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역사 지은이: 프란체스코 키오바로, 제라르 베시에르 지음/김주경 옮김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신안식 제1장 예수, 베드로, 그리고 교황 예수의 이름으로: 초대 교회들 예수는 예언자로서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앞으로 도래할 하느님의 왕국을 이야기했을 뿐, 직접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예수가 죽고 난 후에,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과 그분이 하느님 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제자들의 무리를 그리스도 교인(이하 기독교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줄 곧 이야기해 왔던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열두 사람이 사도라는 이름으로 구별되었다. 사도들은 예수가 죽기 전2∼3년 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으며, 예수에게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은 아직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 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고, 따라서 공동체의 모든 조직은 예수의 재림을 시한으로 하는 한시적 존재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사 도들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 징이다. 중개자 베드로 초기 공동체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기록은 그때 이미 공동체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방인들을 신자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인다면 그들도 유 태의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는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세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유태의 율법은 하느님과 유태인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이었다. 바울로는 기독교가 전통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모든 이에게 문을 활짝 열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직접 보았다는 그는, 그때 특별한 사명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율법과 모세의 계명이 이제 끝났다고 설교하여, 당시에 이미 약해져 있던 기독교 인과 유태교인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바울로의 이같은 단호한 태도에 예수의 동생 이자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인 야고보가 반박하고 나선다. 그는 선택된 백성인 유태인의 전통에 그 누구보다도 충실했다. 한편 베드로는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망설였던 듯하다. 사실 베드로는 바울로보다 먼저 이방인들을 팔레스타인 공동체 안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야고보파의 압력에 못 이겨, 개종한 이방인들도 유태인의 계율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했다. 사도들 가운데 중심 인물이던 베드로는 실제로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서 가장 큰 권위를 행사했고, 주변 인 물들의 의견을 수렴해 합의점을 찾아내곤 했다. 후계자 문제 80∼90년대, 기독교 공동체는 전환기를 맞게된다. 예수의 부활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은 모 두 죽고, 베드로와 바울로도 64년경에 로마에서 처형된 후였다.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70년에 로마인이 예루살렘을 파괴할 때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야고보도 몇 해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공동체의 수는 증가했지만,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공동 체가 대부분이었다. 공동체의 지도층은 유태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단지도 체제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때 지도자 집단의 책임자들을 '장로' '집사'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호칭이 서로 다른 기능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세운 사도들이 직접 임명했지만, 그 계승자들은 모든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서 자유롭게 선출되었다. 신기하게도 공동체 전체가 책임자를 뽑는 이 원리는 그 동 안 단 한번도 논의대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2세대들이 성장하여 공동체의 주축을 이루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떠오른다. 만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진정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않는가? 그의 인성 은 겉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죽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다만 죽은 것처럼 보여졌을 뿐이리라. 그렇다면 부활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죽지 않은 그가 마 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추론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세웠던 사도들의 말을 참고로 해서 답을 찾고자 했다. 이제 이미 죽고 없는 야고보, 요한, 바울로, 베드로, 토마 등이 '권위자'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일치점 찾기에 몰두했던 듯 하다. 이미 분열된, 혹은 분열될 소지가 있던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래서 더욱더 베드로의 말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로, 더 나아가 요한의 말도 참고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베드로 때부터 전승을 통해 전달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승되어온 권위자들의 말, 그것이 바로 후에 (신약성서)라고 부르게 되는 문서들이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동방 교회들은 이 중요한 확신, 즉 베드로의 '믿음'이 곧 '반석'이며, 이 반석 위에 기독교 세계가 세워진다는 확신을 충실하게 따르게 된다.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두 2세기 내내 아직 '조직'에 관한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여전히 믿음에 관한 문제가 본질 적이었다. '누가 명령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가 중요했다. 이방인 승인을 둘러싼 논쟁에 이어 예수의 인성론 논쟁이 있었고, 다시 한번 기독교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위기가 다가온다. 이 위기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데서 생긴 것으로, 그노시스(gnosis, 기독교 이단의 일파인 그노시스파가 추구하던 영적 지식:역 주)에 관한 것이다. 유태교의 전통, 신비교를 선호하던 당시 취향,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신 자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 등이 모여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관하여, 현세와 천국에 관하여 전혀 근거가 없는 사변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 짜 복음서, 가짜 요한 계시록, 사도신자들의 가짜 서신들이 수없이 범람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잡다한 사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이를 사람들은 '그노시스의 위기'라 부른다. 베드로의 교회들 혼란 속에서 정통적 믿음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기독교 신앙이 제일 먼저 선포 된 장소로 시선이 집중됐다. 《신약성서》가 모든 질문에 해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 들이 세운 '사도교회'에서 그 기준점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사도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전승 하여 정통적 신앙을 간직하고 있던 교회로서 에페소 교회, 안티오크 교회, 로마 교회, 스미 르나 교회가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베드로가 세 웠다고 해서 '베드로의 교회'라 불렸던 세 교회(안티오크, 로마, 알렉산드리아)의 정통성이 가장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는 이유로 특별한 권위를 갖 게 된 이 교회들은 그 때문에 '베드로의 믿음'을 소유한 교회로 인정받았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로가 설교를 행한 곳이며 그들의 순교지이다. 이처럼 로마 교회는 초대 순교자들을 배출했으며, 서방에서는 유일하게 사도가 세운 교회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 여러 여건으로 마침내 로마 교회의 내부 조직은 모든 교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그노시스의 위기가 심각했던 터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교리의 의미와 사 도들의 전통을 다시 찾아야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통일과 교리에 정통성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로마 교회와 로마 교회의 신앙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2세기에 안 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로마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곳'이었으니까. '사도들이 전수한 건전한 교리'를 찾으러 동방에서 건너온 헤제시푸스도 로마에서 해결책 을 찾으려 했다. 그는 우선 코린토 교회에서 정통적 교리를 찾았고, 그 다음에는 로마 교회 에서 찾아냈다. 사도들이 세운 이 두 교회에서는 그들이 직접 전수했던 정통교리가 끊이지 않고 전해 오고 있었다. 리옹의 이레나에우스 역시 그노시스파에 반대하며, 180년경에 쓴 ( 반 이단론)이라는 논문에서 헤제시푸스가 공식 발표했던 '사도의 전통'을 다시 문제삼고 있 다. 한마디로 그는 사도의 가르침을 전승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세 운 교회이자,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교회, 즉 로마 교회'에 맡기고 있었다. 이렇듯 2세기 말의 로마 교회는 여느 교회와 비길 데 없는 최고 권위를 지니고 있 었다. 3세기: 군주제적 주교단의 출현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서 참다운 믿음을 찾으려고 했던 2세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는 '군주제적 주교단'을 세우는 경향이 나타난다. 지도자 집단이 공동책임을 지던 이전과 달 리, 지도층의 수장 한 사람이 유일한 책임자로 부각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제도가 변 함없이 발전을 계속한 것은 아니다. 이 제도가 발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 특히 수장의 인격이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 3세기에 들어서면, '군주제적 주교단'을 여러 교회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늦게 이 주교단 형태를 갖추었다는 점 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욱 전통주의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 교회가 언제 처음으로 주교를 두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세기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리된다. 1세기 후에, 코르넬리우스와 스테파누스 1세는 분명히 견고하게 조직된 로 마 교회의 군주제적 주교들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46명의 신부와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 종 42명, 구마자 56명, 독경자들과 수문자들이 있었고, 로마 교회는 약 1500명의 과부들과 고아들의 생계를 돌보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주장 코르넬리우스와 스테파누스 1세는 카르타고 교회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와 극심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잘 알려진 로마의 주교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주교단에 관한 뛰어난 이론가이기 도 해서,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251)를 통해 일치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은 주교의 인격 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신자들이 주교와 연대하여 지역교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 주교들 끼리 연대할 때 '사랑과 화합의 법'이 인도하는 커다란 교회를 이룬다고 주장했다. 주교 공 의회가 이의 실현이다. 그후 그는 주교들에게만 '형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신자들에게는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한마디로, 그는 교회의 '주교단식' 구조를 격찬했다. 로마 교회, 베드로의 교회 이런 '연대'의 구조로 로마 주교가 갖게 될 몫은 무엇이었을까? 키프리아누스는, 주교단 의 동료에게 결정을 강요할 수 있는 '주교 중의 주교'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그는 분 명히 '폭군처럼'이라는 말을 썼다).그러나 그가 '주교 중의 주교'라는 호칭문제로 로마 교 회와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연대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 교회와 그 대변인인 로마 주교는 (이때만 해도 로마 주교에게 교황이라는 호칭이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신앙문제와 성직자 징계문제에 관해서 결정적인 발언 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3세기 말, 기독교 신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조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 주교들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키프리아 누스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에서조차도, 아무도 (마태오 복음)의 유명한 구절,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베드로는 '돌'이라는 뜻임:역주)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오, 16:18)를 사용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추론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명성과 로마인들의 의식을 생각해 볼 때, 로마 교회, 곧 베드로 의 교회가 교회 연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을 듯하다. 제2장 로마의 공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져온 평화 교회로서는 4세기의 첫 시작이 매우 좋지 못했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그리고 그들의 뒤를 계승하는 갈레리우스와 막센티우스 2세는 아예 '기독교'라는 이름과 함 께 교회를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했다. 303년에서 313년까지 10년간에 걸쳐 혹독하고 끔찍한 박해가 있었고, 따라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순교자들과 배교자들이 생겨났다. (교 황의 책)은 로마 주교인 마르켈리누스 역시 가혹한 박해를 더 이상 못 견디고 우상에게 제 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하지만 313년 2월, 로마 제국의 새로운 주인인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 칙령 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이는 모든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와 예배의 완전 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호의적인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정책은, 사위이자 경 쟁자인 리키니우스를 제압한 324년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모든 국민들에게 '거짓 사원' 을 떠나, '생명의 빛을 주는 집' 으로 들어가도록 권고했다. 로마 교회는 황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었고, 웅장한 라테라노 궁전까지 소유했다. 315년 부터 건축되기 시작했던 라테라노 대성당(지금의 로마 대성당)은 아직까지도 '모든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인 교회'라고 불린다. 가장 유명한 로마의 순교자들, 즉 베드로, 바울로, 아 그네스, 라우렌티우스 등의 무덤이 있던 장소에도 화려한 성전들이 세워졌다. 황실 교회가 만든 제도: 공의회(종교회의) 당시의 로마 주교는 실베스테르였다. 그의 주교 재위기간은 꽤 길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 제의 통치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박해 때 입은 상처들을 치료하느라, 로마 주교는 황 제와 경쟁할 수 없었다. 또한 배교한 이전 주교 때문에 실베스테르는 겸손한 태도를 고수해 야 했다. 그 옆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새로운 창시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며, 이 윽고 '사도들과 동등한 자' 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황제는 이 새로운 직책에 집착하면서 '교계 외부의 보편주교'로 자처했다. 단순히 명예칭 호로만 만족하지 않던 그는 로마의 순수한 전통 안에서, 종교분쟁을 해결할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로마 주교에게 묻지 않고 주교회의에 문의했다. 공의회 를 소집했던 것이다. 이미 3세기에도 공의회는 있었다. 그것이 교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 기 위한 가장 정상적인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공의회가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때 황실 교회의 정식 제도가 된 것이다. 로마회의(313)와 아를 회의(314)에서는 도나투스파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애썼으며,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동방을 혼란케 하고 있던 아 리우스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각 교회의 최고 주교들은 본인들이 직접 회의에 참 석하지 않고 대리자들을 파견했지만, 그래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황제의 승인으로 강제력을 갖게 되었다. 영원한 로마 330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기고, 수도 이름을 콘스탄 티노플로 명명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로마'를 환영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후 제국이 분리되자, 황제들은 로마보다는 아퀼레이아라든가 밀라노, 라벤나와 같은 도시들을 거처지로서 선호했다. 아무튼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덕분에, 로마 교회는 껄끄러운 존재인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제 로 마 주교는 황제의 전속 사제가 돌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다. 제국의 수도라는 기능을 빼앗긴 이 도시에서 대신, 한 가지 새로운 이념이 확고히 자리잡 게 되었다. 바로 '영원한 로마'인데, 그 이념의 중심에는 '황실 로마'를 대체한 '기독교 로마 '가 놓여 있다. 로마 황실이 동방으로 자리를 옮긴 대신, 로마에는 본질적인 것, 즉 베드로 와 바울로, 두 사도가 세웠던 기독교의 전통이 남게 된 것이다. 로마는 성 베드로 같은 많은 대주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므로 기독교인들의 성지였다. 그리고 로마 주교는 서방의 총대 주교일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계승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서 발언할 수 있었다. 이런 이념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로마 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옛 귀족층과 국가의 새로운 지도층은 로마 교회에 부를 가져다 주었 을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과 로마인만이 느끼는 긍지도 심어주었다. 기독교 도시의 모범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로마는 거의 완전히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로마를 이렇듯 새롭게 변모시키기 위해 황제와 귀족들의 돈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여러 개의 대성전과 세례당 을 건축했고 카타콤을 세웠으며, 과부들과 고아들도 돌보았다. 로마는 기독교 도시의 모범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의식구조에서 생겨난 최초의 성과들은, 343년에 개최되었던 사르디카(소피 아) 공의회에서 나타났다. 진정한 의미의 공의회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이 공의회에서 나 타났다. 진정한 의미의 공의회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이 공의회에서, 서방의 교회들은 3번 과 5번 규정에 동의했다. 동방의 교회는 이를 거부했으나, 어쨌든 지방 공의회에서 해임된 주교는 누구든지 로마 주교에게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수위권을 확립할 법률적 토대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시인 교황 다마수스1세에 오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최초로 '사도좌'에 대해 말 한 로마 주교로서, (마태오 복음)16장 18절("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 를 세울 것이다.")을 처음으로 인용하여 베드로의 교회 곧 로마 교회만이 참다운 그리스도 의 교회라는 사실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성자 예로니무스의 친구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신뢰받는 상담역이었던 다마수스는 기 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공인한 380년의 역사적 칙령을 고취시켰다. 이 칙령이 명시하고 있듯이, 교회의 신앙은 곧 로마 주교인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던 베드로(373년에 사망했다!)의 신앙이었다. 기독교의 평화 다마수스 교황의 후임자 중에서, 시리키우스와 인노켄티우스 1세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그 들은 '교황령'을 발표하여 영원한 로마라는 이념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교 황령이란, 주교들의 질문에 교황이 보내는 답신을 말한다. 그때부터 이 답신들의 사본은 로 마 교회의 문서고 안에 보관되어 판례로 사용되었다. 교황사에서 가장 위대한 최초의 인물은 대교황 레오 1세이다. 그는 로마 출신이었으며, 위 엄과 열정이 남달랐고 학문에도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당대의 문제들을 해결했다. 452년에 망투 부근에서 훈족의 왕인 아틸라를 만나, 이탈리아 침공을 포 기하도록 설득했고, 455년에 아프리카에서 온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쿠스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도 그를 만나 로마시를 무력으로 짓밟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레오가 꿈꾸고 있던 것은 '기독교의 평화'였다. 