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를 찾아서 지은이 : 클로드 모아티 옮긴이 : 김윤 출판사 : 시공사 봉사자 : 김범준 제1장 로마, 영원의 도시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파괴되고 파묻히면서도, 로마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원의 도시 - 위대한 지적, 정치적, 예술적 수도 - 는 비록 전설의 베일이 그 폐허를 덮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다른 고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역사는 묻혀 있었다. 트라야누스 목욕탕은 네로의 황금궁전 잔해 위에 세운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도 신전 두 개와 몇 채의 공공건물과 민간건물 지붕위에 건설되었다. 16세기에 이 도시를 샅샅이 돌아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필가 몽테뉴는 '완전한 집들의 지붕 위'와 '고대 성벽들의 꼭대기 위'를 걷고 있다고 했다. 2세기 후 독일의 시인 볼프강 폰 괴테는 캄포 바치노를 거닐며 온갖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던 고대 로마 포룸이 여기저기에 반쯤 묻힌 잔해들로 드러난 소들의 목초지로 변해 버린 것을 보았다. 2세기에 수로를 책임지는 관리자였던 프론티누스는 "언덕들이 잡석들 위에 솟아 있다."고 기록했다.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초기 시대의 물리적 잔존물-왕정 로마와 공화정 로마-은 실질적으로 사라져 버렸고, 머지않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새로운 건물들로 덮였다.제국이 멸망한 뒤로 1,000년이 넘어서야 고대 로마의 유적들은 자갈층과 18미터가 넘는 두꺼운 흙더미 속에서 차츰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보물을 약탈당하고 파괴된 로마 로마의 건축학적 보배들은 단지 파묻혀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의 부는 강제로 옮겨지기도 했다. 4세기에 로마는 제국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후 황제들은 새로운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 밀라노, 라벤나를 로마에서 가져간 부로 장식했다. 궁핍과 게르만족 같은 이민족의 침입은 피해를 가속시켰다. 주민들은 더 이상 건물들을 지킬 수 없었고, 침략자들이 빼앗아 간 조각상들과 숭배 대상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또한, 고대의 유적들은 점차 공공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했고, 무성한 잡초와 세월의 먼지로 덮여 버렸다. 하지만 몇몇 지배자들과 침입자들은 현존하고 있는 기념물에 감명받아 보호하려는 시도를 했다. 로마에서 많은 청동제품들을 가져 가려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이자 동로마 제국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2세도 357년 영원의 도시를 순례할 때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조각된 기둥과 바실리카가 있는 트라야누스 포룸, 퀴리날리스 언덕 비탈에 서 있는 시장에 매혹된 그는 '세계의 성지'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5세기 말에 서고트족 왕이자 이탈리아 통치자였던 테오도리크 1세는 폼페이 극장을 보수하게 하고 목욕탕, 원형극장, 상하수도 복구를 격려했다. 이교도의 도시에서 기독교의 도시로, 약탈과 재활용 로마는 312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기독교화되었다. 이교숭배가 금지되고 신전들은 4세기말 칙령으로 폐쇄되었다. 몇몇 신전들은 결국 교회로 바뀌었다.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609년 일찌감치 순교자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 바쳐졌고, 쿠리아는 성 아드리아누스 성당에 헌정되었다. 도시의 모습은 빠르게 변모했다. 전쟁, 기근, 전염병에 지친 사람들은 언덕을 버리고 테베레강을 따라 피신했다. 수세기 동안 인구가 밀집했던 로마 중심지들은 잡초들만 무성한 폐허로 둘러싸였다. 결국 11세기초에 고대 건물들은 귀족 가문들의 손에 넘어가 요새화되었다. 다른 건물들은 희귀하고 탐나는 건축재료인 대리석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석회로로 보내져 구워지거나 다시 사용되었다. 사실상 중세를 통하여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수천 개의 조각들과 대리석 파편들이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테베레강 사이에 위치한 가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상점들의 거리'에는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세기에 고고학자인 로돌포 란치아니는 포룸에 있는 석회로들을 발굴했는데, 그것들은 가장 효율적인 장소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알 수 없는 연유로 파괴를 면했던, '숯이 되어 버렸거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조각상들이 가득 들어 있는 석회가마 하나를 발견했다. 채 구워지지 않은 조각상, 벽 지붕, 기둥들의 대리석은 나폴리, 피사, 올비에토, 몬테 카시노, 프랑스의 성데니스, 영국 웨스트민스터에까지 보내졌다.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는 로마 로마는 파묻히고 파괴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생명의 숨결을 유지하고 있었고, 로마의 부활은 감동으로 넘쳐 을렀다. 이교주의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연구는 B.C. 1세기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중단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몇몇 지역에서 고대 문화와 유사한 것이 존속하고 있었고 유적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교적 기념물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로마 안내서들 기독교화된 로마는 이교도의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여행객을 유혹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 베드로의 무덤과 다른 성인들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는 교회, 근처의 고대 유적을 보러왔다. 50년제가 열린 1300년에는 200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누구든 성 베드로 성당을 참배하는 사람은 완전한 면죄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특히 이러한 로마 방문객을 위해 다양한 관광 코스를 소개한 안내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 중 하나인, 8세기나 9세기에 시작된 '아인지델른 여행 안내서'는 순례자들에게 도시를 훑어볼 수 있는 11가지 관광 코스를 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도시의 성벽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은 물론 탑, 배틀 먼트, 창문 심지어 화장실까지 나열하고 있다. '아인지델른 여행 안내서'는 도시에 대한 적절한 지식뿐만 아니라, 명문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미라빌리아, 중세 여행에서 숭배된 책들 '아인지델른 여행 안내서'는 수세기에 걸쳐 출판된 것으로 순례자들이 '미라빌리아'라 불렀던 많은 안내서들 중 하나였다. 12세기까지 미라빌리아는 오히려 로마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 걸음 후퇴를 시켰다. 문헌과 장소에 대한 직접적 지식이 전설과 상징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고대는 신화적 차원으로 편입되었다. 고대인들은 가장 놀라운 경이로움으로 그들의 도시를 장식했던 모방할 수 없는 거인들처럼 보였다. 이노센트 2세가 교황으로 있었던 12세기에 성 베드로의 성직자 카논 베네딕트는 당대인에게 이런 엄청난 업적들을 알렸다. 베네딕트는 기념물의 고대 이름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들의 이름은 중세 학술용어로 모호해졌다. 하지만 이 주석서 역시 중세의 모든 전설과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12세기에 로마인은 교황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교황과 독일 황제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적 로마 양식을 토대로 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구상하고 있을 때, 로마인은 그들이 통일한 고대 공화국의 유형에 따라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하기를 원했다. 고대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높이 칭송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은 계속 커져 갔다. 미라빌리아는 집정관과 원로원을 부활시키려는 시대의 바람과 도시의 영광을 소생시키려는 소망을 반영했다. 이 책들은 인기가 높았다. 이것들은 계속해서 필사되어,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배포되고 모방되었다. 또 지지학적 묘사방식을 정착시켜 오래 존속되었고 널리 알려진 로마 기념물에 대한 항구적인 보고서가 되었다. 14세기에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이러한 안내서에서 로마에 대한 정보를 이끌어냈다. 비너스에 매혹된 그레고리우스 학장 가장 유명한 미라빌리아 중에서 그레고리우스 학장의 작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국의 신학자 그레고리우스는 파괴적이고 우상 타파에 앞장섰던 교황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참된 고대 애호가였다. 로마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첫눈에 도시의 많은 탑, 좁은 거리와 수많은 교회에 매료되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경탄은 배가되었다. 그는 피라미드, 개선문, 기념비적 건물과 궁전들을 보았다. 그는 조각상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에 감탄했다. 그에게는 그것들의 아름다움이 어떤 마술적인 힘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그중 하나가 그를 매혹시켰다. 너무나 완벽해서 거의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이는 비너스 상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너스 상이 있는 곳까지 오랫동안 걸어야 했음에도 세 번씩이나 발길을 돌렸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순례자들이 보통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에 속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중세인이었고, 그의 관찰은 로마가 혼란스런 미로로 변하고, 여행객이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숲이 되어가고 있을 당시를 반영하고 잇다. 이때는 전설이 사실을 대신하여 활개를 치던 때였다. 판테온은 악마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콜로세움은 태양 신전으로 믿어졌다. 사실상 그레고리우스는 순수한 미적 감각과 조각상에 감동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14세기 인문주의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긴장과 혼란의 시기 이때는 교황의 권위에 계속 도전하는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는 긴장의 시기였다. 1309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교황을 강제로 아비뇽에 머물게 했다. 1378년까지 계속된 교황의 유수기간 동안 대부분의 이탈리아 도시들은 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에 자극 받아 강한 민족적 각성을 경험하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적 르네상스는 고고학 연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계속해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여러 장소에서 발견된 항아리, 도자기, 조각상들은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황제 프레데리크 2세는 1232년 발견한 아우구스타 근처의 고대 그리스 도시를 발굴할 탐험대를 조직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대리석과 조각상에 대한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이 그것들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고대 유물 찬미론자들은 보물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었고, 키가 큰 청동 조각상 같은 몇몇 작품들에 대한 경의는 그와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민의 호민관인 콜라 디 리엔초와 로마 공화정에 대한 향수 리엔초의 전기를 남긴 익명의 작가에 따르면 페트라르카의 친구이자, 귀족의 횡포에 맞섰던 민중의 수호자 콜라 디 리엔초라는 젊은 로마인은 "로마 땅에 널려있는 대리석상을 살펴보느라 꼬박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콜라 디 리엔초만큼 고대 명문들을 정확하게 해독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엔초는 그때까지 발견된 고대 명문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고 모든 대리석상들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1346년에 리엔초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제국에 대한 권한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새긴 청동 장식판을 발견했다. 이것은 아마 4세기에 라테란에 건립된 바실리카 제단 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글자가 새겨진 부분은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청동 장식판은 바실리카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발견되었는데, 드디어 내용을 해독하기에 이르렀다. 리엔초는 문헌들을 전시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이미 자신이 귀족에 반대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있던 리엔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숭고한 로마는 먼지 속에 누워있습니다. 로마는 황제와 교황에 의해 자신의 눈이 뽑혀졌기 때문에 자신의 몰락을 볼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이여, 개인에게 황제권을 부여했던 숭고한 원로원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보십시오." 로마인들은 주의 깊게 경청했다. 1347년에 리엔초는 인민의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한때 그라쿠스, 키케로, 카이사르가 군중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연설했다. 사람들을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던 해방자이자, 귀족들을 회복불능의 상태로 끌어내린 공동체적 이상을 가진 이 수호자는 도시와 국가를 개혁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리엔초는 서서히 무서운 독재자로 변해갔다. 마침내 리엔초는 자리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는 복귀하여 한때 권력을 회복했지만, 점점 더 권력을 남용했다. 리엔초는 다시 쫓겨나 고문을 당한 뒤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중세시대의 학자들에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의 시대로 리엔초는 그 당시에 학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슴에 품고 기념물, 문헌, 명문들을 올바로 이해하면서 로마의 복원을 요구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대인인 철학자이자 의사, 점성술사인 조반니 돈디는 실제로 인문주의 시대에 속해 있었다. 돈디는 로마를 여행하면서 적어 놓은 노트 모음집인 '로마기행'에서 기념물들의 정확한 수치를 알려 주고 있으며, 단지 전설을 되풀이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고대 유물에 대한 돈디의 접근 방법은 감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마술, 정치적 찬양, 시에 호소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견물에 경의를 표하도록 이끈 것은 바로 돈디 자신의 비판정신이었다. 제2장 인문주의자 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고 있을 때 예술가, 학자, 군주, 모험가, 교황은 과거 영광의 잔해를 찾아 열심히 로마땅을 찾아 다녔다. 로마는 약탈당하고 있었다. 명문, 지도, 도면들 속에서 생명력을 되찾은 로마는 실질적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 모두 동시에 15세기에 로마는 불결했고, 인구는 점차 줄어들었으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드 당시 로마는 누더기 걸친 늙은 여인에 비유되곤 했다. 위대한 역사가인 잔 플나체스코 포조 브라촐리니는 로마에서 변덕스런 운명에 빠지기 쉬운 인문주의의 상징을 보았다. 고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고대 유물 애호가들이 도시의 정체성과 통일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은 시간에 대한 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교황들은 공공 토목공사를 벌이기 위한 거대한 계획들을 구상했다. 교황들은 이교시대의 걸작을 수집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기 직전에는 이단숭배로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열기가 초기 고고학 연구에 기여했다. 위대한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떠나던 시기에, 학자, 예술가, 군주들은 로마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고전학자의 산책로 상인이자 골동품 거래상이었던 안코나의 키리아쿠스는 매일 걷거나 말을 타고 도시를 지나다니며 "유적, 신전, 극장, 궁전, 목욕탕, 화려한 오벨리스크, 개선문, 기념주, 귀중한 명문들을 조사하고 베끼고 해석했다." 그는 죽은 것들을 소생시켜 원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했다. 키리아쿠스는 여행안내서에서 이탈리아, 이집트, 그리스, 팔레스타인 여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 이전의 수많은 미발간 문헌들을 베낀 것과 많은 기념물들을 그린 것도 수록했다. 키리아쿠스처럼 그 시대의 학자들은 산책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한 예로 포조 브라촐리니는 로마 교외를 탐험했고, 율리우스 폼포니우스 라에투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이 도시를 돌아다녔다. 한 세기 전에 돈디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산책중에 기록해 둔 노트를 모아 그 당시에 가장 뛰어난 지지학적 해석서 중 한 권을 발간했다.` 문헌학의 황금시기 탐구 열에 불타는 학자들의 정열은 우선 사본들에 쏠렸다. 이 교양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수도원들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원본들을 베끼고 번역하면서 전 유럽을 돌아다녔다.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어디를 가든지 필경사들을 데리고 다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 그는 대리인들에게 비용에 구애받지 말고 그리스 필사본을 구입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교황직에 있는 8년 동안 바티칸 장서들을 늘려 소장도서가 5,000권에 이르렀다. 그것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포조 브라촐리니를 비롯한 교황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필사본들에서 차이점이 발견되었으므로 완전한 판본을 확정짓기 위해 원본들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돌에 새겨진 기록의 보존 고대 언어와 문헌을 연구하는 문헌학은 명문들-기념물에 헌정된 것, 매장된 문헌, 법률, 로마 원로원의 법령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함께 진행되었다. 포조 브라촐리니는 1430년에 시로그스시리즈를 펴냈다. 시로그스는 인쇄의 도움과 많은 출판업자들의 열정으로 다음세기에도 번창했다. 18세기와 19세기 학자들이 분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이러한 모음집들은 가능한 한 많은 문헌들을 함께 묶어 놓고자 했던 당시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너무 조급하게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거나, 파편들이 발견된 장소와 치수들을 명기하지 않아서 어떤 때는 완전히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인문주의자 학식은 이단? 율리우스 폼포니우스 라에투스는 퀼리날리스 언덕에 있는 집에 명문, 동전, 대리석 파편들을 모았다. 그는 친구, 제자들과 함께 열성자들과 학자들의 협회인 로마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고대 양식에 따라 화려한 연회를 열고 음식을 먹었다. 때로는 지금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남겨 놓은 낙서가 발견되는 카타콤에서 모이기도 했다. 회원들은 각자 고대식 이름을 가졌는데, 폼포니우스의 고대식 이름은 고대 로마 종교 수장의 이름이자 교황의 로마어 번역인 폰피펙스 막시무스였다. 이들의 모임을 전해들은 교황 바오로 2세는 폼포니우스를 이교적 향연에 친구들을 끌어들이는 이단자로 여겼다. 그는 음모를 구미고 있었던가? 1468년 협회회원 20명은 사슬에 묶인 채 성 안젤로성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 폼포니우스는 변론을 써 자신의 무죄를 주자했다. 뒤이어 인문주의자의 학식을 이교숭배와 동일시하는 근대 역사 최초의 재판이 벌어졌다. 한 세기 뒤인 종교개혁기에 벌어질 교회에 대한 고발을 예견하는 사건이었다. 학자들은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없었음에도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았다. 폼포니우스는 석방되자마자 대학에서 다시 강연을 시작했고, 이 강의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학생들은 자리를 잡기 위해 한밤중이 되기 전에 도착하기도 했다. 1471년에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은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폼포니우스가 다시 아카데미를 여는 것까지도 허락했다. 이후 아카데미에는 정치가인 발다시레 카스틸리오네 백작과 추기경인 피에트로 벰보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가입했다. 