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지은이: 알레산드로 베초시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신지영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새벽 3시, 내 아들 세르피에로의 자식, 손자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리오나르도라고 지었다. 빈치의 피에로 디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세례를 주었다. 그때 입회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파피노 디 난니 반티, 메오 디 토니노, 피에로 디 말볼토, 난니 디 벤초, 아리고 디 조반니 테데스코, 리사 디 도메니코 디 브레토네 부인, 안토니아 디 줄 리아노 부인,니콜로사 델 바르나 부인, 난니 디 벤초의 딸인 마리아 부인, 피파 디 프레비코 네 부인. 제1장 옛날에 빈치에 최근 레오나르도의 조부인 안토니오 다 빈치가 아이와 그와 가족관계를 증언한 문서가 발 견되어, 화가의 유년기에 관해 난무하던 애매한 사실들과 소위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들이 일소됐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시각을 알고 있다. '새벽 3시', 다시 말해 아베마리아 3시간 후이다. 이는 현재 날짜 계산법으로 환산하면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10시 30분에 해당한다..... 사생아 아이는 서자였지만, 그의 출생을 비밀에 부치거나 혈통을 숨기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분명히 그는 '죄로 잉태된 자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잉태된' 아이로 간주됐다. 훗날 레오나 르도는 어떤 해부학 소묘집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만일 성교가 서로의 열렬한 사랑과 지대 한 욕망하에 행해진다면, 거기서 태어나는 아이는 대단히 총명하고 재기발랄하고 민첩하고 기품 있을 것이다." 두 아버지, 다섯 어머니, 그리고 열여덟 형제 이웃 사람들은 레오나르도의 탄생을 축하했고, 그의 세례식에 참석했다. 이례적인 사실은 아이가 5명의 대모와 5명의 대부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중 매우 존경받는 리돌피 가문의 관 리인인 아리고 디 조반니 테데스코도 있었다. 리돌피는 빈치에 가옥과 땅을 가진 대지주로 서 피렌체의 귀족 가문이었다. 아이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집(읍사무소 맞은편에 있었다)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조금도 소외되지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 카테리나였 다. 그녀의 성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레오나르도의 첫 전기에 쓰여진 대로 '디 부온 산구에'였을까? 아니면 '보스카이 올로 디 체레토구이디'라는 이름의 나무꾼의 딸이었을까? 아무튼 그녀는 레오나르도의 아버 지 집에 자주 드나들었음에 틀림없다. 몇 달 뒤 그녀는 결혼을 한다. 상대는 세르 피에로가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 중 하나인 안토니오 디 피에로 부티 델 바카다 빈치(다 빈치의 d는 소문자)였다. 그는 성 순교자 베드로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이었다. 훗날 레오나르도의 아버 지와 삼촌 프란체스코는 이곳을 다시 지어 운영한다. 안토니오 델바카는 아카타브리가, 즉 싸움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그와 함께 캄포제피에 가서 산판탈레오의 옆 소교구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고 1년여 지난 뒤 딸 피에라를 낳고, 그뒤로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세르피에로 프루오시노 디 안토니오 다 빈치다. 아들을 낳았을 때 그는 25살이었고, 4년 전부터 피사와 피렌체에서 공증인 노릇을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가 태어난 지 넉 달째 되던 무렵, 그는 알비에라 델리 아마도리라는 방년 16세의 젊은 아가 씨와 결혼했다.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 태생인 그녀는 1464년 피렌체에서 아기를 낳다가 죽 는다. 이듬해 세르 피에로는 프란체스카 디 세르 줄리아노 란프레디니와 재혼하지만, 1473년 그녀도 아이 없이 죽고 만다. 레오나르도의 바로 밑 남동생인 안토니오는 1477년에 태어난 다. 당시 18살이었던 그의 어머니 마르게리타 디 프란체스코 디 야코포는 이후로 다섯 아이 를 더 낳는다. 세르 피에로는 마지막으로, 1485년 루크레치아 디 굴리엘모 코르티자니와 결 혼, 일곱 아이를 낳는다. 레오나르도는 55살이 되어서도 그녀를 여전히 '사랑스럽고 다정한 어머니'로 불렀다. 빈치: 하나의 이름, 하나의 문장 사료를 보면 서자인 레오나르도는 늘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즉 피에로의 아들로 불렸 다. 20살 때는 이 이름으로 콤파냐 디산 루카의 장부에 직업 화가로 등록된다. 성은 다 빈치 지만 사실 그는 빈치 태생이 아니다. 그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해도 그는 '리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로 불렸을 것이다. 다빈치 가문은 13세기부터 이 도시에서 유명했다. 레오나르도 증조부의 이름도 세르 피에로였다(하지만 그는 '디 세르구이도'였다. 이는 구이 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다 빈치는 공증인, 고관,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빈치는 시골 읍이었다. 처음엔 에트루리아의 영토였다가 훗날 로마의 영토가 됐다. 이곳은 몬탈바노와 아르노강 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구이디 백작의 중세 성과 산타 크로 체교회, 양로원과 몇 채의 집이 있었다. '빈치는 하나의 성이다. 그런데 그 성의 역사는 어떤 거인들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거만 하게 하늘에 대항했으나 결국 하늘의 벌을 받고 커다란 치욕을 당했다." 빈치의 옛 법령 부 록에 기록된 이 구절은 레오나르도의 우화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뽐내다가 벌을 받는다는 내용의 교훈적인 비유들로써, 그는 다분히 과장된 은유법을 사용해 그의 과학적 지식을 민 중의 지혜와 뒤섞고 있다. 이를테면 하늘로 치솟고 싶어하지만 땅속에 갇혀 오랜 고통을 받 아야 하는 바닷물의 '기상학적' 강신술이 그것이다. 빈치(Vinci)라는 성은 빈치(Vinchi)에서 유래했다. 빈치는 토스카나의 시골 사람들이 엮는 골풀로, 빈치오(Vinchio)라 불리는 개울가 에서 자란다. 그의 고향과 성을 상기시키는 이 이름은 레오나르도의 문장이 된다. 그는 자신 의 성을 골풀의 얽힘장식과 동일시하여 '흰담비를 안은 여인'과'모나리자'와 같은 그의 작 품들에 그것을 사용했다. 박식함과 농부의 지식 유년기에 레오나르도는 이론 교육보다 실용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 물론 그는 공증인의 가정에서 살았지만, 포도주, 기름, 밀가루 등을 생산하는 농촌에서 농부의 지식을 직접 흡수 했다. 조부 안토니오는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그중 일부를 직접 경작했다. 레오나르도가 가 장 좋아한 삼촌 프란체스코는 방앗간을 갖고 있었고, 다른 삼촌 조반니는 '여인숙 주인 겸 푸줏간 주인'이 된다. 장차 기계장치 기술자가 될 레오나르도는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 해 밟고 있는 땅과 '이슬의 미립자'를 관찰한다. '시니스트라 마노(왼손)' "빈치는 유대인처럼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레오나 르도는 무의식적으로 글자를 뒤집어 썼다. 그는 왼손을 사용했고 오른쪽부터 써나갔다. 고대 문명권에서도 그랬고 아랍인들은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수첩을 사용할 때는 흔히 오른 쪽 면을 채운 뒤 왼쪽 면을 채웠다. 은폐 의도라곤 전혀 없었고, 그가 '대단한 작가였던 것 도 아니다. 단지 지각작용이 결여된 결과일 뿐인데, 그는 이것을 어릴 때 못 고쳤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 자유로웠다는 증거도 되지만, 그의 문학교육의 한계를 드러내는 증 거이기도 하다. 그는 글자에 관한 한 표준적인 아이가 아니었고, 문필업에 종사할 수도 없었 다. 레오나르도는 '정상적으로' 쓸 줄도 알았지만 능란하지 않았고, 특히 지형도에 끄적일 때 또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할 때처럼 명확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경우에 국한된 것이었 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선천적인 재능은 그의 모든 감각, 지각력 과 함께 그의 시각적, 그래픽적 재능과 소묘 화가로서의 재주를 발달시키는 데 기여했을까? 필적학자들은 이러한 재능은 '힘에 대한 강한 욕망'과 부합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레오나 르도는 공적인 편지와 추천장을 쓰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시켰다. 공증인과 도공의 집안 레오나르도의 할머니 루치아 디 세르 피에로 디 조소는 그가 유년기에 처음 예술적 체험 을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그녀의 가문에는 공증인도 있었지만, 도기업자와 여러 채의 가옥과 토지, 가마의 소유주도 있었다. 토이아디바케레토에 있던 가마에서는 온갖 종류 의 도기, 특히 채색 마욜리카 토기를 구워냈다. 토이아디바케레토는 빈치와 지척인 곳으로 카르미냐노 읍에 있으며, 14-15세기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왕성한 거래가 형성되던 도기 생 산의 요지였다. 레오나르도가 도자기 기법을 잘 알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증거는 많다. 그는 어릴 때 바케 레토에서 다 빈치 가문의 가마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 가마는 훗날 세르 피에로의 소유가 된다. 최근에는 흙을 구워 만든 조각들, 얽힘장식 모티프가 들어간 마욜리카 토기, 레오나르 도의 소묘를 연상시키는 육각형과 작은 정사각형 도기들이 발견됐다.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토스카나 한가운데에서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빈치는 원시적이고 외진 마을이 아니다. 오르비냐노(레오나르 도의 가문은 이미 1451년에 이곳에 토지와 함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다)에서 산탄사노(빈 치가 속한 소교구)까지 성당들에는 각기 다른 시대의 수많은 미술작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빈치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소장된 1455년도 작품'마들렌'은 레오나르도가 도나텔로와 비 치 의 조각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에 있고 피렌체와 지척 인 빈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예술의 온상인 이웃 도시 피스토이아와 종교, 문화, 상업적으 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의 피사노 형제들이 만든 저부조 작품들 에서 표정, '영혼의 움직임', 손 동작, 심지어 뭔가를 지적하는 손가락들을 관찰할 수 있었 다. 타우 소성당의 프레스코화에서는 '노아의 대홍수'의 소용돌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밀 라 노의 메디치 은행을 지은 건축가 미켈로초가 1452∼1469년까지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아 수도원을 완성한 것도 피스토이아에서였다. 그리고 세르 피에로의 누이이자 레오나르도의 고모인 비올란테가 살았던 곳도 피스토이아였다. 좀더 가까이로는 아르노강 주변의 엠폴리가 피사와 바다, 라발델사와 시에나의 교차점 노 릇을 했다. 엠폴리는 한창 예술적으로 번성하는 도시였는데, 화가 스타르니나, 아뇰로 가디, 로렌초 모나코, 마솔리노, 조각가 티노 다 카마이노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게다가 미노 데 피에솔레의 1465년도 작품으로 추정되는 성모상이 그 증거이다. 그해 레오나르도는 13살 이었고 그는 이때 이미 미술 작업을 시작한다. 미술의 시작 레오나르도는 1468년까지 빈치의 주민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는 대개 그곳에서 살았지만 늘 그곳에서 지내지는 않았다. 세르 피에로는 특히 피렌체에서 메디치부터 벤티볼리오 데 볼로냐에 이르는 가장 유력한 가문들의 회계일을 해주었고 또한 명성 있는 미술작품과 관련 된 증명서들을 작성했다. 레오나르도가 언제부터 미술에 열중하기 시작했을까? 그가 피렌체 에서 가문의 전통에 따라 베로키오의 작업장으로 들어간 1469년부터였을까? 이는 믿기 어렵 다. 도제들은 아주 어릴 때 화가의 공방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레오나르도 는 천재에다 조숙했다는 것이다. 그에게선 예술적 견습 시기와 문학적, 과학적 지식의 견습 시기 사이에 깊은 편차가 있음이 밝혀지게 된다. "세르 피에로는 어느 날(레오나르도의) 소묘를 몇 점 집어들더니 그것을 그의 친구 안드 레아 델 베로키오에게 가져갔다..... 안드레아는 많은 가능성을 지닌 이 습작들에 감탄했 다." 바사리가 쓴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한 가지 직 종을 갈고 닦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소묘에 속하는 이런저런 활동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 적성이 맞았다." 제2장 메디치가가 주름잡던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의 신화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부정확하고 사소한 사례들에도 불구하 고, 조르조 바사리가 그의 명저 '탁월한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삶' (1550년과 1568년) 에 서 인용한 증거들은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세르피에로가 젊은 레오나르도를 도와주었다면 '지식과 문화에 대한 심오한 연구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을 텐데' '정서가불 안하고 변덕스러운 그는 이런 공부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산술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음악을 더 좋아했다. 특히 베로키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림과 조각 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은 레오나르도가 그때 이미 어느 정도 '소묘술'이 있었 다는 가설을 입증한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l488년으로 추정)는 완벽한 예술가, '금은세공사, 원근법의 대 가, 조각가, 판각사, 화가,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직공장이자 사업주이기도 했다. 그는 큰 건의 계약서에 서명한 뒤, 그것을 협조자들과 함께 제작하거나 그의 제자들을 시켜 완성 하게 했다. 전설적이라 할 정도로 명성을 날리던 그의 작업장에서는 1460년대 말과 1470년 대에 보티첼리, 페루지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로렌초 디 크레디,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소 위 덜 중요하다'고 일컬어지는 미술가들이 일했다(그중에는 코시모 로셀리와 프란체스코 보 티치니가 속해 있었다). 작업장의 미술가들은 한데 힘을 모아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 작품들 에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보스는 항상 베로키오의 이름으로 공동 출자자들에게 청구됐다. 이 거장이 1475-1485년 사이에 로렌초 디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마돈나 디 피아차'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이 작품 은 구성면에서 레오나르도가 여러가지 제의를 한 듯하고 아마 몇 군데는 직접 그렸을 것이 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태고지'의 아 랫부분도 마찬가지다. 채 27살이 안 된 레오나르도는 한 특별한 이의 감탄을 샀다(전에 페루지노가 그랬던 만큼). 그가 바로 라파엘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다. 산티는 그의 저서 '크로나카 리마타'에서 베로키오가 우수한 제자를 양성한 점을 찬양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는 세련된 인본주의, 그리고 북부와 동방의 문화가 융합되어 형성 된 새로운 관계 속에 토스카나의 전통이 점점 풍부해지는 특별한 문화의 용광로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된다. 거기서 그는 조토와 마사치오처럼 혁명적인 개념, 강렬한 표현을 한 그림들 가운데에서 이상적인 기준을 찾아냈다. 반면 그의 친구 보티첼리에게는, 특히 벽에 해면 자국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의 피상 성으로 인해 '짧고 간단한 탐구'는 말로 표현되는 풍경화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레 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한심한 풍경화를 그린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 의 '회화론'에서 벽 위의 얼룩들에 대한 관찰 결과를 열정적으로 평가한 구절은 기억할 만하다. 그것들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무한한 것들 속에서 의식이 새로운 창작에 눈을 뜨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당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의 모든 부분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필경 대단히 근 대적이고 호방한 선언이지만, 한편으로는 솜씨의 탁월함과 기술적인 훈련에 대한 강조이기 도 했다. 1473년: 최초의 풍경화 레오나르도가 청년기에 제작한 것들 가운데 확실한 지표가 되는 첫번째 작품은 '산타 마 리아 델라 네베의 풍경)이다. 이 소묘 작품에는 그가 작품을 완성한 1473년 8월 5일이라는 날짜가 자필로 씌어 있다.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최초의 진정한 풍경화'로 일컬어진다. 실 제로 시에나 사람인 암브로조 로렌체티는 그보다 150년 전에 목판에 두 점의 풍경화를 그렸으며, 더구나 풍경화는 극동 미술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주제였다. 그러나 레오나르 도의 풍경화는 그의 고향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다. 레오나르도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본능적인 원형으로서 그의 고향을 참조했다.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성-아마도 라르치아노 성일 것이다-의 전망, 푸체키오 늪의 시각적인 효과, 몬숨마노의 원추형 '화산'이 빚어내는 지평선상의 실루엣 등을 포함시켰다. 작은 배들에 대 한 기억은 그의 붓에서 도망친 듯하다. 그는 나무의 형태와 특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 다. 오히려 지각적, 개념적 현상들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빛의 가치에 관해 새로운 감수성을 표현했다. 선영의 작용에 의해 빛을 떨게 만듦으로써 풍경화에 밀도와 투 명성을 부여한 것이다. 유명한 사건과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면서 레오나르도는 8월의 강 설이라는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예외적인 현상이며, 두 개의 극단적 인 대기순환 현상의 통합이다. 잃어버린 습작들을 찾아서 레오나르도는 비록 젊지만 단순히 직업 화가는 아니었다. 이 풍경화는 그가 소묘의 기술 과 의미에 위대한 독창성을 도입함으로써 스승을, 그리고 같은 작업장에서 그림을 연마하던 대단히 재능 있는 동료들을 능가했고, 피렌체 미술의 여러 우수함을 뛰어넘었다. 얼마나 많 은 소묘를 그렸길래 그와 같은 통합 능력과 대가의 솜씨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잃어버린 레오나르도, 다시 찾은 레오나르도'라는 주제로 수많은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그림 중 상당 수는 원본을 찾을 수 없고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문서의 한 부분, 습작, 복제화, 그가 영감 을 불어넣은 작품들뿐이다. 규칙적으로 흥미로운 발견 소식이 발표되고는 있다. 하지만 그가 포르투갈의 왕에게 줄 태피스트리를 위해 그린 '아담과 이브' 밑그림의 종적은 언제나 찾을 수 있을지? 조각 쪽 에 서는 아직도 크게 놀랄 일이 남아 있다. 확실한 출전이 있는 작품이 없고, 양식의 비교도불 가능하기 때문에 청년 조각가 레오나르도에 관한 자료는 여러 가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용병대의 대장부터 성모상까지(때로는 여기에 '꽃다발을 든 부인' 같은 베로키오 의 걸작들이 첨가된 적도 있다) 많은 조각들을 그의 것으로 인정하여 그의 작품목록에 기입하 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상상의 동물 유실된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작품들 가운데에는 무화과나무 방패 위에 그린 작품 '용'이 있다. 독이 든 입김으로 주변의 대기에 불을 붙이는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이 작은 괴물' 그림은 빈치의 한 농부가 레오나르도의 아버지에게 부탁한 그림으로서 아주 특 별한 의미를 지니고있다.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불가사의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경험한다. '괴물'을 창조해 내기 위해 그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동물의 요소를 다양하게 결합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떤 심리적인 조작을 통해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초현실적인 기법에 의지하는 방법 을 이론화한다. 살아 있는 옷 주름 모델, 특히 그가 입은 옷의 주름에 대한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작업장들에서 널 리 실행됐고, 기교주의자들과 함께 놀라운 발전을 거두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대단한 결의를 갖고 이 일에 몰두, 아카데미풍의 훈련에서 탈피해 회색 캔버스 위에 붓으로 그린 일련의 단색 소묘 시리즈에서 추상의 힘과 '진실'의 능력을 드높였다. 이 뛰어난 솜씨는 바사리의 탄복을 샀다. '회화론' 4부의 제목은 '인물을 감싸는 직물과 그 주름'이다. 그는 거기에 '직 물은 반드시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배치되어야 한다'고 적어두었다. 이 연구에 대한 반향은 그의 장년기의 작품들에도 일맥상통하게 흐르지만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그린 청년 기의 회화와 소묘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해부 모형도 만들었 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회화와 다른 미술 작업뿐 아니라 기술적 체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가와 기술자 레오나르도가 로마에서 포물선 면경을 가지고 용접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시기에 기록한 메모에서, 그는 그로부터 45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둥근 천장의 채광창 위에 거대한 구리 구를 접합한 방법을 상기하고 있다. 이 구는 1468년 베로키오가 주문을 받아 1472년 5월 27-28일에 설치한 것이다. 이때 그는 대성당 공사를 위해 브루넬레 스키가 구상한 장치들에 관한 소묘를 수없이 그렸다. 이 기록은 레오나르도가 브루넬레스키 가 작동시킨 다양한 장치들을 이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극장의 무대장 치를 위한 기계, 또는 그가 발명 특허를 얻은 '물 위를 나는 수레'가 그것이다. 이 수레는 수로를 통해 피렌체까지 대리석을 수송할 계획이었지만, 엠폴리 근처 아르노강에서 그만 모 래톱에 주저앉아 버렸다. 피렌체의 세례당을 증축하기 위해 돔은 피렌체라는 도시 공간의 새로운 기하학적, 사회정치적 수렴점이며, 돔의 맞은편에 있 는 세례당은 완벽함의 표본으로 간주된다. 세례당을 위한 투시도를 작성한 적이 있는 브루 넬레스키는 르네상스기에도 동일한 것을 구상했다. 원형으로 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 당이 그것인데, 미완성인 이 성당은 레오나르도에게 영향을 끼친다. 