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자와 여우의 재능을 겸비한 스페인계의 아웃사이더 체사레 보르지아 이 시점에서 이 책이, 훌륭한 지도자들은 민중을 오직 좋은 방향으로만 끌고 간다는 오해 를 불러일으킬까봐 걱정된다. 이제까지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분명 존경받을 만한 바람 직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이나 로스 페로에게도 흠은 있었지만, 그들은 전쟁이나 비 즈니스에서 뛰어난 가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뛰어난 지도자도 있다. 히틀러, 네 로, 스탈린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어떤 이들은 데마고그나 독재자에게 '지도자'란 용어를 쓰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쁜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자신 의 의사를 강요하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는 "독재자들이 추 종받지 '않을 수' 없다"(맹목적인 추종을 강요한다는 의미 - 옮긴이)고 하면서, 그 때문에 그들이 지도자가 아니라고 말한다.1) 하지만 흄은 설사 경찰국가의 수장이라 할지라도 힘으 로 자신만의 의지를 강요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의 밑에 있는 경찰들의 수가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가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서는 경찰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2)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둑떼의 두목조차도 자기 무리 내에서 공정한 분배 등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남들의 평화를 잔인하게 짓밟는 강도들도 자신들의 평 화를 '유지'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3) 악한 지도자라고 해서 자신의 추종자를 악하게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외부인들 을 약탈하여 내부인들을 살찌워야 한다. 만약 그가 '모든 사람'을 약탈한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그의 목숨 또한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누 구도 결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최소한의 조화' 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은 최소한 '난 널 안 건드릴 테니까 너도 날 건드리지 마.' 정도의 상호 양해 수준에서나마 합의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더 나아가 악한 지도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려 할 때는 그를 '따르지 않을 때보다 나은' 무언가를 약속해야만 한다. 그는 당연히 "나를 따르라. 그러면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다!"라고 말해야 지,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네가 아니라)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해서는 곤란 한 것이다.4) 그리하여 설사 부도덕한 지도자라 해도 지도자인 이상은 추종자들의 이익을 돌봐주어야 한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조약이 빼앗아간 것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네로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이 문화적 가치들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전세계 노동자들의 이익을 구현하겠다고 말했다. 악한 인간 역시 그가 추종자들에게 약속한 이익 때문에 추종 받는 것이다. 추종자들의 의지가 차지하는 '구조적' 중요성은 리더십의 변증법적 본질을 잘 증명하고 있다.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동원되는 목표 안에 있는 자신들의 이익을 잘 알고 있 어야만 하는 것이다. 악한 리더십이 상징이 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 1469-1527년)만큼 이 와 같은 진실을 날카롭게 파악한 이는 없었다. 1인통치의 안내서라 할 작품 <군주론(Il Principe)>은 가히 권력에 이르는 악마의 안내서라 할 만해서, 리처드 3세 같은 포악한 왕은 자신이 새로운 속임수를 추가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리처드 3 세는 "악한 마키아벨리에게 한 수 가르쳐주겠다."라고 말한다.5)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마 키아벨리에게 권력역학을 중립적으로 분석한 사람일뿐이다. 그는 오로지 어떤 것이 권력에 유용한가를 연구했다. 그는 권력을 확립하는데 악할 행위가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연구했지 만, 결코 악 자체를 위해 악을 고무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흔히들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 책'이라는 말에 들어맞게 종종 악한 행위가 쓸모 없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정 직 자체만을 위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최선의 정책'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다룰 때는 때때로 정책적 진실을 유지해야 하며, 도둑떼 두목이라도 공평성 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를 매료시킨 교황의 서자 마키아벨리의 어두운 전설은 그를 가장 매료시킨 동시대인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 1475(?)-1507년)까지 이어졌다. 마키아벨리가 영토(로마냐) 내에서의 공평한 법집행 을, 보르지아의 리더십을 지탱해준 가장 견고한 기초로 보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사 람들은 이 두 사람을 다루면서 바로 이 점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리 더십 연구에서 마키아벨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가 아주 가까이서 관찰한 이 젊은 지도자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르지아 가문은 스페인 출신이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어두운 측면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항해한 때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임명된 로드리고 보르지아(Rodrigo Borgia)는 바티칸에 투우를 도입했다. 그는 가족끼리 있을 때는 스페인어를 썼고, 자신의 유명한 아들을 세사르(Cesar)라고 불렀다. 세사르는 누이동생<(루 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과 마찬가지로 금발의 북이탈리아 태생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스페인식으로 길러졌다. 그는 승마 묘기꾼이자 투 우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겨우 17세의 나이에 발렌시아의 추기경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성직 을 버리고 결혼하여 발렌티노 공작이 되었다. 발렌티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어떤 한 역할에 만족하지 않 고 끊임없는 무언가 다른 것을 추구했으며, 특정한 업적으로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다. 성직 자로서 부친이나 증조부(알폰소 드 보르지아 : 칼릭스투스 3세)처럼 교황이 될 수도 있었고, 군인으로서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를 세울 수도 있었으며, 킹메이커로서 알렉산데르 6세 사 망 후 협상을 통해 원하는 교황을 앉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중 어느 것도 성취하 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왜 많은 주목을 받는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재능이라는 문제에 이르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심판관이었다. 피렌체의 교양 있는 외교관으로서 그가 당시 교황청의 정책을 좋아하거나 경외할 이유는 전 혀 없었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나폴리 왕에게 복종을 강요하다가 실패하자 외국 군대(프랑 스)를 빌려 나폴리를 정복하려 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눈으로 볼 때 중대한 침략 행위였 다(<서술(Discourse)> 1.12).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이 교황의 서자에게 왜 그리도 마음을 빼앗겼던 걸까?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가 남성적 통어력<(비르투(Virtu))>과 여성적 운수<포르투나 (Fortuna)> 사이의 극적인 대립이 인간으로 구현된 존재라고 생각했다6) 그런데 마키아벨 리가 보기에, 인격화된 포르투나는 위험한 동맹군이자 화해할 수 없는 적이었다. 포르투나에게는 차분하게 대하기보다는 저돌적으로(impetuoso) 대하는 편이 좋다. 우리는 여성인 포르투나를 때리고 차서라도 제자리에 묶어놓아야 한다. 그녀는 종종 남자의 침착한 행동보다는 거친 행동이 자신을 정복하도록 허락한다. 그래서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 로 포르투나는 자신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을 만큼 거칠고 야만적이며 거침없는 젊은 남성 들에게 깃드는 것이다.7) 위의 문장은 남성적이 허세로 가득 차 잇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성의 권력에 대한 불 쾌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포르투나가 용감한 자를 선호한다고 할 때, '그녀'는 여전히 통제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종종 자신을 정복하도록 허락"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앞부분(25)에서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의 엄청난 힘을 호메로스의 글 에 나오는 제우스가 '나쁘게 다스려진 나라'를 쓸어버리는 모습에 비유하여 제시한다. 나는 그녀를, 들판을 뒤덮고 숲과 마을을 쓸어버리며 시골 하나를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옮겨다놓는 광폭한 물결과 비교하련다. 그 물결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저항할 기력도 없이 다급하게 달아날 뿐이다.8) 만약 포르투나의 분노를 예견한다면 제방을 쌓아 광폭한 물결을 다스릴 수 있다.(피렌체 사림인 마키아벨리는 봄철이면 반복되는 아르노지역의 홍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포르투나의 모든 속임수를 알아챌 수는 없다. 만약 그녀가 다음번에 분노할 때는 홍 수 대신 지진을 몰고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선견지명과 젊은이의 자신감이 잇다 해도 포르투나의 도움을 받을 확률은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도 다시 한 번 마키아벨리는 좋은 결과를 포르투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양보'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포르투나가 우리의 행위 중 반 정도는 지배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어쩌면 그보다 적은 부분을) 우리 자신에게 맡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녀는 때때로 양보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사의 반 이상을 장악하며 자신의 우 위를 유지한다. 마키아벨리의 영웅들은 이렇게 잔인한 상대와 마주해서 절망적인 노력을 펼친다. 그들은 포르투나가 앗아갈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이익을 챙겨야만 한다. 또한 포르투 나가 너무나도 변덕스럽기 때문에 그들은 패망 직전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행운의 바퀴가 다음번에는 그들을 번영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포르투나는 "알 수 없 는 경로로 움직인다.."(<서술> 2.29) 점성술상의 표식이 핀투리키오(Pinturicchio)가 교황 알 렉산데르를 위해 그린 천장화가 있는 바티칸 궁전을 가리키자, 마키아벨리의 동시대인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극단적인 두려움을 자유의 의지라는 기독교적 믿음 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아 주 제한된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존재란 사방이 계산 불 가능한 우연과 운명의 장난에 둘러싸여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권이 세워지자마자 붕괴하거 나 위대한 인물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다. 사보나롤라(Savonarola) 같은 예언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강력한 메디치(Medici)가는 (마키아벨리 생전에) 두 번이나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교황들이 군주에게 쫓기거나 군주들이 교황에게 쫓기기도 했다. 그가 살던 이탈리아는 그렇 게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강한 자의 손길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렸으며, 그 강한 자 역시 무너 졌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어떤 일을 벌이가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여야만 했 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조언들은 항상 극단을 향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고전시대를 운 운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학파가 찬양했던 ;중용'에 대해서는 경멸을 감추지 않 았다. 그의 생각은, 포르투나에 조용히 압도되기보다는 포르투나와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쓰러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는 군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친절이나 가혹함을 통 해 신민들을 놀라게 하라.9) 우리가 '중용의 길'을 고집하려 해도 포르투나는 너무나 빨리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 흐릿한 '중간길'을 발견하거나 유지하기는 불가 능하다.10)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는 돛을 풀든지 꽉 조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때 중간의 길이란 없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이 공작 '발렌티노'를 보고 경탄할 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이 악한 같은 군인 발렌티노는 일찍이 나폴리 왕의 딸에게 청혼했다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스페인계의 아웃사이더로서, 반독립 적이었던 로마냐를 다시 바티칸의 지배 아래 복속시키라는 부친의 명을 받고 온 인물이었다. 