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추상과 기호의 장인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98] 지은이: 호안 푸니에트-미로, 글로리아 롤리비에르-라올라 지음 / 이경자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미로-추상과 기호의 장인 제1장 지중해 연안의 어린 시절 제2장 "나의 모든 교육은 파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3장 전쟁과 공포 제4장 회화를 뛰어넘어 제5장 범세계적인 카탈루냐인 기록과 증언 미로-추상과 기호의 장인 "미로가 작업하는 모습이나 얼굴, 그리고 창조적 작업에서 생겨난 선들을 보면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감동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솟아나오고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정에 휩싸여 작업하는 미로의 모습을 보면 우리도 그의 동작이나 비상하는 듯한 모습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미로의 모든 작품은 춤추는 정원이고 합창이며, 막 피어나는 생명체나 꽃과도 같은 색의 오페라이다. 이 세계는 점차 사라져버리는 동시에 엄연히 존재한다. 색의 음향은 이 세계에 특성과 현실을 부여하고, 능란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를 부여한다." "땅, 땅, 땅은 내 자신보다 더 강하다. 환상적인 산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으며, 하늘도 그렇다. 내게 충격을 주는 것은 산과 하늘의 시각적 형태라기보다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것이다.... 몬트로이그('붉은 산'이라는 뜻)는 내게 힘을 준다. 이곳은 전제적이고 근원적인 충격을 던지는 땅으로, 내가 언제나 되돌아오는 고향이다. 다른 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몬트로이그와 비교하여 판단한다." 책 표지 글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적 환상을 대표하는 스페인 미술가 호안 미로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콜라주, 시화, 삽화, 조작, 도예 등 미술의 모든 해안에 닻을 내렸다. 그는 현대생활의 가혹함을 탈피해 꿈과 현실을 부수고자 노력했고, 초월적이고 시적인 자연의 개념을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호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부차적인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이루어진 섬광 같고 매혹적인 미지의 세계가 출현했다. 지은이: 호안 푸니에트-미로, 글로리아 롤리비에르-라올라 지음/이경자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박주희 호안 푸니에트 미로(Joan Punyet-Miro) - 호안 미로의 외동딸인 돌로레스의 아들이자 미로의 세번째 손자로, 미로는 그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팔마와 바르셀로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리의 ADAGP(미로의 수익금을관리하는 기관)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다가 현재는 뉴욕 대학에서 수학중이다. 장차 전시회 기획과 필라르 호안 재단의 활동에 참여할 계획이다. 글로리아 롤리비에르-라올라(Gloria Lolivier-Rahola) - 카탈루냐 태생으로 바르셀로나 문과대학 학생이었던 그녀는 파리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파리 고등 실업학교의 페르낭 브로델과 함께 10년간 일했다. 돌로레스의 친구인 그녀는 미로에 대해 많은 것을알고 있었다. 현재 그녀는 파리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경자 -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투르 대학에서 불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와 서울여대, 건국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으며, 저서「몰리에르」와 번역서「재미난 책읽기 지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7번 「베르디」가 있다. 제1장 지중해 연안의 어린 시절 땅의 찬미자, 호안 미로의 탄생 1893년 4월 20일은 바르셀로나의 미겔 미로 이 아스데리아스의 집에 희망과 환희가 찾아든 날이었다. 미젤 미로의 부인 돌로레스 페라가 처음으로 어머니가 되었다. 가구 제조인의 딸인 돌로레스는 마요르카섬의 팔마 출신이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금은세공사 미겔과 돌로레스는 당시 고딕 양식 거리의 중심지였던 크레디토가 4번지에 살았다. 둥근 얼굴과 파란 눈의 귀여운 이 아기의 이름은 호안이었다. 앞으로도 언제나 이 아이가 애착을 갖게 될 카탈루냐와 마요르카섬의 산은 그에게 최초의 양식과 색감을 부여했다. 어린 호안은 코르누데야(바르셀로나의 남쪽으로 150km 떨어져 있는 타라고나 지방에 위치)에 있는 친가에 자주 놀러 갔으며, 마요르카섬에 있는 외가에도 자주 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곤충과 새, 나무, 뱀 들에 매료되었으며, 이 동물들은 미로의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었다. 농부들 사이에서 자란 미로의 환경은 그를 유일하고 특별한 표현 능력을 지닌 땅의 찬미자로 만들었다.그와 아주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미로가 조용하고, 신중하고 ,내면적이라고 말한다. 어릴 시절, 미로는 오랫동안 들판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이미 열다섯 살 때, 미로의 친구들은 그의 신중하고 자신에 찬 태도와, 규칙적인 작업태도에 놀라곤 했다. 미로의 크로키 화첩을 보면, 그가 찬미하던 풍경인 성당, 성, 물레방아, 다리, 나무, 농가 들을 찾아볼 수 있다. 미술학교 학생, 그림에 대한 열정 차츰 그림은 미로의 생활 전체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마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넘을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울타리를 쳐놓은 것 같았다. 1907년, 미로는 풍경화가이자 낭만파 황가이며 귀스타브 쿠르베의 친구인 모데스토 우르헬의 회화수업을 듣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있는 라론하 미술학교에 등록했다. "나의 첫 스승이었던 모데스토 우르헬은 고독과 해탈의 감정을 통해 내게 많은 영항을 주었으며, 이러한 감정은항상 내 그림 안에 나타나 있다. "우르헬의 작품 안에는 항상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나누는 경계선과도 같은 수평선이 있으며, 황량한 나무들과 폐허들로 가득 찬 원경이 있다. 이것은 '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1926)이나 '달을 향해 짖는 개'(1927) 같은 미로의 몇몇 작품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고독이 빼곡한 세계이다. 같은 학교의 선생이었던 호제 파스코 역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학생들을 들판으로 데리고 가, 시를 읽어주었다. 미로는 파스코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의 육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젊은 미로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며 지냈다. 그러나 열일곱번째 생일이 돌아왔을 때, 미로의 부친은 아들이 사업에 투신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했다. 사업에 투신하다? 19세기 말, 스페인의 경제상황은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가능성 거의 없었다. 나라가 불안정한 경제 정치적 상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므로, 국민들 각자가 새로운 산업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젤 미로는 아들에게 바르셀로나의 라 드로게리아 달마우 이 올리베라스 상업학교에서 회계학 수업을 듣게 했다. 미로는 프랑스 시인이자 친구인 자크 뒤팽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아주 불행했네, ...그래서 난 점점 더 몽상과 반항에 빠져들었지." 1911년에 미로의 부모님이 아들의 장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로는 심하게 몸져 누었다. 장티푸스를 동반한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미로는 몬트로이그에 있는 가족 소유의 농장(바르셀로나 남쪽으로 140km 떨어진 작은 마을)으로 여러 달 동안 떠나 있어야 했다. 그곳에서 지내던 어느 날 저년 미로는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랏빛 석양이 멋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감수성을 무시하는 비웃음으로 응답했다. 미로는 크게 반발했고, 결국 아버지는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아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화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1912년 바르셀로나에 있는 프란시스코 갈리의 미술학교에 등록하도록 허락했다. 프란시스코 갈리 미술학교의 교육방식 갈리의 미술학교는,19세의 젊은 미로가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갈리의 수업은 반 관학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예술적 표현과 독창성을 계발하는 데 주력했다. 상당히 진보적인 갈리의 수업방식은 과거 대기들의 작품보다는, 오리려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미로는 20세기의 창건자들인 반 고흐, 고갱, 쇠라, 세잔뿐 아니라, 야수파와 입체파 화가들도 알게 되었다. 갈리는 젊은 제자의 화려한 채색 능력에 감명을 받아, 미겔 미로에게 알들이 화가의 길을 가도록 밀어주라고 권유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에 미로는 "색이 내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형태는 판독해야 할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곡선과 직선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미로는 눈을 감고서 물체를 손으로 만지면서,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는 법을 배웠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점토를 이용한 조각이나 데생으로, 몇몇 친구의 초상을 제작했다. " 오늘날까지도, 이 경험은 조각에서 내 흥미를 끌고 있다. 손으로 반죽을 하고, 축축한 점토덩어리를 잡아서 누르고픈 욕구를 느낀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데생이나 회화에서 갖지 못했던 육체적 즐거움을 만낀한다." 첫 친구들과 첫 작품들 위의 두 학교에서 보낸 기간은 예술에서뿐 아니라, 인간적인 명에서도 결실을 맺었다. 오랜 동안 함께할 예술가 친구들을 만났던 것이다. 도예가인 로렌스 아르티가스, 황가인 엔리크 크리스토폴 리카르트. 훗날 카탈루냐 미술관장이 된 마누엘 그라우가 그들이다. 또한 미로는 유명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알게 되었으며, 1915년 산토 루치 미술 서클(실물 모델을 사생하는 갈리 미술학교 학생들의 나체 데생 모임)에서 모자 제조인 호안 프라트도 알게 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예술가들은 곡선과 음영을 지닌 불규칙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는데, 젊은 미로는 사람의 얼굴을 사생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이미 미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모델을 사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실물 모델은 다만 개인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로는 한걸음 앞서 나가고 있었으며, 데생 연습을 몇 년 더한 뒤에는 유화로 넘어갔다. 미로의 초기 작품에는 여러 화법이 혼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양 몬트로이그'(1914)나 '과일과 포도주병'(1915) 같은 작품에서는 원근법이 흔들이고 있고, 여러 면 사이의 구별이 결여됨으로써 시선이 중심을 잃고 분산되었으며,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표현주의적고 야수파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분할된 붓의 터치와 병렬적인 생깔을 띠는 세자과 반 고흐, 쇠라의 점요화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미로는 갈리 미술학교에서 3년을 보냈으며, 이후 친구인 리카르트와 함께 바르셀로나 시내에 있는 산페드로가에 작은 아틀리에를 얻었다. 아틀리에에 자리잡자마자 입대 영장이 나왔다. 미로는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게 손을 써 달라고 부탁했지만, 미겔 미로는 군대의 규율이 아들로 하여금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도록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 결국 미로는 열 달 동안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로는 리카르트와 함께 계속 그림을 그렸으며, 리카르트 덕분에 군복을 입은 미로의 초상화 두 점을 볼 수 있었다. 달마우와 만남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미로는 바르셀로나의 미술계 인사들, 특히 호세프 달마우의 화랑에 모이는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친분을 가졌다. 키리스마적이면서도 관대한 달마우는 국제 미술계의 현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야수파와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바르셀로나에 최초로 소개했다. 미로는 달마우에게 자신의 초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강렬한 색채와 힘찬 터치를 보여주는 미로 작품의 원초적이고 순수하고 꾸밈없는 힘에 감명을 받은 달마우는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1917년 여름 동안, 미로는 몬트로이그로 돌아와 풍경화 몇 점을 그렸다. 온통 전시회에 대한 생각으로 꽉차 꿈을 꾸는 듯 지냈는데, 이러한 몽상적 경향은 당시의 그의 회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소용돌이 형태와 투박하고 매우 표현주의적인 소재들이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훗날 미로는 '프라도의 거리'(1917), '리카르트의 초상화'('파자마 입은 남자',1917)같은 그림들을 '야수파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미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전시회를 위해, 아직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1918년 2월 16일, 미로의 첫 개인적이 열렸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하지만 전시된 64점의 작품 중, 구매자가 나선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야수파에서 '세부묘사파'까지 첫 개인전에 실패한 미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림 그리는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야수파적인 자신의 그림이 질서와 서정성이 결여된 채, 너무 거칠고 격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18년 여름 동안 미로는 새로운 방식에 도달했는데, 화가 겸 건축가이며, 미술비평가이면서 친구인 호세프 프란시스코 라폴스는 이를 '세부묘사파'라고 지칭했다. 미로는 또다시 몬트로이그로 돌아와, 이곳에서 정신집중에 필요 고요와 평화를 찾았다. 그는 작품수를 줄이면서, 극히 세부적인 것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어느것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폴스에게 보낸 한 편지에게, 미로는 '풍경 안에서, 나무나 산만큼이나 아름다운 풀잎 한 줄기를 완전히 이해하는 즐거움'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을 그리려는 의지와, 바위에 바친 시간만큼 달팽이에게 동일한 시간을 할애하고, 거대한 나무에 바친 시간만큼 작은 풀잎하나에 시간을 할애하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세밀한 칼리그래피적 기법은 이 시기의 네 작품-'수레바퀴''야자수가 있는 집''노새가 있는 채소밭''몬트로이그에서의 경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18~1919년 겨울에 미로는 두 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는 미로의 취약점인 사람 얼굴을 다시 그리는 기회가 되었다. '소녀의 초상화'와 '자화상'에서 미로는 '세부묘사'시법을 도입했으며, 특히 신체의 각 선들을 재현하는 데 이 기법을 사용했다. 디테일들은 그의 신선에 투과되었고, 형태는 양식화되었으며, 대상은 직선적인 형상으로 변모되었다. 파리, 피카소, 다다이즘 그와 동시에, 미로는 파리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미술계가 혁명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프랑스의 수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3월, 미로는 처음으로 파리에 갔다. 그는 파리에 자리잡자마자, 파블로 피카소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미로는 동향인인 피카소의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피카소에게 줄 사블레 과자를 나에게 주었다. 그때 피카소는 라보에기사에 살고 있었다. 첫 만남 이후, 우리는 서로 왕래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독차지하기를 원치 않았다. 파리에서의 나의 삶은 아주 고되었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충고를 잘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초조해할 때 그가 말하기를, '지하철을 탈 때처럼 하게나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일세. 자네 차례를 기다리게!'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미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몇 점의 유화를 들고 돌아왔으며, 그중 하나가 '자화상'(1919)인데, 훗날 달마우는 이 작품을 피카소에게 주었다. 파리에서 이루어진 첫 만남 이후, 피카소는 카탈루냐 동향인의 창조적 재능에 주목했으며, 언제나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파리는 가까스로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에서 벗어났으나, 정치적인 혼돈에 휩싸여 있었다. 이러한 지적 동요의 배경에서 다다이즘이 생겨났다. 이 예술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예술가들과 시인들은 모든 미학이나 문화적 신조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들의 순수성과 자연성을 주장했으며, 전통적인 예술가치를 조롱했다. 미로는 파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다이즘 선언, 아방가르드 잡지들, 화랑, 자주 방문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사상도 좋아했으며, 세계 도처에서 최근 이 국제 도시로 모여든 다양한 화가들도 좋아했다. 