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의 탄생 지은이: 피에르 레베크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서경혜 크노소스궁전은 강대하면서도 평화지향적인 민족이 이룩한 웅장한 문화와 정신적 균형감, 그리고 전성기의 모습을 웅변하고 있다. 크노소스는 밝고 화려하며 건강한 생활과 건전한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집트 문화의 영향과 단순하고도 지극히 인간적 인 에트루리아 문화의 충동적인 성향, 그리고 공동체 조직에서 잉카인이 보여 준 뛰어난 재 능과 지혜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폐허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떤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명확하게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지역이 과거 여러 세기 동안 평화를 누렸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크노소스인은 현실지향적이었다. 그들은 현세에 충실 했고, 사후세계라는 관념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선조숭배를 필요 이상으로 과장함으로써 스 스로를 구속하거나 질식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적은 현실에서 최대한의 효용을 찾았으 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순간에서 인생의 정수를 추출해 냈다. B.C. 2000년경 최초의 그리스인이 그리스 본토로 들어오면서 기존의 사회구조가 뒤집혔 다. 그리고 견고한 수비망을 갖춘 궁전과 호화로운 분묘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건축물은 새 로 전개되는 궁전문명의 세련미와 이 문명의 놀라운 발전을 확연히 보여 준다. 궁전문명은 이후 미케네 왕조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제1장 화려한 청동기시대 그리스에 농경과 목축이 소개된 것은 B.C. 6000년경으로 동양보다 상당히 뒤늦은 것이었 다. 이 신석기시대 기술은 소아시아에서 들어온 이주민이 전해 준 것으로 그리스 반도에 큰 어려움 없이 수용되었다. 테살리아 지방의 비옥한 평야 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조직적인 체 계를 갖추고 한때 막강한 힘을 누렸으리라 여겨지는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원형 성 벽으로 둘러싸인 디미니(Dimini) 성곽 안에는 모습을 제대로 갖춘 궁전이 세워졌다. 이는 군 주체제의 초기형태를 엿보게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케네의 화려한 궁전시대를 예고한다. 한 편, 청동 제련기술이 전파된 것은 B.C. 2600년 전후로, 이점에서도 그리스는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 청동 제련기술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리스는 동지중해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땅에서는 구리의 산출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주석은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가 지 금속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련기술의 발전은 농경기술과 전쟁무기의 발달을 가져 왔다. 공동체사회는 청동기시대 초기(B.C. 2600-2000)부터 형성되는데 이 시기의 도시유적이 아르골리스만 연안 레르네에서 발굴되었다. 이곳은 교역이 매우 활발하던 지역으로,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처치한 머리가 100개 달린 무시무시한 바다뱀 히드라(Hydra) 가 살던 곳이다. 유적에서 발굴되는 가옥은 '머리핀 모양'이라 일컫는 선사시대 가옥형태에 머무르고 있고,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성곽은 이웃의 공격을 막으려 했던 그들의 굳은 의지 를 잘 보여 준다. 유적의 중심부에는 궁전이 우뚝 서 있으며, 여기에서는 강력한 권력을 소 유하는 왕이 성곽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군림했을 것이다. 고대 청동기시대의 그리스사회에서는 아직 참다운 그리스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진정 한 의미에서의 그리스인이 등장한 것은 B.C. 2000년 무렵이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 인도-유럽족의 일족은 카르파티아 지방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유럽의 스텝 지역 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도-유럽족은 유럽 전체와 일부 아시아 의 주민으로 정착하였다. 새로운 그리스인의 도래는 전혀 평화로운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들 은 궁전을 파괴하고 분묘를 도굴하였으며 화려한 수장품도 모두 약탈하였다. 이로써 그리스 반도 전역은 야만상태가 되었고, 이러한 혼란은 이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카 이아인의 이주 초기에는 이들의 야만적인 손이 크레타까지 장악하지 못했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아카이아인의 물결이 닿지 않은 크레타에는 B.C. 2000년경부터 궁전이 건축되기 시작하였 다. 평화가 지속되고 생산증대와 인구증가가 이루어지자, 전제군주제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크레타 궁전은 전제군주제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러나 B.C. 1600년대에 발생한 거대한 자연재해-산토린 화산의 폭발, 그리고 그에 따른 해일과 지진이 아닐까 추정된다-로 초기에 세운 궁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뒤 그들은 더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지어 이 민족의 활기 넘치는 황금기를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B.C. 15세기 중엽에는 바다를 건너 침입해 오는 아카이아인과 싸워야 했고 또다시 막강한 지진을 겪어야 했다. 크 레타섬은 아카이아인이 침입하기 전 수백 년 동안 크노소스 왕의 통치 아래 뭉쳐 있었다. 크노소스의 왕은 미노스(minos)라고 불렀는데, 훗날 아카이아인은 미노스라는 칭호를 고유 명사인 줄 잘못 알고 부와 권력의 상징인 '미노스왕' 전설을 만들어 냈다. 초기 크레타 문명이 남긴 프레스코화들은 크노소스의 군주를 왕이면서 제사장으로 그리고 있다. 더 나아가 군주는 신격을 가진 존재로서 백성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정당 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크레타의 왕권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그리스 신화에서는 미노스왕이 원하기만 하면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와 대화할 수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미노스의 궁전은 정치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을 조종하는 생산중심지이기도 했다. 창고에는 곡식과 생활용품이 그득했고, 인근의 작업장에서는 솜씨 좋은 장인들이 사치품을 만들어 냈 다. 또한 이 모든 공간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역으로 기능했다. 크레타의 전제군주를 이 집트의 파라오나 메소포타미아의 군주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차이점에도 이 왕국들은 신권정치, 절대군주제, 경제활동에 대한 왕실의 통제 등 몇 가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크레타의 백성들은 비록 노예는 아니었지만 예속된 신분이었으며 왕의 권력에 절대 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관료들은 생산과 무역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교묘히 배분했다. 강력한 관료체제의 바탕에는 그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자로 기록을 남겼던 서 기관(필경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체 구조에서 크레타 왕국과 비교될 수 있는 나라들은 소아시아의 연안국들과 시리아, 팔레스타인 연안에 위치했던 소왕국들이다. 빛과 색의 미궁 크레타의 왕들은 막강한 전함과 상선을 동원하여 에게해 전역에 걸친 대해상왕국을 건설 하기에 이르렀다. 날렵한 그들의 선박은 동지중해를 누비면서 그리스 본토와 여러 섬들, 그 리고 아시아와 이집트까지 도자기와 귀금속을 수출했고 귀향길에 오를 때는 광물을 싣고 돌 아왔다. 그리하여 미노아(Minoa)라 부르는 유적지들이 그들의 해상로를 따라 도처에 늘어 갔다. 이같은 넓은 상업망을 바탕으로 일종의 제국주의가 성립되었는데, 그 위력은 특히 키 클라데스 군도에서 막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크레타 문자로 기록된 점토판들이 발견된 펠로 폰네소스 반도 남부 지방도 그들의 세력권 안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문명 에서 유달리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그들이 남긴 예술품이다. 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변화 무쌍한 형태, 그리고 오색이 아롱져 있는 것 같은 색채감각은 가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 하다. 또한 미노스의 궁전에는 뛰어난 기술로 제작된 위생시설이 설비되어 있다. 그러나 무 엇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크레타인만이 가진 독창적인 설계법-비유적인 의미에서의 '미궁' 이라는 단어를 널리 퍼뜨리게 한 바로 그 설계법-이다. 그들의 고유한 건축방식은 궁전을 빛으로 가득 차게 하였다. 또한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제작된 프레스코화, 특히 '라 파리지 엔(la Parisienne)'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의 진수이다. 테라(오늘날의 산토린)섬 의 궁전에서도 이와 버금가는 화려한 색채와 감수성이 충만한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들은 놀라우리만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반도의 아카이아인은 거대한 궁전을 건축한다. 본토의 발전은 크레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었다. B.C. 2000년경 그리스 반도에 들어 온 아카이아인은 곧 원주민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정복자의 언어인 그리스어가 초기 서판에 서부터 등장한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소규모 촌락공동체는 교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크레타인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견고하게 수비된 대궁 전의 축조이다. 그리스인은 이 궁전을 짓는 데 사용된 엄청난 주춧돌을 쌓아 올린 것은 외 눈 거인 키클로페스의 업적이라 믿었다. 최초로 미케네에 궁전이 등장한 시기는 B.C. 17세 기라고 추정된다. B.C. 1580년 이후, 즉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이후의 발전은 특히 괄목할 만하다. 그리스 남부 지방, 특히 펠로폰네소스, 아티카, 보이오티아, 그리고 테살리 지방을 각각 나누어 통치하던 여러 군주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미케네의 왕이 주도 권을 쥐고 있던 이 시대를 미케네 시대라고도 부른다. 튼튼한 수비시설을 갖춘 그리스 궁전 들(지붕은 이중경사로 되어 있다)은 미노스의 궁전과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도자기나 금속공예품 같은 여러 가지 유물에서는 크레타 예술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한 세련미와 섬세함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그리스 궁전의 벽화들은 미노스 궁전의 프레스 코화와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림의 주제는 크게 달라서 사냥이나 전쟁 장면이 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리스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를 보면 그리스 신화 속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하는 비극, 예를 들어 혈족 사이의 암투나 갈등이 언뜻 떠오른다. 크레 타와 미케네 문화의 비교는 매우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주제이다. 미케네 군주제는 크레 타의 조공군주제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서기관의 활동 크레타와 마찬가지로 미케네에서도 서기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이 남긴 자료를 해독하고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미케네의 서판은 물품명세서, 계산서 따 위였다.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 서사적이거나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서판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호머가 남긴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를 담은 것도 발견되지 않았 다. 그렇다고 해서 서판의 내용이 역사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필 로스에서 발견된 서판들은 미케네 군주제도에 대한 완벽한 기록을 전해 주고 있다. 이에 따 르면 왕은 와낙스(wanax)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와낙스는 결코 그리스어가 아니라는 점이(따라서 인도-유럽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재미있다. 서판 에 따르면 왕은 전제군주였으며 동시에 신이었고, 모든 경제활동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역할 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은 총리대신 또는 총사령관쯤 되는 한 명의 '민중의 지도자 (lawagetas)'와 여러 명의 고관, 대신, 행정관의 보좌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조직은 미노스가 다스리던 크레타의 군주제나 동양의 군주제와 그 성격이 흡사하다. 왕국은 여러 행정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각 주는 몇 개 촌락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촌락공동체는 촌장인 바실레우스(basileus)가 다스렸다. 미케네 서판은 미케네 왕국은 봉건체제의 성격을 전혀 띠 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공국가의 성격을 지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미테네 서판에서는 또한 그들의 생산활동의 근간이 되는 경작지의 개발상태도 엿볼 수 있 다. 그들은 경작지를 여러 등급으로 확실히 구분해 놓고 있었다. 왕실 보좌관들은 각자의 영 토를 가졌으며 왕 자신도 직속영지(temenos)를 소유했다. 신들을 위해서는 성지가 할당되어 제식비용과 제관들의 보수를 마련하는 데 쓰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개인소유지가 조금 있기 는 했지만 대체로 '공동경작지'의 형태가 지배적이었다. 토지는 왕실 행정관에 의해 damo(이후 국민을 뜻하는 demos가 됨)라는 집회에서 씨족장에게 정기적으로 분배되었다. 이러한 토지구조는 조공군주국 체제와 전적으로 합치한다.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미케네인의 문자는 수세기를 지나면서도 문 자의 형태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셈족은 중기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자음조직 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알파벳을 고안했는데, 그리스 문자는 여전히 음절 조직체계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리스 문자의 후진성을 대변해 주며, 셈족이 지녔던 창조적 능력이 그 리스인에게는 결핍되었음을 보여 준다. 두번째로는 그리스 전제군주의 왕권은 서기관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점이다. 서기관들은 절대권력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물량의 수효를 기록하는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자는 문맹인 백성을 착취할 수 있는 효과적 통치도구였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궁전을 통해 강화된 왕권과 관료체제를 읽을 수 있다. 뛰어난 수비시설을 갖춘 성곽도시 미케네는 페르세우스가 세웠다고 전한다. 성곽이 축조 되고 난 뒤에도 미케네성은 계속 증축되었다. 최초의 궁전(B.C. 15세기)에 B.C. 14세기와 B.C. 13세기 중엽 두 번에 걸쳐 북벽의 돌출부를 방어하는 성벽과 웅장한 출입문(암사자문), 비밀문이 만들어졌다. 또한 B.C. 13세기 말에는 동쪽의 보루와 페르세이아라는 깊은 샘으로 통하는 두 개의 비밀통로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구조는 티린스에서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성곽은 B.C. 13세기 말에 증축되었는데, 비상시에 주민과 가축을 수용하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성곽의 중심부에 있는 궁전은 삼분할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삼분할방식이란 세 개의 방 을 나란히 이어 배치한 양식으로 후대 궁전건축의 표준형이 되었다. 여기에는 현관으로 사 용되던 두 개의 방(대개 한 방에는 외국인을 위한 욕탕이 있다)과 안쪽에 커다란 방이 하나 있다. 그리고 이 큰 방은 천장의 작은 탑에서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이러한 양식으로 만들 어진 방을 메가론(megaron)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이중으로 경사진 지붕과 고정되어 있는 화로로 특징지어지는 북부형 건축양식을 가리킨다(크레타 왕궁은 납작한 지붕과 이동형 화 로가 특징이다). 메가론의 기원은 그리스보다는 오히려 아나톨리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티린스궁에서도 이와 비슷한 두 개의 메가라(megara)가 발견되었다. 한편 필로스 궁전에도 메가라가 있는데 큰 방에는 음악의 신을 그린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화려한 분묘에서도 강화된 왕권과 관료체제의 확립을 확인할 수 있다. 망령세계는 현실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매장양식도 다양하게 변천해 갔다. 특히 왕족 의 매장은 호화롭게 변했다. 낮은 바닥의 우물형 묘지와 상자꼴의 석분을 이어서 얇게 돋을 새김한 비석이나 석판을 묘 앞에 세우고 묘혈도 갖춘 분묘가 등장했다. 미케네 성곽 내에 있는 원형묘지는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이중 원형묘지 중 아래쪽 묘지는 시기적으로 조금 더 앞서나, 위쪽 묘지의 일부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위쪽 묘지는 죽은 사람과 맺고 있 는 성스러운 인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원형담 안쪽에 세워졌다. 두 개의 원형묘지에 는 모두 호사스러운 부장품이 들어 있다. 그 다음에는 바위 안을 뚫고 연결통로를 만들어 제작한 석실형 분묘와 아치형의 분묘가 등장하는데, B.C. 14세기에 조성된 '아트레우스의 보 물'이라는 분묘는 특히 아름답다. 완벽하게 방어된 성곽에는 군주의 권위를 나타내는 많은 보석과 금은세공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중에서도 미케네성은 천연의 요새로서, 그리스 신화 에도 등장한다. 이 성은 모든 형태의 폭력과 부도덕, 그리고 난행이 아트리드가-제우스의 종손-인물들 속에 구현될 때 그 무대가 되었다. 미케네성의 궁전과 분묘에서 발굴된 유물들 은 크레타풍의 섬세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강건함과 섬세함을 함께 갖춘 아카이아인 은 곧 머나먼 미지의 지평선으로 눈을 돌린다. 아카이아인은 작은 그리스를 외부로 확장시킨다. 당시 이집트 파라오는 그리스 군주를 '푸른 대양(지중해) 위의 섬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라 불렀고 그들과 진귀한 물품을 서로 교역하고 있었다. 한편 후기 청동기시대에 아나톨 리아 중부에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히타이트인의 문헌에도 아키야와(Akhkhiyawa:아카이 아인의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이 말은 펠레폰네소스 반도 또는 소아시아, 어쩌면 로도스섬 을 가리켰을 것이다. 호머가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단어를 사용했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아카이아인이다. 이 말의 어원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중기 청동기에서 후기 청동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리스에 들어가 헬라드(Hellade:고대 그리스 지방의 통칭)의 인 구를 증가시켰던 이민들까지 포함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어쨌든 히타이트 제국의 대왕이 아 카이아 왕을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의 여러 섬과 아시아 해안지방의 정복 아카이아인은 먼저 그리스 연안의 섬을 무대로 세력확장을 시도했다. 막강한 기세로 세력 을 뻗치던 그들도 세력확장 초기에는 미노스의 세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 지 않아 크레타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크레타는 동지중해 지리적 요충지인 동시에, 베 르베르인(북아프리카 지방 주민)의 여러 나라를 비롯해서 동양의 전제군주국들과 교역했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아카이아인의 크레타 정복은 그리스 반도에 미노스풍의 영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 았다. 특히 종교적으로 미케네는 미노스의 크레타 문명과 그리스의 도시국가 사이를 잇는 통로가 되었다. 반면, 미케네화된 크레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선문자 B로 기록된 고문서들이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되었는데, 아카이아인의 진출과 관련해서는, 아카 이아 출신의 왕이 크레타를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만 적혀 있을 뿐이다. 짐작되는 것은 크레 타가 아카이아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으며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아카이아인의 그리스 연안 의 섬 진출은 군사력에 의존한 것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아나톨리아의 해안지방에도 진출했 을 것이다. 그리하여 밀레토스와 콜로폰은 아카이아의 도시가 되었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지방에도 미케네의 기지가 여럿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역들은 사실 동양 대제국들 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동양의 지배자는 마음만 먹었다면 아카이아의 식민개척자들을 손 쉽게 바다로 내몰았을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아카이아인의 동방진출은 동양 각국의 동의 아래 가능했으리라 믿어도 무방할 것이다. 동양인은 아카이아인의 식민구역을 쌍방에게 모 두 유익한 일종의 만남의 장소, 또는 교역의 장소라고 여겼을 것이다. 세계의 변경까지 상업망을 확장시킨다. 아카이아 왕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상업적인 면에서 잘 드러난다. 미 케네인은 사절단과 교역품을 싣고 그때까지 알려졌던 세계의 경계선인-그들의 문화가 이미 많이 이식되어 있던-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제국과 루위 제국(소아시아 남 부에 위치)을 훨씬 넘어 미지의 땅까지 항해하였다. 