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회화의 괴물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84] 지은이: 크리스토프 도미노 / 성기완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베이컨-회화의 괴물 제 1장 그림을 향한 얼굴 제 2장 독창성의 발견 제 3장 살아 있는 이미지 제 4장 감각을 붙드는 작업 기록과 증언 베이컨-회화의 괴물 베이컨의 삶과 예술을 대응시키는 일은 이 예술가 자신이 불러일으킨 유혹이며 동시에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자기 그림을 자기 삶의 항구한 증거라고 확신하지만, 그 그림은 삶의 반영이 아니라 불규칙하고 각색된 메아리이다. 그렇지만 전설과 사실을 오가며 이미 전기물 몇 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매우 특이한 이생을 산 사람에게 그림과 삶은 아주 각별한 관계에 있다. 1950년대 하나의 분화구와 같은 시대의 초상화를 들고 등장한 20세기 최고의 구상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인간을 주제로 격렬한 이미지를 화폭에 펼친 그는 현대인의 분노와 공포, 위기를 기괴하게 표현해낸 인물로 유명하다. 노름꾼에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순간의,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림 속에서 이미지는 변형, 해체되고 괴상망측한 디테일을 혼합한다. 그리고 그 무대는 닫힘과 가두기의 연속이다. 고통받는 존재가 속박된 공간. 그것은 바로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 있는 폭력'을 생산하는 그의 방식이다. 지은이: 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 / 성기완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김기영 크리스토프 도미노(Christophe Domino) - 미술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인 크리스토프 도미노는 여러 전람회 카탈로그의 글과 전공 논문을 썼다. 국립 현대미술관(퐁피두 센터)의 컬렉션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스칼라 출판사에서 낸 바 있다. 성기완 -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음악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월간 음악」「상상」등에 재즈와 록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38번「록의 시대」, 61번「호치민」, 77번「연금술」을 번역하였으며,「뮤직 비디오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공동번역하였다. 제 1장 그림을 향한 얼굴 모든 것이 어긋난 시작이었다. 베이컨은 1909년 더블린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인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태어나서 16년을 보낸 아일랜드는 그와 관련이 없는 것도, 낯선것도 아니었다. 베이컨이 우리에게 매우 강렬하게 일러주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일랜드라는 세계와 베이컨이 맺고 있던 끈을 불확실한 양상으로만 알 뿐이다. 베이컨 자신도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정확하거나 장황하게 말한 적이 없다. 물론 그에게 '아일랜드식 유머', 즉 넘칠때까지 어울려 실컷 마시고 즐기는 축제의 감각이 아이러니한 우울의 배경에 깔려 있지만, 아일랜드 문화는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경마 조련일을 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온 퇴역 영국군 장교이자 기마조련사의 아들이며, 17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같은 이름의 영국 철학자의 먼 후손이기도 하다. 더블린의 꽤 품위있는 지역인 배고트 스트리트에서 살았다고는 해도(그가 산 곳에서 조금 떨어진 길모퉁이에서 50여 년 전 오스카 와일드가 태어났다), 그는 조금 역마살이 낀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영국으로, 때로는 아일랜드 시골의 킬다르 백작이나 킬쿨렌의 이웃 마을 등 말키우는 일을 전통으로 삼고 있는 고장을 전전했다. 위협으로서의 세상 그러나 베이컨의 어린 시정을 규정하는 것은 가정의 이러한 상대적 불안정감이라기보다는 아일랜드의 정치적 동요와 런던 시정의 제1차 세계대전 등 당시 팽배해 있던 전쟁의 기운 속에서 느껴진 긴장과 폭력의 분위기였다. 그는 바로곁에서 느꺄지는 전쟁의 위협이 그를 형성한 기본적 경험이라는 점을 자주 말하곤 했다.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아버지-50년 후 그는 '치사한 놈의 아버지'라 불렀다-와 아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어머니를 빼면, 여러 채의 집과 시골의 토지를 소유한 집안의 사정은 어려울 것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청교도적인 엄숙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고 기수사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천식 때문에 외톨이가 된 아이, 부모가 꿈구어왔음직한 화려한 제복과 기마행진보다 마구간지기와 더 가까운 아이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집에서 묵는 일만큼은 그에게 훨씬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는 기발함과 공상과 미술 연습 등이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궁만큼이나 크다고 일컬어지던 뉴캐슬의 이모 집에 가면 가문 사람이 그렸다는 라파엘로 전파 화풍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꺼져! 프란시스! 무대장치가 시시각각 변하고 어른들이 맡은 역할과 행동은 너무나 자주 모순에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는 극장. 그 앞에서 베이컨은 관습을 벗어난 인성을 지닌 금기 없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는 가족과 단절되었다. 이에 관한 일화는 전설적이고 상징적이다. "어느 날 어머니의 속옷을 입어보다가 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 살 때일거예요. 아버지는 나를 집에서 내쫓았죠." 베이컨은 1주일에 3파운드의 연금으로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그의 주요 소지품은 정신의 자유, 그리고 그가 결코 버리지 않았던 도전적 언동뿐이었다. 1925년 그의 런던 생활이 시작된다. 여성복가게 점원, 파출부, 아무것도 없는 건달생할을 전전했던 런던 시기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발 닫는 대로 떠돌아다니면서 사회의 밑바가부터 궁정의 식당까지 구석구석을 섭렵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에게 자신을 확인할 예기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의 교육을 위해 한 친구에게 그를 위탁했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을 베를린에, 다음으로 파리에 체류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는 실로 귀중한 '위탁감독'이었다. 그는 당시의 방탕한 독일 사회 속에서 감각의 혼란을 경험하면서 때로 해롭기조차 한 밤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그 밤의 세계는 게오르크 그로츠, 오토 딕스, 막스 베크만 같은 신즉물주의 화가들이 보여준 적이 있다. 또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였다. 베를린에서 파리로, 삶에서 예술로 그러나 그의 인생에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1927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파리 생활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파리에 대한 굉장한 애착과 자기만의 액센트와 억양으로 말하던 프랑스어에 대한 친근감을 역설하긴 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는 거기서 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을 마주하는 일생일대의 체험을 하게 된다. 자주 찾던 샹티의 콩데 미술관에서 그는 푸생의 <결백한 자들의 학살>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폴 로젠버그 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전람회는 현대 미술을 체험하는 첫 대면이었다고 토로한다. 이미 명성을 얻은 몽파르노스 학파 같은 당시 파리 화단의 활동가들과 만나지는 않았지만 베이컨은 이미 그림 안에 담겨 있는 잠재력 속에서 파리의 예술적 울림을 감지했다. 그리하여 19세기와 현대 회화의 유산이 그에게 전해진다. 그는 늘 베를렌의 방랑, 보들레르의 시학과 함께 러시아 발레, 초 현실주의의 약동, 뷰뉴엘의 영화적 발명(1928년의 <안달루시아의 개>)등을 찬미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미학적인 영향이라기조다는 세계에 대한 열림이었다. 또한 베이컨은 페리앙, 샤로, 뤼르사, 르 코르뷔지에,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브로이어 같은 사람등 당시의 디자이너들과 건축가들의 작품에도 흥미를 느꼈다. 여러 가지 작업을 전전한 끝에 그는 실내장식과 기구를 만드는 일에 정착을 한다. 또 수채화를 그리고픈 욕망이 솟았다. 그의 최초의 유화작품은 1929년, 그가 런던에 돌아와 얻게 된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스무 살이었다. 유럽의 현대회화 미술은 베이컨에게 탐험의 영역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곧 즉각적인 맥락 속에서, 특히 예술을 향해 열린 그의 눈이 응축적으로 발견한 유럽 예술계의 상황으로부터 드러난 것들을 첫 번째 주데로 삼아 데생에 옮겼다. 당시 상황이 비조형적인 경향이라 해서 그 영향권 아래만 있었냐면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우하우스에서 몬드리안, 피카소에서 막스 에른스트에 이르는 전통뿐 아니라 헨리 무어, 니콜슨, 영국 인상주의의 중심 인물 시커트의 모든 후계자들에게서 자양을 얻은 양차 대전 사이의 이 젊은 런던 예술가의 경험은 다른곳에서는 모순으로 보일 법한 여러 별자리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성좌처럼 보인다. 또한 장 아르프, 나움 가보, 모홀리 나기 같은 구성주의의 중심 인물이나 바우하우스 건축의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사람이 유럽에서 피신해 런던에 체류하면서 1930년대 말 구성주의 전통이 런던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파리의 중심 경향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었지만 참신한 형식작 만남을 낳아 폴 내시 같은 미술가의 작업에 그 색조를 남긴다. 1930년대가 진행되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당시는 사회적, 정치적인 목적성을 띤 진보주의자들과 구상파 화가뿐 아니라 풍경화가의 그림에서도 인상주의적 영감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려는 흔적이 보이던 시기였다. 빅터 패스모어 같은 사람의 예술적 발전이 좋은 예이다. 1936년까지 추상화풍이었던 그는 50년대에 이르러 다시 추상화풍으로 돌아가지만 그사이에는 자연주의적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가 1937년 베이컨과 함께 전람회를 열었을 때가 바로 그에 근접한 경향을 보여준다. 다른 어느 곳보다도 영국에서는 여러 미학적 가능성들이 동시적으로 혼재한 것이 명백하다. 베이컨은 형식적 추상, 초현실주의자들이 개척해 놓은 우연의 경험, 형상에 대한 매우 영국적인 애착등에 잇따라 기대면서 그 모두를 다 소홀히 하지 않는 공간을 창안한 덕분에 그러한 동시적 가능성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1930년대 초부터 베이컨의 곁에 있던 동료 화가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면서 그의 일생동안 더욱 두드러지게 될 특징이기도 하다. 회화의 유혹에 이끌린 런던의 젊은 장식 미술가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었다. 베이컨은 차고를 개조한 아틀리에에 터를 잡았는데, 몇 번 안 되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현대적 장식물들을 이용한 그의 과감한 장식안과 가구들이 주목을 받아 영국 전문지에 평이 실리기까지 했다. 또한 그는 먼 호주 땅에서 말을 기르며 가족과 떨어져 사는, 그와 비슷한 기인 로이드 매스터를 만나는데, 그는 베이컨보다 열 살 정도 위로서 아버지 같은 사람에서 형제로, 연인으로, 끝내는 경쟁자로 베이컨의 삶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베이컨은 드 매스터와 꾸준히 만나면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간다. 거기서 일종의 실리주의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혼돈, 타자와의 결별에 대한 감각, 유혹에의 자각, 숙련의 가능성 등이 엿보이기도 한다. 협잡꾼이면서 관용 어린 사람이라는 모순이 있지만, 모순이 예술가를 만들어내는 것 아니겠는가. 드 매스터는 최소한 베이컨의 인생에 두 방향의 길을 열어주었다. 기술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림의 실제 작업에 따르는 숙련도가 그 하나이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감각이 나머지 하나이다. 그들은 1930년에 함께 오늘날에는 '쇼룸'이라 불리고 있는 그의 개조된 아틀리에에서 가구와 베이컨의 초기 유화를 포함한 그림전시회를 열었다. 베이컨의 계획에 회화가 점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조숙한 예술가로서 미술계에 입문하였다. 첫 번째 성공을 거둔 작품인 <십자가>(1933년)는 예술사가 허버트 리드의 현대 미술 서적인 <<오늘의 미술>>에 즉각 소개되기도 했다. 생존자들, 연인들, 그리고 방탕아 그림이냐 장식이냐? 베이컨은 장식을 그만두었다. 더욱이 나중에는 혹독한 비판을 퍼붓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은 쉬운 게 아니다. 그는 되는대로 아틀리에를 옮기고 몇 차례 공동전시회를 열었으며 1934년에는 런던 어느 집 지하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지만 언론에 성공적으로 보도되지 않았다. 절망한 베이컨은 작업을 게을리하고 가장 극단적인 보헤미언 생활을 하며 부랑아로 전전한다. 무엇보다 그를 끈질기게 휘어잡은 욕망은 노름이었다. 그는 노름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곤 했다. 노름쟁이에 방탕아인 그는 전쟁 직전의 유럽의 긴박한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겠지만 고의적으로 그 변두리에 머물고자 했다. 한편 그는 인간관계를 쌓아가고 우정을 지속시키면서 그 경험을 계속 그림으로 옮겼다. 1936년에는 한 국제 초현실주의 전람회에서 그의 작품이 너무 '덜 초현실적'이라 해서 전시가 거부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여러 전시회에 계속해서 출품했던 흔적은 작업을 그만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베이컨은 자주 전람회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면서 이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던,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위대한 인물인 그레이엄 서덜랜드를 만나 우정을 나우었다. 사랑의 관계를 넘어(시간이 흘러 경쟁관계로 변했지만), 서덜랜드는 베이컨의 기교가 완숙해지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당시 미술계의 실력가들에게 그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1930년대 내내 베이컨의 훌륭한 스승이자 재정적 후원자요 믿음직한 지지자였던 에릭 홀에게서는 예절을 배웠다. 그렇다고 예절바르게 처신하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까지 베이컨은 사는 데 너무 바빠 그것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전쟁이 터지자 베이컨은 천식 때문에 민방위대로 편입되었다. 직접 전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힘든 기간이었다. 놀음, 섹스가 점철된 표류의 세월, 생존의 세월이었다. 폭격으로 무너진 아파트에 아틀리에를 잡고서 베이컨은 아틀리에에 애정을 쏟는 한편, 거기서 밀레의 작품을 연구했다. 밀레는 라파엘로 전파의 유명한 화가인데, 테이트 갤러리에 가면 그의 걸작 <오펠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를 떠난 적이 거의 없는 늙은 하녀 나니와 살았다. 그는 아틀리에 한구석에 은밀한 놀음방을 차려놓고서 음식과 술을 즐기는 친구들을 들이기도 했다. 짓누르는 전쟁의 위협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끈덕지게 그림을 그렸다. 전쟁이 끝나고 시작된 새로운 전쟁 이번에 그의 노력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었다. 1944년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이라는, 거대하고 매우 인상적인 3부작을 발표하게 된다. 작품이 하나의 구성요소에 의거하고는 있지만, 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전쟁의 잔혹함이 완전히 드러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무엇이 이 그림을 그리도록 이글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베이컨이 30년 후에 말한 바에 따르면, 이 습작은 '전통적인 인물을 십자가 발치에 배치하려'했다고 한다. "나는 인물을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틀에 놓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인물을 습작상태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괴물과 인간의 중간쯤 되는, 악몽과 시대의 초상화 사이에 있는 피조물들이 탄생한 것이다. 베이컨은 이 작품이 이전에 제작한 그림의 전시를 결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만큼 이 작품은 그에게 출발점이 된다. 오렌지색 배경에 괴상한 괴물을 그린 이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은 확실히 한'기이한 괴물 작가'가 화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서른다섯이었다. 그후 그의 인생은 향후 50여 년간 멈춤 없이 계속될 그림그리기가 거의 전부이다. 이를 이끌 본능은 한층 날카로워져 있었다. 베이컨은 풍경화와 초상화의 영국적 전통 속에 있는 화가인가? 풍경화의 공간 속에서 감각된 세계를 묘사의 대상이 아닌 경험의 대상으로 삼는 콘스터블 터너의 후예인가? 게인스버로 풍의 선과 빛에 대한 감수성, 캐리커처로까지 귀결되는 호가스 풍의 재치를 물려받은 자인가? 본인은 부정하려 하지만, 두텁게 색칠한 공간과 잔혹성이 담긴 시선을 지닌 그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엿보인다. 제 2장 독창성의 발견 전쟁 후의 런던, 객기와 집요함이 이상야릇하게 뒤섞인 그의 예술가 행로가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정기 전람회, 찬반으로 갈라진 평론가, 몇몇 충실한 지인의 협조 덕택에 그는 곧 인정을 받았다. 성공의 마구간 그러나 역사를 인도하는 올림피아와 별로 영광스럽지 못한 사우스 켄싱턴의 허름한 건물에 있는 그의 작업실 사이는 실로 거리가 멀었다. 1961년, 그는 옛날에 마구간이었던 이곳을 개조하여 죽을때까지 이용하였다. 이곳에 들어와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특히 그가 작업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좁기로 유명한 이 아틀리에는 지저분한 계단을 통해 다른 방들과 이어지는데, 이 계단 또한 끔찍한 불편함으로 유명하다. 잡다한 도구와 잡동사니들, 책, 찢어진 그림, 벽에 시험삼아 칠해본 물감등으로 어수선한 이곳은 얼마 후면 이름을 떨치게 될 재능이 싹을 틔운 토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는 비록 자신의 국제적인 성공을 의식하긴 했지만 훈장이라든지 다른 특별 대우 같은 공식적 형태를 띤 사회적 명성을 경멸했다. 영국 당국이 그것을 제의 했을 때 그는 깨끗이 거절했다. 그렇지만 그는 돈을 버는 데만큼은 열을 올렸다. 그는 돈을 쓸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더구나 그의 노름벽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인 평단의 평가에 무관심했던 그는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몇몇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으며, 그런 목소리조차 점차 드물어진다는 점을 한 하기도 했다. 