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지은이: 장-피에르 모르 출판사: 시공사 봉사자: 신영진 1609년 5월 베네치아, 돛대와 밧줄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한가운데에서 병기창의 노 동자들이 세계의 모든 부를 베네치아로 운반할 선박들을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소란한 가 운데 이리저리 거닐면서 무언가를 적기도 하고 기술자들에게 질문을 건네기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모르는 병기창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갈릴레오였다. 제1장 호기심 많은 교수 선박의 제조에는 도르래, 윈치, 권양기, 무거운 것을 옮기는 굴림대, 배를 물에 띄우거나 반대로 뭍으로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는 빗면 같은 기계들이 필요하다. 이 기계들은 사람들 이 줄로 끌거나 지렛대를 사용하여 작동시켰다. 말을 제외하면 별다른 '동력'이 존재하지 않 던 시절, 그나마 병기창에서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계의 작동은, 축성술의 이론과 천문학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30km떨어진 파두아 대학의 학생들에게 갈릴레오가 가 르치고 있는 '수학'이다. 베네치아 학단의 이방인 기계의 원리를 강의하는 대학 교수라 해서 직접 그 기계를 관찰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 나가는 일은 오늘날에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 그 시절 갈릴레오는 그야말로 괴짜 교수였던 셈이다. 동료 교수들에게 장인이나 뱃사람의 세계는 대학과는 전혀 다른 별세계였을 뿐이다. 그들의 강의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작가의 저작을 주해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갈릴레오는 물리적 법칙은 경험을 통해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모순될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했다. 어쨌든 과학이 2000년 전부터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기술분야 역시 멈추지 않고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점은 병기창을 통해 잘 드러났 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새로 개선된 도르래를 주목했다. 나선형으로 홈이 패어 있고 노끈 이 감겨 있는 나무토막 형태의 제동기였다. 이러한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곳에서 발 명된 거일까 아니면 다른 병기창에서 온 장인이 가져온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기능하는 것 일까? 갈릴레오는 그것을 그렸다. 그는 베네치아의 예술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인정받는 삽화가였던 것이다. 그는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종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 기 시작했다. 모로시니 궁전의 알현에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웠음이 틀림없었다. 걸어갈 것인가 곤돌라를 타고 갈 것인가? 갈릴레오는 오늘 저녁에는 걷기로 작정했다. 슬 라보니아 제방을 따라 산책을 하고 싶었다. 날씨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고 걷고 있자니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항구의 갖가지 장비들이 이상한 향기를 뿜어내 는 봇짐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부들은 밤에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 었다. 온통 먹물을 뒤집어쓰고 포석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문어를 한 무리 개구쟁이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걸음을 늦추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하여 류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훌륭한 류트 솜씨였다. 그 자신 류트 연주자가 아닌가! 그것은 과거에 피사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준 곡조였다. 피복상이던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음악가이자 작곡가였으며, 여러 권의 음악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갈릴레오가 총독의 궁전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만과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무 늦었다. 더 빨리 모로시니 궁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잡아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곤돌라가 대운하를 헤쳐 나가는 동안 갈릴레오는 오늘밤 그의 친구 사르피를 만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르피는 10인위원회의 일원이자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지식인이었 다. 오늘밤에 사르피는 베네치아의 교황에 대한 독립을 저지하려는 예수회의공작에 대해 늘 어놓들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여행자도 여럿 만나게 될 것이다. 흥미를 끄는 많은 여행자들 이 안드레아 모로시니의 살롱을 거쳐갔다. 17년 동안 갈릴레오는 네델란드인, 프랑스인, 바 바리아인, 라인강 연안 지방 사람들을 만났다. 곤돌라가 모로시니 궁전의 '수문'에 닿았다. 갈릴레오는 계단으로 뛰어내려 횃불이 타오르 고 있는 아치 밑을 지났다. 1609년 5월의 그날 밤에 인생을 바꿔 놓을 새로운 소식을 접하 리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튜브의 양 끝에 렌즈를 두 개 끼워 망원경이라는 장난감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찮은 장난감에서 미래를 본 갈릴레오 망원경은 이미 5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제작해 전파하던 망 원경을 1608년에는 파리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렌즈 두 개로 시력을 교정하도록 만들어진 이 안경은 장난감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물체가 확대되어 보이기는 해도 두 세배 정 도밖에 안 되었거니와 희미한데다 찌그러지기까지 했으므로 대중의 관심은 급속히 시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떠했을까? 망원경 소식을 모를 리 없던 프랑스나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이 경탄할 만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대 답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광학기구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결코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 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를 준다고 생각했다. 진리와 관계없는 환상이나 환영을 보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갈릴레오는 그 원리에 대해 어렴풋한 설명을 듣자마자, 직접 망원경 제작에 몰두했다. 그 는 동료들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물리적 법칙을 발견하고 검증하는 첫 째 수단은 무엇보다 경험이었으며, 그 자신 기술분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병기창에서 기계들을 관찰했음을 알고 있 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년 전부터 물리학적 원리와 수학적 원리를 이용한 도구들을 고안하고 제작했다. 중요한 것으로는 온갖 계산과 작도를 도와주는 '기하와 군사 용 컴퍼스'가 있다. 또한 그는 망원경으로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의 교수 봉급 은 대학의 의학 교수의 봉급에 비해 열배나 적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막내는 곧 세 살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토스카나 에 살고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가 지참금을 주지 않으면 동생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부유한 학생들, 특히 귀족 가문의 외국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했 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하인을 데리고 그의 집에 기거했다. 거기다가 기하용 컴퍼스를 만드 는 노동자 마르크 앙투안, 갈릴레오의 가족, 그의 학생들을 위한 텍스트를 베끼는 비서, 하 인 몇을 덧붙이면 파두아에 있는 그의 집을 지배하던 소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공식 강의를 해 야 했는데, 당시 갈릴레오가 가르치던 과목에는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모든 내용을 스스로 작성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17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했고 특히 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발견을 정리하고 책으로 낼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가 그때까지 출판한 것은 고작해야 기하용 컴퍼스의 사용법을 설명한 소책 자가 전부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사색할 시간마저 없다고 푸념을 했다. 만약에 망원경이 충 분한 수입을 가져와 개인교습을 줄일 수만 있다면, 사색을 하고 핵을 쓸 수 있을 텐데, 그러 나 그가 망원경을 만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망원경이 주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자유였다. 17세기 초 과학자들은 커다란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2000년 전부터 강요되어온 낡은 사상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알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그것을 존경해 왔다. 1597년, 그는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코페 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그 분야에서 많은 검토와 논증을 했으며 반박도 했지만, 감히 출판을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제2장 코페르니쿠스주의자 갈릴레오 1609년 당시, 갈릴레오는 적어도 20년 전부터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 에게도 대학의 방침에 맞추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프톨레마이도스의 낡은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왜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까?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은 프톨레마이오스와 모순될 뿐 아니라 성서에도 모순되기 때 문에, 공개적인 지지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성서에 따를 때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 해 있으며 태양은 지구의주위를 돌아야 했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공식적으로 금 지하지는 않았지만,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에서 화형을 당한 것은 그의 학설을 지 지한 데에 부분적인 다른 불만도 품고 있었으며,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공개 적으로 변호한다 해서 화형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 며 모든 동료들과 무자비한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공 격한 그에게 이미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겁쟁이라거나 격론의 장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후의역사 가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단, 그는 싸워야 한다면 견고한 사실에 바탕을 두기를 원했다. 그에게 진실로 견고한 유일한 것은 경험이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많은 '검토와 논증과 반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초등학생의 연습'이라 표현한 것처럼 그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학설을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 해서는 탄약이 필요했다. 그 탄약은 경험이 입증해줄 결과였다. 그는 망원경이 증거를 제시해 주기를 바라면서 곧장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다행히 곧 여름방학이 시작될 참이었다. 갈릴레오는 보통 여름이면 피렌체에 가서 토스카나의 젊은 영 주인 메디치가의 코시모에게 교습을 했다. 그러나 올해는 그의 부친이 별세한 터라 코시모 가 대공의 자리에 올랐고 수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 에 몰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망원경이 가져온 영광 그는 안경 제조인들이 만든 것처럼 코안경의 렌즈를 이용한 망원경으로는 기대할 게 없다 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높은 배율과 선명한 상을 얻기 위해서는 특수 렌즈가 필요했다. 그가 필요로 하는 두 개의 렌즈란, 하나는 약한 볼록 렌즈여야 했고 다른 하나는 강한 오목 렌즈여야 했다. 안경 제조인들이 만든 렌즈는 이와 반대로 강한 볼록렌즈와 약한 오목 렌즈 의 조합이었다. 갈릴레오는 직접 렌즈를 깎고 갈았다. 다행히 베네치아는 유럽 렌즈 세공의 수도였으므로 (베네치아의 겨울은 온 유럽에서 유명했다)필요한 재료와 물품을 구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 움이 없었다. 그는 사물이 흐릿하거나 이지러지지 않게 보이면서 여섯 배의 배율을 얻을 수 있는(다시 말해 대상이 여섯 배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망원경을 곧 제작했다. 이를 다른 것과 비교해 본다면 현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쌍안경은 일곱 재의 배율을 제공하며, 안경 제조인들의 장난감 망원경은 두세배의 배율을 제공하고 흐릿하며 이지러진 상이 맺히 곤 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결과에 용기를 얻어 다시 작업에 착수하여 8월 초에 상이 전혀 이지러 지지 않고 아홉 배의 배율을 제공하는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이었다. 갈 릴레오의 시도를 풍문으로 전해 들은 공화국 정부가 그에게 망원경의 실연을 요청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8월 21일 베네치아의 종탑 위에서 동료들이 지정한 원로의원들을 모시 고 실연을 해보이기로 즉시 수락했다. 밤이면 만나는 경이의 세계 약속된 날, 원로의원들은 약 100m에 달하는 종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을 불평없이 기어올랐다. 고된 일이었지만, 그들은 계단을 오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현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마술이었다. 진실로 경탄스러웠다. 파두아 성당은 종탑에서 32km가 떨어져 있었는데 망원경을 통하여 서는 불과 3.5km의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망원경은 종탑에서 2.5km떨어져 있는 무라노를 사람들까지 보이는 거리인 300m 거리로 앞당겨놓았다. 원로의원들의 열광은 당연 한 일이었다. 곧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망원경을 기증했다. 원로원은 이 새로운 기구를 군사적 으로 이용할 가능성에 매우 감탄하여 그에게 대단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종신직을 보장해 주었고 월급도 두 배로 올려주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계획의 첫째 부분을 이루었다. 망원경은 넉 달 만에 그에게 명예를 가 져다 주었으며, 부분적이나마 재정적 어려움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제는 계획의 둘째 부 분이 남아 있다. 그는 파두아로 돌아가 서둘러 두 번째 망원경을 완성시켰다. 이 망원경은 9 배가 아니라 20배로 대상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갈릴레오가 이것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 라노의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여러 날 동안 밤만 되면 갈릴레오는 하늘에서 그가 원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경이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섬을 발견하거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해변에 첫 발자국을 남기거나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미지의 계곡, 호수, 산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갈릴 레오가 망원경으로 경이로운 관찰을 수일 밤 계속하여 발견한 것은 섬이나 산이 아니라, 그 이전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세계, 새로운 우주였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갈릴 레오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직시 전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1610년 3월, 각국의 지식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로 쓰인 소책자가 '별들의 소식'이 라는 멋진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갈릴레오가 새 망원경을 처음으로 겨냥한 천제는 달이었다. 