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 인간을 위한 건축 지은이: 장 장제르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박소영 제 1장 쥐라 산멕에 뿌리를 두다 1887년, 빠리 샹드마르스 광장에 300미터짜리 탑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탑이 곧 세계 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에펠탑이다. 그해 10월 6일, 프랑스 국경에서 몇 킬 로미터 떨 어진 스위스 뇌샤텔 지구의 라쇼드퐁에서 샤를 에두아를 자느레가 태어난다. 훗날 그는 르 코르뷔지에로 불리게 된다. 라쇼드퐁 스위스 쥐라 산맥의 혹독한 기후 속에서 1000미터 가까운 고도에 자리잡은 라쇼드퐁 은 시계 제조를 주산업으로 하는 인구 약 2만 7천 명의 작은 도시이다. 샤를 에두아르 의 아버지는 그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시계 문자방에 에나멜을 칠하는 칠공이었다. 부계 조상 들은 원래 프랑스 남서부에 살았는데, 종교전쟁을 피해 뇌샤텔의 산으로 피 난해 왔다. 샤를 에두아르의 어머니 샤를모트 마리 아멜리 페레는 피아노를 무척 좋아 했다. 그녀의 영향을 받아 샤를 에두아르보다 두 살위인 형 알베르는 훗날 음악가가 된다. 모계 조상 중 일부는 벨기에에 살았다. 1920년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그중 한 사람인 르 코르베지에의 이름을 따서 르 코르뷔지에라는 예명을 만들고, 자신의 글과 책, 나중에는 조형작품과 건축 프로젝트의 서명에까지 그것을 이용한다. 르 코르뷔지 에는 자신의 이름을 까마귀(르코르보)에 비유하면서 날카로운 선으로 까마귀의 실루엣 을 그리는 등 장난을 쳤다. 알핀 클럽 라소드퐁 지부의 지부장이었던 샤를 에두아르의 아버지는 등산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아들에게 숲과 계곡, 봉우리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가르쳐주었 다. 근면한 학생이었던 샤를 에두아르는 피아노 연습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데생에는 몰두할 때가 많았다. 열세 살 때 일반 교육과정을 마친 그는 시계장식과 조 각공예를 주로 가르치는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미술학교에서:특별한 스승 샤를 레플라트니에는 어린 샤를 에두아르의 앞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파 리 국립미술학교를 다니다 라소드퐁으로 돌아온, 이제 막 스물여섯 살이 된 청년 레플 라트니에는 화가로서 자연의 만물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제자들을 쥐라 산맥의 키 작 은 나무들이 우거지 숲과 너를 초원으로 데려가 그림을 그리게 했다. 1903년 미술학교의 교장이 된 레플라트니에는 이렇듯 일종의 자연주의적 흐름 속에 그만의 독특한 가르침의 자취를 남긴다. 이것은 19세기 말, 전통이나 아카데미 프랑세 즈의 영향을 벗어나면서 예술 창조의 쇄신을 가져온 '아르 누보'운동과 유사했다. 교역 의 증가와 가속화, 미술잡지의 배포가 증가한 덕택에 이 운동은 빠른 속도로 전유럽에 파고들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의 가레, 기마르,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벨기에의 호르타, 에스파냐의 가우디등이 가장 뛰어난 대표적 인물로 꼽혔다. 그 다음에는 글라스고의 매킨토시, 빈의 요제프 오프만과 오토 바그너, 독일의 판 데 펠데와 베렌스가 그 과도 함과 과장됨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근대 운동을 향한 과도기적 단계를 열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태어나 흠모하던 레플라트니에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소년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진정한 변화를 몸소 체험했고, 그것은 그의 개성에 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서 작업하는 동안 형성된 자연주의 경향은 그의 작품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추지만,자연의 영향은 그의 감수성, 그의 영감, 그의 탐구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진다. 첫 번째 건축:팔레의 저택 그림에 매력을 느끼던 샤를 에두아르는 레플라트니에의 반대에 부딪쳤다. 레플라트니 에는 그를 포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내 스승 중 한 분(그분은 정말 뛰어난 스승이시 다)은 나를 평범한 운명으로부터 슬며시 구제해 주셨다. 그분은 나를 건축가로 만들고 싶어하셨다. 나는 건축과 건축가들을 몹시 싫어했다...... 열여섯 살이 되자 나느 스승 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을 따랐다. 건축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하여 샤를 에두 아르는 레플라트니에가 건축과 장식을 가르치기 위해 1905년에 창설한 미술 장식 상 급과정에 입학한다. 그 2년 사이에 그는 처음으로 건축설계를 맡았다. 뛰어난 조각가 이자 미술학교 위원회 회원인 루이 팔레가 위뢰한 일이었다. 이탈리아 여행 하지만 샤를 에두아르는 시야를 넓힐 필요성을 느꼈다. 1907년 그는 팔레의 저택을 지어주고 받은 사례금으로 최초로 장기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조각을 공부하는 친구 레옹 페랭과 함께 그는 레플라트니에에게 여러 번 얘기를 들은 토스카나에 다다랐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피렌체에 체류했다. 그는 건축의 형태와 장식을 뛰어넘어, 그림을 통해 건축을 해독하고 그 조직과 논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날그날의 느낌을 수첩에 적었다. 이 잡다한 기록이 내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순 간순간 느낀 나의 느낌들이 들어 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고친다. 그렇게 함 으로써 더 잘 기억할 때가 많다." 그는 부모에게는 20여 통의 편지를, 그리고 스승에 게는 여행하고 방문하고 발견한 것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 다섯 통을 보낸다. 샤를 에 두아르는 이렇게 해서 평생 그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해결한다. 즉 그런 식으로 글쓰 기 훈련을 한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독서에 열중한 그는 역사가, 철학가, 시인들이 발견한 것들을 통해 사고를 넓혀왔다. 앙리 프로방살의 '내일의 미술', 러스킨의 '건축의 일곱 가지 등'과 ' 피렌체의 아침', 외젠 그라세의 '장식적 구성방법', 오웬 존스의 '장식의 문법', 텐의 '이 탈리아 여행기'는 그의 견해와 작업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다. 빈에서 파리로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피렌체를 떠나 라벤나, 볼로냐, 베로나, 베네치아로 갔다가 부다페스트와 빈에 머물면서 겨울을 나고, 짧은 기간이지만 요제프 호프만의 공방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뉘른베르크, 뮌헨, 스트라스부르, 낭시를 거쳐 파리에 도 착, 얼마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에콜가의 한 다락방에 자리잡는다. 이때 그는 살롱 도 톤(파리의 추계 미술전:역주)의 위원장이며 철골과 유리를 대량으로 사용해 최초의 백 화점인 사마리텐의 건축을 맡은 프랑츠 주르댕과 훗날 바뱅가에 흰 타일을 덮은 계단 식 아파트를 지은 앙리 소바주를 만난다. 리용 여행중에는 젊은 건축가 토니 가르니에 를 만나 '공업도시'에 관한 그의 작업을 보고 깊은 관심을 갖는다. 1908년 두 번째 파리 여행중에 방문한 외젠 그라세는 그를 페레 형제들에게 소개시 켜 주었다. 페레가의 오귀스트, 귀스타브, 클로드는 다른 철근 콘크리트 사용의 선구자 들-프랑수아 엔비크, 아나톨 드 보도, 쿠아네(이상 프랑스), 어니스트 레슬리 랜섬(미 국)-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재료에서 최대한의 구조적, 조형적 수단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때는 페레 형제들이 아직 그들의 대작들-1911년에서 1931년 사 이에 지은 샹젤리제 극장, 1934년에 지은 가구 창고, 또는 왕실 가구 보존판, 1937년 에 지은 건설박물관-을 선보이기 전이었지만 파리의 프랑클린가의 아파트(1903)와 퐁 티외가의 차고(1905)를 지으면서 철근 콘크리트에 대한 탁월한 기량을 이미 충분히 과시한 바 있다. 페레 형제들의 사무소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14개월동안 페레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한다. 거기서 그는 철 근 콘크리트의 가능성과 건축 창조의 새로운 방식을 발견했다. 건축은 기술적으로 가 능한 것과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담은 계획이 충돌할 때 제기되는 문제들을 논리적인 과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서 배운 형식적 인 개념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그는 점점 더 뼈저리게 느껴갔다. 스승 레플라 트니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깨달음과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 "파 리에 도착한 뒤로 저는 제게서 엄청난 공허감을 느끼고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불쌍 한 친구!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게다가 더욱 한심한 건 네가 뭘 모르는지도 모른 다는 거야.' 거기에 저의 엄청난 고민이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공부한 뒤 저는 건축에서 중요한 건 형태의 조화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 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그때까지도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결국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가 페레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간 것은 그의 개성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페레 형제들은 내게 채찍과 같은 존재였습니 다." 사무소의 반일제 근무와 병행하여 샤를 에두아르는 자신의 끝없는 지식욕을 충족 시킨다. 그는 비올레르 뒤크의 저작물을 읽음으로써 건조물의 구조적 합리성에 관하 개념을 흡수한다. 그리고 국립미술학교와 소르본에서 강의를 듣고 국립도서관과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박물관을 자주 관람하고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에 올 라가 몇 시간씩 보내기도 한다. 몇 차례 불화가 있었지만 오귀스트 페레와 르 코르뷔지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한다. 마르세유의 '위니테'라는 거대한 아파트 건설현장을 방문했을 때 오귀스트 페 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르 코르뷔지에의 중요성도 인정하는 말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는 두 명의 건축가가 있다. 다른 한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이 다." 제 2장 격변 1910년의 독일 답사여행과 1911년의 동방 여행르 통해 젊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서 5년을 더 보내고 난 후 에야 비로소 쥐라 산맥에 내린 자신의 뿌리를 잘라버리고 파리에 정착한다.(1917) 이 때부터 자느레 속에서 르 코르뷔지에가 솟아나기 시작한다.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페레 형제들의 사무소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문화적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라쇼드퐁에 연연한다. 1909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미술 학교 상급반 시절의 몇몇 급우와 함께 연합 작업실을 차린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예 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던 이 제휴관계는 실패로 돌아가 곧 해체되고 만다.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슈토처와 자크메의 저택을 짓는다. 이탈리아로 떠날 때 주문 을 받고 검토에 들어갔던 작업이다. 그는 또 라쇼드퐁 미술학교 건물의 설계도도 그린 다. 그때 그린 초안은 1929~1930년에 무제한 제작한 박물관 설계도 속에서 손질하고 1959년 도쿄에 세운 서양미술관 설계도에서 구체화된다. 독일 여행 1910년 4월, 그는 독일로 장기 여행을 떠난다. 그는 라쇼드퐁의 미술학교로부터 공 업생산 조건과 관련된 독일의 미술공예교육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 았다. 그래서 미술과 산업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 독일의 수많은 도시와 기업을 방문한 다. 그의 '독일의 장식미술 운동에 관한 연구'는 1912년 라쇼드퐁에서 발간된다. 그는 여기에 나온 개념중 몇가지를 1925년 발표한 주요 저서의 하나인'현대 장식미술'에서 다시 다룬다. 베렌스 사무소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베를린에서 1910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건축가 페터 베렌스 밑에서 일하게 된다.(훗날 그로피우스와 미스 판 데어 로헤도 그곳을 거친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건축술로 기대할 만한 것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는 유수의 사무소 조직을 처음 접하고 대기업이 건축에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첫 이탈리아 장기 여행, 파리 체류, 그리고 독일 횡단 으로 야기된 급격한 변화를 아직 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1911년 이루 어진 중부 유럽과 그리스,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준다. 동방 여행 1911년 5월 7일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동료이자 예술사가인 오귀스트 클립스탱과 여행을 떠난다. 당시 오귀스트는 그레코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근 1년간 계 속된 이 여행을 통해 두 친구는 지중해와 동방을 발견한다. 쥐라 산맥출신인 샤를 에 두아르에게 이것은 충격이고 계시이고 현기증이었다. 당시 그는 아마도 오랜 전부터 열망해 왔을 변화를 겪는다. "그때까지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막 전개되려는 삶 앞에서 독자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는 첫 번째 여행 이후 항상 가로 10cm, 세로 17cm크기의 작은 크로키 수첩을 갖 고 다니는 습관을 들였다. 일생동안 그는 검은색, 그리고 여든 가지 색 이상의 색연필 을 이용해 여러 가지 메모, 명세서, 스케치를 하며 그 수첩을 채워 나갔다. 그는 그렇 게 관찰과 사고를 축적해 간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내부로, 자기 자신의 역사 속으로 밀어넣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연필 작업을 통해 일단 사물이 내부로 들어오면 그것은 평생 거기에 머문다. 그것은 기록되고 새겨지는 것이다. "그는 부모에게 정기적 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지역신문인'라쇼드퐁 신문'에 실린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그는 시골 건축, 서민 건축, 무명 건축게 관심을 갖게 된다. 거기서 그는 그러한 건축에 내재된 본질적인 것, 자연과 대면한 인간의 요 구에 부응하는 해답을 찾고 싶어했다. 그는 그리스의 아토스산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수도사 생활과 그곳의 풍광, 건축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터키에서는 회교사원을 발 견한다. 지중해 건축의 눈부시게 희고 단순한 형태는 그를 사로잡았다. "단순한 기하학 이 입체-정사각형, 입방체, 구형-를 지배한다." 어린 시절 쥐라 산맥의 컴컴한 전나무 숲과 안개에 사인 계곡을 돌아다녔던 샤를 에두아르는 그 빛에 현혹되고 만다.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에서 이 여행은 절정에 이른다.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와 오귀스트 클립 스탱은 아테네에서 몇 주간 머문다. 미래의 르 코르뷔지에는 매일 아크로폴리스에 가 서 '직선적인 대리석, 수직 기둥, 해안선과 평행을 이룬 엔태블러처(고전주의 건축의 기둥위에 구축되는 수평부분:역주)' 를 바라보며 감동에 사로잡힌다. '햇빛 아래에서 입 체들이 보여주는 재치있고 정확하고 멋진 솜씨'를 넘어 그는 건축물이 지닌 정신력을 연구한다. 그에게 '정신의 순수한 창조... 감동적인 작품'인 파르테논 신전의 아름다움 과 힘은 조형의 정수만이 아닌 정신적 영역으로 여겨졌다. 라쇼드퐁으로 돌아오다 1911년 11월, 나폴리, 로마를 마지막으로 동방 여행은 끝난다. 피렌체 부근에서 샤를 에두아르는 1908년에 방문하여 너무나 감동을 받았던 에마의 샤르트르회 수도원을 또 한번 찾아간다. 그 뒤 그는 라쇼드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5년을 보내고 나서 최 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한다. 페레 형제의 사무소를 거치고 이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 고 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5년이라는 긴 시간을 머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샤를 에두아르는 스물 다섯 살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족, 스승 레플라트니에, 어린 시 절을 보낸 마을,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 미술학교를 떠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지중해와 동방에서의 깨달음이 가져온 변모와 열망을 가슴속에서는 자신 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공업생산이라는 근대의 상황에 맞는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에 새 학과를 만들고 싶어하던 레플라트니에는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와 지난날 그와 같이 강의를 들었던 조 르주 오베르, 레옹 페렝을 설득하여 학교일을 맡긴다. 그의 시도는 곧 실패로 돌아가 지만 에두아르 자느레에게는 여러 건의 건물 설계 주문이 들어온다. 1912년에는 라쇼 드퐁에서 가까운 르로클레 실업가 파브르 자코의 집을 짓는다. 1916년에는 두 건의 설계를 맡는데 하나는 또 다른 실업가 슈보브의 저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부로를 위 해 지은 자느레 페레의 저택이다. 맨 처음 지은 세 건물, 즉 팔레, 슈토처, 자크메의 저택에서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외부의 조형미를 우선시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내부 구조를 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1912~1916년에 지은 이 세 저택은 설계도에서 건물 정면의 구조가 규정되어 있다. 또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영향도 느낄수 있다. 훗날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프랭 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해 '질서, 조직, 순수한 건축 창조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평을 내린다. 돔-이노:하나의 건설체계 라쇼드퐁의 라 스칼라 극장을 정비한 일 외에도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몇 건의 설 계도 검토에 들어가지만 공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는 또 사회적 주거에도 관심을 보인다. 1914년 전쟁으로 플랑드르 지방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게된 그는 조립 할수 있는 구조상의 요소를 이용하여 건축 작업의 절차를 조정하고자 했다. 그의 너력 덕택에 다양한 지혀에서 다소 큰 규모의 집도 빠르게 지을수 있었고 주민들도 스스로 집을 완성할수 있게 되었다. 이 체계를 돔-이노라 불렀는데,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 스(domus)와 혁신을 뜻하는 단어(innovation)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 말은 한편으로 는 조각들을 차례대로 배열해 놓은 도미노 게임을 연상시킨다. 이 체계 역시 조립식 재료를 순서대로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 노릇은 곧 끝나고 건축활동은 계속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데생과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다. 그는 1912년 뇌샤텔에서 '돌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동방 여행 때 그린 열여섯 점의 수채화를 전시한다. 이중 몇 점을 골라 정기 적으로 작품을 제출하던 파리의 살롱 도톤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역사서, 예 술비평서, 시집을 손에 들고 다녔으며 모리스 드니의'이론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와 오귀스트 슈아지의 '건축사'를 다시 읽었다. 그는 '동방 여행'을 집필하기 위해 많은 메모와 기록을 모아 두었지만 이 책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966년에야 그 제목으 로 출간된다. 그는 '도시 건설'에 관한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책으로 발 간되지 않았다. 라쇼드퐁과의 이별 1917년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서른 살이 된다. 그는 이때 이미 라쇼드퐁과 르로클 에 여섯 채의 저택을 지었고, 그 지방의 여러 중산층 가정에서 환영을 받고 있었기 때 문에 그곳에서는 자기가 바라는 차원의 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예감하고 다른 길, 다 른 만남을 갈망한다. 이때 지성과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가 그를 끌어당긴다. 마침내 그는 라쇼드퐁을 벗어나 프랑스에 도착, 그곳에 정착한다. 이로써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그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 10여 년 동안 그는 보잘 것 없는 일반교육에서 출발해 맹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여행, 만남, 독 서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다. 고집 센 독학자인 그는 사물과 건축의 실재와 의미에 관해 더욱 날카로운 지식을 갖게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록하고 데생을 하고 글을 썼다. 그는 라쇼드포에서 받은 교육을 기반으로 조화, 건축, 건축가 의 역할에 관해 점차 다른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샤를 에두아르 자느에 안에서는 르 코르뷔지에가 곧 솟아나올 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제 3장 탄생 1917년, 파리에서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자신의 개성, 아이디어, 작업능력을 눈부 시게 입증한다. 그리고 1920년부터 르 코르뷔지에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 로부터 20년간 그는 조형 표현, 건축 창조,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 또는 저술 방면에 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1917년 드디어 파리에 도착한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생제르멩데프레 성당에서 그 다지 멀지 않은 자코브가 20번지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가 1933년에 파리와 볼로뉴의 경계 지점에 자리한 넝주세와 콜리가의 한 아파트로 아 내와 함께 옮겨간다. 지붕이 테라스식으로 된 이 아파트는 그의 설계로 완공한 지 얼 마 안 된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귀화하여 국적을 취득한지 세 달 만인 1930년 12 월 이본갈리와 결혼했다. 그 몇 해 전인 1923년에는 세브르가 35번지에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차렸다. 그는 그곳에서 사촌 피에르 자느레와 함께 일했다. 사무소에서 설계 한 설계도에 두 사람은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들은 1940년 결별했다가 1951년 인도 의 대규모 설계안들을 구현하기 위해 다시 손을 잡는다. 실업가 르 코르뷔자에 1920년까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안정되고 수지가 맞는 사업을 벌이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철근 콘크리트 응용협회라느 연구소에 출근했다. 이후 벽돌과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회사를 경영하지만 그만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공업 기술 연구협회'라 는 자기 자신의 연구소를 창설하여 건축과 관련된 적지 않은 절차와 요소를 창안해 낸 다. 1919년, 그는 섬유 시멘트(시멘트와 석면 섬유를 섞은 것:역주)를 주요 재료로 하고 둥근 지붕을 갖춘 모놀의 집의 설계도를 완성한다. 훗날 라 셀 생 클루의 '작은 집'과 자울의 저택을 지을 때 그는 모놀의 집에서 사용한 원칙을 다시 채택했다. 그는 노동 자들의 숙소 문제로 고심한다. 그리고 테일러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상품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의 하리화 방법을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회사 대표로서의 직무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사 업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진 못했다. 