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 원색의 마술사 Xavier Girard 지은이: 그자비에 지라르 지음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삼육대학교 식영 4 9733028 백지은 "내 삶의 줄거리에는 이렇다 할 사건들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1869년 12월 마지막 날 북부 프랑스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상인이었던 나의 선친은 아 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열 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 소 서기로 충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했다." 제1장 그림에서 맛본 희열 "그러나 그 도시에는 (18세기 프랑스 화가 모르스)캉탱 드 라 투르가 세운 섬유 디자이너 양성학교가 있었다. 그림과 데생에 흠뻑 빠져든 나는 매일 아침, 심지어는 겨울철에도, 수업 을 듣기 위해 7시와 8시 사이에 일어났다. 결국 부모님은 법학을 그만두고 파리에 가서 그 림공부를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1921년에 쓴 편지에 나오는 이 대목을 마티스가 즐겨 다룬 주제는 개인적인 기호나 자기 성격의 감추어진 일면이 아니라 예술이나 창작과정이었다.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양리 에밀 부누아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밤 9시 북부 프랑스 르카토캉브레지의 외가 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에밀이폴리트 앙리 마티스와 아나 엘로이즈 제라르는 인근의 보 앵앙베르망두아스라는 촌락에서 곡물과 도료를 파는 가게를 꾸려 가고 있었다. 마티스는 어 린 시절을 그곳에서 지냈다. 생캉탱 중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을 많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마티스는 그 시절을 별로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앙리 마르탱 고등학교 시절 (1882~1887)에 그림에 소질을 보 였는지는 몰라도 마티스가 미술사가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1941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그렸다. 급우인 에밀 장과 마티스(나중에 두 사람은 파 리의 미술학교에 들어간다.)는 데생으로 1등상을 받았다. 그것은 마티스가 한참 뒤인 1952년 에 다시 언급할 만큼 기억에 남은 사건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러 파리로 간 마티스는 수업을 청강하고 규정된 시험을 치러 합격한 뒤 '작 은 학위(변호사 자격증)'를 받고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마이트르 드리외 법률사무소의 서 기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률사무소를 잠시 그만두어야 했다. 맹장 염에 걸린 것이다. 스티마 . H 수술한 뒤 몸을 추스르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일이 걸렸다. 회복기를 마티스는 보앵에서 보 냈다. 그가 그림에 처음으로 눈뜬 것은 그곳이었다. 마티스의 나이 스물 하나였지만 그의 인 생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한 이웃이 미술입문서에 실린 풍경화를 베껴 그리는 취미를 갖고 있 었다. 그 사람의 권유로 마티스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감 통을 들고 가서 물방앗간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마치 공증서를 옮겨 적듯이 꼼꼼히 베껴 그렸다. 1890년 6월 에는 '책이 있는 정물'을 완성했는데, 그가 나중에 '나의 처녀작'이라고 부른 이 작품의 정 확성을 과시하기 위해 서명도 '스티마 .H'라고 거울에 비친 형태로 적어 넣었다. 마이트르 드리외 법률사무소에 복직한 마티스는 뒤에 삽화를 그릴 때 그랬던 것처럼 서류 를 꽃과 얼굴로 장식하곤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마티스는 태피스트리와 섬유 디자인을 전문으로 가르치던 캉탱 드 라 투르 학교에서 데생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2시에 일을 시작하기 전까 지 한 시간 남짓". 근무가 끝난 다음에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밤늦도록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틈나는 대로 라 투르(촛불에 비친 정경을 즐겨 그린 프랑스의 화가: 역 주)의 유명한 파스텔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던 생캉탱의 르퀴에르 박물관을 찾았으며, 인근 에 있던 릴, 캉브레, 아라 등지의 박물관에서는 고야, 램브란트, 북유럽의 그림을 발견했다. 이 동안 마티스는 르카토에 있는 외삼촌 에밀 제라르의 식당 천장을 장식했다. 뒤에 그는 이 방에 들여놓은 가구 세트를 디자인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베낀 그림을 식당 벽에다 걸어 놓았다. 1899년, 마티스는 건강이 안 좋아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이 무렵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철저하게 혼자였던 나는 자유롭고 편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러저런 간섭에 약간은 불안 하고 갑갑했다." 1891년 이제는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암탉과 닭장을 그리던' 생캉탱의 한 화가가 써 준 추천서를 한 통 들고 파리로 떠 났다. 그해 가을 마티스는 영향력 있는 보수적 화가 아돌프 빌리앙 부게로를 만난다. "굶어 죽는다!" 아버지의 경고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아버지가 보내 주는 한 달 생활비 100프랑으로 는 굶주림을 면하기도 어려웠지만 마티스는 1891년 10월 5일 쥘리앙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부레로와의 만남은 그 교수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그린 '말벌 등지'의 모사를 지도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마티스는 뒤에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이렇게 술회했다. "첫 수업 시간에 부게로는 내가 손가락으로 목탄을 데생을 더럽힌다. 데생을 좋아 한복판에 그리지 않았다며 꾸중했다." 마티스는 제대로 '연필 쥐는 법'을 배우고 '원근법을 숙지'하기 전까 지는 그림 그릴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마티스는 가브리엘 페리에의 지도 로 누드를 그렸지만 이 스승에게도 좋은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러나 부게로와 페리에는 1892년 2월 마티스가 에콜 데보자르(미술학교)입학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낙방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스승들의 강권이 있었겠지만 그는 그해 에콜 데자르 테코라프 (장식미술학교)야간 반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장래의 미술교수를 위한 도형기하학과정' 을 이수하고 화가 알베르 마르케와 오랜 우정을 다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 아티스는 화가로 서 빛을 보지 못하고 고양에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곤 했다. 마티스는 모순되는 충동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전통 기법을 익히고 에콜의 전통에 따르기 로 마음먹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존경스러운 스승 얄궂게도, 마티스가 자신의 두 가지 충동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 영역을 발견한 것은 에 콜 데 보자르의 울타리 안에서였다. 그는 1892년 말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 서 비공식적으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마티스는 아카데미의 기준 - 모델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거리감을 두고 묘사적으로, 선택 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 에 맞춰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모로는 오히려 그에게 내면을 보라 고 강조했다. 모로는 상징주의가 새롭게 수용한 마니에리스모(16세기 유럽에서 성행한 미술 양식으로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이상 미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 었으며, 길쭉한 팔다리, 부자연스러운 자세 등 객관적 형태보다는 정신성을 깊이 탐구했다: 역주)전통으로 마티스를 이끌었다. 실제로 보이는 모습과 무관하게 대상의 개념을 표현하도 록 권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 마티스는 마니에리스모 양식, 모델의 자연주의적 변형, 장식성에 대한 자신의 약점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가 고전시대의 미술에 신세를 졌다고 고백하곤 했던 것은 이렇게 지적했다. "네가 고대조각을 그리고 싶지 않다니 유감스럽기 짝이 없구나. 거기서 활짝 만개한 3차원 형상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로의 화실은 평화로웠다. 화가 조르주 루오에 따르면 스승에게서 뿜어 나오는 '따사롭 고 이지적인 광채'가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역시 화가인 양리 에브느포엘은, "새하얀 턱 수염, 웃음 띤 얼굴, 초롱초롱한 작은 눈매에, 온후하게 행동하는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고 스승을 묘사했다. 그렇게 차갑고 매정할 수가 없는 에콜의 다른 교수들과 대조적으로 모르 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탁월한 교수법으로 열심히 가르쳤다. 마티스는 뒤에 자신의 스승 은 "심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어디엔가 몰입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회고했 다. 루오가 "전혀 교수답지 않은 진짜 스승"이라고 말할 만큼, 모로는 학생 한 사람 한 사 람에게서 에콜, 에콜의 교수들, 심지어는 모로 자신이 규정한 방식에서 일탈할 수밖에 없는 미술관을 가진 구도자의 모습을 읽어 냈다. 위대한 대가의 취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했던 모로는 제자들로 하여금 좋 아하는 대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작품을 모사 하면서 그 분위기에 젖어 볼 것을 강조했다. 마르케는 17세기 화가 니콜라 푸생, 디에고 벨라스케스, 클로드 로랭을, 에브느포엘은 렘브 란트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산드로 보티첼리와 16세기 마니에리스모 화가 틴토레토 를, 마티스는 18세기 화가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정물화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옛거장들의 모방 마티스의 선택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이미 릴 박물관에서 샤르댕의 그림을 보았던 마티스는 1892년 파리 조르주 프티화랑에서 다시 그의 작품을 보았던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중량감'을 주고 '대상에 몰입된(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앙드레 지드의 표현)' 샤르댕의 그림은 당장 마티스를 사로잡았다. 샤르댕은 마티스가 매료당했던 북유럽 미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았던가? 샤르댕은 마티스가 지향점으로 삼았던 바로 그것, 다시 말해서 이론에 속박 당하지 않는 순수한 관조상태를 이루기 위한 '대상의 결합'을 성취하지 않았던 가? 마티스는 "네덜란드 거장들이 애용했던 은빛 공간 안의 색체 그레데이션, 차분한 (색의)조 화 속에서 빛을 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 색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마티스는 또 돈을 벌기 위해 원화와 똑같은 복제화를 그렸다. (그는 당시 "괜찮은 복제화 는 한 점에 200~300프랑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마티스의 레퍼토리는 프랑스 로코코미술에 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네덜란드 미술까지 다양했다. 결국 마티스는 자유롭게 선택한 거장을 향한 변함없는 애정과 체계적 분석을 향한 욕구 때문에 모방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자유로운 해석은 좀더 급진적인 계열의 화가들을 실험할 기회를 주었다. 마티스가 펜과 잉크로 그린 프랑스 낭만파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레베카 의 유괴'습작은 밝은 곳을 어둡게 어두운 곳을 밝게 그려 명암의 척도를 역전시키고 있다. 야외로, 자연으로! "내 방에는 창문이 둘 있었지." 마티스는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구한 케 생미셸 19번지 비족은 아파트를 회상하며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말했다. "다섯 층 밑으로 센강의 지 류가 보였어. 전망이 좋았네. 오른편의 노틀담, 왼편의 루브르, 맞은편의 법원과 정부 청사가 한눈에 들어왔으니 말이야." 그 건물은 화가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공백은 있었지만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마티스의 이웃으로 지냈던 마르케, 늘 "혁명기념일에나 어울릴 법한 화 려한 옷을 즐겨 입었던" 자클린 마르발,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조카, 에두아르 마네의 친척이 모두 그곳에 살았다. 마티스의 작업실을 찾은 모로는 모든 공간의 배치가 그림 중심 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눈치챘다. 마티스는 1893년부터 카롤린 조블로라는 여인과 살았다. 그녀는 이듬해 딸아이를 낳았다. 딸 마르그리트는 마티스가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는다. 1895년 4월 1일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을 허가 받는다. 성적은 합격한 여든 여 섯 명 중 마흔 두 번째였다. 공식 입학은 그의 생활방식이나 가족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 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까지 꽁꽁 닫혀 있던 에콜의 문이 자신에게 열리자마자 마티스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갑작스레 느꼈다. 그가 표현하기를 원하던 것 은 더 이상 루브르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자기 발견의 과정은 작업실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낡은 허물'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모로가 줄곧 강조하지 않았던가? 아닌게 아니라 마티스는 "거장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노틀담을 등진 풍뇌프와 그 나무 들이 엮어 내는 신비에 싸인 조화"에서 발견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느냐고 모로에게 보 낸 편지에서 썼다. 얼마 뒤 영국에 가서 J.M.W.터너가 그린 센강의 풍경화를 보았을 때 마 티스의 자신감은 더욱 굳어졌다. 그해 여름 마티스는 이웃에 살던 화가 에밀 베리를 앞세우고 브르타뉴 해안으로 가 베일, 뵈제크카프시쥔에 이젤을 세운다. 첫 브르타뉴 여행에서 그가 다소 도전적으로 시도한 외광 화(야외에서 직접 그린 그림: 역주)는 미술사가 피에르 슈네데에 따르면 '소심한 코로' 같은 맛을 주었다. 폴 고갱이 작업하던 동네를 찾기도 했지만 마티스의 작품에서는 고갱이나 고 갱을 추종한 화가들의 입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티스는 네덜란드 화가들이 즐겨 그린 고요한 바다풍경을 좋아했지, 다른 화가들이 그토록 훌륭하게 담아 낸 브르타뉴의 거 센 파도와 물거품은 관심 밖이었다. '책 읽는 여자'(1895)의 차분한 분위기와 그해 마티스가 그린 정물화들은 인상주의가 아 니라 샤르댕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마티스가 처음에 작업실에서 그린 실내화의 강렬한 명암 에서 그가 파리를 떠나기 전에 보았던 코로 회고전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실내화와 풍속화 에 대한 진지한 탐구 덕분에 마티스는 그물 여섯 나이로 국립 미술협회 회장이던 피에르 퓌 비 드 샤반의 추천으로 준회원으로 뽑혔다. 오로지 그림만을 1896년 여름에 있은 마티스의 두 번째 벨일 여행(이번에는 카롤린, 마르그리트, 에밀벨리 와 함께)은 전해의 자신감 없었던 야외작업과 사뭇 달랐다. 모로 화실의 '겸손한 학생'역할 이 이미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성숙해 있었다.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국립 미술협회가 주관하는 살롱 전에 출품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지원 금을 받은 것 이다. 마침내 서광이 비쳤다. 자신감이 불타 오른 마티스는 파리의 미술관을 순례하면서 렘브란트, 고야 등을 보았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도 만났는데,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던 카미유 피사로도 포함되어 있었 다. 고갱에게 야외작업을 권유한 주인공이며 폴 세잔과 빈센트 반고흐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바로 그 '겸허한 거인 피사로'를 만난 것이다. 신인상파(체계적인 붓질로 캔버스를 덮 었던 화가들)에 남모를 영향력을 행사하던 피사로는 마티스에게 더없이 훌륭한 길잡이였다. 샤르댕, 인상주의, 세잔(세잔의 중요성에 마티스가 처음 눈뜬 것은 피사로 덕분이었다.)사이 의 균형 점이던 피사로는 마티스가 당시 지향하려고 했던 우아하고 원숙하며 사려 깊은 인 상주의를 완전하게 구현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다."마티스는 나중에 자신의 형성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 다. 그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를 조심스럽게 흉내내려는 시도에서 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오딜롱르동에게 영감을 받아 자극적인 색을 쓰는 데 이르기까지 다 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폴 세잔 식의 공간구성을 모방했고 신인상파 화가 폴 시냐 클의 충고에 따라 색을 실험하기도 했으며 피에르 퓌비 드샤반의 평온한 세계를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길을 열어 준 것은 마티스 자신의 직관이었다. 제2장 이국의 매력 1896년 귀스타브 모로가 학생들에게 5년의 수업을 마무리짓는 '걸작'을 만들라고 했을 때 마티스는 자연스럽게 실내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식탁을 소재로 한 그림들 중에서 처음 그려진 화려한 '저녁 식탁'은 그가 1897년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모로의 제자 중 에서 가슴이 따뜻한 위클랑브루아슈가 마티스를 옹호한다네."모로도 마티스의 편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의 비아냥을 가슴 아프게 들으면서 마티스는 자신의 잘못 된 길로 들어섰나 하는 의구심에 빠졌다. 아카데미즘의 구렐를 벗어 던지고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생전에 수집했던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작품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렸 을 때 피사로와 마티스는 그것을 보러 갔다. 이 인상파 작품과의 만남과 브르타뉴의 세 번 째 방문은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다는 자신감을 젊은 화가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 마티스의 그림에서는 피사로가 그토록 강조했던 색조와 질감은 일관성이 흔들리지 시작하는데, 이것은 신인상파의 불할법에 노출된 데 따른 반응으로 보인다. 보라, 빨강, 청 록, 연노랑이 잔잔히 펼쳐지던 팔레트에 '(순수한)무지개 빛깔들'이'벨일의 르팔레항구 '(1896)에서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1897년 말 마티스는 카롤린 조블로와의 관계를 정리했지만 마르그리트는 호적에 올렸다. 그는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 출신의 젊은 여성 아멜리파레르를 만나고 있었다. 뒤에 마티스 는 그녀를"단정하고 기품이 있으며 검은머리가 아름다웠고."고 묘사했다. 두 사람은 1898년 1월 8일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브르타뉴 여행가 '저녁 식탁'의 완성은 마티스와 에콜의 긴 극을 넓혀 놓았다. 연로한 모로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더뒷전으로 물러섰다. "모로 선생님은 연세 탓인지 많이 변하셨다."고 1897년 11월 19일 친구 쥘 프랑드랭은 편지에서 쓰고 있다. "붓을 지나치게 대담하게 놀리는 자기도취에 빠진 학생들을 질타하는 (점잖은 표현을 쓰 자면 말이야.)버릇은 여전하시지, 노는 날 시골과 야외의 공기에 흠뻑 빠져 엄청난 작업량을 갖고 돌아온 마티스가 화근이었다. 마티스의 반응은 오래 걸리지 않아다. 그는 나중에 밝혔듯이 "1년의 휴가"를 얻기로 마음 먹고, "그 동안 모든 장애물을 옆으로 치우고 내 눈에 옳다고 보이는 대로 그리기로 결심했 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일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구원이었다." 결혼은 마티스에게 파리를 떠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피사로의 조언에 따라 젊은 부부는 런던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는 터너의 그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로 돌 아온 지 얼마 안 된 1898년 2월 이번 목적지는 코르시카 아작시오였다. 불가사의한 남쪽 '나비처럼 떠돌던 딜레탕트'의 시절은 지나갔다. 1949년에 그가 회고한 대로 더 이상 '렘 브란트에서 코로, 베로네세에서 헴, 샤르댕으로 보유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구태의 연한 화법'으로는 현장감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을 속박하지 않는 나만의 좀더 소박한 수단을 벼리기 위해 먼 곳으 로 떠났다." 마티스는 에콜, 살롱전, 박물관을 뒤로하고 스스로에 기대기 시작했다. 코르시카 여행은 수많은 세기말 화가들을 빨아들였던 직관적 계시를 향한 탐구의 일부분이었다. 코르시카에서 그는 작렬하는 지중해의 햇살 아래 자식을 재충전했다. "나는 현혹 당했다. 모든 것이 빛났다. 모든 것이 색이었고 빛이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브르타뉴에서처럼 이곳 에서도 마티스는 실내화와 풍경화를 골고루 그렸다. 그러나 변화에는 자기절제와 신중함이 따랐다. 야외의 강렬한 색과 빛을 무절제하게 표현하는 대신, 마티스는 불출하는 감정을 약 화(略畵)안에다 가두어 놓았다. 그것은 벽이나 수풀을 이용하여 시야를 의도적으로 좁혀 버 리면서 빠르게 그리는 기법이다. 마티스가 보낸 몇 점의 견본 그림을 보고 친구 에브느포엘은 할 말을 잊었다. 그렇게도 '회색을 능수 능란하게 다루었고' '강력하고 독보전인 조화'의 달인이었던 마티스가 어떻게 '발작 상태의 미치광이 인상주의자'나 그릴 법한 '거친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1898년 4월 18일 연로한 스승 모로가 타계했을 때, 마티스는 코르시카에 있었다. 모로가 죽자 그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티스는 7월이 되어서야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7월 한 달만 잠깐 파리에 머물면서 폴 시냐크가 신인상파 화가의 작품만을 모아 주최한 앵데팡 당전(독립작가전), 조르주 프티화랑에서 열릴 모네 전, 앙브루아즈 볼라르 화랑에서 열린 세잔 전을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7월 아작시오로 돌아온 직후 마티스는 아들 장을 임신한 아내와 함께 툴루즈 부근 보젤이 있는 처가에 가서 머물렀다. 가론강 제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모 네의 그림과 반 고흐의 풍경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해 여름에 그린 정물화들은 그가 당시 유력한 잡지에 연재 중이던 폴 시냐크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획기적인 글을 읽었음을 암시한다. 시냐크의 글을 통해 마티스는 자신이 여태까지 성취한 발전을 평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네, 르누아르, 모네, 피사로, 쇠라, 세잔으로 이어지는 채색파 화가의 계보 안에 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차지해야 할 자리를 예견 할 수 있었다. "촉각만으로 양감을 배우면서" 그러나 1899년 초 일단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곧바로 에콜 데보자르를 찾아갔다. 여러 교 수가 후임자로 임명되었지만 - 한 해 동안 적어도 여섯 명이 갈렸다 - 모로의 빈자리를 메 우지는 못했다. 결국 페르낭 코르몽이 자리잡았다. 