그의 경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의 공식 천문학에서는 달은 수정처럼 매끈한 윤이 나는 구라고 가르치고 있 었다. 그런데 망원경을 달에 맡춘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었다. 제3장 하늘의 소식 이미 달의 사진을 보아서 달에 산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도,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달을 보고 갑자기 그것이 하늘에 떠 있는 원형이 아니라 구멍과 돌기로 뒤덮여 있는 구와 같다는 것을 발견할 때 충격을 받는다. 갈릴레오 자신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별들의 소식))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같은 결론에 도달한 경위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고 나서이다. 즉, 초승달이 나 온 지 4-5일 후 달이 빛나는 두 개의 뿔 모양일 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경계는 완전한 구형에서 처럼 결코 매끄러운 선이 아니라, 반대로 울퉁불퉁하며 불규칙적이고 갈지자 모양 을 이루고 있다."갈릴레오는 이러한 묘사로 만족하지 않고 썩 훌륭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 의 책 전체는 그가 그린 삽화로 가득 차 있다. 울퉁불퉁한 달:신화의 종말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사이의 경계 부근에 밝은 곳에는 밝은 반점이 있다. 경계가 이동함 에 따라서 검은 반점은 감소하고 밝은 반점은 증가한다. 그것은 지구에서와 똑같다. 태양이 하늘에 떠오르면 산에 빛을 받는 부분이 증가하는 반면 골짜기의 어두운 반점은 감소한다. 이것은 달에 산이 많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갈릴레오는 달의 산과 골짜기들을 '공작의 꼬리'에 있는 것과 같은 둥근 반점으로 묘사했 고, 반점의 태양 반대쪽 테두리는 밝게 빛나는 데 반해 태양 쪽의 테두리에는 검은 가장자 리가 있다고 적었다. 이 반점들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둥근 골짜기들이다(오늘날 우리는 이 것을 크레이터라 부른다). 갈릴레오는 그 어두운 부분의 길이로부터 산의 높이를 산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어떤 산의 높이는 7000m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당시 알려져 있었던 지구의 가 장 높은 산보다 더 높았다.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달이 더 높은 산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 구보다 훨씬 더 울퉁불퉁한 셈이 된다. 여기에서 갈릴레오는 하나의 반대에 직면한다. 달이 그렇게 울퉁불퉁하다면 밝은 쪽 테두 리가 들쑥날쑥하게 보이지 않고 왜 그렇게 완전한 원형으로 보이는 것일까? 갈릴레오는 그 테두리에 많은 산맥이 차례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산맥의 움푹한 부분은 다 른 산맥의 융기로 채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파도 치는 바다가 멀리서 보면 평평 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파도의 꼭대기는 모두 같은 높이이고, 파도를 가르고 있는 골짜기는 숨는다. 산, 골짜기, 갈릴레오는 지구네 사용되는 용어를 가지고 달을 묘사했다. 그는 가장 큰 크 레이터를 산맥으로 둘러싸인 보헤미아 같은 지역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지구와 달이 동 일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신비를 벗는 '달의 지구조'와 '지구의 빛' 곧 그는 처음으로 '지구조'(태양관선을 받지 않는 달의 부분이 지구의 빛을 받아 발하는 청백색 빛:역주)현상을 해석하면서 위의 사실에 대한 보충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지구조는 초승달의 직후나 직전에 밝은 부분이 가느다란 모양일 때 달의 나머지 부분을 덮고 있는 회 색을 띤 조명이다. 매우 오래 전에 알려진 이 현상에 대해서 '새 달의 품속에 있는 헌 달'과 같은 온갖 시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갈릴레오 시대까지 아무도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달을 보기 전에 이미 이러한 설명을 생각해 냈으며 몇몇 친구와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의 발견과 더불어 이를 발표해야겠다고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빛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듯 달 자체나 별이 만든 빛이나(그렇다면 월식 때 에도 보일 것이다) '달을 투과한' 태양빛이 만든 빛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논의 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달을 비출 빛으로서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지구이다. 달이 우리에게 반쪽의 어두운 면을 보일 때 지구는 정확하게 반쪽의 밝은 면을 달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지구조란 '달에 비춘 지구의 빛'이다. 갈릴레오는 달이 지구처럼 산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 지구도 달처럼 빛을 발 한다는 사실을, 즉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지구와 하늘, 그리고 지구 와 온천체가 절대적으로 분리된 전통적 세계관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망원경을 별들의 세계로 돌리다:별, 별, 별.... 우리는 눈의 망막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한 밝기를 지닌 별들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직 경이 불과 몇 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우리의 동공에 별빛이 잡히는 대신에, 열배나 큰 직경 을 가진 망원경에 포착된 후에 수렴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면, 100배나 더 많은 별들을 보게 될 것이며, 맨눈에 보이지 않든 많은 별들이 보일 것이다. 갈릴레오는 삽시에 열배나 많은 별들을 발견했다. 그는((별들의 소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오리온좌의 성운들을 모두 묘사하려 했으나, 성운이 포함하고 있는 별들의 양이 너무 많고-500개 이상-시간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러므로 나는 맨눈에 보이는 여덟 개의 별 외에 허리띠(삼태성)와 80개의 별이 있는 오 리온의 칼만을 그렸다." 마찬가지로 그는 묘성군을 이루고 있는 빛나는 여섯 개읜 별들도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40개의 별의 구름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별들의 들판처럼 보이는 은하수였다. 그곳에서는 수십개의 별이 아니라 수천 개의 별이 보였다. 수천 년 전부터 하늘을 가로지르는 이 희미하게 빛나는 띠 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져왔다. 그런데 망원경에 눈을 대자 그 신비는 해결되었다. 그것은 무 리지어 모여 있는 수천개의 별, 별이었다. 그는 운하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세 번째로 발견한 것은 은하수 자체의 물질, 본질이었다... 은하수는 사실상 무리지어 흩어져 있 는 수많은 별들의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증거:눈으로 본다 그때부터 갈릴레오는 날마다 발이 되면 관찰을 했다. 그리고 낮에는 일을 했다. 그는 더 완벽한 망원경을 만들고 있었다. 1610년 초에 새로운 망원경이 준비되었다. 그것은 30배의 확대율을 보여주는 놀라운 망원경이었다. 그것은 갈릴레오가 만든 다섯 번째 망원경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주거나 외국의 동료들에 게 보내거나 심지어는 팔기 위해 많은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거가 평생토록 가장 아끼며 항상 가지고 다녔던 망원경이었다. 그는 이 망원경을 가지고 가장 훌륭한 발견을 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1610년 1월 7일, 밤이 되자마자 망원경으로 관찰을 시작했다. 그때 목성이 보였다. 그 망원경은 정 말 훌륭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행성의 근처에 밝게 빛나는 세 개의 작은 별을 볼 수 있었 다(전에 사용하던 망원경은 덜 좋은 것이었으므로 이 별들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목성에 대한 이별들의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 동쪽 * * O * 서쪽 1월 8일 나는 동일한 관찰을 하면서-나는 내가 왜 그것을 관찰하게 되는지 모르겠다-그 것들이 다른 위치에 있음을 발견했다. 동쪽 O * * * 서쪽 이제 세 개의 작은 별들은 목성의 서쪽에 있었다." 갈릴레오는 처음에는 '밝게 빛나는 작은' 세 개의 별들은 항성(항성은 그가 매일 밤 수백 개나 보는 것들이었다)이고 목성이 그 앞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성이 항 성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심쩍은 사실 은 목성은 1년 중 그 시기에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후 이틀 빔 동안은 구름이 끼었고 갈릴레오는 애가 탔다. 드디어 1월 10일 하늘이 갰다. 동쪽 * * O 서쪽 목성이 가던 길로 갑자기 되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는 이 동한 것은 목성이 아니라 이 별들이라는 사실을 일순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항성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목성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인 것이다.(그러나 갈릴레오는 그들을 위성 이라고 하니 않고 '행성'이라고 불렀다)그리고 그날 세번째 작은 별이 보이지 않은 것은 그 것이 목성 뒤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 확실하다. 며칠 뒤 갈릴레오는 목성 주의를 도는 위성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갈릴레오는 열정적으로 이 별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 네 '행성'이 목성을 따라서 하늘을 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적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로 해도 달이 지구를 "따라서 태양 주위 를 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대를 했다. 갈릴레오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답변했다. "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의심을 가라앉힐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증거를 지니게 되었다. 모든 행 성이 태양 주위의 큰 궤도를 따라 돌고 있듯이 어떤 행성이 다른 행성의 주위를 돌고 있기 도 하다. 우리는 목성과 네 별 모두가 12년 동안 태양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달이 지구 주 위를 도는 것처럼 네 별들이 목성의 주위를 도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적들이 그 들의 눈으로 보게 하기까지 겪어야 할 어려움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곧 '친절한 학생' 으로부터 새로운 발견을 가져올 휴가를 얻어냈다. ((별들의 소식))은 1610년 3월 12일에 출판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성공을 거머쥐었다. 단 며칠 만에 500부를 찍은 책이 절판되었다. 갈릴레오와 망원경, 달에 있는 산들, 그리고 제개의 새로운 '행성'이 전유럽 사람들에게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행성들에 게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여기에 토스카나 대공의 이름이 붙었을까? 제4장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갈릴레오는 자기가 발견한 행성들이 과학자들에게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그처럼 고귀한 이름을 가진 행성을 공격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을 했다. 토스카나의 대공 코시모 데 메디치가 갈릴레오의 '선물'을 받아들인 이상, 네 개의 별 을 공격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메디치가의 여인 마리 드 메디시스였던 것이다. 또한 갈릴레오는 자신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확실하고 오류일 가능성이 있는 발견이라며 메디치가의 이름을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이것 은 앞으로 나올지도 모르는 반대자들에 대한 경고였다. 사실 갈릴레오는, 대공이 이에 대한 답례로 피렌체 궁전의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는 꿈을 들어주기 바랐다. 그러면 그는 왜 베네치아를 떠나고자 했을까? 그가 떠나고 싶어했던 곳은 베네치아가 아니라 파두아와 그 대학이었다. 그는 거기서 20년 동안을 가르쳤고, 이제 그는 모든 시간적 제약에서 벗어날 것을 꿈꿨다. 물론 이제 그는 개인교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망원경 제작, 야간 관측-낮에는 모자라는 잠을 벌충해야 했다-과 이에 따르는 많은 새로운 발견을 정리할 필요성, 이 모든 것은 시간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일들에 자기의 시 간을 모두 할애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것이 망원경으로 승리를 거둔 불과 몇 달 후 에 베네치아를 떠난 것을 모두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었 던 데는 더욱 강력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향수병이었다. 20년 만에 꿈꾸는 귀향 1610년에는 이탈리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탈리아는 베네치 아 공화국, 미라노 공국, 피렌체 대공국, 교황령, 나폴리 왕국 등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 다. 이들은 저마다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정부의 성격 또한 많이 달랐다. 갈릴레오는 토스카나 사람이었다. 그는 피렌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별들의 소식 ))이나 컴퍼스에 대한 소책자 같은 저서의 첫 페이지에서 그는 자기 이름 뒤에 피렌체 사 람이라고 적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는 거의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두 도시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가 갖고 있는 부드러움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거리에 나와 열 띤 토론을 벌이고 그런 생각들이 불꽃놀이처럼 솟구치는 피렌체의 밤을 잊지 못했다. 분위 기도, 음식맛도 달랐다. 그의 발견이 20년 동안 키워온 꿈을 실현해 줄지도 모른다.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자신이 발견한 네 개의 행성을 궁전에 보이기 위해 토스카나로 갔다. 피사에서 대학 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험강의가 있었다. 코시모데 메디치의 측근, 즉 그의 모든 관료들 은 열광하여 행성과 망원경과 그 발견자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은 냉담했 다. 그들 중 가장 존경받는 실력자 리브리는 망원경을 들여다보기조차 원하지 않았다. 몇 달 후 그가 죽었을 때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던 갈릴레오는, 지상에 있는 동안에 이 별들을 보 기를 거부했던 그였지만 하늘로 올라가면서 그들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파두아에 돌아와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에 대한 세차례의 강연을 했고, 이는 대단한 성 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미리 빈타 장관에게 상황을 타진해 보았고 그에게 공식 요청서를 보냈다. 친구들은 그가 떠나려는 것을 보고 크게 걱정했다. 그들은 그가 빠르던 늦던 언젠가는 교 회와 충돌하리라고 예상했다.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베네치아 공화국뿐이었으므로, 그들은 갈릴레오가 베네치아를 떠나는 것은 잘못 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 사그레도는 "나는 당신이 예수회의 친구들이 크게 존경 을 받고 있는 곳으로 가시려 한다니 큰 걱정이 됩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향수병은 신중함을 잊어버리게 했다. 갈릴레오는 7월에 피렌체로 발령이 나자 1610년 9월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침내 출판된((별들의 소식))은 적들의 행동을 불러오고.... 갈릴레오의 친구 사그레도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올바로 진단했다. "당 신의 영주가 권력과 관대함으로 당신의 헌신과 장점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궁정의 요동하는 바다 물결이 꼭 흘러 넘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질투라는 힘센 돌풍으 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는지요?" 이러한 질투의 첫 '돌풍'은 갈릴레오가 피렌체에 완전히 정착하기도 전인 1610년 여름부 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은 아무 논거가 빈약했으므로 실력자들은 감히 개인적 으로 나서지 못했고, 그 하수인들만이 적대감을 표출시켰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의 오래된 적으로는 볼로냐 대학의 마지니 교수가 있었다. 공격을 한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 없는 조수인 호르키라는 사람이었다. 