그것은 '로마의 평화'에 뒤이어 오는 것 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로마에서 나온다. 로마의 평화는 군단이 지켜주었고, 기독교의 평 화는 그 근원지인 기독교 로마와 베드로의 교황좌에서 비롯된다. 베드로의 계승자인 로마 주교가 이의 보증인이므로, 그에게는 모든 교회들에 대한 책임이 맡겨졌다. 따라서 교구의 주교들은 로마 주교에게 협력해야 했으며, 로마 주교만이 '충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교황의 수위권이 최초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축성받은 주교권 교황 레오는 이론가만은 아니었다. 그는 평화와 교회에 관한 자신의 이상을 직접 통치활 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칼케돈 공의회(451)에서는 단성론 논쟁(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 을 모두 갖고 있는가에 관한 논쟁)의 해결책을 내놓았으며, 아를 회의에서는 일라리오의 주 교가 갈리아 지방의 총대주교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두 경우에 두 명의 황제, 곧 마르키아누스와 발렌티아누스 3세의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교황 의 수위권에 대한 레오의 이론이 적용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주교 를 로마 주교 다음으로 격상시킨 칼케돈 공의회의 28번 규정을 취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 었으니,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는 교회 전체에서 여전히 두 번 째 가는 총대주교였던 것이다. 레오 교황의 후임자들 중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교황은, 짧은 기간 재위했던 젤라시우스 1세이다. 그는 494년에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보낸 편지로 유명하다. 그 편지 안에서 젤라시우스는 로마의 평화라는 이념을 설명하면서,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개의 권한뿐입니다. 그중 하나는 축성받은 주교권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을 통치하는 세속권력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권한 중에서 전자가 더 큰 무게를 갖습니 다. 왜냐하면 그 권한에 관한 한, 왕들조차도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공공질서, 즉 세속의 일에 관해서는 고위 성직자들일지라도 황제의 법에 순종해야 합 니다." 이 구절은 매우 귀중한 자산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고대가 중세에 물려준 유언과도 같은 것이다. 그때부터 수위권은 공법으로 표명되었으며, 세속권력과 충돌하게 된다. 세속권력과 충돌하지 않고도 영적 권위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무언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 는 교황은 없었을까? 그리하여 로마 주교가 교황이 되다 답은 1세기 후에 나온다. 바로 대교황 그레고리우스1세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아니키아가 출신으로, 교황 성 펠릭스 3세의 증손자이다. 그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로마 시장이 되었다가, 켈리우스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수도원을 세우고 칩거했다. 그러나 교회의 부름을 받아 부제의 서품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되었다. 그 리고 50세 되던 해인 590년, 자신의 뜻과 달리 주교단과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교황으 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쓴 연설문을 읽지 못해서 부제가 대신 읽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학문이 깊지 못하고, 라틴어의 올바른 용법에도 자신이 없음을 인정했다. 이같은 사람이 14년간 재위하면서 어떻게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을 까? 놀라운 일이다. 그는 큰 문제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쓴 850여 통의 편지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편지들은 그의 활동과 그 시대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탈리 아의 배고픈 민중들, 롬바르디아 전쟁, 시칠리아 교회의 재산관리, 그리고 멀리 떨어진 황제 에게서 버림받은 로마시를 보호하려 한 그의 노력들에 대해서. 그런 그가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고 싶어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뜻에 단 호한 반대입장을 취했던 것은, 그것이 '불경하고 오만한 칭호'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 실 그레고리우스1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썼던 '하느님의 종 중의 종'이라는 서명을 교황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그는 로마의 성사예식을 개혁했으며, 이전에는 고작해야 남 부 이탈리아의 몇몇 수도원에만 있었던 베네딕투스 수도생활을 옹호했다. 그뿐 아니라, 이 위대한 인물은 로마 밖으로도 시야를 넓혔다. 자신이 사절로 있던 시절을 기억하여 콘스탄 티노플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갈리아 지방의 프랑크족과 스페인의 서고트족의 특성을 존 중하여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브리타니아를 개종시키려고 그곳에 수도사들을 보내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은 중세기에 들어서, 교황을 지지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된다. 앵글로색슨족 을 개종시킬 사명을 맡은 최고 책임자인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의 지혜 와 관용이 담긴 불후의 저작이다. 그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심초사하던 그는 저서를 여러 권 썼는데, 그것들은 당 시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회생활에서의 주교의 위치에 관해서 쓴 논문 (사목규정)이다. 교황으로서 그가 지녔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저마다 특성을 가진 교회를 다스리는 과 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교황제도 자체가 아니라 교황직을 수행하는 방법이라는 사실 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 새겨진 '하느님의 영사'라는 두 단어와 함께 길이 역사에 남았다. 제3장 로마 교황 교황령 형성의 동기: 카롤링거 왕조 7∼8세기에 로마 교회와 그 영토는 여전히 비잔틴 제국 치하에 있었다. 황제는 교황 선출 을 조종하거나 아예 선출 자체를 파기했다. 그래서 황제에게서 독립하려던 마르티누스 1세 는 결국 해임되어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재판을 받은 후, 공개 태형을 당했고, 크림 지방으 로 귀양가 고문을 받고 죽었다. 또한 틈을 노리고 있는 롬바르디아족 때문에 교황은 도로를 차단해야 했다. 롬바르디아족에게 들볶이고, 황제에게서도 버림받은 교황은 마침내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청한다. 739년에 그레고리우스는3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마르텔에게 협상을 제의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후임 자카리아 교황 때 기회가 온다. 프랑크의 궁재 페팽이 메로빙거 왕조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을 때였다. 그는 왕관만 쓰지 못했을 뿐, 권세로 보면 왕이나 다를 바 없었 다. 따라서 실데리크 3세를 내쫓을 궁리를 하던 페팽은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권 력을 소지하고 있는 자가 왕의 칭호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쿠데타를 승인한 것이 다. 이로써 페팽은 751년에 수아송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실데리크 3세는 수도원에 갇히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전임자인 자카리아 교황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프랑 크 왕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754년 1월 6일, 스테파누스와 페팽은 샹파뉴 지방의 퐁티 옹에서 만나, 부활절에 '퀴에르지의 언약'이라 불리는 합의에 도달한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 의 카롤링거 왕조를 공인하고, 왕은 롬바르디아의 압제로부터 교황을 해방해 주기로 한 것 이다. 과연 페팽은 두 번의 전투(754, 756)로 롬바르디아족을 정복했고, 승리의 대가인 이탈 리아의 영토를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헌납했다. 이것이 이른바 '교황령'의 시초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페팽이 교황에게 헌납한 영토는 비잔틴 제국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 증여문서)라는 허위 문서가 나돌았다. 그 문서에는 콘스탄티 누스 황제가 문둥병에 걸렸는데, 330년에 실베스테르 교황의 세례를 받고 치유되었다는 이 야기가 씌어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감사의 뜻으로 실베스테르와 그 후임자들에게 라테라노궁과 황제의 문장들, 로마와 '이탈리아 도시, 지방, 영토, 그리고 서구 지역'을 헌납 했고, 그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허위 문서는 중세 기 내내 교황의 세속권력을 정당화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은 독립을 유지하고, 활동영 역을 늘리는 데 필요한 영토들을 찾게 된다.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의 교회 교황 레오 3세는 논쟁의 여지가 있던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할 의도로, 전임 교황들처럼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와 정치적 동맹관계를 계속 이어 나갔다. 덕분에 로마 귀족들 이 쳐들어와서 그를 감금하려 했을 때, 그는 프랑크 왕국의 파데르본에서 샤를마뉴 황제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의 적들은 간통 사실과 위증죄를 들어 그를 끈질기게 비난했다. 이듬해인 800년에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방문하여 교 황을 복귀시킨 후, 사건을 판결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에 대해 아 무런 권한이 없다고 선언한다. "사도좌는 그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며. 12월 23일,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순결서약을 시키고, 성탄절날 드디어 교황의 주재하에 로마인의 황제 로 즉위한다. 이 사건은 두 당사자의 의도를 훨씬 넘어버렸는데, 교황은 황제를 축성할 권리를 획득했 고, 한편 황제는 교황의 축성을 통해 교회 전체를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마음대로 누리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콘스탄티누스가 된 샤를마뉴 대제는 자신을 '교회의 수장'이자 '하느 님의 심부름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교황에게는 제국의 번영을 위해 기도할 임무를 맡겼 다. 샤르마뉴의 거대한 제국은 그가 죽고 나자 차츰 쇠퇴한다. 하지만 대부분 신심이 깊고 덕 이 높았던 교황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힘을 잃으면서 자연히 생긴 자유를 제대로 이용할 줄 몰랐고, 또 이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 서방 세계의 주인다운 태도를 취하고자 애썼던 교황이 있었으니, 바로 니콜라 우스 1세이다. 고귀한 인품을 지닌 이 로마인은 불과 38세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직에 대해 높은 이상을 품었던 그는, 교회가 해야 할 일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구별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교회에 세속적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이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권력은 로마 주교의 손에 있으며, 교구회의는 교황이 내린 결정을 시행하는 기관일 뿐 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1세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붕괴하자마 자 교황직은 타락한 로마 귀족들의 당쟁에 휩쓸려 들어가서, 그 보편적인 의의를 상실하고 지방권력의 노리개가 되었다. 철의 세기 교황 포르모수스가 죽자, 기독교 역사에서 '철의 세기'의 막이 오른다. 사실 포르모수스 교황의 즉위부터 말썽이 많았기에, 그가 주관한 서품과 동맹들도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후임 자인 스테파누스 6세가 자행한 일은 더욱 끔찍하다. 전임 교황 포르모수스의 시신을 파내어 교황의 옷을 입힌 후에, 성 베드로 성당의 중앙에 앉히고서 교황이 주재하는 공의회의 재판 을 받게 한 것이다. 시신은 무참히 훼손되었으며, 사형을 언도받고 로마의 거리를 끌려다니 다가 테베레강에 던져지고 말았다. '시체공의회'는 로마인들의 감정을 격발시켰고, 제국, 특히 이탈리아의 비참한 상황으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후, 1세기반(904∼1046) 동안, 교황권은 로마 당파의 수중에서 놀아난 다. 이 기간에는 44명의 교황과 대립교황(비합법 교황)이 줄을 잇는데, 그중 9명은 살해되었 고, 9명은 해임되었으며, 7명은 추방당했다. 이 시기의 가장 암울했던 때는 이른바 '창녀정 치'의 시기로, 이는 전권을 휘두른 테오필락투스 가문과 이 가문의 영악하고 뻔뻔스러운 여인들, 곧 아내 테오도라와 두 딸, 마로치아와 소테오도라의 품으로 교황권이 떨어진 시기 를 일컫는다. 마로치아와 교황 세르지우스 3세의 불륜으로 태어난 요한 11세는 전형적인 족벌정치를 행 했다. 요한 12세는 세례명을 옥타비아누스에서 요한으로 바꾼 최초의 교황으로, 카푸에서 어 느 유부녀의 침대 속에 있다가 습격을 받아 죽었다. 또한 베네딕투스 9세처럼 은 1000달란 트를 받고 자신의 대부인 그레고리우스 6세에게 교황직을 팔아버린 자도 있었다. 한심한 세태가 전개되었지만, 아가피투스 2세나 베네딕투스 7세, 실베스테르 2세 같은 훌 륭한 교황들도 있었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그레고리우스 6세,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투스 9세 등 세 교황들의 교황좌 다툼이 한 창이었다. 하인리히 3세는, 앞의 두 인물을 수트리 주교 대의원 회의(1046)에서 해임하고 같 은 해에 열린 로마 회의에서는 베네딕투스 9세를 해임하고 같은 독일인 교황이 선출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제 교황은 게르만 제국의 전속 사제가 될 운명이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레오 9세는 사도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베드로 다미아노, 훔베르트, 로렌의 프레데 리크, 힐데브란트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거느리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몇 차례에 걸쳐 주교 대의원 회의를 주재하면서 교회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좌에 오른 지 다섯 해 만인 1054년 4월 19일, 로마에서 죽는다. 교황이 죽었음에도, 정력적인 교 황특사 훔베르트는 그해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 위에 미카엘 체룰 라리우스 총주교에 대한 파문교서를 올려놓았다. 사실 지난 수세기 동안, 로마와 콘스탄티노 플 총주교 사이에는 교리와 권력문제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레오의 파문교서를 받은 미카엘 체룰라리우스가 며칠 후인 24일에 레오를 파문하여 반격을 가했다. 이로써 그 동안 끊이지 않는 분쟁 속에서도 하나의 교회를 유지해 왔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드디 어 사법적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레오 9세가 시도했던 개혁은 도덕의 쇄신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회의적이었다. 교황권 자체가 황제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한, 한계는 명백했기 때문이다. 서임권 분쟁 개혁파의 총수는 로마 교회의 부주교 힐데브란트였다. 교황 니콜라우스 2세와 알렉산데르 2세의 권위 있는 자문인 그는 교황권을 황실에서 해방시킬 방법을 찾았다. 1059년의 라테라 노 주교 대의원 회의는, 그의 의견을 따라 교황 선출을 콘클라베(13세기에 들어서야 사용되 는 명칭), 즉 추기경(로마의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맡기기로 한다. 이때부터 일반 성직자들과 로마 시민들은 선출된 교황을 환호하기만 하면 족했고, 황제는 선거결과를 통보받기만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된 힐데브란트는, 교회 전체를 속권에서 구해 내기 위한 개혁을 더욱 밀고 나갔다. 그가 보기에, 모든 악의 뿌리는 세속인의 서임권에 있었다. 황제와 왕은, 주교와 수도원장도 봉건영주라는 이유로 서임권을 이용해 그들을 지명했는데, 이렇게 임명 된 자들은 좋은 제후였을지 모르나, 목자로서는 자격 미달이었다. 황제와 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교회를 정화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교황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를 (교황지령) 27조목으로 간결히 설명했다. 로마 교회는 오직 하느님이 세운 것이며 로마 주교만이 보편주교이다. 보편주교는 새로운 법을 발표할 수 있고, 주교를 파면, 전임시킬 수 있으며, 황제를 해임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레고리우스는 단순히 교황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교황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독일 황제의 대립은 아주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075년 사순절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교황은 속인의 서임을 더욱 엄격히 금지했다. 이에, 1076년 1월,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와 플레장스에서 황제가 주관하는 종교회의를 열어서 '교황은커녕 못 된 수도승인 힐데브란트'를 폐위했다. 2월 22일에 그레고리우스는 그 반격으로 황제를 파문 했고, 그의 신하들을 충성선서 의무에서 해제해 주었다. 카노사에서 교황과 황제의 단독대담이 열렸다. 교황이 황제를 재판하러 가던 중 카노사에 머무를 때, 하인리히가 교황의 자비를 구하러 온 것이다. 1077년 1월 25일, 참회의 옷을 입 고서 홀로 카노사 성문 앞에 나타난 맨발의 황제는, 교황에게 용서를 외치면서 파문을 거두 기를 간청했다. 이때는 교황이 전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승리의 허약함을 이미 간 파했다. 물론 교황은 당시에 얼마든지 그를 매장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하인리히가 일 단 파문을 면하면, 제국의 군대를 소집하여 자기를 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교 황은 영적 지도자답게 1월 28일 황제를 용서했고 파문을 취소했다. 그리고 이 정복자는 정 복당했다. 그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임을 알면서도, 교황으로서 달리 도리가 없었 다. 그레고리우스 힐데브란트는 1085년 5월 25일, 살레르노에서 죽었다. 전통에 따라, 죽어가 는 교황의 입에 (시편) 44장 8절의 말씀을 넣었다.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불의를 미워했 다." 그는 씁쓸히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추방당한 채 죽어간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 그후, 크고 작은 사건들로 무려 반세기나 끌어온 두 진영의 전투는 보름스 타협으로 종결 되었고, 라테라노 1차 공의회(1122)에서 확인되었다. 서임권 분쟁으로 교황은 통치구조를 더 욱 중앙집권화했다. '로마 교황청'이라는 표현은 1098년에 우르바누스 2세의 문서에서 처음 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11세기 말, 세상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아랍인이 팔레스 타인 지방을 정복했을 때만 해도,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070년에서 1071년 사이에 투르크족이 아랍인 대신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자 사태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예루살렘 성묘를 해방시키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 일 을 신속하게 처리한 자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다.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그는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하는 정열적인 연설을 통해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은 퓌 지방 출신의 기사 주교인 아데마르를 십자군 총감 독으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오른쪽 어깨 위에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누 구나 완전히 면죄받았다. 그 십자표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해주는 면죄부 같은 것 이었다. 십자군에 참여하자는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가 설교가들의 열정 어린 연설을 통해 전달되 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외침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평신도와 성직자, 가난을 면해 보려는 소시민, 모험을 좇는 귀족 청년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섰다. 때는 서구에서 10세기 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군인계급, 기사단의 활약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이다. 원정군은 프랑스인, 로렌인, 이탈리인 남부 노르만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플, 시리아를 거쳐 속속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며, 마침내 1099년 7월 15 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영구적 정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적어도 두 개의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하나는 서구 세계가 이슬람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 문화들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교황이 서구의 진정한 수장으로 떠올라 위세를 떨쳤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대리자 교황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지도자들이었다. 기독교 세계가 새롭게 맞이한 현실의 정상에 는, 오직 한 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12∼13세기에 교황과 황제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 사제권과 제국 사이의 새로운 분쟁의 기초가 되는 이론이 12세기 중반에 공식 표명되었는 데, '두 자루의 칼 이론'이라고 불리며 (루가 복음) 22장 38절에 근거한다. "제자들이 '주 님,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만하면 되었다'하고 말씀하셨 다." 두 개의 칼은 결국 두 개의 권력, 곧 영적 권력과 세속권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 두 권력은 모두 사도 베드로와 계승자들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영권은 교황이 직접 행사하는 것이며, 속권은 황제와 왕에게 위임하여 교황의 명령에 따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투쟁은 칼을 대표하는 두 주역들, 곧 독일 황제인 적발제 프리드리히 1세와 교 황 알렉산드르 3세가 각각 황제 옥좌와 교황좌에 오르면서 불이 붙는다. 여기서 때를 기다 릴 줄 아는 교황이 성미가 급한 황제를 이기고, 마침내 1177년에 베네치아 강화로 교황의 최고권을 인정받는다. 