그러나 결국 1527년의 로마 약탈로 위험한 이교도로 간주된 아카데미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학문적인 지지학의 탄생 고대 도시의 구조와 특징을 분석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당시에 고대 유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폼포니우스는 이 방면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가 되었다. 15세기에는 중세시대에 희미해져 버린 고대의 지명을 복원하고, 중세적인 전설의 배후에 갈려 있는 실체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포조 브라촐리니, 베르나르도 루첼라이, 특히 플라비오 비온도 등은 최초로 원본들을 명문이나 유물들과 대조해 본 사람들이었다. 비온도의 저서 '복원된 로마'라는 제목은 이러한 새로운 지지학 저자들의 목표를 나타내고 있다. 비온도의 두 번째 저서 '승리의 로마'는 로마 고대 유물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는 유적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근대적이면서 기독교가 '찬란하게 승리한' 로마를 숭배했다. 그에게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5세기 지지학 저자들에게 고대 문헌들은 다른 어떤 출처보다 중요했다. 고고학은 아직 과학이 아니었다. 과학적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개인이 보물을 찾아 땅속을 뒤지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중요한 발견에 대한 보고서는 아마추어가 만든 것이었고 역사적 분석이 결여된 그림 같은 목록뿐이었다. 예술가들은 모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발굴되고 있을 때보다 발견 당시의 유적들을 그렸다. 16세기말이 되어서야 발굴에 대한 최초의 믿을 만한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금궁전의 그로테스크한 유물에 도취한 로마 예술가들 16세기초에 콜로세움 근처에 일하고 있던 일꾼들은 프레스코화와 스투코로 장식된 궁륭천장이 있는 건물의 아래를 파 내려갔다. 건물은 네로 황제가 불타 넘어진 건물의 잔해 위에 세운 거대한 황금궁전이었다. 황금궁전은 68년 네로가 죽은 직후에 트라야누스 목욕탕의 건립으로 매몰되었다. 이 건물이 황제의 저택이라고 판명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지하에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었던 황금궁전의 회랑들은 그로토로 불렸고, 장식적으로 디자인된 벽화들과 신화적인 조각상들은 크로테스크라고 불렸다. 그로테스크의 발견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들은 이를 모방하여 궁전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인 라파엘로 역시 바티칸 궁전에 있는 로지아들을 치장할 때 이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프레스코화가 최초로 고대 유물의 색상에 대한 실례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2세기가 더 지나서야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 있는 벽화들이 발견되었다. '예술적 걸자' 라오콘 군상이 불러일으킨 욕망 황금궁전은 무궁무진한 보물을 갖고 있었다. 1547년 한 해만 해도 25개의 조각상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이보다 이른 1506년에 이 땅의 소유주가 발견한, 뱀에 휘감겨 있는 두명의 어린이와 아버지를 표현한 조각상이었다. 이것은 대 플리니우스가 예술의 걸작이라 말했던 라오콘 군상이었다. 건축가 줄리아노 다 산갈로와 미켈란젤로는 플리니우스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 경이로운 작품은 당대인의 기록대로 '불멸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교황 율리우스는 이것을 바티칸에 있는 벨베데레관으로 옮기게 했는데 그야말로 개선행진이었다. 라오콘 군상의 명성은 계속 높아져 1515년 마리냐노에서 승리한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는 이를 전리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거부하고, 몰래 모조품을 만들게 했다. 하지만 진품이나 모조품이나 결코 프랑스 왕에게까지 가지는 못했다. 한참 후인 1797년에 나폴레옹이 이것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갔으나 그가 패배한 이후 바티칸으로 되돌아왔다. 벨베데레관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보관된 최초의 고대 유물 수집품 라오콘 군상은 벨베데레관에 있는 또 하나의 빼어난 이교도 조각상인 아폴로와 함께하게 되었다. 레오 10세는 판테온 뒤뜰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을 더 보탰다. 몇몇 교황들이 고대 이교도 예술품에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수집은 빠르게 진척되었다. 예를 들어 아드리아누스 6세와 파우스 5세는 고대 문화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박물관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안에 있던 조각상들 일부를 팔아 버리기까지 했다. 벨베데레에는 고대 예술관이 하나밖에 없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1471년 1월 18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박물관 관장에서 최초로 대규모 고대 유물 전시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스피나리오, 아마 B.C. 1세기경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암늑대, 게걸스럽게 말을 먹고 있는 사자를 볼 수 있었다. 후에 이노센트 8세는 거대한 콘스탄티누스 두상을 그곳에 안치했다. 아울러 다른 고대 조각상들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유럽의 군주들이나 돈 많은 예술애호가들은 복사품들을 소장했다. 1540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코를 로마에 파견했다. 그는 100개가 넘는 석고조소와 대리석 조각들을 사들여 프랑스로 돌아갔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에 있는 왕궁을 치장하기 위해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벨베데레의 모든 조각상들을 그리게 했다. 고고학에 기여한 수집 열기 이러한 초기 발견에 고무되어 로마인들과 외국인들은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심지어 아주 작은 대리석 파편까지 수집했다. 대리석 부조로 장식된 벽돌로 이루어진 모든 궁전의 안뜰과 회랑들은 실제로 사설 박물관이 되었다. 최고로 세련된 방법은 유적들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었다. 전 유럽에서 발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구입하기 위해 특수 사절들이 로마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분량의 기둥, 대리석 파편, 조각상들이 수출되었다. 이러한 군주들과 교황들의 열정은 고고학에 큰 도움이 되었다. 16세기에 로마 귀족들을 주도하던 파르네세 가문을 위해 일한 고고학자들은 카라칼라 목욕탕에서 높이가 3미터나 되는 거대한 헤라클레스 조각상, 황소떼, 플로라, 수많은 모자이크 같은 예외적인 보물들을 발굴해 냈다. 고대의 귀족들은 정원을 정성들여 가꾸었는데, 이런 장소에서도 역시 수많은 걸작품을 발굴했다. 헤라클레스, 비너스, 아스클레피오스, 그리고 리키니우스 정원들에서 나온 황제들 흉상은 교황 율리우스 3세의 시골 궁전인 줄리아 별장에 안치되었다. 1582년에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고대 그림 중 하나인 알도브란디니 마리아제로 알려진 그림 무더기가 라미아가의 정원에 있는 벽 속에서 발견되었다. 살루스티우스 정원 안에서는 고대에서 가장 큰, 틀림없이 비너스로 추정되는 거대한 여신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무작위식 발굴과정에서 1562년 최초로 도시 모형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발굴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출간되어 로마 지지학은 결정적인 단계를 맞게 된다. 대규모 건설 계획으로 새로운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레오니나 도로를 건설하던 중에 아우구스투스 능묘의 큰 대리석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무덤은 로마 제국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이것은 12세기에 거의 파괴되었다가 13세기에 다시 세워져 요새화되었다. 1568년에는 바로 근처에서 평화제단 일부가 발견되었다. 제단의 나머지 부분은 19세기와 20세기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빼어난 고고학 유적 중 하나는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북동쪽으로 26킬로미터 떨어진 티볼리 근처에 화려한 궁전을 짓게 했다. 15세기의 한 방문객에 따르면, 이것은 '도시만큼이나 컸고', 각 부분들은 리키움, 아카데미, 카노푸스, 포이킬레, 심지어 지옥 같은, 제국에서 유명한 장소들에서 이름을 따 왔다. 그 안에서는 도서관에서부터 극장까지, 정원에서부터 세라피스 신전까지, 큰 목욕탕에서부터 작은 목욕탕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난 직후 이 별장도 네로의 황금궁전과 마찬가지로 버려져 급속도로 폐허가 되었다. 피로 리고리오, 지지학 저자이자 고대 유물 애호가 피로 리고리오는 최초로 하드리아누스 별장을 탐험한 사람이었다. 고대 유물 애호가이며 건축가이자 지지학 저자인 리고리오는 이폴리토 데스테 추기경에게서 티볼리에 별장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재료, 대리석, 장식용 타일과 예술품들을 찾아내도록 위임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실리 목적의 위임사항이 리고리오의 진지한 발굴작업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화려하고 부유한 하드리아누스 별장에 대한 기록'속에 문서로 첨부했다. 리고리오는 16세기의 탁월한 고고학자들 중 한사람이었다. 억지로 짜 맞춘 면이 있긴 하지만 그의 직관력이 대부분 옳았음이 이후에 입증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로마의 모든 장소들을 찾아 다녔고, 자기 작업에 대한 계획과 기록을 남겼다. 고대 유물 애호가로서의 위대한 재능은 '고대 유물 사전'과 로마에 대한 고고학적 지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교황 피우스 4세는 그를 기념물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위치에서 당시의 고대 도시를 소생시키려는 조급함과 그것을 근대화하려는 의지로 분열된 자기 시대의 모순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발굴된 유적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괴가 진행되는 걸 막을 힘이 없었다. 로마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고대 유물을 비난한 교황들 1471년 12월 17일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바티칸 도서관의 건축가들에게 석재를 구하기 위해 어떤 발굴을 해도 좋다는 권한을 부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파괴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알렉산더 6세때 교황청은 포룸과 콜로세움을 경매에 부쳤다. 발굴과는 무관하게 가장 많은 파괴를 불러온 것은 성 베드로 바실리카 건물이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7월 22일에 포룸을 비난했다. 그때까지 시 행정당국, 도로 감독관, 교황청이 서로 연관된 발굴허가가 배타적이면서도 대단히 자유롭게 새로운 바실리카 건물을 짓는 건설업자들에게 부여되었다. 항의에도 불구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조치를 승인했고, 나아가 로마의 고대 항구도시인 오스티아와 포르토의 유적지까지 확대했다. 고대 유물 파괴는 16세기 말 교황 식스투스 5세와 교황의 공식 건축가인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폰타나는 오벨리스크 네로의 원형극장에서 성 베드로 성당 앞의 현재 위치로 옮기는 책임을 맡았는데, 유명한 유적들을 수없이 파괴했다. 일부 교황들이 이와 같이 파괴를 지시한 한편으로, 다른 교황들은 손상되지 않고 의연하게 남아 있던 유적들을 보호하고, 대리석 수출과 고대 유물 거래를 제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1515년 8월 20일에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는 고대 유물들을 담당하는 행정관이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로마의 지지학 지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재발견되었다. 그에게는 명문의 파손을 막아야 하는 책임도 있었는데 이 일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금석문 연구자인 마초키오와 고대 유물 수집가 칼보와 풀비오 같은 유능한 협력자들을 선발했다. 이 팀의 목적은 '옛날 형태로, 이전의 둘레와 길이로, 서로 다른 부분들의 비율에 따라 복원된'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는 것이었다. 1520년에 라파엘로가 죽고 난 후에도 동료들은 작업을 계속했다. 1521년에 마초키오는 명문 모음집을 발간했고, 1527년에 칼보는로마 지도를, 풀비오는 '로마의 고대 유물'을 출판했다. 20여 년간 고고학 발달을 저해한 로마 약탈 바로 직후인 5월 6일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했다. 풀비오와 칼보는 대량학살 와중에 살해당했다. 로마가 겪은 가장 파괴적인 침공은 고고학사의 단절을 의미했다. 침략과 신성모독 행위들이 자행된 이후인 1527년 말, 도시에는 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 당대인은 "종소리도 기도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교회는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고 적어 놓았다. 결국 로마 지지학 연구는 피로 리고리오의 작업, 카타콤의 발견과 함께 20년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로마의 거리와 주택 아래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 풀비오는 자신의 저작 4권과 5권에서 기독교 바실리카와 묘지들을 묘사했다. 그보다 앞서서, 포조 브라촐리니, 안코나의 키리아쿠스, 마페오 베조는 기독교 명문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교회사는 학자들이 성 필리프 네리 예배당으로 집중되는 초기 기독교인의 매장의식을 복원할 수 있게 된 16세기 후반까지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연구에서 고고학은 제외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발굴을 진행해야 했고, 새로운 방법론이 나와야 했다. 카타콤의 발명자, 보시오 1578년 5월 31일에 살라리아 도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포도밭에서 작업하고 있을 때 땅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그곳은 그림들과 그리스, 라틴어 명문들로 장식된 지하무덤 위였다. 그곳에서는 석관들도 발견되었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발굴은 스파니아르드 알폰소 차코니오가 주도했다. 발굴현장에는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차코니오는 찾아낸 그림들을 모사 하게 했지만 발굴 작업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몇 년이 지난 뒤에 학자인 안토니오 보시오가 이것을 완전히 발굴해 냈다. 1593년에 보시오가 처음으로 아르데아티나 도로에 있는 도미틸라의 카타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겨우 18세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신비와 침묵에 끌려 땅속 깊은 곳까지 넓게 펼쳐진 미로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갔다. 신성한 터널들은 사방으로 뻗은 길다랗고 좁은 틈들로 이뤄져 있었다. 방문객들은 벽에 반사된 촛불에 비친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갑자기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들은 신성하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가 자신들의 시체로 더럽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그들은 거의 48시간 동안을 더듬거리며 헤매다가 마침내 출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앞으로는 양초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런 탐험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 경험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보시오의 헌신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시간을 카타콤 발굴에 바쳤고, 모든 카타콤들과 거기에서 발견한 그림들을 위대한 저서 '지하로마'에 기록했다. 지지학적인 배열, 발굴물들 간의 끊임없는 비교, 원본과 명문들, 이 모든 것은 기독교 고고학 발전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보시오는 비판적 방법이 결여된 16세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죽고 나서야 출간된, 로마의 모습을 마치 신성한 묘지처럼 묘사한 그의 책이 불러일으켰을 흥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보시오의 저작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가 이용했고, 마찬가지로 교회가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과 예배의식에 충실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둘러싼 논쟁에도 이용되었다. 카타콤의 발견으로 그때까지 오직 문헌에만 근거를 두고 있었던 논쟁에 불이 붙었다. 제3장 개인적 소장품에서 예술사로 18세기에 로마와 유적들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하나의 유행,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성지순례의 목적지로 자리잡았다. 고대 유물에 대한 광적인 열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부유한 수집가들은 박물관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독일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은 예술사의 기초를 마련했다. 보시오 이후, 기독교 고고학 발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사람들이 카타콤에서 바랐던 것은 유물과 보석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학자들은 새로 발견된 명문들을 출판하고 고대 문헌 원본들을 해석하느라 분주했다. 베네딕트 회의 고전학자 장 마비옹은 '아인지델른 여행 안내서'를 재발견했다. 베르나르 드 몽포송은 교회 교부들의 저작과 기독교 고고학의 출처 목록에 대한 학구적인 간행물들을 출간했다. 고도비초 안토니오 무라토리는 대 그레고리우스 시대로 알려진 성유물 목록이 담긴 몬차의 파피루스 사본에 대한 해설서를 발간했다. 이교세계를 연구하는 고고학 분야는 르네상스가 무르익으면서 진전되었다. 대규모 건설계획으로 금화, 은화, 모자이크, 부조와 하드리아누스 선전의 것들을 포함한 조각상들도 발견되었다. 교황들은 주로 자신의 소장품을 늘리려는 목적에서, 발굴을 통제하는 칙령을 내렸다. 클레멘스 14세는 유물을 새로 발굴하면 교황, 교황청, 그 땅의 소유자, 투자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수지맞는 고대 유물 장사 수집과 매매는 '고고학자'들을 자극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유물들을 팔거나 하드리아누스 별장과 아피아 가도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걸작들의 복원은 수지가 맞았고, 출처의 신빙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여러 조각상들의 파편이 필요에 따라 함께 섞여서 아폴로나 비너스, 혹은 다이애나가 되었다. 로마에 오는 외국인들은 로마의 가장 뛰어난 복제가였던 비르톨로메오 카바체피의 박물관 같은 작업실을 방문했다. 구매자들은 대부분 영국인이었다. 1732년에 최초로 고대 유물 애호가들의 모임인 딜레탄티 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유명한 조직은 고고학 저작물 발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대일주로 알려진 코스에 로마 여행을 하는 것을 유행시키는 데 불을 붙였다. 다른 유럽인들, 특히 프랑스인과 독일인들도 고대 유물에 대한 광적인 열기에 휩싸였다. 로마와 이탈리아에 열렬한 흥미를 가진 그들은 진품보다 값싸고 수출하기 쉬운 복제품과 조각상의 석고소조들을 구입했다.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한때 로마에서 발견된 모든 고대 유물들을 석고소조를 전시할 수 있는 복제품 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 하기도 했다. 위대한 수집가들 르네상스 궁전들은 고대의 파편들로 장식되었다. 18세기에는 특별히 대규모 소장품들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 교황 클레멘트 11세기의 조카 알레산드로 알바니 추기경은 최초의 별장 박물관을 살라리아 도로에 짓게 했다. 그는 그곳에 오벨리스크, 기념주, 석관, 조각상, 그리고 수풀, 나무, 분수 등지에서 나온 제국의 흉상들을 가져다 놓았다. 부조들은 방의 벽 속 오목한 곳에 안치되었다. 다에달루스와 이카루스, 아폴로와 다이애나,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가 여기서 살았다. 건축가 카를로 마르키오니는 1763년에 이 기획사업을 끝마쳤다. 알바니 별장은 요정들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집으로 전해졌다. 핀치아나 별장은 보르게제 공을 위해 고대 유물 박물관으로 변했고, 넓은 정원에는 경기장, 다이애나 신전,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같은 복제 유적을 만들어 놓았다. 가장 아름다운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기초를 놓고, 피우스 6세가 완성한 바티칸의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은 1년에 한 번만 대중에 공개되었다. 피우스 6세는 비용은 일체 고려하지 않고, 부유한 귀족 수집가들이나 많은 건물들에서 나온 조각상들을 사들였고, 성 안젤로상에서 하드리아누스와 미네르바 흉상, 라테란에서 성 헬렌의 석관을 가져갔다. 그는 발견된 모든 것들에 대한 선매권을 자신이 가졌고 교황직에 있는 동안 300개가 넘는 대리석을 모았다. 피우스 6세는 자기 주위에 유능한 대리인들과 조언자들을 포진시켰다. 그들은 일곱 권의 두꺼운 책으로 된 소장품 목록을 만들었고, 바티칸 소장품에 대한 최상의 평판을 확고하게 유지시켰다. 교황은 특히 라티움을 포함한 로마 근교를 발굴했다. 옛날 로마 식민지였던 카스트룸 노붐에서 조각상과 명문 파편과 네로 시대의 금화들이 발견되었다. 마찬가지로 한때 로마 식민지였던 살로나에서 지금은 바티칸에 있는, '욕탕에 있는 비너스'를 발견했다. 스키피오 무덤의 발견으로 드러난 고대 로마인의 장례의식 1780년 5월 석관들이 들어 있는 지하실 몇 개가 로마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문 앞에서 발견되었다. B.C. 3세기에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무찌른 용맹한 장군이자 탁월한 정치가였다. 방문객들은 이 무덤에서 가장 오래된 석관인 B.C. 298년 에트루리아인을 정복했던 바르바투스관에 마음이 끌렸다. 바르바투스의 묘비에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그나에우스의 아들, 용기 있고 현명한 그는 당신 조국의 집정관이자 감찰관이며 평의원이었다. 그는 삼니움에 있는 타우라시아와 키사우나를 정복했고, 루카니아의 땅 전부를 굴복시켜 루카니아에서 수많은 인질들을 데리고 왔다." 