마티스는 다른 배울 곳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의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줄리앙 아카데 미였지만, 허겁지겁 되돌아서야 했다."학생들이 그의 그림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미 요라는 모델이 문을 열었고, 외젠 카리에르가 학생들을 과외 지도하고 있던 화실을 찾아갔 다. "거기서 나는 장 퓌,(피에르)라프라드,(장)피에르, (앙드레)드랭, (오귀스트)샤보를 만났다. 모로의 제자는 그곳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완전한 평화와 차분함 속에서 작 품에 임할 수 있었던" 화실이 문을 닫자 그는 뒤토가에 있던 비에트의 작업실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의 크로키 실습에도 가담했다. 그곳에서 마티스는 50상탐을 내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피에르 슈네데의 표현에 따르면, '학원을 번개처럼' 그렸다. 그는 꼬박 2년 동안 그곳을 드나들면서 해부도를 그렸고, 나중에 시안이며 작가인 루이 아라공에게 말한 대로 눈을 감고 "촉각만으로 양감을 배웠다." 얼마 안 가서 그는 앙투안 부를델이 지도하는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의 야간 조각 강좌도 이수했다. 마르케와 함께 하는 야외작업과 카페 가수들을 그리는 오후시간도 중요한 일과였다. 어느 날 모로 화실에서 함께 수업한 마리 비탈 라가르의 소개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실망스러운 경험이었다. 로댕은 피사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마티스는 생각했다. 어쨌든 '걸어가는 남자'를 창조한 인물은 '아주 위대한 조각가'였다. 이 동안 마티스는'영광이 있는 정물'(1899)을 그렸다. 이 초기작은 그림에 대한 그의 '교 향악적'접근방식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양립될 수 없는 선택을 동시에 시도하면서 하나를 유예하고 다른 것으로 돌아갔다가 도중에 또 다른 것을 버렸다가 나중에 가서야 어딘가 에 서 그것을 모두 다시 살리고 종합했다. 세잔:"우리 모두의 아버지" 경험의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듯 1899년 마티스는 아방가르드 계열의 화랑을 자주 찾았 다. 특히 앙브루아즈 볼라르에서는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 로댕의 로슈포르 석고 흉 상, 고갱의 '소년의 머리'를 잇달아 구입했다. '목욕하는 세 여인'을 구입한 뒤부터 엑상 프로방스의 거장인 세잔의 작품과 좀더 밀도 있는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세잔의 영향은 마 티스가 죽는 날까지 지속된다. 마티스는 세잔의 그림을 산 까닭을, "걸어가는 여인의 손과 저네 구성간의 비율"때문이라 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갑자기 파리를 떠나게 된다."내 아이(마르그리트)아 아파서 이었다. 다시 파리에 돌아갈 때까지 나는 강에서 물놀이하는 군인들을 지켜보곤 했다. 가론 강에 앉 아 나는 풍경화 속의 그 손과 색채를 떠올렸다." 세잔 대(對) 로댕. 마티스는 로댕은 그 자체로 '놀라운', 그러나 자신들이 엮어 내는 '표현 의 모호함'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결합'함으로써 작업한다고 말했 다. 반면에 세잔의 그림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는 '전체적인 구조'와 명료한 조화를 이루 며, 따라서 목욕하는 여인의 손과 풍경화는 동실한 회화적 특성을 갖는다. '농노''마들렌 I''마 들렌 II'같은 마티스의 조각, 드로잉, 그리고 세기말의 아카데미 경향을 담은 습작은 그가 로 댕의 강렬한 표현성과 세잔의 체계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마치 이 줄다리기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마티스는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에 당시 재별견 되어 인기를 모으고 있던 렘브란트의 작품을 연구했다. 마티스는 이 시기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의 자화상은 판화를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다가 우연히 자신을 삐 딱하게 바라보면서 탐색하는 모습을 담은 여느 화가의 자화상과 성격이 달랐다. 마티스는 또한 굽어보는 시점, 공간적 압축, 미묘한 유백광이 표현된 마르케의 그림도 눈여겨보았다. 북쪽으로 둘 루즈에서 돌아온 뒤로 사정은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살롱전을 주관하는 국립 미술협 회는 마티스의 출품작을 거부했다. 그가 그린 옛 거장들의 모사화도 팔리지 않았다. 마티스 는 마르케와 함께 1900년 만국 박람회에 대비하여 그랑팔레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을 맡았 다. 아버지는 송금을 끊겠다고 위협했다. 미술상 폴 뒤랑, 뤼엘은 그에게 세잔의 과도한 영향을 받은 정물과 대신 '실내 인물화'를 그리라고 권했다.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미술의 길이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마티스는 뒤에 레몽 에스콜리에에게 말했다. "인상파 화가들만이 관심이의 초점이었다. 반 고흐와 고갱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을 무너뜨리고 돌파해야 했다." 1900년 6월 13일 차남 피에르가 태어났다. 겨울이 되어 기관지염에 걸린 마티스는 요양을 위해 스위스의 빌라르쉬르롤룽으로 갔다. 그는 스스로 '간단한 이미지'라고 평한 두 점의 소 품을 갖고 돌아왔다. 파리에 도착한 마티스는 일거리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1903년까지 그는 부모님이 아들 장을 돌보아 주고 계신 보앵앙베르망두아와, 때때로 드로잉 모임에 참석하던 파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고육지책으로 일화 적인 주제를 부 드러운 색채에 담은 그림을 마지못해 그리기도 했지만, 판매는 - 화랑 주인베르트 베유, 비 평가 펠릭스 페네옹, '저녁 식탁'을 샀던 볼라르, 미술상 가스통 베른하임, 조스 베른하임 을 통한 - 부진을 면치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림을 포기하고 싶다."(1903년 8월 10일 편 지) 그는 '구빌세 징수관으로 취직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생계를 꾸려 가 기 위해 열었지만 '파리만 날리고 있던' 아내의 부인모자점도 건강 때문에 문을 닫아야 했 다. 여름이 되자 보앵으로 돌아가는 것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마티스는 1904년 초까지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쪽으로 "나는 식구들과 함께 내일 생트로페로 떠난다."고 그는 1904년 7월 12일 편지에 썼다. 툴 루즈를 다녀온 이후로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남프랑스로 훔쩍 도망가고 싶다."는 소망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그것을 나의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고 그는 1903년 한 친구에게 고백했다. "겨울이면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는 북프랑스보다 그곳에서라면 일 을 곱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프랑스는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에 그가 맛본 환멸을 해독할 수 있을 것처럼 마티스를 유혹했다. 그러나 그를 초대한 폴 시냐크가 그토록 열광했던 지중해의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과 "뜨겁디뜨거운 날씨"에 마티스는 그만 질려 버렸다. 마티스가 끝까지 완성한 작품 중에서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은 시냐크의 테라스를 담은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처음으로 신인상주의의 좀더 장식적인 측면과 세잔의 구조적인 색채사용 법을 결합했다. 여기서는 시냐크보다는 마르케의 영향을 더 분명했다. 신인상주의 지도자 시 냐크는 점묘법을 충실하지 않은 마티스의 그림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스 냐크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플라주 데 그라니에 해변에서 그린 '생트로페만'의 장식 적 열망은 퓌비 드 샤반의 영향과 시냐크의 '시간의 조화',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저녁 공기'같은 신인상파가 추구한 낙원의 알레고리에 지고 있던 빛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새로 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 역할을 한다. 이상향을 표현한 그들의 그림과 색채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마티스는 이미 형성되어 틀 이 잡혀 있고 공식적으로 승인되어 있던 미학 앞에서 겸허히 머리를 숙였다. 돌이켜보면 1896~1897년에 그린 최초의 걸작 '저녁 식탁'에서도 그린 태도를 보였지만, 1904~1905년에 그린 걸작'호사, 평온, 관능'에서도 마티스는 비슷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화가와 화가가 다루는 주제 사이에 거리를 두는 신인상주의의 엄밀한 기법이 자연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 운 가능성을 그의 상상력 앞에 열어 줄 수 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야수파 시대 앵데팡당전(1905년 3~4월)에 출품한 '호사, 평온, 관능'은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9월 이 작품을 구입한 시냐크는 열광했다. 신인상파의 모임으로 마티스를 이끈 것은 그가 아니었던가? 장 퓌도 맞장구를 치면서, 1904년 12월의 시냐크 전시회에서 넋을 잃은 마티스 가 '철저한 점묘화가'로 변신했다고 썼다. 그러나 루이 복셀과, 화가이며 작가인 모리스드니 는 '참다운 본성에 반하는 탐구'를 중지하고 '추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마티스에게 경 고 했다. 그해, 미술의 앞날에 대한 작가 샤를 모르스의 조사 - 그는 다양한 미적 성향을 가진 화 가들에게(마티스는 포함되지 않았지만)의견을 물었다 - 에서 드러났듯이 인상주의는 참신한 아이디어나 차츰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온갖 기법, 양식, 방법론이 범람하며 세기말의 데카 당스를 양산하고 있었다. 유일한 출구는 새로 별견된 순수와 원시주의에 있는 것처럼 보였 다. 마티스는 대응은 남프랑스의 오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냐크가 있는 곳은 아니 었다. 스페인 접경지대에 있는 지중해의 작은 항구 콜리우르가 그를 유혹했다. 1905년 5월 15일 마티스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다. 바다가 내려보이는 방에 서 그는 1897년 시냐크가 그 어촌을 처음 찾았을 때 홀딱 반했던 '황홀한 풍광'을 그렸다. 파리에서 본 쇠라의 반 고흐 회고전이 아직 그의 머리에 생생했다. 마티스는 좀더 장대한 구성을 지닌 작품('파라솔을 든 여인')에 활용될 젊은 여인의 점묘 습작을 그렸다. 이곳에 서 그린 '올리브 숲의 마티스 부인'은 반 고흐의 빛을 소용돌이에 쇠라의 점묘법을 접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야성적이며 화려한 채색을 강조하며 새롭게 등장한 야수파의 원리를 주 창하고 나성 화가 앙드레 드랭을 만나면서 이 구도는 갑자기 바뀌었다. 드랭은 한 편지에서 자신의 원리를 이렇게 밝혔다. "첫째, 빛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요체는 바로 그림자의 부정에 있습니다. 여기서 빛은 대 단히 강렬하고 그림자는 대단히 밝지요. 그림자는 햇빛과 대조되는 밝음과 광휘의 세계입니 다. 우리는 그것을 반사광이라고 불러요.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이 점을 간과해 왔 지만, 이런 식의 구성을 앞으로 표현성을 높여 줄 겁니다. 둘째, 마티스와 함께 일하면서 나 는 점묘법에 대한 집착을 뿌리뽑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티스는 여전히 그 방식을 고수 했지만 나는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여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요. 점묘법은 밝고 조화 된 그림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만 의도적인 부조화를 표현하는 그림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습니다." "고통스러울 만큼 현란한"작품 그해 초가을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모자를 쓴 여인'을 그렸다. 콜리우르의 풍경화를 터득한 밝은 색조로 자신의 아내를 강렬하게 표현한 초상화였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1905 년 오톤 살롱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그림은 곳곳에서 갈등을 빚었다. 대중은 이것을 지나치게 가식적이라고 보았고, 보구적 은 살롱전 화가들은 이 도전 적은 그림을 마뜩찮게 여겼다. 회고전이 예고되어 있던 르누아 르, 마네의 그림과도 갈등을 빚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자신의 그림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마 티스가 이제까지 그린 그림은 주로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였던 것이다. 부인도 마티스를 편 들지 않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부인을 요란한 색체를 발산하는 인물로 변모시켰으니 말 이다. 모리스 드니 는 이 작품 - 그리고 그해 마티스가 살롱전에 내놓은 모든 작품들 -을 '고 통스러울 만큼 현란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뒤에 이 그림을 구입한 레오 슈타인은 첫눈에 "어떤 그림보다도 거칠고 추하지만 강하고 밝은 그림"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티스 는 이 초상화가 자신의 작업에 미칠 영향을 누구 못지 않게 우려하고 있었다. 과시적 색체 는 그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야수파는 그를 일상적인 표현을 넘어 인간의 얼굴이 지중해의 강렬한 빛과 격렬하게 융합 되는 미지의 영역으로 몰고 갔다. "사실 그 그림은 아주 실망스러웠다."고 그는 뒤에 술회했 다. "어쩌다가 나의 그림(내 아내의 초상화)이 앞서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 인정을 받기 는 했지만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노력의 서막이 오른 셈이었다." 의구심 오톤 살롱전이 개막된 직후, 야수파에 관한 논의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을 때 마티스는 ' 삶의 기쁨'(19051906)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대작(174X238cm)을 완성하기 위해 그 는 별도의 작업공간을 빌려야 했다. (세브레가 쿠방 데주아조 56번지에 새로 빌린 이 화실 을 그는 1908년까지 사용했다.)'호사, 평온, 관능'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은 마티스가 그때까지 시도한 모든 기법과 양식을 보여 준다. 그림은 샤를모리스의 말을 빌리면, '살롱 심시위원회의 의구심'을 곧바로 샀다. 루이 복셀은 이 작품의 직선적이고 독식 적인 표현을 문제 삼았다. 시냐크도 맹렬히 비난했다. 비록 반스 재단의 계단 벽에 걸릴 정도로 푸대접을 받긴 했지만, 이 그림은 고도의 감각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표현해,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 라르메가 그렸을 법한 회화 시를 창조하겠다는 마티스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이었다. 1906년 5월, 콜리우르로 돌아간 마티스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그릴 생각"이라고 밝 혔다. 사람들은 그를 야수파로 이해하던 바로 그 무렵에 마티스는 조각과 도자기에 손을 데 고 그 작업을 캔버스에다 옮겼다. 마티스의 그림은 이내 순수하게 장식적인 방향으로 흘렀 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생각이었다."고 그는 몇 년 뒤에 말했다. 제3장 색, 무용, 음악 '삶의 기쁨'에 나타난 낙원의 몽상은 세잔 에서 한번 걸러진 야수파의 전원 풍경화 이미 지가 단편적으로 느껴지는 야외소품들에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1906년 봄 마티스 는 알제리로 떠나 알제, 콩스탕틴, 바트나, 비스크라 등지를 떠돌았다. 그는 알제리의 빛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콜리우르로 돌아온 마티스는 여름 내내 '젊은 뱃사람'을 연작으로 두 편 그렸다. 그리고 세잔을 본받아 조각의 이미지를 캔버시에 담기 시작했다. 조각가를 닮은 화가의 초상 '삶의 기쁨'에 나온 인물들을 발판으로 삼아 마티스는 1906~1907년 겨울의 대부분을 '입 체감과 양감과 관련하여 조각이 특이하게 제기하는 요구들'을 탐구하는 데 쏟아 부었다. 화가는 조각'비스듬히 누운 나부 I'을 만드는 데 온통 빠져 있었다. 그러나 모양을 다듬 던 중 그만 점토 모형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재난에 눈앞이 캄캄해진'마 티스는 이 인물을 대형 캔버스에 옮긴 다음 오아시스를 배경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그는 나중에 다시 조각 작업을 재개했다.) 시급히 옮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푸른 나부:비스크라의 추억 '(1907)은 단순한 작은 조각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의 장으로 난폭하게 밀고 들어온 환영이 다. '모자를 쓴 여인'에서도 그랬듯이 마티스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노예를 거 느린 오달리스크',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에두아르 마네의 '올림피아'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포즈를 받아들이면서 드라마틱한 긴장을 불어넣고 있다. 과감하게 정면 을 드러낸 자세, 보란 듯이 위로 올린 팔, 여인의 굽은 두 다리의 일관된 수평성은 극단적인 해부학적 왜곡이라는 느낌을 낳는다. 수정한 부분이 많다는 것은 2차원 표면에 그려진 인물 이 원래 모델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깊이를 주기 위해 파랑에 의존했지 만 (그는 이 것을 세잔 에게 배웠다.)캔버스는 자주색, 야자나무 잎, 무화과나무 잎으로 장식 된 평면처럼 읽힌다. '푸른 나부'는 궁극적으로 장식미술 작품이다. 마티스가 1907년 앵데 팡당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을 때 붙인 제목, '그림 III'은 이 작품이 '호사, 평온 ,관능'후 속 작품으로 의도되었음을 암시한다. 창조의 도가니: 도예 알제리 여행증 마티스는 도자기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도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그가 자주 접한 대상이기도 했다. 마티스는 알제리 도자기 몇 점을 프랑스로 갖고 온다. 얼마 뒤 부터 그의 그림에서 도자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07년에 마티스가 앙드레 메테이 와 함께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을 그저 심심풀이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던 화가는 마티스 말고도 여럿 있었다. 메테이는 일찍이 르누아르, 르동,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와 함께 공동작업을 벌였고, 고갱도 1886년에 도예가 에니네 샤플레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1907년경 마티스에게 독일 하겐이 있는 카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의 저택을 위한 3면 도예화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님프와 사티로스, 춤추는 여인들이 등장하고 포도 넝쿨과 포도송이로 테두리가 쳐진 이 장식화는 다음 몇 년 동안 마티스가 그린 대형 그림들 뿐 아니라 마티스가 만년에 그린 작품에도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채색 도예화는 주제도 그렇고 기법의 단순성도 그렇고 마티스 미학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는 이것을 '수선화가 있는 정물'(1907),'녹색 눈의 소녀'(1908)같은 그림에 등장시켰고 뒤에는 실내 장식을 할 때 자기 타일로 된 벽화를 반드시 집어넣었다.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는 색과 캔 버스가 있다. 나는 자신을 순수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것이, 예를 들어 조형물에 다 네댓 개의 채색 반점과 네댓 개의 선을 간단 간단히 그려 넣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 다."선, 순색, 도자기 표면의 하얀 바탕은 하나로 어우러져, 강렬한 파랑, 주황, 빨강에 잠재 된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 위한 창조적인 시험대 구실을 하고 있다. 거대한 작업 앵데팡당전 폐막과 함께 공식 미술행사가 끝나자 그는 콜리우르로 떠났다. 1906년 여름에 그린 평화로운 풍경화'숲 속의 아부''목가'는 '삶의 기쁨'을 연상시키나 '삶의 기쁨'과 달리 인물이 울창한 초목에 파묻혀 있다. 마티스가 중점을 두는 측면이 1907년에 들어와 눈 에 띄게 달라졌다. '삶의 기쁨'에 나왔던 흐느적거리는 인물은 근육질의 '두 여인'으로 바꿨다. '목가'에서 뚜렷한 윤곽 없이 느슨히 처리되었던 작은 동굴은 '용설 한이 있는 개 울'에서 윤곽이 선명한 추상적인 절벽으로 바뀌었다. 그는 신인상파의 약동하는 팔레트를 지배하던 색들을 좀더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조각하는 자화상'(1906)과 함께 시작되었으 며, 그 해초 '푸른 나부'와 함께 확장된 세잔의 분위기는 마티스가 콜리우르에 도착한 직 후에 착수한 '호사 II'(1907~1908)에서 더욱 무게를 얻었다. 놀라운 광채 1906년의 오톤 살롱 전시회는 마티스가 '진보적' 예술가들 사이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마티스에 대한 아폴리네르의 첫 번째 글(1907년 10월 12일) 은 마티스를, "아무도 감히 거부하지 못할 야수파 중의 야수파"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마티스의 출품작 가운데 한 작품은 거부당하고 말았다. 아폴리네르는 또한 '라 팔랑해(결사)'에 기고한 마티스와의 인터뷰에서, "괴물일 것이라 고 짐작했지만, 알고 보니 그는 프랑스의 가장 섬세한 특성들이 결합된 ...치밀한 개혁가였 다. 그의 특성은 단순함에서 오는 힘과 명징함에서 오는 원숙함이다."라고 마티스를 가장 프랑스 적인 화가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목적이 창조에 있는 것이라면 본능을 기 준으로 삼는 그런 질서도 있어야 마땅하다." 1907년 말의 마티스 작품에서 우리는 상반되는 두 논리의 공존을 본다. 한쪽에는 여과되 지 않은 화려한 색채의 장으로 대변되는 장식적 스타일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무색에 가 까우며 양감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와 마티스의 관계도 이런 구분 선을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마티가 입체파의 전범으로 평가되는 피카소의'아비뇽의 처녀들'(1906~1907)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의 기 쁨'과 '푸른 나부'가 피카소의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두 여인'(1907)을 조각하기에 앞서 마티스도 피카소가 얼마 전에 완성한 기념비적인 두 누드화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마티스의 '거북이와 목욕하는 세 여인'과'접시 놀이'(둘 다 1908)는 그 전해에 피카소 가 탐구했던 기념비적인 양식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서로 영향을 주 고받았음을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서 있는 아부'(1906~1907)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아비뇽의 처녀'에 등장하는 한 인물과 아주 비슷하다. 마티스의 '나비 채를 든 소년'(1907)은 1906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동일한 주제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으로 보인다. 마티스는 기존의 이미지들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으려 했지만, 그 추진력은 외부 정보원 과의 잦은 접촉보다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가령 그해 초 여인 의 초상화를 완성하려고 거듭 시도하다가 끝내 실패하자 마티스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베 로네세의 초상화 '아름다운 나니'를 보았다. 그림 속의 인물이 취한 자세와 옷차림이 자기 의 모델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마티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붉은 조화 식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티스는 그림을 딴판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놀라운 광채를 띠었다."