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메트 알라의 메신저 지은이: 안 마리 델캉브르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이수정 마호메트는 그의 부족이 아라비아의 심장부인 메카에 정주한 지 한참 뒤인 6세기 말 엽에 태어났다. 아랍어로 무하마드라 불리는 마호메트는 아브드 알라의 아들이며, 아브드 알라는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아들이고,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하심의 아들이다. 이렇듯 아라 비아에 서는 모든 사람이, 비록 그가 선지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가계수의 줄기 속에 기록되게 마련 이다. 제1장 선지자의 뿌리 아라비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의 씨족과 부족에 속하게 된다. 마호메트 역시 6세기경에 메카를 정복한 저 유명한 부족, 쿠라이시족의 후예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 브드 알 무탈리브는 이 부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였고, 메카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의 우두머리였 다. 아라비아어로 쿠라이시란 '상어'를 뜻한다 홍해와 걸프만을 주름잡는 것은 상어이다. 그래서인지 상어를 토템으로 삼은 부족에 게 잠 잠이라는 수원지와 카바 성전으로 유명한 메카는 더없이 좋은 정복지가 되었다. 또한 남부 아라비아와 비잔틴령 팔레스티나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메카는, 한편으로 예멘과 이집 트, 시 리아, 북부 아라비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쿠라이시족은 10여개의 씨족으로 구분되는데, 그 중에서도 심이라는 씨족이 가장 유 명하 다. 그러나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자기 후손들이 훗날 역사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는 꿈에 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씨족장 오마야도 자신이 오마야드라는 가장 강성한 아라비 아 왕 조의 기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씨족장의 자리 가 선 망의 대상임을 알고 있는 정도였다. 545년이 되자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오십이 넘게 되었다. 그는 열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둔 행복한 남자이다. 아이가 없다는 것, 그것은 곧, '불구'이거나 '불능'을 뜻했 으므로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그토록 원하는 아들을 얻기 위해 여러 명의 여자와 혼인을 맺 었다. 불행히도 딸만 얻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자기 종족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리라. 딸이란 무거운 짐일 뿐 아니라(그래서 기근이 들면 간혹, 딸이 태어나자마자 산채로 매장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족에게는 끝없이 위험한 존재였다. 결혼 전에 순결을 잃어버리 면 부 족 전체를 욕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사막의 아라비아, 유럽의 1/3에 해당하는 이 광대한 땅은 베두인족, 사라센 사람들 의 나라이다. 사라센(그리스어로는 '사라케노이', 라틴어로는 '사라케니', 불어로는 '사라셍' 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은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 남는 재주를 배워야 한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그 단조로움을 깨는 유일한 것이라면 어쩌다 튀어나온 바위일 뿐인 그곳에 서, 인 간은 무한의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발아래 펼쳐진 끝없는 모 래와 머리 위로 이어지는 끝없는 하늘, 오아시스에서 또 다른 오아시스로, 가축 떼를 몰고 다니는 방랑자들의 조국이란 바로 그러하다. 종려나무와 대추야자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는 베두인 사람들에게 휴식과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의미한다. 그래서 저들 유목민들은 나지 란, 야스리브, 파다크, 카이바르, 마다인, 타부크, 카심과 같은 오아시스 지역을 전통 적인 순 례지로 삼았지만, 실상 그곳에 정주하고 사는 농민들과 상인들에게는 가벼운 경멸을 보이곤 했다. 유목민들이란 지독한 가뭄을 이기며 물과, 그리고 있을 것 같지 않은 가축방목 을 찾아 쉼없이 움직이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살아 남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종종 염소 털로 만든 천막 따위는 걷어 버리고, 겉옷은 이동에 편리하게 고안해 냈다. 품을 넉넉하게 주어 낮에 이동할 때는 움직임 을 편안하게 하고, 밤에 잘 때는 몸에 덮어 몸을 따뜻하게 보호할 수 있게 했다. 낮 이 뜨거 운만큼이나 밤은 더욱 꽁꽁 얼어붙기 때문이다. 험하디 험한 사막의 삶에 낙타라는 사 막의 배가 없었더라면 그 생활은 더욱 고되었을 것이다. 낙타는 200Kg의 짐을 지고 하 루에 100Km를 주파할 수 있다. 그러나 목초지를 찾는 일이 너무 어려워지면, 어린아이나 여 인들 을 납치해 노예로 팔거나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약탈을 감행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 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또 예멘에서 오는 베두인 대상들이 사막을 수놓는다 540년 6월,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아브드 알 무탈리브 소유의 낙타행렬이 천천 히 남하하고 있다. 행렬은 시리아에서 물건을 팔거나 현물로 맞바꾸고 돌아오는 길이 다. 압 드 알 무탈리브는 다마스의 장터를 잘 알고 있으며, 다마스라는 도시가 자신에게 엄청 난 이 익을 가져다준다는 것과 그곳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는 기독교인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를 한번 도 본 적이 없다. 위대한 전략가이기도 한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코스로('왕 중 왕'이라는 뜻) 와 일 종의 평화협정을 맺은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페르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는데, 페르 시아는 보물과 코끼리로 무장한 군대, 그리고 그 나라에서 숭배되는 종교 때문에 아라비아 전역에 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종교란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마술가들의 종교, 선과 악 의 이 원론을 주장한 배화교이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비잔틴령 시리아를 여행하다가 종종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인 이라 크에도 들르게 된다. 그는 비잔틴 제국이 페르시아의 최대 적수라는 것을 알지만, 이 두 나 라가 아라비아의 중,북부를 직접 지배하려고 나서지 않는 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는 것 도 잘 알고 있었다. 아라비아의 중, 북부는 아브드 알 무탈리브가 태어난 곳으로 광대 한 누 푸드와 루부알카리(각각 '비어있는 땅'과 '사막 중의 사막'이라는 뜻을 가진)사막지 대는 물 론이요 에자즈 산악지대까지를 포괄하는 척박한 땅이다. 그리고 이제 몰락해 가는 저 두 제 국이 이곳의 몇몇 유목민족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하지만, 저들은 사실 남부 아라비아 를 노 리고 있을 뿐이다. 남부 아라비아, 옛 조상들이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뜻에서 '아라비아 펠릭스'라고 불렀던 그 땅은 지금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아브드 알 무 탈리브 도 한참 번성하고 있는 이 땅은 잘 알고 있을뿐더러, 유향과 향료 매매로 놀라운 번영 을 이 루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시바 왕국에 대해들은 적이 있다. 비록 수천 년 전까 지 거 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이지만 그 고적이라든지 성채, 수리시설등이 여전히 남아 저들의 찬란 한 문명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시바 여왕의 이야기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제노비 여왕의 기억을 되살린다. 제노비란 이름은 시리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종려나무의 마을', 팔 미라와 연관된다. 그러나 황금과 유향은 낙타에 가득 싣고 솔로몬 왕을 알현하는 시바여왕의 전설 이 '성서'에까지 그려져 있다면, 제노비 여왕의 영광이란 겨우 3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아라비아에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있음을 알았다. '성서'구 경 한 번 못한 그였지만... 카이바르라든가 야스리브 같은 중앙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지대에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 는 '바누 나디르'나 '바누 호라이자'같은 유대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활발한 유대인 공동체라면 아무래도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미 야리트 왕궁의 왕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두 누바스가 자신의 신민들에게도 자신과 같 이 개 종할 것을 강요한 이래로, 이 지역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아라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 었다. 두 누바스는 일찍이 기독교를 믿는 나지란의 아라비아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해, 그리스 도를 대신하여 모세의 신인 여호와를 섬기도록 명령하였다. 나지란은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고향 메카에서 1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아브드 알 무탈리브도 나지란이 오 아시 스를 잘 알고 있었다. 나지란의 아라비아인들이 개종을 거부하자 두 누바스가 2만 명 의 아 라비아인을 화형 시킨 뒤 구덩이에 던져 넣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도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전해지는, 나지란의 '무훈시'를 이루 는 내용 이다. 사막은 선지자들을 낳기도 했지만 또한 시인들을 낳았던 것이다. 시인이 선지자 와 다 른 한 가지가 있다면 현세를 노래한다는 것일 뿐이다. 시인들은 씨족과 부족으로 이루 어진 사막사회의 대변자이면서, 히라왕의 궁전에 기거하는 저 유명한 유대교 시인 아디 이 븐 제 이드처럼 이 사회의 편년사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르시아나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은 아라비아인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아라비아 북부에 기독교 왕국을 세운 아랍인들이라 해도 저들 모두는 시인을 보호한다. 이들 궁정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분명 킨다 왕의 보호 아래 있는 임루 알 카이스이리라. 그는 아라비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고, 모든 베두인 사람들은 그의 시에, 사랑하는 여인이 천막을 쳤던 흔적을 되짚어 가며 그 여인을 사 모하는 청년의 이야기, '카시다스'에 열광한다. 그들의 감성을 뒤흔들며 상상력을 한없이 자 극하는 시가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 시인이 여자라 한들 문제될 게 없다. 베두인 사 람들은 말이야말로 모래와는 또 다른 무서운 무기임을 알고 있었다. 사막을 다라 구비치는 시인들 의 운율은 혁혁한 무훈에 불멸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온 가문의 명예를 퇴색시킬 수 있 기 때문이다. 사막의 종족들은 지나치게 미신에 얽매여 있다. 이들은 진, 저 작은 악령들의 힘을 결코 거스를 수 없다. 진은 도처에 있다. 샘가에 난 구멍, 돌멩이, 나무에까지 퍼져 있다. 진의 기분을 상 하게 해 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불임, 광기, 전염병 따위 온갖 사악한 일들이 닥칠 것이 다. 때문에 이 초자연적인 힘들을 화해케 하기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 유목민들이 숭배하 는 것은 또 있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가 카바 성지 근처에서 사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 이다. 신전 카바는 그 안에 검은 돌을 품고 있는 거대한 정방형 건물, 가히 운석 같다고 할 석조 건물이다. 구전에 따르면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이 첫 번째 카바(신의 처소)를 세웠다고 한다. 그 러다가 노아의 대홍수 때 사라진 카바를 이브라힘(아브라함의 아라비아 이름)과 그의 아들 이스마 엘이 다시 세우면서, 천사 가브리엘이 가져온 검은 돌을 이 거대한 건물의 동남각에 봉해 놓았다고 한다. 카바에서는 세 명의 여신을 숭배한다. 최고의 여신인 알라트, 강한 힘을 가졌다는 알 오 자, 그리고 인간에게서 자손을 끊게 하는 가위를 쥐고 있다는 마나트가 그들이다. 메 카 최고 의 신은 홍옥수로 지어진 우상 '오발'이다. 이것말고도 카바에서 섬기는 신은 더 있 다. 신들 의 수는 거의 360개도 더 될 거라는 게 사람들의 말이다. 메카 사람들은 이렇게 신의 숭배 와 관련하여 관대하다. 그들이 흡사 박물관에 골동품을 모아 놓듯 신전에 온갖 신을 모아 놓는 것은 외부인들로 하여금 메카에서도 그들 고유의 신을 숭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서일 뿐 아니라, 전 아라비아에서 메카를 성지순례의 수도로, 하지의 마지막 귀착지로 하려 할 요 랑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문에 라잡, 두 엘 카다, 무하람등의 성월이 계속되는 동 안에는 신상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6세기말의 메카엔 극소수 거상들과 끊임없이 불어나는 극빈자들이 공존한다. 물가가 폭등하고 투기가 기승을 부린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가 베두인 사람의 계율 을 충 실히 지키는 대상으로 남아 있을 때 다른 씨족의 지도자 몇몇은 상업 귀족층을 형성 했다. 이들을 쿠라이시 내파라 불렀는데,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계율에 따라 축재를 삼가지 만, 카 바 근처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의 일원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쿠라이시 내파를 중심으로 그 바깥쪽에 쿠라이시 외파가 자리잡는다. 한편 다른 메카인들은 이들과 같 은 정 치적, 상업적 특권에서 소외되어 있다. 빚더미를 짊어져 노예로 전락한 베두인 사람, 해방되 긴 했지만 언제나 주인의 감독을 받는 노예들, 가난한 장인들, 수입이라곤 전혀 없는 고아 들, 외국에서 온 소수 기독교인들(용병, 대장장이, 아비시니아 왕국의 노예, 포도주 상인, 물 장수, 모험가)이 바로 그들이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메카의 거리에 하루하루 넘쳐나는 빈곤을 목격한다. 상업성과 종교 적인 성격을 띤 교역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소수 거상들의 배를 살찌울 뿐이다. 그들은 자신 처럼 사막의 계율을 존중하지 않고, 성지순례나 시리아, 예멘으로 떠나는 대상들을 통 해 거 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화의 열병을 보노라면,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현기증 이 일곤한다. 과부와 고아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극빈자들 모두가 버림받고 있다. 가족 의 연 대와 부족의 연대, 다시 말해 아사비야가 깨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보다 금 한 돈, 은 한 량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남자들로부터 독립해 자기 이름으로 상엽활동에 뛰어든 여자들이 생기기도 했다. 이처럼 베두인 사람들의 율법이 와해되자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되기 시작했다. 동시 에 많 은 사람들이 변화를 기다리고, 또 희구하게 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의 기다림 에 응답 할 줄 아는 사람에게 드디어 길이 열리는 걸까. 이 사람은 이제 막 태어나려고 한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아들, 아브드 알라는 메카 최고의 남자이다. 거대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그는 선지자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70년,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나이가 70세를 넘자 기력이 쇠한다. 그는 쿠라이시 족, 마크 줌파, 아므르의 딸 파티마가 낳은 막내아들 아브드 알라의 운명이 다른 아들과 달리 범상치 않은 것임을 예감한다. 그는 벌써 메카에서 으뜸가는 미남으로 소문나 있을 뿐 아니 라, '바 라카(신의 은총)'라도 입은 것처럼 늘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와브 의 아 리따운 딸, 아미나와 혼인한 아브드 알라는 반드시 풍성한 후손을 두리라. 그리하여 아브드 알 무탈리브파에 덮친 물질적 빈곤을 풍성한 자식농사가 상쇄해 주리라. 사실 하심파 의 수 장은 이 근래에 들어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알라의 선지자가 태어났음을 알리는 전래의 이야기는 신비와 경탄으로 가득 차 있 다. 야 수리브 오아시스(훗날의 메디나) 하늘에 찬란한 별이 떠 그곳의 유대인들에게 마호메 트의 탄생을 예고하고, 조로아스터를 경배하는 페르시아 마술사들은 신전에서 1,000년 전부 터 타 오르던 성화의 불길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는 신비로운 전설... 제2장 메카 사람 사람들은 마호메트의 어머니, 아미나가 다마스 시장을 대낮같이 밝히는 강렬한 불빛 의 인 도로 마호메트를 잉태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 다. 그 의 친할아버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그가 코끼리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 다. 그해 에는 예멘 땅 아비시니아 공국 부왕이 대군을 이끌고, 그것도 코끼리가 포함된 대군을 이끌 고 메카에 원정을 왔던 때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코끼리의 해를 570년이나 571년 으로 추정한다. 유복자로 태어난 마호메트는 친할아버지 손에 거두어지고, 이윽고 사막의 유모에 게 맡 겨진다. 아브드 알라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메카에서 350Km 떨어 진 야 스리브로 장삿길을 나섰다가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몇 주전에 죽고 말았다. 과부가 된 그의 아내에게 남겨진 것은 여종 하나와 낙타 다섯 마리, 그리고 몇 마리 양. 그녀는 강대 한 하심 파의 수장이자 시아버지인 아브드 알 무탈리브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호메트는 성소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어머니와 오래 살지 못한다. 새로 아 기가 태어나면 항상 그러하듯, 이 집안 사람들도 그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내고는 저울에 달았 다. 그리고 그 무게만큼의 황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머리카락이 얼마나 무겁겠는가마는 분명 전통의 이름에 값하는 행위였다. 또한 메카 출신의 다른 명문가 의 아 들과 마찬가지로 마호메트도 사막의 유목민 가운데 찾은 유모를 따라 사막 한가운데로 보내 진다. 물론 거기에는 맑은 공기와 야성적인 생활로 아이를 강인하게 키울 수 있다는 이점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다.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란 젖먹이 적 친구 는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 베두인 사람들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베두인의 가난한 여자들은 요즈음도 그러하듯 명문가의 젖먹이 아이들을 찾아 메카로 내려 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 나갔고, 더욱이 언젠가 명문가의 대 를 이을 아이와 소중한 관계를 맺어 미래를 준비했다. 마호메트의 유모는 사드파에 속한 알 리마라 는 여자. 그녀는 마호메트를 따라 타이프 인근의 산악지대로 데려가 키웠다. 운명과 떠나 버리는 소중한 인연 여섯 살 때 사막에서 돌아온 그는 어머니와 야스리브로 간다. 오아스시로 가는 소행 렬은 움 아이만이라는 여종 하나와 낙타 다섯 마리, 어린아이와 어머니. 메카에서 오는 여 섯 살 바기 어린아이에게 야스리브는 신기한 것들 천지였다. 메카에서보다 먹을 것이 많았고 나무 와 풀과, 그리고 미역을 감을 수 있는 호수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마호메 트의 즐 거움을 길지 않았다. 양친을 모두 잃은 고아. 움 아이만이 그를 메카의 할아버지 집으 로 데 려간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이제 팔십 고개에 들어선 허약한 노인이다. 속 깊은 애정은 노쇠한 할아버지와 연악한 손자를 대번에 휘감는다. 그러나 이 애정의 실타래도 아브드 알 무탈리 브의 죽음과 함께 올올이 풀리고, 여덟 살 마호메트에게 직계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 게 된 다. 이제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이라곤 친척밖에 없다.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아브드 알 무탈 리브의 대를 이어 수장이 된 숙부이다. 마호메트의 후견인이 된 아브드 마나프는 아브 탈리브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아라비아인들의 아들 선호란 상상을 초월해서, 아들이 하나 생기면 자기의 고유 한 성 조차 버리고 아무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는 이름에 아이의 이름을 덧붙이는 경우 가 종 종 있었다. 숙부는 선량하고 용감한 상인이었지만 딸린 식구가 많았고, 그래서 가난 하지도 않았지만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 마호메트가 미래의 선지자임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시리아의 보스라에 있는 기독 교 수 도승이다 아브 탈리브는 사막을 횡단하는 긴 여행길에 조카를 데려가곤 했다. 마호메트가 보 스라라 는 곳을 지나치게 되는 것도 이런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보스라는 거대한 사원에 세워진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로 543년에 이미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부인, 테오도라의 명에 따 라 대 주교가 배출되기도 했던 곳이다. 일행은 바히라라는 이름의 은자가 수도처로 삼은 곳 어느 어귀에 머무른다. 이렇게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의 존재가 수도승에게는 새삼스러울 게 없고, 또한 그 때문에 수도승이 자신의 은신처에서 나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외랄 까. 바히라가 처소를 박차고 나와 이들에게 말은 건네더니, 자기의 처소로 들어와 함 께 식사 할 것을 청한다. 사실은즉 꿈에 보이기를, 한 무리의 낙타 행렬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낙타몰 이꾼 하나의 머리에 서광이 빛나고 그 위를 구름이 감쌌다는 말이다. 바히라가 마호메 트를 보매 꿈에 보았던 그 낙타지기가 분명하였다. "너는 정녕 신이 보낸 자로구나. 성경 이 예언 하는 그 선지자라." 이에 바히라는 떠날 참이 되자 아브 탈리브에게 각별히 이르되, "네 나 라로 돌아가거든 그를 잘 돌보되 특별히 유대인을 조심하라. 내가 그에게서 보았던 것 을 저 들이 본다면 필히 악행을 행하리라." 수도승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마호메트에게 악행을 행할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자신의 종족이었다. 하지만 마호메트는 아직 아브 탈리브의 아들 알리와 어울려 장난이나 일삼고, 대상들을 따라 오카즈 장터에 구경 나가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오카즈 마을이 장터 메카에서 불과 수킬로미터 떨어진 오카즈 마을 장은 아라비아 전역에서 제일 유명한 장이 다. 그 곳에서의 교역은 여느 곳에서의 그것과 다르다. 거기에는 '아라비아 최고의 귀인'에 게 팔 요량으로 예멘 공국의 왕이 보낸 보검이나 순종 명마 따위가 있었다. 연단이 마련되 고,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그곳에 올라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장광설로 떠들었다. 자기가 왜 '아라비아 최고의 귀인'인지를 그것도 시로써 이야기했다. 때문에 일족 가운데 유 려한 시 구를 읊을 시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승산이 있었다. 물론 이들에 대한 심판은 감동 하길 잘하는 대중들이 맡았다. 그런 까닭에 무파카라, 즉 영광을 향해 노래하는 이 경 연장은 물건을 사기 위한 시장만은 아니었다. 아라비아 전역의 시인들이 제 재주를 자랑하는 일대 경연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 경연장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주 어졌다. 카시다라는 검은 비단천 위에 황금글자를 수놓은 휘장을 성소의 가운데로 내걸어 한 해 내 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해 놓았고, 그럼으로써 시와 시인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입 에 오 르내리게 했다. 이렇게 선택된 시들은 무알라카, 즉 '걸려진 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장터에서 마호메트는 '말'이 황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쳤다. 팔미라와 같 이 모래 위에 세워진 성곽이 언젠가 허물어지게 마련이라면, 또한 저 성읍들도 어느 날 재가 될 운 명이라면, 말은 마술이었다. 모래언덕을 헤집는 줄기찬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매서워서, 다른 것을 변 화시키 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말은 곧 전능자. 마호메트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변신 지독히도 가난했던 마호메트는 너무 오랫동안 독신으로 생활했다. 베두인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란 자기 사촌과의 결혼이다. 마호메트도 사촌 움 하니와 결혼하고 싶 어 아 브 탈리브에게 허락을 청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곧이어 행운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를 눈여겨본 한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코발리 드의 딸, 하디자. 그녀는 이미 두 번 결혼했던 전력이 있다. 부가 넘쳐 났던 하디자 는 혼자 서 사업을 이끌고 있었고, 그녀가 이끄는 대상은 메카에서 가장 컸다. 그녀는 시리아 로 보내 는 대상행렬의 우두머리로 마호메트를 지적한다. 그에게는 매력이 넘쳤고, 그녀로 하 여금 결 혼을 꿈꾸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이 많았다. 그녀는 사십 고개를 바라보 지만 마호메트는 이제 스물 다섯이었고, 하디자는 부유했으나 그는 가난했다. 마호메 트의 씨 족도 이 결혼에 결사 반대했다. 마호메트도 역시 하디자의 적극적인 구혼에도 불구하 고 이 부유한 여인이 한낱 고용인에 불과한 자신과 왜 결혼을 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 다. 하 디자는 드디어 나피사 빈트 모니야를 매파로 내세워 이 젊은이에게 자신의 애정을 확 인시킨 다. 595년, 마호메트는 청혼을 받아들이고, 혼약으로 맹세한다. 하디자의 씨족으로 들어간 마호메트는 바라카 이븐 나우팔과 같은 건실하고 경건한 청년 들과 교우 하게 된다. 하디자의 조카이기도 한 바리카는 학식이 풍부해 시리아의 복 음서들 을 헤브루어와 아라비아어로 옮길 수 있었다. 그가 지향한 것은 아니프, 곧 유대교에 도 기독 교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일신론이었다. 하디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 명문가의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났으나, 다른 사람을 섬겨 자신의 호구책을 마련해 야 했 던 마호메트가 마침내 평온한 삶을 엮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물질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이 다시 한 번 그의 삶을 뒤흔든다. 자이나브, 로 카야, 파 파티마, 울 쿨툼. 마호메트의 아내가 연달아 딸을 낳는다. 물론 사이사이에 아들이 있 었지만 오래지 않아 다 죽고 말았다. 아라비아 사회에서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처럼 큰 치욕 은 없다. 더욱이 아라비아의 전통은 무제한으로 중혼을 허락하였고 부자들은 젊고 아 름다운 여자들을 얼마든지 노예로 사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하디자가 살아있는 한 오직 그녀에게만 충실할 터였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아내를 맞아들이기보다 양자를 택하기로 했다. 아브 탈리브의 아들로서 자기에 게는 사촌이 되는 아직 어린 알리를 기울어 가는 숙부의 살림을 도울 겸 입양하기로 한 것 이다. 이와 함께 이미 기독교 문명에 젖은 칼브족 출신의 어린 소년 제이드를 노예로 사들였 다. (제이드는 본래 하디자가 선지자에게 준 선물이었으나 선지자는 그를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훗날 조카딸 자이나브와 결혼시킬 만큼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마호메트의 나이 사십. 그는 메카에서 타이프로 가는 방향을 따라 수킬로미터 떨어진 히라 언덕의 동굴에 은둔해 몇 날 밤을 새우곤 한다. 벌거벗은 불모의 산, 히라처럼 명상에 어울리는 장소는 또 없었다. 거기에서 영혼을 유혹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자 611년의 어느 날 밤, 마호메트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몸을 잔뜩 구부린 채로 비르 다라는 품이 큰 망토로 몸을 감싸고 어느 언덕배기 한켠에 잠들어 누워 있다. 그러다 가 갑 자기 빛과 구름에 휩싸인 신비한 물체가 나타나 그를 깨운다. "보라, 그대는 하느님이 보내신 이, 알라의 선지자이니라." 겁에 질려 사지를 떨며 히라 언덕을 내려오는 가련한 남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른다. 초췌한 얼굴에 숨막히는 표정. 그의 검은 눈동자는 열에 들떴고, 한기에 절은 어깨는 무겁기 만 하다. 혼란에 싸여 정신이 없는 그는 차라리 벼랑 위 어딘가에서 몸을 던지는 게 나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 숨통을 옥죄는 두려움. 삶의 굴곡에 낯설지 않은 이 중년의 사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이리도 당혹해 한단 말인가? 악마를 본 겐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정반대로 대천사 가브리엘을 본 것 인지도 모른다. 신의 사자 지브릴이 그의 운명을 예고한 게 아닐까? 이것을 납득하기 까지엔 그 자신 여러 날이 필요했다. 바로 그날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 사람은 부인 하다 지밖에 없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오직 그녀만이 그의 고백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남 아 있 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후원자가 되어 주리라. 놀라운 계시를 경험할 때마다 마호메트는 혹독한 고난에 시달렸고 혼신이 근원에서 부터 흔들린다. 55세의 하디자에게는 모성이 넘쳤고 늘 마호메트를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마호메트 는 자 신이 인간이 영혼을 갉아먹어 사막을 떠돌게 한다는 진들의 희생양이 될까 두려워했 다. 이 때 하디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성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숙한 조카, 바 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조언을 구한다. 조카는 마호메트를 위로하면서도 몹시 두려운 이야기 를 들 려준다. 마호메트의 경험이 모세의 경험과 흡사하다는 점에서는 안도감을 주었지만, 본디 계 시란 언제 어디서나 그에 반하는 저항을 일으키는 까닭에 마호메트 또한 제 부족의 손 에 내 쫓길 것이라는 이야기는 비통하기조차 했다. 마호메트는 연달아 찾아오는 계시의 흔적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계시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찾아왔다. 오한과 땀이 몸을 덮치는데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몽 롱한 의식상태가 몇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귓속에선 이상한 소음들이 윙윙거렸다. 