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빛과 혼의 화가 지은이: 파스칼 보나푸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방정식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과 코르넬리아 빌렘 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브루크의 아들 렘브란트 반 레인이 태어났다. 이 사실은 1641년에 간 행된, 레이덴의 풍물을 소개하는 한 책자에 요하네스 오를러스가 기록한 것으로 렘브란트의 출생을 말해 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렘브란트의 명성과 영광에 이르는 삶을 이야기할 때 우 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제1장 도제기와 야망 하르멘 헤리츠존(짧게 헤리츠라고 불렀다.)반 레인은 1589년 10월 8일에 코르넬리아 빌렘 스도히테르 반 소이트브루크와 결혼했다. 그녀의 애칭 넬트예 혹은 넬트옌은 그녀가 제분업 자의 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르멘 헤리츠도 제분업자였다. 그의 풍차방앗간은 마을 북쪽의 '구라인강'이라는 뜻의 강 '아우데 레인'의 베데스테그 제방 길에 위치해 있었고, '반 레인'이라는 이름은 그런 그의 풍 차방앗간에서 따 온 것이다. 마을의 상류에는 라인강의 다른 줄기인 '신라인강'이라는 뜻의 '니베 레인'이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두 강 사이에는 수로들이 그물망을 이루고 있었는데 바로 여기 에 레이덴이 건설되었다. 16세기 초, 이 도시에는 4만 명 가량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574년, 스페인의 침략으로 약탈을 겪기도 했지만 부흥에 성공한 레이덴은 레이덴 대학이 들어서고 공업이 발달하면서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반 레인가는 1세기 전부터 레이덴에 살고 있었다 1513년, 반 레인 혹은 반데 레인이라는 사람이 이 도시에서 제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렘 브란트라는 이름은 외증조모인 레임프톄 코르넬리스드르 반 블란헴의 이름에서 유래한 듯하 다. 또한 이 이름은 매우 유명한 가문인 반 블란헴가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레임프톄처럼 하르멘 헤리츠도 칼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카톨 릭을 고집했다. 반 레인가는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이는 가문의 보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전염병과 질병과 전쟁이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아홉 명의 아들 중 여덟째 였다. 장남 헤리트는 친할아버지를 따라 이름지었고,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분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 아드리안은 제화업자가 되었다. 그 밑으로 딸을 셋 낳았는데, 두 명은 어 린 나이에 사망했고 렘브란트와 같이 자란 누이는 그중 마흐텔트뿐이었다. 그와 가장 가깝 게 지내던 남자형제는 형들인 코르넬리스와 빌렘이었다. 코르넬리스보다 빌렘이 손아래였는 데, 그들은 둘 다 이미 17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 렘브란트의 아래로는 누이동생인 레이스베트가 있었다. 렘브란트의 가족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제방이 무너졌을 때 하르멘의 풍차가 물을 퍼내는 데 징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르멘은 남을 돕는 일에 주저할 사람 이 아니었다. 도시를 휩쓴 전쟁과 화재, 북해의 거센 파도는 네덜란드인에게 단결의 미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화재와 수재, 지속적이고 가공할 위협 네덜란드의 적은 스페인과 바다였다. 1606년까지 이렇다 할 휴전협정이나 조약은 체결되 지 않았지만, 스페인이 퇴각함에 따라 주연합(오늘날의 네덜란드)은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 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빈틈을 주지 않고 위협해 왔다. 겨울철이나 높은 조수가 밀려올 면, 해수면보다 아래쪽에 놓이게 되는 저지대의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둑이나 제방을 쌓아 바다로부터 그들의 농토를 지켜 왔다. 그렇지만 11월에서 2월 사이에는 영락없이 물이 스며 들어 온 천지에 물이 넘쳐흐르곤 했다. 남자들은 밭을 가는 시간보다 제방을 고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푯말을 세워 구역을 표 시한 뒤 제방을 감시하는 책임을 나누어 가졌다. 끊임없이 바다에 할퀴고 침식당하는 제방 은 이 지방의 유일한 안전책이었다. 한 프랑스 여행자는 "이곳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 다."라고 묘사하지 않았던가!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이 살던 베데스테그의 벽돌집은 방앗간에 맞닿아 있었으며,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제방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하르멘 헤리츠 반 레인 역시 시당국이 지 시한 대로 양동이와 사다리를 현관밖에 두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레이덴에서도 타르와 송진이 길거리와 운하를 비추는 데 사용되고 있었고, 목조 주택이 많 았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레이덴의 시민들은 언제나 초긴장 상태에서 생활했다. 즐거움과 기도 겨울이 되어 운하가 얼면 반 레인 가족은 관리나 성직자나 상인 등 모두가 그러했듯이 투 박한 검은색 옷을 입고 스케이트를 탔다. 그들은 스틱과 공을 가지고 게임을 했다. 축제날을 즐기기를 거부하는 청교도가 아니었던 반 레인 가족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유쾌하게 어울 렸다. 바이올린 주자들이 곡조를 켜면 어떤 이들은 북을 울리고 어떤 이들은 플라지올레토 (작은 플루트)를 불어대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광대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 냈다. 실컷 축제를 즐긴 사람들은 판자 위에 숫자를 기록하며 주사위 게임이나 '거위' 게임 에 빠져들었다. 목사들은 카드놀이를 금했지만 가정집, 길거리, 선술집, 어디건 카드장을 돌 리지 않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다. <성서>를 읽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기 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삶은 고기와 야채를 1주일에 한 번 조리해 그때 그때 데워 먹는 가장 검소한 식사인 '호세포트'를 먹을 때에도 그들은 먼저 기도를 올렸다. 1609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이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던 신성 알베르토는 네덜란드의 북부 7개주와 12년간 휴전을 하고 신교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약을 오랑예가의 모리츠와 맺었다. 이로써 주연합은 자유를 얻었다. 7개 주의 대표자는 행정부를 구성하고 본거지를 헤이그로 정했다. 군대의 통솔권을 가진 총독이 정부를 대표했는데, 총독은 집행권을 가질 뿐 입법권이나 재정권을 행사할 수는 없 었다. 주연합의 실질적인 주권은 막강한 부를 쌓은 중간 계급의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충 서의 대상이던 오랑예가가 쥐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금을 내야 했고, 재산은 계급 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하다 1602년,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배, 부두, 창고, 상점, 작업장 등 네덜란드 의 모든 자원을 흡수했으며, 수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고 상당수의 대형 전함을 관리할 참모 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7년 후, 동인도회사는 대양 너머에 개척한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할 만큼 성장했고, 시민들은 너나없이 향료무역에서 거부를 챙길 단꿈에 젖어들게 되었다. 번영을 구가하는 시민들은 검소했다 여러 해 동안 유럽의 우편망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금융정보가 암스테르담에 집적되고 있 었다. 이로써 1609년 암스테르담에는 외한은행이 설립되었다. 이제 암스테르담은 금융시장으 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항구와 교회와 선술집을 마주 대하고 살던 네덜란드인은 이제 동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행운을 꿈꾸었다. 그들의 삶에는 두 가지 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칼뱅주의적 인 신앙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무역에 대한 열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는 부와 명 예의 추구에만 탐닉해 있었다. 렘브란트가 태어난 세계, 그가 화폭에 담을 세계는 변화된 세계였다. 프란스 할스(렘브란 트보다 25년 전에 태어남)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부심에 가득 찬 섭정은 더 이상 예술가 의 모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얀 베르메르(렘브란트보다 25년 후에 태어남)의 그림에서 고요 한 빛에 감싸여 등장하는 인물들은 프랑스의 우아함에 상응하는 미묘함과 세련미를 띠게 된 다. 1613년, 렘브란트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네덜란드어로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성서>를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형들과 달리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다. 렘브란트가 죽고 6년 후인 1675년, 전기작가 요하킴 폰 산드라르트는, 렘브란트는 네덜란 드어를 읽지 못했으며, 따라서 고전과 예술이론을 습득하는 데에 "책이 큰 도움을 주지 못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 글도 못 읽는 학생에게 레이덴 대학에서 입 학을 허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620년 5월 20일 대학 기록에는, "문학과 학생인 레이덴의 렘브란트 하르멘츠는 14세로, 그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국립대학, 레이덴 레이덴 대학에는 여러 단과대학들이 모여 있었고, 도서관과 유럽 각지에서 몰려오는 학생 들을 위한 기숙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교수들은 시정부의 배려로 베긴교단 내에 마련된 구 빈시설을 거처로 이용했다. 중세적 전통을 고집하지 않는 대학의 교과목에는 과학, 동방어, 그리스어, 점성학, 해부학, 식물학(식물학 연구를 위한 정원이 클루시우스의 주도로 1587년 레이덴에 세워졌다.) 등이 포함되었다. 학생들의 과학 학습을 돕기 위해 도시와 그 주변에는 온도계, 망원경, 기압계들이 설치되었다. 렘브란트가 대학에서 보낸 기간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는 병역과 포도 주세 맥주세 납세, 그리고 다른 몇 가지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는 라틴어나 스타텐베이벨 (1618 - 1619년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가 규정하고 정부 주도로 간행된 '국가의 성경')을 학 습하는 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641년에 요하네스 오를러스는, 렘브란트의 부모가 그의 교육문제에 관련하여 이런저런 근심을 했노라고 기록해 두었다. "렘브란트는 학교공부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 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부모는 렘브란트가 학교를 그만 다니 게 하고 미술의 기초와 원리를 배울 수 있게끔 화가를 하나 붙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리 하여 그들은 자식을 야콥이삭츠 반 스바넨뷔르흐에게 보냈는데, 결국 그가 렘브란트를 가르 치고 다듬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반 스바넨뷔르흐는 평범한 화가였다 초상화나 건축화, 그리고 판타지 등 어느 면모를 보더라도 렘브란트의 첫번째 선생은 히 로니무스 보스의 기법에 충실했을 뿐 그리 훌륭한 화가는 아니었다. 이탈리아에 체류할 때 명성을 얻었던 그는 46세이던 1617년 나폴리 여자인 마르게리타 코르도나를 데리고 레이덴 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작업실에서 렘브란트는 목판을 다듬고 캔버스를 준비하고 물감을 빻는 허드렛일부 터 배우기 시작했고, 드로잉, 해부학, 원근법의 기본원칙을 공부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뒤 반 스바넨뷔르흐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1641년에 출간된 요하네스 오를러스의 레이덴 안내서에 렘브란트는 탁월한 학생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조차 놀랐다. 언젠가 그가 유명 한 화가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렘브란트의 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아들을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유명한 화가인 피테르 피테르스존 라스트만에게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라스트만에게서 더 훌륭하고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테르 라스트만에게서 렘브란트는 첫 스승에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반 스바넨뷔르흐와 마찬가지로 라스트만도 이탈리아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는 로마에 서 아담 엘스하이머를 만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카라바조도 만났을 것이다. 적어도 라스트 만은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았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라스트만은 신화나 <성서>에서 다 룬 주제를 즐겨 그렸는데, 선술집, 야외축제, 길드, 연회 따위 일상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풍경화나 정물화도 그리지 않았으며, 그의 명성은 역사화에서 비롯되었다. 18세 렘브란 트와 41세 스승이 같이 작업을 시작하고 6개월 뒤, 렘브란트는 스승의 주제와 구도법을 완 전히 습득하였다. 이 짧은 기간은 렘브란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레이덴으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에서 바닥이 평평한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약 40km쯤 내려오면 레이덴이다. 레이덴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업실을 열었는데 베데스케그에 위치한 아버지의 집에 만들 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한 살 정도 어린 얀 리벤스와 함께 작업했다. 동향인 리벤스는 렘 브란트가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레이덴의 화가 요리스 반 스호텐 밑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렘브란트도 그의 작업실에서 배웠을까?) 그 뒤 리벤스는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라스트만에게 그림을 배웠다. 따라서 렘브란트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 무렵 18세였던 리벤스는 벌써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평범한 시민 교회나 정부에서 미술품을 의뢰하는 일은 없었다. 예배당에서 성화나 제단화를 찾아보기 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총독은 왕처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화가들 이 그림 주문을 기대할 대상은 보통 시민들이었다. 시민계급은 성서적 삶을 영위하면서 그들의 명예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화가에게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고객에 불과했지 화가의 후원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특 히 그들은 그림이 그들의 엄격함과 야심을 분명히 표현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그림 속 에서 자신들의 모습은 물론 자신들을 움직이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 방앗간집 아들,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다 1628년, 위트레흐트의 법률가이자 미술상인 아르나우트 반 뷔헬이 레이덴을 방문했다. 그 는 자신의 저서 <미술품>에서 레이덴의 '방앗간집 아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나 아직 시기상조이다."라고 써넣는 걸 잊지 않았다. 반 뷔헬이 본 작픔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 렘브란트의 가장 초기작인 <돌팔매질당하는 성 스데반>일 것이다. 나무에 유채로 그 려진 이 작품은 'Rf 1625'라고 서명과 날짜가 적혀 있다. 그러나 그 무렵이면 이 작품은 이 미 팔려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RH 1626'이라고 서명과 날짜가 적힌 <골리앗의 머리 를 사울에게 바치는 다윗>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성전에서 상 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가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1628년에 팔렸을 것이다. 또한 렘브란 트의 형제와 누이들이 모델을 선, 환희에 넘치는 전원생활을 담은 <음악회>일 수도 있다. 이밖에 렘브란트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작품들로는, 1627년에 그려진 <감옥에 갇힌 성 바울> <두 학자의 논쟁> <이집트로 도피> <삼손과 데릴라>를 꼽을 수 있다. 어쩌면 <상인>이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성 베드로>일지도 모른다. 렘브란트가 작업실 벽에 걸어 두었던 것은 아버지의 초상화였을지도 모른다. 초상화는 짙 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머리를 앞으로 숙인 늙은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늙은이의 흰 수염 은 부분적으로 그림자에 묻혀 있다. 어쩌면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그는 나무 바닥을 드러내 머리카락에 반사되는 빛을 표현했다.(아마 붓의 손잡이로 물감을 긁었 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반 뷔헬에게 보여 준 것은 <작업실의 화가>일 수도 있다. 그림에서 이젤 앞 에 선 화가는 팔레트와 한 다발의 붓을 왼손에 쥐고 있다. 그림은 렘브란트의 야심을 표현 한 자화상이다. 이젤에 가로로 걸려 있는 나무 화판은 그 크기나 모양에서 성서적 장면을 그리기에 알맞아 보인다. 캔버스는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1626, 렘브란트는 이미 그려 두었던 성서적 주제를 에칭화로 다시 제작한다 렘브란트는 그해에 <할례> <이집트로 도피중에 취하는 휴식>을, 다음해에는 <이집트로 도피>를 에칭화로 제작했다. 계속해서 그는 어머니의 얼굴과 누더기를 입은 거지들을 에칭 화에 담았다. 주름이나 얼룩, 해진 옷자락 등이 선과 그림자로 표현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까? 렘브란트의 제자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이 쓴 <미술 아카데미 입문>(1678)은 렘브란트 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연습하는 데 힘써라. 그러 면 너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은 이런 원칙을 고수했을까? 그는 언제나 더 많이 배우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 에칭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분명히 빌렘 피테르츠 보 이테베흐, 에사이아스 반 데 벨데, 피테르 빈크본스, 헤르퀼레스 세헤르스의 에칭화를 보았 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크 칼로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는 조각칼보다 염산 을 통해 훨씬 다양한 기법의 에칭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광택제를 사용하는 법과 염산에 부식되는 깊이를 조절하는 법, 그리고 에칭 바늘을 바꾸어 가며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이것은 끊임없는 연습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중 바늘을 고안하여 머리카락을 에칭하는 데 사용했다. 20세도 채 되지 않았던 렘브란트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으로 작업하고 실험했다 1620년대 말경에는 아마 리벤스가 렘브란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리벤스는 1626년에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이 두 예술가보다 10년 정도 나이가 많았던 호이겐스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국의 주연합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후에 런던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제임스 1세로 부터 작위를 수여 받았고, 1625년에는 총독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그는 라틴어 시와 존 던의 시를 번역했고, 법학과 점성학, 신학을 공부했으며, 르네 데카르트와 3개 국어로 서신을 교 환했다. 그가 기록한 일기도 유명하다. 렘브란트와 리벤스의 비교 1630년경, 호이겐스는 '방앗간집 아들'인 렘브란트와 '자수업자의 아들'인 리벤스가 이미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으며 얼마 후에는 그들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 고 기록하고 있다. 호이겐스의 글은 계속해서 이들이 비록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들의 피는 귀족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재능은 출신과 밀접한 관계가 없다는 교훈을 도출했다. 또한 호이겐스는 렘브란트와 리벤스를 그들의 스승들과 비교하면서 이들이 스승에게 아무 런 빚도 지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오늘날 두 화가의 스승들이 그들에게 배운 제자들의 그 림을 본다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아르키메데스의 스승이 자신들의 제자를 보고 느꼈을 부 끄러움을 똑같이 경험할 것이다." 그는 두 화가를 비교하면서, 리벤스는 독창성이 뛰어난 반면, 렘브란트는 판단력이 탁월하 고 생생한 감정 표현에 장점이 있다고 평했다. 그는 <은화 30전을 돌려주는 유다>를 예로 들며 이 그림이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그 어떤 작품보다 더 훌륭하다고 단언 했다. 로마에 가지 않고 화가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호이겐스는 이 젊은 두 화가가 로마에 다녀오지 않은 것에 놀랐다. 17세기 화가치고 로마 경험이 없는 화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푸생,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자신의 능력을 로마에 서 확인한 화가들의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이다. 로마는 화가의 지침자 구상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리벤스나 렘브란트는 두 가지 점에서 로마 여행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이탈리아의 대작을 네덜란드에서도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이유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들의 태도가 호이겐스를 놀라게 했지만 로마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명성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영국의 국왕 찰스 1세의 개인사절로 로버트 커가 주연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총독 은 그를 통해 미술품을 영국 국왕에게 선물했는데, 리벤스와 렘브란트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번째 제자, 첫번째 거래 헤리트 다우는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공부한 첫 번째 제자였다. 그는 당시 14세였다. 작 업실을 호이겐스가 방문한 것이나, 제자가 생긴 것이나 모두 렘브란트의 커져 가는 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어떻게 명성을 얻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렘브란트 사후 50년이 되는 해에 네덜란드의 작가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이들이 렘브란트에게 헤이그에 사는 어떤 신사의 이름을 알려 주며 막 끝낸 작품을 하나 들고 찾아가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렘 브란트는 그림을 들고 헤이그까지 걸어가 100길더에 작품을 팔았다. 