바사리는 지금은 모두 유실된 레오나르도의 청년기의 건축 모형과 소묘 가운데 전망을 탁 트이게 하기 위해 다각 형 주추 위에 세례당을 증축하는 내용의 설계도가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빈틈없음을 무 기로 피렌체를 다스리던 사람들을 굴복시킨 설계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비록 집에 가서 생각해 보면 모두들 그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지 만." 레오나르도의 카리스마적인 설득력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정당함'은 특히 시 각에 호소하는 소묘의 힘에 의해 잘 표현되었다. 이미 1455년 볼로냐에서 아리스토텔레 피 오라반티는 산타 마리아 델 템피오 종탑을 13m 이동시키면서 그러한 계획이 실현 불가능 한 것이 아님을 증며했다. 레오나르도의 작업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두 걸작 베로키오가 그의 작업장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완성한 '수태고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세계 형성기 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콰트로첸토, 즉 15세기 풍 회화의 걸작 들이며, 작업장에서 이루어진 예술적 작업방식, 다시 말해 아이코노그래피(성상학) 계획, 예 비 소묘부터 최초의 터치와 수많은 화가들의 '전문적'인 개입까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견본들이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템페라 물감(물에 녹인 안료를 수액, 아교, 계란 흰자에 이긴 물감: 역주) 대신 유화 물감을 사용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다른 사람이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개입했을 때에는 불연속성이 눈에 띈다. '수태고지'와 같은 작품은 청년 레오나르도 의 한계와 야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가장 다양하고 회화적인 동시에 조형적이고 음악적인 체험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결합시켰다.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 장치'라 는 독특한 조직 안에 통합되지도 않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그린 이 예외적인 작품 에서 레오나르도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67년 '수태고지'가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 도메니코 기를란다 요 의 작품인 줄 알았다. 예비 소묘와 최초의 판본은 레오나르도 혼자 그림 것이 아니고, 베로 키오의 다른 제자들의 손도 갔다. 열성적인 협조자의 작품의 오른쪽 윗부분의 건축물을 보면, 천사의 머리와 성모의 머리, 옷과 풍경에 레오나르도가 개입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471년부터 1476년 사이에 제작되어 1515년 피렌체의 산살비 성당에서 베로키오의 작 품으로 기록된 '그리스도의 세례'는 작업장 제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510년부터 왼쪽의 천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대해 바사 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뛰어난 제자의 실력을 보고 일개 어린아이가 그림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데 모욕감을 느낀 베로키오는 붓에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 도의 손이 간 흔적은 풍경(1473년 8월 5일자 친필 소묘와 안토니오 폴라이올로의 작품들과 비슷해 보인다)과 몇몇 부분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게다가 최소한 한 명의 숙달된 협력자가 얼굴을 그렸고 그보다는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또 다른 협력자가 배경을 그린 것이 분명하 다. 우리는 두 천사의 얼굴, 오른쪽 천사의 양손처리의 엄청난 차이를,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위의 엄격함과 물과 땅의 유동성 사이의 놀라운 대조를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은 세례의 요소로서 물이 주는 상징성과 함께 이 그림이 우주의 집대성이기를 바란 지질학적 몽상을 드러낸다. 상징적인 초상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체류하던 초기에 그린 유일한 초상화는 지네브라의 벤치의 것이 다. 주인공의 신원은 역사 자료에 따라, 그리고 그림 뒤에 그려진, 부인할 수 없는 상징적인 존재인 노간주나무 덕에 확인할 수 있었다. 메디치가 은행의 운영을 맡아 유명해진 벤치 가 문과 레오나르도는 긴밀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이 작은 그림 안에는 다양한 기법, 양 식, 그리고 구상이 조화를 이루며 융합하고 있다. 템페라 물감은 유화 물감과 섞이고, 초상 화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한 간결함은 부동성과 결합하고, 금속성 광택을 내는 추상적인 머리 형태의 활력은 어둡거나 점차로 소멸하는 실루엣들을 담은 풍경의 활력과 함께 작용하 고 있다.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이 작품은 만장일치로 레오나르도의 것으로 추정됐다. 남색 혐의 소송 1472년부터 레오나르도는 독립적인 직업 화가 자격으로 콤파냐 디 산 루카에 가입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하는 일에 동참 했다. 1476년의 것으로 기록된 두 개의 문서는 '레오나르도 드 세르 피에로 다 빈치는 안드 레아 델 베로키오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17살 청년에 대한 남색혐의 에 관한 소송장인데, 여기에는 레오나르도와 어떤 금은세공사, 남자의 윗저고리를 만드는 재 단사, 그리고 베로키오의 공동 출자자인 유명한 토르나부오니 가문 출신인 '리오나르도'라고 하는 사람이 연루돼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결국 석방됐다. 이 기록은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와 작업만 했을까? 아니면 함께 살기도 했을까? 상세하지만 익명으 로 쓰여진 이 기소장을 그의 동성연애에 대한 증거라 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해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피렌체에서 돌을 던져 한 양모 직공을 죽인 혐의로 기소된 적 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피렌체의 가장 유력한 가문들이 총애하는 화가의 하나가 되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중에 그만 이런 나쁜 평판을 들었던 것은 아니 다. '나이와 애정행각 면에서' 레오나르도와 비슷한 페루지노는 '돈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계약도 체결했을 것'이라고 바사리는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1470년 '파울로 데 레오나르도 데 빈치 다 피오렌체'라는 사람이 '불량한 생활'로 추방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볼로냐의 영주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청년이 감옥에 서 6개월을 보낸 후에 상감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런 일치들과 레오나르도에 관한 수많은 주석들-해부학적 관찰부터 익살스러운 구절에 이르는-때문에 가장 모순되는 가설들이 동시에 판치고 있다. 수천 편의 원고에서 발췌한 몇몇 부분 원고들처럼, 잡다한 요소들에서 출발하여 사적인 성격의 메모들까지 속속들이 뒤 지는 것만으로 진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것들은 레오나르도가 다양한 원전에서 본 간단한 인용문들을 베껴 쓴 것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1478년: 설계도와 우연의 일치 1478년은 레오나르도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해이다.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주문을 받았 다. 이어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로렌초)의 형인 율리아노 데 메디치가 죽는 파치가의 주술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레오나르도는 로렌초를 위해 산 마르코 정원에서 일하고 있었 다 그가 장차 밀라노에서 그의 메세나(문화예술 옹호자)가 될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만난 것 도 그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포르차는 로렌초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 피사 에서 피렌체까지 왔다. 같은 해에 레오나르도는 '두 명의 성모 마리아'를 구상한다.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양면에 두 명의 성모 마리아의 부분들이 무기, 공사장의 도구, 다른 기계장치들과 뒤섞여 있는 구상 이었다. 물론 두 개의 옆얼굴도 빠지지 않았다. 하나는 고전주의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습작들과 관계 있는 것이었다. 역시 같은 해 피스토이아에서 대벽화 '마돈나 디 피아차'를 위한 작업이 재개됐고, 베로키 오는 포르테게리 주교의 묘비 설계도 공모에서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를 누르고 당선됐다. 1월 10일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시의회의 궁 안에 있는 산베르나르도 소성당의 벽화를 맡아 달라는 주문을 따냈다. 이때도 역시 폴라이올로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 일은 1477년 12월 24일 그가 이미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주문과 마찬가지로 이 주문도 레 오나르도가 시의회의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세르 피에로의 후원으로 따낸것으로 생각했다 하 지만 레오나르도 자신이 피렌체의 중요한 가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 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이 작품을 시작했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밀라노로 떠난 뒤 이 일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맡았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1485년 필리피노 리피에 의해 레오나르도의 '소묘대로' 완성됐다. 사실 우리는 그가 산 베르나르도의 장식벽을 위해 구상한 그림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그가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위 해 엄청나 습작과,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킨 연작들을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작업장의 그림에서 '진실' 추구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새롭고 개인적인 탐구로 나아갔다. 영화적 소묘 360 방위의 '영화적' 소묘에 대한 구상은 3차원적 재현과 표현의 다양성에 대한 레오나 르도의 지속적인 탐구 주제 중 하나였다. 시선은 사물 주위에서 돌면서 사물 위로 올라가거 나 그에 가까워지며, 사물의 뒷면도 알고 있고, 극히 짧은 노출의 되풀이를 통해 이동한 다. 기쁨과 열정이 가득한 청년기의 소묘들을 보면, 다양한 각도와 자세에서 파악한 손, 여 자의 상반신, 아이의 팔다리를 습작한 것이 분명한 이 소묘들은 여러 성모화와 '동방박사 들 의 경배'에 의거한 것들이다. 그 다음에는 말, 해부학, 건축, 기계에 관한 습작들이 이어진 다. 그는 '최후의 만찬'과 '레다'의 여러 가지 몸짓에서 그것들을 발전시켰다. 레다는 처음 에 는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가 차츰 백조 옆에 서 있는 자세로 변한다. 레오나르도의 몇몇 소묘들은 다양한 자세를 취한 한 인물 ,특히 정면과 측면을 보인 모습 을 표현하고 있다. 조각과 소묘의 이런 관점들은 그의 '회화론'에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그는 '녹로에서 단지를 만드는' 방식을 가지고 회전의 '무한한 면'을 보여주면서 도자기 제조법과의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면서 소묘하기" 레오나르도의 첫번째 피렌체 체류는 하나의 특별한 발생론에 의해 끝난다. 그것은 그의 인문주의가 표현된 진정한 '회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복잡한 아이 코 노그래피라는 하나의 장치를 사용한 것으로서, 철저히 자율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구상 한 최초의 그림이다. 배경들은 멀리 지평선상으로 드넓은 전망, 그리고 심리적인 태도와 상징을 제시하며 열린 다. 그 속에서 애수 섞인 명상은 이성과 비이성을 뒤섞고,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자각은 재 생에 대한 지각과 결합한다. 이 '장치 그림'의 요소들은 톱니바퀴, 나사못, 용수철이 아리라 얼굴, 몸짓, 기하학, 기분, 생명 에너지, 육체와 정신의 움직임', 태도 감정이다. 아기 예수의 생명력이 우주발생론의 한가운데에서 작용하여 성모와 3명의 동방박사가 형성하는 피라미드 형 회전에 이른다. 주위에서는 왕, 목동, 천사, 기사들이 주의 공현을 감싸는 넉넉한 동작으 로 움직인다. 공현, 다시 말해 계시, 나타남은 경배 이상으로 그림의 진정한 동력이 된다.유 려한 소묘 기법과 명암법은 전체를 대단한 강도로 부각시키고 그림에 '완전한 역학'을 부여 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1481년 3월 스코페토의 산 도나토 수도원이 레오나르도에 게 주문한 것이다. 이 수도원 역시 그의 아버지가 공증인으로 있었다. 화가는 석 달 안으로 그림을 완성시키기로 계약을 맺어놓고도 또 다른 작품 '성 제롬'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끝 내지 않고 밀라노로 떠나버렸다. 이것이 1482년에 그가 그의 그림에 쏟을 수 있었던 최대 한의 성의였을까? 화가 레오나르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에게 자신을 군사기술 전문가로 소개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무한한 다리, 요새를 파괴하는법, 운하, 안전하고 공격당할 염려가 없는 뚜껑 덮인 전차, 구포, 박격포.... 고성능을 자랑하는 다른 기계들.... 게다가 나는 청동 말의 제작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것은 저명한 스포르차 가문의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제3장 스포르차 가문의 시대에 밀라노에서 1482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갔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부탁으로 루도비 코 일 모로에게 말의 두개골 형상을 한 귀한 악기인 은제 칠현금을 선사하러 가는 길이었 다. 그는 나이 서른에 위대한 로렌초의 의중을 따르는 예술 대사 역할을 맡은 것이다. 로렌 초는 그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이롭게 만들기 위해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누리던 문화 적 영향력에 의지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이번 출발은 그 이유가 한가지가 아니었다. 그 는 불안한 마음으로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 이탈리아의 아테네 1481년 보티첼리, 페루지노, 피에로 데 코지모, 기를란다요 등 피렌체 회화의 거장들은 교 황 식스투스 4세로부터 바티칸에 와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 명단에 레오나 르도는 없었다. 당시 그가 남긴 메모는 일말의 비관주의가 엿보인다. 신플라톤 학파가 주름 잡던 피렌체 인본주의의 학문적 풍토는 화가의 야심에 제동을 걸었다. 레오나르도는 아리스 토텔레스학파와 실용주의가 득세하던 롬바르디아에서 실험에 더 유리한 곳을 발견할 수 있 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밀라노 공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시샘을 유발하던 분열된 이탈 리아 내에서도 특히 부유하고 근대적이며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문화적으로는 국제적인 고딕 양식부터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에 이르는 유산을 혼합시켰다. 물론 이 도시에는 구상 미술 분야의 수준 높은 인물은 없었지만, 루도비코는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아테네'로 만들 고 거기에 '파르나스산'(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와 뮤즈가 살았다는 곳:역주)을 만들 어피렌체, 만토바, 페라라, 우르비노와 경쟁하게 하고, 자신의 가문이 메디치, 곤차게, 에스테 , 몬테펠트레 가문과 동등해지기를 원했다. 루도비코의 궁정에서 레오나르도는 대가들에게만 수여하는 '피렌체의 아펠레스'(그리스 태생의 고대 최고 화가:역주)라는 신화적인 칭호를 받는다. 그는 작품을 끝낼 때마다 보수 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정기적인 임금을 받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의 실험을 위해 이상적 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궁정의 화려한 '장식품'과 폭넓게 활기 를 불어넣는 속박받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1482년 밀라노는 페라라 편에서 전쟁에 끼여든다. 이때 상업, 무기 제작과 함께 군사 기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의 영주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 다. 그는 한 박식한 친구를 시켜 자기 이름으로 이 편지를 쓰게 했는데, 편지의 요점은 10가 지였다. 먼저 9개의 요점에서 그는 군사 기술자로서의 자질을 강조하며 화평기에는 건축과 수력학에 힘쓰고,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제작하겠노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루도비코 의 아버지인 프렌체스코 스포르차의 묘비 설계안을 찬양했다. 레오나르도가 제공하고자 한 것은, 공작도 알고 있었던 그의 미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직업 의식', 창의력, 실용적인 지 식, 기술자로서의 실행, 꿈의 기계들이었다. 수수께끼와 조화 레오나르도가 이 편지를 루도비코에게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 아탈란테 밀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간 것은 확실하다. 일설에 의하면 그 자신이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칠현금 연주가, 능란한 해석가, 음악의 대가, '악기와 몽환 적인 공연의 창안자로서 밀라노와 프랑스 조정의 감탄을 샀다고 한다. 우리는 그가 남긴 고 문서에서 자동 북, 건반, 비올라, 파이프오르간, 플루트, 백파이프와 같은 바람을 이용한 악 기, 심지어 극장의 음향효과를 위한 자동장치와 수력장치에 대한 연구도 발견했다. 그가 만든 곡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메모들은 재치 있는 수수께끼, 첫번째 밀라노 체류기 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림인 경우가 많다. 변함 없는 것 중 하나-이것은 레오나르도의 큰 주 제 중 하나이다-는 조화였다. 이때 조화는 음악과 물의 음향효과를 만들어내는 조화이기도 하지만 미적 탐구, 요소들간의 균형, 시간의 측정, 우주론의 원칙 같은 조화이기도 했다. 만 일 그에게 '회화학'이 신성한 학문이라면 음악은 그의 '누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비교론'에서 "그림은 음악을 이기고 음악을 지배한다. 그림은 불행한 음악이 그렇듯 만들자 마자 사라지는 법이 절대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는 눈에 '영혼의 창'이라는 특권을 주었다.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중시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영원히 이어지는 씨실이고 유사한 것 들의 대위법이다. 음악은 그에게 뇌의 학문이고 세련되고 인위적이지만 원시적이기도 한 예 술이었다. 때로 그는 이상한 수수께끼를 가지고 음악을 기술할 때도 있었다. '바람은 동물의 가죽을 통과하면서 모든 인간을 소스라치게 만든다.'는 말은 '춤추게 만드는 백파이프', 시 대를 뛰어넘은 원시세계의 뜻이다. 하지만 특히 음악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 그림도 '보이지 않는 것의 표현'이 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제작하여 세상에 알려진 첫 작품은 '암굴의 성모'이다. 이것은 구성이 대단히 복잡하고 미학적 개념의 모범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그는 이에 대해 직감을 갖고 있었지만 피렌체 체류기 동안에는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 의 경배'가 미완성 상태였기 때문이다. '암굴의 성모'는 롬바르디아의 레오나르도파 '기법' 의 원형이 된다. 이 기법이란, 장면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빛 속에서 갑자기 드러나는 요소들에게 진정한 드러남의 힘을 부여하고, 인물, 후광, '부차적인 빛'의 반사광을 정신의 발산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암굴의 성모'는 25년 동안 레오나르도와 그의 공동 출자자들, 즉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의 '무염시태회' 구성원들간의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새로운 고문서를 발견했음 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최초의 그림이 사 라진 뒤(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수많은 이권다툼의 표적이 됐다. 그는 연기와 회의적 인 이의 제기를 하고, 판결과 선고를 받고 나서, 그것을 나중에 모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림을 끝내기로 합의했다(두번째 판본은 지금 런던에 있다). 1483년 4월 25일 레 오나르도는 7개월 안에 작품을 끝내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그는 1508년 10월 23일에야 완료 를 입증하는 증명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큰 주제들, 수많은 비밀과 암시로 가득한 신비한 기호들을 특별히 종합해 놓고 무한한 상징적, 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대지의 몸 속에서 축축하고 꽃이 많이 피어 있는 동굴은 모태인 동시에 지식의 동굴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비론적인 서 정성과 불가사의의 어조를 띤 형이상학적이고 비교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바위 동굴 과 먼 곳으로 사라지는, 접근이 불가능한 산들은 끝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지질학적 인 우주를 표현한다. 그것들은 순전히 정신적이고 신성한 사건의 은밀한 무대를 형성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몸짓들은 마치 생성중인 인류의 역사 가운데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 기 위해서인 것처럼 일순 멈춰 있다. 1483년의 계약에서 예상한 것(성모가 아기 예수와 함 께 두 천사와 두 예언자 사이에 있고 성 요한은 없는)과 일치하지 않는 아이코노그래피는 레오나르도의 이교적인 의도를 보여준다. 성모의 브로치는 그림의 형태 발생에 관해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브로치는 일종의 소우주, 컴컴한 거울처럼 굴절된 빛과 깊은 어둠이 깃들인 눈을 구성하고 있다. 성모의 얼굴 은 여러 개의 대각선이 수렴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지만, 모든 구성의 중심에 있는 것은 브로치와 거기 달린 20알의 진주이다. 레오나르도가 소유한 최초의 밀라노작업장 레오나르도는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협력자, 제자들과 함께 작업장을 열었다. 