마호메트 는 훗 날 "계시가 있을 적마다 내 영혼을 앗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고백했다. 알라의 선택을 받은 마호메트가 하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선포한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태어났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무렵, 마호메트는 신비주의자들이 익숙 하게 알고 있는 허무와 고뇌에 사로잡힌다. 그는 버림받았다고 믿으며 회의한다. 그러 나 바 로 이 점에서 그가 단순한 신비주의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겨우 계시의 첫 장을 열었을 뿐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섞이기 위한 경험이되, 저 혼자만의 내밀 한 경험이 아니므로 조만간 그는 자신이 진정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하느님 과 인 간의 중개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대지에 선포할 대리인이 되었음을 확신한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목소리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다. 지금까지 아담과 아브 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은 인간의 손으로 옮겨져 내려왔다. 마호메트도 하느님의 목소리가 그에게 전하라고 명령하는 그것을 말로써 전할뿐이다. 다중 앞에서의 단호하고 힘찬 선포, 아라비아어로 '꾸란'이라는 이 말이 프랑스어로는 '코 란'으로 옮겨져 오늘날 회교도의 경전이 되었다. 하느님의 교시가 마호메트에 이르러 아라비아얼 엮어지고(시인 헤자즈의 시가 그것 인데) 아라비아 전역에 선포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 이 언 어는 코란의 언어, 곧 성스러운 언어가 된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 함'을 의 미하는 것. '복종하다'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동사, '아슬라마'가 파생되어 생긴 말 이다. 이 동사의 능동형 분사 무슬림은 '복종하는 이'를 의미한다. 하느님에게 복종하고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것, 이것이 마호메트가 받은 메시지의 기조를 이룬다. 마호메트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으며 불신자를 징벌하는, 전능자이자 유일신 인 알 라께 복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설파한다. 알라, 최후의 심판일에 이르러 선한 자에 게 무한한 상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뜨거운 징벌을 내릴 이.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 다. 그 러나 그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마호메트는 먼저 자신의 종족을 개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무 관심 과 경멸과 적대감뿐이다. 그의 첫 번째 추종자는 부인 하디자와 두 양아들, 알리와 제이드. 이처럼 최초의 신 자들은 그의 가족과 주변인들이다. 집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부유한 상인, 아브 바크르가 첫 번째 신 자이다.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크르는 그 용기와 온유함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는 마호메트보다 세 살이 어렸지만 마호메트의 제일 측근이 된다. 또한 잘생기고 멋부리 기 좋 아하는 무스만 이븐 아판같이, 마호메트보다 훨씬 어린 메카의 명문가 자제들이 있었 다. 종 교보다는 멋 부리는데 더 관심이 있었을 우스만 이븐 아판의 개종을 두고 항간에서는 그것 이 마호메트의 딸 로카야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 부유한 신자들 외에는 유대인의 아들이며 대장장이인 카밥 이븐 알 아라트 같은 가난뱅이들도 있었다. 그보 다 더 아래로는 머리가 노란 비잔틴 사람이라고 해서 '루미'라고 비하되던, 해방 노예 소아 이브 이 븐 시난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 가장 아래 계층의 사람으로는, 이슬람교 를 받아 들인 노예들이 있는데, 아브 바크르가 죽은 직전에 구해 준 빌랄 같은 이가 있었다. 마호메트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친척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라는 명령을 받았 다. 곧,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자식들을 개종시키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하심파 족장은 아브탈 리브, 자기를 키워 준 숙부이다. 마호메트는 벌써 자기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 다. 아브드 알 무탈리브의 혈족이 자기를 믿어줄 리 만무하다. 완고한 아브 탈리브가 조상의 신앙을 팽개칠 리 만무한 것이다. 숙부의 정직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건만, 그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씨족의 두 번째 서열은 아브 라합, 아브 탈리브와 형제이며 당대의 부자로서 메카에 끊임 없이 이어지는 순례행렬에 자신의 이익을 걸어 둔 사람이다. 순례자를 상대로 하는 장 사가 때로는 대상들을 파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겨 주었던 것이다. 그에게 종교란 장사 와 동의어였고, 일신론을 내세우는 마호메트의 교리란 일족의 번영을 가로막는 장애 가 될 터이다. 세 번째 인물은 함자, 베두인 사람의 명예를 중시하는 사막의 기사이다. 그에게 삶 이란 경 쟁과 동의어이고, 힘과 용기의 경연장이다. 따라서 종교 따위는 관심 밖이다. 네 번 째 인물 은 압바스. 타이프, 메카, 메디나를 떠도는 고리대금업자로 조카가 떠드는 유일신을 믿는다 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쿠라이시족 전체가 나선다 마호메트는 다시 한번 가혹한 실망을 경험한다. 그 자신은 쿠라이시족과 쉽게 손잡 고 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그 자신의 종족일뿐더러, 게다가 그는 이제 부자였으므 로!) 오 히려 종족에게 멸시 당할 뿐이었다. 자존심 강한 이 남자가, 저마다 명문가의 후예라 고 자부 하는 자신의 종족에게 어떻게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자기의 메시지를 유일한 진리로 간주 하도록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는 좀 미친 게 아닐까, 아라비아어로 말하자면 '마즈넌'이 된 건지도 모른다. 들판 에 나가 낙타와 양이나 치는 게 낫지 않을까? 종족 전체에 불안감이 퍼진다. 마호메트가 유일 신이라 고 말하는 알라는 자손도 없을뿐더러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니, 이를 저 많은 신들 과 진 들이 과연 용서하기나 할까? 막대한 소득원인 카바 성전을 포기하고 순례를 멈추라니? 마호메트의 목숨은 씨족의 수장 아브 탈리브에게 달려 있다. 선지자라 해도 씨족의 일원 인 한, 수장에게 의지하고 수장의 보호를 청할 수밖에 없다. 비록 씨족사회가 그를 좋 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러니 마호메트가 씨족사회에서 파문 당한다면, 마호메트의 적들에게는 이 같 은 호기가 다시 있을 수 없다. 그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쿠라이시족 가운 데도 아 브 탈리브에게 그의 파문을 주문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아브 탈리브가 개종 할 의 사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조카인 마호메트를 적들의 손에 순순히 내줄 수 는 없 었다. 그는 파벌의 계율대로 그를 보호하고 감싸준다. 한편 쿠라이시족 안에서는 이견 이 분 분하고, 아브 탈리브는 마호메트에게 사람을 보내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침착하기로 이름난 우트바가 이 역을 맡는다. 그는 마호메트에게 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자네 가 건강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네. 그렇지만 자네의 행동거지가 이 좁은 성읍에 어떤 구설수와 혼란 을 일으키고 있는지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도대체 왜 그러나? 돈 때 문인가? 그럼 우리가 줌세. 자네를 우리의 지도자로 세울 용의도 있네. 그러니 제발, 우리가 숭배하는 신들이나 이 신들의 추종자들이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거라는 얘기는 좀 삼가 주게. 행여 어디가 아파서 그라는 거라면 우리가 자네의 육신과 영혼을 완벽하게 치료 해 줄 수 있는 이 세상 최고의 의원을 찾아 주겠네." 마호메트는 이 조리 있는 이야기를 슬픈 마음으로 듣고 있다. 메카의 상인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그들은 아예 믿고 싶어하지 않는 거야. 이들이야말로 '불신자 들'이 될 터. 그들은 자신들이 알라를 믿기를 바란다면, 기적을 징표로 내세우라 하는구나. 성 읍을 둘 러싸고 있는 저 사막에 푸른 강물을 흘려 보내 시리아 같은 나라를 만들라니. 달을 2 개로 쪼개 보라니, 그게 무슨 과자라도 된단 말인가. 불신자들에게 실망해서, 자기의 종족 과 화해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워, 마호메트는 신이 그에게 선포하라 했던 한마디를 선포한다. "불신 자들아, 너희들이 숭배하는 저들을 결코 좋아할 수 없구나. 알 라트, 알 오자 또 마나 트라는 여신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신에게는 딸밖에 없는데 너희들은 아들을 가졌다는 건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이는 다름 아닌 너희 자신, 너희의 아비가 아니냐?" 갈등이 첨예화 된다. 그 누구도 카바의 여신들을 이렇게 불경스럽게 말할 수는 없다. 마호메트는 쫓기는 와중에도 부족사회의 연대감과 함자의 도움으로 알 아르캄의 집 에 은 신처를 구한다 조롱과 비난이 난무한다. 마호메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인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이 한낱 조롱거리가 된다. 저들은 심판의 그날을 정확히 말해 보라고, 영원한 지옥불 의 고문 이 무어냐고 묻는다. 그리고 메카의 '잡신'을 섬긴 조상들이 모두 지옥불의 고통에 처 해졌나 고 묻는다. 이는 대개의 경우 질문이라기보다 조롱에 가까웠다. 마호메트는 신과 마 법사와, 시인의 위치를 오락가락했다. 마을의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 매수되었다는 비난이 끊이질 않았다. 그의 맞수는 마크줌파의 수장, 아브 잘이다. 그 와중에 마호메트는 뜻하지 않게 함 자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함자는 그의 숙부로, 가난하고 성마르고 술을 즐겼지만 과단 성 있고 용기 있는 이였다. 그는 어느 날 사막에서 사냥을 끝내고 오는 길에 마크줌파 수장, 아브 잘 이 마호메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수다쟁이 여인으로부터 듣게 된다. 함자에 게 종교적인 문제야 알 바도 아니고, 더욱이 조상의 신들을 무시하는 마호메트가 얄 미웠지 만, 이건 참을 수 없는 문제이다. 자기 조카가 조롱 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은 자신이 손가락 하나를 베어 가게 놔두는 거나 다름없는 일. 씨족의 일원을 건드리는 짓이 씨 족 전 체를 건드리는 짓과 무에 다른가. 함자는 베두인 사람의 계율에 충실하다. 그는 씨족 끼리의 연대감으로 마호메트와 똘똘 뭉친다. 불같이 끓어오르는 성미로 한 손에 무기를 들고 뛰어 가더니 화실을 날려 아부 잘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한다. 싸움 끝에 아브 잘은 자신의 지나 친 행동을 인정했고 함자는 순전히 씨족끼리의 연대감으로 이슬람교가 되었다. 이로써 마호메트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켜설 수 있었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정 신적이 고 육체적인 탄압의 제물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돌팔매질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다. 마호메트도 자기편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중 그는 자기에게 천적과 같 이 굴 던 쿠라이시족 마크줌파의 일원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알 아르캄 이븐 아브드 마나 프. 그는 이 신흥 종교의 교도들에게 널찍하고 길목 좋은 자기 집을 은신처로 제공한다. 마호메 트가 알 아르캄의 집에 은신처를 구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선지자는 이제 어느 파 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완전히 혼자이다. 메카에서의 생활도 어려워지기만 한 다. 하 디자의 장사도 완전히 파산했고, 그를 따르는 신자들의 재정상태도 엉망이 됐다. 추적을 피해 마호메트의 사도들은 망명을 택한다. 615년, 선지자 마호메트는 한 무리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아비시니아로 떠날 것을 권 한다. 마호메트의 사촌이며 아브 탈리브의 아들이요, 알리의 형제인 쟈파르가 우스만 이븐 아판과 그의 처 로카야들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를 이끌고 현재의 에티오피아 땅에 들어선다. 그곳 에는 뛰어난 지혜로 부와 번영을 이룩한 기독교 왕국의 황제, 네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 다. 이들 망명자들은 선지자가 보기에 가장 믿음이 약해 보였던 자들인가? 아니면 마 호메트 에게 충실한 조언자이면서 번창 일로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아브 바크르와 우스만이 함께 메카에 남아 있기엔 그들 사이의 불화가 심각했기 때문일까? 어떤 이들은 이들의 이주 를 통 해 메카에서 움트기 시작했다는 분열의 단초를 읽기도 하고, 벌써부터 자기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일부 신자들을 마호메트가 일부러 멀리하기 위해서였다는 해석도 내 놓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확실한 것은 이 첫 번째 이주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하는 이슬 람교와 기독교 사이의 화합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아비시니아인과 아라비아인의 관계가 어찌 나 끈 끈했던지 이때 이주한 아라비아인 가운데 몇은 아비시니아 교회의 기독교 사상에 감화 되어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수크란 이븐 아므르가 그러한데, 그의 아내 사우다는 남 편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메카에 있는 마호메트의 집에 은신처를 구한다. 사정이 이러하 자 다 른 이민자들 역시 사우다의 뒤를 좇아 아라비아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다시 합 류한 다. 이슬람교의 최대의 적이라 불리는 오마르가 개종함에 따라 이슬람 신자들은 용기 백배한 다 약 40명의 남자와 20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사실 아비시니아의 알 아르캄 의 집 에 도피해 있는 중에도 계속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거기에서조차 쿠라이시족의 습격 을 받았던 까닭에 돌아가며 파수까지 서야 했다. 쿠라이시족은 이슬람이 퍼지는 것에 격분 해 이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메카 사람인 오마르 이븐 알 카타브는 마호 메트를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달려들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 자는 난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모두들 두려워했다. 더욱이 그는 육 척 거 구였으 며, 자존심과 오만함 또한 어찌나 대단했던지 어느 날, 백주대낮에 칼을 빼들고 집회 가 열리 는 알 아르캄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그때 그는 노상에서 만난 사람에게 자기가 지금 부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오마르에게 "먼저 당신 집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나 살펴보는 게 좋을 거요"라고 충고한다. 아뿔싸, 오마르는 자기 여 동생 파 티마와 그녀의 남편 사이드가 이슬람교로 개종했음을 알게 된다. 길을 거슬러 자기 집 으로 되돌아온 오마르는 대장장이 카밥이 자기 여동생과 매제에게 코란을 읽어 주는 소리를 듣는 다. 오마르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카밥은 다른 방으로 숨은 뒤였다. 그러나 오마르는 이미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누이를 다그친다. 누이를 때려 머리에 피를 내더니만 이 윽고 후회를 한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리고 나서는 그들이 읽던 것을 다시 읽어 보라 한 다. 아 하, 구구절절이 옳도다! 감동에 젖은 오마르는 그 길고 알 아르캄의 집에 달려가더니 개종 을 서약한다. 누구도 오마르의 운명이 만인의 운명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마르 는 마 호메트 사후에 배출되는 가장 유명한 이슬람 수장, 칼리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으로서 는 오마르의 개종이 신흥 종교집단 이슬람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증오할 때만큼이나 사랑할 때도 뜨거운, 충직한 메카인 오마르가 이베 카바의 성소 근처에서 나 길 거리에서, 거리낌없이 기도하자고 한다. 훗날 이 같은 대로에서의 기도가 신자와 불 신자를 가르는 징표가 되겠지만, 아직 이슬람교는 진정한 공동체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619년, 마호메트는 하디자와 아브 탈리브의 부음에 접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이유로 눈물 을 흘리지 않는다 하디자가 죽었다. 향연 65세, 마호메트의 아내로 보낸 세월이 25년. 그녀는 마호메 트의 조 언자이며 재정적인 후원자였고, 반려자였으며 또한 그의 영적 지도자이자 최초의 이슬 람교 신자였다. 그녀의 죽음은 마호메트를 비탄에 빠뜨린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의 몫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때에 이르러 마호메트는 사우다와 혼약을 맺는 다. 아 비시니아에 함께 건너갔다가 남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메카에 돌아와 마호메 트의 집에 은거하던 충직한 여인. 그녀를 과부라고 해야 할지 이혼녀라고 해야 할지, 코란 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 그녀는 별다른 매력이 없었을지 몰라도 살림에 능했고, 아이들을 돌볼 줄 알 았다. 하디자가 죽은 뒤 이틀 후 아브 탈리브도 운명을 달리한다. 그의 나이 90세. 아브 탈리브 의 죽음과 함께 마호메트의 운명도 궤를 달리한다. 그의 마지막 보호자가 사라졌기 때문이 다. 뒤를 이어 하심파의 수장이 된 사람은 아브 탈리브의 동생, 아브라합. 그는 모두가 아 는 선 지자의 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마호메트는 아브 탈리브가 우상들과 함께 영원의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못된 녀석에 불과했다. 아라비아인들에게 자기 가족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종족 전체를 지 옥에 떨어뜨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 이는 최고 죄악이었다. 망나니가 되어 버린 마호 메트는 종족의 계율을 어긴 까닭에 소외될 것이고 파문될 것이다. 파문된 자란 곧 사형선고를 받은 자, 제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에 이제 어느 누구라도 손쉽게 그를 처치할 수 있는 까닭이다. 벌써부터 마호메트는 상황에 쫓기고 적들은 쾌재를 부른다. 그가 기도하고 있노라 면 이웃집 담장으로부터 암양의 자궁이 날아들고 불량배들이 모래를 뿌린다. 저주받은 도시 메카를 떠나야 할 것 같다. 타이프에서 박해받고 메카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마호메트가 순례자들에게 복음 을 전 파한다. 신의 섭리에 이끌려 야스리브에서 온 순례자들과 조우한다 620년 여름이면 유난히 많은 순례자들이 카바의 성소를 찾는다. 메카에 온 이방인 가운데 에서 사도를 구할 요량이었던 마호메트가 야스리브에서 온 순례자들 여섯 명을 만난 다. 마호메트의 품성에 반한 이들은 마호메트가 온갖 갈등으로 얼룩진 자기네 성읍의 문제 를 풀 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듬해에는 앞선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다른 일곱을 데리고 메카를 다시 찾는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열둘이 되었다. 예수의 12사도처럼, 이들의 메카 근처에서 가진 첫 번째 모임은 훗날 '아카바의 첫 번 째 서 약'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왜냐하면 마호메트가 이들 야스리브인들에게, 그들의 자신 의 딸과 여인을 보호하듯 자기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씨족을 잃은 자가 새로운 씨족에게 자신의 보호를 요청할 때 행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카 바의 '여에 대한 서약'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서약의 의미는 무겁다. 조상이 없이는, 면면히 내려오는 가계가 없이는 개인의 존재 이유조차 없는 아라비아의 사막사회에서 마호메 트가 자신의 핏줄로부터 결연히 뛰쳐나온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종족의 의미가 수명이 다했음 을 보여준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니라 동맹이라는 것을, 공동의 이상을 기초 로 맺은 약속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종족의 관념을 공동체의 관념이, 우마의 관념이 대 신하리 라. 622년에는 75명의 야스리브 순례자들이(7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아카바 협곡에 서 마 호메트에게 그를 위해 투쟁할 것임을 서약한다. 이것이 '아카바의 두 번째 서약'으로 '전쟁 에 대한 서약'이라고도 부른다. 비로소 마호메트가 수장이 되었다. 모세와 같은 일족 의 수장 이 아닌 공동체의 수장! 여러 종족이 복잡하게 얽혀 사분 오열된 야스리브가 강대한 중재자를 찾는다. 마호 메트 가 이 중재자로 떠오른다. 메카 북동쪽 350Km 지점에 위치한 야스리브는 B.C. 6세기경의 바빌로니아 문헌에도 등 장하는 천년 고도이다. 인구 3,000명. 대체로 아라비아 문화에 흡입되어 아라비아 방 언을 구 사하는 유대인들이 쿠라이자, 나디르, 카이노카의 세 부족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이들 외에 도 오우스와 카즈라이라는 강성한 두 아라비아 부족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온건파들이 나서서 마호메트를 중재자로 급히 불러들였다. 당시로선 오우스족이 카즈라이족을 쳐부순 형국이었지만, 내일은 전쟁이 일어날 지, 한바탕 대란이 일어날지,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푸른 초장의 야스리브는 사실 형제간의 살육을 불사해도 좋을 만큼 기름진 옥토였던 것이다. 지하수가 풍부한 오아시스, 종려나무와 과일이 넘쳐나는 땅 야스리브는 불모의 땅 메카와 다르다. 상인이라기보다는 농부에 가까운 야스리브의 부족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사막 의 베 두인 사람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과, 여러 부족과 씨족 사이의 관계 가 점 차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고, 복수가 내일의 삶을 장담할 수 조차 없 게 하는 상황, 농토를 소유함이 위험과 동의어가 된 지금, 오직 마호메트만이 평화를 회복해 줄 유일한 대안이었다. 622년, 마호메트가 고향땅 메카를 떠나 야스리브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의 시작을 알리게 될 헤지라, 곧 '회교 기원'이다. 이미 3개월 전부터 선지자의 사도 들은 오 아시스로 가는 이 길을 택해 피신 길에 올랐다. 마호메트는 9월의 이른 아침을 택해 마지막 으로 메카를 떠났지만, 메카인들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야스리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제4장 하느님의 원년 출발을 앞둔 9월의 그 아침까지도 마호메트는 생사의 기로에 선다. 메카인들이 이른 아침 부터 집으로 들이닥쳐 그의 침대를 덮쳤던 것이다. 다행히 전날 밤부터 사촌 알 리가 그의 침대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메카인들은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이미 멀리 떠나 버 린 마 호메트를 황급히 쫓는다. 그 바람에 알리도 무사히 고비를 넘긴다. 마호메트가, 충실 한 벗 아브바카르와 같이 길잡이 하나를 의지해 남몰래 떠난 피난길은 메카 남쪽 방향, 야스 리브 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하지만 메카인 역시 능란한 전략가들. 그들은 마호메트 일행을 바싹 뒤쫓는다. 이슬람의 전설은 이때의 상황을 빠뜨리지 않고 전한다. 마호메트의 일행이 어느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차에 적들의 눈에 발각되기 일보 직 전,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마호메트와 아브 바크르가 몸을 숨기고 있는 동굴 입구에 거미가 나타나 거미줄을 치는가 했더니, 또한 그 동굴 어귀에 비둘기 한 마리 가 날 아와 제 둥지를 틀고 태연하게 알을 품더라는 이야기. 이를 본 메카인들이 설마 이 동 굴 속 으로 사람이 들어갔겠는가 하며 그냥 지나쳐 무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카이의 수색은 사흘만에 종결되었다. 사선을 넘은 마호메트와 아브 바르크는 한 달이 지나서야 메디나에 닿는다 도망자들이 야스리블 방향을 바꿔 잡았다. 마호메트가 타이프에서 내려와 메카에 사 는 동 안은 그를 맞아 주는 이들의 보호를 받았지만 메디나에서는 메디나인의 도움을 받을 것이 다. 그러나 이 두 성읍 사이를 줄달음치는 동안은 사막에 그의 피를 뿌려야 될지도 모 르는 상황이다. 그런 까닭에 도망자들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고 이들은 9월말에 야 메 디나에 닿는다. 네 사람의 무리가 야스리브 근방 타니야 알 바다를 지나며 긴 여행이 끝을 맺는다. 쿠바 라는 작은 마을. 마호메트가 멈춰 서서 아브 바크르에게 자기가 이곳까지 타고 온 낙 타를 자신에게 팔라고 청한다. 처음 이 낙타들을 산 사람이 아브 바크르였기에 마호메트는 자기 소유의 낙타로 메디나에 입성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브 바크르가 마호메트의 제안을 받아 들이자 선지자가 400디르함을 주고 낙타를 산다. 낙타의 이름은 카스바, '귀의 1/4이 잘린 이'라는 뜻이다. 선지자의 낙타가 이슬람의 역사에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헤지라, 지리적 결별, 심리적 결별, 사회적 결별. 그러나 결별은 잠깐이었다 마호메트가 메디나 남단의 마을, 쿠바에 입성한다. 코란 사가들이 전하는 바, '정 점에 달 한 태양'이라는 메디나. 열흘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마호메트를 들뜨게 기다렸다. 특 히 앞서 떠났던 마호메트의 신도들은 불안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종려 나무를 지키는 유대안 남자 모든 사람이 제 집으로 들어간다. 바로 그 때 도망쳐 이곳으로 온 자들 의 형체가 멀리서부터 흐릿하게 나타나자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길거리를 내달리며 소리친 다. "보라, 우리의 운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길거리를 메운 다. 이날 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밝았다. 헤지라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헤지라, 이 말은 '도망'이 아니라 '이주'를, '망명'을 의미하는 말이다. 단순히 지 리적 이 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나 씨족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새로운 공동체와의 연대 를 의 미한다. 헤지라는 양 시간대의 확연한 단절을 의미하는 고로 이슬람 역사에서 한 분 기점을 이룬다. 그 이전이 부족 중심의 역사라면 그 이후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 새로운 종교 적 메 시지가 선포된 시대일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역사이다. 마호메트가 야스리브의 오아시스에 닿은 때는 서기 622년 9월 24일. 그러나 이슬람 력으로 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 해당해 이날이 헤지라 원년이 된다. 기독교력이 그레고리력에 기초 하는 양력이었던 반면, 이슬람력은 음력을 지켰던 까닭에 기독교력보다 열 이틀 날이 빠졌 고, 그래서 한 해사 354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제부터 모든 이슬람교도의 한 해가 6 22년 7 월 16일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선지자의 마을이 된 야스리브. 아라비아어로 '도시'를 의미하는 '알 마디나'라는 이름으 로 불린다 메디나는 오늘날 생각하는 의미의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넓은 평원에 집들이 점점 이 흩 어져 있고 한가운데에 종려나무숲과 산막이 모여 있는 성읍일 뿐이었다. 마호메트에게 첫 번째 고민이 생겼다. 과연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 이 성읍의 어느 처소 에 몸을 누일 것인가? 특별히 한 가정의 호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다른 가정의 질투가 걱정되 고 그것은 자기의 자유를 저당 잡히는 일이기도 하다. 선지자는 쿠바에서 2,3일을 머 물며 동 정을 살핀다. 쿠바는 오아시스 남쪽 지대에 있으며 바로 옆에 유대인 부락을 두고 있 었다. 아예 이곳에 정주 하기는 무리이다 싶어 마호메트가 이른 아침에 북쪽으로 자리를 옮 긴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이 때 마호메트가 낙타 한 마리의 재갈을 풀고 주민들에게 선 포하 기를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나니, 제 가는 길로 내버려두라"고 했다고 한다. 저 혼 자가 된 낙타가 오랫동안 여기저기로 떠돌더니 드디어 마을 한쪽 빈터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곳은 두 고아가 물려받은 땅이자 열매를 말릴 때나 쓰던 땅이다. 마호메트는 이 땅을 사들 여 집 을 지으라 명한다. 성전이 완성되었다. 성전은 세속인의 집회장소로도 쓰인다. 2개월이 지나자 햇볕에 말린 진흙으로 만든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순하기 짝이 없 는 성 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마스지드라는 이름을 얻은 이슬람교 최초의 성전이다. '마수게다'에서 파생된 이 말은 나바트와 시리아에서 쓰이는 의미대로 보자면 '사람들 이 꿇 어 엎드리는 곳'을 뜻한다. 이집트에 보존되던 고어체 발음 '마스기드'에서부터 오늘 날 통 용되는 '모스크(회교사원)'라는 말이 나왔다. 이 성전은 모래와 자갈이 깔린 정방형 마당이 벽돌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북쪽으로 는 벽 을 따라 종려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어 진흙과 종려나뭇잎으로 된 지붕을 받치고 있 다. 남쪽으로는 두 개의 숙소가 있어 각기 선지자의 두 부인이 머무른다. 선지자는 그 사 이에 아브 바크르의 아홉살바기 딸 아이샤와 혼인을 했다. 아이샤는 이미 세 살 적부터 아 비의 뜻에 따라 마호메트의 아내가 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선지자는 따로 숙소가 없이 두 부인의 숙소 가운데 하나를 번갈아 가며 썼다. 성전 마당은 당시의 아라비아 관례에 따라 이 웃 부 족에서 온 사절단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이거나, 공무를 돌보고 강론을 펴는 곳으로 쓰 였다. 또한 죄수들을 묶어 놓던 곳도 사람들이 무술을 단련하던 곳도 마당이며, 가난한 사람 들이 모여들어 잠들던 곳도, 공동기도회를 갖던 곳도 그곳이다. 이주 초기, 마호메트는 유대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또한 유대인 이 갖 고 있는 종교는 자신이 설파하고자 하는 그것과 교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이라 생각 했기에 그들이 예배 때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이주'가 엮어 낸 흥분도 잠깐, 야스리브는 복잡한 감정의 파고 에 휩싸 인다. 이슬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한마디도 믿지 않는 위 선자들, '무나파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무하지룬'이라 불리던 메카의 '이주자'들과 연대해 메디나의 충실한 이슬람교도로 남아 있던 안사르, '원조자'들은 무나파쿤과 전혀 성격 을 달 리했다. 이들 '원조자'들은 그 수나 세력, 또 재력에서 이슬람교도들보다 월등한 지위 를 확 보하고 있었지만 마호메트와 연대해 마호메트를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주 저하지 않았다. 마호메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나 공회'라는 이름하에 이들과 맺은 연대, 특히 유대인과 아라비아 종족들과의 연대를 통해서였다. 신도들의 수장이자, 도시의 수장으로서 마호메트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무장한 선지자가 된다 동맹관계를 맺은 부족들이 동맹을 결성하여 서로 보호할 의무를 지는 상호안전협약 을 맺 는다. 이것이 '아만'으로서 이때에 이르러 이들은 '무니눈', 안전의 수혜자가 된다. 