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2세-이집트의 위대한 태양 지은이: 베르나데트 므뉘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방정식 람세스 2세는 그가 살던 당대에 환상적인 명성을 떨쳤으며,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전설이 되었다. 그가 현대에 와서 다시금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강한 정신력과 카리스마, 긴 통치기 간동안의 화려함과 왕실의 찬란함, 국민들에게 안겨준 번영, 그리고 특별한 나라, 이집트에 건조해 좋은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설명된다. 제1장 통치의 시작 람세스 2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문서나 비문은 많이 있으며, 그 시대에 건축된 고고학 적 유적과 예술적 유산 또한 매우 풍부하다. 이 시기는 파라오 시대의 역사 가운데 우리에 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수십년 동안 람세스 2세에 대한 훌륭한 저작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과학적인 대 중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품 가운데에는 케네스 키친, 클레르 랄루에트, 크리스티안 데 스로슈-노블쿠르의 저작물들이 있으며, 1976년 크리스티안 데스로슈-데블쿠르는 파리에서 유명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는 훌륭한 카탈로그가 딸려 있었으며, 1985년에는 캐나 다의 몬트리올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람세스 2세의 통치를 제도적, 국제 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은 현명한 일이라 생각된다. 람세스 2세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닌 복잡한 초상화로 제시되며, 그 측면은 하 나하나씩 차례로 강조된다. 즉, 그는 특별히 장수를 누린 아버지였으며, 당대의 미인들의 남 편이자 연인, 그리고 자신의 여러 딸 중 네명의 남편이었으며, 100여 명에 이르는 자녀의 아 버지였다. 또 그는 경건하고 용감한 장군이었다. 그는 아몬 신에게 비장한 기도를 올린 뒤, 함성을 지르며 거의 홀로 여러 명을 대적하여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건축가였다. 그가 건조해 놓은 장대한 기념물들은 아직도 수많은 방문객을 이집 트 땅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룩소르의 강가 양안에 있는 아부심벨에는 방 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입법자이자 식민통치자, 외교관이었으며, 나일강의 델타 동쪽에 자신이 세운 거대한 제국과 자기 이름을 딴 호화로운 수도를 조직하고 관리하 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물주였다. 태양과 창조의 신인 라의 아들이었고, 오시리스처럼 백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였다. 그는 지하수 수맥을 찾는 데 뛰어났을 뿐 아 니라, 폭풍의 신 세트 숭배에 헌신적인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사실상 람세스 2세는 왕권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던, 다시 말해 자신의 인격과 기능의 대단한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뛰어난 파라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기의 역할을 완벽하게 구현해내며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 세티 1세를 포함해서 훌륭한 선왕들을 능가해 보겠다는 집요한 의지를 불태운 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람세스 2세의 공적과 수훈은 특히 신들이 완성시킨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영원한 이미 지를 공들여 손질하기 위하여 강조되었다. 람세스 2세는 수장과 신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세력은 B.C.13세기에 오랫동안 근동을 지배했고, 그의 영향은 나일강의 제5폭포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가까지 미쳤다. 그러나 이집트의 영광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18왕조의 유산 람세스 2세의 시대는 절정기였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통치가, 이집트를 힘과 번영의 정 상에 올려놓았던 두 선왕, 정복자 투트메스 3세와 세련된 전제군주인 아멘호테프(아메노피 스)3세의 통치를 합한 것이 되기를 원했다. 람세스 2세의 요람을 보호했던 일곱 명의 하토 르 여신(요정에 해당하는 존재)은 오래 전부터 그의 운명을 비범하게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 다. 제18왕조의 위세와 호사스러움의 축도였던 아멘호테프 3(B.C. 1387∼1348년경)의 찬란한 시대가 지난 뒤에는, '이단자'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 아크나톤이 천도했던 일시적인 수 도 (현재 명칭은 텔엘아마르나)인 아마르나 시대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아크나톤은 태양의 원반 아톤이라는 일반적인 신성 형태를 강요했다. 이 신비스러운 파라오는 이집트를 대강국의 위 치를 확보하게 하면서도 국제 무대와 국제적 정치, 군사동맹에서는 거리를 두게 했다. 그후 제18왕조는 왕위 계승문제로 인해 어둠에 휩싸인다. 젊은 파라오 투탄카멘이 죽은 뒤에는 오랫동안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이집트 군대가 권력을 잡았다. 결국 왕권의 내용과 성격을 잘 알고 있으면서 이집트 왕실의 소명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던 장군들이 왕좌에 앉는 다. 제19왕조의 도래 제 19왕조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가 되는 호렘헤브 장군의 주변에서 태어났다. 제19 왕조는 람세스 1세에 의해 건설되고, 세티1세, 람세스 2세, 메렌프타에 의해 유명해졌다. '사수 대장, 기병대 사령관, 국새상서, 왕실마부, 외국에 대한 왕의 사자, 왕실서기, 두 이 집트 왕의 대리자, 나일강 하구 책임사령관, 수도 총독'을 지낸 바 있는 비지르(대신) 파라 메 수가 처음으로 람세스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그 의 계보는 아들 세티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세티 1세는 다름 아닌 젊은 람세스 2세의 아 버지였다. 람세스 2세는 미리 선택되어 보살핌을 받고 재능을 부여받았던 아이였으며, 영광 스러운 왕실을 세우는 데 자신의 재능을 온통 쏟아 부었다. 군인과 평민 출신의 새로운 왕조는 처음부터 끈질기고 단호한 의지로 투트메스 3세와 아 멘호테프 3세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집트, 세 대륙의 교차로 아프리카 북동부에 자리잡은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 의하여 서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으 며, 또한 나일강의 델타에 의해 유럽문명의 일부가 발생한 곳인 두 개의 커다란 섬과 지중 해와 이어져 있다. 시리아-팔레스타인 협곡과 시나이 반도, 지중해와 지중해 섬들9키프로스 섬과 크레타섬), 홍해, 남쪽의 아트바라강과 청나일강과 큰 합류점에 이르는 나일강의 계곡, 계곡 양쪽에 뻗어 있는 현재의 사막은 선사시대부터 사람과 재화가 기술과 부와 사상이 전 달되는 통로였다. 이집트는 1950년대 이전까지 자급자족적이고 고립되어 있다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런 이미지는 지난 30년간의 연구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분명하게 구획지어져 있다. 북쪽은 델 타의 늪지와 지중해 해안, 남쪽은 나일강과 제1폭포, 동쪽은 아라비아 산맥, 서쪽은 리비아 산맥이 영토의 경계가 되었다. 이러한 이상적인 직사각형 안에 두 개의 축이 뚜렷하게 나타 난다. 두 산맥 사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행하는 태양의 길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강의 강줄기가 그것이다. 고대 중국과 같이, 피라미드 시대의 이집트에서도 기하학적인 균형을 완성시키는 다섯 번째의 방위점인 중점이 첨가되었다. 시리아에서 수단까지 이르렀던 이집트의 패권 더 먼 옛날에는 누비아(현재의 수단)와 이집트,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선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집트 는 자신의 문화를 퍼뜨리고 외부의 영향을 자신의 문화에 통합시키면서 주위 문화를 결집시 키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집트는 차례로 이집트의 생활방식을 전파하고 이웃나 라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파라오 시대의 역사가 대단히 길었는데도 불구하고(약 300년), 그 기간이 긴장과 단절, 확장, 분열, 재통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 다. 이집트는 서쪽으로는 별다른 영토 정복사업을 전개하지 않았다. 단지 현재 서쪽 사막의 북쪽에서 남쪽을 이어주는 일련의 오아시스들만을 합병했을 뿐이다. 파라오들이 취했던 전 투적인 행동도 줄 호전적이고 성가신 존재였던 리비아인 집단에 대해서는 방어적이었다. 파 라오는 주로 알렉산드라 서부 해안과 나일강 델타의 서쪽 지류를 따라 설치된 요새의 꼭대 기에서 리비아인들을 감시하게 했다. 람세스 2세는 시리아에서 수단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 집트와 자히(가나안을 포함하여 북쪽으로 뻗어 있는 지역) 사이의 국경에 피람세스라는 새 로운 수도를 건설함과 동세에 누비아에 많은 신전을 세우고 이집트 행정관을 창설하는 등, 황제로서의 의지를 실현해 갔다. 제국의 신들 이집트에는 공식문서를 통하여 추앙했던 여러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신으로는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가 경배했던 주요 국가신인 아몬과 라와 프타가 있다. 아몬은 중기 제국의 아메넴하트와 세소스트리스가 왕조의 신으로 추앙하여 섬겼던 테베의 신이다. 라는 세계의 창조자인 태양신으로, 성스러운 도시 헬리오폴리스에서는 그를 위한 의 례를 계속 올리고 있다. 그리고 프타는 고대 왕실 도시인 멤피스의 수호신이며 창조적인 힘 을 부여받은 장인의 신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신들 중에는 이들 국가신말고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들도 있다. 그들 가 운데에는 양식을 공급하는 암소이자 사랑의 부인인 하토르 여신과 왕실의 신인 호루스, 오 시리스의 부인이자 호루스의 어머니며 마술사인 이시스 여신, 도기를 빚는 녹로 위에서 진 흙으로 인간을 만드는 엘레판티의 신 크눔, 원시의 여신인 사이스의 네이트, 헤르모폴리스에 거주하는 저술과 학문과 법률의 신 토트 등이 있다. 제국의 수호신이며 서로 동체인 세 신, 즉 아몬과 라와 프타는 왕권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여기에서 왕이 생겨났으며 왕권을 정당하여 주는 것도 그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의례행위는 이들에게 집중되며, 그 중심에 이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테베의 아몬, 헬리오폴리스의 라, 멤피스의 프타, 이집트의 그 밖의 다른 신들은 신들의 서열에 따라 농민과 농토를 포함하여 영지, 가축과 목장, 어획물을 받는 주요 수취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의 부, 특히 아몬 신의 부는 람세스 치하에서 계속하여 불어나기만 했다. 누비아에 있는 나우리의 암석에 조각된 큰 석비의 아치에는 마트 여신(우주의 균형과 법 률적 규범의 여신)의 작은 조상을 아몬과 라와 프타에게 바치는 세티 1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것은 토지의 새로운 분할을 인정하는 마트 신을 이용하여 세티 1 세가 아비도스의 오시리스에게 소유물과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세 신들이 보장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백만 년 장례 신전'안에는 그 장면 아래에 오 시리스에게 유리한 토지상의 대단한 특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긴 법령이 적 혀 있다. 선왕인 아멘호테프 3세도 개혁을 단행하기는 했지만,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의 커다 란 변화는 왕과 왕의 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점과, 살아있는 군주가 신성한 근원과 완전 한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적대적인 형제 부활과 재생의 신 오시리스는 새로운 왕조가 '탄생을 반복(우헴 메수트)'함으로써 창조 의 순환에 동참하는데, 세티 1세의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로 그 막이 오른다. 역설적으로, 오시리스와 적대관계에 있는 형제이자 왕좌의 계승자인 호루스와 대립하는 세트 신인 왕조신의 반열에 들어간다. 세트는 악과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하며, 라의 쪽배 뱃머리에 매달려 암흑을 지배하는 뱀의 사신인 아포피스로 변한 악의 세력을 몰아낸다. 세 트는 유용한 폭력의 신이고 질서의 회복을 예고하는 혼란의 신이며, 갑작스러운 비와 폭풍 우의 신으로서 그 뒤에는 쾌청함이 따른다. 또 하나의 역설은 세트 신에게 소속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세티 1세와, 그후 의 람세스 2세와 그의 계승자들이 팔레스타인 왕족-힉소스('이방의 수장' 헤카 카수트의 와 전된 이름)-의 과거의 신인 세트에게 복종했던 것 같다는 사실이다. 힉소스 인들은 B.C.17 세기 중엽부터 B.C. 16세기 중엽까지 지배하다가 제 18왕조의 창시자인 아모스에 의해 완전 히 추방되었다. 그러나 세트는 이집트와 아시아 사이의 국경의 신이면서 이집트 판테온에 초대된 이방 신들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부분 바알 신과 결합되어 두 지역에 공통 의 종교적 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트 신을 수호신으로 삼게 된 세 번째 이유는 람세스 2세의 외모에서 찾을 수 있다. 오 시리스는 일반적으로 식물을 생장시키는 데 유리한 비옥한 진흙의 검은색과 연결되는 반면 에 세트는 불길하고 위험한 색깔인 붉은색으로 표현된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검사한 결과 에 의하면, 그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를 '세트 신 의 동반자'로 만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조건이었다. 세티와 그후의 람세스가의 왕들은 아바리스의 세트를 되살리고, 처음에는 수도를 아바리 스 근처에 세웠다가 훗날 이집트와 가나안 땅 사이의 경계인 자기 고향에 있는 힉소소의 폐 허 위에 수도를 세움으로써 영토 확장과 문화 동화의 계획을 예고했다. 람세스 2세의 몇몇 비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어법에 의하면 세트와 호루스는 '두 주 인', 이집트를 공동으로 소유하는 신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한 씨에서 출생한 지상의 후견 인에게 왕국을 이임했다. 왕권에 대한 웅대한 시각 파라오 체제는 극히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신성한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군주는 지 상에서 창조적인 일을 수행하도록 신들이 미리 계획하고 선택하여 옹립한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적이며 생동적인 힘과 결합되어 있는 전지한 파라오는 천체와 농업의 책력에 삽입된 무 한히 반복되는 정상적인 순환과, 초자연적인 일을 포함하여 신기한 현상을 일으키는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이다. 왕권에 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시각의 기원과 기초는 B.C. 4000 년에 공포하여 아멘호테프 3세가 선포하고 강화한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람세스 2세 때에 더욱 강화되었다. 건국자의 유물 이집트 역사상 첫 파라오, 나르메르는 B.C. 3200년경에 이집트를 건국했다. 그는 파라오 군주제의 기본원리를 제시했다. 왕국을 건설한 왕에 대한 중요한 유물로는 커다란 조각품들이 있다. 바로 거대한 철퇴머 리-소위 '전갈'왕(전갈왕 나르메르)의 철퇴머리와 나르메르의 철퇴머리-와 나르메르의 화 장 판-'화장판'은 원래는 편암의 판으로 그 위에서 화장분을 빻았다-이 그것이다. 그후의 파 라 오들은 이것들을 의도적으로 잘 보존한 것이 확실하다. 이것들은 히에라콘폴리스에 군주제 의 기원이 되는 신전 깊숙한 곳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과 지금은 사 라져버린 다른 유물들은 바로 하나의 법률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전갈'왕의 철퇴머리를 보면 대단히 다른 두 집단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의 윗부분에는 지방신의 종족과 영토를 나타내는 깃발이 있고, 상단부 그림의 왕 앞에는 깃발을 들고 있는 네 사람이 있는데, 그중 두 명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나르메르 철퇴머 리와 나르메르 화장판에도 그들이 등장한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었다. 당시 신석기시대 말에 이집트는 짐승을 길들이고 식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점차 받아들여 서 약탈경제(수렵, 어로, 채집)에서 생산경제(농업, 목축)로 옮아간다. 이와 같은 인간의 자연 에 대한 지배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조직과 새로운 정치구조를 함축하고 있다. 이미 단일한 족장의 지휘를 받고 있던 연방체제는 사실상 전제적이고 신성한 군주체제로 대체되었다. '전갈'왕 나르메르는 깃발들이 나타내는 지방 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평화조약을 맺고 나라에 질서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는 역사 전체를 통해 파라오 군주제를 지배하게 될 원리들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전갈'왕의 철퇴머리에는 농업과 관계된 모습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뾰족한 높은 모사('백색' 왕관)를 쓴 왕이 괭이를 들고 땅을 파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농업 의 기술적 방법(관개, 플랜테이션, 파종, 수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함께 올림으로써 땅을 비옥하게 만들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나르메르 철퇴머리에는 목축 조직이 등장한다. 나선형의 줄기와 줄로 만든 평평한 모자 ('적색' 왕관)를 쓴 왕이 닫집 아래 앉아서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짐승 의 수효를 센다. 여기에는 종족과 영토를 나타내는 신들의 깃발은 사라지고 왕권을 의미하는 깃발을 든 네 사람만이 보인다. 왕권이 창시된 것을 나타내는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 르메르 화장판은 왕권의 원리들을 상징적인 그림(그림-문자)과 초기상형문자(문자-그림)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제국의 정복 : 제5폭포에서 유프라테스 강가까지 힉소스인-팔레스타인의 왕족-이 이집트를 지배한 후부터 이집트제국에 대한의식이 생겨 나게 되었다. 제18왕조의 창시자 아모시스는 힉소스인들을 나일강 동쪽의 델타에 있는 그들 의 수도 아바리스에서 추방하여 팔레스타인의 사루헨까지 쫓아냈다.