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92] 지은이: 자닌 바티클 / 김희균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벨라스케스-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 제1장 세비야의 별 제2장 궁중화가가 되다 제3장 이탈리아, 미술의 재발견 제4장 왕의 영화와 행복을 곁에서 지켜보다 제5장 궁중화가에서 실내건축가로 제6장 이탈리아 반도의 매력 제7장 위대한 10년 기록과 증언 벨라스케스-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 미국과 무역을 해서 엄청난 부를 획득한 세비야는 16세기 말 에스파냐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순결을 빼앗긴 로마를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복원하고자 했다. 17세기 중반에 가면 영락의 길로 좁어들 세비야가 도시로서 눈부시게 성장한 것은 1550-1600년에 이르는 기간이었으며, 벨라스키가 태어난 것은 1599년의 일이다. 17세기 에스파냐 미술을 대표하고, 19세기 프랑스인상주의의 주요 선구자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는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4세의 뛰어난 궁중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펠리페 4세의 후원과 총애 속에서 근엄한 초상화 그리며 바로크 군주들의 이상형을 표현했다. 귀족적 신분을 완벽하게 이용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실현한 벨라스케스는 광선에 비치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함으로써 인상주의를 넘어 20세기 예술의 대담성을 열어주었다. 지은이: 자닌 바티클 지음 / 김희균 옮김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박종환 자닌 바티클(Jeannine Baticle) - 에콜 뒤 루브르를 졸업하고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온 이후 줄곧 미술 분야의 일을 해온 자닌 바티클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 명예관장으로 에스파냐 미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에스파냐의 역사와 풍습, 정치 사회적인 시대상에 대한 연구에 전념함으로써 에스파냐 미술을 풍부하게 해석하는 데 공헌했다. 김희균 -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영어 및 불어 번역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9번「영화의 탄생」, 78번「마네」와「도 365일」「그리스관의 비밀」「타임 투 킬」등이 있다. 제1장 세비야의 별 작은 반도를 감싸듯이 세비야를 굽어 도는 과달키비르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비야의 동쪽은, 오랜 세월동안 침수돼 소택지가 되었다. 16세기 말 펠리페 2세는 이 소택지에 대한 간척사업을 시작했고, 마침내 포플라 가로수 길이 가로지르는 쾌적하고 살기 좋은 알라메다라는 새로운 동네가 만들어졌다. 알라메다는 금세 시인과 인문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변모하게 된다.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는 처음에 산페드로 교구에 정착했다. 이곳에 장차 유명한 화가가 될 그의 첫아이 디에고가 태어나 1599년 6월 6일 세례를 받았다. 포르투칼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세비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안 로드리게스는 1597년 안달루시아 지방 출신의 헤로니마 벨라스케스를 아내로 맞았는데, 디에고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후안 로두리게스는 농지와 적잖은 재산을 갖고 있었으며, 이달기아라고 불리는 소귀족으로 평민에게 부여되는 인두세를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 얼마 후, 그는 프란시스코의 집 근처, 산빈센트 교구로 이사를 하게 된다. 바라메다의 산루카 교구 태생인 파체코는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직업이 화가인 교양인이었다. 그는 1954년 알라메다 광장으로 통하는 푸에르코 거리에 정착했고, 훌륭한 스승으로서 젊은 화가들을 모아 정확하게 사물을 묘사하고 그림을 구성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후안 로드리게스는 화가 파체코를 자시 아들의 스승으로 선택했다. 파체코는 라파엘로의 그림들-당시 라파엘로의 그림은 에스파냐 여러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앞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가 의식을 치르듯이 그림의 모범을 가르쳤다. 그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수적인 성직자나 점잖은 시인 등 세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었고, 당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모험가 세르반테스와 호색한 로페 데 베가, 혹은 마테오 같은 건달들과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1611년 11월 17일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21일에 파체코가 각각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이후 6년간 유효할 파체코와의 도제계약이 이루어졌다. 당시 12살 난 디에고 벨라스키는 에스파냐 소년들이 12살에서 14살 사이에 직업을 얻기 위한 도제수업을 시작하는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그런 도제 생활과 진작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 덕에 벨라스케스는 일찍이 20살의 나이네 소위 걸작이라고 하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벨라스케스가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스승 파체코의 '회화예술'에 잘 언급돼 있다. 이 책에서 벨라스케스의 자질, 힘, 정확성, 화가로서의 재능, 자연의 모범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태도 등에 대해서 얘기하던 파체코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벨라스케스가 "모델로 삼기 위해 소작농을 조수로 고용해서 울고 웃는 모든 표정을 찬찬히 기록했는데, 어떤 어려운 자세도 그는 막힘 없이 그려냈다. 푸르스름한 종이 위에 목탄으로 갖가지 표정을 그린 다음에 백묵으로부분부분을 강조하면서 장차 초상화에 필요한 기술을 충분히 익혔다."고 전하고 있다. 화법시험을 통과하고 파체코와 후안 데 우세다라는 화가 앞에 선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화가조합이 요구하는 면허증을 받았다. 그는 이제부터 화실을 차려서 도제를 가르치고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그 당시 파체코에게서 배운 것은 필치의 넝란함과 완벽함이었으며, 이것이 이후 벨라스케스의 모든 그림을 특정짓게 된다. 그런데 연대기 작가 파로미노의 증언에 따르면, 그외에도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에게 교양을 충분히 전수했고, 실제로 언어나 철학면에서 벨라스케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고 한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스승에게 아카데미즘에 대해 단단히 교육을 받았는데도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의 카라바지즘(카라바조의 사실적 그림과 권위에 대한 저항적 삶을 흉내내는 경향)과 에스파냐의 악당문학을 장악하던 자연주의 경향으로 과감하게 눈을 돌릴줄 알았고, 민중 가운데서 모델을 구해 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행여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더라도 벨라스케스는 자기가 택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단호한 정격은 끝까지 그의 사람 됨됨이의 한 특징으로 남는다. 1618년작 '계란부치는 노파'에서 벨라스케스는 위에서 굽어보며 대상들을 배열하고 빛이 인간의 지각에 작용하는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빛의 강조점'을 마련하는 등 빛과 구성에 대한 남다른 지식을 한껏 뽐내고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다 파체코 밑에서 습득한 것일 테지만, 젊고 재능 있는 벨라스케스는 시대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화가였고, 파체코의 주위에 몰려든 식자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얻어들을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당시 화실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한 지식인들을 접하면서 그는 새로운 지평을 본 셈이다. 같은 해에 그린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온 그리스도'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의 전형을 보여준다. 약간 작은 틀 속에 전경 왼쪽에는 두사람의 모습을 그려놓고 오른쪽에는 정물을 둔 다음, 뒤편의 린물은 좀더 작게 그림으로써 정확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구성이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단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시적인 깊이도 놓치지 않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플랑드르나 이탈리아의 동시대 화가들 그림과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풐 '엠마우스의 순례자'와 '음악회'는 우선 확대해서 잡은 인물들이 전통적인 모댈과 확연히 다르다. 벨라스케스의 인물들의 표정은 힘이 넘쳤고, 그렇게 보년 에스파냐 화가들의 그림은 핏기 없는 죽은 데생처럼 보일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그린 '정물화'는 확연한 돋을 세김과정확한 묘사가 마치 하이퍼리얼리즘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사실 정물화라는 장르는 그림중에서도 급수가 떨업지는 것이지만, 파체코가 자신있게 말한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바로 이런 장르를 텅해서 다른 화가들을 제치고 예술의 정점에 가까이 정점에 가까이 다가갔으며, 정물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 자연의 완전한 모방을 향한 길을 열었고, 이 길을 따라올 많은 화가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19살이 채 되지 않았고, 후아나는 이제 막 16살을 넘겼다. 두 사람은 줄곧 같이 자라왔으며, 파체코가 제자의 재능을 기특해 한 것처럼 후아나도 잘생긴 벨라스케스와의 인연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둘의 결혼식은 1618년 4월 23일, 푸에르코 거리에 면한 산미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인심 좋은 장인 파체코는 알라메다 광장 입구에 있는 330다카트 상당의 집과 갈레고스 거리에 있는 집을 지참금으로 내놓았고, 후아나는 할머니로부터 1200다카트나 되는 선물과 500다카트 상당의 혼수 등 두사람의 결혼을 위해 얼마를 내놓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결혼하기까지 아버지 집에 얹혀 살던 벨라스케스는 결혼하자마자 인두세 면제 특권의 상속을 신청했다. 에스파냐 왕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의장이 주재하는 시의회로 면세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귀족의 직위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619년 5월, 벨라스케스는 첫 딸프렌시스카를 얻어 산미겔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하고, 1621년에는 둘째딸 이그나시아를 보게 된다. 그녀는 산빈센트 교구 사제의 집에서 사제의 집전 아래 벨라스케스의 집에서 세례를 받는다. 벨라스케스는 산빈센트 교구에서 멀지 않은 신축 수도원, 카르멜 수도회의 참사회실에 걸 그림'파스모스의 복음사가 요한'과 성모의 '무염시태'를 그리고, 1619년에는 18세기까지 세비야의 산루이스 예수회 수련원에 걸려 있기 될 '동방박사들의 경배'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스승 파체코가 종교지도자들과 폭넓은 교분을 쌓은 덕이었다. 이처럼 전통적인 주제와 구성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는데도,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사실적인 형태, 자연스러운 자세와 인상, 대상의 질감을 높이는 빛의 과학적인 적용 등에 힘입어 단순한 일화를 늘어놓은 그림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특히 '세비야의 물장수'라는 작품은 파체코가 그토록 격찬해 마지않던 자연의 순수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모델의 인상을 한껏 부풀려주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귀족적인 태도가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걸작이었다. 이 그림의 소유주 후안 데 본세카는 궁중 사제였는데, 궁중 사람들이 이 그림을 돌려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20년 벨라스테스는 감정의 깊이와 리얼이즘의 어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된 수작 '헤로니마 데 푸엔테 수녀의 초상'을 그렸다. 이 그림에 나오는 헤로니마는 66살의 나이에 마닐라로 떠나 그곳에 산타클라라 수도원을 세우고 초대 수도원장을 지낸다. 영국과의 평화조약 체결(1599), 네덜란드와의 12년 휴전, 무너적의 격퇴(1610), 에스파냐 왕족인 안 도트리슈를 루이 13세와 혼인케 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등, 재위 23년 동안 갖가지 업적을 남긴 펠리페 3세가 1621년 5월, 43살의 일기로 세상을 뜨고, 그 뒤를 이어 펠리페 4세가 에스파냐 왕위를 올랐다. 10살때부터 펠리페 4세는 안달루시아의 명가 구스만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 이 폰세카를 시종관으로 두었는데, 그는 어린 왕의 스승이자 최측근으로서 정치 특보란 자리를 꿰차고 세비야의 친구와 심복을 궁중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벨라스케스는 1622년 4월 에스코리알을 방문하기 위해서 마드리드 여행길에 올라, 세비야의 알카사르 가문의 멜초르와 루이스 형제의 환대를 받는다. 특히 루이스는 예수회 회원이면서 인문주의자로 파체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또 세비야의 성당에서 고위직 사제를 지낸 궁중 사제 후안 데 폰세카 이 피게로아도 벨라스케스가 화가라는 이유 때문에 더 친근하게 받아들였다. 벨라스케스는 파체코의 부탁에 따라 당시 가장 유명한 시인이었던 루이스 데 곤고라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루이스는 자신의 첫 초상화에서 호기심과 불안감이 어우러진 약간 놀란 눈빛으로 화가 벨라스케스를 노려보고 있고, 벨라스케스는 당대 최고 시인의 진면목을 재빨리 포착해 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벨라스케스가 궁중화가가 되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던 것 같다. 젊은 화가 벨라스케스는 알카사르에서 멀지 않은 에스페호거리의 궁중사제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산티아고 교구에 속했고, 벨라스케스는 이곳에서 폰세카의 초상을 그렸다. 