이처럼 새로운 권력체에 통합되지 않은 자들, 예컨대 메카인들은 '카피룬' 곧 불충자들이라고 불렀 으며, 이 새 종교의 신도들은 '무슬리문'이라 불려 오늘날 '무슬림'의 사원을 이룬다. 유대인 역시 이 동맹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이들도 본인들이 원하기만 하면 동맹 에 가 입할 수 있었다. 공회의 한 조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본인 이 이 를 원하고 또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슬림과 동일한 조력을 받을 권리 가 있 다." 동맹체는 사실 개인들의 연합체라기 보다는 메카에서 온 이주자들과 메디나의 원조 자들, 메디나의 유대인 부족등으로 이루어진 여러 조직들의 연합체였고, 각 그룹은 자기들 나름대 로 수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라비아 특유의 사회구성 형태이다. 다만 마호메트는 이주 한 쿠라이시족의 수장이자 동시에 모든 신도들의 수장이었고, 더욱이 다른 사회그룹에 속한 신도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한 씨족의 수장이면서 선지자인 마호메트, 바로 이러한 사 실로 인해 그는 정신적인 권위를 누렸으며, 정신적인 권위가 세속의 권위로 이어졌다. 그러 나 세 속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했다. 메카에서 비굴하게 쫓겨난 자가 강인하고 자신만만한 승리자가 된다. 메카에서 메디나로 향하는 동안 마호메트는 안으로부터 심대한 변화를 겪는다. 심약 한 피 해자에서 가공할 만한 지도자로의 변모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놀랍겠지만 이를 전 혀 이 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메카에서 보낸 인내의 세월이 그로 하여금 비범할 정도로 강 인한 성품을 키웠을 뿐더러, 씨족들 사이에 가로놓인 미묘한 얽힘의 원인에 눈뜨게 만들었 다. 마 호메트는 이미 메카가 머지않아 쇠락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분열될 대로 분열된 이 도시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적절한 한순간만 기다리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가진 자료를 살펴보면 부드럽고 체념적인 메카시대의 마호메트가 어 찌하여 단호하고 엄격한 성품을 갖게 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저들 종교의 반석으로 삼은 예수의 이미지, '세상의 죄악을 대속하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 양'의 이 미지가 그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잊어서도 안 되리라. 이러한 이미지는 후대의 무슬 림 학자들이 재구성한 마호메트의 일대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마호메트는 베두인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사막에서 자라는 동안 수년 내내 대상을 따라다 녔고, 그 사이에 방랑하는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사막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러니 ' 왼 뺨을 때리거든 오른 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온화함을 곧이곧대로 가지고 있었을까? 아 니 예수 자신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그 온화함 자체일까? 성전의 상인들을 난폭하게 쫓 아냈 던 이도 다름 아닌 예수 아니었던가? 종교적 신념과 하느님 사업에 대한 믿음으로 충일 했던 마호메트는 모든 것을 하늘 의 뜻 에 맡기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었다. 선지자 마호메트는 종교적 체험과 구체적 행위의 양단에 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만일 그러하지 않았다면, 메디나인들이 어떻게 마호 메트에 게 서 만인에게 명령과 법규를 부과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강인한 성품을 보았겠는 가? 예 수의 왕국과 달리 그의 왕국은 세속의 왕국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그것을 예감하는 이 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는 조만간에 모든 사람이 알게 될 터였다. 메디나에 도착한 지 몇 달되지 안하 마호메트와 이주자들은 막다른 상황에 처한다. 고향 땅 메카를 떠나며 메카 최고의 부자라던 이들이 가져온 것은 겨우 전분 얼마였던 것이 다. 자기 소유의 땅도 없는 이들이 들판에서 일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메디나 이슬람교 인들의 환대에 언제까지나 기대고 있을 수만을 없다.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호 메트는 사막의 오랜 전통과 다시 손을 잡는다. 제5장 메디나의 전사 70여 명의 이방인이 메디나에 정주 하게 된 사실은 기존의 주민들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큰 사건이다. 그리고 이들 이주민들은 기존 주민들이 아량을 베풀었어도 기근과 전염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대추야자 열매와 물만으로 허기진 배를 채 우곤 했다. 겨울이 오면, 건조한 고향 날씨와 달리 매서운 한기가 엄습해 더욱 곤혹스러워 졌다. 열과 이질은 물론 말라리아까지 극성을 부려 아브 바르크를 비롯한 여러 신도가 몸 져눕는 다.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마호메트가 베두인 사람의 본성을 회복한다. 해결책은 단 하 나, 라 지아. 낙타 등에 올라 타 벌이는 제한전을 치르는 것이었는데(말은 최후의 일격에만 쓰였다) 대개의 경우 낙타와 가축을 약탈하는 데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인명을 다치는 일없 이 끝 날 때가 많지만, 싸움이 격렬해지면 많은 피를 흘리면서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획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라지아란 생존을 위한 경제행위로 사막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메디나 인근을 지나는 베두인의 대상을 덮치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주자들은 메디나 원조인들의 동맹 자이 기도 했기에 원조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메카인들 은? 메 카인 대상들은 시리아를 향해 가기 때문에 메디나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점을 통과 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의지가 사막의 관습을 이긴다는 사실이 마호메트가 이끄는 최초의 라이자 에서 부터 드러난다 623년 12월이 되자 이주자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대상들을 약탈한 뒤에 메디나에 전 리품 과 포로들을 이끌고 입성한다. 이것이 나클라의 전투. 그러나 그 와중에 메카인 한 명 이 죽 는 일이 발생했고, 이는 라잡의 달 동안에는 어떤 경우에도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 다는 계율을 어긴 셈이 되므로 대중의 분노를 자아낸다. 신성한 순례의 달에 일어난 이 불 상사를 모두가 주시한다. 이로써 생겨난 반향이 무척 크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하느님의 말씀이 개입해 메카인들이 범한 이 불경이 성월에 일어나는 여타의 살인행위와 명백히 다름을 보여 준다.(코란 2장 217절 "그 기간에 살생은 죄악이라 하나,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고 하 느님과 마스지둘하람에 가까이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그곳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추방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라.") 마호메트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의지가 사막의 관습보다 위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다. 다만 한 가지 아쉽다면 나클라 전투의 승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이주자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규모의 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가 헤지라 2년, 엄밀히는 624년 3월 중순에 찾아든다. 가자에서 돌아오는, 낙타 1,000여 두 규모의 대 상들이 지나고 있었다. 이들은 아바 수피얀의 인솔하에 수십여 쿠라이시족 베두인 사람들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금화 5만 디나르도 더 나가는 물건을 싣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마호 메트는 시리아에서 돌아올 때면 반드시 지나게 마련인 메카와 메디나의 분기점 바드르 오아시 스 근 처에 300여명을 매복시킨다. 그 중 메카의 이주자들은 불과 90명, 그 나머지 전사들은 메디 나인들이었다. 바드르 전투. 메카인 측에서는 74명의 전사자와 40명의 포로를 내고, 마호메트 측에 서는 불과 14명의 전사자를 낸 이 전투는 선지자의 첫 번째 대승으로 기록된다. 이제 라지 아라는 말이 사라지고 지하드, 알라의 적과 벌이는 성전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전장에서 죽어 가는 무슬림들은 신의 증언자이며 순교자라는 의미에서 차이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노 획한 전리품의 1/5이 선지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사상 최초로 이슬람교도들이 무력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사상 최초로 메카 의 상 인들이 선지자의 용맹과 선지자의 사도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자신 들과 자신들의 상업을 위협하는 실제 위험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또한 이슬 람교도들은 마호메트를 보좌하기 위해 알라가 수호천사들을 내려보냈다는 생각을 확실 히 가 지게 되었다. 알라와 함께 하는 전쟁, 지하드가 정당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메카의 쿠라이 시족은 '불신자'로 낙인 찍혔다. 마호메트는 유대인의 종교와도 다르고 기독교인의 종교와도 다른, 또 하나의 종교를 선포한 것이다. 이슬람, 새로운 예언적 메시지가 최고이자 최후의 종교로 선포된다. 무슬림들이 오호드산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는다. 비로소 메카인들이 바드르 전투를 설욕하는 날이 온다. 625년 봄. 기병 200명을 포함한 3,000여명의 대군이 메디나로 진격한다. 쿠라이시족 700명은 단단한 쇠사슬 갑옷을 입 었다. 명실상부한 이 군대의 진두에는 아바 수피얀이 서고, 그의 옆에는 예리한 전략가 칼리 드 이 븐 알 발리드가 진을 치고 있다. 마호메트는 메디나 외곽 오호드산 밑에 진을 치고 적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1, 000여 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믿었으나, 300여명의 위선자들이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이들 의 탈영에도 불구하고 예외 없이 전투가 벌어진다. 메카인들이 수세에 몰린 듯하자, 마호메 트의 전사들은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자신하고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전리품만을 노린 다. 바로 그때, 전열을 가다듬은 메카인들이 메디나인들을 옥죄며 다시 쳐들어오자 이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메카의 여인들이 바드르 전투의 희생자들을 목놓아 외침으로써 전장에 선 남편들을 독려 하고 있을 때, 메카의 쿠라이시족은 평원을 누비며 부상자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 고 있 었다. 선지자의 아저씨이며 용맹한 전사이기도 한 함자가 자기 손으로 해방을 선포해 준 아 비시니아 노예의 투창에 관통 당한다. 여자들이 시체를 조각조각 찢는다. 아바 수피얀 의 부 인 인드가 바드르 전투에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 함자의 가슴팍을 쪼개 간을 꺼내 먹 는다. 선지자는 돌에 맞아 이빨이 깨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선혈이 그의 얼굴 을 덮 는다. 메카인들이 평원의 새 주인으로 나타나 그 땅을 지킨다. 저들의 싸움은 메카의 이주자 들과 마호메트를 겨냥한 것일 뿐 전체 메디나인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님을 보여 주려 하는 것이다. 메디나에서의 사정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선지자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충 직한 한 무리의 신도들만이 마호메트의 곁을 지킬 뿐 유대인과 이민족, 위선자들이 들고일어난 다. 위선자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마호메트는 불충자들을 메디나 입구에서 막아낸다. 2년 뒤인 627년 3월, 메카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이 메디나에 날아든다. 이유는 명백하다.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것. 보병 1만 명과 말과 낙타 를 탄 기병이 600명이나 모여들었다고 한다. 총사령관은 바드르와 오호드 전투를 이끈 장본 인, 아 바 수피얀. 메디나인들은 페르시아 노예 살만 알 파리시의 조언에 따라 참호를 파고 무장병 사 300명을 배치한다. 참호는 6일만에 구축되었다. 참호가 구축되자마자 때마침 적들 의 공격 이 시작된다. 아바 수피얀의 군대가 맞은편에 진을 친다. 참호를 넘어 진격하려는 저 들의 시 도가 번번이 무산된다. 2주 동안 1만 3,000여명의 병사들이 서로 화살을 쏘아 대고, 웅변과 시로 설전을 벌인다. 15일째 되는 날, 광폭한 폭풍이 불어 메카인들의 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천막을 뒤집 고 불길을 일으키며, 낙타와 말을 흩어 놓는다. 아바 수피얀은 어쩔 수 없이 본진을 철수시 키고 무라이시족이 메파로 가는 길을 되밟는다. 마호메트의 승리였다.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 이미 3년 전부터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 사이 에는 미묘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참호전이 한창일 때 유대인 부족 쿠라이자가 메카인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선지자 가 부 족의 남자들은 참수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팔며, 그 재산은 몰수하라고 명 령한다. 불신자의 승리를 도운 이들에 대한 벌. 전쟁이 끝나자마자 메디나 장터 한가운데에 커 다란 구덩이를 판다. 그리고 결박한 유대인을 차례로 하나씩 데려다가 목을 치고 구덩이에 내던 진다. 이렇게 던져진 유대인이 거의 1,000여명에 달했다. 사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바드르 전투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선지 자는 맨 먼저 사소한 사건 하나를 빌미로 잡아서 금은세공을 주로 하는 카이노카족을 지목 했다. 카이노카족은 유대 민족 가운데 가장 약체인 부족이다. 어느 날, 메디나인과 결혼해 이슬람 으로 개종한 베두인 여자 하나가 곡물과 유제품을 팔려고 카이노카족 장터에 나갔다 가, 어 떤 금은세공업자 가까이에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그때 젊은 유대인들이 다가와 그녀 를 희 롱하며 베일을 벗기려 했으나 여자는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자 금은세공장이가 몰래 그녀의 치마끈을 툭 뜯어놓았다. 그럴 때 이 여자가 일어나니 치마가 흘러내려 아랫도리가 다 드러 나고 말았다. 결국 이것은 이슬람교도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 세공 장이가 한 이슬람교도에게 진탕 얻어맞더니, 이 이슬람교도가 다시 유대인들에게 얻어 맞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부터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때 마호메트가 재빨리 개입해 잘못한 부족을 지목하고 그 재산을 모두 양도하라고 이른다. 이는 바드르의 승리에 덧붙여 이주자들 의 재 정을 튼튼하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두 유대인 부족, 나디르족과 쿠라이자족마저도 이 슬람의 선지자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 카브 이븐 알 아크라프라는 시인은 한술 더 떠 바 드르 전투 바로 다음날 메카에 투항해 마호메트에 대한 복수를 선동하지 않았던가? 마 호메 트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고, 마침내 시인의 목을 졸라 죽였다. 사실 마호메트는 자기를 끊임없이 비웃으며 복종을 거부하는 유대인과 끝장을 보기 로 결 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624년 2월에는 자기 신도로 하여금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이 아니 라 메카로 잡으라고 권면하기조차 했다. 625년 8월이나 9월경에는 나디르족에게 메 디나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위선자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이에 저항한다. 그러자 무슬림들은 저들을 보루에 밀어 넣고 저들의 종려나무숲을 사그리 불살라 버린다. 혹자는 이에 항복하기도 하지만 저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된다. 말살정책은 627년의 '참호전' 다음날에 있은 대학살의 날까지 지속되 었다. 그래도 불안정한 외부 상황 이슬람 세력은 메카의 불신자들과 카이바르의 유대인 사이에 끼여 있다. 메카는 마 호메트 를 단죄하고 쫓아낸 제일의 적대도시. 미호메트가 어느 날 꿈에 보인 대로 메카로 순 례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모두들 놀란다. 628년 2월, 마호메트는 메디나를 출발해 자기 고 향땅으 로 향한다. 그가 신도들에게 동참을 권유하자 이들도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 향한다. 그러나 다른 베두인 사람들은 이 일이 너무도 위험한 짓이라며 거절한다. 더욱이 앞으 로 있 을지도 모를 메카 공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메카가 한참 순례의 계절에 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메카를 공격할 게 뭐냐는 것 이다. 그들의 이슬람 신앙이란 아직 굳건히 뿌리내린 게 아니기에 빌미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옛 종교로 복귀할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직 신앙으로 이주자들은 행복하다. 마호메트와 그의 신도들은 무기도 없다. 전통적인 순례자 복 장으로 나선 이들 이주자들의 수가 어느덧 천을 헤아린다. 쿠라이시족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망연자실한다. 순례를 막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적을 들여보낼 수도 없고. 마호메트는 성읍 입구 후다이비야에 천막을 친다. 이 같은 그의 고집에 메카인들은 마 침내 후다이비야 협약을 제안한다. 내년에도 마호메트는 3일간 메카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 다. 이 슬람교도들 대다수는 마호메트가 지나치게 양보했다고 하여 이 협약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 나 마호메트는 이나마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라비아 최고의 메카인들이, 쫓기듯 고향을 떠난 무슬림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징표였기 때문이다. 628년 5월, 미호메트가 메디나 북쪽 약 150Km에 위치한 거대한 종려나무숲, 유대교 도가 사는 곳인 카이바르를 공략한다. 유대인들은 뛰어난 농법과 관개기술로 대추야자수까 지도 재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숲 속에 흩어져 있는 일곱 개의 요새에서 살고 있었는데, 정 주인이 었던 그들은 아라비아의 관습대로 수확물 가운데 일부분을 자기들을 지켜 줄 베두인 사람을 사는데 썼다. 저들은 이런 방식으로 태평하게 농사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메 디나에서 마호메트에게 쫓겨난 나디르족인 도피처로 삼은 곳이 바로 이곳, 카이바르였 다. 마호메트가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곳도 바로 여기, 사막 한가운데 솟은 녹색 정원이 다. 그 가 1,600전사를 대동하고 나선다. 6주에 걸친 저항이 끝나자, 요새의 문이 열리고, 유 대인 일 부가 포로로 잡혀온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열 일곱 살의 예쁜 여자, 사피야가 있었 다. 마호 메트는 재산을 은닉하려 한 그녀의 남편을 처형하게 하고, 사피야를 아내로 맞아들인 다. 다 른 유대인은 선지자와 협상을 벌여 카이바르의 오아시스에 소작인의 자격으로 남아 후 다이 비야에 가 있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수확의 절반을 바치기로 약속한다. 이것은 예전에 베두인 사람들에게 보호를 조건으로 바치던 몫이었다. 선지자의 권력이 확고하게 굳어졌다. 마호메트는 갈수록 자신이 아라비아인임을 자 각한 다. 메카 출신의 아라비아인. 629년 3월에도 마호메트는 메카 순례를 떠난다. 그는 이 여행을 핑계삼아 자기 종족 과의 화해를 도모한다. 가장 적대적이었던 친족, 아부 라합이 624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 의 뒤 를 이은 이는 마호메트의 삼촌, 압바스. 둘은 얼마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호메 트가 마이무나와 혼인을 맺는다. 마이무나는 압바스 부인의 동생. 마호메트는 또한 강대한 권력을 누리는 아바 수피얀의 딸, 움 아비바와도 혼약을 맺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메 카에서 가장 강대한 사람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630년 1월, 마호메트는 한 이슬람교도의 죽음을 빌미로 호다이비야협약을 깨고 1 만 대군을 일으켜 메카로 진군한다.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바 수피얀이 메카인에 게 마 호메트의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조건이란 메카인이 이슬람교도의 자유로운 메카 출입을 보장해 주면, 이슬람교도들도 이를 보장하는 메카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주 겠다는 것이었다. 630년 1월 11일, 마호메트와 그의 군대가 조용히 메카에 입성한다. 선지자 가 카바 에 나타난다. 그리고 일곱 바퀴를 돌더니...모든 우상을 허물라고 명령한 다음, 카바 를 이슬 람의 성소로 선언한다. 메카 입성은 이렇게 무혈입성이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정치 적 승 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승리였다. 마호메트가 '이제부터 존재하는 유일한 귀족은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인 귀족'뿐이라 고 선 언한다. 이에 충직한 쿠라이시족 전체가 무슬림이 되어 아라비아 귀족 계급과 이슬람 귀족 계급이 통합된다. 그리고 다수의 베두인 사람들이 연합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나 지란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부족민들이 화약을 청해,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의 보호를 받되 공물 을 내주기로 약속한다. 북쪽 접경에서는 비잔틴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여러 기독교 부 족들 이 지지자가 되어 준다. 메디나가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로 일어서고 있었다. 안팎에 있는 자신의 적들을 제거하거나 개종시키는데 성공한 선지자이자 전사였던 마호메 트가 한 국가의 선지자이자 수장이 된다. 이제 마호메트는 메디나의 법령체계를, 모든 무슬 림 공동체에 적용될 법령체계를 반포해야 한다. 성전을 벌이는 동안 그를 지탱해 준 알라가 새로운 이슬람 사회를 조직할 때에도 그를 인도하리라. 제6장 마호메트, 국가의 수장 메디나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그것은 부족간의 단순한 연합체계가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 신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한 전래의 베두인 사람의 계율에 충실히 복종하는 선지자 가 선 포한 공동체이다. 이제 마호메트 그 자신이 예배와 법률체계를 상세히 규정하지 시작 할뿐더 러 정복사업을 벌이고, 새로운 동맹자들을 확보할 것이다. 그 권력의 핵심으로 언제나 알라 를 높이 드세우며, 메디나는 진정한 신정국가로 자리잡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외국인의 수가 넘쳐난다.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시 리아인, 이라크인, 예멘인. 이들 가운데에 이슬람의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도 있었지만, 이욕에 이끌 린 상인과 전사들도 많았다. 이제 메디나가 거대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이 거 대도시의 신앙체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진정한 법령체계 가 필 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법제는 물론 종교와 사회부문을 규율하게 될 것이다. 사실 마 호메트 의 삶은 언제나 계시와 예언으로 충일했거니와, 이 계시와 예언이 이제는 무슬림 공 동체의 조직문제에 집중된다. 이슬람의 '오행', 갈수록 커지고 다양화되는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될 버팀목. 이슬람의 종교체계는 그 신도들에게 '오행'이라는 다섯 가지 의무를 부과한다. 이 의무는 초기 국가시대라 할 메카 시대 때부터 전해 오는 것이지만, 메디나 시대에 이르면 새 로운 사회적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첫 번째 의무는 알라가 유일신이며 마호메트는 알라가 보낸 사람이라는 신앙고백 ' 샤하다 '로, 이는 또한 메디나의 영토를 넘어 이교도의 개종의식에 쓰이는 입교선서이기도 하 다. 두 번째 의무는 하루에 다섯 번씩 하는 기도 의식 '살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는 외 부의 성소를 향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메카의 카바, 순수한 아라비아 성소를 향해 기 도해야 했다. 또 사원의 첨탑 꼭대기에 올라가 "알라는 위대하시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나니, 마호메트는 그의 선지자라. 기도하라, 천복을 구하라."고 외치며 기도시간을 알리는 뮈에젠 의 역할을 노비 출신 빌랄이 맡았다. 세 번째 의무는 소위 법적 의무로서 보시라는 뜻의 '자카'로 메디나의 무슬림들을 먹여 살리고 강군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는 일이다. 626년부터는 새로운 세금 하나가 덧붙는데, 이것은 자기의 사업권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부과된 다. 일 종의 인두세인 '지지아'이다. 네 번째 의무는 금식, 즉 '시움'으로 624년의 바드르 전투의 승리 이래로 무하람의 달에 있었던 아수라 금식이 매해 아홉번째 달에 행하는 라마단으로 대체되었다. 메카 점령 이래로 가장 주목을 받은 다섯 번째 의무는 '하지'로 카마 순례를 의무로 만들 었다. 아홉 여자의 남편이기도 한 마호메트가 이 여자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하며, 모든 이슬람 교도들도 자기처럼 할 것을 명한다 메디나 법령체계에 오르는 규정 가운데 하나가 혼인과 가족에 관한 규정. 이는 신흥 공동 체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코란'의 규정은 남자에게 생활능력이 있는 한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게 명시하 고 있 다. 이것은 복혼을 조장하려 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복혼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여러 여자를 동시에 동등하게 대할 수 없을 바에는 그 수나마 줄여 야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물론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아홉 여자에 둘려싸여 살고 있었다. 헤지라 전에 결혼 한 사 우다, 아브 바크르의 딸 아이샤, 오마르의 딸 아프사, 사촌의 부인 중 과부가 된 움 살라마, 의붓아들 제이드의 부인 자이나브, 유대인 여자 사피야, 바누엘 모스탈리크족 족장의 딸 조 바이리야, 아바 수피얀의 딸 움 아비바, 삼촌 압바스의 처제 마이무나. 물론 여기에 열거된 여인들은 동거관계에 있는 여자들을 뺀 것이다. 동거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여자는 유 대인 라야나와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이집트 왕이 보내 온 이집트인 기독교도이다. 당시 이렇게 많은 수의 여자를 가까이 두는 것은 새로 개정된 법령의 관점에서 보더 라도 과부와 고아를 돌본다는 측면에서 권장할 만한 일이기조차 했다. 비록 의붓아들 제이 드의 부인 자이나브처럼 매력이 넘쳐 나서 마호메트로 하여금 사랑에 눈멀게 한 경우도 간 혹 있 었지만, 죽은 남편으로부터 한푼도 받은 것이 없는 불쌍한 과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지 자의 결혼을 살펴보면 정치적 의도나 사막의 계율에 따른 것이 많다. 그리고 선지자는 철저 히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이 여자들과 하룻밤씩 돌아가며 동침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선지자가 수립한 이 법령체계는 그가 농경인이 아니라 사막의 낙타 지기였음을 보여 준다. 이슬람의 선지자는 여자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사막의 유습을 근절 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의도는 특별히 유산상속과 관련하여 잘 나타난다. 이제부 터 여자 들은 비록 그것이 남자들 지분의 50%에 불과하다해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 한 조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전통적인 아라비아 사회에서 여자에게도 유산상속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된 여자들이 이제부터는 씨족 밖의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 미하 며 당시의 부족사회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행위였다. 또한 이처럼 관대한 양보가 뜻밖 의 부작용을 낳는다. 메디나의 농경민들은 유산상속이 거듭될수록 자기 지분의 땅이 작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호메트가 자란 사막사회는 여자들도 재산권과 유산 상속권 을 향유하는 사회로 오직 남자들만이 이러한 권리를 누리던 메디나인의 사회와는 거리 가 멀 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변동은 돈과 고리대금업으로 풍습이 많이 바뀐 메카인들에게조차 적 용되는 것이었다. 메디나의 초창기, 궁핍한 시기에 이자를 받지 않고서는 돈을 빌려주지 않 겠다던 저들의 언행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선지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못하도록 하느 님의 말씀으로 금지했다. 복수, 절도, 간음. 이에 대한 규정이 생겨나 향후 무슬림 법전의 모태가 된다 무슬림 공동체는 단일 부족처럼 제 성원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시작했고 알라는 이 모든 것이 엄격하게 규율화될 것을 명령한다. 즉, 엄격하게 판단하고 공평하게 형량하라는 것이 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가 허용되지만 하나의 복수가 다른 복수를 부르 지 못하 게 한다. 대를 이어 끝없이 반복되는 복수전을 금지한 것이다. 도적질한 자는 그 손을 잘라 고래의 관습을 유지하되, 이것이 무절제하게 적용되지 않 도록 주의한다. 어린 여자아이의 살해행위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간음 또한 범죄로 간주하 여 태형 100대에 처한다. 형이 무거운 건 사실이지만 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엄격하게 요구 되었다. 피의자로 지목되어도 그의 유죄를 밝힐 수 있는 증거들이 명명백백하지 않는 한 소 추가 어려웠다. 선지자가 총애했던 아이샤 역시 낙타지기와 연애를 했다하여 알리로부 터 간 음의 의혹을 받지 않았던가? 마호메트는 신에게 아내의 결백을 고지받고 이후 간음과 관련 해서는 최소한 4인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규정한다.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이슬람교도의 '올바른 몸가짐'을 선지자 자신이 직접 실천해 보인다. 이렇게 법령체계를 정비하면서 일상생활의 습속들 또한 조금씩 정비해간다. 그것은 음식 문화와 의복, 주거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슬람교인의 습속, '아답'은 선지자 자신의 생활양식과 태도, '수나'에서 범례를 찾는다. 이슬람교도는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는가? 이슬람법은 단순히 돼지고기와 도살 전에 피를 흘리지 않은 동물의 고기, 그리고 포도주를 금지할 뿐이다. 반면에 먹고 마시는 방식 에 대해 서는 엄청나게 많은 규정들을 정비해 두고 있다. 음식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어서도 안 되 며, 오른손으로 먹어야하며, 이쑤시개를 사용해서도 안 되고, 사원에 나서기 전에는 가급적 마늘과 생양파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금잔이나 은잔을 만들 어 이에 음료수를 따라 먹어서도 안되며 가죽부대에 직접 입을 대고 마셔도 안된다. 