1499년 말 작업을 시작한 발렌티노는 아펜 니노 산맥 동쪽의 옛 교황령을 신속하게 장악하고 자신을 로마냐공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반도 북쪽의 베네치아나 피렌체와 동맹을 맺고 있는 지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도시국가들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대표들을 파견했고, 마키아벨 리 역시 1502년 여름 급조된 피렌체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이 외교관들이 발렌티노의 본거 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우르비노의 지배자가 책략과 재빠른 기동작전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자신의 공화국이 보여주는 수동성에 비판적인 생각 을 가지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의 진영에 도착하기 전에 피렌체에 보낸 편지에서 이 작전의 과감성을 칭찬했다. 이런 종류의 승리는 전적으로 이 영주의 예지<프루덴시아(prudentia)>에 기초하고 있습니 다. 그는 카메리노(Camerino)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서 출발하여 음식을 먹기 위해 쉬는 시 간도 없이 35마일 떨어진 카글리(Cagli)까지 직행했습니다. 그 동안 조신들에게는 카메리노 를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피렌체 10인위원회의) 각하 제위께서는 이런 종류의 놀라운 성공 을 거둔 신속한 기동작전을 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11) 마키아벨리는 이 사나이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미 존경의 눈길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발렌티노는 대낮에 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 미스터리의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대표단을 늦은 밤에 영접했고, 그들을 만나자마자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추방된 메디치가를 피렌체로 복귀시키려는 이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어떤 의심도 '피렌체' 측의 오만한 판단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당신들은 나를 암살범 취급한단 말이오!"12) 그는 친교를 바라지만 피렌체측이 그를 계속 불신한다면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점을 주목하시오! 나는 이런 상황을 유지하기 싫소, 만약 당신네들이 내가 친구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당장 당신네들의 적이 될 것이오.13) 두 시간 동안 그는 대표단을 바짝 몰아붙였고, 그들은 누구를 위협하기보다는 위협받는 쪽에 있는 자신들의 도시를 변호하느라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고향에 있는 상사에게 이 26세 의 철면피한 군주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것도 당연하다. 이 군주는 위용과 광채가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매우 용감한 사람으로 전쟁에서 대단 한 업적을 가볍게 해치우곤 합니다. 그는 영광과 정복을 위해서라면 쉬지도 않고 피로와 위 험을 모르는 채 싸움에 임합니다. 그는 언제 여기에 나타났나 싶게 금방 다른 장소에 모습 을 드러내는 신출귀몰한 장수입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을 골라 신 하로 삼고,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늘 행운의 도움을 받으면서 무적 의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고 사료됩니다.14) 발렌티노 공작은 마키아벨리 일행의 수장인 소데리니 주교에게 4일 내로 피렌체가 자신과 의 조약에 서명해야 한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소데리니는 마키아벨리를 피렌체로 파견하 여 이 문제를 논하게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피렌체는 여전히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그것은 1502년 6월 중순 이틀 동안 벌어진, 서로 밀고 당기는 어려운 외교적 접촉이었다. 내 턱까지 물이 차오르지 않는 한... 하지만 그해 9월 말 피렌체는 발렌티노 진영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반란군들은 마조네에서 모여 발렌티노를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 사건 과 관련된 소식들을 전하고, 공작과 그의 반피렌체적인 친구들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다시 (이번에 이몰라에 있는) 발렌티노에게 파견되었다. 지난번에는 마키아벨리를 겁에 질리게 했 던 공작이, 이번에는 이몰라에 도착한 그를 따스한 외교적 환대로 숨막히게 했다. 그런데 공 작은 피렌체로부터 좋은 소식과 우정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 청했던 것이다. 예전의 동맹군에 의존할 수 없었던 공작은 프랑스와 스위스에게 지원군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있어야 했다. 만약 그가 빠른 시일 내로 지원을 받지 못한다 면, 반란군을 벌주지 못하고 그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에게 우호적으로 대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약속은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그는 당장 기회 를 잡아서 발렌티노와 맹약을 맺자고 상사들을 설득하려 했다.15) 하지만 그는 상사들에게 정보를 전해주기보다는 정책을 제시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간접적 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16) 그래서 그는 발렌티노의 측근에 있는 익명의 친구를 대리인 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했다.17) 마키아벨리는 당시 발렌티노가 당장은 곤경에 처해 있지만 아직 이용가치가 큰 인물이며, 재빨리 그를 돕지 않는다면 지원 군이 도착한 후에는 피렌체가 그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작은 그에게 말했 다. "만약 그들이(피렌체 사람들이)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난 그들과 관계를 끊겠다. 내 턱까지 물이 차오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우정을 구할 필요도 없지."18) 발렌티노가 반란군 들과 휴전을 협의하자 마키아벨리는 상사들에게 더욱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을 개진했다. 하 지만 그 와중에도 공작은 반란군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9) 마키아벨리는, 만약 피렌체 10인위원회가 지금 행동할 생각이 없다면 자신을 소환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일같이 아무것도 줄 것 없이 공작을 대면한다는 것은 그에게 고역이었다.20) 마침내 공작과 그이 가신들은 마키아벨리를 만나려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반란군과의 휴전은 승인단계에 이 르렀다. 마키아벨리는 평화조약의 문서를 구해 피렌체에 보냈다(11월 10일).21) 발렌티노의 정책은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신시키고 난 다음 그를 고립시켜 혼 란스럽게 만들고 속이는 것이었다. 11월 20일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있는 와중에 전투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당황 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재 천명된 신뢰관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일단 약속이 이루어진 지금 그 신뢰관계가 깨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22) 마키아벨리는 공작이 자신 을 배반한 자들을 쉽게 용서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3) 한편 이번 곤 경으로 인해 발렌티노가 "자기 방식대로만 일을 처리하기는 어려우며 매번 행운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24) 마키아벨리의 반응이야말로 발렌 티노가 반란자들에게 심어주고자한 생각이었다. 그가 심지어 (마치 매처럼 가까운 곳에 서 매일같이 공작을 관찰하던) 자신마저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군주론>에서 발렌티 노에게 더욱 경탄을 보내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는 서로 시합을 하고 있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상대의 수를 거의 읽지 못하고 있었다.25) 12월 10일, 오랫동안 이몰라에서 대기하고 있던 발렌티노는 재빨리 움직임을 개시하여 포를리를 거쳐 체세나로 이동했다. 마키아벨리는 즉시 여장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상사들에게 그들이 주저하는 동안 공작이 다시 적들과 합류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26)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공작을 연 구하면 할수록 그는 공작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종종 제위께 서면으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군주는 매우 비밀스러운 인물입니다. 저는 공작 자신 외에는 누구도 그가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심복들은 여러 번이나 제게 그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계획을 말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명령들은 가능한 한 늦게, 당장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할 때만 내려진다고 말입니다.27) 이 글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발렌티노가 신민들에게 무시무시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여주 었을 때, 즉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던 스페인 출신의 심복 라미로 로르카(Ramiro lorqua)의 목잘린 시체를 체세나 광장에 내놓았을 때 쓰여진 것이다. 마키아벨린 이것이 무언가를 의 미한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 렵다. 다만 이 지배자가 단지 자신의 뜻에 따라 신하를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 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분명 이 행동 뒤에는 군주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 외 에도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인기 없는 신하를 회생시킨 것은, 스페인 출신 부하보 다는 새로운 신하들을 신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왜 그 일을 그렇게 갑 자기 바로 그 순간에 해치워야만 했을까? 어떤 이들은 로르카가 마조네에 있던 반란자들과 내통했다고 믿었다.28) 하지만 당시 발 렌티노는 반란자들을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만약 로르카가 반란자들의 편이었다면 그런 상 황에서 그를 참수하기는 힘든 법이다. 오히려 공작은 자기 진영 내의 (반란군들과 대적할 것을 요구하는) '강경파'를 제거함으로써 화해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다. 사실상 이 잔인한 행위는 로마냐의 이탈리아인들, 마조네 일당, 프랑스 지원군 그리 고 심지어 마키아벨리에 이르기까지 발렌티노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하던 모든 이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이제 발렌티노는 시니갈리아를 점령한 반란군과 휴전을 맺었다. 그는 정복에 도취되어 있 던 승리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그곳에 도착한 척하면서 그들을 모두 감옥에 넣어버렸다. 이 미 발렌티노로부터 시니갈리아에서 무언가 보고할 만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언질을 들은 마 키아벨리는 그날의 상황을 기록했다. 새해 전날 밤 마조네 반란의 두 주모자는 교살되었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와중에 발렌티노는 자신이 '피렌체(!)'를 위해 행한 장한 일에 대해 마키아벨리에게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작은 '피렌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마키아벨 리로 하여금 반란의 진압과정을 상세히 지켜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나를 부른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번의 성공에 대해 감사했다. 그리고 내게 이미 전날에 계획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 다.29)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 앞에서 이번 성공으로 얻은 여러 가지 이득을 설명했다. 발렌티노 는 단 일격에 프랑스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고, 이탈리아의 분열을 막았으며, 무엇보다도 피 렌체에 대항하는 친메디치 세력의 위협을 제거했다. 불행히도 마키아벨리가 이날의 대화를 기록한 상세한 첫 번째 편지는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후 마키아벨리가 쓴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파올로와 그라비나 공 등 오르시니를 살해한 발렌티노 공작 의 방법에 대한 서술>에서 그 내용을 연역해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글이 그 사건이 일어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마키아벨리가 저서 < 피렌체의 역사>에 끼워넣기 위해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30) 그들은 마키아벨리가 상사들에 게 보낸 보고서들과 <서술>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보고 서에서는 10월 초경 그가 공작을 확신에 찬 강인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서술>에서는 그 순간 공작이 "겁에 질려 있다."고 썼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시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에게 강한 인상을 준 다음, 나중에서야 자신의 불안감을 털어놓았다. 2주 후 그는 이렇게 고백했 다. 처음 당신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영토의 위험한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소, 우르비노마저 반란에 합세한 마당에 여전히 나를 확실하게 지지하는 자가 누군지도 모를 판국이었던 것이오. 새롭게 수립된 영토에서 내 모든 일이 불확실했소. 그러니 나는 당 신의 상사들이 내가 불안감 때문에 헛된 약속들을 남발했다고 믿게 하고 싶지 않았소. 하지 만 이제는 걱정이 없으니 나의 행동이 약속들을 뒷받침할 것이오 31) 그리하여 상사들이 마키아벨리에게 발렌티노의 약점들에 대해 쓴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자신도 이미 그이 몇 가지 약점들을 보고했노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32) 그리고 그는 교황의 고령과 불 확실한 건강상태 때문에 생긴 위험을 포함한 몇 가지 약점을 더 추가 할 수 있었다.33) 1502년 10월, 이미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지원이 사라지면 그의 아들인 발렌티노가 큰 시험 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보고서들과 <서술> 사이에 진짜 모순은 없다. 