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 고귀한 야만인 지은이: 프랑수와즈 카생 출판사: (주)시공사 봉사자: 김윤봉 아득한 옛날부터,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는 오직 모방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을 뿐 이었다. 장래의 호가는 부모 대에서 자식 대로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수업했다. 그 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전색제와 테레빈유의 악취를 맡고 때로는 포즈도 취하고 때로는 조수 노릇도 하면서 자랐다. 도제살이는 집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화가의 첫 작업실은 자기 집 지 붕 밑이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반대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점차로 나타난다. 화가가 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반역행위였으며, 도피는 참된 나를 탐구하는 대단 히 개인적인 탐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 세잔과 마네가 그러했고, 고갱 역시 그러했 다. 제 1장 화가의 길 역사라든가 사회학, 혹은 정신분석학-사실은 이 가운데 어느것도-을 이 신비스러운 과정 을 푸는 열쇠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 수 없으리라. 같은 부모, 같은 사건도 동일한 개성을 낳지는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럴 필요까지 는 없을 것 같다. 폴 고갱의 집안과 그의 유년시절은 퍽이나 특이했던 것이다. "나의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은 여장부였다." 프루동은 할머니에게는 천재기질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말의 진위를 증명할 길은 없지만, 나는 프루동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련다. 그녀는 온갖 사회활동에 가담했으며 노동조 합을 설립했다. 하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이 대단히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데 스보르데 발모르부인과 절친했다. 또 한 가지 내가 아는 사실은 할머니가 노동자의 대의를 구현하기 위해 전재산을 탕진했고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다는 것이다. 때때로 그분은 당신의 삼촌(아라곤 가문의)돈 피오 데 트리스탄이 모르코소를 보러 페루까지 갔다. 그분의 딸-그러니까 우리 어머니-은 공화주의자가 주축을 이루었던 바스칸 기숙학교에 서 자라다시피 했다. 아버지 클로비 고갱이 어머니를 알게 된 것도 그 학교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티에르와 아르망 마라가 펴내던 '르나시오날'의 정치 담당 기자로 있었다. 1848년의 사건(1848년 2월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으나 대통령 루이보 나파르트는 1852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복고한다:역주)을 접하고서 (나는 1852년 6월 7 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185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아 무튼 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신문사를 차리겠다며 리마로 이주하기를 고집하셨다. 젊은 부부는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불운하게도 악랄한 선장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는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으셨다. 마젤란 해협의 포르트파민 상륙을 코앞에 두고 아버지는 보트 안에서 쓰러지셨다. 사인은 동맥류 파열이었다. 1903년 고갱이 죽던 해에 쓴 이 흥미로운 가족사는 자신의 증조부를 아라곤가의 혈통에 허구적으로 연결시킨 점만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다. 고갱은 자신의 외조부 앙드레 샤잘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도 있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그 집안의 남자들이 운명적으로 폭력과 가까웠으며 여자들은 이국적인 미모를 지녔다는 사실이 다. 이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렇게 하여 고갱은 1849년에서 1854년 가을까지 생애의 첫 다섯해를 페루에서 보냈다.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나는 그 시절의 일을 기억한다. 우리 집, 그 많은 사건들, 총독의 기념비, 교회, 그 교회는 나중에 나무로 된 돔이 추가되었다. 나는 지금도 어린 흑인 소녀가 조그만 깔개를 들고 평소와 다름없이 교회로 가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 깔개 위에서 기도를 했다. 또 다림질을 기가 막히게 잘하던 중국인 하 인도 기억난다. 당밀 통 사이에 앉아서 신나게 사탕수수를 빨아먹고 있던 나를 발견한 것도 그 하인이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집안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나를 찾고 계셨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도망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내 나이 열아홉살 때 오를레앙에 살던 무렵에는 막대기 끝에 모래를 가득 담은 보자기를 묶고 어깨에 멘채 봉디 숲으로 훌쩍 내뺀 적도 있다. 보따 리를 매단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가는 나그네, 그런 모습의 그림만 상상해도 피가 끓었다. 그림을 조심하시라!" 선원과 주식거래인 시절 1861년 알린은 팔로 가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갔다. 아들도 동행하여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방랑벽이 도졌다.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1865년 12월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상선대 견습 도선사(사관후보생)로 입대했다. 1871년 까지 그는 남미, 지중해, 얼어붙은 북극해를 거침없이 휘젓고 다녔다.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은 것은 인도에서였다. 어머니는 유언장에서 이렇게 권했다. "주위 사람들의 거부감이 심 해 언젠가 너는 고립되고 말것이니, 아무쪼록 네가 하는 일에 정진해 주기 바란다." 그는 고립당하지 않았다. 1872년 파리로 돌아온 이 왜소하고 (등록명부에 기재된 그의 신 장은 160센티미터였다.), 땅딸막하고, 예민한 청년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를 아는 어머니의 친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금융업자이며 사진작가이자, 현대화를 수집하던 구스타브 아로자였다. 아로자는 고갱에게 주식거래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뱃사람이던 고갱은 이제 파리 증권 거래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아로자 일가와 알고 지내던 메테 가트라는 젊은 덴 마크 여성에게 청혼하여, 가정을 꾸미게 되었다. 1874년에 에밀이 태어났고, 1877년에는 알 린이, 1879년에는 클로비, 1881년에 장 르네가, 그리고 1883년에는 폴이 태어났다. 고갱은 아 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갈수록 화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자신의 법적 후견인이었던 아로자처럼 고갱도 그림-특히 인상파 그림-을 수집하면서 조금 씩 붓을 잡기 시작했다. 주식거래인과 화가 젊은 주식거래인이요, 한때는 배를 탔던 사람이 왜,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우리 는 이 핵심적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처음 으로 풍경화를 그린 것이 1873에서 1874년이며, 그중 한 점이 1876년 살롱전(프랑스 정부의 후원으로 매년 열렸던 공식 미술대전:역주)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 인상주의의 대부인 카미유 피사로가 이 젊은 아마추어 화가의 재능과 열정을 재빨리 간파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피사로는 고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1874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이지만,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878년 이후부터였다. 수집가 고갱은 점차 본격적인 화가로 대접받기 시작했으며, 1879년 상 반기에는 이미 인상파 초대전에 출품의뢰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여름을 북프랑스 퐁투아 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보냈다. 과수원과 시골 풍경을 그린 고갱의 그림에는 스승의 체취가 물씬 베어있다. 1885년까지 그가 그린 풍경화는 모두 스승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심술노인 드가와 야만인 고갱 고갱의 내면풍경은 그가 또 한 사람의 화가 에드가 드가를 숭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피사로의 소개로 드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드가는 그 후 고갱의 가장 든든한 후원 자 역할을 한다. 1881년 초 드가는 인상파 미술거래상 뒤랑뤼엘에게 고갱의 작품을 사들이 도록 설득했을 뿐 아니라, 자기도 구입했다. 성미가 고약하고 불손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받던 고갱과, 친구들이 '불평꾼 드가와 잔소리꾼 에드가'라고 꼬집을 정도로 악명 높 은 독설가 드가 사이에 존경과 우정이 싹텄다. 고갱에 대한 드가의 헌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드가는 고갱이 타히티에 체류할 때 도 변함없이 그의 그림을 샀다. 고갱은 바다 저편의 화가에게 글과 그림을 통해 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선하고 똑똑하다네." 고갱은 타히티에서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몸가짐으로 보거나 재능으 로 보거나 드가는 예술가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보기드문 귀감이지... 그가 저열하거나 무식 하거나 야비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네. 예술과 품 위." 무관심에서 벗어나 최초로 평단의 주목을 끈 고갱의 유화는 '바느질하는 수잔'이었다. 이 작품은 드가의 누드화 기법을 연상시킨다. 중심에서 이탈된 구도를 지닌 '파리 화가의 가정, 카르셀 거리'에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드가를 떠올리게 된다. 고갱의 집 내부를 그린 이 작품은 정면에 커다란 꽃병이 놓이고, 화 가는 칸막이에 가려 부분적으로만 보이며, 그의 아내는 피아노뒤로 슬쩍 엿보인다. 고갱의 초기 나무조각인 '가수'에서는 드가가 그린 카페 여가수 그림의 영향력이 확연히 느껴진다. 예술가로서의 안정된 지위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한다. 실직한 고갱은 전업화가 로 나설 생각을 비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고갱을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는 책임감 을 느끼던 피사로와 친구들은 모두 기절초풍했다. "그는 그림에 모든 것을 걸기 위하여 파 리를 떠납니다." 그해 11월 피사로는 외젠 무레에게 이렇게 썼다. "분발을 거듭하면 예술가 로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습니다...잘해 나가리라 믿습니 다!" 그러나 아들 루시앵에게는 그의 본심을 드러냈다. "(고갱은)예상외로 고지식하구나." 가엾은 메테는 임신중이었다. 1883년 11월 고갱은 아내와 다섯아이를 데리고 '생활비가 싸게 먹히는' 루엥으로 옮겼다. 두해에 걸친 쓰라린 생활고는 모험과 고독말고는 달리 대 안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고갱을 내몰았다. 한때 어울려 지냈던 에밀 슈페네커와 피사로에게 보낸 당시의 편지를 보면, 고갱이 주식 거래소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화가로서도 빠른 성공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운 과 천재성에 대한 자신감은 고갱의 생애에서 일관된 상수의 하나인데, 크게 보면 결과적으 로 그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뒤로 얼마나 많은 번민의 나날 을 보내야 했던가! 한마디로 고갱이 루앵으로 떠난 것은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루엥에서 다 시 코펜하겐으로 떠나 메테와 합류했을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녀는 여섯달 만에 아이들 과 루엥을 등졌다.)코펜하겐에서 처갓집 식구들에게 내몰리다시피 하여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후로는 가족과 다시는 못 만나게 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고갱은 그런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다. 젊은 주식거래인이 사 모았던 인상파 호가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하나 둘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잔만은 예외였다. 고갱은 아내에게 극도로 쪼들리지 않는 한 그것만은 남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림이 발목을 잡는다!" 고갱이 루앵으로 떠났다가 코펜하겐(여기서 그는 캔버스 제조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을 거쳐 파리로 돌아온 1883년에서 1885년 6월까지는 고뇌와 자신감이 엇갈린 시기였다. 최 초의 자화상은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갱이 이 시기에 쓴 편지는 자신의 그림보다 더욱 대담하고 흥미롭지만, 당시 그가 그린 풍경화와 아이의 초상화에는 이미 주목할 만한 특성이 나타난다. 가령, 꿈을 표현한 배경을 뒤로하고 커다란 나무잔 앞에서 잠을 자는 아이를 그린 '잠자는 아이'는 다정다감하지는 않으나 깊은 애정이 베어있다. 고갱의 코펜하겐 체류기는 금전적, 가정적, 예술적으로 최악이었다. "아, 피사로 선생님." 그는 편지에다 썼다.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슈페네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이러다 내가 미치고 말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드는군. 하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자꾸자꾸 곱씹어 볼수록,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네." "저 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그는 1885년 5월 피사로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다락방 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매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충격적 발언은 고갱을 끝까지 나아가게 만들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시사한다. 그림은 그를 구원했던 성스러운 의무감이었다. 1886년 파리, 모진 겨울 6월에 고갱은 아들 콜로비를 데리고 파리로 돌아왔으나 아들을 누이에게 맡겨야 했다. 아 이를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변함없는 친우 슈페네커의 집에서 기숙한다, 슈페네커 역시 증권거래소를 그만두었지만, 망망대해로 나온 고갱과 달리 학교에서 그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궁지에 몰린 고갱은 푼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벽보를 붙여야 했다. 고갱은 그림은 많이 못 그렸지만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를 재개하여 제 8호 인상파 전시회 -결국은 마지막이 되었지만-에 열아홉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참가를 거 부했지만, 피사로는 이 전시회를 통하여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와 젊은 신인 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시회 도록을 보면 당시 고갱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그가 화실 주소를 기재하지 않은 유일한 참가 자라는 사실이다. (마리 카사도 기재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그러는 것이 관례였다.) 또 하나, 제목들로 보아 출품작들을 한 해 전 루앵이나 코펜하겐 일원에서 주로 그렸다고 하는 사실 이다. 이 고난의 시절에 그린 작품 중에서 아마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힐 '작약 화분과 만돌린이 있는 정물'은 열대의 울창함에 경도되는 화가의 훗날 모습을 처음으로 예견케 한 다. 7월 중순 퐁타방, 고갱은 메테에게, "푼돈을 긁어모아 브르타뉴로 왔다."고 편지를 띄웠 다. 이 피니스테르의 한 촌락에서 고갱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 2장 브르타뉴와 열대를 처음 만나다. 아늑한 가정생활로부터 하루 아침에 떨려난 고갱은 상황에 휩쓸려, 마치 고독이라는 가시 밭길을 운명적으로 선택한 사람처럼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공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갱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존경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작품에 전념할 수 있어야 했다. 고갱은 몇 달째 붓을 놓고 있었다. 1885년 여름부터 그는 "그림도 그리고 생활비도 줄이기 위해서 브르타뉴의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1886년, 퐁타방의 글로아네크 여관 1886년 여름, 고갱은 캥페를레 부근의 촌락으로, 바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퐁 타방의 글로아네크 여관에다 여장을 푼다. 엄밀히 말해서 고갱이 이곳을 개척한 것은 아니 었다. 20년 전부터 피니스테르의 이 마을은 프랑스 국내는 물론 외국, 특히 미국에서 온 화 가들을 환대하는 곳을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화가들은 특별히 반항적인 기질의 소유자 는 아니었다. 이 지역으로 여행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한 안내서는 "퐁타방은 브르타뉴 일대의 다른 마 을보다 유리하다. 개성 있는 전통의상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이 마을 주민들은 화가의 모델 노릇을 하면 재미도 있을뿐더러 짭짤한 부수입도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 하고 있다. 가족 걱정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고갱은 난생 처음으로 직장과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작품은 최고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그곳 화가들이 자신에게 강 한 인상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부대낄만큼 부대껴서 그런지." 부 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담담히 토로했다. "작품 생각만 한다오. 아직도 작품은 나를 낙심으로 몰아넣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지. 나날이 진척되어 가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이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내가 퐁타방의 닭장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구려. 모든 화가가 나를 어려워하면서 좋아해. 아무도 나의 신념에 찬물을 끼 얹지 못한다오." 경험이 일천한 화가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 준다고 보는 사람도 있 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퐁타방에서 초기에 고갱과 함께 지냈던 동료 화가들의 증언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고갱의 당당한 자신감과 예술적 야심은 정작 그림 자체의 혁명성에 앞서 토로된 감이 없 지 않지만, 화가들은 그의 그늘 아래 기꺼이 모여들었다. "큰 키, 검은 머리, 가무잡잡한 피 부, 무거운 눈꺼풀, 준수한 용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영국화가 아치볼드 해트릭은 뒷날 술회했다. "그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확신에 찬 행 동을 보여 주었으며, 뚱해보일만큼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해 여름 글로아네크 여관에서 지냈던 화가 퓌고되도 이 말을 확인해 준다. "그의 특이 한 이론과, 이론보다도 더욱 특이한 화풍은 전체 화가집단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브르타뉴의 초기작 다른 화가들과 비교했을 때, 고갱은 파리 아방가르드, 즉 아직은 이단시되었던 '인상주의 '의 대변자였다. '퐁타방의 세탁부들'에 나타나는 부드러운 색채와 비연속적인 붓질은 당 시 그가 담백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인상주의 화풍에 물들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고갱은 더욱 창조적으로 나아간다. '브르타뉴 여인들의 춤'에서 그의 천재성이 움트는 것을 본다. 화사한 주제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부근의 작업중이던 파스칼 다냥 부브레 같은 제도 권 화가의 그림에 나타나는 비슷한 정경의 처리방식과 차원이 다르다. 이 그림의 구도는 혁신적이다, 여인들의 새하얀 머리쓰개는 풍속화의 효과적 세부묘사의 차원을 넘어 순수한 장식적 특성을 갖는다. 그들의 불가해한 팔동작과 비껴 나간 시선들은 어떤 신비로움을 던져 주며, 진솔한 표정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우아함이 담긴 얼굴을 선 호하는 고갱의 취향이 나타난다. 구도와 주제 양면에서 더욱 놀라움을 주는 작품은 '라발 의 옆모습이 있는 정물'이다. 이 그림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은 고갱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이 퐁 타방에서 알게 된 젊은 화가로, 얼마 뒤 고갱이 낯선 이국 땅으로 처음 여행을 떠날 때 화 가로서 동행하는 샤를라발이다. 벌써 고갱이 그리는 과일은 사과보다는 망고에 가깝다. 그의 친구가 코안경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이는 기이하게 생긴 주전자는 고갱이 이 무 렵(1886년에서 1887년) 막 빚기 시작한 도자기 중 하나이다. 도예가로서의 고갱 퐁타방으로 오기 얼마전 고갱은, 펠릭스 브라케몽의 친구이며, 일본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도예를 되살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던 일류 도예가 에르네 샤플레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고 갱은 파리를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이런 작업에 손을 댄 것으로 보이지만, 다시 파리로 돌아 온 뒤부터 이 새로운 기술에 푹 빠졌다. 1886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그는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형식을 만드는 방법, 자신이 희구하던 원시적, 근원적 특성을 그림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해가 저물 무렵 고갱은 브라케몽에게 연락을 취한다. "내 거칠 디거친 상상력이 가마에서 얻어낸 소품들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이 괴물 같은 작품들을 보면 당신은 아마 포복절도하겠지만, 그래도 흥미는 느끼시리라 확신합니다." 도예 덕분에 그는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미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이 산업디자인의 선구자는 나중에 썼다. 그리고 제조업자들에게 호소했다. "빈말이 아니오. 제대로 하시오 중요한 것은 직공이 아니라 예술가를 고용하는 일이오." 자신의 손으로 빚은 이 물건들은 늘 고갱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던 기억과 감정을 건드 렸다. 그는 페루의 토기와 친숙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리마에서 수집한 훌륭한 도예품을 프 랑스로 갖고 오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도자기는 고갱을 예술의 시원으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로 인도했다. 늘 돈에 쪼들리던 그는 그림보다는 자신의 도자기가 더 잘 팔리리라 는 기대또한 품고 있었다. 어쨌든 고갱의 도자기는 곧 전시되었고, 쇠라와 랭보를 '발견'했 던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관심을 보인 사람은 극소수였다. "도자 기를 빚는다는 것은 한가로운 여흥이 아니다."고갱은 이렇게 썼다. "태곳적부터 도자기는 아메리카 인디언이 늘 아껴 온 물건이다. 신은 한 줌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한 줌 진 흙으로 우리는 귀중한 돌을 만들 수 있다. 한 줌의 진흙과 한 줌의 재주로!" 그는 이런 기막힌 통찰도 덧붙였다. "가열되는 물질은 가마의 성질을 받는다... 뜨거운 열 기를 견디면서 더욱 듬직해지고, 더욱 경건해진다." 미개인으로 살기 위한 파리 탈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파리를 벗어나는일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 다를 바 없거든.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사흘을 내리 굶고 지내야 할 때가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지만, 의욕이 달아나요. 나는 그 의욕을 되살리고 싶소. 파나마로 떠나서 미개인처럼 살려는 것은 그래서요. 태평양에 있는 타보가라는 작은 섬을 알고 있소. 파나마 해안에서 가까운 곳이지. 인적이 드문 자유롭고 기름진 땅이라오." (아내에게 보낸 편지, 1887년 3월 말) 고갱은 샤를 라발과 함께 4얼에 출발했다. 파나마에서 그들은 고갱의 매부인 후안 우리베 에게서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얼마 안 가 돈이 떨어진 고갱은 파나마 운하 공사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리 는 등 숱한 불운을 겪은 뒤에 두 사람은 파나마로 오는 항해길에 눈여겨보아 둔 마르티니크 로 옮겨 간다. 6월에는 고갱도 다시 붓을 들었다, "우리는 읍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대농장 에서 원주민이 쓰던 오두막을 발견했어." 1887년 7월 슈페테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밝혔다. "오두막 밑으로는 헤엄을 칠 수 있는 바다와 백사장이 뻗어 있고, 양옆으로는 야자수와 이름 모를 과일나무들이 늘어서 있지. 화가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경치라네." 이 일시적 체류는 결국 벽에 부딪히지만 (향수병에 걸린 고갱은 11월에 프랑스행 배를 탔 다) 이국미가 담긴 최초의 뛰어난 풍경화를 제작할 기회와 피사로의 인상주의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갱은 진정한 성숙에 이르렀다. 붓질은 여전히 정교하고 조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는 자신이 느낀 경이감을 비슷한 색채들의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조화를 통 해 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후 고갱의 그림에서 보증수표처럼 나타난다. 더욱이 인물이 등 장하는 어떤 장면들의 구도는 고갱이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나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이다. 빛깔이 바랜 원색의 옷을 입은 섬 여인들이 우아하 면서도 다양한 몸놀림으로 매일매일 오고간다." 나르티니크 시절은 타히티의 낙원에 앞서서 이루어진 단순한 시행착오이상의 의미를 가지 며, 고갱이 돌아왔을 때 파리는 그의 업적에 주목했다. 옥타브 미르보는 이런 평가를 내렸 다. "기괴한 초목과 꽃, 엄숙한 형상들, 장엄한 석양이 있는 숲의 그림은 종교적 신비와 에 덴 동산을 닮은 성스러운 풍요를 안겨준다." 새로운 만남 파리에 잠시 머무는 동안(1887년에서 1888년 겨울) 고갱은 처음으로 작품을 팔았으며 새 로운 친구들을 사귄다. 고갱이 남태평양에 머무는 동안 슈페테커를 대신하여 믿음직한 대리 인 역할을 맡은 다니엘 드 몽프레와 반 고흐 형제였다. 화가인 빈센트는 파리에 1년간 머물 렀으며, 그의 동생 테오는 유명한 화랑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었다. 테 오는 도자기 약간과 여러점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는 마르티니크에서 유화로 그린 대작 '망고따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고갱은 경제적 여유를 갖고 브르타뉴로 돌아가 1888 년 1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오랜 기간 머무를 수 있었다. 창조적은 생산성, 동시대인 모두에 게 미친 결정적인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이때의 브르타뉴 체류는 고갱의 예술가로서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어렴풋한 색조를 들을 수 있다네" 1886년 여름의 브르타뉴는 고갱에게 쾌적한 피난처를 제공했으나, 이번에는 신화적 분위 기로 다가왔다. 이제 그는 브르타뉴가 줄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생기발랄함만이 아니라는 사 실을 깨달았다. 고갱은 지난 몇해동안 지켜보아왔으며, 자신만의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줄 그런 물줄기에 바짝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능으로 젊은 화가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색의 조화, 대조의 기법, 단순화의 필요성, 화가가 실천에 옮겨야 할 감각의 종합 등 이미 유포되어 있던 아이디어를 자기 입으로 옮긴 데 지나지 않았다. 고갱이 주장한 것은 쇠라의 주장이기도 했다. 1888년의 몇 달 동안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다. 왜일까? 한 화가의 갑작스러운 성숙에는 확실히 불가사의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는 고갱이 도 자기에 도입했던 단순성과 대담성이 그림으로 전이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마르티니크가 그 에게 '새로운 원시주의'라는 말로 얼추 집약할 수 있을, 목표에 대한 뚜렷한 관념을 제공했 다는 것을 감지할 수는 있다, 그는 파리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부인에게 털어놓았다. "7~8개 월 일만 하면서 주민들의 성격에 생활공간에 푹 빠져들 작정이오." 1888년 3월초 퐁타방에서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는 좀더 자세한 내용이 드러난다. "나 는 브로타뉴를 사랑하네. 내가 신은 나막신이 화강암 대지에 닿을 때, 나는 내가 그림에서 찾고 있는 강하고 둔중하며 어렴풋한 색조를 들을 수 있다네." 브르타뉴의 흡인력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그 어느곳보다도 근대정신에 강하게 저항한 곳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브르타뉴가 후진성의 축도였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켈트 족의 종교적 전통이 보존되어 있는 보고, 코르넬리스 르낭이 이미 "기독교의 배후에 이교도 정신이 숨어 있는 원시세계"라고 격찬한 전설의 땅이었다, 당시 지식인은 이곳에 매혹되었 다. 문학적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바레스는 1886년 이 지역을 여행한 소감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곳에서 드디어 갈리아의 수탉은 로마의 흙먼지에 더렵혀지지 않게 되 었다." 