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칼 스토츠 VS <반대 유형>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아이들만의 리그를 꿈꾼 순수주의자 칼 스토츠 스타 운동선수들은 영웅들이다. 어린 소년들 그리고 일부 나이든 사내들까지도 그들을 모 방한다. 그러나 영웅을 모방하는 것은 지도자를 추종하는 것과는 다르다. 운동선수는 이기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혹은 팀 동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등등, 다 양한 동기로 운동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직접적으로) 팬들이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 좋아서 운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그의 동기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팬의 주요 한 목적이 그에게 돈은 벌어다주거나 명성을 드높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운동선수 역시 팬들과 목적이나 동기를 공유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은 마이클 조던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마이클 조던인 것이다. 일부 스타들은 자신의 특성이나 상황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다. 이를테면 메이저리 그에 입성한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은 흑인들의 자부심과 지 위 향상의 상징이었다.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운동선수였던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어스(Babe Didrikson Zaharias)는 여성들에게 재키 모빈슨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존 재였다.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는 흑인의 자부심, 이슬람 신앙, 베트남전 반대 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영향은 그 자체로 리더쉽은 아니다. 재키 로빈슨은 다른 운동선수들을 지도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자신의 영향력에 따른 반발을 혼자 감당해야 만 하는 고립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이나 `코트'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리더십이 존재한 다. 예를 들어 풋볼팀의 경우 각각의 구성원들은 특정 구성원의지도적 영향하에서 더욱 효 과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또한 코치들은 선수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그 중 어떤 이 들은 - 누트 로크니(Knute Rockne), 빈스 롬바르디(Vince Lombardi)등- 특정한 스포츠 윤 리의 옹호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편 구단주들은 스포츠 지도자라기보다는 비즈니스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상품을 파는 일 을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팬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세일즈가 스포츠 상품의 우수성을 강 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들의 세일즈 방법은 본질적으로 다른 상품의 세 일즈 방법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스포츠광이 아니면 입사할 수 없다 1920년대에 서로 협조하면서 활동했던 보비 존스(Bobby Jones)와 조지 허버트 워커 (George Herbert Walker)를 보면 스포츠 스타와 스포츠 리더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존 스는 골프의 베이브 루스(Babe Ruth)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베이브 루스가 타고난야 구선수였듯이 존스는 골프공을 쥐고 태어난 사람같이 재능 있는 선수였다. 짧은활동 기간 (그는 28세에 은퇴했다) 존스는 모든 종류의 경쟁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룩했다. 최고의 성적 을 올렸던 1930년, 그는 US 오픈과 브리티시 오픈 그리고 US 아마추어 토너먼트와 브리티 시 아마추어 토너먼트를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 슬램'을 이룩했다. 하지만 존스는 파트타임 골퍼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던 그 시절에도 말이다. 그는 조지아 테크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고,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에모리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업 중 짬짬이 골프 대회에 나가 수많은 우승을 기록했던 것이다. 아마도 존스를 제 외한 누구도 그만큼 적은 시간 동안 경기에 나가고도 위대한 골프 선수가 된 사례는 없을 것이다.1) 그가 실수할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경기에 흥미를 잃었거나 지나치게 어려운 샷 을 시도할 때 정도였다. 다시 말해 존스에게 골프란 너무 쉬운 경기였다. 은퇴한 이후 그는 스폴딩사에서 골프 클럽을 표준화하는 일을 맡아 많은 돈을 벌었다. 또한 조지아주 오거스 (Augusta)에 직접 코스를 열었는데, 나중에 이곳은 마스터즈 인터내셔널 대회의 고향이 되 었다.2)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윤으로 되돌린 성공적인 비즈니스 지도자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지 허버트 워커는 존스의 재능을 자신의 스포츠 리더십의 기반으로 사 용했다. 원래 부유한 투자가였던 워커는 스포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메인주의 케네벙크포트에 있는 별장을 비롯 그가 소유한 두 개의 별장은 사냥, 낚시, 승마, 보트, 테니 스, 골프 등 여러 가지의 스포츠의 요람이었다. 그의 외손자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재임 기 간 중 때때로 할아버지가 물려준 메인주의 별장에 내려와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스포츠 를 즐기곤 했다. 1925년 경주마와 트랙을 구입하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재정을 지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때때로 워커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비즈니스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골프에 대한 그의 애착은 이윤이 아닌 원칙의 문제였다. 그는 프로골프연맹(PGA) 회장을 역임하면서 골프를 진흥시키는 데 열성적으로 몸을 바쳤다. 그의 사위 프레스코트 부시(조지 부시의 아버지)는 골프 실력으로 장인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 스코트 역시 PGA 회장을 역임했다. 워커는 아직 10대이던 보비 존스가 골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예전까지 스코틀랜드인이 창안하고 영국인들이 우세를점하던 골프라는 경기에서, 이제 미국이 주도권을 잡을수 있다 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워커컵'을 걸고 하는 2년 주기 브리티시 -아메리칸 대회 를 창설했다. 그리고 1922년에서 1930년까지 열린 모든 대회에서 존스는 영국팀을 누르고 미국팀을 승리로 이끌었다.3) 워커는 골프에 대해 개인적을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골프 클럽들과 선수, 대중 을 동원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워커의 이같은 열정과 능력은, 서양에서 이른바 신사 스 포츠를 후원하는 귀족적인 전통에서 온 것이었다.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와 아이비리그 대학 들은 스포츠를 인성 훈련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간주했다. 조정경기 펜싱, 폴러, 요트, 골프, 테니스 등의 스포트 중 하나에 유능하다는 것은 고귀한 특권계급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 로턴대학과 하버드대학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스포츠에서 추구하던 격렬함을 장려했다. 워 커가 회장으로 있던 투자회사(브라운 브라더즈 해리먼)는 구성원들이 모두 스포츠광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곤 했다. 1920년대에는 누구라도 브라운 브라더즈에서 일하게 될 사람을 알아맞추는 것은 그리 업 렵지 않았다. 그저 당시 스포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몇몇 사람을 고르면 되었기 때무이 다. 1929년 5월 15일 이 회사가 시카고 사무실을 열었을 때, 상근 관리자는 1920년에 데이비 스컵에 참가한미국팀의 일원이자, 같은 해 노리스 윌리엄스(R. Norris Williams)와 함께 윔 블던 복식경기에서 우승한 찰스 갈란드(Charles A. Garland)였다.4) 이 회사의 시니어 파트 너 애버렐 해리먼(Averell Harriman)은 딘 애치슨(Dean Acheson : 미국무장관 역임. 한국전 쟁의 원인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애치슨 라인으로 유명 -옮긴이)이 노를 젓던 예일 조정팀 의 코치였다. 또 이 회사는 1914년 헨리 레가타(Henley Regatta)에서 영국 팀을 물리친 kqjem 조정팀의 멤버 루이스 커티스(Louis Curtis)를 영입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 했다.5) 토스타인 베블런은 1899년작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이 러한 귀족들의 스포츠 취향을 조롱했다. 그는 이런 ds동들이 귀족들의 전쟁과 사냥 연습이 비생산적으로 변화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구별되는 귀족들의 강건함을 과 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6) 하지만 스포츠의 용도는 육체적 경쟁을 통해 정신 적 능력을 고양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보다 널리 퍼져 있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라 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지렛대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 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 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 려워함이로다.7) 사도 바울 외에도 여러 초기 기독교인들이 스포츠와 관련된 비유를 사용했다. 사실 안티 오크의 이그나티우스는 운동선수들의 모토를 창안하기도 했다. "고통이 클수록, 얻는 것도 크다(pleion kopos, polu kerdos)."8) 따라서 우리는 꼭 스포츠가 엘리트 계급의 전쟁과 사냥 훈련을 반영한다는 베블런의 생각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봐도 귀족이라고 하기 어 려운 헬레니즘 시대의 자유 노예 에픽테토스는 스포츠가 자기 단련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따라서누가 당신을 반대하거든, 신께서 코치가 되어 당신에 게 더 힘든 상대를 붙여주었다고 생각하라."9) 스포츠가 꼭 귀족계급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지만, 사실 19세기 미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10) 그 중 예외가 있었다면 야구였다. 야구는 아이들의 공놀이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는 미국 대중의 스포츠로 발전했다.11) 그리고 특권층 스포츠들도 차츰 사회적 기반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예비학교나 아이비리그에서 유행하던 신사 스포츠인 풋볼은 인디언출신의 짐 소프(Jim Thorpe)와 흑인 폴 로버슨(Paul Robeson) 같은 사회적 국외자들이 참가하는 국민적 스포츠로 탈바꿈했다. 이 분야에서리더십을 바루히한 프리츠 폴라드 (Fritz Pollard) 는 코치로서, 프로모터로서, 홍보담당으로서 일련의 흑인 풋볼팀과 흑인농구팀들을 성공시켰 다.12) 야구계에서는 흑인 리그에서 활동했던 투수 루브 포스터(Rube Foster)가 그런 지도 자 역할을 했다. 13) 쉰여섯 번의 거절도 꺾을 수 없었던 꿈 그러나 공황기였던 1938년, 거의 무일푼의 실직자였던 한 남자가 창안한 리틀리그 야구만 큼 미국인들의 생활에 여러 가지 층위에서 영향을 끼친 스포츠 프로그램은 없었다. 바로 그 사나이 칼 스토츠는 아버지를 따라 야구 경기를 본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펜실 베이니아주 윌리엄스포트에서 일하는 철도노동자였던 부친은, 뉴욕까지 가는 공짜표를 구해 아들 둘을 양키 스타디움에 데려다주고, 그날 저녁에 다시 태워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들이 뉴욕으로 가는 날이면, 다른 철도노동자들의 아이들도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이끌던 양키즈팀의 경기를 보러 스토츠가의 순례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14) 1938 년, 28세의 칼 스토츠(Carl Stotz:1910-1992년)는 공황의 와중에 이 직장, 저 직장을 전전 하면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어른들의 글러브와 자기 키만한 방망이를 든 조카들과 함께 캐치볼을 하면서 놀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스포츠 캐스터의 말투를 흉내내며 가상의 경기 '중계'를 하곤 했다. 그러던 스토츠는 왜 아이들은 머릿속의 경기가 아닌 진짜 경기를 즐길 수 없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경기라면 어른들의 경기보 다 규모를 줄이면 되지 않을까. 그때 조카들의 나이는 여덟 살과 여섯 살이었다. 그는 아이들 수준에 맞는 경기장의 규모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카들이 공을 던 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아이들에게 맞는 홈 베이스에서 퍼스트 베이스까지의 거리를 계산했 고, 투수와 포수 사이의 거리를 측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에게 맞는 경기장의 규모를 계산해서 실제 그라운드 위에 경기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경기장으로 쓸 만한 빈 땅을 찾아냈고, 야구선수가 될 아이들을 발굴했으며, 심판과 코치를 맡을 사람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팀으로 구성된 리그를 만들어내고 이들을 지원할 스폰서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56개의 회사가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57번째 회사는 한 개의 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30달러를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당시로서는 그것도 큰돈이었다. 첫 번째 시즌에 이미 스토츠는 야심찬 소년 리그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플레이오프, '월드시리즈', 명예의 전당, 기록관리서, 올스타게임 이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는 아이들의 리그였다. 그는 프로모션에서 노련한 재주를 발휘했다. 어린이 리그의 진짜 야구인 양하는 분위기를 좋아했던 지방지 스포츠 기자들을 구워삶아서, 신문들이 리그 경기 결과를 마치 메이저리그처럼 보도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츠는 지역 연회장 같은 곳에서 야구의 교육적 측면을 찬양하고, 야구가 인성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연설을 하게 되었 다. 