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러시아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지은이: 리콜라스 워쓰 출판사: 시공 디스커버리 작성자: 박종환 제1장 전쟁에서 혁명으로 1914년은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스드 토크빌의 예언이 막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20세기를 내다보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미래의 강국으로 등장하리라 예상하였다. 러시 아의 경제는 1885년 이래 연간 약 5%의 성장률을 보이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세계 제일의 곡물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으며 주철과 석유의 생산량은 1890년 이래 두 배로 증가하였다. 러시아에는 1905년과 1906년 사이의 혁명적 갈등 이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몇 가지 중대한 양보를 하여 제한된 권력을 지닌 납세 유권자 의회인 두마가 설치되었다. 러시 아가 획득하려고 노력했던 경제성장과 정치안정은 외국 투자자들을 유혹하는 두가지의 수단 이었다. 프랑스 자산가들은 인기를 끌고 있던 러시아 발레처럼 유명해진 '러시아 채권'을 대 량으로 사들였다. 그 당시 파리에서 러시아 발레 공연이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의 비호 를 받아 성공을 거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한 러시아의 대단한 창조역량을 상징 하는 일이었다. 1914년 여름, 민중들에게 신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대한 군대- '프티 파리지엥'은 '2000만 명이 넘는 장정들 징집되다'라는 머릿기사를 실었다- 인 '러시아의 도로 포장용 로 드롤러'의 신화로서, 이 군대는 지나는 길목마다 프러시아 군대를 완전히 짓밟으면서 진군해 '겨울이 되기 전에' 베를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상 전쟁은 정권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기는커녕, 정권의 허약함과 기능 정치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면서 마침내 차리즘의 붕괴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제일 먼저 정체가 드러난 것은 경제적 허약함 이었다. 모든 교전국이 그러하듯, 러시아 정부도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였다. 1914년 말이 되자, 총알과 포탄이 바닥이 난 부대가 점점 더 늘어가게 되었다. 해협이 폐쇄되고 이 에 따라 러시아의 경제가 봉쇄되면서 그 동안 러시아 제국이 외국 수출국들에게 얼마나 많 이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이 갑자기 드러나게 되었다. 1915년 이후 독일 군과 오스트리아 헝가리군에 점령된 서부 지방을 상실하면서부터 러시아는 제국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의 하나인 폴란드의 생산물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민경제는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자, 철도수송 체계가 파괴되어 기관차 총보유량 중 3분의 1이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설비재와 기계 및 도구, 교환부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공장의 전시 체제로의 전환 은 내수시장을 파괴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후방에서는 공산품이 부족하게 되었다. 농민들 이 생산물을 수송할 수가 없게 되자 생산물들은 그 자리에서 썩어갔다. 나라는 인플레이션 과 기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되어 있는 권력에게는 사태를 극복할 능 력이 없었다. 정부의 수동적 태도에 반하여 국가가 확보해 주지 못하는 일상생활의 운영을 돌보는 조합 들이 각처에서 조직되었다. 적십자 위원회는 처음에는 작은 조직이었으나 차차 나라의 위생 행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도시연합과 젬스트보(지방자치단체) 연합은 무기 공급을 집중시키 려 시도하였다. 사업과 산업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은 '군수산업위원회'로 결집되었는데, 이 것은 군사 목적의 생산을 합리화하는 임무를 띤 일종의 준 국가적 부서였다. 소비자들은 그 들대로 수만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거대한 협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은 스 스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의 밑바닥으로부터 출발한, 아직은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정권과 시만사회의 가 장 진보적인 인사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떠맡기보다는, '선한 농민의 지휘자이며 자상한 아버지 차르'라는 인민주의적 군주제의 이상에 매달렸다. 그런 가운데 니콜라이 2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궁전에서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라스푸틴 - 그들 부부의 어린 아들 이 시달리고 있던 혈우병을 치료한 사기꾼 - 의 충고를 따라 1915년 9월 5일 몸소 군의 최 고 지휘권을 떠맡았는데, 이는 한창 국가적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극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실로 전제주의의 자살행위였다. 니콜라이 2세는 모길료프 사령부의 특수부대 안에 틀어박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행위를 중단하고,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국민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했던 황후에게 국정을 맡겨버렸다. 1916년 정권이 와해되는 듯했다. 두마는 단 몇 주 동안 개회된 반면, 무능하고 인기 없는 정부와 각료들이 뒤를 이어 들어섰다. 황후와 라스푸틴이 지배하는 도당들이 적의 침입에 나라의 영토를 일부러 열어주었다고 비난하는 소문이 대중 사이를 떠돌았다. 민주적 입헌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반대세력은 '진보진영'을 구성하였다. 이들 자유 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목표는 그런대로 관용할 만한 것으로 '나라의 신뢰를 받는 정부', 정치 적인 사면, 폴란드의 독립에 대한 법률안의 준비 같은 것들이었다. 길거리의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은 자유주의자들을 마비시켰다. 혁명적 운동들이 놓치지 않고 활용할 사회적 폭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분열되어 있었다. 전쟁은 사회주의 진영 안에 새로운 균열을 초래하였다. 사회주의 진영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망명 중이거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레닌(볼셰비키), 트로츠키(국제주의자), 마르토프(멘셰비키)는 전쟁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하였고 즉각적인 평화를 호소하였다. 더 온건한 다른 사회주 의자들, 츠헤이드제 같은 멘셰비키나 노동주의자 케렌스키는 '방위론자'의 입장을 지지하였 다. 그들은 차르의 전제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서도 조국을 위해서는 방어적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마르크시즘을 도입한 플레하노프 같은 사람들은 굳건한 '사회애국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 분파로 분열된 혁명 가들이 점차로 격렬해져 가는 대중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집중시켜 해소할 수는 없었다. 특 히 전쟁중에 지치고 사기가 저하된 병사들과 수년 전부터 체제비판에 앞장서왔던 페트로그 파드 노동자들의 불만이 거셌다. 1916년 러시아의 국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 워었다. 라스푸틴의 암살(1916년 12월 31일)이 대변해 주는 정치적 위기 상황속에서 전쟁 초 에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던 파업이 다시 확대되었고 군대는 동요하였다. 수송체제의 마비 는 전방과 후방의 보급을 교란시켰다. 이처럼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대책 없이 약화되 고, 반대세력은 분열되고 무력한 가운데에 1917년 '2월의 날들'이 다가왔다. 제2장 2월: 영광의 5일 1917년 2월 19일 유난히도 혹독한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날이었다. 페트로그라드의 행정부는 배급제 실시를 공포하였다. 철도 수송체계가 마비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의 수도 에는 이제 열흘분의 밀가루만이 비축되어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부터 도시의 곳곳에서 빵가 게의 비어 있는 유리창 앞에서 연이은 사건들이 터졌다. 권력이 적에게 매수되어 있다는 소 문과 양식을 저장해 놓고 가격을 올리는 '유대인이나 독일인 투자자들'에 대한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날 페트로그라드의 가장 큰 공장인 푸틸로프 군수공장에서는 식료품 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수천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길거리고 쏟아져 나왔다. 도시는 들 끓었고 두마는 또다시 '무능한 각료들'의 퇴진을 요구하며 그들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그날 에 벌어진 이같은 혼란상황이 - 1905년과 1914년에 벌써 대규모 파업을 여러 번 경험했던 이 대도시는 이를 만성적 현상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 악화되어 며칠 후에는 300년을 면면 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제 여성의 날인 2월 23일은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다. 이날 학생과 사무원을 포함한 수천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페트로그라드의 중심부를 행진하였다. 햇빛이 밝게 빛나 는 날씨였고 여러 주일 이래 처음으로 맛볼 수 있던 봄날 같은 기온(5도)을 맞아 사람들은 온화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처음으로 사건이 터졌다. 빵의 부 족을 항의하는 파업을 벌이고 있던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수천 직물 노동자들은 비보르그 와 수도의 고급 주택가를 잇는 리타이니 다리를 막고 있는 코사크 기병 경찰대의 경계선을 넘었다. 노동자들은 "빵을 달라!"고 외치며 행진을 하였다. 그 속에는 "챠르는 물러나라!"라 는 구호도 섞여 있었다. 곧 그들은 무력한 코사크 기병대를 조롱하며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 너온 노동자 무리와 합류하였다. 고급 주택가의 몇몇 가게들이 약탈을 당하였다. 그러나 노 동자 무리를 놀라게 하고 고무한 것은 코사크 기병대의 무력함이었다. 그날 그들은 평상시 에 시위를 분산시키는 데 사용하던 무서운 채찍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인 2 월 24일에는 햇살이 밝은 날씨로, 파업중이던 15만 명 정도에 육박하는 노동자들이 도심으 로 몰려들었다. 코사크 기병대는 그날도 군본부로부터 정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상태라 시 위 군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없었다. 시위 군중은 구경꾼, 학생, 은행원,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구경하러 나온 부르주아지 가족들로 불어나 점점 더 규모가 커졌다. 100여 개의 무리가 형성되었고 즉석에서 토론회가 벌어졌다. 모스크바역의 맞은편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는 알렉산드르 3세의 기마상 위에서 연사들이 군중에게 연설을 하였다. 2월 25일에 들어서자 파업은 총체적인 움직임으로 확대되었고 시위 군중은 한결 더 정치 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사람들은 계속 "빵을 달라!"고 외쳐댔고 "챠르는 물러나라!"거나 "전쟁을 중단하라!"는 구호도 점점 잦아졌다. 점저 더 확대되어 가는 시위 군중을 향해 무엇 을 할 것인가?사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굶주리고 있는 수도에다가 수백톤의 빵을 공급하기 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정부는 시위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그에 따른 말썽을 피하기를 원하였다.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르 츠리아프니코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2월 25일에 열린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도자 회의에서 외쳤다. "혁명 이요? 혁명은 무슨 혁명? 노동자에게 빵 1파운드만 주면 파업은 끝날 거요!" 1917년 2월 25 일 20시 30분에 페트로그라드 군사 관할 지역의 지휘관인 카발로프 장군은 모길료프 사령부 로부터 니콜라이 2세가 보낸 전보문을 받았다. 이 전보문에서 차르는 "내일이 되기 전에 페 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무질서를 무력을 동원하여 멈추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도시에서 1905년부터 정기적으로 일어났던 산발적인 소요에 지나지 않던 것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비 친 것을 역사를 뒤흔들어놓은 혁명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바로 이 명령이었다. 2월 26일 일 요일 아침 페트로그라드의 도심은 참호를 둘러친 진지 같은 모습이었다. 코사크 기병대와 도시 수비대가 모든 전략적 핵심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고 순찰대는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 다. 기관총은 네프스키 대로를 겨냥하고 있었다. 정오경에 노동자 시위대가 다시 도시 변두 리로부터 중심가를 향해 모여들었다. 기병대와 수비대는 네프스키 대로와 즈나멘스카야 광 장을 향하여 발포를 시작하였다. 15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시위 군중은 낙담하여 집으로 돌 아갔고, 군사령부는 전날 의장 미하일 로드쟌코가 챠르에게 "신임정부"를 임명하도록 탄원 하면서 한 호소를 무시한 채 계엄령을 선포하고 두마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 순간에 혁명적 당파들 가운데 어떤 것도 -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 혁명을 주도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은 합의되어 있는 듯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월 27일 아침에도 노동자들은 폭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실제보다 훨씬 먼 미래의 일로 상상했다... 병사들은 이미 거리에 나와 있었 다." 26일과 27일 사이의 밤에 볼린스키 연대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몇몇 병사들과 장 교들은 막사로 돌아오면서 아직도 낮에 겪은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들은 자신들의 '형제 노동자들'에게 총을 쏜 것에 대해 커다란 자책감을 느껴 그날 밤 반란 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몇 시간 후 이러한 움직임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 소속된 대 부분의 연대로 퍼져 나갔다. 2월 27일은 결정적인 하루였다. 전날의 시위는 혁명적 봉기로 변화하였다. 병사들과 노동자 시위대는 병기창을 점령하고 1만 정 가량의 총을 탈취하여 우 체국과 역과 전화국을 점령했다. 정부를 등지지 않은 군대에 대항하여 하루종일 전투가 계 속되었다. 가장 상징적이었던 최초의 혁명적 행동들 중의 하나는 차르 정권이 가장 유명한 정치범들을 가두는 데 사용했던 러시아의 '바스티유 감독'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감옥 을 점령한 것이었다. 반란 군중은 짧은 전투 끝에 이 상징적인 감옥을 빼앗고 그 꼭대기에 붉은 기를 게양하였다. 감옥에서 그들은 전날 밤에 체포된 이들 가운데 15명 가량의 동료들 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반란 군중들은 페트로그라드의 다른 감옥들로 향하였고, 이 감옥들을 조직적으로 탈취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보통법을 위반했던 8만 명 가량의 죄수 들이 석방되었다. 혁명의 첫 수혜자였던 이들의 약탈행위는 혁명의 대향연에 그늘을 드리웠 다. 페트로그라드 주재 '런던 타임스'특파원은 2월 27일 "누구나 알다시피 폭력적이게 마련 인 군중이 오히려 선량하고 질서정연하다는 점은 혁명의 초두에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사실 임에 틀림없다."라고 런던으로 타전해 와었다. 그는 이어서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지지한다 는 표시로서 자발적으로 붉은 완장을 차거나 단춧구멍에 붉은 리본을 꽂았다. 다방과 음식 점은 문을 다시 열고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였다. 한 다방의 창문에서 다음과 같은 벽보를 보았다. '시민들이여, 이 위대한 자유의 날들을 축하하여 자유의 전사인 당신들 모두를 환영합니다. 들어와서 실컷 먹고 마시십시오!'"라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가적인 기사가 보여주는 것은 2월 혁명이 지닌 다층 구조의 단면에 불과하였다. 27일부터 모든 규율에서 갑자기 벗어난 반란병들과 감옥에서 풀려난 보통법을 어긴 죄수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도시 곳곳에서 상점을 털고 '부르주아지'를 마구 때리고 행 인을 폭행, 공갈하는 폭력을 행사하였다. 3월 1일 막심 고리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군중의 아시아적 폭력을 드러내는 행동들을 혁명적이라고 생 각하고 있다. 약탈이 시작되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도대체 예측이 불가능하 다. 많은 피가, 이전에 흘린 피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르리라는 예감이 든다." 공식 기록 에 따르면 1433명의 희생자를 낸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2월 혁명의 폭력은 전적으로 자 생적인 반응이었으며, 구체제의 상징 중의 하나인 경찰에 대해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대중의 분노가 폭발된 것이기도 하였다. 군중은 경찰을 쫓아 린치를 가하였다. 다른 상징들도 파괴 하였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동상으로부터 잘라 내린 알렉산드르 2세의 돌로 된 거대한 머리 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서민들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차르에게 붙인 '하마'라는 별명을 누군가가 알렉산드르 3세의 기마상 받침돌 위세 써놓았다. 혁명의 대지조자 중 누구도 '영광의 5일'동안 페트로그라드에 있지 않았다. 모두가 망명중 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인 레닌과 마르토프는 취리히에 있었고, 트로츠키는 뉴욕에, 사회혁 멍당의 체르노프는 파리에, 그리고 체레텔리와 단, 스탈린은 시베리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도자들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감당하기 힘 겨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05년 혁명이 유일한 선례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지 표였으므로 사람들은 1905년에 그랬던 것처럼, 우선 연방 지도자 조직인 '소비에트(노동자 대표자 협의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2월 27일 오후에 멘 셰비키, 사회혁명당, 볼셰비키, 노동당 등을 아우르는 여러 혁명적 당파의 투사 50여 명은 두마의 의사당으로 사용되던 토리드궁의 12번 회의실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노동자와 수비대 군인들에게 '그들의 대표를 선출'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다음날 이러한 촉구가 실현되어 공장과 막사에서 그런대로 고르게 선출된 600명 정도에 이르는 대표자들이 소란스러운 협의회를 이루게 되었고, 이 협의회는 호선된 '직업적'혁명가들이 지배하는 집행위원회의 지도를 받았다. 