그는 전람회 개최에 앞선 축하연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유가 없는 좁은 작업실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기 작품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철저한 작업 끝에 나오는 생생한 작품 그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규칙은 아틀리에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고통스러운 시험이었다. 작업, 대상과의 싸움,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이 가져다 주는 시각적 검증, 이것들만이 그가 의도하는 작품의 필요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작품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휴식도 멈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작품을 인정할 수 없으면 그는 부수었다. 아무리 인생이 뒤죽박죽이었어도 고집스러운 요구와 줄기찬 지속성이 특징이라 할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꼭두새벽부터 점심 무렵, 대략 6시에서 정오까지 일했다. 그는 한 번의 승리에 운명을 거는 노름을 하듯 우연한 이미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러니 수많은 화폭이 찢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 전체가 독특한 방식에서 비롯하였는데, 이 방식은 작가가 어떤 토양에서 배출되었나 하는 점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 어떤 태도로 임했는가에 보다 관련이 많다. 그렇다고 작가의 미술적 토대가 그의 작품에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정반대로 그 토대는 끊임없이 작품을 가로지르되 모든 측면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다. 그의 화풍이 진정한 진보나 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나 고비들을 통하여, 단절과 주요 문제제기가 없는 대신 고통과 열정과 반복을 통하여 구성되는 것은 그 때문이고 그 점이 그의 작품세계를 단선적 연대기에서 벗어나게끔 한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붓놀림으로 이루어진 그의 놀랍도록 통일되고 논리적인 미술세계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오늘의 감상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이 주는 최초의 힘, 그 충격적 효과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놀랄 만한 지성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은 마치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무에서 다시 시작하듯 새롭게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과 예술의 방정식 그의 인생과 그림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확실히 미술처럼 열정적으로 몰입해야 하는 일이 개인생활의 영역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중에서도 베이컨만큼 작품과 삶이 명백한 인과관계를 갖는 작가는 드물다. 데뷔 때부터 그러한 인과관계가 예술가의 인생과 우정, 여정을 이끌었던 것이다. 창조에 대한 요구, 삶의 방식, 애정 관계 등 모든 것이 전쟁 직푸의 인물로부터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베이컨의 가가운 친우들이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는 일이 매우 잦았고, 그의 회화기법 전체가 생활세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이 "나의 인생 전체가 내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고 단언하는 것과 예의 자기 조롱을 섞어 시멘트 믹서기가 여러 사물을 버무리듯 현실을 뒤섞어 어디서 무엇이 나왔는지 알아보기가 상당히 힘들도록 자기 자신을 제시하는 것은 그가 거기에 대한 이중의 열쇠를 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가족, 소호의 친지 1940년 아버지가 죽은 뒤 가족과의 유대는 느슨해졌지만 애증이 뒤섞인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를 묻으면서 그는 아일랜드를 묻었다. 베이컨은 1950년과 1952년 사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어머니와 누이를 보러 간다. 그의 가족사가 그 없이 전개된다는 생각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이 여행은 소중한 것이었다. 또한 이 여행은 앞으로 끝없이 그를 매혹할 아프리카의 자연을 발견하도록 해주었다. 반면 그의 개인생활은 사우스 켄싱턴의 아파트 겸 아틀리에 이외의 몇 군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베이컨은 자신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보도록'해주는 화랑과 미술관으로의 산책에 몇 해 동안 오후를 할애했다. 첼시, 소호 등지의 클럽과 퍼브가 있는 런던이 그의 무대였다. 소란과 파렴치 사이의 작은 세계 전쟁 이후 소호의 작은 세계에서는 다양한 운명에 처한 예술가, 기자, 작가 들이 전쟁의 환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술, 동성애, 예술과 일상, 모든 것이 그곳에 속한 집단이 즐기는 게임의 내깃거리였다. 거기서 베이컨이라는 인물은 매우 두드러졌다. 그의 정신세계와 성격을 가늠케 해주는 증언이나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참고는 될지언정 그의 미술에 접근하는 데 일관된 도움을 준다고는 할 수 없다. 콜로니 룸, 프렌치 퍼브, 가고일, 휠러스 같은 클럽과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러한 장소들은 단순한 모임장소가 아니라 베이컨의 일상생활의 중요 부분을 이루는 개인적 습관과 그만의 세계를 형성하는 곳이다. 사교 클럽 콜로니의 여주인 뮤리엘 벨처는 베이컨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소개하곤 하던 활력 넘치는 인물이었다(그녀는 모델로도 자주 등장한다). 휠러스에서 베이컨은 외상거래를 했는데, 같은 테이블에서 먹은 식사를 도맡아 계산하는 버릇이 있던 베이컨에게 이것은 꽤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베이컨과 그의 친구들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던 휠러스의 주인은 단골손님들의 도발적 언사나 무례한 행동을 탓하지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하듯'다른 손님들을 문밖으로 내쫓는 일을 더 즐겼다. 소호에는 데이비드 실베스터같이 미술관과 비평가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베이컨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심오한 지성으로 말하는 내용이 실린 유명한 대담집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미술계에 소속됨으로써 어디든 통하는 방문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든지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베이컨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신랄함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 유동적인 집단에 유혹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잠시 지나치는 뜨내기들도 많았다. 또 베이컨의 부탁으로 자주 네거티브나 초상을 찍곤 했던 사진가 존 디킨처럼 까다로운 인물도 있었다. 때로는 작가, 수집가, 그리고 런던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뜨내기 사교꾼들이 있던 시기가 그때였다. 런던 학파, 혹은 '뮤리엘파'? 그들뿐 아니라 당시의 런던에는 별로 이름이 나 있지 않았던 콜크하운, 맥브라이드 같은 사람들과 자기 재산을 탕진하는 데 몰두한 존 민턴같이 상당한 명성을 날린 화가, 화가의 친구들이 있었다. 미술사가들은 이들과 더불어 루시앙 프로이트, 프랑크 아우어바흐, 마이클 앤드류스 등을 통틀어 '런던 학파'라 칭한다. 여기서 학파라는 개념을 이를테면 '파리 학파'처럼 미학적 일관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나 비록 미학적인 관점에서 이렇다 할 공유점을 찾을 수는 없다 해도, 이 간결한 표현은 1950년대에 영국 미술계의 전면에 나서 활약하던 한 세대의 예술가 그룹이 함께 나눈 우정과 삶의 순간들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런던은 공유된 환경에 더 가깝다. 프랑크 아우어바흐와 루시앙 프로이트는 베를린 태생이었고 레온 코스프는 이민자의 아들이었으며, 베이컨은 반은 아일랜드 출신이었으며 키타이는 미국인이었다. 가장 순수한 영국인인 마이클 앤드류스는 뿌리 없는 사람임을 자처했다. 전쟁 이후의 분위기 속에서 실존주의가 유럽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반면에 런던 학파는 일차적으로 개인적 표현에 흥미를 두었다. 물론 일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미술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니나 이러한 경향은 1950년대 말 리처드 해밀턴과 더불어 팝 아트와 함께 구체적인 형태를 이룬다. 베이컨은 물론, 당시 주변 화가들과 1930년대 이후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던 '추상의 전면적 거부'라는 측면과 미술의 역사적 차원에의 애착을 공유하긴 하지만, 그가 그림에서 이미지를 주고자 했던 위상은 그를 다른 런던 학파 화가들과 근본적으로 구분지었다. 앤드류스처럼 풍경을 기술적(묘사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욕망, 프로이트처럼 초상을 그리려는 욕망, 그리고 회화적 소재의 표현적 차원에 대한 애착(코소프와 아우어바흐)등이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크게 변형된 메아리일 뿐이다. 아마도 베이컨이 가장 선배이며 가장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어떤 이는 런던 학파를 '뮤리엘파'라 부르기도 한다. 우정, 특별함을 훨씬 넘어서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이컨의 삶에는 동반자와 모델이 있었다. 피터 레이시는 1953년부터 1962년 죽을 때까지, 조지 다이어는 1963년에 만났으며, 존 에드워즈는 베이컨의 마지막 20년을 함께해 주었다. 기묘하게도, 베이컨의 미술경력은 그의 우정이 어려움에 빠진 순간과 일치시켜 구분할 수 있다. 테이트 갤러리에서 그의 첫 번째 회고전에 개최되던 날 밤, 병중에 있던 피터 레이시가 죽었다. 조지 다이어는 베이컨의 생으로 날아온 또 다른 불길한 천사였다. 변덕이 심하고 우울증을 지닌 그는 베이컨 주변에서는 투박한 사람으로 통했지만 베이컨이 끈질기게 화폭에 담으려 했던 강인함을 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71년 파리 회고전이 개최되던 날, 베이컨의 성공과 대조가 되는 어둠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1970년대, 1980년대가 지나면서 거리가 바뀌고 모이는 장소도 변했다. 1980년대의 런던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늙어가면서 그는 여전히 친구들과 벌이는 만찬에는 참석하였으나 사교모임에서는 멀어졌다. 몇 번의 말다툼이 있은 후 그는 어떤 모임에서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축제, 시골 여행은 여전히 즐겼다. 그러나 쉬지 않고 계속되는 전람회가 다가올 때면 아틀리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람회는 작업의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었으며 또한 좋은 여행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보다 활력 있는 격렬한 삶을 추구하며 베이컨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공유된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고백하기 곤란한 인간적 측면에 깔려 있는 진실성이다. 그것은 각자의 가장 깊은 인간성을 증언하는 모든 것, 진실을 밝혀주는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베이컨은 통찰력과 정확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했는데, 그는 나약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 거짓말쟁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단지 미술만이 심리의 너머에서 그러한 차원의 진실성을 측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그는 일반적으로 모델에게서보다는 자신들로부터 훨씬 더 의미심장한 어떤 것을 드러내줍니다. 어떤 초상화가 누구와 닮았나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예술가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아세요? 바로 인생이죠. 모든 예술가는 인생과 사랑에 빠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한결 활력 있고 격렬한 인생이 되도록 덫을 씌우죠." 미술의 언어, 방법, 지지기반을 문제삼는 것이 수많은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조건 지우는 데 비해, 베이컨의 작품은, 아마도 그가 이러한 것들을 습득하기보다는 정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놀라울 만큼 자신의 선택과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물론 50년 가가운 미술가 생활에 따른 화풍의 진화와 변화가 있었지만, 유화, 화폭, 이미지를 포획하여 가장 살아있는 순간에 사실을 붙드는 방식을 선택한 출발의 조건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변화는 전혀 없었다. 제 3장 살아 있는 이미지 실재하는 상이라 할 이미지에 대한 애착은 베이컨의 미술적 실천의 근간을 이룬다. 거의 독점적인 방식으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육체의 이미지, 시각과 현실이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서의 이미지, 그림의 최초 질료로서의 이미지가 그 핵심이다. 증거로서의 이미지 그에게 이미지는 가련한 장식의 기능을 벗어나지 못하는 추상과 구별된다. 또한 모방적이고 유추적인, 묘사적 재현과도 구별되는데, 이러한 재현적 이미지는 그에게 '삽화'라는 논박을 면치 못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어떤 유예나 설명도 없이 정신에 부과되는 순간적인 증거와 흡사하다. 그의 이미지는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방법이며 본능과 비이성적인 이해, 총체적인 파악을 기르는 수단이다. 이 지점에서 '닮은꼴'의 논리학에서 해방된 그의 그림이 시작된다. 그의 작업은 그린다는 본능적 행위의 추구 속에서 실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미지가 그의 정신에 부과되는지 자주 묘사하는데, 그것은 마치 스크린에 슬라이드의 영상이 단번에 투사되는 것과 같다. 그러한 정신적 이미지는 과거에 본 사물에 대한 기억이나 사전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차용에서 자양을 얻는다. 이것들은 주목으로부터 도출된다. 베이컨이 무의식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쓰기는 하지만, 이때의 주목을 무의식이 제 역할을 하는 장에서 이루어지며, 그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일깨워진 꿈'의 한 형태이다. 그림 속에서 이미지는 변형, 해체되고 조각나고 과장되며 이중화되고 분화되는 등 분산적이고 복합적이지마, 그 이미지는 늘 증거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의 그림이 구상화의 전통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보여지지만, 베이컨은 충격적인 것, 충격을 가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인체이지만,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은 전적으로 그만의 것이다. 그의 말대로 '단지' 화가일 뿐인, '만일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영화를 하게 되었을' 그만의 방식 말이다. 그의 리얼리즘 이미지를 다루는 이러한 방식이 바로 베이컨이 '나의 리얼리즘'이라 지시하는 바이다. 베이컨은 이 말의 역사적 무게를 잘 알고 사용한다. 베이컨 자신이 쿠르베를 찬탄하지만, 그의 리얼리즘은 쿠르베와 거리가 멀다. 그는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묘사하지 않는 대신 실재하는 시각, 지각의 경험에 의거해 결정적으로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베이컨은 물감을 반죽하는 쾌락이나 미결정된 형태의 언어 속에서 길을 잃은 장식적 추상의 늪, 또는 이미 사진에게 여왕 자리를 내주고 그 신하가 되어버린 구상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을 헤치고 자신의 길을 그려 나간다. 추상의 경험을 통해, 그는 건축적 구성과 배경의 자유로움에 대한 의식을 견지한다. 이때 이미지는 실제 공간에 의거할 필요가 없는 어떤 공간에 위치할 수 있게 된다. 그 공간에는 색과 몇몇 선과 건축도면 같은 것이 공급될 뿐이다. 도 다른 위협요소로 구상이 있는데, 그는 그로부터 더욱 쉽게 벗어 나오기 위해 그것에 의존한다. 사진과 인쇄물을 정보를 제공하는 수많은 형태를 담은 사전과 같기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이중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어떤 묘사에서도 거리가 먼 '실재를 갑작스럽게' 잡아내고 형태의 해체를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바로 그 유사성에 의해, 반 고흐가 그에게 보여준 것처럼, 그림은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현실의 기록에 가닿을 수 있다. "오늘날 이를테면 이미지의 깊은 곳에 닿음 없이 어떻게 어떤 것을 기록하고 그것이 실재로서 당신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미지에의 깊이 있는 닿음'은 1944년부터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으로 시도되어 첫 충걱을 불러온다. 깊이 있는 가닿음은 다양한 양식으로 시도된다. 1960년대 이후 이미지는 많은 그림에서 사진, 액자 등 '그림 속의 그림'으로 제 2의 단계에 놓이며 어욱 두드러진 깊이를 획득한다. 이미지 속의 이미지 1967년에 그린 <이사벨 로스돈에 관한 세 습작>에서는 벽 위의 사진이 모델의 다른 모습과 함께 어울려 있다. <세 개의 초상:죽은 후의 조지 다이어의 초상, 자화상, 루시앙 프로이트의 초상>(1973)에서는 흑백의 두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3부작 1974~1977>에는 사진 포스터 같은 정치선전 포스터가 등장한다. 또한 1967년 <자화상을 위한 네 개의 습작>(1968)에서는 그림 자체가 2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빈 공간을 구축하는 이미지-스크린은 마치 포장끈으로 어느 가게인지 알아보게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이 있다. 1962년의 <십자가를 위한 세 습작>에서 그러한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림 속의 그림은 장식의 파편이라는 형태로 (<복도를 위한 습작 No.1>,1969), 기념물의 인물상의 형태로(<3부작 1976>)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1975년의 <세 인물과 하나의 초상화>의 중앙에 그려진, 사람의 형상에 제일 가까운 인물에서는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들도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구성의 원리를 다중화시키고 이미지의 해체과정을 실현시키도록 한다. (1967)과 더불어, 거울은 거기 반사되는 영상으로 '다른 순간의 장면'인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누드와 거울 속의 인물 습작>(1969)에서 거울은 측면으로 그려진 인물에 관한 특이한 증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거울 속에 누워 있는 인물>(1971)에서는 거울 속에 보이는 상만이 있고 실제의 상은 부재하는 거울상을, <거울속의 조지 다이어 초상>(1968)에서는 인물과 그의 이미지 사이의 해체를 보여준다. 이미지의 여러 상태를 자아내는 그 돌파구를 통해서 그는 단순한 구상적 재현보다 훨씬 더 현실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들은 직접 나타나기보다는 벌어진 문틈이나 논리적 비약, 시간적 역설 등을 통하여 그림 속 공간을 지나가거나 미그러져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그 차이와 출처의 이질성 때문에 대개 표시가 나는 이미지들은 모든 그림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미지들의 출처는 X선 같은 특수 영상에서 신문에 나오는 다양한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으로 재생된 고대의 명화에서 친숙한 장식요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어떤 식이든 결국 '사물들이 제시되면 그것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것이 미술가의 감수성'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베이컨에게 모든 이미지는 그림의 소재가 된다. "아다시피 미술가는 모든 것을 훔치는 사람들이다" 미술가와 주석가들은 예로부터 자신의 참고목록을 작성해 왔다. 