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 들에게 모멸감과 박탈감을 심어주었으며, 이러한 감정은 이집트가 누비아에서 아시아까지 펼쳐진 제국을 건설한 후에야 떨쳐버릴수 있었다. 자기 고모로부터 평화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투트메스3세를 영웅으로 하는 계보의 정복 자 파라오들은 대대적인 파괴와 여러 가지 전쟁 노획물과 포로들의 탈취를 수단으로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여, 국경이 누비아에 있는 나일강의 제5폭포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 게 되었다. 이집트의 식민지로 연방 형태의 정치체제에 편입되어 파라오에게 조공을 바치는 왕국과 도시국가들 가운데에서 특히 누비아는 이집트에게 비길 데 없는 부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아멘호테프 3세 치하의 부와 번영은 제18왕조하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아멘호테프의 다섯 개의 '기념' 신성갑충:제국의 헌법 '군주 중의 군주', 아멘호테프 3세는 영토 전역에 걸쳐 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을 공포 했다. 신성갑충의 형태로 다섯 개의 문서가 각각 수천 부 발행되어 누비아에서 아시아까지 유포되었는데, 여기서 파라오는 전세계에 파라오의 권한과 권력, 영토의 범위, 동맹의 견고 함을 선언했다. 각 신성갑충의 아래쪽(편편한 부분)에는 제국이 공포하는 5개항 가운데 하나가 적혀 있었 다. 1. '결혼' 신성갑충에는 영토의 범위('카로이에서 나하리나까지', 즉 누비아의 게벨바르칼 에 서 유프라테스강까지), 권력의 인정, 정당한 확인이 적혀있다. 2. 아멘호테프 3세의 미탄니인 왕비 이름인 길루케파 신성갑충에는 동맹과 관련된 위세가 표명되어 있다. 3과 4. 세켐-힘의 표현:'사자 사냥' 신성갑충과 '황소 사냥' 신성갑충에는 '짐승 지배' 신 화 에 의거하여 설명한 이스페트를 쫓아내는 행동이 표현되어 있다. 5. 헤카-지배'호수' 신성갑충에는 곡물의례를 통해 마트를 끌어들이는 행위가 나온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신성갑충은 각각 그의 수호신의 다섯 이름과도 관계가 있다. 그 이름들 은 다른 모든 파라오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완전한 통치계획을 알려주고 있다. 1. 호루스의 이름, '황소 사냥' 신성갑충에 나오는 '마트에 나타나는 승리의 황소', (왕 은 적을 쳐부수기 위해 황소의 난폭한 힘을 흡수한다." 2. 두 여신의 이름(북쪽의 코브라와 남쪽의 독수리), '호수' 신성갑충에 나오는 '규율을 확 증하고 두 나라에 평화를 주는 자'. 3. 황금 호루스의 이름, '사자 사냥' 신성갑충에 나오는 '아시아를 정복하는 매우 용감 한 자'. (용감성은 사자의 성질이며, 솔레브의 사자상에는 아멘호테프 3세를 '군주 중의 사자' 라 고 칭하고 있다.) 4. 상하 이집트의 왕의 이름, '결혼' 신성갑충에 나오는 '라는 마트의 주인이다.' 5. 라의 아들의 이름, 길루케파 신성갑충에 나오는 '아몬은 만족한다.'(아멘-호테프)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멘호테프 3세의 다섯 가지 신성갑충의 발행과 대규모 방출 의 목적은 명확해진다. 즉, 그것은 파라오의 권력을 확인하고 제국의 존재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이름과 관련된 제국 헌법의 기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던 듯 하다. 1) 승리 2) 나라의 조직과 이용 3) 권력 4) 넓은 영토에 대한 권위와 영화 5) 동맹과 위세 람세스 2세는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책임을 극히 강하게 느꼈다. 투트메스 3세의 대정복 에 의해 태어나고, 아멘호테프 3세에 의해 엄숙한 인정을 받은 제국의 구상은 람세스 2세에 의해 찬란하게 표현되고 구체화하게 된다. 아부심벨 신전의 비문에 의하면 황제 파라오의 영토는 이제 누비아와 아시아의 영토를 포함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자유롭게 왕래했다. 제 19왕조가 끊임없이 지향했던 제 18왕조는 남자 직계후손이 끊겨 여러 번 왕위 계승에 위기를 겪었다. 호렘헤브가 파라메수에게 흥미를 갖고 그를 람세스 1세로 내세운 것은 그 인물의 가치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손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의 자질과 힘, 그리고 강건한 체력은 견고하고 현명한 정부가 오래 지속되리라는 예상을 가 능하게 해주었다. 제19왕조가 끊임없이 지향했던 제18왕조는 남자 직계후손이 끊겨 여러 번 왕위 계승에 위 기를 겪었다. 호렘헤브가 파라메수에게 흥미를 갖고 그를 람세스 1세로 내세운 것은 그 인 물의 가치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손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의 자질과 힘, 그리고 강건한 체력은 견고하고 현명한 정부가 오래 지속되리라는 예상을 가능 하게 해주었다. 제2장 권력의 실습기 제 19왕조의 창시자인 람세스 1세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4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그는 눈 을 감으면서, 땅의 신인 게브가 자신의 아들 오시리스를 왕좌에 앉혔듯이, 그리고 오시리스 자신도 자신의 아들 호루스에게 왕국을 물려주었듯이 아들 세티 1세에게, 세티 1세를 이어 서는 손자 람세스에게 왕국을 물려주도록 유언했다. 람세스 1세는 신뢰감이 회복된 왕국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제 18왕조 군주의 '긍정적 ' 모델과 '부정적' 모델을 함께 물려주었다. 긍정적인 모델들로는 창시자인 아모시스, 투트메 스 왕가, 특히 그 중에서도 투트메스 3세, 세 명의 아멘호테프, 그 중에서도 아멘호테프 3세, 그 리고 회복자 호렘헤브가 있었다. 몹시 미움을 받았던 부정적인 모델들로는 전쟁을 통하여 제국을 건설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던 하체프수트 여왕, 투탄카멘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특 히 아멘호테프 4세인 아크나톤과 같은 왕들이 있었다. 아케트-아톤(텔알아마르나)에 정착했 던 '배교자' 아크나톤은 자신의 철학적, 신비적 관심에 몰두하여 아버지가 물려준 제국을 돌 보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 세티 1세가 국왕에 즉위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세 가량이었다. 그의 부인 투이는 고급장 교 집안 출신으로(그녀의 아버지는 이전에 기병대 부관의 직책을 맡았다.) 미래의 람세스 2 세와 티야라는 딸을 둔 어머니였다. 새로운 파라오는 강인한 남자이며 용감한 전사였다. 게다가 그는 현명한 통치자인 동시에 신들의 열렬한 매개자로서 그들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기념물을 바쳤다. 그 기념물 가운데 아비도스 신전의 부조는 지금까지도 완벽한 예술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성소에서는 신들만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제 1왕조의 건국자에서 현재의 파라오에 이르기 까지 이집트의 왕들을 선별하여 그 조상들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세티는 자신의 고향 신인 델타 동부의 세트 신을 충실히 받들어 아바리스 신전을 복원했고, 그 근처에 새로운 도시의 첫 건축물인 화려한 궁전을 건축했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이 도시를 자신의 수 도, 피람세스로 정했다. 세티가 세운 건축물들은 테베 지역에서 여러 동이 발견된다. 그는 나일강 서안 구르나에 자신의 장례 신전을 짓게 했고, 왕들의 계곡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장식 하게 했으며, 나일강 우안에는 카르나크 대신전의 다주식홀을 짓게 했다. 또한 세티 1세는 다른 종교도시인 멤피스와 헬리오폴리스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었으며, 누비아, 이집트 중부(아슈무네인), 시나이, 광산과 채석장이 크게 발전했던 와디함마마트(코프토스 동쪽)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도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세티 1세는 사실상 누비아와 이집트 동부와 남동부에 있는 산간지대의 금광을 대단히 중 요하게 여겼다. 와디미야(에드푸 동족)에 있는 카나이스 신전의 법령을 통해 그는 금을 채취 한다는 정책을 이미 천명했고,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이를 강화했다. 이집트 제국의 재건 세티는 국왕에 즉위한 초기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호렘헤브가 시작한 재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카르나크 다주식 홀의 북쪽 벽에는 그가 아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나일강 델 타에서 레바논의 리타니강까지 펼쳐진 지역인 레테누를 원정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라티니강은 베카 평야를 가로질러 티로의 북쪽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파라오는 이곳에서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 그리고 리비아 출신의 토착민 체헤누족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미탄니족이 멸망(무질서한 왕위 계승이 한 원인이 되었다)한 이후 하티(아나톨리아에 자 리잡은 히타이트 제국)가 강성해지면서 근동의 강대국 사이의 균형점이 차츰 북쪽으로 이동 했다. 그런 와중에서 이집트에게 정복된 가나안은 아무루(레바논), 시리아(다마스쿠스 지역) 와 페니키아의 해안도시들이 히타이트 영향권 아래에서 이집트에 종속되어 가는 데 없어서 는 안 될 균형추 역할을 했다. 세티 1세는 재위 8년에 대부분 사막으로 이루어진 이집트의 한 지방인 누비아와 평화조약 을 맺고, 수원을 찾기 위한 원정을 나가 돈골라의 서쪽에 있는 이렘 지방까지 나아갔다. 그 는 아마도 누비아의 총독이며 왕실의 대표인 '쿠시의 부왕', 아메네미페트의 도움을 받았던 듯 하다 람세스 2세의 즉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왔던(그는 쿠반의 비문에 의하면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군 대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람세스 2세는 B.C. 1279년에 즉위하여 67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두 명의 파라오에 의한 공동통치가 존재했으리라는,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가설은 오늘날에 아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가 설은 건국헌장의 정치이념 및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으며, 신성하며 신인일체의 유일한 태양왕의 개념과도 전적으로 배치된다.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버지 곁에서 부관과 지명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는 그에게 왕이 되기 위한 고도의 훈련을 쌓게 했으며, 그가 왕의 특권과 명예를 누리도록 했다. 람세스 2세는 아비도스에 있는 아버지에게 바친 신전의 대비문에서 세티 1세가 자신 에게 얼마나 훌륭한 왕권을 물려주고 싶어했는지를 회고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가슴에 안긴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군중 앞에 나아가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를 왕 위에 앉히라. 내가 살이 있는 동안에 그가 성취하는 것을 보고 싶도다!'" 세티 1세는 11년간 왕국을 통치하다가 죽었다. 람세스는 그 당시 25살 정도의 나이였다. 왕관을 쓰고 몸소 이집트를 영광과 부의 정점에 올려놓기 위해 세티의 행적을 따르고 확대 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람세스의 칭호 람세스는 자신의 '칭호' 혹은 '공식 의례'를 위한 명칭 다섯 개를 선택했다. 이 명칭들 을 살펴보면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통치 프로그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 호루스의 이름 : '마트의 사랑을 받는 승리의 황소'. 2. 두 여신의 이름 : '외국을 정복하는 이집트의 수호자'. 3. 금의 호루스의 이름 :'긴 수명과 위대한 승리'. 4. 상하 이집트 왕의 이름 : '라의 마트의 지배자' 혹은 '라는 마트의 지배자'. (우세르마 트 레) 5. 라의 아들의 이름 : '라에게서 태어나 아몬에게 사랑 받다.' (람세스 -메리아몬) 마지막 두 이름 (우세르마트레와 람세스-메리아몬)은 '카르투슈'(지상의 영토에 태양이 지 나가는 길을 묘사한 타원형 상징)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왕의 '성'과 '이름'이 된다. 람세스 2세의 칭호는 아멘호테프 3세의 그것과 놀랄 만큼 유사한 점을 나타내고 있어서 람세스가 제국에 대해 큰 야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기념비 위에 적힌 표준이 되는 다섯 이름에 부가된 형용어는 룩소르의 오벨리스크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의 장점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오늘날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세 워져 있다. 이 이름들과 그 의미를 상술하고 있는 형용어는 마트를 불러오기 위한 헤카-지 배(기념물의 건축을 포함하는 조직적, 의례적 행위)와 이스페트를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세켐-힘(전투와 전쟁, 또한 국토의 정비)으로 나누어진다. 람세스는 테베에서 아버지 장례식을 마친 뒤 몸소 오페트 대축제의 호화로운 향연을 지휘 했다. 이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아몬 신과 그의 부인 무트 여신, 아들 콘수 신은 환희에 가 득 찬 인파의 갈채를 받으며 열을 지어 꽃으로 장식한 금빛 배를 타고 카르나크에서 룩소르 (신의 '하렘')까지 간다. 그의 통치는 길조 속에서 시작되었다. 왕의 측근 람세스 2세는 청년기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하렘에서 간택해준 두명의 왕후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바로 이시노프레와 왕의 사랑을 받았던 우아한 네페르타리로서, 그녀들이 낳은 자녀 들은 정통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히타이트족의 공주 두명과도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그리 고 그는 네 명의 딸들과도 결혼했다. 그중 하나는 이시노프레의 딸로서 베타나트(아나트 여 신의 딸0라는 아시아풍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자녀(대장에 기재된 50명 이하 의 아들과 50명 정도의 딸)를 작위를 받은 부유한 관리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조부에 의해 시작되고 부친이 이어받았던 가족의 지위향상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많은 수의 왕자가 람세스 2세의 추정상속자가 되었으나, 그들은 대개 람세스 2세가 세상 을 뜨기 전에 먼저 죽었다. 열 세번째 아들 메렌프타가 람세스 2세가 죽고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는 아마도 60대에 접어든 듯하다. 람세스 2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들은 곧 잘 '왕자 고고학자'라고 불리는, 이시노프레가 낳은 케무아세이다. 케무아세는 멤피스에 거 주 하면서 프타 신의 대사제로서 람세스 2세의 특별한 경애와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고문서' 를 연구하고 매우 오래되어 해독하기조차 힘든, 폐허가 된 기념물의 비문들을 복원하는 등 역사가로 활동하며 과거의 파라오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냈다. 또한 그는 왕의 의례(세드 축제나 희년 축제)와 프타 신의 위격인 아피스 황소 숭배를 조직하는 데에도 관여했다. 람세스 2세 통치기의 위대한 인물들 람세스 2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는 중요한 인물이 여럿 나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즉위 초기부터 그를 섬긴 이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람세스가 즉위하면서 아몬 신의 대사제 로 임명한 네부네넨프, 세티 1세 치하에서 아몬신의 대사제를 지낸 네브네테루의 아들로 비 지르인 파세르가 바로 그들이다. 그 다음으로 왕은 언제나 자신의 주변 사람들, 어린 시절의 친구들 가운데에서 인재를 발 탁해 가장 높은 직급의 협력자로 중용했다. 아몬 바켄콘수의 대사제, 세타우 부왕 외국에 왕 의 뜻을 전달할 충실한 사신인 아메네미페트, 그리고 아부심벨의 노역을 감독하는 중책을 맡은, 왕에게 술을 따라는 직분에 있던(람세스) 아샤헤브세드가 그들이다. 혈연이나 혼인으 로 왕실과 인연을 맺은 이 고관들은 모두 왕자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 사이 에 복잡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고관들과 대사제들의 왕조를 창조하고(예를 들면 아비 도스에서는 한 가문에서 연속 6대에 걸쳐 오시리스를 섬기는 일을 맡았다!), 새로운 혈통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지자 조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분쟁과 부정을 저지를 위험성도 갖게 된다. 비지르, 행정부의 수반 거대한 행정부의 기능과 구성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믿을 만한 자료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선 단지 법령과 회장, 포고령, 과세 명보, 관리들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 판결문, 특 히 묘지의 주인에게 바치는 설화와 자전적인 비문이 있는 긴 칭호들을 자료를 긁어모을 수 밖에 없었다. 제 18왕조의 비지르였던 레크미레의 무덤에서 나온 '비지르의 의무'라는 제목의 텍스트 는 우리에게 비지르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거의 완벽한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 비지르는 행 정부(정부가 아니다. 그는 '수상'이 아니다!)의 수반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파라오의 상담자 가 되기도 한다. 재무대신과의 협의, 관리들이나 전령관과의 교류, 토지 관리, 여러 보고서와 행 정적 의식에 대한 검토, 광산이나 채석장의 탐사 조직, 대공사의 지휘, 재판과 궁전 경찰을 감독하는 일도 모두 그의 소관이었다. 라메시드 시대에는 두 명의 비지르가 한 명은 남부(테베)에서, 또 한 명은 북부(피람세스) 에서 동시에 임무를 수행했다. 쿠시의 '왕자', 즉 쿠시의 '부왕', 누비아의 총독(쿠시는 상 누 비아를 지칭하며 와와트는 하누비아를 말한다)은 비지르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 외에도 지방 총독들과 지방 보좌관들은 이집트가 행정적인 분권화를 이룩하는 데 공헌을 했 다. 재무부는 국가의 여러 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이다.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 여 기장하는 일이 이 부서에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세금과 조공을 통해 들어온 구체적인 이 익을 필요에 따라서 여러 기구 (왕실, 하렘, 신전 등)에 직접 할당했다. 신전과 관리들의 서열 라메시드 왕조(제19왕조와 제20왕조)의 통치기간에 중요한 국가신들의 신전은 경제적인 면에서 그 힘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상승하여 어느 누구도 무시 못할 정도로 막강해졌 다. 