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지은이: 실비파탱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김경아 "이제 여기 새로운 이름 하나가 기록되어야 한다. 클로드 모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색채의 조화에 대한 탐닉,...사물을 보는 눈과 보는 사람의 주의를 포착하는 방식의 대담성이라는 면에서 그는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앞으로 우리는 반드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평가 폴망츠, (살롱 1865) (가제트 데 보자르), 1865년 7월 제 1장 살롱전의 낙선자 1840년 11월 14일 파리 9번구 라피트가 45번지, 아돌프와 루이스 쥐스틴 모네 부부 사이에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부모세대부터 파리에 정착한 2 세대 파리인 이었다. 아기는 노트르담 드 로레트 성당에서 오스카 클로드란 세 례명을 받았고 줄여서 오스카로 불렸다. 어린 시절 오스카는 가수였던 어머니에 게 음악적 영향을 깊이 받았다. 부친은 사업에 종사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 다. 1845년경, 아돌프 모네는 가족-아내와 아이들, 그의 양친인-을 모두 이끌고 프랑스 서북 해안 노르망디의 르아브르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이복누이인 마리 잔 르카드르가 살고있었다. 야채도매상인 그녀의 남편이 아돌프를 자기 사업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마리 잔은 어린 조카 오스카의 청년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 친다. 1851년 4월 1일, 오스카는 르아브르 중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나중에 이렇 게 쓰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규율이 몸에 맞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어떤 규율에 도 굽히지 않았다. ...학교는 감옥 같은 곳이었고 하루 네 시간밖에 머물지 않는 데도 나는 너무너무 지겨워했다." 그러나 학적부는 그를 "심성이 아주 착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생"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벌써부터 오스카는 재미삼아 풍자화를 그렸으며, 나폴레옹 시절의 궁정화가 자크 루소 다비드의 문하생이던 장 프랑수아 오샤르에게 그림 레슨도 받고 있 었다. 당시(1875년 무렵) 오스카가 주로 그린 것은 인물풍자화나 보트나 풍경의 스케치였는데, 일찌감치 야외풍경을 선호하는 기질이 싹텄던 것이다. "햇살이 유혹하듯 반짝이고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졌다. 그때 절멱을 따라 달려가는 일이 란!" 1857년: 최초의 변화 1857년 1월 28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낫고 16세이던 모네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1858년, 아이도 없이 과부가 된 마리 잔 아주머니는 조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 다. 화가 아르망 고티에의 친구이자 자신 역시 아마추어 화가이던 아주머니는 조카가 그림 레슨을 계속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스카는 'O.모네'라고 사인을 한 후 풍자화를 문방구, 액자, 철물 따위를 파 는 가게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들은 가게 주인의 옛 동업자 외젠 부 댕의 그림들과 나란히 전시되곤 했다. 모네는 1922년에 이렇게 회상했다. "그 가게에 풍자화를 전시하곤 했는데, 그 덕에 르아브르에서 다소 이름이 알려졌고 변변치는 않지만 수입도 생겼다. 또한 거기에서 외젠부댕을 알게 되었는데, 당 시 서른 살 안팎이던 그는 이제 막 화가로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 부댕의 제의에 따라 나는 그와 함께 야외로 나가 작업을 하기로 했다. 물감 한 통을 사 들고 둘이서 루엘(르아브르 동북편)까지 나갔다. ... 그는 이젤을 세우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제서야 베일이 걷히듯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린다 는게 어떤 건지, ... 화가로서의 내 운명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진정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외젠부댕 덕분이다. ... 그는 너무도 자 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떳고, 자연을 이해하게 되는 한편 자 연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 가르침의 결과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 바로 (루엘 풍경)이다. 부댕의 스타일을 본따 그린 이 작품은 1858년 8월과 9월, 르아 브르 시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파리: 트루아용과 아카데미 쉬스 아들이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아버지의 탄원은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주머니가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1859년 4월 모네는 파리로 떠났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아르망디 고티에와 콩스탕 트루아용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트루아용이 귀중한 충고를 주었다. "먼저 조형작업만을 하 는 스튜디오에 들어가 누드부터 공부하시오. 데생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되... 유 화를 소홀히 하진 마시오. ...그런 다음 루브르에 가서 몇 점을 모사해 보구려. 그리고 내게 자주 들러 당신 작품을 보여 주시오." 1859년 살롱전에서는 트루아용,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카미유 코로, 외젠 들 라크루아, 테오도르 루소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부댕에게 보내는 한 편지는 일생 동안 바다에 매료될 모네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다. "쓸 만하다 싶은 바다 풍경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바다를 그리는 화가조차 전무하니 당신께서는 그 부분에서 큰 성과를 올린 것입니다."(1859년 6월 3일) 모네는 아 카데미 쉬스에서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카미유 피사로를 만난다. 알제리에서의 경험 "(1859년 살롱전에서) 동방의 뛰어난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그 작품들에는 한결 같이 장엄하고 따뜻한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1859년 6월 3일, 부댕에게 보낸 편지) 이러한 경탄은 청년 모네가 아프리카 경비병대에 자원입대한 사건을 얼 마만큼 설명해 준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일로 내 비전이 얼마나 풍부해 졌던가. 그곳에서 받은 빛과 색릐 인상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나중 일이었지만, 내 장래의 관심사가 싹튼 것은 바로 알제리에서였다." 1862년 여름, 르아브르와 그 북쪽 생타드레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모네는 네덜 란드 화가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모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이래로 용킨트는 내 진정한 스승이었다. 화가의 안목을 키우는 마 지막 발전단계에서 그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용킨트는 모네의 아주머니를 움 직여 모네가 알제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파리에서의 모네 1861년 살롱 수상자이자 르카드르의 친구인 오귀스트 툴무셰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다. 1862년 말, 툴무셰의 추천을 받은 모네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알프 레드 시슬리를 가르치고 잇던 샤를 글레르의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스위스 태생 인 글레르는 1942년 살롱에 선보인 (저녁, 혹은 잃어버린 환영)으로 상당한 명 성을 얻고 이었다. 글레르는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모네 역시 스승의 지도 에 순순히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863년 3월, 글레르의 화실에서 함께 작업하던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아버지에 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네를 자신의 "가장 절친한 환쟁이"라고 소개했다. 바지유 는 어머니에게도 편지를 썼다. "퐁텐블로숲 근처에 있는 샤이의 작은 집에서 르아브르 출신인 제 친구 모네와 여드레를 지냈습니다. 풍경화에 뛰어난 그 친 구가 저에게 몇 가지 귀뜸을 해준 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샤이에 혼자 머 물러 있던 모네는 파리로 돌아오자 마자 살롱전과 낙선전(살롱전 낙선자를 위 한 전시회)을 둘러본 듯 하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이 한창 물 의를 빚고 있었다. 그 무렵 글레르의 스튜디오는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모네는 그곳을 떠 났고 바지유, 르누아르, 시슬리도 곧바로 모네의 뒤를 따랐다. 최초의 걸작 1864년 5월, 모네와 바지유는 노르망디의 루앙, 생타드레스, 옹플뢰르를 거쳐 오 베르그 생시메옹에 머물렀다. 바지유가 떠난 뒤에도 모네는 옹플뢰르에 머물렀 는데, 7월 15일 그는 바지유에게 다음과 같은 열정적인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 는 벗이여, 여긴 너무도 멋지다네. 날이면 날마다 한결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 곤 하네. 나를 미치도록 흥분시키는 그 모든 것들을 근사하게 그리고 싶네. ...멋 진 계획을 세우고 있네." 그해 말, 모네는 파리로 돌아갔다. 바지유가 푸르스탕베르가 6번지에 마련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함께 작업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1865년 살롱 심사단은 '르아브르의 화가'가 그린 두 점의 풍경화를 채택했고, 모네는 최초로 공식적인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게다가 비평가 폴 망츠가 (가제트 데 보자르)지 (1865년 7월) 에 그에대한 평론을 게재했다. 1865년 봄, 모네는 샤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바지유에게 이렇게 썼다. " 이 곳 시골은 정말 아름다워. 가능한 한 빨리 와주게' 같은 친구에게 보낸 5월 1일 자 편지에서, 그는 (소풍)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구도(약 3.7mX5.5M)의 유화를 그릴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네가 와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네. 인물들 뒤에 깔 배 경을 선정하려하는데 자네의 조언이 필요하네." 그해 여름, 그는 또 한번 편지 를 냈다. "내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꼭 와서 몇몇 인물들의 포즈를 잡아 주시게. 자네의 도움이 없으면 이 그림은 실패하고 말거야. 그러니 꼭 약속을 지켜주기 바라네." 샤이에서 모네는 예비 스케치에 들어갔고 가을에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작업 실에서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모두들 그러하듯 저는 작업을 시작했 습니다. 자연에서 스케치한 것을, 제 작업실에서 총체적으로 조합하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트레비소 공작에게 보낸 편지, 1920년) 그러나 그 작품은 미완으로 끝났다. 아마도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 그림을 보고 비평하고 간 후 모 네는 자신의 이 청년기 걸작을 1866년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던 것 같다. 사실, (쿠르베에게 자극받아) 큰 구도로 구상된 그림은 진정한 야외풍경화라고 는 볼 수 없었다. 야외 현장에서 그려질 캔버스야말로 바로 미래의 열쇠였던 것 이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혹은 카미유) 모네는 곧 1866년 살롱전에 출품할 그림의 준비에 들어갔다. 