그들 가운데 암브로조 데프레디스, 볼트라피오, 살라이, 마르코 도조노, 나폴레타노라고 불리는 프 란체스코 갈리, '기계 기술자' 줄리오 테데스코가 있었다. 그들은 레오나르도의 작업장에 서 '젖 먹이는 성모'라고도 불리는 '리타의 마돈나' 같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요 약된 구성과 상징체계-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젖과 방울새-때문에 주목할 만한데도 거장의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레오나르도가 직접 그린 원본이 있었을까? 작업장에서 제작한 이 그림은 1485-1487년 사이 ,또는 그보다 나중에 그려졌을 것이다. 몇 가지 세부적인 것들이 런던에 있는 '암굴의 성모'에서 다시 그대로 발견되지 않는가? 이 그림을 구상한 것은 레오나르도 가 틀림없다. 통일된 개념과 세련된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그의 밀라노 작업장 제품의 대 표작이다. 초상화의 개혁 1485년-1490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 두 점, '악사'와 '흰담비를 안은 여인'은 레오나르도 가 초상화 부문에 도입한 근본적인 개혁을 증명하고 있다. '악사'는 '지네브라 벤치'의 '빛 나 는' 곱슬머리에서부터 '성 제롬'의 조각 같은 해부학 구조에 이르기까지 참조사항들의 진 정 한 합주이다. 이 참조사항들은 새로운 심리적 강도에 의해 강화됐고, 그것은 '흰담비를 안 은 여인'에서 극에 달했다. 이때 롬바르디아적인 특성, 북유럽의 영향, 막간의 음악이 연 주 되는 동안 가수가 '동작과 호흡'을 있는 정보라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복원한 흔적이 있는데도 이 초상화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모나리자'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발 휘한다. 구성의 리듬, 흰담비와 반대 방향에서 나선을 그리며 공간을 회전하는 여인의 실루 엣은 전적으로 새로운 초상화 기법이었다. 교양없는 인간, 과학의 예술가 밀라노에 도착한 지 5년 되던 해에 레오나르도는 이론적이고 실용적인 지식,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정비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기계의 예 술가에서 과학의 예술가로의 변신이 시작됐다. 그는 다양한 크기의 수첩에 온갖 종류의 메 모를 모으는 일을 시도했고, 체계적인 논설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그가 당면한 첫번째 문제 는 '문학'과 고전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경험과 예술의 실천에서 지식을 얻는 '교양 없는 인간'으로 칭하고 '어리석 은 자들'인 박사들과 논쟁했다. 어리석지만 잘난 체하고 오만한 그들은 그가 독학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그를 비난했다. 그가 사적인 메모에 흔적을 남긴 이 격렬하고 집요한 분 노의 발작들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전기적 요소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책에서 얻 을 수 있는 명료하고 수사학적인 교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그것 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의 명석함은 예술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믿음,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창조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자수 성가한사람이라는 것을 즐겨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위계 질서, 자유로운 예술과 '기계예술' 더 나쁘게는 '노예 예술' 간의 구별, 경험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아카데미적 박학함을 맹렬히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학문은 지휘관이고 실천은 병졸'이라는 것, 즉 진정한 학문 없는 실천은 나침반 없는 선원과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은 하 나의 학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이론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인간' 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이 그 이상 나아가기를 갈망하고,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붙잡 고 싶어하는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예술에 대한 커다란 꿈을 키웠고 그것을 유토 피아 안에 투사했다. 그는 이상국가의 비행기구들, 기술적이고 건축적인 상상의 세계의 모범 을 미리 보여준 예술가였다. 비행술과 잠수함에 대한 꿈 이카루스의 꿈은 레오나르도를 매혹시켰다. 그는 비행 방법과 기술을 연구하여 일생의 여 러 시기에 그에 관한 사본을 적어도 9건은 남겼다. 젊은 시절, 즉 1487-1490년 사이에 피렌 체에서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 그는 원고 B에 전설적인 비행기구를 그리고, 그것과 새의 날갯짓의 유사관계를 정립했다. 그는 점차 비행술, 특히 연접장치 문제에 역학, 물리 학, 해부학의 개념들을 적용했다. 그러면서 기류 ,기하학적 동체, '수학 법칙에 의해 작용 하는 기구'로 해부된 새의 중심, 저항, 변동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공기 역학에 몰두했다. 솔개와 코르톤이라는 맹금류도 관찰했다. 하지만 이것은 '박쥐 외에 다른 모델은 없다'는 것 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비행은 그에게 기계적 유토피아의 절정, 신의 경지에 오른 기술자가 숭고하고 경이로운 것을 창조하는 꿈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형이상학적인 욕망이기도 했고,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상, '유한한 인간이 장엄한 지리'를 개척하는 데 따르는 꿈 같은 기쁨이기도 했다. 하늘을 정복하는 꿈은 깊은 물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수면을 걷는 꿈에 대응하 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레오나르도는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기계에 대한 욕망이 극단적 인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면 해수면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구를 소유하는 것은 특히 전쟁과 파괴라는 음흉한 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잠수함은 '당신이 아는 도구를 가지고 선박을 침몰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배'이다. 여 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존재한다! 그 비밀은 종이에 그린 그의 습작들과 관련 있는 것이 확 실하다. 상당히 주목할 만하지만 별로 실용적이지 못한 한 소묘를 보면 잠수용 도구도 눈에 띄는데, 이것은 바닷속에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배의 밑바닥과 다른 장치들을 뚫기 위한 나 사송곳들이다. 레오나르도는 공증인 앞에서 이 '기구에 대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는 이 기구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큰 부자 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야만적인 광기' 레오나르도는 전쟁은 '야만적인 광기'이지만 어떤 '필요성'에 따라 응할 수도 있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그는 살생 무기를 연구하고, 그가 발명한 것들을 전쟁 지도자에게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살상 무기, 바닷속 깊은 곳에서부터 음흉하게 공격을 가하 는 무기, 독화살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드러냈다. 전투 장면은 그에게 감동과 시각 효과를 연출하는 이상적인 무대장치를 연상시켰다. 그의 소묘들은 대단히 선정적인 힘을 지닌 '미의 깃발들'이다. 역사상 이 작품 이전 또는 이후의 어떤 표현에서도 이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커다란 박격포 폭탄들(그는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을 가지고 불꽃들이 별처럼 빛나는 하늘을 그렸다. 연극의 한 장면에 쓰려고 만든 것처럼 보이는. 전쟁을 소재로 한 그의 습작 들은 점점 더 큰 미적 정확성을 획득해 갔다. '건축의 의사' 건축학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레오나르도는 '전위적'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정치체제나 공 동 출자자들에게는 맞서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항상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 좋은 기회를 포착 하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기회는 제한된 것일 때가 많았다. 마구간에서부터 신전에 이르기까 지, 난공불락의 요새에서부터 설교를 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묘들은 광대한 계획 중에서 합리적인 부분들이었다. 1487련, 밀라노 대성당 채광탑의 목재 모형이레 오나르도의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그는 건축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고 썼다. 그래서 만일 어떤 건물에 이상 이 생기면 '건축의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구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레오나 르도의 계획은 독창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 전통적인 구상과 혼란스러운 구상, 추상적 인 기하학적 개념 사이의 상호작용, 그조적 요소, 나아가 '음악적 조화의 도표'와 인간 해 부학(두개골의 둥근 지붕 등)사이의 유사함을 결합했다. 인체와 소우주, 대우주의 형태와 관 계에 관한 아이디어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형상지'에서 영감 을 얻었다. 1490년 레오나르도와 함께 파비아에 있었던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는 건물 소묘들 과 건축 하나의 해부적 구조에서부터 신전의 단면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개념은 레오나르 도의 건축 크로키에서 발견된다. 그는 비트루비우스의 견해를 따랐는데, 특히 1490년도 작 품으로 추정되는 유명한 베네치아 소묘가 그 예이다. 원-원은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것이다 - 안에 들어간 인체의 중심은 당연히 배꼽, 그리스어로 '옴팔로스'이다. 도시가 미가 되다 '새로운 도시'라는 주제는 특히 1484-1485년까지 밀라노에 흑사병이 돈 뒤로 사람들의 관 심사로 부각된다. 레오나르도가 생각한 이상적인 도시는 왕궁의 고상한 계단에서부터 하수 도망까지, 모든 수준에서 합리적인 조직, 자연스러운 활력, 상징적인 의미, 기능적인 요구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추상적인 형태를 연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현실적 인 해결책을 제안했다. 도로, 하천은 순환을 보장하고, 그것은 효율성, 만족, 위생적인 면에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 해야할 것이다. 그는 체제의 기반을 사회 계급간의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기능에 두었으며 해부학에서 그런 것처럼 분리된 시각을 갖고 일을 처리했다. 그는 하부구조부터 시작했다. 이런 도시계획 분야의 구상들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르네상스기 유토피아적 도시들의 전통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시각들에 더 가까운 단편 들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알 뿐이다. 하지만 1493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복원과 확장을 위한 시안을 구상한다. 밀라노 도시 계획 설계도에 매달려 일할 때, 그는 시골에서 왔고 비위생적인 도시에 있으면 불편함을 느 끼는 돌의 우화 같은 생태학적인 은유들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고독하고 관조적인 생활 을 포기하고 도시에서, 끝없이 간교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를 원하게 된다." 1490년대에 레 오나르도는 공식적으로 브라만테, 돌체부오노와 함께 스포르차의 궁정 안에서 가장 이름 높 은 기술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비제바노에서 피아차 두칼레와 그 주변 건물의 개축에 관 심을 갖고 방앗간들과 스포르체스카의 수력 관련 건조물, 그리고 공작의 농장에 매달렸다. 오랜 전통의 산물이며 롬바르디아에서 현저히 진척된 수력학적 지식은 나빌리나 모렐라처럼 루도비코 일 모로 시대에 실현된 수문 체계, 운하와 함께 이미 관개와 토질 개선, 에너지 사용, 하천의 조절 분야에 큰 결실을 안겨준 바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연구를 피에몬트 의 이브레아까지 확장했다. '1489년 4월 2일, '인간의 형상에 관하여'라는 책'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해부학적 지식을 심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인체의 기능은 물론이거니와 인체 내부의 본질도 이해하고 싶어했다. '영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가 5가 지 범주라고 부른 것에 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여기서 5가지 범주란 정신적 범주, 일시적 범주, 생명의 범주, 감각적 범주, 그리고 '사물의 종류'의 범주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는 '깊 은 원인'을 파고들고 싶었고, 인체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발 명품'의 토대, 예술로서의 해부학, 그림뿐 아니라 과학적 관찰과도 관련된 해부도를 팽개쳐 버렸다. 그는 첫번째 도판들에서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편견들에 밀접하게 의존했고, 동물을 해 부한 것을 가지고 인체를 상상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는 본 것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발견하리라 예상한 것들도 그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영혼이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온몸을 통해 전체로 퍼져 있지 않고' 뇌의 한가운데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생 각이었다. 판단력은 '모든 감각이 향하는 장소'에 있고, 상상력, 지성, '상식'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계급적이고 군사적인 은유법을 통해, 그리고 감각 을 지각하는 우두머리에 의해, 영혼을 중앙의 뇌실 안에서 섬김을 받는 군주로, ''신경과 근 육'은 대장을 섬기는 병졸들로 정의했다. 척수에서 동물의 전신은 측면의 관을 통해 감각 을 전달하고, 가운데 관을 통해 '생식 능력'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미 비길 데 없이 아름 다웠던 레오나르도의 해부도는 이후 25년 동안 엄청나게 변화한다. 경이로운무대 레오나르도는 연극과 축제를 사랑했다. 순간적인 것, 기분풀이, 꼭두각시 ,경이로운 것들의 예술인 연극은 그에게 그의 직감과 그가 발명한 기계들을 확인하고, 문학, 심리학, 무의식적 인 동작, 상징학에 대한 새로운 정열을 표현할 수 있는 엄청난 실험의 장이었다. 1490년 1월 13일 스포르차 가문의 성에서 그는 이사벨레 다라곤과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혼인을 축하 하기 위해 마련된 '천국의 축제'를 기계들을 가지고 연출했다. 벨린초니가 쓴 대본은 다소 미사여구가 많고 즉흥적인 작품처럼 보인 반면에, 무대를 위 한 기계들의 작용, 천체의 활기, 빛의 효과, 운동, 소리, 노래-레오나르도가 발명한 것들의 결실-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결정적인 사건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나폴리 왕 알퐁소 다라곤(루도 비코 일 모로의 불행한 형수인 이사벨레의 아버지)의 옥좌를 쟁취할 생각이었다. 메디치가 는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루도비코의 질녀인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그는 처음에 프랑스 왕의 원정에서 이득을 얻어낼 생각이었지만, 곧 이탈리아 동 맹군의 편을 들어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494년 11월, 스포 르차 기념물이 녹아 없어질 것을 예상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동이 무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을 목적으로 준비한 청동(적어도 60톤은 되었다)은 페라라로 옮겨져 프랑스군 과 싸우는 에르콜레 데스테를 지원할 대포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화가 레오나르도는 수백 장의 종이를 메모와 소묘로 채워 나갔다. 그것들은 그의 기술적 인 개념들의 발전과정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또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수도원의 식당 에 걸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도 주문받았다. 이때부터 레오나르도가 부자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바늘을 날카롭게 만드는 기계 의 도면을 그리면서 1년에 금화 6만 뒤카의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끈질기 게 라틴어 공부를 계속했다. 라틴어는 언젠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지식인들의 세 계에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열쇠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신은 그들을 무시할 때도 많았지만. 시간, 씨실, 메커니즘 레오나르도의 작품과 연구들은 범학문적 교환, 방법론적 유사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기계를 그리거나 회화의 구성을 스케치하는 것, 인체의 해부학(소우주)이나 지구의 '몸(대우 주)'을 모사하는 것은 그에게는 모두 비슷한 과정들이었다. 그는 어떤 틀이나 괘종시계의 가 장 복잡한 면을 그릴 때 마치 해부를 하듯이 그것들의 기계장치를 연구했다. 모든 요소를 분해했고 우주의 특수성을 연구했고, 구조의 정적 역학에서부터 기능의 동적 역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과 움직임을 관찰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의 소재와 기술, 기본 형태, 중요한 자료, 원칙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했고,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전통적인 과정을 알려고 했다. '화가'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유토피아에 속하며 현실을 넘어선 하나의 신세계, 즉 기술적 상상력에 관한 '시'의 세계를 예고하는 통합 기술에 속하는 새로운 '기계 들'을 그렸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르도가 결의에 찬 태도로 괘종시계와 방적기 연구에 매달린 것은 대단 히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를 위해 수백 편의 메모와 스케치를 남겼고, 그것을 근거로 끝 없이 반복되는 나선 계단, 제동장치, 추진기, 심지어 추의 구조를 구상했다. 그는 괘종시계, 추와 유사한 장치를 제분기, '바람을 만드는 기계', 릴 장치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 는 뛰어난 그림들을 가지고 항구적인 움직임을 불합리한 것으로 설명했다. "오! 별의 항구적 인 움직임을 관찰하는 사람아, 당신은 이 탐구에서 얼마나 많은 헛된 공상을 만들어냈는가? 가서 금으로 변한 돌을 찾는 이들 옆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아보시구려." '최후의 만찬' 레 오나르도가 기술적, 과학적인 견해들을 추구하는 동안 밀라노의 공작으로 공표된 루도비코 일 모로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수도원 안에 스포르차 가문을 찬양하기 위한 영묘 설 립안의 일환으로 그에게 '최후의 만찬'을 주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화가에게 '정신 적인 것'으로서의 회화에 관한 개념, 광학과 음향효과, 해부학과 역학 분야에 관한 다양한 그의 경험들을 훌륭하게 종합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셈이었다. 이 작품은 관상학과 공간 의 표현에 관한 예비 연구를 근거로 한 정밀한 계획의 결실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 가운데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최후의 만찬'은 많은 왕과 황제들로부터 찬사를 듣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부터 나폴 레옹 1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림이 그려진 벽을 프랑스로 수송하려고 했다. 이 그 림은 또한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의 감탄을 샀다. 얽힘장식의 상징체계 1498년 46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의 성에서 카메리니, 살레타 네그라, 살라 델 레 아세의 장식에 매달려 있었다(이것들은 1893년에 재발견되었다). 그는 거기서 자연과 인 위성이 섞인 식물의 얽힘장식이라는 복잡한 체계를 재현했는데, 이것은 루도비코 일 모로의 문장이었고 영원한 회귀와 같은 원형들을 참고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아카데미아'가 새겨 진 도판의 제작 시기는 이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프랑스에서 레오나르 도는 '밀라노 공작에게 소속된 화가들의 우두머리'로 언급된다).그는 이 도판에서 더욱 추상 적인 세계 위에서 이 자연주의적인 기하학을 다시 취했고, 켈트족 미술이나 동양적인 모티 프들을 차용함으로써 상징적인 측면들을 강화했다. 완전무결한 비례 음악처럼 '우주의 모든 것을 껴안는' 수학과 기하학은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부터 그의 작품 속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것들은 점점 더 그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그는 1496년 토스카나 사람 루카 파치올리가 밀라노에 왔을 때부터 이들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루카 파치올리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미간행 논문들을 표절한 혐 의로 고소를 당한 사람이다. 절대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레오나 르도는 이렇게 선언했다. "수학자가 아닌 자는 누구도 나의 원칙들을 읽을 수 없기를 바란 다." 그리고 '루카 어른으로부터 근의 곱셈을 배우노라'는 그의 말에서는 새로 어떤 종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의 열의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는 부주의로 인해 가장 기초적인 셈을 자주 틀렸지만, 기하학 공부의 성과는 즉시 전격 적으로 나타났다. 몇 개월만에 그는 파치올리를 위해 '완전무결한 비례'를 이루는 다면체를 그렸다. 제네바와 밀라노에서 나온 스포르차 가문의 원고 표절물을 보면 이것은 소용돌이꽃 장식과 결부돼 있고, 레오나르도의 '아카데미아'에 나온 것들과 흡사하다. 이것들은 아마도 3 차원적인 견본들을 다시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모델들을 위해 1507년 피렌체의 시의회는 그 견본들에 대한 대가를 파치올리에게 지불한다. 루도비코 일 모로가 몰락하고 프랑스인들이 도착하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났다. 피 렌체에 돌아오기 전에 그는 만토바와 베네치아에 들렀다. 