또한 지역 마이너리그팀의 경기 전에 소년들이 약식 시범경기를 치르게 했다. 1939년에 는 유니폼을 입은 소년 선수들을 데리고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참석했다. 아버지가 스타디움으로 데려가던 철도를 따라가면서, 그는 차장을 설득하여 정거장에 설 때마다 열차 방송시스템으로 윌리엄스포트에서 온 리틀리그 선수들을 환영하는 멘트를 하도록 했다.15) 스토츠는 자신의 비전을 구상하는 데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도 탁 월했다. 그는 첫 세 시즌의 여름 동안 리그팀들이 뛸 새로운 그라운드를 만드는 데 시간 을 보냈다. 처음에 만들었던 그라운드는 이래저래 허점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 꾸밀 수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나무들을 베어내고, 낮은 지대에 배수시설을 하고, 안전 문제를 고려하여 모래와 기타 요소들을 적절하게 혼합하는 등 많은 새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친척과 친 구들, 기타 자원봉사자들이 동참하여 마침내 외야석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쿠션도 제작했 으며, 킴 이름을 새긴 유니폼까지 완성했다. 스토츠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배트와 도루가 가 능할 만큼 느린 야구공, 고무를 댄 운동화 등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거쳤다. 그는 안 전과 협동에 관해서 만큼은 완벽주의자였다. 또한 가능한 한 모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룰도 만들었다. 맨 처음에는 외야에 세 명 이 아니 네 명의 외야수를 배치했다. 왜냐하면 한 아이라도 그냥 벤치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지역 학교에서 온 아이들로 이루어질 것, 적절한 나이 제한 내에 있는 아이들로 이루어질 것 등의 룰도 만들었다. 즉 모든 팀은 최대 다섯 명의 12세 어린이를 보유할 수 있으며, 최소 세 명 이상의 8세 혹은 그 이하 나이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어린이들을 두어야 한다. 또한 복잡한 점수 제도를 만들어서, 어떤 팀이 우수 한 선수를 한 명 스카우트하면 점수를 많이 까먹어서 다른 '스타' 선수를 얻기 힘들게 만 들었다. 게다가 이 리그에는 스타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제한의 돈을 쓸 수 있는 프로야구와 는 달리 점수 제한도 있었다. 맨 처음 스토츠는 자신이 한 팀의 코치를 맡고 있는 지역 리그에만 집중했다. 리틀리그가 시작된 이듬해, 원래 셋이던 팀 수는 넷으로 늘었고, 윌리엄스포트의 다른 지역에 살던 학부 모들이 스토츠에게 또 다른 리그를 만들어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새로운 리그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지력 자체의 협조와 열기가 시작부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새로운 리그를 처음 만드는 데 필요한 조언과 격려, 그리고 필요한 장비들을 기꺼이 지원했다. 일단 또 다른 리그가 굴러가기만 하면, 두 리그팀간의 플레이오프, 그리고 나아가서 스토츠가 꿈꾸던 월드시리즈까지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2차대전의 발발은 리그의 발전에 제동을 걸었다. 코치와 심판들이 전장으로 사라졌고, 유 니폼을 비롯한 장비들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는 펜실베이니아의 다 른 마을들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정식 리틀리그가 출범했다.16) 전쟁에서 돌 아온 베테랑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가족의 재회를 축하하는 분위기는 '함께 하기'를 모토로 하던, 그리고 베이비붐으로 유명한 50년대로 이어졌고, 리틀리그는 아이젠하워시대의 상징이 되었다.17) 지친 도시 아이들의 안식처 성공은 했지만 문제들도 있었다. 스토츠는 리틀리그 구단이 있는 각 지역의 주도권을 강조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리그의 규모가 커지면서 바로 그 원칙이 침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리틀리그에서 공인된 배트, 야구공, 운동화 등을 제공하는 것은 앞날이 창창한 사업이 되었고, 따라서 스토츠는 거대한 회사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는 리틀리그 조정관 자리를 수락했지만, 여전히 처음부터 리그를 후원하던 스폰서들 중 하나의 상담역을 유지했고, 1948 년까지는 한 팀의 코치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리그 활동을 조정하고, 스폰서들 과 상대하고, 리그 룰의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 여행을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가 괴었다. 1948년 말 리그 월드시리즈의 핵심 스폰서인 US 고무(리그의 공인 운동화 제조업 체)는 스토츠에게 리그 회장직에 대한 보답으로 봉급을 제공했다. 스토츠는 최초의 후원자 인 US 고무의 광고담당 중역 찰스 더번(Charles Durban : 후일 이사회 의장이 된다)을 신 뢰했다. 1951년, US 고무가 리그 자체를 하나의 회사로 만들자 스토츠는 리그의 상업화에 불안감 을 느꼈다.18) 리그는 이제 큰 사업이 된 것이다. 리그는 상품을 승인하고, 심한 경쟁을 독 려했다. 리그의 월드시리즈는 사춘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심각한 것이 되어 버렸다. 1952년, 회사와 스토츠 간의 갈등이 마침내 그의 회장 사임으로 이어졌고, 후임으로 피터 맥거번(Peter McGovern)이 부임했다. 스토츠는 창안자와 조정관이라는 명예직만을 유 지했다. 팀들은 점점 더 경쟁을 강화했고, 한 팀의 구성원 수는 12명에서 15명으로 늘어났 다. 바로 스토츠가 우려했던 대로 벤치만 지키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치 들은 가혹한 훈련을 요구했고, 문맹의 아이는 참여할 수 없다는 규칙도 어물쩡 무시되곤 했 다. 1955년(스토츠가 국무성 요청으로 세계 여행을 한 다음해), 그는 리틀리그의 운영 방침 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리를 사임했다. 리틀리그쪽에서는 스토츠와의 불화에 대해 별 것 아 니라는 투였지만 사실 스토츠는 심각하게 대응한 것이었다.19) 1992년 82세로 생을 마감 한 스토츠는 순수주의자였다. 그리고 확실히, 비위를 맞추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자신 도 거대 기업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츠는 리틀리그 최고의 대변인 이었고, 그런 점 때문에 회사쪽에서도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기업에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 1955년 랠프 에드워즈가 그를 <이것이 내 인생이다>라는 TV 프로그램에 초청하려 했 을 때, 스토츠는 그 프로그램이 담배회사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20) 스토츠가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나타났다. 리틀리그 플레이오프에서 어린이들이 성급한 프 로레셔널리즘 때문에 가혹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21) 어쩌면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도 모른다. 어린이들이 메이저리그를 모방하려고 노력한 이상, 메이저리그의 좋은 면뿐 아니 라 나쁜 면도 닮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츠는 자신이 모집한 소년들이 자신이 꿈꾸었 던 리그 속에서 뛰기를 바랬다. 스토츠의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리틀리그는 지역 중심주의와 자원봉사 코치라 는 원칙으로 인해, 누구라도 오래 전 스토츠가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했던 일들을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 리틀리그는 어른들에게 어린 시절을 다시 꿈꾸게 한 다. 또한 험한 생활에 지친 도시 소년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시카고 재개발 계획 기간에 경험한 리틀리그에서 이를 깨달았다고 한다.22) 매년 전세계에서 최소한 일부 아버지와 아이들은 함께 경기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마치 전전의 순진했던 시절, 칼이 조카들을 데리고 함께 놀면서 야구를 그 근원까지 돌아가게 한 리틀리그를 창시했을 때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리틀리그는 시작부터, 아이들의 경기였다. 반대유형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쇼맨쉽이 뛰어난 야구계의 독재자 칼 스토츠가 룰과 공정성의 옹호자였다면,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룰의 독재자였다. 그는 24년간 야구 감독관이라는 직책을 지내면서 엄격한 법률집행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랜디스 는 종종 위기에 빠진 야구를 구해냈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스포츠 리더쉽의 명백한 표본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책에서 반복되는 질문을 해보자. 그가 만 약 스포츠계의 지도자였다면, 추종자는 누구였던가? 지도자와 추종자의 공통된 목표는 무엇 이었던가? 칼 스토츠의 추종자들은 아이들, 부모들, 자원봉사 코치와 심판들, 스폰서들, 그리 고 아이들이 규모가 축소된 야구 경기에서 협동을 배우고 즐거운 경험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어했던 지역 야구팬들이었다. 하지만 랜디스의 추종자들이 누구였는지 말하기는 쉽지 않 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복종했다. 심지어 자유로운 영혼의 대표라 할 만한 베이브 루스도 랜디스의 출장 정지 명령을 수락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각에 범죄자, 아니면 최소한 일탈 자를 다루고 있었다. 그에게 복종한 이들이 그를 추종했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볼 수 는 없 다. 사령대의 죄수가 자기에게 형을 선고한 판사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구팀 소유주들이 랜디스의 추종자들이었나?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 해 랜디스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업적인 계산 때문이었고, 구단주들은 그가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간주했다. 만약 팬들이 야구 경기가 도박 따위로 오염되었다고 느낀다면, 구단 주들은 돈을 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랜디스의 독재적인 방식을 용인한 것은 마 치 경주마 소유주가 잘 기른 말들의 약물 테스트를 감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 지만, 경주마의 주인은 약물 테스트를 집행하는 의사를 자신의 지도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랜디스는 1919년 블랙 삭스의 월드시리즈 조작 스캔들 이후 야구 경기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명을 띠고 불려왔다(미국 야구팬들은 당시 경기 조작에 참여한 시카고 화이트 삭스 선수 들을 가리켜 '블랙 삭스'라는 치욕적인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 옮긴이). 랜디스는 사람들이 우스개로 삼을 정도로 불 같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바로 그 때문에 블랙 삭스 건의 뒷처리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동정심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무한한 자기 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케네소라는 이름은 남북전쟁 당시 그의 부친 이 다리 한쪽을 잃은 전장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랜디스는 일생동안 자신의 결핍 을 장점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그는 인생을 좀더 풍부하게 경험하기 위해 다니 던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기자와 법정 속기사로 직장생활을 한 후, 그는 시카고 유니언 법대 (이 학교는 후일 노스웨스턴 법대에 통합되었다)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가 다녔던 대학 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 미국의 정치가(1860-1925년), 창조론 을 옹호하고 진화론을 공격한 것으로 유명함 - 옮긴이)이 법학 학위를 받은 곳이다. 다시 말해 학문의 요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랜디스의 부친과 함께 군에 복무했던 남부연합군 출신의 월터 그레셤(Walter Gresham)이 1892년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대통령 치하의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자, 랜디스 는 그의 비서가 되어 워싱턴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랜디스는 민주당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도 확고한 공화당원이었다. 그 후 일리노이주의 정치가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그를 연방판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법정에 앉은 그의 화려하고 고압적인 태도는 많은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그의 수많은 판결들은 상위법정에서 파기되었다. 심지어 그 의 가장 유명한 판결(스탠더드 오일의 철도 리베이트에 대해 2,9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 것)도 파기되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랜디스가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 미국의 백만 장자 - 옮긴이)를 법정으로 불러 직접 심문한 것을 좋아했다. 1차대전 중 랜디스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치안방해죄를 인정하는 판결들을 쏟아부었다. 그 대부분이 상위법정에서 파기되긴 했지만, 애국자연하는 호전주의자들은 그의 판결에 환호하 곤 했다. 랜디스는 화통하고 항상 명쾌한 판결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우직한 솔로몬쯤으 로 인식되었다. 헤이우드 브라운(Heywood Broun)은 그를 일러, "그의 경력은 미국에서 극 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지 않을 경우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말했다.1) 다행히 랜디스는 야구팀 구단주들을 기쁘게 할 만한 판결을 몇 개 내렸다. 그는 1915년에 기존 양대 리그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세 번째 리그인 페더럴리그(Federal League)를 만들 려는 노력을 무산시켰다. 그리고 1921년 연봉 조정에서 고용주들이 연봉 액수를 결정할 권 리를 옹호했다. 게다가, 야구 시즌 중에는 법정을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던 시카고 컵스의 팬이었다. 1919년 블랙 삭스 스캔들이 발생할 당시는 야구가 1920년대의 번영기로 막 넘어가기 직전 이었다. 베이브 루스는 초인적인 위업으로 야구를 새로운 차원의 경기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1920년이 되자 그는 자신의 29개 홈런 기록을 54개로 바꿔놓았다. 