무덤의 미로가 완전히 발굴되면서 B.C. 3세기와 1세기 사이의 석관들이 몇 개 더 발견되었다. 피우스 6세는 바르바투스의 석관과 비문들을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으로 옮기게 했다. 다른 석관들은 부수고, 매장유품들은 팔렸으며, 발견된 뼈들은 흩어져 버렸다. 17세기에는, 로마인들은 제국 말기까지 무조건 시체를 화장시켰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 믿음은 1777년에 황제와 그의 가족, 그리고 첫 번째 계승자들의 시체가 소각되었던 신성한 장소, 아우구스투스 우스트리눔의 발견으로 더욱 굳어진 것 같다. 하지만 3년 후에 스피키오 가문의 무덤이 발견되어 로마인들이 매우 일찍부터 시체를 매장하기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후의 발견들도 계속해서 두 가지 관행이 공존했음을 입증해 주었다. 때로는 재를 담은 유골단지와 석관이 한 무덤속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궁전 고대에 필라티누스 언덕은 황제의 궁전을 짓기 위해 따로 보존된 곳이었다. 이 언덕은 중세 이래 포도덩굴과 목초지로 덮여 있었고, 16세기까지 몇 개의 유적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1535년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땅의 일부를 사들여 고대 건물들 위에 화려한 별장과 정원을 지었는데, 이 잔해는 지금도 볼 수 있다. 17세기 말에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하자, 나주에 파르마 공이 도니 살마은 베르가모트, 포도나무, 아티초크를 심고, 그곳에서 열심히 보물들을 찾아 다녔다. 1720년에 파르마 공 프란시스 1세는 이곳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고대 유물 담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비안치니에게 목록을 그리게 했다. 작업은 언덕의 남동쪽 경사면, 즉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82년과 96년 사이에 지은 옛날 프라비아누스 궁전의 일부분으로 한정되었다. 발굴자들은 세 개의 화려한 방들을 찾아냈다. 그중 하나는 반구형의 궁륭천장을 가진 바실리카였고, 또 하나는 16개의 플루트를 불고 있는 대리석 기둥과 12개의 거대한 현무암 조각상 벽감이 있는 옥좌실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라라리움'이었다. 라라리움에서 그들은 높이가 1미터 정도 되는 원뿔 모양을 한 검은 돌을 발견했다. 당대의 학자들은 아무도 그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도 이것은 B.C. 3세기 말에 카르타고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로마로 운반되었던 키벨레 여신의 상징인 흑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돌은 발견된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호화스런 이 궁전은 발굴되었다기보다는 약탈당했다. 문 양쪽에 서 있던 플루트를 불고 있는 두 개의 노란 대리석 기둥은 사라져 버렸고, 코니스와 조각작품들은 소실되었다. 파르마 공은 자신의 몫으로 헤라클레스 두 개, 바쿠스 하나, 제우스 두상, 그리고 부조들을 챙겼다. 궁전 밑에 있는 훨씬 오래된 두 개의 방에서 발견된 그리핀의 집과 이집트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있던 1세기 때의 이시스 궁전의 훌륭한 프레스코화들도 피해를 입었다. 로마 유적을 그린 화가들 도미티아누스 궁전이 플라비안 예술의 바로크적 특징을 보여 주는 반면에, 1세기 이전의 그림들은 폼페이에서도 발견되었듯이 좀더 고전적인 형식을 보여 주었다. 고고학이 점점 심오해지고 영역이 넓어지면서 유적지, 지도, 건축학적 도면목록들이 풍성하게 쏟아졌다. 출판업자와 서적상들의 열정도 자극제가 되었다. 니콜라 푸생을 비롯한 고전주의 화가들은 유적에 초점을 맞추어 풍경화의 소재로 삼았다. 그들 관점의 성공은 전통적인 조각법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베네치아의 미술가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는 건물 데생을 하는 미술가들과 풍경화가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모든 주제를 다루어, '로마경관도','로마의 고대 유적들', 고대 유적지들을 묘사한 판화, 그리고 1745년에 시도한 환상적 구성의 일종인 '감옥'과 같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한편, 그가 만든 로마 지도들은 16세기와 17세기의 수많은 선행자들 작품과 마찬가지로 유적과 유물조각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의 지도 '캄푸스 마르티우스'는 고대 로마 지도인 도시 모형의 조각처럼 보인다. 하지만 피라네시는 그 장소들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보다는 로마의 위대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이와 반대로 그가 만든 하드리아누스 별장 지도는 의심할 여지없는 학문적 가치를 갖고 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 예술사의 탄생 피라네시는 고대 예술의 궁극적인 표현으로서 기념비적이고 창의적인 로마 예술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리스 예술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맞서 그가 지켜 냈던 그리스 옹호자들과 로마 옹호자들 사이의 분쟁은 궁극적으로 고고학을 근대로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1755년 이래 로마에 살고 있던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에게는 그리스 예술만이 유일하게 이상적인 미의 수준에 올라선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위대함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고대인을 모방하는 것이다." 전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신고전주의 운동의 주요 신조 중 하나였던 이 이론과 함께 빙켈만은 최초로 예술사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고대, 전성기, 황금기, 쇠퇴기라는 네 시대를 기술했다. 이 체계 속에서 로마는 설 자리가 없었지만, 이런 분류는 주제를 정한 후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방법이었다. 골동품 애호가들이나 교황들은 유물들을 수집하거나 사회적 위신을 유지하기 위한 동기는 부여받았지만 역사적인 고려에는 항상 소홀했다. 빙켈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복원작업은 양식과 정확한 연대에 관한 사전연구를 요구하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빙켈만은 그때까지 단순히 탐심의 대상이 되거나 모사대상에 불과했던 고대 예술을 역사적인 학문의 주제로 만들었고, 예술사를 고고학의 주요 영역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학구적인 이론가이자 그리스 예술의 찬미자이며 '고대 예술사'를 쓴 빙켈만이, 자신이 그리스적인 것으로 찬탄해마지 않았던 조각상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실은 로마 복제품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학파를 창시했고, 자신의 제자들이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진품을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확인시켜 주는 절차로 여겼다. 제4장 나폴레옹 지배하의 로마 "교황은 로마에 파견될 사절단이 선정한 100점의 회화, 흉상, 항아리, 조각상들을 프랑스 공화국에 인도해야 한다. 이중에는 사절단이 선발한 500개의 필사본들뿐만 아니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유니우스 부루투스의 청동 흉상과 마르쿠스 부루투스 대리석 흉상 두 점이 포함될 것이다." 볼로냐 협약 제8항 로마의 프랑스인과 로마 예술의 마지막 대수집 1790년 프랑스는 로마 점령 당시 교황 피우스 6세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이에 볼로냐 협약을 체결하여 합법적으로 협정에서도 확인되었다.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은 바티칸의 많은 소장품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개인 재산들을 입수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들로 이루어진 로마 전리품을 실은 긴 호송행렬이 파리에 도착한 1799년 7월 28일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있었다.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유화, 고대 필사본이나 조각품과 다른 많은 경이로운 유물들은 프랑스 공화국 박물관의 고대 유물 소장품이 되었다. 이 박물관은 후에 중앙 예술 박물관으로 불리다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정착되었다. 이 박물관은 설계하고 건립하는 데 2년이 걸렸으며, 1801년 11월에 문을 열어 117점의 작품들을 계속 전시했다. 18세기와 19새기의 발견 이후, 당시에 그리스와 관련된 가장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박물관처럼 좀더 기원이 다양한 여러 유물들이 합쳐졌다. 1815년에 빈 협약이 체결되어 나폴레옹 박물관은 종말을 맞이했다. 배상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조각가인 안토니오 카노바가 개입하여 교황은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보르게제 소장품 대부분을 비롯한 몇 작품들은 프랑스인이 구입했다. 이것이 왕립 박물관의 핵심을 이루었고, 나중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불렸다. 피우스 7세와 이탈리아 예술 유산에 대한 법적 보호 나폴레옹의 로마 약탈에 대해 프랑스에서는 어느 정도 심한 반발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로 진격한 동안에 출간된 '미란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고학에 열정을 가진 프랑스인 콰트르메르 드 퀸시는 이탈리아 예술 유산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예술작품들을 옮길 때 손상될 것을 우려했고, 처음으로 유물과 그 기원이 되는 장소 사이에 본질적인 상호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공식화했다. 1800년에 피우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 마찬가지로 문화 유산 문제에 몰두했다. 교황은 1802년에 칙령을 내려 교황의 허가 없이 발굴하는 것과 예술 유물들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에게는 해마다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는 의무를 부여했으며, 박물관 확장과 고고학 교육 향상에 필요한 기금을 하사했다. 이런 조항들은 마침내 1820년에 '파카 칙령'으로 확정되었다. 피우스 7세는 최초로 예술 유산에 대한 국가 보호 원칙을 확립하여 19세기 동안 점차 개인 소장품들이 사라지는데 기여했다. 이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두 사람이 임명되었다. 예술 유물들의 감독자인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는 박물관을 점검하고 확장하는 임무를 맡았고, 고대 유물 담당관인 카를로 페아는 고대 기념물과 교회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의 사법권은 모든 교황국가들로 확대되었고, 그들은 20년이 넘게 예술과 고고학 분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을 동원한 포룸의 정비 카를로 페아의 지휘하에 발굴작업이 재개되었는데, 주로 로마 포룸에서 이루어졌다. 19세기 초에 이곳은 느릅나무가 두 줄로 교차해서 늘어서 있고, 외딴 집들과 석공들의 가게로 둘러싸인 벌판이었다. 소들은 반쯤 파묻힌 유적 주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1565년에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근처에 있던 거대한 대야는 여물통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의 주된 임무는 본래의 지표고도를 찾기 위해 유적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 고고학자들은 유적을 담으로 둘러싸서 보호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최초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셉티마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적용되었다. 한 가지 중요하고도 새로운 것은 이런 발굴작업에 죄수와 노예들을 동원한 것이다. 100여 명 남짓한 노예들은 발에 대포알처럼 생긴 족쇄를 차고,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콜로세움에서 일했다. 하지만 피우스 7세는 실제 복원계획에 착수할 수 없었다. 그가 교황직에 오르면서 시작된 몇 안 되는 계획들은 이윽고 속도가 느려졌고, 로마가 몰락의 길로 빠져들고 사람들이 도시에서 멀리 떠나기 시작하면서 보류되었다. 로마의 삶과 함께한 위대한 발굴 1809년에 로마는 '자유로운 제국의 도시'가 되고, 같은 해 8월 프랑스 제국의 행정구로 편입되었다. 곧 이어 나폴레옹은 로마를 프랑스 제국의 두 번째 수도로 천명한 다음 많은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고고학도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전에는 발굴작업이 보물을 찾으려는 목적 때문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쉽게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단순하게 유물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피우스 7세가 시험한 방법에 따라 유물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 나갔다. 더 나아가 발굴작업은 폼페이 같은 거대한 유적지를 복원하거나 건축물 구조를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스인은 로마에서 대규모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도시 계획가들이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최초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유적들과 도시의 근대화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 방안은 몇몇 교회를 포함하여 불필요한 기념물들을 철거하고 도시를 근대화시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안은 광범위한 발굴작업을 시행하여 유적들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제도를 요구한 공식적인 고고학 프랑스 정부는 다양한 제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810년에 설립되었다가 1811년 '로마 미화위원회'로 대체된 '고대 기념물 및 공공건물 대책위원회'는 로마 지사에게 결정적 역할을 부여했다. 지사는 발굴허가를 내주고, 발굴작업의 속도를 결정하고, 발굴된 유물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고고학 교수법도 재정비되었다. 필리포 아우렐리오 비스콘티 자작은 신화학, 예술사, 고고학, 세 과목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고고학은 예술가나 역사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인은 폐허가 된 로마에서 헐벗고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발굴작업에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100명 단위의 분견대로 편성된 400명이 정부를 위해 일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2,000명으로 늘었다. 드 투르농은 1831년 자신의 저서 '로마에 대한 통계학적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젊은 날을 빈곤과 장래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허비했던 사람들 사이에 일에 대한 열정이 퍼진 것은 이와 같은 발굴작업 덕분이다. 처음에는 힘들어 보이는 일을 하려는 노동자들의 몇 안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 모두를 고용할 일거리가 부족했다. 본보기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사람들의 산업적 훈련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모범적인 발굴의 예, 트라야누스 포룸 113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인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기둥은 이름이 바뀌거나 어떤 실질적인 손상 없이 수세기 동안 살아 남았다. 하지만 한때 기둥 위에 얹혀 있던 황제의 조각상은 16세기 말에 성 베드로의 조각상으로 대체되었다. 기둥 주위에는 잡석들이 쌓였고, 좀더 최근에 지은 건물들로 둘러싸였다. 1810년의 발굴 피우스 6세는 기둥 기저부를 옛날 돌로 포장된 밑까지 치우게 했다. 이 기둥은 남쪽으로는 성 유페미아 수도원과 성령수도원에, 서쪽으로는 수많은 건물등에, 북쪽으로는 두 개의 교회로 구분된 도랑에 서 있게 되었다. 1810년의 계획은 광장을 파 내려가면서 지면을 고르게 닦고 넓혀서 발굴하는 것이었다. 건물들과 두 개의 수도원 해체작업은 1812년 3월에 시작되어 같은 해 12월에 끝났다. 발굴작업은 다음해 5월에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는 그다지 고무적이지 못했다. 처음에는 깨진 기둥들 몇 개, 항아리 하나, 두상 하나가 고작이었다. 1년 뒤에는 여러 가지 조각상들, 황후의 두상 하나, 검붉은 자줏빛 반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상 파편이 나왔다. 발굴하려는 가장 중요한 건물은 고대 울피아 바실리카의 중앙부분이었으나 도서관 주랑현관의 조각들만이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기둥 20개의 기저부와 바실리카의 대리석 판석 잔해도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치운 공간은 벽으로 둘러싸인 넓고 얕은 구덩이 같았다. 이 광장의 발굴작업은 19세기 내내, 20세기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1930년대에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조직한 대규모 정리사업이 뒤따랐다. '카피톨리누스 공원', 무리한 계획 트라야누스 포룸 근처인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콜로세움 지역은 완전히 흙과 잡석으로 덮여 있었다. 정면의 일부분은 무너졌고, 다른 부분은 1803년에 세운 일종의 박차모양의 돌기물로 지탱되고 있었다. 피우스 7세 때 이루어진 작업은 실제로 포룸의 모습을 바꾸지는 못했고 테베레강 근처에 있는 두 신전은 땅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기념물의 적절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카피톨리누스 공원'이라는, 거대한 고고학적 산책로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 포룸, 콜로세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먼저 근대 건물들의 해체, 기념물의 발굴과 무엇보다 넓은 지역의 땅을 고르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것은 비용이나 규모면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무모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1810년에 작업은 시작되었고, 600명의 일꾼들이 포룸에 고용되었다. 작업에 착수하다 그들은 콘코르드 신전,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그리고 흙이 쌓여서 궁륭천장이 거의 흙 위로 드러나 있는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의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1년 후에 이 세 개의 본당들을 아래 판석까지 깨끗이 치웠다. 티투스 개선문과 접해 있던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 수도원은 '비너스와 로마 신전' 잔해 위에 세워졌던 교회처럼 헐리게 되었다. 두 고대 건물들의 기저부는 이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고고학에 기여한 건축가들 건축가들은 고고학 작업에 적극 참여했고 발굴작업에 뒤따랐던 개념을 결정적으로 수정했다. 그들은 건물 맨 아래층을 대대적으로 청소했고 유적의 완전한 지지학적 재현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건물군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은 포룸 건축물에 대한 재발견을 시도하고 테베레강가에 있는 로마의 고대 항구 오스티아에 대한 광범한 발굴작업을 계획했던 카를로 페아가 따랐던 접근방법이었다. '로마 미화위원회' 일원으로 포룸 복원계획의 제휴자였던 주세페 과타니의 구도도 같았다. 그는 '로마 안내서'에서 여행객에게 도시의 배치를 이해하려면 트라야누스 기념주 꼭대기에 올라가라고 권했다. 또한, 유적 상호간의 역동성이 포착되도록 기념물 모형지도 사용을 제안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안내서들은 단순한 도시 묘사만을 담은 것이 아니었다. 지지학적 분석과 고고학적 발견의 평가가 유적지들의 조직적 구조와 로마 전체를 비춰 주었던 것이다. 평가 시기 이 시기의 프로젝트들은 지나치게 과도하고 야심적이엇다. 프랑스 작가인 샤토브리앙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야비하고 약탈적'이었고 나중에는 '사악'했던 프랑스 점령은 거의 전반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점령으로 혜택을 받은 것은 고고학뿐이었다. 언제나 비판 정신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던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이렇게 증언했다. "많은 프로젝트들이 시행된 덕택에 고대 기념물들은 1809년 이래 완전히 달라졌고, 이 유적들에 관련된 지식은 더욱 합리적인 것이 되었다." 제5장 이성의 시대 19세기 포룸, 아피아 가도, 카타콤 같은 중요한 학술적 발굴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래 때때로 무질서하고 성급한 방식으로 축적되었던 자료들 - 원본, 명문, 유물 -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로마 건국 2,600년 기념식이 가까워 오던 1863년, 한 가지 소식이 학계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단히 중요한 조각상 하나가 도시 대문들 중 하나인 제1대문에서 막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로마 북쪽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황비인 리비아 드루실라가 자신을 위해 화려한 별장을 세우게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조각상이 있는 장소를 알아낸 것은 주세페 갈리아르디라는 아마추어 학자였다. 그는 4월 20일에 지표면 아래에서 청색과 녹색 풍경화로 장식된 커다란 방 옆에 온전하게 보존된 아우구스투스상을 발견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키아라몬티 박물관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걸작을 즉시 요구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의 행운 갈리아르디 같은 아마추어들은 지분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교황청에서 발굴 허가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로마 남쪽으로 향하는 고대 라티나 도로의 포장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발견한 사람도 아마추어였다. 