다만 보고서들에서는 조금씩 드러났 던 것이, 새해 전날 밤 발렌티노가 해준 이야기들 덕분에 <서술>에서는 공작의 속내까지 나타났을 뿐이다.34) 공작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서 확신에 찬 모습을 보임으로써 마키아 벨리를 속여넘겼다. 하지만 다시 힘을 회복하자 그는 자신을 약한 사람으로 꾸몄다(그는 자 신의 힘을 감추기 위해 도착한 지원군들을 해산시켰다). 공작이 어쩔 수 없이 반란군들과 다시 손을 잡는다고 그들이 생각해야지만 그이 제안을 수락할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발렌 티노 곁에서 이러한 과정들을 지켜보며 의아했지만, 그이 속내를 꿰뚫지는 못했다. 마침내 상황이 끝나고 공작이 실행한 여러 가지 일이 효과를 나타내자. 마키아벨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했던 시절은 가고 마키아벨리가 발렌티노를 다시 만난 것은, 바로 발렌티노의 부친인 교황이 사망하면서 공 작이 미래의 암운이 드리워질 때였다. 그 만남은 시니갈리아의 반란 이후 7개월 반이 지난 1503년 8월 18일에 이루어졌다. 그들이 만나지 못한 동안 발렌티노는 적들에 대비하여 (주 로 베네치아의 적대자들에 대비하여) 자신이 영토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렉산데를 6세가 사망했을 뿐 아니라, 당시 교황청에 있던 발렌티노 자신도 교황과 같은 병(아마도 말라리아)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보르지아 가문의 병이 독살기도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35) 그리하여 알렉산데르의 죽음으로 생긴 위기는 더 욱 심각한 것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에 선출된 교황 피우스 3세는 발렌티노 와 동맹관계에 있는 프랑스가 지원하는 인물이어서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성직자들 이 권력투쟁을 하는 와중에 타협의 결과로 선출된 늙은 피우시는 한 달 남짓만에 그만 사망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전히 병마에 신음하던 발렌티노는 점점 영향력을 잃어갔다. 알렉산 데르 재위 시절 로마에서 축출되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교황선출 회의단이 피우스 3세를 선출할 때부터 로마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피우스가 사망하자 자신의 선출 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 발렌티노는 처음에는 병 때문에 힘을 쓰지 못했고, 회복 초기에는 로마냐를 둘러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 상황에서는 로베레 추기경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 었다. 로마에서 발렌티노를 만난 마키아벨리는, 그가 몇 달 전 이몰라에서 만난 사람과 많이 다 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키아벨리는 피우스 3세가 선출되던 때에는 로마에 없었기 때문 에 병마에 시달리던 발렌티노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공작이 몸은 완전 히 회복되었지만, 어쩐지 그가 예전에 보여준 확신에 찬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놀랍게도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그에게 공감했지만, 조락한 그를 보고는 동정하기보다 경멸을 표시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가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고 려 때문이었다. 어쨌건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고, 예전에 발렌 티노에 대한 호의적인 보고서를 보내 (10위원회의) 피렌체 외무부를 불쾌하게 만든 경험도 있었다.36) 또한 당시 발렌티노보다 또 다른 정치의 천재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더 뛰어 났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로베레는 곧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되어 르네상스시대의 독보 적인 존재들 중 한사람으로 성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줄리아노와 잠깐 동안 만났지만, 그가 나중에 뒤집을 약속도 상대방이 신뢰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것을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칭 찬했다.37)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가 오랫동안 가문의 적이었던 자의 말을 믿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발렌티노는 줄리아노의 교황 임명을 저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이 가 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를 도왔다. 교황쪽에서도 재임 초기에는 그이 도움이 분명히 필요 했다. 발렌티노는 부친이 임명한 주교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고,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스 페인 출신 지배자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게다가 부친이 남겨준 재산도 상당했을 뿐만 아 니라. 줄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와 충성스런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로마냐의 성 들도 있었다. 특히 성들은 발렌티노가 가진 가장 훌륭한 카드라고 할 수 있었다. 새 교황은 바로 그 옛 교황령들을 필요로 했고, (후일 교황 율리우스의 훈령에 따라 잠깐 동안 로마냐를 지배한)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조차도 발렌티노가 신하들의 충성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지배자란 점을 인정했다. 로마냐는 발렌티노에게 충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마냐는 강력한 한 사람의 군주를 섬기 는 일이, 수많은 여러 군주들을 섬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힘이 약한 군주는 백성들을 잘 지키지도 못할뿐더러,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하 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냐 사람들은 발렌티노의 권위와 위대성 그리고 정직한 행정 덕분에 평화를 누렸고, 이전에는 끊임없이 암살에 이르던 작은 분쟁들을 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발렌티노의 조치들 덕분에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성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병사들과 정부 관리들, (각 지방과 교회의) 수장들에게 돈을 나눠주어 그들의 마 음을 사로잡았으며, 성직자들을 도와서 부친인 교황에게도 이익이 되게 했다. 그리하여 신민 들을 반란이 벌어지는 다른 많은 나라의 본을 받지도 않고, 지난 시절의 군주들을 그리워하 지도 않으면서 발렌티노에게 자신들을 의탁했다.38) 교황 율리우스는 자신에게도 필요한 땅에서 이렇게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자를 간 단히 내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율리우스가 가능한 한 빨리 발렌티노를 배신 하고 그를 파멸시키라는 것을 확신했다. 발렌티노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마키아벨리는 그의 판단력을 냉혹하게 비판했다. 공작은 자기 확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믿을 만한 약속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남의 말을 철저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39) 그의 죄가 그를 한 걸음 치욕으로 이끌어간 것을 보라. 신만이 그 치욕을 씻어주리라.40) 발렌티노가 몰락한 직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근세사를 쓰면서 다시 한 번 그에 대한 운문을 썼다. 신께서 알렉산데르의 목숨을 앗아가자 그의 아들이 있던 땅은 분열과 부패로 가득하게 되었고... 새 교황은 그(발렌티노)의 마음을 부추겼고 - 공작은 동류의 모사에게 속아, 그릇된 길로 나아갔나니.41)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발렌티노의 몰락에 대해 냉혹한 비평을 남기 지 12년이 지난 후 <군주론>에서 그를 '복 권' 시킨 것을 놀랍게 생각한다. <군주론>에서는 이전에 마키아벨리가 목격하지 못한 그 의 질병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그 질병의 효과 를 과장하면서 발렌티노의 몰락을 변명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구이차르디니조차도 발렌티노의 병이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것이라고 묘사했음을 감안하면, 분명 질병의 영향은 중대한 것이었다고 하겠다.42) 마키아벨리가 생각했던 바는, 그가 발렌티노를 소개할 할 때 쓴 '제한규정'들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공작의 '모든' 행동을 고려할 때, 나는 그를 교정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가 행운과 타인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아 급속하게 성장한 모든 이의 모범으로 제시하려 한 다... 따라서 누구라도, 적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1인 통치를 수립하려는 자, 동맹군을 얻고자 하는 자, 병사들의 복종과 추종은 원하는 자, 도전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자, 새로운 조치로 기조 의 방식을 대체하려는 자, 타인들에게 가혹하면서도 관대하려는 자, 반란군을 제거하고 충성 스러운 군대를 얻으려는 자, 여타 군주와 제왕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자, 그런 자들은 바 로 이 사내의 행동에서 가장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3) 마키아벨리는 발 렌티노의 짧은 전기와도 같은 실용적인 추천사를 통해, 발렌티노가 한 모든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운의 파도를 뚫고 행운의 수레바퀴를 굴려라 사실 발렌티노의 경우에는 위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욱 제한된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1인 영토의 창시자'로서 '새로운 군주'의 본보기였다.44) 마키아벨리가 속한 인문주의 전 통에서 국가를 창건하는 일은 영웅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서 도 최초의 영웅으로 국가의 창건자들이 소개되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국가의 창건자들을 일 러 인류에 가장 공헌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45) 마키아벨리의 <서술>에 따르면, '공화국'을 창건하는 일은 거의 성자와 같은 수준의 무욕이 필요한 초인간적인 사업이다. 1 인통치를 수립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지는 않지만 결과는 좀더 불안정하다. 후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의 도움 없이 자신만의 통어력(비르투)으로 정상에 이르는 자는 권력을 오래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에 이르는 과 정 동안 지배의 수단들을 적소에 배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포르투나의 도움을 받아 갑자기 정상에 이른 자는, 그 동안 친구를 만들거나 도전자들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 에 나중에야 단번에 그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 사실 그러한 일은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의 불안정한 이탈리아 정치상황 때문에 누구도 잘 해내지 못할 임 무를 위해 조언을 해야만 했다. 또한 이는 마키아벨리가 발렌티노에게 기대한 임무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지배자의 모델이 발렌티노였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마키 아벨리의 이상국가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호하던 창건자들은 플루타르크가 말한 솔론이나 리쿠르고스, 누마 등의 자기희생적 유형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런 도덕적 지도 자들을 찬양한 것을 두고, 구이차르디니는 '비도덕주의자'가 지나치게 도덕적인 태도를 보인 다고 비판하기도 했다.46)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다른 모든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형태의 정부 특히 순수한 형태의 정부는 퇴락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1512년, 그가 봉직하던 공화국이 메디치가라는 '수장' 없이 정부를 유지하는 실험에 실패하 고 명이 다하자, 마키아벨리는 1인지배를 상대적으로 좀더 안정되고 성공적인 것으로 만드 는 문제를 연구했다. 전에는 피렌체공화국을 메디치가의 손길로부터 지키려 했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로 렌초 메디치의 손자에게 헌정하자,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엇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가 <군주론>을 통해 당시 세태을 풍자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자신이 선호하던 도덕적 지배가 무너지자, 그에 이은 지배는 '필연적으로' 부도덕할 수밖에 없다고 쓴 것이다.47)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그럴듯함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관련된 그릇된 이분법에 기초 한 것이다. 즉 그가 자신의 사상을 공화국에 비친 '도덕적인 부분'과 1인지배에 바친 '비도 덕적 부분'으로 분할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이 더 나은 정부형태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공화국은 통어 력을 널리 퍼지게 하는 반면, 1인지배는 한 사람이 통어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 화국 역시 무정부 상태에 이르기 쉽다는 나름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로마냐도 1인지배라는 틀 속에서도 지배자는 무질서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설사 1인지배라는 틀 속에서도 지배 자는 훌륭한 입법자이거나 개혁자 혹은 백성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자 가 명예를 구한다면 이런 점들은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진실로 세속의 명예를 구하는 군주라면, 타락한 도시를 정복하여 카이사르처럼 그 멸망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로물루스처럼 도시를 새로이 정케 함이 옳다. 진실로 하늘은 그보다 큰 명성을 누릴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며, 인간은 그보다 더 큰 명예를 구할 수도 없다.48) 따라서 공화국이나 1인정권 중 하나만이 훌륭한 정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양자는 모두 특유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공화국은 사공이 지나치게 많은 배와 같고, 1인정권은 지배자 의 뜻에 저항하는 이들이 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그리 위대하지도 않은 실패한 모험가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할 필요가 잇는가? 