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바다의 정복자들 지은이: 이브 코아 출판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봉사자: 이자영 제1장 바이킹의 선조들 바이킹의 시대는 그들이 793년 6월 잉글랜드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린디스판의 수도원 을 약탈하면서부터 개막되었다고 하겠다. 그해 여름 바이킹은 노섬브리아 해안에서 남쪽으 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재로를 휩쓸고 지나갔다. 2년 후 다른 두 수도원이 약탈당했다. 스코틀랜드 해안 앞바다에 있는 이오나와 웨일스의 남쪽 해안에 자리한 모건우그, 이 두지역의 수도원이다. 797년에는 맨섬이 당했고, 800년에는 재로 남부에 있는 수도원이 당했다. 그후에는 좀더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지역이 털렸다. 8세기 말 여름에 벌어진 이 백주의 약탈 극은 이후 300년 동안 지속된 한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그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갈리아 서부 지역을 해상 원정한 그들은 더욱 빈번하게 야만 적인 약탈극을 자행했다. 어떻게 해서 고대 북유럽인들이 전 유럽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약탈자가 되었을까? 그들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BC 6000년경부터 바이킹의 조상들은 원시적인 작은 배를 타고 스칸디나비아 주변의 바다 를 여기저기 항해했다 수세기에 걸쳐 기후가 온화해진 결과, 당시에는 북유럽 전역을 덮고 있던 두터운 빙상이 후퇴하였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긴 땅에서는 이끼가 자랐고, 나중에는 숲을 이루었다. 북유럽을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대서양 연안에 접한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와 덴마크의 600여 개의 섬들, 스웨덴의 수많은 호수와 하천을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사냥감이 풍부한 땅을 찾아 모험을 계속했다. 그들은 악천후 속에서도 바다표범과 고래를 잡기 위해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북유럽인들은 가벼운 카누를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카누는 선체를 해체하여 운반하기가 용이했다. 카누는 바닷물이 새어들지 않게 기름이나 고래의 지방을 먹여 처리한 나무재를 얇은 가죽끈으로 묶어 건조했다. 줄의 매듭은 느슨해지지 않도록 바닷물 속에 담 가놓았다. 그리고 질긴 실로 꿴 황소 가죽을 팽팽히 당겨 틀에 씌웠다. BC 3000년경에는 스칸디나비아 전역이 숲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괭이와 돌도끼를 사용 하여 여러 종류의 침엽수와 참나무, 참피나무, 느릅나무 등의 나무를 깎아 갖가지 물건들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농부가 등장했다. 그들은 순록을 가축화하여 동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기와 우유도 생산해 냈다. 인구도 점점 늘었다. 북유럽인들은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그곳 에 씨를 뿌려 수확을 하였다. 그들은 흙으로 만든 간단한 그릇에 음식을 조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차츰 물고기와 조개류를 대량으로 섭취했다. 이처럼 숲과 바다는 북유럽 문명의 토 대가 되었다. BC 3000년경 동의 야금술이 발달하면서 도구들이 점차 발달하였다. 이때부터 정교하게 다듬은 금과 동 장식품을 비롯하여 면도기와 족집게, 양털옷 등이 유행했다. 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봉건제도가 탄생하자 북유럽인들은 바이킹 시대를 예고하는 첫 번 째 침략을 감행했다 로마 제국이 붕괴되자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종족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게 르만인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인들도 물론 철기시대를 맞고 있었다. 덴마크의 왕 코힐라이 쿠스는 515년 서유럽 침공에 가담했다. 이 원정으로 그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앵글족과 주트족은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이 시대는 말하자면 바이킹 시대의 예고편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미 상거래를 하고 있었다. 스톡홀름 근처의 묄라렌 호수에 있는 헬괴 라는 작은 섬이 산업의 중심지였다. 자인들은 그곳에서 청과 동을 원료로 하여 물건을 만들 어냈다. 그곳에서는 가죽과 모피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그 덕분에 유럽 대륙과 영국, 발트 해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는 8세기까지도 여전히 국경이 모호했다. 바이킹이 최초로 약탈에 나섰을 때, 그들은 모두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라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으며, 외딴 농가에서 동일한 생활 양식에 따 라 살고 있었고, 동일한 신을 숭배했다. 음유시인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고대의 전사와 영웅 을 노래했다. 스웨덴은 7세기경에 두 민족이 서로 융합되면서 나라를 형성했다. 두 민족이란 그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타르족과 주요 근거지가 웁살라(현재의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스베아르족을 말한다. 이 두 민족은 웁살라 왕조의 후손인 단일한 왕의 지배를 받았다. 스베아르족은 해양국가 를 건설하였는데, 그들은 이를 토대로 교역을 활발히 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 신생 왕 국은 나중에 고틀란드섬을 합병함으로써 나라의 기반이 탄탄해졌고, 그 부는 강력한 중세 스웨덴을 건설하는데 이바지하였다. 9세기까지 노르웨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지 만, 그들은 넓은 습지를 사이에 두고 각각 고립되어 있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군주나 대지 주가 다스리는 소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6세기부터 통합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별 성과 가 없었고, 9세기 말 하랄드 미발왕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통일 왕국이 탄생했다. 덴마크에서 는 바이킹 이전 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셸란드, 스카네, 보른홀름 등 덴마크의 동부와는 다른 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더욱이 800년에 고 드프레드왕이 샤를마뉴 대제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당시 덴마크는 단일한 왕,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공격할 만큼 강력한 왕이 다스린 왕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세기에 이르러 바이킹이 서유럽 전역을 강타한다. 8세기 말경에 스칸디나비아의 총인구는 2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9세기로 접어들 면서 이 지역의 인구는 상당히 증가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수확이 늘었고, 따라서 사람들 의 영양 상태도 좋아졌다. 겨울 동안의 노약자의 사망률도 현저히 낮아졌다. 해가 바뀔수록 스칸디나비아에서 사람 이 살지 않는 땅을 발견하기란 점점 더 어려웠다. 이런 인구 통계학적인 용인 외에 바이킹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특성 몇 가지도 그 요인으 로 꼽을 수 있다. 바이킹은 일부다처제였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았다. 젊은 남자들은 성공 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또 바이킹의 법에 의하면 죄를 지으면 추방 을 당했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바이킹은 누구나 고향을 떠나 바다를 항해하며 한몫 잡 으려 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요인들이 모든 걸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바이킹은 모험을 즐기고 멀리 항해하는 걸 좋아하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를 갈망했다. 11세기가 되자 그들이 사는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프리지아(지금의 네덜란드)의 항구를 지나 라인 계곡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형성되었다. 이 항로는 북유럽의 모든 교역이 이루어지는 교차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위를 지나가는 온갖 상품에 매력을 느낀 바이킹은 교역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이 마침내 해적 행위와 약탈로 발전하게 된다. 제2장 노르웨이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까? 노르웨이계 바이킹은 남쪽0으로는 유럽,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 대륙까지 영 향력을 미쳤다. 바이킹 시대가 열리면서 노르웨이인은 인구가 희박한 스코틀랜드 북부와 셰 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에 정착하여 역할을 하였으며, 잉글랜드와 프랑 스를 약탈하러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793년과 794년, 795년 봄에 노르웨이의 리크루(램비 섬), 세인트패트릭, 세인트골럼바의 수도원들을 빠른 속도로, 그리고 남김없이 약탈했다. 노르웨이인이 건설한 아일랜드의 바이킹 부족국가는 9세기 이래 바이킹이 얼마나 대규모 로 격렬하게 침략해 왔는지 보여준다. 이때부터 노르웨이계 바이킹에 의한 침략은 갈수록 결렬해졌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중요 한 사실은 그 규모가 커졌다는 점이다. 스트란드회그라고 불리는 이런 침략은 기습공격에 의존했다. 드라카르라는 바이킹선은 수평선에 나타났는가 싶으면 어느새 해변까지 접근해 왔다. 그리고는 소수의 사나이들이 해변에 상륙해 수도원을 공격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순 식간에 쓰러지고, 집과 교회는 약탈당하고, 보물은 빼앗기고, 건물은 불길에 휩싸였다. 바이 킹 전사들은 가축들을 잡아 재빨리 그들의 배로 되돌아갔다. 때로는 여자들과 강건한 남자 들을 잡아갔는데, 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몽크웨어마우스의 수도원만이 이런 백주의 약탈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839년 토르기슬(투르게이스)이라는 사내가 지휘한 선단이 아일랜드 북부에 상륙했다. 그는 막강한 병사들과 함께 얼스터를 정복하고, 디플린(더블린)을 거점 항구로 하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851년, 이번에는 덴마크계 바이킹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아일랜 드인과 힘을 합쳤다. 한때는 그들이 아일랜드의 주인이었지만, 노르웨이의 지도자 올라프(아 믈라이브)와 그의 동생 이바르-이마르 때문에 데인인의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르웨이인과 데인인은 아일랜드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다. 그 틈에 아일랜드인은 침략자를 몰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다시 새로운 노르웨이의 원정대에게 정복당했고, 그들이 아일랜드와 맨섬, 잉글랜드 서부까지 포함한 제국을 건설하 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000년에 아일랜드의 왕 브리안 보루는 바이킹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았다. 그는 자신이 아일랜드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는 동안 아일랜드의 켈트 문화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문화가 한데 뒤섞였다. 10세 기 말에는 수많은 바이킹이 그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노르웨이계 바이킹은 끊임없이 해상 약탈에 나섰다. 노르웨이인의 정복욕은 꺼질 줄 몰랐다. 그들은 곧 영국해협의 해안에서부터 포르투갈까 지 침략했다. 843년 노르웨이인은 프랑스 서부의 낭트를 약탈하고 누아르무티에섬에 교두보 를 건설했다. 그들은 루아르와 투르까지 항해해 올라가 프랑스 중부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 었다. 소금 교역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브르타뉴의 그루아섬에 상륙했다. 884년 노르웨 이인은 에스파냐에 진출하여 카디스와 세비야를 약탈했다. 10세기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와 리스본도 몇 차례 약탈당했다. 노르웨이에서 아라비 아의 은화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바이킹은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슬란드를 정복하기 위해 노르웨이계 바이킹이 대규모로 이주했다. 815년경에 로갈란드의 플로키는 페로에 제도(덴마크)를 출발했다. 아이슬란드 근처에 도달 했을 때 그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 두 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그 새들을 따라갔다. 곧 섬이 뚜렷이 보였다. 바이킹은 그들이 가져온 인스타파르(노르웨이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서 빼내온 커다란 나무 기둥)를 바다에 던졌다. 새 땅에서 울타리로 사용허기 위한 것이었다. 파도에 기둥들이 육지로 밀려가자 바이킹은 배를 해변으로 끌어올리고 곧바로 새 영토의 경계를 표시했다. 그들은 이탄과 돌로 커다란 공동 거처를 만들었다. 그것은 계란 모양으로 생겼고, 가운데에 는 난로가 있었으면 벽을 따라 단처럼 생긴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 최초의 아이슬란드 진출 이후 대구모 이주가 이어졌다. 870년부터 930년 사이에 1만 명 이상의 바이킹 이주민이 아이슬란드로 건너갔다. 파파르(갈대와 가죽으로 만든, 노를 사 용하는 허술한 쪽배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여 바깥 세계와 교류하지 않고 살던 아일랜드인) 를 내쫓고 바이킹의 족장들은 가족과 하인들을 이끌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이 노르웨이와 농업 환경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슬란드 내륙 에 화산과 빙하가 많지만, 해안지방에는 농업과 목축이 가능한 평원과 계곡이 산재해 있었 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풍부했고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으며, 대장간에서 물건을 만들 철도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주민들은 초창기부터 단일 지도자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주가 계속되자, 930년 이후 아이슬란드는 알팅이라는 대평의회의 지배를 받는 네 개의 지방 으로 구성된 연발이 되었다. 그러나 알팅은 전쟁을 억제하는 기능이 없었기에 얼마 후 씨족 간에 혈전이 벌어진다. 새 사이슬란드인들은 옛 전통을 잘 보존했고, 유럽 대륙과 정기적인 교역도 계속했다. 하 지만 인구가 불어나자 자원이 부족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930년에는 3만 명이던 아이슬란드의 인구가 1세기 후에는 6만 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식량 부족과 영토의 협소 함은 그들에게 저 멀리 서쪽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땅을 찾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 었다. 새벽녘의 어스름 속에 붉은 털 에리크는 길게 이어진 절벽의 사면을 발견했다. 그린란드 였다! 982년 바이킹의 두목 붉은 털 에르크는 아이슬란드에서 3년간 추방되었다.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대가였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몇 년 전에 폭풍우 속에서 군비오른이라는 이주 민이 목격한 적이 있는 땅을 찾기로 했다. 에리크는 험난한 해안을 발견했다. 그곳은 유빙 때문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페어웰 곶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그 곳에서 그는 비옥한 계곡으로 둘러싸인 피오르드를 발견했다. 그는 즉시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이 놀라운 땅의 발견을 자랑스럽게 알렸다. 그는 그 땅의 이름을 '초록색 나라'라는 뜻으로 그린란드라고 지었다. 많은 이주자들이 이 이름에 끌려 그 를 따라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이듬해 봄, 사람과 짐을 잔뜩 실은 25척의 배가 항구를 떠났 다. 배에는 집을 짓기 위한 목재와 소, 그밖에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싫었다. 500 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25처의 배 중 15척만 목 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나머지 배들은 유빙에 부딪치거나 사나운 북풍에 휩쓸려 난파했다. 이주자들은 그린란드에 브라탈리드(오늘날의 토누그들리아르피크)라는 마을을 세우고 동 부와 서부에 각각 한 개씩 식민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땅에서는 생활이 비참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부족했던 것이다. 철 은 넘쳐 났지만 쓸 재목은 부족했다. 생존자들은 모피와 가죽, 바다코끼리의 엄니, 긴이돌고 래의 엄니(이것들은 신비한 효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1000년경 에는 300~400개의 농장에 3000명 정도의 농부가 산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공동체는 완전히 절멸할 때까지 근 5세기 동안 존속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세기나 앞서 레이프 에릭손은 자신의 바이킹선을 몰고 아메리 칸 대륙을 향해 항해갔다 992년 붉은 털 에리크의 아들인 레이프는 몇 년 전에 본 사람이 있다고 알려진 새로운 땅 을 찾아 35명의 사나이들과 함께 그린란드를 떠났다.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집을 지을 목재(그린란드에는 너무나 부족했다)를 구해야 했다. 레이프는 바다로 나가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는 곧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빙산으로 뒤덮인 황무지와 빙하지대를 발견했다. 그곳 은 아마도 래브라도 반도였을 것이다. 이어 그는 빽빽한 숲으로 덮인 구름지대가 펼쳐진, 좀 더 살기 좋은 땅을 발견했다. 레이프는 그곳을 마르크란드(숲의 나라)라고 불렀다. 레이프와 그의 일행은 남쪽으로 내려가 푸른 초목으로 뒤덮인 해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을 빈란 드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그린란드로 돌아온 레이프는 자시인 발견한 곳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이 방금 탐혐을 마친 곳의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땅에 대해 자랑했다. 