그 최고권은 인노켄티우스 3세 때에 절정에 달한다. 35세 젊은 교황 로타이레 디 세니는 그야말로 통치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마음대로 황제를 옹립, 파문했고, 탁월한 외교능력으로 왕들을 중재했다. 또한 프랑스 남부에 있는 카타리 이단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기독교 규범에서 이탈하는 행동을 모두 제거했다. 또한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 스코의 메시지를 포용했고, 탁발수도회가 전개한 복음운동을 교회 안에 받아들였다. 그는 항 상 새로운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대학의 발전을 장려했다. 또한 그는 십자군 4차 원정을 추 진했다. 그러나 교황은 원정군이 성지로 향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동방의 라틴 제 국을 창설(1204)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교황은 중세에 열렸던 공의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렇듯 인노켄티우스 3세의 권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교황의 명칭은 교황의 권위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로마 주교는 처 음에는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불렸다. 그레고리우스 1세 때에는 '교황' 즉 '아버지(이전까 지는 모든 주교를 일컫던 칭호)'라는 칭호를 썼으며, 그레고리우스 7세는 스스로 '베드로의 대리자'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노켄티우스 4세에 오면 교황은 '하느님의 대리자'가 된다. 쇠퇴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인간 능력으로는 유지할 수 없을 높은 지위를 교황에게 부여했다. 호 노리우스 3세와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인노켄티우스가 폈던 정책을 계승하고자 했지만 운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 인노켄티우스 4세 때부터 속권과 영권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 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발표한 칙서 (우남 상탐)에서 표명된 '교황의 신정정치'의 위대함은 교황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갖는 무게와 반비례했다. 교황은, 교황 앞에서 땅이 꺼져 가라지 는 순간까지도 "모든 인간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탈리아의 아나니에서 일어난 사건은 카노사 사건과 정확히 반대된다. 프랑스의 미왕 필 리프를 비롯해 막강한 콜로나 가문과 알력을 빚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아나니에 피신 해 있었다. 1303년 9월 7일, 교황을 이단과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고 공의회를 소집했던 법 학자 노가레가 시아라 콜로나와 함께 프랑스 왕의 명을 받고 아나니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교황궁에 들어가, 그들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교황의 따귀를 때렸다. 이 일로 마음에 깊은 상 처를 입은 보니파키우스 8세는 로마로 돌아와 며칠 만에 숨을 거둔다. 프랑스 조정은 교황 의 후임자로부터 이단소송을 개시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지만, 그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어쨌든 아나니의 치욕과 더불어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것은 실로 교황권의 시련기가 시 작됨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제4장 위기의 시기 아비뇽 다리 위에서.... 아비뇽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교황사에 편입된다. 그는 페루 자에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교황이다. 프랑스 왕과 사도좌 사이의 팽팽한 긴장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추기경들은 타협점으로 작용할 만한 적당한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했는 데, 바로 보르도의 대주교 베르트랑 드 고트였다.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 당시 에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교황에게 계속 지배권을 행사하고 싶었던 미왕 필리프로서는 프 랑스 출신 교황이야말로 뜻밖에 굴러 들어온 행운이었다. 클레멘스 5세는 왕의 눈치를 보아 로마에 가는 것을 자연 망설이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재위 마지막 3 년을 아비뇽에서 머무른다. 아비뇽은 교황의 본래 거처지는 아니었지만, 로마보다는 서유럽 의 중심에서 덜 벗어나 있었다. 그곳에서 교황은 로마 하층민의 골치아픈 문제들도 멀리하 고, 게르만 황제의 간섭도 피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지내기 편했다. 아비뇽에서 단 하나의 군주이자 주인인 프랑스 왕만 섬기면 되었다. 프랑스 왕이 성전기사단을 처벌하라고 협박했 을 때, 클레멘스 5세는 이에 굴복했다. 빈 공의회(1311∼1312)는 탄압을 결정하는 칙령을 낭 독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주교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해 침묵을 강요했다. 그 뒤 2000명에 이 르는 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이 투옥, 고문당했으며 수백 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리옹에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요한 22세가 교황에 오르면서 아비뇽 체류는 장기화되어 갔다. 그는 아비뇽의 주교궁에 살면서 교황청을 재정비했으며, 재정관리 를 엄격하게 시행해 막대한 자금을 모았다. 덕분에 그의 후임 베네딕투스 12세는 화려하고 장엄한 교황궁을 건축할 수 있었다. 이어 클레멘스 6세는 나폴리 여왕 요안나 1세에게서 아 비뇽시와 그 부근의 영지를 금8만 에퀴로 사들이고,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이 누리던 호화 스런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교황이 로마에 머물기를 원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 이 겨,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6년에 아비뇽을 떠난다. 교황의 아비뇽 체류라는 이같은 비정상 적인 시기는 약 70년간 지속된 셈이다. 당대인들 입에서도 이미 '아비뇽 유폐'니, '바빌론의 유수'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 이 기간은 교황사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이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방 교회의 분열과 공의회 우위설 그레고리우스 11세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70년만에 로마에서 콘클라베가 열렸는데, 이번 에도 프랑스인 교황이 뽑힐 것을 두려워한 로마인들이 교황 선거인단에 압력을 가했다. 무 장 병사들이 시위하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선출된 교황이 이탈 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이다. 그러나 선거과정에 따른 무리는 큰 부작용을 가져왔고, 추기경 들 대부분이 프랑스인 교황을 새로 선출했다. 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다시 아비뇽으로 돌 아갔다. 그후로 한동안 로마와 아비뇽에는 각각 한 명씩,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서방 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유럽은 '우르바누스 편'과 '클레멘스 편'으로 갈라져 각기 입장을 고수했다. 각 교황을 편 드는 동기들은 너무나 미묘했고 감정 역시 첨예했기에, 매우 섬세한 정신을 가진 자들조차 그 분명한 동기를 끄집어낼 수 없었다. 여기서 돌파구를 열어준 것이 바로 공의회이다. 유럽 지식층들은 이미 새로운 공의회 이론을 정립해 놓았다. 파리의 철학 교수인 파두 출신 마르 실리우스는 1324년에 《평화의 수호자》라는 글을 발표하여, 모든 권력은 대표자인 군주를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 이전에 이미 국민주권의 입장을 보 인 것이다. 교회에 관해서도 그는 같은 입장을 폈다. 교회의 중심은 신자이므로, 평신도들이 발언권을 가지는 공의회가 교회의 권한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교황은 명예수장일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급진주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공의회에게 최고권을 주는 방법 이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파리 대학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 이론을 지지하고 나섰고, 대다수 추기경들도 가세했다. 공의회 우위론에 입각하여 마침내 피사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세 번째 교황 알렉산드르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우위론 지지자들은 또 한 명의 교 황을 추가한 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다시 독일 황제 지그문트의 도움으로, 1417년에 스위스 의 콘스탄츠에서 만국공의회가 열렸다. 그것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총집합이라 할만했다. 주 교 이외에 황제와 제후 등 평신도와 일반사제까지 모두 참석했고, 소르본 대학장인 장 제르 송과 캉브레의 추기경 주교인 아일리 출신의 피에르가 사회를 맡았다. 이때 공의회가 보편 교회를 대표하고, 그리스도의 권한을 직접 위임받으며, 교황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이 공 의회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더 나아가 공의회는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자진 사퇴하도록 유도했으며, 다른 두 교황들도 해임했다. 그리고 22명의 추기경들과 5개국(독일,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 아)의 대표자들 30명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마침내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마르티누스와 후임자들은 공의회 우위론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사실 제후들은 공위회를 교회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황을 복종시킬 도구로 보았던 것이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교회가 세 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 유럽은 자신의 길을 착실하게 가고 있었다. 14세기 들어 새로운 세계관이 이탈리아에서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15세기 말부터는 북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인간은 스스로를 운명의 주인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정립했으며, 중세보다는 고대를 더욱 친근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런 새 로운 사유방식을 인문주의라고 부른다. 15세기 중반에는 니콜라우스 5세와 피우스 2세가 기독교와 새로운 문화를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니콜라우스는 로마를 인문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로마에 수많은 석학들을 불 러들였고, 수많은 고서들을 모았으며, 바티칸 사도도서관을 세웠다(그도 콘스탄티노플이 오 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뒤를 이은 시에나 출신 에네아 실비 오 피콜로미니는 인문주의 정신이 밴 사람으로 공의회 우위론에 적극 동조했다. 그는 40세 에 인생의 전환기를 맞아 수도회에 들어갔고,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는 인문주의자들을 환대 하고 비평을 아끼지 않은 문화예술 옹호자였다.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러 안콘에 갔다가 거 기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은 인문주의의 미적인 면에 관심을 돌렸다. 이들 덕분에 로마는 피 렌체에 이어 르네상스의 진정한 중심지가 된다. 이 시기에 미에 집착했던 교황은 세 명으로 요약된다. 알렉산드르 6세, 그는 돈과 여자에 대한 정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자이다(그의 사 생아인 체사레 보르지아의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정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영감을 주었다). 율리우스 2세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지만,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의 절친한 친 구이기도 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전의 천장화와 자신의 무덤을 맡겼다. 그의 무덤 건축은 미완으로 그쳤지만, 루브르 박물관과 피렌체에 그 일부인 (모세)와 (노예)가 소장되어 있다. 그는 또한 브라만테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을 명령했다. 끝으로 막강 한 로렌초 가문 출신인 레오 10세는 사교적이고 세련된 인물로 라파엘로의 후원자였다. 라 파엘로는 그를 위해서 교황 접견실의 실내장식을 완성했다. 종교개혁 1517년, 독일의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는 르네상스 시기에 교황권이 지니던 화려한 이미지 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교활한 권력놀음에나 익숙해져 있던 교황권은 루터와 루터의 개혁 앞에서 갑자기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버렸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교황권이 옛날에 제거했다고 스스로 믿었던 기독교의 고질병을 집약시켜 드러냈다. 교황쪽에서 루터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1520년, 루터가 레오 10세의 파문칙서와 교회법전을 공식적으로 불태우고 난 후부터였다. 같은 해에 루터는 세 권의 소책자에서 격렬한 어조로 기독교의 모든 체제를 규 탄했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고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 두려운 말이 드디어 루터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루터 운동은 장 칼뱅의 멋진 개혁이 덧 붙여지자 마치 종이 위에 기름이 번져가듯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수십 년 동안 독일 제 국의 대부분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 네덜란드, 스위스, 대영제국이 개혁운동에 나섰 고, 프랑스와 동유럽 국가들 또한 얼마 안 있어 그 대열에 끼여들었다. 트렌토 공의회 지난 세기처럼 문제의 해결은 공의회를 통해서만 가능했지만, 교황들은 공의회 우위를 선 언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상처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27년 독일제국이 로마 를 약탈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줄리오 데 메디치)는 공의회 소집을 결심할 겨를도 없이 피 난길에 올랐고, 이로써 찬란한 로마 르네상스는 막을 내렸다. 그의 뒤를 이은 교황 바울로 3 세가 트렌토에 공의회를 소집하자는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미 신교와 화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 카톨릭에 남아 있는 것이나마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트렌토 공의회는 세 기간에 걸쳐 열렸다. 긴 세월 온갖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온 결과는 과연 대단해서, 교리와 성직자 규율에 관한 사항이 거의 빠짐없이 다뤄졌다. 단 두 가지가 제외됐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교황의 수위권과 무오류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이 문제들의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 다. 이 공의회를 종결지은 공로는 피우스 4세에게 돌아간다. 그는 조카인 추기경 카를로 보 로메오(교황은 독신이어야 함에도 사실상 자식이 있었으므로, 이 자식을 '조카' 라고 부르고 중용했다:역주)의 자문을 받아서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공의회는 교황에게 몇몇 규율상의 문제, 특히 사제들의 독신과 신도의 영성체 문제를 결정 할 책임을 맡겼다. 이에 피우스 4세는 영성체 문제를 독일 주교들의 선택에 맡기지만 독신 문제는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톨릭의 개혁 트렌토 공의회가 막을 내리자, 결국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절반이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었 음이 분명해졌다. 이로써 교황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력은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아 메리카 신대륙에 카톨릭이 확산되고, 교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교황권이 한층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는 특히 1566년에서 1590년 사이에 차례로 교황좌에 올랐던 세 명의 '개혁자 교황'의 업적이다. 모범적 인물은, 영적 지도자의 면모를 바티칸에 도입했던 피우스 5세이다.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던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청빈한 수도사 생활을 계속했고, 도미니쿠스회의 흰옷을 그대로 고수했는데, 이는 결국 그후의 교황복이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심사관이었던 이유로, 그는 직접 회의를 주관한 종교재판소의 결정에 많이 의존했다. 또한 전례를 개혁하기도 했 다(한 예가 그 유명한 '성 피우스 5세의 미사 경본'이다). 그러나 중세적 관점에 젖어 있던 그는 영국에 개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1세 영국 여왕을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이런 합당치 않은 태도는 왕족들이 교황을 경계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외에 피우스 5세는 오토만 제국에 대항하여 베네치아와 스페인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고, 레판토 해전에서 투르크족을 대파하는 업적도 세웠다(1571년 10년 7일). 그의 뒤를 잇는 그레고리우스 13세는 피우스 5세 만한 열정은 없었지만 업적면에서는 더 뛰어났다. 볼로냐 대학의 법률학 교수였던 교황은 트렌토 공의회에 사법감정인으로 참석하 여, 징계령의 일부를 작성했다. 그는 카톨릭에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특히 예수회 수도사들 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한창인 국가로 보낼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각지에 신 학교를 설립했다(특히 로마 대학). 또한 유럽 도처에 교황대사들을 두고, 그 역할을 변형시 켰는바, 이제 새로운 교황대사는 지역 교회에서 교황권을 위해 일하는 사람(Longa manus) 이 된 것이다. 그가 만든 역법 그레고리안력은 즉시 카톨릭 국가들에게 적용되었고, 나중에 는 서구 전체가 받아들였다. 그는 비교적 개방적인 인물이지만,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 로메 대학살(1만 명이 넘는 신교도가 학살된 사건:역주)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이 감사 의 찬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박식하고 준엄하고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프란체스코회 출신 교황 식스투스 5세는 엄격한 법규를 세워서 먼저 교황령에 질서를 세웠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법규로, 그는 '공포의 교황'이라고 불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증오했다. 한편 교황은 로마를 바로크식의 호화 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황청 구조를 개편한 공적을 세웠는데, 바티칸 제2 차 공의회 때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는 이 구조는 현재 바티칸 교황청의 전신으로, 추기 경의 숫자를 70명으로 고정했고, 15개의 교황성을 두어 교황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근대 이념의 태동과 교황 카톨릭교와 신교가 맞붙은 프랑스의 종교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으로 혼란은 계속되었다.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살! 관용론도 나타났지만 이는 종교무차별론을 낳을 위험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과학은 인간과 세계의 전혀 다른 시각을 열어주었다. 하지 만 소위 과학적 진리란 신앙에 역행할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에, 교회의 시각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7세기 후반부터 근대화는 교회의 동의도 없이, 아니 오히려 거스르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전환기는 이미 17세기 벽두에 시작되었다. 1600년 2월 17일,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으나 환속한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가장 큰 죄명은 사상의 자유 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더 심각한 사건은 1616년과 1633년에 갈릴레이가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다. 그는 교황 바울로 5세, 우르바누스 8세와 맺은 우정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나, 자신 의 이론을 부인하고 죽을 때까지 침묵해야만 했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각 교파는 경 계선을 그어서 유럽의 종교분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항의했으 나 이미 예상되었던 것이므로 곧 거부당했다. 새로운 유럽에서 교황권의 정치적 무게는 변 한 것이다. 교황은 이제 단지 영적인 수장일 뿐이었다. 더 이상 서방 세계가 아닌, 이후로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불리는 곳의 영적 수장이 된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교황권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사망 이후, 피우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까지 약 120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13명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그중에서 뚜렷하게 걸출한 두 교황이 인노켄티우 스 11세와 베네딕투스 14세이다. 인노켄티우스 11세(베네딕투스 오데스칼키)는 귀족 출신으 로 박식했을 뿐 아니라 성실하고 청렴한 성품을 지녔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 던 그는 루이 14세와 대립했는데, 특히 로마에서 벗어나려는 프랑스 교회 문제에서는 뜻을 굽히지 앉고 저항했다. 투르크족의 빈 포위망을 해제시킨 폴란드왕 요한 소비에스키와 황제 레오폴드 1세가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발판을 놓은 이도 인노켄티우스였다. 마침내 그는 헝가리를 해방시키고 베오그라드를 정복했다. 인노켄티우스 11세는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슬람 문화로부터 유럽을 수호하는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마지막 교황이었다. 본명이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인, 베네딕투스 14세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교회 와 근대 문화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백과사전파 학자들은 그의 학식과 개방적 정신, 그 리고 능숙한 일처리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고, 볼테르는 그에게 자신의 비극 (마호메트) 를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의 저서 (법의 정신)과 프리메이슨단만은 비난했다. 