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빛과 색이 있는 건축물 지은이: 알랭 에르랑드 브랑당뷔르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조윤정 제1장 새로운 세계 약탈의 시대가 끝나다 바이킹족의 서유럽 침입은 5세기 바바리아(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지 역:역주)인들의 침략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비극적이었다. 가히 놀랄 만큼 잘 정비된 군대의 공격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계속되었고, 가는 곳마다 황폐와 피폐를 몰고 왔 다. 도시와 수도원에 대한 그들의 공격과 감당하기 힘든 조공 때문에 서유럽 제국을 건설하려는 카톨링거 왕조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911년 프랑크 왕국의 왕과 바이 킹의 수장 사이에 체결된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은 오늘날 노르망디로 불리는 지역을 북방의 침입자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이는 서유럽사에 일대 분 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영국의 정복에 앞서 이곳 서유럽을 섬멸한 파괴자, 바이킹족은 이제 보다 근대적인 국가를 세우는 건설자가 되었으며, 전 유럽에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건축 분야에서 전대미문의 대단히 새로운 면모 를 지닌 비범한 작업에 몰입하였다. 중세 건축의 폭발적 성장 고대 이집트와 로마는 독특한 건축 유산을 남겼다. 전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후자는 그보다 짧은 기간 동안 넓은 지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두 지역에서 위대 한 건축물의 건설은 일반적인 동기에서라기보다는 특정한 목적 하에서 기획되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유럽의 건축작업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즉 건축물 의 건설이 정치권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 즉 정치인뿐 아니라 종교인에 의해서도, 영주뿐 아니라 농민에 의해서도 창조되어졌다. 또한 건축은 도시, 행정, 재정, 종교 등 모든 영역과 관련을 맺었는데, 이것은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새로 지어진 건물은 로마의 건축양식을 따랐 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형태상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중세 들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성벽 내부공간이 협소해진 낡은 도시들은 4세기에 방어성벽을 새로이 구축하였다. 이 같은 수정과 개선, 확장은 중세 전반에 걸쳐 지속 적으로 진행되었다. 새로운 세계 자신의 운명을 돌에서 찾고자 했던 이 사회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인구폭발을 경험하 게 되었다.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0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 의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600년경 1, 470만 명이었던 유럽의 인구는 2, 260만 명으로 불었으며, 페스트가 창궐하기 전인 1348년에는 5, 440만 명 까지 증가했다. 14세기초에 이미 7, 300만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 같은 인구폭발은 농업기술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요소와 밀접한 연 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12 세기 전반에 절정에 달한 농지 개척의 결과, 경작지가 크게 확장되었다. 오늘날의 기 준으로 보면 미약한 것이지만 단위 면적 당 생산량 역시 두 배에서 세 배까지 불어났 다. 이것은 3년을 주기로 한 윤작과, 날 위에 넓적한 쇠를 비스듬히 댄 비대칭형 쟁기 의 도입으로 가능했다. 또한 개선된 마구와 비료의 도입도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에 밑 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서 이와 같은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지 역이나 지주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최고 수확량을 기록한 농지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가 설립한 수도원 교단인 시토 수도회의 부속 농지였다. 인구폭발을 가져 온 또 하나의 요소로 도시를 들 수 있다. 고대의 도시 우릅스(urbs)는 본질적으로 정 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사람들을 한데 끌어 모아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융화시 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세의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고대의 인구 밀집지역으로부 터 탄생한 중세의 도시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는 4세기경 로마가 행정구역을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싸기 시작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시는 우릅스에서 카스트룸(castrum, 요새지)이 되었다. 카스트룸은 내부 지 역을 외부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주변은 리메스(limes)라 불리는 경계 선으로 둘러싸였다. 중세의 도시 도시는 공공건물을 방어해 주었으며, 성당은 곧 이러한 공공건물의 하나가 되었다. 그 러나 대부분의 인구는 여전히 지방에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10세기경 카스트룸은 대부 분의 주민은 물론 시 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가 지고 있던 주교들만이 그곳에 상주하며 소수의 거주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문헌에 의 하면, 보베에서는 50가구 300여 명의 주민만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1세기 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전원에서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는 사람 들, 모험과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도시들이 건설되고 재탄생하였다. 다 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은 하나의 계층을 형성했으며, 훗날 도시의 상류층으로 변모하 게 된다. 이들 사이에서 일단 연대감이 형성되자 이들은 도시를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 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도시와 농촌의 관계는 도시의 이익을 위해 농촌이 일하는 것으 로 역전되었다. 도시는 시장을 형성하였고, 만남의 장소가 되어 상업적 연결망을 창출 하였다. 그 결과 도시는 육로와 수로를 통한 소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육로는 로마 시 대의 군사로를 보완하여 재정비되었다. 이 새로운 도로망은 지형적 특성과 상업적 요 구에 부흥하여 형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육로가 파리로 집결하여 수도 파리는 방사상 도로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는 많은 강이나 지류들이 충분히 정비되지 않았지만 수로는 훗날 부의 원천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개혁 정치와 토지, 그리고 도시라는 영역에 불어닥친 이 혁명은 다른 분야, 즉 정신적 영역 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성직자와 속인 모두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던 교회는 자체적 인 개혁을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073년에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름 을 따서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사실상 이 개혁은 그레고리우스 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910년 베르농에 의해 새워진 부르고뉴의 클 뤼니 수도원에서도 개혁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기독교화 된 유럽의 전지역을 비롯하여 나중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서까지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이 개혁의 목적은 교회를 속인들의 세력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성직자 계층은 몰론 속인 계층은 물론 속인 계층도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 다. 수도원에서는 이 운동의 영향으로 사도들의 삶을 본받아 궁핍과 고행을 기본신조 로 하는 새로운 교단이 등장하게 되었다. 카르토지오 수도회, 시토 수도회, 프레몽트레 수도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 유럽은 변화를 통해 보다 정의롭고, 보다 야심 에 가득 찬 근대적인 얘기를 만들어 냈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맡은바 역할에 따 라 전쟁을 수행하는 계층, 기도를 올리는 계층, 이 세 가지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이처 럼 카톨링거 왕조 시대로부터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 것은 유례없는 기술발달에 힘입 은 바 크며, 이는 특히 건축분야에서 두드러졌다. 돌과 나무 11세기 사회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였다. 그중 건축은 지금까지의 양상과는 사뭇 다 른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여 재고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도로망으로 인해 새로운 교 량이 필요해진 도로교통상의 요구, 자신의 권력을 배가시키키 위한 전투에 대응하는 영주들의 군사상의 요구, 성당과 교구에 새 신자들을 더 끌어 모으는 동시에 새로운 수도원에서 속세를 등지고 사는 성직자의 삶에 안정을 주려는 종교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 안락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을 원하는 새로운 취향이 부과되었다. 종교의식을 위한 건물처럼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몇몇 기념물을 제외하면, 그때까 지의 건축물들은 목재건물이었다. 착착 단계를 밟으며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차츰 목 재는 석재에 자리를 내주었고, 석공은 목공의 영역을 잠식해 갔다. 봉건시대의 모트 처음에는 요새가 흙과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런 형태의 요새는 유럽 대부분 지역으 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건축물을 세우는 데에는 특별한 지식이 요구되지 않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지에 둥글게 도랑을 파낸 후 흙을 가운데로 모아 모트 (motte, 성곽이나 요새를 쌓아올린 작은 언덕:역주)를 만든다. 모트의 높이나 지름은 경우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런 다음에 여기에 목재 '탑'이 세워지게 된다. 경사 진 측면에는 방어를 위해 당시 철조망 역할을 하던 가시나무를 심었으나, 실제로 안전 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불화살 한 방이면 순식간에 불에 타 버렸기 때문이다. 11세 기에 만들어진 유명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는 이 같은 사실이 잘 표현되어 있다. 돌을 이용한 방어 주거건축의 발전은 석조건물의 성장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기술상의 발전은 확고한 방어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중반부터 연 대기 작가들은 석재의 사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세기로 넘어가면 석재의 사용이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진다. 돌로 만든 최초의 성들은 목조 요새처럼 장방형이 었으나, 이는 단지 전통을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성들은 관저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공간은 물론 화려한 의식을 거행할 넓은 공간을 확보해야 했 다. 또한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성의 규모와 양식이 정해져 있었다. 영주들이 좀더 안 락한 거처를 찾아 목조 탑을 떠날 무렵인 12세기 중반에 이르면 탑은 방어적인 성격 만을 띠게 되었다. 장방형이었던 탑은 원형으로 형태가 변화되었다. (프로뱅과 우당, 에탕프, 기타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 1190년이래 프랑스의 필리프 오귀스트왕에게 소속된 건축가들은 원통형 탑을 대중화시켰고, 거의 모든 구조 에서 돌이 나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쪽 벽을 타고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돔형 천장을 가진 방, 발코니 구실을 할 수 있는 평평한 돌지붕이 등장했다. 목재는 벽의 아래쪽을 바라보기 위해 받침대 형태로 내밀어진 회랑을 만들 때나 가끔 사용되 는 정도였다. 교량, 도로, 그리고 기술의 적용 이처럼 나무에서 돌로 넘어가는 변화는 도시에서도 일어났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8- 10세기)의 교량은 고대의 교량과 대조적으로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다. 샤를마뉴 대 제의 명령을 받들어 에젱아르가 건설한 라인강의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813년 이 다리가 전소되자 다리를 돌로 재건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카롤링거 시대의 문헌을 보면, 바이 킹의 배들은 지날 수 없게 하면서 민간인들과 군인들은 건널 수 있도록 만든, 강과 하 천에 건설된 목재구조물에 대한 설명이 여러 곳에 나와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기능은 중세 내내 지켜졌을 것이다. 11세기에는 상업적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많은 교량이 새로이 건설되었다. 이는 영지와 영지를 잇는 결과를 낳았다. 주교 아르노 1세는 몽펠 리에 근방에 자리잡은 자신의 마겔론 성당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늪지를 가로 지르는 다리를 건설했다. 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km에 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다리들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최초의 석조다리가 세워진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처음에는 다리 전체를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교각만 돌로 세우고 그 위에 목재 상판을 얹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재 상판은 건설하기는 용이했지만, 내 구성이 약하고 홍수가 나면 자칫 떠내려가기 쉽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무 거운 하중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건축가들은 당시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던 로마 시대에 세워진 다리를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13세기말에 이르자 다리는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다. 교각은 바람과 물의 저항력을 고려해 강바닥에 단단히 박았으며, 큰 홍수에 대비해 특별히 교량 상단에 구멍을 뚫어 물길이 통과할 수 있게 했다. 카오르 의 발랑트레교와 아비뇽의 생 베네제교 등 현재 남아있는 중세의 다리는 위험에 대비 한 건설자들의 세심한 방비책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목재 상판의 경우에 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목재 상판은 홍수가 나면 아예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 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건축양식 어쩌다 본당의 지붕이 나무로 만들어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수도원의 교회는 대부분 돌 로 지어졌다. 9세기초에 이상적인 수도원의 배치를 보여 주는 생갈의 유명한 설계도면 을 보면, 수도원의 교회는 돌로 지어졌으나, 별채는 나무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1 세기 초에 대수도원장 생튀그가 건축한 클뤼니의 유명한 마구간을 보면 이미 별채도 돌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가 되자 수도원 건물은 본채와 별채를 막론하고 모두 돌로 지어졌다. 이런 변화는 주요 건물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세속적인 용도의 건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만들어진 시토 수도회의 헛간들은 이 러한 추세가 일반적인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돌로 지어진 이 거대한 건물은 나 무기둥(프루아드몽)이나 돌기둥(모뷔송)에 의해 내부공간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있었 다. 도시의 확장과 새로운 요새 이번에는 도시의 건축을 살펴보자. 15세기에 가장 일반적인 주거용 저택은 아래층에는 돌, 위층에는 나무가 쓰였다. 하지만 이 시대보다 훨씬 앞서 몇몇 도시에서 파사드(건 물의 정면:역주) 전체가 돌로 된 건물이 등장했다. 이러한 특징을 뚜렷이 보여 주는 12세기에 건설된 건물을 찾아보면, 클뤼니의 몇몇 건물을 비롯하여 좀더 북쪽에 위치 한 도시인 프로뱅이나 비비에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2세기에는 방어용 성벽의 구 축을 위한 대규모 공사계획도 실행되었다. 고대에 축조된 성벽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비좁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성벽들이 새 도시를 에워쌀 때, 옛 도시와 근방의 군소 지역(툴루즈, 아라, 리모주, 파리 등등)을 같이 둘러싸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도 요새는 나무에서 돌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137년 외드 3세가 디 종에서 2, 630m에 이르는 성벽으로 도시를 감싼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리(노트르 담)는 이런 특징을 좀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필리프 오귀스트 왕은 센강의 왼쪽 둑 (1190)과 오른쪽 둑(1210)을 차례로 쌓아 도시방벽을 건설하여 625에이커에 이르는 지역을 감싸게 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모든 성벽은 돌로 축조되었다. 이때부터 크거 나 작은 모든 도시들이 성벽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성벽의 목적은 단지 방어만이 아니 라, 산재한 주거민들을 응집시키고 도시에 동질감을 증진시키는 역할도 했다. 어떤 도 시들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새로운 성벽들을 훨씬 더 크게 다시 세워야만 했다. 1364년 샤를 5세는 부유한 상업지역인 센강의 오른쪽 강둑을 에워싸는 새로운 성벽을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도시가 되었다. 석조건물 돌을 사용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돌은 값이 비쌌고, 능숙한 석공이 있어야했고, 파내서 옮기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건축과정에도 더 세련된 기술 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난점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에는 될 수 있 는 대로 건물을 거대하게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프라하가 대표 적인 경우이다. 자신의 도시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보헤미아의 군주는 통일성이 거의 없었던 정치의 중심부를 동쪽으로 옮기려 했다. 1348년 황제인 카를 4세는 옛 도시를 반원 형태로 감싸는 새로운 도시를 몰다우강 오 른쪽에 건설하였다. 그는 폭이 약 25m인 넓은 길을 닦았고, 1, 650채의 석조건물을 지 은 뒤, 이 모든 것을 3, 500m의 성벽으로 둘러쳤다. 하지만 이 정도로 하나의 도시를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8만 5, 000명에 이르는 주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황제는 15개의 교구를 설치했다. 이 밖에 커다란 시장과 공회당도 건설했다. 여기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유럽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에서 모든 걸 돌만 써서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또 프랑스 아라 출신의 건축가 마티외에 의해 설계된 새로운 대성당 역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카를 4세의 도시계획은 1957년 브라질의 후스텔리노 쿠 비체크 대통령이 브라질의 새로운 수도인 브라질리아의 건설에 착수하면서 당대의 가 장 위대한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인 오스카르 니마이어에게 설계를 의뢰했던 것과 비 견할 수 있다. 거대해진 성당 현대의 웅장한 도시계획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것에 대한 이러한 선호는 도시 규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개별 건축물에까지 적용되었다. 고딕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길이 가 100m 이하인 성당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높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아졌다. 보베에서는 성당의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48m나 되었고, 스트라스부 르에서는 첨탑의 높이가 무려 142m에 이르는 성당도 있었다. 거대한 것에 대한 추구 는 소교구의 성당에도 적용되었다. 몇몇 성당의 경우 교구가 세분화되어 교구를 주관 할 새로운 대성당이 필요한 경우 그대로 대성당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울름 성당에서 바르셀로나의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에 이 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교회의 건설자들은 동일한 야망을 드러내었다.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은 가장 큰 건축물의 건축을 놓고 경합을 벌이던 부유한 선주들과 상인들 이 1328년 베랑게 드 몽타귀에게 성당건설계획을 맡겨 지은 것이었다. 시토 수도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푸아니의 성당은 길이가 98m였고, 보셀 성당은 132m에 이른다. 어떤 수도원은 작은 도시만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퐁트브로는 대성당을 중 심으로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교구라 할 수 있는 4개의 수도원, 즉 대수도원과 성 마 리아 막달레나 수도원, 성 라자루스 수도원, 성 요한 수도원으로 나누어졌다. 시에서 지은 건축물도 규모에서 이에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14세기에 세워진, 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 다리는 길이가 513km 이르렀다. 다양함과 확산 이러한 중세의 건축작업이 의미하는 바를 오늘날 제대로 평가하기란 어렵다. 많은 건 물들이 사라졌고 그중 어떤 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방 어용 건축물들만이 문헌이나 도판 자료가 전해주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미약하게나 마 증명해줄 뿐이다. 유럽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물들이 많이 있다. 특히 프랑스 는 건축분야에서 풍부한 자료를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국토 전역 에 걸쳐 주요 건물이 산재해 있고, 그중 어떤 것들은 건축사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주심인 파리와 그 인근 지역으로 건축이 집약되기까지 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시기는 대략 16세기 이후로 본다. '유서 깊은 프랑스' 는 중세의 모습은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건축물뿐 아니라 도시계 획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풍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일부 학자들은 주저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장 쟁펠의 (성당의 건설자들)(1959)에는 다 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1050년에서 1350년에 이르는 3세기 동안만 해도 수백 만 톤에 달하는 돌이 프랑스로 유입되어 80개의 대성당과 500개의 큰 교회, 그리고 수만 개의 소교구가 건설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운반된 돌의 양은 고대 이 집트에서 사용한 것보다 많다. 