플로베라와 막심 뒤 캉은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브르타뉴 기행'에서 "창조의 첫날을 목격한 듯 원초적 자유를 구가하는 인간적 형식"을 발견했다고 토로했다. 따라서 고갱에게 는 미술이 그리스와 로마를 구현한 것이었다면, 브르타뉴는 가식이 깃들이지 않은 본래적인 무엇, 시원으로의 회귀를 뜻했다. 더 이상 그는 1886년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작 업하는 단순한 인상파 화가가 아니었다. 이제 고갱은 브르타뉴의 '영혼',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브르타뉴의 풍광과 주민의 개성을 포착하는 데 전념했다. 고갱이 슈페네커에게 한 조언 은 그가 인상주의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자연을 너무 곧이곧대로 베끼지 말게. 예술은 추상이야. 자연앞에서 자네가 꿈꾸듯이 자 연에서 추상을 뽑아 내도록 해. 결과보다는 창조행위를 더욱 많이 고민하게나." 페루에서 온 야만인의 철저한 일본화 고갱은 자신의 이론을 진정한 혁신적 작품으로 뒷받침했다. 브르타뉴에서의 여섯 달은 양 적으로도 매우 생산적이었다. 1888년 고갱은 알려진 그림만 모두 75점을 그렸던 것이다. (그 전해에는 겨우 24점에 그쳤다.)질적으로 두드러진 작품 가운데 '씨름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 작품에서 공간은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형태와 색채는 단 순미와 종합성을 구현하고 있다. 일본 목판화의 단순미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한 고갱은 이 그림을 '페루에서 온 야만인의 철저한 일본화'라고 평가했다. '일본색'이 느껴지는 그의 첫 대작은 '예배뒤의 환상'이다. 야곱이 천사와 벌이는 씨름 을 주제로 묘사한 그림은 호쿠사이(에도 시대 목판 화가, 서양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역 주)의 씨름꾼 소묘를 모태로 삼았다. 여기서 현란하면서도 세련된 채색화가로서의 고갱의 면모가 처음으로 드러난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하나의 도전이었다. "올해에는 스타일을 위 해 수법, 색채 등 모든 것을 희생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억지로라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갱은 지향점을 알고 있었으며, 순수한 개념적 접근에 뒤따르는 위험성을 감지하 지 못할 만큼 둔감한 화가가 아니었다. "분명히 상징주의의 앞길에는 암초가 가득해." 1888 년 10월 16일 슈페테커에게 쓴 편지에서 고갱은 고백했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내 본성의 핵을 이루고 있네... 내가 덜 이해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아... 자네도 알다 시피 예술에 관한 한 나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옳다네!" 제 3장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 테오 반 고흐는 고갱에게 참다운 관심을 가졌고 그의 천재성을 믿었던 최초의 미술상이었 다. 테오 덕분에 고갱은 1888년이라는 중대한 해에 흔들림없이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 를 갖게 되었다. 고갱은 자신이 만들기 시작한 혁신적인 그러나 곧 물의를 빚게 되었던, 작 품을 테오에게 보냈다.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뒤 빈센트 반 고흐와 만났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고갱은 빈센트를 단지 미술상의 형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1887년 11월, 고갱은 빈센트 반 고흐가 몽마르트르의 레스토랑르 탕부랭에서 열었던 모임 에 참석했다. 두 화가는 의기투합해 그림을 교환했다. 고갱은 빈센트가 초창기에 그렸던 해 바라기 정물화 한 점을 골랐고, 빈센트는 브르타뉴의 풍경화를 가졌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파탄으로 막을 내린 두 영웅의 유명한 우정은 원래 테오와 에밀 베 르나르가 포함된 네 사람의 복잡한 관계였다. 베르나르는 빈센트의 친구였다. 베르나르는 1886년 여름 이미 고갱을 만났지만 그가 고갱의 생활에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2년 뒤의 여름이었다. 나중에 베르나르는 자신의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슴(형태를 검은 윤곽선 으로 분할하는 대담한 기법:역주)을 고갱이 도용했다며 평생토록 불만스러워했다. 1887년 고 갱이 인상파에 경도되어 있을 무렵 분명히 베르나르는 이미 날카롭게 경계지운 강렬하고 굵 은 윤곽선 안에 밝은 순색을 채워 넣고 있다. 그의 '풀밭 위의 브르타뉴 여인들'이 고갱의 '예배 뒤의 환상'에 앞서 그려진 것이 틀림없다면, 이 젊은이가 고갱에게 미친 영향력은 결 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일까? 더 유명해진 고갱이 거기서 발 전시킨 내용이 더 혁신적으로 중요하다는 점 또한 부인 못 할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을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겠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흡 수하려고 드는 법이다. 그런 입씨름은 생산적이지 못하며, 누가 누구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장 발장으로서의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여름을 홀로 아를에서 보냈기 때문에 브르타뉴의 화가공동체를 부러워했다. 그는 친구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화상을 보내 달 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보냈다. 그가 고갱에게 받은 그림에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 목이 있었고, '나의 벗 빈센트에게'바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고갱도 나중에 이 그림 을 자세히 술회한다.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고결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장 발장 같 은 강한 인상을 주는 부랑자의 얼굴이다.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으며, 두 눈은 난로의 불빛 에 감싸여 있다. 나는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그리려고 했다. 페르 시아 양탄자의 꽃무늬를 연상시키는 눈과 콧날의 선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미술의 척도이 다." 이 도취에 빠진 형식 분석은 인상파의 사실주의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고갱이 나아가려고 하던 방향을 암시한다. 몇 주일 전에 그는 빈센트에게 자신에게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능 력'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편지로 고백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단순한 얼굴의 모사가 아니 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것은 추상이어야 합니다." 추상이라지만 얼마나 구체적인가! 자신을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부랑자처럼 낭만적 영 웅으로, 순교자로 그리려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허세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초상화는 그가 새로운 성장, 그리고 가정과 과거생활과의 피할 수 없었던 갈등을 처절히 깨닫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부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고갱이 메테에게 보낸 모든 편지에서 빠짐없이 확인되 는 내용인데, 이런 불화에서 그가 느낀 심적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컸다. 겉으로 풍기는 인상과 정반대로 고갱은 매우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으며 자식들을 무척 그리워했다. 그러나 불운은 그때부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고갱의 소명의식을 오히려 강화시키 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는 자신이 천재와 고독의 운명을, 탈출을 위해 끝없이 이주할 수밖 에 없는 역마살의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메테에게 보낸 편지는 고갱이 이러한 약 점을 어떻게 강점으로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는지를, 어떻게 해서 그림이 생존의 이유가 되 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곳에 온 뒤로 나는 심리적으로 꿋꿋이 버티기 위해 내 마음의 섬세한 부분을 닫아 두었다오. 그 부분은 모두 잠복되어 있는 상태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 을 내 옆에 두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또다시 어디론가 도피하고 말 테니까. 내 안 에는 인디언과 섬세한 남자가 공존해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오. 지금은 섬세한 남자가 사 라진 덕에 인디언이 당당히 앞으로 나서고 있다오." (1888년 2월) 아를에서 보낸 두달 빈센트와 함께 생활하면 작품을 사들이겠노라는 테오 반 고흐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갱은 흔쾌히 퐁타방에서 아를로 떠났다. 그가 도착한 날짜는 10월 23일이엇다. 고갱은 두 달간의 아를 생활을 훗날 직접 기록으로 남겼다. 이 상세한 기록에서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드러 난다. 하나는 공동생활이 경쟁과 의견 교환으로 두 화가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되었 다는 사실이다. 자기중심적이고 거만했으며 보스 기질이 있었던 고갱은, 음울하고 변덕스러 운 기질에다 미학적, 윤리적 주제를 놓고 격정적으로 때로는 거의 광적으로 끝없는 토론을 벌이는 데 몰두했던 반 고흐에게 넌더리가 났음에 틀림없다. 반 고흐에게 느꼈던 애증의 성 격이 어떠했건 미술상의 형을 돕는 것이 고갱에게는 득이 되었다는 사정을 무시할 수 없다. 반 고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지만, 그것은 고갱의 지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강한 개성에 힘입었다고 보아야 한다. 때로는 종잡기 어려운 상징주의적 야심을 피력하는 친구의 장광설에 비위가 상할 때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반 고흐는 예수가로서의 고갱을 높이 샀 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것은 '열대의 자연'(아직은 마르티니크로 제한되어 있었지만)을 그 린 고갱의 그림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은(최근에 책으로 간행된 고갱과 반 고흐 형제 사이에 오갔던 편지들을 통해 그 내막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겠는데) 그들의 애 정은 빈센트가 발작을 일으키고 자기 귀를 잘랐을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하는 사실 이다. 그들 사이에는 1890년 빈센트가 오베르에서 자살할 때까지 꾸준히 편지 왕래가 있었 다. "나는 테오와 빈센트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라고 고갱은 아를 체류 말기에 쓰고 있다. "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다." 고갱의 편지는 지금은 부서지고 없는 아를의 작은 '노란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곳 아를에서 나는 물을 떠난 물고기 같은 신세라네." 고갱 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다. "풍경이건 사람이건 모두가 다 시시껄렁하고 구질구 질하기만 해. 빈센트와 나는 사사건건 충돌을 빚는데 그림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그는 도미 에, 도비니, 지앵, 대가연하는 테오도르 루소를 높이 평가하는 데 내 눈에는 하나같이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야. 반면에 내가 좋아하는 앵그르, 라파엘, 드가는 모조리 마음에 안 들어한 다네... 그는 내 그림을 무척 좋아하지만, 내가 작업하는 동안 이게 틀렸다 저게 틀렸다 하면 서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 고갱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그가 낭만주의적이라면 나는 좀더 원시적인 데 기울어 있어." 그러나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전에는 머리 뒤편의 후광으로 상징되었으며 우리가 색채의 빛남과 울림을 가지고 포착하려고 시도 하는 그 어렴풋한 영원의 모습으로 남자와 여자를 그리는 것"에 대하여 언급했을 때, 고갱 이 그렸던 브르타뉴 사람들, 타히티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르풀뒤에서 싹튼 원시주의 고갱은 스스로가 결점이라고 여겼던 것, 곧 기술적 훈련의 부족 또는 '야만성'의 틈새로 자기 예술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던 개성이 서서히 스며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관광지처럼 번잡스러워진 퐁타방에는 더 이상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1889년 10월 그는 르풀뒤로 옮겨가기로 결 심했다.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은 미술사에서 제 2의 브르타뉴 성지가 되었다. 그곳의 마리 앙 리 여관은 은둔을 꿈꾸는 화가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곳에서 고갱은 자신들을 고갱의 제자라고 여기는 메이에르 드 한, 에밀 베르나르, 폴 세뤼지에, 샤를필리제, 아르망 세갱 같은 화가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는 잇달아 대작을 만들어냈다. 모두가 지난번보다 더 자유롭고 대담한 색채, 더 분방한 상상력을 보여주지만, 그것들은 어 디까지나 고갱이 받아들인 세계, 곧 거칠고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브르타뉴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브르타뉴 시절의 원시주의 또는 종합주의를 대표하는 두 작품이 '황색 그리스도'와 아름 다 운 천사'이다. 앞의 것은 퐁타방에서 처음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퐁타방에서 그리 멀리 떨 어지지 않은 트레말로의 한 성당을 아직도 장식하고 있는 채색 나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기 때문이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이 그림에서 트레말로의 예수상의 배경은 황색과 적 색의 전원풍경이며, 머리쓰개를 한 브르타뉴의 세 여인이 마리아와 성스러운 두 여인을 대 체해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다. 선명한 색채, 농담의 부재, 파랗고 가는 선을 이용한 윤곽처 리는 스테인드글라스, 법랑 세공, 도예의 특수 분야에서 차용한 양식은 쿨루아조니슴을 실증 한다. 이 그림은 비평가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테오가 그 나른한 표현을 "건강하고 질박한... 암소"의 표정에 비유한 '아름다운 천사'에서 고갱은 앉아 있는 여인의 원시주의와 옆에 놓인 펠구 도자기의 원시주의를 의도적으로 병립 시켰다. 인물의 초상을 동그라미 안에 두는 기법은 배우를 담은 일본 전통 판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파도 속에서'같은 몇몇 누드화에서 고갱은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비원근법적 시각 과 주인공의 몸과 얼굴의 강한 순수성을 결합했다. 그 결과 원시주의적 솔직담백성을 담은 그의 초기 신화적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구현되었다. 신화적 이미지는 타히티에서 가다듬어 졌지만, 처음으로 싹튼 것은 피니스테르에서였다. 1889년 : 파리 만국박람회 3년도 채 안돼 고갱은 최소한 아방가르드 화단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성공 했다. 그의 재능, 아니 그의 천재성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알게 되었다. 게다가 미술상 및 구매자들과도 선이 닿게 되었으며, 그의 그림을 높이 사고 창작을 격려해 주는 적잖은 화가, 작가들과 교류를 갖기에 이르렀다. 1886년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인상파 전시회 이후로 고갱 은 작품을 한꺼번에 여러 점 발표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1889년에는 전시회에 두 번이나 참여했다. 2월에 그는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눈부신 성과를 한 자리에 모은 대규모 행사였다. 고갱은 또 슈페네커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볼피니 카페에서 마련한 인상주의 종합주의 그룹전에 더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일반인의 관심은 끌지 못했지만 고갱이 주도한 그 전시회는 현대 회화사에 한 획을 그었 다. 여기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화가들(보나르, 드니, 뷔야르)은 세뤼지에가 퐁타방 시절 고갱의 지도 아래 그린 '부적'에서 처음을 접했던 새로운 스타일을 좀더 꼼꼼하게 맛 볼 수 있었다. 고갱의 혁신적 작업은 젊은 작가들에게 계시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샤를 모리스, 알베르 오리에 같은 작가는 고갱이 내걸었던 기치를 적극 수용했다. 시인 오리에는 1893년 요절할 때까지 고갱의 열렬한 옹호자로 남아 있었다. 만국박람회는 고갱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는 막 완공된 에펠탑을 둘러싼 뜨거운 찬반논쟁 에서 소리 높여 의견을 개진했다. 만국박람회 기간중에 발표된 예술에 관한 글에서ㅓ 고갱 은 '철의 승리'와 철로 된 고딕식 창문격자'에 대해 강한 공감의 뜻을 피력하면서, 기초적 인 건축재료에서 장식으로 치닫는 벽토치장물과 금박을 벗겨 낼 각오가 되어 있는 새로운 유형의 공학적 건축가가 등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정성에 대한 고갱의 탐구는 그를 만국박람회의 또 다른 매력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국 적인 풍습과 다양한 주거양태를 보여주는 식민지 민속관에 흠뻑 빠져들었다. 고갱은 앙코르 와트, 보로부두르 유적의 사원들을 재현한 건물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으며 자바 민속관에 서 공연된 무희들의 춤을 지켜보았다. 르풀뒤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겨울 동안의 계획을 베 르나르에게 털어놓았다. "통킹에서 일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그리로 가서 안남어를 배우고 싶어. 주책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미지의 세계를 지독하게 갈망하고 있다네." "그림의 위대한 부활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갱은 얼마 안 가 오딜롱 르동의 부인을 통해서 알게 된 마다가스카르 쪽으로 관심을 돌 리게 되었다. "나는 열대의 작업장을 찾아낼 셈이네. 그곳으로 나를 만나러 오고픈 사람은 얼마든지 와도 좋아." 그는 베르나르에게 이렇게 썼다. 계획이 점점 세부적인 틀을 갖추어 나가면서 고갱은 돈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자네가 만국박람회에서 보았던 그런 원 주민의 오두막을 사기 위해서지... 사실은 여자도 빼놓을 수 없다네. 매일매일 모델이 있어야 하거든." 이미 후끈 달아오른 고갱의 도피욕을 부채질한 것은 반 고흐가 전에 꿈꾸었던 화 가들의 공동촌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었다. 사실 고갱이 타히티로 더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반 고흐의 입김도 작용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르티니크의 그림들을 보면서 반 고흐에게는 피에르 로티가 쓴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던 그 섬이 하나의 현실로 떠올랐다. "고갱이 나에게 들려주는 열대지방 이야기는 황홀하다. 그림의 위대한 부활이 거기서 우리 를 기다리고 있다." 반 고흐는 이렇게 썼다. 고갱은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 "헤라클레스도 안타이오스처 럼 동방의 땅과 닿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법이네. 한두 해 있다보면 튼 튼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 그러나 1890년 9월 오딜롱 르동에게 편지를 쓸 무렵에는 더 이상 한두 해라고 못박지 않 았다. "마다가스카르만 하더라도 문명세계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타히티로 가서 거기서 생을 마치고 싶군요. 당신이 아끼는 나의 그림은 아직은 씨앗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만, 타히티에 서는 나 스스로 그것을 원시와 야성의 상태로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샤를 모리스의 요청으로 옥타브 미르보는 '에코 드 파리', '피가로'지상에다 드루오 호텔 에서 이루어질 고갱의 작품에 대한 공매 기사를 썼다. (1891년 2월) 작품을 처분하여 번 돈 으로 고갱은 여행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코펜하겐의 가족을 잠깐 만나 본 다음 4월 1일 드 디어 마르세유로 출발했다 출발 며칠 전에 친구들은 환송연을 베풀었다. 스테판 말라르메가 축배를 제안했다. "우리 가 축배를 드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하루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뜻입니 다만, 아무튼 자신의 재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머나먼 땅으로 자의의 망명을 선택하여 스 스로의 부활을 시도하는 이 예술가의 고고한 양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 4장 이아 오라나 타히티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 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 시적인 표현수단으로밖에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참된 수단입니다." 1891년 쥘 위레와 가진 '에코드 파리'지 회견에서 고갱은 두 달이 넘는 항해 끝에 1891년 6월 9일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섬 주민들은 '예술 적 사명'을 띠고 왔다는 이 화가를 보았을 때 어안이벙벙했다. 주둔군 대위 제노는 고갱의 도착 순간을 이렇게 전해준다. "고갱은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 특히 여자들로부터 야유의 휘파람을 들어야 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늠름했으며, 상당히 거만해 보였지만, 한편으로 는 호기심과 이제부터의 자기 일에 대한 불안감도 벌써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챙 넓은 갈색의 펠트 카우보이 모자 밑으로 어깨까지 치렁 치렁 내려온 희끗희끗한 장발이었다." 고갱은 처음에는 별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여기 온 지 벌써 20일이 되었다. 그동안 새로운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인지 뭐가뭔지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려면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파페이테는 실망 그 자체였다. 함석집들 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물가가 비싼 별 볼일 없는 조그만 식민지 항구였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야성인'을 찾아 헤맸지만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장에서 죽치고 있는 창 녀와 중국인 선술집 주인, 식민지에 온 술고래 백인뿐이었다. 아직 그림에 손도 대지 못한 처지였으나 그렇다고 몇 주일씩 계속되는 프랑스 혁명 기념일의 질펀한 축제를 마다할 고갱 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파페에테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려 갈 작정이었다. 수염까지 깎은 고갱 은 식민지의 백인처럼 말쑥히 차려 입고 관리들의 사교클럽에서 지방유지들과 교분을 맺었 다. 불행하게도 그에게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리워드 제도 출신 마 오리 족장과 결혼한 괴짜 영국 여인뿐이었다. 고갱은 수전 뱀브리지라는 여인의 초상화를 공들여 그렸지만 아첨을 곁들이지 않은 그의 그림은 그곳 유지들에게서 냉대를 받았다. 얼 마 뒤 화가는 타히티 왕국의 마지막 왕인 포마레 5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가 발딛은 세 계는 이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9월 말 고갱은 파페에테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마타 이에아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티티라는 젊은 혼혈 여성이 그와 동행했는데, 여인은 얼마 안 있어 파페에테로 돌아갔다. 초호 옆의 마타이에아 타히티의 진정한 생활과 풍경을 찾으려는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전원에 널려 있는 눈부신 모든 것이 나를 눈멀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온 나는 늘 색채에 확신을 갖 지 못했다. 공연히 사서 고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본 사물을 적과 청으로 화폭에 담는 건 너무 간단한 일이었다." '노아노아' "아직은 대단한 작업을 하지 못했어." 1891년 11월 7일 고갱은 몽프레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연이 아니라 나의 가장 내밀한 자아 속으 로 녹아 들어가 그림 그리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그리고 파리 로 돌아가 그릴 그림을 위한 밑그림 자료를 쌓아 가고 있다네." 고갱은 기가 막힌 곳(현재 고갱 미술관이 서 있다)을 찾아냈지만, 마차를 타고 읍에서 다 섯 시간도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였다. 고갱이 얼마나 다급한 심정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파페에테에서 벌어진 축제 동안 그는 타히티섬 족장들 중 프랑스 사정에 가 장 밝은 마타이에아 구역의 족장 테투아미를 알게 되었다. (항해가이며 민족학자인 벵트 다 이넬손은 1950년대에 고갱의 타히티, 마르키즈 체류 시절을 연구한 탁월한 저서에서 이 흥 미로운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갱에 얽힌 낭만화되지 않은 일화를 현지인에 게 들을 수 있었다) 노력은 했지만 고갱은 타히티어를 배울 수가 없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데다가 생각도 비슷하고 좀더 원시성이 살아 있는 환경을 소개해 주기까지 한 원주민을 알게 된 고갱은 크게 한숨 돌렸을 것이다. "마타이에아는 타히티에서도 손꼽는 절경이다. 해 안 평야가 보기 드물게 넓어서 산이 적당히 떨어져 있고 따라서 산의 웅장함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초호를 감싸고 있는 산호의 장벽을 따라 몰려오는 파도는 일대에서 연중 부는 남동무역풍의 영향으로 어느 곳보다도 높고 거세다. 거기다가 초호 안에 떠 있는 야자 수가 무성한 작은 섬들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준다." 다니엘손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를 사로잡으려는 모든 것이 느껴지는구려." 드디어 고갱은 꿈에 그리던 곳을 찾아냈다. 새로운 자신감에 불타오른 그는 풀로 지붕을 얹은 파레라고 하는 대나무 오두막을 빌렸다. 주위의 황홀한 풍광은 이따금 영감을 주어 그 림으로 내몰았지만 '판다누스 밑에서', '부라오 나무' 고갱의 최우선 관심대상은 매력적이 고 선량한 원주민의 일상을 기록에 남기는 일이었다. 원주민끼리 주고받는 힘차고 간명한 대화는 고갱에게 더더욱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처음부터 주의 깊고 무게 있는 타히 티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 주옥같은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다. 브르타뉴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에 와서도 고갱은 대지와 사람의 성격, 열대지방과 그 주민 특유의 광채와 우울에 푹 젖어 들었다. "지금은 저녁이오." 고갱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타히티처럼 밤이 적막한 곳은 난 생 처음이오. 적막을 깨뜨리는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은 여기밖에 없을 거요. 여기저기 커다란 잎이 떨어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오. 영혼의 살랑거림이라고나 할까, 주민들은 밤에도 곧잘 나다니지, 맨발로 소리없이 .언제나 침묵뿐이라오. 이 사람들이 어떻 게 해서 몇 시간도 좋고 며칠도 좋고 말 한마디없이 구슬픈 눈길로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오. 나를 사로잡으려는 모든 것이 느껴지는구려." 도착하고 처음 몇 달간 그린 그림('해변에서', '바나나', '테파아투루마', '사색하는 여인', '시에스타 ')은 고갱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었을 무기력과 정체의 공간을 포착하고 있다. 모든 것이 그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하다못해 '도끼를 든 남자'에서도 고된 노동을 하 는 인물은 음울한 몽상속에서 굳어 버린 듯 보인다. "억눌린 힘의 작열하는 불길" '노아노아'에서 고갱은 자기의 첫 번째 초상화 '바히네 노 테티아레''꽃의 여인'에 대해 상세히 언급했다. "타히티 사람의 얼굴 특성을,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매혹적인 웃음을 제대 로 맛보기 위해서 나는 전부터 내 이웃에 사는 토박이 타히티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보면 미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예뻐 보였다.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가 라파엘로의 그림 같았다. 그녀의 입은 말과 입맞춤과 환희 와 비애의 언어에 모두 능통한 조각가가 다듬어 놓은 듯했다. 들거움 속의 서글픈 우수... 이 초상화는 내 가슴의 베일을 통해 내 눈이 본 것과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면에 충실하 려고 했던 것 같다. 억눌린 힘의 작열하는 불길 그 여자는 뒷머리에 단 꽃의 향내에 귀기울 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원스러운 이마의 선에서 느껴지는 기품은 '균제로부터의 일탈이 없 는 곳에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없다 '고 설파한 포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 마타이에아 구역은 주민 대다수가 개신교가 아닌 카톨릭을 믿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되었다. 고갱이 아베 마리아에 해당하는 타히티 말을 들은 것은 교회에서였을까?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배경이 이국적일 뿐 '황색 그리스도', '예배 뒤의 환상'과 같은 계열의 작 품이다. 이 혼합적인 그림에서 고갱은 시공간적으로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다 '성서'의 주제를 이 식하여 원주민의 신앙심을 그려 내고 있다 꿈결의 몽롱함 속에서 고갱이 마치 두 개의 장면을 포개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하나는 현실의 장면(풍성한 바나나의 정물 옆에 보이는 전면의 타히티 마리아와 예수), 또 하나는 가공의 장면, '예술'의 장면(보티첼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천사와, 보로부두펀의 부조를 찍은 사진에서 따 온 기도하는 두 여인)인데, 둘은 노랑, 빨강, 파랑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 채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1892년 3월) 고갱은 이 그림을 소 상히 설명하면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그림은 그런 대로 내 마음에 드는군." 