미케네인의 수출영역을 가늠하게 해주 는 유물인 미케네산 도자기는 리비아(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서부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또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그리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많이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피 렌체의 도로공사 현장에서도 발견되었다. 더욱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엘브(이탈리아 북 서쪽의 섬)라는 지명이 선문자 B 서판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케네인의 항해로 위에 있던 사르데냐와 타렌토만은 미케네인이 정착하여 정기적으로 교역을 하던 장소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현지 지배자의 묵인 아래 사치품을 공급하였다. 미케네인이 멀리 프랑스 해안이나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세워 볼 수 있으나, 스페인 동남부에서 발견된 미케네 도자기의 모방품을 제외하고는 가설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만한 유물이 없는 실정이다. 한편, 미케네 도자기는 리비아까지 수출되었는데, 해안지방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 한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북부 지방에서 미케네의 영향은 비교적 크지 않았다. 그리스 북동부에 있는 트라키아 왕 국과 교역했고,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흑해 서부 연안과 동부 연안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들은 이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흑해 동부 연안의 콜키스에서 발견된 보석세공품은 의심의 여지없이 미케네 전통에 따라 제작되었다. 그러나 흑해 남부 연안에 대한 미케네의 영향은 비교적 제 한되어 있었다. 미케네인의 해양진출은 보석 같은 사치품의 무역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보석 류로 만든 제품은 왕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상품이었다. 또한 식품 과 구리, 주석 따위 광물도 주요 교역품이었다. 미케네인은 청동생산에 필수원료인 주석을 확보하기 위해 소아시아나 이탈리아로 나섰다. 훗날 그들의 항해로는 청동길이라는 이름으 로 부르게 되었다. 베르베르인과 주로 교역하고 있던 레바논과 칼키디케 반도에서 많이 산 출되고 있던 질 좋은 목재도 그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교역품이었다. 영웅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는 현실세계와 공상세계를 넘나드는 영웅들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페르세 우스와 벨레로폰의 이야기, 헤라클레스와 야손의 무용담이 그것이다. 헤라클레스와 야손의 활약상은 특히 돋보인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지리적으로도 웅장한 스케일을 보여 준 다. 서쪽 지방의 끝에서 흑해 깊숙한 콜키스까지가 그들의 무대이다. 헤라클레스는 자기의 사촌이며 미케네의 왕인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열두 가지 과업을 부여받는다. 헤라클레스의 모험은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 시작되어 멀리 대양 한가운데에 있는 엘리테아섬까지 이어진 다. 여기서 몸에 세 쌍의 팔다리가 달린 게리오네스의 황소를 잡아 오는 일이었다. 다음에 그의 모험은 아프리카로 이어지는데, 그곳에서 헤스페리데스 자매가 지키는 황금 사과나무 열매를 가지고 와야 했다. 한마디로 헤라클레스의 신화는 아카이아 개척자와 정복자의 모험 담이라고 할 수 있다. 야손은 아카이아 왕국의 권력과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파시스강까지 원정했다. 그는 메데아 공주의 가슴에 사랑을 불러일으켜 공주의 도움으 로 황금양털을 지키는 용의 이빨에서 생겨난 군사들을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한다. 헤라클 레스도 야손과 마찬가지로 여신이나 요정, 또는 여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신화는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신화는 대담무쌍하게 지중해와 흑해를 누비면서 무역시장을 넓히는 진취적인 아카이아 뱃사람들에 대한 비유이다. 미노스가 시칠리아에서 겪은 모험담도 기록 되어 있는데, 그는 공주의 계략에 빠져 목욕통에서 질식해 죽었다. 모험, 사랑, 죽음 등이 얽히고설켜 이루어 내는 이야기들은 아카이아인의 방랑과 무역활동을 신화로 꾸민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실상과 허구 사랑과 폭력으로 점철된 이야기라면 트로이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난 뒤 500 여 년이 지난 후에 호머는 이를 서사시로 만들어 생생히 전해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발 단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든지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있던 이들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 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고학자들은 문제의 장소에서 엄청난 파괴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연대상으로 트로이 전쟁과 같은 시기(B.C. 1200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 화나 서사시로 전하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헬레네라는 인물 은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헬레네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로, 그녀는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산 증인이다. 서사시의 주제인 비 련은 '일리아드'의 첫 부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나서 광분하는 장면이다. 설령 서사시가 흥미 위주의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고 해 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트로이 성벽의 발치에서 10 년 동안이나 아카이아인을 묶어 두었던 이 원정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빅토르 베라 르는 트로이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는 험난한 항로를 피해 육로수송을 가능케 해주 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카이아인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정을 세웠다. 그러나 아카이아인은 트로이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대규모 약탈극을 벌일 계획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트로이 발굴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아나톨리아 북부 내륙지방에 있던 히타이트 제국은 물론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와 긴밀한 교역관계를 맺고 있던 트로이는 눈부시게 번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은 호머의 서 사시에서도 확인된다. 트로이는 아카이아인의 약탈로 잿더미가 되어 그후 몇 세기 동안 폐 허로 남았다. 그들은 아카이아 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아가멤논-그의 통수권은 의심받 기도 하였다-의 지휘 아래 동지중해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던 도시 가운데 하나인 트로이를 대대적으로 약탈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둘러싸고 뭉쳤던 것이다. 트로이 원정 500년 후에 작 품화된 호머의 서사시가 사실에 대한 충실한 증언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트로이에서 대 규모 약탈이 자행되었음은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트로이 원정이 매듭된 지 얼마 후에 아카이아인은 코린트 지협을 따라 거대한 성벽을 쌓아 또다시 단결을 과시했다. 전쟁터에 나가 여러 해 동안 본토를 비워 둘 수 있었다는 점이나 히타이트 제국의 바로 앞에서 전쟁 을 벌이면서도 히타이트인에게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의 힘은 막 강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진정 바다의 주인이었는데, 이것이 '오디세이'에서 호머가 그리는 주제이기도 하 다. '오디세이'는 귀향을 주제로 한 항해 서사시라는 점에서 '일리아드'와 다르지만 이들을 따로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전쟁과 약탈에 대한 갈증으로 이국땅을 내달렸던 아카이아 용 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고, 고향에서는 기대했던 만큼 환영해 주지도 않았다. 영웅 오디세우스도 귀향길의 먼 바다, 낯선 해안에서 기구한 항해를 한다. 그는 수 차례 난파당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한때는 매혹적이고도 위험한 마녀와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는 10년이라는 기나긴 방 랑의 세월이 필요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왕비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에게 애매 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난장판이 되어 있는-그러나 왕비의 그러한 태도 덕분에 그는 왕 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왕궁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이주민의 신앙과 본토 원주민의 신앙이 결합되어 새로운 종료를 낳았다. 미케네의 선문자 B 서판에 나타나 있는 신들의 세계는 호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신들 의 세계나 도시국가의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신들의 세계와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아폴론 신과 레토 여신,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을 제외한 주요 신들이 거의 다 언급되어 있다. 물 론 신들의 역할이나 지위는 5세기가 지난 후에 창작된 호머의 작품과 다소 차이가 있다. 서판에 있는 그리스 신들의 세계는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된 것은 없다. 불명료한 신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 명의 요소들을 종합, 분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아카이아인이 그리스 본토로 이주할 때 그들은 정신적 자본을 함께 이식했다. 이는 고도 로 사회화된 그들의 종교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종교에서는 주권과 군사력, 그리고 생산 과 번식을 관장하는 신들이 신전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으 며 반유목민 사회의 요구에 잘 부합되는 이 종교는 기존의 토착신앙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리스의 원주민이 다산과 풍요, 그리고 영생의 신들에 대한 고유한 숭배의식을 가지고 있 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인도-유럽인의 종교는 내부적으로 분열하게 되고 개별 신앙의 틀 은 사라져 버린다. 결국 서로 다른 종류가 융합하여 나타난 것은 논리적인 측면보다는 실용 적인 측면이 강조된 새로운 신앙형태였다. 한편, 모신과 동정녀신 그리고 청년신의 수를 헤 아려 보면 이주민 종교보다는 지중해 신앙이 단연 우세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남쪽 신앙은 인간사회와 짐승의 번식을 촉진하고, 밀을 자라게 하며, 과일을 맺게 하고, 또 행복한 영원 의 세계까지 생명을 이어 주는 신비의 힘을 찬양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신앙은 전적으 로 크레타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크레타의 신앙은 또한 생명의 힘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성립된 신석기와 고대 청동기의 신앙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다. 그리스인의 신앙은 이제 구원의 세계라는 개념을 수용하게 된다. 이는 크레타 신앙의 ' 신비' 개념을 물려받은 결과였다. 신비 개념은 이후 도시국가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데메테르(대지의 여신) 여신과 코레(데메테르 여신의 딸로 망령세계의 신 하데스의 아내) 여신에 대한 신비적 신앙이 그것이다. '신비'라는 말과 '비전전수'라는 말이 미케네 서판 에서 발견된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구원의 세계 Elysium(크레타어)은 지하세계에 있다고 여겨졌다. 그리스인은 이 크레타식 개념을 그대로 물려받아 저승세계를 구상해 냈다. 그리고 뛰어난 지혜를 가진 세 명의 왕이 이곳을 다스린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각각 미노스, 라다 만티스, 그리고 아이아쿠스인데, 그중 두 명은 크레타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왕족과 위인 은 영원의 세계에도 특별한 운명을 누렸다. 그것은 그들이 화려하게 단장된 무덤 속에서 영원의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며 영웅의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영웅(hero)이라는 낱말도 크레타어에서 온 것인데, 미노스 문명의 진가를 밝히는 데에 어 휘분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영웅이란 자손이 정성껏 바치는 제사를 받아 무덤너 머까지 그의 권능을 행사하여 사후에도 생전에 다스리던 공동체를 보호해 주는 위대한 인물 을 말한다. 서판에는 무한한 힘을 가진 '영웅 중의 영웅'도 언급되어 있다. 도시국가 시대 에 그처럼 중시되던 영웅의 개념이 바로 여기에 뿌리박고 있다. 제우스와 헤라 아카이아인의 신앙생활은 간단명료하다. 그들의 자연현상의 의인화, 생산의 주재자, 이승 과 저승에서의 보호자라는 기본틀 위에 이 세 가지 영역을 관장하는 여신들을 도처에 두고 있었다. 제우스와 헤라 부부는 이 시기부터 성스러운 결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도시국가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그리스신전에서 가장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합은 애초부터 부조화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결혼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 쟁과 반목이 있었다고 전하는 신화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데에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제우 스는 인도-유럽인의 신인 반면 헤라는 지중해인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후대에 엮어지는 신화에는 제우스의 출생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우여곡 절과 위험했던 그의 유년기가 서술되어 있고, 제우스의 죽음과 그뒤에 청년신으로 소생한다 는 내용도 담고 있다. 제우스는 또 대지의 깊고 깊은 힘을 끌어내기 위해 춤을 추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헤라와의 관계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모순적인 모습을 보 여 주고 있다. 헤라는 누이이면서 동시에 연인이기도 하고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 런데 하나의 신격 안에-오히려 한 인격 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위험 속에서 성장하는 어린 신과 세월의 흐름과 함께 수염이 길게 자란 모습으로 번개와 폭풍을 내리치는 고귀한 대신 의 형상을 함께 수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모순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전은 무너지고 아카이아인이 이룩한 궁전문명은 그들의 권력이 단단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으리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 이 궁전의 세계가 B.C. 1200년경에 갑자기 와해되고 만다. 수비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거대한 필로스 성곽이 붕괴되면서 곧이어 그리스 전역과 크레타섬의 궁전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들의 문명이 왜 이처럼 급작스러운 종말을 맞 게 되었는지는 역사가들이 앞다투어 연구해야 할 주제이다. 암흑기는 빈곤과 무질서의 시대이다. 그러나 점차 조직화된 공동체들과 호머 왕국이라는 국가들이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B.C. 800년 무렵부터 도시국가가 발생하였다. 헬레네 세계는 이렇게 하여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식민지가 확장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창조되 었다. 제2장 아르카이즘, 태동하는 창조력 왕국이 파괴됨에 따라 그리스는 혼돈과 야만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 시기를 '암흑기'라 부 르는데, 이 파괴의 물결이 어떻게 도래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으며 단지 몇몇 가설이 제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대이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도리아인 의 이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핀도스 산맥 너머 그리스 북부 지방에 살던 그리스 민족의 하나로 돌연히 부유한 미케네 왕국으로 내려와서 무력으로 왕국을 점령했다. 이것은 또 다른 그리스 민족의 등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이동로는 도리아어가 사용되던 지 역을 추적하여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케네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아나톨 리아 지방에서는 히타이트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만다. 이 북부 민족은 해안지방을 따라 이집트까지 내려가면서 그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닥 치는 대로 파괴해 버렸다. 이들이 바로 위협적인 '바다의 민족'이다. 이처럼 통과하는 곳마 다 무자비하게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던 두 이주민 집단은 에게해 양편에서 똑같은 내용의 시나리오를 연출하였다. 결국 폭력적 두 집단에 의해 미케네 왕국과 히타이트 제국이 사라 져 버린 셈이다. 파괴와 피로 물든 암흑기가 4세기 동안 이어지다. 민족 대이동은 오랜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때 소아시아로 향한 그리스인의 이동은 특기할 만하다. 소아시아 해안지방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그리스인이 정착하여, 북부에는 아이올리아 인(Aeolians), 중부에는 이오니아인(Ionians), 그리고 남부에는 도리아인(Dorians)이 주로 정 착하였다. 마찬가지 움직임이 소아시아와 아시아 연안 가까운 큰 섬들에서도 나타난다. 레스 보스섬에는 아이올리아인, 키오스섬과 사모스섬에는 이오니아인, 그리고 로도스섬에는 도리 아인이 정착한다. 여기서 가장 늦게 이주한 도리아인이 바다로도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동양과의 교역에 유리한 지역으로 영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그 러나 다른 상황은 순조롭지 못했다. 혼란 속에서 전체 인구의 절반이 줄었고 궁전은 폐허가 되었다. 소규모 공동체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시상태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 들의 우두머리가 바실레우스(basileus)인데, 그 지위는 예전의 전제군주와 전혀 달랐다. 그들 은 부족의 이주를 주도하던 군사령관 같은 부류였고, 반유목생활에서 농업으로 경제구조가 전환되던 무렵에 지력이 좋은 토지를 독점한 자들이었다. 4세기 동안 많은 변동이 있었다. 왕을 구심점으로 하여 공동체사회가 견고하게 구성되었 다. 왕은 평민의회를 주도하는 부족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고문위원회의 보좌를 받았다. 평민 의회는 실제로는 아무 결정권도 갖지 못했다. 이것은 인도-유럽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도리 아인 특유의 정치구조로서 도시국가의 의회 모습을 부분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B.C. 10세기 와 B.C. 9세기 때의 그리스 상황은 호머의 서사시에도 나타나듯이 조그만 왕국들로 분할되 어 있었다. 이러한 소왕국을 '호머 왕국'이라고 부른다.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변화 암흑기가 전적으로 퇴보와 야만의 시대였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도 커다란 혁신이 이 루어졌다. 도자기 예술에서는 미케네풍 작품들이 사라지고 아카이아의 전통을 소화해 낸 새 로운 양식의 기법들이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새로이 탄생한 도자기는 원시 기하학 형태에 서 기하학 형태로 발전하는데, 이점에서 기하학적 세계관의 참다운 실현을 볼 수 있다. 그 러나 이 같은 추상작업은 기존 예술의 내부적 진화에 따른 결과이지 새로 이주해 온 그리스 인이 이루어 낸 것은 아니다. 종교분야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중대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제 우스가 하늘과 땅을 통치하는 신들의 신으로서 더욱 중요시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불확실하 여 항상 반발의 여지가 있는 사회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사상체계였다. 또한 아시아의 여 러 신들이 새로 그리스 신전에 받아들여져서 B.C. 1000년경에는 확고히 자리를 잡는다. 셈 계의 아프로디테와 아나톨리아계의 아폴론과 그의 어머니 레토 등이 그들이다. 호머의 작품에는 2,000여 년의 세월이 집약되어 있다. 그가 B.C. 750년경인, 도시국가의 전성기에 작품을 썼다고 해도 그는 최소한 후기 미케네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구전전통 에 입각해 그의 천재적 능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되풀이되며 제시 되는 하나의 위대한 주제를 중심으로 연주되는 교향곡을 듣는 듯하다. 서사시가 역사연구의 엄밀한 자료로서 쓰일 수는 없으나, 당시 사회상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서사시는 트 로이 전쟁이나 전쟁 후의 귀향을 주제로 하였지만, 그러한 주제의 틀 위에 드러나 있는 것 은 호머 왕국의 사회상이다. 귀족들의 향연에서 음송되던 이 방대한 서사시는 화려했던 과 거를 노래하면서 철기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인에게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뿌리를 재발견하도록 해준다. B.C. 800년경에 유럽계 그리스와 아시아계 그리스에서 도시국가(그리스어로는 폴리스)라 는 새로운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도시국가의 초기에는 귀족세력이 판을 치고 있었으나 차츰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왕은 1년을 재임기간으로 하는 다수의 행정관과 평의회, 평민의 회 등 새로운 정치기구들로 급속히 대치된다. 