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삶 (축복받은 제국의 역사) 지은이: 존 셰이드 john scheid, 로제르 아눈 Roger Hanoune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김수연 로마 제국은 대립과 전쟁,문화교류를 통하여 BC 8세기부터 클로비스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성장했다. 에트루리아와 마그나 그레키아, 즉 대국 그리스의 위협적인 영향권에 들어 있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로마는 AD 2세기경부터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다양한 문 화가 공존했던 이 제국은 5세기경에 이르러 일부 붕괴되기 시작한다. 제1장 라틴의 도시국가에서 세계의 제국으로 로마 문화와 오늘날 서구사회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관련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 치 파라오나 카르타고나 갈리아 시대처럼 로마가 현대사회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와 문화,법률 등, 다양한 로마 문명의 유산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와 사회, 종교, 문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로마인들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한 사 회적 이상은 사회생활의 즐거움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개인이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데 있었 다. 경제적인 생산활동은 전반적으로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부 노예들의 경 우에는 엘리트 집단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종교는 말 본래의 뜻과는 달리 개인적인 신앙 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그밖의 모든 면에서도 그들은 우리와 달랐다. 가룸이라는 생선 소 스로 맛을 냈던 그들의 요리와 후추과자도, 사랑에 관한 예절 관념도, 그리고 남녀 혼탕과 공동 화장실에 대한 청결개념도 우리들에게는 낯선 것일 뿐이다. 전체, 복합적인 전체 12세기에 걸친 역사 속에서, 로마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로마를 단일한 개념으 로 파악하려 하거나 "전형적으로" 로마적인 시기를 골라내려 하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다. 로마의 문화는 각각의 시기마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BC 7세기경부터 이 전 체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라틴어 문화권을 하나의 단일문화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 능한데,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BC 3-2세기경부터는 이러한 성격이 더욱 심화된다. 각각의 시기와 체제를 거치면서 로마 문화는 다른 문명을 섭취해 풍부해지고, 그 문명들 또한 점진적으로 이 전체의 일부로 섞여들었다. 따라서 로마의 과거 에 종종 그러했듯이 몇 가지 특징-농민층의 투박한 단순성, 법률가들의 양식, 고집스러우 나 깊은 신앙심, 개혁에 대한 폐쇄성, 민주주의적 사고방식과 정치에 다한 반감, 뛰어난 전쟁 수행능력 등-만으로 로마 문화를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순수하게` 로마적인 문 화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보하는 로마 문화"라는 개념도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개념은 부유하 고 교양있는 로마, 자유시민의 로마, 다시 말해서 극소수 엘리트들의 로마에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빈민, 여성, 노예들도 분명 로마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그러나 그 들에 관한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인`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들은 절망적인 어 둠 속에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우리가 제국주의 절정기를 구가한 로마를 더 이상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모델이나 절대적인 전범으로 삼지 안는다고 하더라도, 로마의 전체적인 역사는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를 정복한 작은 마을 BC 753년 로물루스가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를 세웠을 때, 어느 누구도 팔라티누스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작은 마을의 운명을 예견하지 못했다. 티베르강 오른편을 경계로 해서 자 리잡은 에트루리아는 거듭 이동하여 점차 중앙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떨친다. 남쪽 이스키아 에는 최초의 그리스 출신 식민지 주민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도시의 융성이라는 역사적인 흐름을 타는 행운을 안고 있었다. BC 6세기 말 엽에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세력권 내에서 로마는 강대하고 번창한 도시국가로 떠오른다. 전 통에 따라 왕이 통치해 오던 로마는 BC 509년 공화정으로 체제를 변화시켰다. 정치 수반 은 집정관들로, 해마다 시민들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법이 로마 를 지배했으며, 이는 훗날 시민법의 주요한 원칙을 이룬다(이 법은 광장 한 편에 붙은 동 판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12표법`이라 불린다). 이 시기를 공화정 시기라고 부른다(BC 509-527). 날로 강성해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의력 때문에 에트루리아는 중앙 이탈리아 에서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때가 BC 474년으로 이후 BC 3세기까지 공화정 체제의 로마는 자유로이 성장하면서 에트루리아 도시동맹 세력을 흡수하고자 노력한다. 로마는 세력이 약 해진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분쟁을 일으켰으며, 라티움의 라틴족, 아브루치의 삼니음인들과 같은 중앙 이탈리아의 여러 민족들, 그리고 더 남쪽으로는 마그나 그레키아의 도시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2세기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 도시연방을 거느리 게 된다. 이 거대한 연방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있는 여러 도시들뿐만 아니라 정복활동으 로 건설한 수많은 식민지도 포함되어 있다. 식민지들의 충성도는 대단해서(식민지들은 로마 를 모델로 도시국가를 건설햇고 로마의 시민들이 이주하여 살았다). 로마는 그 위세로 이탈 리아 동맹국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동맹세력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 포에니 전쟁의 시련 로마가 지중해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로마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의 영토확장 욕구와 이해관계는 몇 가지 조약을 맺는다고 해결될 성싶지 않았다.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한 세기 동안 세 번의 전쟁을 치른다. 첫 번째 전쟁의 서곡은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비롯된다(BC 264-241). 이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명백하게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었다. 곧 두 번째 전쟁이 벌어졌다. 서부 지중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 처절한 대규모 전쟁은 카르타고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패전으로 끝을 맺는다(BC 219-202). 군대와 코끼리를 앞세워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 한니발은 여러 도시와 시민들이 로마를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로마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여러 도시들이 그의 대열에 합류했고 그는 눈부신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엄청난 수의 병사를 공급해 주었던,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군사동맹의 견고한 고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밀려난 한니발은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퇴하고 만다(BC 202). 로마의 최대 적 수였던 카르타고는 잔류세력들의 마지막 저항에도 불구하고 BC 146년 마침내 멸망한다. 세계정복 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 중심의 동맹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로마는 세 차례 의 전쟁을 통해 BC 3세기말부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알랙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 세운 제국들, 특히 마케도니아에 대항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그리스의 도시들이 로마에 도움을 요청, 로마를 지중해 동부지역에 rm끌어들였다. 그 러나 로마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제국과 도시들까지도 무릎을 꿇게 만든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과 전쟁은 1세 기 중반까지 계속됐으나, 로마의 지배력은 확고부동했다. 로마는 끝없이 확장정책을 펼쳤 으며 BC 30년경에는 이집트까지 굴복시킨다. 그러는 동안 로마와 전 이탈리아는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격량에 휩싸인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BC 130-120년경부터 약 1세기 동안 로마와 이탈리아는 내전에 시달린다. 이 혼돈의 시 기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카이우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조치로뷰ㅜ터 시작된다. 그 들은 먼저 엘리트 로마인의 거만함을 누그러뜨리려고 했으며, 제국주의 정책의 성과를 공 평하게 재분배하고자 했다. 가난한 로마의 시민들에게 땅을 할당해준 것 등이 그런 예이 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암살당한다. BC 91년-88년 사이에, 로마의 월권행위에 격분한 이탈리아 동맹의 일부가 정복전쟁의 성과를 분배받는 데 한몫 할 욕심으로 로마에 마지막으로 저항한다(동맹시전쟁). 짧았지만 매우 격렬했던 이 전쟁은 내전의 형태를 띠었으며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이 났다. 하지만 로마에서도 신중론이 고개를 들었다. 100여 년간이나 이어져온 그들의 동맹을 더욱 견고 히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로마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의 권리를 부여한다. 세 번에 걸쳐 일어난 내전은 로마 엘리트들간의 대립의 결과인 동시에 제국주의정책의 영향으로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 심각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계속되는 전쟁과 승리한 군대들이 가져온 귀중한 전리품들로 인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 상이 나타났다. 즉 로마 병사들은 서서히 직업 군인이 되어갔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대장, 즉 최고 집정관들이 정복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획득 했다. 결국 직업적인 군대에 의존하여 개인이 군대를 소유하기 시작하는데, 이때가 BC 1 세기초이다. 그라쿠스 형제사건과 동맹시 전쟁이 끝나갈 무렵, 또 다른 위기가 로마에 찾 아온다. 이 위기는 BC 27년 로마에 새로운 정치체계가 들어서면서 끝난다. 마리우스와 실라의 대립(BC 87-82),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충돌(BC 50-48), 이러한 내전들은 당시 명망 높은 장군들 사이에 독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더 이상파당간의 적대관계를 저지할 수도, 필요한 개혁을 수행할 수도 없는 구체제에 대한 파산선고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시민의 숫자와 제국 의 확장에 대처해서 로마 공화정의 정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로마의 실력자들은 저마다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BC 44) 카이사르의 반대파와 추종자들 간 에 새로운 대립이 일어났다(BC 44-42). 여기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추종자들 사이에도 분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내전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와 그의 동맹자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의 후게자인 옥타비아누 스가 맞섰다(BC39-31). 이 대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둔다. BC 27년 옥타비아 누스는 제1인자로서 원로원 의장의 권위를 확고히 하면서 아우구스트스라는 칭호를 부여받 고 로마 제국을 설립한다. 새로운 정체체제인 제국(empire)의 명칭은 원로원이 부여한 황제(emperor)라는 이름에 서 따온 것이다. (라틴어 imperator는 개선 장군을 의미한다.) 로마제국은 도시국가 로마 의 계속된 정복활동과 확장이 불러일으킨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통치와 행정기구들 을 효율적으로 조정해 나간다. 이제 로마는 1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화와 통일을 유지한다. 