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국가를 위해 카리스마를 버린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막스 베버가 말한 세번째 사회질서인 법적-합리적 유형은 카리스마적 질서만큼 웅장하 거나 전통적 질서만큼 의식적이지는 않다. 사실 그것은 변호사들의 소송준비 서면만큼이나 건조해 보인다. 인민들은 '계약'을 통해 자신들이 지배자에게 복종할 조선을 결정한다. 역사 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혁명은 보통 카리스마적 군주제나 전통적인 군주제를 전복하고 법에 따른 제한된 지배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루어지지만, 대체로 원래의 악정과 섬뜩하게도 유사한 독재 체제에 이르기가 쉽다. 러시아 의 차르가 축출된 곳에서는 독재자 스탈린이 등장했고,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희생을 딛 고 황제 나폴레옹이 탄생했으며, 찰스 1세가 목이 잘린 후 크롬웰은 죽은 왕보다 더욱 큰 권력을 장악했다.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한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의 현명 한 사람들이 역사적 상황의 도움을 받아 그러한 변화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행 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다른 야심을 품었더라면 일을 그르칠 수 도 있었다. 이 경우는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성공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들 중 하나이 다. 조지 워싱턴1732-1799년)이 비록 출신성분은 보잘것없었다고는 하나. 눈부신 업적을 이 룩했고 난 후 다시 고요한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참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멍청이가 된 젊은이 1754년 중무장한 유럽 열강들은 서로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세우며 공격에 철저하게 대 비한 채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라는 땅에서 생긴 조그만 분규가 유럽의 식민지 본국들을 뒤흔들어놓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아 메리카의 숲속에서 작전을 펼치던 한 육군 대령이 프랑스 외교사절을 전투부대로 착각하고 새벽에 그들을 급습했다. 게다가 그와 함께 간 인디언들은 죽은 프랑스 장교들의 머리가죽 을 벗겼는데, 죽은 이들 중 일부는 외교 위임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후일 자신이 추적하던 프랑스군에게 오히려 쫓겨서 희생자를 남기며 퇴각한 21세의 버지 니아인 대령은 조그만 요새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외교관들을 살해했다 는 사실을 인정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서명한 프랑스어 문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영국군 정규군이 이 젊은이를 비난하자, 그는 식민지 군대에서 맡았던 공직을 사퇴했다. 이는 그 후에도 계속 된 워싱턴의 여러 사퇴들 중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하게 비생산적이었던)경우였다. 또한 그는 이때 자신도 모르게 프랑스와 영국,프러시아 등의 제국 지도를 바꾸어놓을 세계전쟁을 촉발하고 있었다. 이 젊은 대령이 소지하고 있던 일기는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조롱을 받았 고, 영국에서는 조지 2세의 혹평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멍청이가 되 고 말았다. 학자들은 그가 악한이었기 때문에 외교관들을 죽였는지 아니면 단지 무식해서 그랬는지를 놓고 토론했다. 그는 수년 동안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해야만 했고, 그래서 체면을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삼았다. 당시 그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Othello)>에 나오는 카시오와 같은 심정이었다. 명예, 명예, 명예, 난 이 명예를 잃어버렸네! 남은 것이라고는 개나 돼지들에게도 있는 것 뿐일세... 하지만 동료 버지니아인들은 워싱턴을 심하게 질책하지 않았다. 그는 사진의 토지개발을 후원하는 페어팩스 가문에게 너무나 유용한 존재였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 대에서 중요한 지위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국의 토지 회사들이 미국의 5대호에서 멕 시코만 사이에 있는 하천들의 통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인들과 경쟁하는 곳에서, 알려지지 않 은 지역들을 찾아내는 데 대단히 유능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주의 기준으로 보아도 말수가 적고 거인 같은 체격이었으나, 믿음직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내티 범포(Natty Bumppo)나 존 웨인 같은 타고난 지도자형이었다. 반면 워싱턴은 버지니아주의 교양 있는 지도자들을 보고 반했다. 특히 그를 매혹시킨 사람은 벨브와르 농장의 안주인 샐리 페어팩 스(Sally Fairfax)였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던 시절의 젊은 식민지 남자들은 농장의 안주인들과 게 사랑에 빠졌다-토머스 제퍼슨도 기혼자였던 베치 워커에게 접근했고, 노미 니 홀의 가정교사였던 필립 리티언 역시 고용주의 아내를 멀리서 경배했다. 워싱턴에게는 군대 외에는 별다른 전망이 없었다. 그의 부친 어거스틴은 첫 번째 아내에 게서 얻은 두 아들을 영국으로 보내 교육시켰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조지 워싱 턴을 포함한)다섯 명의 아이들은, 조지의 나이 여섯 살 때 부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거의 버 려지다시피 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교육받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집안의 재산(쓸 만한 일꾼 7명을 포함해 12명의 노예)조차도 첫째 부인의 아들들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조지는 화내지 않았다. 사실 그는 자기보다 열네 살 연상인 이복형 로렌스 워싱턴 (Lawrece Washington)을 영웅처럼 숭배하고 있었다. 로렌스는 유명한 제독 에드워드 모농 (Edward Vernon)의 휘하에서 카리브해에서 벌어진 소위 '젠킨스의 귀 전쟁'에 참여했던 인 물이다(로렌스는 모농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농장 이름을 바꾸었다). 토비아스 스몰렛은 1740년의 원정에 참가하여 그 역전과정을 소설<로데릭 랜덤(Roderick Random)>에 소개했 다. 로렌스는 이미,얼마 후 이복동생이 자신도 모르고 어처구니없게 충동질할 제국들의 전쟁 에 조금은 끼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매력적인 로렌스는 페어팩스가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로 어울렸고, 자 신을 존경하는 어린 동생을 위한 길도 닦아 놓았다. 하지만 로렌스는 이미 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10대의 조지 워싱턴은 로렌스를 따라 따뜻한 태양 아래서 쉬고 목욕치 료를 할 수 있는 요양 장소인 바르바도스에 갔다. 그런데 이모에는 조지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버렸다. 얼마 후 그는 건강을 회복했는데, 이 사건에서 다행한 점은 후일 혁명전쟁 동안 그 병이 워싱턴 진열을 공격했을 때 그만은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밭을 갈기 위한 대통령직을 사임하다 로렌스와 다른 이복형까지 죽자 조지는 가족 농장 마운트 버농을 물려받았다. 조지의 재산 은 처음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혼을 통해 신부의 지참금을 얻고, 나름의 경 영적 수완을 발휘하여 재산을 조금씩 불릴 수 있었다. 그는 험난한 세계에서 넓은 의미의 ' 신용'을 쌓아갔다. 후일 그가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합중국의 신용을 쌓아야 할 입 장이 되었을 때도, 그는 경제적인 토대가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워싱턴은 나중에 군대 를 운영하던 방식으로 자신의 농장을 운영했다. 즉 모든 세세한 부분을 주의 깊게 관찰하 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유지하며, 항상 만일에 대비했다. 주변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자 라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에 입성했을 때도 모두들 그의 조언을 들으 려 했고, 후일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에서도 수많은 이름난 인물들 중에서도 그는 한층 돋 보였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을 걱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감동 시키는 품위와 연극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젊은 식민지 군인이었던 시절에도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제복을 고안해냈다. 마운트버농에 사는 민간인 신분으로 그는 찰스 윌슨 필을 불러 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식민지 사령관을 뽑을 때도 워싱턴은 제복을 입은 채로 나타나 자신의 능 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그는 예전에 '7년 전쟁'에서는 실수를 범했지만, 브래독(Braddock) 장군 밑에서는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했고, 로버트 옴(Robert Orme) 같은 영국군 장교들의 우정과 존경을 얻었다. 혁명전쟁에서 그가 만약(샤스텔루 같은) 프랑스 장교들과 함께 일했 다면 똑같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식민지에 있던 그는 그곳에서 대치하던 두 나 라의 제국 군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예전에 두 군대가 반목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 을 했던 그가 이제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그는 영국 이 캐나다에서 프랑스군을 쫓아낼 때는 영국군과 함께 싸웠고, 나중에 미국이 영국의 손아 귀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는 프랑스군과 함께 싸웠다. 많은 사람이 개별 주를 위해 싸우던 혁명전쟁 초기에 워싱턴은 이미 '전국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각 주의 군대를 통합하여 '대륙 군대'를 창설하려고 애썼다. 워싱턴은 라파예트(Lafayette)와 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프랑스 장교가 영국령 캐나다 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을 비밀리에 방해했다. 왜냐하면 프랑스를 북아메리카에 다시 끌 어들이게 되면 새로 탄생한 공화국의 앞날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의 해군과 외교적 도움이 필요했지만, 한 열강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열강 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냉전시대의 '비동맹' 제3세계의 지 도자들처럼 열강들이 서로 싸우게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워싱턴은 군대를 통합하고 각 주의회에 대한 연방의회의 지배를 강화하는 동안에도 이미 전후의 정치적 통힙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군권을 반납하고 모든 정치활 동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리고 각 주지사들에게 강력한 통합국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그 후 제정된 허약하기 짝이 없는 연방헌법(Articles of Confederation :1781년 북부 13주가 제정한 헌법 -옮긴이)이 그를 실망시켰지만, 워싱턴은 6년 동안 초야의 생활을 유지했다. 그 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 비상회의에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징 집'되었는데, 그것도 매디슨(Madison)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의 참석을 강권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간 것이었다. 필라델피아회의를 주재한 것은 워싱턴의 생애에서 가장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필라 델피아회의가 연방헌법하에서 위법적인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는 폐회될 때까지 의사진행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의장으로 선출된 워싱턴 역시 철저하 게 비밀을 강조했다. 나중에 이 사실이 연방헌법을 청산하려는 음모라고 알려졌을 때도, 오 직 워싱턴과 프랭클린의 위대한 명성이 대표들을 반역 혐의에서 구할 수 있었다. 