그의 동생인 토르발트는 자신 이 직접 이 땅을 찾아보겠다고 떠났다. 노르웨이인들은 처음으로 그들이 스크라엘링(못생긴 사람)이라 별명을 붙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또 다른 두목인 토르핀 가를세프니는 3척의 배에 600명의 남녀와 소를 싣고 아메리카 대 륙을 향해 떠났다. 그의 목표는 새 대륙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첫해 겨울에는 굶주림에다 가 기독교인들과 바이킹 전통 신앙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들은 모피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울긋불긋한 올을 바꾸는 거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적 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세번째 겨울이 끝나갈 무렵, 카를세프니는 이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린란드로 돌아가 신세계를 잊어버렸다. 제3장 데인인이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침략하다 8세기말 이후 덴마크계 바이킹은 데인비르크(고드프레드왕이 설정한 방어선)로부터 거듭 공격을 해왔다. 이는 카롤링거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와 북해에 위치한 프리지아 제도를 겨냥한 것이었다. 샤를마뉴 대제와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경건왕 루이는 그들을 물리 치는 데 성공했다. 834년 데인인 바이킹은 진정한 의미의 세력확장을 꾀했다. 그들은 도르슈타트의 금융, 상 거래의 중심지를 약탈한 후 거침없이 전진해 갔다.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엘베강에 도착한 데인인은 함부르크를 약탈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앙, 샤르트르,투르가 차례로 공격을 당했다. 843년에 즉위한 프랑스의 대머리왕 샤를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약탈행위를 저지하려 했다. 그는 주요 지점에 튼튼히 보루를 쌓았고,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며, 바이킹에게 엄청난 액수의 세금-데인겔드-을 바쳤고, 데인인의 수 장을 매수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878년에 접어들면서 군사적인 방법이나 외교적인 방법 모두 왕국을 지키는 데 아 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인인은 왕국 전역을 짓밟고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리까지 진격했다. 약 3만명의 덴마크계바이킹이 겨우 200명의 기사가 지키는 파리를 공격했다. 여름에 루앙을 약탈하고 나서 데인인은 885년 11월 파리에 도착했다. 시테섬으로 이루 어진 파리는 도시 자체가 요새였다. 북쪽에 있는 석조 다리와 남쪽에 있는 목조다리에서는 항행을 통제했다.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비만왕 샤를은 이탈리아 원정중이었다. 200명의 기사 와그들의 병사들은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외드와 파리의 조슬랭 주교의 지휘하에 파리를 사 수했다. 하지만 이 소수의 인원으로 700척의 바이킹 배와 3만명의 데인인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루 만에 도시는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하늘은 적갈색의 구릿빛으로 물들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영웅적인 저항을 펼치는 수주일 동안 데인인의 공격이 맹렬하게 이어졌 다. 마침내 센강 양안에 굳건히 자리잡은 바이킹은 참호를 파고 부근에 있는 식량을 징발하 면서 1년이상 포위공격을 펼칠 태세를 갖췄다. 2월이 되자 계속된 공격으로 이미 약해진 남쪽의 목조다리가 센강의 높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유실되었다. 그러자 바이킹은 센강과 루아르 사이의 풍요로운 지역을 멋대로 드나들 며 마음껏 약탈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신중하게 파리를 포위할 충분한 인원을 남겨두었다. 포위된 파리는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주민들은 페스트로 쉽게 쓰러졌다. 하지만 886년 말 마침내 샤를이 돌아와 포위망을 풀었다. 그는 바이킹을 격 파하지는 못했고, 그들에게 많은 은을 주고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 부르군디까지 노략질하는 걸 허락했다. 887년 비만왕 샤를이 물러나고, 888년에는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이 작은 왕국으로 분할되 었다. 그러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외드가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몇 년 후, 바이킹이 프랑크 왕국을 끈질기게 침입한 결과 노르망디 공국이라는 새로운 나 라가 탄생한다. 프랑크 왕국을 거듭 약탈한 바이킹은 마침내 센강 하류 지역에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 다. 그들의 수장은 롤로였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데인인이지만, 그 자신은 노르웨이인인 지, 덴마크인인이지, 혹은 스웨덴인인지 불분명하다. 롤로와 프랑크의 새 왕인 단순왕 샤를은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롤 로는 네우스트리아(오늘날의 노르망디)지역을 봉토로 받았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맡은 영토 를 수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한 프랑스 왕을 섬길 의무가 있었다. 이렇게 샤를은 아직 국력 이 미약한 자신의 나라와 스칸디나비아의 침략군 사이에 확고한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롤로는 브레슬과 엡트 사이의 지역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아 기독 교로 개종하였고, 샤를왕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샤를왕 의 봉신이 되었다. 신하의 의무를 다하면서 그는 땅이 없는 약탈자에서 영주로 변신하였고, 그의 부하들은 농부와 경작인으로 변신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토지를 소유했다. 이런 특권에 덧붙여 그 들에게는 땅과 영주를 보호할 수단, 즉 무기와 말이 주어졌다. 바다를 건너온 바이킹 전사들은 모두 노르만인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법률은 근본적으 로 변했다. 이제 법률과 재산은 대평의회-알팅-가 아니라 최고 계급이 보호했다. 그러는 가 운데 전체적인 봉건제가 싹트게 되었지만, 그 지배계급은 백성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충실한 봉신 롤로는 단순왕 샤를이 부르군디공 라울과 대결할 때 샤를의 편이 되어주었 다. 이이러니컬하게도 라울은 단순왕 샤를을 왕위에서 내쫓고 그걸 기화로 노르만인들의 땅 을 약탈했다. 이제는 노르만인이 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와즈 강변에서 격렬하게 대항했다. 결국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노르만의 영역은 다시 한번 확대되었다. 노르만 공국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루왕과 바이외, 이 두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 다. 5000명에 이르는 바이킹은 프랑크족 원주민들과 쉽게 융화되었다. 롤로는 베랑제 백작의 딸 포파와 결혼했다. 점차 바이킹과 기독교 사회는 하나로 합쳐졌다. 롤로의 선례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남자와 프랑크족 여인들 사이의 결혼 이 증가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같은 그들의 이교도적인 관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양쪽의 언어와 관습, 사회적 인습 등이 융화됨으로써 롤로의 후계자들 은 이후 수세기 동안 상업적, 군사적 우의를 지킬 수 있었다. 프랑크족의 대군주들이 내준 변방지역에서 지배력을 키운 노르만인-그들은 이런 명칭으 로 불리게 되었다-이 노르망디 공국을 서구 최초의 근대 국가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는 역 사학자들도 있다. 1066년 그들은 잉글랜드에 이어서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했고, 안티오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데인인의 맹렬한 기세는 앵글로색슨 땅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835년 이래로 데인인 바이킹은 잉글랜드에 대해 특히 맹렬한 공격을 펼쳤다. 이것은 9세 기 말까지 매년 반복되었다. 공격로는 열려 있었다. 린디스판과 재로를 약탈한 후 노르웨이 인들은 잉글랜드에서 물러났다. 데인인은 템스강을 따라 요새를 구축했다. 이 요새를 발판으로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며 내륙으로 올라갔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들은 앵글로 색슨 영토의 남부와 중부를 유린 했다. 9세기 말경에 그들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요크와 노팅엄에 정착했으며, 머시아를 포위 하고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차지했다. 전술에 능한 웨섹스의 왕 알프레드는 끈질기게 저항했 다. 886년 그는 데인인에게서 런던을 되찾았으며 잉글랜드 남부의 대부분을 해방시켰다. 하 지만 899년 그가 죽고 데인인 원병이 새로 도착하자 그의 업적은 상당 부분 수포로 돌아갔 다. 859년 하스테인 수장은 다른 바이킹 수장들과 합세하여 60척의 바이킹선으로 구성된 선단 을 이끌고 자신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새닛섬을 출발했다. 그는 남부의 곶을 돌아 지 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와 모로코의 해안을 습격했다. 그리고 나서 카마르그(론 삼 각주)로 진격하여 특히 론 계곡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급습했다. 860년 그는 그의 선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루나(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포위공격했다. 잉글랜드의 바이킹 구역인 데인로의 흥망성쇠 9세기 말경에는 요트셔의 북부에서 템스강에 이르는 잉글랜드 전역이 데인인의 지배에 들 어갔다. 데인로는 바이킹의 법률로 통치하는 광대한 지역으로, 더비와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퍼드, 이 5곳의 요새화된 도시가 그 방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로 넘어오면서 데인인도 패배를 겪었다. 노르웨이인들이 북부를 공격하고, 남부에서는 잉글랜드와 왕 에드워드가 끈질기게 데인인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조국 덴 마크는 스웨덴인들에게 짓밟혔다. 927년 에드워드왕은 데인인의 군대를 격파하고 요크를 되찾았다. 데인로의 중심부로 세력 이 축소된 데인인들은 공동의 적인 노르웨이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인들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1002년 11월 13일 마침내 잉글랜드의 왕 에설레드는 잉글랜드땅에 있는 모든 데인인을 죽 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대학살극으로 크게 분노한 덴마크의 왕 스벤은 무시무시한 복수 극을 펼쳤다. 결국 1014년에는 그가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후계자인 크누트 대왕(카누트왕)은 마지막 저항을 제압하고 웨섹스 왕가를 몰아냈다. 1035년 그가 죽자, 아들들의 왕권 쟁탈전으로 그의 제국도 몰락, 잉글랜드의 영토에서 데 인인은 영향력을 상실한다. 이후 바이킹은 이따금 정복을 시도하지만, 그나마 별 성공을 거 두지 못했다. 1069년 마침내 데인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요크시를 포위 공격한 바이킹 전사들이 노 르망디공인 정복왕 기욤이 지휘하는 노르만 군사들의 칼 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다. (기욤은 이후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가 되었다.) 바이킹의 주요 전력은 배에 있었지만, 전사들의 기량 역시 걸출했다. 바이킹 전사들은 가죽으로 된 가슴받이나 쇠미늘 갑옷을 착용했다. 머리에는 원추형 투구 를 썼는데, 이 투구에는 가죽이나 쇠로 만든 평평한 코 보호대가 있었다. 전사들은 일반적으 로 가죽을 덧낸 주목의 재목으로 만든 활을 무기로 사용했다. 전설에 의하면 활시위는 여자 들의 긴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철판을 덧댄 참피나무로 만든 방패로 무장한 이들은 전투중에 육탄전이 벌어질 경우 창과 단검,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솜씨를 지녔다. 큰 키와 막강한 힘을 기준으로 선발 된 보병은 손잡이가 기다란 무거운 전투용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전투 중에는 보병이 적군 의 기마병에 대항하는 막강한 전위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다음으로는 말을 쓰러뜨리거나 방패를 쪼개버리는 무시무시한 전투용 도끼가 적군을 설명했다. 기병은 주로 마자르인들로 구성되었다. 헝가리 출신인 이들은 기병으로서는 최고의 기량 을 지니고 있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쏠 수도 있는 이들은 대형을 이루어 싸우는 전술도 발전시켰다. 그들이 애용한 무기로는 활 외에도 단검, 칼, 창이 있다. 하지만 바이킹이 가장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건 역시 바다에서였다. 그들의 바이킹선은 높은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에서도 항해할 수 있었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적지의 내륙 깊숙 이 침입할 수 있었으며,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도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배의 이물과 고물 을 독특하게 설계한 덕분에 바이킹은 노를 반대 방향으로 젓기만 하면 배를 거꾸로 나아가 게 할 수 있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바이킹은 치사한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격할 날짜를 신중하 게 선택했다. 특히 일요일과 성인들의 축일, 종교행사가 있는 날을 선호했다. 그런 날에는 주민들이 다른 일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낭트에 쳐들어간 날은 843년 6월 24일, 성인 축일을 맞아 장이 열린 날이었다. 파리는 885년 부활절 이른 아침에, 트리어는 882년 성목요 일에 공격했다. 841년 데인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은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아연 질색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을과 수도원을 공격 했다. 제4장 스웨덴인들과 동방으로 가는 길 9세기에 '루스'-핀족이 스웨덴인을 일컫던 말-가 슬라브계 민족의 나라에 물밀 듯이 밀려 갔다. 12세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사가 쓴 '러시아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슬라 브인들은 다음과 같은 제의를 분명히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풍요롭고 광활하지만 혼란 스럽습니다. 부디 이곳에 와서 우리를 다스리고 지배해 주십시오." 스웨덴인들이 러시아에 새로 세운 나라는 키예프를 수도로 정했다 9세기 말경에 루리크라는 스웨덴계 바이킹이 노브고로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세력을 전국으로 확장했다. 그의 대리인 두 사람이 수로를 이용하여 그곳에서 거의 600마일이나 떨어진 키예프에 도 착했다. 키예프는 러시아 북부와 비잔틴 제국 사이에서 명실상부한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리크의 후계자인 올레그 역시 드네프르강으로 진출하여 키예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이 강을 지배함으로써 교역로를 개설하였고,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몇 년 후 새로운 수도 키예프는 교역과 문화, 예술 방면에서 유럽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 나가 되었다. 올레그는 새로운 러시아의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그리고 전함을 건조하여 남쪽 흑해에 이르기까지 강들을 감시했다. 스웨덴에서 비잔틴 제국의 끝에 이르는 바이킹의 항로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바이킹 여행자는 스웨덴 해안에서 핀란드만까지 발트해를 건너야 했다. 그리고 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네바강을 타고 40마일에 이르는 급류와 암초지 대를 지나야 라도가 호수에 닿을 수 있었다. 이 곳에 정착하는 스칸디나비아 상인들도 있었 다. 그들을 제외한 바이킹들은 볼호프강을 따라 일멘호, 그리고 더욱 중요한 곳인 노브고로 드까지 갔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려면 로바트강을 항해해야 했다. 이 강은 폭이 좁아 바이킹 선은 다닐 수가 없었다. 루스는 통나무를 밑에 괴어 배를 육로로 운반하여 드네프르강과 볼 가강의 상류에 닿을 수 있었다. 드네프르강은 그들을 비잔티움으로 데려다 주었고,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인도하여 바그다드에서 온 대상들과 거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니투스는 키예프를 지나는 위험한 급류와 드 네프르강의 협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강 한가운데에 깍아지른 듯한 높은 바위가 섬처럼 버티고 섰다. 여기에 부딪힌 강물은 높이 솟아올랐다가 콸콸대는 무서운 소리를 힘 차게 내지르며 반대편으로 밀려갔다.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루스도 섣불리 이곳을 지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강둑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내리게 했지만 짐은 그냥 배에 두었다. 그 리고는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발끝으로 바닥을 더 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에서 그렇게 하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장대를 이용해 사람들 이 배의 앞과 가운데, 뒤를 받쳐들고 앞쪽으로 운반했다. 이런 식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가며 그들은 암초지대를 힘겹게 빠져 나왔다. 급류를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배에 올라타 여 행을 계속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다른 뱃길을 이용하기도 했다. 발트해를 건너 드비나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드네프르강의 상류에 닿을 수 있었다. 또 다른 길은 비스툴라강을 따라 우크라이나의 드네스트르강까지 가서 북해로 가는 코스였다. 예상되는 공격을 막기 위해 스웨덴인들은 그들이 지나는 길에 주둔군을 배치했고, 중간 기항지에 요새를 세웠다 볼가강과 카마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볼가르의 중간 기항지는 라도가호와 스몰렌 스크시에 이르는 두 길을 모두 감시할 수 있었다. 