그 사이에 토리드궁의 옆방에서 는 두마를 해산시키라는 전날 밤 차르가 내린 결정에 불복하는 두마 의원들이 '질서 회복 및 군대의 통수권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대다수 의 원들의 의사를 드러내주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우선 평온을 되찾는 데에 집중 되어 있었다. '임시위원회'가 최우선으로 선결해야 할 문제는 질서 회복, 특히 반란병들을 그 들의 막사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소비에트와 협상을 해야만 했다. 협상의 결과, 기본 법안이 나왔는데, 이 법안은 1917년 한 해 동안 군 대의 규율을 침식시키게 된다. '군인의 권리 헌장'이라 할 수 있는 '명령 제1호'는 구체제의 가장 가혹한 군사적 규칙들을 폐지하고 시민으로서의 군인이 '병사위원회'로 조직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장교들과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을 격화시켰다. 소비에트는 형세를 관망하는 기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참모부의 의향이나 페 트로그라드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모길료프 사령부에 격리되어 있는 차르의 의향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그마의 확실 성에 '반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붙었다. 볼셰비키이든 멘셰비키이든 사회혁명주의자이든 간에 혁명가들에게 현재는 기나긴 혁명과정의 첫 단계로서 '부르주아지' 혁명이 일어날 때였 으며, 부르주아지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농민 혁명의 길을 열어주리라고 생각하였 다. '소란'이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두마의 위원회와 권력의 집행을 요구하지 않는 소비에 트 사이에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긴 거래 끝에 3월 2일 아침에 양측은 마침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는 '헌법 제정위원회'의 소집을 기대하였고, 한편으로는 구성원 대부분이 자유주의자로 이루어지며 입헌민주당의 대표들이 지배하는 임시정부의 정 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에트의 인정은 조건적인 것이었다. 소비에트가 정부 를 인정하는 조건은, 정부가 기본적 자유와 보통선거를 표방한 민주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계급,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며 경찰을 폐지하여 민병으로 대치하고 시민으로서의 병사의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사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중 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았다. 그것은 1917년의 정치적 투쟁의 목적과 전쟁과 평화의 선택문제 그리고 영토의 문제였다. 1917년 3월 2일의 타협은 '두 개의 권력', 즉 정당성과 러시아 사회의 미래라는 분쟁으로 가득 찬 두 개의 다른 개념 사이의 공존을 탄생시켰다. 한편으로 임시정부의 세력은 질서를 추구하는 정권으로서, 그 논리는 의회주의였으며 그 목표는 현대적이고 자유로은 자본주의 적 러시아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세력은 그들이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에 지배 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더욱 직선적이고 '혁명적'인 권력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 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탈중심적이고 단초적인 자기 자신의 구조의 친화 에 따라, 그리고 특히 변덕스러운 여론의 변화에 따라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역동적인 세력 이었다. 3월 2일 형성된 첫 번째 임시정부는 게오르기 리보프 공이 그 수반이 되었으며 입 헌민주당 다수의 유력한 대표들에게 둘러싸였다. 파벨 밀류코프가 외무부 장관, 니콜라이 네 크라소프가 교통부 장관, 안드레 친가레프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간 에 타협을 이끌어낸 주요 장본인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의 중요 대표 중 유 일하게 각료 자리를 수락하여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연사로서의 재능과 정치적 각축 장에서 그가 취하고 있는 좌파의 위치로 인하여 이미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3월 2일의 타협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수뇌부의 태도의 불확실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번 사건으로 깊이 낙담하고 힘이 빠진 니콜라이 2세는 거듭하여 서로 모순되는 명령들을 내 리고 있었다. 2월 27일 반란이 수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그는 페트로그라드 군사 관 할 지역인 사령관인 카발로프를 사직시키고 이바노프로 대체하였다. 차르는 이바노프에게 "반란을 종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차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 진 차르스코예 셀로의 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철도원은 황실 기차의 방향을 프스코프로 돌렸다. 차르는 3월 1일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그곳에 도착한 후, 반란이 완전한 성공을 거 두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이제 수뇌부의 태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알렉세예브 장 군은 소비에트가 아닌 두마가 지배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자, 최고 사령부 전체의 지지를 받아 니콜라이 2세에게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왕조를 구하기 위해"황제의 자리에서 물러 나라고 권하였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차르의 아들 알렉시우스는 오래 살 가능성이 거의 희 박했으므로 차르는 왕위를 자신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하였다. 왕권을 또 다른 로 마노프 왕가 사람에게 양위하였다는 소식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센 반대의 물결을 불러일으 켰다. 병사와 노동자의 시위대 무리는 즉시 토리드궁으로 달려가 "공화국 만세!", "로마노프 왕조는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임시정부의 각료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여 미하일 대공이 왕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 다. 1917년 3월 3일 18시 대공은 양위증서에 서명을 하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종지부를 찍었 다는 소식에 나라의 모든 도시에서는 환희에 찬 시위의 물결이 가득하였다. 길거리 곳곳에 서는 자유 시대의 상징이며 새로은 체계의 찬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졌다. 제3장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1917년의 행복한 봄날, 새로운 통치자들은 러시아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만 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몇 주 후 임시정부는 기본적 자유, 보통선거, 전면적 사면, 사형 제도의 폐지, 계급,인종,종교적 차별의 철폐, 폴란드와 핀란드의 자결권 인정, 소수 민족에 대한 자치권 약속 등 괄목할 만한 법령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수세기간의 전제정치와 갑 자기 단절한 나라에서 이러한 민주적이고 진정한 혁명적 법령들을 정부의 힘 아래 맡겨놓는 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혁명이 승리하자. 그 다음날부터 이러한 것들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해방에 휩싸인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는 모든 것 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토론회의 영원한 승리였고, 완전한 자유의 향연이었다. 콘스탄틴 파 우스토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담배 한 갑을 사거나 삯마차를 타고 가는 짧 은 동안에도 정치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투표를 어떻 게 하느냐고 물어오는 다방의 점원들도 있었고, 거리에 나가 보면 도시의 벽이란 벽은 모두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이디시어로 쓰인 토론회, 총회, 회합, 선거 프 로그램을 알리는 벽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네프스키 대로는 파리의 라텡 지구 같은 곳으로 변화하였다. 책을 파는 장사꾼들이 빽빽이 줄을 지어 보도를 차지하고서 라스푸틴이나 니콜 라이 2세, 레닌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팸플릿이나 농민 각자가 얼마만큼의 토지를 받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는 사회혁명당의 농업 프로그램을 경매에 붙이기도 하였다." 몇 주가 흐른 후에는, 100여 개의 소비에트, 공장과 지역의 수천의 위원회, '적위대'의 지원병, 농민위원회, 코사크 기병대, '주부위원회'는 물론 치안위원회와 사회 명사로 이루어진 가장 보수적인 기 관들까지도 넘쳐났다. 요구들과 여론들이 표명되는 토론의 장소, 행동의 장소, 대결의 장소 들 또한 헤아릴 수 조차 없이 많이 생겨났다. 1917년 2월에 일어난 혁명은 1905년의 혁명보 다 훨씬 더 완전한 언론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노동자, 군인, 농민, 유대계 지시인, 이슬 람교 여인, 아르메니아인 교사들은 '자신들의'조직을 통해서 고통받고 있는 인민의 참상이나 혁명으로 잔뜩 고양된 커다란 희망을 언급한 수백만 통에 달하는 발의서와 청원서, 그리고 진정서를 소비에트로 보내왔다. 1917년 3월부터 7월 사이, 이 동안에 자신의 권리 주장을 내세우지 않은 직군이나 노동계 는 단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기간 중에 100만 명 이상이 파업을 한 것으로 기록된 다. 장인, 세탁소 점원, 미용사. 다방 점원. 하녀, 운전사 - 공공연히 주장한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수많은 직업인들 - 가 파업의 베테랑인 제련 공장의 노동자들처럼 깃발을 펄 럭이며 행진을 하였다. 노동자들은 여덟시간 노동제를 요구하였고, 요구하는 즉시 새로운 권 리를 획득하였다. 다른 주장들 가운데에는 사회보장, 고용과 해고의 통제, 벌금과 가혹 행위 의 종식이 있었으며, 또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하루에 3리브르의 빵을 살 수 있도록' 월급을 약간 올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일종의 상징성을 띠는 또 다 른 많은 요구들은 보다 큰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싶어하는 '민중' 의 열망을 반영해 준다. 티베르의 직물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에 들어갈 때 몸수색하는 것을 없애주기를 요구하였다. 코스트로마의 노동자들은 잘 알려져 있는 공장 내 스파이와 기업주 의 군대를 쫓아내도록 요구하였다. 모스크바에서는 하녀들이 자신들에게 '노예들에게처럼' 반말을 쓰는 것을 중지해 주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다. 또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다방의 보이들이 "우리는 다방 보이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팁을 폐지하라. 보이도 시민이다!"라 고 쓰인 깃발을 내걸고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대기업과 대도시의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이 정 신을 차리지 못한 혁명의 첫 주에 그 대부분이 실현된 주장들을 정식화하는 데 그치지 않 고, 새로운 체제의 첫 주에 또한 공장위원회와 '적위대'의 단위부대들을 조직하였다. 공장위 원회의 첫 번째 목표는 고용과 해고를 통제하고 고용주가 물품조달을 중단한다는 핑계로 기 업을 함부로 닫지 못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노동의 질서를 유지하고 결근과 싸우는 것이었 다. 요컨대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의 강화는 1917년 한 해를 통틀어 점차 유행하게 된 구호였다. 반면에 경제적 사정은 어두워져 갔다. 실업이 증가하고 공장이 문을 닫았다. 경제 위기가 닥치고 고용주들의 반대가 더욱 치열해 가는 정세 속에서 '노동의 방위'를 위한 자치 조직인 공장위원회는 볼셰비키가 주장하는 기업의 '국유화'에 대한 견해를 무시하였다. '적위 대'의 단위부대들은 무장한(2월 27일부터 무기공장을 약탈한 덕분이었다.) 노동자 지원병으 로서, 공장을 폐쇄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항하여 공장을 지킬 뿐 아니라 혁명이 위협을 받는 경우에는 '혁명을 지킬' 각오가 되어 있었다. 1917년 여름에 무장한 노동자가 페트로그라드 에 2만명 이상, 모스크바에 1만 2천명이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맨체스터'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는 3000명, 티베르에 1500명, 툴라라는 작은 도시에도 300명 이 있었다. 이같이 크고 작은 노동자 군대가 계급 투쟁을 부추키는 볼셰비키의 선정에 점 점 동화되어 '자기들의' 혁명을 지키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한 젊은 장교는 툴라 지방의 지주인 아버지에게 보낸, 환멸에 가득 차 있으나 한편으로는 통찰력을 갖춘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군대 안의 혁명을 묘사하였다. "우리와 병사들 사 이에 가로놓인 심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깊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영주(주인)입니다. 그들에게 요즈음 일어난 일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그들이 승자이고 우리가 패자인 사회혁명 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제는 자기들의 위원회를 가지고있노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당신 들이 영주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영주가 될 차례야!'라고요. 그들은 수세기 동안의 노예상태 를 앙갚음하고야 말 듯한 자세를 보입니다." 1917년 혁명에서 병사들과 농민 - 1000만 명에 이르는 동원된 군중 - 의 역할은 결정적 인 것이었다. 탈영과 평화주의를 통해 이루어진 러시아 군대의 점진적인 해체는 군대 체제 를 총체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령부에게 문제의 근원은 병사위원 회를 창설케 한 명령 제1호였다. 병사위원회는 법조문이 부여한 사실상의 제한된 권리만으 로 만족하지 않고 군사전략에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병사위원회는 명령에 불복종을 하 며 특정한 장교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을 새로이 '선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병사들의 힘'이 점차 군대를 장악하여, 브루실로프 장군이 묘사한 것과 같이 매우 특수한 '참호의 볼세비즘' 을 싹트게 하였다. "병사들은 자기들의 소망과 일치하는 듯 보이는 '참호의 볼세비즘'이 점 점 퍼지는 것을 방임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가 무엇이며 헌법이 무엇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평화와 토지 그리고 법도 장교도 지주도 없이 살 수 있는 자유를 원하였다. 사실상 그들이 아는 '볼세비즘'이라는 것은 속박 없는 무정부주의적 자유에 대한 커다란 갈망이었을 뿐이다." 교전국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러하듯, 러시아 병 사들도 무엇보다 종전을 고대하였지만, 적어도 혁명의 초기 몇 개월 동안은 공공연하게 '항 복을 통한 평화'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농촌 출신이었던 그들은 마을에서 토지 를 분배할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들이 이 현장에 없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땅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더욱더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1917년 3월부터 10월 사이에 20만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쟁에 지치고 참호나 수비대에서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탈 영하였다. 또한 그들의 귀향은 농촌에서도 갈등을 야기하였다. 러시아의 많은 시골 마을들에 차르가 퇴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3월 중순이었고, 혹 은 그보다 더 늦게 전해진 곳도 있었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농민회의가 열리고 작가나 교사나 사제가 농민의 청원과 바람을 표현한 탄원서를 작성하는 관습이 있었다. 페트로그라 드나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문서보관서에는 방대한 '러시아 혁명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여 기에서는 정치적 요구와 종전에 대한 강한 열망을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공화국을 선포 하라". "헌법제정위원회를 빨리 구성하라." "보통선거제와 의무교육을 실시하라" 또 더욱 빈 번히 "정의롭고 공정한 평화조약을 가능한 서둘러 체결하라." 등은 서툴지만 확고한 농민의 청원과 발의의 내용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커다란 사건이 있을 때에만 글로써 표현되는 농 민의 발언들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롭고 시사적이며 예상 외의 것들일 때 가 많다. "우리들, 러시아인은 타타르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가축과 텐트를 가지고 러 시아를 쳐들어왔따. 우리는 독일에 살러 가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독일의 주민들을 노예 로 만들거나 그들의 가축과 재산을 탈취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것은 복음서의 정신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양 날이 선 무기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승리자가 될 수 있지만, 결과는 살육뿐이다." 농민의 발 의와 청원에는 엄격한 경제적, 사회적 요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농민들은 왕이 하사한 영지 와 대지주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여 재분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거의 만장일치 로 '식구수대로' 자신의 토지를 할당받는 농업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급여자 나 전쟁포로들의 도움 없이도 활용될 수 있는 영지만을 대지주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다 른 요구들은 매우 다양해서, 소작료의 감소, 헌법제정의회가 열릴 때"까지 토지 거래의 지불 유예령, 목초지와 숲의 재분배, '전시라는 점을 감안한, 국유림의 벌목에 대한 예외적인' 허 용 등이 있었다. 4월 말까지 여러 주일 동안 농촌에는 고요가 감돌았다. 