도로 양옆에서 그림, 스투코, 팔려 나가거나 흩어진 매장유품들이 가득 찬 수많은 무덤들을 발견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또한, B.C. 2세기 고대 로마 항구들 가운데 하나인 엠포리움에서 규모가 큰 고대 대리석 창고를 발견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노란색, 녹색, 빨간색의 수많은 고대 설화석고, 줄마노, 그리고 사문석 블록들이 있었다. 피우스 9세는 이 건축재료들을 전세계 교회에 분배했고, 행운의 발견자에게는 남작의 작위를 주고 아낌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후에도 고고학 역사는 여전히 이러한 우연적인 발견들을 담고 있었다. 1860년대에 사람들은 전당포 주인들을 협박해서 상당한 양의 돈을 우려내어 로마에서 추방당했던 수집가, 조반니 캄파나 후작의 재판소식을 들었다. 이때는 또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를 했던 안토니오 니비 같은 고고학자가 주도하여 중요하고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시대이기도 했다. 포룸에 대한 니비와 페아의 논쟁 1827년에 니비는 포룸의 발굴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포룸 북쪽 부분, 타불라리움, 콘코르드 신전, '비너스와 로마 신전'을 깨끗이 치웠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이전에 고대 유물 담당관이었던 페아와 대부분의 다른 고고학자들이 대립했던 문제에 부딪혔다. 사투르누스 신전 근처와 카피톨리노 언덕의 맨 아래 부분에 세 개의 기둥이 서 있었는데, 고전학자들은 기둥의 엔타블라처에 새겨진 명문의 파편, ESTITVER를 보고 이것이 주피터 신전의 잔해라고 믿었다. 니비는 사실과 부합되는 판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과 옛날 문헌들에 의존했다. 그는 중세의 로마 안내서 '아인지델른 여행 안내서'에서 이 기둥들이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의 잔해라는 것을 입증하는 완전한 명문을 발견했다. 이 신전은 69년부터 79년까지 통치했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죽을 때 완성되었다. 카리칼라 황제와 안토니우스 황제는 2세기 이후에 이것을 복원하게 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이 고고학자는 콜로세움을 바라보았을 때 포룸 왼쪽에 서 있는 세 개의 벽돌 궁륭천장을 알아냈다. 중세에는 이 거대한 건물을 로물루스 신전으로 추측했다. 15세기 이후로는 평화신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니비는 이것을 4세기 초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페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니비는 진짜 평화신전, 페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모아 놓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있는 인상적인 건축군을 알아냈다. 유명한 로마의 도시모형도 3세기에 여기에서 인준되었다. 방법에 대한 담론 이러한 학구적 논쟁들은 풍자가들의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고대 유물 애호가들의 극단적 보수주의를 비방했다. 하지만 분석방법은 진보했다. 16세기에 교조주의와 사실 곡해는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모델을 찾았던 학자들의 척도가 되는 무기였다. 발굴된 유적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대략 1850년까지 포룸 발굴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그 구조는 니비의 복원작업과 1845년에 나온 독일 학자인 테오도어 몸젠의 저작으로 밝혀졌다. 몸젠은 고대 로마인이 회합을 갖던 장소인 코미티움의 위치를 확정지었다. 1850년 이후 다른 발굴작업들이 시작되었다. 리비아 저택이 들어섰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발굴이 이루어졌고, 제국의 궁전 유적들도 하나둘씩 발굴되었다. 또 아피아 가도 발굴작업은 루이지 카니나에게 위임되었다. 도로의 여왕4세기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브린디시까지 장장 56KM가 넘는 포장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클라디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 이 도로를 아피아 가도라고 불렀다. 사이프러스 나무, 소나무, 올리브 나무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이 길을 따라가노라면 다양한 신전, 별장, 매장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로는 로마에서 약 8KM 떨어진, 호라티우스와 쿠리아티우스가 싸웠다는 전설적인 장소에서 갈라졌다. 흙 둔덕 형태 속에 있는 무덤들은 도로 오른쪽에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세시대에 귀족들은 요새화된 큼직한 성을 지키는 데 사용되었던 탑 모양의 카에칠리아 메텔라 무덤을 포함해 아피아 가도를 따라서 몇 개의 건축물들을 점유하고 요새화했다. 다른 유적들은 헐어 건축자재로 썼고 나머지 것들은 그냥 버려지거나, 산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아피아 가도를 보존해야 한다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호소는 헛된 것이었다. 19세기까지 도로의 윤곽은 폐허화된 무덤들에 둘러싸인 채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아피아 가도를 복원시킨 루이지 카니나 1850 계획은 도로의 전체 범위를 복원하고 선을 드러내어 남아 있는 것들을 발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로의 제1구역에서 집중적인 작업이 3년 동안 이루어졌다. 카니나는 매우 상세하게 진행과정을 기록했고 도로와 복구상태를 큰 평판에 새겨 놓았다. 그는 여기에 서 있는 길다란 무덤들을 상상했는데 이들 중 기념비적인 몇 개는 스투코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고, 다른 것들은 단순한 제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피라미드 모양, 둥근 북 모양, 혹은 보통 신전을 닮은 거의 3,000개의 무덤을 묘사했다. 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발굴 결과는 카니나의 복원 작업이 타당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평판은 한때 수도의 문을 떠나 제국을 가로질러가는 것처럼 보였을 저 위대한 집정관의 도로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통상적으로 집정관들의 상징적인 출발점은 아우구스투스가 포룸 중앙에 세워 놓았던 황금기둥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기독교 고고학의 부활 19세기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과 영웅들이 더 이상 숭배대상이 아니었다. 고고학의 탐험 영역은 이제 지중해 전지역은 물론 중동 지방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트로이를 발굴한 독일 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이집트 연구가인 프랑스 고고학자 샹폴리옹 형제 같은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에트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발굴되었다. 로마에서는 새로운 영역인 카타콤이 재발견되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은 19세기 초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보시오의 시대로부터 이러한 지하묘지들은 대부분 방기된 채로 있었거나 잊혀져 있었다. 고전학자 주세페 미르키는 최초로 교황 크레고리우스 16세에게 기독교 역사의 증거가 되는 지하묘지들의 보호에 관심을 가지도록 했다. 1841년에 마르키는 무덤을 감독하게 되었고, 1854년에는 라테란 기독교 박물관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르키의 제자 조반니 바티스타드 로시는 그 당시에 카타콤의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드 로시는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여러 가지 종류의 전통적 문헌자료, 교회자료들과 중세 서류들을 조사했다. 여행 안내서, 성물목록, 묘지목록 등을 검색한 뒤에, 그는 성 식스투스의 지하예배당이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NELIVS MARTYR라고 새겨진 명문을 발견했다. 그는 문헌을 통해 교황 코르넬리우스가 153년에 식스투스 무덤 근처에 매장되었음을 알아냈다. 드 로시는 계속해서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 전체뿐만 아니라 지하예배당을 찾아냈다. 그때 그는 지하예배당이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묻힌 상태로 남아 있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4세기에 이민족의 침략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순교자들의 무덤에 대한 약탈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다마수스 1세와 그 계승자들은 순례자들이 지하회랑을 방문할 때 곧바로 내려올 수 있도록 넓은 계단을 건설하게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구조물들이 붕괴되어 회랑과 터널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그 로시 전까지 고고학자들은 바로 이 흙더미 앞까지 와서 발굴을 중단해 버렸다. 그러나 드 로시는 흙을 뚫고 계속 파 내려가서 카타콤의 핵심을 발견한 것이다. 지하 로마의 거장 드 로시 드 로시는 같은 방법으로 26개의 카타콤을 발굴했고 거의 10세기 동안이나 묻혀 있었던 회랑들을 개방했다. 지하 바실리카에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예전처럼 종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무덤과, 무덤에 남아 있는 프레스코화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고, 신성한 예술이 연구와 찬탄의 주제가 되었다. 교황 피우스 9세도 이 유명한 장소에 참배하러 갔다. 교회의 영향, 특히 예수회 교단뿐 아니라 이 발견으로 고무된 종교적 열정은 기독교 고고학의 장애일 수도 있었지만, 드 로시는 발견물을 학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다. 그는 몸젠 등 독일 고전학자들과 함께 방대한 라틴 명문 총서의 발간작업에 초빙되어 1864년부터 1877년까지 '지하 기독교 로마'를 저술했다. 드 로시는 1863년부터 '기독교 고고학 연보'를 편집했다. 생애 말까지 그는 2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그의 사후에도 발견은 계속되어 현재에는 76개의 카타콤이 알려졌다. 고고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어려운 작업, 발굴과 해석, 분류와 전파 그 시대의 모든 고고학자들은 자신의 분야를 분류하고 정의하느라 바빴고, 고대를 다루던 사람들은 거대한 합리적 사고방식의 물결에서 도움을 받았다. 정확한 원래의 판본을 확정하는 새로운 방법이 고안되었다. 대상물들에 대한 주제별 목록도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지지학적인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명문들을 묶은 방대한 모음집이었다. 또한, 박물관들도 소장품들에 대한 주제별 목록들을 준비했다. 이런 정보들은 예전에 비해 널리 보급되었다. 새로운 협회들이 여러 발굴작업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다양한 출판물들이 나와 최근의 발굴 상황을 알리고 해설을 실었다. 1810년에 설립된 로마 아카데미는 폼포니우스 라에투스와 인문주의자의 계승자가 되고자 열망하는 고고학자, 아마추어들, 예술가와 성직자들을 함께 불러 모았다. 그들은 사치스런 연회를 베풀었고 유적들을 탐방했다. 고고학회의 설립 고고학 통신협회는 1829년에 고고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주도하에 바바리아 왕 루드비히 1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3세의 후원으로 창립되었다. 이 협회는 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발굴들을 기술하는 회보와 정기간행물을 발간했다. 거의 40년 동안 고고학의 역사는 이 협회와 연계되어 있었다. 이 협회의 국제적인 역할은 1870년 보불전쟁의 결과로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이 협회는 오직 독일인의 통제만을 받아 독일 고고학회가 되었고, 그 활동은 아테네, 카이로, 이스탄불까지 확대되었다. 1873년에 프랑스인은 또 다른 협회인 프랑스의 로마 학파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고고학에서 이룩한 발전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때때로 발굴자들이 아마추어였고, 그들에게 골동품 수집가다운 면이 드러나기는 했어도, 이제는 진정한 발굴사업에 종사하는 순수한 학자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고하게 새로운 방법, 깊이 파들어 가는 철저한 발굴, 역사적 접근법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니비는 죽기 직전 '1838년의 로마'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표면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유적들 속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성장한 나는,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집들의 지하실과 수많은 벽들의 안쪽에, 고대 로마의 지지학과 예술사와 관련된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공언할 수 있다." 제6장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것으로 20세기 고고학은 현대로 접어 들었고 그 방법론을 찾아냈다. 고립된 발굴과 공화정시대와 제정시대로 제한되었던 발견의 세기가 끝난 이후, 초기 로마-왕정 로마-가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고, 차츰 그 기원의 신비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1861년에 이탈리아 민족통일에 접어들었고, 1870년에는 로마가 새로운 나라의 수도임이 천명되었다. 새로운 군주는 로마가 고대 도시이자 교황의 가치 있는 수도가 되기를 원했다. 제3의 로마에서는 여전히 모든것들을 건설해야 했다. 주민뿐만 아니라 신정부 관리들도 대저택이나 오두막으로 이사할 수 없었다. 로마는 삽과 곡괭이 아래서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을 드러냈지만, 많은 유적들은 근대 건물 밑으로 사라져갔다. 옛 지구 몇 수도원들, 수많은 저택, 유명한 별장을 포함하는 중세 도시 대부분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독일 역사가인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잔뜩 화가나서 이렇게 적었다. "건물들이 맹렬한 속도로 건설되고 있다. 지구와 언덕들이 거꾸로 넘어지고 있다. 매시간 나는 고대 로마의 한 부분이 쓰러지는 것을 목도한다. 오래된 도시는 사라지고 있다. 고고학자 란치아니가 건설계획을 옹호하는 응답형식으로 썼던 것은 1870년과 1885년 사이에 발굴된 유물들의 일람표였다. 사실상 식스투스 5세하의 16세기 말 이래, 도시계획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많은 파괴와 발견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에스퀼리니스, 퀼리날리스, 비미날리스 언덕에서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조각품들을 보유하고 있던 로마의 저택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얕은 돋을새김, 테라코타, 가정용품, 긴 머리를 가진 청동 바쿠스, 팔이 없는 아폴로, 실제 크기의 아프로디테 두상을 포함한 조각상들이 테베레강에서 발견되었다. 강 언덕에서 작업이 계속되면서 파르네세 별장의 정원이 발굴되었고, 그때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빼어난 프레스코화와 스투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에톤신화, 디오니소스 전설, 대지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사랑을 찬미하는 풍속화를 보면서 발굴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들 유적모두는 대단히 훌륭했다. 특히 스투코의 경우 모든 형태와 의상이 일종의 화석과도 같았다. 성숙단계에 이른 이탈리아 고고학] 전 세기의 발견과 흡사한 역사를 지닌 이러한 발견들은 1889년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에 설치된 로마 국립박물관을 풍성하게 채웠다. 이탈리아 왕이었던 에마누엘라 2세는 진심으로 자기 나라의 예술 유산을 보호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1870년에 로마 기념물의 발굴과 보존을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했다. 또한, 1875년에 이탈리아 고고학 학교를 만들었다. 프랑스와 독일 연구소들을 본딴 이것은, 로마의 '기념비적 중심'에 있는 발굴의 재개를 부추겨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라고 알려진 것을 발굴했다. 콜로세움의 모든 지하통로와 방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포룸에서 첫번째 중심지역이 깨끗이 치워졌고, 이어서 전체 지면이 정리되었다. 고대인은 진실을 이야기했는가 1899년 7월 포룸의 북서쪽에서 자코모 보니는 흰 선으로 둘러싸인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검은 대리석 조각을 발굴했다. 고대 작가들은 포룸에 있던 라피스 니게르라는 검은 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로물루스 무덤의 위치를 가리킨다고 했고 어떤 이는 로물루스의 양부 파우스톨루스의 무덤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로마의 세번째 왕, 호스틸리아누스의 무덤이라고 했다. 보니는 이 신비스런 무덤에 다가가고자 더 깊이 파 내려갔다. 대리석 밑에는 무덤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여 있는 고대 물건들 과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분적으로 좌우교호 서법으로 쓰여 있는 문헌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글자들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단어 몇 개만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완전히 해독된 것은 첫문장 뿐이었다. "이 신성한 장소를 범하는 자는 누구든 지옥에 있는 신들에게 떨어지는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B.C. 6세기부터 유래된 이 금지령-로마의 불의 신 불카누스에게 바쳐진 성소에 연관된 신성한 고대법-의 출현은 폭발적인 역사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인과 맞선 독일인, 애국적인 고고학 수년 동안, 독일 역사가들은 리비우스가 쓴 문헌을 비롯하여 로마의 기원과 관련된 고대 문헌의 가치를 의심해 왔다. 이러한 극단적 비평학파에 맞선 사람들은 '전통주의자'이었던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들은 문헌들을 굳게 믿었다. 검은 돌은 이탈리아인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전래되는 로마 건국의 역사를 입증해 주지 않는가? 논쟁은 신랄했고, 여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을 가라놓았다.1902년에 논쟁은 재개되었고, 이 논쟁은 1907년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근처와 퀼리날리스 언덕에서 B.C. 9세기와 8세기부터 내려오는 두 개의 큰 묘지가 발견됨에 따라 다시 불붙게 되었다. 동시에 보니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같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두막의 기저부를 발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발견들이 매우 일찍부터 이 언덕들에 정착해 살았다는 고대인의 진술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더 이상 논쟁은 지속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은 부적절한 훈련과 불충분한 방법 때문에 어려운 발굴작업을 기꺼이 떠맡아 수행할 수 없었다. 보니는 층위적인 방법론을 역사적인 발굴에 최초로 적용했으며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고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도 더 이상 조사작업을 진척시키지 않으려 했다. 20세기의 고대 유물 수집가, 로돌포 란치아니 이 시대에도 고고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지학 작업에 바치고 있었다. 란치아니는 3세기의 대리석 지도인 도시모형을 연구했다. 그는 1,000분의 1 축적을 사용하여 이 도시의 새로운 고고학적 지도를 그렸고 15세기 이래의 발견 연대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학술적인 금속판을 만들었다. 란치아니는 분석보다는 기술과 수집에 더 관심을 가진 고대 유물 수집가에 속했다. 지도에서 그는 이 도시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자랑했다. 란치아니는 16세기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로마의 시골 지역 답사를 좋아했다. 실제로 그는 로마의 돌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도시가 분할되어 사방팔방으로 이사하게 되어 또다시 도시의 생명력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에도 모든 발굴장소들을 조사하고 다녔다. 이때부터 긴 조사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고고학자들이 가지고 오는 것은 그림보다 사진이 많았다. 그 당시에 고고학자들은 보니가 포룸에서 사용한, 기구를 타고 공중촬영을 하는 사진의 중요성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 고고학자인 존 헨리 파커는 1807년에 최초로 학술적인 목적으로 이 새로운 방법을 채택한 사람이었다. 로마 정신의 숭배 1911년 란치아니는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을 기념하여 대규모 전시회를 조직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들이 선을 보였다. 제1대문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상까지 이르는 장소에 대한 전시도 함께했다. 투르크와 이탈리아 전쟁의 리비아 원정 직전에, 군주는 언제나 고대 지방들의 풍경화 속에 그려진 도로, 다리, 기념물에서처럼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로마 문명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시대 이래 정치적 야심에 봉사해 왔던 로마 신화는 근대 이탈리아에서도 살아 남았다. 이탈리아 통일과 로마의 정체성은 함께 찬양되었다. 파시즘은 이러한 관념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무솔리니는 1925년 12월 31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지금부터 5년 동안 로마는 모든 영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로마는 거대하고, 질서 있고, 최초의 제국시대, 즉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강력해질 것이다." 고전연구와 로마사에 가해진 자극, 정권을 상징했던 독수리, 그리고 라틴어를 '말할 수 있는 언어'로 재생시키려는 집요한 노력, 이 모두는 로마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자기들을 선전하는 데에 고고학이 본질적인 역할을 하기 바랐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무솔리니 정권의 고고학자였던 길리올리는 '파시즘의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목표와 관련된 고고학 연구의 발전'을 환기시켰다. 