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신의 손을 지닌 인간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31] 지은이: 엘렌 피네 지음 / 이희재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차 례 ======= 로댕-신의 손을 지닌 인간 제1장 타고난 예술가 제2장 배고픈 시절 제3장 걸작, 또 걸작 제4장 새로운 인간 제5장 명성 기록과 증언 로댕-신의 손을 지닌 인간 "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능히 겨룰 수 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가 환상으로 충만한 별세계에 살고 있던 그 무렵에 말이야. 그때 우리는 구름 사이로 빠끔 공간이 열리면서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무리를 볼 수 있었어. 너는 그때 잠시 숨을 멈추고는, 저 암흑을 꿰뚫고 스무 살 청년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아내고 말겠다고 말했지." 조각가 레옹 푸르케 책 표지 글 현대의 미켈란젤로, 조각의 거장이란 화려한 말이 뒤따랐던 천재 조각가 로댕. 그가 차가운 조각들 속에 인간의 고뇌와 열정, 애증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로댕 자신이 너무도 열정적이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복잡하고도 열렬한 연애조차 뛰어난 천재성의 상징으로 용납될 만큼 극도의 추앙을 받았던 로댕은, 20세기 현대 조각의 창조자로 평가되고 있다. 지은이: 엘렌 피네 지음 / 이희재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신지영 엘렌 피네(Helene Pinet) - 1976년부터 로댕 박물관 사진부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한 엘렌 피네는,「로댕의 사진들」을 비롯해「로댕」「조각가」「그 시대의사진들」과 같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희재 -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번「마티스」, 30번「고갱」이 있으며, 그외「말하기의 다른 방법」「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꿈과 상상의 여행」「추적」등이 있다. 제1장 타고난 예술가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는 1840년 11월 12일 파리아르바레트가에서 로댕가의 둘째로 태어났다. 로댕의 아버지 장 밥티스트와 어머니 마리 셰페에게는 두 해 전에 낳은 첫딸 마리아가 있었다. 장 밥티스트 로댕은 노르망디의 면화 상인 집안출신이었다. 산업혁명에 고무받았던 당시의 많은 시골 청년들처럼 그는 1820년 무렵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상경해 경찰국의 서무 직원으로 취직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댕은 아버지의 직업을 기를 쓰고 숨겼다. 일요일이면 가족은 생메다르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난 뒤 파리 교외로 산책을 나가거나 파리의 식물원, 동물원, 박물관 같은 곳을 돌아다녔다. 로댕의 이모인 테레즈 셰페가 세 아들을 데리고 로댕 일가의 나들이에 따라 나설 때도 있었다. 두 가족은 자주 어울렸으며 로댕은 사촌 오귀스트, 에밀, 앙리와 나이가 들어서도 가깝게 지냈다. 그다지 외향적이지는 않았지만 로댕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늘 그렇듯, 꿈에 젖어, 손에 닿는 물건으로 뭐든지 재미있는 놀이를 즐길 줄 알았다. "내 기억으로는 아주 어릴때부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어머니가 자주 들르던 야채가게 주인은 화보나 판화집에서 뜯어낸 종이를 원뿔모양으로 돌돌 말아 자두를 담아 주곤 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베끼며 놀았는데, 그것이 내 첫 모델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조각가의 실제 체험에 따른 기억일 수도 있지만, 소년 로댕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전기연구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로댕이 지어낸 일화인지도 모른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데다가 심한 근시로 고생한 어린 로댕은 발드그라스 초등학교에서 별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이 시절의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실망한 아버지는 로댕을 삼촌 이폴리트가 운영하는 보베의 소년 기숙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로댕은 그곳에서도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삼촌이 그를 다시 파리에 돌려보내기로 결심했을 때 로댕은 아직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며 간단한 셈도 할 줄 몰랐다. 어느덧 열네살이었다. 이제 먹고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예술가가 되겠다고 아버지를 졸라 프티트 에콜에 들어가다 로댕은 아직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댕은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에 파묻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댕은 미켈란젤로 작품을 엮은 판화집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망치로 한 대 두드려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그 길로 그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장 밥티스트 로댕은 이것이 아들에게 적합한 직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좀더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를바랐다. 그러나 로댕은 고집을 꺽지 않았고, 어머니와 누이도 로댕을 편들었다. 아버지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854년부터 로댕은 에콜앙페리알 드 데생(제국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좀더 권위 있는 에콜 데 보자르(미술학교)와 구분하기 위해 프티트 에콜(작은 학교)이라 했다. 수업료가 면제되는 이 학교는,1765년 루이 15세가 세웠으며,1877년 에콜 나시오날 데자르 데코라티프(국립장식미술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프티트 에콜에서는 데생을 중점적으로 가르치기는 했으나, 가구공, 세공사, 철물공, 자물쇠공 같은 예술가적 소양이 중시되는 기능공도 많이 훈련시켰다. 학교를 운영하는 일레르 벨로크와 오라스 르코크 드 부아스보드랑의 가르침 덕분에 이 학교는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르코크 드 부아스보드랑은 학생들의 관찰럭을 키우고 주제의 전체적 형태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리도록 학생들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자연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장려했다. 이 방식은 에콜 데 보자르에서도 한참 뒤에야겨우 도입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로댕은 이런 수업을 통해 자연의 빛이 사물의 형태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조각은 야외미술이다."라고까지 주장하지 않았던가. 로댕은 비슷한 관심과 야망을 공유한 또래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가 사귄 친구들 중에는 나중에 유명해진 이들도 있다. 화가로는 앙리 팡탱 라투르, (그는 에콜 데 보자르에 갓 입학한 신참이었다.) 알퐁스 르그로가 있다. 벌써 2년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조각가 쥘 달루, 그리고 레옹 푸르케도 로댕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파리, 지식에 굶주린 청년들의 배움터 이 젊은이들과 교제하면서 로댕은 자기가 예술세계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쉽게 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지식의 격차를 하루빨리 메우기 위해 무료데생 강습소, 박물관, 도서관 등프랑스의 수도가 제공하고 있던 배움터라는 배움터는 어느 곳이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하루 일과는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학교에 가기 전에는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화가 피에르 로제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어 오전 8시에서 13시까지는 프티트 에콜의 원형홀에서 데생 수업을 받았다. 에콜 데 보자르와 달리 프티트 에콜에서는 살아 있는 모델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연습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옛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교사들도 학교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었고 일정한 요일에만 나와 작품활동을 지도해 주었다. 오후가 되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조각들을 베끼거나 제국도서관에서 사전류를 뒤지면서 보냈다. 그다음에는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이폴리트 뤼카가 진행하는 데생 수업에 참석했다. 이곳에서는 살아 있는 모델과 석고상을 번갈아 가며 그렸다 그리고 저녁이면 그날 하루 동안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종이 위에 옮겼다. 예술적 기교를 습득하는 것만으로 로댕은 만족하지 않았다. 로댕은 어린 시절의 마구잡이식 교육에서 빚어진 지적 문학적 공백을 어서 메우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아 그는호머, 베르길리우스, 빅토르 위고, 위대한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알퐁스 드 라마르틴, 저명한 역사가 쥘미슐레의 책을 읽어 나갔다. "난생 처음 점토를 본 나는 천상에 오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1년 동안은 24시간 내내 오로지 데생에만 매달렸으므로 로댕은 조각이 뭔지 전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조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로댕은 조각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로댕은 진정한 소임을 찾았다고 느꼈다. 19세기의 다른 조각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댕에게 조각은 .곧 점토빚기를 의미했다. 남달리 빠르고 능숙하게 점토를 빚을 수 있었던 로댕은-그는 흙 다루는 기술을 금세 익혔다-그 일에서 재미까지 느꼈으므로 마침내 자기 적성에 딱 들어맞는 분야를 발견했다는 확신를 가졌다. "우선 팔, 다리,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해 보았고, 다음에는 전체 형상을 한꺼번에 만들었다. 모든 것을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는데 지금 내가 능숙하게 해내는 것만큼 쉬웠다. 나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1857년 로댕은 고대의 작품을 모사한 데생으로 두 번이나 일등상을 받았다. 열일곱 살 젊은이는 교사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자연스럽게 에콜 데 보자르 지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재능을 확인받은 청년 아들의 야심을 살려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던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실력가로 자타가 공인하던 조각가 이폴리트 멩드롱을 찾아가 그의 견해를 물었다. (멩드롱은 해마다 열리던 프랑스의 국립미전인 살롱전의 대부였다.) 아버지가 손수레에 실어 화실로 직접 가져온 로댕의 데생과 석고틀-그중에는 로댕이 독자적으로 만든 첫 작품으로 간주되는 장 밥티스트 로댕의 흉상도 포함되어 있다-을 본 멩드롱은 젊은이에게 자질이 엿보인다고 판정했다. 전문가의 칭찬에 용기를 얻은 로댕은 자신만만하게 에콜 데 보자르에 응시했다. 낙방, 또낙방 로댕은 세 번 응시했다가 세 번 모두 고배를 마셨다. 로댕의 뛰어난 솜씨를 익히 알던 친구들은 왜 로댕이 번번이 미역국을 먹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프티트 에콜의 18세기적 분위기에 기울어져 있었던 로댕에게는 에콜 데 보자르를 지배하던 신고전주의적 화풍이 낮설 수밖에 없었다. 제도권의 취향을 맞추지 못하는 조각가가 작업을 의뢰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의뢰받은 작업 없이는 한순간도 버티기 힘든 것이 조각가의 세계였다. 조각은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커도 비좁게만 보이는 화실, 점토·석고·대리석 따위 재료,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 청동주조와 녹청작업, 거기다 모델과 조수도 있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돈이었다. 학업의 포기 1861년, 장 밥티스트 로댕은 얼마 되지 않는 연금을 손에 쥐고 은퇴했다. 이제는 놀고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누이 마리아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교회용품을 파는 가게에서 벌써 몇 년째 일하고 있었다. 1853년 이후로 파리는 나폴레옹 3세와 시의 도시계획을 입안한 바롱 오스망의 주도 아래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많은 조각작품이 도시 곳곳에 들어섰고 건축물 장식 수요를충당하기 위해 여러 곳에 공장이 세워졌다. "어디를 가나 대규모 건축사업에는 조각이 양념처럼 포함되었다. 도시의 빠른 팽창과 맞물려 새로 들어서는 정원, 광장, 교차로에도 어김없이 조각이 들어섰고, 공공 건물이 개축될 때에도 위인들의 조각상은 필수품이었다."고 당시의 한 문헌은 증언해 준다. 일거리를 따라서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는 기나긴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프티트 에콜에서 같이 배웠던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호구지책을 위해 무슨 일에든 달려들었다. 르그로는 실내장식가로 나섰고, 달루는 박제사에게 동물상을 빚어 제공했으며, 석공이 되겠다는 푸르케는 파리를 등지고 마르세유로 떠났다. 로댕이라고 생활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낮에는 남의 일을 했으며 밤에는 자기 만족을 위해 점토를 빚었다. 최초의 모델은 가족이었다. 가정의 비극 실연에 상처받은 로댕의 누이 마리아는 성아기예수수녀원의 수련수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평생 수녀로 남겠다는 종신서약을 몇 주일 앞두고 삶의 의지를 상실한 그녀는 세상을 등졌다. 1872년의 일이다. 슬픔에 잠긴 로댕은 누이가 선택했던 길을 따르기로 했다. 그것말고는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귀스탱 수사가 되어 성령회에 들어갔다. 수도원의 인자하고 예리한 부원장 피에르 쥘리앙 에마르 신부는 수도원이 로댕의 진정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로댕에게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라고 권했다. 그래야만 그가 다시 적극적인 삶에 뛰어들고픈 욕망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고, 로댕은 얼마 안 가서 수도원을 떠났다. 로댕은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처음으로 독립된 생활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이 일 저 일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는 청동을 마무리했고 대리석과 돌을 다듬었으며 은 세공장에서 장신구와 보석을 깎았다. 역작을 만드는데 쏟아 부었어야 할 노력을 그렇게 엉뚱한 곳에다 분산시켜 허비한 시간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생활에는 큰도움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제2장 배고픈 시절 1864년에 처음으로 마련한 화실 "아! 나의 첫 화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고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더 나은 곳을 구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1년에 120프랑을 주기로 하고 고블랭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가까운 르브룅가에 있는 마구간을 하나 빌렸다. 조명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였고 몇 걸음 물러서서 내가 빛은 점토 모형이 실물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이것은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원칙이다-공간도 넉넉했다. 아귀가 잘 안 맞는 창틀과 휘어진 마룻바닥의 틈새로 여기저기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강풍에 시달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지붕 사이로도 외풍이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다. 한구석에는 넘칠 듯 찰랑거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 탓인지 실내는 몹시 추웠고 공기도 늘 눅눅했다. 그곳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로즈 뵈레와의 만남 1864년 고블랭 극장의 정면벽을 장식할 여상주에 매달려 있던 무렵, 로댕은 재봉사로 일하던 스무 살 처녀 로즈 뵈레와 알게 되었다. 가족의 반대를 우려한 로댕은 1866년 1월 18일 아들이 태어난 뒤에야 여자를 가족에게 소개했다. 아들에게는 오귀스트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로댕은 아들을 자기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191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2주일 전까지 53년 동안 헌신해 온 로즈를 정식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다. 