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52] 지은이: 안 디스텔 / 송은경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르누아르-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제1장 입선이냐, 낙선이냐? 제2장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제3장 성공, 그리고 성숙 제4장 앵그르풍 시대 제5장 공식적인 인정 제6장 레콜레트의 르누아르 기록과 증언 르누아르-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나는 물 위에 내던져진 코르크 조각처럼 물살에 떠밀려다녔다. 그것이 어디든 나는 내 그림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르누아르의 일생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그림에 반영되어 대중 앞에 노출되었다. 이것이 그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년에 적었다. 자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기쁨, 그 아름다움과 행복의 세계를 공간에 기록한 화가 르누아르. 영원한 여름날의 햇살과 보는 이를 도취시키는 색상, 몸을 흔드는 무희들, 빛을 발하는 누드들로 가득한 그의 그림세계는 자연에 대한 예리한 지각력과 자유분방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지은이 : 안 디스텔 / 송은경 옮김 출판사 : (주)시공사 봉사자 : 이미영 안 디스텔(Anne Distel) -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인상파 그림 전문가이다. 여러전시회의 주최 및 카탈로그 작업에 참여한 바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로는「인상주의 백년제전」「피사로」「모네에 경의를 표함」「르누아르」「코로에서 인상파들까지」「쇠라」「세잔에서 마티스까지」등이 있다. 또한 수많은 논문을 기고했고, 저서로「인상주의:최초의 수집가들」을 출간했다. 송은경 - 1963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하였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X파일」「프로방스에서의 1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36번「모네」등이 있다. 제1장 입선이냐, 낙선이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 2월 25일 프랑스의 리모주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중 둘은 어릴 때 사망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흔해서,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가난한 집안으로 보자면 사건이랄 것도 없었다. 부친 레오나르누아르는 재봉사였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메를레는 양재사였다. 일가는 곧 파리로 이사했고 루브르 박물관 옆 바비블리오테크가(리볼리가가 재건되면서 사라졌다)에서 살다가 다시 아르장퇴유가 23번지로 옮겨갔다. 열세 살의 견습공 소년 오귀스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보다 열 살 위이며 문장 조각사인 형 앙리와 역시 조각사인 매형 샤를 르레이를 보면서 그는 힘을 얻었다. 대부분 중산층 이상 출신인 그의 미래 동료들의 부모와는 달리, 르누아르의 양친은 화가가 되려는 아들을 독려했고 가능하면 그것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재주를 키워주려 했다. 그들은 아들이 13세가 되자 한 도자기 화공에서 견습공으로 맡겼다. 1860년까지 르누아르는 갖가지 장식품과 그림 부채, 차양, 옷장 등을 재료로 실험했다. 그는 실용적인 작업에 대단한 재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것은 미술공예가란 올가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는 데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국립 미술학교 마침내 그는 당시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밟았던 정통 코스에 입문했다. 1860년 1월 그는 루브르에서 그림 모사를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고, 1962년 4월 1일에는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군복무로 두 차례에 걸쳐 학업을 중단한 일을 제외하고 르누아르는 정규적으로 학교를 다녔으며 상당히 좋은 학점을 유지했다. 그러나 5년간 이탈리아에 유학을 보내주는 장학제도인 '프리 드 롬'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화단에서 공인을 받았다는 표상이었다. 도제제도를 기반으로 고전에만 전념해 투시도법과 해부학적 분석을 가르치는 데 의존하는 틀에 박힌 공식적 교수방식이 그의 양심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글레르의 화실 1961년 르누아르는 스위스 화가인 샤를 글레르의 홧lf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글레르는 자신의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그는 전통 화풍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비교적 자유롭고 편견없는 교수방식으로 많은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 가운데는 몽펠리에 출신의 젊은이로서 1862년 말경에 들어온 프레데리크 바지유, 르아브르 출신의 클로드 모네, 파리 상인의 아들인 알프레드 사슬레도 끼여 있었고, 이들 모두 곧 르누아르와 친구가 되었다. 그들 중 전통적인 교수방식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3년 사망한 외젠 들라크루아부터 시작해, 새롭게 발흥하여 여전히 큰 존쟁거리가 되고 있었던 사실주의의 옹호자 귀스타브 쿠르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취향은 다양했다. 그들은 당대의 화가 카미유 코로를 좋아했고, 장 레옹 제롬과 알렉상드르 카바넬은 싫어했지만 1867년에 작고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에 대해서는 존경해 마지 않았다. 또한 그들보다 불과 몇살 위읜 한 젊은 화가도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었다. 유명한 '풀밭 위의 점심'을 살롱 낙선자전에 출품함으로써 보수주의 세력에 도전한 에ㄷ아르 마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 명칭(살롱 낙선자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례 없는 행사는 대중에게 살롱전에서 반려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 살롱전에 전시할 작품의 자격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은 대부분 막강한 보수주의 성향의 예술원 회원 집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르누아르와 살롱전 해마다 파리에서 열리는 살롱전에 통과한 화가들에게는 일종의 공식 인정 증표가 주었졌고, 그들의 작품은 대단한 명예를 누렸다. 상으로 메달이 수여되고 사설 화랑이 별로 없던 시절에는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잠정적인 구매자들과 연결해 주기도 했다. 주로 비평가들에 의해 유지되는 이러한 제도에 길들여진 대중은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는 무조건 흥분하며 조롱했다. 그러던 중 영향력 있는 세력에 의해 대중의 선호도가 결정되는 이같은 예술 패권주의에는 문제의 소지가 잇으므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며-처음에는 다소 작은 목소리였지만-항의자들을 옹호하고 나서는 움직임이 일부 저널리스트들과 미술동호회, 미술상들 사이에 일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르누아르는 화가로서 첫발을 들여놓았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느트르담의 곱추'로 알려져 있다)에서 영감을 얻은 '라 에스메랄다'란 제명의 작품을 1864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그는 이 그림을 나중에 없앴다고 주장했다.) 르누아르는 관례대로 살롱전 카탈로그에 샤를 글레르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적어놓았지만, 바로 그해 재정의 어려움을 겨꼬 있던 글레르의 화실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국립 미술학교도 그만두었다. 최초의 후원자 1865년 르누아르의 작품 두 점이 살롱전에 입선됐다. 그중 하나는 시슬레의 부친 초상화였다. 그러나 모네의 풍경화 두점이 일부 비평가들의 관심 속에 전시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르누아르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햇다. 그해, 저널리스트들은 주로 마네의 '올랭피아'로 야기된 스탠들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 끝난 전시회가 르누아르를 좌절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1966년 그는 대작 '안토니 아주머니네 여관에서'의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인 시슬레와 쥘 르 쾨르가 퐁텐블로 숲 언저리 마을인 마르로테의 한 주점에 있는 장면인데, 이곳은 화가들과 문필가들이 파리 근교에서 모일 때 가곤 했던 곳이다. 시슬레가 초기 인상파 그룹의 일원으로 널리 알려진 반면 화가인 쥘 르 쾨르는 형인 샤를 르 쾨르와 함께 오늘날 르누아르의 최초의 후원자요, 모델로 주로 알려져 있다. 파리의 부호인 르 쾨르 일가는 일찍이 이 젊은 화가의 재능을 확신하고 초상화며 정물화 따위를 그에게 의뢰했고, 1868년에는 샤를이 루마니아 왕자인 게오르그 비베스쿠를 위해 지은 시내 주택의 장식을 맡기기도 했다. 마를로테 '안토니 아주머니네 여관에서'는 살롱전에 전시된 적은 없지만 르누아르의 초기 경력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야심만만한 작품을 보노라면 쿠르베의 대형 인물화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당시 르누아르가 쿠르베의 작품들을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런 논의가 있다는 것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실내를 배경으로 사실적인 인물들이 규형 잡힌 구도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의 생활상, 특히 화가들의 꾸밈없는 일상의 모습을 주제로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배경은 여관을 스쳐간 서투른 그림장이들의 스케치며 낙서들이 그려진 벽으로 처리했다. 스승 외젠 부댕의 영향으로 한동안 야외에서 그림을 그려온 모네는 이 시기에 퐁텐블로 숲을 배경으로 한 '풀밭 위의 점심'에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같은 제명의 마네의 그림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도전적인 의미도 띠고 있었던 이 그림에서 그는 특히 빛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였다. 르누아르도 야외작업을 거린 것은 아니다. 그는 마를로테에 있는 동안 친구 쥘이 술에서 개들과 산책하는 장면을 그렸다. '퐁텐블로 숲의 쥘 르쾨르'(1866)는 그 경향과 기법이 유명한 바르비종 화가인 나르시스 디아스 데 라 페냐의 그림과 퍽 닮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르누아르는 퐁텐블로 숲에서 작업할 때 디아스와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다아스는 자신의 후원자와 상의해 르누아르의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터주어, 이 젊은 화가가 그림그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무튼, 이 현명하고 말솜씨 좋은 화가 르누아르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확실하게 꼽히게 되었다. "르누아르 씨는 가없게도 낙선했습니다" 1866년 봄, 쥘과 샤를의 누이인 마리 르 쾨르는 이 비통한 말로 젊은 화가의 비애를 전하기 시작했다. "금요일에도 심사결과를 알 수 없어서 그는 전시장 입구에서 심사위원들을 기다리다가 코로와(샤를 프랑수아) 도비니(둘 다 저명한 풍경화가이다)가 나오는 걸 보고 혹시 친구인 르누아르의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그림을 떠올린 도비니 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 친구를 밀었지만 그의 그림은 낙선했습니다. 우린 최선을 다했지요. 재고해 달라고 열 번씩 요구했어요. 입선여부를 떠나서 말이죠. 하지만 어쩌겠소. 찬성하는 여섯 사람이 나머지 심사위원들과 맞붙어야 했으니. 친구한테 낙심하지 말라고, 그림에 대단한 자질이 보인다고 말해주시오. 탄원서를 내고 낙선된 그림들을 전시해 달라고 요구도 하라 하구요.' 그래서 그는 비참햇지만 존경하는 화가에게 찬사를 받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답니다." 결국 심사단은 르누아르가 습작 정도로 치부한 소품에 월계관을 쒸워주었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작품은 낙선시키고 말았다. 극도로 실망한 그는 아무 작품도 보내지 않기로 했던 것 같다. 살롱전 카탈로그에 친구인 모네, 바지유, 시슬레의 이름은 있고 자신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작품들은 입선됐던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마네도 자기처럼 낙선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가 도비니의 충고를 따라, 그해의 유명한 낙선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관계 기관에 항의서를 제출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안토니 아주머니네 여관에서'에 등장하는 신문이 대문자로 '레방느망(사건)'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잔의 어릴 적 친구인 에밀 졸라가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풋내기 작가였던 시절, 첫 미술 비평문을 낸 곳도 바로 이 신문이었다. 1866년 4월부터 실린 글에서 졸라는 마네와 그의 친구들을 열렬히 변호했다. "비스콩티가에 새로운 일이 생겼다" 양친에게 꼬박꼬박 돈을 타 쓴 덕에 돈이 부족할 일이 없었던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1867년 초, 비스콩티가 20번지에 널찍한 화실을 몇 달간 세냈다. 그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렇게 적었다. "지난번 편지 올린 후로, 비스콩티가에 새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장차 세계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둘 대작들을 한아름 들고 모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그는 이달 말까지 여기 머물 겁니다. 르누아르도 있는데, 이 곤궁한 화가들이 바로 제가 거두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여기는 진짜 휴양소입니다. 저는 즐겁습니다. 공간도 풍족한데다 두 친구 모두 쾌활하거든요." 이 편지를 쓰기 직전 바지유는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집엔 지금 글레르 화실 시절 같이 배웠던 한 친구가 숙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화실이 없는 친구죠. 이름이 르누아르인데, 그 친구는 대단히 열심히 작업합니다. 내 모델들을 같이 쓰고 있는데 그 비용에 보태라며 뭘 내놓기까지 한답니다." 이 무렵 르누아르는 작업중인 친구의 초상화'이젤 앞의 바지유(1867)'을 그렸다. 같은 시기에 바지유가 르누아르를 그려준 데 대한 답례였다. 그림 속의 르누아르는 불안정한 자세로 앚아 있는데, 그 모습은 그의 친구들이 자주 묘사하던, 초조하고 불안한 그의 기질과도 일치한다. 관찰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야윈 얼굴에선 강렬한 표정이 느껴진다. 밝은 갈색의 머리는 장차 어딜 가나 쓰고 다니게 될 모자엥 아직 가려지지 않는 상태이고, 평생 달고 다닐 짧고 숱 적은 턱수염과 콧수염을 자랑하고 있다. 르누아르가 로마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그린 것도 비스콩티가의 화실에서이다. "다이아나'에는 쿠르베풍에 가까운 참신함과 주제 선정에 관례를 존중하는 태도가 동시에 엿보이는데, 이는 그가 예술원 회원들의 지지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어렵게 결합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모네, 바지유, 시슬레의 작품들과 더불어 이 그림도 1867년 살롱전 심사위원에게 퇴짜를 맞은 것이다. 바지유가 작성한, 새로운 낙선자전의 창설을 선언하는 탄원서에 서명도 해봤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해는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리는 해여서 화가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찬 많은 군중 앞에 자신의 작품를 내걸고 싶어 유난히 안달이었다. 자신의 그림이 심사단에 의해 반려되는 것을 보고 염증을 느낀 마네는 쿠르베와 마찬가지로 자비로 개인전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의 전시회장은 세계박람회장 한켠에 자리잡았다. 리즈 검은 머리와 검은 누의 처녀가 르누아르의 그림과 사생활에 등장한 것이 이 무렵이다. 이름이 리즈 트레오인 그녀는 1868년 살롱전에서 대성공을 거둔 작품'리즈(1867)'의 모델이었다. 그림을 치우고 난 후에도 풍자와 논란이 이어졌는데, 이르테면 신진화가의 옹호자 쥘 앙투안 카스타냐리는 이 그림을 "바지유의 '재결합한 가족'옆, 모네의 대형화 '보트(지금은 소실되고 없다)'에서 멀지 않은 서까래에다 쓰레기와 함께 걸어 둔다"는 식이었다. 이 작품을 1863년 낙선자전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레 작 '백색의 조화, 제1번:백인소녀"와 비교하는 비평가도 있었지만 대다수 비평가들은 르누아르가 마네에게 빚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밀 졸라는 르누아르와 모네의 작품 간의밀접한 연관성을 예리하게 입증해 보였다. "내가 볼 때 '리즈'는 클로드 모네의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의 자매처럼 보인다....... 우리의 아내들, 아니 우리의 연인들 중 하나를 아주 정직하게, 또한 현대적 양식을 훌륭하게 적용해 그린 게 바로 그녀이다." 이 그림은 더 이상 다른 논평거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르누아르는 친구들과 좀더 깊은 관계로 얽히게 된다. 이 점은 분명히 신흥 조류인 두 점의 그림-바지유 작'라콩다민가의 화실':둘 다 1870년작-에 그가 등장하고 있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르누아르와 바지유는 여전히 절친한 사이였고, 1868년 초 그들은 레페오바티뇰가(1868년 말에 라콩다민가로 개명됨) 9번지로 함께 이사했다. 이곳에서 르누아르는 1870년 초까지 지냈다. 새 이웃인 마네가 그들을 방문했는데, 바지유는 그의 방문을 그림 그리는 구실로 삼았다. 새 화실은 유명한 케페 게르부아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카페게르부아 마네가 바티뇰(오늘날의 클리시가) 대로 11번지에 있는 이 카페를 자주 드나들자 일단의 예술가, 문핅, 비평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네 외에 열심히 출입한 사람으로는 에밀 졸라, 비평가인 자사리 아스트뤼, 에드몽 뒤랑티, 테오도르 뒤레가 있었다. 예술가 가운데는 조각가인 마르셀랭 데부탱과 펠릭스 브라크몽, 바지유, 르누아르, 팡탱 라투르, 드가가 자주 왔다. 세잔, 모네, 카미유 피사로도 파리에 머물 때면 나타나곤 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는 떠들썩하고 논쟁 좋아하며 열정적인 이 그룹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전의 아방 가르드의 상징인 것처럼 보였다. 당시 심술궂은 일부 비평가들은 재빨리 이 그룹에다 바티뇰파란 이름을 갖다 붙였다. 공식적인 성공 리즈는 1869년 살롱전에 선보인 '여름', 1870년 살롱전에 선보인 두 작품-쿠르베풍의 '목욕하는 여인'과 들라크루아에 경도된 '알제의 여인'-에서 모델로 등장했다. 이 작품들은 꽉 짜였으면서도 부드러운 형식을 취해 연출했는데, 의도적으로 현대적인 주제를 택했고 인물 또한 편향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1868년작 '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아내' '광대'처럼 르누아르가 최고의 수입을 올린 초상화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생기 넘치는 색조에 색상 대비를 강조했다. 르누아르와 모네 르누아르와 모네의 유대는 점점 깊어갔다. 1869년 르누아르는 돈을 절약하며 파리 서쪽의 작은 마을인 부아쟁루브시엔에서 양친과 함께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모네가 사는 부지발 근처였다. 당시 모네는 금전상의 문제로 고투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르누아르는 바지유에게 이렇게 썼다. "우린 매일 먹진 않아. 하지만 난 늘 행복하다네. 모네는 좋은 그림 동료거든." 그리곤 애석한 마음을 덧붙였다. "물감이 다 떨어져 난 작업을 거의 못하고 있다네." 말년에 르누아르는 젊은 화가 친구의 알베르 앙드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때 그가 시작에 불과했던 그 고난의 시절을 떠올렸으리란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결코 투사적 기질이 없어서 내 좋은 친구 모네가 없었다면 수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투사적 기질을 갖고 있어서 나를 밀어주었다." 라 그르누예르 르누아르와 모네는 크루아시의 센강에 설치된 식당 딸린 수영장 라 그르누예르에서 나란히 그림을 그렸다. 두드러지게 현대적인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두 예술가에게 들어맞았고, 통념을 깨는 그들의 성향을 잘 보여주었다. 상류층이 좋아하는 모임 장소, 혹은 서민의 시끌시끌한 만남의 장으로,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 라 그르누예르는 인기 있는 명소였다. 몇 년 후 작가인 기 드 모파상은 '폴의 연인'과 '이베트'에서 이곳을 추억하기도 했다. 삽화 신문의 화가들도 종종 이곳을 추억하기도 했다. 삽화 신문의 화가들도 종종 이곳ㅇㄹ 스케치했다. 살롱전을 염두에 두고 이런 곳을 그림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모네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꿈구었다-실패한 계획인 듯했다. 르누아르는 이 주제로 작업한 소품들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을 건질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야외로 나오, 이미 실전 경험이 있는 친구이자 동료 옆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이 작업 습관에 좀더 작은 단위로 끊어 칠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같은 주제를 담은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차이점이 잘 드러난다. 모네는 공간을 보다 체계적으로 짜고 붓 터치가 견고하며, 구성이 대체로 단순화되어 있다. 르누아르는 붓끝을 넓게 터치했고 인물을 자세히 그렸으며 색상을 많이 썼다. 자연스러움이 넘쳐나는 이런 그림들과는 달리, 르누아르가 1870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훨씬 더 보수적이다. 그 그림들은 입선했지만 모네의 작품은 낙선됐다. 1860년대는 이렇게 르누아르에게 용기를 주는 통지서로 마감된다. '바티뇰의 화실'에서 작업중인 마네를 열심히 지켜보던 이 젊은이는, 그림을 그린 팡탱 라투르의 표현에 따르면, "그 자신, 훗날 인구에 회자할 화가"였다. 1870년 전쟁 1870년 7월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26일 르누아르는 제10기병대 소속 병력으로 징집되었다. 보르도 부근의 리부른으로 파견된 그는 파리가 포위당하는 역경에서 살아남지만 병이 나고 말았다. 이질에 걸린 데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결과였다. 제대 후 그는 파리로 돌아왔고, 정치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지유가 전사했고 모네는 징집을 피해 영국으로 갔다. 그리고 집을 약탈당한 시슬레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다시 낙선되다 파리 공식 화단과의 결속을 새롭게 다져보자던 르누아르의 첫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알제의 여인' 후속작이 분명한 그의 대작 '하렘'('알제리 복장의 파리 여인들')이 1872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것이다. 이 작품은 리즈가 포즈를 잡은 마지막 그림이었다. 그녀는 1872년 4월 건축가인 조르주 브리에르 드 릴과 결혼했던 것이다. 낙선자전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는 탄원서에 마네, 팡탱 라투르, 피사로, 세잔 같은 화가들과 더불어 르누아르도 서명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제명을 알 수 없는 초상화 한 점과 '불로뉴 숲에서의 아침 승마'란 대작을 출품했지만 이번에도 낙선되는 고통을 겪었다. 후자의 그림은 르 쾨르 집안의 친구인 앙리에트 다라 부인이 말을 타고 조랑말을 탄 샤를 르 쾨르의 아들 조제프와 나란히 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1873년 낙선자전에전시됐다. 이것은 르누아르가 공식 화단과 거리를 두겠다는 도전의 몸짓이었다. 심사단에서 고의로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고 믿은 그는 다시는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된다. "르누아르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의 주무기는, 놀라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 색조에서 저 색조로 변화시켜 가는 색조의 명쾌한 저울질에 있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강렬한 태양빛에 비친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에밀 졸라, '6월의 두 미전' '르 메사제 드 뢰로프'지 상트레테르부르크, 1976년 6월 제2장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아르장퇴유의 클로드 모네와 더불어 전쟁중인 1870년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네덜란드 여행까지 다녀온 모네가 이듬해 말 (파리 바로 북쪽의) 아르장퇴유로 이사했다. 