바지유와 함께 푸 르스탕베르가의 작업실에서 나온 후 그는 실물 크기의 인물화 (초록 드레스의 여인)을 그렸다. 모델이되어 주었던 카미유 동시외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훗날 모네의 첫 번째 부인이 되었다. 이 작품은 (카미유)란 제목으로 샤이 풍경화 한 점과 같이 출품되어 비평가들의 눈길을 끌었는데, 개중에는 '마네'와 이름이 비 슷하다는 사실을 두고 평을 쓴 이도 있었다. 실내에서 그린 (초록 드레스의 여 인) 이후 모네는 야외로 나가 풍경 속에 인물을 담는 새로운 시도에 열중했다.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그후 모네는 파리 근교에 있는 세브르로 거처를 옮겼다. 5월 22일 아르망 고티 에에게 보낸 한 편지는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그 어느때 보다 행복 합니다. 시골에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곧이 어 그는 정원에 참호 하나를 팠다. (정원의 여인들)이라는, 대형화를 참호 밑에 넣고 캔버스 윗부분까지 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림은 옹플뢰 르로 옮겨졌고 모네는 그해 여름과 겨울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자그 만 노르망디의 항구에서 알렉상드로 루이 두부르란 화가가 외젠 부댕에게 보낸 편지(1867년 2월 2일)에 이 그림이 언급되어 있다. "모네는 아직 여기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그림에 몰두하고 있죠. ...가로 세로 다 3M정도 크기입니다. 실물보 다 약간 작은 여인들이 한여름 옷차리으로 정원에서 꽃을 꺾고 있는 모습을 담 은 그림입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애초에 야외에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867년 정월,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비스콩티가 20전기에서 르누아르와 살고 있던 바지유와 합류한다. 그해 봄, 모네와 르누아르는 도시의 전경을 담는 데 몰두했다. 1876년 살롱전에서 낙선된 (정원의 여인들)을 바지유가 2,500프랑에 샀는데, 그는 그림값을 매달 50프랑씩 지불해 주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아주 잘 지내고 있네." 생타드레스에서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모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내 그림에 다들 탄복하고 있어. 나도 아주 열심히 작업하고 있네. 스 무 점 가량을 그리고 있는데 근사한 바다풍경화며 인물화, 정원화 모두 다 잘되 어가고 있다네." 그 중에는 (생타드레스의 테라스)가 들어 있었다. 이 무렵 모네 의 편지들을 보면 '카미유를 향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녀는 이미 홀몸이 아니었지만, 르아브르의 보네 가족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파리에 남아 있었다. 1876년 8월 8일, 카미유는 아들 장을 출산한다. 나흘 뒤 모네는 아이의 대부 인 바지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띄운다. "통통하고 예쁜 사내녀석이 귀여 워 죽겠어. 하지만 먹을 것도 없이 지내는 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진다 네." 그해 겨울 잠시 파리에 머물렀던 모네는 또다시 카미유를 버려 두고 르아브 르로 떠났다. 그곳에서 1868년 살롱전에 대비해 바다풍경화를 그렸다. 살롱 심 사위원이었던 도비니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그중 한 점이 입선했다. 르아브르, 에트르타, 파리를 오가며 모네는 소설가 친구 에밀 졸라의 도움으로 1868년 봄 한철을(파리 서쪽) 봉니에 르쉬르센 근처 베네쿠르에 있는 오베르그드 글로탱에서 카미유, 장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6월 29일 그는 바지유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 저녁에 르아브르로 가볼까 하네. 내 작품 애호가가 그림을 주문할 건지 알아보려고 말일세. ...우리 가족에게서는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네." '애호가'는 사업가인 루이 조아생 고디베르였는데 그는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한 적이 있었다. 르아브르에서 지내는 동안 모네는 국제해상전에 다섯 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앙투안 볼롱, 코로, 쿠르베, 부댕 같은 화가들도 참여하교 있었다. 모네의 옛 스승인 오샤르가 포함된 심사위원단은 모네에게 은상을 수상했다. 쿠 르베가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를 소개해 준 것도 이 무렵이었다. 8월이 되자 카미우와 장은 페캉으로 이사했고 모네의 가족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바지유에게 띄운 것을 보면 형편이 훨씬 절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내 입장을 생각해 보게. 아이는 병이 났는데 수중에 돈 한푼도 없으니... ." (1868년 8월 6일) 전시회에서 수상을 한 후에도 그의 호 소는 계속되었다. "내 그림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이제는 명성을 기 대하지 않아. ...모든 게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나는 빈털터리라 네. 좌절과 치욕, 기대감, 그리고 더 큰 좌절. 자네만 믿네, 친구여."(1868년 10월 과 11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12월의 에트르타에서 그는 다시금 옛날의 열성을 회복한 듯 보인다. "지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네. 저녁이면 사랑하는 가족이 따 뜻한 불을 피워놓고 난를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자네가 자네 대자 를 한번 봤으면 좋을 텐데. 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친구여. 그 어린것이 커 가는 걸 지켜보는 건 너무도 즐거운 일이라네. 그 애는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네. 그 애를 그려서 살롱에 출품할 생각이네.' 에 트르타에서의 이 짧은 행복의 순간은 모네의 저 유명한 눈풍경화 (까치)에 담겨 있다. 그러나 1869년 살롱전은 또 한번의 고배였다. 1869년 6월, 모네는 파리 서쪽의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 었다. "여긴 아주 좋습니다." 아르센 후사예에게 모네는 이렇게 썼다. 후사예는 (라티스트)란 잡지의 발간자로서 (초록 드레스의 여인)을 구입했다. "작업할 의 욕은 넘칩니다만, 아, 그러나 살롱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 습니다. 헐값에 팔려고 해도 미술상이며 고객들은 등을 돌립니다. 공적인 인정 을 받지 못한 예술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너무도 적은 걸 생각하면 가슴 이 아픕니다." 바지유에게는 그보다 더 측은한 호소문을 띄웠다. "빵도 다 떨어지고 부엌에 는 불기도 없다네. 지난 8일 동안은 램프를 밝힐 기름도 없이 지냈지. "(8월 25 일, 생미셸에서) "그림도 그릴수 없어. 물감마저 한방울도 없거든." (8월 25일,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르누아르가 모네를 도워러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 람은 나란히 이젤을 세우고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라 그르누예르 근 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풍경앞에 자리를 잡았다. 모네는 파리 서쪽 센 강변 의 마를리와 루베시엔, 부발지에서도 그림을 그렸는데 이 지역은 후일 인상주이 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1870년에는 살롱심사위원이었던 장 프랑수아 밀레와 도비니가 힘써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네의 출품작들-특히 (라그르누예 르)-이 모두 낙선되자 비평가들 사이에 큰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1870년 6월 28일, 모네는 카미유 동시외와 결혼식을 올렸다. 며칠 후인 7월 7일 사랑하는 잔 아주머니가 생타드레스에서 사망했다. 모네는 스해 여름 노르망디의 트루빌 해변에서 작업에 열중했고 (로슈 누아르의 호텔)을 그렸다. 프랑스-프러시아 전 쟁소식을 들은 곳도 이곳에서였다. 11월 18일, 바지유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징 집을 피하기 위해 모네는 영국으로 피신했고 곧이어 카미유와 장이 그에게로 건너왔다. "이 사람은 훗날 우리 중 누구보다도 대성할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을 사세 요." 이말은 도비니가 훗날 인상파 작기들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가 된 화상 폴 뒤랑 뤼엘에게 모네를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둘의 만남은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1870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제 1회 뒤랑 뤼엘 전시회에 모네의 그림이 한 점 선보였다. 이듬해 이 화상은 모네의 유화들을 다량 구매하기 시작했다. 역시 런던에 머물던 카미유 피사로와 함께 모네는 런던 박물관을 방문하는데, 특히 존 콘스타블과 J.M.W터너의 작품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모네와 피사로 는 1871년 5월 1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모네는 네덜란드 여행중 들른 잔담에서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다. "내가 본 것 은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1871년 6월 2일)그는 6월 17일 다 시 편지를 냈다. "열정적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여가시간이 거의 없을 지경입 니다." 런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미술관을 열심히 찾아다녔으며, 특히 암스 테르담의 리즈크스 박물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가을이 되자 그는 파리로 되 돌아왔다. "우리는 모네를 자주 만나며 최근에는 그이 집들이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겠다는 강한 의욕도 보입니다. 그가 우리 유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외 젠 부댕, 1872년 1월 2일 제 2장 인상주의의 전성기 "아르장퇴유, 생드니항 구빈원 근처 오브리 저택" 이것은 1871년 12월 21일 모네가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주소이다. 이 편 지에서 그는 "우리는 지금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아 마도 마네가 그에게 권한 집인 듯한) 이 집은 그가 살던 집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 언제나 모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던 센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요트며 예인선, 산책로로 유명한 아르장퇴유 저수지를 비롯해 1870년 전쟁 이후 재건축이 한창이던 철교며 유료 교각들에도 깊은 관심을 가 졌다. 모네는 계속해서 꽃을 그렸는데 주로 자신의 집 정원에서 작업했다. 1872년 봄 내내 그는 종종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삼아 풍경 속에서 인물을 표현하는 법을 연구했다. 생타드레스에서 르카드르 일가를 두 가지 작도에서 그린 적이 있긴 했지만 ((꽃이 있는 정원) 과 (정원의 잔 마르그리트 그카드르), 이번에 아 르장퇴유에서는 정원 구석의 라일락 수풀을 햇빛이 서로 다를 떄 두 번 그리는 시도를 했다. 이 두 작품은 1890년대 모네작품의 주요 특징이 되는 연작의 효시 에 해당한다. 센강과 집 정원 외에도 모네는 아르장퇴유 근처 시골풍경을 즐겨 그렸다. "모네는 수상작을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듯합니다." 고 1872년 12월 12일 부댕이 평했다, 어쨌든 그해는 이 젊은 화가에게 작품의 질이나 수입에서 결실이 따른 한 해였다. 그는 38점의 작품 중 동생 레옹에게 1 점, 마네에게 1점, 루이 라투셰란 거래상에게 5점, 그리고 뒤랑 뤼엘에게 1만 2,100프랑은 받고 가장 많은 29점을 팔았다. 이 거래내역은 모네의 장부에 기록 된 것인데, 그의 장부는 뒤랑 뤼엘이 남긴 영수증과 함께 모네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1년 뒤 작품 가격은 두 배로 뛰어 평균가가 750프랑까지 올랐다, 이번에도 주 요 구매자는 뒤랑 뤼엘이었다. 