교황은 확실히 근대인이었으나 교회는 여전히 과거지향적이었다. 다른 교황들도 모두 도덕 적으로는 훌륭했지만, 트렌토 공의회에서 규정된 교회의 성직자관이 몹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게다가 교황 선출이란 부득이 카톨릭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걸출한 인물을 선택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대는 오랫동안 반수면상태였다. 허약해진 교황권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때는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 등과 같은 카톨릭 국가들이 1773년에 클레멘스 14세에게 예수회의 해체를 강요했을 때이다. 예수회가 해체되면서 주요한 지지세력을 잃은 교황권이 이제 다가오는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직면하 게 될 것인지? 제5장 혁명의 한복판에서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혁명이 일어난 것은 피우스 6세가 교황좌에 오른 지 14년째가 되던 해였다. 교황은 잇달아 터지는 사건 앞에서 계속 주저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항상 뒤늦게 사태에 대처하는 교황청은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오스트리아 황제 요세핀 2세의 개 혁과 봉건적인 경의 표시를 거부하는 나폴리인들에게 즉각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회 피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판단했을 뿐, 진정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 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피우스 6세는 결코 혁명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1775년 성탄절에 발표한 첫 번 째 회칙에서 계몽주의를 싸잡아서 비난했고, 근대 이념을 악마의 음모라고 했다. 그런데 파 리의 소식은 모두가 혼란스러웠고 교황은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1790년 7월 12일에 성직자 공민헌장이 발표됐을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교황의 반응을 끌어낸 기폭제는 사제들에게 공민헌장에 충성선서를 하도록 강요한 사건과, 아비뇽과 브나스크 백작령의 병합사건이었다. 1791년 4월 13일, 드디어 교황은 성직자 공민 헌장을 비난했고, 그 여세를 몰아 인권선언까지 규탄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는 끊 어졌다. 1791년 11월부터 프랑스 내 교회에서는 충성신고를 하지 않는 사제들이 박해를 받았다. 더욱이 루이 16세가 사형되자 교황은 프랑스 공화국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1796년 봄, 나폴 레옹은 이탈리아에 들어와서 알프스 너머로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버리고 북이탈리아 공화국 을 세웠다. 그리고 톨렌티노 조약을 강요해서 아비뇽 교황령과 브나스크 백작령을 빼앗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798년 2월 15일, 프랑스군은 로마에 입성해서 로마 공화국을 선포했다. 교황의 세속권은 완전히 실추됐음이 선언된 것이다. 교황은 우선 토스카나로 추방당했다가, 다시 발랑스로 유배되어서 1799년 8월 29일, 서거했다. 이로써 교황 권은 막바지에 이른 것 처럼 보였다. 나폴레옹과 피우스 7세 피우스 6세는 유배중에도, 차기 콘클라베가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도록 조처해 놓았다. 콘 클라베는 베네치아에서 열렸고, 1800년 3월 14일에 피우스 7세를 선출했다. 새로 교황좌에 오른 루이지 바르나바 키아라몬티는 베네딕투스회 수도자였으며, 새로운 가치관에 매우 개 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백과사전)지지자였고, 1797년 성탄절 강론중에, 기독교와 민주주 의가 양립할 수 있음을 시인해서 일반인들을 놀라게 했다. 1799년 9월 29일, 프랑스군은 전진하는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 앞에서 후퇴해야 했고, 결국 로마 공화국은 함락되었다. 따라서 피우스 7세도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 무장관인 에르콜레 콘살비에게 의지한 교황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1801년에 화친조약 에 서명한 것이다. 그 협약은 교회와 자치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다. 이 특출한 코르시카 출신은 콘살비를 요주의 인물로 판단하여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켰고, 1806년에는 아예 해임을 요구했다. 더욱이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 령을 거부하는 등, 교황이 독립적으로 행동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을 '페팽과 샤를마뉴'의 후 계자로 자처하면서 교황령을 빼앗은 후, 1809년 5월 17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7월 5일에서 6일로 바뀌는 밤에 교황은 여름거처인 퀴리날레궁에서 체포되었다. 피렌체, 그 다음에는 그르노블로 끌려간 교황은 결국 1812년까지 리구리아 지방의 사보나 요새에 감 금되었다가, 3년 뒤인 1815년 6월 7일,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박해했던 자들의 가족들을 맞아들였고, 콘살비를 다시 불러들였 으며, 예수회를 재건했다. 왕정복고 피우스 7세의 용기, 선량함, 경건한 신심은 교황의 위신을 회복시켰다. 기독교의 명예회복 에 유리한 움직임이 있었던 곳은 특히 프랑스였다. 기독교적 낭만주의의 선두는 프랑스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이다((기독교의 정수)(사후의 회상록)). 그리고 기독교계의 왕정복고 주장자는 조제프 드 메트르였다. 그는 교황권만이 사회와 정치의 질서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교황),1819). 1830년에 자유주의 카톨릭 그룹이 파리에서 (라브니르)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발기인 중에는 펠리시테 로베르 드 라므네, 앙리 라코르데르, 샤를 드 몽탈랑베르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와 손잡은 카톨릭교와, 국가에서 분리되어 교황이 영도하는 자유로운 교회 를 이룩할 것을 꿈꾸었다. 독일(괴르 될링거, 묄러), 이탈리아(벤투라, 조베르티, 로스미니), 아일랜드(오코넬), 영국 (와이즈맨, 뉴먼), 오스트리아(괸테르)등지에서 카톨릭 사상은 진정으로 새로운 탄생을 맞이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권이 이같은 새로운 사고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당시의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16세였다. 카말돌리회 수도사 출신의 교황, 바 르톨로메오 카페라리는 (개혁자들의 공격에 승리하는 교회와 교황)을 발행함으로써 1799년 부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나갔다. 매우 관대한 마음을 가졌지만, 정신은 그리 개방적 이지 못해서, 교황은 민주주의 이념과의 화해라면 어떤 형태이든 거부했다. 그는 1832년에 발표한 회칙에서 라므네와 일간지 (라브니르)를 비난했으며, 동시에 언론과 양심의 자유도 비난했다. "누구에게나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고도 그릇된 원칙이다. 아니, 차라리 객담일 뿐이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도 폭넓은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혁명운동을 탄압한 후인 1832년 5월 10일, 마침 로마에서 강대국 대사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이들은 교황령을 잘 관할하 기 위해 꼭 필요한 개혁에 관한 외교각서를 교황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교황은 여기에 조그 만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며, 모든 근대화 작업을 막았다(심지어 교황은 '철도란 지옥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교황이었지만, 교황 자신도 로츠쉴트 은행에서 대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재정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선교운동에는 매우 적극적 이었으며, 본토박이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한 강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황대사들에게 실질적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정부들과 조약을 맺도록 하는 등, 매우 현실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848년의 혁명운동들과 이탈리아 재건운동 피우스 9세는 감당하기에는 매우 벅찬 과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교황 재위기간(33년)동안 그를 지배했던 큰일은 이탈리아 국가 통일을 위한 '부흥운동(리소 르지멘토)'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탈리아 반도에 자유의 열기와 통일의 열망을 고취시켰다. 조반니 마리아 마스터가 페레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의 초기 행정활동들은 '피 우스 9세의 신화'를 낳았고, 사람들은 교황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의 연방국 가를 꿈꾸었다(피우스 9세는 1848년 교황령에 헌법을 부여함으로써, 일반국민이 어느 정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역주). 그리하여 '민중의 봄'이라 불린 1848년의 혁명운동들이 유럽을 뒤흔들자, 이탈리아의 우국지사들은 국가 통일을 위한 투쟁에 뛰어들 때가 왔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정황에서 피우스 9세가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사람 들은 '교황이 배반했다'고 외쳐댔다. 1848년 11월 15일, 교황이 임명했던 교황령 초대 수상 펠레그리노 로시가 암살되고 소요사태가 줄을 잇자 교황은 나폴리 왕국에 있는 가에타로 피 신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다(1849년 2월 8일). 프랑스 군대 는 같은 해 7월 3일부터 군기를 다시 잡고서 1850년 4월에 교황의 귀환을 허락했다. 피우 스 9세는 모든 자유로운 행동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엄격한 보수주의자인 국무장관 자코 모 안토넬리의 손에 정치권력을 위임했다. 1860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교황령이 대부분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와 빌라프란카 휴전협정을 조인하자마자, 이탈리아 통일파와 맞 서서 로마와 그 주위 영토를 수호하는 데 뛰어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세당에서 참패하고 말았고(1870년 9월 2일), 그 틈을 타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1870년 9 월 20일에 로마를 점령했다. 여기서 '로마문제'가 대두한다. 교황 피우스 9세는 모든 화해의 시도를 거부했고,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했다. 이리하여 교황령은, 한 세기도 안 되는 세월 동안 무려 네 차례나 뺏고 뺏기다가(1799,1809,1849,1870) 결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교황권으로서는, 속권을 상실한 것이 오히려 정치적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 회였다. 피우스 9세의 유쾌한 성품, 진실한 신앙심, 여기에 교황이 희생자라는 생각이 동정 심을 불러일으켜 신자들에게서 새로운 감정이 솟아났으니, 바로 교황에 대한 헌신의 마음이 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도들의 무덤에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황을 보러 로마에 갔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차원에서, 피우스 9세는 로마의 중앙집권을 강조했다. 1864년 12월 8일에 교황은 근대 사회의 오류 80가지를 짚은 실라부스(인단교설 80개조)를 공표했다. 거기서 교황은 특히 '진 보주의 및 자유주의, 근대 문화'와 화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통렬히 비난했다. 실라부스는 교황이 갖고 있던 매우 광대한 계획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실라부스가 공 표되기 이틀 전에 이미 교황은 카톨릭 신앙과 교회의 헌장을 정의하기 위해 전세계적인 공 의회를 소집할 생각이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1868년 6월 29일 소집 대칙서가 반포되었다. 1869년 2월 6일에 이탈리아 예수회의 잡지에 실린 '카톨릭 문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이번 공의회의 주요 안건은 아마도 교황의 무오류성을 선언하는 것이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특히 프랑스와 독일은 크게 술렁거렸다. 1869년 12월 8일, 공의회에 참석할 700명의 성직자들이 하나둘 로마로 모여들었다. 교황은 공의회의 규칙들을 명령하고 수정했으며, 참가인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 안, 중심 문제가 과연 교황의 무오류성이라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여기에 호의적이었고, 반대자는 약 140명의 주교들뿐이었다. 이듬해인 1870년 7월 18일에 교 황의 보편적 재판권과 무오류성을 정의한 헌장이 공포되었다. 공포되기 며칠 전, 여기에 동 의하지 않는 60여 명의 주교들은 반대 투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로마를 떠났다. 무오류성은 교황이 교회의 유일한 말씀이 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권주의에 반대 하는 격렬한 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특히 독일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소위 반동적인 교회에 대항하여 '문화투쟁'을 벌였다. 교황의 무오류성 발표가 공포분위기를 불러오자, 같은 문서 안에 공포되어 있는 교황의 '보편적이고도 직접적인 사법권'의 우월성은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실제로 피우스 9세를 비롯한 그의 계승자들은 새로운 교리들을 규정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은 교회의 구조 안에서 자신들의 지배적인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무 오류성을 내세운 공의회 문서에 의거했다. 교황 절대주의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근대화 레오 13세(본명, 조아키노 페치)는 위대한 외교가였다. 그는 이미 수세기 전에 실추했던 교황권의 국제적 위신을 다시 찾은 교황이다. 그러나 교황 레오는 1885년에서 1886년 사이 에 문화투쟁의 반교권주의적인 법률을 재고하게 했으며, 여러 분쟁으로 대립하고 있는 국가 들 사이의 중재자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카톨릭 교 도들을 공화당에 가담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그가 이룩한 가장 큰 업 적은 전통적 교리의 틀 속에서 교회와 근대성을 접근시키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1881년에 그는 학자들에게 바티칸의 고문서관을 개방했고, 카톨릭 역사학자들에게 객관적이 진실을 존중하도록 권고했다. "하느님은 우리의 거짓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평소에 자주 하던 말이다. 그는 사유재산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착취를 고발하기 위해서 1893년의 회칙, (노동헌장)을 공포했다. 실라부스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카톨릭적 사고와 근대 문화의 만남을 저지할 수 없었 다. 레오 13세의 태도가 오히려 근대 문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19세기 말은 참다운 지적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카톨릭 대학과 교육기관의 창설이 그 사실을 증명 해 준다. 파리(1876), 리옹(1876), 앙제(1877), 툴루즈(1879)등 프랑스의 대학들과 루뱅(1883), 워싱턴(1887) 대학이 문을 열었다. 이제 근대 문화와의 직면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의 권력부 안에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는 레오 13세의 후임 피우스 10세가 즉위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성인이었으며, 생전에 성인으로서 추 앙받았지만, 레오 13세처럼 문화를 양성하지도 않았고, 외교적인 유연성도 갖고 있지 않았 다. 레오 13세가 재위를 마치기 몇 년 전부터, 로마 교황청에는 탄압기구가 생겼고, 피우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몇 개월 만에 근대주의적 성서 해석의 선두주자 알프레드 로아 지의 저서들이 단죄되었다. 1907년, 검사성에서 발표한 교령과 교황 회칙은 합리주의의 지나친 행동, 신앙 관련 문서 들의 비판적 분석, 교리 통일주의의 정치적인 면, 기독교 통일운동의 초기 시도 등 여러 가 지를 비난했다. 의미가 모호한 채로 로마 사회를 돌고 있는 근대 정신이라는 이름 아래, 모 든 것은 내재설과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체계로 환원되어 버렸다. 곧이어 의심과 밀고가 만 연한 가운데 카톨릭과 근대 문화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는 동안 유럽 대륙은 화염에 싸이게 되었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막아보려고 있 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서거하고 말았다. 제6장 또다시 맞은 천년 전쟁의 화염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역사상 가장 길었던 평화시기 중 하나에 종지부를 찍었다. 교황직 에서 보면,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속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화염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베네딕투스 15세는 학살극이 벌어질 것임을 즉시 깨달 았다. 그는 이 전쟁을 '유럽의 자살 행위'라고 고발하면서, '무의미한 살육'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교황의 외교활동은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엄격하게 중립을 지킴으로써, 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특히 무력충돌이 가져올 결과 를 두려워했다. "파괴를 낳을 해결책을 버리고, 국가가 패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합시 다. 멸시받고 학대받는 국가들은 두려움과 증오에 떨면서 강요된 멍에를 지고, 반격을 준 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증오와 복수의 슬픈 유산을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물 려주게 될 뿐입니다."(1915년 7월 15일) 평화를 위한 교황의 외교활동과 중립적 태도는 각 정부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양쪽 진 영의 성직자와 카톨릭 지식인들 역시 교황의 그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쪽 모두 자 신이 전제주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믿었으며, 교황이 자기 국가의 군대를 축복해 주기를 원했으리라. 결과적으로 베네딕투스는 인기 없는 교황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 의 클레망소는 '독일놈 교황'이라고 부르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는, 비록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의 결과를 꿰뚫었던 교황을 재평가하고 있다. 전후의 문제 베네딕투스 15세의 계시록적인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무력으로 해결하려던 제1 차 세계대전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유럽은 오히려 불안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 에 가라앉고 말았다. 베르사유(1919년 7월 28일)와 생제르맹(1919년 9월 10일)의 평화조약 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뜻에 따라 세워진 국제연맹도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 다. 한편 동구에서는 1917년의 소비에트 혁명이 전유럽에 새로운 위협을 가해 오고 있었다. 더욱이 1929년에 미국에서 시작해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친 월 스트리트의 공황은 경제를 살려보려는 소망마저 꺾어놓았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던 이 기간의 대부분의 피우스 11세(본명, 아킬레 라티)의 재 위기간과 맞물린다. 독재적이고 고독한 성품을 지닌 교황은 교황의 자리에 오르자 우선, 반 세기가 넘도록 교황청과 이탈리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던 '로마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에 몰두했다. 라테라노 협정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국가는 탈진했다. 자연히 사회적인 문제 들이 잇달았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라도 권력을 잡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극우파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파시스트 국민당(PNF)이 대자본가와 성직자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이 1922년 10월 28일에 권력을 장악했다. 피우스 11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겨우 7개월 만의 일이다. 이제 교황은 무솔리니와 협상해야 했다. 사실 이탈리아 정부는 1870년에 로마를 점 령한 직후, 교황에게 세계 선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이른바 '교황보장법'을 채 택했고, 당시의 교황이던 피우스 9세는 그것을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교황이 바뀌면서 '교 황보장법'에 대한 강경했던 입장은 차츰 부드러워졌다. 사실 가장 전통을 고수하는 교구 주임사제들이 보기에도 교황령의 회복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보다는 교황권의 정치적 독립을 좀더 현대적이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바티칸과 파시스트 정부는 서 로 많은 양보를 함으로써 분명 교회에 유리한 1923∼1925년의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에 그간의 갈등을 종결짓기 위한 외교활동이 있었고, 마침내 1929년 2월 11일에 라테 라노 협정을 조인했다. 이 협정서는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협정에서, 이 탈리아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새로운 바티칸국의 자유와 주권을 보장했다. 교 황은 이탈리아 국가를 인정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임을 받아들였다. 정교협약에서는, 교황이 당시에 다른 국가들과 맺었던 다른 협약들을 모델로 해서 교회와 이탈리아의 관계를 규정지었다. 협정에는 네 가지의 추가조항이 들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조항 '이다. 이탈리아는 교황령 손실의 부분적인 보상으로서, 바티칸 공화국에 연 5%의 이율로 이탈리아 정부 발행의 장기 공채로 10억 리라를 지불했고, 그외에도 7억 5천만 리라를 지급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피우스 11세의 재위중 두 번째 시기(1930∼1939)에는, 유럽을 분열시킨 이데올로기들이 주 는 애매성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1937년 3월 14일 독일어로 공포한 회칙 (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에서 독일 국가사회주의를 비난하고, 1937년 3월 19일의 회칙 (하느 님이신 구세주)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비난한 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8년 9 월 6일, "우리는 영적으로는 모두 유태인입니다."라고 불어로 한 이 말은 온 세계에 울려 퍼 졌다. 