반대자들 은 그런 일에 명망 있는 두 사람을 끌어들인 것을 비난했다. 워싱턴과 프랭클린이라는 위대한 인물들이 헛되게 다루어졌고, 놀랍게도 가장 불미스런 목적을 위해 이용당했다. 만약 비판자들이 회의에서 토의된 사항을 알았더라면 더욱 심한 비판을 했을 것이다. 하 지만 음모가들은 조심스럽게 그런 일을 예방 했다. 그들은 워싱턴으로 하여금 회의 의사록 을 마운트 버농으로 가져가게 해서 대중이 내용을 알 수 없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새로운 헌법이 승인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워싱턴이 그 헌법을 옹 호했고, 또 사람들이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만약 워싱턴이 독재자 가 되기를 바랐다면(혁명 후 정치가 혼란해질 경우 늘 일어나는 일이다) 최소한 한동안은 능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회를 존중했고, 새로운 헌법에 충실했으며, 오 직 한 임기 동안만 대통령의 직위에 머무르려고 했다. 첫 번째 임기가 끝나고(제임스 매디 슨이 쓴)퇴임 연설까지 준비했지만, 워싱턴은 다시 한 번 직무에 '징집'당해야 했다. 심지 어 비판자들조차도 나라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난 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완강하게 나왔 다. 그는 이번에는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초안을 쓴 퇴임 연설문을 출간 했다. 이 글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미국이 열강들의 제국주위 전쟁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새로 탄생한 공화국은 군사적 모험에 자신을 던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 폴레옹 전쟁으로 군사적 모험에 자신을 던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해밀턴 같은 영국 지지파들과 제퍼슨 같은 프랑스 지지파들은 유럽 지배를 둘러싼 이데올로 기적 갈등 속에서 각기 다른 쪽을 지원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 라서 5년 후 대통령이 된 제퍼슨은 '성가신 동맹'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 다. 그런데 흔히들 '성가신 동맹' 이란 표현은 워싱턴이 퇴임 연설에서 쓴 말로 알고 있으 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 워싱턴의 뜻은 바로 그러했지만 그는 좀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했 다. 권력을 잡은 워싱턴이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미국의 위해한 유산이 되었다. 원래 페어스팩스가의 대리인으로 시작했던 그는, 자신이 전쟁 때는 의회의 대리인 이며, 대통령의 직위에 있을때는 국민의 대리인이란 점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 그는 권력 을 양보함으로써 권력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밭을 갈기 위해 군대를 떠났던 고대 로마인 신 시나투스(Cincinnatus)와 같은 사람으로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워싱턴은 자신이 아끼던 명성을 회복했다.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 자신의 명성을 해치는 것은 그로서는 가장 참기 어려운 패배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명예와 국가의 명예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 는 밀접한 것이 되었다. 플루타르크시대이래 일부정치 이론가들은 전설적인 국가의 창건자들 즉 리쿠르구스 (Lycurgus),테세우스(Theseus), 솔론(Solon), 누마(Numa)등이 권력을 수립하고 난 후 자진 하여 권력의 자리를 떠났다는 고전적인 신화를 좋아했다.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는 '현실 주의자'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그런 이상적인 지배 자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디슨을 필라델피아회의에서 그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 그 회의는 정인 절차가 쓸모없어진 곳에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낸 다음 스스로를 해산시켰던 것이다. 예전의 법(연방헌법)이 대비하지 못한 위기 속 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사불란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일 부 존경받는 애국적인 시민들이 '비공식,비공인 명제'들을 통해 그러한 변화를 설계하는 것 이 필수적이다.(<연방주의자(The Federalist)>,No.40) 이 회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Socail Contract)>에 묘사된 입법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그는 권좌에 앉지 않으며, 통치에 참여 하지도 않는다. 공화국을 창설하는 그의 직무는 공화국 헌법 내의 어디 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필라델피아회의의 의장이자 보호자이며 보증자였던 워싱턴은 최고 입법자였지만, 당시에는 어떤 권력도 지니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계획을 던지고는 추인 과정에서는 물러났다. 그런 다음 그는 마치 로물루스(Romulus)처럼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로물루스의 경우와는 달리, (사람이 아니라) 법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가 납치되었다는 소문을 없었다. 워싱턴은 자신의 뜻으로 떠났고, 그리하여 오직 전설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필적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유럽 열강들의 혼미스러운 싸움 속에서 인생을 시작한 이 사람이, 마침내 국가를 창건하면서도 그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위인을 찾는 고전적인 유럽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워싱턴의 업적은 너무나 위대하고도 비범하기 때문에 그 진실한 가치를 평가하기가 어렵 다. 워싱턴은 무덤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동시대 인물들은 그를 가장 흥미로운 사 람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프랭클린, 제퍼슨, 매디슨, 해밀턴 등과 함께 있을 때도 그가 가 장 돋보였다. 학자들과 대부분의 미국인은 그를 미국 대통령 중에서 링컨 다음 가는 위인 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링컨은 별로 돋보이지 않는 삶 끝에 10년이 채 돼지 않는 기간(1858-1865년)동안 위대성을 과시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1770년대의 독립혁명,1780 년대의 공화국 건설, 1790년대의 미성숙한 정부의 운영 등 끊이지 않는 위기 속에서 항상 (제임스 플렉스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필요불가결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헨리 리 (Henry Lee)의 말처럼 "전쟁시에도 첫째, 평화시에도 첫째 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정확하게 평가했고,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지나친 야심이나 절망에 빠 지지 않았다. 다른 대통령들이 정부를 잘 이끌었다면, 그는 어떤 모범도 없이 그 정부를 세 우고, 선례를 수립했으며, 모든 문제들을 직접 해결했다. 제퍼슨, 이젠 당신이 먼저요 건국 초창기에 워싱턴은 그 자체로 국가를 통합하는 성상이자 국가가 하는 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영광 대신 비인격적인 권력의 상징들 즉 헌법,국기,관직,법원 등을 내세웠으며, 자신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로 존경을 얻었다. 그는 군대를 떠날 때도 가능한 한 빨리 군시절의 업적을 상징하는 모든 휘장들을 떼어버렸고, 혁명군 장교들의 엘 리트 클럽 '소사이어티 오브 신시내티'의 메달도 착용하지 않았으며, 그 모임이 세습제로 지 속된다면 모임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그런 성품은 다음 대통령인 존 애덤스(John Adams)의 취임식 때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새로운 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워 싱턴이 의사당을 나가는 애덤스의 뒤를 따르도록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그 영 예를 거부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아니라 제퍼슨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 시켜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법적 체제내에 있는 리더십의 역설이다. 즉 그런 체제 속의 지도자들은, 워싱턴이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했듯이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권위를 얻는 것이다. 권위란 계약의 귄위이고, 미국의 경우 그것은 국민의 권위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 미국의 대통령들은 아무리 찬란하게 보인다 해도 헌법과 법제도 아래에 있으며, 결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는 초기에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워싱턴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공화국'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 카리스마적 권위를 버렸다. 6장 188쪽에 있는 도표를 보면, 워싱턴이 어떤 식으로 카리스마적 권위에서 법적 권 위로 넘어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에서 (링컨처럼 독학으로 공부한) 워싱턴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질을 깊이 있 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 헌법을 기초한 회의를 주재했지만, 의사진행을 문서로 기록하지 않는 '전체 위원회'를 열 때면 언제라도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위원장이 주재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워싱턴은 열띤 토론에 귀를 기울이고 아주 가끔 한마디씩 거 들 뿐이었다. (1840년에 출간된 매디슨의 노트를 통해 이런 사실들이 밝혀졌다.) 이때 워싱 턴은 공화국의 지도자란 전국민의 지혜와 덕을 정제하는 사람이라는 매디슨의 생각을 받아 들였다. 최고의 헌법이론가가 만들어지던 이 회의는, 또한 워싱턴이 공화국에 대해 배우는 학습 기간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변자가 된 워싱턴은 자신의 한계조차도 극복하려고 했다. 혁명군을 이끌면서 그 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속한 주의 이익을 챙기는 버지니아인이기를 그만두었다. 그는 후에 정부를 이끌때와 같이 '전국적' 관점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정부의 수장이 된 그는 미 국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시행되던 노예제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려 했다. 아내가 죽자 자신이 소유한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기름을 조성하여 19세기 초까지라도 해방된 노예들이 지 원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자가 덕있는 국민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 자신이 덕 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의적 지도력은 지도자가 대표하는 사 람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지도력이란 국민들에게 '가장' 이로 운 것이 무엇인지 현명하게 탐색하는 것이며, 그런 탐색의 선악 여부는 국민들의 최종 판 단에 맡겨진다. 또한 그 지도력은 선거인과 피선거인 간의 대화 속에서 그 판들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다. 매디슨이 상원의 역할에 대해 논한 것은, 신생공화국 속에서 다양한 분파들이 전쟁을 요구하던 당시, 워싱턴이 취한 중립적인 입장을 묘사하는데도 적 절하다. 다른 국가들의 판단에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모든 정부에 중요한 일이다. 첫째, 어떤 특별한 계획이나 조치와는 상관없이 그 주목 자체가 다른 국가들에게 현명하고 명예로 운 정책의 소산으로 비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나친 열정이나 일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그 국가 내부의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에 서 불편부당한 세계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은 가장 좋은 안내자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연방주위자>No.63). 