테하마나 "지금은 이곳의 흙과 냄새에 길이 들어 열심히 작업을 한다오. 알 듯 모를 듯한 방식으로 내가 그림에 담고 있는 타히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마오리족(폴리네시아인)이지 바티뇰레 (파리의 화가촌)에서 내가 본 동양인은 아니라오. 거의 1년 가까이 되고서야 비로소 그 점을 깨달았구려." (1892년 7월) 그러나 고갱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빼놓았다. 열세 살 난 폴 리네시아의 어여쁜 소녀와 같이 살고부터 타히티인의 참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말이 없었던 소녀는 고갱이 꿈에 그리던 원시의 이브였으리라. 1892∼l893년에 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고갱은 여러 점의 걸작, 예컨대 '망고를 든 여 자', '베 나베 페누아' '환희의 땅', '마나오 투파파우' '저승사자의 눈길', '메하리 메투아 노 테하마나' '테하마나의 선조' 같은 그림들이다 고갱은 섬을 탐색하던 도중 문명의 때가 덜 탄 지역에서 테하마나라는 이 소녀를 얻게 된 경위를 들려준다. 나중에 파리에서 타히티 생활을 다소 윤색하여 쓴 '노아 노아'에서 이 소 녀는 테후라로 등장한다.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매일 아침 첫 햇살이 나의 방을 비추었 다. 테후라의 환한 얼굴은 주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한없이 자연스 럽고 소박하게 마치 에덴 동산에 온 것처럼 근처 냇가로 가서 물에 잠기곤 했다... 새색시는 별로 말이 없었다. 어떤 때는 울적해 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사람을 비웃는 듯한 묘한 표 정을 지었다. 우리는 서로를 끈질기게 탐구했지만 나는 그녀의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없 었다. 신경전에서 물러나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끝까지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l 나 의 여린 신경은 번번이 허물어졌다. 나는 펼쳐진 책장처럼 알몸을 송두리째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남태평양에서 지상낙원을 그리던 그의 꿈이 현실로 성취된 것은 겨우 이 몇 달 동안이 었다. 고갱은 이때 가장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며 애정과 관능적 기쁨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저승사자의 눈길 '노아 노아'에서 고갱은 자신의 바히네(색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타히티인의 고대 신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 방의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대화의 범위는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전통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은 고갱이 스스로 그 문제를 연구했 다. 그가 참고했던 책의 하나는 파페에테의 한 식민지 관리에게서 얻은 반세기 전에 쓰인 뫼랑후의 '오세아니아 여행기'였다. 그 책은 고대 폴리네시아인의 종교, 의식, 관습을 풍부히 다루고 있었다. 고갱이 쓴 다수의 원고는 이 책에 크게 의존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채화 삽화를 곁들여 신화들을 엮은 '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가장 널리 알려진 '노아 노아'는 이 책에서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 고갱이 이 민담과 전설에 얼마나 매료되어 있었는지는'아 레오이스의 탄생' (보라보라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던 여신을 그렸다)과 '바이 루마티'를 비 롯한 다수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고갱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뒤섞는 데 능통 한 사람이었다. 그 점은 '마나오 투파파우' '저승사자의 눈길'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아 노아'에서 고갱은 이 그림을 착상하게 된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어느 날 파페 에테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날 저녁으로 돌아온다고 약속했지만, (일이 틀어져서) 새벽 1시나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 기름이 얼마 없어 기름통을 채워야 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칠흑처럼 어두웠다.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아니, 의혹이라고 해도 좋았다. 사랑스러운 새가 날아가 버렸을지 모른다는... 성냥불을 켰다 테하마나는 벗은 채 꼼짝도 엎드려 있었다. 공포에 질려 눈을 치뜬 그녀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 여기서 고갱은 눈으로 본 것을 신화로, 예술작품으로, 폴리네시아의 상징물로 바꾸어 놓는 다. "젊은 원주민 여자가 엎드려 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일부밖에 보이지 않는다. 파란 파레우(폴리네시아인이 허리에 두르는 옷)를 씌운 침대 위에 연노랑 이불이 덮여 있다. 자주 색, 보라색이 감도는 배경에는 전기 스파크 같은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다. 낯선 인물이 침 대 옆에 서 있다. 형태와 동작에 현혹되어 있었으므로 당초 누드화를 그릴 생각뿐이었다. 그 런데 곧이곧대로 그리면 약간 음란해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순결한 그림, 원주민의 정신과 개성과 전통을 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원주민 여자의 일상생활에서 파레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침대의 홑청으로 삼았다. 이불은 노란색이어야 했다. 노란색은 보는 이의 내면에 예상치 못한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또 불을 켠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구태여 호롱불을 그려 넣지 않아도 좋았다. 배경은 다소 공포스 럽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으니 자주색이 제격이었다. 이상이 이 그림의 음악 파트에 대한 전 체 윤곽이다. 침대 위에 옷을 벗고 약간 도발적인 자세로 누워 있는 원주민 소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을 나누려는 것일까? 설득력은 높지만 그것은 점잖지 못한 발상이 며 그런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다 정사뒤의 나른한 휴식? 그것도 좀 그렇다. 내가 본 것은 오직 두려움이었으나 그것은 음탕한 노인들의 습격을 받은 수산나('구약성서'에 나오는 정 숙한 여인)가 느꼈을 두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원인은) 당연히 투파파우(저승사자)였다. 원주민들은 투파파우를 두려워하여 밤중에도 불을 켜 놓고 잤다... 나는 밋밋한 배경을 장식 할 셈으로 꽃을 몇 송이 뿌렸다. 그것은 인광을 발하는 투파파우 꽃으로 유령이 주시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타히티인은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요컨대 이렇다. 음악 파트:물 결치는 수평선.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연결된 주황색과 청색의 조화와 거기서 파생되는 느낌. 푸르스름한 스파크의 광휘. 문학 파트:저승사자와 연결된 살아 있는 소녀의 혼, 밤과 낮. 그 림의 제작배경을 이렇게 시시콜콜 밝히는 것은 이유와 동기를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을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그림은 남태평양을 무대로 한 평범한 누드화인 것이다. " 막다른골목 몇 달 동안 고갱은 미친 듯 그림에 몰두했다. 게다가 아리따운 색시까지 얻었다 그러나 고독감이 고갱을 무겁게 짓눌렀다(색시도 심신이 약간 피곤했으리라). 생활고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고갱은-빈털터리 신세에다 유럽에서의 송금도 없었다-이제 귀국을 하지 못해 애가 달았다 지난 19개월 동안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 아넣었다. "돌아가면 그림을 때려치워야 할까 봐."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 고갱은 이런 넋 두리를 실었다. 다시 역마살이 도진 고갱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프랑스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에게 안정된 노후가 보장될 수 있을 거요. 애들하고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테고. 더 이상 끼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거요." (1895년 4월) 그는 1892년 5월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썼다. 그해 여름도 무일푼으로 지냈 고, 총독에게 본국 송환을 애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고갱을 변함없이 옹호했던 소장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가 스물일곱의 나이로 얼마 전에 요절했다. 그때까지 고갱이 거래하던 유일한 미술상이던 테오 반 고흐도 1891년에 죽었다. "마가 끼어 도 단단히 끼었다. "고 고갱은 푸념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다 2년도 안 되는 짧은 동안에 고갱은 주옥같은 작품을 약 80점이 나 그렸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그린 작품에 들어가는 (테하마나의 선조)는 '타히티 부인' 에 대한 고별인사로 간주할 만하다. 여기서 테하마나는 선교사들이 타히티 여성에게 파레우 대신 입기를 권장했던 단아한 '미션계 옷' 을 입었으면서도 신비스러운 공주의 자태로 나타 난다. 그녀 뒤에는 폴리네시아의 저승신과 상업문자가 보인다 상형 문자는 타히티의 문자가 아니라 이스터섬에서 발견된 해독 불능 문자였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고쟁이 그림을 통 해 붙들려고 했던 태고의 위엄, 아련한 자태를 테하마나에게 부여하고 있다. 1893년 6월 4일, 간신히 삼등 선실에 자리를 하나 얻은 고갱이 뒤쉬오폴트호에 올라 프랑 스로 떠났을 때 테하마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현실 부정이었는지 초연함이었는지 - 우리 는 잘 모른다. 8월 30일, 수중에 남은 단돈 4프랑만 가지고 마르세유에 내린 고갱은 다니엘 드 몽프레에 게 전보를 쳐서 파리행 열차표를 부탁했다. 제 5장 몽파르나스의 열대 1893년 12월, 고갱은 재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  안정을 누리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껴 주던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갱은 혼자였다. 아니 혼자나 마찬가지였다. 반 고흐 형제, 알베르 오리에, 메이에르 드 한은 죽었고, 라발은 죽어가고 있었으며, 메테, 몽프레, 세갱은 멀리 있었다. 그리고 피사로, 에밀 베르나르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고갱은 그랑드 쇼미에르가에 두 칸짜리 아파트를 얻었고 사태는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다. 알폰세 무차는 고갱에게 자기의 작업실을 빌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오를레랑의 삼촌에게 약 간의 유산도 물려 받았다. 그는 다니엘 드 몽프레 드가, 자를 모리스와 교우를 재개했다. 그 들의 도움으로 고갱은 뒤랑 뤼엘 화랑에서 타히티 시절에 그린 작품을 중심으로 개인전시회 를 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또 "나의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후일 발표되는 '노아 노아'인데 불행하게도 사를 모리스가 다 소 지나치게 '가다듬었다.' 앞서 고갱은 타히티 시절에 그린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자신한 '이아 오라나 마리아'를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1895년 11월 10일, 고갱의 첫 번 째 개인전 타히티에서 둘둘 말아 배 편으로 부쳤던 그림 마흔 점이 흰색, 노란색, 파란색 틀에 넣어 졌다. 뒤에 로통샹은 이렇게 술회했다. "이 전시회는 세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서는 분명히 성공이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람들은 화가가 시도한 독특한 기법이 아니라... 그의 과도한 문학주의 원시 -민속학주의에 낭패감을 느꼈다. " 카미유 피사로는 화단의 반응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시회는 지식인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들은 넋을 잃었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래 보인다. 그러나 이국적이긴 하지만 남태평양 섬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드가만이 높이 평가할 뿐이 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아예 말도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고정은 '청년은 야성이 살아 있 는 미지의 땅에서 스스로를 재충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예 술은 자네의 것이 아니다. 자네는 문명인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의견 통일을 보지 못 하고 헤어졌다." 다행히 고정을 알아준 비평가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방가르드 계열 문 학과 미술 분야의 권위 있는 비평지였던 '르뷔 블랑슈'지에 글을 기고하던 타데 나탕송 같 은 이는 상징주의 시인이 아니면서도 고갱을 높이 평가했다 몽파르나스 화실, 자기 선전의 진열장 1894년 1월 고갱은 베르생제토리가의 화실로 들어갔다. 멘가와 교차하는 사거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벽을 화사한 노랑과 올리브빛이 감도는 녹색으로 칠했다. 타히티 연인이 사 랑을 나누는 그림, (테 파루루)가 걸려 있는 창문에도 칠을 했다 그곳은 화실이라기보다는 거처였다. 고갱은 그곳을 자신의 작품을 선전하고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을 선보이는 일종 의 개인 화랑처럼 꾸몄다. 벽은 그가 좋아하는 화가들-크라나흐. 흘바인, 보티첼리, 퓌비 드 샤반, 마네, 드가-의 복제화와 "그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반 고흐, 세잔, 르동의 원화들-슈페 네커와 다니엘 드 몽프레가 그가 없는 동안 모아 두었음에 틀림없는-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니엘손) 그 방에는 또 "트로피, 군용품, 도끼, 부메랑, 인디언 도끼, 세모창, 창들이 있었 는데 하나같이 어떤 이름 모를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고 고갱의 전기를 쓴 로통샹은 전한다. '벽난로 장식 선반 위에는 수많은 광물표본과 조개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해군 장 교의 임시 숙소나 탐험가의 허름한 숙소를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실내장식은 파리에서 아주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린 자화상조차도 인정을 받기 위한 필사적인 전략의 일부로 보인다. 그의 놀 라운 (혹자는 이것을 보고 격분했는데) 차림새에 대해서도 비슷한 지적을 할 수 있다. 고갱 은 자신을 기인으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또 한 점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고 아르망 세갱은 뒤에 술회했다. "이젤도 자기가 만들었지만 캔 버스를 준비하는 방법, 물감을 이기는 과정도 모두 독창적으로 고안했다... 고갱은 자기 나름 의 옷 입는 법도 고안했다. 파리 사람들은, 양털 벙거지, 묵직한 감청색 외투, 정교하게 세공 된 버클 등으로 차려 입은 고갱을 거대한 마자르인이나 1655년의 렘브란트처럼 꾸미려고 안 달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얀 장갑에 은팔찌를 끼고 자기가 손수 깎은 지팡이에 몸을 기 대며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걸음걸이로 시내를 활보했다. 안나 라 자바네즈 안나 라 자바네즈와 그녀의 애완용 원숭이를 동반하고 거리에 나선 모습은 한결 그럴싸해 보였을 것이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젊은 혼혈여성 은 1893년 12월에서 1894년 가을까지 고갱의 애인으로 지냈다. 그녀는 1894년 가을 퐁타방 의 고갱 곁을 떠나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갱의 화실을 약탈한다. 그러나 고갱은 유럽에 머무 는 동안 그녀를 모델로 하여 역작을 그렸다. 땅딸한 이 여성은 중국제 같기도 하고 폴리네 시아제 같기도 한 의자에 알몸으로 마치 여왕처럼 앉아 있지만, 사실 그런 의자는 화실에 없었고 아랫벽의 장식무늬도 실재하지 않았다. 복숭아 빛깔의 벽, 파란 안락의자, 노란 바닥 -이것도 사실과 다른데 화실 벽은 연노랑색이었다-이 서로 겉도는 데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오만한 나체 여인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화가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토록 밝은 그림에 이토록 엄청난 신비가 담겨 있다니 !" 고갱은 회상록에서 말라르메의 이 말을 자랑스럽게 인용했다. 그는 화요일 저녁마다 시인 의 집에서 열리던 모임의 단골 멤버였다. "퓌이르 라-바 퓌이르(도주하라! 멀리 도주하라!)" 라는 말라르메의 시구는 시인 자신의 삶보다 고갱의 삶에 더 잘 어울리는 주제였다. 또 한 명의 시인 앙리 드 레니에는 말라르메의 집에 나타난 화가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르 동의 침묵과 대조되어 고갱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다.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는 화요일 모임에 여러 번 나타났다. 뱃사람이 입는 후줄근한 바지, 가무 잡잡한 피부 주름진 얼굴, 솥뚜껑만한 손은 강인하고 거친 인상을 풍겼으며 말라르메의 준 수한 용모, 세련된 교양미와 대조를 이루었다. 말라르메가 고작 센강을 오르내리기나 할 뿐 항해다운 항해는 해보지 못한 가냘픈 유람선의 선장처럼 보였다면, 고갱은 멀리 폴리네시아 의 바닷물에 씻기는 해안선까지 가 보았던 원양어선의 선장처럼 보였다. " 고갱은 말라르메를 숭배해 타히티로 떠나기 얼마 전 시인의 얼굴을 뛰어난 동판화에 담았 다. 말라르메는 고갱을 옹호하는 글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누리는 영향력을 발휘하여 고 갱에 관한 우호적인 글들이 나올 수 있도록 수선했다 "비통한 심정이다. " 고갱은 1898년 말라르메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남태평양에서 듣고 몽프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역시 자 신의 예술을 위해 죽은 순교자이며 그의 삶은 그가 쓴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어 " 시인이 본 고갱 이런저런 글 속에 등장하는 고갱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갱은 주목을 끌기 위해 이 상한 복장을 하고 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를 모리스에 따르면 고갱은 "뼈대가 굵 은 커다란 면상에 이마는 좁았으며 코는 휘었거나 매부리코라기보다는 꺾인 듯한 모양이었 대 입매는 곧았으며 입술은 가늘었다. 눈은 약간 튀어나왔는데... 머리와 상체는 거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파란 눈동자만 눈구멍 안에서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리스의 묘사는 계속된다. "매력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특이한 행동거지 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만함과,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자부심과, 진부함에 가까운 단 순성이 녹아 있었다. 이런 혼합이 그의 힘을 나타낸다는 것을 사람들은 금세 알아차렸다. 평 민 사이에서 생기를 얻게 되는 귀족성이라고 할까, 품위는 결여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고갱 의 미소에는 부드럽고 소박한 맛이 있었다. 그 웃음은 얇고 곧은 입술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긴장이 풀렸을때 입술은 그것이 약점이나 되는 것처럼 명랑함을 후회하고 심지어 는 명랑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듯이 보였다." '노아 노아', 책과 판화 파리 체류 시절에 고갱은 주로 두 가지 일에 몰두했다. 하나는 자기가 타히티에서 쓴 수 기를 뛰어난 삽화를 곁들인 두 권의 필사본('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노아 노아')으로 다듬 는 일이었고 닌 하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목판 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작가이자 화가로서 그가 이처럼 분방한 활동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에는, 사람들 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자신의 타히티 고정을 세 상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전파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연이 있었다. 거기서 에덴을 주제로 한 일련의 뛰어난 목판화들이 나왔다 '아우티 테 파페' '강가의 여 인들', '노아 노아' '향기', '테파루루' '사랑의 몸짓', '테 나베 나베 페누아' '환희의 땅', ' 파페 모에' '신비의 물', '오비리' '야만인'가 대표적이다. 그는 새로운 공정을 고안하고 모노타이프(드가가 이미 부활시킨)와 흐릿한 기법의 전통을 계승하여 수채 전사화와 인쇄 스케치 화를 만드는 데 정력을 쏟아부었다. 요컨대 고갱은 종 이 위에다가 그림과 조각의 중간선에 놓이는 '원시적'이면서도 세련된 작품을 표현했다. 오비리: "이 기이한 형상과 잔혹한수수께끼" 브르타뉴에서 돌아온 이후 고갱은 한동안 '야만인'으로 자처했다. 1894년부터는 다시 도자 기를 굽기 시작하여 가장 훌륭한 도자기라고 스스로 자부했던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오비리' '타히티 말로 야만인'이다. 이 커다란 작품은 광기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긴 머리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늑대를 짓누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나중에 고갱은 편지에 서 이 작품을 '도살자'라고 부르면서 마르케사의 자기 무덤 앞에 이것을 두고 싶으며, "살아 있을 동안에는 내 집 정원에" 놓고 싶다고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바친 '오비리' 목판화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여인은 고생의 생애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고 절박했던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화가가 이해 받을 수 있으 리라는 희망을 포기한 채 마침내 프랑스를 뜨기로 결심한 무렵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오비 리로 상징되는 잔혹한 패배와 야만성, 죽음은 화가에게 마지막 창작의 자극을 주었던 듯 하 다. 이 격렬하고 신비로우며 '원시적인' 작품이 1906년 파리에서 열린 고갱 회 고전에서 처음 으로 선을 보였을 때 젊은 화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 다. 그 중에서도 파블로 피카소는 '오비리'를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오는 한 인물의 토대로 삼을 만큼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유롭게 여생을 보내면서 저능아들과의 부질없는 다툼도 끝내려네" 그 모든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머문 1년은 고갱에게 깊은 패배감만을 안겨 주었 다 세찬 시련이 몰아닥쳤다. 1894년 여름, 고갱은 전에 타히티로 떠나면서 르풀뒤에 있는 마 리 앙리의 여관에 남겨 두었던 그린과 조각을 회수하려고 퐁타방으로 갔다 그러나 여주인은 봉사의 대가로 받은 것이니 이제는 자기 물건이라면서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작품을 돌려받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갱은 콩카르노 항구에서 안나와 원숭이를 집적거리는 뱃사람들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골절상을 입었다 부러진 다리는 잘 낫지 않았다 고갱은 아무 일도 못하 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넉 달을 보내면서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결 국 그는 마지막 출발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드루오 호텔에서 자기 작품을 공매에 부쳤다. 그 역시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 길로 마지막으로 처자식을 보러 코펜하겐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좌절감만을 느끼며 돌아섰다. 1594년 가을 고갱은 몽프레에게 프랑스를 영원히 뜨기로 했다는 결심을 전했다. "고통이 나의 용기를 앗아 갔네 특히 밤에는 한숨 못 자고 뜬눈으로... 남태평양으로 가서 다시는 돌 아오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12월에 파리로 돌아가겠네 유일한 목적은 값은 얼마를 받든 나의 소유물을 모조리 처분하기 위해서지. 잘만 되면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 편하고 자 유롭게 여생을 보내면서 저능아들과의 부질없는 다툼도 끝내려네. ...안녕, 그림이여, 내가 그 리고 싶어서 그리는 그림은 제외하고 말이지. 나는 집을 목조상으로 가득 채울 거라네." 제 6장 마지막 정열의 불꽃 1895년 6월 28일 파리 역 리옹 행 개찰구.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갱은 울고 있었다. 최후의 남태평양 여행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병고와 술과 정말에 찌든 고갱은, 마침내 그 어떤 객기도 허세도 음모도 퇘색시키지 못할 참다운 고결함에 이르게 된다. 두 달의 항해 끝에 1895년 9월 초 파페에테에 닿았다 배는 두 곳에 잠시 머물렀다. 한 곳 은 사이드항이었는데, 고갱이 빠져 있던 이집트 미술의 진수를 맛보기에는 체류가 너무 짧 았다. (하지만 춘화 엽서 몇 장을 구입해 나중에 마르키스의 오두막에 걸어 놓았다. 춘화에 분개한 이웃도 있었지만 즐거워한 이웃도 있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항에서는 좀더 오래 머물렀다. 고갱은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마오리 예술품을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타히티, 낙원? 또는 병원? 처음 몇 달은 실망스러운 나날이었다. 서구화가 빠르게 진척된 것을 보고 그는 곧 문명의 손길이 덜 닿은 외곽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마르키즈 제도에 가서 살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고갱의 건강은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파페에테 생활은 입원과 퇴원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1896년 7월, 1897년 1월, 1897년 12월, 1898년 9월, 1900년 12월, 1901년 2∼3월. 그 사이사이에도 물론 의사의 정기적인 진찰은 당연히 받아야 했다. 불행은 한꺼번 에 몰려오는 듯싶었다. 콩카르노에서 입은 골절상이 도졌고, 매독 후유증으로 고생하는가 하 면, 심장도 좋지 않았고, 음주문제도 심각했다. 뽀루지까지 나는 바람에 문둥병으로 오해한 테하마나가 내빼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열네 살 먹은 소녀를 새로 맞아들였고 타히티의 프랑스인 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 었지만 뿌리깊은 고독감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토 록 기대했건만 퐁타방에서 어울렸던 친구들과 '제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않 았다. 파리 체류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고갱은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내가 지금까지 해놓은 게 무어란 말인가?" 그는 1896년 4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문했다. "완전한 실패야. 나에겐 적수밖에 없다네 악운이 나를 인정 사정없이 쫓아다니는 것 같아. 사람들이 어김없이 도움을 받는 것은 그들의 나약함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지. 그들은 부탁 하는 요령도 알아 나를 도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내가 강한 줄로 다들 알았기 때문이 야. 그때는 자부심을 느꼈지. ...나는 영락없는 실패작이야." "그녀의 눈속에 깊이 숨어 있는 비밀" 하지만 이 절망 섞인 편지에는 고갱이 "내가 지금까지 그린 어떤 그림보다도 뛰어나다.고 보는 그림 -'테 아리이 바히네' '고귀한 여인' -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이 그림은 크라나흐 의 '누워 있는 다이애나' (고갱은 이 작품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와 마네의 '올림피아'(1891 년 이 작품이 뤽상부르 미술관에 들어왔을 때 고갱은 파리에서 이것을 베껴 두었다)를 살짝 자리바꿈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유럽의 누드화에서 거대한 남태평양의 형상이 창조되었 다. 섬세한 잎의 휘장을 경계선으로 발가벗은 여왕이 초호를 등지고 있다. 나무줄기를 휘감 고 있는 뱀은 고갱의 의도를 드러낸다 고갱은 원죄를 암시하지 않으면서 이브를 그리고 싶 었던 것이다 "타히티의 이브는 아주 섬세하고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눈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비밀은 불가사의함으로 남아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이 시기 (1896-1899년)에 고정은 가장 웅대하고 가장 낙천 적인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과일을 들고 있거나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과일을 따고 있는 인물 기도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듯 꼼짝 않고 있는 인물, 말을 타 고 가는 모습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은 예외 없이 울창한 열대수목에 둘러싸여 있다 제목도 생동감 넘친다. '나베 나베 마하나' '즐거운 날'. '파아 이 헤이혜' '타히티의 전원', '백마', '루페 루페' '과일 따기' "이것은 확 트여 있으면서도 덤불 과 개울 사이의 호젓한 공간에 자리잡은 참다운 생활이다. 거기서 여인들은 타히티가 안고 있는 풍요함을 바탕으로 자연이 스스로를 치장하는 웅장한 궁궐에서 나지막히 속삭인다. 우 화적인 빛깔, 찬란하지만 가라앉은 침묵의 대기는 이 모두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유언 타히티는 오직 화폭 위에만 존재하는 에덴 동산일 따름이었다 1897년 12월 절망에 내몰린 화가는 자살을 심각히 고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야심만만하게 구상했고 길이가 무려 4.2미터가 넘으며 '에덴의 낙원을 그린 벽화' 가운데 가장 유명하게 된 그림이었다. 분명히 고갱의 의도는 르네상스 화가들에서 쥐비 드 샤반에 이르기까지 그 가 존경했던 위대한 프레스코 장식 화가들의 대열에 당당히 끼는 데 있었다. 친구 몽프레에 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의 탄생 에 얽힌 전후사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12월 한 달 동안 (자살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네. 해서 죽기 전에 내 마음에 품어 두었던 대작을 그려 보기로 했지. 12월 한 달은 미친 듯 이 일했어 ...겉으로는 아주 투박해 보인다네. ...사람들은 아마 날림이라는 등 미완성이라는 등 한마디씩 해대겠지. 