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 지은이: 조르주 장 출판사: 시공 디스커버리 봉사자: 고유선 제1장 초라한 출발 2만 2,000년 전 인류는 라스코와 몇몇 동굴벽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만 7,000년 뒤, 인류는 가장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문자를 만들어 내 것이다. 사람들은 인류가 전해 오는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자를 만든 배경에는 그보다 훨씬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다. 인류가 존재한 수만 년 동안 선화, 기호, 그림 등 간단한 의사소통의 수단은 많이 있었 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문자가 존재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문자를 사용하 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 체계가 있어야 하며, 이체계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이런한 체계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랜 동안 천 천히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흥미진 진한 이야기이며, 아직도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누락되어 있어 전모를 파악할 수 없 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문자의 역사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지금의 이라크)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B.C. 3000년경 이 일대는 남쪽 수메르 지역과 북쪽 아카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역사적 사건을 보존하려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문자를 만들었다. 수메르 사람들과 아카드 사람들은 이 일대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는 현대의 영어와 중국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이들 사회는 고도로 문명화되어 있었 는데 바빌론과 같은 대도시 주변에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 공동체는 통치자 에 의해 다스려졌지만 종교적으로는 공동체 수호신들의 보호도 받았다. 궁정의 궁신, 사제, 상인들을 제외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주민은 대부분 목자 또는 농부였다. 우르크 대신전 단지 에서 출토된 진흙판에 새겨진 최초의 문자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 준다. 신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진흙판은 곡식의 포대 수와 가축의 수를 적어 놓은 것이다. 최초의 문자는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제작된 진흙판은 수메르인의 사회구조를 알려 준다. 예를 들어 라가시에 있는 신전의 종교적 공동체에는 18 명의 빵 굽는 사람, 31명의 술 빚는 사람, 7명의 노예, 그리고 1명의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수메르 사람들이 상거래에서 온화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이 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를 도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메르의 학교터에서 발견 된 진흙판에는 한쪽에 선생이 쓴 글씨, 다른 한쪽에 학생이 쓴 글씨가 나란히 적혀 있어 설형문자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도 알 수가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물체의 단순한 윤곽 이상의 것으로 서, 물체의 전형을 간단한 선화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산'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를 겹쳐놓 으면 그것은 산 너머 외부 지역에서 데려온 '여자 노예'를 의미했다(c). 학자들은 이 같은 원시 그림문자가 약 1,5000개 정도 있음을 확인했다. 문맥 속에서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그림문자 B.C.29000년경 아주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다. 원시 그림문자에서 즐겨 사용되던 곡선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 서 비롯되었다. 진흙판에 곡선을 그려 넣는 것은 어려움이 많이 따랐고, 그래서 순전히 직 선으로만 이루어진 문자에계가 급속히 발달하게 된었다. 필경사들은 진흙판에 한쪽 끝이 뽀족한 갈대를 이용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사물 을 그려 넣었다. 수메르인은 끝부분을 삼각형으로 잘라 내 첨필(첨필: 깃촉 펜이나 만년필의 선구)을 만들었다. 그림들은 주로 쐐기꼴을 하고 있었는데, 이 특징 때문에 설형문자(설형 문자,cuneiform)라는 말이 생겨났다. cuneiform은 '쐐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cuneus에서 유 래한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설형문자는 많은 변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원래 그림의 형체는 완전 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필경사들이 제멋대로 기호의 형태를 변경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필경사들이 사용한 것이 분명한 '기호목록'이 발굴되 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사전 또는 학습 보조도구라고 해석된다 (원어의 scribe는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훨씬 후대의 copyist와 구분되어 사용해야 하나 마땅한 역어 가 없어 이 두 가지 모두 필경사로 번역함:역주). 기호들은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의 발을 나타내는 기호는 '걷다' '일어서다' '움직이다' 따위 여러 뜻 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뜻에 따라 발음도 달랐다. 기 호가 처음의 간단한 의미보다 더 많은 내용을 나타내게 되자, 그에 따라 기호의 전체 개수 는 점점 줄어들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기호의 수는 600개를 넘지 않았 다. 레부스, 진정한 문자체계로 가는 초석 곧 더욱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다. 필경사들은 기호를 새겨 넣은 젖은 진흙판을 햇볕에 말 리거나 드물기는 사지만 가마에 넣어 말렸다. 이 단계에서 기호는 다양한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기호가 구어를 나타내면서 문자 체계에는 중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모든 발달된 문자체계는 이같이 기호가 소리를 표상하는 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수 메르인과 이집트인의 놀라운 업적은 아이들 놀이처럼 간단히 레부스라는 체계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문자를 사용할 때, 대상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나타내 는 소리를 기록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예를 들어 양탄자를 나타내는 capet 을 쓰고 싶다면, 그것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음소인 'car(달구지)'와 'pet(애완동물)'의 그림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수메르의 그림 문자에서 '티(ti)'는 화살을 의미했는데 이것이 '목 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목숨을 의미하는 단어의 음소도 '티'였기 때문이다. 이것들 은 아주 간단한 실례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소를 사용하는 방법은 점점더 정교해 졌다. 그래서 수메르 필경사들은 어떤 기호가 그림 문자인지 또는 음소문자인지를 구분하 기 위해 때로는 한정부호를 사용했다. 법전, 과학서, 그리고 문학작품 B.C. 2000년경 아랍족과 히브리족 따위 셈족의 선조인 아카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는 주도세력으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B.C. 2000년 직후에는 아카드어가 메소 포타미아의 중심 구어로 자리잡았다. 설형문자는 그 체계가 잘 정비되자 아카드어와 수메르 어뿐만 아니라 다른 구어도 기록할 수 있었다. 수메르어는 구어로서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자 종교문헌 속에서 문어로 보존 되었다. 이것은 라틴어가 카톨릭 교회 내에서 잘 보존된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설형문자는 곧 강 대한 아시리아 왕국의 문자가 되었고, 이어 B.C. 18세기에는 바빌론 왕국의 문자체계로 정 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 사이에서 숫자를 세기 위한 수단으로 초라하게 시작했던 문자체계는 서서 히 발전되어 나갔다. 먼저 중요한 사건이나 계약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고, 이어 구어를 기록하기 위한 체계로 발달했다가 마지막으로 의사소통과 표현이 중요한 수단이 되 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고대 수메르인, 아카드인,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아시리아인은 우편제도로 발달 시킬 수도 있었다. 심지어 진흙으로 봉투까지 만들었다. 설형문자는 여러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신에 대한 찬송, 고대의 예언, 문 학자료 등의 보관을 가능하게 했다. 고대 수메르인은 (길가메시의 서사시)라는 작품을 만들 어 냈는데, 여기에는 '2/3는 신이고 1/3는인간'인 태양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니네베에서 발굴된 아시리아 왕 아수르바니팔(B.C. 669-627) 기념 도서관에서 출토된 자료로 복원 되었다. 위대한 그리스 신화 (특히 헤라클레 스 신화)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서사시에는 대홍수의 이야기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 어 성경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에게 설형문자를 읽고 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호를 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기호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 에게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 때문에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의 필경사는 독립된 계급을 형성했고, 때로는 글자를 모르는 궁신이나 심지어 왕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또 한 우수한 필경학교는 기강이 대단히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메소포타미아 학생들에 관한 기록을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문자체계는 여러 가지 언어를 표기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문자체계는 수메르어나 아카드어말고 다른 언어들도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에 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도를 수사(오늘날의 이란)에 두고 있던 엘람인이 사용 한 엘람어도 설형문자로 기록되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B.C. 1400~1200년에 강성한 문화를 형성했던 아나톨리아(오늘날의 터키)의 히타이트족도 설형문자를 채택하여 널리 활용했다 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의 언어가 인도-유럽 어족에 속했고, 게다가 그들 고유의 그림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설형문자를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른 예로는 고 대 페르시아어를 들 수 있다. 이 언어는 페르시아 왕국(대체로 현재의 이란 지역에 해당하 며 B.C. 500년에 최고로 강성했다)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기록문자로는 메소포타미아 기 호체계에서 파생된 설형문자 알파벳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 에서 발명된 설형문자 체계는 B.C. 3000년에서 B.C. 1000년 사이에 남쪽으로는 팔레스타인,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는 카난어와 우라르티아 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동지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이 설형문자 체계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시대의 역사적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을 것이다. 제2장 신의 발명품 설형문자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널리 펴져 나가고 있을 때 인근의 이집트와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는 다른 문자체계가 발달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문자를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 진흙, 그리고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과 이집트학 학자들이 나일 삼각주의 수많은 기념비에 쓰여 있는 상형문자 체계의 비밀을 해독하지 못했다면 이집트 역사는 대부분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었 을 것이다. 설형문자가 딱딱하고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자체계라면 상형문자는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인간의 머리, 새, 동물, 식물, 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적이고 매혹적이며 생동 감이 있다. 수메르인과 고대 이집트인은 거의 같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는 공통점 이 많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그림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서 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은 아직 가설에 머물러 있으며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집트인은 토트 신이 문자를 발명한 뒤 인간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문자체계를 가리키는 상형문자(hieroglyoph:그리스어 hieros와 gluphien 에서 유래한 것으로 hieros는 '신성', gluphien은 '새기다'라는 뜻)는 실제로 '신들의 글자'를 가리켰다. 가장 오래도니 상형문자로 쓴 기록은 B.C.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상형문자가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그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이 문자는 이집트가 로마인의 지배를 받던 서기 390년까지 별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몇 세기 동안 사용 기호가 약 700개에서 5,000개 정 도로 늘어났다. 수메르인과 달리 이집트인은 훨씬 더 효율적인 문자체계를 만들어 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원시문자가 유치한 선형에서 서서히 진보하여 정교한 문자체계로 발달 했다면 상형문자는 처음부터 진정한 문자체계로 정착했다. 할 수 있다. 상형문자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문자는 거의 완벽하게 구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문자는 콥트어(3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이집트인이 쓴 고대 이집트의 언어, 콥트 교회 의 예배에서는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역주)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부분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둘째, 구체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도 잘 나타낼 수 있었고, 농업, 의약, 법전, 교육, 종교예배, 전승, 기타 문학 일반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기록할 수 잇었다. 이 문자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따른 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전형적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문자이다. 이 문자들을 서로 겹쳐 사용하면 추상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있었다. 둘째는 표음문자이다. 같거나 다른 형태의 표음문자가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이집트인이 사용한 레부스 체계는 초 기 수메르인이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셋째는 한정부호이다. 이것은 문맥 속에서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지적하는 것인지 알려 주는 부호이다. 해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아름다운 글자꼴 이 그림문자 체계는 정말 신들의 문자였다. 일반적으로 신의 이름이나 파라오(이들 또한 신으로 간주되었다)의 이름이 문자 속에 나타날 때는 그 둘레에 타원형 테두리 장식을 둘렀 다. 이렇게 하면 그것의 신성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을 수 있는데, 앞에 놓인 사람이나 새의 머리 방향으로 문장의 방향을 지시했다. 글씨를 읽는 사람들도 같은 방향으로 눈을 굴리라 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늘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기념비나 신전의 벽이 오시 리스나 아누비스 같은 중요한 신이나 파라오의 조상 바로 옆에 위치하면 문장의 앞에 놓인 인간이나 새의 얼굴은 그 조상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했다. 이렇게 되면 읽기의 방향이 바 뀔 수도 있어 문장의 해독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상형문자는 또한 밑에서 위로 쓸 수도 있었고 좌우로 1행씩 교대하는 좌우 교대서식으로 쓸 수도 있었다. 이서식은 부스트로페돈 (boustrophedon)이라고 하는데, 소가 밭을 갈 때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bous와 strephein의 합성어로 앞의 것으 '소', 뒤의 것은 '방향을 바 꾸다'라는 뜻:역주). 상형문자는 대단히 매력적인 글자이다. 신전의 벽과 무덤의 내벽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을 칭송하고 있다. 상형문자 자체가 신성한 물건인 양 느껴질 때 도 있다. 돌에 새겨 넣었거나 그림으로 표현한 상형문자에는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 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의 눈에는 아마도 그것이 신의 계시로 만들어진 물 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상형문자는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었지만 종교의식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설형문자가 담겨 있는 유물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수많은 기념비와 문서들은 고대 이집트 에 고도로 발달된 문화가 있었음을 증언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문자의 도움을 빌려 역사를 기록하고, 왕들의 계보를 작성하고, 왕족의 결혼이나 전쟁 따위 중요한 사건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문자와 함께 역사가 태어났고, 문자의 도움을 얻어 비로소 사 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문자체계는 거대량을 기록하고(초기 수메르인의 경 우도 마찬가지이다.)법전과 성혼서약을 작성하고, 물품 매매계약을 작성하는 데에도 이용되 었다. 그것은 또한 문학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학은 아주 다양한 자료를 포함 하고 있으며 또한 내용이 풍성하다. 여기에는 도덕적 격언, 신과 왕에게 바치는 찬사, 역사 적 사건이나 모험담, 사랑의 노래, 서사시, 우화 등이 포함되어있다. 