호르키는 6월부터 갈릴레오에 대항하여 그를 모욕하는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출판했다. 그가 갈릴레오는 이 발견이 오류 임을 선언하는 주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즉, 점성가들은 이미 점성에서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 모두를 고려했으므로 메디치의 행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다. 소용이 있다!"갈릴레오의 한 학생이 답변했다. 이 행성들은 적어도 호르키를 괴 롭히고 맹신가들에게 혼란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했다. 불쌍한 호르키의 빈약한 논거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로 이것은 갈릴레오의 적들이 경험보다 더욱 신뢰하는 논리 적 추리를 잘 보여준다. 둘째로 이것은 하늘은 인가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다는 고대의 사상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니 교수는 대변인이 실패하자 몹시 화가나서 즉시 그를 내쫓아버렸다. 8월, 두 번째 공격이 피렌체 사람 시치의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배후에는 피사의 교수들이 있었다. 그 논거도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예를 들면, 목성의 위성은 존재할 수 없다. 하늘에 는 움직이는 물체(태양, 달, 맨눈에 보이는 다섯 개의 행성)가 일곱 개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목성의 위성은 존재할 수 없다. 왜 일곱 개 인가?그 이유는 일곱가지 큰 죄가 있고 1주일에는 7일이 있고 세계의7대 불가사의가 있고 이집트에 내린 일곱 사지 재앙이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면 망원경은? 그의 적들은 망원경은 무익하고 오류를 일으킨다고 했다. 고대 작가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이 망원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들은 훌륭한 지식인이었으므로 망원경을 알았을 것이며,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를 승낙 했던 갈릴레오의 동료들은 그 속에서 환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이 '환영'들이 왜 목성의 주위에만 나타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코페르니쿠스와 클라우스 사실 갈릴레오는 그처럼 형편없는 적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에 학생들이 답변하도록 했다. 그에게는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해야 할, 휠씬 더 비중 있는 서신을 교환하 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천문학자 케플러가 있었다. 그는((별들의 소식))이 출판되자마 자 그에 대한 의견을 재촉하면서 케플러에게 한 부를 보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케플 러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알고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지체없이 열렬한 축하를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편지에서 이 책이 불러 일으킨 커다란 반항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제 친구 바커 폰 바헨펠스 남작 이 우리 집 앞에 마차를 멈추었어요. 남작은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게 정말이오? 그 가 별 주위를 도는 별들을 발견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케플러는 곧 공식적으로 갈릴레오를 축하하는 글을 출판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존재를 납득할 수 없었다. 갈릴레오는 그에게 망원경을 하나 보냈고, 마 침내 케플러 자신도 위성들을 볼 수 있었다. 1610년 8월부터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위성의 존재를 열렬히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 그러므로 케플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옹호자였다. 갈 릴레오가 진정 설득하고자 했던 사람은 클라비우스였다. 클라비우스는 예수회 회원이자 교 황의 수석 천문학자였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갈릴레오의 발견을 조롱하며, 미리 망원경에 별들을 넣어두지 않는 한, 망원경 으로 그 별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갈릴레오는 클라비우스가 정직한 사람이므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달이 산을 보기만 한다면 진실을 말하리라고 생각했 다. 11월에 금성의 변화과정에 대한 관찰을 끝마칠 즈음, 다행스럽게도 클라비우스가 그의 충고에 따라 마침내 목성의 위성을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듭되는 새로운 발견 갈릴레오는 첫 번째 발견을 알리려고 노력하면서 파두아와 피렌체에서 관찰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그는 토성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 그는 토성의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반점이 목성의 위성보다 크고 행성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는 위성들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행성의 주위를 도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갈릴레오는 이들 이 잠시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돌출 부분이 태양계 의 가장 훌륭한 경관의 하나인 토성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그의 망원경의 성능이 너무 약했다. 이러한 사실은 45년 후에 호이겐스가 훨씬 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발견한다. 갈릴레오는 토성에서 놓친 행운을 금성에서 만회한다. 그는 곧 금성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점이어서 완전히 확실해질 때까지 발표를 미룰 정도였다. 동시에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발견을 훔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미리 대비 를 했다. 1610년 9월부터 그는 케플러에게 "Haec immatura a me jam frustra leguntar, o.y.."(번역하면 나는 이것들을 헛되이 너무 일찍 읽었다, o.y.)와 같은 다소 이상한 라틴어 문장을 보냈다. 사실 이것은 글자 수수께끼로서, 이 문장의 글자를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다른 문장이 된 다. 이 문장은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는 자신이 틀렸으면 잘못된 것 을 출판하지 않으면 되고, 자기가 옳은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발견이라고 주장하면 자신의 우선권을 증명하기 위해 글자 수수께끼 의미를 밝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갈릴레오는 옳았다. 그는 12월에 프라하에서 케플러에게 중요한 글자 수수께끼를 푸는 열 쇠를 발송했다. 그 문장은 "Cynthiae figuras aemulatur mater amorum(사랑의 어머니는 다 이아나의 형상을 모방한다)."였다. 현대의 독자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겠지만, 르네상스 시기 말의 독자라면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금성(비너스, 사랑의 어머니)은 달(다 이아나)처럼 형태가 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성은 달처럼 변화하여 때로는 둥근 모양 이 되고 때로는 초승달 모양이 된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것은 금성이 때로는 태양 의 뒤에 있고 때로는 앞으로 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금성: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고 다른 천체의 궤도가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금성이 태양의 앞과 뒤로 움직 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금성의 변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반박하는 결정 적인 논거가 된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금성이 스스로 빛을 발아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지구나 달 처럼 금성도 태양의 빛을 받아 밝은 쪽과 어두운 다른 쪽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 이 독자적인 역할을 행사하며 다른 행성들은 지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요컨대 코페르니쿠 스가 옳다. 갈릴레오는 이미 달이 지구와 흡사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제 그는 금성이 달과 비슷하 다고 주장한다. 그는 베네치아의 사르피에게 재미있는 설명을 넣어 편지를 띄웠다. "망원경 을 거꾸로 잡고 달을 보면 금성처럼 빛나는 점을 볼 수 있을걸세." 그 외에도 이 발견에는 당시의 천문학자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또 다른 측면이 내 포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따를 때 지구와 금성의 거리는 많이 변화한다. 그러 므로 지구에서 보이는 금성의 크기도 많이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맨눈으로 보면 금성은 항 상 빛나는 점으로 보인다. 그 빛의 강도가 변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금성이 지구에 실제로 접근하는 만큼 밝아지지는 않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그때까지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에 금성의 크기는 코페르 니쿠스가 예견했던 대로 변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성의 형태도 함께 금성의 크기가 가장 커지는 순간이 금성의 형태가 가장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이 되는 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갈릴레오가 지금까지 성취한 모든 발견 중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가장 큰 뒷받침을 주는 것이었다. 바로 방문하라는 클라비우스의 초대를 받았다. 클라비우스는 결 국 망원경을 들여다보았고 갈릴레오가 예견했던 대로((별들의 소식))에 쓰인 발견의 진실 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자마자 갈릴레오는 가장 아끼는 망원경을 가지고 로마로 출발했다. 새로이 발 견한 사실들을 클라비우스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품고서. 갈릴레오는 1611년 3월 29일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 체류는 매혹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거 기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가까운 친구였던 살비아티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로 마의 수많은 저명 인사와 추기경, 고위 성직자, 영주들이 나를 환영해 주었네. 그들은 내가 관찰한 것을 보고 싶어했고 또 만족스러워했지. 이곳의 훌륭한 조각상과 그림, 벽화와 궁전 과 정원을 구경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네." 제5장 거듭되는 승리 갈릴레오는 로마 대학의 천문학들, 즉 클라비우스와 예수회 소속의 천문학자들에게 환대 를 받았다. 그들은 이미 ((별들의 소식))의 발견을 인정했으며, 금성의 변화를 보고 경탄 했다. 4월 19일, 교회이론가의 제1인자인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클라비우스에게 갈릴레오의 관찰에 대한 로마 대학의 공식 소견서를 요청했다. 클라비우스는 갈릴레오의 관찰에서 결론 을 도출해 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관찰에 동의를 표하는 보고서를 그에게 보냈다. 승리자 갈릴레오:로마가 보내는 영광의 찬사 그의 발견은 그 시대 최고의 천문학과 종교의 권위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교황 바울로 5세는 그를 개인적으로 접견하여 당시의 관례와 달리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게 하는 등 충분한 호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는 로마 대학 전체가 갈릴레오 앞에 모 여 공식적으로 그의 발견을 치하했다. 갈릴레오는 많은 로마의 지식인들을 만났는데, 저명한 지식인 체시 공은 자기가 창설한 린체이 아카데미의 여섯번째 회원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회원들은 새로운 과학적 발 견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로 대학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날카로은 시선을 상징하 는 살쾡이(린체이)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대학에 대한 독립을 내세우려는 의도였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제안을 영광으로 생각했고 몹시 기뻐한 나머지 즉시 수락했다. 그리하 여 그는 당시로서는 자신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서신을 교 환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책 겉장마다 자기 이름 뒤에 '린체이'라고 기재했고, 린체이 아 카데미의 문장을 인쇄해 넣었다. 모든 일은 순조로운 듯 보였고, 갈릴레오는 6월의 태양을 받으며 매우 즐겁게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는 바로 그때에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자기에 대한 비밀 보고서를 종교재판소에 요청하 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달지 못하고 있었다. 11년 전에 로마에서 종교재판소는 별들은 또 다른 중심 항성이며 그 주위를 다른 생성들이 돌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조르다노 브루노르 산 채로 화형시킨 적이 있었다. 그 재판을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벨라르미네 추기 경이었다. '물에 뜨는 물체에 대한 논쟁':예상치 않은 분야에서 만난 큰 적 갈릴레오가 로마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적들의 사기가 한풀 꺾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 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갈릴레오의 천문학적인 발견을 공격하기에는 좋은 시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들은 다른 영역에서 갈릴레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을 언급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 첫째 이유는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이 논쟁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논쟁은 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파 사이의 대립이 천문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셋째로 우리는 여기서 물에 뜨는 물체 라는 매우 순수한 주제에 대한 두 가지 형태의 논리 전개와 논증을 보게 된다. 1611년 9월의 어느 더운 날, 갈릴레오는 대고의 집에서 피사 대학의 여러 교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엘치대학 총장과 로도비코 엘레 콜롬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새로운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철저한 사람이었다(그는 갈릴레오 를 '불쌍한 자'로 취급한 책을 이미 필사본의 형태로 돌린 바 있었다). 또한 귀빈들 가운데 에는 로마를 방문중이던 두 명의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중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봄에 로마 에서 갈릴레오의 천문학 강연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날씨가 더워서 그랬는지, 대화는 얼음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고, 물에 뜨는 얼음 의 특별한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자 젤레 콜롬베와 그의 동료들은 그에 대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언급했다. 얼음이 물에 뜬다면, 그것은 얼음이 판형이기 때문이 라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형태가 얼음에 물에 가라앉아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다. 이 러한 저항이 없다면 얼음은 무거운 물체에 속하므로 가라앉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25년 전에 물에 ?뜨는 물체에 대해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파두아에서 교수가 되기 전에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을 공부하며, 물체를 물에 넣어 물체의 밀도를 측 정하기 위하여 저울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 았다. 얼음판을 힘을 가해 물의 바닥으로 밀어넣었을 때, 손을 놓자마자 얼음은 물 표면으로 다 시 떠오르는 사실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물의 저항은 얼음을 아래로 민 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러한 설명을 부정한다. 얼음이 물에 뜨는 것은 저항 때문도 형태 때문도 아니다. 