체사레 보르자의 군 기술관 자격 으로 그는 로마냐와 마르케,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등을 두루 돌아다닌다. l501년 이사벨라 데스테의 대리인은 이렇게 썼다. "그의 생활은 너무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하루하 루를 겨우 연명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레오나르도가 '기하학에 매달려 일하느라 붓 에 혹사당한다'고 했다. 제4장 미술과 전쟁 루도비코 일 모로의 몰락 1499년 루카 파치올리와의 우정과 '최후의 만찬'이 가져다준 찬사로 힘을 얻은 레오나르 도 는 스포르차의 기념물을 녹이기를 원하고, 궁정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하며, 미술적, 학문적 연구를 심화하려 했다. 그보다 1년 전에 루도비코는 밀라노의 포르타베르첼리나 근처에 있 는 포도밭을 그에게 주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비스콘티 가문의 상속권을 요구하면서 스포르차 가문을 상대로 선 전포고하자, 루도비코 일 모로는 독일로 달아나 그의 조카인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보호를 청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움직임과 무게에 관한') 역학과 수력학(이사벨라 공작부인의 ' 욕조'를 위한 장치 따위)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피렌체에 돈을 저금하기 위해 많은 신경 을 썼다. 그가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을 때 그는 이렇게 기록했는데, 이 말은 겉 보기 엔 초연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공작은 국가와 재산, 자유를 잃었다. 그리 고 그가 계획한 것 중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는 놀라운 비망록이 들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 왕의 고문이 자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루이 드 리니와 함께 은밀히 이탈리아 내륙 여행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함께 나폴리로 가기 위해 로마에서 그를 재회할 작정이었다. 오 른쪽에서 왼쪽으로, 뒤집어쓴 이메모(이는 레오나르도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에서도 실마리가 되는 4개의 단어만은 읽기 쉽게 왼쪽에 서오른쪽으로 쓰여졌다. 이것은 이들을 더 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이것들을 강조하고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단어는 이 여행의 주된 목적과 관계된 것이다. arroma(로마에), annapoli(나폴리에), ligni(리니), 그리고 ladonagione(기증). 그는 또한 그의 뒤집어 쓰기 방 식에 따라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네가 가져올 수 없는 것을 팔아라." 사실 여행의 첫번째 목적지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영토인 만토바였을 것이다. 만토바는 그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자진해서 하다 1500년 초 레오나르도는 '해야 할 일을 자진해서' 함으로써 세도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다양하고도 활발한 출세의 장을 열었다 스포르차의 궁에서 17년을 보낸 뒤 그는 이제 그의 대후원자를 추방하고, 친구이자 비트루비우스의 저서 번역자인 자코포 안드레아 다 페라라 를 죽인 프랑스인들에게서 보호자, 친구,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터키인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연구했고 같은 시기에 터키 황제를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 위에 유럽의 강과 아시아의 강을 잇는 교각 설계도를 그렸다. 베네치아, 그 리고 1502년 이몰라에서 그는 미래의 메세나, 즉 '모나리자'와 '레다'의 공동 출자자가 될 율리아노 데 메디치와 재회했다. 그는 무력으로 피렌체를 탈환하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아레초가 피렌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 아마 그의 친구 비텔로 초 비텔리(체사레 보르자에게 살해당한다)와 함께 발디키아나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처음에 체사레 보르자(아피아니의 자크 4세로부터 로마냐 공국을 빼앗았다)의 '허물없는 친구'로서, 보르자가 몰락한 다음에는 같은 아피아니를 섬기는 피렌체의 사절로 피옴비노에 갔다. 다시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가 다시 찾은 피렌체는 더 이상 위대한 로렌초의 도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로렌초의 독재를 비난했지만 '황금기'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보나롤레의 도덕 혁명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격앙된 분위기가 약간은 가라앉은 도시의 화실들에서 그는 동료들과 재회했다. 기를란다요는 변함없이 존경받고 있었지만 보티첼리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년 전, 레오나르도가 의뢰받았던 가장 큰 주문 두 건(산 베르나르도 소성당의 벽화와 '동방박 사들의 경배')을 물려받은 적이 있는 필리피노 리피는 산티시마 아눈치아타를 위한 주문을 그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성녀 안나'를 위한 습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끝은 맺지 못한다. 1500년 4월 24일부터 1502년 5월 12일까지 레오나르도는 잠간씩 로마 여행을 할 때를 제 외하곤 주로 피렌체에 머물렀다. 로마 여행에 관한 것은 티베르 강가의 방앗간과 티볼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저택에 관한 그의 메모에 언급돼 있다. 로마 여행 뒤, 그는 양식과 주 제 면에서 새로운 기준들을 그의 작품에 도입했다. 밀라노 왕궁의 화려한 생활은 옛일이 됐지만, 레오나르도는 계속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 원에 있는 자신의 .구좌에 피렌체 금화를 위탁했다 이 시기에 그는 고문직 활동을 가장 좋 아한 듯하다. 만토바 후작의 요청으로 그는 빌라 토발리아의 설계도 요약본을 완성했고, 이 것이 피렌체의 언덕 위에 위치해야 완벽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 것을 제안 했다. 사람들은 산 미니아토의 종탑 문제, 산 살바토레 아 몬테의 안정성 문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장소 문제 등, 갖가지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그의 의견을 청했다. 고문 활동 중 가장 낮선 일은 1502년 5월 프란체스코 말라테스타가 로렌초 데 메디치가의 소장품이자 이 사벨라 데스테에게 갈 예정이었던 4개의 오래된 꽃병을 입수했을 때 '골동품 전문가'로 활 약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한 서신들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이사벨라 초상화의 두 번째 본을 부탁할 책임을 맡았던 그녀 의 대리인들이 쓴 편지는 이 화가의 연구와 회화 작업장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에는 상세한 내용과 함께 두 작품이 묘사돼 있다. 작은 '성모'와 '성모, 아기 예 수,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성녀 안나'를 위한 최초의 대형 밑그림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런던 내 셔널갤러리에 보관된 작품이나 바사리에 의해 묘사된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리인 중 한 사람인 피에트로 다 노벨라라 수도사는 1501년 3월 27일자 이사벨라의 편지 에 대한 4월 3일자 답장에서 '레오나르도의 생활은 너무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쓰고, '그는 가끔 그의 두 제자가 그리는 초상화 에 손을 댄다.'고 덧붙였다. 레오나르도는 '기하학에 매달려 일하느라 붓에 혹사'당했다. 4월 14일자 편지에서 이 수도사는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그는 수학실험에 매달려 그림을 잊은 나머지 더 이상 붓을 들지 못하지만', 루이 12세 비서인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를 위 해 '작은 그림' '실타래를 든 성모'를 완성하는 대로 후작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로 약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과 개인적으로 한 계약과 수학에 대한 열정을 핑계로 시간을 벌고 자 했다(그래봤자 기껏 한 달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단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흥미롭다. 스포르차 기념물을 주조하기 위한 거푸집을 얻기 위해 페라라에서 밀라 노의 프랑스 총독에게 보낸 9월 19일자 에르콜레 데스테의 요구서도 역시 신속하게 처리됐 다. 9월 24일 데스테의 대사는 루앙의 추기경으로부터 호의적인 답장을 받았다. 그런데 추기 경은 그에게 루이 12세에게 직접 말해 보라고 충고했다. 파치올리와 함께 피렌체에 있던 레 오나르도가 정수론과 기하학 연구에 계속 몰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린 양과 노는 아기예수'(1501년 작품으로 추정)와 금과 납을 압축하는 압연기를 위 한 습작을 그린 종이 위에 그는 사바소르다(파치올리를 잘 알던 아랍 출신 에스파냐계 유대인) 의 기하학 문서의 라틴어 판본 요약문을 세밀하게 베꼈다. 3년 뒤, 나폴리의 시인이자 고전 연구가인 폼페오 가우리코는 '조각론'에서 레오나르도가 '아르키메데스의 경쟁자 중 가 장 유명하다'고 쓰고 있다. 체사레 보르자를 위한 여행길 1502년 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프랑스인들과 만토바의 영주들을 위해 일했다. 그해 그의 나이 꼭 쉰이었다. 그는 이듬해 여름에 이 도시를 떠났다. 미술과 군사학 분야의 필요 성에 따라 체사레 보르자(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체사레 보르 자는 프랑스 왕이 그에게 허락한 발랑스 공이라는 작위 때문에 '발랑스 사람'으로 불렸다. 체사레는 프랑스인들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 중부에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중이었다. 승리한 루이 12세가 의기양양하게 밀라노에 입성했을 때 그는 그 곁에 있었다. 그때 레오나르도를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프랑스 왕이 조정을 장악한 파비아에서 공인된 국왕의 공문서 형태의 명령을 통해 렝나르도를 '대단히 뛰어나고 대단히 귀중하고 친숙한 건축가이자 제분야의 기술자'라고 불렀다. 로마 생트 엘리제의 장관이자 로마냐 군주이며, 피옴비노 영주라 자칭한 발랑스 사 람 체사레는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영지의 요새도시 연구를 맡기고, 자신의 용병과 기술 자들에게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새 직무는 프랑스 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피렌체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레오나르도의 절친한 친구)와 함께 체사레 보르자의 정복욕을 억제하고 피렌체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노력했다. 8월 18일 전까지, 그리고 그날 이후 몇 달 뒤(1503년 2월 전) 레오나르도는 에밀리아-로 마냐, 마르케, 움브리아, 토스카나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 여행에 관한 메모들은 가로 7cm, 세로 llcm의 수첩에 기재돼 있다(원고 L). 7월 30일, 그는 우르비노에서 진수대의 굴림대 를 그렸다. 그곳에서 그는 또라우라나 계단, 페르도노 데 브라만테 소성당을 그리고 놀라운 솜씨로 4페이지에 이르는 보루 축조 기록을 남겼다. 이때 그는 나침반을 이용하여 기록에 정확성을 꾀했다. 그 다음에는 페사로의 도서관 문 제를 건드리고, 8월 8일에는 리미니 분수에서 분출되는 물의 음악적 조화를 연구했다. 8월 10일과 15일, 체세나에서 그는 전시회를 알리고, 건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면서 성 벽에 대한 기록을 일련의 계산과 함께 급히 갈겨 썼다. 9월 6일 오후 3시에 그는 체세나티 코 교각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예술로서의 지리학 '이몰라 지도'와 '토스카나, 에밀리아, 로마냐의 물리학적 지도'는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 록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이며 영토에 대한 '과학'과 예술간 상호교류의 가장 뛰어난 예이 다. 이것들은 지형 정찰, 지도 제작법에 대한 연구, 기하학, 우주론, 해부학, 미학적 지식들을 총집약해 놓은 논집이다. 후자는 만다라 같은 밀도를 갖고 있고 미생물처럼 들끓는 생명력 에 의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정맥, 동맥, 모세관 조직이 어떻게 나눠지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물리학적 지도'에서 그는 시적 지형학에 무한의 상징학을 섞는 본 원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조감도식 지도 제작법은 정신적, 상징적, 지적, 기능적, 전략적 전망과 지식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이 지도들을 보면 마키아벨리가 '백성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군주와 ' 국가를 구상하는 자들'을 비교한 일이 생각난다. 1503년 10월 24일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는 새 일을 시작했다. 그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교황실의 열쇠를 받았다. 이 방을 작업장 삼아 그는 시의회 궁의 벽을 장식할 '앙기아리 전투'의 밑그림을 그린다. 새로 꾸민 대회의실 벽에 그린 이 작품은 사료관에 보관된 문서들과 레오나르도의 비망록, 사료 편찬, 전기덕에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소실되고 말았다. 세상의 학교 1504년 8월 30일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도구와 물감을 받았다. 이는 주문받은 작품의 웅대함을 말해 주는데, 그 크기가 7×17m에 달했다. 그는 1440년 교황의 동맹군인 피란체 사람들이 니콜로 피치니노가 이끄는 밀라노 사람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는 그림을 그려야 했 다. 이는 그가 그 자신, 피렌체, 그리고 그의 경쟁자들에게 던진 결투 신청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가 맞은편 벽에 그릴 '카스치나 전투'의 주 문 을 땄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을 위해 미래의 화가들에게 모범이 될 '세상의 학교'를 창조 했다. 폭력과 분노의 절정인 '말의 무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낭만적인 전설에 따르면 이미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의 서두 부분이 레오나르도의 실험 도중에 손상됐다고 한다. 그가 그림을 건조시키기 위해 옛 방식으로 불을 붙였는데 물감이 변하면서 방금 탄생한 걸작을 녹였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도구들의 형편없는 질을 하소연했다. 사정이 어찌 됐든, 기록들을 보면 전투의 중앙 부분('군기를 위한 전투')은 오랜 세월 동안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남 아 있었다. 이 그림은 바사리의 프레스코화에 덮여 아직도, 16세기의 방에 존재할 것이다. 군대 건축물 레오나르도는 종교 건축을 할 때는 흔쾌히 팔각형을 사용하고 도시계획을 할 때는 방추형 설계를 확장한 반면, 군대 건축을 할 때는 이상적이고 기능적인 형태인 원을 사용해 다른 분야와 구별했다. 하지만 1577-1577년까지, 즉 그가 체사레 보르자 곁에 있을 때부터 피옴 비노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록을 보면, 기이한 피라미드형 건축과 방사형 건축목록도 나타난 다. 이것들은 여러 각도로 표현되거나, 정사각형 면과 다각형 면을 가졌거나, 또는 동심원구 조, 절반은 나선형, 절반은 미로형 구조를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침수되기 쉽거나 불이 나기 쉬운 통로, 모반이 일어났을 때 대피할 수 있는 비밀 계단을 비롯해 다양한 방위체계 설계도를 작성했다.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는 원형의 요새 설계도 외에 달과 광학에 관해서도 필기하고, 풍경화의 원근법에 관한 보티첼리의 생 각을 비판하고, 제자 살라이의 이름을 3번에 걸쳐 언급하고, 말, 소 같은 짐바리 짐승들이 싣는 짐의 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1504년 가을, 그는 '앙기아리 전투'의 제작을 다 시 중단하고 피옴비노에 갔다. 1504년 11월 20일에는 일을 했고, 오니산티의 날(만성절)에는 '영주에게 이것을 증명해 보 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첫번째 '조직적' 설계도는 기존의 성채와 그가 구상한 망루 사이에 '뚜껑 덮인 길'을 뚫고, 새 망루와 그 도시의 '성문' 사이에 '우측에 가장자리가 있는 해자' 를 파, 성채와 로체타를 잇는 380m의 호를 파는 것이다. 그는 견적서를 작성했다. 망루(높이 20발, 지름 25발)에 585뒤카(옛날에 유럽제국에서 사용한 금화:역주), 총금액이 2099뒤카와 1/16이 들 것으로 예상됐다. 이 종이엔 회화론과 관련된 메모들('어둠은 빛의 결핍이다.....)과 고양이의 청각, 후각, 시각, 이를테면 그들의 '시각적 능력'에 관한 놀라운 관찰도 함께 적혀 있다. 마드리드의 원 고 2에 적힌 건축 관련 메모들은 시에나와 피렌체 기술자들과 그의 흥미로운 관계를 보여준 다(안토니오 다 산갈로는 레오나르도와 함께 피옴비노에 있었고, 범선 항해에 관한 그의 메 모에 관여했다).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에 관한 논문을 연구하고, 여백에 자신 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구절들을 베끼고 거기에 주석을 붙이고 소묘한 것 들을 그의 피옴비노 다리 설계도에 적용했다. 그런 예로는 정사각형의 망루. 입구를 '두꺼운 벽'으로 감싼 반원형 제방, 해상건축 체계 등이 있다. 피란체와 밀라노 사이 1504년 초 몇 달 동안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에 매달려 일하며 그에 해당하는 보 수 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메모를 하기 위해 18권의 '공책'을 샀고 이사벨라 데스테로부터 '아기 예수'의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공작부인을 위해 '뭔가 환심을 살 만한 일을 하겠다' 고 나선 건 바로 살라이이다. 레오나르도는 보기보다 더 자주 빈치에 갔다 그는 언덕들 한가운데 호수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도치아의 방앗간을 연구하고, 몬탈바노 언덕들의 선을 그리고, 피사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같은 종이 위에 물감을 녹이는 방법을 적고,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기 위해 '돌 기름(석유)'을 조절할 수 있는 램프를 그렸다. 이보다 훨씬 전에는 이미 자연 조명을 조절하 기 위해 칸막이를 옮길 수 있는 작업장. 그리고 일과 후 그림을 정리할 때 사용할 기중기를 구상한 바 있었다. 1506년 4월 27일 '암굴의 성모'(1483년에 주문받았다) 문제의 중재 판결이 내려졌다. 레 오 나르도와 암브로조 데프레디스는 2년의 유예기간 안에 작품을 끝내야 했다. 당시 레오나르 도는 피렌체에서 '앙기아리 전투'에 완전히 매여 있었다. 그의 삼촌, 아마도리(피아졸레 의 참사원 알레산드로)는 이사벨라 데스테가 레오나르도에게 주문한 '이 얼굴들'에 관해 그녀 와 우정어린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1506년 5월 30일 프랑스 정부의 간곡한 요구 로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의 제작을 중단하고 밀라노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때 그는 계약서까지 써가며 석 달 내로 돌아오마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어겼다. 8월 18일 밀라노의 총독이자 왕의 대리관이고 프랑스의 원수인 샤를 드 앙부아즈가 그의 체류 를 연장할 것을 요구하는 첫번째 신청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피렌체인과 프랑스인들 간의 외교적인 왕래가 시작됐다. 1507년 1월 14일 블루 아궁에 있던 루이 12세는 '그의 손으로 몇 점의 작품을 그리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리하여 1월 22일 피렌체 시의회는 레오나르도에게 동의를 표 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신에게 할말은 이것밖에 없소." 레오나르도는 국제 정치문제 를 야기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 사이를 왕래하게 된다. 3월에는 피렌체, 5월에는 밀 라노에 가고, 또다시 피렌체와 빈치에 갔다.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세운 삼 촌 프란체스코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은 유산을 놓고 그와 싸웠다. 원한 섞인 분쟁 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레오나르도는 분쟁을 해결해줄 강력한 후원자를 찾았다. 샤를 드 앙 부아즈는 밀라노에서부터 그의 편에 가담했고,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가 피렌체 시의회에 되도록 빨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 때문에 그 들은 '왕의 화가' 레오나르도가 '그(왕)에게 매우 소중한 그림'을 중단하는 것을 허락했 다. 1508년 초 레오나르도는 살라이를 밀라노에 보냈다. "형제들과의 소송은 거의 끝나가고 있 으며 내 생각에 부활절에는 여러분에게 크기가 다른 두 점의 성모화를 가져갈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이 그림들은 대단히 신심 깊은 기독교 신자인 왕과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을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에 그는 그렇게 썼다. 피렌체 체류 기간 중의 두 개의 주 제 '성녀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노는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성모'는 이 그림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위해 그린 작품들은 어떤 것일 까? 그가 피렌체의 시의회에 보낸 1506년 12월 16일자 편지에서 샤를 드 앙부아즈는 레오나 르도를 채 알기도 전부터 그의 '뛰어난 작품들' 때문에 그를 '사랑했고' 그가 '회화에서는 유명하지만' 그밖에 그가 가진 다른 재능, 특히 '소묘, 건축,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다른 것들' 에 대한 재능으로는 유명하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의 별장을 위한 습작들 때문에 그 렇게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왕에게 선사할 그림은 어떻게 됐을까? 밀라노에서 '중단' 됐을까? 레오나르도, 라파엘, 그리고 '근대적 방식' 피렌체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우아함', 그리고 공간과 빛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으로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 같은 토스카나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 다. 한편 몇몇 레오나르도파의 작품들과 레오나르도 주제의 해석은 바키아카, 프란치아비조, 부자르디니 등의 것으로 인정됐다. 바사리는 당시 12살밖에 안 된 폰토르모가 그의 제자가 되어 레오나르도에게서 매너리즘(기교주의)의 싹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시에나에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에 이르기까지 레오나르도의 제자들은 그의 방식과 함께 '앙기아리 전투'에서부터 '노는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성모'와 '실타래를 든 성모'에 이르 는 그의 성상화 목록을 전파시켰다. 