이 그림은 폰세카의 절친한 친구이자 페냐란다 공작의 아들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가 은밀히 궁중으로 들여갔고 그후 채 1시간도 안되어 펠리페 4세와 이 왕자들은 이 그림에 폭 빠지게 되었다. 이윽고 벨라스케스라는 이 특별한 화가는 궁중으로 들어가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린다. 제2장 궁중화가가 되다 막강한 옹호자의 후원으로 벨라스케스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펠리페 4세는 화가가 죽을때까지 그에 대한 믿음과 그림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을 터였다. 덕분에 벨라스케스는 궁중에서 점점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그토록 열렬하게 바라던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미 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시되던 17세기의 에스파냐는 재능이 뛰어난 화가 벨라스케스에게 많은 특전을 부여할 줄 알았다. 제멋대로인 왕의 통치와 무거은 세금, 엄정한 법 아래 눌려지내던 서민들과의 다른 삶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1623년 5월 영국 왕 찰스 1세가 될 영국 왕세자가 펠리페 4세의 누이 동생 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느닷없이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왕세자를 수행한 버킹엄은 경솔하긴 하지만 매력있는 인물이었고, 올리바레스 백작이나 버킹엄은 서열이 높은 귀족이 아니면서도 정치적 야망이 누구보다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좀더 똑똑한 올리바레스는 왕을 다루고 조종하는 방식에 대해서 버킹엄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18살짜리 영국 왕세자와 23살짜리 에스파냐 왕이 만난 궁중에서 연일 여흥과 연극과 투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영국 왕실의 보좌관 버킹엄은 30살, 에스파냐의 대신 올리바레스는 36살이었다. 미녀와 축제, 사냥을 좋아하는 펠레페 4세는 자기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젊은 벨라스케스를 영국 왕세자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영국 왕세자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아주 만족하는 눈치였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영국 왕세자는 벨라스케스에게 100에퀴(금화)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 궁중화가는 벨라스케스 말고 6명이 더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빈첸테 가르두초와 에우제니오 카예스, 주로 위대한 화가 산체스 코엘로를 모사한 초상화가 둘, 그저 그런 화가 로페스, 궁중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유일한 왕실 화가 산티아고 모란이 그들이다. 이 6명 모두 쉰 넘게 나이를 먹은 화가들이라 젊은 왕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한 사람, 이탈리아 혈통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면서 왕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화폭에 매끄럽게 담을 줄 아는 바우티스타 마이노만이 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사실 마이노를 제외하고 당시 궁중의 어떤 화가도 벨라스케스의 진정한 적수가 되지 못했다.다구나 관학풍에 찌들고 학자인 체하는 거만한 화가들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멜라스케스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귀족들과 왕의 시선은 점점 벨라스케스에게 기울었다. 여느 궁중화가들처럼 베라스케스도 월급으로 20다카트를 받았다. 훗날 펠리페 4세가 밝힌 것처럼 '그의 재능과 능력을 얻은 대가로는 적당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월급만 받는 궁정화가들과는 달리 벨라스케스는 1623년 10월 30일 왕실의 품위를 높이는 그림을 그린 공로로 특별상여금을 받았으며, 공짜로 궁중의사의 진료를 받고 왕실의 약을 복용하는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를 궁중 화가로 지명한 것은 '왕궁 재정비사업'과도 관계가 있었다. 이 사업은 1561년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에스파냐의 수도 이면서 왕의 처서가 된 마드리드 전체를 미화 또는 재건하는 사업의 일환이었고, 마드리드와 왕궁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될 것이었다. 왕과 올리바레스 백작, 가르시아 페레스 백작의 초상화는 가르시아 페레스 백작의 미망인 안토니아가 사게 된다. 펠리페 4세의 옷장에 그려진 반신상도 와의 얼굴이 아직 청년의 티를 벗지 못한걸 보면 이 시기에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는 생생한 표정과 손으로 느낄 수 있을 것같은 질감의 표현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태생답게 턱뼈가 툭 튀어나온 펠리페 4세를 정확하게 형상화했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기마도'에서 펠리페 4세의 위풍당당한 자태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궁정교회 산펠리페 바로 앞에서 공개된 이 그림은 궁중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이에 격노한 벨라스케스는 자기의 서명을 지우고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장을 그림 아래 적어놓기도 했다: Didacus Velazquez pintor regis expinxit. 공개되기 전에는 왕궁의 '새로 만든 방'에 걸려있던 이 작품은 당대에는 무참하게 버림받고 결국 훗날에 정당한 평가를 기대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다행스럽게 펠리페 4세는 구성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의 천재성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그림에 크게 만족한 왕은 300다카트의 수당을 지급하고 같은 액수의 교회 연금 혜택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같이 왕의 환대에 용기백배한 벨라스케스는 1626년 장인 파체코에게 궁중화가의 작위를 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1624년 사위를 만나러 와 두 해동안 마드리드에 머물던 늙은 스승 파체코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0줄에 접어든 데다가 종교재판에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고, 게다 가 웬만한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는 그를 궁정에 끌어들이는 일은 거추장스럽기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파체코는 영원히 고향 세비야로 돌아가고 만다. 명사들이 마드리드를 들를 때마다 그들의 자취를 화폭에 남겨 놓는 일은 벨라스케스의 몫이었다. 1626년 5월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조카이면서 교황 특사로 에스파냐를 방문한 바르베리니의 '우울하면서 진지한 '초상을 그린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벨라스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번째 손님은 팜필리 추기경이다. 훗날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가 되는 이 후원자는 바르베리니 특사의 비서관으로 왔지만, 얼마후 교황대사의 자격으로 1630년 5월까지 마드리드에 머문다. 팜필리 추기경은 1626년 10월부터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청원서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부양가족이 많은' 가난한 화가가 지난해 펠리페 4세로부터 약속받은 300다카트의 교회연금을 하루라도 빨리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627년 7월 8일, 카나리 교구를 지금인으로 매일 284마라베디씩 1년에 300다카트의 연금이 벨라스케스에게 주어졌다. 벨라스케스의 자리는 점점 높아져 1627년 3월 7일에는 왕실의 시종으로서 충성서약을 하게 된다. 매일 12플라카를 받고 콘발레시안테스 거리에 있는 관사를 얻을 수 있는 이 직위는 확실히 탐나는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벨라스케스가 점점 더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왕실이 화가들에게 경쟁의 기회를 준 것은 젊은 벨라스케스가 터무니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궁중화가들에게 똑같이 주문한 작품은 왕궁의 새로운 방에 걸 역사화로, 펠리페 3세의 치적과 무어인의 격퇴장면을 담은 대작이었다. 파체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카르두초와 앙헬로 나르다. 에우제니오 카예스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불만을 품은 이유는 자리가 탐나서라기보다는 그의 화풍과 모델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이 세 화가들이 그린 그림 가운데 카르두초의 소묘만이 왕궁의 그림목록표에 적혀 있을 뿐, 그 외에 무어인의 격퇴 장면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림은 1734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왕궁의 한 방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3.5x2.76m나 되는 걸작 중의 걸작으로, 왕궁에 걸린 지 얼마 뒤 나란히 왕궁을 장식하게 된 티치아노의 '레판트 해전의 승리에 관한 우화'와 크기가 비슷했다. 이 작품에 그가 '세비야 사람 벨라스케스'라고 세비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서명한 것은 1627년이었다. 이 그림이 그의 유일한 역사화지만, 그는 이를 통해ㅓ 우화가 요구하는 그림의 형식을 자신도 충분히 맞출 수 있고, 상징적이고 웅장한 주제의 그림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화가들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외교 창구였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올리바레스의 지원을 받는 버킹엄은 당시 화가 중의 화가라는 루벤스를 에스파냐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펠리페 4세는 루벤스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네더란드의 통치자이기도 한 자기 고모가 특사로 보낸 인물이 겨우 그 정도라는 사실에 분개했다. 한편 1628년 9월 2일 루벤스가 에스파냐로 장도에 오르는 그 순간에 버킹엄이 포츠머스에서 암살당한다. 루벤스가 마드리드에 도착한 9월 초순쯤에는 버킹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같은 해 10월 28일 라로셀에서 영국군의 항복과 철수 소식이 잇달아 전해지면서, 올리바레스도 외교정책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루벤스의 외교 임무는 시기를 놓친 것이다. 에스파냐 궁전에 초대된 루벤스가 할 일이라곤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없었고, 8개월의 마드리드 체재기간 동안 왕과 그의 가족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펠리페 4세는 자주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자유롭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따라서 이런 특권은 벨라스케스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화가가 함께 에스코리알을 방문한 기회에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최소한 기술적인 면에서는 루벤스가 벨라스케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벨라스케스는 루벤스를 통해서 자기 마음속에 예술을 향한 열망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이탈리아 여행길은 이처럼 예술의 '재발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629년 4월 루벤스는 에스파냐를 떠나고, 6월 26일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 여행허가를 받는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며칠 전인 7월 22일 궁정출남관은 그에게 '주정뱅이들'에 대한 대가로 100다카트, 그 외 다른 그림에 대한 보수로 300다카트를 주어 그의 발검음을 가볍게 했다. 제3장 이탈리아, 미술의 재발견 발바세스의 변경사령관인 제노바 출신의 귀족 아브로조 스피놀라는 밀라노 총독의 직위와 함께 이탈리아 주둔 에스파냐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피놀라를 통핵서 올리바레스가 노린 것은 1629년 5월 카살을 점령한 프랑스군을 피에몽의 국경 밖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라로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과의 지루한 싸움을 끝낸 프랑스가 이탈리아 국경에 버티고 서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내 에스파냐 영토로 통하는 길을 막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1635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가 되고 1659년에 끝나는 에스파냐-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림을 더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다." 고 파르마의 대사는 적고 있지만, 벨라스케스에 대한 여권 신청서와 추천장을 본 마드리드 주재 이탈리아 측 대사들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벨라스케스가 첩자짓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다고 공공연히 주장할 정도였다. 실제로 올리바레스는, 루벤스의 경우처럼, 벨라스케스의 통찰력과 신중한 몸가짐, 화가로서의 재능이 정치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재충전의 명목으로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는 데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씀씀이가 큰 그는 벨라스케스에게 200다카트의 금화를 주었고, 왕의 초상이 그려진 메달과 여러 장의 추천장을 서주기도 했다. 바르셀로나까지만 해도 12일 한나절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다. 스피놀라일행은 안장을 얹은 56필의 노새와 짐을 실은 12필의 노새를 이끌고, 8월 8일 카탈로냐의 수도에 도착했고, 1629년 8월 10일 성 라우렌티우스의 날 바르셀로나를 떠나 8월 23일 목적지인 제노바에 짐을 풀었다. 그림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것말고 다른 목적은 없아도 믿은 마드리드 주재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는 벨라스케스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스피놀라 행렬은 제노바에서 밀라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고 한다. 라누치오 파르네세의 미망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떠난 걸로 봐서 벨라스케스는 베네치아로 가는 길에 파르마에 들렀음에 틀림없다. 베네치아에 이르러 벨라스케스는 에스파냐 대사 베나벤테 이 베나비데스 백작의 환대를 받는다. 