이슬람교도는 어떤 옷을 입어야하나? 남자에게는 터번이 적극 권장된다. 비단이나 수단으 로 된 옷은 피할 것이며 사프란 색깔도 피해야한다. 값비싼 보석을 걸치는 것은 금 지하되 향수를 사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다. 선지자 자신이 향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슬람 여 자들이 유대 여자들과 흡사해질 것을 제어하여 여자들에게는 가발을 금지한다. 반면에 베일 은 의무적인 게 아니다. 이는 단지 선지자의 부인에게만 권장되었거니와 뭇남자들의 은밀한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려 함이다. 이슬람교도의 집은 어떠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일체의 것과 악기, 포도주 부대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양탄자의 사용은 권장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화려한 살림살이가 그것일 정도이니, 투박함이 이슬람교인 집안의 생명으로 간주된다. 집안에 오락 실을 설치하는 것은 엄하게 금한다. 오락은 메디나의 공터에서나 할 수 있다. 예법을 규정하는 '아답'이 이슬람 사회의 예절을 전수하고 있다 사회관계의 중요성은 도처에서 강조된다. 혼례식에 참석하고, 병자를 방문하며, 장 례식에 참석하고, 선물을 전하는 것. 이 모든 행위는 칭송 받을 일이다. 젊은이가 노인에게 인사하 고, 지나는 사람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작은 집단의 사람이 더 큰 집단의 사람에게 인사하 는 것이 예의이다. 어떤 행위는 용인되었지만 어떤 행위는 폐지되었다. 예컨대 재채기 를 했 을 경우에는 반드시 '신에게 영광을!'이라고 말해야 하며, 이에 다른 사람은 '신의 관용을!' 이라는 말로 화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초대받은 손님이 식사 후에 트림을 하면 이는 주인 에 대한 감사 표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반면 하품은 악마의 사주를 받은 혐오스러운 행위 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만 한다. 이러한 일상의 습속에 이슬람 이전의 관습들 이 덧 붙는다. 예를 들어 할례는 유대인과 아라비아인 공통의 풍습이었다. 메카 점령 뒤 2년이 지나자 마호메트도 순례에 오른다. 이것이 고향 땅을 밟는 마지 막 기 회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632년 3월, 메카에 돌아온 마호메트가 제단을 꾸며 기도의 의무를 다하고 관례에 따 라 말 의 털과 자기의 수염을 깎은 다음 알라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때 순례의 규 칙도 반포한다. 의식이 끝나자마자 마호메트는 메디나로 돌아가 버린다. 이 의식은 무슬림 들의 뇌 리에 영원한 작별의 순례로 각인 되었다. 이로부터 불과 2개월 뒤에, 선지자가 병석에 눕고 말았던 것이다. 순례길에서 쌓인 피곤 때문인지 한밤중에 무슬림 전사들의 묘지를 참배한 탓인지, 마호메 트는 고열과 두통에 시달린다. 고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비명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에도 그는 632년 5월 26일에 오사마 장군을 불러 비잔틴 제국 접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라고 한다. 요르단을 오가는 대상들을 상대로 라지아를 벌이라는 명령이었다. 곧이어 그가 내내 지니던 군기를 오사마에게 건네고 마지막 훈령을 내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 아 침 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632년 6월 8일 월요일 아침, 몸이 좀 가벼워지고 기도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가 되니, 선지자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이 사방으로 번진다. 그 날 오후, 다시 침대에 들은 그가 헛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충직한 신도들을 유혹 으로 부터 지킬 방도'를 적어 줄 테니 쓸 것을 달라고 청한다. 측근들은 당혹스러웠다. 환 자의 발 작적인 몽환을 믿어야 할 것인가? 명로한 정신이 아닌데도 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인가 ? 소 란이 크니, 마호메트가 체념하고 물러가라고 손짓한다. 정신이 혼미해진 마호메트가 맥이 통 하지 않는 말들을 주워섬긴다. 그의 아내, 아이샤가 보매 마호메트가 눈을 치켜 뜨고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지고한 동반자...'를 부르는 듯했다. 아이야사 천사장 가브리엘이 그에 게 나타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그가 운명을 달리했음을 알아챈다. 아이샤는 그의 고개 를 바 로하여 베개 위에 단정히 올려놓는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끓어오른다. 이윽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누구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호메트의 죽음이 찾아오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마호메트의 사후를 대비한 조치가 조금도 취해지지 않았다. 왜 알라는 미리 그의 죽 음을 예고하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마호메트로 하여금 충직한 신도들에게 남길 교훈을 미리 준비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제 신자들은 갈피를 뭉쳤던 이들이 지금은 제각 각 흩 어지고 있었다. 632년 여름,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이슬람의 앞날에 관한 문제이 다. 새로 태어난 일신론이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깨져야 된단 말인가? 마호메트의 삶이 끝났다면 그것은 알라의 선지자가 비로소 그 영광을 드높이기 시 작했다 는 것일 뿐이다.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가 죽었을 때 비잔틴 제국은 물론 페르시 아 제 국도, 이제 막 태어난 프랑크 공국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선지자의 사도들이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 '코란'을 들고 중세 최고의 제국을 건설할 것임을 아무도 예측하 지 못하 고 있었던 것이다. 마호메트 사후의 이슬람 쿠라이시족 아브드 말라의 아들,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이상한 말들을 토해 내기 시작한 때가 611년. 그의 말은 사막의 시인들이 읊던 시들만큼이나 매서워 그것을 듣던 거친 베두 인 사람들을 진한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감동에 겨운 이들 베두인 사람들이 마 호메 트가 전하는 알라의 메시지를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것(가죽조각, 종려나뭇잎, 낙타 뼈, 납작 한 돌 따위) 위에 가는 갈대줄기로나마 갖가지 색깔의 수액을 적셔가며 적어 내려갔 다. 이 렇게 적혀진 것들을 마호메트 사후에 모두 모아 보니 114장에 달했거니와, 오랫동안 선지자 의 비서 역할을 했던 사이드 이븐 사비트가 평생에 걸쳐 이를 정리했고 이 대사업의 결과물 이 '코란'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완성판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마호메트 사후 20년 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사업의 첫발을 내닫은 이는 선지자의 사후 대를 이어 칼리프 가 된 마호메트의 사위, 우스만이었다. 이슬람의 기적이라면 "말이 곧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슬림이 아니고서는 이 기 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호메트는 혹시 자신이 시인이 아니냐는 세인들의 물음에 무척 날카롭게 부정을 표 시했 다. 그러나 사실 '코란'의 여러 구절은 빼어난 시구로서도 손색이 없다. 부드러운 운 율과 반 복되는 장단, 유려한 문체가 누가 들어도 매혹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기적은 바로 거기,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빼어난 하느님의 말씀에 있 다. 그런 만큼 하느님의 말씀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신자들의 생활 곳곳을 따라다녀 어 떤 신 자라도 쉽게 가슴에 새길 수 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의 생활 깊 숙이 파고든 이 말씀은, 메디나 사원의 첨탑에 올라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뮈에젠의 말에서 부터 서늘한 오아시스 그늘 속에 묻혀 있는 노인들에 대한 인사말까지 또 마호메트가 손님 으로 초대되곤 했던 가정모임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생활 전부를 지배했다. 그 무엇도 이 말 씀의 존재를 지울 수 없었고, 거꾸로 이 말씀은 이슬람교도들의 '의식'을 규정해 나갔다. '코란'의 마력은 읽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낭송하는 데서 온다. '코란'의 낭송 은 성악 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어 인간의 심연을 건드린다. 가장 완전한 낭송은 가슴속 저 깊은 곳을 울린다. 청자들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거니와 매번('오 주여', '오 하 느님'과 같은 뜻인) '야 랍비, 야 알라'라는 후렴구가 따라붙는다. 더욱이 '코란'은 마호메트에게 주어진 계시의 순서가 아니라, 말씀의 길이에 따라 편집된 탓에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가장 긴 것이 첫 장에, 가장 짧은 것이 맨 나중에 편집되어 있는데,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불의에 대항해 떨쳐 일어섰으나 상인들 의 무 관심 속에 절망해 있을 때 받은 계시들은 맨 나중에 나온다. 메카 시절을 기록한 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메카의 선지자에게 고난을 예비해 두셨음 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메디나 시절을 기록한 장을 보면 그를 메디나의 영도자로 예비해 두 셨음을 볼 수 있다. 114장에 이르는 '코란'의 수라 가운데 제 1장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오늘날 '서장''개경장'이라고 불리는 '파티하'가 그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슬람교 도들이 줄 줄이 꿰고 있는, 여지껏 이슬람교도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일종의 기도문이다. 이를 옮기자면 이렇다.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의 이름이여, 온 우주의 이름으로 찬 미합니 다. 세계의 주인이시며 자비로운 선인이시니, 심판 날의 주권자이시라. 우리가 경배 하는 이 가 당신이시며 구원을 청하는 이가 당신이시라.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당신이 축복을 베풀었던 이들의 그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당신의 분노도, 우리의 방황도 피 할 수 있게 인도하소서. 아멘." 이후에 이어지는 '코란'의 편집방식에는 특별히 연대기적 질 서라든 지 논리 같은 게 있지는 않다. 이런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무슬림 주석가들이 내놓은 제안 은 '코란'을 메카 시대를 다룬 장과 메디나 시대를 다룬 장으로 양분해 보는 방법이 다. 메카 시대를 다룬 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마호메트가 메카에 서 활동을 시작한 4년으로서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시기는 5년, 6년째 나타난 예언들이다. 이 두 번째 시기에 속하는 장들에는 '이스라'(선지자 무하마드의 '승천 의 장') '카흐프'(선지자에 관한 장) '마르얌'(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등의 이름이 붙 어 있다. 7년에서 10년에 이르는 세 번째 시기는 이브라힘(아브라함), 유스프(요셉), 유누스 (요나)등 선지자들의 생애에 할애되어 있다. 메디나 시대를 다룬 장은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 등을 직접 언급하면서 '차리아' , 곧 신 앙법의 기본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마호메트가 정치적 수장으로 등장한 다. 초기 의 시적 예언들이 보다 무겁고 법리적인 담화로 바뀌는 것이다. 이어 마호메트 주변을 지켰 던 이들의 증언이 이어지는데, 이는 선지자에 관한 일화들을 모은 것으로 하디스라고 불린 다. 이 전체가 모여 수나를 형성하는데, 이를 굳이 번역하자면 '마호메트를 흉내냄'이 라고 나 할 수 있다. 마호메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신도를 위한 증언이 된다. 죽음으로 얻은 승리이다. 이때 후계 문제가 고개를 든다. 마호메트가 죽은 지 단 이틀, 이슬람 공동체가 무너질 듯한 파란이 인다. 오마르와 아브바 크르가 떨쳐 일어나 자신만이 공동체의 앞날을 걸머지고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 선 때 문이다. 선지자의 두 아들을 손자로 둔 알리 또한 선지자의 가문만이 정통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통치에 가장 적임자라고 판정된 아브 바크르가 후계로 결정 된다. 그리고 후계자라는 의미로 칼리파(칼리프)의 칭호를 얻는다. 그의 통치는 632년에서 634년에 이르는 단 두해에 그치지만 그는 이 기간에 붕괴위 기에 처한 이슬람 공동체의 기반을 굳힌다. 그러나 656년에서 661년까지 통치한 알리의 재 위기간 은 온갖 파란으로 얼룩져 이슬람의 대분열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알리 의 지지자인 소수 시아파와 그 밖의 대다수 수니파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보잘것없는 낙타지기 무하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가 아립아인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심어 주는 데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이면 족했다. 그리고 온 세계에 퍼져 나갈 이 종교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는 20년 동안에 벌인 전쟁으로 족했다. 경이로운 이슬람의 메시지 앞에 쿠라이 시족 베두인의 조잡한 계율이 소리 없이 사그라졌다. 이제 하나의 전설이 남았다. 알 라의 선 지자, 마호메트의 전설. 기록과 증언 오늘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8억 3,730만 8,000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세 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종교는 그들 나름의 교리와 의식과 계율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 나름 의 고유한 금기와 이론과 넘침을 가지고 있다. 쿠란 '코란'은 '7세기 아라비아'라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설파된 말씀이다, 서구 학자 들이 행 했던 바와 같이 역사적 맥락 안에서 '코란'을 살펴보면, 그 안에서 마호메트가 생전에 수행 했던 정신적, 물리적 투쟁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114장(또는 수라)으로 구성되고 각 장 은 작은 절(또는 아야)로 분절되는 '코란'은 메카 시대와 메디나 시대로 나누어진 선 지자의 생애를 포함하고 있다. 서정적으로 쓰인 짧은 장들이 메가 시대를 이야기한다면, 보다 법리 적이고 긴 장들은 메디나 시대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메카시대의 수라 가장 짧은 장들로 이루어진 '코란'말미의 수라가 가장 오래된 수라이다. 주로 메카 에 있을 때 설파된 이 말씀은 마호메트가 상인들의 멸시와 때로는 숙부 아부 라합 같은 인척들 의 증 오에 직면해 있을 때(수라 111장)선포된 것이다. 문체는 시에 가까운 서정체로서 교리 는 간 략하게 개진되고 있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운신 알라의 이름으로 어두워지는 밤을 두고 맹세하고, 빛을 비치는 낮을 두고 맹세하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실로 그대들의 행위가 여러 갈래라. 선을 행하고 알라를 경외하며 진리를 증거하는 자에게 알라께서 축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줄터이고 인색하고 스스로가 충분하다고 믿는 자, 진리를 거스르는 자, 알라께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리니 지옥으로 향함에 재산도 쓸모 없음이라. 실로 복음은 알라께 있으며, 내세와 현세도 알라께 있느니라. 그러하매 내가 너희에게 타오르는 불꽃을 경고하나니, 가장 불행한 자들만이 그곳에 이르리라. 그들은 바로 진리를 거역하고 외면하는 자들이라. 알라께 헌신하는 자들만이 그로부터 벗어나리라. 이들은 재산을 바쳐 스스로를 정결케 하며, 자기가 베푼 은혜에 대한 보상을 자기 마음속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진 자들이라. 이들이야말로 완전한 기쁨을 누리리라. 92장, 밤(라일) 1,21절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태양과 그 빛을 두고 맹세하며, 그 뒤를 잇는 달을 두고 맹세하며, 태양의 광영을 밝혀 주는 낮을 두고 맹세하며. 그를 숨기는 밤을 두고 맹세하며, 하늘과 이를 세운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땅과 이를 펼치신 알라를 두고 맹세하며, 인간과 그것을 창조한 알라를 두고 맹세하니 주님께서는 또한 그로 하여금 선악을 이해하도록 하셨음이라. 스스로 정결케 하는 자가 승리한 자요, 스스로 불결케 하는 자가 실패한 자라. 사무드 백성은 저들의 오만으로 예언자를 거역하였으니 보라, 그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가 대표가 되어 일어섰을 때, 알라의 선지자가 가라사대, 이는 알라의 암낙타이니 그것이 물 마시는 것을 방해하지 말지어다 하였으나 그들이 이를 거역하고 암낙타를 살해하였으니 이 죄악으로 인해 주님이 그들을 멸망케 하사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매 주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염려하지 않으시더라. 91장, 태양(샴스) 1,15절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아침을 두고 맹세하고, 어둠이 짙어지는 밤을 두고 맹세하니, 그대의 주님께서는 그대를 버리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그대를 미워하지도 않으시니라. 실로 그대에게는 내세가 현세보다 나으리니 그대의 주님께서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 것인즉 이로 인하여 그대가 기뻐하리라. 그분께서는 고아 된 그대를 발견하여 보호하지 않으셨는가? 또한 그분이 방황하는 그대를 찾아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그분은 또한 가난했던 그대에게 부를 주지 않으셨던가? 그러므로 고아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며,, 간구하는 자에게 거절치 말며, 그대 주님의 은혜를 증거할지어다. 93장, 아침의 청명함(두하) 1,11절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화염의 아버지(선지자를 박해하는 숙부, 아부 라합을 지칭)의 손이 멸망하고 파멸할 것이로 다! 그의 부와 얻은 것이 그에게 아무 도음이 안 되리니 타오르느 지옥불에 이르게 되리라. 그의 아내는 땔감을 운반할 터이요, 그녀의 목에는 단단히 엮인 동앗줄이 감기리라. 111장, 동앗줄(마사드) 1,5절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일러 가로되, "알라는 단 한 분이시고, 알라는 영원하시며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아니하셨나니 그 분과 대등한 자 세상에 없도다." 112장, 경배(이클라스) 1, 4절 메디나 시대의 수라 코란의 첫장을 여는 것은 선지자가 메디나에 있을 때 선포한 말씀들이다. 유대인과 의 동 거, 기독교도와의 접촉이 신흥 이슬람 공동체에 적지 않은 문제를 불러오고 있을 무 렵, 선지 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회문제와 여자들의 문제에 대해 계시를 받는다. 사회관계와 여자들의 범절에 관한 규정 믿음을 가진 자들이여! 허락을 받고 그 집안 가족에게 인사하기 전까지는 너희집이 아닌 어떤 가정에도 들어가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복이 되나니 너희는 이를 교훈으로 할 지어 다. 그 안에서 아무도 발견치 못했을 때에도 너희에게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들어가지 말라. 만일 돌아가라고 하거든 돌아갈지니, 이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일이니라. 알라는 너희 가 행하 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너희 물건이 있어 들어가는 것은 죄악이 아니거늘, 알라께서 는 너 희가 밝히는 것이나 숨기는 것,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믿는 남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시선을 낮추고 정숙하라. 그것이 보다 순결할지니, 실 로 알 라께서는 그들이 행함을 모두 아시니라.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자연히 밖으로 드러나 는 몸 치장 외에는 미모나 어떤 몸치장도 드러내지 말라. 또한 머리수건을 쓰되, 가슴에 이 르도록 할 것이며, 자신의 치장은 오직 남편과 자신의 아버지, 남편의 아버지, 자신의 아들과 남편 의 아들, 자신의 형제, 자기 형제의 아들, 자기 자매의 아들, 자기의 하녀, 성욕을 갖 지 못하 는 하인, 그리고 성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에게만 드러낼 것이다. 또한 여 성이 발 걸음소리를 내어 남자를 유혹해서도 안되나니, 믿음을 가진 자들이여, 모두 회개하라. 그러면 너희가 번성하리라. 24장, 빛(누르) 27, 32절 결혼과 관련된 규정 및 금지 믿는 자들이여 여성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그들을 유산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아니 하거니와 그들의 재혼을 방해해서도 아니 되고, 그들에게 준 것의 일부를 빼앗아도 아 니 되 느니라. 다만 그들의 비행이 명백할 경우에만 예외로 하라. 그들과 더불어 의롭게 살도록 하 라. 만일 너희들이 그들을 혐오한다면, 이는 알라께서 주신 귀중한 것을 혐오하는 것과 같으니 라. 아내를 바꾸려 하거든 그녀에게 주었던 그 어떤 것도 다시 빼앗지 말라. 이를 빼앗 을 수 도 있겠으나 이는 분명히 죄악이니라. 4장, 여인들(니사) 23,25절 간음과 관련된 규정 너희가 거느린 여인들 가운데 간음한 자가 있다면, 너희들 가운데 네 명의 증인을 세 우라. 만일 그들이 여인의 죽음을 증언한다면 간음한 여인을 죽음에 이르는 그날까지, 혹은 알라 께서 다른 방법을 명하실 때까지 집 안에 가두어 두어라. 너희 가운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더불어 간음했다면 그 둘을 함께 벌할 것이되, 회 개하 고 언행을 바로한다면 그들을 상관치 말라! 알라께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무지로 인해 죄악을 범한 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알라께서는 모두를 받아 주시나 니 알 라께서 관용을 베푸시도다. 실로 알라께서는 명철하고 지혜로우시니라. 그러나 죄악을 일삼는 자의 회개에 용서는 없나니, 그들이 죽음에 임박하여 "이제 히개하 나이다."라고 말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고, 불신자로서의 죽음을 맞는 자들에게도 용서 는 없 나니,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별이 예비되어 있느니라. 4장, 여인들(니사) 23-25절 신도들이 여성의 생리에 대해 물으리니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이는 정결치 아니한 것이 니라. 생리가 있는 여성을 멀리하고 생리가 끝날 때까지 가까이 하지 말라. 생리가 끝났을 때는 가까이 하라." 이는 알라의 명령이니라. 알라께서는 항상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거니와 또한 청결히 하는 자를 기뻐하시도다. 대저 여성이란 너희들이 가꾸어야 할 경작지와 같으니, 너희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경작 지로 나아가라. 가서 씨를 뿌릴 것인즉, 너희 자신을 위해 조심스레 하고 알라를 공경 할 것 이며, 언젠가 그분을 영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 복음을 전할지 어다. 2장, 암소(바카라) 222,223절 이혼한 여성은 3개월을 기다려야 하느니 이는 알라와 천국을 믿는 자에게 알라께서 태내 에 창조한 것을 숨기는 것을 허락치 아니함이라. 만일 그들의 남편이 돌아올 의사가 있다면 이 기간에 돌아올 권리가 있나니, 이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하나 남편은 아내에 대해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알라께서는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시라. 2장, 암소(바카라) 228절 이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선지자(예수)의 잉태를 선포하는 대목이건대, 예수가 이슬 람교도 들에게 위대한 선지자로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천사들이 말하길, "마리아여, 알라께서 너를 선택하사 청결케 하셨으니, 너를 모든 여 성들의 위에 두셨도다. 마리아여, 경건한 자세로 너의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허리를 굽혀 예배하는 자들 과 함 께 할지어다." 이것은 알라께서 그대에게 계시한 것인즉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 가운데 하나이니 라. 누 가 마리아를 보호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저들이 화살을 던졌을 때 그대는 저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였으며, 저들이 이에 관해 논쟁하고 있을 때조차 그대는 저들과 함께하지 않았 노라. 또한 천사들이 말하길, "마리아여, 알라께서 너에게 말씀으로 복음을 주셨으니 마리 아의 아들, 그 이름은 메시아 예수이니라. 그의 현세와 내세에 영광이 있을지니, 알라 가까 이 있 는 자들 가운데 한 분이시니라." 그는 이미 요람에서부터 장성한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말할 것인즉, 그는 성인 가운 데 하 나가 되리라." 마리아가 일러 묻되, "주여 제가 어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가 진 어 떤 이도 저를 스쳐 간 적이 없나이다."하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알라께서는 원하시면 곧 창조하시는 분이시니, 그분이 있으라 하면 있을 것이니라." 알라께서는 그에게 성서와 지혜와, 구약과 신약을 가리칠 것이니라.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지자로 보내질 것인즉, 그가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가지고 왔나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 어 숨을 불어 넣으면 알라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새가 될 것이니라. 알라께서 허락하 실 때 나는 장님과 문둥이를 낫게 하며, 알라께서 허락하실 때 죽은 자를 살리리라. 너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처소에 쌓아 두는지를 내가 말하리라. 너희에게 신앙이 있은 죽 너희에게 준비 된 증거가 이것이다. 내 이전에 이미 율법과 구약이 있었음을 확증하고 너희에게 금지되었던 것 몇을 허 용하기 위해 왔나니, 너희 주님으로부터 그 예증을 가져왔노라. 그러니 알라를 경외하고 나에 게 순 종할지어다. 알라께서는 나의 주님이시오, 너희들의 주님이시니 그분을 경배하라. 그것이 합당한 일이 니라." 예수가 그들의 불신을 알고 소리쳐 가로되, "누가 알라의 편에서 나를 따를 것인가" 하니 (안사르), 그들(하비리유마)이 대답해 가로되, "저희는 알라를 따르고 알라를 믿는 자 들이거 늘 저희가 그분에게 복종하는 자들(무슬림)임을 증언하나이다. 주여, 당신이 계시한 것을 믿사어며 당신이 보내신 선지자를 따르나이다. 저희로 하 여금, 증언자 가운데 서게 하소서."라고 하더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예수에게 음모를 꾸미나 알라께서는 이에 대한 방책을 세우셨 나니, 알라께서는가장 영특한 계획자이시라. 알라께서 이르시되, "예수여! 내가 너를 불러(타바파) 내게로 승천케 하며 불신자들 로부터 너를 정결케 했으니, 너를 따르는 자는 부활의 그날에 이르도록 불신자들 위에 있게 하리라. 그런 다음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나니, 너희가 달리 한 것에 대해 가름하여 주리라. 불신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현세와 내세에 이르도록 무서운 징벌을 내리나니 너희 들을 도울 자가 없으리라. 믿음을 갖고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있을 것인즉, 나는 우매한 자들을 사랑 치 않 기 때문이라." 이것이 알라께서 그대들에게 계시한 말씀이요, 지혜요, 복음이니라. 3장, 이므란의 가족(이므란) 37, 58절 유대인 및 기독교인과의 관계:이슬람교도에게 유대인 및 기독교인과의 연대를 금하는 조 례믿는 자들이여, 유대인과 나스라를 친구로, 그리고 보호자로 택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서 로가 친구들이니라. 그들에게로 향하는 너희가 있다면 그는 그들 무리의 일원이거늘, 알라께 서는 이 우매한 백성을 인도하지 않으리라. 그들의 심중이 병들어 "우리에게 불운이 오지 않을까 두렵나이다."라고 말하더라도 알라 께서는 당신 뜻에 따라 승리와 명령을 내리실 것이요, 그러하매 그들은 그들 심중에 감춰 둔 것을 후회하리라. 하여 믿는 자들이 "이들이 바로 저희와 함께 알라를 두고 굳게 맹세한 자들로 당신과 함께 하겠다고 서약한 자들이오니까? 저들의 행동이 헛되니 필히 멸망코 말 아야 하오이다."라고 말하겠으나. 믿는 자들이여, 너희 가운데 믿음을 배신한 자 있다 해도 알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또한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니, 믿는 자에게 겸손하고 불신자에게 강하며, 알라의 길 에서 투쟁하며 어떤 비방자의 험담도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을 오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것 이 바로 알라의 뜻에 부여된 그분의 은혜라, 알라께서는 지혜가 풍성하시도다. 실로 너희의 보호자는 오직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와 예배를 드리고 자카트를 바치며 엎드 려 경배하는 자들이니라. 실로 알라와, 그분의 선지자와, 믿는 자들을 보호자로 하는 자들만이 승리할지니. 믿는 자들이여, 너희 이전에 복음을 전해 받은 자들 가운데건 불신자들 가운데건 너희 종 교를 조롱하고 오락으로 삼는 자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 너희가 믿는 자들이라면, 알라를 경 회하라. 저들은 예배에의 부름을 조롱하고 오락으로 간주했으니 저들은 지혜가 없는 백성이었니 라. 5장, 만찬의 식탁(마이다) 56, 63절 메디나 유대인들에 반하여 알라께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성약을 맺으사 그들 가운데 열두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나니 만일 너희가 예배를 드리고 자카트를 바치며, 나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르며, 나에게 카르드를 바치면, 내가 너희의 죄를 씻어 줄 것이요, 강이 흐르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리라. 그 후 불신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른 길을 벗어나 방황 하리라." 그들이 성약을 깨뜨리므로 내가 그들을 저주하였고 그들의 마음을 곤궁케 하였으니, 그들 이 말씀을 조작하며 그들에게 계시된 진실의 말씀을 망각했음이라. 그들 가운데 소수를 제 외하고는 너희가 그 조작을 깨우치리라. 그들의 잘못을 바로하고 용서할지니, 알라께서는 선 한 자를 사랑하심이니라. 5장, 만찬의 식탁(마이다) 56, 63절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반하여 알라께서는 "우리는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는 자들과도 성약을 맺었으나 저들이 자기들에 게 계시된 것을 망각하매, 알라께서 그들 가운데 적의와 증오를 심판의 날까지 일으키셨노 라. 알라께서는 곧 저들이 행한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시리라.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에게 알라의 선지자가 오셨으니 성서에 숨은 많은 것과 설명되지 아니한 많은 것을 밝혀 주리라. 그리하여 빛과 성서가 너희에게 이른 것인즉, 그것으로 하여 알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평안 가운데에로 인도하시고 그들을 암흑에서 광명으로 인도하사 바른길로 이끄실 것이니라. 알라가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일컫는 자는 믿음이 부족한 자이니, 그들에게 일러 가라 사되, "어느 누구도 알라의 벌을 막지 못하리니, 그분의 뜻이라면 마리아의 아들 예수와 그 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되느니라. 천지의 권능이 알라께 있으며,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알라의 것이라. 원하는 것을 창조하시는 이가 알라이시니 그는 전지전능하시도 다."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이르되 "우리는 알라의 아들이요, 그분의 사랑받는 자들이라."하니 일러 가로되, "그렇다면 왜 그분께서 너희의 죄악에 대해 징벌하시겠는가? 