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마틴 루터 킹도 못하는 일을 해낸 유능한 협상가 앤드루 영 외교관을 둘러싼 삶의 조건은 리더십을 기르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 만약 그가 자신을 파 견한 정부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그는 헨리 워턴 경(Sir Henry Wotton)의 유명한 정의 "외 교관이란 자기 나라를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외국에 보내진 정직한 사람"에 정확히 부합하 는 인물이 된다. 그가 모국으로 보내는 메시지는 은밀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하고, 해외에서 하는 말은 모호하고 표리부동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모국 정부와 부임국가 사이에서 정직한 중개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두명의 주인을 모시는 꼴이 된다. 그렇 게 되면 양국 공통의 목표로 그들을 묶어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외교관의 중요 덕목 중 하 나가 신뢰성이지만, 외교관의 임무 자체는 그의 신뢰성을 갉아먹는다. 만약 그가 오직 주인 에게만 충성할 경우 그는 스파이보다 나을 것이 없고, 그가 부임지에 동화되어버린다면 모 국 정부는 그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외교관이란 이름 자체에 표리부동이라는 뜻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이중적 (di-ploma)이지 않고는 외교관(diplomat)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외교관이란 역할은 르네상 스 시기의 조신들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조신들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연구서는, 그들의 역 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거의 아첨 수준의 공손함이라 말한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iglione)의 대화록 '조신의 서'에서 이야기하는 이들 은, 허위가 진실보다 잘 통한다면 허위를 이용해서라도 조신이 주군을 즐겁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외교관은 이러한 조신들보다 두 배는 공손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모국과 부임국 모두에게 신임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국 정부를 대표하여 부임국 정부를 상대하면서, 동시에 그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물론 이 역시 모국 정부를 대표하여). 만약 그가 양국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등의 목표를 위해 외국 조정에서 일부러 자국의 뜻을 잘못 전달한다면(이를테면, 표현의 강도를 낮춰서), 그는 양쪽의 주인을 모두 배반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국가에서는 일부 지도자들이 외교관 역할까지 해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시나이 점령지를 되돌려주게 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추진할 때, 초기 단계의 비밀접촉에서 경험 많은 외교관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를 보냈다. 하지만 고위급 인사들간의 최종 협상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쌓은 신뢰에 힘입어 자신이 직접 일을 추진했다. 이는 그동안 카터가 제3세계의 갈등에 대해 혁 신적인 감각을 보여 주었고, 또한 양국의 종교적 전통들을 존중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의 성공적인 노력은 헌법상의 혹은 전통적인 대통령의 직무보다는, 간단히 말해 외교관의 직무와 관련이 있었다. 일부 대통령이 직접 국무장관의 일을 해냈듯이, 카터 역시 사실상 중 동에 파견된 특별대사와도 같았다. 대통령이 수석대사 역할을 자임한 것이 카터의 경우가 처음은 아니다.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은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 바로 그 역할을 했다(결과는 꼭 좋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2차대전 당시 국제회의들을 통해 연합군 지 도자들 즉 스탈린, 처칠, 장 제스를 하나로 묶는 친선대사 역할을 맡았다. 좀더 전통적인 대사들 중에서도 역시 대중적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인사, 예를 들자면, 애버렐 해리먼(Averell Harriman),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 존 매클로이 (John McCloy) 등이 대사로 파견될 때는 그 임명 자체가 임무의 중요성과 성공의 필요성을 잘 말해준다. 이런 종류의 대사는 외국의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양국간의 상호협력에 큰 역할을 한다. 주독일 대사로 파견된 데이비드 브루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아데나워 수상이 힘을 합쳐 두 나라가 반공산주의 십자군이 되게 했다. 그리고 브 루스는 이러한 업적으로 냉전시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공식적인 외교관이 아닌 사람들도 종종 본질적으로 외교적인 임무들을 수행한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장군은 종종 동맹군 지도자들을 달래고 협조시키시 위해 전쟁보다는 외교적인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NATO에서 일하 면서 그런 역할을 반복했다. 2차대전 전에는 과학계의 지도자였고, 그 후에는 도덕적, 정치 적 지도자가 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Robert Oppenheimer)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대단히 외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과학자들과 군부 사이를 오 가며 이들이 스트레스와 불만에도 불구하고 서로 협조할 수 있도록 했다. 본성상 거의 전적으로 외교적인 직종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대학총장들은 학문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사회, 동창회, 보직교수, 평교수, 학생 등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집단들이 일종의 조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세력들이 서로 협조해야지만 학사 일 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총장의 기금 모금 임무는 근본적으로 외교적 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외교 직무는 공식적인 대사의 일보다 더욱 복합적인 경향이 있다. 2차 대전후 세계은행의 총재로 재직한 존 매클로이(John McCloy)는 자그마치 49개 국가의 경제 활동을 조정해야만 했다. 이는 아이젠하워와 아데나워 사이를 중개한 데이비드 브루스의 임 무보다 더욱 미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평화 조정 자들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역할한다. 예를 들어, 오페라 극단의 감독은 후원자들과 대행인 들, 이사회, 가수와 그들의 대리인들, 지휘자들, 연주자들, 무대 디자이너와 의상 디자이너들, 기술자들, 성인 합창단과 아동 합창단, 발레 무용수 등등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협조를 이끌 어내야 한다. 그 모든 일에서 바로 외교적인 기술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이다. 재즈의 고향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자라다 최근의 위대한 외교적 업적 중 하나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이룩되었다. 바로 1960년대의 민권운동이 바로 그 분야이다. 그 운동은 '직접행동', 즉 선동과 대치, 그리고 의도적인 위법행위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전복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성 아우 구티누스가 말했듯이, 설사 강도들의 집단이라 해도 그 집단 내의 일들은 공정하게 처리될 수 있다. 즉 전복적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내부에는 나름의 규율이 있는 것이다. 민권운동과 같은 긴박한 일을 둘러싼 연속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불일치와 대립이 점점 날카롭고 격렬해 지는 경향이 있다. 운동에 참여한 성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도덕적 절대주의는 영웅적인 행동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끊임없이 사회가 불안한 가운데서 사 회적 조화를 일구어낸 앤드루 영은 당시 꼭 필요한 존재였다. 민권운동에는 다양한 종류의 영웅과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의 경우는 극적이거나 찬란한 사례는 아니다. 그는 킹 목사나 다른 이들처럼 암살당하지도 않았고, 랠프 애버니 시(Ralhp Abernathy)처럼 감옥에 자주 들락거리지도 않았으며, 존 루이스(John Louis)처럼 자주 얻어맞지도 않았고, 제임스 베벨(James Bevel) 같은 위대한 웅변가도 아니었다. 하 지만 그는 조용히 일하며 여러 사람을 하나로 묶었고, 그들의 메시지가 더욱 잘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했다 앤드루 영(Andrew Young: 1932∼ )은 어느 한 세계에만 소속되지 않는 다양한 세계에 서 태어났다. 부친은 뉴올리언스에서 성공한 치과의사였다. 그곳은 재즈와 블루스가 탄생한 곳이지만, 영은 어린 시절 그런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흑인치고는 피부가 흰 편이었던 그에게 부모는 롤런드 헤이스, 메리언 앤더슨 등의 클래식 음악을 듣게 했다. 영 일가는 흑 인 조상들보다는 토착미국인(인디언을 뜻함) 조상들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영의 가족은 심지어 침례교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19세기에 남부로 온 뉴잉글랜드 선교사 들이 만든 조합주의 교회에 다녔다. 부모들이 좋은 보육원에 보냈기 때문에,. 영은 공립학교 에서 3년이나 월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 는 급우들보다 피부가 희고 부유했을 뿐 아니라, 훨씬 어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버드대학 에 다닐 때는 이런 연령 차이가 더욱 두드려졌다. 왜냐하면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40년대 당시 캠퍼스는 2차대전에서 돌아온 늙은 학생들로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 다녔던 뉴잉글랜드 조합주의 신앙을 계속 유지했다. 예일 출신의 한 사제가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준비하는 중 영의 가족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영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50년대 초 영이 하트포드 신학교에 갈 무렵, UN에 아프리카 국가 들이 새로 등장하면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영은 한때 앙골라에서 목회를 하던 한 교수 때 문에 그 나라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졸업한 후 결혼하려고 했던 여인 진 차 일즈(Jean Childs) 역시 앙골라에서 봉사하려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 학에서 간디를 공부하고 있었다. 나와 한 인터뷰에서 영은, 이미 그러한 생각에 정통한 진 을 발견한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흥미로웠다고 회상했다. 마틴 루터 킹과의 첫 번째 만남은 이 지적인 여성과의 만남과는 좀 대조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1957년 영은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마친 킹의 운전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탈라데가에서 몽고메리로 돌아와서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난 그분이 폴틸리히(Paul Tillich)에 관한 논문을 썼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이전에 폴 틸리히의 글을 많이 읽었고, 운 좋게도 직접 틸리히를 만난 적도 있었 습니다...... 