라파엘은 이 그림들과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에_지대한 관심 을 쏟는다. '레다'또는 '발코니의 여인'에 대한 그의 해설(그가 이것을 쓴 것은 1506년 이 전 일 것이다)에는 1505년까지 레오나르도가 그린 이 작품들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우르비 노의 젊은 화가에게 강한 인상을 줄 정도로 전격적인 습작에 대한 언급만 하고 있다. 그는'(모나리자'와 '막달레나 도니' 간의 명백한 유사함을 발견했다. 1508년 9월 프랑스의 왕실 화가 레오나르도는 마침내 피렌체를 떠난다. 그는 밀라노에 귀 환함으로써 사고와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나는 여기서 증명에 몰두하지 않겠 다. 작업이 정리되면 그것은 곧 입증될 것이다. 나는그저 문제와 발명에만 몰두하겠다. 그러 니 이제 내가 이 분야에서 저 분야로 왔다갔다 해도, 독자여, 나를 비웃지 마라." 제5 장 밀라노, 로마, 앙부아즈 1508년 3월 22일까지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피에로 디 브라치오 마르텔리의 집에서' 조각가 조반 프란체스코 루스티치와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루스티치가 세례당에 기증할 세 점의 청동상('성 세례자 요한의 선교')을 제작할 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책을 만들 기 위해 메모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훗날 '코덱스 애런델'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것은 무 질서한 모음, 수많은 종이의 집적물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것들을 베낄 때는 분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하이퍼텍스트로서 구상된 원고 이 시기에 그는 한 메모에서 그의 방법, 나아가 두려움, 의심, 불안에 대해 진술했다. "내 일은 이 모든 주제에 매달려라, 그것들을 베껴라, 그런 후 어떤 징후의 원형을 기록하고 그 것을 피렌체에 남겨놓아라.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가져가는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네가 발명 한 것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9월 12일 밀라노에서 그는 천체학, 광학에 관한 메모, 그림자 이론, 지리학, 수력학적 관 측, 새의 비행에 관한 견해들을 가지고 원고 F를 시작한다. 그는 여기에 알베르티와 비트루 비우스를 참조한 내용을 덧붙인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의 이동기에 쓰여진 원고 '코덱스 레스터'는 레오나르도의 편집 방식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는 흩어져 있는 메 모와 견해, 자서전적 추억, 고대와 근대의 원전 인용, 그의 다른 사본을 참조한 것들, 그의 다른 저서나 수첩에서 발췌한 것들을 모았다. 이때 그는 체계적이고 결정적인 새로운 자료 집을 만들 작정으로 여러 가지 의견들, 재검토, 판결, 토론 보고, 새로운 실험들과 함에 이것 들을 수집해 나갔다. 그는 가설과 의문 제기를 통해 일을 처리했다. 문장의 흐름을 끊는 회 고들, 강조된 것들, 추가된 것들, 삭제된 것들을 보면 이 글과 소묘들이 예외적으로 짧은 순 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가와 광학: "확실성을 낳는 체험이 여기서 밝혀지다" 그림 이론과 실천에 관한 레오나 르도의 의문 제기의 중심에 광학이 있었다. 원고 C를 보면 그는 1490년부터 이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원고 D를 보면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던 시기, 특히 1508-1509년 사이에 다 시 거기에 몰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그림은 시각의 10가지 속성, 즉 어둠, 명 확 물체, 색, 형태, 위치, 멀리 떨어짐, 가까이 있음, 움직임, 정지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 다.' 눈도 '수학 법칙을 따르는' 기하학 도구로, 그는 직접적인 체험과 전통적인 원전인 갈 리아노, 아비첸노, 알 하진, 베이컨, 페샴, 비텔로, 기베르티, 알베르티로부터 다시 연구를 시 작함으로써 그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알베르티처럼, 심지어 유효성을 놓고 토론을 벌일 때도 레오나르도는 동공의 중심을 축으 로 하는 중앙의 반지름에서부터 시작되는 시각적 피라미드 이론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이 런 원근법적이고 피라미드형인 시각을 빛, 색, 소리, 중력 등에 관한 그의 견해들에 적용했 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음향감도에서 침묵의 지점과 일치할까? 그의 초기의 연구들을 보면 눈은 물체가 있는 방향으로 '시각적 분출물'을 발사함으로써 볼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견 해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 결과 그는 눈이 광선물을 물체에 이해 발사된 미립자로서 받아들 이는 중세의 이론에 찬성했다. 결국 그는 원고 D에서 '시각적 효능은 원근법 화가들의 말처 럼 어떤 한 지점으로 귀착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원고 F에서 시각적 효능은 '눈의 동공 전 체로 확산된다.'고 주장했다. 우주의 역학 힘, 무게, 움직임, 관성, 평형, 저울의 원리에 대한 분석은 레오나르도에게 우주 역학의 실 례들과 비례의 조화를 제공했고, 그는 그것을 음악과 건축, 그리고 그의 관찰 훈련에 적용했 다. 정력학과 동력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이론들을 재검토했다. 원고 1 서는 '움직임의 원인은 무엇인가? 충격은 무엇이고 충돌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자신 의 초기의 고전적 원전들을 밝힌다. '먼지 한 톨의 무게'를 예로든 그는 '저자들을 믿지 말 라'는 경고를 되풀이하면서 실험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을 요구하는 자들을 속인 다.'는 결론을 내린다. 1500년 전까지 레오나르도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고 알베르 드 작 스를 비판하고 잠시 중세 말의 개념들, 이를테면 부리단과 오레슴의 개념들을 답습하고 마 를리아니를 접하다가 결국 1508년경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 돌아온 다. 그는 아마도 고대인들의 가치를 그들의 해설자들에 의해 확산된 모조품과 구분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지상낙원 산 바빌라의 샤를 드 앙부아즈를 위한 별장 설계도는 레오나르도에게 '물의 유희'와 '경 이로운 정원'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의 분수 같 은, 유명한 고대인들의 분수에서 영감을 얻고 시에나의 기술자 타콜라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고문서를 인용했다. 그는 한 설계도에 갖가지 결과, 즉 포도주 냉각기부터 부인의 드레스 밑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작은 물줄기에 이르는, .그리고 수력 방아로 움직이는 악기 부터 천연 향수의 어울림에 이르는 교묘한 발명품들을 묘사했다. 정원은 온갖 종류의 새 를 집어넣고 극히 가는 구리 철망으로 덮을 예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프라톨리노에 있는 메디치가 정원의 발명품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레오나르도는 샤를 드 앙부아즈의 별 장을 위해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장치가 달린 거대한 수력 시계도 구상했다. 그는 환상의 정원을 묘사했는데, 여러 가지 발명품이 '비너스의 자리'를 위한 설계도 안에 서 자연과 인공이 뒤섞여 있다. 비너스의 자리는 키프로스섬을 생각해 설계한 것이다. 그는 '바쿠스 신의 여제관,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신), 목신의 이야기, 그리고 야생의 것들'로 장식할 생각을 한 것일까? 1516년 알도브란디니라는 이름의 키프로스 대주교는 그의 로마의 정원을 위해 페린 델 바가에게 같은 것을 요구한다. 트리불치오의 기념물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는 레오나르도가 작성한 '조반니 자코모 다 트레불초의 분묘' 의 견적서가 등장한다. 견적서의 비용은 3046뒤카에 달한다. 이 기록 덕에 그보다 20년 앞서 그 린 스포르차의 기념물 설계도 중 일련의 습작을 분리할 수 있었다. 이 습작들은 밀라노의 산 나자로에 그의 묘비 건축을 위해 4000뒤카를 할당하라는 트리불치오의 유언에 따른 것이 다. 1488년부터 루도비코 일 모로의 적수였고 그의 몰락을 조장한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프랑스의 원수, 비제바노의 후작, 밀라노의 영주란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 작위는 곧 샤를드 앙부아즈에게 돌아갔다(레오나르도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08년(또는 1511년)부터 그린 레오나르도의 소묘는 '사슬에 묶인 죄수들'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에게 바친 기념물과 마찬가지로)과 함께 기둥들을 포함한 설계도 전체를 보여 준다. 이것은 비록 축소된 규모지만 스포르차 가문을 위해 구상했던 기마상 아이디어를 다 시 다룰 수 있는 기회였다 3차원의 해부학 1510년 겨울이 끝나기 전에 레오나르도는 그의 새로운 해부학 연구 시리즈를 마칠 작정이 었다. 그것은 1489년의 소묘들과 비교할 때 그의 경향의 전환과 명백한 진전을 표현하고 있 었다. 그는 어떤 추론이나 선입관보다는 직접적인 관찰의 정확성을 앞세우면서 하나의 단순 한 시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3차원의 물체 주변을 빙 돌면서 영화를 찍는 것처 럼, 인간의 몸을 점진적으로 분해하는 단계를 보여줬다. 이때 그는 잘린 모습과 단위들을 함께 보여줬는데, 해골의 뼈대를 잘 보여주기 위해 몇몇 부분이나 신체 기관들을 제거하기 도 했고, 반대로 인체의 구조와 성분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근육의 피막을 보존하기도 했 다. 시각적으로 볼 때, 해부 과정에서 미적인 관심과 '과학'의 극치가 서로 충돌하게 만드는 이 도판들은 놀라우리만치 근대적인 느낌을 준다. 거꾸로 쓴 문자의 단편들은 예술적인 효 과를 낳고 있으며, '기괴한 것들'조차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화가가 미리 설정 한 세 개의 시각적 각도는 여덟 개의 시점이 되고, 논리적이고 연속적이고 율동적이고 거의 '사진역학적인' 장치를 구성한다. 하지만 관객이 이 소묘를 볼 때,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기하학의 법칙들을 어기고 가장 이로운 자리를 잡으면서 이상적인 시각을 다시 만든다.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연구의 비길 데 없는 구상적인 특징은 그의 모든 이론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너의 (구두) 묘사가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너 는 독자의 영혼을 어지럽게 만들 것이다." 발텔리나에서 아다의 바프리오까지 레오나르도는 롬바르디아의 영토, 특히 산크리스토파노와 마르테사나 운하, 이세오 호수, 을리오강, 그리고 아다의 트레초, 트레코르니, 바프리모의 수리를 연구했다. 특히 그는 아다 에 있는 멜치 별장의 손님이었는데, 멜치 별장은 그가 증축안을 구상한 곳이다. 그는 베르가 모와 브레시아 연안, 다시 말해 발텔리나에서 '이탈리아 국경'까지의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브리안차 호수의 고저차를 측정하고 밀라노와 프랑스를 연결하는 좀더 용이한 새로운 통신 로를 모색했다. 이것은 일례로 람브로강과 코모 호수 덕에 가능했다. 레오나르도 는덮개가 있는 둑과 운 하라는 대담한 계획을 구상하고 심지어 아르노강이 우회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미리 평 가했다. 1516년 이후 프랑수아 1세는 아다를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이 계획은 16세기 말에 완성된다. 따라서 이것은 미친 짓이 아니었다! 1513년: 바티칸의 망루에서 1511년 레오나르도는 스위스 의용병에 의해 발생한 데시오의 화재를 목격한다. 스위스의 의용병들은 이듬해 루도비코 일모로의 아들 막시밀리안 스포르차에게 밀라노의 정권을 넘겨 준다. 프랑스는 1513년에 최종적으로 후퇴한다. 과거에 스포르차 가문과 맺었던 유대관계에 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을 섬긴 타협자로 간주되었다. 피렌체에서 '카톨릭 동 맹'은 율리아노 데 메디치(그는 옛날에는 프랑스인들과 친했고 레오나르도의 친구였다)를 권좌에 앉혔다가 1513년 3월 이안 데 메디치 추기경을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 출한다. 레오나르도의 동생인 세르 줄리아노 다 빈치는 폰토르모,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은 화 가들과 함께 피렌체가 새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성대한 축제를 연출한다. 1513년 9 월 24일,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멜치, 살라이, 로렌초, '일 판포이아'와 함께 밀라노를 떠 나 로마로 간다. 12월부터 그의 새로운 후원자이자 예술과 학문의 전문가인 위대한 율리아 노가 바티칸의 망루에 그의 작업장을 마련해준다. 이로써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율리 아노는 그의 아버지가 30년 전에 레오나르도에게 주지 못한 기회를 준 듯했다. 그는 그곳에 서 성 베드로 성당의 공사장 감독관으로 일하던 음악가 아탈란테 밀리오로티와 브라만테, 체사레 다 세스토 같은 친구와 제자들, 그리고 라파엘을 재회한다. 그곳에는 경쟁자인 미켈란젤로도 있었는데, 당시 그는 식스틴 성당의 궁륭 천장에 '노아 의 홍수'를 그리던 중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존재를 견디기 힘들어 했음이 틀 림없다. 그들은 자연현상(상징체계와 심리학이 뒤섞여 있는)을 그림으로 그리고 소묘하는 데 대한 견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폭풍우를 묘사하는 방법' 또는 노아의 홍수 를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그의 메모에서 이를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고물'과 새 것 당시 레오나르도는 고대 문명과 신화에 빠져들었다. 그는 망루의 '아리안'을 그리고, 춤추는 요정과 고대의 저부조들을 연구하고, 황실의 무너진 기념물을 묘사하고, 유명한 보 카 델라 베리타를 스케치한다. 이것은 카메오(돋을새김한 옥석) 형태로 '진리'의 태양이 라는 가면을 쓴 '거짓말'의 알레고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나일강의 고대 조각 을 복원하는 일도 맡았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푸토(큐피드를 나타내는 벌거벗은 소년) 는'레다와 백조'에 등장한 푸토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또한 과학적, 미적, 기계적 탐구를 계 속하며 화폐를 주조하는 기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나아가 컴퍼스, 몬테마리오에서 발 견된 조개 화석에도 흥미를 가졌다. 이 시기는 기술 분야에서 그가 그린 3차원적 소묘들-왕관 형태의 바퀴나, 밧줄을 꼬거나 금속 가공기계 같은 것-이 표현 기법이나 세련도에서 다같이 발전했다. 소묘의 세련도는 그 입체감과 기하학적 형태가 추상에 이를 정도였다. 기하학적 변형 1514년 7월 7일 '23시' 레오나르도는 바티칸의 망루에 있던 작업장에서 기하학 유희의 하 나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당시 그는 반달 모양과 그것의 표면, 그리고 원의 구적법을 연구 했다. 그러면서 이런 기하학적 문제들과 '금속의 변환'이나 형상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덩 어리(피라미드나 입방체, 또는 밀랍 원기둥)의 변형 검증법 사이의 상호관계를 정리해 냈다. 변형 개념은 줄곧 그를 열광시켰다. 이를테면 풀무의 작용에 의해 수력 에너지로 바뀐 풍력 에너지나 연속운동으로 변형된 왕 복운동이 그에 해당된다. 그런 원리는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기 위한 기계나 그와는 반대로 렌즈를 닦는 기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기하학 연구 결과를 해부학, 심장 판막(반달 형태, 3개의 꼭지점)에 적용하고 기하학적 변형과 기계적 법칙의 관계를 정립했 다. 그는 늘 그의 수학적 '발명'에 열광했다. 반달 안에 그는 이렇게 썼다. "1504년 크리스마 스 아침, 이 발명품이 내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대축제날 이사벨라 데스테가 자신을 위해 그려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는데도 도리어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고 아르노강의 우회 도면 을 그리면서 아치, 삼각형, 원의 구적법에 몰두해 있는 레오나르도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그는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이렇게 적었다. "원을 정사각형으로 바꾸되, 이때 원의 용적 과 같은 용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만드는 방법을 다양하게 보여준 다음, 이것을 무한히 계속해 가기 위해 필요한 법칙을 정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데 루도 제오메트리코(기하학의 유희)'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기 시 작했다." 예술-과학의 수학적 실험에 열중한 레오나르도는 환상에 속아넘어간 것일까? 물론 그는 그것이 '지성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극소량의 근사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기하학의 유희는 그에게는 단순한 심심풀이가 아니라 위대한 추상예술이었던 것이다. 장난 같은실험 동물을 존중한 나머지 채식주의자가 된 레오나르도는 1515년 어느 피렌체인이 율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본보기로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그의 '괴상 한 익살극'에 전념하기 위해 로마에 갔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수은을 이용해 살아 있는 도마뱀에게 다른 파충류에게서 떼어낸 비늘을 가지고 날개나 뿔을 만들어줌으로써 괴물로 변형시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또 한 방에 관객을 모아놓고 철물 제조인들이 쓰는 풀무로 투명하고 무서운 호스를 부풀려서 공간을 다 차지할 정도로 '바람을 잔뜩' 집어넣음 으로써 관객들을 방의 네 구석에 모이게 만든 사실도 들려준다. 로마초와 바사리는 또 그가 밀랍으로 극히 정교하고 가벼운 동물 모형을 만들어 바람을 불어 공중으로 날아가게 만드는 멋진 장난도 즐겼다고 얘기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놀랍고 괴이한 의상, 환상적인 장치, 마술 환등 등도 발명했다. 경이로움와 놀라움의 미학에는 사람 의 눈을 현혹시키는 조명과 본능이 어울린다. 단순한 아이들 놀이에서부터 우연한 장난까지, 화가는 가장 단순한 심심파적에서 실험의 토대를 끌어내고 그것을 건축과 과학의 원리로 해 석했다. 이를테면 밀짚을 가지고 비눗방울을 만드는 것, 돌멩이를 던지면 수면을 차고 날아 가거나 표면에 원을 만드는 것 등..... 그림과 건축, 포도주 양조학과 자동장치 레오나르도는 자주 바티칸을 비웠다. 1514년 9월 25일 그는 파르마에 있었고, 27일에는 포 강 연안에 있었다. 이때는 주교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율리아노 데 메디치의 옆에서 공학자 노릇을 하느라 바티칸을 비운 듯하다. 그리고 10월 8일 로마로 돌아와 피렌체의 성 요한 신 심회의 수도사로 뽑히나 곧 그만둔다. 루브르의 '성 세례자 요한'은 이 시기에 제작된 것 같다. 그는 또 토스카나 사람 발다사레 투리니 다 페샤를 위해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 모'와 '소년'의 초상화도 그렸다(둘 다 모델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치비타베키아 다리를 위한 설계도를, 그리고 1514년 12월 14일부터는 폰틴 늪지대의 개발을 위한 설계도(이는 1515년 5월 19일 이후 조반니 스코티 다 코모 수도사에 의해 적용 된다)를 구상했다. 피렌체에서 그는 율리아노의 마구간, 메디치가의 새 궁과 비아라르가와 산로렌초 사이의 지역을 복원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린다. 그는 '기계 사자'를 만들었는데 사 람들은 프랑수아 1세의 대관식을 위해 그것을 피렌체에서 리용으로 보낸다. 프랑수아 1세는 앞으로 그의 마지막 후원자가 될 사람으로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항해의 비유'를 바친 것 으 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메모에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언급했다. "위대한 율리아노 데 메디치는 1515년 1월의 아홉쨋날 여명에 아내(필리베르트)를 맞기 위해 로마를 떠나 사부아로 향했다. 이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1515년 12월에 그는 새 왕 프랑수아 1 세를 알현하기 위해 율리아노와 함께 레오 10세를 모시고 볼로냐에 갔다. 새 왕은 필리베르 트 드 사부아의 조카였다. 오래 전부터 아팠던 율리아노는 그로부터 얼마 뒤인 1516년 3월 17일 사망한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가서 피에솔레에 있는 그의 땅의 소작인에게 최고급 포도주 생산 에 필요한 비평과 조언을 청한다. 1516년 3월 13일 그는 다시 로마에 왔다. 이때 그의 신경 은 온통 어떤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8월에는 온 관심이 '담장 밖의 성 바 오로' 성당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 쏠려 있었다. '칼보다 입이 사람을 더 많이 죽인다' 1516년 이전에 율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보여주려고 남긴 일련의 상세한 메모들을 보면_레 오나르도가 위기와 울분의 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수 기사로서 그를 돕 고 있던 조르조 테데스코를 두고 불평을 토로했다. 또 다른 독일인인 조반니 델리 스페키에 대해서는 더 불만이 많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독일인이 조심성 없고 태만하고 심지어 자신 을 염탐하고('나는 그 때문에 은밀히 행할 수가 없다.')스위스 경비원들과 함께 식탁에서 두 세 시간씩 보내고 고대도시 로마의 폐허 속에서 사냥하느라 며칠을 소비한다고. 요컨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을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망루 전체를 거울장수 의 작업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곧 욕구불만과 원한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중상모략을 받고 마술을 부린다는 의심을 산 레오나르도는 더 이상 산토스피리토 병원에 가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다. "(독일인은)교황에게 나를 중상모략하면서 나의 해부학 작업을 방해했다." 건축과 렌즈에 관한 크로키로 뒤덮인 어떤 종이에 그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적었다. "메디치가는 나를 만들고 또 나를 파괴했다" 이것은 메디치 가문과 그의 관계의 씁쓸한 결 산 보고인가? 아니면 메디치, 즉 그가 '생명의 파괴자'라고 부른 의사들을 두고 한 말장난 인가? 레오나르도는 율리아노의 사망 이후 알프스 산맥 너머로 행운을 찾으러 갈 준비를 한 다. 클루의 저택에서, 앙부아즈의 궁에서 1516년 레오나르도는 앙부아즈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때 그는 멜치와 함께 있었으며 살라 이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청된다. 이후 그는 클루의 저택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낸다. 샤를 8세는 1490년 앙부아즈의 왕궁 지척에 있는 이 저택을 구입했다(루이 12세는 이곳을 자신의 궁으로 삼는다). 훗날 프랑수아 1세가 되는 프랑수아 드 발루아는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 누이이자 시집 '7일 설화'의 저자인 마르게리트 드 나바르와 함께 유년기를 대부분 이곳에 서 보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땐 루이 드 리니(레오나르도가 1499년도판 비망록에 인용한 왕의 조카)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클루의 저택과 앙부아즈의 궁은 레오나르도에게 유배지도 천국의 작은 섬도 아니었고, 다 만 만남과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이었다. 