이 화려한 시작이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작품 제작에 더 열중했고 모든 미술애호가들이 그에게 감탄했다." 1630년 4월 23일, 아버지가 62세로 사망했다. 방앗간은 형들 차지가 되었다. 따라서 렘브 란트는 더 많은 작품을 그리고 팔아야 했을까? 꼭 그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가 꿈꾸던 것은 명성이었다. 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에 레이덴은 좁기만 했다. 요하네스 오를러스는 이렇게 전한다. "1630년 암스테르담의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그후 여러 차 례 그곳을 방문해 그림을 그렸다. 이것을 계기로 결국 그는 그곳으로 옮겼다." 주로 가족이 모델이 되어 준 레이덴 시절의 초상화는 역사화를 그리기 위한 준비작업이었 다. 렘브란트의 어머니는 <예언자 안나>의 모델이었을 뿐 아니라, <성전에 나타난 그리스 도>의 중앙에 위치한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초상화들은 이미 강력한 표현력을 간직하 고 있으며, 당시까지 부차적인 장르로 머물러 있던 초상화의 틀을 뛰어넘고 있다. "유럽에서 보기 드문, 인도산 희귀품으로 가득한 배들이 이곳에 도착하오. 이것을 보는 것 이 과수원에서 자라는 과일을 보는 것만큼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소? 화려한 삶과 진 귀한 물건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소?" ---르네 데카르트 제2장 영광과 비탄 망명 중이던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친구인 작가 장 루이쉬에 드 발자크에게 암스테르담의 '화려함'과 '진귀함'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증 진시키는 데 몰두해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도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 다." 참으로 암스테르담의 상업은 번창하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인 프랑수아 드 살리그낙 드 라 모트 페늘롱이 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은 세계 각지에서 흥정과 매매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였으며,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상인들'이었다. 항구에는 배들이 너무 많아 멀리서 보면 돛들이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 암스테르담에는 '흐 라흐텐'이라 불리는 동심을 이루는 세 개의 운하가 도시의 모습을 잡아 주고 있었다. 렘브란 트의 사후 그의 유골이 묻힌 베스테르케르크 교회가 완성되었고, 제방 위에는 벽돌과 돌로 지어진 집들이 늘어서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활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로, 안트베르펜 을 추월해 네덜란드 제1의 항구가 되었다. 1631년, 철학교수이자 의학교수인 카스파루스 바를라외스가 저명 인사들을 이끌고 레이덴 을 떠나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창조와 탐구와 발견을 위한 도시로 만 들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대학이 하나 설립되었다. 네덜란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요스 반 덴 본델의 말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왕관'이었으며 '네덜란드의 영혼'이 자 리한 곳이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 젊은 화가는 곧 자신의 작품에 간단히 '렘브란트'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혹은 예전처 럼 'R 반 레인'이라고 쓰기도 했다. 과거에 그는 'RHL 반 레인'(R은 렘브란트, H는 하르멘 의 아들이라는 뜻의 하르멘츠, L은 레이덴 사람이라는 의미), 혹은 'RHL'이라고 서명했지만 이제 1630년에 사망한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또한 레이덴을 떠난 상황에서 레이덴을 표기할 필요도 없었다. 곧 이어 그는 '렘브란트' 대신 'f', 'fe' 혹은 'ft'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 서명들은 라틴어의 'fecit(그가 제작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야 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의 거장들인 티치아노, 라파엘로, 미켈 란젤로처럼 세례명으로만 알려지기를 원했다. 25세의 렘브란트는 자신이 이 거장들과 동등 하다고 여겼다. 렘브란트는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그것은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였다 주문받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렘브란트는 여러 달 동한 정기적으로 레이덴을 떠나 암스 테르담으로 오곤 했다. 이전에 렘브란트와 1,000길더의 계약(1631년 6월 29일에 증인을 대동 하고 계약을 맺음)을 맺었던 암스테르담 화상인 핸드릭 반 월렌보르흐는 렘브란트에게 중요 한 의뢰를 조달해 주었다. 월렌보르흐는 폴란드와 덴마크에서 살다가 1627년부터 암스테르 담에서 활동하게 된 화상으로,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유럽의 미술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렘브란트에게 숙소와 음식을 보장해 주고, 자신의 집에 그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으며, 렘브란트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격 려했다. 이 중요한 의뢰는 40세의 니콜라스 피테르스존 튈프 교수가 1632년 1월에 수행하는 해부 학 강의를(사형에 처해진 시체를 사용함)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림은 아토니스마르크트의 해부학 극장에서 수행된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을 기녀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완성 작품 은 길드 홀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 장소는 렘브란트에게 무척 뜻깊었는데, 튈프 교수를 포함 해 명망 있는 인물만이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외과의사요 두 번이나 시장으로 선출되었던 튎 교수는 당시에는 행정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렘브란트가 그려야 할 인물이었다. 그림에는 다른 유명한 사람들도 함께 묘사되었는데 그 가운데 외과의사는 하나도 없었다. 렘브란트는<해부학 강의>가 다른 작품과 비교될 것이며 자신의 경력에서 결정적 의미 를 지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에게 찬란한 미래를 보장했다. 이제 점잔을 빼며 놀란 척 승리를 맛보 는 일만 남았다. 지난 1세기 동안 집단초상화는 네델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튈프 교수의 해부 학 강의>는 전통을 따르면서도 이전 작품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집단초상화 는 동일한 조명 아래서 딱딱한 포즈를 취하고 앉아 있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이러한 초상화 에서는 그것의 배경이 연회용 탁자이든 회의 탁자이든 혹은 해부학 극장이든 인물을 그리는 방법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경직되어 있는 인물들의 자세는 실제상황에 구애를 받지 않 았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튈프 교수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는 인물들은 실제로 해부학 강의 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조용히 집중하며 시체 위로 몸을 숙이고 절개 된 팔에 드러난 힘줄을 바라본다. 그림의 모델이 된 인물들은 그들의 지명도와 학식을 렘브 란트가 잘 표현해 주기를 원했고, 렘브란트는 그들의 바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렘브란 트는 이 집단의 중심 인물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그려 넣어 그의 중요성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에게 즉각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1632년 7월 26일, 한 하급관리가 렘브란트를 방문했다. 관리는 암스테르담에 사는 명사들 의 건강상태에 내기를 건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일일이 확인작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렘브 란트는 명사의 대열에 포함된 셈이다. 얼마 후 한 여인이 등장했다. 츠바넨뷔르흐발과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모퉁이에서 렘브란트와 같이 생활하던 화상 헨드릭 반 월렌보르흐의 친적이었다. 프리슬란트 출신으로, 아버지가 예전에 프리슬란트의 레바르덴 시장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사스티아였다. 둥근 턱 과 풍만한 가슴을 지닌 이 젊은 여인은 결혼지참금으로 4만 길더를 가지고 왔다. 여느 처녀 들과 달리 사스티아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1633년 6월 5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약혼했다. 렘브란트는 꽃으로 장식된 모자의 챙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진 사스키아의 초상화를 그 렸다. 입술에 미소를 띠고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그녀가 팔꿈치를 기대고 있는 탁자 아래쪽 의 렘브란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21세 된 아내의 초상화, 우리가 약혼한 지 3일째 되는 날" 렘브란트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사스키아도 모델로 삼았다. 약혼한 날로부터 1년 후 사스키아의 보호자인 목사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가 그들과 함께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가 결혼을 보증해 주었다. 렘브란트가 어머니의 승낙을 받았는가 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에 레이덴에서 공증인이 어머니의 승낙을 기재했다. 그들은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프리슬란트로 떠났다. 1634년 6월 22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결혼했다. 이 보다 몇 주일 전에 렘브란트는, 헨드릭 반 윌렌보르흐의 집에 기거하고 있던 독일 상인 부 르하르트 그로스만의 앨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의로운 사람은 부도다 명예를 소중히 한 다." 그가 의뢰 받은 많은 주문과 사스키아가 가지고 온 지참금이 그로 하여금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방앗간집 아들인 렘브란트 하르멘츠 반 레인은 이제 변호사이자 고위 관리인 처남을 두게 되었다. 또한 렘브란트의 처제 중 하나인 히스케의 남편은 거부 헤리트 반 로였다. 결혼으로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는 급속히 변화했다. 이제 '방앗간집 아들'이란 말은 사라지게 되었 다. 렘브란트는 사랑과 부, 그리고 명성을 얻었다. 총독이 렘브란트에게 개인적으로 그림을 주문했다. 1년 후 렘브란트는 그림 의뢰인 역할 을 맡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비심 많으신 호이겐스 씨, 각하께 저에게 주문하신 세점의 그리스도 수난화를 완성하기 위해 제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세 점의 주제 는 각각 그리스도의 매장, 부확, 승천입니다. 이 세 점은 십자가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십자 가를 세우다>)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와 의미상 연결되는 그림입니다 세 점 중 한 점만이 완성되었고 다른 두 점은 반쯤 끝낸 상태입니다. 호이겐스 씨, 제발 저게 완성된 한 점, 아니 세 점 모두가 각하를 기쁘게 해줄 것인지, 그리하여 공작이신 각하의 욕구에 제 가 부응할 수 있을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제나 당신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로, 존경하는 선생님, 당신에게 저의 최신 작품을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제 희 망을 각하께 전해 주시기 바라며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충직 하고 애정 어린 하인, 렘브란트" 완성해 놓은 그림의 대가를 받고 싶은 렘브란트는 추신을 달았다. "저는 니위베 둘스트라 트의 부렐 연금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사스키아와 렘브란트는 반 월렌보르흐와 암스텔 운 하 그 터에서 2년을 지냈다. 좀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스승과 제자 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페르디난트 볼, 호바르트 플린크, 야곱 아드리안 츠 바케르 들이었다. 그들 중 몇 명에게 렘브란트는 숙소를 제공했다. 회화와 에칭화를 제작 하고 가르치면서 좀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1635년, 블룸흐라흐트에 면한 낡고 커다란 창 고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같은 해에 사스키아가 처음으로 임신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태 어나 세례를 받은 륌바르투스는 두 달밖에 살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유화와 드로잉과 에칭화를 제작하면서 제자들에게 신체의 비율을 정하는 법, 동판에 잉크 칠하는 법, 염료 빻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사스키아와 사랑을 나누고, 맥주 와 진을 마셨으며, 자주 경매를 통해 그림을 팔았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이 해하려 했다. 렘브란트는 구경 못 할 작품을 연구하고 방문 못 할 도시를 스케치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사하고 런던과 이탈리아의 풍경을 스케치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스키아의 포즈, 농부 한 쌍이 힘겹게 떼어놓는 무거운 걸음걸이, 팬케이크를 굽는 여 성 등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에게는 꿈이 필요했다. 렘 브란트는 장식이 달린 레이스나 주름 깃으로 치장한 검정색 옷을 입은 모델들을 그려야 하 는 주문 초상화의 단조로운 엄격성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그는 터번이나 예복, 그리고 무기 로 치장한 노인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그린 것은 예언자도 속물도 아닌 보통 인간이 었다. 그는 이런 초상화를 그리는 데 쓰려고 언월도, 비단 따위를 구입했고, 모사하기 위해 판화와 그림을 사들였다. 처가 식구들은 그의 낭비벽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렘브란트가 아내 의 지참금을 허비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이 부자이며 자기 일의 성격이 그런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누가 부정할 것인가? 조급한 렘브란트 렘브란트가 1639년 1월 27일 급하게 콘스탄테인 호이겐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총독도 렘 브란트의 채무자였음을 알 수 있다. 편지는 그가 총독에게 보낼 작품 두 점을 포장하고 있 을 때 세리인 얀 오이텐보하르트가 그를 불러 어떤 제안을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말하길, 이렇게 하는 것이 각하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저 의 그림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여쭙겠습니다만 두 점의 그 림값 지불을 가능하면 빨리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돈을 급하게 사용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주가 지난 후, 렘브란트는 더욱 다급해졌다. "경애하는 선생님, 이 편 지로 당신이 곤란을 겪지 않을까 망설여집니다만, 세리인 오이텐보하르트가 지불이 늦어진 다는 저의 부평을 듣고 조언을 해준 일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전에 출납관 볼 베르헨은 1년마다 지불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 오이텐보 하르트는 저에게 볼베르헨이 6개월마다 지불금을 지급하며, 따라서 그의 사무실에 4,000길더 가 준비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존경하는 선생님, 부디 속히 돈을 준비하셔서 제가 열심히 일한 대가인 1,244길더를 빨리 받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렘브란트가 마지못해 수긍했던 한 점당 600길더씩 1,200길더에 상아로 만든 액자 값과 포장비 44길더를 합친 금액이었다. 렘브란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주소를 명기해 두었 다. "저는 빈넨 암스텔의 당과 과자점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여러 주일 머문 데 비르 소이 케르브로덴이라는 이 가게의 집주인은 얀 반 벨데스테인이었다. 이집은 임시 거처에 불과 했다. 렘브란트는 그의 명성에 걸맞는 집을 원했다. 총독이 보내 줄 돈을 조급하게 기다리는 사이 렘브란트는 집을 사들였다. 그 집은 흔히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라 불리는, 브레스트라트의 신트 안토니스테이크라는 부유한 지 역에 위치했다. 1606년에 지어진 이 집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층이 진 박 공지붕이 씌워져 있었다. 집주인인 피테르 벨텐과 크리스토펠 테이츠는 집값인 1만 3,000길 더를 분할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매매계약서를 보면 렘브란트가 첫해에 세 번에 걸쳐 대금 의 1/4을 지불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지불은 5년이나 6년 후에 치르도록 되어 있었으며, 잔액에는 이자가 5% 붙었다. 이리하여 1639년 5월 1일,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새 집으로 이사했다. 옆집에는 회상인 반 윌렌보르흐가 살고 있었다. 그곳은 이전에 렘브란트와 사스키 아가 만난 곳이었다. 이탈리아 경험이 없다는 비난을 받던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이탈리아 미술을 발견 했다. 그해 4월 9일, 렘브란트가 경매에서 경쟁자에게 패한 것은 집값에 쪼들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화상인 뤼카스 반 위펠렌의 집에서 경매에 붙여진 작품은 라파엘로의 <발다사 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였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를 소묘했다. 그는 자신의 드로잉에 라파엘로 그림의 입찰가인 3,500길더를 적어 놓았다. 매입자는 암스테르담의 싱엘흐라흐트에 사는 알 폰소 로페즈로, 다이아몬드와 그림을 거래하는 유태계 스페인 상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왕 궁과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미술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의 소장품 중에서 렘브란트는 또 다른 이탈리아 거장인 티치아노가 그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로페 즈는 렘브란트의 'RL 1626'이라고 서명된 작품 <발람과 당나귀>도 소장하고 있었다. 렘브 란트는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와 티치아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를 모사하며 자기 방식대로 인물의 자세를 재구성했다. 회화는 회화를 통해 창조되 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집에서 작업에 열중했다. 그의 작업실은 2층에 있었고 1층에는 가족이 기거했다. 그림과 에칭화는 옆방에 모아 두기 시작했다. 다른 방들은 무기와 이국적인 의상들 그리고 수집품 등을 넣어 두었다. 맨 꼭대기 층에도 몇 개의 작업 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렘브란트의 제자들이 사용했다. 제자들은 동판에 바르는 역청, 밀랍, 송진을 섞는 작업을 하거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했다. 복제품도 원작도 아닌 이 그림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품이냐 아 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리는 것이었다. 코르넬리아라는 이름은 슬픔을 가져왔다. 둘째 아이 코르넬리아는 1638년 7월 세례를 받았지만 3주 후 사망했다. 1639년 말, 사스키 아는 세 번째로 임신했다. 희망이 다시 생겨났다. 1640년 7월에 태어난 이 딸에게도 코르넬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졌다. 그러나 2주 후 이 아 기도 사망하고 말았다. 곧이어 렘브란트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가 레이덴에서 사망했다. 그 녀는 유산으로 9,160길더를 남겼다. 몇 달 후 사스키아와 가장 가까웠던 누이 티티아가 사망 했다. 렘브란트가 1640년 초에 도살된 소를 놓고 제작한 정물화는 종교화와 다름없었다. 죽 은 고깃덩어리는 인생의 부질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당시 렘브란트가 그렸던 다른 우아한 모델들의 피부와는 완연히 다르다. 렘브란트 당대의 사람들 중에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슬픔을 안고 렘브란트는 계속해서 작업했다.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던 피터먼디라는 영국 사람이 그의 여행기에 적어 놓은 유일한 네덜란드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요하네스 오를러스 도 1641년 간행한 <레이덴 안내>2판에서 렘브란트를 소개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마트하우스 메리안이 바젤에서 출간한 토마소 가르조니의 책 <공공광장>에서 도 관심 있게 언급되고 있다. 자크 칼로나 , 아브라함 보세처럼 렘브란트는 17세기 에칭화의 대가였다. 화가와 에칭화가 로서 렘브란트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비뇽은 알폰소 로 페즈가 소장하고 잇던 <발람과 당나귀>를 보고 렘브란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렘브란트 에게 경의의 뜻을 표하고 화상인 한 친구를 보내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몇 점을 사들이도록 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가진 힘은 주문자들이 원하는 것을 집어내는 데 있다 렘브란트는 아첨에 가까울 만큼 숭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인기 화가로 머무는 데 만족 하지 않았다. 1634년, 그는 장갑을 끼고 레이스가 달린 아름다운 옷을 입은 마르텐 솔만스와 그의 아내 우펜 코피트의 화려한 모습을 담았다. 또한 주름 깃을 단 상인 빌렘 뷔르흐그라 프와 그의 아내 마르하레타 빌데르베크도 그렸다. 선주인 빌렘은 손을 그의 선박 위에 올려 놓고 있고, 그의 아내는 그에게 쪽지를 건네고 있는 모습이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들은 주문 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포착하는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1640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도금공이자 액자를 만드는 사람인 헤르만 도메르와 그의 아내 바르첸 마르텐스의 초상화 두 점은 그가 초기에 그린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와 얀 오이 텐보하르트의 초상화로 되돌아갔음을 말해 준다. 이 초상화들은 모델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 을 묘사하는 대신 주제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다. 도메르를 그린 이 초상화에서 렘브란트는 당시 미완성상태에 머물러 있던 코르넬리스 클라츠 안슬로의 초상화에서 표현될 강렬함을 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안슬로의 초상화에서 안슬로는 책이 쌓여 있는 탁자에 앉아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사일비우스, 오이텐보하르트, 안슬로는 모두 <성서>를 읽고 있거나 설교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일비우스는 칼뱅주의자였고, 오이텐보하르트는 아르메니아 교회 소속이었으며, 안슬로는 메노파 신도였다. 이 작품들은 사도나 예언자의 말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상을 담고 있다. 빛과 어둠, 키아로스쿠로 꿈, 명상, 사유를 그리기 위해서 렘브란트는 빛을 이용하는 전혀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다. 외부세계는 더 이상 그의 그림의 주제가 아니었다. 렘브란트는 언제나 판화를 사 모았는데, 판화를 통해 이탈리아 미술을 연구했다. 흑백으로 만 표현된 판화들은 오리지널 유화나 프레스코화의 화려함이나 사용된 물감의 찬란함을 아 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판화로 알 수 있는 것은 구도와 배치와 음영의 움직임뿐이다. 