참고로 대피라미드 하나의 크기는 250만 제곱미터 달 한다." 최근에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중세건축을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들은 종교건축 뿐 아니라 도시건축, 군사건축, 지방건축도 그들의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연구범위 가 훨씬 더 넓게 확산된 것이다. 제2장 건축가 11세기까지 건축사업은 왕실에 의해 주도되었다. 주요 건축물의 건축주는 왕이나 지배 자 같은 군주들이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부터 르네상스의 동이 트는 중세에 이르는 동안, 다양한 건축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보기 드물 정도의 대단한 부의 소유자였고 또한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군주는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왕궁이나 방어에 관련된 일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시 전체를 계획 하고 건설한 14세기의 프라하의 제왕 카를 4세나 파리의 샤를 5세 같은 군주도 간혹 있었지만, 이러한 역할은 주교, 대수도원장, 수사신부 등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영주, 단체, 시, 연합체 등 속인들에게 대폭 넘어갔다. 따라서 건축주들의 수가 현저하게 많 아졌다고 하겠다. 건축주와 건설계획의 탄생 동시에 건축주와 건축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복 잡하고 야심찬 건설사업을 완성시켜 나갔다. 당연히 건축주들은 건물의 건축에서 결정 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계획을 입안하고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건축가를 선 발하고 작업의 연속성을 보증했다. 건축주가 도중에 사망하면 작업이 위기를 맞아 지 연되거나 완전히 중단되기도 했고, 혹은 설계에 변화가 생기는 일도 있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1151년 대수도원장 쉬제가 죽자 생드니 수도원의 재건설 사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작업은 거의 1세기가 지나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그나마 1231년 건 축이 재개되었을 때는 처음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설계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늘 날도 그렇듯이 대형 건설계획은 좀 특이한 인물, 말하자면 몽상가들 때문에 시작된다. 몽상가의 야심은 예산 관련자들로부터 때로는 폭력적일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대형 건축물들에는 으레 특이한 인물들의 그림자가 어려 있게 마련 이다. 11세기 초 샤르트르의 퓔베르와 1160년 파리의 모리스 드 쉴리는 주교였고, 11 세기 초 디종의 생베니뉴베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기획한 기욤 드 볼피아노는 대수 도원장이었으며, 12세기의 필리프 오귀스트와 13세기의 프리드리히 2세는 왕이었다. 또 풀크 네라는 대영주나, 피렌체, 밀라노, 시에나처럼 도시공동체가 건축주인 경우도 있었다. 건축주들의 힘이 없었다면 성당, 성, 공회당, 그리고 교량의 건축을 불가능했 을 것이다. 신앙심의 표현인 이러한 건축물들은 사회생활과 사회 발전, 그리고 공공의 행복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동시에 건축물은 현재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블루아의 백작인 외드는 1033년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건설을 명령했다. 반 면 같은 해에 다리를 건설하려 했던 알비 성당 참사회는 다리에 대한 지배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카오르의 집정관은 1251년에 퐁뇌프의 다리를, 1306년에는 발 랑트레 다리의 건설에 착수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피렌체, 오르비에토, 시에나와 같은 도시들의 자치제가 성당 건축을 책임졌다. 병원의 건립은 자신이 저지를 죄를 씻으려 는 영주들이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후원자들의 출신 성분이 다양하다 보니 건축작업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역사에 남을 만한 경합 스트라스부르 성당의 파사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계획이 수정되면서 건축이 진행되었 다. 이것은 주교와 시 사이의 긴장 관계 때문이었다. 1263년에 맺은 협정도 이 긴장을 완화시켜 주지는 못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최초의 계획은 철회 되었다. 시는 시민생활의 상징인 성당 부지가 시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에나의 경우, 새로운 성당 건설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시민이었는데, 이러 한 사실 자체가 계획의 변화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밀라노에서는 교회건물의 건설과 유지에 관련된 파브리카(fabbrica), 즉 구성위원회의 위원 수가 1387년 105명 에서 1401년 거의 300명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의사 결정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3세기의 전반기부터 시작된 이러한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서 다루어진 문제는 대개 재정적인 어려움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쉽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면 이러한 어려움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이나 공동체, 단체를 막론하고 건축주들 은 확실히 결정하고 나서 자신이 직접 건축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10세기 말과 11세 기 초에는 건축주들이 건축작업을 맡길 만한 전문이력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어려움에 자주 부딪쳤다. 위대한 건축물이 지엽적인 경험밖에 쌓지 못한 건축가의 손에 의해 창 조될 수는 없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으나, 더 이상 그러한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며 아심적인 건설 계획이 사라졌 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시 배워 나가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건축주들 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위상을 말해준다. 건축주들은 광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스 스로 건축가가 되어야 했으며, 강한 의지로 불운을 극복해 가며 모든 참여자에게 최상 의 것을 요구했다. 성직자, 주교, 또는 대수도원장의 신분이었던 그들은 고대 문화와 그 유적에 친숙한 지식인들로서, 고대의 유적에 필적하는 건축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고대의 건물들이 그들이 떠받드는 모델이자 동시에 그들 자신이 구상한 건축물 과 경쟁을 벌이는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건축환경은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다. 제작시 기가 신성 로마 제국 초기나 고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고대 유적들이 많 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견뎌 내며 존재하는 이러한 유적들을 통해 제 작자들은 자신의 무모한 시도가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교회의 사람들 기욤 드 볼피아노, 고즐랭, 모라르를 비롯하여 많은 권력자들이 건축현장에 나타나 작 업을 독려하는데 적극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026년 대화재 이후 생브누아쉬르루아 르를 기획한 고즐랭은 수로를 이용하여 돌을 운반해 탑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그는 문제점들을 모두 극복 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는 에 성공했다. 이들 건축주들은 망치로 거칠게 부 순 돌 대신 빈틈없이 쌓아올리는 마름돌을 원했다. 이러한 요구는 즉시 광범위한 지역 에서 수용되었다. 1023년 옥세르의 한 연대기 서술가는 도취된 기분으로 이 '쿠아드리 스 라피디부스'(quadris lapidibus, 사각형 돌들)에 대해 서술했다. 또한 이들 건축주들 에게는 성당 외형설계의 유형을 새롭게 발전시킬 책임이 있었다. 방사형 구조를 특징 으로 하는 레요낭 양식의 예배당에 있는 데앙뷜라투아르(교회의 측량에 연결돼 성가대 주위에 성가대 주위에 놓인 회랑:역주) 역시 새로운 유형의 것으로, 루앙, 샤르트르, 그리고 옥세르 등의 성당에서 시도되었고, 이는 곧 모든 교회 건축물에 확대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에서는 1077년 로체스터의 주교가 된 군덜프 같은 지식인들이 건축을 담당했다. 매우 교양 있고, 건축에 조예가 깊다고 전해지는 군덜프는 로체스터 성당의 재건설과 60명의 수사를 위한 수도원 건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공사를 위탁 받았다. 12세기에 투르의 대주교인 일드베르는 직접 기초를 측량하고 주교 관저의 크 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직업적인 건축가들이 등장한 뒤로는 건축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위탁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그 결과 툴루즈의 생세르냉 성당의 레이몽 게라르를 비 롯한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건축계획 관리로 제한하였다. 관리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리에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는데, 시토 수도회는 이 방면에 유능하 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시토 수도회에는 후에 수도원장이 된 생주앵 드 마른의 라울, 성 베르나르의 친동생이자 수련수사회의 수장으로서 1134년 건설된 라인 지방의 힘머 로트 수도원 등 많은 수도원의 건축을 지휘했던 아샤르, 1133년 요크셔의 파운틴 수 도원으로 파견된 조프루아 데네, 1142년 아일랜드의 밀리폰트로 파견된 로베르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수도원장의 명령을 받아 르망의 주교인 일드베르 드 라바르댕에게 온 방돔의 트리니테 성당 출신의 수사 장의 경우는 일을 마친 후에도 자신의 수도원으 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근대 건축 건축계획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업무를 전문가들에게 분담하는 것이 불가피 해졌다. 건축가가 건축주에게 지시를 받아 설계를 하고, 작업과정을 지켜보는 근대 건 축가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이제 건축가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여왕이자 정복자 윌리엄의 아내 엠마 가 푸아티에 지방의 생틸레르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선발한 고티에 드 쿠르랑이 그 대 표적인 인물이다. 그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11세기 중반 이후의 건축가들은 건축주의 요구에 맞추어 좀더 과감한 사업을 감행하였다. 당시까지도 쥐미에주 성당처럼 특별히 넓은 회중석을 지닌 성당의 지붕은 나무로 지어졌다. 한편 카니구의 생마르탱 성당의 지붕은 석조로 된 아치형이었지만, 폭이 3. 5m밖에 되지 않았다. 툴루즈의 생세르맹 성당의 아치지붕은 폭 8m에 높이가 21m에 이른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과는 달리 이 육중한 아치형 지붕은 갸냘픈 지지대 위에 놓여졌다. 이것은 기존의 형식에 대한 이중의 도전이었다. 112년 클뤼니 성당의 아치형 지붕이 무너진 사건과 같은 사 고가 몇 차례 일어났다. 이 경우는 원래 설계가 나무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예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건축 규칙에 도정하려 했던 건축가들에게 얼 마나 매료되어 있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문헌들에서 이 점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상 나타난 증거 1139년에서 1173년 사이에 씌여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여행 안내서인 (리 베르 상크티 야코비)는 순례여행 관련 문헌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의 저자인 에 메리 피코드는 교회의 설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 건축작업을 맡고 있는 석공장은 형 베르나르드와 로베르트이다. 이들은 세게레도의 지부장인 돈 비카르트와 수도원장 돈 군데신도의 지휘아래 일하는 50명 가량의 석수들의 보조를 받으며 활발하게 작업을 한다." 1077년 재건설 결정이 내려져 1078년 7월에 작업이 시작되었다. 작업장을 세우는데 소요된 시간을 보면 그런 대규모 사업을 처음으로 진 행하면서 부딪힌 곤란함을 추측할 수 있다. 형 베르나르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 다. 그 이전에 그가 여러 개의 교량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는 정도이다. 베르나르드는 프랑스에서 훈련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교회의 설계가 프랑스적 인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이솟에 온 것이 아니라, 50여 명의 기 술자를 데리고 와서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 기술자들은 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 졌던 것처럼 단순히 돌을 망치로 부수는 대신 각이 지게 절단했을 것이다. 로베르트는 작업장의 현장소장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부장 비카르트와 수도원장 군데신 도는 다른 곳에서 이용했던 편재 방식을 모방하여 건축현장을 관리했을 것이다. 12세 기로 접어들면서 건축가들에 대한 언급이 좀더 빈번해지는데, 그때마다 건축가들은 아 첨 섞인 비유로 추켜세워졌다. 1131년 이후 베르됨에서 건축가로 활약한 가랭은 동료 들보다도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솔로몬의 신전 을 건설한 티루스(고대 페니키아의 항구도시:역주)의 히람(기원전 10세기의 티루스의 왕. 신전 건축을 위해 다윗에게 목재, 목수, 석공을 보내 주었다고 전해짐:역주)에 비 교되었다. 건축가들은 이처럼 높은 명성을 얻는 동시에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욘의 백작부인은 피티비에르 탑의 건설을 마치자마자 건축가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지 그가 다른 건축주의 주문을 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최초의 고딕 건축 초기 고딕 시대의 건축가들 대부분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은 것은 이러한 질투심 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들의 명성은 건축주들의 명성과 경합을 벌였을 것이 다. 생드니의 대수도원장 쉬제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수도원 부속교회의 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아주 세부적으로 공들여 기록하면서도 건축가 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를 썼다. 훗날 새로운 양식의 시초가 될 성가 대석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여 건축한 공을 자신에게 돌리려 했던 것일까? 그의 건축가 에 대한 이러한 침묵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전문 건축가는 이미 그 역할 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쉬제는 자신의 초상화를 여러 개 그리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고 했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명예를 변색시킬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1175년 위르젤 성당의 주교와 수사 신부들은 성당을 완성 하기 위해 롱바르가의 레이몽과 계약을 맺었다. 레이몽은 롱바르가의 사람들 네 명과 함께 7년 안에 이 작업을 마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둥근 천장을 얹고 종루와 돔을 건설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 건물뿐 아니라 군용 건축에서도 서면 계약이 규 범화되었다. 드뢰의 백작인 로베르 가테블레 3세는 단마르슈의 성을 놓고 보몽르로제 출신의 니콜라와 서면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서에서 로베르는 니콜라에게 종루의 형태 는 노장 종루를 따를 것, 높이는 35m, 직경은 25m가 되어야 한다고 특별히 지시하고 있다. 계약금은 파리화 1, 175리브르(10-15세기에 파리에서 주조된 화폐:역주)이며 건 축주가 돌, 모래, 석회, 그리고 물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건축가는 인부들에게 지불하는 급료를 비롯해 작업에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경쟁 건축주들은 건축가들에게 경쟁을 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174년에 전소된 캔 터베리 성당은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혹독한 재난에 직면한 수도사들은 여러 건축가들을 불러모았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건축가들이 모여들었다. 수도사들은 건축가를 선정하기 전에 그들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은 뒤, 노르망디 출신의 기욤 드 상을 선택하였다. 그가 완전히 파괴된 곳과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곳을 구분하면서 착수해야 할 작업을 분석하는 것을 보고 수도사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곧 작 업에 들어갔으나, 추락 사고로 인해 병상에 눕게 되어 결국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 다. 그의 후임자인 영국인 윌리엄은 드 상이 세운 처음 계획을 존중하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이리하여 일드프랑스(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옛 주:역자)의 새로운 미학 이 영국 수도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완고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 처음 에 어떻게 영국에 세워지기 시작했는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한동안 고딕 양식은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영국인들은 여전히 로마네스크 양식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 던 것이다. 전문 건축가들 드디어 전문 건축가 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전열을 정비하는 데에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들의 등장은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 사건 이란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가(1154-1399년 동안 영국을 통치한 왕가:역주)가 프 랑스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을 말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 도 플랜태저넷 왕가가 승리를 거두었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일원인 영국왕 헨리 2세 (1154-1189)는 새 영토의 취약지점을 방어하기 위해 요새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왕 가의 세입과 세출을 기록한 문서에는 기술자들에 대해서도 기재되어 있는데, 엘노스 같은 이는 영국인으로 보이지만 로제 앙고네, 리샤르, 모리스 르 마송, 라울 드 그라몽 등 대부분은 프랑스인이었다. 도버와 기소의 성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지어진 새 건 축물들이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카페 왕조의 필리프 오귀스트왕은 이러한 정책을 이 어받아 대규모로 확대해 나갔다. 1189년과 1206년 사이에 16명의 특출한 기술을 지 닌 건축가들이 모여, 되찾은 도시에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왕국의 방어시설을 구축하였 다. 왕은 가장 신속하고도 가장 적은 비용을 들여 건설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자신 에게 조언을 해줄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자신이 직접 이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았다. 1190년에 건설된 센강의 우안을 방어하는 도시 성벽은 서쪽으로는 루브르탑까지 이르 렀다. 이 성벽은 높이가 31m, 직경이 15m로, 동일한 형태를 가진 20개의 원형성채를 에워쌌다. 견고한 성벽과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한 성채들, 그리고 제한된 수의 입구를 특징으로 하는 파리의 성벽을 원형으로 하여 많은 도시들이 요새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워원회에 속한 건축가들은 이러한 대규모의 작업에는 초심자였지만 저마다 전문 분야 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성의 주위에 호를 파는 일을 맡았으며, 문헌에 '마지스 트리(명인)'이라고 기록된 11명은 포괄적인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13세기 주요 건축가들의 지위 13세기초에 급격한 병화가 일어났다. 건축가들은 더 이상 모든 책임을 홀로 떠맡지 않 게 되었다. 행정당국은 건축 현장에서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필요한 물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며, 인부들에게 정기적으로 급료를 지불하기 위하여 재무국을 설치 했다. 한편 이러한 책무에서 자유로워진 건축가들은 중세의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 새 로운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 시대의 문헌과 삽화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들의 이러한 특권적이고 강력한 지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니콜라스 드 비아르는 1261년의 유명한 설교에서 건축가들에 대한 그의 불만을 토로했다. "이 거대 한 건물들에는 입으로만 명령하고, 더러운 것은 거의 손에 묻히지 않거나 아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건축가'라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 씬 많은 보수를 받는다. 건축가들은 장갑을 끼고 지팡이를 든 채 다른 사람들에게 말 한다. '여기 이 돌을 잘라라. ' 그들은 일을 전혀 하지 않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많 은 대가를 받는다." 사실 재능 덕분에 명령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물질적으로 풍 족함을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쏟아진 이와 같은 비난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던 것 이다. 레요낭 양식의 건축 1231년 생드니 수도원의 재건과 함께 시작된 고딕 건축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의 지위 가 눈에 띄게 새로워졌다. 고딕 건축에는 '레요낭(방사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것은 교회 건축물에 거의 의무적으로 달려 있는 화려한 장미창의 방사형 의장 때문 이었다. 당대에 이 양식은 그 기원을 짐작케 해주는 '오푸스 프란시게눔(프랑스 작품)'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양식은 곧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신성로마제국의 스트 라스부르 성당의 본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교회, 스웨덴의 웁살라 성당, 좀더 멀리는 키프로스의 파마구스타 성당이 이 양식으로 지어졌다. 단단한 석공술로 공간을 제압하여 건물을 빛으로 넘쳐나게한 이 건축양식에 경탄한 당대인들은 이 마술사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다. 장 드 셸, 피에르 드 몽트뢰유, 로베르 드 쿠시, 페터 파를레, 앙리 이벨을 비롯하여 많은 건축가들이 역 사를 빛낸 위대한 영웅들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해졌다. 돌에 새겨진 찬사:서명과 묘소 피에르 드 몽트뢰유는 주교의 요청으로, 1258년 2월 11일 남쪽 수랑(십자형 교회당의 좌우 날개 부분:역주)에 초석을 놓았던 그의 전임자 장 드 셸의 이름을 파리의 노트르 담 성당에 아름다운 고딕체 글씨로 새겨 넣었다. 13세기 후반에는 건축가의 이름을 미 로형 포도에 새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3세기말에 건설된 랭스 성당이나 1288년 건 설된 아미앵 성당의 경우처럼, 미로형 포도가 뒤늦게 건립된 건 이 새김 작업에 실수와 누락이 있었기 때 문이다. 