다른 화가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파의 솔라 리오를 비롯해 레오나르도가 1508년경 블루아 정원의 운하 개설에 관해 말할 때 언급한 수 도사 조콘도 같은 이들이 그보다 앞서 이곳을 거쳐갔다. 레오나르도의 고전 언어에 대한 지식과 '철학적' 자질을 야릇하게 언급한 조각가 벤베누 토 첼리니(그는 훗날 로소피오렌티노와 함께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일하게 된다)의 증언은 너무나 놀랍다. "(레오나르도는) 라틴 문자와 그리스 문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데, 프랑수아 1세는 그의 그런 대단한 미덕에 반해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의 집에서 1년에 며칠씩 묵었다." 우화와 축하 프랑스에서 레오나르도는 연극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그의 무대장식 중 가장 환상적인 것 몇 가지를 되풀이했다. 한 예로 그는 프랑수아 1세가 그의 숙모이자 율리아노 데 메디치의 미망인인 필리베르트 공작부인과 함께 아르장탕에 입성(1517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또 이듬해 6월 17일에 프랑수아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클루 의 저택에서 열린 천국의 축제 때 '기계 사자'를 다시 만들었다.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그는 클루의 작업장에서 일손을 놓지 않았고, 1518년 5월 프랑수아 1세 아들의 탄생과 로렌초 데 메디치와 왕의 질녀인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앙부아즈에서 열린 향연에서도 한몫 했다. 개선문에는 왕실 문장인 불도마뱀 과 흰담비,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원고 H의 라틴어 명구 'Potius mori quam foedari.'(더럽혀 지기보다는 죽음을)가 새겨졌다. 이상 도시 레오나르도는 '최고의 화가'와 '왕의 기술자 겸 건축가'라는 직함을 함께 갖고 있었다. 당 시 그는 신도시 로모란틴의 광대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기하학적 도면은 로마 성의 도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가 쓴 대로 '로몰론티노'라는 이름은 카이사르가 사울드레 위 에 건설한 '로마 미노르(작은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울드레는 전설에서 테베레강과 비교되는 루아르강이 흘러드는 곳이다. 그리고 배경은 황제가 계획한 그대로였다. 레오나르 도가 제시한 설계도는 가장 이론적인 것이었다. 중심에 놓인 운하는 양쪽에서 축을 이루고 그로부터 도로, 다리, 건물, 광장이 질서 있게 분할된다. 도시의 전망은 '왕궁'과 함께 높이 솟아 있다. 분수, 부엌, 마구간도 지정됐다. '춤 출 수 있는 방들'은 '내려앉았을 때 수많은 사망자를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1층에 마련 했다. 모의 해전과 '선박 싸움'을 위해 거대한 못도 구상했다. 작업은 시작됐지만 쇠약해진 레오나르도는 건강 때문에 작업을 하지 못했고, 게다가 곧 도시에 전염병이 돌아 프랑수아 1세는 설계도를 샹보르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됐다. 성의 건 축에 레오나르도가 공헌한 사실은 1518년도 메모에서도 확인되지만, (거기서 그는 도메니코 바르나베이 다 코르토나라는 대가를 언급하는데, 그는 샹보르의 건축가 중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중 계단, 십자가 형태의 방이 딸린 정사각형 방들, 거대한 별장처럼 보이 는 중앙의 성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때는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가 부리에, 그리고 조르 주 드 앙부아즈가 가이용에 지은 성들 안에서 레오나르도의 건축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것 이 관례였다. 레오나르도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두 사람 모두와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증언 앙부아즈에서 레오나르도는 루아르섬에 관심을 갖고 수력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적었다. "앙부아즈에는 물 없는 왕실의 샘이 하나 있다." 그는 1517년 10월 10 일 클루의 저택에서 추기경 루이 드 아라공의 방문을 받는다. 추기경의 비서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여정'에서 '오른손에 약간의 마비증세가 온' 레오나르도의 건강부터 시작 해 흥미로운 관찰 결과를 기록했다. 그는 늙은 대가가 더 이상 '부드러움을 갖고 색을 칠하 지 못하고 그 대신 '데생'과 가르치기만을 계속했다고 적었다. "그는 밀라노 태생의 한 제 자를 키웠는데 그는 일을 퍽 잘한다(이는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코 멜치를 가리킨다)." 안토 니오는 이어 레오나르도의 원고들의 엄청난 분량과 중요성을 강조했는데,'특히 책으로 엮을 경우를 가정해' 그렇게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화가는 이 원고의 출판을 고려하기 시작 했고, 이것의 활판 인쇄와 페이지 단위 조판까지 연구했지만 원고는 결국 간행되지 않았다. 멜치에 의해 이탈리아로 옮겨진 원고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 흩어졌다. 토스카나의 대공작 이 '저속한 것들'로 규정한 고문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그림에서 클로루체까지 레오나르도는 아라공 추기경에게 세 점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율리아노 데 메디 치의 주문으로 실물대로 그린 어떤 피렌체 여인'을 표현한 첫번째 그림이 오늘날 루브르 박 물관에 걸린 '모나리자'이다(아니면 적어도 '벌거벗은 모나리자' 또는 '모나 바나'일 것이 다). 두번째 그림 '젊은 성 세례자 요한'은 '젊은'이란 단어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루브르 박물 관 의 '성 세례자 요한'으로 추정된다. 세번째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의 '성녀 안나'가 분명하 다. 이것은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군상이 잠겨 있는 넓은 풍경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마지막 풍경일지 모른다. 인물들의 발 치에 놓인 돋을새김이 뛰어난 자갈(혹자는 이것을 태반으로 보았다)은 인위적 수단과 자연 의 지질학에 동시에 영향을 끼치는 대담한 미적, 회화적 착상들을 증명한다. 바사리는 프랑 수아 1세가 '성녀 안나의 밑그림을 칠하고 싶은' 욕심에 레오나르도를 프랑스에 초대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연대 추정에 중요한 요소이다. 파울 조베는 1523-1527년 사이에 '목판에 그린 성모 마리아와 그의 할머니 안나와 함께 노는 아기 예수 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있었고, 그것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가 사서 그의 성당에 걸 어놓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뒤에 우리는 왕실 컬렉션에서 이 그림의 흔적도 찾지 못 하다가 1629년 이 그림을 피에몽의 카잘레 몽페라토에서 발견한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 13 세에게 준 것을 알았다. 1525년 밀라노에서 결혼하고 '변사'한 살라이가 남긴 재산 중 '성 녀 안나'라는 그림이 어떤 '모나리라'와 함께 100에퀴로 평가됐다. 레오나르도의 제자였던 살 라이가 스승의 걸작들을 이탈리아로 가져간 것일까? 다른 정보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가 4000에퀴를 주고 '모나리자'를 구입했다고 한다. 하지 만 1519년 4월 23일자 유언에서 레오나르도는 '그의 미술과 작업장과 관련된 모든 도구와 초상화들'을 살라이에게 주지 말고 멜치에게 주라고 적고 있다. 포르트락티(초상화)라는 단 어는 그림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레오나르도는 1519년 5월 2일 클로루체에서 죽었다. 프랑수아 1세는 생제르맹앙레이에 있 는 그의 성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사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고 구전되는 바도 그렇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것은 아무것 도 확실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화를 낳는 데 기여하고 있지만 이 예술가를 평범한 도식 안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석의 방법을 뛰어넘는 독창성, 자유로운 예술과 강한 이미지 는 시간을 초월한 현실성을 창조했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비춰보고 그의 세계에 관한 자기 자신의 의견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기록과 증언 자서전, 그리고 어떤 신화의 초상화 머리가 수없이 많이 돋아났다가 곧 잘리고 마는 히드라처럼, 그의 '자화상들'을 필두로 하 여 레오나르도와 신화는 오늘날 거의 모두 부인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가 피아첸차의 돔의 '교회재산 관리위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지금 피렌체의 레오나르도를 제외하곤 유능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인정받지 못하는 자화상들 레오나르도의 자화상들은 수많은 논란과 의문의 표적이다 놀랍게도 투린의 왕립도서관에 소장된 자화상은 1980년 한스 호스트에 의해 가짜임이 판명됐다. 이 그림은 1810년 주세페 보시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보시는 베르나르디노루이니의 '데모크리트'를 본따서 레오나르 도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혹자는 이 소묘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이고 노년에 접어든 화가 의 모습을 예고한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우리는 루이자 베르토바가 레오나르도 시대의 다양한 취향을 분석(L. Vertova, 1991)하고 나서 밝힌 이 작품과 라파엘 작 '플라톤'의 관 계 와 무관하게 이 자화상의 제작 연대가 1515년경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바이다. 반면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화가의 넓은 베레모와 함께 보관된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은 17세기에 제작된 위조작일 뿐이다. 유행의 지배를 거역함 "(레오나르도는) 용모도 아름답고 우아하고 균형잡히고 보기 좋았다 당시엔 긴 옷이 유행 이었는데도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핑크색 옷을 입었다. 또한 가슴 중간까지 내려오는 구 불거리고 잘 빗질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사후 얼마 뒤 '가디아 노라고 하는 무명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레오나르도는 순응주의를 싫어했을까? 그가 '아름 답게 보이고 싶어하는 자'를 고문하기 위해 유행의 변덕과 지나친 강요에 대해 야유를 퍼부 은 건 분명하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시기별 경향을 점검하고 있는데 '장식을 치렁치렁 단' 어린 시절부터 '발이 너무 죄어 발가락이 서로 겹치는 바람에 발에 온통 못이 박이게' 만든 최신 유행까지 최소한 여덟 기간으로 나누고 있다. ('회화론', 529) 그는 지치지 않고 미 의 본질을 찾았다. "인간의 아름다움 가운데 아주 아름다운 얼굴은 행인을 멈추게 하지만 화 려한 장식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가? 청춘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과도한 치장 때문 에 그 뛰어남을 잃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니 부자연스러운 모자나 두건을 쓰지 말고 단정하 지 않은 머리카락 한 올에도 커다란 수치심을 느끼는 저 딱한 인간들을 흉내내지 말라..... 거울과 빗을 끼고 사는 자들처럼 되지도 말라. 그들의 최대 적 은완벽하게 단장된 머리카 락을 흐트러뜨리는 바람이다..... 머리에 아교를 바르고 다니며 머리카락을 마치 유리처 럼 빛내는 자들을 흉내내지 말라. 인간들의 무분별한 행위는 늘어만 가고 동방에서 아라비아의고 무를 가져오는 선원들도 그 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회화론', 398) "사물을 그들 자신과 흡사하게 만드는 것은 화가들의 공통된 악덕이다" "(영혼이) 육체 적 형상과 닮은 누군가를 발견하면 그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흔히 사랑에 빠진다. 그런 이 유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닮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런 여성을 아내로 맞는다." ('회화론 ', 105) "아름다운 얼굴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부분을 평가하라. 그 아름다움은 당신 자신의 판단보다는 오히려 공통된 의견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얼굴과 닮은 얼굴 을 선택하는 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닮은 것을 좋아할 때가 있 다. 당신이 추하면 당신은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고를 것이고 그 얼굴을 추하게 표현할 것 이다. 화가들이 그리는 인물은 대개 그 화가를 닮았다." ('회화론', 134) "영혼이 어떻게 육 신 속에 사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육신이 어떻게 매일 집을 사용하는지 관찰하라. 즉 그의 일상의 거처가 난잡하고 어지럽다면 그 영혼에 의해 지탱되는 육신도 난잡하고 어지러울 것 이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207 앞) 티치아노와 뒤러 사이에서 1555-1565년 사이에 아뇰로 브론치노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그림에 서 레오나르도는 베네치아 회화의 거장인 티치아노와 '북군의 레오나르도' 뒤러 사이에 자 리하고 있다. 독일 화가의 존재는 레오나르도가 그에 끼친 특별한 영향을 환기시킨다. 뒤러 는 '아카데미아'의 '빈치의 매듭' 시리즈. 해부학, 말의 습작들을 베끼고. 자연과 인간의 비 례에 관한 연구를 심화하고, '타원형을 그리기 위해' 그의 컴퍼스에 ,그리고 군대 건축 소묘 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그의 저서 '멜렌콜리아'에서 다면체의 기하학에 찬사를 보냈고, ' 레 오나르도식'의 노아의 홍수 그림에 나타난 몽환적인 시각을 묘사하기도 했다. 뒤러가 1525-1538년 사이에 제작된 네 점의 판화 위에 표현한 조망 화법은 1480년 레오 나르도가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썼다. "이 새로운 방법을 초상화를 그 릴 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바이다. 이런 나태한 방법은 그들의 능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회화론', 35) 이탈리아에서 쓴 편지 가운데 마지막 편지에서 뒤러는 1508년 10월 베네치아에서 볼로냐 로 갈 계획이라곤 밝혔다. 그런데 그것은 '은밀한 전망을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 이고 '누군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밀라노와 피렌체 사이에서 그가 레오나르도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일까? 지식의 동굴과 조용한 죽음 "나는 교활한 자연이 창조한 다양하고 묘한 형태를 원없이 보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며, 불 타는 욕망에 사로잡혀 경사진 바위들 사이로 먼 길을 걸어 어떤 커다란 동굴의 입구에 도착 했다..... 내 안에서 갑자기 두 가지 감정이 눈을 떴다. 두려움과 욕망이었다. 위협적이고 어두컴컴한 동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동굴이 뭔가 경이로운 것을 숨기고 있는지 보고 싶은 욕망." ('코덱스 애런델', 115 앞) "당신에게 자유가 소중하다면 나의 얼굴이 사랑의 감옥이라는 것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 하기를." ('코덱스 포스터 3', 10 뒤) "죽기 몇 시간 전 이 노인은 내게 말했다. 자신은 100년을 살았고 쇠약함 외에는 어떤 육 체적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는 미동도 않고, 어떤 불편한 증상도 없이 병원 침 대에 앉아 조용히 이 세상을 떴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죽음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검시 를 했다..... 다른 검시의 대상은 2살짜리 아이였는데 이것은 그 노인과 정반대되는 경우라 는 것을 알았다." (윈저 RL. 19027 뒤) 작업장의 화가 "조각가의 작업은 전적으로 기계적인 훈련을 요구하며, 다량의 땀을 동반할 때가 많다. 땀 은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진 흙딱지처럼 된다. 조각가의 얼굴은 온통 횐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흡사 빵 굽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몸은 눈을 맞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몸은 는 을 맞은 사람처럼 작은 비늘로 뒤덮여 있다. 그의 집은 더럽고 돌가루가 가득하다 .화가의 사정은 정반대이다(조각가들처럼 나는 지금 가장 뛰어난 화가들을 말하는 것이다). 화가는 옷도 잘 입고 작품 앞에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서 물감을 찍은 가벼운 붓을 기분 좋게 휘두른다. 그는 자기 취향에 맞는 옷을 차려 입으며, 집은 말끔하고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 차있으며, 그밖의 다른 소음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벅찬 기쁨을 느낀 다." ('회화론', 32) "모든 난관 끝에 엄격함이 생긴다"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쉬운 일이다.'(원고 G, 5 뒤) '스승을 조금도 능가하 지 못하는 딱한 제자.' ('코덱스 포스터 III', 66 뒤) 윈저의 기록(1249 뒤 )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글을 옮겨 쓴 적이 있 다. "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자네는 게으름을 떨쳐야 하네. 펜에 머물러 있으면 영광에 도 달하지 못하네.'" ('지옥', XXIV) '식탐, 잠. 펜 놀리기.' ('소네트집', VII) 그는 교훈적인 격 언과 민간 속담들을 모았다. "시간이 날 때 그것을 낭비하는 자는 친구를 잃고 절대 돈을 모으지 못한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18 앞)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1년 안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윈저 12351 앞) "작은 방과 작은 집은 정신을 일깨우고 큰 방과 큰 집은 정신을 잃게 만든다." (원고 A. 96 앞) "그림의 신성한 특성은 화가의 정신을 신의 정신과 흡사한 것으로 변하게 만든다." ('회화론', 65) 신비한, 마술적인 초상화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데 그는 혼자 어둠에서 너무 일찍 깬 사람 같았다. "프 로이트는 그렇게 썼다. "정신적으로 무당의 차원, 나아가 마술의 차원을 지녀야 한다. 그리 고 거기서 레오나르도의 신화가 형성되었다. 그는 위대한 아름다움, 쇠막대기를 쉽게 구부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_사람, 연구할 때는 '이상하지'만 초인의 투시력을 가진 이로 소개 되고 있다." (R 몬티, 1966) 견해와 연구들 콕토는 레오나르도를 피카소처럼 '연구자가 아닌 발견자'로 여겼다. 아닌게 아니라 레오나 르도의 연구는 무한하지 않았던가? 모든 도착점은 곧 또 다른 관찰, 조사를 위한 출발점이 지 않았던가? 저술과 소묘가 뒤섞인 그의 메모 수첩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그가 숙고한 것을 기록하고. 연구와 사색의 요점을 제시하고, 예술과 일상생활에 관한 온갖 관찰을 적고 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42 뒤)는 젊은 시절부터 나타난 그의 연구의 특징인 이런 모습 을 잘 보여준다. 또한 괘종시계, 기하학적 구조의 크로키, 용의 스케치와 엄청난 분량의 성찰 기록이 나란히 있다. 이 성찰에서 그는 주로 카를로 마르모키, 필라레테 (스포르차 가문의 건축가) 수학 관련 원고, 학자 파올로 델 포초 토스카넬리 (브루넬스키의 친구이자 크리스토 퍼 콜럼버스에게 영감을 준 사람). 화가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유명한 '단테와 신성극'의 저자), 그리스의 절학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번역자인 아르지로풀로스를 참조하고 있다. 코덱스의 다른 장은 대수학으로 시작하여 '마를리아니의 뼈'에 관한 해부학적 질문과 밀 라노를 위한 지형학적 설계도로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 잔니노에게 구멍을 내지 않고 페라레의 탑을 격리한 방법을 생각나게 한다.'고 적고 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611 앞) 급료와 시장 가치 레오나르도는 보수를 얼마나 받았을까? 벤베누토 첼리니는 1540년 프랑수아 1세가 제안한 연봉 300에퀴를 거절하고 곧 레오나르도와 똑같은 급료를 받게 됐다고 회상하고 있다. 레오 나르도는 1년에 700에퀴에다 그가 제작한 작품들에 대한 보수, 그리고 조수 1인당 100에퀴 씩을 받았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에게 준 마지막 급료는 2년에 2000에퀴였다. '귀족'이었던 멜치는 800에퀴,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하인'으로 지명된 화가 살라이는 100에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515년 레오나르도는 율리아노 데메디치 덕분에 로마에서 매달 40뒤카라는 '공탁금'을 받 았다. 이중 7뒤카를 조르조 테데스코에게 주어야 했는데 그는 8뒤카를 요구했고, 이 일은 격 렬한 언쟁을 낳는다. 레오나르도는 1508년 7월부터 1509년 4월 사이에 밀라노에서 루이 12 세로부터 390에퀴와 200프랑(1프랑은 48수)이라는 거액을 받았다. 1495-1497년까지의 지출 과 비교해 보면 이 금액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그의 어머니 '카트린의 묘지'에 120수가. 파 치올리의 정수론과 기하학책 '수학의 요점' 초판을 구입하는 데 119수가 들어갔다. 그 직 전에 그는 무어인에게 3년동안 50뒤카밖에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지만 편년사가 반델로의 소 설에선 2000뒤카를 받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모순과 모호함들 역설, 아이러니, 말장난에서부터 부조리한 것까지. 레오나르도의 작품에는 항상 유추법과 대위법의 직관, 논리, 기술이 들어 있다. 이것들은 오해를 낳기도 하고 독해의 열쇠를 제공 하기도 하고 형태와 특성에 생기를 부여하는 표현 방법에 호소를 하기도 한다. 자연을 모방 하는 것은 자연이 해독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다. '메두사'에서 디오니소 스 적인 '성 세례자 요한'까지 화가는 이성적인 괴물들과 수수께끼의 인물들을 창조하고 있다. "우리의 편지를 읽는 사람은 적잖이 놀랄 것이다. 그가 보기엔 우리가 원대한 계획에 몰 두해 있는 근엄한 사람들로서 쩨쩨하거나 정직하지 않은 생각은 좀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장을 넘기면 그의 눈에는 우리가 경박하고 변덕스 럽고 음탕하고 헛된 것에 정신 파는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방식은 해로워 보일 수 도 있지만 내게는 칭찬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연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다채로우며 그것을 모방하는 자는 누구든지 비난받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의 절친한 친구 인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썼다. 레오나르도의 내부에는 합리적인 갈망이 생의 불합리와 공존했다. 그의 원고를 보면 그가 몰두한 주제가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지 알 수 있고, 그것들은 교훈적인 규범부터 통제되 지 않는 기분의 변화까지. 