구형의 얼음도 판형의 얼음과 마찬가지로 물에 잘 뜬다. 얼음이 물에 뜨는 것은 단지 얼음이 물보다 더 가볍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 체 사이의 대립은 포기되어야 한다. '무겁다'든지 '가볍다'라는 말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한쪽에는 무거운 사물들이 존재하고 다른 쪽에는 가벼운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보다 더 무거울 수 있을 뿐이다. 치열한 '전투':궁지에 몰린 피사의 교수들 논쟁은 극히 날카로웠다. 피사의 교수들은 대공앞에서 자신들이 선택한 분야에서 학문적 명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추기경들이 이 원시적인 논쟁의 증인이 되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예상처럼 갈릴레오의 동료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한 반면, 마페오 바르 베리니는 갈릴레오의 편에 섰다. 코시모 대공은 자기의 식탁이 과학혁명의 배경이 되는 것을 보고 기뻐서 갈릴레오에게 책 을 한 권 쓰도록 요구했다. 코시모데 메디치에게 헌정된 ((물에 뜨는 혹은 물 속에서 움직 이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1612년 5월에 출판되었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그 책에는 망원경이나 특수 장치가 없이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경 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적들의 모든 논거를 예상하고 하나씩 비판해 갔다. 그는 특별히 가벼운 물체인 공기는 물보다 800배 가벼운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혔 다. 이 저서는 하나의 경이로 받아들여졌다. 물에 뜨는 물체에 대한 논쟁은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다. 피렌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논쟁을 화제로 삼았고, 명문가 젊은이들은 갈릴레오에게서 수학을 배우려고 몰려들었다. 그 리고 갈릴레오는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친구가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논쟁을 통해, 정당한 논쟁을 통해서는 자신을 대적할 수 없음을 적들에게 보여주었다. 델레 콜롬베와 그의 패거 리들은 갈릴레오의 책에 대한 응답으로 애매한 소책자들을 여러 권 출판했지만 그들 자신,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도 천문학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논쟁에서도 패배했음을 처절히 깨닫고 있었다. 갈릴레오를 옭아맬 마지막 수단:종교적인 논쟁의 장 당시 '잘못된 생각을 하는'자를 침묵시키는 가장 확실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과학 의 영역을 떠나서 교회의 개입을 촉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는 동맹자, 아니 공모자가 필요했는데 바로 종교인이었다. 여기에는 이미 많은 종교인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 세계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 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증명해 준다. 갈릴레오의 베네치아 친구인 사르피가 있었고, 그 다음 클라비우스, 로마 대학의 예수회 동료들, 벨라르미네 추기경, 교황 바울로 5세, 바르 베리니 추기경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갈릴레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의심스러운 벨라르미네를 제외하고). 델레 콜롬베의 동맹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어'T따. 무식하고 상스럽고 공격적인 이들 은 '신앙 수호대의 개'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들은 페렌체에서 유명한 성 마르코 수도원을 소유하고 있는 도미니쿠스회(예수회와 경쟁하는 종단)의 수도사들이었다. 성 마르코 수도원에서 1621년 만성절에 수호대의 개들은 처음으로 생동을 개시했다. 로리 니 신부는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한 성서의 구정을 인용하여 천문학의 새로운 사상은 '성서에 위배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사흘 뒤 로리니는 갈릴레오에게 다시 한번 '이 이페르니크의 사상'을 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위험은 그다지 커보이지 않았고 갈릴레오는 친구들과 함께 웃어넘겼다. 당시 그는 태양의 흑점이라는 더욱 흥미로운 일에 사로잡혀 있 었던 것이다. 태양의 흑점에 관한 새로운 논쟁 태양의 흑점을 관찰한 것은 갈릴레오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손에 철퇴를 들고 검 가죽을 걸친 미지의 천문학자였다. 사실 흑점 중 한 개는 가끔 육안으로는 볼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러나 활발한 연구는 망원경이 발명된 후에야 시작되었다. 망원경을 이용하면 매우 작은 흑점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1610년부터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점은 많은 문제를 제기했고, 갈릴레오는 1612년 1월에 ((태양의 흑점에 대한 편지))가 독일어로 출판될 때까지 자신의 이론을 출판하지 않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책의 저자는 예수회 회원인 샤이너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611년 흑점을 관할하기 시작한 샤이너가 그것에 대한 결론을 제시한 그 저서에는 갈릴레 오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담겨 있 었다. 샤이너에게 태양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 완전한 천체였다. 따라서 태양에 변화하고 움 직이는 흑점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생성하고 이동하며 사라지는 것처럼 f 보이는 흑점은 단지 태양의 앞을 지나치는 소행성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갈릴레오는 우선 몇 편의 편지를 써서 이에 답했으며, 그후에는 ((태양의 흑점에 관한 역사와 논증))이라는 책을 내어 1613년 3월에 출판했다. 그는 우선 흑점은 태양의 가장자 리로 다가갈수록 점점 납작해진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이 사실에서 흑점은 태양 표면에 달 라붙어 있는 매우 납작한 구름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리고 단면이 보이게 되는 가장자 리 쪽에서 흑점은 작고 얇아져 거의 선처럼 된다. 흑점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태양의 중심 근처에 있을 때 가장 빠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갈릴레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양 전체는 균일한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 태양 표면 의 한 점이 가장자리로 다가갈수록 그 점이 하루 동안 진행하는 거리를 우리는 더 비스듬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그 점이 더 늦게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태양의 흑점들이 태양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는 납작한 구름이 아니라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흑점은 표면이 더 차가운 지대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을 제 외하면 갈릴레오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공식적인 천문학자들에게 가차 없이 두 가 지 공격을 가하고 있다. 첫째는 '태양이 자전을 한다면 왜 지구는 자전을 할 수 없단 말인 가?'하는 점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것처럼 지구는 하루에 한바퀴 자전한다. 왜 그럴 수 없다는 말인가?'둘째는 다시 한번 하늘이 영원한 부동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 한 천체인 태양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결국 인정을 받게 되고, 샤이너 자신도 힘들지만 이를 받아들여 20년 후에는 태양을 화산에서 흘러내린 불꽃의 바다로 그리게 된다. 태양은 더 이상 반들반들한 구가 아 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이 새로운 논쟁이 이탈리아어로 출판되면서 갈릴레오에 대해 전보다 더 욱 위험한 공격이 시작된다. 1613년 5월 코시모 데 메디치는 셋째 아들의 세례를 기념하는 성대한 예식을 열었다. 축 제 내내 갈릴레오가 최근 발견한 별들을 장식한 목성 마차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제6장 함정 피렌체에 정착한 갈릴레오는 네 개의 '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꽃들에는 가시가, 그것도 독이 있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1613년은 갈릴레오에 대한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해이기도 했다. 전투는 그다지 놀라운 방식이 아니었고, 첫 번째 공격은 직접 그를 향한 것 이 아니라, 그의 제자의 하나인 피사의 수학 교수이자 사제인 카스텔리를 향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적들은 자기들의 상대의 제자가 성공하는 것을 곱게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를 공격하면 갈릴레오까지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카스텔 리 가 대학에 자리를 잡았을 때 엘치 대학 총장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엄격히 금 지했다. 이제 그들은 그를 정성 들여 만든 각본 속으로 밀어넣었다. 함정이 점점 갈릴레오의 주변을 둘러싸다. 1613년 3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네 대공 부인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 는 자리에서 피사대학의 한 교수는 카스텔리 신부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성서와 모순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대공 부인은 대단히 경건하고 궁전에서 큰 영향력을 가 진 인물이었다. 피사의 교수들은 요긴한 관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딕투스회 수사 이며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카스텔리는 논쟁을 피하지 않고 적들이 대공 부인의 마음에 일 으켜놓은 근심을 진정시켰다. 다음날 그는 이 사건을 갈릴레오에게 보고했고, 갈릴레오는 카스텔리를 이 일에 홀로 버 려둘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카스텔리에게 편지를 보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 해를 명백히 밝히고 그 편지를 복사하여 돌리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의 적들은 그를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의 첫 단계에서 성 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에 스캔들을 일으키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1614년 12월 새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카치니라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는 "갈릴래아(프랑스어로는 갈릴레오와 동 일함:역주)사람들아, 왜 너희는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느냐?"라는 성서의 구절을 설교 주제로 선택했다. 말장난(갈릴래아라는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을 제외하면, 설교는 갈릴레오와 코페 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격렬한 공격이었다. 다음날, 도미니쿠스회의 책임자는 갈릴레오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어 자기 밑에 있는4000 명의 수사 중 한 명이 저지른 '짐승 같은 짓'에 책임을 느끼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동시에 카치니 수사는 자기 형에게 '비둘기들'에 입회한 것을 비난하는 편지를 받았다. 비둘 기란 오도비코 엘레 콜롬베(비둘기라는 뜻:역주)가 이끄는 교수단을 부르는 용어였다. '비둘기들'이 일격을 날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제 또 다른 수호대의 개가 보습을 드 러냈다. 1612년에 이미 등장했던 로리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의 복 사본 한 부를 손에 넣었다. 그는 그 편지의 여기저기에 수정을 가하여 다시 쓴 다음 종교재 판소로 보냈다. 또한 카치니는 스스로 피사의 종교재판관에게 가서 '자기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갈릴 레오의 오류, 예를 들면, '갈릴레오주의자'들은 하느님을 우연으로 간주한다는 내용 등에 대해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종교재판관들이 증거를 원한다면 로리니가 보낸, 그리고 변조한 편지를 다시 읽기만 하면 되었다. 또 그들은 여러 증인들-갈릴레오의 동료들과 로리 니와 카치니의 친구들-을 심문할 수도 있었다. 이제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사의 종요재판관들은 이같은 고소를 모른 척할 수 없 었다. 그들은 서류를 로마의 종교재판소로 넘겼다. 피할 수 없는 로마 교회의 개입 1615년 2월, 로마의 사제 가운데 갈릴레오의 친한 친구 한명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 신도 잘 알다시피 항상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어제 저녁 나에 게 이문제에 관하여 당신이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가 했던 논쟁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며 물리학과 수학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고 다 시 이야기 했습니다. 성서의 해석은 신학자들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우두머리는 벨라르미네 추기경이었다. 그는 교회를 교황의 권위에 더욱 일치 시킨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과 같은 폭퐁우를 통하여 긴 일생을 이미 이 목표에 바쳐왔다(그는 73세였다).1611년 봄부터 갈릴레 오에 대한 비림 보고서를 종교재판소에게 요청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당시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로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음은 물 론이다. 종교재판관들은 카치니, 로리니와 그 일당들이 갈릴레오의 '불경건'에 대해 뱉어내 는 증언을 점점 쌓아가고 있었던 반면, 벨라르미네는 이러한 고소의 허위성을 미리 간파하 고 있었지만, 훨씬 더 심각한 사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서와 코페르니쿠스 이론 사이의 모순이 교회 안에 초래한 위기감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80년이나 된 오래된 것이었 으나 갈릴레오의 발견과 함께 이 논쟁은 비로소 '위험한' 것이 되었고, 대중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교회 안에 뿌린 근심의 씨앗 이러한 모순에 대해 이제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말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교 회내부에서조차 확실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늙은 클라비우스는 공식적 천문학을 재검토해 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1612년 세상을 떠났다. 로마 대학의 그의 후계자도 같은 입장 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벨라르미네가 즉시 행동을 결심을 하도록 만든 것인 지도 모른다. 그는 1615년 3월 나폴리의 신학자, 포스카리니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옳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쓴 책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이며 유명한 신학자였던 포 스카리니는 벨라르미네에게 자신의 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벨라르미네는 4월 12일 답장을 보냈다. 그는 현상들에 대한 수학적 기술에 그치는 한, 코 페르니부스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해?T다. 그러나 태 양이 진정으로 체계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은"매우 위험한 태도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분 노하게 할 뿐 아니라 성서에 반대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적 건강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다."라 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의 편지는 적들과 그가 말하는 언어가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논의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해는 떴다 지고.'라고 쓴 사람은 하느님께 직접 지 혜를 받은 솔로몬이다. 그가 증명된, 혹은 증명이 가능한 진리와 상반되는 선언을 할 수 있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상의 포기인가, 교회의 전쟁인가! 이처럼 벨라르미네는 포스카리니에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갈릴레오에게 확실한 선택을 강요했다. 