베이컨의 경우 그 목록을 늘어놓으려면 끝이 없고, 별로 문제도 되지 않는다. 콘크리트 믹서기 같은 그는 해석의 자유와 작품해석의 다양한 수준들에 대해 충분히 언급하고 있다. 영향을 받았거나 좋아하는 화풍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았던 그는 이집트 미술, 스페인 북부의 동굴벽화, 세잔, 드가, 엘 그레코, 고야, 쇠라 등을 찬탄한 적이 있다. 그보다 덜하지만 르누아르도. 반대로 영국 화가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셰익스피어, 딜란 토머스, 예이츠, T.S.엘리엇 같은 시인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다. 또 그는 동시대 미술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신랄한 견해를 피력한다. 폴 클레, 잭슨 폴록, 야스퍼 존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베이컨은 고대, 현대를 통틀어 자신에게 영향을 준 대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아마도 베이컨이 가장 큰 존경을 바치는 대가일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한 이 스페인 화가의 '인물에 대한 충실함'과 그 형태를 해체시키고자 하는 열정, 자유로운 구성과 비밀스러운 기술 등은 특히 지금은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베이컨의 초기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십자가라는 모티프도 피카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베이컨이 이 모티프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보다 이미지의 즉각적 포착에 기인한다. 베이컨 자신이 여러 번 확고히 말한 것처럼 거기서 종교적 감성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십자가가 거둔 문화적 성공 너머에 있는 이미지의 구조, 즉 수직성, 중추성 등에 대한 형식적 이끌림이 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중에 그가 그리게 될 십자가 그림에서 실제로 십자가의 구조를 그대로 취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44년의 그림을 보면, 베이컨은 중심 이미지의 윤곽을 왜곡시키고 십자가 밑에 있는 인물들을 강조하는데, 그리하여 금방 그림의 건축적 구조, 즉 3부작의 형태가 테마보다도 더 심층적으로 테마를 붙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3부작의 형태는 그리스도가 죽는 장면에 걸맞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성화가 의거하던 방식이었다. 베이컨의 <십자가 부분>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62년, 1965년의 작품, 1944년 작품을 다시 그린 1988년의 작품 등이 모두 삼위일체적 질서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종교적 상징에는 그다지 빚지고 있는 것이 없다. 단지 그에게 근본적인 표현적 차원을 형성하는 살, 즉 고기의 차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날 것을 표현하는 길 사실 십자가가 베이컨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수세기 동안 여러 화가들이 반복해서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통속화되어온 그 잔혹성 때문이다. 드러난 살, 살육, 이런 것들이 베이컨과 성화들을 다시 이어준다. 예를 들어 성화가인 그뤼네발트는 이젠하임 교회의 제단화(1521~1516)에서 '다부작'이라는 복잡한 형식을 통해 종교적 이미지를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밀고 나간다. 그보다는 훨씬 세속적이지만 또 다른 두 화가가 이러한 살의 모습, 동물성과 죽음을 한층 강조하였는데, 그들은 렘브란트와 수틴이다. 렘브란트의 <가죽을 벗긴 소>(1655)는 동물 그림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려 했던 것으로는 전례가 없는 작품이다. 또한 수틴은 그림을 정규적으로 배운 일이 없다는 공통점을 베이컨이 은근히 자랑하곤 했던 화가인데, 끔찍한 폭력성을 간직한 색감으로 동물의 내장을 그리는 데 심취해 있었다. '고깃덩어리'는 베이컨의 인물화를 푸는 열쇠의 하나가 된다. <페인팅 1946>과 그 새로운 재판이라 할 <고깃덩어리와 인물>(1971), 또는 <고깃덩어리와 사냥새>(1981) 등을 통해 동물 그림의 체계가 서서히 스타일을 잡아간다. 1946년의 그림에서 머리가 반쯤 잘린, 그래서 입 모양 외에 아무것도 아닌 중심 인물과 연설하는 정치가, 독재자(이 그림의 다른 판형에서는 마이크 비슷한 것이 그려져 있다)의 초상이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의 고깃덩어리와 연결되고 있다. 사형집행인, 사악한 사람, 그를 그림자 속에 있도록 하는 우산, 그를 연단에 감금시키는 난간, 제물, 죽은 육신, 베이컨은 공포영화에서 정육점의 진열장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가장 기이한 것부터 가장 진부한 것에 이르는 잔혹성을 표현한다. 편집광적 도상학 다시 그리기, 변형, 왜곡, 재해석 등 그의 도상학은 편집적이다. 악몽에 등장하는 형상, 인간 비슷한 형태, 괴상망측한 디테일을 혼합한 그 도상학은 과장과 조롱, 경멸과 익살을 오간다. 렘브란트의 초상화와 자화상은 베이컨이 말한 '사실을 기록하는 비이성적 표시'와 더불어 베이컨의 회화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대목에서도 이미지의 구조는 단순하고 중심적이다. 얼굴은 그 자체로 연극이 되고 그 의미는 그림의 제한된 공간에서 심장 노릇을 한다. 그렇게 하여 1948년에서 1949년에 걸쳐 그린 '머리' 연작이 나오는데, 이 연작은 특히 입 주위를 중심으로 한 변형과 거기서부터 나오는 침묵 속의 외침과 비명으로 구성된다. 그의 머리 그리기 작업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1650)의 모방에서 또 다른 길을 찾는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40여 점의 이본을 남긴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 연작들은 실패작이며 후회스러운 물건이라고 말한다. 그가 표현하는 이러한 불만족은 매우 강하고 주기적이어서 수많은 작품을 부숴버리는 결과를 낳을 정도였다.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관심은 벨라스케스의 작품세계와 그 모델인 교황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진을 모델로 삼아 그것을 다시 그리는 취미도 드러내준다. 그는 그림을 찍은 사진도 다시 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화집을 광적으로 수집했으며 친구들도 줄곧 그에게 그 책들을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로마에서 멜라스케스의 원작을 볼 기회가 생겼을 때는 보러 가지 않았다. 비슷한 경우가 또 다른 모범인 반 고흐에 대해서도 잇었다. 1957년 베이컨은 반 고흐의 <타라스콩의 길 위에서>를 모작한 연작을 발표한다. 그의 미술세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이 작품에서는 색과 터치가 새로운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제스처와 미술적 기법에 따른 변형의 가능성이 보다 굳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모작을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문제의 반 고흐 연작은 전쟁중에 소실되어 버렸고 현재는 그 사진으로나 볼 수 있다. 이 일은 모방 불가능한 그림을 이미지로 축소시킨 것에 불과한 사진이 옛 대가의 그림에 접근을 가능케 하고 도 그것이 '사용'을 쉽게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 시각적 재시도 그에게 사진자료는 고갈되지 않는 그림재료이다. 사진은 시각의 '셔터'를 충동질하며 풍1부한 이미지 사전의 요소들과 그 회화화 사이의 거리를 잡아준다. 1951년 베이컨의 첫 기명 모델이 된 루시앙 프로이트에서 1959년의 뮤리엘 벨처를 비롯한 수많은 친구 모델들의, 그리도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초상화들에서도 볼 수 있듯 그가 자신의 모델과 맺는 매우 독특한 관계가 바로 그 증거이다. 물론 그들이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는 정작 그림을 그릴때에는 모델 없이 그렸다. 대신 눈앞에는 사진이 있었다. 그는 소호 생활의 동반자인 괴짜 사진가 존 디킨에게 이따금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그것은 사진에 의거하여 그림을 그리고자 함이 아니었고, 또 그 사진 자체를 그리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진은 그의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의학도감의 그림들, 예컨대 1930년대 초에 파리에서 가져온 구강병리학 해설서라든지 엑스선 기술을 가르치는 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각적 재시도의 대상이다. 찢기고 구겨지고 압정에 찍힌 수많은 사진들이 함부로 굴러다니며 작업실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을 다시 찍은 것,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것, 책에서 찢은 페이지 등과 나치 수뇌 괴벨의 사진, 나다르가 찍은 보들레르, 폭동 사진, 그리고 잡다한 인물 사진,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같은 영화의 스틸 사진, 야생 동물의 사진... 뮤브리지의 사진, 움직임을 만들어내다 말 그대로 '고갈되지 않는 시각적 양식'인 사진은 과학기술의 산물이라 근본적으로 예술적인 것은 아니다. 베이컨은 4700여 점의 인체 사진과 그 비슷한 양에 달하는 동물 사진을 모은 뮤브리지의 <<움직이는 육체>>라는 사진집을 이용한다. 1880년대에 찍은 이 사진들에서 미국의 사진연구가 뮤브리지는 6000분의 1초의 셔터 속도로 인간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추적하는데, 이 사진들은 미적인 시선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정신에 근거하여 거리를 두고 바라본, 육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구성한다. 이 사진들은 많은 작품 속에서 직접적인 시각적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뮤브리지에 따른 움직이는 육체 습작><물 한 잔을 마시는 여인과 네 발로 기는 장애 소년>(1965) 같은 작품에서는 몇 장의 연속 사진들이 영화처럼 하나의 회화적 맥락 안에 연결되고 있다. 1952년과 1953년의 '개' 연작 역시 뮤브리지의 사진에서 유래한다. <두 인물>(1953) <풀밭의 두 인물>(1954)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작품들은 뮤브리지의 사진집에서 인용한 레슬링하는 장면을 성애의 장면으로 변형하고 있다. 이 장면은 1979년가지 진행될 <육체의 습작> 3부작의 중심 이미지 역할을 한다. 뮤브리지의 사진 속 이미지는 좀더 신중한 방식이긴 하지만 움직임속에서 절단되고 파편화된 몸의 포즈를 위한 밑재료로 쓰이기도 하고 <뮤브리지에 따른 움직이는 육체 습작>이 나온 지 30년 후에 그린 <걸어가는 남과 여 습작>(1988)에서는 두 육체의 뒤섞임을 위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물리적 리얼리티의 획득 "베이컨의 회화의 시각적인, 문화적인 근본 원리를 규정해 냈다 해도 그의 그림에 각별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수수께끼의 핵심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마이클 페피아트는 말한다. 그의 작품은 다른 데서 영감을 얻은 것이든, 스스로 개발한 것이든, 또는 빌려온 것이든 다양한 이미지로 짜여진 그물로 축소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환기하는 주제나 형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대신 그 그림은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회화의 물리적 리얼리티가 다른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작품이 되도록 하는 특성들과 이어져 있다. 베이컨은 이러한 구체적인 도안 위에 '그만의' 리얼리즘을 위치시킨다. 베이컨이 사진을 원천으로 삼는다 해서 거기서 이미지만을 보고 그림의 물리적 실재성이나 그림을 다룰 때의 그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가늠하지 못한다면 본질을 놓치는 격이다. 또한 그의 그림은 그림의 크기, 실제 공간과 그려진 공간 사이의 비율이 낳는 효과의 산물이다. 여기서 역시 베이컨의 꾸준함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30년 동안 다음의 두 판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림을 그렸다. 작은 그림은 가로 30.5cm에 세로 33.5cm, 큰 그림은 198cm에 147.5cm로 딱 두가지 뿐이다. 편해서거나 우연이 아니라면 실로 놀라운 충실함이다. 비율과 판형 물론 그의 아틀리에로 가는 계단의 폭과 모양새 때문에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큰 규모인 사람 크기의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연극적인 과장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이중적 의지를 실현 가능케 한다. 또 작업에 임할 때 작업대에 놓인 작품의 어느 구석에도 접근할 수 있다. 그는 크기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리는 작업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이 크기의 용이성을 크게 주목한 화가였다. 또한 세 폭을 연결한 작은 화폭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게 해주던 전통적인 세 쪽 거울과 유사하다. 법적 신분 확인을 위해서 여러 작도에서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도 그와 비슷한 경우이다. 이에 비해 큰 화폭의 그림에서는 150cm 가량되는 캔버스 세 개를 연결해 놓고 각각 손가락 몇 개가 들어갈 만큼 간격을 띄우고 따로따로 액자에 넣어 걸어놓았는데 그 세 그림을 합한 폭은 거의 극장 스크린 크기에 해당하며 웅장한 시야를 보장해 준다. 3부작과 정지된 서사 아틀리에가 좁은 탓에 그림을 한 점씩 그리거나, 기껏해야 몇 개의 표시에 의거해 쌍으로 그려야 했지만 3부작은 통일성의 원리 속에서 제작되었다. 물론 그것이 엄격한 연속성이나 단일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는 조화가 부족하지만 균형이 맞는 이미지들이고 시각적 원리들(선, 수평, 색, 대상사이의 관계)이 그것들을 한데 묶어준다. 그렇지만 이 3부작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야기를 그리는 데 이용된던 3부작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가능성들을 뒤얽히게 하고 관객 스스로가 해석의 길을 찾아야 하는 한순간의, '정지된 서사'를 뒷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1944년의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에서부터 그의 괴물 같은 창조물들과 더불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이상한 형상은 짙은 오렌지색으로 통일된 배경 속에서 격리된 채 끔찍한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복수와 밤의 여신들인 에리니스(세 명이 한쌍임:역주)와 기독교의 십자가 형상이 서로 교차하지만, 그들은 단지 그림 속에서 그들이 실재한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3부작의 원리를 여러 해 뒤에야 더욱 그 빛을 발하는데, 그것은 1962년의 <십자가를 위한 세 습작>을 기점으로 그가 30여 점의 대형 3부작을 제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고의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레 대한 직접적인 환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에서 영감을 얻은 3부작>(1981)이후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세월이 가면서 3부작 배치는 베이컨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그 의의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끝없이 재창조되는 회화의 영역 그림의 크기에 관한 문제와 달리 베이컨은 고유의 회화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길을 섭렵했다. 1980년대의 대작들에서는 대상과 점차 단일화되어 가는 바탕 사이의 강한 뒤틀림-이것은 그가 이룩한 예술상의 진전 중 가장 분명한 특징의 하나인데-이 보여진다. 대상은 심하게 변형되었으면서도 그 비유적 의미의 두터움이 배제되어 있고, 바탕색들은 선명한 색깔로 매끄럽게 칠해진 데뷔 당시의 오렌지색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983)의 장미색, <육체습작>(1986)의 노란색, 그리고 접시꽃 색, 강렬한 진홍색 등이 등장한다. 이 색깔들은 장식적인 우아함에 가깝지만 때로는 바탕색이 칠해지지 않은 화폭을 연상시키기까지 할 정도로 그림의 극적 성격을 중화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과 대상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단계를 거친 결과이다. 1957년, 전람회를 앞두고 급하게 그린 반 고흐 연작이 전환점이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 그림을 하마의 피부에 비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캔버스에 색깔을 두껍게 입혀왔다. 어두운 색조와 밀도있는 질감의 배경에 푹 잠겨 있는 대상을 표현하려던 것이다. <머리>(1948~1949)를 보면 동물가죽처럼 두터운 밀도의 그림속에서 대상이 드러났다가 삼켜지곤 한다. 전체적으로 대상을 화폭 가득한 심연 한가운데 위치시키는 암울한 기법이다. 여전히 대상이 환한 빛 한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는 장막을 가로질러 어둠을 꿰뚫어내려는 시도속에서 대상은 부분적으로 약간의 빛을 만난다. 1951년의 <나체>에 등장하는 둥그스름한 몸이 드렇다. 그 시기에도 색깔이라는 계기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려내는 공간이 결정적으로 색깔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반 고흐 연작부터이다. 거침없이 던지는 듯한 붓질은 야수적 욕망의 분방한 에너지를 상기시킨다. 특히 반 고흐 덕분으로 그는 인물을 풍경 속에 집어넣는 방식을 실현했으며, 그로써 대상의 고유한 표면 위에 대상을 새겨넣게 된 것이다. 그 이후 특히 196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그는 점차 링, 육상 트랙, 경기장, 마루 등 하나의 장면, 설치된 표면 위에 인물들을 배치하기 시작한다. 설치된 공간, 내면의 가상공간 연극적인 무대에서 변주된 공간이 3부작<육체 습작>(1970)과 <육체에 관한 세 습작>(1967)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인물들은 좁은 트랙이라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위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있다. 곡예사들이 허공을 가르는 난간 비슷한 신비로운 널위를 전진하는 그림이다. 재현된 공간은 서커스나 경기장처럼 관객을 향해 열려 있으며, 관객은 가볍게 굽어보는 시점을 통해 은연중 그림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면과 계산된 평면이 구성하는 베이컨식 무대장치는 많은 점에서 닫힘과 가두기의 감각에서 비롯한다. 닫힘과 가두기는 그의 주요한 주제로 작용하는데, 이 주제는 직접 묘사되기보다 암시됨으로써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경계 지어진 평면에 '기준점(point de repere)'의 요소가 결합된다. 다양한 화면배치를 허용하면서 공간을 품어내고 대상들을 가두는 것이 줄곧 이 투명한 '감옥'을 비롯한 구조들이다. 1950년대의 기본 색이던 검은색을 이 채색된 공간이 어어받아 인물을 품고 있는 받침대 구실을 한다. 이 받침대는 때로 단순히 암시될 경우도 있고, 금속 침대 비슷한 발판일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자 자동적으로 문, 천장의 등, 스위치, 우발적인 색의 평면, 창문, 여러 종류의 의자들 같은 묘사적인 요소들이 체계적으로 공간을 규정하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중에는 교황의 초상이 새겨진 소파 같은 신성한 것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이나 연인이 누워 있는 침대, 소파 등의 생활용품을 다 포함한 여러 종류의 의자 같은 일상적인 것도 있다. 