너희도 그분이 창조한 인간이거늘 그분의 뜻이 있을 때 관용을 베푸시며 그분의 뜻이 있을 때 징벌하시느 니라. 천지의 모든 것이 알라께 있으며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알라께 있으니 그분께로 귀의 하라" 5장, 만찬의 식탁(마이다) 15, 21절 수나 또는 '정통 이슬람 전통' 수나(하디스라고 부르는 구전문학이나 아라비아의 전통전체를 기반으로 해 형성된 이슬람 전통의 정통)는 진정 '선지자에 대한 모방'이다. 그것은 정녕 '말씀'의 총화이며 마호메트의 행동거지, 곧 그가 먹고 마시는 방식, 입는 방식,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방식, 신자와 불신자 를 대하는 방식 전부를 상세히 전한다. 수나는 이렇게 '코란'의 기둥이 되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의 규범이 되고 있다. 어제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사이 델 보카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장 정통적인 전통규범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 고 이 가운데 한 무리를 뽑아 만든 것이 바로 '하디스'이다. 여기에는 제례, 법, 도덕, 예절 등에 관한 조항들이 혼재해 있다. 선지자의 인품 아이샤가 가로되, "선지자께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부인들에게 청컨대 '내가 아이샤의 처소에서 간병받을 수 있게 해달라.' 하시니 부인들이 동의했다. 선지자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돌아가셨고, 그날 내가 그분의 임종을 지켰다. 그 분은 내 몸에 기댄채 가슴에 얼굴을 묻고 돌아가셨으니 하느님께서 그분의 타액과 나의 그것을 섞도록 허 락하셨다. 아브드 에르 라만이 미스바크(일종의 칫솔)를 들고 들어왔으나 선지자께서는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그것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니 부득이 내가 입으로 물어 그분의 치아 를 문질러 드린 것이다. 57,4(2) 아이야사 가로되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 가운데 하나는 당신의 사자를 나의 처소 가운데 임하게 하사, 그분이 나를 받아들여 나의 어깨와 턱 사이에서 돌아가시게 하심 이다. 나아가 그분의 타액과 나의 그것이 그분의 임종 직전에 섞이도록 허락하셨음이다. 내 가 성스러운 그분의 몸을 받치고 있을 때 아브드 에르라만이 손에 미스바크를 들고 들어왔 다. 그분이 미스바크를 응시하시매 내가 그분의 뜻을 받잡고 말씀드렸거니와 이를 드리오리 까?하니 고개를 끄덕여 그러하라 하셨다. 그분에게 이것을 전해 드렸으나 무척 고통스러워 하시매, '제가 대신 물어 문질러 드리오리까?'하니 그리하라 하셨다. 또한 그분 앞에 다른 미스바크가 있어 떨리는 손을 뻗어 집으사 얼굴에 가까이 가져오시더니 말씀하시기를 '하느 님말고도 또 다른 신성이 있구나. 죽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구나.'하셨다. 그러다가 손을 허공으로 뻗어 말씀하시기를 '지고한 동반자시여.'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 숨을 내쉬 더니 손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64, 83(17) 아이샤가 가로되, "선지자께서는 아침에 닭소리가 들리자마자 침상에서 일어나시곤 했다." 81,18(1) 아나스 벤 말레크에 따르자면 하느님의 보내심을 입은 이는 특별히 거구도 아니었고 특별 히 작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피부색이 하얗지도, 붉지도 아니했다고 한다. 머리카락 또한 아 주 곱슬거리지도 않았고 아주 반들반들하지도 않았으나, 귀밑을 덮고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한다. 또한 그가 덧붙여 말하기를, "그분의 손과 발이 어찌나 강했던지 나는 그분의 것과 흡 사한 손과 발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분의 손은 또 어찌나 컸 던지."라고 했다. 77,68(1,5,7) 우마이드가 이르기를 "비단 쪼가리건 비단 뭉치건 나는 여지껏 선지자의 손보다 더 부드 러운 것을 만져 본 적이 없다. 사향가루건, 향수 만드는 향료건 나는 여태까지 성스러운 선 지자의 냄새보다 더 향기로운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다." 30, 53(3) 엘 바라가 이르기를, "붉은색 긴 옷을 입었을 때 선지자보다 더 수려하게 생긴 사람을 나 는 여지껏 본 적이 없나니." 77, 68(2) 도덕 엘 바라 벤 아집이 이르기를, "신의 보내심을 입은 이께서는 우리에게 일곱 가지 의무와 금행을 선포했거니와 그 의미라 함은 병자를 위문하고 장례에 참여하며 재채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을'이라 말할 것과, 초대를 거절하지 말 것과.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인 사할 것과, 억압받는 자를 도와 줄 것과, 맹세를 지키는 것임이라. 금행으로는 인장을 금으 로 새기지 말 것이며, 은으로 술잔을 만들어 쓰지 말것이며, 말안장으로 침구를 사용하지 말 것이며, 카시천을 사용하지 말며, 비단옷을 입지 말 것과, 비단옷과, 수단옷을 입지 말 것이 니라." 74∼28(3) 가장 충실한 이슬람교도라 함은 (굶주린 모든 이들에게) 항상 먹을 것을 제공하는 자와, 자기가 알건 모르건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자들이라. 2∼6(우다스: 2,5)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바 그대로가 형제의 원하는 바이기도 함을 깨치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이슬람교도가 될 수 없는리라. 2∼7(우다스: 2,6) 믿음의 평안함을 알고자 하거든 다음의 세 가지를 필히 가져야 하느니라. 첫째는 하느님 과 그가 보내신 이를(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사랑해야 하고, 둘째는 누군가를 사랑 할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합치되게 사랑할 것이요, 셋째는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것 을 두려워하듯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빠져 나오게 한 저 우상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 을 두려워해야 함이라. 2, 14(우다스: 2, 13) 아이샤가 전하기를 선지자께서는 (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당신의 집 안에 십자 가 닮은 형상 어떤 것도 두지 않으시고 이를 모두 깨뜨렸다고 했느니라. 77, 90 아이샤가 이르기를, "선지자께서는(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늘 오른쪽을 선호하 셨으니, 오직 의식이 순결함을 위하여 말에 오르실 때나 신발을 신으실 때나 그러하셨다." 8,47·너희들 가운데 잔을 든 자 있다면 잔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지 말 것이며, 화장실에서 는 음경을 오른손으로 만지지 말고, 오른손으로 밑을 닦지도 말지어다. 4, 18 다섯 가지 의무: 할례, 겨드랑이털 제거, 음모 제거, 콧수염 정리, 손톱 정리. 79, 51 예배 아이샤가 이르기를, "선지자께서는(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내가 생리중이었을 때에도 내 품에 기대시며 '코란'을 낭송하시곤 하셨다. 나도 생리중이었음에도 하느님의 보 내심을 입은 그분의 (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6, 3 아브달라 벤 오마르가 이르기를, "선지자께서(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기도를 하 고 계실 때 모스크에 있는 신도 가운데 하나가 손등으로 콧물을 훔치는 것을 보셨다. 그러 자 갑자기 화를 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기도하고 있노라면 하느님께서도 그 대들을 향해 있거늘, 기도중에 하느님을 향해 코를 풀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78, 75(3)· 아부 호레라가 이르기를 하느님의 보내심을 입은 이께서(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 길!)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집 앞에 강이 흘러 그곳에 나가 하루에 다섯 번씩 몸을 씻 는다 해보자. 그에게서 몸냄새가 날 것인가? 누구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터이다. 하루에 다 섯 번씩 기도하는 사람도 (이는 하루일과의 의무이건데) 이와 같으니라. 하느님께서 죄를 씻 어 주심으로도 인해서이거늘." 9, 6 오후의 기도시간을 잊는 자는 그날의 과실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라 9, 15 한곳에 모여 기도함은 각자 떨어져 기도하는 것보다 스물다섯 배나 값어치 있는 것이니 라. 10, 30 아이샤가 이르기를, "선지자께 (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기도중에 돌아앉는 사람 에 대해 여쭈어 봤더니, 이는 사탄이 그로 하여금 기도를 못하게 하려는 수작인 거라고 말 씀하시더라." 59, 11(23) 이븐 오마르가 이르기를 "메디나에 도착한 바로 뒤에 이슬람교도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 기도시간을 아리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곤 했다. 어느 날은 이 이야기를 듣던 한 이슬람교도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따르라기를 사용하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러자 다른 이가 나서서 차라리 유대인이 사용하는 나팔 같은 것을 사용하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때 내가 나서서 그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건 어 떠냐고 물었다. 이즘에 선지자께서 (그에게 축복과 구원이 있으시길!) 빌랄을 가리키며 가라 사대, '빌랄아, 네가 일어나 기도시간을 알리거라.'라고 하셨다." 10, 1 충직한 신도들이 기도시간을 알리고, 기도시간에 맨 첫 번째 줄에 서는 것이 얼마나 영광 되며 또, 이 영광을 차지하는데 추첨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그렇게라 도 하리라.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성전에 나아감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안다면 그들이 서둘러 아침을 챙기리라. 그들이 저녁과 아침의 기도가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안다면 설사 네 발로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하리라. 10, 9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듣거든 뮈에젠의 그 말을 따라 반복할지어다. 22, 6 기도시간을 알리노라면 사탄이 등을 돌려 방귀를 꿔 이 소리를 못 듣게 한다고 했느니라. 22, 6 두 손에 내 목숨을 쥐고 계신 그분께 간구하기를 나로 하여금 땔나무를 담뿍가져다가 그 분이 임재하실 때 기도시간을 선포하고, 기도를 이끌 한 사람을 세운 뒤에, 내 발로 걸어나 가 (기도에 임하지 않은 자들의) 집집마다 불을 지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거늘. 두손에 내 목숨을 쥐고 계신 그분의 힘으로 이들 집터에서 기름진 뼈다귀들과 양들의 튼튼한 두 다리 가 발견되도록 하신다면 저들이 아침과 저녁기도를 빼먹지 않을 것인즉. 10, 29 (함께 기도에 임할 때) 열을 맞춰 정히 설것인즉, 열을 고르게 함이 성실한 기도의 자세 이니라. 10, 74 회중의 기도를 이끄는 자(이맘)는 간략히 해야 할 것인즉, 그의 뒤로는 허약한 자, 병든 자, 연로한 자가 있기 때문이라. 10, 62 내가 (회중 가운데) 기도를 이끌 때, 나의 바람이야 기도를 천천히 하는 것이지만 갑자기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이를 빨리 진행하거니와 이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고통스럽게 듣고 있을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이라. 10, 65 이맘보다 더 먼저 고개듦이 두렵지 않은가? 하느님께서 너의 머리를 당나귀 머리로, 너의 몸을 당나귀 몸으로 둔갑시키지 않을까? 10, 53 이슬람법, 말레크 의식·기독교도들에게 복음과 교회법이 별개의 것이라면, 이슬람교도들 에게는'코란'과 이슬람법이 거의 하나로 뭉쳐져 있다. 헤지라 4세기(기독교력 10세기)에 아 비 제이드 알 카이라바니가 저 유명한'리잘라 또는 말레크 의식에 따른 이슬람 교리와 법 에 관한 사도서한'을 통해 확립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종류의 규범집(절반은 법률 을, 절반은 교리문답을 다루는)이었다. 말레크 의식 또는 말레크 이븐 아나스가 당시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카이루 안에서 창립한, 일종의 법률학파를 뜻한다. 말레크 법률, 종교학파는 지금도 마그렙(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에서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라마단 금식·라마단 달에 있는 금식은 모든 이들의 신성한 의무이다. 새로 달이 뜨면(라 마단)시작해서 그 다음에 새로 달이 뜰때까지(샤왈 달, 헤지라 10월) 계속되는 금식기간은 30일 내지 29일 동안이다. 초승달이 구름에 가리면 지난달 1일을 기점으로 30일을 계산해서 금식에 들어가거니와, 금식을 끝내는 것도 같은 계산법이 따른다. 충실한 신자들은 라마단 첫날밤부터 금식에 들어가지만 금식이 그달 내내 계속되는 건 아니다. 금식은 밤까지만 이 어지기 때문에 본인이 부지런하다면 한밤중에 그것도 가능한 한 늦게 '샤우르'라고 불리는 야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곧 해가 뜰 것 같으면 아무것도 먹어선 안된다. 금식기간 인지 아닌지가 의심스러운 날에는 금식을 해선 안 된다. 실수로나마 금식기간을 더 늘이지 않기 위함이다. 이러한 날의 금식은 설사 그날이 진짜 라마단 기간의 한 날이라도 올바른 의미의 금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정설이다 물론 본인이 자의에 따라 기꺼이 금식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심이 가는 날 아침에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가 정해 보자. 그리고 사실은 그날이 라마단 기간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사실 라마단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그로부터 이어지는 날들의 낮 동안 내내 금식의 의무를 다해 야 하는 것은 물론, 라마단이 끝나도 이를 상쇄한다는 의미에서 하루 더 금식해야 한다. 여 행에서 막 돌아온 여행자는 그날 금식을 하지 않았다 해도, 또 생리중인 여자가 마침 그날 에 생리가 끝난다면 이들은 모두 그날 낮 동안에 식사를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금식을 어 기거나 여행을 떠나게 되어 이로써 금식을 어기게 된다면 이 사람들은 그 벌로 다른 하루를 정해 금식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단순히 잊어버려 금식을 어겼다면 어쩌랴, 이들에게는 아 무 벌도 없다. 반면 금식이 의무화된 기간 동안에 금식을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면 이런 경 우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금식중인 사람이 칫솔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이 기간에 본인의 몸을 심하게 약화시킬 우려가 없는 한 피를 뽑는 것도 금지되어 있 지 않다. 라마단 기간 동안 구토를 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 더 금식의 의무가 부과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일부러 토하려고 시도해 성공한 사람은 그에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임신한 여자가 뱃속의 아이를 염려해서라면 금식을 중단할 수 있을뿐더러 금식중단에 대한 속죄의무를 부과되는, 가난한 자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도 면제받을 수 있다. 다만 이들 에 대한 속죄의무 면제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젖먹이아이를 둔 여자로서 아이의 건강이 염려될뿐더러 다른 유모도 찾지 못한 경우, 또는 아이가 엄마 젖만 을 찾을 경우에는 금식을 중단할 수 있으나 이때에는 반드시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 어주는 속죄의무를 지켜야 한다. 너무나 고령이어서 금식을 피해야 하는 노인네들도 앞서 말한 속죄의무를 지켜야 한다. '음식 나누어주기'에서 말하는 음식이란 하루분 금식에 해당 하는 양의 머드(곡식)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 음식 나누어주기는 라마단 기간중의 금식 의무를 간과하고도 이를 잊고 있다가 다음 라마단에 이를 갑자기 기억하게 된 사람들에게도 해당한다. 사춘기 이전의 자들로서 남자의 경우에는 몽종을 경험하지 않은자, 여자의 경우에 는 초경이 없는 자는 금식의무에서 제외된다. 육신의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되는 때는 사춘 기 때부터이다. 하늘 높은 곳의 알라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사춘기가 되었다면,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오기를 희원함이라.('코란', 24장 58절) 남자가 순수하지 않은 상태에 서 아침을 맞고도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았다면, 월경을 마친 뒤의 여자가 여명이 트기 전에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왔다면,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여명이 트고 나서야 제몸을 씻었다면, 이들 모두는 그날 하루를 금식으로 지내야 마땅하다. 금식기간의 종료일에 있는 축제때, 희 생제(아이드 알 카비르) 때는 금식을 금지한다. 희생제 다음 이틀간도 금식을 금한다. 한 가 지 예외라면 희생제 때에 피를 흘리게 할 동물을 갖지 못한 무타마티에게는 금식이 허용된 다는 것이다. 아이드 알 카비르 이후 4일째 자원에 의해 금식할 수 없다. 다만, 새로이 서원 을 하거나 이날 이전에 이미 속죄의 의무로 금식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예외로 한다. 라마단 기간중에 하루라도 금식을 잊은 사람은 이를 보상해야 한다. 병을 이유로 해 금식을 중단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행중인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기도시간을 줄게 할 수밖에 없는 자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금식을 중단할 수 있고, 이에 대해 보상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들 말레크 학파들은 이 경우에도 금식할 것이 권장된다. 4바리드 이내의 거리를 여행하는 자로서 금식을 중단할 권리를 가지고, 또 실제로 금식을 중단했다면 이들은 속죄(카파라)의 의무가 아니라 보상의 의무를 질 뿐이다. 경전의 해석에 오류가 있어 이 때문에 금식을 중단한 자들도 속죄의 의무를 지는건 아니다. 속죄 의 의무란 먹고 마시고 살을 섞으며 의식적으로 금식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들에게 부 과 되는 것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단지 보상의 의무를 질 뿐이다. 이때 속죄의 의무란 60명의 빈자들에게 양식으로 머드(곡식)를 제공하되 각자에게 선지자의 머드(선지자에 대한 신의 은총과 축원)에 해당하는 것을 제공함을 말한다. 최소한 우리들 말레크인에게 의미하 는 바 속죄는 그러하다. 다만 2개월 동안 계속 금식한다든지, 노예를 하나 해방시켜 이를 대 신 갚을 수 있다. 밤사이에 혼절했다가 해가 뜨기 전에 의식을 되찾은 자는 금식에 대한 보 상이 요구되며 그 보상의 방법으로서 의식을 되찾은 뒤 맨 처음 순간에 기도를 해야 한다. 금식중인 자는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말고 행동거지를 조심할 것이며, 라마단 기간중에는 알 라가 알라 자신에게 표했던 바(경전에 나타난 바)와 같은 정도의 경의를 표해야 한다. 금식 중인 자가 여자를 가까이 해서도 아니 되거니와 잠자리는 물론, 쾌락을 목적으로 한 신체 접촉이나 입맞춤도 안 된다. 단, 이는 라마단의 낮동안에만 해당되며 밤에는 상관치 아니한 다. 신도들이 성관계 때문에 아침을 순수하지 못하게 맞았다 해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 그러 나 라마단의 낮 동안에 접촉이나 입맞춤으로 쾌락을 느끼고, 이로 인해 전립선액이 분비되 었다면 보상의 의미로 금식을 행해야 한다. 나아가 일부러 이러한 쾌락을 찾았다가 사정까 지 했다면 이는 속죄의 대상이 된다. 경건한 신앙으로 라마단의 의무를 다한 자는 그에 대 한 신의 보상으로 이전에 지은(가벼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라마단 기간 동안 가능한 한 자주 '코란'을 낭송한 사람들은(알라로부터) 그에 합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으니, 저의 죄악을 사면 받을 수 있다. 라마단의 경건한 의무는 이슬람 사원에서 이맘의 인도로 마감지 울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원한다면 자기 집에 혼자 남을 수 있거니와, 그럼으로써 고독속 에서 자기 안에 굳건한 신앙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좋다. 충실한 마호메트의 동반자들도 모스크에 들어가 라마단의 전통을 성실하게 지켰거니와, 그때마다 라카스 20개 절을 독송했는데 매 두 절 뒤에는 반드시 후렴 기원구를 넣었다. 이후 동반자 의 후손들은 모두 짝, 홀 구별 없이 36개의 라카스를 독송했으니, 충실한 신자라면 너나없이 이에 부지런할 것이다. 그리고 두 절이 끝날 때면 반드시 후렴 기원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리잘라 또는 말레크 의식에 따른 이슬람 교리와 법에 관한 사도서한' 금식(시암)편 지하드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통치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을 의미하며 항용 '이슬람의 여섯 번째 지주'로 간주되어 왔다. 지하드는 공동체에 대한 참여, 이스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지하드, 성전·지하드는 신의 가르침에 따른 의무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 시 한꺼번에 지하드에 나서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들 말레크인의 원칙이라면 지하드에 임 함에 있어 먼저 적들을 알라에 대한 믿음에 초대하되 이것이 거부당했을 경우, 그리고 그들 이 먼저 호전성을 보일 경우로 한한다. 이 두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할 터, 이도 아니라면 차라리 참수(지즈야)를 원할 터이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닐 경우에는 전 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이 지즈야를 원한다 해 도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이는 오직 우리 영토 안에 편입된 지역민에 한한다. 곧, 전쟁 을 통해 우리 영토 안에 편입시켜야 하는 것이다. 적이 우리 이슬람 전사들보다 두 배나 많 건 적건,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사형에 처해 마땅한 죄악이다. 그러나 적의 전력이 우리 전력보다 월등히 많아 두 배 이상 된다면 도망을 친다고 해서 크게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적과 싸울 때는 우리가 경건한 지도자의 명령을 받든 부패한 지도자의 명령을 받든, 이를 따지지 않고 싸워야 한다. 아라비아인이 아닌 백인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아만(보호)아래 있기를 청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죽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투항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이지 말 일이다. 수도승과 랍비들 또한 그들이 특별히 전사로 참전하지 않은 한 죽이지 말라. 여자라 해도 전사로 참여했다면 죽여도 된다. 가장 겸손한 이슬람교도가 누군가에게 아만을 베풀었 다면 다른 이스람교도들 또한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물론 여자와 소년들도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면 아만을 베풀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아만은 이맘의 재가가 있어야 유효하다는 이설이 있음을 명심하라. 군사작전이 끝나고 전리품을 나눌 때 이맘이 1/5을 취하고 그 나머지를 참가자들이 나눈다. 전리품 분배는 적국의 영토에 있을 때 빨리 끝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섯으로 나누는 것은 기습이나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전사는 전사 의 필요에 따라 분ㅂ재 전에도 말과 자기의먹을 것을 취할 수 있다. 전리품은 전투에 참가 했거나 이슬람의 지하드를 위해 투쟁하다 포로가 된 전사들에 한정한다. 작전 수행중에 병 든 전사나 병든 말에게도 그 몫을 배분해야 한다. 말에게는 두점을, 전사에게는 한점을 부여 한다. 노예, 여자, 소년에게는 전리품을 분배하지 않는다. 단 소년이 무기를 들고 참여했음을 이맘이 인정했을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마찬가지로 주인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몸종의 경 우,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전리품을 분배하지 않는다. 비록 이슬 람의 옛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적이라 해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자들은 이후에도 그 재화 에 대해 적법하게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가(적의 영토 내에서)적으로 부터 재화를 구입해 왔을 경우, 원주인이 이슬람교도라 해도 이를 취득하고자 할 경우에는 그에 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재매입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유형의 재화가 분배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도 또한 원주인은 그에 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재매입해야 한다. 그 러나 본 재화가 분배물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경우, 이슬람교도인 원주인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이를 취득할 수 있다. 5분할의 대상이 되는 전리품에서 미리 공제되어 이맘 의 처분에 맡긴 것이 없는 한 추가로 다른 분배물이 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그럴 경우라 해도 분배 이전에 이를 대상으로 하는 분배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죽고 없는 적들(살랍)의 무기와 의복과 말이 추가 분배물의 대상이 될 뿐이다.(그리고 위의 규칙에 따른다.) 변방(리 바트) 수비대에 복무하는 자들에게는 특혜가 있거니와 이 변방이 적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래서 적들의 공격에 대한 경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특혜의 정도가 높다. 적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없는 한 자식들은 부모의 동의 없이 손에 무기를 들고 출정할 수 없다. 단, 적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물리쳐야 될 필요 가 절실한 까닭에 이 경우에는 부모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리잘라 또는 말레크 의식에 따른 이슬람 교리와 법에 관한 사도서한'성전(지하드)편 메카순례 이슬람이 그 신도들에게 일생에 한 번 부과하는 다섯 번째 의무는 이슬람의 성 소(하지), 메카에의 순례. 이곳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1935년 5만 명, 1969년 40만명, 80년대 말 300만 명! 메카가 선지자의 출생지라면, 또 메디나가 632년을 기점으로 선지자의 안식처가 되었다면 메카는 카바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첫 번째 구조물'은 일종의 육면 체로서(가로 12m, 높이 15m) 황금 글씨가 수놓아진 검은 수단으로 덮여 있는데, 태초의 그 날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아의 대홍수 때 파괴된 것을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을 박도 재건했더니와 대천사 가브리엘이 검은 돌(하자르 알아스와드)을 (본래는 흰색이 었으나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검게 변했다는) 가져다 줘 이를 동남각 지상 1.50m 지점 에 봉했다. 순례는 신도들의 삶에서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선지자의 말씀 또한 이를 분명 히 하고 있다. "순례의식을 올바르게 드리고 음란을 행하지 않는 자는 대저 새로 태어난 아 이와 같이 순결하나니."라고 했음이다. 순례의 성월은 헤지라력으로(1년은 354년일에서 355 일이 되며, 양력보다 10일에서 11일이 적어 해마다 순례와 축제일이 며칠씩 엇갈린다) 두번 째 달이다 그리고 엄격한 의미의 순례는 이달 8일에서 13일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 최대의 순례주간 외에도 작은 순례철(우므라)들이 있는데 이는 한해 내내 이루어질 수 있지만 여기 에 하지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못한다. 순례허가조건·메카의 성소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 하고 있거니와 이스람교도에게는 다음과 같은 참여자격을 요건화하고 있다. 즉, 성년에 이르 렀을 것,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것, 여행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있을 것, 타인과의 분쟁이 미해결인 상태에 있지 말 것. 또한 순례자들은 특정한 세금과 납부금을 낼 의무를 진다. 예컨대 1982년 현재 서류작성비와 허가비로 377사우디레알(14만원 정도)을 지불했고 무타비프(가이드)와 교통비로 295레알(9만 정도)을 지불했다. 순례자들은 도착 즉시 무타비 프를 지명해야 하는데 이는 곧 그의 메카 체류를 좌우할 안내자를 지명하는 것으로 자기 여 권에 안내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있게 기록한 다음 관계당국에서 필요한 인증을 받아야 한 다. 세금과 납부금에는 숙박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숙박비는 순례자가 메카에서 호텔에 머무르는가, (메카에는 거의 호텔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객실수는 모두 합쳐 800개에 불과 하거니와 그 가격 또한 대단해서 하룻밤에 약 16만∼24만원 정도를 호가한다.) 무타비프 집 에 기거하는가, 혹은 앞서 말한 16개 사원 가운데 하나에 임시 기숙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 이다. 최근 수년 사이에 무타비프 1인당 활당된 순례자수가 약 4,000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숙박비와 납부금으로 지불한 돈이 대략 24만∼32만 원에 이른다. 때로 방 하나에 10여명씩 기숙해야 되는 경우조차 있었지만 말이다. 모든 순례자들이 순례의 기점으로 삼는 곳은 메 카에서 75km 떨어진 제단이다. 그로부터 순례자들 대부분이 처음 찾는 곳은 선지자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메카 북쪽 447km). 메카를 감싸고 있는 신성구역으로 진입하기에 앞서 이들 순례자들이 영육을 성화 (이히람)하는 곳이 바로 이 첫 번째 순례의식을 행하면서부터이다. 이때에는 수놓아진 옷을 모두 벗고 흰 천으로 된 두 조각짜리 순례복(이흐람:역주)을 걸칠 뿐이다. 그리고 자주 몸을 씻어 세정의 예를 다할뿐더러 탈비야('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의 기도를 반복한다. 제사와 의식 메디나를 출발한 순례자들은 이어서 성소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 들에게 출입을 금지하는 표식으로 세워 놓은 비석들이 성지를 감사고 있다. (성지구역은 마 름모꼴로 생겨 가장 긴 지름이 대략 10km에 이르고 그 한가운데에 대사원이 자리잡고 있 다.) 순례자들은 높이가 90m에 이르는 첨탑이 일곱 개 세워진 모스크로 향한다. 이 사원은 이미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위해 한 번 확장 개축했던 역사가 있는 곳이다. 2만 9,127m였던 단면적이 확장공사 후에는 16만 618m가 되었다. 그리고 사원 주위로는 30m 폭의 도로도 건 설되었다. 아울러 2층에 8,000m에 이르는 수용공간을 마련했으며 사원 옆에 여섯 개의 대중 공간을 새로 확보했거니와, 이에 이르는 문이 64개이고 크고 작은 다른 문들도 수없이 만들 어 놓았다. 이 공사로 현재 대사원은 한꺼번에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사원이 되었 다. 어쨌든 일련의 성화 작업을 거친 순례자들은 비로소 첫 번째 의식을 시작하는데, 이 또 한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로서 대저 '타와프'라 일컫는 원형일주가 그것이다. 곧, 카바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곱 번 도는 것인데, 처음 세 번은 꽤 빠른 속도로 다음 네 번은 보다 완만하게 도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타와프는 동남각의 검은 돌 앞에서 마감 된다. 원칙적으로는 한차례씩 돌때마다 검은 돌에 입을 맞추게 되어 있으나 8만에서 10만 순례자가 함께 의식을 거행하다 보면 검은 돌에 입맞추기란 하늘에 별 따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카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420m간격으로 사파와 마르와라는 두 개의 언덕이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알라의 명에 따라 아브라함이 버린, 아브라함의 하녀 하가르가 이스마 엘과 함께 일곱 번을 뛰다가 정말 갑자기 기적같이 발견했다는 물이 콸콸 솟는 샘터 잠잠이 잇따. 