자기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이 작품은 내가 여태껏 그린 것 중에서 최고이며, 앞으로도 이것에 근접한 그림을 그릴 자신이 없다고 믿고 있네. 죽기 전에 나의 온 기운을 여기에 쏟아부은 셈이지. 작품 구상이 워낙 뚜렷해서인지 수정 할 필요도 못 느끼네. 서둘러 만들었다는 느낌은 사라 지고 어느덧 생동감이 싹트고 있어. 그림 상단의 양쪽 귀퉁이는 연 노랑으로 칠하고, 왼쪽에 는 제목을 오른쪽에는 내 이름을 써 넣었다네. 황금 벽 위의 양 귀퉁이가 손상된 프레스코 벽화처럼 말이야... 나는 이것을 걸작으로 본다네 " 이것은 인간운명의 다양한 행로와 의문 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아주 먼 옛날의 어떤 야만적 호사스러움" 이 무렵 고갱은 그가 스승으로 받아들였던 앵그르, 마네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가장 뛰어 나고 감동적인 누드화를 한 점 그렸다. '두 번 다시'라는 제목은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 귀'를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고갱의 생활을 향수의 눈길로 집약시킨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고갱이 끝내 성취하지 못했던 원시적 이상미를 잘 구현하고 있다. 나신은 고갱이 자신에게서 빠져 나가고 있다고 느꼈던 생명력을 나타낸다. "다른 그림 들과 같이 보낼 생각으로 작품 하나를 마무리짓고 있다네." 고갱은 몽프레에게 이렇게 썼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 내가 보기엔 괜찮은 작품이야. 나는 누드를 통해서 먼 옛날의 야만적 호사스러움을 암시하려고 노력중이라네. 전체적으로 침착하게 가라앉은 애잔한 색조로 뒤덮여 있지. 이 호사스러움을 낳는 것은 비단도 아니고 벨벳도 아니고 아마 포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금도 아니라네. 다만 화가의 손길로 풍요로워진 색채일 따름이라 네." "흘러간 기쁨의 향기를 저는 지금 이곳에서 맡습니다." 이 누드화의 당당함, 장대한 구성의 넉넉함, 이 시기에 그린 '백마'같은 여러 풍경화의 숨 막히는 광채는 고갱이 그 무렵 편지에서 토로한 바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는 당시 상징주의 시인들이 갈파한 대로 진정한 문학적 능력을 보여 준다.) "오두막 부근은 완전한 침묵이 감돌고 있습니다. 저는 자연의 숨막히는 향기 속에서 격렬한 조화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 있지요. 제가 예감하고 있는 형언할 길 없는 성스러운 공포가 희열을 고양시키는 느낌 이 듭니다. 저는 흘러간 기쁨의 향기를 지금 이곳에서 맡습니다-조각처럼 단단한 동물의 형 체들,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리듬, 그 특이한 부동성에 배어 있는 형언할 길 없는 태곳적의 거룩하고 종교적인 어떤 것, 저는 제 희망의 애처로운 걸음을 느낍니다." (1899년 3월 퐁테 나에서 보낸 편지) 활동가 고갱 가난과 병고에 시달린 고갱은 1899년과 1900년에는 붓을 거의 들지 못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 돈벌이를 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다 보니 일요일과 공휴일밖에는 그림 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네." 그는 나비파와 함께 전시회를 가질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해 온 파리의 젊은 추앙자 모리스 드니에게 이렇게 썼다. 볼라르에게 배편으로 보냈던 몇 점의 그림들-'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외 여덟 점-이 1,000프랑 이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은 고갱을 한층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는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임시직을 전전했는데 지방신문에서 일할 때는 나 름대로 열정을 쏟았다. '게프(말벌)'지에 풍자적인 글을 싣다가 나중에는 주간으로 들어앉았 다. 얼마 뒤 그 자리에서 물러난 고갱은 다시 '수리르(웃음)'지의 삽화를 그렸다 기사를 보 면 고갱은 자유주의적 논객의 반열에 올라설 만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현지. 카톨릭 세력 의 이익을 대변했다. 1900년 9월 23일에는 가톨릭당을 위해 기억에 남을 만한 연설을 하면 서 중국인을 "우리 조국의 깃발에 묻은 노란 얼룩'에 빗대기까지 했다. 고갱을 반식민주의 세계문화주의의 기구(곧 살펴보겠지만 마르키즈 제도에서는 그런 면모를 보였다)로서 이해 하려는 사람은 이런 적대감에서 실망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거듭 확인했듯이 고정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현대적이면서 고전 적이었고, 주관이 강하고 반골기질이 있었음에도 인정받기를 갈망했으며 ,원시인과 도시인이 한 몸에 공존하고 있었다 요컨대 고갱은 유배자로 남았다 또 다른 출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소모적인 정치현장을 피해 타히티를 떠나는 데 필요한 자금이 파리 에서 왔다. 마침내 볼라르가 1년에 일정한 숫자의 그림을 넘겨받는 대가로 매달 300프랑씩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고생이 10년 전부터 학수고대해 온 재정지원이었 다. 고갱은 새로운 출발을 계획할 수 있는 입장에 놓였다. "철저히 새롭고 원시적인 영감의 원칙을 가지고 나는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련다. 이곳에서 나의 상상력은 시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알만하고 매력을 느끼게 된' 타히티에 대중은 너무 익숙해졌다 타히티 때문에 나의 브르타뉴 그림이 감상적으로 보이듯이 마르키즈로 옮겨 가면 내가 그린 타히티 그림도 감미로워 보일 것이다." 원시성은 새로운 삶을 약속했다. "요즘은 가난도 가난이지만 나이보다 앞서 찾아온 노환 에 시달리느라 영 말이 아니다. 작업을 마무리짓기 위해서라도 잠시 쉬어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되었건 다음달에는 마르키즈 제도에 있는 아직도 문명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파투이 바로 옮겨 가서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 보련다. 전혀 때묻지 않은 그런 환경, 완전한 고독속 에서 지내노라면 나의 상상력을 다시 불살라 주고 나의 재능을 매듭지을 수 있게 해주는 정 열의 마지막 불꽃이 내 안에서 되살아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 마르키즈 제도, 히바 오아 고갱이 간 곳은 히바 오아섬(당시에는 도미니크라고 불렸다)의 아투오나였다. 그곳은 "마 르키즈 제도에서도 가장 문명화된 곳"(다니엘손)이었다 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고갱은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01년 9월 16일 섬에 닿은 고갱은 현지의 '가난한 백인들'에게 뜨 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게프'에서 성부와 중국인을 맹렬히 공격했던 고갱을 자신들을 위해 중앙 관료기구에 맞선 투사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고생은 마지막으로 반자연의 생활에 뛰어들어 생산적인 고립의 길을 택했다. 그는 처녀 하나를 애인으로 맞아들이고 쾌적한 오두막을 지었다 이것이 유명한 '쾌락의 집'이다 목각 문틀 위에 새겨진 이 집 이름은 자신의 생활신조를 표명하는 한편, 그가 여학생들을 ' 빗나가게' 만들까 봐 노심초사하던 카톨릭 선교사들을 약올리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18개월 동안 고갱은 자신의 건강상태와 그가 지역문제에 쏟아부은 시간을 고 려할 때 비교적 왕성하게 그리고 쓰고 스케치하고 조각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관료들에 맞 서 원주민을 옹호했으며, 적잖은 시간을 카톨릭 선교단 임원들과 갈등을 벌이는 데 투자했 다. 1902년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은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지만, 타히티 시절의 그림 보다 더 담백하다. 이들은 대체로 모든 원시주의적 상징, 폴리네시아어 제목, 민속적 치장물 을 벗어 던진 수작이다. '부채를 든 여인' '해변의 말 탄 사람들' '그리고 황금및 육체' '부 름' '말 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단순한 형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생동감 있는 빛깔 로 넘치는 이 걸작들은 고갱의 열정적인 토로와 일맥 상통한다. "이곳에서는 시가 저절로 솟아오른다. 붓을 놀리며 꿈속으로 나아가노라면 시정이 전달된다." "우리는 조형미술에서 자유를 창조했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고갱은 죽기 전해에 여러 글과 편지 를 통해서 자기의 삶을 이모저모로 반추하고 있다. "예술에 관한 나의 생각은 옳았다는 느 낌이 든다. ...나의 작품이 살아 남는다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한 화가의 기억도 살아 남을 것이다. " 이런 대목도 있다 "나는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눈에 그 사실을 눈치챈 다. 나의 작품에는 당혹스럽거나 경악스러운 면이 조금도 없다. '나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야 성적' 기질이 있을 뿐이다. (나의 작품은) 그래서 모방이 불가능하다." 1905년 5월 8일 고갱은 눈을 감는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되지만 그는 죽기 직전까지 도 유럽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고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맛보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고 갱은 스페인의 고색창연한 이국정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해 여름에 카다케스에서 늙은 고갱과 젊은 피카소가 만났더라면 어떻 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죽음을 한 달 앞두고 고갱은 당당하지만 애절한 편지를 샤를 모리스에게 보냈다.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것이 못 됩니다. 고독을 이겨내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려면 뱃심이 있어 야 합니다." 그가 이 무렵에 쓴 '전후' '환쟁이의 넋두리'에는 때로는 술독에 빠지고 줏대없 이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늙고 고독한 '히피'가 그려져 있지만, 그의 도발적인 비웃음과 꼼꼼한 논증은 그 절망 뒤에 숨어 있는 용기와 예술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숨기지 못한 다. 스스로 택한 유배, 마지막 궁핍에서 그는 참다운 고결함에 이른다. 역사는 그가 태평양에 서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던져 놓은 그의 마지막 글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잠간 멈추어 서서 그가 보나르, 마티스, 피카소 같은 후대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젊은 화가들 이 , "나에게 모종의 빛을 졌다."고 말한 고갱의 지적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고갱이 마지막으로 쓴 '환쟁이의 넋두리'에서는 그의 예술적 운명, 나아가서는 그가 존경 했던 당대 화가들의 운명이 현대의 사상적 흐름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영웅은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야만의 땅으로 유배를 떠난 덕분에 우리는 유럽 전체를 정 복했고, 최근에는 조형미술에서 자유를 창조했다 만세, 그리고 안녕, 폴 고갱." 기록과 증언 고갱의 편지 고갱이 아내와 친구들에게 보낸 가장 뜻깊고 감동적인 편지를 모아 놓았다. 고갱이 개인 적으로 썼거나 출판했던 다른 모든 글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들은 화가가 풍부한 문학적 재 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에밀 슈페네커에게 슈페네커 보게나. 기요맹한테서 편지 받았네. 전시회에서 자네가 자기 그림을 사고 싶어했다고 썼더군. 하지 만 벌써 임자가 정해져 있네. 가서 그 친구가 그린 다른 그림을 골라 보지 그러나? 그 친구 의 그림을 갖고 있으면 흐뭇한 마음이 들걸세.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가난에 시달리 는 화가의 그림을 사 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지만 말이야. 요즘은 이러다가 내가 미치고 말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드는구먼. 하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자꾸만 곱씹어 볼수록,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네 오래 전부터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다가오 는 듯 싶지만 그래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현상을 합리화해 왔지. 그 단어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 라파엘로 유파의 경우 사고 이전에 벌써 감각이 정식화되어 있은 지 오래였고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스케치를 할 때에도 그런 감각을 견지할 수 있었어. 덕분에 화가로 남을 수 있었지. 내가 보기에는 위대한 화가는 정식화에 능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 가장 섬세하고 그래서 눈에 잡히지 않는 감정이나 마음의 울림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말일세 자연의 무한한 창조 세계를 보게나. 모든 인간은 감정을 낳는 법칙 -강조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효과를 갖지- 이 그 안에 있지 않은가 말이야 커다란 거미를 보게나. 아니면 숲의 굵은 나무 줄기를 보라구. 자네가 깨닫지 사이에 이것들은 자네 안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네. 쥐와 같은 소름끼치는 대상에 손을 갖다 댈 때 우리가 몸을 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네 는 거부감을 지울 수 없네. 우리의 오감은 '곧바로 뇌에' 닿는다네. 아무리 지식을 쌓는다 하 더라도 만물의 무한성 이 찍어내는 감각은 파괴되지 않아. 그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이 선은 운치 있다. 묘사적이다 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지. 직선은 무한으로 나아가며, 창 조를 가둔다네. 수가 던지는 숙명은 또 어떤가 3과 7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충분히 말했다고 볼 수 있겠나? '숫자상으로는 더 적을지 모르지만 색채는 선보다 더 의미심장하네. 눈을 휘 어잡기 때문이지. 운치 있는 색이 있는가 하면 진부한 색도 있어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가 져다주는 색의 조화가 있는가 하면 어떤 색은 부담스러우리만큼 담대하지. 필적학으로 진실 한 사람의 특성과 거짓된 사람의 특성을 구분할 수 있다지 않나. 그렇다면 선과 색을 가지 고 예술가의 기질 안에 깃들여 있는 그보다 훨씬 숭고한 내용을 왜 드러낼 수 없다는 건가. 비운의 천재 세잔을 보게. 그 화가의 본질적으로 신비롭고 동양적인 기질(얼굴에서도 느껴 지지 않는가)을 보라구. 세잔은 자리에 드러누워 꿈꾸는 인간의 수수께끼와 평온함을 발산 하는 형식을 좋아한다네. 그의 무거운 색채는 동양적인 마음의 틀과 조화를 이루지. 남프랑 스 사람답게 온종일 산꼭대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베르길리우스를 읽는다네 그래서 그의 지평선은 매우 높고 그의 푸르름은 대단히 강렬하며 그의 빨강은 가슴 벅차리만큼 약동하지 다양한 의미층을 갖고 있어 읽는 이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베르길리우스 의 작품처럼 그의 회화에 담긴 문학성은 우화법을 구사하며 두 갈래 의미를 갖고 있어 세잔 의 그림에 나타난 배경은 현실적이면서도 풍부한 상상의 공간이라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세관의 그림을 보면서 "거 참 희한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지. 세잔은 신비주의자라네 그의 그림 역시 그렇지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수록 나는 사고의 울림을 옮긴다는 것이 문학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닫게 된다네 누가 옳은지 보세. 만일 내 말이 틀리다면 과거의 거장들이 사용했던 방법들을 두루 꿰고 있는 아카데미의 그 고명하신 양반들은 왜 자신들의 걸작을 내놓지 못 한단 말인가? 구성은 만들어 낼 수 있을 지 몰라도 기질, 정신, 가슴은 만들어 낼 수가 없는 법이야. 젊은 라파엘로는 이 점을 통찰한 것일세. 해서 그의 그림은 설명하기 어려운 선들의 조화가 나타나지. 왜 설명할 수 없는가 하면 그 선들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감추면 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야. 라파엘로 그림의 자연스러운 배경을 이루는 소도구들을 한번 보게나 그것들은 머리와 똑같은 느낌을 전한다네. 정화에 정화를 거듭한 결과지. 카롤뤼 뒤 랑의 풍경화는 초상화만큼이나 '난잡'하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느낌이 그래. 이 곳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예술과 씨름하고 있네. 돈 걱정, 밥벌이도 나를 다른 데로 한 눈 팔게 만들지는 못하지. 나더러 반아카데미파에 들어오라고 말했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일러줄까? 오늘은 100명이지만 내일은 200명이 된다네. 끼리끼리 싸고도는 상업화가가 그중 3분의 2를 차지하게 될 테지 자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제르베 같은 부류가 전면에 나설 거구 말이야 그럼 우리처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몽상가가 설 자리는 어디겠 나? 올해에는 '언론의 호평'을 받겠지. 하지만 이듬해에는 (라파엘로의 아류는 사방에 포진 해 있거든) 그들은 진창을 휘저으면서 자신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네에게 진흙을 던질 걸 세. 한눈 팔지 말고 '기를 쓰고 자유롭게' 그리게 그러다 보면 발전이 있을 거야. 자네에게 재 능이 있다면 머지않아 인정을 받게 될 날이 오지 않겠나. 하지만 그림 앞에서만 너무 땀을 쏟지는 말게나. 강한 감정은 곧바로 옮길 수 있는 법 아닌가. 꿈을 꾸면서 단순한 형식을 찾 도록 하게 일도 그렇지만 나는 아직 출발점에 서 있네 앞으로 6개월 안에는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 기 어려울 거야 아무튼 나는 무일푼이라네. 알거지 신세지. 그렇기 때문에 꿈에서 위안을 얻 으려는 건지도 모르지만. 살다보면 우리 형편도 차츰 나아지지 않겠는가. 집사람과 나는 프 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네 상상이 가지 않을 테지, 내가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는게! 아무쪼록 몸 건강히 지내게. 부인께도 안부 전하고 코펜하겐, 1885년 1월 14일 아내에게 그리운 당신에게 , 지금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편지를 쓰고 있소.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서 오게 된 셈이지. 왜 이리 재수가 없는지 번번이 일이 꼬이는구려 (파나마 운하) 회사에서 2주일 정도 일했는데 파리 본사에서 공사를 대부분 중지하라는 훈령이 내려왔지 뭐요. 인부 90명이 하루아침에 목이 잘렸지. 나도 신참이니까 당연히 명단에 올라 있었구. 그 길로 짐을 꾸려서 이 곳으로 왔소. 안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오. 라발은 얼마 전 황열병으로 몸져 누웠지만, 나는 다행 히 동종요법으로 금세 완쾌되었거든. 끝이 좋으면 다 좋아지는 법인가 보오. 당분간 우리는 흑인의 오두막집에서 지낼 작정이오 파나마 지협에 비하면 천국이지. 우리 밑에는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소 해안가에는 야자수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말이오. 집 주위 에는 별의별 과일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시내까지 걸어서 25분밖에 안 걸린다오. 흑인 남녀들은 크레올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자기네끼리 쉴새없이 지껄이면서 하루 종일 주변을 쏘다니고 있소. 생활이 단조롭지는 않아요. 단조롭기는커녕 정신이 없지. 이곳 프랑스 식민 지에서의 생활에 내가 얼마나 매료되어 있는지 모른다오. 아마 당신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 다.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자연, 때때로 서늘하기도 한 따뜻한 날씨. 한 사람이 생활하는 데 는 별로 돈이 들지 않는다오. 아주 조금이면 되지. 3만 프랑이 있으면 넓은 농장을 살 수 있 는데 그 농장의 1년 소출이 8만 프랑에서 10만 프랑은 된다오.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일 이라고 해야 흑인들이 과일과 채소를 거두어들일 때 잠시 감독하는 것뿐이오. 농작물은 그 냥 내버려두어도 무럭무럭 자란다오. 작업을 다시 시작했는데, 얼마 뒤면 괜찮은 그림을 몇 점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어 쨌든 앞으로 두서너 달은 돈이 조금 있어야 할 모양이오. 그게 유일한 걱정거리지. 당신도 나한테 소식을 좀 전하구려, 많은 변화가 있었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편지 한 통 없을 수 있단 말이오 6월 7일이 또다시 왔다가 갔건만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려 생일을 말하는 거요! 백인 남자가 딴마음 먹지 않고 살기는 그리 쉽지 않은 고장이오. 유혹하는 여자들이 적지 않거든. 피부색은 새까맣거나 희끄무레하거나 간에 아무튼 모두 검다오. 심지어는 과일을 주 면서 덫을 놓으려는 여자들도 있지. 엊그제만 하더라도 열여섯 먹은 흑인 처녀아이가-이쁘 기는 무척 이쁘더군 -갈라진 채 끝이 짜부라든 과바 열매를 주지 않겠소. 처녀는 가 버리고 그 과일을 먹으려고 하니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얼굴이 누렇게 뜬 변호사가 내 손에서 과 일을 빼앗더니 이렇게 한마디 하더군. "선생은 유럽인입니다. 이곳의 관습을 아직 잘 모르셔 서 그럽니다. 과일도 어디서 온 건지를 잘따져 가며 먹어야해요. 이 과일만 하더라도 예사 과일이 아닙니다. 마법이 씌어 있어요. 흑인 처녀가 자기 배에다 갖다 대고 뭉갰단 말입니 다. 나중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요." 나는 그 남자가 나를 속이는 줄로만 알았소. 헌데 그게 아니더구만 그 볼품없는 혼혈 남자의 -교육은 제대로 받았지 -말은 진담 이었소. 한 번 혼이 났으니 이제부터는 속아넘어가지 않겠지. 당신은 쓸데없는 걱정일랑 하 지 말구려 언젠가는 당신이 애들과 함께 이곳에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소. 화내지 말구려. 마르 티니크에도 학교는 있고, 백인들이 아주 드물기 때문에 대접을 잘 받는다오. 한 달에 두 번은 편지를 쓰구려 이 정도면 아주 못 쓴 편지는 아니겠지 생피에르, 1887년 6월 20일 아내에게 그리운 당신에게, 정확한 지적이오, 지난 6개월 동안 당신한테 편지를 한 통도 쓰지 못했지 하지만 내가 아 이들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6개월도 더 된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라오. 커다란 변고나 닥 쳐야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건지. 아이가 위험한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지만, (당신이 꾸며 대는 말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축하할 일은 아니잖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오. 그런 일은 사람을 불구나 백치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증세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법이거든 어쨌든 나도 시련에는 웬만큼 이골이 난 사람인가 보오. 내가 써서 보낸 편지가 당신 편지와 엇갈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소? 나보다 늦게 쓴 주 제에 일부러 소식을 끊었다고? 내가 편지를 쓰건 안 쓰건,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지난 5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아이들 소식을 한 달에 한 번은 내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래놓고도 당신은 아비노릇을 못 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나를 타박하는구려. 6개월 전만 해도 그래. 불쑥 떠오른 생각이기는 했지만, 나는 애들을 만나러 한번 가고 싶 었소. 그런데 코펜하겐의 당신 친정 식구들은 여비가 아깝다고 했지. 늘 그놈의 돈타령 정말 이지 인간미가 있는 사람들인지 야속했소. 옆에서 늘어놓는 '엉뚱한 소리'를 곧이듣는 당신 이 가련할 뿐이오. 그 사람들은 돈이 아깝지 않으면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 는 걸 당신은 왜 모르는 거요 '부부가 얼굴을 맞대지 못하기 때문에 날리는' 생활비는 돈이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요. 당신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뭐요? 당신은 나한테 가장 기대했던 게 뭐요? 하고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서인도제도에서 짐승처럼 일하 는 거요?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처자식을 위해서 ? 나도 많은 걸 희생했소 가족의 품을 떠 나 배를 곯아 가며 살고 있소. 그 대가로 내가 얻은 게 뭐란 말이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주고, 편지를 받아야 편지를 쓸 것 아니겠소. 나라는 사람을 잘 알지 않소. 나는 무턱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계산을 할 데와 안 할 데는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나는 맨주 먹, 맨가슴으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사람이오. 당신 언니는 아직도 당신한테 군림하려 드는 모양인데, 아니할 말로 동전 한푼이나 보태 주면서 그러는 거요? 좋소, 나한테 강요되는 역할을 내가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그런 다음 냉정히 따져 봅시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했는데, 내가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야말로 빚 좋은 개살구요. 당신 오빠들 말대로 내가 2,000-4,000프랑을 번다면 남들한테 손가락질은 안 당할지 모르지, 그런 다고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아요. 왜 앞날은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소. 나름대로의 자신감은 있지만, 그래도 노파심에서 (실력 있는)사람들한테 내가 과연 제대로 길을 택한 것인지 의견을 묻기도 했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의 선택이 옳았으며, 화가는 나의 천직이요 밑천이며 자식들의 미래라고 대답했소 나를 아버지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여 길 날이 오리라는 것이었소. 자식들이 장성하여 세상에 진출할 때 사람들에게 명망을 얻고 있는 아비가 든든한 언덕이 되어 주리라는 것이었소 내가 집을 떠나 그림에 몰두하는 것도 다 그날을 위해서가 아니겠소, 당장은 금전적으로 무용지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 렵겠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오. 어느 세월에 그날이 오겠느냐고 당신은 비웃을 테지.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이게 내 잘못이오? 누구보다도 괴로운 사람은 나요. 그림에 식견이 깊은 사람들이 나더러 당신은 재능이 없다. 게으르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진작에 보따리를 쌌을 거요. 밀레가 아비노룻을 제대로 못 해서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시켰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있소?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소? 바닷가의 한 어부 집에서 묵고 있소. 주민이 150명 쯤 되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 나는 이곳에서 야성인을 자처하며 농부처럼 지내고 있소. 무명 바지 (5년 묵은 것이라 누더기가 되었지만)를 입고 매일 작업을 한다오. 하루에 식비로 1프랑, 담뱃값으로 2프랑을 쓰면서 말이오. 그러니 혼자서 호강한다고 욕하지 말구려.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는 전혀 없소. 구필 화랑에서 내 전시회가 열리고 있소. 평판 은 좋게 난 모양이지만. 그림은 잘 안 팔리나 보오. 언제쯤 내 그림이 팔리게 될지 나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 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가장 장래성 있는 화가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려. 나에 관한 기사 몇 줄을 동봉하오. 코펜하겐에서 내가 예전 에 그린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는데 , 미리 나한테 의견을 물었더라면 좋을 뻔했소.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통킹에서 자리를 하나 얻을 수 없겠는지 알아보고 있소. 당분간 그곳에 머물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릴 참이오. 거기서 월급은 나올 테니까, 구 필 화랑에서 팔린 그림 값의 일부는 당신에게 줄 수 있을 것 같소 당분간은 빈털터리로 지 내야 할 모양이오. 목조상이 잘하면 팔릴 것도 같소. 팔리는 대로 당신에게 300프랑을 보내 겠소. 믿어도 좋아요. 시간이 좀 늦어 질 수도 있지만. 빨리 매듭을 짓기 위해 파리에 편지 를 쓸 작정이오 다음부터는 '당신의 아내, 메테' 같은 무미건조한 말로 편지를 끝맺지 말아 주기 바라오. 당신의 솔직한 목소리를 듣고 싶소. 전부터 누누이 강조했건만, 당신은 한 귀로 홀려 듣는구 려, 르풀뒤, 켕페를레 부근 피니스테르 1889년 6월 말 빈센트 반 고흐에게 나의 빈센트, 장문의 편지를 보내 주셨는데 답장이 너무 늦었습니다. 프로방스에서 당신이 얼마나 외롭 게 지내고 있는지, 당신을 아끼는 친구들의 소식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 다만, 여건이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드 한과 함께 상당히 큰 일거리 하나를 맡 게 되었거든요. 우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을 장식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벽 하나 로 끝낼 생각이었습니다만, 결국 문틀까지 포함해서 사방 벽을 모두 손대지 않을 수 없었습 니다. 배우는 것도 많았고, 유익한 작업이었습니다. 드 한은 가로 2m 세로 1.5m 크기의 대 형 그림을 회벽 위 높은 곳에 그렸습니다. 제가 그려서 동봉했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이곳 아낙네들이 노적가리가 쌓여 있는 삼밭에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완성도 높은 훌륭한 작품이 라고 생각합니다. 더 할 나위없이 진지하게 그려졌지요. 저는 바닷가를 종종걸음으로 걸어. 농촌 아낙네를 그렸습니다. 강아지와 암소 한 마리를 달고서 말이지요. 문은 모조리 초상화로 장식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일했습니다. 하루빨 리 완성품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러니 일을 마치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 이었고, 자연히 차일피일 편지를 미루게 되었지요. 이제서야 당신과 오붓하게 정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군요. 금년에는 종교화를 한 점 밖에 그리지 않았습니다. 상상력이 살아 움직이게 하려면 틈나 는 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을 바라보면 새로운 희열 이 샘솟지 요. 결국은 개성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올해에 제가 심혈을 쏟은 대상은 소를 끌고 바닷가를 무심하게 거니는 시골 아이들의 꾸 밈없는 모습입니다. 