워싱턴은 신생국가의 수반으로서는 드물게 '불편부당한 세계'의 존경심을 얻었다. 무엇이 그런 리더십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의 동료들은 간단하지만 장엄한 '덕'이란 말 로 그것을 묘사했다. 그것은 '공적인' 덕이자 공화주위적 덕이었으며, 공중의 복리를 위한 덕이었다. 그것은 계몽주위가 찬양한 신화 속의 로마 속에서 볼 수 있는 덕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에서 크롬웰과 나폴레옹에 이르는 혁명가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얻기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시민 보나프르트'에서 시작하여 황제가 되었다. 워싱턴은 페어팩스가라는 귀족 집안에 고용된 일꾼으로 시작하여, 현대 혁명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되었고, 신생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시민 워싱턴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우든(Houdon)이 조각한 로마풍의 흉상은 워싱턴이 지녔던 강 력한 결단력과 국민에 대한 봉사라는 원칙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권력의 단맛에 푹 빠져버린 반란군 대장 올리버 크롬웰올리버 크롬웰(1599-1658년)은 워싱턴과는 반대로 법적 지배에서 카리스마적 지배로 나아간 인물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표면적인 유사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의 군주들(크롬웰은 찰스 1세, 워싱턴 은 '식민지군')을 지휘하여 전국 규모의 직업 군대로 길러냈으며, 자신의 군대에 새로운 에 토스(크롬웰은 신앙심, 워싱턴은 탈식민지 미국의 정체성)를 심어주었다. 크롬웰의 반란은 좀더 강탈이 심한 경우였다. 워싱턴은 기껏해야 왕의 식민지 재산을 빼 앗은 정도였지만, 크롬웰은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처음부 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하더라도(또 반란을 일으키고도 한참 동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시민전쟁이 고치려고 했던 지배자의 오만에 대항하면서 그런 상황으로 휩쓸려간 것이다. 시민전쟁이 시작될 무렵 크롬웰의 나이는 40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군대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말타기와 매사냥에 능했고 기병대 지휘에 타고난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왕당파쪽 의 군대는 무장이 잘 되어 있었고, 루퍼트 왕자(Prince Rupert)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 다. 그런데 당시 영국 기병대는 성공적인 공격을 하고 난 후 달아나는 적들을 쫓기 위해 스 스로 대형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왕실 경비대의 주임무가 누더기를 입은 폭도 들을 해산시키는 것이었던, 17세기 영국의 전투기술이 대단히 산만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크롬웰이 지휘하는 철기병의 돌진 작전은 달랐다. 철기병은 '각자의 오른쪽 무릎 이 옆에 있는 병사의 왼쪽 장딴지에 닿는' 대형을 이루어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래서 그들 은 적진을 부수고 난 후에도 계속 다음 행동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크롬웰은 한 번의 공 격을 한 후에는 다시 병사들을 집결시켜 연이은 공격을 가했던 반면, 루퍼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상 자신의 공격군 내에 예비군을 둔 것과 마찬가지였던 크롬웰의 부대는 영국 의 전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군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군사적 공적에는 신앙심도 큰 역할을 했다. 저항하는 장로교도들에게 주교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던 왕은 결국 '설교하고 기도하고 훈련하는 군대'와 마주쳐야 했다. 찰스왕이 전쟁 비용을 모으기 위해 소집한 의회는 주교들과 대립했고, 오히려 군주에 반대 하는 군대에 재정을 지원했다. 왕이 체포되자 군대는 완전한 봉급을 지불받기 전까지 해산 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뉴마켓에서 '엄숙한 서약(Solemn Engagement)'을 맺으며 자신들의 조건을 의회에 제시했다(1647년). 민간의 권위에 대항한 영국군대의 반란은 뉴버그에서 있 었던 워싱턴의 장교들의 반란(1793년)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크롬웰은 망설인 끝에 뉴마켓 의 '서약'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워싱턴은 뉴버그의 반란을 비난하고 격하했다. 바 로 이 두 가지 행동에서 워싱턴과 크롬웰의 장래가 달라진 것이다. 워싱턴은 일개 시민으 로 돌아가서 강력하고 합버적인 정부가 탄생하고 것을 도왔다. 크롬웰은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주무르고 협박했으며, 마침내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는 예전에 찰스 1세가 했던 것보 다도 더 심하게 의회를 농락하고 파괴했다. 크롬웰은 스스로 왕이 되는 것까지 고려했으나 군대의 반대로 그 생각만은 접어두어야 했 다. 하지만 그는 햄프턴 궁전에서 왕의 방식을 흉내냈으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 기도 했다. 칼라일을 흉내냈으며,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했다. 칼라일(Carlyle) 은 크롬웰이 그의 시대가 지운 직무로부터 "마음대로 사임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 점 에서 그가 조지 워싱턴과는 대조된다고 말했다. 군사 반란으로 일어난 이들은 그 과정에서 얻은 권력을 되돌려준 일이 거의 없다. 카이사르, 나폴레옹, 스탈린, 카스트로, 마오 등도 모두 크롬웰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마음대로 사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워싱턴의 경우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 다. 그는 혁명기에 제기된(카리스마냐,혼란이냐라는) 잘못된 딜레마 속에서 합법적인 지배가 탄생하게 했다. 그의 소박한 준법정신은 다른 수많은 위인들이 지니지 못했던 빼어난 예외 였다. 10.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비뚤어지게' 이끈 괘씸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지적 '영향력'이 흔한 것과는 달리 지적 '리더십'은 흔치 않다. 케인스 경(Lord Keynes)은,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죽은 경제학자들이 우리를 재배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추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듯이, 우리는 그렇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제자들이 많았지만, 그가 연구 를 위해 직접 모집한 제자의 수는 적었다. 그 밖의 제자들은 프로이트 자신이 어떤 목표를 향해 끌고 간 이들이 아니라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지식의 탐구란 그 순수한 형태에서 추종자들를 고려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없이 진리를 위한 진리를 구한다. 물론, 이를테면 핵무기의 기초 가 되는 이론을 만들어낸 일부 핵물리학자들이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반 론도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에서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어떤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진리가 사회질서를 해친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자부심으로 여겨왔다. 그리 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종종 그러한 사회적인 고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을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실험과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철학적 방법론을 다룬 역작 <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1739년)을 집 필하면서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이 저작을 완성한 그는 추종자들이 생기기를 기대했으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 책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까지는 많은 시 간이 걸렸고, 그것도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독일)에서부터였다. 그러자 흄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꿔서 엄청난 호응을 받은 <영국사(History of England)>를 비 롯, 수많은 정치 및 도덕 관련 에세이들을 집필하여 지성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흄은 자신의 삶을 두 가지 지적 활동으로 분리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향한 엄격하고도 고독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기존에 발견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널리 확산시키는 작업을 병행했다. 그의 지적인 업적은 주로 전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지만, 그의 '리더십'은 후자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하 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흄 같은 유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만을 걷게 된다. 즉 완고하게 희귀한 진리를 탐구하는데 몰두하거나 아니면 진리를 확산 시키는 일에만 집중한다. 전자에 속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분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종종 '정신나간 사람들' 이라 불릴 정도로 반사회적이거나 '사회 부적응적'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 주변에는 전설이나 일화 같은 것들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그들은 그 분야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질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하고, 자 신과 수입,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도 보통이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소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탁월한 연구에 동참하곤 한다. 이러한 사상가들은 당장의 '추종'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후일 보다 폭넓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하여 종종 키에 르케고르(Kierkegaard), 니체(Nietzsche),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등 소위 '신경증에 걸 린 위인', 다시 말해 사실상 자신만의 동굴 속에 숨어서 지식을 완성하여 바깥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던져준 사람들이 나중에 주목을 가장 많이 받기도 한다. 반면, 지도자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잠재적인 추종자 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관심에 대해 '건강한' 개방성을 보여주 며,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들 은 보다 찬양할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실 순수한 지적 문제에 집중한다고 보기 는 어려운 사람들이다. 