그래서 킹 목사와 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분은 별로 관심이 없는 눈치더군요...... 그래서 가족들과 아이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당 시 사회 상황이나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민권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했을 때, 영은 자신이 만난 가난한 흑인 설교자들은 교 육할 생각도 품고 있었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는 주로 침례교회들과 하층계급 흑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 다. 거기에 속한 목사들은 교육받은 흑인들을 존경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로 묶을 방법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도 말입니다. 내 목표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을 서로 돕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외교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을 서로 돕게 만드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때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앙골라로 가는 것보다 자기가 태어난 남부로 가는게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재즈나 블루스 등 미국의 흑인문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다. 1955년 영이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포르투갈은 미국의 흑인 선교사들이 식민지 앙골라에 들어가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지아의 토머스빌에 있는 조합주 의 교구를 맡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매력을 높이 산 교회지도자들은 그를 다시 북부로 보내 미국기독교협의회(NCC)에서 청년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회연합 (UCC)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의 조정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NCC에서 일할 당시 겨우 25 세에 불과했던 그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들은 맡은 셈이었다.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만났으며, 지적 관심분야도 계속 공부했다. 그는 이제 막 자라나는 교회 관료였던 것이다. 그는 법인 이사회, 재단, 영향력 있는 자선단체 등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가 남부로 가기로 결심한 것도 실을 필드 재단의 유권자교육 계획(VEP)에 포 함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익숙해질 생활방식을 말해주기라고 하듯이, 영은 도체스터에 있는 VEP 센터에 전세비행기를 타고 토착했다. 가르치러 온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아주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셉티머 클라크 (Septima Clark)라는 엄한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60대였던 클라크는 수십 년 동안 주로 테네시주의 유서 깊은 하이랜더 포크 스쿨에서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운영한 인물이었 다. 클라크는 영의 몸에 밴 상류사회 기질을 벗게 하기 위해 그를 거칠게 다루었다. 그녀 는 우선, 나중에 SCLC 사람들이 시위를 하거나, 감옥에 갈 때 유니폼처럼 입게 된 진바지 와 작업복을 영에게 입히는 일부터 시작했다. 효과적인 분업을 한 감옥 안팎의 두 사람 영은 처음부터 법적인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VEP의 돈과 SCLC의 돈은 서로 다른 경 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두 단체의 활동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영은 그런 문제들을 후원자들에게 설명하는데 능숙했다. 그는 수다스러운 편이었으나 예의발랐고, 지식인연하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이상주의적이었다. 그이 이런 측면들에 매료된 킹 목사는 그의 기질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킹의 대리인이 된 영은 자신이 접촉한 대부 분의 백인 관리들보다 유연하고 능숙하게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유능한 협상가인 그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다. 그에 비하면 호세아 윌리엄스(Hosea Williams)는 항상 대결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경파였다. 킹 목사는 모든 상황에서 언제 어떤 사람을 내세울 것인 지를 선택했다. 킹의 전략 중 하나는 지역 사업가들에게 찾아가서 평화를 원치 않느냐고 물어서 경찰과 정치가들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영은 특히 이 일에 능했다. 그는 버밍햄의 사업가들과 합의를 만들어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밤이 되면서 쌍방은 온화하고 침 착한 앤드루 영의 말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전반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영은 대화를 위한 모든 채널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부 운동가들은 딥 사우스(미국 최남부 지방.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을 말한다)에서 백인 박해자들에게 너무나 시달렸기 때문에 상대편 누구와도 접촉하고 싶어하지 안았다. 하지만 백인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영은 그들에게 새로운 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시위대가 행 진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협상을 벌인다면 그들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이 다. 또한 영은 시장이나 보안관들에게 SCLC의 의도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믿었다. 킹의 일부 측근들은 그렇게 하면 충격 효과가 사라지고, 시 관리들이 미리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영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은 더욱 폭력 적으로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은 심지어 FBI에게까지도 접근했다. 당시 FBI는 킹 목사 를 싫어하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으므로, SCLC측에서는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은 FBI 요원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려면 억압적인 지방 법집행자들과 공모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심지어는 킹과 FBI국장 후버의 면 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은 최소한 겉으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이 적대감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벌이자, 그와 경쟁하던 킹의 측근들 중 일부는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호세아 윌리엄스는 영에게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영을 엉클 톰이라 부르면서 상 대편과 협상하려는 그를 조롱하고 다녔다. 여기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윌리엄스 자신이 친하 게 지냈던 제임스 해리슨이란 인물이 실은 FBI가 SCLC에 심어놓은 첩자였다는 점이다. 1966년 시카고에서 운동이 벌어질 때, 또 다른 정보원이 그 도시의 FBI 요원들에게 브리 핑을 진행하면서 영에 대한 비난에 관해 이렇게 보고했다. "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앤드 루 영이 SCLC 관련 정보들을 FBI에 넘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공인된 사실처럼 나돌고 있다." 중재 역할을 하면서 이중간첩 같은 행동을 한다고 의심받는 것은 양심적인 외교관으로서 는 피하기 어려운 위협이다. 어떤 외교관이 한쪽에게 또 다른 쪽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이 해시키는 일을 할 때, 그는 또 다른 쪽의 옹호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외교관의 진정 한 효용은 바로 어떤 대화에서도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태도와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다. 카스틸리오네의 대화록 뒷부분을 보면, 그는 조신의 주용 임무는 주군에게 다른 사람에 서는 들을 수 없는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짓이란 당연히 신에게나 인간에게 나 불쾌한 것이며 특히 군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꼭 필요한 사람, 즉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무엇이 옳은 건지 말해주는 사람이 아주 부족 하기 때문이다. 적들은 그들이 직무를 잘 수행한다고 해서 감동하거나 하니 않는다... 친구 들 중에는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 게다가 그 몇 안 되는 사 람들조차도 군주들에게는 감히 싫은 소리를 하기 어렵다. 킹은 자신을 수행하는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영의 충고를 중요시했다. 이 때문에 킹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고 박해도 많이 받았던 동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영은 미묘한 임무 들을 맡았다. 예를 들어, 제임스 메레디스(James Merediths)가 항의 행진을 조직하다가 흑 인 분파들이 자기를 끌어들이거나 조종하기 위해 싸움질을 벌이는걸 보고 분노했을 때, 킹 은 영을 보내 메레디스와 함께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맡겼다. 킹이 감옥에 갔을 때는 영이 바깥에서 그의 특사 역할을 했고, 킹은 그에게 끊임없이 지 시사항을 전달하여 자기 대신 일을 수행하게 했다. 킹은 자신이 감옥 밖에 있을 때 할 수 없었던 일도 영이 자기대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있을 때나 위기가 올때 더 잘 반응한다." 그래서 킹은 일부러 감옥에 들어가서 위기를 만 들고, 영이 밖에서 그 위기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게 했다. '안팎의 두 사람'은 효과적 인 노동분업을 했던 셈이다. 데이비드 개로(Dabid Garrow)는 다음과 같이 어느 SCLC 간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앤드루 영은 킹 목사의 또 다른 자아이다. 앤드루 영이 없었 다면 SCLC는 실패했을 것이고, 우리의 행동은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흑인과 백인의 중간에 서서 1968년 킹 목사가 사망하고 워싱턴에서 빈민 캠페인이 벌어지는 동안 SCLC는 부분적으 로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영은 조지아주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공 직에 있는 동안 그는 지미 카터를 응원했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았다.