고 그는 그림을 완성하면서 말했다. "나는 늘 이해 받으려고 애썼다" 사라 스타인(그녀의 남편 미카엘 스타인 이 돈을 뎄다), 한스 푸어만이라는 젊은 독일 화 가, 미국 화가 패트릭 헨리 브루스의 주선으로 마티스는 와조 수도원에서 1908년 초부터 그 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수가 50명으로 늘어나자 화실을 앵발리드가의 사크레쾨르 수 도원으로 옮겼다. 막스 베버, 그레타 몰과 오스카 몰, 북유럽과 중유럽에서 온 화가들도 학 생들 틈에 섞여 있었다. 마티스의 강의는 철저하게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스는 하나의 방법만을 고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가르쳤다. 마티스는 전통적인 표현법을 가르치되('신체가 차지하 는 면적, 그 주변의 공간, 비례')마찬가지로 구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강의했다.('화가가 자신 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끌어들이는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기술'). 마티스는 색채 이론은 강렬한 대조관계와 유사관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색채의 임의적인 분 산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은 색과 감각 사이에 아무 것도 끼여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화 가는 오직 몇 개의 선만으로도 인간존재의 '깊은 무게'를 표현할 수 있다. 그는 기술적인 조 언 사이사이에 예술에 관한 소견('마음을 달래는 힘')자연에 기반을 둔 작업과 상상력에 기 반을 둔 작업의 차이점, 법칙('개인을 떠난 법칙은 있을 수 없다'), 당시의 미술계 사정에 대 한 자신의 통찰을 끼워 넣었다. 춤과 음악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추킨은 1906년 마티스의 작품을 꾸준히 사들이기 시작했다. 슈추 킨의 친구이며 또 다른 러시아인 미술수집가였던 이 반 모로소프도 얼마 뒤부터 마티스의 그림을 구입했다. 1908년 슈추킨은 그 전해에 구입한 그림에 만족하고 마티스에게 당시 많 이 논이 되던 주제였던 춤에 관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했다. 마티스는 '삶의 기쁨'에서 군무 - 너무나 무대 안쪽에 박혀 있어 나중에 추가로 그려진 듯이 보이는 - 를 따와 곧바 로 작업에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영감에 휩싸여 마티스는 유채 스케치 '춤 I'을 완성했다. 이 작품 에서는 발랄함과 유례없는 활기, 과단성이 결합되어 있다. 마티스는 슈추킨의 격려에 힘입어 그림을 한달음에 완성했다. 곧 이어 속편으로 그려진 '춤 II'는 '춤 I'에 비해 좀 격정적인 색조로 바뀌었고 발랄하 고 뛰도는 춤꾼들도 좀더 원초적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춤을 추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도 더 장대해졌다. 춤꾼들의 몸놀림 자체는 '삶의 기쁨'에서 어렴풋하게 감지되는 카 르마뇰(프랑스 혁명 당시에 유행한 춤: 역주)이나 마티스가 남프랑스에서 보았던 사르데냐 춤이 아니라, 그가 파리의 카바레에서 보았던 파랑동(프로방스 지방의 춤: 역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1909년 3월 31일 슈추킨은 이렇게 썼다. "저는 당신의 '춤'이 너무나 좋아서 부르주아들 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저의 집층계벽에다 이 누드 그림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음악을 주제로 한 그림을 한 점 그려 주셨으면 합니다."마티스는 군말 없이 음악을 연주하 는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대형 캔버스에 담았다. 마네의 '늙은 약사'를 장식적으로 재구성 한 듯이 보이는 '음악'(1909~1910)은'춤 I'에 나타난 색채의 조화를 바이올린의 풍부한 떨림 음으로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마티스가 '대화'에 착수한 1908년 가을부터 이 작품을 완성한 1912년까지 그의 그림으로 파란색이 쇄도해 들어온다. 또 하나의 장식적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업 실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일컫는 초월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나 무대의 차원 에 머물지 않았다. 그곳은 고독, 행동, 명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으며, 독보적인 색의 공간 이었다. 제4장 거대한 아틀리에 신앙공동체 성심 회가 썼던 건물에서 마티스 일가는 1908년부터 죽 살고 있었다. 창문 밖 으로는 지금은 로댕 박물관이 된 비롱 호텔의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로댕은 그 무렵 작업실 한 곳을 비롱 호텔에 두고 있었다. 비롱 호텔의 투숙객 명단에는 무용가 이 사도라 덩컨도 올라 있었다. 1909년 여름 수도회 건물이 팔리자 마티스 일가는 파리 교외의 이시레물리노로 옮겨갔다 가 나중에 그 집을 샀다.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으로 지어진 그 집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화가는 당장 뒤뜰의 수영장과 온실 옆에다 볕이 잘 드는 목조 아틀리에를 지었다. 그리고 집안을 그림, 양탄자, 직물, 각종 미술품으로 채웠다. 꽃과 모델 "여기가 정원입니다." 마티스는 덴마크의 화가이며 미술사가인 에른스트 골드 슈미트와 가진 1911년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콜리우르를 떠난 뒤로 내 마음에 가 장 드는 곳이지요. 이 화단은 운치 있는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빛 깔들 좀 보세요. 서로들 뚜렷이 구분이 되면서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잖아요." 똑같이 눈부신 정원과 그림이 하나로 융합되었던 것이다. 이시레물리노 시절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인 '춤이 있는 정물'은 전경의 꽃과 마티스가 당시 슈추킨을 위해 그리고 있던 무희들의 원무를 결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910년 초 이 시레물리노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젊은 여인 잔 바드랭을 모델로 한 인물화는 모델을 막 피 어오르는 튤립 뒤에 세우고 있다. 역시 바드랭을 모델로 한 다섯 점의 '자네트'흉상에서 식물의 발육, 튤립의 만개(滿開)가 사람의 얼굴에 담기기 시작한다. 뒷날 마티스가 타히티에 서 돌아와 완성한 작품에서도 꽃으로 변한 머리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마티스의 다른 조각에서도 여성의 육체는 대지에서 발육하는 식물처 럼 묘사되고 있다. 친친 휘감기면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뱀', 굵은 나무 줄기처럼 힘차게 하 늘로 솟아오르는 '등'시리즈가 여기에 해당한다. 오리엔트의 계시 1910년 10월 1일 오톤 살롱 전시회가 개막되자 마티스와 마르케는 한스 푸어만과 도중에 합류하여 뮌헨으로 떠났다. 폐"막을 코앞에 두고 있던 이슬람 미술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 다. 오리엔탈리즘은 오래 전부터 유럽 미술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 왔다. 마티스도 일찍이 1903년에 이슬람 미술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슬람 도자기 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품이라고 극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예술의 수많은 장르가 한자리에 대대적으로 모여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 이었다. 당시의 전시회를 찍은 사진들은 바닥에 겹겹이 펼쳐진 화려한 양탄자, 현란한 직물, 정교한 자수, 도자기, 칠기, 금속공예품을 보여 준다. 유럽과 중동 각지에서 추려 모은 이슬 람 예술의 진수들이었다. 이 환상적인 전시회는 세 화가를 매료시켰다. 세밀화에서 양탄자에 이르는 이슬람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섭렵하면서 마티스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에 눈떴다. 뒤얽힌 식물 모양과 추상적인 곡선을 이용한 아라베스크 줄무늬는 사실적으로 관찰된 모티프에 국한되었던 '답답한 공간'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규정하기 어려운 공간, 한 예술작품의 경계선이 그 너머의 세속적 현실과 뚜 렷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 아라베스크, 장식적 테두리, 겹쳐지는 무늬가 낙원의 무한성을 효 과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이 체험은 마티스의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티스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비평가들은 아직도 '춤 II'와 '음악'에 혹평을 가하고 있 었고 슈추킨은 마티스의 작품을 더 이상 구입하지 않을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설 상가상으로 마티스는 아버지의 부음을 접했다. 엄청난 심리적 중압감에 짓눌리던 마티스는 다음달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스페인으 로 떠났다. 마티스는 거기서 이슬람 도예의 자연스러운 현장과 만날 생각이었다. 마티스는 마드리드에서 잠시 머문 뒤 줄곧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 다를 여행 했다. 그페인을 여행하면서 그린 두 점의 정물화에서는 진한 붉은 색 바탕을 찾아볼 수 있 는데, 이것은 장식적인 소용돌이 직물 무늬를 위한 배경 구실을 하고 있다. 아틀리에4부작 1911년 초 마티스가 이 시로 돌아온 뒤 양탄자, 병풍, 옷 한 벌이'분홍 화실'에 등장했 다. '분홍 화실'은 그해 마티스가 그린 넉 점의 아들리에 그림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었다. 감촉이 느껴질 듯한 직물의 생생한 무늬와 화실을 덧없는 분위기가 대조를 이룬다. 장식성 이 자연 공간에서 모든 사실성을 비워 내기 시작한 듯한(그림 속에 마티스의 조각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느낌을 준다. 그해 봄 '분홍 화실'을 완성한 직후 마티스는 다음 실내화인 '화가의 가족'을 그리기 시작 했다. 이제 꽃의 모티프가 전체 작품공간에 펼쳐지면서 인물은 당당한 실내장식의 부속 물로 상징적 상관물로 바뀐다. 마티스가 처음으로 가족을 등장시킨 이 그림에서 인물들은 똑같은 옷을 입은 두 아들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체스판의 말들처럼 서로 격리되어 있다. 몇 년 뒤 마티스는 이 그림에서 가족은 '순전히 시작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도처에서 맞닥뜨리는 다고 토로했다. 아틀리에 4부작의 세 번째 작품으로 그해 여름 콜리우르에서 그려진 '가지가 있는 실내' 는 한 평론가가 말한 '벨라스케스 효과(빛과 반사광에 매료된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 스를 염두에 둔 표현)'을 활용하고 있다. 덕분에 마티스가 공간을 처리하는 방식은 한 차원 더 복잡해졌다. 일련의 액자와 그림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작품은 공간의 경이로운 다양성과 그 공간을 장악하는 마티스의 탁월한 기량을 유감없이 보 여 주고 있다. 이와 달리, 앞서 그린 두 점의 실내화는 이른바 '베르메르 효과'를 통해 장식 회화의 관조적인 측면을 끄집어내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는 고요한 분위기를 밝은 색으로 탁월하게 묘사했다. 아틀리에 4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해 말에 그려진 '붉은 화실'에서는 장식성에 대한 강조가 수그러든다. 마티스는 자신의 화실을 '관찰자의 마음속'공간으로 바꾸었다. 붉은 바 탕에서 유일하게 돋보이는 것은 그가 그린 밝은 작품들뿐이다. 야수파의 풍경화는 붉은 색 으로 덮였다. 마티스는 마음의 눈, 곧 붉은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였다. 모스크바 체류 1911년 10월 말 '붉은 화실'을 마무리한 직후, 마티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모스 크바까지 함께 여행을 하자는 슈추킨을 초대를 수락했다. 11월 5일 슈추킨은 마티스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슈추킨은 세잔, 모네, 고갱 마티스의 작품을 25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프 랑스에서 각광받는 일류 화가가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러시아 전역 에 퍼졌다. 언론은 마티스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그러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은 마티스의 높은 명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작품이 진부하다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 냈다. 11월 22일, '몸서리치는'추위 속에서 마티스는 '태양을 찾아' 가급적 빨리 남쪽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살아 있는 숭고함" 1912년 1월 29일 화가는 자신과 아내를 탕헤르로 실어다 줄 리자니호 갑판에 있었다. "기 가 막힌 날씨"라고 그는 파리에 남아 있던 마르그리트에게 편지에서 썼다. 마티스가 모로코 로 가게 된 것은 그 전해 여름 잠시 이곳에서 지냈던 마르케의 권유 때문이었다. 마르케는 자기도 합류할 뜻을 부추였다. (마티스가 여러 번 간청했지만 결국은 오지 않았다.)마티스 부부가 빌라 드 프랑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는 비가 억수처럼 퍼붓고 있었다. "탕헤르에 온 지 벌써 달포가 지났군." 마티스는 3월 1일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보름동안 밤낮없이 그저 비만 퍼붓더니 거짓말 처럼 하늘이 맑게 개더구만, 햇볕은 또 얼마나 따사로운지, 리비에라와는 전혀 달라. 노르망 디의 우거진 우림과도 다르지. 그 장식미란! 너무나도 새로운 경험이어서 파랑, 빨강, 노랑, 녹색에 담으려니 막막하구만." 그와 비슷한 현기증을 수십 년 전인 1832년 외젠 들라크루아도 느낀 바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탕헤르의 눈부신 색채뿐 아니라 '살아 있는 숭고함'의 구체적 사례들에 대해 서도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이를테면 '바로 옛날식' 복장, 군청색 또는 선 황색 카프탄 (소매가 긴 아랍 옷), '자주색'과 '주홍색' 옷감, 붉은 재갈,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화과 같은 진한 청록 빛의'바다와 머리 위에서 작렬하는 '지독한 태양'이었다. 날씨 때문에 호텔에 갇혀 지내야 했던 마티스는 방안에서 파란 붓꽃을 그렸다. 그 다음 며칠 동안은 찌푸린 하늘 아래 누워 있는 탕헤르만을 스케치했다. 하늘이 맑게 개자 '창에 서 바라본 풍경'으로 군청색이 펼쳐졌다. '오렌지 바구니'는 화창한 날씨를 알리는 신호였 다. 모로코의 창 마티스는 모로코의 자연이 준 인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정원을 주제로 한 좀더 자유롭 고 자연스러운 두 점의 작품을 잇따라 완성했다. 뒤에 그는 그중 하나인 '야자수'를 "불꽃 처럼 거침없이 솟구친 창조의 충동 속에서 그렸다."고 술회했다. 4월 19일, 마티스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창에서 바라본 풍경'의 파란색이 이제 마 티스가 1908년부터 손대기 시작했던 '대화'를 뒤덮었다. 9월 말, 그는 이반 모로소프가 주 문한 두점의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탕헤르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뭄은 봄에 보았던 연 초록 빛, 청록빛 풍광을 '사자의 거죽'같은 황토색으로 바꿔 놓고 말았다. 그해 초 자신을 매료시 켰던 주제를 잃어버린 마티스는 말을 타거나을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11월 말, 친구 샤를 카무앵 부부가 마티스와 합류했다. 모로코의 창에서 그려진 또 하나의 작품 '성문'도 그해 겨울 틀을 갖추어 갔다. 첫 스케 치의 엷은 황록빛과 연분홍 황토 빛은 부르더운 청색으로 바뀌었고 성문은 둥근 뿌리처럼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성문' '창에서 바라본 풍경' '테라스에서'는 일찍이 낭만주의 화 가들을 꼼짝없이 묶어 두었던 파란 색조에 완전히 지배된 3부작을 이룬다. 꽃과 리프족(북 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한 갈래)전통의상을 담은 실내화는 마티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봄의 충실함과 야성을 되살리고 있다. 마티스의 두 번째 모로코 여행은 1913년 2월 중순'모로코 카페'의 완성과 함께 끝났다. 장식성이 돋보이는 이 그림은 화가가 탕헤르에서 발견한 '절 대적 고요'를 완벽하게 재현하면서 황홀경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유예시키고 있다. 봄의 제전 1913년 봄 (마르세유와 코르시카를 거쳐)이 시레물리노로 돌아온 뒤에도 탕헤르의 기억의 마티스의 그림들에 살아 있었다. '꽃과 도자기 접시'와 '파란 창'의 엷은 황록색을 진한 청색의 바탕이 뒤덮었다. 청색은 입체파의 기하학적 형태와 마티스가 마음의 눈으로 본 모 로코 사이에 놓인 베일로, 세잔의 분위기를 전하는 후광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청색은 동방 에 대한 마티스의 주관적인 이해와 정물화 및 풍경화의 객관적인 세계를 결합했다. 그해 여름 마티스는 '등I'(1908~1909)를 좀더 건축학적인 조각으로 재구성하고, 1909년 '춤 II'와 '음악'의 야심만만한 후속 작품으로 슈추킨에게 스케치만 보여 주고 아직 끝내 지 못하고 있던 폭포에서 물놀이하는 여인들의 그림을 마저 그렸다. 뒤에 '강가의 물놀이 '(1909~1916, 82~83페이지)로 완성되는 이 그림은 주홍색, 청색, 녹색의 수직 줄무늬로 모로 코의 자연을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마티스는 마치 '등'조각들의 장대한 느낌을 캔버스에 옮겨 놓으려고 마음먹은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분위기와 이전의 장식적인 작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제는 삶을 잔 양하고 무희들의 발랄한 원무를 그릴 시가가 아니었다. 임박한 세계대전의 조짐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춤'과 '음악'에 나타났던 약동하는 색채는 녹색, 검은색, 흰색, 회색의 줄무늬로 바뀌었다. 마티스는 이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아내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아내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의 추상적인 특성에게 자리를 내준다. '모로코의 행복한 시절'은 이제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대형 장식화 '모로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색, 회색, 황토색 의 토막들로 이루어진 이 그림의 추상적인 구성은 이고르 스타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1913)에 나오는 음의 토막들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코앞에 두고 마티스는 노틀담 대성당을 그렸다. 깨지기 쉽고 투명한 어항으로 임박한 전쟁의 파괴력을 막아내기라고 하려는 듯이. 물질과 기억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을 때 마티스는 메이블 워런의 스케치, '높은 걸상 위의 여인'(제르멘 레날), '이본 랑스베르 양의 초상'을 비롯한 일련의 초상화를 마 무리짓고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마티스가 여러 번 고쳐 그린 '이본 랑스베르 양의 초상 '은 '자네트'조각들처럼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라는 시각적 비유로 젊은 여인을 표현한 작 품이었다. 모델 주위에 뿜어 나오는 곡선들이 눈길을 끌다. 그해 봄 마티스는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을 사진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 게 되었다. 랑스베르 양의 몸을 휘감고 도는 유령 같은 선들은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인지 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화가는 물길로 환원될 수 없는 생명의 역동성을 부르짖은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였다. 마티스는 입체파 화가 후안그리스, 알베르 글레제, 장 메 칭거 - 그의 추상적 양식은 구조와 공간을 파편 화했다. - 와 교류를 갖는 한편, 박력과 기 계적 에너지에 초점을 둔 미래주의와 막 결별하고 초기 이탈리아 미술에 뿌리를 둔 고전적 화풍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지노세베리니와도 자주 만났다. 마티스는 또 다리, 청기사단 같은 독일 모더니스트 그룹의 전시회도 놓치지 않는 등 많은 지식인,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마티스는 마르케와 함께 당시 공공사업부 차관이었던 마르셀 상바를 만나 자원 입대하겠 다는 뜻을 비추었다. "드랭, 프라크, 카루앵, 퓌가 모두 목숨을 내걸고 전선에 나가있습니다....나 혼자 후방에 남아 있자니까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어요,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상비는 한마디로 그들의 간청을 일축했다. "최선을 다해 그림 을 그리는 것이 애국하는 길입니다." 피난 보앵앙베르망두아는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된 직후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예비역 장교이던 마티스의 동생은 하이델베르크에서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마티스의 동생은 편지 에서 깊은 절망감과 끝없는 기다림, 가족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하소연했다. 8월 26일자 신문에서 퇴각하는 프랑스군이 솜강에서 보주강까지 뻗어 있다니 사실 - 그렇다면 파리와 영불해협으로 가는 길을 독일 군이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였다 - 을 전해 듣고 마티 스는 가족과 함께 이시레물리노를 떠나 처음에는 툴루즈로 갔다. 9월 10일, 마티스 일가는 마르케와 같이 콜리우르에 도착했다. 후인 그리스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마티스와 그리스는 그림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가까운 세레에 살고 있던 조각가 마놀로를 찾아갔다. 1897년에 브르타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티스는 창문을 그 렸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 보앵의 시민 포로를 위해 동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1917년의 한 기사는 이 연작의 프랑스적 영감과 순수한 선과 애국적 동기를 찬양했다. 마티 스는 그리스 그림의 수집상을 만나고, 드행의 일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1914년 1월, 마티스가 빌린 작업실은 케생미셸가 19번지 건물의 4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마티스는 마르케와 재회했다. "작업은 순조롭네." 마티스는 카무앵에게 편지로 자 신의 근황을 알렸다.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1914년 가을 '금봉 어와 팔레트'를 그리면서 그는 이미 자신의 작업실 벽에 걸려 있던 쇠라의 그림보다 '더 강 렬하고, 더 정밀하고, 더 아기자기한' 쇠라의 소품을 베르냉 화랑에서 빌렸다. 마티스의 작 업실 벽에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야곱과 씨름하는 천사'사진과 그가 오래 전부터 거래해 온 베르냉 화랑을 위해 최근에 완성한, 세잔의 과일 정물화를 본뜬 석판화도 걸려 있었다. 1915년 11월 22일 그는 '현대적 구성 법에 따라'데 헴의 화풍을 차용한 거대한 정물화를 끝냈다. 한 수집가가 당장 그 작품을 낚아챘다. 드랭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수집가의 집에 서)나는 피카소의 최근작을 보았다."고 마티스는 썼다. "콜라주 없이 순전히 물감에만 의존 한 새로운 양식의 어릿광대였어. 자네도 보았는가? 그림 교습 마티스는 '모로코 사람들'을 다시 손대는 한편, '강가'의 물놀이'도 꾸준히 그려 나갔 다. '강가의 물놀이'는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을 새롭게 번안한 작 품이었다. 쿠르베의 '화가의 작업실'(1855)은 자연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베어 있는 파카소 의 미완성작 '화가와 모델'(1914)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6~1917년 겨울에 화실을 주제로 그려진 마티스의 그림들에서도 쿠르베의 영향이 느껴진다. 마티스는 파카소의 '우울한 화 가'(그는 붓을 놓고 있다.)와 대조적으로 '작업하는 화가'를 내세우고 있다. 마티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화가는 모델, 창문, 거울, 캔버스가 엮어 내는 치열한 격투를 말없이 중재한다. 마티스는 프론즈로 표현한 '장식 인물'(1908)과 '높은 걸상 위의 여인'(1914)의 이미지 를 기념비적인 '피아노 교습'(1916)에 담았다. 이것은 상반된 흐름 사이에서 상처받은 자아 를 찾는 의로운 창조자의 모순된 열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였다. 이듬해 여름 유럽이 전면전에 휘말려 군인과 민간인이 모두 지쳐 있을 때 마티스는 '음 악 교습'에서 이 주제를 다시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제면 에서 볼 때 두 그림은 완전히 판이하다. 