당시 베네치아는 프랑스 및 교황청과 연합해서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벨라스케스는 대사관 직원들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베네치아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인 긴장상태로 인해 에스파냐 화가를 보는 베네치아인들의 시선이 그리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팔로미노가 전한 바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모사하고(모사본을 에스파냐로 들여온다.), 총독관저의 대회의실을 장식하고 있던 같은 화가의 '천국'에 대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로 향하는 길에 벨라스케스는 이틀 동안 파라레에 머문다. 전에 마드리드에 교황대사로 파견된 적이 있고 그림 수집가이기도 한 사세티 추기경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파체코가 자랑스럽게 얘기한 바와 같이, 옷을 수수하게 차려 입은 벨라스케스는 에스파냐에서와 달리 일부러 식사를 거름으로써, 매 끼님다 집요하게 자기를 불러들이는 성직자들의 식사 초대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세티는 결국 벨라스케스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자기가 먹을 음식을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는데, 벨라스케스는 그처럼 조용하게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구에르친의 고향이기도 한 첸토에 들르고, 안코네 근처의 유명한 순례지 로레토와 볼로냐를 거쳐 로마에 이른다. 전해 주어야 할 편지가 있었는데도 두 도시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631년 1월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로 돌아가끼까지'1년간 머물게 될'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마드리드에 있을 때 초상화를 그려준바 있는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1630년 4월 25일 에스파냐 주재 교황대사직을 물러난 핌필리 추기경으리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이처럼교황청의 후원자들 덕에 벨라스케스는 권위적이고 딱딱하기만 한 에스파냐 궁정의 기억을 잊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파체코와 로마 주재 토스카나 대공의 부관들의 증언말고는 이 첫 번째 로마 체류 기간동안의 기록은 전혀 없다. 어쨌든 바르베리니의 배려로 교황청에 짐을 풀고, 교황청 내 여러 방으로 통하는 열쇠도 건네받은 벨라스케스는 구석구석의 예술품들을 마음놓고 감상하고 다녔다,. 훗날 파체코에게 자주 이야기한 걸로 봐서, 그 방들 가운데에서도 교황청 2층 피냐의 뜰이 내려다보이는 2층이 화가의 기억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벨라스케스는 이러 시스틴 예배당을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베꼈다. 교황청의 엄숙한 분위기에 식상하고, 다가올 폭염을 겁낸 벨라스케스는 1630년 4월 로마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몬테레이 백작에게 청원서를 낸다. 로마에서 가장 높고 바람이 잘 통하는 핀치오 언덕의 비냐궁(메디치가의 저택)에 머물 수 있도록 토스카나 대공의 허가서를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벨라스케스는 독감에 걸려 로마 시내로 다시 내려오기까지 두 달간 그곳에 기거하고, 그 후에는 메디치가의 저택에서 100m정도 내려온 에스파냐 대사관 근처, 스파냐 광장으로 이사하게 된다. 외국 화가들이 많이 사는 마르구타 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몬테레이 대사는 벨라스케스에게 주치의를 보내고 약값을 대신 지불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제공하느 등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벨라스케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댐으로써 마침내 아무런 제약없이 로마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첫 번째 여행길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파코체는 사위가 가져온 빼어난'자화상'과 돌아오는 길에 나폴리에서 그린 헝가리 여왕의 초상화 등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펠리페4세의 누이동생 마리아 도트리슈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2세의 아들인 헝가리왕과 혼인한 것은 두 왕가 사이의 결합을 위해서였다. 1630년 나폴리에서 신랑을 만난 마리아는 8월13일과 12월18일 사이의 어느 날, 벨라스케스 앞에 포즈를 취한다. 벨라스케스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당시의 한 화가의 말에 의하면, '퇴색한 아마빛의 머리와 두툼한 입술, 무거운 시선'으로 꽉찬 그저 그런 초상화였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언제나처럼 이 작품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세를 잡고 앉은 에스파냐공주의 볼품없는 얼굴에서 깊이 있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간파해 내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한 단계 발전한 그림 가운데서'불카누스의 대장간'과 '요셉의 겉옷'은 1630년 로마에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팔로미노였다. 이 작품들은 1634년 16개의 다른 그림들(그중에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것과 에스파냐 화가들의 것이 섞여 있다)과 함께 제로니모가 궁정의 예산으로 사들인다. 1000다카트나 되는 돈을 지불한 이 그림들의 용도는 물론 새로 지은 별궁 부엔 레티로를 꾸미기 위한 것이었다. 제4장 왕의 영화와 행복을 곁에서 지켜보다 1631년 초 마드리에 돌아오자마자 올리바레스 백작을 찾아간 벨라스케스는 따뜻한 환대와 함께, 얼른 가서 왕의 '손에 입을 맞추라'는 엄명을 받는다. 펠리페4세의 기쁨은 각별했다. 벨라스케스가 없는 동안 왕은 자신의 초상화든 식솔들의 것이든 어떤 그림도 그리지 못하게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왕세자 발타사르 카롤로스가 태어난 것은 1629년 10월로, 펠리페4세와 배우 마리아칼데론 사이에서 난 훗날의 명장 후안 도트리슈보다 6달 정도 늦었다. 벨라스케스는 왕세자를 위해 과감한 구성이 돋보이는 '난쟁이와 나란히 선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초상'을 그렸다. 벨라스케스가 발타사르 왕자를 다시 모델로 삼은 것은 1632년 마드리드의 성 제롬 교회에서 의회의 충성서약이 있던 날이었다. 두 번째 그림에서도 벨라스케스는 뻣뻣하게 성장한 와증에도 어린아이의 천진하고 자연스러운 표정만킁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왕자의 매력을 능란하게 표현하고 있다. 산플 도의 베네딕트파 수도원에 걸리게 될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걸작을 남긴 것도 이 시기였다. 이 그림은 올리바레스 백작의 친구이기도 한 아라곤의 사도좌 서기관 헤로니모가 세운 베네딕트 수도관에 봉헌된 것이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 베네딕트 수도회가 그림을 주문한 것은 속죄를 위해서였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까지 이 수도원에 보존된다. 1632년 9월 24일 벨라스케스는 왕의 초상을 담은 그림들에 대한 착수금조로 11레알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그려진 왕의 모습 중 두 점은 1년 전 결혼해서 합스부르크가의 사람이 된 동생 마리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빈으로 발송된다. 이 즈음에 그ㅡ림들은 대부분 펠리페 4세가 마련해 준 화실에서 그린 것이지만, 부엔 레티로 별궁에서 나온 왕과 왕비의 전신상에 대해서 만큼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이페냐리에타 부인과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디에고의 근엄한 표정을 담은 초상화에서는 황금시대 에스파냐의 귀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위엄에 찬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숙녀들과는 달리 온몸을 촘촘히 감싼 자태는 그대로 에스파냐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도의 영혼'이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에서는 벨라스케스의 화법이 한껏 부드러워졌다. 수난받는 그리스도를 병자처럼 표현한 것에서 보듯이 벨라스케스는 이제 초창기의 투박하고 직설적인 리얼리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1633년 5월 8일, 벨라스케스는 의회 경찰직에 오른다. 이것은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드르에게 내리는 여러 관직 가운데 극히 따기 어려운 직분 중에 하나였다. 1633년 7월, 벨라스케스의 큰딸 프란체스카는 14살의 나이로 화가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와 결혼한다. 벨라스케스는 이듬해 사위에게 왕실지기의 지위를 물려주고, 1636년에는 첫번째 외손녀 이네스를 보게 된다. 세비야에 살고있는 벨라스케스의 장인 파체코는 빈첸테 카르두초가 내놓은 '미술 이야기'라는 책이 영 못마땅했다. 1638년 파체코도 35년간 심혈을 기울인 '회화예술'이라는 책을 내놓게 될 이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자기에게 맡겨진 직위를 이용해서 가족의 생계를 충분히 보장할만 한 재산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그는 더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되길 바랐다. 사실 에스파냐의 경제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궁정의 쓰임새는 전혀 줄지 않는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벨라스케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햇는지도 모른다. 1634년 8월 21일 궁정 출납관은 벨라스케스에게 2000레알을 지불한다. 이것은 1629년부터 궁중화가로 있으면서 받은 총월급44만 9천 마라베디보다도 많은 돈이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636년에서 9월, 마드리드에서 쓰여진 한 문서에 의하면 그는 이미 왕의 의복시종관의 직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왕실의 집사가 되어서 군인 계급과 같은 서품과 의복을 받기를 바랐다 1630년에서 1635년까지 에스파냐에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마드리드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는 일이었다. 왕가의 여름 별장이기도 한 이 거대한 궁은 부엔 레티로라고 불리게 된다. 올리발레스는 측근들과 함께 이 건축사업에 열을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펠리페 4세는 국가의 영웅이자 위대한 정복자로 각인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궁 안에 전쟁기념관-나중에는 왕실의 방이라고 불린다-을 지어 펠리페 4세의 업적들만을 보존하기로 했다. 여기 기록되는 것들은 고작 10년도 채 안 된 생생한 역사 그 자체였고 어떤 사건들은 진행중인 상태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궁의 건축사업은 1635년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하는 시점에서 자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 16세기의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가의 카톨릭 왕조와 결합해 이베리아 반도말고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에스파냐의 영토확장에 반대하는 그룹은 독일 영주들, 영국, 네덜란드(특히 종교적인 이유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 등 네 부류였다. 하지만 1634년의 그림에는 네덜란드와 영국만이 교전국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될 에스파냐의 승전을 증언하는 12개의 그림은 카예스, 카르두초, 마이노, 카스텔로, 레오나르도, 페레다, 수르바란, 벨라스케스가 나누어 그렸고, 헤라클레스의 역사를 다룬 10편의 우화는 수르바란의 몫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여기에다 왕가의 기마도 5편을 보태고 있다. 스피놀라 장군의 활약을 다룬그림은 레오나르도의 '쥘리에르의 행복'과 벨라스케스가 그린 '브레다성의 함락'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창'이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탈리아 여행길에 동반했기 때문에, 스피놀라 장군을 그리는 데는 레오나르도보다 벨라스케스가 더 적격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인 총명하고 관대한 성품의 스피놀라를 곁에서 지켜본 화가로서, 스피놀라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림 속에 표현해낼 수가 있었다. X선 분석사진에서는 벨라스케스가 최종 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고치고 덧칠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반추의 결과로 우리는 회화사상 가장 훌륭한 역사화의 하나이자, 상징과 실록이 완벽하게 결합된 걸작을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우화적인 인물을 거부하고 구성이나 색채와 빛의 사요에서 사실성을 한껏 살렸을 뿐 아니라, 심리적인 움직임까지 예리하게 감독해 냄으로써 그림 자체가 사실을 얘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기마도를 위해서 펠리페 4세는 3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벨라스케스는 재빨리 왕의 위용을 그림 속에 집어넣고, 여러 번 가필해 펠리페 4세의 권위를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남겨린 펠리페 4세의 얼굴은 햇볕을 가득 받은 채로 빛나고, 회화사에서 볼 수 없었던 정확성과 위엄에 가득 참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이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세자의 기마도에서도 그는 그간의 그림들이 고집해 왔던 전통적인 모델의 자세가 아니었는데도, 놀란 아이의 표정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반면에 두 왕비의 초상과 펠리페 3세의 그림은 기존의 관습을 충실하게 따랐고,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은 왕비 엘리자베스와 벨라스케스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펠리페 4세의 양부모의 초상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한편 펠리페 4세를 본따서 올리바레스 백작도 의기양양한 자세로 말에 올라탔지만, 포즈만 취해도 저절로 위엄과 권위가 묻어 나오는 펠리페 4세와 달리, 신분이 높은 귀족이 아닌 데다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올리바레스의 초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계급장을 드러내고 한껏 폼을 잡은 올리바레스의 모습에서 벨라스케스는 이런 묘한 뉘앙스까지 정확하게 읽어냈던 것이다. 유난히 걸작이 많았던 이 시기에 벨라스케스는 은빛 자수가 반짝이는 용포를 입은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렸다. 