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를 UN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한때 NCC 관료로 활동하던 곳인 뉴욕으로 돌아 온 그는, 예전에 관심을 두었던 아프리카와 제3세계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카터는 그에게, 킹 목사가 전세계 유색인종에게 지닌 의미 때문에 그를 임명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터는 미국의 식민지 정책이 빚어낸 어두운 과거를 떨쳐내려 했던 영의 노력 때문에 남부 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이 파나마운하에 대한 영구적인 권리를 양 도하는 조약을 체결했을 때이다. 하지만 영은 결국 UN대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중동 외교에 지나친 열정을 보였기 때문 이다. 영은 늘 그래왔듯이 항상 모든 채널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태 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대표와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는 이스라엘의 터부 를 건드렸다. 하지만 PLO는 UN이 인정한 투표권 없는 대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영 은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으로서 사교모임에서 PLO 대표들과 비공식적인 회담을 나누는 데 동의했다.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의 분노를 샀다. 후일 영은 나에게, 당시 이스라엘은 미 국무성이 비밀리에 또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하지만 영을 몰랐 다)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때 이스라엘이 분노한 건 영의 행동 때 문이 아니라 그때 진행되는 다른 회담 때문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바로 그 회담을 보호하 기 위해 영의 회담에 대해 사실을 얼버무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영은 국무부의 성명에 동 의하지 않았다. 당시 [예루살렘 포스트]지의 간부였던 울프 블리처(Wolf Blitzer)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8월 11일, 그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영은 국제조직을 담당하는 국무부 차관보 윌리 엄 메인스(William Maynes)에게 그 회담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국무부 는 그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대통령에게 사실을 보고한) 영이 국무부와 보조를 같이한다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될 것이다. 대신 그는 이스라엘의 UN 대사 예후다 블룸(Yehuda Blum)에게 '공식적인' 발표는 거짓이라고 알려주었다. 카터 대통령은 이미 예전부터 영의 제3세계 접촉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캠프 데이비 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무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영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영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라 나라와 접촉했던 일은, 1982 년에 그가 애틀랜타 시장으로 당선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는 레이건이 워싱턴에서 보내는 지원금을 삭감할 때 시장 자리에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세 계 통화시장에는 언제나 가용자본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대사 경험과 금융위원회에 속한 하원의원 경험이 있는 저는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영은 시장 재직 시절 비판가들로부터 전세계를 '싸돌아다닌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도시를 위해 전세 계의 사업을 끌어들였고, 게다가 애틀랜타가 1996년 하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게 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항상 다양한 세계에서 살아온 인물이었던 영은, 흑인들에게선 지나치게 희다는 비난을, 백 인들에게서는 지나치게 검다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비판가들이 보기에 그는 진정한 남부 인이 아니었다. 일부 빈자의 옹호자들이 보기에 그는 자본가들과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진정한 미국인이기에는 지나치게 아프리카에 경도했다. 세계혁명을 좋아하기에는 지 나치게 미국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중간적인 위치를 상이한 사람들은 하나로 묶는 데 사용 했다. 그는 자신의 개방적인 면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서도, 미국의 안팎에서 일종의 평화 특사가 되어 여러 사람을 화해시켰다. 그는 상이한 분파들 사이에서 비판받으 며 일을 수행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일요일이면 여러 교 회의 설교단에서 설교하는 그는, 자신을 기본적으로 부여받은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목회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대유형 노동분쟁과 학생소요를 동일시한 서투른 조정자 클라이 케어 1958년, 캘리포니아대학 평의회가 클라크 케어를 총장으로 추대할 때, 그들은 1960년대 닥칠 학생 소요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일을 조금이라고 예 상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케어는 버클리 대학에서 교수회의 의장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사무처장으로서 도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부여 주었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노동분쟁의 조정자로서 수백 개의 요소를 해결했고, 수많은 스트라이크를 진정시켰다. 학교의 모든 이들이 알고 존경하는 그가 이런 경력까지 지니고 있으니, 설사 '학생 스트라이크'가 일어난다 해도 그보다 적임자 는 없었을 것이다. 현대 대학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케어의 정의는 다른 대학 총장들이 교본으로 삼을 만큼 유명했다. 1963년 봄, 그는 하버드대학의 권위 있는 고드킨 강의에서 자신이 여러 곳에 쓴 글들을 축약하여 발표했다. 그는 이제 '멀티버시티(multiversity)' 가 유니버시티를 대체했다 고 말했다. 멀티버시티란 수많은 상이한 구성원들 앞에서 가능 하는, 수많은 상이한 역할을 지닌 서비스 센터라는 것이다. 이제 대한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증대하는 공공 서비 스의 요구에 부응하며, 전례 없는 규모로 대학 활동을 산업과 결합해야 하며 새로운 지식 의 조류를 매개하고 또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대학은 케어가 지식산업이라 부르며 찬양한 것의 중심에 전략적으로 위치한다. 프리츠 맥럽(Fritz Machlup)의 계산에 따르면, 이 나라의 국민총생산에서 모든 형식의 지식의 생산, 분배, 소비가 29%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식 생산'은 다른 경제부문 들에 비해 2배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의 철도나 금세기 전반의 자동 차가 맡았던 역할을 금세기 후반에는 지식산업이 맡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 경제 발전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대학이 더 이상 바쁜 국민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학자들의 은둔지가 아니라 바로 그 생활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면, 대학 문을 닫는 것은 국가 자체를 마비시키는 것이나 다 름없다. 그리고 사실 얼마 후 학생들은 케어의 대학 문을 닫으려고 했다. 케어는 다른 모 든 문제를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에만은 미리 대응하지 못했다. 출판된 강의록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비디오테이프로 보면 그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구정에서 케어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대학총장의 임무 중 가장 골치 아픈 것은 각 세대 대학생들의 저항과 분노가 모두 진정 으로 새롭고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미 우리가 다 예측할 수 있는 논란들입니다. 저항 참여자들은 아카데미 자체만큼 이나 오래된 불만들을 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새롭고 급진적이라고 믿습니다. 케어는 이런 말을 한 후 겨우 1년만에 진짜로 새로운 학생들의 요구를 다루게 된다. 인 종분리라는 문제를 놓고1964년 3월, 버클리 대학생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쉐라톤 팰리 스 호텔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들은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흑인을 차별하던 호텔 의 고용 관행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이 승리에 용기를 얻은 학생들이 가을학기를 맞아 버클리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설 장소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전통적으로 학 생들이 정견을 발표하고 정치 팸플릿을 나눠주던 뱅크로프트 거리와 텔레그래프 거리에서 탁자들이 모두 철거된 것이다. 그것은 캠퍼스 내 표현 자유에 대한 탄압이었고, 따라서 학 생들은 확실한 투쟁 이슈를 얻게 되었다. 심지어 교수들조차도 이 문제에서 만큼은 그들 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가들은 점점 투쟁의 강도를 높여서 캠퍼스의 중심지인 스프라울 광장에다 탁자 들을 옮겨놓았다. 경찰들이 탁자에 모인 학생들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다른 학생들이 벌떼 같이 몰려와서 경찰 차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은 자그마치 30시간 동안이나 구호를 외치고 연설을 하면서 농성을 계속했다. 마침내 케어가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협상을 통해 경찰 차를 내보내는 대신 학생들의 불만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협 상이야말로 케어의 전공분야였다. 하지만 그후 케어는 학생들의 저항이 저절로 수그러들기 를 바라면서 6개월 동안 질질 끌었다(이 역시 그들의 불만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마침내 압력에 못 이긴 대학 측은 캠퍼스에 탁자들을 돌려놓는 것을 허락했지 만, 불법적인 일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단서조항은(킹목사의 시민불복종운동 같은) 민권운동과 정면으로 배치되었으며, 또한 위헌적이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란 불법적인 행동조차도 옹호할 수 있다는 의미하기 때문이 다. 또다시 케어는 교수들의 지지마저 잃게 되었다. 교수들 역시 캠퍼스 내의 표현의 자유에 반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음해 봄 대학 측의 최종 입장이 알려지자, 지난가을 스프라울 광장을 점령했던 학생들 은(대학 본부인) 스프라울 홀을 점거했다. 그들의 행동은 역시 학생활동을 억압하는 다른 캠퍼스들에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또다시 경찰이 홀 내의 학생들을 체포했지만 더 많은 시위 사태를 낳았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케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이전에 그는 학교 부설 그리스식 극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대한 고위 책임자들과 함께 학교 정책을 설 명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설득풍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비난조였다. "대학은 무 력 사용보다 대화를 통한 설득을 우선시 합니다." 