젊은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로즈는 집에서 일을 하는 틈틈이 로댕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로댕이 2년에 걸쳐 제작한 '주신 바쿠스의 여제관'의 모델이었다. 새 화실로 이사하던 길에 이 작품이 깨어졌을 때 로댕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카리에 벨뢰즈의 화실에서 일하다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않은 인기를 누리던 알베르 에르네 카리에 벨뢰즈 밑에서 일하면서 로댕은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조각을 훼손시키면서 대중에 영합하는 데 목적을 둔' 세계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카리에 벨뢰즈는 건물 장식조각품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던 흉상 같은 응접실 장식물까지 전분야에 손대고 있었다. 이 흉상은 로댕도 프티트 에콜에서 배운 바 있는 18세기의 비공식 초상화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카리에 벨뢰즈는 식물원, 루브르 대미술관, 파리 오페라 극장 등 중요 공사에 모두 관여하고 있었다. 로댕도 그 작업에 관여했지만 그는 이내 카리에 벨뢰즈의 승인 아래 좀더 작은 시판용 흉상을 전문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맡은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업수완이 좋은 조각가에게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있었다. 하나는 여러 직원을 두고 거대한 화실을 꾸려 나가는 요령이었고, 또 하나는 한 형상을 무한히 변형시키는 기술이었다. 점토상을 그냥 나체로 둘 수도, 옷을 입힐 수도 있었고, 꽃이나 과일로 장식할 수도 있었으며, 머리에 모자를 씌울 수도 벗길 수도 있었다. 이것을 다시 석고, 청동, 대리석으로 각각 다르게 만들 수 있었다. 좌절 로댕은 비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모델의 흉상에 잔뜩 기대를 품었다. 에콜 데 보자르 입교가 좌절된 이후 살롱전은 건축조각가의 낮은 지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미술가들의 경쟁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이는 작가가 구매자-이들은 국가나 지방정부, 또는 부유한 개인으로 공식 미전의 결과에 크게 영향받았다-와 연결되는 고리였고, 비평가들의 발언에 따라 작가의 명성이 쌓이거나 허물어지는 곳도 이곳이었다. 조각가들이 몇 달씩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는 '살롱품'은 일반적으로 석고상으로 제출되었으며, 구매자가 나타나면 청동이나 대리석 같은 영구재료로 제작되었다. 로댕의 살롱전 첫 출품작인 비비 흉상은 너무 사실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출품을 거부당한 59명의 작가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랐을 때 로댕은 앞으로도 몇 년을 더 조수로 썩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이 좌절되었을 때보다 충격이 훨씬 더 컸다. 일감을 찾아 벨기에로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로댕은 서른살이었다.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파리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그는 징집대기자로 있으면서 식료품을 구하러 다녔다. 1871년 파리가 무너지자 그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1870년 가을, 카리에 벨뢰즈는 브뤼셀의 신축 증권거래소를 장식하는 일감을 따내자 식솔과 파리 작업실 인원의 일부(그중에는 조수인 요제프 반 라스부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를 데리고 벨기에의 수도로 떠났다. 로댕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그는 로댕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로댕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아내와 아들, 아버지 (어머니는 파리가 포위되었을 때 천연두로 죽었다.)를 남겨 두고 단신으로 떠났다. 파리 시민들은 굶주리고 있었으며 집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댕의 이모인 안나가 연로한 장 밥티스트를 돌보았다. 그녀는 1872년 뵈레가 로댕과 합류하기로 결심하자 로댕의 어린 아들 오귀스트도 거두었다. 로댕은 제작중이던 모든 점토상을 그대로 놓아두고 작업실을 떠났다. 뵈레는 로댕과 합류하기 전에 점토상들이 마르거나 금이 가지 않도록 젖은 수건으로 꾸준히 덮어 주는 까다로운 임무를 떠맡아야 했다. 그때 이후로 로댕은 작업실을 떠나 있을 때면 항상 똑같은 당부의 말로 뵈레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맺곤 했다. "내 작품들 잘 보살피구려. 너무 축축하게 해서는 안돼. 약간 딱딱한 상태가 좋다오."라든가 "하루도 빠짐없이 점토상을 돌보기 바라오."라는 식으로. 실직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로댕은 저녁에는 여자의 흉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 이름으로 팔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카리에 벨뢰즈는 격노해 로댕을 해고했다. 로댕은 수입이 전혀 없이 여러 달을 보내야 했다. 로댕은 2차 포위로 시련을 겪고 있는 파리의 식구들에게 단 한푼도 송금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카리에 벨뢰즈는 반 라스부르크에게 증전거래소 일을 맡기고 얼마 뒤 파리로 돌아갔다. 반 라스부르크는 로댕에게 동업을 제의했다. 벨기에에서 팔 물건에는 자기 이름을 달고 프랑스 시장을 겨냥한 물건은 로댕의 이름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로댕은 그 제의를 수락했지만 개인적인 작품활동도 병행해 '수종' '도지아' 같은 작품을 브뤼셀의 청동회사에 판매했다. 반 라스부르크와의 관계는 얼마 못 가서 악화되었고 그들은 1875년 이후 갈라서게 된다 새로운 영감과 자신감 벨기에에서 7년을 살면서 로댕은 파리말고도 예술가를 위한 세상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제 프랑스의 수도에만 매달려 있을 필요는 없었다. 로댕은 다른창조의 길들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프티트 에콜 시절에 경험한 그칠 줄 모르는 탐구욕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에 다시 한번 휩싸였다. 유일하게 일손을 놓는 일요일이면 로댕은 아내와 함께 근처의 성당을 찾아가곤 했고, 성당의 조각은 그를 매료시켰다. 박물관에서 로댕은 가만히 서서 루벤스의 걸작을 열심히 머릿속에 집어 넣은 후 저녁에 집에 와서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 로댕과 뵈레는 함께 시골길을 오래도록 거닐기도 했다. 1905년에서 1906년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은 "아무데나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로댕의 주머니는 그가 지니고 다니는 책들로 항상 불룩했다. 잠들기 전에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즐겨 읽었다. 1871년 그가 최초의 개인전을 연 곳도 브뤼셀이었다. 이로써 그는 독립 조각가로서 공식 데뷔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부름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로댕도 이탈리아를 동경하고 있었다. 1875년 말 결국 그도 벼르고 벼르던 이탈리아 여행을 결행한다.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랭스의 성당을 구경한 뒤 로댕은 프랑스를 떠났다. 뵈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들뜬 어조로 여행중에 보고 들은 일을 시시콜콜히 전하고 있다.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미켈란젤로 작품의 스케치에 들어갔소. 이 위대한 마술가가 자신의 비밀을 슬슬 털어놓기 시작하는 것 같아." 얼마 뒤에 쓴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나의 머리는 내가 루브르에서 미친 듯이 보고 그렸던 그리스의 조각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는 당혹스러웠지. 작품을 둘러볼 때마다 내가 영원히 습득했다고 믿었던 진실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거든." 그리스 조각의 평온한 균형과 미켈란젤로의 뒤틀린 토르소는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로댕은 어디를 가나 노트를 하고 스케치를 했다. 최초의 물의:'청동의 시대' 브뤼셀에 돌아온 로댕은 새로운 열정으로 무장하고 1875년 여름부터 매달려 온 파리 살롱전 출품을 위한 대작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가 모델로 쓴 벨기에의 군인 오귀스트 네트는나중에 포즈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토로한 바 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로댕은 전통적으로 선호해 온 근육의 과장된 사용을 추호도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 '청동의 시대'는 벨기에의 미술계에도 알려졌다. 그런데 한 익명의 평론가가 짐짓 작품을 추켜 세우면서 살아 있는 모델에 바로 석고를 씌워 만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것은 진정한 조각가라면 사용해선 안 될 기법이었다. 몇 달 뒤 로댕이 이 작품의 석고상을 파리 살롱전 심사위원회에 제출했을 때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로댕은 자신을 변호하려고 노력했다. "나보다 훨씬 영악한 사람이라야 이런 난국을 뚫고 나올 수 있다."고 그는 푸념했다. 로댕은 벨기에 화가들이 써 준 옹호편지와 심사위원회가 자기의 작품과 비교할 수 있도록 모델의 사진과 모델에 바로 씌워 만든 석고상을 첨부해 보냈다. 그러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심사위원회는 로댕이 비싼 돈을 들여서 만든 모델의 석고상이 든 나무궤짝은 물론 편지 봉투조차 뜯어 보지 않았다. 로댕은 언론의 위력을 절감했고 그후 기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기자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파리 복귀,그러나 암울한 미래 한 차례 홍역을 치렀지만 그래도 로댕은 하루빨리 파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파리로 가는 길에 그는 아미앵, 누아용, 수아송, 랭스의 성당을 둘러보았다. 1877년 말 파리에 도착한 로댕은 생자크가에 전세를 얻어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살기 시작했다. 비빌 만한 언덕이 없던 로댕은 푸르케의 주선으로 다시 카리에 벨뢰즈의 밑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부터 로댕은 세브레 도자기 공장에서 독립 작업가로 일했다. 당시 이 공장의 미술감독으로 위촉되었던 카리에 벨뢰즈는 조각 부문을 육성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버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로댕은 니스, 마르세유, 스트라스부르 등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1878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는 로댕에게는 구세주였다. 로댕뿐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프랑스 예술가와 장인이 그렇게 생각했다. 로댕은 트로카데로 분수의 장식을 맡았다. 가장 힘찬 조각품의 하나인 ' 세례 요한'을 완성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례 요한'은 '청동의 시대'와 함께 1880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는 이때 그려 둔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참 뒤인 1907년 굉장히 큰 남자 인물상을 만들었는데, '걸어가는 남자'라는 이름을 달아 준 것은 평론가들이었다. 로댕은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가 내건 기념물 공모전에 여러 차례 참여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 달랑베르의 인물상만이 겨우 새로운 시청 건물의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로댕의 실력은 누구나 알아주었으며 그의 이름은 조각가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로댕이 전체 인물상을 몇 시간 만에 점토로 빚어 낼 수 있는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리고 '청동의 시대'를 적극 변호해 준 동료 조각가들 덕분에 마침내 로댕은 파리 미술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한순간 관능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 주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 그는 관능을 찬양한다. 그는 삶의 고통, 죽음의 공포, 지옥 그 자체의 공포를 표현할 줄 알았다. '칼레의시민'에서 그는 역사를 대변했고, '빅토르 위고'에서는 자연성의 요란한 분출을 표현했으며, '발자크'에서는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 주었다."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 제3장 걸작, 또 걸작 '청동의 시대'를 둘러싸고 물의가 따랐지만, 프랑스 미술부 차관 에드몽 투르케는 로댕의 재능을 역설한 카리에 벨뢰즈, 장 알렉상드르 팔귀에르, 폴 뒤부아 같은 조각가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투르케는 파리 뤽상부르 박물관을 위해 '청동의 시대'와 '세례 요한'을 구입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는 1880년에 자신의 독립성을 웅변이라도 하듯 신축되는 장식미술박물관의 대규모 핵심 작업을 로댕에게 공식 위촉했다. 박물관 입구를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돋을 새김으로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주제 선정은 로댕이 직접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오랜 세월 자신을 사로잡아 온 주제에 매달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피력하면서 작품을 구성하게 될 수많은 소형 인물상들로 자신에게 그동안 퍼부어져 온 중상모략-실물에 석고를 씌워 작품을 내놓았다-을, 단칼에 뿌리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테의 작품은 당시 프랑스 문학과 미술에서 즐겨 언급되곤 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저승의 강을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그렸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연작장편 '인간희극'은 분명 단테의 신곡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 그리고 장 밥티스트 카르포는 '우골리노'를 조각해 로댕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로댕의 남다른 점은 개별적인 인물과 장면을 풍부히 살리면서 단일 구조 속에서 단테의 작품을 3차원 공간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데 있다. 천장이 높은 거대한 작업실 위니베르시테가 182번지에 있는 대리석 하치장은 국가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조각가에게 전달할 대리석을 쌓아 두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작업실이 12군데 있었다.1880년부터 로댕은 요제프 오스바흐와 함께 작업실을 썼으며 나중에는 인접한 아틀리에를 두 개나 더 쓸 수 있었다. 로댕은 그뒤로 다른 아틀리에도 많이 썼고 그중에는 더 넓은 곳도 있었지만 위니베르시테가에 있는 작업실만은 늘 애용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쓴 편지지의 주소도 이곳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로댕의 숭배자들이 이곳으로 떼지어 몰려들곤 했다. 그들은 테이블, 선반, 심지어 화실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지옥편'에 등장할 다양한 인물상의 팔과 다리를 로댕이 어떻게 일일이 구분하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단테는 예언자이자 작가일 뿐 아니라 조각가이다" "나는 단테의 '지옥편'에 나오는 여덟 개의 원을 그리면서 단테하고만 꼬박 1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해가 저물 무렵 나는 나의 데생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다. 자연을 기초로, 모델을 써서 작업했다." 로댕이 먹을 기초로 하면서 조각적 효과를 예견할 수 있도록 갈색 잉크로 농담을 나타낸 수백 점의 데생은 단테가 쓴 걸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삽화라기보다는 로댕의 해석이 가미된 주석에 가깝다. 로댕의 이 작품은 점차 보편적인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우골리노', 그리고 시인 자신을 나타내는 '생각하는 사람' 같은 인물은 단테에게 빌려 왔지만,로댕은 당초의 주제에서 멀리 벗어나 보들레르의 영향을 암시하는 인물들까지도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고자 했으며 인류의 모든 감정과 정념을 그리고자 했다. '지옥문'의 규모가 어느정도 설정되자 로댕은 거대한 목조틀을 짠 다음 그 위에 점토를 씌우고 다시 석고를 덧발랐다. 거기다가 로댕은 자기가 미리 그린 그림을 높고 얕은 돋을새김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개별적인 인물이나 군상은 사실상 환조로 표현되었다. 20년을 '지옥문'과 씨름했지만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로댕은 창조의 순간에 느끼는 전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것도 최종적일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다시 고치고, 여러 인물 사이에 또 다른 인물을 끼워 넣고, 그런 다음 그 인물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그러다 정 안 되면 그것들을 부수어 다음 실험을 위한 재료로 삼았다. '지옥문'은 그가 담고자 했던 조각품을 모두 담아 낼 수 없었다. 