이러한 신전들은 부를 이용한다거나(특히 농경, 목축, 광산, 채석 등 1차산업 부문에서 이루어졌다) 재화를 분배하는 일, 그리고 경제적 흐름을 지배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중 요한 중계자가 되었다. 아몬 신과 라 신과 프타 신의 대사제들은 국가의 각종 직급 중에서 도 가장 권세 높은 직급에 속했다. 이러한 결과가 반드시 과거의 지역 신들의 희생을 바탕 으로 실현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과거에 지역 신들이 갖고 있던 특권은 왕실의 주도 로 재조직된 새로운 체계 속에 포함되었다. 나우리 법령은 이러한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세티 1세는 선왕조 시대의 파라오들이 선포한 면제 법령을 생각하여 아비도스의 오시리스 신인 새로운 소유물 에 면제 특권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적 자원과 재화가 중앙 행정이나 지방 행정으 로부터 보호받게 함으로써 신전과 신전의 영지를 독립된 경제 단위로 만들었다. 경우에 다 라서 왕실의 결정과 법령을 어길 가능성이 있는 관리들을 기록해 놓은 목록을 보고서 그 권 한에 따라 대략 그들의 서열을 추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쿠시 지방에서 수입한 물품을 감독한다거나 상품들(금, 상아, 흑단, 표범 가죽, 기린의 가죽과 꼬리, 향기나는 식물...)을 수송하는 일을 집사나 서기, 성채의 감독관과 같은 누비아에 있는 성채의 고위직 인사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배를 징발하는 일은 누비아의 부왕, 용병대장, 왕실 영지의 감독관과 쿠시 지방으로 파견된 전령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부역노 동자를 징집한다거나 인력을 충당하는 일, 노동자를 이동시키는 일은 누비아 부왕, 총독, 왕 실 영지의 감독, 군대의 주요 장교, 쿠시로 보내는 왕실전령관의 소관이었다. 또한 중앙 행 정부의 고위 관료(비지르, 궁정의 대신들과 주요 요인들, 판관), 지방 행정부의 고위 관료(누 비아의 부왕, 금집사, 총독), 군대장교, 특히 기마장교, 연락장교(왕실 영지의 감독과 쿠시로 보내는 전령관)는 법령의 조치들을 시행하고 따르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군대대장은 전쟁포로, 징병, 용병(용병은 람세스대에 일어난 전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 을 했다), 직업군인이라는 충원 원칙에 의해 정원을 충당했다. 아시아에서 거두어들인 이집트의 이익은 현지에서 이집트 총독이 수호했다. 이집트 총독 은 조공의 징수, 질서유지, 그리고 지역 신을 쫓아내지 않고도 군림하는 '신들의 왕' 아몬 숭 배를 감독했다. 각 나라와 도시국가는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그 군주는 람세스 2세에게 붙여 졌던 칭호인 '왕중의 왕'인 파라오에게 충성했다. 이집트의 아버지로 자처했던 람세스 2세는 군주의 활동의 핵심인 헤카-지배가 의례 전반 과 섞여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봉헌물, 매일의 의례, 의식과 축제, 성스러운 기념 물 건축 등의 의례의 목적은 나라의 안녕과 영광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3장 통치와 의례 왕의 의례적 기능, 통치활동의 기반 헤카-지배란 이집트에 마트를 가져오고 마트를 유지시키기 위한 왕의 활동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파라오에게 제일 우선시되는 역할은 승리, 번영, 사회 질서와 평화를 얻기 위하여 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신성한(이와 동시에 우주적이며 근 본적이고 사회적인) 규범의 지배에 따르는 역동적이고 긍적적인 결과이며, 또한 신들이 원 하는 규율을 준수한 결과이며, 태양신(라)의 본질 자체에 기인하는 궁극적인 대상에게 호소 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곧 신 자체인 왕을 통해 마트-자신 속에 이러한 개념 모두 가 집중되어 있는 여신, 신성한 개념-가 왕국에 존재하는 결과이다. 왕은 마트(구체적으로 조그맣고 우아한 여신상)를 바침으로써, 그를 만든 신들의 창조적 작용을 얻으려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러면 신들은 파라오에게 나라에 마트를 가져오고 마트를 유지하게 해주는 호의 를 부여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를 지배하는 정의의 원리에 따라 응답한다. 이 정의의 원리란 내재적인 것으로 보상이 따른다고 하는 원리인 것이다. 다른 의례에서 바치는 예물도 다양 한 형태의 이 원리를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호혜적인 계약에 따른 교환이 아니다. 이것은 라의 아들인 왕이 조물주의 행동을 따르고 그들 고유의 실체를 누리며 우주의 대주기에 통 합됨으로써 창조의 강한 힘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트의 의례와 결합된 헤카-지배에 의해 왕은 신들을 진정시키고(신의 분노는 무섭다. 신 의 분노는 대재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들의 호의 덕분에 마트의 지배를 얻는다. 왕이 신들과 맺는 복잡한 관계는 교환과 호혜성의 개념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며, "스스로 도우라, 하늘이 너를 도우시리라."라는 속담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과 영원한 회귀의 주기적인 틀 속 에 위치한다. 파라오, 모든 생명의 근원 람세스 2세는 교훈을 최대로 흡수했다. 그는 신들의 가호를 구하는 대단히 많은 활동을 했고, 그 활동은 위엄이 있었다. 그는 이집트 신들의 대사제에게 위임받은, 편재하는 제식 집행자일 뿐 아니라 신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는 지칠 줄 모르는 건축가이며, 아툼(태양 신의 한 형태)과 같이 거상에 구현된 자신의 신성의 아버지로서 다른 어느 파라오보다도 더 파라오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 파라오는 커다란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할 자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임무에 직면하여 힘을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거기에 람세스 2세 자신이 대상이 되는 재생 의례의 중요성이 있다. 새해와 30년 희년(세드 축제)에 치러지는 왕권을 확인하는 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람세스 2세의 첫 세드 축제는 그가 즉위한 지 30년째 되는 해에 거행되었는데, 그해는 다행스럽게 도 커다란 풍요를 선사해준 계곡의 범람과 때가 일치했다. 그후로 희년은 더 짧은 간격으로 (2-4)년 간격 나중에는 거의 매년) 거행되었다. 케무아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멤피스 에서 축제들을 조직하여 피람세스에서 개최하고, 상이집트와 누비아에서 이를 기념했다. 이 러한 장소들은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자연 현상과 그 재생 효과가 상징적으로 맺어져 있다. 양식의 공급자인 왕 공식적인 서류를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람세스 2세는 끊임없이 왕국의 전반적인 복지 를 염려했다고 한다. 나라의 복지는 무엇보다도 신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다. 신을 씻기고, 기름칠을 하고, 옷을 입히고, 치장하고, 먹이고, 물을 주는 매일의 신성한 의식 을 거행함으로써 신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신들에게 바쳤던 음식은 사제들에게 분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모든 지방(42개의 '노모스')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여러 축 제 때 신에게 경배 드리기 위해 소와 양, 거위를 잡았으며, 수확한 열매도 바쳤다. 이러한 양식 들은 모두 의식이 끝난 뒤 군중에게 분배되었다. 이들은 그밖에도 정기적으로 월급과 식량 배급을 받았다. 피라미드 시대 이후 파라오와 국민들은 암묵적인 계약에 의해 서로 연결되 어 있었다. 즉, 왕은 신들에게 작용함으로써 국민에게 안전과 생계를 보장하여 주고 국민은 군주에게 복종과 존경과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국가가 번영을 누릴 때에는 왕은 신전과 행정부 및 사법부뿐 아니라, 가장 낮은 계층의 구민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래서 군인의 월급이 오르고 장인의 보수가 많아졌다. 이러 한 관대함은 노동에 대한 열의를 촉진했다. 람세스가 누비아의 금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우물을 파게 했다. 파라오는 노동자들이 이집트에서 금을 대량으로 산출하여 계속 수호신들을 아름답게 치장 할 수 있도록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살펴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직접 우물을 파는 일에 힘을 쏟았다. 쿠반(와디알라키에 있는 그의 고향 지방명)의 비석은 와디미야에 있는 세티 15세의 비문 의 영향이 보인다.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능가하려 했던 람세스 2세는 완벽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어미니'인 세티는 노동자들의 고돈 조건을 보고 동 정하여 와디미야 금광에 신전을 짓고 우물을 파게 했다. 람세스는 와디알리키의 누비아 금 광 근처의 비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120쿠데(60m)의 깊이까지 물이 있는지 조사를 했으나 실패했던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반면 람세스는 누비아의 부왕에게서 노동자들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이하여 신, 그 중에서도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신인 하피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 결과 12쿠데, 다시 말해 지하 6m도 못되는 깊 이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솟아올랐다! 강도 높은 건축활동 신상을 금이나 은으로 만들고 수리하며(귀한 금속인 금과 은은 각각 신들의 살과 뼈이다), 그들에게 화려한 신전을 지어바치고, 그들의 창고를 만들고 채우며, 거상과 거대한 오벨리스 크를 바치는 것은 파라오의 의례 행위의 양 날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기고, 선왕들을 칭송하겠다는 의도에서 그들의 작 품-여기에는 제 12왕조 군주들과 제 18왕조 군주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자 기 아버지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이집트와 누비 아 전역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팔레스타인에도 대왕의 이름을 지닌, 아몬신에게 바 치는 신전의 잔해가 남아 있으며, 그가 세우게 한 비문이 제국 전체에 무수히 퍼져 있다. 람 세스 2세는 아비도스에 있는 아버지 세티 1세의 작품을 완성시켰고, 계속하여 그곳에 자신 의 신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람세스 2세도 역시 그 안에 조상의 목록을 기재해 놓았는데, 위 기 시대의 왕들, 즉 중간 시기인 아마르나 시기의 왕들을 제외시켰다. 피람세스에 가까이 있던 아바리스에는 파라오와 자신의 조상의 수호신인 세트의 신전이 계속하여 아름답게 장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시혜도 받았다. 멤피스, 헬리오폴리스, 테 베에서 람세스 2세는 큰 신전들을 새로 건축하고 확장했다. 그는 즉위 초에 카르나크의 다 주식 홀을 완공하고, 룩소르 신전을 확장하여 앞뜰과 탑문을 짓고, 신전 앞에는 거상들과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람세스 2세는 테베의 좌안에 있는, 왕의 분묘를 건설하는 장인들 의 마을인 데이르알메디나에 하토르 여신에게 바치는 성소를 지었다. 그는 특히 아름다운 '백만 년' 신전, 즉 자신의 장례 신전인 라메세움을 지었다. 이것은 유명한 '오시만디아스 의 무덤'으로, 그 로맨틱한 폐허의 모습은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을 매혹하고 있다. 지방의 커다란 도시에도 건축물이 세워졌다. 이집트 중부의 도시에 있는 신들의 지배자, 지식의 신 토트를 포함하는 중요한 여덟 신의 성스러운 아슈무네인/헤르모폴리스 신전이 그 한 예이다. 람세스 2세는 이 신전에 새로운 성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메렌프타와 세티 2세는 이 성소를 장식했다. 그러나 람세스 2세가 신전을 가장 많이 세운 곳은 누비아이다. 즉위 초부터 시작하여 첫 2년간 장식한 가장 오래된 신전인 아스완 남쪽에 있는 베이트알왈리 신전에서 시작해서 나 일강의 제3폭포 근처의 서아마라 신전에 이르기까지, 나일강의 흐름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오 르면서 금광으로 가는 길 위의 여섯 개의 장소에 일곱 개의 신전이 늘어서 있다. 람세스의 걸작, 아부심벨 람세스 2세가 누비아에 세운 신전들은 제각기 명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인 아부심벨의 명성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19세기에는 모래에서 빠져 나오고 20세기에는 물에 서 구원을 받은 두 개의 스페오스(암굴 신전)는 나일강의 제2폭포에서 약 70km 북쪽에 세 워져 있다. 이것은 람세스 2세의 통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엄청나게 큰 기막힌 기념물이다. 람세스 2세는 오래 전부터 신성한 장소로 알려져 있던 메하와 입셰크라는 두 개의 언덕을 신전을 세울 장소로 선택했다. 두 언덕은 서로 150m 가량 떨어져 있는, 강 위로 튀어나온 장소였다. 그가 이곳에 신전을 건축하려 한 것은 자신의 수호신들을 경배하고, 그 신들이 풍 요를 가져다주는 나일강의 연례적인 범람을 보장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통 치와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찬미하기 위해서였다. 메하의 산을 깎아서 만들어놓은 아부 심벨 대신전은 람세스 2세와 세 명의 주신, 즉 아몬 신과 라 신, 그리고 프타 신에게 바쳐졌 다. 이곳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근원적인 어머니이며 사랑과 음악과 기쁨의 부 인인 하토르 여신이 사는 '입셰크의 신성한 산'에 바위를 파서 만들어놓은 소신전은 네페 르 타리-메렌무트 제1부인과 하토르 여신에게 바쳐졌다. 람세스 2세가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작업에 착수한 것이 분명한 이 두 개의 신전은 21년 이 걸려 완공되었다. 대신전의 사다리꼴 입구 앞에는 높이가 20m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좌상 네 개(그중 하나는 손상되었다)가 있으며, 네페르타리와 몇몇 자녀로 이루어진, 훨씬 축소된 가족 성원의 조상이 옆에 서 있다. 제1실(프로나오스)에는 람세스 2세의 얼굴 모습에 왕국의 신 오시리스의 형상을 한, 높이 10m인 '오시리스형' 기둥이 8개 있다. 제1실의 벽과 지성소로 향하는 사각형 기둥이 있는 현관의 벽에는 왕의 역할을 나타내는 두 가지 그림이 줄지어 있다. 두 가지 기능이란 세켐-힘(적을 죽이는 의식의 장면, 카데시 대전투의 서사시적 전개)과 헤카-지배(다양한 예배 의식, 람세스가 신들에게 예물 바치는 장면)를 가리킨다. 지성소 깊숙이에 있는, 바위를 파서 만들 네 개의 거상은 그 장소를 소유 하고 있는 신, 즉 라-호라크티, 람세스 2세, 아몬-라, 프타를 나타낸다. 입구의 문 위 신전 정면에는 람세스가 라-호라크티에게 마트 여신을 바치는 봉헌이 람세스란 이름을 이루는 '우세르' '마트' '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수수께끼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전의 고 도 로 상징적인 의미를 완성하고 있다. 신정의 기능과 거대한 모습은 통치에 성공을 거두겠다 는 의지와 명백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비종교적인 건축물 람세스 2세의 영화에 대한 꿈은 행운을 뜻하는 푸른 터키석으로 장식된 찬란한 수도 건설 로 실현되었다. 정부공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파라오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피람세스, 혹은 퍼람세스로 불리는 이 '람세스의 집'에는 군주와 긴밀한 협력을 맺 고, 주요 행정기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가운데 북부 비지르의 지휘아래 정보들이 집중 되었다. 프타의 멤피스, 라의 헬리오폴리스, '신들의 왕' 아몬의 도시이며 남부 비지르가 살았던 곳 인 테베와 같이 전통적인 종교적, 정치적인 수도들도 물론 람세스 2세의 세심한 배려를 받 았다. 그는 또한 매혹적으로 장식하여 치장한 호수에 가까운 파이윰(델타 끝의 남서쪽)에 있 는 미우르 하렘도 정성껏 돌보았다. 신성한 조각상들 람세스 2세는 사방에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조각상을 세웠다. 이것은 아멘호테프 3세 가 화려하게 시작한 관습이었다(멤논의 거상). 대부분이 거대한 크기인 이 조각상들은 그 자 체가 '왕들의 라' '왕중 왕' '두 나라의 전쟁의 신' '활의 지방(누비아)의 람세스의 살아 있 는 상'등과 같은 형용어가 붙은 신격화된 람세스이다. 이 조각상들은 이 조각상들에게 예배 를 드리는 외근사제와 제식 집행자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보조금을 지 급 받았다. 람세스는 이처럼 제국의 넓은 영토 위에 자신의 신적인 존재를 퍼뜨리면서 누비 아 내륙에서 시리아 북부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으로 권력을 과시했다. '람세스 2세 양식' 기념물,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신성한 건축은 제국과 인간적이고 신적인 그 안의 주민들, 그리고 신인 왕의 장엄함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람세스 2세 시대에도 웅장하고 위엄 있으며 거대하면서도 균형 잡힌 양식이 활짝 꽃을 피웠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아부심 벨의 암굴 신전과 테베(룩소르)의 좌안에 있는 라메세움이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신전의 건축 구조를 완전히 확립시켰다. 그것은 거대한 사다리꼴 탑 문 뒤에 하나나 여러 개의 뜰이 있고, 그 뒤에는 세 개의 홀(한 개의 중앙 홀과 더 낮은 두 개의 측면 홀)로 된 거대한 기둥의 다주식 방이 있으며, 점점 더 좁아지고 어두워지는 일련 의 방과 어둠 속에 예배당이 있는 성소, 즉 신의 장막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거대한 조상과 오벨리스크는 그 장소를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곳으로 완성시킨다. 그 반면 에 신전의 벽들은 아마르나 예술의 교훈을 잊지 않고 간직한 예술가들이 의례를 행하는 장 면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 는 극적인 강렬함과 동작들-특히 카데시 전투의 에피소드 속의-은 겹쳐지는 평행선으로 공 간을 수평으로 나누는 대신, 모든 공간을 장식으로 둘러싸는 편을 선택한데서 기인한다. '람세스 2세 양식'의 또 하나의 특성은 즉위 2년부터 평평한 바닥에 비해 약간 튀어나 온 저부조 대신 도입된 음각의 부조를 사용한 데 있다. 이러한 예술적, 기술적 새로움은 태양의 마술이 부여하는 빛과 그림자의 놀이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람세스의 이름에 첨가된 두 번 째 요소를 세테펜레, '라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이집트와 왕국의 적에 맞서 싸우는 전투는 왕의 중요한 특권과 의무에 속했다. 왕은 침략 자를 쫓아내고 반란을 진압하고 국경을 지키고 영토를 확장했다. 위의 특권과 의무는 적을 물리치고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세켐-힘을 행사하는 왕의 활동의 두번째 요소이다. 제4장 힘과 지배 세켐-힘은 왕국 안에 마트를 유지시키고 정착시키며,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스페트-마 트와 반대의 것-를 밀어내는 왕의 활동을 포함한다. 