당시 프랑스느 건축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어려 운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회사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순수주의 1917년, 오귀스트 페레 덕분에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아메데 오장팡을 알게 된다. 오장팡과 우정을 쌓으면서 그는 사업과 창작열 사이에서 느끼던 불안과 괴로움에서 탈 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혼란스러울 때면 나는 당신의 조용하고 힘차고 명료한 의 지를 떠올립니다. 나이 차이라는 깊은 골이 우리 둘을 구분짓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제 막 연구를 시작하는 참이고 당신은 이미 그것들을 구현하셨으니까요." 오래 전부터 그는 데생을 계속해 왔다. 스위스 쥐라 산맥을 뛰어다니면서, 여행을 하 면서, 그는 데생과 수채화를 수없이 그렸다. 그는 스승 샤를 레플라트니에의 영향에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티스, 시냐크의 영향까지 받게 되었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만의 회화 표현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18년에 그린 그의 첫 번째 회화작품인 '난로'는 그 주제나 수법면에서 결정적인 방식, 하나의 선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구성의 엄격함과 빛의 강렬함은 1920년대를 풍미한 순수주의 계열의 회화와 건 축을 예고하고 있다. 그때부터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렸을 때 스승은 그에게 건축가가 되라고 설득했다. 일생동안 그는 점점 높아져만 가 는 건축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조형예술 가로서도 이름을 날리고자 노력한다. 아메데 오장팡과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순수 한 색의 매끄럽고 넓은 범위 안에서 간결하고 엄격한 기하학적 구조를 통해 질서와 조 화에 우선권을 주고 싶어했다. 그들은 기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입체 주의는 시대의 문제들과는 너무나 괴리된 것 같았다. 그들은 1918년에 '입체주의 이후 '라는 책에 공동 서명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천명한다. 자신들의 미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오장팡이 만든 용어를 다시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순수주의'이다. 이 말은 비 단 형식적인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 단순성, 자금 절약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도덕적 차원까지 두루 포함하는 것이다. 이후 거의10년간,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수많은 데생과 유화를 통해 일상생활의 평 범한 소재를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림으로써 순수주의의 구상과 주제를 밝히게 된 다. 그의 탐구의 목적은 건축물을 '기준선'위에서 조직함으로써 건축물의 조화와 통일 성을 이루려는데 있다. 그는 그림을 '평면이 아닌 공간'으로 인식하고, 따라서 건축 공 간에서 건설된 입체들이 연결되듯이 그림의 공간 안에서도 사물들이 서로서로 연결된 다고 본 것이다. 더군다나 조형 창조, 건축, 도시계획은 다양한 형태의 시각적 현상에 비쳐진 유일하고도 동일한 창조적 표현이 아니던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와 아메데 오장팡은 여러 화랑에서 그 들의 작품을 공동 전시한다. 그러다가 1925년에 둘은 그만 사이가 멀어지고 만다. 1920년에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페르낭 레제를 알게 된다. 그들은 긴밀한 우정을 맺었으나 점차 소원해졌다. 두 사람은 진보, 기술, 기계를 높아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하지만 레제는 기계화라는 표면적인 증상 뒤에 숨을 사회적 차원을 드러내려고 애쓴 반면 오장팡과 자느레는 순수주의에 미적, 이상적 가치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1926년까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그림에서 죽은 자연만ㅇ르 표현했지만 이제 그 는 조개껍데기, 동물의 뼈, 규석, 솔방울들 유기체의 특성을 지닌 새로운 소재, 시적 반응을 일으키는 소재 들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가장 복잡한 형태들, 변형된 소재들은 새로운 서정성을 표현한다. 그제서야 조금씩이나마 그리기 시작한 여인의 몸은 마치 조각이나 기념물처럼 엄격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레제나 피카소의 그림과 비슷하다는 평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사용한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이 단계에서 자연을 새롭게 표현하는 법을 찾기에 이른다. 이제 자연은 르 코르뷔지에 의 모든 형태의 작품의 특성인 질서와 엄격성에 복종하게 된다. 그가 일허게 긴 노정 을 걸은 것은 그가 성숙하는 과정이 그만큼 만만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림은 목격 자 없이 화가가 자기 자신과 벌이는 끔찍하고 치열하고 가혹한 전투이다. 전투는 내 부-마음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밖에서 보아서는 모른다." 잡지'에스프리 누보' 아메데 오장팡과 샤르 에두아르 자느레는 시인 폴 데르메를 알게 된다. 그들은 그와 함께 '에스프리 누보 : 새로운 정신' 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창간한다. 이 제호는 1917 년 11월 기욤 아폴리네르가 개최한 강연의 제목이었던 '에스프리 누보아 시인들'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 잡지는 1920년에 창간하여 1925년 폐간될 때까지 통권 28호를 발행한다. 이 잡 지의 기고자 중에는 아돌프 루스, 엘리포르, 아라공, 콕토의 이름도 들어 있다. 오장팡 과 자느레도 많은 기사들을 써서 여러 가지 가명으로 발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실제보 다 더 많은 저자가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샤를 에두아를 자느레가 르 코르 뷔지에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에게 '에스프리 누보'는 표현의 수단이자 효과적인 선동의 도구이고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킬수 있는 하나의 유용한 틀이었다. 그는 멋진 은유와 충격적인 말투를 구사하 면서 시대를 앞선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기계, 배, 또는 비행기의 아름다움과 힘을 좀더 효과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그는 글과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건축을 향하여 1923년 르 코르뷔지에는'에스프리 누스'에 발표한 자신의 글 10여 편을 모아'건축을 향하여'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근대 건축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세 계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큰 몫을 담당한다. 그의 사고의 핵심은 이미 이 책에 모두 들어 있다. 여기서 그는 현대 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상황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공업이 그러했듯이 건축 도 그런 새로운 상황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건축이 입체감과 표면에 의 해 인지되는 것이라면 건축가는 "기준선-전횡을 막는 확실한 대비책"체계에 따라 설계 단계에서 최대한의 엄격성을 발휘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알아보기 쉬운 원초적 형태 로 돌아가야 한다고 단언한다. 결국 르 코르뷔지에는 건설에 비해 건축의 특성을 이렇 게 강조했다. 건설이 "일련의 획일적인 주택을 지을" 정도로 공업 기술을 활용해야 하 는 것이라면 현재 철과 콘크리트의 등장으로 일대 혼란에 빠진 건축의 창조성은 기술 에 집착하지 말고 그 대신 "원재료와 감동적인 관계를 수립"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의 원칙 르 코르뷔지에는 이론적인 연구가 실제 건축계획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실제 건축계 획은 그 실험성에 의해 다른 이론연구에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쓴 수많은 저서는 그 자체가 연구와 경험, 이론과 실제의 상호작용을 부추기고 풍부하 게 해주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부유층 고객들을 위한 저택을 많이 지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건축가의 사회적인 역할이라는 주장에 의견을 같이한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나 의 의무, 나의 연구과제는 이 시대 사람들을 불행과 재난으로부터 막아주고 그들에게 행복과 일상 생활에서의 기쁨, 조화를 가져다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인 간과 환경의 조화를 확립하거나 재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빌라형 아파트 1920년 그는 최초의 경제적인 유형의 건설-시트로앙의 집-설계도를 완성한다. 여기 서 그는 대량생산을 고무하기 위해 극단적인 합리성관 단순성을 추구한다. 1922년에 는 살롱 도톤에서 빌라형 아파트의 설계도를 발표한다. 이 설계도에는 그가 사적 주거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 노력과 100여 가구의 요구에 부응하는 집단 공간의 배치를 양 립시키고자 한 노력이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설계도에는 공동체에는 봉사하지 못하고 공간만 차지하면서 긴 동선을 만들어내는 교외의 신흥 주택가 지역에 대한 르 코르뷔지에의 적대감이 표현되어 있다. 빌라형 아파트는 청년 건축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가 190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에마의 샤르트르회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발 견한 것을 구체화시킨 예라 하겠다. "도시는 개인의 자유와 집단 활동의 특권을 정신적, 물질적인 면에서 보장해야 한다." 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20여 년 뒤 주거단위라는 양식을 생각해 낸 것도 그 때문이다. 에스프리 누보관 1925년 파리 국제 장식미술 박람회가 앵발리드 광장, 알렉상드르 3세교, 그랑 팔레 와 프티 팔레 주변에서 열렸다. 이 박람회는 건축과 장식미술이 아르 누보와 결별하였 음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수많은 혁신적인 건축가들이 이 박람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가졌다. 말레 스테방은 관광관과 프랑스관을 토니 가르니에는 리옹시관을 세운다. 한편 르 코르뷔지에는 진정한 건축예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에 스프리 누보관을 세운다. 이 건물의 한쪽에는 빌라형 아파트의 설계도에 나오는 모형 주택을 설치했고, 다른 한쪽에는 이 주택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르 코르뷔지에와 피 에르 자느레의 도시계획 작업을 전시했다. 대규모 도시계획 도시계획 분야에서도 르 코르뷔지에는 이론적 연구, 설계, 공사를 계속해 간다. 1922 년 그는 살롱 도톤에서 사방 100m짜리 투시도 형태로 '300만 주민의 현대 도시를 위 한 계획'을 공개한다. 이 건축가는 이론 연구에서 파리의 도시계획이 현실적으로 상당 히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네 가지 가혹한 요청'을 제시한다. 첫째 도심 의 혼잡을 완화시킬 것, 둘째 도심의 인구밀도를 증대시킬 것, 셋째 교통수단을 늘릴 것, 넷째 녹지대를 늘릴 것이 그것이었다. 이 계획이 파리시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라면, 1925년에 나온 '부아쟁 계획'은 정 확히 파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획의 이름은 자동차와 비행기 제작자 가브리엘 부아쟁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훗날 르 코르뷔지에의 지지자가 된다. 1930년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빛의 도시'의 설계를 연구하면서 '현대 도시'의 동 심원적 구조를 포기하고 선적 구조를 채택한다. 기능에 따른 구획정리 방식의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이것은 서로 다른 활동영역은 더 이상 겹치지 않았다. 그리 고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두 집단을 가르는 큰 순환축을 따라 활동영역이 다른 구역을 계단 모양으로 배열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식으로 변화를 개시했고, 나중 엔 전적으로 찬디가르(인도 북부의 도시고 르 코르뷔지에의 설계에 의한 계획도시:역 주)에 맞게 적용된 '7V'체제까지 생각해 내게된다. 그러나 '부아쟁 계획'이라는 이름이 붙은 파리 설계는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1937년의 '파리계획'은 이 나라의 수도를 위해 도심의 상업지구를 마련하고 나라의 각 지방을 향해 뻗은 튼튼한 고속도로망을 갖추는 등 혁신에 대한 강한 야심을 유지하면 서도 실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순수주의 계열의 저택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건축가, 새로운 사회적 주거양식의 창안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1920년부터 1930년까지 현대 미술과 건축의 혁신에 관심이 많은 고객들을 위한 저택 을 연구하고 건설하는 일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활동한다. 열 다섯 건의 설계 중에서 열두 건이 실제로 저택으로 지어졌고, 그중 대부분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었다. 건축 가 르 코르뷔지에의 고객들은 대개 부유층에 속했다. 예술가-리프시츠, 오장팡, 미차 니코프, 테르니지앵, 플라넥스-도 많았고 미술품 애호가나 소장가-쿠크, 라 로슈, 슈타 인-도 있었다. 대부분의 저택이 파리 서쪽이나 오퇴유, 뇌이이, 불로뉴, 라셀생클루, 가르슈, 푸아시 같은 파리 교외에 자리잡았다. 지형이 판이하게 다른데다가 까다로운 토지의 제약-옹색한 부지, 이웃의 권리-이 있 는 곳에서도 저택들은 건축가의 주요 구상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 가 시트로앙 의 집이나 집합주택을 통해 전개한 연구의 흔적이 여러 저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공 간들의 관계화 수직, 수평으로 순환하는 결합면에서 내부 구조는 매우 공들여 구상되 었다. 그 결과 경사로 하나만 있으면 완성시킬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벽을 완전 히 제거한 철근 콘크리트' 그리고 기둥과 들보를 이용하여 공간을 확 터 버리고, 입체 감을 주고, 투명성을 부각시키며, 광선, 햇빛, 나무들의 전망이 안으로 충분히 들어오 게 했다. 거실은 이중 높이로 지을때가 많았다. '건축물에 의한 산책'과 '걷고 돌아 다 니는' 건축의 흐름이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배치했다. 특히 라 로슈와 자느레의 이중 저택과 사부아관은 걸음을 멈추고 완성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둘 다 1920년대 말 르 코르뷔지에가 구상했던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표본들'이기 때문이다. 라 로슈와 자느레의 저택 파리 오퇴유가의 작은 집들과 작은 정원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 끝에 자리한 라 로슈 와 자느레의 저택은 두 가지 프로그램을 따르고 있다. 저택을 이루는 두 건물은 하나 의 입체속에 연결되어 있는데 정면에서 보면 그 입체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독신 은행가로서 입체주의와 순수주의 회화의 소장가이기도 한 라 로슈는 르 코르뷔 지에에게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하기에 적합한 저택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와 달 리 자느레 저택은 르 코르뷔지에의 형인 알베르와 형수 로티 라프, 그리고 그들의 두 딸로 구성된 한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자느레 저택의 구조는 은행가 라 로슈의 저택보다 더 전통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기능의 배치면에서 자느레의 저택은 '기존의 양식을 뒤집은 설계'로 시선을 끌 었다. 이 저택은 침실을 2층에 만들고 식당과 거실을 3층에 만들어 이 큰 방들에서 옥 상 겸 테라스 겸 정원으로 곧장 올라갈 수 있게 했다. 사부아관 사부아관은 1931년 아무것도 없는 넓은 대지에 한 보험업자의 가족을 위해 세운 집 이다. 이 집을 지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순수한 각기둥의 콘크리트 속에 진정한 건축 적 표현을 투사한다. 엄격한 골조에 따라 배치한 가느다란 필로티(건물의 전체, 또는 일부를 지상에서 기둥으로 들어올려 건물을 지상에서 분리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공간 또는 그 기둥 부분을 말함. 르 코르뷔지에가 제창한 건축양식에 의해 만들어졌음:역 주)위에 세운 이 집은 '차단막 없이 뻥 뚫린 지붕과 가로로 긴 창이 있는 공중에 떠 있는 상자이다.' 사부아관은 전쟁중에 파손되고 20여년 뒤에는 토지 수용과 파괴의 협 박을 당하다가 (학교에 자리를 내주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대적인 국제적 탄원 덕 에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제되었다. 그후인 1964년 앙드레 말로에 의해 사부아관은 그것을 지은 건축가가 아직 살아 있는데도 역사 기념물로 분류된다. 일하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건축가, 도시계획가, 화가, 작가였던 르 코르뷔지에는 뛰어난 작업능력을 과시한다. 이러한 능력은 물론 어릴 때 고향 쥐라 산맥에서 획득한 탄탄한 자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또한 작업을 조직해 나갈 때의 엄격성과 고결한 야심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도 했다. "일은 형벌이 아니다. 일하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쉬는 것은 대단히 규칙 적인 기능이다. 더 강하게 해도 안 되고 더 약하게 해도 안 되며 지속적으로 해야 하 는 것이다." 그의 작업능력은 또한 창조하는데 있다. 그는 끊이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작품을 전시하고 여행을 떠나고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순회강연을 다녔다. 가르치는 일은 늘상 거절하던 그였지만 그는 대중 앞에서 말하고 자신의 구상을 밝히 는 것은 좋아했다. 이야기 도중에도 커다란 백지에 미리 준비한 그림이나 즉석에서 그 린 그림을 가지고 자신의 발언을 부연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1928년 첫 소련 방문을 마치고 난 뒤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우데자네이루로 순회강연을 떠난다. 최초 의 미국 여행은 1935년에 이루어진다. 뉴욕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맨해튼의 마천루가 너무 낮다고 거침없이 말함으로써 기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농담 도 도발도 아니었으며 다만 상업의 중심 역할을 하는 현대 도시들에 대한 그의 의견을 피력한 것일 뿐이었다. 그는 중심지에 초고층 건물들을 밀집시켜 놓음으로써 넓은 공 원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37년 미국에 바친 저서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 책이 바로'성당이 흰색이었을 때-수줍은 사람들의 나라 를 여행하다'이다. 레주와 페사크, 복지주택의 두 부류 1923년 보르도 부근에 제당공장을 가진 실업가로, 현대 미술에 경도된 아마추어 미 술가이기도 한 앙리 프뤼제스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레주와 페사크에 노동자 주택단지 를 지어 달라고 주문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것을 복지주택과 집합주거에 대한 자신 의 구상을 시험할 기회로 여긴다. 그는한 건물이 몇 가구로 분배되거나 또는 띠처럼 병렬된 형태의 주택단지 53채를 페사크에 짓는다. 둘 다 하나의 기준을 건축적 모듈 (재료를 일정한 배수 관계로 맞추는 기준 치수:역주)로 삼아 구상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건물의 정면과 박공을 흰색, 파란색, 녹색, 밤색으로 칠해 그들이 서로 어우러지 면서 나타나는 효과-정돈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건물 전체에 활기를 부여한다-를 추 구하는 등 외부의 다색 배합에 관한 연구를 전개한다. '콘크리트 대포'를 잘못 다룸으 로써 빚어진 기술적 어려움이나 심각한 재정 문제에도 불구하고 앙리 프뤼제스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낸다. 코르조의 작은 집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르 코르뷔지에는 부모님을 위해 브베 근처 코르조의 레만 호변에 '작은 집'을 짓는다. 이것을 표면저과 시행 자금면에서 최소 건축의 모델이 된 다. 르 코르뷔지에의 아버지는 192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작은 집'에서 1년 밖에 살 지 못했다. '용기 있고 신앙심 깊은 여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자식들의 애 정어린 존경 속에서' 백수를 누리다가 1960년에 사망했다. 두 개의 회관: 두 개의 실패 제네바의 국제연맹 회관은 1927년에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회관은 1931년에 설계했 지만 둘 다 실현되지 못했다. 국제 연맹 회관의 경우 심사위원장이 377명의 지원자 중에서 간추린 비등비등한 실 력을 갖춘 아홉 명의 최고 건축가들 중 르 코르뷔지에와 자느레의 설계도를 최고로 뽑 았다. 그러나 곧 그들이 제출한 설계도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 외시켜 버렸다. 현대 건축에 문외한인 몇몇 외교관과 창작보다는 관학적인 전통을 고 수하는 데 신경을 쓰는 몇몇 건축가들이 모종의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모든 관점-지역 적 동화, 기능성, 접근의 용이함, 음향효과 등-에서 완벽하게 검토한 혁신적인 설계도 가 탈락한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 겪는 커다란 실패로 깊은 상처를 받고 이후 많은 글을 통해 자신의 씁쓸한 기분을 토로한다. 1928년 그는 '집, 회관'을 발간한다. 그리고'건축을 향하여'의 세 번째 판 서문에서 이렇게 자신의 분노를 토로한다. "우리 는 제네바에서 어떤 현대적인 회관의 설계도를 심사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망신스러울 데가...! '연맹'이 볼때는 왕자, 추기경, 총독,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신혼여행을 다니 면서 본 궁전들만이 진짜 궁전이고 또한 그런 궁전을 회관으로서 기대하고 있다." 소비에트 회관 설계도는 소련 정부가 주최한 한 대회에서 채택되어 크렘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자느레의 설계도의 핵심은 두 개의 거대한 방(각기 15000명과 6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을 거대한 구성축선 의 양 끝에 설치하는데 있었다. 소련 정부는 이 설계도의 현대성에 겁을 집어먹는다. 이에 대해 1932년 1월자 '프라우다'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헐벗은 '산업주의' 정신" 을 지적한다. "그것이 회의장으로 쓰이는 일종의 커다란 헛간처럼 취급되고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동료들에게 지지를 받은 르 코르뷔지에는 소련 정부와 계약을 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계관 건축가인 졸토프스키와의 타협이라는 방 안을 제시해 보지만, 제네바에서 실패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다시 한번 실패하고 만다. 파리, 제네바, 모스크바: 실현된 설계도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르 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자느레는 여러 건의 큰 설계들을 완성한다. 국제 콩쿠르 수상작인 르상트로수아유(모스크바 소재)는 곡선의 입체감과 여러개의 장방형 각기둥을 하나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파리 동쪽의 협소한 부지 한 귀퉁이에 세운 구세군 난민보호소는 식당, 남녀숙소, 작업장, 이 세가지 시설로 이루어 져 있다. 처음에는 본관의 정면을 이중 유리벽-'중화시키는 벽'-을 사용하여 거대한 폐쇄 유리벽으로 만들 예정이었고, '완벽한 공기'를 공급하는 실내 공기조절장치에 의 해 더운 계절이건 추운 계절이건 전면의 통풍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 보았다. 하지만 산재한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그 계획은 곧 취소되고 말았다. 파리 대학생촌의 스위스 학생회관은 학생들의 방 47개와 갖가지 공동시설을 구비하 고 있다. 이 건물은 배치 면에서 르 코르뷔지에가 주거단위에서 실시할 원칙을 예고하 고 있다. 몰리토르 빌딩은 파리와 불로뉴의 경제지점, 불로뉴 숲 부근에 세워진다. 구조는 철 근 콘크리트로 이루어졌지만 정면은 자유로운 모습이다.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창이 전면을 뒤덮어 활기를 주구 있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옥상 테라스 위에 아파트 겸 작업실을 만들어 그곳에서 1934년부너 1965년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산다. 작업 실은 동쪽에 있었는데, 여행할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오전에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는 건축 사무소 일을 했다. 