극히 일부분의 지역 에서만 '무질서'라고 표현될 수 있는 상황들이 벌어졌는데, 특히 1905년 혁명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조직되어 촌락과 면 단위로 농민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러한 위원회들은 대부분 사회혁명당에 가까운 '농촌지식인'의 지도를 받았고 농업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 위해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신임하였다. 그러나 4월 말부터 농민들은 참을 성을 잃기 시작하였고 지주들은 늘어난 '범법행위'와 대면하게 되었다. 농민위원회가 밑으로 부터의 요구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하여 극단화되는 사이에, 4월에는 100건이 채 되지 않았 던 범법행위가 6월에는 1000건을 넘어서게 되었다. 2월 혁명은 차르가 전제정치의 러시아화 정책에 구속되어 있던 여러 국가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힘을 제공하였다. 핀란드, 폴란드, 발트 제국,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타타르, 우크 라이나의 지식인들에게 차리즘의 붕괴는 곧 그들의 자치를 약속해 주는 것이자, 머지않은 미래에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였다. 키에프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문화조직인 라다가 다음과 같이 열렬한 어조로 혁명을 환영하였다. "우크라이나 시민 여러분, 그리고 동 지 여러분! 수세기 동안을 억눌려 살아온 우크라이나에 오늘의 행복한 날이 도래하였고 새 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체제를 지지하십시오. 새로운 체제는 우크라이나에 자 유를 가져올 것입니다. 헌법 제정위회를 준비하십시오. 고국의 자치와 연방국가의 건설을 위 해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목소리를 한데 뭉쳐야 합니다. 곧 라다는 내적인 자치와 독 립을 선포하면서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이름으로 말하게 되었다. 라다의 그것과 유사한 요구 들이 폴란드, 핀란드, 발트 제국, 코카서스에서도 발전되었다. 옛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던 이슬람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도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분열을 다시금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 최초의 여성 해방운동을 지지했던 '진보주의자'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로, 그리고 타타르인의 보호 아래 통일이 실현되기를 원하던 '단일 정부주의자' 와 바쉬키르인과 우즈베크인, 그리고 아제리인이 이끄는 '연방주의자'로 분열되었다. 국가 분 열의 위협을 안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인 여러 열망들에 직면하여 아직 충분한 준비를 갖추 지 못한 임시정부는 그저 좋은 의도를 가진 제스처를 내보이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 그 리하여 다른 종족에게 가해지던 차별적인 조치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폐지되었다. 다른 종 족들은 이제부터 자유롭게 이동하고 직업을 선택하고 학교에서 자신들의 국어를 사용하고 선거를 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승리도 아직 그들에게 집단적인 존엄 성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집단적인 존엄성이란 진정한 '민족적' 개성을 인정할 때에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4장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이냐 전쟁이냐? 정부에게는 연합군의 승리만이 새로운 체제를 서구민주주의에 견고하게 연결시키고 사회 의 단합을 강화하여 정부가 조절할 능력이 없는 혁명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여겨 졌다. 3월 4일, 신임 외무부 장관 파벨 밀류코프는 외국에 주재해 있는 외교관들에게 공문을 띄워 구체제가 체결한 국제적 의무사항을 엄격히 준수하여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수행한다 는 확고한 태도를 천명하였다. 정부에게 새로운 러시아가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은 차르 체 제하의 러시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이 계속 지상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점은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와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쟁을 계 속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 지배되고 있다. 3월 14일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평화주의적 유토피아가 '혁명적 방어주의'와 양립될 수 있는 '전 세계인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소비에트는 국민들에게 '영토의 합병과 전쟁배상 금이 없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모든 전쟁국 정부의 합병에 대한 야망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는 '러시아는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위하여 군대의 전투력을 유지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을 확인하였다. 레닌은 모든 정치지도자 중에서 홀로 볼셰비키 당의 압도적 다수의 의견에 반하여 '혁명 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가 이룩하려 하는 타협정책의 실패를 예언하였다. 그의 '먼 곳으로 부터의 편지' 네 통은 취리히에서 3월 20일에서 25일 사이에 쓰여지는데, 볼셰비키의 기관지 '프라우다'도 그중 첫 번째 것만을 감히 출판하였을 뿐, 나머지는 포기한다. 레닌은 '먼 곳으 로부터의 편지'에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와 즉각적으로 단절하고 혁명의 다음 단계인 프롤 레타리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에게 '프롤레타리아 소비에 트'의 출현은 혁명이 '부르주아지적 단계'를 이미 뛰어넘었다는 신호였다. 이 혁명적인 조직 은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이 정권을 탈취하여 제국주의적인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것 이었다. 레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 플라텐이 독일 정부와 맺은 협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군의 볼셰비키 혁명가들과 함께 3월 28일 취리히를 떠나 치외법권의 특혜를 받는 기차를 타고 독일을 통과하여 스웨덴을 지나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였다. 레닌을 러시아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독일인들에게는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인들은 전쟁을 계속하는 데에 이미 적대적이었던 러시아 민 주에게 레닌의 연설이 안정을 뒤흔드는 힘으로 작용하리라는 계산을 하였다. 레닌은 페트로 그라드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4일 합법적인 집회에 참석한 볼셰비키들에게 유명한 '4월 테 제'를 발표한다. 여기에서 그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임시정부, 의회 공화주의에 전적인 적의 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경찰, 군대, 국가 관료 전체의 폐지, 대토지 몰수와 토지의 국유 화, 노동자의 기업관리 등 자신의 프로그램을 밝힌다. 그는 즉석에서 세 가지 슬로건을 제시 하였다. 그것은 "전쟁 중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 였다. 페트로그 라드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대다수는 경악과 적의에 가득 차서 레닌의 테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테제는 점차 진전을 보였다. 능수능란한 정치가인 레닌은 자신의 테제를 가볍 게 수정하였고, 그리하여 4월 24일부터 29일 사이에 열린 당회의에서 가까스로 다수를 이루 는 150명의 대표자가 레닌의 테제를 지지했다. 그는 '혁명의 다음 단계인 프롤레타리아 혁명 의 단계를 대중에게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긴 불안정한 시기'가 필요하리라는 사실을 인정 하였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회주의라는 도그마에 대해 아는 바도 거의 없고 얽매어 있 지도 않은 당의 볼세키비 투사들은 '사회주의로 가는 데에 부르주아지적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소비에트의 정권 장악과 직접적 행동을 설교하는 레닌의 테제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노선은, 미래에 대해 조급하고 참을성 없는 기 층의 투사들 - 페트로그라드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해병들, 수도경 비대원들,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적위대원들 - 과 파리 코뮨처럼 진압되어 실패한 시기상 조의 반란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같은 지도자 사이라는 좁은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7월이나 10월과 마찬가지로 4월에 볼셰비키당은 널리 퍼져 있 는 생각과는 달리 깊이 분열되어, 한쪽으로는 폭발과 다른 쪽으로는 망설임 사이에서 갈팡 질팡하고 있었다. 1917년 유명한 '당의 규율'은 실제라기보다는 하나의 믿음에 가까운 것이 었다. 4월 18일 밀류코프는 러시아는 연합군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킬 것이며 '종국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싸울 것임을 재천명하는 문서를 연합군에게 보냈다. 이 문서에는 '영토의 합병 과 전쟁배상금의 지불 없는 평화'에 관련한 소비에트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 었다. 여론은 경악하였다. 법무부 장관이며 소비에트의 부의장인 케렌스키는 사직해 버리겠 다고 위협했다. 즉시 수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밀류코르의 해임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탄 원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행진을 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시위 군중이 시 내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많은 구호들이 등장했지만 처음으로 "정부는 사퇴하라! 모든 권력 을 소비에트에게로!"라는 볼세키기의 구호가 나왔다.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첩자 레닌'을 공 개재판에 회부하려는 시위 반대자들-학생, 사무원, 고급 주택가의 젊은이-과 볼셰비키들은 폭력적인 충돌을 일으키며 서로 대결하였다. 1917년 4월 18일 페트로그라드에는 시민전쟁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정부가 러시아는 결코 병합을 원하지 않는다는 공식 발표를 하자, 위기가 지나간 듯했다. 그렇지만 '밀류코프 문서' 사건은 '두 개의 권력'이 지닌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며칠 후, 밀류코프는 문책을 받아 사임을 했고, 밀류코프의 뒤를 이어 '병사위원회 때문에 부패한' 군대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생각한 국방부 장관 구츠코프도 사임을 표했 다. 한편으로 소비에트는 정부와 연정을 이룰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비에트 의 정치참여는 장님의 행진과 흡사했다. 온건파는 대중에 대한 화해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부의 행정과 전쟁 문제에 참여하여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연결시키기를 원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반혁명적' 계획을 좌절시켜 개혀과 갈등의 해소를 얻어내기를 희망하였다. 수주간의 줄다리기 끝에 5월 5일 천신만고로 수립된 이 두 번째 임시정부에는 리보프 공이 다시 의장이 되어 입헌민주당의 온건파가 의장직을 계속 보유했고 7석의 장관자리를 얻은 데 비해, 사회주의자는 6석의 장관직을 얻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유명한 멤버인 세 명의 사회주의자-'혁명적 방어주의'의 중요한 이론가이며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인 체레텔리, 새 농업부 장관 체르노프, 국방부 장관이자 해군부 장관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을 주도했 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자인 사회주의자 장관들이 정부에 들어감으로써 정치판도 는 크게 변화하였다. 사회혁명당원들과 멘셰비키들이 '부르주아지'국가의 관리자의 옹호자가 됨으로써, 그들은 사회긴장이 격화되던 시기에 빵과 토지와 평화에 대한 주장과 요구를 볼 세키비키에게 넘겨주었다. 새로운 정부에게 평화의 문제는 중대한 것이었다. 체레텔리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연합국 이 영토 합병 없는 평화의 원칙에 동의하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또 그는 각국의 사회당이 스톡홀름에 모여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같은 유토피아적인 계획은 사산되었다. 평화의 전선에서 실패한 정부느 전쟁의 전선에서도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조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러시아 혁명의 보나파르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는 연합군의 압박을 받아, 분열되고 주저하는 수뇌부에 반대하여 대공세를 감행한다는 위험 한 도박을 하였다. 잊을 수 없는 전선 시찰에서 국방부 장관이자 탁월한 연사 (볼셰비키는 그에게 '노망 대장'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였던 그는 '2월의 승리를 지키기 위하여 거족적인 분발을 해야 한다'주제의 연설로 '시민으로서의 군인'을 선동하려 하였다. 그는 "자유롭고 민 주적인 새로운 러시아가 실상은 반란을 일으킨 노예의 나라여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여 연설을 들으러 온 병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말이 군대 전체에 퍼졌고 그 동안 전사로 서의 위신 때문에 고생해온 병사들을 또다시 분노에 떨게 하였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많 은 탈영이 일어났다. 6월 10일에서 17일까지의 1주일 동안 10만명 이상이 탈영하였다. 6월 18일 러시아 군대는 수백 킬로미터의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하였다. 러시아 군대는 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몇 차례의 승전을 거두었다. 그러나 7월 2일부터 감행된 독일의 반격으로 물자와 군수품이 달리던 러시아 군대는 무질서하게 퇴각하였다. 2주일 동안 40만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전선은 200Km 뒤로 후퇴하였다. 대전투에서 의 러시아의 마지막 공격의 실패는 2월 체제가 신용을 잃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 였다. 2월 체제는 거족적, 애국적 분발 위에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그 동안 후방에서는 도시와 지방 양쪽 어디에서건 사회적 긴장이 높아져만 갔다. 완고한 태도를 위한 고용주들은 점점 더 급진적으로 되어가는 공장위원회가 요구하는 '노동자의 관 리'를 거부하였으며 파업에 대하여 공장폐쇄로 맞섰다. 지방에서는 농민위원회가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점유하고 대지주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수하였으며 정부로부터 소작세를 다시 낮게 책정받았다. 대지주는 이에 맞서 파종을 중단하고 '무정부 상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군 대를 파견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함으로써 응수하였다. 이와 동시에 다른 민족들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부에게 이러한 문제는 긴급한 현안이 아니었다. 정부는 5월 1일 카잔 에서 범이슬람 제1차 총회가 열리고, '총비서실'과 기본법을 갖춘 우크라이나인들의 열망에 따라 민족군대가 형성되고 분리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소란 과 참칭된 권력 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들이 팽창하는 가운데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들'의 외곽에 결연히 자리잡은 볼셰비키는 압력을 강화하고 온갖 형태의 민주의 급진화 를 고취시켰따. 노동조합과 소비에트에서 항상 소수였던 볼셰비키는 5월 말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회의에서 노동자들의 공장관리를 지지함으로써 처음으로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 러한 첫 성공으로 그들은 용기백배하였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제1차 총회(6월 3~23일)에서 볼셰비키는 다수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으로 이루어진 800여 명의 대표들 중에서 1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총회가 '혁명의회'가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서 어렵지 않게 주도권을 잡았다. 정부를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체레 텔리의 단언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으로 응수하였다. "그러한 당이 존재한 다. 어떤 당도 권력을 거절할 권리가 없으며 우리 당도 권력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 당은 언제나 권력을 장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의 수뇌부가 6월 18일 대공격을 시작한 날에 도 소비에트는 자신들의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를 조직하였으며, 이 러한 시위는 볼셰비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이 제 시한 슬로건인 "제헌의회를 거쳐 민주공화국으로!" 대신에 볼셰비키의 깃발 대부분은 볼셰 비키의 구호 "침략자는 물러가라!" "노동자 관리 만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를 내 걸고 있었다.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의 시위대와 볼셰비키사이에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던 6월 18일에 러시아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그날 막심 고리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페트로그라드는 이제 이전의 도시가 아니다. 거리는 불결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게으르고 비겁해져 간다. 내가 항상 대항해왔던 가장 저급하고 범죄적인 본능이 모두 깨어 나고 있는 듯하다. 