모순에 시달리던 외로운 화가는 사라지고 화가가 사랑하는 이들이 한자리 에 모인다. 마티스는 '암울한 시기'의 가정생활과 관련된 감동적인 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려 냈다. 마티스의 작은아들 피에르는 탱크 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큰아들 장은 공군 지상요원 으로 소집되었다. 한 비평가의 말처럼, 그림에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던 화가는 결국 가족 애와 애국심의 윤리적 지상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 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매혹적이다." 마티스는 1917년 말 니스에서 묵었던 호텔 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호텔 방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던 장식성은 그가 남태평양으로 떠날 때까지 마티스의 작품세계를 지배한다. 제5장 "내 몽상의 대상" "그 힘겹던 시절에 나는 (일간) 신문과 우편물만 기다리며 살았다. 나는 자신의 감정에 많 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그림에 더 이상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풍경화를 그렸다." 마티 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새로 구입한 자동차 르노 11에 모든 '잡동사니'를 쓸어 담고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 리기 위해 가까운 숲으로 달렸다. 풍경화에 대한 관심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티스 이전에도 모네(그는 뒤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 집을 방문한다.)와 코로가 프랑스의 시골을 탐구하려는 충동을 느끼지 않았는가. 몇 달이 못 가 마티스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이끌려 프랑스령 리비에라에 있는 르누아르의 집을 찾아갔다. 1914년 이후 마티스는 기회만 생기면 남쪽으로 떠났다. 물론 예전처럼 멀리 탕헤르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1915년 12월 마르케와 마티스는 마르세유로 갔다. 다음해 1월, 마티스는 아틀리에를 구할 작정으로 다시 마르세유로 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7년 10월 말, 마 르케와 함께 다시 이곳을 찾은 마티스는 호텔 방에서 평론가이며 수집가인 조르주 베송의 초상화 두 점을 그리고 서쪽 레스타크 지역의 나무들을 그렸다. 전망 좋은 방 바람이 몹시 거센 어느 날 강행한 야외작업은 기관지염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마티스는 온화한 날씨와 쾌적한 호텔로 알려진 휴양 도시 니스로 갔다. 몸을 추스리기 위해서였다. 1917년 12월 20일, 화가는 보리바주 호텔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비좁은 방에 투숙했다. 달 포가 넘도록 이어진 매서운 추위 덕분에 마티스는 인상파 분위기의 간단한 채색 스케치를 연상시키는 실내화들을 빠른 속도로 그려 나갔다. 니스의 빛은 인상파의 작품보다 눈부셨다. 이때 그려진 '바이올린이 있는 실내'에는 1916년에 시도한 기하학적 화풍이 반영되어 있 다. 12월 31일, 그는 르누아르를 방문했다. "나는 르누아르를 너무나 존경했다."고 뒤에 마티 스는 피카소에게 털어놓았다. 피카소 역시 르누아르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카뉴에 있는 르느아르의 별장 레콜레트를 찾아갔다. 그가 따뜻이 맞아 주었다." 마티스 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그린 작품들을 보여 주자 노화 가는 '약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치'를 주면서 검은색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또 한 차례의 방문에서 마티스는 다시 자기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나쁘지 않군." 르누아르가 말했다. "하지만 쿠르베와는 거리가 있어." 1919년 6월 르누아르가 타계했을 때 마티스는 단 언했다. "정말이지, 르누아르는 비범했다.! 나는 전부터 르누아르보다 더 고결하고 영웅적인 이야기, 르누아르보다 더 빛나는 업적을 남긴 사람을 가졌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 해 왔다."르누아르와의 만남에서 얻은 심리적 만족감이 없었더라면, 마티스가 마르세유에서 어느 정도 감은 잡았지만 자 기화하는 데는 실패한 동양적 관능의 분위기는 영영 되살아나 지 못했을 것이다. 화가의 소도구 "풍경화 때문에 발이 묶여 있다네." 마티스는 1918년 4월 10일 카무앵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풍경화에서 가식적인 결과를 얻어내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그곳도 어 디까지나 내 희망사항이지만 말이야." 마티스가 니스에 머물면서 자신의 삶을 예술의 요구 에 맞추기로 결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918년 2월부터 4월까지 호텔 바로 옆에다 얻은 작업실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꽃을 그렸다. "모로 에게 배운 폴 오드라가 운영하는 에콜 데자르 데코라티프에서도 일을 한다네. 또 미켈란젤로의 '밤'을 데생하고 있어. .....그의 '로렌초 데메디치'도 연구하고 있지. 미켈란 젤로 조각의 명징 하면서도 복합적인 개념을 내 안에 불어넣고 싶다네." 5월에 마티스는 숲이 우거진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후 여름 시즌 은 파리에서 보내고 가을에는 니스에서 작업하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마티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1918년 4월 화가들이 떼지어 파리르 등졌다. "마티스가 니 스에 있고, 키스 링은 시냐크, 이리브가 있는 곳에서 과히 멀지 않은 지중해 연안에 가 있 다. 오르티츠 드 자라테, 모딜리아니, 반동겐, 조르주 브라크도 파리를 떠나 아비뇽에 파묻혔 다." 1918년 11월, 마티스는 지중해 코트 다쥐르 호텔에 방을 잡았다. 이 '고색 창연한 고급' 호텔의 우아한 이탈리아풍 천장, 타일이 깔린 마루, 무대처럼 은은한 조명을 끌어들이는 채 광 창이 너무나 좋았다. 니스의 소도구 - 파라솔, 병풍, 거울 -에서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동일한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얼마 전까지 파리에서 함께 작업했던 모델 로레트 대신 앙투아네트 아르 누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제 깃털 달린 모자 처럼 단순한 주제도 "하나의 세부만을 묘사한.......수많은 데셍"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프랑스 정원의 다과회 1919년 여름 이시레물리노에서 마티스는 거대한 장식화'정원 다과회'를 그렸다. 그 주제 와 규모(140X211cm)는 모네를 연상시켰다. 마르그리트가 구두를 까딱까딱 흔드는 동안 양 치는 개 릴리는 귀를 긁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악화된 마티스 부인은 모델 앙투아네트에 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비스크라의 야자수와 그가 탕헤르에서 그렸던 나무그늘을 연상 시키는 가운데 부분을 제외하면, 권태로운 분위기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이 정원은 낙원 과 전혀 거리가 멀다. 5월에 마티스는 파리의 베르냉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13년이래 처음으로 가진 개 인전이었다. 아방가르드 작가이며 화가인 장 콕토는 마티스의 전시회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태양에 흠뻑 젖은 야수는 보나르의 새끼고양이로 변했다."고 콕토는 썼다. "보나르, 뷔야르, 마르케의 (장식적이며 사사로운)분위기가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나는 자연을 곧바로 담아 내는 인상주의 작업을 시도했다."고 그해 여름 마티스는 평론 가 라그나르 호페에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집중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고 색채 만이 아니라 선으로도 좀더 강렬한 표현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 시점에서는 내 용, 공간적 깊이, 세부묘사의 충실성 같은 다른 가치들은 어느 정도 회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의 모든 것을 재결합하려고 한다. 조만간 성공하리라 믿는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러시아 발레단 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스트라빈스키가 1908년에 착수하여 1914년 완성한 3막 발레극 '나이팅게 일'의 무대의상과 무대장식을 맡아 달라고 의뢰해 왔다. 중국이라는 환상적인 무대, 스트라 빈스키의 울림이 풍부한 선율, 레오니드 마신 의 당장 마티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제의를 수락했다. "나는 의상을 움직이는 색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는 썼다. "색들은 움직이되, 무대장식의 전체적인 효과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9월에 그 는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간 것은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작업에 임할 무렵 입체파 추종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그는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예의 상 따뜻한 말을 건넸지만 나라는 존재를 아롱곳하지 않았다. 모든 영광은 마누엘 다 팔 라 의 발레('삼각모자')와 무대장식을 맡은 피카소에게 돌려지고 있었다. 1920년 2월 20일, 초연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타계했다. 그해 여름 화가는 쿠르베와 모 네, 샤르댕과 마네 가 작업하던 영불해협의 에트르타로 떠났다. 백사장에 뿌려진 빛과 물고 기를 그린 그림과 마티스가 어머니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린 작품들에서 이 화 가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개인 극장 베르냉 화랑에서 '앙리 마티스가 그린 50점의 데생'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1920년 9월 화가는 니스로 돌아갔다. 마티스를 다룬 최초의 연구서도 몇 달 전에 나온 바 있었다. 베르 냉 화랑은 그해 여러 작가가 쓴 마티스에 관한 두 번째 평론집을 준비했다. 이제 마티스의 모델은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로 바뀌었다. 그녀는 1927년까지 죽 마티스의 모델로 일했다. 1921년 가을, 마티스는 니스 구시가 상가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바다와 마주 한 건물 3층에 방을 얻었다. 역사학자 콩트 드 페에를라가 살던 건물이었다. 알록달록한 무 늬로 장식된 이 방을 그는 꽃무늬 직물, 벽걸이 장식, 카펫 튀어나온 격자 창을 완비한(한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자신만의 작은 동방 극장"으로 꾸몄다. 마티스는 그때그때 그림의 색 조에 맞추기 위해 무대장치를 세심하게 바꾸었고,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린 오달리스 크(odalisque, 하렘의 노예 또는 첩)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마티스에게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프랑스 국내외에서 마티스의 전 시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엘버트 C 반스, 클라리벨과 에타 콘 같은 새 수집가들이 마티스 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딸 마르그리트는 비잔틴 미술과 현대 미술을 공부한 비평가 조르주 뒤티와 결혼했다. 아들 피에르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화랑을 치렀다. 화가는 뒤에 이 렇게 술회했다.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파리를 벗어나 걱정 근심을 모두 잊기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오달리스크'는 아련한 향수, 아름다운 백일몽, 마법 적인 분위기에서 황홀 한 낮과 밤을 지내면서 얻은 체험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1920년대의 가장 걸출한 조각 - 마티스가 제작한 가장 큰 입상이기도 하다 - 은 그가 니 스 에콜 데자르 데코라티프에서 스케치한 미켈란젤로의 '밤'(1524~1534)을 토대로 만든 ' 커다란 나부좌상'(1925~1929)이다. 마티스는 자기 아파트의 장식적인 벽면을 배경으로 역동 적 포즈를 다양하게 시도했다. 이 묵직한 조각상은 처음 니스에 와서 그린 실내화의 은은한 빛 속에서 거의 증발해 버렸던 긴장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오달리스크'를 완성했다고 해서 내가 그때까지 이룩한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울림의 세계로 돌아가 공간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는 공기가 자유롭게 흘러들 수 있는 공간 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1925년 여름, 마 스는 아내, 딸, 사위 와 함께 두 번째 이탈리아 방문 길(로마, 나폴리, 시칠리아)에 올랐다. 다시 니스로 돌아온 뒤 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오달리 스크를 잇달아 그려냈다. 이듬해 가을 마티스는 4층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 방은 전망이 더욱 좋아 바다가 시원 스럽게 내려다 보였다. 자연히 작품도 더욱 웅대해졌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온 빛은 타일 무 늬의 벽지에 반사되면서 그의 그림을 진주처럼 투명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작업실에 앉아 포즈를 취하던 누드 모델의 실체가 희미해지기도 했다. 예들 들어 미완성 작으로 끝난'마드 라스 모자를 쓴 여인'(1929~1931)에서 모델은 하얀 캔버스에 보일 듯 말 듯 이목구비만 드 러난 물질 성이 담기지 않은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글라디올러스와 달리아의 거대하 고 웅장한 화환이, '노란 드레스'(1929~1931)에 보이는 뒤창처럼 마티스를 바깥 세계로 불 러낸 듯하다. 마티스는 이 그림을 끝내지 못하고 타히티로 떠났다. 화가의 휴가 1930년 2월 타히티로 떠날 때의 심정은 지중해 연안으로 떠날 때와 같았다. 그것은 '다른 빛'을 보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마티스는 1942년에 가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자신이 거듭 니스로 돌아오는 이유는 "특히 아름다운 1월의 그 투명한 은빛 햇살" 때문이라 고 말했다. 코르시카, 콜리우르, 탕헤르에 빠져든 것도 빛 때문이었다. 뉴욕에 잠시 배가 정 박했을 때 본 그 '순수하고 빗물 질적이고 수정처럼 영롱한 햇빛'은 나중에 그가 남태평양 에 도착해서 보았던 햇살만큼이나 그를 감동시켰다. 진한 황금빛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 라보는 느낌이었다고 훗날 그는 멋지게 표현했다. 또한 남태평양은 그 무렵 마티스가 찾고 있던 '다른 공간'을 약속하는 듯했다. 3월 4일 뉴 욕에 도착했을 때 마티스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나는 전부터 늘 내 몽상 의 대상들이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현실의 공간을 넘 어서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사건이 다르게 전개되는 지구의 반대쪽에 대한 나의 호기심 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티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모네의 뛰어난 그림들, 세잔의 작품 석 점, 드가, 르누아르, 쿠르베의 그림들, 다소 의심스러운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았 다. 캘리포니아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는 미국의 '광대함'과 '눈부신 햇살'에 넋을 잃었 다. 로스앤젤레스는 '거대한 리비에라'였으며 그곳의 정원은 모로코를 연상케 했다. 3월 21일, 마히티호에 승선했다. 그는 갈매기를 그렸다. '황금 관과 따오기와 젖빛 푸름에 둘러싸인' 남빛 바다는 그가 아작시오에서 돌아온 직후 파리에서 산파란 나비 표본을 연상시켰다. 그는 출발 직전에 이렇게 썼다. "내가 섬으로 가 려는 것은, 색다른 밀도를 가진 밤과 여명의 빛을 보려 함이다."타히티에서 마티스는 "초호 바닥의 잿빛이 감도는 옥록색 물빛, 그물처럼 가지를 뻗은 산호초와 그 다채롭고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 산호 주위로 헤엄쳐 다니는 앙증맞은 파란 물고기 떼"에 매료당했다. 그는 "나 중에 프랑스에 가지고 가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기록들을 많이"수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꿈결 같은 시간 - 신처럼 보였던 투아모투 원주민을 비롯한 "사람들, 경치, 나무, 꽃이 경이로 와 닿았다." - 이 흘러간 후 '한증막' 같은 날씨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다. 피로가 누적되면서 그는 제대로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운 친구에게."그는 6월 6일 피 에르 보나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1주일 뒤에 파나마 행 배를 타네. 늦어도 6월말에는 니스 에 도착할 예정이야. 잘 지내고 잘 쉬었지. 별별 희한한 것을 다 보았거든 돌아가서 자네에 게 들려줌세. 삼호섬에서 20일을 지냈다네. 그 순수한 빛, 맑은 공기, 청초한 빛깔이라니. 다 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터키석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네. 숨막힐 듯 아름다운 물고 기들의 빛깔에 홀려 사진 몇 장 박은 것 외에는 두 손놓고 있었어. 잘 지내게. 프랑스에서 보자고." 마티스는 7월 31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니스로 돌아온 그는 다시 '노란 드레스'에 몰두했다. 나중에 본인도 고백했지만 '노란 드레스'는 타히티에 있는 동안 내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본격적인 작업이 시 작되었다. 마티스는 1931년 타히티의 하늘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색채는 우리 자신의 색채 에 견줄 수 있게 된 다음에야, 기억 속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색채의 일부가 나의 그림에 녹아들기를 바란다. 모로코 여행을 떠났던 들라크루아도 마찬가지 심정 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모로코의 색채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10년 뒤에야 비로소 모습 을 더라냈다."타히티와 타히티의 황홀한 색체 또한 마티스의 주제와 작품공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그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창작자가 자기의 삶을 작품에 불어 넣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때 예술품은 마치 자연물처럼 풍요하고 보고 이를 전율로 몰 아넣는 힘 - 그 눈부신 아름두움 -을 가진 것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마티스는 그가 세 상을 떠난 해인 1954년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그 끈질긴 탐구, 그 타오르는 열기, 모든 작품의 탄생 에 필수적인 그 분석의 깊이를 고취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런 사랑이." 제6장 완전한 통일 1930년, 그는 일상에서 벗어난다. 8월에 마티스는 니스로 갔다. 타히티의 기억이 점점 그 의 세계로 스며들고 있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완성된 조각('티아리')에서 사람의 머리는 타히티의 꽃으로 바뀌었다. 20년 전 자네트의 머리가 튤립으로 변형된 것처럼. 9월에 마티스 는 피츠버그의 카네기 회관에서 열린 국제미술전 심사위원 자격으로 미국에 갔다. 그는 1927년에 금상을 받았다. 그해의 카네기상은 피카소에게 돌아갔다. 9월 28일, 마티스는 앨버트 C. 반스를 메리온에서 만났다. 반스는 1차 대전 이후부터 그의 작품을 많이 구입하고 있었다. 반스는 자신이 1922년에 세운 사립재단의 중앙 홀을 벽화로 장식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작품의 내용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재단에 걸 려 있는 피카소, 르누아르, 쇠라의 그림에 매혹된 마티스는 그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반스 재단의 춤 벽화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달 뒤 니스에서 연필과 잉크로 일련의 작은 습작에 착수했다. 12월에는 다시 메리온으로 돌아와 거대한 벽화의 공간적 구조에서 야기되는 세세 한 문제들을 꼼꼼히 파악했다. 마티스는 높다란 프랑스 양식의 창 위에 솟은 거대한 세 개 의 아치에 벽화를 그려 넣어야 했다. 마티스는 니스 도심의 비어 있던 널찍한 차고를 빌려 작업실로 꾸미고 1931년 벽화를 그 리기 시작했다. 벽화의 주제인 춤은 1905년부터 그의 작품에 등장한 낯익은 주제였다. 수잡억을 손쉽게 하기 위해 마티스는 바로 그림에 들어가지 않고 먼저 종이를 오려 냈다. 오려 낸 종이는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완성된 그림은 한구석으로 밀어 두어야 했다. 크기를 잘못 쟀던 것이다. 마티스는 벽화를 끝 낸 다음 다시 이 작품을 마무리; 한다. 1933년 봄에 이르면 무희들의 군무는 파랑, 분홍, 검 정의 순수한 색채 공간에 펼쳐진 '사랑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마티스는 완성된 벽화에서, "관람자로 하여금 반질반질한 문에 얹혀지기에는 너무 어울리 지 않는 작품의 실제 크기를 무시하게끔 유도하는 도주와 상승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려고, 관람자가 마음의 눈으로 이것을 프랑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하늘로 볼 수 있게끔 만 들려고" 노력했다. 마티스는 1933년 5월 15일 '춤'의 반스 재단 설치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나는 지금 필라델피아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그는 피에르 보나르에게 썼다. "벽화는 제자리를 찾았네. 아주 훌륭해. 마치 건물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야. 그림의 본질 이 바뀌었다 고나 할까." 주제와 변주 엽서에서 마티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다소 피로감이 느껴지는군. 올 여름은 조금 쉬어야 할까 봐."그는 나이 이제 예순이었다. 3년 동안 반스 재단에서 위촉받은 작품에만 몰입하다 보니 몸에 적잖은 무리가 따랐다. 여름 한 철 휴식을 취한 마티스는 9월에 니스로 돌아와 그 전에 밀어 두었던 반스 재단 벽화의 한 변형 물을 마무리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개가 있는 실내'도 그렸 다. 마티스는 책의 삽화에 부쩍 흥미를 갖게 되었다. '춤'벽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는 출판인 알베르 스키라 가 펴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을 위해 처음으로 삽화를 그렸다. 이때 마티 스가 무엇보다도 신경을 썼던 것은 "글자가 새겨진 비교적 검은 페이지와 동판화가 새겨진 비교적 흰 페이지를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1934년 마틱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미국 판을 위한 삽화 작업에 착수한다. 호 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일화들은 소설책을 위한 그의 동판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그가 다른 그림을 그릴 때도 풍부한 소재의 원천이 된다. 반스 재단의 벽화를 그리느라 너무 무리를 한 마티스는 생각처럼 빨리 몸을 추스리지 못 했고 1935년까지 별다른 작업을 하지 못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마티스는 이젤 화는 몇 점 밖에 그리지 않고 있었다. 보나르가 '늦바람'이라고 표현 한 것처럼 마티스가 그림의 실효성 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일까? "세태는 변화하게 마련이므로 언젠가는 이젤 화가 사라질 태피스트리를 위한 디자인에 몰 두하여 '타히티의 창가'(1935), '숲 속의 님프'(1936~1943'등을 남겼다. 그중 실제로 태피 스트리로 완성된 것은 '타히티의 창문 I'이었지만 그 완성도는 화가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 치지 못했다. 1938년 마티스가 뉴욕에 있는 넬슨 A록펠러의 아파트 벽난로를 위해 그린 장 식화는 이 시기에 그려진 '누워 있는 대형 누드/분홍색 나부'(1935), '파란 여인'(1937), '음악'(1939)같은 이젤 화보다 한결 느슨한 구조를 갖고 있다. 마티스는 그가 1930년대 말에 집중적으로 그렸던 장식화보다도 드로잉을 통해 여성을 자 유롭게 탐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수많은 누드화 중에는 거친 스케치, 나중에 드 로잉이 덧붙여진 채색화, 판화, 책의 삽화가 많다. 