그 외에 공식화가 아닌 훨씬 더 개인적인 작업에 속하는 인물상에서 펠리페 4세와 형제와 왕자들은 사냥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프라도 미술관의 수렵관에 걸릴 그림이었던 것 같다. 또 하나 이 시기의 그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승마수업'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에서 시적인 분위기와 리얼리티를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유명한 건축가이자 파체코의 친구인 안달루시아 사람 마르티네스 몬타네스의 초상을 남긴 이유는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다. 마르티네스가 1635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마드리드의 왕궁에 체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작품도 같은 시기의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왕성한 활동이 벨라스케스에게 금전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1636년 10월 24일, 그는 1634년부터 받지 못한 공탁금의 지불을 청구한다. 1638~1639년 사이에 벨라스케스는 체브레우세 공작부인의 초상화(유실)와 1638년 9월 마드리드에 도착한 모데나의 공작, 프란체스코 데스테의 초상화를 그렸다. 벨라스케스 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빛나는 부채를 든 여인은 이 시기의 작품이 아니라, 1640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정숙한 엘리자베스 왕비의 궁정에서 이렇게 가슴이 깊이 팬 옷을 입은 여인을 찾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1639년 5월, 공주 클레르 이사벨 에우헤니아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총독이 된 펠리페 4세의 동생 페르난도는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초상화를 보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 서신에서 페르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다고 불만이던 펠리페 4세에게,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밋밋한 그림을 그린다고 귀띔해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1634년부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아니라 , 디에고 데 실바 벨라스케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기 시작하면서 장인 기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다만 그 효과가 금세 공식화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1640년 마요르 광장의 투우 광경을 담을 때, 그는 공식축제의 연출자이자 건축 분야를 총괄한 고메스 데 모라의 시나리오대로, 궁정의 인물들 사이에 상인과 신하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전통적인 구도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를 둘러싼 억압적이고 계급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이 그의 재능을 가리고 있었고,그 틀을 벗어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제5장 궁중화가에서 실내건축가로 1640~1644년 사이의 잇따른 프랑스-에스파냐 전쟁으로 17세기 유럽사의 한 특징이었던 에스파냐의 군사적 우위가 막을 내리고, 에스파냐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올리바레스 백작도 평화를 원했고, 개혁과 국가의 운명에 관한 새로은 지평도 제시했다. 하지만 경제적 위기가 무엇보다 큰 부담이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카탈로냐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고, 안달루시아마저 반란의 물결에 휩싸였으며, 포르투갈도 거의 주권을 회복하게 된 상황에서, 경제적 위기는 올리바레스에게 치명타나 다름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를 싫어하는 고위 귀족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올리바레스의 유일한 후원자라곤 친구 펠리페 4세뿐이었다. 하지만 1642년 겨울에 일어난 사건들은 에스파냐에게는 불길한 일들이었다. 아라곤과 카탈로냐의 국경에 이른 펠리페 4세는 레리다 지방의 거점인 루시용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1642년 12월 4일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적 하나는 해치운 셈이지만, 그렇다고 올리바레스가 권력을 유지할 상황은 아니었다. 1643년 1월 17일, 올리바레스는 파면통고를 받게 된다. 파체코의 저서 '회화예술'에 적힌 대로, 벨라스케스는 1638년에 이미 왕실시종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때까지의 왕실시종관직은 명예직이어서 실제로 왕실을 지키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수만 챙겼다. 그러다가 1643년 1월 6일 벨라스케스는 올리바레스가 권좌에서 물러나기 11일 전에, 그의 앞에서 정식으로 보직신고를 하고, 1644년에는 왕실의 열쇠를 거머쥐게 된다. 화가로서는 대단한 특권이었음에 틀림없다. 왕이 벨라스케스에게 허가한 녹봉은 2000다카트였는데, 1643년 5월 그는 그중 첫 수령액으로 1만 4천 레알을 받았다. 이처럼 왕과 벨라스케스 사이의 인연은 더욱 긴밀해졌고, 이제부터는 둘 사이의 중개인조차 필요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잇따른 패전과 재정적인 위기 속에서도 펠리페 4세는 미화작업을 추진했고, 벨라스케스는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부분을 심혈을 기울여서 손질하고 가꾸었다. 1643년 6월 벨라스케스는 월급 60다카트와 함께, '왕이 모아두기를 원하는 예술작품 일반'을 관리하는 관리부장으로 임명되어, 왕국 관리의 총책임자인 말피카 백작의 보좌역에 오른다. 1644년 1월 말, 벨라스케스는 왕을 수행하는 500명의 신하들 틈에 끼여 프랑스와의 접경지대로 떠난다. 레리다를 탈환할 목적으로 펠리페 4세가 몸소 원정에 나선 것이다. 총사령부는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 중간 지점, 정확하게 전장인 레리다로부터 25Km밖에 안 떨어진 아라곤 지방의 마을 프라가에 차려졌다. 1644년 5월 15일 전투에서 에스파냐는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급기야 7월 31일 펠리페 4세 행렬이 레리다에 입성하게 된다. 프랑스군에 맞선 이 장엄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펠리페 4세는 5월 말 벨라스케스로 하여금 자기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림도구가 변변치 않던 전쟁터의 초상화를 위해 왕실 회계국 관리들이 급히 재료들을 구해 모았고, 그 결과 우리에게 남겨진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오히려 지나치게 정상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프라가의 총사령부에서 벨라스케스는 왕실 난쟁이의 초상화까지 그렸다. 디에고 데아케도라고 불리는 이 난쟁이의 초상화에는 '사촌'이란 제목이 붙여졌다. 실제로 벨라스케스가 난쟁이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639년 칼라바치야스라는 난쟁이가 죽던 해 이전으로, '사촌'은 4점의 연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 되는 셈이다. 이 며칠의 간격을 두고 그린 왕과 난쟁이의 초상화를 통해 우리는 전혀 성격이 다른 대상들을 똑같은 정확성과 웅장한 필치로 표현해낸 벨라스케스의 재능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초상화에 만족한 펠리페 4세는 자기 대신 왕실을 책임지고 있던 엘리자베스에게 이 그림을 보낸다. 엘리자베스 왕비의 명에 따라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1644년 8월 10일 산마르틴 교회 앞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지만, 정작 누구보다도 좋아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1644년 10월 6일 숨을 거둔다. 이제 막 전쟁터를 떠나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비통한 소식을 접한 펠리페 4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단 하루 만에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었으며, 든든한 후원자와 위원을 모두 잃었노라." 확실한 부르봉가 출신의 엘리자베스 왕비는 후덕하고 어진 아내였고, 바람기가 다분한 남편을 도와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했다. 진지하고 열성적인 그녀의 내조 덕에 펠리페 4세의 바람기도 약간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남긴 7명의 자손들은 이제 카를로스와 1638년에 태어난 마리아 테레사밖에 남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사는 독일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촌 루이 14세와 며칠 차이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어쨌든 벨라스케스는 신심이 돈독한 엘리자베스 왕비의 예배실에 '성모의 대관식'을 그려 바쳤다.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종교화가 된다. 같은 해 11월 27일, 80살의 나이로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죽고, 몇 달 후에는 올리바레스도 세상을 떠나, 벨라스케스의 초창기의 장식했던 두 인물이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45살의 벨라스케스는 잇따른 죽음이 몰고 온 우울한 분위기를 털고 알카사르궁의 미화작업에 전념한다. 군 남쪽면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건축책임자 고메스나 말피카 백작과 알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44년 그는 정오의 화랑에 관한 문제로 의사결정상 상급기관과 분쟁에 휘말려든다. 그러나 위계질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펠리페 4세의 명이기도 했다. 한편, 작업상의 어려움과 아울러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불만은 수당과 급료의 지불에 관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왕에게 다시 이 문제에 관해 청원했고, 1645년 7월 당장 모든 연체금액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1646년 11월에는 다른 왕실시종관이 그에 대한 특별 대우를 문제삼고 나서자,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로 하여금 보직신고를 다시 하게 하는 등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왕실의 다른 고위관리들도 펠리페 4세의 보필에 관한 한 벨라스케스의 특권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45년과 1646년, 두 번에 걸쳐 펠리페 4세는 나바르 지방으로, 아라곤의 발렌시아로 원정을 떠났다. 1645년 9월 22일, 관례대로 아라곤 지방민의 충성서약을 접수한 왕세자는 그해 5월부터 쇠약해지기 시작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열일곱째 생일을 여드레 앞두고 숨을 거둔다. 이 시련은 특히 펠리페 4세에게 잔인한 것이었다. 총명하고 매력적인 왕세자를 끔찍이 사랑한 그였는데, 이제 뒤를 이을 왕손조차 끊긴 것이다. 그저 남은 것이라곤 벨라스케스가 그려놓은 왕세자 카를로스의 아름다운 초상뿐이었다. "신이 내린 이 가혹한 시련의 와중에서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나를 위로해 다오, 나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신에게 나는 이제 마지막 제물을 바친 셈이고, 도무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구나." 펠리페 4세는 1643년 6월 원정길에 아그레다의 수도원에서 처음 만난 누이동생 마리아 데 헤수스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 이처럼 비통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글을 잘 쓰고 총명한데다가 신비로운 비전으로 펠리페 세가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 누이 마리아는 죽는 순간까지 확실히, 펠리페 4세에게는 영혼의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47년 2월 벨라스케스가 새로 맡은 일은 알카사르궁 1층의 오차바다관 건축 작업의 회계 분야였다. 1647년 5월에는 이 작업전체의 감독 책임까지 겸하게 된다. 한편, 다른 작업의 한 책임관이 자기 수당을 벨라스케스가 횡령했다고 주장하면서, 연체금액을 지불해 달라고 청원했다. 펠리페 4세는 다시 벨라스케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1647년 5월 18일, 벨라스케스가 올린 청원서를 보면, 자그마치 20년 전인 1628년부터 1440년까지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왕실이 3만 4천 레알, 3000다카트나 되는 빚을 벨라스케스에게 지고 있던 셈이다. 이처럼 에스파냐 왕정의 재정상태는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심지어 왕도 필요한 것을 마음대로 조달하지 못할 정도였다. 에스파냐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네덜란드와 평화조약을 앞당겨 맺지 않을 수 없었다. 1623년 벨라스케스가 왕궁에 들어올 때 그를 도와준 백작 페냐란다가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1648년 1월 뮌스터에서 맺은 평화조약은 결정적으로 네덜란드를 에스파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펠리페 4세는 같은 해 3월 1일 이 조약을 인준한다. 건축책임자,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1648년 2월에 죽고, 벨라스케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하나씩 없어져 가는 상황에서, 벨라스케스는 알카사르궁의 벽면을 장식할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과 복제화, 고대 유물의 복제품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에 갈 필요가 있다고 펠리페 4세를 설득했다. 1648년 11월 25일, 왕명에 따라 벨라스케스에게 마차와 '그림을 싣고 올' 짐 노새 한 마리가 지급되었다. 이 여행은 마케다 이 나헤라 공작의 공무수행 일정과 맞물려 있었다. 공작은 펠리페 4세의 새 아내 마리아나를 에스파냐로 데려오기로 되어 있었다. 제6장 이탈리아 반도의 매력 베네치아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푸엔테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1649년 4월 21일 벨라스케스는 베네치아 땅을 밟았다. 백작은 대사관에 그의 숙소를 마련하고 그림상들과 접촉할 기회를 마련하는 등 그의 임무수행을 보좌했다. 벨라스케스는 자기가 가장 흠모하는 화가인 티치아노의 진물을 생애 두 번째로 접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가 산 그림은 구약성서의 여섯 장면을 그린 틴토레토의 작품과 베로네세의 작품들이었다. 아마 벨라스케스는 모데나라는 곳에 들러, 1638년 초상화를 그려준 바 있는 프란체스코 데스테를 만났을 것이다. 그 다음에 볼로냐를 지난 것은 틀림없지만, 팔로미노가 언급한 것처럼 복잡한 여정을 택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지 5주 만에 그는 벌써 로마에 들어와 있었다. 