때문에 이 샘물을 마실 거라면 하가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같은 길을 입곱 번 오가면 그에 준비된 기도를 올려야 한다. 더욱이 이 물은 이제 지하로 관개수로까지 뚫어 놓아 공 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은 엄청난 인파 때문에 더욱 힘들다. 한 번 그 길을 오가는 데 40여 분 정도가 걸리는 것이다. 선지자가 걸었던 그 여정을 되풀이하자면 다음 단계로 메카 동쪽 4km 지점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촌락을 들러야 한다. 한때는 그곳에서 나흘 밤을 지내야 하는 것이 순례의 원칙이었으나 순례자들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교회당국은 미 나에서 나흘밤을 지낼 것 없이 곧바로 메카에서 20km 떨어진 아라파트 고원으로 이동토록 허락했다. 그래서 몇 시간 만에 약 2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메카를 떠나 아라프트를 향한다. 이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인간의 물결을 순례자들은 엄청난 인내로 참아내야 한다. 어원을 따져 볼 때, 아라파트란 '지식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새로운 의식을 통해 부 동의 자세로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순례자들이 정오부터 일몰까지 자비의 산 (자발라흐만) 밑에 선 채로(우쿠프)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사실 선지자가 마지막 순례를 와 서 그 신도들에게 최후의 강론을 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오후 6∼7시경이 되면 순례대 열의 머리가 다음 행선지 이둘아드하를 향한다. 순례자들은 제 텐트 앞에서 자기 차례가 오 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여러 자동차들이 이 밤중 내내 양쪽을 셔틀버스처럼 오간다. 밀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밤새 경적소리가 시끄럽다. 이둘아드하는 미나에서 멀지 않은 거대한 투석 경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 순례자들은 다음 여정을 위해 내내 소중하게 간직 하게 될 49개의 자갈을 해뜨기 전까지 밤새 찾아내는 것이다. 오직 이둘아드하 안에서만. 순 례의 절정이라면 아무래도 돌기둥, 잠라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례자들 은 아드하(번제물) 축제의 첫날을 아브라함의 뒤를 좇는 데 바친다. 곧, 하느님이 아브라함 에게 제 믿음의 징표로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라 한 그 장소에 가는 것이다. 약 300m에 이르는 이 길은 중간중간에 세 개의 돌기둥이 있다. 바로 이 길에서 아브라함이 사 탄을 세 번에 걸쳐 만났던 것이고, 사탄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라 이렀던 것 인데, 이 돌기둥이 세워진 자리가 바로 사탄이 출현했던 자리. 아브라함은 아무런 동요도 없 이 이 길 끝까지 내쳐 걸어 하느님께서 지정한 희생제의(아드하라는 말은 바로 이 희생제 물의 제물이라는 뜻에서 파생) 장소에 도달했는데, 그 순간 아들 이스마엘이 어느새 목졸려 숨져 있는 어린양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메카 방향에서 가장 가까운 쪽 돌기둥은 '잠라알 아카바', 두 번째 것은 '알 잠라 알우스타', 세 번째 것은 '알 잠라 알 사르라'라고 불리는데, 이 가운데에 두 번째 돌기둥 옆 170m 지점에는 또 하나의 작은 돌무더기가 서 있다. 아드하 첫날에 순례자들은 49개 자갈 가운데 일곱 개를 골라 먼저 첫 번째 기둥에 최 대한 가까이 선 다음 기둥 한가운데를 겨냥해 힘껏 던져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악마를 상징하고 있는 까닭, 축제 이튿날이 되면 두 번째 돌기둥을 향해 마찬가지로 다른 21개의 자갈을 골라 힘껏 던지고, 사흘째에도 나머지 자갈들을 세 번째 돌기둥을 향해 모두 던진다. 순례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이 의식은 확실히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교회당국의 동 의 아래 고안해 낸 해결책이 이 길을 여러 층으로 내는 것이다. 물론 그 높이에 맞게 돌기 둥 역시 높이를 더욱 오려 쌓고, 지금 미나에는 수백미터 길이의 넓은 '육교'가 세워져 있으 며 3m 높이의 두 번째 길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순례의식은 양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끝으로 완성된다. 이는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마음이 움직인 주께서 마지막 순간에 이스 마엘을 어린 양으로 대치했던 그 감동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동물을 희생제의 제물로 바 치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양이나 염소가 그 대상이 된다. 이 동물이 낙타나 소일 경우에는 일곱 명의 순례자가 함께 그 배용을 분담할 수 있다. 희생제는 '야움 엘 나이르'(축제 첫날) 와 '알 타쉬리크'의 세 번째 날 사이에 드려야 한다. 원칙적으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1/3 이 순례자에게, 다른 1/3이 헌물로, 그리고 나머지 1/3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순례자들의 희생제가 엄청나게 늘어난 지금, 이러한 희생제란 기실 대규모의 도살과 낭비로 끝날 뿐이다. 이제 그 주변에는 제물을 나누려야 나눌 수 없을 만큼, 빈자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성석 인근에서 단 사흘 만에 50만 두의 동물이 목이 졸려 도살되곤 하는데, 성지순례는 대개의 경우 짧게는 십며칠에서 길게는 3주까지 성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뒤안길에서는 이제 내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났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 영혼의 감동과 충만함이 순례길에서의 모든 피로를 잊게 하기 에 충분한 것이다. 무하마드 라비 '늘어가기만 하는 메카의 순례자들', '헤로도토스, 36호, 1985 마호메트와 문학·이슬람 선지자에 대한 유럽인의 관념을 추적해 보는 것은 단순한 호기 심의 차원을 넘어, 이들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성장하는 당시의 이슬람 세력에 대해 어떤 생 각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기독교 유럽은 마호케트에 대해 우스꽝 스러울 정도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사전의 만능성·사전과 백과사전을 일별해 보는 것은 특정 시기의 시대정신과 편집진의 이데올리고를 가장 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마호메트 경우,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모든 사전은 한결같이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르낭 씨의 말에 따르건데 기독교 문명권이 마호메트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바를 보노라면 그것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사람들이 카딕스 지방에서 숭배되던 황금우상 '마음'을 파괴 하려 했지만 거기에 숨어 있을 사탄의 보복이 두려워 샤를마뉴 대제조차도 감히 손대지 못 하고 있다가, 이슬람의 아버지 마호메트가 선지자라는 일견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자마자 이 에 힘입어 우상을 파괴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그릇된 풍문 따위가 그 대표적인 이야기이 다. 외래 종교에 대한 개념이 미비하던 중세 초반의 순진한 믿음은 마호메트, 바포메트, 바 품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는 바품교, 바포메트교, 마호메트교 따위의 미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호메트가 가짜 선지자로 알려져 그가 사기꾼임을 밝혀야 된다는 논의가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반화된다. 그러다가 '존경스러운 피에르'대제 의 명에 따라 '코란'이 불어로 번역되고, 이를 기화로 도미니크파 수도사들과 레이몽 륄, 기욤 드 티르, 마티유 파리 등의 논쟁이 불붙음에 따라 비로소 이슬람과 그 창시자에 대한 올바른 생각들이 단편적으로나마 퍼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드러난 마호메 트의 모습이란 '마법사, 고약한 방탕꾼, 낙타 도둑놈, 교황이 되고 싶었지만 뜻을 못이뤄 제 동류들에게 복수할 요량으로 아예 새로 종교를 하나 더 만든 추기경' 등이다. 기사도에 관한 외설스런 이야기가 그의 생애를 따라다니지만, '미호메트의 이야기'는 사뭇 문학에 가 깝다. 레이노 미셸과 프랑시스키 미셸이 함께 펴낸 '마호메트 이야기'(1831)를 보면 중세인의 눈에 마호메트가 어떻게 비쳤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서 마호메트는 용기와 웅변을 타고난 탁월한 천재, 그래서 인류역사의 거대한 서장 을 연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충직한 가신들에 둘러싸인 봉건영주처럼 강대해서, 오늘도 우 리를 놀라게 하는 저 성곽을 지은 사람처럼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도,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가치가 있는 아래에 인용된 시에 이미 아라비아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피에르 라루스 '19세기 세계대백과 사전' 마호메트 이야기 이 시는 현재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해독 상태에 남아 있으며 이 책의 저 자 안 마리 델캉브르 교수도 이 시를 현대 불어로 옮길 수 없음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이 시의 원문을 싣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문화접목의 상징성 때문이다 코란의 화자를 그나마 호의적인 의미에서 역사 서술자로 간주했던 17세기의 베일에게도 나름의 편견이 있었다. 베일은 그래도 이슬람 교리가 복혼과 복수의 계율을 제외한다면, 기 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개창과 더불어 널리 퍼졌고 지금도 역시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6세 기경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와 가족상황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아브르 알라였으며, 어머니가 에미나였으며, 이들이 가난했 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아브르 알라는 마호메트가 태어나기 2개월 전에 죽었다. 에미나는 마호메트가 여섯 살 때 남편의 뒤를 좇았으며, 아브르 알라의 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 또한 에미나가 죽은 지 2년 뒤에 같은 운명을 맞는다. 마호메트의 삼촌인 아브 탈 리브와 그의 아내는 조카의 처신에 아주 만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를 결혼시킬 만한 돈 이 없었던 까닭에 그로 하여금 시리아 대상을 경영하는 어떤 여자를 섬기게 했다. 하디자라 는 이름의 이 여자는 낙타지기가 아니라면 말몰이꾼이었던 이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 그와 혼인을 맺었다. 당시 마호메트는 25세 였다. 그는 이 여자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고, 그 아래로 네 딸을 길러 능히 출가시켰다. 마호메트는 본디 간질병을 앓았는데 자기의 병을 부인에게 숨기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이는 여느 병이 아니요,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신앙에 대한 하느님의 새로운 말씀을 자기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말해, 이를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속았거나 혹은 속은 척한 하디자가 집 집마다 찾아다니며 자기 남편이 선지자임을 고지함으로써 그녀는 남편에게 구경꾼들을 몰아 주었다. 그의 말에 설복당한 노비를 비롯해 다른 몇 사람이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야기를 전 하고 다니니, 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해 마침내는 메카의 판관들도 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더욱이 밀교의 탄생이 가져올 사회불안이 걱정되어 이들은 마호메트를 처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통보받자마자 마호메트는 즉시 도망을 쳤다. 피에르 바일 '역사 비평 사전' 18세기는 사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모든 종류의 사전이 온갖 형태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백과사전'은 이 시대 사전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다. 이 종교는 이슬람이라 불리는데, 이는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함을 뜻한다. 이들의 메시 지를 전하는 책이 '코란'이며 이는 성경, 글의 의미하나 정확하게는 강독을 의미한다고 보 아야 한다. 이 책을 해석한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는 분명히 모랄이 들어 있다 고 말한다. 예컨대 "왼 뺨을 치거든 오른 뺨을 대 주며,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을 주라. 위해 하는 자들을 용서하며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라. 무식한 자들과 더불어 다투지 말지어다."와 같은 구절을 보라. 여기에는 분명히 학식 있는 자들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다투지 말라는 뜻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과학과 지혜가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책의 여기저기에는 동양적 사고의 일단이라 할 논리의 불연속성도 보이 나 유려하기 그지없는 면들이 여러 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노아의 홍수가 멈추어짐을 설명 하는 마호메트의 이야기를 보자.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대지여, 저 물을 모두 삼키어라. 하늘아, 네가 토해 낸 저 물을 거두어라.' 하심에 하늘과 땅이 이에 복종하더라." 그가 하느 님을 정의하는 바를 보노라면 이는 숭고하기조차 하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만드사 다른 모든 이를 제 형상대로 지으시니, 이들은 어느 것도 제 형상대로 지어내지 못하고 누구도 다른 누구의 형상대로 지어지지 못하더라. 모든 존재를 아울러 보되, 어느 것도 이에 가늠하 지 못하나니." 그러나 이 책은 모순과 불합리와 시간대의 불연속성이 넘쳐난다. 가장 간단하 고 가장 상식적인 물리학적 지식에 대하여조차 완전히 무지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거 기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씌었다고 자처하는 거짓 성서를 쉽게 판별할 수 있는 기준점들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그토록 불합리하고 무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불합 리성을 보지 못하는 속인들이나 이를 경배하니, 이맘 또한 이러한 불합리성을 은폐하기 위 해 말의 홍수를 만들어 낸다. 디드로 '백과전서' 트레부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1701년부터 문예비평지를 발 행했는데, 흔히 '트레부지'는 그로부터 얼마뒤에 성격을 달리해 기독교 수호의 전위에 섰다. 마호메트: 인명, 무하메드, 마호케투스, 마호메태스. 마호케트교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원래 는 최하층민이었으며, '하느님의 종복'이라는 뜻을 가진 아브드 알라라는 이료도의 아들이 었다. 6세기 말엽에 출생하여 7세기 초부터 자신의 기상천외한 교리들을 전파하기 시작했 다. 그러다가 622년 7월 16일, 메카를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유명한 헤지라의 시대 곧, '도피'의 시대를 창건한 이 사람은 63세 내지 65세에 사망했다. 마호메트 1세, 마호메트 2세 등이 터키의 술탄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라는 이 사람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좀전까 지 얘기했던 거짓 선지자일 뿐이다. 마호메트는 탁월한 야심가였고, 지나치리만큼 잔인한 사 람으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무식쟁이에 오직 알라의 사자라는 생각에만 찌들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라비아어로 '찬양하다'라는 뜻을 지닌 '하마다'에서 나왔으며, 마호 메트라는 이 이름은 사실 '찬양할 만한', '유명한', '저명한' 따위의 뜻을 갖는, '하하메드'라 는 그의 본명에서 파생되었다. 트레부 '사전'(1771년판) 마호메트와 연극·마호메트의 일대기는 비단 사전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희곡작가들에게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볼테르는 그를 광신자로 보았고, 괴테는 살인마로 보았다. '마호메트 또는 광신', 볼테르의 비극작품(릴 대극장 1741년 공연, 코메디 프랑세즈, 1742 년 공연). 이슬람교도의 광신을 소재로 하며 광신의 모든 문제를 다루거니와, 종교적 열정이 가져올 수 있는 탈선과 범죄를 함께 보여 주겠다는 것이 작품의 의도. 드라마로서의 '마호 메트'는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물에 불과하다. 선지자가 종교를 기반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 설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함으로써, 종교 또한 허위를 기반으로 건설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자기 의도를 숨기려 하지조차 않을 만큼 야심에 차 있다. 그는 자기의 의도를 관 철시킬 수 있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도구로 제이드를 두고 있는데, 그의 광신이 범죄로 치 달아 죽음에 이른다. 라파르프는 이 연극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18세기의 일반적 인식을 대변해 준다. "'마호메트'는 우리들 모두에게 교훈적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신념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더 멀어졌던 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호의로 다시 가까 워지게 한다. 이 작품은 순수한 영혼에 받아들여졌던 신앙이 어떻게 해서 뜨거운 상상력으 로 불지펴져(건강한 몸에 파고든 고열이 훨씬 더 지독한 법!). 미덕의 수양에 쏟아 부었을 모든 에너지를 범죄행위에 쏟게 되는 광신으로 번지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광신을 경계할 수 있게 한다." 피에르 라루스 '19세기 대백과사전' 마호메트 또는 광신 볼테르 조피르, 파노르(1막, 1장) 조피르 누구? 나? 거짓 탕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고?이 광신자에게 영관이 돌아가게 내버려두라고? 겨우 그를 메카에서 쫓아냈는데 다시 그의 영광을 드높이자고? 안돼. 지금까지 자유롭고 순 결하게 지낸 이 손이 바란을 탐닉하고 사기꾼을 숭배한다면, 이 조피르가 정의의 하느님께 벌을 받아도 마땅할지니. 파노르 당신 안의 그 뜨거운 부정이 감탄스럽군요. 엄숙하고 성스러운 성자 이스마엘 같은 지도 자의 열정이. 그러나 이 열정도 불길한 거외다. 그토록 싫다 하니. 무엇으로도 마호메트의 복수를 막을 수 없을 게요. 그의 도발에, 한때는 당신이 성스러운 율법의 칼을 들었다지만, 불사의 전쟁으로 막아 섰다지만, 당신 발 아래 생긴 맨 처음의 불씨를 잠재웠다지만. 당신 눈에 보이는 마호메트가 얼토당토않은 사기꾼, 유혹하는 사기꾼이겠지만 말이요. 오늘, 그는 왕이 되어 나타났소. 승리하고 군림하는 자로. 메카에서는 사기꾼이나 메디나에서는 선지자 란 말이요. 그는 서른 개의 나라로 하여금 우리가 싫어하는 저 죄악들을 올곧이 경배케 할 줄 안단 말이외다. 내가 무얼 말하오리까? 이 성벽 안에조차 유랑하는 군대가 있으니, 그에 대한 열광이 독약처럼 번지고 그의 거짓 기적이 환상을 부채질하니, 광신과 유혹이 사방으 로 번져 그의 군대가 넘쳐나외다. 무서운 신이 그에게 힘을 불어넣으사, 그를 이끌고 그를 승리케 한다는 믿음이 그것이오. 우리의 진정한 신민들이 당신과 함께함이 지당하나, 그러 나 그들이 언제나 최고의 말씀대로 따른단 말이오? 새것이라면 열광하며 광기에 들뜨는 게 저들이건데, 메카가 두려움에 떨고 있소. 우리의 선행에 의지하며 사는 저들이 저들의 아 버지께 소리치고 있고, 평화를 갈망하고 있소.·조피르·배신자와 평화라니! 아, 용기없는 백성들이여, 끔찍한 노예생활이 그대들을 기다릴 터, 가라, 가서 무릎 끓고 우상 앞에 나아 가라. 저 우상이 그대들 모두를 짓누르고 말 터이니.·마호메트, 제이드, 팔미르(제3장)·마 호메트·내 노라운 권능의 영원한 지지자. 성스럽고 찬란한 알리, 모라드, 엘시드, 아몬, 이 신민들을 굽어보사, 나의 이름으로 저들을 인도하소서. 진리가 승리할 것임을 약속하시고 또 한 훈계하소서. 나의 하느님을 경배케 하되, 또한 두려워하게 하소서, 제이드여 이리로 오라. 제이드 오, 나의 아버지, 나의 왕이시여! 당신을 인도하시는 하느님께서 내게로 오사 당신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 하셨으니, 무엇이든 행하라 하셨으니, 내가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나이다. 마호메트 그분을 기다려야 했다니, 금지된 일을 행하는 자, 나를 섬길 줄 모르는 자라. 내가 하느님 께 복종하듯 그대들은 나에게 복종해야 할 터. 팔미르 오, 주여! 그의 참을성 없음을 용서하소서. 우리 어릴 적부터 당신의 품안에 같이 자라 동질의 감성대가 우리 둘을 휘감고 있건만, 불 행토다, 나의 슬픔이 여전하구나. 당신으로부터 멀고, 그로부터도 멀리 있으니, 나는 포로가 되었구나. 젖은 내 눈이 빛에 일렁이니. 주여, 정녕 당신은 내 행복에 독을 타렵니까? 마호메트 팔미르, 도가 지나치오. 당신 속을 보건대 당신은 무엇에도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무 엇에도 놀라지 않는구려. 내가 제단을 세우고 왕좌를 일으킨다 하나 당신의 운명을 내가 늘 지킬 것인즉, 내가 이 세상을 지키듯 당신을 지킬 것이오. (제이드에게) 당신은 나의 전사들 을 따르라. 그리고 젊은 팔미르여, 그대는 그대의 알라를 섬기며, 오직 조피르만을 두려워할 것이오. 마호메트 요한 볼프강 괴테 1막 서장 등장인물: 마호케트, 알리마(마호메트의 유모) 장소: 별이 총총한 들판 마호메트의 독백 이 영혼을 가로지르는 것을 너희들과 더불어 나눌 수 없구나. 내 감정의 전부를 너희로 하 여금 느낄 수 있게 하지 못하니. 화염의 기도에 누가, 누가 귀기울이리? 간구하는 이 눈동자 에 누가 시선을 주리? 보라, 별이 솟아 반짝이니 영롱하게 웃는구나. 나로 하여 주가 되게 하고 알라가 되게 하라! 나에게 손짓하라! 더 머물 것인즉, 가지 마라. 아니, 너의 시선이 나 를 피하다니? 한탄스럽구나, 그토록 사랑하는 그가, 그가 숨다니! 달이여, 너를 축원하노라. 별들의 왕이여, 나로 하여금 귀부인이 되게 하고 여신이 되게 하라. 너에게 이르는 지름길 이 있으니, 이 어둠 속에 나를 홀로 있게 하지마라. 방황하는 신민 속에 나마저도 방황케 하 지 말지어다. 뜨거운 태양아, 뜨겁게 달구어진 가슴이 너에게 가나니, 나로 하여금 주가 되 게 하고 알라가 되게 하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인도하라. 영광의 그대. 이제 너마저도 멀 리 하강하려 하느냐? 여기 깊은 밤의 한자락을 붙잡고 내가 있으니, 사랑으로 충만한 가슴 으로 일어나, 여기 너를 창조한 이를 보라! 나로 하여금 주가 되게 하고 알라가 되게 하라! 모든 것에 사랑으로! 태양과 별과 달과 하 늘과 땅이. 그리고 내가 어디서 만들어져, 어디서 오는 거냐? 대화 (마호메트에게 알리마가 다가온다.) 마호메트: 알리마, 아, 하필이면 당신이라니. 이 환희의 축제에 가당치 않게. 도대체 나에게 무얼 원하는 게요? 알리마: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 다오. 해가 지고 여지껏 너를 찾아 헤매었으니, 너의 부드러운 젊음을 이 밤의 위험에 앗기지 말아라. 마호메트: 한밤이든 한낮이든 고약한 자에게는 매한기지로 고약한 법. 악은 제 스스로에게 불행을 몰고 오게 마련인데, 두꺼비가 독을 품음이 무에 이상하리오. 건강을 지키는 부적 따 위, 저 하늘 아래 무용지물이니 젊음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명약이라오. 알리마: 뭐라고? 이 허허벌판에 혼자서 있겠다고? 불한당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 한밤 중에? 마호메트: 나는 혼자 있지 않았다오. 우리 주 하느님게서 크신 은혜로 나를 감싸안았다오. 알리마: 네가 정녕 그 분을 뵈었단 말이냐? 마호메트: 당신은 그분을 보지 못한단 말이오? 내가 그분을 뵙노라면, 내 사랑의 열기로 덥혀진 구분과 교통하노라면, 나무의 꽃도, 정적도 사라진다오. 갑자기 내 가슴을 움싸고 있 는 껍질이 터져 나가는 듯. 멀리 심장이 터져 나가고 비로소 그분이 다가오심을 느낀다오. 마치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는 듯이. 알리마: 심장이…터진다고? 혹시 미친 게 아니더냐? 그러고도 어찌 살아 있을 수 있다나 말이냐? 마호메트: 내 주님께 간구하여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터이다. 알리마: 도대체 너의 하느님이란 대저 누구이건데… 알 파타스더냐, 오발이더냐? 마호메트: 불행토다, 가난한 백성들이여. 돌덩어리에 대고 "주여!"를 외치고, 흙더미 따위 에 "축복!"을 외치는 구나! 대체 그것들 어디에 기도를 들을 귀가 있으며, 도움을 베풀 수 있는 팔이 있다는 게요? 알리마: 돌안에 거하시는 그분이, 흙 속에 계신 그분이 나의 목소리를 들어 아는 게 아니 더냐? 그 위대함이 힘의 근원이 아니더냐? 마호메트: 오호라, 위대함이라! 그래서 300명이나 되는 저 사람들이 좁은 틈새로 서로 밀 치며 기도를 올린단 말이오니까? 저들의 제물에서 나는 연기가 무슨 신탁이라도 된다는 듯 이? 당신들은 서로를 저주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소. 이게 당신들의 신이오. 얽히고 설킨 땅 의 한자락을 붙잡고, 온 길을 가로막고 서서 끝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는 거외다. 알리마: 아니 너의 동반자도 없더란 말이냐? 마호메트: 동반자가 있다면 그게 어찌 신이리오? 알리마: 그는 대관절 어디 계시기에? 마호메트: 어디든지 계시다오. 알리마: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과 진배없으려니. 어디에나 있다는 너의 신을 만져 볼 수나 있겠느냐? 마호메트: 물론이오. 당신 사랑에 감사하며 당신을 쥐었던 이 두팔로 보다 더 힘껏. 더 뜨 겁게 만질 수 있다오! 나 역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지만, 알리마, 나 는 포대기에 싸여 있던 어린아이와 같더이다. 내 팔과 내 발이 어둠 속에 저절로 자라니 내 맘대로 할 수조차 없더이다. 알리마: 아, 완전히 변해 버렸구나! 성품마저 변했으니, 정신 또한 일그러졌을 터, 빨리 제 부모에게 되돌려 줌이 낫겠구나! 설사 일이 완전히 그르쳐진다 해도 내 책임이라고는 할수 없을 것이니! 라마르틴, 열린 정신의 소유자 1833년에 동방여행을 떠난 라마르틴은 기독교의 독단주의를 넘어서서 종교적 자유주의에 경도된다.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열린 가슴으로 이슬람 세계에 다가서는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 어떤 인간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렇게 숭고한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이 목표 는 가히 초인간적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미신을 타파하고 하느님을 인간에게, 인간을 하느님에게 되돌려주며, 우상으로 왜곡된 이 혼돈의 세계에서 경건하고 합 리적인 사고를 되찾게 해준다. 그 어떤 인간도 일찍이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또 오직 자 기 자신과 사막의 다른 한쪽에 있는 한 무리의 보조자들만으로, 계획에서나 실천에서나 인 간의 힘을 초월하는 이렇게 큰 역사를 벌일 수 없었다. 나아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인간도 그토록 짧은시간에 그토록 엄청나고 그토록 지속적인 대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예언이 있은 지 단 두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복음과 무기를 지닌 이슬람 사상이 아라비아 3 국을 복속하고, 페르시아와 호라산, 서인도, 시리아, 이집트, 에티오피아는 물론 우리에게 알 려진 북아프리카 제국 전부와 지중해의 섬나라들, 스페인, 그리고 일부 골지방가지 널리 퍼 져 나간 것이다. 계획의 원대함과 수단의 간단함, 결과의 광범위함이 이 인간의 재능을 나타 내 주는 세가지 척도라면 현대사의 위인이라 할지라도 그 어느 누가 감히 마호메트에 비견 하려 들 수있을까?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무기와 법률과 제국을 움직였을 뿐이 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 이전에 이미 전해 내려온 물질적인 힘만을 겨우 건설했을 뿐이다(그들이 정말 무언가를 건설했다면…). 그러나 그는 이 지구상의 1/3을 차지하는 수십 억 사람들을 움직여 군대와 법률과 제국과 신민과 왕조를 세웠다. 그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제단을 세우고 하느님을 받들어, 종교를 일으키고 사상과 신념과 영혼을 부흥시켰다. 구절구 절이 그대로 법규가 된 책을 지어, 언어와 인종이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의 정신으로 통일 했으며, 우상에 대한 증오와 유일신에 대한 정열을 이슬람교도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신성 모독에 대항하는 이들의 열정은 마호메트의 후예들이 지니는 최고의 미덕이다. 신통계보학 (다신론자들이 여러 신들의 계보를 연구한 체계: 역주)의 혼란 속에서 공포된 신의 유일성 개념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서, 유일신의 선포와 함게 모든 우상의 신전들을 불살랐으며, 지구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 주었다. 이 사람이 사기꾼인가?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건대 결코 그렇지 않다. 사기꾼이라 함은 신념을 허위하는 자, 거짓말이 어 찌 진실의 마력을 가질 수 있으랴! 본디 투사력이라는 것이 충동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라 면, 역사에서 행동이란 고양된 영감의 총량에 일치하는 것. 그토록 높고 멀리, 오래 지속되 는 사상이란 곧 신실하고 설득력 있는 사상이라는 것일진데… 그의 살모가 사상, 미신에 맞 선 영웅적인 투쟁,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 이에 불구하고도 메카에서 보낸 인종의 15년 세 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용기, 동류들 사이의 조롱, 어쩔 수 없는 피 신, 끝없는 포교, 열악한 조건에서의 전쟁, 승리에 대한 믿음, 이면에 간직한 초인적 인내, 승리 후의 너그러움, 제국이 아니라 신념을 지향하는 그의 야망, 끝없는 기도,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대화, 그리고 죽음, 죽음뒤의 승리. 사기꾼의 삶이라고 보기에는 신념으로 충일한 삶. 그가 하나의 교리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신념에 기초해서였다. 그리고 이 교리 는 두 개의 원칙 위에 세워졌다. 하느님의 유일성과 빗물질성. 전자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이야기한다면 후자는 하느님의 전능하지 않으심을 이야기하는 것. 전자가 거짓신들의 목을 칼로 베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말씀으로 신앙을 세우는 이야기! 철학자, 웅변가, 하느님의 사도, 입법자, 교리의 완성자, 사상의 정복자, 지상에 20개의 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이를 통일 하는 단 하나의 정신세계를 건설한 사나이, 그가 마호메트이다. 이 인간의 위대함을 어느 단계에 놓을 것이며, 누가 그만한 위치에 있을 것인가? 라마르틴《터키사》 이슬람의 여자들·이슬람 여성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유럽인들의 비판적인 시각에서든 이 슬람교도 자신들의옹호적인 관점에서든,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이 이루어졌다. 현대 민속학의 성과는 여성들에 대한 억압이 이슬람 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민속학자 제르멘 틸리옹은 '하렘과 사촌들'이라는 저서에 서 지중해 양안에 공히, 여성에 대한 공통된 태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누이의 명예 지중해 남북 전역에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여자들의 순결은 남자형제들이, 특히 맏 아들이 관장해야 될 일로 되어 있다. 일곱 살짜리 꼬마 남자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한창때 의 누이를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 다니는 광경이 흔치 않다. 흡사 이 꼬마가 누이에게 닥치 는 위험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 위험이라는 것이 꼬마에게 는 엄청난 수치의 근원이 되어,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혀 무덤 속에 있 는 조상님들마저 뛰쳐나오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혼자서는 코 도 못 닦는 이 꼬마가 자기 하녀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며, 연모의 대상이자 전제권을 휘두를 수 있는 자기의 종복이고, 또 질투의 대상이 되는 아리따운 소녀의 보호자로 나서, 둘 사이의 내밀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온갖 힘을 행사한다. 