르누아르는 자주 그를 찾았다. '아르장퇴유의 센강'과 같은, 두 화가가 같은 주제로 그린 여러 그림뿐 아니라 르누아르가 그린 모네와 모네의 부인 카미유의 초상화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라 그르누예르에서처럼 모네가 친구를 설득해 또다시 야외에 이젤을 세우게 만든 것만 봐도, 다른 곳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모네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아르장퇴유에 있을 당시 모네에게는 다른 방문객도 많았다. 피사로, 르누아르와 가장 절친한 시슬레, 그리고 나중에는 어린 친구들에게 배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마네도 합세햇다. 이 그룹이 이때처럼 든든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기는 처음이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 화가들의 대화는 살롱전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퇴짜'맞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전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겼다. 행정부에 '낙선자전'을 열어 달라고 수없이 탄원해 봤자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먼저 행동을 취하는 문제는 화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그들의 전시회에 동참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데 우선권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바지유가 부모님에게 보낸 1867년 이후의 서한들에서 화가협회를 조직하는 문제를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금 부족으로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르누아르를 포함해 화가, 조각가, 판화가, 기타 예술가로 구성된 협동조함 '소시에테 아노님'이 1873년 12월 27일에 결성되었고, 1874년 봄에 파리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특별히 카퓌신가 35번지의 한 공간을 빌려 연 이 전시회에는 르누아르와 모네를 비롯해 드가, 피사로,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 세잔, 아르망 기요맹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네는 이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살롱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 집단에 대해 한 비평가가 조롱하는 뜻으로 모네의 그림'인상, 해돋이'란 제명을 빗대어 '인상파'란 이름을 갖다 붙였는데 그 명칭이 그대로 쓰이게 되었다. 1874년 비평계의 반응 르누아르는 주목할 만한 최근작들을 선정해 전시회에 참여했다. '무희' '박스'(오늘날엔 '특별 관람석'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의 여인' '추수하는 사람들' 그리고 '꽃' '여인의 두상'이란 제명의 확인 불가능한 작품 두 점이 그것이었다. 그는 '현대적인 인물'에 비중을 둔다는, 자신이 오래 추구해온 테마에 여전히 충실했다. 여성을 주제로 한 세 작품, '무희' '박스' '파리의 여인'을 보고 난 비평가 장 프루베르는 풋내기 처녀부터 '바람둥이 부인네'까지 '파리의 젊은 여인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세 단계 과정'을 발견했다고 평했는데, 이것은 당대인들이 그의 작품을 풍속화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양식보다는 주제에 더 관심을 보이던 비평계에서는 르누아르 친구들의 작품에 비해 그의 작품을 훨씬 관대하게 대했다. 알고 지내던 제널리스트들로부터 호평이 쏟아졌다. 카스타냐리는 "르누아르씨는 대담하다."고 했고, 필리프 뷔르티는 "그는 장래성이 있다.......터너의 기법과도 같은, 자신만의 무지개 효과, 자신만의 빛, 영롱한 색조 속에서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의 데생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고 단언했다. 제1회 인상파전이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작품들이 팔려 나간 것을 제외하고 상업적으로 실패한 전시회가 되고 말았다. 경매에 부친 인상주의 1975년 인상파 그룹은 전시회를 열지 못했다. 막대한 부채 때문에 소시에테 나노님이 해산됐던 것이다. 돈을 모으기 위해, 르누아르와 모네,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가 3월 24일 파리의 오텔 드루오 경매장에 그림 몇 점을 들고 나갔다. 그들의 그림을 보는 시선은 따가웠고-군중은 대놓고 이 그룹의 화가들을 조롱했다-금전상의 결과는 비참했다. 그림20점의 낙찰가가 2천 프랑 남짓한데다가 그중 두 점은 화가 자신이 되샀던 것이다. 인색하기로 소문난 정부도 살롱전에 나온 그림을 점당 3천 프랑 이하에 사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과 (그림값 비사기로 유명한) 장루이 에르네스트 메이소니에의 그림이 한 점에 20만 프랑을 호가하기도 햇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구매자 가운데는 1874년 인상파전에 동참했던 두 화가도 끼여 있었다. 스위스인 오귀스트 드몰랭과 드가의 친구이자 유명한 수집가인 앙리 루아르가 그들이다. 작가 겸 비평가로는, 파리의 각종 명리 단체와 문학 단체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정기간행 잡지 '아르티스트'발행인인 아르센 우사예와 에밀 블레몽이 있었다. 그밖에 모네의 형제인 레옹, 모리조의 사촌이며 훗날 에펠탑과 샹젤리제의 오귀스트 페레 극장 건립 제창자가 되는 가브리엘 토마, 제조업자인 장 돌퓌스, 출판업자인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있었다.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있었다. 조르주 샤르팡티에는 르누아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의 한 사람이 된다. 화가들만큼이나 경매 사정인으로 나선 파리의 미술상 폴뒤랑 퓌엘의 실망도 켰다. 그 자신도 몇몇 그림들에 놓은 가결을 제시하면서 어떻게든 가격을 놓여보려 애썼던 것이다. 뒤랑 뤼엘 1870년 전쟁 직후 뒤랑 뤼엘은 전쟁중 런던에서 알게 된 마네, 모네 피사로에게서 그림을 사들였고, 드가와 시슬레,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들도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가 최초로 산 르누아르의 작품은 1872년 3월 16일 200프랑에 구입한 '예술의 다리, 파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뒤랑 뤼엘은 들라크루아, 1830년 유파, 테오도르 루소, 상업상의 성공을 거두기 전의 바르비종파를 후원했던 한 미술상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신흥 미술시장의 메커니즘을 간파했고 미술상에겐 남보다 앞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1860년대 초 뒤랑 뤼엘은 지난날 쿠르베에게도 그랬듯이 마네와 그의 친구들을 후원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몇 년후부턴 르누아르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매했지만 두 사람은 좋고 나쁜 시절을 막론해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곁에 서 있었다. 1876년: 제2회 인상파전 르누아르의 두 친구, 테오도르 뒤레와 에드몽 메트르는 1875년 르누아르가 그 전해에 반려된 작품들을 다시 살롱전에 출품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중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아무튼 1876년 인상파가 독자적인 전시회를 또 한번 실험하려 할 때 르누아르는 이번에도 인상파에 합류했다. 이 전시회는 그들을 비웃는 비평가들의 격한 분노를 샀다. '말도뒷발 들고 서게 만들' 그런 작품들을 그려내고 있다고 욕먹던 그이 친구들-드가, 모네, 모리조, 피사로, 시슬레, 그리고 신참자인 귀스타브 카유보트-에 비하면 욕을 적게 먹었지만 르누아르도 여전히 야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작품 '어머니와 아이들'(1874년)을 보고 난 아르튀르 베니에르는 이렇게 썼다. "멀리서 보면 루르스름한 안개 속에 초콜릿색 사탕 여섯 개가 강렬하게 드러나 보인다. 저게 도대체 뭐지? 가가이 가보면, 사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세 사람의 눈망울이고 안개는 한 어머니와 그녀의 딸들이다." 이같은 평은 인상파 화가들이 데생 기법도 부족한 서투른 미완의 작품을 대중에게 제공한다고 사잡아 공격하던 풍조를 대변하는 말이다. 1876년의 몇몇 후원자 몇몇 전시 작품의 소유자 이름을 인상파전 카탈로그에 처음으로 명기했다는 것은 실제로 인상파가 살롱전의 후광 없이도 주목을 끌 수 있었음을 말해 준다. 불행하게도 후원자의 수는 극히 적었다. 르누아르를 후원했던 사람으로는 마네, 빅토르 쇼케, 장 돌퓌스, 알퐁스 레그랑, 빅토르 푸팽이 있었다. 단순한 후원자 이상의 인물인 마네는 경제적으로 여려운 젊은 친구들의 그림을 꾸준히 사주었다. 그는 요절한 바지유를 추모하는 전시회에 1867년작 바지유의 초상화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가 바지유의 부친과 거래를 한 것도 바로 이 행사를 통해서였다. 전사한 아들의 초상화를 갖고 싶어하는 바지유의 부친에게 그 그림을 주고 마네는 모네의 그림 한 점을 받았다. 빅토르 쇼케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그림 사는 데 쓰곤 하는 재무부 소속의 하급 공무원이었다. 들라크루아를 대단히 존경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875년 경매에서 르누아르를 발견했지만 그때는 그림을 사지않았다. 그는 또 르누아르의 부추김에 넘어가 세잔에게도 반했다. 당시 쇼케는 세잔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에밀 졸라는 소설 '뢰브르'(걸작)에서 쇼케를 모델로 한 '위' 씨를 등장시켰다. 이 인물은 들라크루아의 작품과 화가 '클로드 랑티에'의 작품을 수집하는 '전직 공무원'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클로드 랑테에란 화가는 마네, 모네, 세잔을 통칭하는 인물이다. 장 돌퓌스는 전혀 다른 세계인 직물 공업에 종사하는 돌퓌스 미그 가문 출신으로 수입도 상당했다. 옛 거장들과 코로, 들라크루아(르누아르는 그의 부탁으로 루브르에 소장된 들라크루아의 '모로코의 유태인 결혼식'을 모사해 주었다)를 비롯해 극동지역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르누아르의 작품은 불과 몇 점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로선 특이하게 오텔 드루오 경매장에 자주 출입했던 돌퓌스는 1875년 경매에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고 과감하게 값을 불러 한 점을 샀다. 그는 이 그림을 평생 간직했다. 자신의 딸 델핀의 초상화를 빌려주기도 했던 알퐁스 레그랑과 빅토르 푸팽은 르플르티에가 11번지 자신의 화랑에서 제2회 인상파전을 열어주었던 뒤랑 뤼엘과 관계된 미술상들이었다. 이제 두 사람을 추가하면서 간략한 후원자 명단을 끝맺어야 할 것 같다. 첫째 인물, '루마니아의 신사'로 알려진 동종요법 내과의 조르주 드 벨리오는 르누아르와 평생의 친교를 유지하게 될 사람이다. 그는 1876년에 처음으로 뒤랑 뤼엘에게서 르누아르의 그림을 샀다.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보다 좀 나중에, 모네의 저명한 '인상, 해돋이'를 구매하면서부터다.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 소장(그의 딸이 유증했다)된 모네의 이 그림은 인상파 그룹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작품이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인상파이자 후원자 그는 후원자보다 화가로 이름을 날리지만 1876년 인상파전의 경우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후원자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부유한 젊은 화가였던 그는 자신의 '바닥 닦는 사람들'이 1975년 살롱전에서 낙선되는 것을 보고, 1876년 2월 인상파전에 참가하라는 르누아르와 루아르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인상파 동료들의 작품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1876년 11월 3일 자기 형인 르네가 28살의 나이로 죽자 큰 충격을 받고 유언장을 작성했는대, "비타협주의자들 혹은 인상파로 불리는 화가들"이 1878년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거액을 내놓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자신의 수집품들이 국가에 귀속될 것임을 예견하고 그 집행자로 그의 형제 마르시알 카유보트와 르누아르를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1877년에도 탈없이 살아, 인상파를 위해 거액을 희사하고 자기 재능과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주최자 및 조정자로서 공헌했다. 상징적으로 친구들 사리에서 바지유가 해내던 역할을 카유보트가 이어받았던 것이다. 르누아르의 후원자 그룹은 비록 인원수는 적었지만 열성만큼은 빠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제2회 인상파전 역시 초라하게 끝났지만 르누아르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1870년대 그의 최대의 야심작 '물랭 드 라갈레트'에 착수한 것이다. 몽마르트르의 무도회 르누아르는 1873년 이사한 생조르주가 35번지에 10년 가까이 주소를 두고 사는 한편 몽마르트르의 코르토가에 화실을 빌렸다. 당시 몽마르트르는 아직 파리 교외 지역이었고 초지와 풍차들로 덮여 있었다. '그네'와 같은 몇몇 그림에서 당시 코르토가 화실에 딸린 정원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물랭 드 라갈레트'(1876)는 대부분을 유원지 현장에서 rmfuTei. 지금은 녹색 건물과 사람들이 나무 밑에서 춤을 추던 정원이 있던 이 유원지는 세기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화가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주 리비에르는 이 그림을 '전적으로 현장에서'제작한, 플레네르화(자연광선을 중시하는 화법의 그림:역주)의 걸작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디테일이나 전체 구도와 관련된 습작이 여럿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중 무도장을 주제로 삼음으로써 르누아르는 1869년 라그르누예르에서 처음 시도한 바 있던 그 테마로 되돌아갔지만 대형 포맷(가로 120cm w조금 넘고, 세로는 180cm 정도다)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의 야심이 좀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두 작품이 다 움직이는 군중을 형태화하고 나뭇잎을 거쳐 떨어지는 복잡한 빛의 형태를 구체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신작에서는 전면의 인물들을 초상화처럼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이 좀 달랐다. 리비에르도 지적한 것처럼 이 작품은 "역사의 한 페이지, 파리인들의 생활을 담은 귀중한 유물" 역사화의 재건으로 고전적 전통을 잇는 '엄밀한 사실주의'로서 자연주의 작품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러나 그는 또 "인상파가 다른 화가와 구별되는 것은 그들이 이같은 주제를 내용이 아닌, 그 색조의 중요성 때문에 취급한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르누아르는 보다 작은 그림들로 시작한 일련의 실험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던 게 분명한데, 특히 윤곽선에 의존하지 않고 색상을 통해서 형체를 만들어내는 유연하고 암시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심지어는 그림자까지도 색채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 이같은 측면은 인상파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림을 보고 난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폭풍우 치는 하늘에 검게 드리운 자줏빛 푸르스름한 구름 같은 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라거나, 알려진 모든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거나, 알려진 모든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반면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그림에서 "무지개 같은 찬란한 반사광"을 보았다. 1877년: 제3회 인상파전 '물랭 드 라 갈레트'는 20여 점이 넘는 르누아르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1877년 제3회 인상파전에 전시되었다. 그 가운데는 카유보트가 빌려준 '그네'도 들어 있었는데,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본 카유보트는 이 작품을 재빨리 자신의 컬렉션에 추가했다. 당시의 유명인사들이 관련되어 있어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그외의 작품으로는, 정치가 레옹 강베타의 친구이자 공화당 의원인 외젠 스퓔러의 초상화와 여배우 잔 사마리의 부인들의 초상화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사르팡티에는 이미 르누아르의 작품을 몇 점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훌륭한 후원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후원의 정보를 높여갔고 르누아르에게 르 쾨르 집안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르누아르는 1875년 이전에 이미 르 쾨르 집안과 불화가 있었다. 1877년 전시회 기간에 르누아르는 조르주 리비에르에게 '앵프레시오니스트'(인상파)란 정기간행물을 내자고 제안했다. 4월에 네 가지 발행물이 나왔다. 14일자 발행물에는 '한 화가' 라고 서명한 르누아르의 편지가 실렸고, 28일자에는 '장식미술과 현대미술'이란 제목의 그의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그는 각 예술 분야의 상호 의존성 및 기계화에 희생된 현대사회의 타락상에 관해 깊이 느낀 생각들을 펼쳐 보았는데, 이 생각은 일생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불행히도 이 간행물은 최초의 발행인 집단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유포되지 못했고, 또 비중 있는 후원자들을 늘려보려던 노력에도 별 도움이 못 되었다. 새로운 후원자들을 찾아서 1877년 5월 24일 오텔 드루오에서 르누아르, 카유보트, 피사로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작품 경매가 또 한번 있었다. 결과는 역시 비참했다. 다행히 르누아르가 초상화 청탁을 꽤 받았다. 그중 몇 건은 한 괴짜가 신청했는데, 이 사람은 최초의 인상파 후원자 명단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외젠 뫼니에는 뮈러라는 필명으로 금세 사라질 다수의 문학작품을 썼다. 독하한 이 사람은 파리에서 작지만 꽤 잘 되는 빵가게를 운영하는 게 본업이었다.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아르망 가요맹이 세잔, 피사로, 시슬레, 르누아르, 모네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그림을 샀고(낮은 가격이지만 화가들은 어려운 시절임을 감안하여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화가들을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고 피사로의 그림을 일등상으로 내걸고 지역 복권식 판매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자기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 주던 르누아르의 그림을 30여 점씩이나 샀다. 그 가운데는 '정자'(1876)와 같은 누목할 만한 작품들도 들어 있었다. 이 수집품들은 수집가 살아 생전에 하나둘씩 흩어져 버렸다. 뮈러의 친척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오랜 친구인 폴 갓P는 파리에서 개업한 의사이다. 1879년 초 르누아르는 안나 르뵈프를 살려 달라며 갓P와 조르주 드 벨리오에게 매달린 적이 있었다. 그의 모델이면서 그의 사생활에서도 모종의 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이 젊은 여인이 중병에 걸린 것이다. 의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사망했다. 르누아르는 수고해준 갓P에게 다른 여인의 초상화 한 점을 선물했다. 이 그림은 세자, 피사로, 기요맹의 작품들이 다수 포함된 갓P의 컬렉션(훗날 그의 아들이 프랑스 국립미술관에 유증했다)에 추가되었다. (1890년 5월에 요양소에서 나온 빈센트 반 고흐가 찾아간 이도 바로 가셰였다. 이때 가셰 역시 그들 도울 길이 없었다. 빈센트는 자살했다. 그러나 반 고흐가 그린, 화가들의 의사이자 친구인 그의 모습은 후세까지 전해졌다.) 이 시기 르누아르의 또 다른 후원자는 탁월한 작곡가로 잘 알려진 엠마뉘엘 샤브리에이다. 마네의 친구이자 특히 모네와 친했던 그는 동료인 피에르 외젠 레스트랭게의 소개로 르누아르를 알게 되었다. 피에르 외젠은 내무부 직원으로, 르누아르ㅡㅡ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위해 포즈를 잡아주기도 했다. 엠마뉘엘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더 수집하기 위해 르누아르로부터 주목할 만한 작품 몇 점을 사들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컬렉션은 그의 사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1878년: 인상파 화가들 인상파에게 호의적인 성향을 보이던 소수의 비평가들 중 가장 열렬한 르누아르의 후원자는 테오도르 뒤레였다. 정치가의 길을 단념할 만큼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집안의 코냑 사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살았다. 에밀 졸라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던 덕분에 그도 마네의 친구이자 비평가가 되었다. 그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처음 산 것은 1873년으로, 재력가 앙리 세르뉘시와 동행해 일본을 포함한 세계일주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가 산 '여름'은 1869년 살롱전에 선보인 작품이었다. 이 그림을 구매함으로써 뒤레는 르누아르의 초창기 후원자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인상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 1878년 팜플렛, 'fp 펭트르 앵프레시오니스트'(인상파 화가들)를 그가 썼는데, 그는 팜플렛의 삽화를 르누아르에게 맡겼다. 이 데생은 뒤레가 소장하고 있던 '리즈'를 본딴 것이다. 르누아르는 자기를 '인상파' 혹은 '비타협주의자들'의 일원으로 분류하는 것을 특별히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나는 순교자 역할을 맡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만일 살롱전에서 내 그림들이 낙선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림을 계속 출품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 해놓은 것들을 내가 하고 있을 뿐이라고, 나느 늘 그렇게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고 말했다. 1878년, 뒤레와 그의 새 후원자들, 특히 샤르팡티에 부부의 결려에 힘입어 르누아르는 살롱전으로 귀환했고, 또다시 자신을 글레르의 문하생이라고 조심스럽게 내세우며 '카페'란 작품을 출품했다. 1879년에는 세잔, 모리조, 시슬레와 달리 네점의 초상화를 살롱전에 보내고 제4회 인상파전에는 한 작품도 출품하지 않았다. 살롱전에 참가하는 사람은 인상파전에 출품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그에게 행운을 가져오는 동시에 이 화가의 경력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르누아르는 살롱전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에겐 잘된 일이죠. 그가 해낼 줄 알았어요. 가난이란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1879년 5월 27년, 카미유 피사로가 외젠 뮈러에게 보낸 서한 제3장 성공, 그리고 성숙 "가장 꾸준히 대기중인 화가" 르누아르가 1879년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 데는 특히 샤르팡티에 부인의 힘이 컸다. 그는 그녀의 초상화를 살롱전에 출품했다. 마르그리트 샤르팡티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도데, 졸라, 공쿠르 형제, 모파상,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작품들을 간행한 출판업자 조르주 샤르팡티에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부르주아 가문의 자손으로, 그녀의 부친은 제2제정이 몰락하기 전까지 왕실에 보석을 대주는 보석업자였다. 샤르팡티에 부인은 그르넬가의 자기 집에서 공화주의자만 엄선해 모임을 갖곤 했다. 그러나 모임의 주요 화제는 문학이어서 자신의 남편을 통해 책을 발간한 저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곤 했다. 고상한 성격의 모임이었지만 딱딱하진 않아서 단골 참석자들은 늘 재미를 느꼈다. 이 모임에서는 잔 사마리같은 당대의 여배우들을 부르기도 했고, 드가와 툴루즈 로트레크에 의해 불멸의 모습으로 남게 된 카페 공연 가수 이베트 길베르나 작곡가 쥘 마스네 같은 인사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아방가르드적 성향이라고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던 장 자크 에네에서부터, 이 집 여주인공의 여동생 이사벨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마네, 모네, 시슬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환영받았다. 