고대 이집트 문학 가운 데 오늘날까지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B.C. 13세기에 존속한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쓰인(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예언, 마법, 의술, 약전,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을 다룬 지리책이나 과학책도 만들었는데, 이 책들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그전에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든 태음력은 B.C. 3000년경에 태양력으로 바뀌어 1 년은 365와 1/4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권위와 특권의 상징이었다 이집 트의 필경사는 물론 서예의 대가였고 따라서 교육의 대가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교육은 곧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암기해야 할 기호의 숫자와 상형문자의 복잡성을 감안할 때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수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열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몇 년 배우는 것이 고 작이었다. 그러나 재능 있는 학생은 어른이 될 때까지 학업을 계속할 수 잇었다. 이집트 스승의 교육방식은 쓰기, 읽기를 통한 암기였다. 학생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소리내어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를 반복했는데, 처음에는 필기체인 신 관문자로 쓰다가 나중에는 정체인 상형문자로 썼다. 교육수단으로는 체벌이 효과적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래서 이집트 격언에는 이런 말도 있다. "남자아이의 귀는 등에 달려있다. 등을 Eoflalus 말을 잘 듣는다." 아주 둔한 아이는 좁은 방에 가두기도 했다. 필경사는 강력한 사회계층을 형성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술 때문에 왕만큼 위세 가 있었다. 특히 왕이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여 쓰기, 읽기, 산수 등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들 계급의 위력은 더욱 대단해졌다. 메소포타미아 필경사가 주로 진흙판을 이용한 데 비해 이집트 필경사는 다양한 필기소재 를 이용하여 글씨를 썼다. 그들은 돌에 상형문자를 새겨 넣기도 했지만, 훨씬 부드럽고 질이 좋으며 다루기 쉬운 파피루스도 이용했다. 벌써 5,000년 전에 사용된 종이, 펜, 잉크 파피루스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식물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파피루스를 이용하여 밧줄, 매트, 샌들, 돛 따위 많은 일상용품을 만들었으며, 그 섬유질 줄기를 이용하 여 종이와 유사한 필기소재를 만들어 글쓰기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들은 파피루스 줄기를 가느다란 조각으로 자르고 이것을 겹쳐 붙인 다음, 이렇게 만든 한 켜 위에 다른 켜를 90도 각도로 덧붙였다. 그런 다음 힘을 주어 건조시키고 다시 닦아 낸 뒤, 전분풀을 이용해 약 20장 정도의 파피루스를 세로로 이어 붙여 3.5~4.5m 또는 7~8m 길이의 두루마리 파피루스 용지를 완성했다. 필경사는 왼손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왼쪽으로밀어내면서 오른손으로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글씨를 적어 넣은 부분을 말아 쥐면서 오른쪽으로 밀어냈다. 두루마리가 길기 때문에(가장 긴 것은 39m나 된다)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글씨를 썼다. 두루마리는 무릎사 이에 꽃아 넣고 무릎 위에 펼치면서 사용했다. 필기도구로는 용도에 따라 한쪽 끝을 베어 내거나 뭉툭하게 부러뜨린 갈대가 사용되었는데 길이는 약 20cm 정도 였다. 걸쭉한 흑색 잉크는 물과 검댕을 이용하여 만들었고접착제를 사용했다. 제목이나 소제목, 장의 시작 부 분은 황화제이수은이나 산화납으로 만든 붉은 잉크로 썼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파피루스의 제조를 독점했다. B.C. 3000년경부터 파피루스는 지중 해 연안 지역으로 수출되었고 이집트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독점이 가격을 상승시켰으므로 이집트 국내 필경사와 그 제자들은 큰 불 만인었다. 그 결과 팔림프세스트(사용된 파피루스에서 글씨를 지워 내고 재생한 파피루스) 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파피루스의 가격이 비쌌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석회석과 도자기류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서를 기록할 때만 사용되었다. 일상적인 필요에 따라 보다 빨리 쓸 수 있는 두 가지의 다른 분자가 상형문자 체계에서 발생했다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그리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작없이었다. 이토록 정교한 기호를 이용하여 글씨를 쓴다는 것은 일상생활에는 적절하지도 못할 QNs만 아니라 빨리 해야 하는 일을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필경사들은 보다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 상형문자를 개발해 냈다. 이것을 신관문자(신관문자: hieratic. 그리스어 hier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성하다'는 뜻)또는 성직문자라고 했는데, 그리스 역사가 헤 로도토스(B.C. 485?~424?)에 따르면 사제들이 처음 이 문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과문자도 상형문자와 마찬가지로 그림문자, 표음문자, 한정부호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 세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관문자의 기호는 원래의 그림과는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B.C. 650년경 상형문자와 신관문자가 함께 쓰이고 있을 때 또 다른 문자체계가 등장했 다. 연자를 많이 쓰는 이 문자는 훨씬 빠르고 쉽게 쓸 수 있었으며, 신관문자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다. 이것을 민중문자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집트에서 가장 널 리 사용되었다(신관ㅁ누자와 민중문자는 모두 상형문자의 변형으로 만자체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역주). 참고로 샹폴리옹이 상형문자를 해독해 내는 계기를 마련해 준 유명한 로제타 스톤에는 같은 내용이 상형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의 3개 문자로 쓰여 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민중문자만 보고 모자인 상형문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고대 민중문자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학자들은 콥트어 구어를 연구하여 고대 이 집트인이 사용한 구어에 대해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콥트어는 민중문자의 일부 기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샹폴리옹은 상형문자를 해독 하려면 콥트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신비에 싸여있는 크레타 선문자 B.C. 2000년경에 상형문자는 그 형태가 완성되었고 이집트 문명도 같은 시기에 널리 퍼져 나가 상형문자로 쓰인 유물을 많이 남겼다. 또한 이 시기에 크레타섬과 그리스 본토에서는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문자체계가 발달했다. 19세기 중엽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글 씨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 기호들은 동석(비눗돌의 일종) 인장의 표면이나 진흙에 새겨져 있 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파이스토스 원판에 새겨진 기호들은 문자의 역사상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1906년에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이 대형 원판의 양면에 나선형으로 쓰인 45개의 기호는 현재까지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사용되는 고대 중국의 문자 체계 중국의 문자 체계는 독특하다. B.C. 2000년경에 만들어진 이 문자는 B.C. 1500년경에 기호 로 되었고 B.C. 200~A.D.200 년 사이에 체제가 완비되어 오늘날까지 별로 변하지 않고 그 대로 쓰이고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상형문자와 설형문자는 여러 세기 전 아라비아 문자로 대체된 반면, 중국의 문자는 단 한 번도 그 모습이 바귀지 않았다. 다만 원래 붓 과 먹으로 글씨를 썼으나 펜이나 볼펜을 사용한다는 점, 인쇄소의 인쇄기가 타자기에는 웬 만한 한자가 모두 들어 있어서 사용하는 데 별 불편이 없으나, 글자가 표준화되어 있기 때 문에 서예에서 중시하는 내리긋는 획의 호방한 남성적 분위기와 위로 올려칠 때의 가녀린 여성적 분위기를 낼 수 없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문자를 신이 내려 준 것이라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자의 탄생에는 삼황(고대 중국 전설상의 복회씨, 신농씨, 황제 세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 관 여했다고 한다. 특히 황제는 B.C. 26세기에 살았던 인물로, 천체와 자연의 생물, 특히 새와 동물 ㅣ 족적을 연구하여 한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황제는 글자의 제작을 명했고 실제로 작업을 한 것은 사관 창헐 이었다고함:역주). 시인 우웨이예는 "황제가 글자를 만들어 놓고 근심을 한 나머지 밤새 울었다."고 울었는 데, 시인의 말대로라면 글자의 발명이 환란 중의 환란이었던 셈이다(시인은 식자우환의 의 미로 이렇게 쓴것같음:역주). 한자의 역사를 조명해 줄 더욱 결정적 자료는 1890~1899년 황하의 대홍수 때 발견된 귀 갑 과 녹골의 파편들이다. 이 파편들 속에 가장 오래된 한자의 흔적이 들어있는 것이다 (여기서 발견된 것이 갑골문자인데 이것이 한자의 원형임:역주). 한자 전문가인 비비안 올턴은 이렇게 말한다. "제사장은 구갑의 한 면에다 질문이 담긴 한자를 쓴다음 그 반대 면을 불에다 들이댄다. 그 불이 귀갑을 갈라 놓으면 그 갈라진 모 양에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어낸다." 그들은 귀갑의 균열을 신의 계시라고 믿은 것같 다. 질문을 적은 한자는 위에서 아래로 쓰여있었다. 모든 문자체계의 첫걸음이며 중요요소인 그림문자가 한자에서는 아직도 존재한다 어디서 나 문자의 첫 시작은 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수메르인, 이집트인, 히타이트인, 크레타인 등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중국인의 경우 문자의 시작은 그림문자였다. 즉, 그림문자를 단독으 로 쓰거나 아니면 조합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주 다른 문명권에서 발 달했어도, 각 지역의 문자체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일부 그림문자들은 그 형태가 아주 유 사하다. 한자는 정교한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아주 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림문자는 급속하 게 전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자에서도 초기의 그림요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자는 시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여러 기호의 조합인 특정 한자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용'을 가리키는 용 자에 '귀'를 가리키는 이 자를 붙이면 '귀머거리' 농자가 된다. 용의 귀로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니 귀머거리 를 설명 하는 데 이보다 더 시적인 표현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자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의 소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데 있 다. 예를 들어 '시' 라는 음소는 '알다' '힘' '세계' '맹세' '가다' '일' '좋아하다' '보다' '보다' '믿다' '가다' '시도하다' '설명하다' '집' 등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들 한자는 다른 부수와 결 합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보통 하나의 한자는 기본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부수와 발음을 나 타내는 음소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의 서예를 보면 하자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예를 들면 한자를 쓸 때에는 반듯한 네모꼴을 유지해야 하며 사전에 정한 필순에 따라 써야한다. 이처럼 서체의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기 때문에 아라비아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한자는 대단히 아름다운 장식적 요소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서예는 중국 미술의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르가 되었다. 한자는 중국 구어(중국 구어는 남쪽과 북쪽이 너무 달라 한자를 쓰면서 말하지 않으면 서 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하여 중국문화를 하나로 결속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제3장 알파벳 혁명 3000년 전 문자의 역사에는 커다란 지각변동이 있었다. 알파벳의 창조였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축적물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까지 진축했던 페니키아인이 알파벳 창조의 주역 이었다. 설형문자, 상형문자, 중국한자의 공통되는 특색은 이들 문자의 각 글자가 단어가 되기도 하고 음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ㅁ누자를 읽으려면 사당히 많은 수의 기 호나 한자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알파벳은 이들 문자와 다르게 기능한다. 이 체계에서는 오로지 30개 정도의 기호만 알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글로 표현할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알파벳은 26개인데, 이것만으로 모든 말소리를 표기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등 학교에서 철자법을 배우는 어린이들이 애를 먹는다. 그러나 중국글을 이해하기 위해 외워야 하는 1000개의 한자(한자 습득의 가장 기초인 천 자문을 가리킴:역주), 이집트인이 사용했던 수백 자의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수습 필경 사가 외워야 했던 600개의 설형문자 등과 비교해 보면 26개의 기호로 된 알파벳은 아주 적 은 숫자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상가들은 알파벳이 발명되고 나서부터 진정한 대중 교육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알파벳 B.C. 2000년 경에 아카이아인이 사용하던 언어는 B.C. 1100년경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미 케네 문명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후 3,4세기 뒤에 페니키아 문자가 그 리스에 전파되었다. 진흙판 조각에서 발견된 이 페니키아 문자는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불확 실하나, 이집트의 민중문자에서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페니키아 알파벳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알파벳은 실제 발음될 때 모음과 결합해야만 음가를 가지는 소리, 즉 음소(자음)로만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히브리어나 아라비아어는 가끔 모음 없이 글씨를 쓴다. 주로 선원과 상인이었던 페티키아인 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모든 민족과 교역을 하며, 알파벳을 널리 퍼뜨렸다. 구약성서를 기록한 아람어와 히브리어 B.C. 800년경에 아람의 도시들에서 페니키아인이 사용한 것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또 다 른 알파벳이 발달했다. 바로 아람어 알파벳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이 이 언어로 기록되 어 있기 때문에 아람어의 문자체계는 언어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구약성서의 대 부분은 히브리어로 전해 내려오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B.C. 100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히브리 문자는 모음이 없었고 또 아람어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 고대 히브 리어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공식어로 사용되는 언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공공문서 와 두루마리로 된 각종 법률 자료에 사용된 이 네모난 문자는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일상생활에 쉽게 쓰기 위해 필기체가 개발되기는 했다. 최근에 히브리 문자는 이디시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언어는 주로 독일어와 슬 라브어를 결합하여 만든것인데 중부 유럽에 사는 유태인들이 많이 사용하며 히브리어와 별 관계가 없다. 이것은 문자가 문자창조의 동력을 제공하는 구어와 별개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아라비아 문자와 히브리 문자 문자의 역사는 한가족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아라비아 문자도 히브리 문자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어떤 매개를 통해 그런 일이 이루어졌을까? 불행하게도 그점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 페니키 아 문자에서 아라비아 문자로 발전했는지 그 연결고리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 시대에 나바테아인이라고 하는 북부 아라비아 사람들이 이미 페니키아 문자도 아라비아 문자도 아닌 다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 초의 아라비아 문자 비문은 512~5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한 622년은 이슬람 기원인 헤지라의 시작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성전 코란은 알라가 612년경에 아라비아 문자로 기록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즉, 이슬람교보다 약간 먼저 생겨 난 아라비아 문자가 널리 퍼진 것은 전세계적으로 이슬람교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했기 때문 이다. 아라비아 문자는 아라비아 구어보다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이슬람교도는 북아프리카, 소 아시아, 인도, 중국 일부 지역을 정복했는데, 이들 지역에서 모두 아라비아 문자체계를 받 아들였다. 서구 기독교 세계가 사라센족을 남부 유럽에서 몰아내지 않았다면 서유럽에서도 오늘날 아라비아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사라센은 중세부터 이슬름교도를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 뒤 기독교권 국가들에서 이 말이 널리 쓰였는데 아라비아 민족 일반을 가리 킬 때 사용했음:역주)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와 문자 기독교인들이 스크립처(문자라는 뜻)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물론 성경을 가리킨다. 마찬가지 로 코란의 문자도 '알라의 문자'였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의 눈에 상형문자가 '신들의 문 자' 였던 것과 똑같다. 이문자는 사람들이 해독하든 못 하든 마땅히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심지어 오늘까지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코란 학교에서는 자기네 나라 말이 있는데도 불 구하고 아라비아어로 코란을 공부한다. 이러한 종교적 이유와 다른 몇 가지 사정이 결부되어 아라비아 문자는 널리 전파되었고 더욱이 페르시아 구어를 표기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아니러니컬한 일이다. 왜냐하며   대 이란어의 전신인 페르시아어는 라틴어나 프랑스어같이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서 셈어인 아라비아어와 전혀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서예가 남긴 다양한 예술작품 히브리어와 마찬가지로 아라비아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으면 모음은 잘 표기하 지 않았다. 아라비아 알파벳은 18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부호와 강세(주로 모음을 나 타내기 위해 씀)를 모두 포함하면 29자가 된다. 필기체에서는 연자가 사용된다. 아라비아 서체의 진정한 장점은 무궁무진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는 알라와 선지자 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게 한다. 또 일부 종파에서는 사람의 얼굴도 못 그리게 한다. 이 때문에 아라비아 문자는 모스크나 기념비를 장식하는 주도니 요소가 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서예는 정교하고 멋진 장식예술이 되었고, 고대의 쿠픽 서법(이라크 의 마을인 쿠파에서 유래)과 하산 마수디의 현대적 서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법과 서예 문화를 낳았다. 