아미앵 성당에는 로베르 드 뤼자르슈에서 토마 드 코르몽을 거쳐 코르몽의 아 들 르노에 이르는 건축가의 계보와, 건축주인 주교 에브라르 드 푸일루아이에 대한 설 명이 공들여 새겨져있다. 랭스 성당의 미로형 포도에는 대주교 오브리 드 윙베르를 중 심으로 장 도르베, 장르 루, 고셰 드 랭, 베르나르 드 수아송 등의 석공장들의 이름이 그 둘레에 새겨져있다. 건축가들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그들의 기술적인 탁월함보다 는 오히려 지성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되어 있다.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의 수도사들 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은 건축가 피에르 드 몽트뢰유는 자신이 건축을 맡았던 성 모 마리아 성당에 아내와 함께 묻혔다. 이곳에는 그가 대학으로부터 받은 '독토르 라 토모룸' 즉 '돌의 박사'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다. 유명한 건축가들의 무덤은 종종 교회 안에 설치되었다. 그 중 몇몇은 신도들의 발길에 닳아 이름조차 읽을 수 없게 되었지 만, 무덤의 평석은 무덤의 주인이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랭스의 생니케즈 성당의 위게 리베르지에, 루앙의 생투앙 성당의 알렉상드르와 콜랭 드 베르 느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위대한 군주처럼 차려 입고서 그들의 직업을 상징하는 컴퍼스와 지팡이, 때로는 건물의 모형을 손에 들고 있다. 양피지에 담겨 있는 이미지 건축가들의 이름은 건축과정을 설명해 주는 수많은 필사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 기에는 그들의 역할과 그들이 건축주들과 맺은 밀접한 관계가 집중적으로 설명되어 있 다. 건축주들은 여러 가지 사항을 지시하며, 그들의 지시 사항은 인부들에게까지 전달 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건축주와 건축가 사이의 관계가 변증법적 성격 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좀더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건축가였다. 프라하 성당은 그러한 사실을 나타내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카를 4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정치적 야심만큼이나 큰 성당을 보헤미아의 수도에 세울 생각으로, 프 랑스의 건축가 마티외 다라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마티외는 1344년에서 1352년까지 이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1354년 건축가는 독일 태생의 페터 파를레로 바뀌었다. 파를레는 전임자의 구상을 독일적인 구상으로 대체했다. 카를 4세는 이 두 건축가에 대한 기술을 건물에 남겼다. 군주의 동료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건축가들이 건축주와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랑 비 성당을 지은 레이몽 뒤 탕플은 왕의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고, 샤를 5세는 레이몽의 아들 샤를로의 대부가 되었다. 1376년 샤를 5세는 레이몽에게 '친구이자 하인이자 석 공인 레이몽 뒤 탕플이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또 미래에 도 계속 해주길 바라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훌륭한 그 모든 봉사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오를레앙의 작업실에서 견습생으로 있는 우리 대자를 교육시키고 보호하며 그 가 책을 비롯한 여러 필수품을 구입하는데 쓸 수 있도록' 피렌체 금화 220플로린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창조적인 예술가와 건축주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14세기말에 서 15세기초에 걸쳐 디종, 부르주, 런던, 그리고 밀라노 등지의 왕궁에서 발견된다. 건축가의 독립 건축가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확립되자 건축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은 여러 군데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로 인해 건축현장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계약과 동시에 건축가에게는 매력적인 경제적 보상이 주어졌지만, 장기 결근에 대해서는 무거 운 압박감이 가해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계약은 모 지방의 성직자와 건축가 고 티에 드 바랭프루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티에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1년에 10리브르, 그리고 현장에 나오면 하루에 10수를 받는 대신 건축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감독관구 이외의 다른 지역의 의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모를 두 달 이 상 떠날 수 없었고, 참사회의 허락 없이는 그가 감독하고 있던 에브뢰의 공사현장이나 감독관구 내의 다른 현장에 가서도 안 되었다. 결국 그는 모에서만 지내야 했다. 1261 년 대 수도원장인 생질 뒤 가르와 파스키에르 근처에 살던 건축가 마르탱 드 로네 사 이에 채결된 계약은 무척이나 엄격했다. 그는 오전에만 일할 경우에 하루에 2수 투르 누아(투르에서 주조되어 13세기까지 사용되던 화폐:역주)를 받았다. 특히 그의 식비는 지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성령강림대축일에는 의복비로 10수 투르누아를 더 받 을 수 있었다. 반면 미카엘 축일부터 성령강림대축일까지는 생질 성당 안에 머물러야 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럴 기회가 거 의 없었다. 1312년 자크 파브랑이 제로나에 고용되면서 맺은 계약서에는 두 달마다 현장에 온다는 조건으로 바르셀로나화로 1, 000수를 받는다는 지불 금액이 명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사에 대한 감독을 금지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예술가의 권리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의 불신은 점차 심화되었다. 1381년 툴의 수도원 총회는, 건축가 인 피에르 페라가 건물설계와 쇠시리 장식의 윤곽을 정하기 위해 사용한 기구인 목재 보받이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소유권을 요구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예술가의 소유권 이라는 미묘한 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으로, 결국 건축주에게 유리하게 결론이 났다. 이후 건축가 아통샤텔은 1460년 5월 9일에 체결한 계약을 통해 수도원 측에 툴 성당 의 파사드를 묘사한 도면을 넘겨주고 그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제3장 표현수단 건축가가 설계를 하고, 건축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등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면 상당 한 노련함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우선 건축주를 잘 설득함으로써 중간에 변덕을 부려 건축 계획의 일관성을 흐트릴 수 있는 감정상의 충돌을 사정에 예방해야 했다. 둘째로 는 공사장에서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건축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여 계획 을 왜곡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했다. 석조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가는 두 가지 종류의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하나는 건축주에게 완공된 건물의 최종적인 형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분야의 일을 맡아하는 인부들의 작업을 위한 지침 서였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다양한 의견 수정을 거쳐 최종설계안에 이르는 건축 가의 작업과정을 보여 주는 스케치들도 이 두 가지 자료와 함께 첨가되었다. 비록 그 러한 사실을 증명해줄 증거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건 아니지만, 이미 중세 때부 터 이러한 스케치가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3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세부적인 설계안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중세의 건축가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처음의 설계안을 변경하고 싶을 때, 복잡한 과정을 일일이 거칠 필요 없이 간단하게 말 한마디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행운을 누렸으리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중세의 거대한 건축물들에서 확인되는 탁월한 전문성을 고려해 볼 때 그다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안의 제출 건축주가 계획을 평가할 수 있도록 건축가는 실물에 가까운 완벽하고도 세세한 도면이 나, 혹은 더욱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모형을 제작해 건축주에게 보여 줘야 했다. 건축주에게 모형을 보여 주는 일은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나무나 회반죽, 혹은 돌을 이용해 손쉽게 제작된 모형들은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이나 그 세부를 완벽하게 보여주 었다. 이러한 모형들은 고대에는 흔히 사용되었지만, 카롤링거 왕조에서 16세기초를 지나면서 북유럽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러나 14세기의 이탈리아와 15세기의 프 랑스에서는 이러한 모형을 사용한 흔적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수아송 의 생메다르 수도원을 짓는 과정에서 밀랍 모형이 제작되었다. 종교적인 건물의 창건 자는 이따금 건물의 작은 모형을 부장품으로 무덤에 같이 묻어주기도 했다. 가장 오래 된 예로는 12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파리의 생뱅상-생트크루아 개성당의 창건자인 실 드베르왕의 와상을 들 수 있다. 14세기초에 지어진 교회 건축물의 정문에는 건물의 창 건자가 건축물의 모형을 손에 들고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에쿠이 대성당의 앙 게랑 드 마리니의 인물상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남아 있는 건축 도면들 양피지의 비싼 가격 때문에 도면을 제작하는 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온 가장 오래된 도면들은 건축을 책임진 건축위원회와 석공들의 숙소에서 발견되었다. 제작 시기가 1250-1260년 사이 로 추측되는 이 도면들 가운데 하나는, 최초의 설계안에서는 서쪽 파사드에서 본당의 회중석이 완성되기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는 본당의 회중석만큼은 파 리에서 활동한 노련한 건축가에게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도면 들을 보면 이러한 최초의 설계안대로 건축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다른 식으로 교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작업장들은 하나같이 건축 도면들을 성실하게 보 존하고 있다. 울름 성당, 빈 성당,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성당, 클레르몽페랑 성당 등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 도면에는 파사드 뿐만 아니라, 건물 측면에 입면도 (퀼른 성당), 단면도(프라하 성당), 예배당(스트라스부르 성당)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1381년 툴루즈 성당의 라 도라드 성당의 재건을 위한 합의서에 포함된 .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1474년에 체결된 파리 생자크 자선병원의 정 문을 위한 계약서에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있는 건축 도면들이 첨부되어있다. 이 도면 들은 석수공인 기욤 모냉의 작품으로, 병원의 지배인들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의 최 종적인 외관을 미리 판단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거이다. 작업장으로의 건축 도면 전달 방법 건축주에게 제출된 도면들은 그리 세부적이지 못해서, 그것들을 그대로 건축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건축가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작업장에 전달하기 위 해서 또 다른 도면을 그려야 했다. 이 도면들은 대개 건축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그러 나 1542년 베른하르트 노넨하머가 착수한 성녀 카타리나 성당 예배당의 원형 천장 재 건 작업을 보여주는 도면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몇 개가 있다. 이 도면에는 원형 서까래를 만들기 위해 돌을 자르는 법이 숫자와 글로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지시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 성당의 서쪽 부벽을 위한 도면을 보면 설계도 가 세단계(기초, 원화창, 종루)로 나뉘어진 채 서로 포개어져 있다. 이 밖에 많은 도면 들이 남아 있지만,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작업용 도면 건축물의 세부를 실제 크기대로 보여 주는 채색 건축도면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2-3mm 깊이로 돌에 새겨 만든 이것은 트레이싱이라 불렸다. 가장 오래된 것 은 12세기 말에 제작된 시토 수도회의 바이랜드(요크셔 북부)지부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트레이싱은 서쪽 장미창을, 두 번째 트레이싱은 같은 창의 중심부를 그 린 것이다. 돌을 정확하고 기하학적으로 절단하는 것은 이제 건축가가 아니라 전문가 가 관심을 갖는 영역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작업용 도면은 '트레이싱 하우스(설계사무 실)'-1324년 최초로 언급됨-에서 보존이 잘 되지 않는 재료 위에 그려졌다. 이 도면 들은 작업실이 해체되면서 동시에 사라졌다. 직접 돌 위에 새기는 이 도면의 형태는 실제 크기로 제작되어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바닥 부분(나르본 성당의 중심부에 위 치한 예배당)이나 성가대석의 외벽(클레몽페랑 성당), 수랑벽(랭스 성당)에서 확인된다. 축소제작된 것도 있는데, 수아송 성당의 남쪽 수랑에는 두 개의 장미창이 묘사된 도면 의 축소판이 그려져 있다. 하나는 샤르트르 성당의 왼쪽 파사드에 달린 장미창, 다른 하나는 랑 성당의 북쪽 수랑에 달린 장미창인 것으로 보인다. 케임브리지 병원, 게겐 바흐의 베네딕트 교회, 레이통 바르자르에 있는 축소판 도면은 건축가들이 메모 사항 을 기억하는데 사용되었다. 형판: 작업장의 기록 필사본을 보다보면 형판의 존재에 관해 상세히 언급한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가운데에는 형판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도 있다. 형판은 보통 나무를 잘라 만든 것 으로 바닥, 서까래 등의 모양을 잡는 데 사용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3세기초의 샤르트르 성당의 것을 들 수 있다. 생셰롱의 스테인드 글 라스를 살펴보면 많은 형판이 조각사의 숙소에 조심스럽게 매달려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돌을 자르는 도구들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커다란 메달에서도 형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조금 후에 작성된 비야르 드 온쿠르의 스케치북은 형판에 관 한 상당히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비야르는 랭스 성당의 방사형 예배당 을 건축할 때 사용된 창살대, 대들보, 첨두아치 등을 위한 다양한 형판의 도면을 그려 놓았다. 그는 독특한 기호들을 이용해 그것들이 짜여진 돌의 어느 위치에 놓여야 하는 지를 지시해 놓기까지 했다. 스트라스부르 성당, 울름 성당, 빈 성당에도 그러한 도면 이 남아 있는데 반하여, 다른 주요한 건물들의 도면은 전혀 남아있지가 않다. 그래서 비야르 드 온쿠르의 스케치북은, 특히 랭스 성당의 건축 작업과 관련해 더욱 중요한 정보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비야르 드 온쿠르 비야르가 1220년대에 그리기 시작한 도면 모음집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세상 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도면 모음집에 자신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 다. "이 책을 보면 여러분은 돌로 건물을 짓는 법, 목공일에 기구를 사용하는 법, 인물 을 묘사하는 법, 데생하는 법, 그리고 측량법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는 자신을 한번도 건축가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진정한 개 성은 가려져 버렸지만, 그는 무엇보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당대에 이룩된 기술적 진보에 흥미를 느꼈다. 자신의 무한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내서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작업이 언제나 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최 근에 그것에 대한 많은 근거들이 지적되었다. ) 그가 '실제의' 사자를 직접 보면서 사 자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면, 당대의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 나 지금 보면 그가 다른 삽화를 보고 베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위 사라센의 무덤이라는 것도 고대에 사용되었던 둘로 접는 서판의 한 짝이라는 사 실이 밝혀졌다. 그는 수력을 이용한 톱 같은 기계도 재현해 냈지만, 그 작동원리는 그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점이 당대의 보기 드문 천재인 비 야르에 대한 평가를 격하시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물의 가치들 도 그로 인하여 평가절하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건축도면 중 하나는 현존하는 건물과 너무나 차이가 커서 실제구조를 그대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린 것이라 고 보기는 힘들다. 로잔 성당과 샤르트르 성당의 장미창을 그린 도면은 현재의 창과 너무나도 다른데, 이것을 단지 솜씨 나쁜 제도공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비평가 들이 모두 지적한 것처럼 랭스 성당의 내부와 외부의 입면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비야르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자료를 보고 다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야르가 몇몇 도면에 기입해 놓은 설명문들도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가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들 가운데 어떤 특징들은 이미 지어진 것(방사형 예배당) 에 관한 것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예를 들면 교차수랑의 하나) 에 관한 것들이다. 랭스 성당의 건축가가 그에게 이러한 자료 모음집을 제공해 준 당 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음집에는 랭스 성당을 지은 건축가가 사용하지 않고 버 린 도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비야 르는 이런 것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야르는 그 건축가에게 서 방사형의 예배당의 건설에 쓰였던 형판도 제공받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랭 스 성당의 건축가가 그와 같은 대규모의 작업에 착수하기 전, 비야르의 상상력을 활용 하기 위하여 다른 건물의 도면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 다. 비야르가 건물의 전체가 아니라 세부에 관한 기록만 남겼다는 사실이 이러한 가정 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가 현존하 는 다른 건축물의 도면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주요한 건축물을 구상했다는 뚜렷한 확증 을 얻을 수 있다. 도면은 건축현장에 관한 모든 것이 그대로 들어 있는 생생한 기록이 다. 최초의 설계에서 변화가 없기를 바라는 건축주들에게 도면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었다. 특히 1211년에 착공했지만 파사드의 공사는 그로부터 50년이 지나서야 시작한 랭스 성당의 경우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경우에 도면은 필 수적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건축주는 도면이든 모형이든 시각적인 형 태로 설계를 보기 전에는 결정을 내리려 들지 않았다. 제4장 작업장 작업장의 조직편성을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시기(대체로 엄청난 발전이 계속 이어졌지만 분명 퇴행의 시기도 존재했다. ), 지역, 재정 상태에 따라, 그리고 최 종적으로는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능과 기술에 대한 지식의 습득 정도에 따라 달 라졌다. 건축가들의 유럽 11세기의 노르망디와 12세기와 13세기의 일드프랑스(파리 주변 지역)에 해당하는 프 랑스의 북부 지방에서 석조건축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게다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집단 이 유입되면서 그들과 함께 새로 들어온 기술 덕분에 새로운 양식들이 선보였다. 그렇 지만 위대한 건축가를 한 명 불러온다고 해서 기술상의 혁신을 이룬 건축이 이루어지 는 것은 아니었다. 그 건축가의 작업을 보좌할 수 있는 숙련된 인부도 있어야 했다. 이렇게 건축기술이 유입된 예 가운데 지역 및 시기에 따라 특히 인상적인 것들을 몇 가지 들 수 있다. 형 베르나르가 50명의 석수공과 함깨 도착한 산티에고 드 콤포스텔 라 성당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1287년 스웨덴의 웁살라 성당의 건설 을 요청받은 에티엔 드 보뇌유는 계약을 체결한 직후 파리에서 모집한 열 명의 장인과 열 명의 도제를 이끌고 장도에 올랐다. 1344년 성 비투스 성당을 건설한 프라하의 경 우도 마찬가지였다. 카를 4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비뇽에서 만난 적이 있는 프랑 스 건축가인 마티외 다라를 불러들여 자신의 제국에 프랑스풍의 성당을 건설해 달라고 간청했다. 마티외는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술자들, 특히 장식석공 및 석수공으로 구성된 기술자 집단을 대동하고 와서 작업에 착수했다. 이처럼 건축가들을 선택하고 나면 나중에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 따라서 때로는 이것이 건축주의 야심 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기욤 드 상은 캔터베리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건축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영국이 정복왕 윌리엄 시대 이래로 석조건물을 짓는 데 상당히 숙련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길드의 조직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돌로 건물을 짓는 작업장은 두 개의 주요한 장인 길드 로 재편되었다. 이 두 길드는 목수들과 석공들의 길드를 말한다. (뭐라고 정의하기 어 려운 세부적인 기능을 지닌 이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금속세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들이 길드에 어떻게 편성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 약간 퇴 보한 시기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1322년부 터 윌리엄 헐리에 의해 건설된 영국 엘리 성당의 외진 너머에 놓인 8각 건축물과 채 광탑에서 알 수 있듯이 목조건축물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당시에는 석조건축이 보다 큰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자태를 뽐 냈다. 따라서 석조건축의 가장 뛰어난 걸작들은 14세기 북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건축가들은 아치형 천장의 건설에서 대담성을 가장 많이 발휘하였다. 영국의 발명품인 팬 볼트(fan vault)는 1446년 레지널드 엘리에 의해 착 공된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 건설에 사용되었다. 독일의 건축가들은 네 부 분으로 갈라진 모양의 사구궁륭이라는 엄격한 형식에서 탈피하여 프라하성의 블라디슬 라프 홀에 넓이 16m, 높이 13m의 하나로 된 돔을 얹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1481년 에 착공된 낭시 근방의 생니콜라드포르 성당 같은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프랑스 건축가들 역시 돔의 하중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였다. 