특히 르누아르는 샤르팡티에 집안에 '대기중인 화가'가 되었다. 샤르팡티에 내외는 그들의 피보호자의 명성을 알리는 데 공헌했는데 방법은 서로 달랐다. 조르주는 1875년 인상파의 경매에서 처음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산 이후 곧 그에게 초상화며 장식화를 여러 점 청탁했고, 모네나 시슬레에게 그랬듯이 주저하지 않고 선금을 주었다. 마르그리트는 그녀가 여는 모임을 활용해 르누아르를 도와주었다. 르누아르는 1876년에 전시한 그녀의 첫 초상화(현재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를 비롯한 초상화 및 점과 그녀의 아이들, 1872년 살롱전에 선보인 대작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은 르누아르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가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유행하던 관례적인 초상화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이얼마나 파격적인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저널리스트로 샤르팡티에가 1879년에 창간한 잡지 '라 비 모데른'에서 일을 돕기도 했던 화가의 남동생 에드몽은, 젊은 부인과 아이들을 담은 이 그림이 "집안의 가구도 평소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어는 한 곳이 다른 부분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어떤 장치도 하지 않고" 그려졌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것은 흔히 가상의 배경 속에 모델을 두고 모델의 모습을 받쳐 주는 소도구를 썼던 당시의 일반적인 초상화 기법에 대단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초상화들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주제는 차치하고도 윤택함이 잘 표현된 그림 표면이 보는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윤기 나는 아이들의 살색과 머리, 옷감의 광택, 물건들의 질감, 이 모든 것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편, 좀 덜 묘사한 곳, 단순화한 색의 긴 때, 스케치로 간단히 끝낸 부분들에까지 화가의 눈이 가 있다. 이 그림은 샤르팡티에 부부와의 인연덕분에 살롱전에서 눈에 띄는 자리에 확보했지만, 이들 부부가 비평가들의 평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다. 비평가들은 작품에 대해선 존경을 표한 반면 탕자의 귀환에 대해서는 그들 특유의 환영사를 늘어놓았다. "이제 르누아르 씨와의 불화는 끝내기로 하자.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환을 환영하며, 그림의 구도는 무시하고 색상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로 하자." 진지한 '가제트 데 보자르'지에서 비평가 아르튀르 배니에르는 관대하게도 이렇게 주장했는데, 그는 전에 르누아르를 조롱했던 사람이다. 르누아르는 천부적인 컬러리스트인 동시에 대단한 데생가라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후원자 샤를 에프뤼시 '가제트'지가 르누아르에게 회의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발행인인 샤를 에프뤼시는 테오도르 뒤레를 통해 전부터 르누아르를 알고 있었다. 오데사 출신의 유태인 은행가 가문의 상속자인 그는 뒤러의 작품에 빠진 미술사가였다. 당대 예술의 첨단을 걷던 그는 드가와 모네를 옹호하며 그들의 그림을 사들이고, 자기 가문과 파리에서 빈, 베를린까지 연결된 작업상의 끈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구매자를 연결해 주었다. 그의 후원의 손길은 르누아르에게도 닿아, 르누아르는 그의 사무실을 통해 여러 건의 초상화를 청탁받았다.(르누아르는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공개하기 전에 에프뤼시에게 보여 주어도 좋겠느냐는 허락을 구했다.) 이때 그린 초상화 중에는 카앵네 딸들을 그린 '현대적인' 것도 있는데, 이것은 레옹 보나와 여타 화가들이 빠져 있던, 높이 평가되고 입증된 양식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사교계 화가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르누아르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편, 르누아르는 신교도 재력가들로 구성된 색다른 집안과 견고한 관계를 다졌다. 뒤레가 르누아르를 역시 에프뤼스와 연결되어 있던 또 다른 수집가 샤를 되동에게 소개했던 것 같다. 와르주몽 저택에 간 르누아르 왈레의 광산을 물려받았던 샤를 되동은 1878년에 '무희'를 구입했다. 그는 훗날 르누아르의 주요 후원자의 한 사람이 될 폴 베라르의 친구였다. 든든한 생계 수단이 있었던 베라르는 외교관 시절의 습관대로 디에프 근처의 영지와 파리를 오가며 살았다. 1890년대 초 르누아르는 여러 차례 와르제몽 저택에 가 환대를 받았다. 베라르가 그의 그림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폴 베라르를 위해 르누아르는 가족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려주었다. 멋진 정원과 가금들이 있는 18세기식 시골저택의 출입문과 벽난로 주변에도 흔쾌히 장식화를 그려주었다. 두 사람은 편지 왕래도 자주 했다. 르누아르는 자기 고민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럴 때마다 베라르는 그의 그림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고 미안해하고 했다. 이들 후원자 외에도 미술상 뒤랑 뤼엘이 르누아르를 도와 주었다. 뒤랑 뤼엘은 1881년부터 정기적으로 그의 그림을 샀다. 좀처럼 드물게 졍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르누아르는 구매자와 맺은 계약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작업계획-살롱전에 낼 만한 대형 포맷의 그림들-을 추진하는 동시에 여행까지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노르망디 해안에서 근 1880년 살롱전에 선보이게 될 '베르느발의 조개잡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사회의 참상을 파헤칠 의도는 없었다하더라도 이 대형 작품은 그 주제로 볼 때 리얼리즘 경향을 띠고 있다. "그림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어촌 여인과 아이들에 대한 서정적, 낭만적 묘사는 당시 공식 집단들에서 중시하던 토속적 정조를 떵르게 한다. 그러나 그가 역점을 둔 것은 강렬한 색채와 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밝고 가벼운 공간이었다. 뱃놀이 일행의 매력 1879년경 르누아르는 노장쉬르마른, 아스니에르, 샤투 같은 센 강변으로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라 그르누예르의 풍경을 더올리며, 그는 보트를 타고 강에 들어간 사내들과 그들의 일행을 확폭에 담았다. 밝은 청색과 오렌지색으로 가득한 이 여름날의 장면은 '뱃놀이 일행의 오찬'(1880-1881)에서 정점을 이루게 될 양식상의 발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81년 2월에 뒤랑 뤼엘에게 팔린 '뱃놀이 일새이의 오찬'은 1880년 여름에 그리기 시작한 것 같다. 르누아르는 배를 타러 온 이들이 샤투의 시아르섬에 있는, 모파상이 '폴의 연인'에서 묘사한 적이 있는 명소 푸르네즈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르누아르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식당 주인 알퐁스 푸르네즈와 그의 가족 초상화도 몇 점 그렸다. 폴 베라르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르누아르는 이렇게 썼다. "저는 지금 샤투에 있습니다....... 그리고 노 젓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어요.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죠. 저도 이젠 조금씩 늙어가, 더 이상 미루고 싶지는 않아요. 더 늦으면 그릴 여력이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되동에게 고민을 털어놨죠. 그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림을 완성하는 게 어려Q다 하더라도 제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진하는 길밖에 없죠. 사람은 이따금 자기 능력 이상의 시도를 해봐야 하니가요." 그가 베라르에게 설명한 것처럼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 가엾은 그림에 상처를 내야 했습니다. 한 상류층 부인이 찾아와서 그림의 포즈를 취해 주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 일에 두 주일을 소비했습니다만, 결론은 오늘 그녀의 모습을 닦아내 버려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이 작업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혼란만 커지고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양식 이 작품의 습작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작품을 자세히 뜯어보면 미세하게 수정한 부분이 무수히 많다. 결국 작업중에 인물들의 포즈를 바꾸기도 하고 색상의 명암도 조정하기도 하면서 그림을 대폭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뱃놀이 일행의 오찬'은 크기가 '물랭 드 라 갈레트'와 거의 맞먹는다. 따라서 두 작품이 야외의 군중이라는 주제면에서는 유사하지만, 불과 5년 사이에 형식면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좀더 부각된다. '뱃놀이 일행의 오찬'은 원경을 단순화하고 특히 각 인물의 특징을 분명히 하기 위해 색상대조법을 구사해 색상이 보다 밝고, 구도도 좀더 자신감이 느껴진다. 르누아르가 윤곽선을 분명하게 그리려 애쓴 것은 비평가들이 인상파는 물체를 흐릿하게 대강대강 그리고 만다며 싸잡아 공격하는 데 대한 대응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상화를 많이 그린 탓에 인물의 개성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881년 살롱전에서 르누아르를 대변한 것은 이 대작이 아니라 두 점의 초상화(어떤 그림인지 분명하지 않다)였다. 마침 여행을 더나려던 르누아르가 에프뤼시에게 출품작을 선정해 달라고 맡겼던 것이다. 모네와 시슬레처럼 그도 이번 인상파전에 참가할 마음이 없었다. 이같은 결정은 순전히 상업상의 고려 때문이라고 그는 뒤랑 뤼엘에게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살롱전에 그림을 내걸지 못한 화가의 진가를 알아보는 수집가가 파리에 열다섯 명이 될가 말까 합니다."라고 썼다. 북아프리카의 햇살 첫 해외여행지는 알제리였다. 겨우내 매달려 카앵네 딸들의 2인 초상화를 끝내고 지쳐 있던 르누아르는 1881년 2월 말, 그가 좋아했던 들라크루아가 그랬듯이 태양과 이국 정서를 찾아 파리를 떠났다. 그가 이 나라를 좋아했다는 것은 친구들과 후언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입증되고 있다. 알제 외곽에 머물던 그는 그곳에서 그림 같은 모티프들과, "선인장과 알로에를 섞어놓은 듯한" 놀라운 식물을 발견했다. 이 식물은 '알제리 풍경: 야생녀의 골짜기'의 주제가 되었다. '야생녀의 골짜기'란 알제 외곽, 르누아르가 작업하던 곳에 있는 카페식 레스토랑의 이름이었다. 그림에 나타난 짙은 군청색과 대조를 이루는 그림자들이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수만큼 인물을 그릴 수 없어 실망했다. 마지막 순간에 모델들이 뒷걸음쳐버리곤 했던 것이다. 1882년 봄, 두 번째 방문 때에야 겨우 몇몇 인물을 그릴 수 있었다. 그해 여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노르망디 해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의 에밀 블랑슈 부인의 집에서 베라르의 집에서 받았던 환대와는 정반대의 대접을 받았다. 그녀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아내로, 화가인 아들 자크 에밀 블랑슈와 함께 작업을 해 달라며 르누아르를 디에프로 초청했는데, 경직되고 내성적인 집안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그가 거친 태도로 신경질을 부리자 그들이 그를 푸대접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 1881년 10월 말, 르누아르는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이탈리아였다. "나는 라파엘의 작품을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갑작스레 여행객이 되었습니다....... 북부는 다 봤고, 이제 장화(이탈리아 반도) 아래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11월 1일 그는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향했다. 아마 파두아와 피렌체를 거쳐갔던 것 같다. 로마에서 라파엘의 프레스코화를 본 그는 이렇게 경탄했다. "이 그림에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다." 11월 말부터는 나폴리에 머물며 미술관들을 순례했는데, 특히 폼페이 그림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그는 카프리에서 새해를 맞았다. 그곳에 머물던 중 마네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마네가 공인받은 첫 증표-수훈자로 지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축하의 뜻을 전했다. 르누아르처럼 리하르트 바그너를 존경하던 파리의 친구들이 그를 팔레르모로 보냈다. 바그너가 '파르지팔'을 작곡하고 있던 곳이다. 그 거장은 마침내 1882년 1월 14일 면담을 허락, 이튿날 35분간 대좌했다. 르누아르는 이 역사적인 만남을 익살맞게 평하고(134-137페이지), '청교도 목사' 같은 초상화를 한 점 남겼는데, 바그너의 실제 모습이 그랬다. 르누아르와 세잔 그로부터 얼마 후 르누아르는 나폴리와 마르세유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레스타크에 안착해 세잔 곁에서 작업했다. 이 두 사람만큼 개성이 다른 짝도 상상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자연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라고 설파하는 중에도 언제나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연구하고 모사하며 루브르 박물관을 '좋은 참고서적'으로 생각했던 세잔과, '라파엘을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던' 르누아르 사이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분명히 세잔의 영향을 받은 르누아르는 작품의 구도에 좀더 관심을 갖는 동시에 단순화 기법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본 불후의 명작들에서 이미 암시받았던 방향이다. 세잔과 있는 동안 르누아르는폐렴으로 심하게 앓았다. 의사는 그에게 알제리에서 요양을 하라고 권했다. 그는 3월과 4월을 거의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 와중에도 그림을 그렸다. 이탈리아의 교훈 1882년 르누아르는 제7회 인상파전에 불참하고 초상화 한 점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그러나 인상파전을 주최한 뒤랑 뤼엘 자신의 수집품 가운데 '뱃놀이 일행의 오찬'을 포함한 그의 그림 25점을 그 전시회에 빌려주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노르망디에서 여름을 보냈다. 거기서 베라르 가족과 블랑슈 가족을 만났으며, 프르빌에서 작업중이던 모네를 뒤랑 뤼엘과 함께 만났다. 그가 카프리로 가는 배의 태양 아래서 그렸다고 하는 '목욕하는 여인'을 본 친구들은 그의 기법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모델을 밝히지 않았지만, 훗날 젊은 여인 알린 샤리고가 그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고, 베르트 모리조의 딸인 줄리 마네에게 고백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진상을 밝히지 않고 두 사람의 관계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수년 동안 조심스럽게 숨겨두었다. '목욕하는 여인'과 1876년 제2회 인상파전에 선보였던 '햇빛 속의 누드'를 비교해 보면 이 화가가 거쳐온 노정이 드러난다. 얼룩덜룩한 빛이 형태를 분산시키는 가운데 앉아 있는 흐릿한 인물 대신에 이 누드는 윤곽선이 분명한 데서 오는 풍부하고 당당한 자태가 있다. 이같은 전환은 대단히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배나 나폴리항 풍경은 전혀 볼 수 없고 흐릿한 풍경 속에 고전적인 테마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1882년에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화가가 언급한 바 있는 목표, '고인의 저 장엄함과 단순함'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도회 관련작들 이탈리아 여행 후 르누아르는 세 점의 대형작을 그리기 시작해 1883년 봄에 마무리지었는데, '부지발의 무도회' 및 한 쌍의 그림인 '도시의 무도회'와 '시골의 무도회'가 그것이다. 이 그림들은 주제와 양식면에서 '뱃놀이 일행의 오찬'과 연관이 있다. '부지발의 무도회'와 '도시의 무도회'에서 르누아르는 마리 클레망틴 발라동이란 젊은 모델을 썼다. 드가의 격려에 힘입어 훗날 자신도 화가가 된 그녀는 수잔 발라동이란 이름을 썼다. 1883년 12월 그녀는 모리스 위트리요란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르누아르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시골의 무도회'에서 르누아르의 친구인 폴로트의 팔에 안긴 무희는 알린 샤리고인 듯하다. 한 쌍인 이 두 작품은 위랑 뤼엘이 1883년 4월에 라미들렌가의 한 공간을 빌려 개최한 르누아르의 첫 개인전에 전시되었다. 뒤랑 뤼엘은 부댕, 모네, 피사로, 시를레 같은 '자신의' 화가들에게 연속해서 개인전을 열어준다는 새로운 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지발의 무도회' 역시 뒤랑 뤼엘의 주선으로, 르누아르의 작품 열 점에 끼여 런던의 한 화랑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르누아르의 런던 데뷔전은 아니었다. 각지의 시장을 치밀하게 탐사한 뒤랑 뤼엘은 같은 해 보스턴과 베를린에서도 르누아르전을 열었다. 저지섬, 건지섬, 그리고 코트다쥐르 1883년 르누아르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는 저지섬과 건지섬을 옮겨 다니며 한 달간 채널 제도에 머물렀다. 뒤랑 뤼엘에게 말한 것처럼, "파리에서 쓸 그림과 자료들을 ...... 내가 이용할 진짜 우아한 모티프의 원천을" 수집하면서. 그해 말 그는 모네와 함께 코트다쥐르로 갔다. 두 사람은 마르세유에서 몬테카를로까지 멀리 돌아다녔다. 여행은 두 주일밖에 안 걸렸지만 그런 중에도 두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가 자신을 지칭하여 부른 '인물화가'는 행복한 마음으로 '아득한 수평선과 더없이 아름다운 색조의 멋진 풍경들을' 스케치했다. ",,,,,, 불행하게도 우리의 빈약한 팔레트가 당해 내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적갈색 색조의 아름다운 바다는 캔버스에서 우중충한 바다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이 그 다음 방문한 이는 프랑스 남부에 칩거하던 세잔이었다. 극립 미술학교에서 열리는 마네 추모전도 보고 그의 성공을 축하해 주기 위해, 르누아르는 때맞춰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네의 화실에서 열린 판매전에서 "가버린 친구의 기념작 하나 선뜻 못 사는 자신의 처지"에 아쉬움을 맛보아야 했다. 가족을 갖게 된 르누아르 이 무렵 르누아르는 생조르주가의 아파느를 떠나 몽마르트로와 좀더 가까운 곳으로 갔다. 그의 화실은 라발가(오늘날의 빅토르마세가) 37번지에 있었다. 1885년 3월 21일. 우동가 18번지에서 알린 샤리고가 첫아들 피에르를 출산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아기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나이 44세에 일어난 이같은 생활의 변화는 1887년 봄에 선보인 대형작 '목욕하는 여인들'로 대표되는 의문의 시대 및 양식상의 변화의 시대와 일치하고 있다. "1883년 무렵, 내 작품에 내재하던 흠이 불거져 나왔다. 나는 인상주의와 더불어 한계에 다다랐고, 나 자신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데생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간단히 말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던 것이다." 르누아르가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르누아르', 1920년 제4장 앵그르풍 시대 라파엘이냐 앵그르냐? 르누아르의 앵그르풍 시대, 혹은 건조한 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시절은 1887년 대작 '목욕하는 여인들'의 전시로 절정에 달했다. 그 기원은 1880년대 초 인상파가 새로운 작룸 세계를 모색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작품 양식에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고, 이탈리아 여행은 그러한 변화를 강화시켰을 뿐이다. 그의 편지, 특히 1883년 이후의 편지에서 그는 그림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러 그림을 폐기하는 한편 단호하게 자기만의 탐색을 계속해 나아갔다. 그는 이론적인 측면에 관한 의문도 품고 있었다. 1884년 그는 규칙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가 모든 타락상의 원인아라고 하는 자신의 오랜 믿음에 토대를 둔 반규칙주의자 모임이라는 새로운 화가협회를 만들려고 했다. 또한 '미술의 근본원리 요강'도 펴내려 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는 현대적인 교수법이 스승의 화실에서 도제로 일하며 기술을 익히는 옛 관행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스스로 이런 부족함을 느낀 그는 과거에 도공으로 일하며 얼핏 배운 그것, 훌륭한 그림 '장인'이 되고 싶다고 되풀이해 피력하곤 했다. 가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는 사실 진보적인 집단들과 복고적인 집단들이 공존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연결돼 있는데, 그로서는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 외에 달리 조리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와르주몽 아이들의 오후' 르누아르의 새 지평이 잘 드러난 가장 초기작은 1884년에 폴 베라르네 딸들을 그린 '와르주몽 아이들의 오후'란 초상화이다. 이 작품의 포맷은 '뱃놀이 일행의 오찬'과 같고 '샤르팡티에 부인과 이이들'에 비해서 약간 작을 뿐이어서, 이 작품에 깃들인 야심이 어는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떨어져 앉은 인물들의 뚜렷한 윤곽에 눈길이 갔다가 색상의 수는 적지만 차가운 느낌을 주는 밝은 색조들로 옮겨간다. 인물들과 똑같이 비중을 둔 소도구들 역시 퍽 단순화되어 있다. 빛은 강하면서도 고르다. 작품에 나타난 단순하고도 장식적인 균형감은 그가 닥치는 대로 답사하면서 발견했던, 고대 폼페이의 프레스코화에서부터 라파엘과 티에폴로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저 위대한 벽화 전통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르누아르가 견고하고도 확실한 윤곽선에 새롭게 관심을 가진 것은 루브르에 소장된 앵그를의 그림들, 그가 늘 존경해 왔던 작품들의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목욕하는 여인들' 르누아르는 누드화를 통해 자신의 실험을 해나갔다. 그 무렵 그는 누드가 "예술의 필요불가결한 형식의 하나"라고 쥘리 마네에게 단언했다. 1885년경 그는 '목욕하는 여인들'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의 대형작에 쓰인 데생화며 습작들이 모두 온전히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그가 이전보다 화실작업을 중시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베르사유 공원풀에 장식된 프랑수아 지라르동의 '목욕하는 님프들'이란 얕은 양각의 부조에서 구도를 따왔다. 루브르에 소장된 프랑수아 부셰의 '목욕하는 다이아나'의 분위기도 느겨진다. '화가는 자기 시대에 준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고 르누아르는 말했다. 이 작품은 앵그르에 경도된 면도 보인다. 유약을 칠해 공들여 마무리한 매끈매끈한 표면에서 앵그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앞서 10년 동안 그가 추구했던 표면 효과와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목욕하는 여인들'은 역사적, 혹은 지리적인 맥락과는 완전히 단절된 이상적인 미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지금것 자기 작품의 기초로 삼은 자연주의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장식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그가 중시하던 예술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작품에 붙인 '장식화 시험작'이란 부제에서 드러난다. 이런 부제를 단 것은 (실험작임을 명시해) 비평계를 입막음해 보려는 방편이었다고 볼 수도 있고, 기념비적인 장식화를 맡아 달라는 임무를 상으로 받고 싶은, 모든 화가들이 꿈꾸는 공식상의 횡재를 노렸던 것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목욕하는 여인들'의 앵그르풍 선과 도자기 같은 색조는 보다 보수적인 집단들로부터 새로운 개종자란 평도 얻어내지 못한 채 그의 후원자들만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뒤랑 뤼엘은 그에게 새 길에서 돌아서라고 종용했다. 