화가 벨라스케스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말라가의 주교, 쿠에바의 추기경의 증언에 따르면, 벨라스케스는 1649년 5월 29일 로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곧이어, 1643년 펠리페 4세가 허락한 2000다카트 중 나폴리 왕국의 부왕인 오나테 백작에게 8000레알을 받아낸 벨라스케스는 7월 초 로마로 돌아온다. 나폴리 왕국에서 그는 이미 병이 깊었던 화가 리베라를 만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 이유는 순전히 예술작품을 확보하고, 원본이든 복사본이든, 고대유물들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에스파냐 왕의 시종관이라는 직위와 바티칸 내에 두루두루 지인을 두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그의 작업이 한결 수월했음은 물론이다. 당시만 해도 교황청은 예술작품이 외국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극히 꺼리는 편이었고, 푸생의 지적대로 프랑스로 팔려간 그림은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도 벨라스케스의 경우는 특별했다. 오늘날 우리는 벨라스케스가 수집한 것들을 보면서 그의 지략과 그림을 보는 눈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1650년 1월 유명한 성 루가 화가협회 정회원이 된 벨라스케스는 같은 해 2월 13일에서 27일 사이에 '판테온 명장 그룹' 멤버로 등록된다. 1542년 교황청의 후원으로 창립된 이 그룹 멤버들 중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총애를 받는 유명한 건축가이자 기사인 알가르디가 이 에스파냐 화가의 가입허가서에 서명한 것이다. 플랑드르의 화가 안드레아스 슈미트의 증언에 따르면, 1650년 3월 19일에 판테온 부속 수도원에서 열린 그룹 정기전에 벨라스케스는 데리고 있던 혼혈 노예'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을 내놓았는데, 팔로미노가 말한 대로 이 작품으로 인해 벨라스케스는 곧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될 터였다. 1650년이 저물 무렵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자신의 초상화에서 보여준 벨라스케스의 '아주 특별한 재능' 을 칭찬하면서, 바티칸 시국의 총리를 통해, 에스파냐 왕에게 바치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작품 수집계획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바티칸 시국에 속하는 세 개의 기사단 중 한 기사단의 제복을 벨라스케스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는 인토켄티우스 10세를 이젤 앞에 세우지도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그렸다. 그는 교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교황은 '키가 크고, 목소리나 용모, 거동에서 청년의 모습을 띠고'있었는데, 그는 교황에게서 풍기는 생기발랄한 분위기를 정확하게 감지해 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초상에는 속세의 얼글과 영원희 얼굴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고, 갈색과 붉은색으로 표현한 교황의 얼굴은 대담하기까지 했다. 붉게 빛나는 교황의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고, 교황의 권위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심리적인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는 벨라스케스의 날카로운 눈은, 이 작은 화면 안에 세세한 감정과 사상과 각양각색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저 고루하고 추하고 완고할 뿐 매력 없는 얼굴로 기억하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에게서 그는 인간에게 구현도니 고결한 영혼의 흔적까지 읽은 것이다. 교황의 초상을 본 교황청 사람들이 다들 벨라스케스의 모델이 되기를 원했다. 펠리페 4세는 1650년 6월과 8월 벨라스케스에게 귀환령을 내린다. 왕은 벨라스케스가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거쳐 마드리드에 당도하리라 여겼을 것이다. 같은 해 10월과 11월 소환장이 다시 도착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로마 주재 에스파냐 대사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벨라스케스는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의붓여동생이자 권력가였던 올림피아 팜필리와 교황의 조카란 사실 덕분에 추기경에 오른 아스탈리 팜필리의 초상도 그렸다. 교황청의 재무관 카밀로 마시니는 열렬한 수집가였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에게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고관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수입을 올려 그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벨라스케스가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또 하나 변호한 것은 사회적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1650년 11월 23일, 그가 데리고 다니던 후안 파레하를 해방시켜준 것도 그 때문이다. 화가 후안 파레하는 이후에도 4년간 벨라스케스를 보좌한다는데 합의하지만 결국 벨라스케스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유명한 '로마 메디치가의 저택 풍경' 두 점을 완성한 것도 이 자연을 주제로 한 습작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화가가 특히 좋아하는 장소를 오래 기억하려는 의도로 화폭에 담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650년 12월 12일, 모데나의 프란체스코 데스테의 비서가 주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벨라스케스가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길에 모데나에 들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열심히 예술작품을 찾아 돌아다니는 벨라스케스를 주인도 없는 궁정에 들여놓을 수 없어서 비서는 그를 돌려보냈다. 비서는 그가 제노바로 가서 볼로냐의 화가 미텔리와 콜로나의 그림을 구해 에스파냐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두 화가의 그림들은 1658년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데스테의 비서에게 말한 대로 벨라스케스는 제노바로 가지 않고, 곧장 베네치아로 가서 화가이자 판화가인 마르코 보시니의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보시니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는 좋아하지만 라파엘로에 대해서는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는 이 에스파냐 화가의 남다른 풍모와 권위에 적잖이 놀랐다. 보시니가 말한 대로, 비싼 값에 예술작품을 사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벨라스케스가 베네치아에서 구한 그림은 다섯 점밖에 안된다. 틴토레토의 소묘 '천국'을 포함해서. 벨라스케스가 4월까지는 로마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5월 중순에 그는 제노바에 있었다. 최근 발견되 자료에 의하면, 그가 예정보다 오래 이탈리아에 머문 것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여인이 로마에서 벨라스케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인은 단순한 시종이 아니라 상류사회에 속한 여인이었고, 1851년 말 안토니오라는 사내아이를 벨라스케스에게 선사한다. 1851년 봄에 임신한 이 아이가 아직 '갓난아이에 불과한' 1852년 11월 그는 로마 주재 나폴리 왕국 관리를 통해서 아기의 양육비를 송금한다. 1651년 5월, 마드리드 주재 모데나 대사 오토넬리는 제노바에서 벨라스케스와 마주쳤다. 벨라스케스는 급히 귀국하는 길이었고, 두 사람은 펠리페 4세의 그림 보는 눈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5월 25일 오토넬리는 발렌시아행 배를 타고 6월 13일에 도착했고, 6월 23일 밤엔 마드리드에 모습을 나타냈다. 같은 날 펠리페 4세가 인판타도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는 벨라스케스도 이제 막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벨래스케스가 펠리페 4세에게 꾸지람을 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훗날 이 사건에 관해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를 '아첨꾼'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는 나를 수없이 속였다."라고 기록했다. 이제 곧 왕비 마리아나가 낳을 아이 때문에 펠리페 4세의 마음도 한껏 누그러져 있었던 모양이다. 1651년 7월 12일 공주 마르가리타가 태어났다. 벨라케스가 끔찍이 좋아한 바로 그 모델이다. 제7장 위대한 10년 펠리페 4세는 이탈리아에서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그림과 고대 유물들을 얼른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왕비 마리아나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마르가리타 공주는 갓난아이여서 왕가의 초상을 그리기에 적절한 시점은 아니었다. 벨라스케스는 공탁금의 반환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8년째 총리를 역임하고 있던 루이스 아로는 유리한 조건에서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실 잣는 여인들'에서는 올림푸스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평범한 삶의 무대를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에스파냐 문화의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대변하면서, 벨라스케스 자신의 기호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제 관객들은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아라크네의 이야기로 수를 놓는 건강한 여인들과, 그 배경에 놓인 신화적인 공간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벨라스케스는 줄곧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1652년 초 공석중이던 궁중 마부장 자리를 탐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전부터 에스파냐 왕궁의 미화와 개축작업에 들인 노력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재능과 혜안으로 미루어볼 때, 마부장에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베라스케스가 자신의 생애에서 이처럼 자기 공을 자찬하고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단호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왕궁을 관리하는 게 그의 눈에는 더 좋아보였던 것이다. 만약 벨라스케스가 가꾸고 관리한 왕궁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화가가 어째서 궁중미화 작업에 더 심혈을 기울였는지, 우리는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부장 후보로 등록된 사람은 넷이었고, 인사위원 중 누구도 벨라스케스를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펠리페 4세는 인사위원회의 반대를 무릎쓰고 벨라스케스를 마부장으로 임명했다. 3월 8일 벨라스케스는 왕궁 대신들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은 몬탈반 백작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았다. 몬탈반 백작은 포르투갈 사람으로 벨라스케스에 대해서 그나마 호의적인 태도를 위한 인사위원이었다. 그저 소심하기로 소문난 화가 벨라스케스는 열정적으로 궁중일을 돌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영광스러운 자리만은 아니었다. 시종과 하급관리들을 지휘하면서, 가장 위대한 화가중의 한 명인 벨라스케스는 왕궁을 따뜻하게 하고, 침대보를 갈고,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일부터 가구와 조상들을 배치하는 문제까지 전부 신경을 써야 했다. 특히 펠리페 4세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것은 가구와 조상들을 배치하는 일이었고, 얼음장처럼 찬 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도 이 작엄을 지켜보느라 펠리페 4세는 심한 독감에 걸리기도 했다. 마지막 초상화를 보면 대리석처럼 굳은 펠리페 4세가 위엄을 놓지 않으면서도 그 속으로 피가 흐르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인노켄티우스 10세의 경우처럼 벨라스케스의 초상화에는 줄곧 권위와 광휘에 빛나는 인물의 모습과 동시에 나약하고 가냘픈 인간의 특성이 같은 평면 위에 드러나고 있다. 이즈음 펠리페 4세의 삶은 그런대로 순탄했고, 큰딸의 옛 가정교사에게 보낸 편지(최근에 출판된 바 있음)에서는 스스럼없이 행복하다고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 보고 있는 초상화는 마드리드 주재 외국대사들이 증언한 대로, 공식적인 행사에 드러낸 딱딱하기만 한 왕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 속에 나타난 펠리페 4세는 오히려 꾸밈 없이 평범하고 친근할 뿐 아니라, 금방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다. 웃을 줄도 모르는 목석 같은 왕은 아닌 것이다. 1653년 빈의 합스부르크가 궁정은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15살이 되는 공주의 초상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비 마리아나와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초상이 빈에 도착하게 된다. 마리아 테레사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나라들 가운데 에스파냐와 전쟁중에 있는 프랑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1654년 1월 21일 마드리드 주재 베네치아 대사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가 파리에 도착했고, 곧 공주가 인도될 거라고 전망했다. 한편 평화협정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프랑스 외교관 위그 드리온이 1656년 6월 프랑스-에스파냐 간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 마자랭만큼이나 치밀하기로 소문난 루이스 데 아로는 '상속받을 남자가 없을 경우에는 여자 형제가 왕위를 상속하게끔 규정한 에스파냐 법 때문에, 이 결혼의 성사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루이 14세가 마리아 테레사 공주를 볼모로 삼아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미리 단속해 두는 발언이었다. 마리아 테레사가 외국인과 결혼하게 되면, 아들이 없는 펠리페 4세를 계승할 사람은 공주 마르가리타가 될 터였다. 벨라스케스는 두 살짜리 마르가리타를 표현할 때 장밋빛과 은색을 섞었고, 좀더 자랐을 때는 주로 흰색을 썼다. 펠리페 4세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귀여운 내 강아지'라고 부른 마르가리타는 그림 속에서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 가장 큰 이것은 17세기에 '가족'이라고 불렸다가 훗날 '궁녀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다. 