그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평범한 수학적 가설 이상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면 교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상 속에 세계의 현실리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때는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2000년 전으로 후퇴하여 아테네의 철학자들이 천문학자들에게 불경건이라는 벌로 협 박하여 하늘의 현상에 대한 수학적인 기술만으로 만족하도록 강요했던 시기로 돌아가보자. 그때부터 지구와 하늘 사이에 대 분리가 일어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강화했다. 그후 모든 종교는 이러한 분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2000년간 종교권력은 '하늘과 땅을 섞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갈릴레오가 새로운 발견을 한 것 이다. 달의 산들,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들, 금성의 변화, 이 모든 것이 보였고 교회는 이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천문학자들이 수학적 기술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의 실제적인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한결 더 수월해졌다. 그럴수록 벨라르미네는 더 급해졌다. 포 스카리니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갈릴레오에게 보낸 최후 통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자 신이 관찰한 바에서 결론을 이끌어내기를 즉시 포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전투에 돌입할 것 인가? 그는 물론 성서에 대한 논란에 휘말려드는 일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의 적들은 상 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논란은 교회의 최고위 층까지 파급되었다. 갈릴레오는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나는 유능한 사람들이 코페르니쿠 스의 사상이 현실성이 없는 수학적 현실일 뿐이라고 내가 생각한다고 여기기를 원하지 않는 다. 나는 그의 사상에 가장 충실한 자 중 하나이므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코페르니쿠스주의 자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의 이론은 물리적으로 옳다기보다는 오 류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 다." 게다가 갈릴레오는 카돌릭 신자였다. 그는 기독교와 교회를 깊이 존경했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시작될 전투의 중요성을 더욱 배가시켰다. 실상 '그의'학문이 금지되는 동시에 '그의 '종교가 부당한 금지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그에게는 학문과 종교 양자가 완벽하게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인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 드디어 그는 로라에 가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전에 그는 시간을 들여서 자신의 사상을 정성껏 정리하고 성서와 새로운 천문학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글 을 썼다. 그는 이러한 글을 대공 부인 크리스티네에게 길게 써보냈다. 그녀는 토스카나 궁정 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부인이자, 그에게 큰 호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편지는 20년 후에야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된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글의 복사본을 여러 장 유포했다. 어쨌든 그는 로마로 출판했다. 로마 주재 토스카나 대사는 갈릴레오가 로라에 오는 것을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러나 코시모 데 메디치는 갈릴레오를 전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므로 대사는 이를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도착하여 대사의 궁전에 체류했다. 이것은 벌써 하나의 성 공이었다.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세인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송사건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악화될 것 같아 보이지 않 았다. 제7장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제 그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신에 대한 카치니와 로리니의 공격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재판관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일에 크게 집착했다. 첫째, 그는 15년 전의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장작더미 위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개인적으로 무죄임을 인정받을 때에야 그의 진정한 목적인 과학을 옹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재빨리 달성했다. '비둘기들'이 일으킨 스캔들이 교회의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는 목적을 달성한 이상, 재판관들은 확실치 않은 고소를 고집하지 마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갈릴레오를 인정하여 주었다. 그에게 대항하는 개인적인 모든 시 도가 중단되었다. 고립무원의 갈릴레오 이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이 성서의 가르침과 양립될 수 있다는 것 을 교회에 증명하는 투쟁을 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달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일에 전념했다. 그는 열정과 달변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쉽게 설득시켰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벨라르미네와 한 번 알현을 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갈릴레오는 편지로 고와 요직에 있는 네 명의 추기경들에 게 자신의 주장을 써보냈다. 호의적인 대답도, 적대적인 대답도 전혀 없었다. 이미 반쯤은 설득시켰다고 여겼던 로마 대학의 예수회 사제들도 점점 애매한 태도를 취했 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대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정식 명령을 교구장에게 받고 있었음이 훗날 밝혀진다. 갈릴레오의 친구들은 또 그들대로 무력감을 체험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절망하여 오르 시니 추기경이 개입해 주도록 권하는 사적인 편지를 보내 달라고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요 청했다. 코시모는 즉각적으로 편지를 띄었고 추기경은 교황과의 알현을 주선했지만, 교황은 갈릴레오가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가 끝내 고집하면 사건이 종교재판소로 넘어 갈 것이라고. 1616년 2월 26일 드리어 벨라르미네와 알현할 수 있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두근거리는 가 슴을 안고 알현에 나갔으나, 켈라르미네는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전 날 이미 결정이 내려졌노라는 답변이 있었다. 종교재판소가 판결을 보내왔다. 그것은 "지구 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상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부조리하며 형식적으로 이단이다. 이 러한 사상은 명백히 성서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 없는 패배 교황의 명령과 함께 전달된 판결문은, 그가 감금형을 받게 되었다는 것과, 어떤 방법으로 든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적들을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채 전투에서 패배했다.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사형 선고를 내린 종교인 중 갈릴레오의 책을 읽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코페르니 쿠소와는 상관없는 서론만을 그나마 대강 훑어 보았을 뿐이었다. 판결문은 사제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낭독되었고 모든 대학에 통보되었다. 전유럽 의 종교재판소는 서점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책을 압수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아직도 2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정확히 그것은 1822년의 일이었다. 크게 낙심한 갈릴레오는 그후 2년 동안 자주 병을 앓았으며, 실제로 아무것도 한 일이 없 었다. 그는 1618년 다시 등장했다. 그해에는 해성이 세 개 발견되었고, 늘 그랬듯이 논쟁이 따랐다. 갈릴레오는 ((시험자))라는 책으로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책은 많은 사 람들이 갈릴레오가 출판한 책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는 것이다. ((시험자))의 출판과 때를 같이하여 교황이 사망했다. 후임자는 우르바누스 8세, 물에 뜨는 물체 사건 이후 갈릴레오와 친구가 되었던 바르베르니 추기경이었다. 갈릴레오는 (( 시험자))그에게 헌증했고, 1624년 다시 로마로 갔다. 새 교황은 그를 환대했고, 프롤레마이 오스의 사상과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가능한 이론으로 소개하는 책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 다. 그리하여 4년의 집필기간 동안 교황에게 몇장을 보내 심사를 받아가며 완성한 것이 (( 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이다. 이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변호하는 살비아티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사상을 옹호하는 심플리치오, 이해력과 분별력을 갖춘 사그레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철회맹세, 그러나 영원한 영광 1632년 책이 출판되었다. 유럽 전체가 일찍이 어떠한 과학서적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열광 적인 반응으로 이 책을 환영했다. 물론 갈릴레오는 표면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지 지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이 옳거나, 혹은 그것을 변호하는 살비아티가 그의 적 심플리치오보다 더 훌륭하게 논쟁을 이끈다 해도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불행히도 교 황의 측근들은 갈릴레오가 그를 조롱하고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며, 멍청한 심플리치오는 실상 교황 자신이라고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고발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갈릴레오의 처지에서 교황을 조롱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뿐 아니라, 더욱이 교 황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격노했다. 이제 69세가 되어 건강상태가 대단히 나빴던 갈릴레오는 로마로 소환되 어 고문의 위협을 받았다. 또한 그는 혼자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로 마의 친구들도 죽었거나 교황이 두려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1633년 6월 22일, 도미니쿠스 회 사령부인 미네르바 동산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이 노인은 죄수복을 입고 판사들과 사제들의 무리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사상이 그릇되었다고 선언하는 글을 낭독해야 했다. 종신 감옥형이 선고되었으나, 그는 1년 만에 풀려났고 피렌체 근처 아르체티에 있는 자기 집에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허락 없이는 집을 떠날 수도 없었고, 감시자가 배석하지 않고는 중요한 방문객을 만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는 말년에 무엇을 했을까? 그는 이미 파두아에서 쓰기로 계획했던 역 학에 관한 위대한 책을 쓰게 되었다. ((두 가지 새로운 학문에 관한 대화))라는 이 책은 현대 역학을 탄생시켰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출판하는 데에도 성공했 다. 이 책은 비밀리에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1638년, 죽기 4년 전에 불굴의 정신을 가진 이 노인은 자기 출판되었으며, 전유럽에서 읽 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과 자신의 승리를 깨달았다. 기록과 증언 무대에 오른 갈릴레오 갈릴레오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새로운 발명품을 추가하다 갈릴레오: 총독 각하, 고귀하신 원로의원 여러분의 파두아 대학 수학 교수로서, 그리고 베 네치아의 대병기창 감독관으로서 귀중한 교수의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유익한 발명품을 가 지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저의 의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 다. 오는 저는 진심으로 기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께 전혀 새로운 기구인 망원경을 보 여드리며 또한 증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은 이비천한 저의 17년간 수고한 연구의 산 물인 망원경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적이고 기독교적인 원리에 따라 제작된 것입니 다. 시간 낭비야! 사그레도: (낮은 목소리로)이제 자네도 푸줏간 주인에게 돈을 낼 수 있겠군, 그래. 갈릴레오: 그렇지, 저들이 이것으로 돈을 벌 테니까. 대학 이사장: (단상에 오른다)총독 각하! 고귀하신 원로의원 여러분! 또 한번 위대한 기술 책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가 베네치아의 문자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 랑하는 학자께서 여러분께, 오로지 여러분께 극히 상품 가치가 큰 대롱을 바쳤습니다. 여러 분 마음대로 그것을 생산해서 시장 판매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시에는 이 기구를 사용하여 적들이 아군을 알아보는 것보다 두 시간 더 일찍 적의 군함의 숫자와 종류를 알 아볼 수 있고, 그리하여 적의 군사력을 파악하여 추적이냐 전투냐 도주냐를 선택할 수 있다 는 것을 아시는지요? 총독 각하, 그리고 고귀하신 원로의원 여러분, 이제 갈릴레오 선생께서 매력적인 따님의 손을 통해 자신의 직관의 증거물인 발명품을 여러분께 들리겠습니다. 갈릴레오: (낮게)이 축제를 내가 끝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네에게 약속하지 못하겠는걸. 저들은 돈벌이가 되는 장난감 하나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것은 훨씬 가치 있는 물건일세. 난 어젯밤 달을 향해 저 망원경을 조준해 보았네. 사그레도: 그래 무었을 보았나? 갈릴레오: 이제까지 알려진 것처럼 달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지를 않네. 사그레도: 뭐라고? 원로의원: 산타 로지타의 성채가 보이는 군요. 갈릴레오 선생. 저기 배 위에서 사람들이 점심을 들고 있군요. 구운 생선이내요. 식욕이 나는 걸요. 갈릴레오: 망원경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수천년간 천문학은 제자리 걸음을 했지. 원로의원: 갈릴레오 선생! 사그레도: 자네를 부르는군. 원로의원: 이 기구로 보니 너무 잘 보입니다. 부인들에게 이제 테라스에서 목욕은 그만 하 라고 말해야겠는데요. 갈릴레오: 자네 은하수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나? 사그레도: 모르겠네. 갈릴레오: 난 알고 있네. 원로의원: 이런 물건이라면 10에퀴(금화)는 부를 수 있겠군요. 갈릴레오 선생 비르지니아: 아버지, 루도비코가 축하드리고 싶대요. 루도비코: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갈릴레오: 나는 그것을 개량한 것뿐이네. 루도비코: 그럼요, 선생님. 덮개를 빨간색으로 바꾸신 것을 보았습니다. 네델란드의 것은 초록색이었지요. 갈릴레오: 이 기구를 써서 특정한 학설을 입증할 수 있을지 생각중이네. 사그레도: 조심하게. 대학 이사장: 당신은 500에퀴는 받을 것입니다. 갈릴레오 선생. 갈릴레오: 맞아요. 500에퀴이지요. 만족하십니까, 각하? 총독: 불행이도 이 공화국에서은 우리의 학자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려면 항상 원로의원들 에게 명분을 제시해야 하네. 대학 이사장: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극이 없잖아요, 갈릴레오 선생? 총독: 우리에게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비르지니아: 내가 제대로 했나요? 루도비코: 그런 것 같아요. 비르지니아: 왜 그러세요? 루도비코: 아니에요. 초록색 덮개를 씌웠더라도 똑같이 좋았을 거에요. 비르지니아: 모두가 아버지에게 만족한 것 같아요. 루도비코: 나도 이제 과학을 조금 알기 시작한 것 같아요. 갈릴레오가 인간 이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진술하다 사그레도: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초승달의 가장자리가 매우 고르지 않고 우둘두둘하고 껄끄럽군. 빛을 내는 가장자리 근처의 어두운 부분에 반짝이는 점들이 있군. 그것들이 하나씩 나타나고 빛이 이 점들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넓은 면적으로 퍼지다가 빛 나는 좀더 큰 부분과 합류하는군 갈릴레오: 이 반짝이는 점들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사그레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갈릴레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산이야. 사그레도: 별에? 