프랑스의 주요 은행인 위니옹 제네랄의 도산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그는 파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모네나 피사로처럼 르누아르도 여전히 뒤랑 뤼엘에게 의리를 지켰지만, 한편으론 1866년 초에 열린 국제 그림 및 조각전에 참가함으로써 뒤랑 뤼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한 화가 위원회가 주최한 이 전시회는 수년간 뒤랑 뤼엘의 라이벌이였던 조르주 프티의 화랑들에서 열리고 있었다. 1887년 '목욕하는 여인들'이 대중 앞에 처음 선보인 곳도 이 전시회장이었다. 시골에서 보낸 여름 르누아르는 여름이 되면 새로운 모티프를 찾아나섰다. 1885년과 1886년, 그는 모네가 살고 dTejs 파리 서북쪽 지베르니 근처로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그는 다시 세잔과 조우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브르타뉴 북부 관광'에 나섰고 라샤펠생브리아크에서 작업하며 꽤 오래 머물렀다. 1888년과 1889년(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르누아르는 엑상프로방스에 있던 세잔을 몇 차례 방문해 집주인의 화풍에 따라 생빅투아르산을 그리면서 '흐린 날엔 칙칙하게, 햇살 좋은 날엔 생기 넘치게, 바람 부는 날에 은백색으로, 날씨에 따라 변하는 올리브나무의 건조함'을 되살려냈다. 에수아예: 전원에서 작업하면서 좀더 유연한 양식으로 되돌아오다1885년 가을 르누아르는 처음으로 에수아예를 방문했다. 파리 동남쪽 오브에 자리한 이 마을은 알린 샤리고가 태어난 곳이었다. 여러 차례 이곳을 찾은 그는 마침내 이곳에 집을 한 채 장만했다. "손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따라서 다른 것보다 뒤처지기 쉬운 물건을 좋아했던" 이 보헤미안도 가장 된 후 결국 집주인이 되고 말았다. 근 소박한 주위 환경을 즐기면서 감탄했다. 화실까지 꾸민 에수아예의 이 집은 영원히 그의 일부가 되었다. 에수아예에서 작업하는 동안 르누아르는 선과 색상을 통틀어 좀더 유연한 양식으로 돌아갔다. 1888년 10월 피사로는 아들 위시앵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랜 시간 르누아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뒤랑과 옛 후원자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낭만적 시대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을 개탄하면서 불평했다고 내게 고백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르누아르는 '파리의 값비싼 모델들에게서 벗어나 이곳 전원에 살면서 강둑에 앉아 세탁부들, 아니 빨래하는 여인들을 그린다.'는 목표하에 에수아예에 정착했다. 그는 뒤랑 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잘된 것 같습니다. 대단히 부드럽고 채색이 되어 있으면서도 뚜렷합니다.' 인상주의의 종말? 르누아르는 제8회인 동시에 마지막이 된 1886년 인상파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전시회에는 초창기 멤버로는 피사로와 드가를 비롯해 몇 안 되는 화가들만 참여했고, 비평계의 주목을 끌었던 이들은 고갱이나 쇠라 같은 대체로 젊은 화가들이었다. 1884년 인상파 화가들은 모네의 제안으로 카페 리셰 식당에서 매달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초창기 화가와 후원자의 이 모임은 친목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1886년경 르누아르는 베르트 모리조가 파리 빌쥐스트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개최한 사설 야회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해 여름 그는 그녀의 초대를 받고 파리 서쪽 망트 근처의 작은 마을인 메지를 방문했다. 르누아르는 1894년에 쥘리 마네와 그녀의 어머니를 그린 것을 비롯해 쥘리 마네의 초상화를 몇 점 그렸다. 베르트 모리조는 르누아르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서로 소개해 주었다. 르누아르는 이 시인의 초상화도 그려주었고, 1891년에 발행된 '파주'란 책의 권두화도 그려주었다. 말라르메는 르누아르에게 시를 바쳤다. 클리시가 근처, 예술의 별장 르누아르 선생이 그림을 그린다 푸른 안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벗은 어깨를 앞에 하고. "저는 옛 그림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드럽고 경쾌하고 영원한......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18세기의 그림 양식을 따른 것입니다....... 프라고나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르누아르가 뒤랑 뤼엘에게, 1888년경 제5장 공식적인 인정 "이상주의자? 자연주의자? 뭐라 해도 좋다...... 그는 여인과 꽃으로 만든 멋진 부케를 창조해 냈다" 1890년대 초 르누아르는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이나,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잡담하고 꽃을 꺾는 도회풍의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이 그림들에는 19세기 말의 흔적들(피아노, 모자, 굴렁쇠놀이 등)이 뚜렷이 나타나지만, 르누아르는 자신의 인물들을 자연주의적 세부 묘사로 짓누를 생각이 없었다. 그림에 보이는 전원적인 분위기며 평온한 조화감은 코로의 목가적인 전원풍경과 18세기 프랑스 화단의 '전원의 축제'로 불렸던 저 유명한 야외 여흥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르누아르도 이 축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전통과 관련한 이러한 언급들을 남은 여생 동안 거듭해서 표명한다. 이 테마들을 다루면서 르누아르는 '건조한' 시대에서 빠져 나와 자기가 그리는 이상 세계에 더 적합하다고 느낀, 보다 유연하고 때로는 벨벳 같은 그림 표면으로 돌아온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테마인 누드를 계속 그렸다. 1892년 나비파 화가이자 이론가인 모리스 드니는 르누아르 그림의 이 새로운 정신을 정확하게 요약했다. "이상주의자? 자연주의자? 뭐가 해도 좋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든 자연과 환영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에 비친 즐거움을 매개로, 그는 여인과 꽃으로 만든 멋진 부케를 창조해 냈다." 새로운 비평가, 새로운 후원자 1870년생으로, 화가로 첫발을 내디딘 모리스 드니의 이같은 찬사는 르누아르의 작품세계가상징주의 그룹의 젊은 세대 화가들 및 비평가들과 퇘폐주의 그룹들을 계속해서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르누아르를 평한 비평가 중에는 반 고흐의 진가를 처음 알아본 사람 중 하나인 알베르 오리에가 있었고, 소설가로느 오리에처럼 상징주의 그룹과 가까웠던 테오도르 드 위제와와 옥타브 미르보가 있었다. 또 '르뷔 블랑슈'의 창간자 중 한 사람인 타데 나탕송도 그중 하나였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새로운 후원자도 끌어들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다른 인상파 화가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의 치과의사인 조르주 비오, 루앙 출신 사업가이면서 '여름', '부지발의 무도회'를 소장하고 있던 프랑수아 드포가 그들이다. 드포는 1906년에 자신의 소장품들을 팔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렵사리 일군의 인상파 그림들을 루앙의 보자르 미술관에 남길 수 있었다. 수집가 중 르누아르와 가장 가까운 이는 폴 갈리마르였다. 옥타브 미르보는 1900년에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근 서적과 그림, 그리고 소득을 수집했다." 1889년에 뒤랑 뤼엘 화랑에서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산 갈라마르는 곧 이 화가와 친구가 되었고, 1892년에는 마드리드 여행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근 (노르망디의) 베네르빌에 있는 자신의 가문 영지로 르누아르를 초대해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여러 점 청탁했다. 장식작업 계획도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한 건도 실현되지 못했다. 안개의 성 1889년 말 르누아르와 그의 가족은 몽마르트르의 지라르동가 13번지, 정원으로 둘러싸이고 안개의 성이란 시적인 이름을 가진 집으로 이사했다. 1890년 4월 14일, 그는 9번 구의 구청에서 알린 샤리고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 피에를 호적에 올렸다. 프랑크 라미, 로테, 레스트랭게, 이탈리아 화가인 페데리코 잔도메네기 같은 오랜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주었다. 결혼을 하고도 르누아르는 자신의 삶에서 알린이 미치는역할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순수 부르주아 출신인 베르트 모리조에겐 이것이 흥밋거리였다. 특히 1894년 9월 15일에 둘째 아들 장(장차 영화업자가 된다)이 출생하면서, 가족은 그의 그림 세계의 포커스가 되었다. 뒤랑 뤼엘 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 조르주도 장의 대부가 되어주었고, 의사의 딸인 잔 보도가 대모가 되었다. 르누아르의 제자였던 잔 보도는 훗날 이 화가의 회고록을 저술했다. 이 무렵 르누아르 부인의 사촌인 가브리엘 르나르가 이 집에 화 살며 장도 돌보고 집안일도 거들고 있었다. 그녀는 1914년 결혼할 때까지 르누아르의 주 모델이 되었다. 1901년 8월 4일에는 셋째 아들 클로드가 에수아예에서 태어났다. 그들 가족은 주로 에수아예에 머물렀지만 르누아르는 여름이 되면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나 노르망디로 가서 그림 작업을 계속했다. 쥘리 마네는 르누아르 가족과 여러 차례 함께 지냈다. 르누아르는 나이보다 일찍 늙어갔다. 얼굴 일부에 경련이 일고 팔다리는 벌써 류머티즘 초기 단계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 지병은 앞으로 더욱 악화된다. 미술관에 입성한 르누아르의 작품들 1890년대에 르누아르는 공식적인 이니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초기 인상파 시절처럼 격한 배척은 당하지 않았다. 1891년말, 혹은 1892년 초 말라르메와 보자르 학교 행정관이던 비평가 클로드 로제 막스는 국가 명의로 르누아르의 그림을 사들이라고 교장인 앙리 루종을 설득했다. 정부측에서 이 화가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프랑스 미술 백년전 때도 로제 막스는 전시작으로 르누아르의 작품을 선정했다. 그 당시 이 화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작품은 모두 끔찍해요. 이런 게 전시된다면 난 몹시 불쾌할 겁니다." 그후 1890년에 르누아르의 친구들은 나라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그 당시 모네는 카유보트에게 이렇게 썼다. "그에게 축하를 보내네. 훈장을 받았더라도 물론 그에게 도움이 됐겠지. 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도 성공해야 하고 또 그런 게 훨씬 더 떳떳하지." 르누아르는 정부의 비공식적인 청탁에는 응해서, '피아노 앞의 소녀들'의 유화 변형작 5점에다 파스텔화 1점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1892년 5월 2일 4000프랑에 매매되었다. 초창기 인상파 멤버 중 국가가 그림을 매입한 생존 화가로는 그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시슬레였다. 사실 1890년 마네의 '올랭피아'를 국가에 기증할 때만 해도, 마네의 미망인에게 그 그림을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돈을 기부했던 사람들의 리더격이었던 모네는 나라에서 이 그림을 받아들이도록 추진하는 데 갖은 고생을 다했다. 모네는 그때 르누아르에게도 기부를 하라고 요청했다. 르누아르는 처음에는 돈이 없다고 변명했지만 결국 적은 금액을 내놓았다. 카유보트의 유증 1894년 2월에 사망한 카유보트는 세잔, 드가,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같은 친구들의 그림과 장 프랑수아 밀레의 데생 두점 등 자신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 일을 계기로 대중들은 인상파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르누아르에게는 두 가지 자격이 주어졌다. 먼저 '물랭 드 라 갈레느' '그네' '햇빛 속의 누드'를 포함한 자신의 그림 8점이 그 컬렉션에 들어 있었다는 점에서 화가로, 또 하나의 유증 집행자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1876년에 작성한 유언장에 카유봍는 자신의 그림들이 "창고나 지방 미술관이 아닌 뤽상부르(당시에는 국립 현대 미술관)에 안치해야 하며, 훗날 루브르로 옮겨야 한다."고 명시했다. 카유보트도 예견했던 대로, 정부는 60점이 넘는 컬렉션 모두를 다 전시할 의사가 없었다. 언론에서 찬반 양론이 쏟아지면서 상당한 공방전(르누아르는 금방 지쳐버렸다)이 벌어진 후, 마침내 1896년 대중 앞에 전시될 작품 40점이 선정되었다. 정부측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는데도 결국 인상주의는 철옹성 같은 이 미술관에 입성했던 것이다. 르누아르는 카유보트의 유증으로 뜻밖의 혜택을 얻었다. 카유보트는 집행자로 일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켈렉션 중 한 점을 가져도 좋다고 유언장에 명기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 상속자들은 훌륭한 것을 가져야 한다." 르누아르는 드가의 파스텔화 '댄스 교습'을 택했다. 얼마 후 돈이 궁했던 그는 이 그림을 뒤랑 뤼엘에게 팔아버렸다. 이 사실을 안 드가는 이후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훈장을 받도록 해보겠다" 1900년 8월 르누아르는 클로드 모네에게 "내가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해왔는지 모르지만 난 자네의 우정을 믿네."라고 썼다.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옛 친구인 폴 베라르가 훈장을 전해 주러 왔다. 쥘 레나르는 르누아르의 반응을이렇게 전했다. "오, 이런! 그래, 코를 낮춰 저 붉은 (리본을)보게나, 똑똑히! 이젠 고개을 들게." 이 영광은 파리 세계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프랑스 미술백년전에 르누아르의 작품 11점이 전시된 데 이어 찾아온 것이었다. 여전히 정부를 불신하던 르누아르는 처음엔 모네와 파사로처럼 이 미전에 참가하기를 거부했지만,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인 로제 막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르누아르가 1890년 춘계 살롱전에 마지막으로 참가하면서 출품한 작품은 '카튈 망데의 따들'(1888)이었다. 그는 이제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시험대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근 같은 해 프랑스 화단의 반대 분파가 주최한 전시회에도 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과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이소니에를 필두로 하는 이 분파는 '국립 보자르파 미전'이란 전시회를 새롭게 창설했던 것이다. 그가 택한 것은 브뤼셀의 XX같은 전위적이랄 수 있는 집단들이었는데, 그는 1890년 이들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주최자인 옥타브 모가 소라와 그의 추종자들을 편애하는 데 공감하지는 않았다. 르누아르는 XX파의 계승 집단인 자유 미학파 1894년과 1904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한편으로 1904년, 1905년, 1906년과 1912년 추계 살롱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대개 사설 화랑에 전시했다. "메디치가의 몰락 이후로...... 그들에 대해 누가 뭐라든, 그 미술상들은 좋은 점이 많다" "만일 그 수집가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 자기가 그 수집가를 쫓아다녀야 했다면 이 불쌍한 화가는 굶어죽었을 것이다." 미술상에게 바치는 찬사문에서 르누아르는 '오랜 친구'인 뒤랑 뤼엘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뒤랑 뤼엘이 이 화가의 작품제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후원뿐 아니라 요구까지 하면서-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늘 습작 수준이 아닌 완결된 작품을 요구해 왔다고 르누아르 자신이 인정했다. 폴 뒤랑 뤼엘은 아들의 도움을 받아 1891년, 1892년(주요 작품 110점 회고전), 1896년, 1902년, 1908년(뒤랑 뤼엘이 1886년 이후로 활동해온 자신의 뉴욕 화랑에서)에 르누아르 개인전을 주선했다. 또한 그룹전도 주최했다. 1900년의 뉴욕전과 1905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연 그룹전이 특히 주목받은 행사였다. 런던전에서는 많은 명작들이 전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뒤랑 뤼엘과 더불어 다른 두 미술상도 르누아르와 지속적인 유대를 다져오고 있었다. 앙브루아즈 볼라르와 베르냉 죈 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볼라르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상의 기초를 닦은 후 파리 미술시장의 요충지인 라피트가에 자신의 가게를 냈다. 그는 당시 무명이던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을 전시해 주는 한편, 1895년 세잔의 첫 개인전도 열었다. 친구의 최근작들을 구경하러 갔던 르누아르는 세잔의 작품들에서 '그토록 세련되지 못하면서도 아주 놀라운, 폼페이 미술과의 설명하기 힘이든 근접성'을 발견했다. 마네의 미망인, 모네, 드가, 피사로처럼 르누아르도 처음에는 볼라르에게 중요도가 낮은 작품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점차 이 젊은 미술상을 알게 되면서 그는 보다 대중성 있는 광맥을 발굴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먼저 낀 진열장과 벽을 보고 돌아앉은 그림 무더기들로 유명했던 볼라르의 가게는 전설적인 화랑이 되었다.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의 고객들이 몰려와 르누아르의 작품을 높은 가격으로 사가기 시작한 것이다. 볼라르가 르누아르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르누아르는 이따금 가슴을 졸였다. 비록 다소 양념이 가미되어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글들은 이 화가에 관한 가장 생생한 자료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한편 르누아르는 볼라르와 함께 카탈로그를 만드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실험(그뒤로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에 동의하기도 했고, 생전에 일종의 화집 자료를 출판하려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볼라르의 성화에 못이겨 석판화와 조각에 손을 대기도 했다. 베르냉 죈 형제 1890년대 초, 조스와 가스통 베르냉 죈 형제는 부친이 세운 화랑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인상파와 그들을 따르는 화가들에게 점차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해 주었다. 이들 형제와 르누아르 간의 상업적인 관계는 1900년에 르누아르전을 주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어 1901년과 1910년에 이 화가가 그들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르누아르의 사망이 그들 관계가 깨진 원인이었을 뿐이다. 이 형제의 고객 중에는 르누아르에게 특히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둘 있었다. 베르냉 죈 형제의 고객들 머저, 모리스 강냐는 엔지니어였다. 그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처음 구입한 것은 1905년 베라르의 판매장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마르를 통해 이 화가를 알게 된 그는 르누아르의 몇 안 되는 절친한 친구 중 하나가 되었고, 2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50점이 넘는 작품을 샀다. 이 그림들은 그의 사후 대중 경매장에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두 번째 인물은 와그랑의 왕자인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였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직업군인이 되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를 '인상파 그림을 수집하는 젊은 왕자이자 운전수'라고 묘사했다. 1차 세계대전 최후의 격전지에서 요절하기 전까지 이 젊은이는 두 가지 열정을 추구하느라 상속받은 유산을 많이 축냈다. 그것은 자동차 수집-차에 깔려 죽은 개의 주인이 소송을 걸면 보상금을 물어줘 가면서가지 차 수빕을 즐겼다-과 그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드는 취미인 인상파 그림 수집이었다. 1905년 그는 광란의 구매 잔치에 돌입해 파란 시내의 모든 미술상을 순회하며 거액의 돈을 뿌렸다. 얼마 안 가,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처음에는 베르냉 화랑과 제휴했지만, 나중에는 이 화랑을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고소가 기각되면서 화랑이 이익을 보았다. 1908년 그는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의 컬렉션을 내다팔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대단히 중요한 르누아르의 작품들도 다수 들어 있었다. 뒤랑 뤼엘이나 볼라르, 베르냉 죈과 국적도 다양한 그들의 고객들 덕분에 르누아르는 1900년 이전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비록 초창기 시절의 후원자며 친구들을 하나둘씩 잃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작품들이 분산되면서 오히려 상업적 가치는 더 높아져, 드가나 모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다. 외국의 미술관에서도 관심을 보았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1907년에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의 초상'을 입수했고, 베를린 국립화랑에서는 1906년에 '와르주몽 아이들의 오후'를 사들였다. 늙어가는 르누아르 이제 르누아르도 안락하게 살 만한 돈이 생겼지만 그의 취미는 여전히 소박해서 금욕에 가가울 정도의 생활을 유지했다. 겨울이면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 남부로 떠난 그라스 부근의 마가뇨스에 머무르곤 했다. 1898년 니스 근처에서 카녜쉬르메르란 마을을 발견한 그는 그곳의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경치, 악화되고 있는 자신의 건강을 고려해 1907년 레콜레트란 이름의 사유지를 사들였다. 그는 그 땅에 집을 한 채 지었는데, 이 집이 앞으로 그의 주 거주지가 될 곳이었다. "이제 더 이상 팔다리에 의존할 수 없게 되고 보니, 대형작을 그리고 싶네. 나는 베로네세의 꿈만 꾼다네, 그의 '카나에서의 결혼식'만 말일세. 그 얼마나 비참한지!" 르누아르가 알베르 앙드레에게, 1919년 제6장 레콜레트의 르누아르 '프랑스 화단의 한 자리' 레콜레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르누아르는 이미 병약자였다. 여행도 거의 하지 않았다. 1910년 뮌헨에 다녀온 것이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었다. 거기서 그는 베라르의 조카딸 프란츠 투르네센 부인과 함께 지냈다. 르누아르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베라르는 몇 해 전에 죽고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변함없이 에수아예에서 소일하며 파리 로세슈아르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1911년 러시아 발레단의 파리 초연에 참석해 달라는, 유명한 재력가 알프레드 에두아르와 그의 부인 미샤(타데 나탕송의 전처였다)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엇다. 1919년 봄-그가 죽기 석 달 전-그는 부르르를 방문했다. 이것이 마지막 나들이였다. 그 무렵 국가 소장품에 선정되어 전시중인 소품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을 보러 오라는 국립 미술학교 교장 폴 레옹의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루브르에 들어간 르누아르의 첫 작품은 아니다. 이자크 드 카몽도가 기증한 그림이 이미 1914년부터 루브르에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숙원 중 하나가 생전에 실현된 셈이다. "옛 거장들을 볼 때면 나는 아주 하찮은 사람처럼 느껴져, 하지만 내 그림 중 적지 않은 작품들이, 내게 프랑스 화단의 한 자리를 보장해줄 것으로 믿어,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처럼 관대하고 분명한, 이처럼 좋은 벗들이 있는...... 일시적인 것과 거리가 먼 프랑스 화단에." 르누아르의 영향 그 즈음 몇 년 사이에 르누아르의 작품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차대전 전 뒤랑 뤼엘과 베르냉 죈 화랑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그의 최신작과 옛 그림들을 신세대에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독일인 비평가 율리우스 마이어 그래페는 이 화가를 다룬 첫 그림 논문집을 1911년 독일에서 발간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에서도 나왔다. 레콜레트를 순례햅ㅂ본 사람이든 아니든 많은 화가들이 이 노장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 가운데에는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앙드레 드랭,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다. 