비록 독일 건축가들보다는 독창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건축 개론 이같은 기술적 우월성은 직업의식과 전문성이 발전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를 더듬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양한 기록 들, 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쓰인 글들을 통해 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기도 한다. 15 세기 말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서 건축 기술에 대한 저작들이 발견되었는데, 결국 이 것은 르네상스 건축에 대한 개론서 구실을 하였다. 프랑스에는 16세기 건축가인 필리 베르 들로름이 자신의 저술 속에 중세적 사유와 기술에 대해 언급해 둔 것이 있다. 건 축 기술을 다룬 최초의 논문은 레겐부르흐 성당(1468)릐 석공장이었던 마트하우스 로 리처가 쓴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의 저술들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전문가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세부적인 '비결'을 묘사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책자가 제한된 독자층을 넘어 널리 확산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양한 사람들, 전문화된 장인들 건축현장에서 지식인 계층과 그보다 훨씬 수가 많은 하급 기술자 사이의 지위의 격차 는 점점 벌어졌다. 물과 돌, 그리고 석회를 운반하는 사람들은 삽화가 곁들여진 필사 본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좀 나은 경우에는 일당으로 급료를 지급받았으며, 이들의 채용은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석회를 섞는 일을 맡은 사 람들은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이 작업이 고도로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석공일이 마무리된 결과물을 분석해 보면 이들이 어느 정도 숙련되었는가에 따라 그 질에 많은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작업이 요구하는 숙련도와 기술의 정 도에 따라 급여가 달라졌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총 급여 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품삯 형태로 임금이 주어졌기 때문에 금전적인 비교를 하기 어렵다. 숙련공들 몇몇 기록에 의하면 벽을 세우기 위해 돌을 쌓는 일을 하는 석공들은 비교적 높은 등 급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썩 잘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등급이 다양하게 설정되었다는 것은 공사장마다 각기 다른 관행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 해 준다. 석수공은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실제 건설 과정에서 건축 가와 석공장의 지시를 건축현장에 전달하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또한 기술 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망치로 돌의 모양을 다듬던 거칠고 소박한 건축기술이 수직과 수평의 작은 이음새로 마무리된 가지런한 돌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들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11세기 초 몇몇 작업 장에서 이와 같은 혁명이 일어났는데, 당시까지 조잡한 건물에 익숙했던 연대기 작가 들은 이 새로운 건물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과 경이감을 글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이 되자 그들은 이러한 구경거리에 익숙해지면서 이 새로운 건물이 얼마 나 경이로운지에 대하여 덜 언급하게 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성공적인 건축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잘 훈련된 석수공, 좋은 도구, 그리고 질 좋은 건축재료, 이 세 가지가 바로 그것들이다. 문자로 기록된 자료들은 그리 명료하 지가 않아서 이점에 대해 거의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건물 자 체를 분석해 봄으로써 그것에 대한 유익하고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돌에 새겨진 서명 석공이 남긴 서명에서도 귀중한 정보를 상당히 많이 얻을 수 있다. 돌의 표면에 우아 하게 새겨진 이 서명은 돌을 자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 위에 남긴 자부심의 증거이다. 또한 서로 다른 건물에 같은 서명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건물의 건축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해 준다. 파리이 생제르맹데프레 교회는 그런 점에 서 의미심장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대수도원장 모라르는 종루 베란다의 건설과 함께 교회의 재건설에 착수했는데 이 동사는 그의 죽음(1014년)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이어 남쪽에 생생포리앵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다음에는 여러 개의 종루, 그 다음에는 수랑 의 동쪽 부분, 마지막으로 본당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돌은 석공들의 서명으로 뒤덮이 게 되었고, 그중 어떤 서명들은 다양한 작업 지역에 걸쳐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이 보든 부분의 공사가 단 한 세대의 인부들에 의해 이루어졌음 을 볼 수 있다. 영국의 튜키스베리 성당에 새겨져 있는 석공의 서명 가운데는 놀랍게 도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서명과 동일한 것이 있다. 이는 석수공들이 영불해협을 오가 며 작업장을 옮겨 다녔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증거이다. 일단 벽이 세워지면 그들은 서명에 따라 성과급을 지불 받았고, 동시에 돌을 자르는 능력에 대한 평가를 받았다. 서명이 사라지는 것은 또 다른 지불 형태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즉 작업량에 비례하 여 임금을 받게 되었고, 그리 세심한 주의를 요하지 않는 기술일 경우 일당이 적용되 기 시작했다. 석공이 서명을 남기는 관례는 지역과 수주기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처럼 자본가의 방침에 따른 건축 계획이 세워졌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상의 증거는 없지만, 11세기 이후 발전 속도는 한층 더 빨 라졌고, 그 속도가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시토 수도회의 고용노동자들 시토 수도회의 건축작업은 이 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측면을 부가시켜 준다. 12세기 말 시토 수도회의 관리를 맡은 노동수사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업무 수행을 거부하는 반역을 일으켰으며, 13세기 중반에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점점 더 적어짐 에 따라 돈을 주고 외부인을 고용해야 했다. 1133년에 이미 생베르나르 성당은 클레 르보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수도사들을 도와 주기 위해 인부들을 고용했다. 수도원 구 성원의 계급에 관한 규율에도 '고용노동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다. 그들은 성과급으로 임금을 지급받았고, 플라랑과 세낭크를 비롯한 많은 수도원의 마름 돌에 서명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로에 대한 흔적을 남겼다. 서명이 지닌 미적 수준은 석재를 절단하는 기술의 질적 수준과 곧바로 연결되었다. 시토 수도회는 최고의 기술 을 지닌 석수공을 고용하기 위해 이러한 서명 행위를 명예로운 것으로 권장했다. 기업화된 건설 공사장 개별 인부들의 서명은 점차 건축주의 서명으로 대체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1500년 노트르담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파리에는 작업장이 다섯 개 세워졌다. 각각의 작업장 의 선두에는 석수장이 다듬어진 돌에 건축주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웨일스에 있는 뷰 마리스성의 건설계획은 많은 건설계획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다른 것에 비해 분석 하기 쉽고 특히 인력의 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뷰마리스는 잘 알려진 바대로 왕실의 건물이 들어선 장소이다. 1268년-1270년에 작성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1, 630명의 인부, 400명의 석공, 30명의 대장장이와 목수, 그리고 1, 000명의 미숙련 노동자와 마차꾼이 이 성의 건설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치들은 이 작 업장이 재정적인 압박 없이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프랑스 오튕에 위치한 생라자르 성당의 1294-1295년에 씌어진 건설 기록들에는 세부적인 임금 내역 이 일부지만 남아 있다. 미숙련 노동자는 7드니에(1수의 1/12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옛 화폐 단위:역주), 미장이와 회반죽을 만든 사람은 10-11드니에, 석공과 석수공은 20-22드니에를 받았다. 최고 임금은 최저 임금의 무려 세 배에 달한다. 이것은 당시 에 위계구분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예이다. 최고의 재료인 돌 완성된 건물의 질은 처음 재료를 얼마나 신중히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고대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선택의 난제에 직면하였다. 오늘날에도 돌이 채굴된 원래의 채석장에서 더 이상 돌이 채굴되지 않거나 좋은 품질의 돌이 공급 되지 않으면, 옛 건물을 복원할 때 재료를 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거대 한 규모의 건물들이 여기 저기에 지어지던 11세기 건축주와 건축가는 품질이 좋은 돌 을 확보하고, 목공을 위한 나무를 찾아내며, 담금질이 잘된 금속을 구하는 일에 고심 하게 되었다. 양질의 돌은 중세의 건축가들에게 최고의 관심사였다. 건축주들은 큰 비 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석재를 개발할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채석장을 확 보하거나 소유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주교나 수도 원장, 군주, 귀족들과 같은 건축주들이 특히 그 문제를 놓고 고심했는데, 그들은 이처 럼 실용적인 해결책을 사용했다. 몇몇 장소에서는 현장에서 바로 충분한 양의 돌을 채 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시농, 쿠시, 그리고 샤토 가야를 등은 아직도 돌을 캐낸 흔적이 남아 있는 방어용 건축물들이다. 산에 자리한 성들처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 은 많은 다른 성들 역시 그 고장에서 채굴한 돌들로 새워졌다. 프랑스 오드 지방의 성 들은 즉석에서 발견하여 쉽게 절단할 수 있었던 매우 단단한 석회암으로 건설되었다. 해발 700-800m에 위치한 케리뷔스, 페이르페르튀즈, 그리고 퓔로랑 등의 성들도 이 런 방법이 아니었으면 건축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베의 요새처럼 동로마 제국 시대 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빼내온 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가까 운 시대에 지어진 건물의 돌을 빼내어 사용하기도 했다. 채석장 건축사업에 대한 열기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임시 채석장으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 하게 되었다. 많은 필사본들을 통해 건축주들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석장이나 버려진 채석장을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세기 초에 캉브레 성당을 재건하기 위 해 채석장을 찾아 나선 주교 제라르 1세는 결국 캉브레에서 10km 가량 떨어진 레댕 에서 채석장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밖에 다른 예들도 많이 있다. 대수도원장인 쉬제는 생드니 성당의 회랑에 쓸 통기둥을 퐁투아즈 근처의 채석장에서 발견할 수 있 었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채석장을 사들이거나(랑 성당이 셰르미지를 사들였듯 이), 건설기간 동안 채석장 사용 계약을 맺어야 했다(투르 성당, 트루아 성당, 모 성당, 아미앵 성당 등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성직자가 채석장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다행 스런 경우(랑 성당과 샤르트르 성당)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채석장이 개인 소유로 되 어 있어서 상업적으로 사용된 경우도 많았다. 비에브르강 위쪽의 경사 지역에 광맥이 있던 파리 성당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채석장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비용 또한 많이 들었다. 노르만 정복이 끝나자마자 영 국은 캔터배리에 성당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교회, 또 웨스트민스터 왕궁과 런 던 타워, 배틀 수도원 등의 많은 건물을 짓기 위해 수백만 톤의 돌을 프랑스 카앵으로 부터 수입해 왔다. 그러던 중 영국은 링커셔의 스탬포드 근방에서 채석장을 발견하였 는데, 운반이라는 결정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기욤 드 상은 돌을 싣고 온 운반선으로부터 돌을 하적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다. 무거운 재료의 운반 부선이 발명됨으로써 수로를 이용한 건축재료의 운반이 가장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운 송방법으로 부각되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의 경우, 비에브르강을 따라 부선들이 내려와 센강의 가장 작은 지류를 통해 성당의 건설현장 근처인 시테섬의 동족 끝에 와 서 짐을 부렸다. 하천이나 강은 건축재료의 운송로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즐랭 수도원장 시대에는 루아르강은 니베르네에서 생브누아쉬르루아르까지 돌을 운반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리에보 성당과 뷔리 생테드몽 성당 같은 곳에서는 짐을 부리고 다시 싣는 작업을 줄이기 위해 특별 운하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대로는 육로를 통한 운반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육로의 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혜를 짜냈다. 14세기 초 파리 근방의 푸아시 수도분원이 건설되었을 때, 콩플랑의 채석장에서 채굴된 돌들은 일단 센강으로 운송된 뒤 포도밭 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작업장으로 옮겨졌다. 건축자재의 운반과정에서 언 덕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랑에서 17km 떨어진 셰르미지 채석장에서 돌을 운반 해 오려면 평지에서 수미터 솟아 있는 아르크(요새)를 넘어야 했다. 이 때문에 황소는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성당의 종루에까지 묘사되었다. 중세에는 무거운 것을 운반 하는 물체를 놓고 특히 많은 창의력이 발휘되었다. 고대에는 말들이 운반 할 수 있는 중량이 0. 5톤에 불과 했지만, 어깨에 거는 마구가 발명되고, 한 쌍씩 짝지 은 짐승들을 앞뒤로 세움으로써 말들은 2. 5톤의 짐을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말이 황소만큼 빈번히 사용되었다. 게다가 말은 황소보다 한배 반이나 더 빠르다는 이 점이 있었다. 건설비용중 운송비용이 상당한 비용을 차지하면서 운송비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영국이 노워치 성당의 공사를 위해 카앵에서 수입한 돌은 현장에 서 채굴한 돌에 비해 네 배나 비쌌다. 트루아예 성당을 건설할 때 토네르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은 운송비 때문에 다섯 배로 비싸졌다. 1412년 건설된 로망 다리는 이에 대 해 좀더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아치를 만드는데 필요한 쐐기 모양의 돌 100개의 구매가는 72플로린이었는데 운송비는 육로를 이용할 경우 40플로린, 수로를 이용할 경우 20플로린이나 되었다. 목재의 운반도 마찬가지였다. 18m짜리 전나무 30그루의 구매가가 50플로린인 데 비해 운송비가 425플로린이나 되었다. 이것을 이제르 강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150명의 사람과 80쌍의 황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비 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수로와 육로에는 작업장까지 자재들을 실어 나르는 부선과 짐 마차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11세기 중반에 노르망디와 11세기 말의 영국, 그리고 12세기 후반의 일드프랑스의 경우 여러 개의 작업장이 가까이에 몰려 있었다 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훨씬 역동적인 당시의 건축작업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채석장에서의 석재가공과 현장에서의 석재가공 건축주들이 운반하는 짐의 양을 줄임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려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석재는 채석장에서 대강 깎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듬어 지기까지 했다. 이 것은 옛 관습을 되살린 것으로 작업에도 훨씬 능률적이었다. 기욤 드 상은 형판을 준 비해 카앵으로 보냈는데, 이와 같은 예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립 베일 수 도원의 건설 기간(1277-1298) 동안 석공들은 조수들과 함께 채석장으로 파견되어 1, 000개의 돌을 잘라야 했다. 1253년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공된 돌들은 당시의 석공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겉단 장뿐 아니라 받침대, 회반죽, 쇠시리 작업에서 그들이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나무와 목공작업 10-11세기에 걸쳐 벌채가 맹렬한 속도로 행해짐에 따라 목공일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키가 큰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된 것이다. 12세기에 대수도원장 쉬제는, 전문가들 이 더 이상 그런 나무를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어덯게 해서 자신이 생드니의 지붕을 만드는데 필요한 나무를 이블랭 숲에서 기 적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였다. 군주, 귀족, 주교, 그 리고 대수도원장들은 숲을 보존하고 건축작업에 필요한 목재를 대는 일에 일관된 정책 을 구사했다. 소유지를 더욱 확장하려 했던 시토 수도회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각별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세심한 관리라는 것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질서한 벌 채의 뒤를 이은 본격적인 벌채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13세기 건축가들 역시 나무를 공 급받는 데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길이가 짧은 나무를 이용하여 다리를 건설하는 방법을 제시한 비야르 드 온쿠르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석재가 큰 인기 를 누리고 있기는 했지만, 목재는 여전히 건축현장에서 필수적인 자재였다. 목재는 건 물의 골조를 만드는 데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비계를 설치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14 세기 중반 윈저성을 짓는 데에는 3, 944그루의 나무가 필요했다고 한다. 종종 채석장 을 소유하지 못한 건축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들은 북쪽에 광대한 숲을 가 지고 있었다. 벌목한 나무의 운송비 역시 건축비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그들은 좀더 많은 수확과 생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금속, 필수적인 건축자재 제3의 건축자재인 금속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 실은 광산에서 채굴한 석재의 최종 절삭에 사용하는 금속도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 술력은 건축의 발전과 상당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 얼마나 정교하게 잘 잘려졌는가는 거기에 사용된 도구의 질, 즉 그 도구의 날카로움과 강도, 그리고 내구 성에 비례하게 마련이었다. 한번 몸에 밴 습관을 쉽게 바꿀 수 없듯이, 건축도구의 사 용도 지역이나 작업장에 다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12세기 프랑스 북부에서 전문 석 수공이 사용하게 망치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 망치는 다른 망치들에 비해 작업을 훨씬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1120년대 시토 수도회가 세운 건물의 질적 수준은 이 수도회의 기술상의 발전과 직결되어 이었다. 그 들은 광석의 채취에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가공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에서 금속의 역 할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퐁트네 수도원에서는 대 장간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반대로 수도원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즉 금속을 다루는 공정을 노동수사가 아닌 일반수사가 담당했던 것이다. 금속에 대한 이 러한 관심은 건축이 아닌 다른 영역, 특히 농업에도 영향을 미쳐 그 분야에 커다란 발 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향은 급속도로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종된다. 사실 고딕 건축 은 이렇게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금속은 레요낭 건축에서 필수적인 요소 로 자리잡았다. 철로 잔뜩 치장을 한 파리의 생트샤펠 성당 같은 건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철재가 보강된 석재건물은 철재를 포함한 금속으로부터 힘을 빌렸다는 점에서 20세기초에 등장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13세기에 어디서 금속을 구할 수 있었을까? 15세기에는 에스파냐로부터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금속을 수입 해 들여왔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전에도 이와 마찬가지였을까? 이것은 현재로서는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기계들 건축과정에 관련된 마지막 문제는 기계와, 기계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물질적인 도움 에 관한 것이다. 중세에는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도 발명이 이루어 졌다. 일반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발명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기술자들이 어떻 게 이전의 형태를 분석하여 그것을 보완하고 단순화시키는가에 달려있었다. 고대에도 기계는 존재했었고, 또한 심오한 연구의 대상이었다. 특히 노예의 도움 없이 어마어마 한 건물을 세우는 공사에 착수해야 하는 중세에 기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중 세에 발명되거나 사용된 기계에 관한 연구를 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문헌 이 없는 데다, 당시의 기계를 묘사한 그림이 양적으로는 풍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같 은 것들이 반복적으로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설현장을 묘사한 화가, 삽화가, 도안가들이 실물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바벨탑을 그리고 있으며, 또 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기계나 기술이 그 시대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실제로 쓰인 시기와 그림에서 나타난 시기는 거의 언제나 커다란 격차를 보 인다. 플랜태저넷 왕가(헨리 2세와 리처드 2세, 존왕)와 카페 왕조(필리프 오귀스트) 사이에서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이 끝나고 150년이 지나자 헤이스팅스 전투(그리고 그 장면을 묘사한 바이외의 태피스트리)가 있었다. 이 두 전투는 20세기초의 참호전투 와 1992년의 걸프전에 사용된 경이적인 기술만큼이나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중세를 연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러한 현격한 격차는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쟁이 건축에 끼친 영향 전쟁은 그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수단을 동원하도록 자극한다는 말이 있다. 