스몰렌스크시에는 이 도시의 막대한 부를 탐내는 스칸디나비아인들과 투르크족, 하자르족, 그리고 많은 동방인들이 모여들었다. 이곳 에는 나중에 다른 시장으로 보낼 유용한 상품들이 집하되었다. 스웨덴 중계인들은 동물의 가죽과 노예를 팔고 중화-중국-에서 온 비단을 사들였다. 그들은 이 비단을 묄라렌호에 있는 커다란 항구도시 비르카로 보냈다. 바이킹이 미클리가르드르, 즉 '위대한 도시' 라고 부른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907년 올레그는 2000척의 배에 나눠 탄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이 보이는 곳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거대한 쇠사슬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연대기 작가는 올레그가 기발한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고 기록했다. 그는 배를 물 밖으로 끌어올려서 밑에 바퀴를 달아 장애물을 피해 갔다고 한다. 그렇게 쇠사슬의 건너 편으로 안전하게 건너간 그는 바람이 순풍으로 변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해 갔다. 당황한 비잔틴인들은 통상조약에 동의했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하지만 바이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963년에 올레그 의 손자인 스바토슬라브는 다뉴브에서 불가르족에게 패했을 뿐 아니라 볼가강 기슭에서 유 목민의 족장에게도 패배를 기록했다. 할아버지대와는 반대로 스뱌토슬라브는 매복군을 만나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 출신의 페체네그족 전사에게 암살 당했다. 스바토슬라브의 아들인 블라디미르는 막강한 페체네그족을 토벌하여 탄생 단계에 있는 러 시아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988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러시아의 지배자를 방문하여,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블라디미르는 정략적인 이유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러시아 헤르손의 세례반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부하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면서 드네프르강에 들어가 집단으로 세례를 받게 했 다. 새로운 종교 덕분에 수많은 그리스정교 신부들이 러시아로 들어왔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 새로운 문화에 쉽게 순응해 갔다. 게다가 동방로에서 얻었던 재물도 감소했다. 근동지역의 은광산이 아시아 부족의 수중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대러시아 제국과 바이킹의 고향인 이교도 스웨덴 사이에는 몇 가지 물품의 교역만이 이루어졌다. 1040년 '대항해가' 잉그바르가 30척의 배를 이끌고 스웨덴의 해안을 떠나 아시아의 이슬 람 세계로 항해해 갔다. 이듬해 그는 시리아에서 사망했다. 그의 패배와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대항해가 잉그바르의 원정, 바이킹 조상들의 영화를 되살려보겠다는 스칸 디나비아 왕의 아무런 성과도 없는 노력,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정복자들의 명성 은 대변혁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제5장 항해가와 상인 노르웨이 북부의 암각화는 석기시대 초기의 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 묘사된 것 들은 갑판이 없는 작은 배로, 길이는 약 11미터, 폭은 1.8미터 정도 되며, 뱃머리에는 동물의 가죽을 씌워놓았던 것 같다. 청동기시대로 넘어오면 이 가죽은 가죽끈으로 한데 엮은 얇은 판자로 대체된다. 배의 건조기술은 매우 느린 속도로 발달했다. 그것은 천년이라는 세월을 걸쳐 서서히 발 달했다 초기의 배에는 용골이 없었다. 이 배들은 얕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높은 파도를 헤쳐 가고, 심지어 여름에는 발트해나 스카게라크 해협 같은 넓은 바다를 항해할 수도 있었다. 하 지만 바이킹선의 이 조상들은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배의 폭이 너무 좁았고, 또 대서양의 높은 파도를 헤쳐가기에는 뱃전이 너무 낮았으며, 용골이 없기 때문에 급류나 역 풍이 불 때에는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함은 돛이 없다는 것이었다. 7세기에 이르러서야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안정성과 방향전환을 위해) 용골을 고안해 냈고 돛대를 세웠으며 돛을 높이 달아 올렸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바이킹의 돛은 진일보한 것이 었다. 길이가 24미터인 바이킹선 위에 돛은 상갑판 위 18-20미터 높이에 달렸으며, 돛의 넓 이는 100평방미터가 넘었다. (가공하지 않은 양털이나 천을 두텁게 두 겹을 겹쳐 만든 바이 킹의 돛은 다른 배의 주의를 끌기 위해 붉은 색으로 칠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스칸디나 비아인들은 배의 우현에 키 역할을 하는 노를 부착해 독창성을 발휘했다. 바이킹은 바다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다. 이는 수세대에 걸친 경험에 의해 쌓인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해상 항해생활이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나 습기로 인해 희생되었다. 시체는 바다에 던졌다. 날씨가 나쁠 때에는 바닷물이 뱃전을 뚫고 들어왔 다. 선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물을 퍼내는 것밖에 없었다. 7명이 노를 저을 때 그중 6 명은 물을 퍼낸다고 노래한 사가도 있다. 바이킹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고 해도 배는 자주 난파되었다. 예를 들면 붉은 털 에리크의 지휘하에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를 향해 25척의 배가 항해에 나섰지만 그중 10 척의 배가 침몰했다. 그런데도 바이킹은 끊임없이 험한 바다를 항행하며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급류나 새로운 땅의 발견에 대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또한 천체 관측기의 일종인 '태양 섹터(풍 향계처럼 움직이는 바늘이 방향을 표시하는 해시계)'뿐만 아니라 태양의 고도를 알려주는 진짜 고도표를 사용했다. 그 덕분에 그들은 태양의 고도를 잴 수 있었고, 근사한 지점을 찾 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측정법은 위도를 재는 데는 충분했지만, 경도는 잴 수 없었 다. 아마 바이킹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 이물에 부딪치는 파도, 배가 지나간 자국, 바닷새 들의 움직임, 물고기와 고래의 이동 모습, 기온의 변화, 바닷물의 색깔의 변화 등을 참작하 여 그들의 속도와 거리를 어림짐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은 육지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동서 방향을 축으로 항해함으로써 경도를 알지 못한다는 결점을 보완하려 했다. 바이킹 항해가들은 천체에 크게 의존했다. 배가 남쪽으로 가고 있을 때에는 해와 달이 하 늘로 떠오르지만. 배가 북쪽으로 갈 때에는 해와 달이 진다. 편광 수정의 일종인 일직선상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사가도 있다. 이 수정을 태양과 수직 으로 들고 빛을 보면 태양빛은 노란색에서 파란색까지 분산된다. 이 돌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고 구름이나 안개가 낀 날에 예비용으로 쓰였던 것 같다. 이것은 다만 희귀한 보석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북대서양 항로는 위험했다. 드라카르선과 노르선은 북극해의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그곳 에서는 한여름에도 거친 바람과 파도가 그들을 삼키려 들었다. 이 항로는 무시무시한 빙산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이 빙산들은 그린란드의 빙하에서 쪼개 져 나온 것으로, 언제라도 배를 난파시킬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험난한 항해에서 바이킹 은 보통의 바이킹선인 드라카르선보다는 노르선을 이용했다. 노르선은 바이킹선보다 작은 상선이었다. 여기에는 30명 정도의 사람, 가축과, 신선한 물과 그 밖의 필수품을 실을 수 있 었다. 출발할 때가 되면 뱃전 나간에 매단 방패를 끌어올려 선창에 실었다. 선교도 세웠다. 선원 들은 자신의 짐이 든 상자 위에 걸터앉아 힘차게 노를 저었다. 노젓기는 바람이 불어 돛을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정이 허락하면 밤에는 항해를 멈췄다. 일단 배가 해안에 닿거나 닻을 내리면 배 근처나 내륙 깊숙이 들어가 천막을 쳤다. 선장은 나무를 멋지게 깎아 만든 조립식 침대에서 잠을 잤다. 선원들은 후드파트라고 부르는, 가죽으로 만든 침낭에 들어가 자거나 장비와 무기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다. 배에서는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피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육지에 상륙한 틈 을 이용해 커다란 가마솥에다 끓이는 음식을 잔뜩 만들었다. 그들은 평상시와 달리 주로 고 기와 소금을 뿌려 말린 생선, 버섯, 감자, 응고시킨 우유, 맥주를 먹었다. 오랫동안 항해를 하며 이 위대한 바이킹 항해가들은 상황에 따라 약탈을 하거나 거래를 했다 이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와도 온갖 종류의 상품을 거래했다.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 다뉴브의 금, 프랑크족의 왕국에서 제작된 무기, 잉글랜드의 흑옥, 그리고 라인강 연안지방 에서 제조된 포도주가 스칸디나비아의 항구로 들어왔다. 이것들을 노예와 말린 생선, 꿀, 가 죽과 교환했다. 숲이 별로 없는 아이슬란드는 집을 지을 목재를 수입해 가는 대신 양털을 팔았다. 노르웨이와 그린란드는 바다코끼리의 상아를 많이 내놓았다. 바이킹의 교역 중심지 에서는 그 마을 안에서 거래를 하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을 지켜야 했다. 이런 법률의 시행은 왕의 대리인이 담당했다. 그는 또한 세금의 징수도 받아서 처리했다. 왕이 보낸 신하는 알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를 통치하는 데 점점 더 막강힌 영향력을 행 사했다. 상인들은 그들의 상거래와 재정에서 왕의 권한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할 조합이나 길드를 결성했다. 이런 기구들은 상인이 집을 떠나 멀리 있을 때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역할도 했다. 조합의 구성원들은 자주 모여 잔치를 벌 이거나 술을 마시고 종교의식도 함께 치렀다. 바이킹과 그들이 지나가는 나라의 지배자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873년 덴마크에서 온 사절이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루트비히왕에게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소개했다. 그 협정에 의하면 양국의 상인은 상품을 사고 팔기 위해 상대방의 국경을 자유 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바이킹은 은의 무게를 달아 교환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이를 위 해 귀금속으로 만든 장신구를 녹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외국의 동전도 마다하지 않았고, 바 그다드의 칼리프에게서 받은 아라비아의 디르함 은화나 카롤링거 제국의 통화까지도 그들의 시장에서 통용했다. 스웨덴의 상인들은 동전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저울과 추를 사용했다. 1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자국의 통화를 갖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흥정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상품의 매매는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스웨덴인들은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역 고유의 관습을 적용했다. 원래 러시아의 백해 해안 지방에서 행해지던, 매매자끼리 만나지 않고도 거래하는 물물교환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 다. 한 상인이 자기 상품의 값을 미리 생각하고, 그것을 편리한 장소에 갖다 놓고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다. 그러다가 돌아와 보면 그 사이에 원주민이 교환할 물건을 갖다 놓았다. 상인이 거래를 이루려면 그 물건을 갖고 가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상품을 가져가는 방식 이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의 해안에 있는 천연항에 무역항과 시장을 세웠다. 그 중에서 비 르카와 헤데비, 이 두 항구가 가장 유명했다 묄라렌호의 비외르쾨섬에 있는 비르카는 850년 지역 총회인 '팅'의 회의장이 자리한 성 채로서, 왕의 대리인이 지배했다. 인구가 밀집한 섬의 북서부에는 바이킹 수비대가 주둔한 요새가 똬리를 틀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에는 6개의 출입구가 있었으며, 빙 둘러 싼 방어용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이런 울타리 안쪽에 상업지구가 자리잡았다. 상업지구는 기슭에 상선이 대기해 있는 해안과 마주보고 있었다. 비루카에는 3개의 항구가 있었는데, 그 것들은 각각 프리슬란드의 상인용, 곡물 수입용, 상품 교환용으로 쓰이는 항구였다. 겨울에 는 호수의 물이 결빙하므로 짐을 썰매에 실어 운반해야 했다. 그곳은 풍요롭고 부유한 도시이며 또한 장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서는 스웨덴의 특산물로 유명한 크리스탈과 유리 구슬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10세기말로 접어들면서 비르카는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헤데비는 비르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틀란드 반도의 동쪽 해안에서 발흥한 도시이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한정된 지역으로 덴마크에 합병되었다가, 900년경에 스웨덴왕에게 점령 당했다. 헤데비 역시 교역의 중심지로서 수출용 도자기와 유리, 호박을 만드는 장인들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곳도 10세기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000년경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헤데 비는 결국 노르웨이의 잔인왕 하랄드에 의해 멸망했다. 그밖에도 소규모 지역 시장이 존재했다.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이런 시장은 외국에서 들 여온 상품과 최고의 기량을 지닌 장인이 만든 물건들을 모든 마을과 바이킹 집단에 공급해 주었다. 농민들과 상인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옷감, 도자기, 쇠막대나 수입 의류와 교환했다. 물물교환이 일반적인 교환방식이었다. 제6장 고향에서의 바이킹 노예, 자유민, 수장: 스칸디나비아 사회는 이 세 계급으로 대별된다. 트라엘이라 불린 사회계급이 최하층을 이루는 노예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거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 자유민이었다가 법적인 지위를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사회의 다른 계층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머리를 빡빡 깎았고, 칙칙한 색의 털옷을 걸쳤다. 여자 노예와 자유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엄마의 신분을 물려받았다. 이들은 20명 정도의 트라엘로 구성된 농장의 일꾼이 되었다. 여자는 가장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역할을 했다. 집안일에서는 어느 정도 존중받는 위치에 있었다. 남자들은 때로 좀더 스케일이 큰 일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싶어했다. 바이킹 시대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그 영향으로 노예를 죽이는 것이 금지 되었고, 노예도 기독교식으로 매장될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의 몸이 된 노예의 수가 증 가했다.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를 갖고 있던 자유민은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농부들보다 사회적으 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그들은 스칸디나비아 사회의 경제, 정치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으 며 무장할 권리와 법의 공정한 심판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원칙적으로 그들은 모두 평등 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권리는 가문의 전통, 소유지의 중요도에 비례했다. 바이킹 문화가 전파되면서 사회에도 변화가 왔고, 전문적인 장인 계층이 출현했다. 예를 들면 대장장이는 주목받는 계층이었다. 대장장이는 쇠를 다루고, 모든 사람들의 안전과 원정 의 승리를 보장하는 각종 무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계층으로는 군인과 상인, 목수, 그밖에 다른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자유민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은 대체로 존중받는 편이었다. 여자들은 가사일을 맡았으며 남편이 집을 비울 때에는 소유지의 관리도 책임졌다. 수장과 왕은 총회인 팅에서 선출했으며, 선거구민을 상대로 자신이 내린 결정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들의 권한은 백성들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백성의 결정이라면 왕이라 도 따라야 했다. 왕의 주요 임무는 백성들의 안전과 번영, 명예를 지키는 것이었다. 왕은 종교의 수장도 겸 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영향으로 중앙 집권적인 왕정이 탄생할 때까지, 왕은 입법권을 갖지 못했다. 알팅이 유일한 입법기관이었다. 알팅에서 바이킹의 생활에 관한 모든 결정을 내렸다 알팅은 바이킹 사회의 유일한 입법 및 사법 기관이었다. 알팅은 다단계로 구성되었다. 면 단위에서는 (적어도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는) 팅은 고정된 소유지를 갖고 있는 자유민으로 구성되었다. 주 단위에서는 여러 면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총회는 1년에 한두 차례씩 야외에서 개최했다. 각 주는 고유의 법률을 제정하였고, 왕의 제의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토론을 원로와 법관이 진행한다. 당시 법률 은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법관은 법률을 모두 암기하고 있어야 했다. 팅은 재판소의 역할도 했다. 바이킹은 재판에서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고, 습관적으로 이를 길게 끌었다. 원고는 자기 면의 총회에 재판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미묘한 사안일 경 우에는 그 지역의 총회로 이송했다. 