왕국에서 도시국가로, 다시 말해 모든 형태의 혁신을 자체 내에 수용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자들은 귀족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도시국가는 출범부터 합의에 따라서 이루어진 체제였다. 그점은 도시의 가장 빈곤한 사람들까지 누구나 평민의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익히 알 수 있다. 물론 구시대의 제도 중 사회통합적인 차원에서 보탬이 될 만한 제도들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들은 도시국가 내에서 이오니아인, 도리아인, 아이올리아인 따위 각 부족을 몇 개의 집 단으로 분할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분할된 집단들이 모여서 도시국가라는 커다란 총체를 이 루었다. 따라서 도시국가는 모든 부분집합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은 공동체 에 소속되어 있는 하위집단, 즉, 핵가족, 가문, 씨족, 부족 등의 구성원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소년소녀들을 성인사회에 통합시키는 방편인 성인식이 부활되었다. 그리하여 사춘기에 이른 청소년을 대상으로 미래의 전사와 산모를 양성했다. 성인의식은 원시 농경사회의 산물로 그 리스인의 부족사회는 도리아인의 이주와 함께 이 성격을 보다 선명히 띠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도시국가의 탄생 그리스에서 최초로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B.C. 1100년경이지만, B.C. 9세기가 되어서야 철 기가 일상생활에 보급된다. 질 좋은 농기구와 무기가 보급되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이에 따 라 생산이 증대되고 교역활동이 촉진되었으며, 수확량이 늘고 잉여생산물이 축적되자 스스 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도 절실해졌다. 이제 그들은 정착생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시 작했으며-농업은 이제 목축업보다 훨씬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서서히 도시국가 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 다양한 생산활동과 교역의 증대, 그리고 이에 따 른 도시화는 조직적인 사회체제 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새로운 사회의 중심이 되었 던 계층은 전쟁용사 출신 귀족이었다. 아울러 B.C. 9세기 말부터 근동지방과 북쪽 국가, 시 칠리아, 이탈리아와 무역이 재개되어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데모스(demos)의 출현과 그들의 권리 데모스에 대한 귀족들의 압제 때문에 도시국가내에는 사회적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 어 여러 차례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결국 시민들의 승리로-투쟁은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곤 했지만, 승리의 의미는 지대한 것이었다-끝나게 되었다. 부족 단위로 식량이나 사치품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군사적 필요성 또한 배가 되었다. B.C. 8세기 말부터는 귀족 출신 기사들만으로는 자체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서 비교적 부유한 농민을 무장시켜서 장갑보병 부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대두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등장한 집단, 즉, 장갑보병들도 그들 몫의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장갑보병단이 편성될 무렵, 또는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농지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소지주와 농민은 부유한 이웃에게 빚을 지고,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 에는 농지를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채무자가 노예신세로 전락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것이 바로 수확량의 1/6을 갚아야 하는 아테네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다. 이렇게 팽팽하 게 긴장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문제해결을 입법권자에게 위탁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경우 입법권자는 쌍방이 출석한 가운데 합의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였다. 이러한 인물 중 아테네 시의 솔론은 개혁을 통해 농민의 부채를 모두 탕감했다. 그러나 솔론도 공공기금을 풀어서 극빈자에게 나누어 주는 데에는 반대했다. 한편 강력하게 부상하는 귀족들에 대항해 참주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로이 등장한 참주들은 시민의 지지 를 받아서 참주정치 체제를 수립하였는데, 코린트시의 킵셀루스가처럼 권력이 대를 이어 계 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법가 특히 참주들은 사회체제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또는 지속적으 로 중단되어 도시국가가 탐욕과 폭력의 도가니로 빠진 이러한 상황을 틈타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 도시국가의 발전이 데모스, 특히 부유한 데모스의 권리를 옹호하는 쪽으로 진전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솔론은 조심스럽게 이들을 정치와 사법활동에 참여시키기 시작하 였다. 이러한 발전은 특히 아테네에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미 B.C. 6세기 말에 클레이스테 네스는 가난한 시민에 대한 부유층의 지배권을 뒤흔들어 놓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았다. 초기 민주주의가 매우 소극적인면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이것은 그리스 민족 의 역사에서 실로 기념비적 순간으로 기록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지역에 따라 달라 어떤 지역에서는-스파르타, 크레타, 테살리아 등- 인구의 대부분이 종속신분의 농민으로 이 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노예는 아니었지만 도시국가나 그들의 소유주에게 전적으로 종속되 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종속민 계층이 나타나는 지역은 대개 도리아인의 지방인데, 이 종속민은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한 옛 토착민 집단인 경우가 많았다. 창조의 희열, 사포에서 피타고라스까지 암흑기 말기에 그리스인은 페니키아의 자음조직 알파벳에서 직접 영향을 받아 그들의 문 자체계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알파벳을 일컫는 것으로 자음뿐 아니라 모음까지도 기록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인이 외부에서 들여온 요소들을 그들 고유의 합리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어떻게 개선해 나갔는가를 보면서 그리스인의 독창성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000여 년 전부터 그들이 사용해 왔던 선문자와는 달리 그리스 알파벳 은 음운분석을 통해 만든 문자체계로서 서기관 따위 지식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 니라 누구든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신자들은 알파벳이라는 표현수단을 빌려 신에게 경의를 나타낼 수 있었고, 작가와 상인, 나아가 모든 백성들은 알파벳을 생활의 갖가지 표현수단으 로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석판에 기록을 남기는 문명이 도래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내려오 던 음영시인의 전통은 B.C. 8세기에 탄생한 서사시로 계승되었다. 서정성이 고양되어 다양한 종류의 시가 탄생한다 호머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호머의 작품을 품위 있게 만든 육보격 리 듬을 빌려 왔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호머의 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지만, 끊임없이 합 리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호머를 능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노동과 나날'을 통해 산 산이 부서진 신들의 세계와 보이오티아 지방 농민들의 암울한 생활에 하나의 질서를 가져다 주었는데, 다분히 교육적인 성격을 띤 이 작품은 우주와 인간사회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이 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것이다. 그뒤를 이어 서정시가 활짝 꽃피는 시대가 도래 한다. 사람들은 서정시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를 표현하기도 하고 사랑과 죽음을 읊 기도 하며 포도주가 넘쳐 흐르는 축제장면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도시국 가를 분열시키는 시민 사이의 분쟁을 주제로 삼아 중용과 절제의 태도를 주창하다가도 때로 는 신랄한 증오를 표현하면서 어느 한쪽을 옹호하는 상반된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이마에 보라색 띠를 두른 사포는 청소년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청소년에게 월계관을 만드는 기술, 문학, 그리고 정열에 대해 가르쳤다. 이와 같은 시기에 한편에서는 합창형식의 서정시가 발 전하고 있었다. 신이나 영웅을 기리는 종교의식에서 부르던 이러한 합창시에는 도시국가의 집단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영웅을 찬양하는 칸타타이든 디오니소스제의 축가이든 서정적 합창시에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한다. 이것이 비극인데, 도시국가가 주최하는 비극적 대제전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의 내 면에 깃들어 있던 정열을 해소했을 것이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 효과가 이것이다. 여하튼 비극을 통해서 사람들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되새겨 볼 기 회를 가졌던 셈인데,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비극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희극이 등장한다. 수학과 형이상학 소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새로운 합리적 사고가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B.C. 7세기 말 이오니아의 탈레스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사상에서는 형이상학과 수학이라는 두 가지 학 문의 방향이 이미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처음에 그들은 '현자 들(sophoi)'이라 불렸다-은 우주를 생성하고 우주의 변화과정을 주재하는 근본원리의 탐구 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합리적 수학의 바탕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피지스(physis:자연 또는 하나의 설명원리)'의 탐구를 기치로 내걸면서 신화적 인 방법으로 우주의 탄생과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만족했던 지난 1,000여 년 간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을 꾀하였다. 여하튼 그들은 경험적 지식을 철저하게 거부하 는 이론적 학문인 수학에 의존하여 추상적인 우주관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이제는 측량 사 대신 기하학자가, 그리고 점성술가 대신 천문학자가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동 양사상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은 단순히 동양의 영향을 받은 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 발전시켜 하나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 루었다. 아시아를 떠나 대그리스(Grand Greece: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피타고라스 는 그곳에서 심오한 깊이를 지닌 학파를 창시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의 발전뿐 아니 라 당시 철학자들이 기하학적 기반을 제공하려 노력하던 지리학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 였다. 이들은 또한 엄밀한 고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절대존재에 대한 신비적 탐구에도 열심이었다. 격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의 종교 도시국가에서는 종교가 정치, 경제와 접목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의 진화양상은 매우 중 요한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고유한 전통신앙을 기반으로 신 전을 다시 건축하여 자기 도시의 기원을 만들어 냈고, 귀족들은 선조영웅을 기리는 의식을 새로 만들거나 행사 횟수를 증가시켜 자신의 권위를 향상하려고 하였다. 특히 다산, 풍요의 신에게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던 도시국가들은 행사비용 전체를 도시국가가 부담하는 방식 으로 다산, 풍요의 신을 경배하는 성대한 제전의식을 치르고자 노력하였다. 이 같은 민중의 요구는 특히 디오니소스 제전과 데메테르와 코레 두 여신에 대한 제식을 통해 점차 충족되 었는데, 시민의 변덕스런 지지에 항상 민감해야 했던 참주들은 이 행사진행에 아주 적극적 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종교건축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또한 도시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제 범헬레네 신전들은 그리스인 사이의 분쟁을 일시적 으로 조정하기 위한 적절한 화해의 장소로서 중시되었다. 이중에서 특히 올림포스(Olympos) 와 델포이(Delphoe) 신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성단들이 도시국가 안에 세워져 제물과 봉헌물이 끊일 날이 없었다. B.C. 7세기부터 B.C. 6세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건축물과 장식물로 치장되었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좋은 예이다. 종 교건축의 발전은 아르카이즘 시대가 가져온 커다란 혁신 중의 하나이다. 신전 건축양식은 아카이아 궁전의 전통적 기법을 부분적으로 흡수하고 동양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아 몇 가 지 규범적인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건축가들은 이러한 양식들-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아이 올리아식-을 체계화했다. 그들은 신전 둘레에 기둥을 세워 원주로 빙 둘러싼 건축물을 창조 했는데, 이 양식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아르카이즘시대는 이후 수세기 동안 확고부동한 모델로 자리잡게 되는 새로운 신전 건축양식이 태동한 위대한 창조의 시대였다. 아르카이즘의 기수 아르카이즘 시대는 그 시대를 이끈 주도적 인물들로 대변될 수 있다. 정치생활을 장악하 던 입법권자와 참주, 그리고 빈곤에 허덕이며 사는 농부도 있었지만, 탁월한 영감으로 빛 나는 작품을 남긴 헤시오도스 같은 시인과 밀레토스학파의 철학자와 피타고라스 같은 인 물들이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합리성에 입각하여 우주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풀어 내려고 하 였다. 한마디로 아르카이즘 시대는 과거 헬레네 세계와 단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창 조를 이룩했던 뛰어난 재능과 혁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B.C. 9세기 말 자급자족 체제는 막을 내리고 그리스인은 다시 항해에 나선다. 810년경 에비아 사람들과 키클라데스 사람들은 북시리아 오론테스강 하구에 있는 알미나 (이 지방의 옛 이름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었다)에 정착한다. 이들 이주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뛰어난 기하학적 문양으로 제작된 아름다운 도자기는 오론테 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멀리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이는 알미나에만 국 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알미나보다 남쪽에 있는 지방에서, 그리고 북쪽으로는 실리시아(현재 시리아와 잇닿아 있는 터키의 남부 지방) 연안 부근에서도 이 같은 유적들을 발굴해 냈 다. 이 지역들은 그리스인이 정복한 땅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무역기지(그리스어로는 시장, emporia라는 뜻)가 뜻밖에도 많이 발견되었다. 교역장소를 설정해둠으로써 그리고 상인들 못지않게 많은 이들을 볼 수 있었던 그 지방의 왕들은 이들에게 조계를 허용해 주었다. 그 사이 다른 지방의 항해자들도 옛 미케네 선원의 자취를 따라 지중해 중부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도시국가 간의 경쟁이 일어나면서 상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서방의 야만인(이들 의 경제력과 문화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과 교역이 가능했다. 심 지어 현지에서 그리스 도자기의 모방품이 제작될 정도였다)지역을 개척하여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상업의 부활기-종종 전식민상업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줄잡아 한 세대 동 안 계속되었다. 그들이 최초로 해외에 무역기지를 설치한 것은 B.C. 750년 무렵이었다. 그것 은 나폴리만에 자리잡고 있는 이시아섬에 건설한 피테쿠스 기지였는데,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본격 식민시의 등장은 B.C. 730년 쿠메가 건설된 다음이었다. 식민활동은 곧 급속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스인이 암흑기 말기와 아르카이즘 시대 초기에 보여 준 해외진출은 미케네 시대를 연 상케 한다. 그리스인 공동체가 발전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중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 하다는 말이 된다. 평야가 협소하고 산지가 많은 그리스땅에서는 곡물을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고 더구나 밀보다는 오히려 귀리의 수확이 열 배나 더 많았다. 특수 용도의 목재뿐 아 니라 일상생활에 쓰이는 목재도 귀했으며, 구리의 함량이 아주 빈약한 데다가 주석은 아예 없었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금속이나 구운 흙, 직물을 재료로 매우 정교하게 제작한 상품들 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이것은 준사치품목으로서 그리스에 올리브 재배가 확산됨에 따라 생산이 더욱 증가하였다-등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무역이 성립되고 확장 될 수 있는 필요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인구의 증가는 무엇보다도 농산물의 생산이 늘 어남에 따라 가능했다(철제 농기구로 포도와 올리브 경작지를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인구의 증가는 그리스인의 해외진출을 활발하게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한편으로는 인구의 증 가가 노동력의 증가를 가져와서 교역에 필요한 잉여물자가 생산되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 로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야만인의 땅으로 이주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때 로는 인구의 일부를 추방하거나 유배 보내는 방법을 통해 도시국가 내에 고조된 긴장을 해 소하기도 하였다. 또 국내에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둥지를 규합하여 바다로 나서는 일도 있었다. 이주민이 항상 그들 마음대로 고향을 떠났던 것은 아니다. 테라 사람들은 리비아도 가서 그곳에 키레네시를 건설하라는 델포이 신탁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서 그들은 아폴론의 큰 벌을 받고 결국은 아프리카로 떠났는데, 키레네가 번영한 도시로 성 장함으로써 테라 사람들의 이주는 마침내 크게 보상받았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볼 때, 이들의 식민활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 도는 도시국가의 내부분열을 조장하던 부조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도 심한 기근 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서정시 속에도 등장하고 있는 이 어쩔 수 없는 기근은 사람들에 게 절망감을 주고 그래서 그들이 고국을 떠나도록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원정은 대부분 한 사람의 지도자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새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원주민 을 정복해야 했다. 그리고 동행한 측량사들이 균등하게 분할한 토지를 추첨을 통해 분배하 고 나면 싸 들고 온 조국의 흙으로 둔덕을 만들어 그곳을 중심으로 부락을 형성하였는데, 이때 성곽 위에 임시로나마 신전을 만들어 신을 모시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신전을 중심으로 식민인의 생활이 조직되고 영위되었다. 그리스의 식민시, 독립적인 도시국가 그리스인의 식민시는 현대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전혀 다르다. 비록 식민시는 종교적 문제 나 다른 중요한 사항에서 모도시국가의 관습을 존중하기는 했어도 그들은 자유로운 정책결 정을 수행하였다. 오히려 식민시와 모도시국가의 긴밀한 관계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밀레토스는 흑해 연안의 식민시를 계속해서 지배하였고, 식민시에서 출발한 시라쿠사는 아드리아해 주변 식민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최초로 흑해 연 안에 세워진 식민기지는 그곳 원주민의 강한 반발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뒤로 같은 장소에 다시 식민시가 건설되고, 곧이어 다른 식민시들도 세워졌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처음으로 식민시가 건설되기 시작한 시기는 B.C. 730년-쿠메 시가 건설된-이후이다. 트라 키아 지방과 프로폰티스 지방 그리고 퐁 지방의 식민사업은 시기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다. 그러나 이곳 식민시들은 더욱 견고한 체계를 가지고 건설되었다. 마르세유는 B.C. 600년이 되어서야 건설되며, 그 주변지역으로의 확장은 또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B.C. 750 년에서 B.C. 550년사이에는 해안지방의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극에 달했다. 당시의 식민사업은 두 가지 대립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개별 도시국가나 탄압받고 있 는 계층의 우연한 결정에 따른 모험일 수도 있었고, 주도면밀한 계획과 신중한 숙고가 뒤 따르는 정책일 수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큰 역할을 했다. 