저는 야외를 그렸건 실내를 그렸건 현실을 호도하는 그럴싸한 눈속임 그림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으므로, 이 황량한 형상들에다 야성을 담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제 안에서 제 스스로 발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곳 브르타뉴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는 잠시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들은 파리라 는 대도시가 있다는 것도, 지금이 1889년이 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모 른다는 느낌 말입니다. 남부 프랑스와는 대조적인 분위기지요. 이곳은 브르타뉴 말처럼 모든 것이 억세고 굳게 닫혀 있습니다 (영원토록 그럴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차림새 또한 상징 성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카톨릭의 깊은 영향력이 느껴집니다 가슴을 꼭 조이는 드레 스의 등 부분은 십자가를 연상시키며, 여자들은 검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릅니다. 수녀처럼 말이지요. 누르스름하고 시무룩한 그 세모꼴 얼굴은 흡사 동양인 같습니다. 저라고 해서 왜 자연을 꼬치꼬치 파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연 속에서 제가 보는 것, 제 마 음에 와 닿는 것을 포기하지 못할 뿐입니다. 바위는 검고 노랗습니다. 브르타뉴 사람들이 입 고 있는 옷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아마빛으로, 요염하게 묘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 다. 아직도 하느님과 본당 신부를 두려워하는 브르타뉴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 처럼 모자를 쓰고 농기구를 듭니다. 남부의 열정과는 거리가 있는 그런 모습을 저는 그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는 대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해초를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지요 띄엄띄 엄 쌓여 있는 상자 같은 그들은 파란 드레스와 검은 머릿수건만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밭에다 뿌릴 거름으로 쓰기 위해 그들이 줍고 있는 해초는 누런 황토빛깔입니다. 아니 노랗다기보다는 분홍빛에 가까운데. 그것은 어두운 바다의 습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매일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문득 생존을 위한 몸부림, (자연의) 비정한 법칙에 대한 순 응, 처연함을 느낍니다 저는 그것을 화폭 위에 담으려고 애씁니다. 우연에 기대지 않고 이성 적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딱딱한 몸짓과 칙칙한 빛깔이 의도적으로 강조된 듯한 느낌도 듭 니다 모두가 '인위적'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그림에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요? 먼 옛날부터 그림에는 철두철미 관습적인 것, 의도적인 '모든 것'이 있어 왔습니다. 자 연적인 것과 거리가 멀며. 따라서 인위적이지요. 과거의 거장들은 천재였다고 당신은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재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들처럼 발전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우리가 기교적으로 보이고, 우리 눈 에는 일본인이 기교적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 우리의 관습, 우리가 전형적이라고 보는 것에 중대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상이나 개성, 또는 다 른 어떤 요소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집단과는 다르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 때, 그는 꾸민 듯한, 따라서 인위적인 듯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를에 있는 생트로핌 교회의 입구를 보셨겠지요. 북부의 관점이나 기법과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결코 자연스러운 비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은 역겨움없이 그것에 감복했습니 다. (진실은 사람이 당시의 심정 속에서 느끼는 무엇입니다.) 꿈을 꾸겠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꿈을 꿉니다. 억압을 떨쳐 내겠다는 의지와 역량이 있는 사람은 억압을 떨쳐 냅니다. 알고 보면 꿈은 늘 현실에서 나옵니다. 야성의 인디언이 꾸는 꿈속에는 멋쟁이 파리 신사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드 한은 여전히 르풀뒤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억해 주는 그 자상한 배려에 진 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구요. 당신이 교환하자는 뜻을 언뜻 비추셨던 (좋고 말고요.) 렘브란트 풍의 스케치는 언제쯤 받아 볼 수 있을는지 요. 건투를 빕니다. 르풀뒤, 1889년 10월 20일 에밀 베르나르에게 베르나르에게 , 정성과 애정이 깃들인 편지를 보내주어서 고맙네. 그래 내가지금껏 답장을 하지 않은 것 은 울적함 때문이었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그링게 애를 썼건만, 나의 가슴을 옥죄는 이 모든 괴로움은 필설로는 형언할 수가 없다네. 대 놓고 나의 그림 앞에서 독설을 퍼부을 패 거리야 사실 마음에 두지 않고 있어. 나의 그림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 아직은 근접해 있을 뿐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세. 예술에서 희생은 불가피하다네.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시행착오를 동반하면서 말이지. 공중에 뜬 관념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표현을 얻지 못하지. 그러게 말일세. 우리는 잠시 천국에 닿지만 그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라네 하지만 말이네 그 꿈결 같은 '순간'은 그 어떤 물질보다도 강력하다네. 추구하고 사유 하는 우리네 예술가는 세상이 우리에게 휘두르는 주먹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하지 만 그건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굴복이 라네. 돌은 부서져도 글은 남는다네. 우리는 어려운 지 경에 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않은가. 난 아직도 달아날 수 있어 내가 원하는 다 통킹 에서 번듯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면, 나는 그림도 그리면서 돈도 벌 수 있거든 동양의 전부 그 모두가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봐. 그곳에 가면 나도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 테지. 서양은 지금 쇠락해 있어. 한두 해만 지나면 몰라보게 강건해질 걸세 . '올림피아'(마네의 걸작:역주)가 팔릴지도 모른다니 세상일이란 참 묘하지. 화가는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말이야 루브르가 인수할까? 내가 보기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 풍랑이 거셀 때는 그런 소식도 위안이 된다네. 차라리 물난리라도 났으면 좋겠어. 그럼 억 만금을 주고라도 '올림피아'를 사들이려고 하겠지. 밀레 못지않은 값을 치르고서 말이야. 지 금은 비록 무지와 몽매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그럴수록 지평선 저 너머의 밝은 세상은 우리 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법이라네. 자네는 젊으니까 그날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주제로 글을 한 편 쓰기도 했네만, 올해에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아. 오리에 한테 편지를 두 통 썼는데 이 친구 답장을 안 하는군. 형편없는 친구 같으니. '모데르니스트 '지가 오지 않아서 그 악마가 쓴 글도 읽지 못했다네. 내가 준 항아리를 쳐다보는 자네 누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웃음이 나오더라구. 자 네한테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나는 도자기에 대한 자네 누이의 안목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 불이 시원치 않았는지 생각만큼 잘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네. 자네야 예전부터 -'모데르니스트' 지상에 내가 그런 글을 쓴 적도 있네만- 내가 모든 표 현매체에서 개성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회색 도자기의 개성은 고온의 불길이 네 지옥의 불길에 그슬린 이 형상은 그러한 특질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해. 지옥을 방문했던 단테의 머리에도 화가처럼 언뜻 그런 생각이 스치지 않았을까 싶어. 불쌍 하게도 됐지, 고통을 견디느라 배배 뒤틀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흠 집이 아주 없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빈센트한테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 우리가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다고 자네에게 지적했 다지. 내가 반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빈센트에게 띄웠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내가 만든 도자기를 화사한 배경 앞에 두고 찍은 사 진 한 장을 보내 주겠나? 표면의 광채가 살아날 수 있도록 조명도 충분히 주고 말일세 건투를 비네 마들렌에게 거친 도자기를 주어서 미안하게 됐구만 르풀뒤, 1890년 앙드레 퐁페나에게 검고 거대한 잠이 카의 생 위로 떨어진다. 잠들거라, 모든 희망이여 잠들거라, 모든 갈망 이여 베를랜 퐁테나 씨께 , '메르퀴르 드 프랑스' 2월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두 편 읽었습니다 렘브란트와 볼라르 화랑 전시회 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후자는 저와도 관련이 있었어요. 탐탁치않게 생각하면 서도, 당신은 자신을 감동시키지 않는 화가의 예술 또는 그의 작품을 검토하려고, 그를 공정 하게 다루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비평가를 저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니 , 그럴수록 더-거기 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 는 것이 화가 본연의 자세라는 생각을 늘 가져 왔습니다. 그 점에서는 흔히 우정에서 비롯 되는 찬사 일변도의 비평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 래가 과묵한 사람입니다만,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하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충 동이 제 안에서 한번 일어나니까. 그것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더군요. 아마 저의 피가 뜨겁기 때문인가 봅니다. 답신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글에 영향받고 자극받아서 나온 예술에 관한 저의 개인적인 넋두리라고 보아 주십시오. 우리들 화가는 가난을 팔자로 타고난 사람들이라서 물질적 생존에 뒤따르는 어려움을 이 렇다 할 불만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창작에 걸림돌로 작용할 때는 정말이지 괴롭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니까요! 그것은 실망을 낳고, 실망은 다시 무력감, 분노,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이 너무나 잘 아는 사정일 테지 요 그런데도 제가 새삼스럽게 이런 사정을 거론하는 것은 수많은 결점들에 대한 당신의 일 리 있는 지적에 대하여 저 역시 공감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폭력, 단조로운 색조, 자의적인 채색 등등-그렇습니다. 아마 그 모두가 거기 있겠지요 아니, 거기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 인 의미에서 이야기되는 그러한 색조의 반복. 그러한 단조로운 조화는 때로 는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카랑카랑한 소리로 튀어나오는 동양의 영창과 그에 수반 되는 비슷한 가락의 낭랑한 음조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풍성한 효과를 낳는 그 충만 한 대조의 느낌 말입니다 베토벤도 곧잘 이용한 방식이지요. (제가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 했다면 말씀입니다.) 가령 '비창' 소나타에서 그랬어요. 들라크루아는 은은한 밤색과 보라색 의 거듭되는 배합 어둑한 외피로 드라마를 암시하고 있지요. 루브르에 자주 가시는 걸로 알 고 있습니다 치마부에의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서 제가 드린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현대 회화에서 앞으로 색채가 떠맡게 될 음악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색은 음악과 같이 진동이며 , 가장 일반적이라서 원래 붙들기가 어려운 것, 바로 내면의 힘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 완전한 정적이 깃들인 오두막에서 저는 자연의 향내에 도취하면서 격렬한 조화에 대 한 상념에 잠깁니다. 제가 예감하는 태곳적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신성한 공포로 고양된 희 열입니다. 지나간 환희의 내음을 저는 지금 이 곳에서 맡고 있습니다. 조각처럼 단단한 동물 들의 형체. 그들의 특이한 부동성에는, 그들이 움직이는 리듬에는 고대적이고 거룩하며 종교 적인,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꿈꾸는 듯한 눈빛은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수수께끼의 몽롱한 표면입니다. 그리고 밤이 찾아듭니다 사위가 고요해지지요. 저는 제 앞의 무한한 공간에 펼쳐진 꿈을 '이해하지 않고 보기' 위해 눈을 감습니다 제 희망의 애처로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어떤 그 림이 찬사를 받느냐에 관심이 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아. 고갱이 늘 이렇게만 그려 준다면!" 하지만 저는 늘 그렇게 되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넓은 화폭에 고갱은 내보이고 있지만 그 알레고리의 뜻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그래요. 저의 꿈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알레고리와는 애시당초 관련이 없지요. (말라르 메의 말을 빌리면) 음악시는 대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예술작 품의 본질은 바로 '표현되지 않는 것. 작품의 표면에 물질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에 있습 니다. 말라르메는 또 제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토록 밝은 그림 에 이토록 많은 신비가 깃들여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림으로 돌아가지요. 그 안에는 우상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설명은 아니었고 조 각품, 아니 조각품이라기보다는 동물의 형상, 나아가서는 그 동물마저도 제 오두막 앞에 펼 쳐진 꿈속에서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녹아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근원과 우리의 미래에 담 겨 있는 수수께끼를 측량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상상 속에서 어루만져 주는 '우리의 원초적 혼'을 지배하는 자연 말입니다 제가 꿈꾸며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저의 영혼 안에서. 제 주위에서 처연히 울고 있던 모든 것을 이해가 가능한 알레고리로 표현한다는 것은 저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겠지 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지만요. 정신을 차려 보니 저의 꿈-그림은 끝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고 가는가? 더 이상 캔버스의 일부가 아니라 거기서 떨어져 나와 구체적인 언어로 그림틀 밖의 벽에 명기되었습니다만, 그것은 제목이 아니라 서명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사전에 나오는 추상어, 구체어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뜻을 이 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림에서 그것들을 파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의미심장한 분 위기 속에서 저는 저의 꿈을 문학적 방편에 의존함이 없이, 제 힘 닿는 데까지 단순하게 옮 겨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지요. 그런 점에서는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비난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 자체가 글러 먹었으니 목표를 바꾸어, 이미 공인되고 신성화된 다른 관념들을 기웃거려 보라 질타하지는 말아 주 십시오 저의 손으로 공공건물이 장식되는 것을 정부가 승인하지 않는 것은 온당한 처사입니다 그 러한 그림은 다수의 사고방식과 충돌을 빛을 뿐더러, 제 입장에서도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 들여 결국 자신을 기만하거나 스스로에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뒤랑뤼엘 화랑의 제 전시회에서 한 젊은이가 제 그림을 못 알아먹겠다면서 드가에게 설명 을 부탁했습니다 드가는 웃으면서 젊은이에게 라퐁텐의 우화 한 대목을 들려주었습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고갱은 목걸이를 안 채운 굶주린 늑대라네" 우리가 제도권 미술로부터, 그것의 인정을 못 받으면 명예도 돈도 안정도 포기해야 하는 그 공식들의 잡탕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데 꼬박 15년이 걸렸습니다 선, 색깔, 구성, 자연 앞 에서의 진지성, 제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고비는 넘겼습니다 네 우리는 자유롭지요. 하지 만 아직도 위험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가 당신께 이 지리한 장문의 편지를 쓴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진지하고 선의로 가득 차 있으며 박식하지요-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꿈꾸도록 우리에 게 강요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네 전문분야인 문학말고는 안중에 없어서 우리 관심사가 미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정이 그러하고 보니 말라르메가 내린 비평가의 정의를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남의 일에 끼여들어 감 놓아라 배놓아라 간섭하는 신사들이라고 했던 가요. 말라르메를 기리는 뜻에서 붓 가는 대로 서둘러 그린 스케치를 동봉합니다. 고매하고 만 인의 사랑을 받았으며 어둠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을 가졌던 그분의 얼굴에 대한 희미한 추억이라고나 할까요. 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고 저의 광기와 야성을 너그러이 보아 주 십사 하는 호소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타히티, 1899년 3월 마주보는 고갱 고갱과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짤막한 인상기. '거친, 자신만만한, 수줍은, 냉소적인, 호감이 가는, 기절초풍할, 우스꽝스러운, 육중한, 불같은, 너그러운, 자기중심적인, 준수한, 파 렴치한, 전설적인'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오스니 ,1883년 괴물 같은 고갱이 자네와 함께 있다니 기쁘군. 자네 밑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수 없었더라 면 그 친구 세상 살 맛이 안 났을 거야. 거칠지만 예의범절은 아는 친구라 같이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걸세. 물불 안 가리고 (일에) 덤벼들 거야. 기요맹이 피사로에게 1883년 6월 퐁타방,1886년 큰 키, 검은 머리카락, 가무잡잡한 피부, 무거운 눈꺼풀, 번듯한 이목구비가 한데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 무렵의 고갱은 준수한 남자였다... 그는 브르타뉴의 어부처럼 헐렁한 청색 바지를 입었고 멋진 베레모를 비뚜름하니 쓰고 있 었다. 걷는 모습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연안어선에 올라탄 비스케만 (프랑스 서해안)의 유복 한 선장 같았다. 광기나 몰락의 자취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고갱을 어려워 했고, 아무리 당돌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굴지 못했다. "독종이다" 이것이 고갱에 대한 일반 적인 평가였다. 아치볼드 스틴디시 해트릭 '한 화가의 50년 순례기', 1939년 파리, 1889∼1891년 고갱은 1889년 말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그는 뼈마디가 굵고 단단한 사람이어서 보통 키였음에도 훤칠해 보였다. 그만큼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거무스레 한 안색은 강인한 인상을 주었으나 나이에 비해 겉늙어 보이는 얼굴은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었어도 그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내 왔는가를 드러내고 있었 다. 고갱의 옷차림새에는 근사하다거나 당당하다거나 남의 눈길을 끄는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는 검푸른 빛깔의 베레모를 머리에 얹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놓은 황갈색 긴 맥펄레인 외 투는 언제 보아도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다 드러나는 외투 밑의 양복은 군데 군데 물감이 묻어 있었다. 고갱은 조끼 대신 브르타뉴풍으로 재단된 감청색 셔츠를 입었다 나무를 쪼아 만든 나막신을 뒤덮다시피 한 그의 나팔바지는 통이 너무 컸다 세련되어 보이 라고 일부러 재단을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바지는 '앵콩파라블(비교불능)' 점포에서 단돈 12프랑 반을 주고 산 기성복이었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일이지만 옷에 관한 한 고 갱은 무조건 싸고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수입원이 없었으므로 한 푼이라도 아껴서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고갱은 정직한 사람이어서 물건값은 어김없이 지불했다 장 드 로통샹 '고갱', 1906년 르풀뒤 ,1889∼1890년 이 무렵 고갱은 마흔두 살이었다.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고 몸도 여전히 건강했다. 자세는 곧았고 구릿빛 얼굴에 머리카락은 길고 검었다. 매부리 코. 커다란 녹색 눈, 턱 주위 에 듬성듬성 난 수염, 팝은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진지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침착하고 신중하게 행동했지만 주위에 속물이 있을 때는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기운이 장사였으나 힘을 과시하는 것은 내켜 하지 않았다 느린 걸음걸이, 절도 있는 동작, 엄한 표정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자연스러운 위엄을 낳았다 이 차갑고 무 표정한 가면 뒤에는 늘 새로운 감각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선원으로 각지를 떠도는 동안 그는 기초적이며 실용적인 처세훈 몇 가지를 받아들였고. 자신이 즐겨 장식했던 일상용품들에다 문제의 구절을 수도 없이 새겨 놓았다 "술과 사랑과 담배는 영원하다!" 이렇듯 고갱은 감각을 맹렬히 갈구했지만 감정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의 성격적 바탕이 되었던 것은 지독한 냉소주의, 세상 전체를 조소의 대상으로 자신의 힘을 미화하기 위한 수 단으로, 자신의 개성적 창조를 위한 원료 정도로 여기는 천재의 자기중심성이었다... 하지만 이 화가가 속물 부르주아나 술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주었던 것은 바로 그러 한 고삐 풀린 과도한 에고이즘이었다 그는 영웅적인 인간이었고, 시종일관 그런 모습을 견 지했다. 샤를 샤세의 '고갱과 그의 시대'에 인용된 모테레의 말, 1955년 타히티 ,1891년 뭍에 내린 고갱이 원주민, 그중에서도 특히 여자들의 환성과 경악을 자아냈다 사실을 빼 놓을 수 없겠다. 고갱 자신도 이미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불안감을 품고 있었지만, 고갱의 풍채가 워낙 좋았고 상대를 경멸하는 듯한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챙이 넓은 갈색 카우보이 펠트 모자 밑으로 어 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머리털이었다. 제노 대위 '가제트 데 보자르' 47 호, 1956년 파리, 1893-1895년 이 무렵 고갱은 어쩌다가 누군가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마다 이상야릇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그것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고갱은 몸에 꼭 달라붙고 진주조개 단추가 박혀 있는 길다란 청색 프록코트를 입었다 그 밑에 받쳐입은 청색 조끼에도 가지런히 단추가 달려 있었고 목 깃은 녹색과 황색으로 수놓여 있었다. 바지는 담갈색이었다. 머리에는 하늘색 챙이 달린 회 색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미끈하다기보다는 억센 두 손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횐 장 갑 안에 숨겨져 있었다 화가는 지팡이 대신 손수 야성적 조각을 해 넣었고 우아한 진주를 박아 넣은 길쭉한 막대기를 짚고 다녔다. 솔직히 이렇게 희한하게 차려 입어도 고갱에게는 마자르족이나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 같은 위풍당당함은 우러나오지 않았고, 희극의 사회자처럼 보였다. 고갱은 이렇게 잔뜩 차려 입고 1894년 (나라의 녹을 받는) 남태평양 주재원을 지망하여 식민지부 차관을 만났지 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괴짜 지원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수위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가히 상상이 가지 않는가! 장 드 로통샹 '고갱'. 1906년 아투오나, 1902년 '환쟁이' 코케(고갱)는 담배, 밥, 사탕, 그리고 고갱이 홀딱 반한 향기로운 머리털을 휘날 리던 어여쁜 처녀들이 몸에 두르고 있던 천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마르키즈에서의 생활은 그가 편지에서 갈구했던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은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고갱은 원주민들에게 허물없이 대했으며. 그들이 자기를 이용하는 것 을 마치 즐기듯이 방치하면서 전혀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가제트 데 보자르'에 실린 포티에의 글에 인용된 기욤 르 브로네크의 말 1956년 아투오나,1903년 죽기 2년 전 ... 시름시름 앓던 인상파 화가 고갱 씨는 아투오나에 정착하여 스스로 '쾌락 의 집'이라고 부르던 곳에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원주민들이 당국에 반기를 들도록 부추기는 데 힘을 기울여 그들이 납세를 거부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도록 사주했습니다 등교 거부에 앞장서기 위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병든 몸이었지만 타후아타에서 온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섬으로 돌아 가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해안까지 직접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 점은 헌병대의 보고서도 뒷받 침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A. 살레 총독이 식민지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1903년, 8월 다니엘손의 '남태평양의 고갱'에 인용 고갱이 본 빈센트 반 고흐 고갱은 죽기 직전에 그동안 써 둔 회상록을 모아서 다듬었다. 이것은 1923년에야 '전후' 로, 그리고 1951년에 '환쟁이의 넋두리'로 발간된다. 여기서 그는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 와 함께 머무는 동안 있었던 비극적인 일화를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 만에 회상한다. 반 고흐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언젠가 여건이 되면 반드시 쓰겠지만, 지금 은 반 고흐에 관한 아니, 우리 두 사람에 관한-몇 가지 사실을 밝혀서 몇몇 집단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려 한다. 지금까지 나와 꾸준한 만남을 가지면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 가운데 여러 명이 미쳐 버 린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반 고흐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패 거리들은 악의에서 -또 어떤 패거리들은 무지에서 -그들이 미친 것은 나 때문이 라고 수군 거린다. 물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자기 친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나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과 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비극이 생겨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 고흐는 요양생활을 하고 있던 정신병원에서 편지를 보내 왔다. "파리에 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곳에는 아직도 권위자들이 있으니까요. 당신 은 전문가를 찾아가서 당신의 광기를 치유해 달라고 매달려야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광인 아닙니까?" 그것은 건전한 충고였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의 충고에 따르지 않았 다 그 반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 '메르퀴르'지를 읽은 사람들은 몇 년 전에 간행된 반 고흐의 편지에서 그가 얼마나 나를 아를로 데려오지 못해 안달이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는 나를 중심으로 공동화 실을 꾸미고 싶어했다. 그 무렵 나는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퐁타방에서 내가 출발시킨 연구모 임이 그 지방에 애착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모호한 육감으로 무언가 비정상적인 분위 기를 눈치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계속 뭉그적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심금을 울리는 반 고흐의 우정에 감복하여 출발을 결행했다. 밤늦게 아를에 도착하여 심야영업을 하는 카페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카페 주인은 나를 쓰윽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게 누구람. 