그외에도 모네 수집 1세대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은행가 형제인 알베르와앙리 에크, 비평가이자 1878년에 나온 팜플렛 (인상파 화가)의 저자인 테오도르 뒤레가 있었다. 이 같은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모네는 보다 높은 가격으로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1873년, 모네는 노르망디로 돌아와 에트르타와 생타드레스 그리고 르아브르항 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인상, 해돋이)란 제목을붙인, 불멸의 명작의로 남게 될 캔버스에는 날짜가 '72'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도 바로 이시기에 그려졌다. 1874년: 최초의 인상파전 1869년과 1870년 살롱전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던 모네는 이제 피사로나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돌려 볼 생각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1867년,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 사이에 살롱전과는 별도로 전시회 를 열어 보자는 안이 제기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기금 부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 그 안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도두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 는데 유독 마네만이 반대하고 있습니다."1873년 4월 22일, 모네는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다. 5월 7일 극작가이자 미술비평가인 폴 알렉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우리가 지금 조직하려는 협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11월 30일 모네 는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협회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라고 썼다. 피사로나 드가,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운동에 무 척 헌신적이었던 것이다 옃 번이나 서립정관을 뜯어 고친 후인 (그 사이 모네가 중재자 역할을 한 것 으로 보인다.)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3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예술가를 포함하는 유한협동조합' 이 탄생했다. 조합의 첫 전시회는 4월 15일에 서 5월 15일까지, 카퓌신가 35번지, 사진작가 나다르 펠릭스 투르나숑의 스튜디 오에서 열렸다. 카탈로그에 실린 65점의 작품을 낸 예술가들에는 부댕, 펠릭스 브라크몽, 폴 세잔, 에드가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모리소, 피사로, 르누 아르, 시슬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부댕이나 레핀 같은 일부 출품자들은 2주 후에 열린 공식 살롱전에도 참여했다. 카탈로그 번호 95번에서 103번까지가 모네의 작품이었는데. 개중에는 한 번호로 두 작품을 분류한 것도 있다. 여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는 (양귀비), 르아브르의 바다풍경화 한 점, (카피쉰가), 실내를 배경으로 카미유와 장을 그린 것((오찬), 1868년)도 있었다. 이 작품들은 1870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것들이었고, 이를 두고 모네가 살롱의 공식 심사위원 단에 과감히 도전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전시회 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 풍경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둔(인상, 해돋이) 가 있었다, 비평가들은 이 반항적 집단에 즉각적이고도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는데, 특히 모네가 주요 공격대상이었다. 루 이 르루아는 (르 샤리바리)지 4월 25일자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란 제목으로 (결과적으로 르루아는 인상파란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경멸적인 사 설을 실었고, 에밀 카르동도 (라 프레스)지 4월 29일자에 '인상파'에 대한 글을 실었다. 4월 22일 (로피니옹 나쇼날)에 논평을 게재한 아르망 실베스트르는 다 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모네와 피사로, 시슬리가 보여준 '사물을 보는 시 선'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한 시선이 찾아내고 자 하는 것은 단지 인상의 효과 뿐이다. 결국 제대로 된 표현은 선 묘사에 숙련된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조합은 12월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76년, 인상파 전시회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평온기 전시회를 둘러싸고 잔뜩 긴장하면서 보냈던 모네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르장 퇴유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함께 작업을 했다. 모네 일 가에 생활비를 보태 주고 있던 마네는 (정원의 모네 일가)를 그렸고 르누아르도 같은 배경으로 (모네 부인과 아들)을 화폭에 담았다. 센강의 다리와 요트는 화 가들에게 변함없이 인기 있는 소재였지만 아르장퇴유 자체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소재였다. ((대로)) 장기간 화단운동을 주도했던 모네는 이번에는 겨울풍경 을 담는데 전념했다. 1874년 가을 모네는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생드니가 2번지, 역 바 로 맞은 편에 있는 초록 덧문의 분홍색 집'이었다. 그 같은 주거환경은 그가 장 차 지베르니에서 살게 될 집을 예감하게 해준다. 그 집의 정원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75년 작품이었는데, 1875년 봄, 화창한 날이면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대 동하고 프티 게네빌리에 근처 강둑이나 꽃이 만발한 목초지로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미래를 굳게 믿고 있긴 하지만 현재를 견디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1875년 6월 28일, 마네에게 보낸 편지) 형편이 어려워진 뒤랑 뤼엘이 처음으로 모네의 그림 구매를 잠시 중단하게 되 자, 모네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사 주는 새로운 구매자들에게 매달리게 되었 다. 이때부터 모네의 장부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주요 구매 자들로는 오페라 바리톤 가수인 장 밥티스트 포레, 직물상인 에르네스 오슈데가 있었다. 특히 오슈데는 1874년 5월에 (인상, 해돋이)를 800프랑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만큼 열렬한 수집가였다. 그러나 1874년 모네의 수입(총 1만 554프랑)은 전년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1875년, 모네는 몇 차례 마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역경을 벗어나지 못하 면 다분간 팔레트를 잡지 못할 것 같습니다."그때마다 이 신의 있는 친구는 돈 을 보내 주었다. 1874년 3월 24일, 뒤랑뤼엘이 경매인으로 나선 가운데 드루오 경매장에서 그 림 경매가 이루어졌다. 르누아르, 모리소, 시슬레, 모네가 163점의 그림을 내놓 았는데, 모네의 그림들은 통렬한 야유 속에 형편없이 낮은 가격으로 입찰되었 다. 그날 그의 수입은 보잘것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모네의 그림을 취급하는 구매 자 집단 (포레, 에밀, 블레몽, 에르네스 메, 앙리 루아르, 빅토르 쇼케)이 점점 성장하면서 그의 재능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 2회 인상파전은 1876년 4월, 파리 르 플렌티에가의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 렸다. 카탈로그에 오른 모네의 작품은 18점이었다. 수많은 비평가들이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모여들었지만, 그런 중에도 언론은 1874년 전시회 때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르망 실베스트르, 스테판 말라르메 등이 호평의 글을 실었고 에밀 졸라도 모네의 주도적 역할에 경의를 표했다. "그룹의 주도자는 모네이다. 그의 붓솜씨 는 유별난 화살함으로 단연 눈에 띈다." 화가이자 수집가인 귀스타브 카유보트와 의사인 조르주 드벨리오 같은 새 구 매자들이 등장했다. 두 사람은 이후 모네의 재정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몽트게롱의 에르네스와 알리스 오슈데 부부 1876년 봄, 모네가 아르장퇴유를 벗어나 주로 파리에서 소재를 찾고 있을 무렵 에르네스 오슈데가 그를 몽트게롱으로 초대했다. 그의 아내 알리스가 상속받은 로탕부르그의 저택을 장식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연회장을 꾸미기 위해 모네는 두계절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다. 여름에는 (칠면조, 몽트게롱 정원 한구석)(혹은 (다알리아))과 (사냥)(혹은 몽트게롱의 공 원길))을 그렸다, 모네가 예르강 근처로 귀스타브 카유보트를 방문한 것도 이맘 때였다. 이듬해 1877년 8월 20일, 알리스 오슈데가 여섯째 아이 장 피에르를 출산했는 데 그 아이는 모네의 아들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훗날 모네에 대한 책을 쓰 기도 한 장 피에르는 노년기의 자신의 모습이 모네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르장퇴유에서 떠나야 합니다." 몽트게롱에서 머물던 모네는 아르장퇴유로 돌아왔다. 다시 돈걱정이 시작되었 다. "후원자가 선뜻 거액을 내놓지 않는 한 우리는 아담하고 멋진 집에서 쫓겨 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집에서 편안히 작업해 왔는데... . 그러나 저는 여전 히 열의에 차 있고 계획도 많습니다."(1876년 7월 25일,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 지) 1877년 정월 한 달은 생라자르역을 그리면서 제 3회 인상파 전시회를 준비 하느라보냈다. 이 전시회에서 모네는 (칠면조)를 선보이게 된다. 아르장퇴유에서 생활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그의 장부에는 수입이 많은 걸로 나와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는 늘 빚에 쪼들렸고, 채권자들에게 제대로 돈을 갚지 못할 경우 가구까지 끌어내 팔아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해야 했다. 드 벨리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또 다른 불운이 덮쳤습니다. 궁색한 걸 로는 모자랐던지 이번엔 아내마저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1878년 1월 15일,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 두 밤만 더 지나면, 아르 장퇴우를 EJ야 한다네. 그러기 전에 먼저 빚을 갚아야 하고." 결국 카유보트가 그에게 돈을 대 주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튼 모네는 그 집에서 나왔다. 집 주인에게 (소풍)을 저당잡힌 채로... . 아무렇게나 둘둘 말려진 채 지하실에 처박혀진 이 그림의 운명은 한 시기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훗날 모네는 (소풍)을 복원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이 그림이 자신의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자신의 초창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 품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파리로 가야 한다! 답답한 시골공기에 갇혀 있던 젊은이들이며 작가, 화가들은 모두 그 생각에 골똘했다. 플로드 모네 역시... 파리에 살고 싶어했다. 박물관이며 전람회에도 가 볼 수 있고 다른 화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작품을 살롱에 선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지나자 그들 대부분은 (특 히 모네는) 조용한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스핑크스에서 한두 가지 비밀을 찾아냈다."