식민지의 기능과 관련하여 식민활동을 기근을 해결하려고 했던 농경기와 교역을 목표로 했던 상업기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출발점부터 오류를 포 함하고 있다. 식민지는 우선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을 충당하는 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 다. 식민지의 식량생산은 서서히 증가되었고, 오랜 기간 뒤에나 그리스 본토로 수출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식민지의 경우는 성격이 달랐다. 서쪽 바다 진출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에비아 사람들은 캄파니아 지방과 티레니아해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통 과해야 하는 메시니 해협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는 지리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사 전에 계획된 것임이 명백하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본토 주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는데, 이미 높은 생활수준에 달해 있던 이들 또한 헬레네 상업이 전파한 사치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자취를 따라서 서쪽으로 영웅 헤라클레스는 괴물 게리오네스의 황소를 잡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거쳐서 미케네 로 돌아왔다. 험난한 여정을 통해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수 많은 요정과 여신의 몸에서 그의 자손을 보았다. 헤라클레스의 이와 같은 모험담은 그리스 상인과 식민개척자에게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줌으로써 그리스인은 무력을 행사하여 토착민 의 영역을 빼앗으면서도 그들 자신의 유산을 되찾는 것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식민지에서의 정착활동도 한결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의 식민활동 은 매우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식민지확 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식민활동은 간단하게 세 가지 유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캄파니아와 메시니 해협에 정착한 에비아섬 출신의 이오니아인, 그리 고 이들과 거의 동시에 메가라 히블라이아와 시라쿠사를 식민지화한 코린트의 도리아인과 메가라의 도리아인, 끝으로 타란토만에 식민한 펠로폰네소스 북부 지방의 아카이아인 등이 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이 세운 타란토시를 포함한 다른 식민시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식민지화되어 있던 도시가 다른 식민시를 건설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처럼 그들은 성 공과 부를 최대한 거머쥐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로 진출을 꾀했다. 때로는 식민시의 건설이 토착민을 종속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주권과 재산, 뿐만 아니 라 때로는 자유마저 빼앗겼다. 남부 이탈리아의 펠라스기족과 시라쿠사의 시릴리인이 그러 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스파르타의 노예와 비슷했다. 식민지의 토지는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비옥해 농산물이 풍부했고, 풍부한 농산물은 교역의 밑바탕이 되었다. 번영과 활력의 세계 이 시대의 문학은 히메라 태생의 스테시코(Stesichore, 흔히 Tisias라고 부른다)의 등장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는 아르카이즘 시대 최고 서정시인으로 신화 특히 서방세계의 신화를 주제로 많은 시를 썼다. 신전 내부에는 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이 증축되고 루카니 아 지방의 포세이도나, 시칠리아의 셀리논테와 아그리젠트 등 거대한 성에는 테라스(흙을 쌓아 올린 터)가 만들어지고 신전이 세워졌으며, 어떤 곳에는 마치 소아시아에서 볼 수 있 는 것과 같은 거상도 세워졌다. 종교는 그들의 생활 속에 뿌리깊게 침투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피타고라스 학파처럼 신비주의적 영감을 받은 철학에 대해서 각별한 존경심 을 갖고 있었다. 토착신앙도 여전히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유서 깊은 대지의 신 과 저승신의 신격은 이탈리아에서는 여신 헤라 안에, 또한 시칠리아에서는 데메테르와 코레 여신 안에 수용되었다. 헬레니즘은 서방세계 이탈리아에서 크게 발전하여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방세계의 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대부분의 생활을 향 락을 위해 바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쾌락을 추구하는 벼락부자의 세 계로서 그리스어로는 이러한 세상을 '트리페(tryphe)'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우유부단함, 자기과시를 위한 사치와 방탕, 여성적인 부드러 움, 섬세함 등을 함축한다. 서방 식민세계에서 그리스 식민개척자들이 이룩해 냈던 위대한 문화적 창조와 왕성한 활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노력은 이탈리아 남부가 대그리 스-그리스보다 더 위대한 그리스라는 뜻-라고 불리는 데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바다, 흑해 흑해 연안의 식민지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이곳의 식민지 건설은 비교적 느즈막하게 이루 어졌고 서방 식민지만큼 화려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 토착민의 세력은 매우 막강해 서 식민개척자들은 때로 이들과 타협해야 했다. 반면에 이 지역의 식민활동은 보다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해협 주위에는 메가라와 밀레토스가 위험한 흑해를 피해 육로수송이 가 능한 지상통로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고, 퐁 지방은 메가라의 식민시인 헤라클 레이 같은 몇몇 드문 경우를 빼고는 밀레토스나 기타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이 거의 독점하 고 있었다. 흑해 북부지방은 특히 식민활동이 왕성했다. 이 지역의 흑해 북부로 흘러 들어 가는 주요 하천들의 하구는 크림 반도나 케르치 해협 등으로 진입하기에 더할 수 없이 유리 한 통로였기 때문이다(올비아는 전형적인 예이다. 올비아는 매우 중요한 식민시의 하나로 부그와 드니스트르라는 함수호 옆에 건설되었다). 한편 호수의 동쪽 끝 코카서스 지방의 해 안 구릉지대에도 세 개의 상업구역이 세워져 부강한 도시 콜키스(동으로는 흑해, 남으로는 코카서스와 면한 지방)와 교역을 하고 있다. 콜키스는 무궁무진한 광물자원을 보유한 매우 중요한 지방이었다. 사실 퐁 지방은 흑해 연안 전지역에 광물을 공급하는 보고였다. 발칸 반 도에 살던 사람들은 에게해에 근접해 있는 트라케 지방이나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 또는 흑 해 서쪽 해안의 식민지를 통해 퐁 지방과 연결될 수 있었고, 금은 머나먼 시베리아의 변 경에서 긴 여정 끝에 입수하였다. 그리과 광물류 못지않게 식량자원의 확보에도 많은 노력 을 기울였다. 흑해 연안 식민시들은 그리스의 주요 도시국가들뿐 아니라 헬라스(Hellas:고대 그리스) 전체 경제의 균형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 업 적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리스에 거주했던 스키타이족의 아나카르시스 는 7현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지방의 문화를 한몸에 가지고 있던 이 학자 는 그리스에서 대모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키벨레 여신 숭배제전을 도입하려다가 동생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마르세유는 교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광물류 운반로의 종착지였던 마르세유는 활기찬 항구였다. 특히 카시테로스 군도에서 생 산되던 주석의 집산지였다. 이 도시의 위세는 론강, 사온강, 그리고 센강이 이루는 축을 따 라 지중해 연안에서 내륙 깊숙이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서쪽의 땅을 엘도라도(황 금의 나라)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앙티브, 아를, 아그드 등 지중해 연안에 위치 한 지역은 매우 중요한 식민도시였다. 스페인에도 국제적인 항구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 은 이베리아 반도의 광산자원이 집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식민지 확장 서방세계에 진출한 포카이아인 외에도 그리스인은 리비아에서는 키레네를, 이집트에는 나 우크라티스 등의 식민시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도시들은 금과 고가의 호화품, 그리고 노예들 을 공급하던 아프리카 내륙지방과 중개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식민사업은 마치 하 나의 거대한 계획이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처럼 부단히 확장을 거듭했다. 이때 식민 기지들의 역할은 본토와 토착민 간의 교역을 이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인은 이를 '엠 포리아(emporia:선주나 도매상이 경영하던 대규모 상점)'라고 칭했다. 코트도르 지방의 빅스에서 발굴된 켈트족 왕녀의 무덤은 엠포리아의 역할과 의미를 한눈 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왕녀는 황금 왕관을 쓴 채 저승세계로 데려다 줄 마차 옆에 누워 있다. 그 옆의 청동제 술잔은 아르카이즘 시대에 제작된 어느 도자기보다도 크고 아름답다. 사온 계곡과 센 계곡을 잇는 육로에서 발견된 이 분묘에서 주석의 이동로, 갈리아 왕실에서 징수하던 물품통행세, 마르세유 사람들이 바치던 조공품 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유적에 는 갈리아족의 전통과 그리스 예술의 진수들이 공존해 있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사실은 모 든 것이 그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야만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B.C. 6세기 말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초기 형태가 보인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 치하 의 아테네에서 탄생한 이 진보적 도약은 그 운명이 순조롭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침략과 주 도권 장악을 둘러싼 도시국가들 사이의 만성적 갈등이 전개되었다. 제3장 고전적 균형, 그 이상과 현실 페르시아 전쟁 다리우스 대왕의 공격개시는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을까? 페르시아는 트라키아와 스키타 이, 마케도니아에서 이미 '개입과 정복'이라는 형태의 외교정책을 펼쳐 가고 있었는데, 이 전쟁은 그들의 정책이 절정에 달한 결과였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리스까지 대왕의 권위 아 래 무릎을 꿇게 하려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유분방한 그리스인이 그들의 이웃인 소아시 아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무척 골치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한편 소아시아 주 민은 페르시아에 철저히 합병되어 있었다. B.C. 499년 이오니아인의 반란에서 그들이 보여 준 교훈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국제정세가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한 다리우스는 독립에 대한 그리스인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다리우스에게 '마라톤의 돌발사(마라톤 평원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 에게 격파당한 것)'란 작은 실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왕은 시종장에게 "아테네인을 기억하소서."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하 지만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대왕의 두번째 원정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선왕의 유 업을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원정을 떠나게 된다. 왕이 직접 진두지휘했던 두번째 원정에 동원된 군사와 함대의 규모로 볼 때, 크세르크세스는 이번에야말로 끝장내겠다는 비 장한 각오로 원정을 떠났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대는 초반에 기선을 잡았다. 특히 테르모필레 싸움에서는 아테네시를 점령하는 등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테미 스토클레스 앞에서 페르시아군은 주춤했다. 문제는 해전이었다. 아테네는 전략을 바꿔 바다 에서 승부를 걸기로 했다. 결국 살라미스 해전(B.C. 480)은 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살라 미스 해전에서 도시국가들은 총연합해 페르시아 함대를 섬멸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울분을 삼키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귀향길에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B.C. 479)에서 페르시아군 은 다시 한번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리스 병사들은 패잔병을 계속 추격하여 그들의 영토 에서 페르시아인을 모조리 추방해 버렸다. 이제 평화가 깃들었다. 양국의 평화협정은 30년 뒤에 맺어졌다. 아테네 제국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는 보다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스파르타를 제 치고 가장 먼저 전면에 부상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혹독한 지배에서 갓 벗어난 소아시아 의 그리스 도시국가와 아르키펠라고(에게해)의 도시국가를 연방화했다. 이것이 델로스 (Delos) 동맹이다. 동맹의 목적은 공동수비에 있었으며, 본거지를 이오니아인의 성지 델로스 섬에 두었다. 동맹국들은 바다에 던진 무쇠 덩어리가 다시 솟아오를 때까지 화합을 지속해 나갈 것을 맹세하였다. 이 동맹에서 아테네는 맹주로서 정책방향을 설정하는데, 머지않아 고 유의 직무와 권리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동맹의 성격을 변질시켜 나가게 된다. 결성 할 당시에는 자발적으로 가입한 회원국들의 동맹이었던 것이 차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하 나의 제국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B.C.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에 있던 동맹국 공동의 보물 을 아테네로 옮기면서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아테네 신전에 관리를 위탁하였다. 게다가 아테 네는 아시아 도시국가에 갤리선 건조를 할당하거나 가혹한 기부금을 징수하는 등 여러 가지 혹독한 조치를 취하여 명맥상의 동맹국 칭호를 가지고 있던 도시국가들에게서 실질적으로 는 모든 자유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이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들의 반역은 무력으로 보복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제국 내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부유한 도시국가들의 반발 은 더욱 심했다. 아테네의 가혹행위는 스파르타, 메가라, 아이기나 들과 심각한 불화를 가 져왔다. B.C. 446년 스파르타와 평화조약을 맺을 때까지 두 나라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지속되었다. 아테네는 이제 에게해의 주인처럼 행사했다.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그 리스인간의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테네의 패권시대는 계속되었다. 아테네는 경제적 이 해관계가 상충하는 코린트와 메가라에 대해 여러 차례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참다 못한 코 린트와 메가라는 결국 스파르타와 연합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강력한 경쟁국인 아테네의 완고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 이다. 드디어 두 진영 사이에 대결양상이 전개되었다. 자신의 지배권 안에 있던 '동맹국들' 의 세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해병을 자랑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아테네시와 장갑보병을 자랑 하는 귀족주의 체제의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국가들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전쟁은 확전을 거듭했고,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의 자세한 모습은 밝혀 내기 매우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싸움은 일진일퇴 밀고 밀리는 상황이었다. B.C. 421년 평화협정 이 체결되면서 양쪽 진영은 다시금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B.C. 415년 아테네 시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이웃을 토벌하기 위해 원조를 요청해 오자 이를 승낙하는 무분별 한 짓을 감행하였다. 시라쿠사시와의 전투에서 아테네의 함대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병사들 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이에 따른 급격한 인구상실이 있었음에도 아테네는 9 년 동안 더 저항하였으나, B.C. 404년 마침내 함대를 반환하고 수비시설을 파괴하는 등 굴 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최후 B.C. 5세기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펼쳐지는 두 제국주의 진영의 대립과 역학관계를 분 석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B.C. 4세기경의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도시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이합집산이 되풀이되었고, 페르시아는 다시 그리스 국내 문제에 간섭하고 나섰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승리로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유리한 상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들 은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가혹하게 짓밟아 버렸으며, 아테네가 B.C. 449년 페르시아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B.C. 386년 페르시아와 2차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B.C. 371년 렉트라 전투에서 테베인들이 승리함에 따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까지 그리스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파르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한편 B.C. 404년 궁지에 몰렸던 아테네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제2차 델로스 동맹'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번에는 동맹국들의 자주권을 지난 세기보다 훨 씬 넉넉히 보장하였는데, 스파르타조차도 이 동맹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렉 트라 전투는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여는 시발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규모면에서는 단지 중위 정도를 지키던 테베시가 에파미논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힘을 합쳐 강력한 영 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산되어 있는 힘을 결집하여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테베는 9년 간 패권을 지켰다. 그러나 B.C. 362년 마티네 대회전을 고비로 테베의 패권시대도 막을 내린다. 엄청난 규모의 마티네 대회전에는 그리스 주요 도시국가들이 거의 모두 참전했는데, 에파미논다스는 이때 전사하고 말았다. 전 투 뒤에도 아테네는 그럭저럭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서투른 실수 를 저지른 아테네는 제2의 동맹국마저 잃었다. 그뒤 B.C. 335년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 세스3세의 강요에 못 이겨 협정을 맺음으로써 아테네는 완전히 몰락했다. 그 무렵 마케도 니아에서는 필립 2세가 즉위하여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다 피폐해진 그리스 도시국가를 압박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와 그 아들 알렉산더 대왕에게 무릎 을 꿇고 만다. 식민세계의 전성기 사람들은 종종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고대 도시국가를 유달리 강조하는 경향이 있 다. 더구나 현대사의 관점에서 두 도시국가의 역사적 의미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곤 한다. 이것은 적절치 못하다. 당시 서방 식민지에서는 플라톤이 예언했던 대로 야만인들의 위협이 점차 가중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식민세계 역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는 수사학과 희극이 빠른 발전을 보여 주었다. 셀리논테의 이중으로 된 신전 이나 아그리젠토에 건축된 사원의 테라스는, 그리스의 유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풍요로우며 장식에서도 가장 큰 감동을 자아내는 예술품으로 손꼽힌다. 변방에서도 헬레니 즘 문화는 한창 꽃피고 있었다. 특히 흑해 지방에서는 B.C. 480년에 킴메리아족의 보스포러 스 왕국이 탄생했는데 이 나라는 금은세공품으로 유명하였다. 그들의 금은세공술은 그리스 풍과 스키타이양식을 융합한 뛰어난 경지를 지녔다. B.C. 5세기에는 타지역에 비교해 볼 때 발전이 더디던 마르세유 지역도 넘치는 활력을 과시했다. 그들은 프로방스 해안지방에 새로 운 상품판매소를 설치하였다. 마르세유는 켈트족의 세계 힌터랜드(hinterland)와 교역하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전개를 펼쳤던 그리스 식민 세계를 한눈에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 B.C. 6세기 초 아테네 시민들은 솔론의 통치 이후 자신의 권력을 부단히 확대해 갔다. 솔 론은 평민의회의 최고기관인 평의회와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재판소 등 새로운 정치기구를 만들어 냈다. 그의 뒤를 이어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등장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 격을 더욱 넓혔다. 또 클레이스테네스는 만인의 의견표시(말의 평등권)를 장려했으며, 평의 회와 10개 부서로 나누어진 평의회의 하부조직 프리타니(prytany)의 활동을 보다 강화하였 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체제는 아직도 다분히 이론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페리클레스의 등장으로 비로소 진정한 제도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는 국가사업참여에 보수 를 지불하는 미스토포리(mistophorie)제도를 만들어 가난한 시민들의 생계유지에 도움을 주 었다. 