야구라는 거위는 황금알 을 낳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블랙 삭스라는 악한들이 이 거위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따 라서 즉각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했다. 여러 대응 방안들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소 위 '래스커 플랜(시카고의 사업가 앨버트 래스커(Albert Lasker)의 이름을 딴 것)' 이었다. 이 안에 따르면 세 사람의 이사로 구성되 이사회가 무제한의 권한을 가지고, 야구 경기를 규찰하고 규칙 위반자를 처벌하게 되어 있었다. 많은 저명인사들이 이 이사회 후보로 올랐 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대표 밴 존슨은 이 안에 반대했다. 그러자 존슨의 팀에 있던 일부 선수들이 그가 스캔들로 얼룩진 야구를 살리는 것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내셔널 팀으로 이적하겠다고 위협했다. 마침내 야구계는 서둘러 이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사회장으로 랜디스를 뽑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나중에 임명하기로 했다.2) 랜디스가 임명 되고 그가 눈치빠르게 일들을 처리해나가자, 사람들은 랜디스 혼자 '차르' 역할을 하는 것이 충분할 뿐 아니라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는 독재자를 선 호하던 시대였다. 전후 혼란과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격랑의 20년대"를 예고하던 잡음들 때문에 대중은 구식의 채찍 요법을 갈망하고 있었다. 영화계마저 마찬가지 과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침 무성영화 코미디언 패티아버클(Fatty Arbuckle)의 파티 추문(아버클의 신인 여 배우를 성적으로 농락하다가 죽게 한 사건 -옮긴이)이 있었고, 할리우드는 도덕적으로 해이 한 영화들에 눈살을 찌푸리던 윌 헤이스(Will Hays)를 '도덕 경찰'로 임명했다. FBI는 '빨 갱이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에드거 후버라는 젊은 청교도적 관료에게 거의 무제한의 권 력을 주어 전국을 감시하게 했다. 때때로 랜디스 판사는 야구 감독관으로서 권위를 행사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 사무실 앞에다가 단순히 '야구'라는 단어만 써붙였다.3) (짐이 곧 야구이 니라.) 자기가 내린 판결이 상급 법원에서 수없이 번복되는 것을 보아온 이 인물은 이제 누 구도 자신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는 자리에 앉은 것이다.4) 그는 구단주들과 선수들을 떨 게 만드는 권력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도박에 연루된 선수들을 추적했을 뿐 아니라, 도박과 관련된 구단주(필리스의 윌리스 콕스)도 추방했다.5) 그러면서 그가 감수해야 했던 얼마되지 않는 손해 중 하나는 연방판사직에서 사임하는 것이었다. 2년 동안 그는 야구계의 독재자로 서 5만 달러의 봉급을 받으면서도 연방판사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그를 탄핵하자 할 수 없이 판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야구계에서 그의 힘은 더욱 막강해졌다. 랜디스가 야구계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헤이스가 영화계에 끼친 영 향보다 더 긍정적이었고, 장기적으로는 후버가 FBI에서 행사한 독재적인 권력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약물테스트도 경마에 이롭다. 랜디스가 극적으로 포장한 '범죄와의 전 쟁'은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결코 사과하지 않고,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라는 정책을 채택한 그는 닫힌 문 뒤에서 일하면서 어떤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고, 기자회견 을 열지도 않았다. 구단주들은 그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그는 구단주들이 보유한 선수들을 다루는 채찍 역할을 했다. 선수들은 그가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랬다가는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가 야구라는 경기의 신뢰도를 지 킨다고 생각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잠깐 동안의 효과적인 일탈 방지 장치였고, 그가 일한 모든 시간 동안 대중을 상대로 한 홍보 수단이었다. 그의 잔소리로 인해 야구는 좀더 그럴 듯해 보였고, 대중은 안심했으며, 그의 일기를 연장해준 사람들은 이따금 칭찬을 받았다. 헤 이우드 브라운이 지적한 바처럼,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멋진 쇼였다. 하지만 리더십과는 아무 런 관계가 없었다. 13. 완벽한 육체로 현대무용의 역사를 쓴 타고난 예술가 마사 그레이엄 예술가는 지도자가 되지 않고도 성공적이고 중요하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예 술가의 목표는 관객에게 예술적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만족은 그 자체로 관객이 또 다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지 않으며, 그 예술가와 어떤 다른 목표를 공유하게 하지도 않 는다. 예술가의 욕망은 예술품을 완벽하게 만들고, 르에 따른 기쁨을 관객에게 주는 데 그친 다. 아른 목표들, 예를 들면 직업적 성공이나 금전적 보상 등은 더욱 사적인 문제이며, 관객 과 공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혹자는 일부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에서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별개의 목표를 가지 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바흐의 교회음악은 다른 사람들도 신을 찬양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설교자의 역 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바흐의 칸타타를 듣고 깊이 감동받았지만, 그에게 신에 대한 믿음이나 신을 찬양하는 마음이 안 생겼다고 해서, 예술작품으로서 바흐의 작품 이 실패했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바흐의 종교음악은 예술적 기쁨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바흐의 세속 칸타타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흐가 자신의 세속음 악과 교회음악 모두에 같은 아리아들과 같은 합창을 사용하려고 한 것에서도 양자간의 기본 적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 국가들은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선전 (propaganda)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진정한 예술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느 낀다. 하지만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예술가인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이 어 떤 대의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추종자들을 끌어모은다. 터너(Turner)는 자신의 회화가 담은 진실의 깊이가 자연에 도달하기를 바라던 예술가였다. 하지만 터너의 작품을 옹호하는 문장 을 쓴 존러스킨(John Ruskin)은 하나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하고 있던 그의 목표는 '근대' 예술의 이상을 변화시키고, 예술가와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동과 기준을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빅토리아시대의 예술가 지도자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이다. 그는 예술 품들 -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벽지, 의자, 책 등 -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장인 정신을 구매자들에게는 바른 취향을 길러주는 운동을 벌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는 그가 자신의 디자인 학교에 고용했던 100여 명의 장인들 외에도, 그가 유일하게 책임감 있 는 장인정신을 지닌 진정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중세의 길드체 계를 회복하려 했던 그는 정확히 예술과 사회를 동시에 개선하려 했던 인물이다.1) 예술가 와 예술가 지도자 간의 차이를 잘 알 수 있는 사례는 로스앤젤레스 무용학교라고 할 수 있다. 1915년에 세워진 이 학교는 설립자인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t. Denis)와 테드 숀 (Ted Shawn) 부부의 이름을 짜서 데니숀(Denishawn) 이라고 불렸다. 세인트 데니스는 전 세계를 돌며 무용 공연을 열거나 [특히 데이비드 벨라스코(David Belasco)가 연출한] 뮤지 컬 등에서 공연한 빼어난 무용수였다.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무용수였던 숀은, 세인트 데니스의 명성을 이용하여 그녀의 즉흥적인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건립하려 했다. 그리하여 학생들과 재정 후원자들 그리고 관객을 단순한 예술 소비자로 다루기보다 는 이제 막 떠오르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부흥시키는 데 참여할 지원자로 받아들였 다.2) 하지만 세인트 데니스는 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배운 바 없었던 그녀는 테크닉을 연마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 신이 다양한 종류의 신비주의로부터 배운 신체를 대하는 태도와 무용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 등은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계획에 부응했다. 이 두 사람은 로스앤 젤레스에서 일단의 젊은 학생들을 모아서 예술적으로 진지하고 기술적으로 전문적인 비발레 형식의 무용을 가르쳤다. 학생들 중 일부는 데니숀의 창설자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용 형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두 갈래 길로 갈라져서 20세기의 현대무용을 창조했다. 그 중 하 나는 도리스 험프리(Doris Humphrey)와 찰스 와이드먼(Charles Weidman)이 창설한 무용학 파였고,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한쪽의 학파는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 1893-1991 년)과 루이스 호르스트(Louis Horst)가 창설한 것이었다. 이 데니숀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가 르친 두 사람에게서 각기 상이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세인트 데니스로부터는 신체를 신성한 대상으로 여기며 그 에너지를 각자의 내부에서 불러내는 정신을 배웠으며(이에 반해 발레에서는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으려 한다), 숀으로부터는 그들의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활동을 하는 법을 배웠다. 가슴을 헝겊으로 묶고 남자 무용수역을 하다 1893년에 태어난 마사 그레이엄은 뒤늦게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샌 타바버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연기학교에서 공부했다. 데니숀에 입학했을 때 (1916년) 그녀는 이미 스물셋의 나이였으며,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나이 많고 덜 훈련되었으 며, 몸매도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세인트 데니스가 요구했던 섬세하지 못해서 일본무용 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세인트 데니스는 그녀의 가슴을 헝겊으로 묶고 그녀를 선이 굵은 남자 무용수역으로 활용했다.3) 아직 현대무용의 관객이 없었으며 실험적인 작업을 펼칠 만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시절, 데니숀을 유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인트 데니스는 학교가 자립할 수 없다면 교육을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숀은 프로모터의 자질을 발휘하여 무용수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돈을 벌어오게 했다. 그들은 보드빌 쇼(희가극 따위 - 옮긴이)난 백화점에서의 무용 교습, 영화 출연 등으로 비용을 보충했다고 한다. 실제로 세실 드 밀(Cecil B. De Mille) 감 독이 연출한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1919년)를 보면 회교 수도사로 분한 젊은 마사 그레이엄이 잠깐 비친다.4) 데니숀의 또 다른 젊은 스타 찰스 와이드먼은 그리피스(D. W. Griffith) 감독의 <폭풍의 고아들(Orphans of the Storm)>(1922년)에서 엑스트라로 출연 하여 돈을 벌었다. 그리피스는 자기 여배우들을 데니숀에 보내 우아한 동작을 연습하도록 시켰다고 한다.5) 1924년, 세인트 데니스와 숀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그레이엄은 데니숀을 나오게 되 었다. (그레이엄은 항상 자신을 무시했던 세인트 데니스의 편을 든 반면, 그녀를 후원했던 숀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다.) 데니숀을 위해 참여했던 보드빌 쇼 덕분에 그녀는 <그리니치 빌리지 폴리즈>(Greenwich village Follies: 시사풍자극 따위를 공연하는 여성극 단 - 옮긴이)에서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코미디언 조 브라운(Joe E. Brown), 작곡가 콜 포터(Cole Porter) 등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있는 극단에서 유사동양 적인 무용을 했다. 2년 동안 이렇게 상업적인 무용수 생활을 한 후, 그레이엄은 무용 교습 제안을 받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마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즐겁게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녀는 뉴욧주 로체스터에 새로 만들어진 이스트먼 음악학교에서 1년 동안 가르쳤다.6) 로 체스터에서 파트타임 무용수들을 가르치면서 그레이엄은 점점 철저하게 푼련되 자신만의 팀과 함께 공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미 33세였고, 몸이 망가지기 전 에 자신의 비범한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계에 보여주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그녀 는 데니숀 시절의 동료(이자 애인)였던 루이스 호르스트를 불러, 뉴욕에서 무용스튜디오를 열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데니숀에서 호르스트는 '음악감독'으로서 학교 연습 때난 공연 때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었다. 무용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섬세한 편곡자이자 작곡가인 (그레이엄보다 11년 연상의) 호르스트는 데니숀의 엄격한 학풍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던 이 학생의 천재성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그는 돈 한푼 받지 못하면서도 기꺼이 그녀와 합류하여 전체 무용 용어를 새로 쓰는 도정을 걷기로 했다.7) 그레이엄은 학생들에게 가혹하리만큼 매일같이 기본 동작들을 반복하게 했기 때문에, 가장 열정적인 학생들만이 그녀와 함께 연습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의 학생들은 모두 여성들이 었는데, 그들은 낮 동안은 웨이트리스나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만 훈련을 받았다. 