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클로드 모네)(1922) 제 3장 "멋진 파리" "나는 파리에서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본다." 파리출신이지만 소년기와 청년기를 르아브르에서 보낸 모네에게 파리는 전원풍 경이나 바다풍경과는 또 다른 풍요로운 도시로 다가선 듯하다. 그는 언제나 파 리에 매혹되고 있었다. 1859년 6월 3일 파리에서 부댕에게 보낸 한 편지는 젊은 화가 모네가 이 도시에서 받은 첫인상을 전한다. "멋진 파리!" 그는 특히 센강과 강둑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일찍 일어나서 기분 좋게 선창가를 산책하다가 튈르리까지 걸었습니다. 너무도 매혹적이고 나 는 더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1864년 3월 7일, 아르망 고티에에게 보낸 편 지) 1867년 5월 20일에는 바지유에게 이런 사연을 띄운다. "르누아르와 파리의 이곳저곳을 그리고 있다네." 파리에서 살기는 했지만 정작 파리 풍경을 그린 일이 없었던 부댕은 모네의 재능을 속속들이 인정했다. 1869년 1월 18일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린 모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파예트가의 한 화랑에 그의 파리 풍경화가 있는데, 세 부묘사만 좀더 가다듬는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이 청년은 재능을 가지 고 있다." 파리에서 달아날 것인가...아니면? 1868년 12월, 모네는 노르망디에서 바지유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자네가 거기 있는 것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아. ...자연속에 서 홀로 지내는 게 더 나은게 아닐까? 사람들은 파리를 떠도는 이야기에 지나 치게 빠져버리지. ...내가 여기서 하는 작업은, 최소한 다른 누구의 작품과도 같 지 않을 것이란 장점이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것은 나만이 느낀 것을 표현한 것이니까. 앞으로 난 파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걸세. 매년 한 달 이상을 넘기진 않을 거야." 그러나 모네는 급속히 진로를 변경한다. 1869년 6월 2일, 부지발 근처 생미셸 로 옮겨 온 직후 그는 아르센 후사예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리에 와서 살라고, 그렇게 되면 제 재주로 이익을 챙기기도 손쉬울 거라고 충고하셨죠. 살롱전에서 퇴짜를 맞으면서 저는 작심한 게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정착했으며, 기막히게 좋은 환경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4월25일, 부댕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금년에도 모네의 작품 두점은 거절당했지만 그는 라투셰의화랑에서 생타드레 스를 그린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한을 풀었다. 미술애호가들이 그 그림을 보려고 모여들고 잇다. 라투셰의 집 창 앞은 군중들로 붐빈다. ...예측불허성과 격정 덕 분에 모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추종을 받고 있다." 때때로 모네는 친구들을 만나러 파리로 상경했고, 바지유가 그리고 있던 (콩 다맹가의 작업실)(1870)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다. 앙리 팡탱 라투가 그린 (바티뇰 작업실)(1870)에도 모네가 등장한다. 그는 또한 1870 년 6월 28일 파리에서 카미유 동시외와 결혼식을 올렸다. 리슬리가의 작업실 1871년 가을 영국에서 돌아온 모네는 당시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이 곧잘 애용하 던 생라자르역 근처의 롱드레 에 드 뉴욕 호텔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는 주소를 리슬리가 8번지로 사용하면서 아르망 고티에의 작업실에서 1874년까지 작업했 다. 1877년 그는 기차역을 소재로 삼았다. 한동안 그와 르누아르는 (퐁네 프)(1872)를 각각 한 점씩 그렸다. 모네는 센 강변의 강둑과 선창, 수도의 중심부에 놓인 디리같은 전통적인 파 리의 이미지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후, 1873년에는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본 (카퓌신가)를 두점 그렸는데, 이 그림들에서는 그가 바롱 하우스망의 파리 복원작업에 매료되어 있었음이 엿보인다. 모네의 캔버스에 화려한 색채로 등장 하는 행복에 겨운 군중은 바로 '멋진 파리'였다. 이러한 풍경을 담은 작품 중 하 나가 1874년 제 1회 인상파전에 전시되자 루이 르루아를 비롯한 몇몇 비평가들 은 모욕적인 비평을 서슴지 않았다. 모네가 동시대인의 삶을 위의 그림처럼 표현한 것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1863년에 주창한 '근대성-덧없고 순간적인 것' 이라는 선언에 부응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도시풍경',높은 곳에서 잡은 원근법의 효과는 카유보트와 피사로 역 시 실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에 영향을 준 요소로 두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순간적 속성을 지닌 사진이고, 또 하나는 특이한 시점과 색 채의 평면적 설계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 판화였다. 일본풍 선호주의와 프랑스 화단 모네는 파리에서 친숙해지기 전, 이미 런던과 잔담에서 일본 판화를 접했다. 1875년 3월 31일, 작가인 에드명 드 공쿠르는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에 이렇게 썼다. "일본풍 선호주의는 오늘날 그림에서 패션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내 동생과 나 자신이 진정한 선구자라 하겠지만. ... 지금은 인상파 화가들이 이 유행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파리를 휩쓴 '일본풍'은 모네 의 (일본여인)(이 그림은 1876년 제 2회 인상파전 카탈로그에 실린 대로 Japonnerie로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해 4월 14일 드루오 경매에서 처럼 Japonerie로 블리기도 한다.) 이라는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모네의 공공 유원지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유 주변의 여러 정원들이 도심을 전원에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을 준다면, 파리의 공원들을 그린 그림은 정확히 그 반대의 효과를 내고 있 다. 생타드레스 시절 이휴로 정원에 열성적인 관심을 가져온 그는 이제, 파리의 우아한 상류사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 두 곳-튈르리와 몽소공원-을 소재 로 대여섯 점의 잘품을 완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1876년 봄, 모네는 리볼리가 198번지 쇼케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튈르리 풍 경을 넉 점 그렸다. (모네 이전에 마네와 르누아르도 같은 풍경을 소재로 삼은 적이 있다. 그중 석 점은 의사인 드 벨리오와 에르네스 메, 카유보트가 각각 한 점씩 구입했다. 1877년 제 3회 인상파전에서 몽소 공원을 그린 작품과 나란히 튈르리를 담은 그림 석 점이 전시되었다. 1878년, 모네는 에르네스 오슈데 집 근처에 위치한 이 공원을 담은 두 번째 작품을 완성시켰다. "생라자르역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막 떠날 채비를 마쳤습니다." 1877년 1월 17일, 모네는 카유보트의 이름으로 생라자르역 근처 몽세가 17번지 에 새 스튜디오를 세냈다고 출판업자인 조르주 샤르팡티에에게 말했다. 그는 곧 바로 기차 역 안팎을 소재로 한 연작물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이전에 그가 화 폭에 담았던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화폭에 담았는데, 이때 그의 관심은 인물보 다는 생동하고 있는 근대 공업기술의 장관이었다. 풍경화가 그러한 소재를 택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모네는 새롭게 변모하는 시대적 특성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장소로 눈을 돌 림으로써 스스로가 진정한 자기 시대의 일원임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생라자 르역- 졸라의 소설 (인간이라는 짐승)(1889-1890)에 자주 나오는 장소로서 마르 셀 프루스트는 그의 저서 (지난날의 추억)에서, 졸라가 이 소설에서 리종이란 이름의 증기기관차를 묘사라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은 산업화와 유리와 금속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그것은 '도 시로 가는 관문' 으로서 부지발이나 루브시엔, 아르장퇴유, 베퇴유,퐁투아즈, 지 베르니, 노르망디 같은 인상주의의 메카를 연결하는 다양한 노선의 출발지였다. 인상파 화가들의 눈길을 끈 소재는 비단 이 역만이 아니다. 퐁 드 뤼롭 근처의 기묘한 철교(1867년 안내서에 따르면 '그 별난 모양새와 대단한 크기가 놀라운') 또한 모네는 물론 마네와 카유보트의 영감을 자극했다. 모네는 파리의 공공 유원지를 담은 그림들 외에도, 생라자르역 전경을 담은 그림 여덟점(마지막 여덟번째 것은 카탈로그에 실리지 않았다.)을 1877년 4월 제 3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다. "나는 다시 시골사람이 되었다." 1878년 1월 아르장퇴유를 떠나야 했던 모네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데댕부르가 26번지에서 카미유, 장과 몇 개월을 보내면서, 몽세가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그해 3월 30일,모네는 미술수집가인 에르네스 메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아 내가 3월 17일에 둘째 아이를 나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돈 한푼 없고 산모와 아 기의 병원 치료비조차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 또 다른 후원자 외젠 뮈레와 졸라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도달했다. 마 침내 이 가족의 오랜 친구이자 둘째 아이 미셸의 출생등록 증인이 되어 주었던 마네가 이번에도 앞장서서 도와 주었다. 모네는 다시 정원 그리는 일에 매달렸다. 일 드 라 그랑 자트의 센 강둑을 담 은 작품 열 점은 이제 곧 탄생하게 될 명작을 예고했다. (카퓌신가)를 그린 지 5년째 되던 1878년의 축제일을 맞아 모네는 분주한 파 리 풍경을 다시 캔버스에 담았다. 국제전함회가 열리는 해엿다. 깃발로 물결치 는 거리의 군중을 담은 (몽토르궤유가)와 (생드니가)를 끝으로 모네는 파리에 이별을 고했다. 이제 파리는 그의 작품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저는 다시 시골사람이 되었고 그림을 팔러 잠시 들르는 일 외에는 파리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1879년 2월 8일, 뒤레에게 보낸 편지) "제가 베퇴유의 센 강변, 너무도 멋진 장소에 텐트를 쳤다는 소식을 들으셨 는지 모르겠습니다."(1878년 9월 1일, 외젠 뮈레에게 보낸 편지) 센강은 겨울 풍 경 시리즈의 소재가 되었다. 이 무렵의 그림들 속에는 카미유를 잃은 모네의 슬 픔이 짙게 배어 있다. 카미유의 죽음은 그의 청춘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고 뒤이어 인상파 운동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제 4장 센 강변의 아름다운 마을, 베퇴유 파리 서북쪽, 센 강둑에 위치한 베퇴유의 경관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마을보 다 약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숲이 우거진 섬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센강 의 만곡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모네는 교회를 둘러써고 모여 잇는 집들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하고자 끝없이 노력했던 것을 보면, 모네가 자신이 선택한 이 마을을 얼마 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베퇴유에서 이젤의 위치를 크게 바꾸지 않 고서 빛과 새로운 구도를 끈질기게 탐구했다. 그 결과 탄생된 작품들은 카유보 트, 뒤레, 드 벨리오에게 속속 팔려나갔다. " 내 그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 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퇴유에서 모네와 그의 가족은 알리스, 에르네스 오슈데부부와 그들의 여섯 아 이들과한집을 썼다. 