이로써 모든 시민을 국가경제에 포함시키겠다는 그들의 의도는 제도적 틀을 갖출 수 있었고,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그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 가 해군과 육군, 기병대에도 이 제도를 적용해 그들 역시 봉급을 받게 되었다. 요컨대 국가 가 국민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들이 보수를 받는 직업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더욱 공고해졌다. 페리클레스는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축제를 더욱 자주 개최하는 한편, 모든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끔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이는 정책을 썼다. 다양한 미스토이(임금, 수당 또는 월급)로 시민들 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평의회는 아테네 민주정치 체제의 핵심으로 수레 바퀴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해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정책결정에서 평의회가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의회에서 추첨을 통해 선출된 자들로 구성된 평의 회는 행정관을 임명하고 그들을 엄중히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한편, 특별한 정치교육을 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평민의회는 하나의 결정안을 채택하기가 무섭게 그것을 번복할 만큼 변덕스럽고 동요되기 쉬운 집단이었으며 언변에 능한 사람이나 아첨꾼이 득세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더욱이 시민의 자격 또한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여성과 외국인은 시 민이 될 수가 없었다-외국인은 몇 세대 전부터 아테네에 살았어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가 없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헬라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진보된 체제이긴 했지만,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행해졌으며 한계 또한 많았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자신들의 운명을 각자 의 의식과 이해를 척도로 하여 자주적으로 결정할 권한과 다수결원칙을 철저히 법률로 규정 한 것으로는 최초인 만큼 의의가 매우 크다. 실상 아테네인의 의회정치에서는 민중지도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페리클레스는 건설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펼치면서 거의 30년 동 안이나 의회를 다스렸다. 투키디데스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으로 아테네 민주정을 비아냥거 렸다. "겉보기에는 민주주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이끄는 군주제와 다름없었다." 제우 스와 동등한 올림포스족이라고 칭송받던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로는 그만큼 주도면밀하고 지혜로우며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민회는 돌팔이 웅변가들의 무대로 전락 하고 말았다. B.C. 5세기 말에는 패전을 구실로 들고 나온 귀족들의 공모가 있었다. 소수 귀족집단이 권력을 잡은 뒤 민주주의 체제는 중지되고 말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바 지에 치달을 무렵에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방인의 신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독배 를 마셨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서도 사회의 혼란상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B.C. 4세 기에는 공공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고, B.C. 400년 이후에는 선동가의 제안 으로 평민의회에 출석하는 대가가 지불되기도 했다. 시민들은 군비에 쓰는 세금에는 인색했 지만, 흥행물에는 그렇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테오리크(theoric)라는 흥행물세를 거둬 빈민 구제기금으로 썼다. 이처럼 시민의식은 더욱 희박해져 병역의무마저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 고, 마침내 외국 용병에 의존해야 했다. 스파르타의 귀족정치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부에 자리잡았던 강력한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사회구조는 아테네 와 전혀 달랐다. 스파르타 시민은 세 개의 계층으로 분리된다. 호모이오이(homoioi)라는 평 민은 국가에서 토지를 할당받았고, 도리아인의 침공 이전에 그 지역에 살던 토착민의 후손 인 노예들은 평민의 토지를 경작했다. 그들은 숫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었고, 위험한 계층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세번째 계층은 외부거주자(perioeci)이다. 명목상 자유민인 이들은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떤 직업이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고 토 지도 경작할 수 있었으나, 오이로타스강 계곡만은 예외였다. 이 땅은 시민의 토지로서 '정 치적인 토지'라고도 불렀다. 오이로타스강 계곡의 토지는 원칙적으로 균등하게 분배되었는 데, 오직 시민만이 분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들의 구전에 따르면 이런 식의 토지분배는 신화적 인물 리쿠르고스(B.C. 9세기 이전에 스파르타를 다스렸다고 한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 제도는 구성원 개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는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공 동체적 평등의식의 발로에서 기원했다. 시민의 대다수는 병사였는데, 이것은 적의 공격에 대 비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노예집단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균등분배란 이상일 뿐이었다. 스파르타에도 처음부터 토지귀족이 존재했다. 이들은 '정치적 토지'말고 다른 토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올림피아 경기를 묘사 한 그림에서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올림피아 경기에 서도 토지귀족들이 월계관을 독차지하곤 했다. B.C. 550년경 평등을 부르짖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귀족들 가운데세도 특히 부유 한 사람들의 사치스런 생활에 제동을 가했고 외국과의 교역도 완전히 금지시켰다. 이로써 스파르타는 평등주의 국가로 한걸음 다가섰지만 그것은 단지 명목상의 표현에 불과했다. 전 통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몇몇 중요한 가문들의 위세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평등하게 땅을 배분한다는 이상적인 정책은 현실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없는 시민이 사망하는 경우, 그의 재산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돌아가게 되고, 이때 상속자는 죽 은 사람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결국 이렇게 하여 두세 개의 토지가 한 사람에게 귀속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반면에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간신히 연명할 정도의 할당량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평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였다. B.C. 5세기부터 사회구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B.C. 464년, 지진으로 사회가 혼 란스러워지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지주를 제거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B.C. 397년에는 노예와 중간계층 그리고 빈곤 때문에 하층민으로 전락한 시민들이 평민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유혈사태로 치달았다. 전통을 중시하던 이 사회는 제도적인 변화를 도모하기에는 너무도 보수적이었다. B.C. 4세기 초에 실시한 토지의 매매나 저당허용은 특권층의 이익으 로 귀결되었다. 또한 평민의회나 30인 원로 그리고 5인의 민선장관(시민의 투표로 선출함)들 이 비밀경찰을 고용하는 등 구습이 존속했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에 대한 교육이 국가의 책 임하에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겉치레에 불과하였다. 문학과 역사학의 발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고대 작가들이 50년 시대라 일컫는 시기로 접어든다. '50년 시대'는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때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 어나기 전까지의 반세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기에는 아테네인의 창조활동이 매우 활발 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창작활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쇠퇴의 길 을 걷는 중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페리클레스가 심혈을 기울여 번성을 꾀했던 '그리스 학 파'도 B.C. 4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리스 학파에 대해서 프랑스의 주교이자 학자인 펜 늘롱은 이렇게 말한다. "아테네에서는 모든 일이 시민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시민의 의사는 연설가들의 언변술에 좌우되었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체제로 점차 발전함에 따라 평민의회와 재판소에서 시민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시칠리아 출신 코락스와 테이시아스는 청중을 설득하는 변론술을 발전시켰다. 이는 아리 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극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부정을 저질러 정의를 누르고 승리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소 피스트들의 급격한 진출과 함께 수사학은 B.C. 5세기 말엽부터 B.C. 4세기 초에 걸쳐 꽃을 피운다. 수사학은 사고의 방법뿐 아니라 화술에도 매우 중요한 기술을 가르쳤다. 웅변 대필 가들의 변호문이 몇 편 전해지고 있는데, 문제에 실제로 관련된 인물은 전문변호사를 통해 서만 그들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필가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진술해야만 했 다. 또 의회에서 발표한 장황한 정치연설도 몇 편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마케도 니아 왕 필립 2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감동적이고도 열띤 연설을 펼쳤던 아테네의 애국 자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은 가히 걸작이라 하겠다. 이외에도 곳곳에서 큰 집회가 있을 때면 변론가가 반드시 참석하여 화려한 연설을 하곤 했는데, 이처럼 수사학을 필요로 하는 영역 은 매우 넓었다. 정치연설 중에서는 이소크라테스의 '파네규리코스'가 특히 유명하다. 수사학과 변론술이 사회적 욕구에 맞추어 크게 번성할 즈음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 우리피데스로 대표되는 비극도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비극과 민주주의는 서로 발전의 촉진 제 역할을 하였다. 비극은 토론을 활성화해 민주주의 정신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고, 민주주 의 발전은 비극 창작에 번뜩이는 영감을 주었다. 비극의 등장인물은 거의 대부분 영웅시대 의 왕족이었다. 비극은 영웅들의 화려한 활약상을 빌려 당대의 인물과 사회를 통렬히 비판 하거나 분석하는 잣대를 제공했다. 반면에 희극은 그 시대의 사회상 중에서도 주로 재산증 식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다. 희극도 비극 못지않게 시대적 관심사에 대해 심각한 반성 의 기회를 주었다. 비극은 B.C. 4세기에 이르러 시민정신의 퇴조와 함께 점점 쇠퇴의 길을 걷는다. 희극의 성격도 점차 변화했다. 그리하여 정치와 사회를 적나라하게 풍자했던 아리스 토파네스류에서 메난드로스 등이 이끄는 신희극으로 주류가 옮아간다. 한편 B.C. 6세기에 이오니아 지방에서 기원을 보았던 역사서술이 B.C. 5세기 헤로도토스 의 등장과 함께 눈부시게 발전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 는 페르시아 전쟁과 야만인 사회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야만인의 신기하고 색다른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투키디데스는 사료를 정확하고 엄격하게 분 석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과학적 역사연구 방법론은 후에 폴리비오스나 타키투스 등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들은 투키디데스의 모범을 좇아 역사를 '시간을 초월한 지식'으로서 추구 하였다.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이성을 추구하는 수학과 철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는 이오니아 지방과 서방 식민지에서 아르카이즘 정신에 입각하 여 우주와 자연에 대해 사유했다. 뒤이어 소피스트가 등장했는데,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흐 름을 관통하고 있는 개념이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단어, 담화, 이성을 뜻하는 말로, 로고스를 추구한 철학자라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꼽을 수 있다. 현실비판 적이면서도 풍자적이고 상대적인 사유방법을 추구했던 소피스트는 훗날 계몽주의 사상가에 게도 볼 수 있는 방법론적 회의에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전시대의 자연 철학자를 독단적이라고 비판했고, 동시대의 소피스트를 지식을 파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면 서 지혜의 탐구자임을 자처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오한 저작들은 오늘날까지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 끊임없이 인류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플라톤은 절대적 이상주의를 표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이 세계는 단지 우리의 사고가 빚어 낸 형상일 뿐이며 인간은 미와 사랑을 통해서만 실재인 이데아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기하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열정 만큼이나 생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의 정신을 몇 등급으로 나누어 정리하기도 하였다. 학자들의 활동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소수의 젊은 엘리트들만이 그들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예술작품에도 도시국가와 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있다. 올림피아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 대모신 신앙의 신비로운 세계에 입문하게 하는 엘레우시 스의 데메테르 여신, 코레 여신 신전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제우스 신전의 벽면은 헤라클레스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엘레우시스 신전에서 는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뛰어난 부조를 감상할 수 있다. 부조에는 어린 신트립톨레 무스가 데메테르와 페르세폰, 두 여신에게 신성한 밀알을 건네 받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밀알에서 모든 곡물이 자라게 된다. B.C. 5세기 아테네 예술의 가장 위대한 면모는 페리클 레스가 발의하고 페이디아스가 감독한 아크로폴리스 복합건축물의 디자인과 실행이다. 이 는 고대 미케네 시대의 석조건축물이 남아 있는 성벽 안에 아테네 여신에게 바쳐진 세 개의 신전을 함께 모은다는 의도를 가지고 건축되었다. 프로피라이아라는 웅장한 입구를 지나 아 크로폴리스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 지어진 건축물과 함께 위대한 고대 건축물의 잔해가 서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르테논 신전의 화려함이다. B.C. 447년에 세워진 파 르테논 신전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보물창고였으며, 또한 그들의 수호신 아테네에게 바쳐진 성역이기도 했다. 새 건축물은 정교한 조각품들로 뒤덮여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은 특히 아름답다. 박공벽 한쪽에는 아테네의 탄생을 묘사했고, 다른 한쪽에는 여신이 삼촌 포 세이돈과 싸우는 모습을 그렸다. 켄타우로스(반인반마의 모습을 지닌 괴물), 아마조네스(흑 해 연안에 살았다는 전설적인 여성전사)와 겨룬 싸움이 상징적으로 새겨 있는 벽도 있는데, 이것은 질서가 혼돈을 물리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신전 외벽을 장식한 띠 모양 의 조각은 아테네인의 일상생활을 보여 준다. 매년 열렸던 범아테네 제전에서 기병대와 행 정관, 제물을 가득 채운 바구니를 머리에 인 처녀들, 그리고 외국인들이 신전 전면에 조각되 어 있는 신들의 무리를 향해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신들은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인 간세계와 전혀 무관한 인상이다. '50년 시대'의 아테네 예술은 장엄함과 고요미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육지와 바다를 제패 한 시민들의 긍지가 배어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지도자 아테네, 모든 예술가들의 정신 적 고향 아테네, 바로 그 아테네의 명성에 어울리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예술 속에 구현된 이러한 평정과 부동성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B.C. 5세기 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의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각가들은 균형을 잃었고, 도 자기그림은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안의 표출이었다. B.C. 4세기에는 돌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의 고통에 신을 근접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려는 노력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 중요한 변화는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었다는 점이다. 에피 다우로스에는 그 지역에서 숭배되던 신을 기리기위해 톨로스(tholos, 원형신전)가 건축되었 는데, 델포이 신전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이 신전의 건축양식은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더쥐 모습을 하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를 기리는 전통의식이 거행되 었다. 한편, 프락시텔레스는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젊은이와 허리를 굽혀 흐느끼고 있 는 처녀의 모습을 조각했는데, 스코파스의 작품은 남성적이고 정열적이다. 또 인체 각 부위 의 비율을 정립한 리시포스는 신을 보는 인간의 시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알렉 산더의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했는데, 이것은 군주의 영광을 예술작품 속에 실현하려는 첫 번째 노력이었다. 당시 예술활동에 신비주의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신 비주의는 혼란스러운 시대가 산출해 낸 산물이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신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은 신에 대한 그리스인의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전에 바치는 봉헌물은 더욱 늘어 갔다. 이 같은 현상은 그리스인이 혹독한 시련을 겪 던 시기에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작용하였던 델포이 신전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종교적 변 화와 사회적 변화는 서로 밀접하게 작용하는 것이어서 이때 새로 건설되는 사회의 성격이 종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미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민중에게서 큰 숭배를 받던 지신, 데메테르와 코레,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제전을 더욱 확대하여 국민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네 숭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열렬한 것이었다. 이와 같 은 성향은 정치까지 파급되어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아테네 여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을 세우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아테네 여신의 축제인 범아테나이아는 세월이 흐를수 록 성대히 치러져 화려한 대제전을 이루었다. 엘레우시스에 있는 데메테르 여신과 코레 여 신의 신전도 대폭 확장되었는데, 이는 크레타의 전통 속에 뿌리박혀 있는 신비주의적 신앙 이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되었음을 뜻한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손된 이 신전에 먼저 귀족 당의 대표 키몬이 입문실을 복원하였으며, 후에 페리클레스는 신전의 규모를 두 배로 확장 하였다. 디오니소스에게는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새로 세운 신전을 헌납하였다. 그것말고도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등장했는데, 이때는 흥겨운 향연이 함께 이루어 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아테네에서 행해진 '디오니시아(Dionysia)'는 화려한 행렬과 극의 상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랑하였다.