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과 약혼한 마녀  지은이 : 장 미셸 살망  출판사 : 시공사  봉사자 : 김생남  "태생을 보면, 마녀에게는 배우자도 가족도 없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운석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괴물. 누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 마녀는 어디 있는가. 접근이 불가능한 저 어느 곳.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얽히고 설킨 광야의 한끝이 아닐까. 혹은 한밤중 선사의 어느 고인돌 아래쯤. 그녀가 거기 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혼자. 그러니 두렵지 않을 자가 누가 있나. 사나운 불길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이를 믿으랴. 그녀는 그저 한 여인일 뿐인데. 거칠고 무서운 삶이라 한들 그녀가 여자임을 잊게 할까. 연인의 본성을... 모든 것은 사탄에서 비롯하나니, 살아 숨쉬며 저주하는 마녀들이란 사탄의 보금자리. 사람들은 마녀가 두렵다 말들 하지만, 마녀가 없다면 그들은 권태로움에 죽을 것임을 고백해야 하리." - 쥘 미셸레(Jules Michelet),  마법은 암흑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미신 또한 아니다. 마법은 세계와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표상하는 인식양식이다. 마녀들의 집회, 마법의 의식, 이단재판 그리고 화형은 시작과 끝을 가진 하나의 역사이며 아직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15세기 중엽 아라스는 아르투아 백작 영지의 수도로서 번성했던 도시였으며 그랬던 만큼 중세 말기에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직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지 않았지만 부르고뉴공 필리프 르 봉의 봉토에 속하여 거대한 국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1459년 이후 아라스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도시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1459년, 아르투아 백작 령에서 은둔생활자 한 사람과 다른 몇 사람이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은 그로부터 훨씬 전 랑그르에서, 1459년까지 준수되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일반조례에 위배된다 하여 로비네 드 볼스라는 은둔생활자를 마법사로 선고하고 처형한 데서 연유한다. 아르투아 태생 로비네 드 볼스는 처형되기 전에 두 공범자를 밝혔다. 한 명은 인근 마을 두에의 창녀였고, 다른 한 명은 성녀 마리아의 영광을 노래한 시들로 더욱 잘 알려진 아라스의 화가 장라비트였다. 체포되자마자 이들 두 피고인은 종교재판관 피에르 르 브루사르의 요청에 따라 주교회 재판에 두 명이 선임되었다. 아라스 수도회 참사원이며 신학박사인 자크 뒤부아 아라스 주교, 장 드 베이루트가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 지역 최고의 지성인이자 권위자들로서 특히 프란체스코회 장 드 베이루트는 1450년, 로마에서 교황을 대신하여 사면권을 가진 고해신부(엄밀한 의미에서는 한정된 사항에 관해 교황에게 사면권을 위임받은 사면주교대리를 지칭:역주)를 지내기도 했다.  공국의 권위에 힘입어 두 심판관은 정열적 조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었음은 물론이다. 불행한 두 피고인은 자신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주술사라고 자백함과 아울러 여러 명의 공범들을 밝혔다. 1460년 5월, 두 사람은 도시 한가운데에 설치된 화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의 머리에는 악마가 그려진 주교의 모자가 씌워졌고 종교재판관 피에르 르 부르사르는 흥분한 대중 앞에서 그들의 범죄를 공표했다. 이어서 '세속의 정의'를 시행하는 사법심판관에게 그들이 인도되었으며, 예정대로 처형이 진행되었다.  최초의 마법사들은 악마를 경배하는 이단자들, 다시 말해 보두교(Vaudois) 신도들이었다  12세기에 리옹의 상인이던 피에르 발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청빈을 계율로 삼아 성서 중심의 엄격한 그리스도교를 실천하고 설파하던 중 교황의 결정에 따라 이단으로 지목되어 알프스의 험한 계곡지대를 도피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마법의 신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실제 이교도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맨 처음 마법사로 지목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연대기의 편자들은, 그들의 죄목이 무엇이었으며, 재판관의 강요에 못 이겨 그들이 자백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아라스의 보두교 신자들은 악마를 숭배하는 밀교를 형성했다. 그들은 '보두향(Vauderie, 카톨릭 교리와 주술적 요소가 결합된 보두교의 내세:역주)'을 믿었고, 마법의 집회에 갈 때면 특별한 고약을 온 몸에 바르고 다리 사이에 가는 막대기를 끼웠다 - 그렇게 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 먼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라스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숲에서 정기적으로 벌어지던 마법의 집회에서는 거구의 악마가 때로는 숫염소로, 때로는 원숭이나 개로, 또 어떤 때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들을 기다렸는데, 참석자들은 카톨릭에 반하는 주술을 읊어대며 악마를 경배했다. 마법의 집회는 곧 대향연으로 이어지고 통음난무하는 광란으로 끝났다. 집회를 갖는 동안, 그들은 카톨릭 교의를 저버리고 하느님과 삼위일체, 성모 마리아를 조롱했으며 십자가를 짓밟고 예수의 수난상에 침을 뱉았다. 집회는 두꺼비들에게 성찬예식을 행하는 저주의 의식으로 마감되는데, 두꺼비들은 곧 이어 먼지로 변하며 불길한 악의 가루를 만들어 냈다. 이런 집회를 통해 보두교 마법사들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과 동물을 죽음으로 이끌었으며, 폭풍우를 일으키고 전염병을 만연케 했다.  믿기 어려운 이 이야기들은 재판관이 강제로 자백시킨 결과였다. 거짓으로 자백하면 살려 주겠노라던 약속이 거짓이었다고. 자기들이 속았노라고 소리칠 때면 마법사들은 이미 화형대 위에 올라선 다음이었다.  재판이 무르익을 무렵, 도시의 귀족들이 연루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자 아라스의 보두교 사건은 새로운 앙상을 띠게 되었다  1460년 7월, 신흥 상공업자이며 시행정관이던 앙투안 사케스페와 역시 시행정관이던 장 조세, 시치안관 앙리 드 루아빌이 체포되고, 부르고뉴공의 조세징수관 마르탱 코르니유와 또 다른 시행정관 기욤 르페브르는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마을을 떠났다. 이어서 다른 유지들도 소추를 피하지 못하고 투옥되었는데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심지어는 포앵 드 보포르와 같은 귀족들마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법에 연루된 범죄가 하층민과 관계될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실상 지도층 인사들이 이에 결부되자 시의 사회적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국 내에서는 아무도 아라스의 상인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 모두를 마법사로 의심하는 풍조가 생겼다. 그때 기사 보포르의 재심청구에 따라 마침내 관련서류가 브뤼셀로 송부되었다.  필리프 르 봉은 루뱅에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청취한 다음 군사로 하여금 소송의 전말을 감독하도록 했다. 1460년 10월 22일, 아라스 교구청에서 마지막 심리가 열리고 그 자리에서 네 명의 피고가 판결을 받았다. 한 명은 '세속의 정의' 에게 인계되어 처형되고, 나머지 세 명은 비교적 긴 감금형과 무거운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감옥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포앵 그 보포르가 당시로는 형사재판의 최고심이던 파리의회에 재심을 청구했던 것이다. 명문가의 후예였던 덕에 파리에서 든든한 후원을 끌어댈 수 있었던 터라 가능했던 기회였으나, 사실 그 과정에서 온갖 제한과 탄압이 따랐다. 최종심 결과는 아라스의 판관들과 기소자들에게 불리하게 나왔다. 그 사이에 광기가 있던 재판관 자크 뒤부아가 결국 미쳐서 죽었다. 파리 의회는 1491년 최종판결을 공표했는데, 기존의 모든 판결은 무효로 선언되고 아직 생존해 있는 기소자들에게 오히려 벌금형이 내려졌다. 이렇게 거둔 벌금은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해 바칠 특별 미사 비용으로, 또 그들이 사라져 간 형장에 십자가를 세우는 비용으로 쓰였다.  마법은 종교재판을 통해 그 골격이 다듬어진 16세기의 산물이다  마법 탄압은 1420년에서 1430년 무렵 유럽에서, 특히 도피네 지방,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의 알프스 일대, 그리고 쥐라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13세기 이래로 보두아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마법이라는 신화는 이교도들과 마법사들을 추적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던 종교재판관들이 그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아라스의 보두교 사건은 종교재판의 효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취조의 비결과 시기적절한 고문의 사용 -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 앞에 열 다섯 번씩이나 가해졌다는 보고도 있다 - 에 힘입어 종교재판관들은 그토록 많은 마법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라스 사건의 독특한 성격은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개가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종교재판관은 마법사를 지목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반면 행정관청은 마법이 그토록 빨리 전염된 데 대해 일단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사실 마법사에 대한 소추를 중단시킨 것도 필리프 르 봉이었다. 루뱅의 신학자들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라스 법정의 세속적인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파리 의회는 피고들을 복권시켰다.  15세기 말은 마법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확산되는 한편, 대규모 마녀사냥을 벌이기 위한 사법적 장치가 정비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마법사에 대한 쓸데없는 공포와 편견에 대항하고자 만만찮은 저항세력이 구축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톨릭에 대한 이 같은 최후 저항세력도 머지않아 무너지고 만다.  마법이란 진정 무엇이었던가? 가장 관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특벽한 능력이었고 가장 심하게 말하자면 반종교였다  마법사(le sorcier)란 상징이나 의식을 통해 타인의 운명(라틴어 sors는 '결과 sort' 또는 '운명 destin'을 의미한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는 '저주하다(jeter un sort)'에서 그 동의어가 파생된 주술(sortilege)과 주문(malefice)이다. 이탈리아어 fattura(hecir는 프랑스어의 faire)도 물론 저주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만 15세기 초부터 마법사란 단어의 의미도 한결 간명하게 변하여, 그들 능력이 악마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전달되었다.  마법은 최소한 공론가들의 눈에는 이처럼 반종교의 상징으로 보였으며, 마법에 능한 자들, 곧 마법사들이란 악마를 경배하는 자들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지 못할 것이 없는 존재, 따라서 시대의 모든 불행을 몰고 오는 악마요 사탄이 되었던 것이다. 악마의 이미지를 마법사의 이미지로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은 몰락하는 중세의 또 다른 특성이기도 하다.  선의 담지자로서의 신과 악의 담지자로서의 악마가 세계를 둘러싸고 서로 투쟁한다는 생각은 근세에 들어서서도 카톨릭 세계에서 특히 지속된다.  모든 이교도는 마법사로 의심받았으며 유대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악마를 경배하는 종교분파가 있다는 생각은 11세기부터 있어 왔으며, 이는 이교도집단이나 이교도로 판단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었다. 그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려는 탄압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에 항거하는 자들은 모두 악의에 찬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악마숭배, 카톨릭에 대한 증오, 마법의식,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행위, 사람고기를 먹는 풍습, 성적문란 따위가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그리고 정통교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운동은 대중적 혐오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이는 보두교뿐 아니라 13세기에 프란체스코회에서 갈라져 나와 엄격한 청빈을 주장했던 청빈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 역시 동일한 죄목으로 심판받곤 했는데, 번번이 추방당하거나 사유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던 그들은 왕실금고를 넉넉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바스(Sabbath, 본대 유대교 안식일로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가리키나 중세 유럽에서는 마법의 집회를 의미:역주)라는 용어 - 또는 프랑스어 문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의어, 시나고그(Synagogue) - 가 반유대주의적 종교재판에서 비롯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 왕국은 유대교에 반하는 이 전형적 방식을 통치기술로 사용함으로써 그 효율성과 극단적인 부패성을 잘 보여 주었다. 이 기술을 동원하여 필리프 르 벨과 기욤 드 노가레는, 악마와 교통한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유대교 주요 지도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화형장에서 재가 되었고 조직은 와해되었으며, 거대한 부는 몰수되어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가던 왕실의 금고를 채우는 데 쓰였다.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 가는 전염병과 빈곤에는 불가사의한 이유가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을, 또는 사회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메로빙거 왕조 이래로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여러 문헌들은 특히 저주로 말미암은 재앙의 예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일반대중들을 괴롭히던 숱한 불행들, 예컨대 사람들의 전염병과 가축들의 돌림병, 흉년과 자연재해 따위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지 설명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전염병 발발은 특정한 그룹, 곧 대부분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의 고의적인 행위 탓으로 돌려졌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든가, 빨리 전염시키려고 문의 손잡이나 벽에 기름칠을 했다는 등 악의적인 조작은 이렇게 생겨났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폭풍우를 불러오거나 가축을 몰살시키거나, 암소의 젖을 바싹 말리거나, 원수의 가족윽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불행이 닥치는 순간마다 마을공동체는 마법사인 듯한 사람들에게 대부분 사형으로 끝나게 마련인 보복을 가하곤 했다.  특히 동요가 많았던 중세의 마지막 2세기에는 - 노르망디의 한 사가는 15세기 전반부를 '인구폭발기' 라고 이름붙였다 - 유달리 주술과 관련된 재판이 많았음을 형사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곧 일반대중의 불안감이 급증했다는 이야기이며 그들이 마술에 얽힌 이데올로기에 더욱 접근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민담에 함축되어 있는 불안의 정서는 아주 오랜 전설에 기원을 둔다  야행성 마녀, 즉 밤이 되면 야수로 변해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어린아이들을 한입에 잡아먹으러 집집마다 쳐들어간다는 여자의 이미지는, 사실 악마신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설은 로마 시대의 문학이라든가 게르만 신화와 같은 고대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0세기 프륌 지방의 트레브 대주교는 소속 주교들에게 회람할 목적으로 성직자의 규율에 관한 길잡이용 책을 쓴 적이 있다. 이렇게 해서 그후 분실된 카롤링거 왕조의 법령집 축약본, <카농 에피스코피(Canon episcopi)>가 후세에 전해 오는 것인데, 그 책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로마의 여신 다이애나와 함께 특정한 동물의 등에 올라타 밤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여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달이나 물, 또는 축축하게 젖은 장소와 결부되는 어머니 같은 여신이자 지혜로운 여인으로 형상화된 다이애나는, 종종 마녀들의 이미지와도 연결되어 어떤 학자들은 그녀를 가리켜 '마녀들의 여신' 이라고까지 이름한다. 이후에 나타나는 다른 문헌들은 세례 요한의 죽음을 청한 헤로데왕의 부인 헤로디아의 이름이나, 게르만 만신전의 수호여신 홀다의 이름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탄압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악마학자들이 내세웠던 <카농 에피스코피>는 마녀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악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말을 타듯 빗자루나 동물의 등을 타고 한밤중에 창문이나 굴뚝으로 집을 빠져 나가는 여자가 곧 마녀라는 것이다.  15세기 말 악마론 초기 이론들이 등장하자, 종교재판관들이 사냥에 나선다  중세 초기부터 하나의 전설로 유럽인의 믿음 속에 실려 온 이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이제 오랜 역사가 되었다. 더욱이 15세기에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면서 악마신화의 토대를 형성했던 이러한 사실들은 17세기 말까지 줄곧 맹위를 떨쳤다. 실제로 탄압이 심했던 기간은 15세기 전반부이나 악마적 주술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 형성된 것은 1480년경이며, 이론 형성에는 문헌 두 권이 주요 근거를 이루었다.  1484년 12월 5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칙서 - 금인칙서(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를 발표하여 두 명의 종교재판관으로 하여금 쾰른과 마인츠 사이의 북부 독일 전체를 관할토록 했다. 그때까지 종교재판소는 주로 라인강 유역과 보두아 지역의 이교도들을 추적할 뿐이었는데, 인노켄티우스 8세의 칙서로 더욱 강력해진 그들의 권한은 자연히 지방행정관청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마법문제가 현실로 대두됨에 따라 자크 스프렝거와 앙리 엥스티토리스, 두 재판관은 마법의 주술사들을 응징하는 데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은 듯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교황권이 주술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낀 것은 사실 그때가 처음이었다. "최근 우리들 귀에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들려 옵니다. 마인츠, 쾰른, 트레브, 잘츠부르크, 브레멘 등 북독일 지역 교구들에게서 다른 지방이나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녀 할것없이 자신의 구원을 잊어버리고, 카톨릭 신앙으로부터 벗어나 몽마(잠자는 여자를 범한다는 귀신:역주)와 음몽마녀(잠자는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악령:역주)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술과 마력, 푸닥거리나 미신적인 언동, 마술 따위로 여인들의 자손과 어린 짐승들이 땅의 기운과 포도밭의 열매들이 그리고 과실들이 쇠잔해지고 사멸해 가고 있습니다." (인노켄티우스 8세) 이렇게 해서 또한 처음으로 악마적 마법과 주술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 칙서야말로 마녀사냥의 헌장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로 악마론 연구서들이 전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마녀사냥이 급증했다    2년 후,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악마론에 관한 저술로는 최고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편집인 장 프뤼스의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본디 종교재판관들을 위한 교본서로 발간되었지만 오직 마법의 단죄만을 목적으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여타 교리서들과 성격을 달리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1484년 칙서가 그 권능을 부여했던 두 명의 재판관,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였다.  엥스티토리스는 셀레스타 출신으로서 이 마을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 보두교인과 후스 계열 종파(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요하네스 후스 교리의 신봉자:역주) 및 모든 종류의 이단자들(알자스, 라인강 유역,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등지의 이교도들과 주술사들)을 추적하면서 오랜 수도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순회재판에 나섰다가 올로미츠와 브르노 지역 사이의 어딘가에서 실종되었다. 그는 오늘날 <마녀의 망치>의 단독저자로 추정되지만 어찌 되었든 이 책이 거둔 성공을 자크 스프렝거와 나눌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프렝거는 바젤 출신으로 그 역시 고향의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쾰른 대학 신학부 교수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학자, 스프렝거는 또한 쾰른시 설교자 형제단의 수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교단의 높은 직책을 연임했던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또한 대단했으나 종교재판관으로서의 활동은 그보다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 대부분을 도미니크 수도회를 개혁하고 로사리오 신앙을 전파하는 데 바쳤다. 그의 지적, 종교적 권위는 교회의 신학적, 도덕적 증표로 기능했다. 그래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마녀사냥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5세기 말부터 서구는 마녀사냥의 물결에 휩싸여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그 절정에 다다른다. 이 물결은 때로 극한을 달려 사회적 재앙을 부르게 된다.  제2장 마녀사냥  15세기 말에 이르자 마녀사냥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었다.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1480년에서 1520년까지의 기간과 1580년에서 1670년에 이르는 기간은 마녀사냥의 역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두 시기가 되었다. 이 두 시기는 특별히 그 규모의 방대함과 정도의 심각성에서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는 희생자들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었을뿐더러 사냥의 주축은 언제나 종교재판소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날 무렵에는 세속법정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탄압을 자행했다.  마법사는 이단자이며 배교자이다. 그들을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마녀사냥의 잔인함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러저러한 이유는 이미 <마녀의 망치>에서 제시되었으며 그 이유들은 그후 끊임없이 상기되었다. 마법과 관련한 죄악이야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이었다. 마법사는 원래 해로운 존재인데다가 악마의 주장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종교적 죄악까지 범했다. 그들은 하나의 밀교를 형성하여 항상 전파를 멈추지 않을뿐더러 자신들의 피로 직접 작성한 악마에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모두가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 있음을 단 한 사람도 의심하지 않는 사회에서 마법과 관련한 죄악은 죄악 가운데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다. 마법사는 이단자일 뿐만 아니라 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악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까닭에 배교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죄악은 신앙에서 잠시 '빗나간' 신자들이 무지해서 죄를 범하는 것과 다르다. 마법사의 죄악은 무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의식적 행위이다. 법정은 따라서 최소한의 동정도 보일 수가 없으며 다시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는 더더욱 없다. 일단 마법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면 이제 남는 것은 화형뿐이다. 다만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화형대에 세우기 전에 먼저 교수형을 집행하는 정도가 법정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은총이다. 한편, 마법사가 죄를 부정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법사의 진술 또한 악마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재판관들이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때도 있었다. 그럴 경우, 마법사로 추정되는 피고인들은 추방, 다시 말해 공민권을 박탈당하거나, 어디론가 가서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도록 권유받았다.  왕국의 지배자는 마법의 죄악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악마연구가 이교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악마의 마법이라는 신화가 종교재판의 와중에 형성된 것이라면, 세속재판관들이 마녀사냥에 재빨리 개입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사제들이 세속의 법률가들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 것일 뿐이다. 프랑스 문화권에서 악마론에 관한 책은 16세기 말에 급증하다가 17세기 초에는 가장 인기 있는 주제로 자리잡았다. 저자들은 모두 왕실재판관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명성을 날렸던 사람은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였던 장 보댕이었다. 그는 화폐 유통 원리를 주장하고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설명한 사람이며 16세기 최고의 정치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580년에 출간한 <마법사의 빙의망상(악마나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믿는 망상:역주)>이라는 책의 저자로 동시대인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선풍을 불러일으켰으며 프랑스와 외국에서 재판을 거듭했다.  