아시아적인 혁명이 밀어닥쳐 러시아를 파괴하고 있다." 4월에도 그랬던 것처럼, 전쟁문제가 7월 3일과 4일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된다. 6월 하순,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정부에서 수비대의 일부인 기관총 사수대 제1연대를 전방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연대는 1만 명의 병사와 1000명의 기관총 사수로 구성되어 볼셰비키의 투쟁근거지인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에 주둔해 있었다. 6월 21일 이후 수도의 중요한 무장 병력이었던 이 연대는 정부에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반란을 일으켰따. 그들은 전방으로 떠나가기를 거부하면서 정부가 '결정을 밀고 나갈 경우'에는 '정부를 쫓아내겠다'고 협박하였다. 7월 3일 수비대의 여러 연대들은 이것을 행동에 옮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 주기로 결정하였다. 무장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이 미 지났던 적이 있는 거리를 따라서 소비에트가 있는 토리드궁으로 향했다. 그날 온건파 사 회주의 지도자들은 어렵게 시위 군중의 흥분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 는 일부 기층의 투사들에게 압도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레닌은 핀란드 해안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6월 29일 수도를 떠났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나서서 흥분을 진정시켰따. 결정을 내리지 못한 다수파는 시위 군중에게 그대로 머물렀다가 다음날 소비에트에게 압력 을 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7월 4일자 '프라우다'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혼란상을 드러내준다. '프라우다'의 1면에 커다 란 빈 공간이 인쇄되어 발행되었다. 절제를 요청하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내보낸 기사 가 마지막 순간에 나오지 않게 된 것이었다. 7월 4일 혼란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날 아침 크 론슈타트의 해병대가 반란의 승리를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고 상륙하였다. 해병대는 즉시 '인터내셔널'을 연주하는 군악대를 선두로 하여 볼셰비키 구역인 발레리나 크세신스카야의 옛 저택 앞으로 나아갔다. 핀란드에서 돌아와 지치고 망설이는 레닌은 발코니에 나와 간단 한 연설을 하는 데 그쳤다. 이 연설에서 그는 흥분한 군중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리지 않고 소비에트 권력이 곧 도래하리라는 신념만을 애매하게 선언하였다. 방향을 상실한 군중은 또 다시 토리드궁으로 향했따. 숫자는 많았지만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군중은 신 속하게 와해되었다. 네프스키 대로의 지붕 위에 매복해 있던 정부군이 몇 발의 사격을 가하 여 혼란을 일으켰다. 오후 5시경에 격렬한 뇌우로 시위 군중의 일부가 흩어졌다. 하루가 끝 날 무렵 토리드궁 앞에서 희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권력을 소비에 트의 저명한 인사들인 사회주의적 장관들이 왜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위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회혁명당 장관, 체르노프가 토리드궁의 층계 위로 모습을 나타냈 다. 그는 "민중의 아들아, 민중이 주겠다고 할때 권력을 받아라!"라고 그에게 소리치는 성난 군중에게 즉시 붙잡혀 차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번에는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당사에서 나와 그의 명성의 도움으로, 잠시 동안 '민주주의의 인질'이 되었던 체르노프를 힘들게 구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밤에 정부는 레닌과 그의 '독일 스파이들'이 쿠데타를 선동하였다고 여 겨 신뢰도가 높은 군대를 보냈다. 수도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100여명의 볼셰비키가 체포 되고 볼셰비키당은 금지되었다. '카이저의 하수인'으로 지목되어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레닌 은 핀란드로 도주하였다. 그의 도주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을 더욱 신뢰하게 해주었고 볼셰 비키당은 마비되었다. '7월의 날들'이 지나고 리보프 공은 케렌스키에게 새로운 정부를 구성 하는 임무를 맡겼다. 입헌민주주의자들의 내각 참여에 대한 망설임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긴 내각의 위기(7월 6일~23일)를 겪은 후, 케렌스키는 '혁명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부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시 권력을 잡은 입헌민주주의자들과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그럭저럭 연합하여 동거할 수 있었다. 제5장 혁명은 계속되고... 권력의 정상부에서는 독재권력을 노리는 민간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권력다툼에 빠져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사법, 군사, 행정 등 국가를 지탱하는 세 기반은 기능을 멈추 고 말았다. 이제 법질서는 우롱당하고 모든 형태의 권위는 도전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사회 저변에서는 시골과 공장, 빈민 거주지와 병영에서 혁명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막심 코리키는 7월 10일 이렇게 적고 있다. "대중의 어두운 본능과 함께 날뛰던 볼세비즘 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는 퍽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부르주아지 세력이 사회주의자 전체에 대항하여 폭발하고 있다. 반혁명은 이제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며칠 후에는 2월 혁명 이후 노동자 지역의 회색 군중의 손에 주기적으로 점령당해 왔던 페트로그라드의 고급 주태가들이 본래의 정적을 되찾았다. 모든 분란의 원인 이자 폭동적인 모임의 진원이지이며, 제어할 수 없는 시위의 구심점인 페트로그라드의 소비 에트도 온건해졌고, 토리드궁에서 소몰리니 학원 쪽으로 추방되어 수도의 중심가에서 더욱 멀어졌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보수적인 세력 집단들-입헌민주당과 가까운 대기업과 은행가 들을 결집시키는 러시아 경제부흥협회, 대지주연함, 육군과 해군 장교연합-이 권력의 맨 앞 줄을 차지하였다. 보수적인 언론은 매일 소비에트의 해체, 볼셰비키의 추방, 병사위원회의 폐지를 호소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보나프라트가 되어 '볼셰비키적 자코뱅주의'를 근절시키 기로 결심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전선에서 사형제도의 부활, 병사위원회의 권리 제한, 농 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파견 등 독재적인 조치들을 증가시켰다. 이렇게 시끄러운 여름 동안에 새로운 실력자가 부상하였다. 그의 모호한 노정은 바로 혁명의 모습을 상징하 여 준다. 그는 바로 케렌스키가 브루실로프 장군 대신에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코르닐로프 장군이었다. 사병 출신인 이 시베리아 코사크의 아들은 모든 구체제의 장군들 중에서 군대 의 민주화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남서부 전선을 지휘 하는 동안 집회를 금지하고 탈영병을 총살함으로써 군대의 규율을 회복시켰다. 케렌스키는 소비에트와의 관계, 그리고 비록 온건하기는 해도 혁명주의자로서의 그의 과거 덕분에 보수 주의자들의 눈에는 타협적인 인물로 비쳤다. 그런데 무정부 상태가 러시아를 좀먹어 들어가 는 세태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고위수뇌부, 기업주와 연합국은 민간인 케렌스키보다 군인 코르닐로프가 더욱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8월 12일부터 같은 달 20일까 지 모스크바에서는 '삼부외'라 일컬을 만한 모임이 열렸다. 기업주, 노조, 직업집단의 대표들 과 장교 집단, 교회, 볼셰비키를 제외한 정당을 아우른 여러 단체들이 참여한 국가자문회의 는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상황은 코르닐로프에게 유리하게 돌아 갔다. 코르닐로프는 모든 혁명위원회의 해체,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국가 개입의 전면적 중 단, 철도와 군수공장의 군사화, 후방에서의 사형제도 부활등 러시아를 '무정부 상태'에서 구 출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군사 쿠데타의 계획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 였다. 8월 25일 정부의 수반은 총사령관에 정치계획을 탐색하고 오라는 임무를 주어 모길료프 사령부로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정부가 허약함을 시인하는 것으로 판단 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가 차지할 자리인 집정내각의 정상을 차지할 채비를 갖춘다. 케렌 스키의 밀사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코르닐로프가 전권을 요구하고 있다고 정부의 수반에 게 보고하였다. 케렌스키는 긴급히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반역적인 총사령관과 대결하기 위 해 자신에게 전권을 수여하기를 요구하였다. 입헌민주당의 각료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 장을 취하고 케렌스키를 지지하기보다는 코르닐로프의 해임을 손하하며 전권 이양요구를 거 부하였다. 케렌스키는 즉시 코르닐로프의 직위를 해임하고 스스로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반역자로 몰려 법의 밖으로 몰려난 코르닐로프는 '러시아를 구하기 위하여' 크리모프 장군이 이끄는 코사크 사단을 페트로그라드로 진입시킨 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권력다툼 속에서 소비에트는 케렌스키를 지지하고 '반혁명에 대 한 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켜, 여기에서 '7월의 날들' 이후 처음으로 멘셰비키, 입헌민주주의자 들, 볼셰비키가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이 풀려나서 다시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볼셰비키들은 철도 종사원들과 병사들 사이에 심어놓은 자신들의 비밀 조직을 재활성화하여 해임된 총사령관의 충실한 군대가 전진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코르닐 로프가 기대했던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수도 근처, 케렌스키와 소비에트의 면전에서 사기가 떨어져서 제자리걸음을 하였을 뿐이었다. 2일 후 군사 쿠데타는 무산되고 크리모프는 자살하였으며 코르닐로프는 체포되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아마 레닌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훗날 케렌스키는 회고하였다. 실제로 쿠데타의 실패는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코르닐로프를 공공연하게 지지하던 입헌민주주의자들은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신용을 상실하였다. 사실 비밀리에 존속되고 있 었지만, '7월의 날들' 이후 정치가들에게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볼세비즘은 '혁명을 살렸다' 는 후광에 둘러싸여 다시 등장하였다. 얼핏 보기에 이번 대결의 승리자였던 케렌스키의 세 력은 사실 매우 허약했다. 총사령부는 케렌스키를 신임하지 않았으며 이제부터 그를 '볼셰비 키의 인질'로 간주하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권력의 전통적인 승계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 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층부에서는 혁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군부와 정치인이 국가의 정상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나라는 더욱더 깊은 혼 돈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든 형태의 권력이 사라졌다. 병사들은 탈영을 하여 자신들에게 수모를 준 장교들을 학살하였으며 농민들은 지주의 집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노동자는 '노 동자의 관리'를 즉각 시행하라고 주장하면서 공장을 점령했다. 병영 깊숙이 퍼져 나가고 있 는 기강의 해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제443보병 연대의 병사 들이 그들에게 운인으로서의 직분을 회복하라는 훈계를 하기 위해 찾아온 페트로그라드 소 비에트의 일원인 테오도르린드 군사위원에게 린치를 가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은 1917년 여름 동안에 나타난 군의 걷잡을 수 없는 약화를 나타내주는 지표이다. 린드 군사위 원은 2월 27일 노동자 시위대 편에 서서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를 ansjEMfls 2월 혁명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독일군의 공세-8월 21일 리가각 점령되었다.-가 한층 강화되자 탈영이 증가하였다. 병사들에게 '반혁명 분자'로 낙인이 찍힌 수백 명의 장교들은 병사들에 게 체포되어 학살되었다. 절정에 달한 탈영병의 숫자는 하루에 수만 명으로 집계되는 적도 있었다.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지 주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가축의 분배를 놓치지 않고 받는 것이었다. 탈영병의 무리는 상 점을 약탈하고 주민들에게 거친 행동을 하여 소도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10월 초 20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타락한 군대를 탈영하였다. 가을에 씨 뿌리는 시기가 다가오자 농촌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그때까지 농민위원 회로 조직된 농민들의 요구는 소작료 개정, 목초지, 삼림, 지주가 파종하지 않은 토지의 점 유로 한정되어 있었다. 정부는 토지개혁 일정을 자꾸만 뒤로 늦추고 있었다. 정부의 거짓 약 속에 크게 실망한 농부들은 8월 말에서 시작하여 9월, 10월을 지나면서 '단번에' 지주를 쫓 아버리기 위하여 영주의 토지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토지에 대한 요구가 가장 높았던 대단히 비옥한 '흑토'지방인 우크라이나에서 무기를 소지한 탈영병들 이끄는 농민반 란이 가장 격렬하였다. 탐보프 지방에서는 8월 24일 그 지역의 대지주인 보리스 비아젬스키 공의 살해와 함께 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봄부터 농민들은 비아젬스키 공에게 수천 헥타르 에 이르는 목초지를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무시되었다. 이 목초지는 1905년 가혹하게 진압된 농민반란에 가담한 것을 처벌하기 위해 그가 여러 공동체에서 몰수한 것이 었다. 얼마 전에 마을에 돌아온 무장 탈영병들에게 고무받아 더욱 대담해진 5000여 농민들 은 8월 24일 공의 토지를 침략하였다. 영지를 지키는 코사크의 소규모 분견대는 농민들과 벌인 전투에서 금방 밀려났고 비아젬스키 공은 체포되었다. 그는 즉시 즉석 농민재판에 회 부되어 조롱 섞인 재판 끝에 '농민들처럼 싸우고 조국을 지키느 srjt을 배우도록 전방으로 보내라'는 판결을 받았다. 군중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족이 너무 많다! 죽여라!" 즉시 그는 사형당했다. 이어서 비아젬스키 공의 부모와 하인들도 살해 되었고 저택은 불타고 1만 헥타르가 넘는 토지와 가축, 농기구는 여러 마을공동체에 분배되 었다. 9월과 10월에 탐보프(저택 1200채 중 250채가 불탔다), 펜자, 보로네즈, 사라토프, 오 렐, 툴라, 리아잔 지방에서 1000개 정도에 달하는 영지가 이같은 식으로 약탈당하고 불타버 렸다. 이제 질서를 유지해 주는 공권력의 보호를 잃은 지주들은 겁에 질려 도시로 도망하였 다. 1917년 가을 농민들은 국가의 붕괴를 목격하였고, 이와 동시에 귀족와 대지주의 영지를 비호하던 세력들인 공무원, 법관, 세금징수원, 그리고 군인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권력이 붕괴되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1917년 가을 러시아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규모 농민반란은, 1902년 시작해서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처음으로 극에 도달했던 반란 의 대주기에서 승리에 찬 귀결로 여겨졌다. 1917년은 토지의 점유와 그토록 기다려온 '검은 분배'-식구수대로 토지를 나누는 것-그리고 농촌에 대한 도시권력의 감독 거부를 위한 농민 과 대지주 사이의, 그리고 농민과 국가 사이의 대결에서 가장 결정적인 단계였다. 도시에서도 사회 분위기는 점점 더 경색되어 갔다. 고용주를 불법으로 감금하는 등 점점 더 폭력으로 되어가는 파업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주는 가끔 생산을 중단하였다. 경제사정은 악화일로였고 식량부족이 일반화되었으며, 물가는 급등하고(7월에서 10월 사이에 세 배로 뛰었다)수십만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공장위원회는 급진화되어 온건파 사회당과 노 동조합을 압도하였다. 노동자들은 고용과 해고뿐 아니라, 재고품과 보급을 노동자들이 직접 감독하는 '노동자의 관리'가 이루어져야 상황이 호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 동자의 관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정권'같은 급진적인 정부 형태가 필요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정권만이 급진적인 조치들을, 이를테면 점저 더 유행하게 된 단어인 기업의 차압과 '국유화'를 유일하게 시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3월 이후 공약을 내걸고 기다 려 달라는 요구를 반복해온 정부의 정책에 환멸을 느낀, 도시와 농촌 대중의 뚜렷하게 내보 여준 급진화 경향은 볼세비즘화를 의미하느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볼셰비키의 투 사들과 노동자들은 공통으로 내건 슬로건의 단어들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농민혁명은 토지의 '국유화'와 토지에 대한 집단경작을 권하는 볼셰비키의 프로그램 보다는 '검은 분배'에 호의적인 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에 더 가까운 완전히 자립적인 길을 밟았다. 농촌에 볼셰비키가 알려진 것은 오로지 '펴오하와 땅'이라는 요술과 같은 두 개의 구호를 전파하는 '참호의 볼세비즘'을 전달해 주는 탈영병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불만을 품은 모든 사람들이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1917년 10월 초에 볼 셰비키당의 당원은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다. 모든 국가권력이 여러 위원회와 소비에 트 및 과격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져버린 1917년 가을의 제도적인 공백 속에서, 볼셰 비키는 잘 조직된 결연한 핵심 분자들이 확고한 태도를 갖고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제 자신의 힘보다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9월에 페트로그라드(여기에서 트로츠키는 9월9일 새로운 집행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 키예프, 사라토프 및 50여 지방도시의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볼셰비키의 일정한 발전에 초 조해진 케렌스키 정부는 소비에트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화국 평의회'같은 새로운 기구를 조 직하려 애썼다. 이 평의회는 1917년 3월부터 약속된 제헌국회의 선거를 준비하는 임무를 띤 일종의 예비 국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국 평의회의 개회 때(10월 7일) 트로츠키가 그 것을 '새로운 두마'라고 선언하자, 볼셰비키의 대표들은 모두 회의실 밖으로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 보여준 볼셰비키의 퇴장은 후일에 가서 10월 혁명의 첫 번째 단조라고 평가받 게 되었다. 