그렇지만 미로는 파리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1920년 6월에 다시 몬트로이그로 돌아왔다. 입체라인가, 세잔파인가? 미로는 파리에 가기 이전인 1919년 여름을 몬트로이그에서 보냈으며, 여기서 제작한 '몬트로이그의 성당과 마을'과 '몬트로이그의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는 썩 만족스러웠다. 후자는 '신사실주의(극도로 미세한 디테일까지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것을 추구하려는 그의 욕구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나뭇잎은 '세부묘사' 방식으로 다루어졌고, 경작지는 여러 가지 강렬한 색으로 터질 듯 빛을 발하며, 포도나무 밑동은 미로 자신이 카탈루냐 땅에 쏟는 애착을 반영하듯이 땅과의 관계를 더 잘 나타내기 위해 '휘어져 있다.'이는 거의 강박적인 애착으로서, 미로는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줄곧 올리브 가지와 캐롭 나무 열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 둘은 미로가 그의 얘술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카탈루냐의 풍경과 맺고 있는 관계의 상징이다. 미로는 초상화, 나체화, 풍경화를 그린 후에, 정물화로 돌아왔다. 작품에 기입된 날짜를 보면, 그가 여러 점의 유화를 동시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여름과 가을에, 미로는 몬트로이그의 농장에서 유화 네 점을 그렸다. 이 작품들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그들이 몇 년 전에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가 시행했던 '분석전 큐비즘'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훗날 미로는 입체파 화가들에 대해 "나는 그들의 기타('지겹게 되풀이되는 말'을 뜻하기도 함: 역주)를 부술게야."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로는 그들이 갖는 언어의 조형적 한계를 폭로했다. 그렇지만 '포도, 말, 파이프''붉은 꽃''스페인 트럼프 놀이''토끼가 있는 정물'(혹은'탁자')- 이 네 작품 모두 1920년에 그려졌다-안에 나타난 입체파와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즉 원근법의 오른쪽 성의 사용이 그러하다. 이 모든 양상은 미로가 입체파의 기법을 익히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네 작품은 지중해 연안 출신이라는 미로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카탈루냐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미로식 큐비즘'이다. "나의 진정한 지적 교육이 이루어진 곳은 파리였습니다. 프랑스어 역시 내게는 지적 작업과 사색의 언어였지요. 어떤 계획을 구상할 대면, 나는 프랑스어로 생각합니다. ...사생에 잠겨 무언가를 만들려 하면, 곧바로 프랑스어가 움직거리지요,... 나의 모든 교육은 파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내 꿈의 색이다'' 제2장 "나의 모든 교육은 파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파리에 온 미로 파리에서 보냈던 처음 3개월은 미로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후로 미로는 겨울에는 파리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자연과 접할 수 있는 몬트로이그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그의 전작품을 1000페세타에 구입하여 파리의 화랑에서 전람회를 연다는 내용으로 달마우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1921년 3월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야 미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조각가 파블로 가르가요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블로메가 45번지의 아틀리에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미로는 몽파르나스 한복판에서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살게 되었다. 우연인지 작업실 옆에는 화가인 앙드레 마송이 있었다. 이들은 인사를 나누었고, 곧 '블로메가 그룹' 이라고 불릴 모임의 초기 핵심 인물이 되었다. 미셀 레리스, 로베르 데스노스, 조르주 랭부르, 앙토냉 아르토, 롤랑 튀알, 자크 프레베르, 아르망 살라크르도 그룹에 참여했고, 훗날 전원이 초현실주의에 합류했다. "정말 힘든 시기였다. 유리창은 깨지고, 벼룩시장에서 45프랑에 구입한 난로는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업실은 아주 깨끗했다. 직접 청소를 했다. 무척 가난한 시절이었다. 점심을 제대로 먹는 것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다른 날에는 말린 무화과로 때워야했다." 라 리코른 화랑에서 열린 미로의 전시회 약속한 대로 달마우는, 1921년 3월 29일 파리 보에티가 있는 라 리코른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28세인 카탈루냐 화가의 첫 국제전시회였다. 불행히도 이 전시회는 또다시 실패로 기록되었으며, 첫 번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빈털터리가 된 미로는 몬트로이그로 돌아가 여름을 보내야 했다. 그곳에서 미로는 거의 6개월 동안 '농잘'(1921~1922)의 제작에 매달리는데, 이 작품은 미로의 사실조의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리듬과 균형을 맞추는 데에만 여러 날이 걸렸다. 야외에 이젤을 세워놓고 대상을 응시하는 미로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도 더 예리했다. 달팽이, 도마뱀, 풀잎 둥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라도 그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졌다. 1921년 가을이 끝날 무렵, 그는 '농장'을 미완성인 채로 파리로 가져와 블로메가에서 완성했다. 그러나 '농장' 을 구입하겠다고 나선 황랑이나 화상은 없었다. 실의에 차 있던 미로는 어느 날 저년 '농장' 을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 전시했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헤밍웨이가 5000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했다. 농장 여주인 1921~1922년 사이, 미로는 여전히 파리와 몬트로이그를 오가며 지냈다. 농장에서 새 작품을 시작하면 파리에서 완성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1922년, 가르가요의 아틀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미로는 작은 호텔이나 친구 집들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화가인 장 뒤뷔페의 아틀리에를 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미로는 '꽃과 나비' '탄소 램프' '밀 이삭'을 그렸으며, 이 세 작품은 미로의 사실주의 시기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농장 여주인'(19922~1923)은 사실적인 디테일에, 실제 모델과 전혀 무관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과도기적 작품이다. 미로처럼, 이 여인은 땅에서 힘을 빨아들인다. 균형 잡히지 않은 두 다리로 서 있는 이 인물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년의 굳은 태도와 고정된 시선은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박제된 듯한 고양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극단적인 양식화를 보여주는 형태는 오브제에게서 생명을 앗아가기는 하지만, 완벽한 균형에 이르고자 하는 미로의 욕구를 보여준다. 어쨌거나 미로는 몇 년간 이러한 경험을 지속한 후에, 길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체파나 다다이즘은 그에게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길, 즉 그를 이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줄 예술적 영감의 근원을 찾았다. 무의식의 발견 블로메가의 풍요롭고 시적인 분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때부터, 미로는 예술에서 혁신적인 것을 향해 나아갔다. 작가, 시인, 화가 들의 충동에 이끌려, 다른 조형언어가 탄생했다. 그것은 비합리성에서 나온 매혹적인 미지의 신세계였다. "시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회화를 뛰어넘는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1923년 여름, 미로는 카탈루냐의 모태적 대지를 다시 접하고, 명상에 잠기기 위해 농장으로 돌아와, 파리의 친구들을 놀라게 만들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경작지'(193~1924), '사냥꾼'(혹은'카탈루냐 풍경', (1923~1924), '전원')(1923~1924), '가족'(1924)이다. 이 네 작품은 물체와 형태의 양식화라는 특성에 지배되고,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될 것임을 예고했다. 사실 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로는 이 급작스런 변화를 통해 기호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작품에 환상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내게, 나무는 단순히 나무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 살아 있는 인간이다. 글 것은 인물이고, 나무이며, 특히 우리 고장의 나무인 캐롭 나무이다. 말을 걸고, 잎을 지녔으며, 심지어 불길하기조차 한 인물이다." 사실, 미로는 나무에 눈과 귀를 그려놓는 한편, 그림을 혼잡스럽게 만드는 요소를 제거했다."다른 식물 전체를 표현할 때에는, 한 포기의 식물로 충분하다." 여기서 미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그는 라폴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네. 그래서 종종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하지. 처녀지를 여행하는 탐험가의 공포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작업에 따르는 규율과 엄격함은 곧 두려움을 떨쳐버려 준다네." 원추, 피라미드, 원기둥 블로메가로 돌아온 미로는 비합리성을 추구하는 두 선구자인 폴 클레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예술을 만났다. 이들의 예술은 니체 철학과 이탈리아의 형이상학 회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미로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인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화풍도 연구했다. 여러 사상, 감정, 이미지를 결합한 미로의 작품들은 현저한 진보를 이루었다. '입맞춤'(데생,1924)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에서 서로 입맞춤하는 입술을 구별할 수 없지만, 허공에 떠 있는 왼쪽의 실루엣은 구별할 수 있을뿐더러,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충격을 암시하는 흑백의 작은 선들도 구별할 수 있다. 같은 해(1924), 미로는 '모성' '신사' 'K 부인의 초상화' '전복'처럼 단순한 그림이나 데생을 그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원추, 피라미드, 원기둥은 인산의 신체와 성기를 묘사하는 데 충분했다. 미로는 이 작품들에서 부차적인 디테일에 지체하지 않고서, 주제를 잘 형상화하기 위해 각 인물이 갖고 있는 가장 표현적인 모습에 정성을 쏟았다. 여러 모습을 한 남자를 그린 '신사'는 단순화 된 이 형상들 중의 하나로 황당한 유머(땅과 연결된 큰 발, 그 당시 품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콧수염, 닭 벼슬처럼 우쭐대고 오만스러운 머리 위의 붉은 왕관)를 지니고 있다. 도식화된 이 모든 작품들은 미로의 예술세계가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단순하면서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가득 찬 복잡한 이 세계는 1920년대의 화가인 미로에게서 나온 정말 놀란 미지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 축제 미로는 열심히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이시기에 순전히 초현실주의적 착상에서 나온 작품인 '아를르캥의 사육제'(!924~1925)를 제작했다. "1925년, 나는 순전히 환각을 좇아 그림을 그렸다, ...종종, 기아 상태가 이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한동안 작업실의 회칠한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서, 종이나 캔버스 위에 이 형태들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아를르탱의 사육제'에는 환상 속의 생명체로 이루어진 세계가 방안에 나타나며, 바의 전면에는 탁자가 있고 후면에는 열려진 창문이 있다. 아마도 미로의 작업실인 이 방에는 원기둥, 원추, 구로 이루어진 인물들과 연결된 기괴하고 신비로운 개체의 집단이 있다. 이 시절, 블로메가 그룹은 초련실주의 운동과 이 운동의 창립자인 앙드레 브르통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브르통은 1924년부터 자신의 목적과 추구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순수한 정신적 자동기술을 통해, 우리는 말이나 글 또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의 실제적인 진행과정을 표현할 것을 제안한다. 이성에 통제를 받지 않고, 모든 미학적이고 정신적인 고정관념의 권외에서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표현한다." 피에르 화랑 1925년, 파리의 피에를 화랑은 처음으로 미로의 전람회를 개최했다. 미로는 4년 전에 있었던 라 리코른 화랑에서의 실패를 잊지 않고 있었다. 환상적인 의도인지 혹은 도발적인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자정 무렵에 전람회 개최행사를 위해 화랑문을 열었으며, 미로는 이 화랑 주인인 피에르 뢰브와 함께 전람회를 주최했던 자크비오보다 더 우아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초대객들은 미로가 보헤미안 복장을 입으리라고 상상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행사는 대성항을 이루었으며, 초대객들은 초현실주의적인 요란한 행사를 기대했다. 이 행사를 좀더 공식화하기 위해 초현실주의 그룹의 전회원들이 초대장에 공식화하기 위해 초현실주의 화가인 미로의 밝은 미래가 예고되었으며, 미로와 계약을 맺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훗날, 미로는 이 계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기에 막스 에른스트와 나는 자크 비오와의 계약에 서명했다. 그는 우리에게 매달 1만 5천 프랑을 지불했다. 그건 너무 적은 액수였다. 겨우 캔버스를 사고,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추상으로 어쨌든 미로는 이 전람회를 계기로 점차 작업실의 칩거에서 벗어나, 이미 탐험을 시작한 새로운 차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엄격한 작업태도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을 등지게 만들었지만, 브르봉은 그를 '우리들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 작가'로 간주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미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부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예술을 집대성하는 총제적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추상화되었다. 특히 비이성적 자극과 반수 상태의 환영이 등장했다. 이후로, '사랑'(1926), '나부'(1926), '머리'(1927)같은 작품에는 명확하게 식별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즉, 선은 어두운 색과 단색들로 이루어진 기괴한 실루엣을 이루었다. 미로는 자신의 칼리그래픽 기법을 이용해, 무의식의 몽환을 상기시키면서 회화의 조형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작품은 단순히 '회화' 라고 명명되었다. 그것은 실제 대상과 관련이 없는 표상문자 같다. '카탈루냐의 농부'(19250를 보면,몇 가지 요소- 턱수염, 눈, 바레티나(카탈루냐 농부가 쓰는 전통모자)-를 통해 사람임을 식별할 수 있는 반면, 곤충, 도마뱀, 행성, 식물, 칼탈루냐 도상학의 전형적 요소들은 기호로 표시되었다. 사다리, 언제나 사다리... 1926년 여름과 1927년 여름 동안, 미로는 몬트로이그로 귀향했다. 그는 자연과 벗하는 것을 빼고는 모든 외부접촉을 끊고서, 하루 여덟 시간씩 작업에 정진했다. 행서, 사다리, 개의 실제적인 형상을 뛰어넘어 더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는 관객의 판단을 뒤엎고서, 이번에는 자연이 더 순수하고 총제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새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1926), '달을 향해 짖는 개'(1926), '수닭이 있는 풍경'(1927)같은 유화 안에서, 여러 형상들은 주위 환경과 강력한 대화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배경을 포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을 향해 짖는 개'에서, 사다리는 지상과 천상의 공간을 연결시킨다. 사다리는 도피를 향한 문이며, 무의식이라는 미지의 차원에 도달하게 해주는 문이다. 그러나 사다리는 물질세계와의 재회를 향한 문이기도 하다. 제2의 고향인 파리로 돌아온 미로는 친구인 자크 비오의 도움으로, 몽마르트르에 있는 투르라크가에 새 아틀리에를 얻었는데, 이 아틀리에는 앞서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엘뤼아르 등이 작업하던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하자마자, 미로는 작업중에 방해받는 것을 막기 위해 '정차하지 않고 달리는 기차'라고 쓰인 팻말을 문에 걸어놓았다. 꿈의 '로미오와 줄리엣' 예술가들과 교제하는 범위가 더 넓어졌다. 이처럼 폭넓은 교제로부터 나온 첫 계획들 중의 하나가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치 제작으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극단주인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디아길레프가 미로와 막스 에른스트에게 공동으로 제작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 둘은 무대막과 발레리나의 의상에 그들의 '생리형제적'인 환영과 몽상적인 풍경을 옮겨놓았다. 1926년 5월 18일, '로미오와 줄리엣'이 파리의 사라 베른하르트 국장에서 초연되었다.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등장인물들을 잘 식별하지 못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기발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뭔지 모를 형사들로 장식된 의상을 걸친 두 주인공은 비밀스런 무의식의 세계에서 빠져 나온 것 같았다. 