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코레에 대 한 숭배가 확대됨에 따라 도시국가의 신들과 집단의 번식을 보호하는 신들 사이에 일종의 교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테네 여신이 다신과 풍요의 신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번식을 관장하는 여신들-아크로폴리스에 그 신전이 있는 처녀신 아르테미스 여신도 포함하여-에 대한 숭배는 보다 뿌리깊은 종교적 발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연의 순환과 성인세계에 입문하는 성인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농경과 연관된 비교적 절제된 신비주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점점 개인적인 성향을 띠는 시민들의 욕구에 예전의 신비주의는 더 이상 호응받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초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전 소크라테스 학파와 소피스트의 이성주의가 전통적 신앙을 뒤흔들어 놓은 틈을 타서 전 대미문의 강렬하고 무절제한 또 다른 형태의 신비주의가 기존의 종교를 전복해 버리기에 이 르렀다. 그리고 B.C. 415년에 이르러서는 페니키아에서 아도니스 숭배가 도입되었다. 아도니 스는 아프로디테의 젊은 연인으로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면서 아테네 신들 속으로 쉽게 동 화되었다. 동양적인 신비주의 의식의 시발점이 되는 아도니스 제식은 매우 요란하면서도 감 동에 찬 행사로서, 아도니스의 영광과 굴욕을 연출하면서 그의 정열을 기리는 의식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가져온 많은 변화와 혼란은 이러한 방식의 신앙생활을 더욱 활성화시 켰다. 전통적으로 아테네 신전에서 숭배받고 있던 몇몇 신들의 신격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경우가 그랬다. 메나데스(Menades:이성을 잃은 여자)로 구성된 신도에 둘러 싸여 등장하는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와 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구원적 사랑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적세계를 지배한다는 이 여신 은 생식력과 관능적 충동을 한몸에 지닌 신으로 추앙받았다. 에피다우로스에 신전이 있는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도 마찬가지인데, 원래는 단순히 영웅에 불과하던 그가 이제는 그리스 에서 가장 숭앙받는 신의 하나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신과 신도의 교감을 부추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든지 그들은 외국의 신앙까지 도입하게 된다. 주요 대상은 아시 아의 신들이었다. 동방의 신들이 그리스에 많이 들어오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두드러지는 현상이지만, 이미 이때부터 그리스인의 상상력과 종교생활의 저변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변화의 징조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이며, 동시에 신에 대한 열망이 처음으로 강하게 진동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반응하였다. 예컨대 플라톤과 프락시텔레스는 현실세 계 위에 하나의 이상세계를 구상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았으나, 가난한 자들과 여인들은 싸구 려 신비주의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경쟁의 승자, 마케도니아 종교적 열정을 강화하는 기운은 도시국가의 한계를 넘는 범세계적인 면을 내포했으나 정 치적으로는 실패였다. 왜냐하면 도시국가의 구조 자체가 이제 더 이상 시대적 욕구에 부응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B.C. 338년 케로네아 계곡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에 패배함으로써 그리스 도시국가는 사실상 독립성을 잃고 말았다. 승전한 마케도니아는 폴리스에서 가장 신성하게 존중되는 법규에 대해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서 애꾸눈 안티고네왕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트는 판테온 신전에 할렘을 설치 했다. 한 아첨꾼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부도덕한 시를 헌정하였는데, 이는 도시국가의 신 들에게 퍼붓는 노골적인 모욕과 다름없었다. "신은 저 멀리 있습니다. 가까이 있더라도 신 은 듣지 못합니다. 어쩌면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데메트리오스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당신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무도 돌도 아닌 실제로 존재 하는 당신을!" 그리스와 유럽 그리스 도시국가의 말기 상황을 분석할 경우 긍정적인 측면만 내세울 수는 없지만, 부정 적인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또한 부당한 일일 것이다. 헬레니즘이 여성혐오주의 문화 였고, 야만인을 멸시했으며 비인간적 노예사회였음은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 움직이는 도구'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먼저 그리스의 역사는 마케도 니아의 정복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정복이라는 어마어마한 야심에 제국의 백성과 동맹국의 국민을 함께 참여시켰다. 바로 그 순간부터 새 로운 세계가 싹텄는데, 거대한 헬레니즘의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인도 무려 3세기 동안 아시 아의 내륙지방과 이집트에서 계속 위력을 떨쳤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유럽의 정 치와 문화 전반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용어들-이를테면 정치, 민주주의, 귀족주의, 비극, 희 극, 철학, 역사, 지리, 수학, 신비주의 등-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점이다. 기록과 증언 이상적인 미에 대한 그리스인의 찬양, 망루에 선 아폴론 요한 빙켈만(Jobann Winckelmann)은 1755년 자신의 첫 저서에서 당시 서구 사상의 주류를 거슬렀다. 그는 바로 크 양식에 반기를 들고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그리스 예술의 단순미를 제창하였으며,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예술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그의 이러한 예술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신고전주의 문학과 예술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세월의 거친 풍파에 맞서서 살아 남은 예술작품이 많이 있지만, '망루에 선 아폴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아폴론에 대한 시적 묘사에서 호머의 표현이 가장 뛰어나듯이 아폴론의 모습을 구현한 수많은 예술품 중에서는 이 작품이 가장 탁월하다. 행 복으로 충만한 세상, 샹젤리제에서 군림하는 아폴론, 영원한 청춘을 간직하고 있는 아폴론의 모습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빛나는 젊음으로 한층 부각되어 있는 이 육체의 남성미는 힘차게 뻗어 있는 그의 팔다리 위를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무형의 미의 왕국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 그리고 천상의 예 술을 잉태하는 창조자가 되어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명상에 잠길 수 있도록 영 혼을 승화시켜 보라. 그곳에는 사멸하는 것도 없고 인간의 생존본능에 지배받는 것도 없다. 단지 천상의 에스프리만이 잔잔히 흐르는 냇물처럼 내부를 순환하고 있을 뿐이다. 처음으 로 아폴론이 무서운 위력을 가진 자신의 화살을 당긴 것은 피톤(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식 이라고 전하는 거대한 뱀)을 향해서였다. 그는 재빠른 뜀박질로 상대를 추격하여 최후의 일 격을 가했다. 위엄에 찬 그의 시선은 환희에 넘쳐서 승리의 경지 저 너머로 무한을 꿰뚫으 면서 뻗어 나간다. 경멸의 빛이 그의 입가에 감돌고, 참을 수 없는 격분으로 그의 콧구멍은 부풀어 있으며, 노여움이 눈썹까지 치올라 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침범할 수 없는 평화 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고 그의 눈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예전에 한 시인의 예지에 의해 모든 신의 아버지 제우스의 모습이 훌륭히 구현된 적이 있지만, 하나의 예술작 품으로 전해지는 제우스의 모습 중에는 여기 그의 아들이 보여 주는 자태만큼 완벽하게 그 의 위대함이 표현된 것은 없다. 다른 모든 신들이 가진 신성한 아름다움이 이 아폴론의 형 상에 다 모여 있는 듯하다. 아폴론의 이마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잉태하고 있던 제우스의 이마 그대로이며, 눈썹은 그의 굳은 의지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둥근 안공 속의 눈은 모든 여신들을 지배하는 대여신이 가졌던 눈 그대로이며, 입술은 미남 브란쿠스에게 정욕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던 바로 그 입술이다. 포도나무에서 태어난 듯한 머리카락은 마치 제푸로스 (의인화된 서풍의 이름)의 입김으로 흩날리는 듯 성스러운 그의 머리 주위에서 물결치고 있 다. 그 머리카락은 신액의 향기를 머금은 것 같고 자비의 여신들의 손으로 머리 꼭대기에서 아무렇게나 묶여진 것처럼 보인다. 이 예술의 기적을 보며 예언의 영감으로 가득 찬 자들만 이 느낄 수 있는 감동에 휩싸인 나는 어느새 델로스섬으로 리키아(소아시아 남부 해안지방) 의 신성한 숲으로 내 몸이 이동하는 것을 발견한다. 아폴론이 행차했다는 영광을 받은 그곳 으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미는 피그말리온의 끌과 정이 탄생시킨 지고한 미인이 신에게 부여받았다는 생명력과 똑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 흉내낼수 없는 명작이여. 너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예술 그 자체가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내 붓끝을 인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너의 자태를 묘사하기 위해 지금까지 애쓰며 끄적거린 이 짧은 글을 네 발치에 바친다. (요한 빙켈만, '회화와 조각에서의 그리스 모방론') 아테네인의 종교 생활 프랑스의 역사가 퓌스텔 드 쿨랑주(Fustel de Coulange)의 '고대 도시국가'는 19세기 역 사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가 고대인의 가족구조와 도시국가구조의 기본원리 였음을 보여 주었다. 다음은 아테네인의 종교생활을 다룬 그의 글이다. 로마인만이 신에게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의 가슴에도 신에 대한 두려움 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스민족은 초창기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정신적 유산을 오랫동 안 간직하였다. 특히 스파르타인은 조심성 많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은 달이 차기 전에 는 결코 원정을 떠나는 일이 없었고, 전투를 개시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서 수 많은 제물을 바쳤으며, 완벽하게 구상된 계획이나 반드시 해야 할 일도 불길한 징조가 보이 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곤 하였다. 아테네인은 그 사고방식이나 민족성에서 로마나 스파르타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일맥상통한다. 아테네 병사들은 그달의 일곱 번째 날이 되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았으며, 함대가 바다로 떠날 때는 팔라스(Pallas:아테 네 여신의 별칭)상에 다시 정성스럽게 도금하였다. 크세노폰은 다른 어떤 그리스 도시국가 보다 아테네시에서 가장 많은 종교제전이 이루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것은 아리스토 파네스나 플라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테네시와 주변 지역은 수많은 신전과 제단 으로 뒤덮여 있다. 이곳에서는 도시국가가 주관하는 제식에서 종족 내의 제식, 그리고 데메 스(demes:아테네의 행정 단위)의 제식과 가족 단위의 제식 등이 제각기 행해지고 있었다. 모든 가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전이었으며 널찍한 터에는 대개 성스러운 묘지가 하나쯤 있었다. 아테네인은 오랜 전통과 의식에 대해서 각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인의 주된 종교 자체이며 가장 헌신적인 신앙을 바치던 대상은 그들의 선조와 영웅이었다. 이들 을 대상으로 아테네인은 제사를 바쳤으며, 따라서 망혼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매년 첫 수확물을 죽은 사람들에게 바치도록 법으로 규정해 두었고, 죽은 자의 화를 불러일으킬 만한 언사는 한마디도 발설하지 못하도록 또한 법으로 금지하였다. 이처럼 아테네인은 선조 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신성화했다. 또한 그들은 제식을 치를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절차를 자세히 기록해 두기도 했는데, 거 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참으로 기이한 의식들이 생겨났 다. 1년 중 한 번은 테세우스(아티카의 영웅)의 연인인 아리아드네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것 을 기억하는 제식을 거행했는데, 의식에서는 분만의 몸부림과 외침을 그대로 재현했다. 다른 연중제식인 오초포리는 테세우스가 아티카로 귀환하였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무언극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날 아테네인은 테세우스의 군사령관이 했던 것처럼 군사령관의 지팡이에 왕관을 씌우고 테세우스가 살았던 시대의 복장을 입고서는 그가 외쳤으리라고 상상되는 소 리를 부르짖으며 행진했다. 어떤 날은 냄비에 야채를 넣고 끓이는 의식도 거행했는데, 그들 도 그 의식의 의미를 몰랐던 것 같다. 아테네인도 로마인처럼 불길한 날을 정해 놓고 있었 다. 이런 날에는 결혼식을 치르는 일은 결코 없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평민의회도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매월 18일과 19일은 정결의식이 치러졌다. 그 어떤 흉일 보다도 가장 불길한 날인 플린테리(Plynteries) 날에는 아테네 수호신의 조각상을 베일로 덮 었다. 반면 아테네 여신의 축제일에는 여신상에 씌웠던 베일을 걷어 들고 시민들이 긴 행렬 을 하였다. 이때 시민들은 모두 여신을 수행해야만 했다. 아테네인은 또한 풍성한 수확과 농 사짓기 알맞은 날씨를 기원할 때,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기근이나 페스트를 몰아내기 위 해서도 제물을 바쳤다. 로마인이 시빌(예언의 의인화 또는 예언을 하는 여인)들이 남긴 책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 처럼 아테네인도 과거의 신탁을 모아 두었다. 그뿐 아니라 아테네는 프루타네이온에 예언자 를 묵게 하였다. 그리고 길목 곳곳에서는 점쟁이, 제관, 해몽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또 한 징후들을 맹신하는 습성도 있었는데, 재채기를 하거나 귀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곤 했 고, 항해를 떠나기 전에는 예언에 귀를 기울였으며,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는 새의 날아다님 을 해독했고, 병에 걸렸을 때는 부적을 목에 걸고 다녔을 만큼 주술에 의존했던 그들은 불 길한 조짐이 하늘에 비치면 평민의회를 해산하기도 했다. 아테네인은 무슨 말을 할 때면 먼 저 행운을 기원하는 말을 꺼내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연단에 선 웅변가도 신탁을 내세워 대중을 설득시키려 했다. 연설가들은 "여신이 그렇게 명령하셨다."는 말을 번번이 되뇌었는 데, 그것은 자신의 연설에 더욱 큰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퓌스텔 드 쿨랑주, '고대 도시국가') 아크로폴리스에서 올린 기도 에르네 르낭(Ernest Renan, 19세기 말의 프랑스 작가)이 아테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감 동을 적은 기도문이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회고'라는 저서에 '아크로폴리스의 완벽한 아름 다움을 이해하게 된 순간 그 자리에서 올린 기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오, 고결함이여, 꾸밈없고 진실된 아름다움이여! 여신이여, 당신을 숭배하는 것은 이성과 지혜의 숭배이며, 당신의 신전은 의식과 참됨의 교훈,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신비로운 당신의 세계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당신의 제단 위에 나의 회한을 바칩니다. 당신을 발견하기까 지 그동안 나는 무한한 탐구를 해야 했습니다. 당신이 아테네인에게 전수해 준 비전은 그저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어서 나는 그것을 얻으려고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을 하고 숙고했습니 다." 르낭은 아테네 숭배가 너무나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 있었다고 말한다. "진실이여, 1,000년 동안 사람들은 당신을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야만인의 종교는 기세가 더욱 확장되기만 하여 여신을 섬기는 종교를 잠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르낭 은 이러한 점을 느끼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여신이 이러한 인간들을 용 서해 주기를 기원하며 이렇게 기도한다. "위대한 인간과 영웅의 거처에 불을 지피고 그 불 을 관리하는 불씨여, 우리의 영혼이 완전의 경지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 세상은 당 신에게 의탁함으로써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 몸을 무장할 것이며 그리하여 파멸로 이끄는 속삭임들에 대해 저항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민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회의주의에 저항할 것이며 이성을 발견한 지금까지도 내 영혼을 동요하는 마음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오, 아르케제트여, 천재적인 인간의 작품속에 구현된 이상형이여,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귀빈의 대접을 받기보다는 당신의 집에 초대된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신전 기둥의 받침에 나 자신을 묶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교훈 이외의 것은 모 두 잊겠습니다. 나는 고행하는 수도사가 되어 당신 신전의 원주 위에서 도를 구하겠습니다. 나의 방은 당신의 원주가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가혹하고 불공평한 사람이 되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연모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언어를 배우겠습니다. 그외에는 어떤 다른 말도 다 잊어버리렵니 다. 당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일에 대해서든 나는 무조건 부당하게 처신할 것입니 다. 나는 당신의 자손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아들을 섬기는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이 에레스테에게 주었던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찬양하고 칭송하며 그 들의 단점까지도 좋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 히피아여, 당신의 신전을 꾸미고 있는 저 기 저 소벽에는 제전을 열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백성이 그들의 후예라고 믿겠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이성과 순수예술에 대한 관심 이외의 것은 모 두 없애겠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자신의 병적 기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나의 열정에 자족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나의 확고한 결심을 지지하여 주십 시오. 오, 살류테르, 도와주소서. 오, 그대, 구원자여. '얼마나 많은 현실적 난관에 부딪힐 것인가! 얼마나 많은 정신적 습관들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달콤한 기 억들을 내 가슴속에서 제거해 버려야 할 것인가!' 나는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이여. 나는 뒷걸음질도 칠 것이고 약한 면도 보일 것입니다. 하나의 철학이, 아마도 사악한 철학 이 내게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 주었는가 봅니다. 선과 악, 즐거움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이성과 광기는 비둘기의 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잘라 말할 수 없듯이 확실하 게 선을 그을 수 없이 미묘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진정 사랑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회나 철학, 아니면 종교가 절대적인 진리를 구해 냈다고 한다면, 그 사회나 철학, 또는 그 종교는 다른 것들을 물리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유일하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다 오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 리가 과거를 평가하고 취사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사상들이 미래에 재평가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만심에서 나온 얘기일 것입니다. 지금 까지 한 말들은 모두 오염된 나의 정신이 내게 속삭이는 불경스러운 언사입니다. 만약 이런 것에 마음이 솔깃해졌다면 당신의 문학처럼 모든 면에서 성스러운 문학은 권태만을 자아내 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나의 순진함에 미소를 띠겠지요. 우리는 권태로 부패하였습니 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통찰력을 지닌 여신이여,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퇴폐까지 고백하겠습니 다. 솔직히 나는 이성과 상식만으로는 충분히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얼어붙은 스트리몬과 트라키아의 취기에는 이성을 뛰어넘는 더 풍부한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후예들이 권태의 후예로 받아들여질 시대가 언젠가 찾아올 것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만일 당신이 극지의 새하얀 눈과 남극 하늘의 신비를 보았다면, 오, 항상 평온 한 여신이여, 당신의 이마는 예전 같은 평온을 보여 주지 못할 것이며, 이제 넓은 세상을 향 해 새롭게 눈을 뜬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옹할 것입니다. 당신은 진실하고 순수하며 완전합니다. 당신의 대리석은 얼룩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비잔틴에 있는 하지아-소피아 사 원의 벽돌과 회벽 역시 순수함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원은 하늘의 궁륭을 재 현하고 있습니다. 그 사원은 무너지겠지요. 그러나 당신의 신전에 있는 신상안치소가 그만큼 많은 신도들을 수용할 만큼 컸어야 했다면 당신의 사원 역시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거대 한 망각의 강이 흘러 이름도 없는 심연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었습니다. 