현대식 천박한 가구들도 이 그림의 정신적 공간을 구성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그렇게 구성되는 이 '내면의 가상공간'은 그 여러 특징적인 지표들과 더불어 초상화에 추상성을 부여하려는 유혹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엄정하게 단색으로 처리된 바탕그림이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탕색은 인물들을 관통한다. <조지 다이어와 이사벨 로스돈의 머리를 위한 습작>(1947)의 경우, 바탕색은 인물들의 크게 벌린 입과 투명한 얼굴 안에 착색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풍경화의 유혹이 끈질기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풍경화라 할만한 작품이 극히 드물긴 하지만, 프랑스 남부나 모로코 같은 자연풍경(<탕게르의 말라바타 부근 풍경>, 1963), 혹은 의도적으로 동물을 배치해 놓은 아프리카로의 귀환(<강을 가로지르는 코끼리>, 1952)등을 볼 수 있다. 또한 화가가 필요로 하는 건축물의 구조를 제공하는 도시풍경도 볼 수 있다(가장 입체파적인 작품<소호 거리의 이사벨 로스돈의 초상>(196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베이컨은 입체파 화가를 본받아 그러한 구조를 선호했다. <거리의 조각상과 인물들>(1983) 같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내면과 외부가 뒤섞이는 또다른 관점의 거리에서도 인물의 '고림'은 여전히 발견된다. 지도처럼 재구성된 불안한 형태의 풍경에 대한 환기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갑자기 성층권으로 들어가버린 듯한 1978년의 낯선 <풍경>과 사물에 대해 신기한 교훈을 주고 있는 <물방울>(1979)<모래 언덕>(1981,1983)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화풍과 상당히 벗어나 있는 것들이다. 베이컨은 그것들을 스스로에게 금지시키지 않을 줄 알았다. 인간적 형상의 부재는 여기서 예외로 부각될 만하다. 길에서 방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채색된 공간에서 건물의 내부와 실내장식에 이르기까지, 베이컨이 제시하는 공간은 불안정한 영역과 불확실한 가로선, 그리고 기준선이 자주 무시되는 포괄적인 공간이다. 기준점의 상실, 혹은 차라리 그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모호한 공간이 되어버린 그의 공간은 동시에 안식처이자 위협의 장소이며 그 유일한 진실은 회화의 전체적 율동과 개별적 움직임 속에만 머물고 있다. 링이라는 스포츠 이미지와 거기에 결합된 폭력성은 문자 그대로 이 예술가와 그림 사이의 전투적 개입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 하나하나가 그대로 새로운 시합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저수지는 말과 이미지로 가득 차 있고, 올가미 또한 준비되어 있다. 베이컨과 모델의 몸, 운동, 운동하는 몸 사이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포획하는 것, 바로 그것이 베이컨의 야망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림은 '이따금'의미 그 자체에 직접 도달하는 경우가 있으며 육체 안에 숨겨진 음울하고 연약한 보석을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잘 말해줄 수 있다. 베이컨이 노려야 했던 것은 바로 그 '이따금'이었다. 제 4장 감각을 붙드는 작업 우연에 맞기는 기교 : 노름꾼처럼 그리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걸고, 어떤 규칙으로 게임을 하는지 안다. 노름을 하듯 게임을 하는 것이다! 노름을 할 때, 사람들이 특히 큰돈을 걸고 할 때처럼 자기 일에 완전히 빨려들어 있는 것처럼 그는 미술작업을 할 때조차도 노름꾼이다. 그는 그림에 우연과 우발성을 결합한다.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그는 서정적 추상성을 강조한 유럽 초현실주의자인 자동기술이나 미국 사람들이 시도한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액션 페인팅 비슷한 무엇을 합해 자기만의 원리를 닦았다. 이 연관성은 베이컨이 극구 부인하는 것인데, 특히 추상표현주의에 관해서는 더욱 완강했다. 그는 표현을 믿지 않았고, 이미 보았다시피 추상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 쿠닝의 작품에는 조금 너그러웠지만 폴록의 그림들은 싹 치워버리라고 했을 정도였다. 또한 자유자재한 데생이나 선처리도 그만두었다. 이 탁월함은 그림을 선입관속에, 베이컨의 표현법으로는 '삽화'속에 가두어버린다는 것이다. 붓의 대상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이다. 그래서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듯 베이컨은 머뭇거리고 고치고 다시 그릴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그림이 너무 뻑뻑해진다. 베이컨은 그림이 '즉각성'의 느낌을 주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73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나는...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우연을 많이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작품에 적지 않은 손질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 그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 단순히 나는 손으로 붓을 쥐고 찍어 누르고 던집니다. ... 단지 완성된 이미지나 반쯤 그려진 이미지에 붓을 던져 그 이미지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우발성의 제어 우발성에 도전하는 일에는 교활함마저 섞여 있으며 그는 그 제어법을 어니 정도 통달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척이나 다양한 도구를 동원하면서도 가장 단순한 재료를 다루는 그의 회화기법의 중심을 이룬다. 모든 종류의 붓, 작은 빗자루, 스프레이, 문자 스티커뿐 아니라 걸레 같은 천조각, 스폰지, 벨벳, 원을 그리는 데 사용한 쓰레기통 뚜껑, 심지어 특수한 재료의 효과를 얻기 위해 일부러 면도를 하지않은 자신의 볼도 사용되었다. 그는 캔버스의 뒷면을 사용하는데(캔버스 뒷면은 경제문제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이미 앞을 사용한 캔버스를 뒤집어 썼던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앞면과 반대로 뒷면은 보다 불규칙적이고 보풀이 많다. 이렇듯 그의 작업현장 자체가 새로운 도박이었다. 실패작을 팽개쳐놓고 부수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내 작업의 반은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을 깨는 데 있다."고 그는 말한다. 몸 따라가기가 출발지점인 동시에 그림의 성공이 걸린 도박이고, 결국 도착점이 되는 그는 관념을 넘어 본능에 의거하여 작업한다. 그렇다고 그가 만듦새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거의 우아하기까지 한 터치와 매끄러움의 부족, 통제할 수 없이 칠해진 얼룩 사이의 모순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어느 시기에는 작품 앞에 유리를 끼워 전시하기를 즐긴 적이 있다. 관람객들이 그 균열에 주목하지 않고 전체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하면서 빛의 반사가 강조하는(아마도 과도하기조차 할) 작품과의 거리두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과 살아 있음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이 화가는 그리하여 매우 정형화되고 선택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나는 매우 정돈된 이미지를 원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지기를 바라죠." 베이컨 미술의 원동력은 바로 이 기술적인 도박, 즉 존재의 즉각성과 움직임, 생생함을 이용하는 이 모순에서 나온다. 진실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경험적인 발견을 선호하는 베이컨의 기호는 셰익스피어적인 의미의 중력이나 루이스 캐롤류의 공상을 떠올리게 하며 결국 삶과 그 술책, 육체, 고통, 죽음, 역정과 함께한 예술의 오랜 전투가 된다. 그렇지만 이 '희망 없는 낙관주의자'는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마 언제나 웃음을 그리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이래로 그의 작품이 보여준 바는 무엇인가? 거기 '인간적인 것'이 있지만, 그것은 연속적이고 꽉찬 이미지는 아니었다. 괴물과 인간 중간에 있는 그 피조물은 움직이지 않는 포즈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적인 지속 가운데에서 겉모습이 아닌 살아 있는 것들의 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포획된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시간에서 가름된 한 순간이나 역사, 일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지속 자체를 보여주려는 내기이다. 지속과 살아 있음 이 작가는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움직임, 노력, 태만 등 생생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그 모순된 힘의 장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한 상태의 묘사 이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개인과 개별의 경지를 넘어서는 원리의 표현을 모색했다. 그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사진의 응고된 한 순간처럼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실존 인물들이 잘 보여주는 여러 상태, 떨림, 경련 같은 '동시적인' 드러냄이다. 그만큼 육체는 수축과 팽창, 이완과 반작용의 극장 아닌가. 그리하여 그 육체는 그림안에서, 베이컨에게서 영감을 얻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명명한 것처럼 '형상'(Figure. 원문에 대문자로 씌어 있음:역주)이 된다. 이 대문자로 시작하는 '형상'은 베이컨의 그림의 주제를 특수한 것, 형상화된 것 너머의 어떤 것이 되게 한다. 이점은 그가 특별히 이름이 있는 문(초상화), 그리고 실제 문과 닮은 문(실제와 닮은 초상화)을 그릴 때조차 변함이 없다. 이 '형상'은 개별성을 넘어 하나의 존재 이상의 원리를 담고 있다. 베이컨은 출현과 사라짐,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 존재하는 이 연약한 존재를 회화 공간 안에 그리는 데에 역설적인 그 원리를 두고 있다. 괴물, 짐승, 그리고 인간 '형상'의 첫 인상은 괴물의 그것이며 괴물은 보슈의 악마적 시각이나 에른스트의 상상세계뿐 아니라 인체해부도의 한 대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1944년 3부작이 선을 보인 후 동물이 작품에 등장한다. 개(<개>, 1952년), 원숭이들(<침팬지>, 1955년), 코끼리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움직임 속에서 포착된 것들이며 '살아 있음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운동선수, 수련기의 미켈란젤로에서 빌려온 누드 등이 등장한다. 누드가 홀로 등장할 때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세를 취하는 반면 둘이 등장하면 사랑하는 자세나 레슬링하는 자세처럼 포옹하고 있다. 그 다음 시기에는 옷을 입은 일상인의 몸이 등장하는데, 이는 베이컨이 단지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한 부분인 '머리'에 관심을 갖기 전이다. 그리고 나서 1948~1949년 사이의 '머리'가 나오고 1950년대 초에는 교황 연작, 그리고 나서 친구들의 초상이 특히 1960년대에 등장한다. 친구들의 초상은 연작이라기보다는 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군을 구성한다. 얼굴을 할퀴어놓는 것이 제일 원리이며 베이컨이 애호하는 방식인 형태해체는 몸 전체, 공간, 세계에 적용되고 있다. 형태해체는 '보기' 그 자체이다. 움직임과 형태해체 뮤브리지의 사진, 이탈리아 미래파와 보초니의 <연속적인 공간속의 특수한 형상>(1913),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1912) 따위의 혁신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고 영화가 고유한 질료를 발견한 이래로 그림의 현실 파악은 움직임의 재현쪽으로 이행한다. 그때 형태해체는 그 주요 수단으로 이해된다. 화가들은 해체를 감행한 대신 시선을 당황케 했으며 보고자 하는 욕구밖에 없는 현장의 '학살자'로 통하게 되는 대가를 지불했다. 피카소나 베이컨 같은 화가라면 '참 안된 일이군'하고 말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 자체가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베이컨은 모델 앞에서 그리는 것을 가급적 피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모델들이 스스로 희생양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켜 사물을 그 겉모습에서 떼내고 그 해체 속에서 새로운 겉모습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떨림에서 떨림으로 육체는, 또는 육체의 한 부분은 운동하고 있다. 그러나 부동성과 움직임의 정지 역시 그 육체의 다른 부분에서는 움직임의 요소이다. 베이컨에게는 움직임을 다루는 자기 방식이 있다. 걷기가 자주 등장하고, 자전거 타기(<자전거를 타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1966), 연인들이 뒹구는 자세(<침대에 누워있는 인물들에 관한 세 습작>, 3부작, 1972), 그리고 추락도 있다. 움직임은 자기 도구와 지표를 갖는다. 공학적인 이미지에서 차용해온 회전하는 원반과 화살표가 매우 직접적인 표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인물 위에 그려진 두터운 흰 얼룩이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주저앉지 않으려고 버티는 엉거주춤한 자세는 여러 작은 운동성들, 내적인 운동성들이 모인 결과인데, 그래서 거칠게 표현된다. 붓으로 흩뜨리기, 문지르기, 두 개로 분화시키기, 여럿으로 만들기, 관점의 변화, 조각으로 떼어내기, 어긋나게 하기, 그리고 끝내 표면을 찢는 일까지 감행한다. 그 훼손에서 상처받은 이미지가 도출되고 그의 그림은 그 뒤틀림으로 세상을 장식하고 잇다. 그러나 사실상 연약한, 자주 고통에 잠길 뿐 아니라 마조히스트가 꿈꾸는 것처럼 그 고통 속에서 존재감을 체험하는 이 유동하는 육체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유일한 근거인 육체 베이컨에게 이 고통받는 육체는 보편적 존재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을 뒤섞어준다. 너무나 자주 그려진, 고통의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푸줏간의 도마 앞에서, 그리고 쉽게 부패하는 고기 앞에서 느끼는 구체적 감각이 그 안에 섞여 있다. 가죽이 벗겨지고 피 흘리고 퍼렇게 멍든 그 육체를 그려 베이컨은 고집스럽고 친절하게 이를 일깨우려 한다. 베이컨의 잔혹함은 모든 애정이나 감정뿐 아니라 혐오스러움나저 초월한 바로 이 급진적인 유물론에서 나온다. 고기, 몸, 섹스, 몸은 낯설고, 진부하며, 비밀스러운 물질이다. 베이컨은 껍질을 벗겨내어 그 '형상'을 사랑의 장소, 목욕탕, 화장실같이 내밀함과 사소함이 사는 곳에 위치시키며 단순한 누드 너머로 끌어낸다. 그리하여 그는 육체의 부분들을 세밀하게 떼어낸다. 다리, 엉덩이, 등, 목, 발(발은 자주 등장하지만 손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종종 시선이 지워진 눈, 머리, 베이컨 특유의 강렬하고 도전적인 벌린 입(베이컨은 "모네가 석양을 그리듯 나는 입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공개적이면서도 내밀한, 우리 껍질의 창구인 입은 물론 말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입은 삼키기도 하고 빨기도 하고, 숨쉬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고 씹기도 한다. 입은 육체의 신비를 걷어낸 깊이일 뿐인 내면으로 접근하는 입구이다. 입은 심연처럼, 성기처럼, 또 우리 몸에 뚫린 모든 구멍, 관, 항문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마지막 비명 베이컨의 입이 시작도 끝도 없이 벌어진 채 침묵 속에 있는 반면, 우리 입은 비명을 지른다. 1929년 샹티에서 본 푸생의 <결백한 자들의 학살><전함 포템킨>(1925)에 등장하는, 몰고가던 유모차가 계단을 굴러 떨어지자 놀라는 여인 등에 묘사된 외침들은 '표현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또 퍼져 나가는 파장이 그림 전체를 채우는 뭉크의 <비명>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외침은 이질적이다. 동물적인 웃음(<초상화 습작>,1953)일 경우도 있고, 익사한 사람의 마지막 비명일 수도 있다(<교황>,1953). 그가 스스로 덧붙이는 대로 '너무 추상적'으로 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공포보다는 외침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할 때 베이컨의 모호함과 애매함의 중의성은 전폭적인 것이 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표현이나 심리학 쪽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을 말하려 하는 한 방식이다. 그는 거리를 확보한 그림, 의대생이 보는 도감처럼 드라마가 빠진 그림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고 싶었고, 믿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표현의 문제는 이름을 매긴 초상화와 자화상을 통해서도 완벽하게 제기된다. 초상화는 1951년부터 루시앙 프로이트, 뮤리엘 벨처, 이사벨 로스돈, 조지 다이어 등을 통해(최소한 이름을 다는 것을 통해) 줄기차게 맥을 이어왔다. 여기서는 닮은꼴이 그려지지 않으며, 심리를 표현하지 않는 방식이 다시 한번 관철된다. 이 초상화들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 선으로 갈라져 있고 얻어맞았지만 생동감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3부작을 통해 다중화된 고독, 고뇌, 버림받음 같은 것들이 외적인 유사성의 기호라기보다는 공통된 운명의 흔적으로 초상화의 든든한 배경을 이룬다. 배반의 그림자 또 몸과 그림자 사이의 유사성은 그 거리감 때문에 다시한번 시험대에 오른다. 그 거리는 초상화와 모델 사이의 거리를 반영하는데, 그림자들은 막스 에른스트에게서처럼 그림자를 생성한 대상과 관련하여 놀랄 만한 자유를 부여받고 있다. 지나치게 동적인, 몇 개의 단순한 색칠로 이루어진 육체의 얼룩인 그 그림자들은 본 대상을 자주 왜곡한다. <개를 데리고 있는 조지 다이어에 관한 두 습작>(1968)에서 조지 다이어의 그림자는 개의 형상이며 <1973년 5월~6월의 3부작>에서는 괴물의 모습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그림자가 그림 바깥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 둘의 동일성은 불안정한 부합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한 인물을 그 유령과 대면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단순히 삽화적인, 묘사적인 형상화는 베이컨과 거리가 멀다. 변형과 형태해체, 거기에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어우러져 베이컨 고유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형상은 이야기도 없고 참고자료도 없는, 해부학의 요소들처럼 육체적 쇠퇴를 겪으며 여러 형태 속에서 가시화되는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것앋. 우리는 신경이 건드려지고 해부된 '형상'을 본다. 1960년대에 걸쳐 입들은 닫혀지고 마치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는 듯한 크게 뜬 눈이 가끔씩 등장한다. 문자 그대로 "눈은 있으되 보지는 못한다." 그와 더불어 혼돈의 회화가 시작되고 이제 코, 뺨, 어깨, 팔 전체 등 육체의 모든 부분이 이용 가능해진다. '형상'은 벨베데르의 아폴로나 앵그르를 닮았으나 부분에 국한되어 있다. 이 '형상'은 베이컨이 추구한 회화적 꿈을 그려주는 첫 번째 도구, 그의 미술의 배경이자 절도가 되는 감각의 실재화이다. 감각을 그리다 감각을 그리겠다는 꿈은 베이컨의 전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에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다. 베이컨의 경우 이 대목에서도 영국의 정신으로 즐겨 이야기되는 경험주의가 한몫을 하고 있다. 감각이란 무엇인가? 사물과 자아에 동시에 들어 있는, 현실과 연계된 끈인 이것은? 