하지만 원래 탁자들을 제거한 것은 경찰 력이었고, 대학 측은 표현의 자유 문제에 대해 토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날 그리스식 극장에서 학생 지도자 마리오 사이오(Mario Savio)가 할말이 있다면서 연단으로 올라가겠 다고 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그가 연단으로 올라가자 경비원이 그를 무대 아래로 집 어 던져버렸다. 이에 대한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교수회의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학 본부 측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케어는 학생과 교수 모두의 신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곧 이사회의 지지도 잃었고, 캘리포니아 주 의회와 차기 주지사인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역시 그를 믿지 않았다. 위대한 협상가가 자기편을 하나도 만들지 못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소요가 끝난 다음해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희생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케어는 평소 연방정부와 대학간의 긴밀한 관 계를 옹호했다. 그는 특히 규모가 큰 대학이 변화하는 데는 그런 관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드킨 강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방정부는 '모든 대학 연구비 지출의 75%'를 지불했다. 게다가 '지난 회계연도에 (켈리포니아에 있는) 6개 대학에 대 학기금의 57%를 지원 받았으며', 그중 40%는 방위산업과 관련이 있었다(우주탐험 같은 분 야도 포함한다면 그 액수는 더욱 늘어난다). 다시 말해, 케어의 설명대로라면 대학과 정부는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 하나의 실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부가 전쟁에 참여하면 대학 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전쟁 반대를 위해 워싱턴에 가 는 대신 캠퍼스에서 시위를 벌여도 상관이 없었다. 이전에 항만과 노조 사무실, 기업이사회 등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었던 케어의 조정 능력이 왜 대학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었던 케어의 조정 능력이 왜 대학에서는 무용지물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그가 아카데미를 산업모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지식 '산업'과, 그 ' 생산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적인 분석을 하는 걸 자 랑했다. 그가 알던 산업 협상은 대단히 단순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 는 두 개 집단이 있고, (임금, 노동조건, 의료 및 연금 등) 몇 가지 이슈들에 한정된 협상 이 이루어진다. 이 도식을 그대로 아카데미에 적용한 케어는, 주의회와 주의회가 임명한 이 사회를 고용주로, 평교수들과 보직교수들을 노동자로 간주하면서 행동했다. 이 간단한 모델조차도 그가 생각한 것보다는 복잡했다. 예를 들자면, 행정을 맡은 보직교 수들(총장, 사무처장, 학장 등)은 종종 평교수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또한 협상에서 총장 자 신을 제3자가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더욱 나쁜 것은 케어의 모델에 학 생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교수들이야 노동자로고 쳐도, 학생들은 노동자도 아 니었다. 당시 마리오 사비오가 말했듯이, 학생들은 '지식산업'이 '생산품'을 만들 원재료 취급을 받았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한 케어는, 결국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고귀한 가치를 수호하는 우월한 위치에 가게 되었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돈을 대는 정부에 대학이 의존하는 것은 경고했다. 후일 학생들이 어떤 심한 행동을 했건 간에(실제 로 전쟁을 둘러싼 대립 격화되면서 많은 심한 일들이 일어났고, 절망한 학생들은 마약문화 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저항자들의 첫 번째 행동은, 케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학생 들과 교수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케어는 학생들에 대해 조금의 감정이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교육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학생 수가 증가했다는 의미에서만 학생들 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케어가 예견한 유일한 극단주의는 '일부 이질집단'이 미국 캠퍼스에 외국의 사례를 도입 하는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라틴아메리카나 일본의 모델에 따라 사회를 공격하기 위한 성채로 대학을 바 꿔놓으려 한다. 케어는 자기 자신의 모델조차도 대학이 사회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도하는 핵 심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망각했다. 학생들은 성채에서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채를 포위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대학이 사회에 대해 유사정부적인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도전한 것이다. '외교관' 케어는 자신의 추종자로 삼아야 할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기 싫어했거나,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밑에 있는 교수들의 충고를 완고하게 거부했 다. 그가 추종자를 잃자 당연히 소요를 중지시킬 수 없었고, 이어 이사회와 주의회가 그를 경원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이사회 꼭두각시로 생각했고, 이사회쪽에서는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1967년 초 로널드 레이건의 압력으로 이사회는 그를 해고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종말이 가까웠을 때조차도 그들의 적대감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앤드루 영과는 달 리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했고,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장을 해제 했다. 그는 학생들을 꺼려했는데, 이는 훌륭한 외교관 타입의 총장이라면 결코 하지 말았어 야 할 행동이다. 또한 가능한 많은 채널을 열어두는 것은 외교적으로 필수적이다. 버클리 사태에서 케어는 앤드루 영이 아니라 불 코너(Bull Conner)처럼 자신의 적들이 착한 사람 처럼 보이게 했다. 코너가 실수투성이의 악당이었다면, 케어의 의도는 좋으나 일에 서투른 사람이었다. 복잡한 서투름, 그것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종류의 무능이다. 케어는 일부 극 소수 학생들을 대학으로부터 격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거대한 문을 굳게 닫았을 때 바깥쪽에 격리된 건 학생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전쟁엔 규칙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군사의 천재 나폴레옹 군대에서 리더십은 아주 쉬워 보일 수 있다. 군인들은 상관에게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만약 추종자가 추종을 거부할 경우 총살당할 수도 있다. 물론 탈영 역시 위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투지휘자들은 찬양하는가? 워싱턴 D.C.에 있는 수많은 동상들은 대부분 연단 위에 선 정치가가 아니라 말에 올라탄 장군들인 것이다. 군사 지도자가 맞이하는 어려움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이라면 근 대 국가가 대신 맡아서 수행한다. 군사 지도자는 존경받을 만한 결정을 통해 바로 앞에 있는 무장한 추종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지자들(정부 내의 인사들과 시민들)을 확실하 게 장악해야만 한다. (설사 당장에 라도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충실한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효과적인 명령을 '전달'하는 것, 다시 말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추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 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군사 지도자는 자신의 예지를 침착하게 유지해야만 추 종자들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임무는 과장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기 마련이다. 위대한 전쟁이론가 카를 폰 클아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전쟁이란 무슨 실수나 극단적인 상황이 닥칠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곳에서나 비합리적인 것이란 말이다. 전투요원들이 자신의 죽음과 적들 의 죽음 그리고 엄청난 폭력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게 하게 위해서는, 지도자는 병사들 내부에 일종의 심리적 폭발상태, 다시 말해 적절하게 '통제된' 폭발상태를 창조해내야 한 다. 훈련과 제복, 규율 같은 것들은 모두 이 위험과 분노로 넘치는 부자연스러운 심리게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불러일으키고, 또 때로는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여기서 억제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클라우제비츠가 갈등 당사자간의 상호전형이라 부른 것 때문이다. 전투 중인 쌍방은 상대의 폭력에 더욱 큰 폭력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분노하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점점 더 폭발적인 상태에 이르고, 공방 전이 진행됨에 따라 나중에는 전쟁의 목표 자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쟁은 처 음 추구한 제한된 목적이 성취되었다 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으며, 마치 대화재와도 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 하지만 지휘관은 병사들이 적들에 대해 품는 분노와 두려움을 조절하고, 종종 자신조차도 억제해야 한다. 전쟁이 통제를 벗어나는 두 번째 이유는 클라우제비츠가 마찰이라 부른 것 때문이다. 이 는 군사행동의 각 부분이 지속적으로 각기 다른 내외적 장애물들을 만나면서 정확한 조화 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직선경로를 전진하게 되어 있는 각 부대는 부대원들이 각 기 상이한 피로점과 과감성 혹은 자기 통제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각기 상이 한 피로점과 과감성 혹은 자기 통제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각 개인은 모두 자 신만의 악마와 마주치며, 훈련 때 지녔던 평형감각을 잃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훈련 때의 움직임과 실제 전쟁중의 움직임과의 차이는 땅 위에서 걷는 것과 물 속에서 걷는 것만큼이 나 크다고 말했다. 만약 미식축구의 치어걸들이 물 속에서 함께 다리를 들어올리는 동작 을 한다면, 각자의 다리의 굴곡이 다르고 근육의 힘도 다르므로 서로 상이한 물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저항을 극복하려고 하면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고 동작을 흐트러뜨리기 십상이다. 이런 마찰이 한 줄에서만 일어만다 해도 곧 다른 줄에도 영향을 미쳐 그 효과가 전체 파 급된다. 마찰이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두 개의 불규칙성은 연결과정을 거치면 서 여러 개의 불규칙성을 만들어낸다. 