이로써 교황권은 견줄 데 없는 도덕적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39년 2월 11일 갑자기 서거한 교황은, 그 무렵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와 동조하고 있던 파시즘을 비난하고, 라테라노 협정을 파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피우스 12세(본명,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피우스 11세 시절에 추기경 국무장관을 지낸 바 있다. 그가 교황좌에 있던 시기는 역사상 가장 문제거리가 많았던 어려운 기간에 속한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이어 동서냉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재임기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그는 교회를 통치하면서 측근의 도움보다는, 서류에 의지 하여 혼자서 일을 처리해 나갔다. 교회의 법률적, 교계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1943년 회칙 (신비체의 교리)), 성서 연구를 개방하며(1943년 회칙 (성서 연구의 새로운 방식)), 새로 운 신학을 비판하고(1950년), 또한 프랑스의 노동자 사제들의 경험을 비난(1954)한 모든 경 우에서, 피우스 12세는 오직 교황 한 사람만이 그런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 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그가 지향했던 정치노선은, 예전에 제1차 세계대전 때 교황 베네딕투 스 15세가 채택했던 것으로서, 파첼리가 정책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교황청은 중립을 지킨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치의 잔혹상을 바티칸에서 잘 알고 있었는데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는 사 실이다. 교황이 죽은 후에, 독일의 극작가인 롤프 호슈트가 (신의 대리자)(1964)라는 극에 서 교황 역시 나치의 공모자였고 고발하자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때 바티칸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교황청의 활동과 증거자료들)을 발간했다. 교황청은 나치의 범죄를 대중 앞에 공개 고발하면 오히려 피해자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차라리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해서 그들을 슬픈 운명에서 구해 내는 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보았다고 한다. 연합국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교황 역시 극적인 선택 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이고 정치적인 신중함에서 나왔다는 식의 이런 설명은 모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피우스 12세의 재위중, 특기할 만한 점은 교황이 방송매체를 통해서 알려졌다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그의 후대로 올수록 점점 더 잦아진다. 시청각 매체가 그의 모습을 담기 시작 하자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하나는, 교황의 모습이 방송매체를 타면서 나타나는 파급효과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한 메시지가 주는 효과만큼, 혹은 그보다 더 커 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달 속도가 빠르고 대중 동원력이 큰(1950년 성년에는 250만 명의 순례자들이 바티칸을 찾았다) 방송매체를 통해, 교황이 카톨릭 교회의 유일한 책임자임을 인식시킬 수 있었으며, 이로써 교황이 지역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더욱 직 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피우스 12세가 죽자, 누구나 이제 교회 지도자의 모습이 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 고 당시 77세였던 안젤로 론칼리, 곧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잠시 공백을 메 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요한 23세의 재위기간은 교황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우선 교 황의 통치방식이 예전과 완연히 달랐다. 교황 요한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좋은 목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카톨릭 신자이든, '분리된 형제들'이든 아니면 신앙인이든, 무신론자이 든 간에,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누구를 대하든지 아주 소박하게, 선한 마음과 겸손함을 가지고 대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품었다. 1959년 1월 25일, 그는 만국공의회를 소집할 뜻을 밝혔다. 모든 분파의 기독교인들이 초대 되었다. 1962년 10월 11일, 그는 직접 개회식을 진행하면서, 참석한 사제들(3000명이 넘는)에 게 비난을 금하고, 그보다는 세상사람을 만나고, 세상의 문제를 직면하기 위한 길을 찾으라 고 당부했다. 그는 온 세계에 발표한 회칙에서 모범을 보였다. 가장 중요한 회칙은 (지상의 평화)로서, 그가 사망하기 불과 몇 주 전에 발표된 최후의 회칙이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전쟁이 정의 의 도구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평화를 위해서는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며 신앙의 구분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의 죽음은 전세계인의 슬픔이었다. 그의 후임자인 바울로 6세,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는 요한 23세만큼 인기를 누리지는 못 했다. 재임시 요한 23세가 바울로 6세를 '우리의 햄릿'이라고 부르곤 했듯이, 폭넓고 깊이 있는 학문을 닦은(그가 책90상자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설이 되었다) 바울로 6세에게 는 비극적인 우유부단함이 있었다. 오랫동안 피우스 12세의 고문으로 있었던 그는, 찬반 양 론을 지나치게 비교 검토해 보다가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는 소수파의 전통주의적인 해결책으로 기울곤 했다. 이렇게 해서 피임을 비난한 회칙((인간생명), 1967)은 교회의 만 장일치 전통을 깨뜨려버렸다. 세상과 만나야 할 필요성과 신앙의 초월적인 영역을 배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주저하고 고민하던 교황은, 60년대의 낙천주의가 끝난 후 현대 사회에 나타난 불안을 온몸 으로 구체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1965년 12월 8일에 공의회를 무사히 종결짓고, 결정 사항들의 난점을 파악하여 때로 는 용기 있게 적용해 나갔다. 동구에서 온 교황 사람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사항들이 기록된 자료집만 있으면, 교회가 세 번째 의 천년을 맞이하는 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 렇다면, 그것은 공의회의 역사를 모르는 데서 나온 생각이다. 회의 진행과정은, 민주주의 토 론이 늘 그러하듯이, 명백히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 모든 사항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기록된 회의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만장일치라는 것은 보기 좋은 것이겠지 만 좀더 섬세하게 분석해 보면, 공의회 문서의 내용들이 모호할 때 오히려 만장일치가 이루 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일단 공의회가 끝나고 나면, 사실 그 적용은 평범한 인간인 교황이 결정사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교황청의 태도를 과신하 지 않는다면, 교황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바울로 6세의 후임자들이 공의회가 가진 이러한 역사적 의미의 베일을 벗긴 것이다. 알비노 루치아니, 요한 바울로 1세의 교황 제위 기간은 불과 33일에 지나지 않았다. 콘클라베를 끝내고 나오면서, 추기경들은 기쁨에 겨워 서, 진실로 '하느님의 후보자'를 뽑았다고 확신했다.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겸손함과 미소는, 비록 몇 주일 동안이었지만, 선한 교황 요한의 시절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게 해주 었다. 그러나 그가 더 오래 재임했더라면 무슨 일을 했을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폴란드 사람인 카롤 요셉 보이티아, 요한 바울로 2세는 아드리아누스 6세 이후로 이탈리 아인이 아닌 첫번째 교황이다. 용기와 결단력, 공산체제에서 얻은 경험으로 그는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교회를 잘 이끌어갔다. 그가 받은 교육으로 보면, 그가 교회 현실의 무제에 보수주의의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당 연한 듯하다. 그는('거룩하신 뜻에 따라') 교회의 교계제도를 확립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교황은 이 위계의 맨 꼭대기에 있으며, 모든 권력을 겸한다. 1983년 1월 25일에 발행된 새 교회법은 교회에서 교황의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때 사용했던 용어를 다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요한 바울로 2세는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완전히 현대적인 시각 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는 교회 내부에서는 권위적이며, 시민사회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민 주적이고 게다가 민중주의적인 이중의 태도를 갖는다. 오랫동안 윤리학 교수였던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가르칠 때는 항상 도덕문제를 중점에 둔다.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카리스마를 지닌 요한 바울로 2세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빈번한 세계여행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 려 하는데, 그가 여행할 때면 언제나 세심한 것에까지 많은 준비와 공이 들어간다. 그는 도 착하는 곳마다 먼저 땅에 입을 맞추고, 미사를 거행하여 엄청난 군중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몇 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특별한 재능과 배우기질을 맘껏 발휘하여 그가 방문하는 국가의 현실에 적합한 연설을 한다. 피우스 12세보다 더 숭배되고 있는 요한 바울로 2세는 카톨릭 교회의 안과 밖에서 수많은 비평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요한 바울로 2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잡하다. 그에 관해서 쓴 글들을 읽노라면, 교황의 아주 작은 몸짓과 언어표현까지도 찬양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칭송에 당황할 때가 있고, 그런가 하면 드물기는 하지만 그를 향한 격렬한 공격에 놀랄 때 도 있다. 만일 시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올바른 평가를 기다리면서 평정함을 갖고자 하 는 역사가라면, 시라시드의 권고(외경서, 시라시드 11:27∼28)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선포하지 말지어다. 한 인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만 죽 음의 순간일 뿐이다." 미래에는 어떤 교황이 필요할까? 21세기에 들어서는 마당에 교황권에 어떤 자리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를 가정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최근과 같은 발전이 연장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교황권이 점 점 더 독재적이 되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황권은 사실상 모든 중간 권력과 지역 교회의 자치권을 제거할 것이다. 또 하나는,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바꿀 정도로 교회의 구조를 교회의 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그 안에서 교황의 기능을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요한 바울로 2세가 1995년 5월 25일에 공표한 가장 최근의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에 서, "새로운 상황에 개방적인 수위권을 행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런 의미에서이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의 마비상태'에 다가와 있는 것은 아닐는지? 기록과 증언 고대의 교황직 마태오 복음 16장 18절 1세기 말, (마태오 복음)이 씌어졌을 때, 이 구절을 읽고 로마와 로마 주교를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 '반석'은 베드로가 보여준 믿음이었 다. 2∼3세기에 로마 교회는 비할 데 없는 명성을 누렸다. 이 명성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순 교할 때까지 신앙을 증언한 장소가 로마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때도 (마태오 복음)에 의거해 로마 교회의 중요성을 인정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세기에는 서방에서 그랬듯이, 동방에서도 복음서에서 말한 그 '반석'이 그리스도이거나 혹은 베드로, 혹은 베 드로의 믿음이라는 생각이 여전했다. 그러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처음으로 교황 다마수스가 이 구절을 이용해서 베드로라는 인물과 베드로가 세운 교회를 '베드로의 계승자'로 연결시 켰다.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 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 각하느냐?"하고 예수님이 다시 묻자 시몬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 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나의 아들 시 몬아, 이것을 너에게 알리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너는 베드로(반석이라는 뜻:역주)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지 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내가 하늘 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무엇이 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 다. (마태오 복음), 16장 13절∼20절 성 다마수스 1세 다마수스는 로마 주교로서, "너는 베드로이다..."는 구절을 권력 확립을 위한 방식으로 해석 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교황직에 오르게 된 배경과 교황직을 수행하는 방법은 4세기 말 에 교황의 역할이 가졌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교황 리베리우스 밑에서 부제로 있던 그는 355년, 교황이 망명길에 오를 때 동행했다. 하 지만 곧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366년 9월 24일에 리베리우스 교황이 갑자기 사망하자, 후임문제로 걷잡을 수 없는 무질 서가 벌어졌다. 리베리우스에게 변함없이 충실하고자 했던 무리는, 즉시 율리아누스 대성전 에서 교황의 부제였던 우르시누스를 주교로 선출했다. 그러나 펠릭스를 신봉하는 패거리는 다마수스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다마수스는 부랑자 무리를 매수하여 율리아누스 성전을 습 격한 뒤, 3일 동안 우르시누스파를 무자비하게 학살해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다. 결국 10월 1 일 일요일에 그의 패거리가 라테라노 성전을 점령했고, 다마수스는 그곳에서 교황으로 축성 받았다. 그런 후에 총독의 지지를 구하여(처음으로 교황은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공권력에 도움을 청한다) 당장에 우르시누스와 그 일당을 로마에서 내쫓았다. 노상에서 격렬한 혈투 가 10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다마수스 일당은 우르시누스파가 피신해 있던 리베리아 성전을 공격했다. 이교도 역사가인 아미엥 마르슬랭은, 무려 137구의 시신이 땅바닥에 방치 되었다고 전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다마수스의 교황권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권 위는 여러 해 동안 땅에 떨어졌다... 그는 왕족과 귀족계급 특히 귀부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부인들의 놀잇감'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가 보여준 화려한 생활과 극진한 환대는 이교도 귀족 이 기독교에 갖고 있던 편견을 던져버리게 해주었다. 한편 그는 이단자를 적극 응징했다... 그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2차 만국공의회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 며, 당시부터 진행되고 있던 동방과 서방의 긴장완화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 다마수스 교황은 지칠 줄 모르고 로마의 우위권을 제창했고, 종종 로마를 사도좌라 불렀 다. 그는 또한 신경의 정통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교황에게 있다고 했다. 그리고 387년에는 권력층을 설득해 성직자 문제를 결정하고, 또 그들을 소환할 수 있는 최고 결정기관이 바로 교황임을 인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황에게 사법권의 특별한 면책특권을 부여하기 를 거절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만은 그의 생각에 찬성하여 380년 2월 27일, 예전에 사도 베드로가 직접 전수했고, 그 이후에는 로마의 교황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베드로가 공표한 바대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했다. 다마수스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우위권 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주장하듯이 교구회의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 베 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 따라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한 언약(마태오 16:18)의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자격에만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로마 주교의 우위권을 주장했던 다마수스 교황 은, '매고 푸는' 견줄 데 없이 막강한 사법권을 누렸다. 이런 신념은 성직자 규율에 관한 결 정에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는 순교자들과 전임 교황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풍자시들을 직접 지었다. 성 예로니무스 는 운문과 산문으로 지은 순결에 관한 에세이들도 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황은 자신이 아르데아티나 가도에 건축을 명했던 교회 안에 매장되었으나, 그의 시신은 후에 생로랑인다 마수스로 이장되었다. 그의 축일은 12월 11일이다. J.N.D. 켈리 (교황사전), 1994년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서구뿐 아니라 동방에까지 그 인품이 널리 알려졌고, 그의 권 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지역 교회의 자치권을 존중했으 며, 자신의 역할이 다른 주교들의 역할을 가려버리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알렉산 드리아의 총주교에 보낸 그의 편지가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주교께서는 일전에... '당신께서 명령하셨듯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주교께서 저를 지 칭하실 때,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마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들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신분으로는 저의 형제이며, 도 덕적으로는 저의 아버지들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만 제가 보기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그저 지적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외람되 지만, 저는 주교께서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그다지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신다는 생각 이 듭니다. 왜냐하면 주교께서 저에게,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주교의 편지 첫머리에서 '훌륭하신' 보편 교황이라는 호칭을 쓰신 까닭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제가 원치 않는 표현입니다. 성덕을 갖추신 사랑하는 주교께 간절하게 부탁드리오니, 이후로 더 이상 그런 말을 쓰지 않 으셨으면 합니다. 주교께서 그렇게 모범을 보이셔야만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 현하는 사람들의 습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제게 풍겨 나오는 인품을 통해서 존경받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형제들의 명예를 훼손해 제가 높임 받는 것을 명예로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명 예를 느낄 때는 보편 교회가 명예를 차지할 때입니다. 또한 제 형제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 을 볼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실로 제가 명예를 느낄 때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 아오는 명예를 거절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주교께서 저를 감히 보편 교황으로 생각 하신다면, 주교께서는 당신이 제게 부여한 보편성을 다시 거부하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부탁드리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시다. 공허를 부풀리고, 서로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사라지게 합시다. 티야르 (로마의 주교), 1982년 영적 권력, 세속 권력 (교황지령)-신정정치의 선포(1075)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유럽에서 교황권이 절 정에 이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 로마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오로지 구세주 한 분이시다. 2. 로마 주교만이 정당하게 보편적이다. 3. 로마 주교만이 주교들을 해임하거나 용서할 수 있다. 4. 교황특사는 직분이 주교보다 낮다 할지라도, 공의회에서 모든 주교들 위에 있다. 또한 교 황특사는 그들에게 해임선고를 내릴 수 있다. 5. 교황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해임할 수 있다. 6. 교황이 파문한 사람들과는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없다. 7. 교황만이 상황에 따라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고, 새로운 백성을 모을 수 있으며, 성직 자회의 교회를 수도원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 또한 교황만이 부유한 주교구를 나눌 수 있고, 반대로 가난한 주교구를 합칠 수 있다. 8. 교황만이 황제의 기장을 사용할 수 있다. 9. 교황은 모든 왕족들이 발에 입맞출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10.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모든 교회에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11. 교황의 이름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12. 교황은 황제를 해임할 수 있다. 13. 교황은 필요에 따라서 주교들의 자리를 옮길 수 있다. 14. 교황은 어떤 교회의 성직자라도 교황이 원하는 다를 교회의 성직자로 임명할 권리가 있 다. 15. 교황의 명령을 받은 자는 다른 교회에서 서품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분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 서품을 받는 자는 교황에게서 받은 품급보다 더 높은 품급을 다른 주교에게 받으 면 안 된다. 16. 