클라트테(빛)빌딩은 건물의 야금전문 기업가인 에드몽 바네르의 주문으로 제네바 남 동쪽에 세워졌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이중 높이에다가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거실을 비롯한 방들, 금속 구조물과 문틀의 규격화와 조립식 부품 제작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유리 제품의 광버위한 사용 등이 그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1890년 R.H. 터노크가 시카고에 브루스터 빌딩을 세우면서 그 건물 8층에 설비한 방식을 부활시켜 계단에 유리판을 사용했다. 바이센호프와 '신건축의 다섯 가지 요점' 1927년 예술, 산업, 수공업의 통합을 추구하던 독일 공예가 연맹은 바이센호프 슈투 트가르트 그낭 언덕 위에 개인주택과 공동 아파트를 합친 주택단지를 건설하려는 구상 을 품고 당시 가장 혁신적인 건축가 몇 명에게 그러한 구상을 털어놓는다. 작업의 지 휘를 의뢰받은 건 이 협회의 부회장인 미스 판 데어로헤였다. 15명쯤 되는 건축가 중 에서 미스 판 데어 로헤 외에 페터 베렌스, J.J.P. 우트, 브루노 나우트와 막스 타우트, 루트비히 힐버자이머, 발터 그로피우스, 빅토르 부르주아, 아돌프 라딩, 요제프 프랑크 가 설계에 참여하낟. 바이센호프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시트로앙 주택에 적용한 원칙을 가지고 구상한 개인주택 두 채를 짓는다. 바이센호프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건축 실험 으로 구상과 설계의 대조로 예술계와 건축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기를 이용해 르 코르뷔지에가 출판한'신건축의 다섯가지 요점'은 이 논쟁의 열기 를 한층 달아오르게 한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설계도를 검 토하면서 철근 콘크리트가 현대 건축에 공헌한 바에 관해 그가 수년 전부터 밝혀온 생 각들을 단호 하고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다섯 가지 요인이란 첫째는 필로티, 둘 째는 자유로운 평면, 셋째는 가로로 긴 창, 넷째는 자유로운 정면, 다섯째는 옥상 정원 이다. 이 요소들은 각각 따로 고찰할 수도 있지만 하나로 연결할 수도 있다. 이토록 단순하고 독단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신건축의 다섯 가지 요점'을 표명한 일은 충격 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설계에 접근할 때는 항상 자유와 실용주의를 앞 세우던 르 코르뷔지에의 방식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건축작 품의 풍부함과 다양함에 비해 축소 지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요점'은 철근 콘크리트를 수단으로 한 건축 형태와 관계있는 작품들이 대부분 전제로 하던 원칙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점'의 일부 요소가 표현된 건축작품이 처음 등장한 것은 30년 전으 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9년 윌리엄 러배런 제니가 시카고에 지은 라이터 빌딩이 드 대표적인 예이다. 라이터 빌딩은 건물의 중량을 지지하는 벽이 없이 '뼈대만 있는 건 물'이었다. 따라서 건물의 정면은 온통 창문으로 뒤덮여 있었다. 페터 베렌스는 1909 년 베를린에 있는 A.E.G.회사의 터빈 공간의 내부 공간을 비우고 건물의 정면을 커다 란 유리창으로 정리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공간의 유동성-유선형 공간-과 입 체들의 융합, 높고 낮은 천장 아래에서 높낮이로 낼 수 있는 효과, 수평선의 표현력, 띠처럼 옆으로 길게 나열한 창문-리본 윈도-을 추구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1년 에 아스펠쉬르 라레드에 구두 공장을, 그리고 1926년 데사우에 바우하우스 건물을 지 을 때 내력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건물의 정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어느 방향에 서 봐도 막힘없이 시원스러웠고 건물 내부로 쑥 들어가게 배치한 구조물과 분리되었다. 1917년 네덜란드에서 테오 판 되스부르흐에 의해 창설된 '데스틸'파는 주택의 통일성 과 수직적, 수평적 표면의 융합에 관한 그들만의 구상을 독자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24년 게리트 리트벨트가 유트레히트에 세운 슈뢰더의 집은 그런 구상들을 멋지게 구체화한 예이다. 한편 미스 판 데어로헤는 내부 공간의 해방, 입체들의 융합, 내부와 외부의 소통, 투명성을 위해 철근 콘크리트의 모든 구조적 가능성을 개발하였다. 특히 1919~1921년에 작업한 투명한 마천루의 설계와 1923년에 지은 자신의 '전원 주택'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바이센호프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평면을 가능하게 해주는 강철구조 위에 집단주택을 짓는다. 집의 시설 르 코르뷔지에는 주거 공간의 내부 구획은 모든 차원-대지, 도시, 집, 그리고 그 집 내부의 '시설'까지-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가구에 대한 그의 취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단순한 형태로 흘러갔다. 그는 핵심적인 기능, 기본적인 기능만을 갖 춘 가구들을 원했다.-식탁, 의자, 안락의자, 긴 의자, 침대는 생물학적 기능에 부응해 야 하고 인테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물품들, 책, 집기, 면직물로 만들어 진 제품, 기타 자질구레한 간단한 물건들은 필요에 따라 놓을 수도 있고 놓지 않을 수 도 있다-그런데 그는 이것들을 가구라고 부르지 않고 '집의 시설'이라고 부른다. 그가 지은 순수주의 계열 저택들의 주인들에게 그는 평범한 가구, 이름 없는 회사의 제품들을 사용하도록 권한다. 그래서 그는 흰 나무로 만든 토네 뵈사의 의자를 많이 사용한다. 그는 기능을 위해, 건축을 위해, 공업적 생산조건을 위해 엄격한 설비를 특 징으로 하는 창조 과정에 개입하게 된다. 그는 병렬할 수 있는, 나아가 포개놓을 수 있는 '정리함'을 만들어 그의 건축에 활용한다. 1926년부터 1930년 사이에 많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일부 가구에 강철관을 사용 하기 시작한다. 1926년 아일린 그레이는 '조절할 수 있는 탁자'를 만들고 브로이어는 안락의자를 만든다. 1927년 미스 판 데어 로헤와 마르트 슈타름은 바이센호프에 금속 구조의 가구들을 소개한다. 1928년 르 코르뷔지에는 피에르 자느레, 샤를로트 페리앙 (1927년 10월 세브르가의 사무소에 합류했다)과 함께 가구 시리즈를 제작하여 쉬르크 의 저택과 라 로슈의 저택에 가구를 설치할 때 활용한다. 이 가구들은 1929년 파리의 살롱도톤에서 정리함과 함께 소개된다. 이 가구들의 강점은 그 구조의 극단적인 간결 함과 그것과 다른 요소들 사이의 단순성에서 나온다. 처음에 토네 회사에서 생산하던 이 가구들은 점차 위대한 고전작품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현대 장식미술 1925년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 장식미술'을 펴낸다. 이 책에서 그는 '장식'이라고 불 러야 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이 책의 삽화는 놀랍고 시지어 충격 적이기까지 하다. 비데가 박물관에 관한 장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비행기 동체, 전기 터빈, 부아쟁 자동차들이 루이 15세식 서랍장과 마주보고 서 있다. 거기서 그가 하려고 하는 말은 분명했다. 아니 신랄하다고 할 정도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생각하기 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유용한 물건들은 인간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들 에게 정확함,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을 요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를 통렬히 비판하고 그런 과거의 모형들이 박물관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가 볼 때 민속예술은 창조와 사용이라는 논리를 통 과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다분히 선동가적인 면모가 있 던 르 코르뷔지에는 '리폴린(에나멜 도료의 일종:역주)법'을 선언하고 나선다. "모든 시 민은 벽걸이 천, 다마스크(공단으로 무늬를 낸 견직물, 식탁보, 커튼 따위로 쓰임:역주), 벽지, 형지 대신 흰색 리폴린을 칠해야 한다. 우리는 집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그 런 다음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저서의 가르침은 "현대 장식미술에는 장식이 없다."는 충격적인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르 코르뷔지에는 물건의 완전성은 기술적, 경제적 압박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그가 '실용적인 물건 이상'이라고 생각 한 건축의 경우에는 기능주의적 개념을 거부하지만, 공업적으 로 제조된 물건의 경우에는 그런 개념에 동조된 듯하다. 근대 건축 국제회의 1928년 이후 30여 년간 르 코르뷔지에는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을 벌일 필요 성이 있을 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멋진 모임을 알게 된다. 몇몇 친구와 엘렌 드 망드로의 너그러운 도움에 힘입어 그는 상당수의 건축가, 예술가, 예술비평가, 정치가 를 집결시켜, 학무의 경계을 뛰어넘어 건축과 도시계획의 전반적인 중요성에 대해 심 사숙고하기 시작한다. 이런 자발적인 활동이 흔히 C.I.A.M.으로 불리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를 낳았다. 각각 의 회의는 특히 한가지 주제만을 다루었다. 현대 건축의 기본 원리, 새로운 미학의 연 구, 저렴한 임대주택, 주택 집단, 도시계획, 주택과 여가, 건축과 미학, 신도시와 사회 생활 중심지, 도심, 인간적인 주거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회의 의 하나인 1933년도 회의에서 '아테네 헌장'의 원칙-거주하는 것, 육체와 정신을 연마 하는 것, 일하는 것, 왕래하는 것,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탄생했고 1943년 르 코르뷔지에는 이것을 책으로 낸다. 제 4장 개화 제 2차 세계대전 뒤 르 코르뷔지에는 그이 예술의 개화기를 맞는다. 마르세유의 '위 니테'라는 주거단위는 사회적 주거에 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롱 샹 성당은 콘크리트로 인간 영혼의 비상한 고양을 표현하고 있다. 회화, 조각, 직물, 판화의 작품활동을 통하여 르 코르뷔지에는 '주요 예술의 종합'을 실현한다. 전투, 그 리고 그에 이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으로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건축활동이 중단된 다. 난민들을 위한 가건물과 조립식 학교건물의 설계도를 몇 채 그린 뒤(그중 몇 건은 장 프루와 공동제작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40년 6월 사무소의 문을 닫기로 결정한 다. 그리고 아내, 사촌 피에르 자르레와 함께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인 오종으로 몇 달 동안 피난을 간다. 그곳에서 그는 주로 집필과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몇 년 뒤'오종'연작에 포함된 그림과 조각 중 일부는 그곳에서 그린 스케치를 기본으로 한 것 들이며, 제목도 이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비시에서의 실패 1941년 내무부 장관 마르셀 페루통은 르 코르뷔지에에게 대실업 투쟁위원회의 한 자 리를 맡긴다. 얼마 후 그는 정부 고문 라투르느리가 주재한 위원회에서 건축산업의 정 상화를 위한 정책 입안의 임무를 맡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로서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의 도시계획과 건축 설계를 실현하 기 위하여 여러 관청의 도움을 얻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계와 접촉한 일은 실패로 끝났다. 혁신적인 구상, 야심적인 설계, 당당한 발언에서 자주 엿 보이던 그의 독단적인 표현이 현대 건축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별로 개방적이지 않은 정부 당국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교섭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파 정치인 들로부터는 파시스트로 몰렸다. 하지만 그가 접촉한 당국자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만 봐 도 그가 아무런 정치적 성향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를 건설하고 정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자금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1935년에 '빛나는 도시'를 쓰면서 이 책을 '정부에' 헌정한다. 훗날 그는 스탈린, 무솔리니, 페탱, 네루에게 직접 호소하 기도 한다. 대단히 생산적이었던 10년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점차 사무소 생활이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근 10년간의 단절을 보충하기 위하여 그는 건축과 도시계획 작업, 조형예술, 저술, 이 세 분야에서 강도 높은 활동을 벌인다. 1940년 12월 31일자 법령에 의해 협회의 명부에 이름이 오른 사람만 건축가 자격을 인정해 주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오귀스트 페레처럼 학위는 없지만 탁월한 작품을 고 려하여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이 이름은 1944년 4월 20 일 협회 명부에 기재되었다. 몇 년 사이에 르 코르뷔지에의 사무소에는 엄청난 수의 설계가 실제로 구현된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르 코르뷔지에는 설계는 많이 하지만 거의 짓지 못한다는 사람 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세유의 위니테 주거단위 1945년, 모든 국민이 심각한 주택난을 겪던 때에 프랑스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적인 치장을 하지 않은 아파트'계획을 실시하기로 했다. 자금은 물론 정부에서 대 기로 했다. 몇 년 전 르 코르뷔지에를 만났을 때에는 철도공사 이사로 재직하고 있던 기술 관료 라울 도트리가 당시 재건설과 도시 계획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현대 건 축에 대해 개방된 태도를 갖고 있던 그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마르세유의 건물 중 하나 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르 코르뷔지에는 25년간 주택 분야에 종사 하면서 항상 근간으로 삼아온 구상들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그가 볼 때 이것은 주거 개념, 기술의 실현, 사회적 연구, 그리고 도시계획의 혁신, 이 네 가지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도시 근교의 전원도시를 탐탁지 않게 여기 던 그는 '수직적 전원도시'를 짓고 싶어했다. 그것은 빌라형 아파트의 설계(1922)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현대의 건축기술로 한 건물에서 개인의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 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1907년 토스카나에서 발 견한 에마의 샤르트르회 수도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표준 크기의 주거단위' 를 짓는다.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방의 배치와 시설이 특히 인체치수를 고려하여 연 구했기 때문이다.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골조 위에 세웠고, 아파트의 마루, 천장, 벽은 각각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완벽한 방음이 보장된다. 내부에 난 여섯 개의 '복도'-그 중 하나에는 상 점들과 호텔이 늘어서 있다-는 주거지와 연결된다. 건물 북쪽의 박공은 막혀 있다. 나 머지 세 면에는 로지아가 나 있다. 집들이 건물 내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데도 건물 에는 빛이 잘 들어오며 나아가 빛의 양도 조절할 수 있다. 공기와 물의 흐름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아파트에는 냉난방 시설이 되어있다. 샤를로트 페리앙은 배치와 정리 를 하기 좋도록 내부를 구획했다. 아파트에는 다기능 정리함이 많이 갖춰져 있고, 작 은 갑실이 있어 배달물을 복도에서 부엌으로 곧장 들여놓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통제가 잘 되지 않던 시대에 갖가지 부품들을 조립식으로 제작하는 방식 에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았고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여 작업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청부로서는 I.S.A.I.와 르 코르뷔지에의 독창성에 기인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힘들 었다. 이 건축가의 수많은 적수들은 이 계획의 실현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제4공화국의 정치적 불안 속에서 재건설부 장관이 여섯 번이나 바꾸닌 동안 공사가 몇 차례나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바람에 공사기간이 5년이나 걸렸다. 그래 서 '머리가 돈 자의 아파트'(마르세유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는 1947년 10월 착공하여 1952년 10월 14일에야 준공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빛나는 도시'는 설계자의 희망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준 공식을 끝내자마자 정부는 집들을 팔기 시작했고, 1954년에 빛나는 도시는 평범한 공 동주택이 됐다. 공동시설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아예 기능을 포기해 버렸다. 현실적으로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는 복도의 상점들은 영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옥 상 테라스의 체육관은 사유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주거양식, 건축기술, 도시계획이라 는 세 가지 관점에서 보면 빛나는 도시는 시대를 훨씬 앞지를 것이었고 성공작이었음 을 부인할 수 없다. 콘크리트의 서정성을 드높인 롱샹 성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종교예술 위원회는 쿠튀리에 신부와 레가메 신부의 주도하에 예술과 건축의 창조적 정신으로 종교 건축물의 건설계획을 추진하려고 노력한다. 1937년에 착공한 아시고원의 성당은 1957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모리스 노바리 나가 설계하고 바젠, 샤갈, 레제, 뤼르사, 루오아 같은 쟁쟁한 화가들이 장식을 담당했 다. 모리스 노바리나는 이 성당을 짓는 사이에 오댕쿠르에 또 하나의 성당을 지어 바 젠, 레제, 르 모알에게 장식을 맡기기도 했다(1949). 1950년 마티스는 방스의 로제르 소성당을 구상하고 장식을 맡는다. 1924년, 벨포르 협로를 내려다보는 롱샹의 언덕 위, 보주 산맥의 광활하고 수수한 경 치 속에 세워진 네오 고딕 양식의 이 성당은 1944년에 폭격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브 장송의 대주교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성당의 재건축을 맡기고 싶어 주교좌 성당의 참사 원인 라되르와 프랑수아 마테를 급히 그에게 보낸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와 몇 년 전부터 친분이 있던 쿠튀리에 신부와 함께 르 코르뷔지에를 설득해 설계 책임을 맡기 는데 성공한다. 롱샹을 처음 방분했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수첩'에 연필 스케치를 한 그렸는 데, 거기에 훗날 검토하게 될 핵심이 다 들어 있었다. 이 작은 성당은 다양한 입체가 서로 맞물린 복잡한 건물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방에서 건물을 감싸고 있는 광대한 지평선에 노출된 역동적인 하나의 몸으로 보인다. 긴 의자와 십자가는 브르타뉴 태생 의 고급가구 세공인인 조제프 사비나가 조각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후 모든 조각작 품을 그에게 맡긴다. 르 코르뷔지에는 성당 부근에 관리인의 집과 순례자의 집도 지었 다. 롱샹 성당은 걸으면서 볼 때 그 참모습이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의 다른 어떤 건축물 보다도 더 그렇다.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건축물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걷고' '달린다'. 그것이 살아 있는 건축이다." 뒤발 공장, 쿠루체트와 자울의 집 르 코르뷔지에는 마르세유에 주거단위를 짓는 동안 생디에의 뒤발 공장(1946-1950),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쿠루체트 박사의 집(1949), 그리고 뇌이이쉬르센의 자울의 집 (1951-1955)을 비롯한 여러설계를 동시에 진행한다. 이 공사 하나하나가 그 고유한 본질과 전후관계로 볼 때 건축작품의 한 단계를 의미한다. 기능적인 관점에서 특별히 연구한 뒤발 공장은 처음으로 차양을 설치한 건물이다. 공장의 두 개의 막힌 박공 위 를 보면 그 고장 특유의 장밋빛 사암과 마감이 안 돼 꺼끌꺼끌한 건물 정면의 콘크리 트 골조가 대비를 이룬다. 쿠루체트의 집은 순수주의적 요소들을 그 지역 기후의 특성 에 맞추었다. 벽돌과 콘크리트를 결합하여 정면을 짠 자울의 집들은 뒤발 공장에서 첫 선을 보인 '야수파' 적인 표현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평평한 벽돌로 만든 카탈로니아 식 둥근 천장이 반궁륭 형태의 지붕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이 친밀감 있는 입체를 만 드는데 한 몫 하고 있다. 찬디가르: 네루의 부름 르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10년의 대표작은 인도에서 탄생한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 탄의 분리로 탄생한 펀자브 정부는 찬디가르에 수도를 세운다. 판디트(학식이 많은 바 라문교의 학승을 부르를 말:역주) 네루는 미국의 건축가 앨버느 메이어에게 도시계획 초안을 맡긴다. 그런데 메이어의 협조자로서 공공건물의 설계를 맡은 폴란드 출신의 건축가 샤를 노빅키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바람에 앨버트 메이어와의 계약은 체결되지 못한다. 1950년, 네루는 행정관 타판과 주임기사 바르마를 유럽에 파견한다. 두 사람 은 C.I.A.M의 회원인 영국의 건축가 맥스웰 프라이와 제인 드루를 만나 그들로부터 르 코르뷔지에와 접촉해볼 것을 권유받는다. 극도로 까다로운 설계여서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마침내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1950년, 찬디가르 설계를 위한 총괄 고문으로 임명된 그는 즉시 설계를 진행할 수 있도록 맥스웰 프라이, 제인 드루, 피에를 자느레, 이 세 명의 건축가를 지정한다. 그중 피에르 자느레는 르 코르뷔 지에의 사촌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다시 팀을 이뤄 설계를 진행하는 동안 내내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한다. 1951년, 그는 찬디가르의 도시계획 설계도 작성에 들어갔고 12월 22일 판디트 네루 에게 찾아가 이 일을 앞두고 느끼는 기쁨과 그의 자유로운 지성과 감성을 털어놓는다. 이때 이미 그는 자신이 풀후의 걸작으로 만들고 싶어하던 '벌린 손'에 대한 애착을 그 에게 털언놓는다. 오종, 위비, 그리고 황소 건축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르 코르뷔지에는 조형품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는 다. 게다가 그 조형품들의 다양한 표현형태는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한 보충관 계를 형성했다. "나는 조형예술-'순수 창작' 현상-의 실천에서 나의 도시계획, 나의 건 축의 지적 활기를 찾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30년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예술의 종합'을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1949년 그는 앙리 마티스가 회장이고 '오늘의 건축'지 의 창간자인 앙드레 블로크가 차석 부회장이며 피카소도 회원으로 가입해 있던 조형예 술 종합협회의 수석 부회장이 된다. 그는 예술의 종합을 위해 여러 가지 배경속에 놓 인 별채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그가 죽은 뒤에 하이 디 베버가 취리히에 지은 '인간의 집'에서 부활한다. 어린 시절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그림이 자신의 건축만큼 평가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괴로워했다. 하지만 1949 년 보스턴 현대미술연구소 주최로 미국에서, 1953년에는 파리 국립현대미술관과 드니 즈 르네 화랑에서, 1954년에는 스위스 베른의 쿤스트할레에서 전시회를 여는 등, 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게 된다. 순수주의의 시기와 시적 반응을 일으키는 주제들의 시기가 끝난 뒤 1940년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회화는 한층 더 치밀하게 구상된다. '오종'과 '위빅' 연작, 그 이후의 '황 소' 연작은 복잡한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색은 한층 짙어지고 나아가 강렬해지기까지 한다. 면들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된다. 사물과 신체는 변형된다. 꿈과 상상은 현실을 변형시킨다. 초현실주의의 영향도 받는다. 회화와 데생은 조각의 예고편이 될 때가 많 았다. 청각적 조각 1938년 르 코르뷔지에는 공산당 의원이며 1929년부터 1937년까지 '위마니테'지의 편집장을 지낸 폴바양 쿠튀리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의 설계작업에 들어간다. 