반스 재단 엘버트 C 반스는 펜실베이ㄴ아주 피라델피아 외곽 메리온에 살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방부제 '아지롤'을 개발해 상품화함으로써 재산을 모은 사람이다. 1912년 그는 친구인 미국 화가 윌리엄 글랙컨스와 누이이자 정보에 밝은 감정가인 거트루드, 형제인 마이클, 그리고 피카소와 마티스의 초창기 작품 수집가인 레오 스타인의 자문을 받아 그림 수집을 시작했다. 반스는 파리를 여행할 때마다 마티스, 피카소, 샤임 수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해, 특히 르누아르와 세잔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을 사들였다. 자신의 그림 선택 방식이 비웃음을 사자 이에 질린 그는 1922년 재단을 설립해 자신의 컬렉션들을 안치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데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진지한 민주주의자였던 반스는 만인, 특히 미국 흑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미술을 표방하는 한편, 비평가나 미술사가를 혐오한 탓에 이들이 자신의 컬렉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그의 컬렉션 가운데 많은 수의 작품들이 세계 각지의 미술관에서 전시된 1990년대 이전에는 반스 재단과 재단 소장 명작들은 신화적이고 접근하기 어렵기로 이름나 있었다. 세잔의 그림 69점과 마티스의 그림 60점에다가 르누아르의 작품 180점-초기작은 화가 생존시 구입-이 있는 곳으로는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기묘하게도 반스 박사는 그렇게도 존경했던 이 화가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전쟁 때문이었고 다음에는 화가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종말 고령에다 지병을 앓고, 1915년에는 상처를 하고, 또 두 아들이 부상당하는 전쟁까지 겪었는데도 화가의 마지막 10년은 풍부한 결실의 세월이었다. 의자에만 묶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르누아르는 1912년경 그림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산책가지 중단했다. 그의 아들 장의 향수어린 회고에 따르면, 집안 사람들의 생활도 하나같이 그의 그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인들이 포즈를 취하고, 대형 캔버스에 작업할 수 있도록 이젤도 새로 고안했다. 작은 그림을 그릴 때는 캔버스를 받침대 위에 고정시켰다. 손떨림을 막기 위해 움츠러드는 손에 붕대를 감고 붓을 잡았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동시대인들을 감동시켰다. 이 화가가 손에 붓을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린다는 그릇된 신화까지 탄생했다. 이 잘못된 감동은 오늘날까지도 불식되지 않고 있다. 르누아른가 손가락으로 음계 연습을 하듯 짧은 시간에 연습 삼아 그런 유화 습작들을 대충 훑어보기로 하자. 이 그림들은 화가의 명성에다 급부상하던 미술시장이 가세해 실제 가치 이상으로 과대 평가돼 버렸다. 그러나 노화가의 숙련도가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이들 그림에서 화가는 화려한 색상들을 배치했는데, 특히 심홍색, 녹색으로 강조된 노랑, 군청색들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할 것을 고려해 일부러 좀더 진하게 채색했다. "이제야 이걸 이해하기 시작했어" 지중해의 빛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자신이 즐기던 테마를 작업하는 과정에서 르누아르는 비너스, 목양자 파리스, 넵튠, 님프와 같은 고전 신화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주제가 지나치게 강조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바다나 침대에서 나체의 여인이 등장하고 그녀에게는 비너스나 니니란 이름이 붙여진다. 더 이상 덧붙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변명이 주어진다 해도 내게 필요한 것은 몇몇 인물들을 조화 있게 배치하는 일뿐이다. 너무 많은 학식이나 너무 많은 인물들로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지 못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919년 12월 3일 레콜레트에서 숨을 거두었다. 폐병으로 앓아 누워 있던 중이었다. 아들 장에 따르면, 숨지기 몇 시간 전 화가는 꽃을 그리려고 하니 팔레트와 붓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들을 다시 간병인에게 건네주고 나서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야 이걸 좀 이해하기 시작했어." 기록과 증언 서신들 르누아르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생한 개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을 썼고 화가로서의 관심사들을 유머나 느낌으로 전달했다. 오자투성이인 그의 편지들은 글을 쓴 사람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편지 왕래가 사람의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 소개된 편지들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바지유에게 : 가사 걱정 1868년 초 르누아르는 바지유와 함께 라페오바티뇰과 9번지로 이사해 그곳 화실을 함께 썼다. 아래의 글은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 양친의 집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자지유에게 르누아르가 쓴 편지이다. 친애하는 벗이여, 레바티뇰에서 방금 도착해 자네 편지를 읽었네. 창 크기는 높이가 4미터, 폭이 3미터일세. 주름까지 계산해 높이 4미터에 폭 2미터짜리 커튼을 네 장 준비하면 될 거야. 아르디에게 당장 편지를 써주게. 1주일 전쯤에 살롱전 통지서를 보냈는데 아직 그 화실에서 자네 그림을 보지 못했거든. 난 세르슈미디가 36번지로 보냈는데 그게 잘못된 게 아닌가 걱정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 그 사람과 금전상의 문제가 있어서 직접 편지를 쓰기가 어렵네. 전당포에 맡긴 자네 시계 전표는 찾을 수가 없네. 어디 둔 건지 정확히 알려주게. 난 빌다브라이에 있네. 뭘 가지러갈 때 빼고는 레바티뇰엔 거의 가지 않아. 자네가 부탁한 걸 하려 하니, 혹시 돈이 있거든 즉시 부쳐주게. 자네가 다 쓸 게 아니라면 말이야. 내 걱정은 할 것 없네. 아내도 자식도 없는 몸이고 당장 그렇게 될 기미도 없으니가. 그 목공품을 내가 조치해야 하는지 어떤지 꼭 알려 주게. 그 일을 하게 되면 나로선 상당히 지장이 있을 테니 말이야. 무엇보다도 지금 난 작업중이고 게다가 여기선 잘 버티고 있지만 파리에 가면 먹을 게 늘 충분한 것도 아니거든. 지금 난 배가 고프고 내 앞에는 흰 소스 친 가자미가 놓여 있으니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번에 좀더 긴 편지를 쓰겠네. 호주머니에 12수밖에 없어서 (이 편지에) 소인을 찍지 못할 것 같아. 그건 파리로 나갈 대 써야 하거든. 가스통 풀랭 '바지유와 그의 친구들', 1932년 사르팡티에 부부에게 : 돈과 스타일 다음의 두 편지는 1878-1880년 무렵 르누아르가 자신의 후원자인 조르주의 마르그리트 샤르팡티에에게 보낸 것들이다. 친애하는 벗에게 이달 말이 되기 전에 300프랑을 부탁하네. 미안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론 이런 시시하고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부탁 편지는 쓸 일이 없을걸세. 내가 자네보다 연배가 높으니 존경심말곤 나한테 아무것도 빚질 일이 없겠지. 청구서도 받지 않게 될 테니 자네한테 내 청구서를 보내는 일도 없을 거고. 그리고 벗이여,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그녀가 가장 아끼는 화가를 대신해 대단히 감사하다고 전해 주면 고맙겠내. 언젠가 내가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녀 덕분임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는 말도 전해 주게. 내가 나만의 힘으로 그런 성공을 거둘 리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녀에게 이 모든 감사를 표하기 전에 내가 그곳에 가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바라 예를리히 화이트 '르누아르 :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서신들', 1984년 친애하는 부인께 제가 보기엔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베라르 부인의 아이디어에 관해 얘기하려 합니다. '라 비 모데른'의 끝페이지에 금주의 패션을 싣자는 생각입니다. 파리로 돌아가는 대로 제가 그림 작업을, 대단히 정확한 그림이어야겠지만, 맡게 될 겁니다. 부인쪽에선 여직원 전체를 맡으셔야 할 겁니다. (장 루이) 메이소니에나 기타 인물들이 그린 스케치에 그들이 곡 흥미를 느낄 거라곤 볼 수 없으니까요. 모자업자나 의상업자들과도 타협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주엔 모자, 다음주엔 드레스, 하는 식으로...... 하나의 아이디어죠. 해볼 만한지 어떤지, 저는 부인께전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바바라 에를리히 화이트 '르누아르 :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서신들', 1984년 뒤레에게 : 연기된 여행 비평가이자 수집가인 테오도를 뒤레는 일찍부터 르누아르와 알고 지냈다. 이 편지는 1881년 부활절 다음날 씌어진 것이다. 친애하는 뒤레에게 런던 여행을 왜 연기했는지 설명하려니 대단히 송구스럽군요. 나는 막 휘슬러를 만났지요.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더군요. 그가 찾아와선 샤투에서 점심을 하자고 했어요. 이 위대한 화가와 잠시 같이 있었다는 게 정말 기쁩니다. 이 모든 걸 말씀드리는 것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감히 그에게 말도 붙이지 못햇을 것이기 때문이죠. 잡지에 난 당신의 글을 가지고 그와 말문을 텄거든요. 내일 난 그 사람과 점심을 하게 될 텐데, 내가 여행을 내년쯤으로 연기하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당신께 좀 설명해 달라고 이미 그에게 부탁해 뒀습니다. 나는 지금 꽃나무와 여자와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는 중이어서 다른 건 쳐다볼 마음도 없습니다. 늘 미안한 심정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심려 기친 걸 생각하면 내 이 요란한 변덕을 당신이 참아낼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게 되지만, 한편으론 저 멋진 영국 여자들을 한번 봤으면 하는 기대감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우유부단하니 정말 통탄할 일이긴 하지만 내 성질이 원래 그래서, 나이가 들면 바꿀 수도 없는 것 아니가 걱정도 됩니다. 날씨도 아주 좋은 내겐 모델들이 있습니다. 자, 그게 내 유일한 핑계랍니다. 살롱전에는 카앵네 딸들의 초상화들을 내려고 합니다. 그것들도 작년처럼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않길 빌어야죠. 휘슬러는 런던에서 급작스럽게 오느라 당신한테 알리지도 못했다더군요. 미안하다고 전해 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떠나온 것도 알지 못할 뻔했다고 하는데 그건 맞는 얘기 같습니다. 조만간 또 편지하겠습니다. 미셀 플로리순, '르누아르와 샤르팡티에 가족, 1938년 2월 뒤랑 뤼엘에게 :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은 이유 1881년 르누아르는살롱전 참가 준비를 끝내고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살롱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미술상 폴 뒤랑 뤼엘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껴 3월 알제에서 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뒤랑 뤼엘 씨께 제가 왜 살롱전에 참가하는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살롱전에 그림을 내걸지 못한 화가의 진가를 알아보는 수집가가 파리에 열다섯 명 미만입니다. 살롱전에서 빛을 못 본 화가의 그림을 외면하는 작자들은 8000명이나 됩니다. 제가 해마다 큰 것은 못 돼도 초상화 두 점을 출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어떤 행사가 어는 장소에서 열린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나쁘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빠져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저는 살롱전 측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화가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그림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믿으며...... 조만간 그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저는 모든 화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태양 아래 머물며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저 자신 제 목표에 도달햇다는, 제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아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저로서도 대단히 놀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시면 살롱전에 그림을 내면서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당신께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입장을 친구들에게 잘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살롱전에 작품을 내는 것은 순전히 비즈니스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약 같은 것이어서 아무 효과가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해가 되지 않지요. 저는 건강을 회복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작업해서 낭비한 시간을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납니다만, 당신도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돈 많은 수집가들도 많이 만나게 되시길. 하지만 제가 돌아갈 때를 대배해 그 사람들을 잘 잡아두셔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 달 더 머물 겁니다. 이 놀라운 나라에서 쓸 만한 작품 하나 건지지 못하고 알제를 뜨고 싶진 않으니까요. 우리의 친구들과 당신의 안녕을 충심으로 빌며. '르누아르 회고록', 1987년 샤를 뒤동에게 : 안녕, 베네치아여 1881년 가을 르누아르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친애하는 벗이여 안녕 베네치아여, 아름다운 재색 하늘이여. 약속의 땅, 진정한 파라다이스. 나는 로마로 출발해 나폴리로 갈걸세. 라파엘의 그림들을 보고 싶어. 라, 파, 엘, 말이야....... 대단한 습작 두 점을 파리로 보냈는데 2주 후에나 도착할 거야. 한 미술품 판매업자에게 그림이 마르거든 부쳐 달라고 맡겼거든. 생조르주가로 보냈으니 베네치아가 연상되는지 어떤지 자네가 보고 내게 알려주게. 난 (운하) 맞은편 산조르조에서 바라본 도제스궁을 그렸는데, 이건 지금가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작업일 거야. 일렬 종대로 섰을 때 우린 적어도 여섯 번째였지. 잘 있게. 마르셀 슈네이데 '이탈리아에 관한 르누아르의 편지' '라주 도르'1, 1945년 10월 폴 베라르에게 : 영원한 이탈리아 가옥들이 비친 수면이 아름다운 여긴 정말 황홀합니다....... 나는 태양과 그것이 비친 수면에 반해서, 이런 것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태양을 찾아 고생하느냐 하면 과거에 내가 해온 작업은 그것에 근접조차 못하기 때문이죠. 미술관에 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자연의 근처에도 못 갑니다. 저 위대한 명작들은 잿빛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빛을 찾아 다니는 것도 쓸데없는 짓입니다. 내 그림들도 결국엔 검은 빛을 띠게 될 테니까요. 조각가들은 운이 좋은 작자들이죠. 그들의 조각품들은 태양 아래 서 있으니가요. 그리고 그 순수한 형태가 다 갖추어지면 그것들은 빛의 일부가 되고 나무처럼 자연 속에서 살게 됩니다....... 르누아르는, 밝은 노랑 위에 연황색을 쌓아올린 습작을 들고 왔다는 소문 속에 귀환할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여자들을 찾아보았죠. 첫날에는 열정적이었지만, 둘쨋날엔 이 오베르뉴 출신의 (검은 피부) 여자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았죠. 아! 파리, 멋진 여자들의 모자가 있고 생명이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묘사 가능한 태양인데, 내가 왜 거길 떠나왔던가? 친필 원고 밒 필사본 판매전 카탈로그 중에서, 드루오 리브 고슈, 파리, 1979년 2월 16일 뒤랑 뤼엘에게 : "아직도 열정적으로 모색중입니다" 나폴리에 있던 1881년 11월 21일, 르누아르는 자신의 미술상에게 또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뒤엘 씨께 한동안 당신께 편지를 쓰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그림도 한 꾸러미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 아직도 열정적으로 모색중입니다. 만족스럽지 않아서 닦고 또 닦습니다. 이 열정이 걷히면 좋겠습니다. 당신께 제 소식을 전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구요.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들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오랜 모색의 시간 후엔 늘 그렇듯이, 저는 제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 ...... 로마에서 라파엘의 작품을 봤습니다. 너무 아름다웠고 더 빨리 못 본게 아쉬웠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지식과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을 하려 들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유화는 앵그르가 더 좋습니다. 그러나 프레스코화는 단순미와 숭고함이 깃들인 라파엘의 그림들이 탄복할 만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단출한 가족들도 다 잘 지내시겠지요. 이탈리아가 너무 아름답긴 하지만 곧 뵙게 되겠죠. 파리는...... 아! 파리...... 저는 어떤 일에 착수했습니다. 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망칠지도 못르니까요. 저는 미신을 믿는 편이죠. 리오넬로 방튀리 '인상주의에 관한 기록' 1930년 팔레르모에서 : 리하르트 바그너와와의 역사적인 조우르누아르는 신원 미상의 '바그너를 존경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 작곡가와 자신의 만남에 대해 촌평해""T다. 이 편지는 1882년 1월 14일자로 돼 있다. 친애하는 벗에게 ......오랫동안 우리 형님한테 반항해 왔는데 그가 나폴리로 드 브라예의 소개장을 보내왔더라구. 난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고, 드 브라예의 서명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지. 그리곤 거기에서 15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오느라 배멀미가 날 것 같았어. 문득 호주머니를 살펴봤는데 편지는 없었어. 호텔에 두고 왔나 봐. 배를 타고 오면서 난 갖은 고생을 다 했네. 배를 붙들고 있을 수 없었지. 팔레르모에 도착했을 때 내 몰골이라니. 도시가 우울해 보여서 저녁에 돌아가는 배를 타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 결국 난 '프랑스 호텔'이라 씌어 있는 합승마차까지 쓸쓸하게 걸어갔지 바그너가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우체국에 들렀는데 불어를 하는 사람도 없고, 바그너를 아는 이도 없었어. 그런데 내가 든 호텔에 독일인이 몇 사람 있어서 결국 그가 팔메스 호텔에 있다는 걸 알게 됐지. 마치를 타고, 훌륭한 모자이크화가 있는 몬트레알레를 갔다 왔네. 돌아오면서 난 우울한 생각에 빠졌어. 출발하기 전 나폴리로 전보를 쳐놨는데, 아무 희망도 없었지만 난 기다렸지. 하지만 결국 아무 소식도 오지 않길래 내가 날 소개하기로 했지. 난 그 거장에게 내 존경심을 표할 수 잇게 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편지 말미엔 대충 이런 말로 끝맺었네. "파리로 돌아갈 때, 특히 라스쿠 씨나 망데 부인에게, 당신 소식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드 브라예 씨한테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 서명이 된 소개장을 보지 못했거든요. 저는 지금 팔메스 호텔에 와 있습니다." 하인에게 편지를 부탁했더니 몇 분 후에 돌아와선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말하더군. "논 살루에 일 마에스트로." 그리곤 가버리는 거야. 다음날 나폴리에서 부쳐온 그 소개장을 받은 나는 다시 그 하인한테 심부름을 부탁했지. 그가 이번엔 경멸감을 뚜렷이 드러내며 편지를 받아가더군. 접수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길래 난 몸을 숨기고 마차 문 밑에서 기다렸지. 내가 이렇게 두 번이나 직접 찾아온 건 40수를 구걸하려고 온 게 아니란 걸 그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으니까. 마침내 영국인처럼 보이는 한 금발 청년이 왔는데, 그는 러시아인이고 이름은 유코프스키라더군. 그가 구석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곤 작은 방으로 데려갔어. 그는 내 직업을 잘 알고 있다고, 지금 바그너 부인이 날 맞이할 수 없는 사정이라 대단히 미안해하더라고 하면서 팔레르모에서 하루만 더 묵을 수 없겠냐고 묻더군. 바그너가 지금 파르지팔의 마지막 가락을 작곡중인데다 몸이 안 좋아 예민한 상태라서 먹지도 못하다니 어쩐대나. 난 그에게 바그너 부인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곤 한 가지만 물어보고 가겠다고 했지. 그 사람과 난 잠시 같이 있었는데 난 그에게 내 방문의 목적을 말했지. 그의 미소를 본 나는 실패구나 생각했는데 그가 자기도 화가라고, 자신도 이 거장의 초상화를 그려보려고 2년 동안 바그너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고 있다고 털어놓더군. 그러면서 "그가 나에겐 거부하는 것을 어쩌면 당신에겐 허락할지도 모르고, 게다가 바그너를 만나 보지도 않고 갈 순 없는 것 아니냐."면서 나더러 기다리고 있으라고 충고해 주더군. 끝으로 날 위로하고 난 이 매력적인 러시아인은 다음날 2시에 만나자고 하더군. 이튿날 난 그를 전신국에서 만났지. 그는 어제, 2월 13일에, 바그너가 그 오페라를 다 끝냈다고 하면서, 그 때문에 바그너가 대단히 지쳐 있으니 5시전엔 오지 않는 게 좋겠고 5시에 오면 내가 어려워하지 않도록 자기가 함께 있어 주겠다고 하더군. 난 흔쾌히 받아들였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네. 정각 5시에 그리로 간 나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하인과 마주쳤다내. 그는 내게 따라오라고 하곤 자그만 온실을 통과해 그 옆의 작은 거실로 데려가더니 커다란 의자에 앉으라고 하더군. 그리곤 우아한 미소를 띠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는 거야. 난 거기서 바그너 양과 바그너의 아들인 듯한 몸집이 작은 청년을 봤는데 러시아인은 없었어. 바그너 양은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다고 내게 말하곤 나가버렸어. 두꺼운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어. 그 거장이 나타난 거야. 넓은 소매에 검정 새틴 단을 댄 벨벳 실내복 차림이었지. 그는 대단히 잘생긴데다 아주 공손했어. 나와 악수하곤 어서 다시 앉으라고 하더군. 그리고는 '으흠, 오!'를 연발하며 반은 불어로 반은 독어로, 우습기 짝이 없는 대화가 시작됐다네. 그는 쉰 음성으로 말을 맺곤 했지. 난 대단히 만족스러웠어. '아! 오!'에 이어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지. 파리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아닙니다. 나폴리에서 왔어요. 그런 다음 난 소개장을 잃어버린 얘길 했어. 다 듣고 난 그가 꽤 한참 웃더군. 우린 별별 얘기를 다 나눴네. 우리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계속해서 '친애하는 선생님'이라고. 당연한 거지만 그렇게 불렀지. 그러다 내가 그만 가려고 일어서려니까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나를 도로 의자에 앉혔어. 조금만 더 계세요. 내 아내가 올 테니까. 그런데 그 사람 좋은 라스쿠 씨는 잘 지내나요? 난 그에게 최근엔 라스쿠 씨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이탈리아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 사람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도 모를 거라고 말했지....... 마침 그 러시아 청년 바그너 부인과 함께 들어오더군. 그녀는 내게 드 브라이어 씨를 아느냐고 묻더군. 난 고개를 들었어. 드 라브이어 씨라구요? 모릅니다. 부인, 전혀 몰라요. 그도 음악가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소개장을 써준 이가 그 사람이 아닌가요? 오, 드 브라예요? 네, 잘 압니다. 죄송하군요. 우린 그렇게 발음하지 않거든요. 난 이렇게 말하곤 낯을 붉히며 사과했지. 하지만 라스쿠 얘기를 하면서 부끄러웠던 걸 충분히 보상했지.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흉내내 보였거든....... 우린 음악계의 인상파들에 관해 얘기했어. 난 정말 얼마나 바보스런 소리만 늘어놓았던지! 결국 난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수탉처럼 얼굴이 빨개진 채 온몸이 후끈거렸어. 한마디로 멍청한 놈이 불쑥 나타나 도를 넘어 떠들고 있는 꼴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그분이 퍽 유쾌했어....... 마지막에 가서 난 자네가 상상할 수 있는 제일 어리석은 얘길 충분한 시간을 갖고 털어놨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유코프스키 씨에게 말하더군. 