전쟁 중에는 항상 무언가가 잘못되기 마련이고, 일단 한 군데서 잘못되기 시작하면 전체가 잘못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부대의 행위 내적인 마찰만을 고려했다. 하지만 외적 저항의 마찰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상대편의 불균등한 기질, 컨디션, 그리고 임무에 대한 이해도 등에 따라 다양한 정도로 나타난다. 전진하는 부대의 상이한 수준의 적대 세력을 만나게 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적들의 '유약성'이 공격자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저항 진영의 일부가 갑자기 항복하면, 공격자들의 전체적인 계획을 흐트러뜨려서 공격전선이 교란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일부의 약한 적들을 섬멸하고 전진하는 부대는 오히려 우군들과의 지속 적인 접촉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적 마찰 효과가 미식축구 치어걸들이 물 속에 서 다리를 맞출 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면, '외적' 마찰 효과는 치어걸들이 공연하는 무 대에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와서 그들을 붙잡고 방해할 때와 유사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상호전형과 마찰을 가장 잘 통제하는 군사 지도자기 자신의 병사들을 가 장 유용하게, 가장 설득력 있게, 가장 확고하게 지도하며, 자신의 임무를 깨달은 추종자들 이 확신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런 지도자는 지속적인 혼 란 상황 속에서도 해야 할 일과 버릴 일, 그리고 수정할 일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보기에 바로 이런 종류의 통제력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은, 클라 우제비츠 자신이 프러시아군대(나중에는 러시아군) 장교로 있을 때 직접 맞서 싸웠던 나폴 레옹이었다. 가능한 빨리 가능한 많은 적을 제거하라 나폴레옹은 초기 공세에서 자신의 군대와 적군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파악하고 적들 을 물리치는 데 그 한계를 '이용'했다.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의 한계를 초월한 게 아니라, 마찰과 상호전형이 항상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적을 누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전쟁의 모든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의 천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을 둘러싼 낭만주의적 신화는 이해할 만한 것이며, 거의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서 곧장 위대한 인물로 떠올랐다. 심지어 그의 기벽도 매력의 일 부를 이루었다. 어떤 이들에게 그는 프랑스의 화신 즉 얼굴이자 목소리였다. 하지만 실제 로 그는 태어난 곳의 발음에 영향을 받아 약간 이국적인 악센트가 있는 프랑스어를 구사했 다. 그의 올리브빛 얼굴은 감정이 고양된 순간에는 백열처럼 빛났고 오랜 침묵에 싸여 있 을 때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유연한 몸에 키가 작았던 그는 분명 이탈리아계였다. 그래서 적 들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Napoleone Buonaparte)라고 불러 서 그가 이방인임을 강조하려고 했다. 혁명의 열기가 넘치던 섬 코르시카에서 대어난 나폴레옹은 그 지역의 애국자 파올리 (Paoli)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급진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하급 귀족 집안이었던) 그의 가족은 코르시카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 경험을 겪은 나폴레옹은 후일 귀족들을 죽이는 이념에는 별로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그의 친척들이 바로 그런 이 념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을 얻은 후 친척들에게 유럽 각국의 왕좌를 헌사함으로써 추락한 가문을 되살리려고 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식 정통 훈련을 받았다. 가난한 귀족 자제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그 역시 군인 으로서 출세하는 길을 택했다. 브리엔느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며 수학과 신무기에 소질을 보였고, 당시 발전하고 있던 포병 분야로 진출했다. 16세의 나이에 장교가 되었으며 처음 에는 혁명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4세 때 영국군으로부터 툴롱(Toulon)을 탈환하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형제의 눈에 들게 되었다. 26세 때에는 파리에서 일어난 정당한 반란(방데미르 13)을 진압했고, 27세 때는 좌익 판테온 클럽을 폐쇄했다. 하지만 그 때 까 지도 그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리자르 카르 노(Lazare Carno)만이 희미하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르노는 성벽 공학에 조예가 깊은 기하학자로 혁명군의 신병들을 뛰어나게 교육함 으로써'승리의 조직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방데리므 집정내각의 일원이었는데, 오 스트리아에 대항한 삼중공격 작전(라인 강변의 두 부대와 이탈리아 밀라노를 중심으로 포진 한 세 번째 부대가 오스트리아 왕국을 압박하는 작전)에 나폴레옹을 끌어들였다. 나폴레옹 은 이 중 마지막 부대, 즉 4만 명의 헐벗은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령 리비에라에 머물 게 되었다. 육지(북)에서는 리구리아 산맥이 그들을 가로막고, 바다(남)에서는 영국군함들이 대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제노바(동)로 이동한다면 미리 매복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을 만나게 되고, 마르세유(서)로 후퇴하면 사르디니아왕 빅토르 아마데우스 3세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동맹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빅토르 아마데우스와 오스트리아 군대 사이의 틈이라 할 수 있는 리구리아 산맥을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리구리아 산맥은 프랑스군이 포진하고 있던 바다 쪽으로는 급경사가 져 있지만, 북쪽으로는 닭 벼슬 모양으로 울퉁불퉁한 구릉과 분지들이 길게 이어 져 롬바르디아 평원에 이른다.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먼저 산맥을 넘어 분지에 집결했다. 그들은 나폴레옹 군대가 계곡을 따라 산맥을 내려오면 전열이 좁아질 것을 예 상하고, 그 상태에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구릉들 때문에 좁은 분지에 고 립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길고 긴 산맥들이 대부대의 협력을 막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러 개의 진로를 이용해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여러 분지에 분산 고립된 적의 부대들을 재빠른 공격으로 일거에 마비시켰고, 그 결과 사르디니아군은 튜랭으로, 오스트리아군은 밀라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 주일 동안 유럽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매일같이 종횡무진하며 번개 같이 공격을 날렸다. 오늘은 몬테 노테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4월12일), 내일은 밀레시모에서 사르디니아군을(4월1일),. 그 다음날은 카세리아 성을 무너뜨리고(4월14일), 그 다음날은 데고를 함락시키는(4월 15 일) 식이었다. 또 그 다음날(4월 16일) 오스트리아군이 데고를 탈환했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속력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부전선(세바)에서 핵심 병력을 빼와서 데 고를 재탈환한 다음, 다시 일부 병력을 세바로 보내 점령을 확고히 했다. 나폴레옹은 이 렇게 적군들을 각개 격파함으로써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디니아군이 그들을 압도적인 병력을 합치는 걸 막았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디니아군이 서로 멀리 떨어져 각각의 본거 지로 향했던 것이다. 동맹군은 산맥의 통로들을 장악하여 나폴레옹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 지만, 그는 오히려 그 지형을 이용하여 적들을 마비 시켰다. "정치적 광신주의로 들뜬 프 랑스인들이 엄청난 기세로 다가와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클라우제비츠는 몬테노테전투 에 대해 이렇게 썼다. 27세의 나폴레옹은 두 나라의 장군들이 꽁무니를 빼게 만들었고, 이 제부터는 하나씩 차례로 섬멸할 것이다. 사르디니아군이 먼저였다. 사르디니아는 밀라노와는 달리 빈에 중심을 둔 거대한 오스트 리아제국과 떨어진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모든 부대는 튜랭에 있는 사르디니아 군 을 공격하여 몬도비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4월 27일 그곳에서 아마데우스왕에게 휴전을 강요한 다음, 다시 군대를 밀라노 쪽으로 돌렸다. 이 모든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진 행되었다. 이 정복여행은 초반부터 이미 나폴레옹 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 특징은 다 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1.승리 자체를 위한 승리. 예전의 전쟁에서 승리란 종종 그 이점이 불분명했다. 어떤 군 대가 적을 섬멸시켰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나 항구를 얻게 되지도 않았다. 물론 패배한 상 대는 군사를 잃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아군의 이득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구 체제(앙시앵 레짐)하에서 군대란 그 자체로 귀중한 재산이었다. 귀족들로 구성된 장교군단은 글자 그대로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결코 무모하게 희생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비용이 많이 드는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인 장교들은 역시 비용이 많이 드는 용병들을 지휘했다. 소중한 영토를 방어하는 것뿐 아니라 소중한 자신들을 지키는 것 역시 이런 군 대의 목표였다. (매콜리(Macaulay)k 프리드리히 대왕의 부왕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이점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군대에 대한 그의 감정은 돈에 대한 수전노의 감정과 비슷했다. 그는 군대를 모으고, 숫자 를 세고, 병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누가 이 귀 중한 축적물들을 기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혁명이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군대는 유럽의 모든 섭정들이 공격해오는 것 에 대항하기 위해 일반 서민들을 징병하여 만들어진 '무장한 인민들' 이었다. 이 군대의 목표는 더 이상 진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을 비롯해 어떤 희생을 치르 고서라도 공격해오는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는 이 시기 프랑스인들 이 '정치적 광신주의'에 몰입해 있었다고 쓴 것이다. 이제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지나 인텔리 계층의 유능한 사내들이 장교직을 수행했다. 카르노 자신부터가 서기였던 아 버지 아래 태어난 시인이자 기술자였다. 일단 사망한 장교들이 신속하게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군대는 곧장 용감하기 짝이 없는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예전의 유럽 열강들의 전쟁은 안정구조 속에서 가끔 일어나는 제한된 발작 같은 것이었 다. 