장 보댕만이 유일한 경우는 아니어서 조금이라도 지적 능력을 가진 법률가라면 모두 자신들의 현장경험을 함께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제국령, 로렌 공국의 판사 니콜라 레미가 1595년 <악마숭배>를 펴낸 것이라든가 프랑슈콩테(당시는 스페인령)의 판사 앙리 보귀에가 1603년에 <마법사를 저주함에 부쳐>를 펴낸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이다. 보르도 의회에서 왕의 고문을 역임했고 남서부 지방 민정사찰관이던 피에르 드 랑크르는 같은 장르의 고전을 1612년과 1662년에 각각 출판했는데, <사악한 천사와 악마의 변덕>과 <마법의 무신앙성과 불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녀사냥꾼들이 가장 많이 애용한 지침서는 스페인 예수회 마르틴 델 리오가 1599년 루뱅에서 펴내고 수차례 개정판을 낸 <마법연구>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대규모 마녀사냥은 세속법정이 담당했다  '상급심'과 '교수대'는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구체제(Ancien Regime)에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5세기부터 종교재판소는 마녀사냥의 책임을 벗게 되었고, 이제 그 기능과 역할을 봉건제후와 왕실법정이 대신 떠맡게 되었다. 16세기 초에 이르면 이미 중세의 낡은 종교재판소가 프랑스 영토 내에서 사라졌으며, 교황 바오로 3세가 1542년에 재편한 로마의 종교재판소 역시 권위를 잃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각 교구에 설치되어 있는 교회법정 또한 점차 권한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는 왕이 직접 마녀사냥에 개입하곤 했다. 펠리페 2세가 1570년에 내린 형사 칙령은 몇 차례에 걸친 수정과 보완을 거치면서 마법의 죄가 무엇이며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규정하는 현실적 근거가 되었다. 이제 남부 독일 라인강 유역, 로렌, 프랑슈콩테 등,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곳에서 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관은 봉건제후와 왕실법정뿐이었다.  마녀사냥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곳은 다름 아닌 마을공동체이다  마녀사냥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농촌사회를 황폐화시키는 불행이 누적되어 개인 사이의 관계가 심하게 멍들었을 때 나타나곤 했다. 계속된 종교전쟁, 30년 전쟁, 프롱드의 난,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 사정, 때맞춰 닥친 기근, 페스트와 가축들의 전염병 따위 여러 가지 불행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동안 마녀사냥과 같은 사회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최적 조건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 주위를 맴도는 모든 불행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으려 했으며, 마침내 그 이유를 '불순한' 사람들의 '불길한'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면서 불안감과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국경이 정비되면서 각 지방이 왕령에 빠르게 통합되었던 반면 중앙집권회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이 모든 상황이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지방정부는 지역 주민의 화급한 요구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행정력을 정비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주민들은 사형이라는 신속한 방법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주민들이 행하는 즉결재판은, 마법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는 피해 당사자들이나 '청년수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젊은이들이 주도했다. 대부분 '냄비 두드리기(특정 개인의 집 앞에서 냄비를 두드려 소란을 피워 비난의 뜻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중세 유럽의 풍습:역주)'로 시작하는 사형은 더욱 심각한 결과로 비화되곤 했다. 욕지거리에 쫓겨다니던 마녀는 돌멩이 사례나 몽둥이질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살인자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마을 유지들의 힘을 빌려 사면장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술에 만취한 기아나 연대 병사들이 소문이 흉흉한 레진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1644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레진을 흠씬 두들겨 패고 거리고 끌어내고는 목에 밧줄을 걸어 교살해서 시신을 제르강에 던져 버렸다. 어떤 자들은 한눈에 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마을공동체의 요청을 받고 레진의 집에 들이닥친 이들 병사들의 행동은 본격적인 마녀사냥에 불길을 당겨 놓은 셈이었다. 병사들은 도처에 공포와 무질서를 흩뿌려 놓았다.  마녀사냥꾼은 투시력을 갖고 있다고 자처했다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던 1644년은 어떤 젊은 목동이 부르고뉴 지방을 휩쓸고 다니던 때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의 눈을 보기만 하면 대번에 악마와 교통한 흔적을 찾아내어 마법사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다고 자처했다. 이렇게 해서 마법사로 드러난 희생자들은 왕실법정에 세워져 심판을 받아야 했다. 마법의 문제와 관련하여 비교적 신축성 있는 태도를 보였던 의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상급심판소들은 여전히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들은 마법사로 지목된 피고를 처형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뒤 영외로 추방하는 권능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 중 하나가 1670년, 베아른에서도 있었다. 열여섯 살 난 어린 도제 하나가 마법의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고 자백함에 따라, 그로 하여금 그 지방에 우글거리는 마법사를 가려내기 위해 모든 마을들을 순회하도록 한 것이다. 도제의 말에 따르면 마법사들은 얼굴에 장막과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도제는 서른 개 마을을 돌면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사람을 심판대에 세웠는데, 그에게 지목당한 마법사는 6,210명에 달했다. 포 지방의회가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요소가 이 지역을 휩쓸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생활은 무질서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시골마을에서 소문이란 그 자체로 정설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캉브레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 바쥐엘에서도 다섯 명의 마녀가 심판을 받았다  1599년, 바쥐엘에 사는 과부 렌 페르슈발을 지목하는 수많은 고발장이 지방법정 문전에 쌓이기 시작했다. 과부가 이웃 사람과 가축을 해친다는 내용이었다. 과부가 자신의 손녀딸을 죽였다는 사위의 고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을 유지 한 명이 얼마 전부터 '기이한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웃 마을 돌팔이의사(guerisseuse, 본래는 마술이나 전통 비법으로 병을 고치는 의료행위자를 의미함:역주)는 렌 페르슈발이 그 병의 원인이라고 했다. 게다가 유지의 젖소 가운데 한 마리가 최근에 사산을 하지 않았던가? 또한 과부는 어떤 보두아인과 가까이 지내는데, 어쩌면 그에게서 비밀스런 마법을 전수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족으로부터 외톨이 취급을 받았으며, 이웃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았다는 모든 정황은 늙은 과부에게 불리하게만 작용했다.  물론, 지방정부의 관리에게 체포되었을 때 과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무척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 분명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자기를 기다리는 운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집회에 참석한 사실을 자백하고, 공범의 이름을 실토한 과부는 순순히 화형장으로 향했다.  폭력의 순환이 시작되었다. 2년 후에는 70세의 또 다른 과부 알드공드 드 뤼가 같은 운명을 겪었다. 이미 몇 년 전에도 카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법을 베푼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던 노파였다. 노파는 나쁜 평판에 줄곧 시달렸던 터라 소문의 진상을 철저히 가리기 위해 아르덴의 로크루아에 자진 출두하기로 결심하고, 마법사를 가려내도록 위촉된 돌팔이의사에게 몸을 맡겼다. 벌써 마법사를 274명이나 찾아냈다던 자였다. 그는 알드공드의 몸에서 모든 털을 다 제거하고 긴 바늘을 이용하여 온 몸을 교묘하게 찔러 보는 실험을 단행했다. 악마가 노파와 맺은 계약을 증명할 셈으로 노파의 몸에 남겨 놓았을,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내려는 수작이었다. 결국 돌팔이의사는 흔적을 발견했다. 왼쪽 어깨 위에 있는 다섯 개의 점을...  알드공드의 오기는 늑대의 소굴에 자진해서 들어가 마법사냥꾼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장 논리적인 증거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알드공드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심판을 의뢰해 왔겠는가?" 노파는 목이 졸려 살해된 뒤 화형에 처해졌다.  바쥐엘에서는 1621년에도 세 명의 마녀가 심판받았다. 첫째 마녀는 화형에 처했고 나머지 둘은 훈방되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1627년에 다시 기소되었다. 한번 자리잡은 소추와 취조라는 폭풍을 잠재운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마법신앙의 주요한 윤곽은 다양한 증언을 재구성하여 이루어졌다. 앞뒤가 맞지 앉은 증언이 대부분이었지만...  마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진정한 입교의식을 거친다는 뜻이기도 했다. 타고난 심령술사인 악마는 자기를 섬길 만한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그가 위축되거나 방황하는 순간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적당한 때에 기꺼이 돕겠노라는 충성을 맹세케 하는 대신그가 어려울 때에 기꺼이 돕겠노라는 일종의 계약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악마의 꾐에 걸려든 사람은 성수를 뿌려대거나 성호를 긋거나 저주를 퍼부으며 즉각 저항하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요물은 한 말이 넘는 간교한 꾀보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렌 지방에서 중세 군주와 가신이 맺는 충성의 의식 비슷한 충성의 서약을 어떻게든지 받아 내고 만다. 이렇게 선택된 자들은 카톨릭교를 저버리고 새 주인에게 홀딱 빠지게 되며, 새 주인은 검은 가시나 자기의 발톱으로 복종을 상징하는 악마의 징표를 그들의 몸에 새기곤 한다, 이때 고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징표를 새겨 넣는데, 대개 피부에 못이 박힌 형상이거나, 사마귀 또는 할퀸 상처로 남는다. 선택받은 자가 여자일 경우에는 '한 번 껴안아 주는' 의식이 따른다.  악마론자들의 기술과 달리, 악마와 짝짓는 일이 마녀에게 결코 쾌락은 아니었다. 마녀는 자기의 새 애인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이며 몸 속으로 들어올 때 너무나 큰 고통을 준다고 불평하곤 했다. 여자의 입교의식은 사탄과 그 배우자 사이의 계약을 완전히 성사시킨다는 의미에서 결혼으로 끝맺음을 한다. 결혼의 대가로 암흑의 지배자는 여인에게 금화나 은화 몇 닢을 주는데, 이는 물론 가짜여서 오래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사라져 버리거나 진흙이나 똥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악마론자들은 마녀들의 이 놀라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환상에 근거한 이야기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야말로 마법의 세계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점이다. 바법의 집회는 한밤 중,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높은 언덕이나 숲 속 깊숙한 후미진 장소에서 희미한 화톳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마녀들과 마법사들은 악마에게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고 대부분 걸어서 집회장소에 도착했다. 때로는 악마 자신이 돼지, 당나귀, 양, 심지어는 닭을 회오리바람으로 낚아채서는 마법사들을 그 짐승들의 등에 태워 데려오기도 했다. 로렌 지방에서는 마법사들이 막대기나 빗자루에 말 타듯 걸터앉아 여행한다는 이야기는 거의 전해오지 않는 반면, 그들이 특수한 고약을 온 몸에 칠해서 몸이 안 보이게 할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먼 거리를 단숨에 여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다른 지방에서처럼 정설로 굳어 있다.  마법의 집회는 카톨릭 의식과 정반대로 진행되어, 늘 나무걸상(un escabeau, 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카톨릭 교회의 기도대를 지칭함:역주)에 앉아 있는 그들의 주인에게 마녀와 마법사가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녀와 마법사는 염소 형상을 하고 있는 악마의 '궁둥이에 입을 맞춤'으로써 악마를 찬미했다. 집회는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광란이 난무하는 축제로 고조되고, 참석자들끼리 아무렇게나 짝을 지어 즐기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악마는 성적유희의 순간에 이르러 몽마(남자)나 음몽마녀(여자)로 자유롭게 변신했다. 악마와 관계하는 성은 별다른 쾌락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악마의 정액은 차갑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축제에서 희생양으로 제공되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이 기괴한 짝짓기에서 태어난 열매였다.  이런 식으로 입교하여 사탄의 공모자가 된 마법사는 자신의 주인에게 봉사할 수 있는 특별한 권능 '저주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마법사는 억수 같은 비를 내리게 해 경작지를 침수시킬 수 있었고, 엄청난 벼락을 몰고 와 집과 나무를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었으며, 끔찍한 냉해를 가져와 푸른 보리밭과 풍성한 과수원을 단숨에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마법사는 주술을 걸어 가축의 번식을 막는가 하면 남자를 성적 불능으로 만들고 여자에게 불임의 고통을 주었으며, 사람의 해골로 만든 분말가루를 사용해 우물을 오염시키고 벽과 문의 손잡이에 기름을 발라 놓아 페스트를 전염시켰다. 더 나아가 마법사들은 동물로 변실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양이로 변한 후 갓난아기의 요람에 훌쩍 뛰어올라 아기의 숨통을 짓누르거나 눈을 할켜 놓기도 하고, 밤새 산야를 헤매는 늑대가 되어 느닷없이 여행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마법사의 감각기관은 기능이 정지되어 있어 아무리 혹독한 고문에도 능히 견딜 수 있으며 눈물조차 흘릴 줄 몰랐다.  한마디로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사고를 저지르는 주범이었던 셈인데, 이는 공포에 질린 중세인이 보여 준 상상력의 극한이었다.  마법사로 몰리는 희생양은 열에 아홉이 여자이며, 혼자 사는 과부가 가장 좋은 사냥감이었다  마법의 집단에서 최고 우두머리는 여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는데, 특히 가장 나이가 많고 가난한 여자가 적격이었다. 결국 그런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여인들은 이미 마녀로서 내정된 운명이었다. 종종 구전되어 오던 민간요법의 지혜를 지니고 있던 그녀들은 주술을 걸 줄 아는 존재로 의심받곤 했다. 이로써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믿고 스스로 흐뭇해했던 바와 달리, 사회는 과부들에게 따뜻한 연민을 보여 주지 않았음이 입증된다.  신학자들조차 여자들이 그 본성에서 남자들보다 악마적환영에 더 약한 법이라고 떠들고 다니곤 했다. 대규모의 마법사사냥이 그 무엇보다도 마녀사냥에 - 그 기원은 분명히 마법사사냥이었을 터인데도 - 집중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마녀사냥은 한 번도 일관되게 진행된 적이 없다. 광신적이고 귀가 얇은 어느 판사가 어떤 마을공동체의 울분에 접했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 열정이 사그라들면 같이 사그라들고, 잠시 후에 다른 지방에서 다시 고개를 들곤 하던 것이 마녀사냥이었다. 이런 우연성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의 전반적인 성격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 장애요인이었다.    악마론자나 마법 재판에서 맹활약하던 판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서구 역사에서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자행된 마녀사냥처럼 그토록 일반화되고 지속적이던 대학살은 없었다. 마녀사냥이 가장 밀도 있게 진행된 때는 17세기의 첫 25년 동안이며, 1640년대 - 17세기 유럽의 대혼란 가운데 가장 조용했던 시기 - 와 1660년대에도 탄압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쳤다. 17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에서 그 불씨가 꺼져 갔는데, 특별한 지역 사정에 얽혀 탄압의 불길이 다시 당겨지는 예외도 있었다. 18세기 초에야 마녀사냥에 착수한 폴란드의 경우가 그것이다.  악마론자들과 판사들이 주장하는 마녀사냥에서 희생된 자들의 수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 그들의 증언은 많은 경우 광적이기조차하다. 예를 들어 니콜라 레미는 1576년에서 1606년 사이에 로렌에서 2,000 내지 3,000명의 마녀는 불살랐노라고 거림낌없이 주장하며, 1609년부터 장데스파네와 라부르 지방을 대청소한 피에르 드 랑크르는 수백 명을 화형대에 세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랑슈콩테의 앙리 보귀에는 10년 사이에 30여 건의 재판을 이끌었다고...  아마도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마녀사냥의 규모를 과장했을 것이다.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것,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역시 종교재판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악마론 연구자들의 증언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탄압의 규모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는 축소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속했으며, 14세기 말에서 17세기 마법사 탄압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북프랑스 지방의 경우, 정작 심판대에 섰던 사람들은 300명이 채 못 되었으며 실제 처형된 사람들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마녀 재판이 사가들의 연구를 통해 철저하게 분석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마녀사냥이 어느 정도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더욱이 모든 경우가 정식 재판에서 처리된 것이 아니고 종종 사형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유럽역사의 한 시기가 화형대의 명멸하는 불빛에 기대어 전개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사실들은 재판과 처형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강 하게 자극할 수 있을 만큼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고루게 분산되어 있었고 숫적으로도 충분했음을 반증할 뿐이다.  마녀사냥은 그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에 따라 삽시간에 번졌고, 때문에 전모를 파악할 수 없으리만치 변화무쌍하고 고통스럽게 진행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했을 것이 분명하다.  16세기, 마법은 이단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겼으므로 세속법정은 기꺼이 종교재판을 수행했다. 그 같은 선택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시골의 한 농무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때, 몸을 다치지 않고 올가미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사법기관과 그가 휘두르는 가공할 무기가 작동하는 데에는 마을에 떠도는 시시한 풍문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일단 마법에 대한 의심이 싹트면, 사법관은 지체 없이 개입해 조사에 착수하고 이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는 별별 사소한 일이 다 포함된다. 모든 종류의 죽음, 온갖 질병과 사고, 거북살스러운 사건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거나 예측할 수 없던 일이라면, 모두 마법에 그 이유를 돌렸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자.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죽어 있는 아기, 높이 걸린 사닥다리에서의 추락, 욕설이 오가는 언쟁에서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악마나 너를 데려가 버리지." 기이한 성적 습성을 가진 것, 마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황하거나 땅바닥을 멍하니 쳐다보기, 십자가 한쪽이 깨진 묵주를 가지고 다니는 일 등등.  장 보댕은 이렇게 말했다. "심판에 임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 심판은 곧 하느님에게서 주어졌느니라!"  비록 고문에 견디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마법사로 간주된 사람이 자백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서 증거로 채택되었으며 그들 역시 고발되었다. 또 형사법의 일반원칙을 깨고 증거능력이 없는 미성년 아동들의 증언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증언에 따라, 아이들의 부모들조차 - 부모가 마법사이며 아이들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음에도 - 마법사로 고발할 수 있었다.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보기에 앞서 한 가지 의문이 앞선다. 마법사의 첫 번째 적이었던 사법관은 어떻게 마법사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이들 사법관과 그 조수들은 끊임없이 마법사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마법의 주술에 조금도 걸리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꾀를 내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법관들과 조수들은 악마의 저주조차도 자신들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특별한 면책특권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마법을 사실로 확정하기 위해 재판관은 여러 가지 추측과 증거를 이용했다  마법사로 지목된 사람이 실제로 마법사임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들이 있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은 물을 이용하는 실험이었다. 법정은 중세의 신명심판(불길이나 열판에 손을 대어도 다치지 않는 자 또는 싸워서 이기는 자를 무죄를 했던 판정방법:역주)에서 유래한 물실험을 악마의 표징을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의 혐의를 찾을 때에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마법사라고 기소된 사람은 강이나 늪, 또는 운하에 던져졌는데 종종 무거운 바위를 매단 채였다. 만일 그가 물위로 떠오르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자기를 경배하는 자를 악마가 정말로 죽게 내버려둘 리가 없지." 이렇게 해서 악마와 교통하는 증거를 밝힐 수 있었고, 마법사라고 판정된 기소인은 즉시 처형되었다. 한편, 물 속에 빠져 죽는 자는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마법사는 악마의 영적 본성을 공유하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세간의 믿음에 따라 마법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들의 몸무게가 분명히 겉보기보다 가벼울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표징이 그들의 몸 어느 구석이든 반드시 표시되어 있을 것이며, 그들은 바늘로 찔러도 무감할 뿐만 아니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조사를 쉽게 하기 위해 혐의자의 몸에서 털을 모두 제거했다. 이 작업에는 마법사들이 털 속 어디엔가 그 모습을 변형시켜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부적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바늘이나 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부위가 나올 때까지 찔러댔는데, 이 부위가 바로 악마의 표징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 역시 마법사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표징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심한 고문을 당한다 해도 마법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귀에가 드니즈 프뤼동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프뤼동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너무 울어서 더 이상 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구 두들겨 팼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아니다. 악마론자들의 이야기를 따르면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악마가 그들을 억제하는 까닭인 것이다.  마녀로 의심을 받아 심판대에 오르면, 유죄판결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조사는 어떤 종류의 대답도 혐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결론짓곤 했다  아드리엔 되르는 60세 가량 된 중매인으로 몽벨리아르의 금은세공사이던, 피에르 바크송의 미망인이다. 그녀의 성벽은 매우 불순했는데,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도 마녀로 의심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녀는 1646년 8월 10일에 감금되어 8월 14일에 조사가 시작되었다. 증인 32명이 그녀를 고발했다. 먼저 그녀에게 마법사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질문은 함정을 숨기고 있다.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마법사도 없고 따라서 악마도 없다는 대답이 되므로 이단자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네'라고 대답하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잇따른다. "누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녀는 들은 대로 본 대로 적절하게 얼버무려야 한다. 하느님께 못된 기도를 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죽게 하는 사람, 그리고... 만일 사법관이 여인의 입에서 더 많은 사실이 나오기를 바란다면, 먼저 정답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정말 마법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죽인다고 생각할까? 