전쟁은 정치 분야에서 뿐 아니라 건축분야에서도 합리적 사고를 증진시켰다. 12세기 후반부터 도시나 요새를 포위 공격하기 위한 기계들이 발명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돌을 날리는 기구인 투석기의 발명이었다. 50명의 사람 을 동원해 10톤의 추를 가진 투석기를 사용하여 시험해 본 결과, 100-150kg 정도의 돌을 약 150m 밖으로 날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마의 투석기는 20- 25kg 정도의 돌을 약 225m 날릴 수 있었다. 필리프 오귀스트가 수개월에 걸쳐 가야 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에도 기계들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몇몇 기계는 심리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공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전쟁에 사용 되는 기계를 고안하는 임무를 맡은 기술자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시기부터 이다. 전쟁에 필요한 기계의 제작은 목공전문가들이 맡아서 했다. 이런 기계들은 민간 분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중기와 비계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고대로부터 기구가 사용되었다. 로마의 작가인 비트 루비우스의 건축 관련 저서들은 중세에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는 특히 이 기구들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 놓았다. 평형추의 사용과 이중도르래 덕분에 이 기구들은 비약 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건물이 그리 높지 않으면 기중기는 땅에 설치되었으며, 그렇 지 않은 경우에는 단 위에 설치되었다. 또한 기중기는 많지 않은 인력으로도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다. 기중기는 축을 가지고 있었고 돌출된 기중기의 팔은 3m정도였으며, 이러한 기능에 맞추어 도르래가 장착되었다. 기중기에 동력을 전달하는 방법은 다양했 다. 가장 간단한 것이 권양기였는데, 이 경우에는 힘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으로는 고대에도 사용되었던 쳇바퀴가 있다. 이것은 바퀴 안쪽에 두 사람이 들어가 걷 는 힘으로 움직이거나, 표면에 사다리 모양으로 달린 막대기를 잡아당김으로써 움직였 다. 지름이 2. 5m인 쳇바퀴에서 한 사람이 550-600kg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 중세의 기술자들은 그들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바퀴의 지름을 8m까지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쳇바퀴는 점차 대형화되었고 더 많은 인 부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쳇바퀴를 만드는 것은 간단했기 때문에 둥근 천장의 꼭 대기에 설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보베 성당과 샬롱쉬르마른 성당, 그리고 알자스 지방 의 몇몇 교회에는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제 쳇바퀴를 옮겨 가지고 다니 며 여러 작업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샬롱쉬르마른 성당의 쳇바퀴는 처음에는 본당의 첫 번째 서쪽 교각 위쪽의, 돔형 천장의 중심부에 자리한 원형창 위에 설치되 어 있었지만, 나중에 크기를 줄여 북쪽 수랑의 위쪽 공간에 재설치되었다. 이처럼 들 어올리는 기구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비계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되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비계가 아주 육중했으므로 땅 위에 수평막대를 세워 돌에 고정시켜 두었었다. 이것은 건물을 석재로 마무리할 때 원형 천장으로 올라가는 데 사용되었다. 이 수직과 수평으로 된 부분 위에 널빤지가 놓여져 인부의 작업대 겸 재료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비계는 매우 견고해야 했다. 비계로 올라가는 데는 이동이 가능 한 목재 사다리가 사용되었다. 이는 주로 석공 및 석재와 석회를 나르는 짐꾼들이 사 용했다. 채워진 구조에서 비어 있는 구조로 고딕 건축의 탄생은 들어올리는 기구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 이 기구를 이용해 건축 재료가 곧바로 벽으로 올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비계 는 단순히 건축재료를 놓아두는 바닥 역할에서 벗어나 석공의 작업대 구실을 했다. 그 리하여 비계의 무게 역시 현저히 가벼워졌고, 비계를 땅 위에 세우는 대신 벽에 고정 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건축가는 인부들의 수직이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먼저 위쪽의 작업공간으로 이동하는 나선형 계단을 세웠다. 수평이동은 두꺼운 벽의 내부에 만들어진 좁은 통로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첨두 아치의 천장 건설에는 지면에 닿지 않 은 채 벽과 벽 사이를 연결하는 비계가 필요했다. 이러한 비계는 넓은 작업공간을 제 공했으며 무거운 목재 홍예틀을 쉽게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발 전이라면 비계가 작업장의필요와 진척도에 따라 손쉽게 철거되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진정한 협력관계 이러한 고도의 기술은 대성당이나 수도원, 그리고 주요한 비종교적인 건물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그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건축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석재를 다 루거나 사용하는 기술의 수준이 전통적인 방법에 머물러 있었다. 대성당과 시골 교회 의 차이는 오늘날 가장 정교한 사무용 빌딩과 뜰에 있는 헛간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중세 건축을 판단하는 데 심각한 오류를 범하 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중세의 건축가들은 이상하게도 18세기의 르네상스 건축가들, 나아가 현대의 건축가들과 닮은 점이 있다. 건축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건축주와 직접 적인 관계를 맺으며 건축주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 자체만을 놓고 보면 단지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다. 건축가의 천재성은 그들을 인정해 주고 그들의 구 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건축주를 만났을 때만이 발휘될 수 있었다. 건축은 건축가와 건축주라는 이중성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기록과 증언 중세의 건축물을 아무리 유심히 관찰해도 건축현장에서 사용된 기술이나 인력의 편제 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알려면 그림이나 기록들에 의존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당대가 아닌 이후 시대에 작성된 데다 정형화 된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다. 게다가 이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거의 사용되지 적이 없 으며 변역도 거의 되어 있지 않아 상당히 난해하다. 건축가 11세기초 성직자를 비롯한 건축주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이상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건축가를 양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자, 이 석공장들은 전문가가 된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랭스의 생레미 성당에서 대수도원장 에라르와 후임자 티에리가 행한 작업(안젤름, (히 스토리아), 1039년) 대수도원장 에라르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너무나 방대한 것이어서 결국 그 자신도 이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 의 후임자인 티에리는 이미 완성된 건물의 상당 부분을 헐어 내고 좀더 현실에 걸맞게 다시 짓기로 결정했다. 1005년, 당대의 유명한 고위 성직자들의 선례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도원장 에라르는 자신의 관할 교회를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모은 뒤, 돌 을 다듬어 건물을 짓기 위해 기초공사부터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어떤 건물보다 우아하고 장려해야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와 그의 동시대 인들은 이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28년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는 자신의 작업 을 완성하지 못한 채 노령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의 사후 후임자인 티에리가 작 업을 맡아 끝내려고 하였으나, 워낙 공사가 방대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한다는 것 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현명한 수도사들과 랭스 지방에 사는 덕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조언을 들은 티에리는 선임자가 지 은 건물을 부분적으로 허물기로 결심했다. 건축가들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 고 생각되는 몇몇 기초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보다 단순하면서도 적 합한 교회의 건설에 착수했다. 이 작업에 착수한 것은 그가 대수도원장의 자리에 오른 지 15년째 되는 1039년경이었다.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누구나 그를 도우려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건축자재의 운반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마차와 황소를 동원했다. 기초 공사가 새로 시작되었고 그 위에 처음에 새워진 건물에서 떼어 낸 기둥을 심었다. 기 둥 위에는 조심스럽게 중심을 맞춘 아치가 올려졌다. 성당은 차츰 건설자들의 손에 의 해 형태를 갖추어갔다. 회랑의 벽이 곳곳에 세워졌고 본당의 마룻대가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며 올려졌다. 힝크마르에 의해 봉헌되었던 낡은 교회는 완전히 허물어졌고, 성 가대석에는 날씨에 상관없이 종교행사가 열릴 수 있게끔 임시지붕이 설치되었다. 그러 나 이렇게 작업이 한창 진행되어 가던 참에 11년 8개월간 자신의 수도원을 관할하던 대수도원장 티에리가 1045년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다. 그래서 수도원의 주임사제 를 역임한 에리마르가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에리마르는 교회건설에서 티에리의 가 장 열렬한 협력자였으며, 자신의 관할구에서 나온 수입의 상당 부분을 티에리에게 기 부하기도 했었다. 그는 곧 선임자의 작업을 이어받아 이미 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남쪽 수렁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초공사를 마치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만 이 덩그렇게 서있던 북쪽 수랑을 완성했다. 마침내 오르베 수도원 근방의 숲에서 가져 온 커다란 대들보가 도착하자 그는 목재지붕을 건물에 얹었다. 이제 건물은 각각의 부 분이 모두 완성되었다. 빅토르 모르테 (건축사에 관한 문헌 모음집), 1911년 주교 로제에 의한 솔즈베리 성당의 건설(말름스베리의 윌리엄, (데 게스티스 레굼 안글 로움), 1107년) 노르만 출신의 솔즈베리 주교였던 로제는 프랑스의 기술과 양식을 영국에 소개했다. 주교는 마음이 후한 사람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결정을 내리면 결코 비 용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특히 건물을 세우기로 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 그러 한 예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솔즈베리 성당과 말름스베리 성당 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말름스베리 성당의 외관을 거대하 고 아름답게 꾸몄다. 건물의 석재들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물려 쌓아 올려진 것을 바 라보노라면 이 석조건물이 단 한 개의 돌로 만들어진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 이다. 솔즈베리 성당의 경우에는 성당의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극히 화려한 장식을 아낌없이 한 덕택에 영국에서 가장 뒤어난 외관을 가진 성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 다. 로제 주교는 신에게 진심으로 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이여, 나 는 당신의 거처의 이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나이다." 빅토르 모르테 (건축사에 관한 문 헌 모음집), 1911년 휴주교에 의한 링컨 성당의 건설 (시로 노래한 성 휴의 삶은 휴(1200년 사망)의 시성식이 거행된 1220년경에 쓰인 것 으로 추정되는 6보격의 라틴어 장시이다. 시인에게 성당은 하나의 정신적인 실체이며, 이것이 주는 의미는 그것이 낳은 상징과 비유의 층위에 존재한다. 시인은 실제적인 건 설 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링컨 성당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묘사를 통해 성당이 재건되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 지 않았지만 성당이 당대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을 권세와 의미를 말해준다. ) 그는 놀라운 기술을 동원하여 성당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이 성당을 짓는 과정에서 그 는 자신의 종복들이 제공한 수단과 노동만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도 당연한 것으로 여 겼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잘려진 돌이나 석회 반죽을 일종의 지게에 실어 어깨에 짊어지고 운반했다. 두 개의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다리를 저는 한 장애인은 자신 에게 할당된 지게를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좋은 전조가 들 어있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나면 그는 지팡이의 도움을 받는 것을 떳떳지 않게 여겼다. 곧은 것을 구부러지게 만드는 한낮의 작업이 그의 구부러진 모습을 곧게 펴주었다... 이전의 석조건물은 완전히 파괴되고 새로운 건물이 솟아올랐다. 이 건물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정확히 십자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끈질긴 노력 끝에 세 부분을 하 나로 통합하였다. 아주 단단한 기초부분은 가운데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벽은 공중 높 이 올려진 지붕을 받쳐 주었다. 기초부분은 대지에 갇혀 있었지만 벽과 지붕은 지상에 노출되었다. 대담하게도 벽은 구름까지, 지붕은 별까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값비싼 건 축자재들은 열성적인 상인에게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원형 지붕은 날개 달린 새들 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구름을 헤치며 나는 것처럼 넓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원형 지붕은 마치 단단한 기둥 위에 올라앉은 날아다니는 피조물처럼 보였다. 회반죽은 흰 돌들을 서로 단단히 맞물려 주었는데, 석공의 손을 거치면서 이 흰 돌들은 빼어난 특 징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벽은 하나하나의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개별 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서로 인접한 부분들이 하나의 연속체로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인공적이 아닌 자연의 결과처럼, 또한 결합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실체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값비싼 자재인 검은 돌(퍼벡 대리석)로 만들어진 돌 공예품도 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물론 이처럼 한 가지 색만 사용되는 것이 만족스 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 돌들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사람들은 그것이 벽옥인지 대리석인지를 판단하는데 정신을 빼앗긴다. 벽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디고 대리석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귀족적인 것이다. 이런 자재로 만들어진 작은 기둥들이 빙 둘러 서서 춤을 추듯이 지주를 감싸고 있다. 새로 자라난 손톱보다 윤기 있는 건축물의 바 깥쪽 표면은 눈부신 모습으로 찬란한 별빛처럼 반짝인다. 자연은 그곳에 다양한 형태 들을 그려 놓았다. 아무리 예술가가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할지라도 자 연이 완성해 놓은 이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멋진 이음새가 천 개의 작은 기둥들을 가로로 아름답게 정돈시켜 주며, 강렬하고 고급스러운 미광을 발하고 있는 이 기둥들은 그들의 힘으로 성당의 전체적인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다. 또한 사치스러운 이 기둥들이 미광으로 성당을 비춤으로서 성당은 훨씬 화려하게 보인다. 고귀한 모습으로 높이 솟은 이 기둥들은 깨끗하게 빛나는 마감, 우아하고 기 하학적인 질서, 조화를 이루면서도 실용적인 아름다움, 만족스럽고 탁월한 기능, 그리 고 아무리 문질러도 닳지 않을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 양 측면에 늘어선 창문의 눈부 신 행렬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눈을 혼란스럽게 한다. 창문에는 천국의 시민들과, 그들이 지옥의 지배자를 무찌르는 데 사용한 무기들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곳에는 두 개의 커다란 창문이 마치 두 개의 발광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북쪽과 남 쪽을 향해 방사되는 둥근 빛은 쌍둥이 같은 광채로 다른 모든 창문들을 무색하게 만든 다. 다른 창문들이 평범한 별이라면, 이 두 개의 커다란 촛대가 무지개를 본따서 다양 하고 생기 있는 빛으로 성당의 윗부분을 밝게 비추었다. 아니, 그것은 본딴 것이 아니 라 능가한 것이다. 무지개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이 두 개 의 창문은 태양 없는 미광이요, 구름 없는 섬광이다... 기초 부분은 육신, 벽은 인간, 지붕은 영혼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육신은 대지, 인간은 구름, 영혼은 별에 해당된다... 천상의 빛으로 세계를 비추는 일은 성직자들의 기품 있는 임 무이다. 이것은 밝은 창으로 표현된다. 장소마다 질서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다음 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채광층의 영역은 수사신부를 의미하고 측량의 영역은 주교대 리를 의미한다. 수사신부가 속세의 일을 맡고 있다면, 주교대리는 지속적으로 열심히 신성의 직무를 수행한다. 화판의 모양으로 빛을 발하는 창의 윗부분은 세계의 다양한 미를 의미하며 아랫부분은 교황의 이름을 나타낸다. 둥근 빛을 내뿜는 쌍둥이 창은 성 당에 달린 두 눈에 해당한다. 큰 것은 주교를, 작은 것은 수석 사제를 의미한다. 주교 는 불러주기를 바라며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고, 수석 사제는 극복하기 위해 북쪽을 바 라보는 것이다. 즉 전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 후자는 사멸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 인다. 이러한 눈을 가진 성당의 얼굴은 하늘의 촛대와 레테(망각의 강:역주)의 어두움 을 경계하고 있었다. 샤롤 가스통 옮김, (시로 노래한 성 휴의 삶), 1986년 석수장 고티에 드 바랭프루아가 체결한 모 성당 건설을 위한 계약서(1253년) 건축주와 석수장을 묶어 주는 계약서가 13세기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주교, 수석 사제, 그리고 모 성당의 참사회는 이 문서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의 가호를 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석수장인 고티에 드 바랭프루아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 으로 모 주교 관구의 건설 작업을 위탁함을 공표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임자, 그 리고 참사회가 전술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고티에 드 바랭프루 아는 매년 10리브르의 급여를 받는다. 그가 장기간 이어지는 질병 때문에 더 이상 일 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전술 한 10리브르의 급여를 받을 수 없다. 또한 작업장에서 일하거나 업무상 출장을 떠날 경우에는 하루에 3수의 급여를 받는다. 또한 그는 우리의 허락 없이는 주교 관구 밖에 서 어떠한 일도 맡아서 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작업장에서 쓸 수 없는 목재를 수령하 게 될 것이다. 그는 모 성당 참사회의 허락 없이는 에브뢰를 비롯하여, 모 성당 이외 의 다른 작업장에 가거나, 그곳에서 2개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그는 모에서 지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는 전술한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할 것과 계속적인 성 실성을 보일 것을 맹세했다. 서기 1253년 10월 작성. 롤랑 레슈, (고딕 성당의 건설자 들), 1989년 긴의 백작인 아르누 2세에 의한 아르드르의 축성: 시몽의 역할과 작업장의 인부들 (1200-1201년) 전문적인 건축가들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긴의 백작인 아르누 2세는 생토메르를 방어하는 벽(포사툼)을 본따 아르드르에 축성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도시를 방어 성벽으로 둘러쌌는데, 이 같은 벽은 긴의 전역에 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수의 인부들이 해자를 두르기 위해 모여들었 다. 측량사인 시몽은 측량자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감독했다. 그는 직접 측량하기보다는 눈대중으로 보아 마음속에 계획한 대로 작업이 진행되었는지를 살폈다. 그는 집들과 헛간들을 허물고 과수와 꽃나무를 베었다. 또한 비싼 가격으로 나그네에게 임대해 주었던 많은 옛 건물들을 헐었으며 야채와 아마밭을 갈아 엎었다. 그는 길을 내기 위해 경작지를 파괴하면서, 분노로 절규하는 사람들이나 불평하는 사 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농부들은 도르레, 마구, 흙을 실어 나를 낡은 사 륜마차, 그리고 돌을 실어 길 위에 흩뿌리는 데 쓰일 거름마차를 제공했다. 해자를 파 는 사람들은 곡괭이와 삽을 이용하여 일했으며, 땅을 파는 사람들은 넓적한 날이 붙은 농부의 삽을 사용했다. 또한 건물을 부수는 사람들은 농부의 나무 망치를 썼으며, 외 장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농부의 타봉을 사용했다. 각각의 장비와 도구들은 가장 적합 하고 필수적인 용도에 사용되었다. 명령을 받아 뗏장을 걷어 내는 잔디 작업인들과 짐 꾼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마디가 많은 지팡이로 무장한 하사관들과 왕의 심복들은 수시로 인부들을 불러내 십장이 주의 깊게 정해 놓은 방법에 따라 일하도록 을러대곤 했다. 가브리엘 푸르니에, (중세 프랑스의 성), 1978년 작업장 중세 후기의 삽화가들은 작업창을 즐겨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삽화들을 통해 작 업장의 실제 모습을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다행히 이 풍부하고 생 기 넘치는 세계를 우리 앞에 부활시켜 주는 기록들이 조금은 남아있다. 누아예성의 건설(게스타 폰티피쿰 아우티스오데렌시움, 1106-1206년) (옥세르 주교들의 규칙)의 저자는 성이 건설되는 과정을 매우 세부적으로 기술해 놓았 다. 우리는 위게 드 누아예가 그의 유산의 일부이며, 그의 조상들이 이룩한 공적을 통 해 유명해진 누아예성(카스트룸)에서 수행한 작업을 기술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그곳의 축성 작업에 쏟은 노력과 그곳에 투자한 상당한 액수의 경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자 한다. 산의 밑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사방으로 세랭강이 흐르고 있던 이 도시의 아래쪽을 둘러싼 성벽의 꼭대기에 위게 드 누아예는 아주 단단 한 나무나 돌을 이용하여 발포 장치를 만들었다. 지형적인 특성상 이 방향에서는 성 (카스트룸)으로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출입구의 방어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도시 위쪽의 산비탈에다 바위를 깊게 파내서 참호를 만들기도 했다. 요새의 중심부(프레시 디움)가 서 있는 산의 정상에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정리해 놓기에 알맞은 넓은 공 간이 마련되었다. 