그 동안 내전에 동원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돌려, 끝까지 로마에 저항하는 민족들을 정벌 하자 평화가 찾아왔다. 또 전쟁과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후부터 이탈리아인들과 로 마의 속주 주민들 모두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의식해 통일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지배를 문제삼지 않았다. 이 평화의 시기(팍스 로마나)에 프린키파 투스(원수정)라 불리는 체제가 탄생했다. 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한 로마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체를 이루며, 그 속에서 인적, 경제적, 문화적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진행시킨다. 이 통 일된 체제 속에서 러마 문명은 절정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제국 3세기 중반 재개된 내전이 반세기 동안 이어지면서, 평화의 시기도 종말을 고한다. 로 마 제국은 점차 로마 고유의 특징을 잃어가면서, 로마의 제국이 아닌 세계의 제국으로 변해 갔다. 지방에서 부흥한 "거만한" 귀족들이 로마에서 그 세력을 휘두르자, 로마는 옛날처럼 독자성을 가진 도시로서의 명성을 더 이상 지켜갈 수 없었다. 국경에서는 파르티아인들 과 게르만족들이 쉴새없이 국경을 넘어 침략해 왔다. 그러나 로마는 3세기 말부터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개혁정치와 함께 새 로운 시기로 접어들어갔다. 이때부터 로마는 두 제국으로 나뉘어 두 황제가 통치한다. 모 든 명령체계는 일신되고 보다 효율적인 체제가 들어섰다. 다시 1세기 동안 로마는 예전의 안정과 번영을 느릴 수 있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기독교가 번성하면서 새로운 체제으 지 주가 된다. 그러나 외적들의 침입에 시달리던 서로마제국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제국의 중심은 동로 마제국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세운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이 제국의 진정한 수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왕이 로 마를 침략했고, 455년에는 반달족의 겐세리크가 로마에 엄청난 피해를 입렸다. 476년에는 결국 게르만의 오도아케르에 으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만다. 533년부터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일부분이나마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그 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고대의 문명세계 거의 전부를 거느리고 통합했던 거대한 단일체, 세계의 제국 로마도 끝을 맺는다. 세계의 제국 로마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로마에서 파견한 행정관이 통치하던 지역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략 40여 개에 달했다. 서쪽의 지부롤터에서 동쪽의 흑해, 북쪽의 영국에서 남쪽 사하라 사막과 수단 지방,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펼쳐저 있었다. 로마 군데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오직 페르시아 제국뿐이었다. 자발적이든 강제 적이든, 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500년 이상을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로마 제국이 이 모든 지역에 흔적을 남기고 또 각 지역들간에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주 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로마는 절대적인 불평등의 사회였다. 로마 시민들이 모두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와 자유시민, 외국인과 로마인, 남자와 여자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 별의 벽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폭넓은 가족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명예와 안정을 추구했는데, 이런 독특한 사회제도를 '클리엔클라" 관계라 부른다. 제2장 로마인의 일상 고대 로마인들은 노예와 자유시민이라는 매우 판이한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자유 시민은 소수의 로마인과 다수의 외국인(다른 도시나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 출신인 이들을 페레그린이라 불렀다)으로 구성돼 있었다. 또한 로마 시민들 중에서도 일반대중과 귀족은 엄격하게 계층이 구분돼 있었다. 하지만 이 사회 계층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 수적인 크기에 반비례하고 있다. 다수를 차지한 노예와 일반시민 계층에 대해서는 현재 전해지는 자료가 거의 없고, 남아있는 것은 엘리트 계층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노예 로마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여러 분야에서 노예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 다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은 사실 이 수많은 공노와 사노들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노예시장으로 팔려온 이들은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어떠한 정치적, 법률적 권리도 없었다. 제정기에 들어와 노예 소유주의 지나친 행위를 금지 하는 조치가 취해지면서 노예들의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고대 로마 말기까지 노 예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노예들은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일을 맡았다. 개인 소유의 노 예 중 도시지역의 노예들은 매우 다양한 일에 종사했지만, 농경지역에 사는 노예들은 형편 이 그리 좋지 않았다. 또 한 집안에 사는 노예 사이에도 주인의 신임 정도와 그들의 능력 에 따라 생활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노예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는가 하면- 심지 어 일부 노예들은 자시 노예를 거느리기도 했다- 거의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주인의 상담 자나 긴밀한 협력자, 주인의 친구 역할까지하는 노예도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노예와 농 장에 묶여 비참한 환경에서 육체노동을 하던 노예들이 있었다. 키케로와, 그의 노예이자 16세기까지 널리 쓰인 속기법의 발명자이기도 한 티로에 대한 이야기는 주인과 자유노예간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이다. 키케로와 그보다 세 살 아래인 티로는 같은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 키케로는 티로 에게 늘 관심을 두고 살펴보면서 그를 심복으로 만든다. BC 53년 키케로가 마침내 노예신 분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때부터 티로는 마르쿠스 툴리우스라는 옛 주인의 성을 자신의 이 름 앞에 붙인다. 이제 티로도 로마 시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티로는 이후에도 키케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위해 일한다. 두 사람이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암살당한 후에도 티로는 옛 주인이자 친구가 생전에 남긴 편지와 연설문 등을 모아 출간하면서 활발하게 추모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이 러한 예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키케로가 죽고 100년 후, 원로원은 주인이 자신의 집에서 암살당한 경우에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노예는, 설령 그가 이미 해방된 노예라 할지라도,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도시나 공공단체에 속한 공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예와 자유노예들은, 주인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주인의 성과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더라도, 그래서 로마 시민이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주인의 권력과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 로마 시민이 되는 것 여타의 고대국가와는 달리, 로마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노예와 외국인에게 선별적 으로 시민권(오늘날의 국적)을 부여했다. 주인이 개인적으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거나 공공 의 결정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시민권을 주었으며, 그것은 개인이나 한 가족, 또는 환 집단까 지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 노예의 헌신에 대한 보상이거나 로마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대 사로 혜택을 준 것이다. 이러한 "귀화정책"은 별다른 체계없이 이루어졌으며, 사안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시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시민권외에도 출신 도시에 따라 분 류한 또 하나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두 개의 시민권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 렇다고 어느 한 시민권에 따르는 의무가 면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로마 시민의 수는 기원 초에는 1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400만 명이었다). 로마 제국의 울타리 내에서 살고 있던 5000만 명의 사람들(이 수치는 로마의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에 비하면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로마의 이름을 앞세워 엄청난 특 권을 누렸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출신 도시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BC 212 년 바시아누스황제는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 내에 살고 있는 자유민 신분을 가진 모든 외국 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이 칙령은 안토니우스법이라 불린다). 이 칙령은 로마의 자유시민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가장 큰 장벽을 철페한 것이었다. 이후 모든 자유시민은 로마의 법 앞에 평등했으며, 로마법의 보호와 혜택을 동등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시민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로마 시민은 그들이 가진 세 개의 이름 때문에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이름이 있고(예를 들면, 마르쿠스), 다음으로 가문의 이름, 즉 성이있고(툴리우스), 첨명(첨명)이 있 었다(키케로). 이렇게 셋으로 이루어진 이름은 로마 시민임을 나타내는 특징이어서, 로마 시민으로 행세하고 싶은 이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붙였다. 이외에도 로마 시민은 대체로 아버지의 이름 ("마르쿠스의 아들" 이라는 식으로)과 출신부족(로마 시민들이 속한 35개의 지역 중 어느 하나)을 나타내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시민을 공식적 으로 지칭할 때는, 마르쿠스의 아들이며 코르넬리아 부족 출신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라는 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로마인들은 간단한 옷을 입었다. 튜닉이라는 무릎까지 오는 긴 속옷위에 남자 들은 두건이 달린 망토를 입었고, 여자는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입었다. 공식적인 자리나 의식이 있을 때는 튜직 위에 토가라는 길고 펑퍼짐한 옷을 주로 입었는데, 서열에 따라 "휘 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했다. 군인들은 안구스티클라부스라는 자주색의 좁은 띠를 튜닉 위에 두르고 금으로 만든 고리 를 장식했으며, 원로원 의원은 라티클라부스라는 폭넓은 자주색 띠를 둘렀다. 집정관들 역 시 자줏빛 띠로 장식한 토가를 입었다. 이렇게 구분된 덕분에 로마 시민들은 타인의 신분 과 지위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로마 시민들은 평등하지 않았다 로마의 장인과 노동자들은 자유시민이든 해방된 노예든, 함께 조합을 만들어서 한 집단을 이루기도 했다.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사타리콘》에는 당대의 갑부인 트리말키온의 짐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동양인 자유노예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생계에도 도움이 되었다. 로마 사회는 납세자만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였다. 단순한 시민집단 외에도, 개인마 다 그들이 내는 세금(개인은 재산의 정도를 신고했다)에 따라 정부가 등급을 매겼다. 하나 의 등급은 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그 대가로 일정한 권리를 누리는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대개 한 평생 지속되고 세습되지는 않았다. 이런 제도에서는 공공의 결정과 정해진 조건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중요시했다. 