정오에 내가 몸이 괜찮을까? 점심 시간전까진 앉아 있어 줄지도 몰라. 자네도 이해해 줘야겠지만 아무튼 내가 최선을 다해 보지. 오랜 시간 앉아 있어 주진 못하더라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닐세. 르누아르 씨, 미안하지만 유코프스키한테 당신이 그와 함께 날 그려도 괜찮겠는지, 방해가 되지 않겠는지 한번 물어보세요. 유코프스키는 저도 막 여쭤보려던 참인걸요, 어쩌구 저쩌구...... 당신은 어떻게 그릴 생각이세요? 난 정면 얼굴을 그릴 거라고 대답했지. 그는 잘됐다고 하더군. 난 이미 구도를 잡아뒀기 때문에 뒷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그러자 바그너가 그에게 말했어. 자넨 프랑스로 향해 앉은 내 뒷모습을 그리고 르누아르 씨는 앞모습을 그리게 되겠군. 하! 하! 오!...... 다음날 정오에 난 그리고 갔지. 나머진 자네도 알 거야. 그는 대단히 쾌활했는데 (난) 너무도 신경이 쓰여서 앵그르가 아닌 게 유감이었어. 간단히 말해, 나로선 시간이 잘 지나가는 것처럼 생각됐는데 35분간이었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지. 하지만 오히려 좀더 빨리 끝났더라면 걸작이 될 뻔했어. 막판엔 모델이 쾌활함을 잃고 뻣뻣해져 버렸으니 말이야. 난 그 뚜렷한 변화를 포착했는데 어쨌거나 자네도 보면 알 거야. 끝에 가서 바그너가 좀 보자고 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하!하! 내가 꼭 청교도 목사처럼 보이는군. 그건 사실이야. 아무튼 난 완전히 망치지 않은 게 대단히 기뻤다네. 그 걸출한 두상으로 작은 추억을 만들었으니 말이야. 잘 있게. 르누아르가 ......그는 프랑스 사람들은 미술 비평을 너무 많이 읽는다고 대여섯 차례나 되풀이했어. 미술 비평이라, 하!하! 큰 웃음. 독일계 유태인들! 하지만 르누아르씨, 프랑스에는 내가 독일계 유태인들과 혼동하지 않을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알고 있소. 불행하게도 난, 이 거장과의 대화 전체에서 느낀 그 솔직함과 유쾌함을 전달할 수가 없네. 바바라 에를리히 화이트 '르누아르 : 그의 삶과 예수, 그리고 서신들', 1984년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 그림 작업과 태양에 관하여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82년 1월 말 무렵 혹은 2월 초, 르누아르는 마르그리트 샤르팡티에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친애하는 부인께 나폴리에서 되동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부인께서 종종 제 얘기를 하신다는 걸보고 기뻤습니다. 부인의 어린 따님을 그린 그 파스텔화를 기대에 차서 기다리고 계신다구요. 서둘러 파리로 돌아오는 게 옳았겠지만 전 그때 한창 많은 것을 배우고 있던 중이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오래 걸릴수록 초상화도 더 나은 게 나올 테고...... 저는 나폴리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폼페이 그림들은 어는 모로 보나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는 태양 속에 있습니다. 햇빛 아래서 초상화를 그리는 건 아니고, 몸도 따뜻하게 덥히고 주변 경관을 바라보며 저 자신도 옛 거장들의 저 장엄함과 단순함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요. 라파엘은 야외 작업은 하지 않았지만, 프레스코벽의 태양에서 보듯이, 그도 태양을 연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렇듯 바깥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저는 좀더 큰 조화만을 보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태양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지 못하고 흐리게 하고 마는 소소한 디테일들 속에서 길을 읽지 않는 법을 말입니다. 파리로 돌아가는 대로 이런 전반적인 연구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해볼 생각이고, 그렇게 되면 부인께서도 그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 자신 뭘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무인께서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겠지만 저로선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게끔 만들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부디 안녕히 계시고 부군께도 힘찬 악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셀 플로리순, '르누아르와 샤르팡티에 가족', 1938년 2월 의지와 무관한 '독립파'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직후 르누아르는 자기 그림을 인상파전에 출품하려는 뒤랑 뤼엘의 계획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그 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1882년 2월 26일, 레스타크에서 친애하는 뒤랑 뤼엘 씨께 ......오늘 아침 저는 당신께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제 그림들은 당신 재산입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든 제가 막을 순 없겠지만, 전시를 하는 사람은 결코 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 몇 마디 말속에 제 생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제가 피사로-고갱 그룹과 아무 관계도 없고 소위 독립파란 그룹에 가입한 적도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첫째 이유는 제가 살롱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다른 전시회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거듭 거절합니다. 물론 당신은 제 허락 없이 그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는 데 제가 반대할 권리가 없지요. 당신 이름으로 전시한다면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림들을 내놓은 사람은 제 이름이 서명된 그림들의 소유주인 당신이란 점 말입니다. 카탈로그나 포스터, 팜플렛을 비롯해 대중에게 나가는 모든 안내장에 이 조건을 넣어서, 내 그림들이 뒤랑 뤼엘 씨의 재산이며....... 이렇게 라도 해야, 제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파'가 되어버리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부디 노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전시회를 주최한 이는 당신이 아니라 고갱 씨니까, 이 일로 당신이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를 변함 없이 헌신적이고 충실한 당신의 화가로 믿어주세요....... 제가 거절했다고 해서 당신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이 그들한테 떠넘겨질 테니까요. 저 자신, 그리고 제 취향과 당신의 이익을 고려해볼 때 나란히 서고 싶지 않은 그 사람들 말입니다. 따뜻하고 진심어린 제 우정을 믿어주실 것과 당신의 건강을 충심으로 빌며....... '르누아르 회고록', 1987년 손으로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 르누아르가 자신의 미술상이자 친구인 사람에게 보낸, 가슴 아픈 말년의 편지1919년 2월 27일, 카네에게 친애하는 뒤랑 뤼엘 씨께 제게 편지를 쓰느라 고생하셨단 얘기 듣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당신이 저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신지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거 꼭 믿어주세요. 부탁드리건대, 제 모든 연민을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추신' 당신은 제게 편지를 쓰셨지만 저는 같은 방법으로 답장해 드릴 수가 없군요. 그건 제겐 불가능하답니다. 리오넬로 방튀리 '인상주의에 관한 기록', 1930년 르누아르가 남긴 말들 르누아르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독창적인 언어 감각을 즐겼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한 말과 농담에 자신의 개성을 입혀 수집해 두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존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르누아르가 한 말이다. 알베르 앙드레와 장 르누아르가 아마도 가장 충실한 전달자일 것이다. 앙드레가 들은 얘기 르누아르에 반한 화가 알베르 앙드레는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화가가 화실에서 한 즉석 논평들을 아주 잘 모아두었다. 옛날 내가 그 화실에 있을 때 난 가엾은 글레르를 열받게 만들었지. 근 1주일에 한 번씩 왔어. 그가 내 이젤 앞에 와 멈춰 섰지....... 그땐 내가 거기 들어간 첫 주였어. 나는 견본작을 잘 베껴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 내 캔버스를 본 글레르가 근엄한 태도로 말했어. "자네 지금 재미로 그리는 거지?" 내가 대답했지. "사실 그래요. 재미가 없다면 이 짓을 하지 않을 테니가요!" 그가 내 말을 이해했는진 나도 몰라. 알베르 앙드레는 이렇게 촌평했다. "르누아르의 대답에 핵심이 있다. 그는 그것이 무한히 즐겁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다. 근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어떤 종교적인 사명을 완수하고 있다거나 공화정을 구제하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이란 건 그렇지 않은가, 벽을 장식하려고 있는 거야. 따라서 가능한 한 화려해야 해. 우리가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게끔 되어 있으니 말인데, 내게 그림이란 것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그렇지, 예뻐야 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면 세상엔 괴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아. 그림은 위대한 동시에 즐거울 수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프라고나르가 재미있어 하니까 사람들은 재빨리 그를 이류 화가라고 말했지.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진지하지 않다고 평가받지, 그림, 음악, 문학에서 제 몫을 해내는 예술은 항상 주목받게 되어 있어....... 자신의 가치를 알아야 해. 옛 거장들을 볼 때면 난 아주 하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하지만 내 그림 중 적지 않은 작품들이, 내게 프랑스 화단의 한 자리를 보장해줄 거라고 믿어. 재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처럼 관대하고 분명한, 이처럼 좋은 벗들이 있는...... 일시적인 것과 거리가 먼 프랑스 화단에. 나는 언제나 운명 앞에 나 자신을 맡겨 왔고, 결코 투자적 기질이 없어서 내 좋은 친구 모네가 없었다면 수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그는 투사적 기질을 갖고 있어서 나를 밀어 주었다. 오늘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난 그것을 강물에 내던져진 코르크 조각에 비유한다. 빙빙 돌다가 물살에 실려가고, 튀어 오르고, 잠겼다 떠오르기도 하다가 잡초에 걸리면 벗어나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다가 마침내는 사라지고 만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신만이 안다....... 예술에 관한 경구들 아버지의 메모들을 발견한 장 르누아르는 부친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 이 메모들을 그대로 실었다. 그 자체로 완결된 이 단상들은 르누아르가 젊은 화가들을 위해 출판하려 해'Tejs ' 미술의 기초'의 기본 원리가 되는 것들이다. 예술의 첫 번째 개념과 관련해 내가 근본 원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불규칙성'이다. 지구는 둥글지 않다. 오렌지는 둥글지 않다. 그것은 어떤 부분도 형태나 무게가 다른 부분들과 똑같지 않다. 오렌지를 사등분해 각각의 안에 든 씨의 수를 세어 보면 어는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 각각의 씨들 역시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술이 불필요하다면 왜 풍자를 하고, 왜 예술을 핑계삼는 짓을 한단 말인가?...... 내가 편안하기만을 원한다고? 그래서 나는 거친 나무 가구만 쓰고 장신구나 장식물도 없는 집에서 산다....... 예술 애호가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메달을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지, 예술 애호가들에 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예술가가 아니다. 가서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놓은 것을 보라. 그러나 본질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베껴선 안 된다. 당신의 것이 아닌 어떤 기질을 습득하려 애쓰다 보면 당신이 하는 것 가운데 특징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장 르누아르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년 화실에서 바닥엔 천 조각이 뒹굴고, 흰 나무의자 몇 개, 이젤, 붓, 유화물감...... 얼핏 보면 이 창조의 무대는 경험 없는 사람을 실망시킨다. 그러나 일단 이 화가의 친밀한 공간으로 들어서서 캔버스와 모델에 둘러싸여 작업하는 그의 모습을 본 방문객은 그에게 압도당하고 만다. 이젤 앞의 르누아르 말년의 르누아르를 잘 알던 화가 알베르 앙드레 덕분에 우리는 레콜레트의 그의 화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르누아르는 죽지 전, 자기에 관해 쓴 이 젊은 친구의 저서(1919년 발간)를 읽어볼 수 있었고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파리에 있는 것이든 시골에 있는 것이든, 그의 화실에는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가구가 전혀 없다. 천으로 싼 부서진 소파와 모델이 쓰는 낡은 꽃 모자들, 의자 몇 개가 전부이다. 그러나 다 끝낸 그림과 마르기를 기다리는 그림들, 현재 작업중인 캔버스들이 뒤섞여 화실은 마치 알라딘의 동굴처럼 현란한 색상으로 뒤덮여 있다. 어쩌다, 보여주기 위해 그림틀에 넣어 걸어놓은 그림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놓은 것일 경우가 많다. 그는 따로 작업복을 입지 않는다. 그가 가늘고 긴 다리를 꼬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다. 모직 슬리퍼를 신고 숄로 몸을 감싼 채, 머리에는 귀까지 덮는 모자나 흰 린넨 모자를 쓰고 있다. 그는 항상 시거를 들고 연신 불을 붙여댄다. 그는 친구들을 즐겁게 맞이한다. 그러나 호기심에서 찾아온 사람이다 싶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완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변해 버린다. 그 같은 불청객을 몰아내고 다시 자신의 이젤 앞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딴사람이 된다. 모델들이 자주 불러주는 가락들을 휘파람으로 불거나 흥얼거리면서, 자신의 눈으로만 찾아낼 수 있는 모델들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그가 자신의 예술론을 소박하게나마 패력하고픈 마음이 들게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에 한해서일 뿐이다. 평생을 그림 그리는 일만 해온 이 사람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 아주 조금만 말한다. "저 올리브나무들에 깃들인 빛을 보라구.......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지. 저건 분홍, 저건 청색...... 그리고 하늘이 그것들을 관통해 들어오지. 그걸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해. 그리고 구름들과 함께 달라지는 저기 저 산들...... 저건 와토풍 그림에서 보이는 배경 같은 거지." "아! 저 젖가슴! 얼마나 부드럽고 중량감 있는가! 금빛 색채를 띠며 밑으로 처진 저 아름다운 기복...... 저건 자네 무릎을 꿇게 만들고도 남아. 만일 젖가슴이 없다면 내가 과연 인물들을 그렸을까 의심스러워." 알베르 앙드레 '르누아르', 1919년 스케치에서 완성작까지 복잡한 그림을 시작할 때 그는 진정한 습작이라 할 만한 것을 하지 않는다. 일단 모티프가 결정되면 그 주제의 분위기를 살려 작은 그림 몇 점을 그린다. 그것은 한 인물일 수도, 때로는 대여섯 사람일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최종적인 작품을 위한 일종의 연습이다. 마침내 그것이 마음속에 잡히면 붉은 크레용으로 구도를 잡고, 그것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긴다. 딱딱한 연필 데생은 그에게 잘 맞지 않는다. 무론 연필 데생 습작 중 뛰어난 것도 몇 점 있다. 하지만 질량감이 큰 그림을 목표로 하는 그에겐 연필보다 부드럽고 좀더 다채로운 색상이 필요하다. 그가 선호하는 것은 목탄 연필이나 적갈색 파스텔이다. 그는 이제 작업 도중 붓을 바꿀 수가 없게 되었다. 일단 붓을 선택해 마비된 손가락 사이에 고정시키고 나면, 붓은 캔버스에서 케레빈유 단지, 파레트, 다시 캔버스로 순환하는 여행을 한다. 피로로 손이 무감각해지면 누군가가 그의 손가락에서 붓을 빼주어야 한다. 그가 스스로 손가락을 벌릴 수 없는 까닭이다. 그는 시거를 달라며 휠체어를 뒤로 굴린다. 한쪽 눈을 가늘게 치켜 뜨고 불만스럽게 툴툴대거나 겸손하게 칭찬을 한 후 그는 다시 작업에 몰입한다. "한 그림에서 자연을 모사하는 짓을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지, 그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림은 모델의 냄새를 강하게 풍겨선 안되는 동시에 자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은 말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풍경화에선 한가롭게 노닐고 싶게 만드는 그림이 좋고, 여자 인물화에선 젖가슴이나 등을 손으로 만져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이 좋다." 알베르 앙드레 '르누아르', 1919년 르누아르와 그의 모델들 "모델은 다만 거기에 서서 날 그리로 갖아 끈다. 모델은 자기가 없었다면 내가 창안할 수 없었을 것들에 과감하게 덤비게 해주며, 내가 지나치게 멀리 가면 과정을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그는 늘 집안에 모델을 두기를 좋아한다. 그는 커다란 손과 발을 선호한다. 그의 마지막 20년 동안 거의 독점적으로 모델로 봉사한아름답고 건강한 처녀들은 화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보모 겸 하녀들이었다. 그의 인물들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타입의 여성은 이렇다. 마치 키스라도 해달라는 듯 튀어나온 입술, 밝고 쾌활한 눈, 엉덩이가 과장된 긴 몸통, 둥그스름하면서 그다지 근육질이 아닌 약간 짧은 다리, 뼈가 없는 듯한 느낌. 이런 타입은 1880년을 전후해 좀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주변에서 이런 타입만 보아온 그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자신의 모든 인물들에게 그러한 특징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새 모델은 그의 평정심을 깨트리며 그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는 작업할 만큼 편한 기분은 못 되지만, 새 모델을 그냥 보내 버릴 만큼 대담하진 않다. 그는 말없이 캔버스 한 구석에 장미나 의자에 늘어진 천 따위를 그린다. 그 동안 모델은 자신과 무관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포즈를 취한다. 알베르 앙드레 '르누아르', 1919년 장 르누아르가 본 화실 두 번째 특전 받은 증인은 장 르누아르이다. 르누아르는 형태를 연상시킬 만한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흰 배경에 끝없이 잔잔한 붓 터치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때때로 아마인유와 케레빈유로 섞은 물감이 묽어서 캔버스 밑으로 뚝뚝 흘러내리기도 했다. 르누아르는 그것을 '주스'라고 불렀다. 이 주스 덕분에, 대여섯 번 붓질을 하고 나면, 그가 의도한 색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색조가 캔버스 표면-을 뒤덮었다....... 나는 종종 아마인유 3분의 1과 테레빈유 3분의 2를 탄 연백(얇은 조각 모양의 안료)으로 아버지의 캔버스를 준비했다. 그렇게 처리한 캔버스를 며칠 동안 말렸다. 이제 실제 그림 제작과정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먼저 연한 핑크나 청색으로 붓질을 시작했는데, 이 색상들은 그 다음에 칠하는 적갈색 안료와 섞여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좀더 나중 단계로 오면 노랑과 꼭두서니빛(주황색) 적색 염료들을 사용했다. 아이보리 블랙(상아를 태워서 만든 흑색 염료)은 다른 것보다 나중에 도입했다. 그는 직선 스트로크나 각진 스트로크로 전진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어린 젖가슴의 윤곽을 따라가듯 곡선을 이루는 붓질 방식을 썼다. "현실적으로, 직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치라도 불균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첫 붓질에서부터 캔버스는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 첫 효과의 신선함을 잃지 않으면서 주제를 형상화하는 일이 그의 고민이었던 것 같다. 마침내 현상액 속에 잠겨 있던 감광판에 상이 떠오르듯 연무 속에서 모델의 육체나 풍경의 윤곽이 드러나곤 했다. 처음엔 무시했던 것들에도 나름대로 적절한 무게가 실렸다. 그는 한바탕 기를 쓰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주제를 완전히 점령했다. 그림을 그릴 때의 그는 결투를 벌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화가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의 방어막에서 마지막 약점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사냥에 나선 사람과도 같았다. 다급하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자신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확장하는 그의 붓 놀림에 깃들인 갈망 어린 다급함을 보노라면 벌레를 문 제비가 지그재그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이 연상됐다. 나는 지금 일부러 죠류에 빗대어 얘기하고 있다. 르누아르의 붓은 그런 제비의 부리가 눈과 연결되는 방식처럼 시각적 지각력과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 르누아르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년 다른 사람들이 본 르누아르 우유부단하고 느닷없이 우울증을 보이곤 했던 르누아르는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초조함은 그가 바친 노고와 갈등을 저버리지 않았던 자신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평온함과 대조를 이룬다. 늙어서 지체가 부자유한 순간까지도 자신의 그림에 끊임없이 쏟아 부었던 그 에너지는 동시대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간략한 그의 초상 저널리스트이자 화가의 동생인 에드몽 르누아르는 인상파를 위해 문필력을 발휘했다. 이 글은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의 원고이다. 저는 여러분께 그를 20줄로 소개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환희에 차서, 몰두한 채, 엄숙하게, 멀리서, 거리를 급히 지나가는 그를 수십 번은 보았을 것입니다. 잘 잊고 정리가 되지 않으면 열 번이고 되돌아와 같은 짓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잘 잊어버립니다. 길을 갈 땐 늘 뛰어다니고 실내에 있을 때 꼼짝도 않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몇 시간씩 보냅니다. 뭘 생각하는 걸까? 작업중인 그림 아니면 구상중인 그림입니다. 그림에 관한 한 그는 아주 말을 삼갑니다. 그의 환한 표정이 보고 싶거든, 그가 즐거운 가락 몇 구절을 흥흥대는 게 듣고 싶거든-오, 그때의 놀라움이란-식탁에서, 아니, 통상적으로 즐거움을 찾는 자리에서 그를 찾지 말고, 그가 작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들러 보세요. 에드몽 르누아르 '라 비 메데른의 제5회 미전' (라 비 메데른), 1979년 6월 19일 샤르팡티에 씨 집에서 열린 한 저녁 파티 한번은 아버지께서 마를리 숲에서 그림을 그리시다가, 문득 그 날 저녁 샤르팡티에 부부의 집에서 열리는 성대한 저녁 파티에 초대받은 일을 기억하셨다. 그는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레옹) 강베타 총리에게 소개될 예정이었다. 신축한 빌 호텔의 대형 패널 장식화를 르누아르에게 맡겨 달라고 샤르팡티에 부부가 총리 석득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파티복 입기를 성가셔 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와 풀먹인 깃과 와이셔츠의 가슴 부분만 있는 가짜 가슴판으로 된 희한한 콤비네이션을 걸치는 것으로 시간을 절약했다. 그것은 그 당시 꽤 자주 사용하던 의장이었다. 샤르팡티에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점잖게 실크해트와 스카프와 장갑과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주었다. 깜짝 놀란 하인이 미쳐 그를 가로막기도 전에 그는 벌써 객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순간 한바탕 웃음소리가 그를 맞았다. 서두는 통에 재킷을 깜박 잊고 와 와이셔츠 바람이었던 것이다. 샤르팡티에는 무척 재미있어 했고 그가 불편하지 않게 자신도 웃옷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다른 신사들도 그를 따라 했다. 