갑자기 극장 안에서 60여 명의 관객들(그들 가운데에는 블로메가의 예술가들도 여러 명 끼여 있었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으며, 발레처럼 부르주아적인 공연에 미로와 에른스트가 공동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한 불만을 소리 높여 항의했다. 그들은 "사상이 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슬로건이 담긴 전단을 뿌렸다. 얼마 후에 브르통과 아라공은 미로와 에른스트가 초현실주의를 헐값으로 귀족들에게 팔아넘겼다고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비평문을 발표했다. 네덜란드에 간 카탈루냐화가 미로는 이번 기회에 17세기 네덜란드 대가들을 연구하기로 했다. 1928년 봄, 2주일간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서, 미로는 반 다이크, 프란스 할스, 얀 베르메르, 얀 스텐이 시도한 세밀한 디테일 묘사와 사실주의적 완벽성에 사로잡혔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복제 그림엽서집을 가지고 왔다. 투르라크가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세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 연작은 '네덜란드의 내실'이라고 명명되었다. 제1편인 '네덜란드이 내실 I'은 H.M. 소르그의 '류트 연주자'를 변용해 개작했다. 소르그 작품의 모든 디테일이 미로의 손을 거쳐 그대로 번역된 것 같다. 연주자, 연주자 오른쪽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있는 여자, 흰 탁자 밑에서 털실뭉치를 가지고 있는 고양이, 뼈를 핥고 있는 개, 창문을 통해 보이는 암스테르담의 전경들이 그러하다. '네덜란드의 내실 II'의 바탕이 된 작품은 얀 스텐의 '고양이 춤 레슨'이다. 더욱 혼란스럽고 더 자유로운 '네덜란드이 내실 III'은 비극적이다. 염소를 출산하는 여자의 성기에서 피가 강물처럼 흘러나온다. 여자의 다리는 꼼짝없이 땅에 고정되고 절망적으로 앞을 향해 벌려져 있는 팔을 고통을 표현한다. 회화 살해 1929년 10월 12일, 미로는 집안 친구인 마요르캬 출신의 필라르 훈코사 이글레시아스와 마요르카섬의 팔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필라르는 스물여섯이었고, 미로는 서른여섯이었다. 미로는 라이야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 작업에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관여하지는 않네. 난 지시를 내리는 여자는 원치 않아.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만족스럽네.필라르는 완벽한 동반자지. 그녀가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 버려진 거지 같은 존재였을 것이야." 아홉 달 후인 1930년 7월 17일, 이들의 외동딸인 마리아 돌로레스가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예술적인 면에서, 다가올 앞으로의 2년간은 미로에게 격정적인 시기였다. 그는 '회화살해'의 욕구를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자신의 화법은 더욱더 순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팔레트와 붓을 버리고, 데생과 콜라주에 전념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스페인 무희'(1928)로 이 작품에는 새 깃털 하나와 모자 핀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한한 공간에서 춤을 추는 깃털의 가벼움은 정신적인 이미지의 종합체 같다. 1928년에서 1932년까지 미로와 그의 가족은 파리와 몬트로이그를 오가며 지냈다. 회화로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무위로 끝난 후에, 미로는 슬럼프에 빠져들며, 이 위기는 2년간 지속되었다. 바르셀로나로 귀향 유럽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1930년대의 경제위기는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자크 비오는 더 이상 미로의 작품을 구매할 수 없었다.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혁명적인 적극적 행동주의에 합류했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혁명'은 '혁명에 협력하는 초현실주의'가 되었다. 미로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그들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는 가담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시인, 영화인, 화가 등 우리 모두가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1933년의 물질적인 궁핍은 미로를 스페인에 머물도록 했다. 미로는 자신의 출생지인 바르셀로나의 크레디토가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기계 카탈로그와 잡지에 몰두하여, 기구나 기계류 사진을 오려 모았는데, 이는 18점의 콜라주를 제작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곧이어 그는 이 콜라주들을 기초로 하여, 18개의 대형 그림으로 이루어진 연작을 시도했다. 수많은 요소들이 작품 도처에 나타나 있다. 미로는 산업세계에 대한 완전히 개인적인 시각에 도달하기 위하여, 일상품들의 형태를 더욱더 변형시켰다. 같은 해 가을, 파리의 베른하임 화랑에서 전시된 이 시리즈의 전작품은 관객들의 열렬한 호평을 받았다. 관객들은 미로가 추구하는 변화를 뒤따를 의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겪는 끔찍한 비극은 어떤 천재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설 수 있지만, 큰 활력을 줄 수도 있다.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역행적 힘은 아직도 만연되어 있다. 이 힘은 우리를 잔혹성과 몰이해의 궁지로 깊숙이 몰로 가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그로써 끝장날 것이다." ''예술지'', no 1, 1939년 제3장 전쟁과 공포 새로운 기법의 탐구에 몰입할 수 있던 블로메가의 행복했던 시절을 뒤이어, 1933년에 딸이 출생한 이후에도 평온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미로는 콜라주나 사지 데생에 몰두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종류의 재료를 배합해 보았다. 야성 회화 연작 1933년 여름 동안, 이러한 실험적 작업을 통해, 사지에 그린그림과 콜라주 연작이 탄생했다. 이것은 이듬해 여름에 몬트로이그에서 완성된 그 유명한 '야성 회화'라는 연작파스텔화를 향한 첫 단계였다. 이 연작의 제목은 무심하게도'인물'과 '여자'인데, 제목과 주제 사이의 관계가 느슨한 듯 보인다. 이 연작 중 한 작품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종이 한 장을허공에 쳐들고 있는 여자는 오페라 여가수를 연상시킨다. 미로는 일상사의인간들을 채택하여, 독설적인 유머를 가지고 상상의 괴물을 만들었다. 정밀한 세부처리와 강렬한 색채는 이인간들에게 별이 총총한 하늘위로 떨어져 나간 유령의 형상을 부여했다. 대다수인물들은 머리칼대신에 세 개의 검은 털을 가지고 있으며, 성별을 구분할 수 있도록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는 이 인물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디테일이다. 인간을 이상하고 잔인하게 변형해 놓았다. 이 '야성 회화' 연작 안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죽음과 기아에 대한 미로의 사상과 관심을 '변덕'(l794-1799)이라 명명된 고야의 판화 연작과 비교해 보는 일도 흥미 있을 것이다. 고야의 유명한 연작 중의 하나인 '잠든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는 고야를 악몽의 어두운 세계에 위치시키면서, 꿈의 세계를 탐험한다. 모든 판화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스페인을 침공해온 나폴레옹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기괴하고 과장되며 왜곡된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1세기가 조금 더 흐른 후, 미로에게 고통과 죽음이라는 환각적인 이미지와 1939년 스페인 내전의 이미지를 투사할 과업이 넘겨졌던 것이다. 1935년, 미로는 이 과업을 끝까지 밀고 나가 '남자의 머리' '밧줄과 인물들' '두 여자'를 그렸다. 이 세 작품은 미로가 거친 직조를 이용해 고심 끝에 만든 일상적인 재료인 판지로 제작되었다. '남자의 머리'는 격정적인 유화로 농부들의 두려움과 기아에 직면해 미로가 느낀 충격을 그리고 있다. 머리의 형태가 왜곡되었고 눈도 크게 과장되었다. 혀는 분노로 소리치는 듯 앞으로 삐죽 나왔는데, 이는 장차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질 시대를 예고하는 전주곡 같다. '밧줄과 인물들I'이 보여주는 회화의 상징성은 정치투쟁뿐 아니라, 육체의 투쟁을 조명하고 있다. 캔버스 중앙에 붙어있는 농부의 밧줄은 구속의 이미지와 자유 결여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압제, 구속, 사상의 억압이야말로 이 작품이 조명하고있는 숨겨진 의미이다. 전쟁화 1936년경, 작품은 더욱 이성적 경향을 띠어만 가고 화가 또한 한층 더 저항으로 빠져들었다. 그해 여름 7월 13일, 왕당파 총수인 칼보 소텔로가 암살된후 스페인은 민족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로 나뉘었다. 프랑코 총통은 군대를 장악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서 농부와 민중이지지하는 공화주의 정부에 대항해 격렬히 투쟁했다. 농부와 일반 민중은 쿠데타의 장본인인 프랑코에 대항해 무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내전은 1939년 2월 프랑코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로는 농장에 은거해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는 공화주의자들편에 서서 자신의 무기인 예술을 통해 투쟁했다. 스페인 내전을 반향하는 27점은 메소나이트판(단열용섬유판 :역주)에 그린 것으로, 미로의 항거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미로가 메소나이트라는 건축재료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농부들이 사용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재료에 긁힌 자국을 내고, 자연 그대로의 표면에 구멍을 뚫고, 시멘트를 섞은 조약돌로 덮었다. 이것은 파시즘의 대두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표출이다. 여기에는 '야성 회화' 의 괴물들이 등장하지 않고, 표면은 흑백으로 뒤섞여있다. 작품의 후면에는 재와 연기와 화재로 뒤엉킨 전장터가 있고, 전면에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남자와 여자들이 그려져 있지만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전쟁은 미로의 머리에 선명히각인되었으며, 무의식을 그대로 옮겨놓는 미로만의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내 그림은‥‥‥ 공격적인 힘이 외재화된 것이다. " 파리에서의 망명생활 1937년, 호안, 필라르, 마리아 돌로레스는 전쟁을 피해 파리로왔다. 프랑쿠, 히틀러, 무솔리니는 유럽을 위험에 빠뜨렸다. 박해받는 모든 정치인, 지식인, 작가, 화가 들이 파리에 망명해,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사령부를 세웠다. 거처와 작업실이 없는 미로는 몽파르나스의 작은 호텔에 기거했으며, 매일 라그랑드 쇼미에르 미술학교에 갔다. 미로는 여기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나, 그에게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파리에 온 지 몇 주일 후, 자크 비오는 미로가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피에르 화랑의 이층방을 마련해 주었다. 몇 달 전부터 팔레트, 붓, 물감을 구하지 못했던 미로는 이 작업실에서 매우 놀랄 만한 작품인 '낡은 구두가 있는 정물'(1937)을 완성했다. 강렬한 색깔, 충격적인 사실주의, 구속 없는 표현성 등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 작품의 기법은 반 고흐의 '구두'(1881)를 연상시키는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는 주제와 그 구성이 잘 들어맞는다. 미로와 반 고흐에게 낡은 구두는 가난, 굶주림, 고통, 비극과 상통한다. 오래된 사과에 꽂힌 포크, 포도주병,굳은 빵조각은 당시 유럽의 이미지라 할 가난의 이미지와 경직되고 혼란에 빠뜨리는 시각을 주었다. 1937런의 파리 국제박람회 공화주의 정부를 도울 기회를 찾던 스페인 망명 예술가들에게, 파리 국제박람회가 열린 1937년은 중요한 해였다. 스페인은 박람회에 전시할 작품보다 국제적인 원조가 한결 긴요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관에는 피카소의'게르니카' 같은 놀라운 예술품이 있었다. '게르니카'는 독일군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에 자행한 폭격장면을 벽화로 그린 것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바로 옆에는 미국 조각가인 알렉산더 콜더의 수은 분수가 있었다. 전시작 중 여섯 개 셀로텍스판(절연 방음판 :역주)으로 만든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있었는데,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불안과 고통은 관람객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제목은 카탈루냐 민족가의 제목인 '엘세가도르' (원래는 풀 베는 농부이지만, 낫을 무기로 싸운 민병을 뜻하기도 함 : 역주)였다. 이 작품이 바로 미로의 '민병'으로, 손에 낫을 들고 두 팔을 쳐들고서 항거하는 카탈루냐 농부를 표현한 그림이다. 총이 아닌 낫을 들고 있는 농부..., 미로에게 전쟁은 땅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표현된 전통과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박람회가 끝난 후,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호세프 루이스세르트가 설계한 스페인관은 철거되었고, '게르니카'는 미국으로 보내졌으며, 콜더의 분수는 작가가 보관했다. 공화주의 정부에 호의적인 지지를 보낸 '민병'은 발렌시아에 있는 사령부(수취인은 문화예술부 장관)로 발송되었다. 아마도 이 작품은 그곳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파손된 것 같다. 언제라도 고국에 힘이 되겠노라고 마음먹고 있던 미로는 포스터를 한 장 그렸다. 한 남자가 주먹을 들고서 놀랄 만한 힘을 표현하고 있는 '스페인을 도웁시다'가 그것이다. 포스터 밑에는, "오늘날 파시스트 세력은 힘을 잃고있다. 그 반대편에 있는 힘은 민중으로써, 민중이 갖는 거대한 창조적 역량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스페인을 도약시킬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는 진정 정치적 메시지이다. 미로는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혹함을 잘 알고 있었고, 다시는 가족과 고국을 보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민병'과 이 포스터- 팸플릿을 그린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간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딸과 함께 8월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자화상, 시화, 여자 1938년에 제작된 자화상과 초상화 연작은 총체적 언어를 추구하는 미로의 끊임없는 욕구를 증명한다. '자화상 I'은 캔버스에 연필로 정밀하게 세부묘사한 데생으로, 색을 칠하지 않아 미완성작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미로는 1919년에 그렸던 초상화와 같은 부류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지 않기 위해, 이번 초상화를 완성하지 않은 듯하다. 미로의 가장 유명한 시화인 '별이 흑인 여인의 가슴을 애무하다'안에서는, 관능적이고 시적인 문구와 동일한 색조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에서 평화로운 유희가 형성되며, 놀라움과 즐거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다시 한번 도피용 사다리가 나타나 있지만, 그림의 오른쪽에 위치한 사다리는 땅을 천구와 연결시킨다. 검은 바탕은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며 ,그 분위기 안에서 형태가 진화되는 느낌을 준다. 같은 해 '앉은 여인 I'과 '앉은 여인 II'라는 뛰어난 작품이 제작되었다. '앉은 여인 I'은 여성의 몸을 극단적으로 변형시켰다. 색면이 머리,목, 상반신을 명시한다. 몇 가닥의 액모가 신체의 어느 부분인지 가늠케 해준다. 여성의 음부가 박혀 있는 귀중한 목걸이가 길게 늘어진 젖가슴 위에 놓여 있다. '앉은 여인 II'는 머리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이 더욱 양식화되어 있다. 앉아있는 몸은 두 다리와 화포에 뚫려 있는 구멍처럼 생긴 거대한 음부를 보여준다. "내가 그린 여성의 음부는 인류의 근원이라 할 여신과 같은 존재이다." 바랑주빌의 하늘 1939년 초, 가족의 안전을 걱정한 미로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도인 파리가 독일군의 첫 공략 목표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노르망디 해안의 평화로운 마을인 바랑주빌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1939년 8월에서 1940년 5월까지 머물렀다. 미로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에서의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랑주빌은 몬트로이그에 견줄 만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미로는 이곳에서 3년 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쌓였던 분노와 폭력을 누를 수 있었다. 다시 자연을 접한 그는 디에프 시내와 바닷가, 바람 부는 해안 절벽을 돌아다녔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한 이후,1939년 9월 3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9개월 후,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독일군이 됭케르크와 디에프를 향해 진격했다. 필라르가 이야기하기를, "그해 여름 바랑주빌에서 우리는 '르 클로 데 상소네'라 불리는 집에 머물고 있었죠. 우리에게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브라크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이 전쟁을 '웃기는 전쟁'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군대가 디에프항으로 들어오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죠. 우리도 루앙으로 떠났습니다." '성좌' 시리즈 바랑주빌에서 미로는 가장 유명한 걸작으로 꼽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성좌'가 그것이다. 1940년 1월 21일에서 1941년 9월12일까지 제작된 23점의 소형 구아슈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고에서 나온 작품이다.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미로는 내면으로 침잠하여, 이 세계와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았다. 땅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수도사처럼, 자연을 통해 순수한 마음을 쌓아갔다. 