개럿 매팅리(Garrett Mattingly)는 마키아벨리의 발렌티노에 대한 열정을 이 저자의 본질적인 협소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49)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마키아벨리가 직설적으로건 풍자적으로 발렌티노를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협소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록 특별한 실수 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해도, 스물일곱의 나이에 몰락했고(31세에 사망했으며), 지속적인 유 산 없이 증오와 어두운 소문만을 남긴 인물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키아 벨리가 새로운 국가를 창건할 것을 권유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일반적으로 그는 플루타 르크와 몽테스키외나 루소 같은 후일의 플루타르크 해석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 다. 즉 국가를 창건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는 도덕이 아직 타락하기 전인 한 민족의 탄생기 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읽은 고전 문헌들에서 '새로운'이란 뜻을 가진 단어들 (neos, kainos, novus)이 '조잡하고, 거칠고, 시간으로 정체되지 않은' 등의 뜻을 담고 잇듯 이, 마키아벨리에게도 '새로운(nuovo)'이란 용어는 보통 경멸적인 뜻으로 쓰였다. 즉 '새 로운' 것은 '비합법적' 혹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불안정한' 것이기도 하다. 결 국 그것은 시간의 천형을 안고 잇는 것이다.50) 마키아벨리가 발렌티노에게 그다지도 열중한 까닭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실 용주의적인' 저자가 실패의 로망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발렌티노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에는 불운이 겹겹이 찾아왔다. 즉, 알렉산데르의 죽음, 발렌티노의 투병, 피우 스 3세의 이른 죽음, 줄리아노 추기경의 악의 등이 모두 겹쳤던 것이다. 불운은, 자신의 통어력이 아니라 타인의 힘으로 정상에 오른 '새로운 군주'일 뿐 아니라 가장 불안정한 유 형의 군주로 발렌티노를 첫 번째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가, 인 간이 불운과 싸우는 불공정한 경쟁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도 놀라운 능력 덕분에 발렌티노는 2년 동안 빠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그가 맞섰던 난관들을 생각하면 발렌티노의 조치들은 매우 빼어난 것들이었다. 물론 발렌티노의 경우는 일상적 정치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 케이스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발렌티노의 극단적인 경우는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서야 하는 모든 지배자에게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인간사의 반 이상을 포르투나가 지배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발렌티노가 겪은 극단적 인 일들뿐 아니라 모든 어려운 상황에 다 해당된다. 외국의 적들, 신하들 사이의 분열, 라 이벌 지도자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매일같이 새로운 위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장애물들을 헤쳐가려는 의지는 그 자체로 일종의 통어력이자 미지의 것에 맞서는 용 기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특히 <군주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것 아니면 저것' 논리를 사용한 것도 매일의 위기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논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사적으 로 양분한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세상에는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만약 당신의 적이 뚱뚱한 쪽이라면....." 종종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51) 구이차르디니는 구분과 그에 따른 선택이 그런 식으로 명쾌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마키아벨리를 비판한 다. 예를 들어 약한 장군은 공격을 택해야 하는 반면 강한 장군은 공격을 '기다려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패러독스에 대해서도, 구이차르디니는 그런 선택이 합리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지형, 쌍방의 경제적 여건, 제3자의 침공 가능성 등 여타 많은 요소들을 검 토해야 한다고 말한다.52)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어떤 정치적. 군사적 행위의 특정한 측면들을 '그 자체로' 독 립시켜 분석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의 판단은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거나 당면 한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소위 정치의 과학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그가 이렇게 '실험실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 있 다. 그리고 각각의 독립된 선택을 현실의 망에 집어넣으면 당연히 여타 문제들과 얽히게 된 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사고 실험을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 는 명쾌한 선택으로 시작하지만, 그 선택은 곧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과정이 끝없 이 계속된다. 각각의 가지에서 뻗어나온 선택지들은 방향에 따라 수많은 다른 선택지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병사가 사격훈련을 하면서 가상의 적군들을 쏘는데, 한 명을 쏠 때마다 두 명의 다른 적군들이 나타나는 상황과 비슷하다. 병사는 끊임없이 사 격에서 적들을 모두 맟출 경우에만 훈련을 계속할 수 있다. 만약 한 명의 적이라도 놓친다 면 병사는 적탄에 맞은 것으로 간주되고 게임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충고가 실용적인 이유는, 열정과 자존심 그리고 물질적 결핍이 불안정하게 뒤섞여 이루어진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는 진리를 그가 끊 임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행운의 수레바퀴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53) 따라서 아무리 강한 권력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불안정 한 상황 속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구도 속에서 보면, 항 상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난관에 대비해야 한다. 발렌티노가 이룩한 주도권도 마조네의 반 란에 대응하면서 수립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위협 앞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부터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호메로스적인 은유를 사용하지만) 불운의 파도가 덮쳐올 것을 대비하여 제방과 둑을 쌓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키아벨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백성들의 환심을 얻 어두는 것이다. 결국 발렌티노가 가졌던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자원은 자신이 선정을 베풀 었던 로마냐 사람들의 충성심이었지 않는가. 차라리 두려운 존재가 돼라 마키아벨리 당시로서는 정치의 일부와 같았던 전쟁에 대해서 논하면서 자연적인 이점들 (지형, 자금, 대포, 요새)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사용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 이 없기 때문이다. 군주는 애정과 호의를 통해 병사들의 용기와 충성심을 얻어야 한다. 사람 들은 마키아벨리의 전쟁론을 논하면서 흔히 이 문제를 '사기'의 문제라고 요약하곤 하는데, 실은 그보다 더 큰 범주의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용병'들의 사기가 아니라 ' 시민'들의 충성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시민들의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공 화국 형태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군주'는 백성들의 존경과 지원을 얻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항상 용감한 군대 대신 불량 배 무리를 조련하는 데 노고를 다 바치게 된다. 용병들에 기반한 나라를 가진 이는 결코 강하거나 안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용병들이란 분열적이고, 탐욕스러우며, 규율이 엉망이고, 불충하며, 자기들만 있을 때는 자랑을 일삼지만 적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 에게서 신뢰를 얻지도 못한다. 그들은 오직 적이 없을 때만 침략을 막을 수 잇을 뿐이다. 그 들은 평화시에는 고용주를 자신들의 먹이로 삼을 것이며, 전시에는 고용주를 적들의 먹이로 던져줄 것이다. 그들은 고용주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장에 나 가는 것은 오로지 보수 때문인데,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많은 돈을 받는다고 생 각하는 용병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54) 이 글은 <서술>이 아니라 <군주론>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오직 공화 국의 지도자들만이 신민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식시키려 하는 것 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성채의 주민들에 관해 논하면서,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데 쓰이는 성채들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백성이 없다면 누가 그 성채들을 채울 것 인가?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성채는 신민들의 미움을 받지 않는 곳이다. 군주가 아무리 많은 성 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만약 신민들이 군주를 미워한다면 성채는 군주를 구하지 못한 다.... 나는 자신이 성채를 신뢰하기 때문에 신민의 증오를 무시하는 모든 이에게 경고한 다.55)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군주론>의 10장에서도 마키아벨리는 성채들이 때때로 쓸모가 있긴 하지만, 군주가 포위공격이라는 고난을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가질 때만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군대는 금방 성채를 적들에게 넘겨주고 말 것이다. 활기찬 영토를 지니고 잇는 신민에게 사랑받는 지배자를 공격하는 일은 쉽지 않다.56) 따라서 강력한 도시를 지닌, 신민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군주는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만약 적들이 그를 침략한다면 필히 모욕만을 얻게 될 것이다.57) 마키아벨리는 심지어 <서술 >에서 훌륭한 성채는 지배자를 타락시키고, 신민들에 대한 신뢰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충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소홀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채란 적이나 신민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되는 것이란 사실을 모두 아실 것 이다. 하지만 첫 번째 경우를 고려하면 성채란 불필요한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아예 해를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두 번째 경우 성채들이 어떻게 해를 끼치는지 살펴보자. 만 약 어떤 군주나 공화국이 신민들의 반역을 두려워한다면, 신민들의 증오를 받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런데 지배자가 악정을 행하지 않았다면 증오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지배자가 힘으 로 신민들을 꺾을 수 있다고 믿는 주요한 이유는 성채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따라서 신 민들의 증오를 불러오는 지배자의 악정은 성채의 소유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성채들은 지배자를 보호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이미 말했듯이. 성채들은 신 민들에 대한 무책임한 악행을 부추기기 때문이다.58) 마키아벨리의 체계 내에서 충성스러운 신민의 중요성은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어떤 군주 가 경쟁하는 두 세력 중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 할 경우 반드시 약한 쪽과 연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한 세력이 그에게 더욱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또 미래에 그 세력이 독자 노선을 추구할 가능성도 적기 때문이다).59) 신민에 대한 정직한 대우야말로 좋은 정책 이다. 물론 적에게는 책략과 사기를 쓰는 것이 좋다.60) 소위 '현실정치'에 대한 마키아벨 리의 유명한 교훈들도 각각의 문장을 따로 떼서 읽기보다는 맥락을 고려해서 읽으면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그는 두려움과 사랑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지배자가 있다 면, 두려움쪽을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장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군주'가 사랑을 얻을 수 없음을 각오하고 두려움을 얻기로 한다면, 그는 미움받는 것만은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얻는다고 해서 필히 미움받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신민들의 재산이나 그들의 여인들을 약탈하지 않는다 면, 미움 없이 두려움만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61) 같은 이유로 군주는 주민들이 지배자에게 지나치게 반항적인 영토를 정복하려들면 안 된 다.62) 만약 그랬다가는 승리자의 힘이 늘어나기보다는 고집스런 신민들의 저항 때문에 힘 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영토를 정복하는 일을 일종의 자 충수에 해당한다(<서술> 2.19). 1인지배의 한계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전쟁의 한계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생각과 도 상통한다. 클라우츠제비츠가 말하는 마찰(Friktion)의 역할은 마키아벨리의 포르투나 (Fortuna)의 역할과 상응한다. 