누이라는 이 아리따운 소녀에 대 해. 코란 혁명 기독교력 7세기에 이슬람은 도시화의 과정에서 만연되기 시작하는 아라비아 사회의 균열 에 대항해 투쟁을 시작했다. 그것도 현상적인 균열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 근원에 대한 투쟁 을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균열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포함하거니와, 이미 이 당시 부터 이 차별의 근원으로 '전통구조의 붕괴'가 거론되고, 그에 따른 저항운동이 태동하고 있 었다. 이를 인위적으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요구가 도시와 부락에서 넘쳐나니,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유목민들의 법규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산과 관련한 이슬람법을 보자. 아 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가 상속받는 재산의 1/2에 해당하는 몫을,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상속재산의 1/2을-나머지는 고인의 미망인과 선대와 형제들이 분할하기에-딸이 물려받을 수 있다. 미망인은 남편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상속재산의 1/4을, 자손이 있을 경우 1/8을 갖게 되어 있다. 고인의 선대가 아직도 생존하고 있으나 고인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부와 모에게 각기 동등하게 1/3을 분할하고,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1/6씩을 분할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산상속법이 어느 측면에서 합리적이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당시 이 법이 반포되었던 사회적 맥락을 조명해 보아야 한다. 곧, '코란'은 전적으로 남편으로 하여 금 (설사 아내가 자기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해도)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책임지 도록 했다. 더욱이 아내에게는 자기 소유의 재산을(지참금, 전남편과 사별하며 받는 혼인금, 유산 등) 혼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 당시 입법자들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분 아니라 때가 되면 아내와 자식의 생존을 책임지게 한 반면, 딸에게는 남편에게, 나중에는 아들에게 의지해서 살 수 있게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필요이외의 다른 부담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걸음 더 나 아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스스로 벌어야 하는 아주 비극적인 경우, 곧 과부이면서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의 경우라면 아버지 재산의 1/2을 상속받고 남편재산의 1/4을 상속받을 것이며, 결혼할 당시에 남편에게서 약속받은 혼인금 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코란'이 반포될 때 함께 선포된 이러한 법조문이라면 문명화 된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농경 부족사회에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는 폭탄으로 간주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재산이라는 것이 직물다발이나 돈주머니로 전해지는 이슬람 마을의 부자들 에게는, 이 재산을 유산의 형태로이든 결혼지참금의 형태로이든 이슬람법이 정한대로 조각 조각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비록 이 때문에 기독교도들이 언제 나 그러하듯 재산을 큰 덩치째로 간직하는게보다 드물고 보다 어려워졌지만, 유목민들 또 한 마찬가지 기준에 따라 낙타이건, 암양이건 또는 염소이건 간에 모든 재산을 쉽게 분할할 수 있었다. 이들의 현실을 살펴보면 이 분할의 의미가 보다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양을 49마리 가진 어느 베두인 사람이 홀어머니와 아들 둘, 딸 셋, 그리고 과부 하나를 남긴 채 죽었다고 하자. 교회법에 따라서 여섯 마리는 과부에게, 여덟마리는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세 딸에게는 각기 다섯 마리가, 두 아들에게는 각기 열 마리가 돌아가게 되어 있다. 덧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도합 49마리에 이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렇게 재산이 나누어 진다 해도 현실적으로는-다툼이 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그나마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이것이 흩어지지 않는다. 우선 할머니가 양 여덟 마리를 가지고 혼자서 어쩔 것이며, 며느리 (아이들 전부의 또는 일부의 어머니) 또한 양 여섯 마리를 가지고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 겠는가. 더욱이 할머니나 며느리나 딸들은 혼자 살 것을 두려워할뿐더러 아직 보호가 필요 하다. 장차 오빠이건 아들이건 손주이건 간에 의지할 이 남자에 대해 일정한 지분까지 확 보하고 있는 마당에. 유산으로 상속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일정한 신뢰를 가지고 그로 부터 보호를 기대하며, 그의 쥐꼬리만한 수입이라도 나누자고 할 수 있는 터에. 아들 또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터이다. 따라서 모두들 장남이, 아버지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해결 해 주기를 기대한다. 비록 이들 모두는 자기 지분이 얼마만큼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재산의 분할이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농경정주민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들이 분할하는 것은 가축도 아니고 돈다발이나 직품다발도 아니고, 땅이기 때문이다. 죽으면서 48헥타르의 농지를 남긴 농부에게 앞서 말한 것처럼 일곱 명의 유산상속자가 있다면 딸들과 부인에게 약 20헥타르의 땅을 베어 내줘야 한다. 그리고 이딸들은 다른 부락의 다른 종족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언 젠가는 이방인이 될 수 있고, 이 이방인들이 어느 날엔가는 친정 할아버지의 땅을 소유해 이땅이 완전히 이방인의 이름으로 소유될 수 있다. 마그렙 농민들의 경우, '토지의 균일성'과 다른 성씨를 가진 남자일 경우 '형제'로 입양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착을 불가능하게 한 '다른 성씨의 토지경작권 행사 불가능성'에 기초 한 전통적인 사회 구성형태를 이슬람 법제가 뒤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문중 의 토지경작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주어진 토지의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중심자리에 시 조의 묘를 들여놓곤 했는데 말이다. 제르멘 틸리옹 '하렘과 사촌들' 만일 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에 대항해 저항할 것을 명령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자에게 남자에 대해 대항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선지자의 이 한마디가 이슬람 여성에 대한 선대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이상생활 사막의 어머니들에게는 딸의 출생이 아들의 출생과 같은 주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 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산을 돕는 여자들이 알라에 대한 찬미송을 부르며 탄성을 지르지 않 는 한, 아이를 산모에게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또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여자이라 는 것을 산모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관행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에 사는 베두인 사람이건 도시의 하층민이 건 중산층이건 상류층이건, 심지어는 궁정에서도 그랬다. 부자들도 딸이 태어났다고 해서 아들이 태어났을 때처럼 풍성한 잔치를 벌이는 일이 없었다. 이는 여자아이들이 이미 어렸 을 때부터 모든 사회생활로부터 격리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오직 아들만이 집안의 생존을 보 장해 줄 수 있다는 곧 외부의 적에 대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베두인적 현실을 나타내 주 는 것이기도하다. 더욱이 딸은 결혼과 동시에 가족을 떠나 남편과 살며 아들을 낳음으로써 상대부족을 더욱 더 강화시켜 줄 게 아닌가, 이슬람 이전 시대의 베두인 사람들은 딸이 태어나자마자 이를 사막의 모래밭에 산 체로 매장해 버리는 경우가 있어 '코란'이 이를 강력하게 금지했을 뿐 더러 무조건 아들을 원하거나 딸의 출생에 표정이 굳는 아버지들을 비난할 정도였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부모이다. 선지자 집안에서 쓰,인 아미나, 하디자, 아이샤, 자이납, 파티마, 움쿨숨, 나피샤, 로키야 등이 이슬람 국가 대부분에서 쓰이는 여자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행이나 가족의 전통, 지역 적이고 또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출생직후에 또는 지역에 따라서는 생후 7일째에 성직자가 부모짐에 들러 아이의 이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다음, 아이의 귀에 대고 기도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아이를 신자들의 공동체에 포함시킬 뿐더러, 미신적인 생각이지만 앞으로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는 악령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수나는 아이의 생후 7일째에 아이의 머리를 밀고, 동물을 잡아 번제를 드리도록 권 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벼운 정도의 값이 매겨져 있다. 즉 아 들에게는 낙타 두 마리를 잡되, 딸의 경우에는 한마리로 족하고, 그도 아니면 생략해도 무 방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잡은 동물의 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그 밖에도 신 자들에게는 아이의 머리카락 무게만큼의 금이나 은을 오몬에게 받치도록 권고되곤 했다. "베리을 찢어라!" 이라크 시인, 쟈말 시카 아자하우가 금세기 초에 조국의 여성들에게 했던 말이 이것이 다. 지난 세기의 후반기부터 몇몇 이슬람 국가의 소수 진보적 지식인들의 눈에는 베일이야 말로 이슬람 세계의 몰락과 더불어 더욱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가로막고 개명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상징물로 보였다. 이집트인 리파 베이의 프랑스 여행기를 보면, 프랑스 여성들의 주로 그가 접촉했던 부르 주아 계층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의 이슬람 사회를 사는 지식인의 눈에 어떤 점에 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리파 베이는 첫번째 이집트 학술대표단을 이끌고 1826년부터 1831년까지 파리에 머물렀으 며, 그의 보고서에는 두 세계 사이의 차이점이 동양이라는 한 세계가 유럽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해 가진 당시의 무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리파 베이는 그 글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혼자서 여행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또한 이 나라의 속담을 보면 남자의 아름다움은 지성에 있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화술에 있다고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닌게 여성들에게도 지성과 제주 와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자기 조국 사람들에게 프랑스 여자들에 대해 말하며 "그곳에서 여자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고 전한다. 완고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익숙한 동 양인에게 서유럽의 예법 또한 의심스러워, "남자들은 어떤점에서 여자들의 노예라고까지 볼 수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엄격한 정통 이슬람교인 이 사람의 눈에는 프랑스 여성들의 모 랄 또한 비판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여성의 미덕이란 베일을 썼는지 안썼는지에 따라 결정 되는 게 아니라 그녀의 교육 정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훗날에 이집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최초로 창안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일, 밀라야, 아바야, 차도르 또는 차르샤프란 여성들에게 보호막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1919년 봉기를 주도한 이집트의 진보주의 여성들은 바로 베일밑에 무기를 감추기도했다. 이 집트 여자들이 조국의 정치투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란에서는 진통 의 1978년 후반기에, 여성들이 차도르 밑에 무기를 감추어 다니기도했다. 오늘날에는 작은 촌락이나 시골의 빈민층 부녀자들이 베일을 쓰는 걸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에는 이것이 일 하는데 방해가 된다 해서 쓰지 않던 것이다. 이는 상층계급 사람들의 서구화에 대항하는 항 의표시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초기에는 베일과 이슬람 전통복식에 대한 투쟁 이 서장을 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히려 복고적 풍속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성 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아직도 터부시되고 있는 이슬람의 현실에서 여자들이 선호하 는 직업군이 있다. 대학졸업자들은 우선 여학교 선생님이나 여자대학 이집트에는 여자대학 이 많이 있다. 교수가 되기를 바라며, 의사가 된다면 산부인과나 소아과에 가기를 바란다. 중간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분야에서 간호원으로 일 하고자 하고 있으며, 겨우 얼마 전부터 남자 동료들과 함께 사무직과 연구소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생겼다. 필자는 이집트와 시리아, 이란에서 여성 전용이나 남성 전용의 작업장들이 있는 걸 여럿 보았다. 이러한 현실은 대부분의 하층민들이 아직도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으며, 이들에게 근대적 교육이 그리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가정의 아버지들이 자기 딸을 이 성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공장에 내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들을 성별에 따라 구분함으로써 일단은 하층민 여성으로 하여금 집밖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74년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 모로코 여성이 자신의 학위논문에 적기를, 만일 어떤 여자가 직장의 요구에 따라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다면 그녀는 반드시 사회 하층민으 로 전락하고 말리라고 했다. 확실히 오늘날에 사회생활의 의무를 면제받은 사람은 부유층 부인들뿐이다. 그러나 실업이 만연해 상당히 많은 수의 남자들이 제대로 식솔을 부양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에조차 자신의 아내를 다른 남자의 감독하에 일하게 놔두는 남편이 있다 면, 이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뚜재이 정도로 치부되고 만다. 여자가 직업활동을 통해 스 스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란 모로코나 튀니지, 이집트, 터키처럼 인력이 남아도는 나라에서 는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현재의 유럽에서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일들이 있다. 예컨대 가정부라든가 판매원이라든가 하는 직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에서는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남자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아주 드문 경우로 외국인 여성들이 진출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자신의 몸을 아바야로 칭칭 둘러싼 이슬람 여인네가 바그다드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 선다. 그리고는 남자 점원에게 속옷을 산다. 분명히, 우리 서구인들의 눈에나 이러한 현상 이 역설적으로 비쳐질 것이다. 시아파의 분열 이슬람은 무엇보다 하나의 신앙체계이다. 이슬람은'코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선지자 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신자들의 공동체안에 "하느님외에 다른 신은 없나니, 마호메트는 하느님의 보내심을 입은 이라"라는 믿음을 선포하는 데서 그 존재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이 러한 근본 신앙에 고집을 제외한다면 이슬람은 하나가 아니다. 시아파 시아파, 루이 마시뇽의 표현에 따를 때 '이슬람 정통주의자들'인 이들은 선지자의 후계자 가 그 집안사람들 가운데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바람이 실현된 것은, 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알리가 칼리프의 직위에 오른 것은 오스만이 살해되고 나서이며, 승계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던 그의 재위 또한 상대 적으로 짧게 끝나고(656-661)파란으로 얼룩졌다. 그의 승계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던 아이사 가 알리의 옛 동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알리는 지지자들을 찾아 메디나를 떠나고, 자신의 대의를 환영하는 이들이 있는 이라크 남쪽, 쿠파에 정주한다. 그 리고 바로 거기에서 아이샤 진영에 대항해 656년 12월에 군대를 일으키고 대승을 거두니, 이것이 소위 '낙타전쟁'이다. 이것은 또한 최초의 이슬람 내전이기도 하다. 1년 뒤에는 알리 가 새로운 적수를 만난다. 아라비아와 이집트가 신중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을 당시. 시리아 전역이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살해당한 칼리프 오스만의 부모 모아비야는 곧 시 리아 총독의 편에 섰다. 모아비야가 알리를 자극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충직한 알리의 측근 들이 모아비야의 화청을 거부하며 오직 알리만이 죽은 선지자의 대를 이을 수 있다는 믿 음으로 뭉치니, 말 그대로 확실한 파당(시아)을 형성한다. 이들 알리의 추종자들을 이때 부터 '시아파'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리는 661년, 쿠파의 사원에서 나오다가 카리 자파 젊은이에게 살해당해 네제프에 안장된다. 이때에 이르러 시아파는 알리의 아들 하산에게 희망을 걸지만, 그 역시도 680년초에 살 해당한다. 같은 해에 이라크에 도착한 하산의 동생 후세인이 모아비야의 뒤를 이어 다마스 쿠스의 군주가 된 모아비야의 아들 야지드와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그 역시도 케르벨라 근 처에서 그의 동료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학살당한다. 강자에게 억압받는 약자들과, 또 정의 를 상징하던 알리계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이 시아파의 이념을 순교자의 차원으로, 그리 고 지난한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시아파 신봉자들이 박해받는 자가 되어, 흑기를 사용하며, 이미 성소로 선포된 네제프와 케르벨라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비통해한다. 이슬람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이들은 '선지자 가문의 사람들'에게 충직한 신하로 남는다. 그 들에게는 오직 알리계의 사람들만이 정통 칼리프가 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거니와 바 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칼리프리는 말 대신에 '이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은 3대에 걸친 초대 칼리프의 재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선지자가 운명할 당시에 조성 된 이슬람 공동체(이즈마)의 '만장일치'에 대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시아파의 관념은 신자들 대다수의 합의에 기초하는게 아니라 '무오류와 무결점'인 알리의 직계에서 배출되는 이맘들에 대한 경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마마트의 관념도 시아파의 성립과 함께 보다 중요해지고 그 사회적 적용 또한 확장되었다. 시아파의 이맘을 사원에서 화중 앞에 나아가 (아리비아어 아마마는 '앞에서'라 는 의미를 가진다.) 기도나 이끄는 수니파의 이맘과 혼동해선 안된다. 이맘이 이맘일 수 있는 것은 아담 이래로 하나의 이맘에서 또 다른 이맘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광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광채가 그로 하여금 무오류와 무결점의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무오류성이 그로 하여금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할 뿐더러 무결점성이 그에게서 어 떤 잘못의 흔적도 찾지 못하게 한다. 그 사람야말로 '코란'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사람이며, 시아파의 전통에 따 르자면 이 숨겨진 의미란 본래 선지자가 알리에게만 전수했던 것이다. 때문에 다시 한번 루 이 마시뇽의 말을 빌리자면, "코란이란 침묵하는 이맘이요. 이맘이란 말하는 코란"인 것이 다. 이마마트의 전능성 시아파에게 이맘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당대의 이맘을 진정으로 알지 아니하고 죽는 자 는 불신자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나니"라는 격언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맘은 생전에 알리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정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러한 과 정이 예전에는 물론 오늘날에도 늘 논란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맘의 후보자로 올라 있는 사람들의 정통성 논란이 늘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시아파는 여럿 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동안 배출한 이맘의 수에 따라 가르면, 두오데심계 또는 이맘파가 첫째이고, 이스마엘계 또는 7년파가 다음이라면, 자이드파와 자파르파도 있다. "권위의 교회" 시아파는 이슬람 전체에서 약 10%를 차지하는 소수파이다. 그럼에도 워낙 복잡하게 갈라 져 있어 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시아파중 가장 중요한 세지파(두 오데 심파, 이스마엘파, 자이드파)는 특정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해답을 제시한다. 예컨대 여자 문제에서 시아파의 적대세력들은 이스마엘파가 이슬람 공동체를 여자들의 공동체로 만들어 놓았다고 힐난한다. 두오데심계 이맘파는 정반대로 계약혼(무타)을 허용하고 있으며, 자이드 파는 수니파식의 복혼을 허용한다. 하물며 법·예배·정치·사회문제등에 대해서는 제각기 시아파의 지파수만큼이나 많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여러 지파에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신성한 광채를 발하는 이맘은 언제 어디사나 무오류와 무결점의 존재라는 생각 에는 이견이 없다. 그들은 이 무오류성에서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곧 이맘이란 죄를 짓지도, 실수를 하 지도 않는 존재인 까닭에 신자들은 이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에의 순종이야말로 시아파를 이성과 개인적 판단에 호소하는 수니파로부터 구별해 주 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시아파는 인간이성의 무기력함을 설파한다. 이 분야의 석학, 골드자이어의 말을 빌 리자면 "수니파는 '합의의 교회' 시아파는 '권위의 교회"인 셈이다. 따라서 시아파 율법학자 의 권위란 수니파 율법학자의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수니파의 이맘이 목사라면 시아파의 이맘은 교황이다. 시아파가 저들의 정신적 지도자를 아야툴라 혹은 몰라로 경배 한다면, 수니파는 이들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수니파의 이슬람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시아파가 확산되는 것에 일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고난'을 조장하는 여러 분파들의 발현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 다.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는 분파들이 종종 타키야나 키트마, 곧 정통교리의 옷을 입고 자기 들의 이설을 숨김으로써 억압의 굴레를 벗으려 한다. 이슬람 전체에서는 물론 비교적 다수 를 형성하고 있는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에서조차 소수파로 몰리고 있는 시아파는 불과 얼 마 전까지도 피해자로 자처했다. 순교자는 알리, 하산, 후헤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아파 는 수니파가 다른 이맘들 또한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박해받았다고 믿는 시아파 신자들 의 정서는 스스로의 몸에 채찍을 들어 피를 보일 만큼 오히려 박해에 열광하고 있는 건지 도 모른다. 이라크 정부는 최근에 이러한 류의 태형을 금지하거나 완화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 성행하고 있으며 지극히 피가학적인 양태를 띠고 있 다. 특히 순교자가 된 이맘들의 '정열'을 되살려 낼 수 있다고 믿는 '아수라' 기간에는 그 폭력성이 극에 달한다. 이는 이란에서도 8대 이맘, 알리알 리다의 성소가 있는 콤과 메세드 에서 더욱 심했는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까닭에 아야 툴라 호메이니가 이러한 유습이 솜적이라 하여, 이를 알라의 대의를 건설할 수 있는 보다 긍정적인 방법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것이다. 시아파에게는 성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서도 두 명의 성녀, 즉 선 지자의 딸이면서 알리의 부인이요. 하산과 후세인의 어머니인 파티마와, 이맘 리다의 누이 로서 14세에 사망해 콤에 묻힌 순결한 파티마가 가장 열광적으로 경배받고 있다. 박해받는 자들, 박해하는 자들 시이파가 이슬람 역사상 수니파의 공권결에 탄압받았다면, 시아파 역시도 이들 '정통' 신 비주의자(수피)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이슬람의 수피들이 주장하는 바는 매개자로서 이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느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기 위한 노력이란 사랑과 함께 신앙 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선출된 이맘의 '한 조각 신성' 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알 할라지가 고문에 처해진 것도 (1923 년) 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맘과 아부 샬 알 나부바크티 때문이다. 더욱이 시아파의 가혹함 이 수니파의 그것만 못하지도 않다. 맹목적인 시아파들은 '다신론자들은 불순할지니' (《코 란》2장 28절)라는 《코란》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과의 접촉을 교묘하게 피하여, 그들이 사용했던 그릇조차도 꺼려할 정도이다. 이러한 류의 강경함 은 자파르파라고 자처하는 시리아의 메투알계에게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통해 왕가의 상속권과 선지자의 정통성을 결합시 킨다. 시아파의 흑기는 이슬람 역사에서 셰리프 왕조의 창건자, 이드리스 1세와 함께 모로코 에서 나부꼈다. 아울러 마그렙에서 휘날린 시아파 흑기가 파티미드 왕조(969-1171)의 창건 과 함께 이집트에서도 나부꼈다. 본질적으로 반골적인 시아파는 아주 오랫동안 대항권력으 로 존재했다. 그러던 것이 이집트의 파티마드 왕조, 이란의 사파비드 왕조, 또 북예멘의 자 이드파와 함께 권력의 심장부를 장악했던 것이다. 1970년 이래로 시리아는 국민의 10%에 불과한 알라우이파(노자이리스계)의 하페즈 엘아사드 대통령과 그의 일족이 제11대 이맘을 몰아내고 권좌에 올라있다. 그래서 권력을 장악한 쪽과 이슬람 형제단의 사주를 받은 다수 수니파가 혈전을 벌여 이슬람 역사에서 보기 드문 시아파 대 수니파의 투쟁을 전개해 오고 있다. 그렇지만 시아파를 정치무대의 전면에 내세우고 빈자와 억눌린 자의 이슬람을 건설 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1979년 혁명을 통해 이슬람 공화국을 창건한 호메이니 이맘 때 부터이다. 그러나 시아파 지파들의 이러한 정치적 역할도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교리논쟁을 잠재우 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특정 지파의 논리라는 것이 언제나 다른 지파에 대한 자기 집단의 우월성과 헤게모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제로 이용되는 까닭에, 그래서 다른 지파에 대 한 문화적 베제 기제로 이용되는 까닭이다. 다만 호메이니계의 이러한 다기성을 오직 현존 하는 권력집단을 와해시켜 자기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야기되는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어느 날엔가 '맏디'가 강림하면 정의의 날이 도래해 심판이 있으 리라는 시아파의 믿음은 전 이슬람계에 존재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은 이 맏디가 마호메트였다고도 하고 예수라고 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모세의 신비로운 동반 자 알키드르였다고도 한다. 이를 통해 보건대 맏디 사상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시아파이며 그들에 따르면 알리와 그 보조자로서의 예수가 맏디라는 것이다. 이 맏디 사상 이야말로 이슬람 인민운동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슬람 법에로의 회귀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시간적으로 영원불변하고 공간적으로 일국체제이며, 엄격한 일신에 바탕을 둔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1979년의 이란 혁명을 보고 충격을 받는 한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유럽인들은 단순한 이슬람 신앙의 표상과 전투적 이데올로기를 구별하지 못한 채, '통합주의자'라는 말을 무조건 이슬람법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성의 이름으로 벌이는 투쟁은 622년, 선지자가 죽은 직후부터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역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로 각인되 어 왔다. 이러한 현상이 종교적 계기에 바탕하고 있음을 지명하지만 이는 또한 시대에 따라 부족 간의, 인종 간의, 왕조 간의 또 이념 간의 경쟁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사실이다. 여기에 서의 승리자가 새로운 지정학적 세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1928년에 창설된 이슬람 형제단의 영향 아래 전개된 현대 이슬람 운동이 주창하기를 '코 란은 우리의 헌법'이라고 했거니와 이러한 운동도 벌써 꽤 오랜 역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보다 직접적으로 유럽의 계몽주의 운도오가 산업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지식인들의 나다(르네상스)가 고양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에서 결과적으로 두가지가 뻗쳤으니, 자유주의적 모더니즘과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것이다. 