생활비를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그 집에는 강까지 이어진 과수원이 하나 있었으며, 모네는 자신의 작업용 보트를 강에 정박시켜 두곤 했 다. 얼마후인 1878년 12월, 두 가족은 좀더 안락한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모네 는 파리 몽세가에 있던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뱅탱유가 20번지에 새 스튜디오 를 구했다. 베퇴유의 새 집에 온 모네는 도시생활의 혼잡함에서벗어나 자연 속 에 파묻힌 채 전에 없이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고 인상파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다. 제 4회 인상파전에 2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했지만, "내 의지와 상 관없이 배신자란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의했을 뿐"(1879년 3월 25일, 뮈레에게 보낸 편지) 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세와 이사비용으로 마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자 모네는 다시 한 번 이 사할 계획을 세웠다. "저 자신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반길 만한 사람을 달리 찾을 길 없는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깊은 근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내 그 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 각할 수 없는 이 비정한 현슬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떠나는게 이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이곳에서 꿈 같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1879년 5월 14일 에르네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가엾은 제 아니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모네가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미셸을 출산 한 후 '극도로 허약해진' 카미유의 건강을 염려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마침내 1879년 9월 5일, 그는 이렇게 썼다. "가엾은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 로 남겨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완전히 낙담했습니다. 당신께 또 하나 부탁 을 드려야겠습니다. 돈을 동봉해 드리겠으니 일전에 우리가 몽 드 페에테에 저 당 잡힌 메달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이 라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 주고 싶습니다." 이 마지막 사랑 의 표시를 보면 이 화가가 자신의 젊은 날의 동반자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느 끼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9월 26일, 넋이 나간 모네는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다. "저느 극도의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두 아이를 데리고 내 삶을 어떻게 꾸 릴 수 있을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그해 가을 날씨가 나빳기 그는 야외작업을 포기하고 과일과 꽃, 마침 사냥철 인 탓에 찾아보기 쉬웠던 죽은 사냥감을 소재로 정물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 다. 모네가 카미유 사망이후 곧바로 정물화를 그리게 된 것은 당시의 어려운 경 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모네와 아들들은 퇴거당할 지경에 처해있었고 그때 만 해도 그의 정물화는 풍경화보다 더 고가로 팔렸던 것이다. 혹독한 겨울 1879년에서 1880년 초에 이르는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모네는 갑작스레 센강 의 정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강 대부분이 꽁꽁 얼어붙더니 해빙기로 접어 들면서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왔다. 자연의 장관에 매료된 그는 점차 대기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모네는 보는 각도와 관찰 한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자아내는 장대한 구도를 갖춘 작품 대여섯 점을 그릴 수 있었다. 모네는 이젤의 위치를 옮기지 않거나 아주 약간만 변화시 키고도, 작품과 무관한 다른 소재들을 차단하면서 빛의 움직임에 따른 형상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퇴유에서 완성된 그림들은 특별한 감정의 차원을 보여준다. 차가운 색조로 처리된 풍경화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 속의 하늘과 강물은 겨울이 주는 창백함과 정적, 그리고 황량함만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그림 들은 당시 모네를 압박하던 경제적 근심과 정신적 방황을 반영한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연합적 심상' 이 작용한 듯, 모네의 우울한 심정이 자연물에 결합된 것이다. '부빙 시리즈'는 당시 모네가 처한 상황을 암시해 준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 다. 깨진 얼음덩어리들이, 인상파 집단의 붕괴와 카미유의 사망으로 한 시절의 종말에 이른 한 화가의 개인적 삶의 전환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도전: 살롱전과 최초의 개인전 1870년, 심사위원단이 또다시 출품작을 퇴짜 놓아 이후 살롱과 거리를 두고 지 내 왔던 모네는 1880년 한 번 더 공식적으로 살롱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전년도에 르누아르가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로 수상한 것도 모네가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자신이 1874년 인상파 운 동의 확립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 의 살롱 응모를 배신행위라고 비난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던 모네는, 자신의 구 와 같은 결정은 오직 그림을 팔기 위해셔였다며 조심스런 해명의 편지를 뒤레 에게 띄웠다. 모네의 응모작 두 점 가운데 (라바쿠르)만이 입선되었고 그나마 초라하게 전 시되었다. 졸라는 모네의 제작방식이 너무나 경솔하다고 비난했지만, 그의 재능 을 인정하고 그가 장차 성공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0년 안에 그의 재능은 제 대로 평가될 것이며, 그의 작품은 호평 속에서 전시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거액에 거래될 것이며, 그는 당대 동창의 거두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살롱에 나타난 자연주의 3),(르 볼테르) 1880년 6월 21일) 이처럼 모네는 살롱으로 복귀하는 한편-1년 전부터 스스로 '독립화가 (independent artist)'라고 칭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이 개최하는 제 5회 전 시회에는 등을 돌렸다. 모네의 불참은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의 탈퇴 이후 서서 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던 인상파 집단의 붕괴를 한층 더 부채질했다. 6월 들 어 모네는 최초의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 장소는 출판업자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1879년에 창간한 잡지(현대인의 삶) 부속 화랑이었다. 테오도르 뒤레가 서문을 쓴 카탈로그에는 18점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전시회에서 몇 점의 작품이 팔려 나갔다. 모네는 그 돈으로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희 망과 용기를 얻었다. 1880년 7월 5일, 그는 뒤레에게 이렇게 썼다. "무척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8월이 되자 그는 르아브르 화가동지회의 1880년 전시회에 참가했다. 고향에서 는 살롱 당선작을 포함한 그의 그림들이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몇 년 간 노르망디 해안에서 그린 바다풍경화들은 파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곧 베퇴유를 떠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센 강변에 위치한 멋진 곳을 찾고 있 습니다. 푸아시가 어떨까 생각중입니다."(1881년 5월 24일 졸라에게 보낸 편지) 카미유 사망 이후 모네의 가정과 오슈데의 가정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에 르네스는 아마도 사업상 파리에 머물러야 했던 모양이고, 알리스는 모네의 두 아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모네 곁에서 지냈다. 베퇴유 체제기는 아르장퇴유에서 지베르니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이며 중요한 이행기로 기록된다. 이 시점에서 모네으 생활과 경력은 그의 미래에 결정적 요 소로 작용할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첫째, 그는 이제 원숙기에 접 어들어 화가로서 체득한 지난날의 경험을 소화할 수 있게 된 동시에, 구인상파 집단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카미유 가 죽은 후 장차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될 여성의 비중이 점점 커짐으로써 그 의 사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뒤랑 뤼엘의 지속적인 후원은 이제 곧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이란 예감을 안겨 주었다. 이 모든 낙관적인 징조를 멋 지게 담아 낸 작품이, 모네가 베퇴유를 떠나기 몇 달 전에 제작한 (베퇴유의 화 가의 정원)이다. 1881년 12월, 고맙게도 뒤랑 뤼엘이 이사비용을 대 준 덕분에 모네는 알리스 오슈데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퇴유에서 동쪽으로 32km가량 떨어 진 푸아시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강변에 자리잡은 새 집은 생루이 별장 이라 불렀다. 뒤랑 뤼엘: 여러 면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준 충실한 후원자 1880년대 초부터 모네의 구매자 명부에는 조르주 프티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뒤 랑 뤼엘이 자주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뒤랑 뤼엘은 정신적, 재정적으로 끊임없 이 이 화가를 지원해 주었다. 해가 갈수록 뒤랑 뤼엘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마침내 지난날의 후원자 집단 (가주 장 밥티스트 포레, 뒤레, 샤를 에프뤼시, 드 벨리오, 뮈레)을 대신하게 되 었고, 이제 모네는 자신의 작품을 옛 후원자들에게 싼 값으로 팔려 하지 않았 다. 1881년 2월 이후 뒤랑 뤼엘의 구매가 계속되자 모네는 살롱전을 완전히 포 기하는 동시에, 같은 해 제 6회 전시회를 개치했던 인상파와도 소원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2년, 뤼니옹 제네랄 은행이 파산했고, 뒤랑 뤼엘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일로 모네는 마음을 바꿔 제7회 독립화가들 전시회(앵데팡당전)에 참여하기로 하고 무려 3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3월에 레이쇼팡 파 노라마(파리, 생토노레가 251번지)에서 열렸다. 1880년에도 날타로운 공격을 퍼 부은 조리스 위스망 같은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인상파의 시각과 모네의 극도로 독자적인 색채사용법을 두고 여전히 비난을 퍼부었지만, 모네의 바다풍격화는 격찬을 받았다. 노르망디 해안 푸르빌에서 새로운 그림소재를 발견한 모네는 강렬한 창작욕 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해 겨울과 다음해 여름까지는 불확실한 시기였다. "미래 는 너무도 암울해 보입니다. 