그것 은 원래 파리에서 가까운 발쥐프에 세울 예정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때 부터 그는 더 이상 조각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 터 그와 알고 지낸 브르타뉴 출신의 고급가구 세공인이자 조각가인 조제프 사비나가 1946년에 그의 데생을 보고 만든 작은 조각을 그에게 보내왔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작품을 보고 최고의 공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며 이때부터 근 20년 동안 두 사람은 협 동관계를 맺는다. 이는 실로 기묘한 만남이었다. 두 차례의 여행을 하는 동안 르 코르 뷔지에는 데생을 하고 설명을 하고(대개는 글로), 사비나는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려 고 노력한다. 이 협동관계를 기반으로 다양한 나무로 제작된 조각 44점이 공동 서명을 달고 탄생한다. 1950년에 만든 '토템'과 1953년에 만든 '여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형 이었다. 그중 일부는 본래의 재질인 나무의 색깔을 그대로 살렸지만 많은 것들이 르 코르뷔지에의 다색배합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그는 조각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여겼 다. 그는 하나의 건물이나 건물의 총체가 그들을 둘러싼 공간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조각의 표면, 입체감, 충만과 공백의 상호작용이 힘과 긴장의 총체를 표혐한다고 보았 다. 그는 소리를 내보내고 듣는 '청각적인 조각'에 관해 말하곤 했다. 건축행위를 억압 하는 제약-대지, 계획, 고객, 재정-에서 해방된 르 코르뷔지에는 공간을 침투하고 형 상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조각에서 발견한다. '이동식 벽' 1936년, 르 코르뷔지에는 태피스트리 예술 옹호자인 마리 퀴톨리의 요청으로 첫 태 피스트리 작품을 만든다. 그 뒤 그는 1948년에 다시 직물공예를 시작한다. 그것은 30 여 개의 무늬 지형을 바탕으로 제작했는데, 그중 28개를 완성한다. 규모가 큰 것 중 몇 개는 찬디가르의 의회와 법원에 걸리고 도쿄에 있는 극장의 장막으로도 사용되었다. 직물공예를 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오뷔송 국립 미술학교 교수이자 화가인 피에르 보 두앵과의 만남이었다. 그에게 입수한 태피스트리 기술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는 초벌 그림에서 무늬 지형으로, 그리고 수직공의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 는 건축 공간과 벽의 표면에 대한 그의 감각에 부응하는 힘있고 특별한 표현방식으로 서의 태피스트리를 짧은 시간에 시험할 수 있었다. 그는 태피스트리를 '이동식 벽'이라 고 불렀다. 이는 주인이 이사를 하게 되면 태피스트리를 걸었던 곳에서 떼어 다른 곳 에 가져가 걸 수 있는 일종의 양털로 짠 벽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감수성 에 맞는 재료를 발견했다. 찬디가르에서 그는 법원 건물 하나를 위해 64 평방미터 짜 리 태피스트리 8장과 144 평방미터 짜리 태피스트리 하나를 만들어 표면이 거친 콘크 리트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법정의 음향효과를 향상시켰다. 모뒬로르 어릴 때부터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는 형태의 균형, 공간과 입체의 조화의 비밀을 캐 려고 노력했다. 곧 그는 옛 건물들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가 지은 순수 주의 계열 저택들의 정면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기준선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43 년, 그는 연구를 한층 전진시킨다. 그는 조화를 이루는 치수의 일람표를 만들어서, '황 금률' 이나 '황금수' 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일련의 크기들을 정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대중 사회에 수용될 수 있을지 늘 염려하던 르 코르뷔지에는 13세기에 자신의 이름을 건 일련의 조화로운 수를 구성한 피보나치처럼 순수하게 수학적인 토대를 근거로 한 추상적인 일 람표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는 이미 1930년에 마틸라 지카가 작업했던 원칙을 차용해 인체의 각 부분의 기본치수에 비례하는 일람표를 작성한다. "이것의 가치는 인정할 수 있는 수치를 토대로 인간의 신체를 선택했다는 데 있다. ... 비율이란 그런 것이다! 비 율은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1947년에 열린 한 회의에서 이 체계에 '모뒬로르'라는 이름을 붙인 다. 1950년에 그는 자신의 연구, 체계, 결과를 진술한 저서를 내놓는다. '모뒬로르-건 축과 기계공학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간에 비례하는 조화로운 치수에 관한 에세이'가 바로 그것이다. 1955년, 그 후속편인 '모뒬로르2'에서는 그 절차에 대한 평 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후 일람표의 토대가 된 서 있는 인간의 형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이 체계를 조정한 후에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설계도에 사용한 모든 건축 요소들의 치수를 모 뒬로르를 토대로 결정한다. 마르세유의 주거단위의 '표준 크기'도 이 비율의 원칙에서 나온 것이다. 아테네 헌장 프랑스로 귀화한 뒤 파리 경찰국이 교부한 신분증에는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 일명 ' 르 코르뷔지에', 직업 '문인' 으로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건축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의 뿌리 깊은 열망을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실제로 그는 40여 권의 저서와 서문,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많은 글을 남겼다. 르 코르뷔지에가 쓴 책은 대부분 성명서이거나 자신의 습작이나 설계를 소개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한 것들이었다. 그는 1943년에는 '건축학교 학생과의 대담'을, 1945년에 는 '인간의 세 가지 시설'을, 1946년에는 '도시계획을 생각하는 방식'을, 1954년에는 ' 작은 집'을 냈다. 1943년에 출판된 '아테네 헌장'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1933년에 열린 제4차 근대 건 축 국제회의의 결론을 다시 한번 다루고 있다. 그가 제안한 원칙은 그 책이 발간되었 을 당시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이후 상당수가 명백하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비록 도시의 현실에서는 자주 우롱당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알제에 관한 시'와 '직각에 관한 시' 르 코르뷔지에는 명확한 발언, 생기 넘치는 은유, 이미지와 어조의 병렬법을 사용해 듣는 이를 설득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두 권의 중요한 성명서격인 '건축을 향하여' 와 현대 장식미술' 이후, '건축학교 학생들과의 대담'이나 '작은 집' 같은 얇은 책들은 그의 설득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감수성, 자유로운 글쓰기, 은유 감각은 너무나 자 연스럽게 시적 표현을 끌어낸다. '알제에 관한 시'는 제목부터 그것을 예고하고 있다. 비록 알제의 도시 개발에 따르는 어려움을 진술하고 줄줄이 거절당한 7가지 계획을 통해 전개했던 설계안들을 변호하는 내용의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르 코르뷔지에는 이 글 속에서 '바다, 아틀라스 산맥, 카빌리아산이 상서로운 푸른색을 과시하는' 이 도시 앞에서 그가 느낀 감동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1955년에 펴낸 '직각의 시'도 그 못지않게 시적 형태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생생 하고 흥분된, 또는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데생과 글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어느덧 예 순여덟의 나이에 접어든 르 코르뷔지에였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여지껏 끌어온 투쟁 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떠나고 가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항상 군인처럼 싸 우고 투쟁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늙은 투사는 갑자기 회의에 빠진 듯하다. "우리는 우 리의 인생 옆에 앉아 잠자코 지낼 수는 없단 말인가?" 실패와 고초: 유엔에서 유네스코까지, 알제에서 생디에까지 르 코르뷔지에는 많이 짓 기도 했지만 실패도 많이 겪었다. 국제기구의 건물을 짓기 위한 세 건의 대규모 설계- 1927년의 국제연맹회관, 1947년의 뉴욕 국제연합본부, 그리고 1951년의 파리 유네스 코 회관-의 경우, 그의 설계안들은 배척되거나 변형되거나 무시됐다. 페사크의 프뤼제 스가와 찬디가르 계획을 제외하면 그의 도시계획안은 하나같이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 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상처를 입고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했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꺾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고집의 소산이었 던 것이다. 제5장 절정 말년의 마지막 10년 동안 르 코르뷔지에는 글도 덜 쓰고 그림도 전만큼 그리지 않는 다. 그는 직물과 조각 작품도 많이 만들지만, 그의 시간과 정력의 가장 큰 몫은 건축 을 위해 아껴둔다. 그는 찬디가르의 거대한 건물들과 라 투레트의 수도원 건축으로 생 애의 절정에 오른다.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공공건물과 관련된 대형 프로젝트 를 맡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겨우 초안을 잡았을 때 그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1965년의 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는 1957년 르 코르뷔지에의 아내 이본이 사망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관대하고 의지가 강하고 공명정대하고 청렴결백한 여인. 36년간 가정, 내 가정의 수호천사 노릇을 하던 여인"이었다. 그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명랑한 성격을 타고난 그녀는 남편이 곤란과 역경을 견딜 수 있도록 많은 도 움을 주었던 모양이다. '직각의 시'에는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를 생각 하면서 쓴 글이 있다. "나는 그런 면에 나를 비춰보고 거기서 나를 찾았다. ... 그녀는 한없이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누가 그녀를 그토록 고매하게 만든 것일까? 투명한 마음을 가진 아이의 정직함을 소유한 그녀가 지상에서 내 옆에 있다. 보잘것없는 일상 행위에서 그녀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1959년, 르 코르뷔지에는 어머니를 잃는다. 그 의 어머니는 백살 넘게 장수했다. 어머니가 아흔 한 살이었을 때 쓴 아들의 글을 보면 그 나이가 되어서도 '작은 집'에서 '자식들의 애정어린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해, 달, 산, 호수, 집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어머니에 대해 아들은 일종의 숭배심을 지니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아흐메다바드 펀자브 수도의 도시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 서쪽에 자리잡은 중요한 사적 도시 아흐메다바드에서 여러 건의 설계를 맡은 상태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는 쇼드한과 사라브하이의 저택들과 미술관 하나, 그리고 제사공장 협 회 건물을 지었다. 그는 이런 설계들을 하면서 입체감을 강조하고 표면에 콘크리트를 보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야수파적인 건축을 표현한다. 찬디가르의 대규모 공공건물 짓기에 앞서 지은 이 건물들은 건축 방식과 기후의 제약이라는 측면에서 유익한 실험 의 장이 되었다. 찬디가르: 거친 콘크리트의 위대한 교향악 찬디가르 계획 중 하나는 도시 북쪽의 '카피톨(언덕)'에 대규모 공공건물을 집결시키 는 일이었다. 검토한 다섯 개의 주요 건물 중 세 개가 먼저 완성되었다. 국회의사당, 대법원, 종합청사가 그것이었다. 나머지 두 개, 즉 총독궁과 지식의 박물관은 영원히 설계도 상태로만 남게 되었다. 이렇듯 처음 구상이 미완성으로 끝남으로써 건물 전체 의 균형을 해치고 말았다. 제네바의 국제연맹 회관이나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회관 같은 커다란 공공건물 설계에 서 실패한 르 코르뷔지에는 이곳에서 마침내 대규모의 구성을 실습해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설계도를 그릴 때 하나의 커다란 축을 중심으로 각각의 것들을 편성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단절, 간격, 불균형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것은 이 건축가가 자신의 기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코 단순하게 정렬되는 법이 없는 건물들이 너무나 다른 크기와 표현을 제공했다. 아마도 전체적으로는 고전 적인 대규모 도시계획 구성에서 착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대칭을 거부함 으로써 그러한 구성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힘을 부여하고 있다. 게다가 르 코르뷔지에는 빈 공간을 모뒬로르를 기본으로 하여 조정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도랑, 작은 언덕, 큰 언덕, 수면, 조각을 만들면서까지 기복을 주었다. 이렇게 구성된 '유희'는 공간을 구조화하고, 상호간의 긴장과 힘의 그물로 건물들에 연계성을 부여한다. 다시 한번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물이 없는 공간을 다루면서 '외관은 내부의 결과물이다.' 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건물 사이의 빈 공간도 건축의 일부이므로 되는 대로 장식해서는 안되며, 그 대신 긴밀히 결합하고 구성한 전체 속에 서 그 빈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또는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과 함께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각적 조각' 과의 관계도 분명하다. 그는 자기들끼리 소리를 보내고 화답할 수 있도록 입체들, 그리고 꽉 찬 것들과 빈 것들의 상호작용을 조직했다. 국회의사당, 대법원, 종합청사는 거친 콘크리트 외관이라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그 러나 이것들은 형태면에서 상당히 달랐다. 이 건물들에는 현관 지붕의 윤곽, 콘크리트 장막에 뚫린 구멍, 로지아, 석루조, 물매, 옥상 위의 상부 구조물 같은 콘크리트로 만 들어진 조각들이 부품으로 사용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모든 건물의 내부를 장식하면 서 인도의 햇볕, 평원 깊숙한 곳에 자리한 히말라야의 강렬한 햇빛을 소재로 하여 원 없이 빛을 휘두르고 인도하고 조절하는 기회를 가졌다. 인간이 손이 주는 이미지에 집 착한 이 건축가는 데생, 회화, 태피스트리, 조각품에서 손을 자주 표현해 왔다. 그는 찬디가르에서는 야외 계단식 강당 위에 바람을 맞으며 회전하는 '벌린 손' 기념물을 설 치함으로써 국회의사당 전체를 조정하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그의 사후에야 실현된다. 한편 르 코르뷔지에는 위에서 언급한 건물들보다는 비중이 적은 건물도 펀자브 정부의 수도에 많이 지었다. 박물관, 요트클럽, 미술건축학교등이 그것 이다. 라 투레트 수도원: 야수주의와 거장의 솜씨 리용의 도미니크회 교구 참사회는 롱샹 성당을 지을 건축가로 르 코르뷔지에를 선임 했던 R.P. 쿠튀리에의 제의로 1952년 르 코르뷔지에에게 리용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에뵈쉬르라르브레슬에 수도원을 지어 달라고 청했다. 이 수도원은 1953년 설계에 들 어가 1956년에 공사를 시작했고 1959년에 완공했다. 전체적인 방침은 건축에서 중세 건물의 엄격함을 지향하자는 것이었다. 이 수도원 건물은 단순한 형태와 콘크리트의 극단적인 거친 느낌이 공간의 정교함, 직접 또는 반사 조명의 고급스러움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무미건조한 주변 환경 속에 서 수도원 건물은 수준 높은 영성에 도달한 느낌을 준다. 신교의 교육을 받아 불가지 론(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인식론:역주)을 신봉하는 르 코르 뷔지에도 롱샹 성당을 지을 때는 기도에 응한다는 의미에서 온통 부드러운 곡선으로 감싸인, 눈부시게 흰 카톨릭 교회를 만들었다. 라 투레트에서 그는 공부, 명상, 사고의 고양에 적합한 고행 장소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 제공했다. 마지막 설계, 마지막 작품 찬디가르를 짓고 라 투레트 수도원을 완성하는 동안에도 르 코르뷔지에는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 많은 설계를 주도한다. 그는 1958년의 브뤼셀 만국박람회를 위해 야니스 제나키스와 함께 필립스관을 설계했다. 1959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리잡기 전에 세브르가에 있던 그의 사무소에서 일하던 두 일본 건축가 마에카와, 사카쿠라와 함께 도쿄 서양미술관을 지었다. 그리고 같은 해 루치오 코스타와 함께 파리 대학생촌의 브 라질 학생회관을 완성했다. 1962년, 역시 르 코르뷔지에 곁에서 일한 적이 있는 조즈루이스 서트는 자신이 대학 원장으로 있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을 대표해 그에게 케임브리지에 카펜터 센터라는 시각예술 연구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업계획은 전혀 구체성을 띠고 있지 않 았다. 그것은 이 기관이 그만큼 독창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조즈 루이스 서트 가 르 코르뷔지에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르 코르뷔지에는 공간과 그 공간이 수용할 수 있는 기능을 동시에 상상해야 했다. 미국의 건축가 설리 번이 남긴 명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가 현실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형 태는 기능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건축은 어느 정도 짜여진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카펜터 센터의 예는 그런 이유에서 한 번쯤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계획의 부재는 건축가로부터 건축적 창조에 역동성을 부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 를 빼앗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설계에서 그가 만들어낸 요소들-필로티, 난간, 차양-중 몇 가지를 다시 채택한다. 콘크리트가 표면에 드러나긴 했지만 이 건축물은 건축가의 집요한 요구로 이례적으로 아주 매끄럽고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생테티엔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 피르미니의 시장이 자 하원의원이며 르 코르뷔지에의 영원한 친구요 지지자인 외젠 클로디위 프티는 1955년 그에게 운동장과 문화의 집(프랑스에서 문화부 직속으로 운영하는 문화시설: 역주), 성당, 주거단위로 이루어진 종합시설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르 코르 뷔지에가 프랑스에서 지은 집합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문화 의 집만이 건축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완성된다. 그가 설계를 마친 운동장과 주거단위 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앙드레 보젠스키와 페르낭 가르디앵에 의해 완성된다. 르 코르 뷔지에는 1960년부터 조제 우브르리와 함께 성당 설계에 들어간다. 설계만으로 끝난 트랑블레 성당(1929)과 생트봄 지하 대성당(1945~1951) 설계 이후, 그리고 롱샹 성 당과 라 투레트 수도원의 완공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피르미니에서 새로운 종교건축 계획에 손을 댄다. 그의 설계는 이전에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착상에서 나온 것이 었다. 하지만 건축가가 죽은 지 5년 뒤인 1970년 공사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 단된다. 외젠 클로디위 프티는 1989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성당의 완공을 위해 악착 같이 싸운다. 그는 최고 행정담당자들을 상대로 다양한 교섭과 간섭을 벌이지만 건물 의 완공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마르탱갑의 작은 별장에서 루브르의 카레 광장까지 1962년, 일흔 다섯이 넘은 르 코 르뷔지에가 쥘리앙 드 라 퓌앙트와 함께 베네치아 병원 설계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가 파리 서쪽에 자리한 라데팡스 지구에 대단위 종 합시설을 설계해 달라는 의뢰를 해왔다. 그것은 조형예술, 건축, 음악, 무용, 영화, 텔 레비전을 위한 네 개의 교육시설, 말하자면 20세기 예술관을 짓는 일이었다. 마침내 프랑스 정부가 르 코르뷔지에의 창조적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게 국가적인 중요성을 지 닌 대규모 공공시설의 설계를 의뢰한 것이다. 처음에 르 코르뷔지에는 장소를 두고 망 설이면서 앙드레 말로에게 이 시설이 들어설 장소를 그랑 팔레가 있는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그랑 팔레를 파괴하고 싶어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종이에 스케 치 몇 개를 대충 그릴 시간밖에 없었지만 운명적으로 이 설계를 맡게 된다. 1951년 르 코르뷔지에는 바다와 모나코가 마주보이는 마르탱갑에 작은 별장을 짓는 다. 별장 바로 옆에는 레뷔타토 집안에서 경영하는 식당 '바다의 별'(르 코르뷔지에는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했다)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일린 그레이와 장 바도비 치가 1929년에 지은 저택이 있었다(르 코르뷔지에는 이 저택의 벽을 프레스코화로 장 식해 주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사무소의 소란과 스트레스를 피해 이 작은 별장에 와서 명상하고 데생하고 글을 썼다.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서 오랫동안 수영도 했다. 1965년 7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르 코르뷔지에는 마르탱갑으로 휴양을 떠났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친지들이 걱정하고 있던 터라, 그는 8월 24일 형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알베르' 형...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건 강해." 1965년 8월 27일,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지중해에서 수영하던 중 급사하고 만 다. 9월 1일,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성당 제대 앞에서 하룻밤을 지낸 그의 시신은 파리 로 옮겨진다. 마지막으로 르 코르뷔지에는 세브르가 35번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소에 들어간다.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엄숙한 경의를 표하기로 결정한다. 밤이 되자 불 켜 진 루브르의 카레 광장에 모인 수만 인파 앞에서 앙드레 말로는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 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죽기 직전에 쓴 것처럼 "한 가지 구상이 세상에 알려지려면 최소한 20년이 필요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려면 30년이 필요하며, 그제서야 그 구상은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제서야 무덤과 추모비 위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기록과 증언 배움의 과정과 반항 학교의 거부 친애하는 선생님께,... 제게 조각이 아닌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은 옳은 판단이셨 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게선 힘이 느껴지니까요. 제가 놀지 않고 공부만 한다는 걸 굳이 선생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조각 가인 제가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제가 생각하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큰 진전이 있어야 하니까요. ... 아직은 분명치 않은 저의 미래에 막연한 그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서 40년이라는 기 간이 저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 건축예술에 대한 저만의 개념이 이제 막 희미하게 잡혀가는 중입니다. 지금껏 저는 빈약하고 불완전한 능력밖에 갖고 있지 못해 그 주변만 맴돌았을 뿐이죠. 순수하게 조형적인('형태'만을 추구한 결과죠) 저의 건축 개념을 일격에 무너뜨린 빈 을 떠나 파리에 도착한 뒤로 저는 제게서 엄청난 공허감을 느끼고 이렇게 혼잣말을 합 니다. '불쌍한 친구!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게다가 더욱 한심한 건 네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른다는 거야.' 거기에 저의 엄청난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을 누구한테 물어볼까 요. 저보다 훨씬 더 모르면서 오히려 저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샤팔라에게요? 