바이킹 사회에서는 소송 과정에 피고에 대한 신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피고는 팅에서 자신을 방어했다. 피의자는 자기의 주장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한 얼마든지 무죄가 될 수 있었다, 젊은 범죄자는 보통 벌금형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피해자의 가족에게 위자료를 지 불했다. 혈연관계는 신성한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해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바이킹 가족은 유난히 강한 유대관계를 지녔다. 모든 사람이 가족의 명예를 소중하게 지 켰다. 가족의 한 구성원에게 모욕을 주면 그것은 가족 모두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바이킹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면 피해자의 가족은 가해자의 전 가족을 상대로 복수를 하거 나, 아니면 적어도 보상을 요구했다. 어떤 가족은 대를 이어 계속되는 복수 때문에 완전히 파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간의 유대는 형제자매뿐 아니라 삼촌이나 고모, 이모, 사촌들, 말하자면 가깝고 멀고 에 상관없이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개인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한 개인이 가족들에게 쫓 겨나는 것은 그가 조국에서 추방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가족은 사회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 가장 강력한 중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다처제가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유한 자유민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보 통이었다. 한 명의 본처가 집안의 열쇠를 허리띠에 차고 다니며 가사를 책임졌고, 첩들은 노 예계급에 속했다. 바이킹은 대부분 농가나 거대한 공동주택에 살았다. 길이가 12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방 하나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공동주택은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그 유적이 흩어져 있다. 주춧돌 위에 쌓아 올린 측벽은 안쪽으로 약간 휘었으며, 지 붕은 얼핏보기에 뒤집어놓은 배처럼 생겼다. 지붕은 집 내부에 두 줄의 기둥을 세워 지탱했 다. 건축 솜씨는 거칠다고 할 수 있다. 땅바닥의 수직으로 박은 굵다란 기둥, 벽의 하단의 도리와 그와 유사한 천장의 들보가 그러하다. 실내의 벽은 욋가지에 찰흙을 거칠게 발라 만들었다. 지붕은 초가지붕이거나 너와지붕, 또 는 뗏장은 입힌 평평한 돌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경사면이 직접 벽면에 걸려 있다. 아이슬란드에서처럼 그들은 가축을 기르는 일을 주요한 농업활동으로 삼았다. 농가는 널 따란 공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실상 마을이 없는 셈이었다. 커다란 농가의 내부는 단순하지만 편안하고 따뜻했다. 집안에는 돌이 깔린 현관과 난로가 있는 거실, 침실, 젖소의 젖을 짜는 착유장이 있었다. 넓은 실내는 집안 사람들이 편하게 생활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탄으로 된 벽은 두께가 2미 터나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추위를 잘 막아주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방문객은 길고 좁 다란 통로를 지나야 했다. 연기를 빼내기 위한 지붕의 통기 구멍을 제외하면 '홀'에서 밖으 로 뚫린 구멍은 없었다. 창문은 바이킹 시대 말기가 되어서냐 처음 등장했다. 초기의 창문에 는 동물의 반투명한 방광을 걸어놓았다. 오늘날의 사우나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증막도 설치되어 있었다. 바이킹은 체력단련을 무척이나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규모가 커지면서 살림도 규모가 커졌고, 날이 갈수록 집도 대형화되고 다른 건축 의 건축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가장 큰 규모의 농가는 그것이 하나의 작은 촌락처럼 보일 정도였다. 헛간과 화장실, 한증막-그리고 때로는 부엌까지도- 본채 밖에 별도로 세웠다. 겨울이 길어서 가족들은 여러 달 동안, 그리고 기나긴 밤을 집안에서 지내야 했다. 거실에는 두 개의 긴 의자-길이가 1.5미터 정도 되는 흙으로 만든 선반-가 벽에 붙어 있 었다. 이 의자들 사이에는 땅을 밟아 다진 자리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난로 역할을 하 는 움푹한 구덩이가 있었다. 난방과 조명, 두 가지 역할을 하는 난로 주위에는 돌을 빙 둘러 세워두었다. 그 난로 이외 에 또 하나의 난로가 있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조리용으로 쓰였다. 이 전통가옥의 커다란 홀 내부는 먼지가 많고 공기가 탁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 처럼 깜박이는 난로의 불빛으로는 수공업(여자들의 직물 짜기, 남자들의 연장 수선)을 하기 가 어려웠다. 집안은 항상 북적거렸다. 이 공동주택에는 자기 가족뿐 아니라 첩과 하인, 노예,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한데 섞여 살았다. 모든 사람이 밤에는 한 방에서 지냈다. 침대는 조립식 이어서 밤에만 펴놓았다. 집안의 가장 부부만이 침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상자침대(상자 처럼 둘레를 둘러싼 침대: 역주)에서 자는 특권을 지녔다. 부엌은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고기는 석쇠나 쇠꼬챙이를 이용하여 굽거나 삶았다. 때로 는 고기를 기다란 갈퀴에 꽂아 그냥 불에 올려놓았다. 고기를 삶기 위해서는 가마솥이 필요했다. 물이나 우유는 나무로 만든 그릇에 담고 그 안 에 뜨거운 돌을 집어넣음으로써 금방 데울 수 있었다. 연회를 겸한 종교의식은 가장 커다란 집의 실내에서 치렀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이 행 사에서 그들은 중요한 계획을 세웠으며, 다가오는 계절에 거행할 원정도 함께 논의했다. 또 한 시인과 연설가들도 이 자리에서 마음껏 자기가 지난 재주를 뽐냈다. 바이킹 가족은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모든 것을 집에서 만들어 썼다 그들은 빵과 버터, 치즈, 이 모든 것들을 농가에서 만들었다. 식품은 얼리거나 말리는 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저장했다. 생선은 말렸다. 계란처럼 상하기 쉬운 식품은 땅속에 묻어 보 관했다. 겨울에는 우유를 천연 얼음을 채운 벼에 담아 보관했다. 목제 연장(갈퀴, 고무래, 곡괭이, 괭이)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다. 집은 집주인이 직접 짓거나 마을의 목수가 지었다. 기나긴 겨울밤은 연장을 수선하며 보냈다. 모든 농가는 연장을 상자에 잘 보관해 두었다. 목공와 소목일에 쓰이는 연장은 전혀 원시적이지 않고 현대의 것들과 유사했다. 뼈를 다듬어 물건을 만드는 일은 동네 장인들의 주요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뼈로 만든 빗이나 동전, 칼자루 등에 무늬를 새겨 넣었다. 철기 제작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바이킹은 뛰어난 대장장이였다 커다란 농가에는 자체 대장간이 있었다. 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농민들이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 썼다. 재료인 철광석은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습지에서 캐냈으며, 철의 생산은 제련을 위한 숯의 제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금속은 막대 형태로 대 장간으로 옮겨 다시 손질했다. 스웨덴에서 광부들은 동이라는 귀중한 금속을 캐냈지만, 구하 기 힘든 다른 원광들은 보통 수입에 의존했다. 동석은 바이킹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부 노르웨이 특정 지역의 노천 에서 찾을 수 잇는 이 다루기 쉬운 광석을 깎아서 일상적으로 쓰는 그릇을 만들었다. 대장장이들은 때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촌락이나 농가에서 자신의 기술을 발휘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근처 시장에 제품을 내다 팔았다. 그들 은 실용적인 제품만 만든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볼룬드라는 이름의 사내가 문학작품에 나 오는데 이 사내는 '금반지도 만들고 쇠칼도 만들었다.' 이 볼룬드(대장장이 웨이랜드라고도 불렸음)는 쇠는 물론 금과 은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그는 칼날에 물결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길 수도 있었고, 보석을 만들 소도 있었다. 제7장 신과 영웅 바이킹의 종교는 이교적인 다신교였다. 바이킹은 신들이 북유럽 신화의 올림포스산이라 할 수 있는 아스가르드에서 산다고 믿었다. 아스가르드는 요새였으며, 그 한가운데에는 이그 드라실이라고 하는 늘 푸른 물푸레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뿌리가 저승까지 미치고, 또 그 가지는 하늘을 뚫고 올라갈 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기독교가 서유럽에 전파된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난 중세 초기까지도 스칸디나비아는 여전 히 다신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딘과 토르, 프레이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지배했다. 오딘은 다른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 주신이었다. 그는 지혜와 전쟁, 정확히 말하면 승리의 신이었다. 그는 거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전략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력과 교묘한 작전으로 승리를 쟁취하도록 전략을 세웠다. 바이킹은 그다 다리가 8개 달린 슬레이프니라는 말을 타고 멀리까지 여행을 다닌다 고 여겼다. 그는 여행에 후진(사고)과 무닌(기억)이라는 이름의 까마귀 두 마리를 데리고 다 녔다.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은 '번개'를 의미한다. 그는 두 마리의 숫염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폭풍 같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돌아다녔다. 토르는 미욀르니르라는 손잡이가 짧은 망치를 휘둘렀다. 미욀르니르는 번개를 상징한다. 스는 거인과 숲의 작은 요정들, 추위 와 굶주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했다. 인간과 비슷한 성질을 지녔고, 사납지만 인정이 많은 토르는 일반인과 농민들에게 가장 친근한 신이었다. 선하고 관대한 프레이르는 풍요의 신이었다. 그의 여동생인 미의 여신 프레이야는 발키리 들오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다. 이 여장부 전사들은 힘세고 용감한 바이킹 전사를 선발하기 위해 오딘이 지상에 파견했다. 전쟁이 끝나면 발키리는 전사한 바이킹 영웅을 바이킹의 내 세인 발할라로 데려갔다. 이런 주요 신들 주위에는 기타 신들과 난쟁이, 악마, 정령들-그들은 때로 망자의 영혼의 화신이기도 했다-이 맴돌았다. 바이킹은 그들의 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신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신과 계약을 맺었다 신들은 가족과 가족의 이익, 명예를 지켜줄 뿐 아니라 나라, 전사, 농민을 지켜주었다. 그 들은 왕을 도와 평화를 수호했고,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게 해주었다. 바이킹에게 신은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신을 후원자로 여겼다. 그들은 신에게 바칠 의무도 있었지만 받을 권리도 있었다. 신자들은 기꺼이 신을 숭배했지만, 그 대가를 기대했다. 신에게 신자가 기대한 만큼의 능력이 없으면 신자는 분통을 터뜨렸다. 신자는 신에게 등 을 돌리거나 신을 모욕했다. 또한 그들은 제식을 집행한 '사제' 인 중개자를 추방하거나 심 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제식은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농민들은 자신이 기르던 가축이 죽는 걸 보며 기도를 드렸고, 전사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으며, 가장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는 언제나 공동으로 올리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샘이나 커다란 바위 근처의 들판이나 빈터, 작은 숲 등 열린 공간에서 행해졌다. 그것이 어떤 종류 든, 성소로 쓰였을 만한 건물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언어에는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많은 지명이 룬드(숲), 빈(풀밭), 아 케르(들판) 같은 신의 이름으로 끝난다. 그들은 아주 커다란 나무를 보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우주수' 라며 숭배했다. 이그드라실이라는 이 나무는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나오는 거 대한 물푸레나무로, 우주를 지탱하는 우주의 축과도 같은 것이다. 바이킹 사회에는 종교적인 일만 맡아하는 전문적인 사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계별로 수 장이 사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은 당연히 이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기 가족뿐 아니라 같은 농가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주위로 불러모았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역의 수장에 게 '고다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말은 '신의 사람' 또는 '제사장 '이라는 뜻이다. 종교의식은 봉헌과 물물교환의 중간 형태를 띠었다 아라비아의 연대기작가인 이븐 파들란은 루스 상인(스웨덴계 바이킹)이 볼가강 유역의 작 은 섬에서 그들의 신에게 올린 제식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루스는 모피와 아름다운 노예 를 가득 실은 그들의 배에서 내렸다. 그들은 빵과 우유, 고기, 그리고 맥주의 일종인 나비브 를 가져왔다. 그들은 나무로 인간의 형상을 깎아 똑바로 세워놓은 입상을 향해 걸어갔다. 입 상 주위에는 땅에 박힌 기다란 말뚝을 들고 있는 작은 우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입상 앞에 엎드려 이렇게 외쳤다. "오, 신이시여! 나는 먼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과 이렇게 많은 검은 담비의 모피를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 속해서 다른 상품들도 죽 열거했다. 그리고는 "당신에게 바칠 공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 하면서 가져온 것들을 풀어놓았다. 이 기도 다음에는 거래의 성공을 바라는 부탁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나에게 디르함과 디나르 같은 아리비아의 은화를 많이 갖고 있는 상인을 인도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인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사가고, 어떤 일로도 나와 다트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종교의식의 핵심은 제물의 봉헌이었다. 바이킹은 동물뿐 아니라 사람까지 제물로 바쳤다 9년에 한 번씩 특별히 격식을 갖춘 제례행사가 열렸다. 이 의식의 핵심은 바이킹이 블로 트라고 부른, 여러 종류의 피 묻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비레멘의 아담은 이 의식을 상 세히 묘사했다. "온갖 생물의 수컷의 머리 9개를 바쳤는데, 이 전통은 그들의 피로 신을 달 래기 위한 것이었다. 목이 잘린 몸통은 그들의 피로 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목이 잘린 몸통은 '사원' 근처의 작은 숲에 걸어두었다. 이 이교도들에게 이 숲은 성스러운 곳이었 다. 그들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각각의 나무가 신성해졌다고 여겼다. 말, 사람과 함께 개들도 매달려 있었다. 한 기독교인이 내게 전해준 바에 의하면, 그는 72개의 뭄뚱이가 줄지어 달 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제물은 칼이나 도끼로 처형하고 피는 성배에 담았다. 이 피는 성수처럼 뿌리거나 점쟁이 가 검사를 했다. 교수형 역시 흔한 방식이었다. 이 죽음의 의식이 끝나면 축제가 열렸다. 축 제는 신에게 격식을 갖춰 술을 바치는 헌주로 시작되었다. 우주의 탄생과 멸망: 거대한 물푸레나무가 세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바이킹의 우주관은 다원적이었다. 우주는 셋 또는 아홉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고, 아사 신족이 사는 아스가르드의 지배를 받았다. 우주의 한가운데 사방에 있는 나라들의 중앙인 미드가르드가 있는데, 이곳이 인간이 사는 세계였다. 그 바깥쪽에는 신이 살고 있었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땅은 거인이나 괴물이 사는 우트가르드였다. 커다란 뱀이 이모든 것을 받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아주 두려운 존재로, 만일 이 뱀이 자 유로이 움직인다면 우주는 멸망하게 된다. 우주를 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이그드라실 로, 이것은 영원히 푸르름을 잃지 않는 물푸레나무이다. 이 나무의 밑둥에는 3개의 샘이 솟고 있었다. 첫째 샘은 이 세상의 모든 강으로 흘러들었 다. 두 번째 샘은 오딘이 지혜를 얻은 곳이었고, 세 번째 샘은 운명을 상징했다. 상징적인 여러 동물들이 나뭇가지에 자리잡은 반면에 뱀들은 언제나 나무 뿌리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 다. 신들은 자주 그 나무의 그늘에 모였다. 신들이 그곳에 가려면 밝게 빛나는 하늘에 걸린 은하수를 건너야 했다. 이 나무에 대해 스칼드(고대 스칸디나비아의 궁정시인: 역주)는 이렇 게 노래했다. 나는 물푸레나무가 어디서 자라는지 알지,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리는 그 나무는 아주 키가 크고 흰 점들이 찍혀 있지, 그것으로부터 나온 이슬이 계곡을 지나 운명의 여신 우르드의 샘을 영원히 채워준다네. 바이킹 영웅들은 모험가 위험을 즐겼다. 스칼드는 이런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사가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돌에 룬 문자를 새겨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11세기까지 바이킹은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았 다. 그들의 모든 시가(에다)와 전설(사가)은 대대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아이슬란드의 승려가 송아지 가죽에 그것들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오늘날까지 그 내용이 전 해질 수 있었다. 구전의 전통은 예술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외딴 마을 사람들은 에다를 멋지게 다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젊은 세대에게 수많은 시구를 끊 임없이 읊어주었고, 그 젊은 세대는 그 다음 세대에게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구전의 전통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사람들은 그것을 업으로 삼게 되었고, 부자나 왕의 궁정시인이 되었다. 