그는 1947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그림이 드로잉 - 지극히 단순하게 가슴에서 바로 나오는 선 말일세 - 과 조금이라도 더 밀착될 수 있도록 일부러 험한 길을 택했네. 나의 여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건 터무니없이 먼길이지." 고통이라는 글자 마티스는 몸져눕고 1937년 9월 입원한다. 회복은 더뎠다. 부인과는 법적으로 완전히 갈라 섰다. 루이 아라공이 말한 '고통이라는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글자는 이후 거듭 마티 스의 삶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1938년 말, 마티스는 샤를 펠릭스 광장의 아파트에서 니스의 시미에 언덕에 자리한 대형 호텔 레지 나로 거처를 옮겼다. 그 호텔은 영국에서 오는 겨울 관광객을 위해 1897년에 지 어진 호텔이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이곳에 묵은 적이 있었다. 마티스의 한 시기가 막 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니스시대는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입은 채 졸고 있는 모델을 그린 ' 꿈'(1940)과 함께 끝났다. 이 시기에 그는 드미트리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적과 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에서 무대와 의상을 맡았다. 안무는 레오니드 마신 이었다.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무대는 반스 재단의 '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로 꾸며져 있었다. 1939년 8월, 마티스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회를 보 기 위해 제네바로 갔으나 그림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전운이 감도는 제네바를 바로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 잡지 '베르브'(시흥)의 표지를 디자인 했다. 스테인드 글래스 빛깔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검정 바탕은 그해 여름 마티스가 파리 에서 그린 그림들에서 나타는 '마네의 검정'이었다. 마티스는 영화도 자주 보러 갔고 특히 장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법칙'에 열광했다. 그는 이후 비서 겸 모델 리디아 텔렉토르스 카야를 데리고 남프랑스로 가서 드로잉과 유화를 그렸다. 마티스의 친구들과 아들은 프랑스를 떠나라고 성화였다. 한때는 그도 알레리나 마르티니 크로 떠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은 니스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40년 5월 독일 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그는 파리에서 브라질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 다. 그는 당장 여행을 취소했다. 그때의 심경을 아들에게 편지로 토로하면서 마티스는 만일 자신이 떠났으면, "도망자라는 죄의식에 짓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방에 깃들인 불안 "과 "끝없는 불편함"이 무의식을 송곳처럼 파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니스로 돌아가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스가 "시간을 금쪽같이 여기면서 부지런히"작업 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전시 1941년 1월 17일 마티스는 리옹에거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았다.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 게 3~4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고 그는 의사들에게 간청했다. 회복기에 그린 드로잉들은 나 중에 '주제와 변주'라는 화집으로 출판되었고 루이 아리공이 서문을 썼다. 젊은 야간간호 사 모니크 부르주아가 일련의 유화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다. 1943년 6월, 마티스는 이 무렵 연합군의 공습목표가 되어있던 니스를 떠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방스의 한 별장으로 옮겼다. 방스의 별장은 타히티를 연상시켰다. 방스에서 그는 '평생 의 작업'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고 간추린 일련의 실내화를 그려냈다. 화가로서의 마지막 피날레였다. 동시에 오려 낸 종이가 방벽을 메우기 시작했다. 반스 제단 벽화를 그릴 때 써서 톡톡히 재미를 본 마티스는 '누워 있는 대형 누드/분홍색 나부'의 연습작업에도 종이 오려붙이기를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잡지 '카이에 다르'(미술평론)의 3,4호 활용했다. 표지도 이 기법으로 디자인했다. 이처럼 선, 색, 조형적 공간을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식용 실크스크린 작품과 마티스가 전시중 내내 작업한 책'재즈'가 나왔다. 1944년, 마티스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처와 딸이 게슈타포에 체포당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멜리 마티스는 6개월 징역을 선고받았다. 딸 마르그리트의 소식은 몇 달째들을 수가 없었다. 마르그리트는 고문을 받은 후 탈옥했으나 다시 수용소로 보내졌 다. 그러나 마티스는 드로잉과 삽화를 계속 그렸다. 1944년 8월 25일에 파리가 해방되자 마티스는 비소로 수도로 올라왔다. 파리에서 열린 마 티스 전시회는 호평을 받았다. 1945년 7월 26일, 예술전문지 '아르'는 '마티스 돌아오다'라는 기사에서 마티스가 1940년 이후 처음으로 파리를 찾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오톤 화랑에서도 그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 트 미술관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었다. '베르브'는 마티스 특집호를 냈고 파리의 메그트 화랑은 그의 작품을 전시했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이 들 전시회에서 빠져 있던 것은 전시에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졌거나 해외로 빠져나갔거나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장식화들이었다. 1946년과 1947년을 방스에서 지내면서 마티스는 '베르브'특별호(1948)에 실릴 대형 실내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1947년 말 드디어 마티스는 프랑스 땅에서, 자신을 빛으로 매료시킨 그 땅에서, 자신의 '이제까지의 탐구'를 총결산하게 될 '건축학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전에 마티스의 간호사였던 자크 마리 수녀의 추천으로 종교화를 소생시키려는 열정에 불타 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레시기에 수사가 마티스에게 그의 별장 부근에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 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해 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바로 의기투합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오려 붙이기 작업을 스테인드 글래스 창에 적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재즈'에서처럼 스테인드 글래스 창은 맞은편의 '글이 적힌 페이지', 곧 '십자가의 길''성모와 성자''성도미니코'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마티스는 1951년까지 모든 시간과 열정을 여기에 쏟아 부었다. 로사리오 성당은 모든 색 채가 하나로 결합 도는 하얀 작업실, 그의 걸작, 그의 마지막 '교향악적 실내화'여야 했다 1949년 초 마티스는 방스를 떠나 성당을 위한 실물과 똑 같은 크기의 모형을 들여놓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넉넉한 레지나 호텔로 옮겼다. 그는 스테인드 글래스 창과 재단을 장식하 기 위해 오려 낸 종이를 벽에 다 붙였다. 벽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런 제도판 역할을 맡게 된다. 그가 성당을 위해 구상한 '주랑뒤의 정원'이 작업실 내부를 덮기 시작했다. 성당은 차근차근 지어져서 마침내 1951년 6월25일 준공되었다. 마티스는 건강 때문에 준공식에 참 석할 수 없었다. 1950년부터 마티스는 다른 오려붙이기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는 방수 성당의 창에서 소재를 딴 것이 많았다. 1954년 잠시 시골에 가 있는 여름이 끝날 무렵 쇠약해진 몸을 끌고 다시 니스로 돌아갔다. "10월 15일," 마르그리트는 뒤에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넬슨 록 펠러 여사의 성당(뉴욕주포칸티코 힐에 있는 유니온 처치)의 장미창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 고 죽는 순간까지 디자인을 수정했다."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 눈을 감았다. 아주 긴 대나무 막대 끝에 단 목탄을 이용해서 마티스는 침대 위의 천장에 웃고 있는 손 자들의 커다란 얼굴을 그려 넣었다. 방 한귀통이, 그의 마지막 오려붙이기 작품('포도덩굴 ''들 양귀비')가까이에는 방스 성당을 위한 창 디자인이 있었다. 마티스의 온 생애를 대변 하는 '천상의 예루살렘'의 수수께끼 같은 기수(騎手)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순결한 힘 으로 무장한 채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기록과 증언 마티스가 본 마티스 마티스는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에게 자주 편지를 썼지만 편지 내 용은 대부분 작품에 관한 것이었다. 편지를 살펴보면 만족할 줄 모르고 작품의 완전성을 갈 구하는 마티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반면 일상에 대해서는 거론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듯 한 태도로 꼭 필요한 사항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짤막한 일대기 한 프랑스 잡지가 창간 특집호에 싣겠노라고, 마니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사생활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화가로서의 이력만을 간단히 적어 보냈다. 1869년 12월 31일, 르카토캉브레지에서 출생. 1887년, 법대 입학. 1892년, 귀사타브 모로의 미술학교에 등록,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 라파엘로, 샤르댕, 다비드스츠 데 cpa, 필리프 드 샹페뉴 등의 그림을 연구. 1894년, 샹데마르에서 프랑스 국립 미술협회가 주최한 살롱 전에 처음으로 출품. 브르타뉴와 지중해 연안에서 창작 휴가, 1904년, 드뤼에 화랑에서 전시회. 당 시 '야수파'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으나 점차 인정받기 시작함. 회화, 조각, 판화 전시회 다 시, 그후 작업을 계속하면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알제리, 영국 등지를 여행. 처음에는 루브르에서 연구한 대가들의 칙칙한 색채를 따랐지만, 점차로 밝은 색채를 쓰게 되었다. 인상파, 신인상파, 세잔, 오리엔트 미술의 영향을 받음, 1914년을 고비로 장식성에 치우쳤던 스타일이 평면성을 천착하는 현재 스타일로 바뀜 생활은 아주 규칙적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 내 작품을 다룬 책과 논문이 다시 있음. 그 글들에서 내 작품세계와 현대 미술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임. 예를 들어,'앙리 마티스'(누벨 르뷔 프랑세),'양리마티스'(크래). 식사와 음악에 관해서 마티스가 니스의 한 친구에게 철저하게 작업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식사습관을 소개한다. 잠시 후 나는 마티스를 저녁에 초대했다. 마티스는 자기는 저녁을 먹지 않으며 저녁식사 시간 뒤에 잠시 들르겠다고 대답했다. 마티스가 왔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발동하 여 왜 저녁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12~13년 전부터," 마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점심 때 과식한다는 사실을 깨 달았습니다. 배가 고플 때 먹는 음식은 진짜 별미지요...주로 정오에 점심을 먹는데 - 나는 무지무지 먹습니다. - 식사 뒤에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 잠시 낮잠을 잡니다. 그런데 저녁 때 다시 배를 채우면 나른해지면서 밤에도 악몽을 꾸다가 깜짝 놀라 잠을 깨 곤합니다. 잠 자리에는 10시쯤 들어가 아침 5시에 눈을 뜨지요. 일찍 일어나야 될 수 있는 대로 햇빛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건강에는 별 이상을 못 느끼고 삽니다...스무 살 때보다 더 건강하지 않나 싶어요. 사람마다 생활습관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나는 술도 조금밖에 안 마 십니다. 대개는 묽은 포도주나 맥주 한 잔 정도로 끝내지요. 독주는 피합니다. 과도한 건 무 조건 질색이에요..." 그는 자신의 그림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몇 번이나 음악을 예로 들었다. 결국 나는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아주 좋아합니다.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어릴 때부터 바이올 린을 켰습니다. 하지만 화가로 성장할수록 내 바이올린 솜씨에 불만이 생기더군요. 한 음악 선생님이 그르더군요. 한 1년만 꾸준히 연습하면 내가 바라는 수준만큼은 올라설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1년 동안 연습했지요. 여섯 시간이나 연습하는 날도 많았지요. 덕분에 지 금은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 앞에서)연주를 해도 망신스러울 정도는 아니랍니다." 프랭크 해리스 '흑점', 1976년 스무고개 짧은 길 문과 짧은 답변. 1. 문: 당신의 그림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답: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2. 문: 추상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답: 경우에 따라 다르다. 3. 문: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조토, 프라 안젤리코, 비잔틴 모자이크, 페르시 아 세밀화? 답: 모두 다지만, 무엇보다도 세잔. 4. 문: 세속적인 주제와 종교적인 주제 중 창조의 즐거움을 더 만끽하는 쪽은? 답: 나는 모든 주제를 인간의 정서로 환원한다. 5. 문: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는? 답: 세잔 6. 문: 당신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단서라면? 답: 말하지 않겠다. 7. 문: 조각이 당신 그림에 미친 영향은? 답: 구체적 형상에 익숙해지고, 드로잉을 통한 자연 묘사를 보완할 수 있었다. 8. 문: 당신의 작품에서, 그리고 미술 일반에서, 선과 색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답: 둘 다. 9. 문: 당신이 색채 구사에 가장 창조적으로 기여한 점이라면? 답: 색을 통해 공간감을 주었다. 10. 문: 당신의 작품 중에서 그 점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그림은? 답: 말하지 않겠다. 11. 문: 색체, 양감, 형태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고 선으로 돌아선 까닭은? 답: 천만에. 나는 언제나 색채와 씨름하고 있다. 12. 문: 종이 오려붙이기와 그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답: 둘 다. 13. 문: 작품을 르카토의 박물관에 기증한 이유는? 답: 내가 태어난 곳이니까. 14. 문: 당신보다 젊은 화가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답: 말하지 않겠다. 15. 문: 절은 화가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답: 많이 그리되.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 16. 문: 미술학도는 먼저 선부터 공부해야 하는가. 색채부터 공부해야 하는가? 아니며 한 꺼번에 공부해야? 답: 기질에 따라 다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한꺼번에 해야 한다. 둘을 조화시키기가 쉽 지 않지만. 17. 문: 음악이나 문학 같은 인접 예술에 대한 소양이나 화가로서의 발전에 중요하다고 보 는가? 답: 아주 중요하다. 18. 문: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는? 답: 모든 시기가 중요하지만,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19. 문: 현대 미술이 나아갈 방향은? 답: 빛. 20. 문: 콜라주에서 당신 예술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아냈다고 보는가? 답: 아니. 아직 끝내지 못했다. '마티스와 풀어 본 스무고개' '로크'지, 1953년 8월 25일 카바레에서 배운 것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모사 하던 수업시절을 거친 마티스는 단순한 모방의 차원을 넘 어서서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화실을 벗어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매일 나는 전날 한 생각을 되살려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습관이 되어 왔는데 아무 데서나 그림을 척척 그려대는 동료들이 몹시 부러웠지요. 몽마르트르에 있는 물랭 드라 갈 레트 카바레의 주인 드브레이가 자기 가게에 와서 그림을 그리라고 화가들을 잔뜩 초대하곤 했습니다. 반 동겐은 걸물이었어요. 무희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척척 그림을 그려냈으 니까요. 나도 초대를 받고 그곳에 가긴 했지만 기껏 배운 것이라고는 파랑들 춤의 곡조뿐이 었습니다. 악단의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악을 쓰면서 일제히 후렴을 넣는 것이었 어요. "쫄딱 망한 아저씨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 드리세!" "빈털터리 아저씨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 드리세!" 당신도 그 노래를 아나요? 뒤에 지금 반스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춤'을 그릴 때 그 곡조가 도움이 되었지요......그림을 그리면서 휘파람으로 흥얼거렸답니다. 어깨를 들썩거리면 서 말이지요......좋은 시절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카르코 '마티스와의 대화'. 1941년 영향 마티스는 다른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발전과 성 장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애쓴 적이 결코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스스로를 겁쟁이거나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한 예술가의 개성은 다른 개성과 부딪치고 겨루는 가운데 발전하고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고 그 개성이 굴복한다 해도 그건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다 본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앙리 마트시의 인터뷰. 1907년 타히티 끊임없이 돌아다니기는 했어도 마티스가 멀리 여행을 떠난 경우는 드물었다. 1930년 남태 평양을 다녀온 이후 그는 상상 속에서 티히티로 거듭 돌아갔다. 베르데: 타히티 체류가 당신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까? 마티스: 타히티 체류는 대단히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적도만은 편 세계에서 빛을 체 험하고 싶었습니다. 그곳의 나무를 만나고 그곳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 든 빛은 자기만의 조화를 내보이는 법입니다. 풍토가 다르니까요. 태평양의 빛, 그곳 섬들은 빛은 마치 짙은 황금빛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처음에 도착하고 먼저 실망부터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다가 조금씩 섬의 아름다운에 눈떴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거세게 불어오는 무역풍에 뒤로 몸을 젖히며 비단처럼 사각거리던 키 큰 야자수 잎들, 거기에 화답하듯 섬을 에워싼 산호초를 철썩철썩 때려대던 파도. 나는 추호에서 곧잘 멱을 감았습니다. 검은 해삼의 날카로운 윤곽과 대조되어 더욱 찬란 하게 빛나는 산호 속에서 헤엄을 쳤지요.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추호의 물 속 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머리를 쑥 집어넣었습니다....그러다 갑자기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 어 눈부신 세상을 바라보았어요... 타히티...섬...그러나 고요한 무인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유럽인의 불안은 그곳까지 따라가니까요. 그런데 그 섬에는 걱정 근심이 없어요. 그래서 유럽인은 권태에 빠집니다. 그 들은 숨막히는 무료함 속으로 즐겨 빠져들고 권태를 극복하거나 기분을 돋울 짓은 아무 것 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그들 위에, 또 그들 주위에 이 태초의 경이 로운 빛, 이 장엄한 광채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빛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유럽인은 공장 문을 닫고 원주민은 동물적인 쾌락을 탐합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졸고 있 는 아름다운 땅. 고요한 무인도, 외로운 낙원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면 누구라도 금세 권 태를 느낄 겁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앙드레 베르데와 앙리 마티스의 인터뷰, 1952년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방스 성당을 설계하면서 마티스는 일에 깊이 몰입하여 한때는 수도자가 될 생각까지 했 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그림이었다. 나는 아무런 걱정도 간섭도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여건만 마련된다면 독방에서 수도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평생 동안 나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널리 받아들여 지던 지배적 여론에 영향받았다. 그 지배적 여론에 따르면 화가는 오직 자연에서 관찰한 내 용만을 그릴 수 있고 상상력이나 기억에서 나온 것은 조형예술로서의 값어치가 없는 사입 작품으로 폄하되었다. 미술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자연을 우직하 게 모사 하라." 화가로 활동해 오면서 나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런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 었다. 내가 사실적인 모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분할법, 야수파 같은 다채로운 사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투쟁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런 저항은 자연스럽게 나를 드로잉, 색채, 명암, 구도 같은 그림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분석으로 이끌었다. 다른 요소들의 존재에 의해 이 요소 하나하나가 자신의 설득력을 상실 하는 법 없이 하나의 종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 구성물 안에서 이 요소 들의 내재적 가치가 훼손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한마디로 그것은 수단의 순수성을 존중하자는 말이었다. 이전 세대의 화가들의 작품은 시대마다 다르게 받아드여진다. 순수한 색으로 구성된 인상 파 그림은 다음 세대의 화가들로 하여금 색은 비록 대상이나 자연현상을 묘사하는 데 쓰이 기는 하지만 대상과는 무관하게 그 색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이렇듯 색은 그것이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가령 파랑은 강렬한 보색을 동반할 때 날카로운 징소리처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빨강이나 노랑도 마 찬가지이다. 화가는 필요할 경우에 적절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성당에서 나의 주된 목표는 하얀 바탕에 검은 선이 그려진 단단한 벽과, 빛과 색의 표면 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성당은 나의 필생의 작업이며 벅차고 진지하고 힘겨웠던 예술적 노력의 결실에 해당하 는 셈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작업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내 예술적 탐구 의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나에게 점지된 작업이다. 