옛 성의 벽(무니티오)-이 경우에는 외벽이 더 단단했다. 이것은 주교 인 클레랑보의 동생이 주교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완성한 것이다-에 또다시 바깥쪽으 로 보다 높은 성벽을 쌓았다. 새로운 성벽은 보다 두껍고 단단했으며 중간에는 커다란 탑(투리스)이 세워졌다. 또한 그 외벽을 따라 바위들을 파 내어 깊은 참호를 만들었다. 그 앞쪽으로는 공격해 오는 적들에 대항해서 장애물과 장벽으로 요새의주요 부분들(프 레시디움)을 보호할 수 있도록 산에다 굴을 팠다. 그는 외벽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여 성벽의 윗 부분을 아주 두꺼운 대들보로 덮었다. 따라서 그 안쪽은 활이나 투석기 등 적의 어떤 공격 방비로부터도 안전했고, 전방에서 오는 공격자들이 참호에 접근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어시설이 구비된 상태에서는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 들도 차단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요새의 중심부(프레시디움 프린시팔레)를 감싸는 성 벽의 바깥쪽에다가 아주 아름다운 궁전(팔라티움)을 건설했다. 이로써 요새의 주요 부 분에 대한 방어시설(프레시디움 무니티오니스)을 완성하였다. 군주의 쾌적한 주거지인 이곳을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수많은 장식물로 치장했다. 그는 탑(투리스 프린시 팔리스) 아래에 위치한 포도주 저장고에서 땅굴을 파, 좀더 아래에 위치한 왕궁에 이 를 수 있게 하였다. 덕분에 요새의 주요 부분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필요 없이 포도주 를 비롯한 여러 음식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음식물들은 바구니에 담겨져 요새의 중심부 를 감싸는 성벽의 아래쪽으로 내려졌고, 포도주와 물은 교묘하게 설치된 파이프를 통 해 매우 조심스럽게 운반되었다. 성을 지키는 수비대를 위해 모아진 식량은 중무장한 경계병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방책을 걸어 잠궈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를 취 한 후,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마음놓고 충족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요새의 주 요 부분(프레시디움)에는 무기와 전쟁 및 방어에 필요한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 리고 위게 드 누아예는 기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위해 위쪽 요새(무니티오)를 둘 러싼 성벽 안에 위치한 집들을 많은 비용을 들여 구입하는 동시에, 그것의 소유권을 조카에게 재위탁하였다. 이리하여 요새의 이 부분과 왕궁의 주요 건물들은 안전했던 것은 물론이고, 요새의 주요 부분(프린시팔레 프레시디움)을 둘러싼 성벽의 바깥쪽에 위치한 왕궁(팔라티움)으로 군주를 알현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고 드나들 수 있었다. 또한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비거주자들을 쫓아낼 수 있 었기 때문에 성의 군주는 충성심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위족 성벽(인프라 셉 타 수 페리오라)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교구 교회 (무니키피움)를 성벽 바깥(엑스트라 셉타)으로 옮겨 놓고 군주를 위한 예배당에만 요 새의 위쪽 내부에 남겨 두었다. 빅토르 모르테 (건축사에 관한 문헌 모음집), 1911년 장 드 도르망의 유언 집행인들이 파리의 콜레주 드 보베에서 행한 노동에 대한 계산서 (1387년) 이 기록은 작업 견적서, 경쟁입찰, 작업현장에서의 화합, 인부에 대한 급여 등 작업장 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생활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제1항. 전술한 각하의 전술한 결정과 명령을 적용하고 수행하기 위해 전술한 석수장 레이몽은 전술한 건물의 형태, 자재 양식, 그리고 두께에 대한 상세한 보고문을 만들 었다. 또한 보다 적은 비용을 투자하고도 작업을 훌륭히 수행하길 원하는 모든 유능한 인부들이 이 보고문의 내용에 대해 일 수 있도록 보고문은 그의 서기들에 의해 복사되 었다... 그런데 전술한 작업에 대한 지시와 자신들이 요구한 것보다 몇 배나 깎인 급여 등이 실린 보고문을 많은 석공들이 주의 깊게 보았다.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고 토론 을 마친 끝에, 전술한 계약서는 석공장 레이몽의 견해와 결정에 따라 이미 급여가 줄 어든 수석석공에게 수여되어 그가 보관하게 되었다. 수석 석공은 이미 밝힌 것처럼 낮 은 급여로 전술한 계약을 체결할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매일 작업하고 있었다... 성 요한의 참수일인 목요일에 석수장 레이몽이 작업장으로 와서 석공과 곡괭이질을 맡 은 일꾼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면밀히 살펴본 후 이하에서 지상까 지 굴착된 부분을 모두 측량했다... 장티유로부터 수송되는 돌들은 여러 대의 마차에 나눠 실릴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것들의 양을 정확히 측정할 시간은 없었다. 는 작업장에서 일하던 서툰 석수공 하나에게 돌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맡겨졌다. 몇몇 경우를 통해 미루어 보면, 그는 이 작업으로 4수를 받았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 는 여름에는 일할 수 있는 낮의 길이가 길 뿐 아니라 매우 무더웠다. 갈증이 나는 무 더위 속에서 인부들은 돌, 석회, 모래를 비롯한 여러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그들의 불 만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0월 18일 금요일, 성 누가 축일이다. 교회의 규칙에 따르면 이날은 모든 작업을 쉬어 야 했다. 그러나 작업장에서는 여전히 공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전술 한 벽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날의 일이다.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되었으므로, 공사 를 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몇몇 석공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자기들이 점심 때 휴식을 취하는 동안, 곡괭이질꾼들은 계속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술한 곡괭이질꾼들은... 같이 쉬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술한 곡괭이질꾼들에게 음식 과 마실 것을 참호로 가져다주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일한 대가는... 겨 우 4수였다. 사순절이 되자 작업장에서 일하는 석공들과 인부들은 작업장의 관례에 따 라 모든 숙련공들과 인부에게 은혜가 베풀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혜란 그들 모두 가 먹을 한 마리 양의 고기를 의미했다... 성신강림절이 다가오면 작업장에서 일하는 석공들과 인부들은 늘 한 목소리로 은혜와 호의를 요구했다. 그것은 이곳처럼 체제가 잡히고 장기적인 작업장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관례였다. 과연 예수승천일에 그들 은 작업장에서 약간의 양고기와 약간의 급여를 더 받을 수 있을까? 고용주이자, 모든 인부들의 우두머리이며 이 문제의 결정권을 가진 전술한 석공장 레이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결정을 내리기를 원했고, 사실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만약 그렇게 하 는 것만이 그들을 만족시키는 길이라면 전술한 석공들과 인부들은 함께 만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 만찬에는 고용주인 전술한 석수공 레이몽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잘 알 려진 많은 명사들이 참석했다... 7월 20일경 드 보베 씨가 이 작업장을 지나면서 인부 들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인부들 에게 1프랑씩 사례금을 지불하라고 자신의 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귀스타브 파니에, (13-14세기 파리의 산업과 근로계급에 관한 연구), 1877년 건축자재 고대의 기념비적 건물에 필적할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쉽게 채석하여 자를 수 있는 양 질의 돌이 있는 지층을 찾아내야만 했다. 또 목공에 필요한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씨 앗을 심고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했다. 헤이스팅스 근방의 배틀 수도원의 건설(크로니쿰 모나스네리 데 벨로, 1066) 건축자재의 운반 문제는 건축주와 석공장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돌 이 부족했던 영국은 노르망디로부터 돌을 수입해야 했다. 언제나처럼 왕이 건축자재의 운반을 걱정하자 수도사들은 왕이 교회부지로 결정했던 장소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건조한 토양이라 물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을 지 적했다. 그리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왕이 동의해 준다면 그와 같이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데 좀더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왕 은 버럭 화를 내면서 적을 무찌른 뒤 자신이 차지하게 될 바로 그 장소에서 신성한 교 회의 기초공사를 좀더 빠른 속도로 진행시킬 것을 명하고는 즉시 자리를 떴다. 감히 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수도사들은 물의 부족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던 것이 다. 이에 대하여 관대한 왕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로 응답했다. "짐이 신 의 은총을 받았다면 , 짐은 다른 어떤 주요 수도원에 공급되는 물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포도주가 공급되는 수도원이 바로 바로 그 장소에 건설되는 것을 보게 되 될 것이다." 그러자 수도사들은 이번에는 완전히 숲으로 뒤덮인 그 근방에서는 건축에 적합한 돌을 구할 수 없다며 열악한 장소를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재산으로 비용 을 충당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충분한 양의 돌을 해로로 카앵에서 수송해 오기 위하 여 자신의 선단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왕의 결정에 따라 수도사들이 노르망디로부터 돌의 일부를 배에 실어 수송해 온 바로 그 순간에 한 수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 식이 전해졌다. 게시의 내용인즉 그 수녀가 게시를 받은 장소로 가서 신이 지시한 대 로 했더니, 과연 교회를 짓기로 한 부지에서 그리 멀리 덜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정말 좋은 질을 돌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짓기로 되어 있는 그 건축물에 필요 한 자재를 공급해 주기 위하여, 신의 뜻에 따라 누군가 그곳에 보물을 묻어 놓은 것 같았다. 마침내 기초공사가 끝났다. 당시 시각으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 를 지니고 있었다. 이어서 왕의 결정에 따라 ' 스탠더드'로 알려진 해롤드왕의 깃발이 내려지던 것을 바라보던 바로 그 장소에 높은 제단이 조심스럽게 세워졌다. 빅토르 모 르테 (건축사에 대한 문헌 모음), 1911년 생드니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찾아서 (대수도원장 쉬제, 데 콘세크라티오네, 1140년) 생드니 성당의 건축주인 대수도원장 쉬제는 목재를 찾는 일의 어려움이라는 주제에 관 한 가장 유명한 문헌을 남겼다. 대들보감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지역뿐 아니라 파리에서 나무에 관계된 일을 하 는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곳은 숲이 없으므로 대들보감을 찾을 수 없고 옥세르 지방까지 가야 그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데 쏟아야 할 노력과 엄청난 시간에 질리고 말았다. 조과를 마치 고 돌아온 어느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내가 직접 주변의 숲을 둘러보고서 대들보감 을 찾아낸다면 시간의 지연과 온갖 잡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 음날 아침 일찍 대들보의 치수를 들고 목수들과 함께 만사 제쳐 놓고 곧바로 이블린 숲으로 출발했다. 슈브뢰즈 계곡을 지나면서 나는 우리 수도원의 관리들과 그 지역을 관할하는 관리들, 그리고 숲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우리가 찾 고 있는 크기의 대들보감을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 달라고 했다. 그 들은 내 말을 듣고 나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 사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큰 소리 로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 그들은 우리가 그만한 크기의 나무는 그 지역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 놀란 것이다. 이블린 숲의 반을 포 함하여 많은 영지를 소유한 우리의 가신이며, 슈브뢰즈의 영주인 밀로가 오랜 기간 왕 과 아모리 드 몽포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3층자리 방어탑을 건설하느라 질 좋 은 나무는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해준 말을 하나도 받아 들이지 않고, 확고한 믿음을 갖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쯤 뒤 우리는 적당한 크기의 대들보감을 하나 발견했다. 자. 이 이상으로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빽빽 한 숲과 가시나무 사이를 지나온 우리가 열두 그루의 대들보감을 한자리에서 발견하게 된 마당에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숫자였다. 우리는 이것들을 성 스러운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나무들을 강탈자의 손길로부터 안전하게 따로 골 라 두셨다가 당신과 당신의 순교자를 위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주 예수를 찬미하며,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새 건물의 지붕에 이 나무들을 얹었다. 대수도원장 쉬제, (데 콘세크라티오네), 1140년 석공장 장 드로에게 작성한 플랑드르의 바폼성 건축 계약서 (1311년) 몇몇 계약서는 각각의 세부사항을 구분하는데 극도의 정확성을 보여 준다. 이 문서를 보고 듣게 될 모든 사람에게 아라의 집행관인 토마 브랑동이 인사를 보낸다. 주앙(장) 드 로에가 우리를 비롯해 석공장 지라르 드 살뢰, 주앙 테타르, 주앙 데스탱 부르, 다르투아 부인의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에 몸소 등장해, 다르투아 부인의 바폼성 에 홀로 쓰일 석조 건물을 짓는 데 동의했다. 이것은 내부의 길이가 24m이고 폭이 21m인 건물로, 사방이 1. 5m 두께에 12m 높이의 벽들이 세워지게 된다. 또 한 면에 는 예배당과 동일한 폭의 개구부를 지닌 아치가 씌어지게 된다. 아치는 둥근 쇠시리로 작성될 것이며 홀의 끝에는 네 개의 커다란 창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양 측면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대로 필요한 크기의 창문이 네 개 설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여섯 개의 이중창과 여섯 개의 창틀이 달린 보통 창이 설치되어야 한다. 홀에는 적절한 곳에 두 개의 벽난로가 설치되며, 홀 가운데에는 벽과 떨어져 있는 기 둥이 두 개, 벽에 붙은 기둥이 두 개가 세워져야 한다. 이 기둥들은 지붕을 이루는 목 재 아랫부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높게 세워져 세 개의 아치를 지지하게 된다. 그 리하여 순전히 돌로 만들어진 이 아치들이 구성하는 공복(인접한 아치가 천장, 기둥과 이루는 세모꼴 면:역주)가 설치되어야 한다. 전술한 기둥들은 기초부분과 머리부분에 다가 화려한 장식을 하게 될 것이다. 홀의 끝에는 지붕의 구조물에 맞는, 적당한 넓이 와 크기를 지닌 두 개의 박공지붕이 얹혀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면 이 박 공지붕에는 프랑스제 방수도료가 입혀질 것이며, 이 도료 위에다가는 많은 양의 부조, 공, 꽃무늬를 장식해야 할 것이다. 안마당 쪽 네 홀의 네 모퉁이에는 네 개의 터릿(작 은 탑)이, 중앙에는 다섯 개의 터릿이 적절한 간격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모퉁이의 터릿들은 앤태블러처로부터 뻗어 나오게 되는 반면에, 중앙의 다른 터릿들은 바닥으로 부터 뻗어 나와야 한다. 그 한쪽에 자리한 나선형 계단은 벽쪽 통로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전술한 홀은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총안(활 쏘는 구멍:역주)이 뚫린 통로로 감 싸여야 한다. 두 개의 박공지붕이 안쪽으로 밀어 넣어진 덕택에 통로는 박공지붕의 바 깥쪽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이 홀에는 필요에 따라 많은 문틀이 설치되어야 한다. 네 개의 터릿은 벽을 지나는 통로와 같은 높이여야 하며, 건물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총안이 뚫려 있어야 한다. 만약 통로보다 3m정도 더 높게 터릿의 위치가 잡혀져야 한 다면 그렇게 지을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람직하다면 사방에 앤태블러처를 설치하여 그 위의 목재지붕을 지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홀에 자리한 네 개의 기둥은 사암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부조와 나뭇잎들로 장식된 수랑과 갓돌, 그리고 기둥머리 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 대한 비용은 주앙이 책임진다. 독립적으로 세워진 두 개의 기 둥은 길이가 4. 5m이고, 이 길이에 적절하다면 굵기 18뼘짜리 통기둥이 쓰여야 한다. 두 개의 기둥은 석재벽돌로 만들어져 벽에 반쯤 묻혀져야 한다. 또한 거기에는 배수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개구부가 설치되어야 한다. 기초부분은 주앙의 비용으로 하며, 지 상에서 1m정도 내려가야 한다. 더 깊게 할 필요가 있다면 그 비용은 다르투아 부인이 제공할 것이다. 앞서 언급하고 그 비용을 산정한 건축작업은 전술한 주앙 드 로에의 비용으로 충당될 것이다. 이것은 건설비용에 인건비를 합쳐 파리화로 300리브르가 될 것이며, 후에 그에게 이 비용이 지불될 것이다. 돌, 석회, 모래, 담을 쌓는데 드는 재료, 밧줄 등 작업에 필요한 모든 건축자재는 작업장으로 공급될 것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는 담을 쌓는 것과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자신의 비용으로 충 당해야 한다. 수랑은 우리의 책임이므로 여기에서 제외된다. 전술한 공사의 진행비가 합의된 금액에서 파리화로 10리브르 이하일 때 주앙은 초과한 금액에 대한 추가로 받 지 않고 합의된 급여만으로 일해야한다. 그러나 초과분이 파리화로 10리브르 이상일 때 주앙은 급여의 초과분을 따로 지급받는다. 주앙은 공사에 사용할 수 있게끔 미리 잘라둔 돌들을 공사 시작 전의 가격으로 사들여야 한다. 가능한 그는 전술한 공사를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이번 계절에 끝내야 한다. 쥘 마리 리샤르, (다르투아와 드 부르고뉴 여백작 마오), 1887년 트루아 성당의 지붕공사를 위한 계약서(1390년 10월 11일) 건축자재의 공급과 그 사용에 관련된 작업의 비용 지불 문제는 매우 엄격한 계약상의 논점이 되었다. 랭스에 사는 슬레이트공 주앙 느뵈와 트루아에 사는 코라르, 이 두 형제는, 덕망있고 지각 있는 트루아 교회의 수석사제를 비롯한 참사회원들을 상대로 하여 트루아 교회의 대외진에 위치한 대기둥에서부터 우물 옆에 있는 작은 기둥에 이르기까지 지붕을 덮는 작업을 맡겠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그들은 석판과 못 을 조달하여 작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대가로 350리브르 투르누아를 받기로 (각하와) 계약을 맺었다. ... 전술하신 고명한 분들(수석사제와 참사회원)을 전술한 지붕공사를 위해 그들에게 충분한 양의 나무판자를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위의 계약에 따르면 그들 형제는 현재 융통되는 법화로 현금 350리브르 투르누아를 대가로 받게 된다. 전 술한 형제는 전술한 간사들이 자리한 가운에 전술한 고명하신 분들로부터 교회건물의 공사 용역비 총액 중 100리브르 트루누아를 이미 받았다. 나머지 250리브르 투르누아 는 전술한 고명하신 분들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지불하실 것이다. 즉 성 안드레 축 일에 100리브르 투르누아가 지불되고, 크리스마스에 다시 100리브르 투르누아가 지불 되며, 나머지 50리브르 투르누아는 그들이 전술한 작업을 끝내면 지불될 것이다. 그들 은 억류의 고통과 감옥생활을 각오하고, 현존하거나 앞으로 생기게 될 그들과 그들의 상속인들이 소유하게 될 동산과 부동산을 우리 주 예수와 모든 정의로운 사람들의 판 단에 맡기면서 간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해야한다. 즉 그들 형제는 각각 전 술한 방법에 따라 완벽하게 완수하고 성공적으로 끝마무리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 떤 결점이나 편차, 혹은 편차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를 어길 시에는 변상과 함께 그로 인한 모든 비용과 손해를 그들이 책임져야 한다. 이 와 관련한 모든 사항에 대해서 전술한 형제는 이 문서와 조항에 상충하는 모든 지역적 인 관례와 인습들, 그리고 성주나 주임사제의 권위에 의존하는 행위, 상소, 기타 다른 모든 반대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중단한다는 식의 법적 근거를 상 실한 선언도 포기해야 한다... (에콜 데 샤르트르의 장서), 1862년(맨 앞의 첫 단락은 스티븐 머리가(트루아 성당의 건축)(1440년)에서 번역해 놓은 것임) 루앙의 생투앙 수도원 교회에 대한 보고(1440년) 생투앙 수도원 교회의 교차탑을 떠받치고 있는 교각 네 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다룬 아래의 상세한 보고서에 의하면, 아버지 알렉상드르의 후임으로 이 교회 의 건축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건축가 콜랭 드 베른발은 이 사태에 관하여 어떤 책임 도지지 않게 되었다. 다음은 각각 루앙 참사구에서 만인의 왕이신 우리 주님을 위해 일하는 석공장인 시몽 르 누아와 주앙 윌메, 루앙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전술한 마을의 예배당 건설 책임자 인 주앙송 살바르, 주 예수의 간사인 주앙 룩셀, 석공장인 피에르 방스가 작성한 보고 서이다. 앞에서 말한 사람들은 모두 탑의 기둥 네 개와 커다란 횡단 아치 네 개가 받 치고 있는 그 엄청난 무게를 생각할 때 그들의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 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생투앙 성당의 대수도원장과 수도원 부원장, 집행관, 곡물창 고의 감시인, 그리고 전술한 생투앙 성당의 공사 책임자에게 이미 보고를 한 바 있다. 이 기둥들은 외진 쪽이 지지대에 의해 받쳐져 있지 않다. 그 결과 기둥들은 그 위치에 서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어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전술한 기둥이나 커다란 횡단 아치 가 약간이라도 움직인다면 교회의 탑과 성가대석이 연이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러 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술한 장인들과 인부들은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이 미 공사가 시작된 외진의 지지대를 완성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조언한다. 그래야만 탑의 기둥들과 횡단 아치, 그리고 인접한 기둥들이 서로 단단히 결합되어 안전해진다 는 것이다. 장인들과 인부들의 이러한 보강 작업을 빨리 수행하기 위해서 성찬배등 값 비싼 물건을 팔거나 저당 잡아서라도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다. 그렇게 해야 공사가 빨리 진행될 수 있고, 그만큼 교회가 안전해진다는 논리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도 위험한 상태에 놓 여있다는 것이다. 전술한 보고를 들은 공사의 책임자는 곧바로 장인들과 인부들에게 이 보고를 양피지에 기록하고, 거기에다가 그들의 서명이나 왕실사무소에 갈 때 사용 하는 인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대수도원장과 수도원 부원장, 집행관, 곡물창 고의 감시인, 그리고 전술한 생투앙 성당의 공사 책임자들이 모두 입회한 자리에서 그 는 자신이 공사와 관련된 직무에서 손을 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부실하게 지어 진 교회에 어떤 재난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 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의 보고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수도원장과 전술한 수도사들에 의해 미래에 그들의 것이 될 교회의 건설 공사에 석공으로 임명된 콜랭 드 베른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인이 된 그의 아버지 알렉상드르 드 베른발 역시 생전에 는 같은 공사를 맡아서 했었다. 전술한 콜랭 드 베른발은 훗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 기 위해 전술한 보고서의 복사본 한 부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 보고서는 은 총의 해인 1440년 1월 23일 월요일에 작성되었다. (에콜 데 샤르트르의 장서), 1862 년 건축기술 11세기 전반에 자신들의 능력을 재량껏 펼쳐 보인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창조 적 예술가일 뿐만아니라 탁월한 기술자임을 입증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난제들을 극 복하는 새로운 해결책들을 고안해 냈다. 