그 레이엄이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음악과 무용을 가르치며 생계를 해결했던 호르스트는, 더욱 피로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레이엄 자신도 역시 바깥에서 돈을 벌어와 야 했다. 그녀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Leopold Stokowski)가 지휘하고 레오니드 마신 (Leonide Massine)이 안무를 맡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봄의 제전>(1930년)의 미국 공연 에서 희생자의 역할을 맡아 춤추기도 했다. 그레이엄은 일요일이면 '불이 커지는' 홀을 빌려 최초의 실험적인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 들에는 [뉴욕 타임스] 최초의 무용 평론가 존 마틴(John Martin) 등 여러 추종자들과 프로 모터들이 몰려왔다. 호르스트는 공황이 한창인 1933년에 최초의 현대무용 저널 [댄스 옵서 버(Dance Observer)]를 창간하여 그녀의 명분을 복돋웠다. [그레이엄의 형부 윈스롭 사전트 (Winthrop Sargeant)가 이 잡지에 자금을 제공했다.] 1930년대 동안 그레이엄의 과감한 아 이디어들은 뉴욕 아방가르드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녀의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 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의상을 직접 디자인했고, 그녀가 움직이는 공간을 규정하 기 위해 주로 조명에 의존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에게 딱 맞는 무대 디자이너로서 일 본계 미국인 조각사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를 찾아냈다. 노구치 역시 그녀처럼 동 양의 신비주의에도 관심이 많았다. 노구치는 자신의 조각품들이 그것이 속한 공간을 조각한 것이며, 그 공간이야말로 그레이엄의 그 조각들 사이에서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춤을 추었 다. 노구치는 그녀의 공연을 위해 35개의 무대를 창조했다.8) 내 무용단에 처녀는 필요없다 그레이엄은 무용이 놀랍도록 새로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발레는 대지와 싸움을 하는 것과 간다.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대지를 건드리고, 그 위를 살짝살짝 뛰어다니며, 대지로부 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중에 맞춰 오고 간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무용은 대지에서 우러나 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용수들을 대지 위에서 훈련시켰다. 그녀가 가르친 기본적인 동작은 꺾쇠십자무늬 속에서 골반을 땅에 붙이고 다리를 뒤로 한껏 젖히는 것이었다.9) 그러면 세 워진 상체는 자연스럽게 앞뒤로 흔들리며 대지로 돌아가고, 몸 전체가 공기 속에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그녀는 모든 관객이 극장 어디에서건 무용수들의 횡경막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신체가 공기를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은 원초적인 욕구, 삶에 대한 의지를 말 해주는 것이었다.10) 그녀가 만들어낸 동작들에는 본능적인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골 반의 진리(Pelvic Truth)'를 개발하고 무용수들에게 '질로 호흡하라'고 가르쳤다.11) 그녀는 신체가 원초적인 섹슈얼리티로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내 무용단에 처녀를 들여놓지 않겠다."12) 그레이엄은 고도의 엄숙성을 계발했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신비교의에 몸바친 신도들과도 같았다. 그녀는 결코 무용수들을 친구처럼 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조롱하던 사람들은 얼굴 찡그림과 불만스러운 표정, 검은 의상 등이 현대무용의 상징이라고 말하곤 했다. 줄스 파이퍼(Jules Feiffer)가 그린 정치만화에서는 현대무용가의 검은색 레오타드(댄서 , 곡예사 가 입는 것으로, 아래위가 붙은 몸에 꼭 끼는 옷 - 옮긴이)가 모더니티의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마침내 남자 무용수를 받아들이고 난 후 이 중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지닌 잠재력을 계발하고 있었고, 다른 여성들에게 그 잠재력 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오직 여성들만을 훈련시켰다. 그래서 그녀가 무용단 을 이끌고 연습하는 것을 본 남성들은 질 선망증(여성들에게 남근 선망증이 있다는 프로이 트의 주장을 패러디한 것 -옮긴이)에 걸릴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공연 중에 그레 이엄은 한두 명의 여자 솔리스트를 의식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여자 코러스 앞에서 춤추게 했다. 하지만 베닝턴 칼리지와 코네티컷 칼리지에서 여름 동안 열린 무용 클리닉에서 그레 이엄은 남학생들을 위해 다른 동작들을 안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13) 이제 그녀의 여자 무 용수들은 (대부분 180센티미터가 넘는) 남자 무용수들을 향해 달려가고 뛰어올라가야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대지에 기초한 무용을 만들면서 그렇게도 철저히 배제했던 발레의 일부 동작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14) 그녀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폴 테일러(Paul Taylor)의 도약 동작을 안무해주었다. 그리고 후일 루돌프 누레예프(Rudolpf Nureyev)와 미 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inikov)가 그레이엄의 팀에 합류했을 때, 그들도 그 동작 을 연습하게 된다. 에릭 호킨스(Erick Hawkins)는 그레이엄의 안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남자였다.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밑에서 발레를 훈련받은 호킨스는 자신의 무용에 동물적인 생명 력을 불어넣었고, 그레이엄은 이 16세 연하의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1940년대 그녀가 그와 함께 보여준 무용에는 예전에는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흥겨움과 다양성이 잘 살아 있었다. 하지만 당시 호킨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뛰어난 무용수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 르면서 호킨스는 그레이엄과 함께 무용단을 이끄는 완전한 파트너가 되기를 바랐다. 그는 바로 그레이엄과 결혼을 함으로써 그 자리를 얻었다. 말하자면 오래 전 테드 숀이 데니숀을 만들기 위해 썼던 방법을 반복한 셈이다. 그레이엄은 그런 관계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 실을 직접 경험했고, 자신은 그런 관계에 빠져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사랑이 그녀를 눈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첫사랑은 자신의 무용단이었다. 그녀는 호킨스가 무 용단의 일부라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신체 는 힘을 잃어갔다 - 여기에는 무대 안팎에서 호킨스와 벌인 충돌도 한몫을 했다.15) 결국 프랑스와 영국 공연 도중 그레이엄의 무릎이 고장을 일으켰고, 공연은 취소되었다. 호킨스는 영국에 그녀를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1951년에 마사 그레이엄과 에릭 호킨스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58세의 나이에(하지만 당시 그녀는 자신이 40대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레이엄은 다시 몸 을 추스리고 새로운 무용을 창조했다. 이제 그녀는 그리스 비극과 성경에 나오는 집념에 찬 강인한 여인들 - 메데이아(Media), 페그라(Phaedra), 요카스타(Jrcasta), 클리타임네스트라 (Clytaemnestra), 유디트(Judith), 헤로디아(Herodias) 등 - 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1950 년대에는 그녀의 고전적인 무용 작업 덕분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모든 방 면의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계속된 그레이엄의 무용 활동은 오로지 끊임없는 훈련의 결 과였다. 그녀가 휘몰아치듯 돌면서 뒤로 쓰러지는 동작을 할 때면 마치 보이지 않는 무용수 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을 하면 다른 무용수들은 놀라고 경탄한 나머지 한숨을 쉬면서 쳐다보곤 했다. 아그네스 드 밀 (Agnes De Mille)은 그 중 한 장면을 잃게 기록하고 있다. 마사가 <디티람빅(Dithyrambic)>을 공연할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깜짝 놀랄 만한 동 작을 보았다. 그녀는 한 발을 땅에 대고 앉아서 다른 쪽 다리를 바로 앞으로 쭉 올려 뻗었 다. 그리도 눈깜짝할 새에 오직 한쪽 종아리와 허벅지 힘으로 굽혔던 다리를 뻗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저럴 수가!"하고 난 소리쳤다. 나는 어떤 다른 무용수도 그런 동작 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16) 마침내 그녀의 신체가 힘을 다했을 때(70대에 들어서!) 그녀에게 훈련받은 무용수들이 그 녀가 한 놀라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명의 훌륭한 무 용수들이 그 역을 맡을 수 있었다. 그 중 펄 랭(Pearl Lang)은 어떤 평론가로부터 '그레이엄 이 맡았던 시적인 역들을 가장 잘 해석한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뛰어났다.17) (후일 랭 은 록스타 마돈나에게 교습을 한 일로 잠깐 동안 다시 유명해지기도 했다.) 키츠의 소 네트처럼 완벽한 육체 무용을 그만둔 후에도 그레이엄은 여전히 유명인사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현대예술 의 역사에서 그녀의 위치는 확고했던 것이다. 그녀는 무용과 음악뿐 아니라 영상 예술에서 도 자취를 남겼다. 노구치는 그녀의 두상을 두 번 조각했다. 그녀의 스타일 감각은 의상과 무대 디자인뿐 아니라 극장 밖의 패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에 어떤 식으 로 옷감을 입혀야 생동감이 잘 표현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기본적인 옷감들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상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던 무용수들에 게 잃게 말하기도 했다. "옷 만드는 천을 두려워하면 안 돼요, 옷을 만들 째 겁을 집어먹으 면 금방 천이 그걸 알아채고 말을 안 들으니까."18) 음악가들은 기꺼이 그녀를 위해 작곡했다.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는 <헤로디아데 (Hereodiade)>의 음악을,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봄(Appalachian Spring)>의 음악을 맡아주었다. 그 외에도 그녀와 협력한 사람들은 다리 우스 밀호드(Darius 에, 펄 랭은 <카루셀(Carousel)>에, 스튜어트 호즈(Stuart Hodes)는 <당신의 마차 를 칠해요(Paint Your Wagon)>에 출연했다. 그레이엄은 무용수가 아닌 배우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뉴욕 네이버후드 플레 이하우스 스쿨(New York's Neighborhood Playhouse School)'에 있는 동안, 모든 종류의 연 기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도왔고, 야심찬 배우들에게 자신들의 동작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 하는지를 가르쳤다. 그녀는 사람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가서 표범의 동작을 관찰하도록 했다 고 한다. 그녀의 학생이었던 리처드 분(Richard Boone)은 TV 드라마 <총을 잡고 떠나자 (Have Gun, Will Travel)>에서 잔뜩 웅크린 총잡이의 자세를 보여주었는데, 그는 이 자세 가 그레이엄에게 배울 때 고양이가 웅크렸다가 뛰어오르는 장면을 보려 연습한 것이라 고 말했다.20) 그레이엄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정 후원자였던 캐더린 코넬(Katharine Cornell)은 많은 여배우들이 그레이엄에게서 자신의 신체로 말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주장했 다. 그레이엄은 데니숀 무용단을 파괴했던 상반된 두 가지 에너지를 결합하는데 성공했다. 루 스 세인트 데니스는 오로지 무용 연기를 계발하는 데만 관심 있는 예술가였다. 테드 숀은 새로운 무용 형식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숀의 노력은 두 가지 문제 때문에 좌절되었다. 즉 우선 그에게는 창조성이 부족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파할 완 전히 새로운 무용 스타일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당시 그는 당장 상업적인 이 익을 얻어야만 하는 긴박한 상태에 있었다. 이 점이 그를 실패로 몰아갔다. 결국 그는 예술 가 지도자라기보다는 단순한 기업가가 되었다. 만약 이 책에서 그를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 려고 했다면, 나는 그를 로스 페로 같은 세일즈맨의 범주에 넣었을 것이다.21) 마사 그레이 엄 역시 여러 가지 일에서 기업가적 기질을 봄 발휘해야 했다. 기금을 모으고, 후원자를 모 으고, 무용 평론을 장려하고, 수입을 올리고, 자신의 무용단에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는 무 용 교습을 하는 것 등이 그런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도, 자 신의 이름이나 무용단의 기술 혹은 현대무용의 상업적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많은 요청들을 거부했다. 예술가 지도자로서 그녀는 자신이 진흥시키고자 한 현대무용의 진지한 명분을 훼 손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컬트 종교의 사제와도 같이 자신을 정케 유지하여 상 품 판매만을 추구하는 장사꾼의 길을 철저하게 피했다. 그녀는 테드 숀이 바로 그런 장사 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엄은 시대와 장소를 타고난 예술가였다. 그녀의 동작들은 현대적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적이었다. 폴 테일러는 현대무용이 "재즈를 제외한다면 진정으로 미국적인 것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예술형식"이라고 말했다.22) 그레이엄은 독립적인 뿌리를 지닌 무용을 창조하 기 위해 처음에는 발레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저항했다. 그 때문에 금세기 초 미국의 무용계 를 지배하던 러시아계 이민 예술가들과 사이가 나빠졌다. 