그라세에 게요? 아니면 주르댕이나 소바주, 파케에게 물어볼까요? 저는 페레를 만났지만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너는 건축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저는 반발심이 일었기 때문에 선인들에 게 자문을 구하러 갔습니다. 저는 가장 '미친' 투사들을 선택했습니다. 20세기의 사람 들, 로마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저는 밤이면 도서관에서 로마인들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노트르담에도 갔고 미술학교에서 하는 마뉴 시대의 고딕 양식에 관한 강좌도 드었습니다. ... 그리고 이해했습니다. 그 다음엔 페레 형제들이 제게 채찍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이들 이 제게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때로는 토론을 통해 저는 알게 되었 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로마네스크 양식을 공부하면서 저는 건축이 란 형태를 조화시키는 일이 아닌 다른 무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럼 과연 그게 뭘까요? 그때까지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계역학, 그후엔 통 계학을 공부했습니다. 지난 여름 내내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릅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실수를 거듭한 뒤, 오늘에서야 저는 현대 건축에 대한 저의 지식이 얼마나 공허 한지를 확인하고 화를 냅니다. 분노와 환희 속에-'마침내' 저는 좋은 것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아냈기 때문입니다-저는 기본이 되는 것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학이란 과목 은 어렵기는 하지만 아름답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이고 너무나 완벽합니다!... 페레의 작업장에서 저는 콘크리트라고 하는 것. 그것이 '주장하는' 혁명적인 형태를 보았습니다. 8개월간 머문 파리가 제게 외칩니다. 과거의 예술에 대한 꿈을 버리고 논 리, 진실, 정직을 향해 가라고 말입니다. 높은 곳을 쳐다보고 앞으로 가라고 말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고 의미를 실어 파리는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랑한 것을 불태워라. 그리고 네가 불태운 것을 사랑하라."... 건축가는 논리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과학적이면서도 가슴이 따뜻한 사람. 예술가이자 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이제 알 것 같습 니다. 조상들은 자문을 구하는 후손에게는 적절한 말을 들려준다는 사실을요. 사람들은 미래의 예술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 예술은 존재할 것입니다. 인류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예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환경이란 바로 쇠입니다. 그리고 쇠는 새로운 수단입니다. 이 예 술은 시작부터 눈부십니다. 파괴를 잘하는 재료인 쇠로부터 철근 콘크리트가 나왔으니 까요. 철근 콘크리트는 놀라운 결과를 낳을 발명품입니다. 민중의 역사 속에서 철근 콘크리트는 그것이 만든 기념물에 의해 독창적인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저는 더 이상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동 의할 수 없죠. 선생님은 20세 청년들이 성숙한 인간, '활동적'이고 실천적인 인간이 되 기를 바라시죠. 자기 자신에게서 왕성하고 충만한 힘을 느끼는 '선생님'은 젊은이들도 그 힘을 갖고 있다고 믿으시니까요. '젊은이들'에게도 힘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앞 으로 개발할 힘입니다.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행지에서, 라쇼드퐁에 부임하신 처음 몇 년간 고독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개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작은 성공은 너무 일찍 찾아왔어. 무너지기 쉬워. 모래 위에는 집을 짓는 게 아니야. 변화가 너무 일찍 시작됐어." 선생님의 병사들은 유령입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선생님은 '혼자' 남으실 겁니다. 선생님의 병사들은 자기 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존재하는 이유도 방법도 모르니까요. 선생님의 병사들은 그 런 것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미래의 예술은 생각의 예술이 될 겁입니다. 높은 데를 바라보며 전진하는 개념!... 사랑하는 제자 올림 파리 미술학교 '학교' 는 19세기 이론의 산물로, 정밀 과학 분야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지만 상상 력을 요하는 활동은 깡그리 망쳐 놓았다. 그런 활동들에 '모범적이고' '참되고' '올바르 고' 인정받고 검인되고 허가받은 규칙들을 정해 놓음으로써 말이다. 모든 것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시대에 학교는 '학위'라는 형태로 공식적인 제동장치를 설정해 놓았다. 그런 식으로 학교는 삶에서 등을 돌린다. 학교는 재료의 무게와 강도, 연장들이 이룬 혁혁한 발전을 멀리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채 건축을 죽여버렸다. 건축은 삶의 표현이 되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망쳐 버렸다. 데생이 건축을 죽였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데생이다. 이 유감스러운 상황에서 전 시대의 창조적인 영혼들을 침해해온 것을 권위 로 내세우는 파리 미술학교가 군림하고 있다. 이 학교는 가장 역설적인 곳이다. 가장 보수적인 비난 속에서도 선한 의지, 철저한 공부, 신념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이 미술학교에서 습득하는 뛰어난 손재주에 감탄한다. ... 내가 바라는 것 은 머리가 손을 지배하는 것이다. 평면, 정면, 단면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솜 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지성이 손재주를 다스리기를, 특히 지성이 조롱거리가 되 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학교 공부가 작업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 는 것, 그리고 형편없는 기적-데생대로 재료를 사용하면 절대로 지을 수 없거나 짓더 라도 무너지고 마는 것-을 행해야 할 때만 현대 기술에 의지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엄 청난 금전의 낭비 속에서 뼈대가 없는 사고, 부실한 사고의 지주 역할을 하느라 현대 는 품위를 상실하고 있다. 미술학교의 부실 건축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나는 학위라는 최고의 대관식-프랑스 학사원이 수여한다-을 거행하는 이런 사치스러 운 교육은 현대처럼 광범위하고 복잡한 시대에는 수용할 수 없는 요구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절대 자만하면 안되고 그 대신 건강하고 정당하고 품위가 있어야 하거늘, 어찌 하여 '자만'이 건축가의 속성이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새로운 시대의 건축은 동시 대의 엄청난 대량생산으로 확대되고 있다. 건축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에 들어 있 다! 인간의 '보호처' : 주택과 수송 수단(도로, 철도, 물, 공기). '시설' : 도시, 농가, 촌락, 항구, 그리고 주택에 딸린 시설들, 즉 가정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형태' : 불과 100년 사이에, 빛을 받아 빛나고 살아 움직이는 조형물들로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 새로운 소재와 기능적 구조가 등장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손이 닿거나 눈이 관찰하는 모든 것. 그렇다면 우리는 건축과 관련된 모든 행위, 현재 벌어지는 일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의 하나인 이 행위에 대해 학위를 요구할 것인가? 학위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 셈인가? 이 질문은 학위의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준다. 학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 다. 세상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 4-6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나 가족(가난한 그들은 자식이 학교를 나오면 특 권을 얻을 것으로 상상한다)이 요구하는 이 학위를 힘들게 따는 사이에(나는 학생들에 게 너무 많은 고백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고결한 온순함, 멋진 열정, 다양한 인생 앞에 활짝 열린 '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중한 청년기가 아깝게 소모되고 만다. 학 위는 마치 병마개처럼 모든 것을 막아버린다. 학위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젠 고통도 배움도 모두 안녕. 너는 이제 자유롭다!" '배움'이란 개념이 '고통'의 동의 어가 되다니! 그들은 젊은이들을 녹초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배움이 무엇인가? 그것 은 매일매일의 기쁨이고 인생의 햇빛이다. 만일 사람이 살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배우 는 고귀한 능력을 개발시킨다면 인간은 거기서 더 없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고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인간,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야 할 것이 다. ... 나는 프랑스 정부가 그들에게 학위를 수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유를 진짜 알고 싶다. 나는 한 정부의 사명은 그 시대를 관리하고 항상 변화하는 인생의 항로에서 국 민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지 장벽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중요한 원천: 과거와 자연 발명에 대한 권한을 중시하는 나는 과거를 증거로 삼았습니다. 과거만이 끊임없이 나 를 채찍질하는 유일한 스승이었죠. 건축적 발명이라는 미지의 세계 속에 던져진 자들 은 세월이 물려준 교훈을 자신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지켜 준 증거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속이라고 부릅니다. 그 것은 민간전통 속에서, 그 세력을 인간의 집 너머 신들의 영역까지 확장시키면서 창조 적인 영혼의 꽃을 피울 때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창조적인 영혼의 꽃, 그것을 구현하 는 전통의 사슬 고리 하나하나(이는 바로 작품 하나하나를 의미합니다)가 당대에는 혁 신적이고 나아가 혁명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뭔가 공헌하는 바가 있었던 거죠. 역사는 표지에 의거하지 않고 정당한 증거들만을 보존해 왔습니다. 따라서 모방, 표절, 타협은 뒤로 처지고 버림받고 나아가 파괴되고 맙니다. 과거를 존중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 서, 모든 창조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랑과 존경을 느낍니 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민속 공부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쏟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훗날 나는 비행 청소년들이 은닉처로 삼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허물고 싶어한, 그 유 명한 알제의 카즈바 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전국 교각도로협 회가 남부 자동차 전용도로 요금 징수소로 바꾸고 싶어한 마르세유 구항도 그랬고, 시 의 역사적 유물을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지 자문을 구해온 바르셀로나도 그랬죠. 이 모 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더러 과거의 것은 무조건 파괴하려 든다고 비난했습니다! 나의 이러한 존경, 사랑, 감탄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고객들에게 조상의 솜씨를 파 는 편을 택한 아버지에 대해 아들이 취하는 건방이나 게으름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 런데 생각하기를 포기한(이는 가장 슬픈 일입니다) 결과, 이 나라는 민속유물로 장식 하라는 권유를 받고 있습니다. 겁쟁이, 상상력이 빈곤한 자, 소심한 자들로 구성된 패 거리가 도시와 시골, 전국토를 가짜 건축들로 채울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솔론(그리 스의 정치가. 많은 개혁을 단행함:역주)도 그런 죄를 지어 벌을 받았습니다. 다섯 달의 여행 끝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앞에 도착한 것은 내가 스물세 살 때의 일이군요. 그때 보니 박공은 끄떡없었지만 신전의 긴 측면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지난날 터키인 들이 숨겨둔 화약의 폭발로 기둥과 엔태블러처가 파괴된 것입니다. 몇 주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이 돌들을 존중하고 염려하고 놀란 손길로 쓰다 듬었습니다. 그들은 소리 없는 나팔수, 신의 진실이었습니다! 과거는 결코 완벽한 실체가 아닙니다. ... 과거에도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있습니 다. 악취미가 과거에서 비롯되지만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에 비해 하나의 이점을 갖 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것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과거에 호의를 갖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가한 시간만 있으면 됩 니다. 우리는 무심하게 과거를 응시합니다. 아름답거나 추한 그것의 외관에 민족학적 의미, 풍속 자료, 역사적 가치, 소장품적 가치 등이 추가되고, 그러면서 더욱 흥미를 끌게 됩니다. 지난날의 문화 산물에 대한 우리의 감탄은 이렇게 객관적인 경우가 많습 니다. 즉, 발전중인 어떤 문화의 산물 속에 존재하는 것과 인간과의 매력적인 만남에 서 빚어진 감탄인 것입니다. 인간이랑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는 단순한 동물입니다. 문 화는 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금은보석으로 장식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안에 존 재하는 미개인이 벌이는 행동입니다. 어떤 현실적인 이유나 고상한 이유로도 우상숭배를 변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우뚝 서서 마치 암처럼 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우상파 괴론자가 됩시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전혀 새로운 문명이 태어났다는 것, 과 거의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는 것, 즉 새로운 의식 상태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직도 충분히 인식하 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카데미즘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시공을 초월해 인간의 감 수성을 순수하게 표현한 당당한 문명이나 수수한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펼친다면 과거 를 연구하는 것은 생산적인 일입니다. 건축은 '제도대'에서 벗어나 인간의 가슴과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특히 가슴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가슴이 사랑-옳 은 것, 감성적인 것, 창조적인 것, 다양한 것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은 안내자일 뿐, 그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창조적인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 지름길은 건축잡지들을 정기구독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풍요로움이라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분야를 탐험하며 발 견하는 데 있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편협한 논쟁에서 벗어나십시오. 사물의 이치를 정 열적으로 파고들어 건축이 자연스럽게 그것들의 결론으로 판명될 수 있게 하십시오. '학파'를 없애십시오(비뇰 학파가 안되는 것처럼 '코르뷔' 학파도 안됩니다. 제발 부탁 입니다!). 틀에 박힌 표현, '요령', 손재주도 안됩니다. 우리는 이제 막 현대 건축을 발 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부분들이 신선한 구성에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100년 후에 우리는 하나의 '양식'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양식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품격-창조된(진짜로 창조된) 모든 작품 안에 깃들인 정신 적인 태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나는 학생들뿐 아니라 건축가들도 색연필을 쥐고서 나무와 잎사귀를 그리고, 나무의 정령, 조개 껍데기의 조화, 구름의 형성, 모래 위에서 펼쳐지는 파도의 유희를 표현하 면서 내적인 힘의 연속적인 표현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손(머리도 함께)이 이런 내적 탐구에 열중하게 되기를. 인간의 친구, 나무는 모든 유기적 창조의 상징이다. 나무는 완전한 건축을 나타낸다. 나무랄 데 없는 질서 속에서도 우리 눈에는 가장 환상적인 아라베스크 모양으로 보이 는 매력적인 광경, 매년 봄마다 촘촘히 뻗은 가지에 정확한 거리를 두고 돋아나는 새 이파리들, 너무나 규칙적인 잎맥을 가진 잎사귀들, 땅과 하늘 사이에서 인간의 지붕 역할을 해주는 나무, 우리의 눈앞에서 뛰어난 스크린 역할을 해주는 나무, 딱딱한 건 축물의 가변적인 기하학적 구조와, 우리의 가슴과 눈 사이의 기분 좋은 척도, 도시계 획가의 손에 들린 귀한 연장, 자연의 힘의 가장 종합적인 표현, 도시에서 인간의 노동 현장이나 휴식 공간 주변에 있는 자연의 존재. 이렇듯 나무는 인간의 천년지기인 것이 다! '태양, 공간, 나무들' , 나는 이들을 도시계획의 기본 재료, '본질적인 기쁨'을 가져다주 는 것들로 인정했다. 그렇게 단언하면서 나는 인간을 도시에 배치하는 동시에 자연 배 경의 중심에, 그것의 원초적 감동의 중심에 배치하고 싶었다. 나무를 빼앗기고 자기가 만든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 사는 인간을 보라. 물론 가끔 공식적인 기회를 이용해 기 하학의 순수함과 힘을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나무도 없이, 아무 꾸밈 도 없고 모든 것이 볼품없고 거친 도시의 한 부분(또는 전체)에서 어떤 결함 있는 질 서나 치명적인 무질서의 전횡 속에서 방황하면서, 이렇듯 벌거벗고 빈곤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맨해튼 한복판에 '센트럴 파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국인들을 돈만 쫓는 자들이라고 비웃을 수 있는가? 맨해튼 중심에 화강암 바위와 나무들로 이루 어진 450만 평방 미터 넓이의 공원을 보존한 뉴욕 당국의 저력 앞에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자연도 놀랍도록 감성적이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시적 반응을 일으키는 사물들'로 인정받은 것들은 그들의 형태, 크기, 재료, 보존성 때문에 우리의 실내 공간 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파도가 다듬은 조약돌도 그렇고 호수나 강물에 의해 둥글게 깎인 자갈도 그렇습니다. 자, 여기 해골, 화석, 나무뿌리, 해초가 있습니다(그것들은 때 로 화석처럼 굳기도 합니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우면서 그리스, 또는 힌두 양식의 조각 이 새겨진 온전한 조개껍데기도 있습니다. 깎인 것들은 놀라운 나선구조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이 종자, 규석, 수정, 돌, 나무 조각, 요컨대 자연의 언어로 말하는 이 무수한 증거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매만지고 눈으로 탐색합니다. 이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친구들입니다. ... 그들을 통해 자연과 우리의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 때 나는 그들을 내 그림과 벽화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여러 가지 특성들 이 표현됩니다. 수컷과 암컷, 식물과 광물, 새싹과 열매 ... 모든 뉘앙스 ... 모든 형태. 그리고 우리들, 즉 생활 속에 뿌리 내린 남녀는 단련되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수성 으로 반응하고, 우리의 영혼 속에서 영혼에 관한 것들을 창조합니다. 적극적이지는 않 아도 덜 수동적이고 덜 부주의합니다. 다시 말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여하고 헤아려 보고 존중합니다. 우리에게 힘, 순수함, 통일성, 다양성을 말해 주는 자연과 '직결된' 이런 강의를 듣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연필이 그 려내는 이 조형물들, 이 유기적 삶의 증거들, 자연과 우주의 온갖 법칙들에 지배되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뛰어난 설득력을 지닌 이 표현들을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조약 돌, 수정, 식물, 또는 그것들의 퇴화기관의 흔적에서 시작해 비를 머금은 구름, 지표면 의 한 현상인 침식까지,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결정적인 장면이란 우리의 피난처인 자연이, 수많은 요소들이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 는 터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날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고대의 석고상에 관한 맥빠진 연구를 이런 것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인, 로마인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을 도리어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성서의 광채를 앗아간 교리교육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확고불변한 해답을 거부하듯 확고불변한 색깔도 회피합니다. 진보, '성당이 흰색이었을 때' 나는 가장 격렬한 증오심, 겁, 게으름, 무기력을 무기로 이 나라 프랑스와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것-발명, 용기, 특히 이성과 시가 공존하고 지혜와 기도가 한데 어우러 진 건물과 결부된 창조적 재능-을 악착스럽게 파괴하거나 이들과 싸우는 데 전념하는 자들의 양심을 시험해 보고 참회하게 만들고 싶다. 성당이 흰색이었을 때, 유럽은 새롭고 비범하고 대단히 무모한 기술이 꼭 필요한 일 을 준비했다. 그 기술의 사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천년 전통의 유산을 무시하고 미지 의 모험을 향해 문명을 내몰아간 정신이 내재된 형태의 체계를 낳았다. 백인종이 있는 곳은 어디나 하나의 국제어가 군림함으로써 생각의 교환과 문화의 수송을 용이하게 했 다. 하나의 양식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전파되었다. 그것은 예술 에 대한 사랑, 무사무욕, 창조하는 삶의 기쁨 같은 정신적인 환희들의 정열적인 분출 을 유도하는 양식이었다. 성당들은 새 것이었으므로 흰색이었다. 도시도 새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부분을 계획대로 질서정연하게, 규칙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지었다. 전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희고 눈부셨듯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반짝거렸듯이, 이제 막 잘린 싱싱한 프랑스의 돌도 눈부시게 희었다. 새벽들에 둘러싸인 모든 도시나 마을 에서 신의 마천루는 그 지방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높게 성당을 지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부조화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 다. 그것은 낙천적 행동, 용기있는 몸짓, 자부심의 상징, 탁월한 기량의 증거가 되었다! 신에게 호소하면서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세계가 시작되었다. 폐허 위에서 꽃이 피듯, 희고 맑고 즐겁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영원한 신세계가 펼쳐졌다. 사람들은 익숙하게 사용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등을 돌 렸다. 100만년 만에 기적이 이루어졌고 유럽은 달라졌다. 그때 성당들은 흰색이었다. 나는 그 지나간 시대와 이 시대가 한가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성당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기존의 성당은 다른 자들-죽은 자들-의 것으로 서 세월에 마모되어 새까매져 있다. 기관들, 교육, 도시, 농가, 우리의 삶,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 등 모든 것이 훼손되어 새까매져 있다. 하지만 우연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이 신선하다. 이미 사람들의 시선은 죽은 것들을 피해 앞을 내다보고 있다. 