난 댁을 안다우." 내가 반 고흐에게 자화상을 보냈다는 사실로 주인이 왜 반색을 했는지가 충분히 설명되고 도 남을 것이다. 반 고흐는 카페 주인에게 내 자화상을 보여 주며 곧 도착할 친구라고 말했 던 것이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각에 그를 깨우러 갔다. 짐 정 리를 하고 잡담을 나누고 산책을 하면서 아를과 아를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탄복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갔다. (그러 나 아를 사람들은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날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반 고흐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나는 새롭게 시작했 다. 뇌가 희한하게 생겨 먹어서인지 나는 남들처럼 마음먹은 대로 붓이 잘 안 나간다. 기차 를 타고 가다가 아무 데서나 내려 물감을 꺼내 눈깜빡할 사이에 빛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다 그림이 마르면 뤽상부르로 보내지고 거기에는 카롤뤼 뒤 랑이 라는 서명이 쓰 인다. 나는 그런 그림을 높이 사지 않지만 그 사람만큼은 높이 산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차분하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불안하다. 어느 곳에 가든자연 전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뜸들이는 기간이 내게는 필요하다. 그 만큼 자연은 변화무쌍하고 변덕스러우며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아를과 그 주변의 뚜렷한 풍취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만 3주가 걸렸다. 우리는 꾸 준히 일했다 특히 반 고흐가 그랬다 한 사람은 화산, 한 사람은 안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 는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장먼저 놀란 것은 작업실이 너무 지저분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어지럽고 무질서한데 도 그의 그림은 빛났고 그의 말 또한 빛났다. 도데, 공쿠르, '성서'는 이 네덜란드 사람의 뇌 를 불살랐다. 아를에 있는 부두, 다리, 배, 남부 프랑스 전체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네덜란드 로 자리잡았다. 그는 심지어 네덜란드어로 글을 쓰는 법도 잊어버렸고 이미 간행된 동생에 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처럼 알맹이 없는 표현을 다 소 남용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오로지 프랑스어로만 용케도 글을 썼다. 비판의 저변에 놓여 있는 이성을 실타래처럼 뒤얽힌 그의 사고로부터 풀어내려고 안간힘 을 써 보았지만 나는 그의 그림과 말이 빚어 내는 모순을 도저히 해명 할 수가 없었다. 가 령 그는 메조니에에게 무한한 존경의 염을 품고 있었고 앵그르는 끔찍히 싫어했다 드가는 그를 절망스럽게 만들었고 세잔은 허풍선이에 지나지 않았다. 몬티첼리를 생각할 때면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를 노엽게 만든 것 하나는 비록 이마가 좁아 저능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득이 인정 할 수밖에 없을 때였다. 거기다가 나는 한없는 부 드러움이라고나 할까, '성서'에서 말하는 이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첫 달부터 나는 공동자금의 이용에서 똑같이 무절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대처 해야 했을까? 미묘한 상황이었다 비록 적은 액수이기는 했으나 돈궤를 채우는 사람은 구필 화랑에서 일하던 반 고흐의 동생이었다. 나 역시 그림을 팔아서 생활비를 보태기는 했지만 말이다. 무언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나는 평소의 나답 지 않게 아주조심스럽게 넌지시 그 이야기를 비추었다 반 고흐는 뜻밖에도 그 지적을 고깝 게 여기지 않았다. 돈궤 하나에는 위생적인 야간 나들이(유곽)를 위한 돈, 담뱃값, 비상금, 집세를 넣어 두기 로 했고, 돈궤 위에는 종이 와 연필을 올려놓아 각자가 상자에서 꺼내 쓴 돈을 양심적으로 적어 놓기로 했다. 또 다른 돈궤에는 남은 돈을 몽땅 넣고 그것을 사등분으로 쪼개어 1주일 간의 식료품비로 사용했다 우리는 식당 출입도 그만두었고 작은 가스 스토브를 써서 나는 요리를 하고 반 고흐는 식료품을 사 왔다. 그는 집 가까이 에서 모든 것을 사는 편이었다. 한번은 그가 수프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곤죽을 만들어 놓았는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 였다. 물감을 섞어 캔버스에 떡칠을 하는 그 방식 그대로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수프는 먹을 수가 없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반 고흐가 한 말이 걸작이었다. "타라스콩(프랑스 남부의 도시 :역주)식이라오! 도데 영감이 좋아했을 텐데 !" 벽에다가는 백묵으로 이렇게 썼 다 나는 성령 이다. 나는 멀정하다. 우리가 함께 지 낸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까맣게 잊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록 얼 마 안 가서 파국이 우리를 덮쳤고 신들린 듯이 일했지만 나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 지던 기간이었다 사람들은 두 남자가 거기서 서로에게 유익한 일을 엄청나게 많이 했으리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한 일이었으리라. 내가 아를에 도착했을 때 반 고흐는 신인상파에 한창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척이 나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모든 학파가 그렇지만 신인상파에 문 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신인상파가 이 불같은 성격을 가진 자주적 인 인간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보랏빛 위의 노란색, 보색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작업이 그에게서는 착 가라앉은 불완전하고 단조로운 배합으로 끝났다. 힘찬 나팔소리가 빠져 있었 다 나는 그를 깨우치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반 고흐의 안에는 풍요 하고 기름진 땅이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무릇 독창적이며 뚜렷한 개성이 박혀 있는 모든 인 간이 그러하듯이 그는 주위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절대로 고집스럽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의 반 고흐는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찾아 낸 것 같았다. "당신은 그 시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1 얼굴과 머 리 :크롬옐로 2. 옷:크롬옐로 3. 넥타이 :크롬옐로. 에메 랄드 그린에메랄드 빛갚의 핀. 4. 배경 :크롬옐로." 이탈리아 화가가 나에게 말하면서 덧붙였다. "심하다. 심해, 온통 노랑이니. 그림이란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구만!" 여기서 세세한 기법을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반 고흐가 자신의 독창성을 한 줌이라도 훼손당하는 일 없이 내 가르침에서 득을 보았다는 사실을 여 러분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도 매일매일 나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가 오리에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 고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한 말도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다. 내가 아를에 도착했을 때 반 고흐는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고 반면에 나이가 훨씬 많았던 나는 성숙단계에 있었다. 물론 나도 반 고흐에게 나름대로 신세진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쓸모가 있다는 인식이었고 그림에 대해서 내가 품었던 생각이 옳다는 확인이었다 그 리고 상황이 어려울 때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깨달음도... 내가 떠나기 직전에 반 고흐는 유난히 퉁명스럽고 소란스러워졌으며 그러다가도 벙어리처 럼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인가 한밤중에 내 침 대로 다가오기도 했다 무엇이 그때 눈을 뜨게 만들었을까? 나로서는 시치미 뚝 떼고 이런 말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무슨 일이오, 빈센트?" 그러자 반 고흐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 침대 로 스르르 돌아가서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번은 반 고흐가 그토록 좋아하는 해바라기 정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그의 초상화를 그 리기로 마음먹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여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명 나긴 난데, 제정신 이 아니로군요." 그날 밤 우리는 카페에 갔다. 그는 도수가 낮은 압상트를 주문했다. 돌연 그가 술이 든 유 리잔을 내게 던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피한 뒤 두 팔로 그의 몸을 휘어감고 카페를 나와 빅토르 위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몇 분 뒤 반 고흐는 침대 위에 누웠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내리 잤다. 눈을 뜬 반 고흐는 다소곳이 말했다. "고갱 선배, 지난밤 제가 선배를 못살게 굴었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악감정은 전혀 없지만 어제 같은 장면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어 요. 만일 내가 맞았더라면 나도 자제심을 잃고 당신 목을 졸랐을 지 모릅니다 괜찮다면 당 신 동생에게 그만 돌아가겠노라고 편지를 넣고 싶소."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한술 뜨는 등 마는 등 하다가 혼자 밖으로 나가서 꽃이 만발한 월계수 향 내가 진동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 위고 광장을 거지 반 가 로질렀을 때 빠르고 불규칙적인 낯익은 발소리 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반 고흐가 면도날을 손에 들고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내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 지 그는 우뚝 멈추더니 머리를 숙이고 집을 향해 되돌아갔다. 그때 내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면도날을 빼앗고 다독거려야 했을까? 때때로 자문해 보지만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조금도 없다 돌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돌을 던져도 좋다 나는 그 길로 아를의 고급 호텔로 가서 시간을 묻고 투숙한 뒤 바로 잠을 청했다 마음이 뒤숭숭하여 새벽 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연히 늦잠을 자게 되었다. 눈을 떠보니 7시 반 가량이었다 광장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 부근에 경관 몇 사람과 중절모를 쓴 시 경국장의 모습이 보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반 고흐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쪽 귀를 머리 가까이까지 잘라 냈다. 피를 멈추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다음날 1층 방 두 개의 마룻바닥이 온 통 젖은 수건 천지였고, 우리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혈흔이 낭자했던 것이다 문득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 반 고흐는 바스크 베레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사귀는 여자가 없는 사람이 어쩌다 말동무처럼 지낼 만한 상대를 구하곤 하던 집으로 찾아가서 포주에게 깨끗이 씻어서 봉투에 넣은 자기 귀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걸 받아 두고 나를 기억해 주시 오." 그런 다음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전에 덧 문이란 덧문은 모조리 단단히 잠그고 창가의 탁자 위에 희미한 불을 밝혀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분 뒤 매춘부들만 어슬렁거리던 거리는 온통 난리법석을 이루었다. 우리 집 문턱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나는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절 모를 쓴 신사가 다그쳤다 "친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요, 엉?" " 무슨 말씀인지?" "알면서 딴 전을 피우는구먼. 그가 죽었어요." 평정을 되찾고 호흡을 가다듬기까지 2∼3분이 흘러야 했 다. 나는 분노와 모멸감과 슬픔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견디 기 힘들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찬찬히 살펴봅 시다" 반 고흐는 온몸에 이불을 둘둘 만 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 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만졌다 온기는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고 잃어버렸던 기운도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나는 들릴락말락 시경국장에게 소근거렸다 "이 친구를조심조심 깨워 보시지요. 만일 저를 찾거든 파리로 떠났다고 해주십시오 나를 보면 저 친구 발작이 도질 겁니다. "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부터 시경국장은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는 의사와 마차를 부 르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일단 잠에서 깨어나자 반 고흐는 친구와 담배와 파이프를 찾고 심지어는 우리가 1층에 놓 아두었던 돈궤까지 찾았다 틀림없이 그것은 의심이었지만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 다 고생을 팔자로 알고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그깟 돈은 관심 밖이었으니까. 반 고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병원에 닿자마자 그의 정신은 다시 오락가락하기 시작했 다 그 나머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새삼스럽게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몇 달에 한 번 씩 이성을 되찾아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뛰어난 그림들을 미친 듯이 그려냈던 한 인간이 맞닥뜨려야 했던 뼈저린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내가 반 고흐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에는 퐁투아즈 부근의 오베르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 는 몸이 회복되면 브르타뉴로 나를 만나러 오고 싶지만 이제는 치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는 것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단어를 쓴 적이 없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된 지금, 혼탁하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죽는 것이 그나마 품위를 유지하는 길 이겠지요." 반 고흐는 배에 권총을 쏘아 자살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몇 시간동안 파이프 담배를 피 우다가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다만 예술만을 사랑하면서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눈을 감 았다. '몽스트르'에서 장 돌랑은 쓰고 있다. "고갱이 '고흐'를 부를 때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 다." 비록 진상은 모르고 다만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만 장 돌랑은 옳았다. 이유는 여러 분이 잘 알리라. 상징주의 미술 문학을 위한 '상징주의 선언'은 1886년 발표되었다. 5년 뒤 젊은 시인이며 비평가인 알베 르 오리에는 상징주의 미술을 선언하여 상징주의 미술의 선두주자였던 폴 고갱의 작품세계 를 해명하고 찬양했다. 대지가 찬란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아주 멀고 먼 전설의 언덕에서 '성서'에 나오는 야곱이 천사와 싸움을 벌인다... 폴 고갱의 이 놀라운 작품은 태초의 낙원에서 펼쳐진 '성서'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다 그것은 꿈과 수수께끼의 불가사의한 매력과 순박한 영혼의 손으로 반쯤 걷어 올린 상징적인 휘장을 드러내고 있다. 예민한 후각의 소유자에게 이 그림은 종교, 정치학. 사회학의 신빙성에 얽힌 영구불변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보이며 키메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을 뿜는 괴물:역주)의 마술적인 주문에 길들여진 사나운 태고의 야수를 보 여준다. 이 기적과도 같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드타이유(확실한 벌이) 루스토노(투자)의 작품으로 메워진 화랑에서 넋을 잃고 있는 거드름 피우는 피둥피둥한 은행가가 아니라 점묘 화가의 얼룩덜룩한 세계를 받아들일 정도로 패기와 지성미를 갖춘 예술애호가가 이렇게 감 탄사를 내뱉었다. "바로 이 거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라는 작품에 나타난 플로에르멜의 머리장식과 숄, 브르타뉴 여인 그리고 이것이 드러내는 우리가 살고 있는 19세기!! 이제 나는 더 이상 반동이 될 수 없다. 나는 인상파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인상파인지도... "하지만 선생, 이 그림이 인상파 화풍이라고 그 누가 말하던가요?" 인상파라는 단어가 잘못 쓰인 데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는 말썽 많은 오해를 해소할 때가 도래하지 않았는가 싶다. 대중은 이 바닥에서 주름잡는 비평가나 수준 낮은 강단 교조주의 자의 치졸한 취향에 반기를 들고, 남을 모방하지 않는다는 데서 턱없는 자유를 누리는 모든 화가를 인상주의자로 싸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일리 있는 견해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악의없이, 아무리 폭넓게 쓰인다 하더라도 이 말에는 대중을 오도할 수 있는 뜻-사실은 정확한 뜻이지만-이 불행하게도 숨어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인상주의'라는 말은 감각에 토대를 둔 미적 감수성을 암시한다. 인상주의는 리얼리즘의 변형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 정형화되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정신화된 리 얼리즘이기는 하되 본질적으로는 리얼리즘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에 내재된 형태나 빛깔이 아 니라 감각에 비추어진 형태나 빛깔을 통해 물적 현실을 모방하려고 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인상주의는 감각의 번역이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기보활동에서 야기되는 예기치 못 한 모든 특성과 질풍같은 주관적 종합에서 야기되는 모든 왜곡을 그대로 수용한다. 확실히 피사로나 클로드 모네는 쿠르베와는 다른 방식으로 형태와 빛깔을 부여한다 그러나 근본적 으로는 쿠르베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쿠르베보다 한술 더 떠서 -그들도 오직 형태와 빛깔 에만 매달린다. 그들의 예술 저변에 흐르는 궁극의 목표점은 물적 대상, 참다운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상주의' 운운할 때마다 대중은 불가피하게 리얼리즘의 특수한 변형 이 라는 모호한 암시를 받는다. 그들은 한 감각의 '순전히 감각적인 인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려 할 따름이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서 영혼의 눈꺼풀을 반쯤 열고. 환각을 불러 일으키는 스웨덴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복된 인간은 얼마나 드문 가. 스웨 덴보리는 말했다. "그날 밤 나의 내면적 자아는 눈을 떴다 그 눈은 하늘을. 관념의 세계를, 땅 밑 세계를 응시 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예술가. 절대를 추구하는 예술가라면 모 름지기 이런 도취의 세계를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 나에게는 폴 고갱이 그런 숭고한 관조의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 보인다 내가 보기 에 그는 역사적 차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 새로운 예술을 고취시키는 사람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술을 일반 미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느낌에 그것은 예술가 자신을 연구하는 작업에 버금가는 과제이며. 스무 점 남짓 되는 작품과 그 럴듯한 아첨의 수식어 10여 개로 만족하는 요즘 비평가들의 관행을 한 차원 뛰어넘는 작업 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회화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궁극적인 지향점-아니 모든 예술의-은 대상 의 직접적 재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관념을 특수한 언어로 옮겨 표 현하는 데 두어야 한다 예술가의 눈앞에서( '절대적 실체의 환기자'로 간주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눈앞에서) 대 상-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실체 (관념)를 우리의 상대적인 지성에 맞도록 변용한 상대적 실체 -은 대상 자체로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예술가에게 대상은 오직 '기호로만 나타날 수 있 다. 오로지 천재만이 무한한 알파벳의 세계 안에 떠 있는 그 대상의 철자를 발음할 줄 안다. 이러한 기호들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 자신의 시를 써 내려간다는 것 -기호는 필수불가결 하지만 그 자극로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관념만이 전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이 가시적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눈을 가진 예술가의 과제로 보인다. 이러한 원칙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결론-너무 당연해서 새삼스럽기조차 하지만-은 다들 짐작했겠지만 '기호를 쓰 되 복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아한 문체를 쓸모없는 미사여구로 치장함으로써 자기 작품에 무언가가 덧붙여졌으리라는 환상에 젖어 있는 작가와 다를 게 무 엇인가?...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그림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1. 관념적. 그림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을 표현하는 데 있으므로. 2. 상징적. 그 관념은 형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으므로. 3. 종합적 . 그런 형식 , 그런 관념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제시해야 하므로 4. 주관적. 그림 안의 대상은 대상이 아니라, 주관이 파악한 관념의 기호로 보아야 하므로. 따라서 . 5. 장식적 . 이집트인파 그리스인, 원시인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장식적인 그림이 라 함은 동시에 주관적이며 종합적이며 상징적이며 관념적인 예술의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의 깊게 되돌아보면 장식적인 그림이야말로 참다운 그림이다. 그림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진부한 벽면을 사상, 꿈, 관념으로 '장식'하기 위해 발명되었다고 볼수밖에 없다 이제 주위의 그림은 몰락해 가는 문명의 변덕스러움이나 장삿속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안 된 비논리적인 세련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최초의 시도 는 장식적 의도로밖에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이제까지 모든 연역법을 동원해 합리화하고 특색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미술, 일견 복잡해 보이기도 하며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쉽사리 데카당트 미술이라고 취급하기도 했던 그 미술은 끝까지 분석해 들어가면 단순하고 자연발 생적이며 시원적인 미술의 형태로 귀결된다. 미학적 추론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적 예술은 누가 뭐라 해도 진정한 절대예술이다.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도 그렇지만 그러한 예술이 처음에 인류가 뛰어난 본능으로 간파했던 원시 예술과 근원적으로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내키지 않는 발길로 우리의 산업화된 전람회를 가득 메운 민망스럽고 파렴치 한 '공예물' 앞을 지나치면서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그런 예술이다. 또한 그것은 나의 느낌 으로 내가 그의 작품 이면에 깔려 있는 예술관을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면 -원시적이고 야 성적인 기질을 가진 위대한 천재 예술가 폴 고갱이 우리의 초라하고 부패한 나라에 세우려 고 애써 온 예술이기도 하다. 이미 원숙한 경지에 이른 그의 작품을 이 자리에서 묘사하거나 분석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이 위대한 예술가를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경이롭고 차원 높은 미학을 파악하고 공인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골고다 언덕'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황색 그리스도' 같은 훌 륭한 그림, 모든 선, 모든 형태, 모든 색채가 단어처'럼 관념을 나타내고 있는 마르티니크와 브르타뉴의 기막힌 풍경화, 쓸쓸한 배경 속에 주저앉아 형언할 수 없는 꿈의 비애와 키메라 의 고뇌, 우연의 배반. 그리고 현실과 삶과 어쩌면 내세의 허망함 때문에 눈물짓고 있는 듯한 담홍색 머리의 예수를 그리고 있는 거룩한 '감람동산'에 나타나 있듯 통찰력 있는 눈 만이 파악할 수 있는 그 표현할 길 없는 드넓은 관념의 바다를 어떻게 언어로 제대로 되살 릴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정념 , 정신과 육체가 빚어 내는 숱한 갈등, 성적 쾌락의 비애가 몸부림친다고나 할까. 이를 갈고 있는 그 낮은 부조에 붙여진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행복하리라'라는 아이 러니컬한 제목에 담긴 철학을 내가 어떻게 옳길 수 있겠는가? 비교의 순수한 환회, 수수께 끼의 육감적인 애무, 불가사의한 숲의 환상적인 그늘을 찬양하는 또 다른 목조각 '신비에 빠지라'를 내가 어찌 묘사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거룩한 도공이 진흙이 아닌 영혼 으로 빛은 그 이상야릇하고 야수적이고 원시적인 도자기에 대해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면 이 작품들이 아무리 육감적이고 수준 높은 걸작품이라 하더라 도 고갱이 다른 문명권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이루어 냈을 성취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고갱은 다른 모든 관념적 화가와 마찬가지로 뭐니뭐니 해도 장식가이다. 그의 구도는 캔버스의 좁은 한계에 속박당해 있다. 때때로 우리 는 고갱의 작품을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고갱의 작품은 자신을 부당하게 감금하고 있는 틀을 언제라도 박차고 나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요컨대 몰락해 가는 우리의 세기는 위대한 장식가를 오직 한 명-쥐비 드 샤반까지 포함 시킨다면 두 명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은행가와 고등행정학교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 의 덜 떨어진 사회는 이 희대의 예술가에게 최소한의 궁궐은커녕 그의 꿈이 영글 수 있는 최소한의 오막살이조차도 국내에 마련해 주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몽매한 우리의 신전 벽은 르느프뵈 같은 화가와 유명무실한 제도권 화가들의 악다구 니로 훼손당하고 있다!... 예술의 불꽃이 인류의 정신에 다시금 불타오를 그 어느 날 후세인들은 우리를 얼마나 욕 할 것인가! 우리를 조롱하고 침뱉을 것인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는 천재적인 장식가를 갖고 있다 벽! 벽! 그에게 벽을 주어라!... 알베르 오리에, (상징주의 미술) '메르퀴르 드 프랑스' 1891년 2월 9일 노아노아 고갱이 타히티에서 쓴 글을 1894년 파리에서 엮은 필사본 '노아노아' '향기'중에서 일부 를 발췌했다. 고갱이 이 책을 간행한 목적은 일반인에게 타히티의 신화와 일상생활을 소개 하고 자신이 남ㅌ평양에서 그린 신비로워 보이는 그림들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는데 있었 다. 다음 글은 그 중에서도 자전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한쪽은 바다였다 또 한쪽은 산을 등진 망고나무 한 그루가 으스스한 동굴로 들어가는 입 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의 오두막 가까이에는 또 한 채의 오두막이 있었다. 그 옆에는 카누도 있었다 시든 야 자수는 황금빛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발톱으로 큰 야자열매를 움켜쥐고 있는 거대한 앵무 새 같았다. 그날 밤 담배를 피우러 백사장으로 나갔다. 태양은 수평선을 향하여 빠르게 가라앉아 가 더니 어느새 내 오른편에 누워 있는 무레아섬 뒤로 막 숨고 있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나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뿐이었다. 달빛이 스며 들어와,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마치 피아노건 반처럼 오두막을 균일한 간격으로 엮고 있는 갈대줄기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의 선조 들이 피리로 불었을 그 갈대 줄기 - 타히티 사람들은 '비보'라고 부른다-는 말없이 기억하 다가 밤이 되어야 비로소 입을 연다. 그 소리에 취해 잠이 들었다. 머리 위편으로 저 높이 판다누스 잎을 깔아 놓은 지붕 위에서는 도마뱀이 산다. 깊은 잠 속에서도 나는 머리 위의 공간 드넓은 창공을 볼 수 있었다. 이 곳은 숨막히는 감옥이 아니었다. 나의 오두막은 공간 이며 자유였다... 나는 해안도로를 벗어나 덤불 숲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제법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있었다 주민들이 아직도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작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마 타무아)(한때), (히나 마루루) 같은 그림 에 나오는... 나는 다시 길을 떠났다 타라바오 (섬에서 가장 먼 쪽)에 닿았다. 경관이 말을 빌려 주었다 말을 타고 유럽인이 거의 찾지 않는 동쪽 해안선을 따라갔다 이티아 구역으로 이어지는 작 은 마을 파아오네에 이르렀을 때였다. 