그의 영감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변모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상들은 조각가로서의 그의 삶을 기록한 일기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대칭을 무시하고 배열된 200여 명의 인물은 서로 용해되면서 얽히고설킨 군상을 만들어 낸다. 로댕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이 낳은 현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인물상 여러 개를 없앴으며 1900년에 열린 석고상 전시회에서는 환조 인물상을 대다수 제거했다. 파리 로댕 박물관의 수석학예관이 '지옥문'을 짜맞춘 것은 로댕이 죽은 뒤였다. 그리고 1926년에야 최초의 청동상이 만들어졌다. "'지옥문'은 걸작으로 가득하다."고 로댕의 친구인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은 격찬했다 실제로 '지옥문'에 나오는 여러 인물상은 그 자체가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 '세 망령' '웅크린 여인' '한때는 투구 제작자의 아리따운 아내였던 여인' ' 우골리노' '아담' '이브' '절망' '사랑의 도피' '무릎 꿇은 탕녀'‥ 어떤 인물상은 다른 인물상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가령 '돌아온 탕아'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사랑의 도피' '절망'은 모두 '우골리노 '의 아들 가운데 한 명에서 유래했다. 모든 인물은 얼마든지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었고 석고, 대리석, 청동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다. 더욱이 '지옥문'에 등장하는 많은 신체 부위는 말년까지 로댕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다. 주목받는 조각가로 사회에 소속되지 않고는 아무도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로댕은 수줍음이 많고 병적이리만큼 대인관계에 불안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자기 할 일을 잘해 나갔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예술가들이 어울리는 사교모임에 얼굴을 비추었다. 마담 샤르팡티에의 살롱에는 공쿠르 형제, 알퐁스 도데,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에밀 졸라 같은 작가가 드나들었다. 쥘리에트 아당의 살롱에는 정치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런 모임에서 로댕은 새로운 정신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 비평가들이 로댕의 예술을 선전하는 데 한몫했다. 에밀 베르주라는 자신이 로댕을 만난 최초의 언론인이라고 주장했다. 로댕에게 경도된 윽타브 미르보는 "미르보는 위대한 로댕을 알아보았다네."라는 유명한 풍자송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귀스타브 주프루아가 있었고, '라르' '예술'지의 편집자인 레옹 고셰와 '랭트랑시장' '비타협'지의 기자 에드몽 바지르를 비롯해 많은 논객들이 로댕에게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에 로댕은 영국으로 여러 번 여행을 가서 친구 알퐁스 르그로의 집에 머물렀다. 르그로는 로댕에게 판화를 가르쳐 주었으며 영국의 미술인들에게 로댕을 소개했다. '지옥문'에 몰두하며 틈틈이 흉상을 제작하다 1880년대에 제작한 흉상들로 로댕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것은 대부분 우정의 표시나 답례로 만든 것들이었다. 로댕은 보상이 뒤따르는 주문품보다는 친구의 모습을 흉상에 담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금전적인 굴레에 속박당하지 않을 때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릴케는 로댕의 흉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로댕에게 사람의 얼굴은 그가 직접 참여하는 연극의 한 장면과 같다. 그는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그의 예리한 눈초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는 자기가 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본다." 로댕은 르그로, 카리에 벨뢰즈, 쥘 달루, 앙리 베크, 오메르 드와브랭(칼레 시장), 옥타브 미르보, 로제 마르크스 등 많은 지인들의 흉상을 만들었다. 유명한 사람의 흉상을 만들면 명성을 더욱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에드몽바자르가 로댕에게 조언했다. 그러면서 바지르는 빅토르 위고와 정치평론가 앙리 로슈포르를 천거했다. 빅토르 위고는 다비드 당제르가 만든 자기의 흉상이 최고라고 여겼으므로 로댕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로댕이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막지 않았다. "나는 화초가 가득한 그 집 베란다에서 몇 시간씩 일했다. 이따금씩 빅토르 위고가 냉담하고 굳은 얼굴로 응접실을 가로질러 가곤했다. 그는 방 맞은편 끝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고 로댕은 전한다. "나는 살아 있는 모델의 측면 윤곽을 작품의 윤곽과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하는 것을 작업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한 작업원칙을 관철시키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으므로 나는 옆이나 뒤로 걸어가서 재빨리 그를 훔쳐 본 다음 작은 종이에 그의 얼굴 윤곽을 가급적 많이 그려 두었다. 그는 나를 본 체 만 체했지만 나더러 나가라는 식의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두부 윤곽을 다각도로 그려 내가 만드는 흉상의 두부와 비교했다. 천신만고 끝에 작품을 완성하긴 했지만 참으로 힘겨운 작업이었다." 작업실: 모델, 주형공, 수정공, 조수 로댕의 작업실은 분업이 이루어지는 작은 공장처럼 조직되어 있었다. 석고주형공은 조각가가 만든 점토모형으로부터 여러점의 석고상을 떴다. 수정공은 대리석 덩어리를 대충 잘라내고 조수가 석고모형을 새기기 쉽도록 요소요소에 구멍을 뚫어 둔다. 주물공은 대개 독립적으로 일하면서 여러 예술가를 상대했으며, 운치를 살리기 위한 녹청작업 역시 1900년을 전후해 로댕과 일했던 리메처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전문가에 의해 처리되었다. 모델 또한 작업실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로댕은 모델에 대해 아주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훈련받지 않은 모델을 선호했다. 판에 박힌 듯만 기계적 포즈를 누구보다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로댕은 주문받은 일감, 자신의 실험, 그리고 지인들을 위해 무수히 많은 인물 흉상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를 잠깐씩 또는 영구적으로 도와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1900년 무렵에는 그 수가 제법 불어났다. 그러나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고갱은 단순한 허드레꾼을 주변에 거느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쥘 데부아, 프랑수아 퐁퐁, 카미유 클로델, 아리스티드 메욜, 앙투안 부르델처럼 장래성이 있는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입장은 분명했다. "제자는 받지 않지만 조수로서 내 옆에서 일할 수는 있다." 카미유 클로델, 젊은 조각가 로댕은 1883년 말 친구인 알프레드 부세를 대신해 젊은 여성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카미유 클로델을 만났다. 훗날 외교관 생활을 하며 극작가로 활동하게 되는 폴 클로델의 손위누이 카미유는 열아홉이었다.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그녀는 조각가가 되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카미유의 발랄한 착상과 독창적 재능,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에 감동받은 로댕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수준에서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이상적인 여인상을 카미유에게 발견했다. 로즈 뵈레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였으나, 로즈는 로댕의 사회적 신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미유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원숙한 조각가를 더없이 숭배했다. 1885년부터 그녀는 로댕의 조수가 되었다. 로댕이 카미유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던 대작의 손과 발을 카미유에게 빚게 한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의 한 기록은 이렇게 증언해 준다. "그녀는 점토성형법의 비밀을 오래 전에 터득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석고를 잘 다루었으며 거장 자신도 미처 체득하지 못한 정교한 기술과 힘으로 대리석을 깎을 줄 알았다." 카미유는 로댕의 아틀리에를 관리하며 두 사람의 사랑과 언쟁을 지켜본 프랑수아 퐁퐁과 일했다 카미유의 얼굴과 육체 1888년까지 카미유는 부모와 함께 생활했지만 부모는 카미유의 불륜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미유는 로댕이 얼마 전에 임대한 폴리파양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탈리로 113번지로 거주지를 옮겼다. 두 예술가는 이 18세기의 퇴락한 저택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남몰래 애정을 키워 나갔다. 카미유의 얼굴과 육체는 로댕의 작품에 거듭 나타난다. 그녀는 ' 사책' '오로라' '성 조지' '프랑스' '회복기의 환자' '지옥문'에 나오는 저주받은 영혼 여럿에 등장했다. 여자를 보는 로댕의 눈도 달라졌다. 그때부터 여자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로댕이 사랑에 빠진 연인을 거룩하게 표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85년과 1896년 사이에 만들어진 '영원한 우상' '입맞춤' '영원한 봄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무용' '사랑의 도피'같은 작품에서 인물들의 움직임은 격정, 사랑, 무아경, 깊은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웅크린 여인' '나는 아름답다네' '패권' '저주받은 여인' '신들의 전령 이리스'같은 작품은 가장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에 속한다. 장엄한 역사의식: '칼레의 시민' 1884년, 칼레 시장 오메르 드와브랭은 칼레시의 영웅적 인물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로댕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로댕은 14세기에 일어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칼레를 구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에 항복한 영웅적인 시민이 실은 한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로댕은 순식간에 이 주제에 빠져들었다. 영감이 샘솟듯 넘쳐흘렀다. 그는 칼레의 여섯 시민을 군상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고 동상건립위원회 앞으로 편지를 띄웠다. "전 참이 운이 좋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기발한 착상이 생겨났으니까요. 참으로 독창적인 기념상이 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여러분의 돈은 보람있게 쓰일 것입니다. 애국심과 자기희생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는 훌륭한 착상과 기회는 아무 때나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위원회는 기본 골격을 묘사한 첫 스케치에 만족을 표현했지만 1885년 7월에 시안으로 제시된 소형 모형에는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생각한 영웅적인 시민의 모습은 이런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우리의 이상과 배치됩니다." 그러나 드와브랭 시장의 지지 아래 로댕은 군상을 계속 만들어 나갔다. "대개 처음에는 내 자식들에게 옷을 안 입힌다" 로댕은 여섯 개의 인물상을 따로따로 만들었으며 기존의 방식대로 처음에는 옷을 입히지 않고 누드 점토모형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위에다 옷만 덮으면 되는 겁니다. 옷이 어디에 달라붙어 있건 점토모형은 살아 숨쉬게 되지요. 차가운 조각물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생명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1886년 로댕이 마무리작업을 끝내고 석고상을 뜨기 직전, 자금사정으로 사업이 잠시 지연되었다. 위원회는 해산되었지만 로댕은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1895년 이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 여섯 점의 인물상을 보관하기 위해 생자크가의 한 마구간을 빌려야 했다. 1870년대는 영예롭게 저물고 로댕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국립미술협회 창립회원이 되었다. 정부는 그에게 화가 클로드로렌과 작가 빅토르 위고의 기념상을 제작해 달라고 위촉했다. 1889년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었으며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에펠탑이 세워진 해였다. 그러나 그해 예술계를 가장 흥분시킨 사건은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 클로드 모네의 합동전시회였다. 모네는 70점의 그림을 내놓았고 로댕은 32점의 석고상을 전시했다. 자기 분야에서 각각 혁신을 불러일으킨 두 예술가는 평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만일 진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면 후세인들은 나의 '발자크'를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한 것이므로, 나는 나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리라 장담할 수 있다. 사람들이 비웃는 이 작품, 마음먹은 대로 부수기가 여의치 않으니까 기를 쓰고 조롱하는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제4장 새로운 인간 "당신 덕분에 이제 나는 발자크를 조각하게 되었어요" "저는 어마어마한 주제에 매달려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1891년 7월 9일에 쓴 이 편지에서 로댕은 당시 문인협회 회장이었으며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에밀 졸라에게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 문인협회는 이 모임을 창설한 _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념상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파리의 팔레루아얄 극장에 세워질 그 기념상을 로댕은 약 3m 높이로 만들어 1893년 5월까지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발자크 같은 인물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로댕은 이 소설가의 생김새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파리의 도서관에는 발자크의 석판화가 7-8점 가량 있지만 크기가 작다. 나는 대단히 정교한 파스텔 초상화를 사진에 담았다‥ 바로 투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이었다. 그 박물관에는 불랑제가 그린 그림도 있다‥ 나는 또 데스 마스크와 발자크의 삶을 기록한 중요한 문서들도 뒤졌다." 로댕은 브뤼셀까지 가서 발자크의 손을 뜬 청동상을 보았다. "이제 나는 필요한 것을 모두 갖게 되었다. 이 손을 가지고 나는 발자크를 너끈히 재현할 수 있다." 그는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사진가 나다르는 은판사진 한 장을 주었다. 작가 오렐(마리 앙투아네트 모르티에)은 발자크처럼 생긴 바위가 담긴 그림엽서를 보냈다. 귀스타브 주프루아는 발자크를 꼭 닮은 파리생제르맹가에 있는 한 서적상을 소개했다. 로댕의 서재에는 발자크의 작품도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이 모든 문서자료는 로댕이 발자크의 육체와 개성을 체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미흡했다. "자료를 모두 모았다고 자연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모델 없는 작업은 불가능하며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는 착상조차 어렵다고 로댕은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1887년 이후 해마다 카미유 클로델과 함께 여름을 보냈던 앙주로 돌아갔다. 이번에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작업에서 쌓인 피로를 '제자'와 같이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고향에서 작가를 닮은 모델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발자크를 많이 닮은 우체부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스케치를 여러 점 제작했다. 다음에는 작가가 단골로 드나들던 양복점을 찾아 발자크의 치수대로 프록코트를 만들고는 석고에 담갔다가 꺼내 모조 인형 위에 걸어 말렸다. 발자크의 전체적 골격을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언제나 그렇듯 해부학적 구조를 계산하기 위해 누드 환조를 먼저 제작했다. 그리고 머리, 가슴, 몸통을 빚었고, 수도복을 입은 발자크, 잠옷을 입은 발자크, 머리가 없는 발자크를 만들었다. "위대한 예술은 기한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가?" 로댕은 열심히 일했지만 처음 정했던 마감날짜를 훌쩍 뛰어넘고 말았다. 기다리다 지친 문인협회는 18947년 10월 스물네 시간 안에 기념상을 인도하라고 으름짱을 놓았다. 