그는 역사가들에게 로마 역사의 연속성, 로마 민족의 영원성, 그리고 로마가 시작된 이래 로마가 누려 왔던 영광을 드러내느 임무에 불과했다. 무솔리니는 고고학자들을 대거 동원해 대규모 발굴계획을 수립했다. 통틀어 두 개의 그룹이 그가 좋아했던 역사의 정치적 활용이라는 개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의 도시를 복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포룸들과 바다로 향하는 마레 가도 건설과 관련된 오스타아의 발굴이었다. 이 길은 로마가 지중해로 팽창하는 상징이자 기본축이었다. 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프로그램들은 도시 재개발과 분리될 수 없었다. 무솔리니는 파괴와 건설을 동시에 명령했다. 다시 한 번 로마의 작은 광장과 좁은 거리들은 파묻혔지만 죽지 않은 문명의 지면을 되살리기 위해 파헤쳐졌다. 파시스트 로마가 제국 로마를 찬양했다. 측량이나 목록작업도 없이 아우구스투스 포룸이 깨끗이 치워진 후, 작업은 가끔씩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기념제는 1937-1938년, 아우구스투스 탄생 2,000년 기념제로 절정에 달했다. 그 웅장한 무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광장이 만들어지면서 정리되고 복원되고 떨어져 나갔다. 평화제단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강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본래의 자리에 자리잡았다. 장관을 이루었던 1937년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전시회로 '로마의 화신 아우구스투스 전시회'가 열렸다. 1937년의 조직자들은 1911년에 란치아니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야심적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최대규모의 세기적 전시회가 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지도, 그림, 사진, 석고소조, 그리고 제국 전역에 있는 300개가 넘는 유명한 기념물의 모델을 의뢰했다. 이것들은 4세기초의 웅장한 로마를 기념하는 부조지도가 있는 특수실에 안치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전시회를 도왔고, 무솔리니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다졌다. 게다가 이 전시회는 학술적인 성공도 거두었다. 이것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모든 종류의 문헌과 증거물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개막연설에서 길리올리는 이 계획의 정치적 기능을 숨기지 않았다. 로마 정신은 모든 것의 어머니로 선언되었고, 무솔리니는 수호자이자 다가올 영광의 보증인으로 공표되었다. 물론 무솔리니는 그런 제스처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좀더 웅장한 업적을 요구했다. 그는 로마에서부터 오스티아에 있는 바다를 잇는 통로를 만들고자 했다. 이 도시를 해안과 연결하기 위해 영광의 도로가 필요했고, 이 도로를 따라서 제국의 포룸들을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로마가 시작될 때부터 파시스트 제국까지 로마의 정복을 보여주는 다섯 개의 지도들도 전시되었다. 파시스트 고고학에 대한 평가 또한 무솔리니는 오스티아 유적지도 발굴하게 했다. 이 로마의 고대 항구는 이미 18세기에 한차례 발굴되었다. 카를로페아가 50명의 죄수들을 보내 대규모 청소작업을 벌였으나, 심한 습지였기 때문에 작업을 단념해야 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피우스 9세 때가 되어서야 작업을 재개하여 조각상과 중요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910년에 고고학자 발리에리는 그곳에서 날개달린 '승리의 미네르바'상을 발견했다. 당시에 그녀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국가에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스타아가 진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8-1942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무솔리니의 사람이었던 귀도갈차가 작업과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1942년 국제박람회 개최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다가 2세기 층만 정리했던 것이다. 평가작업 없이 이보다 나중에 형성된 층들은 사라져 버렸고, 더 이전에 형성된 층들은 묻혀 버렸다. 그래도 오스티아의 발굴은 로마 건축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고, 최초로 호레아라고 불렸던 유명한 밀창고들과 근대 아파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인술라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묘지와 미트라를 모신 작은 예배당인 미트레아의 발견은 2세기와 3세기의 종교생활과 기독교의 경쟁상대였던 동방 숭배의 대중성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다. 로물루스의 흔적? 이전 세기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에도 많은 수확을 거두었고 계속해서 많은 걸작들이 산출되고 있다. 로마의 토양은 고갈되지 않을 것인가? 아직 묻혀 있는 유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양을 추정하기란 불가능하다. 한 예로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고고학자들은 문헌들과 3세기에 만들어진 도시모형에 의거한 추측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플라미니우스 원형극장, 주피터, 주노, 헤라클레스의 신전들, 바쿠스 극장 등은 여전히 숨겨져 있다. 캄피텔리의 산타 마리아 교회밑에서 주피터 신전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수세기에 걸쳐 자료가 축적되어 왔음에도 오직 옥타비아 주랑현관만이 이전의 화려함의 일부를 드러냈다. 아직도 더 깊이 파 내려가야 할 것이다. 다른 장소에도 초기의 논거들이 발굴되고 있다. 보니가 발견한 B.C.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일찍부터 언덕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징표와 B.C. 6세기에 에트루리아 왕들의 실존을 증명해 주는 1930년경 성 오모보노 성당 아래서 발견된 고대 신전은 고대 역사가들의 주장이 지닌 타당성을 입증해 준다. 1988년 10월 한 고고학자가 포룸 가장자리에서 고대 성벽의 흔적들을 발견했을 때, 팔라티누스 언덕이 자신의 마지막 비밀 중 하나를 포기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B.C. 8세기에 건설된 이 도시의 신성한 장소를 지정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20세기까지 이런 발견은 제정시기나 공화정 말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현재는 왕들이 다스리던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그 시대에서 점점 멀어지지만 고고학자들은 그 기원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영원의 도시는 자신의 비밀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기록과 증언 로마는 호수이다. 서양문명은 로마로 흘러 들었으며 그곳에서 다시 흘러 나왔다. 로마를 시간앞에 다시 불러 세운 사람들이 보내는 찬탄과 안타까움! 문화유산의 소실 중세에 많은 대리석이 특수한 석회가마 속에서 구워져 건축자재로 다시 이용되었다. 19세기에 로돌포 란치아니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석회가마들을 다량으로 발굴했다. 1869년에 석회가마 하나가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티베리우스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가마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개는 구워져서 석회가 되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몇 개는 온전했다. 온전한 것들 중에는 지금 테르메 박물관에 있는 베일을 걸친 클라우디우스 흉상, 네로 두상, 장식용의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 기둥으로 쓰이는 세 개의 여인상,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에페부스의 정교한 작은 조각품들, 하포크라테스 두상, 그리고 다른 작은 파편들이 있다. 1883년 2월 베스타 신전 앞마당 남쪽 방면의 발굴에서 대략 길이가 4.3미터, 넒이가 2.7미터, 높이가 2미터인 대리석 더미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대 베스타 여신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몇 개는 온전했고, 나머지는 파편들이었다. 조각상들과 파편들은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함께 조심스럽게 포장했고, 몸체의 곡선 때문에 생긴 빈 공간은 톱밥으로 채웠다. 거의 손상되지 않고 완전한 조각상이 여덟개 있었다. 우리는 깨진 것들 중에서 발판 위에 사랑스럽게 앉아 있는 베스타 여신의 하반신을 발견하고 모두 깜짝 놀랐다. 이것은 안타깝게도 수많은 세월을 축축한 앞마당 구석에 노출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2월 9일 오전 6시 30분, 경이적인 발견의 자리에는 일꾼들 외에 네 사람만이 있었다. 나는 그때 당시 열정과 활기에 넘치는 황태자가 어떻게 일군들을 도와서 대리석 더미를 일으켜 세우고, 그 조각상들을 앞마당 벽 맞은편에 세워 놓았는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가 로마 유적 발굴의 황금시대였다. 우리는 그것이 마치 꿈이었던가 회상하곤 한다. 대리석을 캐는 사람들은 나란히 누워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들 사이에 공간이 남지 않도록 나무 다발처럼 정연하게 장방형으로 쌓아 올렸다. 어떤 행운으로 이러한 조각상들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가를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베스타 신전에 있던 많은 양의 다른 대리석들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리라는 점이다. 이 발굴 과정에서 가마 두개와 석회와 목탄 저장소 두 개를 발굴하였다. 로돌포 란치아니 '고대 로마의 파괴', 1901년 로마에 대한 포조 브라촐리니의 명상 유적에 대한 명상은 때로는 신의 부르심보다 더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다. 1430년에 로마의 재난을 조사하던 포조 프라촐리니는 그리스, 로마 유적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영국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걸작인 '로마제국의 흥망'에서 이를 묘사하고 있다. 교황 유게니우스 4세 말년에 두 충복인 포기우스와 그의 친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가 기념주들과 신전들의 잔해 사이에서 쉬면서 전망좋은 장소에서 넓고 다양한 폐허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유적들은 운명의 흥망성쇠에 대한 교훈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그것들은 인간과 그가 가장 자부하는 업적, 그 어느 것도 보존하고 있지 않았고, 공동묘지에 제국과 도시들을 묻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위대함에 비례해서 로마의 멸망은 더욱 끔찍하고 비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전은 무너졌고, 황금은 약탈당했으며, 운명의 수레바퀴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았다. 지금 이 신성한 장소는 가시덤불과 들장미에 뒤덮여 볼성사납게 변해 버렸다. 우리가 앉아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예전에는 로마 제국의 머리요, 지상의 성채요, 다른 나라 왕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승리의 계단들이 긑없이 늘어서고 수많은 나라에서 거두어들인 전리품과 공물로 부유했던 세계의 장관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가! 어떻게 변했는가! 어떻게 마멸되었는가! 승리의 도로는 덩굴로 지워져 버리고 원로원 의석들은 퇴비에 묻혀 버렸다. 팔라티누스 언덕으로 눈길을 던져 보라. 형체도 없는 수많은 파편들 속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극장, 오벨리스크, 거대한 조각상, 네로 궁전의 주랑현관을 찾아보라. 도시의 다른 언덕들을 둘러보아도 빈 터는 폐허와 텃밭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로마인들이 법을 제정하거나, 정무관을 선출하기 위해 모였던 포룸은 인제 데쳐먹는 야채를 재배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거나 돼지와 들소들이 들락거리도록 버려져 있다. 영원할 것 같던 공공건물이나 일반 건물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엎드려 있는 힘센 거인의 손발처럼 벌거벗은 채 부서져 있다. 폐허는 시간과 운명의 힘에 손상당하지 않은 거대한 유적들과 대조되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러한 유적들은 최초로, 전설적 기념물로부터 고대 이교의 기념물까지 한층 더 시야를 넓힌 포기우스가 상세하게 기술했다. 1. 그는 다리, 개선문, 능묘, 세스티우스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공화정 시대의 카툴루스 이름과 그의 덕망이 새겨져 있는 카피톨리누스의 소금관청에 있는 두 줄의 궁륭천장을 구별하루 수 있었다. 2. 베스파시우스가 내전이 종식되고 유대인들에게 승리한 이후에 세운 판테온의 온전한 형태로부터 평화신전의 세 개의 아치와 대리석 기둥에 이르기까지 11개의 신전들을 어는 정도 볼 수 있었다. 3. 그가 경솔하게 규정한 7개의 공중목욕탕 중 어느 것도 몇몇 통로와 배수로를 상상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카라칼라 목욕탕은 여전히 설립자들의 이름이 보존되어 있었고, 견고함과 방대한 규모, 다양한 대리석들, 크기가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둥들을 살펴보면서 거기에 투여된 노동과 비용을 실제 사용의 가치와 비교해 보는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콘스탄티누스, 알렉산더, 도미티아누스 목욕탕 중에서, 혹은 티투스 목욕탕 중에서 지금도 몇 가지 흔적들이 보일지 모른다. 4. 티투스, 세베루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그 구조와 비문의 보존상태가 완벽했다. 떨어진 파편은 트라야누스의 이름과 함께 존중되었다. 그리고 플라미니아누스 도로에 그때 당시 남아있던 두 개의 개선문은 파우스티나와 갈리에누스 사후의 천박한 악평 탓으로 돌려졌다. 5. 포기우스는 콜로세움에 감탄한 나머지 아마 대부분 집정관의 가건물로 사용되었을 벽돌로 된 작은 원형극장을 간과했을 것이다. 마르첼루스와 폼페이의 극장들은 공공건물이나 민간건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원형극장, 아고날리스와 막시무스에서는 상황과 형태만을 조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6. 트라야누스와 안토니우스 기념주들은 여전히 서 있으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들은 부서지거나 파묻혔다. 많은 신과 영웅들, 예술의 기량은 금동 기마상과 다섯 개의 대리석 조각상으로 변형되었다. 그중에는 가장 두드러진 것은 피디아스와 프락시텔레스의 말 두마리이다. 7.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의 두 개의 능묘 혹은 무덤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무덤은 작은 흙 둔덕 정도로 보일 뿐이고 성 안첼로성인 하드리아누스 무덤은 명성을 얻었으며, 근대적인 요새의 외관을 띠고 있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이름도 없는 기념주들과 더불어 이들은 고대 도시의 잔해들이다. 좀더 최근 구조물의 표식들을 성벽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벽들은 375개나 되는 작은 탑을 포함하여 원주의 길이가 16미터이며 13개의 성문을 통해 시골로 이어지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의 흥망' 1776-1788년 아피아 가도의 보호 라누치오 비안키 반디넬리는 항상 로마의 예술적 유산을 원형 상태로 보존하는 것을 옹호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로마의 전반적인 유적들과 훌륭한 예술품들의 감독자였으며 위대한 고고학자이자 에트루리아 예술, 예술사와 이론의 전문가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적 보호를 요구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거대한 고고학적 공원들을 만들고자 제안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문 밖에 있는 로마의 아피아 가도만큼 커다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기념물 속에서 로마 공화정의 몰락에서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시작과 그와 더불어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까지 고대 역사의 두드러진 장면들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벽들과 성 세바스티아누스 문에는 본 전경은 2,000년 동안 메초조르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서구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대해 가졌던 동경과 같은 것이다. 그때 이후 이러한 모든 것들은 파괴되어 집들의 홍수 밑으로 가라앉았으며 광란적 투기로 말미암아 사라져 버렸다. 경치뿐만 아니라 예술적, 역사적 유산들을 보호하는 법률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법률이란 그것들을 존중하는 실질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면 생명력도 없고 무력한 것이다. 이 경우에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관료주의적 타성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좀 더 높은 정부관리들 차원, 그보다 더 높은 지배계급 차원에 놓여 있는 문제이다. 아피아 가도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소리가 울렸을 때 힘있는 중간계급 언론의 오르간 독주만이 그런 명분을 가지고 싸우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징후와도 같다. 비슷한 여러 경우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훌륭한 예술적, 문화적 유산들이 파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로 채워진 방들이 있는 베네토의 별장들이 외양간으로 바뀌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미의 걸작으로서, 제1급 대중문화의 목격자로서 이름 높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급속히 아메리카 남부에 있는 몇몇 도시들처럼 뒤죽박죽이고 천박하며 시끄럽고 식민지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학문적 견지에서 볼 때 둘도 없는 오랜 에트루리아 도시의 유적과 잔해들이 엔테 마렘마의 트랙터 바퀴 밑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선동적이고 순전히 기만적인 농업 '개혁'에 희생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예술적 유산에 대한 공격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증거들로 한 권의 책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 부서와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임무인 기구들이 수행하고 있는 '문화유산 보호 계획들'로 이것을 상쇄시키려는 것은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기구들이 때로는 대단히 영웅적인 작업조건들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감독자들은 교회를 비롯한 당국자들로 하여금 이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법률을 못 본 채 넘기도록 가한 압력과 저항방식이 중앙당국으로부터 점점 지지를 못 받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예술적, 역사적 유산의 보존은 중간계급이 상승할 때 그들이 높이 쳐든 깃발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들은 이제는 그 깃발이 수그러드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 이것은 이제 노동계급의 전위, 상승하는 지배계급이 집어들고 높이 쳐들어야만 하는 깃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노동계급만이 유일하게 그 깃발을 들고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 그리고 틀림없이 노동계급은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이것에 맞서 싸울 용기나 힘이 부족한 훌륭한 중간계급의 수많은 대표자들이 자기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 만들어진 법과 제도들은,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를 받고 공격을 개시하고 있는 가장 탐욕스런 투기자들의 공격에 직면하여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법은 부와 화폐이다. 성직자의 선동행위와 위선도 일조하고 있다. 오직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한 지배계급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문화유산 보호를 담당하고 있는 부처 책임자들인 몇몇 행정관료들을 경제적인 면에서 합리적으로 재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미술청장은 몇 년 후면 나라의 예술적 유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거의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역설했다. 그가 말했던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억지로 책임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되고, 보수도 나쁘고, 지배계급들의 도덕적 지지도 없는 힘들기만 한 직업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드 가스페리 정권의 일원인 국민교육부 장관은 어떤 장관도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가 적어 '유권자들의 힘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 장관에게는 예술적 유산이 유권자들이 던지는 표를 줄여 그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 경우에서조차도 이 사람은 문화와 이탈리아 현실과의 실질적 연계, 이탈리아를 실제로 사랑하게 하는 연계가 없다는 점에서 그가 속한 정당의 전형적인 지도자들과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독자들이 행여 오해를 해서 여기서 내가 낡고, 오래되고, 먼지에 쌓여 있는 어떤 것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현실생활의 요구들과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민중들의 생활환경 개선에 대한 요구는, 특히 대도시에서 조정되어야 할 변형형태이다. 