원주민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보세요, 사람 만드는 양반!" (그는 내가 화가임을 아는 것이다. ) "와서 같이 듭시다!" 나는사양하지 않았다. 표정이 너무나 따뜻했다. 나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비굴하다는 인상 은 조금도 주지 않으면서 대뜸 말을 끌고 가더니 솜씨 좋게 나뭇가지에 매어 놓았다.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남녀가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린아이들 의 모습도 보였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폴리네시아 여인이 말을 걸었 다 "이티아로 갑니다 " "무얼 하시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입에서는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내를 구하려고요 이티아에는 미인이 많다는군요." "한 사람 소개할까요?" "좋지요." "마음에 드신다면 드리겠어요. 내 딸이랍니다 " "젊습니까?" "에하(네 ) ." "예쁜가요?" "에 하." "몸도 튼튼하고?" "에하. "그럼 됐군요. 데려와 보시지요." 여자가 나갔다. l5분 가량 흘렀을까. 사람들이 야생 바나나와 참새우로 폴리네시아 토속요 리를 준비하는 동안 여자는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든 숙성한 소녀를 데리고 들어 왔다 얇디 얇은 분홍빛 모슬린 옷에 싸인 황금빛 어깨와 팔이 인상적이었다. 꽃봉오리 두 개가 가슴 위로 볼록 솟아 있었다. 소녀의 매혹적인 얼굴은 지금까지 내가 섬에서 보았던 그 어떤 얼 굴과도 다른 것이었다. 곱슬기가 약간 있는 소녀의 머리는 빽빽한 덤불처럼 숱이 짙었다 햇 빛은 소녀의 머리를 축제의 연노랑 빛깔로 물들였다 소녀의 고향은 통가였다 옆에 앉은 소녀에게 몇 가지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 "아이 타(아뇨) ." "내 오두막에서 함께 지낼래?" "에하 " "병에 걸린 적이 있니?" "아이타 " 그게 전부였다 소녀가내 앞에 펼쳐 놓은 바나나 잎에다 말없이 음식을 놓고 있는 동안 나 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나는 열세 살 먹은 소녀에게 넋을 빼앗겨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소녀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도 궁금했다. 여인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자니 조금 찔렸다. 소녀에 비해 내 나이가 너 무 많았기 때문이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엄마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나는 이 조숙한 소녀에게서 자기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독립심, 고결한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차분한 분위기를 느꼈다. 묘하게 웃음짓는 그 부드러운 입매는 소녀가 만만치 않음을 암시했다 나 는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섰던 것 같다. 나는 매여 있던 끈을 풀고 말 위에 올랐 다. 소녀가 내 뒤를 따랐다. 소녀의 엄마 남자, 그리고 두 젊은 여자-소녀는 이모들이 라고 했다-도 뒤에서 따라왔다. 우리는 파아오네에서 9킬로미터 떨어진 타라바오로 떠났다. 몇 킬로미터를 가자 그들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멈춥시다" 나는 말에서 내려 산뜻하게 꾸며진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 오두막은 화려하다는 느낌마 저 주었다 대지의 풍요함이 넘쳐흐르는 집이었다. 바닥을 보니 마른 풀 위에 아름다운 돗자 리가 깔려 있었다‥‥‥아주 점잖게 보이는 제법 젊은 부부가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소녀 는 엄마 옆에 앉더니 엄마를 나에게 소개했다(이 엄마는 생모가 아니라 기른 엄마:역주). 침 묵이 흘렀다. 우리는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듯이 차가운 물을 돌아가며 마셨다. 소녀의 엄마 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친절한가요?"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네." 내 입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그런 대답이 나왔다 "내 딸을 행복하게 해줄 생각인가요?" "그래야지요." "여드레 뒤에 그 아이는 우리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면 그때 당신을 떠날 수도 있어요 "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 들이 따라왔다. 도중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잘됐구나, 잘됐어! 이제 프랑스 사람의 색시가 되었다 이 말이지? 부디 행복하게 살렴!" "행운을 빈다!" 가족은 타라바오에서 우리를 남기고 떠나갔다 신부와 나는 마차를 탔다. 마차는 우리를 25킬로미터 떨어진 마타이에아로 데려다 주었다 새색시는 별로 말이 없었다. 어떨 때는 울적해 보이는가 하면 어떨 때는 사람을 비웃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서로를 끈질기게 탐구했지만 나는 그녀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신경전에서 물러나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끝까지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 지만 나의 여린 신경은 번번이 허물어졌다. 나는 펼쳐진 책장처럼 알몸을 송두리째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1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어린애더 되어 있었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 이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애정을 고백했다 그러자 소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잘 안다 는 뜻이었으리라!) 그녀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때로는 밤에 달빛이 섬광처럼 테하마나의 황금빛 살결에 줄무늬를 긋기도 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실은 그 정도도 나에게는 과분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녀는 파아오네의 엄마 집 에 다녀 오겠다고 말했다. 약속은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떠났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그녀를 합승마차에 태우고 피아스타 몇 푼을 손수건에 싸 주면서 여비로 쓰고 아버지에게 맥주를 사다 드리라고 당부했다. 이대로 다시는 영영 얼굴을 못 볼 것 같았다 나의 색시는 돌아올까? 며칠 뒤 그녀는 돌아왔다.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매일 아침 첫 햇살이 나의 방을 비추었다 테하마나의 환한 얼굴은 주위를 온통 금빛으로 물들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한없이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마치 에덴 동산에 온 것처럼 근처 냇가 가서 물에 잠기곤 했다. 변함없는 일상. 테하마나는 점점 유순해졌고 점점 사랑스러워졌다 그녀에게서 피어오르는 타히티의 향기 (노아 노아)가 사방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날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었다. 선악의 구분은 이미 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모든 게 아름다웠고 모든 게 좋았다 테하마나는 내가 일하거나 명상에 빠져 있을 때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언제 말을 걸어야 나를 방해하지 않는지를 정확히 알았다. 우리는 유럽 에 대해서, 하느님 에 대해서. 신들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한 테서 배웠고 나도 그녀한테서 배웠다. 변함없는 일상. 밤이 오면 우리는 침대에 누워 이야기 했다. 그녀는 별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샛별과 저녁별을 프랑스 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 히 여겼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설명은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녀도 별들의 이름을 자기 나라 말로 알려 주었다... 느린 속도로 밤하늘을 우울히 배회하는 유성 이 투파파우(저승사자)일 거라는 믿음이 그녀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스트린트베리와 고갱 마지막 남태평양 항해를 앞두고 고갱은 베르생제토리 거리에 있던 화실을 자주 드나들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게 1595년 2월 18일 드루오 호텔에서 열릴 작품 공매를 위한 도록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스트린드베리는 거절했다. 고갱은 통상적인 서문 대신 거절의 뜻이 담긴 스트린드베리의 회신과 그에 대한 지신의 답장을 도록에 실었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폴 고갱에게 1895년 2월 1일 당신은 1894년에서 1895년으로 넘어가던 해의 겨울을 되돌아보면서 당신의 도록을 위해 서문을 써 달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프랑스 학사원이 앞에 있고 팡테옹(프랑스 의 저명 인사들이 안치된 사원:역주)에서 멀지 않으며 몽파르니 묘지와 바로 인접한 곳에서 살았지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강인한 기질에 어울리는 약간의 공간과 분위기를 찾아서 오세아니아 의 그 섬으로 떠나려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써 드려야 할 글입니다. 하지만 처음부 터 저의 입장은 모호했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요청에 대해서 "못 쓰겠다."고, 아니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잔인하게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군요. 왜 당신의 요청을 거절하는지를 밝혀야 할 책무가 저 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차가 운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게으른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고장난 제 손을 핑 계로 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사실은 손 때문도 아닙니다. 아무리 손이 아파도 글을 못 쓴 적은 없으니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림을 이해 할 수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그림은 너무나도 타히티 일변도여서 저로서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털어놓아도 당신이 놀라거나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당신은 남 에게 미움을 받을 때 더 힘을 얻는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몰라요. 남으 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집단화되고 분류될 테니까요. 당신의 예술에는 이름이 붙여지겠지만 앞으로 5년도 못 가서 젊은 사람들은 시 대에 뒤떨어진 예술의 본보기로 그 이름을 들것입니다. 정작 자기네들은 더 쓸모없는 그림 을 그리기 위해 그 모든 헛수고를 하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저는 당신을 범주화하고 연속된 사슬 중의 한 연결고리로 파악하여 당신의 예술가로 서의 발전 과정을 이해해 보려고 제 나름대로는 애도 써 봤습니다만 소용이 없더군요.... 지난밤 저의 생각은 쥐비 드 샤반과 남부의 만돌린과 기타 소리에 이끌렸습니다 저는 당 신의 작업실 벽에 걸려 있던 태양으로 충만한 그림들의 어지러움을 떠올렸습니다 잠을 자면 서도 그 이미지를 생생히 보았어요. 저는 어떤 식물학자도 본 적이 없는 나무, 퀴비 에 (비 교해부학을 확립 한 프랑스의 동물학자'역주) 같은 생물학자도 상상하지 못했을 동물, 오 직 당신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화산에서 흘러나오는 바다 신이 살 수 없는 하늘. 선생 저는 꿈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 다 "선생. 선생께서는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하늘을 창조하셨지만 저는 선생께서 창조한 세 계 안에 들어가 있기가 싫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를 좋아하는 이 몸에게는 너무 밝기 만 해요. 선생의 낙원에 사는 이브도 저의 이상형은 아니랍니다. 제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성도 달리 한 두 명은 있거든요!" 오늘 아침 저는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는 샤반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뤽상부르 박 물관으로 갔습니다 꽃을 따는 아내와 한가롭게 노는 아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가져다 줄 고기를 끈기있게 기다리는 (가난한 어부)를 자세히 감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던지요! 하지만 어부가 쓴 가시면류관이 제 눈에는 거슬리더군요. 저는 그리스도와 가시면류관을 싫어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런 게 싫습니다 묵묵히 상처를 받아 주는 이 동 정심 많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제게는 추호도 없습니다. 저의 신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의 심장을 먹는 비출리푸출리입니다 천만에요, 고갱은 샤반의 갈비에서도 모네의 갈비에서도, 바스티앵 르파주의 갈비에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고갱입니다. 문명의 속박을 혐오하는 야만인입니 다. 창조주를 시샘한 나머지 틈나는 대로 자기만의 조그만 창조세계를 만들려 하는 거인족의 운 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장난감을 분해하여 새 장난감을 만드는 어린아이입니다 남들처럼 하늘을 파랗게 보기보다는 빨갛게 보기를 원하는 부정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면서 흥분하다 보니 당신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한 느낌이 드 는군요. 진심입니다 현대 작가는 실재하는 존재를 그리지 않고 자신의 인물을 '지나친 단순화'로 몰아넣었 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 아무쪼록 이번 여행이 당신께 좋은 여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돌아와서 연락주시기 바랍 니다 그때쯤이면 저도 당신의 예술을 지금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럼 드루오 호텔에서 열릴 새 전시회에 쓸 새 도록에 진지한 서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야만인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할 필요성을 조금씩 절감하고 있으니까요. 폴 고갱 가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에게 1895년 2월 5일경 오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의 전시회 도록을 위한 서문으로 보내 주신 편지 말입니다. 일전에 당신이 저의 화실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저는 당신 에게 서문을 부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북구인다운 당신의 푸른 눈은 벽에 걸린 그림들 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반역의 예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당신의 문명과 저의 야만 사이에 거대한 충돌이 빚어졌던가 봅니다. 당신은 문명 속에서 고뇌하지만 저는 야만 속에서 생명력을 되찾습니다 제가 이질적인 세계에서 빌려 온 형태와 조화로 그린 저 나름의 이브 앞에서 당신의 탁월 한 기억력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렸던 모양입니다 당신의 문명화된 사고 안에 자리잡은 이브는 당신이나 우리를 여성은 불결하다는 생각으로 이끌기 십상이지요 저의 화실에 걸린 고대의 이브는 언젠가 당신에게 겁을 주지 않게 될 것이며, 기분 나쁜 웃음도 짓지 않게 될 겁니다. 퀴비에도, 그 어떤 식물학자도 몰랐던 그 세계는 오직 저만이 그릴 수 있었던 낙원이 아닌가 싶어요. 그림과 꿈의 현실화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가로놓여 있지만 그것 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도 일종의 '니르바나(열반)'을 맛보는 것 아닌가요? 우리 눈앞에 벌거벗고 나설 수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제가 그린 이브(뿐)입니다. 당신의 이브는 간단한 옷을 걸쳤는데도 부끄러움 없이는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친 아름다움 은 죄 악과 고통을 낳았지요. 당신이 제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두 여자를 직접 비교하느니보다는 저의 이 브가 말하는 마오리어 와 당신의 이브가 말하는 유럽의 굴절어를 비교하겠습니다 오세아니아어에서는 언어의 기본적인 성분들이 날것 상태로 남아 있으며 주로 고립되어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지요 모두가 벌거벗었고 인상적이며 원초적입니다. 반면에 굴절어에서는 언어의 뿌리가 언어의 부조와 윤곽을 닳아 없애는 일상의 교섭속으 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투박하게 배열된) 돌과 돌의 연결부위 더 이상 육안에 드러나지 않 는 완벽한 모자이크이며 사람들은 갈고 다듬은 예쁜 그림만을 우러러봅니다. 어쩌다 보니 언어문제를 장황하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저는 다만 오세아 니아 땅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 제가 왜 야만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 었는가를 설명드리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스트린드베리, 당신께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언제쯤 다시 만나 뵐 수 있게 될는지요 그때 가서도 지금처럼 당신을 못 잊을 겁니다 폴 고갱과의 대화 다음은 당시 널리 읽히던 '에코 드 파리'지(1895년 3월 15일)와 고갱의 인터뷰이다. 대 화는 고갱이 남태평양으로 떠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기자인 외젠 타르디외가 가다듬기 도 했지만 고갱의 체취가 생생히 묻어 나오고 있다. 그는 가장 과격한 혁신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타협을 모르는 가장 '오해받는' 예술가이다. 그의 재능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그를 저버렸다 그를 허풍선이로 치부 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그는 거기에 주눅들지 않고 오렌지색 강과 빨간 개를 줄기차게 그리면서 여전히 자기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고갱은 헤라클레스처럼 단단하다. 곱슬곱슬 한 머리는 허옇게 셌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기운이 넘쳐나고 눈은 초롱초롱하다. 특유의 표 정을 지으면서 웃을 때 그는 점잖고 수줍으면 아이러니해 보인다. " '자연을 모사한다'는 표현의 참뜻이 도대체 뭐겠습니까?" 그는 기지개를 켜면서 도전 적으로 내게 물었다. "우리 '대가들의 모범을 따르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왜죠? 왜 우리가 그런 모범을 따라야 하죠? 그들은 남의 모범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 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부게로는 무지개가 만들어 내는 모든 광채로 빛나는 여인들에 관해 말하면서 파란 그림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그 의 그림에 등장하는 밤색 그림자를 부정할 수 있는 겁니다. 부정할 수 없는 유일한 사실은 그의 그림에서 그 어떤 광채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파란 그림자 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내일이라도 어떤 화 가가 그림자는 분홍색이다 또는 자주색이다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조화롭고 사색 을 유발하는 한 거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 "그렇다면 당신의 빨간 개와 분홍빛 하늘은?" "의도적입니다 철저히 의도적이지요, 필요해서 그렇게 그렸습니다. 내 그림의 모든 특징은 세심하게 고려되었으며 미리 계산된 것입니다. 왜, 작곡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일 상생활이나 자연에서 빌려 오는 단순한 대상은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과 색조를 특정 하게 배열하여 조화와 융화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그 대상은 간접적인 도움을 줄 따름입니 다 내 그림의 선과 색은 가장 통속적 의미에서 말하는 현실의 대응물을 갖고 있지 않습니 다. 어떤 관념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지요. 내 그림의 유일한 목적은 상상력을 자 극하는 데 있습니다 ... 내가 믿는 것은 어떤 색채나 선의 배열과 우리 마음 사이에 존재하 는 신비로운 친화력입니다" "색다른 이론이군요!" "전혀 색다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위대한 화가는 모두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라파엘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보티첼리 , 크라나흐 다들 자연을 비틀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 서 그들의 그림을 잘 보면 얼마나 제각각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작품은 자연에 진실해야 한다고 당신이 고집을 피운다면 렘브란트도 별 볼일 없어지고 라파엘로도 볕 볼일 없어집니다. 보티첼리나 부게로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자연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알려 드릴까요? 사진입니다. 조만간 컬러 사진이 나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혁명적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런 표현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루종 씨가 나를 그렇게 불렀지요. 나는 그에게 선배들의 작품과 다른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모두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 다. 거장이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죠... 나는 빠른 시일안에 제대로 이해 받을 날이 오리란 생각을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습니다. 만일 내가 남들이 이미 한 것을 답 습한다면 스스로 평가하기에 나는 가련한 표절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현하려고 애쓸 때면 저급하다는 낙인이 찍힙니다 나는 표절자보다는 저급한 사람으 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 "그리스인이 완벽하고 순수한 이상적인 조각의 세계를 구현했고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그 림에서 동일한 성취에 이르렀으므로 이제는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 다고 보는 교양인이 많습니다. "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미는 영원하며 1,000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중세가 생각한 이상미가 있고 이집트가 생각한 이상미가 있어요. 그리스인은 인체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 "왜 타히티로 가셨습니까?" "이 목가적인 섬과 원초적이며 순박한 주민에게 매료당했기 때문이지요 고향으로 돌아왔 다가 다시 떠나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근원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해요. 나의 이브는 동물에 가깝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음란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예요. 그러나 살롱전에 출품된 비너스들은 하나같이 추잡하고 외설적입니다. 떠나기 전에 샤를 모리스의 도움을 얻어 타히티 생활을 소개한 책을 펴낼 생각입니다. "제목은?" "'노아 노아' 타히티 말로 향기란 뜻이지요" 종장의 배경 뒤에 '태고의 존재' '묘석' '르네레'등의 저서를 남기는 빅토르 세갈렌은 고갱이 죽은 직후인 1904년 스물다섯 살 때 해군 군의관의 신분으로 아투오나를 찾아가서 고갱의 작업 실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고갱이 마르키즈 제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파리에 처 음 소개한 글이다. 그것은 장려하면서도 비통한, 어딘지 모순된 그의 죽음의 고뇌와 잘 어울리는 배경을 가린 화려한 막이었다. 밝고 뚜렷한 휘장은 유랑하는 인생의 마지막장에 어울리는 분위기 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갱의 강한 개성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광채는 그가 마지막 거 처로 정한 이곳을 다시금 비추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충만한 활기로 차오르게 만든다. 그 광채가 너무도 강렬하다 보니 주연배우와 원주민 '엑스트라들', 주연배우를 둘러싼 무대장치 와 소도구가 동일한 색조로 물들어 있다. 고갱은 괴물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인간을 묘사하는 데 충분한 그 어떤 도덕적, 지 적 . 사회적 범주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범속한 무리에게는 판단이 곧 규정을 의미한다. 당신은 존경받는 사업가이거나 청렴결백한 공직자이거나 재능있는 화가 이거나 가난하지만 정직한 보통 사람이거나 양가집 규수이다 당신은 '예술가'일 수도. 심지 어는 '위대한 예술가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까다롭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되 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범주화에 필요한 상투적 문구가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 니 고갱은 괴물이었다. 철저하고 오만한 괴물이었다. 한 가지 면에서만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신체 에너지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맴돈다 일상의 나머지 부문(집안일, 의 례적 방문, 의무감)에서는 그들은 전통적이며 평범하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 육체적 타성 의 문제이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격정적인 작가가 왜소한 교회 관리인처럼 생겼을 수 있 다. 천재가 반드시 빈틈없고 정확한 사람처럼 보이란 법은 없다. 고갱은 이 중 어디에도 들 어가지 않았다. 말년의 그는 야심에 차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은 올바름을 좇았지만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그는 본인들이 마다하는데도 약자를 도 우려 했다. 도도했지만 남들의 의견과 판단에 어린애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원 시적이며 거칠었다. 매사에 변덕스러웠으며 극단적이 었다. 우리는 화가로부터 그의 거처로 옮겨 간다 거처는 화가를 위해 마련된 무대에 지나지 않 는다. 절제와 균형미가 돋보이는 자연물로 인상 깊게 꾸며진 단촐한 무대. 잎을 엮어서 얹 은 적갈색 지붕은 노란 칸막이 (역시 잎을 엮어 만들었다) 위로 두 개의 길다란 경사를 이 루고 있으며 거추장스러운 장식은 없다. 지붕과 풀이 자라는 바닥 사이에는 이 곳에서 나 는 재료로 된 질박하고 소탈하면서도 튼튼한 뼈대가 우뚝 서 있다. 올라간 바닥으로 이어 지는 짧은 계단 앞에는 작고 수수한 초막이 있어 점토상이 비에 젖어 허물어지지 않게 해준 다 여기서 발길을 멈출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성한 상이기 때문이다. 고대적 제의는 '성서'에 나오는 이방인의 기도를 연상시킨다 "발 밑의 대지가 낯선 고장에 나는 왔다. 머리 위의 하늘이 새로운 고장에 왔다. 나의 안식처가 될 땅에 왔다. 아, 대지의 영혼이여, 이방인이 그 대의 양식으로 심장을 바치노라 " 자세는 불상을 닮았지만, 두툼한 입, 불룩 튀어나온 꼭 감은 눈, 콧구멍 부근에 와서도 거의 넓어지지 않은 일자 코는 토속적 생김새를 반영하고 있다 마오리 땅에서 출현한 부 처라고나 할까 고갱은 폴리네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다양한 자세를 보는 데서 희열 을 느꼈지만 신상을 표현하는 일은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었다. 폴리네시아인은 자신이 받드는 신들을 형상화하는 데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무를 깎는 데도, 용암이 나 붉은 사암으로 된 거대한 기둥을 다듬는 데도 서툴렀다. 오직 상징과 성막과 무덤 이미 지를 형상화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본채에 당도한다 작은 방을 지나면 열린 박공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화실이 나타난다. 현관의 장식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설명적인 문구를 달았으며 침착한 색 조로 마모된 투박하지만 선명한 장면들로 에워싸여 있다 머리 위에는 '라 메종 주이르(쾌 락의 집)'라는 명패가 달려 있다. 좌우에는 파란 입술, 심한 경련을 일으켰든가 아니면 나 태한 자세로 있는 호박빛 군상들의 행렬을 그린 두 점의 화판이 있고 거기에 황금빛 문장이 적혀 있다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행복하리 신비에 빠지면 그대는 행복하리." 이어서 선사시대의 인물처럼 투박한 몸매를 가진 두여자의 알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마지 막으로 두 개의 캔버스가 벽에 바로 기대어져 있다. 그중 한 그림은 한 무리 원주민 들이 밝은 남색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원주민들의 발 밑은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황토빛이다. 한 남자가 페이(야생 바나나)를 목덜미 위에 얹고 있다. 적갈 색 바나나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녹색과 황색의 옷에 팽팽히 감싸인,올리브 빛깔의 반점이 나 있는 구릿빛 상반신의 처녀들은 머뭇거린다... 원주민의 무기가 어지러이 널린 화실 안을 느긋하게 거니노라면 씨근거리는 작은 풍금이 눈에 들어 오고 어울리지 않는 가구 몇 개와 하프, 그림도 몇 점 보인다. 화가는 얼마 전에 마지 막 작풍을 끝냈던 모양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뛰어난 작품에 매달렸다 그것은 자화상, 비애의 초상이다. 멀리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다부진 상체를 곧게 편 모습. 땅딸 막한 체구에 입술은 아래로 처져 있고 눈꺼풀은 무겁다. 1896년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골고다 부근의 자화상)이 라는 쓸쓸한 제목이 붙어 있다. 날짜와 서명이 적혀 있지 않은 또 한 점은 같은 자화상이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는데 역시 단단한 체구와 오만한 자 세로 약간 곁눈질하는 듯한 이 그림은 보다 사실적이며 정교하다. 화실에서 가장 자리를 많이 차지하면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은 세 여인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담았다. 