오, 심연이여, 당신 만이 유일한 신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들이 흘린 눈물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현자들의 사유에도 진실의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승의 모든 것은 단지 상징이며 꿈 일 뿐입니다. 신 또한 인간처럼 사라져 갑니다. 영원한 신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 니다. 신앙이 우리를 구속하는 사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자색 수의에 싸서 죽은 신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 정성껏 모셔 두는 것으로 우리는 신앙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르네 르낭, '유년기와 청년기의 회고') 청동기시대궁전에서 발견된 음절문자들 군주체제의 크레타와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표의문자들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계 통적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크레타인의 선문자 A와 아 카이아인의 선문자 B다. 선문자 B는 선문자 A에서 파생된 것으로 크레타의 서기관이 그들 의 언어와 다른 그리스어를 기록하기 위하여 기존의 문자를 응용한 것이다. 연구 결과 선 문자 B는 500여 년 가까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는데, 그동안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미노스 시대 사람들은 세 가지 기록체계를 연이어 개발했다. 처음 두 가지는 상형문자 체 계였고 마지막 것은 선문자(선문자 A)였다. 오늘날 선문자의 비밀이 몇 가지 밝혀지긴 했지 만 이 세 가지 문자들은 여지껏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 다나 이 같은 표기체계들이 어떤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쓰였는지조차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 다. 선문자 B는 선문자 A(아마도 B.C. 17세기부터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를 바탕으로 하여 고안된 문자로서 처음에는 미케네 궁전에서 사용되었는데, 아카이아인이 크레타를 정 복한 뒤 크레타 궁전에서도 사용되었다. 선문자 B는 88개의 부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문 자의 대부분은 선문자 A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이 문자는 1951년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해독되었다. 이 문자의 해독으로 먼저 서판들이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것은 B.C. 2000년경 그리스 본토의 인구가 크레타로 이주했으리라는 가설을 확증해 준다)과 여기 에 쓰였던 그리스어가 호머의 서사시에 쓰였던 그리스어보다 500년 전의 것이라는 사실 등 이 밝혀졌다. 즉, 그리스어는 에게해 건너편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인이 사용했던 구어와 함께 인도-유럽어로서는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경제생 활에 대한 풍부한 정보-토지 관리방식, 왕실에서 소유하던 가축들의 용도, 대장장이의 작업 현황과 그들에 대한 감시체제, 노예제도-를 담고 있었다. 종교에 관한 기록을 담은 서판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특히 의식을 치르기 위해 도자 기나 향불, 향료가 든 기름 등 왕실의 보물을 사용하는 경우에 신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문자는 물건의 수효를 가늠하는 계산과 기록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 나 같은 시기에 아시아에서는 선문자의 불편함을 피할 수 있는 더욱 세련된 자음조직을 갖 춘 알파벳이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훗날 도시국가에서 사용될 그리스 문자 의 근본이 되었다. (피에르 레베크) 미케네 서판에 나타나 있는 신들의 계보 올림포스 신족의 계보는 미케네 시대보다 몇 세기 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 족의 계보에 들어 있는 주요한 신들은 이미 미케네 서판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신 들은 아주 보잘것없는 신으로 전락하여 단지 명맥만을 유지하기도 했고(Ilitbya는 예전에는 대지의 여신이었으나 나중에는 순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신격이 축소되었다), 또 어떤 신들 의 신격은 대신안에 수용되기도 했으며(Paiawon이 누리던 신격은 아폴론 신으로 합치되었 다) 어떤 신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신: 아폴론, 아레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포세이돈, 에니알리오스, 파이아원, 스민테우스, 자그레우스, 도포타(=주인), 와낙스(=왕)여신 : 아프로디테, 아르테미 스, 아테네, 데메테르, 헤라, 에피메데이아, 에리니스, 일리티아, 시토, 마테레 테이자(=성모), 포트니아(=여주인), 와나소이(=여왕) 아티카 도자기의 발전 아테네 도자기는 다양한 변형을 거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중심으로 한 추상적 양식이 풍미하던 시대를 거쳐 매우 화려한 동양풍의 시기로 넘어갔으며, B.C.6세 기부터는 도자기 위에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붉은색 진흙으로 된 도자 기 위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B.C.540년경부터는 그림이 있는 부분은 붉 은색을 그대로 둔 채 바탕은 검은색으로 채색된다. 이 기법의 개발로 도자기의 장식그림은 더할 나위 없는 정교함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다. 솔론, 입법자 그리고 시인 솔론은 부채를 탕감해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아테네인에 게 새로운 정치체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가 애가에 자신의 행적과 정치적 노선으로서의 중용주의를 담았는데, 이중 몇 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의 정체>에 실려 있다. 1. 그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국민에게 충분한 권리를 주었다. 그들의 권 리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았고 조금도 더하지 않았으며 힘을 가진 자와 자신의 부귀로써 힘 을 과시하는 자에게 못마땅한 것이 없도록 조처하였다. 나는 양편 모두의 든든한 보호자로 서 해야 할 의무를 밀고 나갔으며 어느 한쪽이 부당하게 승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2. 국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라의 우두머리가 국민을 학 대하지도 또 너무 자유분방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때 국민은 지도자를 가장 잘 따를 것이 다. 왜냐하면 현명하지 못한 자에게 갑자기 행운이 떨어지면 비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3. 토지분배를 원하는 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광적인 희망을 가지고 약탈에 가담했 고, 큰 부를 얻을 거라고 기대했다. 내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거짓된 말로 자기들을 기만하 고 있음을, 내 이면에 잔혹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다.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가! 지금 사람들은 나를 원수로 보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 냐하면 나는 약속한 것을 신의 가호 아래 이루어 냈으며,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경박 하게 처신하지 않았고, 독재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업무를 처리한 적도 없으며, 비옥한 조국 의 땅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다." 4. 부채탕감과 노예신분에 해방된 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렇다. 내가 국 민들을 단합시켜서 이루려고 했던 일 중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 무엇보다도 시간의 심판대 앞에서 나를 가장 잘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는 올림포스신들의 위 대한 어머니, 검은 땅이다. 나는 방방곡곡에서 땅속 깊이 박힌 말뚝들을 뽑아 버렸다. 예전 에는 속박에 지나지 않았던 이 땅이 이제는 자유의 땅으로 변했다. 나는 많은 동포들을 신 들이 건설한 우리의 조국 아테네로 다시 불러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로 팔려 조국을 떠났던 자들이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끔찍스러운 가난 때문에 유배생활로 전락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타향을 전전하며 살아와서 아티카의 말을 잊은 경 우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로 여기 우리 도시에서도 수치스러운 노예생활을 하며 그 들 주인의 잔혹하고 변덕스런 성미 앞에서 오금을 떨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자유롭 게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실행할 때 정의와 현실적 제약을 동시에 참작하 면서 법에 의거하여 진행했으며 내가 약속했던 바를 끝까지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선 한 자들과 악한 자들 양자에게 각각 합당하고 공평한 법을 만들었다. 만약 나 이외의 어떤 사악하고 욕심 많은 사람 하나가 국민들을 마구 몰아쳤다면 그는 국민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때 국민의 적인 토지귀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정책만 폈다면, 혹은 그들이 마음속으로부터 국민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바의 정책만 폈다면 우리는 많은 국민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 는 온 힘을 다해 그들 모두를 멀리하고자 했다. 마치 사냥개의 무리에 둘러싸여 그 한가운 데에 있는 늑대처럼..."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정체') 나우크라티스, 이집트 영토내의 그리스 조계지 곳곳에 식민시를 개척했던 그리스인은 중요 교역로 위에 무역기지를 건설하 기로 했다. 이러한 정착지들은 현지 권력의 승인을 얻어 개설한 상인들의 조계지였다. 그 예로 이집트에 개설한 교역소 나우크라티스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마시스(B.C. 568-B.C. 526)는 그리스인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인에게 여러 이권을 부여했는데, 특히 나우크라티스를 내주어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이집트에 정착하기보다는 더 멀리 향해를 떠나 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제단을 차려 놓고 성역을 만들 수 있는 땅을 제공했는데, 이들 중 가 장 크고 유명하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들던 성역은 헬레니온이었다. 이곳은 키오스, 테 오스, 포카이아, 클라조메네스 등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과 로도스, 크니드, 할리카르나스, 파셀리스 등 도리아의 도시국가들, 그리고 아이올리아의 도시국가 미틸레네가 힘을 합쳐 공 동으로 설립했다. 이들은 공동소유인 성단에 감시관을 파견했고, 다른 도시국가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른 도시국가에는 그럴 권리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기나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 특한 제우스의 성역을 만들었고, 사모스 사람들은 헤라의 성역을, 그리고 밀레토스 사람들은 아폴론의 성역을 따로 만들었다. 예전에 나우크라티스는 이집트의 유일한 상업항이었다. 어쩌다가 한 상인이 나일강의 다 른 하구로 입국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그는 고의적으로 장소를 혼동한 것이 아님을 맹세해야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진의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서약을 한 뒤 카노피크라 통칭되던 나일강의 다른 하구로 다시 항해해야만 했다. 이때 마침 역풍이 불어서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면 배에 실었던 화물들을 나룻배에 옮겨 싣고 나일강을 따라 삼각주를 빙 돌아서 나우크 라티스까지 운반해야만 했다. 나우크라티스 항구는 이처럼 특권을 누리던 도시였다. ('역사' 제2권, 헤로도토스) B.C. 5세기 초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두 대학자 밀레토스 학파의 맥을 이어 헤라클레이토스도 우주의 생성과 활동에 대한 근본원리를 탐 구하였다. 그는 우주의 근본을 불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주만물은 생성유전하며 항상 유동 의 상태라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변화는 감각의 환영이라고 믿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3세기에 활약한 그리스 전기작가이다. 그는 열 권짜리 책을 남겨 그리스 철학자들의 삶을 전해 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렸을 때부터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은 아 무것도 모른다고 선언하였으나,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고 자처했다. 그 는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스스로 깨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 티온은 그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라고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일관되게 자연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 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만물의 전체에 관한 사유, 그리고 정치 에 관한 사유, 마지막으로 종교에 관한 사유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을 아르테미스 여 신의 신전에 맡겨 놓았는데, 어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부러 애매모호한 문체를 사 용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것은 활발한 지적능력의 소유자만이 자신의 책을 이해하기 바 랐기 때문이며, 아울러 그 책의 성공에 따르는 시기와 질투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 였다. 티몬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무리 중에 관중을 모독하고 수수께끼같은 말을 내뱉던 헤라클레이토스라는 고함꾼이 있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헤라클 레이토스가 저작을 미완성으로 남겨 두기도 하고 때로 어떤 부분에서는 일관성이 없이 서술 한 것은 그의 우수에 싸인 기질 때문이라고 하였다. 안티스테네스는 '계승'이라는 저서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위대한 정신을 대변하는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신의 남자형제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이상이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평판이다. 이후 그 의 이름을 따서 헤라클레이토스 학파가 생겨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물은 불에서 생겨났으며 불 속에서 성장하고 불 속 에서 소멸한다. 만물은 운명에 따라 변화하며 반대편과의 화합을 통해서 조화를 이룬다. 만 상은 영혼과 악마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우주에서 질서정연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야 기하기도 하고 우리가 보는 태양이 실제와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또한 그는 "영혼의 한계 는 ...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만심이야말로 크나큰 죄악이며 삶은 기만이라고 했다. 헤 라클레이토스도 때로는 가장 우둔한 사람까지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쾌하게 발언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몽매한 자들도 그의 말을 듣고 영혼이 승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간결하면서도 심오하다는 점에서는 그의 사상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었 다. 그의 학설을 자세히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불은 하나의 원소이고 만물은 불로 환원될 수 있다. 이 제일원소가 희박해지거나 압축됨에 따라 만물이 탄생한다. 만물은 대립에서 생겨나 며 만물의 총체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간다. 이 전체에는 한계가 있고 세상은 하나이다. 세상은 불에서 탄생했으며 영원의 시간 속에서 이미 정해진 시기에 맞추어 다시 불타 없어 진다. 이것은 운명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 중에서 생성으로 인도하 는 것은 '전쟁'과 '불일치'이며 소멸로 이끄는 것은 '일치' '조화' '평화'이다. 변화라는 것은 상승로와 하강로의 교차에서 비롯되며 세상의 질서는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 불은 압 축되면 습해진다. 그리고 불이 더욱 압축되면 물이 생성된다. 물이 결정화되면 토양으로 변 한다. 이것이 바로 하강로이다. 반대로 토양이 액화되면 물이 생기고, 이렇게 생긴 물에서 다른 요소들이 발생하는데, 만물은 거의 바다에서 기화된 수증기에 그 기원을 둔다. 이것이 바로 상승로이다. 그는 천상을 덮고 있는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 나 대체로 그곳에는 균열된 부분들이 있고 균열의 함몰부는 우리를 향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맑은 증기들이 그 안에 서로 뭉쳐 불꽃을 이루어 내는데 이것이 바로 별이라고 하 였다. 태양의 불꽃은 가장 밝고 가장 뜨거운데, 그것은 다른 별들이 태양보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이다.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다. 그러나 달은 순수공간을 가로지르 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태양은 맑고 순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와 항상 바람직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태양은 지구를 따뜻하고 밝게 해주는 것이 다. 태양과 달의 균열 부분이 위쪽을 향해 있을 때 일식과 월식이 일어난다. 달에 주기가 있 는 것은 달의 균열 부분이 점차적으로 조금씩 돌기 때문이다. 낮과 밤, 달, 계절, 1년, 비와 바람 따위 모든 자연현상은 서로 다른 수증기의 증발현상에 의해 발생한다. (디오게네스 라 에르티우스, '위대한 철학자의 생애') 파르메니데스의 저작은 단편만이 전한다. 다음은 그의 사상을 피력한 시의 첫 부분이다. 나의 길을 인도하는 암말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길, 도시국가에서 그들을 받드는 인간들에 게 가호를 내리는 신의 길로 나를 이끌었을 때, 등에 나를 태우고 질주하던 암말들은 내 영 혼이 갈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를 인도하였다.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따라갔고 총명 한 전령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젊은 아가씨들이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달아오른 굴 대는 수레바퀴 속에서 삐걱거리면서 피리 같은 소리를 냈다(왜냐하면 양쪽에서 바퀴 두 개 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밤의 궁전을 뒤에 남기도 온 태양의 딸 들은 얼굴의 광채를 가리었던 베일을 손으로 펼치면서 빛을 향해 질주하였다. 나의 여정을 수행하면서... 밤의 길과 낮의 길이 내려다보이는 바로 거기에 문이 우뚝 서 있다. 상인방과 돌로 된 문턱이 경계를 가르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선 그 문은 웅장한 문짝과 함께 완벽한 모 습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방법으로 벌을 내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입구의 통행을 통제 하는 디케가 문의 열쇠를 쥐고 있다. 젊은 아가씨들은 그를 유혹해서 열쇠를 얻어내려고, 단 지 한 순간만이라도 문고리를 열도록 하기 위해 솜씨 있게 그를 설득하며 달콤한 말을 건넸 다. 못과 두터운 쐐기로 고정되어 있는, 청동으로 조각된 경첩이 문짝 사이에서 반원을 그 리며 움직이는 순간 광활한 공간을 드러내면서 문이 움직였다. 바로 그곳으로 젊은 아가 씨들이 전차들과 말들을 들이밀고 들어간다. 수레의 바퀴자국이 나 있는 그 길 위로 여신은 반기며 나를 맞이하였다. 그녀는 나의 오른손을 자신의 손에 쥐고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여, 불사의 마부들을 동행하고 암말에 실려 여기에 온 너, 잘 왔구나. 왜냐하면 인간들이 범상하게 찾아드는 곳을 벗어난 이 길로 너를 이끈 것은 우리의 원수 모이라이 여신이 아닌 테미스와 디케였다. 그러니 모든 것을 깨쳐 알지어다. 그리고 조화로운 움직임이 내면의 진 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영혼을 세상의 온갖 동요로부터 해방시키거라. 인간의 사고에는 진실한 것도 믿을 것도 하나 없으니. 그리고 네게 이것도 가르쳐 주겠다. 만물의 존재에 대 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가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일 뿐이니 라." (파르메니데스, '단편') B.C.6-B.C.5세기의 민주주의 수호자들과 다양한 민주주의 체제 참주, 개혁가, 민중의 지 도자, 이들은 모두 아테네의 점진적인 민주주의 건설에 기여하였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세 명의 인물을 여기 소개한다. 호인 페이시스트라토스, 자신의 정치적 실패를 토대로 민중의 편으로 돌아선 클레이스테네스, 그리고 가장 위대한 페리클레스이다. 다음은 페리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변천되어 갔는가를 잘 설 명해 주고 있다. 최고 권력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라기보다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겸손한 태도로 군림했다. 그는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고 성품이 온화했기 때문에 사소한 죄를 저지른 자 들에 대해서는 넓은 아량을 보여 주었다. 특히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금을 융자해 주 어 그들의 땅을 일구어 생활할 수 있게 도왔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런 정책을 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빈민들이 도시에서 배회하기보다는 농촌 곳곳에 분산되어 살 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국가의 살림에 관여할 여유나 욕구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농촌이 개발됨에 따라 국가의 수 입도 증대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수확의 1/10을 세금으로 거두었기 때문이다. 