타타위가 주창하고 알 아프가니가 영감을 불어넣은 근본주의는 현대 세계의 요구를 받아 들이되, 신앙의 진원지로 돌아가 과거 우마(이슬람 공동체)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움직임은 20세기 들어 정치운동을 통해 표출된다. 자유주의적 모더니즘 이 바스(아랍 부활당)와 나세르주의가 표상하는 아랍 민족주의의 근원이 되었다면 이슬람 형제단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귀착된다. 이 두 이념이 경쟁에 경쟁을 거둡해 급기야는 1980 년을 기점으로 이라크 바스당과 이란 호메이니파 사이의 처절한 전쟁으로 번진다. 이슬람의 물결이 일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탈식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근대 민족주의가 70년대 이래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실패 로 끝났다. 아랍 세계 전체로 보더라도 이스라엘에 대항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지 못했 으며 아랍 국가들과 비아랍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독교도와 이슬 람교도 사이의 다툼(레바논)도 해결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슬람 공동체의 양적 확대에 따라 서 야기된 혼란이 20세미만 인구가 60-65%를 차지해 가뜩이나 변동의 와중에 처한 전통사 회에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초래했다. 때문에 세속화된(탈종교화된) 서구와 무신론화한 공산 주의 사회 앞에서 오직 차리아에로의 회귀만이 특히 전통과의 단절이 가장 급격하게 나타나 는 가장 근대화된 나라에서 마지막 구원의 길로 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슬람 행동주의자들은 아랍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나아가 억압하기까지 한 근대화주의자들에 대해(아랍인이든 비아랍인이든) 복수를 다짐했다. 그들은 차리아와 그 에 따른 체벌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도둑질한 자의 손목을 자르고 태형 을 가하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된다는) 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에 관해서도 (예컨대 간음의 현장에 최소한 4인의 목격자가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주장 의 강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래서 차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언제나 적용되었고, 1979년 부터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 파키스탄, 수단, 모리타니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했다.…오늘날 이슬람주의자들은 두 개의 큰 줄기와 여러 하위 분파로 구별된다.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첫번째 줄기는 이집트의 사이드 코트브(1966년에 교수형에 처해진)가 주요 한 이론가인데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부패하고 위선적이며 비정통적인' 정권을 타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파이다. 이러한 주장의 실천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곳이 이란 이다. 두번째 줄기는 목표를 지향하지만, 비폭력적 전술을 구사해 정부를 '질식'시킴으로써 사회를 '재이슬람화'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교리에 부응하는 이슬람 국가의 도래를 촉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정보화혁명의 여명기에 서 있는 지금 한가지 의문이 남는 다. 과연 이슬람주의자들은 전통과 근대성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정도의 기쁨을 가져 다주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산을 돕는 여자들이 알라에 대한 찬 미송을 부르며 탄성을 지르지 않는 한, 아이를 산모에게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또 굳이 말 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여자이라는 것을 산모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관행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에 사는 베두인 사람이건 도시의 하층민이 건 중산층이건 상류층이건, 심지어는 궁정에서도 그랬다. 부자들도 딸이 태어났다고 해서 아 들이 태어났을 때처럼 풍성한 잔치를 벌이는 일이 없었다. 이는 여자아이들이 이미 어렸을 때부터 모든 사회생활로부터 격리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오직 아들만이 집안의 생존을 보장 해 줄 수 있다는 곧 외부의 적에 대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베두인적 현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하다. 더욱이 딸은 결혼과 동시에 가족을 떠나 남편과 살며 아들을 낳음으로써 상대부족을 더욱 더 강화시켜 줄 게 아닌가, 이슬람 이전 시대의 베두인 사람들은 딸이 태어나자마자 이를 사막의 모래밭에 산 체로 매장해 버리는 경우가 있어《코란》이 이를 강력하게 금지했을 뿐 더러 무조건 아들을 원하거나 딸의 출생에 표정이 굳는 아버지들을 비난할 정도였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부모이다. 선지자 집안에서 쓰,인 아미나, 하디자, 아이샤, 자이납, 파티마, 움쿨숨, 나피샤, 로키야 등이 이슬람 국가 대부분에서 쓰이는 여자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행이나 가족의 전통, 지역 적이고 또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출생직후에 또는 지역에 따라서는 생후 7일째에 성직자가 부모짐에 들러 아이의 이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다음, 아이의 귀에 대고 기도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아이를 신자들의 공동체에 포함시킬 뿐더러, 미신적인 생각이지만 앞으로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는 악령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수나는 아이의 생후 7일째에 아이의 머리를 밀고, 동물을 잡아 번제를 드리도록 권 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여자아이들에게는 가벼운 정도의 값이 매겨져 있다. 즉 아 들에게는 낙타 두 마리를 잡되, 딸의 경우에는 한마리로 족하고, 그도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잡은 동물의 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그 밖에도 신자 들에게는 아이의 머리카락 무게만큼의 금이나 은을 오몬에게 받치도록 권고되곤 했다. "베리을 찢어라!" 이라크 시인, 쟈말 시카 아자하우가 금세기 초에 조국의 여성들에게 했던 말이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후반기부터 몇몇 이슬람 국가의 소수 진보적 지식인들의 눈에는 베일이야말로 이슬람 세계의 몰락과 더불어 더욱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가로막고 개명의 가능성을 원천 적으로 봉쇄하는 상징물로 보였다. 이집트인 리파 베이의 프랑스 여행기를 보면, 프랑스 여성들의 주로 그가 접촉했던 부르 주아 계층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의 이슬람 사회를 사는 지식인의 눈에 어떤 점에 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리파 베이는 첫번째 이집트 학술대표단을 이끌고 1826년부터 1831년까지 파리에 머물렀으 며, 그의 보고서에는 두 세계 사이의 차이점이 동양이라는 한 세계가 유럽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해 가진 당시의 무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리파 베이는 그 글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혼자서 여행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또한 이 나라의 속담을 보면 남자의 아름다움은 지성에 있고 여자 의 아름다움은 화술에 있다고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닌게 여성들에게도 지성과 제주와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자기 조국 사람들에게 프랑스 여자들에 대해 말하며 "그곳에서 여자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고 전한다. 완고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익숙한 동 양인에게 서유럽의 예법 또한 의심스러워, "남자들은 어떤점에서 여자들의 노예라고까지 볼 수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엄격한 정통 이슬람교인 이 사람의 눈에는 프랑스 여성들의 모 랄 또한 비판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여성의 미덕이란 베일을 썼는지 안썼는지에 따라 결정 되는 게 아니라 그녀의 교육 정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훗 날에 이집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최초로 창안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일, 밀라야, 아바야, 차도르 또는 차르샤프란 여성들에게 보호막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1919년 봉기를 주도한 이집트의 진보주의 여성들은 바로 베일밑에 무기를 감추기도했다. 이 집트 여자들이 조국의 정치투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란에서는 진통의 1978년 후반기에, 여성들이 차도르 밑에 무기를 감추어 다니기도했다. 오늘날에는 작은 촌락이나 시골의 빈민층 부녀자들이 베일을 쓰는 걸 볼 수 있다. 지난 세 기에는 이것이 일하는데 방해가 된다 해서 쓰지 않던 것이다. 이는 상층계급 사람들의 서구 화에 대항하는 항의표시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초기에는 베일과 이슬람 전통복 식에 대한 투쟁이 서장을 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히려 복고적 풍속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성 간의 자유로운 왕래가 아직도 터부시되고 있는 이슬람의 현실에서 여자들이 선호하 는 직업군이 있다. 대학졸업자들은 우선 여학교 선생님이나 여자대학 이집트에는 여자대학 이 많이 있다. 교수가 되기를 바라며, 의사가 된다면 산부인과나 소아과에 가기를 바란다. 중간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분야에서 간호원으로 일 하고자 하고 있으며, 겨우 얼마 전부터 남자 동료들과 함께 사무직과 연구소에 진출하는 여 성들이 생겼다. 필자는 이집트와 시리아, 이란에서 여성 전용이나 남성 전용의 작업장들이 있는 걸 열럿 보았다. 이러한 현실은 대부분의 하층민들이 아직도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으며, 이들에게 근대적 교육이 그리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가정의 아버지들이 자기 딸을 이성 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공장에 내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 까 닭에 노동자들을 성별에 따라 구분함으로써 일단은 하층민 여성으로 하여금 집밖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74년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 모로코 여성이 자신의 학위논문에 적기를, 만일 어떤 여자가 직장의 요구에 따라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다면 그녀는 반드시 사회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말리라고 했다. 확실히 오늘날에 사회생활의 의무를 면제받은 사람은 부유층 부인 들뿐이다. 그러나 실업이 만연해 상당히 많은 수의 남자들이 제대로 식솔을 부양하지 못하 고 있는 지금에조차 자신의 아내를 다른 남자의 감독하에 일하게 놔두는 남편이 있다면, 이 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뚜재이 정도로 치부되고 만다. 여자가 직업활동을 통해 스스로 해 방될 수 있는 기회란 모로코나 튀니지, 이집트, 터키처럼 인력이 남아도는 나라에서는 기대 할 수조차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현재의 유럽에서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일들이 있다. 예컨대 가정부라든가 판매원이라든가 하는 직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에서는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남 자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아주 드문 경우로 외국인 여성들이 진출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아바야로 칭칭 둘러싼 이슬람 여인네가 바그다드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선 다. 그리고는 남자 점원에게 속옷을 산다. 분명히, 우리 서구인들의 눈에나 이러한 현상이 역설적으로 비쳐질 것이다. 시아파의 분열 이슬람은 무엇보다 하나의 신앙체계이다. 이슬람은《코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선지 자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신자들의 공동체안에 "하느님외에 다른 신은 없나니, 마호메트는 하느님의 보내심을 입은 이라"라는 믿음을 선포하는 데서 그 존재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이 러한 근본 신앙에 고집을 제외한다면 이슬람은 하나가 아니다. 시아파 시아파, 루이 마시뇽의 표현에 따를 때 '이슬람 정통주의자들'인 이들은 선지자의 후계자 가 그 집안사람들 가운데 선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바람이 실현된 것은, 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비교적 나중의 일이다. 알리가 칼리프의 직위에 오른 것은 오스만이 살해되고 나서이며, 승계 당시부터 논란이 많았던 그의 재위 또한 상대 적으로 짧게 끝나고(656-661)파란으로 얼룩졌다. 그의 승계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던 아이사 가 알리의 옛 동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알리는 지지자들을 찾아 메디나를 떠나고, 자신의 대의를 환영하는 이들이 있는 이라크 남쪽, 쿠파에 정주한다. 그리 고 바로 거기에서 아이샤진영에 대항해 656년 12월에 군대를 일으키고 대승을 거두니, 이것 이 소위 '낙타전쟁'이다. 이것은 또한 최초의 이슬람 내전이기도 하다. 1년 뒤에는 알리가 새로운 적수를 만난다. 아라비아와 이집트가 신중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을 당시. 시리아 전 역이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살해당한 칼리프 오스만의 부모 모아비야는 곧 시리 아총독의 편에 섰다. 모아비야가 알리를 자극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충직한 알리의 측근들 이모아비야의 화청을 거부하며 오직 알리만이 죽은 선지자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뭉치니, 말 그대로 확실한 파당(시아)을 형성한다. 이들 알리의 추종자들을 이때부터'시아 파'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리는 661년, 쿠파의 사원에서 나오다가 카리자파 젊은 이에게 살해당해 네제프에 안장된다. 이때에 이르러 시아파는 알리의 아들 하산에게 희망을 걸지만, 그 역시도 680년초에 살해 당한다. 같은 해에 이라크에 도착한 하산의 동생 후세인이 모아비야의 뒤를 이어 다마스쿠 스의 군주가 된 모아비야의 아들 야지드와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그 역시도 케르벨라 근처 에서 그의 동료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학살당한다. 강자에게 억압받는 약자들과, 또 정의를 상징하던 알리계(系)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이 시아파의 이념을 순교자의 차원으로, 그리고 지난한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시아파 신봉자들이 박해받는 자가 되어, 흑기(黑旗)를 사용하며, 이미 성소로 선포된 네제프와 케르벨라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비통해한다. 이슬람 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이들은 '선지자 가문의 사람들'에게 충직한 신하로 남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알리계의 사람들만이 정통 칼리프가 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거니와 바로 이런 이 유로 그들은 칼리프리는 말 대신에 '이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은 3 대에 걸친 초대 칼리프의 재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선지자가 운명할 당시에 조성된 이슬람 공동체(이즈마)의 '만장일치'에 대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시아파의 관 념은 신자들 대다수의 합의에 기초하는게 아니라 '무오류와 무결점'인 알리의 직계에서 배 출되는 이맘들에 대한 경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마마트의 관념도 시아파의 성립과 함께 보다 중요해지고 그 사회적 적용 또한 확장되었다. 시아파의 이맘을 사원에서 화중 앞에 나아가 (아리비아어 아마마는 '앞에서'라 는 의미를 가진다.) 기도나 이끄는 수니파의 이맘과 혼동해선 안된다. 이맘이 이맘일 수 있 는 것은 아담 이래로 하나의 이맘에서 또 다른 이맘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광채를 지니 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광채가 그로 하여금 무오류와 무결점의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무오류성이 그로 하여금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할 뿐더러 무결점성이 그에게서 어떤 잘못의 흔적도 찾지 못하게 한다. 그 사람야말로《코란》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사 람이며, 시아파의 전통에 따르자면 이 숨겨진 의미란 본래 선지자가 알리에게만 전수했던 것이다. 때문에 다시 한번 루이 마시뇽의 말을 빌리자면, "코란이란 침묵하는 이맘이요. 이 맘이란 말하는 코란"인 것이다. 이마마트의 전능성 시아파에게 이맘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당대의 이맘을 진정으로 알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불신자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나니"라는 격언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맘은 생전에 알 리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정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러한 과정 이 예전에는 물론 오늘날에도 늘 논란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맘의 후보자로 올라 있는 사람들의 정통성 논란이 늘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시아파는 여럿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동안 배출한 이맘의 수에 따라 가르면, 두오데심계(系) 또는 이맘파(派)가 첫째이고, 이스마엘계 또는 7년파가 다음이라면, 자이드파와 자파르파도 있다. "권위의 교회" 시아파는 이슬람 전체에서 약 10%를 차지하는 소수파이다. 그럼에도 워낙 복잡하게 갈라 져 있어 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시아파중 가장 중요한 세지파(두오데심 파, 이스마엘파, 자이드파)는 특정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해답을 제시한다. 예컨대 여자문 제에서 시아파의 적대세력들은 이스마엘파가 이슬람 공동체를 여자들의 공동체로 만들어 놓 았다고 힐난한다. 두오데심계 이맘파는 정반대로 계약혼(무타)을 허용하고 있으며, 자이드파 는 수니파식의 복혼을 허용한다. 하물며 법·예배·정치·사회문제등에 대해서는 제각기 시 아파의 지파수만큼이나 많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 여러 지파에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신성한 광채를 발하는 이맘은 언제 어디사나 무오류와 무결점의 존재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다. 그들은 이 무오류성에서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곧 이맘이란 죄를 짓지 도, 실수를 하지도 않는 존재인 까닭에 신자들은 이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러한 권위에의 순종이야말로 시아파를 이성과 개인적 판단에 호소하는 수니파로부 터 구별해 주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시아파는 인간이성의 무기력함을 설파한다. 이 분야의 석학, 골드자이어의 말을 빌리 자면 "수니파는 '합의의 교회' 시아파는 '권위의 교회"인 셈이다. 따라서 시아파 율법학자 의권위란 수니파 율법학자의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수니파의 이맘이 목사라면 시아파의 이맘은 교황이다. 시아파가 저들의 정신적 지도자를 아야툴라 혹은 몰라로 경배한 다면, 수니파는 이들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수니파의 이슬람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시아파가 확산되는 것에 일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고난'을 조장하는 여러 분파들의 발현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 다.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는 분파들이 종종 타키야나 키트마, 곧 정통교리의 옷을 입고 자기들 의 이설(異說)을 숨김으로써 억압의 굴레를 벗으려 한다. 이슬람 전체에서는 물론 비교적 다 수를 형성하고 있는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에서조차 소수파로 몰리고 있는 시아파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피해자로 자처했다. 순교자는 알리, 하산, 후헤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아 파는 수니파가 다른 이맘들 또한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박해받았다고 믿는 시아파 신자들 의 정서는 스스로의 몸에 채찍을 들어 피를 보일 만큼 오히려 박해에 열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라크 정부는 최근에 이러한 류의 태형을 금지하거나 완화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 했지만, 이는 여전히 다른 나라에서 성행하고 있으며 지극히 피가학적인 양태를 띠고 있다. 특히 순교자가 된 이맘들의 '정열'을 되살려 낼 수 있다고 믿는 '아수라' 기간에는 그 폭력 성이 극에 달한다. 이는 이란에서도 8대 이맘, 알리알 리다의 성소가 있는 콤과 메세드에서 더욱 심했는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까닭에 아야툴라 호 메이니가 이러한 유습이 솜적이라 하여, 이를 알라의 대의를 건설할 수 있는 보다 긍정적 인방법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것이다. 시아파에게는 성녀(聖女)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서도 두 명의 성녀, 즉 선 지자의 딸이면서 알리의 부인이요. 하산과 후세인의 어머니인 파티마와, 이맘 리다의 누이로 서 14세에 사망해 콤에 묻힌 순결한 파티마가 가장 열광적으로 경배받고 있다. 박해받는 자들, 박해하는 자들 시이파가 이슬람 역사상 수니파의 공권결에 탄압받았다면, 시아파 역시도 이들 '정통' 신 비주의자(수피)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이슬람의 수피들이 주장하는 바는 매개자로서 이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느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기 위한 노력이란 사랑과 함께 신앙 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선출된 이맘의 '한 조각 신성(神性)' 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알 할라지가 고문에 처해진 것도 (1923 년)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맘과 아부 샬 알 나부바크티 때문이다. 더욱이 시아파의 가혹함이 수니파의 그것만 못하지도 않다. 맹목적인 시아파들은 '다신론자들은 불순할지니' (《코 란》2장 28절)라는 《코란》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과의 접촉을교묘하게 피하여, 그들이 사용했던 그릇조차도 꺼려할 정도이다. 이러한 류의 강경함 은 자파르파라고 자처하는 시리아의 메투알계에게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통해 왕가의 상속권과 선지자의 정통성을 결합시킨 다. 시아파의 흑기는 이슬람 역사에서 셰리프 왕조의 창건자, 이드리스 1세와 함께 모로코에 서 나부꼈다. 아울러 마그렙에서 휘날린 시아파 흑기가 파티미드 왕조(969-1171)의 창건과 함께 이집트에서도 나부꼈다. 본질적으로 반골적인 시아파는 아주 오랫동안 대항권력으로 존재했다. 그러던 것이 이집트의 파티마드 왕조, 이란의 사파비드 왕조, 또 북예멘의 자이드 파와 함께 권력의 심장부를 장악했던 것이다. 1970년 이래로 시리아는 국민의 10%에 불과 한 알라우이파(노자이리스계)의 하페즈 엘아사드 대통령과 그의 일족이 제11대 이맘을 몰아 내고 권좌에 올라있다. 그래서 권력을 장악한 쪽과 이슬람 형제단의 사주를 받은 다수 수니 파가 혈전을 벌여 이슬람 역사에서 보기 드문 시아파 대 수니파의 투쟁을 전개해 오고 있 다. 그렇지만 시아파를 정치무대의 전면에 내세우고 빈자와 억눌린 자의 이슬람을 건설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1979년 혁명을 통해 이슬람 공화국을 창건한 호메이니 이맘 때부터이다. 그러나 시아파 지파들의 이러한 정치적 역할도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교리논쟁을 잠재우 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특정 지파의 논리라는 것이 언제나 다른 지파에 대한 자기 집단의 우월성과 헤게모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제로 이용되는 까닭에, 그래서 다른 지파에 대 한 문화적 베제 기제로 이용되는 까닭이다. 다만 호메이니계의 이러한 다기성을 오직 현존 하는 권력집단을 와해시켜 자기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야기되는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어느 날엔가 '맏디'가 강림하면 정의의 날이 도래해 심판이 있으 리라는 시아파의 믿음은 전 이슬람계에 존재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은 이 맏디가 마호메트였다고도 하고 예수라고 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모세의 신비로운 동반 자 알키드르였다고도 한다. 이를 통해 보건대 맏디 사상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시아파이며 그들에 따르면 알리와 그 보조자로서의 예수가 맏디라는 것이다. 이 맏디 사상 이야말로 이슬람 인민운동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슬람 법에로의 회귀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시간적으로 영원불변하고 공간적으로 일국체제이며, 엄격한 일신론 에 바탕을 둔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1979년의 이란 혁명을 보고 충격을 받는 한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유럽인들은 단순한 이슬람 신앙의 표상과 전투적 이데올로기를 구별하지 못한 채, '통합주의자'라는 말을 무조건 이슬람법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성의 이름으로 벌이는 투쟁은 622년, 선지자가 죽은 직후부터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의 역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로 각인되어 왔다. 이러한 현상이 종교적 계기에 바탕하고 있음을 지명하지만 이는 또한 시대에 따라 부족 간 의, 인종 간의, 왕조 간의 또 이념 간의 경쟁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승 리자가 새로운 지정학적 세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1928년에 창설된 이슬람 형제단의 영향 아래 전개된 현대 이슬람 운동이 주창하기를 '코 란은 우리의 헌법'이라고 했거니와 이러한 운동도 벌써 꽤 오랜 역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보다 직접적으로 유럽의 계몽주의 운도오가 산업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지식인들의 나다(르네상스)가 고양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에서 결과적으로 두가지가 뻗쳤으니, 자유주의적 모더니즘과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것이다. 타타위가 주창하고 알 아프가니가 영감을 불어넣은 근본주의는 현대 세계의 요구를 받아들 이되, 신앙의 진원지로 돌아가 과거 우마(이슬람 공동체)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움직임은 20세기에 들어 정치운동을 통해 표출된다. 자유주의적 모더니즘 이 바스(아랍 부활당)와 나세르주의가 표상하는 아랍 민족주의의 근원이 되었다면 이슬람 형제단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귀착된다. 이 두 이념이 경쟁에 경쟁을 거둡해 급기야는 1980 년을 기점으로 이라크 바스당과 이란 호메이니파 사이의 처절한 전쟁으로 번진다. 이슬람의 물결이 일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탈식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경 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근대 민족주의가 70년대 이래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실패로 끝 났다. 아랍 세계 전체로 보더라도 이스라엘에 대항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지 못했으며 아 랍 국가들과 비아랍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다툼(레바논)도 해결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슬람 공동체의 양적 확대에 따라서 야기 된 혼란이 20세미만 인구가 60-65%를 차지해 가뜩이나 변동의 와중에 처한 전통사회에 심 각한 정체성 위기를 초래했다. 때문에 세속화된(탈종교화된: 역주) 서구와 무신론화한 공산 주의 사회 앞에서 오직 차리아에로의 회귀만이 특히 전통과릐 단절이 가장 급격하게 나타나 는 가장 근대화된 나라에서 마지막 구원의 길로 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슬람 행동주의자들은 아랍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나아가 억압하기까지 한 근대화주의자들에 대해(아랍인이든 비아랍인이든) 복수를 다짐했다. 그들은 차리아와 그 에 따른 체벌(體罰)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도둑질한 자의 손목을 자르고 태 형을 가하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된다는) 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에 관해서도 (예컨대 간음의 현장에 최소한 4인의 목격자가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주장의 강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래서 차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언제나 적용되었고, 1979년부터 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 파키스탄, 수단, 모리타니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도 적용되기 시작 했다. …오늘날 이슬람주의자들은 두 개의 큰 줄기와 여러 하위 분파로 구별된다. 혁명적 성격 을 지니는 첫번째 줄기는 이집트의 사이드 코트브(1966년에 교수형에 처해진)가 주요한 이론가인데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부패하고 위선적이며 비정통적인' 정권을 타도해 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파이다. 이러한 주장의 실천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곳이 이란 이다. 두번째 줄기는 목표를 지향하지만, 비폭력적 전술을 구사해 정부를 '질식'시킴으로써 사회를 '재이슬람화'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교리에 부응하는 이슬람 국가의 도래를 촉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정보화혁명의 여명기에 서 있는 지금 한가지 의문이 남는 다. 과연 이슬람주의자들은 전통과 근대성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