한편 남아라비아, 에티오피아, 사하라 일부 지역에서는 변형 문자체계가 발달되었다. 비 록 이들 문자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페니키아 문자에서 유래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들 중 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티피나그라는 에티오피아 문자인데 글자 하나하나가 뛰어 난 기하학적인 구도를 갖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 문자는 여자들만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티피나그 문자를 사용한 투아레그 사회는 모계제를 채택하 고 있었는데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글자를 안다는 것은 곧 권력을 의미했다. 그리스인은 아람어 알파벳에서 일부 자음을 빌려와 모음으로 사용했다. 페니키아 문자에서 직접 도는 간접적으로 유래된 문자들은 모두 자음만을 표기했다. 따 라서 그 문자를 읽으려면 머리 모음을 다 외우고 있어야 했다. 문자 중에 모음의 수가 적은 셈어에서는 이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하는 모음이 많은 그리스인에게는 아주 곤란했다. B.C.8세기경 상형문자는 여전히 이집트에서 쓰이고 있었고 알파벳 문자는 팔레스타인 연안 일대에서 200년 이상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보다 북쪽인 그리스에서는 기존의 알파벳 체계로는 표기되지 않는 전혀 다른 언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모음 을 표기하기 위해 아람어 알파벳에서 특정 기호를 빌려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아람 어 자음 중 그리스어에 없는 것을 골라 모음을 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A(알파), E(엡실론), O(오미크론), Y(업실론) 등이 생겨났다. I(이오타)는 그리스인이 기존의 겻을 변 형해 만들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지리한 전개과정이 계속되었다. 어쨌든 B.C.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어 알파벳은 완전 정착하게 된다. 모두 24자인 그리 스어 알파벳은 자음이 17개, 모음이 7개였다. 그리스 알파벳에는 대문자와 소문자가 있었는데, 돌에다 글씨를 샛길 때는 대문자가, 파 피루스나 왁스판에다 쓸때는 소문자가 널리 쓰였다. 그리스인은 점판암 위에 왁스를 두껍 게 바른 것을 필기소재로 이용했다. 학생들은 첨필이나 가는 막대기를 이용하여 이 판 위 에다 글씨를 썼다.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표면의 왁스를 부드럽게 닦아 내면 써 넣은 글씨 가 모두 지워졌다.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도 값싼 필기소재를 이용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였다. 이들 도기는 그동안 많이 발굴되었다. 이들 도기를 오스트라카 (ostraca)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 민주정치의 특징인 오스트라시즘(공동체에서의 추방:역 주)을 연상시킨다. 서구문명은 알파벳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을 그리스 문명에 의존했다. B.C.5세기와 4세기의 그리스인은 그리스 문자를 구사하여 시, 희곡, 서사시, 역사,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문학을 창조했다. 유럽은 그리스인의 문자체계를 물려받았을 뿐 만 아니라 그 문학작품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어는 콥트어, 아람어, 그루지야어 등 정교한 알파벳 체계의 선구가 되었으면, 프랑 스어에 그대로 도입된 라틴어 알파벳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어가 후대에 준 영향은 어느 정도 파악되었지만, 그 인과관계의 자세한 내용은 오늘날의 학자들도 정확 하게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훌륭한 뱃사람이었고 지중해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탈리 아의 에트루리아(현재의 토스카나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리스 문자를 전파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에트루리아 신비는 그리스 문화유산의 신비를 더해준다. 에트루리아인은 찬란한 고대문명을 일군 부족이다. 그들은 정교한 지하묘지에 대단히 아 름답고 매력적인 세련된 벽화와 조각을 남겼다. 이중에는 고대 그리스어를 많이 닮은 문자 로 쓰인 에트루리아 비문들이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의 언어는 아직도 불분명한 데가 많아 '에트루리아 신비'라고 부른다. 에트루리아 왕둘은 B.C.4세기까지 로마를 통치했지만, 그후에는 라티움 지역의 부족들에 게 쫓겨났다. 미래의 로마인이 되는 정복자 라티움족은 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표기하기 위해 에트루리아 알파벳을 빌려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몇몇 권위 있는 학자들은 라틴 알파벳이 에트루리아 부족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그리스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간에 B.C.3세기경에는 19자로 구성된 라틴 알파 벳이 확실히 정착되었다. X와 Y는 그보다 훨씬 뒤인 키케로 시대(B.C.1세기경)에 추가되었 다. 로마인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돌에다 글씨를 샛길 때는 대문자를, 파피루스나 왁스 판에 쓸 때는 소문자를 사용했다. 돌에다 글을 샛길 때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돌에 새 겨야 할 글자수와 돌의 크기를 따져 본 뒤에 글자의 크기를 정했다. 글씨를 새기는 사람은 파피루스에 쓰인 원고를 잘 검토해야 했다. 그런 다음 돌 위에다 초크(백악)로 줄을 그어 글자가 들어설 자리의 위와 아래를 정했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간판 제작자가 쓰는 방식 과 아주 유사하다. 그런 다음 목탄으로 먼저 글자를 써넣고 이어 색을 칠했다. 이 같은 예비 과정을 모두 마쳐야만 비로소 글자 새기는 일에 착수했다. 서기 2,3세기에 들어오자 민중 서체와 언셜체(uncial)라는 두 가지 새로운 서체가 개발되 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 서체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서기 1000년까지 쓰였다. 라틴 알파벳과 같은 기원을 가진 인도 문자 인도 문자는 위대한 통치자 아소카왕(B.C.272~231)의 칙령을 돌에 새긴 B.C.3세기에 처 음으로 등장했다. 이 비문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인도에는 두 가지 우뚝한 문자 체계, 즉 카로스티어와 브라미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인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변 종들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브라미어는 데바나가리 문자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데, 데바나가리 문자는 인도의 성스 러운 언언인 산스크리트어를 기록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는 그후 서서히 세속어에 밀려났 다. 브라미어는 현대 인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인 힌디어의 원천이 되었으며, 브라미 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모두 있는 완벽한 알파벳 체계를 갖추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학자 들은 이 문자가 인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결 론지었다. 인도 여러 지역(특히 인더스강 유역)과 동부 지중해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역로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인도인은 아라비아, 페니키아 연안, 더 나아가 그리스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B.C.326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강 유역을 정복한 유명한 역사적 사건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인도 언어 중 특히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B.C.4세기에 인도인은 이미 고도의 문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B.C.4세기에 살라투라에서 태어난 파나니는 최초의 문법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인 도인이 '신의 문자'라고 생각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과 모음의 기능을 잘 설명했다. 인도 문자가 알파벳 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고 또 정교한 구조의 음운체계를 갖고 있음을 감안하면 파나니의 업적은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인도의 주된 언어들(보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은 주 모음인 '아(a)를 갖고 있다. 또한 각 단어들은 보이지 않는 수평축을 기준으로 자음과 모음이 결집하게 되어 있다. 이 와 같이 독특한 문자형태로 인해 인도 문자는 대단히 유동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 티베트와 기타 동남아시아 국가(라오스, 타일랜드, 캄푸치아, 미얀마)에서 사용되는 문자는 저마다 발달해 나온 과정은 다르지만, 모두 인도 문자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베트남 문자체계는 이들 문자와 같으 ㄴ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는 17, 18세기에 라틴어 알파벳을 도입했다. 당시의 포르투갈 제주이트파 신부들이 남부 베트남과 ㅏ북부 베트남이 서로 다른 문자체계를 사용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고, 베트남 인에게 라틴어 알파벳으로 통일도니 문자체계를 가르치면 전도 가 더욱 쉽지 않을까 하여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 코크 누(나라의 글자라는 뜻)' 또는 '코크 누'라고 하는 베트남어 표기체제를 만들어 냈다. 라틴어 알파벳은 베트남어의 소리를 완벽하게 표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성 구별기호인 점과 강세가 추가로 마련되었다. 문자를 읽거나 쓸 수 있는 능력은 보편적 현상이 아닌다. 2000년 전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는 다양한 문자가 존재했다. 그렇지만 모든 지역에 문자 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학자들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3000여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이들 중 겨우 100여 개 정도의 언어가 문자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글을 쓰지 못하거나 글쓰기에 매 우 서투르다. 아래의 연대는 대략적인 것이다. 문자의 출현시기는 실제로 중복되기도 한다. B.C.3500~3000년 수메르에서 우르크 문명이 싹텄다. 간단한 계산을 하기 위해 그림문자 가 생겨났다. 중국에서는 그림문자가 발생하여 표의, 표음문자로 발달되어 갔다. B.C.3000년 인도에서도 문자가 발달했다. 돌이나 구리판에 최초의 글씨가 새겨졌다. B.C.3000~2500년 나일강 유역에서 상형문자가 발달했다. B.C.1000~700년 페니키아 알파벳은 그리스어와 모음이 들어 있는 발달된 그리스 알파벳의 선구가 되었다. 아람문자는 동쪽으로 퍼져 나가 히브리 문자와 아라비아 문자의 선구가 되 었다. B.C.600년 그리스인과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공회당의 '검은 돌'에 라틴어 가 처음 등장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카롤링, 고딕, 휴머니스트 서체 따위가 등장하여 라틴어를 기록했다.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키릴어는 동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제4장 필경에서 인쇄로 로마인은 그들의 문명과 함께 라틴어와 라틴 문자체계를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 5세기 뒤에 샤를마뉴 대제는 기독교가 로마 문명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그는 야만인들 의 오랜 지배로 사라져 가던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착수했다. 여러세기 동안 글을 쓸 줄 아는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라틴 문자를 사용했고, 기독교 세력이 팽창하면서 성경을 베끼는 일도 라틴 문자로 수행되었다. 842년 스트라스부르크 조약이 성립되면서 공식문서에 세속언어(자국어)가 사용되기 시 작했다. 고대 독일어와 고대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조약은 샤를마뉴 대제의 두 손자 독두왕 샤를과 독일왕 루이스가 서로 동맹을 맺고 셋째 손자 로타르에게 대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대 프랑스어가 라틴어보다 더 빈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거의 1000년 이상 필경기술은 수도사들이 독점해 왔다 글을 쓸 줄 아는 세속인은 거의 없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샤를마뉴도 문맹이었다. 그가 왕실 문서에 결재를 할 때에는 필경사가 마련해 준 서명하는 자리에다 십자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 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필경사와 달리 중세 유럽에서 필경사로 교육을 받은 수도사들은 창작가도 아니었고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글씨를 베꼈을 뿐 스스로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중세 필경사의 창조적인 측면은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서예의 대가였던 것이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 시대부터 그들은 필경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아름다운 글씨와 장식을 곁들인 정치한채식 필사본을 창조해 냈다. 이것이 최초의 책이 되었다. 성경을 필사하던 초기의 필경사들은 라틴어로 볼루멘이라고 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사용했다. 그러나 볼루멘은 결코 적당한 필기소재가 아니었다. 파피루스는 값이 비싼데다 질 기지도 못하고 또 한 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수하기도 번거롭고 텍스트를 인용 할 때 어느 부분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언급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양피지가 없었다면 채식기법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필기소재인 양피지의 출현은 필기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양피지는 아시아 의 페르가몬에서 처음 제작되었다. 양피지는 그리스어 pergamene에서 나왔는데 페르가몬 에서 나온 가죽이라는 뜻이다. B.C.2세기에 이집트는 경쟁국가인 페르가몬에게 필경의 필수 품인 파피루스를 공급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썼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필경사들은 가죽을 사 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집트인도 아주 초창기에는 동물의 가죽을 사용했다. 양피지는 주로 양가죽, 송아지가죽, 염소가죽으로 만든다. 그외에 가젤, 영양, 타조 등의 가죽도 사용되었 다. 양가죽과 소가죽은 다른 가죽과 달리 양면을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벨룸지는 최고 품질의 양피지인데 아주 어린 송아지나 사산된 송아지의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이 단어는 송아지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에서 나왔다. 벨룸지의 주된 특징은 잉크나 페인트가 번지지 않아 원래의 색깔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 문에 아름다운 채식화를 그려 넣을 때는 주로 벨룸지를 이용했다. 책의 탄생 양피지를 만들려면 먼저 날가죽을 석회수에 담가 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가죽을 꺼내 어 박박 문지르면서 남아 있는 살과 털을 모두 제거한다. 그리고 나서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기름을 빨아들이기 위해 석회가루를 뿌리고, 석쇠 위에다 널어서 말린다. 이렇게 바 싹 말린 뒤 다시 무두질을 하는데, 이과정이 완벽해야만 날가죽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완 전히 없앨 수가 있다. 필경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칼이나 속돌로 양피지 표면의 흠집이나 거칠한 부분을 제거하여 결이 고르고 반질반질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양피지에 잉크가 잘 먹 히고 번지지 않는다. 양피지는 두 가지로 뚜렷한 장점을 지닌다. 첫째, 깃촉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 데, 이것은 잘 부러지기 쉬운 갈대붓보다는 훨씬 글을 쓰기가 좋았다. 둘째, 로마의 코덱스 (권자본과 다르게 여러 장을 책처럼 접어 놓은 책자본:역주)같이 한데 묶을 수가 있었다. 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코덱스는 특별히 접혀 함께 묶인 여러 장의 페이지로 되어 있었 다. 9세기 또는 10세기부터 각 사원과 수도원은 필사실을 갖추고 있었다. 원고를 필사하고 장식하고 장정하는 필사실은 주로 도서관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며, 주 로 독립된 방으로 설치되어 온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도원에서 불을 때는 유일한 방이 었다). 그러나 수도회에 따라서는 조그만 방을 여러개 설치해 놓기도 했고, 가난한 수도원 에서는 필사실이 회랑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작업의 일정 부분으 ㅎ  채로 해야 되었지만 필경사들은 저마다 좌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필경사는 써야 할 글씨의 스타 일에 따라 각각 다른 거위깃펜을 사용했다. 깃펜은 주기적으로 손질해야 했고 자주 잉크를 채워 넣어야 했다. 필경사는 하루 네 페이지(양피지 2저판 기준) 정도 쓸 수 있었다. 한페이 지는 가로 25~30cm 세로 35~50cm 였다. 필사작업의 근본은 완벽한 조직과 엄격한 분업이었다. 필사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은 기도시간에만 중단되었다. 똑같은 필사본에서 철자오류와 그림기술의 차이가 나는 것은 필경사들이 구술을 받아 적었거나 동일한 책을 나누어 작업했 기 때문이다. 필사작업에는 종종 수녀들도 참가했는데 중세에는 남녀가 같이 기거하는 수도원도 많이 있 었다. 수련수사, 도제, 초심자들은 줄 긋는 일부터 했다. 그러면 필경사들은 그 줄을 따라 글을 써 나갔다. 이런 밑줄이 지워지지 않은 원고들도 많이 남아 있다. 초심자들은 비교적 간단한 일부터 시작했는데 필사실에는 그런 잡일이 많았다. 원고의 필사는 수도원의 주요한 수입 원이었기 때문에 늘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도원의 필경사는 예술가가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걸작이 되었다.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가 주문하는 명예로운 일거리는 가장 재능 있는 필경사들의 몫이었 다. 이들 이름 없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제일 덕목인 겸손 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수도사들은 허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스 스로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필사본에다 자랑스럽게 이름을 적어넣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혹은 그 수도사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자랑할 때 수도우너은 그에게 필사작업을 중지 시켰다. 그러나 그 수도사가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과 수도회를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각서 를 제출하면 다시 작업을 허락했다. 장식 작업은 채식화가와 세밀화가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정말 재능 있는 예술가였는데, 각 단락과 장절의 두문자에다 도금문자를 써 넣었을 뿐만 아니라 꽃, 사람, 전원풍경 따위 생동 하는 세밀화를 함께 그려 넣어 책의 품위를 높여 주었다. 그들은 그림의 전체 윤곽을 먼저 첨필로 그리고 거위깃펜과 잉크를 이용해 마무리 했다. 필요할 때는 컴퍼스, 자, 직각자 등이 사용되었다. 색깔 있는 윤곽선은 펜으로 그렸고 마지막으로 빈 곳을 메워 넣을 때만 가는 붓을 사용했다. 수도원은 특정 공정을 잘 해내는 기술자를 수도원 안에서 구할 수 없을 때는 실력 있는 세속 예술가를 초빙하기도 했다. 수도원은 또한 제본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이들은 가 죽 책표지와 책의 걸쇠(장금장치)를 만들곤 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등극 전까지만 해도 필경사들은 서체를 마음대로 골라 쓸 수가 있었다. 처음에 수도사들은 로마 시대에 쓰이던 모든 서체를 이용했다. '언셜'이라는 필기체 대 문자와 보 다 작고 둥근 '세미언셜' 서체를 사용했다. 그리고 기념비에 글자를 샛길 때 쓰는 '대문자' 도 사용 했다. 때로는 종교적 기념비에 문자를 샛길 경우 널리 이용되던 '러스틱' 이라는 투박한 대문자도 사용했다.