하지만 마찰은 일정하지만, 포르투나는 변화무쌍한 것이다. 포르투나는 이번에는 이쪽 편을 들었다가 다음 번에는 다른 쪽 편을 든다. 이렇게 마키아벨 리의 세계는 클라우츠제비츠의 세계보다 더욱 불안정하고 극적인 것이며, 그의 '군주'는 클 라우제비츠의 장군보다 더욱 치열하게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이나 ' 군주' 할 것 없이 모두 병사의 사기나 신민의 충성 등 추종자들의 복종에 기대고 있다는 점 은 동일하다. 마키아벨리는 적이나 동맹국, 혹은 경쟁관계의 국가, 외교상의 파트너 등에 대해서는 책략이나 음모를 추천하지만, 신민들을 속이는 것은 오직 속은 신민들이 결과를 보고 군주에게 감사하게 될 경우에만 무방하다고 말한다. 군주는 포르투나에 맞서서 홀로 싸울 수 없다. 강도단의 두목도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주 '는 더더욱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는 추종 자들의 충성을 얻어낼 정도의 선심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군주가 다른 이들을 약 하게 대할 때조차도 추종자들은 그를 기쁘게 따르게 될 것이다. 사실 악당 같은 군주가 지니 매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보스턴 시장 제임스 컬리(James Curley)는 감옥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아일랜드계 선거구민들은 그가 인류에게 아무리 해 를 끼쳤다 해도 아일랜드계 주민들의 이익만은 확실하게 챙겼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이 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방약무인하게 전통을 깨고 범죄에만 예술가적 소질을 발휘하는 최고 의 도둑은, 마키아벨리를 매혹시킨 발렌티노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잇다. 우리는 주로 마키아벨리가 글로 쓴 초상을 통해 발렌티노를 안다. 발렌티노는 로마냐에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고용했지만, 한 장의 초상화도 남기지 않 았다. 하지만 발렌티노가 지녔던 영웅적인 정열의 일부는 르네상스 지도자들을 그린 여러 그림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63) 특히 티치아노(Tiziano)의 <시간의 우화(Allegory of Time)>(1565년)에는 포르투나와 끊임없이 싸우고, 결국에는 패배하고 마는 심정이 잘 형상 화되어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란 사자와 여우의 재능을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64) 타치 아노는 청년의 사냥개 같은 열정과 장년의 사자 같은 용맹과 노년의 여우같은 교활함을 묘 사하면서, 마키아벨리보다 더 마키아벨리적인 느낌을 준다. 오른쪽에서 비치는 빛은 청년의 얼굴을 환하게 감싸고 있고, 장년의 그늘은 경험을 말해주며, 노년의 형상에서는 이마를 밝 히는 엷은 빛이 마지막 남은 지혜와 재주를 말해준다.65) 마키아벨리가 악인을 찬양하고 지 배자에게 악덕을 권유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지만 이해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 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고, 권력자라면 누구나 필요에 의해 포악성과 교활함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묘사한 군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수다스런 리처드가 아니라 비극성이란 측면에서 좀더 미묘한 존재였다. 반대유형 피에로 소데리니 뛰어난 정치가가 되기에는 너무나 윤리적인 마키아벨리의 상관 어떤 학자는 마키아 벨리가 상과 피에로 소데리니를 섬기면서 그 상관에게 결여된 지배자의 기술을 배웠다고 주장한다.1) 소데리니가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관리로 봉직하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신임 받는 외교관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심지어 소데리니의 '마네킹'이란 말까지 들었다.2)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소데리니와 발렌티노를 모두 쓰러뜨리기 위해 계략을 짬으로서 둘 사이엣 묘한 연관관계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소데리니는 발렌티노의 분명한 반대유형이었 다.3)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소데리니는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정치적 지반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직위는 곤팔로니에레 델라 주스티치아(Gonfaloniere della giustizia : 정의의 지도자라 는 뜻 - 옮긴이)였다. 이 직위는 시뇨리아(Signoria), 즉 국가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을 의미하 는 것이었지만, 기실 그는 위원 9명 중 한 명분의 투표권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 리에 취임한 지 단 두 달 만에(1502년) 그는 종신위원장이 되었다. 수많은 위원회와 이사회 들이 수행하는 국가의 임무는 보다 높은 영속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련 한 경제통이었던 소데리니는 저항하는 피사를 다시 피렌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고, 활기차게 친프랑스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심기를 건드렸 다. 소데리니를 옹립한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확장하고 싶어했지만, 소데 리니는 그들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성실성과 청렴함을 찬양했 지만, 그가 (귀족들중) '일부' 분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소데 리니는 소란스런 피렌체 정치계에서 중립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한 분파에 가담해서 다른 분파와 싸우려 하지도 않았 고, 적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자신의 힘을 증진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자제심은 현명하고 윤리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덕을 지키기 위해 악을 마음대로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악이 그 덕을 쉽게 파괴할 수 있을 때는 말이다.4) 소데리 니는 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강도 높은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 에 결국 그 가치를 훼손했다. 그의 태도는 마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피렌체 시민들 앞에 '비무장의 예언자'로 나타났을 때와도 유사했다.5) 마키아벨리는 인간 소데리 니에는 경탄했지만, 지도자 소데리니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 발렌티노에는 경탄 했지만, 인간 발렌티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정치가랄 이렇게 두 개의 극단 사이에 존재한 다. 이 두 가지 이상을 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어떤 상황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윤리성과 재능의 드문 결합을 희망했고, 고대 영웅들에게서 그러한 결합을 언뜻 보았다고 생각했다. 16. 수많은 영혼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떠난 지상의 천사 도로시 데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주요 문화권에서는 신성한 인물들을 존경해왔다. 그 중 일부는 초 자연적인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즉 예언자나 신비한 방법으로 병을 고치는 이들이었 다. 어떤 이들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성을 얻었다. 그들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육신의 안락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특히 순교자들은 삶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린 사람들이었 다. 이처럼 삶 자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경외심 을 불러일으킨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이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어떤 인간이 아무리 나약할지라도, 만약 그가 죽음을 무릅쓸 용기를 지니고 있다면, 또 스 스로 그 죽음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그를 영원히 신성하게 된 다. 설사 그라 여러 모로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생명에 집착하는 반면 그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가장 숭고한 위인으로 인정한다. 우리 모 두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그의 모든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1) 하지 만 순교정신 그 자체가 영웅을 '지도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순교자들은 결코 죽기 전 에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죽고 나서도 추종자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살아가 는 동안 세상의 사소한 일들을 훨씬 뛰어넘는 대의명분에 봉사하는 일종의 '느린'순교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들 역시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다. 카톨릭 교회에서 지정한 성자들은 그들에게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성 토머스 모어(St. Thomas More)를 믿으며 가죽옷을 입고 살아가는 광신도들은, 순수한 심리학적 통찰을 통해 본다면, 영화<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내의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내의를 입지 않는 팬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어떤 성자들은 제한된 일부 숭배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성자' 역할 을 하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아빌라(Avila)의 테레사(Teresa)에 대해 말한 것을 보자. 그녀가 생각하는 신앙의 핵심은 신과 신자간의 끊임없는(불경하지 않은) 애정관계와 유사 하다. 그리고 그녀의 본보기와 가르침에 감화 받은 젊은 수녀들이 이 같은 방향으로 신앙생 활을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녀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고 있지 않으며, 그 녀가 하는 일이 일반적인 인간의 이익을 만족시킨다는 조짐도 전혀 없다.2) 사람들이 생 각하는 성자란 이런 경우일 수도 있다. 다른 문화권에 서라면 '바보'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른 다. 하여튼 인간의 이해가 먼저인 거친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천국을 증거하는 일 외에 지상의 직무를 수행하는 성자들도 있다. 그들은 보통 천 국을 증거하는 일을 먼저 염두에 두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지상에서 한 일 때문 에 존경을 바친다. 다시 한 번 제임스를 인용해보자.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는 믿을 만한 사람인 성자에게 손을 뻗친 다.3) 카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그들을 먹 이고 돌보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이런 성자에 해당할 것이다. 러스킨은 그런 사 람들을 '일하는 성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구름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성자들이나 보 통사람들에겐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성자들과는 구분된다.4) 성자들이 다른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성자들은 그 일을 넘어선 무언가 '초월적인' 목표나 보상을 위 해 일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가 아니라 해도 테레사 수녀와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미국의 전국 규모의 민간조직 또는 지방의 관련단체들. 개인 기부금으로 만들어 적십자사 같은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한다-옮긴이)를 등치 시키진 않는다. 세상 일에 헌신하는 성자들은 수레를 끄는 나귀와도 같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일한다. 이런 경 우를 하나의 독립된 리더십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한 기적 만들기나 선행과는 구 분해야 한다. 다윗 왕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신의 뜻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 하지 만 다윗은 (심지어 열렬한 추종자들의 눈으로 보아도) 도덕적인 성자가 아니었다. 박애주의 자들은 '훌륭한 일'을 하지만 그 자체로 그의 '인품' 이 훌륭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 에 반해 성자들은 그가 하는 일뿐 아니라 그이 인품으로 우러나오는 더욱 고고한 삶이나 더욱 높은 차원의 열망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이들을 추종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그들의 편이 아니어서, 그들은 종종 세상사의 중간에서 터무니없는 일을 하고 있 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잠재된 선을 통합하고 실현하는 존재 로서, 만약 그들이 없다면 그 선은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5) 그런 사람들 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관습이나 두려움 혹은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경계들은 가볍게 훌쩍 뛰어넘는(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돋보이는' 존재들이다. 따 라서 그런 존재는 보통사람들에겐 위험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연유로 그들은 아주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성자들은 그런 대접을 받은 적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있 는 법이다. 그리고 카톨릭노동자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을 창설한 도로시 데이 (Dorothy Day : 1897-1980년)는 자기 집에서 그런 대접을 받았다. 바로 부친이 그녀를 그 런 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도로시가 40세 때인 1937년, 그녀의 부친이 쓴 일기를 보자 (다섯 형제 중) 장녀 도로시는 가족의 골칫거리다. 그 애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공산주의 자가 되었고, 지금은 카톨릭 십자군이나 마차가지다. 그 애는 카톨릭계 신문사를 하나 소유 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전국으로 강연 따위를 하며 돌아다닌다. (관습법상) 남편과는 별거중 이며, 외동딸은 카톨릭계 학교에 집어넣었다. 