하지만 아피아 가도의 표면을 바꾸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형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두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쫓겨난다고 할 때, 그들이 도로가에 세우고 있는 개인별장들에 들어가 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겉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이러한 변모를 멈추고자 하는것은, 인간존재의 성장을 멈추고 옛날의 아름다웠던 어린이에서 우리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노인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문제는 지적인 차원에서 새 건물을 지을 때 옛날 건물들을 중요시하는 의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는 모든 옛 건물들은 영원히 닫혀 있는 역사에 대한 출입구이기 때문이다. 건물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유일하게 존경받고 있으며 이미 그 아름다움으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도시 가운데 몇몇을 파괴시켜 버린 투기적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의 아름다움은 유례없이 매력적인 행운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거의 항상 정확한 계산의 결과이며 수세대에 걸쳐 도시 정부와 민중들의 직접적인 의사표현이 수반된 지시의 결과이다. 아마 이러한 의지와 연속성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중세 도시 시에나의 문헌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헌들 속에서 우리는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의 도시개량을 위한 건물기준을 정하고, 이러한 개량사업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된 설비의 세부항목을 제시해 주는 모든 법령과 포고령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시에나시는 과거의 가장 귀중한 도시유적 중 하나이며 전 세계의 찬탄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있다. 베로나에서는 1276년의 법령들 속에서 어떤 당국자나 관청도 인민평의회의 승인과 '도시 미관청'의 동의 없이는 신축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이탈리아 민중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좀더 실질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규정되어 널리 알려져야 하며 지지를 받아야 한다.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조직들이 필사적으로 역사적 건물들을 지키고 설득시키고자 노력해야 하는 때가 종종 있었고, 밤 사이에 치기 어린 용기로 가득 찬, 몇몇 배 나온 파시스트 관리들이 이끄는 무장한 무리들이 건물을 해체시키기도 했다. 그때도 오늘날처럼 이러한 난제들에 대한 파시스트적 심성을가진 전형적인 대응방식은 곧바로 권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심지어 수사적인 표현에 호소하는 것조차 없다. 오늘날 부동산 투기를 대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25%의 이윤에 돈을 투자하고 있는데 재정적, 기술적 통제들을 회피하기 위해 능란하게 가장 교묘한 방안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고, 도시 개발을 제한하는 법률과 예술적 유산과 경치를 보호하는 법률들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권력자들을 등에 업고 공공연한 공격을 개시한다. 아피아 가도에 가해진 가장 큰 흉터들 중 하나는 피아 카사 산타 로사 건물이다. 그것은 '자선 단체를 위한 존경심에서' 모든 규정들에 대한 파기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장이 규정된 계획에 의해 공원을 조성하기로 되어있는 한 구역의 땅에 건물 한 채를 짓도록 위임받은 것은 아마도 저명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것이다. 민중의 가장 선진적이고 책임 있는 영역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파괴를 종식시킬 수 없을 것이고, 이 사람들이 열렬히 바라는 것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누치오 비안키 반디넬리 '로마:권력의 중심' 1970년 고고학자 피나네시 1756년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로마 유적'출간은 이 시인 같은 출판업자를 로마 고고학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고대 유물에 관한 그의 착상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대중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이 유례없는 성공은 피라네시의 설득력있는 상상력과 결합된, 공학기술과 건축에 대한 심오한 지식 때문이었다. 로마 여행 로마는 항상 외국인들을 매혹시켜 왔다. 수세기 동안 순례자들, 인문주의자들, 예술가들과 정부관리들이 몰려들어 전설적인 경이로움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즐거웠든 실망했든 로마를 둘러본 그들은 때때로 영감을 받아 이 도시에 대한 인상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들은 그들이 살았던 당시의 로마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357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당대의 역사가인 아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는 그 방문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황제께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셔서 주권과 모든 미덕의 본향인 로마로 들어가 뱃부리연단에 도착하여 놀라운 경외감으로 옛날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기념물인 포룸을 바라보셨다. 눈길을 돌릴 때마다 마주치는 수많은 경이로움에 경탄하시고, 원로원에서 귀족들에게 연설하셨으며, 연단에서 진심으로 호의를 다하여 민중들에게 열변을 토한 다음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궁전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가끔 승마경기를 거행할 때마다 황제께서는 긍지는 없으나 한편으로는 방종으로 인해 반항적으로 되지도 않은 평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셨다. 반면에 황제 자신은 적절한 겸손과 공경하는 태도로 바라보셨다. 왜냐하면 황제께서는 보통 다른 도시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변덕스러움에 달려 있는 검투사 시합기간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 가지 사건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셨다. 황제께서는 일곱 언덕과 언덕의 경사면과 아래 바닥 등 도시의 여러 지구들을 돌아보고, 교외지역도 방문하셨다. 황제께서는 처음 보았던 것들 모두가 가장 뛰어난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셨다. 특히 다른 신전들보다 빼어난 타르페이아의 주피터 신전에 경탄하셨다. 그리고 시골 지방만큼 큰 목욕탕들, 테베레강의 돌로 견고하게 만들어 꼭대기까지 인간의 눈길이 거의 미치지 못할 정도로 큰 원형극장, 방대한 규모에 당당한 높이, 견고하고 웅장한 아치, 계단처럼 차례차례 우뚝 솟아 있는 벽감들을 가진 판테온은 이전 황제들의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신전과 평화의 광장, 폼페이 원형극장, 음악당, 경마장, 그리고 영원의 도시의 다른 장식물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황제께서는 창공아래 가장 정교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심지어 신들에게도 칭찬을 받았던 트라야누스 포룸에 이르렀을 때,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꼼짝도 않고 서서, 인간의 힘으로 그려 낼 수도 없고 이것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온당한 욕망을 넘어서 있는 거대한 규모에 가장 몰입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어떤 시도를 해보겠다는 희망도 포기하고 모방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스스로 만족해하셨고, 황제를 등에 태우고 광장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트라야누스의 말을 복제하실 수 있었다.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열망" 수필가인 미셸 드 몽테뉴는 1580년경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1월 26일 수요일, 우리는 테베레강 맞은편에 있는 야니쿨룸산에 올라가 그곳에 있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것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여러 가지 중에서, 그는 바로 이틀전에 햇빛을 본 옛날 성벽의 커다란 일부분을 보았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한눈에 로마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곳을 떠나 그는 벨베데레 벽감에 서 있는 조상들과 교황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집하기 시작해서 거의 마무리된 훌륭한 회화전시실을 보기위해 바티칸에 갔다. 그는 이 유람 도중 어디에선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두세 번 했던 기부를 한 셈 치기로 했다. 축축하고 사나워진 날씨 탓에 급히 지갑을 넣었는데 그게 호주머니로 들어가지 않고 미끄러져 떨어져 버린 듯 했다. 그는 매일 로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자세히 연구하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프랑스 안내인 한 명을 고용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사소한 불만 때문에 그만두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안내인 없이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구입한 몇 가지 지도와 책들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고 밤늦게까지 독서를 하여 습득한 정보들을 다음날 실질적으로 써먹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안내인을 안내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는 무덤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장기간에 걸친 로마의 지배를 증오했던 이 세계는 우선 이 경이로운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파괴시키고 깨뜨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 비록 엎드려 있고 죽어 있다 할지라도 훼손된 잔해들이 여전히 공포와 증오로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유적 자체를 파묻어 버렸다. 그렇게 많은 세월 동안 그 수많은 존속살인의 충격들과 끊임없는 공모가 로마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수는 없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보여 주는 약간의 근거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운명은 여전히 그 묘지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로마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만이 남아 있게 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 속에서, 심지어 현재 훼손된 채 남아 있는 신체의 일부가 존재했던 모든 것들 중에서 최소한의 가치만을 지닐지라도, 불멸의 영광에 대한 적들의 악의적인 포악성은 그들로 하여금 맨 먼저 제국 도시에서 가장 훌륭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파괴하도록 충동질했다. 현대인들이 고대 세계의 화려한 건축물들 위에 세우고 있거나 덧붙이고 있는 사이비 로마의 건물들은 비록 현세대의 감탄을 자아낼지도 몰라도, 그에게는 위그노들이 파괴시킨 프랑스 교회들의 지붕과 벽 위에 까마귀나 제비떼가 짓고 있는 둥지들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이 무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들을 고려해 볼 때 비록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실제 규모에 두려움을 느껴 무덤의 대부분을 묻어 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그에게는 이 거대한 퇴적물이 타일 조각들과 깨진 항아리들처럼 몇 년 전의 불행한 발굴들로 인해 생긴 것처럼 보였다. 산만한 높이와 크기의 수많은 퇴적물은 영광의 기이하고 놀라운 증거를 통해 그들이 적대시하여 공모했던 이 도시의 영광과 탁월함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던가를 세계로 하여금 철저히 이해시키는 특별한 신의 섭리로 보였다. 그는 일곱 언덕, 특히 가장 유명한 카피톨리누스와 팔라티누스 언덕의 제한적인 부분만을 보고서는 여기에 얼마나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던가를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단지 평화신전의 잔해들, 로마 포룸이 있던 장소, 이제 막 산산이 부서져 버린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유적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떻게 이러한 두 개의 대건축물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전체 공간을 차지하고 서 있을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덕에는 이것들 외에도 25-30게의 신전들과 수많은 민간인 가옥들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것에 가보면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 그 장소라 할지라도 무한한 변화과정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계곡들 중 몇개는 메워져 조시의 주요 하수구가 설정되었고, 수로를 형성했던 벨라브룸과 같이 깊었던 곳도 지금은 주위의 산만큼 높아졌다. 이것은 애처롭게도 고대 로마 유적들의 점차적인 집괴로 이루어졌다. 몬테 사벨로는 마르첼루스 극자의 퇴적된 잔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고대에 살았던 어떤 로마인이 다시 돌아왔다해도 그 장소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한참 아래로 파 내려간 후에야 저 아래의 기저부 위에 서 있는 어떤 높은 기둥의 꼭대기에 다다르는 일이 흔했다. 현대 건축가들은 그들이 짓는 주택의 기초가 바로 옛날 건물의 꼭대기이고, 보통 현대식 건물의 지하실층은 옛날 건물의 지붕들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하고, 고대 건축물 자체의 기초나 혹은 벽들의 안정성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아래에 있는 건축물의 파괴된 지붕 위에 자신의 건물을 기초했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들을 처분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리고 여기에 바위로 된 구조물과 같이 단단하고 안전한 현대 도시를 세웠다. 수많은 도로가 오래된 거리 위 9m를 메웠다. 미셸 드 몽테뉴 '미셸 드 몽테뉴 작품집', 1877년 몸서리치는 제안들 샤를 드 브로세가 쓴 '1739-1740년에 이탈리아에서 쓴 비공식 서한들'에서 우리는 그 당시 로마 유적지들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콜로세움과 안토니우스 목욕탕의 고고한 적막감 사이에 처음 섰을 때, 한때 명예로웠으나 이제는 버려진 고대 유적들의 장관을 보고 영혼이 떨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콜로세움 바깥벽의 회랑들은 지금도 청동막대들이 빠져 버린 석재 중앙의 구멍 속에 설치된 장대에 물건들을 펼쳐 놓고 있는 소상인들에게 보호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바깥벽의 반구만 남아 있는 아케이드와 기둥으로 된 기념비적인 네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닥층은 부분적으로 파묻혀 있습니다. 웅장한 코니스에 거대한 돌들이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살피는 이 없는 콜로세움은 자신의 무게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콜로세움에 필요한 것은 약간의 보수 작업뿐입니다. 내부에 있는 아래쪽 회랑들의 완전한 원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엄청나게 파손되어 매우 서글픈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거의 커다란 달걀 모양으로 보이는 경기장에서 우리는 고대 좌석의 줄들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좌석줄들은 9만명의 관객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로나에 있는 원형극장은 이 경기장의 1/3크기인데도 대략 3만명의 관객들을 수용할 수 있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주민들이 잘 보수했던 베로나 원형극장을 볼 때, 로마인들은 자신의 원형극장을, 특히 거대한 규모와 명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아직도 가장 훌륭한 부분들은 이렇게 무질서하게 내버려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벽만 남아 있는 베로나의 원형극장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나머지 절반을 그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경기장을 훌륭한 공공광장으로 바꾸기 위해 콜로세움을 반원형극장으로 만들고, 카엘리안산 쪽에있는 나머지 아치들은 해체시켜 버릴 계획입니다. 콜로세움 전체가 누더기옷을 걸치고 있는 것보다 반쪽이라도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친애하는 로마인들이여, 옛날의 해군력을 상기시켜 주는 거대한 분수나 호수를 광장 한가운데에 조성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콘스탄티누수 개선문은 이 광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개선문은 금세기에 성공적으로 보수되었습니다. 야만인들은 모든 조각상들의 머리를 떼어내 버렸고 새로 만들었습니다. 돋을새김 부조들은 상태가 좋아졌고 더불어 대리석 조각들도 제자리에 놓였습니다. 한마디로 이 개선문은 좋고 나쁜 모양새가 섞여 있지만, 오늘날 주요한 로마 유물들 중 하나이자, 보존이 가장 잘된 것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근처에 있는 작고 둥글며 초라한 낮은 마차 출입구를 볼 수 있습니까? 퀸투스여! 그 앞에서 납작 엎드리십시오. 그곳은 키케로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공화국의 지도자가 횃불 든 12명을 앞장 세우고 로마 군인 2,000명을 뒤따르게 하여 귀가할 때 지나갔던 그 자리가 지금은 단지 포도재배와 포도주 양조를 겸하고 있는 몇 사람들의 빈약한 안마당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한 사람을 겁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샤를 드 브로세 '1739-1740년에 이탈리아에서 쓴 비공식 서한들' 낭만적 로마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인 스탈 부인은 '코린'을 로마에서 썼다. 이곳에서 영웅 코린과 오스왈드는 유적들의 시적인 매력을 발견했다. 오스왈드는 코린이 안내한 높은 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싫증나지 않았다. 역사 연구는 결코 현장 자체의 모습 그대로 재연할 수 없다. 관찰력은 모든 영혼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그는 지금 그것들 사이에 살고 있는 것처럼 고대 로마인들을 신뢰하고 있다. 정신적 기억은 독서로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은 사고에 생명력을 주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감동으로 생겨날 수 있고 우리가 배우는 것들을 목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틀림없이 이러한 잔해 사이로 뚫고 들어온 근대식 주택들 때문에 짜증도 나지만, 몇몇 초라한 지붕 옆에 있는 주랑현관, 교회의 작은 창문들 사이에 드러나 있는 기둥들, 혹은 야인 집단의 거주지로 사용되는 무덤은 단순함과 위대함이 잘 조화되고 흥미로운 발견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유럽 도시의 모든 것들은 평범하고 지루하다. 그리고 로마는 다른 어떤 곳보다 빈번하게 불행과 지위격하의 서글픈 면을 보여 준다. 하지만 동시에 깨진 기둥이나 반쯤 지워진 돋을새김 부조, 혹은 영구 시멘트로 접착되어 있는 몇 개의 돌들은 가슴을 부채질하는 신의 광채인 영원한 힘이 인간에게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재조명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 좁은 구역 안에서 수많은 경이로운 사건들이 벌어졌던 포룸은 인간이 지닌 도덕적인 위대성의 뚜렷한 증거이다. 로마의 말기에 세계는 불명예스런 지배자에게 예속되어 있었고, 역사에서 단 하나의 업적도 찾아내기 힘든 수세기가 흘러갔다. 주민들이 변방의 침략자들에 맞서서 싸웠던 도시의 중심인 포룸은 회고를 통해 모든 시대 천재들의 주제가 되어왔다. 그래서 용감하고 자유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존경심은 후세대의 마음까지도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은 네빌에서 공화정의 흔적이나 그보다 앞선 왕정시대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로와 지하 운하들은 유일하게 남은 사치품들이다. 시칠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로마인들은 대리석 사용을 수용했다. 하지만 위대한 행위들이 이루어지던 장소를 조사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경건한 순례에 대한 열망으로 끝없는 감동을 경험하고 있다. 모든 이름있는 나라들은 위대한 사람들과 위대한 작품들을 빼앗길 때도 상상력을 발휘했다. 한때 눈을 매혹시켰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기억의 마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스탈 부인 '코린' 폐허의 미학 역사가인 장 자크 앙페르는 여행기와 역사적인 비판주의를 혼합했다. 그는 '언제나 비판주의는 약간의 편협한 측면이 있었다.'면서 '나는 이 비판주의가 전세계를 바라보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다. 16세기나 17세기에는 폐허에 대한 시적인 취향이나 반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감상주의와 더불어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출현했으며, 루소 이전의 프랑스 문학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감각과 마음의 세기가 감상주의에 이르게 했는데, 이는 사고와 쾌락의 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는 이미 폐허의 은총에 대하여 몇 가지 매력적인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시적인 매력을 발산했던 그는 새로운 세기를 위하여 이전 세기의 사상이 걸어 잠가 놓았던 종교와 상상력의 영역을 다시 열었던 사람이다. '기독교 사상'의 독자들 가운데는 유적에 대한 유창한 이론에 감탄하고 이제 제국 도시의 유적들 가운데서 위대한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었던 로마에 관해 불후의 명작을 쓴 작가가 있다. 