로댕은언론을 통해 "예술품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풍토라 할 수 있는 차분한 성찰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각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알력은 점차 심해졌다. 로댕을 지원했던 문인협회의 신인 회장 장에카르가 사임했고, 로댕은 이미 지불받은 1만 프랑을 작품이 인도될 때까지 제삼자에제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그해 말까지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스타브 주프루아 같은 사람들은 로댕을 옹호했다. 당시 외국에 나가 있던 졸라는 로댕에게 이렇게 썼다. "발자크는 기다릴 것입니다." 로댕은 1898년 살롱전에서 발자크의 석고상을 전시하기로 결심하나 말썽이 뒤따른다 "문인협회 기념사업위원회는 로댕 씨가 살롱전에 전시한 볼품없는 작품에 항의를 표하며, 이것을 발자크의 인물상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알린다." 위원회는 1만프랑을 돌려받고 발자크 상의 제작을 장 알렉상드르 팔귀에르에게 맡겼다. 친구들과 각계각층의 숭배자들이 항의서한을 작성하고 후원금을 모았다. 1896년부터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발자크 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논쟁이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민감한 정치의 영역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로댕은 자신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내 작품은 내가 소유하겠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공개서한에서 밝혔으며, '발자크'를 살롱전에서 거두어들인 뒤 다른 어느 곳에도 세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완성된 석고상을청동으로 뜨지도 않은 채 뫼동에 있는 자기 집 정원에 두었다. 브뤼셀에서 열화와 같은 요청이 있었지만, 더 이상 물의가 따르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작품을 보내지 않았다.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로댕은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시간이 흘러 자기가 옳았음이 입증될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발자크'는 어차피힘에 의해서든 아니면 설득에 의해서든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고야 말 것이다. 사랑의 파국 '발자크'의 완성이 자꾸만 미루어진 것은 창조적 사고가 무르익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카미유 클로델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정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고, 빈혈로 고생했다. 1893년, 카미유는 이탈리로 113번지로 돌아갔다 완전히 갈라선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로댕과의 동거생활을 청산했다. 카미유는 오래 전부터 로댕과 결혼할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로댕은 평생의 반려인 로즈 뵈레를 저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1893년, 로댕은 비위생적인 그랑드오귀스탱 전셋집을 떠나 뵈레와 함께 벨뷔에 있는 슈맹스크리브로 갔다가 다시 뫼동의 언덕빼기에 자리잡은 빌라데브릴랑으로 옮겼다. 로댕은 아직도 카미유를 깊이 사랑했으며 카미유가 늦추기로 한 관계의 끈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욱 관심을 쏟아 부었다. 심지어는 둘이 갈라선 다음에도 로댕은 계속해서 카미유를 돕고 카미유 모르게 그녀의 일에 개입했다. 로댕이 늘 제삼자를 통해 은밀히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로댕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기 전, 그러니까 1892년의 살롱전에서 로댕은 심사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카미유가 제작한 로댕의 흉상을 적당히 눈에 띄는 자리에 전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재능을 가진 젊은 예술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95년, 그는 친구인 학자 가브리엘 무레에게 "내가 사랑하는 이 천재적인 여성(결코 과장이 아님)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로댕은 늘 돈에 쪼들리던 카미유 대신 때때로 그녀 조수의 봉급을 지불하기도 했다. 1898년, 기자인 마티아스 모르아르트가 프랑스 잡지 '르 메르퀴르 다르'에 카미유에 관한 장문의 논평을 썼다. 그녀의 명성은 높아 갔다. 카미유는 '작은 성주' '왈츠' '뜬소문' '파도' '클로토' 그리고 자전적 색채가 강하게 배어 있는 '성련'을 살롱전에 전시했다. 카미유의 피해망상 카미유는 로댕이 자기의 대리석 조각 하나를 훔쳐 갔다고 비난하면서 "내 작업실에 얼씬도하지 말라."고 로댕을 위협했다. 함께 생활했던 초기에 두 예술가의 작품성향은 무척 비슷했다. 카미유는 로댕의 연인이자 오른팔이었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자신의 재능을 로댕과 나누었는데, 어떤 작품들은 누가 누구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별 이후 카미유는 시련에 봉착했다. 그녀는 로댕이 단물을 쏙쏙 빨아먹는 바람에 자신의 창조적 재능이 고갈되었다고 믿었다. 로댕의 예술가적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던 반면, 카미유는 '로댕의 제자'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덕거리고 있었고 점점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1905년부터 카미유의 강박관념은 착란증세로 나타났다. 지난 겨울에 작업했던 모든 조각품을 여름에 깡그리 부수는가 하면 주소도 알리지 않고 몇 달씩 잠적하곤 했다. 1913년, 카미유는 빌레블라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며 얼마 후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30년을 갇혀 살았다. 카미유는 아비뇽 부근 빌뇌벨에 있는 보호소에서 눈을 감았다. 끌로드 로렌, 칼레의 시민, 빅토르 위고 1890년대에 접어들어 로댕의 작품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발자크)에만 모든 정열과 시간을 쏟아 부은 것은 아니었다. 1889년에 의뢰받은 클로드 로렌의 기념상이여러 번의 우여곡절 끝에 1892년 낭시에서 공개되었다. 오메르 드와브랭이 수완을 발휘해 마침내 '칼레의 시민'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받침돌의 선택이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로댕은 군상들이 탁 트인 하늘을 배경삼을 수 있도록 베네치아에 있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바르톨로메오콜레오니 상처럼 아주 높은 받침돌을 쓰든가, 아니면 대중들이 주제의 핵심을 케뚫어볼 수 있도록 아주 낮은 돌받침을 원했다. 동상건립위원회는, 로댕이 약간 자조적으로 표현한 바에 따르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이를 만족시킨다는 이유를 내세워" 절충안을 택했다. 1895년 6월 15일, 옥타브 미르보, 로제 마르크스, 귀스타브 주프루아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있었다. 당시의 관례대로 체조 시범 경기가 펼쳐지고, 가장행렬이 벌어졌으며, 열기구가 하늘로 올라가고, 꽃다발 증정, 그리고 연설이 있었다. 1924년, '칼레의 시민'은 아르메 광장의 낮은 돌받침 위로 옮겨졌다. 1889년에는 팡테옹 신전에 세울 빅토르 위고의 기념상 의뢰가 들어왔다. 위대한 작가가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로댕의 스케치는 거부당했다. 1891년에는 그것과 다른 '빅토르위고'의 스케치를 완성했다. 석고상은 1897년에 완성되었고 대리석상은 1909년에 비로소 제막식을 가졌다. "나의 '조각'을 보여 주고 내가 이해하는 조각의 내용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예술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고 로댕은 말했다. '발자크'로 물의를 빚고 카미유 클로델과 갈러선 뒤 로댕의 관심사는 달라졌다. 그는 마침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작품세계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로댕은 남은 힘을 자신의 모든 조각과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는 데 쏟아 부었다. 제5장 명성 파리 알마 전시관에서 열린 회고전 1900년 6월 1일, 교육부 장관 조르주 레귀에는 파리 알마 전시관에서 로댕 전시회를 개최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자신의 첫번째 회고전에 로댕은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해 만국박람회를 보려고 전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168점에 이르는 석고상, 청동상, 대리석상을 볼 수 있었다. 옛 작품, 새 작품, 작업중인 작품도 전시되었다. 벽에는 로댕의 스케치와 외젠 드뤼에가 찍은 71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 샤를 모리스와 에드몽 피카르가 로댕의 작품세계를 해설하는 강연을 덧붙였다. 알마 회고전을 계기로 해외에서 이루어지던 로댕의 전시회도 일단락을 맺기에 이르렀다. 1896년, 로댕은 제네바에서 두 친구 퓌비 드 샤반, 외젠 카리에르와 전시회를 열었으며, 1899년에는 브뤼셀,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헤이그에서 쥐디트 클라델의 도움을 받아 개인전을 가졌다. 국제적 명성 회고전 준비에 투입된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전시작품이 팔려야 웬만큼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전시회가 끝났을 때 로댕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안도감을 털어놓았다. "이번 전시회는 '정신적' 성취감으로 보나 재정적으로 보나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네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전시회를 여는 데 들어간 모든 비용을 뽑기에 충분했다네. 모두 20만 프랑어치가 팔려 나갔거든.‥ 거의 모든 박물관에서 나의 작품을 구입했지. 필라델피아 박물관은 '사색'을 구입했고, 코펜하겐 박물관은 8만 프랑을 들여 별도로 나의 개인전시실을 만들기로 했어. 그리고 함부르크, 부다페스트, 드레스덴에서도 지대한 관심을보였다네.‥ 당초 기대했던 액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많이 팔려 나간 셈이지." 로댕에 대한 관심은 외국에서 더욱 뜨거워졌고, 전시회를 열자는 요청이 동경, 뒤셀도르프, 부에노스아이레스, 몬트리올, 베를린 등지에서 쇄도했다. 로댕의 작품을 엄선해 전시하는 순회전이 세계 각지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프라하 전시회였으며 로댕은 1902년 그곳에 직접 갔다. 파리 회고전이 끝난 뒤 로댕은 자신이 신처럼 군림하던 빌라데브릴랑에 알마 전시관을 그대로 재현했다. 지혜의 스승처럼 보이는 부처상이 정원에 놓여 있는 뫼동은 조각의 성지가 되었다. 예술가, 각국 대사, 고관대작들이 이 유명한 작업실에 초대받으려고 몸이 달아있었다. 1908년, 로댕은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방문을 받았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도 로댕은 틈틈이 조각과 예술 일반에 관한 이론적 토대를 갈고 닦았다. 1914년 3월에 간행된 그의 저서 '프랑스의 대성당'은 호평을 받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랭스의 대성당이 폭격을 받자 로댕은 크게 상심했다. 식지 않는 창작의 열정 로댕은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확대하거나 결합하는 등, 방대한 작품군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조각에 담았는데, 그중에는 퓌비 드 샤반,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가 있다. 로댕은 1903년 런던에서 휘슬러의 후임으로 국제 조각가·화가·판화가 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오랫동안 작업해 오던 빅토르 위고의 기념상이 1909년에 제막되었다. 또한 1888년에 작은 크기로 만들었던 '생각하는 사람'도 1904년의 살롱전에 훨씬 큰 크기로 출품되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온갖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을 파리의 광장 한곳에다 전시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1906년 4월 21일 팡테옹 계단에서 거행된 제막식에서 세공 웨베르 부인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 한 구절을 인용했다. 작품 의뢰가 쏟아졌다. 일설에 따르면 1900년 이후 조수들의 수가 무려 50명이 넘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인물이 거대한 돌덩어리에서 튀어나온 듯 미완성 상태의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로댕 후기의 대리석 조각-'신의 손' '대성당', 작은 무용수 연작들-은 외국의 로댕 숭배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대리석상에 영혼을 쏟아 붓는 지혜로운 인간" 로댕은 특히 영국, 미국의 부호들을 위한 인물상을 많이 제작했다. 에드워드 시대의 런던 사교계를 주름잡았으며 로댕을 워윅 백작 부인에게 소개한 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친구였던 메리 헌터 부인, 이브 페어팩스, 정치가 조지 윈드햄 미국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미술수집가 케이트 심슨, 재력을 바탕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로댕실을 개설한 미술수집가 토머스F. 라이언, 그외 많은 저명 인사들의 흉상을 만들었다. 로댕은 친구들의 흉상도 제작했다. 귀스타브 주프루아, 마르슬랭 베르텔로, 안나 드 노아예, 헬레네 폰 노스티츠 힌덴부르크가 그들이었다. 그는 또 1908년 미국 무용가 로이 풀러가 소개한 일본 여배우 하나코에게 매료당했다. 로댕은 하나코의 얼굴을 53장이나 스케치했다. 로댕은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졌던 후작 부인-일명 공작 부인으로 뉴욕의 저명한 변호사의 딸-클레르 드 슈아죌도 살아 숨쉬는 듯한 흉상으로 표현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작업에서 피로를 느끼던 로댕은 오로지 로댕에게 돈을 후려내려는 목적으로 접근한 이 미국 태생의 음모가에게 농락당하고 말았다. 수백 점의 데생이 사라진 다음, 로댕은 그녀가 자신의 작품으로 돈벌이를 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로댕이1911년 그녀와 결별하자 비로소 그의 친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로댕은 로즈 뵈레가 있는 뫼동으로 돌아갔다. "머리는그만 매만지고 움직이시오" 오랜 동안 로댕은 한 번도 데생을 중단한 적이 없었지만, 1890년대 말에는 좀더 새롭고 자연스러운 데생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여자를 모델로 세우고 누드를 그렸는데, 새로운 기법을 그 자신은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부터 그 기법이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약간은 있었지만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다가 자연 앞에서 점점 나 자신의 편견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 편견을 거부할 줄도 알게되고 모델을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우리에게는 대부분 익명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모델들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요청했다. "머리는 그만 매만지고 움직이시오." 모델은 작업실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로댕의 눈이 모델을 좇는 동안 그의 손은 거침없이 종이 위를 달렸다. "나는 실물에서 곧바로 포착한 움직임을 받아들이지, 움직임을 꿰어 맞추지는 않는다." 그의 데생 기법은 '본질적인 것을 포착하기 위해 단순화'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서둘러 그린 약화, 습작, 스케치하고는 다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누적되어 온 경험의 정수를 드러낸다. '지옥문' 같은 군상에서 인물을 따로따로 표현했듯 로댕은 누드에서 모든 물질적 관련성을 제거해 그 내재적 의미를 드러냈다. 비서들 전시회, 작품 의뢰, 사람 만나는 일 따위는 많은 시간과 방대한 문서작업을 요구했다. 20세기 초로 접어들자 로댕은 비서를 채용해 각종 우편물과 자료를 관리하고 프랑스와 외국의 일간지에 난 기사를 번역하며 자질구레한 일상 업무를 처리하도록 맡겼다. 조각가인 아내 클라라 베스트호프의 소개로 로댕을 알게 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이중 하나이다. 릴케는, 로댕이 나대는 비서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릴케는 화가 월리엄 로덴스타인과의 업무 서한에 너무 깊숙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로댕은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다. "욱하는 성미 탓에 릴케와 충돌을 빚었지. 그는 충실한 친구였어." 비롱관의 예술가 주인 1908년 로댕과 화해한 릴케는 조각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선생님께서 오늘 제가 입주한 이 아름다운 건물을 직접 방문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꾸지 않은 정원 너머로 세 그루의 월계수가 경이로운 자태로 서 있고 때때로 들토끼가 피륙을 짜듯이 울타리 사이를 넘나듭니다." 파리의 비롱관은 정교 분리 전까지는 신앙공동체인 성심회가 사용하던 건물이었으며 그 당시는 싼값에 세를 놓고 있었다. 입주자 중에는 무명인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유명인이거나 나중에 유명해질 사람들이었다. 장 콕토, 앙리 마티스, 이사도라 덩컨, 릴케가 그들이었다. "(로댕은) 1층 전부와 동측 건물의 2층, 그리고 정사각형 중앙홀을 빌렸다‥ 그것들은 로댕이 늘 꿈꾸었으면서도 찾아내지 못하던 그런 방들이었다‥ 그는 온갖 것을 이곳에 갖다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끔씩 이곳에 와서 전시된 작품들도 둘러보고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을 이곳의 위풍당당한 창을 통해 정원을 내다보고 싶어했다." 