나르메르 화장판의 뒷면에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 적을 무찌르는 왕의 모습은 세켐-힘의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 유물에서는 폭력적인 행동(세켐)은 백색 왕관과 관련되어 있고, 화 장판의 앞면에 나타난 것처럼 의례적인 행동(헤카)은 적색 왕관을 쓰고 이루어진다. 그로부 터 얼마 후 나르메르 시대에 두 개의 왕관은 각각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의미하게 되었다. 곧 이 두 개의 왕관은 하나로 통합되어 유일한 권력을 상징하는 이중 왕관을 형성한 것이 다. 이중 왕관이란 곧 '두 개의 권력'(pasekhemty)을 뜻하는데, 그리스어로는 프셴 트 (pschent)라고 번역되는, 파라오의 머리 위에 이중의 마술적 힘을 집중시키는 왕관을 말한 다. 농업의 주인으로서의 왕 나르메르의 철퇴머리는 목축의 조직과 관련이 있는데, 이와 짝을 이루는 전갈 철퇴에서 왕은 화려한 장식을 한, 허리에 두르는 옷을 입고 백색 왕관을 쓰고 역동적인 자세로 서서 호미를 손에 쥐고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려고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 는 이 첫 번째 자세는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모든 파라오에게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왕 은 카오스와 무질서와 황무지를 밀어낸다. 땅과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주인이며, 오 시리스의 아들이자 정통 후계자이며, 지상의 왕국을 능가하는 신성한 왕국의 신비한 대표자 인 호루스가 물려준 이집트 영토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자가 바로 왕인 것이다. 다음에 왕은 신전과 신전의 측근들에게 완전히 자유롭게 땅을 맡겨 경작하게 할 수 있다. 서양과 중세 기독교 세계의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빌려 말하면, 왕은 신전에게 '사 용 권'을 위임했지만, '직접적인' 소유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파라오적 군주제 초기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백색 왕관이 세켐-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나라를 수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토 분배와 농경 조직도 왕의 능력과 이를 사용하기 위한 힘이 분명히 직결되어 있다. 첫 번째 군사원정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은 곧 두차례 에 걸쳐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선 람세스는 재위 2년에 델타의 섬으로 망명한 해적인 샤르단족, 이른바 '바다'민족의 공격을 받아 싸워야 했다. 샤르단족은 해전에서 패 배 하여 파라오의 군대에 통합된 이후 용감하게 사력을 다해 싸운 전공에 대한 보상으로 소작 지를 부여받았다. 람세스 4년에도 그는 서남아시아에 첫 군사 원정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람세스 2세는 가나안과 티로와 비블로스에서 이집트인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 아무루의 왕 벤테시나가 히타이트의 보호를 받다가 이집트의 종속국이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 다. 승리를 거둔 람세스는 페니키아를 거쳐 이집트로 돌아왔다. 람세스 재위 5년에는 벤테시나의 배신으로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와 람세스 2세가 싸우는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오론테스강의 양쪽 기슭과 카데시 요새 주위에서 양국의 군 대가 서로 격돌했다. 람세스 2세의 행동 서사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카데시 전투는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벨,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의 벽에 새겨졌다. 전설을 가미한 이 거대한 광경은 '보고서'라 부르는 간 략한 글과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긴 글인 '시'로 된 두 개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패배한 것도 아니고 승리한 것도 아닌 전투의 실제 결과는 이 경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 다. 여기서는 마차를 탄 람세스가 거의 혼자서(개인 경호원만 데리고) 히타이트 군대와 겨루 어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람세스가 여기서 원했던 것은 기념비적인 삽화가 대대적으로 진실성을 증명해 주는, 용감한 행동에 대한 표현이었다. 람세 스는 아버지 아몬 신에게 기도를 한 뒤 혼자서 다수의 무리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자신이 진 실로 국민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의 우두머리인 라와 아몬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선택받은 자 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이러한 찬란한 진리 앞에서 사실의 진위 여부는 대 단치 않은 일일뿐이다. 카데시 전투의 진행 람세스 재위 5년 여름 둘쨋달의 아흐렛날에 파라오는 피람세스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 다. 그의 뒤를 이어 아몬, 라, 프타, 세트라는 수호신들의 이름을 지닌 네 사단의 군대가 따 랐다. 왕은 '전나무 계곡'에 있는 식민지인 람세스-메리아몬에 도착하여, 해안길이나 베카 평 야를 통해 카데시로 갔다. 왕은 '보고서'에 의하면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지대'에 멈추 었 다가 북쪽, 샤브투나라는 도시쪽으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강의 여울목에 통로가 있었다. 두 명의 베두인족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당시까지 히타이트의 재배를 받고 있던 그들 부 족이 파라오에게 충성하기를 원한다고 고했다. 게다가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으로 아 주 멀리 떨어진 알레포 부근에 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집트군의 위 치를 조정하고 람세스가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와탈리가 보낸 첩 자였다. 함정에 빠진 파라오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북서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아몬 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라 사단은 샤브투나의 여울목을 건너고 있었고, 프타 사단과 세트 사 단은 그보다 더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사로잡힌 두 명의 히타이트 포로가 태형을 받고 히타이트 군대가 아주 가까운 요새 뒤에 숨어있으며, 금방 쳐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 는 사실을 자백했다! 프타 사단에게 이 급보를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진을 치는 데 몰두해 있던 아몬 사 단은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한 소대의 히타이트 군마들이 나타나 샤 브투나의 여울목에 있던 라 사단을 공격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람세스는 갑옷을 입고 자신의 애마들이 이끄는 마차에 올라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 아몬을 의지하 여 고함을 지르면서, 마치 몬투처럼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아무루에 머물러 있던 이집트 분견대, 네아린족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마도 그 들은 다시 침착을 되찾은 이집트 부대의 도움을 받아 파라오를 도와 싸웠던 듯하다. 어쨌든 그곳에 있었던 람세스의 자녀들이 비교적 안전했던 점으로 보아 이집트 진영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다음날 아침, 고생을 하긴 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이집트 군대는 싸울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은 람세스에게 화친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제안을 받은 참모부는 파라오에게 그 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 결과 군대는 방해를 받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람세스가 들을 돌리자마자 무와탈리는 벤테 시나를 폐위시키고 아무루의 통제권을 다시 빼앗았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대립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은 주변의 나라와 도시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15년간을 더 다투며 대립했다. 그들의 영향권 하에 있는 나라와 도시들은 무력에 의한 강요를 이기지 못하거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종주국을 바꾸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주로 아무루와 우피(다마스쿠 스 지방)의 종주권을 놓고 전쟁을 치렀다. 람세스 8년과 9년에 람세스의 군대는 다푸르까지 전진하여 투니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제국은 다른 전선에서도 이민족과 싸워야 했다. 아 시리아가 히타이트를 위협하고 있었던 반면, 이집트는 서쪽에서 리비아에 대항해 왕국을 지 켜야 했다. 게다가 더 큰 위기가 하티를 약화시켰다. 무와탈리가 죽고 나서 두 명의 후보가 왕위를 놓고 싸웠다. 무르실 3세라는 칭호로 통치한, 우르히-테슈브로 불렸던 무와탈리의 서자와, 그의 숙부이며 합법적인 후계자였던 하투실 3세가 그들이다. 결국 하투실 3세가 승리를 거 둔다. 우르히-테슈브는 변방으로 유배되어 람세스 18년에 이집트로 망명했다. 하투실 3세는 조카를 추방할 것을 요구했으나 람세스는 거절했다....다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인가? 람세스 의 군대는 실제로 전쟁 준비를 갖추었지만, 하투실 3세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막강하게 커지 는 데 압박감을 느껴 람세스와 평화협상을 했다. 그 동안 누비아는 얌전히 이집트의 감독을 받았다. 그러나 람세스 재위 20년, 람세스는 이 렘 지방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그곳에서 7000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국제조약 평화협상 끝에 람세스 2세와 하투실 3세는 람세스 21년에 은탁자 위에 국제 공식언어인 아카드어로 쓰여진 조약에 서명했다. 점토판 위의 복사본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에 보관 되었으며, 파피루스에 이집트어로 번역한 것도 피람세스의 고문서실에 보관되었다. 또 카르 나크 벽의 거대한 비문에도 새겨졌다. 두 강대국은 양국간에 전쟁을 영구히 중지하며 상호 양보한다는 데 동의했다. 즉, 이집트는 아무루를 포기하는 대신 우피 지방을 보존하며 페니 키아항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여 파라오의 밀사가 우가리트까지 난 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이 조약에는 놀랍게 현대적인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평화에 대한 약속과 형제애, 불가침과 상호협력 협정,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그것 이다.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그리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누구든지 조약을 어 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함으로써, 조약 을 보장해 주는 일종의 국제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파라오는 이처럼 신들의 아들이자 후 계자로서의 의무를 멋지게 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번영과 사치를 동반한 평화의 시대가 찾 아왔으며,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수십 년간 평온한 행복을 만끽했다. 람세스 2세와 하투실 3세의 딸의 결혼 조약을 맺은 후 두 나라 사이에는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두 왕은 서로 서신을 주 고받았고, 대황후들(네페르타리와 하티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다. 또 그들은 서로 우정어린 방문을 했고, 해가 지나면서 피람세스의 궁전에 남아 있던 우르히-테슈브 사 건 같은 갈등도 희미하게 잊혀져 갔다. 동맹관계가 너무나 확고해져서 두 왕은 혼인으로 동 맹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투실은 람세스에게 자신의 장녀를 왕 비로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파라오의 마을을 끌기 위해 시종과 가축과 말 등의 여러 지참금을 주기까지 했다. 동양의 보화와 함께 수많은 관리를 대동한 미탄니의 공주 길루케파를 맞아들였던 아멘호 테프 3세의 영상이, 기꺼이 공주를 맞아들이는 람세스에게 떠올랐을 것은 분명하다. 문화가 다른 두 대표단 사이에 다소 격렬한 논쟁과 불가피한 충돌이 있은 후, 약간 지체되긴 했지 만 위대한 순간이 다가왔다. 히타이트 공주에게 이집트의 순수한 기름을 붓는 것을 지켜보 던 하티 여신의 후원으로 드디어 혼례 행렬이 이어졌다. 약속했던 지참금과 호화로운 선물 이 그 뒤를 따랐다. 이집트 경호대는 미래의 천일야화의 공주를 맞이하러 나갔다. 그녀는 왕 의 궁전에서 마토르네페루레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다른 왕비들(이시노프레, 네페르타리와 그들의 딸, 공주이자 왕비인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후에 미-우르의 하렘에서 살게 되었다. 람세스 2세는 즉위 40년에 역시 많은 지참금을 준비한 하투실 3세의 차녀와 결혼했으나 새 결혼을 그다지 실효가 없었다. 질서와 정의를 보장하는 왕 군사력이든 경찰력이든 힘의 사용은 파라오의 세켐-힘의 영역에 속했다. 마트의 두 측면 인 사회의 평화와 경제적 번영이 세켐의 목적이었다. 왕은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 언제나 직접 개입했다. 그리하여 람 세스 2세는 즉위 30년경 그의 첫번째 희년의 시기에 미묘한 사건을 겪었다. 테베 좌안에 있 는 여러 신전의 창고를 맡고 있던 한 비양심적인 관리자가 신들과 선왕 숭배에 돌아가는 재 물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자기 몫으로 빼돌린 것이다! 훔친 물건들은 적지 않은 양이었다. 그 부정직한 관리가 집에 기록해 두었던 장부 덕분에, 아마포, 가죽 샌들, 다량의 구리, 지 금, 도구, 주물과 마차 30대와 장비들, 가축(30마리의 거북, 10마리의 염소, 30마리의 거위), 포도주 다섯 항아리, 곡물 2만 푸대가 적힌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는 (델타의) '변경 ' 의 목초지에 가축 책임자로 임명되자 테베에 부인과 자식을 떼어놓고 부끄러움 없이 부정거 래를 하게 했다. 그들의 술책을 알아차리고, 감독관 몰래 창고에 드나드는 여자들을 고소한 이는 하티아이란 평서기였다. 그 사건을 기록한 오스트라콘(석회 조각)에서는 그 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의 아내는 심문을 받고 자기 남편이 창고의 관리자였기 때문에 창고에 들어갈 수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다음에는 그 남편을 소환했다. 그는 자기가 훔쳐내어 아버지 집에 숨겼 던 물건들은 순찰병들에게 이미 빼앗겼다고 하면서, 그들이 1년 전부터 자신을 괴롭혀오던 터라 그들을 고소할 생각이었으며, 심지어 파라오에게 탄원할 작정을 했었다고 맹세하면서 태연자약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서류가 궁전으로 이전되고 람세스 2세는 이 중대 사건을 엄 격하게 다루어서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에게 재판을 하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결말은 우 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오스트라콘의 내용은 문학적인 목적에서 손질을 가한 듯하며, 여 기에서 멈추고 있다. 농업 조직과 토지의 분할 람세스 2세의 토지 정책에 관한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 시기 전후의 자료 를 가지고 그의 토지정책을 추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람세스 2세 시대의 비문 들을 통하여 그가 신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던 것처럼 자신의 조각상에게도 보조금을 지급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람세스 재위 24년의 것으로 여겨지는, 재무부 감독 관 파테헤시와 호리라는 이름의 아몬 사제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이미 그 시대에 아 몬의 영지가 대단한 수준의 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헤르도토스에 의하면 람세스 2세(그리스 작가는 세소스트리스라고 불렀다)는 충실한 관료 들과 병사들을 위하여 토지를 사각형으로 균등하게 나누어 분할했다. 그들은 이미 이집트의 수호신들을 위하여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디오도포스는 헤르도토스의 증언을 확증하면서 '세서스트리스'를 나르메르(메네스)에서 다리우스 1세로 이어지는 여섯 명의 입 법자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농경지의 조직과 분할은 초기 군주제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승리와 연결된 왕의 능력이 었다. 람세스 2세는 말할 나위 없이 그 능력을 취대로 발휘했으며, 아울러 왕의 기본적 특권 을 위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도덕과 정의를 존중하고, 풍족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 람세스 2세의 긴 통치기간동안, 사 회는 필연적으로 여건이 개선되고 문화적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람세스 2세의 세기 를 특별히 찬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이들은 장인, 법률가, 건축가, 의사, 서기관, 예술가들 이다. 제5장 삶과 영속성 데이르알메디나의 장인 공동체 테베의 강줄기 좌측에 자리를 잡고 시메산(대장례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산)의 산자락에 감싸듯이 안겨 있는 데이르알메디나는 가장 감동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제18왕조 초부 터 제20왕조 말까지(약 1000년의 절반 동안!) 노동자들과 예술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좁은 골짜기에 살면서 왕들의 계곡과 왕비들의 계곡의 무덤들을 파고 건축하고 장식했다. 왕실 재단 소속인 장인 공동체는 남부 비지르(람세스 2세때에는 파세르와 그의 후계자로 카이, 네페렌페트, 프라호테프가 있었다)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았다. 그곳에서 일하는 건축 가와 장식가 무리는 선박의 항해법을 모델 삼아 그 기법을 근간으로 조직되었다. '선장'이 '오른쪽 조'와 '왼쪽 조'(우현과 좌현)라고 불리는 두 개의 조를 지휘하고, 각 조는 조장의 명 령에 따라 행동했다. 