그레이엄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공연하던 도중 마신과 마찰을 일으켰다. 1931년 뉴스쿨에서 현대무용을 강의할 때 는, 디아길레프(Diaghilev) 무용단의 전통을 미국에 도입한 마이클 포킨(Michel Fokine)이 그녀에게 엉터리 질문공세를 퍼붓고 조롱하는 바람에, 그녀는 결국 그를 쫓아내고 말았 다.23) 발레 전통 내에서 혁신을 시도하던 조지 발란신은 오랫동안 그레이엄과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59년 발란신이 그레이엄의 무용단에게 자신의 무용단과 공동 공연을 하 자고 제안함으로써 화해할 수 있었다.24) 그때는 이미 그녀의 미국적인 예술이 발레와 공존 할 수 있을 만큼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때였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무용단에 동양계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 무용수를 받아들여 그들과 함 께 독특한 무용세계를 창조했다. 신비주의의 개념에 해박했던 그녀는 경의를 가지고 동양사 상을 공부했으며, 그녀의 현대적 사고는 재즈 리듬을 수용하게 했다. 그녀는 토착 미국인(인 디언을 말함 - 옮긴이) 무용수를 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거의 매년 뉴멕시코의 무용 페스티 벌을 관람했다. 그리고 한때 그녀의 남편이었던 에릭 호킨스는, 자신이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의 경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토착 미국인의 정신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레이엄은 자신의 무용이 분명한 미국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적이란 것 자체가 그녀의 목표는 아니었다. 모든 예술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한 편으로는 사회적 목표들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예술을 존중하고 보호하려 했다. 예술가 지도자의 도구는 분명 예술품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바로 예술가 지도자를 다른 지도자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터너의 예술이 지닌 정신을 찬양하면서, 바로 그가 그린 그림과 같은 예술적이고 찬란하며 자연에 충실한 문장을 썼다. 모리스는 놀랍도 록 아름다운 벽지와 제본작업을 통해 협동적 장인정신을 찬양하는 자신의 명분을 떠받쳤다. 그레이엄이 독창적이고 미국적인 무용형식이라는 명분을 수호하기 위해 쓴 도구는 바로 매 끄럽게 정제된 자신의 신체, 과감하게 드러낸 젊은 육체의 아름다운 곡선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키츠(Keats)의 소네트처럼 완벽하게 정서된 육체였다.25) 반대유형 마돈나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을 뿐인 뛰어난 엔터테이너 마사 그레이엄이 스물셋의 나이 에 데니숀 무용학교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전에 무용 교습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상 태였다. 1978년 마돈나 루이스 베로니카 치코네(Madonna Louise Veronica Ciccone : 1958 - )가 그레이엄의 무용 방법을 가르치던 그레이럼 무용단의 스타 펄 랭의 교습을 받 기 위해 등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치코네 양은 그전에도 수년 동안 무용 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는 그녀의 자질을 알아본 한 교사에게 배웠고, 그 다음에는 미시간 대학에서 무용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앤아버의 교정에서 2년을 보낸 그녀는 뉴 욕으로 가서 랭에게 무용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미시간대학에서 무용 시범을 보여 준 적이 있었던 랭은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에 있는 앨빈 에일리 (Alvin Ailey)의 보조 무용수들에 대한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치코네는 에일리의 팀에 자리 를 얻은 후 랭에게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1) 하지만 랭이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혹독한 훈련은 이 참을성 없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에게 맞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엄식 무용을 배우려고 왔지만, 실은 고대의 신화보다는 나이트클 럽 스트립댄서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치코네는 자신의 긴 이름을 줄여 마돈나(그녀 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하다)로 바꾸고, 여러 조그만 록그룹들을 전전했다. 그 중에는 '모던 댄스'라는 이름의 록그룹도 있었다. 그녀는 가수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전에 드럼도 배 웠 다. 이 모든 분야에서 그녀는 다른 드러머들이나 무용수, 가수, 작곡가들보다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재주에 그녀의 공격적인 쇼맨십과 세일즈맨십이 결합되자 그녀는 록 문화의 여신이 되었다. 그리고 록 콘서트라는 광적인 대중의식의 중심 에서 빛나는 커다란 상징이 되었다. 마돈나가 모델로 삼은 이들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프린스(Prince), 보이 조지(Boy George) 등 노골적인 섹스 어필을 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호한 구석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들 중 일부를 향해 격렬한 비난을 해대기도 했다. 최신의 흐름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마돈나를 비롯한 대중문화 현상들에 대해 집중적으 로 연구했다. 그 현상들은 미국인들에게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특이한 문화만큼이나 이상한 것이었다. 엘비스(Elvis) 숭배의 경우 팬들은 일종의 종교적 숭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마돈나를 둘러싸고도 부많은 학문적 연구들이 이루어졌고, 그 연구자 들은 그녀의 연극적인 제스처들을 현학으로 포장했다. 둘째로 필자는 전복적인 의미로 MP[마돈나 현상(Madonna Phenomenon)]를 다루는 더욱 추상적인 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이 논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담론으로, 우리는 마돈나 자 신의 담론까지 포함하여 마돈나를 둘러싼 서로 갈등하는 여러 담론 구성들을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담론 구성들이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정체성에 연결되지 않은 기초 체 계라는 의미의 성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2) 계속하여 마돈나를 '보 다 높은 의미'를 담는 수용체로 본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연구들에 따르면, 그녀는 ' 남자들의 장난감' 이미지를 통해 페미니즘을 손상시켰지만, 자신의 행동과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태도를 통해 페미니즘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가부장적 권위를 파괴했지만, 또한 자기 상업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소비주의를 정당화했다.3) 그녀는 레스비언들이 성고정성(gender fixity)을 파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무기이지만4), 그녀가 다 이어트에 들어갈 때는 여성에게 날씬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적 독재에 복종하는 것이기도 했 다.5) 그녀가 종교를 이용할 때면,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조롱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 앤드로 그릴리(Andrew Greeley) 신부에 따르면 - 신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 었다.6) 마사 그레이엄은 문화비평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예술을 보여주었다. 그때도 오늘날과 같은 이론가들이 있었다면, 아마 그들이 마돈나에게서 여러 가지를 읽어냈듯이 그 녀의 예술에서도 원초적인 의미들을 찾아냈을 것이다. 사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몇 가지 비교할 만한 점들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신체를 보여주면서 영상예술과 의상 과 음악을 이용했다. 또 1991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진실 혹은 대담(Truth or Dare)> 를 보면, 마돈나가 자신의 무용단을 생각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 그레이엄이 학생들에게 쏟 았던 애정에 비견됨을 알 수 있다. 그 영화에서 마돈나는 무용수들을 '내 아이들'이라고 부 르기까지 한다. 물론 그녀는 보통 어머니들과는 아주 다르게 자신의 아이들이 '정서적으 로 불구 상태'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마돈나는 침대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게이 무용수 들에게 지분거리는 장난을 치며, "아직 젖 먹을 시간이 아니야." 따위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드러난 가슴에서 그들을 떨어지게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난 여자를 싫어하는 호모 녀석은 고용하지 않을 꺼야." 마돈나의 섹스 선풍은 기묘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별로 충동질하지는 않았다. 마조리 로슨 (Marjorie Rosen)이 메이 웨스트(Mae West)에 대해 쓴 것은 마돈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다. "그녀의 유혹적인 말이 할로(Harlow)난 크로포드(Crawford)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 주 추하게 보였을 것이다."7) 마돈나의 팬들은 학자들이 마돈나에게서 찾아낸 전복적인 가 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다른 록스타의 공연에서는 흔한 알코올이나 약물을 별로 복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나 테스처가 아무리 지저분하다 해도 그녀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천진성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제시 헬름스(Jesse Helms : 극우 방송평론가 출신 미상원의원 - 옮긴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의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 이기는 힘들다. 물론 우리는 이제 메이 웨스트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당시 검 열당국이 메이에게 가했던 압력은 마돈나의 경우보다 훨씬 심해서, 그녀는 라디오 출연이 금지될 정도였다. 영화제작소 헤이스 오피스는 <90년대의 벨르(Belle of the Nineties)>를 찍으면서 그녀가 검열관들이 검토한 시나리오에 쓰여진 것 외에 어떤 다른 말이나 동작을 지어내지 않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감시인을 두었다고 한다.8) 웨스트는 여장 남자에 관한 희곡을 쓰면서 자신의 걸음걸이를 연구했다.9) 마돈나의 고등학교 무용 선생이었던 동성애 자 크리스토퍼 플린(Christopher Flynn)은 그녀를 게이바와 디스코테크에 데려갔고, 마돈나 의 캠프(동성애적 하위문화의 일종 - 옮긴이) 취향은 바로 그런 곳들에서 형성되었다.10) 영화 <진실 혹은 대담>에서 마돈나가 무용수들을 어린애 취급할 때, 팬들은 그녀가 섹스란 어른들이 하는 괴상한 짓거리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이때 팬들 역시 아이들이 된다!). 선구적인 영화 평론가 파커 타일러(Parker Tyler)는 메이 웨스트의 섹슈 얼리티에도 이와 유사한 '어린애 취급하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1) 영화 <귀 여운 자기(My Line Chickadee)>에서 어눌한 사기꾼이자 전문적인 음란물 반대 운동가로 나오는 필즈(W. C. Fields)는 그녀의 완벽한 제물이었다. 타일러는 이 영화에서 웨스트가 그 를 다루는 방식이 어린아이를 달랠 때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라고 말한다.12) 도발적 인 언행에서 어린아이 같은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 때문에 마돈나의 신성모독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진다. 그녀가 십자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벌거벗은 남자가 매갈려 있기 때문"이 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녀의 팬들이 교회를 모욕하고 다닐 리도 없는 것이다.13) 또한 그녀 가 (성직자들이 입는) 통상복을 입는다고 해서 그녀의 팬들이 '신에 대한 열망'을 경험하 리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마돈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엔터테이너인 것이다. 마돈나는 자신의 예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했다. 즉 "나 자신 이 즐기고, (주로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그녀의 목표이다.14) 바흐가 대위법을, 드뷔시가 조성을 중시했다면, 마돈나에게 중요한 것은 충격이다. 충격이야 말로 그녀가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매체인 것이다. 그녀는 예술가이긴 하지만, 예술가 지도자는 아니다. 그녀는 추종자들을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하는가? 마돈나의 초기 팬들은 그녀의 옷차림을 흉내냈다. 하지만 마돈나의 목표 가 어린 10대들이 스웨터 밖에 브라를 입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인사를 흉내내는 것은 그저 팬들이 하는 짓거리 이상이 아니다.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에서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이 웃통을 벗고 나오자 내의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 졌다. 존 케네디 대통령이 모자를 안 쓰고 다니자 많은 남자들이 그를 따랐다. 이같은 사실 로 보아 남성들도 10대 소녀들처럼 스타들을 따라 유행에 휩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 지만 케네디를 '추종했던' 사람들에 '모자를 벗는 행위로' 그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한 것 은 아니었다. 공연하는 가수로서 마돈나는 나름의 재주와 규율을 지니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예술적, 역동적 만족감을 준다. 사업가로서 지금까지 그녀는 현명하고 성공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녀 는 다재다능한 것이다. <애타게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와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등의 영화를 통해서 그녀는 자신이 뛰어난 코미디언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레이엄과는 달리 그녀는 어떤 학파를 결성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개발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명분을 위해 운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레이엄은 무용을 공연했을 뿐 아니라, 나름의 미학을 설파했다. 