릴케는 이렇게 썼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비롱관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나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한다" 1900년 이후 로댕은 많은 상을 받았다. 1903년에는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게 되어 앙투안 부르델이 로댕의 수상을 축하해 뫼동 근교의 부아드벨리지 공원에서 잔치를 벌였다. 로댕의수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어, 잔디 위에서 바이올린 선율에 맞추어 맨발로 춤을 추는 이사도라 덩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또 1905년 예나 대학에서, 1906년 글래스고 대학에서, 1907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조각가의 유일한 희망은 자기 이름으로 된 박물관을 갖는 것이었다. 그 무렵 비롱관이 헐리게 되어 입주자는 규정에 따라 강제 퇴거명령을 받았다. 많은 로비 끝에 로댕은 다소의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나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한다. 여기에는 석고상, 대리석상, 청동상, 석상, 데생, 그리고 예술가와 장인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내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골동품들이 포함된다. 나는, 이 모든 소장품을 비롱관에 전시해 이곳을 로댕 박물관으로 정하고 내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 것을 국가에 요청한다." 로댕이 빠뜨리고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기증품이 또 있다. 그가 1880년대 초부터 모은 신문기사, 그가 받은 편지, 그의 작품을 찍은 사진, 장서가 그것이다. 정 계에서는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폴 봉쿠르가 그의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술계에서는 귀스타브 코퀴오, 쥐디트 클라델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플로드 드뷔시, 기욤 아폴리네르, 로맹 롤랑, 아나톨 프랑스, 클로드 모네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1912년, 행정위원회는 로댕이 이 건물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한다는 데 합의했다. 위원회의 결의안은 화가이며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에티엔 클레망텔 장관의 최종재가를 거쳐 1916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로댕은 이미 그때 뇌졸중으로 쓰러져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모사꾼들이 그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사태를 우려한 로댕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에게 로즈 뵈레와의 결혼을 강력히 권했다. 늙은 연인의 결혼식은 1917년 1월 29일에 거행되었다. 뵈레는 2월 16일에 죽었고 로댕은 11월 10일에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2주일 뒤에 거행되었다. 기록과 증언 로댕과 여인들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로댕에게 다가섰던 조수와 숭배자는 때로는 조각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여성은 로댕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로즈뵈레 . 나는 위대한 조각가와 그의 평생의 반려였던 여성이 맺었던 관계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관계였다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교양이나 지적 능력의 커다란 불균형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평등한 부부라는 현대적 기준에서 보면, 그리고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이른바 여성의 자유, 독립 따위를 고취하기 위해 유포한 갖가지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면, 요즘의 젊은 여성들은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그릇된 기준으로 평가하는 셈이며, 더욱이 로댕 자신과 로댕 부인은 그런 관점을 경멸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로댕 부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이나 자신의 주인에게 받았던 형편없는 대우에 아무런 불평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어떤 회생도 치를 사람이었다. 때로 그녀는 나한테 와서 로댕의 속을 뒤집어 놓는 빡빡한 약속과 일정을 원망하곤 했으며,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로댕이 식사 후에 구두를 신겨 달라고 해서 구두끈을 묶느라 허 리를 숙이는 바람에 소화가 잘 안되는데, 그런 어려움을 몰라 준다며 원망섞인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말을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고 사실 이런 불평조차 극히 드물었다. 원시인처럼 천진난만한 그녀는 남편이 제 힘으로 전세계 예술계와 문화계에서 개척한 드높은 위치를 실감할 때가 거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로댕이 그녀가 독차지할 수 있었던 무명의 가난한 조각가에서 재도권의 인정을 받는 공인이 되어 바깥 세계와 활발한 교섭을 갖게 된 상황의 변화를,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가 끼여들 여지가 없게 된 현실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앤서니 루도비치 '오귀스트 로댕의 개인적 추억', 1926년 로댕 부인이 아끼던 황갈색 고양이가 로댕의 무릎으로 뛰어올라 로댕의 수염에 머리를 비벼댔다. "어머, 고양이 색깔이 당신 젊었을 때 수염과 같은 색깔이네요. 이 녀석도 젊었을 때 당신처럼 바람둥이였을까?" 부인이 말했다.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는 퉁명스럽게 받았다. "빨간 머리 남자는, 아주 착하든가 아주 못됐든가 둘 중 하나라우." 로댕 부인이 내게 말했다. "나도 그런 소리 지겹게 들었지. 내 머리가 아직 젊었을 때 말이야. 하지만 난 못된 짓은 하지 않았소." 로댕이 쏘아붙였다. "벌써 잊어버렸나 봐." 부인이 중얼거렸다. 로댕은 방을 나가 버렸다 카미유글로델 1892년 6월 25일 로댕 선생님 무료해서 다시 펜을 들었어요. 이곳 리즐레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이 안 갈 겁니다. 오늘 전 가운데방(온실로도 쓰인답니다.)에서 식사를 했어요. 이 방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정원이 보이지요. 쿠르셀 부인이 저더러 부담 갖지 말고 가끔씩 이 방에 와서 식사를 해도 좋다고 말했답니다. 아니, 매일 그래도 좋다고 했어요. (빈말은 아닌 것 같았어요.) 얼마나 고맙던지! 시골길을 걸었어요. 어디를 가 보아도 건초, 밀, 귀리 같은 곡물은 모두 수확이 끝나 있었어요. 보기만 해도 시원했지요. 당신이 조금만 자상하다면 우린 이곳에서 낙원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어느 방이든 당신 작업실로 쓸 수 있답니다. 노부인은 우리에게 헌신적이리라고 저는 확실해요. 부인은 강에서 헤엄도 칠 수 있다고 했어요. 당신만 괜찮다면 꼭 그러고 싶어요 전 수영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뜨거운 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보다 백번 낫잖아요. 미안하지만 수영복 한 벌 사 주실래요? 하얀 테두리선이 나 있고 블라우스와 바지를 따로 입게 되어 있는감청색의 중간 사이즈로요‥ 밤에는 당신이 함께 있다고 상상하면서 알몸으로 자지만 깨어 보면 실망뿐이지요. 당신에게 입맞춤을 보냅니다. 카미유 추신, 나 몰래 바람 피우면 안 돼요. 옥타브 미르보에게 1875년 잘 있었나. 클로델 양은 누구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완잔히 무시되고 있다네. 여러 번 공수표를 날리긴 했지만 자네가 클로델 양을 위해 모종의 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난 알고 있어. 자네는 플로델양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자네와 신념을 위해서 그동안 희생을 아끼지 않았네 .자네는 천성이 모질고 야박하지 못해서 남달리 어려움도 많이 겪었어. 클로델양이 나하고 같은 날 자네의 집을 찾아가 줄지 잘 모르겠군.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2년이나 되고 나는 그동안 편지 한 통 안썼거든. 나도 같이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클로델 양에게 달려 있는 셈이지. 어떤 때는 행복감에 젖기도 하고 그럼 마음도 조금 가벼워지네만, 요즘은 인생이 얼마나 가혹한가 새삼 절감한다네. 샤반은 몇몇 친구들한테서 연대 서명을 약속받았다는 그 편지를 장관에게 보내야 할 거야.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하지만 말일세. 사람들은 덮어 놓고 나를 클로델 양의 후견인으로 단정짓지만, 그건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네. 클로델 양은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예술가야. 나를 늘 병신 취급했던 관련 인사들이나 동료 조각가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클로델 양은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거야. 그런 사람들은 우리네 생리에는 잘 안 맞거든.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는 마세나. 나는 언젠가 클로델 양이 성공하리라고 굳게 믿거든. 솔직한 예술가적 자부심을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성공이 남보다 뒤늦게 찾아오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네. 그것이 클로델 양을 서럽게 만들겠지만 말일세. 뒤늦게 성공과 명예를 누린다해도 건강을 해쳐 가면서까지 자신을 혹사할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마음 고생은 영영 보상받을 길이 없을 테지 부인께도 안부 전해 주게나. 로댕 추신, 쓰고 보니 너무 맥빠지는 이야기뿐이로군. 클로델 양에게는 이 편지를 보여 주지 말게. 엘렌 발 포르제 뫼동. 1896년 2월 5일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다시 일을 하고 잠을 잘 수 있으니 불안을 이겨낸 듯싶습니다.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아니, 행복할 겁니다. 다시 젊어진 듯한 느낌이 들고 나의 머리는 열정으로 가득 찼으니까요. 내가 여자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식이 다를 뿐이지요. 뭐랄까. 나의 성스러운 자매로 여긴다고나 할까요. 그들의 깎아 놓은 듯한 매끄러운 육체와 심장을 찬미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를 만들어 낸 위대한 조물주는 당신네 여자들에게 분명히 더 공을 들인 것 같아요‥ 매일 아침 나는 이 새로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새삼 감탄합니다. 이곳의 안개는 너무나 곱습니다. 철도는 쉬지 않고 마치 또 다른 안개인 듯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토해 냅니다. 당신은 무한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 모든 것을 색으로 칠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재능을 얼마든지 쏟아 부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작업은 잘 되어갑니까? 이번 주에는 기분이 좀 어때요? 당신에게 진정한 공감과 존경과 헌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A.로댕 이브 페어팩스 1904년 7월 18일 존경하는 나의 벗 페어팩스 양에게 편지 잘 받았습니다. 친구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정성을 보니 흐뭇하군요. 모든 대상에게, 모든 사람에게 그토록 헌신적으로 자신의 힘을 쏟아 부을 수 있음은 참으로 여성적인 미덕이지요. 당신은 초자연적 질서 안의 태양이요 창공입니다. 당신이, 아니 모든 여성이 마주하게 되는 그 무수히 많은 대화와 글 중에서, 더욱이 당신과는 무관할 수도 있는 그 많은 자리에서, 당신은 늘 자비로운 여신처럼 환히 빛나고 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요. 당신이 말을 하지 않을 때도 당신의 몸짓. 당신의 과장 없는 표현, 당신의 움직임(어쩌면 사람의 마음에 그토록 쏙 와 닿을 수가 있을까요.)은 예술가의 영혼을 건드리는 표현성을 갖습니다. 언제 시간을 내서 파리에 오실 수 있으면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아직 대리석으로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흉상을 통해 나는 늘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그웬존 1906년경 존경하는 선생님께 안개 속에서 전 너무너무 행복했답니다. 특히 역에서 당신이 했던-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을 마지막 순간에 다시 내뱉었을 때 저는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저의 사랑, 저의 재산, 저의 가족, 아니 저의 모든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가진 전부예요. 선생님한테 부담을 드리긴 싫고 한순간이라도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게 하기는 더더욱 싫어요. 아무리 제가 질투심이 불타고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한이 있어도 말이에요 ‥사랑은 못된 저를 양순하게 만드나 봐요. 당신의 메리로부터 헬레네 폰 노스티츠 힌덴부르크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로댕이 그토록 사랑했던 해변에 와 앉아 있다. 주위에는 스케치와 데생이 몇 점 있고 절반 가량 부서진 석고상도 두 개 놓여있다. 지금은 밤이다. 한숨을 토하며 영원한 그리움의 언어를 내뱉는 바다위로 달빛이 교교하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로댕의 인물들이 솟아나온 근원을 강하게 감지한다. 그 인물들은 자연의 모든 소리를 어버이처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가장 깊이 표현한다. 아침에 피어난 붉은 협죽도 앞에서 혹은 자줏빛 노을 앞에서 남자의 토르소가 얼마나 기품 있게 솟아있는가. 이 데생에는 식물처럼 엉킨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둘러싼 숲의 향기가 코에 와 닿는 듯하다. 로댕에게는 땅과 하늘이 여자의 향기였다. 여자는 밤에 피는 꽃이다. 마르그리타 별장에는 '이포모에아'의 새하얀 잔 모양을 한 꽃들이 해질 무렵 진한 향기를 풍기며 피었다가 아침 햇살과 함께 시든다. 로댕이 그리는 여성들도 이런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들은 추하게 시드는 법을 모른다 (늙은 투구 제작자의 아내)에는 노년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쇠락함보다는 영원한 아름다움에 더욱 이끌린다. 헬레네 폰 노스티츠 힌덴부르크 '로뎅과의 대화',1931년 클레르 드 슈아죌 그 여자는 결혼을 통해 맺어졌다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족보를 걸핏하면 들먹여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위스키가 좀 과하다 싶은 날이면 그 여자는 ‥샤를마뉴 때까지 이어지는 옛날 고리짝 족보를 더듬어 올라갔다. 다행히 그 여자는 로댕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기 덕분에 로댕이 지금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고 반드시 토는 달았지만. "로댕! 내가 로댕이에요!" 그 여자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로댕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그녀는 로댕의 작업을 방해했으며 자기에게만 관심을 쏟을 것을 강요하면서 로댕을 쇠진시켜,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중요한 예술품을 수없이 강탈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어떤 가정부 못지않은 극성스러움으로 로댕의 시중을 들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로댕의 얼굴을 씻기고 구드를 신겨 주었으며 머리를 빗어 주고 옷을 입혀 주고 로댕의 짜증을 불평 없이 받아 주었다. 대신 그의 진정한 친구와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여자는 로댕을 모든 지인으로부터 떼어 내 그를 은둔자처럼 만드는 데 사실상 성공했다.‥ 뮤즈의 자질구레한 책략과 음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거론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 로댕에게 증거를 곁들여 그 여자의 본색을 털어놓고 말았다. 불쌍한 로댕! 그는 열다섯살 아이 처럼 사랑 때문에 울부짖었다. 로댕은 흐느끼면서 '우골리노' 조각을 등진 채 허물어져 내렸다‥버림받은 뮤즈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 여자는 나를 윽박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비롱관에 나타난 그 여자는 로댕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데생을 하고 있던 로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을 불렀다. 이윽고 그는 엎드려 있는 뮤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인을 내보내!" 