성당은 그 탐구를 종합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에게 열어 주었다. 이 작업이 헛되이 끝나지 않고 지금은 지나가 버린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 한 예술 시기의 표현으로 내내 자리잡을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이 완전히 실현 되기 전까지는 아직은 확신을 갖고 단언 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 이다. 그러나 조형적 전통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주는 생명력은 여전히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명력을 나의 계시라고 부르고 싶으며, 뿌리를 더듬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 로 그 계시가 넉넉하고 힘있게 표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로사리오 성당' '방스 도미니크 수도회 로사리오 성당',1951년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 마티스와 샤를 카무앵의 우정은 두 사람이 귀스타브 모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싹텄 다. 요즘은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뙤약볕 아래 작업을 하고 있지. 작업이 끝나면 녹초가 된 다네. 아무래도 시간을 바꿔야 할까 봐. 내일부터는 아침 6시 반이나 7시부터 시작할까 하 네. 한두 시간 열심히 그려야지. 올리브 나무는 그 시간에 가장 아름다워. 한낮도 괜찮지만 너무 위압적이라서 말이야. 세잔은 이 색조의 조화를 기가 막히게 포착한 것은 견디기 어려 운 휘황찬란함이 아니었지만 말이야. 조금 전에 나는 올리브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잤네. 그곳 에서 본 색의 조화가 너무나 감동적이었어. 그런 낙원을 분석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지만, 자네나 나나 화가이니까 별 수 있겠나! 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네! 눈부시면서도 포근하고 부드러운 햇살. 왜 그런지 나는 니스의 햇살에서 자꾸만 투렌을 떠올린다네. 투렌의 햇살이 좀더 금빛에 가깝다면 이곳은 은빛이야. 햇살이 스치는 대상은 풍요한 빛깔에 물든 다네. 예 컨대 나는 녹색을 그리려다가 등줄기가 뻐근해질 때가 왕왕 있지. 작업을 끝내고 난 뒤 나 는 나의 졸작들이 걸려 있는 방안을 빙 둘러본다네. 그리고 나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작품 을 가끔씩 발견하곤 해. 아직 확신은 못 하지만 말이야 마티스가 샤를 카무앵에게 1918년 5월 23일 스타일 카무앵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마티스는 이른바 장식적인 '웅장한 스타일'의 개념 을 새롭게 정의하자고 제안한다. 자네는 이것이 사물의 일면만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웅장한 스타일 의 겉모습만을, 진정으로 웅장한 스타일의 어설픈 윤곽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 지 않겠는가? 고갱과 코로 둘 중에서 누가 더 웅장한 스타일을 가졌느냐고? 스타일은 그 화가의 마음에 있는 질서와 품위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 질서가 습득된 것이든 개 발된 것이든 직관적인 것이든 말이야. 그러나 특정한 편견에서 기인된 스타일은 얼치기밖에 만들어 내기 못해. 이것 어디까지나 내 진심일세. 마티스가 샤를 카무앵에게 1918년 5월 2일 영국모델 시인이며 작가인 앙드레 루베이르의 꿈을 마티스는 현실로 이루어 낸다. 꿈에 그리는 영국 처녀가 있다고 자네가 말 한적히 있지. 결국은 사라져 버렸다는 그 처 녀보다 어쩌면 더 아름다운 영국 처녀와 한 시간 전에 세 번째 작업을 했네. 나의 모델은 지금 이곳에 있고 내일 모레 다시 올 거야. 와서는 내 눈을 바라보겠지.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내 눈은 아무런 불안도 방패막이도 없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되곤 한다네. 변화무쌍 한 그녀의 눈은 어제만 하더라도 개암나무처럼 엷은 갈색이었는데 오늘 보니 색깔을 못 알 아보겠더군. 나는 리디아를 가까이 불러서 눈동자 빛깔을 말해 달라고 했지. 그녀의 말로는 자기 눈과 내 눈이 같은 빛깔이라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지.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 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일더니 눈동자 빛깔이 변했음을 깨달았어. - 맹세코 나는 아무 짓 도 하지 않았네 - 눈동자가 진해졌다 이 말이야. 나는 그녀의 눈동자 빛깔이 변한 것은 얼 굴이 후끈 달아올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그녀의 눈동자, 입술, 부드러운 턱의 곡 선이 빚어내는 감미로운 조화를 아마 상상하기 힘들 거야. 그걸 자네한테 어떻게 전달해야 좋을지....그녀는 놀란 비둘기처럼 내 손안에 앉아 있어. 영국 아가씨는 자네의 기대 수준에 서 벗어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이틀 뒷면 다시 나에게 온다 이 말씀이지. 마티스가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7년 4월 5일 벼락같은 영감을 기다리며 정물화를 그리는 방법? 먼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일 필요가 있다. 작업에 몰두하려고 애쓰는 중이란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꽃과 과일을 그리려고 마음먹 었지. 작업실도 그에 맞게 꾸며 놓았단다. 하지만 주변상황이 뒤숭숭하다 보니 마음먹은 대 로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구나.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일깨우기 위해서 얼굴을 맞대 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대상부터 그려 나가기로 결심했단다. 영화사 몇 군데에다 교섭을 해서 미인들을 몇 명 소개받았지. 요즘은 오전에 세 시간, 오후에 세 시간씩 서너 명의 미인 과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꽃과 과일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지. 때때로 어떤 모티프가 떠오르면 나는 아틀리에 한구석에 멈 추어 선단다. 표현 성이 풍부하지만 나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있는 그런 모티프, 나는 벼락 같은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단다. 그럼 어김없이 영감이 떠오르지. 그런 영감은 내 생명 력을 몽땅 빨아들인단다. 마티스가 피에르 마티스에게 1940년 9월 1일 인간 마티스 이시레물리노와 니스에서의 월요일은, 편지를 정리하고 소소한 사무를 처리하거나, 작가, 화가, 전기작가, 가까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날이었다. 마티스와 피카소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관계를 자주 불꽃이 튀었다. 1943년부터 1953년까지 피카소와 지낸 프랑수아즈 질로가 두 화가의 우정을 자신의 회고록에 소개했다. 그녀는 마티스를 우 호적으로 평가했다. (마티스는)파블로를 아들처럼 자상하게 대했다.....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을 사귈 때 주 는 쪽은 상대방이고 파블로는 늘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파블로는 능동적이었고 마티스는 수동적이었다. 파블로는 무희처럼 마티스의 마음을 사로잡 으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마티스가 파블로를 정복하곤 했다. "우리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해."라고 마티스는 언젠가 파블로에게 말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잃게 될 테니까" 뒤에 마티스가 사미에의 레지나 호텔을 다시 거처로 삼았을 때 우리는 2주일에 한 번 꼴 로 마티스를 보러 갔다. 파블로는 그때마다 최근에 그린 그림이나 스케치를 들고 갔고, 나도 종종 그럴 경우가 있었다. 마티스는 리디아를 시켜 최근에 완성된 자기 그림을 갖고 오게 하거나, 오려붙이기 작업을 했을 때에는 오려 낸 종이를 벽에다 붙여 보였다. 어느 날 마티스는 얼마 전에 구입한 연한 자줏빛이 도는 연분홍색 중국 옷을 보여 주었 다. 고비 사막의 호랑이 가죽을 안감으로 댄 아주 긴 옷이었다. 마티스는 연한 자줏빛 아랍 장식물 앞에 그 옷을 놓았다. 옷은 아주 두툼했고 목깃의 하얀 털이 솟아 있었다. "새로 구한 모델에게 입힐 작정이야."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그전에 프랑수아즈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군." 파블로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마티스가 고집을 꺾지 않는 바람에 나는 중국 옷을 입어 보았다. 나는 머리까지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마티스가 소감을 털어놓았 다. "여, 괜찮은 작품이 나오겠는걸." "정 그리고 싶거든, 그림은 내게 주고 옷은 프랑수아즈에게 주구려." 파블로가 말했다. 마 티스는 물러서기 시작했다. "글세, 옷이 프랑수아즈에게 잘 맞기는 하지만 자네 그림에는 어 울릴 것 같지 않은데." "상관없어요." 파블로가 응수했다. "그렇다면 자네한테 더 어울리는 물건이 있지. 뉴기나 건데. 미개인의 전신상이야. 그게 나올 거야." 리디아가 전신상을 자 기러 갔다. 고사리처럼 생긴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는 데, 파랑, 노랑, 빨강으로 강렬한 줄무늬가 아로새겨져 있고 아주 야만스러워 보이는 조각이 었다. 그리 오래 된 물건 같지는 않았다. 실물보다도 큰 그 조각은 어딘가 쭈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다리는 끈으로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었고 머리에는 깃털장식이 있었다. 그때까지 본 뉴기니아의 토속미술품보다 훨씬 근사했다. 파블로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차에 싣 고 가기가 어렵겠다고 대답하고는 나중에 사람을 보내서 가지고 가겠다고 덧붙였다. 마티스는 좋을 대로하라고 했다. "하지만 가기 전에 플라타너스를 구경하지 그래."나는 마 티스가 어떻게 플라타너스를 호텔 방까지 갖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때 어마어 마하게 키가 큰 처녀가 - 나이는 스무 살 남짓, 키는 180cm이상으로 보였다. - 방안으로 들 어왔다. "자, 플라타너스를 소개하지." 마티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티스가 호텔에서 나온 뒤 파블로가 말했다. "거기서 무언가 이루어지는 것 같기는 해. 하 지만 그 나이에 여자들과 그런 식으로 지내는 게 좀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아? 체통을 좀 찾아야 할 텐데 말이야........좌우지간, 그 뉴기니 물건은 겁나더군. 마티스도 어지간히 겁이 났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하루빨리 없애려고 그렇게 안절부절이지. 귀신을 다루는 데는 내가 자기 보다 한 수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파블로는 그후 곧바로 파리로 떠나 거기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마티스는 그 일을 잊어 버리지 않았다. 그는 파블로가 파리를 간 줄도 모르고 라미에 도예소로 전화를 걸어 물건을 찾아가라고 독촉했다. 나중에는 파블로에게 직접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서 왜 물건을 안 찾 아가느냐고 성화였다. 빨리 파블로에게 넘기지 못해 애가 단 사람 같았다. "그렇게 무시해도 좋을 물건이 아니야. 그렇게 으스스한 말 건도 아니고." 마티스는 편지에 썼다. 그러나 파블 로는 마티스가 중국 옷보다 뉴기니 조각이 자기 기질에 맞는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마티스가 자기는 지성적인 화가, 파블로는 감성적인 화가로 생각한다 는 사실에 반감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마티스는 그 물건을 발로 리로 보내왔다. 일단 물건 을 손에 넣자 파블로는 그런 대로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는 마티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시미에까지 찾아갔다. 프랑수아즈 질로와 킬턴 레이크 '피카소와의 생활', 1964년 루이 아리공의 방문 초현실주의 작가 아리공이 마티스의 창조성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밑바탕을 살짝 보여준 다. 드디어 화가를 만나러 그가 사는 '궁전'을 찾아갔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티스의 간접적인 초상화가 될 책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였다. 그리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서 거의 매일 나의 '주제'를 만나러 갔다. 내가 포즈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면 마티스는 선 선히 수락했다. 나는 내 모델을 더듬었다. 그 어깨를, 몸통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는 모습을 이해해야 했다...느닷없이 그가 자신의 모로코 여행, 자기가 택시에서 본 여자, 어떤 옷감 에 대해서 입을 열시 시작했다. 화가들과 나 같은 사람의 차이점은, 그들이 스케치와 거친 밑그림을 통해 유사성을 지향하면서 작업하는 반면, 나의 경우는 내가 쓰는 글이 대상의 주 위를 끝없이 뒤엉킨 리본처럼 휘감아 돈다는 사실아.ㄷ 나는 아무 것도 자르지 않고, 아무 것도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는 모델에 관한 나의 생각, 내가 눈을 들어 창 밖 을 바라보거나 전화기를 바라볼 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모두 담고 있게 된다... 요컨대 화가들이 말하는 초상화는 내가 글로 표현하는 초상화와 다르다. 햇살이 밝거나 땅거미가 깔릴 무렵 마티스의 불에 갑자기 주름살이 나타나고 그의 입술이 창백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럴 때 내 가 머뭇거리면 마티스는 당장 눈치를 채고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나한테? 천만 에요. 일단 평정을 되찾으면, 나 역시 그 은밀하게 엄습하는 고통을 체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양리 마티스의 그늘을 바라보았다. 냉소를 머금은 어렴풋한 형상을 보았다고 상상하면 서... 백색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시미에에 있는 마티스의 방이다. 거기에는 하늘이 있다. 잠재력으 로 충만한 그 야릇한 하늘은 천장에 떠 있지 않고, 이 공간의 주인이 문자 그대로 '들어 올려 '고상하게 표현한 여인들의 얼굴을 둘러싸면서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은 백색 하늘, 마 티스의 하늘이다. 이 하늘을 배경에 두고 있는 얼굴들 또는 정물화들은 하늘의 선명함을 조 금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대기의 균일한 백색을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있다. 선이 펼쳐지는 방식, 선이 표면을 제한하는 방식은 모두 그 백색을 존중하도록 계산되어 있다. 마티스는 이렇게 유지되는 백색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거듭 그 점을 강조했다. 자신 의 그림책에서 페이지 구성의 중요성, 글과 삽화 사이의 균형에 많은 배려를 했던 것처 럼...여기서 말라르메가 쓴'하얀 불안'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그림의 하얀 불안," "안녕"...옳은 말이지만, 텅 빈 백지에 대한 시인의 예찬, 백지를 검게 물들이는 것에 대한 시인의 예찬, 백지를 검게 물들이는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은 화가에게는 출발 점에 불과하다. 그는 백지를 검게 물들이지 않는 요령을 알고 있다. 그가 선을 그어 나가는 종이는 깨끗한 백지보다 더 하얗다고 단언 할 수 있다. 그것이 더 하얀 이유는 자신이 하얗 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마티스는 드로잉으로 빽빽이 뒤덮인 벽을 가리켰다. "보시다시 피 어디를 보아도 같은 흰색입니다...나는 어디에서도 흰색을 제거하지 않았어요." 사방의 백색. 이상한 도미노 게임. 내가 방문할 때마다 이 도미노 패들은 체스의 명인들의 수처럼 자신들의 위치를 아주 느리게 옮기면서 게임을 완성해 나갔다. 여백이 드러나는 곳 마다 새로운 백색의 드로잉으로 불완전한 무대를 채우며... 루이 아라공 '소설 앙리 마티스',1971년 마티스의 생활 레지나 호텔의 마티스를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자클린 뒤엠은, 마티스의 하루 일과와 계절에 따라 파리와 니스를 오가던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마티스의 거처에서 빛이 치지 한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올이 가느다란 베이지색 모직 바지와 목깃이 뾰족한 헐렁한 재킷을 입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어야 나는 마티스가 친구 피에르 르베르디 와 함께 자기 옷을 방돔 광장에 있는 유명한 의상점 샤르베에서 맞춰 입는다는 사실을 알았 다. 단추가 달리지 않은 재킷 안에는 낙낙한 녹색 스웨터와 분홍색 셔츠를 받쳐입었는데, 단 정하게 솔질된 짧은 흰 수염이 얼굴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흔 아홉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리하고 형형한 눈이 작은 금테안경 너머에서 고 있었다. 이 밝고 넉넉한 방에는 화가의 하얀 침대, 벽에 걸린 그림들, 꽃, 멧비둘기가 있었다. 가구 위에는 분홍 질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유일한 파란색은 마티스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 동자는 하늘색에서 남색으로 바뀌었고 있었다. 마티스는 부탁으로 나는 밖에 나가서 평범한 베이지색 포장지와 교과서를 싸는데 쓰는 파 란 종이를 사 왔다. 마티스는 내가 사 온 종이를 처음에는 벽에 나란히 가로 대고, 다음에는 겹쳐 붙이면서 농담에 변하를 주었다. 그런 다음 미리 짜 놓은 구도에 따라 백지를 갈매기 나 물고기 같은 다양한 형태로 오렸다. 그의 자신에 찬 손놀림은 번번이 나를 놀라게 만들 었다. 종이를 다 오리고 나서 마티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에게 오려 낸 종이를 색종 이 바탕 위에다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이 작업은 미리 찍어 둔 점을 따라 이루어졌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구근의 다양한 요소들을 새롭게 배열해 나갔다........ 마티스의 일과는 시계처럼 정확했다. 그의 일과는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온 '식구' - 리 디아, 나, 요리사, 가정부 - 는 준비를 단단히 해놓아야 했고, 어김없이 제자리에 가 있어야 했다. 야간간호사는 '주인 어른'이 아침에 먹을 약을 꼬박꼬박 대령했고 세수를 시키고 옷을 입혔다. 그 일을 끝낸 뒤에야 그녀는 눈을 붙였다. 요리사는 우유를 탄 커피, 빵, 잼을 준비 하고 약을 내놓았다. 나는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져갔다. 면도를 마친 마티스는 향수냄새를 풍기며 쿠션을 등에 대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시트에는 데이지 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티스는 애연가였으므로 이따금씩 담뱃재가 시트에 구멍을 뚫곤 했다. 마티스는 그 구멍을 볼품없이 깁기보다는 데이지 꽃무늬로 덮어야 한다고 우기곤 했다. 그는 침대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다리오 뉴스를 들으면서 아침을 먹어싿. 식사를 마친 다 음에는 손을 씻고 작업에 들어갔다. 수술을 받은 뒤로는 하루에 한 두 시간밖에 침대 밖으 로 나갈 수 없었는데, 그것도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했다 그는 점심때까지 일하곤 했다. 그 무렵 마티스는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라는 책에 들어갈 삽화의 예비스케치를 그리고 있 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했으므로 내가 모델이 되었다. 그는 모델이 움직 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연필을 깎 거나 종이에 수채화 물감을 칠하곤 했다. 그는 색칠한 종이를 많이 사용했는데, 집에서 색칠 한 종이만을 고집했던 것이다. 코발트블루 같은 마티스 특유의 멋진 색상의 비결은 바로 거 기에 숨어 있었다... 마티스는 길게는 1주일 내내 목탄 초상화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다 시 시작했다. 그는 윤곽, 양감, 광선을 모두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단 한 번의 붓질로 그것 을 재현할 수 있었다...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제력이 강한 사 람이었다. 그의 집중력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오전 내내 일만 하다가 점심을 들고는 낮잠을 잤다. 오후에 마티스는 침대에서 나왔다. 그는 집안에서 걸어다니거나 때로는 시내로 산보를 나 갔다. 가끔은 친구들 방문하기도 했다... 마티스는 자신이 세심하게 선택하여 배열해 놓은 물건들 속에 있어야 마음을 놓은 사람이 었다. 물건들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어야 했다. 물건들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곳 에 놓여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가구 위의 항아리 하나를 닦아도 원래 있던 자리에 제모습 대로 놓아두지 않으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마티스 주변에는 허투루 놓이는 물건이 없었다. 그는 주변의 형태들을 예리하게 살펴보고는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는 물건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아직 쓸 수 있는 데 버려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 철저한 감시에 때로는 숨이 막힐 것 같았 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지라 절약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어린 마티스는 동생과 손가락에 침을 묻혀 마루 틈새에 낀 씨앗을 집어내곤 했는데, 씨앗 100g를 모으면 아버지에게 1수를 받을 수 있었단다... 오후 5시경 마티스는 연한 차를 마셨다.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내가 책을 읽어 주었다. 그는 기분 좋게 들었다. 한번은 샤토 브리앙의 '무덤 저편에서의 회상'을 읽은 적도 있다... 6월말이면 우리는 파리로 떠났다. 마티스는 몽파르나스에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었다. 여 름을 마티스는 그 아파트에서 보냈다. 그는 남프랑스의 여름은 너무 덥고 많은 사람들로 북 적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프랑스 국영 철도회사에서는 마티스를 위해 '응접실과 커다란 침대칸'이 있는 특별 차량 을 내주었다. 리디아는 특실에 딸린 침대 칸을 차지하고 간호사, 요리사, 나는 그 옆에 나 란히 붙은 세 개의 침대 칸을 썼다. 고양이들은 방스의 정원사가 보살펴 주었다. 리옹역에 도착하면 우리는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앙리 마티스 일행'이라는 데서 적지 않은 자 부심을 느꼈다. 일단 파리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여장을 풀면 우리는 종전의 규칙적인 생활 로 되돌아갔다. 많은 방문객이 찾아왔다. 에드몽드 샤를 루가 인터뷰를 하러 왔다. 롤랑 프티는 발레 작품 을 무대장식을 의뢰하러 왔지만 마티스가 내켜 하지 않았다. 루이 아리공은 삽화로 쓰겠다 며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어느 날 오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솔로이스트인 이베트 쇼비레가 찾아와 앙리 마티스를 위해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춤을 리파르(1905~1986, 발레에서 음악이나 무대장식보다 무 용을 중시한 러시아의 안무가: 역주)풍으로 추었다. 무용수의 몸놀림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섬세한 동작으로 연기하기까지 무용수가 얼마나 맹렬한 연습을 했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마티스는 연필을 허공에 들고 도취된 듯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시 니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레지나 호텔에서 묵을 차례였다. 그 호텔의 로비는 으리으리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고,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과이나 사월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박물관 같은 공간을 이루는 다른 방들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고색 창연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니스와 방스의 마티 스 거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이한 빛 - 은 마치 수도자가 생활하는 그리스 어느 사원에 온 듯한 느낌 이을 주었다. 