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에 언셜체는 비명 글씨와는 다르게 펜으로 쓰인 둥근 서체를 가리켰 다. 768년에 샤를마뉴 대제의 치세가 시작되자 세미언셜 서체에서 영향을 받은 '카롤링'이라 는 획기적인 서체가 등장했다. 선명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이 서체는 여러 세기에 걸 쳐 중세 서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샤를마뉴 시대에는 정확한 원고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치 세 이전에 필사된 원고에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많은 오류가 나타나 있었다. 수도사들의 소 홀이나 무식으로 이 같은 원고상의 오류가 계속되어 어떤 때는 문장 전체의 뜻이 달라지는 수도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가장 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하여 온갖 정성을 쏟아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런 잘못을 고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표준화된 카롤링 필사본에는(권위 있는 원전에 의거)라는 표시가 찍혀졌는데 이는 원전의 완벽한 전사를 보 장했다. 필사작업이 세속화되자 새로운 예술가 계급이 생겼다. 12세기 말에 이르면 고육분야에 대한 교회의 독점적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도사와 함께 일했던 세속 필경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길드나 직인 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 진출한 상공업 계층인 부르주아를 위해 공식문서를 작성해 주었고 또 직접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책의 출간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책제작이라고 해야 귀족 의 경우에는 호화장정본, 성직자의 경우에는 예배서나 신학서가 전부였다. 여기에 새로운 분야의 출판이 추가되었다. 철학, 논리학, 수학, 천문학 분야의 저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단테같은 작가는 자국어로 글을 썼다. 이제 라틴어는 모르지만 자국어는 읽을 줄 아는 일반 대중들이 자국어로 쓰인 책들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중산층이 문학과 책을 접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 수요에 맞추기 위해 필경 작업소의 숫자가 늘어났고 다양한 책이 제작되었 다. 이제 온갖 종류의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리책, 교육책, 의학책, 천문학책, 심지어 소 설까지 나왔다. 특히 (롤랑의 노래)와 같은 궁중 연애담은 아주 인기가 있었다.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필경 작업소를 찾아가 자기가 원하는 서체와 삽화를 지정하면서 책 제작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주문은 독자와 필경작업소 사이에서 중개인 노릇을 하는 책 공급 업자가 대 행해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12,13 세기에 대학 주변에 길드와 협동조합이 많이 생겼다. 책을 찾는 부유한 상인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학생들도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했다. 대 학들이 많이 설립되면서 권위 있는 교재를 베껴야 하는 일거리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필 경사들은 많은 일거리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부유한 학생만이 전문 필경사 를 찾아갈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공인된 서점에서 사본을 빌려 와서 그들 스스로 베껴야 했다. 일거리가 폭주하면서 필경사는 점점 더 전문화하여 자신들의 권리와 동료들의 기술적 비법을 보호해 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또한 도제 제도도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필 경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수도회 소속 초심 필경사와 마찬가지로 밑줄을 긋고 물감 재료 를 빻는 등 아주 하찮은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도제 기간은 최소한 7년이었고 그중 7년째 되는 해에 가서야 비로소 조금씩 자신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완성도니 작품은 수석 필경사와 그 동료들이 심사했다. 만약 작품이 조합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정되면 그 도제에게는 독립된 필경사 호칭이 주어지고 자신의 필경 작업소를 설립할 수 있는 자격 이 주어졌다. 단 스승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작업소를 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원고의 오류를 수정하다가 제멋대로 추가 사항이 들어가기도 했다. 책 제작사 연구가인 존 드레퓌스에 따르면 도제에게 부과된 규율은 아주 엄격했다고 한 다. 필경을 배우는 도제는 손을 잘 유지하기 위해 과음, 과식을 삼가야 함은 물론 여성과의 빈번한 성 접촉이나 과중한 노동도 피해야 했다. 필경사는 모든 서체를 익혀야 했고 또 어떠한 원고라도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 리 다재다능 한 필경사라고 해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필경 작업 소에는 교열자가 있 었는데 이 사람은 여백에다 적절한 교정 부호를 사용하여 교정해야 할 곳을 표시해 주었다. 실수가 사소한 것이라면 칼로 긁어 내고 깨끗해진 표면 위에 다시 쓰면 되었다. 단어 하 나가 그대로 빠져서 삽입해 넣을 수 없다면 여백에다 그 단어를 쓰고 손가락을 그려 넣어 단어가 들어갈 정확한 자리를 지시했다. 아예 한줄이나 한 단락이 빠졌을 때는 페이지의 맨 밑에 그것을 써 넣었다. 그러면 삽화가 그 부분에 테두리를 친 다음 사람이 거기서부터 빠 진 부분까지 걸어 올라가는 그림을 함께 그려 넣었다. 책제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필경사 협동조합이 높은 작업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에 어떤 필 사본은 정말 위대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필경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었고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수입이 따를 뿐이었다. 그래서 가장 재주 있는 필경사나 삽 화가는 일상생활의 물질적 어려움을 고민하지 않고 작업에만 전념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 가 수도사가 되기도 했다. 문화적 변화의 흐름에 따라 고딕 서체는 휴머니스트 서체로 대치되었다 원고의 내용이 바뀌면 사용되는 글자꼴도 바뀌었다. 필경사들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고딕 서체를 즐겨 사용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화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현실적 이 유도 있었다. 고딕 서체는 카롤링 서체보다 갸름하여 동일한 양피지에다 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었 다. 게다가 당시는 깃펜의 끝을 비스듬히 잘라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서적대 위에 수직으로 놓인 양피지에다 글을 써 넣으려면 깃펜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들어야 했 다. 이러한 붓 잡는 법은 네모나고 중간이 끊어진 고딕 서체를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 한 이때는 고딕 양식이 서서히 출현하고 있던 시대였음이 고려되어야 한다. 고딕 건축의 대 표적 특징인 중심이 교차하는 천장과 뽀족한 아치는 고딕 서체의 형태와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러나 14, 15세기에 들어와 고딕 서체를 완전히 배격하는 전혀 새로운 서체가 이탈리아 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동그랗고 넓적한 서체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휴머니스트 서체라 했 다. 그리고 이 서체가 널리 이용되던 때 유럽 문명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 발 생했다. 그것은 활자를 이용하는 활판 인쇄의 발명이었다. 요한 구텐베르크의 동료들은 그의 인쇄술이 출판에 미칠 엄청난 영향을 헤아리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11세기 이후부터 활자를 사용했다. 압착기도 구텐베르크 이전에 수세기 동안 사 용되었다. 이것은 포도즙을 짜내거나, 펄프를 압축해 종이의 면을 고르게 하거나, 직물 위 에다 무늬를 찍어 넣거나 할 때 사용되었다. 15세기 초엽 목판에 새겨진 원고가 종이 위 에 인쇄되었고, 그런 다음 성인 이나 성서 속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조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목판 위에 종이를 놓고 손으로 문질러서 인쇄를 하는 아주 원시적인 것이었다. 1440 년 마인츠에 사는 요한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기계화도니 인쇄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구텐 베르크의 친구인 페터 쇠퍼는 납과 안티몬의 합금을 이용해 크기가 서로 다른 글자를 주조 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기계 인쇄술은 현대인이 볼 때에는 엄청난 혁명잊었지만 당시에는 필경의 연장으로 인식 되었다. 인쇄없자의 목적은 필경사와 겨루어 그들이 내놓는 호화로운 책자와 똑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쇄면에 많은 여백을 남겨 나중에 채식사가 장식을 하도록 꾀했다. 인쇄업자들은 이처럼 손으로 쓴 필사본과 외관상 아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 내려 애를 썼 다. 이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대단히 화려한 대문자를 포함해 다양한 글자체와 부호들이 만 들어졌다. 인쇄업자들은 심지어 깃펜으로 쓴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글자와 글자를 이어붙이 기까지 했다. 책제작사 연구가인 존 드레퓌스는 이렇게 썼다. "처음 인쇄된 책은 손으로 쓴 책과 맞먹 을 정도로 가능한 한 외관이나 내용이 훌륭해야 했다. 145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의 화려함은 당시 손으로 제작된 성경의 아름다운 글씨와 장식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인쇄가 곧 필경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산적해 있는 기술적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종이가 도입되면서 더디고 힘겹던 필사작업이 한결 쉽고 빨라졌다 구텐베르크는 중국에 서 오래 전부터 사용된 종이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인이 언제 종이를 발명했는지 정확한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아마도 서기 2세기경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러 가지 소재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마침내 재생된 넝마 조각에서 자주 얻어지는 아마포가 가장 품질이 좋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먼저 물에 담근 다음 잘 씻어 짓이기면 펄프가 나오 는데 여기에다 물과 전분을 적당히 첨가하면 바로 종이가 생산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제지기술을 최고의 비밀로 숨겨 왔지만, 8세기경 사라센 제국과 겨룬 탈라스 싸움에서 사라센병에게 붙잡힌 중국 포로들은 마지못해 그 비밀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 다. 그 뒤 제지기술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스페인과 시칠리아로 전파되었다. 13세기에 들 어와 유럽의 주요 지역에는 제지공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한두 가지 개선된 사항을 빼놓고 종이를 만드는 법은 중국인이 처음 사용한 방법과 같았다. 종이 보급 이후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가 아니라 타이포그래피(활자의 크기, 활자들 사이 의 균형과 배열 등을 다루는 기술:역주), 인돼, 그리고 출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제5장 출판업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성공을 거두자 손으로 쓰는 일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쇄술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써 야 하는 글쓰기의 세계는 전보다 더 확대되었고, 깃펜은 생각을 문자로 기록하는데 없어서 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인쇄술의 놀라운 발달과 대규모 출판의 실현이 가져온 주된 결과는 지식의 보급과 문어의 활용이었다. 옛날 필경사들에게도 그러했지만 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권력을 의미 했다. 장 폴 사르트르가 그의 소설 (말)에서 썼듯 문자의 습득은 곧 '이 세상을 정복하는 수 단'이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사람은 고려인이다. 1234년 고려인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그러나 서구인은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해 두지 않았다. 서구인 이 알고 있는 금속활자 발명의 주인공은 구텐베르크일 뿌닝다:역주). 이 기술이 언제 유럽에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은 1462 년부터 구텐베르크, 푸스트, 그리고 쇠퍼가 개발한 마인츠 인쇄기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도안공, 주자공, 식자공을 두루 갖춘 인쇄소 가문이 많이 생겨났다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를 개발하려고 했다. 그는 16세기 유럽에서 널리 쓰인 레테라 안티카 서체를 발명했다. 많은 도안공들이 이 서체를 모방했다. 마누티우스는 필기체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페트라프카의 글씨에서 영감을 받아 우아하고 약간 비스듬한 필기체인 알디네, 즉 이탤 릭체를 발명했다. 루카 파치올리는 자신의 저작(신성한 균형)에서 인체의 균형을 기하학적 모형으로 환원함으로써 서체를 발명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하학적 모형은 레오나르 도 다 빈치의 선화를 그대로 원용했다. 16세기 초에 서체만들기 작업의 주무대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갔다. 특히 프랑스 인 제프루아 토리가 1530년에 내놓은 여러 서체들은 인쇄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레오 나르도 다 빈치를 열렬히 숭배했던 도안공이자 식자공인 토리는 파치올리의 가르침을 좇아 샹 뢰리 서체를 개발했다. 그는 곧 시몽 드 콜린의 전속 서체도안사로 임명되었다. 시몽은 파리의 몽테뉴 셍트-쥬네비에브에서 황금의 태양이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콜린이 사용하던 서체는 레테라 안티카에서 응용한 것이었는데 시몽은 그리스풍의 폰트(같은모양, 같은 크기의 활자 한 벌:역주)를 도안하는 작업에 열심이었다. 이 작업은 1540~1541년에 클 로드 가라몽이 개발한 저 유명한 그렉 뒤 루아 서체(왕이 사용하는 그리스풍서체)를 디자인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탤릭체 그렉 뒤 루아를 만들어 낸 뒤에 가라몽은 토리의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로마풍 의 서체(똑바로 세워진 정체)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그후 활자계의 으뜸 서체가 되었다. 가라 몽 로만 서체(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이 서체는 영어식 발음인 개라몬드 서체로 알려져 있 음:역주)는 샹플뢰리가 내세운 서체제작의 제일 원칠, 즉 '글자의 배열과 글자 크기의 균형 을 절묘하게 실현한 예술과 과학의 화합'을 구체화 했다. 출판업의 선구자들 문학을 애호한 인문주의자 프랑수아1세 시대에 서체도안의 명문인 에스티앙가가 등장했 다. 프랑수아1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문은 제네바로 피신했다. 극소은 마르틴 루터 가 고딕체를 사용하여 종교개혁 관련 출판물을 발행한 곳이었는데 에스티앙가는 이 도시를 유럽의 유수한 출판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18세기 중엽까지 에스티앙가는 앙리1세, 로베 르, 샤를, 앙리2세,폴, 그리고 앙투안 등을 차례로 배출하면서 출판업의 성가를 한층 드높였 다. 이 가문은 그리스와 로마 고전 번역물과 당대 학자들의 저서를 차례로 출판했고 새로 운 서체도 만들어 냈다. 그보다 더 북쪽인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 태생으로 앤트워프의 시민이 된 크리스토프 플 랑탱이 활발한 활약을 보였다. 그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전속 서체도안가였고 제본가 이기도 했으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인쇄술의 무궁한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려고 했다. 그의 작업소에는 한꺼번에 16대의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34년동안 1500여점의 작품을 발간했는데 그중 하나가 스페인의 인문주의자인 아리아스 몬타누스의 감독하에 편 찬된 폴리글랏 성경(여러 언어로 쓰인 대역 성경:역주)이다. 플랑탱 이외에 라이덴에 본거 지를 둔 엘제비어 가도 지질이 훌륭한 앙굴 ㅔ 종이와 정밀한 활자를 이용하여 좋은 책을 많이 출판했다. 이들은 대규모 상업출판의 효시다. 포켓북과 급진 사상 16세기말 반 종교혁명과 종교재판이 득세하여 새로운 사상을 억압하고 있ㅇ르 때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유럽 출판 협동조함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절대군주 체제에 적응할 수 없던 이들 출판인은 1550년 이후 라틴어 책자 출판을 중단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을 자국어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리옹 출신의 출판인 에티앙 돌레의 순교에 대한 기억이 이들 출판인의 가슴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돌레는 프랑수아 라블레와 클레망 마로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에라스무스의 (기독교 전사의 교본)을 출판하여 종교재판소의 분노를 사서 1546년 8월 3일 파리의 화형 장에서 불타 죽었다.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에서는 출판 금지된 문학작품이 속속 출판되는 본고장이 되었다. 엘제 비어는 그런 시대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손바닥만한 크기의 소형책자인 포켓북을 많이 출 간했다. 이 소형책자는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처음 고안했다. 루이 14세 시대에 가난한 사람과 미친 사람은 격리, 구금되었고 문자는 격자무늬의 감옥 (모눈종이)속에 가두어졌다 프랑스 국립과학원의 조장 신부는 왕실 지정 인쇄소에서 새로운 알파벳을 도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구속을 좋아하던 시대인지라 문자는 수학적 정밀성을 자랑하는 도식 속에 가두어져 철장 속의 포로같이 되었다. 모든 문자는 정사각형 속에서 도안되었고, 정사각형은 다시 64개의 자그마한 모눈으로 나누어져 격자모습을 취했다. 이것이 타이포그래피가 완성 되는 원형이었다. 다른 주장이 있겠지만 문자의 전형을 창조한 도안공은 수학자라기보다는 예술가적 성질을 지니고 있던 필립 그랑장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선하고 분명한 것을 찾고 있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펴낸 (백과사전)은 장식이나 치장을 배격했다. 이 책은 지면을 아 름답게 꾸미거나 장식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자 독자들은 이제 시각적인 즐거움보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에 이르렀다. 독자의 욕구 를 충족하려면 문자의 가독성을 높여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디도가 사람들 은 새로운 정신이 담긴 서체를 개발했다. 1755년 프랑수아 앙브루아즈 디도는 단순하면서도 시원한 알파벳을 도안하여 이것을 피에 르 루이 와플라르에게 조자 시켰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대표적인 서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디도 서체의 정교한 수직 글자꼴은 프랑스 타이포그래피의 정화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716년에 윌리엄 캐슬런이 멋진 로만 서체를 도안했으며, 이것은 1776년에 미 국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존 배스커빌이 만들어 낸 서체는 그 명성이 널리 퍼져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모방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들 모방자의 한 사람인 이탈 리아의 지암바티스타 보도니는 보도니 서체를 개발했다. 문자의 역사를 바꾼 새로운 발명품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래 거의 변하지 않고 1783년까지 사용되어 왔던 수동식 인쇄기는 하루에 최대 300장 정도를 안쇄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에 들어와 디도가 구텐베르크 인쇄기에다 쇠받침대와 구리판을 추가했다. 