에칭화 제작 경험을 통해 렘브란트는 명암을 넣을 때 에칭 바늘로 선을 그리는 방법과 깊 이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선과 명암과 에칭화를 제작하며 얻은 실질적 경험 에서 나오는 그림 이해는 그의 작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캔버스에 빛과 그림자를 구성해 넣으려 할 때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유화가 아니라 에칭 화였다. 그는 잉크로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릴 때처럼 키아로스쿠로기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색채를 넣어 그림에 더 많은 차원을 부여할 수 있었다. 키아로수로 기법이란 논리적으로 빛 이 그림자를 만들 부분에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것이다. 이 기법은 그림에 강조부분을 만들 어 주며 화가가 바라는 효과를 창출해 준다. 렘브란트가 어깨 때문에 그림자가 져야 할 손 과 장갑에 빛을 주었다면 그것은 손과 장갑이 그 그림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 한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해 동안 렘브란트는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동시에 특정한 세부묘사를 통해 <성서>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표현하는 기법도 포 기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자의적인 사용은 결국 회화를 종말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부부는 새로 태어난 아기와 새로운 그림 주문에 전념했다 1641년 9월 22일, 사스키아와 렘브란트의 네 번째 아이가 조이데르케르크에서 세례를 받 았다. 아기의 이름은 티투스였다. 근심 속에 몇 주가 흘렀지만 티투스는 죽지 않았다. 당시 프란스 바닝 코크라는 야심가가 암스테르담의 명사로 등장했다. 그는 시장의 사위가 되어 야심을 채울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곧 시청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고, 아내와 헨드 릭 데 카이세르가 설계한 싱엘흐라흐트의 저택에 거주했다. 코크의 군경력은 꽤 성공적이었으며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비롯한 장교들은 도시를 방어했고 공화국을 기초했던 것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해전이 끝난 뒤 군대와 시민 민 병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퍼레이드를 벌이거나 사격대회를 여는 것 정도였다. 1640년 말, 코크와 부대원들이 렘브란트에게 그들의 집단초상화를 의뢰했다. 이 초상화는 1642년 완 성되었다. 그러는 사이 티투스를 낳고 병석에 누워 있던 사스키아가 약간 회복되었다. 렘브란트의 부대 초상화는 다른 초상화들과 비교되었다 군인들을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의 전통은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보다 더 오 래 되었다. 다시 한번 렘브란트의 그림은 선배들의 그림을 능가해야만 했다. 또한 이 그림은 각기 다른 부대를 그린 다섯 화가들의 집단초상화들보다 우수해야 했다. 그것들은 요하킴 폰 산드라르트가 그린 코르넬리스 비케르 대장의 부대 초상화, 호바르트 플린크(렘브란트의 옛 제자)가 그린 바스 대장의 부대 초상화, 바르콜로뫼스 반 데르 헬스트가 그린 룰로프 비 케르 대장의 부대 초상화, 니콜라스 엘리아츠 피케노이가 그린 반 블로스베이크 대장의 부 대 초상화, 야콥 아드리안츠 바케르(렘브란트의 옛 제자)가 그린 데 그라프 대장의 부대 초 상화이다. 사스키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그림 값으로 1,600길더를 받기로 했다. 16명의 군인 한 사람당 약 100길더가 책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구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금액은 달라졌다. 이것은 집단초상 화에 대한 대가로는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 금액은 네덜란드에서 튤립 구근 하나 값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물론 군인들이 계약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돈을 따로 지 불했을 수도 있다. 사스키아는 몸져누워 있었다. 그녀는 병에 걸렸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몇 달 동안 그림에만 몰두했다 1642년 초에 이 초상화는 의뢰인에게 인도되었다. 그 제목은 스케치북에 모사해 놓은 수 채화에 붙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부관 헤르 반 블라르딩엔(빌렘 반 로이텐뷔르흐)에게 부대 출동을 명하는 청년 대장 헤르 반 퓌르메란트(바닝 코크)>였다. 렘브란트 사후 12년이 되는 해에 필리포 발디누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린 그 누구보다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물들 사이로 한 다리를 들고 마치 걸어가는 듯 서 있는 대장은 손에 도끼창을 들고 있는데 이 잘 묘사된 광경은---누구에게나 이것이 실제 크기라는 인상을 준다. 다른 인물들은 서로 분간 하기 힘든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이 실제 관찰을 통해 그려졌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1642년 6월 5일, 사스키아는 유언장을 통해 마지막 소망을 이야기했다 사스키아는 약 4만 길더를 렘브란트와 티투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반이 티투 스에게 할당되었다. 티투스가 성인이 되거나 결혼하기 전까지 이 돈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렘브란트의 몫이었다. 단, 그가 재혼하면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사스키아는 유 언장에서 렘브란트에게 재산목록을 만들 필요는 없음을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렘브란트가 티투스를 고아원에 맡기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6월 14일, 사스키아는 30세로 사망했다. 아마도 결핵이 원인인 듯하다. 5일 후에 매장된 그녀의 시신은 7월 9아 렘브란트가 묘를 마련해 둔 아우데케르크 교회로 운구되었다. 티투 스는 겨우 한 살이었다. 렘브란트에게는 그림 주문이 쇄도하고 있었다. 1642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는 렘브란트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그러나 렘 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죽음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 남을 것 이다. 이 그림은 구상이 예술적이고 인물의 다양한 배치가 무척 독창적이며, 무엇보다 강렬 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할 때 다른 그림들은 놀이카드처럼 보이고 만다." ---렘브란트의 제자 사뮈엘 반 호그스트라텐 (<야경>으로 알려진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에 대해) 제 3장 고독과 파멸 누구도 렘브란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천재성이라 는 문제를 제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주문화에만 의존하여 먹고 사는 화가에게는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욕구에만 충 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렘브란트로부터 기대한 것은 한 점의 집단초상화 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예술작품을 그렸다. 그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렘브란트의 천재성은 애호가와 수집가를 매혹시켰지만 고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고객들은 렘브란트의 천재성이 아니라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에 대가를 지불했다. 초상화 는 모델과 똑같아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내면, 파악하기 힘든 본질, 그리고 변 형된 사물을 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렘브란트의 몇몇 제자들이 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렘 브란트의 욕망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 즉 그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 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몇 달이 지나 렘브란트는 그녀의 초상화 옆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다음 '렘브란트 f 1643'이라고 서명과 연도를 기입한 그림을 제작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죽 음을 부정하고 있다. 그와 사스키아가 함께 서 있는 장면은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었다. 그에게 이러한 종류의 초상화는 <성서>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주제가 그의 붓끝에서 표현된 것이다. 렘브란트의 내면에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믿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천재는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해될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에 개의치 않고 렘브란트는 회화와 에칭 작업을 계속 했다. 렘브란트는 티투스를 돌봐 줄 유모를 고용했다. 게르톄 디르크스라는 유모는 건장한 시골 여인으로 아브라함 클라스존이라는 트럼펫 주자의 미망인이었다. 이로써 렘브란트는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구름이 낀 밝은 하늘 사이로 비스듬하게 햇살이 비치고 있는 풍경화 <세그루의 나무>를 그린 렘브란트는 드러누운 돼지, 사색에 빠 진 철학자, 곡물더미에 소녀를 던지는 수도사, <성서>적 주제들, 거지들, 남자의 나신 등 어 디서나 그림의 주제를 발견했다. 그는 칼뱅주의적인 특성에 맞추어 자신의 영감을 재단하지 도 않았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꿈꾸거나 기도하거나 죄악을 저지르는 인물들은 마 치 렘브란트 자신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어린 아들의 유모를 정부로 삼았다.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의 말은 렘브란트에게 알맞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을 풍부 히 하려 할 때 나는 명예보다는 자유를 추구한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목표로 한 삶만을 생 각했다. 그 삶은 그림을 위한 것, 그림을 통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림에 종속되었으며, 모 든 것이 그림을 위해 희생되었다. 1640년대 말, 렘브란트는 주문 초상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모자를 쓴 노인들이 사슬에 묶여 공상을 하는 그림이나, 팔꿈치를 창턱에 기대거나 손을 문 위에 얹은 채 몽상에 빠져 있는 소녀의 그림 같은 것들은 주문화의 범주에 들 수 없는 것들이다. <성서>의 내용을 그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렘브란트는 <간음한 여인> <요셉의 꿈>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등 <성서>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제 작했다. 그 가운데 <간음한 여인>과 <할례>는 1646년 11월에 2,400길더에 총독이 구입했 다. 이 그림들은 형태나 크기에서 렘브란트가 7년 전에 그린 것과 거의 같았다. 총독은 꾸준 히 그림을 주문하고 사들였다. 이 때문에 렘브란트가 고객과 맺는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렘브란트가 죽은 뒤 많은 시간이 흐르자 불확실한 일화와 이야기들이 기록되었다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3개월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알 려지면서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 그의 작업속도가 느린 이유는 처음에 그린 그 림이 마르면 곧바로 그것을 다시 그렸기 때문이다.----작업할 때는 만약 왕이 온다고 하더 라도 작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다는 생각 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했다."(필리포 발디누치) "(렘브란트는)하나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리기 위해 판본을 열 개 정도 만들었다. 그가 가 장 만족스러운 터번의 위치를 잡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때에 따라서는 이틀이 걸렸다."(아 르놀트 하우브라켄) "어느 날 렘브란트가 한 부부와 아이들의 집단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이 끝날 무렵 렘브란트의 원숭이가 죽었다. 그는 새로운 그림에 착수하는 대신 죽은 원숭이를 집단초상화 에 그려 넣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델들은 이 정나미 떨어지는 사체가 그들 옆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죽은 동물이 창출한 효과가 그에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렘브 란트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숭이를 없애 버리는 대신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 었다."(아르놀트 하우브라켄) 렘브란트의 요구는 그가 만족을 주어야 할 고객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객으로부터 멀어진 렘브란트는 고객 없이 사는 생활을 배워야 했다. 낭비와 추문이 일 상으로 자리잡았다. 렘브란트는 경매장, 화상, 행상인, 의류상인들에게 끊임없이 물건을 구입 했다. "그는 특이하거나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의상들을 사들이기 시작했 다. 아무리 더럽더라도 그는 이것들을 작업실 벽에 걸어 두었다. 작업실에는 취미로 모아 두 었던 아름다운 골동품들과 더불어 활, 미늘창, 단검, 장검, 단도 등 고대와 현대를 망라하는 온갖 종류의 무기, 엄청난 양의 판화, 메달, 정교한 드로잉,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편 그는 사실상 사치를 부린 것에 불과했지만 통이 크다는 평판이 나 있었다. 그는 이런 좋은 평가를 이용해, 예컨대 여러 분 야의 대가들이 그린 드로잉이나 유화 등, 어떤 물건이든 경매에 붙여지면 매우 높은 입찰가 를 불러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보다 높은 값을 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자기 직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발디누치가 소문을 듣고 전한 이 이야기는 사실인 듯하다. 사스키아는 렘브란트에게 약 4 만 길더를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렘브란트가 유산의 일부를 그림에 필요한 낡은 물품이나 오브제의 구입에 사용했든, 혹은 자기 직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든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그는 무책임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의 도시인 암 스테르담에서 낭비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칼뱅주의적인 암스테르담 사회는 그의 방탕을 마뜩찮게 여겼다 헨드리켸 스토펠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헨드리켸 스토펠스도히톄르 야헤르는 신트 안토 니스테이크에 살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1649년에 렘브란트의 정부가 되었다. 그의 정부 게르톄 디르크스가 이 관계를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648년 1월 24일, 게르톄는 티투 스를 상속인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로써 렘브란트에게 받은 사스키아의 귀금속을 포함 한 그녀의 전재산은 티투스에게 남겨졌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몇 달 후 그녀가 렘브란트에게 약혼파기 소송을 걸었을 때 유리한 증거로 작용했다. 법정은 그녀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유언장을 취소시키는 대가로 렘브란트 에게 1년에 200길더의 돈을 그녀에게 지불할 것을 명령했다.(이전까지 렘브란트는 166길더 를 주고 있었다.) 얼마 후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귀금속을 게르톄로부터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빚에 쪼들 리던 게르톄는 이미 귀금속을 모두 전당포에 잡혀 둔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법정에 세우고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고발했다. 1649년 10월 23일, 그녀는 1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 았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고우다로 이송하는 비용을 지불했다. 그녀는 그곳에 유폐되었다. 렘브란트는 그녀의 생활비를 계속 지불해야 했다. 렘브란트는 시기심을 느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헨드리켸 스토펠스는 소송과정의 증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24세이거나, 아니면 23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렘브란트는 그녀보다 20년 위였다. 렘브란트는 헨드리켸가 자신의 정부로 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주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 의 모델을 섰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결혼은 사스키아가 남겨 준 유 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계속 돈을 뿌리고 다녔고 빚더미에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트 안토니스데 이크 집의 옛 주인에게 아직도 채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소송과정이나 경제적 상황 때문에 손상되지 않았다. 1650년 람베르트 반 덴 보스는 마르텐 크레체르의 소장품들을 찬양하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소장품 가운데는 티치아노 나 루벤스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렘브란트여! 나는 '렘브란트'라는 이름 하나만으 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당신의 명성을 굳이 나의 펜을 긁적여 입증하지 않겠습니다." 1650년, 미술감정사 두 명이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의 재산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렘브란트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은 전부 1만 7,000길드로 평가되었다. 또한 렘브 란트가 그린 그림들의 값어치는 모두 6,400길더로 평가되었다. 그의 재산은 채권자들을 안심 시키기에 충분했다.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상인과 정치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훨씬 지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렘브란트와 어울리는 절친한 친구들은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하거나 주석을 달거나 그 림을 그리는, 한마디로 창작자들이었다. 얀 코르넬리츠 사일비우스는 신학자이자 설교가였 다. 헨드릭 마르텐츠 소르흐는 화가였으며 에프라임 뷔에노 박사는 암스테르담의 가장 유명 한 의사이자 작가였다. 렘브란트는 그들의 모습을 에칭화나 유화에 담았다. 또 다른 친구였던 얀 식스는 암스테르담 시장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시와 비극 을 쓰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모습을 한 식스의 첫 초상화를 렘브란트가 에칭으로 그린 다음해인 1648년, 식스는 <메데이아>라는 긴 비극시를 출간했다. 식스는 성 오메르(프 랑스 북부)로 도피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레이덴 대학에서 수학했고 1640년에 이탈 리아 여행을 했다. 1652년에 그는 사업을 포기했다. 가끔 그는 렘브란트를 디메르디케에 위 치한 그의 영지로 초대해 머물게 했다. 그곳에서 렘브란트는 풍경화와 식스의 <알붐 아미코 룸>을 위한 두 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얀 식스도 고미술품과 에나멜화, 그리고 다른 예술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집방법은 렘브란트와 달랐다. 렘브란트의 채권자들이 점점 까다로워졌다 채권자들이 잠잠해진 것은 메시나의 귀족인 돈 안토니오 루포가 렘브란트에게 별다른 주 문사항 없이 <철학자>라는 작품을 주문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 는 않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대해 말했고, 채권자들은 돈에 대해 말했다. 그가 그림을 그린 다는 사실은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1653년에 인내심을 잃은 채권자가 생겼다. 주연합은 영국을 상대로 다시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다. 증권시장은 파국에 다다랐다. 렘브란트는 돈을 빌려야만 했다. 얀 식스가 그에게 1,000길더를 빌려주었다. 로데베이크 반 뤼딕은 보증을 섰다. 전 암스테르담 시장인 코르넬 리스 비트센과 상인인 이삭 반 헤르트스베크가 각각 4,000길더씩을 빌려주었다. 직접 그린 그림을 포함한 렘브란트의 모든 재산을 이 빚에 대한 담보로 저당 잡혔다. <붉은 모자를 쓴 사스키아의 초상화>와 <설교하는 세례 요한>은 얀 식스의 소유가 되었다. 렘브란트는 결코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집값을 청산할 수 없었다. 1653년 2월, 옛 주인인 크리스토펠 테이츠 는 렘브란트에게 이자를 포함해 아직도 8,470길더의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법정에 선 렘브란트와 헨드리켸 렘브란트와 헨드리켸는 교회재판소에 소환되었다. 소환에 응하면 그곳에서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이유를 말해야 했다. 그들은 소환을 거부했다. 1654년 7월, 칼뱅교 교회 법원은 헨드리켸만을 다시 소환했다. 왜 렘브란트는 소환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 다. 헨드리켸는 이후로도 계속 소환을 받았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다. 마침내 그녀가 재판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재판부는 그녀에게 부정한 관계를 포기하고 참회하라는 훈계를 늘어놓 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렘브란트와 살았다. 1654년 10월, 사스키아가 묻혀 있는 아우데케르크 교회에서 렘브란트와 헨드리켸 사이에 서 태어난 딸이 세례를 받았다. 새로 태어난 딸의 이름은 코르넬리아였다. 1654년, 렘브란트는 다시 빚의 지불기한을 넘겨 버렸다 다시 렘브란트 매년 50길더를 지불 받는다는 조건으로 테이츠와 계약을 맺었다. 테이츠는 렘브란트에게 그림 주문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과 렘브란트의 빚의 총액을 알고 있었 다. 코르넬리스 아이스베르트 반 호르는 시칠리아의 귀족 안토니오 루포를 대신하여 렘브란트 에게 500길더를 지불했다. 이것은 1652년에 주문한 그림(<철학자>로 알려진) <호머의 흉상 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대가였다. 하지만 이 그림은 1653년에 제 작한 것으로 서명되어 있다. 이를 통해 렘브란트가 작업한 기간을 알 수 있다. 테이츠는 렘브란트가 고객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소녀의 초상화를 주문하며 계약금으로 65길더를 주었던 상인 디호 안드라다가 그러한 경 우이다. 잔액은 그림이 인도되면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드라다는 완성된 그림이 소녀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렘브란트에게 배상을 요구했다. 비판을 참을 수 없었던 렘브란트는 나머지 금액을 요구하며 맞섰다. 고객들은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656년 5월, 렘브란트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5월 17일, 렘브란트는 법원에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의 소유를 티투스에게 옮기는 명의 이전 신청을 했다. 그는 부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떠맡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요구를 기각했다. 레이덴에 사는 렘브란트의 한 형제가 극빈자이며 그의 누이는 거의 파산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법정은 티투스와 렘브란트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어 줄 후견인을 지목했다. 1656년 7월 20일, 고등법정이 지목한 프란스 얀스존 브뤼닝흐가 렘브란트의 재산을 정리 했다. 