물론 나는 예술가에게 창조행위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바흐는 자신의 예술을 전파하기 위해 무슨 운동을 벌이지는 않 았다. 그저 행동으로 예술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예술 부문에서 '리더십'을 이 해하고자 한다면, 분명 마돈나가 아니라 마사 그레이엄을 살펴보아야 한다. 14. 마틴 루터 킹 VS <반대 유형> 로버트 패리스 모제스 자신의 꿈 속으로 청중을 끌어들인 위대한 설교자 마틴 루터 킹 대부분의 리더십 훈 련과정에는 대중연설 연습도 포함되어 있다. 고위공무원들은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전에 리 허설을 하고, 정치가들은 발성법과 토론 코치를 둔다. 로저 에일스(Roger Ailes)는 TV 프로듀서로 일한 경력 때문에 닉슨, 레이건 그리고 부시 대통령의 중요한 고문이 되었다.1) 하지만 사람들은 미리 준비된 연설 혹은 웅변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미국인들은 그런 경향이 강하다. 우리는 말보다는 행동을 보여주는 '강인하고 과묵한 사람' 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네' '아뇨'란 말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표현하는 존 웨인이 나 게리 쿠퍼 같은 사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자연스럽게 나온 말만을 진정한 것이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중하게 계산된 몸짓이나 정교한 연설, '약삭빠른' 대답 따위를 싫 어한다. 그래서 한때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는 정치 가들에게 '미리 계획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가끔씩 일부러 실수를 저지르라고 충고했다. (물론 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계획되지 않은 실수들'을 '계획'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웅변술을 개발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조차도 행동과 말[에르가(erga) 와 로고이(logoi)]을 확실하게 구분했으며, 그리스에 넘치던 입심 좋은 선동가들을 불신했 다. 빼어난 스타일리스트였던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즉흥적인 대화에 능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최고의 웅변가 키케로는 그리스식 교육을 오랫동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설가는 자연적인 본능에 따라야 한다고 썼다.2) 분명 (위대한) 지도자가 꼭 위대한 연설가일 필요는 없다. 조지 워싱턴은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의 임무가 사람들을 어떤 목표를 향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볼 때, 말은 상 당히 유용한 수단이다. 조지 워싱턴은 조나단 트럼벨 주니어, 데이비드 험프리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등 고전적인 수사학(rhetoric : 웅변술이란 뜻도 있음 - 옮긴이)을 철저하게 교육받은 연설문 작성자들을 데리고 있었다. 제퍼슨, 링컨, 윌슨 등은 모두 수사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 제퍼슨은 소심한 편이어서 연설을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링컨과 윌슨은 점점 더 뛰어난 연설을 했다. 사실 미국 역사에서 웅변가들의 영향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식민지 시기 미국인들 은 웅변가들의 부름에 답하여 종교적 참회운동, 마녀사냥, 전쟁 등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 1703-1758년, 미국의 신학자, 저서 <의지의 자유>가 있다 - 옮긴이)를 비롯한 종교인들은 웅변으로 아테네를 뒤흔들었던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 : 기원전 384-322년,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보다 더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식 민지 남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버지니아주는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와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 등 뛰어난 웅변가들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독립미국의 헌법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패트릭 헨리와 헨리 리, 존 마셜(John Marshall), 제임스 매 디슨(James Madison)등은 버지니아주의가 헌법을 인준하는 행사를 웅변의 축제로 바꾸어놓 았다. 10세기 미국 역시 위대한 연설가들의 땅이었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 다니엘 웹스터 (Daniel Webster), 존 캘훈(John Calhoun),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은 돋보이는 분야에서 돋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설교다, 순회강연, 하기강습회, 신앙부흥회 등 연설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19세기 말 인민당원들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후원하고 모방했다. 1930년대에는 휴이 롱(Huey Long), 커플린 신부(Father Coughlin), 엘리자베스 플린(Elizabeth Flynn)등이 사회적 불만을 대변했다. 또 이어 세계는 웅변가들(히틀러, 무솔리니)에 의해 찢겼고, 다시 웅변가들(처칠, 루스벨 트)에 의해 뭉쳐졌다. 어떤 이들은 위대한 웅변가들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라디오와 TV, 세상의 급속한 변화, 역시 급속하게 변화하는 대중의 관심, 언어보다는 영상을 강조하는 경향 등이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클레어 부스 루스(Clare Boothe Luce), 풀턴 쉰(Fulton Sheen), 마리오 쿠오모(Mario Cuomo), 제시 잭슨(Jesse Jackson), 조지 윌리스 (George Wallace),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 앤 리처즈(Ann Richards), 루이스 패러 컨(Louis Farrakhan),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등 뛰어난 연설자들이 현대의 다양한 분 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에서 웅변술이 그리스시대나 로마시대만큼 중요한 역할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19세기만 해도 열변을 토해 오랜 시간 수많은 군중들을 붙들어놓거나, 장기 간의 토론에서 재치 있게 답변하는 것 등은 중요한 정치의식이었다. 링컨과 더글러스는 세 시간 길이의 토론을 여덟 번이나 가졌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깨끗하고 리듬감 있게 전달하지 못했다면 청중이 계속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루한 연설에는 금방 싫증내기 마련이다. 링컨의 테너 목소리는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 의 빌 클린턴은 링컨이나 더글러스 같은 사람들과는 도저히 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도 상대편은 대규모 관중에게 마이크를 쓰지 않고도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앨 졸슨(Al Jolson)같은 데 비해, 클린턴은 나지막하게 노래하는 발라드 가수처럼 보일 것이다. 고대사회의 웅변가들에게는 엄청난 육체적 부담이 가해졌고, 그들은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 일종의 의료 처방을 받기도 했다. 프닉스(Pnyx) 언덕에서 회의가 열릴 때 아테네의 웅 변가들은 수천에 달하는(총회의 경우 6000명 정도) 동료 의원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해야 했다.3) 그러니 크고 명확한 목소리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 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연설과 논쟁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4) 입 안에 자갈을 넣 고도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는 데모스테네스의 일화는 당시에 발성이 얼 마나 중요한 기술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이다.5) 웅변(rhetor)의 중요성은 로마시대에 와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후기 고대사회까지 외 교, 법, 군사, 행정 등의 분야에서 웅변술이 계속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웅변가들의 교육은 동서양에 걸친 제국 내의 다양하고 분방한 지역들을 묶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6) 그리고 웅변가의 삶은 거의 독실한 종교인 수준의 진지성이 담긴 훈련의 나날이었 다. 연설자는 의미 없는 말을 내뱉어 상대의 놀림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그는 단어를 선택할 뿐 아니라 단어를 효과적으로 배열하면서 자신 의 말을 다듬어야 한다. 또한 그는 상대편의 깊은 인간 본성 내에 있는 동기까지 읽어야 한 다. 그렇게 한다면 연설자는 자신의 테크닉과 힘으로 상대의 불안을 조장할 수도 있고 가라 앉힐 수도 있다. 또한 연설자가 상대의 도전을 빗나가게 하거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균형감각과 재치, 지식, 재빠른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깔끔하게 요약하 는 표현이나 반대로 자세한 설명 등에도 익숙해야 한다... 물론 제스처, 얼굴 표정, 억양과 음도 등 연설을 전달하는 물리적 기술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게다가 기억력 역 시 주요하기 그지없다. 만약 연설을 위해 정리해서 모아놓은 자료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다면 그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7) 위대한 설교자는 재즈 뮤지션이다 오늘날에는 대중연설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단을 살펴보면 여전히 예전 같은 대중연설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흑인교회, 그 중에서도 남부침례교 회의 설교단에는 아직도 많은 연설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실 미국의 연설 문화는 설교단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윌리엄 제닝 스 브라이언이 그랬듯이, 정치가들조차도 종교적인 주제가 담긴 연설을 했다.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성직자의 자식이거나 본인 자신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와서도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게리 하트(Gary Hart),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제시 잭스, 앨 고어(Al Gore) 등의 대통령 후보가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마 리오 코오모나 윌리엄 버클리 같은 가톨릭교도들의 연설 습관에는 가톨릭교회에 다니거나 가톨릭교회 학교에서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다. 과거 미국 젊은이들은 매주 일요일 설교에 서 대중연설을 배웠다. 이는 복음교회파 신자들의 경우에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일요일에는 여러 번의 설교를 듣고, 평일에도 설교를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열한 살 때 (전국침례교도대회에 참석하느라 집을 비운)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오늘은 하루 종일 훌륭한 예배를 드렸어요. 교회엔 사람들이 별로 안 왔지만 에드워드 목 사님은 두 번이나 좋은 설교를 해써요. 오늘 매터 홀리의 장례식도 있었는데 심스 목사님과 잭슨 목사님이 장레식 설교를 했어요.8) (방점 표시된 오자는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기 위 해 일부러 쓴 것임 - 옮긴이) 후일 킹 목사가 연단에 섰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수많은 설교들이 메아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학습과 연설, 그리고 연설학습은 그의 성장기를 가득 메웠다. 마 치 웅변가들이 고대 사회를 하나로 묶었듯이, 설교자는 그의 이웃들을 하나로 묶었다. 법대나 사범대뿐 아니라 어떤 교육기관도 신학 교육기관만큼 배움의 내용을 전수하는 데 효과적이지는 않다. 킹은 대학을 졸업한 후 크로처 신학교에서 35개의 과목을 이수했는데, 그 중 11개가 설교와 찬송에 관련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 다. 교회의 것교 임무 대중연설 설교의 준비 예배 설교 설교의 문제들 예배의 관리 성직자의 라디오 이용9) 배움의 습득이란 것이 지혜의 확산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흑인 설교자들만큼 그 일을 잘해낸 사람들은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마을의 지혜를 저장하고 보급하는 사람들이었다. 도 래 전 미국의 가톨릭 사제들 역시 영어를 모르는 문맹의 이민자들과 함께 미사를 진행할 때 똑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흑인 설교자, 심지어는 노예 시절의 문맹 설교자들도 글을 통해서는 아닐지라도 찬송가와 다른 설교들을 통해 흡수한 성경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해리엇 터브먼은 읽거나 쓸 줄 몰랐지만 연설과 노래에 아주 능했다. 1840년대 대농장주 윌리엄 N. 윌리엄스(William N. Williams)에게서 해방된 노예이자 킹 목사의 외증조할아버지인 윌리스 윌리엄스(Willis Williams)는 자신의 전 소유주에게 설교를 함으로써 기독교 성직자의 특별한 지위를 증명하 기도 했다.10) 그는 슬하에 아담과 이브라는 이름의 두 자녀를 두었는데, A. D.라는 약자로 더 많이 알려진 아담은 후일 아버지보다 더 높은 위치로 상승했다. 윌리스 윌리엄스는 반문 맹이었지만, A. D. 윌리엄스는 하나님 말씀의 종이 됨과 동시에 주인이 되기 위해 길고 고 통스러운 훈련과정을 겪었다. 그는 동료 목사 한 사람으로부터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수준 까지 글을 배웠는데, 번화한 도시 애틀랜타로 간 후자신의 설교 실력이 아주 유치해 보인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애틀랜타 침례교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자신의 영어 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34세의 나이에 대학에서 설교 자격증을 얻게 외었다.11) 킹의 외할아버지 A. D. 윌리엄스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열세 명밖에 안 되는 신자들로 교회 건물도 없이 목회를 시작하여, 후일 애틀랜타에서 가장 권위 있고 영향 력이 큰 흑인교회를 만들었다. 그의 딸은 고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애틀랜타로 올라온 마이 크 킹(Mike King : 나중에 '마틴 루터 킹'으로 개명한다)을 만났다. 킹은 학교에 다닌 적 은 있었지만 15세의 나이에 아직도 글을 쓸 줄 몰았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목사가 된 그는 예비학교를 마치고 모어 하우스대학에 등록하려고 했다. 하지만 A. D. 윌리엄스가 학교를 다닐 때보다는 수학 능력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는 두 번이나 입학시험에서 떨어졌 다. 