왕실과 권세가들과 가깝게 지낸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영웅들의 무용담을 쉬지 않고 노래했다. 이 영웅들은 모두 고귀한 신분에 용맹성, 재 빠른 공격력 등 같은 덕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모험과 위험, 전쟁을 좋아했다. 그들은 먼 나라의 해안에 상륙하여 당당하게 약탈을 했고, 왕처럼 굴었으며 이국의 공주와 결혼했 다.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왕조를 창시하여 주군으로서 그들의 영토를 다스렸고, 많은 자손을 남겼다. 스칼드가 세련되게 다듬은 사가는 점차 진정한 문학 장르로 자리잡아 중세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바이킹의 마지막 영웅은 호전적인 모험가로서 잔인왕 하랄드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전쟁은 그의 삶 자체였다. 노르웨이왕들과 러시아 대공들의 친구이자 비잔틴 제국의 황제 를 섬겼으며,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의 부마이며 나중에 노르웨이왕이 된 하랄드는 데인인과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그는 1066년 잉글랜드인들과 싸우다가 가슴 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바이킹 전설의 마지막 계승자로서 그는 무시무시한 폭풍우 속에서 울리는 천둥과 같은 존 재였다. 투르게이스, 하스테인, 붉은 털 에리크, 레이프 에릭손, 올라프 트리그베손으로 이어 지는 전사의 계보에서 잔인왕 하랄드는 대미를 장식했다. 이들은 전사이자 약탈자, 해적, 침 략자로서 3세기 동안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살았다. 잔인왕 하랄드가 죽자 스칸디나비아 영웅의 계보는 단절되고 만다. 그 이후에는 불완전하고 신빙성이 없는 전설만이 있을 뿐이다. 바이킹을 피를 좋아하는 야만적인 이교도로 못박아 놓음으로써 역사는 그들이 이 세계에 공헌한 바를 망각했다. 그 들은 아이슬란드와 페로에 제도, 셰틀랜드 제도 같은 섬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켰으며, 노르망 디 공국이나 키예프의 러시아 제국처럼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나라를 세웠고, 새로운 교역로를 개발하고 노브고로드와 스몰렌스크 같은 상업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혈통을 지닌 새로운 종족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이킹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놀라게 한 그들은 바로 노르만인들이었다. 잔인왕 하랄드가 죽은 지 이틀 후 노르망디 공국의 왕 기욤은 잉글랜드를 향해 항해를 시 작했다.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이다. 기록과 증언 에길의 사가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음유시인들 가운데 아이슬란드인인 에길 스칼라그림손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은 없었다. 그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운율과 은유를 구사한 고대 스칸디 나비아 최고의 시인이었다. 노르웨이 송네의 바로 남쪽에 자리잡은 피르다필피에 크벨드울프(저녁의 늑대)라는 농부 의 가족이 살고있었다. 그에게는 토롤프와 스칼라그림(대머리그림)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 데, 그들은 해와 그림자처럼 정반대 되는 성격을 지녔다. 토롤프는 하랄드왕에게 접근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하랄드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은 짐을 챙겨 아이슬란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스칼라그림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그곳을 탐험한 후 당시 관례대로 그 땅을 차지했다. 그도 아버지처럼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형을 닮은 큰아들은 이름도 형의 이름을 따서 토롤프라고 지었고, 작은아들인 에길은 그의 아버지를 닮아 몸집이 크고, 검은머리에 말수가 적었으며 영리했다. 에길은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노련한 시인처럼 완곡대칭법 (하나의 명사를 복합어 또는 어군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기교: 역주)을 구사할 줄 알았 다. 일곱 살 때에는 함께 놀던 열한 살 짜리 친구를 죽였다. 열 일곱 살리 되자 형인 토롤프 를 설득하여 바이킹 원정에 끌어들였다... 그가 처음으로 노르웨이에 돌아왔을 때 왕국은 피 묻은 도끼라는 별칭을 지닌 왕 에이리 크와 특히 왕비 군힐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술고래인 그는 연회에서 술을 잔뜩 먹고 그 집의 주인인 아틀레이야르바르드를 칼로 찌르 고 법망을 피해 달아났다. 욕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박식함이 돋보이는 연작시를 읊어대 면서... 그는 잉글랜드에서 대규모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여기에서 사랑하는 형 토롤프를 잃는 슬픔을 맛보았다. 그후 그는 노르웨이로 돌아와 과부가 된 형수 아스게르드와 결혼했다. 12 년간 방랑생활을 하던 그는 마침내 아이슬란드로 돌아왔고, 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이름 을 널리 떨치게 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945년, 그는 소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노르웨이로 갔다. 이를 기 화로 그가 에이리크(피묻은 도끼 왕)와 특히 그의 아내 군힐드-고집이 세고 교활한데다 마 술에 능통한 여인-에 대해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악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는 우선 왕의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 그런 다음 나라를 수호하는 영령으로 하여금 왕 과 왕비를 왕국에서 쫓아내게 하기 위해 니드스튕이라는 불명예의 상징인 단장을 들어올렸 다. 에이리크와 군힐드는 잠시 후 추방되기로 정해졌다. 에길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에 다시 아이슬란드의 보르그로 돌아와 부 친인 스칼라그림의 임종을 맞았다. 그러자 권태감이 그를 엄습해왔다. 그는 활동을 하고 싶 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긴 배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잉글랜드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을 만나 그는 다시 철천지원수 에이리크와 군힐 드의 땅으로 떠내려갔다.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에리리크의 측근인 아린비외른은 에길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에길을 찾아와 왕 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왕은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에길을 다음날 아침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당시에는 밤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아린비외른은 에길에게 밤사이에 왕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머리 값을 치르라.'고 충고했 다. 에길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름다운 형식, 절묘한 구성, 탁월한 묘사와 문체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할 정도였고, 왕에게 용서를 구하며 끝나는 시였다... 에길은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새로운 모험을 하고 스웨덴의 뵈름란드 를 탐사했다. 이 여행 중에는 끔찍한 일들이 숱하게 일어났다. 그는 다시 아이슬란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보드바르가 물에 빠 져 죽는 걸 보게 되었다. 너무나도 가호간 시련이었다. 얼마 전에도 그는 한 아들이 벼에 걸 려 죽는 참척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는 차라리 죽기로 결심했다. 그의 딸 토르게르드의 사랑만이 그를 절망에서 구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선의에서 나온 기만책을 쓴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목숨을 끊기 전에 죽 은 아들들을 위해 만가를 지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딸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소나토레크(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는 이가 빠지고 반귀머거리에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 노인이 되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알팅의 모든 구성원이 보는 앞에 그가 모은 잉글랜드의 금은 보화를 내놓고서 그의 동포들이 자신의 전리품을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겠다는 그 목 표를. 레기 부아예 '북유럽의 신앙', 1973년 에길의 어린 시절 그라나스타디르에 사는 그라니의 아들은 토르드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였고, 에길 스칼라그림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에길은 많은 시간을 레슬링하며 보냈다. 그는 성질이 어찌나 급하고 화를 잘 내는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아들보고 그에게 양보하라고 할 정도였다. 초겨울에 흐비타르벨리르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구기경기가 열렸다. 각 지역에 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스칼라그림의 집에서도 많은 식구들이 경기에 참여하러 그곳에 갔 다. 에길은 토르드에게 자신도 경기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일곱 살이 었다. 토르드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는 에길을 뒤에 태우고 말을 달렸다. 그들이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경기를 치르기 위해 편을 짜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린 소년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들도 역시 편을 갈랐 다. 에길은 헤그스스타디르 출시의 헤그의 아들인 그림이라는 소년과 맞서 그 반대편에서 싸우기로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에길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림은 최선을 다해 격차를 벌 렸다. 에길이 화가 나서 방망이를 들고 그림을 두들겨 팼다. 하지만 그림은 그를 잡고 땅바 닥에 동댕이를 쳤다... 에길이 경기장을 나서자 아이들이 그를 놀려댔다. 에길은 토르드 그라나손을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었다. 토르드가 말했다. "나와 함께 가서 우리 둘이 그 녀석을 혼내주자." 토르드는 에길에게 들고 있던 도끼 겸 창 으로 쓰는 미늘창을 건네주었다. 당시 이것은 흔히 쓰이던 무기였다. 그들은 아이들이 경기 를 하는 곳에 도착했다. 그림이 막 공을 잡아 방망이로 멀리 쳐내자 다른 아이들이 공을 잡 으러 달려갔다. 그걸 보고 에길은 그림에게 달려가 도끼를 휘둘러 두개골을 박살냈다. 그런 다음 토르드와 에길은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에길이 집에 돌아오자 스칼라그림은 그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베라는 에길이야말로 진정한 바이킹이라 하면서 그는 나 중에 자라서 자신의 전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에길은 이러한 시를 읊었다. 어머니가 말했지요 / 빠른 배와 가장 좋은 노를 / 사람들이 내게 사줄 거라고, / 바이킹들 과 함께 떠날 수 있는 배를. / 뱃머리에 우뚝 서서 / 배의 키를 잘 잡고 / 그리고 항구에 도 착하여 / 적들을 무찌를 그럴 배를. '에길의 사가' 레기 부아예 번역 에길의 탄식 납덩이 같은 무게가 / 내 혀를 짓누르고 있어 / 나는 노래 한 소절도 / 부를 수 없다. / 오딘이 / 내 소중한 보물을 훔쳐갔다. / 내 영혼을 들춰봐도 / 아무 도움도 되지 않네. 우리 집의 기대주가 / 땅바닥에 쓰러졌다 / 거센 바람 앞에서 / 고개 숙인 숲의 나무처러. / 피를 나눈 혈족의 몸을 / 이승의 자기 집에서 / 무덤에 넘겨주고 온 자가 / 어찌 기뻐할 수 있으리. 나는 먼저 / 어머니의 죽음과 / 아버지를 잃은 걸 말해야 해. / 내 찬양의 속삭임은 / 언 어의 신전에서 / 솟아오른다네, / 그곳은 언어가 사는 곳, / 그곳은 아름다운 단어가 / 잎사 귀처럼 장식되어 있는 곳. 우리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져 / 커다란 틈이 벌어지고 말았네. / 사나운 파도가 / 아버지 가 굳건히 쌓아놓은 것을 부숴 버렸네. / 얼마나 큰 틈이 벌어졌는가, / 얼마나 텅 비어버렸 는가, /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 내 아들을 앗아간 그곳이. 사나운 해신 란은 / 우리의 땅을 온통 짓밟아버렸네. /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 그는 전리품으로 빼앗아갔네. /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 인연의 끈이 끊어졌다네. / 내가 꼭 쥐 고 있던 / 그 단단한 줄이. ...바다는 탐욕스러운 해적처럼 / 나의 귀중한 재산을 앗아가버렸네. / 말하기도 끔찍하게 / 나의 혈족을 빼앗아갔다네. / 우리의 든든한 방패였던 그가 / 우리를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 고 떠났다네. / 죽음이라는 먼 길을 떠나며 /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 단 한 점의 나쁜 생각도, / 허위도 / 내 아들 안에서 자라나지 못했으리라는 걸. / 만약 내 나들을 지켜주던 어린 나무가 / 단단했다면, / 만약 내 아들이 야만스러운 적들에게 / 무릎을 꿇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에게는 내 말이 곧 법이었다. / 그는 항상 내 편이었다. / 설령 다른 모든 사람들이 / 나와는 다른 견해를 지녔다해도. / 다른 누구보다도 / 그는 나를 지지했다. / 그는 언제나 / 든든한 요새였다.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 나의 편이 되어줄 / 충실한 다른 동지들 / 과연 찾을 수 있 을까? / 배신자들 틈에서 / 친구들이 스러지고 / 그래서 내가 도망을 가야만 할 때, / 과연 누가 나를 엄호해 줄까? ...아들을 잃은 슬픔을 /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 그와 같은 죽음에 / 무엇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을까? / 어떻게 내가 그와 같은 아들을 / 또 낳을 수 있겠는가, / 형과 같 은 운명을 타고날 / 아이를.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 전혀 즐겁지 않다. / 설령 그들이 평화의 사도라 할지라도 / 나는 그들을 피하련다. / 이제 내 아들은 / 신의 저승세계에 도착했을 것이다. / 내 아내의 사랑하는 아들은 / 그곳에서 혈족들을 만나게 되리라.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 내 아들을 삼켜 버렸다. / 가증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 그는 이제 영원히 /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단 한 점의 불명예스러운 일도 / 결코 그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오딘, 신 중의 신이자 / 미미르(지혜의 샘에 사는 거인 족의 현자: 역주)의 친구인 그 에게 나는 앞으로 절대 / 기꺼이 제물을 바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설령 그가 / 나의 불행 에 대한 보상으로 /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걸 / 선물로 준다 할지라도. 늑대의 적이자 / 백전 노장인 그, / 그가 나에게 준 이 비할 데 없는 선물, / 그것은 바로 나의 예술이다. / 그리고 그와 함께 / 적들을 파멸로 이끄는 천성을 지닌 / 나는 그들의 배 반 행위를 / 뿌리뽑을 수 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 이주의 적인 / 저승의 여신 헬이 / 곶에서 나를 기다 리는 것이 보인다. / 그렇지만 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 즐거이, / 그리고 아무 두려움 없이 / 죽음을 기다린다. 에길 스칼라그림손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죽음' 락스 골짜기의 사가 사가의 일반적인 주제인 꿈은 아이슬란드의 상상력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꿈은 기본 적으로 미래를 예시한다. 꿈은 영웅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웅운 신이 예정해 준 자신의 운명을 명예롭게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자 구드룬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올 겨울에 많은 꿈을 꿨어요 그중 네 가지 꿈이 혼란스러워요. 그런데 아무도 그 꿈에 대해 만족스럽게 해몽을 하지 못해요. 물론 내 마음에 들게 해몽을 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자 게스트가 말했다. "당신의 꿈에 대해 말해 봐 요. 어쩌면 그것에서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자 구드룬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집밖의 어떤 시냇가에 서 있었어요. 머리에는 나에게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나는 모자를 벗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나는 모자를 벗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이 나에게 그러지 마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모자를 우악스럽게 벗어 시냇물에 던졌어요, 그러자 꿈은 거기서 끝났어요." 구드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 꿈은 이렇게 시작돼요. 난 호숫가에 서 있던 것 같아 요. 손목에 은팔찌를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내 것이었고, 나에게 잘 어울려 보였어요. 나는 그것이 귀중한 장신구라는 생각이 들어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내가 그 렇게 생각한 순간, 팔찌가 손목에서 미끄러져 나와 물 속으로 빠져버린 거예요. 나는 팔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 팔찌를 잃은 상실감은 보통 그런 장신구를 잃어버렸을 때와 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어요. 그리곤 잠에서 깨어났어요." 게스트는 다만 이렇게 말했 다. "그건 단지 꿈에 불과해요." 다시 구드룬이 말을 이었다. "세 번째 꿈은 이래요. 나는 금팔찌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 요. 그런데 이걸 잃어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 팔찌를 먼젓번 것보다 더 오래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이것이 먼젓번 것보다 소중하게 여겨지 질 않았어요. 