어떤 일반적인 교구회의도 교황의 명령 없이는 소집될 수 없다. 17. 교황의 권위를 벗어날 경우에는 어떤 문서나 책도 교회법의 가치를 지닐 수 없다. 18. 그 누구든 교황의 판결을 수정할 수 없으며, 교황만이 모든 사람들의 판결을 수정할 수 있다. 19. 어느 누구도 교황을 심판할 수 없다. 20. 아무도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를 비난할 수 없다. 21. 모든 교회의 중요한 소송문제는 교황에게 보고해야 한다. 22. 로마 교회는 결코 과오를 범한 일이 없다. 그리고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앞으로도 결 코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23. 교회법규에 따라 서품을 받은 로마 교황은 복되신 베드로의 공덕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성인이 된다. 24. 교황의 신하들은 교황의 명령이나 동의에 따를 때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25. 교황은 교구회의의 모임 밖에서도 주교들을 해임하고, 또한 죄를 용서할 수 있다. 26. 로마 교회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카톨릭 신자로 여기지 않는다. 27. 신하가 의롭지 않은 자에게 충성서약을 했을 경우에, 교황은 그 신하의 서약을 해제시킬 수 있다. 마르셀 파코 (신정정치, 중세의 교회와 권력), 1989년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일차 판결 1076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파문하고, 신하들이 황제에게 불복할 것을 종용했다. 사도의 왕 복되신 베드로여, 기도하옵니다...당신은 복되신 바울로와 함께, 성스러운 로마 교회가 제 뜻과 상관없이 제게 지휘권을 맡겼다는 사실을 입증하실 수 있는 증인이시나이 다. 또한 당신은 제가 당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높여 정복자로서 자처하지 않았다는 사실 도 증거하실 수 있나이다. 저는 평신도들의 염려를 받고 속세의 영광을 누리며 당신의 자리 에 앉기보다는 오히려 비천한 순례자로서 삶을 마칠 수 있기를 더욱 간절히 원했나이다. 그 러나 특별히 당신께서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제게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셨고, 지 금도 기뻐하신다면, 믿사옵건데, 그것은 당신이 내리신 은총의 결과이지, 결코 제가 수고하 여 일한 결과가 아니옵니다. 당신의 은총이 제게 내려온 것은 제가 당신의 대리자이기 때문 이며, 이 은총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으로, 하늘과 땅에서 매고 풀 수 있는 권력이니이 다. 저는 이 확신에 힘입어, 당신의 교회를 수호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권세와 권위에 의지하여, 있을 수 없는 무례함 으로 당신의 교회에 항거한 하인리히 황제의 자손에게, 튜턴과 이탈리아 전왕국의 통치를 금하나이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했던 맹세와 또한 그들이 그에게 지금껏 하 고 있는 맹세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모든 사람들이 왕에게 하듯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금하 나이다.…저는 당신께서 베드로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께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또한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모든 국가들이 알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권세를 믿는 믿음으로 그를 믿나이다. 마르셀 파코 (신정정치, 중세의 교회와 권력),1989년 보니파키우스 8세의 칙서 (우남 상탐) 1302년, 프랑스의 미왕 필리프와 한창 마찰을 빚고 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칙서를 내려 교황의 절대 권력을 확언한다. ...따라서 이 교회, 하나뿐인 이 유일한 교회는 단 하나의 몸, 단 하나의 머리를 갖고 있을 뿐, 괴물처럼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 하나의 머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의 대리자인 베드로, 그리고 베드로의 계승자이다... 복음서의 말씀은 그 권력에는 두 개의 칼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따라서 두 개의 칼, 즉 영적인 칼과 속세의 칼은 모두 교회의 권력에 속한다. 그리고 이 속세의 칼은 교회를 위해서 쓰여야 하며, 영적인 칼은 교회가 써야 한다. 사제는 영적인 칼자루를 잡으며 왕과 기사는 속세의 칼자루를 잡는데, 속세의 칼은 사제의 동의를 거쳐 사제의 뜻에 따라 사용되 어야 한다. 그리하여 속세의 칼은 영적인 칼에 복종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속권은 영권에 복 종해야 한다...영권은 어떤 지상 권력보다 더 위엄 있고 더 고귀하며, 영적인 것들이 세속적 인 것들보다 우월한 만큼, 그 점은 분명하게 인정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 야 할 필요가 있음을 선언하고, 정의하고, 선포한다. (카톨릭 신앙) (교회지도자의 교리서), 1961년 교황에 대한 헌신 1809년 7월 5일, 나폴레옹 1세는 교황령 안에서 대륙봉쇄령의 실시를 거부하는 피우스 7 세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기독교 여론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조치들은 오히려 사람들이 교황에 대해 헌신의 마음을 품는 계기가 되었 다. 생앙주성에서 울리는 대포소리는 곧 교화의 세속통치권이 추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다. 교황의 기가 내려지고 대신, 세상 모든 곳에 영광이나 몰락을 예고했던 삼색기(프랑스 국기:역주)가 올라갔다. 로마는 그 동안 수많은 격동이 일어나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아왔 지만, 그 모든 소동들은 오랫동안 로마를 덮고 있던 먼지만 겨우 걷어갔을 뿐이다... 교황은 대답하기를, 인간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라데가 이처럼 보나파르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거늘, 하물며 교황인 피우스 7세로서야 삼중관을 받으며 하느님 앞에서 한 맹세 를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또한 교황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단지 자신은 한낱 관리자일 뿐인 교회의 영역을 양보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혼자서 떠나야 하냐고 교황이 묻자, 한 장군이 대답했다. "교황 성하, 대신 한 명만 대동하실 수 있 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기경 파카는 옆의 추기경의 의상실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파카가 추기경복을 입고 돌아왔을 때, 그는 존엄한 교황이 벌써 경관들의 손에 이끌려 강 제로 계단을 내려서는 모습을 보았다. 계단 아래 땅바닥에는 부서진 문의 파편들이 여기저 기 널려 있었다. 피우스 7세가 로마를 떠났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22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마치 병사가 하루를 행진하는데 5수씩 가지고 다니듯이, 그러나 그는 결국 바티칸으로 다시 돌아 왔다!... 교황은 우선 공식 항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파문칙서에 서명하기 전 에, 파카 추기경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실 건가요, 추기경?" 추기경은 대답했다. "눈 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교황 성하! 그리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 이 바로 하늘이 원하는 것입니다."교황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 다음, 서명을 하고 외쳤 다. "이 칙서를 배포하시오." 메가치는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마리아 대성당, 그리고 성 요한 라테라노 성당의 문에 첫 번째 칙서들을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뜯겼다. 미올리 장군이 그것을 황제에게 보냈던 것 이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라데 장군은 정문을 통해 퀴리날레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궁 안에 잠입해 있던 시리 대령이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장군은 방으로 올라갔다. 예식실에 도착 하니, 40명의 스위스 수비대가 있었다. 수비대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교황은 위험에 직면하여 신에게만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포르타 가도로 향하는 길가에 면한 궁전 창문이 군인들의 도끼질에 모두 부서졌다. 서둘 러 일어난 교황은 성직자 법복에 두건 달린 외투를 입고 추기경과 파카, 데푸이그, 주교 몇 명과 비서실의 시종들과 일반 접견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교황의 양쪽에는 추기경 둘 이 서 있었다. 라데 장군이 들어왔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창백한 라데 장군은 잠시 난처해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속통치권을 포기해야 하며, 복종하지 않을 경우, 미올리 장군에게 끌 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사후의 회상록), 1966년 르네상스 교황의 문화예술 옹호정책 교황의 문화적 예술적 역할은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 개종을 하고, 로마에서 교황의 역할이 커진 것이, 쇠락기에 접어든 제국주의 로마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행운이었다. 교황들의 문화예술 옹호 사상에는 모호한 면이 없지 않았고, '올바른 통치'와 나뉘는 경계 선이 불확실하게 보일 때도 많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을 환대하여, 개종시켜야 하 는 로마의 종교적인 측면 때문에 세속적 주권자들의 의무도 변해 갔다. 이렇게 해서 유용성 과 필요성에서 형식미로 치중하는 현상이 정당화되었다. 원칙의 엄격함에 외관의 화려함이 란 의혹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문화예술 옹호는 거울의 반영 같은 것이었다. 화려한 겉모습 은 교회권력의 반영이며, 교회가 권력을 갖는 만큼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온 것 이다. 그러나 교황들의 문화예술 옹호 사상이 항상 일관되며 꾸준히 지속된 것은 아니다. 유 난히 발전한 기간이 있었지만 침체기와 쇠퇴기 역시 있었다. 창조적이고 방탕하며 속세의 위대함에 도취된 교황 다음에는, 겸손하고 보수적이며 엄격함을 고집하는 교황이 뒤를 이었 는가 하면, 헌금을 절약하고, 인간적인 영광에 대해서는 아무 욕심 없이 단순히 교회를 복구 하고, 유지하기만 한 교황도 있었다. 15∼16세기의 르네상스는 식스투스 4세, 인노켄티우스 8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바울로 3세 등 군주적 교황들이 권력을 잡았던 때이다. 양심 의 규명 시기에 잠시 주춤했던 문화예술의 발전은, 예술의 역할을 의지주의적이고 명료하게 개념 정립한 바로크 시대를 만나 다시 풍성한 꽃을 피웠다. 바울로 5세, 우르바노 8세, 알렉 산드르 7세 등이 주역이었고, 그들의 질주 앞에서는 18세기도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북쪽의 플라미니아문으로 들어오던 순례자들을 도시로 쉽게 들어오게 하기 위해 많은 도 로를 만들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화에 박차가 가해졌다. 로마로 들어오는 두 개의 '세 갈래 길' 중 하나는 국민의 광장으로 들어서고, 다른 하나는 율리우스 2세가 바티칸으로 직접 통하게 만든 기울리아 가도를 따라 생앙주 다리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대성당들은 서 로 잇기 위해서 식스투스 5세 때 만든 직선 도로망은 여러 가지 행진에 늘 이용되었다. 거 대한 건축물을 좋아하는 로마의 취향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카피톨레 광장, 성 베드로 성당 앞의 베르니니의 주랑 같은 광장이 만들어져서, 감탄을 자아내는 휴식장소로 이용된다. 분수는 교황들의 관심이 유용성에서 웅장함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식스투스 5세와 아쿠 아 펠리스, 바울로 3세와 아쿠아 파올라, 인노켄티우스 10세와 나보네 광장의 플뢰브 분수, 클레멘스 12세가 계획하고 베네딕투스 14세가 완성한 트레비 분수 등이 있다. 트레비 분수 는 가장 유명하면서 동시에 가장 웅장한 분수로 맨 나중에 만들어졌다. 위풍당당한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그 역량을 한껏 발휘한다. 1454년에 처음 계획하여, 1614년에 정면 부분을 완성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시대에 따른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도입되었다. 건축가와 설계도가 모두 바뀌어서, 미켈란젤로가 원했던 그리스식 십자 형태가 더 많은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라틴식 십자 형태로 변했다. 반구형 천장은 웅장함을 비롯한 모든 효과가 절정에 이른 건축술의 걸작품이다. 율리우스 2세는 콘 스탄티누스 시대의 성당을 모조리 변형시켰다. 이같이 과거를 경시하고 당대를 선호하는 경 향은, 주요한 대성당들을 모두 당시의 취향에 맞춰 복구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보로미니가 보수한 성 조반니 라테라노 성당의 중앙 홀도 그 한 예이다. 물론 속세권력을 찬양하는 경 향도 건축에 나타나고 있다. 퀴리날레궁, 바티칸궁, 라테라노궁과 같은 교황궁들은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다른 나라의 권력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단 순히 개수만 한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개축했다. 1592년부터 영원한 교황 거처지가 된 퀴리 날레궁은 17∼18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바티칸 정부는 조화를 생각 않고, 오늘날까지 도 건물에 손을 대고 있는 교황들을 비난하고 있다. 장식은 웅장한 멋보다는 막강한 부의 위력을 나타낸다. 벽뿐만 아니라, 전에는 나무로 오목볼록하게 장식되었던 둥근 천장까지 회 화가 들어섰다(미켈란젤로의 걸작품인 식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라파엘로가 꾸민 회랑과 여 러 방들). 조각품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개혁주의자의 비판에도, 교황은 교육적 가치를 보 아 성상을 고이 간직해 왔다. 자신들의 취향과 메시지를 반영하는 성상을 통하여, 교회의 영 성을 부드럽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필립 르빌랭 (교황사 사전), 1995년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의 계약 율리우스 2세는 정치가, 전쟁지도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멋진 역할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 같은 예술가의 후원자라는 것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의 건축을 계획했던 이도 바로 율리우스 2세이다. 오늘 나는, 율리우스 2세와 소데리니가 결국 승리했다고 적어야 한다. 장관이 내게 피렌체 에 머물 용기를 주었다면, 나는 지금 볼로냐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일시적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피렌체를 떠난 것은 우습고도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영주가 당분간 내게 수여한 공화국 대사라는 칭호가 생각났다. 벤티보글리오 가문이 세즈 위원회들과 함께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정부관사에서 율리우스 2세를 만났던 때도 생각난다. 영주는 내게 대사라는 칭호를 주면서, 교황의 진노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나 의 요청을 들어주마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도 다 부질없는 계획이었다.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율리우스 2세 가 내게 친아버지처럼 대해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교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대사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몹시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교황에게 공화국의 사절이 아니라, 마치 속죄자인 듯 나를 소개했다. 그때 나는 교황이 내 상상처럼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상했던 교 황의 모습은 로마에서 떠도는 교황에 대한 험담 때문이었으리라. 교황을 직접 보고 나서, 나 는 상당히 놀랐다. 이제 나는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해 왔음을 인정할 수 있으며, 또한 인 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성 베드로 성당에 세우기로 했던 기념비에 관해 교황이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의견을 바꾼 점에 대해서만은, 내 생각을 아직 바꿀 수 없다. 그는 처음 약속한 대로 내게 모든 것을 일임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교황을 위해서 최상의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작품을 위해 구상했던 노예들, 승리의 장면들, 그밖에 낮은 부조 등 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한낱 지나가버린 그림자처럼 생각해 야만 한다.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과 그 존재이유를 전부 표현해 보려 했다. 내가 나타내려 했던 것은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최근에 거의 고정관념처럼 되다시피 한 현시대의 인물들을 표현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더 고집을 부려봤자, 교황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지 금, 율리우스 2세에게 '즉각 복종'하라고 충고했던 사람들이 옳았다고 인정한다. 아버지와 부오나로토 형님도 내게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틀린 것은 항상 패한 자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틀린 사람은 바로 나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그림자들(율리우스 2세의 기념비)이 머리에서 지워질 때까지, 나는 고집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볼로냐의 교회 앞에 자신의 동상을 건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나는 그것을 수락하고 말았다. 하기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 의 초상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여기서 쓴 바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율리우스 2세는 내가 마지못해 이 동상을 만들게 되리라고는 한순간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롤랑도 크리스도파넬리 (광인 미켈란젤로의 일기) 교황의 무오류성 성 베드로의 수위권이 가지는 힘과 성격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로마에서 열린다. 교회를 다시 정의 내리고, 교황의 유일 무이한 역할을 단정짓기 위해서이다. 공의회 안에 갈등이 생겼으나, 피우스 9세가 회의를 주 도하고, 정신적으로 강한 압력을 가해 마침내 1870년에 교황의 무오류성이 선언된다. (성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증거에 근거하고, 역대 교황들이 공의회를 통해 입증 한 분명한 칙령들을 따르면서, 우리는 피렌체의 만국공의회를 새로 정의 내린다. 피렌체 만 국공의회는 카톨릭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준다. "교황청과 로마의 교황은 전지상 에서 수위권을 갖는다. 또한 로마 교황은 사도들의 우두머리이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자 요, 모든 교회의 머리이자, 또한 모든 기독교인의 아버지이며 스승이신 성 베드로의 계승자 이다. 만국공의회록과 교회법전이 밝히고 있듯이, 전능하신 목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는, 성 베드로의 인격을 빌려 교황에게 모든 교회를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위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구세주의 뜻에 따라,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 위에서 수위권을 소유한 다는 것과, 로마 교황의 재판권이 구주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가르치고 또한 선언한다. 모 든 서열의 목자와 신자는 신앙과 도덕성 문제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회의 통치와 규율 문제 에 대해서도, 각자 혹은 함께, 성직계급에 종속될 의무와 진정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를 가진 다. 이처럼 로마 교황과 함께 영성체와 신앙고백의 통일성을 지키는 교회는 단 한 명의 목 자가 다스리는 단 하나의 공동체이다. 이것이 카톨릭 진리의 교리이며, 누구나 이 교리에서 벗어나면 믿음과 구원에서 벗어날 위험에 처한다. 교황의 권력은 일반 주교의 재판권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세우신 주교 들(사도행전 20:28), 곧 사도의 계승자들은 진정한 목자들로서, 재판권을 행사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무리를 돌보고 통치한다. 반대로 이 권력은, 대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말씀대로, 최고 의 보편 목자를 통해 확인되고, 공고해지고, 보호받는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명 예는 곧 보편 교회의 명예이다. 나의 명예는 곧 내 형제들의 견고한 힘이다. 각자가 마땅히 명예를 누릴 때, 나는 진실로 명예롭다."... 사도의 거룩한 수위권으로 로마 교황은 모든 교회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로마 교황이 신자들의 최고 재판관이라는 것과, 교회의 사법권에 관계되는 소송이라면 누구든지 교황의 심판에 의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또한 선언한다. 어떤 권위보다 지고한 사도좌의 재판권 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으며, 누구도 교황의 결정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만 국공의회를 교황보다 우위에 있는 권위로 여겨서, 공의회에 로마 교황이 내린 재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 교황이 교회의 규율이나 통치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문제를 재판할 수 있는 완전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감독하고 지시하는 책임만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교황이 이 최고권의 완전한 전체가 아니라 중요한 일부분만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교황의 권력이 교회, 목자, 신도들 각각 또는 전체에게 직접적인 것 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파문을 당해야 한다... 영원불변하는 신앙과 진리의 이같은 카리스마는 하느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이는, 그들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들의 고귀한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그리스도의 보편적 무리가 오류투성이의 양식이 아닌 천상의 교리의 양식 을 먹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카톨릭교의 분열이 사라질 때 교회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교황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는 교회를 지옥의 권세 앞에서 견고하게 지 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으로 사도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이 시대에, 교황의 권위에 이의를 제 기하는 사람이 없지 않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 최고의 목자라는 기능에 덧 붙여주신 특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초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하 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카톨릭교를 찬양하고 그리스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공의회의 동의를 얻어서 하느님이 계시하신 다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선언하는 바이다. 