무엇보다 이그림은 궁중 내부의 은밀한 특징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왕가의 기록이다. 왕과 벨라스케스는 플랑드르풍의 꾸민 듯한 일대기로 궁중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순간을 잡아서 표현하자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이같은 왕실 풍경이 빛을 보게 된 것이ㅏ다. 이 그림에 나타난 배경은 부르주아들이 모이는 그 흔한 살롱이 아니다. 1659년 벨라스케스 자신이 '꼬마 천사'라고 부른 왕가의 상속녀가 놀고 있고, 펠리페 4세 부처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고 있다. 5살쯤 되어보이는 공주에게 한 궁녀 (공주의 시녀)가 막 음료수를 건네주려 할 때, 벨라스케스는 이 장면을 영원의 시간 속에 묻어놓은 것이다. 애초에 화가는 공주 마리아 테레사를 왼쪽에 배치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있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X선 분석 결과 그림 왼쪽 부분에 고친 흔적이 많이 드러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1657년 왕자 펠리페 프로스페르가 태어나고, 1659년 피레네에서 체결된 에스파냐-프랑스 평화협정의 징표로 이듬해 마리아 테레사가 루이 14세와 결혼하게 된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자, 벨라스케스는 마리아 테레사의 모습을 그림에서 지우고 자기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같은 줄로 위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궁녀들'은 알카사르궁 남쪽의 호사스러운 방이 아니라 펠리페 4세가 궁중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머물던 궁 북쪽에 걸렸고, 그 덕에 1734년의 대화재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펠리페 4세가 조부 펠리페 2세처럼 돈독한 신앙심으로 무장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한 것은 순전히 아그레다의 마리아 공로였다. 자책감에 젖은 펠리페 4세는 점점 더 에스코리알궁에 관심을 보이고, 이때 에스코리알궁을 개수하기 위해 들인 노력에 대해서는 거의 같은 시기인 1667년 당시 수도원장의 자세한 증언이 남아 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1652년에서 1654년 사이에 벨라스케스의 하나뿐인 딸 프란시스카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652년 아들을 출산했고, 죽을 당시에 3etkf이었다. 1654년에는 16살 먹은 손녀딸 이네스와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나폴리 청년의 결혼식이 있었다. 한편 벨라스케스는 자기의 그림을 도와준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켰고, 그중에서도 특히 주교 카밀로 마시미와는 각별한 관계였다. 카밀로 마시미는 마드리드 주재 교황청 대사로 천거되기도 했는데, 펠리페 4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58년 6월 12일 벨라스케스는 마침내 펠리페 4세로부터 산티아고 기사단의 제복을 하사받았다. 팔로미노의 증언에 따르면, 이같은 특혜는 에스코리알궁의 미화잡억에 대한 보상이었는데, 그렇다고 왕실화가이지 마부장인 벨라스케스의 고난이 끝났던 것은 아니다. 산티아고 기사단 참사회는 벨라스케스에게 수여된 특혜가 정당한가를 조사하기 위한 지루한 실사작업에 착수했고, 벨라스케스는 이 실사작업 과정에서 에슾냐가 포르투갈과 전쟁중이기 때문에 리스본이나 포르투에서 확보한 증어들은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의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청취한 의견서에 따르면, 산티아고 기사단 참사회의 회원 과반수 이상은 벨라스케스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동료화가들과 귀족들 중 말피카 후작이 그랬다.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사고 팔거나 가게를 연 적이 없다는 점과 말을 탈 줄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그만큼 승마는 귀족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참사회의 반대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벨라스케스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두세를 면제받았다고 해서 그가 귀족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벨라스케스의 모친이 농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참사회의 눈에는 탐탁치 않게 보였던 것이다. 1659년 7월 29일 교황청의 특별허가증이 나왔지만, 기사단의 반대는 여전히 강력했다. 펠리페 4세가 마부장에게 귀족 증명서를 발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증명서는 왕실 서기관 루이스의 이름으로 발부되었고, 이튿날 코르푸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몸)신자들이 모인 교회에서 니에블라 백작의 집전 아래 벨라스케스는 기사단의 제복을 입는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의 방의 미화작업을 끝냈고, 그의 지휘 아래 방 천장을 미텔리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이즈음 벨라스케스는 특별히 왕실 난방에 쓸 나무를 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것조차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바쁜 와중에도 왕자 펠리페 프로스페르와 8살 먹은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그려 빈으로 보냈다. 화가로서의 활동이 뜸하다는 점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벨라스케스 나름대로의 대꾸인 셈이다. 이전과 똑같이 자유로운 필치와 창의력에 빛나는 작품 '메르쿠리우스와 아르고스'를 그린 것도 그 무렵인데, 거울의 방에 걸린 이 4개의 신화장면 중 3개는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두 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이 결혼식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접경지역인 비다소아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1660년 4월, 벨라스케스를 폰타라비까지 데려다줄 짐수레가 마련되었고, 4월 8일 화가는 마드리드로 떠났다. 왕실의 수집품 중 호화로운 장식융단과 양탄자가 페아산트섬으로 옮겨졌다. 팔로미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리아 테레사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던 이날, 벨라스케스는 값비싼 밀라노식 은단추가 박힌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그 위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망토를 둘렀으며, 어깨에는 날밑과 칼집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멋있는 칼을 차고 있었다. 그 은장식은 이탈리아풍으로 조각한 것이고, 금목걸이 끝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유명한 산티아고 기사단의 패각이 걸려 있었다. 1660년 6월 26일 마드리드로 돌아온 벨라스케스는 피곤했지만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화가 디에고 발렌틴 디아스에게 보낸 편지(한 장은 벨라스케스가 가지고 있었다)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벨라스케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때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팔로미노의 증언). 1660년 8월 2일 스승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에 돌아온 지 채 5주밖에 안 되었을 때, 벨라스케스의 집에 머물고 있던 화가 미텔 리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7월 31일에는 벨라스케스가 심한 가슴통증과 호흡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왕의 주치의인 차바리와 몰레스가 급히 불려왔으며, 소문에 의하면 왕이 친히 벨라스케스를 보러 갔다고 한다. 1660년 8월 7일 오후 3시, 7일간의 고통이 지난 후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이자 왕궁의 마부장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이 세상을 떴고, 8월 14일에는 그의 부인마저 벨라스케스와 같은 길로 떠나버렸다. 혹시 전염병이 아니었을까? 늦은 밤의 엄숙한 장례식이 성 요한 침례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귀족들과 시종들이 그의 관을 지켰고, 장중한 왕실 성가대의 음악이 그의 마지막 여행길을 호위하고 있었다. 기록과 증언 사위, 디에고 실바 벨라스케스 내 사위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당시 내 밑에서 배우던 학생들 중 3등을 차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5년 동안 그림을 가르쳤고, 내 딸아이와 결혼을 시켰다. 내 딸아이도 그의 솔직함과 예술적인 재능, 그 재능이 가져다줄 미래가 좋아보였던 것 같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나는 장인이 되는 것보다 스승이 되는 것이 더 영광인지라, 행여나 내 딸을 차지해 예술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단호한 편이었다. 그러네도 내가 내 학생을 나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리라(스승이 학생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라파엘로를 제자로 두었다고 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해가 될리 없고, 티치아노를 제자로 둔 것이 조르조 카스텔프란코에게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도 아니다. 물로 내가 지금 내 사위의 예술적인 재능(차차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을 칭송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사위에게 끊임없이 은공을 베풀어준 우리들의 신실한 전하 펠리페 4세(하늘이 우리를 도와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를 추앙하기 위해서이다. 1622년 4월 22일, 에스코리알궁을 보기 위해 내 사위는 마드리드로 떠났고, 그곳에서 알카사르궁의 두 신사 루이스와 멜치오르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특히 궁중사제장이자 예술애호가인 후안 데폰세카를 알게 된 것은 벨라스케스에게 행운이었다. 사제장은 당시 마드리드에서 존경받던 루이스 데 공고라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벨라스케스에게는 한낱 꿈이었을 뿐이다. 1623년 백작의 소개로 벨라스케스는 돈 후안을 알현할 기회를 가졌다. 바로 이분이 그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신 분이다. 벨라스케스는 그에 대한 답례로 왕세자실의 시종인 폐냐란다 백작의 아들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궁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서 채 한 시간도 안 돼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왕과 왕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은 벨라스케스에게 초상화를 부탁했지만, 그는 우선 전하의 초상부터 그리는 것이 합당해 보였던 모양이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지 알 수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결국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1623년 8월 30일에 완성되었고, 전하께서는 대단히 만족해하셨다. 벨라스케스를 궁중으로 부른 올리바레스 백작과 왕자들은 펠리페 4세를 그토록 빼어나게 표현한 그림은 그전까지 없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러 온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했다. 벨라스케스는 즉석에서 웨일스의 왕자를 그렸고, 이 초상화로 100금화를 받았다. 올리바레스 백작과 처음 얘기를 나눌 때, 백작은 벨라스케스에게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전담하게 될 테니까, 그 외의 그림은 그리지 말라고 했다. 반면에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623년 10월의 마지막 날, 백작과 벨라스케스 사이에 오간 계약서를 보면 벨라스케스는 월급으로 20금화를 받고 작품료를 따로 수령하게 될 뿐 아니라, 왕실 주치의의 진료를 받는 특전이 주어졌다. 벨라스케스가 아플 경우, 전하를 대신해서 올리바레스 백작이 그를 왕실 주치의에게 데려가도록 규정한 것이다. 언젠가 벨라스케스는 야외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왕의 기마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왕의 허락을 받아서 세인트 펠리페 교회 앞 칼레 마요르에서 대중에서 공개되었다.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화가에게는 영광이었고, 펠리페 4세께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나도 이 그림을 직접 보았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말에 대해서는 이 장의 뒷부분에 인용하게 될 것이다. 1626년 펠리페 4세는 수고비로 300금화와 수당으로 300금화를 벨라스케스에게 지급하도록 명했다. 수당 300금화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결재한 금액이었다. 뿐만 아니라 벨라스케스는 2년 임대료가 200금화나 되는 집을 왕실로부터 제공받았다. 마지막으로,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3세가 무어인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펠리페 4세가 지정한 담당자들(산티아고 기사단의 후작 후안 바프티스타 크레첸치오와 그의 동생 도미니크 기사단의 후안 바프티스타 마이노, 둘 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었다)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다른 세 화가보다 호평을 받았고, 곧이어 왕실지기의 직책을 얻어 국가의 월급을 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월급 외에도 왕실 사람들에게는 대개 생활수당이 지급되었고, 각종 경비를 환불받을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있던 벨라스케스를 위해서, 펠리페 4세는 여러 번 그의 소원을 들어 주겠노라고 다짐했고, 마침내 400다카트에 달하는 지원금과 여행 경비로 2년치의 월급을 얹어주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올리바레스 백작을 찾았을 때, 백작은 여러 장의 추천장뿐 아니라, 200금화와 왕의 초상이 담긴 메달을 벨라스케스에게 선물로 주었다. 벨라스케스가 로마에서 그린 그림 중 자화상 한 점은 그의 예술을 기리는 의미에서, 또 그림에 대해 안목이 높은 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보관하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오랫동안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길에 나폴리에 들러 헝가리 왕비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을 들고 1631년 초 마드리드로 귀환한 것은 에스파냐를 떠난 지 꼬박 1년 반이 지난 뒤였다. 