종이밖에 구할 수 없었던 미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 상상력을 한층 더 전개시켰다 연작 '성좌'에서는 물질문명을 초월하려는 미로의 의지를 나타내려는 듯 사다리가 여느 때보다도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1940년 2월 4일, 미로는 뉴욕에 있는 그의 화상인 피에르 마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금 나는 15-20점의 템페라화와 유화연작을 작업중입니다. 사이즈가 38x46cm인이 연작은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연작은 내주요 작품들 중의 하나로 크기는 작지만 거대한 벽화 같은 인상을 줍니다." 역설적으로 '성좌'에는 격정도 야만도 없다. 오히려 고전음악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상케 하는 운율이 있다. 아라베스크가 공간을 지배한다. 푸르스름한 여행중에 무한한 공간을 떠다니는 움직이는 듯한 유색의 형태들을 한층 부각시킨다. 관능적인 리듬이 공간을 침범하고, 양식화된 형상들이 음악의 음표를 떠올리게 해준다. 미로는 시만큼이나 풍부한 예술적 자극을 주는 고전음악에 큰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말하자면미로는 시각적 멜로디를 작곡한 셈이며, 이 멜로디의 시각적인 제목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조국으로 루앙에서 '성좌'의 제작에 매달렸던 미로는 가족과 함께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끔찍했다. 기차에는 부상자들이 가득했고, 폭격을 피하기 위해 여러 번 멈춰 서야 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친구인 건축가 세르트와 함께 미국행 여객선의 탐승표를 구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표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다시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독일군이 입성하기 8일 전에 파리를 벗어났다. 피게라스에서 스페인 당국은 여행객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필라르는 다음과같이 회상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해 댔습니다. 만약 남편이 체포되었다면, 내 책임이라고 느꼈을 겁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한 것은 바로 저였거든요." 그들은 바리케이드를 넘었고, 비크에 있는 미로의 누이동생과 함께 며칠을 보내다가 마요르카섬으로 떠났다. 마요르카에서는 필라르의 부모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유럽에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었다. "나는 여기 팔마에 피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신에게 말하기를 '이봐 친구, 너는 끝이야. 너는 해변에 드러누워, 지팡이로 모래 위에 그림이냐 그릴 테지. 그게 아니면 담배연기로 말이야. 넌 다른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모든 것이 끝이야.'" 미로는 '성좌'의 작업을 계속했으며 ,1940년에서 1942년까지 마요르카섬에 머물렀다. 당시 주민이 40만 명이던 이 작은 섬의 풍광, 오색으로 물드는 새벽, 푸른 바닷물, 별이 총총한 밤, 알무다이나 궁전, 고딕 양식의 성당은 미로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미로는 지중해의 에너지를 흠뻑 받아들였다. "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일에 대한욕심이 생긴다. 나는 조각, 도자기, 판화도시도해 보고싶다. 또한, 내 생각에 하찮은 목적을 제시할 뿐인 이젤의 회화를 가능한 한 뛰어넘는 작품을 시도해 보고 싶으며, 회화를 통해 내가 끊임없이 생각해 왔던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다." ''20세기''중에서, no 2, 1938년 5-6월 제4장 회화를 뛰어넘어 바르셀로나와 '바르셀로나' 연작, 도중의 휴식 1942년, 미로는 팔마와 몬트로이그에 고립되어 평온한 시절을 보내면서 '성좌' 연작을 끝마쳤으며, 가족과 바르셀로나의 언덕위에서 살았다. 그는 크레디토가의 작업실을 다시 찾았다. 내전은 카탈루냐 지방에서 문화적인 삶을 완전히 몰아냈다.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모든 지적활동에 의심의 눈을 보내는 바르셀로나는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미로는 이 불모지에서 한껏 사색과 탐구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때로는 가차없는 비평을 가했다. 이 시절 자신과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비평을 세밀하게 적어두곤 했는데, 그 노트들은 미로 재단에 보관되어 있다. 끊이지 않는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스페인의 신비주의 작품과 시들 또한 이 시절의 애독물이었다. 미로의 그림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몰두한 그의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그는 연필, 목탄, 수채물감, 파스텔 같은 다양한 전통적 재료와 오디 잼 같은 엉뚱한 재료들을 이용해, 별의 별 종이에 작은 그림을 그렸다. 미로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실험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도자기도 시작했으며, 조각과 석판화 분야에 대한 지식도 심화시켰다. 이 몇 년 동안, 미로는 정치적 성격을 떤 석판화 50점을 완성했는데. 처음 몇 점은 바랑주빌에서 제작되었다. 이것이 '바르셀로나' 연작이다. 이들은 '야성 회화'를 연상시키며, 같은 시기에 시작된 '성좌'에 나타난 시와 우주의 평온함과 대조를 이룬다. 횐 종이에 거칠게 그린 검은 선은 번민하는 중심 인물들의 극적 요소를 부각시킬 만큼 공격적이다. 또 한번 미로는 프랑코 체제에 혐오감을 표현했다. 이 괴물 같은 형상들을 통해, 그는 독재의 공포와 그 주체들의 추악함을 강도 높게 폭로했다. 프랑코 체제에서 8개월간 투옥되었던 미로의 절친한 친구 호안 프라트는 탄압이 약간 수그러든 1944년에 이 연작을 출판했다. 미로는 조르주 라이야르에게 "검열 당국은 이것이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석판화 연작인 '바르셀로나'는 야성회화로 시작되었던 전쟁화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했다. "자유 쟁취는 단순성의 쟁취이다" 1944년, 미로는 사색과 명상의 시기를 종결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소형 캔버스에서 시작한 작업은 곧이어 대형 캔버스로 옮겨갔다. 앞으로도 반복할 여자, 새, 별에 대한 주제는 강박적이라 할 만하다. 미로는 타고난 능란함을 발휘해, 극도로 단순화된 형상들을 조화롭게 배열했다. 원색의 눈, 성기, 별, 새, 태양들은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밝은 바탕 위에 각자 자리를 잡고 있다. '음악을 듣는 여인'과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를 듣는 무회'는 제목이나 구성에서 음악을 연상시킨다. 이 제목들은 미로가 1940년 팔마 성당을 방문한 것과 연관이 있다 미로는 라이야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는 오르간 연주자가 연습하는 것을 들으러 갔네.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성당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아무도 없었지. ...오르간 음악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어두운 성당 내부로 스며들어온 빛줄기가 여러 가지형태를 암시해 주었네." 세계적 명성을 향해 전쟁 발발 이전 몇 년간, 미로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유명한 전시회 '환상미술, 다다이즘, 초현실주'(1936)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세계대전과 함께 모든 예술활동이 지지했다. 미로는 프랑코 당국이 자신의 존재를 잊도록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은둔하며 지냈다. 하지만, 1927년 파리에서 미로를 만났던 미술비평가 겸 역사가인 J. J. 스위니는 1941년에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미로의 첫 회고전을 개최했으며, 미로에 관한 주요 서적도 출판했다. 1945년, 피에르 마티스는 미로의 초창기 도예품들과 23점의 '성좌' 연작을 전시했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마티스는 미로에게 "빵을 팔 듯이 자네 그림을 많이 팔았네."라고 말했다. 1959년, '성좌'는 앙드레 브르통의 '평행 산문'이 덧붙여져, 스텐실로 찍혀 나왔다. 앙드레 브르통은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주 예전부터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현란한 모습의 이 형상들, 갑작스레 발산하는 빛으로 어두운 밤의 찢길 듯한 바람을 쫓아내주는 이 형상들. 이 형상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성좌이다." '성좌'는 처음으로 미로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고, 이때이후로 미로의 전시회가 세계 전역에서 개최되기 시작했다. 1962년 파리, 1964년 런던, 도교에 이어 교토, 그리고 1968년 생폴드방스와 뭔헨에서 전람회가 열렸다. 범세계적인 카랄루냐인: 미국에서 의뢰한 벽화의 제작 마드리드에서는 한낱 무명인 이었고, 바르셀로나쉐서는 지식인과 몇몇 지인들만 알아주었으며, 유럽에서의 명성은 아직 대중적이 아니었던 반면, 미국에서 미로는 이미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로의 영향을 받은 폴록, 로스코, 고르키 같은 미국의 신세대 화가들은 미로를 선구자로 간주했다. 드디어 미로가 '미국을발견'할 시간이 왔다. 1947년에 신시내티의 테라스 힐턴 호텔에서 레 구르메 식당에 벽화를 그려 달라고 의뢰해 왔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대형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미로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었다. 1947년 2월 뉴욕에 도착한 미로는 10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대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내전은 스페인에서 모든 외부세계의 흐름을 차단시켰고, 그를 은둔과 명상의 시간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후에 이루어진 이 여행은 문화적인 삶과 국제적인 삶으로 회귀했음을 뜻했다. 미로에게 몬트로이그의 땅과 카탈루냐의 경치가 의미 있던 만큼 이러한 삶 또한 필요한 것이었다 1920년, 미로는 "범세계적인 카탈루냐인이 되어야 하네. ...새 출발을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네."라고 리카르트에게 편지를 띄웠다. 미로는 뉴욕에서 전쟁으로 헤어졌던 친구들인 콜더, 뒤샹, 작곡가 바레즈, 건축가 세르트 들을 만났다. 그는 판화가 헤이터의 작업실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서 드라이포인트동판기법으로 판화를 제작하곤 했다. 이 작품들은 루마니아태생의 프랑스 시인이자 수필가로 다다이즘의 창시자로 알려진트리스탕 차라의 ''앙티테트''(1948)의 삽화로 사용되었다. 미로는 원색 동판조각기법도 시도했다. 자크뒤팽은 이 여행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미로는 이 여행에서 자신의 작품과 현실의 중요성에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이 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고 느낀다. 특히 그의 예술이 갖고있는 근원적인 힘은 현대사회의 역동성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로는 뉴욕현대미술관이 그를 위해 기획한 회고전을 계기로, 1959년에 미국을 다시 한번 방문했다. 벽화 신시내티의 주문을 받은 미로는 자신의 작품이 '전시용'으로 한정되기를 원치 않았다. 회화와 건축은 서로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주어야 한다.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약 10mx3m의 웅장한 벽화가 식당 벽에 펼쳐졌다 커다란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림의 파란 바탕을 비추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는 원색의 형상들과 그래픽이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처럼 이 시기의 미로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때까지 작은 화폭에 그렸던 기호와 형태들을 대형 화폭에 옮겨놓을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이번에는 하버드 대학을 위해 대형벽화를 제작했다. 1951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주문을 받아, 밑그림 없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그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또 다른 기념비적인 그림과 타일 벽화를 제작했다. 파리로의 귀환 1948년에 미로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블로메가 모임은 이미 오래 전에 해체된 상태였다 전쟁 전에도 그랬듯이, 미로는 항상 움츠려 지내던 혹독한 파리의 겨울을 프랑스어 책과 문학책을 읽으며보냈다. 그는 랭보, 아폴리네르, 로트레아몽, 자리들의 시를 읽곤 했으며, 이들이 남긴 흔적은 영원히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파리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로는 자신의 후기회화작품들과 초기 도예품을 발표하기 위해 마트가 기획한 전시회를 계기로 파리로 돌아왔다. 프래베르, 차라, 마송, 레리스 등 많은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 모두가 전시회 카탈로그에 실을 글을 써주었으며,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 마트는 미로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에 매달렸다. 파리에서는 미로의 회고전이 두 번 열렸다. 첫 번째는 1962년 국립 현대미술관, 두번째는 1974년 미로의 80회 생일 때 파리 현대미술관과 그랑 팔레에서 개최되었다. "회화와 시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로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시적 환영으로 정신세계를 키워 나갔다. 그는 조르주 라이야르에게 그가 경험한 환영을 설명했다. "토끼 한 마리가 들판을 달려가고 있었네. 그때 석양이 지고 있었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토끼를 보았는데, 나선 모양의 소용돌이가 치더군, 그것은 태양을 향한, 무한을 향한 소용돌이였네. 태양은 노란 불꽃이었지.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적인 환영이 일어났네. 그건 태양의 폭발이었지. "1924년부터, 미로는 그림 안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은 문자를, 다음에는 단어를 그려넣었다. 1920년 말엽에는 그림 안에 형상과 문장을 함께 그려넣었다. '내 갈색머리 아가씨의 육체' '이것이 내 끔이 색이다' 죽음의 징조'라는 글이 삽입되었으며, 1938년의 가장 유명한 삽입 글은 '별이 흑인 여인의 가슴을 애무하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시화'라고 불렀다. 겉보기에는 그래픽이 투박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공들여 다듬어졌다. 그래픽은 그림에 삽입된 말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말은 그래픽의 가치를 높여준다. 미로가 자크 뒤팽에게 말했다. "이처럼 글은 그림의 소재가 된다. 글은 오로지 그림과 하나가되고 더 풍요로워지기 위해 작품 안에 등장하는데, 그 어떤 무게나 강요도 없이 회화와 시의 꿈을 낳는 조형상의 균등성을주장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야." '표제시'는 1931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절정기는 1959년대쯤이다. 강렬한 이미지와 조화로운 단어를 통해, 표제시는 미로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시적인 제목을 몇 가지 예로 들어보자. '별이 비추는 호수에 새가 빠지다'(1953), '뱀 기어가는 소리에 동이 트는 새벽의 리듬에 맞추어 밤이 떠오른다'(1954), 아주 아름다운 제목인'새 날개에서 떨어진 이슬방울이 거미줄의 그늘에서 잠든 로잘리를 깨우다' '백조가 지나가자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호숫가의 여인들'. 몇 년이 지난 뒤에는 그림에서 문장이 사라졌다. 표제시 대신에, 그림 밑에 삽입된 제목이 시적 느낌을 강화해 주었다. 제목은 미로의 상싱력에서 섬광처럼 솟아 나왔다. 미로는 "제목은 마지막에 나온다."고 라이야르에게 말했다. 친구들의 요청으로, 미로는 단 2회에 걸쳐 잡지에 시 텍스트를 발표했다. 1962년에는 ''예술지''에 '시적 유'를, 1952년에는 ''시상''에 '아를르캥의 사육제'를 발표했던 것이다. "책은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조상의 위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파리에 있는 판화가 마르쿠시와 자신의 공동작업장에서 첫 삽화(특히 트리스탕 차라의 ''여행자들의 나무''를 위한 삽화)를 제작한 1930년대 이후로, 미로는 결코 판화작업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1948년부터 시인 친구들의 강한 요청을 받은 미로는 페르낭무를로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계속해, 수많은 판화작품을 만들었다. 이 판화들은 갖가지 문화행사나 카탈루냐지방의 행사를 위해 제작된 시적인 작품이며, 탁본과 포스터용으로 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자크 뒤팽은 "미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이 수많은 판화는 미로의 무한한 지적 풍요성을 보여준다. 어떤 예술가도 그렇게 자유롭게 작업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창작열에 불타지 않았다. "고 말했다. 삽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을 꼽으라면 차라의 ''독백''과 엘뤼아르의 ''온갖 시련을 겪으며''에 실린 작품을 거론할 수 있다. 후자는 전후에 나온 가장 아름다운 시집 중 하나로 화가와 시인과 출판업자들 간의 긴밀한 협조 아래 제작되었으며, 목판 위에 조각된 80점의 원색 삽화가 실렸다. 1948년에 시작된 이 시집작업은 10년 후에나 끝이 난다. 1957년, 미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판화 부문 대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석판화, 아콰틴트(aquatint, 동판부식법의 한 가지), 부식동판화 따위 모든 기술을 섭렵했고, 대담성의극치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모든 크기의 작품을 소화할 수 있었다. 미로는 책의 범주를 벗어나, 대중에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후로도 미로는 바르셀로나와 마요르카에 지은 아틀리에에서 기력이 다할 때까지 판화가와 삽화가로서의 길을 계속 이어 나갔다. '느린 회화와 '자발적 회화': 1949년-1950년 1940년대 말, 미로는 여행을 하거나, 삽화가요 조각가이자 도예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바르셀로나와 몬트로이그에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뉴욕과 파리에서 거둔 성공에 고무된 미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열심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미로 재단 책임자인 로사 마리아 말레트는 1940년과 1950년 사이에, 회화 55점을 비롯해 데생, 조각, 부식동판화, 석판화 작품을 통산해 150여 점이 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미로는 정해진 주제-여자. 