즉 로마 교황이 그의 권위를 가지고 말할 때는, 다시 말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목자이자 스승 으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사도의 최고 권위에 의거하여, 모든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상의 어 떤 교리를 채택해야 한다고 결정할 때는, 성 베드로께서 친히 약속하신 거룩한 도움으로 로 마 교황은 무오류성을 향유한다. 이 무오류성은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정의 할 때,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갖추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로마 교황의 정의는,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 때문에 결코 취소할 수 없는 결정 적인 것이다. 누군가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오만한 태도로 우리의 정의를 반박한다면, 그는 파 문을 당해 마땅하다. 아테르누스, 로제 오베르 (만국공의회의 역사,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964년 빅토르 위고 교황의 무오류성 선언을 환영하는 교황권 지상론자들에 반해서, 여러 분야의 국제 여론은 이 정의를 거부하고 조롱했다. 무오류성! 아! 나, 교황은 진정 오류가 없도다! 그리하여 나, 교황은 절대로 발을 헛딛는 법이, 거짓을 말하는 법이 없도다. 그리하여 나, 교황의 입에서는 절대로 오류가 튀어나올 수 없도다. 이 놀랍고도 놀라운 무오류성,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오류성이 지상최고의 눈에서 빛 을 발하노니... 오 밤이여! 그들을 용서하라! 바람보다 자유롭지 못하고 식물보다 연약한, 불행한 희생자, 불행한 인간, 흔들리는 땅 위에 선 불안한 보행자. 떨며 달아나고자 동요하는 마음. 작은 소리라도 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이러한 존재여! 자신의 뒤에 컴컴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느끼는 자, 자신 앞에 깊은 구렁이 가로막고 있음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자신만이 정상에 올라서 있다고 느끼는 자! 비루한 육체 안에 끔찍한 해골을 가진 자. 그러면서 하늘을 향해 "주여, 나는 당신과 동등한 자니이다!" 하고 말하는 자! 나는 권위이며, 나는 곧 확신이니, 그러므로 내가 느끼는 고립감은 하느님이여, 당신이 느끼 는 고독감과 같은 것이니이다. 나, 교황은, 인간이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그 거대한 무 위에 당신과 함께 서 있는 유일한 자니이다. 구주시여, 마치 당신 앞에서 모든 것이 무에 불과하듯이, 모든 것이 또한 나, 교황 앞에서 무에 불과하나이다. 나는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며, 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또한 나는 존재가 무 엇인지 알고 있나이다! 나는 당신을 붙잡아 나의 열쇠로 당신을 열어서 하느님,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나이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 있는 하느님, 밑바닥까지 나는 당신의 깊이를 보나이다. 어두컴컴한 우주 안에서 나, 교황만이 맑은 정신을 지닌 유일한 자니이다. 나는 길을 잃을 수 없으며, 당신조차 내가 결정하는 것을 따라야 하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여기 진리가 있도다!" 하고 말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말해진 것이니이다. 내가 법을 선포하고 명령을 내렸을 때, 그리고 당신의 분노가 시작되는 점과, 당신의 자비가 끝나는 곳을 내가 발설했을 때, 그때는 당신조차도 하늘에서 당신의 거대한 이마를 숙여야 하나이다! 별이 수놓인 커다란 수레는 두 개의 큰 바퀴를 축으로 하여 돌아가나이다. 하느님과 나, 교황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빅토르 위고 (교황), 1878년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지상의 평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함께 인권선언은 새로운 세대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 다. 과거에 피우스 6세는 인권선언을 비난한 바 있다. 그로부터 174년 후인 1963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오히려 인간의 권리를 지상의 평화의 기초로 내세운다. 그의 회칙 (지상의 평 화)가 현대에 들어와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교황의 칙서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권리와 신체에 해를 입지 않을 권리, 그리고 특히 음식과 의 복, 주거, 휴식, 의료혜택, 사회복지 등,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수단을 누릴 권리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질병에 걸렸을 때, 불구가 되었을 때, 배우자를 잃 었을 때, 노후를 맞았을 때, 실업상태에 처했을 때, 그리고 생계수단을 잃고, 그 결과 자신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안전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인격을 존중받고, 좋은 명성을 지니고, 진리탐구와 사고의 표현과 확산, 예술 창작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도덕질서와 공공재산의 보호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 한 인간은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 따 라서 기초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이 속해 있는 정치공동체의 발전 정도에 따라 기 술적, 전문적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각자의 자질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자 신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적합한 책임과 지위를 가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남편과 아내 가 서로 동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나누는 가정을 이루거나 혹은 사제 또는 종교적 삶의 소명 을 따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자유롭게 선택된 결혼을 기초로 하는, 붕괴될 수 없는 단 하 나의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세포로 여겨지며 또 마땅히 그렇게 여겨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가정의 안정을 공고히 하고, 가정이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질서를 따를 의무가 생겨난다. 무엇보다도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을 보장해줄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일할 권리가 있으며, 자발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에는, 건강과 도덕성을 해치지 않고, 청소년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노 동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그리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여성이라는 점과 아내와 어머니라는 점이 고려되는 노동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개인이 책임을 다한다는 조건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의 기초 이다. 인간은 사회적 삶을 살도록 태어났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연합하고 협력할 권리가 있으며, 집단 속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조직체를 만들 권리, 그리 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직책을 자유롭게 담당할 권리를 갖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는 전대륙에서 2000명이 넘는 주교들이 모였으며, 로마 밖의 18개 교회에서 온 참관인들도 참석했다. 공의회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계를 향해 교 회의 문을 여는 데 매우 큰 공을 세웠다. 종교의 자유 선언 ...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은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 자유는, 인간이 면 누구나, 개인이든 사회집단이든 권력의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 하여 종교문제에 관해서 그 누구도 자신의 양심에 반대하여 행동할 것을 강요받거나, 혹은 비밀리에든지 공공연하게든지, 혼자서든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서든지 양심에 따라 행동 하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또한 공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하느님의 말씀 과 이성이 인간에게 알려준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한다. 사회의 사법질서에 따르면서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됨으로써 종교의 자유권은 시 민권을 구성한다. 현대 세계와 교회 세상의 발전에 관해, 그리고 세상에서 현대인과 인류가 차지하는 새로운 위치에 관해,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서를 채택했다. 이 시대의 모든 인간, 특히 가난한 자와 고통받는 자의 기쁨, 소망, 슬픔, 불안은 곧 그리 스도 제자들의 가슴에 울려 퍼지지 않는 것으로서 진정 인간적인 것이란 없다. 성령의 인도 하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모여서 하느님의 왕국을 향해 걸어가며, 모든 이들에게 선포해 야 할 구원의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진정한 기독교인의 공동체는 그 리하여 인류와 인류의 역사에 실제적이고 친밀한 유대감을 갖는다. 때문에, 전에는 교회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노력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들에 국한시키지 않고, 모 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의회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존재와 활동 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공의회가 내다보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이며, 가족이 중심에 놓인 우주와 함께 전 인류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세계이다. 그것은 또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연극무대 이며, 인간의 노력과 실패, 승리가 있는 세상이다. 기독교인의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창 조주의 사랑으로 세워졌고 그 사랑으로 보존되고 있다. 사실 세상은 한 번 죄의 노예로 떨 어진 적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을 통하여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구하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화하고, 그 완성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는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류가 누리는 권력 앞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세상의 진보에 관해서, 우주 안에서 인간이 갖게 될 위치와 역 할에 관해서, 개인적인 노력과 집단적인 노력이 갖는 의미에 관해서, 그리고 마침내 인류와 사물의 궁극적인 운명에 관해서 때때로 불안감에 휩싸여 자문해볼 때가 있다. 공의회란 그 리스도의 인도로 모인 하느님의 모든 백성의 신앙의 증인이자 안내자이지만, 그런 공의회 역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해서 인류라는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복음의 빛을 비춰 주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교회가 교회를 세우신 분에게서 받는 구원의 능력을 인류에게 일 임할 때만이, 이 백성이 속해 있는 인류가족 전체에 대한 사랑, 존중심, 유대감을 더욱 분명 하게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교회가 구원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다. 그리고 교회는 인 간사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한 이 모든 것의 주축이 되는 것은, 일치단 결한 전체 안에 존재하는 인간, 육체와 영혼, 가슴과 의식, 사고와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교황과 다른 종교 슈말칼덴 동맹의 조항에 따른 교황권 1517년에, 루터는 로마 교회를 고발했다. 이로써 그는 1520년에 파문당했으나, 대담하게도 자신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교황에게 바쳤다. 그는 죽기 전(1546)에, 또 한 권의 선 동적인 책을 집필했는데, 사탄이 로마에 세운 교황권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529년에 14개 도시와 여섯 왕은 종교개혁을 저지하려는 황제에게 항의하기(protest) 위해서 스피르 회의를 개최하고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들을 '개신교도(항의하는 자 들, protestant)'라고 불렀다. 때문에 교회는, 우리 모두가 유일한 수장인 그리스도 아래에 있을 때만이, 또한 모두 평등 한 사명을 맡은 주교들이(그들의 타고난 재능은 평등하지 않지만) 교리, 신앙, 성사, 기도, 그리고 자선사업 등에 관해 만장일치로 굳게 단결하고자 할 때만이, 진정으로 통치,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 예로니무스는 사도들이 그랬고,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모든 사 람 위에 군림하기 전까지, 전 기독교 세계에서 모든 주교들이 그랬듯이, 알렉산드리아의 사 제들은 모두 함께 교회를 통치하고 있다고 쓴 바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볼 때 교황은, 그리스도 위에 있으며, 그리스도에게 대항하여 일어선 적그 리스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도가 자신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이 구 원에 이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권력이라는 것은 무 이며,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것도, 위임받은 것도 아니다. 성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그의 권 력이란 '하느님 위에서, 하느님께 대립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투르크족과 타타르족조차도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도의 얼마나 큰 적인가. 그런데도 그 들은 기독교도의 신앙을 막지 않으며, 육체적 복종만을 요구할 뿐이다. 끝으로 교황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미사와 연옥과 수도사의 삶, 예배 등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리고(이것이 바로 교황의 모습이다) 있는 것을 보거나, 또 실제로 가증스러운 짓을 하는 것은 자신인데도 기독교도가 가증스러운 짓을 고백하지 않는 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을 볼 때, 그를 악마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악마를 구세주나 신처럼 숭배할 수 없듯이, 우리가 교황 혹은 적 그리스도를 사도의 수장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책에서 내가 증명 했던 바와 같이, 사실 교황의 통치란 거짓을 말하고, 살인하고, 육체와 영혼을 영원한 파멸 로 이끌어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P. 얀톤 (16세기 종교개혁의 길과 모습), 1986년 교황 바울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의 공동선언 (1965년 12월 7일)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 총회가 막을 내리기 전날, 교황 바울로 6세와 콘스탄티노 플의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9세기 동안의 분열을 종결하기 위해 공동선언을 했다. 이 '정의와 상호 용서의 손짓'을 통하여 그들은 마침내 화해의 길을 열었다. ...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특사들이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와 다른 두 명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이어서 이 교황특사들 역시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교구회의와 총대주교로부터 같은 파문을 받았던 뼈아픈 사건의 기억은, 신뢰와 존중으로 맺어지는 형제 관계(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교황 바울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공의회에서 신자들의 일치된 사랑과 정 의를 향한 공통된 소망을 표현해야 함을 확신하고,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마태오 5:23∼24)"라고 하신 구세주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공동의 합의로 다음을 선언한다. a) 상처를 입히는 말과 근거 없는 비난, 비난받을 행동으로, 이 시대의 슬픈 사건들을 일 으키고, 그 흔적을 남겨놓았던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b) 또한 오늘날까지도 사랑으로 서로 가까워지는 데 장애가 되는 파문선고를 유감으로 생 각하며, 이를 교회와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c) 끝으로, 분열 이전의 불쾌했던 일들과, 상호 몰이해와 불신 등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 에 결국 교회공동체에 사실상의 분열을 가져온 그 이후의 사건들을 개탄한다. 교황 바울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와 공의회는, 이같은 정의 실현과 상호 용 서의 태도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 사이에 아직도 존재하는 과거와 최근의 분쟁 들을 완전히 불식시키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정화하고, 잘못 된 역사를 반성하며, 또한 사도 신앙의 공통 표현과 지혜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서, 성령의 활동 아래 그 모든 분쟁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카톨릭 문헌 제2차 바티칸 총회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은 제2차 바티칸 총회에서 채택된 가장 혁신적인 문서이다. 더구나 이 선언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참으 로 놀라웠다. 증오와 부정적인 태도로 보낸 수세기 이후에, 대화의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이 다. 이제 교회는 '종교의' 독점을 의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모든 민족들은 사실, 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단 하나의 기원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 느님께서는 모든 종족을 이 지구에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이라는 유일 한 궁극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게 될 성스러운 도시 안에 모일 때까지 하느님의 섭리와 선하신 증거들과 구원의 계 획들은 모두에게 펼쳐져 있다. 인간을 둘러싼 조건은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 서, 인간은 그 조건이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이며, 죄악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기원과 목적은 무엇인가?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길을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 이후의 심판과 보상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 존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의 기원이 되고 종착지가 되는 형용할 수 없는 궁극적 신비는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표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1965년 10월 28일 요한 바울로 2세와 다른 종교들 전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이 교황 및 주교들과 함께 아시시에 모여서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들은 교황 요한 바울로의 초청을 받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모인 것인데, 1986년 10월 27 일에 있었던 그 사건은,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황은 로마 교회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아시시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고, 침묵하며 행진했다는 사실은, ... 각 종교의 구체 적인 차이점에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커다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영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종교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일치감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 표징 같은 것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비서실장인 아렌즈 추기경은 1년 후에 일본의 교토에서 종교인들의 만남이 있었을 때, 다른 종교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만남에서 기적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남으로 우리는 함께 사랑을 추구하고,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을 찾고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지고, 그 첫 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이 런 의미에서, 오늘 이 종교지도자들의 만남은 사람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 다.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통합주의라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시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교토에서도 정성 들여 준비된 종교들 간의 대화는, 여러 신앙의 각기 다른 특성을 존중하면서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줍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타 인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 돌아보는 일일 것입니다." 바티칸 생활 요한 바울로 2세는 선임자들처럼 교황궁의 제일 꼭대기 2개 층에서 살고 있다. 교황궁 건 물의 양쪽 날개는 식스투스 5세 때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성 다마수스궁을 폐쇄하고, 니 콜라우스 5세와 그레고리우스 13세 때에 있었던 본래의 건축형태를 사변형으로 바꾸었다... 교황의 관저는 4층에 있는데, 바로 아래층에 있는 교황의 집무관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앞쪽에 사무실들이 죽 이어져 있다. 이 사무실들은 교황의 비서 스타니슬라스 지위즈 명예주교와 개인보좌관들이 사용하고 있다. 교황의 서재 는 건물 남쪽 벽면의 두 번째 창문이 달린 방으로 성 베드로 성당이 내려다보인다. 교황의 침실은 건물의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다. 