그는 '재산양도'의 원칙을 적용해 달라고 탄원했다. 이 원칙은 보통 채무자의 신용이 믿을 만한 경우에 한해 허용되는 것이었다. 바다에서 입은 피해와 손실이라는 핑계로 탄원 이 받아들여졌다. 렘브란트는 징역형을 살 뻔한 파산의 불명예에서 구제되었다. 1656년 7월 25일과 26일,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 집의 총 재산목록이 작성되었다 363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재산목록은 모든 항목이 꼼꼼히 기재되어 있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면 '세탁실의 린네르', '백랍 주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 상', '베개 두 개', '동인도의 바느질 상자', '육지 바다 동물 표본 47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그린 얼굴 초상화', '얀 리벤스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등이 있다. 유화로는 아드리안 브라우베르, 앤 리벤스, 헤르 퀼레스 세헤르, 팔마 베키오, 피테르 라스트만, 호바르트 얀츠 플린크, 얀 포르셀리스, 뤼카 스 반 발켄뷔르흐, 야코포 바사노, 라파엘로, 얀 반 아이크, 조르조네 등의 작품이 있었다. 또한 10여 권의 판화 묶음집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형 피테르 브뢰겔, 형 뤼카스 크라나흐, 안토니오 템페스타, 뤼카스 반 레이덴, 루벤스, 야콥 요르단스, 자크 칼로 등의 판화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티치아노,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안니발레 카라치, 조반니 바티스타 로소(피오렌티노), 줄리오 보나소네 등의 작품을 모사한 판화들이 있었다. 렘브란트의 집은 대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산을 다 잃어 가는 시기에 렘브란트는 두 번째 해부학 강의 그림을 제작했다 토린스 교수는 얀 식스와 튈프 교수 모두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튈프 교수의 후임으로 암 스테르담에 있는 의과대학의 검시관이 된 요하네스 다이만 박사가 렘브란트에게 해부학 강 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다. 이 강의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가 걸린 교실에서 행해 지고 있었다. 다이만의 초상화는 같은 방에 걸릴 예정이었다. 첫번째 해부학 강의 초상화를 통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명성과 부를 얻었다. 24년 후 역경에 처한 렘브란트는 자신이 아직도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입증해야 만 했다. <해부학 강의>를 통해 렘브란트는 예전의 시도와 두번째로 대결하게 되었다 손상되기 전 원화에는 누워 있는 시체 양쪽으로 여덟 명이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다 이만의 옆에 선 조수가 두개골을 들고 있다. 1723년, 화재로 이 작품의 3/4이 소실되기 전에 이 작품을 본 요쉬아 라이놀드스 경은 이 그림의 색채는 티치아노의 것과 흡사하다고 말했 다. 이 그림이 연상시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는 티치아노만이 아니다. 시체가 누워 있는 모습은 만테냐의 그림인 <죽은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재산목록 200 번으로, 재산목록에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귀중본'이라고 씌어 있었다. 1656년 9월, 렘브란트의 재산이 경매에 붙여지기 시작했다 골동품들이 팔려 나갔다. 미술품들은 1657년 세금으로 징수되었다. 채권자들 간의 견해 차 이로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팔리지 않다가 1658년 2월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집이 1만 1,218길더의 가격으로 팔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빚을 청 산하기에는 부족했다. 1658년 9월,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판화 모음집과 드로잉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다 음과 같은 매각 광고가 실렸다. "화가인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재산이 상선회사와 상환불능재 산 처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당사자인 렘브란트 반 레인이 수집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거장들의 유명한 미술작품들을 매각함. 동시에 당사자인 렘브란트가 제작한 다수 의 드로잉과 스케치도 매각할 것임. 이 매각은 상기한 때에 이전 매각이 이루어졌던 칼베르 스트라트에 위치한 바랜트 얀츠 스휘르만의 여관 카이제르스크론('황제의 왕관'이라는 뜻)에 서 집행될 것임." 매각은 집행되었고, 모든 재산은 흩어졌다. 그러나 매각 총액은 겨우 600길더에 지나지 않 았다. 이제 자신의 소유가 아닌 신트 안토니스데이크의 빈 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인 시 인 예레미아스 데 데케르의 초상화를 찬양하는 H.F.바테르로스의 시를 읽었다. 그는 파산과 악평, 소외를 근심했을까? 그는 파산했고 따돌림받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제4장 은둔과 죽음 경매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잃은 1658년에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한 점 제작했다. 신중하고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이 초상화에서 그는 왼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다. 자기 확 신과 권력을 상징하는 것 같은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예술의 거울이었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초상화도 마지막 초상화도 아니었다. 그는 약 100여 차례에 걸쳐 유 화와 드로잉과 에칭화로 자화상을 제작했다. 이 점에서 그를 능가할 화가는 없다. 1625년, 그는 성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 틈에 자신을 그려 넣었다. 1626년에는 손에 하프를 쥔 모습으로(<음악모임>에서), 1665년에는 고대 화가인 제욱시스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 으로 자신을 그렸다. 근심에 찬 모습, 환희에 찬 모습, 상냥한 모습, 자신만만한 모습, 잘난 체하는 모습, 오만한 모습, 환멸에 지친 모습, 나이가 들어 얼굴에 살이 오르고 주름이 진 모습 등 그는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노쇠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의 초상화는 사실을 모 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넝마 같은 옷을 입었든 화려한 옷을 입었든 자화 상을 통해 그가 밝히려 했던 것은 고독이라는 주제였다. 그는 숨겨진 확실성을 찾아내 고독 에 저항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자화상은 그가 지닌 화가로서의 야망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록을 작성하듯 자신의 얼굴을 통해 표현이나 자세 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탐구하려 한 시도들이다. 또한 그의 자화상은 선언이다. 티치아노나 라파엘로의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판본을 창출한 결과였으며 이를 통해 렘브란트는 자신이 미술사의 이정표인 이 대가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의 자화상은 기도이기 도 하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도와주는 죄인이나 혹 은 돌아온 탕아의 모습으로 그렸다. 렘브란트에게는 아직도 경제적인 문제가 계속되었다 1658년에도 렘브란트는 1653년에 얀 식스로부터 빌린 1,000길더의 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빚의 채권자는 상인이자 수집가인 로데베이크 반 뤼딕으로 바뀌었다. 반 뤼딕은 3년 이내에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고 거기에 덧붙여 보충배당금의 형태로 그림 한 점을 달라 고 요구했다. 렘브란트는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티투스의 상속분 문제를 제외하면 특별한 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 몇몇 채권자들은 1647년에 책정된 티투스의 유산이 과대 평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이 소환되었다. 배심원들은 렘브란트가 <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를 그릴 때 초상화 값으로 100길더씩을 지불한 두 남자, 렘 브란트에게 루벤스를 구입한 반 뤼딕, 화가 필립스 코닌크, 은세공인 얀 반 로와 사스키아가 가지고 있던 보석의 설명서를 썼던 반 로의 아내 등에게 증언을 들었다. 배심원은 증언에 설득되었다. 1660년 12월 18일, 렘브란트는 마침내 신트 안토니스브레스트라트의 집을 떠났다. 모든 재산이 팔렸고 빚은 청산되었다 1657년과 1658년에 자신의 드로잉과 에칭화 수집품이 매각되었던 카이제르스크론 여관에 서 렘브란트는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기능공과 상점 주인이 사는 요르단 구역의 로젠 흐라흐트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은 도시를 둘러싼 운하 세 개 중 가장 외곽에 위치한 카이제르스흐라흐트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1년 집세가 225길더인 이곳에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2월 15일, 렘브란트는 공증인이 기재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는 티투스와 헨드리켸 가 렘브란트를 책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가입한 예술가 연합인 성 누가 길드의 규율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산 때문에 렘브란트는 암 스테르담에서 어떠한 거래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채권자가 된 티투스와 헨드리켸에게 950길 더의 빚을 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작할 모든 유화, 드로잉, 에칭화 작품의 소유권을 티투스와 헨드리켸에게 양도했다. 이 양도는 그의 사후 6년까지 유효했다. 그래도 가끔씩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르트 데 헬데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초상화 주문도 가끔 있었다. 당시 그린 야콥 야콥츠 트리프의 초상화는 마치 예수의 제자 중 하나를 그린 듯하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얼굴은, 예수, 성자, 라비, 남자, 여자 등 어느 것을 봐도 고독하고 심각하며, 렘브란트 자신의 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 품은 <성서>의 세계에 사로잡힌 신화와 꿈에 표현을 주려 했다. 암스테르담 시에서 색다른 그림을 주문했다. 네덜란드의 영광을 표현해 달라는 것이었 다 이것은 원래 렘브란트의 옛 제자 호바르트 플린크가 맡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플린크는 미완성 스케치만을 남긴 채 사망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로마와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네덜란드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네덜란 드인은 자신들의 투쟁을 타키투스가 묘사한 대로 로마인에 대항하는 바타비아(Batavia, 네 덜란드의 옛이름)인의 투쟁에 비교했다. 바타비아인이 로마인의 지배를 종식시키기로 결의 한 곳은 지도자인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연회장이었다. 1662년, 렘브란트의 그림이 완성되어 시청에 걸렸다 그러나 그림은 불과 몇 달 만에 떼어졌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는 다시 렘브란트 에게 돌아왔다. 대신 요리스 오벤스라는 사람이 다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플린크의 스케 치로 되돌아가서 키빌리스의 옆모습을 그렸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어떤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탁자 위로 뻗친 무기들 위에 떨어지는 빛이 키빌리스의 상실된 한쪽 눈을 드러냈던 까닭일까? 상 징적인 인물은 결함이 없어야 했다. 국민적 자부심이 손상을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시위원들은 물감을 칠한 방식도 못마땅해했다. 팔레트 나이프의 거친 자국은 과시를 위한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렘브란트는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사방 6m 정도로 잘라 버 렸다.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고객뿐만 아니라 미술애호가들까지 당혹스럽게 했다 렘브란트가 사망한 뒤 몇 년이 지나 1685년 프랑스의 작가인 앙드레 펠리비앙은 <가장 탁월한 고대와 현대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 을 그렸다. 그의 방식은 대부분의 플랑드르 화가들이 채택한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묘사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그는 넓은 붓질을 통해 두꺼운 물감층을 한겹 한겹 발라 나갔다. 물감 을 혼합하거나 부드럽게 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취향이 바뀜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그 의 작품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18세기 초에 아르놀트 하우브라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림들을 같은 방 식으로 제작했다. 나는 몇몇 세부는 최대한도로 세심하게 그리는 반면 나머지 부분은 마치 집을 칠하는 것처럼 형태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칠해 버리는 그의 그림을 여러 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작업방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가 자신의 의도를 성취했을 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하다. 렘브란트가 작품을 제작한 방식이 고객의 욕구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것은 몇몇 그 림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우브라켄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초상화가 하도 두껍게 칠해졌기 때문에 인물의 코 를 잡아 그림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귀금속이나 진주목걸이, 혹은 터번에 새겨 넣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멀리서 보면 매 우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다 암스테르담 직물제조업자들은 렘브란트에게 그들의 길드 모임을 그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집단초상화는 잘려진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보다 크기가 약간 작았다. 제목이 <직 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인 이 작품은 길드 본부에 걸릴 예정이었다. 이 그림은 검은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남자가 양탄자로 덮인 탁자 주변에 모여 있고 비서 한 명이 뒤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가장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은 한 남자가 넘기고 있는 펼쳐진 책이다. 계산 을 맞추어 보고 있는 것일까? 렘브란트는 그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들은 시선을 위로 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보는 것일지 도 모르겠다. 거의 감지하기 힘들지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과, 탁자에 부 여된 원근법을 통해 그들이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화가가 인물들을 올려다보며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물들이 각각 1661년과 1662년 의류 검사위윈이었던 얀 비테르, 코르넬리스 에흐베르 트 모베르, 빌렘 반 레네벨트, 세르바스 델 카우르트, 얀 얀츠 아렌트뷔르흐인지, 혹은 같은 시기에 견본품을 감독하던 빌렘 반 도이엔뷔르흐, 볼케르트 얀스존, 야콥 반 론, 아르나우트 반 데르 미에, 요하켐 데 네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단지 개인들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고 있는 초상화이 다. 암스테르담의 시의원들은 렘브란트의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화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그 다음해인 1662년에 제작된 <직물 제조업자 길 드 이사들의 초상화>는 사정이 달랐다. 올려봐야 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 그림에서 그들은 그림에 권력이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늙은 렘브란트가 부르주아들로부터 명성을 얻길 원했던 것일까? 1662년 출간된 시에서 얀 보스는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고 말했 다. 그는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되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소장품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1661년, 두번째 그림 <알렉산더 대왕>을 시칠리아 메시나 가문의 돈 안토니오 루포에게 보내고 그 대가로 500길더를 받았다. 1660년, 이탈리아 화가인 구에르티노는 렘브 란트가 제작한 몇 점의 에칭화를 보고 그가 대가임에 틀림없다는 편지를 루포에게 보낸 바 있다. 루포는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한 점 더 주문했다. 호머였다. 루포의 주문이 자신의 이상에 걸맞는 것이었기 때문에(렘브란트는 1653년, 루포가 주문한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린 바 있다.) 렘브란트는 루포 의 비판에 너그러웠던 것일까? 루포가 분리된 네 조각을 붙여 만든 <알렉산더 대왕>에 불 만을 나타내었을 때 렘브란트는 이 초상화를 다시 제작해 시칠리아로 보내 주었다. 또한 루 포가 다시 이 초상화의 미완성된 부분을 지적했을 때 렘브란트는 그것을 완성시켜 루포에게 보냈다. 두번째 여인 헨드리켸가 사망하다 루포의 주문만으로는 경제사정이 해결되지 않았다. 1662년 10월 27일, 렘브란트는 아우데 케르크 교회의 사스키아 묘를 팔아야 했다. 그녀의 유해는 로젠흐라흐트의 끝부분에 위치한 베스테르케르크 교회의 더 저렴한 묘로 이장되었다. 1661년 8월 7일, 병상에 있던 헨드리켸가 작성한 유언장은 딸인 코르넬리아가 법적 상속 인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재산 용익권을 렘브란트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렘브 란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단지 그녀와 렘브란트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 을 뿐이다. 1642년에 사스키아의 유언장에서처럼 이 유언장에서도 헨트리켸는 '위프라우브(juffrouw, 부인)'나 '호이스브라우브(huisvrouw, 배우자)'로 기재되었다. 렘브란트와 헨드리켸는 결혼했 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의 유산 을 잃지 않기 위해 헨드리켸와 결혼하기를 거부해 왔다. 하지만 파산해 빚더미에 오른 렘브 란트는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1663년 7월 말, 헨드리켸가 죽으면서 남겨 준 유산 역시 터무니없이 적은것이었다. 헨드리켸도 베스테르케르크 교회에 묻혔다. 티투스는 겨우 21세의 나이로 아버지 렘브란트에게 집과 먹을 것을 주면서 그를 돌봐야 했다 렘브란트는 또다시 하르멘 베케르에게 돈을 꾸어야 했다. 보석과 직물을 거래하던 하르멘 베케르는 화상이기도 했다. 이미 렘브란트의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베케르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그림을 담보로 돈을 꾸어 주곤 했다. 몇 달 후 렘브란트는 베케르의 빚을 모두 청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이 얀 식스에게 진 빚이 로데베이크 반 뤼딕 을 거쳐 다시 베케르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케르는 렘브란트에게 돈보다도 그림을 원했다. 베케르가 원한 그림은 여신 주노의 초상화였다. 1664년 봄, 베케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주노의 초상화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늦어진 것일까? 렘브란트는 1660년 암스테르담에서 윌리엄 3세의 친위대에 가입 한 프레데릭 리헬의 주문에 따라 그의 말 탄 모습을 그리느라 혹은 티투스의 초상화를 제작 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1665년 초, 렘브란트의 채권자인 이삭 반 헤르트스베크는 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렘브란 트의 재산을 매각한 수익을 우선 채권자였던 티투스에게 돌려주었다. 티투스는 이밖에 브레 스트라트 집의 매각을 통해 6,952길더를 받게 되었다. 티투스는 곧바로 이 돈을 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렘 브란트가 한스 홀바인 2세의 그림 대금으로 1,000길더를 지불할 수 있었을 것인가? 렘브란 트는 당시 집주인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고 있던 르젠흐라흐트의 집을 구입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사들였다. 1667년 12월 29일, 훗날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는 메디치가의 코시모 3세가 로젠흐라흐 트의 렘브란트 집을 방문했다 코시모 3세를 수행한 필리포 코르시니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2월 29일 목 요일, 맑지만 추운 아침. 오후 5시경부터 하늘이 흐려졌다. 그때부터 조용히 안개가 끼기 시 작해 밤이 될 때는 자욱해졌다. 이곳의 전형적인 날씨이다. 각하께서는 군중들을 영접하신 후 블라외와 페로니를 대동하고 대가들의 그림을 보러 가셨다. 그들 중에는 설계가 반 벨데 나, 유명한 화가인 레인브렌트(렘브란트를 의미함), 바다의 풍경을 그리는 스카무스도 있었 다. 또한 각하는 아직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화가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서 작품들을 보셨다. 각하께서는 화가들로부터 존경과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코시모가 '유명한 화가인 레인브렌트'의 집에서 본 것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아마 작업중 인 초상화들이었을 것이다. 의자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쥐고 있는 뚱뚱한 노인의 초상화이거 나, 남자는 한 쌍의 장갑을 엄지손가락으로 쥐고 있고 여자는 부채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초상화 두 점의 스케치인 듯하다. 아니면 렘브란트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분명히 코시모는 그 가운데 하나를 구입했을 것이다. 17세기 초에 이미 메디치가의 레오폴도 추기경은 유명 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수집하는 컬렉션의 예를 따라 유명한 화가들의 자화상을 수집하기 시 작했다. 추기경이 사망한 후 이 수집품들은 대공작 코시모의 소유가 되었다. 이 '유명한 화 가'의 초상화 한 점을 그가 과연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유럽여행을 하던 코시모와 한 번도 조국을 떠난 적이 없는 렘브란트는 어떤 대화를 나 누었을까? 렘브란트는 방문객들이 자신의 그림을 너무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물감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하우브라켄에 따르면)이 조언을 코 시모에게는 하지 않았다. 공문서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경의와 존경의 표현이 오고 갔음 을 알 수 있다. 코시모는 로젠흐라흐트의 집에서 한 쌍의 부부를 그린 초상화를 볼 수 있었 을까? 만약 봤다면 그 초상화는 초기 단계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완성된 것이었을까? 캔버 스에 쓰인 날짜를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남자의 왼손이 그를 향해 서 있는 젊은 여인의 어깨에 가 있다. 그의 오른손은 그녀의 가 슴을 만지고 있다. 그녀는 왼손을 가슴 위에 올려진 남자의 오른손에 대고 있다. 이 부드럽 고 고요하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들은 누구일까? 야콥과 라헬의 사랑인가, 아니면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인가? 