새, 별이 주제의 중심축이다-에 천착하면서, 동시에 평행을 긋는 두 길을 나아갔다. 첫번째는 '느린 회화'로의 길이며, 두 번째는 '자발적인 회화'로의 길이었다. 예를 들어 '붉은 태양이 거미를 갉아먹다'같은 '느린 회화'에서는 검은 테를 두른 원색의 형태들이 캔버스의 올이 군데군데 나타나 보일 정도로 얇게 물감을 덧칠해 만든 바탕(그렇다고 건성건성 칠해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뚜렷이 부각된다. 그와 반대로 자발적인 회화에서, 미로는 캔버스를 채우고있는 형상들을 단번에 그린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상한 물건이나 엉뚱한 소재(판지, 포대자루 등), 전통적이지 않은 규격의 캔버스를 사용했으며 밧줄 같은 다른 소재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탐구의 시기는, 미로가 회화와 멀어졌던 5년간의 시기를 거친 후에, 1960년 새로운 단절의 시기로 이어진다. 이때부터 미로는 열렬히 자발성의 길, '행위회화'의 길로 나아갔다. 미로와 아르티가스 1942년, 미로는 뒤피나 마르케와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던 로렌스 아르티가스의 도움으로 도예에 입문했다. 그렇지만 아르티가스와 본격적으로 공동작업을 시작한 것은, 미로가 카탈루냐의 산악지방에 위치한 갈리파에 만든 가마와 새 작업장을 방문한 1953년이 되어서였다. 아름다운 원시적 풍경, 맑은 공기, 파란 하늘이 미로를 매료시켰다. 두 친구는 행동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협력작업의 기준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회화와 도예는 일체를 이루어야한다. 이들은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두 예술의 단순한 결합을 거부했다. 그래서 도자기를 굽기 전에 도색을 하기로 했는데, 이 방식은 뛰어난 기술을 요하며, 화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지켜봐야 할 만큼 고된 과정이다. 그들은 산에 있는 돌이나 바위에서 영감을 얻어, 특이한 형태를 지닌 작품을 제작했다 1954년부터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 작업을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도예가의 이름을 본떠 '니코스테네스'라 명명했다. 1956년, 32점의 도자기가 '화염의 대지'라는 제목을 달고 파리의 취향을 물씬 풍기는 마트 화랑에서 전시되었다. 도예품은 파리인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미술비평가였던 자크라세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전시회를 둘러본 사람들은 살아 숨쉬며 증식하고 있는 석화된 형태들의 숲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느꼈던 인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유약으로 뜨거워진 빛, 그리고 색채를 머금은 도자기 재료의 광택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유네스코의 달과 별 1955년, 미로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신축 건물의 외부에 전시될 두 개의 대형 벽화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미로는 아르티가스와 공동으로, 도자기 타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늘 그랬듯이 미로는 유네스코 건물 자체의 건축양식을 참조해 작품을 구상했다. "벽화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들에 대한 역자용으로, 큰 벽 위에는 강력한 붉은 원, 다시 말해 태양이 필수불가결했다." 반면 작은 벽 위에는 푸른빛을 띤 초승달을 그리기로 했다."나는 큰 벽에는 거친 표현을, 작은 벽에는 시적인 암시를 추구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미로와 아르티가스는 스페인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관람했고, 바르셀로나 박물관에 있는 로마 양식의 벽화와 가우디의 모자이크도 연구했다. 처음 구워낸 작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면이 너무 매끄럽지 않은가 하는 불만이 있었다. 로마 양식으로 건축된 갈리파 성당의 낡은 벽에서 영감을 얻은 그들은 표면이 거칠거칠한 타일판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이 방법은 작품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해 주었다. 1958년 5월 29일,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폈다. 그들은 흙 4톤, 유약 250g, 나무 10톤을 사용했다. 미로와 아르티가스는이 작품으로 1957년 구겐하임 재단이 수여하는 대상을 받았다. 유네스코 벽화느 앞으로 일련의 도예 걸작품이 탄생되리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걸작품 중 하나는 생폴드방스의 마트 재단에 있는'미로관'인데, 이 작품은 재능 있는 세명의 카탈루냐 출신 예술가-미로, 아르티가스, 세르트-의 공동작업으로 제작되었다. 도예를 통해 미로는 그에게 중요한 두 가지 목표-진정 대중적인 예술, 실질적인 공동 예술창작-를 달성했다. 조각가미로 1949년, 미로는 처음으로 10여 개의 청동검을 만들었다. 그후1966년과 1971년 사이에 미로는 그의 정신세계를 3차원으로 옮겨놓은 많은 조각품을 제작했는데, 이 조각들의 중심 주제는 여성이었다. 땅 위에 놓인 종 비슷한 긴 치마를 입고 있는 숭배의 대상인 이 중년 여인상들은 고대 지중해 문화-크레타섬의 조각상, 더 나아가 안달루시아의 성모 마리아 상들-를 재현해 만든 것으로, 성적 징후-생식기를 나타내는 움푹 팬 구멍, 볼록한 가슴, 돌출된 남근-가 다분히 드러나 있다. 조각이 채택하는 방식은 회화가 추구하는 방식과 정반대이다. 회화에서 미로는 기호와 형태를 매개로 해 자신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밖으로 투사한다. 반면 조각에서는 다양한 양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그는 이 양감을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세계에 맞추어야 한다. 조화, 시, 균형 잡힌 구성은 조각가 미로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양감의 비밀이며, 그의 촉수를 멈추게 하는 것은 회화의 재료보다 더 강력한 재료의 신비이다 미로는 양감을 완벽하게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창조정신에는 두 갈래 길이 필요했다. 때로는 둥글고 통통하며 매끄러운 형상들을 조각하고, 때로는 여러 물체에 변형을 가했던 것이다. 미로는 산책길에 주운 모든 물건에 지대한 애정을 가졌으며, 녹슨 철이나 버려진 기구 앞에서도 감격했다. 그는 이런 물건들에 새로운 존재의 이유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한데 접합시키거나, 청동 안에 집어넣어 주조해 영원히 함께 하도록 했다. 이후 미로는 기념비적 조각을 만들기 위해 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지나 시멘트를 사용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미로는 대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바로셀로나 시청을 위해 만든 미로의 조각 '여자와 새'(1982)는 기념비적 조각의 마지막 예이다. "그림은 섬광 같아야 한다. 그림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시처럼 매혹적이어야한다. 그림은 빛을 발산해야하며. 피레네 산맥의 목동들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하는 이 부싯돌과 같아야한다. ...예술은 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 대지 위에 씨를 뿌렸다는 것이다." '나는 정원사처럼 일한다' ''20세기'', no 1, 1959년 2월 제5장 범세계적인 카탈루냐인 꿈의 아틀리에 1953년에 미로는 60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상황과 작업에 따라, 바르셀로나, 몬트로이그, 파리, 뉴욕, 갈리파를 오갈 뿐 이제껏 꿈꿔오던 아틀리에를 현실로 만들지 못했다. 이미 붓칠을 시작해 완성작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그의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야 할 유화에 푹 파묻혀 아무 생각 없이 작업에만 골몰할 공간이 한없이 그리웠다. 마침내 어머니와 부인의 고향인 마요르카섬이 평화의 정박항이 되어주었다. 아틀리에 설계는 세르트가 맡았다. 하버드 대학 교수이던 세르트는 전후 가장 뛰어난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다. 처남이며 팔마의 건축가인 엔리크 훈코사가 살림채 건축을 담당했으며, 아틀리에 건축공사도 감독했다. 1954년에 '아브리네스'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브리네스'는 미로가 매입했던 팔마 근처의 부지이다 미로는 세르트에게 전권을 부여했으며, 다만 미로가 준비하고 있는 대형 작품의 크기와 기후를 고려해서지어 달라고 당부했다. 공사는 1956년에 모두 끝났다. 불쑥불쑥 작업을 재개하고 싶었지만, 미로는 곧바로 미완성유화들을 풀어놓지 않았으며, 자기만의 공간을 꾸미는 일을 별로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산책길에 나무토막을 주워오거나, 대중에게 친숙한 작품의 소재가 될 만한 오브제나 농기구를 그러모았다. 미로는 라이야르에게 "여기 모아둔 물건들은 작업과 관련이 있다네. 내 작업이 무엇인지 암시해줄 뿐만 아니라, 분위기 조성을 하는 데 꼭 필요하지.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대중미술일세."라고 말했다. 2년 후, 미로는 바로 옆의 토지인 '그의 보테르'를 매입했는데, 그곳에는 아름다운 17세기 저택이 있었다. 이 집은 정신적, 육체적 휴식의 장소가 되었으며, 부속 건물 한켠에는 조각용 아틀리에가 들어섰다. 자유로운 행위 : 새로운 단절 뉴욕 체류 동안, 미로는 그곳 신세대 작가들의 회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화는 인간의 자유, 한계를 뛰어넘어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보여주었다. 이 회화가 나를 해방시켰다."고 평했다. 또한 파리에서 미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대두한 중요한 사고의 변화를 확인했다. 미로는 예술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모든 관학적인 가르침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편협한 사회와 단절하는 위험을 감수했던 1920년대처럼, 진실과 자유로의 회귀를 수호하고 조상 전래의 가치를 옹호하는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장애물이 제거된 뒤였으나, 아직도 서구세계는 과소비, 도박용 경마와 같은 다른 형태의 구속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중상주의 앞에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미로는 열정적으로 회화를 재개했다. 1959-1960년 사이의 왕성한 작품활동이 그 증거이다. 그는 점점 더 격렬하고 단순한 노선을 취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지표나 뿌리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단절, 이중 노선, 역행, 끊임없는 탐구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이후로는 행위의 단순화가 한층 두드러지게 되었다. 미로의 손자 다비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로지 상상력에서 나온 색과 기호의 지휘자(상상력의 악보는 자유였을 것이다)와도 같았던 할아버지가 공기처럼 가벼운 손으로 빈 공간에 형태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미로는 서양 사회의 채워지지 않는 축재 욕구에 단순성과 순화된 행위를 대비시켰다. 형상들이 서로 혼합되고 뒤엉켰으며, 새는 탄도가 되었다. 별은 이 단순화 작업의 영향을 그리 심하게 받지 않았다. 별은 성운이나 낙서 자국처럼 표현되었지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미로는 자신의 모든 근원적인 힘을 조형언어로 만들고, 행위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두껍고 공격적인 선을 지닌 형태들을 단번에 그리기를 원했다. 그의 '다시 그린 자화상' '태양 앞에선 어린 소녀의 환희' '여자와 새'가 바로 그 예이다. 미로는 빈 공간 위에 가는 선과 솜털이 붙은 듯한 원을 그려넣었다. 자크뒤팽은 산만하게 흩어진 이 기호들을 위협받는 인간-절망과 공포를 나타내지만 생존의 희망을 간직한 인간-기호로 해석했다. 3부작 미로는 예술적인 감동을 유발하고, 최소한의수단으로(작품마다 수단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면서) '충격'을 불러일으키려는 힘든 임무를 자신에게 가했다. 이 임무를 위해 미로는 빈 공간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게 해주고, 해탈의 인상을 부각시켜 주는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작업은 3부작의 제작과정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61년에 3부작 '청색 I' '청색 II' '청색 III'을 제작하기 위해 미로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명상에 잠겼다. 그가 종교의식에 비유한 명상과정은 작업을 위한 예비단계로 영적 해탈에 도달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졌다. 그런 뒤에야 그는 스스로 '나를 탈진하게 만드는 전투'라고 표현한 작품의 제작에 몰입했다. 미로에게 3부작은 '모든 노력의 종착역'이었다. 1968년에 제작된 '은자를 위해'는 한결 더 해탈에 다가선 작품으로 꼽힌다. 1974년, 미로는 카탈루냐 출신의 젊은 민족주의자의 사형 집행일에, 또 하나의 3부작을 완성했다. 미로는 이 작품을 통해 단 하나의 선, 즉 내면으로 향한 삶의 끊어진 선을 가지고 형벌의 잔악함을 표현했다. 그 제목은 '사형수의 희망'이다. 공인 미로 세계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부는 여전히 그를 모르고있었으며, 스페인 내전 동안 자유의 편에 섰던 전력을 사면하지 않았다. 미로가 75세 되던 해인 1968년에야 친구들 덕분에 스페인에서의 첫 공식 전시회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드디어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에 미로의 작품을 맞이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아방가르드 회화와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스페인 관광부 장관이 제막식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지만, 미로는 이를 거절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스페인내의 지적 활동을 억누르고 자신과 동포를 격리했던 스페인정부가 이제는 현대 미술에 관심을 .가지다니 미로가용인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전람회에는 개인소장가들과 유럽 여러 미술관에서 보내온 예전의 유화들뿐 아니라, 미로의 아틀리에서 온 최근 유화들도 전시되었다. 조각품들은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에서 선별되었다. 이 전람회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에 이미 혁신적 건축술을 창조했고, 미술학교와 그래픽 학교를 세웠던 카탈루냐 지방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로 이번 전시회가 끝나고 1969년, 젊은 건축가들은 미로에게 기발한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협회 건물의 대형 유리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가, 3일간 전시한 뒤에 지워버리자는 것이었다. 'Miro otro(다른 미로)'라 이름붙은 이 행사의 정치적이고 한시적인 성격과 아울러, 이 행사의 동기가 된 반체제주의적 정신이 미로를 매료시켰다. 그는 구경거리가 될 만한 소지를 피하기 위해 밤에만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미로는 예술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일을 맹렬히 비판했다."나는 먹어치울 수 있는 고기가 아니지.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야. ...그런 현실을 향한 항거는 더욱 단단해진다네." 미로는 라이야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70년대 초, 미로는 캔버스 중앙을 불로 태웠는데, 이는 1974년의 그랑 팔레 전시회에서 빈축을 샀다. 미로는 이 행위의 이유를 직접 설명했다." 나는 조형적인 측면과 직업적인 면에서 캔버스를 불태웠습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이 작품들로 한 밑천 잡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퍼붓는 비난이었지요." 미로 재단 아라공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전시회 때, ''프랑스인의편지''에 기고한 평론에 '새벽 동이 트는 바르셀로나'라고 사실 1941년 이후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되찾았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미로의 오랜 친구인 호안 프라트는 미로에게 현대 미술을 전파하기 위한 기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나 예술적인 면에서 후한 성품을지니고 있을뿐더러, 전세계인들이 예술과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고심하던 미로는 독립성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이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이곳이 자신의 작품을 위한 전시공간뿐 아니라, 연구기관도 겸하기를 원했다. 미로와 그의 친구들은 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1975년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재단이 일반인에게 문을 열었다. 팔마의 아틀리에와 생폴드방스의 마트 재단을 설계했던 세르트가 건축한 미로 재단의 건물은 몬후익 언덕의 화려한 지중해성 식물들에 둘러싸여 서 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쭉 늘어선 전시장들에 미로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장들은 공간을 흐르는 빛과 완벽한 균형미로 경탄을 자아냈다. 교묘하게 배치된 통로들로 간간이 허와 실이 대비되는 공간 배열을 보여주는 이 건축물 안에는 5000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중 217점은 미로와 그 가족의 기증품이다. 이 재단은 수많은 행사를 주최했는데, 특히 미로 탄생 100주년 회고전은 주목할 말한 축제였다. 말년기, 마지막 행동 미로는 차츰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1979년, 여러 아틀리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던 미로는 가족과 친구들의 동의를 얻어 바르셀로나의 재단과 유사한 새로운 재단을 마요르카섬에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미로의 소유지 안에 세워진 이 재단은 미로의 작품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살아있는 미술연구소가 되었으며, 미래의 세대를 위한 문화의 등불이 되었다. 1983년, 미로의 건강은 하루가 달리 악화되어 갔다. 앉아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물감과 연필을 놓지 않았다. 