바람이 바뀌고 있다. 겨울바람이 봄바람에게 밀려나고 있다. 아직도 하늘은 먹구름이 걷히지 않아 어둡지만 곧 갤 것이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 사람들, 뭔가를 아는 이들, 그들이 신세계를 건설하도록 해 야 한다. 신세계에서 최초의 흰 성당이 세워질 때 우리는 보게 되리라, 알게 되리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진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당한 열성과 상당한 열정으로 급격한 변화가 완성될 것이다!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소심하게도 세상은 먼 저 증거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증거? 이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증거는 옛날에는 성당이 흰색이었다는 것이다... 생명은 사방에서, 예술을 '만드는' 작업실 밖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룹들 밖 에서, 우리가 '품위'를 따로 떼어놓고 국한시키고 깨뜨리는 책들 밖에서 드러난다. 생명의 위기란 없다. 다만 예술 제작자들의 협동의 위기만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조형예술가들은 도처에서, 집약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이, 무제한으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상은 매일, 매시간, '현재의' 아름다움과 진실의 찬란함 속에서 모 습을 드러낸다. 이는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내일은 새로운 진실과 새로운 아 름다움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모레는 내일과는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이... . 이렇게 생명은 채워지고 충만해진다. 생명은 아름답다! 우리는 영원한 '미래의 것들' 의 운명을 고정시킬 계획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 않은가? 매순간 모 든 것은 현재의 소산일 뿐이다. 현재의 시간은 놀라운 강도로 창조하는 시간이요, 창조적인 시간이다.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기계문명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개인, 또는 집단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거의 모든 당대의 제품과 한몸을 이루면서 작업실, 제조소, 공장, 그리고 기술자들과 예술가들의 머릿속-의도, 법령, 계획, 생각-에서 뛰쳐나와 세력을 떨치고 있다. 새 시대가 왔다! 그리고 이 새 시대는 7세기 전 새로운 세상이 탄생했을 때, 성당이 흰색이었을 때와 모든 점에서 유사하다! <성당이 흰색이었을 때-수줍은 사람들의 나라를 여행하다> 폴롱, 파리, 1937년 익명의 기술자들, 기름때에 절은 철공소의 수리공들이 대형 여객선과 같은 멋진 것들 을 구상하고 만들어냈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그것을 평가할 길이 없다. 따라서 이 '혁신적인' 작품들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법을 배우려면 직접 대형 여객선에 들어가 몇 킬로미터를 걸으며 둘러볼 기회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건축가들은 학교에서 얻은 편협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건축 규정을 알지 못한 채 살 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착상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성당이 아 직 아담한 크기였을 때도 대담하고 박식한 대형 여객선 건조자들은 대궐 같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 위에 띄웠다! 용도를 내세운 건축은 답답하다. ... 대형 여객선이 운송수단이고 새로운 것이라는 점을 잠시 잊으면, 우리는 이 거대한 대상으로부터 무모함과 규율, 조화, 조용하고 간결하고 힘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 을 것이다. 유기체의 창조자라는 본분을 직시하는 신중한 건축가라면 대형 여객선을 보면서 끔찍 스러운 오랜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전통보다는 차라리 자연의 힘을 존중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빈약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착상들보다는 이 시대가 제기하고 요구한 문제로부터 도출해낸 당당한 답을 택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 덕택에 우리는 큰 진보를 이룩했다. 육지인들의 작은 집은 구시대의 표현물이다. 대형 여객선은 새로운 정신(에스프리 누 보)에 의해 조직된 세상을 실현하는 첫 단계에 해당된다. ... 건축은 진보가 필요치 않고 게으름이 지배하며 과거에 의지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일 이다. 다른 분야는 내일에 대한 불안에서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고,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내고 있다. 전진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되고 만다. 하지만 건축에서는 절대 아무도 도태되지 않는다. 아! 이것이 바로 건축가의 특권인 것이다. ... 나는 비행기 발명가의 정신을 건축에 접목시키려 한다. 비행기에서 배울 점은 그 형 태에 있지 않다. 우리는 비행기가 새나 잠자리가 아닌, 날아다니는 기계라는 걸 깨달 아야 한다. 비행기에서 배울점은 문제 제기를 주도하고 그것의 실현을 성공으로 이끈 논리적 필연에 있다. 우리 시대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해결책은 반드시 나오기 마 련이다. 하지만 집에 대해서는 아직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기계가 이룬 기적, 그것은 잘 조화된 도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화의 정도는 경험과 발명이 기계를 정련시킴에 따라 완벽에 가까워질 것이다. 인간의 모든 작업은 언젠가는 검증을 받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작업의 결과가 사람 들의 정신, 마음, 의식에 자리잡는다. 나중에는 제도 속에 끼여들어 우리의 정서를 건 드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세월이 흘러 사람이 죽으면 거짓으로 찬양을 받거나 부당하 게 무시당한다. 명예 회복도, 당연한 자격 박탈도 뒤늦은 일이다. 오늘날과 같은 예술 의 혼란기에는 세월이 씨를 뿌린 수많은 이상 증식물에 의해 팽창되고 장황해진 이 현 상을 축소하는 것이 좋겠다. 기계를 검증할 근거는 '돌아가느냐, 돌아가지 않느냐!'이다. 인과 관계가 아주 직접적이다. 대체로 돌아가는 기계는 모두 한 순간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명백한 유기체'이다. 나는 이런 분명함, 이런 건강한 생존력 앞에서 우 리가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 생명이 창조되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부모의 감정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해하고 심오하고 진실된 감정에 다른 요소들이 추가된다. 기계는 계산 이다. 계산은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창조적 체제로서, 우리가 예측하는 우주, 질서 정연한 생명의 확실한 표명으로 생각하는 자연을, 우리 눈에는 정확해 보이는 검증을 통해 설명해 준다. 이 계산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 기하학이며 이 기하학 위에서 계산 의 실행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기하학은 '우리의 것' , 사건과 사물을 평가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하고도 소중한 수단이다. 기계는 기하학의 소산이다. 기하학은 인간을 매 료시키는, 인간의 위대한 창조물이다. 따라서 시각, 촉각, 감각의 직접적 기제가 작용한다. 진실로 기계는 조각품을 만드는 기술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질서정연한' , 감각의 생리학을 실험할 수 있는 멋진 무대 이다. 주택의 대량생산, 그 위대한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공업은 물결처럼 밀려와 새로운 정신으로 활기가 가득한 새 시대에 맞게 제작된 새 도구들을 선사하고 있다. 경제의 법칙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주택문제는 그 시대의 문제이다. 오늘날 사회의 평등은 이것에 달려 있다. 변혁의 시 대에 건축의 첫째 의무는 가치의 재검토, 주택 구성요소의 재검토에 있다. 대량생산 방식은 분석과 실험을 토대로 한다. 대규모 공업이 건축을 책임져야 함 주택에 소요되는 부품의 대량생산 방식을 정립하 여야 한다. 대량생산 정신을 창조해야 한다, 대량생산 방식으로 집을 짓는 정신, 대량생산된 주 택에 사는 정신, 대량생산 주택을 구상하는 정신. 우리의 머리와 가슴으로부터 주택에 관한 고정관념을 털어버리고 비판적이고 객관적 인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볼 때, 비로소 도구로서의 집, 대량생산하는 집, 우리의 삶에 동반된 도구로서의 미학에 맞는 건강하고 (도덕적으로도) 아름다운 집의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가의 감각이 엄격하고 순수한 기관에 불어넣을 수 있는 활기 때문에 아름답다. ... 계획이 수립되었다. 루세르 씨와 보느베씨는 저가 주택 50만 채의 건설을 공포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이것은 건축사상 이례적인 상황으로서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 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준비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은 정신도 확립돼 있지 못하다.' ... 전문화는 석공 분야에 서 이제 막 접근한 상태이다. 공장도, 전문 기술자도 없다. 하지만 대량상산 정신만 싹트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준비될 것이다. 실제로 건축의 모든 부분에서... 공업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변형시켜 '신소재'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시멘트와 석회, 형강, 타일, 단열재, 도관류, 철 물, 방수 도료 등, 이런 예는 많다. 지금 이것들은 건설중인 건물에 마구잡이로 사용되 고, 예정에 없이 추가되고, 막대한 비용을 잡아먹고, 조잡한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 것은 다양한 건축재가 대량생산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또한 대량생산 정신이 없 기 때문이며, 자재뿐 아니라 건축 자체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연구를 한 적이 없어서 발생한 일이다. 대량 생산정신은 건축가들과 (그들에게 전염되고 설득당해) 주민들에 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제 막 숨가쁘게 지방 분권주의를 이룩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우리는 침략당한 나라들의 황폐화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재건설이라는 모든 이들의 막중한 임무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소장품 속에 들 어 있던 목신의 피리를 꺼내 분다. 심의회와 위원회에서도 피리를 분다. 그런 다음 사 람들은 투표로 대책을 결정한다. 이런 사건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파리와 디에프 사 이에 각기 다른 양식의 역 30개를 만들라는 압력을 북부철도회사에 가한다. 급행열차 가 통과하는 30개의 역에는 모두 하나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는 그만의 특성과 영 혼을 지닌 사과나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목신의 피리여! 그런데 공장에서 대포, 비행기, 트럭, 열차의 차량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제조 한 뒤에 서서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집을 제조할 수는 없을까? 이런 것이 바로 시대적 정신이라는 것이다. 준비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 든 할 수 있다. ... 앞으로 20년안에 분할된 도시와 교외의 토지들은 더 이상 삐뚤빼뚤 하지 않은, 드넓은 직사각형이 될 것이다. 그런 대지에서는 대량생산한 부품을 사용할 수 있으며, 건설의 공업화 또한 가능할 것이다. 마침내 사람들은 일일이 '치수를 재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숙명적인 사회 변화는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를 변모시키고 주 거의 개념을 바꿔놓을 것이며, 도시는 혼돈 상태를 벗어나 질서를 찾을 것이다. 그렇 게 되면 이제 집은 몇 세기를 견딜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답답한 것, 부유함을 드러내는 호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자동차가 도구가 된 것처럼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은 기초를 튼튼히 다진 땅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서서 오래 전부터 가문과 혈통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온 구시대의 유물에서 벗어날 것이다. 건축, 감동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우리는 돌, 나무, 시멘트를 사용해 집을 짓고 궁전을 만든다. 이것은 건설이다. 여기 에는 재간이 작용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내게 도움을 준다. 그러면 행복해진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답군. 건축이란 그런 것이다. 내 집은 편리하다. 고마운 일이다. 철도와 통신 회사 기술자들에게 감사하듯 당신에 게 감사한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벽들이 질서정연하게 하늘로 치솟은 모습은 나를 감동시킨다. 나는 거기서 당 신을 느낀다. 당신은 부드럽고 거칠고 매력적이고 의젓하다. 당신의 돌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당신은 내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킨다. 나는 어떤 생각을 말하는 뭔가를 둘러본 다. 그 생각은 한 마디 말도 작은 소리도 없고, 다만 그들과 관계 있는 프리즘에 의해 서만 명확해진다. 이 관계는 현실적이거나 서술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당신 영 혼의 수학적 창작이다. 그것들은 건축의 언어이다. 당신은 생기 없는 것들을 가지고 ' 무궁무진한' 실용적인 계획 위에서 내게 감동을 안겨주는 관계들을 만들어냈다. 그것 이 건축이다. 모든 순수주의 계열의 저택들처럼 슈타인의 저택은 '건축물에 의한 산책'의 기회를 제 공한다. 집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우선 '살기 위한 기계' , 즉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한 기계, 안락함이라는 육체의 요구를 만족시킬 목적으 로 만든 부지런하고 친절한 기계인 것이다. 집은 또한 사색을 위한 장소이고, 최종적 으로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우리의 영혼에 없어서는 안 되는 평온을 가져다 주는 장 소이기도 하다. 나는 예술이 만인을 위한 싸구려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말은 그저 어떤 이들에게는 집이 미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의 현실 적인 목적과 관련된 것은 기술자가 해결해준다. 사색. 아름다움을 느끼는 영혼, 그곳을 지배하는 질서와 관련된 이 모든 것, 그것이 '건축'이다. 그것은 일부는 기술자의 몫이 고 일부는 건축의 몫이다. 집은 인간 중심주의 현상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즉 모든 게 인간으로 집결된다. 이런 단순한 이유로 집은 숙명적으로 인간하고만 관련이 있으며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다. 집은 우리의 행동과 결부된다. 달팽이 껍데기와 똑같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인간을 척도로 맞춰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오늘날 건 축이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여러 가지 가치에 관한 전체적인 재검토를 가능하게 해 줄 유일한 방법이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물결의 시기, 기계문명 이전의 근 6세기, 현대 와는 달리 외관의 화려함, 궁전, 성당에 몰두한 시기, 기계주의 전에 왔다가 좌절된 그 찬란한 시기를 거쳐온 만큼, 재검토는 한번 꼭 있어야 한다. 건축은 '걷고' '달리는' 존재이다. 그것은 책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여러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파리 눈을 가진, 공상만화에나 나옴직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추상적 인 꼭지점을 둘러싸고 조직된 도표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시대 건축이 몰락한 것도 이런 착오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 인간의 눈은 지상 1.6 미터 되는 곳에 있으며, 앞에 있으며, '앞을' 본다.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현실이다. 축을 중심으로 부채같이 펼쳐지는, 인간을 기만하는 그 많은 도면들을 쓰레기통에 집 어넣게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정면을 보는 눈 두 개를 가진 우리 인간은 걷고 이동하고 일하는 가운데 차례로 등장하는 건축 요소의 전개를 확인한다. 인간은 거기 서 연속적인 충격의 소산인 감동을 느낀다... 외부의 순환에 관해서는 삶과 죽음, 건축이 주는 느낌의 삶과 죽음, 감동의 삶과 죽 음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부'의 순환과 관련된 것일 때 이것은 훨씬 더 타 당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생물은 하나의 소화관이다. 그리고 건축 역시 간단히 말해서 내부의 순환이다. 비단 기능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특히 감성적인 이유들, 즉 작 품의 다양한 측면들, 실제로 발걸음을 옮길 때에만 실행되고 포착될 수 있는 조화 때 문이다. 그것들은 예상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벽이나 전망, 문이라는 먹이를 우리의 눈 에 제공하고, 또 그 먹이들은 새로운 공간의 비밀, 창문이나 훤히 뚫린 공간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의한 그늘과 어슴푸레한 빛, 강렬하게 내리쬐는 밝은 빛, 정교하게 구획된 최초의 도면처럼 건물을 세우거나 식물을 심은 원경의 전망을 제공한다. 내부 의 순환이 잘 되는지의 여부가 건축작품-건물의 존재 이유와 관련을 지어 세운 몸체 의 조직-의 생물학적 미덕이 될 것이다. 좋은 건축은 안팎으로 '걷고' '돌아다니는' 존 재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건축이다. 나쁜 건축은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럽고 인간의 법칙에 어울리지 않는, 정해진 어떤 지점을 둘러싸고 고정되는 것이다. 설계도 설계, 그것은 구상을 밝히고 고정시키는 것이다. 즉 구상이 섰다는 뜻이다. 설계도는 이 구상들을 정돈하여 이해하기 쉽고 실현 가능하고 전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분명한 의도를 드러내야 하며 그전에 하나의 의도를 제공하는 구상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도면은 재료를 분석해 놓은 표로서 농축된 것이 어야 한다. 수정이나 기하학적 도표로 보일 정도로 농축된 형태 속에서 설계도는 엄청 난 양의 구상과 추진력을 지닌 의도를 담고 있다. 미술학교라는 거대한 공공시설에서 사람들은 좋은 설계도의 원칙을 연구했다. 그런 다음 몇 년 사이에 그들은 교의, 비결, 요령들을 정해 놓았다. 이전의 유용한 가르침이 위험한 관습이 된 것이다. 그들은 내부의 구상을 가지고 외부, 외관에 할당할 몇 가지 기호들을 만들었다. 구상의 집합이자 이 집합 속에 통합된 의도라고 볼 수 있는 도면 은 벽을 나타내는 검은 점들과 축을 나타내는 선들이 장식판 위에서 모자이크를 이루 고, 반짝이는 별 모양의 도표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착시현상을 유발한다. 가장 아 름다운 별이 아카데미에서 주는 로마 대상을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면은 뭔 가를 낳는 존재이다. '도면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것은 엄격한 추상화이고 보기에는 무미건조한 대수학이다.' 또한 건축 도면은 전투 도면이기도 하다. 전투는 진행중이고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다. 전투는 공간 안에 놓인 입체들의 충격으로 발생하며, 이미 존재하던 구상의 결합과 추진력 있는 의도가 사기를 높인다. 좋은 도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무너지기 쉽고, 존속하기 어려우며, 호사스러운 것 을 너절하게 늘어놓아도 모든 것이 빈약할 뿐이다. 처음부터 도면은 건축방법을 함축하고 있다. 건축가는 무엇보다도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대와 상관없이 항존하는 이 문제를 건축에만 한정해 보자. 나는 이 관 점으로만 보려고 노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야기 를 시작하겠다. 하나의 도면은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다. 집이나 궁전은 모든 생물과 유사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부의 건축 '요소들' 에 관해 말하겠다. 그리고 '질 서정연한 배치'로 넘어가겠다. 한 장소에 놓인 어떤 건축의 효과를 관찰하면서 여기서 도 역시 '밖'이 곧 '안'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 기준선 기준선은 독단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그것은 열심히 한 모든 작업을 인정하는 확인 절차이며, 초등학생의 구구단 검산, 수학자가 증명을 마쳤다는 기호와도 같은 것이다. 기준선은 정교한 관계, 조화로운 관계를 연구하는 길로 인도하는 정신적 명령을 충족 시켜 준다. 그것은 건축작품에 조화로움을 부여한다. 기준선은 질서에 대한 유익한 지각을 가능케 하는 감성적인 수학을 가져다준다. 기준 선을 선택하면 건물의 기초적인 기하학이 결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기본적인 인상 중 하나를 결정한다. 기준선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영감의 순간에 속하며, 건축 의 중요한 작업의 하나에 해당된다. 밖이 곧 안이다 미술학교 학생들은 방사형의 축을 그려 놓고, 건축물 관람객이 오직 그 건물만 지각 하며 자기가 그린 축이 결정한 중력의 중심에 시선을 고정시키리라 상상한다. 무엇을 탐구할 때 인간의 눈은 항상 움직이며, 자신도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돈다. 인간은 모 든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시선은 전체 중력의 중심으로 이끌린다. 그러다 주변으로 확 장된다. 옆집, 멀고 가까운 산, 높고 낮은 지평선이 끼여들어 그 모습은 거대한 덩어리 로 변한다. 겉보기의 입방체와 실제 입방체의 용적은 즉각 계량되고 산술적으로 예측 된다. 입방체에 대한 감각은 즉각적이고 본원적이다. 당신이 지은 건물의 용적이 10만 입방미터라고 치자. 그런데 이 입방체 옆에 수백만 입방미터짜리 입방체가 있다면 그 것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 다음에는 밀도의 느낌이다. 돌을 깐 우물, 나무, 언덕은 기 하학적으로 배치한 형태보다 밀도 면에서 훨씬 약하다. 대리석은 나무나 그외 다른 것 보다 훨씬 밀도가 높게 보인다. 여기에도 서열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건축물을 볼 때 지형의 요소는 입방체, 밀도, 소재의 질(숲, 대리석, 나무, 잔 디, 푸른 지평선, 가깝고 먼 바다, 하늘)에 따라 상당히 한정되고 다른 느낌을 준다. 지형의 요소들은 '입방체' , 지질의 성층 구조, 소재 등과 같은 계수의 지배를 받으며 괴상한 옷을 입은 벽처럼 서 있다. 마치 방의 벽처럼. 벽과 빛, 슬프거나 명랑하거나 가라앉은 그늘 또는 빛 등등처럼. 우리는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잘 구성해야 한다. 부인. 우리는 먹진 비례를 가진 상자처럼 매끄럽고 평탄한 집, 인공적이고 비현실적 인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사고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집, 소리가 잘 울리지 않는 집을 당신에게 지어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와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복잡하고 거친 집들에는 반대합니다. 전체적인 통일이 각 부분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안이한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심사숙 고한 결과입니다. 단순한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 초목의 잎들과 반대 방향으 로 지은 이 집에 기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현관은 중심축 선상에 만들지 않고 측면에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분노를 살 일일까요?... 크고 환한 현관 뒤에 휴대품 보관소와 화장실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돌지 않고 곧장 갈 수 있습니다. 한 층을 올라가면 큰 나무들의 그늘에서 벗어난 높은 거실에 당도하는데,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초목의 전망은 멋질 것입니다. 하늘도 많이 보일 테죠. ... 지붕은 없습니다. 지붕 자리에 정원, 일광욕실, 수영장을 설치할 것 입니다. 따라서 거실에서 전체가 내려다보이며 빛이 거실에 집중됩니다. 우리는 커다 란 이중창을 사용해 유리의 차가운 표면을 중화시키는 따뜻한 온실을 설치할 겁니다. 온실에는 중세 성이나 애호가들의 온실에서 볼 수 있는 기이한 식물들과 수족관 등을 가져다놓을 겁니다. 