그가 어떻게 로마 유적들이 불어넣었던 영감을 표현하는 경탄스런 단어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또한 사건과 인생에서 유적들의 진지한 언어를 배우지 않았던가? 그는 자기 시대와 자신의 천재성으로 로마 유적의 웅장한 특징과 감동을 느끼고 표현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는 응답 편지에서 이들에 대해 단지 몇 줄만을 할애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편지에서 농축된 정확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노트 소설가 에밀졸라는 1893년에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하루 종일 로마의 영광을 상기시켜 주는 유적들과 낯선 잔해 속에서 보냈다. 아침에 맨 먼저 포룸에 갔다. 우아함과 힘에 대한 근사한 인상을 주는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의 남아 있는 기둥들이 창공을 등지고 서 있었다. 율리아 바실리카는 흔적밖에 없었지만 깨끗이 치워 놓았고 규모가 작은 포룸은 콜로세움이나 카라칼라 바실리카 같은 유적들과 비교할 때마다 놀라움을 주었다. 로마의 생활은 어떤 때는 매우 작은 공간에 제한되어 있고 다른 때에는 상당한 지역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더 나아가서 베스타의 오래된 '수녀원'은 팔라티누스 언덕에서부터 내려오는 칼리굴라 궁전 유적의 지배를 받는 흥미로운 것이다. 거의 맞은편에 다른 종교 신전 안에 교회 하나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거대한 세개의 아치, 세 개의 소란반지와 궁륭천장이 있는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이다. 궁륭천장에서 떨어진 파편은 거대하다. 얼마나 큰가! 어째서 이 벽들을 이렇게 거대하고 두껍게 만들었을까?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를 통과하는 사크라 도로를 둘러보면 매우 흥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크라 도로가 구부러지면서 솟아오른다. 이렇게 거친 돌들 위에서 차대받이 장치가 없는 이륜마차를 탄 승리자들은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폐허속에 있는 현재의 포룸은 회색빛으로 황폐해 있다. 먼지, 잔디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사크라 도로의 포장석들 사이에 있는 약간의 잡초 덤불 숲은 뜨거운 여름 태양과 지금도 서 있는 몇 안되는 포카스 기념주와 신전기둥들이 드리운 좁은 그림자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뱃부리연단과 곳곳에 있는 신전들, 하지만 포룸을 재현해 낼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이 있다. 나는 단지 장면을 끌어내는 예술가일 따름이다. 다음에는 코로세움에 갔다. 거대한 크기, 푸른 하늘을 등지고 월계수들과 함께 서 있는 붕괴된 가장자리, 어디에나 펼쳐져 있는 궁륭천장 모양의 회랑들, 혹은 경사면처럼 꼭대기가 없는 계단들, 거상은 하늘을 등지고 있는 모든 통로들과 더불어 돌로 된 레이스 세공품과 같았다. 머리 위에는 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었고 작은 구름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태양과 황금과 위엄으로 구워진 이 유적은 폐허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거대해 보였다. 티투스 개선문에는 노예신분으로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촛대를 들고 되돌아오는 패배한 유대인들을 새긴 돋을 새김 부조가 있었다. 오후에는 카라칼라 목욕탕에 갔다. 이것은 알 수 없는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보존상태가 좋은 모장이크 지대가 깔려 있는 동시에 500명이 목욕할 수 있는 풀의 표지들이 있는 냉욕탕. 또한, 커다란 미온욕탕과 지금도 그 옆에서는 전체 구조를 볼 수 있는 난방용 보일러가 있는 온욕탕,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종류의 별채 건물들. 하지만 경이로운 것은 높은 방들, 두꺼운 벽돌, 엄청나게 많은 기념물들이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성들은 이렇게 퀴클로프식으로, 거대한 것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벽돌과 시멘트의 퇴적물들이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있고,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엄청난 사치, 무엇을 위한 거대한 문명이었던가? 이것의 주변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들처럼 보였다. 오늘날 우리는 거인의 집을 짓기 위해 쌓았던 원석들과 건축자재들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밀 졸라, '나의 여행 ; 루르드, 로마', 1955년 사진작가 파커 영국의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존 헨리 파커는 1863년에 로마로갔다. 고대 기념물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고고학 동호인 협회를 설립하고 많은 강연과 유람여행을 조직했다. 파커는 1866년경에 로마의 주요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사진 찍는 야심적인 계획을 추진했다. 1879년에 그는 작업의 결실인 대략 3,300여 점에 이르는 목록을 발간했다. 발굴의 역사 로마 최초의 고고학자들은 보물을 찾는 사람이었다. 고대 유물은 돈이나 사회적 위신이라는 이득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발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탐욕에 가득 차서 유물들을 축적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예술가이자 고대 유물 수집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조각가이자 금세공인으로 유명해졌다. 그 시대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고대 기념물들과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보물 찾기에 참여했다. 아마 내가 스물세살 쯤이었을 때, 로마에서는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매일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재앙이 두렵기도 하고, 또 앞으로 쓸 흥미거리를 찾으려고 축제일에 고대 건물로 가서 건물 일부를 밀랍이나 연필로 모사했었다. 그리고 수많은 비둘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총으로 새들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접촉을 피해 아들 파글리노의 어깨에 새총을 짊어지게 하고, 둘이서만 폐허가 된 건물에 가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가장 살찐 비둘기들을 푸대에 가득 담아서 집에 돌아왔다. 나는 내 총에 탄환 한 발 이상을 장전할 필요가 없었다. 무거운 푸대를 가득 채운 것은 순전히 이 방면에 대한 내 기술 덕분이었다. 나는 새총을 직접 만들었다. 새총의 내부와 외부는 거울처럼 빛이 났다. 나는 또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비밀스런 제조공정을 창조하여 성능이 뛰어난 화약을 만들었다. 어떤 각도에서도 멋진 사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감탄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탄환 1/5무게의 화약을 총에 가득 채우고서 직사거리로 200보를 날아간다. 이 유희가 예술이나 연구로부터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가 사냥을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건강이 매우 좋아진 것을 보면, 오히려 많은 것을 얻은 셈이다. 나는 천성이 감상적이다. 이런 취미에 몰두하고 있을때면 심장은 기쁨에 가득 차서 힘차게 뛰었고, 연구와 수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점에서 내 총은 내게 손실보다는 더 많은 이득을 주었다. 이 일을 통해 포도원에서 본격적으로 일할 계절이 오기까지 로마에 오곤 했던 롬바르드 농민들처럼 진기한 물건들을 찾아다니는 사냥꾼들과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땅을 파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빈번하게 고대 메달들, 마노, 옥수수, 홍옥수, 그리고 카메오등을 발견했다. 또한, 때때로 에메랄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루비같은 보석을 찾아내기도 했다. 농민들은 이것들을 상인들에게 싼 값에 팔아 넘기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몇 번이나 상인들이 물건값으로 준 줄리오만큼 많은 금화를 주었다. 이 거래에서 내가 얻은, 적어도 열 배는 되는 이익과는 무관하게, 나는 대부분의 추기경들과 유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진기한 물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고 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많은 파편들 가운데 둥근 콩 크기만한 돌고래 머리가 내 수중에 들어왔다. 이 머리의 양식은 대단히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훨씬 능가하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이 돌은 매우 훌륭한 색깔을 가진 에메랄드였기 때문에 내게 수십 냥의 금화를 지불하고 이것을 샀던 삶은 이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수백냥의 금화를 받고 되팔 수 있었다. 자연과 동급을 이루는 빼어나게 예술적인 토파즈는 미네르바의 머리 모양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개암 열매만한 것이었다. 또 다른 보석으로 목이 세 개인 케르베루스를 묶어 놓고있는 헤라클레스가 새겨진 카메오도 있었다. 너무 아름답고 세공기술이 정교해서 미켈 아뇰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본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많은 청동 메달들 가운데 나는 주피터의 머리가 새겨진 것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가장 완벽한 솜씨를 지닌 머리와 뒷면에 같은 기법으로 작은 숫자들이 훌륭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나는 이 진기한 물건들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늘어놓고 싶지만 자제하겠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인생', 1888년 발견, 또 발견 플라미미오 바카는 고대 유적에 열광적인 흥미를 가진 건축가였다. 그의 회상록은 발굴에 관한 기록에서 최초의 본보기가 되는데 때때로 일화를 진실보다 앞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발견들에 대한 귀중한 문헌이다. 나는 아버지 가브리엘 바카께서, 보물을 파내는 데 열심히던 발르의 추기경이 일꾼들에게 파내도록 한 마르코 아그리파 목욕탕에서 커다란 금박을 입힌 로마 제국의 왕관을 찾아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이 금관은 로마 거리에서 파는 짐블레테라 불리던 둥근 케이크를 닮았기 때문에 일꾼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기에 짐블레테가 있다."그리고 팁을 받을 요량으로 추기경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말했다. "저희들이 청동 짐블레테를 발견했습니다." 후에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여관 주인은 이 짐블레테를 하나의 신호로 간주했다. 이것이 이 왕관을 짐블레테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목욕탕들 위에 세운 것이다. 나는 벽을 세우려고하다가 물을 발견했다. 나는 금속봉으로 조사해 코린트식 주두를 찾아냈다. 이것은 바닥부터 꽃무늬까지 네 뼘 정도되었다. 이것은 로툰다의 주랑현관에 있는 것들과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 물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지하실을 지을 때 완전히 평평한 테라코타 관들로 덮여 있는 커다란 벽감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박난로로부터 열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밑에서 나는 고대인들이 밟고 다녔던 대리석 더미로 덮여 있는 바닥을 찾아냈다. 대리석 더미 밑에는 두꺼운 포장용 돌들이 있었고, 그 밑에는 이 돌들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기둥들이 있었다. 이것은 난로가 위치해 있던 두 기둥들 사이에 있었다. 또한 못과 그다지 크지 않은 네 개의 화강암 기둥으로 정밀하게 고정되어 있는 얇은 납판으로 가득 찬 큰 구멍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찾는 것을 그만두고 벽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교황 율리우스 3세 시절 장관 관저 근처 레우타리가 살고 있던 거리에서 지하실 밑에서 폼페이우스 상을 발견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15뼘 높이였다. 이 조각상을 가운데 두고 벽이 두 집을 갈라 놓고 있었다. 두 집 주인들은 서로 자기가 조각상의 주인이라고 우겼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조각상의 더 큰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은 조각상의 가장 중요한 머리가 자기 집에 있기 때문에 자기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그 사건은 법정으로 넘어갔다. 무식한 법관은 머리를 깨뜨려 각각 자기 몫으로 나누어 갖도록 명령했다. 가련한 폼페이우스여! 프톨레마이우스는 자신의 머리가 잘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자기의 대리석상에게까지도 불행이 따라다니게 했던 것이다. 카포디페로 추기경은 이 어리석은 결정을 듣자마자, 집행을 연기하게 하고 교황 율리우스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교황은 경악했다. 그는 즉시 그 조각상을 조심스럽게 파내라고 명령하고, 그 소유자들이 나눠 갖도록 500냥의 금화를 내려 보냈다. 일단 이 조각상을 옮기자 교황은 카포디페로 추기경에게도 같은 몫을 주었다. 이것은 분명히 교황의 결정이었지만 카포디페로가 실행한 것이었다. 이 조각상은 지금 폰테 시스토에 있는 그의 저택 방에 있다. 살라리아 대문 옆, 성벽들 내부에 있는 아버지의 포도원에는 '살루스트 정원들'이라고 불리는 땅이 있다. 땅을 파헤치자 주위가 온통 노란색 기둥들로된 주랑현관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달걀 모양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기둥들은 코린트식 기저부와 주두를 가진 18뼘 높이의 플루트를 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걀 모양의 건물에는 아름다운 구도로 배열된 바닥 면까지 내려가는 반점무늬의 대리석 계단들로 통하는 네 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출입구마다 투명한 동방의 설화석고로 된 두 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 건물 밑에는 길이가 10뼘, 지름이 각각 한 뼘이 넘는 두 개의 납관에는 'NERONIS CLAUDIVS'란 명문이 있고, 한 사람이 몸을 숙이지 안고 통과할 NT 있을 정도로 넓은 몇 개의 관들이 발견됐는데 전부 그리스 대리석 더미로 채워져 있었다. 다량의 모자이크뿐만 아니라 은과 다른 금속들로 만든 작은 경화만한 고르디우스 메달들도 발견했다. 몬테풀차노의 추기경은 성 베드로 예배당의 난간을 짓는 데 사용했다. 추기경은 또한 설화석고 기둥도 사들였다. 그는 온전하고 깨끗하게 닦은 것을 하나 가졌고, 깨진 것들은 테이블을 만들게 해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포루투갈 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이 선물들이 바다의 높은 파도 위에 떠 있을 때, 사나운 운명의 여신은 이것을 바다에 선물로 주고 말았다. 나는 셉티미우스 개선문 근처의 로마 포룸에서 지금은 파르네세 추기경의 안뜰에 있는, 커다란 받침돌이 뽑혀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받침돌은 문자와 이름들로 덮여 있었다. 고대 유물들을 살펴보기 위해 곧잘 나가 보곤 했던 몇 년 전, 나는 카포 디 포베에 있는 성 바스티아노 대문 밖에 서 있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작은 여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여관 주인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몇 달 전에 한 남자가 램프를 찾아 그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남자는 그날 저녁 세 친구와 함께 자리를 떴다. 하지만 친구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6개월 동안 저년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여관 주인은 그들이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그들이 여느 때처럼 저녁을 끝마치자 그는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래서 그들이 카라칼라 원형극장에 있는 굴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다음날 아침 여관 주인은 모든 사실을 당국자에게 알렸고 그들은 즉시 굴로 달려갔다. 굴 안을 살펴보던 그들은 불과 얼마전에 깨진 많은 도자기와 항아리 조각들이 들어 있었던 거대한 흙더미가 파헤쳐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흙을 긁어 파내는 데 사용되었던 철제도구들을 찾아냈다. 그 사건을 밝히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장소에 있었던 나는 그곳에 가 보았다. 나는 흙더미와 항아리 모양을 한 꽃병 파편을 보았다. 그리고 그자들은 고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으로 그 보물들을 찾아낸 야만인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플라마니오 바카 '회상록', 1704년 예외적인 사건들 피에트로 산티 바르톨리는 로마 건축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었다. 피라네시의 '로마의 고대 유적들'에 예고되었던, 생생한 재구성을 위한 많은 시도들과 트라야누스 기념주의 부조 그림들은 그가 진실로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라는 평판을 확고히 해주었다. 콜로세움 콜로세움 북쪽에서 어느 귀족 부인의 정원을 파 내려가다가, 어떤 특권을 가진 유흥장소였음을 알게 해주는 수많은 납관들과 대리석, 회화, 가구, 조각상들로 고상하게 장식되어 있는 다양한 지하방들을 찾아냈다. 성 그레고리우스 성 그레고리우스 맞은편에 있는 코르노발리아 정원에서 오랜 기간 동안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채색된 지하방, 주랑현관, 거대한 석회화 기둥, 조각상, 목욕실, 흉상, 그리고 희생의 증서들이 담겨 있는 작은 철제 상자와 기지 추기경에게 팔린 한 마리의 반암 사자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경탄스러웠던 것은 대략 12뼘 정도의 방이었는데, 방바닥은 약 한 뼘 정도의 벽 높이까지 올라와 있는 납으로 깔려 있었다. 이 납과 벽 사이가 벌어진 틈에서 수많은 금화를 발견했다. 우리는 이것이 로마 제국의 보물창고이거나 아니면 지위가 높은 사람의 재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클레멘트 10세 때에 같은 장소를 다시 파기 시작하여 여러 조각상들과 몇 개의 빼어난 흉상들과 메디치의 추기경이 구입한 에로스와 프시케, 반점무늬가 있는 대리석 조각상들, 성 베드로의 그릇을 나타내는 매우 훌륭한 금속제 램프는 말할 것도 없고, 우수한 고대 유물들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발견했다. 이 지점 반대편에서도, 그들은 보물찾기를 시도했으나, 단지 많은 동전들만을 발견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동전들의 가치는 고철 무게밖에 안 되었다. 나중에 이노센트 10세 때에 콜로세움까지 가는 소로에 이르는 더 낮은 문 높이까지 다시 파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곳에 많은 구리들과 구리작업을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들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구리그릇 제조인들이 사용했음직한 가게들을 발견했다. 이 때문만이 아니라 이웃에 있는 귀족들을 배려하여 발굴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발굴은 클레멘스 10세 때 재개되었고, 몇 개의 훌륭한 소금창고들, 주량현관이 있는 안뜰, 성벽 밖 성 로렌초 교회의 영안실 예배당에 재사용된 각력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기둥들, 조각상들을 포함한 많은 대리석 두상들, 셀 수 없이 많은 흉상들이 도금하여 은으로 새긴 개선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금속조각을 발견했다. 금속조각들, 카스트라 페레그리낙이라고 불리던 건물의 일부가 거기서 발견되었다. 이것들 중 약간은 틀림없이 개선문 건설에 쓰였을 것이고, 많은 부분이 은으로 도금되고 장식되어 있었다. 안토니아나(카라칼라 목욕탕) 파르네세 헤라클레스의 발견은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몸은 안토니아나에서, 머리는 깨끗이 치운 트라테베레에 있는 우물 밑바닥에서, 다리는 마리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발굴이 진행중이던 프라토키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 이 다리들은 보르게제 별장의 지하실에 있는 다른 고대 유물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교황 바오로 3세 때 그의 손자인 파르네세 추기경의 명령에 따라 안토니아에서 발굴된 수많은 작은 작품들, 소규모 금속 조각상들, 메달들, 기름 램프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을 포함해서 많은 조각상들과 기둥들, 얕은 돋을새김들, 여러 가지 반점무늬 대리석들의 모습이 드러난 궁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것처럼 멋진 장소로 변했다. 왜냐하면 이 궁전만이 유일하게 플로라, 검투사, 거대한 크기의 뛰어난 구도를 갖춘 황소를 포함한 다른 조각상들, 혹은 마치 창고처럼 지금도 여전히 지하실에 있는 두 개의 큰 방에 쌓여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두상, 흉상, 돋을새김 부조들뿐만 아니라 두 개의 헤라클레스와 같이 빼어난 양식을 가진 거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황소가 서 있던 안마당 바깥쪽에서 발견된 돋을 새김 부조를 빼고는 피에트라 광장에서 발견된 안토니아나에서 나온 것들이다. 오늘날에도 피에트라 광장에서는 안토니우스 바실리카라고 부리던 11개의 거대한 코린트식 주랑현관 기둥을 볼 수 있다. 거기서 발견된 대리석 일부분은, 수로관이 나보나 광장 분수까지 연결되고 있던 이노센트 10세 때 발견되었다. 다른 것들은 로툰다의 고물상이 사용하고 있던 그 장소를 좀더 위엄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 한 교회를 해체하는 동안에 발견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전망을 터서 이 당당한 신전에 좀더 고귀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철거하기를 바랐다. 신전의 주랑현관까지 밀어닥쳤던 몇 채의 집들이 철거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랑현관의 벽들 안에서 두 개의 기둥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던 신들을 묘사하고 있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에 속한 조각상들과 비슷한 조각상들을 찾아냈다. 