회의에 사로잡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1882년 9월 18일 뒤랑 뤼엘에게 보 낸 편지) 이제 모네의 친구가 된 이 화상은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돈과 풍부한 충고로 응답했다. 뒤랑 뤼엘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모네의 그림을 전시했으며 10 월에는 노르망디에서 그린 20점의 작품을 구매했다. 1882년은 모네가 롬가 35번지에 위치한 뒤랑 뤼엘의 아파트 대형 거실을 장 식하기 시작한 해이고 그 작업은 1885년까지 계속되었다. 1883년 3월, 이 화상 은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새 화랑에서 모네의 그림 56점을 전시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언론과 대중이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큰 충격을 받은 모네는 전시회 를 미흡하게 준비한 탓이라며 뒤랑 뤼엘을 비난했다. "저는... 제 맘에 꼭 드는 집과 풍경을 찾을 겁니다."(1883년 4월 5일, 뒤랑 뤼 엘에게 보낸 편지) 모네는 자신에게 전혀 영감을 불려일으키지 못하는 "이 초라한 푸아시가 싫다." 고 몇 번인가 토로한 적이 있었다. 뒤랑 뤼엘에게도 그런 생각을 전한 적이 있 다. "이곳의 전원은 저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군요."(1882년 5월 27일) 그해의 주요 작업이 주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이루어진 점으로 볼 때 결과적으 로 푸아시에서의 짧은 체루는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가 알리스 오슈 데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 당시 두 사람의 친분이 상당환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 음을 알려 준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당신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 다는 것을 잊지 마시요."(1883년 2월 12일, 에트르타에서) 푸아시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모네는 결국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시급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나이도 마흔둘이나 되었으니 진정한 안정이 필요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지녀 온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견국을 뒤지기 시작했고 뒤랑 뤼엘에게도 반복해서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1883년 4월 5일의 편지에 모네는 이렇게 밝혔다. "일단 적절한 곳에 정착하면, 파리에는 사전에 날짜를 잡아 놓고 한 달에 한 번씩만 다녀올 생각입니다." 지난해 그는 이미 파리 뱅탱유가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처분했다. 푸아시를 떠나는 비용 역시 뒤랑 뤼엘이 대 주었다. 모네는 이렇게 편지를 띄 었다. "이 모든 일로 당신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작업을 시작 하면 대작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 시골이 제 맘에 꼭 들기 때문입니 다." 그는 드디어 지베르니를 발견했던 것이다. "저는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에게 지베르니는 너무도 멋진 곳입니다" 1883년 모네는 뒤레에게 이렇게 썼다. 1880년대 내내, 모네는 파리에서 서북쪽 으로 64km가량 떨어진, 에프트 강과 센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이 마을이 점점 좋아진다고 많은 편지들을 통해 끊임없이 토로했다. 7년 후 그는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전원이나 가옥은 어디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지베르니의 집을 사들였다. 제 5장 너무도 멋진 곳, 지베르니 1883년 알리스 오슈데와 아이들을 데리고 지베르니를 정착한 직후, 모네는 마 네가 4월 30일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12월이 되자 모네는 르누아르와 더불어 난생 처음 지중해 해안으로 향했다. 엑 상프로방스에 있던 세잔을 만난 두 화가는 걸음을 재촉하여 이탈리아 내륙으로 들어가 제노바까지 여행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모네는 이탈리아 국경 근처 보 르디게라 바로 위에 있는 리비에라로 가 석 달을 머물렀다. "보르디게라는 우리 가 여행하면서 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새로운 풍경을 소재로 한 연작을 다시 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시기 바랍니다. ............ 저 혼자 진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저만의 느낌에 몰입해 고독하게 작업할 때 일이 잘 됩니다." (1884년 1월 12일. 뒤랑뤼 엘에게 보낸 편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열대식물로 유명한 보르디게라를 본 모네는 '지상의 낙 원'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오렌지며 레몬나무, 야자수, 멋들어진 올리브 나무밑 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닐 수 있소.......... 저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오렌 지며 레몬나무들을 그려 보고 싶소........ 바다와 하늘의 푸르름을 따로 설명할 길이 없구려." (1884년 1월 26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이 지방의 광선과 대기를 전달하기 위해 모네는 자주 쓰지 않던 색조를 사용 했는데, 자신의 이탈리아 체류를 정리하는 한 편지는 뒤랑뤼엘에게 이 점을 예 고한다. "푸른 색이나 분홍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풍경 그자 체가 정확히 그러한 화사함과 신비한 햇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 로 포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풍경이 비둘기 가슴색이나 선명한 펀치색입 니다. 저는 날마다 아름다운 이곳에 완전히 홀려 있습니다." (1884년 3월 11일) "흰 절벽, 하얀 자갈 해변, 푸른 바다가 있는 에트르타, 초승달처럼 둥근 작은 마을이 햇살아래 펼쳐졌다." (모파상, <르 모델>, 1883년) 1883년에서 1886년 사이 모네는 르아브르 북쪽에 있는 에트르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그곳의 하늘과 바다뿐 아니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를 끌어당겼던 게 분명하다. 역시 이곳을 자주 찾은 방문객으로 기 드 모파상이 있 는데, 그의 소설 상당수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파상은 모네의 에트르 타 찬양에 공감했고, 그곳에서 몇 번 만난 두 사람이 낸 같은 시기 작품에는 강 한 연계성이 보인다. 쿠르베와 부댕처럼 모네는 다몽항, 아몽항. 아발항의 기암석을 그렸고 가끔 에 귀유의 뾰족 바위도 그렸다. "당신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모를꺼요......... 어디서 이곳의 절벽을 또 보겠소." (1883년 2월 3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1886년 봄: 네덜란드에서 보낸 며칠 모네는 레이덴과 하를렘 사이에 펼쳐진 튤립 벌판에 매료되었고, 그 벌판을 그 린 다섯 점의 그림을 집으로 가지고 와 지베르니의 스튜디오에서 완성시켰다. 이 그림들은 하늘을 다소 밝게 처리하면서도 상당히 넓은 공간을 주고 있어 벌 판에 압도당하지 않는 네덜란드 지평선의 광활함을 보여준다. 1886년 6월 15일, 조르주 프티화랑에서 열린 제 5회 국제 그림.조각전에 이중 두 점이 선보였고, 후이스망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모네가 그린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은 압도적입니다! 참으로 눈을 즐겁게 합니 다." (1886년 6월 28일, 오딜롱 르동에게 보낸 편지) 한편, 모네는 베르테 모리소에게 이렇게 알렸다. "출품작 모두 훌륭한 분들에 게 고가로 팔렸습니다." 구매자 모색 뒤랑 뤼엘의 재정상태가 악화되면서 모네는 자신의 거래상과 손을 끊고 구매 자들에게 직접 그림을 파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걱정이 되었지만 결 국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 덕분에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 문에.......... 다른 구매자를 찾아 나선다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1884년 5월 18일, 뒤랑 뤼엘에게 보낸 편지) 작품을 처분하려는 생각으로 모네는 조르주 프티가 매년 주최하는 국제전에 몇 차례 참여했다. 그는 뒤랑 뤼엘에게, 경쟁자인 조르주 프티가 잘되면 그 역 시 이익일 것이라고 힘들여 설득했다. 그 결과 모네는 두 미술상에게 작품을 나 누어 팔게 되었다. 일례로, fp 뱅으로 불리는 브뤼셀의 화가집단이 개최한 1886 년 전시회에 출품된 모네의 작품들은 프티와 뒤랑 뤼엘에게 똑같이 분배되었다. 뒤랑 뤼엘이 자신을 돕는 셈치고 미국 쪽을 공략해 보자고 제안했을 때 모네 는 1886년 1월23일 조심스런 답장을 보냈다. "당신이 미국에 거느 희망에느 공 감합니다만, 저로서는 우선 이곳에서 제 그림을 알리고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 다." 그러나 1886년 뉴욕에서 개최된 '파리 인상파의 유화와 파스텔전'에는 모네 의 그림이 40점이나 전시되었다. 미국 화가인 메리 캐삿과 존 싱어 사전트의 도 움으로 이 전시회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 "바다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바위들은 신비한 동굴, 대못, 바늘이 한테 엉 킨 형상을 하고 있소." (1886년 9월 18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브르타뉴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고 베르테 모리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던 모네는 1886년 가을 모르비앙만의 벨일섬을 여행 했다. 그때 그는 섬 서쪽 케르빌라우앙이란 마을의 한 어부집에서 묵었는데, 그 곳은 바다와 면한 살풍경한 곳이었다. 그 풍경에 자극받은 그는 40점 가량을 그 렸고, 이들은 장소와 기상상태에 따라 몇 개 부류로 나뉜다. 그림 하나하나마다 모네의 관찰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 그림들을 연작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연작을 제작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진정한 바다의 모습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는 매일 한 번도 빼지 않고 매순간 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관찰해야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같 은 소재를 네 번 혹은 여섯 번 이상 그릴 때도 있소." (10월 30일, 알리스 오슈 데에게 보낸 편지) 브르타뉴에서 보낸 동안 모네는, 아직 본능적이고 비체게적 이긴 했지만 소재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방식은 훗날 한결 조직적인 절차를 거쳐 발전한다. 벨일에서 모네는 귀스타브 제프루아를 만났다. 그는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의 진보적 신문 <<정의>>에서 일하는 미술평론가였다. 모네의 절친한 친구이자 열렬한 지지자가 된 제프루아는, 극심한 태풍속에서 이젤을 절벽에 묶어 두고 작업하던 모네의 모습을 회고 하기도 했다. 모네는 EH 작가인 옥타브 미르보의 방문을 받았다. "거친 벨일을 다녀와서인지 이번 작업은 상당히 수월할 것 같습니다. 이곳엔 오직 푸른 색과 분홍색, 황금색밖에 없습니다." ( 1888년 3월 10일, 뒤레에게 보 낸 편지) 모네는 1888년 정월을 재중해안에서 보냈다. 그는 칸에서 모파상을 만나는데, 모파상은 그에게 앙티브에 있는 샤토 드 라피네드에 묵으라고 권했다. 그곳은 화가들이 애용하는 호텔로 풍경화가인 앙리 조제프 아르피니예도 머물고 있다 는 얘기였다. 그곳에서 모네는 30점 가량을 그렸다." 저는 울타리를 치고 태양 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금은 보석으로 그림을 그려야 할 판입니 다." (1888년 2월 1일, 로댕에게 보낸 편지) 이 이미지는 이미 보르디게라에서 시도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같은 소재를 한 번 이상 그릴 때도 있었지만 아 직 진정한 의미의 연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6월들어 모네는 테오 반 고흐에게 열 점을 팔았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의 동 생으로 부소와 발라동 화랑에서 일하고 있었다. 