마티스의 작업실은 실제로 수도자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방스의 도미니 크 수도회 성당의 모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클린 뒤엠 '선과 그 밖의 것들', 1986년 마티스의 화실 파리의 수수한 화실에서 니스의 빛으로 충만한 널따란 아틀 이까지 화가가 수십 년 동안 잡업해 온 공간들을 따라가 본다. 캐 생미셜 화실 마티스가 파리에 온 직후에 구한 캐 생미셸 가19번지의 작업실은 화가의 말에 따르면 "천 장이 낮고 점잖지 못한 가구가 딸려 있지만 전망은 기가 막히게 좋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나는 캐 생미셸가에서 살았다. 베를렌의 작품을 내는 바니 에 출판사가 바로 밑에 있었다. 내 방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은 5층 아래로 센 강의 작은 지류를 굽어보고 있 었다. 전망이 아름다웠다. 오른쪽에 노틀담, 왼쪽에 루브르가 있고, 정면에는 법원과 경찰청 이 있었다. 일요일 오전이면 부두는 늘 북적거렸다. 부두에 정박한 거룻배, 작은 의자를 깔 고 앉은 낚시꾼들, 낡은 책들이 담긴 상자를 뒤지는 사람들, 그곳은 파리의 심장부였다. 마티스 '흑점', 1976년 이실레물리노화실 1909년 마티스는 가족과 함께 파리 교외의 이시레물노에 있는 쾌적한 집으로 이사 간다.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그 집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마티스는 멋진 수영장과 온실 옆에다 당장 화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처음으로 1919년 5월 베르냉 화랑에서 마티 스의 개인전이 열린 것을 계기로 북구의 평론가 라그나르 호패가 다음달 파리에서 마티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마티스 씨. 여기에는 대작이 보이지 않는 군요. 벽에 걸려 있는 것 은 초상화를 위한 습잡 아니면 야외에서 그린 스케치뿐입니다. 큰 그림은 이제 안 그리시나 보죠?" "그립니다. 하지만 이 작은 방에서는 그릴 수가 없어요. 대작을 그리려면 공간과 거 리가 필요합니다. 이시레물리노의 별장에다 화실을 만든 것도 그래 서지요. 거기서는 장식용 작품을 그릴 수가 있어요. 그뿐인가요, 거기에는 꽃들이 만발한 멋진 정원도 있답니다. 색을 구성하는 요령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정원은 나의 가장 큰 스승입니다. 꽃들은 나의 망막에 지울 수 없는 강하 인상을 남기곤 해요. 팔레트를 한 손에 쥐고 캔버스 앞에 상태에서 말이 지요. 그때 내 마음의 눈에 어떤 기억이 또렷이 살아나 도움을 줍니다. 그럼 나는 붓을 놀리 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보면 나도 자연주의 화가인가 싶군요. 자신의 기억에 귀기울이고 모 든 창조적 재능에 긴밀히 결부된 선별의 본능에 귀기울이는 것을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한다 면 말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번 놀러 오세요. 오후 아무 때나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산 책하기에 안성맞춤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오늘 이 작은 방에다 전화를 놓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스웨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파리의 전화 사정에 대해서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 다. 그리고 악수를 한 다음 헤어졌다. 라그나르 호패'내가 만남 마티스', 1920년 투명한 방의 신비 "그림에는 빛을 발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마티스는 사위인 미술학자 조르주뒤티에 게 말했다. 영롱한 수정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니스의 변함없는 색채는 마티스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1월의 풍요롭게 투명한 은빛 햇살"은 마티스의 발길 을 해마다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1940년대에 루이 아라공 - 당시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시인 으로 이미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 은 마티스와 가깝게 지냈다. 마티스를 주인공으로 한 책에서 아라공은, "이제까지 드로잉과 그림에서 한 번도 표현된 적이 없었던 두 가지 진 실"을 전하면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시미에 언덕에 자리잡은 미궁 같은 궁전의 밝은 방에서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가 낯선 실 험을 하고 있다. 이 방에는 그런 실험의 사례가 적어도 100개는 있다. 한 곡조의 무한한 변 주처럼, 마티스는 결코 완성될 수 없을 이 '완성된'이미지들 속에서 작업을 해 나가는 이유 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듯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이제까지 드로잉과 그림에서 한 번도 표현된 적이 없었던 두 가지의 진 실이 드러나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라고 한 뷔퐁의 유명한 격 언과 "보라리 부인은 나 자신이다."라고 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이다. 루이 아라공'소설 앙리 마티스', 1972년 니스의 카니발 고시 한복파넹 자리 자은 마티스의 화실에서 바라본 거리의 가장행렬은 그의 작품공간으 로 흘러 들어갔다. 마티스는 니스에 와서 처음에는 퐁셰트 구역에서 살다가 나중에 시미에 언덕으로 거처를 옮겼다. 니스는 마티스의 명성과 관련이 깊다. 이 관련은 화가가 말라르메 또는 롱사르와 맺 었던 교우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어떤 위대한 화가가 유독 한 곳을 골라 작업의 거점으로 삼 았다는 것은 무심히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마티스의경운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그 이유는 이 화가의 정직성 때문이다. 이 말을 쓰고 보니 이제까지 한번도 내가 정직함 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 앞에 나 스스로도 놀란다. 정직성은 합리성보다 마티스 의 작품세계를 훨씬 정확하게 담아 내는 말이다. 정직성은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벌써 눈앞에 떠오른다. 마술 이 왕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정직성'은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딱한 노릇이 다. 어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마술에서 벗어나시기를, 마티스의 화실에는 속임수가 없다. 카 지노는 한참을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나온다. 마티스의 창은 니스를 향해 열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 말이다. 그 경이롭게 열린 창 너머 에는 안경 너머 마티스의 눈동자처럼 파란 하늘이 있다. 거울과 거울의 대화가 펼쳐진다. 니 스는 화가를 바라보고 화가의 눈에 투영된다. 참으로 별난 보바리 부인인 셈이다! 마티스의 입에서 "니스는 나 자신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그러기에는 마티스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고(처음에는 '겸손하고'라고 썼다가 '자신만 만 하고'로 바꾸었다.)너무나 정직하다. 결국 플로베르는 자신을 헐뜯은 셈이었다. 플로베르는 너무 정직했지만 적어도 겸손하지는 않았다. "왜 니스냐고? 나는 예술에서 내 마음에 수정처럼 맑게 다가오는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해 왔지. 거기에 필요한 투명함을 뉴욕, 오세아니아, 니스 등등 세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었 다. 아마 3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북쪽으로 가서 그렸더라면 그림은 달라졌을 거야. 구름과 잿빛과 아스라이 사라지는 빛깔들을 담았을 거고, 그런데 뉴욕에 가면 화가들이 이렇게 말 합니다. 이 금속성 하늘 밑에서는 그림을 못 그린다.!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멋있어! 모든 것이 맑고, 수정 같고, 정확하고 투명하거든, 그 점에서 니스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어. 내가 그리는 대상을 조형적 수단으로 구상된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라네. 나는 눈을 떴을 때보 다 눈을 감았을 때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어. 우연적인 속성들을 벗어 던진 알맹이, 바로 그 것을 그리지." 더욱이 니스는 빛과 열대의 화초뿐 아니라 또 다른 영감의 원천까지도 제공했다. 프랑스 의 그 어느 도시도, 심지어는 파리도 니스보다 국제적이지 않다. 관광객의 숫자만을 두고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자기 고향의 흙먼지와 전통 과 관습을 가지고 니스로 왔다. 더구나 마티스는 자기가 원하는 모델을 이곳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모델은 니스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시아, 러시아, 심지어는 남태 평양 출신의 모델을 통해 그는 드넓은 바깥 세계를 호흡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 곳곳에서 그 강력한 유혹이 느껴진다. 새롭게 구성된 세계와... 루이 아라공 '소설 앙리 마티스', 1972년 "나의 농장" 아름다운 무대, 규칙적인 생활 - 그것은 마티스가 꿈꾼 화가의 낙원이었다. "드디어 내가 농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왔습니다."고 마티스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하루 에도 몇 시간씩 이곳에서 꾸물거립니다. 화초에는 손이 많이 가거든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녀석들을 보살피면서 나는 녀석들의 형태, 무게, 유연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건 그림 에 많은 도움이 되지요." "요컨대 지상으로 돌아오셨다 이 말이군요" "당연하지요...언젠 안 그랬던가요?" 그러면서 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내 가 싫증을 모르고 지내는지 이제 아시겠어요? 지난 50년 동안 나는 잠시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을 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먹고 나서 한숨 잔 다음 2시에 다시 붓을 들고 오후 내내 저녁때까지 줄곧 일을 합니다. 상상이 안 가실 겁니다. 일 요일에는 온갖 감언이설로 모델들을 꼬드겨야 합니다. 일요일 같은 특별한 날에 와서 포즈 를 취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번에 마지막이라고 장담하지요. 물론 모델료는 두 배를 주 어야 해요. 그래도 상대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나는 주중에 하루 쉬게 해주겠다고 약 속합니다. 한 모델이 이르더군요. '하지만 선생님, 몇 달 째 계속 말만 앞세우고는 하루도 쉬게 한 날이 없잖아요.' 서글퍼요! 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일요일을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입장을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지중해 호텔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밖에서 가장행렬이 벌어졌을 때는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요란한 음악과 환호와 웃음소리라니! 프란시스 카르코 '마티스와의 대화' 1941년 마티스의 미술 강의 마티스는 미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상세히 표현했다. 그가 글을 쓴 것은 이해 받 기 위해서였지, 이론을 구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결국 마티스의 발언은 방법에 관한 기 존의 모든 통념, 모든 공식 미술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창작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 는 창문인 셈이다. 마티스는 자기 눈에 드러난 '예술의 진실'을 때로는 강의하듯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간다. 1908년 12월 25일 ≪르그랑드 르뷔≫지에 실린 '화가의 메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색체의 역할 내가 실내를 그린다고 가정하자. 내 눈앞에는 찬장이 있다. 찬장은 나에게 선명한 빨강의 감각을 주며 나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빨강을 칠한다. 이 빨강과 캔버스의 백색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한다. 이제 그 빨강 옆에 녹색을 칠하고 바닥을 노랑으로 칠한다고 가정하 자. 역시 녹색과 노랑, 캔버스의 백색 사이에 나를 만족시키는 어떤 관계가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색조는 서로를 약화시킨다. 내가 바른 이런저런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색과 색의 관계는 개별 색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방식이라야 한다. 처음의 관계 대신 이제 새로운 색의 조합이 나타나 나의 생각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여러 번 수정을 거쳐 그림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보일 때까지 나는 그림을 계속 고쳐야 한다. 나는 자연을 비굴하게 묘사할 생각이 없다. 자연을 해석하여 그것을 회화의 정신에 복종 시켜야 한다. 내가 모든 색조에서 찾아낸 관계는 색들의 살아 있는 조화, 음악을 작곡할 때 의 그런 조화를 낳아야 한다... 색들의 표현적인 측면은 본능의 차원에서 나에게 과제를 남긴다. 가을의 정경을 그리기 위해 나는 이 계절에 맞는 색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직 가을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느낌에서만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 오직 가을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느낌에서만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 낙엽만이 가을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서늘한 파란 하 늘의 얼음 같은 투명함도 가을을 훌륭히 전달한다. 나의 느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가을 은 여름의 연장선 위에서 따사롭고 포근할 수도 있으며 이미 겨울을 예고하는 차가운 하늘 과 황갈색 나무의 스산한 분위기처럼 아주 춥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색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관찰, 감각, 체험을 통 해 선택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시냐크 같은 화가는 보색효과에 흠뻑 빠 져들었다. 보색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색을 써야 할지를 그에게 자연 스럽게 알려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감각을 잘 표현하는 색을 쓸 뿐이다. 색조의 균형을 이루려는 충동은 인물의 모습을 바꾸게 하거나 구성 자체를 바꾸도록 몰아간다. 하나의 구 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균형에 이를 때까지 나는 작업을 계속한다. 바야흐로 모든 부분이 자기에게 걸맞은 관계를 찾아내는 그런 순간도 도래한다. 그 순간 만일 내가 그림에 붓질을 한 번 이라도 더 가하면 나는 그림을 완전히 다시 그려야 한다. 현실적으로도 나는 보색 이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과 감정을 밑바탕으 로 하여, 또 자기 감각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밑바탕으로 삼아 색을 구사했던 화가들의 그림 을 연구하면, 특정한 색을 법칙을 정의할 수 있으며 지금 통용되고 있던 색 이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화가의 노트', 1908년 정서를 여과 없이 순수하게 옮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용 수단의 범위를 폭넓게 꿰뚫고 있어야 하며 그 수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젊은 화가는 실수 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가장 황당한 모험과 부단한 탐구를 일컫는 말 이 아니던가?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당시에 나는 오직 색채만을 가지고 어떤 균형과 표 현적인 율동을 얻으려고 애썼다. 또 어떤 때는 아라베스크의 힘만을 파고들었다. 색이 지나 치게 강렬해졌을 때는 형태들이 더 큰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명확히 정의될 수 있도록 색 을 죽였다.(그렇다고 색을 어둡게 만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조금 방황한들 어떠리? 한번 방황할 때마다 그 사람은 그만큼 성장하는 것을. 가스통 딜의 ' 오늘의 화가들' (1943년)에서 색이 다시 표현 성을 얻었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전까지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오랫동 안 색은 드로잉의 보완 물로 머물러있었다. 라파엘로, 만 테냐, 뒤러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 은 모두 드로잉으로 구성한 다음 색을 덧붙였다. 반면에 르네상스 직전의 이탈리아 화가들, 특히 근동 화가들은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 았다... 멀게는 들라크루아, 반 고흐, 특히 고갱,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이 닦아 놓은 길 위에서 세 잔은 확고한 방법론을 구축했으며 색채에 양감을 도입했다. 그것은 색의 복권, 정서적 환기 력의 복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색의 역할과 양식' 가스통 딜의 ' 회화의 문제들'(1945년)에서 조각 내가 조각에 손을 댄 이유는 내 생각을 좀더 명료히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 하자면 내 감정에 질서를 부여하고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림에 도 도움이 되었다. 내가 궁극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아래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나의 모든 감각에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이다. 장 기샤르 메일 리의 ' 마티스' (1967년)에서 구성과 표현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나에게 어느 정도 기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 만 나의 야심은 제한되어 있어 그림을 바라보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시각적 만족 너 머로 나아 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화가의 생각을 그의 회화적 수단과 분 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수단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 생각이 깊을수록 물론 표현은 더욱 완전에 가까워질 것이다. (완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복잡할 이유는 없다.)나는 인생을 느끼는 감정과 그 감정을 옮기는 방식을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타오르는 정염, 격렬한 몸짓으로 드러나는 열정이 표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그림을 전체적인 구성 자체가 표현적이다.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 리, 그들 주위의 비어 있는 공간, 비례, 모두가 제 몫의 표현 성을 갖고 있다. 구성은 화가가 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으로 배열하여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한 그림에서 모든 부분은 주연은 주연대로 조연은 조연대로 주어진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것은 그림 속 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림 안에서 제 몫을 찾지 못하는 부분은 해로운 부분이다. 예술품 은 전체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필요한 세부묘사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관건으 로 작용하는 핵심적 묘사를 가려서는 안 될 것이다. 구성은 어디까지나 표현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구성이 이루어질 대상의 표면에 따라 내 용이 바뀐다. 반듯한 정사각형의 종이가 눈앞에 있다고 하자. 나의 드로잉은 종이의 모양과 필연적인 관계 아래 놓인다. 가령 나는 이 정사각형 위의 드로잉을 이것과 비례가 다른 직 사각형의 종이에 또다시 똑같이 써먹지는 못할 것이다. '화가의 노트',1908년 사물의 본질 그러나 조개, 파란 화분, 커피 잔, 커피포트, 검은색과 녹색의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세 알의 녹색 사과로 이루어진 정물화 - 무려 서른 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는데 -에서 나는 명 상, 시점을 다양한 조정, 군더더기의 제거를 통해 내가 추상적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믿네. 당분간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반복하다 는 것도 불가능한 노릇이지. 그것만큼은 분명해. 그래서 나는 별스럽지 않고 전보다 육체 성이 강조되는 방식 을 고수하기로 나 자신을 다그치고 있어. 그렇게 하면 사물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거든, 그 래서 얼마 전부터 굴을 그리고 있지. 거기에는 미각이 깃들여 있어야 해. 그림 속에서 굴은 조금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금은 네덜란드 풍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어. 이것은 내가 이 주제로 그린 세 번째 작품이라네. 물론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방과 주변의 공간을 감 안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했네. 나로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 지. 나는 내가 오래 전부터 억눌러야 했던 자연의 속성, 그림이 주는 유쾌한 맛을 다시 발견 하기에 이르렀네. 나는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귀착될지 몰라. 내가 어제 막 성취한 것의 가 치에 대해서 아직은 확신을 못 가진다네. 갓난아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것 하 나만은 분명해. 비록 내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것은 선과 색채, 수채화 등의 표현수 단이었지만,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야 할 이런 그림들은 오직 유채로만 그려질 수 있다는 사 실을 말이야. 중요한 것은 다양한 색채와 다양한 비례의 표면을 표현력 있게 섞는 작업이지. 나는 그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해. 이전의 작업으로 되돌아가서 나의 최근 작업이 거기에 무 엇을 보탤 수 있을지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네. 테오도르 팔라디에게 1940년 12월 17일 그 신비의 요소 여자의 몸을 그린다고 가정하자. 먼저 나는 우아함과 매력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신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선을 찾아내 그 의미를 웅축시킬 것 이다. 첫눈에는 매력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좀더 폭넓은 의미, 좀더 인간미 넘 치는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이미지에서 서서히 매력이 배어 나올 것이다. '화가의 노트', 1908년 실마리를 찾아서 나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하나의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면, 아니 예민한 감수성이 방법의 도움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인생은 얼마나 괴롭겠나. 나는 완전히 흔들리겠지 만, 생각해 보면 평생을 살아오면서 안 그런 적이 없었지. 절망의 순간에 이어 행복한 계시 의 순간이 찾아온다네. 그런 계시 덕분에 나는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나 는 선으로 이루어지는 드리옹보다 풍부한 수단(색)을 써서,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 도록 논리적으로 이끄는 실마리를 찾는 데 관심이 쏠려 있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에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나는 나를 감동시키는 부분을 자연에서 가져온다네. 