미로의 마지막 창작행위는 첫 스승이 했던 것처럼 수평선을 긋는 것이었고, 그 옆에 모데스토 우르헬이라고 썼다 "만약 3000년 후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회화의 해방뿐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해방을 도왔다고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기록과 증언 미로의 말들 미로는 글쓰기는 자신의 '전공'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전공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떤 사태와 보고, 느끼고, 작업하는 것에 대해 훌륭히 말할 줄 알았다. 미로는 충동이 아니라 필요성을 따르는 사람처럼, 엄정하고 정확하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다. "나는 정원사처럼 일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말이 적고 비극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어린 시절 지독히도 슬픈 시기를 보냈기에, 지금은 비교적 균형 잡힌 성격이지만. 모든 것에 혐오감을 느낍니다. 삶이 부조리하게 다가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이성적인 추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가 염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 긴장은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나는 이 긴장에 적합한 분위기를 시, 음악, 건축 들에서, 날마다하는 산책에서, 또는 어떤 소리들(시골의 말소리, 수레바퀴 삐걱이는 소리, 발자국 소리, 한밤중의 외침, 귀뚜라미소리)에서 찾습니다. 하늘이 보여주는 광경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거대한 하늘에서 초승달이나 태양을 볼 때 나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내 그림에는, 큰 빈 공간 속에 자그마한 모든 형태들이 있습니다. 빈 공간, 빈 수평선, 빈 평원, 박탈된 이 모든 것이 언제나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현대를 상징하는 풍경 중에서는 공장, 밤의 불빛, 비행기에서 본 세상이 좋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던 순간은 한밤중에 워싱턴 상공을 비행한 때였습니다. 한밤에 비행기에서 바라본 도시는 정말 경이롭습니다. 비행기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아주 작은 개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밤에 절대적인 어둠 속을 비행하는 동안 들판 저 위에서 보이는 농부들의 불빛처럼 큰 중요성을 띱니다. 아주 하찮은 물건들이 내게 아이디어를 줍니다. 나는 부자들이 사용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접시보다 농부들의 수프 접시를 더 좋아합니다. 대중미술은 항상 나를 감동시킵니다. 대중미술은 속임수도 트릭도 없이, 곧장 목표로 나아갑니다. 대중미술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풍부한 가능성을 지닙니다. 나는 모든 물체가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이 담배, 이 성냥갑은 그 어떤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렬해 보이는 내밀한 삶을 담고있습니다. 나무를 볼 때면, 마치 그 나무가 살아 숨쉬고 말을 하는 존재라도 되는 양 충격을 받습니다. 나무 역시 인간적입니다. 부동성도 내게 충격을 줍니다. 이 병, 이 유리, 한적한 해변 위의 큰 조약돌은 움직이지 않는 물체이지만, 마음속에 큰 동요를 불러일으킵니다. 육체의 전체는 팔이나 손, 다리와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그림에서는 모두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내 그림에는 혈액 순환이라 할 그 무엇이 존재합니다. 어떤 형태가 적합치 않으면, 이 순환이 멈춰버립니다.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지요.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면, 나는 아프거나, 심장이 잘 박동하지 않거나,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거나, 숨이 막히는 듯한 신체적인 고통을 느낍니다. 나는 열정적인 흥분상태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나는 몰입을 위해 육체적 충동을 따릅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배설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림이 즉각적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좀 전에 여러분에게 묘사했던 신체적인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는 싸움꾼이기에 곧 투쟁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나와 내가 하는 것 사이의 투쟁, 즉 나와 그림, 나와 신체적인 고통 사이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은 나를 자극하고 흥분시킵니다. 나는 이 신체적인 고통이 멈출 때까지 작업을 계속합니다. 나는 충격, 나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충격에 빠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충격의 원인은 화포의 작은 실 한 가닥.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이 탁자의 빛나는 표면 위에 내 손가락이 남긴 이 손자국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내게는 출발점이 필요하며, 출발점은 단지 먼지 한 점이나 광채일 수 있습니다. 이 형태는 일련의 물체를 낳으며, 하나의 물체는 다른 물체를 태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실 한 가닥이 나에게 세상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나는 정원사나 포도재배 자처럼 일합니다. 사물은 천천히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형태의 어휘를 갑자기 발견했습니다. 이 어휘는 거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형성되었습니다. 모든 사물은 사물 본래의 흐름을 따릅니다. 이 사물들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접목도 해주고 상추밭에처럼 관개도 해주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내 머릿속에서 무르익어 갑니다. 언제나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합니다. 심지어 서로 다른 작업이라 할 회화, 판화, 석판술, 조각, 도예도 동시에 합니다. 나는 작품재료와 작업도구에 따라 사물에 삶을 부여하는 방법과 기술을 정합니다. 내가 끌을 가지고 목판에 조각을 한다면, 이 작업은 나를 그에 맞는 정신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내가 솔을 가지고 석판에 혹은 뾰족한 칼끝으로 동판에 작업을 한다면, 이 작업 또한 나를 다른 정신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도구와 소재의 만남은 살아 움직이면서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충격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1주일동안 그림을 보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1초 동안 그림을 보고서 자신의 전 생애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에 그림은 섬광 같아야 합니다. 그림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시처럼 사람을 매혹시켜야 합니다. 그림은 빛을 발해야 하며, 피레네 산맥의 목동들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하는 이 부싯돌과 같아야 합니다. 그림이 공기 중에 내뿜는 것이 그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림이 파손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대지 위에 씨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초현실주의를 좋아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회화를 최후의 목표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화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고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회화는 씨를 남기고, 그 씨를 다른 것들이 탄생하는 곳으로 퍼뜨려야 합니다. 그림은 풍요로워야 합니다. 그림은 세상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림에서 꽃, 사람, 말 들을 볼 수 있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림이 이 세상을 살아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말입리다. 나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강렬함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낍니다. 이 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점점 더 박탈적 성격을 회화에 부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자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경우에는, 미로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국경, 사회적 관습. 관료적 관습 때문에 제한된 사회에 속해 있는 스페인화가인 미로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익명을 향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시기에는 항상 익명이 지배를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익명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적으로 개인적인 행동, 다시 말해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으로 개인적인 행동은 익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익명이 보편성에 도달하게 해준다고 확신합니다. 어떤 사물이 국지적일수록 그 사물은 더 보편적으로 됩니다. 이본 타양디에가 정리한 대화록 ''20세기'', 1권, 1호, 1959년 2월 1979년, 미로는 바르셀로나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0월 2일, 학위수여식에서 그는 '예술가의 민사상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연셜을 했다. ...글로써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내전공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내 언어는 시각적인 것으로, 회화의 언어입니다. 나는 일평생 이 언어활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말해야 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글로 쓰는 강의를 하는 대신, 여러분이 기억을 더듬어 내 작품으로 되돌아가서, 그 작품에서 내가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어쨌든 이 엄숙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엇인가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그것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내 행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인간 행동의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민사상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인 예술가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견해에 입각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술가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가가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목소리는 예언자적이며, 예술가가 속해 있는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술가가 어떤 나라. 예를 들어 적대적인 역사 때문에 잔혹하게 상처받은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든 형태의 무지, 모든 오해, 모든 악의에 대항하여 카탈루냐는 존재하고 있으며, 독창적이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천명해야하며 그러기 위해 세계 도처에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국제 문화와 세련된 엘리트주의에 둘러싸여 있는 예술가가 말을 할 때, 그는 지식과 특권층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가가 세상사를 알고 그것을 표현하려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든 시도의 근원이며 궁극적인 수신자인 민중의 깊은 지혜와 직접 교류를 해야 하며, 계층간의 장벽 때문에 예술가의 이런 일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억압받는 상황에서 예술가가 말을 할 때 , 그는 자신의 전작품을 금지에 대한 거부로 변화시켜야 하며, 모든 압제와 편견과 허위적인 공공의 가치에서 해방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시도를 하건 간에, 일반인, 특히 민중을 위해서나 민중의 역사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때, 예술가는 자신이이 시도나 노력에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 시도나 노력에 도움을, 즉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도움을 주어야하며, 때에 따라서는 작품활동으로 이에 기여하는 효과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 유대와 애국심에 대한 말,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의 경계를 뛰어넘는 직접 대화에 대한 말, 자유를 위한 원대한 시도에 경의를 표하는 이 말들이 이 기념식장 안에 울려 퍼지게 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 1993년 4월-8월에 바르셀로나의 미로 재단이 개최한 전시회의 카탈로그 '호안 미로, 1893-1993'에서 발췌 내 마음속의 할아버지 다비드 페르난데스 미로는 미로의 맏손자이다. 다비드의 글-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된 기사,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프랑스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신-은 미로의 사생활에 얽힌 귀중한 증언을 담고 있다. 1992년 미로의 두 재단은 이를 한데 모아 발간했다. 바다 앞에서의 성스러운 고민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을 묘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수필가나 전기작가, 연구자들이 이미 거의 모든 것을 말해 버린 화가인 동시에, 이 글을 쓴 저자의 할아버지인 호안 미로일 때 특히 그러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화, 서로 같이 나눈 웃음들, 둘만의 은밀한 눈길, 무수한 인상들이 두서 없이 머리에 떠오른다. 색의 마술사인 할아버지의 투명한 청색과 마주하기 위해, 지중해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아브리네스 영지의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걷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는 마술사나 도사 같은 할아버지의 삶을 공유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는 그의 존재-애정이 넘치면서도 비밀스러운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살고싶다는 충동을 일으킨다. 갈매기의 날개모양을 한 지붕이 있고, 흰색과 파랑, 노랑과 빨강으로 이루어진 성역인 아틀리에에 출입하는 것은 마음의 휴식과 동시에 흥분을 유발했다. 작업실 안에는 폭발적인 색으로 처리된 있다. 그 작품들은 운 좋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또한 오브제, 산책중 주워온 물건, 우연히 제작된 작품-새둥지 위에 놓인 작은 해마. 벽에 못 박힌 쥐 , 박쥐의 해골, 불꽃놀이 문양의 넥타이 등-도 있었다. 미로의 재능은 놀라움의 효과와 충격효과에 근거하고 있다. 예측불허의 인물인 할아버지는 항상 깜짝 놀라게 만드신다. 식탁에서 한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거라! 작은 빵 같구나. 이 닭을 봉투에 담아야겠다. 이 뼈로 뭔가 만들 수 있을 거야. 아주 훌륭한 뭔가를 말이다." 할아버지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 조약돌은 태양만큼이나, 풀잎은 그의 소중한 캐롭만큼이나, 곤충은 독수리만큼이나 중요하다. 겉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미로의 작품이 될 수 있다. 순수신비주의자인 미로-사람들은 미로가 테래즈 다빌라 성녀와 장 드 라 크루아를 찬양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끊임없는 창조적 황홀경에 빠져 있다. 오로지 상상력에서 나온 색과 기호의 지휘자(그 상상력의 악보는 자유였을 것이다) 같았던 할아버지가 공기처럼 가벼운 손으로 빈 공간에 형태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미로의 삶과 작품 안에, 다양한 열쇠가 있다. 열쇠란 몬트로이그, 타라고나의 들판, 유칼리 나무와 종려나무, 포도나무와 캐롭 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배경으로는 서쪽에 드높은 산들이 있고, 동쪽에 지중해가 있는 횐 집이다. ...'몬트로이그의 성당과 마을' '시우라나' '농장' '수레바퀴' '경작지' 같은 주요작품에 등장하는 이 풍경들은 그의 진실을 밝혀주는 출발점이다. 또한 그것은 작품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전창작활동을 지배하는 사고의 출발점이다... 마요르카섬은 미로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달콤하고 고요한 은신처이다. 이곳은 마술 사슬의 끝이며, 그의 부인이자 수호신인 필라르이다. 어찌 보면 이곳은 동양이라 할 수 있다. 페니키아인과 회교도들이 마요르카섬에 가져온 영향을 상기해 보자. 이런 영향으로 미로는 동양적인 모든 것에 경외를 품고 있다. 미로에게 파리는 작가수업, 지식, 시, 친구 들을 대변한다. 나는, 1919년에 시계상이던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으라고 종용했던 바르셀로나의 부당하고 경직된 몰이해로부터 도망친 이 내성적인 젊은 화가가 당시 예술의 메카였던 파리에 도착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상상하곤 했다. 미로는 "범세계적인 카탈루냐인이 되어야 한다."고 친구인 리카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리의 분위기는 미로에게 그림 그리는 일을 제쳐두게 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아침마다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했고, 저녁마다 화랑들을 돌아다녔다.... 예술에서뿐 아니라 인간이란 면에서도, 미로에게 배울 점이 많이 있다. 첫 번째는 그의 강인한 독립성이다 이미 파리에서의 젊은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카페나 당시 유행하던 모임에 거의 출입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홀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작업에 몰두했다. 