가장 권위가 있는 계급은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비롯하여 600명의 의원과 전임 집정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역할은 현 집 정관의 직무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가사계급을 구성하는 군인은(제정초기에 2만 명 정도였다). 군대에서 기병이나 일반장교 로 복무할 의무와 배심원 자격으로 법정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제정하에서는 이 두 계 급의 구성원이 대거 지방행정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로마 집정관의 호위를 담당하는 하급군인이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이나 제국 내의 다른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계급이 있었 는데, 10인대라고 불리는 지역 원로원(이것은 중앙의 원로원 계급을 모델로 하여 성성된 것 이다)이나 황제의 가문에 관련된 제식을 담당한 아우구스탈 등이 그것이다. 원로원과 기사계급이 말하자면 로마의 엘리트 집단인 셈이다. 그러나 로마의 모든 엘리 트들이 이 두 계급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니다. 부유층 가운데 상당수는 그 계급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한 계급에 소속되려면 재산 외에도 갖춰야 할 요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 수의 귀족은 엘리트 내부에서도 특별한 집단을 구성했다. 대물림받은 그들의 권위는 전설적 인 가문의 역사에 힘입어 대중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공화정 시기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가문들(예를 들어, 율리우스나 모르넬리우스)끼리 집 단을 형성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결합을 통해 그들은 공동으로 옛 선조의 유산을 되찾았으며, 집단 지례를 확고히 하고(이것이 이른바 씨족이다). 가문의 묘지를 공유했다. 그러나 가문간의 결합은 기원 초가 되면서 점차 사라진다. 로마의 엘리트 집단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엘리트들은 로마나 그 인 접지역의 출신자로 한정되던 데서 벗어나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몇 세대를 거치 면서 지방 유지층이나 로마에서 이주한 귀족층 등, 지방 출신 가문까지 아우르는 경향을 보 여준다. 가족 내의 권위 로마의 하층민은, 심지어 노예까지도 자유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합법적인 가정(가 족)을 꾸려나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오직 지배계급만이 제도에 맞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 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가문의 명성과 권위, 제사, 유산 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가장은 노예를 포함한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엄 청난 권한을 행사했다. 가정 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가장은 유산을 물려주고, 결혼과 입 양 등을 통해 가문을 이어나가고, 도시국가를 존속케 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가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이러한 권력을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아이의 교육을 가장이 직접 담당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 고 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가족의 범위는 직계가족뿐 아니라 6촌까지 방계가족도 포함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로마 가정의 전형은 한 증조부의 후손 3대가 모여 사는 형태였다. BC 2세 기경에 아일리 투베로네스 일가는 열세 가족이 같은 집에서 살았다.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 도-라틴어로 가족을 가리키는 파밀리아(familia)는 종종 이들만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했 다- 가족의 일원이었다. 전통적으로 한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은- 아내, 아이, 노예는 물론 이고 때로 자유노예까지 포함하여- 한 집에 사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상류층에서는 결혼한 아들이 대개 분가해 살았으며, 생활비조로 부모에게 재산을 받아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아들들은 독자적인 결정권이 없 었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아버지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그들의 것 이 될 수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딸은 결혼하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남편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아내가 남편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타나 고 있다. 이런 현상은 법적인 여성해방의 추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결혼하고도 계속 해서 아버지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물론 부부재산제의 점진적인 확산이 실질적인 여성해방과 맞물려 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결혼식 딸의 경우에는 12-16세 사이에 혼사를 정했고, 아들도 대체로 18세 전후해서 결혼을 했 다. 제정기에는 원로원 가문이라는 좁은 범위 내에서 선택해야 하는 행정관은 대략 첫 임 기가 시작되는 24세 경에나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다(단, 그만한 능력 을 갖춘 사람의 경우에만 그랬다). 가장 격식있는 형태는 콘파레아티오라는 결혼 종교의식 이었다. 10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물까지 바쳤던 이 의식은 점차 세습귀족들 사이에서만 전 해 오다가 공화정 말기에 사라진다. 또 다른 형태로, 5명 이상의 증인 앞에서 신랑이 신부 를 사오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결혼식이 있었다. 이는 남자가 신부의 아버지에게 딸을 데려 오는 대가로 돈을 준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장 흔했던 형태는 우수스(usus: 라 틴어로 "사용"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결혼식이었는데, 여자가 1년 동안 남자 가족과 같이 살아본 다음에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법적인 결혼식을 올리 는 사람은 로마인들 중 살기가 괜찮은 일부에 불과했다. 로마에 살고 있던 그 밖의 외국인 들은 나름대로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로마인들은 평균 3번 정도 결혼을 했다. 여성의 사망률이 높고 이혼이 쉬운 탓도 이었지만, 단지 문서상으로만 부부인 경우도 있었다. 결혼 여부는 일반적으로 가장들이 결 정했으므로 개인의 감정이나 사랑과는 무관했다. 결혼이란 그저 양쪽 집안의 우호를 증진 시키고 가문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데, 집안의 세습재산이 많을수록 그런 경향 이 심했다. 그러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젊 은이들의 책임감이 줄어들었다거나 로마의 결혼풍속이 붕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높은 아동 사망률 때문이다. 로마에서 태어난 아이가 유아기를 무사히 지낼 확률은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고, 20세까지 살아남는 아니는 그 절반에 불과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의 수가 20대를 넘어서 점차 감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마인들이 아내를 서로 교환하거나 임신한 여자와 결혼했던 이유를 알만한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카토의 일화는 유명하다. BC 1세 기경의 정치가였던 카토는 호르텐시우스가 임신한 자기 아내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호루텐시우스가 죽자, 그는 옛 아내와 다시 결혼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했다 결혼한 여자들은 집안에서 미약한 존재였다. 그들에겐 가문을 위해 희생할 권리조차 없 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정을 관리했고, 그리스의 여자들처럼 방에만 갇혀 지내지는 않았다. 부인은 남편과 동반해서 외출을 할 수 있었고, 남자들이 모이는 식사모임 등에 참속할 수도 있었다. 또한 사회적인 활동도 가능했는데, 예를 들면 기혼여성만을 위한 의식 등에 참석하 곤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 이름이 정해지면서부터 정식으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사내아이는 태 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여자아이는 9일째 되는 날 이름을 부여받았다. 가장은 아이가 어떤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령 기형아라든지 하는 경우에는 내다버릴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화려한 토가(집정관이 입는 것과 같은 보라색 띠를 두른 것)를 입고 부적을 넣은 작은 주머니를 목에 걸고 다녔는데, 이것을 블라라고 불렀다. 딸은 결혼할 무 렵, 그리고 아들은 성년복을 입는 17세 정도가 되면 이 불라를 벗고 성인 대접을 받았다. 아이들은 집안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따로 마련한 좌석에 않아 집안의 연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고, 종교의식에서도 아버지를 돕는 역할을 했다. 로마 사회의 기반, 클리엔텔라 관계 로마의 시민들은 자유시민으로서 그가 차지하는 서열에 따라, 때로는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사회의 여러 조직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평범한 가문에 재산은 많지 않으나 야심을 가진 이들은 부자나 권력자의 클리엔텔라("피보호자"라는 뜻으로, 클라이언트, 클리앙 등으 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라틴어의 원음을 기준으로 표기했다:역주)가 되곤 했다. 이 관계는 세습되었으며, 클리엔텔라와 파트로누스("보호자"라는 의미:역주)간에 아주 긴밀 하고도 상호적인 유대관계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동원해서 상대방 을 보호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서로간의 충실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상호부조 관 계는 정치, 사회, 재정 등 총체적인 면에서 로마인의 삶의 아주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조 세 유권주의를 바탕으로 한 로마 사회에서 평범한 개인이나 단체가 제대로 인정받기란 그만 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클리엔텔라 관계말고도, 한 로마인은 다른 도시의 세력있 는 가문이나 같은 로마에 있는 가문의 클리엔텔라가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정식 계약에 의 해 몇 개의 단체나 한 지방 전체가 로마 명문가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고마의 퀴두스 아라디우스 루피누스 발레리우스 프로쿨루스(오늘날 아프리카 튀니지에 해당 하는 불라 레기아 출신으로, 원로원 가문의 후손)의 저택에서 발견된 6개의 동판에는 320-322년 사이에 아라디우스및 그의 후손들과 바자센시(튀니지의 나뵐과 수스사이에 자리 한 도시) 사이에 체결된 상호 보호조약이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로마 제 국에서는 주교가 파트로누스의 역할을 맡는 경우가 흔했다. 상호부조 로마는 온통 수많은 계약과 사적인 관계로 얽힌 사회였다. 이런 관계 덕분에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이나 여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사건들로부터 안전과 편리함을 도모할 수 있었다. 클리엔텔라에 기반한 우호관계는 공화정 시기에 이어 제정기까지 이어졌다. 그리 고 "팍스 로마나" 덕분에 모든 계층의 로마인과 로마 내 외국인들이 수월하게 외국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제국의 모든 시민과 도시들에 대한 결정권을 로마가 쥐고 있었던 만큼 이 시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호스트와 클리엔텔라, 파트로누스 간의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여행할 때 후원과 접대를 후하게 받으려면 능력 있는 파트로누스 한 명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로마의 국가체제가 어디서나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험이나 은행, 통신 등의 체계가 광범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으면서도 그 지역사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중개인이 필요했다. 이 매개자가 호 스트이다. 계약과 방문여행을 통해 맺은 이런 우호 관계는 클리엔텔라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 클리엔텔라와 파트로누스, 혹은 호스트들 사이의 보수는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으 며, 상대방의 지위나 재산 등에 따라 결정되었다,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자신의 보호 아래에 있는 협력자들을 더 많이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과 사를 막론하고 많은 돈을 내야 했는데, 특히 공적으로는 부담이 컸다. 클리엔텔라 관 계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에베르게티즘이라는 신의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로마와 제국 내 모든 도시들의 사회적, 정치적 중추의 역할을 했다. 