다.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어" 사과 그림에서 그는 다양한 색채와 배열을 통해 관조적인 것에서 감각적이고 황홀한 것까지 보다 광범위한 분위길르 표현했다. 그처럼 자신의 의도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들을 세심하게 배열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인간관계나 눈에 보이는 속성들-고독, 접촉, 화합, 갈등, 평정, 풍요 그리고 호사 등-뿐만 아니라 고양과 환희에 찬 상태가지도 투사했다. 정물을 가지고 이처럼 표현력 강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은 세잔의 유년에 어떤 고착된 아이디어가 무의식에 뿌리내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갖게 한다. 그러니까 사과가 그의 관심을 끌기 훨씬 이전의 유년기에 말이다. 그리고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는 말에서 우리는 사과에 대한 세잔의 집착이 유별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과는 그에게 최고의 성취를 위한 도구였다. 그는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에고를 이 평범한 과일을 통해 되찾았다. 자신의 관심을 끄는 테마와 신화의 황금사과를 연관시켜, 그 테마에 숭고한 감정을 부여했다. 세잔의 사과는 예술가들이 승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의 일반적 목표인 성적 욕망의 해소-이것은 프로이트나 그의 동료들이 주자했던 바이다-라는 꿈을 암시한다. 마이어 샤피로 ' 19세기 및 20세기 현대 미술' 1978년 생트빅투아르 후기 생트빅투아르산 그림 이들 그림 중 일부는 캔버스에 두터운 색채가 중첩되어 있어 풍경의 형태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은 만년에 들어선 예술가의 창조적 고통과 끈덕짐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세잔의 다른 그림들 예를 들어 수채화는 무한한 위안을 주는 미묘함과 서정성으로 충만해 있다. 불꽃 같은 수많은 색점을 이용해 신비한 표현-혹은 시각적 음악-을 창조해서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여러 점의 유화와 수채화에서 세잔은 구성의 맨 밑 중심에 집중하는 색점들을 교묘히 사용함으로써 산의 윤곽을 안쪽으로 오무라들게 했다. 그는 이런 표현을 통해 위대한 창작품이라면 반드시 갖추게 되는 훌륭한 질서를 보여 주고 있다. 후기 생트빅투아르산 그림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평원 위에 무중력상태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의 모습이다. 그 산은 마치 인간과 신 사이에서 정신적 거간꾼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이들 그림에서 땅의 색깔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분출한다. 세잔은 그 색깔들에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서 그것들이 하늘로 상승하면서 인간의 열망과 우주적 조화의 황홀한 결합을 노래하게 하는 듯하다. 이 후기 작품들은 창조의 초월적 아름다움이라는 신비한 주제를 전달한다. 그래서 시인 릴케는, "그 풍경에서 세잔은 종교를 그려 냈다."고 말했다. 리처드 베르디 ' 세잔', 1992년 생트빅투아르 유람기 프로방스에서 가장 높지는 않지만 가장 험준한 산으로 알려져 있는 생트빅투아르는 봉우리 하나가 홀로 서 있는 산이 아니라, 1000m정도의 높이를 가진 연봉들이 거의 일직선을 그으며 펼쳐져 있는 산이다. 그런데 정상 부분은 이 산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걸으면 나오는 엑스 분지에서 볼 때에만 가파르게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상처럼 보이는 부분은 시작지점에 불과하고 진짜 정상은 동쪽으로 반나절 가면 이르는 곳에 솟아 있다. 북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고원에서 남쪽으로 급격하게 수직으로 강하하는 이 연봉은 그 산마루가 세로축을 형성하는 웅장한 석회질 습곡을 이룬다. 서쪽에서 볼 때 이 세 특성은 극적인 외양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산괴와 습곡의 단면을 구성하게 되어 이 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산의 근원을 짐작하게 하고, 아울러 무언가 굉장한 것을 갈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트빅투아르산이 지닌 놀라운 점은 등산객을 위한 안내서에도 나와 있듯이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는 석회암이 뿜어대는 광채이다. 산에는 길이 없다. 산 전체, 아니 기울기가 완만한 북쪽 등성이에서도 찻길이나 사람 사는 집을 찾아볼 수 없다. (산정에는 17세기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버려진 작은 수도원이 있다.) 가파른 절벽은 전문 산악인만 접근할 수 있지만 다른 등성이로는 일반인이라도 별 어려움 없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등반을 시작해도 정상까지는 하루가 좋이 걸린다. 나는 그 7월의 어느 날 폴 세잔로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면서 엑스를 금방 떠나왔으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행안내를 하고 싶은 엉뚱한 충둥을 느꼈다. (금세기 초부터 이 길을 따라 등반한 사람은 무수하게 많았고 나는 그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산을 직접 보고 싶었다. 세잔이라는 대화가가 즐겨 그린 이 산은 나에게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생트빅투아르를 실제로 보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상상을 온통 사로잡았고, 나는 즉석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강렬한 쾌감이 수반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 생트빅투아르를 눈으로 확인하자! 그리고 나는 여행길에 나섰다. 나는 세잔이 바라본 세잔이 재현한 생트빅투아르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느낌을 따랐다. 내 평생에 생트빅투아르처럼 강렬하게 나는 끌어당긴 것은 없었다. 페터 한트케 '생트빅투아르산의 교훈' 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