금이 은보다 훨씬 귀한데도 말이지요. 잠시 후 나는 몸이 비틀거리는 것 같아 서 손을 짚어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요. 그러자 금팔찌가 돌에 부딪쳐 두 조각이 나버렸어요. 깨진 팔지 조각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그때 느낀 감정은 상실감보다는 비통함이었 어요. 왜냐하면 팔찌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으니까요. 팔찌의 갈라진 면을 자세 히 보니 다른 금들이 더 간 것 같았어요. 그러자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그것을 깨뜨리 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꿈은 이렇게 끝났어요." 게스트가 말했다. "이 세 번째 꿈은 좋지 않은 것 같군요." 구드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번째 꿈은 이렇습니다. 나는 온갖 보석들로 치장된 금투 구를 쓰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내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그 투구가 너무 무겁게 여겨 져 마음에 걸렸어요. 어찌나 무거운지 간신히 머리를 들고 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렇다 고 그 투구의 흠을 잡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나는 그걸 벗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하지 만 투구가 내 머리에서 벗겨져 흐밤스피오르드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러자 나는 잠에서 깨 었지요." 게스트가 말했다. "이 꿈들의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같은 것으로 여겨질 거예요. 나는 그것들을 거의 비슷하게 해몽할 테니까. 당신은 네 명의 남편을 맞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당신의 첫 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의 결 합이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이 머리에 커다란 모자를 쓰고 그것이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당신이 모자를 우악스럽게 벗어 물 속에 던져버린 다는 것은 당신이 그의 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릴 때 '바다에 던지다' 라는 표현을 쓰지요." 게스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두 번째 꿈에서 손목에 은팔찌를 꼈다고 했지요. 그 건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한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이지요. 당신은 그를 매 우 사랑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해요. 그가 익사해서 당신 곁을 떠 나게 되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그 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은 세 번째 꿈에서 금팔찌를 낀 것 같다고 했지요. 그건 세 번째 남편과 결혼한다는 뜻입니다. 금이 은보다 귀하고 더 비싼데도 당신 남편은 그런 대접을 못 받을 겁니다. 그리 고 그때쯤이면 이 나라의 풍습에 일대 변화가 올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당신의 이번 남편 은 새로운 신앙과 의식을 받아들일 텐데 우리는 그것이 더 낫고 성스럽다고 여길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조심하지 않은 탓에 팔찌가 조각났고 그 조각들에서 피가 흘렀다는 것은 당 신의 남편이 살해된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당신의 결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의 네 번째 꿈에 대해 얘기해 보죠. 당신은 보석으로 치장된 금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무거웠다고 했지요. 그건 당신이 네 번째 남편 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강력한 수장이 될 것이고, 당신을 억누를 겁니다. 그 리고 당신이 투구를 흐밤스피오르드에 빠뜨렸다는 건 그가 그 피오르드에서 생을 마감한다 는 뜻입니다. 이 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락스 골짜기의 사가' 소스틴 베블런 번역, 1925년 에다 '에다'는 바이킹 문명의 대표저인 문학작품이다. 에다의 시적인 작품들-그 문체는 우리 가 보기에는 생략이 많고 복잡하다-은 사가의 산문보다 더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 이 시들 은 구전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 내려왔으며 스칸디나비아에 라틴 문자가 전해 진 이후에야 문자로 전해진 이후에야 문자로 시록되었다. 에다 '에다' 라는 명칭은 13세기에 기록된 '산문 에다'와 '시의 에다'라는 서로 다른 두 사 본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중 더 오래된 스노리 스투를루손(1179-1241)의 <산문 에다>는 그 기원이 1230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스칸디나비아의 신화를 최초로 집대성해 놓은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옛 시들은 이교도 신화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내포하고 있는 헤이티와 케닝 스로 알려진 비유법에 의존한 바가 크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에다'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스노리가 젊은 시절을 보낸 아 이슬란드 남부의 지성의 중심지인 오디가 전와된 것이 아닌가싶다. 하지만 이것이 '위대 한 할머니'라는 고유의 뜻을 지닌 말일 수도 있다. 에다의 시인 '리그스툴라'에 그 말이 쓰였는데, 이는 '모든 지식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중세 유럽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역사학자였으며, 그의 < 헤임스크링글라>는 노르웨이 왕조의 신화적인 기원부터 13세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 다. 이는 그보다 나중에 나온 프로이사르트의 연대기보다 더 우수하며, 객관성이나 사료를 대하는 자세, 조심성 있게 추론해낸 역사의 해석 등으로 근대 역사학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 다. 스노리가 '에길의 사가'의 저자일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트림스크비다'는 '시의 에 '의 시 중 하나로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에다'의 원고인 '코덱스 레기우스'는 현재 레이캬비크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13 세기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고문서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것은 1210-1240년경에 만들어진 원고의 필사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구전된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성스 럽고 영웅적인 내용의 시들을 모은 것으로, 13세기에 필사자들이 문자로 옮겨 놓았다. 입으로 읊는 시 이 시들의 원저자는 누구이며, 그 기원은 어디일까? 이에 대한 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 다. 문헌학이나 고고학, 역사학적인 분석과 문체의 분석, 시 자체(풍경 묘사, 그 지역이나 시 대의 특이한 식물상과 동물상) 등을 기준으로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 북유럽에서는 뒤늦게 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1000년경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기록이 가능 해졌다. 룬 문자는 긴 글을 기록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전에는 모든 걸 암기 해야 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운법의 기교와 악센트로 묘미를 살리는 시의 연, 온갖 수 사적인 장치로 장식된 시는 영웅적인 행위와 영광스러운 일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매 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에다의 시는 입으로 읊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글로 쓰거나 읽 으면 그것이 지닌 본래의 맛을 잃게 된다. 따라서 기록으로 남은 것은 근사치일 수밖에 없 다. '툴라'나 '갈드르' 같은 초기 형태부터 정교한 '드로트뵈트'까지 서구는 주로 청각 적이고 음악적이었다. 음악에서 통주저음처럼 규칙적인 모음운을 리드미컬하고 능숙하게 구 사하면서 상상 속의 이야기를 끝없이 이끌어 나갔다. 그 시들의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노 래나 찬가, 성가였을지도 모른다. 레기 부아예 '북유럽의 신앙', 1973년 발드르의 죽음 부정한 로키가 오딘의 둘째아들인 발드르를 죽인 사건은 '커덱스 레기우스'를 이루는 20 편의 에다의 시 가운데 첫 편인 '볼루스파'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일부이다. 천지창조에서 신 들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북유럽의 우주의 역사는 예언을 주제로 전개된다. 선량한 발드르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꿈을 꾸었다. 아사 신족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 기해 주자 그들은 발드르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달라고 신께 은총을 빌었다. 프리그(발드 르의 어머니: 역주)는 모든 만물에게서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발드르와 아사 신족은 장난삼아 발드르를 총회의 회의장에 세워놓고 발길로 차거나 때리거나 돌을 던 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해를 입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굉장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로키 라우페이아르손은 발드르가 해를 입지 않아 불만스러웠다. 그는 프리그의 집에 있는 펜살리를 찾아가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러자 프리그가 이여인에게 회의장에서 아사 신족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모드들 발드르를 공격했 지만 그는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프리그가 말했다. "무기나 나무로는 발드르를 해칠 수 없지. 내가 그들 모두에게서 맹세를 받아냈으니까." 그러자 그 여인이 물었다. "모든 만물이 발드르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는 겁니 까?" 프리그가 대답했다. "발할 서쪽에 나무의 새싹이 자라고 있소. 일종의 겨우살이라 합디 다. 그 나무는 너무 어려서 맹세를 받을 수가 없었소." 그 여인은 곧 사라졌다. 로키는 겨우살이가 있는 곳으로 가 그 나무를 꺾어 들고 총회장 으로 갔다. 호드는 사람들이 빙 둘러선 곳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장님이었다. 그를 보고 로키가 말했다. "당신은 왜 발드르를 공격하지 않나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발드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 나에게는 무기도 없고." 그러자 로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해서 발드르를 영광되게 해줘요... 어 디 있는지 내가 안내할 테니. 이 막대기로 그를 공격해요." 호드는 겨우살이를 받아들고 로키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발드르를 공격했다. 나무가 날아 가 그에게 명중하자 그가 땅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신들이 정신을 차리자 프리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사 신족 중 누가 자신의 사랑과 호의를 얻고 싶어하는지, 누가 헬(암흑과 죽은 자의 여신: 역주) 에게 찾아가 발드르를 찾아볼 것인지, 그리고 헬이 발드르를 다시 아 스가르드로 도려보내 준다면 누가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할지를 물었다. 이 여행의 적임자로 오딘의 아들인 대머리 헤르모드가 거명되었다... 아사 신족은 발드르의 시체를 바닷가로 옮 겼다. 발드르를 실은 배는 가장 커다란 배로 이름이 흐링고르니였다. 아사 신족은 이 배를 띄워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화장식에 온갖 종들이 참석했다. 가장 먼저 오딘이 프리그와 발키리들, 그의 큰 까마귀들과 함께 왔다. 프레이르는 굴린부르스티 또는 슬리드루그타니라 불리는 수퇘지가 모는 마차를 타고 왔다. 헤임달은 굴토프라는 말을 타고 왔다... 헤르모드는 깊은 골짜기를 9일 동안 달려 헬에게 닿았다... 헤르모드는 헬에게 발드르와 함께 집에 돌아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또 아사 신족이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겨 있는지 말해 주었다. 하지만 헬은 발드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시험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산 것이나 죽 은 것이나 가릴 것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를 위해 운다면 그는 아사 신족에게 돌아 갈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울기를 거부하면 그는 나와 함께 지내야 한다." 헤르모드는 돌아와 보고들은 것을 모두 전했다. 그러자 아사 신족은 전세계로 사자를 보 내 발드르가 헬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울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모두들 그렇게 했 다... 스노리 스투를루손, '에다' 앤소니 폭스 번역, 1987년 프리티오프의 사가 낭만주의 시대의 스웨덴의 위대한 시인 에사이아스테르네르는 1820년경 '프리티오프의 사가'를 썼다. 이 작품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스웨덴 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아이슬란 드 사가를 모방한 이 작품은 바이킹의 아들 프리티오프와 왕의 딸 잉게보리 공주 사이의 비 극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프리티오프와 잉게보리 힐딩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 그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 두 식물이 자라고 있네. / 북 유럽에서는 처음 보는 이들은 너무나 아름다워 모두가 사랑했다네. 그중 하나는 / 머리를 힘차게 하늘을 향하고 있네. / 근처의 있는 숲의 왕인 참나무처럼 / 그것은 곧고 품위가 있네. 다른 하나는 차가운 겨울을 사로잡은 향기로운 장미 같네. / 아직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 고 있지만, /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려고 하네. 폭풍우가 하릴없이 헤매다 사라지네. / 모진 바람 속에서도 나무는 늠름하게 서있네. / 하 지만 태양이 나타나면 / 장미도 곧 꽃을 피우겠지. 이 둘은 행복하게 살았다네. / 젊고 활기찬 참나무는 / 프리티오프라네. / 아직 피지 않은 장미, / 그건 바로 아름다운 잉게보리라네. 햇빛을 함빡 받은 그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 사랑의 여신인 프레이야가 그들은 자신의 궁으로 데려와 /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네. 찬란한 달빛이 / 숲에 어른거리는 밤이면 / 사람들은 풀밭에서 / 요정의 왕과 여왕을 본 것 같다고 한다네. 룬 문자를 깨치자마자 / 왕이 된 것보다 더 행복해진 프리티오프는 / 그걸 애인에게 가르 쳐주며 / 무한한 행복을 느꼈네. 때로 그녀는 프리티오프와 함께 / 그의 배를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갔네. / 그가 능숙하게 방향을 틀 때면 / 그녀는 기뻐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네. 사람들이 난로가에서 지내는 겨울밤이면 / 프리티오프는 글을 읽으며 지냈네. / 그는 신 들의 무훈담과 / 여신들의 화려한 이야기를 좋아했다네. 그는 생객했다네. "프레이야의 황금색 머리칼은 / 바다처럼 풍요롭고 바람에 살랑이는 모 습이 더없이 아름다워라. / 잉게보리의 황금 그물 머리칼도 / 그녀를 둘러싼 장미와 백합처 럼 아름다워라. 잉게보리의 풍만하고 희고 부드러운 가슴. / 그녀의 비단옷 아래 그 가슴은 부풀어 있다 네! / 부풀어오른 비단은 / 장미 봉오리처럼 아름다운 두 요정을 드러내고 있다네. 음유시인들은 게르드의 아름다운 두 볼을 높이 칭송하네. / 아침 햇살 같은 신선한 그 볼 을. / 하지만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잉게보리의 볼은 / 새벽의 여명보다도 신선하다네. 그리고 그녀의 마음씨는 난나처럼 / 선량하고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네. / 아! 행복한 발 데르.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올라 / 음유시인들이 목청껏 읊어댄 그의 죽음을 함께 나누네. 나의 죽음이 발데르와 같기를- / 충실한 소녀가 나를 위해 울어준다면- / 난나처럼 상냥 하고 진실된 소녀가- /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헬과 함께 지내리!" 하지만 왕의 딸인 그녀는 / 베틀에 앉아 노래 부르며 / 비단을 짜고 있네. / 그녀는 옛날 의 용맹한 영웅들이 무훈을 쌓은 영광스러운 장면을 / 무늬로 넣어 재현하네. / 그녀의 가 는 손가락 밑에서 / 그들이 온순하게 그녀를 바라보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볽힌다네. / 그들이 그녀의 어릴 적 친구와 / 어딘가 닮은 걸 확인 하고는 / 들뜬 마음으로. 그리고 프리티오프는 돌아다니다가 / 키 큰 자작나무에 I와 F를 새겨놓았네. / 그 글자들 은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처럼 / 한데 얽혀 있다네. 속세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 난리법석을 떠는 낮에도 /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 한 가지. / 그들의 운명을 하나로 하는 것. 희미한 서리 하나 들리지 않고 / 모든 것이 고요한 밤이 오면 / 그들은 잠이 들지만 / 여 전히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끔을 꾸네. ...그러자 힐딩이 말했다. / "이보게, 이 사랑은 그대에게 고통이 될 거야. / 그녀가 원한 다 해도 / 그대는 벨레의 딸과 결혼할 수 없네. 벨레왕으로 말할 것 같으면 / 그의 조상이 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네. / 내가 보기에 토르스텐의 아들은 / 그와 같이 고귀한 태생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프리티오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누구에게나 조상은 있지요. / 하지만 저는 우리 숲의 왕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므로 / 고귀함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민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 그는 어디에 가든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 운명은 고통을 줄뿐만 아니라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 희망을 가지면 왕처럼 당당해질 수 있는 법. 