남향의 제일 끝 창문과 동향의 두 개 창문으로 햇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욕실, 전용 치과, 식당, 부엌과 다용도실은 동쪽에 면해 있고, 의상실 과 창고들은 북쪽에 면해 있다. 교황의 개인예배실은 관저 안에 있다. 그곳에서는 식스투스 5세의 앞뜰이 내려다보인다. 바울로 6세는 별세하기 몇 년 전부터 걸음이 불편해지자, 관저 위의 옥상에 테라스를 만들게 했다. 정원으로 내려가지 않고도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바울로 6세 이후로 접견실의 장식이 검소하지만 매우 아름답다면, 관저와 식당, 침실, 사무 실 등은 안락해 보이나 특별히 화려하지는 않다... '행복한 소수'를 위한 교황의 미사 교황은, 교황이 되기 전에 대주교와 추기경을 지냈던 크라코프 시절의 습관을 그대로 지 키고 있다. 오후 11시 30분쯤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난다. 간단한 운동 후에(피우스 12세가 처음으로 운동기구 일체를 갖추어놓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서, 잠시 묵상을 한 후, 7시경에 개인예배실에서 비서들과 함께 미사를 올린다. 종종 초대 손님들이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것이 전임자들과 아주 색다른 점이다. 이 사적인 미사에서, 교황은 로마에서 총회를 여는 수도회장들(때로 보좌관들까지), 정기 방문 한 나라나 지방의 주교들, 평신도단, 혹은 폴란드 친구들을 종종 초대한다. 때때로 다음 일 요일에 방문하게 될 로마시 소교구 책임자들이나 사제들을 그 며칠 전 아침미사에 초대하기 도 한다. 실제로 이 미사의 초대 여부는 교황의 개인비서인 스타니슬라스 지위즈를 통해 전달되며, 좀처럼 드문 이 기회를 갖고 싶을 때는 대개 그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초대받은 자들은 7시 전에, 성 안나문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교황의 미사에 초대받아 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스 위스 호위병과 비질란차 지역의 경찰관은 매우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이제 는 그들도 아침미사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교황이 로마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 미사에 손님들이 초대되기 때문이다. 스위스 보초병 병영을 지나서 왼쪽에 제법 가파 른 4단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복도에 승강기가 있고, 그 옆에는 역시 경관 한 사람이 보초 를 서고 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지위즈나 수녀가 내려와 예배실로 안내한다. 승강기 를 타고 올라와 브론즈문으로 들어가면 대기실로 곧장 들어선다. 이때 대기실에 겉옷을 벗 어놓으면 된다. 그리고 작은 복도를 따라 예배실로 들어가면 교황이 이미 미사복을 입고 묵 상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집안일과 부엌일을 맡아 하는 폴란드 출신 수녀 여섯 명은 매일 아침 이 미사에 참석한 다. 50명 정원인 예배실에 손님들이 꽉차면, 참석자들은 복도에서 미사를 드릴 때도 있다. 정각 7시에 시작된 미사는 조용한 가운데 천천히 진행된다. 참석자나 상황에 따라 언어를 바꾸기도 한다. 대개 폴란드어나 라틴어로 하는데, 특정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국 가의 언어를 사용하여 프랑스어나 독어, 스페인어를 쓸 때도 있다. 외국여행을 하기 전에 교 황은 자신이 방문하게 될 국가의 언어로 미사를 드리는 연습도 한다. 미사중에는 때때로 ( 사도서한)을 다른 보조사제들이 읽거나 수녀들의 찬양으로 대신할 때도 있다. 여기에는 특 별한 규칙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체만은 직접 교황의 손을 통해 배령한다. 준비기도와 감 사기도(교황은 예배의 앞뒤로 있는 이 두 가지 예식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하고 진지하게 임 한다)를 합해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미사가 모두 끝나면, 교황은 다른 공동 집전자들과 함께 미사복을 벗는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모여 있는 도서실에 들어가서 초대 손님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동안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의 사진사인 아르튀로 마리 가 사진을 찍는다. 때에 따라 교황은 손님들에게 작은 기념품이나 기념 메달, 묵주, 사진이 나 그림 등을 선사한다. 그리고 손님들과 작별인사를 한다. 참석자의 대부분이 돌아가는데, 아침을 같이 먹자는 권유를 받은 사람들은 식당으로 인도 된다. 타원형의 식탁에는 같은 종류의 평범한 여남은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자리마다 식기 가 차려져 있다. 수녀들이 커피와 우유, 치즈, 잼을 가지고 들어온다. 빵은 이미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시종인 안젤로 구젤이 식사시중을 든다. 교황은 말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질문을 하는 편이다. 아무리 길어야 한 시간 남짓인 아침식사와 대화가 끝나 면, 교황은 일어나서 손님들과 작별을 고한다. 만일 그 손님이 크라코프의 (티고드니크) 편 집장이나, 저지 투르비르처럼 교황의 폴란드인 친구이거나, 하여튼 교황과 아주 잘 아는 사 람들이라면 애정이 담긴 악수를 주고 받은 뒤 포옹을 한다. 그러나 교황은 이들에게뿐 아니 라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를 보여준다. 아침식사 후에 교황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측근들과 아침인사를 나누고 하루 일과를 간단 히 이야기한다. 그후에는 모두들 교황을 혼자 남겨두고 방을 나간다. 그러면 11시까지는 아 무도 알현하지 않도록 지시를 해놓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교황 은 예배실로 간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 그리고 돌아와서 책상에서 글을 쓴다. 그러다가 다시 예배실로 가서 제단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중단하고 다시 돌아와 일을 하고, 다시 돌아가 묵상에 잠기고... 1년에 500건의 개인적인 알현 교황은 11시부터 일을 하는데, 우선, 3층에 있는 교황의 개인도서실에서 측근들을 만난다. 이 도서실은 1870년 이래로 큰 사무실로도 사용되어 왔다... 요한 바울로 2세는, 각 지역의 주교들이 5년마다 한 번씩 교황을 의무적으로 방문하는 사 도좌 정기방문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만남은 교황에게는 지역 교회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이고, 지역 교회들에게는 교황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각 주교는 특별 알 현 때에 국가 혹은 지역 단위로 함께 만나서 점심을 든다. 개인적인 알현은 1년에 약 450건에서 500건 사이이다. 교황은 알현중에 나오게 될 문제들 을 분명히 기억하기 위해서 미리 문제 하나하나를 짚어서 준비해 둔다. 종종 오전 시간이 끝날 무렵, 교황은 교황궁의 거실에서 순례자단을 맞이한다. 초대받은 자들이 교황을 기다리 고 있으면, 시간에 맞추어 교황이 교황성의 주교나, 고위 성직자 혹은 비서를 동반하고 들어 온다. 그러면 추기경이나, 주교, 혹은 집단의 책임자가 모인 사람들을 교황에게 소개한다. 교 황은, 순례자단이 로마에 오게 된 계기인 모임의 주제에 관해 미리 준비한 짤막한 연설을 한다. 그리고 나서 축복을 베풀고, 단상을 내려와서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한 사람 한 사람과 몇 마디씩을 나눈다. 수백명이 단체로 올 때도 있다. 이 경우에도 교황은 일 일이 인사를 한다. 각자가 교황 성하와 개인적인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 다. 교황의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 교황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어서, 사람 들은 신뢰감을 가지고 최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알현실에서 이야기가 길어지 면 도서실로 자리를 옮겨 공식적인 의례 같은 것 없이 대화가 연장된다. 그러다 갑자기 교 황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식사를 하면 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그러면 요리를 담당하는 수녀들은 항상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교황의 식탁에 식기를 몇 개 더 놓는다. 교황은 먹는 일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그래도 폴란드 출신의 수녀들은 피로츠키, 세르니크, 파테, 치즈 케이크, 생선 젤리 등과 같은 교황의 고향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를 번갈아가며 준비한다. 식사분위기 역시 부드러우며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성직자, 평신도, 수도회장이나 혹은 수녀원장, 카톨릭 대학의 총장 등 방문객들이면 누구나 교황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생활에 잠시나마 참여했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면서 자리를 뜬다!... 식사가 끝나면, 교황은 30분 정도 쉬고 나서 바울로 6세가 만든 테라스로 나간다. 거기서 약 한 시간 정도 성무일과서를 읽거나, 묵상을 하거나, 언어공부를 하거나, 또는 그냥 휴식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맡는다. 교황은 바티칸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단념하기로 했다. 가능 한 한 만나야 할 사람을 모두 만나고 싶어하는 교황으로서는 산책으로 시간을 뺏기게 되면, 휴식시간이 아예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황은 사무실로 돌아와서 오전에 그랬듯이 아무도 만 나지 않고 오후 6시 30분까지 조용하게 일한다. 천천히...서두르기 오후 6시 30분, 공화국 국무성성 책임자의 정규 알현이 시작된다. 교황은 그들의 말을 모 두 들은 후, 서류를 건네받는다. 이 서류들은 나중에 꼼꼼하게 검토된다. 그는 결코 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특히 사람을 임명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당장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거나 적합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편이 다... 오후 8시쯤에는 저녁을 먹는다. 보통은 저녁식사 역시 점심식사처럼 '일하면서 먹는 식사' 이다. 식사가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가, 로마의 법원이나 국무성에서 보낸 서류들을 검토한 다. 교황은 모든 서류를 일일이 살펴본다. 그리고 서명을 하고, 글을 쓰고, 표시를 해두며, 그가 서류에서 수정하고자 하는 점을 의논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책임자들을 부르는 일을 잊지 않는다... 요한 바울로 2세의 하루는 개인기도를 하고, 성무일과서의 만도를 외운 후, 오후 10시 45 분에 모두 끝난다. 그의 침실의 불은, 밤 늦게까지 일하고, 때때로 바울로 6세처럼 불면증까 지 걸리기도 했던 전임자들 때보다 훨씬 일찍 꺼진다. 바쁜 생활 탓에 그의 건장한 체질이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교황은 그것을 수면으로 보충하는 셈이다. 늘 지켜지는 기도시간 그러나 그렇게 바쁘다고 해서 요한 바울로 2세가 꽉 짜인 시간표와 공식의례의 틀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교황은 그 바쁜 중에도 결코 기도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 는다. 오전에는 묵상, 미사, 성찰, 그리고 업무가 이어지는데, 그 중간중간에 몇 분간, 제법 긴 기도를 한다. 거룩한 성사를 경배하고, 예배실의 바닥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데 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성무일과서를 낭독한다. 규칙적으로 로자리오 기도를 올리며, 매달 첫 주 토요일에는 폴린 예배당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서, 바티칸 방송국이 중계방송 하는 로자리오 기도의 낭독을 주재한다... 미사를 드리기 전에, 교황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긴 준비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미사복에 입을 맞춘 후, 옷을 입는다. 미사를 드리고 나서도 예복을 벗을 뒤에,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는 교황으로서 공무가 많음에도, 모든 사제들의 본업인 사목의 임무를 잊지 않는 다. 영성체를 주고, 성 금요일마다 성 베드로 성당에 고해성사를 들으러 오며, 친한 사람이 나, 평신도 하급 직원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얼마 전에도 시종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 었다. 또한 예배실에서 타이피스트와 열쇠공의 결혼을 주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성사 중에서 도 가장 소소한 성사까지 직접 하면서, 교황은 카톨릭 성사의 고귀한 위엄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어한다... 소박한 어투 교황이기 이전에 사제인 요한 바울로 2세의 행동은 몹시 인간적이고 소박하다. 사제의 면 모에서 풍기는 위엄이 최고권자가 갖는 위엄을 압도한다. 그의 시선에서 단호한 의지와 권 위를 느낄 수 있지만, 피우스 12세와 같은 권위의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요한 23세가 교황의 모습을 친근하게 만들어놓았고, 요한 바울로 1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로 6세 는 수줍음 때문에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요한 바울로 2세는 교황 요한 23세가 지녔 던 착하고 어진 이미지는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특유의 활달한 태도, 솔직함, 직선적인 어 투는 애정 어린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측근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교황은 항상 상냥 하고 세심한 배려를 하지만, 그들이 자신 앞에서 지나게 겸손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교황 은 오랫동안 시종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나서 옷을 입고 벗었다. 그러나 최근에 쇄골과 대 퇴골에 부상을 입은 후로는 시종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교황은 공식 의례를 극도 로 간소화했다. 교황보다 더 공식 의례에 매달리는 국가 원수들이 알현할 때말고는, 남자는 정장을 하고, 여자는 미사포만 쓰면 되며, 옷은 어두운 색이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 우스 12세 때 했던 것처럼, 교황에게 다가가기 전에 세 번 무릎을 꿇는 일은 없애버렸다. 방 문객들의 방명록 관리는 교황 관저의 주교가 하며, 평신도 안내자가 방문객을 3층의 입구에 서 맞이한다. 예전에는 이들을 부속 대기실의 성직자들이 교황에게 소개했는데, 이제는 국무 성에서 파견된 주성직자들이 그 일을 맡아 한다. 교황은 그들을 따뜻한 미소로 맞이한다.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시간은 대개 몇 분에 불과하지만, 면담내용이나 만나는 사람의 중요성에 따라 더 길어질 때도 있다. 교황은 말을 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편이며, 질문도 하지만, 교황 에게는 직접 질문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알현이 끝나면, 방문객들은 교황에게서 교황 메 달이나 묵주, (바티칸과 기독교 로마)같은 책, 라파엘로의 복사품 등을 받는다. 국가 원수 들이나 지도자들에게는 기념 메달을 주기도 한다... 간소한 복장 요한 바울로 2세는 복장도 간소화했다. 교황 복장인 길고 하얀 '수단'을 처음으로 사용했 던 교황은 피우스 5세인데, 그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 출신으로서 수도회 복장이 그대로 교 황복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는 특별히 큰 축제 때를 제외하고는, 붉은 옷을 입는 것이 보통 이었다. 피우스 6세 이후로, 교황의 평상복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수단이 조금 짧아지고, 덜 풍성해졌을 뿐이다. 교황은 보통 때는 매일, 단추를 잠근 커프스 소매와 로만식 칼라의 와이셔츠 위에 하얀 실내복을 입는다. 수단과 달리 이 실내복에는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망 토가 달려 있다. 허리에는 물결무늬 흰색 허리띠를 매는데, 허리띠에 달린 두 개의 천이 수 단의 왼쪽 옆으로 늘어져 있고, 그 끝에는 교황의 문장과 금술장식이 달려 있다. 허리띠는 양쪽 옆구리에 고리 두 개로 고정시키게 되어 있다. 그 두 개의 고리를 프랑스어로는 '드무 아젤(아가씨)'이라고 부른다! 교황의 가슴까지 내려오는 목걸이 끝에는 금십자가가 달려 있 다. 이 목걸이는 오랜 관습에 따라 고리를 이용해서 세 번째 단추에 걸도록 되어 있다. 손가 락에는 십자가 반지를 끼고 있으며, 머리에는 추기경이 쓰는 둥글고 납작한 모자를 사철 내 내 쓰고 있다. 그는 요한 23세가 썼던 자줏빛 벨벳 모자는 쓰지 않는다. 날씨가 추울 때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짧은 외투에 풍성한 붉은 망토를 입고, 겨울이나 혹은 햇살이 뜨거울 때 는 큰 챙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다. 발에는 역시 붉은 가죽신을 신는데, 선임자들이 신었던 아주 오랜 옛날의 고리 달린 구두를 연상시킨다. 공적인 예식이 있을 때는 성가대 복장을 한다. 수단 위에다 로셰툼(주교, 추기경이 입는 옷:역주)을 걸치는데, 이것은 일종의 중백의로 몸에 꼭 끼는 아주 얇은 옷이다. 그리고 비단 으로 된 두건 달린 외투인 모제트를 그 위에 입는다. 이전 교황들은 겨울이면 만성절에서 예수 승천절 사이에 백조가 수놓인 벨벳의 모제트를 입었지만, 요한 바울로 2세는 그것을 입지 않는다. 다만 카톨릭 국가의 대사를 맞이할 때는 모제트 위에 목 뒤로 걸쳐서 몸 양쪽 으로 늘어뜨리는 천인 스톨라 하나만 더 걸칠 뿐이다. 예식 때에는 주교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다. 수단 위에 흰색 긴 원피스인 오브를 입고, 허 리띠를 묶은 뒤 스톨라를 걸치고, 그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시 미사 때 입는 소매 없는 흰옷, 사쥐블을 입는다. 그리고 그 위에 어깨에 거는 흰 띠를 X자형으로 두른다. 요한 23세 때부터는 '팔다'라고 하는 옷을 입지 않았다. 이것은 오브 위에 입는 것으로 비단으로 된 아주 풍성한 하얀 치마인데, 교황의 발이 안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입는 것이었다. 하지 만 이 긴 옷 때문에 피우스 12세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땀 이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사쥐블 위에 입던, 푸른 줄무늬가 있는 하얀 장식깃의 일종인 파 농도 사라졌고, 오브 위에 걸쳤던 평평한 끈 같은 것도 없어졌다. 바울로 6세가 밀라노 형제 들이 교황에게 바쳤던 삼중관을 판 이후로, 교황들은 삼중관을 쓰지 않으며, 대관식도 사라 졌고, 수석 부제 추기경이 새 교황에게 좁은 끈 같은 팔리움을 둘러주는 취임식으로 대치되 었다. 그러나 요한 바울로 2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주교관마저 거절했다. 하나는 보석이 박힌 값진 주교관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가벼운, 금실로 짠 주교관이다. 대신 그는 바울로 6세가 쓰던, 훨씬 단순하고 가벼운 주교관을 사용한다. 추도미사나 장례미사중에는 은실로 짠 하얀 주교관을 쓴다. 그는 흰색과 붉은색, 이 두 가지 공식 색깔만 사용한다. 이 두 가지 색말고 다른 색을 사용했던 교황은 바울로 6세로, 그는 녹색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교황이 좋아하는 사람들 교황은 모든 사람을 만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인, 어린아이, 고통당하는 자, 장애인이 나 가난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이면, 일반 접견을 하기 전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을 찾아오는 아 이들을 맞는다. 아이들이 제일 처음으로 교황을 알현하게 되는 셈이다. 교황은 아이들과 이 야기하며 안아주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성탄절을 앞둔 일요일에는 로마에 있는 모든 초등학교 아이들을 성 베드로 광장에 초대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구유에 누워 있 는 아기 예수 인형을 나눠준다. 그리고 삼종기도를 올리고 나서, 인형을 들고 기뻐하는 아이 들에게 축복을 베푼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교황은 또 장애인과 노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수녀들이 아주 연로한 할머니들 을 알현시키는데, 교황은 할머니들과 어울리느라 시간을 지체하기 일쑤이다. 세상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교황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요한 바울로 2세는 서류보다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전임자 중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이 교황이기 전에 먼저 로마의 주교라 는 것을 보이기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직접 성사를 하는 것이다. 그가 성체를 나눠주고, 고 해성사를 받고, 세례를 주고, 결혼식을 치르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주된 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 주교들이라고 해서 얼마나 더 많이 성 사를 수행할 수 있을까? 그는 여름휴가나 여행 때 이외에는, 거의 일요일마다 로마의 소교구를 순방한다. 그의 1년 계획서에는 293개의 소교구들이 기록되어 있다. 교황은 방문하기로 한 소교구의 특징을 더 잘 알기 위해, 그곳 교회의 주임사제나 보좌신부를 미리 식사에 초대한다. 방문하기로 한 날 에는 집사와 비서인 지위즈, 그리고 한두 사람의 고위 성직자를 대동하고서 오후 4시쯤에 두 대의 자동차로 성 베드로 성당을 떠난다. 오토바이를 탄 이탈리아 경찰이 호위를 하지만, 교황이 과시적이 호위를 끔찍이도 싫어하기 때문에 경호업무는 거의 눈에 안 띄게 치러진 다. 소교구 입구에 도착하면, 그곳 교회의 대표들이 교황을 맞는다. 그리고 교황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과 악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축제 같다. 특히 서민의 동네 일수록 더욱 그렇다. (피가로)의 특파원인 마리안 로즈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일요일 오 후, 나는 티뷔르티나가 소교구 사람들과 함께 교황을 향해, '어여쁜 성모 마리아여, 당신은 이 동네의 영광이십니다!' 하며 노래를 불렀다. 종이 잠망경까지 들고 나온 할머니 한 분과,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는 풍선을 가진 아이를 안은 젊은 아버지 사이에서 숨이 막혀 죽 을 뻔했다." 사람들로 꽉찬 교회에 들어서기까지 한 시간 이상이 걸릴 때도 있다. 교회 단상에 오르면, 교황은 자기가 그들의 주교이자 아버지라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것, 정의롭게 살 도록 노력할 것, 그러기 위해서 성모 마리아께 기도할 것 등을 소박하게 그들의 언어로 이 야기한다. 사람들은 교황을 사랑하며 이 폴란드인과 하나가 됨을 느낀다. 장 셸리니 (바티 칸의 요한 바울로 2세), 1985년 바티칸 시국의 기구 조직표 교계제도의 정상에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있으며, 그가 카톨릭 전체 교회의 운명을 지 배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 즉 독립 자치국가의 주권자인 교황은 전세계의 교회를 지휘하기 위해서 교황청을 둔다. 카톨릭 교계제도는 교회의 신성한 권력에 종속되며 교회의 교구 분 할을 따른다. 교황 주위에는 추기경들이 있다. 교황은 추기경회의를 소집할 수도 있고, 그들 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길 수도 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사망하면, 그 대리직을 수행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한다. 총대주교, 관구장 대주교, 대주교는 교황과 주교 사이에서 제2의 결정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서구에서는 로마가 중심이 되면서 사실상 이 직급은 명예직 위가 되었다. 이들은 대주교구 소속 주교들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그래서 교회권력의 또다른 중심축은 교구를 감독하는 주교들에게 있다. 교황청은 교회가 통치하기 위해 만든 기관의 총체이다. 교황청은 교황이 통치하는 모든 분야, 즉 정치, 종교, 행정, 사법의 영역을 관할한다. 그 안에는 세 개의 기구가 주된 역할 맡고 있다. 우선 국무성은 교황과 보편 교회의 관계, 그리고 민간 정부들과의 관계들을 담당 한다. 신앙교리성성은 신앙과 품행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한다. 이 성성은 또한 법원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 사도공소원의 최고재판소는 최종 결정기관이다. 바티칸시 정부는 다른 기관 들에 비해서 오늘날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