대학교에서 보직을 맡은 교수들은 학문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아 무래도 행정과 관련된 여러 사무를 맡다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부대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끊임없이 예상치 못한 타인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지식 연구에 꼭 필요한 '일관된 정신적 탐구'에 매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위대한 행정가의 두뇌는 자연히 당일의 세부계획,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것들, 일상의 파 편들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따라서 복잡한 사고나 광범하고 장기적인 계획 등에 관심을 기 울이기는 어려운 법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평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과감한 생각을 꺼내기가 어렵 다. "세상에는 남들에게 안정되게 보이는 것이 생활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럴수록 그런 사람들은 불안정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원칙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이사회 앞에서 내놓기에는' 어려운 의견이나 추상적인 문제 를 이야기하는 용감한 사람은 몽상가, 이론가 혹은 분란을 일으키는 말썽꾼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추종자가 없이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니체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지식인 지도자들 은 종종 지식탐구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자책한다. 현대 보수주의운동의 지식인 지도자로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윌리엄 F.버클리 주니어(William F.Buckley, Jr.) 는, 자기가 이론적 작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학문적인 문장을 읽을 능력을 상실했 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버클리의 좌파측 라이벌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목표에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는 데 관심이 있었고, 그것은 단지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득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관된 지적 입장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학자들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대중에 영합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대 중의 구미에 맞춰주는 것은 리더십의 임무중 하나이다. 니체는 추종자들에 관심을 두지 않 았다. 그는 진리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바쁘기 짝이 없었다. 지적 리더십은 지적 활동의 최고 형태는 아니다. 최상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보통 어떤 사상가의 생애에서 특정한 단계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흄과 마친가지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전기 이론으로)독창적인 업적을 이룬 다음 나중에서야 인기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은 자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하는 데 9년이란 세월을 보낸 다음, 사회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어떤 지식인 지도자가 리더십을 발휘 할 때에는 그에게서 가장 깊이 있고 창조적인 업적을 기대하기란 힘든 노릇이다. 하지만 드 물게 그런 일들을 동시에 해낸 사람들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로 일하면서 기독 교사상을 개변시킨 설교를 했다. 볼테르 역시 스콜라철학과 일원론적 기독교에 대한 비판 자업을 세련화하는 동시에 연극과 역사 그리고 서사시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또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찬송과 강론, 성경 번역 등에서) 자신의 신학이론을 개발하면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하나의 지성계 자체를 창조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보기 드문 능력을 발휘한 예로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도 소크라테스 일 것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빠른 두 사나이의 결투 소크라테스가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실제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이끌지'않았다면, 그가 그 젊은이들을 '삐뚤어지게 이끈' 죄목 으로 사형이라는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다른 외로운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특이 한 사람이었지만, 심오한 학문에만 매달려 사람들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상생활과 부 딪치며 자신이 가르치는 곳에서 자신도 배웠다. 비록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몇가지 활동 을 꺼리기는 했지만 대체로 공중 지향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용감한 병사였던 그 는 사모스(Samos), 포티데이아(Potidaea)(430년), 델리움(Delium)(424년), 암피폴리스 (Amphipolis)(422년) 등의 전투에 참가했다. 포티데이아 전투에서는 그리스군의 방진이 철수 하는 동안(철수할때는 방진이 가장 취약한 시점이며, 따라서 차분한 자기통제가 극도로 어 려운 상황이다), 쓰러진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 사람-옮긴이)를 구해오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플라톤의 <라케스(Laches)>에는, 델리움 전투에 서 모두들 달아나고 있는데도 굳건하게 임무를 다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본 라케스 장군이, 형제들의 군사훈련을 맡기기 위해 아버지에게 그를 소개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군 경력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시민(테테스)이라면 중무장한 보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병들은 자신 의 돈으로 무기를 장만해야 했고,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여름 동안 일손을 놓아야 했기 때 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전장에서 주인의 무기를 챙기고 보급품을 사오는 등의 심부름을 하 는 소위 '당번병' 역할을 하는 노예(히페레테스)까지 대동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그 의 부친이 아테네 귀족들에게 존경받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그는 분명 아내와 아들들을 부 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과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70대에 이 른)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재판하는 법적에서 많은 벌금을 낼 돈이 없다고 말한 것을 근거 로, 그를 아무런 생계수단이 없는 똑똑한 부랑자쯤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박식의 정도로 보아 그는 귀족집안 사람이라고 짐작된다. 게다가 그는 예전에 소피스트 인 프로디코스에게 수업료를 지불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아테네의 부유층 자제들의 교육에 조언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의 뒤를 이어 민주주의 지도자가 된 니키아스 (Nicias)는 자기 아들을 가르칠 음악가에 관해 소크라테스와 상담했다. 또한 솔크라테스의 오랜 국 경력으로 보아, 그는 단체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무장 전사들은 하나의 분대를 이루어 서로 빽빽하게 방패를 겹치고 행동했기 때 문에, 어떤 한 사람이 영웅으로 떠오르기는 어려웠다. 그런 종류의 임무에 익숙한 사람이 동 료 시민들과 '엇나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소크라테스의 의향이 있는 사람과는 누구하고라도 대화를 나누는 특이한 방식으로 남들 을 가르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토론을 나누던 곳은 양가집 자제들과 외국인들 혹은 여행하는 학자들이 모이던 김나지움(연무장)으로, 다시 말해 보통의 정상적인 장소였 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소크라테스의 교육방식(관중 앞에서 지적인 대결 을 벌이는 것)은 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아케네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 다. 그들의 전체 문화가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체육, 지식, 법률 등 모든 분야에서 경연 (agoon)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의 삶이 지닌 논쟁적인 성격은 과장할려야 과정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다. 소 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체육, 음악 그리고 설득술 등을 경쟁했다. 정치 역시 지금 우리가 보 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경쟁적이었다. 심지어 법안의 통과마저도 신법과 구법 간의 경쟁을 통해 개정되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마 치 구법이 사형을 구형받은 것처럼 가정하고 다섯 명의 변호인이 개정 반대의 주장을 펼쳤 다. 재판 자체도 유효한 증거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 중심으로 짜여진 합법적인 결투였다. 시 민들은 정부에 경쟁들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교환(안티도시스)이라는 제도였다. 한 시민이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할 경우, 그는 어떤 다른 시민이 자신보다 세금 낼 능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 논쟁에서 진다면 자기 재산과 그의 재산을 교환 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아테네인들은 경쟁자(아고니스트)들이었다. 연극경연의 주연 연기자는 첫 번째 경재자(프로타고니스트)라고 불렸고, 모든 배우 역시 경쟁자로 간주되었다. 아이스킬로 스(Aeschylos)는 한 희곡에서, 주인의 명령으로 (코린트) 지협의 경기에 파견된 사티로스의 코러스가 주인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참가하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웅변이나 연극 들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의 등수를 매기고, 리 스트를 작성하며, 누가 무엇을 잘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누가 이 계절의 가장 아름 다운 사람인가? 누가 전쟁 지도자로서 가장 훌륭한가? 그들은 시에서도 이런 리스트를 늘 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사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 람), 가장 훌륭한 사물은? (물) 등등. 이런 세상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에 하나인 카에 로폰(Chaerophon)이 좋은 날을 잡아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 는가?"란 질문을 던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없다."였다. 소크라테스 는 그 신탁을 듣고 놀랐다고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그는 그전부터 가장 현명한 사람으 로 행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대면하던 날, 아테네 사람들은 어떤 총잡이가 ' 헬라스(그리스의 옛이름 - 옮긴이)에서 가장한 말을 해서 관중의 박수를 받았을 때, 소크라 테스 자신이 이런 분위기를 확인해주고 있다. 그의 말을 듣고 관중이 환호했을 때, 나는 숙련된 권투선수에게 한방 맞은 사람처럼 정 신을 잃고 비틀거렸다네. 그러고 나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문제를 좀더 생각할 시간을 얻기 위해 프로디코스 쪽으 로 몸을 돌렸지.... 아테네인들은 이런 대결을 좋아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대중적인 토론을 경멸했는 데, 이 사실만으로도 초기 대화편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토론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 짐 작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고르기아 스(Gorgias)를 다시 싸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실력 없는 경쟁자들은 논점을 회피하며 "간 간이 서로 모욕을 주고받음으로써 구경꾼들로 하여금 엉터리 논객들에게 귀기울인 걸 후회 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논객들은 논점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기술로 논쟁에서 이겨야 했 던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겨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쟁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논쟁의 목적은 상대편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그가 더듬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호 메로스는 당시의 체육경연에서 패자는 흙탕과 오물을 뒤집어쓰고 패배를 한탄했다고 썼다. 