극히 숙련된 노동자들과 대부분이 글을 아는 국가 최고 수준의 예술가 들이 마을 인구의 가장 활동적인 핵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때로는 하인 이나 개인 시종을 거느리기도 했다. 정부가 그들에게 하인(예를 들면 물을 긷는 사람 등)을 부리도록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두 명의 서기관이 장부를 기록하고 회계를 맡았으며, 문건 을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간수와 경찰은 가족의 평화를 켜주고 그 지역을 보호했다. 이 사람들은 사막지대에 외따로 떨어져 살면서 물과 자재와 상품 등 필요한 물품을 운반 하기 위해서 나귀를 기르기도 하고, 개인들이 소비하기 위해 작은 가축과 가금류를 키우기 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중요 물품들은 대개 현재 군림하고 있 는 파라오의 '백만 년의 신전'의 회계 담당이나 비지르를 통하여 공급받았다. 이들에게 지급 되는 급료는 곡물과 기름, 유지, 생선, 야채 등의 현물이었고, 람세스 2세 치하에서는 고기나 포도주가 특별히 분배되기도 했다. 마을의 여자들은 빵과 맥주를 만들었다. 장인과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중앙 행정 부가 일부를 떠맡았다. 중앙 행정부는 그들에게 직물과 의복, 신발, 땔감 등을 공급했다. 각 행정부처들에서도 무덤벽에 바를 석고나 템페라화에 사용되는 물감 같은, 작업에 필요한 재 료와 장비를 공급했다. 그러나 공동체는 공동체 내부에서 선출하는 성원들로 구성되는 평의회에 의해 행정적 통 제를 받으며 대단히 자율적으로 관리되었다. 평의회의 구성은 상황이나 사건의 경중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었다. 평의회는 일상적인 거래에 대한 간단한 분쟁에서부터 범죄나 불법행위 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사법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범죄에 대해서 평의회에서는 예심만을 할 수 있었으며, 판결은 비지르가 내렸다). 데이르알메디나의 주민들은 급료의 잉 여분을 값비싼 상품, 사치재, 가사 용역, 나아가서는 동료들의 장례도구나 장식품과 교환하 는 등의 중요한 경제적 활동에 참여했다. 발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비문들이나 파피리, 수많은 오스트라카 같은 매우 풍부한 유 물들 덕분에, 람세스 2세 치하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이 공동체의 가정과 가사, 종교, 직업, 그리고 사회 경제적 생활이 대단히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통치기간이 길었고 번영을 누렸기 때문에 급료가 증가하고 노동시간은 감소했다. 그리고 인원도 통치 초기에는 48명이 었는데 말기에 이르러서는 32명으로 감소했다. 67년 동안 람세스 2세와 그의 어머니, 자녀 들, 부인이 된 딸들, 부인들의 무덤이 건축되고 장식되었다. 그중 네페르타리의 아름다운 무 덤은 왕비들의 계곡의 보배이다. '지하 납골당(파 케르, 즉 건축중인 왕의 무덤)'의 장인들은 여가시간에 자신의 무덤을 만 드는 데 몰두했다.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동시대인이었던 센네젬과 이푸이, 파셰드의 무 덤이 바로 그 훌륭한 예이다. 이러한 묘지들은 대단히 많은데, 파괴된 것도 있고 혹은 기적 적으로 보존되어 멋진 장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의 법률생활 데이르알메디나의 장인들은 그들의 문서가 증명해 주고 있듯이 활발한 법률적 활동을 전 개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교육을 받은 이 세계에서는 아주 미미한 거래나 사소한 분쟁이 있을 때 에도 표면이 평평한 석회 조각이나 도자기 조각 위에 그것을 간결하게 기록했다. 값비싼 물 건이었던 파피루스는 경제적으로 중대한 일이거나, 입양과 유언처럼 엄숙한 일을 처리할 때 에만 사용되었다. 제국의 곳곳에서 유능한 판사와 수많은 서기관과 하급 관리들이 비지르의 통제를 받아가 면서 사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감독했다. 경제관료나 유복한 부르주아들의 법률적 사건으로 법원이 온통 논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네시의 유산 메스(혹은 모세)의 무덤의 잔해는 그 무덤이 자리하고 있던 멤피스의 원래 위치에 원형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중 몇몇 조각들은 오늘날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전시되어 있다. 이것 은 무덤 벽면에 유명한 소송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특별한 무덤이다! 그 사건은 1세기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새롭게 전개되었다. 융성했던 제18왕조 초기에 왕조의 창시자이며 힉소스를 추방한 아모시스왕은 자신의 충복 들과 용감한 전사들에게 포상으로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네페르라고 하는 사 람과, 특히 아바나의 아들인 아메스 사령관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이때 메스의 조상인 네 시도 밭과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는 이 토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었고, 그의 자식들은 법적 관례에 따라 토지를 분할하지 않고 함께 경작했다. 이러한 토지의 불분할 관례는 네시의 한 여자 후손이 법적 절차를 통해, 불분할 상속자들의 장녀로서 그녀가 토지를 관리할 권리가 있다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낼 날까지(호렘헤브 시대) 수세대 동안 효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그녀의 여동생이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다. 법원은 두 사람 각 자에게 각각의 몫을 나누어주고, 각자의 배당을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과세 명부에 기록하라 는 판결을 내리고 그를 위해 서기관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그러나 장녀는 자신의 권리를 지 키기 위해 반격에 나서서, 그녀의 아들인 서기관 후이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소송을 제기했 다. 그에 따라 후이는 죽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이가 죽고 나서 그의 미망인과 어린 아들 메스는 카이라고 하는 관리에게 부정 한 방법으로 도움을 받은 다른 공동 상속인들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토지의 소유권이 자신 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메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기 위해 과세대장을 증거로 제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카이와 아메네모페라고 불리는 사법관 사제와 함께 피람세 스 궁전의 비지르 앞에 나아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이름과 죽은 남편 후이의 이름은 과세대장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카이는 후이의 미망인이 주인 없이 비워놓은 영지를 빼앗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던 것이 다! 성인이 되어 멤피스 프타의 재무서기관이 된 메스는 카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그 를 대장을 날조한 혐의로 고소했다. 메스의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이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해 준 덕분에, 메스는 자신이 네시의 후손이며 아버지 후이가 평생동안 문제의 토지를 경작했 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람세스 2세 치하의 메피스 법원은 메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메스는 13아루레스(35헥타르)의 영지를 되찾았다. 그는 무덤에 인접한 작은 뜰의 벽에 그림을 새기 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재판의 행복한 결말을 서술하게 했다. 데이르알메디나의 라모세 서기관의 유산 투트메스 4세의 장례 신전의 재무 서기관으로서 완벽한 만족감을 주었던 라모세는 비지르 파세르의 주목을 받아 람세스 2세 재위 5년에 데이르알메디나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유능하고 사려 깊었던 라모세는 그 덕분에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그것을 주로 장례 신전 을 위해 쓰거나 경건한 물건을 사는 데 소비했다. 풍요의 신과 여신들에게도 기도와 예물을 그토록 많이 바쳤건만, 라모세와 부인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부부는 켄히케프섀프 라는 소년을 입양했고, 그는 자라서 라모세의 서기관직을 이어받았다. 켄히케프셰프는 양아버지인 라모세만큼 유능하고 사려가 깊지 못했다. 그는 교양이 없는 데다가 비지르인 카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왕의 무덤을 만드는 노동자와 예술가들 을 자신의 사적인 일을 위해 동원하는 불경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 준 유산을 늘려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다. 그는 60세까지는 안 된 50대의 나이에 나우나크테 라는 젊은 처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역시 자식은 없었다. 젊은 부인은 켄히케프 세프가 죽은 후 재혼을 했고, 얼마 후 (람세스 5세 시대)에 그녀도 늙어 개인 서류로 쓰는 대단히 긴 호화로운 파피루스(넓이가 43㎝에 길이가 192㎝나 되었다)에 유언을 남겼다. 그녀 는 유서를 통해 켄히케프셰프가 남긴 재산을 도합 8명인 자식들에게 분배했다. 그녀는 배은 망덕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어떤 자식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파라오가 통치하던 시대 내내, 그리고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때에도 여자들은 완전한 법 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나우나크테처럼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 었을 뿐만 아니라, 동산을 거래하고 하녀를 고용하고 도제를 육성하고 유서를 작성하고 법 정에 출두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유산을 관리하며 심지어는 마을 평의회의 판사자리에 앉 을 수도 있었다. 람세스 2세의 의사들 전문적인 분야를 시술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의사들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급료를 받는 공 무원들이었다. 그들 곁에서 세크메트 사자 여신의 성직자들도 의술과 수의술을 펼쳤다. 마술 과 의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처방전은 마술 주문을 외움으로써 그 효력을 발휘 했다. 그리하여 유명한 의학 파피루스에도 "아픈 사람의 어느 부위에 약을 바를 때 외우는 말. 여러 번 외울수록 약의 효력이 크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람세스 2세 치하에서도 제국의 모든 궁전들은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이집트의 의사와 마술사들을 찾았다. 그들의 명 성은 그들이 가진 지식뿐 아니라, 그들이 믿는 신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때때로 악령에 사로잡힌 듯한 절망적인 사람들도 그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위대한 의료 파피루스를 살펴보면 이집트의 의사들은 정확한 해 부학적 지식과 외과적인 방법을 능란하게 이용했고, 동물성, 식물성, 광물성 물질들의 성질 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어서, 그에 따라 진단을 내리고 치료하고 처방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은 인체기관의 각 기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파라오 예술의 그늘에 가린 개인 예술 기념물이 공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개개인의 사적인 조상과 회화는 그 시대의 개인 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신앙심은 보다 개인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사회가 전반적 으로 번영함에 따라 물질의 소비가 대형화되고 색채의 사용 또한 자극적인 방향으로 변했으 며, 보석들은 화려해지고 의복들은 통이 넓어지고 주름이 많아지는 등 복잡해졌다. 이처럼 왕의 기념물이 위압적인 위엄을 풍기는 가운데 개인적인 예술품들은 어떤 때는 장 중하게, 또 어떤 때는 바로크적이거나 다소 기교를 부린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작품의 질은 주인의 재정적 수준, 즉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수수한 소묘, 자연스러 우면서도 때로는 풍자적인 그림들은 그 윤곽의 신선함과 색채 선택의 정확성으로 인하여 우 리를 경탄시킨다. 문학 데이르알메디나에서 발굴된 유적 가운데에는 다량의 문학작품 복사본이 있다. 주민들은 소규모의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행하는 문학작품에서 뽑아낸 글귀와 ' 고 전'에서 발췌한 글을 외워서 석회 조각이나 큰 항아리 조각에 새기기도 했다. 고대의 작 품 가운데에는 교훈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교훈) (시누헤 이야기)와 같은 몇 편의 소설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문학작품들도 유행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설화와 전설을 다룬 (두 형제) (숙명 적인 왕자), 신화적이거나 우의적인 이야기와 일화를 소재로 한 (호루스와 세트의 다툼) (진실과 거짓의 이야기), 역사적인 성격의 소설인 (예언적 설화) (아포피와 세케넨레의 다툼) (조페의 점령) (시세네 장군)이 있었다. 당시의 목가적 서사시인 (카데시의 시)는 데이르알메디나의 주민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던 듯하다. 제 19왕조 때에는 대단히 사랑을 받은 문학 장르가 나타났다. 사랑의 시와 일종의 종교적 낭만주의 계열이 바로 그것으로, (나일강의 범람(하피)에 대한 찬가)가 큰 성공을 거두었 다. 라메세움, 문화의 중심지 람세스 2세 즉위 초에 건설된 라메세움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활동적인 '생명의 집'(일종의 대학)이 있었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글과 신이나 왕을 찬양하는 찬가와 고대 의식을 연구하고 복사하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람세스 2세가 인 정한 공식적인 종교의 테두리 내에서 단순화와 혼합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또한 그 들은 외래의 신을 받아들이고 신과 왕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를 발전시켰다. 장례문학도 다 양하게 나왔다. 예를 들면 (문들의 책)이 그런 종류이다. 게다가 (낮에 나오기 위한 책)이 나 (사자의 서) 같은 내세를 주제로 한 매우 중요한 책들이 널리 전파되었다. 의사와 마술사, 여러 분야의 서기관, 천문학자, 기하학자, 건축가, 지리학자, 그리고 예술가 들은 '생명의 집'에서 충실한 교육을 받았다. 백과전서파는 우주의 모든 요소를 새, 생선, 식 물, 도시, 신, 직책 등의 범주로 분류했다. 그들은 오늘날 오노마스티카라고 불리는 주해를 붙인 단어들의 목록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고대의 학과는 라메세움에서 그 시대를 풍미했던 보편적인 지식의 정신으로 잘 소 개되었음이 틀림없다. 보편주의와 세계주의는 람세스 2세 시대의 지적 활동의 특징이다. 라메세움에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데이르알메 디나의 예술가들이 라메세움에 와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눈부신 파라오 1213년경 최후의 희년을 맞기 하루 전날 밤 람세스 2세는 피람세스에서 사망했다. 그곳에 서 그의 시체는 70일 동안 방부처리를 받았다. 장례 행렬은 성대한 예식 속에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테베에 도착하여, 람세스는 영원한 거처에 안치되었다. 왕국의 모든 영역에서 람세스 2세 시대는 파라오의 역사에 최후의 절정을 이룩한 빛나는 시기였다. 이집트 제국의 힘, 그리고 정치, 종교, 문화적 명성, 왕중의 왕이며 신이기도 한 람세스 2세의 영광, 행정의 효율성, 신전과 그 주위의 화려함, 웅장하고 화려한 수많은 기념 물, 보편적인 평화와 번영 등, 이 모든 것을 그후의 파라오에게서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람세스 2세의 열세번째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메렌프타는 람세스 2세 사후 몇 년 동 안은 연속성을 유지했으나, 그후 냉혹한 멸망을 맞았다. 왕권 다툼으로 제19왕조는 멸망하고 왕국은 위엄 있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외침의 위협 속에 생활수준은 급격히 저하되고 내 부적으로는 부패했다. 마지막으로 빛을 발한 시대는 제20왕조의 두번째 파라오인 람세스 3 세의 치세기이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위대한 선왕인 람세스 2세를 모방하려고 했지만, 그 모델은 절정에 이른 태양처럼 눈부시고 비교할 수 없는 사실과 기억으로만 머물렀을 뿐 이다. 기록과 증언 종교문서 람세스 2세 시대의 신학은 제국의 신들과 오시리스 전설의 신들에 대한 단순화, 혼합주의, 보편주의로 특징 지워진다. 장례 문서도 다양했다. 예를 들면 왕들의 무덤에는 (문들의 책) 이 있었으며, (사자의 서)가 크게 유행했다. 풍요로운 경제상황이 태동시킨, 현재를 즐기라 는 철학은 (하프 연주자의 노래)에서도 표현되었다. 아몬에게 바치는 찬가 람세스 2세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기도문은 새로운 신학의 골자를 담고 있다. 존재 가 시작될 때 스스로 창조된 신 아몬은 지상의 군주인 자신의 아들 파라오의 유일한 왕권에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테베의 신은 성 삼위이체를 형성하기 위해 다른 두 명의 국가신과 손을 잡는다. 아몬은 그 신의 이름이며, 라는 얼굴이며, 프타는 몸이다. 40장 스스로 만들어진 자, 그리고 모습이 알려지지 않은 자, 완전한 외모가 신성한 상으로 나타나 조각상을 만들고 스스로 창조된다. 완전한 힘이 그의 마음에 생명을 주고 그는 알을 신비 속에 존재하게 하도록 자기의 몸에 씨앗을 더한다. 존재자는 존재하고 탄생 속에서 찬란히 빛나며 스스로를 완성하며 예술품을 창조하는 진정한 예술가이다. 50장 '우리는 당신을 경배한다.' '우리는' 당신의 위세를 '숭배한다.' 하늘의 원반의 빛은 당신의 얼굴에서 나온다. 태초의 신, 당신을 위해 나일강은 동굴에서 솟아난다. 땅은 당신에게 예배드리는 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게브가 증가시킨 산물은 유일자, 당신에게 속한다. 당신의 이름은 강하고 당신의 기운은 세다. 철산도 당신의 기운을 당할 수 없다. 돌진하여 단숨에 덮쳐 움켜잡는 날개를 펼친 매의 신. 포효하는 신비한 사자. 그는 자기 발톱에 떨어지는 것을 움켜쥔다. 거북은 도시를 위해, 사자는 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공격하는 자에게 꼬리로 대기를 휘젓는다. 그가 울부짖을 때 땅이 흔들리고 모든 것이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다. 그의 힘은 무진하여 견줄 자 아무도 없고, 강하여 그 탄생은 이집트의 아홉 신에게 완전하다. 바루크와 다우마스, (고대 이집트의 찬가와 기도문), 세르프 출판사, 파리, 1980년 (사자의 서) (사자의 서)(혹은 (낮에 나오기 위한 책))는 사자의 주변에 둔 파피루스 두루말이에 대 부분은 상형문자로 씌어진 주문집이다. 