어쩌면 이 인물들은 티투스와 그가 1668년 2월 10일 결혼한 은세공인 얀 반 로의 딸 마흐달레나 반 로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렘브란트는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에 비견되었다 시인 예레미아스 데 데케르는 렘브란트가 '당대의 아펠레스'(아펠레스는 B.C. 4세기의 그 리스 화가이다)이며 '탁월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화가라고 말했다. 1630년대 초반, 콘스탄 테인 호이겐스는 렘브란트가 프로토게네스, 아펠레스, 파르하시우스를 능가한다고 쓰고 있 다. 그러나 후대 화가들의 모델이자 지침이 되는 전설적인 화가들, 아무 그림도 남아 있지 않은 이 같은 고대화가들이 렘브란트가 자신과 동일시하려고 했던 인물들은 아니다. 렘브란 트가 원했던 인물은 제욱시스였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특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B.C. 5세기의 유명한 그리스 화가였던 제욱시스는 한 노파의 방문을 받았다. 노파는 그에 게 아프로디테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노파는 자신이 모델을 서겠다고 주장했다. 작업이 진행되던 어느 날, 초상화와 모델을 바라보던 화가는 마침내 웃음을 터뜨 렸다. 그리고 결국 그는 웃다가 죽고 말았다. 렘브란트의 작업실에도 한 여성을 그린 빛 바 랜 초상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걸려 있지 않은가? 지치고 주름살이 잡힌 렘브란트는 진을 너무 마셔서 부은 얼굴로 모델을 응시하곤 했다 모델의 요구나 그림의 요구에 렘브란트는 웃음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쓴웃음이었 다. 그는 혼자였다. 곁에 남은 이는 열다섯 살짜리 딸뿐이었다. "그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약간의 빵과 치즈, 아니면 훈제 청어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아르놀트 하우브라 켄) 티투스는 마흐달레나 반 로와 결혼한 후 싱엘흐라흐트에 위치한 장모의 집에서 살고 있 었다. 1668년 9월 4일, 티투스는 사망했다. 그는 베스테르케르크에 묻혔다. 1669년 3월 22일, 새 로 태어난 티투스의 딸 티티아가 니베 제이테스카펠에서 세례를 받았다. 렘브란트는 가족을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를 그렸다. 1669년 9월에는 성전 안에 아기 예수 와 함께 있는 시므온(<누가 복음>에 나오는 경건한 노인)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그림은 화가인 알라르트 반 에베르딩엔과 그의 아들 코르넬리스가 렘브란트의 작업실에서 봤으리라 추측된다. 1669년 10월 4일, 63세의 나이로 렘브란트는 사망했다 전통에 따라 모든 그림은 벽 쪽으로 뒤집어 놓았고 거울은 검은색 크레이프 천으로 가렸 다. 10월 8일, 렘브란트는 베스테르케르크 묘지의 헨드리케와 티투스의 옆자리에 묻혔다. 그 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없다. 다만 교회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을 뿐이다. "10월 8일. 돌호프 건너편, 로젠흐라흐트에 살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 관을 나른 사람 여 섯 명. 유족은 자식 두 명. 비용은 20길더." 며칠 후 재산목록이 작성되었다. 유산을 코르넬리아와 티티아에게 분배하기 위한 것이었 다. 코르넬리아와 티티아의 경우 렘브란트가 헨드리켸, 티투스와 체결한 공식문서에 의거해 렘브란트의 이름으로 상속되었다. 브레스트라트의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에 있던 재산은 1656년에 363개 항목에 걸쳐 이미 기재된 적이 있다. 로젠흐라흐트 집의 재산목록은 50여개 의 항목으로 기재되었다. 가구, 린네르, 도자기, 유화, 드로잉, 그리고 골동품, 무기, 갑옷 조 각, 고대 작품 등의 항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디누치가 쓴 글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파 산과 고독 속에서도 끊임없이 '화가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을 사 모았던 것이다. 기록과 증언 렘브란트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물품들 1656년 7월 25일과 26일에 작성된 이 목록은 브레스트라트의 신트 안토니스데이크 집에 렘브란트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 서적, 가구 따위 여러 가지 물품을 소개하고 있다. 입구홀 1. 과자 요리책(소품), 브라우베르 7. 카드놀이(소품), 브라우베르 3. 어린아이와 여인(소품), 렘브란트 4. 렘브란트의 작업실, 브라우베르 5. 음식이 차려진 탁자, 브라우베르 7. 석고 두상 7 두 명의 벌거벗은 어린이 석고상 8. 자는 어린이, 석고상 7. 낡은 신발 10. 작은 풍경화 렘브란트 11. 또 다른 풍경화, 렘브란트 12. 서 있는 작은 사람(소품), 렘브란트 13. 촛불이 비치는 광경, 얀 리벤스 14. (성 제롬), 렘브란트 17. 토끼(소품), 렘브란트 17. 돼지(소품), 렘브란트 17. 작은 풍경화,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18. 풍경화, 얀 리벤스 17. 또 다른 풍경화, 얀 리벤스 20. 작은 풍경화, 렘브란트 21. 렘브란트가 그린 <싸우는 사자들> 22. 얀 리벤스의 <월광> 23. 얼굴 초상화, 렘브란트 24. 또 다른 얼굴 초상화, 렘브란트 25. 정물화, 렘브란트 가필 26. <갑옷을 입은 병사>, 렘브란트 27 <바니타스>, 렘브란트 가필 28. 또 다른 <바니타스>. 렘브란트 가필 29. 바다 풍경 , 헨드릭 안토니츠 30. 스페인제 러시아 가죽 의자 네 개 31. 검은 시트를 입힌 의자 두 개 32. 전나무로 만든 선반 대기실 33. 사마리아인, 렘브란트 가필 34. <부자>, 팔마 베키오 35. 렘브란트<오두막>, 렘브란트 36. 그레이하운드 두 마리, 렘브란트 37. <십자가에서 내려지다>, 렘브란트 38. <나사로의 부활>, 렘브란트 39. <머리를 손질하는 창녀>, 렘브란트 40. 숲속 풍경,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41. <토비트>, 라스트만 42. <나사로의 부활>, 얀 리벤스 그림 43. 산 풍경화(소품), 렘브란트 44. 풍경화(소품), 호바르트 얀츠 45. 초상화 두 점, 렘브란트 46. 그리자유(grisaille, 회색 계통의 채도가 낮은 색으로 돋을새김처럼 그리는 장식화법, 그 작품), 얀 리벤스 47. 그리자유 두 점 , 포르셀리스 48. 초상화, 렘브란트 49. 초상화, 브라우베르 50. 모래언덕에서 본 풍경, 포르셀리스 51. 모래언덕에서 바라본 풍경화(50보다 작은것), 포르셀리스 52. 은둔자(소품), 얀 리벤스 53. 작은 초상화 두 점, 뤼카스 반 발켄뷔르흐 54. <불타는 병>, 형 바사노 55. 브라우베르의 <돌팔이 의사>의 모사품 56. 두상화 두 점 , 얀 피나스 57. 투시도, 뤼카스 반 레이덴 58. 사제를 그린 얀 리벤스 그림의 모사품 59. 모델을 그린 작은 습작, 렘브란트 60. 가축몰이 그림(소품), 렘브란트 61. 드로잉, 렘브란트 62. <그리스도의 채찍형>, 렘브란트 63. 그리자유, 포르셀리스 64. 그리자유, 시몽 드 블리제르 65. 풍경화(소품), 렘브란트 66. 초상화, 렘브란트 67. 초상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 68. 말 그림 몇 점, 렘브란트 69. 풍경화, 렘브란트 70. 작은 집들 몇 점,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71. <주노>, 피나스 72. 상아틀 거울 73. 상아 액자 74. 대리석으로 만든 (포도주) 냉장 용기 75. 투르네산 탁자보를 덮은 호두나무 탁자 76. 스페인제 의자 일곱 개(녹색 벨벳 시트) 대기실 뒷방 77. 제프타가 그린 그림 78. <어린아이와 처녀>, 렘브란트 79.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렘브란트 80. <나부>, 렘브란트 81 안니발레 카라치 그림의 모사품 82. 반신상 두 점, 브라우베르 83. 안니발레 카라치의 또 다른 작품을 모사한 그림 84. 바다 풍경화(소품), 포르셀리스 85. 노인의 얼굴, 반 아이크 86. 시체의 초상, 아브라함 빌크 87. <죽은 자의 부활>, 아르티 반 레이덴 88. 스케치, 렘브란트 89. 스케치의 복제화, 렘브란트 90. 초상화 두 점, 렘브란트 91. <솔로몬의 성전 봉헌>(그리자유), 렘브란트 92. 렘브란트의 작품을 모사한 <그리스도의 할례> 93. 풍경화 두 점(소품),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94. 금 도금된 액자 95. 작은 오크 탁자 96. 판지로 만든 병풍 네 개 97. 오크 압착기 98. 보통 의자 네 개 99. 녹색 의자 쿠션 네 개 100. 구리 주전자 101. 외투걸이 거실 뒤쪽의 방 102. 숲 속 풍경화, 작자 미상 103. 노인의 얼굴, 렘브란트 104. 풍경화,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105. 여인의 얼굴, 렘브란트 106. <국가의 화합>, 렘브란트 107. <작은 마을>, 호바르트 얀츠 108. <작은 황소>, 렘브란트 109. <사마리아 여인>, 조르조네 110. 고대 조각상 세 점 111. <그리스도의 매장> 스케치, 렘브란트 112. <성 베드로의 배>, 아르티 반 레이덴 113. <그리스도의 부활>, 렘브란트 114. 성모 마리아, 우르비노의 라파엘로 115. <그리스도의 얼굴>, 렘브란트 116. 겨울 풍경화(소품), 그리메르 117. <그리스도의 십자가>, 렐리오 다 노벨라라 118. <그리스도의 얼굴>, 렘브란트 119. 작은 황소, 라스트만 120. <바니타스>, 렘브란트 가필 121.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그리자유), 렘브란트 122. <아브라함의 희생>, 얀 리벤스 123. <바니타스>, 렘브란트 가필 124. 풍경화(그리자유) ,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125. <일몰>, 렘브란트 126. 큰 거울 127. 푸른 시트가 있는 의자 여섯 개 128. 오크 탁자 129. 수를 놓은 탁자보 130. 삼나무 압착기 131. 삼나무 찬장 132. 침대와 베개받이 133. 베개 두 개 134. 담요 두 장 135. 푸른 벽지 136. 고리버들 세공 의자 137. 다리미 예술품보관실 138. 지구본 두 개 139. 작은 광물 상자 140. 작은 기등 141. 작은 백랍 단지 142. 오줌 누는 어린아이 상 143. 동인도산 잔 두 개 144. 작은 중국인이 그려진 사발 145. 황후의 조각상 146. 동인도인의 파우더 상자 147. 아우구스투스 황제 상 148. 인도의 물잔 149. 티베리우스 상 150. 동인도인의 바느질 상자 151, 카이우스의 두상 152. 칼리굴라 상 153. 화식조 도자기 두 점 154. 헤라클레이토스 상 155. 인물 도자기 두 점 156. 네로 상 157. 철제 투구 두 개 158. 일본 투구 159. 크로아티아 투구 160. 로마 황제 상 161. 무어인의 실물 크기 두상 주형 162. 소크라테스 상 163. 호머 상 164. 아리스토텔레스 상 165. 광택이 나는 고대 두상 166. 파우스티나 상 167. 철제 갑옷과 투구 한 벌 168. 갈바 황제 상 169. 오토 황제 상 170. 비텔리우스 황제 상 171.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상 172.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상 173. 도미티아누스 황제 상 174. 실리우스 브루투스 황제 상 175. 육지,바다 동물 표본 47점 176. 육지,바다 동물 표본 23점 177. 두 개의 호리병박이 달린 해먹 178. 실물 크기 석고상 주형 여덟 점 안쪽선반 179. 조가비, 산호가지 , 실물 크기 주형 다수 180. 고대 큐피드 조각상 181. 권총 한 자루 182. 퀘틴이 만든 낡고 장식된 철 방패 183. 쇠뿔로 만든 구식 화약통 184. 쇠뿔로 만든 터키산 화약통 185. 메달 보관함 186. 심을 넣어 보강한 방패 187. 누드 인물상 두 점 188. 모리스 왕자의 얼굴에서 뜬 데스마스크 189. 사자와 황소상 각 한 점 190. 지팡이 여러 개 191. 큰 활 미술서적 192. 렘브란트의 스케치가 실린 책 193. 반 레이 덴의 목판화가 실린 책 194. 발의 목판화가 실린 책 195. 바니 , 바로치 등의 동판화가 실린 책 196.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제작한 동판화가 실린 책 197. 도금한 작은 침대틀, 베르휠스트 198. 원본과 복사본을 포함한 뤼카스 반 레이 덴의 동판화가 실린 책 199. 전세계 대가들의 드로잉을 실은 책 200. 안드레아 만테냐의 귀중본 201. 대가들의 드로잉과 판화를 실은 큰 책 202.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큰 책 203. 기묘한 드로잉과 다양한 의상을 보여 주는 목판화와 동판화를 실은 책 204. 형 브뢰 겔의 판화를 실은 책 205. 우르비노의 라파엘로의 판화를 실은 책 206. 우르비노의 라파엘로의 매우 귀중한 판화를 실은 척 207. 안토니오 템페스타의 판화를 실은 책 208. 뤼카스 크라나흐의 동판화와 목판화를 실은 책 209. 안니발레 카라치 , 아고스티노 카라치 등의 동판화와 목판화를 실은 책 210. 안토니오 템페스타의 판화와 에칭화로 표현된 인물화를 실은 책 211. 안토니오 템페스타의 작품을 실은 큰 책 212.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큰 책 213. 골치우스와 뮐레르의 동판화를 실은 책 214. 우르비노의 라파엘로가 그린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 판화를 실은 책 215. 브라우베르의 드로잉을 실은 책 216. 티치아노의 거의 모든 작품을 실은 매우 커다란 책 217. 진귀한 자기와 베네치아산 유리 제품 218. 렘브란트가 그린 일련의 스케치가 포함된 골동품 책 219. 골동품 책 220. 렘브란트의 스케치가 실린 큰 책 221. 텅 빈 골동품 책 222. 작은 서양 주사위 판 223. 골동품 의자 224. 광물을 담는 중국 단지 225. 커다란 횐색 산호 덩어리 226. 조각상을 동판화로 옮긴 책 227. 헴스케르크의 모든 작품이 실린 책 228. 루벤스 등 대가의 초상화를 실은 책 229. 여러 대가들의 풍경화를 실은 책 230.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실은 책 231. 바구니 두 개 232. 춘화도를 모음집 233. 유명 화가들의 풍경화를 실은 책 234. 터키 건축물과 터키인의 삶을 묘사한 멜키오르 로르크 등의 그림을 실은 책 235. 렘브란트와 홀라르 등의 판화를 담아 놓은 동인도산 바구니 236. 렘브란트가 그린 최고의 스케치들을 실은 검은 가죽 양장 책 237. 흘바인, 한스 브로자머, 이스라엘 반 메켄엠의 판화가 등장하는 종이 상자 238. 렘브란트의 전작을 실은 또 다른 책 239. 렘브란트의 누드 드로잉을 실은 책 240. 로마의 건축물을 그린 최고 대가들의 드로잉과 풍경화를 실은 책 241. 초상화가 들어 있는 중국 바구니 ..... 253. 건축 드로잉을 실은 책 254. 얀 식스의 비극 <메데이아> 255. 자크 칼로의 <예루살렘 여행> 256. 렘브란트의 풍경화를 실은 송아지 가죽 장정 책 257. 렘브란트의 인물 스케치를 실은 책 257a.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58. 등근 접시 그림들을 실은 나무 장정 작은 책 259. 렘브란트의 풍경화를 담은 작은 책 260. 뛰어난 문자도안을 실은 책 261. 렘브란트의 조각상 드로잉을 실은 책 262.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63. 라스트만의 렌 스케치를 실은 책 264. 라스트만이 붉은 분필로 그린 스케치를 실은 책 265. 렘브란트의 펜 스케치를 실은 책 266.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67.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68.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69. 같은 작품을 실은 또 다른 책 270. 룰란트사베리의 대형 드로잉을 실은 책 271. 탁월한 대가들의 드로잉을 실은 책 272. 렘브란트의 스케치를 실은 4절판 노트 273.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축소본 274. 얀 리벤스와 페르디난트 볼의 작품을 실은 또 다른 판화집 275. 약간의 스케치 묶음 276. 큰 크기의 종띠 더미 277. 렘브란트의 그림을 모사한 반 블리트의 판화 상자 278. 의상실 칸막이 279. 철제 목가리개 280. 극락조와 부채가 들어 있는 옷장 281. 여러 가지 크기의 책 17권 282. 병정들의 모습을 실은 독일책 283. 목판화를 실은 독일책 284. 토비아스 스티머가 삽화를 그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285. 오래 된 성경 286. 작은 대리석 잉크스탠드 287. 모리스 왕자의 석고틀 골동품보관장이 있는 대기실 288. <요셉>, 아르티 반 레이 덴 289. 틀이 있는 판화 세 점 290. <성모영보제> 291. 풍경화(소품), 렘브란트 292. 풍경화(소품), 헤르퀼레스 세헤르스 293. <십자가에서 내려지다>, 렘브란트 294. 얼굴 그림 295. 시체 얼굴, 렘브란트 수정 296. <목욕하는 다이아나>(석고상), 아담 반 비아넨 297. 모델, 렘브란트 298. 세 마리 강아지, 티투스 반 레인 299. 그림책, 티투스 반 레인 300. <성모 마리아의 얼굴>, 티투스 반 레인 301. 달빛 풍경화(소품), 렘브란트 수정 302. 렘브란트의 <그리스도의 채찍형>을 모사한 그림 303. 여자 누드화(소품), 렘브란트 ...... 311.소나무 탁자 작은작업실 312. 골동품 무기와 관악기 33개 313. 인도의 무기 60개 314.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 13개 315. 활, 화살, 방패 등 13개 316. 하프와 터키식 활 한 개 317. 실물 크기의 손과 팔 주형 17개 318. 가지진 뿔 다수 319. 석궁과 철궁 네 개 320. 골동품 투구와 방패 다섯 개 321. 조롱박과 병 아흡 개 322. 바르톨트 벤과 그 아내의 두상 두 점 323. 그리스 고대작품의 석고 주형 324. 아그리파 황제의 조각상 325. 아우렐리우스 황제 상 326. 그리스도의 얼굴 습작 327. 뿔이 달린 사티로스의 머리 328. 시빌라 상(골동품) 329. 라오콘 상(골동품) 330. 대형 바다 식물 331. 비텔리우스 상 332. 세네카 상 333. 여성의 두상 서너 점(골동품) 334. 다른 두상 네 점 335. 작은 금속 대포 336. 다양한 색상의 고대 직물 다수 337. 7현금 338. 렘브란트의 소품 두 점 큰 작업실 339. 미늘창, 검, 인도 부채 등 소품 20개 340. 인도의 남녀 의상 다수 341. 거인의 두상 342. 몸통막이 갑옷 다섯 개 343. 목제 나팔 344. 두명의 무어인, 렘브란트 345. 어린 아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림 선반 346. 수사자와 암사자 가죽들과 다양한 색상의 외투 두 개 347. 다나에를 그린 대형 그림 348. 공작, 렘브란트 작은사무실 349. 크고 작은 그림 10점, 렘브란트 350. 침대틀 작은부엌 351. 백랍 주전자 352. 냄비와 프라이팬 다수 353. 작은 탁자 354. 찬장 355. 낡은 의자 다수 356. 쿠션 두 개 회랑 357. 흰 주발 아홉 개 358. 오지그릇 두 개 세탁실의 린네르 359. 남자 셔츠 세 개 360. 손수건 여섯 개 361. 냅킨 12개 362. 탁자보 세 개 363. 깃과 소맷부리 약간 마르흔 반 데르 묄렌, 발테르 L. 스트라우스, <렘브란트에 대한 기록>, 1979년 렘브란트와 당대의 사람들 렘브란트의 탁월한 능력은 일찍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음 기록은 동시대인과 제자가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수 있게 해준다. "당신을찬양라고환명한다." 총독의 개인비서 콘스탄테인 호이겐스는 렘브란트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1631년 에 라틴어로 쓴 호이겐스의 일기는 젊은 렘브란트에 대한 최초의 비평이자, 가장 열광적인 찬양이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대가로 받은 은전을 대사제에게 돌려주고 있는 회개하는 유다의 그림 은 다른 어떤 미술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탈리아의 모든 그림뿐 아니라 유사 이래 전승되어 온 아름답고 감탄을 자아낼 만한 모든 그림과 비교해도 그렇다. 이 그림에 등장하 는 다른 인물들은 제쳐놓고 우선 나는 절망에 빠진 유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격렬한 감정으 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은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아직 희망의 빛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 누더긴옷, 뒤틀린 팔, 피가 흐를 정도로 꽉 쥔 손을 보 라. 미친 듯이 몸을 내던져 무릎을 꿇은 유다의 온몸은 엄청난 고통으로 앞으로 굽어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전세계에서 제작된 가장 고매한 작품과 대조해 보고 싶다.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이전의 어떤 시나 그림도 이 작품과 비견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 라. 프로토게네스, 아펠레스, 파르하시우스가 설령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네덜란드의 방앗 간집 아들이-나는 이 글을 쓰면서 떨고 있다!-그림 속의 한 인물에 부여한 이 특별하고도 총체적인 풍부함을 결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렘브란트여 ! 당신을 찬양하고 환영한 다. 트로이나 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의 명성은 결코 자신의 고향을 떠나 보지 못한 채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한 네덜란드 젊은이의 명성을 능가하지 못한다. 물론 그의 조국이 부여한 명성은 말할 것도 없다. 콘스탄테인 호인겐스의 일기, 리하르트 프리덴탈의 <대가들의 편지>(1963년)에서 대가의 기법 렘브란트의 제자 베른하르트 카일이 11686년에 쓴 글.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기질이 남달랐던 이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데도 가장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 는 안쪽 선이나 바깥쪽 선 등 경계를 나타내는 윤곽선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거칠고 반복 적인 붓질로 그의 취향에 따라 강력한 힘을 지닌 어두운 색만을 칠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짙은 어두운 색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거의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러한 붓질 로 그는 매우 천천히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을 들여 천천히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이 같은 채색을 통해 얻은 엄청난 명성 덕분에 (따라서 드로잉은 제외된다.) 수많은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렘 브란트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면 그 앞에서 2∼3개월 동안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의 그림 그리는 속도가 느린 이유는 처음에 그린 그림이 마르면 곧바로 그 위에 다시 덧칠을 해 그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때로는 거칠게 또 때로는 부드러운 붓질이 계속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감의 두께가 손가 락 굵기의 반 이상이 될 정도였다. 이런 까닭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려 있지만 완성 작품 수는 매우 적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장된 태도는 전적으로 렘브란트의 생활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는 매우 변덕스러웠고 모든 사람을 경멸했다. 그는 평민적이고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못마땅해했으며 항상 단청치 못한 더러운 옷을 입었다. 그 옷은 붓을 닦거나 하는 따위 일을 하기 위해 입곤 하던 작업복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최고 권력을 지닌 왕이 행차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왕이 그를 보려면 렘브란트가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계속 들락날락해야만 했다. 필리포 발디누치, 탄크레드 보레니우스가 서문을 쓰고 주를 단 <렘브란트의 선별작>(1942 년)에서 렘브란트를 보는 두 사람의 화가 몇 세기 동안 화가들은 렘브란트를 스승으로 여기며 그의 그림을 연구했다. 그의 작품은 참고와 도전의 대상인 동시에,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과장의 이점, 외젠들라크루카가 렘브란트의 작품을 관찰하다 1851년 6월 6일 의상에 가려진 부분까지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록 그가 이러한 정교한 묘사를 줄곧 해온 화가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습작을 통해 한 화가를 평가하는 데 이 기준만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자연을 진실 되게 묘사한다. 극적인 힘 혹은 인상의 숙련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렘브란트가 작업실에서만 일했더라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 다. 언젠가는 렘브란트가 라파엘로보다 훨씬 위대한 화가라는 것인 증명될 것이다. 나는 건전한 미술학도들이 혐오스러워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 을 이 불경스러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살아갈수록 진실이란 매우 아름다운 것인 동시에 매우 드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렘브란트에게 없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괜찮 다면, 라파엘로의 절대적인 숭고함이다. 라파엘로의 숭고함이 선과 인물의 당당함에 깃들여 있다면, 렘브란트의 그것은 인물의 신 비로운 해석과 그들이 지닌 표정과 몸짓의 자연스러움에 깃들여 있다. 어떤 이는 특정 인물 의 위대성에 어울리는 웅장한 강조 때문에 라파엘로를 더 좋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 의 조소를 무시하고 말한다면, 그리고 참되고 성실한 취향에 대해 말한다면, 이 위대한 네덜 란드인이 신중한 페루지노의 문하생보다 더욱 천성적인 화가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1853년 4월 28일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치러야 한다. 나도 그러한 효과를 많이 개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효과를 산출했다고 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그림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렘브란트와 우리의 동족인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의 작품들이 포함된다. 