농촌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그는 데메스(demes)마다 재판관을 두었는데, 때로는 몸소 시골로 가서 감독하거나 분쟁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농촌시찰을 나갔다가 아테네 남동쪽 히메토스산(후에 '비과세의 땅' 으로 부름)을 지나던 길에 자갈밖에 없는 땅을 열심히 갈고 있는 한 농부를 보았다. 의아하 게 여긴 그는 농부에게 그 땅에서 무엇이 수확되는지를 물어 보았다. "고통과 신음말고는 열리는게 없죠. 아마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 고통과 신음도 한몫 거두어 가야 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농부의 정직함과 열정에 감동한 페이시 스트라토스는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안정된 생 활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 아래 이루어졌 던 참주정치는 크노소스 치하의 황금시대와 같았다."고 그를 칭송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의 가혹한 정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그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 스를 말할 때는 그의 국민에 대한 애정과 인간적인 면모가 가장 자주 언급된다. 그는 모든 것을 법에 따라서만 다스리려고 했을 뿐, 자신은 아무런 특권도 향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정체')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주로 페리스아 전쟁을 다루고 있으나, 고맙게도 그 시대의 사회상 을 여러 모로 그리고 있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이미 부강해 있던 아테네는 참주들의 독재정치가 몰락한 후 더욱 강력해졌다. 이때 전면 에 부각된 인물이 둘 있었다. 알크메이온 출신으로 아폴론의 여사제 푸티아를 매수했다는 클레이스테네스와 티잔드르의 아들 이자고라스이다. 이자고라스의 조상이 누구인지는 정확 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대단한 가문 출신이 분명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제우스에게 제물 을 바쳤다고 전한다. 두 인물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중의 편으로 돌아섰 다. 그는 혈연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아테네의 행정체계를 지연중심의 열 개의 부족으로 구분 하고 이온의 네 아들, 셀론, 아이지코레스, 아르가데스, 호플레스의 이름을 따서 붙였던 부족 명 대신에 새로이 토착민 영웅의 이름으로 바꿨다. 예외로 아작스라는 부족명이 있었는데, 아작스는 아테네의 이웃 나라에서 활약한 외국 영웅의 이름이었다. 이상에서 본 것이 시쿠 온 출신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취했던 조처들이다.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는 시쿠온 출신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의 외손자였다. 그는 이오 니아인을 멸시했던 듯하다. 그는 아테네의 부족이 이오니아인의 부족과 똑같은 방법으로 구 성되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외조부의 모범을 따랐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가 권력에 올랐던 초기에는 자신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 자, 부족의 수를 늘리고 그 이름을 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열 명의 족장을 임명하고, 열 개의 구를 각 부족에게 분배하였다. 민중이 그의 편이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경쟁자들 을 누를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 '역사') 투키디데스의 유일한 저작인 '펠레폰네소스 전쟁기'는 전쟁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그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을 무마하 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의회는 스파르타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는다는 데 동 의했으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전쟁에 따른 시 련외에도 개인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민중은 전쟁 초기의 보잘것없는 생활수단마 저도 빼앗기게 되었으며, 부유한 자들도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었던 건축물과 설비물을 잃 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전쟁 그 자체였다. 대중의 불만은 가라앉을 줄 몰라 서 마침내 페리클레스에게 벌금을 징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군중은 본질적으로 변덕스 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얼마 후 페리클레스를 다시 총사령관으로 선출하여 지휘를 맡 겼다. 사실 그가 참주로 있는 동안 아테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그의 통치로 아테네가 또다시 번영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죽고 난 한참 후에야 사람들은 그 전략이 품고 있는 탁월한 예견을 깨달았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행동하기에 앞서 신중하게 준 비해야 하며, 특히 해군을 잘 관리해야 하고, 적대감이 팽배하고 있는 동안은 제국을 확장하 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며, 어떠한 새로운 모험 속으로도 도시국가를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예견과 우려에도 페리클레스의 사후에 아테네인은 그의 전략 과는 정반대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야욕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사업에 도시국가를 개입시키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성공을 거둔다 해도 단지 몇몇 사람의 영 예와 이익만을 가져올 뿐이었고, 실패할 경우에는 도시국가 전체의 고통이었다. 페리클레스는 탁월한 재능과 청렴한 성품으로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권 위로 시민 개개인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러면서도 하나로 굳게 뭉치게 했다. 페리클레스는 국민에게 조종당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국민을 자신의 신념대로 이끌 줄 아는 현명한 지도자 였다. 그는 비열한 방법으로 권력을 확장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감언이설 은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국민에게 얻은 신용을 믿고, 때로는 국민이 원하는 바와 상 치되는 입장을 고집하기도 하여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시민이 지나친 신뢰감을 표명할 때면 경계조의 웅변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반대로 근거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안심시킬 줄도 알았다. 그가 죽은 뒤 정치가들은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일념으로 국 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고 모든 일의 추이를 국민이 결정하도록 맡겼다. 이로써 커 다란 제국을 지휘하는 맹주로서의 한 국가가 범할 수 있는 치명적 과오가 자행되었다. 그중 에서도 시칠리아 원정은 엄청난 과실이었다. (투키디데스, '펠레폰네소스 전쟁기')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한 늙은 과두정치가 한 익명의 작가가 남긴 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글은 크세노폰(B.C.431-B.C.352)의 저작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늙은 과두정치 가'라고 부르는 인물이 쓴 '아테네의 정치체제'라는 글이다. 귀족주의를 완강하게 옹호하였 던 저자는 국민을 악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바로 그 국민에게 자신의 노선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의 정치 풍속도를 그려 냈다.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내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아테네인이 지금과 같은 정 치체제를 선택한 데 대해 칭찬할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선택이 교양인의 권익을 옹호하기보다는 악한 자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가난한 자들과 민중이 교양인과 부유층보다 중시되는 정치형태가 아테네에서는 아주 당연한 듯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전함을 움직이며 국력의 밑바침이 되는 자들이 민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테네의 국력이 장갑보병이나 귀족 혹은 교양 인이 창출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항해사, 조타수, 이등수부장,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들, 그리고 배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 정치참여-모든 사람들이 추첨과 선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거나 시민이라면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권리- 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은 몇몇 특별한 관직에는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직은 국민 전체 를 구제할 수도 있지만 전체 국민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정책결정에 관 련된 관직이나 기병대와 관련된 관직은 아무에게나 맡길 것이 아니라 그 직책에 가장 적합 한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직책말고 그들의 가정경제에 큰 보탬을 줄 수 있는 직무는 앞다투어 맡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아테네인이 교양인보다는 악한 자, 가난한 자, 그리고 민 중에게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매사를 처리해 나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점 에서 그들이 민주주의의 충실한 파수꾼 역할을 했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사실 가난한 자와 민중 그리고 열등한 자들의 증거는 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민중이 아니라 부유한 자와 교양인이 번성한다면 그것은 국민이 자신들 반대편에 있는 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수한 자들의 집단에서는 탈 선과 부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또한 엘리트들은 자신의 자질을 계발하려고 노력하고 있 기 때문이다. 반면, 무지와 무질서, 무교양은 민중에게 흔히 볼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을 악으 로 몰고 가는 것은 빈곤과 교육의 부재와 무지이다. 그런데 교육의 부재나 무지는 어떤 경 우에는 빈곤에서 비롯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저자, '아테네의 정치체제') 통음난무의 디오니소스 제전, 니체는 그리스 문명에서 아폴론 정신과 디오니소스 정신을 동시에 보았 다. 아폴론 정신은 엄숙하고 절제된 것이며, 디오니소스 정신은 광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다. 광적인 디오니소스 신도인 메나데스(Menades: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미친 여자)의 끔찍 한 방랑은 디오니소스 정신의 지배하에서 이루어지던 것으로,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바쿠 스 신의 여사제들'속에 이들의 모습을 담았고, B.C.5세기 때의 도자기공들도 이들의 모습을 종종 도자기 위에 표현하였다. 처음으로 제물을 바친 여인은 바로 판테의 어머니였다. 살인의 서곡을 장식한다는 역할을 맡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판테는 아가베가 어머니임을 알아 보고 머리에서 관을 벗어 던지고는 어머니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머니, 저예요. 어머니의 아들 판테라고요. 에시온 궁전에서 당신이 낳은 바로 그 아들 입니다. 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어머니.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로 저를 죽이지 는 말아 주세요!" 그러나 아가베는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은 거꾸로 뒤집힌 채 디오니소스의 혼이 씌어 아들 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의 팔을 뽑아 버렸다. 이 행동은 신이 그녀에게 내 려 준 힘을 빌려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또 판테의 다른 쪽에 서 있던 이노도 남은 팔을 뽑 아 버리고 살점을 베어냈다. 때마침 아우토노에가 다른 여신도들을 이끌고 도착해 보니 판 테의 주위는 아우성의 도가니였고 여자들은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축제 무 도회에 온 양 토막난 판테의 육신을 손에 들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갈갈이 찢긴 그의 몸은 가파른 암석 위에, 덤불이 우거진 땅 여기저기에 굴러다녔다. 판테의 머리는 어머니가 들고 갔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디오니소스 지팡이 위에 얹었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사자의 머 리를 가지고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노획한 이 끔찍한 물건을 아주 자랑스럽 게 과시하고 다녔다. 그리고 도시의 성벽 근처로 가서, 자신의 단짝이며 사냥 동반자인 수려 한 자태의 승리자 디오니소스를 찬양하고, 그녀 자신의 눈물로 아롱진 승리의 트로피를 바 쳤다. 이 기구한 여인을 피해 나는 달아날 것이다. 우리의 성 주위에 아가베가 출현하는 것 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 정도를 잃지 말고 신을 존경할지니..." 바로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취해야 할 가장 현명하고 가장 훌륭한 태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에우리피데스,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 B.C. 5세기와 4세기경의 도자기 장식가들은 매우 다양한 그림을 도자기에 그려 넣었다. 특히 디오니소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춤추고 있 거나 휴식중인 메나데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작가가 메나데스의 모습 을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해 묘사한 작품도 있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최면상태에서 난폭하 게 날뛰는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의 광적인 자태를 보여 주려는 것으로 작가의 동작묘사는 매 우 훌륭하다. 예를 들어서 반원을 그릴 정도로 몸을 앞으로 깊숙이 굽히거나 뒤로 젖힌 모 습, 목을 완전히 뒤로 구부린 모습, 머리와 몸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동작을 묘사한 장면 따위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작품들은 작가가 실제로 그러한 장면을 보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 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도 있다. 메나데스의 광란 장면을 연구한 어느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그들의 행태는 현대 예술가들이 즐겨 다루는 히스테리컬한 상태나 신들린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H. 장메르, '디오니소스, 바쿠 스 이야기') 아테네 시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문 뛰어난 변론술로 아테네 시민의 행 동을 촉구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을 꼽으라면 '최초의 탄핵 연설' 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아테네 시민에게 두 가지 노선을 제시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였다. 그것은 비열하게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맞겠는 가, 아니면 마케도니아 왕의 부당한 야욕에 맞서 도시국가 전체가 궐기하여 쓸모없는 용 병 대신에 아테네 시민으로 병력을 구성하여 대항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열띤 연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후에도 몇 년 동안 사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이여, 나는 당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본 어떤 신이 끝내 필립왕에게 그 같은 행동을 하도록 종용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필립왕이 당신들에게서 탈취하여 이미 손에 넣은 그 많은 것에 만족하여 더 이상 탐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갔다면, 분명 당신들 가운데 몇몇은 그러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여 비굴하게 그대로 주저앉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 의 비열한 행위 때문에 우리 도시가 황폐해진 이 상황에서 이런 식의 태도야말로 가장 큰 죄악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필립왕은 지금도 계속 새로운 기도를 감행하며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양도하려고 마음먹지 않 았다면, 최근에 있었던 그의 소행은 여러분의 무관심을 자극하고 여러분을 일깨울 수 있으 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나는 여러분이 생각조차 않으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만 해도 우리는 필립왕을 벌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폐허가 되지 않도록 전쟁 을 끝내려 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결코 잊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의 작태를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는 여러분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훗날 결코 그를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이쯤에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 스스로 전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우리 자체에서 병사를 뽑아 모아 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전함이 이제 적을 공격하러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의 취약지를 찾아야 합니다. 아테네인이여, 우리가 조금이라도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면 적의 취약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앉아서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연설이 나 듣는다면, 당면한 과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부대가 파견된 전지역과 도시국가 전역에서 신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사령관 한 명에게 실 속 없는 명령만 주어 파견하고는 여기서 웅변조의 약속만 일삼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 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적은 우리를 비웃고 우리의 동맹국 병사들은 적의 전함이 가까이 오면 겁에 질려서 죽어 버릴 것입니다. 승리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개인적 유희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사령관이 지휘하는 군대 란 오합지졸 용병들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과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습니까? 아테네 시민이여, 여러분이 스스로 구성한 병사를 파견해 정세를 직접 확인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병사들이 귀환해서는 기존의 전략을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서 전략적 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있 다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전해 듣기보다는 여러분 눈으로 직접 전세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 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 치욕을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그리고 여기 모인 우리들 중에도 어 떤 자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필립왕이 스파르타인과 합의해 테베를 공격하려 하며 보이 오티아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필립왕이 페르시아 왕에게 사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여기저기서 들은 소식을 자기네 마음대로 엮어서 떠벌리고 다닙니다. 아테네 시민이여, 신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자신의 성공에 완전히 도취한 필립왕은 물론 세인들이 떠들어대는 허망한 꿈을 꾸고 있다고 믿습니 다. 자신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필립왕은 그렇게 몰상식한 방법으 로는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한다면 앞으로는 허황된 유 언비어를 경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립왕은 우리의 적입니다. 그는 우리의 소유물을 빼앗 으려 하며 오래 전부터 우리를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러하듯 자신의 일 은 자기 스스로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남에게 해결해 달라고 맡긴다면 해로운 결 과만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당장 전장에 나가서 싸우지 않는 다면, 언젠가 바로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 자문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여러분이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들의 의무를 철저히 다할 것이라고 지금 당장 굳게 마음먹지 않는다면 상황은 앞으로 불리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데모스테네스, '최초의 필리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