갈릴레오: 거대한 산들이야. 그 꼭대기들은 떠오르는 태양빛에 금빛으로 빛나는 반면, 골 짜기들은 어둠에 덮여 있지. 자네는 빛이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로 내리퍼지는 것을 보고 있 네. 사그레도: 그러나 그것은 2000년 동안 믿어온 천문학과 모순되지 않나? 갈릴레오: 그래. 자네가 본 것은 나말고는 이제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네. 자네가 두 번 째일세. 사그레도: 그렇지만 달이 산과 골짜기를 가진 지구일 수는 없네. 지구가 별일 수는 더더욱 없고. 갈릴레오: 달은 산과 골짜기를 지닌 일종의 지구일 수 있고, 지구는 하나의 별일 수 있다 네. 수천 개의 별 가운데 섞여 있는 평범한 천체일 수 있어. 다시 한번 보게나. 달의 어두운 부분이 완전히 어둡게 보이는가? 사그레도: 아니. 주의해 보니까 잿빛이라 할 희미한 광채가 보이는군. 갈릴레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광채이겠는가? 사그레도: ? 갈릴레오: 그것은 지구에서 가는 빛이라네. 사그레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산과 숲과 강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물체에 불과한 지구가 어떻게 빛을 발하겠나? 갈릴레오: 달이 빛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야. 지구와 달은 태양의 빛을 받기 때문에 빛을 내는 것이지. 달이 우리에게 빛을 보내듯이 우리도 달에게 빛을 보낸다네.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는 초승달로, 때로는 반달로, 때로는 보름달로 보이고, 때로는 안 보이기도 하는 것일세. 사그레도: 그렇다면 달과 지구는 전혀 다른 점이 없겠군? 갈릴레오: 외관상 그렇다네. 사그레도: 로마에서 한 사람이 화형당한 것이 10년도 채 안된 일이네. 그의 이름은 조르다 노 브루노인데 그도 바로 그렇게 주장했네. 갈릴레오: 그래.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눈으로 볼 수 있네. 망원경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게. 사그레도. 자네도 보고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사실이네. 오늘은 1610년 1월 10일. 하늘이 없어졌다고 인류는 역사에 기록해야 할 것일세. 사그레도: 어마어마한 일이군. 갈릴레오: 나는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네. 어쩌면 그것은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지. 대학 이사장: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선생님과 둘이서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갈릴레오: 프리울리 씨, 내가 들을 수 잇는 것은 모두 사그레도 씨도 들어도 됩니다. 대학 이사장: 그렇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분이 듣게 되면 당신이 곤란해질 텐데요.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절대로 믿기 힘든 일입니다. 갈릴레오: 사그레도 씨는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믿을 수 없는 일과 부딪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대학 이사장: 두려워요, 두려워.(망원경을 가리키며)저기 저 유명한 기구가 있군요. 저것은 이제 그냥 버려도 돼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그레도: 왜요? 대학 이사장: 당신이 17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이라고 내놓았던 저 발명품이 이제 이탈리아 어느 길 모퉁이에서든지 몇 푼만 주면 살 수 있을 만큼 흔한 물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 니까? 저것이 네델란드에서 생산되어, 이 순간에도 항구에서는 네델란드 화물선이 500개의 망원경을 내려놓고 있어요. 갈릴레오: 정말이오? 대학 이사장: 당신의 침착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선생. 사그레도: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갈릴레오 선생께서는 이 기구를 사용해서 요즈음 천체에 대한 혁명적인 발견을 했단 말입니다. 그것을 아셔야죠. 갈릴레오: 당신도 들여다보십시오. 대학 이사장: 나는 이 고철 덩어리의 대가로 갈릴레오 선생에게 봉급을 두 배로 올려주도 록 한 사람이오. 이 발견만으로도 내겐 충분하다는 사실이나 아십시오. 처음 망원경을 들여 다보던 때에, 이 기구가 여기서만 제조될 수 있다고 믿었던 원로의원들이 바로 근처 길 모 퉁이에서 이 망원경을 빵 한조각 값에 팔고 있는 많은 노점상을 보지 못한 것은 순전한 우 연이예요. 사그레도: 프리울리 씨, 나는 이 기구의 가치를 상업적인 관점에서는 판단하지 못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그 가치가 너무나 커서... 대학 이사장: 철학적 관점이라고요? 수학자 갈릴레오 선생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요? 갈릴레오 선생, 당신은 전에 이 도시를 위해 매우 유용한 펌프를 발명했고, 또 당 신이 제작한 관개시설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지요, 직조공들도 당신의 기계를 칭찬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갈릴레오: 그렇게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프리울리 씨. 뱃길은 여전히 느리고 불안하며 비 쌉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에 걸린 믿을 만한 시계가 필요합니다. 항해를 위한 안내서가 필 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나는 이 망원경을 가지고 극히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특정한 별들 을 알아낼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하늘의 지도 가 항해에서 수백만 에퀴를 절약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리울리 씨. 대학 이사장: 이제 그만 됐어요. 당신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어요. 선생은 나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나를 이 도시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소. 사람들은 나를 가치 없는 망원경에 속 아 넘어간 어리석은 대학 이사장으로 기억하겠지요. 당신은 500에퀴를 받았으니까요. 그렇지 만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은 정직한 남자로서 하는 말인데, 이 세상이 구역질 이 난다는 것이오.(그는 문을 꽝 닫으며 나간다) 갈릴레오: 화를 내니까 더욱 호감이 가는군. 자네 들었나. 돈벌이를 할 수 없는 세상이 저 친구에게는 구역질이 난다는군. 사그레도: 자네, 그 네덜란드 기구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갈릴레오: 물론이지. 소문으로 들었네. 그렇지만 원로원의 수전노들에게 만들어준 것은 두 배 나 더 좋은 것이라네. 방안에 집달리를 들여놓고 일을 할 수는 없쟎은가? 그리고 비르지 니아도 곧 결혼지참금이 있어야 하고, 그 아이는 똑똑하지가 못하거든. 그리고 나는 책 사는 것을 좋아하지. 과학서적만 필요한 것은 아니네.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네. 썩어빠진 시대야. 저들이 나에게 지불하는 것은 포도주통을 실어 나르는 마 부에게 주는 품삸보다도 훨씬 적다네. 두 시간 수학 강의를 하는 대가로 장작 4코르트(장작 을 재는 단위:역주)값을 줄 뿐이라네. 이제 나 저들에게서 500에퀴를 우려냈네. 그런데도 나 는 여전히 빚을 지고 있네. 어떤 빚은 20년이나 된 것일세. 5년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텐데. 자네에게 또 다른 것을 보여주지. 사그레도: 갈릴레오. 왠지 두려움이 느껴지는군. 갈릴레오: 이제 젖빛으로 반짝이는 은하수의 안개를 보여주겠네. 은하수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아나? 사그레도: 저것은 별이군, 수없이 많은. 갈릴레오: 오리온 성좌에만 500개의 항성이 있다네. 저것은 수많은 세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세계들일세. 화형당한 사람이 말했던 멀리 있는 별들이지. 그는 저것을 눈으로 보 지 못했지만, 예상했던 것이라네. 사그레도: 그렇지만 지구가 설령 별이라고 해도 그것이 태양 주의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 의 주장에까지 이르려면 아직 갈길이 머네. 하늘에는 다른 위성을 가진 별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지구 주위로는 여전히 달이 돌고 있네. 갈릴레오: 그렇잖아도 생각중이네. 사그레도. 그저께부터 생각하고 있네. 저기 목성이 있 네. 저기 목성 근처에 망원경을 통해서만 보이는 작은 별이 셋 있네. 나는 월요일에 그 별들 을 보았지만 그 위치에 별로 주의하지 않았지. 어제 다시 살펴보았어. 그런데 세 개의 별 모두가 위치를 바꾼 것이 확실하네. 나는 그것을 기록했네. 오늘 그 별들이 또다시 위치를 바꾸었네. 어떤가? 게다가 내가 보았던 것은 네 개였어. 자 다시 보게. 사그레도: 네 개밖에 안 보이는데. 갈릴레오: 네 번째 별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 도표가 있네. 이 별들이 어떤 운동을 했는 지 계산해 봐야겠네.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오의 생애)), 1939년 갈릴레오의 재판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열린 갈릴레오 재판의 판결문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로마 교황청의 총종교재판관인 로마 교회의 추기경은 기독교 공화국 전체에서 이단적 타락과 싸우기 위한 대표로 특별히 임명되었습니다. 피렌체 출신 고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인 일흔 살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5년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일주운동을 한다는 잘못된 학설을 진리하고 한 이유로 성무청에 기소되었습니다. 또한 이외에도 당신은 이같은 학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서신 교환자인 독일의 수학자 들에게도 써보냈으며, 태양의 흑점에 대한 책을 인쇄하게 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과 같 은 학설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도 출판했습니다. 성서에 의거하여 자신에게 가해진 반대에 대해, 당신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옛 제자에게 쓴 편지의 형태로 된 문서의 복사본이 우리에게 접수되었는 데, 여기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입장과 일치하며 성서의 진실된 뜻과 권위에 어긋나는 여러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하여 신성한 법정은 성스러운 신앙을 해치는 손실과 무질서를 막고자, 최고 종교재판소의 여러 추기경 예하의 명령에 따라 재판소 고문 신학자들은 태양의 정지와 지구의 운동이라는 두 가지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명제는 철학적으로 부조리하고 오류이며 성서와 명백하게 모순되므로 형식상 이단이다.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부동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일주운동을 한다는 명제도 역시 철학적으로 부조리하며 오류이고 신학적으로는 신앙에 대해서 오류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당신을 관대하게 처리하고자 했고, 1615년 2월 25일 로마 교황의 앞에서 열린 성청에서 교령이 내려져 벨라르미네 추기경 예하께서 당신에게 이 잘못된 견해를 전적 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며, 이러한 견해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성무청 경감이 이 견해를 아무에게도 가르치거나 옹호하는 것을 금지하고 감옥형을 명하도록 결정되었습니 다. 이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벨라르미네 추기경 예하께서는 당신에게 자기의 집에서 관대하 고 친밀하게 충고를 한 후, 다음날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경감이 공증인과 증 인을 데리고 이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며 앞으로 글로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했습니다. 당신은 이에 복종하기로 약속을 하고 석방되 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유해한 학설을 완전히 뿌리뽑고 이 학설이 스며들어 카톨릭의 진리를 해치 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청에서는 성서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오류하고 인정되는 이와 같은 학설을 언급한 책을 검열한다는 교령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원제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 스의 두가지 세계 대체계에 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라는 책이 당신의 이름으로 피렌체에서 인쇄되었습니다. 금서청은 이 책이 출판되어 잘못된 지동설과 태양의 정지설이 매일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 이 책을 매우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책에서 당신이 위의 명령을 위반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이 책에서 이미 이단 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금지된 위의 학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책에서 여러 우회를 통해 이 학설은 아직 미결상 태에 있지만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성서와 위배된다고 밝혀진 학설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잘못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다시 신성한 법정에 소환했습니다. 당신은 선서를 하고 심문을 받 고서 그 책을 쓰고 인쇄하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교령을 받은 후, 약 10년 에서 12년이 흐른 뒤에 그 책을 쓰기 시작했노라고 자백했습니다. 당신은 그 책에 대한 출판 허가를 요청하기는 했지만, 당신에게 출판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준 사람에게 당신이 그와 같은 학설을 주장하거나 옹호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또한 잘못된 부분을 위한 논쟁이 반박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독 자들이 생각하도록 이 책이 여러 면에서 구성되어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이에 대한 변명으로, 글을 대화체로 썼기 때문이며, 잘못된 입장에 대해서도 그럴 듯하고 창의력 있는 논쟁을 부여하고, 각각의 토론자가 범인들보다 더 날카로우며 자기 입 장에 철저하도록 내려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와 같은 잘못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말했 습니다. 변호 준비를 위해 주어진 기간 동안 당신은 켈라르미네 추기경 예하의 증명서를 제시했는 데, 당신의 말에 따르면 당신이 철회 맹세를 했고 성무청이 당신에게 참회를 명령했다는 적 들의 중상 모략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얻어낸 것이라 했습니다. 이 증명서에서는 당신은 철회맹세를 하거나 참회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으며, 단 지 지구가 움직이며 이와 반대로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학설은 성서에 위배되므로 이 학설 을 옹호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성청에서 발간한 교황의 선언을 통고받았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증명서에는 '가르친다'와 '절대로'라는 두 가지의 금지조항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당신은 14-16년이 흐르는 사이에 잊어버려서 책의 출판 허가를 요구할 때에 금지조항에 대 해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 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잘못은 악의 때문이라기보다는 헛된 야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호를 위해 제시한 이 증명서는 당신의 죄를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위의 학설이 성서와 모순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감히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 을 지지하고 진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금지 통고를 받은 후에 교묘한 술책을 써서 얻어낸 이 허가를 앞으로는 무효라고 선언합니다. 단신이 자신의 의도에 대해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므로 우리는 당신을 엄격하게 취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조를 받는 동안 당신은 신앙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에게 나쁜 의도 가 있었음을 인정했으며,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신에게 불리하게 제시된 많은 사실들 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고백과 증언, 그리고 여러 사항에 입각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고 숙고한 결과,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과 그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 아의 이름으로 우리, 즉 법정과 이사회, 거룩한 신학의 고명하신 대스승 및 박사 등의 고문 으로 구성된 우리는 한편으로는 성무청의 재무관이자 박사인 카를로 신체리와 다른 편에는 고소를 당해 여기 출두해 심문을 받고 고백성사를 받은 피고,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이의 소 송에서 이 문서로 판결을 내립니다. 우리는 당신 갈릴레오는 소송에서 상술된 이유와 당신이 위에서 고백한 이유 때문에 이 성 무청에서 강력한 이단의 의심을 받고 있음을 선고합니다. 