곧 그들 중 몇몇은 전문적인 감정작업에 몰두 하기 시작한 것이다. 캉브레 성당의 재건(게스툼 폰티피쿰 카메라켄시움, 1023-1030년) 당대의 다른 건축주들과 마찬가지로 캉브레 성당의 주교인 제라르1세도 강철같은 의 지로 불운을 극복해 나갔다. 주교인 제라르가 처음으로 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 성당의 수도원 건물이 사람들이 묘사한대로 규모가 작다는 것을 확인하고 예전에 세워진 벽들이 갈라지지 않 았는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신의 가호로 수 도원을 좀더 만족스러운 상태로 만들리라는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가 강림하신지 1023년째 되는 해까지는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그는 안팎으로 분쟁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의 자비를 믿는 그는 여러 충직한 지도자들로부터 용기를 얻어 예전에 지어진 벽을 허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요한 자금이 확보되자 그는 엄청난 난제를 안고 있던 한 건물의 재건설에 자신의 모 든 정력을 바쳤다. 그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으로 인하여,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인하여 자신이 그 공사를 완성하지 못한채 미완성인 공사장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 하였다. 그는 건설계획을 지연시키는 장애요인 가운데 하나가 기 둥을 운반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서 잘려진 기둥은 21km나 되 는 먼곳에서부터 운반해 와야만 했다. 그는 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며 그는 여러 곳의 땅 믿을 조사했다. 자신을 믿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신의 도움으로 그는 마침내 도시에서 6. 4km정도 떨어진 레뎅이란 마을에서 긴 구덩 이를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기둥으로 쓰기 적합한 돌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만 돌이 있었던게 아니었다. 그 근방을 파보니 니젤라라는 지역에서 기쁘게도 또 다른 종류의 질이 좋은 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견을 하게된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들리고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신성한 작업에 몰두했다. 결국 그는 신의 자비 로 7년이 지나자 이 거대한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바로 이 해가 주 예수가 강림하신 지 1030년째 되는 해이다. 빅토르 모르테, (건축사에 관한 문헌 모음집), 1911년 생토메르 성당 근방의 아르드르성의 건설(아르드르 출신의 랑베르의 연대기, 1060년) 모든 건축에는 파괴가 동반된다. 다음의 예는 셀레스의 모든 건물들이 다른 곳으로 자 리를 옮긴 경우이다. 부르고뉴의 백작 와스타스의 집사인 아르누는 어떻게 셀레스의 모든 건물을 아르드르 의 높은 성으로 옮겼는가? 부르고뉴의 백작 외스타스의 집사 아르누는 만사가 잘 풀리 는 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르드르 근방의 방앗간에서 넘어지면 코가 닿을만큼 가 까운 곳에 자리한 늪지대에 두 개의 수문을 만들었다. 늪지 한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수문 사이에는 많은 물로 채워진 깊은 진흙창이 있었다. 늪지는 언덕의 아래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요새로 쓰이는 상당한 높이의 둔덕을 강화했으며 성벽과 제방위 로 솟아 있는 '아성'을 보강했다. 그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언덕과 숲 사이에 위치한 이 요새의 아성을 짓는 데 쓰 일 자재는 훈련받은 곰이 운반해 왔다고 한다. 제방으로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어떤 장소에 행운의 부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도 있다. 그 부적이란 바로 한 덩어리의 순금 이라는 것이다. 아르누는 요새의 외곽에 매우 견고한 도랑을 파서 방앗간이 요새 안으 로 편입되도록 하였다. 곧 부친이 예전에 세워 놓은 계획에 따라 아르누는 셀레스의 모든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리와 출입구를 비롯해 모든 필수적인 구조물을 갖춘 아성을 아르드르에 지었다. 이날부터 셀레스의 많은 주택들이 허물어졌으며 모든 건물들이 철 거되어 아르드르로 옮겨졌다. 그날이후 셀레스에 대한 기록은 그곳에 있던 거대한 성 이 없어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아르드르에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어디에서나 아르누가 아르드르의 보호자이자 군주로 영원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빅토르 모르테 (건축사에 관한 문헌 모음집), 1911년 기욤 드 상에 의한 캔터베리 성당의 재건축(캔터베리 성당에 대한 저바스의 연대기) 1174년 캔터베리 성당의 동쪽 끝이 화재로 파괴되었다. 이 화재는 저바스라는 이름의 수도사에 의해 목격되었다. 저바스는 그후 10년간 지행된 재건축에 대하여 기록을 남 겼으며, 여기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완벽하고도 생동감 넘 치는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전승되어 오는 중세의 건축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정보가치 가 높은 것이다. 한편 수사단은 어떤 방법으로 불타버린 교회를 복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조언 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진착이 없었다. 교회의 기둥은 화재의 열기에 너무나 도 약했고, 비늘처럼 얇게 조각조각 떨어지는 데다 세우기가 배우 힘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여서 아무리 지혜를 짜내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힘들었다. 프랑스와 영 국의 건축가들이 소집되었만 이들 역시 의견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전술한 기 둥들을 위쪽 벽에 손상을 주지 않고 복구할 수 있다고 했다. 또다른 이들은 안전을 위 해서 교회전체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주장을 듣고 수도사들은 깊은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그들의 말대로 한다면 자신들의 생전에 이런 대규모의 공사가 완성되는 것을 보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숙련공들 가운데 기욤 드 상이라는 활동적이고 민첩하며 목재와 석재 모두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수도사들은 활기차고, 독창성도 있어 보이고, 좋은 평판 을 지닌 그를 채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되돌려 보냈다. 마침내 공사는 그에게, 그리고 신의 섭리에 맡겨졌다. 수도사와 많은 날들을 함께 보내며 불타버린 벽의 위아래, 안 팎을 유심히 관찰한 그는 한동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소심해 진 수도사들에게 더욱 큰 절망만 안겨 줄지 몰라서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과 다른 실 무자의 힘을 빌려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 나갔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안정 감 을 되찾았을 때, 수도사들에게 안전하고 탁월한 건물을 원한다면 화재로 갈라진 기둥 들을 비롯해 모든 것을 허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수도사들은 그의 이성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사들은 그가 약속한 훌륭한 건물을 원했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안전한 건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의 주장에 동의했다. 또 내키 지는 않았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성가대석을 허무는 작업도 승낙했다. 그는 바다 건너 에서 돌을 수입하는 일에 착수했다. 또한 그는 배에서 짐을 싣고 부리며 시멘트나 돌 을 들어올릴수 있는 독창적인 기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는 돌의 모양을 잡아주는 형판을 조각사들에게 보내어 같은 모양의 돌을 준비하도록 했다. 마침내 성가대석은 허물어졌다. 그렇지만 그 해에는 그외에 더 이상 다른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 건물은 옛 건물과는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선 옛 건물에 대해서 말하자면, 국민 적인 존경을 받는 가수인 에드머는 자신의 소곡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옛 건물에 대해 묘사하였다. 그는 대주교 랑프랑이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 이 건물은 무 너져 잿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고 노래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교회는 세 번이나 불 로 인한 재난을 입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신성한 순교자 엘페즈가 야만적인 데인 인 들에게 사로잡혀 수난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을 때이다. 두 번째는 카앵의 수도원장이 었던 랑프랑이 캔터베리 성당을 관할하게 되었을 때이고, 세 번째는 대주교 리처드와 수도원 부원장 오도가 떠났을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낡은 건물이 해체와 경이로 운 새 건물의 건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또 우리의 거장 기욤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기욤은 내가 앞에서 밝힌 것처럼 새 건물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낡은 건물을 허물었다. 첫해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보냈다. 다음 해 가을해 성 베르탱 축일(1175년 9월 5일)을 지낸 뒤 그는 양 측면에 두 개씩 네 개 의 기둥을 세웠고 그 겨울을 지낸 후(1176년)에는 두 개를 더 세워 각각의 측면에 세 개씩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들과 측랑의 외벽위로 그는 아치와 원형지붕을 덮어씌운 뒤 각 기둥을 중심으로 세 개씩 구획을 설정했다. 세 번째 해(1176/7)에 그는 양 측면 의 끝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성가대석과 수랑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종석과 원형지붕을 씌운 뒤 그는 이 부분에 큰 탑에서 전술한 기둥까지 이르는 낮은 트리포리움을 결합시켰다. 수랑에 해당하는 부분은 대리석 기둥으로 치장되었다. 다음 에는 수랑에 해당하는, 큰 원형천장 아래쪽에 설치된 기둥 사이 세 구획들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우리를 비롯해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 비할 수 없이 값진 것으로 여겼다. 우리를 즐겁게 만든 이 찬란한 시작을 보면서 우리는 공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 번째 해가 지나가고 네 번 째 해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 해의 여름(1178)년이 되자, 그는 왜진의 공사를 시작하 며, 측면의 각각 다섯 개씩, 총 열 개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 두 개는 나머지 두 개의 주 기둥에 부합하도록 대리석으로 치장하기도 하였다. 이 열 개의 기둥위로 아치와 원형 천장이 씌워졌으며, 이어서 양 측면에 트리폴이아와 윗부분의 창이 완성 되었다. 다섯 번째 해가 시작될 즘 그는 큰 원형천장을 옮기는 기계를 준비하고 있었 다. 그때 갑자기 대들보가 그의 발밑에서 꺼지는 바람에, 돌과 목재가 15m높이의 천 장 기둥머리에서 무너져내려 그를 덮치고 말았다. 이 사고로 그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가 다시 작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욤 외에는 그 누구도 경미한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오직 이 거장에게만 신의 복수, 혹은 악마의 분 풀이가 퍼부어진 것이다. 기욤은 한동안 병상에서 치료를 받으며 부상에서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건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에 겨울이 다가오자 원형 천장의 공사를 서둘러 끝내야했다. 기욤은 석공들을 관리해 오던 재간 있고 부지런한 한 수도사에게 자기대신 공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 문에 그 수도사는 많은 질투와 앙심을 사게 되었다. 기욤은 병상에 누운채로 그에게 작업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해서 네 개의 주기둥 사이의 구획들이 완성되었다. 그중 두 개는 겨울이 오기 전에 형태를 갖추었지만,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다시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4년이나 소요된 이 작업은 그 해에도 완전히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5년째로 접어들게 되었다. 햇수로 4년째에 되는 날에서 여덟번째 날, 즉 9월 13일 여 섯시경에 일식이 있었는데,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욤이 사고를 당했던 것이 다. 그곳에서 계속 치료를 받아봐야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기욤은 작업 을 포기하고 자신의 조국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그의 뒤를 이어 공사를 맡은 사람 은 영국출신의 윌리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몸집은 작았지만 다방면의 재능을 지니 고있었으며 꼼꼼하고 정직하게 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5년째 되던 해 여름(1179)에 그는 북쪽과 남쪽의 수랑을 완성하였으며, 그 전해에 내린 비로 작업이 중단되었던 대 제단 위의 원형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또한 동쪽 교회의 확장공사를 위한 기초를 다졌 다. 그곳에는 성 토마스의 예배당의 외벽 공사가 끝났는데, 그 높이가 원형천장의 굴 곡진 부분까지 육박하였다. 월리엄은 벽 바깥쪽으로 탑을 하나 짓기 시작했는데, 좀더 높이가 낮은 그것의 원형천장은 겨울이 되기 전에 완성되었다. 납골당에 묻혀 있는 성 토마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느라 그때까지 건드리지 않았던, 전술한 성 트리니티 예배 당의 윗부분에 있던 성인의 시신은 미리 다른 곳으로 옮겨, 그의 행적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7월 8일에 철 거한 성 트리니티 예배당의 재단을 자재로 삼아 예언자 성 요한의 재단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성스러운 돌의 역사가 소실되니 않기 위함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화재 이후로 성가대석의 낡은 부분은 대부분 파괴되어 새롭고도 웅 장한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 두 건물 사이의 차이점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옛 건물과 새 건물의 기둥은 형태나 두께 면에서는 거의 비슷하지만 길이가 다 르다. 새 기둥이 3. 7m나 길어졌다. 또 예전의 기둥머리는 소박한 것이었지만, 새것은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옛성가대석 기둥은 22개였지만, 새 건물에는 28개가 있 다. 옛 건물은 아치를 비롯해 모든 것이 소박했고 조각도 정이 아닌 도끼를 사용해 작 업했다. 그러나 새 건물은 거의 모든 부분이 정으로 조각을 하였고, 대리석 기둥이 많 이 세워졌다. 또한 옛 건물에는 성가대석을 덮고 있던 원형천장은 수수한 것이었지만, 새 건물의 원형천장에는 아치형 서까래와 종석이 설치되었다. 옛 건물에는 성가대석과 외진을 가르는 벽이 있었다. 그에 비해 새 건물에는 외진과 성가대석이 그렇게 칸막이 에 의해 구분되지 않고, 네 개의 주기둥이 받치고 있는 커다란 원형천장의 가운데에 세운 종석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옛 건물에는 탁월한 그림으로 장식된 목재 천장이 있 었지만, 새 건물에는 돌과 가벼운 튜퍼로 건설된 아름다운 원형천장이 있다. 옛 건물 에는 트리포리움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새 건물에는 성가대석에 두 개, 교회의 측랑에 한 개가 있다. 이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은 모두 기록보다는 눈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새 건물이 옛 건물에 비해 성가대석의 위쪽 창만큼 높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측랑의 위쪽 창도 마찬가지인데, 이 창들은 대리석 갓돌 위에 얹혀져 있다. 훗날에는 탑 옆에 위치한 성가대석의 폭이 그렇게 좁혀진 이유가 교회 건물의 머릿돌에서 의문으로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 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 다. 그 이유중 하나는 옛 교회의 둘레의 양 측면에 자리한 성 안셀무스탑과 성 안드레 탑 때문에 성가대석의 폭이 직선을 유지하지 못했으리라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성 토머스 예배당이 성 트리니티 예배당이 서 있는 교회의 머릿부분에서 직선으로 세 워지려면 성가대석보다 훨씬 좁아야 한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전술한 탑을 옮기는 것 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탑들을 철거하는 대신, 탑들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만 성가대석의 폭을 직선으로 하였다. 탑에서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가대석 바깥쪽에 위치한, 통행이 잦은 통로의 폭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비스듬하게 이 작업을 진 행시켰다. 반대쪽에서 보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제단의 폭은 세 번째 기둥부분에 서 성 트리니티라 불리는 예배당의 폭과 합쳐질 정도로 좁아진다. 그 너머로 네 개의 기둥이 양 측면에 같은 간격으로 놓여있다. 하지만 기둥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이곳을 지나면 또 다른 네 개의 기둥이 원을 그리며 서 있는데 그 위에 올려진 작품들은 한 곳으로 집결한다. 이것이 기둥들의 배치방식이다. 전술한 탑들로부터 뻗어 나온 외벽 은 처음에는 직선으로 이어지다가 곡선을 그리며 휜다. 그리하여 둥근 탑에서 양쪽 벽 이 만나 끝난다. 이 모든 것을 글로 읽는 것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명료하 고 기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글로 읽다 보면 옛 건물과 새 건물 사이의 차이 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화재가 일어난 지 7년째 되는 해(1181)에 우리의 석공이 한 일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해의 공사에는 새롭고 멋진 납골당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납골당 위에 자리한 측랑의 외벽에는 대리석 기둥머 리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비가 들어온다는 이유로 창을 바꾸려 하지는 않았 다. 또한 안쪽의 기둥도 세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7년째 해가 지나가고 다시 8년째 해가 시작되었다. 8년째 해(1182)에 윌리엄은 여덟 개의 안쪽 기둥을 세우고 아치와 창이 달린 원형천장을 교체했다. 또한 원형천장 밑에 위치한 가장 높은 창의 아랫부분 까지 탑을 올렸다. 9년째 되는 해(1183)에는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작업도 진척되지 않았다. 10년째 되는 해(1184)에는 탑의 위쪽 창이 원형천장과 함께 완성되 었다. 기둥들 위로는 낮은 트리포리움 하나와 높은 트리포리움 하나가 놓여졌다. 로버 트 윌리스 옮김, (캔터배리 성당의 건축이야기), 1845년 1316년의 감정 보고서(샤르트르 성당에 관하여) 샤르트르 성당의 수도참사회원들의 요구로 왕실 석수장인 니콜라 드 숌, 노트르담의 건축가 피에르 드 셸, 파리이 목공간사인 자크 드 롱쥐모에 의해 샤르트르 성당에 대 한 감정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원형천장을 지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네 개의 아치가 양호고 튼튼하다는 것을 삼가 말씀드린다. 또한 아치를 받치고 있는 기둥 또한 양호하 며 원형천장의 꼭대기를 받치고 있는 종석 역시 양호하고 튼튼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 다. 그리고 원형천장의 반 이상을 벗겨 내는 작업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비계를 유리 위쪽의 트레이서리로부터 떼어 내어 성가대석과 중앙 홀 사이의 높은 주 랑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밑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비계는 원형천장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 필요성 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교회에서 발견된 결점입니다. 이것은 노트르담 건축가 피에르 드 셸, 왕실 석수장 니콜라 드 숌, 파리의 목공간사인 자크 드 롱쥐모 세 사람이 이탈리아 출신의 수사신부인 장 드 르아트, 목수인 시몽, 전술한 공사의 임원인 베르토가 참석한 가운데 수석사제의 명령을 받아 표명한 견해입 니다. 하나, 외진의 원형천장을 살펴보니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서둘러 시작하지 않으 면 커다란 위험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원형천장에 인접해 있는 플라잉 버트레스(부벽과 주 건물을 연결한 벽받이:역주)를 보았는데 이것을 강화할 필요가 있 습니다. 이것이 즉시 수행되지 않으면 많은 손상이 연이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 탑들 을 지지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수리가 필요합니다. 하나, 현관의 기둥은 수리가 필 요하며 양 측면의 개구부에는 지지물을 놓아 위쪽에 놓인 것을 받쳐 주어야 합니다. 바깥쪽으로는 문설주 하나가 모퉁이 기둥의 밑동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나머지 문설주 들은 교회의 몸체 부분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지지물을 세우면 이러한 압력이 약화될 것이며 필요한 부착물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우리의 책임 자인 베르토에게 막달레나상을 움직이지 않고 보수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 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 우리는 커다란 탑(남쪽 탑)을 보고 중요한 보수가 실제로 필요하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측면의 한쪽이 갈라져 있으며 작은 탑 중 하나가 부서져 떨 어져 나가기 직전입니다. 하나, 정면 현관의 결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덮개가 깨어져 조각이나 버렸기 때문에 금속장부로 서로를 연결하면 지탱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 다. 이것은 고정이 잘되기 때문에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우리응 첫 번째 비계를 창의 트레이서리에서 떼어 내면 외진의 원형천장에서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 작은 천사상을 지지하고 있는 기둥이 완전히 썩어 있기 때문에 성직자용 본당의 다른 기둥과 연결할 수 없습니다. 본당의 기둥은 서까래가 모여 있는 윗부분이 부서져 있습니다. 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두 개의 지붕틀을 제단 후방의 반원형으로 된 부분에 연결시키고, 작은 천사 상은 이 지붕틀 가운데 하나에 얹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술한 마룻대 위에 올려진 서 까래의 상당 부분을 안쪽으로 집어 넣어야 합니다. 하나, 작언 성자상이 놓여 있는 종 루는 매우 낡았습니다. 큰 성자상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은 손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 대성당의 지붕엔 네게의 장부가 필요합니다. 지금 것은 한쪽 끝이 썩어 있습니다.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각하의 기술자들에게 말한 방식에 따 라 수리해야 합니다. (에콜 드 샤르트르의 장서)중 아르부아 드 쥐벵비유의 편집에 의 한 글, 1862년 트루아 성당에 쓰인 전문기술에 대한 기록(참사회원들의 협의, 1362년) 트루아 성당의 대한 기록은 건축가들 이 직면한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 준다. 아래 기 록은 석공장인 피에르 페상이 1362년 12월 성 마르티누스 축일 다음의 토요일에 트 루아 성당을 방문하여 쓴 것이다. 제1항:낮은 원형천장에 설치된 모든 홈통을 새로 설 치해야 합니다. 제2항:이무기돌 옆 엔태블러처가 설치된 많은 장소의 보수 또는 교체 가 필요합니다. 