이 같은 금속 프레스는 사상 최초의 것으로 이 를 이용해 대형 종이에다 인쇄할 수 있었다. 동시에 스풀(종이를 감는 틀:역주)위에서 종이 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완성되었다. 1807년에는 가압장치가 발명되었고 1812년에는 평판인 쇄(평판 위에 종이를 놓고 평판 프레스로 누르는것)대신에 여러 개의 인쇄판을 동시에 탑 재할 수 있는 원압형(원통형)인쇄판이 발명되어 대체 되었다. 원압인쇄기는 프리드리히 쾨니 히가 최초로 완성했는데영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소형 종이에 찍을 경우 한 번에 한 페이지만 인쇄할 수 있으나 대형 종이를 이용하면 한 번에 네 페이지 또는 여덟 페이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평판을 사용하면 그 판에 들어 있는 내용밖에 찍을 수가 없으나 원압인 쇄판을 사용하면 서로 다른 내용을 동시에 네 번 정도 찍을 수가 있으므로 인쇄속도가 빨 라진다:역주). 동시에 자동 잉크 공급기가 발명되어 잉크볼(인쇄공이 판면에 잉크를 바를 때 쓰던 기 구:역주)이 사라지게 되었고 인쇄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우너압인쇄기는 하루에 1100장을 인 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28년에 오거스터스 애플거스와 에드워드 쿠퍼가 영국의 (타임스) 지를 위해 발명한 4원압형 인쇄기의 출현으로 하루에 약 4000장까지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 다. 애플거스와 쿠퍼는 또한 종이 받침대도 회전하는 회전형 인쇄기를 발명했는데, 이로써 한 시간에 800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이 회전형 인쇄기는 오늘날 널리 쓰이는 윤전 인쇄 기의 선구라 할 수 있음:역주). 회전형 인쇄기가 주도한 속도 경쟁은 19세기 말 라이노타이프의 발명으로 더욱 불이 붙었 다 구텐베르크 시대이래 식자공은 글자를 한자 한자 뽑아서 조합해야 했다. 1872년까지 식자공은 글자를 뽑아서 줄에 따라 정렬한 뒤 게라(조판한 활자판을 담는 그릇:역주)에 넣어 판반(인쇄를 하기 위한 판:역주)에 맞추어 본 다음 줄과 나무 쐐기를 이용하여 위치 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인쇄가 완료되면 게라를 해체하여 활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숙달된 식자공은 시간당 최대 1500자를 조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노타이프(1행 단 위로 식자 해 주는 자동식자 주조기:역주)가 도입되면서 한시간에 9000자 정도를 조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1930년에 들어와 사진 식자가 개 발되면서 또다시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된다. 사진 식자는 발명 당시만 해도 인쇄 업체들에게 무시당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그 장점이 널리 알려져 활발하게 도입 되기 시작했다. 신문이 그날그날 벌어지는 일을 보도한는 것이 이제는 꿈이 아니었다. 몇 개 인쇄판과 잉크를 사용해 한 페이지 양쪽면을 인쇄하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원색 인쇄도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4, 5개의 롤러를 갖추고 4, 5개의 색깔을 쓸 수 있는 회전 형 인쇄기만 있으면 고속 원색인쇄도 가능했다. 인쇄의 발달은 18세기에 신문의 발달은 가져왔다 정기간행물이 처음 나온 것은 17세기 초엽 네덜란드와 독일에서였다. 1759년에 새뮤얼 존슨 박사는 이렇게 개탄했다. "지식은 늘려 주지 못하는 신문이 매일 가짓수만 증가하고 있다. 조간신문에 난 얘기가 석간신문에 또 나고 석간의 얘기가 그 다음날 조간에 또 나온 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의해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고 1789년 8월에는 인권선언으로 구체화되자, 다음해인 프랑스에서만 300개 이상의 신문이 출간되었다. 이들 의 한결같은 꿈은 영국의 (타임스)같은 신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타임스)는 1785년에 존 월터에 의해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고 그후 1788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타임스)는 편집자의 논설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경세지라는 별명을 얻 었다. 18세기에 프라하에 사는 독일인에 의해 석판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이제 한가지 문제만 빼고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본문과 삽화를 동시에 인쇄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796년 알로이스 제너펠더는 뮌헨 근처의 졸른호펜 일대에서 나는 석회석이 불에 달굴 때 유성 잉크를 배척하는 성질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1796~1799년 사이에 석판인쇄술을 발명했다. 이 인쇄술은 물과 기름이 서로 배척하는 성질 을 이용한 것으로 1800년에 영국 특허를 얻었다. 그후 석판 대신에 얇은 금속판을 사용하 는 것, 그리고 사진을 사용하는 기술(1840년 개발)등이 보강되었다. 석판인쇄술은 1860년 이후 부쩍 수요가 늘어난 포스터 제작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제너펠더는 자기 고장에서 산출되는 석회석에 인쇄 잉크로 글씨를 쓴 다음 질산으로 대리석판을 부식시켜 볼록판을 만 들어 악보 등을 인쇄했는데, 다공질인 대리석이 수분을 오래 지녀 유성인 인쇄 잉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석판인쇄술의 원리를 발견했음:역주). 이 시기에 타이포그래피의 스타일이나 응용에 결정적인 수정이 가해지지는 않았다. 그러 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디자이너들은 삽화를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 다. 그래서 신문 레이아웃도 현태가 많이 바뀌어 독자의 반응을 수렴하는 쪽으로 변해 갔 다. 독자반응의 수렴, 이것은 현대출판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인쇄의 주된 영역은 신문과 책이지만 펜으로 써야하는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편지, 법률문서, 예술창작 등은 손으로 쓰고 있다. 손으로 직접 쓴 서면이 계약, 유언, 매매서류 등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해 오늘날에도 일부 법률문서에는 수기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필경사의 유일한 일거리였던 법류문서는 일반대중의 눈에는 곧 필경사를 고용한 악덕 사채꾼을 연상케하는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 에 사람들은 필경업을 악덕 고리대금업과 동일시했다. 필경사들이 과거에 오랫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문 필경사의 지위는 너무나 퇴락하여 19세기 말이 되면 술주정꾼으로 치부되기가 일쑤였다. 1750년 아헨이 살고 있는 요한 얀트센이라는 한 지방관리가 금속펜을 발명했다고 주장했 다.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펜을 발명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보스턴 미캐닉)지는 금속펜이 미국에서 발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보스턴 의 유지인 페레그린 윌리엄슨이 발명했다는 것이다. 1808년에 발간된 독일 정기간행물은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칼리닌그라드)에 살고 있는 학교 선생이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740년에 발간된 프랑스 소책자는 금속펜을 프랑스인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들 국가에서 일반적인 수요에 부응하여 이 같은 기술혁신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 진다. 거위깃펜은 제작과정에서 균일한 품질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황금만이 그 대용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손으로 만든 금속펜은 너무 거칠어서 종이를 찢는 경우가 가끔있었다. 그러나 기계를 이용한 생산과정이 점점 발달되어 값싸고 품질 좋 은 펜촉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금속펜은 현대 산업사회 최초의 소모품이 되었다. 파스칼은 잘 쓸 줄 아는 것은 잘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19세기이래 필기도구는 점점 개량되고 갈수록 세련되었다. 좀더 정확하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도구를 찾다보니 만년 필, 볼펜, 타자기, 워드 프로세서가 발명되었다. 이러한 도구의 개발로 글쓰기가 훨씬 쉬워 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과정에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제6장 무자해독자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상형문자, 설형문자, 그리고 크레타 선문자의 비밀 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해독 불가능한 문자를 해독해 낸 그들은 문자언어의 비 밀왕국을 파헤친 보물 추적자들이었고, 그들의 성공으로 마침내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현대세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문자를 누가 창조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회계사, 필경사, 습자선생 등 익명의 대중들이 만들어 냈다. 예부터 이들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문 자를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돌이나 진흙판 위에 새겨진 애매한 기호를 해독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학 자들은 시대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서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선구적이고 가장 영감에 가득 찼던 사람은 상형문자를 해독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일 것이다. 설형문자가 해독된 것도 아마 거의 같은 시기일 것이다. 베아 트리스 앙드레 레크남은 이렇게 썼다. "수메르라는 이름은 2000년 이상이나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체계가 수메르의 페허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크레타 선문자B는 1956년에 사망한 마이클 벤 트리스에 의해 1950~1952년 사이에 해독되었다. 짧지만 충만한 생애 샹폴리옹은 1804년 그르노블의 왕립 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상형문자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산스크 리트어, 중국어, 콥트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곧 콥트어가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언 어의 최근 형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822년 파리에 있는 프랑스 문학학술원의 종신서기인 앙드레 다시에에게 보낸 유명한 편 지에서 '고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직책, 이름, 성을 써 넣는 데 사용한 음운 알파벳에 관한' 이론을 설명했다. 그샹폴리옹은 곧 그것을 로제타 스톤의 해독에 원용함으 로써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는 1824년에 (고대 이집트인의 상형문자체계에 대한 개요)라는 저서를 내놓았고, 1828 년에는 예술가 네스토 로트와 함께 이집트 탐사여행을 떠나 탐사의 단계별 기록을 일기에다 깨알같이 기록했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사망했다. 42세였다. 로제타 스톤이라고 알려진 돌기둥은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발견되었다. 알렉 산드리아의 동쪽, 나일강의 서부지류에 위치한 라시드항 부근에서였다. 그것은 B.C. 196년에 제작되었다. 당시 열두 살 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왕을 기리는 칙령을 그리스어로 만들어 돌에다 새겨 넣은 것이었다.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쓰여졌 지만, 그에 앞서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새겨져 있었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정복을 놓고 다투던 시절인 1801년 영국인이 알 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샹폴리옹은 1808년에 파리에서 로제타 스톤의 탁본을 구해 여러 해동안 연구했다. 그는 상형문자로 쓰인 텍스트에는 두 개의 타원형이 있으며, 테두리 속에 들어 있는 이름은 그 리스어 텍스트에 나오는 크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모든 상형문자는 표의기호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로제타 스톤 속의 기호는 사물뿐만아니라 소리도 나타낸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콥트 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타원형 테두리 장식 속에 들어 있는 기호의 의미를 해독 해 낼 수 있었다. 로제타 스톤을 읽으려면 사자의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그는 타원형 테두리 장식 속에 들 어 있는 텍스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 다. 일반적으로 상형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지만 사자의 시선이 특별한 안내역을 맡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크레오파트라의 이름을 다른 돌에서 읽어 냈다. 로제타 스톤의 맨 윗부분에 적혀 있던 크레오파트라의 테두리 장식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잘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그는 나머지 텍스트를 해독할 수가 있었고, 상형문자가 표의 기호뿐 만이 아니라 표음기호로도 구성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정립했다. 설형문자의 해독으로 가는 대장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추리소설처럼 아슬아슬하다 설형 문자의 해독은 1800~1830년 사이에 여러명의 학자들이 고대 근동의 문자를 발견한 것에서 시작된다. 괴팅겐 대학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그로테펜트는 자신이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문자를 해독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라스무스 C.N. 라스크, 유젠 뷔르누프, 크리스 티앙 라센, 특히 헨리 크레스윅 롤린슨 같은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했다. 페르시아의 베히스툰에 있는 한 암벽에서 롤린슨은 샹폴리옹이 로제타 스톤을 대했을 때 와 같은 어려운 문제와 만났다. 에드윈 노리스는 두 번째 기둥이 엘람어라는 것을 알아냈 다. 롤린슨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은 세 번째 기둥의 해독에 도전했는데 마침내 1851년에 세 번째 기둥의 112줄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셈어인 아카드어로 쓰여 있었다. 1857년 런던에 있는 왕립 아시아 학회는 최근에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을 네 명의 아시리 아 학자인 롤린슨, 에드워드 힝크스, 윌리엄 H, 폭스 탤봇, 그리고 율리어스 오페르트에게 보냈다. 서로 상의하지 않고 그 문자를 해독해 달라는 의뢰였다. 한 달 뒤에 그들은 각자 번역문을 제축했는데 본질에서는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다. 1905년 프랑수아 튀로 당쟁은 가 장 오래된 수메르 문자의 첫 번째 번역문을 제출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설형문자 해독분야는 조금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계속 발전하였 다. 그래서 장 보테로는 이렇게 썼다. "모든 분야의 역사를 잘 살펴볼 때 1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아시리아 학자들만큼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들인 분야는 없다. 그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자그마한 불씨에서 발견과 이해의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려 고대문자 해독분야에서 알 찬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이분야의 발전은 영원히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고대사의 방대한 사료들을 발굴해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크레타에 남아 있는 세가지 문자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존 에번스 경은 크레타섬의 도시인 크노소스 고대 왕궁의 페허에서 몇 개의 진흙판 조각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글씨 같은 것이 쓰여 있었다. 아주 단편적인 가장 오래된 진흙판에 새 겨진 문자는 B.C.2000~16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두 번째 것은 에번스가 선문자 A라 고 불렀는데 나중에 B.C.1750~145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직까지도 이 선문자 A 를 풀어 낸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에번스는 세 번째 문자를 찾아냈는데 이것을 선문자 B라고 했다. 선문자 B가 쓰인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A를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선문자 B 로 쓰인 진흙판은 많이 남아 있다. 에번스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이 문자를 해독하기 위 한 ㅁ낳은 가설과 이론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에번스가 사망하기 5년 전에 한 학생이 그의 과업을 계속하겠다고 맹세했다 1936년 에버 스는 런던에서 '이 오랫동안 잊혀 왔던 크레타 ㅁ누명과 그 부족들이 사용한 신비한 문자체계'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청중 중에는 고대언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열네 살 난 중학생이 있었다. 그 십대 소녀의 이름은 마이클 벤트리스이다. 벤트리스는 이 회의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해독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크레타 문자의 수수께끼를 꼭 풀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선배 학자들에게 열심히 편지로 질문을 했고 마침내 선배 학 자들이 실패했던 크레타 문자의 해독에 성공했다. 벤트리스의 업적은 선문자 B를 해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그리스 본토에 살던 미케네 주민들도 이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해 보였다. 이들 주민은 후에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전설적 주인공들과 동시대인이었다. 마이클 벤트리스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사소한 발견들을 꾸준히 축적해 나감으로써 이 같 은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냈다. 그의 친구이며 동료학자인 존 채드윅은 벤트리스의 특별한 재능을 이렇게 말했다. "벤트 리스는 기호의 무질서함 속에서 특정한 상수를 발견해 냈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능력, 이것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높이 사는 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기호가 많이 있다 벤트리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서른넷에 사망한 이후 많은 연구가 계속되었으나 구체적 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선문자 A나 파이스토스 원판은 아직도 그 신비가 풀 리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마야 문자체계의 특정 부분이나 이스터섬(세계의 배꼼이라고 일컬어지는 남동 태평양의 칠레령 작은 섬:역주)의 목판에 새겨진 롱고-롱고어는 아직도 신 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명석한 분석력을 발휘해 세계의 기괴한 문자 들, 예를 들면 스칸디나비아 룬 문자, 웨일스와 아일랜드에서 널리 쓰였던 켈트 문자체계인 오감 문자 등을 해독해 냈다. 해독되지 않은 문자의 수수께끼, 문자를 발명한 사람들의 재능, 그리고 ㅁ누자체계를 마침 내 풀어 낸 학자들의 천재성은 계속하여 사람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호 자체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기도 하는데, 기호는 번역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엇인가 얘기 해 주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비로 가득한 문자의 역사는 또한 복잡한 변화의 역사이다. 