마르셀 티렐 '로뎅의 말년', 1925년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오늘날 클로델은 단순한 로댕의 피후견인이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비평가들은 카미유 클로델이 스승 오귀스트 로댕에게 진 빚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특히 1893년 이 전에 나온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 판단을 받아들인다하더라도, 그러한 판단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나는 본다‥ 이 예술가의 경력을 크게 지배하는 네 가닥의 줄기가 있으니, 그것은 자연주의, 일화주의, 연극성, 전통이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는 이 네 가지 기본 성분이 결합되어 있지만 각각의 상대적 비중은 카미유 클로델의 인생단계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사실주의야말로 이 조각가의 양식에서 변함없이 나타나는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벌써 1882년의 '늙은 헬렌의 흉상'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성년'과, 1900년 이후 좀더 상업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 현재 티시에 컬렉션에 포함되어있는 '늙은 여자의 머리'같은 일군의 작품에서 본질적인 특징의 하나를 이루고있다. '왈츠' '클로토' 같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나타나지만, '성년'에서는 여기에 명확히 개인적인 요소가 덧붙여진다. 이 점은 거미집처럼 짜여진'공원'에서, 또는 '왈츠' '성년' 같은 자전적 작품의 구성적 비대칭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893년부터 카미유 클로델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바로 자연의 탐구였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 예술가가 만들었던 가장 창조적인 조각들이라 할 수 있다. '뜬소문' '욕실의 여자' '파도' '간통'에 완성도를 지닌 조각작품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 작품들에서 카미유 클로델은 마노처럼 깎기가 어려운 재료로 대상을 아주 작게 표현하는데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그녀는 스승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독창성을 날카롭게 의식했다. 카미유 클로델은동 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것이 로댕과 한구석도 닮지 않았다는걸 너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초창기의 흉상에서. 특히 1886년에 만든 '나의 동생'에서 카미유 클로델은 대상을 '역사화'함으로써 연극성에 강한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로 자신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폴 클로델은 젊은로마인으로, 루이즈 드 마사리는 앙 샹레짐 치하의 젊은 여성으로, 그리고 몇 년 뒤에 메그레 백작은 앙리 2세 당시의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으로 등장한다. 이런 계열의 작품들 말고도 카미유 클로델은 주문을 받고 전통을 중시한 인물상들을 많이 제작했다‥ 1897년부터는 초기 작품의 특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카미유 클로델은 표현성보다는 전통적 양식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세우스와 고르곤' 같은 작품은 놀라우리만큼 고전성에 충실한 양식을 보여 준다.그것은 당시 로댕과 결별한 다음 그녀가 새롭게 시도한 방향이었다. 다시 한번 이 새로운 선택은-이 무렵 이미 '하마드리야드' 작업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아 1895년에 결행된 것으로 보인다-스승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06년의 '부상당한 니오비드' 역시 이 시기의 작품을 특징 지우는 충만하고 조화로운 형상에 대한 명백한 관심 속에서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그 인물에 예술가가 부여한 포즈는 자전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비대칭적 구성을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1905년에 완성된 '서른일곱 먹은 폴 클로델의 흉상'은 20세기 프랑스 인물조각의 신기원을 마련했으며 이를테면 로베르 블레리크의 양식에 비견할 만하다‥ 비극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서사적 정신이 예술가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우리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 예술가를 재발견하고자하며 그녀가 금세기 초의 조각사에서온당하게 차지해야 할 중요한 자리를 되찾게 되기를 희망한다. 프랑스 푸아티에 박물관 학예관 브루노 고디숑 1984년 카미유 클로델 전시회 카달로그 로댕과 작가들 로댕은 단테, 발자크, 보들레르, 위고에게 매혹당했다. 그런가하면 로댕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글을 통해 그를 아낌없이 밀어주던 당대의 작가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책에서‥ 그는 많은 영감을 얻었다.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는 순간 그것은 계시처럼 다가왔다. 지나간 세대의 고뇌하는 육신들이 그의 눈앞을 스쳤다. 그는 외부적 가식을 훌렁 벗겨 낸 세상을 보았다. 자기 시대에 대한 시인의 위대하고 영원한 판단을 목격했다‥ 그의 관심은 단테에서 보들레르로 옮겨졌다.‥ 이 시인의 글에는 쓰인 것이 아니라 손으로 빚어진 듯한 눈부신 대목들이 있다. 단어와 시구는 시인의 빛나는 손 아래로 녹아들었고, 한 행 한 행은 부조를 닮았으며. 소네트는 정교하게 장식된 기둥머리를 받드는 기둥들처럼 발전되어 나가는 생각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로댕은 시예술이 극한으로 나아가면 또.다른 예술의 바깥 경계선과 만나며 보들레르의 시는 바로 그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보들레르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먼저 걸었던 예술가, 더욱 거대하고 더욱 잔혹하며 더욱 불안스러운 삶에 신음하는 육체들을 추구한 예술가를 발견했다. 두 시인의 작품을 읽은 이후로 로댕은 그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영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예술이 형태 안에서 표현을 찾으려고 시동을 걸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생이 의미를 결여했다고 여길 때마다 거듭 그들에게 돌아갔다. 로댕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살았으며 과거를 자신의 젖줄로 삼았다. 나중에 자신이 어엿한 예술가로서 그들과 어깨를 겨를 만한 경지에 올라섰을 때, 두 인물은 마치 지난날 로댕의 고통스럽던 현실의 기억처럼 그의 눈앞에 솟아올랐으며,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온 듯이 로댕의 작품 속으로 들어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 1902년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1849-1903) 여기 조각의 본질이 있다.‥ 여러분은 이 안으로 얼마든지 문학을 불러들일 수 있다. 단, 그렇게 대입된 내용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이다‥ 그것은 부조에 담긴 문학도 아니요 환조에 담긴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조각이다‥그에게 정념은 형태, 표면, 선의 문제일 뿐, 이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이다. 월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말 카미유 모클레르의 '오귀스트 로댕' (1905)에서 인용 옥타브 미르보(1850-1917) 비평가이며 소설가인 옥타브 미르보는 로댕을 변호한 최초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로댕은 한 번은 2주일 동안, 또 한 번은 꼬박 한 달 동안 미르보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미르보는 공쿠르 형제 중 한 명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일기' 1889년 7월 3일)."이 과묵한 사내가 자연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면 온갖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달변가가 됩니다. 그는 독학을 통해 신통기에서 잡다한 전문지식까지 두루 꿰고 있는 박학다식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는 여러 가지이다. 첫째, 로댕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192통의 편지이다. 그리고 1889년 로댕이 만든 미르보의 테라코타 흉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미르보는 1897년에 간행된 로댕의 데생집에 서문을 썼으며, 마지막으로 로댕은 1899년에 나온 미르보의 소설 '고통의 정원' 특별판에 삽화를 그렸다. 미르보는 로댕의 조각보다는 데생을 더 좋아했다. 실제로 모델을 자유롭게 관찰하는 로댕 말년의 드로잉 양식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미르보였다. 엘렌 피네 안나드 노아예(1876-1933) 그녀는 못마땅해했고 실제로 로댕에게 그런 뜻을 전했다. 로댕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로댕에게 부인에게 직접편지를 쓸 것을 권했다. 로댕은 편지에서 ,먼저 당사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흉상을 만든 데 유감의 뜻을 나타낸 다음, 그녀의 흉상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선정한 전시 희망 작품에 올랐다고 덧붙였고, 전시회 도록에 '미네르바'나 '태고의 비너스'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다음날 찾아온 부인은 부드러운 시어가 아니라 단호한 산문적 어조로 대놓고 실망감을 표현했다. "나는 여자 복이 지지 리도 없나 봐. 시인도 다를 게 없구만." 로댕이 내게 말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그는 나를 받아들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소. 나를 맞아 준 것은 내가 사랑하던 그 땅이었으니까. 덤불이 더욱 우거진 정든 길을 따라 나는 걸어갔다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그곳의 샘물은 밤이고 낮이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그 먼 곳으로 뻗은 길의 양편에서 한번도 시든 적이 없이 피어 있던 장미를 비추어 주었겠지 샘 너머 숲 위로는 철새들이 날아다니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오. 로댕은 커다란 개처럼 나를 맞이하면서 궁금증이 서린 눈빛으로 나에게 아는 척을 하더군. 말은 없었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소. 여인의 미소와 아이처럼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몸짓으로 로댕은 옥좌에 앉은 동방의 신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움직였다오. 그리고 집 구경을 시켜 줍디다. 이제 그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소. 그를 둘러싼 세상은 더욱 무르익었고 말이오. 그는 박물관에서 정원까지 작은 집을 여러 채 지었더군 집, 통로, 작업실, 정원은 놀라운 골동품으로 가득 차 있었소. 골동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척인 양 행복한 모습이었소. 그들의 몸에 달려 있는 수많은 눈들은 낯선 바깥세상이 아니라 서로를 향하고 있었고. 행복에 겨운 듯 로댕은 그들의 아름다운 어깨와 뺨을 어루만지고 멀리서 좀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그들의 입술을 읽는다오. 로댕이 옆에 있으면 모든 것이 피어나고 모든 것이 무르익소. 순간 우리는 모든 새로운 것을, 당연히 와야하는 것,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섭리와 운명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오! 그는 별처림 움직이지. 그는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다오. 1905년 9월 15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앙리 로슈포르(1830-1913) '랭트랑시장'(비타협)지의 편집자로서 필명을 날리던 앙리 로슈포르는 에드몽 바지르의 소개로 로댕을 알게 되었다.1854년 그는 급한 성질을 누르고 로댕 앞에 로델로 섰다 로슈포르에 따르면 로댕은 한 시간 동안 그의 코끝과 이마에 둥근 점토를 붙이고 다시 한 시간 동안 그것을 떼어 냈다 한다. 로슈포르는 여자의 흉상을 만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우리는 로슈포르의 불 같은 성미를 감안해야 한다. 로댕은 그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고불평했다. 로댕은 로슈포르의 재치 있는 언변에 끌려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또 두 사람 다 골동품에 관심이 깊었다. 그러나 로슈포르는 로댕의 예술을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발자크'를 '눈사람'이라 혹평했고, 미르보가 '로마인 카이사르의 섬세한 머리'라고 격찬한 자신의 흉상에도 떨떠름해했다. 로댕의 이 흉상은 1881년 마네가 그린 로슈포르의 초상화와 아주 많이 닮았다. 아서 사이먼스(1865-1945) 로댕이 창조한 모든 인물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움직임 속에 있다. 그것은 정념, 관념, 존재상황, 침묵이다. 그의 '지옥문'은 단테보다는 보들레르에 가까운 괴로운 세계의 온갖 고뇌가 현실적인 행동 안으로 무리지어 몰려드는 수직 비행과 추락이다. '저주받은 여인들이' 시커먼 동굴, 깎아지른 산봉우리에서 솟아오르고 혹은 급강하한다. 그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 달라붙지만 발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물불 안 가리고 벼랑을 끌어안지만 밑이 안 보이는 시커먼 구멍으로 속절없이 굴러떨어진다. 애원하듯 미친듯이 팔을 흔들고 절망의 극한선에 이른 육신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욕망의 과일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의 그 걸신들린 듯한 허기로, 이 모든 고통과 비애에 젖은 육체들은 마지막 욕망을 불태운다. 그들은 오직 욕망의 삶을 살아가며, 그러한 집착은 자연의 모든 울타리를 뛰어넘어‥ 때로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요한 폭력의 세계로 그들을 끌고 들어간다. 로댕의 조각에서, 그가 강력하게 발언하는 그 무엇은 살아 있는 육신처럼 거룩하게 고동치고 있다. 그는 부드럽고 차가운 살의 관능적인 온기를, 부드러운 덮개 아래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해골의 섬세한 결을, 남성의 힘과 여성의 나긋나긋함으로 나타나는 뼈와 근육의 모든 절묘한 구조를 감각에서 감각으로 느끼고 또 옮긴다. 그의 손은 어깻죽지와 사타구니를 진한 애무처럼 지그시 누르는 듯하다. 튀어나오고 움푹 들어간 등뼈의 섬세함은 그의 손으로 하여금 그것을 새롭고 아름다운 형태와 동작으로 빚어 낼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그의 손은 드넓은 윤곽선으로 부풀어오르는 가랑이를 좇아간다. 목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진 허리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대변하며 바르르 떨고 있다. 아서 사이먼스 '포트나이틀리 리뷰', 1902년 6월호 조지 버나드쇼(1856-1950) 1906년, 인생의 절정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기 전에 제대로 된 나의 흉상을 세상에 선보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때 나의 머리에는 대뜸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로댕이 작업을 맡아 줄 수 있을까? 다른 조건이면 나는 절대로 응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로댕이야말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였고, 미켈란젤로, 피디아스, 프락시텔레스 같은 비범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로댕과한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다른 인물이 자신의 흉상을 만들게 방치한 사람은 후손들에게 머저 리 중의 머저리 취급을 당하리라고 믿었다. 조지 버나드 쇼 '네이션'. 1912년 11월 9일 쇼의 흉상은 이미 놀라우리만큼 진척되어 눈부신 생명력과 개성을 보여 주고 있어 .이것은 쇼라는 인물이 그만큼 예외적인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지 그는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포즈를 잡고 있다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906년 4월 26일 월리엄 로덴스타인에게 보낸 편지 어제 세번째로 벌였던 작업에서 로댕은 쇼를 작고 귀여운 어린이 의자에 앉혔소. 이 모든 것이 아이러니와 풍자를 전매특허로 하는 작가에게는 무척 재미난 모양이었어. 로댕은 이어서 철사로 흉상의 머리를 잘라 냈지. (쇼는 이 참수 장면을 더없이 희열에 찬 표정으로 지켜보았다오.) 로댕은 쐐기 모양을 한 두 개의 버팀대 위에 머리를 비스듬히 놓고 작업에 들어갔어요. 조각가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과 거의 비슷한 각도로 약간 위쪽에서 머리를 바라보았지 그러더니 머리를 다시 바로 놓았소. 작업은 이제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진행된다오. 먼저 쇼가 일어서지‥ 그러므로 쇼보다 총상이 조금 밑에 오게 돼요, 이번에는 총상 바로 옆에 앉아 키가 점토상과 같아지고 둘은 평행선을 이루지. 약간뒤쪽으로 어두운 커튼이 쳐져 있어서 윤곽이 늘 뚜렷하게 살아난다오. 대가는 마치 시간을 분으로 압축해서 쓰는 것처럼 민첩하게 손을 놀려요. 매처럼 빠른 그의 손은 잇달아 떠오르는 수많은 얼굴 중에서 오직 하나만을 잡고 씨름하는 듯하다오. 하도 번개 같은 솜씨라서 지켜보던 사람은 작업이 끝난 한참 뒤에야 기억을 더듬어 그의 작업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906년 4월 19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로댕과 사진 조각가의 꼼꼼한 감독 아래 촬영된 7,000여 장의 사진은 로댕의 조각작업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로댕의 생전에도 그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세기의 조각가들은 대체로 카메라를 잠재적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조각연보를 뒤져 보아도 1862년에 화가들이 사진을 예술의 일원으로. 