그걸 본 강베타는 대단히 '민주적'이라고 말했다. 만찬은 더 한층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장 르누아르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년 디에프에서의 스캔들 르누아르는 샤르팡태에 가족과 베라르 가족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았지만 몇 몇 집안과 불화를 낳기도 했다. 블랑슈 집안과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에밀 블랑슈의 아들로서 젊은 화가였던 자크 에밀 블랑슈가 1881년 7월 디에프에서 부친에게 보낸 아래 편지에 그런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어제 르누아르가 왔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저와 같이 작업해 주었으면 해서 어머니가 초대 하셨거든요. 방을 준비 못해 대접이 후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건 차라리 잘된 일이었죠. 어머니는 그에게 저녁을 먹자고 하셨어요. 45분 정도 걸렸죠(보통 15-20분 걸리죠). 그걸 참지 못한 어머니는 식사도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재치도 없고 서툰 미장이에다 식사도 늦게 해서 신경 쓰이게 한다고 내놓고 불평하셨죠. 아머닌 이제 그를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거예요....... 그는 일몰을 10분만에 그렸습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격분케 해서, 어머니는 결국 "물감만 낭비한다!"는 말을 그에게 해버리셨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말이 떨어진 게 다행이죠. 저로선 어머니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어요. 너무 당황했거든요. 자크 에밀 블랑슈 '추억을 낚으며', 1949년 말라르메의 야회와 베르트 모리조의 야회에서 시인 양리 드 레니에는 르누아르를 다룬 한 책의 서문을 써주면서 이 두 모임을 회고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집에서였다....... 그는 여윈 얼굴에 신경질적인 깡마른 사내였다. 지적이면서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리한 눈에 얼굴이 안 돼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차림새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품행이었다. 그는 방금 말라르메의 초상화를 그렸다는데, 그다지 닮진 않아서 걸작이라기보다는 화가와 시인 사이의 우정의 표시 같았다. 서로 친했던 그들의 관계는 마네의 화실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였다. 그곳을 단골로 드나들던 말라르메는 지금은 외젠 마네의 부인이 된 베르트 모리조와도 잘 알았다. 내가 르누아르를 다시 만난 것은 베르트 모리조의 집에서였다. 말라르메는 빌쥐스트가로 나를 데려갔다. 음악회가 끝나면 우리는 일요일마다 곧잘 외출했다. 그곳은 인적 드문 낯선 곳이었다. 외젠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 그들 부부의 딸 쥐리는 흠잡을 데 없는 상중류층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외젠 마네는 예민하고 진지한 한편 오만하고 차가울 정도를 예의를 지켰고, 쓰고 있는 하얀 모자만큼 기품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베르트 모리조는 예리하고 우수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동양적인 눈길로 사냥개 라에르테를 바라보는 어린 딸 쥘리는 말은 없지만 천진난만하게 뺨을 물들이며 뛰어 다니는 어린애였다. 사람들은 1층의 거실 겸 화실에서 고상한 제정시대 가구에 둘러싸인 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라르메는 벨기에의 빌리에 드 릴아담에서 했던 강연을 여기서도 되풀이했는데...... 드가가 반응을 보였다. 테오도르 드 위제바는 슬라브인다운 예민함으로 한몫 거들었다. 르누아르는 교양 없고 촌스럽게 빵을 뜯었는데, 손은 이미 흉하게 변해 있었다....... 앙리 드 레니에 '르누아르, 누드를 그리는 화가'. 1923년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 '르뷔 블랑슈'의 창간자인 타데 나탕송은 문학과 미술계의 아방가르드 단체들을 옹호한 사람이다. 끊임없는 흥분감이 르누아르의 발길을 재촉한다. 절을 하고 난 그가 허리를 펴고 뒤틀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에 비해 헐렁한 옷에 가린 연약하고 수선스럽고 민감한 자기 몸을 쉼없이 몰아친다. 그 바람에 피부에 주름이 잡히고 이목구비가 뒤틀리고 눈꺼풀이 떨리고 좁은 면상에 신경질적인 표정이 살아난다. 황폐하고 주름지고 메마르고 일그러지고 회색 터럭이 빽빽한 얼굴, 눈에는 불꽃이 튀지만 툭 튀어나온 광대뼈 위에 인자하게 자리잡고 있다. 민첩한 손가락은 회색 콧수염과 턱수염을 쉴새없이 쓰다듬다가, 결국 숱이 적고 반항적인 머리카락에 이르러 손을 뗀다. 처음 봤을 땐 가까이하기가 힘든 외모지만, 그것은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쾌활함과 거기서 나오는 선량함에 의해 즉시 상쇄된다. 그는 왔다갔다.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 채 일어서기도 전에 다시 앉기로 결정하곤 한다. 일어나서 걸상으로 가 시거를 찾는다. 아니, 거랑 위에는 없다 또한 이젤 위나 탁자에도 없다. 그곳 어디에도 없다....... 타데 나탕송, '르누아르' (르뷔 블랑슈), 1896년 5월호 남달라 보였던 아버지 장 르누아르는 1차 대전에서 부상당한 후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몸을 회복하던 오랜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곁에서 지난날을 얘기하며 보냈다. 아버지가 (학교로) 날 찾아오셨을 때,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 섞인 그는 마치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단추로 채우는 깃이 달린 작업복 재킷 차림에 부드러운 펠트 모자 밑으로 약간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다른 학부모들의 풀먹인 깃, 검정 실크 넥타이, 기름 바른 콧수염, 빳빳하게 주름잡힌 바지들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온 아버지를 기피했다. 아버지에게 입을 맞추던 나는 급우들의 놀란 시선에 당혹감을 느꼈다. 어는 월요일, 첫째 시간이 끝나고 휴식 시간에 로제란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 아버지는 오페라 인근의 대형 식료품 상회 상장이며 트루빌에 별장도 있다는 것이다. 그 '거만'의 결정판은 자기 어머니가 위대한 외과의사인 도양한테서 돌기 제거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한 마디로 그들은 참으로 세상물정에 밝았다. 아이들이 우리 주변에 빙 둘러섰다. 로제가 주머니에서 2수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자, 이걸 네 아버지한테 드리고, 가서 머리나 깎으시라고 해." 그때 내가 돈을 받고 그 애한테 고맙다고 했어야 하는 건데, 부모님은 내게 자선을 받아들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을 들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잠깐 동안, 운동장의 나무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다음 순간 내가 얼마나 격하게 그 신성 모독 자에게 덤벼들었던지 급습 당한 아이는 미처 방어도 못 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아이의 목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그 애를 때렸다. 급우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 애를 질식시켜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학사담당자 앞으로 불려가 내가 한 행동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머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내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결국 며칠 조용히 지내라며 날 집으로 돌려보냈다. 적어도 난 그 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내가 다시 등교하자, 아이들 모두가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었다. 난 놀라는 한편 기분이 좋았다. 로제가 약수를 청했다. "네 아버지가 화가란 걸 말하지 그랬어!" 장 르누아르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년 1914년의 스냅사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미술비평가인 동시에 이 노화가의 숭배자였다. 어제 나는 가정 위대한 생존 화가인 르누아르의 최근 사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화실에서 등나무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그의 바로 뒤로는 돌려놓은 캔버스가 몇 점 보이고, 왼쪽 배경에는 시골 풍 찬장이 하나 있다. 르누아르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포개고 앉아, 왼손으로 의자를 꼭 잡고 오른손은 외쪽 무릎에 얹고 있다. 검은 바지에 재색 재킷, 점박이 타이, 중산모자 차림인 그는 반짝이는 눈이 놀라우리만치 표정이 풍부하여 삶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빨아들일 것 같아 보인다. 기욤 아폴리네르 '파리 주르날' 1914년 7월 13일 화가들의 눈에 비친 르누아르 재능과 진솔한 인격을 겸비한 덕에 르누아르는 인상파 동료와 젊은 화가들을 비롯해 많은 화가 친구들을 사로잡았다. 세잔 '엑스(엑스프로방스)의 까다로운 거장' 폴 세잔이 1902년 7월에 쓴 편지에 들어 있는 글이다. 나는 모든 생존 화가들을 경멸하지만 모네와 르누아르는 예외이다. 드가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에드가 드가와 대화하는 형식을 빌려 쓴 글이다. 드가는 플레네르풍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블라트):하지만 르누아르도 모네와 마찬가지로 야외 작업을 하지 않았던가요? 드가:르누아르라, 그 사람은 경우가 달라요.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죠. 색색의 실뭉치를 가지고 느는 고양이, 당신도 봤을 겁니다. 파리의 내 화실에 있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여 드리죠. 그 그림은 색조가 선명하고....... 드가는 공상에 잠긴 듯했다. "르누아르라, 우린 더 이상 서로 만나지 않소!" 앙브루아즈 볼라르, '세잔, 드가, 르누아르에게 들은 얘기', 1938년 고갱 폴 고갱의 이 얘기는 1928년에 처음 인용됐는데 그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는 법도 모르면서 잘 그리는 화가, 그가 바로 르누아르이다........ 요술을 부리듯 아름다운 점 하나, 애무하는 듯한 빛 한 줄기로도 충분히 표현을 한다. 뺨엔 마치 복숭아처럼, 귓전을 울리는 사랑의 미풍을 받아 가벼운 솜털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앵두 같은 입술은 한 입 깨물고 싶고 진주 같은 미소 속엔 작고 희고 예리한 아이의 치아가 드러난다. 아돌프 바슬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928년 모네 제프루아에게 보낸 1919년 12월 8일자 서한에서 모네는 애통함을 표했다. 르누아르의 죽음은 폭풍처럼 나를 강타합니다. 그와 더불어 내 인생의 한 부분도, 젊은 날의 투쟁과 열정도 사라졌습니다.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그룹의 유일한 생존자로 이렇게 살아 있다니. 다니엘 빌덴슈타인, '클로드 모네, 일대기 및 카탈로그 레조네', 1985년 보나르 내가 르누아르의 짧은 편지를 받은 것은 '르뷔 블랑수'(1898)에서 낸 작은 책에 들어갈 필화 몇 점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고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는 내 내 그림을 좋아한다고 썼다. 자네에겐 매력적인 구석이 있으니 그걸 소홀히 하지 말게, 앞으로 자네보다 훨씬 담대한 화가들과 마주치더라도 그 재능은 소중한 것이다....... 이것이 르누아르가 한 무명 신인에게 쓴 편지의 개요이다. 나는 르누아르가 아직 건강이 좋을 때 알게 되었다. 그가 우리 일행의 일원으로 점심을 같이하러 플라스 클리시의 한 레스토랑에 갔을 때였다. 재색 양복을 입은 여윈 체격에 모자를 쓴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농담도 했다. 그는 우리를 지나치게 진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훗날, 나는 코랭쿠르가 그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때에는 가브리엘이 상근 모델로 일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르누아르의 손병이 재발해서 그녀는 간병인이 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자 작업실에 있던 친구들이 나가버렸다. 르누아르도 직접 나갈 일이 생겼지만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어서요, 어서 소변을 보세요." ...... 말년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사실인 것 같지 않은가. 보나르? 우린 윤색을 해야 한다는 얘기 말이야." 그 얘긴, 윤색이라 하면 외국의 상투적인 수법들이나 미학 이론들을 도입해 누군가의 시각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골치 아픈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자신만의 장대한 우주관을 창출해 냈던 것이다. 그는 본성에 따라 작업했고, 모델과 빛-보다 열정적인 순간들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비하면 다소 무디긴 하겠지만-에 그것들을 투사할 수 있었다. 나는 르누아르를 조금 엄한 아버지쯤으로 생각했다. 피에르 보나르 '르누아르에 대한 기억들', (코모에디아) 1941년 10월 18일 마티스 앙리 마티스는 "르누아르는 자기 그림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마티스는 그의 작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다음은 그가 쓴 오슬로 인상파전의 카탈로그 원문 가운데서 발췌한 내용이다. 일단 시도했다 하면, 인생을 대하는 자신감과 겸손한 기질 덕분에 그는 관대하게도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뛰어난 재능으로 축복 받고 그 재능에 감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겼던 한 화가를 만나게 된다. 앙리 마티스, 프랑스 미전 카탈로그 오슬로, 1918년 드니 이 거장이 카녜에 머물 때 방문한 적이 있는 로리스 드니는, 르누아르가 세잔의 그림을 어떤 수집가의 집에 들여놓기 위해 썼던 술책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드니는 "그의 예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세잔에겐 금욕주의 같은 게 있다. 반면 르누아르는 인생이나 그림에 대해 그처럼 확고한 생각을 갖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르누아르는 세잔을 존경했다........ 그는 세잔의 그림 중 쇼케가 처음 구입한 그림을 쇼케네 집에 들여놓기 위해 애썼던 얘기를 즐겨 했다. 쇼케 부인은 세잔의 그림을 무척 싫어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쇼케가 구입한 그 그림을 루나아르가 보관하기로 하고, 르누아르가 쇼케 부인 앞에서 세잔의 칭찬을 늘어놓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니까, 르누아르 선생, 당신은 세잔 그림의 열렬한 숭배자료?" 르누아르가 대답했다. "제 집에 세잔의 멋진 그림이 한 점 있어요. 몇 군데 흠이 있긴 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이죠." "그림 내일 그 그림을 가져와 보세요." ...... 결국 쇼케 부인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지만 그녀는 몹시 놀랐다. "하지만, 마리, 마리! 이건 내 그림이 아니야. 르누아르 씨 거란 걸 당신도 잘 알면서," 그러나 르누아르는 그 농담이 꽤 오래 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쇼케가 없는 틈을 타 그의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부인은 내막을 모르는 것처럼 하세요. 남편을 얼마나 기쁘게 해줄 수 있겠어요!"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세잔의 그림을 쇼케 집안에 걸 수 있었다. 모리스 드니, '르누아르' (라 비), 1920년 2월 1일 비평계의 반응 "나는 다른 화가들을 모조리 헐뜯지 않고서는 한 화가를 칭찬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이 싫다." 생애 중 반세기 이상 동안, 르누아르는 많은 비령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는 지독한 것들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자신의 작업이 신성시되고 미술사의 한 장으로 논의되는 것을 살아 생전에 목격할 수 있었다. 르누아르에 관한 다음의 글들은 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리즈, 매력적인 파리 처녀 자샤리 아스트뤼는 바티뇰파의 마네, 바지유, 졸라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1968년에 그가 남들보다 앞서 르누아르의 작품을 언급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르누아르의 '리즈'는, 아주 낯설고 강렬한 표현력으로 유명한 '올랭피아'에서부터 시작된 저 특이한 3부작의 완결작에 해당된다. 마네의 뒤를 이어 모네가 '카미유'라는 초록색 드레스에 장갑 낀 미인을 탄생시켰다....... 셋 가운데 가장 점잔 빼는 '리즈'가 등장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불로뉴 숲에 선 매력적인 한 파리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조롱하고 비웃는 듯, 다소 서투르게 '귀부인' 행세를 하며, 그곳에 펼쳐져 있을지도 모를 무도회, 야외 카페, 신식 레스토랑, 괴상한 나무로 만든 재미있는 식당 등등을 외면하고 그늘진 숲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다. 이것은 독창적인 이미지로, 대단한 매력이 있다. 아름답게 표현된 효과, 색조의 섬세한 조걸, 단일화되어 분명한 전체적인 인상, 잘 구상된 명암, 이 그림에 깃들인 기술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퍽 특이하고 흥미로운 기법이다. 전체적인 매력이 빛에 좌우되는 주제로 작업했음을 감안할 때, 이보다 더 명쾌하게 그려내기도 힘들 것이다. 햇빛 받은 백색이 더할 수 없이 맛깔스럽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 그 섬세한 뉘앙스와 눈에 띄게 가벼운 감촉에 매료당하게 된다. 자샤리 아스트뤼, '화려한 스타일, 르누아르', (레탕다르), 1868년 6월 27일 글레르 선생의 방탕한 제자 '아르티스트'의 책임 편집자였던 아르센 우사예는 다작의 문필가였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행정관에 이어 지방 미술관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한 이 사람 역시 모네와 르누아르의 최초의 후원자 중 하나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자연을 위한 자연에 더 관심을 쏟은 이 그룹의 진정한 두 거장은 모네(마네와 혼동해선 안 된다)와 르누아르이다. 이들은 오르낭의 쿠르베처럼 붓질이 야만적일 정도로 정직한 거장들이다. 모네를 낙선시킨(살롱전의) 심사위원단에서 다행히 분별력을 발휘하여 르누아르를 입선시켰다고 들었다. 아시다시피 이 화가는 불 같은 이질을 들라크루아도 서명했을 법한 '알제의 여인'과 같은 작품에 찬란하게 토해 낸다. 그의 스승 글레르가 봤다면, 자신만의 기법으로 과감하게 그림으로써 모든 문법규칙을 조롱하는 이런 방탕한 아들을 내가 낳았나 하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글레르 역시 위대한 예술가이므로 그 표현 형식이 어떻든 간에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르누아르와 모네의 이름을 기억해 두라. 나는 화랑에 모네의 '초록 드레스의 여인'과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 초기작을 한 점 갖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증할 것이다. 뤽상부르 미술관이 아무 편견 없이 모든 그림들에 문을 개방하게 되는 날 말이다. 아르센 우사예 '아르티스트', 1870년 6월 1일 '낭만주의적 인상파' 작가이자 미술사기인 필리프 뷔르티는 인상파를 옹호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이다. 르누아르는 분명히 인상파의 한 사람이다. 좀더 정확하게 구분한다면 '낭만주의적 인상파'라고 할 수 있다. 민감한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것을 싫어한다. 그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자, 벤치, 탁자)을 색다른 접근법으로 강조함으로써, 춤추고 얘기를 나누는 등장인물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움직임을 부여할 수 있었고, 미동하는 태양 광선의 자리를 잡아줄 수 있었다. 현실에 없는 현실감을 전체 장면에 불어놓은 것이다. 우리의 친구 스퓔러의 초상을 보면 이목구비를 표현하는 데 견고함이 부족하지만 그의 표정은 강렬하다. 생각하는 눈에다 살빛이 생생하다. 도데 부인과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화들은 실물과 똑같다. 사마리 양의 초상화는 쾌활한 몸종 역을 맡은 여배우의 얼굴이 잘 묘사되고, 무대의 분위기가 적적하게 살아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프라고나르의 저 생생한 스케치들까지 들춰보게 만든다. 프랑스인의 기질이 초상화에 적용됐을 때 어떤 유사점을 보이는지 살펴보기 위해 말이다. 필리프 뷔르티, '인상파전' '라 레뷔블리크 프랑세즈' 1 1877년 4월 25일 무지개색이 있는 캔버스들 작가인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는 1880-1890년 사이에 가장 활약이 켰던 미술 비평가이다. 1883년 샤르팡티에는 그의 비평집 '아르모데른'을 발간했다. 벨벳 같은 살결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반사광, 머리칼과 의복 위에서 춤추는 햇살의 장난에 이상하게 매료되어 버린 르누아르는 자신의 인물들을 그야말로 햇빛으로 적셔오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스런 뉘앙스나 멋진 무지개가 캔버스 위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것을 목격하는 짓과도 같다! 이 그림들이야말로 살롱전에서 내놓은 가장 운치 있는 작품들이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1881년 살롱전' (아르 모데)', 파리, 1883년 "스탕달에 버금가는 심오한 통찰력!" 일찍이 인상파의 후원자가 된 옥타브 미르보는 풍자적이고 예리한 비평문들로 인상파를 변호했다. 대단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그는 모네와 반 고흐의 작품들을 소장한 바 있다. 여자는 우아함과 부드러움, 매력, 꿈, 교태를 얼마든지 자아낼 수 있다. 그리고 신비와 병적 상태가 얼마든지 있다. 심연처럼 깊어 설명하기 어려운 그녀의 표정과 '향내 감도는' 살결의 광휘, 순결한 욕망과 희망이 피어나는 열여덟 살의 사랑스러움,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뭇잎의 자줏빛 그림자를 미동시켜 가벼운 드레스 위로 따라오게 해 공원의 그늘 밑으로 천천히 걸어갈 때의 그녀의 우울한 기분, 등을 구부리고 가슴을 출렁이며 흩날리는 순금발의 머리칼을 왈츠 추는 사람의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그가 당기는 대로 몸을 맡길 때의 그녀의 자유분방함,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뾰로통하게 극장 관람석의 찬란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그녀의 태도, 그녀의 눈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도 허공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고, 그녀의 귀는 모든 것을 들으면서도 술렁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결코 현실이 되지 않을 이상 속의 꿈, 열정의 비참함이 시작되고 열정의 혐오감은 끝이 난다. 이 잔인하고 매혹적인 여인이 낭송하는 사랑과 잔인함을 모두 담은 시, 그녀는 저 스스로 드러냈다가 저 스스로 숨어버리고, 그것을 다 알고 달랠 줄 아는 여자이다. 이 모든 것을 르누아르는 이해하고 포착하고 표현했다. 그는 진정 여자의 화가이다. 기품 있어 보이다가 감정적이다가, 지혜롭다가 모자라다가, 번갈아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그의 여자는 언제나 우아하다. 그녀의 눈에는 섬세한 감성이 깃들여 있고, 어루만지는 손은 키스처럼 가볍고, 통찰력은 스탕달의 그것만큼이나 심오하다. 그는 육체의 형체나 어린 카네이션의 섬세한 무늬와 화려한 색조만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모습까지도, 마음속의 '음악적 움직임'과 넋을 빼는 신비감을 표출하는 영혼까지도 그려낸다. 그의 인물들은 첨단의 화가들이 보여주는 인물과는 달리 겹겹이 입힌 물감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맑은 농담이 담긴 음계와 색상의 모든 멜로디와 빛의 모든 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노래한다. 옥타브 미르보, '르누아르' (라 프랑스), 1884년 12월 8일 "재잘대는 예쁜 장난감"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의 친구이자 반 고흐를 발굴한 알베르 오리에는 상징주의 비평가의 전형이었으나 요절했다. 우주가 그를 위해 조성해 놓은 광대하고 어여쁜 장난감 시장에서, 르누아르가 특히 즉각적으로 끌린 것은 분홍 자기 같은 살결에 아른아른하고 화려한 새틴 의상을 걸친 귀여운 인형들이었다. 사과 빛으로 물든 뺨과 변함 없이 웃는 모습의 빨간 입술과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짙푸른 눈이 그를 매혹시켰다. 그는 아름답고 귀여운,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재잘대는 여자를 그리고 싶었다. 