토르는 언제나 /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후원자입니다. / 자신의 칼에 의지하는 자는 / 자신의 운명의 주인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백합이여, 안심해요. / 그대를 위해 나는 내 피를 바치겠소. / 나는 토르에 게 묻겠소. / 나에게서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갈 수 있는지." 바이킹의 계율 하늘을 빙빙 돌며 사냥에 나선 매처럼 멀리, 널리 그대는 지금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바이킹 계율을 열심히 글로 옮기고 있다.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듣고 싶지 않은가? "당신에게는 둥근 하늘 외에는 다른 어떤 천막도 없 다. 바이킹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당신은 방패 위에 누워 손에 칼을 쥐고 잔다. 안에 틀어박 혀 있지 마라.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은 없다. 적과 마주칠까 겁낼 것 없다. 너의 망치를 들 고 토르는 거인족들을 물리친다. 무서워할 것 없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질 필요도 없다. 폭풍 이 불 때에는 돛을 더욱 높이 올려라. 그 순간이 바로 바다가 축제를 여는 때이다. 도망치는 사람은 놓아주어라. 그는 죽어 마땅하다. 그의 배는 차라리 즉시 침몰되는 편이 낫다. 너의 배에 절대 여자를 태워서는 안 된다. 여자라면 육지에서 예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자 들은 항상 남자를 유혹하여 일을 그르치게 한다.....그리고 용감한 자만이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철로써 지배해야 한다. 금은 그것의 노예에 불과하다. 네 몫의 전리품은 운수에 의해 정해진다. 그 외에는 요행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명예를 걸고 그런 걸 막 아야 한다. 싸우게 되면 바이킹은 네 사람 몫의 힘을 내야 한다. 절대 물러서면 안 되고 무 슨 수를 쓰든 이겨야 한다. 위험을 향해 용감히 뛰어들어라. 그라고 필요하다면 죽어라. 이 를 어기면 우리 무리에서 축출되리라.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 뒤에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무장을 해제당한 적은 배려해 줘야 한다.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 건 비열한 짓이다. 당 신이 우리들 가운데 돋보이고 싶다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라, 부상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그것이 너에게 명예로운 일이다! 이상이 법전, 다시 말해 계율이다." 테그네르의 '프리티오프의 사가' 파리의 포위공격 프랑스의 연대기작가인 아봉은 885년 지루하게 이어진 데인인의 파리 포위공격을 맞아 용 맹스럽게 저항한 외드 백작과 그의 용감한 200명의 부하들을 찬양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여, 말하라. 너그러운 영웅, 자비심 많은 사제인 조슬랭 주교가 너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저승의 왕 플루토와 한 패인 데인인들이 너에게 어떻게 했는 지 말하라.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나는 아무도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아 무척 놀랐어요. 당신은 그 일들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예기해 봐요." 다음은 그 잔인한 녀석들이 너에게 가한 만행에 가한 예기이다. 돛대가 높이 솟은 70척의 배와 그보다 작은 배들이 잔뜩 몰려왔다... 그들이 수심이 깊은 센강 하류의 여러 지점을 차 단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강이 어떤 큰 동굴 속으로 사라져버렸나 의심할 지경이었다. 강물 은 소나무와 참나무, 느릅나무, 오리나무의 숲으로 변해버렸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 중 두 사람이 특히 용감했다. 한 사람은 승리의 화신, 무적의 외드 백 작이다. 쇠몽둥이로 파리 성벽의 밑부분을 부수려고 하는 적들에게 그는 기름과 밀랍, 송진 을 쏟아 부었다. 이 혼합물은 사나운 기세로 데인인들의 머리가죽을 녹였고, 그들의 머리털 을 모두 빠지게 했다. 적들은 일부는 항복했고, 나머지는 강물로 뛰어들었다. 다른 또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외드의 동료이자 유능한 주교 에블이었다. 그는 쇠꼬 챙이로 고기를 꿰듯이 화살 하나로 일곱 사람을 명중시켰다. 그리고는 농담 삼아 그들을 부 엌으로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그 누구도 이 두 영웅보다 뛰어나지 않았고, 진실로 그만한 능 력을 지니지 못했다. 이들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한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면의 용사들은 기독교가 지닌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4만 명을 헤아리는 적들에게 용 감하게 대항했다. 적군은 끊임없이 새로운 원병을 보충 받아 공세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색 칠을 한 방패에 돌들이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빗발치는 화살 세례에 방패는 신음소리를 냈고 투구는 삐걱거렸다. 약탈전에서 돌아온 기병이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 참전했다. 잘 먹고 휴식을 취한 그들이 치고 받는 난투극에 합류했다. 탑을 향해 돌을 던져보기도 전에 그들 가운데 많은 인원이 치명상을 입은 채 그들의 배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이 애석하게도 마지막 숨을 거두자 데인족 여인들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통한의 눈 물을 흘렸다. 그들은 각자 소리 높여 남편을 불렀다. "당신은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가마솥 인가요? 나는 잘 알고있어요. 오, 악마의 아들이여,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승리를 거둘 수 없어요..." 이렇게 해서 이 야만족의 여인들에게 성탑은 가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낮고 둥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의 기초를 허물고 싶은 열망을 지니고 있었 다. 성벽에 커다란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러자 곧 꼭대기에서 데인인들을 향해 거대한 수레 바퀴가 투하되었다. 그들 가운데 여섯 명이 목숨을 잃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졌다. 사람 들은 그들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들은 전사자의 수를 늘렸을 뿐이다. 아봉, <노르만인들에 의한 파리 포위공격>, 1000년겅 룬 문자 1000년경에 스칸디나비아에 라틴 문자가 젼래되었다. 그전에는 룬 문자가 기록을 위한 유 일한 수단이었다. 돌에 새겨진 이 신비한 기호는 오딘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북유럽인들 은 이것을 마법과 주술,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외경과 공포의 대상으 로 여겼다. 룬 문자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오랫동안 폭넓게 사용했다 해도 그것이 그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룬 문자가 발생한 곳은 스칸디나비아가 아니다. 룬 문자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이미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룬 문자는 다뉴브강 중류지방에서 게르만인들이 처음 사용했고, 그후 주요 교역로를 통해 덴마크에 전해졌다. 최초의 '푸타르크' 푸타르크(Futhark)는 북유럽의 알파벳이라 할 수 있다. 알파벳이라는 말이 그리스 문자의 첫 두 문자인 알파와 베타로 이루어져 있듯이 푸타르크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의 처음 여섯 문자인 f, u, th, a, r, k로 이루어진 말이다. 룬 문자는 본질적으로 비명에 쓰이는 문자로, 로 마자의 대문자처럼 비문을 새기기 위해 돌에 새겨졌다. 이것은 필기체 문자가 아니었다. 하 지만 이것은 목판 비명을 새기는 데에도 쓰였고, 귀금속으로 만든 장신구에도 룬 문자가 새 겨진 것이 많이 있다. 최초의 푸타르크는 24개의 기호로 이루어져있다. 이것들은 처음 만들어진 이후 9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소리와 그것을 표기하는 기호가 극심하게 변화했고, 기호의 수도 24개에서 16개로 줄어들었다. 푸타르크의 초기 형태는 고대 게르만어의 음운체계를 표기하는데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 다. 특히 자음이 그런 특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갖고 있다. 모음은 스칸디나비아어의 필요성 에 맞춰진 것이다. 다음은 초기 푸타르크이다. f u p a r k g w : h n i j e p R s t b e m l ng o d 규정에 의해 정해진 철자법은 없었다. 오늘날에도 비문을 각각의 단어로 분절해내기 어려 운 경우가 있다. 때로는 점을 찍어 분절을 명시하기도 했지만 항상 그런 것을 아니었다. 비명학자가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비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때에는 그 비문이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 십상이다. '루나'라는 단어가 '숭배하다'라는 뜻을 지 닌 게르만어의 '라우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따라서 룬 문자는 신비한 의 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부 에다의 시들도 '강력한' 룬 문자가 지닌 신비한 능력을 열거하고 있다. 각각의 룬 문 자는 고유의 특성을 지녔다. 룬 문자를 새긴 조각공들이 아주 특별한 권리를 누렸다는 점도 깊이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룬의 대가'들은 현명하고 굉장한 인물로 여겨졌다. 제2의 '푸타르크' 제2의 푸타르크는 8세기 말 또는 9세기초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자의 수는 24개에서 16개로 줄었지만, 몇몇 문자들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발음을 표기하 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런 감소는 그리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모음을 표기하기 위해 조각공들은 2개의 모음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이중모음). 이것은 오늘날 영어나 프라스어의 -au, -eu, -ou와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새로운 푸타르크의 16문자이다. f u p q r k h n i a s t b m l R 그리고는 드디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라진 전사나 상인을 추모하기 위한 제문 을 비석에 새기는 시대가 열렸다. 다듬지 않은 천연의 돌에 직접 비문을 새긴 경우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영광의 주인공은 적어도 마을의 수장 정도 되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모리스 그라비에 '스칸디나비아 사람들'. 1984년 장례 의식: 아라비아 여행자의 이야기 바이킹에게 죽음은 다른 세계로의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망자가 발할라로 즉시 갈 수 있도 록 화장을 하거나, 또는 신들의 나라로 신비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여행을 했다. 왕과 영 웅, 농부는 다른 세계에서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을 함께 매장해 주기를 원했다. 그 런 이유로 바이킹들은 이국의 여행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장례 의식을 발전시켰다. 아리비아의 연대기작가인 이븐 파들란 덕분에 우리는 992년 볼가강 기슭에서 거행된 루스 수장의 화장 장면을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 볼 수 있다. 나는 그들(루스)의 수장이 죽으면 화장은 장례 절차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 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장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수의가 완성될 까지 열흘 이상 땅속에 따 로 매장되어 있었다. 망자가 가난하면 작은 배를 만들어 거기에 시체를 싣고 화장했다. 하지 만 부자면 그의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삼등분했다. 그 하나는 가족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수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비드(에르피욀 또는 장례용 맥주)를 마련하 기 위한 몫이었다. 나비드란 망자의 여자 노예가 함께 화장되는 날 마시는 술이었다... 수장이 죽으면 그의 가족은 하녀와 여자 노예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가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 다. 그게 누구든 그 약속은 지켜야 했고, 이를 취소할 수는 없어서다. 그 말을 내뱉은 여인 이 아무리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싶어도 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수장이 죽자 그의 여자 노예들도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그 와 함께 죽겠는가?"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제가하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부터 그녀는 다른 두 노예의 감시를 받았다. 그 노예들은 그녀를 발끝까지 씻겨줄 정도로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다. 망자의 수의를 만드는 등 준비작업을 하는 동안 그와 함께 죽 기로 한 여인은 마치 즐거운 잔치를 준비하듯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수장과 그 의 노예를 함께 화장하기로 한 날이 되자 나는 그를 실어 갈 배가 정박되어 있는 강가로 나 갔다. 그 배는 강둑에 올라와 있었다... 곧 그 둘레에 커다란 목제 발판처럼 생긴 것이 설치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 주위를 빙빙 돌았다. 하지만 망자의 시신 은 여전히 무덤 속에 있었다. 그들은 아직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관을 가져와 배에 싣고는 디바그(무늬를 놓아 짠 비단)로 만든 양탄자와 쿠션을 그 위에 덮었다. 이어 그들이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여인이 다가와 쿠션을 관 위에 넓게 펼쳐 놓았다. 그 녀는 그뿐 아니라 망자의 수의를 입히는 일부터 노예의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의식의 전과정 을 집행했다. 죽음의 처사는 체격이 건장하고 표정이 근엄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목제 틀 위에 있던 흙이 제거되었고, 틀도 치워졌다. 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겼다. 꽁꽁 언 시체가 거무 죽죽했다. 사람들은 시체를 무덤에 매장할 때 맥주와 과일, 류트라는 악기까지 함께 묻었는데, 그것 들도 같이 꺼냈다. 놀라운 사실은 시체가 살색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시체에 수의를 입히는 의무를 수행했다. 속바지와 바지, 장화, 상의와 디바그로 만든. 금단추가 달린 망토를 시체에 입히고 나서 디바그로 만든 모자를 씌우고 칼 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시체를 배에 쳐놓은 천막으로 옮겼다. 그들은 나비드와 과일, 향기로 운 풀들을 시체 주위에 빙 둘러 늘어놓았다. 또 빵과 고기, 양파도 시체 앞에 던져놓았다. 그 과정을 마치고 그들은 개를 한 마리 잡아 두 토막을 낸 후 그 조각들을 배 안에 던졌 다. 이어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무기를 모두 가져와 그의 곁에 쌓아놓고, 말 두 마리를 끌고 와서 땀을 흘릴 때까지 달리게 했다. 그리고 칼로 말을 두 토막을 낸 후 그 살을 배 안에 던졌다. 암소 두 마리도 그렇게 했다. 수탉과 암탉도 각각 한 마리씩 죽여 역시 배 안에 던 졌다. 그러는 동안 죽음을 자청한 여자 노예는 각 천막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각 집의 주인은 그녀와 성관계를 가지며 말했다. "네 주인에게 가서 말하라. 그에 대한 사랑 으로 이 행위를 한다고." 금요일 오후가 되자 그들은 그 여자 노예를 그들이 만든 문틀처럼 생긴 곳으로 데리고 갔 다. 그녀는 남자들의 손바닥을 딛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가 섰다. 사람들이 그녀를 내려놓자 그녀는 이방어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들이 그녀를 다시 들어올리자 그녀는 조금 전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들이 그녀를 다시 내려놓았다가 들어올리자 그녀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똑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녀에게 암탉을 한 마리 주었다. 그녀는 닮의 목을 잘라서 던져버렸다. 그들은 그 닭을 주워 다가 배 안으로 던졌다. 나는 통역자에게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 처음에 그녀 를 들어올렸을 대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것 좀 봐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여 요!'두 번째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죽은 친척들이 빙 둘러앉아 있는 것이 보여 요.' 세번째는 이런 말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제 주인님이 천국에 계시는 게 보여요. 천국 은 초록빛의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분 곁에는 남자들과 어린 소년들이 있어요. 그분이 저를 부르는군요. 저를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게 해줘요!'" 그들은 그녀를 배가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팔에 끼고 있던 팔지 두 개를 풀어 자 신을 죽이기로 되어 있는 죽음의 천사인 노파에게 주었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두 개를 빼어 죽음의 천사의 딸들에게 주었다. 이어 그들이 그녀를 배에 오르게 했지만, 천막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나무 방 패를 든 사내들이 한 때 몰려왔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나비드가 든 술잔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 통역자가 내게 말해 주었다. "그녀가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두 번째 술잔이 주어졌다. 그녀는 그 잔을 받아들고 길게 노 래를 불렀다. 