교전 당사자들마저도 그 구조 자체를 뒤흔들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왕들은 이런저런 목 적으로 싸움을 벌였지만 왕권 자체를 전복할 생각은 없었다(그러려면 지나치게 큰 희생이 필요했다). 하지만 혁명군은 사정이 달랐다. 혁명군은 그들이 맞선 군대뿐 아니라 그 군대 를 보낸 정치체제까지도 파괴하려고 했다. 이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적을 제거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결과 역사상 보기 드문 형태의 잔인한 살육전이 나타났다 (비슷한 예를 고르라면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전쟁 정도일 것이다). 혁명군은 바로 이러한 일탈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2. 전격작전. 18세기까지 전쟁의 기술은 진형, 진지 구축, 전개 등을 꾸미는 정교한 예술 같은 것이었다. 전장에서 교전에 임하는 군대는 전투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세심하게 배치 되었다. 이때 전투목적이란 병참선 확보, 통신망 유지, 핵심영지 방어, 상대편의 선택된 목 표물 위협 등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목적은 병력과 장비라는 귀중한 자원들간의 실제 충돌을 무릅쓸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에 한했다. 나폴레옹은 목표물들에 대한 거의 무차 별적인 공격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단숨에 파괴해버렸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장군들은 빠 른 전투를 기피하도록 교육받았으나, 나폴레옹은 바로 그것을 추구했다. 즉, "일단 싸우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보기만큼 무모한 작전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일단 상대편의 (전략적 중요 성과 상관없이 어떤 부분이라고) 일부가 무너지면 다른 부분들 역시 금방 곤경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곧 '마찰'이 상대편을 악화시키게 되고, 리구리아 산 맥에서 지형 자체가 나폴레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듯이 전쟁 자체가 그의 편이 되는 것이 다. 리구리아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이 적들의 분산된 일부 부대를 신속하게 패배시키자, 사르 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갈팡질팡 하면서 연합작전을 펴지 못했다. 당시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작전, 다시말해 유일한 작전은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퇴각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 안전한' 작전이 실은 가장 위험한 작전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들을 분리시킨 다음 차례 로 격파시켰던 것이다. 3. 보급을 위한 싸움. 나폴레옹은 리구리아 해안에 갇힌 헐벗고 굶주린 부하들에게 롬바 르디아 평원에는 음식과 신발 그리고 옷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빨리 평원으로 내려갈수록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도 빠르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보상을 얻기 위 해서는 적들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나폴레옹의 기동성은 많은 경우 병참선과는 상관없는 보급을 추구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그들의 부대는 '징발'과 약탈에서 무자비한 양 태를 보이게 되었다. 이 역시 혁명 정치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구체제하에서 싸우던 군대는 용병들이 귀족들의 통제를 벗어날까봐 약탈을 기피했다. 주군들이 용병들의 활약에 따라 서로 합의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규율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군은 인 민의 이름으로 싸웠고, 인민의 물품으로 생활했다. 징병으로 군인이 된 그들은 농가에서 곡식과 닭을 징발하고, 병기고에서 무기를 약탈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4. 아군이 수적으로 우세할 때만 싸운다. 리구리아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디니아군 은 그 둘을 합치면 나폴레옹의 군대보다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각각의 교전에서 나폴레 옹은 자신의 부대가 수적으로 앞설 때만 공격을 가했다. 그후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 아군이 갈라지자, 그는 세 군사력 중 가장 수적으로 앞서게 되었다. 사르디니아군을 무력화 시키고 나자 그의 군대는 오스트리아군의 두 배에 달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놀라운 기동 성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숫자대신 영리한 전술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5. 단순성. 나폴레옹은 각 교전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위장, 매 복, 협공, 복합전개 등으로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행동에 여러 가지 제약 이 가해진다는 같은 이유로 장기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장기계획은 교전 중에 벌어지는 새로운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즉홍적인 조치들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항상 어떤 목표물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고, 예상치 못한 적들의 포화를 빠져나왔으며,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클라우제비츠는 지휘관에겐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으로 다음 교전 지점을 선택했다. 전쟁 중의 우연한 사건들은 예정된 계획을 방해할 수 있지만, 잘 이용하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아는 지휘관은 마차 역시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6. 끊임없이 이동한다. 예전의 전쟁은 정적인 상태를 지향했다. 그래서 군대 역시 정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군대는 기회만 있으면 요새를 구축하려 했다. 즉 식수공급선 확 보, 진지 구축, 막사 건설 등을 통해 강력한 방어기지 만들어내려 했다. 그리고 물론 다시 행진을 시작하기 전에는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완비하려 했다. 같은 이유로 전 있는 군대 는 일단 진지를 구축하면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무하마드 알리의 '빠지고 치기' 전술을 구사하라 나폴레옹은 이런 공식들을 일찌감치 부숴버림으로써 적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계속 헤엄 치지 않으면 질식하고 마는 상어처럼 움직임을 그칠 줄 몰랐다. 그의 군대는 항상 적과 새 로운 보급을 찾아다녔고, 어느 곳에서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절들이(때로는 나폴레옹 자신조차도) 그가 어디에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에 그의 군대는 더 안전할 수 있 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서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장기간 의 막사생활이나 포위공격이 초래하는 지루함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다른 지휘관들은 고전적인 포위공격을 선호했다. 직업군대라면 어딘가 자리 를 잡고 생활해야 한다. 그 장소가 어떤 마을 앞이고,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적들은 사로잡은 채 말려죽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나폴레옹은 생애 동안 단 두 번, 한번은 만투아 (1796년)에서, 다른 한번은 단치그(1807년)에서 포위공격 작전을 벌였는데, 첫 번째 포위에 서는 아예 대포의 화문을 막은 다음 포위를 풀고 알프스를 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구원군 을 공격하러 나섰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에옹이 만투아에서 포위를 푼 사건을 두고 "그가 그 문제를 철저히 생각하고 결정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클라우제비츠는 그 일 때문에 만투아 함락은 6개 월이나 더 연장되었기 때문에, 당시 나폴레옹이 그저 동적인 전투를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나폴fp옹이 보급을 위해 부대 일부 를 점점 더 멀리까지 파견해야 했기 때문에, 부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곳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포위부대와 이동 부대로 분할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번에 한가지 일을 하면서 즉 구원 군을 격파한 다음 다시 포위를 시작하면서 군대의 통일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 리는 그의 단순성 방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즉 신속하게 이동하지만, 항상 함께 이 동한다. 부대를 분할하지 않고, 단결로 사기를 유지한다. 1796년 4월 남서쪽에서 롬바르디아 평원으로 진입한 이 사내는, 그해 10월 이미 북동쪽의 알프스산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 영토 전부를 점령 했고, 알프스를 넘어온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네 번 물리쳤으며, 라인 강변에 있던 두 부대 의 프랑스군이 합류하기 전에 이미 빈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의 이러한 성 공에 놀란 프랑스 집정내각은 나폴레옹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임무를 주어 중앙이탈리 아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북부의 군대를 지휘하지 못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위 협했고, 그 결과는 그는 유임되었다. 그는 해고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군사적 해결뿐 아니라, 적대를 종식시키는 외교적 해결까지도 떠맡게 되었다. 그는 그가 정복한 이탈리아 영토 대신 베네치아만을 오스트리아에 돌려줌으로써 협상을 끝냈다. 나폴레옹은 그때 빈까지 정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바로 그 부분에서 나폴레옹에게 아주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는 일단 첫 번째 수준의 분석 에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지나 라인 강에 있던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오스트리아 군대 전체 를 격파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평가는 좀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아야 한다." 클라 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분석을 더욱 진행시킨다. 즉 당시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각으로부터 라인강의 프랑스군이 그 후 6주 동안 나폴레옹군과 계속 합류하지 못할 수 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군은 충분한 군대를 보내서 나폴레옹 을 격파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는 "비평가가 더욱 넓은 시야로 보자면"이라고 말하면서 논의를 더 욱 진전시킨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라인 강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 은 거의 노출된 상태였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일격만 가해도 무너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렇게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행동이었을까? 