체육경연과 정신적 논쟁 간의 유사성은 소피스트들이 헬라스의 종교 행사들에서 경쟁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의 <소히피아스(Hipias Minor)>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경연에 참여하여 히피아스에게 다음과 같은 조그만 '승리의 송가'를 헌사하는데, 그것은 핀다로스(Pindaros)가 체육경연에 바친 노래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대의 명예는 그대의 나라와 조상들에게 지혜의 기념비를 바쳤노라!" 그러니 플라톤이 자신의 초기 대화편들의 배경으로 체육경연이 벌어지는 장소 즉 레슬링 학교, 군사 경연장, 경마장 등을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분명 경연이란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경쟁을 즐기 며 거칠게 싸우는 사람이다. 오늘날 소트라테스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가 편법을 쓸 때조 차도 소피스들의 방법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길고 도 가정이 많은 논의를 전개하면서 상대편에게는 짧고 자신이 확실하게 맏는 것만 말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그는 마치 스스로 어떤 배역을 맡고 그 배역을 맡은 이를 패배시키는 데서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말한다. 또 그는 상대편이 허위진술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 며 동시에 자신도 그런 비난을 받는다. 너 자신을 알라 당시 아테네로 몰려든 소위 '소피스트'(sophist:'소피스트'는 그 자체로는 '전문가'란 뜻이 지만 그 안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라불린 외국인들은 오랫동안 지식 사기꾼이 라는 평판을 들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아테네엔들을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들은 대체로 아테네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경쟁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이 일부 아테네인들과 견해를 달리할 때 소크라테스는 종종 소피스트들의 편을 들었다 - 기숙의 전문성을 찬양한 것이 한 예이다. 고대 아테네의 교육은 영험한 조상들이 물려주고 영험한 시인들이 흡수 한 지혜를 강조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영험' 이란 단지 불확실성의 다른 말에 지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목수나 구두 수선공은 최소한 자기가 하는 일의 방법을 알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그러한 평범한 전문가들을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태도는, 노예를 가지고 있었던 아테네인들이 바나우사아(banausia), 즉 사람의 손으로 하는 천한 일을 경멸 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아테네 사람들과 소피스트들을 모두 비난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아테네의 어리석 은 군중이나 잘난 체하는 외국인들과 아주 다른 인물로 제시한다. 또 플라톤의 후기 제자들 은,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소피스트들은 모든 윤리에 무관심 했다고 소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한 단순한 견해는 역시 반대의 단순한 견해를 낳기도 하는 데, 이를테면 스톤(I.F.Stone)은 아테네인들이 현대의 지유쥬위자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자유 토론의 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소크라테스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찬양이나 비난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 우선 그가 다른 소피스트들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독창적인 인물로서, 플라톤뿐 아니 라 많은 아테네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그의 영향 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다음 발언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었던) 니키 아스가 친구인 군장교에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하면 그에게 계속 말려들 수밖에 없다고 경 고하는 장면을 보자. 누구라도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나우게 되면, 그 이야기가 어떤식으로 시작되었든지 간 에, 소크라테스는 어느새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전 생애를 다 털어놓게 만든다네. 일단 그렇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그의 모든 주장을 다 시험해볼 때까지 그 사람을 놔주지 않지. 나는 그의 방법을 알고 또 그가 얼마나 성가신지 알고 있다네. 하지만 리시마쿠스, 난 그가 접근하게 게 싫지 않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 행동과 과거의 행동이 부적절한 것이었다면, 한번쯤 살펴보는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일세. 만약 어떤 이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나이 가 곧 지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좀더 사려 깊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일세. 그래서 난 소크라테스가 나를 시험한다 해도 놀라거나 불쾌하지 않네. 사실 세간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을 때, 우리 도 역시 그의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네. 치열한 윤리적 탐구야말로 소타라테스의 핵심어였다. 그는 다른 이들뿐 아니라 자신의 정 신의 깊이를 탐구했다. 사실, 그는 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계속 연구했다. 크리티아스, 자넨 마치 내가 스스로 검토하고 있는 게 무언지 알고 또 원하기만 하면 그 걸 자네한테 설명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듯이 반응하는군. 하지만 사실은 그와 거리가 머네. 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네와 함께 탐구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라네. 왜냐하면 내겐 지식이 부족하니까 말일세... 내가 자네에게서 진리를 구할 때, 실은 내가 모르는 걸 내가 알 고 있다고 생갈할까봐 두려워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겠나?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들의 욕망과 지식의 상태를 검토하도록 강요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전일성을 구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열정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자기정화 노력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 인이 자신의 완벽주의적 열망에 스스로 상처입은 반면,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다스리려고 했다. 라케스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질문을 던 졌다. 라케스의 말로 판단하자면,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그와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델포이신전이 던진 충고, 즉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그리 스인들의 전통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질문을 보다 새로운 깊이로 승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것을 질문하라고 가르쳤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라고 가르쳤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y)>(23c)을 보면, 소크라케스의 제자들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열정적으로 탐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뒤흔들어놓은 모습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젊은이들은 사람들이 검토당하고 있는 것을 즐겁게 들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가끔 나 를 본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검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차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제 딴에는 무엇인가 아는 듯이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실은 안다고 해도 거의 아는게 없는 자들이 즐비하게 많다는 걸 알아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검토당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내게 화를 내서 "소크라테스라는 괘씸 한 자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라고 고함을 지르게 된 것입니다. 시민들을 '검토'한 것 외에, 소크라테스의 교의들(그의 유명한 패러독스들)은 개념의 투명 한 순수성을 찾고자 하는 내적 요구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들이었다. 그는 모든 덕이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지식이란 덕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무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부 과한 높은 기준에 따라 아테네인들의 윤리와는 다른 윤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악을 악으 로 갚지 않았고, 악을 저지르기보다는 차라리 악을 감내했으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삶 을 살았다. 그가 생각한 덕 있는 삶은 아킬레우스와 아작스(Ajax)의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패러독스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있다. 그레고리 블라스토스 (Gregory Vlastos)가 그러했고, 플라톤은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소크라테스의 생각 을 논리적으로 정식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지닌 통찰의 '심리적' 통일성은 (성 프란체스코나 간디, 바알 솀 토프 등) 일부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볼수 있는 일종의 윤리 적 절대주의에서 유래했다. 소크라테스의 종교적 경건 역시 좀 특이하긴 했으나 대단히 신실한 것이었다. 그 자신에게 진실하게 사는 것은 그가 경배하는 신들에 대해 진실하게 사 는 것이었고, 그것은 신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신들의 '윤리' 때문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모든 스승의 원형 소크라테스가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그의 논증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세가 치 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지신의 삶을 변화시켜야겠다고 느끼면서 떠나갔다. 그가 엄격한 (소피스트들의 방법을 근본적인 자기 질문의 도구로 사용하는) '지적 ' 훈련을 통해 윤리적 목표를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크라테스를 연구하 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 윤리적 목표를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거부하면서 국가의 계약이론을 동원하여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크리톤(Crito)>에 나오는 네 가지 논증 중에서 법에 대한 '묵 시적 동의'는 가장 중요하진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논증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졌던' 것이 다. 