제6장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0월의 사회주의 대혁명'이 지난지 80년 후, 1917년 10월에 일어난 사건을 둘러싸고 '해석 전쟁'이 벌어졌다. 우선 '자유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입장을 지닌 역사학파는, 1917년 10월 의 볼셰비키 혁명은 폭력에 강요된 쿠데타에 불과했으며, 현실의 기반을 모두 빼앗긴 소수 의 광신자들이 사회혼란을 조장하기 위하여 획책한 노련한 음모가 낳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학파의 해석에 대해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는 1917년 10월 혁명은 의식적으로 볼 세비즘에 가담하였던 '대중'이 기도한 노정의 논리적 귀결이자, 불가피하며 예견된 귀결이었 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셋째로 사료편찬 학파는 이러한 두 '속류주의'를 거부하고 이 학 파의 선구자인 마르크 페로가 정당하게 쓴 바와 같이, "1917년 10월의 봉기는 대중의 운동 이면서, 동시에 여기에는 소수만이 참가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려 애썼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의 소지를 지니는 동시에 자극적인 연구가 수없이 쌓이는 덕분에 1917년 10월의 혁명은 두 개의 운동이 수렴된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기에 대한 치밀한 준비의 결과로서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과 다양하고 자율적인 광범한 사회혁명이 그것이다. 후자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운동인 거대한 농민반란, 군대조직의 심층적인 해체, '노동자의 관리' '소비에트에게 정권을' 같은 진정한 혁명 구호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 운동, 구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다른 민족들의 민족해방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혁멱 하나하나는 저마다 고유한 시간성과 내적인 힘 그리고 볼셰비키의 슬로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수한 갈망들을 갖는다. 1917년 말이라는 짧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지내면 서 주위의 제도적 공백속에서 활동하던 정치적 소수파인 볼셰비키의 활동은 더 큰 다수의 열망 쪽으로 향한다. 정치 쿠데타와 사회혁명이, 나중에 수십년간 자행된 독재정치의 손에 분리되기 이전에, 순간적이나마 하나로 포개지는 것 같았다. 레닌은 망명지 핀란드로부터 봉기를 재촉하고 7월의 날들에 맛본 쓴 경험에 위축되어 있 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혁명적 율법주의'를 비난하며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 앞으로 부단 히 편지를 보냈다. 9월 12일과 14일 그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와 '마르크스주의 와 봉기'라는 두 통의 편지를 띄웠다. "볼셰비키가 두 개의 도시 소비에트에서 다수가 되자 마자,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을 수 있고 또 잡아야만 한다."라고 레닌은 썼다. 즉각적인 평화 를 제시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줌으로써 "볼셰비키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정부 를 세울 것이다." 레닌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볼셰비키가 형식적 다수가 되기를 기다 린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다. 어떠한 혁명도 다수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가 지 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는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볼셰비키 당중앙위원 회는 레닌이 보낸 9월 15일의 편지를 간략하게 검토하였다. 레닌의 제안들에 대해 볼셰비키 의 지도자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비에트가 신속하게 '볼세비즘화되고'있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일을 서두른단 말인가? 10월 20일로 예정된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를 기 다리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서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레닌의 생각은 중앙위원회의 그것과 달랐다. 만약에 정권교체가 소비에트 총회의 투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 생겨나는 정부는 연합정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볼셰비키도 그 정부의 구성에 참여하게 되겠 지만, 그것은 시골과 군대에서 인기 있는 멘셰비키나 특히 사회혁명당처럼 소비에트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형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레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소비에트 2차 총회의 소집 전에 볼 셰비키가 무장봉기를 통해서 스스로 권력을 차지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이 이 봉기를 비난하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으나, 볼셰비키가 전권을 갖고 반대에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레닌은 10월 초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쓰고 노동자로 변장을 하여 비밀리에 페트 로그라드로 돌아온다. 이중의 죄목-외국의 이익을 위한 음모와 첩보활동-으로 그는 여전히 경찰에 쫓기는 처지였다. 10월 10일 레닌은 수도의 한 아파트에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의 위원 21명 중 12명을 불러모아었다. 그는 열 시간 동안의 토론 끝에, 가장 가까운 시일 내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제까지 한번도 당이 내려본 적이 없는 중대한 결정을 놓고 투표를 하도로 출석자 다수를 설득하였다. 이 결정에 열 명이 찬성을 하였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둘이 반대를 하였다. 이들은 케렌스키가 정부에 충실한 군대를 여전 히 보유하고 있으므로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를 기다려야 하며, 때이른 반란으로 볼셰 비키에게 다가온 좋은 기회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철석같이 견지하였다. 10 월 16일 당중앙위원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수비대에서 온 보고서는 그다지 고무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군대의 수뇌부는 중립을 표명했고, 병사들은 지쳤고 전방으로 전속될까 봐 두려워 하고 있었다. 노동자 투사들의 사기도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총회의 모임이 있기 직전에 반란을 일으켜 무슨 소득이 있단 말인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일반 당원' 에 대한 이러한 보고서에 자신감을 얻어 쿠데타를 연기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들의 제안은 불결되었지만, 이번에는 21명이 출석한 가운데 여섯 표를 얻었다. 카메네프는 당중앙위원회 를 사임하였다. 이틀 후 그는 '새로운 생활'이라는 고리키의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여기에서 지난 당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지노비예프와 자신은 "당이 즉시 무장봉기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데에 반대했다"고 선언하였다. 레닌은 지노비예 프와 카메네프에게 노발대발하여 "당장에 당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공격하였고, 공개되어 연일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게 된 볼셰비키의 즉각적인 봉기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0월 1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으로서 트로츠키는 소수파인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형식적으로는 소비에트에 속하지만 실상은 볼셰비키로 이 루어진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페트로그라드의 이 '혁명군사위원회'의 공식적인 목적은 '독일 의 위협에 대비하여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을 수호하고 코르닐로프의 반혁명분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개개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 이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이러한 조직의 가면을 쓰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볼셰비키의 이러한 준비에 대비하여 케 렌스키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그는 정부와 함께 현실과 유리된 채 겨울궁전에 갇혀 볼셰비 키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 코르닐로프 사건 이호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된 총사령부 는 마지막 수주일간 군의 사기 그리고 볼셰비키와 싸우겠다는 의지에 대해 그를 안심시키는 보고를 계속 보내왔다. 그리하여 케렌스키는 쿠데타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여 단번에 볼 셰비키를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쿠데타가 터지기만을 기원하였다.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2월 혁명과 달리 10월 혁명은 사태를 통제하 지 못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볼셰비키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사실상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에 직접적으로 참가한 사람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수비대, 크론슈타트 해병대, 페트로그라드 혁명군사위원회에 가단한 병사 수천 명, 공장위원회와 볼셰비키 투사 수백 명 이 전부였다. 충돌이 드물었고 희생자의 숫자도 매우 적었던(열 명 이하)점이 쿠데타가 저항 없이 수행되었고 그런 만큼 손쉽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10월 22일 페트로그 라드의 혁명군사위원회는 수비대의 사령부에게 이제부터 수뇌부의 명령은 혁명군사위원회가 승인한 후에야 유효하다고 통고하였고, 그때부터 군사활동이 시작되었다. 23일 낮 동안 군대 마다 위협적인 선언을 뱉어내는 한편, 최후통첩을 발포했다. 저마다 시간을 벌려는 움직임이 었다. 볼셰비키가 가져올 잠재적 위험성을 항상 과소평가해 왔으며 또 수비대를 신뢰하지 못하던 정부는 24일 아침 도시의 전략적인 요지에 장교 후보생으로 구성된 군대를 배치시켰 다. 그리고 10여 명의 코사크 기병대와 140명의 여성 자원병으로 구성된 '여성결사대'가 겨 울궁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혼란이 예상될 때마다, 노동자 지구의 시위대가 강을 건너와 중심가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네바강의 다리들을 들 어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지는 것은 일상 관례였다. 그에 더해 그날 정부가 취한 유일한 '공격 적'조치는 볼셰비키 신문사 두 곳을 폐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반혁명적'인 행위에 대한 대답 으로 볼셰비키는 폭력행도을 개시하였다. 페트로그라드 혁명군사위원회의 분견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다리, 우체국, 전화국, 은행, 기차역 같은 건물을 점령하여 수도의 전략적 중심지를 손아귀에 넣었다. 10월 25일 새벽에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발사되지 않았다. 케렌스 키는 밤새도록 전선의 사령부에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는 아침 9시 세르비 아 장교로 변장하고 겨울궁전에서 나와 미국 외교관에게서 외교관 기를 단 자동차를 빌려 타고 불확실한 원군 요청을 위해 도시를 떠났다. 그는 후일 '회상록'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떠 나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 중에 "유대인 카렌스키는 물러나라, 트로츠키 만세!"라고 벽 위에 서투른 글씨로 휘갈겨 쓴 낙서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케렌스키가 겨울궁전을 떠나던 순간, 수도의 다른 쪽 끝에서는 레닌이 혁명군사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해임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 선언문은 아침 9시 45분 신문사에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는 폐기되었으며, 정부의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병(노동자와 병사)대표 소비에트 조직인 혁명군사위원회의 손에 이양되었다. 이 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와 페트로그라드 수비 대의 수반으로 조직된다. 이것으로 인민이 투쟁을 벌여온 목표-즉각적이고도 민주적인 평화 의 제시, 토지소유제의 폐지, 노동자의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 건립-가 달성되었다." 레닌 의 주도권 행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을 믿지 못하는 이 볼셰비키 지도자는 이러한 선언을 통하여 하나의 기관에 전권을 부여하기를 원했다. 이 기관은 오로지 볼셰비키 당중 앙위원회가 위임하는 기관이며 레닌이 걱정하는 '혁명적 율법주의'성향을 지닌 소비에트 총 회에는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10월 25일은 이상한 날이었다. 거리는 고요하였고 사 무실과 상점은 정상적으로 일을 했고 사람들도 여느 때와 같이 중심가에서 활동을 하였다. 11시에 문을 여는 증권거래소에서도 전혀 동요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주식 시세도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블화는 전날처럼 1달러당 6.20루블에 거래되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겨울궁전은 폐기 선언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점 거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는 각료들이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지원군을 기다 리며 모여 있었다. 한편으로 스몰리니에서는 600명이 넘는 대표들이 모여 시시각각 연기되 고 있는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를 커다란 혼란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6시 30 분 혁명군사위원회가 띄운 최후통첩이 당도했다. 임시정부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겨울궁전은 순양함 아브로라호의 포격을 받을 것이며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대포 공격도 뒤따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밤 9시에 순양함 아브로라호는 포격을 하였다. 실제로 선상에는 포탄 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아브로라호는 한 방의 공포를 쏘았을 뿐이었다. 두 시간 후에 요새에 서 몇 발의 포탄이 발사되었으나, 조준이 형편없었기에 겨울 궁전을 크게 파괴할 정도는 아 니었다. 그러나 약속된 지원군이 오지 않는 데에 실망한 코사크 기병과 장교 후보생들은 궁 전을 지키라는 자신들의 임무를 내버리고 후퇴를 하였다. 자정이 되었을 즈음에는 여성결사 대와 장교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병대와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선발대가 궁전 의 문과 창을 부수고 들어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10월'이란 영화가 보여주는 영우 적인 모습처럼 겨울궁전은 치열한 공격 끝에 점령된 것이 아니라, 궁전의 수비가 포기된 후 몇 명의 분견대가 점령한 것이다. 결국 1917년 10월 26일 새벽 2시 10분, 체포된 마지막 임 시정부의 각료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미 세 시간 전에 계속 연기되고 있던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가 드디어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대도시의 노동자들과 병사위원회 소비에트 대표들의 수가 농촌 소비에트 대표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이로써 전러시아 소비에트 제2차 총회는 러시아 전체 소비에트를 충분히 대표 하는 총회가 될 수 없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은 '소비에트의 등뒤에서 저질러진 군 사적 음모'를 비난하면서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트로츠키는 비꼬는 투로 "당신들은 실패한 불쌍한 작자들이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고. 당신들이 처하게 될 역사의 쓰레기통으로나 가 시오!"라고 말했다.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유일한 동맹자인 좌파 사회혁명당의 소집단 멤버들 과 함께 남아서 총회에서 그들의 무장봉기를 비준시켰다. 그리하여 총회는 '모든 권력을 소 비에트에게' 부여한다는 레닌이 작성한 문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순전한 형식적 결정을 이 용하여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소비에트의 나라'에서 인민의 이름으로 통치를 하고 있다는, 기만에 가득 찬 허구를 순진한 사람들에게 믿게 했다. 몇 시간 후, 총회는 해산하기 전에 새 로운 볼셰비키 정부-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평의회'-의 건설을 인가하였고, 새로운 체제의 첫 행위로서 평화와 토지에 대한 명령에 찬성하였다. 기념비적인 날인 10월 2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말을 했다면 아마도 '황홀하다'고 했을 것이다. 후일 레닌은 "러시아에서 세계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펜을 줍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 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장에는 모든 것이 황홀한 동시에 쉽고 또한 평범하게 보였다. 계속 되고 있는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럽의 대사관들은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1년 전부터 러시아를 뒤흔들어온 복잡한 혁명과정중에 발생했던 잡다 한 사건들 중에서 이번 일의 새로운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10월 25일 레닌의 정치적 행동 은 "시작하고 나면 길이 나타난다."