특히 미술의 한 분과로 받아들이는 데 격렬히 맞섰던 예를 좀처림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대조적인 반응의 원인은 조각가의 작업이 화가의 작업 이상으로 각종 도구의 활용과 노동력의 부득이한 개입을 전제로 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조각가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예술품을 여러 개로 복제한다는 발상을 늘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게다가 사진은 조각과 유사한 기술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조각가의 석고상처럼 사진 속의 이미지는 얼마든지 복제되고, 확대되고, 축소될 수 있었다. ‥ 조각과 사진에 내재된 이러한 공정 (고철)은 보들레르처럼 "진정한 예술 애호가는 예술과 산업을 혼동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던 예술가 집단에게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산업적 특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그럼에도 사진이 자신들의 작품을 좀더 폭넓게 알릴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 ,저렴한 돈으로 연구를 위한 항구적 모델을 손아 넣을 수 있는 경제적 수단, 또한 특정한 주제나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용시키기 전에 자신들이 수집하는 기록자료를 양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가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챘다‥ 로댕을 사진이라는 매체의 선각자로 볼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사진을 활용했던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로댕을 명백한 혁신가의 반열에 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사진의 기술을 다각도로 빈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와 달리 로댕은 사진에 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언급하더라도 경멸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던 많은 사진가들과 잦은 접촉을 가지면서 로댕의 태도는 서서히 바뀌었다. 그가 가장 창조적인 활동을 벌인 1880년대에 로댕은 스스럼없이 카메라를 작업실로 끌어들였다. 카메라는 이미 그가 작업실에서 활용하고 있던 수많은 도구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전시되지 못한 조각품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28점의 사진을 전시장에 내걸었던 1876년의 제네바 전시회를 관람한 뒤 로댕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이미지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진은 그가 작품을 위해 발전시키는 담론을 내실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로댕은 일군의 사진가들을 고용해 그의 지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작품을 모조리 기록에 담도록 지시했다. 그때 촬영된 사진들은 자크 에르네 뷜로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는 기록의 성격을 가졌지만. 외젠 드뤼에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점차 탐미적인 경향으로 발전하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스티븐 하위스, 헨리 콜스, 미국인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엘렌 피네 '로댕, 조각가, 그 시대의 사진가', 1985년 나는 사진이 예술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진은 유한계급이나 수다쟁이의 전유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사진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아직도 일반인들은 스타이켄의 손이 이루어 낸 모델에 대한 철저한 해석과 그런 심오한 정서를 가능케 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모르고 있다. 나는 스타이켄을 아주 위대한 예술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사진가로 본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사진은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 사진가가 현실을 왜곡하느냐 않느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타이켄이 어느 정도까지 자의적 해석을 하느냐에도 나는 관심이 없다. 그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무슨 수단을 어떻게 쓰든 도대체 그게 왜 문젯거리가 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오직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 그 결과는 틀림없이 사진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 예술가의 작품인 한 그것은 늘 관심을 당길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카메라 워크', 1908년 10월호 활짝 열린 대가의 작업실 친구, 예술가, 정치가들이 로댕의 작업실을 찾았다. 평소의 수줍음을 극복하고 로댕은 자신의 예술을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기쁨을 맛보았다. 작업 공간, 생활 공간 1863-1864: 파리 13구 르브룅가 96번지 1864-1871: 파리 9구 클리시로 1865: 파리 18구 에르멜가 5번지 1872-1877: 익셀(브뤼셀 교외) 상수시가 111번지 1877-1882: 파리 5구 생자크가 268번지 1877-1886: 파리 15구 푸르노가 36번지 1880-1917: 파리 7구 위니베르시테가 182번지 대리석 하치장 1885: 파리 17구 생테제리가 17번지 1885-1890: 파리 15구 보지라르로 117번지 1886-1887: 파리 14구 푸앙소가 10번지 1887-1895: 파리 14구 포부르생자크가 17번지 1888∼1902: 파리 13구 이탈리로 113번지(카미유 클로델과 함께) 1890-1898: 파리 13구 샹들랄루에트가 노이부르 별장 1896∼1917: 뫼동 폴베르가 빌라데브릴랑 1898∼1917: 뫼동 비뉴가 14번지 1904-1917: 뫼동 오르펠리나가 10번지 1908-1917: 이시레물리노(뫼동 부근) 샤토가 1번지 1908-1917: 파리 7구 바렌가 77번지 비롱관 보지라르로 117번지 우리는 보지라르로의 작업실에 있는 그를 발견했다. 조각가가 주로 사용하는 이 작업실은 사방 벽이 석고로 얼룩져 있었고, 낡은 주물용 화덕이 있었으며, 천으로 둘둘 만 커다란 젖은 점토에서는 음습한 냉기가 솟아올랐다. 머리, 팔, 다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며 그 한복판의 여윈 고양이 두 마리는 마치 동화에 나오는 기린처럼 보였다. 로댕은 실물과 같은 크기를 한 여섯 명의 칼레 시민 점토상이 얹혀 있는 받침대를 돌렸다. 그 인물들은 강한 사실주의로 표현되었으며 앙투안 이 바리예가 동물의 옆구리를 나타내는 데 즐겨 썼던 그 우묵한 공간이 사람의 몸에 훌륭히 적용되어 있었다‥ 로댕은 우리를 보지라르로의 작업실에서 대리석 하치장으로 데려가, 앞으로 장식미술학교에 설치될 그 유명한 정문을 구경시켜 주었다. 두 개의 거대한 현판은 돌산호의 퇴적층처 럼 보이는 어지러운 고리무늬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면 처음에 산호초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매혹적인 작은 인물들이 이루어 내는 모든 세상을 그린 돌출과 함몰, 융기와 공동(포론)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인물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로댕의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타난 서사적 박진감을 차용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한 특성은 또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등장하는 노도처럼 밀려드는 군중을 연상시킨다. 부조로 그런 웅대한 시도를 한 사람은 로댕과 쥘 달루말고는 없다. 보지라르로 작업실이 대단히 사실적인 인간애를 구현하고 있다면, 대리석 하치장은 말하자면 단테로부터 연유된시적 인간애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쥘과 에드몽 드 공쿠르 '일기',l886년 4월 17일 대리석 하치장. 이곳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아틀리에, 곧 공장이다. 오직 그곳에서 벌어지는 작업의 효율적 진행만을 염두에 두고 꾸며진 공간이요 노동의 현장이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가구류나집기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친구들이 선사한 몇 점의 그림마저도 횟가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천을 씌워두었다. 축축한 천으로 감싼 점토상, 꿈을 담고 있지만 아직 형태가 잡히지 않은 잿빛 덩어리, 미래의 작업을 위한 작은 모형, 준비 단계의 작품, 현재 진행되고있는 작품이 이 공간의 유일한 장식품이다. 사방을 잠시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 공간의 주인이 자신의 생각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으며 점토를 빚는 일 외에는 사실상 바깥 세계에 관심도 없고 일상의 애환에 흔들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에 감도는 공기 자체가 조각가의 치열한 정신을 잉태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힘겨운 도전 앞에서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으며, 완성점에 이르렀다는 만족감에서 한 번도 긴장을 푼 일이 없다 에두아르 로 '로댕 씨의 작업실' '가제트 데 보자르' 1898년 5월호 방 한구석에는 대여섯 명의 이탈리아 모델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대가가 호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하프와 바이올린을 든 거리의 익사 두 명이 유행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로댕은 그 모든 움직임을 앉아서 관찰했다. 그는 악사들을 스케치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다른 한구석에서는 학생들-이라기보다는 조수들-이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들 은대가의 거대한 군상에 회를 발랐고, 또 어떤 친구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스케치했다. 작업에 따르는 치열한 열기로 온 방 안에는 생동감이 넘쳤다. 필리프 헤일 '보스턴 화단', 1895년 뫼동의 작업실 로댕이 "루이 13세의 건축양식으로 꾸민 작은 성"이라고 묘사한 이 별장은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소. 붉은 벽돌과 노란 벽돌로 지어진 건물 정면에는 창이 모두 세 개 뚫려 있으며 가파른 회색 지붕에는 높은 굴뚝이 솟아 있다오. 그 밑으로는 이탈리아의 포도밭에서 볼 수 있는 초라한 집들이 빽빽히 들어찬 발플뢰리 계곡이 '그림처럼' 무질서하게 놓여 있어요‥ 다리를 하나 건너서 역시 이탈리아의 시골마을을 연상시키는 작은 여관을 지나 터벅터벅 걸어가오. 입구는 왼편에 있지. 먼저 굵은 자갈이 깔려 있는 긴 참나무 길이 있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나무로 된 작은 격자문이 나오고 ‥ 다시 작은 격자문이 나타난다오. 거기서 노랗고 붉은 작은 집 모퉁이를 돌아서면 석상과 석고상이 빼곡 들어찬 정원이 기적처럼 나타나지요. 알마 전시회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별채가 이 정원으로 고스란히 옮겨졌다오. 별채는. 여러 명의 석수들과 로댕 본인도 작업을 하는 다른 몇 채의 작업실과 함께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하오. 점토를 굽는다든지 하는 잔일을 처리할 수 있는 부속 공간도 딸려 있었소. 수족관 안의 동물들처럼 수많은 높은 유리문들을 통해 우리를 응시하는 듯한 현란한 백색의 조각들이 모여 있는 이 넓고 밝은 홀에서 우리는 묘한 힘을 느낀다오. 그것은 광막한 공간감에 가깝다고나 할까‥ 홀에 들어서기도 전에 벌써 우리는 이 수백 개의 생명체가 실은 하나의 생명체이며, 하나의 힘, 하나의 의지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있어요. '기도'의 대리석 조각과 거의 모든 석고상. 한 세기의 작품을 모두 소집해놓은 듯한 느낌. '지옥문'을 구성하는 뛰어난 부분들이 거대한 유리 진열창을 가득 메우고 있소. 필설로는 형언할 수가 없어요. 부분들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 그것들이 나란히 혹은 첩첩이 쌓여 있지 .내 손만한 누드 인물상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 조금 큰 것도 있소. 어쨌든 모두가 부분품이고 완성작은 거의 없어요. 대개 팔 하나, 다리 하나가 되는 대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부근에는 그 팔과 다리가 붙어야 할 몸통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지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엉뚱한 사람의 머리. 엉뚱한 사람의 팔을 달고 있는 상반신이 보이지‥ 마치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소.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만일 이 하나하나의 인물이 그 자체로 완전했더라면 이 모든 것이 불완전해 보였으리라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오. 이 폐허의 모든 부스러기들은 상상을어넘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그 자체로 완전하며 보완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오. 어느새 우리는 이것들이 몸의 일부 그것도 다른 몸에 속하는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다오. 그들은 그토록 맹렬하게 서로 달라붙어 있소. 그때 문득 우리는 몸을 조화로운 전체로 보는 것은 학자의 몫이며 예술가의 과제는 차라리 그 요소들을 활용해 더욱 논리적이며 더욱 영속적인 새로운 관계, 새로운 통일성을 수립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오.‥ 결코 마르지 않을 풍요로움. 무한하며 지속적인 발명, 현존, 표현의 순수함과 격정, 젊음, 무엇인가를 늘 더 나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재능은 인류의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오. 탁자가 있고 회전대가 있으며 황갈색과 황토색으로 구운 작은 인물상들이 놓여있는 궤가 있소. 팔은 내 새끼손가락보다 크지 않지만 넘쳐흐르는 생명력에 나의 심장박동은 빨라진다오. 동전 하나를 겨우 가릴 만한 손이지만 눈꼽만큼의 가식도 없이 섬세하게 다듬어졌으며,지혜가 넘쳐흘러 마치 거인의 힘으로 커다랗게 확대된 듯이 다가온다오. 이렇듯 이 남자는 자유자재로 인물을 창조해요. 그는 너무도 위대하오. 아무리 작은 인물상을 만들더라도 그 인물상은 살아 있는 사람보다 크다오.‥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수백 수천 점의 인물상이 그곳에 있어요. 그 하나하나가 문제작이며, 그 하나하나가 사랑, 헌신, 관용, 탐구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다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1902년 9월 2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영국화가의 방문 알퐁스 르그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로댕을 찾아갔다. 그는 로댕과 절친한 사이였다. 위니베르시테가의 작업실로 르그로와 함께 찾아갔을 때 뜻밖에도 로댕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로댕을 먼 발치에서 흠모하고있었다. 살롱전 다과회에서 로댕의 늠름한 풍채를 멀리서 지켜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 그를, 또 그의 작품들을 코앞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대작('지옥문')에 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었다. 실물을 보고 약간 실망했지만 나의 생각은 곧 달라졌다. 웅대한 구상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가 자못 기대되었다. 내가 더 감동을 받은 것은 '빅토르 위고'였다. 그 옆에 있는 운명의 여신들도 그에 못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그 밖에도 당시 조수였던 부르델이 열심히 다듬고 있던 인물상과 흉상이 여러 점 있었다. 로댕을 마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모든 작품을 영웅숭배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점토를 힘있게 빚으면서 로댕이 한 모든 말이 나에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니 로댕처럼 준수한 머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뚝 솟은 콧날, 시원스러운 양미간, 이마와 콧등의 대담한 연결이 무엇보다도 눈길을 끌었다. 눈은 작았지만 투명했다. 눈가의 주름이 광대뼈까지 뻗어 있었으며 억센 머리털은 말의 갈기, 혹은 그리스의 투구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뭉툭한 손톱이 달린 그 억센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고 르그로가 사전에 귀뜸한 모양인지 로댕은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런던으로 돌아가기 전에 뫼동으로 꼭 찾아와 달라고 로댕은 신신당부했다. 뫼동에서 나는 그의 작품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많은 작품외에도 로댕은 정교하게 다듬은 작은 모형들이 가득 들어 있는 진열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중에서 두세 개를 꺼내더니 이런저런 방식으로 늘어놓았다. 그런 과정에서 구성의 착상을 얻게 된다고 로댕은 말했다.‥ 나는 영국에 로댕의 천재성을 알리고 싶어 애간장이 탔다. 