소크라테스는 도시국가 아테네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아테네를 경배 하고 있었고, 따라서 탈옥으로 그 국가를 모욕할 수 없었다. 블라스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무지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진심이었다고 주장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지닌 법적 정당성을 변호한 바 있다. 하지만 아마도 키에 르케고르처럼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지니 핵심을 파악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즉 신성 (혹은 세계 자체)에는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소크 라테스에게 어려운 문제는, 바로 이 사실을 알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말이 부적절하다고 주 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여전히 세계에 대해 무언가 유용한 말을 찾았다는 것이다. 소크 라테스는 정신을 윤리적 행동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정열에 아무런 철학적인 형태를 부정하지 않았던 성 프란체스코 등과는 다른) '지식인' 지도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스스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끝없이 '욕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오직 목이 마른 사람만이 간절하게 물을 구한다. 소크 라테스에게 있어서 탐구의 동기는 바로 무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모른 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제스처나 전술적인 고백 혹은 그가 질문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 기 위한 것짓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이 지적 리더십의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지식의 '부재' 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에서 출발한다. 위대한 스승은 전략적으로 무지한 사람이며, 부정적 사고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식의 저정고에서 꺼낸 지식들을 주위에 나우어 주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 는 오직 자신이 탐구한 것만을 '깨달았고' 또 끊임없이 깊이를 더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자신에게 베푼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데, 이는 결 코 거짓된 말이 아니다. 오직 아테네만이 그에게 지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열성적인 젊은 이들을 공급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지식욕은 소피스트들에 의해 더욱 커졌 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후일 플라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소피스트의 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빚진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모든 스승들의 원형이다. 그들은 에너지와 호기심 그 리고 지적인 참신함을 갖추고, 결코 일종의 교육 테크닉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자신의 윤리적 이해를 증힌하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법 대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스승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진지한 사상가들은 플라톤처럼 오직 엘레트 사상가들만이 아는 정교하 고 비교적인 연구에 몰두한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초심자들로부터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면 아마 거짓을 것이다. 사실상, 교실에서 위대한 지식인 지도자를 만나기는 힘들다. 살롱의 볼테르, 카페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소아시아를 여행한 바울 같은 사람 들이 소크라테스의 아들들이다. 혹은 주교의 자리에 앉아 설교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그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가 설교할 때 청중이 감동을 받으면 역시 우리도 감동받을 것 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것이 있으니 참으로 놀라워라. 그 순간 우리와 그들 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고, 그들은 듣는 것을 말하며, 우리는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도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소크라테스 개인을 그린 그림들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것은 그가 죽음에 임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 습을 그린 다비드의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원(School of Athens)>을 보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며 탐구를 계속하는 그의 모습을 좀더 잘 알 수 있다. 그 그림에서 위대한 이성의 사원 내에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세속의 베드로 와 바울처럼 자리를 주재하고 있고, 소크라테스는 옆으로 비켜나서 손가락으로 각 논증들을 구분하면서 사람들과 한창 논쟁을 벌이고 있다. 외딴집으로 숨어버린 비운의 천재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년)은 종종 소크라테스와 비교되며, 사실 그 두 사람은 몇 가지 놀라운 유상성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무아지경에 가까운 놀라운 집중력으로 지식을 탐구했고, 지식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으며, 순수한 언어와 순수한 인생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생활과 동떨어 진 현대철학을 상징하는 본보기나 다름없다. 그는 바로 그러한 분리를 한탄했지만 그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을 만나 해결하기 위해 아 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을 만나 철학적인 자기검토를 했던 소크라테스 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몇 사람 안 되는 학생들과도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케임브리지대학의 철학자들조차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기독교 국가 오스트리아에 완전히 동화된 부유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천재란 것을 증명해야만 싫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천재 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세 명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 자살을 기도했다. 그 후 그는 공학 을 공부했으나, 자신에게 맞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철학적 수학이라는 가장 추상 적인 연구에 몰입했다. 그 비교적인 셰게에서 그는 금방 케임브리지의 스승 버트런드 러셀 을 뛰어넘었고, 곧 심지어 러셀조차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사상 때문에 고립감을 느끼에 되 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정기적으로 자신이 노르웨이에 지은 외딴집으로 피신하여 이론을 연구하 곤 했다. 1차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면서 수학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관심 분야를 옮겼으면, 한동안은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고려한 적도 있었다. 전쟁 후에는 소박하게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심정으로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하 지만 그는 학생들의 느린 이해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다. (굳이 학위도 받지 않은 상태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곧 강사, 그리고 다 시 교수가 되어 언언의 평상 용법에 대해 강의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형상적 이론 이 아니었고, 강의 역시 평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선의를 가지고 보통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할리우드의 서부영화와 싸구려 탐정소설 등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 역시 도피적인 것일 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적으로 이해 가능한 언어를 탐구하려는 윤리적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 다. 그는 언술의 완전한 정직성을 성실의 문제로 보았다. 또한 인생의 순수성을 획득하기 위 해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그는 한때 학교 선 생으로 일했던 마을로 찾아가 자신이 때렸던 모든 학생에게 일일이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 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봉사의 삶을 살도록 설득했다. 심지어 그에게서 철학을 듣던 학생들 은 간호사나 막노동꾼 같은 초라한 직업을 택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오만한 태도로 비난하다가도 갑자 기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친해지는 것도 두려워했으며, 특히 자신이 아주 강한 매력을 느끼던 몇 명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가서야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가르칠 때마다 자신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이끌지도' 못했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그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학생 몇몇 을 철학을 버리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르치면서 배우는 지식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론들은 대개가 (기계적인 동작을 하는 몸과는 다른 곳에 있던 그의 정신 덕분에) 고립상태나 군대에 복무하던 중 혹은 천한 일을 하던 도중에 짜여져 나 온 것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고자 했으나 그의 이론과 방법은 그의 의도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사상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실 패로 이끌었다. 소크라테스가 인생의 한복판에서 바쁘게 움직인 사람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 은 인간사회의 변경에 서서 말문이 막힌 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11. 하나님 아버지-어머니 속에서 교회를 지킨 어미호랑이 메리 베이커 에디지난 2000년 동안 서구 문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도 예 수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 대한 기록들이 그러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지도자들의 명단에서 제외한 것이 이상하게 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다루는 리더십에 대한 정의에서 벗어나 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누 구였으며, 그는 무엇을 목표로 그들을 모았는가? 예수의 생애를 알려주는 최초의 기독교인 들,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조차도 그의 목표, '하나님의 나라'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 으며, 예수의 외로운 죽음 앞에서는 그를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인들에게 '역사적인 예수'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실패자였다. 