무미건조한 기호부터 모호함을 다룬 진정한 시까지 섭렵하면서 모순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인간과 동물, 노인과 청년, 악덕과 미덕. 평화와 전쟁, 전통과 혁신(기계들을 비교한 것 등), 분노와 차분함. 성스러운 것과 세 속적인 것 등에 직면한다. 필리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깔고 앉은' 우의적인 소묘(64페이 지)의 뒷면에 그는 '쾌감과 불쾌, 사랑과 질투, 행복과 욕구. 행운과 징벌, 회개'와 같은 상 반된 감정들을 적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이전 주장들에 대한 반박을 서슴지 않았고, 그것은 그가 취한 또 하나 의 방법이었다. 그의 방법이란 현상에 대한 분석적인 실험을 전통적이고 교조적인 개념들과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 논쟁, 연구방향을 쉽게 진술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연구 말미에 무심코 적어놓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부당하게 그의 것으로 인정 되는 경우도 잦았다. 레오나르도는 그가 인정하지 않는 주장을 인용해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의 '잘못된 의견',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고 확신하는 것 ('코덱스 레스터', 6B-31 앞) 같은 일을 반박하기를 즐겼다. 1508년까지 그는 물은 일종의 혈액이 순환되는 것처럼 운반 되어 바다에 저 산 위까지 가는 거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동의했다. 하지만 차후의 연구에서 의견을 바꾸게 된다. 유추법 소용돌이, '생명처럼 순환하는 움직임'의 미학은 새의 비행에 관한 소묘, 지네브라 벤치 초상화의 머리털, 혈액 순환과 '각막 막질의 융기에서 생기는 물에 관한 연구, 식물 기계(괘 종시계의 태엽)에 관한 연구,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 형성의 라이프모티프(반복되는 주제)였 다. 이것은 또 (레다와 백조)의 구불구불한 몸매, 성 조지와 용의 소묘, 특히 모든 것이 붕괴 한 우주의 성난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간 '노아의 홍수'의 주제이기도 했다.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유추법은 레오나르도가 끊임없이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를 오가면서 그것들을 인간의 몸, 또는 동물의 몸과 '대지의 몸'에 비교한 것이 다. 그는 이를 위해 땅과 조수의 숨결까지 탐구했다. "만일 인간의 몸 속에 허파가 숨을 들 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피의 호수가 있다면, 대지의 몸에도 세상이 호흡할 수 있도록 커졌다가 작아지는 대양이 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55 뒤) 개중엔 이상한 유추법도 있다. 이를테면 거품투성이의 물마루를 도박판 위에 던진 팻더미 에 비유한 것이다. ('코덱스 레스터',4B-4 뒤) 해부학과 발생학에서 그는 머리를 '집'에, 기 관 을 '악기'에, 그리고 분맥 딸린 기관지를 나무에 비교하고 있다. 인후해부학을 근거로 레오 나르도는 목소리를 내는 '수학적 기계'를 그리고, 입의 24개의 근육이 미소뿐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움직임'마저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맥은 지저분한 간 속에 뿌 리를 두고 있지 않을까? 그는 자가당착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이를테면 '복 숭아나무가 그 씨에서 탄생하듯' '심장은 정맥의 나무를 만들어내는 씨!'라고 주장했다. (윈저 RL, 19028 앞) 이 모든 것이 말로는 너무 간략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소묘는 숨막힐 만큼 아름답고 구체적이다. "....정맥은 길게 전개되며 뱀처럼 꼬여 있다..... 간은 말라서 색깔이나 본질 이 언 것처럼 보이고...... 톱밥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연륜이 아주 오래된 것들 은 나무색, 또는 메마른 밤나무색 껍질을 갖는다. 나무의 껍질은 양분을 다 빼앗겼기 때문이 다. 정맥총은 인간 안에서 움직이는데, 인간은 오렌지와 흡사하다. 늙어감에 따라 껍질이 두 꺼워지고 과육이 쭈그러든다는 점에서." (윈저 RL. 191027 뒤) "비례는 수,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 무게, 시간, 위치, 존재하는 어떤 힘 속에도 있다." (원고 K, 49 앞) 역설 과 어리석음들 역설은 명제 속에도 많지만 방법과 증명 속에도 많다. 예를 들어 지구의 한쪽 반구에서 지축을 통과하여 지구의 다른 쪽 반구까지 가는, 즉 대척점까지 판 우물을 따라 흐르는 강 같은 것이다. ('코덱스 레스터' 16A-21 뒤) 다른 예로는 강의 흐름에 관한 그의 관찰과 관 련 된 것으로 강은 역병 후에 더 깊고 더 투명해질 수 있다고 했다. ('코덱스 레스터', l7B-20 앞) 여기서 그는 '현실적인' 방안을 지닌 이상한 '숙명론적' 대위법을 제안한다. 그 것은 '커다란 동물들'로 하여금 짓밟게 해서 강을 청소하는 것이다. ('코덱스 레스터', 15A-22 뒤) 그의 천재적인 직관에도 불구하고 '코덱스 레스터'는 레오나르도가 전통에서 물려받았거 나 그 자신의 실험의 한계로 인해 자승자박할 수밖에 없었던 실수들이 가득하다. 그는 달에는 바람과 파도가 있고(그것이 지구에 의해 반사된 햇빛의 거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수를 결정하는 것이 달이 아니라고 믿었다. (물이 바다 밑바닥으로 흡수된다고 보았다. 11A-26 뒤) 현실과 상상의 충돌 "움직임은 다양한 힘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두 가지 성질이 있다. 실제로 그것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중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고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면은 상상력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고 물질적인 면은 물질적인 몸에 의해 만들어진다." (마 드리드 I, 122 뒤) "경험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실험과 상관없는 결과를 기대하는 당신의 판단 이 빗나갈 뿐이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471 앞) "자연은 우선 이성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나중에 경험을 하는데 우리는 그 반대로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선 경험을 하고 거 기서 출발해 이성적인 탐구로 가는 것이다." (원고 E. 55 앞) "감각을 통과하지 않은 정신적 인 것들은 헛되며 눈에 보이는 진리만을 잉태한다." (윈저 RL, 19070 뒤) 레오나르도의 생 각은 분명 '코덱스 아틀란티쿠스'(378 뒤)에서 그가 묘사한 것과 모순된다. "자연에는 원 인 없는 결과가 없다. 원인을 이해하면 우리는 굳이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 고 롬바르디아의 방앗간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뜨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더 나아질 것이라 고 믿는다. 경험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의견이 그렇기 때문이다." (원고 마드리드 I, 151 뒤) 농담을 좋아하는 예언자 "최고의 행복은 비참함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완벽한 지혜는 무분별한 짓의 계기가 될 것이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112 앞)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한 자각에 이르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고 달리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 리를 들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또한 예언과 꿈의 용법'도 일러주고 있다. "마치 그것이 불시에 떠오른 생각이나 황당무계한 헛소리, 어리석은 소리인 것처럼 말하라. 그러면 많은 이들이 거기서 하나의 동기를 끌어내는 습관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우리가 제거하면 할수록 더 커지고, 더 많이 부여하면 할수록 사라질 것이다." ('코덱스 아틀란티 쿠스', 1033) 자연에 대한 모방을 넘어서 현실과 자연에 대한 상상력의 표현에 관한 레오나르도의 주장은 사실주의나 축소 지향적 인 자연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의 복제와도 관계가 없다. 자연의 완벽하고 '신성한' 창조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려면 자연을 참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때 자연의 다앙한 현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제작 연대가 1490년으로 추정되는 '코덱스 아틀란티쿠스'(387 앞)에서 레오나르도는 로 마 의 몰락에서 출발하여 조토와 함께 부활한 뒤 이전 회화의 상상력 안에서 다시 길을 잃었다 가 결국은 마사치오와 함께 되살아난 미술사의개요를 진술한다. 물론 조토와 마사치오가 도입한 실험적인 가치와 쇄신의 복잡성을 레오나르도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지만, 역설적이게도 청년 조토가 '염소의 거동'과 다른 모든 동물에 대한 능란한 소묘를 통 해 독창성을 분출시킨 반면 마사치오는 '그의 완벽한 작품을 가지고 스승 중의 스승인 자연 외의 다른 모델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들이 어떻게 헛되이 그림을 그리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말은 덫이 될 때가 많았다. 대개는 의도적으로 그랬지만 때로는 그가 언어 표현 능력과 소묘와 회화가 그에게 주는 것 사이에서 엄청난 간격을 느껴서 그런 적도 있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399 앞)에서 그는 '옛날 것들을 모방하는 것이 현대의 것들을 모방하는 것이 현대의 것들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칭찬받을 만하다'고 했다. 미술의 신성함에 관해서도 그는 자가당착에 빠진 듯했다. '소묘는 너무나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업적뿐 아니라 자연이 하는 것 이상을 한없이 추구한다.' ('회화론'), 130) 고 했는가 하면 '나는 일반적으로 자연을 흉내내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공공연한 자랑거리고 삼는 자들을 많이 보았다. 자연과 가장 닮은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어떤 다른 화가보다도 더 초라한 이야기꾼이다.'라고도 했다. '바쿠스'와 '성 요한' 루이 13세가 홀바인의 작품 한 점과 티치아노의 작품 한 점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영국의 찰스 1세에게 준 것으로 추정되는 루브르 박물관의 '성 요한'은 레오나르도의 작품 중 가 장 모호하고 불가사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책의 저자들이 그의 '애매한' 미소-혹자는 이것을 내면의 세계에 대한 관조라고 표현하지만-를 모나리자의 미소나 '이상한 나라의 앨 리스'의 '미소만 남기고' 사라지는 유명한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결부시킨다. (바쿠스)의 정체는 이 인물이 남녀 양성이라는 터무니없는 해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너 무나 혼란스럽다. '바쿠스'는 원래 성 요한이었는데, 17세기 후반에 이 그림에 포도나무 잎 과 지팡이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속성을 추가하여 이교도적인 내용을 강화한 것이다. 1625년 퐁텐블로에서 이 그림을 본 카시아노 델 포초는 이것을 '퍽 세련됐지만,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키지 않으므로 호감이 가지는 않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에로스와 승화 "쾌락을 억제하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주장했다. 프로이트가 '레오나르도의 유년기의 추억'(1910)이라는 논문을 쓴 뒤로 정신분석학은 오해와 확대적용 에 의해 풍부해진 레오나르도의 에로스에 관한 온갖 의문들에 강박증에 가까운 집중적인 관심 을 쏟았다. 거기서는 레오나르도의 진면모보다 비평가의 편견과 기분의 반영이 더 눈에 띄 는 듯하다. "나는 밀라노인에 대해 굉장히 철저하게 쓸 태세를 갖춘 듯하다. 나의 유년기의 최초의 기억 중 내가 요람에 있을때 한 밀라노인이 다가와 그의 성기를 내 입속에 넣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입술 안쪽을 여러 차례 쳤다." 이 '유년기의 추억'은 프로이트의 레오 나르도 이론의 중요한 자료로, 이것을 가지고 프로이트는 '이렇게 형성된 인간은 다른 사람 이 사랑에 쏟는 열정을 연구에 쏟으며 사랑하기보다는 연구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결 론을 내렸다. 레오나르도의 말에 따르면 "교접행위와 그에 필요한 신체 기관들은 너무 흉측해서 얼굴의 아름다움, 행위자의 장식, 신중함이 없다면 자연은 인류를 파멸시켰을지 모른다." 반대로 그는 음경은 '인간의 지성과 관계가 있고 고유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을 때도 있고'자기 마음대로, 때로는 인간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고 깨어난다. 그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대신처럼 위엄 있게 보 여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의 외음부'의 형태와 팽창을 연구하면서 거기에 장난 스럽게 '요새의 문지기'란 이름을 붙였다. 해학적인 글을 쓰기를 좋아한 그는 창녀들과의 경 험이 많고, 여자와 종교에 관한 에로틱한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성병 을 두려워했을까? 그는 '종종 인생의 파멸의 이유가 되는 헛된 쾌락'에 반대해 신체적, 정 신적 위생을 훈계한다. "음탕함은 생식의 원인이고 식욕은 생명의 지지자이며, 두려움. 또는 공포는 생명을 연장 시켜 준다. 고통은 도구를 보호한다." 명백하지만 필요한 '악'(또는 '악덕')과 목숨을 지켜주 는 '선' 간의 대위법 위에서 효력을 발하는 이 네 개의 경구를 통해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필연성'을 찬양했다. 그는 또 "영혼의 열정은 음탕함을 추방한다."라고 적 으며 해학 이상의 까다로운 도덕성을 드러냈다. 그가 아이를 낳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그는 한 형제에게 쓴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다. " 너는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적을 낳고는 기뻐하는구나.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추구 할 것이다. 그 자유는 네가 죽은 다음에야 그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가 이 편지를 정말 보 냈을까? 화가는 사랑을 자극한다 "사랑은 모든 종류의 동물에게 중요한 것인데, 만일 시인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도록 자 극한다면 화가도 그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다. 화가는 애인 앞에 사랑하는 사람의 초상을 놓아주기 때문이다.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키스를 하고 말을 한 다..... 작가가 주는 아름다움으론 그렇게 할 수 없다..... 때로는 나도 신성한 것을 표현 한 그림을 그릴 때가 있었다. 그림을 구입한 연인이 거리낌없이 키스할 수 있도록 그 그림 에서 신성한 표현을 없애고 싶었지만...... 어떤 화가는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서 누구든 그것을 본 사람은 하품을 했다. 어떤 화가들은 너무 음란하고 음탕한 행위를 그리고는 똑 같이 들뜬 기분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자극했다. 그것이 시와의 차이점이다." ('회화론 ', 25) 모순되는 징후들 레오나르도가 맞서 싸운 소송이 있은 지 1년 뒤. 그의 삶의 몇몇 측면은 잘 알지만 그것 을 확대적용한 면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편년사가 조반 파올로 로마초는 그의 저서 '거짓말 의 책'에서 레오나르도를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피디아스와의 대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 다. 레오나르도: 나는 나의 제자 안토니오 볼트라피오와 살라이를 어떤 제자보다 사랑했는데 이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피디아스: 자네 혹시 그들에게 피렌체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난을 한 것 아닌가? 뒤에서 하는 것 말일세. 레오나르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그가 이제 겨우 15살 먹은 아주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피디아스: 창피하지도 않은가? 레오나르도: 제가 뭣 때문에요? 대가들에 따르면 이토록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도 없는데 요. 전 선생님께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피디아스: 그렇다면 어서 해 보게. 그럼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단 말인가? 레오나르도: 세상에 그걸 모르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남성의 사랑은 오직 미덕의 행위여서 어릴때부터 가지각색의 애정과 우정을 함께 결합시키기 때문 에 성년이 되면 그들의 우정은 견고해집니다. 그밖에도 남성의 사랑은 철학자들이 보기에도 찬사를 받을 만한 규범이었습니다. 이 담론은 화가의 전기의 일부만 참조한 것이다. 화가 보시는 레오나르도가 고급 창녀인 크레모나와도 육체관계를 맺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가 가장 사랑한 살라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초상화에 자주 등장했는데, 레오나르도는 1478 년부터 이런 유형의 미남 청년을 그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현상은 1510년까지 계속된다. 영양과 건강 채식주의자 레오나르도, 위생학자 레오나르도.... 그의 원고에는 부엌의 자동화와 약의 조 제를 위한 계획도 들어 있다. '레다와 백조'의 습작을 그린 종이나 '비행의 예언'에는 그 가 장을 본 물건의 목록이 나타난다. 포도주와 빵, 계란과 버섯, 미네스트라(수프) 재료와 샐러 드용 야채도 있었지만 '고기'와 '영계'도 빠지지 않았다. "인간과 동물은 타자의 죽음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는 음식의 통로, 소화관, 다른 동물들의 묘지, 죽음의 식당, 부패의 집이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207 뒤) 레오나르도는 구체적으 로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고 말만 하는 자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보라. 많은 이들을 단순한 양분 통로, 두엄 생산자, 변소 채우는 인간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서 달리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코덱스 포스터 III', 74 뒤) 파리에 대한 말은 더 끔찍 하다. "인간은 새로 변해서 무덤에서 나온다. 그래서 인간의 손 안에 있거나 식탁에 있는 양식마저 슬쩍하는 방법으로 다른 인간들을 공격한다." (원고 I,64 앞) "영영 태어나지 못할 병아리가 얼마나 많은가" 레오나르도는 저서 '예언집'에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혹함에 분개하고 있다. "양. 소, 염소, 그밖의 유사한 동물들. 인간은 그중 무수한 것들로부터 새끼를 빼앗고 목을 베고 야만 적인 방법으로 갈기갈기 찢는다." 이런 글도 있다. "일단 입에 들어간 계란은 병아리를 생산 할 수 없다오. 영영 태어나지 못할 병아리가 얼마나 많은가."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1033 앞) 이런 저주들은 그가 채식주의자였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그 확신은 인도제국에서 안 드레아 코르살리가 율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 (1516년 출간)에 의해 확고해졌다. " 그들은 피가 든 음식은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조차 살아 있는 것을 해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의 친애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선생이죠." 한편 레오나르도는 생체해부학을 실행했고 고기를 샀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아가 그는 과 일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은유를 적용했다. "호두, 올리브, 도토리, 밤 등, 많은 어린 것들이 인정사정없는 매질에 의해 어머니 품에서 떨어져 나와 땅에 떨어진 다음 훼손된다." ('코덱 스 아틀란티쿠스', 373 앞) 사려 깊은 식도락가? 1480년 레오나르도는 꼬치 회전기의 자동운동에 관해 여러 장의 습작 크로키를 그린다. 그리고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의 한 페이지에서 두 개의 체계를 비교한다. 하나는 어떤 무게의 중력이 동력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뜨거운 상승기류가 에너지 의 원천이어서, 그것이 스크루를 돌리면 스크루가 꼬챙이에 움직임을 전달하는 체계이다.(불 을 올리거나 줄임으로써 구운 고기의 회전속도를 조정 할 수 있다.) 1506년 '코덱스 레스터' 에서 그는 꼬치 회전기에서 출발한 증기 발명품을 연구한다(그것은 이미 고대에 썼던 방법 을 적용한 것이다). "단지의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온 끓는 물은 맹렬히 발산되고 이렇게 완전히 증기로 변한 물이 고기를 돌린다." (원고 9A. 28 뒤) '건강'과 행복 레오나르도는 '의술 학교에서 범죄자의 몸을 해부했다. 그는 이 비인간적이고 혐오감을 일으키는 작업을 하면서도 태연했다.' (파울 조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원고 1523-1527) 하지만 해부학 공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학의 실천과 용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의 메모는 다분히 피상적인 의견들로 가득하다. "의사, 후견인,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고 건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요소들의 동등 함, 또는 조화 덕에 건강이 유지되는 과정, 그것들의 불일치가 건강의 붕괴와 파괴를 초래하 는 과정을 이해해야하며....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730 앞) 반대로 이런 글도 남겼다. " 의사들은 병자를 체험한다. 인간이 그런 타락상태에 이르면 병자들의 고통이나 참된 재산, 즉 건강의 상실을 이용할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도서관'에는 '건강 유지론'도 들어 있다. 그리고 '코덱스 아틀란티쿠스'(213 뒤)에는 17개의 '의학적인' 구절이 들어 있다. "당신이 건 강하기를 바란다면 이 식이요법을 따르라. 식욕이 없을 때에는 음식을 입에도 대지 말고 밤 참을 가볍게 들라. 잘 씹어 먹어라 그리고 익힌 것과 간소한 것을 섭취하라. 화를 내지 않도 록 조심하고 탁한 공기를 피하라. 식탁에서 뜰 때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정오에는 낮잠 을 자지 말아라. 포도주를 절제하라. 소량씩 자주 마셔라. 단 식사중이 아닐 때나 위가 비 었을 때는 삼가라. 변소에 가기를 꾸물거리지 말라. 엎드려 눕거나 머리를 낮게 하고 눕지 말라. 밤에는 이불을 잘 덮어라. 머리를 쉬게 하고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라. 음탕함을 피하 고 식이요법을 준수하라." 이때 그는 중세의 전통적인 생각들을 이어받는다. 레오나르도의 훈계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로 피상적이다. "식욕 없이 취한 음식 이 건강에 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갈망 없는 연구는 기억력을 약화시킨다." (원고 Al, 114 앞) 그는 종종 심리학적인 해석을 내리곤 했다. "화가나 소묘화가들은 고독해야 한다. 