그러나 A. D. 윌리엄스는 황소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위에게서 어떤 가 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영향력으로 그를 학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킹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초급영어에서 두 번이나 낙제점을 받은 그는 최후의 기회였던 여름학교에서 학점 을 메워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마이크 킹은 A. D. 윌리엄스의 영향력으로 그의 뒤를 이어 에버네저 침례교회의 주임목사가 되었다. 앞으로 4대째 목사가 될 마이크 킹의 아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원했고, 그에 따라 북부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 다. 마이크 킹으로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박사학위가 굳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았지만, 실은 아들은 아버지가 가졌던 배움에 대한 열망을 계승했던 것이다. 그리고 윌리스 윌리엄스가 문맹에서 능변으로 탈바꿈하여 목회를 이끌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증손자가 애틀 랜타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대학에 가서 박사가 된 것은 그리 대단한 도약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이다. 몇 대에 걸친 이들의 삶은 바로 설교단의 웅변을 단련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들은 서로 의 설교를 비평하고, 주제와 수식을 함께 개선하며 끊임없이 웅변술을 세련되게 다듬었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즉흥에 능해서 그들의 설교는 재즈나 블루스와 닮았다. 그들의 설교는 앞선 찬송과 다음 찬송을 감안하기 때문에 항상 음악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 앨범 <리버 사이드 클래식 재즈 역사> 속에 들어 있는 1926년도에 행해진 한 설교는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뉴욕의 J. M. 게이츠 목사는 회중 앞에서 영가의 구절들을 낭송하며, 다음 부를 노래가 그것임을 알린 다음 가사에 적절한 문장을 부언한다. 그러면 회중은 허밍으로 그의 목소리에 화답하고, 그러는 동안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간다. 마침내 그가 첫 번째 가사 를 노래하면 회중이 곧 그를 따라 노래한다. 그러면 그는 그 노래에 맞춰 비슷한 억양으로 후렴을 붙이듯 설교를 하고, 다시 두번째 가사로 이어진다. 찬송과 설교가 이런 식으로 결합된 때를 살펴보면, 4세기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북아프리카의 괄괄한 신자들 앞 에서 그런 식의 설교를 했다. 그러니 A. D. 윌리엄스, 마이크 킹,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모 두 설교자가 되기 전에 성가대와 아카펠라 그룹에서 노래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 다. 사실 그들의 설교에서 드러난 특징들은, 다시 말해 블루스 음악과 비슷한 후렴구, 후렴 구에서의 강약 조절, 조용한 서두, 크레센도와 아첼레란도, 요약의 역할을 하는 종결부 등은 모두 매우 음악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을 보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후 렴구처럼 작용하고 있다. 위대한 웅변가는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한다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 1929-1968년)는 북부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남부 특유의 근본주의와 감정적인 태도에 대해 고민하던 때로 묘사했다. 하지만 키스 D. 밀러(Keith D. Miller)는 그 고등교육의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 킹은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와 풀 틸리히(Paul Tillich) 등의 신학자들을 인용하기 좋아했지만, 킹 목사가 후기에 쓴 글들에 서 발견되는 그의 독서 흔적은 그가 신학교에서 읽은 설교집들이었다. 그 중에는 해리 에머 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같이 비교적 유명한 사람의 설교도 있지만, 윌리스 해밀 턴이나 토머스 버터릭같이 오늘날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것도 있었다.12) 보다 추 상적인 신학자들이 킹 목사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들은 그가 읽고 배운 백인 '설 교자' 들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들이었다. 킹 목사는 오직 설교의 형태로 종교사상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마치 재즈 뮤지션이 고전음악 학교에서 음계를 배우듯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물론 그의 재능이 꽃핀 것은 고전 악기들을 재즈 공연에서 사용할 때였다. 킹이 복부에서 보낸 기간은 설교자의 자격을 보다 강화한 때었다. 그는 학위 자체만을 위 해서 공부하지는 않았다.13) 물론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사람들 앞에서 더욱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키케로의 말처럼, 웅변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교양 있는' 말을 능란하게 구사해야 하는 것이다. '박사'라는 지위 자체도 권위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흑인 목회자들 역시 다른 모든 목회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태도를 통해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마틴 루터 킹은 어릴 때부터 책임감 있는 자세를 키워나갔고, 말투도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열한 살 때, 그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 은 편지를 썼다. "아버님께서 심심해하시거나 아무런 할 일이 없으시다면, 제게 편지를 몇 자 적어주십시오."14) 이러한 방정한 품행은 청소년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난 수업에 일 분이라도 늦으면,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볼까봐 매우 걱정을 했다. 한때는 내가 너무 심각한 사람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항상 옷을 말끔히 차려입었도, 얼룩 한 점 없이 방을 청소해 두었으며, 신발도 윤기나게 닦았고, 옷도 주름 하나 없이 잘 다려 입었다.15) 어떤 이들은 잃게 외양을 중시하는 경향이 수사학(웅변술)에 내재한 문제라고 말하며 비 판했다. 그런 수사는 효과만을 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수사는 전적으로 인공적이고 위선적이며 기만적인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가리고 덮는 역할을 할 뿐이다. 진 짜 진실은 오로지 아무것도 가리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적 품행을 포함하여) 품행이 좋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우 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며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욕망은 순수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식들에게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려고 하는 부모들은 '자연스러운' 부모들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단련하는 목회자 역시 자연스 러운 것이다. 사실 웅변술이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말 자체도 그렇지 않은가? 분노나 상실감 에서 나오는 비명소리는 '자연스럽지만' 내용이 비어 있다. 언어는 무턱대고 지르는 비명으 로는 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기호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언 어 '이상의 것'이 우리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아침에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굿모닝'하고 인사하지만, 이 표현은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우리의 감정을 거 의 담고 있지 않다. 상대가 연인이라면 사랑의 노래를, 어린아이라면 격려를, 직장상사라면 충성의 표시를 하는 것이 더욱 진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정도까지 아침 인사에 열성적이지 않다.16) 그래서 우리는 '안녕하세요.'나 '잘 지내죠.' '안됐군요' 등의 틀 에 박힌 말로 진실을 감추고, 죽음이나 탄생 혹은 엄청난 재난 앞에서는 고작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교단의 연사는 애통해하거나 흥겨워하는 회중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를 배운 사람이다. 연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 상황에 적절한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가서 청중의 감정에 응답하고 그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 결과는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키케로의 말처럼, "웅변가가 의도한 효과는 청중의 반응에 들어 있고, 오직 그들의 반응과 찬성에서 확인된다."17) 마틴 루터 킹은 키케로가 말한 이상적인 웅변가처럼 청중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자원들 즉 교양, 훈련된 목소리, 체력, 기억력을 사용했다. 그는 청중을 고 양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고양시켰다. 또한 그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며 스스로 고난을 불러온 인물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예언자들처럼, 킹 역시 그가 나중에 얻게 된 지도자의 위치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요나처럼 자신의 사명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 어했다. 하지만 사명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킹의 웅변은 사람들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이끌었고, 그 사람들이 가는 길을 킹도 따라갔 다. 스는 자신이 던진 말에 따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가 위험에 처한 후, 킹은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하지 만 결국 킹은 투옥에 이어 협박과 암살미수, 모함, FBI의 위협 등 점점 강도 높은 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모든 압력은 그에게 더욱 깊은 신앙심과 사명감을 느 끼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자신을 고치는 의사처럼, 설교자의 사명을 통해 스스로를 감화시 킨 것이다.18) 재미있는 사실은 키케로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키케로는 일생을 통해 위험한 대결을 피해 살았지만, 자유를 찬양하는 데는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독재에 저항하게 했다. 결국 키케로 자신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대항하여 용감히 연설함으로써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 웅변가의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부 름에 응답하는 영웅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웅변가의 마지막 조건은 자신이 웅변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인공적인 것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진실한 것이 된다. 지도자와 추종자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서로를 샹해 다가가 는 것이다. 모든 산에서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라 마틴 루터 킹의 웅변술을 이룬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표현을 배워왔다. 그러나 결국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 오자 오로지 자신의 결단만이 그 표현들을 진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위대한 웅변의 배경에 있는 드라마이다. 우리는 그의 연설을 부분으로 분리하여 각각의 근원을 살필 수 있다. 하지 만 그것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면 새로운 의미, 즉 킹 목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의미 가 나타나는 것이다. 킹이 한 가장 유명한 연설의 종결부는, 1952년 흑인 설교자 아키발드 캐리(Archibald Carey)의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 모든 산기슭에서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라. 버몬트와 뉴햄프려의 그린 산맥에서뿐 아니라, 뉴욕의 캣츠킬 산맥, 아칸소의 오자크 산맥, 조지아의 스톤 산맥, 버지니아의 블루리지 산맥 까지... 그 모든 산기슭에서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라!19)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킹이 어디 서 문장을 차용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사례는 그가 링컨 시대부터 차용한 수많은 위대한 연설문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킹이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에서 행한 연설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끝난 곳에서 시작 한다("백 년 전...").20)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독립선언문을 끄집어내서 미국인들에게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호소했다면, 킹은 바로 게티지버그 연설로 되돌아가서 다시 그 것이 독립선언문과 연계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킹은 자신의 말이 그러한 역사 적 근원을 지니고 있음을 알린 것이다. 링컨은 인간해방 차원에서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하 지만 그로부터 백 년 후,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기서 킹은 '백 년 전'을 변 주하여 '백 년 후'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로부터 백 년 후, 흑인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로 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그는 지리학적인 표현으로 나중에 절정을 이룰 '모든 산꼭대기'라는 표현을 준 비하고 있다. '구석진 곳'에는 사람들이 고립 당한 채 버려져 있으니, 이는 미국의 번영과 인권에서 지리적으로 소외된 장소를 의미한다. 