그녀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아마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법에 관한 책들을 소지하고 있는가? 그녀는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기 가게에 마법사들에 관한 책이 한 권 있음을 기억한다. 첫 번째 조사에서 그녀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둘째 날, 그녀는 경솔하게도 만일 내 몸에서 악마의 표징을 찾아낸다면 내가 마녀라고 해도 좋다고 말한다. 셋째 날에는 그녀는 의혹을 부정한다. 하루 쉬고 네 번째 조사가 있는 날, 사법관들은 여전히 자백하지 않는 그녀에게, 계속 부정한다면 고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윽박지른다. 다섯째 날, 그녀가 여전히 결백을 주장한다. 그 후 며칠동안 증인들과 대질심문이 벌어지며, 자기의 죄를 인정하라는 종용이 따른다. 그리고 그녀가 마법사임을 증거하는 사실들이 열거된다. 그녀에게 빵 한 조각을 받은 어느 집 아이가 그날 갑자기 죽었다. 어느 날 시력을 잃은 사람이 있었으며 젖소의 젖이 말라 버렸다. 어느 날은 밤늦게 들어오지 않았느냐, 어느 날엔가는 창문도 모두 닫고 있더라, 그러고는 큰 소란을 피웠더랬지. 한번은, 맞아, 정말 기분 나쁘게 자기 집 고양이로 변해서는... 그녀는 계속해서 나는 좋은 여자이며 자기를 마녀로 인정하는 따위 거짓자백을 하고 싶지 않다고 강변해 본다. 8월 31일, 결국 상반신을 벗기운 채 은바늘로 온 몸을 콕콕 쪼이는, '검진'을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등 한가운데, 어깨 조금 아래쪽에서', 바늘이 '손가락 길이만큼 깊이 들어가', '15분 이상'을 있어도, 그녀가 '아무런 고통을 호소하지' 않을뿐더러, '피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부분을 찾아낸다. 이것이 '악마의 징표'는 아니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아직도 고집하겠는가?" 이제부터 고문이 시작된다. 두 손을 등뒤로 묶고 공중에 걸어 놓은 채 15분 가량 고문이 가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결백을 주장한다. 감옥에 처박은 지 3주가 지난 어느 날, 정확히 9월 2일, 십중팔구 똑같은 고문이 반복될 것을 예상한 그녀는 마침내 마법의 의식에 얽힌 모든 이야기를 자백하고 만다. 악마와 짝짓기, 저주 퍼붓기, 유령으로 나타나기... '자백'과 '신앙고백'을 섞어 가면서, '가슴을 깨우쳐 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그분의 용서를 구하며... 9월 2일과 4일, 자백에 따라 작성된 조서가 낭독되고 그녀는 이를 순순히 시인한다. 유죄로 판명된 그녀는 9월 11일 처형된다.  조사의 시작은 고통을 주는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시작되었다. "사법관은 서둘러 고문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마녀의 망치>는 충고한다  심문이 자백을 유도해 내지 못하면 고문이 시작되었다. 보댕은 고문기구를 개방된 곳에 설치하여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고문에 못 이겨 터져 나오는 절규가 주위 감방에 고통을 전달하도록 하는 방법도 강구되었다.  물고문을 예로 들어보자. 두 발을 결박당하고 벽에 고정된 고리에 손목을 끼운 다음 형틀에 눕혀진 혐의자는 일단 9리터 남짓 되는 물을 삼켜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또 한 번 그만한 양을 삼켜야 하는데, 합해서 195리터 가량 먹어야 하는 셈이다. 물고문말고도 불로 발바닥 굽기와, 보댕의 말에 따르자면 '그 무엇보다도 가장 탁월한 기술'인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도 있었고, 밧줄과 쐐기를 이용하여 두 다리를 비트는 방법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혐의자는 세 번까지만 고문에 처할 수 있었으며 고문을 받고 다음 고문을 받기 전에는 최소한 하루는 쉬게 했다. 이렇게 간격을 둔 이유는 혐의자의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체벌의 고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였다. 혐의자가 다음에 이어질 고문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시간을 확보하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혐의자는 자백을 한 다음날에는 자백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규정 외의 고문을 가했다. 이때 혐의자가 전날의 자백을 부인하고 나서면 고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사법관들은 오로지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전력했다  고문에 저항하는 시간은 물론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든 유형의 강압에 오랫동안 견디어 냈다. 그렇지만 검사와 판사의 공모하에 연출 되는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끔찍한 고문소리, 일부러 집어 넣은 흉악범 감방에서의 처참한 생활, 반복되는 똑같은 취조, 고문 사이사이의 끝이 없을 것 같은 공포 앞에 대다수 혐의자들은 쉽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결국 자백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고문의 끝에 이루어지는 자백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공모자들의 이름을 실토하게 마련이었고, 이로써 사법관은 새로운 취조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피고가 상급 법정에 항소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의회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는 정평의회가 상고심을 담당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버림받은 상황에서, 또 자신의 권리조차도 알지 못하는 채, 지나온 시련으로 지칠대로 지친 피고인들은 항소할 시간 여유마저 가질 수 없었다. 판결이 나자마자 곧바로 처형이 따르곤 했다! 구원의 속죄양들은 정화의 불길 너머로, 대속의 육신은 물론 소송의 기록까지, 모든 것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법정이 이 모든 것을 화형대 위에 내던졌던 것은 모든 파행의 기억을 영원히 지워 버리고자 함이었다.  세속법정의 판사들도 종교재판의 예를 따라 예외적인 소송절차를 밟곤 했다.  심문에 의존하는 소송절차는 이단투쟁을 위한 종교재판이 이미 3세기 전부터 기틀을 닦아 놓은 것으로 16세기부터는 세속법정에서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교회법에서 비롯한 소송절차가 12세기와 13세기를 전환점으로 하여 형사법에도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의식혁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형사소추는 동방 이민족의 침입시(흉노족의 서진:역주), 게르만인이 도입한 사법절차의 유산을 이어받아 고소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개인이 소추당할 때에는 고소인이 구체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그의 죄목을 고발하고 나서야 했다. 법정은 고소가 사실에 입각했는지를 판단하고 양쪽의 주장을 청취해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액까지도 결정해야 했다. 만일 고소인이 자신의 주장을 법정에서 관철하지 못할 경우에는 고의적인 비방의 유무에 따라 오히려 고소인이 판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종교재판의 소송절차는 판사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피고는 자신의 결백을 자신이 입증해야 했다  이단재판의 경우, 일단 소의 제기가 있으면(익명으로 하는 고발일지라도) 그 조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판사에게 귀속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고소인의 비밀은 보장되었으며, 재판비용은 이미 고소와 동시에 즉시 소추대상이 되었던 피고소인의 몫이 되었다. 사안의 심각성에 미루어 이단재판은 일반적인 고소절차의 역순을 밟아 나갔다. 곧 피고소인의 유죄를 이미 확신하고 있는 판사에게, 또 어떻게 해서든지 완벽한 자백을 유도해 낼 생각으로 혈안이 되어 있는 판사에게, 피고소인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피고는 앞으로 어마어마한 장애들을 극복해 나가야 했다. 취조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외부세계와 격리된 채 그는 누가 그를 고발했는지, 자신의 주요한 죄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취조는 엄격했다. 판사는 피고와 함께 쥐와 고양이의 숨바꼭질을 연출했으며 유도심문으로 피고를 함정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변호사의 도움이 허용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 우선 신경 써야 했던 변호사는 피고인에게 자백하라고 충고했고, 그럼으로써 준엄한 심판을 피하라고 종용할 뿐이었다. 피고는 결국 고문이라는 심판대에 세워졌다. 가장 잔인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불고문,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밧줄고문 등은 사람들이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죄악을 피고 스스로 진술하게 만들어 주었다.  유럽에는 16세기 전반을 통하여 악마론에 관련한 선명한 지형도가 그려진다  초자연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믿음, 초능력을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모든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악마에 대한 믿음처럼 초능력에 대한 믿음도 -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오래 전에 형성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 수미일관하게 체계 화되었다. 신학자들과 심판관들 또한 그들의 합목적성이 요청하는 바에 따라 이러한 믿음과 악마적인 마법 사이에 발빠른 등식을 성립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사학자들이 또 하나의 아귀를 맞추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악마적인 마법의 전염병에 오염되었던 지역은 전체 유럽을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지역적인 경계와 또 의식의 경계점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00년과 1650년 사이에는 유럽 전체가 악마적 마법의 존재, 곧 마법의 집회와 저주의 밀교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문학작품들이 전해 주는 증언들은 독일에서 이탈리아, 영국에서 스페인까지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에 대한 재판기록이나 체벌, 화형 등과 관련한 가장 비극적인 표징들을 찾아본다면 지역에 따라 커다란 편차가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지역들은 악마신화에 근거하여 다소 밀도 있는 소추를 진행했음에 반해 다른 지역들은 악마신화 자체를 무시해 버렸다. 악마적 마법이 하나의 정식으로 성립되어 범죄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지역은 주로 북유럽 일대와 남유럽의 몇몇 지역이었다. 가장 많은 사례가 나타난 곳은 아르투아, 플랑드르, 에노, 캉브레지, 브라반, 룩셈부르크, 로렌, 라인강 유역의 남부 독일, 알프스 지역, 부르고뉴, 프랑슈콩테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기아나, 베아른, 랄부르, 바스크, 피에몽, 북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맥 일대만이 마녀사냥의 열병을 앓았을 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노르망디나 파리에서와 같이 산발적이었거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왕국(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 드 프랑스를 지칭:역주), 브르타뉴, 남부 랑그도크, 포레즈에서처럼 거의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악마적 마법사냥의 지역적 한계성이 놀라운 것이라면 재판과정 자체에 대한 연구 또한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피고들의 증언과 심판관들의 담론 사이에 종종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곧 심판관들 자신이 악마론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관점을 피고에게 조목조목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촌락민은 이런저런 사람이 이런저런 악행을 행했다 하여, 또 마을공동체나 특정의 몇몇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불행을 초래했다 하여 그들을 고발했을 뿐이다. 이러한 고발에 맞닥뜨려 개인간의 공격성향을 악마적 마법의 담론으로 해석하고 또 그러한 해석을 회유와 협박으로 피고에게 강요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심판관들이었다.  악마적 마법은 따라서 사회 엘리트와 지식인들 - 사제들이든 세속의 지식인들이든 - 이 만들어 낸 하나의 문화적 생성물이었다. 이러한 문화는 당시의 일상적인 의사전달 수단, 곧 미사의 강론, 부락민의 일상적인 대화, 전설, 민담 또는 처형이라는 자극적이고 교훈적인 구경거리를 통하여 서서히 보편적인 의식구조를 형성해 나갔다.  북유럽, 특히 종교개혁으로 신교를 수용한 국가에 인접해 있는 카톨릭교 신봉 지역에서는 불에 의지하여 마귀를 쫓는 의식이 성행했다. 악마적 마법론은 이단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비교적 적게 노출되었던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운명의 장난꾼들', 다시 말해 마법사나 마술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들로 의심받지 않았다.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마술사, 점성술사, 연금술사, 점쟁이, 예언자, 이들 또한 사물과 사람에게 특정한 형태로 권능을 발휘하면서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마녀사냥 열풍에서 무사했다. 그렇다고 마법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꼬리를 감추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악마신화 신봉자가 등장한 시기는 1420에서 1430년 사이로, 당대를 풍미했던 수도사 베르나르딘 데 시엔느에서 이단심판관 베르나르도 라스테그노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특히 라스테그노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몇 해 사이에 <종교재판관의 등불>과 <마녀학 개론>이라는 개설서를 두 권 출판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렇지만 교단의 반응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마녀사냥이 고개를 든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잠깐이었으며, 피에몽과 롬바르디아 - 주로 그리종 계곡과 발트라인에 인접한 코노 교구 - 에 국한되었다. 제노바와 포 계곡 일대에서 화형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들 지방에서 벌어졌던 마녀사냥은 잠깐뿐이었다. 17세기가 연출했던 대대적인 마녀사냥의 영향을 가장 덜 받은 나라는 이탈리아이다. 예외적으로 트리엔트에서 17세기 초에 마녀사냥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 것은 이 지역이 독일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이다.  이탈리아가 마녀사냥이라는 잔인한 열병에 전면 노출되지 않았던 것은 종교재판소의 태도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말 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잠깐 스치고 지나간 마녀사냥의 불길은 물론 종교재판관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542년에 바오로 3세가 종교재판소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하고, 유명한 로마 중앙 성청을 개설하자, 종교재판소들은 세속법정의 탄압에 가까운 엄격한 법현실에 맞서 온건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종교재판소는, 이단적인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관계가 없는 한, 종교적인 일탈에 한층 관대했으며, 상식에 비추어 탄력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했다. 이 같은 태도 변화는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에서 그렇듯 잔인한 종교재판이 맹위를 펼치던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에서조차 북유럽에서 볼 수 있는 마녀사냥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프리울리 지방에서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베난단티가 마법사들과 투쟁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시발점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면모를 일신한 카톨릭 교회는 1570년을 전후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새로운 기틀을 잡아 나가고자 노력했다. 바로 그 무렵 베네치아 북동쪽에 위치한 프리울리 지방에서 전통적인 신앙형태가 새로 발견되어 종교재판관들을 경악시켰다.  사계재일이 돌아오면 예수처럼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쓴 젊은이가 한 무리의 청년들을 이끌고 한밤중에 원정을 떠났다. 스스로를 '베난단티(Benandanti, 풍작과 축복의 승부사들:역주)'라 일컬은 이들은 수수막대기로 무장하고 조자파 평원으로 마법사들과 싸우러 나갔다. 그들은 칠흑 같은 밤에 벌어지는 이 전투의 결과에 따라 그해의 풍작을 점쳤다. 베난단티가 이기면 풍년이 들고 바법사들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민가에 잠입해 식량과 포도주를 축내곤 했다.  누구나 베난단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베난단티는 선천적으로 선택된 자, '행운을 타고난'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까닭에, 사계재일의 밤이 돌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정신이 몸을 떠나 마법사들과 한 판 싸움을 벌이러 떠난다는 것이다.  종교재판관들은 다른 신앙형태도 발견했다. 밤하늘을 날아 들판을 가로질러 민가에 들어가서는, 식량을 먹어 치우거나 포도주통에 구멍을 뚫어 놓는 여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종교재판관들은 악마론이 주장하는 악마적 마법의 징후를 판독했다고 믿었다. 베난단티들은 마법사와 싸우러 출정한 축복의 승부사들이 아니라 그 자체 마법사 집단이었으며, 야간전투는 온몸에 고약을 칠한 채 밤하늘을 날아다닌 여인들이 가세한 마법의 집회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전통축제를 둘러싼 해석상의 대립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가난한 농사꾼에 불과한 베난단티들은 종교재판관들에 맞서 자신들의 성실한 신앙을 거듭해서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카톨릭의 승리였다. 종교재판관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농사꾼들은 마법의 집회를 치렀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프리울리 농부들의 전통적 문화행사는 소멸되었으며, 베난단티와 하늘을 나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악마적 행위의 표본으로 남게 되었다.  프리울리 농부들은, 기독교 문화가 접목시켰던, 게르만인의 아주 오래된 신화를 간직한 것이다  오늘날 그 사건을 돌이켜보면 베난단티의 주장이 옳았고 종교재판관들의 해석이 그릇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르만인은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이 보탄(Wotan, 고대 게르만족의 주신:역주)의 인도에 따라 구천을 떠돈다는 믿음이 있었다. 기독교 문화에서는 이 분노에 찬 군대가 무덤이 없는 모든 주검들과 한 무리를 이룬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베난단티들은 사계재일의 밤이 돌아올 때마다 샤머니즘적 열광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들을 이끌었던 대장은 고대 게르만인이 사계재일의 왕이라 불렀던 지도자였으며, 베난단티들이 투쟁했던 마법사들의 두목은 잔인한 악령 아를르캥(Arlequin)이었다. 아를르캥은 이미 코메디아 델라르테(16세기 중엽에 생격난 즉흥 가면희극:역주)에 회화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한편, 밤하늘을 나는 여인들은 중세의 전설을 통해 구전되어 왔으며, 10세기에 <카농 에피스코피>에 나오는 '야성의 메스니'이다.  이러한 세간의 믿음이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남아 프리울리 농민들 사이에서 수세기 전부터 환상적인 문화형태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믿음은 악마적이고 불길한 마법과는 관게가 없었다. 반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가톨릭 교회의 완고함에 밀려 마법사로 낙인 찍혔을 분이다. 어쨌든 종교재판관들은 교본에 그려져 있는대로 마법의 원형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는 마법의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일반적인 형사범으로 심판받았다.  남부 아탈리아에서는 마술의식이 성행했다. 16세기 말에는 종교재판소가 개입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애정문제, 재산문제, 건강문제 등에서 즉각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의식적 주술을 사용하여 초자연력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모두가 갈망하던 신비로운 힘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마술의식에서 마녀사냥을 촉발시킨 단초를 찾아보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악마적 마법의 불길한 흔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마술의식을 처음 거행한 분류는 지식인, 교양인, 진정한 의미의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걸인 수도사들이나 카톨릭 사제들 상당수가 인문주의자 그룹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14세기에 요한 22세가 그들을 공식적으로 단죄한 적이 있을 만큼 마법의식의 기원은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의 강신술과 아라비아 마술의 전통을 잇는 이들의 마법의식은 연금술과 점성술에서 얻은 지식이 축적되면서 더욱 풍성해졌다. 그들은 작은 병이나 가락지에 갇혀 있는 정령들을 불러내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화를 새롭게 재발견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마술지식도 재해석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고대의 연금술 교본들이 도움이 되었다. 피크 드 라 미랑돌 같은 몇몇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기독교 문화와 연금술이라는 마술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마술과 관련되고, 마술의 이름으로 불렸던 모든 지적 사유형태를 신플라톤주의적 전망에서 집대성한 <신비철학>이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르네상스 후기인 1533년에 이 책을 출간한 저자는 당대 최고 마술가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데 네테세임이다.  전통과 연금술을 원용했던 인문주의자, 철학자, 점성술사들은 마술에서도 무언가 놀랄 만한 경험을 얻고자 했다  16세기 말, 몇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나폴리 지방의 마술사들은 고도의 지적 사유와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공식들을 찾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용했던 교본들은 거의 대부분이 위서나 필사본들이었으며 망토 밑으로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통에서 생겨난 <솔로몬의 작은 열쇠들>, 악마의 마술을 다루고 있는 비교서,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네 번째 책>이 그랬다. 당시의 마술사들은 의식과 적절한 공식을 통해 화금석의 비밀과 금속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법을 밝히기 위해, 또는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초자연적 정신을 이용하고자 했을 뿐이다.  나폴리의 지식인들 또한 이러한 보물찾기의 열기에 휩싸였다. 가장 유명한 보물찾기의 사례는 1528년에 나폴리 성벽 밑에서 죽은 프랑스 장군 로트렉의 경우인데, 그가 죽기 전에 전리품, 곧 금화를 가득 채운 대포를 숨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여자들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사랑의 미약을 만들거나, 자석으로 만든 부적을 지니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을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신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끔 했으며, 병이나 외부의 위협에서 지켜 준다는 히브리 공식들을 종이 조각에 적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마술 숭배와 별도로 구전된 비결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대중들의 마술 숭배가 있었다. 이런 마술은 농노들의 부인이나 소규모 장인들의 부인, 창녀들과 같은 문맹자들이 행했다. 여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결은 상징적인 의식을 행한다거나 약초의 효능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감히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맡기지 못했던 여인들의 치료, 어린아이들의 간병, 삐거나 부러진 사지의 접골에 주로 신통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 특히 남부 농촌지방에서 -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악연으로 인한 질병들, 곧 저주나 주문에 걸려 생긴 질병들이라고 믿는 경우에는, 그것이 설사 내과질환이나 할지라도 이들의 민간요법에 호소했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을 때, 바람기 많은 애인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아 상사병을 앓는 여인들이 있을 때, 아니면 한창 원기왕성한 시기의 남자들이 성적 불능상태에 빠질 때 등 어떤 치료를 통해서도 속시원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들의 신통력에 기대곤 했다.  이들 돌팔이 치료사들의 능력 한계는 어디인가? 그들이라고 사람들의 운명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만일 항간의 마술사들이 병 고치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권능에 복종시킬 수 있는 비밀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의문 때문에 약초의 효능을 알고, 사랑의 미약과 부적을 만들 줄 알며, 때로는 위대한 마술의 신들을 향해 주문을 외기도 하는 돌팔이 치료사들은 존경받는 만큼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신들린 사람'으로 의심받곤 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마법과 마술의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대중 마술에 침투한 강신술사와 무당들은 가락지나 작은 병 속에 귀신들을 가두었다가 그들을 거울 속에 불러내어 미래를 예언하게 할 수 있다고 자처했다.  종교재판관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연금술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마술사, 무당, 신들린 사람, 이들 모두는 바로 마법사였다. 더욱이 마법의 집회가 열린다는, 그 유명한 호두나무가 있는 베네벤토 유역이나 나폴리 북쪽의 플레그라에안 평원 - 아베르네 호수에 있는 지옥의 입구, 시빌에서 퀴메에 이르는 미궁 - 은 그 자체로서 온갖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저승의 상징이었던 까닭에 종교재판관들은 확신에 확신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1580년부터는 유럽에서처럼 이탈리아에서도 종교재판이 빈번하게 열렸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재판관들은 결국 피고의 입에서 악마신화의 핵심을 이루는 한마디, 마법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불길한 악마의 마법이 아니라고 판명된 이상 연금술사들의 마술과 무당들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종교재판은 17세기까지 계속해서 '미신'으로 보이는 것들을 단죄하고자 했지만 남부 이탈리아에는 화형이 없었다.  