제3항: 존경하는 주교님의 예배당에서 안뜰(성가대석의 남쪽) 쪽으로 플라잉 버트레스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홈통 위로 뻗어 나가 기와의 위쪽 을 지나 첫 번째 첨탑의 기초부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개의 플라잉 버트레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4항:석공장 주앙 드 토르부아예의 새 건물을 본 전술항 책임자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너무 높다는 것 외에는 결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는 전술한 건물을 모퉁이에 세워진 첨탑 정도의 높이로 허물고 이전의 석조물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전문가로 서 그는 이 작업에 드는 비용을 250플로린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5항:그 밖에 부주교 의 사택으로 이어지는 새 플라이 버트레스에 대해 한가지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회반죽과 시멘트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서, 필요했다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했습니다. 몰라도 이같은 상황에서 이보다 더 강력하고 효 과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습니다. 제6항:높은 홈통의 난간기둥이 조각났 기 때문에 물이 벽을 타고 내려옵니다. 제7항:통로의 많은 연결부분에서 빗물이 타고 내려오므로 보수를 해야 합니다. 제8항:종루에 달린 네 개의 홈통의 자리를 잡아 주어 야 합니다. 그 지점은 플라잉 버트레스 위쪽의 연결부위입니다. 이곳에 주요한 결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보수해야 합니다. 제9항:필요하다면 전술한 책임자들은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당신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스티븐 머리가 번역한 (트루아 성당의 건 축)(1987년) 중에서 밀라노 성당의 건축에 대한 보고 1386년 착공된 밀라노 대성당은 그 규모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롬바르트의 건축가 들(이 문헌에서 '책임자'들로 지칭되는 이들)은 그 공사를 부담스러워 했다. 1399년 이 공사의 책임을 맡게 된 프랑스인 장 미뇨는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에 대항하여 여러 건축가들이 반박을 펴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1400년 1월 25일 일요일. 석공장인 장 미뇨는 이곳 평의회에 출두하여 자신이 전술한 건물에 내구성이 부족하다고 보는 모든 이유와 근거를 날짜가 기입된 편지를 통해 밝 혔음을 진술했다. 그는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전술 한 석공장 장 미뇨는, 이전에 자신이 서면으로 제시했던 내용과 특히 전술한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서 교회를 둘러싼 부벽 전체가 내구성이 결여되어 그 위에 얹혀진 것을 지지할 힘이 없으며, 따라서 부벽은 교회 내부의 기둥보다 세 배는 두꺼워야 한다는 점을 밀라노 성당의 건설평의회 책임자들에게 존경과 진실의 이름으 로 주장했다. 이에 대한 책임자들의 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진술과 관련하여 책임자들은 전술한 교회의 모든 부벽은 내구성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몇 배나 무거운 무게라도 문제없이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이유로 부벽에 사용한 대리석인 브라치오와 사리티움은 그 두께에 관계없이, 미뇨가 증거로 제시한 프랑스 교회에 사용된 브라치오보다 두 세배 이상 강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 술한 부벽이 교회 내부의 기둥들보다 지금처럼 1. 5배만 두꺼워도 내구성이 있으며 정 확히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보다 좀더 두꺼워진다면 교회의 돌출부 때문 에 전술한 교회가 어두워질 것인데, 이러한 예는 석공장 장 미뇨의 양식대로 지어진 파리 교회의 부벽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이러한 부벽에 장애가 될 요 인 많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뇨는 전술한 교회의 외진의 탑을 지지해 줄 네 개의 탑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탑들을 지지해 줄 기둥이나 기초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 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위치에 놓인 탑들을 가지고 교회가 세워진다면 분명히 붕괴 되리라는 점도 지적했다. 또한 뾰족한 원형천장이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보다 강하고 붕괴 위험이 없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그것이 몇몇 무식하고, 열정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무책임하게 제기된 의견이라고 반박했다. 그들이 내놓은 제안들은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고집만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기하학이라는 과학이 예술과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하여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장 미뇨는 과학 없는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며, 천장이 뾰족하든 둥글든 그것들의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에 부가하여 천장을 아무리 뾰족하게 만든다 해도 이것들은 엄청난 무게와 추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책임자들은 그 들이 탑들을 그런 모양으로 만들고자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로 전술한 교회와 수랑을 통합하여 기하학적인 요구를 따르는 직사각형 모양을 만 들려는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수랑탑의 힘과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것이었 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이같은 형태로 천국의 왕좌 중간에 앉아 계시며, 왕좌의 주변에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신들이 그 공사에 착수한 이유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 성구실에 있는 두 개의 기 둥들이 기초공사 없이 바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내구성이 있 는 이유는, 전술한 기둥들이 세워지는 돌출부가 커다란 돌로 만들어졌으며, 앞서 밝힌 대로 쇠못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 세 개의 탑들은 정확하고 튼튼하게 지어질 것이며, 탑들에 가해지는 하중은 사각형 위로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수직재는 붕괴하지 않는다면서, 이 탑들은 그 자체로 강하며 그 때문에 이 탑들에 둘러싸인 외진이 탑에 내구성을 부여해 준다고 말했다. 미뇨는 그들이 주장하는 가설은 모두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들은 전술한 교회와 공사 에 정당함과 개선을 원하기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거나, 두려움이나 다른 장애로 부터 도피하고자 하므로, 실제로 결점이 발견되어도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려 들 것이 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술한 거장 장 미뇨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부터 이런 문제에 정통한 네 명 내지 여섯 명, 또는 열두 명의 더 우수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술한 건물은 확실히 붕괴될 것이며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막대한 손실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책임자들은 같은 진술에서 다 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장 미뇨가 기하학을 거론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이 작업에서 언급될 문제가 아니라고 응수했다. 그들은 미뇨가 기하학의 원칙을 들먹 이지만, 흔히 운동력이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에서의 인간 운동은 직선이나 곡선, 아니면 이 두 개가 혼합된 형태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신체가 완벽하게 삼등분되듯이, 이 교회가 올려지는 운동과정 역시 다른 기술자들이 결정한 삼각형법 (ad triangulum)에 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직선이나 아치의 형태로부터 기하 학의 원칙과 경험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결정되었노라고 말했다. 또한 미뇨는 예술없는 과학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마는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다른 진술에 마련되어 있다고 말했다. 1400년 2월 회의가 소집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유명한 건축가 들이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1400년 2월 21일. 밀라노 대성당의 대주교를 찾아 많은 대리인들과 성당참사회원들이 그의 저택으로 왔다. 그들 가운데에 는 세 명의 프랑스인 기술자인 시몬튀스 니그뤼스, 조안 사노메리우스, 메르메튀스 드 사방디아(사보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먼저 이 문제에 관하여 전술한 고귀한 분들로부터 그들이 보기에 이 교회에 가해지는 하중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을 것 같냐 는 질문을 받았다. 전술한 기술자와 석공들인 우리는 전술한 교회의 모든 것을 관찰하 고 조사했음을 밝혀둔다. 우리는 특히 노출된 기둥 두 개의 기초부분을 살펴보았다. 이 기둥들을 지지하고 있으며 전술한 교회의 후진과 접해 있는 기초부분은 매우 부적 절하고 허술하게 놓여졌다. 이 기둥들 가운데 하나는 건물 쪽으로 한 발짝 이상 잘못 들어가 있으며 자재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전술한 교회의 안팎으로 놓인 기둥들은 맨 아래까지 조사할 필요가 있으며, 전술한 것처럼 잘못 놓여진 것은 제대로 놓여진 커다 란 석재 받침 위에 다시 설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토대는 제대로 수평을 맞 추어서 계획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다른 기초들과 잘 맞추어 지지되어야 한다. 또한 석회액이 사용되어야 한다. 이 기초부분들은 기둥 초석들의 수직선과는 2브라키아 이 상 떨어져야 하고, 단벽의 표면과는 1브라키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 도한 전술한 교 회의 후진 외부에 위치한 전술한 두 개의 기둥이 지닌 내구성이 하중을 지탱하기에 충 분한가도 검증되어야 한다. 우리는 두 개의 기둥으로 두 개의 플라잉 버트레스를 지지 한다면 그 교회는 지금보다는 좀더 내구성이 부여될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 바이다. 또 한 전술한 교회의 다른 모든 기둥들이 만족스러운 상태인가가 검토되어야 한다. 우리 는 그것들이 지금 닷 l만들어진다면 좀더 나을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또한 전술한 모 든 기둥들이 지금 상태에서 그들이 떠받치고 있는 하중을 지지하고 연결할 수 있는지 가 검토되어야 한다. 몇몇 기둥들이 제대로 정렬되어 있지 않았는데, 좋은 석공들이 투입된다면 기둥머리 위의 쇠시리와 축받이를 교체할 수 있을 것이며 쇠시리를 적절하 고도 가볍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교회의 성구실 모퉁이에 자리한 기 둥의 원형 개구부에 균열과 구멍이 나있다는 것을 밝힌다. 이 때문에 성구실과 예배당 의 천장에서 빗물이 타고 내려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것을 막고 시멘트를 바 른 후 새로운 홈통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몬튀스 니그뤼스, 조안 사노메리우스, 메르메튀스 드 사방디아(서명) 1400년 5월 8일. 하나님과 동정녀 마리아의 이름으로 1400년 5월 8일 나, 노바라의 베르톨리노는 저명하고 가장 고귀한 왕자인 공작 각하의 명령을 받고, 성모 마리아 교 회의 건설을 의뢰받고 참여한 몇몇 건축가들 사이에 벌어진 견해차를 조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전술한 공사의 관리자는 이러한 논쟁과 견해들을 서면으로 보내 주었다. 나는 이것들을 검토했으며 지금은 전술한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석공과 기술자들과 함께 머물고 있다. 이것은 의견의 불일치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전술한 기초부분을 일정 깊이까지 파 보았다. 이로써 건설과정과 관련하여 제기된 의혹들이 분명해졌다. 간단히 답하자면 교회의 기초부분은 좀더 정확한 비율을 지녀야 한다. 이 것은 지상의 몇몇 부분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교회의 아름다움을 과소평 가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이 교회는 매우 아름답고 커다란 건물로 찬양 받아 마땅하 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 건물이 영구적인 내구성을 가지려면 다음의 몆 가지가 보강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로 전술한 교회의 폭과 넓이를 감안하면 교회 본체의 부벽이 필요한 만큼 크지 않다. 따라서 본당은, 다른 예배당과의 사이에 칸막이를 설 치해야 하며, 양 측면에 성채를 볼 수 있는 창이 달린 예배당 형태로 축소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세 개의 본당에 최대한의 내구성이 보장될 것이다. 위로 솟아 있는 아치를 감안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기초를 보다 견고하게 해줄 것이고, 또한 교 회의 본체는 외진의 크기와 잘 어우러져서 훨씬 아름답고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 리고 교회 후진에 교회 묘지 쪽으로 예배당을 하나 만들 필요가 있다. 오른쪽 두 개의 부벽에 밀착될 이 예배당은 가능한한 작게 만들 동시에 이미 세워진 건물에 피해를 주 지 말아야 한다. 이 예배당은 내구성이 더 강해질 것이며 그 영역 안에 공작 각하께서 원하시는 무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덤이 설치되는 이 영역과 더불어 예배당은 곧게 놓여져야 한다. 성가대석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G. 홀트가 편집한 (예술의 기록사)(1957-1958) 중에서 베네치아의 건축가 베르나르도, 노비라의 건축가 베르톨리노의 글 포서링 교회의 신랑 건설을 위한 계약 노샘프턴에 위치한 포서링게이 교회는 15세기에 대학교회의 역할을 하기 위해 에드워 드 3세의 아들에 의해 재건설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성가대석이 제일 먼저 건설 되었으며, 1435년에는 신랑의 건설이 착수되었고 윌리엄 호우드라는 건축가와 계약이 맺어졌다. 윌리엄 호우드의 재건축 방식은 이미 지어져 있던 성가대석(지그은 사라지 고 없다)의 디자인을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계약은 대지주인 윌리엄 월스턴, 고결하고 막강한 권세를 지닌 왕자의 행정관인 성 직자 피텀, 그리고 나의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인인 요크 공작과, 자유 신분의 석 공으로서 포서링게이에 거주하는 윌리엄 호우드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 계약서에는 윌 리엄 호우드가 성가대석과 연결되어 있는 포서링게이 대학교회의 신랑을 전술한 성가 대석과 똑같은 폭과 넓이로 새로 짓는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길이는 전술한 성가 대석의 밑부분으로부터 24m이며 벽과 벽사이는 0. 9m 두께로 짓는다. 또한 이 계약에 서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는 전술한 식량의 지반공사를 맡기로 했으며, 굴착공사와 더 불어 이 공사는 자신의 비용으로 치르기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정확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이 공사에 들어가는 자재의 비용은 전술한 각하로부터 그에게 충분히 공급된다. 전술한 신랑에 그는 두 개의 측랑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전술한 방식 에 따라 지반공사와 굴착공사를 해야 한다. 이 두 개의 측랑은 높이나 폭이 전술한 성 가대석의 측랑과 같아야 하며 전술한 신랑의 높이와도 같아야 한다. 같은 신랑과 측랑 의 정원은 잡석 위에 반석을 깔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전술한 신랑과 측랑의 마너지 부분은 모두 말끔히 잘라 낸 마름돌로 외장되어야 한다. 내부는 가공하지 않은 돌로 짓되, 의자와 탁자 부분, 창의 문턱, 아치와 단대공을 지지하고 있는 기둥과 기둥머리 는 여기에서 제외되어 정성을 다하여 세공되어야 한다. 각각의 측랑에는 전술한 성가 대석과 모든 점에서 같은, 쉽게 잘라지는 암석으로 만든 창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창에는 원형 쇠시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전술한 두 측랑의 서쪽 끝에는 전술한 측랑 의 창에 어울리는 채광부분이 네 개 있는 창을 하나 설치해야 한다. 각각의 측랑에는 절단하기 쉬운 암석으로 만든 사각의 총안흉장이 설치되어야 하며 각 끝은 첨탑과 맞 닿아야 한다. 전술한 각각의 측랑은 절단하기 쉬운 돌을 깔끔하게 잘라 만든 여섯 개 의 커다란 부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각각의 부벽은 작은 첨탑으로 마감되어야 하며 이것은 전술한 성가대석의 첨탑과 일치해야 한다. 신랑의 부벽만은 전술한 성가대석의 부벽보다 좀더 크고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채광층은 안팎이 모두 깨끗이 절단된 마름 돌로 지어져야 한다. 이것은 열 개의 커다란 기둥과 네 개의 대응주(벽에 붙은 기둥: 역주)에 의해 지지되어야 한다. 즉 위쪽의 기둥 두 개는 성가대석과 연결되어야 하고 아래쪽 두 개는 전술한 본당의 끝부분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술한 성가대석의 대응주 두 개는 절단하기 쉬운 돌로 말끔하게 세공된 두 개의 관석(벽을 뚫고 양쪽으 로 내민 돌:역주)으로 성가대석의 중앙문의 양쪽과 결합되어야 한다. 벽마다 세 개씩 조명과 성수반을 설치하여 네 개의 재단-전술한 성가대석의 중앙문 양쪽에 하나씩, 그 리고 전술한 측랑의 양 측면에 하나씩, 그래서 제단은 총 네 개가 된다-에 설치하여야 한다. 전술한 각각의 측랑에는 첨탑 위쪽으로 다섯 개의 아치가 세워질 것이다. 또한 각각의 창에는 채광구가 네 개씩 뚫려야 하는데 이것은 모든 점에서 전술한 성가대석 의 채광층과 같아야 한다. 또한 전술한 각각의 측랑에는 여섯 개의 거대한 아치가 세 워지는데, 각각의 측면은 그 끝이 채광층에 인접한다. 또한 전술한 성대대석의 아치와 일치하는 두 개의 거대한 아치는 전술한 첨탑과 연결된 채 각각 총안장식이 달린 반석 이나 용마루 장식에 세워진다. 전술한 신랑의 서쪽 끝에는 세 개의 단단하고 거대한 석조 아치 지붕 위로 첨탑 하나가 교회보다 높게 세워진다. 전술한 첨탑의 높이는 24m 높이로 반석위로 솟아야 한다. 벽 사이는 1. 9제곱미터가 되어야 하며 벽은 1. 8m의 두께로 전술한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 또한 전술한 신랑의 꼭대기에는 커다 란 문이 달린 구획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같은 첨탑의 서쪽 끝에도 설치된다. 전 술한 첨탑이 전술한 흉장(방어용 낮은 벽:역주)의 높이에 이르면 여덟 개의 판유리를 끼우며, 또한 각 모서리는 전술한 성가대석이나 본당의 것과 동일한 형태의 뾰족탑으 로 마감해야 한다. 전술한 예배당은 커다란 사각형의 총안장식으로 꾸며지게 된다. 또 한 전술한 첨탑의 문 위로는, 첨탑의 대아치와 같은 높이와 신랑과 같은 폭을 가진 창 이 드러나야 한다. 전술한 첨탑에는 두 개의 층이 설치될 것이며, 각 층의 위쪽으로는 벽의 중간에 여덟 개의 채광층이 있어야 한다. 각 층에는 채광구가 세 개씩 있어야 한 다. 또한 첨탑의 바깥 면은 쉽게 잘라지는 돌로 정성스럽게 세공되어야 한다. 이 계약 에 따라 모든 작업을 시연해 보기 위해 전술한 요크 공작은 마차와 돌, 석회, 모래, 밧 줄, 나사, 사다리, 목재, 비계, 기계 등 전술한 작업에 필요한 자재를 모두 가지고 올 것이다. 이로써 작업은 앞서 밝힌 방법에 따라 기일을 엄수하여 성실히 진행되고 마무 리될 것이다. 작업에 대한 대가로 윌리엄 호우드는 전술한 각하로부터 30파운드를 받 게 될 것이다. 이 총액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지불될 것이다. 전술한 교회, 측랑, 부벽, 현관, 첨탑의 기초공사를 위한 굴착작업을 한 뒤, 잘려진 기초반석을 놓고 작업이 잘 진행되도록 바람벽과 돌림띠를 설치하는 작업까지 끝내면 그는 6파운드 13실링 4펜스 를 받게 된다. 또한 기초반석으로부터 0. 3m 높이로 전술한 작업을 안팎으로 모두 마 쳤을 때 100파운드를 받게 된다. 또한 위에서 밝힌 방식대로 0. 3m마다 필요한 부분 을 설치하고 완전히 세공하고 가장 높은 뾰족탑과 전술한 신랑의 흉벽에 이르는 공사 를 완전히 끝내고 나면 30실링을 받으며, 전술한 신랑의 가장 높은 총안장식까지 자르 고 부설하고 쌓아 올리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전술한 건축주와 전술한 윌리엄 사이에 체결된 방식에 따라 모든 작업이 끝나게 되면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는 300파운드를 모두 지불받게 된다. 단 이것은 그가 채무를 지지 않았 을 경우이다. 만약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가 그의 인부에게 완전한 급료를 지불하지 못 했을 경우, 이 공사의 사무관은 인부의 급료로 지불되어야 할 금액을 제외한 약수를 그에게 지불하게 된다. 전술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전술한 각하를 위해 전술한 공사 를 관리하고 감독하게 될 사람들이 작업을 맡아서 할 부설자들을 선택해 일을 시키게 된다. 이 부설자들은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에 의해 앞서 기술한 방식에 따라 급료를 지불받게 된다. 그리고 만약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가 부설자 가운데 두 명 이상에 대 해 부적절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자라고 불만을 늘어 놓는다면, 이 부설자들은 지방의 석공장들의 감독하에 언제라도 심사를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의 과오와 무능력이 입증되면, 전술한 각하의 명령에 따라 전술한 작업을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으로 즉각 교체될 것이다. 또 만약 윌리엄 호우드가 전술한 공사를 합당한 시간 내에 끝내 지 못하면 공사는 각하나 각하의 조언에 따라 앞서 기술한 협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그는 각하의 뜻에 따라 감옥에 넣어지고, 그의 모든 동산과 유산은 각하의 처분과 명 령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증인과 전술한 건축주, 그리고 전술한 윌리엄 호우드는 잉 글랜드 정복 이후 우리의존경하는 군주이신 헨리 6세가 즉위하신 지 13년 되는 해의 9월 24일, 계약을 위해 이 계약서에 서로 날인을 교환했다. 더글러스 크누파와 G. P. 존슨(중세의 석공), 1933년 기계 기계 제작에 관한 문헌은 건축에 관한 문헌보다 그 수가 훨씬 적다. 아를 성당의 기중기 건설(공증인의 초고, 1459년) 앞서 언급한 해(1459)의 6월 7일. 다음 사항을 모두에게 알린다. 고명한 신학자이자, 아를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덕망있는 수도원장인 알지리아리우스 바르토로메이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를에 거주하는 건축목재상인 기요 페리시에게 급여와 지출금을 지불했 다. 이것은 그가 100아를 퀸틀이나 되는 무게를 들어올여 옮길 수 있는, 건축공사에 적합한 새로운 기붕기를 만들어 양질의 목재건물을 지을 수 있게 하는 데 대한 대가이 다. 이것에 의해 들여올려진 자재를 이용하여 전술한 수도회는 신의 영광과 동정녀 마 리아를 찬양, 찬미하며 새 교회를 짓게 되었다. 이 기중기는 전술한 수도회 교회의 공 사를 위해 석재는 물론, 이 교회의 건설에 필요한 여러 자재를 들어올리는 데 사용된 다. 다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기요는 약정한 형태대로 기중기를 성공리에 축조하 기 위해 교회의 작업장에서 6월 한달 간 자재를 모아 놓고 조립에 들어갔다. 기중기는 높이가 8로드(5m)가 되어야 하며 양쪽 면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술한 수도원장 각하는 자신의 비용으로 이에 필요한 모든 지출을 부담하며, 기중기가 설치된 장소를 깨끗이 청소할 의무를 지닌다. 수도원장 각 하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대는 비용과 지출을 기중기에 필요한 모든 철재 부속을 구입 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이 철재부속을 수선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지출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수도원장 각하나 그의 수도원이, 기요에게 그가 처음에 약속했던 형태대로 만들어진 기중기의 대가로 48플로린을 지불하는 데에도 동의했다. 2플로린은 공탁금과 지출비용으로 즉시 지불되고 나머지 46플로린은 15일 이내에 지급하기로 한 다. 일단 기중기가 축조되어 시험을 거치고 나면 이것이 설치된 날부터 그 적합성 여 부에 상관없이 이 금액은 지불된다. 수도원장 각하로부터 공탁금과 지출비용으로 48플 로린 중 먼저 지불된 2플로린을 받은 사실을 기요는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하였다. ... 아를의 시민으로서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뱃사공인 피에르 자캥, 석공인 비용 알베르 나, 그리고 공증인인 나 바레나르 팡조니 등이 증인으로 입회한 가운데 수도원의 도서 관 옆에 있는 회랑에서 아를 성당의 인장이 날인되었다. B. 몽타뉴, (프로방스의 도미 니크 수도원의 건축), 19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