이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그의 손자인 추기경 관저에 있는 계단에 놓였다. 이노센트 시대에 발견된 것들은 성 판크란치오 대문 밖에 있던 그의 별장관저 정면에 고정되었다. 다른 것들은 카피톨리누스에 놓였다. 피에트로 산티 바르톨리 '로마와 주변지역에서 행해진 여러 발굴 작업들에 대한 회상' 로마의 프랑스인 외교관인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로마에 있는 프랑스 행정부가 초래했던 결과들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프랑스인들은 집정관 체제하에서 최초로 로마를 침공했을 때 악명 높은 약탈을 저질렀다. 제국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 침공은 매우 사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성공하자 질서가 잡혔다. 프랑스 공화국은 로마에서 평화협정 조건으로 2,200만 프랑, 안코나 요새의 접수, 프랑스의 대리인이 뽑은 100점의 회화와 초상, 100점의 필사본을 요구했다. 특히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흉상을 원했다. 당시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스스로를 브루투스라 부르고 있었고, 그들의 선조로 추정되는 경건한 조각상을 갖고 싶어한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그는 누구의 선조인가? 아틸라는 로마를 떠나는 조건으로 단지 몇백 파운드의 후추와 비단만을 요구했다. 우리 시대에 로마는 잠시 동안 회화들과 함께 자유를 되찾았다. 종종 무시당했거나 불행했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들을 무시했던 은혜를 모르는 도시를 위해 전리품으로 진상하기 위한 걸작을 남겼다. 제국시대의 프랑스인들은 공화국시대 프랑스인들이 로마에서 저질렀던 파괴행위들을 복구해야 했다. 그들은 또한 프랑스 군주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면서 저지른 죄악을 부끄러워했다. 포룸 발굴을 위해 프랑스 행정부가 채택했던 안은 라파엘로가 레오 10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즉 콘코르드 신전의 기둥 세 개를 지면 위로 돌출시켜 사크라 포장도로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고, 평화신전을 가로막고 있는 신건물들을 철거했다. 또한 콜로세움 계단을 덮고 있던 흙을 치우고 경기장 내부를 청소하여, 티투스 목욕탕 일고여덟개의 방을 볼 수 있게 했다. 또한, 트라야누스 포룸을 발굴하고, 판테온,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 고상한 귀족의 신전을 수리했다. 로마 밖에 있는 팔레리 성벽과 카에칠리아 메텔라 무덤의 보존을 위해 기금도 모았다. 근대 건축물들에 대한 보수작업도 이루어졌다. 이제는 없어졌지만 벽이 없는 성 베드로 성당의 지붕을 수리하게 했다. 성 아그네스와 산 마리노 아이 몬티 성당은 거친 비바람에서 보호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지붕 일부와 포장도로도 고쳤다. 미카엘 안젤로 성당의 돔을 벼락에서 보호하기 위해 피뢰침도 설치했다. 도시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묘지를 유적지로 지정했고, 성 로렌초 수도원 근처에 있는 오른쪽 것은 완성시켰다. 퀼리날리스 언덕은 풍부한 반암과 로마 대리석 속에서 외면의 빈곤함을 드러내고 있다. 본래 제국의 궁전을 세우기 위해 설계되었으나 보나파르트는 그곳에 주거를 정하기 저에 퐁텐블루에서 포로로 잡은 교황의 납치 흔적들을 없애 버리려 했다. 이것은 이 승리자가 넓은 대로를 통과해서 자신의 황궁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몬테 카발로 사이에 놓여 있는 도시의 일부를 파괴하도록 한 것이었다. 엄청난 현존물들이 파괴됨에 따라 거대한 꿈들은 사라졌다. 결정된 계획들 중에는 리페타에서부터 리파 그란데에 이르는 부두건설 계획도 있었다. 이 부두의 기초들은 놓였을지도 모른다. 성 안젤로성과 루스티쿠치 광장 사이에 있는 네 구역의 집들이 부분적으로 매입되었고 철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넓은 도로가 성 안젤로성의 아래 부분부터 보였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인은 어디든지 다녔다. 거대한 광장은 카이로에서 나는 종려나무와 파라의 카페에서 따온 이름의 카페들로 둘러싸였다. 로마에서 나는 동향친구와 핀치오를 열었다. 사람들은 한 줄로 연속되어 있는 계단을 통해 이곳에 갈 수 있다. 포폴로 광장의 서쪽 부분에는 작업장과 상점들이 들어찼다. 개활지 끝에서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테베레강 너머에 있는 바티칸과 성 베드로 성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자작의 회고록' 로마의 독일인 장편 '중세 로마사'의 저자인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이탈리아 통일 직전에 로마로 이사했다. 1871년 6월 18일 로마는 흰색으로 칠한 묘지로 변했다. 이제 주택과, 고대에 공경의 대상이던 궁전들은 흰색을 뒤집어 썼다. 수세기 동안 슨 녹을 깨끗이 제거하고, 지금 우리는 처음으로 로마가 얼마나 건축학적으로 볼품없는가를 보고 있다. 로사 집정관은 콜로세움도 밀어 버렸다. 영국인 디아킨이 몇 년 전에 책으로 쓰기도 했던 콜로세움의 플로라는 이렇게 파괴되었다. 신성한 도시에서 세속도시로 달라지는 것은 이교도 로마가 열렬히 신성한 도시로 바뀌어 가던 때의 역전이었다. 수도원들은 사무실로 바뀌고 있다. 굳게 빗장이 걸려 있던 문들은 부서졌다. 수세기가 흐른 뒤에 수도사와 수녀들의 밀실에 햇빛과 공기가 다시 뚫고 들어갔다. 그래서 짧은 기간 안에 성 실베스테르 성당, 빌립보 수도원, 미네르바 신전,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곳에 살고 있던 수도사들은 오소리처럼 추적을 받았다. 그들이 유령처럼 방, 복도, 회랑 사이를 몰래 다니는 모습은 동정심을 자아냈다. 몇몇 사람들은 틀림없이 조만간 금제에서 벗어나리라는 기대로 기뻐했을 것이다. 고대 로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20년 후에 이 세계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 1873년 1월 12일 건물들이 맹렬한 속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몬티 지구는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어제는 네그로니 별장의 높은 담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도로까지 깔리고 있었다. 이미 프라에토리안 캄프에 도시의 새로운 지구들이 조성되고 있었고, 콰트로 코로나티 옆에 있는 코엘리안의 경사면에서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파네페르나에 있는 성 로렌초 성당 옆에도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거의 매시간 고대 로마의 일부분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고대 도시에 속해 있는 반면에 새로운 로마는 새로운 세대의 것이었다. 만일 내가 지금 로마에 처음 왔다면, 나는 이러한 작업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거나 품어 볼 수도 없을 것이다. 1874년 4월 2일 수도원들은 이제 거의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 수도사들이 건물을 떠나는 바로 전날 저녁에 성 오노프리오 성당에 갔다. 회랑에 들어섰을 때 수도사들 가운데 몇 명의 돌로 된 분수 주위에 말없이 슬프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야니쿨룸 위에 걸려 있는 천둥구름이 수도원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로마 국립박물관은 루치아니에 있는 성 로렌초 성당에 건립되었다. 다른 수도원들의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국립 문서보관소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성 마리아의 그리스식 바실리카로 옮겨 간다고 한다. 빔콜리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옆 언덕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학교를 지켰고, 결과적으로 그들 주거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복합기술연구소는 그 거처를 바로 성 베드로 수도원에 못 박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안과 미네르바 신전에서 수도사들은 도서관 사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수년 동안 그렇게 편안하고, 항상 한결같은 호의로 환영받았던 이 도서관들 어느 것도 나는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내 이름이 금서목록에 있기 때문에 나는 옛날의 좋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부당한 생각들, 내가 지울 수 없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콜로세움의 발굴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거대한 지하터널이 빛을 보았다. 중요한 조각상들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 발굴작업을 위해 스타티온의 모든 예배당과 중앙에 있던 십자가도 철거되었다. 이런 행위는 경건한 모든 사람들과 바티칸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비카르 추기경은 로사 집정관에게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날마다 콜로세움으로 기도를 드리러 가는 구불구불한 군중의 행렬이 길에 흘러 넘쳤다. 그리고 발굴작업은 쉴새없이 계속되고 있다.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 '로마 저널' 기독교의 고고학 카타콤이 발굴되어 초기 기독교인들의 장례의식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알려졌다. 교황청 당국자들의 실질적 지원이 늘어남에 따라 지하 로마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39년과 1949년 사이에 걸쳐 피우스 12세는 바실리카 밑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자세히 탐색하게 했다. 이 발굴로 고대 묘지와 로마 도로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카타콤을 둘러보다 고전학자인 샤를 드 브로세에 따르면 18세기에는 카타콤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몇 개의 무덤만이 알려졌고, 무덤들을 방문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들은 산적들의 은신처였다. 나는 여러분들을 카타콤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안내하려고 한다. 이것은 로마의 카타콤들을 찾아보는 어려움을 덜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덤들은 한 번 이상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성 아그네스의 카타콤을 둘러볼 정도로 어리석었다. 그렇지만 내가 겪은 많은 시행착오들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돌산을 깊이 파 내려간 긴 지하회랑 양 옆에는 돌이 마치 도서관처럼 벽감들로 분할되어 있다. 시체를 불태우는 관습이 폐지되었든가 아니면 이 관습이 도입되기 전이었든 간에, 이것이 다른 용도가 아닌 묘지로 사용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는 로마 카타콤들의 관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벽감에는 한 구 또는 두 구 이상의 시체들이 놓였고, 그후에는 감염을 막기 위해 밀봉되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속에서 살기 위해서라거나 박해를 피해 신성한 비밀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무덤들을 팠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짓이다. 그야말로 공기도 빛도 없는 상태에서 이 터널들은 얼마나 훌륭한 거처들을 만들어 냈던가! 이 넓고 높은 회랑 전체와 적어도 15km나 덮고 있는 미로와 같은 터널을 완성하는 일은 정말로 멋진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나폴리에는 로마보다 더 훌륭하고 더 얕은 자신들의 카타콤과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없었다. 나는 간혹 누군가가 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생활할 수 있는 집이 될 수는 없었다. 나폴리 카타콤 쪽 출입구에 있는 매우 큰 방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벽들에 칠해 있는 그림들의 잔존물은, 그곳에서 살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는 죽은 성인들을 위한 어떤 경건한 예배의식이 거행되었다는 명백한 징표들이다. 이것이 이 주제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만일 더 자세히 알고 미송과 뷔르네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들은 많은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샤를 드 브로세 '이탈리아 감동들' 성 칼리스투스의 묘지 조반니 바티스타 드 로시는 1849년에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을 발견했고 기독교 고고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이 '지하 기독교 로마'는 학술적인 연구일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서 그가 겪은 모험들을 흥미진진하게 기록한 것이다. 성 칼리스투스의 지하예배당 나는 1849년에 지금은 신성한 사도관저의 재산인 몰리나리 포도원에서 글자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대리석판 파편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성 코르넬리우스의 이름 일부가 새겨져 있었다.-RNELIVS MARTYR. 이 파편은 성 코르넬리우스 묘지 위에 놓였던 비석에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마르키 신부에게 보여 주자 그는 키르체리아눔 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요구했다. 4년 뒤인 1852년 3월 어느 날, 나는 마르키 신부와 함께 북쪽 도로 끝으로 걸어갔는데 부분적으로 흙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둥근 천장 밑을 지날 때는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끝에서 우리는 탄산석회 속에 최근에 판 구멍을 발견했다. 구멍 속에 머리를 들이밀어 보니 도굴꾼들이 쌓아놓은 흙더미가 아니라 위에서 안으로 떨어진 돌멩이들로 가득 차 있는 방이 보였다. 도적들이 관습에 따라 더 넓은 구멍을 파지 않고 이 방과 접해서 은거해 있었던 것이다. 독자들은 이미 이것이 얼마나 좋은 징조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근 연구는 우리가 본래 있던 무덤을 변형시켜 버린 건물의 입구, 계단 혹은 잔해로부터 아래로 떨어진 잡석 밑에 묻혀 있는 이러한 장소들을 정확하게 찾아낸다는 점에서 좀더 오래된 방법들과는 차이가 있다. 반면에 도둑들은 이런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면 은신처로 삼고 탄산석회와 고대 도굴꾼들이 판 흙더미 속에 만들어진 동굴 방향을 따라갔다. 이번 사건은 이 바람직한 실마리에 들어맞았다. 최초로 나타난 것은 좋은 벽돌을 가지고 세운 아치였는데 초기 지하 예배당의 형성과 복원에 관한 확실한 징표였다. 그 다음에 우리는 아치 밑에 있는 그림들을 발견했다. 비잔틴 양식으로 그린 두 성인 그림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하예배당이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첫 번째 그림 옆에는 'SCI CORNELI PP', 두 번째 그림 옆에는 ', IPPI......N.....'이라고 새긴 명문이 있었다. 성 코르넬리우스와 관련된 성 키프리아누스 숭배에 관해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곧바로 두 번째 이름을 완성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CIPRIANI, 따라서 이곳은 성 식스투스와 성 체칠리아 묘지에서 멀리 떨어진, 칼리스투스 무덤 지하예배당에 있는 코르넬리우스와 키프리아누스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지학 저자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줬던 성 코르넬리우스의 무덤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의심하겠는가? 나는 그림들을 보자마자 벅찬 기쁨에 압도되었고, 그림 다음에 있는 무덤이 진짜로 내가 상상했던 그것인지 자문하지도 않았다. 무덤의 다른쪽 면에서 우리는 성직자복을 걸치고 있는 다른 두 성인들의 초상을 발견했다. 첫 번째 성인의 이름 SCS XYSTVS PP ROM은 완전했고, 두 번째 성인의 이름은 닳아서 없어져 버렸다. 이런 그림들 측면을 접하고 있는 무덤은 열려 있었고, 돌이나 한때 돌을 덮고 있었던 명문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몇 개의 다마스커스 문자들이 무덤 입구 위쪽에 있는 오른쪽 모퉁이에 붙어 있던 대리석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석관 앞에 있는 긴 명문의 작은 파편도 있었다. 이것은 형태와 규모면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었고 대부분 다마스커스 필법으로 되어 있었다. 파편에는 적합한 이름을 추정할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어구도 없었다. 무덤에 남아 있던 명문에서 빠졌던 것이 바로 그 무덤 내부에서 찾아낸 세 번째 파편에서 발견되었다. 이 파편을 4년 전 포도원에서 발견한 파편 다음에 놓자 이것은 딱 들어맞았고 전체 명문을 알 수 있게 되었다.-CORNELIVS MARTYR EPiscopus..... 서로 다른 시기에 발견된 두 개의 파편과 그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대리석 장식판의 윗부분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는 세 번째 파편을 함께 되돌려 놓자 유명하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제목이 무덤 꼭대기를 정확하게 덮었다. 장식판의 두께는 결론적으로 무덤의 뚜껑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고 판명해 준다. 무덤의 왼쪽 구석에서 우리는 이 대리석의 정확한 두께의 표시를 백악 속에서 볼 수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드 로시 '지하 기독교 로마' 기독교 고고학에 대한 결론 아직 젊지만 기독교 고고학은 이미 제법 인상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국립 학문과 과학 연구 센터'에서 일하는 학자인 필립 페르골라는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을 연구하는'과학의 방법과 대상의 진보를 기술하고 있다. 기독교 고고학은 20세기에 얼마나 달라졌는가? 오늘날 기독교 고고학은 더 이상 안토니오 보시오나 조반니 바티스나 드 로시의 것과 같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계승자가 되었고, 이 출생 배경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기독교 고고학의 세계는 고고학 전체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접근방법을 달리하는 학자들을 함께 묶어 놓는다. 예술사가들, 금석문학자들, 문헌자료 전문가들, 그리고 '전통적'방법에 의거하거나 가장 최근의 기법들을 취하는 발굴자들까지. 전통적으로 기독교 고고학은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부터 비롯되는 기독교 기념물들, 특히 교회, 세례당, 수도원, 그리고 묘지들과 관련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영역은 경제와 정치를 포함해서 사회 전체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기독교 고고학이라기보다는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전에 이 학문은 기념비적 징표를 7세기의 시작부터 고려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나중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9세기까지는 바로 간다.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서구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나름대로 기독교 고고학의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다. 매우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모든 활동은 로마와 로마의 전통적인 제도들과 관련을 갖고 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래 로마 카타콤의 발굴과 행정을 감독해 왔던 '기독교 고고학을 위한 교황 위원회'와 1925년 설립되어 전세계로부터 자신들의 특수분야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3년 동안 이곳에 오는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교황 기독교 고고학 연구소'가 그렇다. 지난 30년 동안에 있었던 큰 발견과 중요한 논쟁들 이것을 열거하기란 불가능하다. 많은 기념물들이 발굴되어왔고 이런 발견은 종종 확고하게 굳어진 믿음에 의문을 던지게 했다. 로마와 카타콤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몇 개의 이론들은 특히 학술적 연구와 문제들의 혁신으로 뒤집혔다. 로마에서 가장 장관이었던 발견은, 특히 통상적이지 않은 그림들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던 라티나 도로에 있는 카타콤의 발견이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타콤에서 알려진 수백 개의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볼 때, 사적인 복합 건축물의 주인들은 매우 특이한 성경적인 이미지들뿐만 아니라 완전히 이교도적인 장면들도 그리게 했었다. 대략 330년과 380년 사이로 추정되는 이 복합 건축물은, 고고학자들과 후기 고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추측과는 딴판으로,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 사이에 죽음에 직면할 때와 사후문제에 이르기까지 명백한 관용과 긴밀한 결합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카타콤에 관해서도 최근 연구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밝혀 내고 있다. 본래 카타콤이 특별하게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모든 종교적 귀속과는 무관하게 초기에는 같이 모여 있었으며, 지하 터널 내부에 매장하는 유형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마지막으로 최근 30년 동안 기독교 고고학은 가장 최근 세대의 연구자들이 행한 층위학적 발굴의 도움으로 활동의 수와 영역을 넓혀 왔다. '훌륭한' 발굴들은 때때로 수많은 기념물들의 연대기를 개정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에 대한 다른 이미지들을 제공해 주었다. 피에 굶주린 야만인의 침략으로 촉진된 단절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모든 영역에 걸친 진보적 변화들과 함께 중세시대를 향한 긴 이행 과정을 입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롬바르드 족은 30년 전에 명예를 회복했다. 반달족 또한 지금 명예가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아프리카 도착은 전통적인 경제순환에서 어떤 단절도 초래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가거나 어느 지방에 정착함으로써 일어난 파괴는 이제 단지 명백히 최근 몇 년간의 모든 고고학적 발굴들과는 모순되는, 낡은 이론의 향수에 젖은 저작들 속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