이 점에서 흥미를 끄는 일화가 있다. 1920년대의 파리의 보헤미안 사회에서, 카탈루냐 출신의 고독하고 소심한 이 화가는 멋부린 의상 때문에 '몬트로이그의 신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도, 넥타이 핀을 꼽고 지팡이 드는 것을 좋아했다.... 미로는 그 자체가 꿈이었다. 할아버지자신이 이 사실을 인정했듯이, '자면서는 절대 꿈을 꾸지 않고, 깨어 있을 때만 꿈을 꾸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로의 위대한 진실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그의 작품의 순수성과 정직성이 있다. 우리는 지성주의와 이론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알고 있다. 결단코 미로에게서는 경직되고 폐쇄된 이론들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산책할 때. 경치를 보지 않고 발 밑의 땅이나 하늘을 바라본다." 미로의 침묵은 전설적인 것으로서 의미로 가득찬 침묵이다. 확고한 제스처 항상 신비의 후광으로 둘러싸인 투명한 눈빛을 지닌 침묵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할아버지의 친한 친구 호안 프라트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나는 미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 피카소와 달리 미로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체에서 꽃이 피기를 원했다. 관도, 대리석도, 비석도 원치 않았다. 땅-생명 -죽음-땅-생명... 이것이 그의 순환과정이기 때문이다. 미로는 단테처럼 땅, 하늘, 시, 우정, 사랑을 제외한 모든 현실에서 해방된 사고를 통해 창조된 세계 안에서 살고자 하는 그의 목적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완전한 파괴와 생존의 희망사이에 놓인 우리 세대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미로는 단순하지만 깊은 뜻이 담긴 이 글을 리카르트에게 보냈다. "나는 산을 거닐고, 책을 읽고, 아름다운여인을 응시하고, 자네에게 형태와 리듬과 색의 환영을 암시하는 음악회에 간다네. 이 모두가 내 정신을 양성하고 풍요롭게 하지. 내 언어가 강력한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네. 특히 성스러운 불안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일세. 성스러운 불안 덕분에, 인간은 진보를 하게 되지." 모든 것이 이처럼 행해졌다. 마요르카섬의 빛나는 이 가을 동안, 80세의 이 젊은 화가는 별과 새와 여자와 구름의 신비를 해독하면서, 성스러운 불안을 간직한 채 해변을 거닌다. ''엘 파리'', 1981년 11월 14일 가정에서의 미로 ...내가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거의 항상 할아버지 곁에서 사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그에게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닌,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유명인으로서의 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외부로부터 전해들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할아버지라는 인물과 유명인, 이 둘을 일치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서 내 스스로 그의 작품을 탐구하면 그를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변호사, 목수, 배우, 아니면 은퇴를 하고 쉬는 할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는 화가였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첫 기억은 마요르카의 '그의 보테르'에서의 모습으로,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며, 부모님 내 동생 에밀리오, 조부모님, 관리인 부부인 토메우와 마르가리타, 그들의 딸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할아버지가 왕래하던 두 건물에 관심을 가졌다. 한 건물은 세르트가 건축한 아틀리에였다. 빨강, 노랑, 파랑 덧문이 달린 창문을 가지고 있는 이 아틀리에는 흰색의 큰배가 바다 위에 놓여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다른 건물은 언덕 위에 있는 '그의 보테르'로 이 큰 집은 18세기 초 마요르카의 고저택으로 엄숙하고 음침한 건물이다. '그의 보테르'는 초현실주의풍 건물로 그 안에 들어가면 벽면에 할아버지의 낙서, 칸막이 벽에 기대어놓은 횐 캔버스들, 테라코타 만든 작은 호각들, 초벌 스케치만한 그림들, 꼭두각시 수집품, 벽에 압정으로 꽂힌 익살스러우면서도 이상한 우편엽서들, 미로-아르티가스 합작의 도자기 액자에 들어 있는 호안 프라트의 사진, 피카소의 사진, 뼈로 만든 콜더의 꼭두각시, 부엌 벽에 걸려 있는 박제 고양이, 또 다른 캔버스들, 바닥의 물감 자국들, 검은 옷차림을 한 증조부모님의 초상화가 있었으며, 이 수많은 인상적인 물건에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듯 바다가 보이는 큰 테라스가 있었다. 결국 나와 내 남동생은 할아버지가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처럼 호기심 많은 두 아이에게 이곳은 마술의 집이요 천국이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할아버지에게 이 집은 세르트가 설계한 아틀리에의 질서와 정밀성에 대한해독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은 할아버지의 진정한 성역으로, 그는 외출을 삼간 채 마치 사무실에 출근하듯이, 매일아침 이곳으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층계참에서 할아버지를 조심스레 부르면서 식사시간을 알렸다.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던 또 다른 장소는 아틀리에의 뒤뜰이었다. 땅은 돌로 되어 있었고, 벽에는 녹슨 큰 닻, 통나무, 쟁기가 기대어 있었다(지금도 여전하다). 어느 날 저녁, 할아버지는 이 뜰에서 우리와 함께 공놀이를 했다. 아동기가 지나고 청소년이 되자, 화가 미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점점 더 커졌다. 뒤팽이쓴 훌륭한 전기를 두 번이나 읽었고, 화가인 미로와 할아버지인 미로를 동일시할 수 있었다. 나는 몬트로이그와 타라고나 들판에 쏟은 할아버지의 애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세례 요한 축제일(6월24일 :역주)부터 몬트로이그 축제일인 9월30일까지 지속된 장기 여름휴가였다. 할아버지는 이 농장에 부속 아틀리에를 지었고, 그곳에서 아침이면 그림을 그렸다. 그라고 나서, 할아버지는 바닷가로 나가거나(할아버지는 수영을 잘하셨다) 장시간 산책을 했는데, 돌아을 때는 나무조각, 조약돌 따위 조각에 쓰일만한 물건을 한아름 안고 왔다. 바다와 땅에서 캐낸 원석 같은 영감의 근원인 몬트로이그. 불그스름한 돌산의 정상에 로카 성녀의 암자가 있는 이 땅은 할아버지가 이젤과 붓을 들고 이웃 들판과 산에 자리잡고 작업하던 시절인 1916년의 아름다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몬트로이그는 출발점인 동시에 필연적인 도착점이었으며, 미로의 진실이었다. 어느날 무쟁에서, 나는 피카소가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이보게, 자네는 자네의 진실이 있는 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행운을 가졌어. 난 그럴 수가 없네." 몬트로이그에서 보낸 여름 시간은 달콤하고 강렬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소작농 부부에게는 나와 내 동생보다 약간나이가 많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올가미로 토끼를 사냥하는 법, 수로를 열고 방향을 바꾸면서 관개하는 법, 유칼리 나무에 기어오르는 법. 새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농부들과 함께 지냈으며, 식사도 같이했다. 소작농인 에우헤니는 우리에게 항아리째 마시는 법과, 포도 수확법, 캐롭 열매 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마을로 올라가서 조합에 포도를 내려놓은 다음, 저녁때 농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저녁식사 후에는 뽕나무 그늘 아래서 에우헤니는 우리에게 스페인 내전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는 공화주의자 편에 서서 에브르 전선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이야기와 팔에 난 상처에 매료됐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여름생활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거짓 없고 순수한 땅과 농부들과 함께 어울렸던 것이다.... 나는 농장에서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한밤의 산책을 기억한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빼미 소리, 나타났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박쥐와 귀뚜라미들이 별이 박힌 둥근 천장 같은 하늘 아래서 우리를 뒤따랐는데, 땅과 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험이었다. 나는 이 모든 신비를 이끄는 길잡이가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넌 나를 이해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인생에는 전환기가 있었다. 파리에 가기로 결정한 시기이다. 파리에서 할아버지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는 블로메가 45번지에 살던 멋진 시절로, 할아버지가 가입했던 '작가-미술가그룹'의 역사, 충동적이고 도발적인 초현실주의와 다소간에 관련을 맺는 역사에 해당한다. 알다시피 할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시절에 대해, 1920년대 파리, 아르토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할아버지는 아르토에 대해 말씀해 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내가 요양원에서 아르토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단다. 그는 멍한 눈을 하고 방에 있었는데, 나는 그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그는 통나무를 들고 있었는데, 상상의 낫을 가지고 그 장작을 패는 행동을 하더구나. 내가 방에 들어가자, 그는 야성적이고 겁에 질린 눈으로 몇 초간 나를 응시하더니, 그 행동을 다시 계속하는 거야. 나는 몸이 얼어붙었지. 불쌍한 앙토냉 아르토... 배우 시절, 우리에게 항상 연극표를 주었는데 그후로는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단다. 얼마 후 세상을 떠났거든." 할아버지가 말하기로 작정하면-그건 종종 있었던 일이다-이 시절의 기억, 예술가 모임, 친구들 자신의 습관, 보헤미안 시절에 겪었던 배고픔에 얽힌 이야기 보따리들이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풀어져 나왔다. 피카소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재미있었으며, 예정에 없이 이루어졌다. 내 동생, 조부모님, 친애하는 세르트 부부와 나는 생폴드방스에서 두 대의 자동차로 출발했다. 무쟁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피카소의 집은 내게 중세 영주의 성처럼 보였다. 피카소의 비서인 자클린과 미셸이 우리를 맞이했고, 염소 한 쌍, 거위 한 쌍, 고양이 한 쌍, 아프가니스탄산 개 한 쌍도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긴 복도를 지나, 오렌지색 식탁보가 깔린 둥근 탁자가 있는 아주 밝은 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검은 눈동자의 파블로 피카소가 우리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얼마나 멋진 모습이었던가! 나는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올림푸스 신전을 방문하는 것 같았다. 피카소는 요란한 바둑무늬 바지와 줄무늬 셔츠에 노란 가죽 단화를 신고있었다. 가끔 그는 기모노를 입었으며, 씨가 아주 더울 때는 러닝 셔츠와 팬츠만 걸쳤다 항상 우아한 차림의 할아버지는 나무랄 데 없는 여름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나비 넥타이를 맨세르트는 현자를 닮았다. 나는 흥분에 싸여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 이 인상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어 와 카탈루냐어 와 프랑스어를 아주 재미있게 섞어가며 말했다. 그림들은 벽에 걸리지 않고 벽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책과 카탈로그뿐 아니라 종이와 이국적인 물건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는데, 모든 것은 잘 정리된 혼돈을 이루었다. 그들은 지난 시절과. 피카소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대해이야기를 나눴다. 피카소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스페인의 최근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류 시럽을 탄 차가운 레몬 주스를 마신 후에, 우리는 피카소의 집을 산책했다. 나는 피카소를 더 잘 보고 그의 말을 잘 듣기 위해 할아버지 옆에 붙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한창 작업중이거나 이제 시작한 그림이나 조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힘은 할아버지의 힘과 달랐다. 피카소의 성안에는 예외적이고, 정신을 교란시키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창조의 힘이 존재했다. 반면, 할아버지의 성에는 더 많은 평화와 신비가 지배하고 있었다.... 비평을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여기서 비평이란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실패한 예술가, 콤플렉스에 싸인 지식인, 오만한 관학자, 냉소적인 전위예술가들이 하는 비평을 말한다. 할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에 보내는 자기 자신의 눈길이었으며, 스스로 가하는 규율과 혹독한 제약은 작품에 완벽한 통합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발전했으며, 이 발전은 그가 결코 저버리지 않은 도발정신으로 발전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 즉 관객의 반응을 존중하는 반면, '전문가들' 이나 '참여적인' 미술애호가들의 의견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유네스코의 벽화나 바르셀로나 공항의 벽화, 맨해튼세계무역센터의 대형 태피스트리가 군중에게 불러일으키는 인상이었고, 그것이 호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문제가 되지 안았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가 충격이라고 불렀던 것이기 때문이다. V.콤발리아 ''미로의 발견7''1990년 시인 미로와 그의 시인들 스스로 시를 쓰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미로는 시인들의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위대한 시인들에게 시상을 주었고, 그들의 단어에 색채를 부여했으며, 그들의 문장에 약동하는 힘을, 그들의 시구에 운율을 주었다. 시와 회화사이에는 영원히 작용하는 연금술이 있다. 미로는 글과 색으로 이루어진 시화 작품을 제작하는 한편, 그림이 전혀 없는 글쓰기도 시도했는데, 다듬어지지 않은 이 글이 지닌 강력한 호소력은 큰 화제가 되었다. '아를르캥의 사육제' 이 그림에 기록된 환각을 불러일으킨 배곯던 시절, 내 창자를 뒤틀고 난도질하던 담배 피는 광대 복장의 고양이들과 그들이 풀어놓은 실타래, 그날 저녁 블로메가45번지 -석유 램프 빛에 비친 내 인생에 언제나 지대한 영향을 주던 '13'이라는 슷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숫자-의 집에 들어오면서, 알루미늄 다리를 가진 거미 모양의 여성 성기에 붙어 있는 새의 목덜미처럼 떨리는 백설 같은 종이 위에 그려진 개양귀비 핀 들판에 활짝 핀 물고기 이 시절에 회칠한 벽 위에 새로운 영상을 투사했던 불꽃을 가지고 있는 줄기와 창자의 심지 사이에 있는 여성의 둔부, 나는 외알박이 안경 모양으로 박아놓았던 횡단보도의 징을 신사 같은 내 눈에서 뽑았고, 기아상태에서 날아 다니는 나비에게 매혹된 귀, 음악의 무지개, 현금의 비처럼 떨어지는 눈, 혐오스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다리, 마룻바닥에 부딪힌 공, 구역질나는 현실의 드라마, 기타의 음악, 인광을 발하는 대서양에 몸을 담근 나의 갈색머리 여인의 육체를 찌르러 가기 위해 빛나는 원을 그리면서 파란 공간을 가로질러가는 유성. 호안 미로 ''시상'', no 4, 1934년 1월-3월 '시적 유희' 빨간 카네이션이, 장밋빛 눈 위에 누운 앵무새의 꼬리 달린 대구가 들고 있는 우산의 꼭지에서 터진다. 검은 옷을 입고 카나리아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마른 몸매의 키 큰 부인 둘이 음악회장에서 나온다. 공작새의 꼬리, 인광을 발하는 해골 주위에 카탈루냐의 민속춤을 추는 나이팅게일의 원무 속에 묻힌 나의 선조의 화장한 시체 앞에서 미소 짓는 박쥐의 콧등을 물어뜯는 불타는 나무. 내 넥타이의 빨간 점들이 하늘을 찌르고 발터스트라스 행의 A. S. 완행열차 안에 앉아서 '베를린 공원'의 동물원 수족관을 구경하러 '식물원'에 갔다. 빈대가 내 엉덩이를 물었다. 나는 경보 단추를 눌렀다. 성모 마리아나 숫처녀처럼 순결한 개구리가 운전수 옆에 앉아 있다. 거지가 보도에서 파란 동전을 줍는다. 적갈색 머리를 한 벌거벗은 무희가 푸른 센강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비가온다. 장밋빛 아기가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쪽쪽 빤다. 갈색머리에 무덤 가장자리 같은 눈을 가진 엄마는 절망의 검은 심연 속에서 파랗게 질려 숨을 헐떡인다. 제비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순수한 사랑, 내 배꼽을 짓누르는 노새들, 라파엘로 전파의 나비가 나는 곳에 기관총을 난사하듯이 뭉개버리러 가기 위해 살구잼으로부터 선회하며 내려오는 노새들. 진홍색 나비가 대서양을 맨발로 걸어가는 내 여인의 깊이 팬 옷깃에 등지를 튼다. 대서양에 개양귀비가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 횐 식탁보 위의 횐 우유 한 잔 빨간 앵두 초록색 풍뎅이 유성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타 이 기타의 줄들이 공간을 가로지른다 제비들이 기타 줄마다 등지를 튼다 이 줄은 아름다운 여인의 목을 조른다. 호안 미로 ''예술지'',20-21권, 파리, 1945-1946년 '미로의 탄생' 오늘 알에서 나온 새가 새롭게 날갯짓하며 나무에 등지를 틀러 왔을 때, 미로는 맑은 공기 전원, 우유, 가축떼, 순진한 눈, 앵두잎을 따는 영광된 가슴의 부드러움을 음미했다. 미로에게는, 오렌지빛과 연보랏빛 길이나 노란 집들, 분홍 나무, 오랫동안 사방의 벽과 권태에 구멍을 뚫을 포도와 올리브빛 하늘의 이편에 있는 땅보다 더 나은 재물은 어디에고 없었다. 두 여자 중 한 명은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여자였다-내가 그녀 외의 다른 여자들을 알고 있었던가? 그녀가 미로의 그림 중 극도로 단순한'스페인 무희'에 반했다. 빈 캔버스 위에 모자 핀 하나와 깃털만 있는 작품이다. 첫 아침, 마지막 아침, 세계가 시작한다. 전율하는 삶, 변화를 더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과 고립되어 어둡게 살아야 할 것인가? 글이 내게 애착을 느낀다. 내게 말을 하고, 나를 보고, 내 말을 듣는 순수한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내게 애착을 느낀다. 오래 전부터 미로는 가장 투명하게 변신한 이 순수한 세상의 모습을 반영한다. 