그것의 영혼은 자주 멈춰버리곤 하는 시계의 내부장치와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짐작했다....... 가장 확실하게 인공적인 특성을 가진 것들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기분 좋은 모든 기계적인 유흥 가운데, 고상한 모든 인공적 존재들 가운데 있었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것들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유혹했다는 점이다....... 르누아르가 세계와 여성을 그와 같이 이해하고 바라보았다면, 그가 단순히 '예쁘고' '피상적인' 작품 세계를 창조한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피상적이란 것, 그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심오하다. 만일 이 화가가 자기 모델들의 지성을 전적으로 억눌렀다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림에 자신의 지성을 모조리 쏟아 부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 지성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유별난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쁘다'란 문제도, 물론 그것은 그의 작품의 한 성질이긴 하지만, 유행을 쫓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추구하는 참기 힘든 '예쁘다'와는 다르다. 르누아르의 '예쁘다'는 가장'의 경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탁월함과 동일하고, 심지어 불가능하기까지 한 '예쁘다'로서 놀랄 만큼 흥미롭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로 그 지나침에 있고, 다음으로는 그것이 철학적인 '예쁘다', 상징적인 ' 예쁘다'로서 이 화가의 영혼과 관념과 우주론적 믿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앞에 체계화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사실 예쁜 외면들을 다루는 방법 외에 달리 무슨 수로 사물과 존재를 간파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존재와 사물의 유일한 목표가 자신의 아이의 영혼, 자신의 화가의 영혼을 매혹시키고 기쁘게 해주고 재미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알베르 오리에, '르누아르'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1891년 8월 그림: 사물을 본 결과 르누아르에게 충실했던 옥타브 미르보는 1913년 베르냉 죈 화랑에서 연 르누아르 회고전을 맞아 이 노화가에게 감동적인 경의를 표했다. 르누아른가 해마다 완성한 작품들을 총괄한 이 전시회와 책에서 우리는 그 영광이 전세계인의 갈채 속에 굳건히 뿌리내린 화가들과 정확히 같은 반열에 오른 그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작업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들 가운데란 것도 알게 된다. 그의 그림은 그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다른 화가들은 스스로에게 문제를, 대단한 문제들을 설정해 놓았다. 그리곤 인생의 목적과 한계, 예술과 인생의 관계, 인생에서 예술의 자리와 예술에서 인생의 자리에 관해 우리에게 과장된 사색들을 제공해 주었다. 미학자, 비평가, 철학자, 선구자, 현학자 할 것 없이 모두들, 자기를 낮추어 세상을 구할 것도 아니면서 우리에게 세계를 설명하려 든다. 그들은 무슨 문제든 해결해 왔다. 마치 인생이 무슨 문젯거리인 것처럼, 인생 자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인생의 해답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림이란 거의 자연에서 기쁨을 추출해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르누아르는 그림을 그려왔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젊은 시인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림을 그려왔다. 그렇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언제부터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고 얘기하게 되었는가? 당신과 내가 숨을 쉬듯 르누아르는 그림을 그린다. 그에게 그림은 사물을 본 결과이다. 다른 이들의 눈길은 방황하고픈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손은 자기 눈길이 머물렀던 기쁨을 공간에 기록했다....... 르누아르의 작업은 매일같이, 달마다, 해마다, 마치 꽃에서 꽃잎들이 열리듯 혹은 과실이 익어가듯 명료하게 발전해 왔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운명에 뭔가를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부여한 적이 없다. 그는 살면서 그려왔다. 자신의 일을 해왔다. 아마도 우울한 그림은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유일하고도 위대한 화가일 것이다. 옥타브 미르보 '르누아르'(전시회 카탈로그), 1913년 불라르: "르누아르가 내 초상화를 그렸다"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른는 세잔, 드가, 르누아르에 관해 쓴 책의 저자로도 유명한. 조르주 베송의 주장에 따르면 르누아르는, 보라르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담들을 낚아채 가지고 "그것들을 기록하려고 자기 서재로 급히 달려갔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1920년에 첫 발간된 아래의 원문은 그의 어조를 잘 전해 준다. 볼라르는 신뢰성이 부족한 증인으로 드러났지만 역사가들에게는 그의 저서들이 중요한 (단, 주의해서 활용해야 할) 자료였다. 나는 벌써 몇 차례 포즈를 취했다. 그는 내 모습을 석판화 한 점과 유화 세 점에 담았다. 그중 하나는 대단히 훌륭하다. 그 작품(1908년작)에서 나는 탁자 위에 양 팔꿈치를 대고 마욜의 조상을 쳐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나는 그 그림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건 르누아르가 청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베른슈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1910년) 전까지 얘기이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나는 그것과 똑같이 청색의 조화가 두드러진 내 초상화를 갖고픈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르누아르도 이에 동의했지만 조건이 있었다. "자네가 내게 감명을 줄 만한 청색톤 의상을 입고 오면 해주지, 알겠나, 은색 반짝이가 들어간 금속성 청색 말이야." 나는 청색에 푹 빠졌다. 그러나 내가 괜찮다 싶은 옷을 입고 가면 르누아르는 "아니야, 맘에 들지 않아,"라고 말했다. 1915년 나는 레콜레트에서 며칠을 보냈다. 초상화 건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그 집으로 가는 길가에 줄지어 선 오렌지나무 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볼라르!" 르누아르가 야외로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그랑드 루이즈'와 정원사 밥티스탱이 든 안락의자에 실려오고 있었다. 모델은 캔버스를 들고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짐꾼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르누아르가 모델에게 소리쳤다. "그렇게 빨리 가지 마, 마들렌, 내 그림을 좀 봐야겠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이 주일 넘게 밖엘 나가지 못해서 시야를 새롭게 틔울 필요가 있었네....... 마들렌을 모델로 뭘 시작해볼 생각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내 우산을 잊었지 뭔가. 태양은 마술사야! 옛날에 내 친구(로테)와 함께 알제의 전원에 있었을 땐데, 우린 문득 당나귀를 탄 멋진 인물을 발견했지. 그러나 가까이 오는 걸 보니 그 사람은 그저 거지일 뿐이었어. 햇빛 때문에 그의 넝마 같은 옷이 보석 달린 옷처럼 보였던 거지." 모델은 그림을 나무에 기대어 세웠다. "별로 나쁘지 않지, 응?" 르누아르가 한쪽 눈을 약간 찡긋하게 말했다......."불행하게도 내 그림은 아파트의 빛 속에서 보면 어두워 보일 거야. 하지만 화실에서 '고생'하고 나면 짧은 기간 내에 완벽한 광휘를 되살려낼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화실에 도착했다. "볼라르, 내 '여의사'를 불러주게!"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말했다. "난 그 '간병인'이란 말이 영 낯설어!...... 자네랑 작업 좀 해야겠어....... 저 의자에 가 앉게....... 자넨 지금 특이한 빛을 받고 있군. 하지만 훌륭한 화가라면 어떤 류의 빛에서든 작업할 수 있지....... 손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자넨 모를 거야. 자, 여기 있는 클로드의 종이 호랑이를 잡든지 난로 앞에서 자고 있는 저 고양이를 택하든지." 나는 고양이를 택했고 그놈의 환심을 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녀석은 잠시 가르릉거리더니 내 무릎 위에서 잠들어버렸다. '여의사'가 팔레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르누아르가 물감 이름을 대면 그녀가 튜브를 짜주었다. 팔레트가 준비되고 그 간병인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주자 르누아르가 소리쳤다. "그리고 내 '엄지손가락', 그걸 잊었잖아." 나는 내 초상화 작업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의사'가 자기 앞치마 호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을 찾아냈다. 르누아르는 무대장치는 전혀 염두에 없는 듯 곧바로 캔버스를 '공략한다'. 눈에 띄는 건 온통 점들이고 점들이 계속 찍히다가 어는 순간 붓질을 하자 갑자기 주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그의 손가락들은 죽어버렸지만 르누아르는 아직도 예전처럼 한몫 해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르누아르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보라구, 볼라르, 손은 그림 그리는 데 필수적인 게 아니야! 손이란 똥이나 마찬가지라구!" 앙브루아즈 볼라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920 "그가 전달하는 기쁨" 역국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는 1910-1912년 런던에서 인상파전을 두 차례 열어, 영국 해협 맞은편에서 프랑스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위대한 현대 화가들 중 특히 르누아르는 자기 자신의 감성을 맹목적으로 신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특정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기쁨과 그가 전달하는 기쁨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에서 명백히 좋은 면들을, 인간이란 동물 중에서도 어린이를, 햇빛과 하늘과 나무와 물과 과실을 열렬히 좋아했다. 그것은 모든 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다만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방식이 남달랐다. 그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욕구를 감동으로 대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초연한 자세로 그것들을 좋아했다. 이 같은 초연함에 얼마나 철저하게 의지했던지, 그는 자신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바로 사랑스러운 장면이라고, 현대의 다른 어떤 천재도 감히 하기 힘들었던 말까지 대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그처럼 급속하게 널리 호평받게 된 데는 그의 초연함이 필요한 적정 선을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이 주효했다. 그의 감성은 감동으로 변형되는 지점에 머물러 있다. 또한 그 감성은 당연히 그 내부에 보편적인 미적 정조를 내포하고 있지만, 소박한 태도에서 나오는 충만감과 직접성 같은 것을 보유하고 있다. 르누아르가 순진하다거나 우매하단 뜻은 아니다.......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꽃 한 송이, 한 타래의 머리칼에서 느낀 희열을 단편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로저 프라이, '르누아르' (비전과 디자인) 1920년 세잔, 르누아르, 여인, 그리고 관능성 화가이자 이론가인 모리스 드니는 르누아르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르누아르는 드니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르누아르를 위한 추도사를 듣고 난 그는 세잔과 르누아르의 예술을 대조시켜 끝맺은 장문의 성명서 형식의 글을 한 편 썼다. 그는 1922년 자신의 저서인 '누벨 테오리'(신이론)에서 이 문제를 또 한번 언급했다. 세잔이 자신의 정육면체와 구와 원주를 에스파냐 교사 같은 엄격함을 가지고 주장하는 데 반해 르누아르는 수평면들 사이에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달래듯이 유도해 냄으로써 스스로를 즐겁게 만든다. 전자는 위대하지만 서투른 장식가인 동시에 논리가이다. 후자는 자신의 상상력에 몸을 맡겨버리는 숙달된 관능주의자이다. 세잔은 다소 경멸하는 투로 우리에게 말한다. "르누아르라, 그래, 당신은 뭘 기대하는 거지? 그는 파리 여자들을 그렸다구!" 그와 달리 세잔의 여자들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 이외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복되는 구도에다 대상물이 앉아 있는 자세도 엉망이지만, 그가 모사를 하든 상상으로 그리든, 그것은 모두 일정한 양식이 있는 완결된 그림들이다. 또한 르누아르의 말처럼,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하얀 캔버스 위에 두 번 칠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두 화가 모두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성숙해졌다. 그들의 색상이 무르익은 것이다. 르누아르는 포도주색과 붉은 벽돌 색을 결합하는 대담한 색상 사용이 줄어들고 황금색 색조를 띠었다. 세잔은 마치 벽돌과도 같은 견고함을 띠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호수처럼 투명하고 비단같이 아른거리는 쪽으로 변해갔다....... 예술의 목표는 즐거움이다. 세잔 이래로 즐거움은 주로 지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옛날의 미학에서 지성과 관능은 결코 성치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림이 자연의 모방과 서로 대처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도 저 행운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리고 르누아르의 예에서 진실과 감정, 성식과 온건을 맛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자. 예술의 세계, 그곳에선 모든 것이 질서와 미일 뿐 풍요, 정적, 관능만이 있을 뿐. 나는 질서를 좋아한다. 그러나 다면체나 원형, 머리 없는 여인과 코 없는 얼굴들로 조직되고, 서로 상치되는 더럽고 탁한 색상들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그림에서 관능미가 차지하는 역할이 너무도 쉽게 잊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림작업의 화려함과 풍부함까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관능미마저도. 르누아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모리스 드니, '르누아르', 1920년 2월 1일, (누벨 테오리), 1922년 반스: 경계의 확장 미국의 갑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동시에 르누아르의 든든한 고객이었던 앨버트 C. 반스는 세상이 이 화가의 독특한 능력을 알아주길 바랐다. ......모네의 감수성과 관심은 사실상 야외의 빛과 색상 효과란 영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그의 감각은 새로운 충격을 받을 때에도 지난번의 반응과 유사한 방응을 일으키곤 했다. 또한 선택과 해석도 번번이 자신의 고정된 습관과 제한된 배경의 단조로운 지시에 따랐다. 따라서 시야를 확장해 다음 것을 좀더 풍부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르누아르도 자연에 대한 인상파적 해석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모네의 기술적 방법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각에 와 닿는 충격과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것에 대한 그의 해석은, 자기 비전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감수성과 통찰력을 확장하는 데로 나아갔다. 이렇게 해서 인상파 형식이 르누아르에 이르러 보다 풍부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느데, 그것은 그의 예리한 지각력과 자유분방한 수용력이 인상파 형식에 깃들인 가능성을, 그것을 처름 주창한 이들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가능성을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모네는 일련의 풍경화에서 대단히 다양한 주제 접근법을 취했다. 특히 같은 주제를 하루 중 여러 시간대별로 조명했을 때의 특징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 장면과 그 사람의 개성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특성은 모두 똑같다. 다시 말해, 모네는 삶의 특정 양상에만 눈떠 있었고 자신의 특화된 비전의 범위를 넘어서는 곳까지 도달하는 일은 드물었다. 반면에 르누아르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지각력을 끝없이 펼쳐 나갔다. 그는 새로운 회화적 효과와 연계성, 관계, 가치, 의미 같은, 삶의 행위들의 넓은 영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위대한 회화 전통과 깊이 동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발견하고 선택하고 확립하고 조직하고 표현했다. 모네와는 대조적으로 르누아르는 똑같은 지점의 풍경을 무수히 여러 번 그려도 각각의 변형작 모두에게 자신의 정신과 감정의 추이가 본질적으로 차별성 있게 나타나도록 그릴 수 있었다. 앨버트 C. 반스와 비오레트 드 마지아 '르누아르의 예술', 1935년 르누아르에겐 무엇이 있나? 20세기 미국 비평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인 클레먼트 그린버그가 르누아르의 그림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밝혔다. 르누아르에 대한 내 반응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서 막강함에 가까운 것을 발견하고, 또 다른 날엔 유약함에 가까운 것을 본다. 한순간, 찬연하게 빛나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 명멸하는 데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는 날엔 더할 수 없이 견고해 보이다가도 그 다음날 보면 다만 부드러움뿐이다. 그의 그림들에는-한결같이, 또한 후기의 그림들일수록 특히 더-그것들을 비춰 주는 조명에 대한 특이한 감수성이 깃들여 있는데, 바로 이 점이 내가 그에 대해 이렇게 느끼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를 들라면 인상파 미학에서는 빛과 거리를 들겠지만, 이 얘긴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 관람의 조건에 대해 일반 화가들 수준 이상으로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 이는 인상파 중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르누아르의 그림만이 예외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상주의 덕분이 아니라 르누아르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나는 빛과 어둠을 다루는 그만의 특수한 방식-명암의 대비가 순수 색상 대비와 아주 어렵게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에서 그 같은 설명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의 그림을 직접 조명이나 밝은 빛 아래서, 혹은 가까이서 보았을 때 희미한 경향이 있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주제가 인상파의 범주를 탈피해 다양성을 보인다는 점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한 느낌이 그처럼 자주 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이 주제 저 주제로 손쉽게 자주 옮겨 다녔다. 그러한 시도가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1880년경의 수작이라는 풍경화들조차도 일정한 완결성이 결여돼 있으며...... 그가 비인상파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주제들인 단독 인물, 정물, 꽃 장식을 다루면서 그래도 그는 꾸준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한편, 그의 노년의 수작 중 일부-그의 전 작품 가운데 가장 수작이 되겠다-는 집단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르누아르와 너무 근접해 있어서 그의 독특성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림의 질과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한 작금의 견해 중 상당 부분이 그의 미술에서 나왔는데도 그의 미술이 정작 당대에는 다른 인상파들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기법'이 조야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견해는 절충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밝은 색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전통적인 현대 사조의 주요 항목으로 자리 매김 되었다. 클레먼트 그린버그, '르누아르' (예술과 문화), 1950년 미술관 소개 세계적인 미술관이라면 어느 곳이나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약간씩은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름난 컬렉션을 갖춘 곳들로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런더늬 내셔널 갤러리,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베를린의 국립화랑, 에센의 포크뱅 미술관, 스톡홀름의 국립미술관, 상파울루 미술관,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시카고 미술협회, 보스턴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화가의 가장 위대한 걸작 두 점은 뜻밖에도 다소 덜 유명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스'('특별 관람석')는 런던의 코톨드 협회에 있고, '뱃놀이 일행의 오찬'은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에 있다. 르누아르 작품 컬렉션이 가장 잘 되어 있는 곳으로는 미국의 두 미술관을 들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주 메리온에 소재한 반스 재단에 180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 소재의 스틸링과 프랜신 클라크 미술협회에 30점 이상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22년에 설립된 반스 재단은 순수한 미술관이라기보다는 교육 시설에 가운데, 이는 재단 설립자인 앨버트 C. 반스의 뜻에 따른 것이다. 마네에서 마티스에 이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그림들을 갖춘 그의 컬렉션은 양이나 질 모두에서 각별하다. 이곳의 컬렉션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재단의 허가를 받은 학생들 및 재단과 재단 상속자들이 선정하는 일부 방문객들에게만 관람을 허용했다. 최근 들어 건물 복구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이 재단관리 관계자들은 반스 재단에 반입된 이래(그 가운데는 80년 이상 된 것들도 있다)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일부 명작들을 워싱턴 D.C.와 런던, 파리, 동경, 기타 도시들에서 전시하도록 처음으로 허용했다.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에 있는 스털링과 프랜신 클라크 미술협회는 싱어 재봉틀로 돈을 번 스털링 클라크의 자선에 힘입어 1955년에 설립되었다. 반스 박사와 마찬가지로, 스털링 클라크도 1차 세계대전 전부터 컬렉션을 조성하기 시작해 고전 미술품들뿐 아니라 19세기 전후의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의 그림들을 갖추어놓았다. 프랑스의 두 곳에는 이 화가의 기념관이 보존되어 있다. 카녜쉬르메르 소재 레콜레트의 그의 집은 원상태 그대로, 오래된 올리브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보존되어 있는데, 그 안에 이 화가의 작품 대여섯 점을 전시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을 1906년에 '르누아르 사유지의 매매 및 예술적 활용을 위한 위원회'와 알프스 해운국의 도움을 받아 칸P시가 조성했다. 인상파들의 섬으로 알려진 샤투의 시아르섬에 자리한 푸르네즈 레스토랑도 최근 그 본래의 기능을 회복했다. 르누아르 시대 때처럼 센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유명한 테라스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복원된 데는 '프르네즈 하우스 친구들 협회' 및 샤투 당국의 공이 컸다. 또한 샤투 당국에서는 이 레스토랑 내부에 기념관도 조성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