유력인사들은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도 시들에 많은 반대급부를 약속하고 제공했다. 서커스의 유치, 연회, 대중 목욕탕의 무상이용 공공건물의 설립이나 보수, 로마로 보내는 전령의 비용 부담 등, 이들이 자신의 명예나 지위 를 지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의 명목은 수없이 많았다. 그 대신 이 유력인사들은 최고의 지 위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일종의 사회적 의무와도 같았다. 약속이 좀 늦게 이행되더라도,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상대방에게 해주어야 할 일을 명백 히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규범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당사자가 사망하는 경 우에는 후손에게 의무가 대물림되었다. 이런 엄격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자유에 대한 요구 와는 별도로 로마 시민과 도시국가의 삶은 상당부분이 고대사회의 상호의존 법칙에 의해 규 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는 그리스로부터 부분적으로 이어받은 도시국가의 모델을 보전하고 확산시켰다. 로 마를 거치면서 비로소 도시국가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오늘날의 법치국가들이 원형으로 삼는 법률의 원칙들을 만들어낸다. 500여 년 동안의 변화를 거치면서 라티움의 도시국가 로마는 모든 자유인의 조국이 된 것이다. 제3장 도시국가의 세계 도시국가의 체제 내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그리스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 고 생각한 사람들 사이에는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 큰 차이가 있었다. 로마인들의 고유 한 특징이야 제쳐두고라도 사실상 로마는 BC 7세기경부터 지중해를 중심으로 태동한 도시 국가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당시의 다른 도시(그리스 국가들이나 카르타고)와 유사한 사회생활을 꾸려나갔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즉 로마인들은 집단의 이익 을 놓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공동으로 결정을 내렸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수많은 도시국가와 그들의 연방이 파괴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시국가의 행정적, 정치적 모델이 널 리 보급되고 보다 공고해졌다. 로마 제국은 하나의 모자이크와도 같았다. 로마라는 최고 권력 밑에 위상과 자율권의 정도가 저마다 다른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였 던 것이다. 시민이 하는 일 자유 로마인은 시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시민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 람은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라 시비타스, 즉 도시국가의 성원이 시민 전체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 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를 누렸으며 선거에 참여하고 법을 만들고 판결을 내리는 등, 시민 의 자격으로 다양한 "일"을 했다. 로마를 공간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의 중심도시와 그 밖 의 영토로 이루어진 도시국가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라는 세계는 수많 은 도시국가와 일부 로마인, 그리고 대다수의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였다. 로마적인 도시국가의 모델 로마는 납세 유권자의 도시국가였다. 권력은 소수 엘리트가 쥐고, 그들이 정부를 구성했 다. 또 원로원 의원과 군인만이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었다. 모든 투표는 직접선거 방식이 어서, 최상의 가치로 간주되는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여우도 있고 로마 에서 살 필요도 있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예술이나 그밖의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거나 자유시민으로서 권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법률이나 정치에 관련된 자유로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치 집회나 기타 회합 등에 자신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들은 선거에서 피선될 수 있을 만한 재력도 가지고 있었고, 시민들을 위해 화려한 구경거 리를 베풀거나 대규모의 공공건물을 지울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이는 로마뿐 아니라 로 마 제국 안팎의 도시국가들에서도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엘리트들의 이러한 권위와 부로 인해서, 또 제정기 황제의 전재로 인해 서 공화주의적인 원칙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 원칙을 지킬 책임은 다른 중소 도시국가들에게 떠넘겨져 확산되어 간다. 로마, 강력한 귀족정치의 모델 집정관, 사법관, 지방총독 등 로마 행정관들의 권력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강력했다. 물론 그들에게더 제한 조항이 있었다. 매년 세금을 내야 했고, 그들이 내린 결 정이 성직자나 일부 고위 행정관(호민관, 집정관)들에 의해 유보되거나 거부당해 취소될 수 있었다. 걸국 그들도 법에는 승복해야 했던 셈이다. 행정관을 보좌하는 기구로는 원로원이 있었는데, 그 권위와 위세로 행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도시행정에 어느 정도의 일 관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종종 로마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 형태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제정은 겨우 4세기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황제나 제후를 꿈꾸는 권력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위와 같은 제도적인 균형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군인과 같은 주요 세력들은 평생토록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경우 정치. 법률적 난제를 종결짓기 위해 일반 시민이나 행정관의 신분으로 전환할 수 있는 특권도 가지고 있었다. 제정기는 도시국가의 황금기였다 제정을 거치면서 로마의 정치적 자유는 속박당했으며, 제국 내에서 독립을 꾀하는 어떠한 의지도 무참하게 짓밟혔다. 하지만 이를 오늘날의 제국주의나 독재정치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로마인들은 그렇게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전혀 그럴 의지도 없었 다. 게다가 제정의 성립과 발맞추어 그전 시기보다 좀더 깨끗하고 좀더 강력한 행정부가 정립되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도시국가와 사회에까지 전파되어 나타난다. 황제의 절대권 위와 그에 버금가는 행정권을 말미암아 제도의 미흡함과 부당함을 보완할 수 있었으며, 그 덕분에 소위 문명권의 도시들은 수세기 동안 하나의 단일한 법률적, 행정적 원칙아래에 통 합될 수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권위하에서는 어떠한 저항이든지 쉽사리 제압할 수 있었다. 반면에 개인 과 집단의 결속은 더욱 용이해져서, 순수하게 로마인 엘리트 계층으로 한정하던 징집대상을 제국 내 대도시의 귀족들에게까지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지방 정치는 이러한 새로운 생활 에 적응해 나가는 한편, 전통도 함께 이어가고 있었다. 로마나 이탈리아 반도 내의 다른 지 역도 마찬가지지만, 일상생활은 도시의 전통적인 틀 속에서, 그리고 지역 행정관이나 지역의 풍속에 따라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파견하는 관리는 로마의 권위를 상징했으며, 세금의 징 수나 제국 영토의 방어, 공공질서의 유지 등과 같이 오직 로마인의 이해와 관련된 일에만 개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영지나 지방 순회중에 중죄 재판을 열기도 했다. 초기 로마시 대의 전쟁이 일단락된 후 로마에서 임명한 총독들이 수많은 도시에 상주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이 도시들은 강력한 주변 적들의 끊임없는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평화롭고 안 정된 한 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로마의 독창적인 도시국가 로마는 오랫동안 변화를 거듭하면서, 로마와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 은 미쳐 갖지 못했던 근본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란 직접적으로 국가 권력과 법률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협소한 공동체라는 의미 정도였다. 로마에서는 이와 달리, 도시국가는 무엇보다도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즉 출생에 의해 획득하 거나 행정권자로부터, 가장으로부터, 또는 법률에 의해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공동 체였다. 따라서 로마 시민의 권리는 본국의 국경을 넘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영토확장도 권리의 확장에 한몫을 했다. "식민지들(최초의 식민지인 오스티아에서부터 리 용과 카르타고와 쾰른을 거쳐 레바논의 발베크에 이르는)"은 이탈리아 반도와 대양 저편까 지 펼쳐진 로마의 영토이자 로마의 몫이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국가를 이루었던 이들 식민지는 굳이 로마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 않았다. 개인들간에 원만하게 동화가 이루어졌던 점은 도시국가들의 가장 특징적인 면이다. 옛 노 예들에서부터 로마에 사는 외국인들과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까지 모두가 로마로 귀화했는 데, 이는 BC 89년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이나 AD 1세기 말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집권기에 에스파냐의 도시국가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러한 시민권 정책은 두 사지 축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라틴" 이라고 불리는 시민권이 있었다. 라틴은 공화정 초기부 터 로마의 식민지들과 라틴 동맹국들에 적용하던 것으로, 합법적인 결혼과 기타 사안에 대 한 결정권만을 인정해 주는 시민권이다. 라틴들은 로마에 일정하게 거주하지는 않았으므로 로마에서 투표할 권리는 가질 수 없었다. 제정하에서는 라틴 도시들의 비로마인들도 그들 이 거주하는 자치도시를 관리하거나 행정관직을 수행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가문 전체가 로 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로마 심ㄴ권을 모든 "자유시민"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더 이상 법률적으로 "라틴" 도시라는 구별은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보편적인 모델의 한계 로마의 영향권 내에서는 도시국가의 모델이 실제적인, 혹은 이상적인 사회조직 형태로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제국 내의 도시들은 도시국가의 개념을 어느 정도는 달리 설정했다. 시리아나 고 대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의 도시들, 자기네 고유의 모습을 고수한 도시들, 혹은 3세기에 접 어들어 도시국가의 반열에 오르기 이전의 이집트의 도시 같은 페레그린의 대도시들은 결코 완전한 도시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로마 제국 안에도 도시국가의 모델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조직을 갖추고 있는 지역 이 있었다. 변방의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역, 영국과 시리아 등, 때때로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로마의 방어선 역할을 하던 교통로 주변의 지역들이 그러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로마와 같은 조직보다 토착 조직이 한결 우세한 경우 를 찾아볼 수 있다. 광대한 지역에 결쳐 정착했던 초기 로마의 트리부스(부족 중심의 원시적 사회조직:역주) 형태가 북아프리카, 고대 프랑스, 영국 등의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런 지 역의 중심도시는 별 영향력이 없는 것이 보통이어서, 고대 말기에 오면 명칭 자체가 그곳에 살고 있는 토착 부족의 이름과 혼동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나 인위적으로 꾸며서 오히려 촌스러운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의 영향력, 통일성의 기초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도시국가의 개념이 정착되자 로마의 수많은 식민지들, 다시 말해서 로마법을 본받아 조직, 통치되는 도시들이나 자치도시들, 조직의 형태는 같으나 더 많은 자 율권이 보장되었던 도시 등, 각 문명화된 지역은 로마의 법률과 계속적으로 밀접한 관련성 을 가졌다. 더 나아가 로마법이 점차로 그 지역의 법률을 대체해 가면서 로마 제국의 문화 적인 통일성을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로마법이 일종의 공용어가 되었던 셈이다. 로마에서는 각지에서 모여든 엘리트들이 원로원 계층이나 기사계급 내에서, 또는 제국의 행정부 안에서 서로 융합하게 된다. 중간 계층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BC1세기 경부터 직업화되기 시작한 군대였다. 로마의 군대는 어느 시기에서나 시민들이 주축이 된 주둔 부대와 동맹국민들이 주축을 이루는 지원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화정하에서는 지원부대를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충원했고, 제정 초기부터는 지방의 주 민들도 동원했다. 