는 나폴레옹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볼셰비키의 지도자에 게 페트로그라드의 정권 장악은 세계혁명의 출발점이 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유 럽 쪽 부분에서 이 혁명을 실현하는 것만도(반면 1917년 2월까지도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핀란드, 발트해외 국가들, 트란스코카서스 지역과 폴란드 등의 나라들은 분리되 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볼 때, 이번 혁명은 세계혁명이라는 운도의 시작, 다시 말해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영토의 합병이나 전쟁배상금 없는' 전반적 평화에 대한 즉각적인 협상을 시작 하기 위하여 교전국들에게 제시한 엄숙한 호소인, 유토피아적인 '평화에 대한 명령'은 대부 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신념과 부합하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의 10월 혁 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10월 혁명은 하나의 기폭제였다.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에 지쳐 있던 유럽 세계 전체에 임박해 있는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나 여러 주가 지난 후 볼셰비키는 하나하나 드러나는 자명한 사실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1917년 혁명 과정의 심장부에 있는 문제였으나, 세 계대전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러시아가 이제까지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굴종적인 브레스 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는 것을 전제로 했다. '토지에 대한 명령'은 유토피아에 근거해 있지 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커다란 오해가 낳은 산물이었다. 언제나 토지의 국유화를 격찬 하여 왔던 볼셰비키들이었지만,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재한다는 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지의 사적인 소유는 배상금 없이 폐지되었다. 모든 토지는 재 분재를 위하여 지역위원회의 처분에 맡겨졌다." 사실상 이 명령은 수많은 촌란공동체가 1917년 여름부터 시도해온 사항인 대지주, 다시 말해 부유한 농민에게 속한 토지를 점유하 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볼셰비키느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도와주었던 농민의 자율적인 혁명의 현실을 일시적으로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볼셰비키 는 10여 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프로그램을 다시 시도한다. 10월 혁명의 결과 나타난 체제 와 농민 사이의 대결의 정점인 1929년~1930년 농촌의 강제 집단화는 1917년의오해가 빚은 비극적 해결책이었다. 두 번째 오해는 전통적 제도를 파괴하는 일에 참가하는 동시에 볼셰 비키의 권력인 인정과 확장을 위해 싸운 모든 기구들-공장위원회, 노동조합, 사회주의 정당, 지역위원회, 적위대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과 볼셰비키당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몇 주일 후 이 기구들은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볼셰비키당에 종속되거나 제거되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에서 가장 유행했던 구호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는 눈 깜빡할 사이에 소비에트 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권력이 되어버렸다. 또한 볼셰비키가 그들의 이름을 내걸고 행동했던 페트로그라드와 다른 커다란 산업 중심지들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이 요구하였던 또 하나의 중 요한 권리는 '노동자의 관리'였다. 그러나 '노동자의 관리'는 급속히 기업과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의 이름을 내건 국가관리로 대체되었다. 실업, 구매력의 끊임없는 하락, 굶주림에 사 로잡혀 있던 노동자들과 경제적 효율성을 생각하는 국가 사이에 상호 몰이해가 정착되었다. 1917년 12월부터 새로은 체제는 노동자들의 요구의 물결과 파업에 직면해야 했다. 몇 주 후 에 볼셰비키는 1917년 한 해 동안 그들이 노동세계의 일부에서 쌓아올린 대부분의 '신용자 본'을 상실하였다. 세 번째 오해는 차르 체제 시절의 구제국에 편입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과 새로운 볼셰비키 정권과의 관계였다. 볼셰비키의 쿠데타는 원심적 경향을 가속화하여 처음 에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이러한 경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셰비키는 구러시아 제국 의 다른 민족들의 주권과 평등성, 자주적 결정권, 연방에의 권리, 분리에의 권리를 인정하여 마치 러시아 중앙권력의 보호로부터 다른 민족들이 독립하도록 권장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몇 달 후 폴란드, 핀란드, 발트 제국,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리가 독립을 선 언하였다. 레닌은 뒤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이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그에게 압도되어 민족의 자주적 결정권을 우크라이나의 밀과 코카서스의 광석과 석유를 보존할 필요성 밑에 예속시켜 버렸다. 요컨대 새로은 소비에트 국가의 중요한 이익을 보존해야 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는 적어도 영 토의 차원에서 구러시아 제국의 계승자로 재빨리 자인하게 된다. 1918년 시작되는 내전은 1917년 동안 독립한 민족들에 대한 중앙-러시아와 볼셰비키-이 주도한 재정복 전쟁이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라고 레닌은 말했다. 그는 1916년 말 "계급 투쟁을 인정하는 자는 모든 계급사회에서 계급투쟁의 자연적인 연속, 발전, 가속화를 표현하 는 내전을 인정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폭려과 내전과 농민전쟁, 공포와 기근의 행렬로 점철된 1918~1922년은 구러시아 제국에서 1914년에 시작된 '위기의 대주기'의 '당연 한 연속'이었으며,유토피아와 모호함과 오해를 담고 있었던 1917년 혁명은 하나의 중요한 지 표에 지나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에 파견중이던 젊은 지성인 피에르 파스칼은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자문한다. 그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 증언한 최초의 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11년간(1916년~1927년)에 걸쳐 쓴, 흥미진진한 '러시아 일기'의 저자였다. 1917 년 12월 26일 그는 '공산주의'에 진입한 세대의 커다란 환상을 꿰뚫는 글을 적는다. 이 세대 에게는 '이론적'볼세비즘은 가장 크고 깊은 무엇인가를, 즉 자유와 정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 을 나타내는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10월의 대신화는 이미 진행중이었다. "그들 볼셰비키들 은 이론가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볼셰비키도 아닌 러시아 국민이 그들을 따르 고 있다. 국민도 미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민은 토지에 대한 현재의 불의와 불 행의 중단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슬프게도 고통을 받으며 서툴게 이러한 미래를 만 들어냈다. 러시아 혁명은 그 반작용이 어떤한 것이건 간에 1789년 혁명과 같은 영향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을 일개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대이다. 그러므 로 보쉬에가 '세계사'를 쓴다면 한 장은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기록과 증언 엇갈린 시선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시작(1917년 2월 28일) 혁명의기반을 놓았으며 두달 동안 혁명의 운영을 장악하고 있던 구성원 가운데에는 우선 케렌스키, 스코벨레프, 츠헤이드제 등 세명의 두마 의원이 있었고, 또한 그보즈디에프, 그리 네비치 셰치터, 판코프, 소콜로프 등의 비서들, 그리고 알렉산드로비치 드미트리에프스키, 베 레닌 츨리아프티코프, 카펠린스키, 파블로비치 크라시코프, 페트로프 잘로우트스키, 스테크로 프 나함케스, 수하노프 힘머, 차트로프 소콜로프스키 등 여덟명이 있었다. 각자의 이름은 가 명이었다. 가명으로 공적인 활동이나 문필활동이 이루어졌고 집해위원회에서 선출되 되었다. 차르 체제 시절에는 당원으로 활동하는 이름이나 필명을 가명으로 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 가피했고, 혁명기에는 가명이 진짜 이름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계속하 여 가명이 사용되었다... 2월 28일 아침에는 각당의 대표들이 집행위원과 합류하러 왔다. 처 음에는 별로 많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다음날에야 회합에 참가했고, 며 칠이 지난 후에야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볼셰비키인 몰로토프 스크리아빈 과 스탈린 주가쉬넬린, 분트주의자인 엘리히와 라페스, 멘셰비키 보그다노프와 바투르스키, 노동주의자인 브람슨과 차이코프스키, 사회혁명당의 루사노프와 젠지노프, 라트비아 사회민 주당의 스토츠카와 코즐로포스키가 있다... 혁명의 초기단계에서는 사회주의적인 당들의 유 명한 지도자나 미래에 혁명의 중심 인물이 되는 사람들 중의 누구도 위원회에 나오지 않았 다. 그들은 강제수용이나 국외추방으로 말미암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집행위원회 의 최초의 지도자들은 곧 소수파가 되어 힘을 잃어버렸다. 중요한 역할들은 고참들에게로 양보되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의 정책에 새로은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이미 다른 경향의 대표자들이었다. 잽행위원회의 회의는 11시에 시작되었다. 회의는 과도하며 힘을 고갈시키는 일이었으며, 그날의 회의에서나 그후 며칠간의 회의에서도 프로그램에 따라 회의를 진행한 다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였다. '즉시 해야만 하는 선언'이니, '긴급 발언' '특별히 중대한 문 제' '혁명의 운명과 관련된 발의'니 해서 토의는 5분마다 중단되곤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특 별한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회의는 질서가 전혀 없이, 그리고 고정된 의장이 없이 진행되었다. 후일 정기적으로의장 역할을 수행했던 츠헤이드제는 초기 에는 거의 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서도 없었고 회의의 토의과정을 기록하지 도 않았다. 기록을 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갖가지 위험에 대한 혼란스러운 긴급 발언과 통제 불능에 가까운 무절제만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행되리라는 희망이 없이 명령을 내 렸고, 분견대가 교육을 받아 임무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이 분견대를 파견하였 다. 소비에트 성원들이 모여 있는 방의 옆방에서는 소음이 점점 커져 귀가 먹을 듯했다. 여 기에는 회사원, 우편배달부, 교사, 기술자, 대표자, 의사, 변호사, 작가들이 모였다... 소비에트 만이 유일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모든 경향의 노동자 조직을 자유로이 주물렀다... 나는 그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위임을 받았다. 그것을 막는 법조문이 없으므로 나는 소비에트가 '혁명적 열기'에 사로잡힌 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근거가 없었다. 위원회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행동했다. 결국 며칠 후 소비에트의 숫자는 약 2000이라는 터무니없는 수치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올바른 소 비에트 조직을 확립하고 정부에 대한 요구의 규율을 적합하게 정착시켜야 했던 집행위원회 에게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소비에트의 수적, 양적 구성으로 보아 소비에트가 의회로서 실제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것은 완전히 감정 적인 기능만을 채워주었다. 유일하게 힘을 가지고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정부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것은 집행위원회였다. 소비에트가 이 프로그램에 찬성하는 것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다. 위원회의 성원들은 모두 곧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우리느 옆방에서 일 어나는 일에 괘념치 않고 우리의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어느날 나는 거기서 오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절망적인 몸짓을 하였다. "그냥 토론회지 요. 누구나 원하는 대로 말하는 거지요!" 나에게는 여러 번 회의장을 지나치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 회의장의 광경은 밤샘공부를 하는 광경을 연상시켰다. 대표자들은 테이블 주위에 놓 인 걸상이나 긴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의 일부는 방의 중앙에 놓았고, 일부는 벽에 붙 여서 놓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걸상들은 방에서 사라졌다. 걸상들이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입추의 여지가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간부회의 임원들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서 있었으며 한 무리의 보조자들이 의장의 어깨에 늘어붙어 회의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인가 사흘째 되는 날엔가는 테이블도 사라져 버리 고 회의는 완전히 서커스장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2월 28일 5시경에 허위 경보가 울렸 다. 안뜰에서 한두 발 총탄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일이 아니었으나, 소비에트들이 터질 듯 들어찬 방에서는 부끄러울 정도의 공포심이 감돌았다. 모두가 "코사크다!"라고 비명을 질러 댔으며, 장교들과 다른 군인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고 땅에 엎드렸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 혁명과 토리드궁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렌스키만이 창으로 달려가 창가로 뛰어올라 쉰 목소리로 "모두 제 위치로! 두마를 지킵시다! 안 들립니까, 나 케렌스키의 명령이오, 혁명과 당신들의 자유 를 지킵시다, 두마를 지킵시다! 전원 원위치로!"라고 외쳤다. 공포에 사로잡힌 안뜰에서는 아무도 듣는 것 같지 않았으며 어디인지도 모르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공격도 계속되지 않자, 허위 경보였음이 확실해져다. 사태 의 긴박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모스크바가 이미 가담했으며 그곳에서는 수비대의 도움으로 혁명이 이미 손쉽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러시아는 해방되었다. 이제 전제정치가 사라졌다. 우리 앞에는 무언가 다르고 놀라운 것, 우리가 알지 못하느 것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승리와 아무 관계도 없어보이는 비루한 사건들 속에서 내가 느낀 생각 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들은 저마다 이것이 꿈이나 마술은 아닐까, 여기서 곧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념에 잠기곤 하였다. 레닌의 페트로그라드 도착, 1917년 4월 3일 레닌은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호의를 받으며 도착하였다. 이들은 레닌을 벨로스토프로 마 중하러 나가서 사태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기차 앞부분은 노래와 환영의 외침, 여기저기서 건네오는 인사말 등으로 소란스러웠다. 아치 아래에 개선 행렬이 이어지고, 노동자와 병사의 열렬한 갈채가 있었다.. 행렬이 다가왔다. 츠헤이드제가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레닌을 맞기로 한 홀 중앙에 그의 자리를 배정해 두었다. 츨리아프니코프는 점잖은 사회자라도 되는 듯이 분주하게 "실례합니다, 동지들, 실례합니다, 좀 비켜주세요, 동지들!" 하며 외쳐댔다. 그의 뒤로 작은 무리의 선두에는, 얼어붙은 듯한 표정에 둥근 모자를 TMs 레닌이 손에 멋지 꽃다발을 들고 홀 중앙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는 마치 예상치 못했던 장 애물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츠헤이드제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츠헤이드제가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로 '환영사'를 낭독했다. 그것은 내용이나 형식, 어조에서 모두 변증법적인 연설이었다. "레닌 동지,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의 이름과 혁명 전체의 이 름으로 우리는 동지의 러시아 귀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혁명적 민주주의 의 최우선 과업은 안에서이든 밖에서이든 적의 방해로부터 우리의 혁명을 수호하는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민주세력의 총집결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 리느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이 목표를 추구하기를 희망합니다..." 츠헤이드제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놀라움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이상한 '환영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 나 레닌 자신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연설을 하는 동안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는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행위원회의 대표들 에게 등을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답사를 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 해병, 노동자 여러 분! 나는 여러분 속에서 승리의 러시아 혁명을 맞이하며,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 로서 여러분을 맞이하게 되어 기쁩니다...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유럽 전체 내전의 시작 입니다... 우리의 동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호소에 따라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착취자들에게 무기를 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적 세계혁명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독일 에서는 모든 것이 들끓고 있습니다. 곧 유럽의 제국주의는 붕괴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취 한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의 붕괴의 기원을 마련하였으며, 새로운 시대의 초석을 놓았습니 다. 선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이것은 츠헤이드제의 환영사에 대한 대답이 아닐 뿐 아 니라, 그곳에 참석하였던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러시아 혁명의 '맥락'에 걸맞은 대답도 아 니었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인 영접은 끝이 났다. 