당신은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이고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서에 위배된다고 선포된 견해를 지지하고 진리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변호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당신은 이런 범죄자에 대하여 교회법과 그외 일반 법과 특수법이 정하는 검열과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순수한 마음과 거짓없는 신앙으로 우리 앞에서 철회 맹세를 하고 모든 오류와 이 단의 학설을 저주하고 카톨릭 교회에 대한 모든 오류와 이단을 우리가 지시하는 형태와 방 식으로 거부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당신을 석방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커다란 잘못과 해로운 실수가 벌을 완전히 면제받지는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는 좀도 신중해지고 유사한 범죄를 생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따 끔한 일침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책((두 가지 새로운 우주체계 에 관한 대화))를 금지하도록 공식적으로 명령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당신을 이 성무청에 형식적으로 감금할 것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참회를 위하여 3년 동안 매주 한 번씩 7장의 참회 시편을 외울 것을 명합니다. 우리는 앞으 로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상기한 형벌과 참회를 완화하거나 변경하거나 제거할 권리를 갖습니다. 우리는 누리에게 주어진 전혀 다른 더 나은 방법과 형태로 이상과 같이 주장하고 판결을 내리고 선고하고 공포하며 명령하고 또한 유보하는 바입니다. 아래에 서명한 우리 추기경들은 이같은 판결을 내립니다. 아스콜리니 추기경. 벤티볼리오 추기경. 성 오노프리오 추기경 안톤. 제시 추기경. 베로스피오 추기경. 지네티 추기경. 갈릴레오의 철회맹세: 그러나 일흔 노인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피렌체 출신 고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인 나, 일흔 살의 갈릴레오는 법정에 직접 출두하 여 성서를 앞에 놓고 성서에 손을 얹고, 전체 기독교 세계에서 이단적 타락에 반재하는 종 교재판관이신 존경하는 추기경 예하 여러분들 앞에 무릎을 꿇는 바입니다. 나는 성스러운 카톨릭 교회와 교황께서 진리라고 여기며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언제나 모두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혜로 앞으로도 그것을 빋을 것이라고 맹세합 니다. 자는 성부청으로부터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인다는 잘못된 견해를 완전히 포 기해야 하며, 이 잘못된 학설을 주장해서도 안 되며 그것을 지지해서도 안 되며 말로나 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학설은 성서와 모 순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단 선고를 받은 이 학설을 발표했으며, 특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으면서 매우 능숙하게 이 학설에 유리한 여러 근거를 제시하는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매우 강하게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즉 태양이 세계 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신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과 모든 충성스로운 기독교인들 앞에서 내게 향해진 강력한 의심을 제거 하기 위하여, 진실된 마음과 거짓없는 믿음을 가지고 오류와 이단적 사상을 맹세로써 철회 하고 저주하며 성스러운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든 다른 오류와 이단적 사상도 저주합 니다. 나는 앞으로 이단적인 어떤 것도 말로나 글로 발표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단자 나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성무청이나 거주지 내 종교재판관이나 교 회 관청에 알리겠습니다. 나는 또한 성무청이 내게 부과한 속죄의 고행을 엄격하게 지키고 따르기로 약속하며 맹세 합니다. 그리고 저의 약속과 맹세를 하나라도 위반하는 경우-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마 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교회법고 그같은 죄에 대한 다른 일반적 규정들과 특수한 규정 들이 부과하는 모든 벌과 징계를 받겠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손을 얹고 있는 하느님의 성스 러운 복음서가 나를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철회맹세를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된다는 것을 증명하 기 위해 나는 이 철회맹세의 문서에 서명하고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미네르바 동산의 성 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이것을 한자 한자 낭독했습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철회맹세를 하고 친필로 서명하는 바입니다. 그는 예상치 못했던 징계를 받아 무척이나 낙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 라 예상해 왔던 대로 책이 금지된 데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갈릴레오의 편지들 그라츠의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대단한 석학이여. 파울 암베르거가 전해준 당신의 책을 며칠 전이 아니라 바로 몇 시간 전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파울이 독일로 돌아간다 하니, 지금 당신에게 감사의 글을 몇 자 적어 보내지 않는 다면 은혜를 모르는 자가 될 듯합니다. 당신이 이 책으로 나에게 우정을 표시해 준 데 대하 여 당신께 진정한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책은 아직 서문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서문만으로도 당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탐구해 나가는 길에서 당신과 같은 동지, 진리의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 유쾌한 일은 없습니다. 진리에 몰두하고 잘못된 철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드문 것은 실상 딱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시대의 비참함을 개탄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확인한 훌륭한 발견을 당신과 함께 축하할 때입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의 책 전체를 홀로 조용히 읽겠다는 약속입니다. 거기서 매우 멋진 것을 보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받아들였고 그의 학설은 다른 가설로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었으므로 더욱 큰 기쁨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의 학설에 대한 검토, 성찰을 하고, 반박을 하는 글을 많이 썼지만, 지금까지 그것 을 감히 출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인 코페르니쿠스의 운명이 두렵기 때문입니 다. 한편으로 그는 불멸의 명예를 얻었지만, 다른 편으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경멸 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내 생각을 공개하려고 해보겠지만, 그 렇지가 않으니 그같은 시도를 뒤로 미루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촉박하고 당신의 책을 빨리 읽고픈 마음에, 모든 면에서 애정과 헌신을 당신께 드 리며 이 편지를 그만 끝맺을까 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조만간 소식 주세요. 언제나 당신 소식은 환영입니다. 1597년 8월 3시경, 파두아에서 당신의 명예와 이름에 충실한 파두아 아카데미의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라하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존경하는 각하 이제 제가 수주일 전 케플러에게 보낸, 순서가 도치된 글자들을 각하와 케플러에게 해독 해 드려도 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완전한 확신이 있으며 조그 마한 의심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개월 전쯤 저녁에 금성이 나타나서, 제가 확신하게 된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저 는 망원경으로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제가 본 금성은 선명하고 완전한 원 모양이었으나 매우 작았습니다. 금성은 태양에 대한 이각이 최대가 되는 점으로 다가가기 시작할 때까지 이러한 모양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금성은 크기가 커지고,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쪽 부분에서 원형의 테두리 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채 안 되어 금성은 완전한 반원으로 줄어들었고, 이러한 모습은 정점에서 멀어지면서 다시 태양 쪽으로 돌아갈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금성은 그후 반원의 모습을 잃고 초승달 모습이 됩니다. 그것은 점점 더 가느다랗게 되어 대단히 얄팍한 두 개의 뿔 모습이 되었다가 완전한 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금성이 아침 나절에 나올 때에는 뿔이 태양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대 단히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이 됩니다. 그것은 이각이 최대가 될 때까지 점점 커집니다. 이때 금성의 모습은 반원이며 며칠 동안 그 모습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후 금성은 금방 반원에서 완전한 원형으로 되며 수 개월 동안을 이처럼 완전히 둥근 모 양을 유지합니다. 초승달 모양의 직경은 저녁에 떠오를 때의 모습보다 약 다섯 배나 큽니다. 이러한 멋진 경험은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의심해 왔던 두 개의 명제에 대한 확실하고 도 감각적인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첫째 명제란, 모든 행성은 원래 빛이 없는 존 재라는 것입니다(금성이 그렇다면 수성도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둘째 명제란, 금성은 수성이나 다른 모든 행성들처럼 필연적으로 태양의 둘레를 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타고 라스 학파와 코페르니쿠스 학파, 케플러와 나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했으나, 이에 대한 가시 적인 증거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금성과 수성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케플러와 다른 코페르니쿠스파 들은 스스로 올바른 것을 믿어왔으며, 올바로 철학을 했다고 자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우리를 무식하며 미치광이라고 까지 여겨왔던 것을 자 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신께 보낸 'Haec immatura a me iam frustra leguntur, o.y.'라는 글자 수수께끼는 순서대로 배열하면, 'Cynthiae figuras aemulatur mater amorum.'이 되는데, 이는 금성은 달의 변화를 모방한다는 뜻입니다. 사흘 전 밤, 저는 식을 관찰했으나 그림자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며 안개로 덮여 있는 것 같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이 그림자가 거기서 대단히 멀리 떨어진 지구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다른 상세한 점들에 대해서도 쓰려고 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붙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이 편지를 끝맺어야만 하겠군요. 케플러씨와 하스달 씨, 세게트 씨에게도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존경하는 마음으로 각하의 손에 입을 맞추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1611년 1월 피렌체에서 충실한 종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와 서한집)) 란두치에게 보낸 갈릴레오의 편지 약 2개월 전 플랑드르에서, 2000m 거리에 있는 사람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매우 멀리 있는 물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망원경이 모리스(데 나사우)백작에게 헌납 되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습니다. 이처럼 경이로운 현상을 보고 나는 생각을 l했습니다. 망원경은 원근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는 듯 보였고, 나는 그것을 만들 궁리를 했습니다. 결국 나는 완벽하게 이 목표를 성취하 여 플랑드르 망원경의 성능을 능가하는 망원경을 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베네치아에 전해져...나는 6일 전 총독 각하와 원로원에 소환되었습니다. 원 로원에서 망원경을 보여주었는데,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원로의 원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종탑에 몇 차례나 기어 올랐습니다. 그 들은 거시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와 범선과 선박을 보았는데, 이것들을 망원경 없이 육안 으로 보려면 두 시간 이상 전속력으로 가야 하는 먼 거리에 있었지요. 나는 망원경이 육지나 바다에서 대단히 유용하리라고 판단했고, 대공 각하께서도 망원경 을 대단히 좋아하지는 것을 보고, 이달 25일 원로원에 출두하여 총독각하께 망원경을 드리 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후 행정장관이며 대학 개혁자의 한 사람인 프리울리 씨께서 원로원에서 나오면서 내 손을 잡고 말하기를, 원로원은 파두아에서 지난 17년간의 나의 봉사를 크게 인정하고 있 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봉급으로 1년에 금화 1000굴덴을 지급 하며 나를 종신직 교수로 임명하라는 명령을 개혁 당국자에게 즉시 전달했습니다. 1609년 8월 29일자 갈릴레오의 편지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에 감탄한 원로의원 1609년 8월 21일, 행정장관인 나 제롬 프리울리는 갈릴레오, 피에르 콘타리니, 라우렌트 소란초, 카발리의 훌륭한 박사와 함께 갈릴레오의 이른바 망원경의 경이롭고 진귀한 효과를 보기 위해 성 마르코 성당의 종탑에 올랐다. 그것은 모직물로 겉이 싸여 있고 함석으로 만들어진 대롱으로서, 길이는 4분의 3 쿠데 정 도이며, 양 끝에 1에퀴 크기의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가 각각 한 개씩 끼워져 있었다. 우리들 각자는 한쪽 눈을 망원경에 대고 다른 쪽 눈을 감고서 리차 푸시나와 라르게라, 치오자, 그리고 트레비세너머 코넬리아노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파두아의 성 유스티니아누스 성당의 정면과 종탑이 보였으며, 무라노의 성 야곱 성당에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었고, 사람들이 곤돌라를 타고 유리 제조인들의 운 하 입구에 있는 콜로나의 트라게토에 내리는 것, 그리고 간석지와 도시의 다른 많은 것들도 보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갈릴레오가 해왕성을 발견했는가? 갈릴레오는 어떻게 해왕성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천문학에 약간이라도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면, 갈릴레오가 그의 유명한 망원경 덕분에 달 의 분화구와 태양의 흑점과 금성의 변화와 목성의 위성들, 그리고 그의 지적이 있는 뒤 44 년 후에 네덜란드인 호이겐스가 행성의 환이라고 밝혀내는 토성의 양쪽에 있는 이상한 두 개의 돌출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많은 발견 외에도, 그는 은하 수를 별들의 무리로 '해명'했는데, 이러한 모든 발견들은 1609년의 겨울에서 1612년 사이 매 우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반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같은 해인 1612년에 이 이탈리아 천문학자 가 해왕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아직 천왕성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다.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의 관찰 노트에 해왕성의 위치를 기록해 넣었다. 실상 최근까지 천문학자들 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 9월 9일 미국 천문학자 찰스 코월과 캐나다 천문학자 스틸만 드레이크가 국립과학협회에서 이 주제에 대해 천문학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내용의 대단히 흥미로운 발표를 할 때까지도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해왕성의 발견에 대한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확립되어 있었다. 해왕성은 1795년 5월 8일 랄랜드가 처음으로 관측했는데, 그는 이것을 항성이라고 생각했다. 1846년 갈은 르 메리에의 계산을 기초로 하여 마침내 해왕성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겨우 3cm 구경의 망원경을 가지고 태양계의 여덟 번째 행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1612년 12월 28일 3시 46분, 갈릴레오는 목성의 오른쪽에 비교적 밝은 별을 발견하고 노 트에 그 사실을 기록했다. 