스페인에서도 마녀사냥은 극히 제한된 현상이었다. 오직 바스크 지방만이 마법사들을 화형대 위에 세웠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스페인 역시 마법에 대해 이탈리아에 비견할 만하다. 스페인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소는 로마의 종교재판소보다 훨씬 엄격했지만 마법사로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잔혹하지는 않았다. 오직 하나 바스크 지방만이 악마적 마법의 전염병에 휩싸였다. 종교재판소가 개입했을 때도 그것이 꼭 재판소의 의지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역공동체와 세속법정의 압력에 밀려서였던 경우가 많았다. 1466년부터 기푸스코아 주의회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에게 혹세무민하는 마녀들을 일소하도록 끊임없이 요청했다. 16세기 초 몇 해 동안 마녀들의 아성으로 지목된 두랑고 지방의 비스카야에서 종교재판관 로그로뇨는 약 30명을 화형시켰다. 1527년에는 아홉 살과 열 살 된 두 여자아이들이 자기들이 마녀였다고 자처하고 나섬에 따라 종교재판관들이 이들을 대동하여 그 지역의 마법사들을 식별하러 나선 일도 있었다. 왼쪽 눈가에 있는 점이 마법사의 상징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적발해 낸 마법사가 150명에 달했다.  폭력의 불길이 인 것도 잠시, 종교재판소는 16세기 중반 무렵 박해를 중단했다  세속법정과 세속법정을 지지하고 있던 대중들의 열기를 가라앉힌 것은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이었다. 그들은 줄줄이 엮여 들어오는 피고인들의 죄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고들에게 무겁지 않은 형벌을 부과했고 대부분 간단한 조사를 끝낸 후 훈방시키곤 했다. 더욱이 종교재판소를 창설한 본래의 목적은 새로 개종한 신자들과 유대교인(marranes, 특히 예수의 신성은 인정하고 카톨릭교로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카스티야와 포르투칼의 술어:역주), 무어인을 통제하기 위한 데 있었다. 마법은 그들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다. 단지 이탈리아의 트리엔트 지방에서처럼 스페인에서도 짧고 예외적인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오로지 바스크 지방에서만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라부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창 마녀사냥의 불꽃이 타오를 때 바스크 지방에서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종교재판관 로그로뇨가 세속법정의 요청에 따라 수가라무르디에 심판관을 보낸 때가 1610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환되어 1614년까지 재판이 계속되었다. 그들의 재판은 세속재판관들의 요구에 비해 오히려 가벼운 형을 언도하고 끝났다. 여덟 명의 마녀를 화형에 처하고 형이 선고되기 전에 죽은 다섯 명은 허수아비를 화형대 위에 세웠다. 17명은 사면되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뒤에 서서히 긴장이 가라앉았다. 바스크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남부 이탈리아의 강신술과 비슷한 제의적 요술과 무속만이 종교재판소의 눈에 거슬렸을 뿐이다.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이러한 관용은 로마의 종교재판소와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마술사, 점쟁이, 돌팔이 치료사 그리고 초자연력과 교유하는 모든 이들이 마법사와 동일시되었다  악마적 마법에 대한 믿음이 휩쓸었던 프랑스와 그 접경지대의 특징은 마술에 대한 갖가지 형태의 믿음이 조직적으로 악마 모델로 환원되었다는 것이다. 농촌에는 앞날을 알아보거나 소중한 사람을 되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자 할 때 사람들이 의지하던 점쟁이들이 있었다. 또 보건지식이 전무했던 농촌에 꼭 필요한 치료사들이나 경험이 많은 무면허 의사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역할을 담당했던 여인들이 대개 마녀로 의심받았으며 나아가 그들의 치료방법은 악마에게 전수받은 것으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데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추측 아래 화형대에 세워졌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성술과 연금술에 빠져 자기들이 교유하는 초자연적 정신의 힘으로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들과 사제들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강신술사들 또한 조화의 신(demiurgos, 플라톤 학파에서 말하는 조물주:역주)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렀다.  지식인들 역시 마법의 문제로 법정에 섰다  역사가들의 연구가 농촌지역의 마법 실태에 주로 관심을 두었던 까닭에 지식인들의 마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 사이에 마술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지표들은 생생히 살아 있다. 우선 1565년에서 1640년까지 파리 의회가 마법을 행한 혐의로 기소된 1,019명의 심판을 담당했다. 파리 의회에서의 재판은 대개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항고심에 해당했다. 더욱이 파리 의회의 관할지역은 왕국의 1/3에 해당되어 무척 넓은 편이었다. 공소를 제기한 피고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도시에 살면서 사회적, 문화적 수준이 높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때문에 파리 의회가 재심한 피고들의 절반 이상이 남자들이었던 반면 농촌에서 마법의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은 80% 이상이 여자였다. 파리 의회에 관용을 호소한 남자들이 마술사였으며 강신술사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살았다면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서서 죽음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곧 마법에 대한 관용 때문에 파리 의회의 명성이 드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명이 넘는 피고들이 결국 화형대 위에 서야 했지만.  어째서 이러저러한 지방이 마녀사냥에 기세를 올렸고 다른 지방은 침묵을 지켰는가? 이 의문을 풀려면 결국 근세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주장의 뒤편에는 악마적 마법의 심원이 어디인가, 그것이 어떻게 현실로 구체화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숨어 있다.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교재판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특히 의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5장 마법의 몰락  악마적 마법에 관련한 범죄들은 16세기를 통하여 재판관들과 지식인의 의식 속에 굳게 각인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마법재판에 대한 반대의견과 악마론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의심은 물론, 마법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몇몇 지식인들이 뜻을 같이하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각을 세간에서 인정한 것은 17세기 후반이었다.  악마론에 동조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특별히 어떤 사회적 집단이나 계층에 따라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개 개인적 신념에 따라 결정되곤 했다. 단지, 악마적 마법의 문제에 직면하여 신학자나 종교재판관, 로마 교황청이 발표하는 의견은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5세기에 탄생된 악마론의 신화가 종교재판소와 교황청의 책임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이미 16세기부터 자기들의 목적과 달리 지나치게 과장된 마녀사냥의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교회의 이러한 입장 변화가 원칙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마는 현실로 존재하며, 악마가 인류를 타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트리엔트 종교회의 이후에 카톨릭 교의를 형성하는 주요한 받침돌이 되었다. 1586년 시스티나 5세 때까지도 점성술은 물론 모든 형태의 예언을 단죄하는 칙서가 발표되었다. 왜냐하면 미래를 예견한다는 것은 악마의 도움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법현실 속에서 자제의 필요성을 느꼈다  종교재판소가 마법 심판에 개입할 때는 대개 세속법정의 지나친 열정을 가라앉히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17세기 초에 바스크 지방에서 있었던 수가라무르디 사건을 예로 들자면 종교재판소의 한 판사가 마녀 혐의로 기소된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 적이 있었다. 알론소 데 살라사르 이 프리아스가 1611년에 사면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 관대한 판결은 마녀사냥의 열기를 잠재웠다. 그는 마법이란 사람들의 고지식함이 만들어 낸 결정물에 불과하며, 마법의 이미지란 병적 상상력의 산물이며, 온갖 귀신들과 악마들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밤이란 인간 의식의 순수한 발명품이라고 보았다. 그는 서로 상반되는 수백 종류의 증언들을 분석하여 분명한 증거를 댔다. 악마적 마법에 대한 믿음과 그 억압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나선 첫 번째 문헌은 독일 예수회 소속 프리드리히 슈페의 저서이다. 그가 1631년에 펴낸 <형사범죄에 관한 신중함과 마녀 재판에 대하여>는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657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로 7세가 마법재판에서는 최대한 신중하도록 각 판관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671년, 프란체스코회 소속 자크 도튄 신부가 마법의 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최초의 본격적인 개설서를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마술가와 마법사에 대한 지적 경계와 무지의 맹신>은 프랑스 사법정신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세속의 지식인들은 상반되는 의견들 사이에서 갈등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대개 마녀사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프로테스탄트들도 악마의 존재와 역할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마녀사냥은 교황숭배주의의 발현이라고 간주했다. 의사들 역시 이러한 입장에 서서 마법이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악마론을 신봉하는 재판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1563년, 장 비에는 <악마에 대한 환상, 주술 그리고 독약>이라는 책을 바젤에서 출판했다. 그는 악마의 존재나 악마의 충실한 심부름꾼인 진짜 마법사의 존재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을 써서 치료해야 될 단순한 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을 교회에 인도할 때는 오로지 약으로 치료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폈던 이는 장 비에가 처음이 아니지만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클레브 공작의 주치의였는데 1569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온 그의 저작을 반박한 책이 바로 장 보댕의 <마법사들의 악마 숭배>였다.  17세기에도 여러 의사들이 마녀사냥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중요 인물로는 기 파탱, 마르크 덩캉, 피에르 이블랭, 또 이들과 같은 부류로서 흔히 '자유주의자'로 불리던 자연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인 지식인들, 계몽사상의 추종자들이 그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 그룹의 중심에는 마자랭 추기경의 도서관 사서인 가브리엘 노데가 있었다. 이들은 사교 살롱과 아카데미에서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재판관들 역시 그곳에 출입했다. 때문에 재판관들 가운데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재판관들은 악마론의 교과서가 정리해 놓은 기존의 입장에 동조했다  많은 재판관들은 장 보댕이 정리해 놓은 입장, 특히 하급재판소의 재판관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최고재판소의 재판관들, 주로 의회의 재판관들은 마녀사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형사법규를 좀더 탄력적으로 적용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형사 소송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하급재판소의 정도가 지나친 여러 행태가 공공질서와 왕권을 교란하는 데 위협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금씩 마녀사냥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모든 의회가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파리와 디종 의회 의원들은 신중했던 반면 루앙 의회 의원들은 전통주의자에 가까웠다.  일반인들은 물론 사법 재판관들과 사회 엘리트들의 여론 - 실제로는 사회 엘리트들의 여론만이 중요했지만 - 은 17세기에 들어 점차 변해 갔다. 이들은 마녀사냥이 막을 내리는데 기여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유명한 재판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 놓았던 것이다.    1609년, 엑상프로방스 지방에서 귀족 출신의 젊은 수녀 마들렌 드망두아 드 라 팔뤼가 환각과 야밤 공포에 시달려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엑스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두 신부 - 미카엘리와 동티우스 - 는 성 우르술라 동정수녀회 소속 드 라 팔뤼 수녀가 마귀에 씌었다고 확신했다. 이들은 수녀를 위해 마귀쫓기 집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윽고 이 젊은 수녀는 높은 평판을 누리고 있던 마르세유 지방 아쿨 교구의 루이 고프리디 주임신부를 고발했다. 고프리디 신부는 드 라 팔뤼 일가의 고해사제로 마르세유에 거주하던 드 라 팔뤼 수녀의 담임사제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드 라 팔뤼 수녀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고발당한 것이다. 고프리디는 본디 명망 있는 사제였다. 그는 주교의 후원과 지지를 받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엑스 의회가 이 사건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중 고문을 받던 사제는 1611년 2월 죄를 '자백'했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신앙을 부인했으며 마법의 집회에 참석하고 저주를 일삼았다는 것, 마들렌을 저주하여 마녀로 만들었으며 그녀를 유혹하여 '육체적으로도 잘 안다'고 말했다. 2개월 만에 재판이 종결되고 1611년 4월 30일 고프리디가 화형대에 오름으로써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전체에 영향을 미쳐 비슷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17세기 전반에 벌어졌던 마법 사건의 전형이 되었다.  17세기 중엽, 루댕 지방에서 벌어진 악마 사건은 고전적인 비극의 한 차원을 형성한다  사건은 또다시 성 우르술라 수녀회의 한 작은 수도원에서 일어났다. 수녀원장 잔 데장주 수녀가 식솔로 거느리던 수녀들에게서 마귀들림의 흔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인 마을사람들도, 지역 귀족들과 밀접하게 연계된 교계 인사들도, 잔 데장주가 마법사로 고발한 위르뱅 그랑디에 사제도 이 외침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생피에르 뒤 마르셰 교구의 주임사제인 그랑디에는 자유분방한 정신의 소유자로 세칭 자유주의자였으며 지방정치에도 관여하고 있는데다 귀족 부인들의 고해신부였던 까닭에 그녀들에게 만만찮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하여 1632년 보르도 주교단의 지지를 등에 업은 그랑디에는 공개적으로 벌어진 마귀쫓기 집회에서 수녀원장의 고발이 근거 없음을 쉽게 증명했다..  정치의 개입, 루이 13세의 재상인 리슐리외 추기경은 루댕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성 우르술라 수녀회에는 리슐리외의 친척이 있었다. 더욱이 루댕은 절대국가의 강화기에 있어서 절대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지방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사람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던 까닭에 리슐리외는 카톨릭계 마을을 근처에 새로 만들면서까지 루댕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랑디에의 지지를 받는 마을 집정관이 반대했지만 성채도 허물어뜨리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자기의 측근인 마르탱 드 로바르드몽을 내려보내 성채 해체를 감독했다. 그를 루댕에 파견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도 성 우르술라 수녀회에 친척들이 있어 그랑디에 사건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사실 그랑디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마귀들림이 실제로 가능하고 그랑디에의 유죄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결국 마법사건에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파리 의회의 법정을 기피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로바르드몽은 리슐리외로부터 그랑디에를 심판할 특별위원회의 설치를 승인받았다. 1633년 말부터 이 주임사제는 영어의 몸이 되었다. 1634년 봄에 있었던 예심은 치밀하게 준비되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이끄는 마귀쫓기 대중집회와 함께 벌어졌다. 그랑디에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악마와 계약을 맺은 적이 없으며 마법의식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고 줄기차게 부인했다. 그래서 1634년 8월 8일에 이르도록 판결이 지연되다가 바로 그날, 판결과 함께 산 채로 화형장의 불길 속에 던져졌다.  그랑디에 신부는 음모의 희생양인가 아니면 마귀에 들렸는가, 논쟁이 시작되었다  엑스 지방의 사건에 이어 루댕 사건으로 여론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들끓었다. 더욱이 수녀원 수녀들이 이끄는 마귀쫓기 집회는 시련에 처할수록 더욱 돋보이는 그랑디에의 성품과 대비되어 더 한층 논쟁에 불을 붙였다. 귀신들림과 사제의 유죄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한쪽 편 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 편 사람들은 성 우르술라 수녀회원들이 공모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발 더 양보하여 수녀들이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한편, 그랑디에는 세력다툼의 덫에 걸렸을 뿐이라고 믿었다. 첫 번째 부류는 성직자들, 특히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 자유주의자들, 대다수의 의사들은 두 번째 부류를 형성했다. 고위 성직자들 또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푸아티에 주교는 그랑디에의 유죄를 확신했던 반면 보르도의 대주교는 주임신부를 모함하는 음모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재판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성 우르술라 수녀들의 신앙 지도가 프란체스코회에서 예수회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당대의 이름난 고해 신부 가운데 하나였던 쉬렝 신부가 잔 데장주 수녀의 신앙고백을 담당하게 되었다. 쉬렝 신부는 수녀원장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으며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던 그랑디에가 처형된 이상 수녀원장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성흔의 은사까지 받았다고 공개하여 그녀는 성녀의 호칭까지 얻었다. 왼손에 붉은색으로 예수와 마리아, 요셉과 성 프랑수아 드 살의 이름이 차례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1638년에는 프랑수아 드 살의 무덤으로 성지순례를 떠나 프랑스 전역에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 파리에서는 리슐리외를 접견하고 생제르맹에서는 루이 13세와 왕비를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 더욱이 귀향길에 루이 14세의 분만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루댕 사건이 다시 논쟁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책과 팜플렛과 투서를 통해 빠르게 전파된 새로운 정보들은 양 진영의 주장들을 여과없이 담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잔 데장주 수녀는 마법에 관한 일반의 여론을 다시 환기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다.  루비에 사건으로 지식인들 사이의 여론은 마귀들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1633년,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마을에 있는 성 루이와 성 엘리자베트 간호수도회 수녀인 마들렌 바벵이 갑자기 발작증세를 보였다.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한 에브루의 주교는 이에 지체 없이 개입하여 또 하나의 마법 사건이 되지 않도록 재빨리 덮어 버렸다. 그러나 이토록 가벼운 사건도 9년이 지난 후, 수도회 주임사제인 마튀랭 피카르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신의 계시라는 여러 징후들과 귀신쫓기 의식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마들렌 바벵과 마튀랭 피카르가 마법사로 낙인 찍혔다. 바벵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피카르는 교회묘지에서 무덤이 파헤쳐지는 굴욕을 당했다. 그러자 주임사제의 가족들이 루앙 의회에 항소를 제기했으며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재판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조사와 역조사가 거듭되었다. 이 지루한 싸움은 1647년 피카르뿐만 아니라 그의 보좌신부였던 토마 불레까지 소추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법을 신봉한 토마 불레는 마들렌 바벵과 성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이 유희에서 태어난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그는 판결이 있던 날, 그 동안 모시던 옛 주임사제의 유골과 함께 불길 속으로 사그라졌다.  루비에 사건은 이전의 마귀들림 사건들보다 훨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비에의 '수녀님'들은 신흥 상공업자(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던 까닭에 귀족 출신이었던 루댕이나 엑상프로방스의 '수녀님'들보다 더욱 쉽게 저잣거리의 풍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을 겪는 동안 여론은 '반마귀들림', 곧 마귀들림의 허구성을 직시하자는 쪽으로 선회했다. 피에르 이블랭이 진행했던 조사에서 증인으로 출두했던 이는 왕비의 보호 아래 있던 의사였다. 그는 마귀들림이라는 생각 자체에 반대하며 그것은 차라리 위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소위 귀신들렸다는 여인들이 모두 심리적 불안을 겪는 환자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루비에의 마귀들림 사건은 수녀들의 패배로 끝났다. 수녀들이 옛 원장수녀였던 프랑수아즈 드 라 크루아에게 마법의 혐의를 씌웠지만 그녀는 곧바로 왕실 참사원에 직소하여 파리 교구 재판소에서 무죄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음해에 참사원이 진행중인 모든 재판을 직권으로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지식인들의 여론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아 마귀들림은 물론 마법을 둘러싼 자백이 허구라는 인식을 심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피비린내 나는 마녀사냥으로 상처를 받았던 부르고뉴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여기에서도 예정된 행로가 되풀이되는데 성 우르술라 수녀회, 발작, 공개적인 귀신쫓기 집회, 공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르브 뷔베 수녀를 마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교구법정에서 디종 의회법정으로, 다시 파리 의회법정으로 이관되기를 거듭하다가 바르브 뷔베는 1664년 갑자기, 그러나 당연하게 무죄 석방되었다.  17세기에 의회 재판관들은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취지로 마법 재판의 행로를 바꾸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그러나 잇달은 마법사건의 반작용으로 최고심 재판관들 - 특히 왕실 직속 항소심을 담당했던 의회 의원들 - 은 마법을 더 이상 범죄 구성요소로 간주하려 하지 않았다. 갈 길은 멀고 험난했다. 파리 의회의 판관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인데다 '자유주의' 사상에 가장 개방적인 집단이었으므로 언제나 논쟁의 중심자리에 서게 되었다. 1601년을 기점으로 그동안 마법 심사의 대명사라 할 야만적인 물실험이 금지되었다. 1624년에는 하급심으로부터 의회에 항소할 권리가 모든 피고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사형이 언도될 경우에는 항소가 자동으로 이루어져야 했지만 자치권을 고집하는 지방법원들은 이를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파리 의회는 1641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엄격하게 대응하기 시작하여 선고 즉시 화형을 집행하는 지방의 하급재판소 재판관들을 문책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법해석과 관련해서 파리 의회는 가장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이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항소가 있을 경우에 형량이 체계적으로 경감되었으며 사형은 대부분 추방으로 감형되었다. 곧 이어 지방의회 대다수가 파리 의회를 뒤따랐다.  1665년부터 콜베르와 그 조력자들은 시대착오적인 형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막대한 임무에 전념한다  왕국 신민들의 일상화된 습속을 수정하게 될 이 거대한 작업은 1670년, 형사법령의 포고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는 마법에 대한 어떤 언급도, 멀리 우회하는 간접적인 표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르고뉴 지방이 마녀사냥으로 인해 피로 물든 기억이 아직 생생한 그때, 이 법령의 포고는 차라리 경악이었다. 하지만 마법에 대한 언급 자체가 빠져 있었던 것은 법률 입안자들의 편에서 보자면 일종의 중의적 규정이었다. 마법이 범죄 구성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암시는 분명한 진보로 해석되지만 언급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방민들의 저항을 염두에 두고 이를 반영했기 때문인 것이다.  1671년과 1672년 즉결재판소의 판결들은 베아른, 기아나, 노르망디 지방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에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지만 모든 지방의회 가운데 가장 확신에 넘쳤고 반항적이었으며 가장 전통적이던 루앙 의회는 여전히 지방의 각급 법원에 마법 심판을 일임해 놓고 있었다. 