이런 식으로 페레그린과 지역 주둔군이 같은 명령체계 내에서 오랜 기간 함RP 생활하면서 병사들간에는 동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지원 부대의 병사들은 복무를 마 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은-지역 주둔군이든, 지원군이든 상관 없이-반드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만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정치, 행 정적인 문화와 도시국가의 지중해적인 모델은 이런 경로를 통해서도 확산될 수 있었다. 자 유민 출신의 병사들은 복무를 마치면 (최소 21년에서 26년간) 대개 오랫동안 주둔했던 식민 지에 자리를 잡거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로마의 도시국가 모델을 확산시키고 정착시키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로마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들의 정치체제를 후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제도적으로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는 도시국가의 근본 원리에 따라 움직였 다. 로마는 이러한 원리를 전세계에 확산시켰고, 그 정신을 로마법 속에서 체계화했다. 도 시국가 그리스의 유산들이 오늘날의 근대 민주주의까지 전해지는 것이 바로 이 로마법을 통 해서이다. 의식을 중시하고, 다신교면서도 교조적이지 않고 공동체를 중시했던 로마의 종교 역시 도 시국가라는 로마의 특성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 "팍스 로마나"의 기치 아래 그들이 보여 준 관용과 유연한 사고방식은 서기 4세기경에 이르러 종교의 대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바 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제 4장 종교와 신앙 신과 정교의례의 거대한 조각 그림 로마인들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종교의례를 지키게 되어 있었 다. 시민들은 도시에서 열리는 대중제례에 참석했고, 장인들은 그들의 조합에서, 군인들은 부대에서, 도심지에 사는 사람들은 자시 구역에서, 그리고 개인은 가정에서 각자 제식에 참 여했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한 사람이 여러 의식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의 사정 도 로마와 같았다. 로마인의 종교생활은 한마디로 여러 신과 다양한 제식으로 짜여진 거대 한 조각 그림과도 같았다. 신의 계시를 분명하게 전해주는 권위가 있는 종교가 확립돼 있 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집마다, 혹은 도시에 따라 종교의 독창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가 지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공동체들은 저마다 그들만의 종교와 신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나 라틴의 도시들은 반드 시 카피톨리움의 3신(주피터(유피테르), 주노(유노), 미네르바)이나 신격화된 황제 같은, 로 마의 수호신을 숭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판테온의 나머지 자리에는 어떤 신을 모시든 자유 였다. 그래서 갈리아에 있는 식민지 트리에르에서는 레누스 마르스를 주신으로 모셨으며, 시리아에 있는 식민지 발베크-엘리오폴리스에서는 주피터, 비너스(베누스), 메르크리우스의 3신을 특히 숭상했다.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로마 가문은 저마다의 신을 모시고 있었다. 땅 을 지켜주는 가정의 신, 그 가문의 미래의 활약상을 보장하는 집주인의 정령 등이 있었고, 율리우스 집안(카이사르 가문)의 비너스나 2세기 초에 원로원 의원을 지낸 폼페이우스 마크 리누스 가문의 디오니소스, 다른 폼페이우스 가문의 메르크리우스 신과 이시스 신 등과 같 이 하나의 신격 안에 위대한 여러 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가문의 수호신도 있었다. 우리는 현재 전해지는 기록을 통해 맨 먼저 당시의 대중제례나 대가문의 제식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나 주요 대도시 등에서 치렀던 아주 유명한 종교의례조차도 실제 기 록에는 지극히 단편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이전 시대부터 전하 는 것이라고는 몇 개의 무덤과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몇 개의 유물뿐이다. 따라서 제식 자 체에 대해서는 추측해볼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주요 도시를 벗어나 주변부로 갈수록 그에 대한 기록과 정보의 양은 점점 줄어든다.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골 하층민의 종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의 주거지는 어찌나 보잘것없었는지 찾아내기 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이러한 환경에 대해서는 결코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치렀던 제식의 흔적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종교의 시민사회적 모델 개인적인 종교의례와는 별도로 시민 전체의 종교 행사는 사원 앞 광장에서 공식적인 사제 와 집정관의 집도하에 열렸다. 이런 공식적인 성격 문에 일반 시민은 공공제식에 상당히 수동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개별 축제 때(2월의 죽은 자들의 축제)나 문중에서 갖는 지역 종교 모임, 또는 장인들 같으면 조합 내의 의식 등이 있을 때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공공제식의 목적은 각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 기원하는 것이었다. 모든 제식 행위는 집단에서 생겨난 것이지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 다. 제정하에서 공공제식은 개별적인 제식과는 별도로 황제에 대한 숭배와도 관련이 깊었 다. 로마와 그리스인들의 의식 속에서 종교란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고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신들은 인간 공동체의 파트너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협조를 해야 했으며, 이런 서로의 기본적인 협약을 존중해야만 했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한 자신들의 우 월함을 내세워서 자유시민들을 위협하거나 굴복시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이러한 다신교의 체계 속에서는 신들끼리도 저마다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절대신이란 결코 있 을 수 없었으며 이는 신중의 신인 주피터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의 종교는 이렇듯 공화주의 자와 집정관과 신이 맺고 있는 상호 존중의 확고한 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고대의 도시 는 신에게나 인간에게나 동일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모든 공공 행위는 종교 행위였고, 모든 종교 행위는 공공 행위였다. (가정 내에서 행하는 제식은 여기서 제외된다.) 로마에서 신 성에 관한 법률은 공법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제식을 중시한 종교 로마의 종교는 제식과 실천이 전부였다. 어떤 가르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종교의 의미 에 대한 어떤 계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제식은 절대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인간보다 우월하나 인간에게 우호적이며 그들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믿음.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식을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 의 믿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야 한다거나 거기에 집착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 또한 이 때문에 로마인이 그들의 신이나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하는 데 지장이 있었던 것도 아 니다. 그들의 책은 온통 제식의 내용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알리는 신화와 설명과 가설과 철 학 체계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종교적 실천에 주석을 달고 설명을 붙이려는 노력 은 오로지 몇몇 엘리트와 그 주면인물들만의 것이었다. 가난한 시민과 농민, 그리고 많은 노예들은 이런 유식한 해석에 바칠 시간도 그럴만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요한 제식으로는 예언과 희생의 의식이 있었다. 희생의 의식 중 가장 볼 만한 것이 피 를 바치는 제물의 이식이었는데, 대중연회에 쓸 목적으로 가축 한 마리를 신에게 바치는 형 식이었다. 먼저 희생물을 죽인 후에 그 제물을 여러 부분으로 자른다. 그중 신성을 상징하 는 부위는 제단 위에서 불태웠으며, 나머지는 제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그 자리에서 먹었고, 일부는 팔기도 했다. 이러한 분배 행위는 암암리에 신의 위대함과, 죽음 을 치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의 의식은 수없이 다양한 형 태를 보이긴 했지만, 개인 행사든 공공 행사든 할 것없이 모든 종교의식의 핵심이었다. 예 언의 의식 역시 갖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로마인들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예언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신의 동의를 구했다. 로마의 집정관이나 사제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조 언을 얻고자(신탁예언집)(시빌라의 신화에서 유래한 고대 로마의 예언집)을 찾았다. 죽음의 제식 종교의식 중에서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장례의식이다. 장례식 의 중요한 제식은 어디서나 거의 동일한 형태를 띠었다. 시신은 그들이 살던 도시나 마을 가까이에 묻었는데, 묘지는 도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주관하는 장례식은 죽은 자를 그들만의 신계(신계)로 인도하는 의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신격화 된 고인들이 산 자들의 세계 바깥에서 음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었다. 죽은 자는 가 족과 종교인들이 그에게 이식을 바치는 한 계속 살아 있는 것이었다. 장례의식에서 집안의 가장이 고인돌에게 제물을 바치는 희생의 의식은 매년 되풀이 되었다. 가문의 제례 가운데에서도 매장의 방식은 집안에 따라 많이 달랐다. 로마의 지하 공동묘 지들을 보면 집집마다 다 다를 정도로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역에 따른 차이와 더불어 사회적인 격차도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같은 거대하고도 화려한 무덤이나 부유층의 지하 묘소, 또 중류층의 장례제단이나 비속 외에도 집단 묘지가 무수히 많았다. 집단 묘지에는 귀족가문의 노예나 자유노예, 또 클리엔텔라들도 묻힐 수 있 었다. 이런 곳으로는 납골당(유골 단지가 들어 있는 작은 칸막이가 여러개 놓여 있는 방)이 나 제정기 2세기 초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카타콤(대저택의 지하에 판 묘소로, 반드시 기독 교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등이 있다. 가난하기는 라지만 비참할 정도는 아닌 수준 의 로마인들은 "장례조합"에 묻혔다. 여기서 장례를 치르고 제대로 된 무덤을 갖고 매년 제례까지 받기 위해서는 생전에 조금씩 부담금을 적립해야 했다. 이런 종류의 좀나은 건물 들 주변에는 기와나 항아리 조각 등의 재료를 활용해서 만든 임시 묘소도 찾아볼 수 있었 다. 이런 무덤들은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주로 묘지에 이르는 길 주변이나 묘지 건물을 세우기에는 너무 좁은, 놀려 두고 있는 따에 자리잡고 있었다. 죽음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로마 문명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초기 라티움에서는 BC 7-6세기의 화려한 무덤들이 매우 초 라한 시체 안치소와 나란히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조금 후에는 부유층 시민의 무덤 도 매우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화려한 장례식을 제한했던 사치단속법의 영향 때문이다. 2세기 중반이 되면 장례방식은 화장에서 매장으로 바뀐다. 최고 부유층은 석관 묘에 매장되었으며 때때로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일반인들은 수의만 입은 채 나무관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대서의 인정에 기반한 종교의 모자이크 로마 제국은 이민족을 받아들일 때 그들 고유의 종교를 인정했고 자유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마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공적인 종교의 의무도 로마 제국의 도시와 로마 시민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로마인의 개인적인 신앙은 외국인들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시민 전체의 권익에 비추어 보 아서 사회적인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통제를 받지 않았다. 제식의 순수한 종교적인 내 용외에 하나의 신성이나 계시, 또는 예언자나 주술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 그리 고 할례 같은 의식 등은 엘리트들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미신이나 쓸데없는 행위고 배척받았 다. 그래서 한때 할례를 금하고 억제하기도 했다. 