그러자 노파가 그녀에게 어서 잔을 비우고 주인이 기다리는 천막 안으로 들어 가라고 재촉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 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머리만 반쯤 천막 안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노파는 그 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녀를 천막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자신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사내들이 노예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나무 막대기로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야 다른 소녀들이 겁을 먹고 자기 주인과 함께 죽기를 거절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여섯 명의 사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모두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를 죽은 주인 곁에 눕혔다. 두 사내가 그녀의 팔을 잡고, 둘은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죽음의 천사는 그녀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 그것의 양끝을 두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것을 잡아당기라는 신호였다. 죽음의 천사는 넓적한 단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가 슴을 마구 찔렀고, 그 사이에 사내들은 그녀의 목을 힘껏 졸랐다. 그녀가 죽을때까지. 그러자 망자의 가까운 친척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나뭇조각을 들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 다... 죽은 소녀가 주인 곁으로 옮겨지자 배에 쌓아놓은 나뭇단에 불이 붙어졌다. 마침내 사 람들이 불을 붙이기 위해 너도나도 짚단과 장작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각자 들고 온 횃불을 장작더미에 던지자 불길이 활활 타올라 쌓아놓은 나무와 배, 천막, 죽은 남자, 노예 소녀 등 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레기 부아예 '북유럽의 신앙', 1973년 일상생활 용품들 고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연구하면 바이킹의 가정생활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장인으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장 신구와 보석, 농기구, 가구를 만들어 썼다. 바이킹은 양털을 잣기 위해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추가 매달린 물레가락이나 북을 사용 했다. 뉴펀들랜드의 랑소메도에서 물레가락이 발굴되자 비로소 그곳이 바이킹의 유적지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돌이나 흙을 구워 만든 추는 날실이 수직으로 짜이도록 베틀 위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용도로 쓰였다. 추를 조절하려면 나무나 고래의 뼈, 드물게는 쇠로 만든 특별한 빗을 이용 했다. 양털을 빗기는 빗과는 달리 머리 빗은 항상 뼈로 만들었다. 바이킹은 재주가 많은 대장장이로, 스웨덴에서 출토된 가마솥에서 알 수 있듯이 철판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먹을 것은 나무로 만든 용기나 비눗돌(불순물을 다소 함유한 활석의 일종: 역주)로 만든 그릇에 넣어 보관했다. 랑소메도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뉴펀들랜드 북서 해안 근처의 랑소메도에서 살았던 주거 흔적이 발견 되자, 바이킹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수세기 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심 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신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의 식민지인 랑소메도는 뉴펀들랜드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으 며 최근에는 그곳에 캐나다의 국립공원이 들어섰다. 팍스캐나다(국립공원과 역사공원을 관 리하고, 유적지의 조사작업을 담당한 고고한 연구팀을 운영하는 연방정부의 한 부서)는 발 굴작업을 벌였다. 그 지역은 이미 1961년부터 1968년에 걸쳐 노르웨이 조사단이 북아메리카 의 최초의 바이킹 주거지인 빈란드를 조사하며 발굴작업을 벌인 적이 있다. 랑소메도는 북 아메리카에 있는 유일한 바이킹 주거 유적지이다. 이 식민지는 전설적인 인물인 레이프 에 릭손의 시대인 9세기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적지에는 떼나 이탄을 입힌 8개의 건물이 있다. 그 중에는 커다란 집이 3채 있고, 이 보다 작은 건물들은 작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을 발굴하자 2,400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1,500점 정도는 목제품으 로 이탄 습지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주목한 만한 발굴을 한 이들은 노르웨이인들이다. 이들 이 발견한 광물 찌꺼기로 만든 벽돌과 숯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그 연대가 860~890년과 1060~1070년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또한 바이킹이 이미 그곳을 점령했 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 85점울 발견했다. 한편 팍스 캐나다는 45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다 른 바이킹 유적지에서 발견한 유물의 숫자와 비교해 보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이킹 주거지의 수와 형태에서 랑소메도에 필적하는 아이슬란드의 흐비타르홀트에서는 88 점의 유물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아이슬란드의 유적지에서는 3층짜리 건물의 터가 발견되었는데도 그렇다. 랑소메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흐비타르홀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쇠로 만든 못이나 대갈못이었다. 팍스 캐나다는 식민지의 성격에 관한 의문점을 풀려는 의도에서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 지역이 사람들이 오랜 기간 살던 곳인가? 과연 그렇다면 그곳이 항구적인 주거지였을 까? 식민지의 경제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목초지, 목재, 철- 이것들만이 탐나는 요소였을 까? 바이킹은 그들이 스카라엘링(못생긴 사람)이라고 부른 원주민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을 까? 원주민들이 바이킹과 한 시대에 그 지역에 살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였을까? 인 디언? 에스키모(이누이트)? 혹은 이 두 인종의 혼혈? 바이킹은 거주하기가 불편한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이킹이 그 곳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집을 손본 횟수이다. 이탄으로 만든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집은 수명이 25년 정도로, 그 기간이 지 나면 집을 개·보수하지 않은 채 버려져 불에 타버렸다. 따라서 그 지역은 사람이 25년 이 상 살았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 있는 스칸디나비아인의 집들은 대부분 주춧돌이 놓여 있 다. 하지만 랑소메도에서는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집들에 주춧돌이 없다는 사실 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이슬란드와 마찬가지로 그린란드에서도 일시적인 구조물은 기초가 튼튼하지 않았다. 이 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랑소메도의 바이킹 마을은 항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 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수도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스칸디나비아의 집들은 30명 이상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20명 이상이 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모두 동시에 그곳에 기거했다면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총 주민 수는 90명을 넘지 않 았을 것이고, 아마 60명이나 그 이하였을 것이다, 바이킹은 무엇에 끌려 랑소메도에 머물게 되었을까? 그곳은 경치는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풍랑에 떠밀려 그곳에까지 왔던 것은 아닐까? 그린란 드 남서부 주민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배가 거친 래브라도 해류에 밀려 벨아일 해협에 이르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거대한 북쪽 반도의 끝부분에 돌출된, 주민이 살지 않는 땅이 뱃 사람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게다가 옛날에야 어땠는지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오늘날 보기에는 그 지역은 바이킹에게 익숙한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 남서부와 아주 비슷하다. 그곳에는 그들을 유인하는 요소가 많았다. 우선 숲이 근처에 있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 들은 해변에서 떠내려온 재목을 모으거나 유럽에서 목재를 가져와야만 했다. 그곳에는 또한 바다표범과 바다코끼리, 고래, 대구, 연어, 순록, 그리고 여우(이것은 혐오 의 대상이 아니었다)도 있었다. 중세 말기에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가 유럽 시장에 유입될 때까지 그린란드인들은 바다코끼리의 엄니를 유럽에 공급했다. 중세의 문서들에는 이 동물 의 가죽과 특히 그 가죽으로 만든 밧줄을 언급하고 있다. 바이킹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 말 린 생선, 특히 대구는 이미 유럽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필 요로 한 수요 이상의 어획고를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을 거래하는 데는 랑소메도에서 발견되 는 아메리카자작나무의 무게를 달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킹 사가에는 신세계에 있 는 거대한 대구 어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곳은 목축과 철광 개발에 유리한 곳이었을까?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서부의 바이킹은 전통적으로 농사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기후조건과 척박한 토질, 북부의 짧은 작물 생육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가축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고, 새로운 땅을 찾을 때에도 좋은 목초지가 있는지 의 여부를 중요한 조건으로 삼았다.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랑소메도는 그런 점에서 아이 슬란드와 그린란드보다는 유리한 환경이었으므로 바이킹이 소와 그밖에 다른 가축을 함께 데려갔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고려해볼 때 랑소메도의 바이킹 주거지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고, 그 들이 그곳에 머문 기간도 길지 않았던 것 같다. 빈란드의 사가에 바이킹이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했는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이곳에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기보 다는 특정 계절에만 사용하는 임시 숙소를 세우려 한 것 같다. 인디언들은 아르카이크기의 말에 아마도 바이킹과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 살았던 것 같 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스크라엘링'이 바로 그들일 것이다. 랑소 메도가 오랫동안 그 실체를 찾고 있는 빈란드건, 아니면 단순히 바이킹의 계절적인 임시 숙 소 건간에 그곳은 신세계에서 독특한 곳임에 틀림없다. 비르지타 왈라스 '고고학 논고'27호 1978년 3,4월 로스킬데선 코펜하겐 서부 스쿨델레브의 로스켈데 피오르드에서 수중 고고학의 첨단 기술 덕분에 발 견된 5척의 덴마크 배들은 바이킹의 선박 건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880년 노르웨이 고크스타드의 거대한 바이킹 고분발굴 당시 9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왕의 배'가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사용된 온갖 유형의 배 들의 대표주자격으로, 보편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아주 최근의 것일지라도 바이킹의 작업 기준을 보면 고크스타드 유형의 배로 구성된 모든 선단은 해상에서의 전투와 교역을 위한 항해, 이 둘을 모두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 금세기에 발견된 수많은 배들은 고크스타드선이 교역과 전투,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고안 된 일반적인 유형의 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800년경의 바이킹 시대 초기에는 고크스타드와 오세베리의 무덤에서 찾아 낸 왕의 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수한 상선이 사용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또한 그로부터 2세기 후인 바이킹 시대 말기에 이르면 더욱 다양하게 설계된 우형의 배들이 출현했다. 스칸디나비아 전역을 통틀어 다양한 유형의 배 사이에는 용도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용도 로 설계된 것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쿨델레브의 발굴로 선박 건조자와 항해가라는 바이킹의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로스킬데 피오르드의 어부들 사이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로스킬데시에 이르는 피오르드의 좁은 해협 가운데 하나인 페베렌덴의 바닥에 있는 나무와 돌로 된 보(인 공댐)는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 1세(1400년경)가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출항시킨 배의 잔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보는 1957년과 1959년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올라프 올센과 올레 크룸믈린 페데르센이 상세히 조사한 바 있다. 첫 번째 조사에서는 덴마크의 고고학자들이 새로운 다이빙 기술을 이용하여 주중 발굴작업을 벌였다. 그들이 기록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은 한 척의 배가 아 니라 여러 척의 배로 구성된 소규모 선박을 발견했으며, 이것들은 마르그레타 1세의 치세보 다 앞선 시대인 1000년경의 것이라고 한다. 전투함과 상선, 그리고 어선 이 배들은 돌로 가득 채워졌으며, 그 압력으로 배의 외판은 산산조각이 나서 해협 바닥에 깔렸다. 이로 인해 잠수부들이 배를 인양하는 건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1962년에는 보 전체 의 물을 배내고 난파선 조각을 하나씩 복원시키기 위해 일렬로 말뚝을 박았다. 이렇게 해서 5척의 난파선이 복원되어 1968년 로수킬데에 특별히 세워진 비킹스키브샬렌 (바이킹선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곳에는 방문객들이 복원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작업장 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또한 덴마크 국립박물관 해양고고학 연구소 본부로서 난파선과 보 등에 대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스쿨델레브의 유물들은 바이킹 시대 말기에 스칸디나비아의 다양한 지역에서 건조된 5가 지 각기 다른 배들의 유형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9세기 전반에 로스킬데시를 모든 공격으 로부터 지키기 위해 로스킬데 피오르드로 모여든 배들이다. 그들은 크고 작은 두 척의 전투함과 크고 작은 두 척의 상선, 그리고 아마도 한 척의 어 선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전투함과 상선은 선실 모양이나 비율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투함은 기다랗고 폭이 좁고 물에 얕게 잠기며, 선수재는 한 쪽이 이물에서 고물까지 이르고, 돛처럼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노를 내놓는 구멍이 선체에 뚫려 있었다. 반면에 상선은 길이에 비해 폭이 넓고 높이도 높고, 노가 나오는 구멍은 배의 끝쪽에 있 을 뿐이고, 복판에는 선창을 넓게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스쿨델레브의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바이킹 사회에 대해 피상적인 개념만 세워놓 았던 시기에 바이킹이 전사와 상인으로서 널리 진출할 수 있는 발판 구실을 한 다양한 유형 의 배들을 최초로 볼 수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하부구조는 왕권을 둘러싸고 발달했 다. 교역은 계절별 시장에 다한 왕권의 보호를 받아가며 번창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도시 로 발전했다. 이건 당시 북유럽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바로 이런 교역에 의해 부가 도시 로 집중되자 도시는 약탈 원정의 목표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스쿨델레브와 헤데비(현재의 독일-덴마크 국경 남쪽에 있는 슐레스비히 근처)의 거대한 상업중심지처럼 보를 설치할 필 요가 있었다. 헤데비는 항구 입구에 어마어마한 방어용 시설을 설치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르 웨이계 바이킹의 공격을 받아 약탈당했다. 헤데비는 유틀란드 반도의 기저부에 자리잡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스칸디나비아의 교 역의 중심지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발굴작업이 거 행되었다. 1953년에 항구에 대한 수중 탐사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다리와 울타리에서 나온 주요 기둥과 말뚝이 빛을 보게 되었다. 잠수부들은 또한 바닥 밑바 닥에서 그 도시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말해 주는 수많은 공예품과 유물들을 찾아냈다. 무기 와 상품, 그리고 인간의 뼈가 나왔으며, 특히 난파선의 잔해가 나와 배를 복원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흘수선까지 불에 태운 다음 일단의 기둥 뒤에 고정시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화공선(-옛날에 저의 배를 불태워버리기 위해 연료나 폭발물을 가득 실은 다 음 불을 질러 적의 선박 사이로 떠내려보낸 배: 역주)으로 쓰였던 것 같다. 올레 크룸믈린 페데르센 '덴마크의 바이킹' '덴마크지',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