월리엄 헨리와 사전트가 뒤에 로댕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나도 로댕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2년 후 로댕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께 다소나마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과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오셔서 부담 없이 스케치라도 하시지요." 노대가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으니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모델은 실제로 아름다웠다. 로댕의 너그러운 눈길 아래 나는 그녀를 그렸다. 그때처럼 나의 둔재가 안타까운 적은 없었다. 그날 저녁 그 예쁜이한테- 누구라도 안 그럴 수가 없었으리라-저녁을 사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자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로댕이 자초지종을 훤히 알고 있음을 알았다. "앞에 앉아서 그리는 건 좋지만 식사만은 안되오! 그렇게 많은 모델을 잃었소!" 로댕은 늘 그리고 있었다. 연필로 대충대충 데생을 하면서, 어떤 때는 거기에 가볍게 색을 입히면서 모델 주변을 부지런히 오갔다. 그는 눈으로 모델을 애무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그 아름다움으로 나의정신을 유도했다. 나는 로댕이 뫼동에서 보여 주었던 초기 데생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 데생들은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이었으며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무도, 심지어 로댕조차도 늘상 시도하기 어려운 대담한 발상이 엿보였다. 내가 그 뛰어난 데생에 부쩍 관심을 보이니까, 로댕은 한편으로는 놀라워하면서도 싫어하는 빛은 아니었다. 아무도 이 부스러기들에 주목하지 않더라고, 가지려고도 하지 않더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아마도 영국 수집가들은 벌떼처럼 몰려들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로댕은 그 데생들을 나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월리엄 로덴스타인 '사람과 추억' 1권, 1934년 예술과 기법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이 석고상, 대리석상, 청동상으로 완성되려면 조각가의 손을 떠난 다음에도 주물공, 확대공, 수정공, 밀랍공, 녹청공 같은 많은 기술자의 손을 거쳐야 한다. 인체의 윤곽은 몸이 끝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윤곽을 만드는 것은 몸이다. 나는 배경을 등지고 있는 빛이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점토상을 놓는다. 점토상을 얹은 받침대를 돌릴 때마다 나는 새로운 윤곽을 얻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인체주위를 빙그르르 돌면서 작업한다. 나는 다시 시작한다. 윤곽을 좀더 엄격하게 조이고, 정교하게 다듬는 다인체의 윤곽은 무한히 나을 수 있으므로 나는 될수록 오래, 혹은 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까지 자꾸 새로운 윤곽을 끌어들인다. 받침대를 돌리면 그림자였던 부분이 환한 빛을 받는다. 가급적 나는 빛속에서 작업하려 애쓰므로 그럴 때 나는 새로운 윤곽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윤곽이 모두 만족스럽게 정의되었을 때 운만 따라 주면 정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대조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할 수 없다. 위나 아래에서 높은 곳과 낮은 곳에서 윤곽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컨대 인체의 입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 나는 가슴근육, 어깻죽지, 엉덩이와 나의 점토상을 비교한다. 허벅지의 튀어나온 근육을 분석하고 발이 바닥에 닿아 있는 방식을 조사한다. '청동의 시대'를제작할 때는 화가들이 대작을 그릴 때 쓰는 사다리까지 동원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의 점토상을 살아 있는 모델과 가급적 정확히 일치시키려고 애쓰면서‥ 위에서 본 윤곽도 연구했다. 이를테면 '입체 데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설명 한 작업방식에 따르자면 평면적인 것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중간 시점들에 의해 통합된 바른 윤곽들의 결합은 충실한 이미지를 낳는다. 정확한 윤곽의 처리를 통해 진실의 영역으로 일단 들어서면 표현은 덤처럼 저절로 솟아오른다. 작품이 마치 스스로를 표현하는 듯하다. 어찌 되었든 인간의 생각은 자연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알리고 부과하는 것과의 비교를 통해 제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형원칙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형상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표현성도 부족하다 형상과 현실사이에는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단순히 영감에만 의존해 만들어진 작품은 제아무리 유연하고 섬세하다 하더라도 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자연으로부터만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예술가를-일단 그가 자연을 이해하고 번역했을 때-창조자로, 아니 자신의 거룩한 모방자로 만든다. 오귀스트 로댕 '뒤자르댕 보메츠와의 대화', 1913년 모델링(성형) 나에게 성형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내가 조각가로서 데뷔한 아틀리에에서 일하고 있던 콩스탕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가 기둥머리에 잎새를 장식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로댕, 자네는 그릇된 방식으로 일하고 있네. 자네가 묘사하는 잎은 하나같이 평면적이야. 실감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지. 잎새의 일부는 끝이 자네 쪽으로 오도록 표현하게. 그래야 원근감이 느껴지거든.‥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앞으로 조각을 할 때는 형상을 길이로 보지 말고 두께로 보라구. 표면이라는 것도 부피의 가장자리로, 자네 쪽으로 향한 커다란 점으로 보지 않으면 안 돼. 그 점에 유념하다 보면 자네도 성형술을 익힐 수 있을 걸세." 그 원리는 나에게 엄청난 소득을 안겨주었다. 나는 인물상 작업에 들어가면서그 원리를 적용했다. 인체의 다양한 부위들을 평탄한 표면으로 이해하는 대신 나는 그것들을 내적 부피의 돌출로 표현했다. 나는 불룩한 몸통과 팔다리에서 살갗 한참 밑에 자리잡은 근육이나 뼈의 노출을 표현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내 인물상의 진실은 그저 표면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그러하듯 안에서 밖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귀스트 로댕 '예술: 폴 그셀의 대화록', 1911년 주물 주형이라는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원작을 다루지 않으며 무수히 많은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작을 다루게 됨을 뜻한다. 석고, 테라코타, 요즘은 합성수지로 된 이들 복제품은 '부분틀'을 이용해 얻을 수 있다. 부분틀을 거듭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주형을 틀에서 제거 할 때 부수지 않고 해체하도록 틀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복제품 덕분에 하나의 작품이 상업적 또는 교육적 용도로 널리 유포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들어오자 개인이나 공공 단체가 수많은 주형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주물공정 덕분에 내구성 면에서는 취약한 점토나 플라스틸리나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모형을 석고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점토모형은 부수기 때문에 석고상은 원작의 자리에 당당히 올라설 수 있다. 점토모형에 석고를 발라 일단 틀이 완성되면-부조의 경우에는 틀이 하나이고 환조의 경우에는 두 개의 '껍질'로 이루어진다-틀 안의 점토모형은 제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물질을 채워 넣는다. 주형뜨기는 모형이 완성된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이다. 로댕처럼 일단 자기 손을 거친 모든 성형물을 석고상으로 뜨는 경우는 조금 극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조각가들은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도 최초의 완성작을 부지런히 석고상으로 떠 놓는다. 대부분의 경우 점토모형에서 본을 뜨지만 자연상태에서 바로 본을 뜨기도 한다. 사람의 팔다리, 옷, 동물로 주형을 뜨는 것은 자연스러운 작업방식으로 수용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업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가령 1783년에 나온 필리프 로랑 롤랑의 '우티카의 카토의 죽음'이나 1877년 살롱전에 출품된 로댕의 '청동의 시대'의 경우처럼 조각가가 실물에서 주형을 뜬 뒤 그것들을 결합한 것 말고는 아무런 예술적 창조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대중이 강하게 받았을 때는. 젊은 예술가의 활동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물의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1917년에 이미 주저 없이 자기 손으로 주형을 떠서 '신의 손'을 만들었던 로댕과 롤랑은 자신들의 작품이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게 된 것은 조각가의 실력과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여론의 공격에 맞섰다. 주형작업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의 전문 장인들이 담당-은 주로 석고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때로는 점토가 선호되는 경우도 있었다. 더 그럴듯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틀에서 제거한 점토상은 불에 구웠다.(고열상태에서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속을 파냈다. 굽기 전에 예술가는 다시 한번 작품에 잔손질을 가해 일반주물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매끄러운 표면의 결을 살릴 수도 있었다. 앙투아네트 르 노르망 로맹 '19세기 프랑스 조각' J986년 파리 그랑팔레 전시회 카달로그 로댕의 작품조합 우리는 '지옥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세 망령' 군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인 '아담'을 모델로 삼아 로댕은 그 팔을 조금 손본 다음 같은 인물상의 세 복제품을 배열했다. 우리는 이것을 동일한 작품을 다른 각도들로 보여 주어 정면의 구성을 겨냥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인물상들이 좀더 간격을 벌린 다른 방식으로' 세 자살자'라는 제목 아래 일반에게 공개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로댕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점은 현재 목록이 작성되고 있는 뫼동에 있는 로댕 저택의 주형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댕은 동일한 인물의 복제품을 몇 개 만들어 주위에 늘어놓기를 즐겼다. 그것들은 로댕에게는 어휘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제품을 자르고 거기에 새로운 요소를추가하고. 혹은 단순히 변형시키고, 혹은 새로운 구성에 편입시킴으로써 영감을 얻어 나갔다. 로댕은 하나의 인물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끝없이 변주하는 것보다는 만족스러운 모형을만들어 그것으로 다른 구성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동일한 인물상의 복제풍을 여러개 만들어 조합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번 보게 된다. 먼저 대칭조합이 있다. 여기서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반복이 일어난다. '세 망령' '세 목신' 또는 같은 오른손이 두 번 사용되는 '비밀'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다른 평면 위에 놓이는 조합도 있다. 좋은 예가 ' 밤의 두 인물의 조합'이며 '노동의 탑' '저주받은 이'의 구상에서도 그런 주제를 확인할 수 있다. '저주받은 이'에서는 반복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물들을 복잡하게 쌓아올린 좀더 섬세한 조합이 있다. 니콜 바르비에 '19세기 프랑스 조각) 1986년 파리 그랑팔레 전시회 카탈로그 마르코타주 "예술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작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활용해 새로운 조각품으로 결합하는 과정." 로댕은 마르코타주를 아주 빈번하게, 또 능숙하게 써먹었다. 그중의 일부는 '문제작'으로 발전해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다음 전시회에 출품되어 팔려 나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그가 가진 창조적 천재성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될 이해 불가능한 수많은 군상에 들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이 실험적 작품들은 때로는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예술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적인 일면을 강하게 드러낸다. 순간적으로 영감이 떠올라 공책 한귀퉁이에 휘갈겨 놓은 메모처럼 석고상들에 담긴 내면의 수액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었다. 조각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미 다양한 작품을 실례로 들어가면서 그런 주제를 언급한 바 있다. 이를테면 '순교자' '사색' ' 우골리노' '무릎을 꿇은 목신' '추락하는 사람' 등이 그러하다. 나는 널리 알려진 다수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예외적 특성 때문에 여기에다 '피로'를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젊은 승리자' '아테네의 죽음'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달과 지구' '잠자는 아담과 이브'에 거듭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로댕이 마르코타주를 개인적 탐구를 위해서만 아니라 공개를 염두에 두고 만드는 신작에도 활용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는 늘 눈앞의 재료에 동시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그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키고 마는 그의 거침없고 광포한 상상력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알랭 보지르 '19세기 프랑스 조각) 1986년 파리 그랑팔레 전시회 카탈로그 밀랍주형법 1. 조각가는 일반적으로 석고, 점토, 대리석, 돌, 또는 나무를 이용해 모형을 만든다. 원작에 해당하는 모형의 표면에는 본을 뜨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지 않도록 보호막을 입힌다. 2. 모형의 본은 아주 곱고 말랑말랑한 물질이 들어 있는 통에다 눌러서 뜬다. 나중에 틀 안으로 부어 넣을 녹은 밀랍의 압력을 버터 낼 수 있도록 보강재를 쓴다. 작품의 규모가 클 때는 녹인 밀랍을 눌러 넣는다. 3. 속이 텅 빈 틀을 이용해 내화물질로 조각가가 처음에 만든 원작과 동일한 심을 만든다. 4. 내화심의 표면을 긁어 낸다. 그렇게 하면 심과 틀 사이에 틈이 생기는데, 바로 이곳으로 밀랍을 부어 넣게 된다. 완성된 청동상은 이때 만들어진 공간과 같은 두께를 가질 것이다. 5. 내화심 주위로 틀을 밀봉한 다음 틀과 심 사이로 밀랍을 부어 넣는다. 원작을 완벽하게 모사하려면 이 단계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밀랍이 식으면 틀을 제거한다. 밀랍이 덮인 모형을 원작과 같아지도록 다시 세세한 손질을 가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조각가는 수정을 하거나 특별한 효과를 낳는 보강작업을 할 수 있다. 조각가와 서명, 판수, 주물공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도 이 단계에 와서이다. 6. 밀랍모형에 미로처럼 관을 연결한다. 모형을 가열할 때 녹은 밀랍은 이 도관을 통해 빠져 나간다. 이 도관은 또한 녹인 청동물이 틀 안에서 골고루 퍼질 수 있게 하고 청동물이 들어올 때 공기가 빠져 나갈 수 있게 한다. 7. 미세한 알갱이의 내화재를 밀랍모형과 도관 표면에 바르고 단단히 굳을 매까지 기다린다. 그다음에 완성된 '주형'을 가열한다. 액체상태의 밀랍이 도관을 통해 틀 밖으로 빠져 나가면 내화심과 밀랍 위에 발랐던 내화재로 이루어진 주형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8. 주형을 550에서 600의 고온으로 가열한 다음 두꺼운 막을 입힌다. 이것이 다 마른 다음에야 청동을 부어 넣을 수 있다. 9. 녹인 청동(1200)을 틀에 부어 빈 공간을 메운다. 그런 다음 틀을 부수어 그 안의 청동상을 드러낸다. 청동상과 도관은 밀랍을 덮은 형상의 정확한 복제품이다 10. 도관을 잘라 내고 청동의 표면을 줄로 다듬어 껄끄러운 부분을 모두 제거한다. 그것은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지리한 작업이다. 청동상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내화심을 조심스럽게 제거한다. 다듬기가 모두 끝났으면 청동 표면에 냉온산화제를 입혀 가느다란 부식층 을만든다. 이 인위적인 절차를 녹청작업이라고 한다. 이렇게 녹을 입히면 세월이 흘러도 청동상의 표면이부식되지 않는다. 녹청은 조각을 실내에 둘 것인가 야외에 전시할 것인가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다. 그것은 갈색, 검은생, 녹색 ,청색을 띨 수 있고 색조도 연하게 혹은 짙게 만들 수 있다. 요즘 예술가들은 녹청의 색조를 미묘하게 변화시켜 특수한 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