광장의 군중들은 문을 부술 기세로 지도자 가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다. 한번 더 츨리아프니코프는 레닌에게 길을 터주었다. 탐조 등 불빛 속에서 붉은빛, 금빛, 깃발이 휘날리고, 수천 명이 내지르는 환호 사이로 새로운 '마 르세예즈'가 울려 퍼졌다. 레닌은 그곳을 떠나, 대기해 있던 유개차에 올랐다. 그러나 군중은 또다시 연설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레닌은 연설을 위해 자동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나는 우리의 혁명의 하늘에 나타난 가장 빛나는 별이 처음으로 '인민에게 행하는 연설'을 듣기 위 해 광장으로 가려 했으나 문틈에 끼여 나갈 수가 없었다. "거짓과 기만... 자본주의의 탐욕이 낳은... 부끄러운 제국주의적 전쟁에의 참전..."이 내가 들을 수 있었던 연설의 유일안 단편들 이었다. 그리고 나서 레닌은 탐노등을 뒤루 한 채, 오케스트라와 깃발과 노동자 군대와 병사 들과 그 외에도 어마어마한 수의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볼레비키의 구역인 발레니나 크세 신스카야의 옛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교차로에 이를 때마다 다른 군중들 앞에서 유개차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해야 했다. 행렬은 매우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 대한 예찬은 대 단했고 상징적이었다. 나는 행렬에 끼여 있는 군인들의 생각이 궁금하였다. 그들을 모두 볼 셰비키나 볼셰비키의 동조자라고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들은 적이 베푼 친절로 러시아에 도착한, 공식적 직함도 없는 한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말을 하였다. 내가 불협화음을 들은 것은 볼셰비키의 지역 내에 들어 섰을 때였다. 레닌이 이미 개진한 주제를 다시 들추었을 때, 한 병사가 소리쳤다. "아니, 저 런 놈은 총검으로 찔러 죽여야 해! 알겠어여? 저놈은 독일놈이라고요." 니콜라이 수하노프 '회상록' 전러시아 소비에트 2차 총회 카메네프는 "오늘의 의사일정에는 첫째 정권의 조직, 둘째 전쟁과 평화의 문제, 셋째 제헌 의회의 문제가 포함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로조프스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당사 의 동의안에 따르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보고서를 낭독하고, 이에 대해 토론한 다음, 집행위원회와 각 당의 대표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의사일정으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다고 말 했다. 갑자기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군중들이 계속해서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소리보 다 훨씬 더 커다란 소리로서, 귀가 멀 듯한 대포 소리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불안 한 얼굴오 어두운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마르토프는 발언권을 요구하며 쉰 목소리로 다음 과 같이 크게 외쳤다.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지들! 첫째 문제는 위기의 평화적 해결일 것입니다. 원칙적인 이유뿐 아니라 전략전 이유 때문에 우리는 내전을 예방할 수단에 대해 긴급히 토의해야 합니다. 밖에서는 우리의 형제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있습니다! 소비에 트 총회가 열리기 전에 정권의 문제가 혁명적 정당들이 꾸민 군사적 음모를 통해 해결되는 이 시점에서...(잠시 동안 소음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모든 혁명적 정당을은 현실 을 직시해야 합니다. 총회에서 제기된 첫째 문제가 정권의 문제인데, 지금 이 문제를 거리에 서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인정하는 정권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혁명적 민주주의의 대변자라면, 반혁명의 위험한 폭발을 초래할 수 있는 내전이 시 작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적인 해결의 가능성은 연합된 민주주의 정권의 형 성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정당이나 사회주의 단체와 협상을 벌이기 위한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창 뒤로는 여전히 고막을 찢는 듯한 규칙적인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대표 들은 욕설을 주고받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러시아는 증오와 공포에 태평스러운 무모함에 둘러싸인, 대포 소리 울리는 밤에 태어나고 있었다. 사회혁명당원들 그리고 통일된 사회민주 주의자들은 마르토프의 제안을 지지하였과 결국 이 제안이 채택되었다. 한 병사가 농민 소 비에트가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를 거부하였음을 알렸다. 그는 대표단을 통하여 그들에게 공식적인 초청장을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몇몇 농민 대표들이 이곳에 참석해 있습니 다. 나는 그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제안은 수락되었다. 육 군 대위 복장을 한 카라시가 거칠게 발언권을 요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총회 를 주도하는 있는 정치적 위선자들은 우리가 정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것은 총회가 열리기 전부터도 우리의 등뒤에서 해결되고 있던 문제인데 말입니다. 겨울궁전 이 포격을 당했습니다. 이런 포격은 그같은 일을 감행한 정당의 관에 못질을 하는 행위입니 다!" 한동안 소동이 뒤따랐다. 다음 연사인 가라가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평화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거리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번 사 태에 반대하고 있으며 모든 정치세력이 정권 장악 기도에 반대할 것을 호소합니다." 제12부 대의 대표인 쿠친이 말했다. "저는 정보전달의 사명을 띠고 이곳에 파견되었고, 즉시 전선으 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의 군사위원회 전체는, 제헌의회가 열리기 3주일 전에 소비에트가 정권을 탈취한다는 것은 군대의 등에 칼을 꽂는 짓이며 국민을 배반하느 범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라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쿠친은 잠잠해 지기를 기다려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페트로그라드에서 이러한 짓을 막읍시다. 나는 모든 대표들이 나라와 혁명을 구하기 위해 이 방을 떠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고막을 찢는 소 동 속에서 연단에서 물러났을 때에 군중은 소란하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그를 둘러쌌다. 그 리고 나서 킨추크라는 길다른 다갈색 수염을 기르고 듣기에 좋은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지 닌 한 장교가 연단에 올라섰다. "저는 전방의 대표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군대는 이 총회에 서 올바른 대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라 군대는 제헌국회의 개최를 3주밖에 남겨놓 지 않은 이 마당에 소비에트 총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합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군대는 소비에트 총회가 필요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 니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네가 누구를 대표해서 이야기한다고? 너는 누구를 대표하고 있는 거냐?" 병사들이 소리쳤다. "제5부대, F 제2연대, N 제1연대, S 제3저 격부대의 소비에트 중앙 집행위원회이다." "네가 언제 선출되었느냐? 너는 병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장교만 대표할 뿐이다! 병사들은 뭐라고 하던가? 야유와 함성이 뒤따랐다. 킨 추크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전선의 투사들은 이미 일어난 일과 지금 일 어나고 있는 일의 모든 책임을지지 않는다. 우리는 혁명을 걱정하는 혁명세력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전선의 투사들은 총회를 떠날 것이다... 거리고 나가 싸워야 한다." 비난 섞인 함성이 무수히 터져 나왔다. "군대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사 수반으 로서 이야기하는군!" "지각 있는 모든 병사들은 이 총회를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코르닐 로프주의자! 반혁명분자! 선동자!" 다음으로 킨추크는 사회의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는 새로 운 행정부를 구성하는 문제에서 임시정부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에 도달할 수 없 었음을 맨세비키를 대표하여 통고하였다. 잠시 동안 그의 목소리르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목처을 높여 멘셰비키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볼셰비키가 다른 집단과 정당의 의견도 묻지 않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도움을 받아 군사 음모를 꾸몄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총회에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총회에서 탈퇴하는 바이며, 다른 집 단과 정당들고 우리를 따라 탈퇴하여 서로 뭉쳐 현사태에 대해 토의하기를 촉구합니다." " 배신자다!" 계속되는 소란 사이로 사회혁명당을 대표하여 겨울궁전 포격을 비난하는 헨델만 의 연설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우리는 이같은 무질서에 반대합니다." 그가 내려가자마자, 얼굴이 마르고 눈빛이 번쩍이는 젊은 병사가 연단 위루 튀어 올라와 극적인 몸짓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그가 "동지들이여!" 라고 외치자 침묵이 흘렀다. "제 성은 페터슨입니다. 저는 라트비아 제2저격대를 대표하여 발언합니다. 동지들은 지금 막 군사위원회를 대표하는 두 대표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군대를 대표한다면 그 선언들은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요." 그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러나 그들은 병사들은 대표하지 않습 니다!" 라고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제12부대는 오래 전부터 대소비에트와 군사위원회의 재선을 주장해 왔으나, 당신들 집행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위원회에서도 9월 말까지는 졸병대표들이 모이는 것을 거부해 왔습니다. 위원회는 반동분자들이 이 총회에서 자기들의 가짜 대표를 뽑게 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지금 동지들에게 말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라트비아의 병사들이 여러 번에 걸쳐 말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행동을 원합니다. 정권은 우 리 손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 사기꾼 대표들은 총회를 떠나야 합니다! 군대는 그들의 편이 아닙니다!" 방은 박수 소리로 진동하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사건 전개의 리듬에 넑을 잃고 대포 소리에 놀란 대표들은 주저하였다. 한 시간 동안 계속하여 연사들은 연단 위에서 그들 을 강타하여 그들을 일치단결시켰고 동시에 그들을 압도하였다. 그들의 편은 없는가? 러시 아가 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인가? 군대가 페트로그라드를 향하여 진군한 것이 사실이었는가? 그후 맑은 눈의 이 젊은 병사가 말을 했고 그들은 전광석화처럼 진실을 깨달았다. 거기에 병사들의 목소리가 있었고, 수백만의 흥분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그들과 같 은 사람들도, 그들과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세가 달라졌다. 그후 유 대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조직인 분트의 대변인 압람모비치가 모습을 나타냈다. 두꺼운 안 경의 유리알 너머로 그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현재 페트로그라 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끔찍스러운 불행입니다. 분트 집단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선언에 서명을 하고 총회에서 탈퇴합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고 팔을 들어올렸다. "러시 아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의무는 우리가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 범죄 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겨울궁전에 포격이 계속되고 있는 이상, 시의 두마는 멘 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 소비에트 농민 집행위원회와 만장일치로 임시정부와 함께 죽기로 결 정을 하였으며,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총탄에 가슴 을 내밀 것입니다... 우리는 총회의 모든 대표들도 그렇게 할 것을..." 다음 발언은 무시무시 한 야유와 협박과 모욕의 폭풍 속에 고스란히 파묻혔다. 이러한 폭풍은 50명의 대표들이 일 어나서 출구로 나가버리자 그 절정에 달하였다. 카메네프는 종을 흔들어대며 "자리를 떠나 지 말고 오늘의 의사일정을 넘어갑시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트로츠키가 일어나 창백하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차가운 경멸을 띤 어조로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자칭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타협꾼에 지나지않는 이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주의자들, 그리고 겁쟁이 분트주의자들 은 다 가버려라! 역사의 쓰레기통에나 들어갈 쓰레기들아!"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10일' 민중의 말 1917년 3월 구일 총회에서 채택된 페트로그라드 담배공장 노동자 대표들의 결의안 1917년 3월 9일 페트로그라드의 전담배공장(8개 공장, 9044명의 노동자)대표들의 총회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에 보낼 대표들을 다음과 같이 선출하였다. 즉 그 들은 아나톨리, 세묘노바, 피프소프, 칼리니네, 드로즈도바, 이바노프이다. 이 대표들은 담배 공장 노동자의 이익을, 특히 다음과 같은 조처를 수호하여야 한다. 1. 여덟 시간 노동제를 공포한다. 2. 추가 노동시간을 폐지한다. 3. 기업주의 '블랙 리스트'를 폐지한다. 4. 임금을 인 상하고 노사 동수로 구성된 가격위원회를 창설한다. 5. 이사회는 노동자에게 정중하고 공손 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6. 아동노동을 금지한다. 7. 이사회는 노동자와의 갈등을 노동자 대 표의 중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8. 노동자의 눈에 의심스럽게 보이는 요소들을 기업 에서 추방한다. 9.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는 공장위원회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10. 몸수색 을 없앤다. 기물의 상태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공장위원회의 소관에 속한다. 11. 여자를 포 함한 모든 노동자들에게 일정량의 담배를 지급한다. 12. 벌금을 없앤다. 공장위원회는 과실 을 범한 노동자를 처벌하는 규율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13. 노동재해를 보상한다. 14. 질병 이나 다른 모든 정당한 경우에는 임금을 공제하지 않는다. 15. 의료보험제도를 신설한다. 16. 모자보호제도를 신설한다. 17 다음가 같이 기업 내 위생상태를 개선한다. a) 탈의실 설치 b) 비누와 수건을 갖춘 세면대 설치 c) 더운 음식과 차, 끓인 물을 제공하는 식당 설치 d) 충분 한 수의 환풍기 설치 e) 대부분의 장소의 습도가 극도로 높다는 사실을 기술위원회에 알릴 것 18. 노동자에게 매 26주마다 1주일의 유급휴가를 지급한다. 19. 여자, 미성년자, 체격이 왜소한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나르게 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화물 운반을 위해서는 건장하 고 짐을 잘 부리는 노동자를 고용한다. 20. 감독은 노동자 스스로가 선출한다. 21. 공자 규율 을 완화한다. 22. 고의가 아닌 기물 파손에 대한 벌금을 폐지한다. 총회는 노동조합을 설치 하기로 결정하며 그 주소는 다음과 같다. 7구역 로제스트벤스크야 38번지 1호실 (매일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접수함). 노동자는 모두 의무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여야 한다. 회비는 1주에 5코펙(루블의 100분의 1:역주)이다.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회비를 지불하는 노동자만 공장에 고용한다. 리아잔 지방 라넨부르크 지대 농민위원회의 임시집행위원회 결의문(1917년 3월 25일) 위원회는 농업문제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해 모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1. 모든 토지는 의무적으로 파종해야 한다. 2. 자신의 힘으로 경작하지 않는 지 주의 토지는 모두 소작을 주어야 한다. 3. 모든 소작료는 1데시아티네(헥타르) 당 10루블로 정한다. 모든 지세와 세금은 지주가 부담한다. 4. 임대되는 토지는 그 토지를 임대하기를 원 하는 사람들 모두가 제비뽑기를 하여 분배된다. 5. 지주에게 전방에 나가 있는 아들이 있느 경우에는 한 명의 전쟁포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넓이의 토 지를 보유할 수 있다. 6. 농민위원회에서 정한 가격으로 농산물을 공급하기로 군대와 협약을 맺은 지주에게는 어떠한 구속도 가해지지 않는다. 7. 45데시아티네 이하의 토지를 소유하는 소지주의 경우, 전방에 징집된 사람이 한 명이 있으면 한 명의 전쟁포로의 노동력을 사용하 는 것이 허용되며, en 명의 사람이 전방에 징집되어 있으면 세 명의 전쟁포로의 노동력을 상요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이같은 방법으로 경작된 토지의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 전 에 경작된 토지의 면적을 초과하여서는 안 된다. 8. 농기구나 기계가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 에는 지주의 영지에서 징발한다. 9. 말은 1914년 8월의 동원 가격으로 지주에게서 징발한다. 10. 지주와 불화가 있는 경우, 지역위원회의 구성원들은 항소를 허용하지 않는 결정을 내려 야 한다. 11. 남편이 전쟁에 나갔거나 전사한 가정의 여자들의 토지는 모두가 파종되어야 한 다. 시베리아 보병대 제61연대 공병여단 병사들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게 집단으로 보낸 편지 병사와 노동자의 소비에트 의원 여러분! 우리는 과거의 권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 다. 장교들은 망치 아무런 일도 없었으며 혁명이 일어난 적은 결코 없었다는 듯이 과거와 똑같이 처벌을 계속하고 있고, 병사와 노동자 형제들이 획득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왔지만 우리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장교들은 우리가 말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 우리가 자유로이 말하고 조직하려 한다면 총살을 서슴지 않을 기세입니다. 