회화는 느낌이 부여되도록 잘 그려지는 것이기도 하지만(누구나 어떤 그림에 대한 느낌이 있게 마련이다), 회화의 작업은 그 느낌에 가치를 메기고 인식하며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감각을 정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세잔과 베이컨, 그리고 그 방식에서 마티스나 폴 클레 등은 자아가 바라보는 대상과 그에 대한 자아가 가지는 감각 사이의 거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연속성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예술가의 작업은 이 감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베이컨에게 감각은 지식이나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 즉 지성의 매개도 없이 신경망을 통해 직접 감지된다. 사물의 몸에서 관찰자의 몸으로 직접 가는 최단의 길을 잘라내는 일은 바로 암시와 우발성을 그리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회화의 세계는 삽화의 세계보다 더 통절합니다. 회화의 세계는 고유한 삶이 있고 따라서 보다 통절한 방식으로 이미지의 본질을 실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술가는 감각의 밸브를 열어냅니다. 아니, 차라리 '풀어낸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네요. 그렇게 하여 보다 보는 사람에게 그 '삶'을 격렬하게 전달할 수 있지요." 감각의 밸브를 연다! 이 말은 그의 슬로건이 됨직하다. 그만큼 이 말은 베이컨이 품고 있는 의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질서와 혼돈 베이컨의 말을 죽 듣다 보면, 이 감각적이라는 것이 단순히 '감각적인 것'과 얼마나 대척되는 것이고 손쉬운 효과를 낳는 끔찍한 인상이나 단순한 정염의 감정과 얼마나 반대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는 작업으로부터 샘솟는 고통과 폭력의 장면은 적나라한 물자체(세상의 적나라한 소재), 일상적 혼돈으로의 귀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림은 가혹한 실존적 진부함 속의 무질서보다는 질서의 유혹에 이끌리려 한다. 음울한 휴머니즘과 창조적 경험주의, 그리고 절망적인 쾌락주의를 오가며 이 예술가는 실존의 표지인 고통을 잠정적이나마 사물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의지로 탈바꿈시킨다. 이러한 야심은 문학가에게 보다 쉽게 부함될 만한 것인데, 실제로 문학가들은 그의 그림 제목이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들레르, 라신, 셰익스피어(베이컨은 자기와 이름이 같은 조상인 프란시스 베이컨에게 셰익스피어가 얼마 동안 작품을 맡겼다는 사실을 농담삼아 즐겨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보다 가까운 동시대 영국의 예이츠, 파운드, 엘리엇 등. 베이컨은 연극이나 문학이 '작업에 유익한 흥분'을 가져다 주며 비극 속에는 '신화의 위대함과 그 추락 사이의 거리'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일한 신앙으로서의 실존 우리 시대에 라신의 '오레스테스'나 셰익스피어의 '멕베스'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비극의 차원을 획득할 만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을 상실한 오늘날의 모든 예술가들은 단지 특정한 상황에 직면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한 자기 신경계에 긴밀히 일치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예술가는 자기의 실존을 유일한 신앙으로 삼고 거기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며, 이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이상은 있을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고립된 생활을 한 베이컨은 현대적인 미술세계를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세계에서는 소수집단 속에서 매우 19세기적인 낭만적 삶을 살았는데, 그의 삶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doleo ergo sum(나는 고통 받는다. 고로 존재한다)."로 재해석한 삶이었다. 비극의 연속 고대의 연극이 모델은 될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극장에는 더 이상 드라마가 없다. 베케트의 연극이라도 사정은 같다. 그의 아일랜드 기질과 '본질에 닿으려는' 의지가 그의 연극을 거의 회화와 마찬가지 것으로 만들긴 하지만, 오늘날의 드라마는 차라리 폭력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베이컨에 따르면 이 폭력은 매우 모호하다. 폭력은 일상의 옷 뒤에, 혹은 다른 어디에 언제나 자신을 숨기려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20세기의 역사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인정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도식화한 '폭력의 일상화'라는 옷속에 폭력은 몸을 숨긴다. 베이컨은 예술가의 기본 조건의 하나라 할 자기중심주의에 머무르는 것을 즐기려는 듯 자기 예술과 시대 사이의 관계에 관한 암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를 거절했지만, 인정하는 동시에 부인하기 위해 폭력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내 화폭의 폭력성을 말할 때마다 나는 매우 놀랍니다. 내게는 그다지 폭력적이지 않게 보이거든요. 내 그림에는 리얼리즘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인상을 준 것은 아마도 리얼리즘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삶이 내가 그리는 것보다 훨씬 폭력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약간 후에는 피카소를 연상시키며 회화에는 어느 정도 폭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예, 그렇죠.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있는 폭력, 그것은 드물지만 예술에서 가끔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미지가 옛 틀을 부수면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베이컨은 1992년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거기서 그는 다음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노화가에게 소중한 한 친구를 향한 열정이 그를 마드리드로 이끌었다. 그는 끊임없이 작업하고 생산했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좋은 값에 팔렸고 그에 관한 중요한 전시회가 몇 개 기획되고 있다. 아틀리에의 작업대 위에는 그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각틀과 채 손대지 않은 배경 안에는 여러 선이 교차된 얼굴이 있다. 전투가 중단되고 게임이 유예된 모습이다. "나는 가장 좋은 것은 우연스레 온다는 걸 압니다. 갑자기 포착된, 그리고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미지들이죠. 무의식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이따금 뭔가가 우리에게 표시를 해주는 일이 생깁니다.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너무 거창한 것 같으니 이제 '우연'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낫겠네요. 나는 매우 심오한 질서가 부여된 혼돈의 실존을 믿고, 그래서 우연의 중요성을 믿습니다. 나는 본능이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주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내가 한 것들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지요." 1940년대의 괴물 그림에서 50년 후 작가 자신이 되어버린 성스러운 괴물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완결될 수 없는 노정이 존재한 것이다. 육체는 죽지만, 느낌은 죽지 않으므로 그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기록과 증언 일화 사진가이자 기록작가, 1950년대와 1960년대 소호의 예술가 사회와 동성애자 사회의 열성 멤버이기도 했던 다니엘 파슨은 베이컨이라는 인물의 연약함이나 가혹함을 숨김 없이 보여주면서 상당히 매력적인 면모를 알려주는 전기를 썼다. 일화로 엮은 이 전기에서 입방아 비슷한 투로 적힌 몇 대목을 소개한다. 친근하면서도 남다른 베이컨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작업실에서 그는 미리 데생을 하지 않고 직접 화면을 붓으로 공략하면서, 대번에 중심 이미지부터 시작했다. 중심 이미지에 대한 성난 붓질은 배경에 들이는 세심한 손질과 대조적이다. 앤드류 더햄이 테이트 갤러리의 카탈로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잔잔한 배경에는 그림의 진척에 따라서 계속 손질이 가해진다. "늘 성난 태도로 성급히 작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장 성공한 것으로 치는 그림은 매우 빨리 그려진다. 베이컨의 터치는 날카로운 비수를 휘두르는 듯한 거침없는 서예의 필치에서 수채화가의 섬세함, 물감을 듬뿍 묻힌 농염한 밀도의 필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상감을 넣을 때 같은 건조하고 예민한 필치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는 뾰족한 촉이나 돌기를 던지듯 붓질하기도 한다." 언젠가 프란시스는 자기는 아틀리에를 절대로 청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쌓이는 먼지가 화폭에 모래를 칠할 때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에 먼지를 묻혀 그 먼지를 아직 마르지 않은 그림에 바른 적이 있다. 그는 전통적인 구아슈 물감을 광택제 없이 사용했는데, 물감을 큼직한 덩어리로 직접 그림 위에 짜놓곤 했다. 앤드류 더햄은 또 베이컨이 듬뿍 찍어 바른 물감 위에 충분한 양의 테레빈을 구아슈 물감에 섞은 건조한 글라시(색깔이 마르면 칠하는 밝은 빛의 물감:역주)와 섬세한 담채색을 덧칠하곤 했다고 들려준다. 그러면서 더햄은 "그는 재료의 섬세함과 유연성을 시험하는 일을 매우 즐긴 듯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다른 화가도 그렇지만, 베이컨은 윤곽을 흐릿하게 하거나 희미하게 하기 위하여 손가락과 조그만 스폰지를 사용했다. 또 결이 있는 벨벳을 캔버스에 눌러 가는 격자무늬 선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어떤 규칙에도 복종하지 않았지만 직선을 긋는다든지 문자 스티커를 사용한다든지 여러 실제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스티커의 사용은 물론 중심 이미지의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소박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것은 콜라주에 매우 가까웠다. 한번은 마이클 앤드류스가 그림에 아크릴릭과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프란시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사실은 아크릴릭과 스프레이를 써." "정말?" 하고 내가 놀라 말했더니 그는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보다는 덜 눈에 띄게." 아크릴릭은 빨리 마르는 물감이라 매우 유용한데, 화폭의 거친 질감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가 아니면 바탕의 넓은 부분을 같은 색조로 칠할 때 특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과녁에 화살을 던지듯 그림을 그려 물감이 뚝뚝 떨어지게 놔둔다. ... 평론가 존 리처드슨은 베이컨이 어떻게 수염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들려준다. 베이컨은 사나흘 정도 수염을 안 깎다가 거울 앞에서 수염에 물감을 칠한다. "매우 독창적인, 베이컨 특유의 휘도는 듯한 터치는 바로 '막스 팩터 화장품'으로 찍어낸 것이다. 그의 초기 초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마구 칠한 듯한 얼굴이 정확히 이것이다." 리처드슨은 심지어 베이컨이 사용하는 거친 캔버스 뒷면을 그 '3일 동안 기른 수염'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프란시스는 자기 그림에 매우 엄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은 저주를 퍼붓는 등 가혹하게 대했다. 세인스베리는 폴 단쿠아에게 프란시스가 여덟 점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을 부숴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아침의 전화 한 통이 그 소식을 확인해 주었다. "모델 하러 오실 필요 없어요." 한번은 파티에서 베이컨이 새로 그린 교황 그림을 '대단하다'고 자평했다. 세인스베리는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작품을 보고 결국에는 살 요량으로 베이컨에게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가는 길에 프란시스는 생각해 보니 그만한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더니 도착해서 부숴야겠다고 선언했다. "안돼요. 그럴 순 없어요!" "작품이 보고 싶다면 들어오실 수는 있어요." 라며 베이컨이 양보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더니 베이컨은 면도칼을 들고 작품에 북 그어버렸다. "그는 우리에게 남은 부분을 주었죠. 우리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받아다가 둘둘 말아서 자동차 지붕 위에 갖다 놓았습니다." 예술가가 배워야 할 것 중 제일 힘든 일 하나가 어디서 그치느냐이다. 보통 때 베이컨은 그걸 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멀리 갔다 싶으면 가혹할 정도이다. '타임스' 에 따르면 베이컨은 700점에 이르는 초기 작품을 부수었을 거라고 한다. 사실 그 반밖에는 안 되지만, 그중에도 혹시 남아 있으면 좋았을 작품이 꽤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 1962년 5월 21일, 전람회 개최 전날 프란시스는 일반 관객에게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나를 테이트 갤러리에 데려가 한바퀴 둘러보게 했다. 우리는 단 둘이서 천천히, 아무 말 없이 '텅 빈'(프란시스의 굉장한 작품들 앞에서 이 말을 쓸 수 있다면) 회랑을 걸었다. ... 조용한 테이트 갤러리의 실내를 거닐고 있는 동안, 나는 딱 한번 프란시스가 정말로 흡족하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작품에 만족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겁에 질려 있는 인상이었다. ... 베이컨의 런던 생활 처음 소호에 와서 프란시스를 봤을 때, 그는 10년은 젊어보였다. 43세가 아니라 서른 살 같았다. 어느 정도 얼룩덜룩한 색깔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남프랑스에서 구입한 가죽 바지 덕택이기도 했다. 그런 차림은 다른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의 사나이다움(그런 바지는 말론 브란도 같은 사람이 입던 것이다)은 그 차림을 어찌나 돋보이게 하던지 다른 옷 입은 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 프란시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거나하게 마신 뒤 프레드 잉그람스와 버치 앤드 콘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공동전에 걸린 프레드의 그림을 보러 간 일이 있다. 프란시스는 프레드의 그림 하나를 찍으면서 "이 그림이 여기서 유일하게 좋은 물건이에."하고 말했다. 제임스 버치는 이에 감동받았지만 프란시스의 술취한 정도를 보고 다음날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약속대로 다음날 와서 450파운드짜리 수표를 썼다. 몇 달 후 내가 프렌치 퍼브에서 프레드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에 프란시스가 프레드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아 프레드를 소개하면서 일부러 톤을 높여 "기억나지, 프란시스. 왜 그림 하나를 샀잖아."하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그가 "내가 취했나? 도대체 그걸 가지고 뭘 한다고 샀지?" 프레드는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현명한 프레드는 자기 카탈로그의 작품소장자 명단에 그를 올려놓았다. 오늘날 프레드는 젊은 영국 화가 중에 가장 유망한 화가의 하나로 간주된다. 베이컨은 자기 전람회 개최일에는 예의바르게 행동하지만, 남의 전람회에서도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코크 스트리트에서 열린 어느 전람회 리셉션에서 우리가 한 별로 너그럽지 못한 행동을 생각하면 아직도 후회가 되어 몸이 떨릴 지경이다. ... 그의 약점 하나는 다른 화가를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는 점이다. 프란시스가 하는 말은 표현력이 완벽하여 누가 봐도 그의 코멘트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위험신호에 눈이 먼 나머지 그에게 환심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희생양도 있다. 캐롤라인 블랙우드 여사가 의미심장한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프란시스가 어느 성가신 화가에게 들볶임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가 자기 그림을 보러 와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죠. 프란시스는 거절했고 그는 자기 그림에 겁을 먹은 거 아니냐고 쏘아붙였습니다. 그에 대한 프란시스의 응소가 걸작이었죠. '당신 아틀리에에 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 넥타이를 쳐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요!" 휠러스에서도, 뮤리엘의 클럽에서도 베이컨은 언제나 자기가 돈을 냈다. 정확히는, 자기 앞으로 달아놓도록 했다. ... 뮤리엘은 그를 끝없이 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란시스는 자기가 산 샴페인을 따서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술잔이 흘러넘치도록 한 잔씩 따라주곤 했는데, 그러면서 거창한 말로 건배를 제의하곤 했다. "허울뿐인 친구에게는 불행을, 진정한 친구에게는 샴페인을!" 이것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습관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목을 뒤로 당기고 환하게 웃으면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말투로 '건배!'를 외친다. 이 이미지는 내 기억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 그러나 집처럼 드나들던 콜로니에서도 그는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는 마치 머리 뒤에 눈이라도 있는 듯 거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가 화장실 갈 때 마치 자기와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잔을 들고 가는 것이 사실은 술을 버리려는 것이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자기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도 실은 자기가 술을 덜 먹기 위한 것이었다. ... 그는 자기를 따라 집에 온 별로 양심적이지 못한 친구들에게 그림들을 파는 경우가 잦았다. 1960년대에, 극작가인 프랭크 노먼은 런던 거리를 산책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본드 스트리트를 지나고 있는데 어느 화랑에서 자기 그림을 보고 있는 베이컨을 만났다. 그 그림은 그가 탠저에게 준 그림이었다. 그는 화랑에 들어가더니 가격을 물어보았다. 자그마치 5만 파운드! 그는 그 자리에서 수표를 써주더니 그림을 가지고 나오자마자 길거리에서 그림이 산산조각날 때까지 발로 짓밟았다. ... 마거릿 공주는 프란시스에게 별로 좋은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리셉션 장에서 프란시스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인데, 바로 그녀의 리셉션 장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샴페인 잔에는 술이 넘치고 공주는 프란시스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 현시욕이 가득 찬 나머지' 노래부르던 가수의 마이크를 빼앗았다. 가수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콜 포터의 발라드를 오케스트라에게 청했다. 마거릿 공주는 콜 포터의 노래를 외루고 있었으나 노래는 정말 못 들을 정도였다.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귀부인들과 연미복 차림의 신사들의 위선적인 부추김 때문에 노래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노래가 후렴구에 이를 무렵 위협섞인 소리가 연회장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노래 부르던 공주의 목소리를 덮을 만큼 컸다. 