이 나라 사람으로 카톨릭을 믿는 친구라면 그 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 애는 지난겨울에는 마이애미에서 (사촌들인) 클렘과 케이 트와 함께 살았다. 난 그 애가 내 주변에 오지 못하게 하겠다.4) 낯선 영혼에 관심이 많은 특별한 영혼 부친은 10대인 도로시가 사회당(Socialist Party)에 가입했을 때부터 그녀에 대한 경원을 멈추지 않았고, 이 때문에 데이는 괴로워했다. 그녀는 분명히 아버지를 존경했음에 틀림없 다. 그는 소설과 희곡을 쓰는 아일랜드계 작가였지만, 경마잡지에 글을 쓰는 것을 주수입원 으로 삼고 있었다. 그이 세 아들도 모두 저널리즘 계통에서 일했고, 무론 도로시도 그랬다. 그런데 그는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도로시만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원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도로시가 과거에 부친에게 반항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조용하고 말 잘 듣는 딸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 거리를 두고 살 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 사람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낯선 거리들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에 사 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하고 상상하곤 했다. 또 각기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 이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하면서 여기전기에 있는 교회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은 1904년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었다. 그때 그녀는 여덟 살이었는데, 재난을 당한 이웃들이 그녀의 집으로 피신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 녀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지진으로 집을 잃은 이웃들에게 옷가지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 다.7) 지진이 일어난 후 도로시의 가족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시카고로 향했다. 도로시는 그곳 에 있는 미시간호(Lake Michigan) 주위를 걸으며 자랐다. 그녀가 꿈꾸던 삶은 명상을 하기 엔 딱 어울리는 호숫가와 바닷가에서 결정되었다. 후일 그녀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스테 이튼 아일랜드 선착장에서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어배 나(Urbana)에 있는 일리노이주립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급진적 인 학생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가장 이색적인 학생들이었기 때 문일 것이다. 그녀는 항상 가까이 있는 것들에는 불만을 지니고 상이한 삶을 관찰하고자 했 으며, 정신의 '낯선 이웃들'을 찾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서 혹시 그 때문에 불만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책을 멀리한다면, 이 불안이 사라질지도 몰라." 그녀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8) 대학시 절 데이의 가장 친한 친구는 레이너 시먼스(Rayna Simons)였는데, 명석한 운동권 유태인 이었던 그녀는 후일 모스크바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데이가 어배나에서 2학년을 마친 후(1916년), 그녀의 가족은 모두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때 데이는 가족을 따라갔지만, 부친 의 간곡한 설들에도 불구하고 별로 수지맞지 않는 일인 급진적 저널리즘 계통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회주의 간행물인 <콜(Call)>에서 봉급을 받기 시작하자마자 집을 나와 자신의 아파트를 얻었다. 그녀는 세계산업노동조합(IWW)에 가입했고, 반징병동 맹(Anti-Conscription League)을 위해서 일했다. 급진적인 간행물들은 재정이 풍부하지 못했으므로 봉급은 낮고 일은 많았다. 후일 그녀는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과 플로이드델(Floyd Dell)이 편집장으로 있던 ,<대중(The Masses)>지로 옮겨갔는데, 그녀는 많은 직원들이 연설을 하러 나간 동안에도 잡지 만드는 일을 훌륭히 해내는 편집자였다, 때때로 그녀만 빼고 모두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녀 혼자서 집지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일했던 경험 하나 하나는 나중에 그녀가 적은 자본과 인력으 로 간행물을 발간할 때, 특히 16년 후 <카톨릭 위커(Cartholic Worker)>를 발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데이는 잡지일 관계로 슬럼가와 파업 현장 그리고 급진적인 회의등에 참석했다. 그녀는 트로츠키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와 인터뷰했고, 1차대전에 반대하는 이들과 함께 워싱턴 으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감옥에 가게 했던 가장 중요한 워싱턴 여행은 기자로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드로 윌슨이 집권하고 있는 백악관 밖에서 벌어진 여성참정권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친구 페기 베어드와 함께 그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데이는 여성참정권론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더 존스처럼 투표를 근본적인 해답이 아닌 개량주의적 조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 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감옥에 있는 여성참정권론자들에 대한 대우에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보석이 허가되자 그들은 감옥 밖으로 나갔고 또다시 체포되었다. 세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 그들은 3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데이는 오코콴 경범죄가 노역소에 수용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단식 투쟁에 들어갔 다. 당국은 <엘리스 폴(Alice Paul) 같은> 일부 저명한 여성들이 단식 중 사망할 것을 우려 해서 그들에게 강제 급식을 시행했다. 단식 6일째 되던 날 단식하던 이들은 모두 링거 주사 를 맞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0일째 되던 날 그들의 요구조건은 모두 받아들 여졌고, 그들은 나머지 수감 기간을 채우기 위해 교도소로 보내졌다. 일반 죄수들이 있은 감옥으로 간 데이는 그곳에 있는 여성들의 성생활 실태를 파악하고는 무척 놀랐다. 죄수들은 남자들이 면회오는 일요일을 대비하여 토요일 밤마다 공동목욕탕에 서 함께 목욕을 했는데, 그녀는 "나는 가장 조악한 형태의 성을 보았고, 그 성에 내 마음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부끄러워했다."라고 말했다.9) 단식으로 몸이 허약해진 21세의 데이는 심 한 우울증에 빠졌고, 그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다(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기도란 유약한 자 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그녀는 잠시나마 신앙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10) 데이가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대중>지의 동료들은 전쟁을 반대하는 선동을 했다는 이 유로 기소되어 있었고, 물론 <대중>지는 폐간되었다. 데이는 검찰에 불려가서 비협조적인 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예전의 친구들이 정 치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새로 사귄 친구들은 보다 문학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말콤 콜리(Malcolm Cowley : 얼마 후 페기 베어드의 남편이 된 사람), 맥스 보던하임(Max Bodenheim), 마이크 골드(Mike Gold), 케네스 버크(Kenneth Burke), 앨런 테이트(Allen Tate), 하트 크레인,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유진 오닐(Eugene O'Neil) 등의 작가들 이 있었다. 그 중 테이트는 남부 출신의 농민주의자로 시골 생활을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농 민주의자들은 영국에서 있었던 카톨릭 '분배주의' 운동에서 몇 가지 사상을 빌어왔는데, 도 로시 데이도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녀는 극작가 오닐-바 다와 관련된 신비주의, 술마실 때면 드러나는 카톨릭적인 시정 등-에 더욱 경도되어 있었 다. 수개월 동안 데이는 밤새 술을 마시며 보냈고, 새벽이면 거리로 나가 막 문을 열고 있는 교회 앞에서 어슬렁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오닐의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는 날 밤 역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우울해하던 친구 루이스 홀러데이(Louis Holladay)가 오닐의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안 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두 삼켜 버렸다. 잠시 후 그는 무시무시한 발작을 시작했고, 오닐과 동행들은 경찰이 마약 복용 혐의로 자신들을 조사할 것이 두려워 모두 자리를 떠났다. 하지 만 데이는 혼자 자리에 남아 그를 팔에 안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 그러고는 경찰이 찾지 못 하도록 약을 가지고 오닐에게로 가서 사건의 경과를 이야기했다.11) 파도와 함께 밀려온 신을 향한 사랑 데이는 다양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특히 오닐처럼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듯 보 이는' 남자들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12) 하지만 이번에는 라이오넬 모이스(Lionel Moise) 라는 터프가이 타입의 남자에게 깊이 빠졌다. 그는 예전에 <캔자스시티 스타(Kansas City Star)>지에서 헤밍웨이와 함께 일할 때 그를 경악케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신문사에 서 싸움을 벌이고 나와서 병원에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는데, 마침 그때 데이는 같은 병원에 서 전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주로 감수성이 여린 '남자애'들만 사귀었던 그녀 는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의 모이스에게 푹 빠져버렸다. "당신은 거칠어요. 바로 그렇기 때문 에 당신을 사랑하는 거예요."13) 그녀 자신이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이 시절의 사랑 이 야기는 데이가 쓴 유일한 소설에 기록되었는데, 일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 기도 했다.14) 심지어 데이는 모이스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그의 다른 연인들이 마약이나 경 찰과 관련된 문제로 고생할 때 그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데이는 이제 막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모이스의 연인과 함께, 그 를 찾기 위해 시카고에 도착하여 IWW 사람이 빌린 집에 묵었다. 그런데 시카고 경찰은 그 집을 급습하여 이 두 여인을 매춘 혐의로 체포한 것이었다. 이번의 수감생활은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고상한 (그리고 중산층 출신의) 여 성참정권론자들과 함께 수감되었지만, 이번에는 창녀들이 그녀의 동료였다. 데이는 창녀들이 경찰에 대항하여 서로를 보호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오래 전 그녀가 목격한 지진이 일었났을 때처럼, 그녀는 벌거벗은 채 성병 감염을 검사 받았고, 이러한 모욕은 경찰의 가혹 행위에 희생된 이들 사이에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하층민들의 생활을 경험한 그녀는 후일 '환대의 집'을 운영하면서 음식이나 잠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들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뉴욕에서 모이서와 함께 살던 때, 데이는 모이스에게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했고, 그는 낙태하라고 시켰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했지만 그는 떠나버렸다. 실연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그녀는 마침 청혼해온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해외로 나갔다. 그녀는 약 1년간을 시 칠리아에서 지내며 모이스와의 관계를 소재로 소설<열한번째 처녀(The Eleventh Virgin)> 를 썼다. 어떤 이들은 말년의 데이가 지난 삶을 참회한 것이 주로 자신의 (문란했던) 성생활 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부끄럽게 생각한 것은 자신 의 남편과 함께 한 '합법적' 섹스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이용했고, 따 라서 그 일이야말로 분명 참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15) 1921년, 데이는 미국으로 돌 아오면서 남편을 떠났다(그리고 몇 년 후 이혼을 했다). 그녀는 시카고의 <리버레이터 (Liberator)>지와 뉴올리언스의 <아이템(Item)>지 등에서 저널리스트 생활을 계속했다(뉴 올리언스에서 그녀는 직업 댄서 일을 한 후 댄서들에 대한 연재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녀 는 자신이 쓴 소설의 영화판권을 판 돈으로 스테이튼 아일랜드 해변가에 집을 마련해서 새 로운 연인 포스터 배터햄(Forster Batterham : 케네스 버크의 처남) 과 함께 살았다. 그리 고 그들 사이에는 딸 타마르(Tamar)가 태어났다. 바다를 사랑하는 해양생물학자였던 버터 햄은 많은 점에서 데이와 취향이 비슷했지만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바닷 가에서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그녀는 무언가 더욱 지고한 것이 있다는 생각에 고민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배터맨과 함께 나누었던 바다에 대한 사랑 은 그녀를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도 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그녀에게서 사 랑뿐 아니라 신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세속적인 만족의 꼭대기에서 서서 삶을 새로이 정리했다. 파도가 잦아들고 달이 떠오를 때면, 가끔씩 그는 밖으로 나가 미끼를 잡았다. 그는 늦게까 지 부두에서 낚시를 한 다음 해초와 소금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곤 했다. 그는 11월의 서늘 한 바람을 몰고 들어와 조용히 날 꼭 껴안았다. 나는 그의 스웨터에 달린 주머니에서 나오 는 모든 잡동사니들을 사랑했다. 낚시에서 돌아오며 주워온 조개껍질들, 주머니에서 흐르는 모래를 사랑했다. 