기록하기위해 6000 전부터 발달한 문자는 사색하고 고안하고 창조하고 존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문자는 '언어가 원활한 기능을 수행하자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 다. 기록과 증언 글쓰기는 예술과 기술의 경계선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타이 포그래피와 서예, 마음을 만족시키는 기호와 상징, 즐거움을 주는 게임, 도발심을 불러일으 키는 낙서. 글자와 도시 현대세계, 특히 광고의 홍수 속에서 글자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되었다. 글자는 단어의 덩어리와 의미의 연상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 자체 하나의 시각 경험이 되었다. 서구문명에서 글자는 추상적 재현에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발전했다. 아래 글에서 로베르 마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한 '글자그림'의 어지러운 목록을 나열하고 있다. 뉴욕의 대동맥인 브로드웨이와 그 중심지 타임 스퀘어는 글자의 응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42번가에 즐비한 영화광고는 그야말로 빛의 신전이며, 6층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큰 백 화점 메이시의 문자광고도 현란하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 1500개 이상의 광고를 보면서 돌아다닌다. 무엇보다 시각 이미지가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은 라스베거스이다. 스타다스트 호텔의 거대한 네온 사인은 1만 5000개의 전구를 이용해 작동되고 있다. 사정은 홍콩도 마찬가지이 다. 이 도시들은 밤낮없이 문을 열어 놓은 형태와 색채의 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도시는 이름 모를 저자가 집필한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냥 들여 다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미지가 스스로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돛대와 기둥과 깃발이 요란한 주유소에는 큼비막한 활자가 인쇄된 광고문구가 햇빛을 받으며 펄럭인다. 졸고 있는 승객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지하철 광고는 어떤가. 달콤한 유혹 같은 광고문안이 잔뜩 붙어 있는 담벼락, 단어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내려는 듯한 애드볼룬, 하늘은 천천히 떠다니면서 광고문구를 수놓는 광고용 비행기. 기둥 형태의 입간판. 거기에 붙어 있는 찢어진 포스터 조각이 오히려 낙서 같아 보인다. 지나간 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잊혀지 기호들. 수퍼마켓 게시판에 백묵으로 써 갈긴 가격표시, 이국적인 글자로 뒤덮인 포장용 궤짝, 유 원지에서 벌이는 화려한 쇼, 알록달록한 포스터가 잔뜩 나붙어 있는 식료품 가게의 유리창, 신문가판대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각종 신문, 파리의 약국 창문에 붙어 있는 수수께끼 같 은 광고문안, 고딕체 음료수광고가 붙어 있는 카페의 창문, 하얀 백묵으로 휘갈겨 쓴 글씨, 가게 바깥의 차양, 싼값에 판다는 세일 표시, 가게 앞면을 큰 글자로 메운 몽땅떨이 세일 광고. 지하실의 싸구려 대매출 가격표시, 색깔이 칠해진 담벼락, 밝은 색상을 자랑하는 집, 히 피들의 메시지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탈리아식 부고, 자동차 등록번호, 시가도. 신문, 잡지, 신간서적 내용견본, 소책자, 포스터, 안내자료, 우편문, 전보, 책, 사전, 전화 번호부, 논문집, 사용 매뉴얼, 지도, 구인광고, 그리고 연애편지, 팩시밀리 전송지, 만화조각, 토큰, 복권과 지폐, 손으로 쓴 식당 차림표, 서점의 진열장, 그리고 계속된다. 부동산 중개 업소 입구의 유리창, 움직이는 네온 사인, 번쩍거리는 글자, 네온 사인을 타고 기어 올라가 거나 기어 내려오는 글자, 광고로 도배한 것만 같은 자동차들, 샌드위치 맨, 화려한 쇼핑 백, 이 모든 것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화물차 차량마다 적혀 있는 알 수 없는 숫자, 계산기 위로 흘러 넘치는 숫자의 파도, 몬 트리올에 있는 쿠바 전시관 파괴적이고, 극적이고, 글자가 제멋대로 춤추는곳, 그 환상적인 벽, 마루, 그리고 천장. 가지 ㅁ낳은 나무처럼, 가리키는 곳이 많은 이정표, 길 위로 낮게 드리운 플래카드, 일부 는 집의 현관이나 박공에서 내결린 것도 있고, 뒤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온 것도 있으며 빈 공간을 색깔로 가득 채우면서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것도 있다. ......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경고표시들이 있다. '비상구' '경찰' '대기' '주차하지마시오(일요일 이라 퍼레 이드가 있을 예정)' '출입금지' '광고 부착금지' 이것들말고 손이나 눈의 동작을 가리키는 표시도 있다. '밖으로' '안으로' '위로' '아래로' '당기시오' '미시오' '신분증 제시' 로베르 마생 (글자와 이미지) 글쓰기의 의미 기록 수단, 문자의 도입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문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문자 가 바꿔 놓은 역사의 흐름은 무엇인가? 이오스 소재 성 요한 교회에 있는 서기 2, 3세기경의 그리스 비문. 알파벳과 음절문자의 창조는 기호의 숫자를 급격히 감소시키고 언어를 표기하는 무제한한 능력과 대중이 손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체계를 가져왔다. 카난어 알파벳에서 나온 각종 알파벳이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먼저 퍼졌고 그후 다른 지역에 전파 되면서 빨리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는 문자체계 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글자를 깨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고 정치, 경 제 관계 사건뿐만 아니라 종교, 역사, 문학에 관련된 내용도 문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문자해독 수준이 진일보하여 문자에 의한 기록범위가 넓어진 것은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가 능했다. 그리스에서는 알파벳이 발달하고 교육체제가 잘 정비되어 문자해독자가 곧 성직자라는 사고방식이 깨질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문자는 중앙정부의 발전에 어느 정도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문자가 중앙정부의 권력신장을 촉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자해독률이 높아짐에 따라 투표를 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났고, 투표제도는 국민이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 것이다. 아울러 문자해독은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 습득의 새로운 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그전에는 방대한 지역에서 입으로만 전해 오던 인간 의 지식이 문자로 기록되어 눈으로 면밀히 검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구전과 전승들이 구체적인 수단에 의해 조직적으로 기록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를 읽고 분석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분석에는 인간의 지능과 인식능력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바로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이 음절문자의 체계 내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아주 초기에 개발된 표의문자를 가지고 지식을 축적, 발전 시켰다. 그러 나 공동체 내의 많은 사람들이 손수비게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대중적 형태의 문자가 개발 된 것은 근동에서 알파벳이 발명된 이후의 일이다. 그후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손으로 쓰인 원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알파벳은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잭 구디 (접촉, 인간의 의사소통과 그 역사) 타이포 그래피의 기술 활자가 발명된 순간부터 형식과 내용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형식은 인쇄된 책이고 내 용은 책에 적혀 있는 글이었다. 2세기 동안 타이포그래퍼의 역할은 미미했다. 갈등은 저절 로 해결되었다. 19세기부터 타이포그래피의 역동성이 기표와 기의를 통일했다.(기표와 기의는 소쉬르의 구 조주의 문법 이론에서 나온 용어로 기표는 형식, 기의는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역 주) 토리, 뒤러와 다 빈치의 제자 토리는 O(완전한 원)에다가 중세의 학예 7과 (문자, 논리, 수사, 산수, 기하, 음악, 천문: 역주)를 가두었고 또 다른 중요한 철자에다가 아홉 뮤즈(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슈네 사이에 난 아홉 자매신:역주)를 표상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학예 7과 아홉 뮤즈를 플래절렛 (앞면에 넷, 뒷면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플릇 같은 목관악기:역주)의 형태 속에다 가두어 넣었다. 이 악기를 앞면에서 원근축소법으로 그려 보면 똑바로 세워 놓은 O와 옆으로 누운I 를 겹친 형태가 된다. 이 두 글자는 원과 직선의 만남인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관을 상징하기도 한 다. 이오 여신의 상징 아래에 놓은 이 두글자에서 모든 알파벳 글자가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토리는 눈과 컴퍼스로 생존 당시에 쓰이던 모든 알파벳을 O주위에 배치했는 데 이중앙의 O는 태양을 상징하느  ㅂ로 여기에서 나온 스물세 줄기 햇빛은 각각 아홉 뮤 즈, 학예7과, 4대미덕, 그리고 3대 은총을 가리킨다. (샹플뢰리)(1529)에서 묘사되고, 주석이 달리고, 꼼꼼하게 검토된 23자 중에서 일부 글자는 자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A는 "활발하게 걸어가는 남자의 쫙 벌어진 다리"를 가리킨 다. A를 가로로 건너지른 빗장은 "정확하게 남성의 성기를 가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겸손과 순결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좋은 글자 꼴을 얻으려는 사람은 마땅히 겸손하고 순결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A는 글자꼴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고ABC중에서도 제일 첫째임을 명심해야 한다." 토 리는 자와 컴퍼스로 A를 ㅁ나들었는데 자와 컴퍼스는 왕과 여왕을 나타낸다. D는 "내가 아비뇽에서 본 극장 무대"의 이미지이다. 이무대는 "앞면이 일자이고 뒷면은 반 원형이어서 D를 닮았다. H는 "집을 나타낸다. 수평으로 그은 선 밑부분은 (나는 이 수평을 글자의 한 가운데에서 일직선으로 그었다.)아래층에 있는 홀과 방을 나타낸다. 윗부분은 이층에 있는 대연회장과 크고 작은 방을 의미한다." I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여기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문자가모두 신적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호머는 (일리아드)8권의 도입부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제우스는 언젠가 자신이 원한다면 하나의 금줄을 가지고 다른 신은 물론이고 지구와 바다도 자기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만약 금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 발 앞에 멈춘다 면 "그 줄의 두께와 균형이 너무도 적절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I의 모형이 되지 않을까?" 금줄이라는 주제는 토리의 작업에 일관되어 있다. 그는 가끔 다른 풍유적 이미지도 활용 했다. 가령 황금의 가지 이미지가 그것이다. "황금의 가지는 23개의 잎사귀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것이 알파벳 23자의 숨겨진 기호"라고 말했다. O의 마지막 이미지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빌 려 온 것인데 토리가 그리스, 로마 고전과 이탈리아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토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콜로세움을 천 번도 더 보았다. 파괴되기 전의 콜로세움 은 O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겉은 원형이고 내부는 타원형 이었다." L은 또 다른 비유인 리브라 기호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태양이 천공의 정 중앙에 있을 때." 햇빛을 받은 인간과 그 그림자가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M은 그 설명이 평범해 보인다. "이 글자는 너무 뚱뚱하여 허리띠가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긴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 나 가장 즐거운 이미지는 Q라고 할 수 있다. Q는 모든 글자 중 유일하게 꼬리가 달린 것인 데 토리는 이 글자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ㅁ나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 기괴한 글자에 대하여 오랜 생각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Q에 꼬리가 있는 것은 이 글자 하나만 쓰지 말고 좋은 친구인 U와 함께 쓰라는 뜻이다. Q는 친구 U가 늘 자기 뒤를 따라오기를 바라고 또 그 꼬리로 포옹하고 싶어한다." S를 발음해보면 "뜨거운 쇠를 물속에 넣었을 때와 같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지 막으로 토리는 Y가 동시대인들의 '허영심'을 표상한다면서 쾌락과 미덕의 상징이라고 말 했 다. 토리는 나중에 자신의 말이 비판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상모략꾼과 할 일 없 는 호사가들이 짖어대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예언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수 한 학생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기 위해" 환상과 공상에 대해 글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토리는 라블레처럼 현학적인 태도를 싫어했는데, 두 사람은 유희정신에서 그리고 유머러 스한 언어감각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여기 참고로 (샹플뢰리)첫장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금년은 1523년, 나는 침대에 누워 기억의 바퀴를 굴림녀서 수천 가지 공상(심각한 것도 있지만 즐거운것도 있다.)을 하고 있다." "구제주의 공현축일날 아침이다. 나는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했고, 간단하고 맛좋은 음식을 별 힘들이지 않고 소화했다." "그 공상 가운데에는 내가 한때 도안했던 고풍스런 글자의 기억도 들어 있다." 로베르 마생 (글자와 이미지) 타이포 그래피의 도전 형식과 긴으, 이 두 명제가 현대의 패션을 주름잡아 왔는데 한 번은 형식을 강조했다가 그 다음은 기능을 강조하는 시으로 순환되었다. 가끔 형식과 기능이 균형과 합일을 이룬 시 기도 있었다. 최근의 활자 관계 서적들은 현대에 걸맞는 타이포그래피 모양을 만들라고 줄기차게 요구 해 왔다. 1931년에 폴레서는 이렇게 썼다. "인쇄소는 유행하는 옷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 다. 인쇈소의 목적은 유행으로 포장도니 문자자료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알 맞은 형태의 인쇄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쇄소는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살 아 있는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펴내는 것이다." 모든 시대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이미지를 갖춘 개성의 시대였다. 고딕 서체는 그것이 나 온 시대의 같은 예술 작품, 예를 들면 건축물 등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20세기 초 의 아르 누보스타일은 오토 에크만의 타이포그래피나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건축)의 구성 주의에 ㅁ낳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각 시대의 특징을 뚜렷 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문제점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 나가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대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인 쇄물도 우리 시대의 인식되지 못한 몇가지 특징을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개별 예술분 야는 그 자체로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이포그래피도 예술 일반의 흐름에 합류해야만 번성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 혼자 있으면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타이포그 래피는 그 기술적 특성상 스스로에게 부과한 법칙과 제약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예술 일반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 다. 사람들은 가끔 타이포그래피가 너무 쉽게 시대의 흐름에 영합한다고 불평을 하는데 차라 리 그 시대의 흐름에 아주 초연한 체하다가 고사해 버리는 것보다느 낫다고 할 수 있다. 이 런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창조적예술가는 유행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예 술가 나름의 독특한 스타일  의식적인 노력보다는 아주 완만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생 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 정정밀, 질서 등의 가치는 그래픽 디자인보다는 타이포그래피에서 더 잘 구현된다. 타이포그래피는 높은 예술적 수준을 이룩하자는 것도 아니고 창조적 본능을 충족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창조성의 보다 현실적인 측면, 즉 형식과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을 그 본령 으로 한다. 기계로 만들어 낸 활자를 일정한 규격에 따라 각 면에 잘 배열하는 것은 정밀 한 구성과 명확한 균형감각을 요구하는 일이다. 타이포그래터는 네모칸에 작업을 할 때 그 능력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능적인 측면이 주특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잘 그려진 도표는 어떤 기능적인 매력, 심지어는 그윽한 심미감마저 준다. 그 리고 어떤 때는 아주 흔한 열차 계획표가 화려한 색채와 형체로 가득 찬 엉성한 디자인보다 더 좋은 디자인이 될 수도 있다. 타이포그래피는 광고에서도 한몫을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특이한 아이디어와 신제품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데 그 주된 수단은 인쇄물이다. 타이포그래피 예술은 넙적 하고 가늘고, 크고 작은 수만 가지 활자 중 가장 알맞은 활자를 골라 텍스트(광고할 내용) 를 해석하고 구성해 준다. 타이포그래퍼가 임무를 잘해 내기 위해서는 좋은 활자를 골라 야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서 '위니베르스'라는 글자를 가지고 20개에 달하는 타이 포그래피의 변형을 시도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색채의 다양성과 타이포그래피 의 통일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 이같이 멋진 타이포그래피가 오늘날 타이포그래피의 업계 에 존재하는 혼란스런 상태를 일소하는 질서와 조화의 전범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인쇄물은 타이포그래퍼가 예술적 허식을 버리고 인쇄물을 통해서마 ㅎ  할 때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타이포그래피의 구성은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실 제적이면서도 정확해야 한다는 스탠리 모르슨의 철학을 상기해 볼 만하다. 바로크 시대의 건축, 현대의 조각과 건축,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예술과 철학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증언하고 있다. 즉, 공간 속에는 순수한 형태와 반형태가 있는데 전자는 의미를, 후자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스트들 이 바로크 건축을 재평가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 형태와 공간을 결합시켰다 는 점이었다. 이 같은 바로크적 특징은 현대에 와서 더욱 깊이 천착되었다. 대형 입방체를 이어 붙여 생활공간을 만들 때 건물 사이의 빈 공간은 전체 구조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 것은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가벼운 휴식 을 취하기도 하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곳"이 된다. 동북아시아의 철학에 따르면 창조된 형탱9ㅢ 9ㅂ9 직으9ㄴ 빈 공간에서 생겨난다. 