한편 중앙정부에서는 페레그린이나 로마 시민에 대해 종교적인 금지사항을 법으로 정하여 규제하기도 했다. 그래서 갈리아에서는 1세기 중반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금지되 기도 했다. 종교의 자유의 한계 유대의 경우를 보면, 로마가 취했던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유대에 대한 로마의 정책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마와 유대 사이에는 협정에 의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유대의 종교생활은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심하게 규제를 받지 않았다. 고의성이 있든 없든, 몇 가지 지나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로마 정부도 너그러운 태 도를 취했다. 이러한 정책은 유태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기 70년경 예루살렘에 있 는 여호와의 신전을 파괴하고 재건축을 금지하고 신전에 모금된 유태인의 돈을 주피터의 신 전에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차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유태인들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이 탄압이 사실은 순전히 로마 내부의 군사적인 원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문제였고, 이 사건이 유태교에 가져다 준 엄청난 역사적 반향에도 불구하고, 신전의 파괴는 단지 진압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일 뿐 이었다. 요컨데 유태교의 교의가 문제가 된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길제러 이런 탄압 이 있은 다음에더 유태인들은 교회나 가정에서 그들의 종교행사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었 다. 3세기까지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거나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 었으며, 그들이 나쁜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일어나 결과일 뿐이다. 공공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했다거나 불법적인 단체의 구성, 명령에 대한 불복종, 또는 공동체 생활 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는 것 등에 대한 질책이 결국은 유태인 박해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3세기 중반의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됐을 때 기독교는 이미 제국 내 엘리트들 사이에서 확고히 세력을 굳히고 있었다. 로마는 이교도들을 억누르기는 했으나 그들을 개종시키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 로마 이전 시기부터 있었던 각 지방의 여러 가지 신앙은- 특히 시골에서는 개인적인 신앙 활동이 무수히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일반적으로 로마와 로마화된 도시의 대 중신앙의 기반이 되었다. 심지어는 로마의 식민지에서도 지역마다 서로 다른 신을 모실 수 있었다. 페레그린의 도시에서는 로마의 종교를 강요당하지 않았고 거의 전적인 종교의 자 유를 누렸다. 다시 말하면,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로마 문명은 대체로 포용력이 있는 편 이었고 결과적으로 다종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기의 종교의 개화 지역의 종교는 종종 로마의 정복활동의 덕을 보기도 했다. 갈리아나 다뉴브 지방 같이 덜 문명화된 지역에서는 매우 빠르고도 자발적으로 로마 종교를 흡수했으며, 바로 그 점 때 문에 이전에는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기념비적인 유산을 가지게 된다. 정복자 로마나 로마화 된 토착민들의 문화와, 그 지방의 고유의 문화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갈로로맹(갈리아 지방의 로마화된 지역:역주) 지방에서는 로마 신의 특징을 빌려 그들의 신을 표현했으며, 흙벽과 나무로 만든 사원대신 로마 사원을 본떠서 돌로 된 사원을 세웠다.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가던 기독교는 서기 313년 콘스탄니누스 황제로부터 공인을 받게 되며, 로마 교단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제국 어디에서나 별다른 저항 없이 전교할 수 있었 기 때문에 기독교의 가르침은 널리 퍼져나가서 로마의 체제 내에서 자리를 잡는다. 예루살 렘이나 시리아,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그리고 라틴세계까지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가 있었는 데, 종교회의가 있을 때면 그들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기독교의 주요한 신락적 현안에 대해 자시들의 이론을 관철하려고 애썼다. 보수적인 원로원에서는 아직도 희생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고 기독교도들은 단일 교리를 세우지 못해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유태교는 아프로디시아스(소아시아 카리아 지방)의 공회 당애서 번성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변화 가운데에서도 로마 세계는 그대로 존속되고 도시는 여전히 생활과 활동의 틀을 이루었다. 훗날 사람들은 기독교가 (일부의 은둔 수도자를 제외하고) 이 틀 내로 통합되었 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그들이 시민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위와 그 들의 종교를 양립시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기독교의 이상은 인간의 국가에서 활약하기보다 는 "신의 국가(이 단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저작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추구하 라고 설교하고 있지만,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도들은 이러한 영적인 상태와는 별도로 전통적 인 의무를 수행하게 된다. 4세기 추반부터 주교들이 도시의 파트로누스 역할을 맡기 시작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 세계를 정복했다. 그러나 로마의 도시국가 모델이야 말로 기 독에 꼭 필요한 체제였다. 헬레니즘과 이탈리아 반도의 문화에서 유래한 로마의 전통 건축술은 시민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포룸(고대 로마시 중앙의 대광장:역주), 목욕탕, 원형 경기장, 곡예장 같은 공공 건물은 로마 시민 고유의 생활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사회의 엄격한 계층구조 를 반영하고 있다. 제5장 가옥, 촌락, 그리고 오락 로마인의 개인생활과 가족생활의 기본 틀은 가옥이었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폼페이 으 고대 가옥 모델(BC4-3세기)을 상상하면 그 형태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저택에서..... 로마의 가옥은 일하기 위한 곳을 제외하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중 요한 곳은 조상의 초상화 같은 가문의 기념물을 두거나 라레스나 페나테스 같은 수호신을 성소 주변에 모신 사적인 종교 시설을 둔 곳이었다. 거기에는 아트리움이라 불린 로마식 정원- 정원이라기 보다는 방 같은 곳인데 여못 위에 구멍이 뚫린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과타블리눔이라는 널빤지를 깐 방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벽화로 장식한 일련의 방이 있다. 이곳은 실물로 착각할 만큼 정밀한 그림을 그려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자 했고, 연극 무대의 장식과 신화의 장면을 재현해 놓음으로써 마치 박물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 으러 회랑이 있는 정원 주위의 공간으로 이곳에서 여가를 즐겼다. BC 2세기부터는 실내 정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인의 가옥에서 중요한 것은 외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일가가 함께 사는 전통 가옥은 주요 인사들에게 하나의 위엄의 상징이었다. 당시 대저택의 도면이나 트 리말키온의 저택, 비트로비우스의 건축론, 또는 페트로니우스의 기록 등에서 이런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런 대저택은 대부분 주인으 동료인 클리엔텔라를 위해 연회실과 접대실 입구 근처에 배 치했다. 횡와(횡와)의자에 길게 누운 채 트리클리니움이라 부르는 큰 방에서 진행하는 두 종류의 연회가 있었다. 케나라는 연회는 갖가지 고기와 생선을 맛보는 것이었고, 코미사티 오는 물을 탄 포도주(간혹 단맛을 첨가하기도 했다)를 마시는 연회였다. 그 옆에는 그리스 식 객실(간혹 실내 회랑까지 있음)과큰 접견실이 있었고, 바실리크식 실내 회랑이 있는 경우 도 있었다. (황제의 옥좌가 있던 방은 이같은 부유층의 저택이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나 머지 사실(사실)이나 여인들의 방, 노예들의 방과 작업실 등은 가옥의 안쪽에 물러나 있었 다. 제정기 이전에 이미 부유층의 가옥은 새로운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후면벽을 여 러 층으로 쌓거나 방을 클로버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식당을 반원 형태(시그마 모양)로 만들기도 했다. 대리석이나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한 저택들은 자연스러움이 밴 공간이 나 회랑이 있는 정원만으로도 그 호화스러움을 충분히 자랑할 수 있었다. ...다락방까지 하지만 관연 얼마나 많은 로마인들이 헬레니즘 시대의 왕자나 살았을 법한 이런 저택을 갖고 있었을까? 소수의 귀족과 지주 정도나 가능했다. 대다수 시민들은 특징도 없고 화려 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에 살았으며, 이런 집들이 도시 가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폼페이의 가옥 설계도를 대충 훑어봐도 알 수 Dlt다. 이들의 집은 건물을 조화롭게 배치한 것도 아 니고 특별한 장싯ㄱ을 했던 것도 아니다. 집에 따라서 중심이 되는 방이거나 때로는 유일 한 방인 아트리움은 창문이 없는 지붕으로 덮여 있어서, 문과 크지 않은 창문을 통해서만 겨우 채광이 가능했다. 그러나 자유민이건 노예건 할 것 없이 가난한 이들이 비좁게 몰려 살았던 갈레타라는 다락방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은 그리 튼튼하지도 않았으며 늘 화재의 위험이 있었다. 또한 상가에 면한 가게나 작업장 위 에 딸려 있었던 반층짜리 집이나 고미다락과 같은 공간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계획없이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선 빈민지구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촌락의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공공 건물이나 관공서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초라한 집에는 대리석도 조각도 없었고, 모자이크도 그림도 가구도 은수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로 마와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나 카르타고의 수많은 평민들이나 아프리카 대토지의 농민들, 갈리아의 가난한 도기공들과 같이 로마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이들에 대한 것은 우리의 박물관에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의 초라한 가옥에 관련된 것으로는 흙으로 구운 테라코타 그릇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 이다. 장인이나 근로 계층은 자유민이든 자유노예든 할 것 없이 때때로 전문적인 조합을 형성하 기도 하면서 조금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폼페이나 지중해 도시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작은 안뜰 주위에 방이 몇 개 딸려 있는 구조였다. 공화정 말기부터 벽돌 건축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들 도시의 중류층은 로마나 오스티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아파트식의 여러 층짜리 집을 지어 살았다. 작은 방과 거실, 복도, 그리고 창문이나 발코니 가 있는 이런 식의 가옥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아마도 착각이겠지만.) 농가와 시골별장 시골도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가옥 형태가 엄연히 구별되었다. 방이 하나뿐인 초 라한 집이나 노동자외 소작인의 농가는, 카이우스 플리비우스의 거대한 이탈리아 별장이나 독일의 네니히, 프랑스의 몽모랭,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등지에서 발굴된 대지주의 영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들 특권 부유층들은 그들의 저택에 예술품이나 은공예품을 수집하면서 황제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시칠리아의 피아자 아르메리나에 있는 저택이 그런 예인데, 이곳의 각 방은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4세기 초반). 실생활을 하는 건물과는 분리되어 정원을 마주보고 죽 늘어선 별의 형태를 취한 이러한 별채의 형태를 취한 이러한 별장들은 카르타고의 모자이크 로 유명해진 율리우스 같은 영주들이 이용했다. 고대 말기에 도시 국가의 형태가 와해되면서, 시골 저택들은 로마의 엘리트들이 그들이 영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칩거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감당해야 할 많은 책임과 부담을 피하고자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6세기경 브루티움9오늘날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살던, 저명한 원로원 가문의 후손이자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고트족의 왕이 최고의 영예직에 임명했던 카시오도루스라는 인물은 귀족관료들의 칩거생활을 개탄하 여, 왕에게 강제로라도 과거 엘리트들의 생활방식을 복원시킬 것을 주장했다. 