나폴레옹은 원래부터 어떤 고정된 지점을 장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그 지점이 수도일지라도 말이다. "만약 오 스트리아군이 빈을 버리고 아직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넓은 곳으로 피해버린다면 어 떤 일이 벌어졌을까?"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이 이미 자신이 고안해낸 새로운 전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이제 군대는 어떤 장소를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 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적군을 괴멸시킬 수 있을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굳혔던 것이다. 사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가능성은 15년 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현실로 나 타났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나폴레옹을 물리쳤던 것이다. 1804년 클라우제비츠는 구체적인 언급을 통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예견하기도 했다. 만약 후일 보나파르트가 폴란드를 침공한다면 이탈리아에서보다는 그를 물리치기 쉬울 것 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에 들어간다면, 나는 그의 패배를 확신한다. 1812년의 러시아 공격이 초래한 치명적인 결과를 생각하면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전 쟁에서 나폴레옹식의 전략은 오히려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여전히 전투 자체를 위한 전투를 벌였고, 뭉쳐서 이동했으며, 보급선을 무시했고, 최소한의 계획을 짰으며, 기회 를 기다렸다. 하지만 과거에는 승리의 수단이던 전략이 이제 운명의 족쇄가 되었다. 1812 년 무렵 나폴레옹은 더 이상 전에 그랬던 바와 같이 단일한 군대의 지배자가 아니라 전유 럽에서 끌어모은 수많은 병력들을 통솔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1084년부터 그는 황제였고, 입법자이자 행정관,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제국의 군사지도자 였으며, 카리브해 해군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군대를 응집력 있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즉홍성 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차르의 군대는 소위 무하마드 알 리가 '빠지고 치기 (rope-a-dope)'라고 불렀던 복싱 전술을 사용했다. 알리는 상대의 헛손질을 유도하고 난 다음 상대가 힘이 빠지면 되살아나서 반격을 가하곤 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장군 쿠 투조프(Kutuzov)가 러시아 인민들이 겪는 구원의 고행에서 나온 신비로운 예지로 나폴레 옹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 좀더 회의적인 클라우제비츠는 러시아군이 더 나은 대안 이 없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사실상 러시아군은 1812년 무렵 나폴레옹의 적들이 자연스럽게 채택하게 된 전략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나폴레옹이 직접 통솔하는 군대에는 항복하는 대신, 그의 예하 장군들과 싸우는 전략이 었다. 군생활 초기부터 나폴레옹만큼 전쟁의 내적 한계 즉 마찰은 군대의 움직임과 군대의 성 공 자체에 의해 군대를 마모시킨다는 점을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과감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산과 어려운 기동전, 복잡한 통신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고, 공격할 능력이 있을 때는 언제나 공격 했다. 그는 보급선의 성가심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약탈을 선택했다.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 한 적군과는 아예 교전을 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장기적인 마찰 효과를 깨닫지 못했다. 전쟁이란 마치 주기적으로 발작 을 일으키는 환자와 같은 것이어서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는 1790년대 의 혁명전쟁에서 자신의 장병들을 자유에 대한 열정과 희망으로 적들과 맞서게 할 수 있었 다. 하지만 그가 혁명을 배신하고 황제가 되고 난 후에 전투는 제국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들은 구체제하의 일상적 전투로 퇴행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폴레옹 자신마저 변하고 말았다. 전쟁은 이제 더 이상 흥분되는 도전이 아 니라 일종의 중독이 되었다. 그는 적들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더 많은 전쟁을 원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의 전쟁은 위대한 격투사가 싸움을 통해 스스로를 마모시키는 헛수고가 되 고 말았다. 한니발(Hannibal)이 고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그 땅세서 끝없는 전투를 벌일 때, 파비우스(Fabius)는 로마인들에게 최초의 '빠지고 치기' 전략을 조언했다. 즉 "아무리 타 고난 운동선수라고 오랫동안 계속 임을 쓰면 지치듯이" 한니발 역시 그러할 테니, 그로 하 여금 전쟁에 지치게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한니발을 성과 없는 싸움속에 묶어 둔 지 수년 후, 마침내 파비우스는 그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싸움꾼의 아귀 힘이 이미 사 라진 후에는 그를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법이다." 전쟁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승리자의 에너지, 집중력, 배짱 역시 엄청나게 마모시키는 법이 다. 우리가 탄력이 뛰어난 젊은 병사들을 제트 전투기에 실어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클라우제비츠가 지휘자라면 모두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라 말했던 뛰어난 정력과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의 힘도 15년 동안 유례없는 규모와 강도의 전투들을 치르면서 서서히 떨어져갔다. 게다가 나중에는 군사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치에까지 힘을 분산해야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정치를 살펴보녀, 그가 어떻게 전쟁의 또 다른 한계, 즉 내적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정책 관련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내적으로 마찰은 성공하고 있는 군대라도 마모시킨다. 외적으로는 '군사적' 전형이 군대로 하여금 전쟁 원래 의 '정치적' 목적과 단절되게 한다. 클라우제비츠가 내린 가장 유명한 명제를 인용하자면,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외교의 지속에 불과하다." 전쟁의 내적 메커니즘은 증오와 파괴의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의 기반이 되는 사회의 외적 요구에 따 라 조절되어야만 한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사르디니아와 오스트리아 군대와 정치적 해결을 모색할 때,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얻은 정치적 이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까지 승리를 확장하려 하지 않았으며, 안정을 얻기 위해 약간의 노 획물을 양보하고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 했다. 그는 '변칙적으로' 행동했으나, 그 판단은 현명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종신집정관이 되고 황제가 된 후, 최고 군사정치 기구들을 자기 밑으로 통합 시켰다. 그러자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의욕은 프랑스 국민들의 실제 필요를 앞서 나갔다. 그는 구소련의 독재자들처럼 실제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 때에도 끊임없는 전쟁 위협과 전쟁준비 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전쟁으로 창출된 권력이 지니 는 논리로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부조리한 사회가 그 궁극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깊숙이 침공한 후, 유럽의 왕들은 그를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에서 패퇴시킬 수 있었다. 그가 정복한 모든 땅들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고, 그가 이룩한 승 리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피터 파레(Peter Paret)는 만약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프랑 스혁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가 유럽전쟁을 통해 끝없는 팽창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정부는 프랑스의 '자연 적' 국경을 유지하는데 만족했을 것이다. 그 자체로도 프랑스 영토를 상당히 확장시킨 것 이었으니까 말이다.. 혁명과 전쟁을 겪은 후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는 정치 공동체를 지배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그 공동체 안에서 통합된 국가를 이루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민간지도자로서 전쟁을 통제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전쟁이 그를 통제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사로잡혔고, 자신의 능력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전쟁을 연구했고, 경험했다. 그는 타고난 전사였으며, 일생 동안 전쟁 으로 단련되었다. 오랜 기간 그는 평화를 만들 수도,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는 승리가 일상이 될 정도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리가 그를 마모시킬 때까지 전쟁을 그만 둘 수 없었다. 천재가 하는 일이 최고의 규칙이다 나는 이제까지 나폴레옹의 '군사적'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 의 '민간 리더십'의 기초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무장한 지도자로서만 왕관을 머리에 얹을 수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지금은 워싱턴의 국립미술관 에 있는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우리는 칼을 풀고 막 시민법전을 완성한 순간의 모습, 그 러나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칼을 다시 뺄듯한 모습의 나폴레옹을 볼 수 있다. 군사 지도자로서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다양한 동기 만족시켰다. 그의 약탈 정책은 영토를 획득하는 이들에게 당장의 이익을 주었다. 게다가 자신의 병사들을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 는 혁명의 실천자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명분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이미지 를 차용하여 독수리 깃발 아래 병사들을 불러모아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전쟁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기를 유지하는 데는 대가였다. 