마법 문제에 국가가 결정적으로 개입한 것은 1682년 칙령은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부인까지 연루된 '독살사건'을 계기로 포고되었다. 악마적 마법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 칙령은 마술사들과 마법사들을 소추하려면 실제로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 곧 독약을 사용했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이는 소추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 이제 떠도는 풍문을 근거로 하여 재판에 계류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신중함은 당시에 왕실과 법원을 지배했던 경건한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는 카톨릭 교회의 개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입법자들은 악마의 실재성도, 악마의 앞잡이라는 마법사들의 악행이 존재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판관들에게 구체적인 증거수집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사실상 악마죄의 성립을 막을 수 있었을 뿐이다. 계몽철학의 전파와 함께 마법은 점차 저속한 미신이나 대중들의 무지, 상상이 만들어 낸 환상으로 추락해 갔다.  저주와 악마의 옷을 벗은 문화현상으로서의 마법은 18세기부터 급격히 조락하여 미신의 지위로까지 밀려난다  그러나 마법사, 증류기, 아황증기 등은 신비한 힘과 보이지 않는 정신에 사로잡힌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 속에서 조만간에 부활한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마법의 범죄들은 18세기를 통하여 서구 국가들의 사법현실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직 낭만주의자들이 문학과 회화와 음악 속에서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놓았을 때에야 잃었던 영광을 일부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전유럽에 마법이 하나의 이야기로 퍼져 마법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지역에까지 마법의 형상이 그려진 것은 대략 19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특히 대중문화를 재발굴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가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지난 세기들로부터 구전된 민담과 전설이 악마론의 지배를 받던 지식인들의 낡은 문화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그림 형제와 같은 작가나 민속학자들이 채록한 마법의 이야기들은 이제 문학으로 환원되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렇게 문학의 중개를 통하여, 저주와 악마로 점철된 마법은 잃어버린 정당성의 일부분을 되찾았다. 마법 이야기는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는 소재였으며, 제일 유명한 화가로는 고야를 들 수 있다. 스페인은 마녀사냥의 불길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고야의 화첩은 마법의 집회와 마녀들에 대한 삽화로 가득 차 있다.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 시인, 소설가, 음악가들은 중세의 음흉함을 다시 발견한다  낭만파 음악가들은 마법에서 주요한 테마들을 많이 얻었으며 멘델스존과 베를리오즈가 특히 그러하다. 역사학자 쥘 미슐레의 저작 또한 이러한 낭만주의 운동의 연장선에 자리잡고 있다. 1862년 빛을 본 <마녀>는 악마론과 마녀사냥의 일화를 통해서 사학자들이 새로운 역사인식 틀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제공한 저서였다. 미슐레는 중세를 일컬어 악마의 지배를 받은 암흑기라 했는데, 그 속에서 마녀는 교회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여인의 전형이며 자연과 육체와 의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미슐레는 마녀는 당대의 반순응주의자로 보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해석을 남겼지만, 이러한 관점은 후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비록 마법이 역사 연구의 가장 풍요로운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폭넓게 논의된 주제 가운데 하나라 하더라도 그 의미는 아직도 우리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류학 분야의 최근 연구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무속 연구는 그동안의 고전적인 문헌들이 못다 이야기한 많은 의문점들을 밝혀 내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기록과 증언  마법사건  풍문에서 화형장으로! 그것은 터무니없는 만큼 불가피한 것이다. 어디에서나 똑같은 도식이 반복된다. '소문이 나쁜' 여자가 등장하면, 이웃사람들은 공포 - 훗날에는 강박관념이라 불리지만 - 로 전율한다. 사법기관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여기 17세기 말에 흔히 볼 수 있던 진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다른 경우처럼 화형장의 불길로 끝이 나는...  페론을 심판대에 서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은 지도 3주일이 지났다. 예수승천일과 유월절, 그리고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가 베풀어지는 5월의 3주간, 마녀의 고난은 1679년 5월 8일, 삼천기도 행렬이 길게 늘어선 날에 시작되었다. 두에의 성 자크 교구 주민들이 장대 끝에 높이 매단 금색 용을 뒤따르고 있을 때, 부비니 지방 사람들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은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리며 신부를 따라 경작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그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페론 사건을 마을사람들의 농사걱정과 연결시켜 본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마녀의 피와 살을 재로 만들어 뿌린다면 오랫동안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는 대지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땅 위에 뿌려진 성 요한의 뼛가루처럼, 아라스나 피카르디 화형장의 묵은 뼛가루처럼, 이 또한 저주를 물리치고 풍작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무심한 재판기록을 일일이 살펴볼 필요조차 없다. 페론이 겪었던 한 편의 드라마에는 철따라 행해진 제의의 비현실적인 측면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네 명의 기사  사실 성 요한제가 돌아오면 북부 지방 마을에서는 마법사 화형식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수아비 화형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바친 희생양은 나무나 지푸라기가 아니었다.  뒤러가 그린 묵시록의 네 명의 기사를 닮은 마르시엔 수비대의 네 명의 병사가 부비니에 죽음과 공포를 몰고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녀사냥이란 무시무시한 유행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희생자인 페론 고귀용은 마을의 남쪽, 정확히 말해서 네 명의 병사가 묵고 있는 마르시엔 주거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5월 8일 저녁 8시에서 9시경, 네 명의 병사는 페론의 집에 들이닥쳐 돈을 요구했다. 그들은 마을사람들이 꾸며 낸 페론에 관한 험담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삼천기도일을 맞아 카바레에 놀러 갈 비용이나 마련하려고 그날의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냈던 것이다. 그들이 페론을 데리고 교회 광장 쪽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 여럿 있다. 방앗간 머슴인 드니 방드빌이 그들을 뒤쫓아가며 주워들은 얘기는 이렇다. 병사들은 8전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페론은 4전에 그들을 쫓아 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이윽고 광장에 있는 질 포보 카바레에 들어갔다. 병사 하나가 주먹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마녀 같은 년!". 그의 동료들은 한술 더 떠서 억지로 그녀를 자리에 앉힌 다음 너저분한 너스레를 떨어댔다. "벽난로 속으로 날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으라구." 유달리 흥분한 한 병사가, "자, 나를 위해 한 잔 할까. 마녀야, 끝장을 내 주지." 하며, 억지로 페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면서 옷섶을 헤쳐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손길을 내밀었다. 다른 병사가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마녀로 아는데 수치스럽지 않느냐 말이야. 자, 2전을 내놓았으니 이제 6전이 남았군. 6전을 마저 주면 풀어주지." 세 번째 병사는 테이블 위에 2전을 얹어 놓고 성호를 그었다. "오, 마녀의 돈이시여!"  페론은 저항하며 이 수모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궁리했다. 그녀는 일단 집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웃에서 돈을 빌려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자기들의 노획물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페론은 카바레 주인에게 돈을 빌려 보려 하지만 헛수고였다. 병사들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 외양간에 매어 둔 젖소를 끌어내더니 젖소와 함께 제일 가까운 선술집으로 끌고 가 버렸다. 거기에서 만난 방앗간 주인 제롬 조스브노우가, 다음 주 일요일까지 젖소를 담보로 묶어 둔다는 조건으로, 페론에게 6전을 빌려 주마고 약속했다. 그래서 방앗간 주인은 페론의 남편 앙드리외 뒤포세를 불러 그에게 돈을 주고, 남편은 다시 병사들에게 6전을 건네주었다...  병사는 수탈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요, 말이 우리 편이지 적군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양심이라곤 털끌만큼도 없는 병사들이야말로 사실 민중수탈의 일선에서 성실히 복무한 자들이다...  사법장치가 발동하다  페론과 남편은 이미 흠집난 평판을 묵묵히 견뎌 내야 했다. 마을사람들 일부는 병사들의 편을 들고 있지 않은가. 미셸 퐁트니에 집에 하숙하던 그들 병사 하나가 페론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 왔다. 마녀가 아니라는 페론과 마녀가 분명하다는 자기 중 누가 옳은지 법정에서 가려 보자고 떠들어댔다.  패소자에게 가혹한 보복을 규정하는 형사법정에 함께 서서 누구 말이 옳은지 내기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양쪽 모두 판결이 날 때까지 감금당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자기 아내에게, 자기에게, 더 나아가 식구 모두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털어 버리겠다는 심사에서 남편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남편은 5월 10일, 부비니 남작령 장원 법정에 정식으로 제소했다. 그날로 네 명의 증인이 출두하는 첫 번째 심리가 열렸다. 육중한 사법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이 거대한 기계를 멈출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법정에 선 희생자들을 산산이 부수어 놓고 말았다.  병사들도 뒤포세의 고소로 즉시 투옥되었다. 5월 11일에는 하숙집 주인 미셸 퐁트니에가 판사들 앞에 출두했다. 그는 자신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피고 가운데 하나가 자기 집에 묵고 있으며, 자신 또한 사건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페론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 그녀를 마녀로 몰아붙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마녀'는 해볼 때까지 해보자는 심사에서 5월 24일, 사촌 잔 고귀용과 모랑의 아들 장 바쉬까지 끌어들였다. 게다가 5월 26일, 장원의 재판관들은 정확한 증거를 대보라고 연실 닥달해대고 페론은 추가로 네 명의 이름을 더 밝혔다. 앙투안 쿠플레의 미망인이며 클렌령과 마르엔령 세리인 마리안 뒤크로케, 플린령의 주민인 앙드리외 퓌셸과 필리포르 퓌셸, 장 트뤼앙의 딸 마들렌 트뤼앙이 새로 등장한 인물이다. 5월 27일과 28일, 그들과 대질심문에 나선 페론은 이들이 다름아닌 마녀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언제인지 날짜는 불명확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딸, 마리안까지 걸고 들어갔다. 5월 28일, 페론은 자신의 자백과 고발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이윽고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사면을 구하는 대가로 유죄를 순순히 인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의 심판  5월 29일 월요일, 유월절이 지난 지 8일째 되는 날, 마침내 페론이 감옥에서 나왔다. 광장에 세워진 공시대로 24명의 남자가 그녀를 인도했다. 장원 서기인 들르뤼가 만인 앞에서 형을 공포했다. 피고는 간밤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의 심방을 받고 고해성사를 했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그 때문인지 판사들은 그녀 육신을 절반만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절반은 만인 앞에 걸어놓아 그녀가 저지른 믿을 수 없는 죄악에 대해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조치였다. 페론이 주장했던 장 뒤바르는 단돈 15전을 받고 시체가 걸릴 회전원반을 온종일 돌리기로 했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상급법원에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마르시엔의 네 명의 병사가 일삼고 다닌 폭행과 증오의 난동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1679년 한 해 동안 부비니 화형장에는 새로운 불길이 계속 타올랐다.  로베르 뮈셈블레 <최후의 화형>  악마론자들이 말하기를...  악마와 폭력을 그리는 간명한 삽화들은 대중들의 무지에 가까운 상상력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악마의 마법을 구성하는 여러 믿음들은 악마론자들이 말했던 바와 같은, 여러 가지 공식적인 담론에 의거하여 형성되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접어들 무렵, 스프렝거와 보귀에 같은 재판관들이 악마론의 '스승'으로 떠올랐다.  앙리 보귀에는 한 마법사건의 여러 정황들을 예로 들어 종교재판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건의 일반 모델을 제시한다.  여덟 살 난 루이즈 마야가 다섯 귀신의 음해를 받음에 따라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이 투옥된다  1598년 6월 5일 토요일, 클로드 마야와 움베르트 뒤 페르슈 드 쿠아리에르의 여덟 살박이 딸 루이즈가 갑자기 온몸에 마비를 일으켰다. 두 손을 땅에 짚고 사지로 기어서야 겨우 움직이는데 고개 또한 뒤틀려서 보기가 더 사나웠다. 이런 형색으로 며칠을 더 지나 어느덧 7월 19일이 되니, 아비와 어미는 귀신들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놀란 아비와 어미가 생소베르 교회로 줄달음쳐 귀신쫓기를 간청하므로 한판 법석이 났다.  찬찬히 살펴보니 귀신은 다섯이었다. 늑대 귀신, 고양이 귀신, 개 귀신, 이쁜이 귀신, 그리고 그리핀(Griffi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몸은 사자이며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인 괴물:역주)이 들어앉아 있었다. 사제가 루이즈에게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느냐고 물으니, 아이가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이라 대답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뚱보 프랑수아즈 드 쿠아리에르'라고도 불리는 쉰여덟 살 가량의 이 여인을 아이가 그 난리통에 손가락으로 짚어 낸 것이다. 된통 걸려든 것이 분명했다.  어미 아비 따라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면서 만일 부모가 경견히 기도하면 몸이 곧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뒤 한숨도 돌리기 전에 밤이 되었다. 어미 아비가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데, 아이가 "귀신 둘은 벌써 죽었어요. 계속 기도하면 나머지 귀신들도 마저 죽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딸자식이 제일이거늘 어느 부모가 기도를 멈추겠는가.  다음날 새벽이 되자 아이는 더 나빠져서 끝도 없이 토해냈다. 마침내 땅을 향해 몸을 구부리니 귀신들이 입으로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주먹처럼 큼직한 실타래 모양으로, 화마처럼 시뻘건 색깔로, 한데 검정 고양이는 뒤로 처지는 것이었다. 아이가 죽었다던 그 귀신과 또 한 귀신은 맨 나중에야 나오는데, 처음 셋보다는 행실 곱게 도망쳐 나왔다. 이 둘은 처음부터 제 힘을 숨긴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아이가 그 둘이 벌써 죽었다고 말했겠는가. 한번 터져 나온 다섯 놈은 화롯가를 서너 바퀴 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즉시로 아이는 기운을 차리고 거동이 좋아졌다. 이를 보더라도 귀신쫓기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어미 아비 기도가 뒤따를 때에 직방이다. 이 불쌍한 어린 것을 보고 우리 모두 배워야 한다.  일이 어찌 된 것이냐 하면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은 6월 4일 밤에 루이즈 마야의 집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집에서 잤다고 한다. 사실은 움베르트가 남편 몰래 없던 말로 하라고 했지만 프랑수아즈가 자꾸 간청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아래처 헛간에서 자고 가라고 허락한 것이다. 프랑수아즈가 잘 곳을 돌아보는 사이 움베르트는 가축을 돌보러 갔다.  이때를 틈 타 늙은 프랑수아즈가 루이즈와 루이즈보다 나이 어린 두 자매에게 다가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빵, 한 조각을 내밀며 말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만약 얘기를 하면 너를 죽여 먹어 버릴 테야." (분명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이튿날 루이즈가 귀신들린 것이다.  움베르트는 프랑수아즈에게 재워 주기 곤란하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증언했고 부부가 함께 딸아이 증상을 낱낱이 증언했다. 루이즈 또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 아이가 아직 어려 철이 없어 보여도 말하는 품이 삼사십 대 여인네만큼이나 차분했다. 앞뒤가 이러하니, 정의가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을 잡아들여 투옥함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에게서 진실을 짜낸 방법들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은 감옥소에 갇힌 사흘 동안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는 죄가 없다고 내내 주장했다. 하물며 그런 자기를 가두어 두는 것은 큰 잘못이라 누누이 이야기하니, 겉보기에는 그 같은 성녀가 또 없을 것 같았다. 말끝마다 하느님이요, 입을 열었다 하면 성모님, 천상의 성인, 성녀님이니 손에 거머쥔 묵주가 쉴 새가 없었다. 한데 이 긴 묵주 끝 어디에도 십자가를 찾을 길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것이 바로 자기 죄를 반증해 주는 지표 아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다그치자 애써 울려 하는데도 참새 눈물만큼도 비치는 게 없었다. 그러니 어찌 철통같이 감시하지 않을 수 있으며 호락호락 취조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날도 진실을 대라고 몰아붙였지만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악마의 표징을 찾기 위해 머리카락을 몽땅 자르고 옷을 갈아 입히는 수밖에 없었다. 성현의 말씀대로 옷을 벗기는데 겉보기에 어떤 징표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머리에 손을 대자, 악마의 은사가 있어 죽기로 몸부림을 쳐댔다.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쉽게 머리카락을 자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발광을 하더니 마침내 하나둘씩 자백하기 시작했다. 나날이 새로워, 전날에 뱉은 이야기에 하나씩 둘씩 덧붙이는 게 많았다.  앙리 보귀에 <마법사의 저주함에 부쳐>  마법사들은 자기들이 원할 때면, 어디서든 우박을 내리는데, 이는 하늘을 거머쥐고 맴도는 악마의 권능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표독한 악마는 먹구름을 몰아 원하는 곳에 큰 비를 내리니, 이는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다.  마법사의 가루에 대하여  이 가루는 어떤 때는 까맣고 어떤 때는 하얗다가 또 다른 때는 다른 빛깔이다. 자크 보귀에와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이 로이 모네레를 죽이고자 달려들 때, 미리 제 주인에게서 얻어낸 흰 가루 빵조각에 뿌려 먹였으니 필시 이 가루가 마법사의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클로드 로이에게 복수를 다짐하던 티에벤 파제가 어느 날 치즈 안에 가루를 섞어 로이에게 먹이자 로이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법사의 고약과 연고에 대하여  마법사들에게는 제 주인되는 악마가 만들어 건넸거나 저들이 직접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고약과 연고가 있으니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들은 마법의 집회에 갈 때나 변신술을 부려 이리 따위로 변신하고자 할 때, 또는 제 몸의 오감을 잠들게 해 악마가 제 몸을 업고 편히 지내게 하고자 할 때 고약이나 연고를 온몸에 문지른다. 이런 경우 말고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니 고약과 연고는 이때만을 위한 것 같다.  마법사는 숨결과 입김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가  마법사들은 숨결과 입김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피해를 입힌다. 예를 들라 하면 플리볼레트라 불리기도 하는 클로드 가이야르가 있다. 에부슈 교회에서 맞닥뜨린 클로드 페리에를 향해 훅 입김을 내쏘니, 그 즉시로 병에 걸리더니 점차 거동조차 불편해졌다. 페리에는 가난과 무기력 속에 한 해를 보낸 다음 결국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마법사는 말로 어떻게 피해를 입히는가  마법사들은 말로 피해를 입히고 생명도 앗아간다. 니데는 어떤 마녀가 단 한마디 말로 사람들을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한 마녀가 단 한마디 말로 이웃집 여자의 턱을 위아래로 사정없이 패대기치는 것도 직접 보았다고 한다.  마법사는 시선으로 어떻게 상처를 주는가  다섯 번째로, 마법사들은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이다. 스프렝거는 어른보다는 어린것들이 마법사에게 다치기 쉽다고 일러준다. 재판관들 또한 마법사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미혹에 빠지고 마음이 평정을 잃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금수야 마법사의 눈길이 슬쩍 닿기만 하여도 금방 귀신들리고 말 것은 뻔한 일이다.  마법사는 손으로 어떻게 피해를 입히는가  여섯 번째로, 마법사들은 살짝 건드리는 손길 하나로도 폐해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종교재판관들이 모든 사법심판관들에게 이르는 것처럼 마법사의 손과 간격을 두고 서는 게 현명하다. 세 발자국이나 떨어진 사람을 제 옷으로 걸어 끌어당긴 다음 손길 하나로 저주를 건 마녀를 직접 보았다.  마법사는 지팡이로 어떻게 피해를 입히는가  일곱 번째로, 마법사들은 지팡이로 두드림으로써 생명을 앗아간다. 프랑수아즈 스크르탱과 티에벤 파제가 자백하기를 여러 마리의 암소와 여러 마리의 암말을 지팡이로 치고 주문을 걸어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법사는 특별히 어떤 질병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여기 마법사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하는 질병들을 알려 주겠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종류의 질병이다. 복통, 두통, 족통, 장염, 전신마비, 뇌졸중, 문둥병, 지랄병, 부종 등등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마녀들의 이단에 붙이는 금인칙서  죄 없는 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하느님의 종복 가운데 종복이시니 영원히 기억하라. 진심으로 기원하노니 대저 하늘의 높으신 이가 구하시는 바에 합당하도다. 큰 믿음이 솟아 천세만세에 이르러 세간 곳곳에 꽃피리라. 모든 이교의 낭설들이 신도들 처소 저 너머로 쫓겨갈지니 우리 기꺼이 말뚝을 박아 경계를 삼으리라. 우리 기꺼이 성심으로 다짐할진저 이교의 낭설들을 구축할 수단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정하리라...  사실인즉, 최근 우리들 귀에는 들려오는 바가 심상치 않아 못내 슬퍼하나니 마인츠, 쾰른, 트레브, 잘츠부르크, 브레멘 교구 등 북부 독일 지역 일대는 물론이려니와 여타 지방과 도시, 장원, 성채에 이르기까지 남녀는 불문하고 구원의 은총을 저버린 채 음몽마녀와 몽마를 받아들인다 하는도다. 주문과 마법과 푸닥거리와 또 온갖 형태의 미신이 마술과 함께 범람하니 이는 필시 여인들과 가여운 동물들의 산기를 메마르게 하리라. 대지의 정기와 포도나무의 열매와 과일나무의 열매들을 시들게 하고 말리라. 여인들처럼 남자들도, 작은 동물들처럼 큰 동물들도,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동물들을, 포도원을, 과수원을, 초원을, 목장을, 보리밭을 그리고 경작지와 채소밭을 온통 망쳐 놓으리라.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크고 작은 동물들을, 내우와 외환으로, 잔인한 고통으로 해치고 멸하리라. 그들은 남성들의 씨를 말리고 여성들의 수태를 훼방하리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하리라. 성스러운 영세로 영접한 신앙 또한 부정하여 신성을 모독하리니, 뿐만이랴, 온갖 죄악과 악행을 서슴지 않으리니 인류의 공통된 적이라, 영혼을 병들게 하며 천상의 거룩하심을 욕보이리라.  신학교수이자 전도단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 사도가 청했고, 청하는 바에 따라 이교도의 창궐을 막는 최일선에 복무한다하나 - 앙리 형제를 전기한 북부 독일 지방의 도시, 성채, 장원의 제 교구 감독관으로 서임하며, 자크 형제를 라인강 유역을 관할하게 하는 도다 - 해당지역의 사제와 세속 권력의 훼방이 심하다 하니, 본 형제들 또한 여타 지방과 도시, 장원, 성채에 어떠한 권한을 행사할지 모른다 하니, 이는 전기한 마법의 악행에 즈음하여 처벌과 교정의 권한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지방과 도시, 장원, 성체와 제 교구에 범람하는 마법의 악행이 잠잘 줄 모르니 영혼을 병들게 하고 파멸로 인도하는구나.  그러하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이 명하는 바에 따라, 이단 심판의 대업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어떠한 형태의 장애도 극복하여 나아가기를 원하매, 그는 이단의 부패를 척결하여 죄 없는 자들의 구하는 바에 합당하게 적절한 치유책을 마련해야할 바이다. 신앙에 대한 열정이 하늘 높은 곳에 이르도록 모든 성채와 도시와 장원과 교구에 이단 심판관들을 보내는 까닭이 이러하노라. 또한 본 서한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전술한 두 형제에게 종교재판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게 할지니 이는 사도권에 합치하는 바이기도 하거니와, 전기한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교정, 투옥, 처벌할 제 권한을 향유하리라. 이는 앞서 명기한 금인칙서가 정하는 바와 같이 모든 장원 성채, 도시, 교구는 물론이요, 여타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건대 그 속인 또한 예외가 아니라...  