처음에는 야유의 휘파람이 들리더니 나중에는 우레 같은 함성이 이어졌다. 공주가 노래를 하다가 더듬거렸다. 공주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지다가 점점 송장처럼 창백해졌다. 거의 울기 일보직전이었고,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프란시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노래를 너무 못하더군. 누가 나서서 멀춰야 했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뭘 하려면 그거보다는 잘해야지."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프란시스의 입을 막지 못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아무리 체면치레를 할 일이 있어도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의견이 선입관 때문이거나 그릇된 것이거나 부당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 의견이 사람들을 모욕할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개의치 않았다. ... 또 기억할 만한 일이 있다. 우리는 콜로니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 프렌치에 들른 뒤 골든 라인온으로 3차를 하러 갔다. 프란시스가 하도 기세등등하자 어떤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화가요/" "이거 운 좋군! 마침 나는 집을 손질하고 있는 중이라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일거리를 줄 수도 있는데." "좋아요! 친절하시군요!" 프란시스는 함박웃음으로 고마워했다. 바로 며칠 전, 그의 그림 하나가 뉴욕에서 300만 달러에 팔려 나간 후였다. 다니엘 파슨 '프란시스 베이컨, 한 인물의 삶', 1994년 우발성을 부추기고 운명을 시험하다 베이컨은 매우 정확한 감식안의 소유자였으며 논쟁감각과 언어감각, 능란한 말솜씨, 매우 분명한 발음의 소유자였으며, 대화를 즐기는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일상생활에 남겼고, 평론가나 친구들과 대담을 나눌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1989년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취재되어 그해 '아트 인터내셔널'지에 실린 영국 평론가 마이클 페피아트와 대담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밝힌 마지막이자 가장 정확한 대담에 속한다. 페피아트 : 얼마 전 과학적 이미지를 보기위해 과학 박물관에 다녀왔다고 했죠. 베이컨 : 예.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아시다시피 생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생각으로 뭘 하느냐입니다. 이론이란 그 이론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집니다. 머릿속에는 일련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고 나는 그때 그 초상화들을 집어넣을 만한 배경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원하는 것을 찾지는 못했죠. 그 많은 것들에서 건질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페피아트 : 당신이 늘 되돌아가는 이미지들이 있죠. 이를테면 이집트 미술 같은 것. 똑같은것을 자주 보시죠? 베이컨 : 예. 같은 것을 보고 또 보고 합니다. 나는 이집트 미술이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봅니다. 그러나 시, 그리스 비극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으며 암시성이 큰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참고합니다. 페피아트 : 언어가 이미지보다 더 일깨우는게 많은가요? 베이컨 : 꼭 그렇지는 않지만, 자주 그런 것 같네요. 페피아트 : 그리스 비극을 다시 읽을 때 당신은 새로운 이미지를 암시받습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친근한 이미지들에 보다 깊게 들어갑니다? 베이컨 :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를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이 단 하나라는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 사실을 자신하겠습니까? 광고에 나오는 이미지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만큼 일깨우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모든 것이 암시의 원천일 수 있습니다. 페피아트 : 당신에게는 그 말들이 열어주는 것이 소리나 말이 아니라 이미지일 경우가 많죠. 언어가 이미지를 부추기는 셈인데. 베이컨 : 가장 자주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들은 그들 자체로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꼭 이미지들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죠. 그들이 쓴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입니다. 페피아트 : 다른 동시대 미술가와 특별히 비교되는 것 하나가 문학에 민감하다는 점인데요. 예를 들어 드가가 당신에게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잖아요. 베이컨 : 그렇습니다. 드가는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그의 파스텔와, 특히 누드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는 완전히 엄청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대단한 암시의 힘이 깃들여 있지는 않습니다. 페피아트 : 보다 덜 완결된 작품들은 어떤가요? 그런 암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좀 덜 완결된 것이 있나요? 예를 들어 내가 알기로 당신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품을 경탄해 마지않는다면서요. 또 최근에 당신은 브뤼넬의 데생에 대해 말한 적이 있죠. 당신에게 매우 자극적이라고. 베이컨 : 정신상태에 따라서는 어떤 차단 스위치가 일련의 이미지와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주는 연결 스위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페피아트 : 당신은 강렬한 이미지를 그리는데, 어떤 것들은 매우 정확하고 중요한 것들이 아닌가요? 베이컨 : 예.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끄집어낼 수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이미지들은 스스로 다가옵니다. 페피아트 : 전혀 색다른 체험이겠네요. 베이컨 : 예. 나의 그림은 그렇게 나오죠. 어디서 그것이 오는지는 잘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페피아트 : '자동기술'에 기대고 있나요? 베이컨 : 아닙니다. 나는 정말 그건 믿지 않아요. 내가 믿는 것은 우연과 우발적인 사건이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초상화를 그린다고 할 때, 나는 그것들이 우연의 도움으로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나는 전혀 실물을 모사하고 있지 않은, '삽화적'이지 않은 모습을 붙잡고 싶습니다. 페피아트 :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예상할 수가 없겠네여? 베이컨 : 예. 나는 '이것이 내가 원했던 거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실의 한 국면이기도 한 구체적인 방법속에서 어떤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그리는 사람의 외모에서부터 그 현실이 태어나도록 노력합니다. 페피아트 : 그러면 두 가지의 조합입니까? 베이컨 : 이건 많은 것들의 조합이고 이런 일은 우연 없이는 현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유도된 우연입니다. 왜냐하면 머릿속에는 초상화로 만들어보려는 인물의 상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지점에서는 더 이상 그린다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한다'는 것 이외에는 문제될 것이 없는 거죠. 페피아트 : 그러면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이군요. 베이컨 : 이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생각과는 관련이 없어요.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모아놓으니까요. 나의 경우는 사전에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페피아트 : 한편에는 모델의 모습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와 연결된 모든 종류의 느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베이컨 : 모델과 연결된 느낌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고, 차라리 내게 다가온 느낌들입니다. 이것은 삽화적인 모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두 요소의 충돌로 빚어지며 한번 결합되면 하나의 모습을 띱니다. 그러나 또한 이런 말들도 다 말일뿐이니까 근사치에 불과합니다.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피상적이라 생각됩니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잃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예의바른 말투로, 부르주아적으로 말합니다. 말로는 자신을 결코 직접 표현할 수 없습니다. 페피아트 : 그러나 그리스 비극도 있고, 셰익스피어, 예이츠. 엘리엇 등 당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줄곧 일상적인 것, 예를 들어 신문 사진 같은 것에도 그만큼 의지하더군요. 베이컨 : 사진은 그렇게 자주는 아닙니다. 아주 우연한 방식으로만 씁니다. 페피아트 : 사진을 많이 감상하긴 하던데, 사진집이라든가, 요새도 그러세요? 베이컨 : 이니요. 달리나 뷰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로 재미있는 것들을 보여주었는데, 바로 거기에 영화의 재미가 있죠. 반면 단순한 사진은 그와는 다른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안구의 단변도 같은 것이 재미있는데, 그것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페피아트 : 아직도 당신의 감각을 뒤흔드는 것들이 있나요? 보통 시각적인 것에 대해서는 자꾸 무뎌지지 않나요? 베이컨 :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만, 오늘날에 만들어지는 것들은 그리 충격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대중의 소비를 위해 생산되고, 모든 것이 평범하니가. 오늘날의 이 끔찍한 우리나라 정부와 같은 모습이죠. 돈을 버는 수단들,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페피아트 : 충격도 없고 흥미도 감동도 없이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감각을 뒤흔들지 않고도 감흥을 받을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고, 결국 첫눈에 보기에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이미지, 예를 들어 전쟁의 이미지 같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요. 베이컨 : 그것들은 폭력적이나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매우 예언적인 예이츠의 시 '재림' 의 마지막 구절이 훨씬 끔찍합니다. "그리고 어떤 괴물이 마침내 찾아온 자기 때를 맞아 베들레헴으로 기어가 거기서 빛을 보려 하는지." 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어떤 전쟁그림보다도 강렬하죠. 그 어떤 공포스러운 전쟁 사진보다도 더 특별합니다. 예이츠의 공포는 그 특유의 예언적 성격과 더불어 진정한 떨림을 주는 문자 그대로의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페피아트 : 또 그 인상적인 형식도 충격을 더해 주는 한 요소일 텐데요. 베이컨 : 그렇습니다. 사물은 인상적인 형식을 갖지 못하고서는 충격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벽에 튄 피에 불과하죠. 똑같은 것을 반복하여 보면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벽에 튄 피보다 더 힘이 있는 형식을 취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지시하는 바가 보다 광범위해집니다. 그것은 당신의 심리속에서 메아리를 내고, 생명의 순환계를 괴롭힙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을 둘러싼 대기 자체를 변화시키죠. 예술이라 불리는 것 대부분이 시선의 차원에 머무르고 마는데, 이것들은 매력적이고 예쁘긴 하지만 당신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페피아트 : 당신 정신 속에 항구하게 들어 있는 어떤 그림이 있나요? 아니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생각하여 그립니까? 베이컨 : 모든 것을 이미지로 생각하죠. 페피아트 : 감각의 나무 아래로 떨어져 있듯 이미지가 언제나 당신에게 주어져 있나요? 베이컨 : 이미지들은 그런 식으로 꾸준히 주어집니다. 그러나 정신을 가로지르는 이 모든 유령들을 결정체로 만드는 데 도달해야 하는데, 그건 또 다른 일이지요. 유령과 이미지, 그 둘은 정말 다르거든요. 페피아트 : 당신은 꿈꾸십니까? 또는 꿈을 기억합니까? 꿈에서 영향을 받습니까? 베이컨 : 아니요. 내가 꿈꾼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꿈은 절대 기억 못하겠어요. 2~3년 전 너무나 매력적인 꿈을 꾼 적이 있어서 그 꿈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사해 보려 했는데 그것은 결국 한 꾸러미의 '넌센스'에 불과하더군요. 다음날, 내가 써놓은 것을 보았더니 아무 형식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번도 꿈을 내 작업에 이용해본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림을 그리는 실제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옵니다. 페피아트 : 시작할 때는 무작정 시작해 놓고 보나요? 베이컨 : 아니요. 무작정 시작하지는 않아요.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리지요. 일이 잘되면, 그 다음 무언가가 다가와 결정체가 되죠. 페피아트 : 당신은 밑그림이나 기본 골격 같은 것을 그리나요? 베이컨 : 아주 조금, 이따금씩, 그러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제 작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게 맞죠. 어쩔 때는 뭘 그릴지 잘 모르고 그리는 수가 있죠. 대상을 화폭에 배치함으로써 시작합니다. 어떨 때는 그렇게 하여 진전이 있고, 어떨 때는 안 그렇습니다. 첫날에는 잘 안 되고, 둘째날에도 그렇죠. 그리고 또 그리고, 그러다가는 지웁니다. 이따금 남아 있는 그림자가 다른 이미지를 유도해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미쇼의 작업에 쓰이는 '자유로운 선'을 믿지는 않습니다. 너무 임의적인 면이 있거든요. 페피아트 : 충분히 의식적이지 않고, 충분히 의도적이지 않은가요? 베이컨 : 어떤 무의식적인 것 위에 의지가 덧붙여져 드러나는 순간에 의거해서만, 의도된 무언가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페피아트 : 당신은 당신 그림을 계속적으로 제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데, 이것은 특이한 종류의 대화가 아닌가요? 베이컨 : 완전히 하나의 대화죠. 페피아트 : 그리는 행위 자체가 당신만큼 작업을 하고 무언가를 암시해 줍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거래관계죠. 베이컨 : 예. 결국 그렇죠. 그리는 행위 자체가 뭔가를 더 해주길 늘 기대합니다. 벽을 그릴 때가 그렇습니다. 처음 던지는 붓이 현실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벽이 다 칠해진 후에는 사라져 있습니다. 페피아트 : 그러면 당신은 작품을 그릴 때마다 그와 대면하겠네여. 참 힘든 일일텐데. 베이컨 : 아주 힘들죠. 페피아트 : 요새도 그림을 부숩니까? 베이컨 : 늘 그렇습니다. 더 손을 댈 수 없게 되면 하는 수 없죠. 그려놓은 것 속에서 뭔가 나올 수 있을지 헤아리다 보면 정말 더 악질이 됩니다. 여전히 뭐가 나오기는 해야하고... 페피아트 : 일종의 장인이 된 것입니까? 베이컨 : 예. 원래 그랬죠.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고통에 찬 사람들, 예술가라는 사람이 된다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들의 이미지가 무엇을 닮았는지는 다소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페피아트 : 그러나 점차 그림 그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 되었어요. 베이컨 : 예. 어떤 의미로는 더 어려워졌죠. 요새 만들어진 것들은 십중팔구 본질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실재'라 부를 만한 것은 훨씬 더 생생해졌습니다. 몇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 훨씬 더 강렬해졌고 그 얼마 안 되는 것들 속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이라는 바탕 베이컨의 참고자료의 취향은 복합적이다. 시각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문학도 참고의 대상이다. "이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스'는 정말 대단하다."고 그가 회고한 바 있다. 사실상 이 작품 전체가 고대극 특유의 상징적인 힘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장면 설정에서도 그의 그림에 배어 있다. 그가 언제나 드러내놓고 말하곤 했던 다음 텍스트와의 친밀한 관계는 그의 회화 전체를 읽는 열쇠이다. 아이스킬로스, 어떻게 에리니스 여신들의 에우메니데스가 되었나? B.C.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그리스 비극에 지옥의 여신인 에리니스 여신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나오는 비극은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아들이자 엘렉트라의 형이며 아폴로의 수호를 받는 오레스테스의 끔찍한 이야기를 위해 지어진 3부작(베이컨의 3부작과 같은 형식)이다. 오레스테스는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다. '코레포에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리니스 여신들이 나타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임무란 죄 지은 자를 추적하여 징벌하는 것이다. 오레스테스 : 지금 나는 내가 저지른 죄악과 징벌, 그리고 내 백성 전체 때문에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다. 승리로부터 나는 추악한 오점을 얻게 되었구나. ... 아! 아! 이 검은 옷을 입고 수많은 뱀을 칭칭 감은 고르고노스(머리털이 뱀같이 생긴 세 자매 괴물 : 역주) 같은 여인들은 누구란 말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보낸 이 성난 암캐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들이 나를 쫓아오고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작품의 프롤로그부터 에우메니데스 여신들은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데, 아폴로가 자기의 수호를 받는 오레스테스를 델포이의 신전으로 피신시킨 후 그녀들을 잠들게 한다. 아폴로의 무녀 피티아스가 그녀들을 먼저 만난다. 피티아스 : ... 이사람(오레스테스) 앞에 낯선 여인들의 무리가 있다니... 뭐라 할까. 이 여인들은 차라리 고르고노스, 비료할 만한 유형은 그것뿐 아닌가. 어떤 그림에서 예전에 이들을 보았지. 피네아스의 식사를 치우고 있는 이들을. 그러나 그녀들은 날개가 없고, 검고, 정말 구역질이 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숨을 쉬면서 하도 코를 그르렁거려 옆에 다가갈 수도 없었고, 눈에서는 끔찍한 진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은 신들의 상이 있는 신전은 물론이고 여염집에서도 입을 수 없는 것들이었지. 이 무리가 속해 있는 민족을 한번도 본적이 없지. 그리고 과연 어느 나라가 이들을 벌하지 않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자랑스럽게 보살필 수 있을까? 당시의 장면 설정에 따르면 에리니스 여신의 무리가 바퀴가 달려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무대장치인 에킬렘 위에 있었다(베이컨의 작품에서 모든 인물이 받침대 위에 등장하는 원리를 상기시킨다.) 