폴 엘뤼아르 ''예술지'', no 1-3, 1937년 '거울-미로' 미로의 이름 안에는 거울이 있다 때론 이 거울 안에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세계가 있다 태양의 과업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계란 노른자 뇌면조가 멀리서 지저귄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아침의 문을 질질 끌면서 검은 태양이 저녁의 지하창고로 떨어진다 어슴푸레한 잿빛과 유배당한 그늘 유리 깨지는 붉은 소리 밤이라 불리는 과부 세탁부가 소리 없이 나타난다 파란 새탁비누 안에 든 미로의 천체 때늦게 뜬 별이 빛난다. 자크 프레베르 ''호안 미로'', 1956년, '무지개를 향햐여' ' 22, 23, 24...' 눈보다 더 잘 녹는 밀에서, 줄넘기의 괴물 장미가 창문 없는 화려한 잿빛 궁전 안에서 활짝 핀다. 지붕 밑 방의 수령초를 향해 디아볼로(공중팽이놀이 : 역주)를 던져 떨어뜨릴 정도까지 높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모래 섞인 꽃의 소용돌이 사이로 돌진한다. ' 38, 39, 40... '미끼새가 펄펄 끓는 피의 붉은천(투우사용 붉은 천 : 역주)을 가지고 지나가고, 빛나는 시구의 소매만이 너무도 민첩한 나머지, 무감각한 경비대에 번진다. 태고의 솥(까마귀의 날갯짓이 미끼새의 털을 홑날려 보낸다)에서 위장과 조작의 냄새가 강하게 퍼져 나오는 동안, '콘차'는 '사랑'의 단어와 '쇠퇴하다'라는 단어의 철자를 말한다. 앙드레 브르통 ''상승 기호'', 1968년 '산들이여, 춤을 추어라'(1961) 나는 정신의 대지진을 통해 미로를 본다. 이 지진이 지난 후에는, 수천 개의 균열이 생겨나지만, 이 우주의 단 한조각도 절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저 멀리서 더 이상 구르지 않는 포효하는 표류물, 조각된 형상, 평온한 탁자는 크레바스나 정해진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바위투성이 암벽 위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데 분주한 미로를 떠올린다. 활력에 넘쳐 관습에 젖지 않은 화가. 그는 행복의 바퀴에 보상금과 불씨를 뿌린다. 그는 상복의 주름 안에 오시리스(이집트의 신 :역주)를 되살리기 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태우지 않는다면 유성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미로는 불을 들고 달려가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며, 불을 지핀다. 르네 샤르 ''20세기'', 1974년 '미로, 저녁과 아침' 수탉은 시도 때도 없이 허공의 유리창을 깨뜨려 영롱한 별을 만든다. 우리를 휩쓸어버린 흰색으로 가득 채우는 검은 영상과 오색의 영상. 하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를 깨우기 위한 퍼덕이는 날갯짓과 영상들의 외침말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피셀 레리스 ''놀라운 찬탄'', 1973년 강렬한 불과 널려 있는 사막의 질서정연한 어떤 것. 벽시계의 똑딱 소리마다 모래의 장미와 깃털의 불꽃이 시계침의 도가니에서 솟아나며 시계 숫자에 공백을 표시한다. 결핵은 간석지, 모래톱, 삼각주, 연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천지 사방으로 연을 놓아버린 자는 달의 다른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 보라, 남색. 초록, 노랑, 주황. 빨강 어떤 흑사병이 어두운 혈관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는가? 모르는 사이에 전염된 사람들을 만발한 문신과 반점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인가? 셀 레리스 ''균열'', 1969년 조각가 미로 "미로는 기호를 창조하듯 물체를 창조한다. 그는 물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강요한다. 미로는 자신과 함께 무에서 출발해 창조를 하자고, 본보기를 만들며 자유의 한계를 확장시키자고 제안한다." 알랭 주프루아 ''조각가 미로'', 1974년 미로 재단 바르셀로나와 마요르섬의 팔마에 있는 미로 재단은 미로와 그의 친구들과 부인 필라르의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이 두 재단은 미로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소명 외에도, 각종 예술분야의 만남과 전시회의 기획을 통해 현대 미술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재단 호안 미로 재단의 기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요한 사실을 상기해야한다. 그것은 미로가 숫자상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인물들-호안 프라트, 라이몬 노게라, 호세프 루이스 세르트, 호아킴 고미스-과 맺었던 긴밀하고 확고한 우정을 말한다. 이들 모두가 호안 미로재단의 탄생에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고 나섰다. 호안 미로의 절친한 친구인 호안프라트는 미로의 작품을 수집한 첫번째 인물이었을 것이며, 미로 전문가였다. 음악에서 시, 회화에 아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전위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프라트는 미로 재단의 설립계회의 발기자였으며, 넓은 범위에서 보면 바로 그의 덕택으로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 바르셀로나 시당국은 미로의 탄생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첫 선집전을 개최했다. 조국스페인의 공공기관이 주관한 이 전시회는 바르셀로나의 산타크레우라는 옛 병원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선별된 주요 작품들이 모였는데, 일부는 미술관이나 개인소장가들로부터 온 것이고, 일부는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있는 미로의 아틀리에에서 온 것이다. 이 전시품들은 미로의 작품에 대한 지대한 흥미와 미로가 20세기 미술에 끼친 공헌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프라트는 미로가 보관하고 있는 전시작품들을 관객들이 아무 때고 볼 있도록 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확신하였고, 미로에게 그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미로는 이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이 기관의 설립을 조건부로 승낙했다. 그 조건이란, 일반 대중과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뿐 아니라, 20세기 여러 미술사조와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젊은 작가들의 화가로서의 소명을 자극할 것이다.... 계획이 차츰 구체화되어감에 따라, 이 기관이 들어설 자리로 기존의 건물을 선택하자는 생각은 조금씩 배제되었고, 마침내 건물을 새로 짓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호세프루이스 세르트는 1937년 이후로 미로와 절친찬 친구가 되었다. 1937년은 이 둘이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스페인관을 설립하기 위해 함께 일했던 해이다. 세르트는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미로의 아틀리에를 설계해준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 세워질 건물의 설계와 건축 역시 그가 맡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르셀로나 시당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시당국은 세르트와 미로가 택한 몬후익 언덕 위에 있는 부지를 양도했으며, 건축비용의 일부분도 분담했다. 한편 착공아 들어가기 전인 1971년에 창단된 후원회 또한 미로 재단와 계획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호아킴 고미스였다. 모든 독창적인 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이자, 취미로 했던 사진의 전문가였던 고미스는 미로 재단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비슷한 연배로 서로 각별한 사이였던 이 친구들의 한결같은 노력, 그들아 보여주었던 끈기와 열정, 이것이 바로 계획에 불과했던 재단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호안 미로, 호안프라트, 라이몬 노게라, 호세프 루이스 세르트, 그리고 호아킴 고미스의 이름은 미로 재단과 연결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오리올 보이가스, 재단 회장 미로 재단의 많은 소장품 가운데서 모든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두말할 나위 없이 1만여 점 이상이나 되는 미로의 작품이다(회화 217점, 조각 153점, 직물작품 9점, 판화 전집, 5000여 점에 달하는 데생, 습작, 크로키). 재단의전소장품은 거의 모두가 호안 미로가 기증한 것이다. 1979년대 초에 재단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미로 재단이 소유한 소장품들의 성격, 특히 회화작품들의 성격을 결정하고있다. 이 시기는 20세기 미술의 고전이 된 미로의 작품들이 전세계 개인소장가들과 미술관, 화랑에 퍼져 있었던 시기로, 미로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있던 대부분의 유화를 재단에 기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화화의 대부분은 주로 미로가 말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1960년대 이전의 그림이 빠져 있다는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로 부인은 개인소장품 중 일부를 재단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나머지 소장품을 분배했지만, 가족들도 모두 그녀의 의견에 따라 재단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프라트는 처음부터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했다. 이 기증품들은 미로의 1960년대 이전 작품이다. 재단의 기본 자산 중에는 미로가 바르셀로나시에 기증했던 작품들도 있는데, 이것은 1969년에 옛 산 타크레우 병원에서 열렸던 회고전이 끝난 후에는 재단이 보관한다는 조건으로 미로가 기증한 것이었다. 마르그리트 마트와 애메마트, 파에르 마티스, 마뉘엘 드 뮈가가 기증한 작품들도 재단의 자산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1940년대 중반부터 1974년 사이에 제작된 미로의 청동 조각들 중에서는 세인의 흥미를 끄는 일부 작품만이 재단에 전시되었다. 대개의 경우, 미로의 모든 조각품들은 여러 본(일반적으로 네 개)을 찍어내기 때문에, 재단이 작품당 몇 개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 청동 조각들 외에도 재단은 1946년의 제작품 한 점과 1950년대 작품 네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미로의 후기 대형 조각 중에 두 점, 즉 라 데팡스 거리에 전시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비적 작품(1975)과 바르셀로나의 옛 도축장 용지에 조성된 공원에 전시된'여자와 새'(1982)의 모형도 소장하고 있다. 미로는 1972년에야 비로소 직조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생애에 걸쳐 예술개혁가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미로는 호세프 로요의 도움을 받아 여러 개의 직조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태퍼스트리에 가깝기는 하지만, 태피스트리라는 장르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대형 태피스트리 (1979)는 미로가 그림 표면의 직조와 색깔을 씨실과 날실로 전이시키려고 노력한 방식을 자세히 보여준다. 물론 미로는 연극계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한정되고 특발적인 관계에 불과했다. 우리는 재단에서 볼 수 있는 연극과 관련된 아주 다양한 성격의 소재들을 통해, 미로가 연극과 맺고 있던 관계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미로가 1932년 몬테카를로에서 러시아 발레단이 초연한'어린아이의 유희'를 위한 의상과 무대장치의 고안에 관여했을 때, 이 무용공연을 위해 제작한 모든 데생, 습작, 모형은, 무용가들의 무대 위에서 실제로 행할 동작을 고려해 작업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모리와 메르마' 공연에 사용되었던 대형꼭두각시들(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이 인형들은 미로의 그림을 기초로 클라카 극단 단원들이 만들었으며, 도색은 미로가 맡았다)은 미로가 3차원을 다루고 동작을 통제하는 면에서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미로의 대형 그래픽 작품들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재단은 모든 판화, 석판화, 책, 포스터에 대해 각 2부씩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들 중 몇 작품들은 이 2부외에도, 여러 상태의 초벌그림과 모형도 함께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재단이 보유한 이 주요소장품들은 리즈 히르츠가 쓴 ''그는 작은 까치였다''의 삽화를 그리기 위해 최초로 스텐실 작업을 했던 1928년부터 말년까지, 미로가 제작한 판화의 발전모습과 창작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판화는 예술적 가치와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한 컬렉션이라는 점에서도 가치를 지닌다. 미로 재단은 미로의 '바르셀로나' 연작 전체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7년에 시작되어 1944년에 인쇄가 끝난 이 연작은 스페인 내전을 바라보는 미로가 던진 조형적인 대답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50점의 흑백 석판화 전제에 대해 각기 5부씩만 찍어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 판화 대부분이 여러 수집가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것 같다. 미로와 프라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작품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재단은 '바르셀로나'의전작품뿐 아니라, 전사지와 다양한 상태의 초벌그림들도 모두 수집할 수 있었다. 재단의 소장품과 미로 작품이 잘 전시되어 있는 다른 미술관의 소장품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재단이 '미로의 기록', 즉 전생애를 통해 미로가 제작한 5000여 점의 데생, 습작, 다양한 크로키로 구성된 총합체를 보유하고있다는 사실이다. 미로가 여러 차례에 걸쳐 거주지를 옮겼던 사실과 참혹한 전쟁의 경험과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모든 '기록'은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한편으로 이것은 미로의 세심하고 꼼꼼한 작업 방식으로 설명 할 수도 있다. 이 컬렉션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언어의 발전을 한 발자국씩 뒤쫓게 해주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탐험하도록 부추긴 집념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그가 자신의 작품을 두고 행했던 깊은 명상도 들려준다. 로사 마리아 마레트, 관장 마요르카 재단 '마요르카와 필라르-호안 미로 재단'은 1981년에 탄생되었다. 당시 미로 부부는 미로가 작업하던 네 곳의 아틀리에- 세르트가 건축한 아틀리에가 있는 '아브리네스' '그의 보테르' 의 전통 가옥, 판화 아틀리에, 석판화 아틀리에-를 유증하기로 결정했다. 미로는 마요르카섬에 완전히 정착한 1956년부터 그가 사망한 1983년까지 이 네 곳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했다. 이 전시기에 걸쳐, 미로는 자신의 창작세계를 이루었던 모든 것이 망각 속에 빠지거나, 단순히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심했다. 이같은 가능성에 직면한 미로는 법률적인 해결책을 취했는데, 그것은 마요르카 주민들이 최우선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팔마의 시당국에 그의 재산 일부를 유증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미로의 희망을 받아들여 팔마 시청은 미로 재단-다시 말해, 활기차고 능동작인 문화 센터 -의 설립을 승인했다. 미로가 사망하고 3년이 지난1986년, 법규상 명시된 조항에 맞추어 재단이 들어설 부지를 닦는 공사와 재단세우는 공사와 계획되었다. 미로의 미망인 필라르 여사는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재정면에서도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재단의 설립을 위해 그녀는 309점의 수채화와 세 점의 유화를 소더비 경매소에서 매각했다. 1986년 12월 9일,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경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여기서 얻은 돈으로 이 계획이 착수되었고, 팔마시뿌 아니라 전세계에 미로 주요 작품들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대학원 원장이며 세르트의 제자였던 유명한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는 미로가 살았던 '그의 보테르'와 '아브리네스', 그리고 두 아틀리에의 부지에 새로 세을 재단의 건물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모네오의 참여로 마요르카의 필라르-호안 미로 시립재단온 살아 생전에 미로가 표명했던 의지를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것은 미로 본인이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다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는 목적을 지닌 공간, 마요르카섬의 문화중심지, 젊은 화가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탐구의 기회를 제공할 장소를 세우려는 의지였다.... 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예술자산은 주로 미로가 사망할 당시 아틀리에에 남아 있던 그림들로 이것은 미로가 절차탁마해온 예술언어의 해방기와 성숙기에 해당하는 말년 작품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해서 미로가 마지막순간까지 옆에 두었던 이 작품들은 그의 창작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는 한편, 그의 절정기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왕성한 생명력과 완숙미와 곧고 힘에 넘치는 선을 주목해야 한다. 이 작품들이 지닌 지중해적 광채와 근원을 살펴볼 때, 이 작품들은 전적으로 마요르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단의 자산은 상당수가 미로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회화 134점, 데생762점, 그래픽 248점,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 300점, 조각 25점, 타일 벽화 2점, 콜라주2점, 미로가 '그의 보테르'의 벽에 해놓은 낙서, 3500점에 달하는 다양한 물품(작업을 위한 소재, 개인 물품)-이었다. 하지만 1992년 12월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이후 이 작품들은 재단에 맡겨졌다. 한편, 자료적인 자산은 미로의 개인서신들(지식인들과 예술계 인사들이 보낸 약 100여 통의 편지)과, 1918년에서 1958년까지와 신문 스크랩과 정기간행물, 미로의 개인 장서에서 가져온 100여 권의 서적, 100여 장의 가족 사진들로 이루어졌다. 파요르카의 필라르-미로 재단의 간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