과장 은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린 M. 브뤼야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했다. 렘브란트가 그렸더라면 얼굴에 좀더 치중했을 것이며 손과 의상은 겨우 알아볼 정도로 처리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눈에 비치는 모든 대상을 그것 의 중요도에 따라 제시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이것이 내가 렘브란트에 깊이 심취해 있는 이 유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식으로 그리면 매우 어색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측면에 서 나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파올로 베로네제는 회화의 모든 장르를 통 틀어 가장 탁월한 묘사가이다. 이 점에서는 루벤스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대상을 선택적으 로 과장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표현적인 힘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루벤스가 격정 적인 장면을 그리는 데에는 영광스런 파올로보다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에는 뭔 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다. 이러한 그림에서는 렘브란트의 그림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탁월한 방법은 덜 중요한 곳에 적용되어 모호함만 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인위적인 측면을 철저히 감추고 문제가 되는 대상을 정확하게 부각시키 는 그림이다. 이러한 그림 역시 노력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만족시키는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보다 훨씬 더 섬세한 것이어야 한다. 1854년 7월 5일 렘브란트 이후로 회화에서 주변 인물과 중심 인물의 조화가 등장했다. 내 생각에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러한 주제로 대가들의 작품들을 서로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854년 7월 29일 티치아노와 렘브란트, 그리고 푸생의 그림에서는 일반적으로 풍경 이 인물과 조화를 이루 고 있다. 렘브란트의 경우 배경과 인물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 그의 그림은 구석구석 볼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우리는 자연 전체를 즐긴다. 그와 같이 렘브란트의 그림도 어느 한 부분만을 독립시켜 볼 수 없다..... 티치아노나 렘브란트의 작품을 모사할 때 우리는 이 대가들이 설정한 빛과 그림자의 관계 를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그림을 재생하거나 세월에 손상된 부 분을 복구한다. 하지만 대가들이 자신들이 실제로 그렸던 그림 대신에 연기에 절은 이 엉터 리 그림을 본다면 매우 괴로워 할 것이다. 1857년 10월 29일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그림에서는 생략이 펄요한 세부를 적절히 생략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없다. 렘브란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플랑드르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은 확실히 이보다 낫다. 렘브란트에게 이러한 생략은 계산된 결과만큼 직관적이다. 그의 변덕스러운 에칭 바늘 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조차 피상적인 묘사만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유화나 판화를 포함해 쉽게 그려진 것이건 투여된 노력이 기교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건 간에, 네덜란드와 플랑 드르 화가들의 작품에 상상력이 포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일기>, 1822-1863년 반 고흐의 반응 1877년 9월 18일 약간의 여가가 생겨 트리펜호이스에 있는 렘브란트의 에칭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것은 오래 된 계획이었다. 나는 아침에 도착해 기쁘게도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언젠가는 테오와 함께 이 작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테오야, 하루나 이틀 정도를 이러한 일에 할애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렴. 종종 밤에라도 초롱을 들고 먼 거 리를 가서 병들거나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우리 아버지, 그래서 그들에게 고통의 밤 에도 불을 비추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렘브 란트의 그림을 보면 어떨까? 렘브란트의 <이집트로 도피>나 <예수의 매장>같은 에칭화를 보면 그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트리펜호이스에 소장된 그림은 정말 화려하다. 거룩하게 황혼이 질 무렵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분은 그들 가운 데 자리하신다. 사물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따르는 자는 거룩하다. 렘브란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물들로부터 얻은 마음속의 보화로부터 그는 세피 아(Sepia, 짙은 갈색의 수채화 물감) 드로잉, 목탄 드로잉, 잉크 드로잉 등을 그릴 수 있었 다. 영국 박물관에 있는 이 드로잉들은 베다니의 집(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곳) 을 표현하고 있다. 어스름이 내리는 방에서 품위 있고 인상적인 주 예수의 모습이, 황혼이 투과되는 창문을 배경으로 어둡고 경건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의 발에는 마리아가 앉아 있다. 그녀는 좋은 자리에 있다. 누구도 그녀를 그곳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마르타는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는 불을 지피거나 그 비슷한 일 을 하고 있다. 나는 이 드로잉과, 이 드로잉이 나에게 건네는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이며 삶의 광명을 얻을 것이다." 1877년 10월 30일 나는 더 이상 늦은 밤에 깨어 있을 수 없다. 아저씨가 금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렘 브란트의 에칭화 아래쪽에 씌어 있던 문장을 기억한다. "한밤중에는 빛이 힘을 발산한다." 나는 작은 가스등을 밤새 켜 놓고 있다. '한밤중에' 나는 종종 누운 채로 불빛을 쳐다보며 다음날 할 일의 계획을 짜고 어떻게 작업을 최선으로 이끌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1885년 10월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는 완벽하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리고 한 손에 불을 들고 그린 <유태인 신부>는, 비록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 만, 끊임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친근한 작품이다. 보라! <직물 제조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에서 렘브란트가 얼마나 실물에 충실한가를.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그림에서와 마찬 가지로 최고의 고상함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초상화의 경우처럼 실물과 똑같 이 그릴 필요가 없을 때는 얼마든지 대상을 관념화했다. 그는 시인 다시 말해 창조자가 되 었던 것이다. <유태인 신부>에 존재하는 렘브란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얼마 나 그 그림을 잘 이해했던가.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죽어야 한다." 이 얼 마나 숭고한 감정과 깊은 뜻을 지닌 말이며 적절한 평인가. 프란스 할스와 그의 그림으로 말하면 언제나 '바닥'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너무나 깊은 신비감을 주 기 때문에 그가 표현하는 대상은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마술 가'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이 말은 그리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85년 10월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의 부분작, 그렇다, 이 그림 앞에서도 나는 놀라 멍하니 서 있 었다. 너는 살색을 기억할 수 있니? 발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땅의 색이었다. 프란스 할스의 그림에서도 살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땅의 색이었다. 최소한 자 주 그렇다. 가끔 나는 의상의 색조와 얼굴의 색조가 이루는 대조를 말하고 싶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렘브란트, 이스라엘스는 언젠가 컬러 리스트(색채의 효과를 중요시하 는 화가)라기보다는 하모니스트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검은색과 횐색의 사용을 허용했는지 금지했는지 알려 다오. 이 두 색은 금 단의 과일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885년 12월 어제 처음 보는 렘브란트 작품을 대형 사진으로 보았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가 슴, 목, 턱, 코끝에 빛이 비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붉은 깃털 같은 장식이 달린 커다 란 모자 그림자에 이마와 눈이 가려 있었고, 붉은색, 혹은 노란색으로 기억되는, 가슴이 깊 이 팬 상의가 그려져 있었다. 배경은 어두웠다. 사진은, 사스키아는 무릎에 앉아 있고 자신 은 포도주잔을 치켜 들친 있는 자화상에 등장하는 렘브란트의 신비한 미소를 연상시킨다. 최근 내 머릿속에서는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의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내가 그들의 그림을 많이 봐서가 아니라 주변에 당시 사람들을 연상시켜 주는 많은 유형의 인물들이 있 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무도장에 가서 여자들과 선원, 군인들의 얼굴을 본다. 그곳에는 20-30상팀을 내고 들어와, 독주는 못 마시기 때문에 한 잔의 맥주를 대신 하면서 저녁 내내 즐기는 사람 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그곳에 간다. 모델을 충실히 그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많은 발전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생각의 요지를 숨김없이 표현하려면 진실한 자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너는 충분 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시골 아낙네를 그렸다면 그림 속의 인물은 시골 아낙네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 지로 내가 창녀를 그렸다면 나는 그것이 창녀답기를 원한다. 이런 이유로 렘브란트가 그린 창녀의 얼굴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렘 브란트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진지함으로 신비스러운 미소를 대단히 아름답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의 마술가이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것이며, 내가 본질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다. 1890년 5월 렘브란트의 그림을 연구할 것 같다. 특히 <기도하는 남자>의 밝은 노랑에서 보라에 이르 는 색조의 변화를 말이다. 빈 센트 반 고흐, <빈 센트 반 고흐의 서한> "그는 밤으로 낮을 그렸다" 프랑스 화가 외젠 프로망탱은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이기도 했다. 1876년 발행된 <옛 거장들>에서 그는 렘브란트와 <야경>에 여러 장을 할애했다. 트리펜호이스에 있는 <야경> <야경>에는 아무 매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아름다운 회화예술 작품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야경>은 놀랍고도 당혹 스럽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강요할 뿐, 우리를 압도하는 매력이라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눈에 이 그림은 비위를 거스른다. 우리 시각은 분명한 형태와 맑은 사유, 그리고 분 명하게 규정된 대상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와 같은 익숙한 논리와 정직함을 공격 한다. 이 그림의 무엇인가가 이성과 마찬가지로 상상은 반쪽짜리이고, 우리의 마음에 가장 쉽게 설득되는 것은 오랜 습관에 종속된 것이며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경고 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그림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는 여러 원인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혐오스러운 빛이 있다. 우중충한 나무 액자는 그림을 음침하게 만드는 동시에 분명한 의미 와 청동및 색조, 혹은 힘을 약화시키며, 대신 그림을 실제보다 더욱 뿌옇게 보이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제약이다. 이는 캔버스를 적당한 높이에 걸지 못하게 만드는 동시에, 원근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과도 상치되므로, 감상자는 그림을 매우 가까 이 에서 수평으로 보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작품? <야경>은 옳건 그르건, 이해할 수 없는 작품으로 간주되며 이 점은 이 그림에 커다란 명 성을 갖다 주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이 그림의 장점을 조사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의미를 캐묻는 일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 그림은 하나의 수수께끼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이 이다지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문자적인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의 제목으 로 충분하다. 우선 우리는 이 작품의 이름과 등장인물들의 직업을 알고 있다. 화가가 그림 아래쪽 꽃무늬 장식틀에 조심스럽게 그들의 이름과 직업을 써넣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들은 화가의 환상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었을지라도 기본적인 요소들은 실제의 삶에서 유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등장인물들이 무기를 들고 걸어 나오는 이유를 모른다. 그 러나 이것은 그리 심각한 미스터리는 아니다. 렘브란트가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데 실패했다 면, 그는 분명해지는 젓을 원하지 않았거나, 분명히 표현하는 법을 몰랐을 것이라고 나는 확 신한다. 그리고 무능력, 고의적인 침묵 등 다양한 가설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이 그림이 몇 시경의 정경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 이는 가장 논란이 많은 동시에, 가장 쉬운 문제이다. 앞으로 뻗은 대장의 손이 외투에 드리운 그림자를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렘브란트가 언제나 빛을 다음과 같이 처리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 분하다. 밤의 어둠은 그의 작품의 감초이다. 그림자는 그가 늘 사용하는 시적 언어이자 극적 표현을 낳는 일상수단이다. 초상화, 실내장식, 전설과 이야기의 묘사, 풍경화, 에칭화, 유화 어디서나 밤으로 낮을 그렸다. 장면은 불확실하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이 작품의 위대함은 구도가 아니다. 작품의 주제를 직접 선정 했던 것도 아니었고, 작품 착수 방식은 첫 소묘에서부터 그의 능동적 행동이나 명료성을 한 단계 고양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장면은 불확실하고 행동은 비현 실적이며, 관심의 초점은 매우 분산되어 있다. 첫 소묘에서부터 결함이 있었던 탓에 그림이 이해되고 배치되고 효과를 산출하는 방법에 처음부터 우유부단함이 깃들여 있었다. 어떤 이 는 걷고 어떤 이는 멈춘다. 어떤 이는 머스킷총에 화약을 재고, 어떤 이는 총을 쏜다. 북을 치며 얼굴을 내민 이는 연극의 기수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인물들은 초상화에 걸맞은 정지 상태에 고정되어 있다. 인물들은 비례에 맞지 않는다 결국 전체적인 구도에는 진실된 면이나 회화적인 독창성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물 하나하나는 어떤가? 내게는 어떤 인물 묘사도 탁월하지 않다. 첫눈에 알 수 있는 인상은, 명백한 이유도 없이 인물들 사이에 비례가 잘못 설정되어 있 으며, 각 인물은 부적절하며 인물에 부여된 성격에서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다. 대장은 너무 키가 큰 반면 부관은 키가 너무 작다. 훨씬 키가 큰 코크 대장과 비교해도 그렇지만 다른 부수적인 인물들과 비교해 봐도 부관의 키는 너무 작다. 때문에 조숙한 수염 을 달고 있는 이 작은 젊은이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초상화의 관점에서 인물 하나하나를 봐도 성공적이라 보기는 힘들다. 얼마나 닳았는가도 미심쩍지만 관상학적으로도 그리 매력 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1642년 이미 자신의 능력을 온 세상에 떨친 초상화가의 작품 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반은 여성이고 반은 반딧벌레인 존재 이 그림에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추측을 좌절시키는 삽화적인 인물이 하나 있다. 그림의 테마와 무관한 이 인물의 생김새, 의상, 이상한 빛에는 마술이나 낭만적인 의미, 더 나아가 이 그림과 상치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인물은 작은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하다. 마녀처럼 생겼으며, 혜성 같은 머리카락과 장식이 달린 머리채를 했다. 그녀는 병사들 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가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세부묘사가 잘 되지 않은 그녀는 허리에 흰색 수탉을 한 마리 매달고 있다. 이것은 돈 주머니로 보일 수도 있다. 군중 틈에 섞인 이유가 뭐든 그녀는 전혀 인간 같은 모습이 아니다. 거의 색도 없고 생김 새도 없다. 생김새를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나이도 불분명하다. 그녀의 외관은 인형 같고 걸음걸이는 기계적이다. 거동으로 보면 거지같지만 온몸에 다이아몬드를 걸치고 있다. 또한 작은 여왕 같은 분위기와 넝마 같은 의상이 공존하고 있다..... 그녀는 희미한 불처럼 깜빡거 리며 빛을 내고 있다. 가까이서 관찰한 수록 형체가 없는 그녀의 존재를 나타내는 미묘한 선을 파악하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우리는 그녀를 둘러싼 인광을 보게 된다. 이것은 현실의 빛도, 렘브란트의 팔레트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빛도 아니다. 인광은 그렇지 않아도 이상 한 그녀의 얼굴에 마녀 같은 모습을 부여해 준다. 캔버스의 어두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위치는 어두운 붉은색 의상을 입은 남자와 검은색 옷을 입은 대장의 중간이면 서 약간 낮은 곳이다. 이 위치는 그녀가 내뿜는 빛이 주변과 놀라운 대조를 이루기에 가장 효과적인 곳이다. 이 돌발적인 빛은 그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컬러리스트 렘브란트 특히 오늘날 모든 사람의 견해가 일치되는 부분은 그림의 채색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눈 부시다' '눈이 멀 정도이다' '믿을 수 없다'라는 평가가 따랐다. (독자들은 이 말이 폄하를 위 해 사용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림의 제작도 일반적으로 대가적 이 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점점 미묘해지고 있다.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색을 골라 이 것을 조화로운 관계 속에 능숙하고도 정확하게 칠해 넣는가? 이것은 색이 밝든 어둡든, 색 조가 풍부하든 단조롭든, 전문용어로 말해 좀더 둔한 '투박한' 것이든(실제 색에 가깝든) 아 니면 색조에 변화가 있는 '혼합된' 것이든 상관이 없다. 결국 색의 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화가의 기질과 취향 그리고 적합성의 문제이다. 이 그림에 추상적인 빛은 없다 렘브란트는 그러한 방법으로 작업했을까? <야경>을 한번 보기만 해도 그 반대라는 사실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두 군데의 순색과 두 군데의 붉은색, 그리고 한 군데의 어두운 보라색과 한두 군데의 작렬하는 푸른색을 제외하면 거의 색이 없는 이 격렬한 캔버스에는 유명한 컬러리스트의 팔 레트와 그들이 사용한 일반적인 기법과 상응하는 것이 전혀 없다. 얼굴은 인간의 혈색을 표 현했다기보다 겉치레로 칠했다는 인상을 준다. 얼굴들은 붉은색이나 포도줏빛을 띠거나 아 니면 창백하다. 하지만 이 창백함마저도 벨라스케스가 그의 인물에 부여한 실제적인 창백함 이 아니다. 더욱이 프란스 할스가 인물의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 하나하나에 피색, 노란 색, 회색, 보라색을 미묘하게 배합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미 말했듯이 의상 모자, 다 양한 장신구에서 색채는 정확하지도 표현적이지도 않다. (그 점에서는 형태도 마찬가지이 다.) 예를 들어 붉은색은 전혀 치밀하지 않은 붉은색이며, 그 점은 비단에든 공단에든 무차 별 적용된다. 탄알을 장전하고 있는 호위병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다시 말해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붉은색으로 입고 있다. 진정한 컬러리스트라면 결코 놓치지 않았을 이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의 관상학적 특성, 즉 그의 본성과 실체에 한순간이라도 렘브란트가 주목했 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흔히들 붉은 옷을 입은 이 사람이 빛과 그림자 속에서 매우 논 리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색조 변화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벨라스케스나 베로네제, 티치아노, 조르조 네, 물론 루벤스도 이 그림의 구성과 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 가에게 부관이 입고 있는 의상의 형태와 색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노란색이 섞 인 흰색인가? 아니면 너무 옅어서 흰색처럼 보이는 노란색인가? 진실은 이렇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빛을 표현해야만 하는 이 인물에 렘브란트는 빛을 입힌 것이다. 명도 처리는 매우 능숙하게 색채의 처리는 매우 부주의하게 말이다. 여기에서 컬러리스트로서 렘브란트가 드러난다. 추상적인 빛은 없다. 빛은 그 자체로는 아 무것도 아니다. 빛은 반사되거나 흡수되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지고 발산되는 색채의 결과 물이다. 따라서 매우 어두운 색조도 밝은 빛을 발할 수 있고, 또한 매우 밝은 색조도 그렇지 못할 수가 있다. 컬러리스트에게 빛의 표현은 오로지 그것을 어떤 색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것 은 빛과 색을 하나로 만드는 명암의 농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야경>에서 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명암의 농도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빛 속으로 사라 졌다. 그림자는 검고 빛은 희다. 모든 것은 밝거나 어둡거나 둘 중하나이다. 즉, 채색의 원칙 이 적용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빛을 발하거나 어두워져야 한다. 키아로스쿠로 드디어 이 그림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논할 순서이다. 이것은 렘브란트가 개척한 새로 운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위대한 원동력이다. 나는 렘브란트가 사물을 바라보는 고유한 방 법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키아로스쿠로라 불리는 기법이다. 어느 누구도 이 기법을 그렇게 지속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보다 도 불가사의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가리워진 동시에 가장 생략된, 그리고 가장 암시적 인 이 기법의 이름은 화가들의 용어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에 속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기법은 다른 무엇보다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빛과 안개와 베일과 신중함이다. 