삽화가 그 주요 장들을 장식하고 있다. 이 책에는 개 인이 내세와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죽은 후 함정을 극복해 내는 방법들이 적혀 있 다. 자기 지배 낮에 올라가는 주문. 누우는 말했다. "하늘의 문은 나를 위해 열려 있다. 나를 위해 땅의 문이 열려 있다. 게브 의 빗장은 나를 위해 열려 있다. 나를 위해 하늘의 성이 열려 있다. 나를 해방한 자는 나를 지키는 자이다. 내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 팔을 땅으로 보낸 자는 나의 팔에 묶여 있 는 팔을 가진 이이다. 펠리칸의 입이 나를 위해 열렸다. 그것은 내가 낮으로,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가도록 해준다. 나는 내 마음을 지배하고 내 가슴을 지배하고 내 팔을 지배하고 내 다리와 입과 내 육신 전부를 지배한다. 나는 장례의 봉헌물과 물과 바람과 파도와 강과 해안의 주인이다. 나는 나 에게 대항하는 자들과 저승에서 나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지배한다. 나는 또한 지상에서 나 에게 대항하도록 명령을 받은 자들을 지배한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일으키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일으키고 왼쪽으로 몸을 돌린다. 나는 앉고 일어서며 먼지를 턴다. 나의 혀와 입은 나에게 사려 깊은 안내자이다. 이 책을 아는 자는 낮에 올라갈 수 있고 지상에서 산 자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그는 결 코 죽지 않으리라. 이것은 100만 번 진실이다." 변화 지상의 죽음의 경계를 벗어난 사자, 우주안에서 자신의 주인은 그가 원하는 대로-그가 적 절한 주문만 안다면-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의 어느 것으로라도 화할 수 있다. 인간은 이렇 게 마술에 의해 창조물과 일체가 될 수 있다. 연꽃의 형상을 취하는 주문. 누우는 말했다. "나는 광채에서 나와 라의 콧구멍에 속한 순수한 연꽃이다." "나는 호루스 를 위하여 그를 찾으러 내려간다. 나는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순수함이다." 심판 사자는 오시리스와 42명의 신성한 배석판사가 있는 심판실에 들어간다. 그의 심장은 진리 와 정의(마트)의 이름이 쓰인 상형문자의 기호와 함께 저울에 놓인다. 그리고 토트의 감시하 에 그것을 재고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거기에서도 정확한 주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영원한 의무 낮에 올라가는 주문. 서방에서 라를 경배하고 저승의 주민을 찬양하고 묘지에 있는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고 그가 걷고 발을 넓게 내디뎌 묘지에 들어가고 나가며 살아 있는 영혼으로서 변화를 완수하게 하라. 그는 말했다. "나는 저승에 오시리스의 모자, 네메스를 가지고 있는 오시리스의 후계자이 다. 그러므로 너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찬양받는 그의 아버지로 변한 나를 보라. 그 러므로 나를 바라보고 나로 인하여 기뻐하라. 나는 찬양을 받는다. 나는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 변화한다. 나의 바에게 길을 열어라. 너의 정당한 자리에 있어라. 내가 아름다운 서방에서 쉬는 것을 허락하라. 너희들 사이에 자리 하나가 나에게 주어졌다. 너의 길을 열어라! 너의 빗장을 풀 어라! 오 라여, 이 나라의 수호자여, 그대는 영혼의 수호자이기도 하며, 신들을 올바른 길로 인 도하는 자이다. 나는 그의 현관을 지키는 자이며 배를 끄는 자이다. 나는 신들을 자기 거처 에 배치하며 문을 감시하는 유일한 자이다. 나는 저승에 있는 그의 역에 머무는 자이다. 나 는 측량사들을 감독하는 측량사이다. 저승 지하의 경계는 나의 것이다. 나는 침묵의 왕국에 서 쉬는 자이다. 나는 나는 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신들 가운데 있는 영혼을 위하여 서방 에 봉헌물을 바친다. 나는 라의 후계자이다. 나는 신비한 페닉스이다. 나는 지하세계에 들어 가며 그 평화를 맛보는 자이며, 밖으로 나와서 누트에서 쉬는 자이다. 나는 위 하늘의 왕자 를 소유한 자이며 라를 따라서 아래 하늘을 다니는 자이다. 나의 봉헌물은 하늘에 있는 라의 평원에 있고 지상에 있는 수체트의 평원에 있다. 나는 라에게 속한 자들과 함께 지하 저승을 건너간다. 나는 투느처럼 심판한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보폭도 크게 걷는다. 나는 뛰며 비밀 소유물을 가진 자의 위엄속에서 그것을 듣는다. 나의 변화된 모습은 호루스와 세트이다. 나는 지하 저승의 신성한 봉헌물의 수장이며 영광스러운 사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자이다. 적을 무찌를 때 내 마음은 용맹스럽다. 오, 라의 면전에 있어 그의 영혼을 쫓아가는 영광 스러운 사자들이여, 그대들의 밧줄로 나를 끌어당기라. 그대들은 라를 인도하는 자들이며 위 하늘의 사람들을 이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서방의 꼭대기에 있는 성스러운 영이다." 클레르 랄루에트,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텍스트와 세속적인 텍스트) 제1권, (동양의 지식 ),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1984년 네페르호테프를 위한 노래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신앙은 연회나 잔치에서 표현되는 일종의 향수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하프 반주를 곁들여 대개 맹인인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현재를 즐 기라는 지상의 쾌락을 찬양하면서, 사자와 그의 행적을 떠올리며 그가 세상을 떠나 행복한 곳에 살 것을 기원했다. 첫 번째 노래 오시리스, 아몬의 사제, 정의의 목소리, 네페르호테프의 무덤에 있는 하프 연주자의 노래. 그는 말했다. "이 의로운 양반은 얼마나 곤한가! 그러나 행복한 운명이 다가왔다. 조상 때 부터 육체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자리를 채운다. 라는 새벽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툼 은 서산으로 기운다. 남자들은 잉태시키고 여자들은 수태한다. 콧구멍은 바람을 호흡한다. 그러나 땅이 다시 밝아올 무렵 이미 그들의 자식들은 지나가 무덤으로 간다. 하루를 행복하게 지내라. 마음이 온유한 너의 누이가 네 옆에 앉아 있는 동안 너의 콧구 멍에 향과 정제된 기름을 함께 놓아라. 너의 가슴에 연꽃 장식과 화환을 놓아라. 노래와 춤 이 네 앞에 있게 하고 근심을 뒤로 던져라. 고요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이 싫증 내지 않는 땅에 도착하는 날이 올 때까지 기쁨만을 기억하라. 하루를 행복하게 지내라, 네페르호테프, 정의의 목소리, 순결한 손을 가진 사제여. 나는 그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들었노라. 그들이 쌓아올린 건축은 무너지고 그들의 무 덤은 사라져, 신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이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같이 되었다.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은 돌에 넓은 균열이 가 잘려 나갔다.) 클레르 랄루에트, 앞의 책,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1984년 정치적 텍스트 람세스 2세 시대에 대한 공식자료는 풍부하고 다양하게 남아 있다. 외교 서신, 왕의 칙령, 사법 서류, 행정 회장, 공공 장부, 관리들의 자서전은 람세스 2세 치하의 이집트라는 문명화 되고 존경받는 국가를 알기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자료이다. 비지르의 의무 이 주목할 만한 자료는 파라오 다음으로 국가의 중요한 인물인 비지르, 즉 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규정하는 임무를 적어 놓은 글이다. 투트메스 3세(제 18왕조)의 비지르였던 레크미레 의 무덤 벽에는 비지르의 명예와 의무와 권한이 열거된 텍스트가 잘 보존되어 있다. 레크미레 비지르에게 주는 교훈 이 사회의 고위관료들이 우선 파라오의 집무실, 곧 생명-건강-힘에 들어온 후 새로이 임 명된 비지르 레크미레를 불러왔다. 파라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이제부터 이 집무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라의 온갖 대소사가 집무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비지르가 된 다는 것은 부드럽고 안락한 일이 아니라 때로는 쓸개즙과 같이 쓰디쓴 일이다. 비지르는 주인집의 금을 둘러싸고 있는 구리와 같다. 그는 고위관료나 판관 앞에서 고개 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 그는 아무 말이나 들어서도 안 된다. 주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남쪽과 북쪽에서, 그리고 나라 안 여기저기에서 원고들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그대는 모든 일을 법에 따라서 처리하며 모든 사람에게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 그들의 권리를 존중 하도록 주의하라. 판관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물과 바람이 그가 한 모든 일을 말하며, 그 의 행동을 모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판관이 처리한 일에 실수가 있을 경우에, 그것 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판결을 받은 자의 입을 통해 알려진다. 그는 대변인을 편들어서 "나는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원고의 질문에 대답할 때 규칙에 따라 답변하는 것이 판관의 안전한 처신이다. 그 렇게 하면 판결을 받은 자가 "나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멤피스 의 책에 들어 있는 "존경하는 왕께 법을 준수하는 비지르는"라고 하는 금언을 존중하도록 하라. 너도 비지르 케티에 대한 말, 즉 그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이해서 주변 사람을 해쳤다 는 따위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 케티의 주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고소했을 때 비지르는 그에 관해서 의사 표명을 했다고 생각하고 끝끝내 이를 거부했다. 이것은 직권남 용이었다. 그것은 불공평하며 신성모독이다. 모든 사람 앞에서 공평하게 재판하는 것이 비지 르이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동하는 한 그는 자기 자리에 머무를 것이다. 자기가 들은 대 로만 한다면 만사가 형통하다. 어느 때라도 법에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라. 오만한 자와 어울 리지 말라. 군주는 주제넘게 행동하는 자보다는 두려워하는 자를 더 좋아한다. 네가 지시 받 은 대로 행동하라. 그 일은 네가 완수하라고 네 앞에 놓여 있다. 클레르 랄루에트,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텍스트와 세속적인 텍스트) 제1권, (동양의 지식 ),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1984년 바켄콘수의 자서전 국가신 아몬 신전의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힘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증대하자, 그 대사 제는 공적 생활의 제1인자로 부상했다. 바켄콘수는 람세스 2세를 둘러싸고 있는 충성스럽고 사려 깊은 고위관리의 무리를 대표한다. 등의 기둥에 대하여 귀족과 왕자, 아몬의 대사제, 정의의 목소리 바켄콘수는 말한다. 나는 의롭고 공평하며, 주 인에게 유익한 사람이며, 신의 계획을 존중하며, 신의 길을 걸으며, 신전 안에서 훌륭하게 의식을 완수한다. 나는 주인의 완전한 신뢰를 즐기며, 아몬 신전의 과업을 지배하는 자이다. 오, 그대들, 판단을 할 수 있고 지상에 머물러 있으며 내가 나이 먹어 허약해진 후 100만 년이 흐르고 또 흐른 뒤 태어날 그대들, 가치를 인정하기에 자유로운 마음의 그대들, 그대들 모두에게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여러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상에 머물러 있던 동안 나의 사람됨을 알리려 한다. 생애와 업적 나는 자식들에게 청년기의 교육을 도와주고,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 으며, 그들을 비참한 지경에서 갱생시켰으며, 신전(아몬의 신전)에서 훌륭히 임무를 행하는 좋은 아버지였다. 나는 테베 앞에서 그의 몸에서 나온 아들, 상하 이집트의 왕 우세르마트레-세테펜레, 라 의 아들, 아몬의 사랑하는, 생명을 타고난 람세스를 이하는 일의 주인이었다. 나는 그를 왕 자에 등극시킨 아버지 아몬의 기념물을 만들었다. 나는 (왕의) 조수이며 아몬의 대사제 바켄 콘수, 정의의 목소리였다. 나는 주인의 일을 맡아보는 동안에 아몬의 신전에서 훌륭하게 처신했다. 나는 그를 위해 아몬 신전의 윗문에 '아몬의 사랑하는 람세스는 기도를 듣는 자'라고 불리는 신전을 지었다. 나는 하늘에 비할 만큼 아름다운 화강암으로 만든 오벨리스크를 울타리 안에 세웠다. 그 앞 에는 테베의 정면에 돌로 지어 올린 건물이 한 동 있었으며, 정원은 나무로 가득했다. 나는 아름다움이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두 개의 금문을 만들었다. 나는 아주 높다란 돛대를 깎아 만들어, 그것을 신전의 신성한 앞뜰에 세웠다. 나는 또한 아몬과 무트와 콘수를 위하여 강으로 나가기 위해 커다란 배도 깎아 만들었다. 귀족, 왕자, 아몬의 대사제, 바켄콘수. 클레르 랄루에트, 앞의 책,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1984년 이집트-히타이트 조약 아시라아의 위협을 받자,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했던 두 나라,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은 끝이 났다. 람세스 21년에 람세스 2세 와 하투실 3세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은 지금까지 알려진 첫 번째 국가 대 국가의 조약이 라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국제법에 대한 첫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티 사절의 도착 왕의 사절이 자그마한 은탁자를 들고 도착했다. 그것은 생명-건강-힘의 파라오에게 건네 주기 위해 하티의 왕 하투실이 보낸 것으로, 상하 이집트의 왕, 우세르마트레-세테펜레, 라 의 아들, 매일 그의 아버지 라처럼 영원하고 무한하게 생명을 부여받은 아몬의 사랑하는 람 세스에게 평화를 청하기 위해서이다. 조항 -하티의 왕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집트에서 탈취하기 위해 이집트 국경을 넘는 것이 영원히 금지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세르마트레-세테펜레는 영원토록 하 티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탈취하기 위해 하티의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 다. 나의 아버지, 하티의 무와탈리 대왕 통치기에 맺은 조약과 같이, 나 하티의 대왕 수필룰리 우마는 여기서 맺은 조약을 지킬 것이다. 이집트의 대왕, 아몬의 사랑하는 람세스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이날부터 우리는 함께 그것을 지켜 나갈 것이며, 정확한 구상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외부의 적이 이집트의 대왕 우세르마트레-세테펜레의 나라에 쳐들어 오면, 이집트의 대 왕은 하티의 대왕에게 '그들과 싸울 증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면 하티 의 대왕은 람세스의 적들을 쳐부술 것이다. 하티의 대왕이 직접 오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람세스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보병이나 기병을 보내야 한다. -혹은 아몬의 사랑하는 람세스가 자기의 신하나 그에게 죄를 지은 자에게 진노할 경우, 그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떠나야 한다. 그때 하티의 대왕은 그 사람이 누구든 그들을 쳐부 수기 위해 그와 함께 행동해야 하고 그들에게 분노해야 한다. -이집트의 대왕, 아몬이 사랑하는 람세스의 나라 사람들이 하티의 대왕에게 망명할 경우 에 하티는 절대로 그들의 망명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그들을 이집트의 대왕, 우세르마트레- 세테펜레, 그들의 주인인 생명-건강-힘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혹은 알지 못하는 한두 사람이 이집트에서 도망쳐, 하티에 망명을 요청하고 하티의 신민 이 되려 한다면, 그들이 하티에 정착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될 것이며, 이집트의 대왕, 아몬의 사랑하는 람세스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혹은 알지 못하는 한두 사람이 하티에서 도망쳐, 이집트에 망명을 요청하고 이집트의 신 민이 되려 한다면, 이집트의 대왕, 우세르마트레-세테펜레는 그들이 정착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거이며, 하티의 대왕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보증 -하티의 대왕이 이집트의 대왕, 아몬의 사랑하는 람세스와 체결한 조약은 은탁자에 기록 한다. 하티의 신 1000명과 이집트의 신 1000명이 나와 더불어 이 말들에 대한 증인이다. -은탁자 위에 있는 말들은 하티와 이집트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는 자는 하티의 신 1000명과 이집트의 신 1000명이 그의 집 과 나라와 신하를 멸망시킬 것이다. 은탁자 위의 말을 지키고 무시하지 않는 자는 하티 백성이든지 이집트 백성이든지 가리지 않고 이집트의 1000명의 신과 함께 하티의 1000명의 신이 그를 번영케 하며, 그가 가족과 자식과 신하와 함께 살도록 할 것이다. 클레르 랄루에트, 앞의 책,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1984년 세속 문학 중기 제국에 유행했던 몇몇 이야기들은 라메시드 시대에도 변하지 않고 유행했다. 예를 들어 (시누헤 이야기)는 학생이나 교양인들에 의해 꾸준히 필사되었다. 문학은 사랑의 시, 자연에 대한 사랑, 아름다운 감정의 찬미, 미래에 대한 탐구 등의 일종의 낭만주의가 주조를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또한 람세스 2세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도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 감을 주었다. 히타이트 공주와 왕의 호화로운 결혼을 파라오 시대 말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 다. 사랑의 시 부유한 귀족계급 내에서 개화한 섬세한 감정은 제19왕조하에서 사랑의 노래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 사랑의 시 가운데 성서의 아가에 있는 내용과 흡사한 것도 있 다. 해리스 500파피루스 (시 1) .....내가 그대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을 어디에 주려 하는가? 그대는 나를 껴앉고 싶지 않은가?....쾌락을? 그러나 그대가 내 허리를 애무하려고 나를 찾는다면, 그것은 나의.... 그대는 먹으러 가려는가? 그대는 배의 노예인가? 그대는 옷 때문에 가려는가? 나는 이불보를 가지고 있는데. 그대는 맥주 때문에 가려는가? 나는 그대에게 내 가슴을 내미는데. 그 재원이 그대에게 넘친다. 나를 껴앉는 하루가 수백만 평의 땅보다 더 이로우리! (시 2) 그대의 사랑은 나의 몸과 섞인다. 물에 섞이는.....것처럼. 송진에 넣은 약처럼, 술과....의 혼합처럼. (시 3) 그대는 누이를 보러 올 (수 있는가?) 전쟁터를 달리는 말처럼, 덤불 위로 날아오르는 매처럼. 하늘이 그의 사랑을 주었기에.