테오가 모네의 그림들을 전시하 자 저널리스트인 펠릭스 페네옹은 <<르뷔 앵테팡당트>>지에 "열 점의 앙티브 바다풍경이 부소와 발라동 화랑 부속 쇼룸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썼다. 당신 신인상파론에 경도되어 있던 페네옹과 피사로는 이 전시회를 달갑게 여기지 않 았을지 몰라도, 모파상, 말라르메, 제프루아는 격찬을 보냈다. 베르테 모리소는 모네에게 편지를 띄워 그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당신은 대중을 완전히 사로잡 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외고집입니다.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새로운 구매자에게 작품을 팔 수 있게 되자 힘을 얻은 모네는 5월 25일 뒤랑 뤼엘의 파리 화랑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미국에 선전하려는 뒤랑 뤼엘의 시도에 반대하고 있었다. 크뢰즈 계곡 "여기서도 새로운 풍경을 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칠고 웅 대한 이곳은 벨일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놀라운 작품을 꿈꿨지만 작업이 진행될 수록 장애물이 늘어 마음먹은 대로 전달하기 힘듭니다."(1889년 4월 8일, 모리소 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 서부 크뢰즈강에서 영감을 얻은 20점의 기묘한 그림들 역시 지난번처 럼 두세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 중 아홉 점에서는 전보다 훨 씬 더 두드러진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베퇴유의 부빙,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 벨 일과 앙티브의 바다풍경화를 거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어진 소재 를 공통된 접근법으로 대하는 방식이 점차 발전되었고, 마침내 크뢰즈계곡을 그 린 이 아홉 점의작품에 이르러 연작물이란 개념이 결실을 맺게 된 거 이다. 이 것은 한 대상을 거의 동일한 시점에서 바라보며 그린 변형판의 수가 급격히 증 가했다느 것, 그리고 빛의 변화만이 각 작품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아홉 점의 풍경화야말로 연작물이라 부를 만 한 것이었는데, 그 용어는 모네 자신이 먼저 사용했다. "이 무섭도록 음울한 날 씨속에서..... 내 그림들을 보면 소름이 끼치오. 그림들은 너무도 어둡소. 게다가 어떤 것에는 하늘도 등장하지 않소. 그림들은 애처로운 연작물이 될 것같소." (1889년 4월 4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제프루아에게 보낸 4월 24일 편지에서 모네는, 계절이 이 풍경을 그리는 데 어 려움을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자연을 따를 수는 있지만 따라잡지는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강물의 수위가 들쭉날쭉해 하루 는 초록인가 하면 다음날에는 갑자기 노란 빛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물이 거의 말라 버렸다가도 이튿날 금세 맹렬한 급류가 되어 흐릅니다." 4월 21일, 그는 조르주 프티에게 이렇게 썼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입니다." 이 무렵 모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품과 그의 작품을 나란히 선보일 파리 전시회였다. "그들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쌍둥이 예술을 이 나라에서 가장 찬란하고, 확실하 게 구현해 온 사람들이아" (옥타브 미르보, <<파리 에코>>, 1889년 6월 25일) 로댕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모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 예술가와 공 동 전시회를 열고 싶어했다. 1889년 2월 28일, 그는 로댕에게 이렇게 썼다. "선 생과 저 둘이서 힘을 모으면 멋진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달로그에는 모 네의 작품이 145점, 로댕의 작품이 36점 실렸다. 모네를 위한 서문에는 미르보 의 서명이 실려 있고 로댕의 소개는 귀스타브 제프루아가 맡았다. 로댕은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인 군상 <칼레의 시민>에 특히 신경을 썼고, 1864-1889년 에 제작한 자신의 대표작들을 내놓은 모네는 이 전시회가 지난 25년 동안의 작 업을 회고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제프루아는 1889년 6월 21일 <<정의>>에 "이 전시회는 클로드 모네의 화가로서의 삶을 담은 이력서이다." 라고 썼다. 일 부에서 혹평도 있었지만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전시회가 열렸던 6월 21일, 모네는 조르주 프티에게 이렇게 썼다. "로댕의 군 상들이 죽 늘어서는 바람에 뒤에 있던 제 그림들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 되 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불운이었고, 저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동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면 각자의 작품을 어디에 놓을지에 대해서도 함 께 의논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사실을 로댕은 알고 있었어야만 합니 다........... 나와 의논하고 내 작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 주었다면, 서로 마 음 상하는 일없이 배열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텐데, 이제 제가 바라는 일 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지베르니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위 대한 예술적 재능을 갖춘 두 거장의 공개적 다툼은 가까스로 무마되었다. 마네의 <올랭피아> 1889년 5월에 개막된 프랑스 미술 100년제에 모네의 작품 석 점이 선보였다. 그때 같이 전시된 그림이 바로 1865년 살롱전에서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던 마 네의 <올랭피아>였다. 모네는 이 그림을 구입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 해 마네의 친구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이는 경의의 표현인 동시에 그림의 소유 자인 그의 아내를 도울 수 있는 사려깊은 행동이기도 합니다." 모네는 1889년 10월 25일 로댕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켐페인은 예술부 장관을 지낸 앙토냉 프루스트의 반대에 부딫혔다. 1890년 1월 22일, 모네는 모리소에게 이렇게 썼다. "프루스트란 작자는 바보 멍청이입니다. 그자에게 편지를 써서 그렇게 말해 줄 겁니다. 그리고 전쟁이 선포되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결국 모네는 정 부에 압력을 가해 뤽상부르 박물관에 <올랭피아>를 전시하는 데 성공했다. < 올랭피아>는 1907년에야 조르주 클레망소의 중재로 루브르로 옮겨졌다. 모네는 다시 이젤 앞으로 돌아왔다. 1890년 7월 11일, 그는 모리소에게 " 이 악마적인 그림(<올랭피아>) 때문에 고생이 막심합니다........ 제가 그만큼 기대가 큰 모양입니다. 결국 그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라고 썼다. "저는 지베르니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여행중에도 모네는 오직 지베르니와 그 정원, 아들 장과 미셸, 연인 알리스, 그 리고 오슈데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 전원에서의 내 생활을다시 찾고 싶소.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면 정말 좋을 것같소." (1884년 2월 12일, 보르 디게라에서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 모네-로댕 공동전시회 카탈로그를 작성할 당시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그린 넉 점을 묶어 '야외인물 스케치'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림들은 오슈데의 딸들을 그 린것이었는데, 그는 1890년 7월 11일 모리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아이들을 '내 어여쁜 모델들'이라 불렀다. 옥타브 미르보가 '아름다운 지베르니의 인물화' 라고 묘사한 이 그림들은, 모네가 사생활과 작업을 접합하여 창조한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이것을 인위적인 기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산 예술임을 간파한 미르보는, 카 탈로그 서문에서 그의 가정적 행복을 특히 강조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의 의지를 좀먹고 용기를 파괴하는 열병, 아귀다툼, 계략으로 가득 찬 파리는, 모네 와 같은 우직한 정관자, 사물에 내재한 생명과 자신의 위대한 열정을 상통시키 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시골에서 살며........ 야외는 그의 스튜디오이다. 소문도, 동인이나 심사위원도, 미학도, 볼썽사나운 질투도 없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제작 하고 있다." "저는 지금 각기 다른 효과를 내는 연작물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제가 바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한층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설픈 솜씨로는 될 성싶지 않습 니다.......... 제 느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너 무 무력해지지 않고 좀더 오래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진보를 이루었다 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89년 10월 7일,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보낸 편지) 제 6장 노적가리, 포플로, 그리고 대성당 <올랭피아>켐페인 이후 모네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왔다. 이제 그의 그림세 계는 한동안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시점부터 그는 단발로 그치는 개별 작품은 거의 그리지 않게 되었다. 1890년 후 반 6개월에 걸쳐 완성한 그림들을 보면 이제 그가 연작물 작업에 골몰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노적가리 연작으로 모네는 뒤랑 뤼엘과 화해할 수 있었다. 저음으로 제작한 연작은 20여점 가량되는 지베르니의 노적가리 시리즈였다. 1891년 초, 부소와 발라동화랑은 모네의 그림 석 점을 각각 3,000프랑에 구입했 다. 동시에 1888년에 빚어진 불화를 청산한 모네와 뒤랑 뤼엘은 다시 활발한 교 류를 나누게 되었다. 모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을 완전히 인 수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 달라고 뒤랑 뤼엘에게 요청했다. 1890년 12월 15일,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에 게 팔려고 그림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작품 전부를 다 붙잡고 있기는 힘이 듭 니다. 발라동이 왔길래 몇 점을 팔았습니다. 노적가리 그림들을 쥐고 있으려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1891년 4월 3일 피사로가 그의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한 편지를 보면 이 연작 화가 즉각적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모네의 그림만 원 한다. 수요만큼 다 그리지도 못할 거다. 모두 <노적가리: 저녁 무렵 인상..........> 에 열광하는 걸 보면 정말 놀랍다. 그리는 족족 4,000-6,000프랑에 미국으로 팔 려 나간다." 5월이 되자 노적가리 그림 15점이 뒤랑 뤼엘의 화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 드 모네의 최근작'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회였다. 카탈로그 서문은 모네의 친구인 제프루아가 맡았다. 피사로는 격찬을 늘어놓았다. "이 그림들은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대가의 작품이다. 