즉, 한동안 도시에 머물면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생활과 시골에서 여유롭게 사는 생활을 병행하자 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와 정치가 매력을 잃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는 곧 로마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카시오도루스 자신의 행동을 보더라도 이미 변화 의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훗날 고대 후기 이탈리아의 지적 중심 지 역할을 하게 되는 수도원 두 개를, 도시가 아니라 칼라브리아의 비바리움에 있는 그의 영지에 세웠던 것이다. 공공건축물, 로마 이상의 표현 도시와 도시의 공공시설은 단순히 부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로마 정치 형태의 성 격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거대한 공공건물은 로마의 제도와 역사를 반영한다. 집정관들이 낸 도로망은 정복활동의 지도이며, 분수와 공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관은 도 시 문명의 중요성을 부여준다. 또 대규모의 군사 수용시설은 가옥이나 공공건물과 더불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쓸데없는 장식을 배제한 도시 중심부의 정비는 당시 로 마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로마나 주요도시의 중심부에는 포룸이라는 광장이 있었다. 정치적 모임을 위해 세운 것 으로, 집회나 대중 모임, 재판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광장 주변을 따라 바실리크식의 시장 이 인접해 있었는데, 날씨가 궂으면 비를 피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대중제례를 모시던 사원과 제정기 이후 신격화된 황제를 모시던 제단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어서, 광장에 상당 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아우구스투스 포룸에서 로마의 트라야누스 포룸까지, 프랑스의 바베이와 포르투칼의 코님 브리가에서 아테네와 팔미르까지, 또 팔라티누스의 황궁에서 트리에르와 콘스탄티노플의 황 궁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구도시와 신도시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구획지어져 있었다. 로마 세계에서는 어디서나 기념 건물의 외관을 똑같이 공인된 방식으로 치장했으며, 동일한 부분 을 강조함으로써 도시국가의 공동체적 구조와 통치자의 초인간적인 권위를 드러냈다. "신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여유를 허락해 주셨도다"(베르길리우스) 시민으로서의 이상 적인 삶을 느리기 위한 두 번째 여건은 바로 오티움, 즉 즐기는 삶에 있다. 이들의 공적 인 생활은 오전 나절에 시민으로서의 활동을 마친 후에도 계속되었다. 오후에는 여가활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목욕과 유희였다. 제정하에서 위생은 개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가 전쟁의 노획물로 점차 부유해지자, 도시마다 공중목욕탕을 세웠다. 처음에는 평범했던 공중 목욕탕은 갈수록 웅장하고 사치스러워졌다. 공공장고였던 만큼 점차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이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목욕탕은 로마의 문명화된 삶의 상징이자 고대 도시의 쾌락의 중심 지가 되었다. 로마 시민이 하루 일과를 끝맺음하고 오후의 연회를 준비라는 자리였던 이 목욕탕 문회는 점차 세련된 유희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공중목욕탕의 건설과 유지에는 엄청난 돈이 들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황제와 마음씨 좋은 기부자에게 후원을 받아야만 했다. 공중목욕탕은 단순히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레저의 중심지였다. 목욕탕의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거나 놀이를 하기도 했고, 만남과 사교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산책을 위한 정원은 도서관과 박물관, 연회장으로 통해 있었다. 거리와 포룸에 서만큼이나 공중목욕탕에서도 많은 오락활동이 경쟁하듯 이루어졌던 것이다. 빵과 유희 종교 축제는 일반시민에게 훌륭한 식사를 제공하는 행사이자, 신과 사제들이 지켜보는 가 운데 끝을 맺는 유희의 장이었다. 이륜마차 경주는 오랫동안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유희였다. 일찍이 팔라티누스 언덕이나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를 가르는 계속에는 거대한 경기장이 건설되어 있었다. 검투사들의 경기는 원래 성대한 장례식의 폐막 행사에서 유래했으며 처음에는 포룸에서 열렸다. 그러 다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로마인들의 유희 중 최고의 행사로 자리잡게 된다. 플라비아누스 왕조 시기에는 거대한 계단식 원형경기장이 네로 황제의 황금궁전의 정원 자리에 세워지기 도 했다. 제정기에는 각 도시의 중심 지역마다 극장과 원형경기장이 들어섰다. 로마만큼 번성하지 못한 도시에서는 극장을 개조해서 검투사들의 대결을 유치하기도 했다. 검투사들 의 결투, 이국적인 동물의 사냥대회와 함께 전차경주는 로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었 다. 그러나 전차 경주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황제나 집정관, 지역 유지들이 선거에 서 승리하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개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부 검투사와 전차기수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수단은 모두 4개조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초록, 빨강, 흰색, 파랑의 4가지 색으로 분류되었다)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종교 축제도 대개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공연예술"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을 맺곤 했다. 아마도 극장에서 상연된 공연은 한결 고상한 즐거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극장은 거대한 성소(성소)나 사원 건축물의 일부인 경우가 보통이었다. 제정기에 이르면 공연예술을 통해 풍자 희극배우들이나 어릿광대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그 유적들이 폐허로 남아 있지만, 로마 제국의 거대한 건물들은 시민의 오락 이나 레저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 경기장이 검투사와 곡예사들에게 박수를 치며 재충전하는 것, 이것이 로마 중간층의 이상적인 삶이었 다. 사는 집은 변변치 않지만 이들에게는 거리와 놀거리만은 넉넉하게 제공되었다. 하기야 사람들은 결투의 승자뿐 아니라 이 거대한 공연의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에게도 박수를 보냈 다. 그러나 간혹 관객석에서 항의와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로마의 엘리트들이 수많은 일반시민과 접하는 거대한 장소가 언제나 정치적인 기능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로 마의 황제와 집정관들은 비판적이고 요구가 많은 대중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인기도를 저울 질 했던 것이다. 로마 사회에서는 유희조차도 시민사회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테네보다도 오히려 로마가 그리스 문명을 세계에 전파했다. BC 2세기경부터 그리스의 문화는 로마 제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새롭게 정비한 이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로마 시대 말기에 이르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비 잔틴-로마 문화이다. 제6장 로마문화 로마와 그리스 문화는 소수의 폐쇄적인 집단 내부에서만 계승이 되었다. 기초교육을 담 당할 학교는 있었지만, 공적인 혹은 사적인 보조금이 체계적으로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극소수의 로마인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BC 2세기경까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구는 5%를 넘지 않았다. 기원 초에도 자유시민 남 성중 10분의 1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데, 그외에 약간씩 글을 아는 인구가 상당수 있 었다. 13세기경 유럽 제국에 비견할 만한 이 정도의 수치를 보고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로마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사회, 경제 부문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그 외에 몇몇 장인들, 소수의 귀부인들(아마 전체의 10%에도 못 미치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행정일 을 담당하는 노예와 자유노예들(이들의 수는 가변적이었다)이 있었다. 이처럼 문자를 사용 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되었다. 학교교육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 세계에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가장과 가장들의 몫이었다. 학교의 교사는 회랑이나 상점의 뒷방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학생들은 부유한 가문의 아 들이거나(가정교사가 없는 경우) 주인이 행정적인 일을 시키기 위해 맡겨놓은 노예들이었고, 이따금 예외적으로 장인의 아들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끼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엄밀한 의 미의 문화와 문법, 수사학(그리스 말과 문자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것) 등은 보다 세심하 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는데, 극소수의 엘리트들만을 대상으로 공공장소에서, 예를 들 면 로마의 트라야누스 포룸이나 그리스 지역의 팔라이스트라(고대 그리스의 레슬링 경기장: 역주)에서 수업을 했다. 철학이나 법률같은 과목은 몇몇 도시(로마, 아테네, 베이루트)에서 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직무(집정관, 사제, 군인, 법률가)를 수 행하는 과정에서 말해 주는 것을 들음으로써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좋은 가문의 젊은 이들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공의 문제나 법률적인 논쟁, 군 대에서 취해야 할 행동 등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4세기 경부터는 점차로 기독교 의 교리가 이런 상류층의 문화의 내용 속에 더해지게 된다. 문학의 모델, 그리스 BC 2세기에서 기원초에 이르는 200여 년간, 당시 문화의 절대적인 모델이었던 그리스 문 학의 한켠에 로마 문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원 초에 이르러 절정을 맞 는다. 그리스 세계의 풍속을 본떠 수많은 로마의 지식인들이 재미삼아, 혹은 거의 "직업적 으로" 책을 썼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내전이 일어날 무렵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저택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그의 서재에는 490여권에 달하는 위대한 석학들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라나 라틴어 문학이 부훙했다고 해서 로마 제정기에 꽃을 피운 헬레니즘의 제2차 부흥 기를 잊어서는 안된다. 한동안 침체와 쇠퇴기를 맞았던 그리스의 웅장한 예술은 서기 2세 기경에 이르러 다시 황금기를 맞는다. 이것이 "제2차 소피스트 운동"이다. 그리스의 철학 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크 로스)뿐만이 아니라 키케로에 의해 재발견된 플라톤의 사상들까지, 지중해 문명 전체를 지 배함으로써 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수많은 걸작들이 도미티우스 황제 (81-96)와 트라야누스 황제(98-117) 시대에 간행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지리학자 프 톨레마이오스와 의사 갈리아누스, 감미로운 풍자시인 르키아누스가 2세기 중반경 그리스어 로 책을 집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을 오늘날 유럽 문학과 같은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당세에는 문학도 역시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제 한적인 행위였다. 그러니 작품을 널리 읽히게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문학 행위의 한 부 분일 뿐이었고, 그것도 소수의 사본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빌 려주어서 베끼게 하거나, 또는 아예 기증하는 방식으로 책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 서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 소수에 불과했다. 볼루멘과 코덱스 책이란 사치스럽고 비싸고 보관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창작 행위는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 BC 2세기경의 책이란 것은 3미터가 넘는 길이에 높이가 30센티미터에 이르는 파 피루스의 두루마리(Volumen)였기 때문이다. 잉크를 사용하여 일반적으로는 대문자로 쓰여 졌던 당시의 책은 두루마리의 옆면을 아래로 하여 보관했다. 오른손으로 무릎을 받치고 왼 손으로 두루마리를 풀어 펼치며 읽는 모습이 그리 흔했던 건 아니다. 대개 혼자 책을 읽을 때도 크게 소리를 내어 읽었다. 또 비소가 읽어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따로 두는 일 이 많았다. 