그것이 해왕성이었을까? 팔로마산의 거대한 망원경의 도움을 받아 제작된 상세한 천체도를 보면, 이 장소에는 같 은 밝기를 가진 항성은 하나도 없다. 갈릴레오가 주목한 '천체'의 위치는 컴퓨터가 그날 해 왕성의 위치라고 지적하는 장소에서 1분의 각도가 떨어진 곳이다.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1분의 각도라는 것은 맨눈의 해상력이라면 고작 목성 직경의 두 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행성의 척도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해 왕성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한 달 후인 1613년 1월 27일 23시경, 갈릴레오는 목성의 20반경 거리에서 광도 7의 천체 하나를 관측했다. 컴퓨터는 이 천체가 틀림없이 SAO 119234라는 번호로 등록된 항성이라고 확인했다. 그 다음날인 1월 28일 항성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조금 빛이 약한 다른 별이 그 옆 에 나타났다. 컴퓨터가 그린 도면에서는 그 장소에 해왕성이 있었다. 이번에도 해왕성의 이 론적인 위치와 갈릴레오가 지적했던 위치 사이에는 1분이라는 각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해왕성은 궤도가 섭동하는 경향이 있고 천문학자들이 그것을 정확히 측정하려 노 력중이므로, 이러한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갈릴레오가 1월 27일의 그림에 해왕성을 기입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동 속도가 매우 느린(하루에 22초의 각도)해 왕성은 그날도 틀림없이 보였을 것이다. 흥미 있는 역사적 복구작업에 힘을 얻은 이 두 명의 천문학자들은 중도에서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1702년 9월에 해왕성이 다시 목성 가까이 접근했을 뿐 아니라, 더 큰 행성들에 가 려졌다는 사실을 컴퓨터로 알아냈고, 이제 이 현상을 언급한 과거의 천문학적 기록이 없는 지 알아보기 이해 도서관을 뒤졌다. 그들은 새로운 발견으로 긴 기간에 걸친 해왕성의 운동에 대한 연구를 더욱 다듬을 수 있 었다. 누가 알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신비로운 열번째 행성을 발견할 수 있을런지. 피에르 콜러 ((과학과 생명)), 760호 1981년 1월 위대한 일들 이 작은 논문에서 나는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탐구할 수 있도록 위대한 일들을 제시 하려 한다.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주제가 탁월하고 과거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사실들을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도구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사실들을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도구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맨눈으로 이미 발견한 수많은 항성들에다가 지금까지도 한번도 관찰된 적이 없고 과거에 알려진 것보다 열 배나 더 많은 별들을 덧붙여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 은 확실히 위대한 일이다. 지구에서 약 60 지구 반경이 떨어져 있는 달을 2반경 정도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는 것 은 대단히 멋있고 즐거운 일이다. 망원경을 통해 볼 때 달의 직경은 맨눈으로 볼 때보다 30배나 더 크게 보이고, 그 표면은 900배, 그 부피는 2만 7천 배 크게 보인다. 달이 반들반들하며 매끈한 표면으로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구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높은 언덕과 깊은 골짜기와 굴곡으로 덮 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한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은하수의 성격을 이성적으로뿐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보여줌으로써 은하수에 관한 논쟁을 종결지었다는 점도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이 성운이라고 불렀던 별들의 성격이 오늘날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납득시킨 것도 매우 흥미롭고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놀라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은, 그래서 천문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알리고 싶 은 사항은, 이제까지 아무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 것들은 금성과 수성이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듯이 잘 알려진 어떤 별 주위를 돌고 있다. 이 행성들은 그 별을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지만, 그 별에서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멀어지 지는 않는다. 내가 얼마 전에 이 모든 것을 발견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으로 깨달아 고안하게 된 망원경이라는 기구 덕택이다. 앞으로 나나 다른 사람들은 망원경을 이용하여 더 중요한, 다른 발견들도 하게 될 것이다. 우선 나는 망원경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그것을 발명하게 된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 내가 관찰한 것들에 대해 서술하려 한다. 나는 약 10개월 전에 한 플랑드르 사람이 망원경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망원경 으로 보면 관찰자의 눈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뚜렷이 보인 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경이로운 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 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후 자크 바두베르라는 프랑스인이 파리에서 편지를 보내 이 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것이 내가 전력을 다해 이 기구를 연구하 여 비슷한 것을 만들게 된 경위이다. 얼마 후 나는 굴절이론에 기초하여 이 기구의 작동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선 납으로 된 대롱을 준비하여 그 양 끝에 두 개의 렌즈를 붙였다. 그 렌즈는 앞면은 둘 다 평평하고, 뒷면은, 하나는 오목하고 또 하나는 볼록하게 했다. 나는 한 눈을 오목한 부분 에 대고서 물체들을 충분히 크고 가깝게 볼 수 있었다. 맨눈으로 볼 때보다 사물들이 세 배 로 가깝게, 그리고 아홉 배로 크게 보였다. 다음에 나는 대상을 60배로 확대하는 보다 정밀한 망원경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후에도 노력과 경비를 아끼지 않고 애쓴 결과, 나는 대상을 맨눈으로 볼때보다 1000배로 확대해 주 고 30배 이상으로 가까이 보이게 할 만큼 훌륭한 기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구가 육지나 해상에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는 다 열거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구 내의 것들을 제쳐놓고 하늘을 관찰했다. 나는 우선 달을 보았는데, 불과 2 지구 반경의 거리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그 다 음 나는 믿기 함들 만큼 큰 줄거움을 가지고 항성과 행성들을 매우 자주 관찰했다. 별들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그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탐구했고, 결국 그 방법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이제 그와 같은 관찰을 하려는 사람들은 특별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물을 매우 뚜렷하고 선명하며 흐리지 않게 보이 게 하는 대단히 잘 만들어진 망원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적어도 대상을 400배로 확대하는 망원경이라야 한다. 그래야 사물을 20배로 가까이 볼 수 있다. 이 만큼 좋은 망원경이 없이는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보기는 힘들다. ..... 이제 우리에게 보이는 쪽의 달 표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다 밝 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보겠다. 밝은 부분은 반구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간이 보이는 부분으로서, 이것은 전체에 퍼져 있 다. 반대로 어두운 부분은 달 표면을 구름처럼 흐릿하게 덮은 부분이며, 이것은 반점처럼 보 인다. 약간 어둡고 커다란 이 반점들은 눈에 잘 띄어서 항상 관찰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는 이 것들을 다른 흑점들과 구별하여 크고 오래된 것이라고 부르겠다. 다른 흑점들은 더 좁고 극 히 많아서 달 표면 전체, 특히 더 밝은 부분을 뒤덮고 있다. 이러한 흑점들은 전에는 전혀 관찰된 적이 없었다. 이들을 매우 자주 관찰한 결과, 우리는 달의 표면은 많은 철학자들이 달과 다른 천체에 대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매끈하고 부드럽고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 반대로 지구가 산맥과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달도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움푹 팬 부분과 부풀어오 른 부분으로 가득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경위는 다음 과 같다. 삭이 지난 수 4일이나 5일째 되는 날, 달이 빛나는 뿔 모양으로 나타났을 때, 어두운 부분 과 빛나는 부분을 분리하는 선이 완전한 구의 경우처럼 타원형을 그리지 않고, 울퉁불퉁하 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나타났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경계 너머 어두운 부분까지 빛 나는 증식물 같은 것이 퍼져 있었고, 역으로 어두운 작은 조각들이 빛나는 부분까지 침투해 있었다. 게다가 때로는 어두운 부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많은 작은 흑점들이 '오래되고 큰' 흑 점을 제외한 태양빛을 받는 부분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은 흑점들이, 그 어두운 부분은 태양 쪽을 향하고 있는 반면, 태양의 맞은 편에서는 마치 타는 듯한 산봉우 리같이 빛나는 윤곽 밑에 흑점들이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지구의광경과 같은 모습이다. 다시 말해 골짜기들은 아직 빛의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태양과 맞은 편에 있는 산들은 눈부시게 빛난다. 그리고 태양이 떠오 름에 따라 움푹 팬 곳의 그림자가 줄어드는 것과 같이, 달의 빛나는 조각이 커질 때 달의 작은 흑점들도 어두움을 잃어간다. 게다가 달의 어두움과 빛의 경계가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할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달의 어두운 부분에서 수많은 빛나는 점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들은 멀리 떨어 져 있는 밝은 부분과 완전히 구분되며, 또 그와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 점 커지고 밝아져서 두세 시간 후에는 나머지 빛나는 부분에 통합된다. 빛나는 부분은 이렇게 해서 퍼져 나간다. 그러나 그 동안 다른 점들도 어두운 부분에서 사방으로 불어나고 확장되어 그들 역시 계속 커지고 있는 빛나는 부분에 통합된다. 같은 모 습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지구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전, 평지는 어두운데도 산의 높은 꼭대 기는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이다. ...... 그외에도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의 경계에서는 더 크고 더 어두운 많은 양의 어두운 흑 점들이 보인다. 반대로 더 멀리 있는 흑점들은 덜 어둡고 더 흐릿하게 보인다. 그러나 위에 서 쓴 것처럼, 항상 흑점의 검은 부분은 태양빛이 비추는 쪽을 향해 있는 반면, 달의 어두운 부분을 향해 있는, 태양의 맞은편 부분의 흑점은 빛나는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 달의 표면은 푸르스름한 점들로 덮여 있는 공작의 꼬리와 같이 흑점들로 덮여 있는데, 이 는 차가운 물에 뜨거운 것을 담근 유리잔과 흡사하다. 유리잔의 표면은 금이 가고 울퉁불퉁 해질 것이며 사람들은 이것을 얼음 유리라고 할 것이다. 갈릴레오 ((별들의 소식)) 지구가 달보다 더 밝게 빛난다! 심플리치오: 지구가 태양빛을 달처럼 밝게 반사한다고 믿는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지구는 너무 어둡고 불투명해서 빛을 그렇게 잘 반사할 수 없습니다. 살비아티: 지구가 빛을 반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당신이 믿는 이유는 그것뿐이 아니지 요. 심플리치오 씨. 나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당신 자신보다 더 잘 안답니다. 심플리치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당신이 나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비아티: 곧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는데, 달이 거 의 만월이 되어 낮에도 보이고 한 밤중에도 보일 때 낮과 밤 중에서 언제 보이는 달이 더 밝습니까? 심플리치오: 물론 밤이지요. 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구름기둥, 불기둥과 비슷 한 것 같습니다. 태양이 있을 때 달은 작은 구름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달은 밤에는 밝게 빛나지요. 낮에 구름 사이에 있는 달을 본 적이 있는데 흐릿하고 표백이라도 한 듯 보였지 요. 그러나 달은 밤에는 밝게 빛나지요, 낮에 구름 사이에 있는 달을 본 적이 있는데 흐릿하 고 표백이라도 한 듯 보였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 달을 보니 매우 밝게 빛났어요. 살비아티: 만약 당신이 달을 낮에만 보았다면 달이 구름보다 더 밝다고 생각하지 않았겠 군요? 심플리치오: 그렇습니다. 살비아티: 당신은 정말로 달이 낮보다 밤에 더 밝게 빛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심플리치오: 나는 달이 실제로는 낮이나 밤이나 똑같이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달이 밤에 더 밝게 보이는 이유는 밤하늘이 어둡기 때문이지요. 낮에는 주위의 것들이 모두 밝으니까 달빛이 있어도 밝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실비아티: 당신은 한밤중에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지구를 본 적이 있나요? 심플리치오: 그런 질문은 내게는 농담처럼 들리는군요.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하 는 질문 같기도 하고요. 실비아티: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 라.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답해 보세요. 내 질문이 그른 것이라면 내가 이 상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겠어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그 질문을 받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으니까요. 심플리치오: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대답하지요. 우리처럼 지구 위에 있는 사 람은 낮은 지구의 부분, 즉 태양빛을 받고 있는 부분을 밤에 본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실비아티: 그러므로 지구가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낮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이지 요. 그러나 반대로 달은 밤에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지요. 심플리치오씨. 지구가 달처럼 밝게 빛을 발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밤처럼 어두 운 곳에서 지구가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달보다 휠씬 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비교를 하려면 한밤중의 달빛이 아니라 낮에 보이는 달빛과 지구의 빛을 비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지구가 빛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심플리치오: 그런 것 같군요. 살비아티: 당신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낮에 흰구름 사이에 달이 있는 것을 보면 구름과 매우 흡사하지요, 이 구름들은 매우 간단한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달처럼 빛을 잘 흡수 합니다. 큰 구름이 눈처럼 희게 빛나는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자주 있지요. 만약 이 구름이 밤에 그처럼 빛을 발한다면 달이 100개 있는 것보다 더 밝게 주의 를 비출 것입니다. 이 구름들이 밤에 태양빛이 없을 때 지구처럼 어둡다는 사실을 생각한 다면 모든 의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먼 곳에 낮게 있을 때 그것이 구름이 먼 곳에 낮게 있을 때 그것이 구름인지 산인지 구별을 하기가 힘들었던 적이 많이 있었을 것입 니다. 그것이 바로 산이 구름 못지않게 빛을 낸다는 증거지요. 사그레도: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기 반달보다 조금 큰 달이 있어요. 그리고 저쪽에 는 높은 벽에 햇빛이 쏟아지는 군요. 여기서 보면 달이 벽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자, 보세요. 어느쪽이 더 밝습니까? 벽이 더 밝은 것 같지 않아요? 갈릴레오 ((두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