그중 한 여인은 몸을 웅크리고 있다 폴리네시아 과일을 원주민 특유의 방식으로 들고 있는 왼 쪽 여인은 반쯤 돌아서는 뒷모습을그렸는데 체중이 오른다리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밑에서 다리를 포개고 앉은 또 한 여인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두 인물 모두 대담하 고 단순하게 처리되었으며 전형적인 타히티 원주민의 표정을 짓고 있다. 세번째 여인은 두 사람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거리에 서 있으며 쥐비 드 샤반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자세를 취 하고 있다 땅과 하늘로 이분된 배경이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다. 암록색 땅, 밝고 연한 초록 색 하늘, 잔잔한 저녁 하늘은 한가로운 세 인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역설이 있다 임종을 앞둔 화가가 빛으로 충만한 이 땅에서 자신의 마지막 붓끝을 놀렸던 작품. 낮은 구름 아래로 앙상한 나무들이 무리지어 있고 반짝거리는 눈송이 가 초가지붕에서 녹는 브르타뉴의 살풍경 한 모습이다. 고갱은 문둥병으로 죽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걸렸던 수많은 병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 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는 단순히 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병은 내면적 갈등과 패배감으로 악화되었다 어린애 같은 갈등은 사소한 분쟁에 휘말린 이 숭고한 투사 를 갉아먹었고. 소송에서의 패배는 영광으로부터의 추락처럼 이 순수한 예술가가 감내하기 에는 너무 벅찼다 고갱의 주위에서 (나른하게) 배회하는 '엑스트라들'은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마르키즈 원 주민이다 파르스름한 줄이 얼굴에 나타나 있어 눈은 더욱 깊어 보이고 입은 엄청나게 커 보인다 투명한 피부에는 상징적 문신이 옷처럼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의 문신은 (먼 옛날에 벌어졌던)전투의 승리를 암시한다. 많은 원주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갱을 따랐다. 이 덩치 큰 아이들은 자신들의 관습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들에게는 죽은 문자나 다름없는 셈 어계나 라틴어계의 단어들로 자기네 언어를 오염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릇된 정보를 전 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원주민은 참으로 예절바르고 양심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행동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 '현재. 아투오나 구역 히바오아섬은 파노라마와 같은 배경과. 수많은 폭포로 장식된 거대한 암벽은 단층의 대규모 함몰과 함께 시원한 계 곡으로 곧바로 이어지고, 암벽 꼭대기의 삐죽빼죽한 능선은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구름의 수평 막대에 고르게 덮여 있다 보통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아득히 높은 암벽 은신처에 원주민이 안치해 둔 시신들이 있다. 무대의 골격 해안선까지 좌우로 계곡을 감싸며 이어지는 산자락, 바다가 더 큰 봉우리- 밀려오는 파도의 봉우리 -로 가로막는 계곡.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오세아니아 해안의 그 활기 없는 산호초가 이 곳에는 없다. 이곳의 바다는 살아 있다. 몸부림치며 해안선을 깎 는다 바다는 만으로 밀려와 고동빛 황금빛 해안을 휘감고 오래 전에 폭발한 화산에서 흘러 내려온 용암을 두드린다. 이 거칠 것 없이 확 트인 공간 속에 푸른 녹음이 깃들여 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황토빛 야자나무와 빛을 향해 고개 들린 수많은 꽃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들이다 어디 서나 물소리가 들린다. 물은 계곡을 따라 밀려 내려오고 땅 밑으로 스며들고 부드러운 자갈 이 깔린 강바닥을 뱀처럼 핥는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가뭄을 모르는 이 향기로운 여름의 따사로움 속에서 모든 것이 왕성하게 번식한다 오직 인간을 제외하고는. 이 점잖고 창백한 마르키즈 사람들은 마지막 행보를 내딛고 있다 그들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굳이 거드름 피우면서 진단을 내릴 필요가 있을까? 아편은 그들을 수척하게 만들었다. 무시무시한 발효 즙은 새로운 중독으로 그들을 갉아먹었다. 소비는 그들의 가슴을 텅 비웠다. 매독은 그들 씨를 말렸다. 이 모든 것의 화근은 '문명'과의 접촉이었다 앞으로 20년 뒤면 그들은 더 이 상 '미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어쩌면 영원히 이 지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노릇 이다. 이제 섬의 황량한 심장부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곡은 저승사자의 길처럼 보인다 부서진 축 대 위의 키 작은 판잣집들은 자신들의 토착신이 죽는 것 지켜보았고, 이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서늘한 아침 고갱도 그곳에서 죽었다. 고갱과 가까웠던 티오카라는 친구가 향기로운 꽃송이를 고갱의 머리에 두르고 관습에 따라 모노이 기름으로 고인의 몸을 닦아 낸 다음 구슬피 뇌까렸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없다" 고갱의 내면 풍경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에 관한 고갱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 추상 충고 한마디. 자연을 너무 곧이곧대로 베끼지 말게. 예술은 추상이야. 자연 앞에서 자네가 꿈꾸듯이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 내도록 해. 결과보다는 창조행위를 더욱 많이 고민하게나 슈페네커에게 퐁타방. 1888년 8월 14일 양성 만일 큰사람이 되고 싶다면, 오직 당신의 주체성과 양심 속에서만 행복을 찾기를 원한다 면, 당신은 스스로를 성을 초월한 양성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슴, 영 혼, 요컨대 거룩한 모든 것은 물질의 노예, 다시 말해서 육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들렌 베르나르에거, 1888년 10월 귀족주의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는 고귀함, 아름다움. 고상한 취향, 지나간 그 시대가 앞세웠던 고결한 의무를 사랑한다. 나는 예의범절. 정중함, 심지어는 루이 14세조차 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나는 귀족주의자이다 예술가로서 말이다. 예술은 소수를 위한 것이다 예술은 원래가 귀족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귀족만이 예 술을 후원했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서. 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의 책무라고 느꼈기 때 문에, 혹은 허영심으로, 예술을 후원했으리라.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들은 위대하고 아름다 운 창조물을 후원했다 왕과 교황이 예술가를 대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정치인, 은행가, 관리. 예술비평가는 예술을 후원하는 척 하지만 그들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어물전에 생선을 사러 온 사람처럼 꼬치꼬치 따진다 예술가가 혹시 공화파는 아닐까 하 고! '알린을 위 한 메모' 브르타뉴 나는 브르타뉴를 사랑하네 이 곳에는 야성적이고 원시적인 무언가가 있어 내가 신은 나막 신이 화강암 대지에 닿을 때 나의 귀에는 내가 그림에서 찾고 있는 강하고 둔중하며 어렴 풋한 색조가 들리거든 슈페네커에게 퐁타방. 1888년」2월 도자기 도자기를 빚는다는 것은 한가로운 여흥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도자기는 아메리카 인디 언이 늘 아껴온 물건이다. 신은 한 줌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한 줌 진흙으로 우리는 귀 중한 돌을 만들 수 있다. 한 줌의 진흙과 한 줌의 재주로! '만국박람회 미술 촌평' 세잔 비평가 선생. 당신은 세잔을 이해하려는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군요! 오늘 당신은 그를 떠받듭니다! 떠받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를 이해해야 하건만)당신은 이렇게 말 합니다. "세잔은 단색이다 " 하지만 다색 심지어는 다성이 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요 눈과 귀를 열어 보세요!... 세잔은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세잔인 것으로 만족한다!" 무언가 착각을 하시는군요. 만일 그것이 세잔의 본모습이었다면 화가 세잔은 태 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티와 달리 세잔은 다독가입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에도 정통 합니다. 렘브란트를 제대로 볼 줄 알며 푸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환쟁이의 넋두 리' 색채 우리에게 참으로 불가사의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색채는 수수께끼가 아닌 논리적인 방 식으로는 사용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색채 자체에서, 색채의 고유한 개 성에서, 신비롭고 불가사의 한 색채 내부의 힘에서 발산되는 음악적 감각을 만들기 위해 색 채를 이용한다 상징은 정교한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처럼 색채는 떨림이다. 가장 보 편적이며 따라서 가장 붙들기 어려운 내부의 힘을 색채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다양한 사물 ' 코로 나는 빌다브레 숲에서 노니는 코로의 요정들 앞에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희들을 한번도 그림에 담은 쩍이 없으면서도 기쁨에 넘친 코로는 더없이 순박하 고 진지하게 안개가 자욱한 지평선 아래 펼쳐지는 요정들의 춤을 그리고 있다. 파리 교외 의 아담한 전원주택들은 영락없는 이교도의 사원이 된다 코로는 꿈꾸기를 즐겼으며 그의 그 림 앞에 서면 나 역시 꿈속에 잠긴다 '다양한 사물' 드가 자네가 드가를 만났다니 무척 기뻐. 나를 어떻게 도울 방도가 없을까 하고 동분서주하는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이. 옳은 지적이야. 드가는 신랄하고 늘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다니지 (슈페네커가 그러는데 나도 그렇다는군 ) 하지만 자기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만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거든. 그는 천성적으로 선하고 똑똑하다네 몸가짐으로 보거나 재능으로 보거나 드가는 예술가가 마땅 히 본받아야 할 보기 드문 귀감이지 드가와 친하거나 드가를 숭배하는 사람 중에는 보나 르,쥐비 . 앙토냉 프루스트 등등 쟁쟁한 인물이 많지만 드가는 절대로 청탁 따위는 넣지 않 는다네. 그가 저열하거나 무식하거나 야비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는 사람은 내 주위에는 한 사람도 없어 예술과 품위 " 몽프레에게 파페이테. 1898년 8월 15일 그는 앵그르를 존경한다. 이 말은 그에게 자부심이 있다는 뜻이다. 실크 모자. 파란 안경 에다 우산까지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공증인. 루이 필립 시대의 부르주아이다. 예술가처럼 꾸미는 데 털끝만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드가이 다. 드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제복을 혐오한다. 자기가 입고 다니는 옷 도 예외는 아니다. 선한 사람이지만 총기가 넘치다 보니 심술궂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혹 은 짓궂다는 말도 듣는다. 비슷비슷한 소리이겠지만. 자신의 말이 무슨 예언이나 되는 것처럼 큰소리 탕탕 치는 젊은 평론가가 언젠가 이런 말 을 했다. "드가, 그 인정 많은 심술쟁이 노인!" 드가가 심술쟁이 노인이라니! 궁정에 입궐하 는 대사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를 활보하는 그런 노인을 닳았단 말인가! 인정 많다니! 그 얼마나 진부한 표현인가 드가가 겨우 그 정도인 줄 아는가!... 옳지, 젊은이의 말뜻을 이제야 알겠다! 심술쟁이 노인. 드가는 기자들을 만나지 않는다 화가들은 드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드가의 견해를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목을 매단다. 하지만 이 심술쟁이 노인, 퉁명스러운 사나이는 속마음을 좀처럼 털어놓지 알고 상 냥하게 대답한다 "용서하시오. 잘 보이지가 않아요. 알다시피 내 눈이 이 모양이 되어 놓아 서..." 그런 면이 있는가 하면 드가는 상대가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젊은 이에 대한 육감이 있다 지성으로 똘똘 뭉쳤으면서도 남의 부족한 지성을 탓하는 법이 없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뇌까릴 뿐이다 "차차 배우게 되겠지." 하지만 정작 본인 앞에서는 이 렇게 말한다. "그대로 그 길을 가면 앞으로 대성 할 수 있겠소." 처음 그림에 입문할 무렵 드가한테서 나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는 강자이지만 아무도 그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들라크루아 색채에 완전히 감싸인 들라크루아가 색채를 자연 모방의 한 방식인 물리학 법칙으로 정당 화하는 모습은 놀랍다. 색채 ! 그토록 심오하고 그토록 신비로운 꿈의 언어. 나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그의 본질적인 환상성과, 그가 살았던 시대 주름잡았던 그림들의 본질적인 산문성 사이의 거센 충돌을 희미하게 탐지한다. 반역을 기도하는 본능을 그도 어쩌지 못한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당당히 타고 앉아 상상력 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 '다양한 사물' 들라크루아의 '돈 후안의 난파선' 사진 한 장 보내 주게 너무 비싸지만 않다면 말이야. 고백하네만 가끔은 이런 그림을 보고 있을 때만 예술이라는 집 안에 갇혀 지낼 수 있을 듯 한 느낌이 들어 이 사나이의 야수 같은 기질을 자네는 깨닫지 못했나? 들라크루아가 야수 를 잘 그리는 건 바로 그래서라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늘 호랑이의 유연하면서도 힘 찬 몸놀림을 떠올리곤 해 이 뛰어난 짐승의 근육조직은 분석을 허용치 않는다네. 호랑이의 발톱은 그리 될 수 없어 보이리만큼 뒤틀려 있어 그 야생생활도 그렇지 않은가. 들라크루아 도 같아. 그의 팔과 어깨는 늘 과격하게 뒤틀려 있어 합리적 분석을 허용치 않지 그러면서 도 생생한 정열을 표현한다네 그의 옷은 뱀처럼 돌돌 말려 있지만 그럼에도 얼마나 호랑이를 닮았는가!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돈 후안의 난파선)은 강한 괴물의 영감을 주거든 그래서 이 웅대한 작품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한껏 즐기고 싶은 마음이야 험한 바다 한복판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굶주 림은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지. 남는 것은 그림뿐이야 그 그림은 현실을 흉내내는 게 아니라 네 배는 노리개일 뿐이지 항구에서 건조된 게 아니야. 들라크루아 씨는 뱃사람은 못 되었 을지 모르지만 그 얼마나 뛰어난 시인인가! 그가 고고학적 세부묘사에 경도된 제롬을 흉내 내지 않은 것은 백번 천번 잘한 일이었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슈페네커에게 1895넌 5월 24일 에펠탑과 철제 건축물 틀림없이 이번 박람회는 비단 기계의 측면에서 뿐 아아직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재 료에 합당한 장식의 형식이 아직 예술적으로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인하고 억센 철에다 왜 부드러운 재료를 덧씌웠단 말인가? 새로운 이 기하학적 윤곽에 왜 하필 자연주의 에 밀려난 구태의연한 낡은 장식물을 덕지 덕지 덧붙였단 말인가? 건축공학자는 자기 고유 의 새로운 장식수단을 갖고 있다. 다름 아닌 장식 볼트, 철제 쐐기 ,철로 된 고딕풍 격자이 다 에펠탑에는 그런 게 부분적으로만 눈에 띈다 모방된 동상은 철과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볼트로 죈 철제 괴물을 그대로 놓아두는 편이 낫다. 왜 철 위에다 예쁜 그림을 덧칠해야 하는가? 왜 오페라 극장에나 어울 릴 그런 도금을 한단 말인가? 안목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철, 철, 오직 철을 앞세우라! 색채 는 재료처럼 장중한 맛이 나게끔 사용하라 그래야 쇳물을 연상시키는 위풍당당한 건물이 들 어설 것이다. '파리 만국박람회 미술 촌평' 정부의 지원 (슈페네커가) 나에게 창작장려금을 지급해 달라는 청원서를 얼마 전에 정부에 낸 모양이 야.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보다 더 비위가 상하는 일은 없네 물론 친구들한테야 언젠가는 빚을 갚을 수 있는 날 이 올 테니 그때까지 나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 어디서 돈 좀 끌어다 달라고 사정도 했고말이야. 하지만 나라에다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만일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껏 제도권 밖에서 힘겹게 추구해 온 모든 노력.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평생토록 잃지 않으 려고 애써온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거품이 되거든. 몽프레에게 1896년 8월 그리스 미술 원시 미술에서 자네는 언제나 자양분을 얻을 수 있어. (성숙한 문명의 미술에 있는 것은 오직 반복뿐이지.) 이집트 미술을 공부할 때 내 머리에는 항상 건강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다네. 반면에 그리스 미술을 공부할 때. 특히 몰락기의 그리스 미술을 공부할 때는 혐오 감과 반감이 내 속에서 꿈틀거리지 뭐겠나. 부활의 가능성은 전무한 죽음의 어렴풋한 예감 이라고나 할까... 페르시아 미술, 캄보디아 미술, 그리고 이집트 미술을 항상 기억하게. 그리스 미술은 제 아무리 아름다워도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어 . 몽프레에게 타히티, 1897년 10월 호쿠사이 호쿠사이가 그린 이 무사도에서 당신은 라파엘로가 그린 (성 미카엘)의 귀족적 인 몸짓, 미켈란젤로의 힘이 결합된 순수한 선, 그럼에도 빛과 그늘의 연출이 없는 훨씬 단순한 기법 을 보지 못하는가? 자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연과 그렇게 가까울 수가 없 다. 호쿠사이 그림이 갖는 품위와 단순 명쾌함을 굳이 말로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 능적인 감각이 있고 원초적인 특성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첫눈에 그 그림의 진가를 알아볼 테니까 '다양한 사물' 인상파 인상파 화가라기보다 나는 폭도였다. ...그때 인상파 화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은 접어 두고 색채에만 몰입했다. 장식적인 효과를 노렸음에도 그것은 자유롭지 못했고 실재에 접근해야 한다는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상상적인 허구의 풍경이 존 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조화로웠지만 거기에는 목적이 없었다. 인상파가 세운 집은 단단한 기초가 없다 감각의 매개를 색채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탐구의 중심을 눈에다 놓았지 사고의 신비로운 중심부에 두지 않았다 자연히 과학 적 인 탐색으로 빠져들었다. 물리학과 형이상학은 별개이다... 그들은 최초의 성공에 눈멀어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일의 관료이다 어제의 관료보다 더 살벌한. '다양한 사물 ' 마네 마네도 기억난다 그 역시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내 그림을 보 더니 (내가 그림에 막 입문했을 무렵)그는 내 그림이 좋다고 했다. "아마추어에 불과한걸 요." 나는 거장의 말에 몸둘 바를 모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당시 나는 주식거래인으로 일하면서 밤과 휴일에만 그림을 공부했다. 그때 마네는 이렇게 말했다. "당치 않은 소리, 그림을 못 그려야 아마추어지."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았던지 '전후' 모로 이런 비판과 대조적으로 위스망은 모로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좋다. 우리도 모로를 평가 하니까. 문제는 얼마나 평가하느냐에 있다. 모로에게서 우리는 문학적으로 나아가려는 열망 을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비문학적인 한 인간을 본다. 그러므로 귀스타브 모로는 유식 한 사람들이 정착시킨 언어로만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옛날이야기의 삽화가 같다. 그의 작품을 이끄는 원동력은 심장 가까이에는 없다 그는 물질적인 풍요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모든 인간을 보석으로 치장 된 보석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마디로 모로는 세련된 도안사이다 '위스망과 르동' 음악과미술 문학에는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이 있다 심사숙고된 이야기를 지향하는 입장과 아름다운 언어 형식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입장이다. 이 대립은 아주 오래갈지도 모르며 승산은 반 반이다 시는 오직 아름다워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밖에 없다 음악가들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소리, 조화 그것이 전부이다. 그들은 특별한 세계에서 산 다. 미술도 특별한 위치를 누려야 한다. 음악의 누이인 미술은 형태와 색채로 살아간다. 그 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하기 십상이다. '알린을 위한 메모' 낙원 적어도 그곳에 가면, 겨울을 모르는 하늘 아래, 놀라우리만큼 기름진 발 밑의 대지위에서, 타히티 사람들은 그저 손만 뻗으면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하지 않 아요. 반면에 유럽에서는 추위와 굶주림의 소용돌이에서 빈곤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몸 부림치면서 피땀을 흘려야 비로소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있지요 오세아니아의 미지의 낙원에서 살아가는 축복받은 타히티 사람들은 인생이 제공하는 달콤 한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사랑하고 노래부르는 것입니다. 빌룸젠에게 1890년말 피사로 만일 당신이 피사로의 모든 작품을 감상한다면 그 다채로움 속에서도 -보트랭은 제 아 무리 변신을 거듭해도 보트랭이지만-일관된 고도의 예술적 통제력뿐 아니 라 본질적으로 고상하고 직관적인 예술을 감지 할 것이다. 저 언덕 위의 건초더미가 제 아무리 멀리 떨어 져 있다 하더라도 피사로는 용케 그것을 굽어 내려보고 꼼꼼히 살핀다. 그는 모든 사람을 관찰했다고 당신이 말했던가? 왜 안 그렇겠는가! 모든 사람이 그를 관찰했지만 그들은 그를 부인했다. 그는 나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만은 그를 부인하지 않으련다. 한 전시실에 그가 그린 매혹적인 부채가 놓여 있다 반쯤 열린 울타리 문이 짙푸른(피사 로의 초록) 목초치를 반으로 가르고 있고 그 문 사이로 꽥꽥거리는 거위떼가 불안한 듯 좌 우를 살피며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제기한다. "우리가 쇠라 쪽으로 나가는 건가, 밀레 쪽 으로 나가는 건가?" 그들이 뒤뚱거리며 도달하는 종착점은 결국 피사로이다. '전후' 가난 나는 극단적인 가난이 무엇인지를 안다. 춥고 배고프고 그에 부수된 모든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말이다. 가난은 별게 아니다 사람은 가난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약간의 의지력만 있으면 나중에 가서는 그것을 대수롭 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가난이 끔찍스러운 것은 가난 때문에 일을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데 자기 시간의 3/4을 쏟 아부어야 하고 자기 정력의 절반을 퍼부어야 하는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특히 그렇다. 한편으로 시련은 사람안에 있는 천재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은 사람을 지쳐 쓰 러지게 만든다. '알린을 위 한 메모' 현재 자네에게 비밀을 한 가지 털어놓을까. 지극히 논리적인 문제라서 방법론적으로 접근해야 겠네 .처음부터 나는 내가 잘먹고 잘살기는 글러먹은 존재라는 걸 알았어. 자연히 나의 성미 도 거기 에 맞출 수밖에 없었지. 내일의 문제로 애태우며 고민하느니 나의 정력을 현재에 쏟아붓기로 한 거야, 승부가 날 때까지 끝끝내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레슬링 선수처럼 말 이야.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는 이렇게 혼자 뇌까린다네 또 하루를 넘겼구나. 내일은 죽을지 도 모르지만 몽프레에게 1892년 3월 11일 자부심 상상을 초월하는 자부심으로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력과 의지를 내 방식대로 일하는 데 끝내 쏟아부었다! 자부심은 결함인가, 아니면 북돋워야 할 대상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 각한다. 우리 안에 도사린 짐승과 격투를 벌이는 것보다 위대한 일은 없다. '알린을 위한 메모' 르동 나는 오딜롱 르동이 어떻게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 모른다 그 괴물은 허구이다 르동은 몽 상가이며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추하다는 것, 이것은 문제이며 현대 미술과 비평 의 시 금석이다. 르동의 심오한 예술을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는 노트르담의 동상에서 추함 을 못 느끼듯이 '괴물스러움'에서도 추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평소에 보지 않는 동을 분명 괴물처림 보이지만. 그것은 평범한 대중성에 영합하지 않는 한 그 어느것도 진 실되고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타성 때문이다 자연은 신비를 자아낼 만큼 무한하며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 자연 끊임 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화가 또한 자연이 스스로의 역량을 발취하는 수단의 하나이다 내가 보는 르동은 이 창조의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자연이 선택한사람이다. 그의 작품에 꿈은 현실이 된다. 꿈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린 모든 식물들은 우리 속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어둑한 그늘 속에서 우리는 한두 그루 나무의 줄기를 알아본다 나무 한 그루의 꼭대기에 무언가가 있다 마치 사람의 머리 같다 극단적 논리로 따져 보면 그는 이 생물형태의 현실 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것은 진짜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을 어렴풋이 흉내낸 것인가? 어느 쪽이든 그 형상은 그림에서 분리되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시련을 헤쳐 나간다 꼭대기에 머리카락이 나 있고 두개골을 살짝 열어 거대한 눈을 보여 주는 그 사람의 머리 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괴물인가? 천만에! 밤의 어둠, 정적속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내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는 것은 괴물과는 거리가 먼, 아주 인간적인, 심 장의 언어이다 '위스망과 르동' 르누아르 그리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면서도 잘 그리는 사람, 바로 르누아르이다... 르누아르의 작품 에서는 모든 선이 사라진다. 그러니 선을 찾아서는 안 된다. 찾아보아야 없기 때문이다. 마술처럼 ,사랑스러운 색의 조각 정겨운 빛의 깜박거림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성을 갖는다. 바라보는 이의 귀에 음악을 띄워 보내는 사랑의 훈풍 속에서 넘실거리는 머리채가 복숭아 같은 뺨을 희미하게 덮고 있다. 한 입 베어물고 싶은 욕망을 자아내는 앵두 같은 그 입술 이 살짝 웃음지으면 백옥 같은 작은 치아가 진주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깨 물리면 아프니까. 여인의 이빨인 것이다 그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위대한 르누아르... 이탈리아로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야릇한 머리를 보았다 왠지 모르게 내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왜 낮선 선율이 내 귀에 들렸을까? 상 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지 않는 눈을 가진 창백한 학자의 머리. 그의 눈은 보지 않고 다만 듣는다 나는 도록을 읽었다 '바그너', 르누아르 작,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전 후' 야성과고독 야성은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 조할 자신이 없었던 생산적인 요소를 찾아서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l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 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운 것은 하나같이 나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 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게 나만의 앎이 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환쟁이 의 넋두리' 가르키즈 제도 아투오나 1903년 4월 상징주의 자네는 상징주의를 문학과 미술에서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잘 알겠지 그 주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일치하지 후세인들도 같을 거야. 좋은 예술작품은 누가 뭐래도 살아 남는 법이니까 말이야. 문학비평가가 열심히 써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거의 없어 나는 간사한 언론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려고 했던 그 고약한 방식에 내가 빠져들지 않은 것을, 조금 건방진 말일지 모르지 만 천만다행으로 여긴다네 따분하기는 하지만 나를 어지간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 숱한 평론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저 웃고 말지. 몽 프궤에게 카투오나. 190B년 11월 허영 무슨 일을 하든지 당당한 자부심을 가질 일이며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일 입니다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자부심도 생기니까요. 하지만 허영만은 제발 피하십시 오 돈 자랑을 포함해서 허영이란 건 그가 속물임을 뜻하니까요 파들렌 베르나르에게 1888 년 10월 나약함 사람들이 어김없이 도움을 받는 것은 그들의 나약함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지 그들은 부탁 하는 요령도 알아. 나를 도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내가 강한 줄로 다들 알았기 때문 이야 그때는 자부심을 느꼈지 지금 나는 약하고 지쳐 있네 무자비한 투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 기진맥진해져 버렸어 나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네 모든 자부심을 던져 버리고. 나는 영락없는 실패자야 몽프레에게 타히티 1896년 4월 여자 여자는 자유롭고 싶어한다 자유는 그들의 권리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자가 그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자신의 미덕을 배꼽 아래에 둘 때 그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아마 더 건강해질 것이다. '알린을 위 한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