극장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는 많은 수의 청중을 위한 낭송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두루마리말고도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이나 행정적인 업무에 밀랍 칠을 하고 간혹 책 처럼 제본한 얇은 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코텍스(codex)라 불렀다. 3-4세기경부터 양피지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런 형태의 책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변형 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보관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공간을 적게 차지했던 코텍스는, 기 억력에 주로 의존하던 넓은 의미의 독서에서 텍스트에 의한 좁은 의미의 독서로 빠르고도 용이한 변회를 의미하는 지표였다. 다시 말해서 코텍스의 출연은 지식에 변모를 일으킨 것 이며, 이로써 지식은 보다 더 분석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문화가 기독교회되었던 것도 분 명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을 결속시켜 준 헬레니즘 예술 문학과 마찬가지로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의 전통은 오 래 전부터 로마 제국의 동부 지중해 지역과 이탈리아에 형식과 내용을 제공했고, 로마 제국 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남부 갈리아의 가난한 도 기공들은 여전히 켈트식의 이름을 썼고, 라틴어는 거으 할 줄 몰랐지만, 인장무늬가 새겨진 도자기에 그리스 신화의 장면들을 그려넣음으로써 이를 널리 퍼뜨렸다. 신인동형론(신인동형론)과 신에게 형체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에 거세게 저항했던 민족들조 차 고대 말기에 이르면 거의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유태교회당의 모자이크를 보면 그것 을 잘 알 수 있다. 가령 베트 알파의 모자이크를 보면 이삭의 희생과 천체의 황도, 그리고 4절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로마가 그 위세와 부로 전세계에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솜씨 좋 은 장인들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주제, 예를 들어 2세기초반 오늘날의 루마 니아인 다키아 지역의 정복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로마 트라야누스 기념비의 조각과 루마 니아 도부루자 지방에 있는 아담 클리시의 조각은 그 양식이 아주 다른데, 사실 아담 클리 시의 조각은 매우 어설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장인들을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갈로로맹의 도기공이나 동방과 아프리카의 모자이크 세공인들이 그러한 경우로, 이들은 이탈리아의 작품들을 압도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로마는 예술의 주요한 흐름과 동떨어져 있기도 했다. 예술의 주류는 오히려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예술과 직접접함으로써 형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아시아 카리아에 있는 아프로디 시아스의 조각가들은 트리폴리텐의 레프키스 마그나를 위해 작업했으며, 그리스인 제노도루 스는 오랜 기간 동안 퓌드돔의 메르크리우스 신전에서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결국 전형적인 이탈리아 양식 가운데 일부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흑과 백 을 주로 한 로마의 모자이크 양식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화려한 색채의 모자 이크가 세계적인 주류였다. 이 부문에서 로마는 오히려 변두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지방에서 모델로 삼는 작품이 생간되는 곳은 역시 수도- 작업실, 행 정관청, 궁전 등-였다. 이 전파의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있다. 복사본이나 스 케치 노트만 봤던 것인지, 아니면 영감을 얻기 위해 장인들이 직접 로마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편 공공 예술작품은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황제의 초상이 새긴 동전 과 화려한 조상들, 왕조의 신전 양식 등이 그 주된 경로였는데, 로마 아폴론 신전의 경우에 는 님의 메종 카레에 재현되었다. 예술은 또한 일상생활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 가 옥의 벽화들은 공공예술에서 형태를 빌려온 것이다. 서유럽 제국은 공식 예술이 잘확산된 예를 보여준다. 황제를 칭송하고자 세운 종교건물들이 그 예인데, 지방의 후원자들이 건설하긴 했지만, 황 제가 파견한 관리가 통제를 했다. 테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세워진 파리 센강의 뱃사람 기 념물을 보면, 고전적인 위대한 신들(주피터, 불카누스) 뿐만 아니라, 켈트족의 신들(에수스, 머리가 세 개인 타우르스)도 등장시키고 있다. 또 1세기를 지나서 네로 황제 시대에 마이엔 스의 군대주둔지 주변의 상인들이 주피터 신에게 바쳤던 원기둥을 보면, 거기에 새겨진 초 상화들은 더 이상 토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지역적인 색채란 묘비같은 개 인적인 예술에서나 극히 미미하게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부조는 특별한 경 우에 지역적인 신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의 전통적인 초상의 의존하는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시스 여신이나 갈리아의 로스메르타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로마 여신의 형상을 빌려 오기도 했다.) 제국 후기의 예술혁신 4-5세기경 로마 제국의 도시와 기념물과 가옥의 형테에서는 당시 전반적으로 퍼지던 쇠 퇴나 체념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410년 서구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을 때도, 로마의 문명까지 파괴하지는 못했다. 아치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크성당, 콘 스탄티노플과 트리에르의 궁전, 거대한 조상들, 황제의 석관묘 등, 로마 예술의 중요한 유산 을 만들어 낸 것은 오히려 제국 후기였다. 이 시대에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모자이크가 유행하였으며 엷은 인장무늬를 새긴 도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물론 기독교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많은 예술 형식들이 나타났다. 건축분야에서는 사원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장 례식을 거행하던 과거의 형식과는 달리 건물 내부에 추모행렬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형 태의 교회당이 등장했다. 크고 작은 바실리크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마을의 모습이 달라졌 고, 지도도 다시 그려야 했다. 조형 예술부분에서는 장식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회화분야 에서는 카타콤의 벽화가 점차 수수해 지기 시작한 반면 성서나 복음서의 장면을 그린 그림 이 부자들의 석관묘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 역시 로마 예술의 연장선상 에 있었다. 공화정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이들은 형편이 보다 열악했으며 이 점 때 문에 훗날 역사가들은 이들의 예술을 서민예술이라 부른다- 표현력이 풍부한 조형 예술에 많이 의존했다. 로마의 엘리트들은 공공 주도의 헬레니즘 예술을 존중했지만 새로운 예술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인 인상화된 자연주의 형식이나 자연그러운 비율을 따르지 않 았다. 3세기 경부터 이러한 예술 경향의 혁신이 일어나면서 점차 기독교화된 로마의 주요 예술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몇가지 새로운 기준에 따 라 만들어진 장면이 있는데 이는 헬레니즘의 자연주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부조와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서민 예술에서 시작된 이 표현력이 풍부한 예술은 5세기 경의 로마 예술과 비잔틴 예술을 탄생시킨다.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크 성당은 로마의 모든 건축 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형식은 모든 영역 에서 그대로 남아서 필사본의 세밀한 삽화에서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특히 조형예술의 새로운 종교적인 내용을 도입했지만, 그 내용을 담은 형식은 여전히 과거 의 틀 안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 기독교 제국에 의해 전승된 로마 문화 이렇듯 새로운 기독교 문화는 전통 문화와 단절을 선언하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이 극장 과 원형경기장과 공중목욕탕의 집단적 유희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이교도의 예술과 문학 과 사고방식의 유산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로마에 있는 비아라티나 카타콤이나 영국 에 힌턴세인트 메리의 저택 장식을 보면 신화적인 주제(헤라클레스, 벨레로폰)와 성서의 장 면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얼굴에까지 고전 미학에서나 나타나 는 생동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4세기경부터 시작된 새로운 제국에서도 로마의 전통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확산 되지는 않았지만 그 생명력 만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예로, 이 시기에 전개된 활발한 지적활동을 꼽을 수 있다. 성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직자들의 책 이외에도 많은 저술들이 단행되었다. 백과사전(마크로비우스, 테우도시우스 의 사트루날리아)이 편찬되었고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주석집(세르비우스가 쓴 베르길 리우스의 주석과 같은)이 발간되었다. 문헌학 분야의 작업이나 문학작품과 성서의 복제 작 업이 이루어져서 그 덕분에 수 많은 작품들이 사라질뻔한 위기를 넘겼다. 히브리어나 아랍 어(고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역주)그리스 어로 쓰여있던 성서와 복음서는 성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했다(불가타). 학자들은 종교분야의 갖가지 내용을 성문화 했으며(탈 무드)이런 작업은 법룰분야에서도 이루어 졌다. 로마 황제들이 공포했던 법률들이 테오도 시우스 법전속으로 흡수 편입되었으며 이는 훗날 근대 시민법의 바탕을 이룬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세계의 문화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저술과 정비 작업 덕분에 오늘날 까지 전해지고 있다. 문자문화의 퇴조 후기 제국 문화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4세기경부터 문자문화는 퇴조하기 시 작했다. 기독교 제국의 엘리트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된 학교 를 세우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식층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 다. 기독교가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에 대해 동정적인 정서를 지 니고 있었는데도 성직자와 수녀는 당연히 글을 읽고 쓸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더 멀리 퍼 졌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에서는 서적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서구에서는 라 틴어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집트의 콥트어(변형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여진 고대 이집트 어)와 동방의 고대 시리아어가 교양어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도시화 의 정도와 군사, 경제적이 여건에 따라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 람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 아르리카의 로마 점령지역, 갈리 아와 몇몇 그리스어권의 지역에서는 6세기 이전까지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볼 수 없 었다. 하지만 5세기 경에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더 이상 약점이 되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문자가 관청과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들어오기 까 지는 다시 또 한세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클로드 니콜레) 로마는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그들은 유럽의 교양어중 하나인 라틴어를 우리에 게 전해주었고 수많은 로망어를 남겨주었다. 또 로마의 법률과 공화정 체제, 그리스 문화, 지중해 지역의 두 종교- 유대교와 기독교-를 중세와 근대 세계로 넘겨 주었다. 이 모든 로 마의 유산은 로마의 정복활동과 세계통일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유산들이 전해진 방식 또한 로마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유럽인은 모두 로마의 시민 이다. 그들 모두는 로마가 고대 세계로부터 전승하여 고르고 개선해서 후대로 넘겨준 다양 한 문화유산의 수혜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