나아가 본 사도권에 기초하여, 천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희망하는 모든 성민들에게 천주의 말씀을 선포할 자유롭고도 전적인 권한을 두 형제에게 수임하나니 저들이 적절하고 합당하다고 판단할 때, 자유롭고 적법하게, 이 권능을 능히 행할지라...  주 예수 탄생 후, 1484년 12월 5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하 재임 원년에  마법의 집회, 사바스(Sabbath)  악마론의 기초를 이루는 여러 믿음 가운데 마법의 집회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믿음이다. 종교재판관의 질문은 이 하나로 귀결되며 모든 마녀의 자백 또한 반드시 이를 포함한다. 교회 미사에 정반대되는 예식, 악마의 축제, 지옥의 침침한 불길에 기대 펼쳐지는 기괴한 춤, 마법의 집회는 상상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경이적 리얼리즘과 치밀한 구성을 잃지 않는다.  마녀가 진짜로 마법의 무도회에 갔다면  이어서 한차례 춤판이 벌어져 등에 등을 맞대고 둥근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데, 절름발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곰살궂게 군다. 클로다 장프로스트와 프랑수아즈 스크르탱이 전하기를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충동질해 춤판을 벌이는데, 이때 악마는 염소와 양의 육신을 입고 나타나 함께 춤춘다 한다. 앙투안 토르니에 또한 검은 양이 제 발로 내 손을 잡고 춤을 추자고 하는데 그 발이 "아주 딱딱하고 거칠었다."고 자백했다.  희희낙락 살풀이에 악사가 빠질쏘냐. 오보에가 구성지고 악마는 늘 피리를 분다. 마법사들이 한바탕 노래를 불러대는데 이건 숫제 제멋대로이다. 아무거나 섞어서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오르면 둘씩 짝지어 춤을 추는데 상대는 늘 바뀐다. 그나마 둘씩 짝짓는 경우는 드물다.  춤이 끝나 짝을 지을 차례가 되면, 아들이 어미를 싫다 않고, 오빠가 누이동생을, 아비가 딸을 마다하지 않는다. 제 식구끼리 짝짓는 게 남사스럽지 않으며 이 자리의 누구나 그렇다. 페르시아 이방인들은 한술 더 떠 어미와 아들이 묶여 만든 자식이 마법사와 마술가로 제일이라 읊어댄다.  원초적 기쁨  자, 마법사들의 쾌락이 어떠할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그러한 상상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해괴하고도 해괴한 것은 악마가 남자에게는 음몽마녀로, 여자에게는 몽마로 번갈아 나타난다고 한다. 일찍이 조르주 강디옹과 앙투안 강디옹이 확인한 바 있으며 앙투안 토르니에와 자크마 파제, 그외 여럿이 이를 증언했다.  세상에서는 찾을 길 없는 이 삶의 환락에 몸을 굴린 마법사들이 이제는 연회와 만찬으로 미각을 즐길 때이다. 온갖 종류의 음식이 상에 오르는데 모인 사람들의 성분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르다. 식탁을 아예 버터와 치즈와 살코기로 뒤덮는다. 클로드 장기욤과 자크마 파제는 "식탁 한가운데 불 위에 큰 냄비를 올리는데 그 안에 고깃덩어리가 지글지글 끓고 있다."고 고백했다.  마실 것은 때로 포도주가, 때로 물이 나오지만 앙투안 토르니에는 "나무잔에 가득 채워진 것은 포도주였으며 아무도 물을 달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소금은 없다. 왜냐하면 소금은 악마가 그토록 증오하는 불멸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당신께 바치는 모든 제물과 성찬에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이런 까닭에 영세 때도 소금을 쓰며, 소금은 악마의 전능을 막아 주는 전능자의 징표라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금은 지혜의 표상이다. 천주께서 어찌 마법의 집회에 쓰이도록 허락하시겠는가. 이는 그의 비밀스런 심판이시다. 곧, 마법사들의 행위가 광기에서 비롯하는 게 아님을 예증하려 하신 것이다.  누군가는 빵 또한 상 위에 오르지 않는다 하나, 아랑통 출신의 크리스토플은 마법의 집회에서 치즈와 살코기와 빵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들은 거기서 먹는 음식들은 아무런 맛도 없고 살코기 또한 말고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연회를 마치고 나올 때에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한다. 미르보 출신의 마녀 클로다 뷔아라는, 그때까지 먹은 것은 바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랑통의 크리스토플도 "아무것도 안 먹는 것과 같다."고 하며 "악마는 사기꾼이다."라고 동의했다. 바람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온갖 음식이 되게 조화를 부리니 어찌 그릇되지 않다 하겠는가. 이처럼 마법의 축제에서 여전히 주린 배로 빠져 나오므로 제 주인을 욕되게 하며 불평하는 마법사를 내가 둘이나 아는데 그들의 작위는 백작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마법의 집회에서 먹는 것은 진짜 음식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탄의 노예들  연회가 끝나면 마법사들은 악마에게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아뢰는데 제일 잘했다 칭찬받는 것는 가장 많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많은 질병을 퍼뜨리고, 많은 곡식을 망쳤다는 것이니, 이는 재주껏 최대의 악행과 죄악을 범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척했다가는 휘파람과 야유로 만신창이가 되며 무리에서 외톨이가 될 뿐 아니라 종종 매질을 당해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마법사들 사이에 널러 유포된 불문율이 있다. "악마가 무엇을 더 시켜야 할지 모를 만큼 최고의 악덕을 행하라."  사탄이 하늘 높은 이에 맞서 제 앞잡이를 인도하는 것이 이러하며 그가 목적하는 것은 단 하나, 인류를 멸하는 것이다. 안타깝다. 죄 많은 인간을 천주로부터, 성유로부터, 영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천주와 성모와 성인, 성녀를 절대로 일컫지 못하게 한다. 설사 일컫는다 할지라도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서만 일컫게 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몫을 빼앗자는 것이다. 나아가 오직 하나의 주인을 섬기고 오직 하나의 주인에 충성하라 하는데, 그 주인은 바로 악마 자신이다. 게다가 최고의 악행을 서슴지 말라 하니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질병에 빠뜨리고, 가축을 죽이며, 원수에게 복수를 일삼고, 대지의 결실과 열매를 망치게 하고, 모든 씨앗을 메마르게 한다. 이것은 악마가 마법사들이 해야 할 몫으로 정한 최소한이다.  악마는 또한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이롭지 못할 바를 말하지도, 행하지도 못하게 한다. 재판관들은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 마법사들은 우박을 내리는데 이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교회 미사를 거스르는 예배  때로는 마법의 집회를 일컬어 미사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 방식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식을 주제하는 이가 상제의(사제가 미사 때 흰옷 위에 입는 소매 없는 제의:역주)를 입는데, 검정인데다 십자가가 없으며 성배 또한 물로 채워 성단을 등진다. 이어서 영성체 밀떡을 대신하여 둥그렇게 자른 검은 순무를 두 손으로 높이 치켜드니 모든 마법사들이 일시에 높은 소리로 "주인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하고 외친다.  악마가 성수를 만든다고 땅에 파 놓은 구멍에 오줌을 싸자 예배를 주제하는 이가 검은 성수채로 복사를 보는 이들에게 오줌을 뿌린다.  끝으로 악마는 염소로 그 형상을 바꾸었다가 다시 불로 변하더니 이윽고 재로 돌아간다. 마법사들은 이 재를 수습하여 숨겨 가지고 마을로 들어가 모든 재앙과 저주의 악행을 도모한다.  이야기를 종결짓기 전에 악마는 살아 계신 천주의 모든 표정을 흉내낸다는 것을 밝혀 둔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으로 자기를 숭배할 수 있게 하겠는가. 이를 명심해야 한다. 마법의 춤이라는 것도 고대 유대인의 춤이 아닌가? 그들도 야훼께 번제를 드릴 때나 경배를 드릴 때 환희의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계약의 궤'에서 다윗이 하프를 켠 것을 보라, 그런데 이를 가리켜 불행한 뱀이 소진되어 마법의 집회를 끝내면서 재로 변했다고 판단하면 안 될까? 또한 열두 제자를 불러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살과 피로 먹고 마시게 한 것을 흉내내는 건 아닐까? 구역질 나는 사탄의 '희생'을 어찌 생각할지는 모두에게 맡기겠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털이 쭈뼛쭈뼛 일어선다. 사실은 성채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것을 몰랐다면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악마가 천주에 대한 경배를 흉내내어 우상의 경배에 성체를 희롱하겠는가. 우리가 경배하고 흠모하는 성스러운 모든 것을 그가 비웃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숭배자들에게 자기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에 입맞추게 하는 것은 명백한 조롱이 아니겠는가.  앙리 보귀에  <마법사를 저주함에 부처>  낭만주의적 해석  마법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은 미슐레를 거칠 수 밖에 없다. 미슐레는 마녀를 통해서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여인들의 전형을 도출해 냈다. 오늘날 이러한 그의 명제를 그대로 취하는 사가는 없다. 다만 '환상적인 견신자'가 작성한 고대의 문헌들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지 않도록, 이를 상기시켜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계약  ...오직 희생자만이 없을 따름이었다. 그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희생자를 데리고 가는 것뿐인데. 그녀는 자기에게 사랑을 바쳐 이 슬픈 몸을 피로 얼룩지게 한 그의 열정을 떠올렸다.  순간, 이 희생자는 사냥꾼의 기척을 느꼈다. 몇 분 후면 그녀는 영원히 돌 속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녀는 외양간에 걸린 누더기로 온몸을 감싸고 줄행랑을 쳤다. 자정이 되기 전에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우거진 미지의 장소에 도착했다. 숲 속 어느 곳,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버려진 땅 위에서 야생동물처럼 도토리를 그러모아 게걸스럽게 먹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몇 세기가 흘러 버린 듯, 그녀는 돌변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마을의 여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영혼이 바뀌자 몸가짐도 변했다. 그녀는 도토리를 주워 먹는 멧돼지, 웅크리고 있는 원숭이 같았다. 그녀는 올빼미 우는 소리, 날카로운 웃음소리 같은 것을 듣거나, 들었다고 생각될 때 전혀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녀는 겁이 났지만 스스로에게 일렀다. '아니 어쩌면 어치새일지도 몰라.' 다시 웃음소리가 사위를 찢어 놓았다. 어디서 나는 걸까 이 소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선명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아, 드디어... 네가 여기 왔구나. 하지만 네 진정 기꺼이 온 것은 아니로다. 네 운명의 마지막 비밀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너... 거만한 여인이여, 내 너를 채찍질해 서둘러 여기에 오게 했으며, 네가 울부짖으며 호소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했으니, 남편에게 버림받고 멸시 당한 채 집도 없이 해매던 너, 만일 내가 너에게 예비된 탑 속의 감옥을 보여 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면 지금 네가 어디 있겠느뇨?... 늦었도다. 너무 늦게 왔구나. 너처럼 젊은것에게 세인이 일컬어 '마귀할멈'이라 할 제, 어찌 이처럼 더디 왔느냐? 너의 애인이요, 너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은혜의 소유주에게. ...자, 이제 나를 섬기고 내 발에 입을 맞추어라. 태생부터 너는 내 것이었노라. 교활함과 악마적인 매력이 그러하노니, 바로 내가 네 연인이요, 남편이었느니라. 너를 내 장원으로, 자유로운 풀밭 위로, 숲 속으로 인도하겠노라... 내가 무엇을 얻겠는냐? 오래 전부터 내 시간 속으로 너를 인도하지 않았더냐? 뜨거운 열정으로 너를 찾고, 소유하고, 채우지 않았더냐? 네 피를 갈아 새 것으로 채워 준 이가 누구더냐? 내가 찾지 않는 네 육신이란 무인지라. 네가 왜 내 아내인지를 너는 모르리라. 우리의 결혼은 아직 완전하지 않나니, 내게는 내 규범이 있어, 이에 충실해야 하느니. ...보라, 영원을 기약해 보자꾸나."  "내가 지금 어디에 있나이까? 무엇을 말해야 하리오? 오, 나는 느꼈나니,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은 내 운명이었나이다. 당신은 나를 교묘하게 애무하고 만족시키며 풍요롭게 했으니, 내가 이렇게 서둘러 오지 않았음이오... 어제, 검은 사냥개가 벗은 나를 물었을 적에 타는 듯한 이빨을 보고... 알았나이다.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그날 저녁, 사냥개가 식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힐 때 누군가가 그를 통해 내피를... 당신이었나이다."  "너를 나락에서 구해 여기 오게 한 이가 바로 나이니라. 내가 그 모든 것을 행했으니. 이제 네가 바로 아는구나. 나는 너를 한동안 잃었더랬지. 왜? 나는 너를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지라 네 남편이 거추장스러웠단다. 너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내게 인색했지. 그러나 그건 내 방식이 아니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인 것, 이제 네가 바로 아는구나. 바로 그 때문에 네게 약간의 고난을 주고, 단련시키고, 이제 때가 됨에 너를 무르익게 한 것... 그것이 내 배려이니라.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는 아무나 주어지는 대로 영혼을 사로잡지 않나니, 나는 선택된 영혼들을 원하건대, 분노와 절망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들이라. ...네게 더 이상 숨길 게 없구나. 오늘 이대로의 모습이 나를 기쁘게 하거늘, 너는 아름답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소유자로다. ...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오늘은 유독 너를 탐하고 싶구나. 네기 원하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리니. 그러나 내 아내 됨은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숭고한 일이니. 보라, 네가 정녕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악을 행하고 싶사옵니다."  "훌륭하구나. ...내 너를 사랑함에 이유가 없지 않구나. ...네 대답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나니, 모든 법과 예언의 권능이 있나니. ...네 선택이 올바르므로 네게 주어지리라. 그 이상의 모든 것, 나머지 모든 것이 함께 주어지리라. 내 모든 비밀을 알겠고 땅 끝을 보게 되리라. 세상이 네 것이며 네 발 밑에 황금이 쌓이리라. 아울러 여기에 진짜 다이아몬드가 있으니, 보라 내 아내여, 이름하여 '복수'라 할지어다. ...오, 어찌 우리의 마음이 이다지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지... 바로 예서 내 너를 완벽하게 소유하노니, 네 적들이 네 앞에서 추풍낙엽이 되겠고 네게 자비를 구하며 은혜를 간청하리라. 그들이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리라..."  "당신의 몸종이건대... 내가 진실로 은혜를 저버렸사옵니다. 당신은 한결같이 내 빈 구석을 채워 주셨으니, 나는 당신의 것이옵니다. 주인님! 나의 창조주이시니 무엇을 더 바라오리까. 당신은 달콤한 쾌락을 주나니, 당신의 은혜가 황홀합니다.  이때 그녀는 땅에 엎드려 경배한다! ...교회 예식을 방불케 하는 경배는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상징일지니! 그녀의 주인, 세계의 군주, 바람의 왕자는 격렬한 숨결로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한꺼번에 세례와 서품식과 혼인, 세 가지 성례를 치른다. 이 새로운 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반대의 의미로 진행된다. 그녀는 인종의 세월을 보내며 잔혹한 비결을 전수받으리라. '복수'의 사도가 되어!  지옥의 가루가 그녀의 힘을 북돋아 가공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두 눈은 더욱 번득여 순결한 달빛조차 그녀의 눈빛 아래 힘없이 사그라들고 공포에 떨었다. 지옥의 수증기와 화염과 분노,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욕망(이는 분명 새로운 것이다)으로 부푼 그녀는 기괴한 미와 완벽함으로 넘쳐났다. 그녀가 사위를 천천히 들러보았을 때... 자연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나무들이 말을 하고 지나간 일들을 들려주었다. 풀잎들이 약초로 변했다. 건초였던 풀뿌리들이 훌륭한 약재로 바뀐 것이다.  다음 날, 그녀는 모든 적들로부터 완전하게 차단된, 안전지대에 다시 깨어났다. 사람들이 밤새 그녀를 찾았으나 푸른 치마 조각만을 발견했을 따름이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가 급류에 몸을 던진 건 아닐까? 산채로 악마가 데려간 것은 아닐까? 틀림없이 그렇게 천벌을 받았으리라.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내지 못해 정말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주 대했을 때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변해 있었다. 오직 눈만이 살아 있었지만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아주 이상하고도 불안한 섬광이 감돌았다. 그녀 자신조차도 다른 사람이 자기를 두려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녀는 눈길을 내리깔지 않았다. 단지 옆눈길로 응시했다. 황도의 경사각에 맞물려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지 못하도록. 하룻밤 사이에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그녀가 불꽃 사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녀가 불꽃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불꽃이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혼탁하고 강렬한 화원인 것을! 악마와 교통하며 새겨진 불꽃의 흔적이 바람에 흔들리는 남폿불 같은 야성의 그림자를 드리워 불길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뒷걸음질 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했으며 온몸에 휘감기는 격한 감정으로 번민했다.  그녀는 프랑스 중서부 지역의 구릉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고대 동굴집 같은 혈거지에서 살았다. 까마득히 땅 위로는 오랜 전쟁과 영원한 재해, 재앙의 흔적이 깊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부적합한 곳, 바로 거기, 악마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주민들 대부분은 그의 충실하고 열성적인 사도들이었다. 서부 변방지대처럼 그가 좋아하는 곳은 또 없으리라. 거기에는 자연과의 은밀한 음모가 있고 독약과 치유의 주술이 있으며 사람들은 알 수 없지만 지혜로운 여인 톨레드와 악마의 세계가 신비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입김이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를 드러나게 했다. 그녀는 자기의 슬픈 침소의 입구에도 벌거벗은 나무들로 경계를 세웠다. 그로부터 몇 리를 벗어나면 하천을 만들어 놓은 몇 개의 마을들 어귀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에 서면 내면의 작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이르는 말이 있다. '보라. 너의 왕국이니라. 네 오늘은 비록 방랑으로 살아가나 내일은 네가 세상을 지배하리라.'  쥘 미슐레  <마녀>  루댕의 악마  루댕의 마귀들림 사건은 18세기 프랑스 마녀사냥의 절정을 이루었고, 한편으로는 그것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대규모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1632년 가을, 성 우르술라 수녀원 소속 수도원이 온갖 '악마들'의 희생물이 되면서 수녀들 사이에 발생한 최면상태(죽은 사람이나 귀신의 혼이 들린 영모의 상태:역주)였다. 고해신부 위르뱅 그랑디에가 마법사로 지목되었다.  폐하,  여기 7개월 전에 지옥불에 떨어진 한 사람이, 최대한 명명백백하게 폐하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있사오니, 두 가지 점을 아뢰겠습니다.  첫 번째는 본 교구 수녀들이, 교회가 귀신들린 것으로 증언하도록 요구하는 어떤 표상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며, 그에 따라 저는 본 교구 수녀들이 귀신들린 바 없다고 결론짓고자 합니다.  귀신들림의 첫 번째 표상은 갖가지 언어로 말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것들을 알아들어야 하옵건대 문제의 악마들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라틴어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어법이 틀린 게 많아서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악마들의 지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구마사제들은 악마들이 가장 능숙하게 구사하고 그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인 우리나라 말로 말하게 하는 것을 생각해 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어를 말하기 좋아하는 걸로 보아 악마들은 프랑스를 사랑하나 봅니다. 그러나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이 악마들의 침묵을 관대히 보아준다는 의미에서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취조할 때면 그들은 내가 자기들과 맺은 계약에 따라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대답합니다...  귀신들림의 두 번째 표상은 귀신들린 자를 공중에 들어올리는 것이온데 이 악마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아무리 명령을 내린다 해도 결단코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문제의 악마들은 세 번째 표상 역시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비밀스럽고 숨겨진 사실들을 밝혀 내야 하는데도 이들은 점잔만 빼거나 게걸음을 걷거나 땅바닥에 드러눕는 것밖에 하지 못했사옵니다.  폐하, 이외에도 그들은 어리석은 짓거리를 많이 재잘거렸거니와 일일이 아뢰기가 민망할 따름이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가짜 귀신들림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코 이단자일 것이옵니다. 루댕의 구마사제들은 인간의 몸을 빌어 나타난 이 원수의 증언을 통하여 저를 불리하게 만드는 여러 정황들을 이끌어 내려 했습니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들이 종종 기도와 잠언과 아부하는 말로 악마를 일컬어 관대한 이, 지혜로운 자, 벗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저와의 계약을 확인해 준다면 그 대가로 사탄이 육신의 옷을 빌어 입은 수녀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하니 생각건대 구마사제들은 천주가 영원토록 사탄을 유폐시켜 놓은 저 먼 곳으로부터 그를 빼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말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노니 폐하, 그들의 소행을 더욱 소상히 말씀드리도록 허락하신다면 그들의 방법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그들이 이 마을의 이교도들(프로테스탄트교인들:역주)을 얼마나 분노하게 했는지 금방 아시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천주와 성모가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탕한 이야기와 신성모독의 발언을 악마가 마음대로 하게끔 했던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 엎드려 말씀드리옵건대 현명한 악마들이란 기도할 줄 아는 악마들이오니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또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폐하께 간청하옵건대 본 귀신들림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도록 소르본 대학의 두 교수를 위촉하셔서 제 문제의 전말을 심사숙고해서 검토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옵소서. 제가 만일 죄인이라면 가장 잔인한 형벌과 고통을 달게 받겠나이다. 제가 만일 무고하다면 저의 결백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자비로운신 천주께서 저를 이 가혹한 운명 속에 방치하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지옥의 빛을 거두어들이시고 애지자가 심연 저 깊이로 떨어뜨려 놓은 진실의 한 가닥을 파 올리실 것임을 제가 믿사옵니다. 제가 죽게 되든 살게 되는, 최소한 이 믿음만은 저와 함께 하겠거니와 삶과 죽음으로 제가 심판받으오리다.  폐하께  최고의 겸손과 복종과 성실과 고통으로, 폐하의 종복이며 신민인, 위르뱡 그랑디에.  미셸 카르모나  <루댕의 악마들, 위르뱅 그랑디에가 국왕 루이 13세에게 보내는 편지>  최초의 보고서는 10월 1일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성녀와 공경하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 이름으로 우리들, 파리대학 신학부 사제 - 기사 피에르 바레와 루댕 교회 수도참사회원, 성 우르술라 수녀회 상기 지회 고해신부인 장 미뇽, 성 미셸 교구 유세브 드 생미셸 신부, 샤를 교구의 부흥 사제 피에르 토마 신부는 상기 수녀원에서 회합하여 본관 수녀들의 소원을 청취한 결과, 작년(1632년) 9월 21일과 22일 사이에서 이번 달(10월) 3일에 이르기까지 수녀들이 신비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호소를 접했음.  그 가운데 한 환영은 새벽 1시부터 4시 사이에 마르트 수녀에게 출현했는데, 긴 외투와 법의를 걸친 속세의 남자로서 한 손에는 하얀 양피로 싼 책 한 권을 들고 있었음. 그는 책을 펼쳐 두 개의 환상을 보여 주었으며 이 책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본 수녀에게 들려준 다음 책을 가지라고 종용했음. 본 수녀가 이를 거절하며 수녀원장이 주는 책이 아니라면 어떤 책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 환영은 자기의 죽음을 바라느냐고 물으며 그녀의 발 아래 엎드려 한참 동안 울었다고 함. 결국 마르트 수녀가 감동하자 상기 환영이 말하길 그가 심대한 고통에 처해 있는데, 천주께 기도할 수조차 없으니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자. 마르트 수녀는 그가 필시 연옥에 있는 영혼이라 생각하고 수녀원장에게 이를 청하겠다고 대답함. 그러나 환영의 존재를 더 감당할 수 없었던 본 수녀는 바로 옆 침대에 있던 다른 기숙 수녀를 불러 깨웠음. 두 수녀가 모두 일어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한 시간 가량 무릎을 꿇고 있자 바로 그 옆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함. 4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함.  그런데 허원 수녀들의 기숙사에 동일한 환영이 나타나 원장수녀와 부원장 수녀 각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 "나를 위해 천주께 기도하도록 하시오." "나를 위해 천주께 계속 기도하시오."  또한 본관 수녀들의 말에 따르면 9월 24일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에 전체적으로 검은 공 모양의 또 다른 환영이 구내 식당에 나타나 전술한 마르트 수녀를 난폭하게 땅에 쓰러뜨리고 수녀원장을 의자에 주저앉히며 어깨를 짓누르는가 하면 그 순간 현장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수녀가 정강이를 챈 듯한 고통을 느꼈는데, 크고 붉은 타박상 자국이 남았으니 전치 8일(치료비 약 19수우에 해당)을 요했다고 함.  그 밖에도 지난 달 내내 밤이면 밤마다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는 날의 연속이었음을 본관 수녀들이 증언함...  10월 11일, 조사망이 압축되어 위르뱅 그랑디에가 마법사로 지목되었음.  악마의 즐거움  "악마가 나를 희롱하자 그가 내 몸에 일으키는 전율과 흥분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황홀함이 더해갔으며 다른 이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이 때문에 저 저주받은 영혼도 아울러 기쁨을 느낄 것이고, 그에게 힘을 불어넣으리라. 