색채는 강렬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쁘다는 인상을 주 고 밑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배경부분에서 다소 옆길로 샌 듯 보이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한 화가이다! 대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작 품 모두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성공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의 그림에서는 만족 감이 풍겨 나온다." (1891년 5월 5일) 1891년 봄, 여름, 그리고 그을: 포플러 연작 연작의 두 번째 소재는 포플러였다. 모네는 지베르니 위쪽 에프트 강둑에 있는 일 오 오르티에게 자신의 보트를 정박해 두곤했다. 그가 작업하고 있던 어느 날, 늪지 근처 공유지가 경매에 붙 여졌다. 모네는 진행중인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포플러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1891년 10월 8일, 그는 공유지를 매입한 목재상에게 돈을 쥐어 주었다. 노적가리 연작과 마찬가지로 20점에 달하는 포플러 연작도 즉각 성공을 거두 었다. 1892년 1월, 부소와 발라동 소속의 테오 반 고흐를 대신해 모리스 주아양 이라는 사람이 그중 몇점을 구입해 몽마르트르가의 화랑에서 소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3월에는 뒤랑 뤼엘이 15점의 포플러 그림들을 전시했다. (그는 한 작품당 4,000프랑을 지불하고 일곱 점을 샀다.) 연작물이 한자리에서 전체적인 느낌을 고려해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중은 넋을 잃었다. 3월 22일, 모네는 뒤랑 뤼엘에게 이렇게 썼다. " 제 전시회를 연다니 정말 기쁩니다. 몇몇 권위자 들로부터 전시회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모네는 뒤랑 뤼엘외에 다른 화상과도 거래할 것임을 밝히고 있 다. "한 거래상에게만 작품을 파는 일은 화가들에게 절대적인 손해뿐 아니라 악 영향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다음 그는 자신도 이제 어느 정도 부를 확보했 음을 암시하며 분명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부터는 선금을 받고 그림을 그리 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쫓기지 않고 여유있게 그림부터 완성하고 싶습니 다. 그리도 어느 그림을 팔 것인지 시간을 두고 결정할 것입니다." 알리스 오슈데를 부인으로 맞다 모네가 여행중 매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써 보낸 편지들을 보면 80년대 들어 그녀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은 언제나 지베르 니에 가있소....... 당신과 아이들이 내 인생의 전부요...... 당신없는 행복이란 없 소." (1884년 1월 26일과 2월 1일, 보르디게라)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내 가 슴속에 있소. 언제든지 내게 기대시오." (1888년 26일, 앙티브) "그림과 당신, 그 것만이 내 삶이며 내 유일한 관심이오." (1889년 4월 28일, 프레슬린) 에ㅏ르네 르 오슈데가 죽고 1년이 흐른 1892년 7월 16일, 모네는 알리스와 결혼해 10여년 에 걸친 모호한 가정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로부터 나흘 뒤 그는 지베르니 의 교회에서 의붓딸인 쉬잔 오슈데를 시집보냈다. "이 골치 아픈 대성당은 정말 그리기가 힘이 드는구려!" (1893년 2월 22 일, 알리스 모네에게 보낸 편지) 모네의 연작기법은 대성당 연작에서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그는 루앙의 대성당 서쪽 정면에 이젤을 세우고 작업했다. 서명은 1894년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이 그림들은 1892년과 1893년 (매년 2월에서 4월 중순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세 군 데의 각도에서 완성되었다. 그가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작업방식과 30여 점에 달하는 작품 탄생의 모태가 되는 이 소재를 정복하려는 그의 굳은 결의를 알려 준다. "매일매일 뭔가 첨가할 게 생기고, 전날 놓쳤던 새로운 상이 무의식 중에 떠오르곤 하오.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하지만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 고 있소. ...... 기력이 떨어져 더 이상 작업하기도 힘들어요.... 밤새워 악몽만 꾼 적도 있소. 대성당이 내 위로 무너져 내렸는데, 아 그게 푸른 색이며 분홍색, 아 니면 노란 색으로 보이지 뭐요." (1892년 4월 3일) 이 연작물의 가치와 진가를 잘 알고 있던 모네는 부소와 발라동, 모리스 주아 양과 동시에 거래하겠다고 뒤랑 뤼엘에게 한바탕 낯뜨거운 공갈을 쳤다. 그는 한 점당 1만 5,000프랑을 요구했지만 결국 1만 2,000프랑으로 낙찰되었다. 1895 년 5월, 대성당화 20점이 뒤랑 뤼엘의 화랑에열린 모네의 최근작전에 전시되었 다. 당대 화가와 작가들은 이 그림들의 중요성을 재빨리 간파했다. 화가 폴시냐 크는 자신의 <<주르날>>에서 "벽들이 경탄을 자아낼만하게 표현되어 있다."라 고 적고 있다. 피사로도 이 연작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나는, 나 자신 그렇게 오랜 세월 추구해 왔던 참으로 뛰어난 통일성을 이 연작물에서 발견한다." (1895년 6월 1일, 루시앙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언론의 찬사 가운데 모네가 특 히 주목했던 것은 <대성당의 혁명>이란 인상적인 제목으로 <<정의>>에 실린 조르주 클레망소의 장문 사설이었다. 놀라운 눈의 인상 1894년에서 189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두 달동안 모네는 현재 노르웨이의 수 도은 오슬로에서 16km 가량 떨어진 산트비켄마을 근처에 머물렀다. 그 '순백의 광대함' 한가운데 우뚝솟은 콜사스산에 고무된 그는 또 다른 연작물에 착수햇 다. "여기 이곳에서 보는 것보다 더 멋진 인상을 생각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눈 의 인상 말이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이지만 동시에 믿기 어려 울 정도로 난해하다." (1895년 3월 1일, 의붓딸 블랑슈 오슈데 모네에게 보낸 편 지) 그곳에서의 체류가 끝날 무렵, 모네는 노르웨이의 풍경화가인 프리츠 타울로를 포함한 몇몇 화가들의 축하를 받았다. 5월이 되자 파리 대중은 뒤랑 뤼엘의 화 랑에 대성당 연작 20점과 나란히 전시된 노르웨이 풍경화 여덟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 작업에 열중했던 곳들을 연작으로 그리다 55세에 접어든 모네는 젊은 시적에 가슴에 담아 두었던 풍격을 다시 보고 싶 어했다. 그는 1896년과 1897년 겨울에는 노르망디를 방문했고, 특히 두 번째 겨 울 동안에는 프티 아이의 절벽위에서 본 옛 세관 초소를 담은 그림 열 점 제작 했다. 세관초소가 등장하는 그림들의 제목을 보면, 이 건물이 모네에게 바랑주빌의 '어부의 집'이 되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은 집'은 연작의 원 칙에 입각해,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에 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1898년 6월 1일,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이 그림들이 지베르니에서 그린 센 강의 아침 시리즈 몇접과 나란이 걸려 있었다. 1990년 베퇴유에서 그린 작품들 역시, 최근 완성한 기법을 자신의 과거와 연결 된 소재에 적용하려는 모네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1902년 2월, 모네의 새로운 거래상인 베르넹 죈 화랑에서 '피사로의 최근작과 모네의 신연작물전'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베퇴유에서 작업을 했다. "날바다 런던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1900년 3월 4일, 블랑슈 오슈데 모네에게 보낸 편지) 젊은 날을 보냈던 곳을 돌아보던 모네는 런던에도 세 차례나-- 1899년 가을, 1900년 2월, 1901년 2월에서 4월사이-- 다녀왔다. 여기에서 그는 "템스강 위로 펼쳐진 운무의 인상을 그리고픈" (1887년 10월 25일, 뒤레에게 보낸 편지) 오랜 야심을 펼치게 된다. 국회의사당과 체어링 크로스 지역, 워털루의 다리들이 모 네를 사로잡았다. 그는 사보이 호텔에서 내려다본 두 개의 다리 풍경과 성 토머 스 병원에서 잡은 의사당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1900년 2월 24일 할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엄한 안개'로 표현했듯이, 무엇보다도 모네의 관심을 끈 것은 안개 자욱한 런던의 인상이었다. 모네는 새로운 기법에 맞춰 충실하게 제작한 색다른 런던 풍경화를 지베르니 스튜디오로 가져와 완성했고 포플로 연작 때처럼, 37점이나 되는 이 연작들을 함께 묶어 선보였다. 1904년 5월과 6월, '런던 템스 풍경 시리즈(1900-1904년)'라 는 제목으로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이다. 사실 템스강은 런던 을 소재로 한 그의 세가지 연작을 잇는 연결고리역할을 한다. "저는 베네치아에 푹 빠져 있습니다." (1908년 10월 19일, 뒤랑 뤼엘에 게 보낸 편지) 잠시 향수병에 빠졌던 모네는 다시 새로운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1908년 (이제 그의 나이 68세였다.) 10월에서 12월 사이 그는 알리스를 데리고 위대한 화가들의 도시 베네치아를 여행했다. 이것은 그이 마지막 주요 여행이었 다. 런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건축물과 바다, 그리고 빛을 조화시키려고 노 력했다. 석조건물, 특히 왕궁은 "이 독특한 광선" (1908년 12월 7일, 제프루아에 게 보낸 편지)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모네는 이 도시의 '마술적이고 동 화같은 모습'에만 주목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마르셀 프루스트 가 <지나간 것들의 추억>에서 언급한 바 있는 무시간의 영원한 베네치아에 비유되곤 한다. "두 줄로 늘어선 궁전들 사이를 지날 때 나는 보았네. 햇살을 받은 장밋빛 성들의 모습이 태양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것을." (<어여쁜 치트 지다>) 템스강 풍경화들처럼 모네의 베네치아 풍경화들도 그후 몇 년동안 지베르니에 서 마무리되었다. 1912년 5월 6월 베르넹죈 화랑에서 29점의 베네치아 풍경화가 선보였다. 전시와 함께 미르보의 글을 담아 <클로드 모네의 베네치아>라는 제 목으로 미르보의 글을 담아 <클로드 모네의 베네치아>라는 제목으로 화집도 출간되었다. 5월 31일 폴 시냐크는 소리 높여 이 화가를 칭송했다. "당신 의지 의 표현인 양 모든 것이 결합되어 있으며, 감정에 반하는 세부묘사라고는 단 하 나도 찾아볼 수 없는 베네치아 풍경화들........ 나는 이들을 당신 예술의 지고한 분신이라고 예찬합니다." "지베르니가 그립소.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니 그곳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겠소." (1892년 4월 13일, 루앙에서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 이 무렵 몇 년 동안 모네는, 여행기간중에도 지베르니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1890년 집주인이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예술과 가족, 특히 알리스에 대한 사랑 을 정원가꾸기에 모두 쏟아부었다. 정원은 해가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 는 루앙 식물원에서 구한 갖가지 식물을 집으로 보내는가 하면, 북유럽 여행중 에는 '식물표본 몇가지'를 가져다 주겠노라고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푸르빌에서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1896년 3월 18일)는, 지베르니 정원에 꽃이 피면 어떻게 손질할 것인지 상상해 보고 있노라는 열정을 담고 있다. 말년에 들어선 모네는 지베르니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 제 이곳만이 그가 영감을 얻는 원천지가 되었다. "수면 여기저기 떠다나는 딸기처럼 수줍고, 하얀 꽃잎들로 둘러싸인 한 송이 백합의 주홍색 마음같은........ 좀 과장된 표현같지만 떠 다니는 꽃침대위에 서로 꼭 끼게 누워있는 사람들 같은 모습은, 마치 팬지꽃들이 나비처럼 정원에서 날 아올라 푸른 광택이 나는 날개를 파닥이며 연못 가장자리 투명한 그늘 위를 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하늘빛 가장자리........" 마르셀 푸르스트 <백조의 길>(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