그는 항상 압도적인 병력으로 싸웠으므 로, 병사들은 누구도 지나치게 어려운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병력을 분산하지 않았으므로, 병사들은 결코 공포와 혼란이 따르는 고립상태에 놓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자신의 병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러기에 더욱 병사들을 철저하게 통 제할 수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전체가 되어 싸우는 프랑스 국민들이었고, 모든 이들이 군 대의 일부분이었다. 또한 연극적 소질이 풍부했던 나폴레옹은 극적인 제스처를 통해 휘하 장군들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데도 능란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황제의 자리를 충분히 감당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끊 임없이 군사적 지도력을 과시함으로써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점점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황제의 광휘에 둘러싸이고 스스로 무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자, 그와 군대 사이의 유대를 유지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이제 나폴레옹은 클라우제비츠가 나폴레 옹의 성공과 실패를 설명했던 바로 그것, 전쟁의 불확실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 다. 나폴레옹의 연극적 감각 역시 이제는 그저 황제를 장식하는데 쓰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감각은 독수리, 속간, 샤를마뉴왕의 지삭환, 왕홀과 보주, 왕관 등 권력을 상징하는 것을 모두 쏟아 부은 웅장한 초상화들에 바쳐졌다. 그 중 앵그르(Ingres)가 그린 초상화는 숭배를 유발하는 모든 수단을 모아놓은 카탈로그처럼 보이기까지도 했다. 하지만 신민의 경회에서 비롯하는 충성은 오래 전 그가 호소했던 혁명의 대의가 만들어낸 충성에는 못 미 쳤다. 그는 더 이상 만인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자가 아니라 다만 일신의 영예를 호소하는 자였다. 나폴레옹의 생애는 "전쟁에는 규칙이 없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확인시켜준다. 앞서 말한 나폴레옹 전쟁의 여섯 가지 특징은, '그런' 단계에서 '그런' 병사들을 다루는 ' 그런' 지도자가 사용할 때 효과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조차도 그런 특징을 지닌 전략으로 더 이상 우세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런 특징들이 유용했던 이유는 나 폴레옹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마찰'과 '상호전형'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서 그것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석과 행동이 필요했다. 클라우제비 츠에 따르면, "천재가 하는 일이 최고의 규칙이다." 하지만 1912년 더 이상 나폴레옹은 더 이상 군사적 천재가 아니였다. 실패한 장군은 글자 그대로 병사들을 상실한다. 병사들은 그의 실수 때문에 죽는 것이 다. 그렇지 않으면 상관인 민간 지도자가 병사들을 상실할 위험을 막기 위해 그를 해고할 것이다. 동료 장교들은 그를 고립시킬 것이며, 그의 부하들은 탈영을 하거나 그를 무시할 것 이다. 나폴레옹은 병사들과 왕좌를 잃었다. 하지만 그가 초기 전쟁들에서 보여주었던 현명 함 때문에 그의 전설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설사 그의 전투들이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 용될 수는 없다 해도, 그는 항상 당시 상황을 고려한 관점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연구도리 것이다. 초기에 그의 목표는 혁명적인 것이었고, 그것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규정했다. 하지 만 안정된 권위는 혁명의 스타일에 반하는 것이었고, 황제가 된 그는 뒤늦게서야 그 사실 을 깨달았다. 군사 지도자 나폴레옹을 그린 걸작들은 그가 주문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모든 그림은 그가 제1집정관과 황제가 되고 난 후 완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 히려 1797년 자크- 루이다비드가 그린 스케치가 젊은 나폴레옹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영화감 독 아벨 강스(Able Gance)는 1920년대에 찍은 자신의 영화에서 나폴레옹역으로 알베르 뒤 도네(Albert Dieudonne)를 캐스팅했다. 그 배우가 다비드의 스케치와 아주 닮았기 때문이 다. 사실 그 영화 속의 나폴레옹이, 다비드와 앵그르가 찬란하게 그린 나폴레옹보다 훨씬 더 그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강스는 비스듬한 각도에서 그의 시선이 잠깐 멈출 때를 잘 보 여준다. 강스는 비스듬한 각도에서 그의 시선이 잠깐 멈출 때를 잡고 있다. 뒤도네가 머리 를 살짝 치켜들면서 독수리 같은 눈매를 보여줄 때 바로 젊은 나폴레옹의 모습이 생생하 게 살아난다. 그때 그의 눈은 곧게 빛나고,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순간 나는 무하마드 알 리가 펀치를 피하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쳐들며 싸우던 모습을 떠올 린다. 링에서건 전장에서건 대부분의 투사들은 싸우는 동안 많은 시간을 제대로 살피지 않 고 무턱대고 싸운다. 하지만 알리는, 나폴레옹처럼,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유형 조지 매클렐런. 적 싸우기보다 피하기에 급급한 '서부의 젊은 나폴레옹' 위풍도 당당한 조지 매클렐런은 운명적으로 영광을 얻을 사람처럼 보였다. 모두들 그렇 게 생각했고, 물론 매클렐런은 자신은 더욱 확신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 의 나이는 34세였지만 본인이 늘 자랑했듯이 훨씬 젊어 보였다. 그는 이미 군대와 사업이 라는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으로서 멕시코 전쟁 에서 명예롭게 싸웠고, 정부가 보낸 군사참관인으로 크리미아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 업가로서 오하이오와 미시시피 철도의 사장이 되어 당시 '성장산업'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군대로 돌아온 그는 사람들이 링컨 대통령의 자리에 자신을 불러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보다는 독재자가 되는 쪽을 선호했다. "난 대통령 같은 건 싫어. 독재자 라면 잘할 텐데."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클렐런은 웨스트버지니아의 리치마운틴에서 전과를 올린 덕분에(하지만 그는 싸우기보 다는 전투를 지켜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서부의 젊은 나폴레옹'이라 불렸고, 사실 겉보기엔 그러한 비교가 어울리는 듯했다. 링컨에 의해 포토맥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위세 를 과시하며 효율적으로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부대를 집결시키는 작전을 주장했고, 악조건 에서 교전하는 것을 경계했다. 표면적인 수준에서 보면,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마찰'을 생생 하게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는 장군들이 전쟁의 불확실성을 예견하 고 그에 맞서 싸울 것을 권고했다. 장군들은 전쟁이란 항상 안개 속이나 물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측불가능이란 짐을 적들에게 지우면서 자신은 오히려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매클렐런에게서 수적 우세라는 명제는 꼼짝달싹 못하는 마비의 원칙이 되었다. 그 는 자신이 충분히 훈련되고 장비가 구비된 충분한 수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병력은 아군의 두려움 때문에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매클렐런은 이러한 경향을 최고로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부동맹군의 병력을 두 배 내지는 네 배까지 올려 평가했다.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 최악의' 시나리오를 잡아서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하여 결국 실제로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찍이 전쟁 중의 루머나 얼마나 과장되는지 잘 알고 있었던 클라우제비츠는, 장군이란 "의심을 통해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매클렐런은 행동을 취할 때가 되면 나폴레옹이 가장 기피했던 느린 포위공격을 선호했 다. 그리고 막상 전장에 이르면 대접전을 피할 수 있는 책략이나 특별한 전술을 갈망했 다. 앤티어텀(남북전쟁의 격전지, 북군의 매클렐런이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을 저지한곳)에 서 그는 거의 승리의 올가미에 갇힌 듯했다. 그는 적들을 추격하며 더 나아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성취한 이득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그는 대군을 이끌고 체서피크 만 남쪽까지 깊숙이 전진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곧 리치 먼드(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맹의 수도)를 위협할 듯 보였으나, 풍부한 보급을 바라고 만을 따라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그는 필요할 때 남쪽에 있는 적들과 대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북쪽으로 향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전쟁 수행에서 각 요소들간의 내적 마찰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책에 대 한 전쟁의 외적 관계에 대해서도 감각이 무뎠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전진시키지는 않으면 서 끊임없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으며, 자신의 휘하에 있지 않은 다른 장군들을 모함하기도 했다. 게다가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노예제도폐지 반대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연 방군의 명분을 흐리게 하기도 했다.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자, 그는 부하들에게 군사적으로 는 상부의 명령을 따르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반대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해방령을 발표한 링컨을 '폭군' 이라 불렀고, '원숭이' '고릴라' '바보' '겁쟁이' 따위의 경멸적인 별 명을 붙이기도 했다. 따라서 매클렐런은 자신이 애지중지한 병사들이 바친 충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군사 지도 자의 '목표'인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전쟁의 본질, 그리고 대통령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못 이해했다(대통령은 우유부단을을 감춘 그의 영웅적인 수사 때문에 오랫동안 기만당했지만 그를 관대하게 다루었다). 매클렐런은 병사들을 사랑한다고 말하 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추종했고, 측근들과 함께 서로를 칭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 만 동료 장성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했고, 더구나 열세의 적들과 만나는 것도 피했다. 사실 상 매클렐런은 자신이 결코 참여하지 않을 전투를 준비하면서 전쟁 기간을 소비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풍당당한 용모, 고상한 수사, 철저한 준비, 운명에 대한 감각 등이 '지도자의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클렐런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 들은 어떤 목표를 향해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질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매클렐 런은 오히려 자신의 추종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