접의 중심축 선상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정원 쪽으로 나가면 나무 아래서 점심식사나 저녁식사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그 층은 하나의 방으로 돼 있는데, 거실, 식당 등과 서가로 쓸 수 있습니다. 참, 한가 운데에 원통형 관을 설치할 겁니다. 뭔가 소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화박스나 보온병 처럼 방음이 되는 코르크 벽돌을 가지고요. 우스운 생각이죠! 하지만 생각처럼 우습지 만은 않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일 뿐입니다. 이 원통형 관은 마치 동맥처럼 밑에서 위로 집을 관통합니다. 어디에 설치하는 게 좋을까요? 안쪽 벽과 원통형 관을 설치한 방의 벽은 천으로 감쌀 것입니다. 안방에는 정리함 선반이 설치되지요. 안방에서는 커다란 나무들의 잎사귀와 여름 식당이 보일 것입니다. 만일 연극 공연을 하고 싶으면 그곳을 덮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층계로 내려가면 커다란 유리 앞에 있는 무대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 원통형 관이 수영장 옆에 있는 이 문까지 올라와, 수영장과 관 뒤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지붕에는 기와나 슬레이트는 없고, 타일 틈바구니에서 풀이 자라는 일광욕실과 수영 장이 있습니다. 그 위로 하늘이 있죠. 사방에 담장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이곳을 볼 수 없습니다. 저녁에는 별과 폴리 생잠의 컴컴한 숲을 볼 수 있지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간막이 벽을 치면 바깥 세상과 완전히 고립될 수도 있구요. 로빈슨 크루소처 럼, 카르파치오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기분전환이 되겠죠. 이 정원은 프랑스식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생잠 공원의 큰 나무들 덕택에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드는 작은 원시림입니다. ... 원통형 관으로 충분한 햇빛이 들어오니 잘됐지 뭡니까. ... 부인, 이 설계도는 전화 두 통 하는 사이에 설계사가 허겁지겁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다분히 고전적이 지형 앞에서 몇날 며칠을 말도 하지 않고 숙고하고 구상한 결과물입니다. 일말의 시적인 멋을 내포하고 있는 이 구상들... 이 건축 주제들은 가장 엄격한 건축 의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철근 콘크리트 필로티 열두개가 있으면 마루는 저절로 생깁니다. 이렇게 지어놓은 콘크리트 우리 안에서 도면은 짐승 을 가두기 위해 만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소박한 역할을 합니다. ... 오랫동안 우리 는 너무 복잡해서 내장을 밖에 내놓고 다니는 사람 같은 인상을 주는 도면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장은 정리정돈해 안으로 집어넣고 액체만 보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건축의 가장 큰 어려움이 거기 에, 정렬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런 건축 주제들에 시적인 멋이 살아 움직이게 하려면 엄격한 유사성이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사된 뒤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쉬워 보입니다. 그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하지만 처음 구성의 노선을 정할 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구조와 계획이 단순하면 청부업자가 덜 까다롭게 구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며 이런 고약한 구조적 수렴은 해결책이 마음 에 들 때에만 용납될 것입니다. ... 건축가들의 칭찬이 그것입니다! 이 마지막 자만의 표현은 웃으려고 해본 소리입니다. 정말로 약간의 웃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현대 장식미술에는 장식이 없다 현대 장식미술에는 장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장식이 인간의 삶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정정하자. 예술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즉 예술은 우리를 고양시키는 사심 없는 열정이다. 따라서 상황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사심 없는 느낌과 필요성을 고려하면 된다. 실제로 는, 공업에서 어느 정도 완벽함을 표현했듯이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깝게 개선한 연 장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장식미술의 찬란한 계획이다. 갈수록 공업은 완벽하게 합목 적적이고 유용한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그것들의 진정한 호사스러움은 우리의 정신을 만족시켜 그것들의 우아한 개념과 순수한 형태, 효율적인 용도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것들 하나하나에게 고유한, 이런 이성적인 완벽함과 명확한 결정은 그것들 사이의 연대성만으로 충분히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관계들에 의거해 우리는 그것들에게서 한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장식미술이라! 내가 지금 역설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이 역설은 겉보기 에만 그럴 뿐이다. 이 항목 밑에 장식이 없는 것을 모두 집합시키고, 평범하고 '예술적 의도'가 없는 모든 것을 변호하자. 눈과 머리가 그런 것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 하게 하고, 아라베스크 문양, 얼룩, 색과 장식의 시끄러운 잡음에 대해서는 반항하고, 때로 재주 있는 모든 작품들을 무시하고, 때로는 사심 없는 행동이나 관념적인 행동을 묵과하고, 수많은 학교, 선생, 학생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자.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자. '그들은 모기만큼 성가신 존재들이야.' 그래서 결국 '현대 장식미술에는 장식 이 없다.'는 막다른 골목으로 가자는 것이다!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없는 것일까? 검토 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진다. 역설은 사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 속에 있다. 우리 머릿속을 채운 이것들을 왜 '장식미술' 이라고 부르는가? 여기에 역설 이 있다. 왜 의자의, 병의, 바구니의, 구두의, 모든 유용한 물건들의, '연장'의 '장식미술 ' 이라고 부르는가? 연장을 가지고 예술을 한다는 건 역설이다. 내가 말하는 역설은 연장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것이다. 라루스 사전에 나온 대로 '예술은 어떠한 개념의 실현에 지식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라는 말에 동조한다면, 연장을 가지고 예술을 한다 는 말은 유효하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지식, 능력, 능률, 절약성, 정확성 등- 을 어떤 연장의 완벽한 제작에 쏟아붓는다 치자. 그러면 좋은 연장, 뛰어난 연장, 최고 의 연장이 나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제작' 과정, 공업 과정에 있다. 우리는 하나의 표 준을 추구하며 개인적인 것, 임의적인 것, 제멋대로인 것, 머리가 돈 것들은 멀리한다. 우리는 규범 속에 있으며 견본 물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역설은 용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 장식이란 잡다한 것, 미개인이 선호하는 기분풀이이다(나도 내 안의 미개인 같은 부 분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인간의 판단 능력은 많이 발전했고 정신 수준도 많이 고양됐다. 우리의 정신적인 요구는 이전과는 다르며 장식보다 우월한 그 무엇이 우리에게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따라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국민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질수록 장식은 사라진다.' (이렇 게 단정적으로 쓸 사람은 아돌프 루스-오스트리아 태생의 근대 건축의 개척자:역주- 밖에 없다.)... 옛날에는 장식물이 드물고 비쌌지만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고 값도 싸다. 옛날에는 단순한 물건이 많고 값도 쌌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것이 드물고 값도 비싸다. 옛날 에는 장식물이 과시의 요소였다. 농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접시를 벽장에 보관하 고 수놓은 조끼는 명절에나 입었다. 군주들의 멋진 집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 늘날 백화점에는 장식물이 넘치고 경박한 처녀들이 그것을 싼 값에 사간다. 싸게 팔 수 있는 이유는 결함이 생겼거나 질이 안 좋은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공장측은 장식가에게 돈을 줘서 생산한 제품의 결점을 위장하고, 재료의 빈약함을 감추고, 번쩍 거리는 금은세공술로 멋부린 매력과 요란한 조화에 시선을 돌리게 해서 장식물의 결점 을 보지 못하게 하는 편이 득이 될 것이다. 날림으로 만든 물건은 지나치리만큼 장식 이 많은 법이다. 고급품은 흠이 없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튼튼하다. 장식이 없다는 것 은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것을 대변한다. 산업화는 이렇듯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장식이 가득한 주철 난로가 단색 난로보다 싸다. 촘촘하고 변화무쌍한 당초문, 주철로 만든 사소한 물건들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예는 이밖에도 많다. ... 지난 몇 해 동안 우리는 금속 건축과 함께 발생한 일련의 사건을 목격했다. '장식과 구성의 분리'가 그 시작이다. 그 다음엔 새로운 형태의 징후로 '구성을 비난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 다음에는 '유기체'의 법칙을 재발견하려는 욕망을 일깨우면서 '자연' 앞에 서 경탄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후 사람들은 '단순함'에 심취했는데, 그것이 우리를 양 식과 시대 미학의 본능적인 모습으로 이끄는 역학의 진실과의 첫 접촉이었다. ... 만일 솔론 같은 현명한 이가 나타나 '리폴린(에나멜 도료의 일종:역주)법' '회반죽'이라는 두 가지 법으로 우리의 흥분을 가라앉힌다면, 우리는 도덕적인 행위를 할텐데. 즉 '순수성을 사랑하게' 될 텐데! 그리고 우리의 처지를 고양시킬 수 있을텐데. 다시 말해 '판단력을 갖게' 될 텐데! 우리를 삶의 환희로 이끄는 행동이 바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 담장에 칠한 흰 '리폴린' 위에서 과거의 잔해를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 들은 눈에 거슬릴 것이다. 반면 그것들은 다마스 원산 피륙과 벽지의 여러 가지 색깔 을 더럽히지 않는다. ... 집이 온통 흰색일 때 아무 것도 거스르지 않고도 사물의 모양이 부각된다. 사물의 입 체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색깔 또한 뚜렷하다. 석회의 흰색은 절대적이며, 흰 종이 위에 쓴 글씨처럼 모든 게 또렷하게 기록된다. 숨김이 없고 정당하다. 깨끗하지 않거나 보기 싫은 물건을 거기 놓아보라. 금방 눈에 띌 것이다. 그것은 화 장품 판매 코너와 비슷하다. 영구히 개정되는 재판소이다. 진실의 눈이다. 석회의 흰색은 극단적으로 도덕적이다. 파리의 모든 방을 회칠을 해야 할 것을 규정 하는 법령을 승인하라. 나는 그것이 경찰의 대대적인 과업이고 수준 높은 도덕의 발현 이며 위대한 국민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빵, 우유, 물이 노예와 왕 모두에게 풍부하듯 회반죽은 부자나 빈자에게, 곧 모든 사 람들에게 풍부하다. 그렇다면 가구란 무엇인가? 가구란 이런 것이다. 일하는데, 먹는 데 필요한 탁자들, 먹는 데, 일하는 데 필요한 의자들, 다양한 방식으로 쉬는 데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안락의자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정리해 놓는 데 필요한 '정리함들'. 가구는 도구, 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구는 우리의 요구에 따라 봉사한다. 우리의 요구는 일상적이고 일정하고 항상 같다. 그렇다, 항상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쓰는 가구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이고 일정한 기능'에 부응한다. 모든 인간의 요구는 똑같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도 똑같다. 하루하루가 주어지 고 한평생이 주어진다. 이런 기능에 부합하는 도구는 정의를 내리기가 쉽다. 그리고 강관, 접히는 금속판, 자 동 용접과 같은 신기술 덕택에 우리는 과거보다 더욱 완벽하고 효과적인 제작 방식을 갖게 됐다. 더 이상 집의 내부는 루이 14세 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걸 일컬어 놀라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술의 종합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공간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생물, 인간과 동물, 식물과 구름의 원래의 몸짓이요, 평형과 지 속성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존재의 첫째 증거는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꽃, 식물, 나무, 산은 선 채로 어떤 환경 속에 살아 있다. 어느 날 그들이 오만한 태 도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눈에 띄어 주변에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다. 우리는 자연의 결합에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렇게 넓은 공간을 조직하는, 그 토록 웅장한 화합에 감동되어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상상한다. 건축, 조각, 회화는 특히 공간에 종속되고, 각자 적합한 방식으로 공간을 지배하려고 애쓴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미적 감동의 열쇠는 공간의 기능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주변에 대한 '작품(건축, 조각, 회화)의 작용' : 파도, 고함이나 웅성거림(아테네 아크 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방사 현상이나 폭발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분출하는 선 들, 가깝거나 먼 풍경이 흔들리고 영향을 받고 지배되거나 애무를 받는다. 주변의 반 작용: 돌담장, 그 규모, 정면의 여러 가지 무게들과 함께 놓고 본 장소, 주변 경관의 넓이와 경사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나 긴장된 산의 능선까지, 모든 분위기가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인간 의지의 신호이며, 그것에 깊숙이 꺼지거나 부각된 느낌, 조 밀하거나 듬성듬성한 느낌, 난폭함 또는 부드러움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수학-조형적 음향효과의 발현-처럼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 그리하여 가장 미묘한 질서에 호소할 것 이고, 기쁨(음악)이나 압박(소음)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1910년경 내 세대의 예술가들이 놀랍도록 창조적인 입체주의의 충동 속에서 접 근했던 공간의 '장엄화'와 관련된 선언을 겸손되이 하려 한다. 그들은 약간의 직관과 안목을 가지고 '4차원'에 관해 논했다. 일생을 예술에, 특히 조화의 추구에 바친 덕에 나는 세 가지 예술, 즉 건축, 조각, 회화를 실천하면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우리는 시대의 분기점을 만드는 중대한 변화가 한동안 순환한 다음에야 진실 을 발견하게 된다. 그 변화란 공간의 지배하에 놓인 건축, 조각, 회화와 같은 주요 예 술의 종합이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가능해졌다. 이때 '이탈리아식' 원근법은 무력하다. 이와 다른 것이 있다. 이 일을 우리는 4차원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이론 의 여지가 없는 자연의 산물이지만, 정의하기가 불가능하고 비유클리드적이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주장들-이를테면 회화는 벽에 구멍을 뚫으면 안 되 고 조각은 땅바닥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등-을 가차없이 몰아내는 발견이다. 불가해하거나 깊이가 없는 예술작품, 또는 거점에서 추방되지 않은 예술작품은 없다 고 생각한다. 특히 예술은 공간 과학이다. 피카소, 브라크, 레제, 브랑쿠시, 로랑, 자코 메티, 리프시치와 같은 화가들이나 조각가들은 모두 같은 것을 정복하는 데 헌신한 사 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건축과 연관된 예술들을 어떤 식으로 결합해야 좋을지를 알았다. 그것은 세잔의 그림처럼 견고하게 축조된 통일성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을 열광시키고 자극을 주는 보기 드문 가능성이 있다. 포르트-도레에서의 주요 예술들의 만남이 그것 이다. 그것들은 서로 도우며 드리운 안개와 아이디어들과 예술가들을 흐트러뜨릴 것이 고, 소간벽, 합각, 합각머리에 대는 삼각면, 전통적인 창 사이의 벽 등에 기득권을 줄 것이다. 이 결합은 기존의 것과 다를 것이다. 도시계획은 결정을 내리고, 건축은 만들 고, 조각과 회화는 그들이 선택한 말을 건넬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마차를 타고 약속 시간에 맞춰 어딘가를 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야릇 하다. 요즘처럼 탈바꿈하는 세상에서는 약속이 중요하다. 그래야 처음 들여놓은 시설의 재 고품을 정리하고, 그 대신 행동하고 느끼고 지배하기 위해 가구를 들여놓기를 갈망하 는 기계주의 사회를 맞이할 수 있다. 1946년 4월 출간된 <오늘의 건축>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공간>에서 데생,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데생을 한다 는 것은 보는 법, 사물과 사람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개화하고 죽는 것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본 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데생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기록되어 남는다. 데생, 그것은 또 발명하고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현상은 반드시 관찰이 있은 뒤에 나타난다. 현상을 발견하고 나서 행동으로 들어가 눈앞에 있는 것 너머로 당신을 인도하는 것이 연필이다. 그때 꼭 생물학이 개입하는데, 모든 생명이 생물학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데생은 언어이고 학문이고 표현수단이고 의사 전달 수단이다. 데생은 사물의 이미지 를 영속시킴으로써 지금은 사라졌으나 그림으로 남은 사물을 환기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내포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 데생은 문서나 구두 설명의 협조 없이도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 은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고 구체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술가에게 데생 은 아무 구속 없이 자신의 미감을 추구하고 아름다움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예술가에게 데생은 연구하고 탐색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는 수 단이고 그가 관측하고 이해하고 나아가 해석하고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용하는 수 단이다. 데생은 예술 없이도 가능하다. 예술과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반대로 예술은 데생 없이는 표현할 수 없다. 데생은 놀이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말하길 삶의 지혜는 휴식을 취할 줄 아는 데 있다 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영원한 휴식 상태이다. 하루종일 카드놀이를 하고 럭비를 하고 인디언 놀이를 하고 병정 놀이를 한다. ... 아이들과 남자들은 최대한 진지한 태 도로 거기에 매달린다. 나도 그렇다. 나는 오래 전부터 데생을 해왔다. 경치, 건축물, 유리창, 술집의 병들, 램프, 조개, 돌, 푸줏간의 뼈, 자갈, 소녀들, 동물들, 그런 것들이 단계들이고 열쇠들이다. ... 예술의 주제는 비밀일 수 있고 영원히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또는 흔적을 찾고 발 견하고 고안한 사람에게만 드러날 수도 있다. 또는 그 흔적이 어떤 개인이나 예술가 자신의 흔적일 수도 있다. 개인의 흔적은 인정될 수 있다. 사물은 상대적인 것이다(인 간의 지각은 개인의 기능이다). 어느 날 저녁, 지중해변 마르탱갑의 작은 별장에서 식사를 마친 나는 아코디언 연주 자인 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부인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들 뒤로 멋진 난간, 바다, 암초들이 보였다. 달마저도 한몫을 했다. 요컨대 완벽한 풍경이 었다! 하나의 주제, 이 주제, 알맞은 시간, 확고한 일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멋지고 좋은 만큼 그것이 예술에는 해가 되고 예술의 적이 된다. 사실 그 모든 것은 결과 뒤에, 또는 결과 아래에 있어야 한다. 결과는 동의를 가져오고 그것을 해결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을 떠들고 다니지 말라, 그것을 써붙이고 다니지 말라, 입을 다물어라, 일하라, 작품(그림)을 만들어라. 사람들 은 화가에게 그렇게 말한다. ... 이제 내 나이 77살로 웬만큼 평가받는 건축가가 되고 나니 사람들은 내게 설명을 요 구한다. 어떻게 교육도 받지 않고 준비 과정도 없이 건축의 현대적인 감동을 창조할 수 있었느냐고. 구경꾼들은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중요 한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어서 이것을 소리 높여 떠들지 않을 수 도 있다. 나로 말하면 1918년부터 행동에 돌입해 원칙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나이 서른 살 때 인지한 방향으로 서투르게 출발했던 것이다. 즉시 비바 람이 몰아쳤다. 1923년, 한편으로 건축과 도시계획 활동을 하고 있던 나는 무례한 발 언으로 괴로움을 겪고 난 뒤 공공연하게 화가를 자처하는 언행은 의도적으로 삼갔지만, 그렇다고 그림 그리는 취미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1923년부터 1953년까지는 침묵의 30년이었다. 1948년 나는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나의 건축작품에서 뭔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 면(나는 이것을 이렇게 정정하련다. '만일 당신이 나의 건축작품과 도시계획 작품에 약 간의 고나심을 기울이는 데 동의한다면') 당신은 이 은밀한 수고를 대단한 미덕으로 인정해야 한다." 마르세유의 주거단위 '빛나는 집'에 관하여 ...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에서 '첨단' 실연을 시도한 것은 우리가 작업실에서 회전 가옥이나 버섯 모양의 집, 또는 다른 공상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똑같다.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동료들과 달리 나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런 나의 의견을 표명함으로써 르 코르뷔지 에의 편을 들고자 한다. ...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이런 표명들과 몇몇 보수주의 '거물들'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르 코르뷔지에를 택하겠다. 하지만 그 즉시 그를 돌아보고 그에게 "안 되는 일도 많다"고 말하기는 할 것 같다. 모든 것 이 가능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본디 변화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르 코르뷔지에가 어떤 괴물-몇몇 사람 들의 견해에 따르면-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괴물은 당국 의 행정 재산에 들어간다는 말인데, 이런 사태는 우리의 '머리가 좀 돈' 주택단지(마르 세유 주거단위:역주)에 더 이상 안전 밸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인만 큼 더욱 심각하다. ...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국가가 르 코르뷔지에를 프랑스 현대 건 축의 반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되면 더욱 염려스럽다. ... 우리는 의식을 점검해 보자. 그리고 우리 중 한 사람의 인습에 대한 책임이 우리 모 두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지금은 법으로 규제되고 있는 건축가라는 직업은 우리 의 정신적인 무정부상태를 반영한다. ... 예술가들, 심미안이 있는 사람들, 실용주의자 들, 현대주의자들로 구성된 예술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 원에서 '빛나는 집'이 오류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이 좋겠다. 1948년 1월 25~26일 R. 루조의 <건물의 하루>에서 그것에 대해 분별력 있게 말하려면 공사 현장을 직접 가봐야 한다. 최근 재건설부는 몇몇 특권자들에게 그것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재건설부는 무슨 수 를 써서든 이런 체험을 하게끔 노력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마르세유에 짓고 있는 주거단위는 하나의 체험이 아니고 건축, 조형, 다양한 표면처리, 일조, 실내공기 조절, 수용 능력에 관한 체험의 가장 큰 '합'을 안겨주는 예로 제시되고 있다. ... (주거단위는) 높은 건물인데도 높은 벽이 없다. 