궁극적으로 사 랑의 감정을 투입해야겠지. 인생에서는 사랑을 쏟아 붓는 만큼 고통이 뒤따를 수 있지만 그 림에서는 그렇지 않거든.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1년 10월 6일 가슴으로부터 바로 나는 정신이 나간 늙은이지. 만족에 겨워 눈을 감기 위해서 죽기 전에 그림을 새롭게 시 작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으니 말이야. 헌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나는 나의 그림이 나의 드로잉 - 지극히 단순하게 가슴으로부터 바로 나오는 선 말일세 - 과 조금이라도 더 밀착될 수 있도록 일부러 험한 길을 택했네. 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 면 그건 터무니없이 먼길이지.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있 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표면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나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즐겨 쓰는 색들의 관계를 보면, 나는 내가 대상을 원근법 없이, 그러니까 바로 정면에서 - 아주 코앞에서 바짝 - 내 느낌과의 관련 속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네. 그렇게 되면 색들 의 신비로운 관계에서 모종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논리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반사광 없이 국부적인 색만을 쓰고 사람의 형상을 모두 같은 평면 위에 놓아야 하겟지? 이처럼 그림 속 의 단순화된 요소들에다, 자연 그 자체가 내 안에 일깨우는 감정을 충실히 반영한 완전히 허구적인 색을 칠해야 하겠지? 하지만 나의 인공적 그림에서도 나는 표면적 현실을 위한 공 간을 남겨 두기로 했어. 그리고 그것이 갖는 장점도 있다는 요소도 본질적인 요소 못지 않 게 쓸모가 많은 법이거든. 앙드레 루베이르에게, 1947년 6월 3일 선과 감성 선은 내 감정을 가장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옮긴 것이다. 매질이 단순하지 않았다면 그렇 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드로잉은 드로잉과 스케치를 혼동하는 몇몇 사 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 나의 드로잉은 빛을 낳는다. 우중충한 날이나 간접광 밑 에서 보면 그 안에 선의 특성과 섬세함뿐 아니라 색에 비견될 만한 빛과 농담의 차이가 담 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은 밝은 대낮에 보아도 꽤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보통 드로잉을 그리기에 앞에 목탄 같은 좀더 느슨한 매질로 습작을 하곤 한다. 그 과정에서 모 델의 성격, 인간적 표현, 주변을 에워싼 빛의 특성, 분위기, 오직 드로잉으로만 표현될 수 있 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찰한다. 어떤 때는 며칠씩 이어지기도 하는 그 탐색에 지쳐 버 릴 때쯤,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다. 바로 그때 나는 펜을 들고 거침없이 그려 나가기 시작한 다. 순간 나는 손놀림 속에 감정이 표현되고 있음을 명료히 깨닫는다. 감정에 젖은 선이 하 얀 백지의 빛을, 그 소중한 백색 성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나는 아무 것도 덧붙이거나 뺄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종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수정은 불가능하다. 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묘기처럼... 나는 드로잉을 한번도 특별한 솜씨를 요구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 드 로잉은 무엇보다도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의 상태를 기술하는 수단이었다. 어눌함 없 이 감상자의 마음에 곧바로 다가갈 수 있도록 단순하고 가식 없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선호 나는 수단이었다. 실내에서 나의 모델, 곧 사람은 결코 '조연'이 아니다. 그들은 내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 이다. 나는 전적으로 모델에 의존한다. 나는 모델을 마음껏 관찰하면서 '그 모델의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포즈를 잡아낸다. 새로 모델이 오면 나는 그녀가 자기를 의식하지 않을 가장 편안한 자세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그 뒤로 나는 그 포즈의 노예가 된다. 때로는 싫 증날 때까지 같은 모델을 몇 년씩 쓰기도 한다. 나의 조형기호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관심 을 두고 있는 모델의 영혼(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거 기에 무엇이 있겠는가? 모델의 모습은 언제나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표현할만한 것이 있다. 모 델이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모델의 몸 자체에 특별히 나타나 있지 않고 완전한 조 화, 조형성을 이루는 종이나 캔버스 전체에 분산된 선이나 특수한 농담에 나타나 있다. 그러 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간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아직 모든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승화 된 관능적 쾌락이다. 그림자나 반 농담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명암이나 변조를 거부하려 고 한다. 나는 선의 무게에 변화를 줌으로써, 무엇보다도 선이 백지 위에서 경계를 정하는 영역을 가지고 변조의 효과를 낳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백지 위의 다양한 부분들 간의 관 계를 통해 바꾸려는 것이다. 렘브란트, 터너, 색채주의자들의 그림에 대체로 이 점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이론 없이'작업한다. 나는 내가 이용하는 무르익으면서 나에게 포 착되는 나의 생각에만 기대어 그림을 그린다. 샤르댕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바르게 보일 때까지 덧붙인다."(혹은 뺀다고 말해도 좋다. 나는 많이 지우는 편이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만일 화가가 올바른 원칙 위에서 작업한다면 집을 짓는 것처럼 논 리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측면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 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을 뿐이다. 만일 인간적 측면이 있을 경우 그것은 불가피하게 작품 전체를 물들일 것이다. '요점',1939년 "나는 이끌린다." 드로잉 작업을 할 때 나의 연필이 종이 위에 남기는 궤적은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는 사 람의 몸짓과 비슷하다. 내 앞에는 길이 나 있지 않다. 나는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끌릴 뿐이다. 나는 나의 모델 속에 있는 한 점에서, 나의 연필이 잇따라 거치게 될 다른 점들과는 무관하게 늘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내 눈에는 보이는 또 다른 점을 향해 움직인다. 나는 그 때그때 생기는 내부적 충동을 그림에 옮겨 놓을 뿐이다. 내 눈이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아 직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 이상의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외부적 장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희미한 불빛을 향해 나아가서 일단 거기에 이르면 내 앞에는 저 멀리서 또 하나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나는 다시 그곳을 향해 창조의 일보를 내디뎌야 한다. 그 길은 참으로 흥미롭다. 마치 거미가 한 코 한 코 거미줄을 짜 나가듯이. '커다란 주제들'은 아직 나에게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큰 주제는 신중함을 요구하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다. 그런데 '신중함'은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본능의 거리낌없는 발산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루이 아라공 ' 소설 앙리 마티스' , 1971년 "우리는 시대에 속해 있다" 원칙은 개인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 유능한 교수가 라신 같은 천재를 능가하 수 없 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공식을 반복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공식의 의미를 간파하는 일은 아무나 못 한다. 마네 나 르누아르의 작품보다는 라파엘로나 티치아 노의 그림을 연구했을 때 좀더 완전한 창작의 지침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을 나도 굳이 부 인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마네 와 르누아르가 따랐던 원칙은 그들의 기질에 맞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 르비노의 비너스'(티치아노)나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라파엘로)를 흉내내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의 그림보다는 마네 나 르누아르의 소품을 더 좋 아한다. 그런 모작들은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속 해 있으며 시대의 사상, 감정, 심지어는 망상까지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가에 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져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런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 람이다. 예컨대 플랑드랭보다는 쿠르베가, 프레미에보다는 로댕이 우리 시대를 더 잘 표현한 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설령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레 유배자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시대와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으며 어떤 작가도 그 끈에서 놓여날 수 없다. 후세의 미학자들은 우리 중의 그 어느 누구도 레오나르도 다 빈 치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에 쓰인 레오나르도 다 빈 치의 책을 예로 들게 될는지도 모 른다. '화가의 노트', 1908년 그림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흔히 나는 작업을 시작할 때 처음의 신선한 표층감각을 기록한다. 몇 년 전까지 나는 그 결과에 만족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여기에 만족한다면, 비록 안목이 넓어지기 는 했지만 내 그림에는 모호한 구석이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지 않고 따라서 다음날이면 거의 알아보지 않고 따라서 다음날이면 거의 알아보지 못할 한순간의 덧 없는 감각을 기록해 두었어야 했다. 나는 그림을 만드는 그런 감각의 응축상태에 이르고 싶었다. 한자리에서 이루어진 작업에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작품을 곧잘 뜯어고치 는 편이다. 그래야 나중에 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 다. 한때는 벽에 내 그림을 걸어 놓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림을 보면 과도한 흥분의 순 간이 떠오르는데 나는 평온한 상태에서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요즈 음 나는 그림에 평온함을 담는 데 애쓰고 있다. 평온함이 성공적으로 담길 때까지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화가의 노트', 1908년 오래 바라보기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모델이나 주제를 오래 바라보고 색채의 전반적 초안을 짜도록 하 라.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떤 풍경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색채라든가 구성의 차원에 서 어떤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그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라. 그런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나의 마음에 나타난 특성이 그림의 중요한 부분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유 념하면서, 완성된 작품에서 보여질 모든 것을 암시해야 한다. 작업과정에서 모든 것이 내적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것을 보태서는 안 된다. 때때로 붓을 놓고 주제가 조화를 이루는지 확인해야 한다. 당신이 우선 지향하는 것은 통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색에서 질서를 찾을 것, 내가 이해한 서너 가지의 색을 캔버스에 바르라. 할 수만 있다면 또 하나의 색을 바르라. 그러지 못하겠으면 캔버시를 옆으로 밀어 두고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하라. 사라타인의 강의 노트에서 1908년경 후배화가와 마티스 마티스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한 대는 선생 노릇도 즐겼다. 그는 젊은 화가들을 어떻게 받 아들였는가?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르누아르에서 폴록까지 마티스는 신진 화가들에게 피카소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새로운 조류를 피 카소보다 덜 단정적으로 대했다. 마티스는 뉴욕에서 미술상을 하는 아들 피에르가 보내 온 도록 몇 종을 보여 주었다. 거 기에는 잭슬 폴록과 그 비슷한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그림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가 도록을 다 보기를 기다렸다가 마 티스가 입을 열었다."다음에 올 자기 작품을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할지 늘 판단에 애를 먹는 것과 같은 이유지. 사람은 앞서 활동했거나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화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어. 후배 화가들에 대해서도, 만일 그 화가가 나를 깡그리 잊은 것이 아니라면 나 는 조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그가 나를 앞질러 나간다 해도 말이지. 하지만 만일 그가 내가 그림이라고 받아들이는 부분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면 더 이상 그를 이해할 수는 없게 돼. 따라서 판단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 능력 밖의 일이거든. 젊었을 때 나는 르누아르의 그림에 심취했어. 1차 대전이 끝나 갈 무렵 나는 남프랑스에 있었는데, 르누아르는 아주 연로했고, 나는 그를 여전히 숭배했으므로 카뉴에 있는 그의 집 을 찾아갔지. 르누아르는 나를 아주 따뜻이 맞아 주었어. 몇 차례 방문이 더 있은 뒤 내 그 림을 들고 갔어. 르누아르의 반응이 궁금했거든. 그는 그림을 보더니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네. '솔직히 말하겠네. 자네는 좋은 화가가 못 된다는 것, 아 니 아주 엉터리 화가라는 것이 나의 속마음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하지 못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네. 자네가 찍은 검정은 캔버스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있더군. 감 정을 쓰면 캔버스에 구멍이 숭숭 뚫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평생을 지론이었어. 검정은 색이 아니라는 소리야. 자네는 색으로 말을 하지. 그런데 자네가 바른 검정은 캔버스에 찰싹 달라붙어 있더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네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생각 같아서는 자 네는 형편없는 화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자네를 화가로 볼 수밖에 없네.'" 마티스는 빙긋 웃었다. "이젠 알겠지, 다음 세대를 이해하고 평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조금씩 만들어 나갈 뿐 아니라 미적 규범도 함께 발전시켜 나가지.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신이 창출한 가치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세우는 것이지. 그러니 자기가 도달한 지점보다 앞에서 출발하는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그런 그림은 토대가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야. 우리가 무대 에 나타났을 때 그림의 운동은 우리를 잠시 담고 꿀꺽 삼켜서 사슬에다 약간을 보태지. 그 러나 운동은 계속되어 머지않아 우리를 지나쳐 가. 우리는 운동밖에 있게 되고 그림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야." 그러자 파블로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오호라, 이제 보니 우리 중에 인과의 사슬을 말하 는 불교도가 계셨구먼요."파블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그림을 판단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나는 체질적으로 그런 일에 안 맞아. 신진 화가들의 제스처에 기죽거나 놀아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과시적인 행동 앞에서 굴복하는 것, 그것처럼 볼썽 사나운 일도 없고요,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 는 건 아닙니다. 나는 푸생 같은 화가와는 전혀 공통성이 없어요. 그러나 무의식은 너무 강 력한 것이어서 유파는 달라도 어차피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인류는 바로 그 저변의 뿌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뿌리는 어차피 드러나요, 그런 데 우리가 왜 스스로를 포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프랑수아즈 질로와 칼턴 레이크 ' 피카소와의 생활' , 1964년 추상에 대하여 "오늘날의 추상미술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마티스의 답변 "먼저, 추상미술은 단 한 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미술은 일 화적 특성을 벗겨 낸 근본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추상적이다. 하지만 말장난은 하지 말자...... 문제는 비형상적 미술이라는 소린데........ 오늘날의 미술이 자신의 물질적 조성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상을 종합으로 표현하는 화가는 언뜻 대상에서 벗어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대상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화가는 불가피 하게 대상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지만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대상이 자기으 l마음에 불러일으킨 반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잇 어야 한다. 우리는 대상에서 출발한다. 감각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허공에서 출발하지 않는 다. 무에서 유가 생길 수는 없다. 오늘날의 추상화가들은 대부분 허공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근거가 없고, 힘이 없고, 영감이 없고, 느낌이 없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 는 관점을 고수한다. 그들은 추상을 흉내낸다. 우리는 그들이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 색채들 간의 관계에서 어떤 표현성도 찾아내지 못한 다. 그들이 관계를 만드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모든 색을 헛되이 쓰는 셈이다. '관계'는 사물간의 친근성이며 공통언어이다. 관계는 사랑이다. 그렇다. 사랑이다. 관계 가 없으면, 이 사랑이 없으면 관찰의 기준이 성립되지 못하며, 예술작품도 존립할 수 없게 된 다. 앙드레 베르데와 앙리 마티스의 인터뷰 1952년 마송이 본 마티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예술가가 바라본 화가 마티스. 그 사람은 실제보다 컸다! 실제보다 크게 그는 약간 무미건조하고 뻣뻣한 사람으로 나타 났다... 무미건조하고 진지하고 초연한 사람, 알겠는가?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화가에게 쏟았던 관심이었다. 그것은 작품 에 대한 의례적인 관심 이상이었다. 그는 나를 주시하면서 나의 방법론에 대해서 질문을 던 졌고 나 역시 그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앙드레 마송 ' 조르주 샤르보니에와의 대화' , 1958년 가르침에 대하여 마티스는 왜 자기가 학교를 열었다가 나중에 닫았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젊은 화가들이 내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학생 수는 많았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시도를 하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주력한 것은 그들에게 전통 감각을 심어 주는 일이었다. 혁명적인 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스승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쿠르베의 말이 나왔을 때 학생들이 느낀 실망감은 당연히 컸다. "나는 전통에 대한 폭넓은 지식 안에서 내 개성을 독자적이며 합리적인 감정을 내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학생 개개인에게 뚫고 들어가려는 과정에서 나는 그만 지쳤다. 내 눈에는 잘못된 방향으 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정작 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제 방식입니다." 서글픈 것은 그가 ' 마티스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화가가 되던가 선생이 되든 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 문을 닫았다. 자크 귀엔, '마티스와의 대화' ' 라브 비방' 지 1925년 12월 15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젊은 화가의 가능성과 책임. 앞선 세대의 영향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 젊은 화가는 그 안에 휩쓸리기 쉽다. 숭배하는 선배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화가는 자기 기질에 맞는 다양한 문화 권의 예술품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민감한 화가는 앞선 세대가 기여한 내용을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본인이 부인하고 싶어 도 그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롭고 참신한 영감으로 스스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젊은 화가는 모든 것을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이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작품들에 표 현되어 있는 다양한 견해들을 마음속에서 조화시킴과 동시에 자연에 곧바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표현수단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면 화가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원 하는가?"라고,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단순하건 복잡하건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가 자신의 내면적 감정을, 스스로를 속이거나 스스로에게 너무나 관대함이 없이, 진지하게 탐구할 수만 있다면, 그런 탐구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와 똑같이 일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림에 대한 단상' ' 베르브' 지 194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