이때 아폴로가 나타나 다음의 말로 그녀들을 쫓아버리고, 그 동안 오레스테스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피신하여 재판에 회부된다. 아폴로 : ... 정의의 이름으로 머리를 치고, 눈을 뽑고, 목을 베고, 활짝 꽃피운 아이들의 정액을 망치고, 사지를 자르고, 돌로 쳐죽이고, 척추에 꿴 꼬챙이 밑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도록 하는 것이 당신들의 자리이다. 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들이여, 이것이 당신들의 기쁨의 원천 아닌가. 당신들의 모든 면모가 이 끔찍스러운 것과 맞아떨어진다. 당신들 같은 괴물들에게 적당한 곳은 피를 마시는 사자들이 사는 동굴이지 신탁을 하는 신전은 아니다. 목동 없는 그곳에 가서 배불리 마셔라. 어느 신도 당신들 같은 무리에는 흥미가 없으니. ... 그러자 에리니스 여신들이 노래한다. 에리니스 여신들 : ... 우리의 운명은 움직일 수 없네. 우리는 능란하게 계획을 끝내는 사람들. 우리는 죄악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경외받을 사람들, 죽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고, 신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해도 없는 곳에 산자도 죽을 자들도 살 수 없는 곳에 자리잡고 영예도 화려함도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결국 아테네 여신의 지지를 받은 오레스테스는 유리한 판결을 얻는다. 아테네가 에리니스 여신들을 설득하여 선의 위치에 서게 하고 에우메니데스, 즉 관대한 여인들이라는 이름을 준다. 오레스테스가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에리니스의 위협적인 이미지는 계속 살아남아 베이컨의 예술적 창조에까지 이른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중에서 이미지를 낳는 시들 베이컨은 20세기의 위대한 영국 시인들의 작품에 친숙했다. 그는 양차 대전 사이에 꽃을 피운 영국 모더니즘의 중심 인물인 T.S. 엘리엇이 보여준 '완전한 절망의 분위기'를 찬양했으며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정치가이기도 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영감어린 시에서는 '진정한 떨림을 주는 공포'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의 시는 베이컨의 미술세계 깊은 곳에 메아리를 남기고 있다.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 (1930) 제2의 계단의 첫 번째 굽이에서 나는 돌이켜 밑을 보았다. 악취 나는 공기의 안개 밑에서 똑같은 그 모습이 안개에 매달려 희망과 절망의 기만에 찬 얼굴을 지닌 계단의 악마와 싸우고 있는 것을. 제2의 계단 두 번째 굽이에서 엎치락뒤치락 비틀리고 꼬인 그들을 밑에 내버려두었다. 이제는 얼굴들도 보이지 않고 계단은 캄캄하며, 침 흘리는 늙은이 입처럼 축축하고, 쭈글쭈글해서, 손질할 길도 없고, 늙은 상어의 이빨 내민 목구멍 같았다. 제3의 계단의 첫 번째 굽이에는 무화과 열매처럼 불룩한 홈 파진 창이 있었다. 그리고 아가위 나무 꽃과 목장의 풍경 너머엔 청록색 옷을 입은 어깨가 딱 벌어진 사나이가 고풍의 피리를 불어 오월의 계절을 매혹하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은 고왔다. 흩날려 입을 덮는 갈색 머리칼은, 엷은 자색과 갈색의 머리. 흩어지는 마음, 피리의 음악, 제3의 계단 위에서의 마음의 정지와 움직임, 사라지면서, 사라지면서, 희망과 절망을 초월하는 힘 제3의 계단을 올라갈 때에, 주여 저희는 값없나이다 주여 저희는 값없나이다 다만 한 말씀만 하소서. '네개의 4중주 : 이스트 코커' (1936~1942) 상처난 외과의는 메스를 들고 병처를 찾는다. 그 피 듣는 두 손 밑에서 우리는 체온 차트의 수수께끼를 푸는 의사의 날카로운, 그러나 따뜻한 연정을 느낀다. 우리의 건강은 우리의 병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이 없으며 아담과 그의 유산인 죄악을 상기시키는 죽어가는 간호원에 복종한다면 회복하려면 병은 점점 악화되어야 한다. 온 지상은 우리의 병원이다. 파산한 갑부가 물려준 그 속에서 우리의 건강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도처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의 간호로써 죽어야 할 것이다. 한기가 발에서 무릎으로 오르고 열이 마음의 선에서 노래한다. 몸을 따뜻이 하자면 얼음 같은 단죄의 불 속에서 얼며 떨어야 한다. 그 불꽃은 장미이고, 그 연기는 들장미다. 뚝뚝 듣는 핏방울은 우리의 유일한 음료이고, 그 피 흘리는 살은 우리의 유일한 식료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살과 피가 건강하고 견실하다고 생각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금요일'을 성스럽다고 부른다. T.S. 엘리엇 '시' 예이츠의 '재림' (1920) 커져가는 나선의 위로 줄곧 돌아 올라가 매는 더 이상 매 부리는 사람의 호소를 듣지 못하는구나. 사물들은 서로 떨어져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난폭한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펼쳐져 있고 피로 더럽혀진 파도가 도처에서 치고 순결한 자들의 신성한 축제를 잠기게 하니 가장 훌륭한 자들이 모든 신앙을 잃고 가장 사악한 자들은 미친 정념으로 숨이 가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계시가 가까웠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재림이 다가왔도가. 재림! 이 말을 발음하자마자 세계정신으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영상이 내 시선을 괴롭히는구나. 사막의 모래밭 어디엔가 사자의 몸을 하고 사람의 머리를 한 괴물이 태양처럼 멍하고 잔인하 눈으로 천천히 다리를 옮기자 주위에는 사막의 새들의 성난 그림자가 소용돌이친다. 다시 암흑이 내리지만 나는 지금 알고 있다. 2000년 동안 돌 위에서 잠든 우리는 한 요람을 위해 악몽의 고통을 알아야 했고, 어떤 괴물이 마침내 찾아온 자기의 때를 맞아 베들레헴으로 기어가 거기서 빛을 보려 하는지 알아야 했음을 예이츠 '51편의 시' 베이컨 바라보기 베이컨은 미술을 말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지만, 그의 작품은 수많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여기 모인 글의 저자들은 각기 베이컨의 작업이 갖는 특이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이착 골드버그는 베이컨이 몸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방법적 측면을 설명해 준다. 그 다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림에 포획되어 있는 베이컨 회화의 리얼리티를 감상한다는 독특한 상황을 주목한다. 또 들뢰즈는 베이컨 회화의 주요 문제를 제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형상화, 얼굴, 3부작의 활용 등 다섯 개만을 싣는다. 해체의 문법 1957년부터 베이컨 회화가 형상을 다루는 세 가지 주요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는 몸이 붕괴되고 해체되면서 어긋나게 하기, 중심 잃게 하기, 비틀기, 겹치기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해체의 기법들은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복합적으로, 그리고 종종 몸을 위해서는 분리되어 쓰인다. 형상들의 비틀기는 과도함과 결핍의 균형에서 온다. 다시 말해 육체의 풍만함을 일련의 형상이 보여주는 부정확성과 대조시키는 데서 비틀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또 팔다리를 거품처럼 찍은 얼룩으로 변형하는 혼합의 효과와 연결되어 있다. 살덩어리들이 집중되고, 모든 해부학적 논리를 거슬러 펼쳐져 있다. 축축한 살은 무정형의 경계에까지 극도로 비틀어져 범람하고 베이컨적인 세계를 침범한다. 육체의 표피는 더 이상 침투를 막지 못하며, 껍질이 벗겨진 살은 상처와 찢김으로 위협받는다. 피부는 뜯어진 막으로 변형되고, 거죽이 내장과 혼동된다. 둘째 단계는 한 형상에 이질적인 여러 태도와 움직임을 모으는 데 있다. 이때 각 태도와 움직임을 특별한 독립체로 다룬다. 3부작 '방안에 있는 세 형상' (1964)을 보면 왼쪽의 형상은 상반되는 두 태도를 비합리적으로 결합시킨 모습이다. 굴절된 척추선이 두 대립 부분을 연결해 주면서 동시에 분리선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재봉질'은 옆모습으로 그려진 축 늘어진 형상의 등이 거의 곧은 것과 대조된다. 근육처리 방법 또한 첫 번째 포즈의 정적인 분위기와 두 번째 포즈의 역동성을 부각한다. 이렇듯 해체된, 여러 단계를 혼합한 움직임에 대한 연구의 그럴듯함은 사진을 이용해 영감을 구한 것이다. 셋째 단계는 '시점혼합-형상'이다. 이 방식은 한 형상 안에 구성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시점을 결합하는 것이다. 분절된 형상들이 동시에 앞모습, 옆모습, 7분신, 뒷모습 등 다시 말해서 한 인물을 빙 돌며 얻어진 연속적인 상 안에 모여 있다. 그림인지 굴곡 있는 조각인지 모를 이 형상 속에 베이컨은 평면 위에 조각의 공간에서 가능한 여러 변형태들을 뒤섞는다. 이렇듯 겉모습을 교란시켜 '보이는 바'가 아니라 '존재'를 보여주고자 한다. 3부작 '방안의 세 인물'(1964)과 '루시앙 프로이트와 프랑크 아우어바흐의 이중 초상화'(1964)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팔다리를 더 이상 뜻대로 못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흐물거리게 된 겉모습은 사용된 인위적 기법들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몸은 불가능한 병치와 상이한 시점들을 결합시키는 경향들 때문에 뼈를 발라낸 듯 흐느적거린다. '루시앙 프로이트와 프랑크 아우어바흐의 이중 초상화'에서 몸통은 앞을 향해 있는 반면 골반은 궁둥이 쪽으로 거의 90도에 가깝게 돌려져 있다. 이런 과도한 비틀기는 관절이 없는 '꼭두각시'의 이미지를 만들며, 신체 각 부분의 기능적 독자성을 보장해 준다. 일관성이 전혀 없는 괴물의 형상과 베이컨의 형상은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한 인물에 세 가지 원리가 혼합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베이컨의 형상은 괴물과 다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웅크리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1966)은 풍부한 표현성을 지닌 그림이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이며 머리가 둘인, 이 침팬지를 닮은 그림은 모든 종류의 어긋나게 하기를 동원하여 뒷모습, 옆모습(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을 결합시킨다. 베이컨은 이 기법을 더 밀고 나가 몸과 얼굴을 이중화, 삼중화하는 데까지 이르며 신화에 나오는 케르베로스(머리가 셋, 꼬리는 뱀의 형상을 한 지옥을 지키는 개, 무서운 문지기 : 역주)를 연상케 하고 있다. 이제 단순한 시점의 이동인 '어긋나게 하기'에 '운동'을 덧붙여보자. 베이컨은 이 요소를 신빙성을 얻는 데 이용한다. 1962년의 3부작을 보면 몸은 재결합되어 연속적인 테를 이루어 머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난폭하게 전진하다가 부딪혀 터지거나 짓눌리며 쭈글쭈글 포개어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몸과 살을 다루는 방식에서 모범을 보인 이 3부작을 보면, 왼쪽 그림에서 붕대로 둘둘 만 것 같은 몸은 한 덩어리로 취급되며 해골을 모아둔 모습이나 축 늘어진 살을 재현하고 있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이러한 기교부리기가 모든 면에서 절제되어 있으며 세부는 과감히 생략하고 모양을 제한하지 않는 매우 자유롭고 호방한 필치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윤곽에 구애받지 않는 몸은 용암 같은 액체로 펼쳐진다. 데생은 여전히 무겁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지만 살은 아주 풍만하다. 그에게 살의 중요성은 전통적으로 살에 부여되었던 가치와 다르다. 살은 몸을 미학적으로 또는 에로틱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베이컨의 살은 연상적이고 구축적인 상상력을 극단까지 추구하기 위해 쓰이는, 함부로 주무를 수 있는 재료다. 그러나 살 역시 형태해체와 다른 많은 형식적 중첩을 통해 매혹과 혐오. 아름다움과 추함을 갖는 다의적 대상이기도 하다. 또 '조지 다이어와 루시아 프로이트의 초상'(1967)처럼 종종 운동 속에서 시간이 포착되며 그에 따라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동작 하나하나를 이루는 단계들이 역동적인 방식으로 연결된다. 한쪽 방향의 상에서 시간성을 느낄 수 있으며 흐릿하게 처리된 왼쪽 부분의 몸으로 역동성이 표현된다. 그런식으로 재현된 몸과 얼굴의 운동성은 동시에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편재적인 혼합양식의 형상,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형상에까지 이른다. '헨리에타 모라에스의 초상화를 위한 습작'(1964)에서는 아카데믹한 포즈가 생략과 불균형으로 점철된 둘그스름한 아라베스크풍의 기괴한 형상이 된다. S자 구조, 달걀 모양, 아라베스크 구조와 생략된 원형의 구조에 근거한 지나친 도식화는 베이컨의 그림을 미완성품처럼 보이게 한다. 도식화된 재료의 밀도가 어찌나 느슨한지 끝없이 압축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난폭한 형태해체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압축의 개념은 몸과 얼굴의 주변부를 파열시키거나 삭제해 버린다. 이착 골드버그 미출간 텍스트 되살아난 회화, 그리고 관객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역설은 관객과 그림의 첫 만남에 관한 것이다. 관객은 이내 감상을 완전히 무화시키고 관객의 지위를 앗아가려는 그림의 의도에 직면한다. 그림을 보러 온 관객의 의도는 빗나가고 대신 관람자 자신이 알몸으로 노출된다. 뒷면을 사용한 캔버스는 피부를 품고 있는 외배엽이며, 이 피부는 작품 안에 간접적으로 제시된 훔쳐보려는 사람앞에 급작스럽게 웅크리고 나타나서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탕에 제시된 틀 지워진 거울 속에서만 나타날 뿐 실체는 사라져 있다.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그 반영체는 이미지의 변주를 위한 우발적인 고정점 구실을 한다. 이는 기법, 캔버스의 질감 등이 그림을 엿보게 하는 틈새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식으로 관람객과 캔버스는 해체를 위하여, 즉 비-실체, 반-구축 등을 역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채택된 필수적인 받침대이다. 만일 이 요소들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화'될 가능성이 너무 클 것이다. '붕괴'란 든든한 토대가 전제되어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며 고정장치를 푸는 일 역시 미리 고정해 놓았음을 암시한다. 어떻게 그릇 없이, 흐름의 표면없이 액체를 보여줄 수 있을까? 움직임이 실행되는 고정된 틀 없이 운동을 보여준다? 그럴 수는 없다. 베이컨이 붙잡아낸 재현방식은 증인-관객의 지위가 실추되면서 그 자신이 위태로워지고 동요될 때 완결된다. 이 효과는 불안한 받침대에 못박혀 고정된 '살'이 80년대의 그림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가장 모범적인 성취가 '널판지 위의 피-페인팅'(1986)에서 이뤄지는데, 이 그림에서 오렌지색 바탕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좁은 널은 꼭 다이빙대처럼 보인다. 오렌지색 바탕은 초기 그림에서 등장하던 것이다. 1944년의 '세 개의 습작'에서 주색조로 쓰인 오렌지색은 격동의 상태, 전쟁, 원초적 폭발, 색깔의 탄생이다. 그리고 회색 널 위에 떨어진 핏자국. 그런데 그 널 위에서 누가 피를 흘리는가?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인가? 작가인가? 관객인가? 관객은 현기증 속에서 자신의 시점과 꼿꼿함을 잃는다. 누가 (작품에 그려진) 전기 버튼을 누르고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경련을, 목숨과 죽음을 보여주고 숨기는가? 무엇이 궁극적인 차단기인가? 베이컨의 차단기는 베케트의 '양민 학살자'와 비슷하다. 장면과 관객에게 연결된 현실을 부수어 베이컨은 매개체 없이, 은유적 코드와 연결되는 연동장치 없이 육체적 삶을 격력하게 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육체와 정신의 통일성을 증명하는 심리적 끈을 혼돈에서 건져내 새롭게 창조한다. 이 그림은 심리의 파열을 유발하지만, 그럼으로써 주체는 매개체 없이 곧바로 (모든 의미에서) 구제되어 보다 순수한 휴머니티를 부여 받는다. 인간이 된 관객의 얼굴에 눈물이라 불리는 액체가 흐른다. 미셸 몽조즈 '베이컨 혹은 창조적 역설' 1993년 현대적 형상화와 사진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취하는 태도는 평론가적이 아니라 철학자적이다. 회화는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을 빼내야 한다(들뢰즈는 '형상'을 대문자로 시작하는 Figure로 쓰고 있다. 여기서 '형상'은 단순히 외양을 묘사하는 '형상화'를 넘어서는, 대상의 리얼리티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 역주). 그런데 베이컨은 현대 회화가 형상화 혹은 삽화화와 관련하여 고전 회화와 다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는 두 가지 여건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사진이 회화적이고 자료적인 기능을 떠맡으면서 현대 회화는 예전에 회화에 주어졌던 이러한 기능을 다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형상화된 작품에 회화적 의미를 부여하던 '종교적 가능성'에 따라 고전 회화가 어느 정도 좌우되었던 반면 현대 회화는 신 없는 놀이이다. ... 종교적 감정이 고전 회화의 형상화를 지탱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종교적 감정이 '형상'의 해방을 가능케 하고 모든 형상화를 넘어선 '형상'을 출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현대 회화는 놀이이므로 (삽화적인) 형상화의 거부가 보다 쉬워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현대 회화는 화가가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찍혀 나오는 사진이나 복제품에게 침범당하고 포위당해 있다. 그 결과 화가가 하얗고 순결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믿는 것은 이제 오류이다. 작가가 타도해야 할 온갖 복제품들이 이미 캔버스를 완전히 물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사진을 두고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사진은 '사람'이 본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본 것을 형상화한다. 단순히 사진이 '구상적'이라고 해서 위험한 것은 아니다. 위험한 것은 사진이 시각 앞에, 따라서 회화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종교적 감정을 거부하고 사진에 포위당한 현대 미술을 회화에 잔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참한 영역인 '구상성'과의 관계를 끊어야 하므로 누가 뭐래도 예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추상회화가 그것을 증명해 보인다. 형상화로부터 현대 회화를 뽑아내기 위해서 추상회화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길이 있지 않을까? 머리, 얼굴, 고기 ... '머리'와 '고기'에 대해서 같은 것을,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 머리가 고기로 이루어졌다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이는 고기가 정신이라고 말하는 거나 같다. 육체의 여러 부위 가운데 머리는 가장 뼈에 가깝지 않은가? 그레코나 수틴을 보라. 그런데 베이컨은 머리를 그렇게 보지 않은 모양이다. 뼈는 얼굴에 속한 것이지 머리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시체에는 머리가 없다. 머리는 뼈 없이 흐물거린다. 그렇다고 액체는 전혀 아니고, 닫혀 있다. 머리는 살로 이루어져 있고 얼굴 윤곽도 데스 마스크가 아니다. 머리는 뼈와 분리되어 있는 닫힌 살의 부위이다. 블레이크의 초상화에 대한 습작이 그렇다. 베이컨 자신의 머리는 매우 아름다운 시선이 닿는 눈구멍 없는 살이다. 그래서 그는 렘브란트를 찬양한다. 렘브란트는 그처럼 눈구멍 없는 살로서 자화상을 그릴줄 알았던 마지막 화가였다. 베이컨의 모든 작품 속에서 머리-고기의 관계는 집약적인 단계를 거쳐 점점 내밀한 것이 된다. 우선 뼈에 붙어 있는 살인 고기가 '형상-머리'가 얹어져 있는 트랙이나 받침대에 놓인다. 고기는 우산 밑에서 얼굴 모양을 지우고 있는 머리 주변의 두터운 '살의 비(빗줄기)' 이기도 하다. 교황의 입에서 나오는 외침과 눈에서 나오는 연민은 고기를 대상으로 한다. 다음은 고기가 머리를 갖는 경우이다. 교황 작품보다 전에 나온 두 '십자가'처럼 머리를 통해 고기는 십자가에서 벗어나고 십자가에서 내려온다. 다음으로 베이컨의 '머리' 연작이 확연히 보여주듯 머리가 고기와 동일성을 획득한다.. 