나는 바다 냄새를 풍기며 침대에 들어온 그는 마르고 차가운 몸을 사랑했 고, 그의 성실성과 자부심을 사랑했다.16) 윌리엄 제임스는 도로시 데이가 카톨릭으로 귀의한 것은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 자라던 것 이 갑자기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경우라고 설명한다.17) 데이에게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계 기가 된 것은 출산이었다. 즉 자신이 아닌 다른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그녀로 하여금 신앙 으로 되돌아가게 한 것이다. 그녀는 딸 타마르가 세례 받기를 원했고, 1927년 7월 그녀의 뜻 대로 되었다. 하지만 데이 자신은 세례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부가 그녀에게 배터햄과 결혼하거나 헤어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배터햄은 원칙적으로 결혼제도 자체를 반대했고, 그녀는 그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데이 는 딸이 세례 받은 지 5개월만에 자신도 세례를 받았다. 자신과 딸을 부양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주로 카콜릭 정기간행물 인 <커먼윌(Commonweal)>에 글을 썼고 희곡도 썼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달 동안의 할리우드 작가 생활에 실망한 그녀는 멕시코로 가서 7 개월 동안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취재하여 <커먼윌>에 기고했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프리랜스 작가와 카톨릭 조직체의 비서일 을 겸하며 살았다. 그녀의 사회적 양심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녀는 워싱턴으로 가서 후버 대통령의 집무실 앞에서 벌이는 단식 투 쟁에 합류했다. 그 투쟁에 카톨릭 지도자들이 아무도 합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 녀는, 워싱턴에 있는 카톨릭 성전에 가서 홀로 기도했다 데이는 아직 자신의 새로운 신앙과 사회적 관심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급진적인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무력한 카톨릭 공동체에 들어온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했다. 그녀는 인도를 구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현대판 성 프란체스코와 성 클라라의 만남 그녀가 뉴욕의 아파트로 돌아오자 기도에 대한 응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한 남 자가 그녀의 올케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강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 이름은 피터 모랭 (Peter Maurin)으로, 1877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후 한결같이 방랑생활을 해온 재치 있는 독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노동자이자 선생인 그는 교회와 도서관을 섭렵하며 만 나는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했다.18) 1950년대에는 모랭이 버금가는 비종교적 인물인 '트럭운 전사들의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 트럭운전서 노동조합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노조 를 결성했으나 의문의 실종을 당한 인물 - 옮긴이)가 잠시 동안 미국인들을 매료시켰다. 하 지만 모랭은 1932년 데이와 만난 직후부터 죽는 날까지 그녀의 필요는 충족시켰다. 만약 그들의 만남이 중세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아마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성 클라라의 만남을 그린 조토(Giotto)가 또다시 비슷한 광경을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다만 그 그림에서는 클라라에 해당하는 데이가 프란체스코에 해당하는 모랭보다 더 빛나는 모습 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모랭 없이는 그녀의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테지만, 데이 는 모랭보다 더욱 활동적이면서 사람들은 이끄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카톨릭 신자가 된 후 데이는 교회로부터 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신부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일어 날 만하니까 일어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모랭은 신부들보다 더 현명했다. 프랑스 평신도 신앙의 전통에서 자라난 그는 수십 년 동안 카톨릭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성 토마 스의 말이나 교황의 칙서 등을 데이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또한 그는 교회가 가난 한 사람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다고 믿었다. 데이가 모랭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모랭을 지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데이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데이는 그를 떼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 각하는 진리를 금언의 형태로, 즉 암송하기 쉬운 짧은 문장으로 잘라서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었다. 후에 데이가 그의 금언들에 <쉬운 에세이들>이란 제목을 붙여 <카톨릭 워커>지에 싣자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금언들의 난해하고 심오하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데이의 아버지뻘이었던 모랭은(그는 그녀보다 20년 연상이었는데 더 늙어 보였다) 실제로 도 '믿음의 아버지' 역할을 했고, 진짜 유일한 아버지처럼 그녀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데이는 실제 아버지에게 그러하듯이 때때로 그에게 반항하기도 했다. 하 지만 그들의 불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금방 해소되었다. 첫 번째 불화는 그들의 첫 번째 기획인 신문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모랭은 기독교의 복음 은 당장 세 가지 과제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노동자의 간행물을 통한 지적인 쇄신, 기독교적 '환대'를 위한 시설(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자선'이란 말은 적합 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세 가지 였다. 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 과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예전에 바닷가에서 들을 읽고 쓰는 생활을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 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기꺼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려 했고, 좌익 신 문들을 만들었던 경험은 카톨릭 간행물을 위한 훌륭한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 게는 빈민들을 위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할 만한 자금이 없었으며, 조그만 신문의 첫 번째 발행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일하던 성 바울 교회에 있는 인쇄기를 빌렸기 때 문에 겨우 비용을 맞출 수 있었다. 데이와 그녀의 친구들이 신문에 쏟아 부은 열정에도 불구하고 모랭은 서서히 모양을 갖춰 가는 신문을 보면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세속적인 저항의 내용이 지나치 게 많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다시 말해 그의 생각이 아닌 내용이 지나치게 많았다). "모든 사람을 위한 신문은 누구를 위한 신문도 아니야." 그는 이렇게 말하곤 집을 나가버렸다. 대 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5월 1일 데이와 세 명의 동료들은 유니온 광장에 나가 메이 데이를 경축하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카톨릭 워커>지를 한 부당 1페니에 팔았다. 다시 나타난 모랭은 신문의 편집진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신문이 '지나치 게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쓴 가시에 대해서만 책임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세속의 제도들은 결국 사랑으로 극복될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제도들에 대항 하느라 지나치게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모랭은 노동조합들이 파업을 무기로 싸 울 때면 그것에 반대했다. "파업(스트라이크)은 날 치지(strike)못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 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데이의 자세는 확고했다. 그녀는 급진적 활동들이 사랑의 도구일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환대' 사업 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니치 빌리지와 할렘에 '환대의 집'을 열었다. 그리고 농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모이자. 데 이는 '녹색혁명'이야말로 공업의 억압에 대한 기독교도의 적절한 대응이라는 모랭의 주장에 굴복했다. 모랭이 농장 이상은 러시아의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의 '땅으로 돌 아가기' 운동과 테이트 같은 남부 농업주의자들의 주창했던 카톨릭 '분배주의' 가 결합한 것이어었다. 대공황기에 특히나 중요했던 '환대의 집'과 빈민숙고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는 신 문이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데이는 카톨릭 교도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교 회 '자선' 사업으로는 충족되지 않은 요구를 촉발시켰다. 즉 그녀는 밖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과 함께 살며 가진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환대의 집'들은 일자리를 잃은 수백 명의 빈민들을 먹여 살렸으며, 더욱 많은 공간을 얻어 또 다른 집을 마련했다. 이어서 10여 개이 다른 도시에도 이를 본뜬 '카톨릭 노동자의 집'이 마련되었다. 데이와 모랭을 따르는 '카톨릭 노동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 도 그들은 매일같이 기도하고 독서하고 정신교육을 받으며 엄격한 규율을 유지했다. 그들이 받은 정신교육이란 처음에는 모랭이 중얼거리는 금언들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 들과 공감하는 신부들과 교수들 그리고 신학자들이 직접 그곳에 와서 식사를 나눠주고, 세 상 속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세미나를 열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카톨릭 고위층에서는 데이에게 '조언자'를 파견하여 그녀가 교리상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 도록 경고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이는 실제로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이는 부 분적으로는 그녀가 (세속의 기관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결을 펼쳤지만) 교회와는 거의 대 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톨릭노동자운동은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할 때는 집회와 선동 을 무기로 삼았지만, 교회가 상대일 때는 모랭식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리고 데이는 자신이 뒤늦게 카톨릭에 합류한 개종자라는 의식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모태 신앙을 지닌 카톨릭 신자라면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언제나 자기 집을 수리하듯 도 전할 수 있었겠지만, 개종자인 데이의 경우는 남의 집에 초대된 손님처럼 조심스러울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교회측의 비난을 면할 수 없었던 진정한 이유는 신앙심과 사회봉사에서 보 여준 그녀의 성실함에 모두들 감복했기 때문이다.19) 이 여인은 일시적인 선심이 아니라 온 생애를 바쳐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매일같이 미사에 참석하고 매주 고해를 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글을 썼을 뿐 아니라 신앙인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교회의 일부 고위층들은 급진적인 신자인 그녀를 골칫거릴 생각했지만, 만약 그들이 그녀를 순교자로 만들었다면 더욱 골칫거리로 생각했지만, 만약 그들이 그녀를 순교자로 만 들었다면 더욱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내전에서 카톨릭 교회가 프랑코 장 군(스페인 공화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독재자-옮긴이)을 지지했을 때도, 카톨릭노동자운 동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그를 반대할 수 있었다. 또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데 이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마르크스와 레닌을 옹호하는 글을 쓸 수 있었다.20) 레 즈비언 재키가 바로 예수님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매우 빠르게 교체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톨릭노동자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하지만 데이는 동료들과의 불화, '환대의 집'에서 일어나 는 폭력 사건들, 농장경영의 실패 등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도 항상 침착성을 유지했다. '환 대의 집'들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받아들였기 때문에 항상 술주정꾼과 정 신병자 그리고 호색한과 맞서야 했다. 데이는 책을 소중히 다루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 을 듣기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물건들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싸움을 벌여서 고요을 깨뜨렸으며, 모두들 그녀에게로 와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알코올중독에 빠진 신부들과 직무 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모두 그녀가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주기를 원했다. 