그를 반갑게 맞아준 올리바레스 백작은 어서 가서 펠리페 4세께 인사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왕을 다시 보게 된 벨라스케스는 다른 사람에게 초상화를 맞기지 않은 것과 자기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켜준 데 대해 정중히 감사를 드렸으며, 펠리페 4세 또한 벨라스케스를 보고 기뻐하셨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벨라스케스를 향한 펠리페 4세의 배려를 읽을 수 있다. 펠리페 4세는 그에게 화실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실열쇠를 늘 지참하고 계시다가 틈이 나는 대로 화실에 들러 벨라스케스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으셨다. 언젠가 펠리페 4세의 두 번째 기마상을 그릴 때는 바깥에서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처럼 위대하신 분이 벨라스케스에게 베푼 배려는 끝이 없었다. 벨라스케스의 아버지는 작은 마을의 행정비서관직을 맡으면서 매년 1000금화를 받는 특혜를 누렸고, 벨라스케스는 의복담당 비서를 거쳐 왕실시종관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벨라스케스는 왕의 거처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권리를 확보한 셈인데, 이것은 수많은 기사들이 염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시간을 어기는 일 없이 펠리페 4세를 위해 일하는 중간에도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이 모든 영광과 특전은 벨라스케스의 재능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그의 예술은 아직도 진행형이고, 그는 오늘의 이 자리를 넘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나는 그가 누리는 행복을 마음속으로 나누면서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회화예술'중 벨라스케스의 생이 부분 발췌 F. 파체코 거장 벨라스케스의 편지 두 통 추기경 카밀로 마시미에게 보낸 벨라스케스의 편지 1654년 3월 28일, 마드리드존경하는 추기경님께, 어제(27일) 성삼위일체회의 신도를 통해 13일자 귀하의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저희 왕께 축복을 서원하시면서, 귀하의 편지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귀하께서 보내신 물건이 에스파냐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려드리고, 그로 인해 왕께서도 대단히 흡족해하셨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저같이 미천한 자가 귀하의 편지를 받아보는 것이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고, 귀하를 이 마드리드 궁전에서 뵈올 기회가 있다면 그 또한 무한한 기쁨이겠습니다. 혹시라도 교황님께서 다시 저를 그분 곁으로 불러주시면 저는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면서, 우리 주께서 귀하의 건강을 보살피시기를 기도합니다. 귀하께 매인 시종,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발렌틴 디아스에게 보낸 벨라스케스의 편지 이 편지에 귀하와 마리아 부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저의 마음을 실어보냅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여행하는 고된 길 끝에 저는 6월 26일 토요일 새벽 알카사르궁에 이르렀고, 하느님 덕분에 건강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왕께서도 같은 날 마드리드에 당도하셨고, 여전히 아름다우신 왕비께서는 친히 왕을 맞으러 카사델캄포까지 나가셨다가, 두분이 나란히 아토차 교회의 성모 마리아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는 왕세자가 왕의 귀환을 기념하는 투우를 마요르 광장에 준비하셨는데, 이것은 바야돌리드의 축제를 연상시키는 조촐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말씀하신 대로 귀하와 부인 마리아께서 모두 건강하시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제가 언제든 두 분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고, 제 친구 토마스 데 페냐에게도 저의 안부를 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너무나 바빴고 모든 일들이 정신없이 진행되어온 탓에 저는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이곳은 별다른 일 없이 평온하며, 하느님께서 두 분의 건강을 오래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1660년 3월 마드리드에서, 귀하에 대한 무한한 경의를 담아,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야돌리드의 귀족자제를 위한 중학교 문서기록실 영광, 망각, 재평가 드문 기록들 "나는 티치아노와 라파엘로 등의 화가를 좋아한 낙관적인 성품의 화가를 안다. 그는 자기가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와 다른 화가들이 죽은 다음에 명성을 떨치게 된 사실을 두고, 창의적인 정신의 승리로 해석한다. 그는 투박하고 과장된 필치를 즐겨 사용하며, 왜 티치아노를 본받아 말끔하고 세련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투박한 그림에서 1등이 되고 싶지, 세련된 그림에서 2등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발타사르 그라시안 '영웅' 중에서, 1651년 말을 하는 대신 그림에 가득 목소리를 집어넣는 에스파냐 화가, 그대 위대한 벨라스케스는 능란하고 교묘하게 미에 생명을 부여할 줄 알고, 감정을 칠할 때마다 듬성듬성 갖다댄 붓으로도 이 섬세한 마음의 동요를 읽어내나니,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과 똑같으며, 얇은 호판 위에서도 손의 굴곡은 물감의 덮개를 스르르 벗어나고 있다. 겉모양을 그리면서 그대는 사람의 얼굴을 빚고, 그대의 색채가 얼굴을 살아 움직이게 하므로, 우리는 이제 그림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사람의 형상을 보는 줄 믿지 않을 수 없다. 보시니 피만드르가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코얀테스라는 화가와 벨라스케스라는 화가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류 화가라고는 볼 수 없겠지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죠. "일류에는 못 미치는 화가들의 그림과 다를 게 없죠. 하지만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에스파냐 화가가 자연을 특별한 방식으로 읽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모습만 그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얘기한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거지요." 앙드레 펠리비앙 데자보 '위대한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해설' 중에서, 파리, 1668년 벨라스케스만큼 많은 재산을 모은 화가는 거의 없다. 1660년 그가 마드리드에서 죽었을 때, 그에게는 부와 명성이 주어져 있었다. 그가 가장 잘 그린 그림은 물로 초상화였다. 그는 반다이크식의 가는 붓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굵직굵직하고 과감한 필치로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낼 줄 알았고, 이것이 결국 완전한 환각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보인 것이다. 이 화가의 생애에 대해서는 팔로미노가 세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마리에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나타난 빛과 어둠의 대비는 얼마나 위대한 리얼리즘이고 얼마나 위대한 재능의 표현인가. 그는 사물 사이를 지나는 여백을 통해서 사물들을 개별화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각각 다른 시기의 작품을 한데 모아놓은 이 방을 지나며 우리는 그림에 관한 갖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그림을 따라 지나는 길은 그가 자연의 완전한 모방을 위해서 갔던 길과 같고, 이'세비야의 물장수'는 우리에게 온갖 세세한 물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그림의 길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세한 것들을 통해서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며,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서 각 존재의 특수성을 읽어낸다.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그림을 메마르고 딱딱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술 취한 바쿠스의 음흉한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훨씬 자유롭고 발랄한 그림들을 다시 보게 된다. 바로 그가 진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고, 보이는 것이 아닌 드러나는 것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카누스의 대장간'에서 그의 필치는 더 부드러워졌으며, 한층 더 물이 올랐다. 등장인물들은 이제 모방된 자연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완전한 그림은 '실 잣는 여인들'이다. 이 작품이 벨라스케스가 추구한 마지막 양식이며, 우리는 벨라스케스의 손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지경에 이른다. 이제는 그의 뜻이 그림을 그린다. 그가 추구한 그림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그린 일련의 초상화는 이제까지 그려진 초상화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 안토니오 라파엘 멩스, '걸작'중에서 1776~1780년 재발견 '화가 중의 화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마네의 편지 1865년 9월 3일 일요일 아침, 마드리드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자네와 같이 보지 못하는 게 유감이네. 여기 프라도 박물관에 그럴듯하게 배열되어 있는 다른 학파의 그림들이란 그에 비하면 그저 농간을 부린데 불과하지. 벨라스케스는 그야말로 화가 중의 화가이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쁠 따름이네, 우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그 초상화는 사실 벨라스케스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공주는 물론 틀림없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이지만 말일세. 여기 있는 큰 그림 하나는 우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기사들'이라는 작품처럼 촘촘하게 여러 사람을 배열한 것인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훨씬 더 세련되고 말끔히 복원된 탓에 색깔이 아주 선명해. 여백과 풍경은 벨라스케스의 제자가 맡았다는구먼.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은, 펠리페 4세 시대의 한 배우의 초상화라는 설명이 붙은 그림일 거야. 온통 검은색 옷으로 둘러싼 배우의 모습 뒤에서 배경은 스르르 뒤루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아. 이외에도 '실 잣는 여인들', 알론소 카노의 아름다운 초상화, '궁녀들'도 빼놓을 수 없지. '궁녀들'속의 키 작은 철학자를 닮은 난쟁이, 특히 주먹을 허리께에 걸친 채 정면을 바라보는 이 난쟁이는 정말 훌륭해. 진정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이 작품들, 훌륭한 초상화, 그 모두를 나열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네. 모든 게 다 걸작이니까... 에두아르 마네 보들레르에게 보낸 마네의 편지 1865년 9월 14일 목요일, 바세 성에서결국 저는 벨라스케스를 알게 됐고, 그가 우리들 중 가장 위대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는 마드리드에서 30~40점의 작품을 보았는데, 모두가 걸작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명성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 여행의 여흥과 피로도 벨라스케스를 보기 위해서라면 견딜 만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자카리 아스트뤼크에게 보낸 마네의 편지 1865년 9월 17일, 바세 성에서에스파냐 여행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이 피곤한 여행을 보상받고도 남았던 것은 벨라스케스였다네. 그는 화가 중의 화가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네. 그는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오히려 무한한 희망과 자심감에 넘쳤지... 에두아르 마네 에스파냐 정신의 구현 (벨라스케스는) 에스파냐적인 정신을 단번에 표현할 줄 알고, 그의 조국이 갖고 있는 것을 적절한 형태로, 정확한 필치로 읽어낸 화가였다. 꼼꼼하고도 세련되게, 강렬하면서도 빈틈없이, 간결한 것에서조차 힘을 표현하는 그의 걸작들을 보고 나면 화가들은 아마 붓을 꺾으려 들지도 모른다. 카를 유스티, '벨라스케스와 그의 시대' 1888년 공간감각 벨라스케스의 생애 말년에 그린 두 작품, '궁녀들'과 '실 잣는 여인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공간감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감각 위에서 그는 티치아노의 화법을 소화해낸 것이다. 리얼리스트답게 그는 사람과 물체, 벽과 둥근 천장, 베틀을 이용해서 관객들이 거리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고, 절하는 모습과 긴장된 손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베짜기가 직업이 된 여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장치했다. 게다가 그림 전체를 한눈에 읽을 수 있도록 했고, 원경과 근경의 차이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동감으로 인해 우리는 그림 속의 공간에 참여하며 거기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것이 벨라스케스가 다다른 예술전 리얼리티의 정점이다. 마이어, '벨라스케스', 1936년 불분명한 윤곽과 외면 벨라스케스를 말할 때 우리는 항상 그가 여백과 분위기를 즐겨 표현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백과 분위기로 정확히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알지 못하니까. 벨라스케스의 인물들을 감싸는 '여백'의 효과는, 정확히 말하면 윤곽과 외면이 흐릿하게 표현되어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게 윤곽과 외면을 흐리게 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그림을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고, 그런 이유로 그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벨라스케스는 틀림없이 대중적이지 않지만, 그가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처럼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현실은 신화와 다르다는 ktlf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벨라스케스' 1953년 가장 '사실주의적'이며 가장 '비물질적'인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그의 품성, 독자성, 심지어 고독에 의해서 더욱 뚜렷한 특징을 지니게 된다. 