그 제일 아름다운 것 중에는 머리가 고기(정육)의 색깔로, 즉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것이 있다. 최종 단계에서는 고기 자체가 머리인데, 머리는 1950년의 '십자가 부분'처럼 엉뚱한 자리에 위치해 고기에 힘을 부여한다. 이 작품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정신인 개의 시선 아래 모든 고기가 아우성치고 있다. 베이컨이 이 그림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된 것은 외적인 방법의 단순성 때문이다. 고기 한가운데에 입을 뚫어놓은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또 그는 3부작 '스위니 아고니스테스'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덩어리처럼 입과 입 안쪽, 고기와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잘라놓은 동맥과 비슷한 잘린 부위와 열린 입이 엄밀하게 같은 부위가 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때 입은 엉뚱한 자리에 위치되어 모든 고기를 얼굴 없는 머리가 되도록 하는 힘이 된다. 입은 더 이상 특정한 기관이 아니라 몸 전체를 삼키는 구멍이자 그 구멍을 통해 살이 내려가는 입구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는 임의의 자유로운 표시를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베이컨이 '외침'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 외침은 고기를 향한 어마어마한 연민에서 나온다. 외침과 폭력 ... 외침이라는 각별한 대목을 고려해야만 한다. 무엇 때문에 베이컨은 외침에서 회화의 가장 드높은 목표를 보게 되었을까? '외침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히 강렬한 어떤 소리에 색감을 부여하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음악은 음악 나름대로 마찬가지 임무를 지니고 있다. '외침'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외침을 촉발하는 힘과 음성적 외침을 관계 지우는 것이 음악이다. 미술 역시 외침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절규하는 입을 그 힘과 관계 지운다. 그런데 몸을 경련시킨 후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지역으로서 입까지 이르는, 외침을 야기시키는 힘들을 절규를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광경과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되며 고통을 완화하며 재구성하는 행위를 낳는 지각 가능한 대상과 혼동해서도 절대 안된다. 외침은 모든 광경을 혼란에 빠뜨리며 고통과 감각을 넘치게 하는, 보이지도 않고 지각되지도 않는 어떤 힘의 포로이다. "공포가 아니라 외침을 그린다."는 베이컨의 표현은 뜻 깊다. 양도논법에 따라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이렇다. 내가 공포를 그린다면 외침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포스러운 것을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외침을 그린다면 시각적인 공포를 그리는 것은 아닌다. 외침은 보이지 않는 힘의 포획이자 검출이기 때문이다. 알반 베르크는 마리아의 외침에서, 그리고 그와 너무나 다른 룰루의 외침에서 이러한 외침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는 마리아와 룰루의 음성적인 외침 모두를 비음성적인 힘과 관련짓는다. 즉 수평으로 퍼지는 마리아의 외침과 대지의 힘을, 수직으로 뻗치는 룰루의 외침과 하늘의 힘을 관련시킨다. 베이컨은 그림을 통해 외침을 표현하는데, 시각적인 외침과 심연 역할을 하는 열린 입을 더 이상 '미래의 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보이지 않는 힘들과 관련짓는다. 문을 두드리는 괴물스러운 '미래의 힘'을 검출하는 일에 관해 말한 사람은 바로 카프카이다. 각각의 외침이 그러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외치지만, 정확히 말해 장막 뒤에서 외치고 있다. 이 장막으로 그 사람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보지도 못하고 또 자기 앞에는 아무 볼거리도 없다. 또 외침을 야기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 즉 이 미래의 힘을 보이도록 하는 기능밖에 없다. 프랑스어에서 '~앞에서 devant, ~으로부너 de'가 아니라 '~에 대하여 a 절규한다 crier'는 표현을 쓰는 것은 외침과 이러한 힘과의 결합, 다시 말해 회침의 지각 가능한 힘과 외침을 낳는 보이지 않는 힘의 결합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부분이면서도 대단한 역동성을 부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베이컨이 광경의 폭력성과 감각의 폭력성을 구분하면서 둘 중 하나에 도달하려면 다른 하나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는 일생일대의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그의 대담 속에는 이러한 선언이 수없이 들어 있다. 베이컨은 자신을 '정신적으로는 염세주의자'라 말한다. 세상에서 공포 이외에 그릴 만한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에서는 낙관주의자'라 한다. 시각적 형상화는 회화에서 부차적이고 점점 그 중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마치 공포만이 우리를 삽화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인 양 '공포'를 과도하게 그리는 것을 비난하면서 점차 공포가 없는 '형상'으로 이행한다. 그러나 무엇으로 '공포보다는 외침'을, 즉 광경의 폭력성보다는 감각의 폭력성을 선택해 그릴 수 있는가. 선택은 살아 있는 신앙고백인가. 보이지 않는 힘. 미래의 힘은 이미 존재하는 것 아닌가. 가장 나쁜 그림이나 가장 추한 고통 속에서도 이미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모든 '고기'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시각적인 몸이 보이지 않는 힘에 레슬링 선수와도 같이 직면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갖고 있는 시각성 이외의 어떤 시각성도 그 힘에 부여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각성 속에서 그 몸은 몸을 움직여 싸우며 승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다. 이 가능성은 우리의 힘을 앗아가고 우리를 유혹하는 광경 한가운데에 그 힘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는 한 획득하기 힘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전투가 이제 가능해진 것과 같다. 그림자와의 싸움만이 진짜 싸움이다. 시각적 감각이 그 감각을 좌우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직면했을 때, 감각은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힘을 분리해 낸다. 또는 그 힘을 연인으로 삼는다. 생명은 죽음에 '대해' 외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패퇴시키는 명약관화한 힘이 아니라 생명이 검출해 내어 격퇴시키고 외침으로써 주목하도록 만드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리하여 삶의 차원에서 죽음이 판단된다. 보통 우리가 만족하고 마는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다. 베이컨은 베케트만큼이나 아주 강렬한 삶을 위하여 말하는 작가에 속한다. 이 화가는 죽음을 '믿는' 화가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완전히 참상묘사주의이지만, 이것을 점차 강해지는 삶의 '형상'을 위해 쓴다. 우리는 카프카나 베케트처럼 베이컨에게도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 고집스러움과 존재 자체 때문에 길들여지지 않는 '형상'이 끔찍한 것. 사지 절단, 인공보철, 실추. 또는 불발 등을 ' 재현하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형상을 조련시켜 놓는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새로운 웃음의 능력을 삶에 부여한 것이다. 3부작 ...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개의 화폭이 공존해야 할 필요성을 형성하는 3부작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세 개의 리듬, 또는 세 개의 리듬을 지닌 '형상'의 구별 2. 그림 안에서 증거(외적 증거와 리드미컬한 증거)의 순환과 더불어 존재하는 '리듬-증거'의 현존. 3. 적극적 리듬을 재현하기 이해 선택된 특징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 적극적 리듬과 수동적 리듬의 결정. 이 법칙들은 일부러 적용하려는 도식이 아니다. 대신 그들은 비이성적 논리, 또는 회화를 구성하는 감각의 논리의 일부를 이룬다. 이것들은 단순하지도 완강하지도 않다. 이 법칙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연속적인 순서와 혼동되어서도 안된다. 이 법칙들은 항상 한결같은 역할을 중앙에 배치하지 않는다. 이 법칙들이 함축하는 계수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이 법칙들은 그 성질과 상호관계의 관점 모든 면에서 변화무쌍한 두 극단 사이에서 성립된다. 베이컨의 그림은 너무나 넓은 영역의 운동성을 섭렵하고 있어 이 3부작의 법칙은 수많은 운동성 가운데 하나이거나, 그 운동이 언제나 몸 위에 작용하는 힘에서 유래하는 한에서는 복잡한 힘들이 작용하는 어떤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은 맨 마지막 질문은 그중 어떤 힘이 3부작에 상응하느냐이다. 만일 3부작이 방금 우리가 정의한 법칙을 지닌다면, 그 법칙에는 어떤 힘들이 대응될까? 첫째로, 단순한 그림들에서는 이중의 움직임이 있다. 구조에서 '형상'으로, 또 '형상'에서 구조로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 힘은 고립의 힘, 형태해체의 힘, 그리고 흩뜨러뜨리는 힘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는 그 힘들 자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 힘들은 고립, 형태해체, 흩트러뜨림의 현상을 힘의 차원에서 한 번 더 작동시켜 짝을 지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형의 운동과 힘이 존재하는데, 바로 거기에 3부작이 개입된다. 이번에는 현상의 차원에서 짝짓기가 한 번 더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힘들이 작용하고 다른 운동이 도출된다. 한편으로 이것은 더 이상 구조나 바탕과 '결합하는' 형상이 아니라 단일한 색깔이나 강한 빛으로 채색된 바탕 위에 난폭하게 '던져진' 형상들 간의 관계이다. 많은 경우에 이 '형상'들은 빛과 색깔만이 있는 허공에 던져진 공중곡예사를 닮았다. 그래서 3부작이 빛과 색깔의 선명함을 필요로 하며 전체적으로 말끔히 처리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잇다. 1953년의 '머리' 3부작이 그 드문 예외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빛이나 색깔의 단일성이 형상들과 바탕을 즉각적으로 관계 지우긴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형상들은 단일한 빛과 색깔 속에서 서로 극명하게 분리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앞서의 '고립'과는 매우 다른 분리와 분할의 힘이 여기 작용한다. 3부작의 기본 원리는 여기에 있다. 빛과 색깔의 단일성의 최대치, 그에 따른 형상들 간의 최대의 분리. 이것이 렘브람트가 주는 교훈 아닌가. 리듬감 있는 인물이 낳는 것이 바로 빛이다. ... 결합하는 시각과 색깔 우리는 베이컨 회화의 세 가지 기본 요소들을 보았다. 세 가지란 각각 골격이나 구조, '형상', 그리고 윤곽이다. 그런데 직선이든 곡선이든 외곽선으로 이미 골겨과 형상에 적합한 윤곽이 그려지면 감각적 거푸집이 재도입되는 것처럼 보인다(이미 고갱이나 반 고흐에 이런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들은 색깔의 상이한 양태를 확인해 주는 구실을 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골격이나 형상의 것이 아니라 선, 평면, 입체 등 자율적인 요소의 상태로 올라선 세 번째 윤곽이 존재한다. 한 평면으로(또는 거의 한 평면으로) 가정된 근접평면 위에서 형상과 구조의 공통적인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원반, 트랙, 웅덩이, 받침대, 침대, 매트리스, 소파 등이다. 그리하여 세 요소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 세 요소는 모두 색깔로 집중되어 색깔 안에서 존재한다. 전체의 통일성과 각각의 요소의 분할, 또 각각의 요소가 다른 요소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이 바로 보색대비, 즉 색깔 사이의 관계이다. ... 보색대비가 단지 더운 색과 차가운 색의 관계, 색깔에 따라 변하는 수축과 팽창의 관계로부터 성립되는 것만은 아니다. 보색대비는 또한 색깔의 처리방식과 그 처리방식 사이의 관계로부터 존재하기도 한다. 또 순수한 색조와 불순한 색조 사이의 조화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결합하는 시각이며 색깔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이 의미, 또는 이 시각은 그림의 세 요소인 골격, 형상, 윤곽보다도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 이 셋은 색깔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으며 색깔 속으로 집중된다.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일종의 차원 높은 미적 감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마이클 프라이드가 색채주의자와 관련해 이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미적 감각을 양식을 결정하는 단순하고 임의적인 감각인가, 아니면 잠재적이고 창조적인 힘인가?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1981년 '머리 I'이 말하는 바 한 소설가가 '머리 I'(1948)에 목소리를 주었다. 바르가스 로사는 육체적 사랑이 작품을 관통하는 한 소설에서 베이컨의 이미지를 채택한다. 티치아노, 부셰,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과 더불어 '머리 I'은 작가에게 소설을 푸는 열쇠이다. 이 소설에 재등장하는 것들은 베이컨이 좋아했을 만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다른 작가에게 메아리를 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초상 나는 단번에 왼쪽 귀를 잃었다. 아마 어떤 사람하고 싸우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얇은 틈 사이로 나는 선명하게 세상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볼 수도 있다. 비록 사시로 힘들게 보지만, 사실 언뜻 보기에는 눈을 닮지 않았지만, 내 입 왼쪽의 푸르스름한 돌기가 바로 눈이다. ... 한쪽 눈만 잃었으니 다행이다. 나머지 한쪽 눈은 어느 안과의사가 열여섯번의 수술 끝에 살려놓았다. 눈꺼풀이 없어서 자꾸 눈물이 흐르지만 그 눈이나마 텔레비전을 볼 때는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적이 출현하면 재빨리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나의 집은 나를 둘러싼 인큐베이터 같은 상자이다. 나는 그 벽을 통해서 보지만 아무도 바깥에서 나를 볼 수는 없다. 이 엄청난 음모의 시대에 집안을 지키는 데는 아주 유용한 방식이다. ... 나는 매우 발달된 후각을 지니고 있다. 내게 제일 많은 즐거움과 고통을 주는 것이 코다.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냄새를 채집하는 이 막으로 된 거대한 조직을 코라 불러야만 할까? 나는 입에서 시작하여 점점 넓어지다가 황소 같은 내 목까지 내려가는 이 하얀 껍질을 지닌 희끄무레한 덩어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니다. 갑상선이 부은 것도 아니고 목젖이 커지는 선단비대증도 아니다. 이것은 내 코이다. 나는 이것이 아름답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그 과도한 민감성 때문에 근처에서 쥐라도 썩거나 악취가 나는 물질이 내 집을 돌게 되어 있는 관을 통해 지나간다든지 하면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또한 나는 코를 숭배하며 이따금 내 영혼이 머문 자리가 코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지만, 남아 있는 네 개의 자국은 잘 아물었고 딱딱해져 쉽게 땅바닥에 엎어질 수 있으며, 필요하면 달리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적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나를 추적해 왔지만 나를 잡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어떻게 팔다리를 잃었냐 하면, 아마 일하다 사고가 난 것 같다. 아니면 어머니가 임신기간을 좀 편하게 지내보려고 먹은 약 때문인지도 모른다(현대 과학이 언제나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내 성기는 다치지 않았다. 내 파트너 역할을 하는 젊은이나 아가씨가 그들의 몸이 내 종양을 문질러대지 않도록 내 몸을 위치시킨다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종양이 터지는 날에는 악취를 풍기는 고름이 흘러 나오고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관계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향락주의자이다. 사실은 자주 실패하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미리 사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하늘에 붕 떠있거나 대천사 가브리엘이 된 듯 환한 느낌을 주는 반복적인 오르가즘을 길게 느낀다. 연인이 내게서 느끼는 혐오감은 매력으로, 그 다음에는 쾌감으로 바뀐다. 늘 그렇지만 술이나 약의 도움으로 최초의 거부감을 극복하고 나의 침대에서 뒹굴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여인들은 심지어 나를 사랑하기까지 하며 남자들은 나의 추함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수많은 우화나 신화가 일깨우듯 영혼 깊은 곳에서 미녀는 언제나 야수에게 매혹되는 법이며, 사냥한 청년의 가슴속에 퇴폐적인 무엇이 깃들여 있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내 연인 누구도 나의 연인이 된 것을 후회한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공포스러운 것과 욕망을 섬세하게 결합시켜 쾌감을 불러일으켜준 것에 대해 내게 고맙게 여긴다. 나와 더불어 그들은 모든 것이 성욕을 자극시키녀 아랫도리 같은 가장 천한 기관조차도 사랑과 결합하면 영적으로 화하고 고귀하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나와 사랑의 춤을 추는 동안 욕설퍼붓기, 오줌누기, 변보기 등 누구에게나 유혹적이지만 거의 아무도 감히 해보려고 않는 천한 짓거리를 나누던 기억이 지나간 시절에 대한 감상적인 추억으로 남는다. 내 자존심의 가장 큰 원천은 내 입이다. 입이 크게 벌려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절망 속에서 울부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벌려 내 희고 뾰족한 이빨을 보여준다. 누가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두 개가 빠졌는지 세 개가 빠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돌이라도 씹을 만큼 튼튼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이 이빨들은 하얀 닭의 속살이나 암소 궁둥잇살을 열렬히 좋아하고 암탉이나 거세된 수탉의 가슴살이나 다릿살, 혹은 새의 앞가슴에 박히길 즐긴다. 살을 먹는다는 것은 신의 특권이다. 나는 불행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동정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이며 그것으로 족하다.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못났다는 것을 아는 일은 정말 큰 위안이 된다. 신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고려한다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세상이 지금보다 나았던 시절이 있었나?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뭐 하러 그런 걸 따지나? 나는 살아남았고 이상한 외모에도 인류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내 사랑이여, 나를 잘 보라. 나를 인정하고, 너를 인정하라. 마리오 바르가스 로사 '계모의 찬양',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