길이 135미터, 높이 52미터 되는 정 면이 수평 줄무늬 때문에 가벼워 보인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6미터짜리 필로티들은, 가구 다리가 그러하듯 조형의 관점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금방 간파할 수 있다. 이 필로티들은 정신적, 미적 이점이 있으며, 지면을 드러내고, 보행자가 갑자기 정면을 접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널따란 내부공간은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고 각각 의 필로티 사이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액자 형태로 잘린다. 이제 주거단위는 기초공사가 끝났다. 이 철근 콘크리트 뼈대-르 코르뷔지에는 이를 ' 병 상자'라고 부르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는 1년 안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면 거의 400채에 가까운 집이 차곡차곡 쌓아놓은 병들처럼 거대한 뼈대 속의 칸들을 점령할 것이다. ... 주거단위를 보고 기둥을 사용할 때와는 다른 식으로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 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성공적인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할 것 이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문제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새로운 삶을 체험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한번 가서 볼 필요가 있다. S. 질 들라퐁 1949년 12월호 <미술>에서 발췌 프랑스 미학의 옹호자이며 국가 고문인 텍시에 씨가 마르세유인들이 입주하기 시작한 '빛나는 도시' 에 공격을 가하고 나섰다. 이것을 만든 르 코르뷔지에 씨의 편에 선 사람들은 이미 30억 프랑이라는 거액이 들 어간 '빛나는 도시' 때문에 2천만 프랑이라는 약소한 금액을 추가 지출해야 할지도 모 른다. '프랑스 미학협회'의 회장인 앙리 텍시에 씨가 손해배상액으로 2천만 프랑을 요구하 고 나섰기 때문이다. ... 대체 어찌된 사정일까? 국가 고문을 겸하고 있는 텍시에 씨는 미셸가에 르 코르뷔지 에 씨가 세운 거대한 건물 때문에 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 모양이다. 그는 이 집합주 택-321채의 아파트, 부속 상점들, 수영장, 운동장, 탁아소, 18개에 달하는 복도(하나하 나가 한 층과 연결되어 있다)-을 주재한 신개념보다 이 '괴물'의 너무나 낯선 추함을 더 염려하고 있다. 원고는 '용법', 특히 공동 거실에 통합된 부엌의 용법을 이해하자 대단한 만족감을 표 명한 최초의 주거자들의 견해에는 관심이 없다. 상처받은 것은 앙리 텍시에 씨의 미적 감각-그는 프랑스 미학의 옹호자이다-뿐이다. 하지만 텍시에 씨의 예술적인 염려 뒤엔 훨씬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클로디위 프티 씨에 의해 거부당한 건축가들, '빛나는 도시'의 건설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기껏해야 이 유감스러운 선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특히 이미 문제 가 된 낭트에서) 건축가들의 이해관계이다. <해방된 파리인> 1952년 8월 25일 표준 크기의 주거단위, 모든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프랑스 정부가 주도한 현대적인 주 거양식을 세계에 알리는 현장에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고 기쁘고 뿌듯합니 다. ... 여기 이 작품은 아무 규정 없이, 지독한 규정들에 맞서 싸우며 세웠고, 인간을 위해 만들었으며, 인체의 비례에 맞게 만들었고, 또한 가공하지 않은 콘크리트의 새로 운 탁월함을 드러내는 튼튼한 현대 기술로 만들었으며, 결국은 이 시대의 뛰어난 자원 을 가정이라는 사회의 기본 세포에 투입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자기 친구와 협력자들 앞에서 감동을 드러냈을 때, 나 또한 감동을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를 따르고, 우리가 낙성식을 거행할 때, 정확히 말해 그토록 말이 많던 이 주거단위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에 그를 도와준 사람 들입니다. 이 주거단위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이의도 많이 제기했고 열광으로 흥분하기 도 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이겠지만 결국 이와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습니 다. ... 오늘 우리는 인간의 모든 편협함, 모든 치사함, 모든 몰이해를 떨쳐버려야 합니 다. ... 주거단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프랑스에 건설한 모든 건물의 중심에 있으며, 해방 이후 세운 24만 9천 가구 중 320채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또한 온갖 것들, 특히 건축 가 르 코르뷔지에가 엉뚱한 짓을 하는 데 낭비한 돈에 대한 비난의 온상이 되고 있습 니다. 하지만 이 320채의 주택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정부가 해방 이후 몇 년 사이에 시작한 일련의 실험 건물에 속하며 아마도 예일 것입니다. 건물의 개념 자체가 그렇고 주택의 개념, 주택의 시설이 그렇습니다. 주거양식마저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 고 제기된 온갖 비난들이 얼마나 현실,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과 다른가를 알게 되면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동굴에 비유하지만 사실 주거단위 는 샤르트르회 수도원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곳에는 소음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이며, 이 '도시'의 주민들이 전적으로 꾸려가는 가정의 사생활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곳 생활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이상한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부모들과 떨어져본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모퉁이 공간에 서 아이들이 지루해할 거라고 말하지만 대신 그들에겐 옥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옥상 이 있기에 이 아이들은 겨울의 긴 저녁 나절 동안 기껏해야 수증기 가득한 부엌에서만 뛰어놀아야 하고, 봄과 가을(그리고 때로는 여름에도 자주)에는 4층 또는 6층짜리 집의 복도 한 귀퉁이에서 온종일을 보내야 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행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둡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햇빛을 듬뿍 받습니다. 사람들은 불편하 다고 말하지만 여름에 한번 이곳에서 살아보십시오. 마르세유 전역이 작열하는 태양 광선을 막기 위해 덧문을 닫을 때, 이 집에는 더 좋은 분위기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가 득 안습니다. 그것은 집의 방향 덕분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인들의 위대한 전통 을 재발견하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르세유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유일한 장소인 아드 님의 집에 다녀오는 길이거든요. 혹시라도 여사께서 아드님의 작품을 못미더워하셨다면 마음 푹 놓으세요. 작품은 좋 습니다. 친구들이 예상한 것보다 낫더군요. 그는 자신을 믿었고 그의 생각이 옳았습니 다.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은 손가락을 깨물어야 한다니까요! 큰 나팔을 불어 회심한 사 실을 알리기 싫다면 숨어서 기도나 해야 할걸요. 이것은 20세기 중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집입니다. 시대에 맞는, 이런 종류로 서는 거의 유일한, 쾌적한 삶을 보장해줄 집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행복해했습니다. 그는 무척 감격한 것이 틀림없어요. 친구들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정치적인 생각? 르 코르뷔지에, 공격을 당한 뒤에 유명해지다 우리 시대에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력-이 이론가이자 예술가에 대해 적어도 우리 세 대에서는 마음놓고 험담도 칭찬도 할 수 없을 것이다-은 지대하다. ... 심지어 오늘날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주장들이 관학주의의 개론처럼 보일 우려는 없는 지 자문해야 할 지경이다. ... 르 코르뷔지에는 질서를 존중하는 인간이다. 그것이 사회적 규율과 관계된 경우이건, 거대한 체계의 내적 논리와 관련된 경우이건 그는 질서를 잘 이해하고 있다. '신질서' 의 지지자들이 프랑스를 차지하던 시대에 르 코르뷔지에는 가장 위대한 품위를 드러낸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과격한 그 어떤 비난도 이 인 물의 성실성과 명예를 훼손하지 못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의 우주는 강제수용자의 우주이다. 좋게 봐도 게토(유태인 거류지:역주)의 우주일 뿐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진흙과 핏방울로 손과 소매를 더럽힌 페탱과 히틀러 같은 인간들의 질서를 선전하는 자로 단정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그는, 신 질서라는 괴물이 어떤 이데올로기(내가 보기엔 그 자체가 인간의 미래를 위해 더없이 위험한 것 같은)의 부패한 표본이 돼버린 우리 시대를 좀먹는 악의 계시자이다. 현대의 건축이론가들은 모두 사회적 요구를 바탕으로 미학을 세우는 것 같다. 사회주 의적 공산주의 이론들과 이것들의 몇 가지 미학적 명제들, 유물사관과 기능주의 사이 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 ... 르 코르뷔지에 씨에게 건축은 총체적인 요구를 만족 시키는 수단이다. 물론 그는 이런 정의가 건축적 아이디어를 철저하게 규명하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기하학적 비율의 아름다움에 관한 고전적인 명제들을 진술하고 있다.... 알렉스 드 생제르 씨가 상당히 과격한 한 선언문 에서 공표한 바에 따르면,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볼셰비키 사회에서 개 인은 사라져야 한다. 인간은 거대한 조직의 표준 성분에 불과하며, 건축물 또한 표준 적인 요소들로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지역적인 양식이나 국가적인 양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건축은 혁명 정신처럼 세계공통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르 코르비지에는 은행가에게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한다. 그는 파리와 모든 도시를 파 괴하는 것은 콘크리트 산업과 신건설 산업의 재정을 지원하는 은행들에게 멋진 사업이 될 것임을 일러주고 있다. 신걸설의 실현은 모든 동업조합을 파괴하고 새로운 무산계급을 창출한다. 이런 식으 로 비볼셰비키당의 군대는 축소됐고 볼셰비키당의 군대는 확장됐다. 신건설은 조형문 화, 회화와 조각을 파괴하며, 인간적 활기를 빼앗고 인간을 기하학상의 동물로 격하시 킨다. 또 국제 자본을 대대적으로 열어 놓고 그것의 절대권력을 엄청나게 확장시킨다. 모든 것이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귀착하는 러시아에서 우리는 그 상황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다. ... 이런 엄청난 기도가 신건설을 위한 국제협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지 그프리드 제데옹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피리로 돌아온 이후 줄곧 '빛나는 도시'는 제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주민인 저는 우리가 상상하고 지어야 하는 것의 이전 단계인 석고와 양털 집을 잊기 위해 파 리를 건닐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규정하도록 우리를 도 와주시고 기쁨과 빛을 위해 한 도시의 가능하고 멋진 비율을 작성해 주심으로써 미래 의 인간형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신 점에 감사드리며 치하하는 바입니다. 선생님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드문 유형에 속한 분이시며, 우리가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한 것처럼 몽상가가 아니라 지난 세기에 운하, 도시, 철도 분야에서 공 구 제작자들이었던 놀라운 생시몽주의자들의 기질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햇빛과 이성 에 바친, 선생님의 이 멋진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정신에 대한 기억을 안겨줌과 동시 에 한 사회의 생물학에 관한 가장 놀라운 자료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자료집에 들어 있는 현상들은 제가 아틀라스(하늘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신:역주)라고 부 르는 이 책을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어떤 세상의 풍요로운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선생님의 위대한 저서에 우정어린 경의를 표하 는 바입니다. 그것은 한 시인의 몽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자료집인 것입니다. 정부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프랑스 국민의 성대한 경의를 표하기로 결정했을 때 전보 가 날아들었습니다. "깊은 슬픔 속에 그리스 건축가들은 아크로폴리스의 흙을 르 코르 뷔지에의 무덤으로 가져갈 대표를 뽑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어제는 이런 전보를 받 았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걸작들과 그가 건설한 도시 찬디가르가 있는 인도는 최고 의 경의 속에 그의 유해에 갠지스 강물을 부으러 오겠다." 이런 것이 영원한 대갚음인가 봅니다. ... 르 코르뷔지에는 막강한 적수가 많았습니다. 그중 몇 분은 생존해 우리의 명예가 되고 있고 나머지는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도로 건축 혁명을 통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끈질기게 모 욕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광은 모욕을 통해 최고의 광채를 얻습니다. 그런 영광은 개인보다는 작품에 바쳐져 왔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폐쇄된 수도원의 넓은 복도를 작업실로 삼아왔고 많은 수도 를 구상한 분이 결국은 쓸쓸한 오두막에서 돌아가시고 말았군요. ...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더 은밀하게는 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화나 조각이나 시를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건축만을 위해 싸웠습니다. ...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를 잘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은 "집은 삶의 보석상자가 되어야 한 다."입니다. 그는 항상 도시를 꿈꾸었습니다. 이 '빛나는 도시'의 설계는 거대한 정원들 에서 솟아오른 탑들입니다. 이 불가지론자가 금세기의 가장 인상적인 교회와 수도원을 지은 것입니다. ... 그는 과격한 논리를 담은 이론을 곧잘 설파했는데, 그 이론들은 예언적일 때가 많았 고 공격적이어서 세기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모든 논리들은 걸작 선고를 받거나 아니면 잊혀집니다. 하지만 그 이론들은 건축가들에게 숭고한 책임감을 일깨워 주었고, 그것은 오늘날 그들의 것이 됐습니다. 땅의 암시를 머리로 정복한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건축가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를 이 시대 최초의 영감 제공 자로 부르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 그는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예술가였습니다. 1920년에 그가 한 말이 그걸 증명합니다. "건축은 빛 속에 결속된 형태들을 가지고 노 는 교묘하고 정확하고 멋진 놀이이다." 더 나중에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콘크리트가 아무리 단단하다 할지라도 그 뒤에 숨은 우리의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다. ..." 그는 논리와 기능이라는 이름으로 감탄스러울 만큼 자의적인 형태들을 만들어냈습니 다. ... 건축 형태의 위대하고도 깊은 유사성을 드러낸 것은 그의 이론들이 아니라 그의 작품 들입니다. ... 여기 핀란드를 변모시킨 알토와 영국의 전언이 있습니다. "예순 이하의 건축가 중 그 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축가는 없다."고 적혀 있군요. 소련의 전언도 있습니다. "현대 건축은 위대한 대가를 잃었다."... 미국 대통령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전세계적이었고 그의 작업에는 영 속성이 실려 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소수의 예술가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었 다."... 오랜 스승이여, 오랜 친구여, 안녕히 가십시오. 편히 주무십시오. ... 갠지스강의 성수와 아크로폴리스의 흙을 여기 뿌립니다. 그가 이룬 성과를 일일이 들추어내기는 어렵다. 우리의 유한한 시계의 회상 너머로 그가 사라지는 순간, 고결하고 위대한 인격의 무게와 충격이 즉시 감지됐다. 그가 살 아서 자신의 잠재력을 활용할 수 없음은 얼마나 큰 비극인지. ... 일생 동안 비옥하고 풍부한 건축, 시, 발명의 풍부한 재능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로 이 만능인의 작품과 인생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다. 그 리고 그것은 미래의 세대들을 부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폭넓은 것이었다. 발 터 그로피우스, 1965년 9월 10일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르 코르뷔지에를 위대한 건축가, 위대한 예술가, 진정한 개혁 자로 인정하고 있다. ... 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진정한 해방자였다는 사실에 있다. 미스 판 데어 로헤. 1965년 9월 7일 르 코르뷔지에의 죽음이 전한 충격이 가라앉자, 우리는 그가 제작한 작품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엄청나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그가 어느 분야에서 가장 뛰어났 는지 가리기란 쉽지 않다. 그는 예술가로, 신건축의 선구자로, 젊은 세대를 격려한 대 들보로 존재했다.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너무나 활력 넘치던 우리의 코르뷔는 죽었지 만, 그는 아직도 멈추지 않는다(그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마르셀 브로이어, 1965년 9월 20일 조정 생각보다 전달하기 쉬운 것은 없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투쟁, 일, 노력을 통해 어떤 자산, 즉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들을 조금씩 획득한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인 개 인의 모든 연구, 모든 자산, 오랫동안 대가를 지불한 이 경험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 이다. 죽음은 인생의 법칙이다. 자연은 죽음에 의해 모든 활동을 마감한다. 노동의 열 매인 생각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흐름 속에 시간은 흐르고 하루하루가 간다. ... 젊었을 때부터 나는 사물의 무게와 건조한 접촉을 해왔다. 재료의 무거움, 재료의 저 항과 접촉했다. 그 다음에는 인간과 접촉했다. 인간의 다양한 자질, 인간의 저항, 인간 에 대한 저항과 접촉했다. 나의 인생은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또한 재료의 무 게에 대해 무모한 해답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 그런데 그것이 먹혔다! 또한 나의 인 생은 이런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그로 인해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까지도 경악하는 것이 내 인생이었다. 또한 나의 인생은 그것을 인정 하는 것, 용인하는 것, 본 것,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는 것이었다. ... 또 나의 인생은 바람과 햇빛을 통해 나의 보잘것없는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 올해 내 나이 77살인데 나의 도덕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은 만들어야 한다. 절제, 엄격성, 정확성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예술 창조에 필요한 것은 규칙성, 절제, 연속성, 끈기이다. 이미 나는 다른 글에서 인생의 정의는 항구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항구성은 자연스 럽고 생산적이다. 항구성이 있으려면 겸손해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용기, 내면의 힘의 증거이고 삶의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 나는 고집쟁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눈이 있는, 느낄 줄 아는 당나귀의 눈을 가진 고집 쟁이이다. 나는 조화에 대한 직관을 가진 당나귀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시각형 인간 이다. 아름다울 땐 아름다운 것이다. ... 내가 17살 넘어 처음 집을 지은 이후 나는 숱한 모험, 곤란, 재앙을 겪고 때로는 성 공하면서 작업을 계속해 왔다. 77살이 된 지금 내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져 있다. 나의 연구와 나의 생각은 몇 번쯤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듯하지만, 장애물은 항상 존재하면 서 방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는 항상 활동적이 었고 적극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시혼을 추구했다. 눈 과 손을 가지고 일하는 시각형의 인간인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조형적인 표현들에 의 해 자극을 받는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속에 있다. 응집력, 일관성, 통일성, 건축과 도시 계획의 결합,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은 하나뿐이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며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참견하지 않는 수줍은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혁명적인 요소도 있고 혁명적인 사건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냉 정하게,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아야 한다. ... 50년 전부터 나는 세상의 소문과 군중을 피해 나의 은신처에서(나는 명상을 좋아한 다. 심지어 나 자신을 당나귀에 비유한 적도 있다) '착한 서민'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 을 연구해 왔다. 한 가지 걱정이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가정에 성사 의 의미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가정을 가족의 신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무리 작은 집도 더없이 귀중한, 행복을 상징하는 곳으로 변했 다. 크기와 용도에 대해 그런 개념을 갖는다면 당신은 옛날에 세운 성당들 밖에서, 오 늘 당장 가족에게 맞는 신전을 지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들어가 살 집을 통 해 그 일을 할 수도 있다. ... 장소와 부지 선정에 전념하는 것이 임무이다. 그것이 '건설자'의 임무이다. '건설자'는 지칠 줄 모르는 우애 있는 대화로 건축 예술의 양팔인 기사와 건축가를 연결시키는 새 로운 직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이 가족이 신전이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사람들은 세놓기 위한 상 자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건축의 개념은 불완전했다. 건축이라는 개 념이 단 한 가지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정의란, 건축은 주거, 노동, 여가를 위해 장소와 부지를 창조하고 그것들을 '자연 상태' , 다시 말해 우 리의 거부할 수 없는 주인인 태양의 단호한 명령 아래 놓는 것이다. 낮과 밤은 언제까 지나 계속되면서 우리 행위들의 타당성을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을 되찾아야 한다. 생물학, 자연, 우주와 같은 근본적인 법칙들의 축에 일치하는 직선을 찾아야 한다. 수평선처럼 구부러뜨릴 수 없는 직선을. ... 현기증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삶을 사는 동안 이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머릿 속에서 이루어지고 형성되고 배태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끝 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1965년 7월,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