세비야에서 태어난 그는 16세기 고전주의 거장들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파체코에게 그림을 배웠고, 새롭게 경험한 사실주의와 세비야에서 보낸 젊은 시절에 거장다운 솜씨로 구사한 악마주의를 통해 자신의 그림세계를 성숙시켜 간다. 벨라스케스의 마드리드 도착, 궁정에서 활동한 경력, 왕실 수집품에 대한 견문, 베네치아 출신 거장들에 대한 존경심, 이런 것들 덕분에 그는 당대 유럽 화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이고 새로운 회화언어를 갖게 된다. 대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빠른 터치로 벨라스케스는 자신이 관찰한 현실을 물질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으면서 고정시킬 수 있게 된다.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는 모든 화가 중에서 가장 사실주의적이며 독특한 분위기에 정신적인 깊이를 지닌 초상화가이면서, 동시에 테크닉 면에서는 '비물질적'이었다. 원숙기의 작품들은, 케베도가 언급했듯이 아주 경쾌한 작은 점, 윤곽이 없이는 연한 채색, 멀리서 보면 사실적으로 보이는 반점으로 이루어진 아롱진 광채로 환원된다. 이렇게 해서 조용하고 엄숙한 정신과 고전주의적인 기질의 소유자 벨라스케스는 순간적인 것을 고정시키고, 바로크적인 감수성과 어긋나는 표면과 섬광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특이한 것과 구체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마력적인 벨라스케스적 기법(생명이 있는 것들과 사물들에게서 거의 모든 물질적인 특성을 제거함) 사이의 이런 긴장감이 17세기의 회화에서 가장 암시적이고 균형잡힌 완벽한 순간을 가져온 것이다. A. E. 페레스 산체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장 '황금기의 에스파냐 회화' 전시회 카탈로그, 파리, 1976년 펠리페 4세, 문학과 그림의 옹호자 펠리페 4세는 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학 장르 가운데에서도 희곡을 옹호했다. 연극 상연에 대한 왕과 궁정의 기호도는 사냥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은 회회를 교양 7학과(중세 이후 교육의 주요 학과로, 문법, 논리, 수사와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을 총칭하는 말:역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한다. 이 논쟁은 엘 그레코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1677년 칼데론이 구두변론을 펴면서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에게 베푼 은총을 회고한 이후 유리하게 종결된다. 칼데론은 물론 로페데 베가도 궁정에서 공연하는 작품을 쓴다. 이 작품에는 전쟁에서 거둔 찬란한 승리가 묘사돼 있는데, 이는 나중에 부엔 레티로 궁의 레이노스 살롱 그림의 주제가 된다. 칼데론의 '브레다성의 공격'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성의 함락'에 영감을 준다. 칼데론은 또한 부엔 레티로의 새로운 궁전에 관한 우의적인 희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1634년에 상연된다. 이어서 그가 쓴 많은 작품들이 1640년에 낙성된 새로운 궁전의 극장에서 상연도리 예정이었다. 이 극장은 기술적으로 완벽한 시서과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기계장이를 갖추고 있었다.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칼데론에게도 왕은 막강한 옹호자였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칼데론도 1637년 산티아고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와 달리 그는 군복무 면제를 받지 못한다. 엔리게타 하리스, '벨라스케스' 파에동 출판사, 1982년 '궁녀들', 회화의 신학 철학자 미셀 푸코는 '궁녀들'을 대단히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 성찰의 테마로 간주했다. 그는 의식상태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림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믿었다. 그런 종류의 의문에서 영감을 얻은 피카소는 말년에 '궁녀들'을 주제로 40여 편의 습작을 하였는데, 독창적인 작가들은 저마다 이 최고의 걸작에서 그들 자신만의 미학적인 관심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그 실재에 가깝게 반영된 모습을 탐색하는 체해야만 한다. 우선, 거울에 나타난 모습은 왼편에 있는 대형 캔버스의 이면이 비친 것이다. 이면, 아니 표면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반영된 모습은 캔버스의 앞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영된 모습은 창문과 대조를 이루면서 창문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과 마찬가지로 거울에 반영된 모습은 진부한 장치이다. 그러나 창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주의 깊은 태도의 등장인물들과 화가와 그림을, 그들이 주시하고 있는 광경과 결합시켜 주는 감정표현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거울은 강렬하고 즉각적이며 아주 뜻밖의 움직임에 의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림의 앞쪽에서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을 찾게 하는데, 이는 가상의 입체공간 끝에 있는 그 존재를 보이게 하면서도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거울에 비춰진 것 사이에서 그려진 반점들이 측면에서 흐르는 빛을 수직으로 차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모습은 배경의 벽에 난 열린 문과 이웃하고 있다. 문 역시 방안으로 퍼져들지 않는 뿌연 빛을 뚜렷한 윤곽으로 드러낸다. 만일 조각된 문과 커튼의 곡선, 계단의 암영이 바깥쪽을 향해 패어 있지 않다면, 그 밝은 부분은 단지 금빛의 단색만으로 처리됐을 것이다. 여기서 복도가 시작된다. 그러나 복도는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자체로 소용돌이 치다가 멈추는 노란 빛의 파편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가까운 동시에 끝이 없는 이 배경에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띈다. 그는 옆모습을 보이며 손으로 벽걸이 천을 잡고 있다. 발은 두 개의 계단 위에 놓여 있으며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할 것이며, 관찰당하지 않은 채 방안의 상황을 간파한 데 대해 만족할 것이다. 거울도 그렇지만 그는 무대의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울만큼 주의를 끌지 못한다. 우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복도를 따라 등장인물들이 모여 있고 화가가 작업하는 이 방을 우회하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또한 조금 전에는 그림 속의 모든 시선들이 주시하는 무대의 전면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거울에서 발견한 모습처럼 그는 분명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의 밀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한 가지 있으니, 그는 거기에 직접 있다는 것이다. 그는 외부로부터 갑자기 문간에 나타난다. 반영된 모습이 아니라 뜻밖의 출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울은 아틀리에의 벽을 넘어서 그림의 앞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안과 바깥을 혼동시킨다, 계단에 발을 올리고 몸을 돌린 양면성을 지닌 이 방문객은 부동의 균형상태에서 들어오는 동시에 나가고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러나 그의 육체가 자리잡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는 새롭고 동일한 부류처럼 방을 가로질러 거울에 비쳐 반사되는 영상들의 즉각적인 움직임을 되풀이한다. 거울 속의 창백하고 미세한 실루엣은 불쑥 문에 나타난 건장하고 키 큰 남자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다... '이 그림의 의도 자체' 그림의 전경과 후견을 차지하는 마루에 있는 사람은 화가까지 여덟 명이다. 그들 중 다섯 명은 머리르 다소 기울이거나 돌리거나 숙인 채 그림의 앞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무리의 가운데에는 회색과 장미색의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어린 공주가 있다. 공주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반면 상반신과 드레스의 장식 밑단은 약간 왼쪽으로 비껴 있다. 하지만 시선은 그림의 앞에 서 있는 관람객 쪽으로 똑바로 향하고 있다. 캔버스를 양쪽으로 똑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 가운데의 선은 이 공주의 미간 사이로 지나갈 것이다. 공주의 얼굴은 그림 전체 높이의 3분의 1선상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틀림없이 이 작품의 주제가 있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의 의도 자체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해 보이고 더욱 강조하기 위해 화가는 전통적인 형태를 그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다. 즉, 중앙에 있는 인물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을 배치했다.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는 천사처럼 무릎을 꿇은 한 궁녀가 공주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측면으로 윤곽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공주의 얼굴 높이에 있다. 그녀는 공주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 오른쪽에 다른 궁녀가 역시 공주 쪽으로 몸을 돌린 채 고개를 가볍게 공주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시선은 공주가 화가가 바라보는 앞쪽을 향해 있다. 그녀 오른쪽으로 두 명이 짝을 이룬 두 그룹이 있다. 한 그룹은 뒤로 물러나 있으며, 난쟁이들로 구성된 한 그룹은 전경에 나와 있다. 각 그룹의 한 사람은 정면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은 오른쪽이나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그룹은 그들의 자세나 키에 의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닮은꼴을 하고 있다. 즉, 뒤쪽에는 신하들(왼쪽에 있는 부인은 시선을 오른쪽에 두고 있다)이 있으며, 앞쪽에는 난쟁이들(오른쪽 끝에 있는 소년은 그림 안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이 있다. 이와 같이 배치된 등장인물들은 핵심인물에 따라서 두 가지 형태를 구성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X자 모양일 것이다. 왼쪽 위 지점에서 화가의 시선이 있고, 오른쪽 위 지점에서 신하의 시선이 있다. 왼쪽 아래의 지점에는 캔버스 뒷면(정확하게 말해서 작업대 다리)이 있고, 오른쪽 아래 지점에는 개의 등에 발을 올려놓고 난쟁이가 있다. 이러한 두 선의 교차점, 즉 X의 중앙에 공주의 시선이 있다. 또 다른 형태는 큼직한 곡선을 이룬다. 양편의 경계느 멀찍이 떨어진 높은 지점인 왼쪽의 화가와 오른쪽의 신하에 의해 구분된다. 그리고 한결 더 가깝게 있는 움푹한 지점은 공주의 얼굴과 공주를 향하고 있는 궁녀의 시선과 일치한다. 이 유연한 선은 하나의 수반 형태를 이루는데, 이른 그림의 한가운데에서 거울의 위치를 압박하는 동시에 제거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는 맞은편의 풍경이 어떤지를 알았다. 그곳에서 국와 부처가 있다. 우리는 방문객의 존경어린 시선과, 공주와 난쟁이들의 놀란 표정으로 이미 그들의 존재를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림의 끝에 있는 거울 속의 실루엣으로 그들을 다시 알아보게 된다. 모두들 조심스러운 표정과 치장한 몸인데, 그들은 가장 창백하고 가장 비현실적이며 가장 위태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희미한 빛이나 작은 일럼임만으로도 그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들은 또한 가장 등한시되고 있다. 사람들의 뒤편에 교묘히 스며들어,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 배치돼 다소곳이 소개되는 그들에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보이는 범위 내에서는 그들은 가장 덧없는 존재이며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역으로, 그림의 바깥에 있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물러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들을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표현의 순서를 바로잡는다. 따라서 우리가 마주 대하는 것은 그들이며, 우리가 몸을 돌리는 쪽은 그들을 향해서이며, 연회복을 입은 공주를 소개하는 것은 그들의 눈앞에서이다. 돌려세운 캔버스부터 공주까지, 공주부터 오른쪽 끝의 난쟁이까지 하나의 곡선이 그려짐으로써,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서 그림을 배치하고, 공주의 시선과 이미지가 마침내 종속되는 구성의 진정한 중심이 이와 같이 나타나게 된다. 이 중심을 펠리페 4세 부처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 중심은 상징적으로 일화 속에 나타난 지배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림과 관련하여 중심이 갖는 세가지 기능 때문에 그러하다. 중심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모델의 시선과 장면을 주시하는 관객의 시선, 그림을 구상하는 화가의 시선(그려진 시선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 있으며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시선을 말한다.)이 정확하게 겹치게 된다. 이러한 '주시하는'것의 세 가지 기능은 그림의 바깥지점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다시 말해서 표현되어진 것과의 관계에서는 이상적이지만, 그것을 기점으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히 현실적인 그런 지점이다.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그것은 보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러한 현실은 그림의 안으로 투사되어 이상적이고도 현실적인 이 지머의 세 가지 기능들과 부합되는 세 가지 모습으로 투영되고 회절된다. 이를테면 그림의 왼쪽에는 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방문객이 계단에 발을 올린 채 방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그는 무대의 배후를 차지하지만, 광경 그 자체인 국왕 부처를 마주보고 있다. 끝으로, 중심에는 참을성 있는 모델들 속에서 성장한 채 미동도 않는 왕과 왕비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있다. 미셀 푸코, '말과 사물' 갈리마르, 19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