킹은 연설을 진행시키면서 점점 더 높은 곳 으로 장소를 이동시킨다. 링컨은 노예해방령이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했다. 킹은 링컨기념관 앞에서 그 수표가 '잔 고 부적' 상태라고 말한다. 소위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부도수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이 위대한 기회의 나라에 자유를 위한 잔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공허한 약속들만 남은 채 흑인들은 여전히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있다. 여기서 킹은 지리적 분석을 시간적 분석과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지금'이야말 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때"라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인종차별이라는 그늘지고 쓸쓸한 계곡으로부터 인종적 정의라는 햇살 만 발한 길로 나아갈 때입니다. 여기서 '햇살 만발한'이란 표현은 당시 유행어인 '길고 뜨거운 여름'과 셰익스피어의 '불 만의 겨울'이란 표현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진정한 자 유를 얻을 때까지는)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으로 넘치는 무더운 여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곧 다시 "정의가 빛나는 밝은 날", 정의가 넘치는 "따뜻한 곳"이 이어진 다. 하지만 킹은 정의의 긴급성을 비폭력이라는 도덕적 제한과 연관시킨다. "우리는 항상 고 귀한 품위와 규율을 지키며 투쟁을 전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의 물리적 힘 앞에 영혼 의 힘으로 대항하며 당당한 우월성을 과시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힘이 약하면 물러서겠다 는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은 언제 만족할 거요?"라고 물을 때마다 킹의 대답 은 언제나 같다. 흑인들이 경찰들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만행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킹의 이러한 불의의 사례들을 나열하는 동안 청중의 반응은 점점 더 고조되어가고, 마침내 그는 예언자 아모스(5:24)의 말을 인용하며 문장을 끝낸다.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의로움이 세찬 급류를 이룰 때까지는, 우린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 설교자들은 고전적인 형식과 강한 리듬이 있는 흠정영역성서(King James Bible)를 설교에서 적절하게 이용해왔다. 여기서 킹 목사 역시 마치 시처럼 각운이 뚜렷한 문장의 특 징을 잘 살려서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킹 목사는 투옥과 구타에 지친 운동가들에게 다시 한번 고통이 따르는 구원의 길 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미시시피로 '돌아가십시오' 앨라배마로 '돌아가십시오' 그들은 결코 '절망의 계곡'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광의 고지가 멀지 않은 것이 다. 이때쯤 계획된 연설시간이 끝나가지만, 감정이 고양된 청중은 여전히 그의 말을 계속 듣 고자 한다. 그러면 그는 이미 다른 곳에서 행한 연설 중 일부를 끌어와서 즉흥적으로 인용 한다. 하지만 그 문장 역시 그가 여기서 언급한 독립선언문과 연관된 것이다. 그의 꿈은 "미 국의 꿈(American Dream)에 깊이 뿌리박은" 꿈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여기서 그는 다시 흠정영역성서 중 아사야서(40:4-5) 를 인용한다} 골짜기마다 메워지며, 언덕과 산이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 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는 꿈 이...그는 마지막 문장을 고양된 톤으로 거의 노래하듯 이야기한다. 그리곤 다시 준비된 연 설문으로 돌아와서, 앞으로 그들을 전진할 수 있게 하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깨어 희망의 돌을 꺼낼 수 있고(다니엘서 2장 35 절 중 '우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어'를 변용한 것)...,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가 함께 일 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갈 것이며, 함께 자유를 위해 우뚝 허면, 언젠가 자유의 날이 올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함께'라고 말하는 문장마다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그의 연설문은 바로 여기서 끝나 있었다. 하지만 킹은 청중이 한껏 고양되었지만 아직 절정에 다다르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아키발드 캐리의 연설 '내 나라는 당신 의 나라'를 변용했다. 캐리는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흑인 유권자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바로 이 문장을 사용했다. 당신 캐리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애국적인 노래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킹은 자신의 연설에서, 모든 미국인들에게 독립선언문 과 게티즈버그 연설, 노예해방령 등 미국의 신조에 충실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리고 1960 년대의 일부 저항세력과는 달리, 그는 미국의 상징들이 말하는 메시지를 왜곡함으로써 애국 심을 가진 이들에게 반발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성조기는 자신의 국기였고, 미국이 란 나라는 자신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링컨은 노예 평등이라는 낯선 요구를 하면서, 미국인들이 매년 7월 4일이면 자축하는 독 립선언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예전의 신조를 꺼내 새로운 신조를 인정하게 했고, 예전의 말 을 자신이 한 새로운 말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그는 노예해방령을 받아들인 미국인들이 어떤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조에 충실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링컨에 따 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착한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킹은 주먹을 과시하며 비집고 들어온 외부인으로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느 미국인들 앞에서 미국의 노래를 불렀고, 미국의 역사와 상징, 자부심의 표징들을 손상시키지 않고 흑인들의 요구를 관철하려고 했다. '우리 나라'는 흑인들이 목숨 바쳐 지키는 나라이기 도 한데, 성조기는 흑인들이 해외에 나가서 싸울 때 간직했던 것이기도 한데, 만약 그들이 집으로 돌아와 미국의 산들을 보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 가? 결국 모든 산에서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라는 킹의 연설은 처음 캐리가 했던 연설과도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이 연설에서 킹은 미국의 곳곳을 모두 언급하며, 이 산에서 저 산으 로 넘나들며 연설을 진행한다. 마치 아이스 킬로스(Aeschylos)의 <아가멤논(Agamemnon)> 에서 트로이의 멸망을 알리는 봉화가 산정에서 산정으로 이어지듯이, 미국의 모든 지명들을 한 번씩 언급하며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그리하여 뉴햄프셔의 거대한 산들에서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고'..., 뉴욕의 산들에서, 펜 실베이니아의 앨러게이니 산맥에서, 콜로라도의 록키 산맥에서, 캘리포니아의 언덕들까지... 킹은 미국을 가로지르며 지명들을 일일이 거론한 다음, 이제 가상의 여행자에게 양심의 지 명들 둘러보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지아의 스톤 산에서도 '자유의 종이', 테네시의 룩아웃 산에서도 ' 자유의 종이', 미시시피의 모든 산과 언덕에서, 모든 산기슭에서도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합시다.' 킹의 연설에서, 남들에게서 빌려온 부분은 원문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새로운 공명을 울 린다. 그의 '산'은 아모스서의 의로움이 급류가 되어 흘러내려오는 산이며, 다니에서의 우 상을 친 돌이 이룬 태산이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평탄해져 하나님의 길이 되는 산들이다. 성 경에서 '산'이란 말은 윤리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설교에서 그랬듯 이, 킹 목사 같은 설교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의미를 감안하게 된다. 산은 시편(36 : 5-6) 에서 하나님의 굳건함을 상징하고, 이사야서(40 :9)에서는 예언자들이 산정상으로 불려가며, 또 시편(43 :3)을 보면 하나님이 성산에 계신다. 이 설교자는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 는 용어들을 통해 청중의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링컨이 그 위대한 연설에서 사용했던 것 이상의 어떤 논리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링컨 역시 성서에서 빌려온 언 어로 '부활'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연설에서, 킹은 성서와 미국사의 다양한 근원에서 빌려온 것들을 하나로 묶어냈다. 미 국사에 빛나는 위대한 문장들로부터 시작하여,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그 문장들이 지닌 본질들이 드러나게 했고, 결국에는 흑인영가를 인용하며 끝맺음을 했다. 그는 국가적 자부심 과 치욕, 상실과 획들, 투쟁과 초월 등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하나의 노래 속에 담았다. 그가 지녔던 꿈은 그의 앞에서 함께 손과 가슴을 맞대고 있던 이들의 꿈과 같은 것이었고, 또한 그 꿈은 에드워드 힉스(Edward Hicks)가 몇 번이고 그린 그림에 담겨 있는 계시록적인 평 화의 꿈이기도 하다. 힉스는 미국의 지형을 상징으로 사용하여 윤리적인 풍경화를 창조했다. 그 역시 다른 이들로부터 (특히 벤저민 웨스트의 그림 <인디언들과 펜실베이니아의 조약> 에서) 많은 것들을 빌려와서, 이사야서에서처럼 사자와 양이 누워 있고 아이가 함께 노는 꿈을 그렸다. 1825년의 그림에서는, 제퍼슨이 가장 좋아했던 미국 풍경인 버지니아주의 자연 교각을 마치 펜실베이니아와 인디언들 위에 걸린 하늘의 무지개처럼 묘사했다. 아마도 이는 킹 목사의 위대한 연설과 놀랍게 일치하는 영상 표현이 아닌가 한다. 로버트 패리스 모제스 킹 목사를 대신할 수는 없었던 과묵한 민권운동가 모든 웅변가들이 다 자신의 한 말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민권운동기에 활동했던 많은 훌 륭한 연설가들이 나중에는 다른식의 삶을 살았다. 웅변술의 인공적인 측면이 진실을 가리는 데 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지어 킹 목사의 웅변에서도 무언가 거짓된 것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유명한 킹 목사보다도 로버트 패리스 모제스를 더욱 존 경했다. 모제스는 여라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지만, 연설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권운동에서 웅변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웅변적이기까지 했다. 모제스는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들은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랐다.1) 모제스는 뉴욕의 해밀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병든 부친을 돌보기 위해 하버드를 그만두고 고등학교 수학선생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너무나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여름방학 동안 킹 목사가 이끌고 있던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에 자원봉 사를 신청했을 때, SCLC는 그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모제스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 일은 SCLC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특이한 것이어서, 그는 괴짜 취급을 받았고, 어쩌면 공산주의자거나 FBI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모제스는 그때까지 SCLC도 감히 가려고 하지 않았던 미시시피농촌의 극도로 가난한 흑 인들이 사는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1963년과 1964년에 비폭력학생협동위원회(SNCC) 활동 의 일환으로 그곳의 유권자들을 조직했다. 모제스는 매콤 군의 공포 분위기에서도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는 SNCC의 열성 회원들 중에서도 가장 냉정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히고, 총에 맞았지만 조금도 굽힐 줄 몰랐다. 그리고 민주당 전 당대회에 대체 후보들을 보내는 일을 했지만, 너무나 겸손한 까닭에 자신의 업적을 숨기려 했다. 킹 목사와 다른 이들이 워싱턴 행진에서 할 연설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제스는 조용 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인 "나라에 정의가 없다면, 그 나라는 힘센 도둑떼와 무엇이 다 른가?"라고 쓴 피켓을 들고 법무성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모제스(Moses : 성서의 모세와 이름이 같음 - 옮긴이)란 성이 성서적인 느낌이 든다고 하자, 그는 대신 모 친의 처녀적 성인 패리스(Parris)라는 성을 썼다. 1966년에는 자신이 반대하는 베트남전쟁에 징병되자, 캐나다로 달아나 다른 이름으로 살았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탄자니아로 가서 8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1976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흑인 어린이들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대수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는 맥아더재단의 도움을 받아 자 신의 효과적인 대수학습 프로그램을 학교마다 확산시켰다. 민권운동가들에게 최악의 위험이 닥쳤을 때 모제스가 보여준 인간성과 확신, 본보기 등을 감안할 때 그는 위대한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킹 목사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세상에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삶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듯이, 웅변가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링컨은 해리엇 터브먼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 다. 하지만 그들은 똑같은 목표를 향해 일했고, 서로가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도왔다. 웅 변가형 지도자의 반대유형은 웅변가를 보완할 수는 있지만, 그를 완전히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