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시 4) (누이의) 못의 풀은 황홀하여라. 누이의 입은 연꽃 봉오리 같고, 그녀의 가슴은 만드라고라 같고, 그녀의 두 팔은.... 이마는 서양삼나무로 만든 덫과 같고 나는 상오리여라. 나의 다리는 미끼에 사로잡혀 그녀의 머리카락 안에 있고 서양삼나무의 덫에 걸렸구나. (시 5) 나의 마음은 그대의 사랑 앞에 기품을 유지할 수 없구나. 내 즐거운 작은 이리! 그대의 황홀함을 나는 버릴 수 없어라. 내가 두들겨 맞아서 늪에서 살도록 쫓겨날지라도, 지팡이와 몽둥이로 코르 지방까지 쫓겨날지라도. 종려나무 방망이로 쿠시 지방까지 쫓겨날지라도. 지팡이로 물을 댄 지방까지 쫓겨날지라도, 회초리로 황무지로 쫓겨날지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리라! 베르나르 마티유, (고대 이집트의 사랑의 시), IFAO, 카이로, 1996년 나일강의 범람에 대한 찬가 땅을 비옥하게 하는 홍수가 하피의 이름으로 신성시되었다. 제19왕조에서 만들어진 목가 적인 대작은 이 자연환경을 찬양하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홍수는 전설적인 풍 요를 가져다주었다. 1.안녕, 홍수여! 땅에서 솟아나/ 이집트를 살게 하는 자. 종들이 그를 찬미한 후에, 자기의 모습, 낮의 어둠을 감추는 자. 모든 (어린 가축)이 살도록 라가 창조한 평원을 물에 잠기게 하는 자. 물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방을 적시는 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이슬. 게브의 사랑하는 자, 네프리를 데려오고, 프타의 일을 (번성하게 하는 자.) 2.물고기들의 주인. 그대는 철새를 남쪽으로 데려온다. 그것은 뜨거운 바람이 불 때 돌아오는 새가 아니다. 보리를 창조하고/ 밀을 싹트게 하는 자. 신전에 풍족하게 공급하는 자. 홍수가 늦게 찾아올 때 코는 막히고, 모든 이들이 가난해진다. (신들에게 바치는 떡)을/ 줄(일 때) 수백만 명이 죽어간다. 나라 전체가 고통을 받도록 탐욕스럽게 만드는 자. 아이나 어른이나 방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인다.) 홍수가 다가올 때, 크눔이 홍수를 창조할 때를. 홍수가 나면 나라가 기뻐 날뛰며, 모두가 즐거워한다. (모든 입이) 웃으며, 모든 잇속이 드러난다.... 8.(켜져라, 홍수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봉헌물을 바치도록, (사람들)이 (그대에게) 소를 잡아 바치도록, (사람들이 그대에게) 많은 제물을 바치도록, (사람들)이 (그대를 위해 새들을) 살찌게 하도록. (홍수를 위해 사막에서/ 사자를 잡아라.) 사람들은 홍수에게 좋은 것으로 보상한다. 사람들은 신에게 봉헌물을 바쳐야 한다. (홍수가 한 것과 같이) 향과 정제된 기름, 긴 뿔을 가진 소, 짧은 뿔을 가진 소, 그리고 가금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 샘의 구멍에서, 홍수에서 나오는 것은 부유함이다! (그의 이름은 지하세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들은 그것을 누설하면 안된다. D. 반 데어 플라스, (나일강의 범람에 대한 찬가) 제1권, 네덜란드 연구소 부어 헤트 나비 제, 오스텐, 레이데, 1986년 직업에 대한 풍자 이 글은 라메시드 시대에 신전의 '생명의 집'에 있는 견습서기들이 자주 베꼈던 것으로, 산만한고 유순하지 못한 생도들의 눈에 서기직의 장점을 칭송하기 위해 쓰여졌다. 이것은 차루 출신 두아우프의 아들 케티가 페피라는 아들을 위해 지은 교육의 기초이다. 그때 그는 아들을 서기학교에 넣어 궁전의 고위관료들의 자제들과 함께 지내게 하려고 강을 따라 거주지로 내려가고 있었다. 직업의 선택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매맞는 사람을 보았다. 그렇다. 나는 매맞는 사람을 보았다. 그러니 책에 마음을 두도록 하여라. 나는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보았다. 그러므로 책을 능가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책은 물위의 배와 같다. 케미트의 책을 끝까지 읽어봐 라. '거주지의 모든 자리가 서기의 것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명령을 집행하는 자는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나는 서기라는 직책 만한 직책 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네가 어머니보다도 책을 더 사랑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책 속의 아름다움이 네 얼굴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서기는 직업 중에 서 가장 위대한 것이다. 이 나라에 그만한 것은 없다. 서기는 비록 그가 어린아이라 할 지라 도 사람들은 그에게 절을 한다. 사람들은 그를 보내 전갈을 전하며, 그는 돌아와 '하인옷' 을 입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조각가나 세공사를 급파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파피루스를 캐는 사람은 서기를 위해, 줄기를 자르기 위해 늪지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힘에 부치게 일하며, 모기와 파리가 못살게 굴어서 그를 녹초로 만들고 지치게 한다. 그리고 상관에게 자유로운 직업은 서기밖에 없다. 서기는 자기가 바로 상관이다. 네가 책 을 안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네 눈앞에 다른 직업이 있어서는 안된다. 클레르 랄루에트, 전게서 벤트레치의 비석 쿠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비석에는 오랫동안 상상력을 자극한 사건인 람세스 2세와 마토르네페루레의 결혼에 고무된 설화가 페르시아 시대에 새겨졌다. 이 이야기에서는 바크 탄 왕이 이집트의 의사이며 유명한 사위인 람세스 2세에게 자기 막내딸의 병을 치료해 달라 고 부탁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잇다. 먼 궁전에 도착한 의사는 젊은 처녀가 '테베에서-지배 하는-콘수' 신만이 쫓아낼 수 있는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조각상의 바크탄 여행과 체류 왕은 테베에서-지배하는-콘수 신을 신성한 커다란 배로 데려오며, 또 5척의 운송 배, 마 차, 여러 마리의 말이 좌우에서 수행해 오도록 명령했다. 이 신은 1년 5개월 만에 바크탄에 도착했다. 바크탄의 왕이 병정들과 신하를 데리고 (테베에서) 지배하는-콘수 신 앞에 나아 갔다. 그는 엎드려서 "우시마레-세테팬레 왕의 명령으로 당신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 하여 오셨군요."라고 말했다. 이 신은 벤트레치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바크탄 왕의 딸에게 마술 액체를 먹였다. 그 녀는 즉시 나았다. 그녀 안에 있었던 영은 테베에서-지배하는 -콘수 신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령을 쫓아내는 위대한 신이시여, 평안하게 어서 오십시오! 바크탄은 당신의 도시 이며, 백성은 당신의 종이며, 나도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당신 을 안심시켜 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 나와 바크탄 왕과 함께 축제를 열도록 명령해 주십시 오." 이 신은 "바크탄 왕이 이 영에게 큰 제물을 바치게 하라."고 자신의 사제에게 신호를 보냈다. 테베에서-지배하는-콘수 신과 바크탄 왕의 영 앞에 큰 제물을 바쳤고, 그들을 기려 축제 를 열게 했다. 바크탄 왕은 바크탄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대단히 즐거워했다. G.르페브르, (이집트 소설과 설화) (바크탄의 공주), 매조뇌브 출판사, 파리 1988년 람세스에 대한 전설 오시만디아스, 세소스트리스, 혹은 람세스라고 불리는 대 파라오는 고대부터 사라지지 않 는 전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직계후계자들은 그의 시대를 황금기로 생각했다. 결코 다 시 오지 않을 축복받은 시대, 많은 기념물로 찬미되고 있는 그 시대는 축복된 영광의 후광 으로 둘러싸인 이 영웅을 훌륭한 파라오로 만들었다. 위대한 세소스트리스 헤로도토스는 역사적 오류와 고유명사의 오류로 위대한 람세스를 세소스트리스라고 불렀 다. 이러한 오류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역사의 아버지'는 일화와 우화적 감각을 가지 고 법률적인 관찰과 현실적, 역사적 사실들의 관계에 접근했다. 그러므로 이 왕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이제 세소스트리스라고 하는, 그들 다음에 즉 위한 왕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사제들은 이 왕이 전함으로 아라비아만을 출발하여 홍해안 을 정복한 다음, 배가 더 들어갈 수 없는 얕은 바다에 이를 때까지 원정을 계속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이집트로 돌아오는 길에 대군을 일으켜 대륙을 횡단하면서 지나는 모든 민족을 정복했다고 한다. 귀환길에 그가 정복한 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을 앞서가던 세소스트리스는 펠루스의 다프 네에 도착했다. 사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이집트를 맡겨 다스리게 했던 형제가 그와 그의 아들을 자기 거처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형제는 집 주위에 나무를 쌓아 올리 고 불을 질렀다. 세소스트리스는 이 사실을 알자마자 아내와 상의했다(그는 원정 때마다 그 녀를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장작불 위에 다리를 놓듯 여섯 자녀들 중 둘을 눕히고, 두 자 식의 몸을 밟고 걸어서 불길을 빠져나가라고 조언했다. 세소스트리스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래서 두 자녀는 죽고, 세소스트리스는 다른 자녀와 함께 탈출했다. 세소스트리스는 이집트에 돌아와 자기 형제에게 복수를 했다. 그후 자기가 데려온 많은 포로들에게 일을 시켰다. 돌을 날라오고 헤파이스토스 신전에 큰 암괴를 끌어오는 일을 한 것이 바로 그들이다. 또한 강제노역으로 오늘날과 같은 운하를 판 것도 그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에 말과 수레가 돌아다니던 이 나라에서 이 두 가지 운송수단을 앗아가 버렸다. 세소스트리스는 에티오피아를 지배했던 유일한 왕이다. 헤파이스토스 신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상은 그의 통치를 기념하고 있다. 높이가 30쿠데나 되는 두 석상은 그와 그의 부인 을 나타내며, 높이가 각각 20쿠데 되는 네 석상은 그의 자녀들을 나타낸다. 훨씬 후에 헤파 이스토스의 사제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가 그 석상들 앞에 황제의 석상을 세우는 것을 막았다. 사제는 황제에게 황제의 무훈이 이집트인 세소스트리스의 무훈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황제에 못지 않은 정복을 했고 스키타이인에게도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다리 우스가 하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황제는 황제의 무훈을 능가하는 왕 의 기념물 앞에 황제의 조각상을 세울 자격이 없다고 사제는 말했다. 다리우스는 이러한 주 장에 굴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헤로도토스, (조사), 제 1권에서 제4권 아부심벨의 거상들 룩소르 신전 서쪽의 오벨리스크를 파리로 옮기는 작업을 맡았던 기사, 아폴리네르르바는 이 모험에 대해 훌륭한 글을 썼다. 다음의 발췌문은 이프삼불(아부심벨)에 있는 람세스 2세 의 거상들에 감동하여 쓴 글이다. 나는 이브림을 떠나 특별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이틀간 여행했다. 아랍인과 나누 는 대화, 그들의 노래와 춤, 강 양안의 모습, 토착민의 관습에 나는 그간의 이집트 체류로 이미 익숙해졌고, 그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지겨운 생각이 들었 으냐, 어쨌든 나는 이프삼불에 다가갔다. 곧 바위를 파들어간 두 신전이 나의 주의를 끌었 다. 풀이라고는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는 사막지대의 강가에 수직으로 서 있는 산 속에 건축 된 이 두 기념물의 운명은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영원한 불모의 땅이 된 산들이 멀리 펼 쳐져 있다. 산들 사이는 산들의 표면과 마찬가지로 바람에 의해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로 가 득 차 있다. 이 모래바람은 두 번이나 대신전의 입구를 막았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나 는 산을 돌아 정면으로 갔다. 정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압도적인 광경이 완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입구의 좌우에 앉아 있는 네 개의 거상을 바라보면서 황홀경에 빠졌 다. 그것들은 람세스를 조각한 것이다. 네 거상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것들은 파낸 바위가 하나이듯이 그들도 동일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들의 모습 은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완벽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표현방식에는 생동감이 있었다. 조용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위대한 세소스트리스는 영광 속에서 휴식하며 만족감에 잠긴 듯했 다. 각각의 얼굴에는 그의 영혼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위대하고 유익한 일을 했노라고.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며, 나는 그들로 인해 행복했노라고. A. 르바,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를 파리로 이전한 역사), 카릴리안-괴위리 and Vr. 달몽 편역, 파리, 1839년 고고학적 현실 라메세움은 람세스 2세의 무덤이며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네페르타리의 무덤이었고, 최근에는 그의 아들의 무덤이었다. 이 중요한 장소에서 진행중인 고고학 연구는 람세스 2세 시대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중요한 복구작업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테베 이집트학 연구소는 몇 년 전부터 람세스 2세 시대에 만들어진 두 개의 중요한 유적을 발굴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것은 J. F. 샹폴리옹 이래로 라메세움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신전과, 유명한 왕들의 계곡에 있는 KV. 7 무덤이다. 이 연구는 프랑스 쪽 에서는 몽펠리에 1대학(URA 1064)과 루브르 박물관이, 이집트 쪽에서는 고대 이집트 연구 및 문헌 센터와 고미술품 고등심의회가 참가하여 프랑스-이집트 협동체제를 구축하며 아주 긴밀하게 이루어졌다. 연구진은 이들 외에도 인류 문화유산의 목록에 올라 있는 두 장소를 복원해 보존하려는, 유네스코의 작업을 위한 쌍무 과학협력과 문화예술 보호의 혜택을 입었 다. '이집트의 위대한 태양'의 영원한 기념물 왕을 예배하는 신전인 라메세움은 람세스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완벽한 기념관이 다. 돌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지식의 보고는 지난 세기에 이집트학 학자들이 답사를 했다고 는 하지만, 그에 따르는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터였다. 서부 테베의 프랑스 고고 학 대표단 감독인 크리스티앙 르불랑이 최근 이곳에서 행한 발굴작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메세움을 처음으로 문헌에 기록한 사람은 B.C. 1세기에 이집트를 여행한 그리스 사학자 인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와 아마도 에카테 다브데르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라메세움은 ' 오 시만디아스의 무덤'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테베의 서안에 세워져 있었다. 라메세움에 대한 일람표 작성과 연구는 수년 전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본 상태에 있으며, 현장에서 이루어진 기초적인 과학적 연구에는 훼손된 유적의 복구가 추 가되었다. 기원 후 초기까지만 해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기념물이 지금에 와서 폐허가 된 데에는 갖가지 원인이 있다. 혹독한 기후와 지각구조의 변동뿐 아니라, 수세기를 거치면서 기념물을 채석장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행동도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사암과 석회암과 화강암을 잘라다 팔고 벽과 기둥을 허물어 파괴했으며, 때로는 더 위세 있 는 기념물의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유적을 통째 가까운 장소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사필귀정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에 의해 밝혀 진 바에 의하면, 람세스 자신도 자신의 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선왕들의 신전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고 하니까 말이다.... ....변방에서, 특히 북쪽에서 진행된 발굴작업에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그것은 울타리 벽의 중요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신전의 건축 일람표는 연구가 진행되어 앞으로 몇 년 후면 라메세움, 즉 람세스 2세의 '백만 년 신전'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백 만 년 신전'이란 고대 이집트에서는 영원한 기념물이란 뜻의 수사학적 표현으로서, 신격화된 형 태의 파라오 자신과 결합된 판테온의 위대한 신들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다. '백만 년 신전'의 부활 전체 면적이 5헥타르에 이르는 상황에서 문서와 고고학 현장을 직접 대조한다는 것은 그 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리학은 때때로 건축가뿐 아니라 이집트학 학자에게도 대단히 유용 하게 이용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명과 초상화 자료에 언급되어 있는, 지금은 사라진 건물의 불확실한 기반을 탐색하기 이해 광대한 답사를 시도했을 때 즉각 입증되었다. 전기 측정을 통해 작성된 고유 저항의 지도에 의해 신전의 기념문과 과거의 첫번째 탑문 앞에 있 던 부두의 둑에 해당될지도 모르는 구조물이 묻혀 있다는 가설이 오늘날 한층 더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거대한 조상술에 대해 이루어진 조사를 통해서도 신전의 첫 번째 뜰에 서 있던 람세스 2 세의 유명한 거상을 연구할 수 있었다.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가 증언하는 것처럼 B.C. 1 세기만 해도 잘 보존되어 있던 이 화강암의 거인은 '왕들의 태양'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었 으 며, 사람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왕의 이 석화된 상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지진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엎어 지고 잘려 나간 것이다. 이것도 레이저 기술 덕택에 입체적으로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학 자들은 땅에서 발굴해낸 수많은 조각들을 식별하고 기록함으로써, 단상까지 포함한 높이가 15m 이상(이집트의 30쿠데)에 이르는 이 거상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 시할 수 있었다. 