부활한 예수만이 자 신을 버린 사람들을 결속하고, 그들에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엄청난 수의 추종자들을 만들 게 했다. 이렇듯 죽고나서 활약하는 부활한 예수는 역사가들이 다룰 주게가 아니라 신자, 신화학자, 신학자들의 주제이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는 부 활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 초기 전도자들과 그 중에서도 뛰어난 바울이었다. 바울은 교리 를 정립하고, 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막대한 에너지와 청조적인 지력을 발휘 했다. 물론 그가 곧 기독교의 설립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베드로와 다른 이들 또한 전도했 다. 다만 이들은 바울만큼 영향력 있는 기록을 하지 않았기에ㅡ 우리가 그들을 좀더 모를 뿐이다. 그들 뒤의 어떤 곳에 존재하는 예수는 신비이고 구세주이고 대속자이고, 단순한 지 도자라기보다는 좀더 은밀하고 높은 어떤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지도자이기도 했던 다른 계시의 전달자들(예를 들면 모세나 마호메트)과는 다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성자(도로시 데이 - 16장 성자형 지도자 참조)난 전통의 수호자(교황 요한 23세 - 8장 전통적 지도자 참조)와 달랐다.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는 무로부터 교단을 창설한 혁신자였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도 어느 정 도는 그들의 교회를 재설립했다. 이는 오랜 복음을 위한 믿음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그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좋은 예이다. 카톨릭 수도회를 창설한 사람들 즉 성 베네딕트, 성 프란체스코, 성 도미니크, 성 이르나티우스ㅡ 등도 그러 한 예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설립되어왔다. 그러 한 지도자들은 진보를 위한 실제적인 개혁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개혁 정신에 개방적으로 봉직했던 교황 요한 23세가 한 일을 넘어서는 일을 이루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같은 사 람은 추종자들에게 놀랄 만큼 새로운 가치관을 전파했던 것이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 미국에서 '새로운' 기독교 교회는 단지 목사들의 행활양식만을 개조한 것은 아니었다. 셰이 커교도(Shaker), 모르몬교도(Mormon),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신자(Christian Scientist), 재림 교도(Adventist), 아마시교도(Amish) 이들 모두는 기독교 복음서에 의존하면서도 이를 완 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재해석했다. 셰이커교의 앤 리(Ann Lee) 혹은 제칠일예수재림교의 엘런 화이트(Ellen White) 같은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초기에 투쟁했던 것을 현대적인 상황에서 되풀이한다. 이들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메리 에디일 것이다. 이들중 그녀를 따르는 추종자의 수 때문이 아니라(크리스천 사이언스 교회의 신자는 항상 미국 인구의 1퍼 센트도 되지 않았다) 그녀가 만들었던 조직의 특성 때문이다. 이 조직은 셰이커 교회, 모르 몬 교회, 아미시 교회 등 보다 배타적인 체계와는 달리 당시의 '건강한 정신 풍토'를 수용 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풍토의 미래를 결정했다. 윌리엄 제임(William James)는 1899년 영향력 있는 기포드 강연에서 - 이 강연은 <종 교적 경험의 당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 19세기의 종교적인 개념들을 두 가지 주요 학파로 구분했다. 하나는 '병든 영혼'을 강조하 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건강한 정신'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첫 번째 학파는 인간과 신의 분리, 본성의 타락, 죄의 유전, '원죄' 등을 강조한다. 두 번째 학파는 신이 세계를 자신의 선한 영역으로 창조했다는점, 신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신은 자신 의 자비로운 본성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인간의 본성은 신의 본 성을 따라 주조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의 지성계는 처음에는 '병든 영혼'에 주안점을 둔 여러 종류의 사상가들 즉 청교도 신학자들, 칼뱅주의 신학자들, 한탄하듯 설교하는 뉴잉글랜드 설교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기회, 풍부한 자원, 개인적인 창의성을 강조했기에, '처녀 대 륙'을 개척하고 신의 사역이 사탄의 방해로 가로막히지 않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낙관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청교도적인 칼뱅주의에 갇혀 있던 사람(윌리엄 제임스 자신은 조금 도 그렇지 않았지만)에게는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새로운 정신, 특히 당 시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스위스이 에마누엘 스웨덴보르크의 신비적인 정신주의에 열광했 던 사람이다. 그의 아들인 윌리엄은 영적인 사고에서 일종의 치유력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 가 뉴잉글랜드의 비관주의로부터 심리적으로 해방된 것과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그는 19세 기 후반에 영어권 나라들을 휩쓸었던 '건강한 정신' 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이 운동 덕분에 퇴보적이거나 전근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신학적인 관점들이 진보적인 의미 를 갖게 되었다. 빅토리아시대의 종교적인 위기는 여러 전선에서 발생했다. 지질학과 생물학은 성서의 역 사적인 근거를 파괴하는 듯했고, 인류학은 기독교를 다른 '원시' 구원 종교와동일하게 다 루었다. 산업화는 삶에서 신비를 제거했고, 문명을 합리화, 비인간화했다. 맨체스터파 경제 학은 자비와 이타주의가 지닌 정신적인 가치를 파괴했다. 여러 방향으로 찢기고, 진화론의 정글과 생존의 쟁탈에 휘말리고, 철도 기관차와 증기선과 전선줄들을 따라 미래에 처박힐 듯이 질주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 무엇이라도 믿고 싶어하는 맹목적인 의지를 보여주기 도 했다. 워즈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상거래로 더럽혀지고 공업 때문에 질식하는 이들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믿고자 하는 이들이었을 것이 다. 차라리 나는 낡은 교리에서 양육된 이교도인 편이 좋을 듯하다. 많은 교의들, 새로이 주조되어 낡지 않은 교리들 즉 낭만주의, 초월주의, 견신론 , 최면술 등은 그러한 버려진 영혼들에 위안을 주었다. 그 모든 교리들은 본질적으로 거대하고 기계 적인 것들을 초월하여, 시대의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은 천상의 생명력을 추구했다. 여성은 정신주의가 확산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에서 묻혀진 존재였던 여 성은 '남성들이 주도하는번잡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점점 합리화되어가던 시대였 지만, 여성에게는 고등교육을 바든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 고된 정신노동은 여성들의 섬 세한 체계를 거스른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산업계의 고위층'이나 실험실의 과학자, 탐험대 의 탐험가일 수 없었다. 여성들이 히스테리나 망상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그들 은 그런한 진단을 확인시켜줄 치료를 받았다. 여성들은 운동할 만큼 건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코르셋으로 옥죄이고, 긴 스커트 때문에 절룩거 리면서 수파운드나 되는 머리카락의 무게를 감당하며, '위험스러운' 신선한 공기가 차단된 방 속에 갇혀 있던 빅토리아시대의 여성들은, 여성들의 불평을 물리칠 만큼 '단호한' 태도를 자랑하던 남자 의사들에 의해 돌보아졌다. 의사인 헨리 맨즐리(Henry Mandsliy)는 모성애와 자녀 양육을 다음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냉담한 이성에 비추어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본질적으로는 배설물에 불과한 것에 대한 이 모든 애정 소동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지 않은가?... 출산의 과정이나 아이 가 강요하는 기본적인 시중에는 좋은 점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맨즐리는 여성을 동보는 일에는 전문가라는 평을 들었다. 19세기의 가장 흥미 있 는 발전 중 하나는 몇몇 여성들이 그들이 갇혀 있던 바에서 새로운 능력을 개발했다는 사 실이다. 알렉스 오언(Alex Owen)은 영국과 미국의 여성 심령술사 사이에 대서양을 가로지 르는 관련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만일 여성들이 좀더 '예민한' 성이라면 남성들이 추 측조차 하지 못하는 힘의 원천을 느낄 수도 있다. 여성 영매와 심령술사는 하지 못하는 힘 의 원천을 느낄 수도 있다. 여성 영매와 심령술사는 남성적인 의학에 저항하여 그들 자신의 건강과 능력을 회복하는 데 재능을 발휘했다. 그들은 정신치료를 전문적으로 했는데, 그 치료는 종종 정신력의 고양을 위한 식이요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어떤 이들은 그들을 퇴영적이고 반동적이며, 합리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라고 치부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종종 "낙관주의와 급진적 이상들, 민주적인 원리"를 위 해 일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루이자 로우(Louisa Lowe)는 정신 이상자 교정운동 (Lunacy Reform Movement)의 지도자였는데, 이 운동은 여성을 정신병원에 쉽게 위탁하는 것에 반대했다. 로우는 자신을 금치산자로 몰아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남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운동과정에서 그녀가 옹호한 여성들은 바로 예전의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이렇 게 많은 여성 치료사들은 예전에 똑같이 병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 병을 낳은 조건들에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기적이 아니라 과학이다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1821-1910년)는 한때 병에 시달렸던 지도자들 중에서 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녀는 1866년 얼음판에서 낙상한 그 유명한 사건 때문에 치료 를 받았는데(그녀는 이 사건을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사고에서 회복되면서 일생 동안 겪은 여러 병에서 회복된다. 후에 에디의 반대자들은 그녀의 의사가 말한 것을 근거로, 그 사고 때문에 그녀가 대단한 물리적인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진술서 를 만들어내가도 했다. 그러나 에디는 낙상 후 2주일 동안 친구들의 그릇된 요법으로 "척 추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으며, 그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심리 치료법은 본래 일종의 정신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병은 당시 후진적 문화와 의 술에 복종해야만 했던 여성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린의 얼음판에서 미끄러진 이 45세의 여성은 두 번 결혼한 경력이 있었다. 첫 남편은 죽었고 두 번째 남편은 그녀를 버렸다. 당시 개업의들의 (정기적인 모르핀 요 법을 포함한) 모든 약물 치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그녀는 일생 동안 심리적으 로 무능한 상태였다. 의학을 사용하지 않는 치료사, 피니어스 큄비(Phineas Quimby)만이 그녀를 해방싵킬 수 있었다. 영리한 발명가였던 큄비는 최면술의 개척자인 프란츠 앤턴 메 스머(Franz Anton Mesmer)의 모든 기술을 습득했지만, '동물의 자기력'에 대한 사이비 학 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초보적인 실험들을 통해 정신의 연상활동이 자기력을 만든다는 가설을 입증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치료를 연상하도록 함으로써 정신치료에 성공 을 거두었다. 가끔씩 '촉진' 즉 안마나 마사지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환자들이 연상 과정을 생생 하게 그리도록 하는 것만이 목적이엇다. 무엇보다도 그의 촉진법은 고통을 완화시켰다. 치료 를 받는 여성의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무거운 머리띠를 풀 수 있었다. 