3월 15일에는 장교의 협박 때문에 병사 둘이 도망을 하였습니다. 우리 여단의 대장이 왔을 때 그는 우리에게 "차렷!"이라고 호령을 한 다음, 우리와 같은 나쁜 놈들에게는 말도 하고 싶지 않으며, 규율을 벗어난 방식으로 그 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총살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몇 시간 동 안이나 계속하여 차렷자세를 취하고 있도록 하곤 하며, 전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 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의원 여러분께 우리 장교들을 체포하여 우리를 과거의 권력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까지 과거의 권력을 회복시키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연대 전체에서 과거의 방식대로 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러니 의원 여러분, 여러분께서 그들을 체포하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저히 총회에 모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동시에 자유 시간을 갖지 않도록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연대와 여단의 대장 을 그쪽으로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 차례나 피를 흘렸으며 흉악범 취급을 받 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의 태 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느끼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이 자유를 누리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 자유를 쟁취하여 누리시오!"라고 우리에게 말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관들이 윌가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만족 시켜줄 조치를 위해 주거나 우리에게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의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간청합 니다. 1917년 3월 18일 보고서 오렐 지방과 쿠르스크 지방에 있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영지의 집사였던 라브 리노프스키의 청원서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영지의 관리인인 본인은 오렐 지방와 쿠르스크 지방에 위 치한 대공의 영지에서 최근에 발생한 커다란 사건으로 각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부활절의 첫 며칠간 계속하여 낯선 자들의 주도 아래 촌락회의가 열려, 데리우기노 영지에서 기사 소 콜로프와 산림관리인 그리츠케비치를 쫓아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 다른 회의에서는 30년 이 넘도록 대공을 섬겨온 산림관리인의 우두머리를 브라소보 영지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하였 습니다. 같은 시기에 30여 명의 남자들이 관리인에게 와서 전화선을 끊고 대공의 숲에서 불 법적으로 벌목을 한 농민들의 명단이 실려 있는 장부와 공책을 꺼내어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길을 막으면 산림관리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사냥을 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대공의 산림에서 고라니는 세 마리 죽였습니다. 협박을 수반한 농민들의 이러한 전적으로 불법적인 행도은 대공의 영지에 서뿐만 아니라 러시아 농업의 미래에도 심각한 결과를 미치리란 점에서 중대한 일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행동들이 너무 늦이 않은 시기에 멈추어지지 않는다면, 최근에 농민들이 저 지른 수많은 질서의 파괴는, 나라의 부를 보장해줄 영지들에 대한 무정부적인 약탈을 초래 하게 될 것이며 수십년 동안에 걸쳐 힘들여 이룩해온 모든 것을 완전하게 파괴해 버릴 것입 니다. 대공의 영지의 관리인은 각하께서 즉시 개입하시어 농민들에게 차리즘의 붕괴가 무정 부 상태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저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두마 의원이나 내각으니 높은 지위 에 있는 대표가 현장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공의 영지들은 모스크바-보로네즈 철 로선 근처, 데리우기노역과 브라소보역과 알투코보역 근처에 위치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1917년 4월 13일 영지 관리인 라브리노프스키 1917년 10월의 첫 보름간의 군대 상태에 대한 군사적 정보 보고서 발췌문 규율 위반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것은 적과 내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의 극 도의 사기 저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규율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어서 온갖 사 고와 말썽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가장 잦은 내통의 경우는 서부 전선에 배치된 군대에서 관 찰됩니다. 서부 전선의 군대는 모든 면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군대입니다. 참모본부에서 우 리에게 보내온 보고서는 최근 적과의 내통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떠한 군대에서는(제3부대, 제10부대, 특수부대)내통은 이미 흔한 현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무 리를 지어 병사들은 직접 적의 병사들과 접촉을 하여 그들에게 빵, 담배, 특히 주루 따위 상 품을 삽니다. 이때 적의 병사들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러시아어로 쓰인 독일 국가의 전단을 우리 병사들에게 건네주는 일을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참모본부에서 온 보 고서들은 토론이나 설득으로 내통을 막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무익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효과가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통한 자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것입니 다. 그러나 내통이 확산된다면 단순히 처벌에 의존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군대의 공격력에 대해서는 모든 보고서가 동일하게 비관적입니다. 현시점에서는 코사크 군대만이 유일하게 문자 그대로의 규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대들은 붕괴의 정도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전투 거부도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핑계는 피 로, 열악한 음식, 장비의 파손과 부족, 신발이나 따뜻한 의복의 결핍 등입니다. 병사들이 전 투명령에 불만을 터트리거나 비판하는 정도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계급이 규율을 위반하는 것도 또한 더 이상 문제거리가 아닙니다... 규율 위반은 세 범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1) 상관의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야기되는 병사의 규율 위반 2) 전쟁이 무한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반동분자'라고 여겨지는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일반적인 불신 이 야기하는 규율 위반 3) 장교의 특권에 대항하는 위원회로 조직된 병사들이 주도하는 계 획적인 행동의 결과에 따른 규율 위반... 최근에는 세 번째 범주의 규율 위반이 증가하였습 니다. 부대와 위원회는 장교도 병사와 동일한 배급을 받아야 하며 장교들에게도 새 복 지급 을 중단해야 하며 장교들도 병사와 같은 막사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결의안에 동 의하였습니다... 우리가 간부들에게 입수한 보고에 따르면 전쟁에 대한 병사들의 태도는 점 점 더 부정적으로 되어간다고 합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높아졌는데, 이것은 병사들 간에 볼셰비키의 사상과 구호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평화에 대한 열망 은 무척 커서, 제2,5,11부대의 지휘관이, 몇 명 부대에서는 최근 전선에서 있는 아군의 패배 가 종전을 앞당길 수 있는 사건으로 환호를 받았다고 보고할 정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보고서들에게 도출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군대가 붕괴되고 규율 이 존재하지 않으며 상관이 특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교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전쟁을 연장하려 한다는 생각과 함께 병사들의 장교에 대한 증오심이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군대는 기근의 위 협을 받고 있습니다... 군사 정치부장 참모 본부의 육군 중령 쿠르스크 지방의 행정관이 법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발췌문(1917년 10월 6일) 쿠르스크시에서는 10월 5일 13시부터 상점과 개인 아파트에 대해 무단 가택수색이 있었습 니다. 이러한 불법적인 가택수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탈영병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불 법적인 가택수색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군중이 약탈을 하거나 싸울 의도를 가지고 모여듭니 다... 몇 시간 후 저녁때에 낯선 사람들이 지방의 보금 책임자 수프라스키의 집에서 새로운 가택수색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수프라스키가 개인 용도로 집에 보관하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비누와 밀가루를 약탈하였습니다. 이 사건들 때문에 쿠르스크시의 경찰 서장은 현 재 예상되고 있는, 특히 유대인에 대한 박해행위들을 취하기 위하여 시의회 대표, 폭동 진압 경찰 군사 책임자의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회의에서 쿠르스크시는 도시 내 질서를 회복하 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참석한 모든 정당원이 의견의 일치 를 보았습니다. 참석자 대다수가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지역 군사령관에게 요청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령관은 믿을 수 있는 군대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계엄령 선포를 거 부하였습니다. 게다가 쿠르스크시에는 탄약고와 술창고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입니 다. 그러나 겨우 권총으로 무장한 사람 11명이 지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소요가 일어난 다면 이 창고들은 쉽사리 장악될 것입니다. 10월 6일 아침 군중들은 케르손 거리과 모스크 바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거리에서 그들은 보로치릴네 상점을 약탈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팔라기네 경사가 군중들에게 린치를 당할 뻔한 보로치릴네 일가를 어렵게 구출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탈영병의 무리가 팔라기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기병대는 팔라기네를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팔라기네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가고 말았습니다... 하층 계급의 고삐가 풀렸으며, 특 히 유대인들이 모든 잘못의 원천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시의 상황은 극도로 위 험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으며, 완전한 무정 부 상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쿠르스크 지방의 행정관 N. 시소예프 중요한 문헌들 명령 제1호 페트로그라드 지역 수비대와 모든 호위대, 군대와 포병대와 해군의 모든 병사들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즉각적이고도 확실하게 집행할 것이며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이를 숙지해 야 한다.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다. 1. 모든 중대와 대대, 연대, 병참대, 포병 중대, 기병대와 모든 종류의 군대 부서, 전투 함대에서는 즉시 선거를 통 하여 위에 상기한 군대의 졸병들 가운데셍서 대표위원회를 선발한다. 2. 대표 소비에트의 대 표를 아직 선출하지 않은 모든 군대에서는 중대마다 한 사람씩 대표를 선출하나. 이 대표는 증명서를 발부 받아 3월 2일 아침 10시에 두마에 참석한다. 3. 군위원회는 모든 정치행위에 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와 그 위원회에 따른다. 4. 두마의 특별 군사법정의 명령은 노 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결정이나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 경우에만 집행되어야 한다. 5. 소총, 기관총, 장갑차 같은 모든 종류의 무기는 중대와 대대의 위원회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장교가 독촉하는 한이 있어도 장교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6. 병사들은 군복무를 하는 동안 엄격한 군대 규칙을 엄수해야 한다. 그러나 부대 밖이나 복무 이외에 정치적, 시민적, 개인적 생활에서 병사들은 모든 시민이 향유하는 권리를 침해받아서 는 안 된다. 특히 상관이 지나칠 때 차렷자세를 취하거나 의무적으로 경례하는 것은 폐지된 다. 7. '각하'나 '귀하' 같은 장교에 대한 호칭도 폐지되며 '장군님' '대령님' 등으로 대체된다. 모든 상사의 졸병에 대한 부당한 대우, 특히 반말이 금지된다. 병사들은 이러한 명령이 위반 되거나 장교와 병사들 간에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 중대위원회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모 든 중대, 대대, 연대, 병참대, 포방 중대 및 다른 군대 보조 근무 기관에 이같은 명령을 전달 하라! 봉기의 기술 나는 이 편지가 9일까지 페트로그라드의 동지들 손에 들어가리라는 희망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10월 8일 이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10월 10일로 예정된 북부 지역의 소비에 트 총회에 너무 늦게 도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페트로그라드와 그 일대의 노동자와 병사들의 행동이 곧 개시될 경우를 대비하여 '한 결석자의 조언'을 보내려 합니다.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점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혹 은 볼셰비키, 오늘날 둘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혁명의 정권이 전세계의, 특히 교전국의 착취받는 자들과 노동자들, 러시아 농민들의 기탄 없는 지지와 커다란 공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볼셰비키들에게 재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오래 전 에 입증된 이러한 진실에 대해서는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모든 동지들이 완전하게 확신하지 못하는 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소비에트에게 권 력을 이양하는 것은 오늘날 사실상 무장봉기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자명한 듯 보이지만,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현재도 깊이 생각해 보 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무장봉기를 포기하는 것은 볼세비즘의 핵심적인 구호를 포기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국제주의 전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장봉기란 정치투쟁의 특수한 한 형태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법칙에 지배되며, 주의 깊에 연구되어야 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실을 대단히 강조하였으며, "무장봉기는 전쟁처럼 하나의 기술이다."라 고 쓰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마르크스가 말한 이러한 기술의 중요한 규칙입니다. 1. 봉기 를 가볍에 여기지 말 것.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본다는 생각을 가진다. 2. 무슨 수를 써서라 도 압도적인 우위의 군사력을 결정적인 시기와 결정적인 장소에 집결시킬 것, 그렇지 않으 면 준비와 조직에서 우수한 적이 봉기를 일으킨 자들을 쳐부술 것이다. 3. 일단 봉기가 시작 되었으면 극히 과감하게 행동할 것이며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격을 해야 한다. "방어 는 무장봉기의 무덤이다." 4. 적을 불시에 급습하고 군대가 아직 흩어져 있는 순간을 포착하 려고 노력할 것. 5. 작은 승리라 할지라도 매일 (도시에서라면 매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승 리를 거두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사기의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전략 으 거장 당통의 말을 빌려 무장봉기에 관한 모든 혁명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 다. "대담하라, 더욱 대담하라, 항상 대담하라." 이와 같은 원칙들을 1917년 10월 러시아에 적용될 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내부와 외부로부터 페트로그라드에 대한, 그리고 노동자 지구, 핀란드, 라벨, 크론슈타트에 대한 가능한 한 가장 급작스럽고 신속한 동시적인 공격, 1만 5천 명에서 2만명 (어쩌면 그 이상)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함대 와 우리의 '부르주아지 수비대(사관생도)'와 우리의 '반혁명 왕당파(코사크 부대)'에 대한 공 격 등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화국, 전신국, 정거장, 다리를 빼앗고 확보하기 위 하여 함대, 노동자, 군대 등 세 가지 주요 병력을 한데 결합하십시오. 가장 견고한 분자들을 선택하고 ('돌격대'와 수병, 젊은 노동자) 그들을 소부대로 분할하여 모든 주요 지점을 점령 하고, 그들을 모든 중요한 작전 어디에나 참가시켜야 합니다. 중요한 작전이란, 예를 들면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하고 고립시킨 후, 함대와 노동자와 군대가 협공하여 점령하는 것으로 서, 이는 기술과 커다란 담대함을 요구하는 임무입니다. 소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적의 중 심부(사관학교, 전화국, 전신국 등)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최후의 1인까지 목숨을 버리지만 적을 살려두지 않는다는 구호를 따르는 우수한 노동자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이 나는 경우에는 지도자들은 당통과 마르크스의 대원칙을 성공리에 적용할 것이란 희망을 가집시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혁명의 성공은 이틀이나 사흘간의 투쟁 에 따라 결판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