왕의 어머니인 투이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조상의 파편들도 연구되 어 그리스 사학자의 기록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라메세움을 복구하고 개발하기 위해 마련한 중요한 프로그램도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훼손된 기념물의 사라진 부분을 복구해낼 것이다. 즉, 보 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신전의 지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 게 해줄 것이다. 묘지로 변한 창고 발굴작업의 성과로 얻은 오스트라카와 파피루스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라메세움이 세속화되고 그곳에 배속된 성직자들에 의해 회복불능의 상태로 약탈당하기 전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삼면에 부속실과 신전 창고가 있는, 거친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이 건축물은 파라오 시대 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커다란 경제시설이다. 라메세움은 제 22왕조 때부터 테베의 성직 자들이 이 시설을 묘지로 변경하여 사용하게 함으로써, 그곳에서 문화적 활동이 공식적으로 중단된 후에 라메세움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또 다른 역사적 단면을 엿보게 해준다. 특히 오소르콘 1세와 타켈로트 2세 시대에는 왕의 가족들이 그곳에 매장되었고, 무덤 예 배소의 잔해가 남아 있어서 그곳에서 장례예배가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소르콘 1세 의 증손녀 사토르케넴 같은 왕가의 일원도 그곳에 묘지를 가지고 있었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 2세의 무덤 신왕국의 왕들은 장례예배 신전, 이른바 그들의 무덤을 신전에서 분리시키기로 했다. 그리 하여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막에 왕실의 무덤을 팠다. 억수처럼 강한 비가 몰고 온 진흙더미로 가득 찬 람세스 2세의 무덤은 부분적으로만 청소가 되었다. 발굴작업은 1993년부터 이루어졌지만, 하부구조가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진행 속도가 매우 느렸다. 무덤의 부속실과 묘실의 일부에서 굴착해낸 흙이 제거되었다. 그곳에서 람세스 2세의 석 관과 장례용 항아리 집합소의 부분들이 발견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것들은 도굴꾼들에 의 해 부서져 있어서 이집트 학자들은 복잡한 조각 맞추기를 해야 했다. 미라와 유물함과 덮개에는 (문들의 책)의 분할에 따라 온통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었 고, 덮개에는 왕의 와상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런던의 소언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아버지 세티 1세의 석관처럼 람세스 2세의 석관도 유색안료로 상감되어 있다. 갖가지 파편에서 이러한 안료로 그린 선을 찾아볼 수 있다. 유적들을 자세히 조사해본 결과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장례용 항아리 집합소는 한 개의 흰 대리석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이 집합소에는 원통형의 구명이 네 개 있는데, 그 안에는 왕의 내장을 담고 잇는, 작은 금으로 된 관이 들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람세스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덮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별견되리 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묘비는 이를 꽂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각형의 작은 구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처럼 설치된 예가 확인된 다른 왕의 무덤으로는 아메노피스 3세의 무덤이 유일하다. 람세스 2세 의 무덤이 갖는 독특성은 이 구멍이 반쯤의 깊이에서 석회의 뚜껑문으로 닫혀 있다는 점이 다. 이 뚜껑문의 가장자리는 구멍 둘레의 돌에 걸쳐져 있다. 위쪽의 절반에 표면이 예배소로 보호되어 있는 장례용 항아리 집합소가 들어 있었으므로 뚜껑문으로 가려진 아래쪽에도 다 른 물건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그 면적과 부피는 금세기 초 이래 루브르 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는 푸른빛의 멋진 항아리 네 개를 거기에 놓는다 해도 충분한 크기이다. 이 항아리에는 왕을 미라로 만드는 데 사용한 헝겊이 들어 있었으며, 고대에 무덤이 도굴된 후 에 옮겨진 것이 확실하며, 아마도 그곳이 원래의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 공동묘지를 발굴한 결과 출토된, 나무와 구리로 만든 여러 개의 람세스 2세의 차 우아브티스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지난번 답사에서 수집한 표본 과 같지 않다. 불행하게도 조각난 작은 상은 묘실에서 나온 것인데, 그 뛰어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궁전의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푸른 기가 도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이 상은 노모스의 관을 쓴 미라의 형상을 한 람세스 2세를 표현한 것으로서, 얼굴 모습과 관의 윤곽은 검은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따로 발견된 두 발은 떨어져 있으나 장부와 장붓구멍의 체계에 의해 조각상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크리스티앙 르블랑, ('이집트의 위대한 태양'의 영원한 기념물), (성서의 세계), 1997년 1-2월 네페르타리의 무덤 왕비들의 계곡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이집트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하는 네 페르타리의 석실 분묘가 자리하고 있다. 심각한 보존상의 문제로 인하여 아름다운 그림들이 손상된 무덤은 1950년대에 공중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86년에 가서야 고대 이집트 문명협 회와 게티 보호연구소가 훼손된 프레스코 벽화를 복구하고 안정시키기 위한 첫 작업을 실시 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 연구팀에 의해 여러 분야에 걸쳐 심도 높은 연구가 이루어진 후 1988년 2월에 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선 유약을 보강했으며, 그 다음에는 벽에서 떨어진 그림조각들을 하나하나 짜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표만을 때투성이로 만든 먼지를 비 롯한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과거에 서투르게 가필하거나 보완했던 부분을 원상태로 복원시 키는, 프레스코를 씻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점에서 파라오 시대의 것과 흡사한 혼합물을 사용했다. 네페르타리의 석실 분묘는 라메시드 시대에 여러 차례의 폭우를 겪는 동안 크게 손상되었 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훼손이 가속화된 것은 시아파렐리의 무덤이 발견된 후부터이다. 이 무덤이 발견되면서 석실 분묘 주위의 미기후(매우 좁은 환격 내의 기후)는 엉망이 되었다. 1970년과 1983년 사이에 여러 편의 과학보고서가 출판된 후, 1986년 9월에 고대 이집트 문명협회와 게티 보호 연구소의 주도로 벽 표면의 20% 정도에 물감을 안정시키기 위해 첫 번째 긴급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벽면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임시로 얇은 면 조각과 일 본 종이 1만여 조각 이상을 프레스코 위에 붙였다. 1987년 고대 이집트 문명협회와 게티 보 호 연구소는 첫 단계에서 시험해본 방법에 따라 회화를 전체적으로 처리할 것을 계획하는 협정을 맺었다. 꼭 필요한 경우로 작업을 국한시키면서 사라진 부분을 덧칠하고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현대 기술의 발전 덕분에 심층적인 생물학적 분석뿐 아니라, 지질 학적이며 결정적인 분석을 이용하여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말고도 비관입적 방법 (정보처리와 다중 스펙트럼 분석)에 의한 비색정량 연구가 첨가되었다. 무덤 내부에 미기후 적 조건은 지속적으로 통제시킴으로써 유지되었다. 무덤을 판 장소의 지질을 보다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 다시 말해 환경이 훼손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그 지역 전체에 대해 지질학적 연구와 광천학적 연구도 실시했다. 이집트와 외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여러 전공 분야의 연구팀-지식인, 복원자, 고고학자, 사학자, 기술자-은 다른 부분에서 과거의 불안정한 유약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는 염분의 결정과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환경적 조건을 분석, 조정하는 작업을 했다. 네페르타리 석실 분묘의 구조작업 제 2단계는 이탈리아의 복원자인 파울로 모라의 지도하 에 1988년 2월에 시작되었다. 떨어진 조각을 다시 붙이고 기름 램프의 그을음이나 몰지각한 여행객들의 손자국 같은 더러운 때와 먼지를 제거하여 그림을 세척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가필한 부분을 제거하고 파라오 시대의 것과 동일한 혼합물로 대체했다. 이 작업은 1992년 완전히 복구되어 마무리되었으나, 이집트 정부는 공중에 대한 폐관을 연장했다. 너무 많은 수의 방문객들이 들어가면 미기후적 조건, 특히 공기의 습도와 기온을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복구작업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에 무덤은 제한된 수의 방문객들에게만 개관되었다. 그러나 그림을 최고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 사용한 방법과 같은 해결책, 다시 말해 왕비들의 계곡이 아닌 다른 장소에 똑같은 복사품을 만드는 계획을 고려중인 듯하다. (가상 고고학) 아르토 출판사, 파리, 1996년 드러난 KV.5 무덤 람세스 2세의 아들들을 위해 왕들의 계곡에 지어놓은 무덤에서 흙을 제거하는 공사를 하 는 동안 고고학자들은 주목할 만한 유적을 발굴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도와 방들이 복 잡다단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막힌 문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켄트 위크 교수는 이 발견을 재검토하고 그 고고학적 결과를 규명했다. 왕들의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람세스 2세의 여러 아들의 묘소로 사용되었던 KV.5 무덤이 1987년 카이로의 미국 대학에 의해 테베 지도 제작사업 도중에 재발견되었다. 연말로 계획이 잡힌 보존작업에 대비하여 1월과 2월에 우리는 그때까지 조사한 곳보다 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장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방인 1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잇 는 중앙 홀은 몇 개의 기둥에 균열이 나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균열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기까지는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손도 대지 않는 편이 현명하게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곳에서 지체하지 않고, 홍수가 운반해온 퇴적물과 무너져 내린 천장에 의해 막혀 있는, 방 안쪽의 문을 열어보기로 결정했다.(큰 비로 인한 이러한 홍수는 이삼백 년마다 한 번씩 왕들의 계곡에 밀어닥쳤고, 우리는 앞의 두 방에 쌓여 있는 퇴적물을 층층 이 관찰한 결과 최소한 열 번의 홍수의 흔적을 확인했다.) 1920년에 무덤을 방문하여 KV.5의 두 방에 대한 지도를 유일하게 작성했던 제임스 버튼 도 이 문에 대해 특별한 기록을 덧붙였다. 그는 한 보고서에서 이문이 다주식 중앙 홀의 마 룻바닥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방들과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만약에 그 말이 사실 이라면, 기둥에 균열이 간 것은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마룻바닥이 부실해진 탓이며, 피해가 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보강물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설은 곧 증명이 되었다. 우리는 기어서 문을 넘은 후 무덤의 처음 두방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잔해더미와 마주 쳤다. 잔해를 치우면서 우리는 오래 전에 천장에서 떨어진 커다란 덩어리가 홍수가 운반해 온 퇴적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두 개의 방에서 는 2.1m의 천장에 파편이 2m 높이로 쌓여 있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1.4m의 파편만이 쌓여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고, 우리가 작은 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놀랍게도 절벽면 안에 수십미터에 걸쳐 축조되어 있는 복도와 방의 거대한 조직망이었음이 밝혀졌다. 우리가 왕들의 계곡에서 이미 중요한 무덤으로 분류해 놓았던 KV.5가 이제는 이 집트 전체에서 가장 큰 무덤이 되는 순간이었다. 19세기에 제임스 버튼과 다른 탐험가들은 KV.5 무덤의 첫 방들을 보았지만(이상하게도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장식된 벽과 점토 기물을 언급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다), 이 문을 넘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문과 연결된 58개의 방과 복도는 3000년 이상 동안 누구에 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KV.5의 첫 방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들도 조각한 부조와 우아한 회화로 장식되어 있었으 며, 그 바닥은 깨진 도자기 조각, 보석의 파편, 가구, 석관, 장례용 항아리, 미라 시체, 오스 트라카 등의 장례 기물이 도굴된 흔적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잔해로 가득 찬 컴컴한 복도를 작은 횃불에서 뿜어 나오는 빛에만 의지하여 따라 기어들어 가다가 아름답게 조각하여 채색한 오시리스 신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이 조각상은 높이가 1.5m로, 다주식 중앙 홀로 통하는 문에서 30m 가량 떨어진 안쪽의 벽감 안에 있었 다. 이 조각상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30m 길이의 횡단 복도 두 개가 시작되고 있었고, 수십 개의 방이 그 측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각 복도가 끝나가는 곳에서는 무덤의 아래층으 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계단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 층에도 많은 방이 있으리라고 생각 된다. KV.5 무덤의 유일한 지도는 지금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이 람세스 2세의 52명의 아들을 위한 가족 영묘라면, 위층에 있는 많은 방은 아마도 각 아들에게 바치는 봉헌물을 받는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아래층에 있는 방들은 묘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 므로 석관의 파편과 미라들은 아래층에서 나온 것일 터이며, 과거에 도굴자들이 노획물을 갖고 급히 도주하면서 위층의 복도에 떨어뜨린 것들일 것이다. KV.5 무덤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지 도와 기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켄트 위크스, (이집트 고고학), (드러난 KV.5 무덤), 이집트 탐험협회보, 런던, 1995년 100여 개의 방이 확인되다 왕들의 계곡에서 켄트 위크스와 카이로의 미국 대학팀은 KV.5 무덤을 계속 발굴했고, 이 제 무덤에서 확인된 방의 숫자는 무려 116개로 증가했다. 서 있는 남성의 상을 표현한 부조 들은 16개의 기둥이 있는 중앙 홀에서 가파르게 내려가는, 무덤으로 돌아가는 복도의 벽에 서 발견했다. 역시 급경사가 진 두 번째 복도의 발굴작업을 통해서는 단편적인 부조의 장식 을 발견했다. 입구의 두 방 가운데 두 번째 방에서 땅속으로 파내려간 4m 길이의 깊은 구 멍에는 무덤의 첫 번째 임자, 그러니까 람세스 2세의 아들이었던 듯한 네명의 시체가 있었 다. DNA 검사를 해보면 그들의 관계가 부자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다 주식 석실 분묘가 단지 기념비로서가 아니라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점은 오늘날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발굴시기 : 1996-1997년, (이집트 고고학), 이집트 탐험협회보, 런던, 1997년 인터넷상의 유적 켄트 위크스 교수팀에 의해 진행된 람세스 2세의 아들들의 무덤 발굴작업의 진전과 그 지 도상의 발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www.vkv5.com). 항상 작동되는 TMP(테베의 도표화 설계)의 유적은 대화형 도표와 조작 가능한 3차원의 모형 제 작, 사진합성 덕분에 신입자에게 고고학자를 대신해 주며 접근 불가능한 이 유적을 발견하 게 해준다. 연대기 선왕조 시대 : B.C. 4000년대 후반 '창시자' 나르메르-메니(메네스) : B.C. 3200년경 아키이케기(제1-제2왕조) : B.C. 3200-2700년경 고왕국(제3-제6왕조) : B.C. 2700-2200년경 제1중간기(제1-제11왕조 초) : B.C. 2200-2065년경 중왕국(제11왕조 말-제12왕조) : B.C. 2065-1797년경 제2중간기(제13-제17왕조) : B.C. 1797-1543년경 (제 15-제16왕조는 힉소스 왕조이며, 제17왕조는 힉소스인과 싸운 테베 왕가의 왕조이다) 신왕국(제18-제20왕조) : B.C. 1543-1078년경 제18왕조 : B.C. 1543-1292년경(인용된 주요왕 : 아모시스 1543-1518년경; 하체프수트 1479-1457년경; 투트메스 3세 1479-1424년경; 아멘호테프 2세 1424-1398년경; 아멘호테프 3세 1387-1348년경;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1348-1331년경; 투탄카멘과 아이 1327-?; 호렘헤브 ?-1292년경) 라메시드 시대(제 19왕조와 제 20왕조) : B.C. 1292-1078년경 제19왕조 : B.C. 1292-1186년경 람세스 1세 : B.C. 1292-1291년경 세티 1세 : B.C. 1291-1279년경 람세스 2세 : B.C. 1279-1212년경 메렌프타 : B.C. 1212-1202년경 제19왕조말 (세티 2세, 아멘메스, 시프타, 타우세르트) : B.C. 1201-1188년경 제20왕조 : B.C. 1188-1078년경 (람세스 3세 1185-1153년경) 제3중간기(제21-제23왕조) : B.C. 1078-748년경 말기시대(제24-제25왕조 ) : B.C.748-332년경 마케도니아의 점령 : B.C. 332년 람세스 2세 시기에 대한 자세한 연대기 : K.A. Kichen, RamsesⅡ, le pharaon tromphant, tableaux des pp. 328-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