이것은 잘 포착되지 않는 사물에 매력을 부 여하고 기묘함을 자극하며, 지적인 사유에 우아함을 더해 준다. 이것은 느낌과 감성, 불확실 한 것, 규정하기 힘든 것 무한한 것, 그리고 꿈과 이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실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보고, 느끼고, 묘사하는 이 기법의 결과물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세계는 언제나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에 선은 사그라지거나 없어져 버리고 색은 증 발해 버린다. 더 이상 엄격한 윤곽선에 가두어져 있지 않은 모델링(modelling, 그림에서 대 상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일)에서 붓질은 덜 명료해지고 표면에는 물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숙달되고 민감한 손에 그것은 가장 사실적이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온갖 기교를 지닌 그 손은 이중의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부여한다. 그 하나는 실제에서 부 여받은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의 전달에 근원을 둔 생명이다. 요약하면 여기에는 캔버 스에 깊이와 거리를 부여하고, 가깝게 하거나, 위장하거나, 분명히 묘사하거나, 진실을 상상 속에 묻어 버리는 여러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키 아로스쿠로라 불리는 예술이다. 상상의 빛 렘브란트는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빛의 도움으로만 색을 칠하는 것과 빛을 통해서만 드로잉 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든 결점을 이야기하든 혹은 의심스러운 것이든 명백한 것이든, 그의 작품에 퍼부어진 수많은 비평들은 하나의 단순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가 빛에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또는 그림의 주제는 그것을 요구하고 허용 했을까, 아니면 거부했을까? 만약 첫번째라면 작품은 작품이 지닌 정신의 결과이다. 이 경우 작품은 숭배되어야 한다. 두번째라면 작품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작품은 언제나 논란의 대 상이 될 것이고 잘못 이해되어질 것이다. 사물의 빛과 어둠을 통해서만 주제를 묘사했던 렘브란트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야경> 에..... 더 이상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젠 프로망탱, <옛 거장들>, 1876년 문필가들이 본 렘브란트 렘브란트도 시인의 환상에 영향을 미쳤다. 모호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작품은 시인들에 게 신성한 느낌은 물론 불경스러운 느낌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동일한 불안에서 생성된 두개의 다른 표현이었다. 폴클로델, 빛의 신성함 회화가 의식이나 장식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현실을 바라 보며, 의미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기호와 상징의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회화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이다, 이 네덜란드의 화가는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전 의 기법과 경향에 자신의 그림을 종속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사물을 선별하고 포착하 는 눈이자, 그림을 그리는 거울이었다. 그가 수행한 모든 것은 '성찰'에서 나왔다. 그가 우리 에게 제시하고 있는 모든 인물은 돋보기 거울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듯하다. 그림자의 농담법 중심의 초점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명암의 변화, 강렬함과 집약된 주의력에 상응하는 엷거나 정확한 세부, 전체와 관련되어 빛을 발하는 지점을 주의해 보자. 이들은 반짝이는 효 과와 농담법, 반사와 반향, 허공과 공간의 중요성 그리고 눈을 유혹하는 대상으로부터 해방 된 침묵을 기묘한 방법으로 일깨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렘브란트가 홀로 창조하고 실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뒤쪽에서 빛을 비추어 캔버스에 영혼을 부여하는 기법과, 빛에 노출된 얼 굴의 시선을 통해 빛에 응답하는 방법을 시도한 최초의 사람도 유일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다른 화가들이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을 때 그는 대가적인 권위와 충만한 힘을 가지고 이 기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이러한 초상화들은 역사가 나 윤리학자의 관점으로 연구되고 다듬어진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남자나 여자는 밤과 친숙하다. 이 인물들은 우리를 향해 밀고 들어온다기보다는 두꺼운 매 개물에 막혀 멈추어 서 있다 기억으로 생성된 빛에 휩싸여 있는 이 인물들은 자기 인식에 다가가고 있다.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 창조와 재창조의 힘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화가의 내면에서 나와 반향을 일으킨다. 소멸로 이르는 길에서 그들은 우회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약한 기억이 더듬거리며 찾아내고자 하는 경원성을 성취한다. 하나하나의 인물상을 고립시키고, 개성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이 인물상들에 새로운 삶을 부여한다. 그것은 이 초 상화가 일상에 묻힌 상황과 개성을 변형시킨 결과이다. 그리하여 렘브란트의 유화와 에칭화에서는 특별한 분위기가 생성된다. 그것은 꿈, 최면상 태, 갇힌 듯한 상태, 과묵함, 타락한 듯한 밤의 느낌, 어둠에 집중하고 있는 날카로운 정신이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무디어져 간다는 느낌 같은 것이다. 이 위대한 네덜란드인의 미술 은 더 이상 '지금'과 '여기'라는 시공간적인 확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폭발한 이미지이며, 감각의 축제이자, 영원성을 획득한 순간적인 기쁨과 색채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은 보여지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 기억되기 위한 방문이다. 우리는 모델의 몸짓이나 태도, 그 리고 집단 속에서의 상호작용에 화가가 함께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림의 표면과 '여 기'와 '지금'을 넘어선 화가의 회고적인 여행은 불확실하게 연장되며, 여행의 끝은 그림의 경 계선이 아니라 불러일으켜진 반향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극은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리고 회상은 겹쳐진 기억의 층을 교란시키고 연관성 있는 다른 기억을 불러낸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서는 누구도 이 그림이 영속적이라거나 분명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이 그림은 불확실한 창조물이자 하나의 현상 과거로의 기적적인 회귀이다. 한 순간 장막이 올려졌다가 내려져 버린다. 장면은 사라지고 바뀌어진 빛은 기적을 말소시킨다. 한순간 전에 그곳에 있던 방문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순간이다. 이 마술 같은 출현 때문에 방문자가 아직 거기 있는 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기껏 그가 살아 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말한 조수현상과 비교할 수 있다. 조수는 썰물이 시작될 때에 이미 모든 부분에서 파도의 방향이 바뀌고 있 다는 충만하고 완벽한 느낌을 준다. 조수는 네덜란드를 규정하는 왕복운동의 요소이다. 그러 나 렘브란트가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를 부풀게 하고 우리의 실체를 꿰뚫을 때 사용한 주제 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다. 렘브란트에게 빛은 수액이자, 정신의 지지대인 동시에 발현 이다. 그가 얼마나 빛을 사랑했던가! 빛의 움직임과 효과, 하늘의 전 영역에서 열리거나 닫 히는 광경, 우리의 내면과 사유의 힘을 방문하고, 가로지르고, 꿰뚫어 보는 햇빛의 가장 적 절한 각도를 그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던가! 이집트인과 그리스인은 영구적인 석조건축 과 지적 사유를 통해 명백하고도 거침없는 형태와 멀리 존재하는 신성한 신과의 대화를 표 현하고 있다. 반면 렘브란트의 대가적 면모는 광선과 시선, 그리고 시선의 아래에서 삶과 언 어를 부여받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시선은 명료하게 만들어 주는 것 이라기보다는 그림의 인물과 대상에 조화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저하면서도 빠른 걸음걸이로 이 놀라운 미술관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야경> 으로 알려진 거대한 작품 하나만 걸려 있는 중앙홀에 들어섰다. 네덜란드를 가로질러 암스 테르담의 한가운데 자리한, 그리고 네덜란드 전성기의 한가운데 서서 영광을 던져 주고 있 는 이 그림은 내가 몇 년 전에 프로망탱의 책을 애태우며 읽은 후 꼭 찾아가서 보기로 결심 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우선 가장 심오한 정신이 축적하고 정제한 '금'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정화되고 집약된 요소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유인 '빛'에 가벼운 충격을 받는다. 심리적 충격에서 회복되어 눈을 다시 한번 뜨고 보는 순간 구도가 주는 충격을 만났다. 중앙에 위 치한 두 명의 주요한 인물을 보자. 한 사람은 지배자로서 검은색 옷에 붉은색 장식띠를 두 르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이 사람이 입은 옷을 어떻게 말로 옮길 것인가?-뒤쪽의 나머 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발은 액자틀 모서리에 걸쳐져 있다. "한 걸음 더." 지배자의 몸짓은 빛을 발하고 있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마치 그들이 나온 어두 운 뒤쪽 문을 지나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 버릴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무장을 한 채 낮선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아무 의미 도 없는 것일까? 그들 역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 화가는 앞쪽에서 뒤쪽으 로 명암을 변화시키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뉘앙스를 부여한다. 우리는 내딛은 첫발과 준비를 하고 있는 다른 발의 자세를 흉내내어 보기까지 했다! 깃발이 펄럭인다. 북이 울린다. 아니 울리려 하고 있다. 대포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폴 클로델, <네덜란드 미술>, 1935년 과시, 노쇠, 그리고 선 위대한 선. 나는 이야기를 빨리 진행하기 위해 이 단어를 말한다. 그의 마지막 초상화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지고한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생동물조차 나의 선을 인식할 것이다." 윤리성이란 원동력은 그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했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강요되어 있고, 어쩌면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 을 나르시스적인 태도로 거울앞에 앉은 한 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느 작품과 함 께 제시된 초상화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기법적 발전과 이러한 발전이 그에게 끼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으리라. 1642년 이전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자기 과시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과시는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동양적인 초상화나 '성서'적 장면을 담은 그림에서는 풍부한 장식과 장신구에 호화로움이 넘쳐난다. 예레미아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값비싼 양탄자 위에 서 있다. 또한 바위 위에 놓인 항아리가 금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렘브란트가 속된 의미의 부를 창출하고 그리며 기쁨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스키아의 모습을 담은 <플로라로 변신한 사스키아>나, 호화스러운 차림을 하고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힌 채 잔을 쳐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부터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그렸다. 그들은 넝마를 입었지만 영예롭게 표현되었다. 화려한 것을 꿈꾸던 때에도 그는 비천한 사람의 얼굴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드문 예를 제외하고 그의 붓끝에서 나오는 관능은 얼굴을 그리려 할 때는 뒤로 물러났다. 젊은 시절에조차 그는 세월의 때가 긴 얼굴을 더 선호했다. 할스와 달리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사실 묘사에서 처진다는 평이 많다. 다시 말해 그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차이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특징 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모델은 '선험적으로' 약하지도, 비겁하지도, 크지도, 작지 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 어느 것이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델의 특징은 미리 정해 져 있지 않다. 웃고 있는 티투스-그는 렘브란트의 아들이다-를 제외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델 은 없다. 모든 얼굴은 극적이고 힘든 모습이다. 무리 지어 하나의 태도에 집중하는 인물들은 거의 언제나 폭풍 전의 고요함을 표현한다. 그들은 무거운 운명을 지고 있다. 그들은 그 운 명을 정확히 평가하면서 순간에서 순간으로,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추적하고 있다. 하지 만 렘브란트 자신의 드라마도 그가 관찰한 세계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자유 를 위해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처 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동시에 상처로부터의 도피처를 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자화상에서 상처받은 자를 보지만,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자신만만함을 느끼게 된다. 렘브란트? 그가 가장 초기에 그린 몇몇 무모한 초상화를 제외하면 우리는 그의 초상화에 서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진실을 추적하는 고뇌에 찬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각이 지닌 날카로움을 냉엄하게 거울을 응시하려는 충동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때때로 그는 거의 사악하거나 허영에 찬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딱딱한 그의 표정은 부드러워진다. 거울 앞에서의 나르시스적인 만족은 근심과 감동으로, 그리고 마침내 겁에 떨 고 있는 모습으로 변해 간다. 잠시 동안 렘브란트는 헨드리켸와 같이 살았다. 이 경이로운 여인은 그의 관능과 부드러 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자화상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심리 적인 징표를 읽을 수 없다.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선한 분위기 같은 것이 도래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혹은 초연함일까? 무엇이라 부르든 여기에서는 마찬가지이 다. 생의 종말이 다가오면서 렘브란트는 선해졌다. 자기 방어를 위한 가면은 벗겨졌다. 사악함 이 세상 앞에 쳐 놓은 그 장막 말이다. 사악함과 모든 형태의 공격성, 그리고 유머, 욕망, 에 로티시즘, 허영 등 우리가 성격의 문제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장막을 거두고 세상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선함 혹은 초연함은 그가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규 범을 따르기 위해(예술가는 포기하는 순간에만 믿음을 갖게 된다.), 혹은 약간의 미덕을 만 들어 내기 위해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특질이라 부를 만한 것에 그가 격정적으로 심 취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세계에 대해 좀더 순수한 시각을 갖고 좀더 진실하게 작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그가 자신이 선한지 악한지, 혹은 심술궂은지 인내심이 많은지, 욕심 이 많은지 관대한지,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유일한 과제는 하나의 눈과 하나의 손이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그의 마지막초상화에 거의 상처 입은 채로 나타나는 순수함을 쟁취했다. 1666-1669년에 암스테르담에는 극단적인 삶을 영위하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죽은 듯이 침대에서 이젤로, 다시 이젤에서 세면실로 오갔다. 그는 세면실에서 더러운 손톱 을 한 손으로 거친 스케치를 그렸다. 그것은 우둔함과 진배없는 잔인한 선함이었다. 주름진 손은 붓을 들어 붉은색과 갈색을 묻히고 눈은 대상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지성은 아직 희망 이 사라지지 않은 세계로 눈을 이끌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의 마지막 자화상에서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다. 부드럽게 말이다. 그는 화가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상에서 캔버스로 옮겨가는 눈, 작은 물감통에서 캔버스로 옮겨가는 손의 동작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화가는 그곳에서 분명하고도 조용한 손의 움직임에 몰입해 있었다. 조용하게 또 가는 흔 들림 속에서 모든 과시와 허영, 그리고 강박관념이 변해 갔다. 법적으로 그것이 전부였다. 서명의 장난 덕분에 모든 것이 헨드리켸와 티투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렘브란트가 가진 것 은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뿐이었다. 이제 막 한 사나이가 그와 작품을 끝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쓰레기 하치장의 지불 권뿐 이었다. 그러나 그전에 바로 그전에 그는 다시 <돌아온 탕아>를 그려야 했다. 그는 광대극 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었다. 장 주네, <렘브란트의 비밀>, 1958년 미술사가와 렘브란트 네덜란드, 키아로스쿠로, 역사, 종교, 신화 등 이 모든 것이 렘브란트를 연구하는 미술사가 들에게 문제가 된다. 그의 전설과 신비스러운 개성은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해답을 불가능하 게 만든다. '렘브란트는, 세계를 종결할 수 없는 드라마로 다뤘다' 기본적으로 모든 네덜란드인은 화가로 탄생한다. 그들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이 타고 난 재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발전되고 실행에 옮겨져 단지 열광의 한 순간과 짧은 노력 의 분출을 한두 세대에 걸쳐 추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네덜란드처럼 그 역사 와 땅이 삶을 그리는 화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은 없다. 물론 렘브란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수천 명의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로 삼았던 것을 렘브란트는 상상력의 일차 재료로만 사용했다. 또한 다른 화가들이 사실을 보았던 곳 에서 렘브란트는 숨겨진 연관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불가사의한 감수 성에 결합시켰다. 또한 그는 보편적인 창조물에서 주의 깊게 추출한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 를 위한 계획으로 변화시켰다. 그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그에게 무관심 할 때, 그리고 대중의 머리가 그의 이상한 관 점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는 대중의 바깥에 존재했다. 때로 그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적대 감을 불사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의 언어로 이야기를 건넸고,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또한 대중이었다. 나아가 그는 고통의 근원을 찾는 자신을, 그리고 그의 이해와 사랑과 증오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과 열정을 다스리고, 더 나아가 감정과 열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내부 에서 세상의 다른 이미지와 섞기 전이었다. 그후에야 그는 비로소 감정과 설정을 편견 없는 마음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가장 충만하며 가장 지저분한 도시의 구석, 짐 부리는 일을 끝내고 붉은 기를 단 채 부두 에 늘어선 배들, 녹슨 쇳조각, 훈제 청어 생강빵, 바닥에 끌리는 값비싼 진홍색 대존복 자락, 꽃시장이 발산하는 노란색 등으로 가득 찬 암스테르담에 렘브란트가 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떻게 금색과 붉은색 , 그리고 태양과 물보라가 뒤섞인 곳에 감도는 은색과 붉은색을 발견 할 수 있었을까? 온갖 색깔로 물들인 옷들이 창문에 걸린 더러운 유태인 거리에서 일어나는 소란과 타오르 는 백열광에서 생기는 적갈색 그림자 사이를 렘브란트는 지나갔다. 그는 장식적인 건물의 정면과 화려한 색채의 의상을 물결에 반사하는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종종 암스테르 부두까지 가곤 했다. 해변을 마주한 이 도시에 빛나는 밤이 찾아오면 암스테르 부두에서는 수를 놓은 직물, 열대과일, 이국적인 새 따위가 커다란 선박에서 부려지곤 했다. 도시의 운하 때문에 항상 축축한 지하실에 햇빛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 먼지들 이 춤을 춘다. 이런 광경만을 본 그가 신비로운 동양과 머나먼 바다를 향한 상상여행을 펼 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가? 게토 지역의 고리대금업자가 금을 저울질하는 오두막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가난한 가족 이 넝마 같은 옷이나 임시방편으로 지은 캘리코 옷을 입은 채 쭈그리고 있는 오두막집에 가 보기도 했다. 철로 된 흥갑과 상감세공을 한 무기들 세공된 구리와 가죽을 쌓아 놓은 어둠 침침한 고물장사의 오두막도 가 보았다. 비록 가난이 평범한 것이 되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 을지라도 어떻게 그가 이러한 장면을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가슴을 내놓고 아이에 게 젖을 먹이고, 죽어 가는 늙은이는 짚으로 만든 매트에 누워 있고, 상처는 더러운 옷에 감 사여 있고, 배고픔과 사랑의 결백함이 재발견되는 장면을 말이다. 이와 같은 추진력은 선택적이다. 그리고 세계는, 의지를 표현하는 움직이는 상징의 채워지 지 않는 저장소가 된다. 그러나 의지는 필요할 때만 그러한 상징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때 의지는 내적인 힘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점하고 있는 공간과 부피가 바로 선언 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빛에 잠겨 있는 것은 밤에 잠겨 있는 것의 반향이다. 밤에 잠겨 있는 것은 보이지 않게 빛에 잠겨 있는 것에 이른다. 사유와 응시, 말, 행위는 그림자 속에서 거의 알아보기 힘든 이 이마, 이 눈, 이 입, 이 손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머리와 몸이 출생과 고통의 순간, 그리고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이다. 렘브란트가 작업할 때 사용하던 도구는 철핀과 동판, 염산, 그리고 횐색과 검은색이었다. 그는 세계를 종결할 수 없는 드라마로 다뤘다. 그래서 밤과 낮은 형태가 잡혀 새겨지고 격 변을 겪은 후 진정되어 그의 욕망과 슬픔에 따라 살고 죽었다. 이것은 영원성에 대한 절망 적인 희구이자, 그의 심장을 지배했던 절대성 이었다. 엘리 포르, <미술사, 현대 미술> 4권, 1921-1927년 가장 고전적이지 않으며, 가장 낭만적인 화가 렘브란트 미술에 천재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렘브란트이다. 