그 안에 빈 공간이 없다면 물병은 한 덩어리의 흙에 불과하다. 그것이 용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빈 공간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 렇게 말했다. "30개의 바퀴살이 바퀴축을 향해 집중된다. 그러나 바퀴의 본질은 그 바퀴살 사이에 존 재하는 빈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물병은 흙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물병에게 그 기능을 수행하게 해주는 것은 그 속의 빈 공간이다." "창문과 문이 달린 벽들이 집을 구성한다. 그러나 집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은 그 안의 빈 공간이다." "이것이 하나의 도 이다. 유용성은 물질로부터 나오지만 본질은 빗물질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원칙은 타이포그래피에 원욜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쇄된 면의 빈 공간이 그다지 큰 의리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현대의 타이포그래퍼들은 빈 공간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타이포그래퍼는 빈 공간을 디자인의 공식적 요소로 파악하고 있고, 또 빈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변화를 적절히 이용할줄 알게 되었다. 리듬이 이세상을 움직이고 있고 또 모든 생명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생물은 리 듬에 맞추어 생장하며 바람은 주기적으로 불어 와 연기, 나무, 보리밭, 모래언덕 등을 흔든 다. 인간의 생활에 기계가 도입됨으로써 우리는 일하는 리듬의 진정한 가치를 더 잘 인식하 게 되었다. 또한 근론자의 정신적, 육체적건강은 정교한 구조를 갖춘 율동적인 작업일정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예술작품은 리듬 있는 감각의 모든 음영을 잘 전달해 왔다. 특히 20세기 에 들어와 리듬의 의미와 힘은 디자인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타이포그래퍼가 리듬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인쇄된 활자는 그 것이 직선, 곡선, 수직, 수평, 사선 등 그 무엇이든간에 율동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간단 한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는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오게, 또는 뾰족하거나 둥글게, 혹은 대칭이거나 비대칭으로 구성할 수 있다. 공간배치가 텍스트의 행간이나 전체 구성에 리듬을 준다. 이것은 음악의 한 소절이 다양한 템포와 강세로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 지이다. 단락이 긑날 때 생기는 빈 공간이나 행과 행 사이의 공간은 구성에 기여하며 다 양한 활자크기는 타이포그래피에 형태와 리듬을 준다. 아주 간단한 타이포그래피도 잘 구성 되어 있으면 멋진 리듬감을 나타낸다. 종이 모양도 리듬감을 이루는 또 다른 요소이다. 정사각형 종이가 주는 균형감이나 직사 각형 종이가 주는 길고 잛은 가장자리의 강세도 리듬의 요인이 된다. 어떻게 ㅗ할자르 ㄹ조 합하느냐에 따라 타이포그래퍼는 무수한 가능성을 펼쳐 보일수 있다. 구성에서 리듬감은 종 이 모양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디자인할 때 티아포그래퍼는 경직된 형태와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 유용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형태에 생명과 아름다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 에밀 뤼더 (타이포그래피) 유럽의 초기 인쇄술 초창기의 인쇄업자들은 손으로 슨 책과 유사한 책을 만들려고 애썼다. 그래서 연자와 정 교하게 장식된 대문자를 도입했다. 특히 첫머리 대문자는 페이지가 모두 인쇄되고 난 다음 에 스탬프를 이용하여 금박을 입혔다. 1663년에 발간된 슬라브 성경의 속표지는 중세의 필 사본보다 더 정교하게 장식되고 채식되었다. 펜에서 프린트로 인쇄술이 필경을 완전히 대체해 버릴 것 같은 시기에 글쓰기 예술은 새로운 활력을 얻었 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글쓰기의 고전적인 교범이 나왔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결정 판으로 남아 있다. 1440년대에 챈서리라는 서체가 교황청에서 채택되었다. 이것은 카롤링 서체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우아하고 읽기 좋은 글자꼴 때문에 곧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고, 오늘날 이탤릭 이라고 부르는 서체의 원형이 되었다. 이탤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챈서리체가 이탈 리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챈서리 서체는 1522년 루도비코 아리기가 쓴 (챈서리 서체를 쓰는 법)이라는 책에서 처 음 인쇄돈 모습으로 등장했다. 오른쪽 페이지에 보이는 것은 상대방을 아주 높여서 부르는 극존칭 칭호인 생략형들인데 알파벳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위의 그림은 필기 도구인 깃촉 펜을 준비하느  정이다. 1530년에 지오바니안토니오 타글리엔테의 (현대 서체)가 발간되었다. 타글리엔테는 챈서 리에서 고딕 흑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체를 자세하게 설명햇다. 심지어 히브리어를 쓰는 방법까지 언급되고 있다. 1540년 지오반바티스타 팔라티노가 쓴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팔라티노는 언어 자체를 사랑하고 언어적 유희를 좋아하는 학자였다. 그는 칼데아어, 아라비아어, 이집트어, 인디아 어, 시리아어, 키릴어, 그리고 자신의 이름지어 불렀던 사라센 알파벳 등으로 작품을 출판했 다. 그는 또한 레부스 글씨 (상형문자의 현대판으로서 어떤 사물을 나타낼 때 그것과 소리 가 같은 단어들로 표현한다)도 즐겨 썼다. 오니쪽면 중에 D자와 그 옆에 두 개의 달걀이 함 께 그려진 것이 보인다. 이것은 dove(이탈리아어로 '어디에'라는 뜻)라는 단어를 레부스식으 로 나타낸 것으로 달걀 두 개를 나타내는 단어는 uove인데, d+uove가 되어 dove를 나타낸 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알려진 습자 교본은 1741년에 출간된 조지 비캄의 (유니버 설 펜맨)이다. 이 책의 멋진 속표지는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잘 드러내 준다. 이 책에는 여 러 가지 습자견본이 들어 있을 뿐만아니라 도덕적 교훈과 글을 쓰는 신중한 마음가짐에 대 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글씨는 성공적인 사업가를 만들어 내는 필수적인 첫걸음이다.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 으면 사업에 유용할 때가 많다. 물론 아름다운 글씨는 보기에도 좋다. 글씨는 눈과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 두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먼저 눈에서는 크기와 균형감을 얻 고, 손에서는 용기와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눈이 정확해야만 높이와 거리를 잴 수 있고 글 씨이음새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또 손을 잘 놀려야 붓의 위치와 강세를 제대로 조정할 수 있고 글자를 모두 쓰고 난 후에 고르게 잘 썼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글씨를 잘 쓰려면 주어진 규칙에 따라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읽기 쉽고 단정하고 힘찬 글씨는 보기에도 좋고 또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업가들은 글씨를 잘 쓰고자 하는 것이다. 단번에 시원스럽게 써 내려간 글씨는 자연스럽게 보이면서도 글씨 전체에 웅장한 아름다움을 준다. 또한 종이 위의 공백 을 메우기 위해 장식적인 붓놀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러 멋을 내기 위한 글씨는 써서는 안 된다. 또한 너무 흥에 겨운 상태로 글씨를 써 내려가면 오히려 글씨를 망치는 수 가 있으니 글씨 쓸 때는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가락이 너무 길거나 짧거나 또는 지루하게 반복되면 음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해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아름다움과 유용함이 글씨의 표본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가장 쉽게 습득하려면 훌륭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글자의 형태와 균형에 대해 잘 익힌 다음 이 책에 나와 있는 각종 서 체들을 열심히 베껴 쓴다면 학습자의 손도 점점 능률적이고 효율적이 되어 결국 완성과 숙달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글씨는 훌륭한 신사에 비유될 수 있다. 신사는 예의바르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면서 우아하고 침착한 태도를 갖게 된다. 글씨의 습득도 이와 다를 것 이 무엇이겠는가! 조지 비캄 (유니버설 펜맨) 글쓰기 기술에 대하여 신비한 기술이여! 천사같은 사람이 가르치는 신비한 기술이여! 사람의 눈에 말을 걸고 형체 없는 생각을 체색하는 기술이여! 비록 그대는 귀가 먹고 말이 없지만 우리에게 구원 을 주네. 그 축복받은 기술을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 감각으로 세 가지의 기능을 수행케 하 네. 우리는 머리와 가슴을 보고 듣고 만지네. 그대의 신비한 뜻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서 우리에게 천천히 전해져 오네. 소리가 없으되 그 뜻을 전해주고, 비록 잘 보지는 못한다 하나 이 거대하고 둥근 지구의 온갖 지역을 해집고 다니네. 이리하여 살아 있는 생각을 담 은 죽은 글자가 영혼에다 사상을 확대시켜 주는 망원경같이 되네. 인간의 한정된 목숨에 죽음 없는 증인이 되어 주고, 모든 사건과 신분을 뛰어넘어 영원히 존재하네. 우리 유한한 인간은 글자에서 영원을 맛보네. 역사의 시작을 보고서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알려 주네 그리고 역사와 예술과 법률을 가르쳐 주네. 운명처럼 모든 자연을 한 권의 책에 보존하는 기술이여! 조지프 샹피옹 악보 쓰기 글쓰기는 하나의 증언이며 감정과 의미의 파장을 측정하는 진도계이다. 악보는 그 어떤 기록보다도 기보법을 충실히 구현한 것이다. 소리의 장단,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 각 소절의 템포와 형태를 잘 적어 놓은 악보는 정서적 감동과 움직임을 기록해 놓은 텍스트이 다. 음악가들은 악보를 읽으면 음악이 저절로 떠오른다고 한다. 기보법의 문제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작곡가가 어떻게 주제와 의도를 표현하려 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동시대인과 후대에 전달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들이 늘 표현의 한계에 부딪혔으며, 기보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애 매모호함을 피하고자 여러모로 노력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작곡가들은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로 기보를 한다. 그래서 그것을 해석하려면 먼저 작곡 가가 처했던 시대적 맥락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곡의 성격이나 움직임을 나타 내는 음표, 바꾸어 말하면 미묘한 해석상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음표가 늘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이러한 생각은 수세기 동안 음악을 표기하기 위해 똑같은 그림기호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생격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것이 기도 하다. 즉, 기보가 음악을 표기하는 영원 불변한 국제적 수단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기보에 사용 된 서로 다른 기호는 음악가, 작곡가, 연주가의 독특한 스타일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성을 가져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토록 다양한 의미는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쓴 책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러한 연구가 쉽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의미가 음악적, 문헌적 맥락에서 추출되어야 한다. 어 쨌든 기보에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위험성이 뒤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보는 아주 복잡한 레부스 문자체계와도 같다. 악상이나 음악적 구조를 음표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비교적 간단한 일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 나 지휘자에게 그 악보대로 연주를 하라고 하면 기대와 전혀 다른 연주가 이루어지는 경우 가 많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보의 형태는 개별 음표와 악곡의 전반적 윤곽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다. 그러나 상식적인 능력을 갖춘 음악가라면, 기보라는 행위 자체가 매우 불확실한 것이 며, 그것의 의미 또한 전달 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 것이다. 우선 기보에는 소리의 장단이 나 고저, 그리고 템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술적 기준은 기보법에 의해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음표의 정확한 길이는 시간 단위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 있 고 고저는 정확한 진동수가 파악되어야만 알 수가 있다. 규칙적인 템포는 메트로놈에 의 해 측정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처럼 규칙적인 템포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본질이나 스타일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음악-예를 들면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 페라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이 똑같은 기보법에 따라 기록된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 가? 음악의 다양한 장르와 차이점을 생각할 때 모든 시대, 모든 스타일의 악곡이 1500개 정 도의 기호를 이용하여 기록됟 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기보법에 사용되는 기호는 이처럼 한정되어 있지만 그기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 해서는 두 가지의 다른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첫 번째 원칙은 기보를 하나의 작품으로 파 악하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연주 방법에 대한 자세한 지시가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입장 이다. 두 번째 원칙은 기보를 연주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라고 보는 입장이다. 두 번째 원칙에 입각한 기보는(첫 번째 원칙과 마찬가지로) 작곡의 형태와 구조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런 것은 다른데서 찾아내야 한다. 단지 소리를 가능 한한 정확하게 표현하기 만 하변 된다. 이것은 연주 행위 자체에서 깁의 의도가 구체화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1800년까지는 음악을 기록한다는 것은 작곡가의 창작품을 구체적으로 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1800년 이후부터는 연주 방법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방법 사이에도 중복되는 점이 많다. 예를 들별 16,17세기에 특정 악기를 연주할 때 손의 위 치를 어디다 두라고 지시한 다이어그램은 작품을 기호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연주 방법 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이어그램은 의하는 코드(가령 류트 같은 악기에서)를 얻기 위한 손가락의 위치 를 나타냈는데, 이것은 음묘가 실제로 소리로 될 때에만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가락의 위치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만으로는 머릿속에서 음악을 상상할 수없으며 오로지 손가락의 위치만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주 방법을 지시한 것으로서 기보법 상의 극단 적인 예이기는 하다. 1800년 이후의 악보(예를 들면 엑토르 베를 리오스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및 기타 작곡 가들의 작품)는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소리나게 하라는 방법, 즉 연주 방법을 기록 새 놓은 것이라 할 수있다. 주어진 지시를 잘 따르면서 음표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이 정 확한 음악을 얻는 길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악보가 곧 음악이라는 입장에 따라 쓰인 1800년 이전의 악보를 연 주하려고 할 때에는 정확한 연주 방법을 알 길이 없다. 그렇게 하려면 악보 말고 다른 근 거를 찾아야만 했다. 이것은 음악 교수법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먼저 기보 를 배운 다음에 음악의 형태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표준 기보가 음악 그 자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아무도 학생들에게1800년 이전의 악보와 그이 후의 악보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것 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선생이나 학생이나 이런 이원적 기준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악보가 연주 방법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또 어떤 경우 에는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오류가 흔히 방생한다. 이와 같이 악보를 읽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작품의 표기냐 흑은 연주 방법이냐-이 있 음을 음악사 시간 첫머리에 기악이나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얘기해 주어야 한다. 그 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록된 대로만' 연주를 한 거나 노래를 부를 것이고(대부분의음악선 생은 이렇게 가르친다) 악보를 잘 분석하여 그 가치를 완전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모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음악의 정서법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음악적 정서법이라는 것이 있다. 기보법에 사 용되는 몇 가지 특징적인 부호도 이 정서법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리타르단도(접접 느려지는 연주: 역주),트릴(떠는 소리: 역주), 아포자투라(앞꾸밈음: 역주)등은 특별한 경우 를 빼놓고는 악보에 기재되지 않는 다 그러니 악보에 '적혀 있는 대로' 연주한다면 문제 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음악적 장식은 써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써넣다 보면 음악가의 창조적 상 상력 구속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은 자유로운 장식을 요구한다. 니콜라 아르농쿠르 (음악의 대화) 기술의 영향 어떤 도구로 어떤 소재에다가? 글쓰기의 구성과 역사를 생각할 때 당연히 생기는 질문 이라고 할 수있다. 기록된 기호는 그것을 창조해 낸 문명에도 많이 의존했지만 필기 도구와 필기 소재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죽, 왁스판 그리고 비단 어디에 쓸 것인가? 필기 소재는 파피루스(이집트),천(이집트),구운 진흙판(메소포타미아), 돌(메소포타미아),대리석(그리스),구리(인도), 가죽(사해 근처), 사슴 가죽(멕시코),자작나무 껍질(인도),용설란(중앙 아메리카), 대나무(폴리네시아), 종려나무 잎(인도),나무(스칸디나비 아), 비단(중국, 터키),상아(오턴), 왁스판(이집트, 서유럽)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면 필기 도구는? 이렇게 다양한 소재에다 동일한 도구로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 다. 그래서 갈대 줄기, 붓(파피루스나 동물의 뻣뻣한 털로 만든 것),첨필, 끌, 깃촉 펜등이 이용되었다. 필기 소재와 도구는 글씨의 형태를 결정했다. 파피루스에 갈대로 쓴 글씨를 연구하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전혀 다른 문자체계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독자적인 문자체계를 만들어 내지 않고 이미 알려진 문자체계를 재생하는 일만 한다고 하 더라도 그 결과는 판이할 수있다. 어는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필기 소재의 성격이 필기 도 구의 사용에 영향을 미쳐 원래 문자체계와 재생된 문자체계 사이에서도 서로 유사점을 찾기 어렵게 된다. 필기 소재로는 유리, 뼈, 납, 철, 양피지, 벨룸지, 그리고 종이 같은 것도 추가할 수있을 것이다. 