행복 은 영혼의 원기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코덱스 애시번햄 II', 27 앞)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최후의 만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동방박사들의 경배'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골똘히 손가 락 으로 뭔가를 가리키거나 시계 밖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최후의 만찬' 의 원근법은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상상의 공간속으로 연장시키고자 한다. '동방박사들의 경 배'와 '최후의 만찬'은 '영혼의 개념'을 두 가지 방법으로 연출한 '끝이 보이지 않는' 걸 작 이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위한 최초의 습작들 뒤에 레오나르도는 이야기의 신화적인 면들 을 포기하고 관념적인 면에서 새로운 시각을 향해 돌아섬으로써 전에 찾아볼 수 없던 양식과 구성을 선택한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예비 소묘에는 최종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 소들, 다시 말해 고대 건축의 폐허들, 이교도 세계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의 관계에 대한 암시 등이 이미 들어 있다. 반면에 최종 판본에서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의 구성의 조화와 주제를 주의 공현이라는 주 제보다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관점과 중앙의 커다란 집의 비율을 축소시켰다. 단봉낙타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 는 것은 미래를 한층 더 이상화한 차원에 놓음으로써 레오나르도의 신플라톤주의적인 영감 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기하학적 구조가 자질를 감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는 피렌체를 떠 나 밀라노로 가면서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벗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인물들은 예비 칠을 했을 때보다 위치가 더 높이 올라가서 마치 이제 막 생성되는 아이디 어들처럼 표면에서 펼쳐지며, 자연과 기교,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변전 속에서 주의 공 현의 당사자들 주변에서 생명의 흐름과 격렬한 회전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뒤 죽박죽이고 경악, 두려움, 의혹에 사로잡혀 신체적, 정신적인 소란에 휩싸여있다. 힘의 선과 시각적인 방향은 소용돌이치면서 행위의 중심을 향해 모이고 거기서 격렬함은 진정된다. 성 모는 고정된 점인 데 반해 예수는 관례적으로 질서정연한 회전을 통해 동방박사의 선물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어, 동방박사는 예정설의 신비한 의미를 획득한다. 전면의 뒤는 이야기를 하면서 연방 손짓을 하는 여자 무녀들의 지점이지만, 또한 신전의 재건축 현장에서 바쁘게 일하는 화가, 소묘하는 건축가, 그의 부름에 답하는 어린 조수들, 석공과 목수들도 있다. 왼쪽의 '고대' 배경 안에는 꼭대기가 부러진 홍예문이 있지만 폐허 위에선 자연과 부지런한 생명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가운데는 상승과 결합을 나타내는 또 다른 상징이 지배하고 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원근법 속에서 건축구조물 위에 놓인 계단은 기둥까지 ,하늘까지 올라가고 있다. 오른쪽에는 맹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덕과 비이성적 인 것 사이의 대결과 함께 기사와 용의 싸움이라는 주제에 대한 습작도 계속 그렸다. 지평선을 향해 열리는 이 배경 속에서 꿈틀거리는 덩어리는 신화적인 동시에 영웅 적인 분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쇠퇴와 르네상스의 이어짐에 대한 상징적 개념이 애수와 겹쳐진다. 그리고 과거의 폐허, 홍예문, 기둥, 역사의 계단 가운데에서 자연은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종려나무를 다시 푸르게 하고 나무를 키운다. 마치 브론코네의 비유처럼. 브론코네는 메디치 가를 상징하는 '덤불이 무성한 가지'로 안정된 구성을 보장하는 형태인 동시에 '생명의 나 무'의 상징이다. '최후의 만찬'의 내용과 역학 레오나르도는 원근법에 의해 현실 공간을 깊은 공간까지 연장시켜 그로부터 환상을 창조 했다. 그는 빛과 형태를 선으로 분리 표현함으로써 극적인 사건을 연출하여 일련의 '이야기' 자세, 몸짓. 표현으로 조직한다. 지면(더 이상은 해독할 수 없는)의 소묘, 벽 위에 걸린 융단, 격자 천장 멀리 보이는 풍경 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커다란 방안에 원근법이 '자연스럽게' 끼여드는 듯한 인상을 주 는 데 한몫을 한다. 전면 표현의 영향하에 그림 속 빛의 주된 원천은 방의 자연조명과 마찬 가지로 왼쪽에 있다. 고전 조각을 연상시키는 옷을 입은 열두 사도는 엄격한 대칭 없이, 다 만 세 명씩 짝을 지어 배치됐다. 마음의 동요가 담긴 두 가닥 움직임이 중앙으로 집중되고, 그리스도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움직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림 전체가 말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그 말의 메아리는 성화의 장엄한 무대 속에서 얼굴에서 얼굴로, 그리고 사도들의 손에 영향을 끼치고있다. '정물화' 같은 스승, 장식된 식탁보, 식탁위에 '성좌처럼' 놓인 물건들은 거의 음악적인 하모니의 작용에 의해 구성의 율동적인 분리 표현에 기여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 이 웅장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림의 거대한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특히 공간과 빛 의 지배의 관계에 기인한다. 레오나르도는 마치 벽위에 영원하고도 유일한 스냅 사진을 고 정시켜 놓은 것 같다. 1498년에 완성된 그림은 불행하게도 매우 빠른 시일 내에 허술함을 드러낸다. 관례적으로 는 레오나르도의 기술적인 실험들이 주된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벽의 습기와 건물의 변형도 그림의 보존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림은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지 않고 좀더 천천히 제작해 달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극히 얇은 유기적 소재에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리고 그 위에 기름기 많은 템페라물감과 유화 물감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예술가의 기계들 비행기, 잠수함, 자동차, 장갑전차, 승강기, 심지어 자전거까지.... 학자들의 최근 보고에 의하면 우리는 초인적인 레오나르도, 거의 악마적인 선구자, 온갖 새로운 물건(이미 오래 전 부터 작동해온 것들까지 포함하여)의 발명가라는 신화와 거리를 유직할 필요가 있다. 하지 만 레오나르도에 의해 새로운 기술의 알파벳이 만들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사바 다 카스틸리오네 주교는 1549년에 지은 그의 저서 '회상록'에서 레오나르도를 일컬 어 '램프의 그늘에서 벗어난 위대한 최초의 발명가'라고 말했다. 레오나르도는 자동 전차나인쇄 기가 방적기와 함께 인간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의 건축 구조물 을 거대한 기계적-수력적 유기체로 생각했고 자동화에 대한 원대한 꿈은 도시 전체를포괄 했다. 동시대보다 훨씬 더 앞섰던 그는 전통적인 개념과 자신의 예감을 꾸준히 비교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방법을 변화시켰다. 그에 따라 적용 방법과 기술은 다양해졌고, 똑같은 기계 요소들의 사용 범위가 각기 다른 형태의 기계와 기능에까지 확대됐다. 무기: 공기 역학과 용어 레오나르도가 그의 소묘들(원근법적으로 부등각일 때가 많은)에서 '이야기한' 현상들을 관찰하거나 상상할 때의 시선은 너무나 독특하다 그가 이 죽음의 병기들을 그럴듯하고 매력 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도표-분석법도 독특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창조성에 서술적인 요소들을 끼워넣음으로써 그것들을 순수하게 유토피아적이고 '공상과학적이고' 강한 미적 힘을 가진 기능들이 존재하는 환상적인 것들로 변화시켰다. 1480-1490년까지 레오나르도는 다종다양한 화기에 관심을 가졌다. 도화선이 달린 점화기나 '끝없는' 수력 건축물들을 상기시키는 나선 모양의 용수철이 부착 된 부싯돌, 부채꼴로 발사되는 '배수관이 달린 기관총이나 33연발 기관총', 사격의 속도와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 회전하는 기관총, 선박의 대포, 심지어 큰 부피의 불을 피우는 데 쓰 이는 회전하는 '격자' 박격포, 그리고 '키르쿰폴고레, 즉 대포를 갖춘, 회전하며 선회하는 포 좌에도 관심을 가졌다. 레오나르도는 무기의 역사를 위해 일련의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알키만드레, 알로브로트, 아르카브, 아타나세스, 브리콜라, 카르카플로틸레스, 클리르프, 클 로틀, 프롤리스토, 이밀크로네, 마르틸라트로, 스트린굴라 등 아르키트론크, 즉 혁신적인 증 기 대포도 빠뜨리면 안 된다. 그는 아르키트론크를 발명한 공을 아르키메데스에게 돌렸다. 그는 그것의 가장 눈부신 효과 세 가지, 즉 증기, 맹위, 진동에 경탄했다. 그는 또 살인적인 폭발성 총알, 방향을 지시하는, 공기 역학적인 날개가 달린 탄환. 그리고 코톰브로트 처럼 불꽃을 닮은 기이한 방화성 포탄의 효과도 찬양했다. 레오나르도는 깊은 인상을 주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표현을 믿지 않았다. 오히 려 적의 포탄의 충격을 감소시켜 주는 공기 역학을 믿었다. 그가 만든 '돌격용 전차'는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비행접시를 예고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바다와 공중의 디자인 한 세트의 발사장치에서 나무. 밧줄, 요소들 간의 연접장치 등 모든 것이 특별한 기하학에 관여하면서 기계의 힘과 능력을 감소시킨다. 다 빈치의 작품은 과학과 기술의 삽화들 중에 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데, 이는 끝없이 지루하기만 한 증명 없이 자신의 방법을 설명하 는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예술작품, '디자이너' 레오나르도의 창작물 때문이기도 하다. 레오 나르도의 비행에 관한 크로키와 그보다 몇 년 전에 시에나의 공학도들이 수첩에 그린 소묘 들간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런데도 분절되는 날개가 달린 그의 '큰 나비 (날개치며 나는 비행기)'는 그 무게 때문 에, 나아가 착륙장치 때문에 인간의 힘만으로는 공중에 뜰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학자 지 롤라모 카르다노가 레오나르도의 비행 시도에 대해 한 논평은 간결하다. "빈치는 시도했고 실패했다." 그의 글라이더는 확실히 더 그럴듯했다. 상징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이 레오 나르도의 기구를 날게 하려는 시도를 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최근, 평형추를 약간 앞으로 옮 기고 극도로 가벼운 소재를 사용한 결과, 실험은 성공했다. 선박과 잠수함에 사용하는 기구들은 좀더 현실에 근접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레오나 르도의 말년에 체사리아노(비트루비우스의 저서 발행자)는 밀라노 스포르차의 성에서 코모 호수까지 잠수로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레오나르도는 인간과 동물의 헤엄치는 법을 연구하 고 고무 오리발과 잠수 상태에서 호흡하기 위한 장치와 물 위를 걷기 위한 구명대를 그렸 다. 그는 또 시간의 측정과 천체의 움직임의 관계, 조화와 역학의 관계에도 매료되었다. 이보다 훨씬 더 기묘한 것은 '걸어가는 '자명종'에 대한 묘사이다. (원고 B, 20 뒤 ) "이 것은 시간을 아주 아껴 쓰는 사람들을 위한 추시계이다. 작동법은 다음과 같다. 깔때기가 그 릇에 물을 쏟아 대립적인 평형상태가 이루어지면 저울이 올라가 최초의 용기에 쏟고, 그러 면 두 배나 무거워진 그릇이 잠자는 사람의 발을 힘껏 들어올리며 잠을 깨워 그를 일터로 향하게 한다." 무대장치 지금은 사라진, 축제와 공연을 위한 무대장치와 기구에 관한 수많은 소묘들 가운데 몇 개는 '코덱스 애런델'에 남아있다. 폴리치아노의 '오르페우스'를 위한 장치가 그에 해당된다. 이 연 극에서 산이 전개되고 플라톤이 지옥에서 솟아오를 수 있는 것은 평형추와 기중기 덕이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서 '오첼 델라코메디아(희극의 새)'라는 자동 인형은 피렌체의 부활 절 축제 때 등장하는 전통꽃마차를 폭발시키기 위한 '콜롬비나'를 연상시킨다. 어떤 원고에 서는 '쿠리우스 극장', 즉 순회하는 무대장치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정교한 기하학적 원 칙을 적용함으로써 각기 다른 두 개의 연극 플롯을 동시에 소개할 수 있는 장치이다. 연금술과 땅의 경작 레오나르도가 구상한 농기구들은 기술의 발달도 보여주지만(18페이지에 묘사된 자동 압착 기를 보라. 에너지원이 단 하나여도 연속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그림의 '비법'을 위한 소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원고 F의 42(뒤)에 '유연한' 목판 (또는 판자)을 만들기 위한 '화학적 비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암소와 황소의 위를 뒤집 거나' 또는 '밀라노의 양배추 잎이나 상추'를 사용하여 만든 여러 가지 물감의 혼합물로 세 심하게 이 '조형 재료'를 만든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64 뒤)에서 그는 '왕의 물(질산과 염산의 혼합물)'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이 물은 햇빛을 녹인다." 이것은 사실 금과 은을 분리시키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이 방법은 연금술사들의 전형적인 의견과 일치하고, '작품 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비법'대로 행한 것이다. 이것은 연금술적인 '변환'을 연상시킨다 .레오나르도는 점성술과 강신술, 기만적인 관상학, 수상학(손금을 보는 학문), 연금술 같은 사이비 과학과 신비술을 격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그는 연금술이 화학과 가까워질 때는 존 중할 만하다고 인정했다. 진정 그는 증류에 관심을 가졌고, 증류기를 그렸고, 도자기로 증류 기를 만드는 방법을 기술했다. 그는 세 개와 주된 냉각방법과 연금술사들의 것과 같은 가마를 그렸다. 또 화가의 물감과 니스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아세톤과 그밖의 다른 용매도 증류했다. 마지막으로 레오나 르도는 깨지지 않는 찻잔과 단지, 유리나 단단한 돌의 모조품, 금속의 성형을 위해 찍어내는 법, '동결' 플라스틱 가공법, 다양한 도금법 등을 상상했다. 살라이의 자전거안가, 나폴라옹의 자전거인가? 최근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를 복원한 결과 '외설적인' 소묘들이 그려진 페이지의 뒷면에 있는 자전거의 크로키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며 유치한 수준)를 발견했다. 이것은 레오나르도 가 직접 그린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장의 한 소년이 그린 것일까? 나폴레옹 시대에 '코덱스 아틀란티쿠스'가 프랑스로 옮겨졌을 때, 또는 라디슬라오 레티가 암시하듯 최근 이 책을 복원할 때 슬쩍 추가된 것일까? 이런 형태의 자전거는 1820년대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아우구스토 마리노니는 이것이 원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구멍이 넓은 체인과 입방체의'나무 톱니바퀴가 달린 이런 유형의 전동장치 는 최근 발견된 '코덱스데 마드리드 I'(10 앞)에 등장하는 레오나르도의 소묘에서만 발견된 다...서툰 한 제자가 훈련을 위해 자전거발명 -이는 특별히 앞날을 예견한 일이다-과정의 첫번째 단계를 표현한 스승의 그림을 졸렬하게 흉내낸 것이다." 수의 즐거움과 불가능한 발명들 레오나르도는 계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때로 기계적인 발명품과 강의설계도로부터 엄 청난 이득을 얻기를 희망했고. 때로는 원의 구적법을 풀기 위해 다변형의 '무한한' 변의 수 에 대해 사색하거나. 수백 배, 수천 배, 수백만 배 증가시킨 무게를 거의 논리적인 외양을 띤 그의 기계들을 가지고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고 그리고 바다 위에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는 지구의 지름이 약 125007라는 사실도 측정했지만(이것은 상당 한 근사치였다) 지중해에는 40200개 이상의 항구가 있다는 것도 계산했다. 레오나르도는 파치올리를 만나기 전에는 간단한 산술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서 그는 '홀수는 제곱근이 없다'고 적었다. 그런데 1504년 11월 30일자의 한 메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눈뜬 그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성 안드레아 축일밤, 밤이 지나고 양초도, 내가 쓰던 종이도 다 떨어졌을 때 , 나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려 원의 구적법 문제를 풀었다." 전화와 망원경 레오나르도는 많은 집에 소식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그 집들에서는 감시인이 경계하고 있 다가 지하통로를 통해 소식을 전달하는 식으로 하여 45분 만에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인터 폰'망을 그렸다. (원고 B, 23 앞)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의 한 예언에서 그는 '가장 먼 나라 사람들이 서로 말하고 대답할' 그 날을 언급하고있다. 하지만 시대를 감안할 때 이것은 전 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 편지 쓰는 것'을 말한 것이다. (1033 뒤 ) 레오나르도는 앞을 내다본 예견자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쉽게 감동받는 관측자였 다. "행성들의 본질을 알려면 지붕을 열어라. 커다란 달을 보려면 망원강을 사용하라. 그 다 음에는 종이를 들어라. 거기에 바늘로 여 러 개의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그 구멍들을 통해 해를 쳐다 보라." ('코덱스 트리불치아노'. to 앞) 그리고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해는 움직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주의와 모나리자 숭배 레오나르도주의는 19세기에 절정에 달했고, 그 반향은 금세기 예술의 전위를 관통했다. 레 오르도는 도처에, 문학, 영화, 연극, 음악, 그리고 오늘날에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매체 안에 존재한다. 억제할 길 없이 점점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레오나르도의 예술은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확산의 열기에 휩쓸렸다. 모나리자 (모나리자) 신화는 1550년 바사리의 근거 없는 묘사와 함께 시작됐다. 바사리는 눈썹처럼 사소한 부분에 역점을 두었다. 1625년 퐁텐블로 성에서 카시아노 델 포초는 이 그림을 보고 선언했다. "부족한 것은 말뿐이다." 1800년에 '모나리자'는 보나파르트의 방에 걸렸다. 1804 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이때부터 이 여인은 흡혈귀 키마이라, 스핑크스, 가짜 변태, 사랑의 대상, 세속적 성모. 대단한 매춘부 요부, 양성의 상징, 고대인의 상상력과 근대적인 아이디어의 화신 등으로 치부되어 왔다. 사드는 '여성성의 본질 그 자체'를 본 반 면, 낭만주의와 퇴폐주의 문학가들에게 이 그림은 양성의 천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환영이다.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는 빈첸초 페루자라는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루브르 박물관 에서 도난당한다. 그림은 2년 뒤 피렌체에서 회수된다 피카소가 의심을 받고 아폴리네르가 도둑으로 누명을 쓴 반면, 아눈치오는 사건의 배후인물을 자처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모나리자'는 이 사건으로 더 유명해졌고, 고상한, 또는 가증스런 신기루(로베르토 롱기에게 는 '맛없는 빵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가 되었고, 열광적인 성화상 파괴운동의 표적이 되 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림은 안전을 위해 앙부아즈로 짧은 망명을 떠난다. 1952년 72개의 (모나리자) 판본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몇 개는 다 빈치의 자필 작품이라는 주장이 일었다. 그림은1956년 습격을 받았고, 1963년에는 미국으로, 1974년에는 일본과 소련으로 화 려한 여행을 떠났다. 질병의 징후를 적발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모나리자에게는 세이 렌, 프랑수아 1세의 정부, 또는 아틀란티스의 여왕 등 끝없이 새로운 신분이 부여됐다. 미술 사가들은 그녀를 랭스의 천사, 중동지방에 있는 로마 교회의 어떤 모자이크, 또는 캄보디아 의 크메르족의 왕에 비교한다. 그녀의 전설적인 시선은 모나리자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것 으로 보인다 관객은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하고 난해해지는 그녀의 미소에 사로잡하 고 그때 그림 전체가 신비한 거울의 패러다임이 된다. 1914년 절대주의 화가가 되기 전이었던 말레비치는 모나리자를 두 개의 십자가로 지웠 다. 그로부터 얼마 뒤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은 수염을 붙이고 LHOOQ(이철자를 그대로 읽으면 불어로 엘아오쇼퀴,즉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말이 됨 :역주)라는 무 례한 제목을 붙였다. 미래파 화가 레오나르도 포토다이내미즘과 에어로페인트에 관한 이론의 영감을 레오나르도로부터 얻은 이탈리아의 미래파 화가들은 특히 기계와 기술적, 건축적 유토피아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그와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은 '모나리자'를 싫어했다. 카라는 그 그림을 '역겹다'고 했고, 아르덴고 소피치 는 '바보 같은 커다란 머리통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녀에게선 하제작용 외에 다른 미덕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웅가레티는 이렇게 시사했다. "미래파에는 한 사람, 레오나 르도 같은 이가 부족했던 것 같다. 만일 그가 있었다면 동시대의 과학과 예술을 통달한 채 예술과 과학을 절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을 텐데. (미래주의는) 예술의 마술 같은 특성을 놓쳐버렸다."('미래파를 추도하며'1927년) 연극과 노래에서 '레오나르도풍의' 소설가 쥘 베른은174년 (모나리자)라는 희극을 썼다. '열렬한 레오나르 도주의자'인 아눈치오는(암굴의 성모) (레다와 백조) 그리고 특히(모나리자를 훔친 남자)라 는 제목의 영화시나리오를 썼다. 밥 딜런. 냇 킹 콜, 엘턴 존은 레오나르도를 노래했다 에 이젠슈타인, 타르코프스키, 달리, 부뉘 엘 같은 위대한 연출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신화를 그 들의 차원으로 끌어들였다. 영화가 그것이었다. 미술, 사회학, 기호학 레오나르도는 상징주의, 라파엘 전파, 인상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팝 아트,개념 미술, 플럭서스, 그래피티즘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화는 현대 미술 위를 맴돌면서 장 마르 가가 1959년 발표한 '비자르'에 실린 (모나리자 파괴주의론)과장 시외가 1767년 발표한 (모 나리자 게임)같은 기이한 연구들을 낳았다. 일일이 인용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나리자)를 주 제로 한 큰 전시회들을 언급해 보자. 1971년 도쿄와 파리에서 열리고 만 레이에 의해 소개 된 전시회, 1978년 뒤스부르크 전시회, 역시 1978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예술에 관한 예술'전, 1993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구간;과 함께 개최한 '흉내와 창조'전 등이 있었다. 1972년부터 '레오나르도 사료관'(1993년부터 다 빈치 박물관에 소속)은 레오나르도 의 작품에 대한 각종 전시회에 대한 문헌자료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