우리에게 자기 행위를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그 역시 즐거움을 구할 것이므로 거기에서 그가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와 우리 영혼을 지배하리라..."  성 우르슬라 수녀회에 갓 입단한 아그네스 수녀가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던 바로 그날(1632년 10월 11일)도 그녀는 귀신들린 상태였는데 이는 수녀원장이 나에게 확인해 주었다.  마법의 원인은 기숙사 계단에 놓여 있던 장미다발에 있었다. 장미다발을 주워 화병에 꽂은 이가 수녀원장인데 장미꽃이 만개하자 귀신들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마귀들린 수녀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그랑디에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기운이 어찌나 세던지 다른 수녀들은 물론 그 누구도 귀신들린 수녀들을 어쩌지 못했다.  그들은 그랑디에를 찾아내야 한다며 수녀원 지붕을 타고 달렸으며,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기까지 했는데, 모두 잠옷차림이었다. 이 소란 끝에 그녀들은 4-5일 동안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우박과 추위와 비를 견디며 내내 버텼다.  이 급작스런 사건에 마을 전체가 휘말렸으며 몇 주일 후에 한 목격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귀를 쫓을 때에 수녀들과 교회가 겪은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다섯 수녀가 있었는데 이들 각자에 두 세명의 신부들이나 수도사들이 달라붙어 있었죠. 그런데 어떤 수녀들은 공포감을 조성하려고 온갖 짓을 다했더랬습니다. 반면에 또 어떤 수녀들은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손을 들었다 놓았다, 이 와중에 주민들이 왔다갔다, 여기적기로 뛰어다니고, 어떤 이는 한숨을 푹푹 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들을 비웃고, 먼지는 자욱하게 날리는데 날은 덥죠, 마을 전체에서 피워 놓은 마늘 연기와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하던지... 그것은 정말 지옥의 한 장면이었지요..."  마귀들린 수녀들  1. 잔 데장주, 수녀원장, 30세. 코제스 남작인 루이 드 벨시에와 쉴르 왕가 샤를롯 드 구마르의 딸. 노제레 제후인 루이 드 바르브지에르의 질녀. 상스 주교인 옥타브 드 벨가르드의 종손녀.  여섯 귀신에 사로잡힘:  레비아탕 세라핀; 이마 정중앙에 좌정.  아망; 힘의 마귀.  이자카론; 힘의 마귀, 오른쪽 갈비뼈 맨 밑에 좌정.  발랑; 오른쪽 갈비뼈 두 번째 대에 좌정.  지배의 귀신.  아스모데; 타락한 좌천사.  베에모; 타락한 좌천사, 위장에 좌정.  2. 루이즈 드 제쥐, 28세. 노제레 제후인 루이 드 바르브지에르와 두제랑 부인의 딸.  두 귀신에 사로 잡힘:  카롱; 미덕의 마귀, 이마 정중앙에 좌정.  에아자스 또는 에아자르; 심장 위에 좌정, 지배의 마귀.  3. 잔 뒤 생테스프리, 루이즈 드 제쥐의 언니.  한 귀신에 사로잡힘:  세르베르; 심장 위에 좌정, 권천사 귀신.  4. 안 드 생트아그네스, 19세. 모트 브라세 후작 장과 드 페로넬 드코르뉘의 딸.  네 귀신에 사로잡힘:  아샤프; 이마 정중앙에 좌정, 힘의 마귀.  아스모데; 심장 위에 좌정, 타락한 좌천사.  베르트; 식도에 좌정.  아카오스; 관자놀이 좌측에 좌정.  타락한 좌천사.  5. 클레르 드 생장, 시칠리아 태생으로 리슐리외 추기경의 친척.  일곱귀신에 사로잡힘:  폴뤼시옹; 왼쪽 어깨에 좌정.  지품천사 귀신.  엘리미; 미덕의 마귀.  상팽; 오른쪽 갈비뼈 두 번째 대에 좌정.  지배의 마귀.  네프탈리; 오른쪽 팔에 좌정, 권천사 귀신.  쟈뷜롱; 이마 정중앙에 좌정. 권천사귀신.  성처녀의 적; 목 위에 좌정.  색욕; 오른쪽 관자놀이에 좌정.  미셸 드 세르토  <루댕의 마귀들림>  마녀사냥꾼  북부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오는 한밤의 전투의식을 통해 그해의 풍년을 점쳤는데 그것은 베난단티와 마법사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1580년경에 이 풍습을 발견한 종교재판관들은 그들의 믿음을 이단과 유설로 해석했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교의를 받아들인다고 서약하면 비교적 가벼운 형벌에 처해졌다. 재판관들이 이것을 마법과 연관지어 파악한 것은 그보다 조금 후인 17세기에 들어서이다.  바티스타 모두코에 대한 판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멘.  본관, 펠리스 데 몬테팔코 신부는 신학박사이며 아퀼라 교구 및 콘코르디아 교구 전체를 총괄하는 이단재판관으로서 교황청의 특별 위임을 받아 다음과 같이 명한다.  바티스타 모두코는 아퀼라 교구 프리울리 지방의 시비달현 행상으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본 교구 신도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단성이 농후하며 실제로 수년 전부터 이단의 교의를 수용했으며, 관계인의 영혼이 심상치 않으므로 본관은 맡은 직책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경건한 카톨릭 신앙을 가슴 깊이 주입시키고 관계인의 정신 속에 뿌리박힌 이단의 악을 발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이는 본관의 의무이자 권한이다). 본관은 본관의 귀에 들려 온 온갖 소문을 면밀하고도 정확히 조사하여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관계인에게 필요한 유용하고 시기적절한 치료책이 무엇인지를 노심초사하여 찾을 것이다. 실사와 증언 검증은 물론 관계인을 소환하여 가능한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관계인이 연루된 고발 내용들을 조사한 결과, 정의가 요청하고 교회법령이 명하는 바에 따라 본관이 수집한 자료들을 낱낱이 검토했다.  분명 본관은 그러한 기소이유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사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고자 원했기 때문에, 관계인이 소요했던 곳이 지옥의 암흑 속이었는지 신앙의 광명세계였는지를 상관하지 않고, 관계인이 이단의 오점을 남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상관하지 않고, 오직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전기 마을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 소속한, 지극히 존엄하신 지오바니 바두아리오 감독관의 입회 아래 신학은 물론 교회법과 세속법에 모두 정통한 여러 전문가들을 자문으로 위촉하여 공회를 열었다. 본공회를 통하여 재판 결과를 성실히 검토해 본 결과, 또한 그에 상정된 모든 사실들을 개별적으로 검토하고 비교 형량해 본 결과,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관계인의 법정 자백대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점을 들어 이단의 악행을 행했다고 결론짓는 바이다.  행운을 타고난 사람  관계인은 22년 동안 이단의 악행 속에 발을 담갔으며 이는 관계인이 동 기간에 베난단티의 한 무리로 활약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12월의 사계재일 날 관계인의 어머니가 관계인을 낳을 때 사용한 천으로 지은 '행운의 셔츠'를 주며 "너로 하여 이 옷에 성례를 주었노라." 말하면서 성구를 외운 후 "베난단티로 떠날 때 이 옷을 입으라." 했다. 또한 자백에 따를 때, 그날 밤 이 옷을 입고 나가 베난단티가 아닌 트리비그나노 출신의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예전에는 내 것이었던 이 셔츠를 입고 있으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니 관계인이 "그래야 한다면 그리하리다." 대답하며 그후 22년을 이 남자와 함께 했다.  그 밖에도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천주에 대한 경외를 버리고 상기 옷의 내력을 전파하며 한 사제로 하여금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니 이는 관계인의 자백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게다가 관계인은 태어날 때 행운을 타고난 모든 이들은 이런 집단에 속하게 되며 나이 20이 되면 베난단티의 한 무리를 이루는 게 지당하다고 감히 본관 앞에서조차 누누이 이야기하고 이를 주장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관계인은 매년 사계재일 날, 곧 목요일 밤과 금요일 사이에 집을 나서 아자노 근처의 드넓은 초원이나 관계인이 말하는 코네글리아노 '평야'에 갔으며 때로는 시르기니스에 인접한 독일령 초원지대까지 이르렀다.  관계인이 말한 바를 본관이 정리해 보건대 베난단티들은 앞서의 장소에 도달하여 먹고, 마시고, 뛰면서, 그리고 회향나무 막대기를 들고 함께 싸우면서 소란을 피운 것이다.  마법사들의 이름을 비밀에 부치다  나아가 관계인은 만용은 지나친 데 천주에 대한 경외심은 극히 미미하여 마법사들과 베난단티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이 주의 뜻에 어긋난다고 거듭 주장했다. 또한 이 성TM러운 축제는 천주가 허락하신 것이라고 망발하는가 하면 이 싸움이 천주를 위한 것이며 관계인의 행동을 지휘했던 베난단티의 대장은 천주가 임명했다고 망언을 했다.  또한 관계인은 악에 속아 남달리 그를 맹신하며 관계인의 행동이 천주의 명령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으며 죽은 뒤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나라에 임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울러 관계인은 자기 입으로 분명히 고백하기를 이 축제와 전투에서 베난단티들은 금박을 두른 흰 태피터 천 위에 사자를 장식한 깃발로 상징을 삼고, 마법사들은 금박을 두른 붉은 태피터 천 위에 네 명의 검은 악마를 장식한 깃발로 상징을 삼는다고 했다.  이 싸움의 귀로에서는 지하실에 들러 먹고 마시며 또 다른 형태들을 작당했다.  그밖에도 관계인은 감히 믿고 주장하기를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제 뜻하는 바에 따라 육신을 빠져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며 이는 바로 싸움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또한 관계인은 극단적인 사악함과 범죄성을 보여 주는 이 모든 것을 고해하지 아니한 채로 성찬식에 임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욕되게 했다.  파문하지 아니하고 사면하다  그러나 자비로우시며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때로 이단과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시는데 이는 카톨릭 신자들과 덕망 있는 사람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 하심일 뿐만 아니라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을 더욱 겸손하게 하고 재판을 겪게 함으로써 회개하게 하려 하심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관은 주어진 지침에 충실하여 여러 현인들과 함께 의논한 결과 관계인이 앞서 말한 모든 죄악과 일탈을 딛고 이제 교회와 공회의 품으로 돌아와 부정할 수 없는 카톨릭 교의를 가슴속 깊이 묻게 되었음을 목도했다. 따라서 본관은 관계인에게 선서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개종할 것을 허락했고 또 허락할 것이며 전기의 이단을 포기함을 아래에 규정하는 방식대로, 공식적으로 천명할 것을 명한다.  개종을 맹세함에 따라 이단에의 귀의에 예정되어 있는 파문형을 사면한다. 교회에 출석하여 개종을 맹세하되 진심으로, 또한 성실한 신앙으로 교회의 일체성을 받아들여야 하며 본관은 관계인이 이를 수락한다고 믿고 또한 희망한다.  이상으로 갈음하여 아래 개종의 서를 작성한다.  1. 투옥 6개월. 당국의 명시적인 허가서가 있을 때에는 외출 가능함.  2. 향후 2년 동안 사계재일 금요일 밤마다 단식하여 천주께 그 기간에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것.  3. 향후 5년 동안 1년에 3회, 즉 부활절, 성모 마리아의 몽소 승천절(8월 15일), 성탄절에 관계인은 죄를 고해하고 성찬 예식을 행할 것이며 이를 증명하는 교구 확인서를 종교재판성청에 제출하거나 발송할 것.  4. 관계인은 자녀를 낳을 때 사용한 옷가지 천을 태워 없애지 말고 종교재판성청에 발송할 것.  관계인은 참회와 구원을 위해 향후 3년간의 축제일마다 묵주의 기도(로사리오의 기도)를 암송하며 천주께 죄사함을 기원할 것.  본관이 합당하다고 인정할 때에 관계인에게 명한 회개의 고행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경감시키거나 면제시켜 줄 가능성을 남겨 둠.  카를로 긴즈부르그  <야간전투,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의 실태와 농경제의>  오늘날의 마녀는?  우리 문화에 편재해 있는 현대의 마법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악마적 마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적 마법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남아 아직도 마법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도처에 남겨 두고 있다. 주술적 마법과 악마적 마법의 경계가 모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의 양극단(이탈리아 최남단과 노르망디의 보카주 지방)에서 채록한 두 증언은 마법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다.  말  바벵 사람들에게 이웃사람들이 말을 거는 것은 오직 그가 자신의 힘, 곧 악의에 찬 마법의 효력을 확신할 때뿐이다.  조세핀은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 되는 일이 없을 때는 잠자코 있지요. 그러다가도 무언가 일이 좀 풀리는 듯하고 잘 나간다 싶으면 꼭 와서 말을 걸어요. 주로 장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나야 뭐, 그 사람하고는 아무 말도 안 하니까요." 조세핀은 '악의 기운'과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고 있다. 그런데 장은 언제나 함정에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예수 승천일 전날인데, 장이 송아지를 한 마리 팔려고 했어요, 세상에 나온 지 13주밖에 안 된 어린 놈이었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래, 이것을 기회로 장에게 마법을 걸려고 노린 거예요. '나한테 그 송아지를 팔지.' 하고 장한테 말했다는데, 글쎄 장이 거절했다지 뭐예요. 그 사람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저주받지 않게 미리 보호막을 쳤어야지 그래. 그 사람이 말을 걸게 내버려둔 것하며 말 나온 걸 거절까지 했으니 두 번씩이나 경솔한 짓을 했단 거죠. 위험한 인물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그이의 원한을 샀으니 두고 보나마나죠. 장을 벌 주려고 마법사는 송아지 어미의 젖을 말려 버렸어요...  맨날 똑같은 액운을 똑같은 마법사가 줄창 내리는 거지요. 모양만 바꿀 뿐이지! 1969년 5월에 있었던 일인데 장이 나한테 '금방 태어난 송아지를 팔았으면 좋겠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 이웃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당장 사겠다는 걸 또 거절하잖아요. 2-3일 후에 이 송아지 어미가 판야초를 먹고 젖이 말라 버린 거예요, 송아지를 살수 없게 되니까 그 사람이 '밤하늘을 날아갔다.' 온 거지요. 밤에 몰래 바벵 주위의 초원지대에 가서는 판야초를 풀어 젖소의 젖이 '말라 버리게' 한 거예요."  '판야초'는 이 지방에서 밤에 나는 식물로 곰팡이나 희끄무레한 버섯과 비슷하게 생겼다.껍질이 투명해서 속에 광택 나는 하얀 액체가 실타래 같이 얽힌 갈래들을 따라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 하얀 액체가 우유나 젖이 말라 버린 젖소의 지방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식물에게 젖을 빼앗겨 젖소의 젖이 말라 버리거나, 너무 묽어 유제품업자들에게 팔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젖소의 젖이 판야초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판야초를 석유나 알코올로 태워야 한다고 말한다. 장의 말을 빌리자면, "생크림을 태우는 건 어려운 일이예요. 툭툭 튀거든요." 그러니까 판야초를 젖소의 유지방이 꽉 차 있는 수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판야초를 불태우고 난 자리에는 성별한 물과 소금을 뿌린다. 바벵 사람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이 지방의 다른 사람들은 마법사들의 마법으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조치를 취한다. 그것은 판야초를 태울 때 '그 자리에 유리 조각과 바늘을 뿌려 놓아 판야초를 자라게 한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젖소의 젖이 그냥 말라 버리든, 판야초로 흘러 들어가 말라 버리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 사람은 없다. 몇 개월이 지나 그들의 생활에 좀더 익숙해졌을 때, 나는 보카주에서 이러한 일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단순히 강자와 약자('악'과 '선')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접촉이, 그것이 말이건, 시선이건, 물리적 접촉이건 간에, 주문에 걸린 사람으로부터 부와 힘 - 여기서는 우유 - 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송아지를 팔 때쯤에 장은 자기에게 원한을 품은 마법사와 말을 하는 실수를 했다. 그래서 마법사는 젖소의 젖을 말려 장에게서 부를 환유적으로 '빼앗아' 간 것이다.  접촉  신체의 접촉 - 가장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 가운데서도 바벵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악수이다. 악수는 가장 보편화된 생활양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마법에 걸려드는 미끼가 된다는 것이다. 역시 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포마르 신부님 장례식 날, 그 이웃이 갑자기 뛰어오더니 인사를 하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1년에 한 번도 인사하지 않던 사람이 하필 그날 따라 인사를 하러 왔으니," 이때 갑작스레 악수를 한 것과 2-3일 후에 젖소가 유산한 것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웃사람은 장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가 아닌데, 굳이 악수를 청한 것은 장을 건드려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젖소의 유산은 당연한 결과이고 이미 예측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장간에서도요. 그이가 마법을 걸려고 온 힘을 눈에 집중시켰는지 눈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장에게 걸어오더니 또 인사를 하는 거예요. 이것도 이상한 일이지요. 그 사람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이 없거든요. 자기 밥이다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보는 눈이 많으면 그냥 가버려요." 장은 이때도 무심결에 악수를 했다가 아차 했다고 조세핀이 대신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또 불행이 닥칠 텐데."(언제나처럼 장은 악수가 마법의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장이 소금을 만지가만 했어도!" 조세핀은 못내 안타까워했다. (조세핀은 성별한 소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꺼림칙한 일이 생기면 바로 소금으로 마법의 효과를 씻어 낸다.)  다음 날, 장은 탈곡기 바퀴 한 짝을 잃어버리고 토르세에서 온 젊은 친구와 대판 다투었다고 한다. ...마법사의 계략에 한 번도 제대로 대처해 본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장은 - 분명히 부인과 동생의 충고에 시달려서 - 차라리 술독에 빠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절망해서 술만 들이키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는데 그나마 장은 정신병원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최소한 마법사가 와서 무섭게 굴지 않았으니까.  시선  말을 걸거나 신체의 접촉 외에 시선을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은 치명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자동차를 몰 때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도끼 같은 눈초리와 마주치잖아요. 내가 호주머니에 소금을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도랑에 굴러 떨어졌을 거예요. 언젠가는 호주머니에 손을 막 넣는 순간 - 소금에 손을 대려구요, 가끔은 나도 잊어먹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 그만 도랑에 처박혔다니까요." 조세핀의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때가 11월 25일이었잖아. 당신이 연장 놓고 간 게 있다고 다시 집에 돌아온 날. (그러니까 장은 이미 연장 때문에 신경질이 나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 사람이 길에 서 있다가 장을 똑바로 쳐다봤대요. 그래서 장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는데 (운전중에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반 정신나간 사람이더라구요." 다행히 그때는 조세핀이 집에 있어서 장을 진정시켰다. "자, 소금. 됐어. 이제, 다 끝났어..."  조세핀이 설명해 준 마법 예방법은 다음과 같다.  a) "악수는 절대로 하면 안 돼요." 그녀의 시동생은 더 자세하게 일러주는데, "왜냐하면 마법사들이 우리 몸에 손을 대니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마법을 거는 거라니까요." 어쨌든 '악수'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b) 이야기를 나눌 때 제일 좋은 예방법은 헤어질 때 마지막 말을 내가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면 똑같이 인사를 하고 후딱 그 자리를 떠나야 돼요." 그 사람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마땅히 할말이 없으면 또 인사를 되풀이한 후에 휙...  c) 시선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마법사가 쳐다보면 헤어지는 마지막까지 먼저 시선을 돌리면 안 돼요." 마법 예방책에 일가견을 가진 조세핀은 꽤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마쳤다. 자기는 아프거나 신경질을 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네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앞서 이야기한 자잘한 규칙을 어김없이 지켰기 때문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처럼 물리적인 직접 접촉(신체 접촉)은 반드시 피해야 하지만 간접적인 접촉(말이나 시선)은 피할 수 없을 경우 참고 자기가 끝을 보는 것이 해결책이다.  잔 파브라 사다  <말, 죽음, 저주>  사르데냐 농경문화에서는 - 사르데냐의 예가 남부 유럽의 농경문화 전반에까지 확대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 개인 간 공격성향이 시선을 통해 표출된다. 그래서 '저주의 시선'에 대한 믿음도 생겼는데 이는 한 사람의 힘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 사물에게 눈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이다. 저주의 시선은 해치거나 '버릇을 고쳐 줘야 될' 사람 위에 가서 그대로 꽂힌다. 시선은 한 순간에 가서 박히며 그 사람에게서 힘을 빼내는 무장해제의 효과가 있다. 시선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재산이나 건강, 피를 없애는데 말 그대로 흡혈귀처럼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시선은 이처럼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다.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시선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기본 재화를 위협하는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다. 수확, 건강, 가축의 영양상태, 농산물에서 나오는 모든 것, 빵, 치즈, 포도주는 물론 공동체에서 자신의 안전을 상징하는 모든 외적 표상들과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  저주의 시선은 건강을 위협한다  오늘날에는 시선이 근대화된 형태로 존재해서 자식들의 학업성적이나 트랙터, 자동차 따위에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요 대상은 여전히 한 개인의 물리적 통합성, 즉 건강이다. 저주의 시선으로 생긴 질병은 의사들도 정확히 진단할 수 없고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다.  누구든지 이 시선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누구든지 이 저주의 시선을 내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저주의 시선은 농촌공동체가 공동체의 암묵적인 규율을 깨뜨리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취하는 제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규율은 공동체가 소유하는 재화 - 물질적이든 상징적이든 - 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가족에게 공평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유럽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부의 분배를 둘러싸고 보이는 낡은, 전자본주의적 사고의 편린이다. 농경사회의 제조건이 주어졌을 때 이 같은 공동체 평등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개인이나 가족의 성공이나 사회적 신분상승이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모욕이며, 더 나쁘게는 일정하게 주어진 재화의 총량 가운데 다른 사람이나 가족들의 몫을 빼앗아 자기 것을 늘렸기 때문에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저주의 시선 밑바닥에는 욕구가 있다  마을공동체는 공동체의 규칙을 깨뜨리는 자에게 제재를 가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자임한다. 저주의 시선은 바로 그러한 욕구에서 나온다. 공동체의 정의를 등에 업은 공격자는 지나치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를 징벌하면서 부당하게 훼손된 평형상태를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공격성을 가지는 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가난한 농촌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저주의 시선은 부자들만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단정하는 그녀의 다음 말이 놀랍다. "저주의 시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질투심에서 비롯하는 거니까요."  공동체 평등주의와 불행에 의한 재화의 재분배라는 관념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다. 행복은 일시적이며 그 자체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여 양심의 가책마저 느낀 가축, 아이들의 순탄한 성장, 학업의 순조로운 진행 같은 세속적인 성공이 공동체적 정의와 운명의 제재를 부르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성공은 자연의 질서를 해쳐 어느 날엔가는 이 질서가 바로잡히리라는 것이다. 너무 즐겁거나 행복하면 불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섯 달 된 딸아이가 있었는데 옆집 사는 남자가 하루는 자기 부인한테 '두고 봐, 저 애는 곧 죽을 거야. 너무 예쁘게 생겼어.' 라고 말하는 걸 들었죠. 그러고 나서 진짜 우리 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어요." 이 여인은 모든 것, 특히 행복은 언젠가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정한 마술 제의는 저주를 풀어 준다  저주의 시선에 맞닥뜨릴 때 어떻게 하면 무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칭찬도 위장된 저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술적 제의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가 말을 걸거나 나를 해치려는 기미가 보이면 부적을 몸에 지니거나 두 손가락을 세워 뿔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저주의 시선에 걸렸거나, 걸렸다고 생각될 때는 '아는 여인', 즉 무당에게 달려가야 한다. '시선을 해독할 줄 아는' 여인이나 또는 탈구나 아이들의 위장병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들을 곧잘 치료하는 마술치료사들이 한 마을에 네댓 명씩은 있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기도의 힘을 빌려오는 이 여인네들 덕분에 저주의 시선에서 무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장 미셸 살망  전통적 비방  언제 어느 때든지 경험제일주의가 통용되는 곳에서는 병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비법들이 존재했다. 