모랭이 생각한 농장은 영원한 가족 공동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한 이들은 자식들 을 생각해서 자신들이 경작한 땅을 소유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데이는 마침내 독신자들만 농장에 들어올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농장은 항상 일시적이고 숙련되지 못한 인력들로 넘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잠깐 동안 그녀 옆에서 와서 일하면서 후일 자신들에게 필요한 경험을 얻고 나 서 떠나버렸다. 그녀가 한 세대의 선생, 저널리스트, 사회사업가 등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중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존 코글리(John Cogley), 마이클 해링턴(Micheal Harrington),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에드 마시냑(Ed Marciniak) 등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데이가 보기에 이상을 저버린 변절이라고 생각할 만한 경우도 있었다. 해링턴은 카 톨릭 신앙을 버리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코글리는 평화공동체를 떠나 군인이 되었던 것 이다. 코글리의 경우는 2차대전 중에 발생한 수많은 변절자들 중 하나였다. 카톨릭노동자운동에 속한 많은 젊은이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라는 데이의 호소를 저버리고 군대에 입대했 던 것이다. 전쟁의 열기로 인해 몇몇 '환대의 집'들은 문을 닫아야 했고, 남은 집들에 있 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늘 그렇듯이 데이는 이번에도 어려움을 이겨냈다. 1950년대 동안 카토릭노동자운동은 핵 무장과 메커니즘에 반대하여 단식투쟁, 집회, 시위 등을 벌였다. 미국 전역에 걸쳐 새로운 '환대의 집'들이 세워졌고, 데이는 끊임없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신앙생활 을 독려했다(데이 자신의 신앙심도 더욱 깊어져갔다). 1960년대로 들어서 카톨릭노동자운동에 새로운 종류의 급진파들이 유입되자. 데이는 세대 차이의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창녀들과 술주정뱅이들에게 대단히 동정 적이었지만, 70년대가 가까워오면서 만난 레즈비언들과 마약 사용자들에겐 그와 유사한 동 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반핵시위 때문에 종종 수감되었는데, 감옥에서 본 레즈비언 들의 행태에 실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자세로 그런 배타적인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매력적인 여배우인 주디스 맬리나 벡와 함께 수감된 적이 있었다. 같은 감방에 수감된 여죄수들이 벡에게 추근대기 시작하자 데이는 화를 내며 간수를 불러 그녀를 독방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곤 데이는 그 문제로 괴로워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성급 하게 화를 낸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하지 만 현실에서 그것을 실천하긴 아주 힘들다.(벡에게) 접근했던 재키가 바로 예수님이다.21) 데이는 뉴욕 카톨릭 노동자의 집에서 마약을 사용하고 난잡한 생활을 하는 60년대의 운동 가들과 공감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느 정도 '제어'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녀는 활동가들이 만든 카톨릭평화동지회(Catholic Peace Fellow-ship)의 편지서식에서 자기 이름을 빼버렸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발생한 카 톨릭 좌파 진영의 분열 때문에, 트래피스트 교단의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고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22) 데 이는 여전히 카톨릭평화동지회의 지도자들을 존중했지만, (그들과는 달리) 피임, 낙태, 동성 애, 사제의 순결, 여성 사제의 금지 등의 교회정책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교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받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신학적 보수주의와 사회적 급진주 의를 동시에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견해는 단순히 전략적인 이유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녀가 어떤 목적을 위해, 타인의 찬사나 동의를 얻기 위해, 거짓 행위를 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이 성자형 지도자들의 역설이다. 즉 이런 지도 자들은 추종자들의 말을 가장 안 따르는 지도자이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신이 자신에게 준 메시지를 그 유효성 여부에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들은 추종자들이 아니라 신을 즐겁게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점이 추종자들이 그를 따른 이유가 되었다. 데이가 빈민들을 생각하는 수세대의 사람들에게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도 바로 그녀의 신앙적 열정 때문이었다. 데이는 지금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 가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카톨릭 워커>지는 발행을 늦추지 않고 있으며, '환대의 집'들은 여전히 곤궁에 빠진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있다. 특히 <카톨릭 워커>지는 수세대 동안 신학교와 수녀원 등에서 젊은 카톨릭 신자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고 있다. 데이가 선택의 순간에 서서 평안한 삶을 버리고 세상에 봉사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미스터리 같다. 그리니치 빌리지 시절 '꼬마요정'이라 불렸던 그녀는 질문을 던지 거나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서 누구보다도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오래 전 존 스파이 어(John Spier)가 찍은 사진을 보면, 그녀의 경이로운 시선이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녀의 초기 급진주의와 후기의 봉사정신이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반대유형 애먼 헤너시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 거리의 활동가 1950년대 들어 애먼 헤너시는 피터 모랭(1949년 사망)을 계승하여 도로시 데이 밑에서 운 동의 2인자 역할을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데이와 결혼하여 2인자역을 영원히 맡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 그는 도로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카톨릭 교도가 되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 때 그들의 나이는 벌써 60대에 접어들었고, 데이는 헤너시가 결코 한 여자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그의 모습을 존경하기는 했지 만, 또한 그가 이쁜 아가씨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1) 헤너 시는 모랭과는 아주 상반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모랭이 데이보다 20년이나 연상이었던 반면 그는 네 살 아래였다. 모랭은 기도를 중시하고 정치적 대결을 좋아하지 않으며 남들 을 조용하게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헤너시는 60년대에 소위 '거리 극장' 이라 불렀던 곳에 끼어들어 시끄럽게 떠들던 활동가였다. 사실 그는 수많은 60년대 활동가들을 이끈 존재였 다. 그는 군사무기를 훼손하기 위해 군부대의 담장을 넘는 과격한 행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그의 저항방식은 다른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애비 호프먼(Abbie Hoffman)이 "내 발길이 닿는 곳에 혁명이 있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 가지로, 헤너시는 자신을 가리켜 '1인 혁명'이라 불렀다. 그는 호전적인 수사를 잘 쓰는 평 화주의자였다. 한번은 데모 대열에 있는 그에게 한 구경꾼이 "당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고 믿소?"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 제기랄, 하지만 세계가 날 바꿀 수도 없지."라고 대답했 다고 한다.2) 데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가톨릭노동자운동이 물에 탄 듯 제구실을 못한다 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우리 중 누구도 감옥에 간 적이 없다는 거죠."3) 물론 데이는 감옥에 간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참 전인 1920년대의 일이었다.. 결국 헤너시와 데이는 반핵운동 때문에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중서부 지역에서 자라던 10대 때부터(그는 그때 이미 IWW의 회원이었다) 급진적인 여성 들을 존경했던 헤너시는 웨스트버지니아 광부들의 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마더 존스를 마차 에 태우고 간 적도 있었다. 마더 존스는 80대의 나이(그녀는 6살 정도 더 먹었다고 과장했 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옥에 들락거렸다 4) 헤너시 덕분에 데이 역시 70대의 나이에 (세자르 차베즈 농장 일꾼들과 함께) 감옥에 가게 되었다. 데이와 헤너시가 7년 동안 그렇게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 녀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헤너시는 겸손이라곤 조금 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그는 자신이 나온 모든 가시를 두세 개의 스크랩북에 오려붙여 ('환대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5) 모랭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봉사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반면, 스스로 무정부주 의자라고 공언한 헤너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모두 말해주었다. 먹는 법, 굶는 법, 자는 법, 일상 문제를 해결하는 법 따위를 모두 지적하는 항상 옳은 사 람은 역시 지겨운 사람이기도 하다. 6)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공통의 경험과 이상이 있었다. 모랭과 마찬가지로 헤너시는 노동자들과 공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육체 노동을 하며 그들의 삶을 체험 했고, 그 같은 방식으로 전도를 했다. 그가 <가톨릭 워커>지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고된 노동을 하며>란 제목으로 자신의 노동 경험을 소재로 칼럼을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데이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감옥 속에서 보낸 절망의 시기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1차대전에 참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년 7개월 동안 애틀랜타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 다. (그는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징병을 거부하고 감옥에 가려고 했으나. 그때는 어차피 징병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헤너시는 50년대의 가톨릭노동자운동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이야기만 했지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는데, 바로 헤너시가 그런 흐 름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는 <가톨릭 워커>지의 운영에도 규율을 확립했다. 엄청난 에너 지를 소유한 인물이었던 그는 연방 예산의 많은 부분이 핵무기를 생산하는 데 쓰이자 연방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앞서 핵시대의 평화운동을 펼치고 거리를 투쟁의 장으로 활용한 그는 <가톨 릭 워커>지를 60년대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데이와 그녀의 나이 든 동료 들에게 성장을 강요했다. 그는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 하지만 친구들에겐 가혹하기 그지없 다.7)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로 데이는 바로 그런 점을 사랑했다. 그의 창조적인 도발이야말로 그녀와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헤너시는 오랫동안 함께 팀플레이를 하기는 힘든 인물이었다. 사실 그가 뉴욕에서 7년 동안 진행한 사업들은 도로시 데이의 도덕적 권위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50년대 발에 이르러 그는 젊고 아름다운 한 가토릭노동자운동가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가 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인 '조 힐 하우스(Joe Hill House)'를 열었다. 그 후에도 그는 눈부 신 저항활동을 계속 벌였고, 어느 날 자신이 바라던 대로 데모 대열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 다. 1970년, 그는 78세였고,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던 중 사망한 것이다.8) 그는 자 신의 신조를 극적으로 실천한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특 이한 인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것은 가톨릭노동자운동에 합류 했을 때뿐이었다. 심지어 그때조차도 사람들은 헤너시의 '허풍'을 약간 경멸했다. 그가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깎아 내릴 수는 없다. 심지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조차도 나름의 유머를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헤너시는 데이에 비견되는 윤 리적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 아무도, 설사 그녀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데이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 점이야말 로 윌리엄 제임스가 모든 성자형 지도자들의 특징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다음 문장에서 데이와 헤너시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자들의 주변에는 그들의 신비로운 감각과 정열과 선함이 광채를 이루며 둘러싸고 있어 서 그들의 모습을 크고도 부드럽게 만든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대기와 배경이 어우러진 그 림과도 같다. 그리고 그들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센 남자들이라고 나무막대기나 돌무더기처 럼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9) 헤너시가 전장에 던져진 돌맹이였다면,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랭이 바랐듯이 사랑으로 전 쟁을 녹이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