그런 목록을 길게 열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또 그런 소재가 모두 기술 혁신을 가져온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기호의 형태는 처음 에 필기 도구와 필기 소재의 유형에 따라 결정되었지만 그 뒤에 꾸준히 발전해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령 종이가 널리 사용되었을 때, 또는 펜을 잡는 손의 위치가 달라졌 을 때, 비록 문자체계가 완전히 새로워지지는 않았지만 형태가 어느 정도 달라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서로 다른 서체는 금방 식별한다. 어떤 서체를 볼 때 가장 분간하 기 어려운 것은 필기 소재가 그서 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그 필기 소 재가 특정 서체를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나주에 그 서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인지를 분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석비에 새겨진 글씨에 매흑되어 왔다. 그런데 석비 서체는 늘 돌 위에 글 씨를 샛길 때만 사용되던 것일까? 필경 사들이 이 서체를 다른 소재에 널리 사용했는데 우 연히 돌에 새긴 것만 오랜 동안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 한 답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어떤 언어와 문자체계는 흔적도 없이, 아니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는 가? 왜 어떤 언어는 견고한 소재 위에 쓰여져 시간에 의한 마멸고 풍우에 의한 손상을 극 복하고 오늘날까지 살아 남게 되었는가?" 르네 포노 (의사소통과 언어) 명암의 사용 그리스 비문과1,2,3세기의 로마 비문을 비교해 볼 때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 비 문들은 그다지 크지 않고-어떤 것은 높이가 몇cm밖에 안 된다-똑같은 굵기의 획으로 구성 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직선으로 구성된 비문이다. 그리스 것고 로마 것 사이의 유일한 차이라면 그 직선에매어있는 정신이다. 그리스 대문자는 크기가 비슷하고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들은 질서와 정연한 배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 대문자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조화로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라틴 대문자는 처음에는 통일성을 지향한 것 같으나. 나중에는 거 기에서 벗어나 글자꼴에 따라 크기를 다리 하여 조화보다는 리듬을 더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같이 글자의 크기가 달라지는 시 점은 로마인이 정복 지역에서 자신들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던 때와 일치한다. 보통 눈 높이였던 비무은 점점 더커졌고, 깊이 새겨졌다. 글자에 채색을 한 경우에도 서 로 달느 각도에서 행간에 비추어지는 명암의 적절한 효과로 글자의 흠이 분명하게 인식되게 했다. 이러한 기법은 가독성을 높여 주었다. 빗물이 수직 부분이 채색을 서서히 벗겨 내 점 점 읽기 어렵게 된 반면 수평 부분은 먼지가 쌓여 더 진게 되면서 음영의 효과가 더욱 커 졌다. 글자가 통일성 있는 외관을 갖추려면 글자 사이의 균형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수평 부분을 가늘게 하고 수직 부분을 굵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 수직 에 가까이 가면 커브를 더 굵게 새기고 바깥으로 파도쳐 나가며 가늘게 새기는 방법도 었 었다. 이것이 '음영을 생각한 글씨 새기기" 기술이다. 이 과정에서 미학적 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바로 이 때문에 N자의 경우-이것은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하다-두개의 수직은 그것들을 잇고 있는 사선보다 가늘게 새겨져 있는 것 이다. 만약 유연한 갈대로 글씨를 쓴다고 해도 손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 한 두 개의 가는 수직과 하나의 굵은 사선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글자가 진화된 과정을 단 하나의 요인-그것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발견되었든지-에다 돌린다는 것은 무리 한 일이다. 그렇지만 결과를 결정한 기술적 고려 사항을 무시할 수 없다. 더러는 글씨를 쓰 는 사람이 일부러 자기 자신에게 기술적 난제를 부과한 경우도 있었다. 르네 포노 (납, 잉크 그리고 빛) 서예와 글자놀이 어원을 살펴보면 서예란 말은 아름다운 글씨를 뜻했다. 실제로 서예는 예술과 표현의 필 요, 그림과 기호의 표기 사이에 아슬아슬 하고도 불확실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글씨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서체의 예술이 존재했고 또 그것을 돌에 새기고 베껴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캘리그램(주제에 어울리는 도형에 시행을 맞춘 시)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폴리 네르였다. 그전에는 그리스-라틴 세계에서 '그림으로 나타낸 시'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는 데 그렇게 된 데 에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히브리 문자나 아라비아 문자-이 문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캘리그램이라 할 수 있다-또는 오늘날까지도 그림 문자를 사용하는 중구 군자와 달리 서구의 문자체계는 서예 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 서구 문자는 강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가끔 그림으로 나타낸 시가 그 구속을 뜷고 나와-극히 제한된 경우이지만- 자연스런 형태를 취하기는 했 다. 그 이상을 넘어서면 불법은 아니었지만 별로 자랑할 것 없는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되었 다. 이같이 그림으로 나타낸 시가 문학적 호사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걸 만들어 내려면 상 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같은 흘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구의 서체 특히 라틴 서체는 고도의 수상화 과정을 거쳐 얻어진 모습을 그대로 보존 하면서 현재의 사태에 만족해 버린 것만 같았다. 이러한 사정은 라틴 문자에만 국한되는 것 이 아니라 그리스 문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리스 문자는 더 먼저 개발되었기 때문에 힘들게 얻은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간절했던 거 같다. 반면 아라비아 사람은 그리스 사람과 전혀 달랐다. 아라비아 문자는 서예로 구성할 수있을뿐만 아니라 글 자 자체가 그림과 문자의 중간쯤에 위치했다. 아라비아 세계에서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대 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림이나 다름없는 그 글씨는 곧 그것을 쓴 사람 자신을 나타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으로 나타낸 시의 잠재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의사 표현의 다른 수단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그림으로 나타낸 시의 장정은 텍스트를 읽어보지 않아도 그것이 나타내는 것-말개, 계란, 문장-을 금방 알아볼 수있다는 것이다. 최초로 각운에 맞 춰 시를 쓴 로데스의 시미아스라는 시인은 언뜻 보기보다는 더욱 복잡한 구조를 가진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인은 로데스 북동쪽 해안에서 야간 떨어진 섬인 시미 출신으로 추정되는데B. C.300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치세 시의 인물이다. 시미아스는 자신의 시에다 시각적 시미아스 효과를 주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시의 리 듬을 자신이 묘사하려는 사물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시행을 늘이고 줄여서 날개, 달걀, 도끼를 묘사하고 싶다면 그 사물의 형태를 이루게끔 써 나갔다 (앞 페이지의 <부활절 날개>참조 : 역주).이렇게 되어 시각적 형태와 시적 형태(여기서 형태라는 pun을 사용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시각과 시의 형태를 대비시키려다 보니 이 말을 쓰게 되 었다)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게끔 꾸 며져 있는 것이다. 캘리그램을 제작하는 노력에 힘입어 형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물론 형태와 의미 를 일치시키는 데 따르는 혼란들 있을 수 있지만, 캘리그램은 시와 언어의 본질을 찾아내려 는 진지한 노력이라고 볼 수있다. 제롬 페뇨 (캘리그램에 대해) 일반적인 태도에 대하여 글씨 쓰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 있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이런 사람은 단시 간 내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 람들은 오로지 연습과 실습을 통해 재주를 보충해 나가야 한다. 재주 있는 사람과 똑같은 수준에 이르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은 반드시 결실을 가져다준다. 굵은 획, 가는 획, 그리고 연자획 붓의 효과를 확실하게 하려면 굵은 획, 가는 획, 그리고 연 자획을 잘 알고 있어야 한 다. 굵은 획은 펜이 움직이는 방향과 관계없이 펜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피해서 쓴 획을 말한다. 가는 획은 펜이 낼 수 있는 섬세한 줄을 말한다. 연 자획은 글자와 글자를 이어주 는 것이다. 가는 획과 연 자획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있다. 서예의 대가들은 가는 획을 글자의 한 부분으로 치부하고, 연 자획은 글자를 시작하고, 끝내고, 이어주는 정도로 기능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연 자획을 가볍게 보아서는안된다. 영혼이 인간의 육체에 소중하 듯이 연자획도 서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이같은 연결이 없다면 움직임도 없고 정열도 없고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어 주는 생명력도 없게 된다. 모든 연자획과 일부 가는 획은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펜의 네모진 가장자리를 잘 사용 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가장자리는 글씨를 쓸 때 가장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펜 을 만들 때 가장자리를 가장 넓적하고 길쭉하게 만든다. 나의 원칙을 충실히 따른다면 곡선 으로 된 연자획은 사선으로 된 직선보다 훨씬 우아하다. 연자는 원형에서 수직으로, 원형에서 원형으로, 수직에서 수직으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글씨쓰기나 알파벳 연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글을 쓸 때의 손놀림 연습을 하면 글쓰기에 속도가 붙는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서둘러 쓰려고 하 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천천히 쓰는 것도 좋지 않다. 너무 빨리 또는 너무 느리게 쓰면 좋은 글씨를 얻기 어렵다. 너무 빨리 쓰면 글씨가 고르지 못해 일관성을 잃게 되고, 너 무 천천히 쓰면 동작이 무겁게 되고 머뭇거리게 되어 때에 따라서는 떨리는 글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속도에 관한 한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양극단의 중간에 서려고 노력해야 한 다. 서두르지 말고 기초를 충실히 익히고 나면 서서히 속도가 붙게 되며, 또 글쓰기에 절대 로 필요한 손의 자유로움도 얻게 된다. 형태에 대하여 아름다운 글씨꼴을 얻으려면 기본규칙을 충실하게 지키고 지속적으로연습해야 한다. 글 자를 크게 쓰고 펜의 각도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글씨가 좋아진다. 이것을 완전히 몸에 익혀 글쓰기 교본이나 다른 참고서를 보지 않고서도 본능적으로 다양한 서체를 쓸 수 있는 상태 가 되어야 한다. 글씨를 쓰는 사람이 형태를 제대로 익혔는가는 속필을 시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천히 쓸 때는 알 수 없었던 명백한 오류가 속필을 할 때에는 금방 드 러나기 때문이다. 운필에 대하여 두 가지 형태의 운필이 있는데 하나는 타고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단한 연습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물론 천부적인 자연스런 운필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펜을 눌러 쓴 부 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사이에 자연스럽게 균형이 잡히게 해준다. 이러한 재주를 타고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글은 잘 쓸 수 있다. 불행하게도 자연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았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운필요령은 천부적 재 주만큼 날렵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부지런히 연습을 계속하고, 손을 가볍게 놀리고, 펜촉 을 날카롭게 깎고, 펜을 다양한 방식으로 힘차게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돌 위에다 새겨 넣은 글씨처럼 견고하고 무거운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므 로 부드럽고 우아한 운필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글씨의 정돈에 대하여 글씨를 쓰는 원칙을 알되 질서정연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면 서예의 일부분만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한 것처럼 상상력과 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력은 글씨를 아름답고 힘차고 뛰어난 효과를 갖게 해준다. 품위는 글씨를 아름답고 힘차고 뛰어난 효과를 갖게 해준다. 품위는 글씨를 검토하고 조정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간파하게 해준다. 질서정연한 마음의 모든 측면이 이 간단한 설명에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정돈된 작품을 남길 수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작품은 일관성이 있고, 좋은 구조를 갖출 수 있는 한편, 자간과 행간의 배열이 일정하고 글 자의 선택이 알맞아서 지나친 데라고는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반드 시 혼란과 부조화가 드러나게 된다. 파예송 (글쓰기의 기술) 내용 텍스트의 의미와 서예는 전혀 별개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서로 긴밀 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서예는 텍스트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일반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글자와 그 주위의 하얀 종이와의 대비는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완벽의 경 지를 추구한 전통 서예는 정서와 사고로 가득 찬 강력한 구성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 리하여 공간에 쓰인 글자의 진정한 뜻을 전달 할 수 있었다. 서예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은 우선 글씨의 디자인을 먼저 볼 것이고 그 다음에 글자의 뜻을 살필 것이다. 어떤 때는 글자 의 아름다운 디자인에 가려 그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서예의 수준은 글쓰는 사람의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 풍부하고 다양한가에 따라 결정된 다. 전체적인 구성, 흑백의 배열, 리듬 등을 살펴본 뒤에 텍스트를 해독하고, 마지막으로 서 예의 형태밑에 감추어진 의미를 읽어야 한다. 준비 속도와 유용성의 시대인 20세기에도 서예는 여전히 인내의 예술이다. 서예에는 지름길이 란 없다. 서예를 공부하려면 몇 년에 걸쳐 도제시절을 보내야하고 서예와 관련된 모든 문화적 측면을 습득해야 한다. 대가들의 글씨를 그대로 베껴 쓰면서 끊임없는 연습을 해야 한다. 대가들의 탁월한 솜씨를 몸소 접함으로써 심미안을 개발해야 한다. 과일나무는 대지로부터 양분을 천천히 빨아들여 과일을 익게 하고 과일마다 독특한맛, 색 깔, 풍취를 준다. 서예가도 이처럼 자신의 예술을 천천히 익혀 나가야 한다. 연습은 그의 내 부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을 천천히 일깨워 주고 수만 가지의 뉘앙스를 지닌 표현을 가능하 게 해준다. 서예가는 획득된 지식과 정신적 수양을 바탕으로 붓 끝에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 끝 에서 점 , 획, 단어가 생긴다. 그가 사용하는 잉크는 정맥에서 흘러 나오는 피와 같다. 서예 가의 본질이 잉크 속에 완전히 녹아들고 그래서 그 본질이 붓끝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호흡 서예가의 호흡조절 능력은 붓놀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보통사람은 본능적으로 숨을 쉰다. 서예가는 도제로 훈련받는 시절에 호흡조절 방법을 배운다. 그래서 글자와 글자 사이의 중단 시간에 숨을 들이쉰다. 서예가가 글씨를 쓸 때 숨을 들이쉬느냐 내쉬느냐에 따라 선을 긋는 움직임이 달라진다. 운필이 길어질 때 서예가는 방해 받지 않기위해 숨을 꾹 참는다. 글씨를 쓰기 전에 숨을 쉴 수 있는 곳, 먹물을 다시 채울 수 있는 곳을 미리 보아 두어야 한다. 숨을 참을 수 있다 고나 아직 먹물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작품의 예정된 지점에 이르면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먹물을 보충해야 한다. 전통 필기구를 사용하는 서예가는 만년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잉크가 무제한 흐 르기 때문에 호흡조절을 불필요하게 한다. 그리고 작업하는 도중에 시간의 무게를 느끼는 즐거움을 서예가에게서 빼앗아 간다. 집중 서예가는 정신을 완전히 집중하는 순간이 오면 황홀경에 빠져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게 된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정한 길을 찾게 된다. 온몸이 서예에 몰입하게 되고 그의 정신과 육체는 완전 일치를 이루게 된다. 완전한 집중 상태에 도달하면 시각과 청각의 공백을 경험하게 된다. 서예가는 스스로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야 하면 그의 시간을 일상생활의 구속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의 주변에 있는 것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진공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공 모양의 진공으로 그는 그 중심이 된다. 그는 정신집중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진공의 정중앙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주인이 되는 풍성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몸은 무게를 잃게 되 고 겨드랑이에서는 날개가 생겨날 것이다. 그의 표현양식은 점점더 심오해지면서 자기 자신 에게 진실하게 될 것이다. 그의 내부 에너지는 최고점에 달해 글씨로 분출되어 나올 것이다. 집중은 더욱 분명하고 더욱 명석한 비전을 보여 준다. 모든 틀을 넘어서 서법은 전통의 수호자요 서로 다른 세대의 서예가들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서법은 나라 와 서예의 대가마다 다를 수 있다. 서법은 서예가의 내적 흥분을 조절해 주고 그의 감정이 용출하는 것을 막아 준다. 또 이 때문에 서예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 법이 마련해 주는 특정한 기준이 하나의 이상적인 출발점은 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한 서예가는 이런 모든 원칙의 고정된 틀을 벗어 넘어서야 한다. 서예가로 대성하려면 처 음에는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되겠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진 정한 서예는 규정할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모든 원칙을 뛰어넘는 강력한 어떤 것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배치 서예의 구성에서 빈 공간이라는 개념은 없다. 오로지 흑과 백이 있을 뿐이고 흑이든 백 이든 모든 공간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건축과 서예를 서로 비교해 볼 수 있 으리라. 건축의 디자인은 살아 있는 공간을 규정한다. 벽 사이의 공간은 벽 그 자체만큼이 나 실제적이고 의미가 있다. 서예에서 공간의 가치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글자, 혹은 글 자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의 상호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표현 환희, 행복, 평화, 근심, 사회적 폭력등은 서예에 흡수되어 표현된다. 정서를 흡수하여 다 시 활성화시키는 능력 때문에 서예는 보편적 언어가 되었다. 비록 아라비아 문자로 쓰여 많 은 사람이 읽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산 마수디 (서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