그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수단을 창출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가장 속물과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그의 위대함에는 평범한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는 자연을 모방하는 사람들 가 운데 가장 정직했으며 가장 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대상이라도 취했다. 또한 그 는 형태, 색, 표현이 무엇을, 어떻게 의미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양 손으로 그려 넣은 빛과 그림자에서 대상은 가장 화려한 형태로 도출되었다.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최소화하며 마치 야외에서 그린 듯이 보이려 했던 반 다이크와 달 리 렘브란트는 빛과 그림자에 관한 한 가장 격렬하고 비약적인 대조를 사용했다. 마치 지하 감옥에 있는 사물을 그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은 '과도한 어두움이 있는 밝음'이라 고 일컬어져 왔다. 그의 시각은 그가 익숙했던 인공적인 어두움으로부터 살쾡이의 눈 같은 날카로움을 얻게 되었다. "신비와 침묵이 그의 연필에서 나왔다." 그는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며, 물감으로 밤의 어두움과 오후 태양의 화염을 그리는 데 똑같이 성공했다. 그것이 장엄한 것이든 눈부신 것이든 상상이라 는 수단으로 주변의 여러 가지 대상을 포괄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시인이었으며,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단지 평범하고 특징이 없는 한 사람의 화가에 불과했다. 그에게 손의 힘은 눈의 힘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상 그가 심오한 지식과 마찬가지로 대가 적인 기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다루었던 주제에 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색은 때때로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거나 혹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잘라진다. 붓의 손잡이로 물감을 칠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역사화와 풍경화도 똑같이 훌륭하다. 우리는 그의 풍경화를 영원히 볼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렘브란트의 풍경화는 자연에서 파낸 것 같다. 모든 것이 너무나 정직하고 사실적이다. 그것은 눈이 다른 감각에게 암시해 놓은 느낌과 연상으로 가득 차 있어, 곧 그 느낌과 연상들이 우리의 집이라는 강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자라온 장소인 집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그림이 전해 주는 인상의 강렬함을 변 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가장 고전적이지 않으며, 가장 낭만적인 화가이다. 월리엄 해즐릿, '미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1817년 '관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렘브란트의 성격을 이루는 근본요소이다 흔히 반항적 화가로 특징 지워지는 렘브란트의 성격이 낭만주의를 창출했다고 말한다. 특 히 대중으로부터의 소외와 사회적 추방과 관련된 부분에서 19세기 동안 렘브란트의 전설은 좀더 극적으로 각색되었다. 그러나 레이덴 출신의 이 젊은이가 스스로를 거칠고 반항적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의 자화상을 통해 볼 때 분명하다. 대영 박물관에 있는 최초의 자화상은 두꺼운 입술과 딸기코를 한 모습으로, 그러한 반항 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보다 1년 후에 제작된 첫 에칭화 역시 투박하고 거친 선으로 묘사된 거친 표현을 담고 있어 세련된 것이라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한 에칭화인데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를 그가 좋아하던 거지 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거지는 한때 그를 따뜻하게 받아 주었던 부르주아 사회를 호통 치고 있다. 관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렘브란트의 성격을 이루는 근본요소이다. 영예롭던 시 절에는 그 성격을 적절히 절제할 수 있었지만 중년에 이르러서는 그 성격이 강하게 표출되 었다. 이 같은 사실은 처음으로 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 한 사나이가 쓴 세 권의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케네스 클라크, <렘브란트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1966년 과학과 미술, 렘브란트 조사계획 렘브란트 작품의 진품성에 대한 문제가 심심지 않게 제기되어 왔다. 20세기 초에 그의 작 품목록은 1,000여 점을 웃돌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연구 결과 그의 작품 총수는 그 1/4로 줄었다. 렘브란트 조사계획(The Rembrandt Reaserch Project)이 완료된다면 얼마나 많은 작품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을까? 이 과정은 앞으로 수년간 더 지속될 것이고 그때가 되더라 도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날 것 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위원회는 자신들의 역사와 목표, 그리고 조사방법을 이야기한다. 렘브란트의 작품목록을 새로 작성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는 확신이 렘브란트 조사계획 을 이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제를 다룬 연구문헌은 풍부하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그의 작 품에 대한 많은 해석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진품성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그의 많은 작품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1960년대부터 렘브란트라는 작가의 것으 로 여겨져 온 모든 작품들이 객관성을 보장받기가 힘들어졌다. 당연히 조사는 1960년대까지 이루어진 렘브란트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당시 상 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렘브란트의 것으로 여겨져 온 작품들에 실증적이고 명확한 연 속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생각은 굳어져 갔다. 특히 17세기 이후로 내려오는 그의 에칭화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한 연속성은 매우 적은 수의 그림들에만 존재했다. 그 러나 그마저도 대표할 만한 기준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렘브란트의 모든 미술작품들은 전적 으로 불확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제자들이 만든 작품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은 증가했다. 이러한 지식은 렘브란트의 진품을 분명히 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제자들의 작품임 이 명백해진 작품들을 따로 분류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남은 작품들이 매우 이질적이고 방대 한 작품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의 계획이 시작 단계(1968년과 1969년)에 놓여 있을 때 책을 출간했던 (호르스트) 헤 르손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기존의 이미지에 용기 있는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력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들은 조사방법과 결론의 동질성은 미 술사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구성해야만 가장 효과적으로 보장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번째로 중요한 기본원칙은 각각의 작품을 대상으로 놓고 가능하면 완벽하게 그 생김새 를 학습하고 기술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대부분은 표면에 보이는 것만을 조사해야 했다. 또한 비교를 쉽게 하기 위 해 관찰된 것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 감층이 불연속적인 곳과 반투명하게 된 곳 모두를 더 이상의 차별을 두지 않고 단순히 '바 닥'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물감층(일반적으로 노란색을 띤 밝은 갈색)이 어떤 경우에는 실 제와 바닥이 아니라 준비를 위해 반투명한 갈색을 미리 칠해 둔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것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였다. 실제의 바닥을 그 물감층 너머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직접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술사가들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가장 친숙한 기술은 엑스레이 사진을 이용하는 방법이 었다. 엑스레이 사진은 젊은 렘브란트가 어떤 방법으로 구도를 잡고, 최초의 물감을 바른 후 어떻게 완성해 갔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 주었다. 연륜연대학(나무의 나이테에 근거해 날짜를 셈하는 방법)은 오크 패널(물감 아래쪽에 놓 임)의 날짜를 셈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었다. 바닥과 물감층에서 표본을 채취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실험을 하는 것은 문헌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좀처럼 미술사가들의 조사를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과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단편적이며, 작품의 물리적 구성에 관계된 구조 화되어 있지 않은 정보로부터 해석을 이끌어 낸다. 반면 미술사가들은 그림과 그림의 제작 방법을 양식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커다란 관심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도상학(종교미술에서, 형상의 표현형식이 지닌 상징적 의미나 교의상의 약속 등을 해명하는 학문)적 방법의 경우 그것이 실제적인 지식과 합치되는 경우와 그것이 특별 한 암시를 제공해 주는 몇몇 경우에만 목록 작성에 참고로 했다. 종종 이러한 암시는 렘브 란트의 작품에 대해 그와 당대 사람이 일반적으로 승인했던 다소 낭만적인 생각과 매우 달 랐다. 조사방법에 대한 몇 가지 반성 우리는 과학적인 실험의 결과가 결코 렘브란트의 작품과 제자들의 작품 또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작품들을 구별해 해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증 명한 렘브란트의 작품이 이후의 모작으로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가 양식적인 근거에서 설정한 작품의 목록이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는 '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많은 수의 작품이 소홀히 처리된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그 양식적인 특징 때문에 18세기나 19세기의 작품으로 여긴 몇몇 작품이 실제로는 17세기의 것임을 발견했다. 우리의 목록에서 독자들은 문학적인 측면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렘브 란트를 시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매우 불신했다. 숭고하게 여긴 그림을 찬양했던 과거의 노 래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 감정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목록은 가라앉은 음조이다. 렘브란트 조사계획 위원회는 그의 작품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A: 렘브란트 작품 B: 렘브란트의 작품인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스러운 작품 C: 렘브란트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작품 렘브란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작품의 예:C. 42 <노파의 흉상>(일반적으로 < 렘브란트의 어머니>로 알려짐) 요약된 견해 모방작. B. 353번 에칭화에 기초. 이제까지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음. 주석 극단적으로 무질서하게 칠해진 물감이나 색의 이상한 강조(예를 들면 지나치게 밝은 눈까 풀)와 더불어, 의도된 것으로 보기 힘든 심하게 긁힌 자국 때문에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제 작한 그림으로 보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의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 제작방법은 매 우 거칠고 형태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지 않다. 이것은 렘브란트와 같은 효과를 내려고 한, 극단적으로 표면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단조롭고 탁한 회색 배경이나, 단조롭고 얇 은 검은색과 회색의 모델링은 렘브란트나 그의 제자의 그림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결론은 두 개의 논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이 노파는 다른 그림 위에 그려진 것인데 이 그림은 엑스레이 사진으로 볼 때 17세 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없는 기법을 사용했다. 미완성이었던 이 밑에 깔린 그림은 그 위에 현재의 그림이 그려질 당시 충분히 말라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다. 이것은 불규칙적인 균열의 특징으로 추론할 수 있다. 둘째, 이 초상화는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추측해 왔듯이 노파를 그린 렘브란트의 1628년 작품 B. 352번보다는 B. 353번 에칭화와 더 많이 닮았다. 이 에칭화는 오랫동안 B. 352번 작품을 B. 354번 작품과 조합해 만든 모방작으로 여겨져 왔다. A. D. 드 브리스 아즈는 이 것을 사위 엘 반 호그스트라텐의 작품으로 여겼고, C. 화이트와 K. G. 본은 이것을 미카엘 루카스 레오폴트 빌만의 작품으로 생각했다 B. 353번 에칭화는 분명히 회화를 그리기 위한 시작품이다. 한두 개의 변형 작품-머릿수건의 그림자가 이처럼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이 있는 이 회화작품들은 이 에칭화와 너무도 닮아 있어 왼쪽 뺨을 비롯한 몇 개의 지점에 난 긁힌 자국에서까지도 에칭화를 그대로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C. 42번 작품의 날짜가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B. 353번의 에칭화는 1650년 직후 기 재된 사후서명(terminus post quem)이 씌어 있다. 패널에 쓰인 나무의 재질에 대한 좀더 면 밀한 연구와, 가능하다면 연륜연대학의 측정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이다. 요약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붓질, 렘브란트나 그의 유파와 다른 색을 사용한 제작과정, 엑스레 이 사진을 이용한 밑에 그려진 그림의 분석, 그리고 한때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졌 던 에칭화를 원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C. 42번 그림이 모방 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이 17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많 은 근거를 갖고 있다. 렘브란트 조사계획 위원회, <렘브란트의 전작> 1권, 1982년 자신을 그리는 렘브란트 자화상을 통해 렘브란트는 최고의 전기작가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다양한 인물들을 그의 삶과 연관시킨다. 조지프 헬러는 렘브란트를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을 썼고, 소설 속에 서 렘브란트는 수수께끼에 답하고 있다.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며 그 자신이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다. 흉상은 왼쪽 전경의 붉은 천을 씌운 사각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렘브란트는 이 흉상을 경매에 내놓으면 얼마나 돈을 벌 수 있을까 생 각했기 때문에 그가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그리 많은 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으리라. 호머의 흉상은 복제품이었으니까.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복제한 흉상을 다시 진품처럼 복제한 헬레니즘적인 복제품에 불 과했다. 결국 진품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값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가격은 이미 작품을 주문한 시칠리아 귀족과 암스테르 담의 네덜란드인 중계상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아마 그 중계상들 중 한 사 람이, 렘브란트에게 그림 제작을 주문하는 것과 17세기 미술계의 걸출했던 두 인물을 서로 알게 해주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미술의 후원자와 미술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11년 이상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 사이에 독설이 오고간 적도 있다. 구매자는 화가가 자신을 속였다고 불평하고, 화가는 그렇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림 값은 500길더 였다. 1653년에 500길더는 많은 돈이었다. 암스테르담은 홀란드주와, 7주연합 중 홀란드를 제외 한 다른 여섯 개 주(이들 7주 연합이 분권적 경향이 강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만들었다.) 어느 곳보다도 생활비가 비싼 곳이었다. 그러나 500길더는 이런 암스테르담에서조차 상당히 많은 돈이었다. 9년 후, 돈 안토니오 루포는, 500길더는 이탈리아 미술가에게 같은 크기의 그림을 주문했 을 때 지불할 금액의 여덟 배라고 불평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그는 당시 렘브란트가 암스테 르담에서 그 금액 열 배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곳 암스테르담에 서 그는 유행이나 따르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경제적 파국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 그 는 남은 여생을 가난 속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196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그림을 230만 달러에 구입했다. 1653년의 암스테르담에서 500길더의 돈이면 기능공이나 상인이 자신과 가족을 1년간 먹여 살릴 수 있는 큰 액수였다. 다시 말해 이 액수는 거의 집 한 채 값에 해당했다. 이미 1만 3,000길더 짜리 집을 구입하고 10년에서 11년이라는 세월을 매우 풍족하게 살아 온 홀아비 렘브란트 반 레인은 자신의 명성이 차츰 기울고 있으며, 수입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500길더는 충분치 않았다. 14년 후에도 그는 9,000길더가 넘는 재산을 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섯 건의 채무를 해결해야 했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네덜란드의 신교는 스페인을 상대 로 한 긴 혁명에 휴전조약을 맺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 했다. 페스트가 창궐했다. 경제적 좌절감이 유행병처럼 번져 나갔다. 경제는 빈곤했고 자본은 바닥 을 드러냈다. 채권자들은 채무 이행을 요구했다. 렘브란트의 집은 선택받은 네덜란드인이 사는 주거지역에 자리한 화려한 도시형 저택이었 다. 이 지역은 도시의 동쪽 중에서도 가장 넓고 화려한 길에 면해 있었다. 바로 신트 안토니 스브레스트라트였다. '브레스트라트'라는 말은 '넓은 길'이라는 뜻이다. 골목을 돌아서면 우아한 집들이 비슷비슷하게 늘어선 이 곳은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들과 관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이 렘브란트의 첫번째 후원자이자 보증 인이 되었다. 렘브란트가 분할상환을 조건으로 이 집을 구입했을 때 그 첫번째 상환금은 그 의 첫번째 아내인 사스키아의 지참금에서 지불되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격찬 받던 해에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화려한 것이었다. 어떤 기록은 1631년 레이덴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 엄청난 그림주문을 받은 25세 의 젊은 렘브란트는 1632년과 1633년 사이에 5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전한다. 2년에 50 점이므로 2주에 한 점꼴로 그린 셈이다. 이 숫자가 거짓이라 하더라도 매우 인상적임은 부정할 수 없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도시의 중산계급으로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 중산 계급은 지도계급이었다. 사스키아는 일찍 고아가 되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프리슬란트 지 방 레바르덴시의 전직 시장이었고, 그녀의 사촌은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화상이었다. 그런 렘브란트가 이제 청산할 수 없을 만큼 큰 빚에 쪼들리게 된다. 렘브란트는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아리스토텔레스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집을 팔든지 친구에게 돈을 꾸든지 해서 빚을 청산하리라고. 그리고 그는 자신이 돈을 꿀 수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옷을 점점 더 검은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무수한 짙은 그림자가 있는 배경에다가 계속 더 검은 혼합색을 칠했다. 그는 캔버스가 검은색을 빨아들이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들로부터 돈을 꾸어 집값을 지불한 후에는 이 집 을 어린 아들 티투스에게 명의 이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빌린 돈을 갚지 않기로 결 심할 때 그의 친구들로부터 집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아직 어려 아버지가 돈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티투스의 유산에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47세였다. 그리고 파산에 직면해 있었다. 사스키아는 11년 전에 죽었다. 렘브란트 반 레인 부부가 8년간의 결혼생활 중 낳은 네 명 의 아이 가운데 마지막으로 태어난 티투스만이 2개월 이상을 살아 성장했다. 렘브란트가 그림과 비슷한 감정과 색조로 우울하게 자기 침잠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렘브란트를 바라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렘브란트가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바라볼 때, 사스키아와 같이 살던 시기를 애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으로부터 행복한 결혼의 종말이 세 아이의 죽음과 마찬가지 로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예전에 하녀로 들어왔다 곧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헨드리켸 스토펠스라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철저하고도 정확하게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스키아로 하여금 재 산을 자신의 것으로 쓰게끔 유도한 이 공증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 다. "당신이 그린 그림의 인물들은 왜 그렇게 슬퍼 보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을 서던 키가 큰 남자가 물었다. "그들은 걱정을 하지." "무엇을요?" "돈!" 미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심각하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다락방 벽에 걸려 있던, 1652년의 자부심에 가득 찬 초상화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이 초상화에서 그는 손을 둔부에 댄 채 작업복 을 입고 꼿꼿이 서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빈의 예술사 박물관에서 대담하게 그의 눈과 마 주친 모든 관람자는 그의 도전적이고 정복 불가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애수에 젖은 고뇌는 그가 다른 사람을 그릴 때나 걸맞은 것이었다. 조지프 헬러, <자신을 그리는 렘브란트>,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