전통이 구전되던 시대의 비법들을 석학들이 마침내 민간요법으로 정리하고 정식화했다. 13세기에 독일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알베르트 르 그란트가 <알베르트 르 그란트의 놀라운 비법들>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대중서적도 그 중의 하나로 당신의 민간요법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달걀을 부드럽고 연하게 하려면  달걀을 부드럽고 연하게 해서 망태기 같은 데 넣어 가지고 다녀도 깨지지 않게 하려면 양질의 식초에 5일 동안 담가 촉촉하게 적셔 놓으면 된다.  어떤 사람이 죽을지 어떨지를 미리 알아보려면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을지 어떨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보러 가기 전에 손으로 마편초를 주무른 다음 환자의 침대 곁에 가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 본다. 그가 기분이 좋다고 대답하면 회복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남자나 여자한테 사랑받고 싶을 때는 손에 마편초 즙을 고루 적신 다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살짝 건드리면 되는데 이 비법은 여러 번 증명된 바 있다.  방안의 벼룩들을 몰아낼 요량이라면 운향과 암말의 오줌 달인 것을 뿌리면 되는데 단 한 마리도 살아 남지 못한다. 대 플리니우스도 이 처방이 지금까지 알려진 방법 가운데 제일 효과가 좋다고 했다.  빈대를 완전히 박멸하려면    침대 속에 우글거리는 빈대를 박멸하려면 뱀 모양으로 생긴 오이를 하나 골라 물에 푹 절인 다음 침대에 비빈다. 이 비법이 직방인데, 다른 비법을 하나 더 소개하자면 소의 쓸개즙이나 똥을 식초 속에 녹여 침대에 문지르는 것이다. 다음 날이면 침대 속에서 빈대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뱀을 쫓아 버리려면  어느 곳에든지 뱀을 쫓아 버리고 싶으면 그곳에서 독수리 깃털을 삶거나 태운다. 독수리 심장을 감싸고 있는 깃털은 뱀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수리 심장은 사자나 늑대의 털과 연관되어 있어 악마들도 쫓아 버린다.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악마를 보게 하려면 후투티의 피를 구해 그 사람의 얼굴에 비빈다. 그 사람은 온갖 악마가 자기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꿈을 꿀 것이다. 여행을 편안하고 피곤하지 않게 하고 싶으면 손에 쓴 쑥을 묻히거나 쓴 쑥으로 허리를 둘러친다. 또한 이 풀을 쑤어서 발을 씻으면 전혀 피곤해지지 않는다.  갈등과 이혼을 막으려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갈등과 이혼을 막으려면 암수 한 쌍의 메추라기 심장을 꺼내 수놈의 심장을 남자가, 암놈의 심장을 여자가 지니고 다니다. 물론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훨씬 전부터 실행해야 한다. 그러면 부부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일이 없을 뿐더러 주문이나 마법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다.  어린아이의 이빨을 나게 하려면  어린아이들에게 아무런 고통 없이 이빨을 나게 하려면 토끼의 수액을 구해 삶은 다음 이빨이 나가를 바라는 때에 맞춰 아이의 잇몸에 문지른다. 아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빨이 스르르 나오는데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확인되었다.  나뭇가지에 자기 이름을 새기려면  자기 이름이 복숭아씨나 복숭아 나뭇가지에 새겨져 있는 걸 보고 싶으면 먼저 예쁜 복숭아씨 하나를 골라 깨끗한 땅에 묻은 다음 6-7일, 복숭아씨가 반쯤 벌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서 꺼내 그 위에 시나브로유로 원하는 이름을 쓴다. 이것이 마르면 가늘고 질긴 실로 열린 부분을 잘 묶어 땅에 묻는데, 나무에 이것이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것을 첨가하거나 다른 처리를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앞으로 수확하게 될 과실에서 씨에 써 놓은 이름이 똑같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지에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이름을 새길 수 있다.  흑사병을 치료하려면  흑사병을 치료하려면 매자나무 수 극소량에 테리아카를 함께 끓여 미지근한 상태에서 흑사병 환자에게 마시게 한다. 그 다음, 환자에게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어 땀을 많이 흘리게 하면 오래지 않아 흑사병이 낫게 된다. 이는 여러 명의 명의들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써온 공공연한 비법이다.  쥐똥에 대하여  꿀에 섞은 쥐똥만큼 발모제로 좋은 것은 없다. 털이 빠진 부분에 고루 문질러 주면 금방 효과가 나타난다.  도마뱀 똥에 대하여  나이가 들어 노화가 진행되는 여성들이 젊음과 탄력을 간직하고 싶다면 도마뱀 똥이 제일 좋다. 도마뱀 똥은 주름을 제거하며 살결을 희게 하여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지켜준다...  새끼 도마뱀 똥과 갑오징어의 뼈, 백포도주 주석, 잘라 낸 사슴뿔 가루, 쌀가루를 1:1로 섞고 오랫동안 개서 반죽한 후 체로 불순물을 걸러 낸다. 이것을 아몬드 기름과 포도나무, 정원의 괄대충, 모예화를 각각 같은 양으로 섞은 증류수에 하룻밤 담가 둔다. 그런 다음 하얀 꿀을 듬뿍 넣어 모두 반죽한 후 사용한다.  이때 조심할 것은 아주 청결하게 보관할 것과 만들 때도 계량컵으로 재료의 양을 정확히 재서 혼합하는 것이다. 사용할 때는 필요에 따라 얼굴, 손, 젖가슴, 목에 골고루 발라 준다. 금방 아름다움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이 비법이 얼마나 완전무결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줌의 장점에 대하여  오줌은 따뜻하고 톡 쏘는 독성이 있어서 나는 아주 소중한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오줌을 마신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만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이처럼 좋은 건강요법은 찾을 수 없다. 오줌은 피부병을 낫게 할 뿐만 아니라 궤양과 만성적인 상처에 효과가 있고 그 외에도 숱한 질병에 쓰이는데 그 효능은 다 알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오줌의 장점을 다 이야기하면 오줌을 마시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사람 뼈에 대하여  사람 뼈의 효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간질이든 지랄병이든 무척 잘 듣는다. 뼈를 가루로 빻아서 공복에 마신다.  사람의 침에 대하여  사람의 침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각기 효능이 다르다. 첫째, 식후에 나오는 침은 아무 효과가 없다. 둘째, 공복시에 나오는 침과 오랫동안 입 속에 고였던 침에는 독기가 서려 있어 효능이 크다. 마지막으로 소화가 된 후에 나오는 침은 두 종류 사이의 중간이다. 사람의 침을 살무사를 비롯한 온갖 뱀과 파충류, 독이 있는 동물들에게 떨어뜨리면 즉시 죽는다...  침을 수은과 섞어 녹인 다음 한 차례만 그 숨을 들이마시게 해도 흑사병 환자를 낫게 할 수 있다. 이 비법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대중에게 너무 많이 알려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빨간 달팽이에 대하여  빨간 달팽이에 대해 알고 있는 이 놀라운 비밀들을 독자들에게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내가 예전에 빨간 달팽이를 솥에 넣고 보름 동안을 볶아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자란 아이들에게는 죽처럼 만들고, 젖뗀 아이들에게는 수프를 타서 먹였더니 다른 치료가 필요 없이 탈장을 한꺼번에 고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까다로워 먹이기 어려울 경우에는 증류수에 설탕을 타서 함께 먹여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빨간 달팽이와 로즈메리를 1:1로 섞어 곱게 빻은 다음 항아리 속에 밀봉해 보관한다. 항아리를 마구간의 두엄자리 밑에 40일 동안 두면 거기에서 기름이 나오는데 이것을 역시 유리병에 넣어 밀봉해 둔다. 여자들이 해산을 전후해 걸리는 모든 부인병에 이 기름을 복용하도록 한다.  거미와 거미집에 대하여  의사들에 따르면 거미는 사람에게 아주 해로운 반면, 병 치료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거미의 유익한 면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거미 가루를 붕대에 싸서 이마와 관자놀이에 붙여 놓으면 만성 두통에 그만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거미집을 붙여 놓으면 피가 배어나오면서 두통이 멎는다. 또 상처가 나거나 궤양이 있는 곳에 붙여 놓으면 상처가 덧나서 곪지 않는다.  고양이 수액에 대하여  고양이는 암놈이든 수놈이든 그 골이 특히 명약이라서 목 부위에 살살 문질러 대면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 고열이 계속되다가 금방 염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굴껍데기에 대하여  굴껍데기를 곱게 빻아 생으로든 볶아서든 신선한 버터 약간량과 혼합하여 사용하면 고질적인 치질을 고칠 수 있다. 만성궤양이나 화농이 난 자리에 바르면 금방 상처가 깨끗이 치료된다.  털에 대하여  털에는 역시 사람털과 토끼털이 치료용으로 제일이다. 사람털을 가루로 만들어서 매일 아침 7-8일 간을 백포도주와 함께 복용하면 황달이 낫는다. 토끼털을 태워 상처 부위에 뿌리면 즉시 피가 멎는다. 나아가 수종환자나 결석환자가 토끼털 가루를 백포도주와 함께 음복하면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떤 물질을 부드럽게 하려면  풀딸에서 즙을 채취해서 먼저 컵 속에 담아 놓은 다음 구더기를 잡아 잘게 부순다. 구더기 가루를 천에 싸서 짠 다음 이것으로 따뜻하게 덥힌 물질에 문질러 바른다. 그런 후에 이 물질을 즙에 흠뻑 적셔 두면 부드럽게 된다.  수정을 물러지게 하려면  납 태운 것과 수정을 같은 양으로 섞어 돌 위에 놓고 으깬 다음 도가니에 넣고 녹인다. 또는 생 석회와 홍예종석의 재를 같은 양으로 섞어 만든 용액을 9-10회 걸러 낸 다음 강철이나 수정을 이 용액에 24시간 동안 담가 놓는다. 시간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연성을 얻을 수 있다.  철을 무르게 하려면  사람 피를 뽑아서 피 중에서도 위에 뜨는 물만을 걷어내 새 깃털을 적셔 놓는다. 불 속에서 철을 잘 달군 다음 아까의 깃털로 철이 딱딱하게 굳을 때까지 부드럽게 문질러 준다. 이것이 철을 무르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사람 똥에 대하여  옛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 똥에 함유된 성분과 효능은 놀라울 정도이다. 목과 관련된 질병인 편도선, 후두염 따위를 한순간에 치료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된다. 먼저 좋은 체질을 가진 건강한 젊은이에게 약간의 누룩과 소금을 뿌려 잘 구운 빵과 함께 층층이부채꽃을 사흘 연속 먹인다. 아울러 빛깔이 연한 적포도주를 함께 마시게 하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먹게 하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첫날에 받은 똥은 아무 효과가 없으므로 내다 버리고 이튿날과 사흘째 받은 똥은 조심스럽게 수거해서 같은 양의 벌꿀과 섞는다. 이것을 먹거나 찜질하듯 환부에 발라 주면 목에 생긴 모든 질병을 순식간에 치유할 수 있다.  개똥에 대하여  개를 가두어 두고 사흘 동안 뼈다귀를 주어 갉아먹게 한 다음, 똥을 누면 수거해 말린다. 이질에 그만이다.  늑대똥에 대하여  늑대가 고기는 물론 뼈까지 씹어먹는 잔인한 동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늑대똥에서 뼈가 발견되면 이 뼈를 잘게 부순 다음 약간의 포도주와 함께 먹는다. 심한 복통, 설사에 잘 듣는다.  소똥에 대하여  소똥은 암놈이든 수놈이든 갓 태어난 놈의 것이 제일이며 포도나뭇잎이나 배춧잎으로 잘 싸서 화로 속에 넣어 따뜻하게 한 다음 이를 복용하면 상처로 생긴 모든 염증을 단번에 치료할 수 있다. 소똥은 좌골신경통을 완화시켜 주며 식초와 섞어 놓았을 때는 임파선을 잠재워 주는 성분이 생긴다. 즉, 연주창에 특효가 있다.  <알베르트 르 그란트의 놀라운 비법>  다른 문명권에서의 마법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분리되지 않은 아프리카나 아이티 같은 전통적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마법은 존재한다. 유럽의 악마학이 보여주는 모델과 좀 다르지만 인간 개개인의 운명에 나타나는 불행을 설명하고 유럽에서의 '저주'가 그러한 것처럼 인간 상호관계를 특징짓는 공격성을 상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믿음은 노예들을 통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전해졌다. 아프리카인들의 신앙은 본래의 뿌리에서 단절된 채 유럽 문화권이나 인디언 문화권과 접촉하면서 변형되고 발전되어 왔다. 아이티에서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보두교 의식과 통합된다.  식민지 시대 이래로 마법사들의 수효와 신비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보다 과장되어 전해졌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이티의 대다수 사람들은 저주의 마법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실제로 마법을 행하는 이들이 곳곳에 존재함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다. 사거리 곳곳마다 볼 수 있는 무당집과 묘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갖가지 신비한 공포, 미신타파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움포(houmfo, 아이티 무속인들의 거주지:역주)'에서 압수되는 물건들, 때때로 일어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범죄들은 상당수가 허구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실에서 저주의 마법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범죄행위가 아무리 가공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인 살인보다는 바람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독살하는 것보다는 저주하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나는 아이티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중에서 마법사들이 저지른 사건은 아주 적은 비율일 것이라고 믿는다. 자기의 적을 저주하는 자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증오심을 만족시키게 되므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법한 더 심각한 범죄를 피할 수 있게 된다.  갓난아이들조차 마법사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부터 아이티에서 일어난 마법의 사례들 가운데서 아주 전통적인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 갓 3개월 된 갓난아이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이야기이다. 더욱이 자료를 제공한 화자는 바로 희생자이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내가 어렸을 때 마녀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자주 들었다. 그때 나는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였다고 한다. 언니 마들렌은 당시 백일해를 앓고 있었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어 부모님은 나보다도 언니의 건강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시경, 부모님 대신에 나를 돌보아 주던 젊은 하녀가 나를 데리고 집 뒤에 있는 회랑으로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멀리서 들은 부모님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급히 달려왔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녀에게 물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를 달래려고 애쓰는 티가 역력했는데도 말이다. "아기가 그런 비명을 아무 이유 없이 지를 리 없지 그것은 아이가 보통 때 칭얼대는 소리가 아니야. 어디 핀 같은 걸로 찔렸는지 살펴보거라. 아이를 볼 때는 절대로 위험한 물건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니! 늘 주의를 주었건만." 어머니는 화가 나서 하녀를 꾸짖었지만 그녀는 핀 같은 것은 지니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거듭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칠 줄 모르고 비명을 질러댔다.  어머니는 나를 집으로 데려와서 옷을 벗겨 보았다. 가슴팍에 바늘이 꽂혀 있었고 밖으로는 바늘귀만 겨우 나와 있었다. 놀란 아버지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의사 오댕 씨를 황급히 부르러 달려갔다. 그러나 바늘이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서 의사도 뽑을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기 때문에 바늘이 몸 속 여기저기로 움직이다가 심장을 찌를 위험이 컸다. 부모님은 가진 돈을 다 털어 응급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추궁 끝에 하녀는 '운강'이라는 마을 무당이 크리스마스 전까지 어린 '천사' 하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아마 마들렌 언니를 독살하려 했다가 주위에서 간호하는 사람들이 한시도 틈을 주지 않자 계획을 바꿔 나를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이 일로 법적 후속조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기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던 어머니는 그 길로 당장 하녀를 내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희생자를 상징하는 물건은 저주를 더욱 쉽게 해 준다  희생자를 상징하는 인형이나 희생자의 소지품을 가지고 저주를 거는 고전적인 방법은 아이티에서는 공공연히 알려진 일이지만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도 있다.  한 예로 마법사는 커다란 나무통에 물을 가득 담아 놓고 주문을 걸어 살인청탁의 표적이 된 사람을 물통 가까이로 유인한다. 그가 다가와서 자신의 그림자를 물 위에 비쳐보는 순간, 칼로 그를 찌른다. 이때 물이 즉시 빨갛게 변하면 급소에 명중한 것이다.  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물건으로 특정한 저주의 의식을 행하면 된다.  다음의 일화는 이러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크멜이라는 지방의 주임사제가 어느 날 늙은 농부의 임종을 지켜보러 갔다. 가서 보니 이 농부는 한평생 수많은 악행을 일삼은 보코(boko, 무속인)였다. 그는 많은 비행 가운데 하나를 털어놓기를 병으로 앓아 눕기 얼마 전 신부의 성대를 가지고 마법을 걸어 신부를 저주했다고 고백했다. 신부는 그의 죄를 사해 준 뒤 저주한 물건을 되찾으려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늙은 농부가 물건을 숨긴 장소를 일러주며 빨리 가 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날이 바로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신부가 성대를 찾아서 이제 저주가 풀렸겠지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신부는 죽고 말았다. 마법을 풀려면 사실 운강(houngan, 마법사)의 개입이 필요했다. 마법을 건 장본인이라도 그 결과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살도 순수하게 자의에 의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마법이 유도한, 일종의 정신착란의 결과일 뿐이다.  마법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들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적을 저주하며 마법을 건 장본인이 늘 안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희생자의 가족이 운강에게 돈을 주고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 금방 추적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원인이 마법이나 저주 때문이라는 의혹이 일 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범인을 찾으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때 범인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불사할 수 있다. 더욱이 모든 것을 굽어보며 마법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즉 '신'이 존재하지 않는가. 설사 신이 마법을 건 죄인을 처벌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가족들에게 버림받게 된다. 그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시위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은 죄인을 보호하기를 거부하고 적들이 마법과 저주를 걸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아마도 이러한 대응이 많은 사람들을 범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럽고 직접적인 저주가 아니라 좀더 서서히 효력이 나타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의 양상은 문자 그대로 살인과는 거리가 멀다. 주로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병을 유발할 수 있는 '독약'을 사용한다. 맺힌 원한만큼, 상대방에게 끼치고 싶은 해악의 정도만큼 독약의 양을 조절하여 고통스런 질병이나 잔혹한 사고 또는 파산으로 이끈다. 이렇게 다양한 주문에 응하기 위해서 '보코' 또한 저주의 방법을 아주 다양하게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마법의 '술수'는 은밀한 움포나 한적한 교차로, 묘지에 있는 바론의 십자가 밑에서 행해진다. 비밀에 둘러싸인 마법은 용감한 사람들이 치명적인 독약의 구성성분과 저주를 거는 절차까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법의 비밀은 보코가 무속행위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술이 아니라 마법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아이티에서는 자기들이 마법을 직접 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알프레드 메트로  <아이티의 보두교>  아장데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마법사일 수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권능으로 자기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믿는 마법사는 특별한 의식을 행하지도 않을 뿐더러 구체적인 주술행위도 하지 않고 어떤 마약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행위는 다만 심리적인 행위일 뿐이다.  본문에서는 어느 노인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오랫동안 마법사라는 비난을 받아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죽음을 앞두고 오점 없는 과거를 남김으로써 종족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를 욕되게 했으니 내가 죽으면 서슴지 말고 내 배를 가르거라."  그가 죽자 그의 친족들이 모여 은밀히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우리의 혈족이 죽었으니 독약의 신탁을 준비합시다.' 하여 독약을 준비했다. "보라, 우리의 혈족이 죽었으니 그의 배를 갈라 보리라. 그 안에서 마법의 실체가 발견되면 독약의 신탁으로 이 닭이 죽으리라. 만일 마법의 실체가 발견되지 않을 때에는 독약의 신탁으로 이 닭이 생명을 부지하리라."  독약의 신탁이 이 닭을 살려 놓을 경우에는 닭 한 마리를 가져다가 신탁의 진위를 가리는 또 하나의 심판이 행해진다. "보라, 저 닭이 살아 남았으니 이는 신탁이 말해 주듯 진리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다. 오늘 혈족의 뱃속에서 마법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면, 신탁의 힘이 있어 두 번째 닭이 죽으리라. 만일 앞서의 신탁이 거짓이었고, 혈족의 뱃속에 마법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이 닭 또한 생명을 부지하리라."  이때 혈족의 뱃속에서 마법의 실체가 발견될 것이라는 신탁이 나온다면 그들은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시체를 매장해 버릴 것이다. 반면에 신탁이 마법의 실체가 뱃속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은밀한 목소리가 활기를 띠고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리라.  "여기, 우리 혈족의 배를 갈라 봄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땅거미가 내리고 사위가 거뭇해지니 죽은 이의 형제를 불러 "저의 형제가 와서 배를 갈라 보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한다.  희생자의 내장검사는 마법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게 한다  죽은 이의 친족들이 시체를 거두어 묘지로 데려가 그를 바닥에 누이자 그의 친형제가 이른다. "나의 형제여, 나의 형제여." 이어서 주위에 둘러선 친족들에게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내 형제를 이대로 장사지낼 수 없으니 내가 그의 배를 갈라 열어 보이리라. 내가 마법사이면 그 역시도 마법사라. 그의 내장 속에서 마법의 실체가 발견된다면 내 내장 속에서도 발견될 것이니 이제 배를 갈라 내게도 마법의 실체가 존재하는지를 함께 보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배 위에다 절개할 부분을 가늠하여 상처를 낸 다음, 대나무를 꺾어 가지에 틈을 지른다. 이어서 이 틈 사이에 내장을 끼운 다음, 내장의 부분부분을 천천히 감아 올린다. 이렇게 전부를 감아 올렸을 때, 일제히 큰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 내장을 찔러 보고 살을 검사한다. 그리고 마법의 물질은 없다고 선언하면, 마법에 정통한 연장자들이 이를 확인하므로 더 이상 논란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것으로 충분하니 내장을 다시 뱃속에 집어 넣을지어다."  배를 가른 사람과 죽은 자의 아들들이 그 자리에 함께 했으니 아들들이 그를 어깨에 메고 강가에 가서 씻긴 다음 몸에 바를 기름을 건네준다. 온몸에 기름칠이 끝나면 소금을 주어 뿌린 뒤 그에게 이른다. "집에 돌아가거라. 네가 우리 혈족의 배를 갈랐으니 너와 네 가족이 함께 마실 맥주를 만들어 놓으리라."  농장을 관장하는 친족 중 한 명이 집에 돌아가 맥주를 만들고 배를 가른 사람에게 전갈을 보내 오도록 한다. "맥주가 준비됐으니 이제 오시게나. 맥주를 더불어 나누세." 배를 가른 사람이 농장에 모습을 나타내면 모든 혈족이 그 주위를 에워싼다. 혈족의 제일 큰 어른이 나와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들고 "배를 가른 이는 나오시오." 하고 말하면 그가 나오고, 그러면 다시 큰 어른은 "배를 가른 이의 가족 또한 나오시오. 우리가 선물을 주노니, 맥주를 나누리라."고 말한다.  죽은 사람의 친족들과 배를 가른 사람의 친족들은 이어서 선물을 교환한다  서로 맥주를 나누었던 이들 죽은 사람의 친족들과 배를 가른 사람의 친족들은 이제 선물을 교환한다. 한 사람이 선물을 내어 놓으면 이어서 반대편 사람이 나와 선물을 내어 놓는다. 선물교환이 끝나면 음식을 만들고 닭을 잡는다. 아울러 맥주를 마시며 배를 가른 이에게 큰 잔을 돌린다.  배를 가른 이는 제 몸을 정성스럽게 씻고 사람들은 그에게 기름을 주어 온몸에 바르게 한다. 이어서 배를 가른 이가 "맥주를 가져오라." 하면 맥주와 음식과 닭을 함께 주니 그와 친족들은 이를 먹고 마신다. 이로써 배를 가르는 의식이 끝난 것이다.  옛날에는 자기 부인이나 남편이 마법으로 죽었다고 의심이 갈 때는, 죽은 자의 친족이 신탁의 결정을 가지고 왕에게 찾아갔다고 한다. 왕이 다시 이를 독약의 신탁으로 확인하여 같은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될 때, 왕은 범인에게 희생자의 가족에게 창으로 보상하라고 일렀다 한다. 마법을 걸었던 이는 창 20개와 여자 한 명으로 보상해 속죄를 했다고 한다. 만일 이 일에 관여한 또 다른 마법사가 있다면 그의 몫으로는 추가로 창 10개가 더 배당되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대부분 그것으로 잠잠해졌다.  에반스 프리차드  <아장데 사람들의 마법, 신탁 그리고 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