큄비는 관자놀이와 머리를 마사지하고 횡경막을 두드릴 때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셨다. 그 물 치료가 끝나면 여 성들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무거운 머리 카락을 풀어야 했다. 큄비의 환자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큄비는 여성들을 '약한 성'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주도하려는 욕구를 불어 넣어주었다. 그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여성이 병들었다면, 그것은 일반 적으로 문명이 우월한 연상력을 사용하는 여성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큄비가, 문명이 정신에 대해 갖는 힘을 이해한 것은 아주 예리한 통찰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형성할 개념 능력을 갖지 않은 아이들조차도 어떻게 질병을 연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문명의 힘을 통해 설명했다. 어린아이들의 잠재의식은 문명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에 대한 신호를 받는다. 큄비는 다섯 살 난 아이가 자기 어머니의 증상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서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정신이 정신에 미치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 은 '정신적인 분위기'를 지니며, 그들의 정신은 그 분위기 속에서 주변의 사회문화적인 태도 에 속박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큄비는 당시 교회에 속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는 타인과 나눌수 있는 진리('참된 그리스도'는 진리이다)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악마를 '추방' 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선한 연상이 사악한 연상들을 물리치는 경우이며, 따라서 기 적이 아니다. 이는 바로 큄비 자신이 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치료는 실험적이며 기 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에 기반한 것 이라고 말했다. 1862년 큄비는 처음으로 에디를 치료했다. 1864년에 재발했다가 다시 나은 뒤에 그녀는 큄비의 사도 겸 제자가 되었고, 1866년 그가 죽기 직전에 잠시 그를 방문했다. 큄비의 죽음 으로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으며, 그 고통은 그녀가 얼음판에서 미끄러졌을 때 겪었던 것만 큼이나 깊었다. 또한 이때 남편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녀는 1866년 신약 성서를 읽고 큄비의 도움 없이도 자신을 치료했다. 신약 성서에는 사람 들이 낫고자 한다면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예수의 말이 나온다(마태복음 9:2, "예수께서 저 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자에게 이르시되...") 그녀의 사목 방식은 큄비와 같은 인간적인 연상('촉진'을 하든 하지 않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성서를 - 복음뿐 아니 라 복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 읽게 하는 것이었다. 에디가 이러한 전략을 선택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사실 아주 글을 못 썼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들은 오락적인 가치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1865년 14조 수정 안에 따른 노예해방을 경축할 때 쓴 글에서 그녀는 이러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모든 종루에서 울리는 기쁜 종소리- 사로잡힌 자를 위한 기쁨! 오래도록 들린다! 80년 동안 슬퍼했던 이들은 말할 수 있네 그 종소리의 거룩한 의미를. 산문에서도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큄비를 찬양하는 글에서 그녀는 큄비가 어떠한 강령회 따위도 갖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 해방된 성령들의 우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두운 미지의 문턱을 넘어 끝없이 심연에서 보이지 않는 인디언 여인의 공포에 질린 영혼을 불러내는 경 건한 도인을 믿지 않았던 그가 말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독서'로 치유되었기에,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적절 하리라고 믿었다. 1866년 치유된 이후 그녀의 여러 해 동안 옮겨다니며 살면서, 때때로 아 물아물한 정신계에 빠져들었고, 큄비즘을 퍼뜨렸으며, 그녀 자신의 신학을 종이 위에 옮기기 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성서의 '상형문자'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도록 가르치 려 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얼마나 큄비와 다른지를 보여준다. 사실 그녀는 과학적인 도전 에 저항하라 수 없었던 직역주의자들로부터 성서를 구해내자는 광범위한 운동을 벌인 사람 들중 하나였다. 그녀는 스웨덴보르커처럼 다른 이들은 그저 고대사라고 생가가했던 것을 정 교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언어는 마치 신화처럼 변해갔는데, 스 웨덴보르크와 그의 모방자들도 그와 비슷한 글을 쓰곤 했다. 마크 트웨인(Ma가 Twain)은 에디의 과장된 문체에 대해 유명한 풍자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에머슨은 이미 스웨덴보르 크에 대해 쓰면서 트웨인식으로 풍자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라고 그 성급한 독자가 물었다. "벽옥과 마노와, 녹주석과 옥수로, 방주와 어린 양으로, 성배와 성의로, 나병과 에메랄드를 지니고서, 제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갖고, 불수레와 왕관을 쓴 용으로, 비히모드와 유니콘으로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그러나 특이한 신학을 전개하면서도 에디의 신학은 성서적인 진보의 편에 있었는데, 이는 마치 빅토리아시대의 매체들(알렉스 오언이 묘사했던)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던 것과 같 다. 그녀는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서는 바울을 모방했지만 글에서는 바울의 메시지를 해체 시키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가 대속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에디는 자신의 신학 체계를 죽음 위에 세울 수 없었으며, 그러한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했 다. 그녀가 보기에 바울은 너무나 유물론적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의 구주는 삶이며 불멸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육체적인 피는 '저주받은 나무'에 그 피가 떨어졌을 때 죄를 씻어내는 능녁을 가 졌을 뿐이지, 하느님의 사역을 다하기 위해 정맥을 흐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피의 정신적인 의미'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의 정신적인 의미를 추구했다. 예수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처럼 그녀도 바울이 예수의 삶을 신학화하기 이전의 인간 예 수라는 '초기'의 모습을 찾아 성서를 탐색했다. 이 때문에 그녀가 르난()과 다르게 보일 수 있는데, 르난은 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배제한 채 '인간예수'에 이르는 길을 탐색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겉보기에 불과하다. 그녀가 보기에 치유는 기적이 아니라 아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죽음, 질병, 악덕은 정상 적인 질서를 침해하는 것이며, 치유와 건강,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질서를 침해 하는 것이 아니다. 톱밥 광산을 금광으로 바꾸다 알려지지 않은 여러 저술 작업을 한 지 9년 만에 에디는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1875년)의 초판을 출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교회를 만들 수 있었다(큄비는 이러 한 야망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만든 이 초기 교회가 성립된 과정을 보면, 다른 많은 경우처럼 스캔들, 분쟁, 상호 고발로 얼룩져 있다. 날뛰는 추종자들이나 에디의 귄위에 도전하는 라이벌 지도자들 모두 그녀가 단지 큄비를 표절했을 뿐이라고 비난했으 며, 그녀의 치료가 믿을 만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고상하지 못한 광경은 바울의 교 회가 겪었던 진통을 상기시킨다. 너희들 모두는 말한다. "나는 바울의 편이다." "나는 아폴로의 편이다." "나는 세파의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편이다." 그 운동에 쓰이거나 교환된 돈에 대해 몇몇 전도자들은 에디를 고소했고, 에디는 다시 맞소송을 제기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해임하려 했고, 자산 조직에 대한 그녀의 결정 력이나 능력을 줄이는데 성공했다.<과학과 건강>을 출판할 때 재정적으로 그녀를 후원한 조지 배리(George Barry)와 다니엘 스포포드(Daniel Spofford)는, 그녀가 1877년 아서 길 버트 에디(Asa Gilbert Eddy)와 결혼하자 그녀와 절연했다. 그 둘은 그녀의 가치가 떨어졌 다고 느끼고 그들이 주었던 돈을 돌려받으려 했다. 이일로 고통을 겪던 에디는 마침내 제자 들 중 하나를 시켜 스포포드를 옛 매사추세츠 법률에 있는 마녀죄로 고발했다. 1878년 적절하게도 세일럼에서 열린 재판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건을 이해하려면 M.A.M(Malic-ious Animal Magnetic:적대적인 동물 자력)이라는 에디의 이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신을 치료할 수 있다면 감염될 수도 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잠재의식에 대한 큄비의 통찰이었다. 따라서 '정신적인 범죄'는 에디가 항상 경고했던 위험한 것이었다. 그녀는 <건강과 과학>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넣었다.. "세일럼의 마녀들이 지닌 위험은 과 거의 일이 아니다... 형이상하가 과학은 최면술을 법으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적들이 그녀에게 분노를 집중시키자. 그녀는 이러한 분노가 발산되지 못하도록 '파수꾼'들을 경호원으로 모았다. 위기의 시기 동 안 그녀는 12명의 파수꾼들이 그녀를 둘러싸도록 했는데, 이들은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가 숨쉴 수 있는 건강한 정신적인 대가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더 이상 마녀죄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뉴버리포트 헤럴드>지는 에디가 스포포드에게 어떤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법원이 무슨 일 을 할 수 있는지 알 수없고, 마찬가지로 감옥의 벽도 그 힘을 제한할 수 없다." 사실 벌집 행도 스포포드의 정신이 사악함을 발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에디는 정신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판사는 그 사건을 거부하면서, 법원이 스포포드의 생각을 통 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점에서는 에디도 동의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디의 직위는 좀더 보장되었지만 교회에는 당혹감이 감돌았다. 그녀의 유능한 조수인 조 세핀 우드버리(Josephine Woodbury) 부인이 성관계를 밎지 않고 아이를 가졌다고 선언했을 때, 에디는 이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힘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6년밖에 되지 않아서 우 드버리는 마침내 파문당했다. 어떤 부인이, 성령이 아니라 자기 남편이 그 기적의 아이의 아 버지라고 했다면서 우드버리를 고발했던 것이다. 새로운 교회의 웅성거리는 분위기에서 그런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 었다. 바울의 고린도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고소하고 비난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근 친상간을 범하고 이교적인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은 권위를 굳게 단언함으 로써 이에 반응했다. 에디도 그렇게 했다. 에디는 중오한 사상가나 치료사가 아니라 교회 지 도자로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신학만이 아니라, 교회학으로 자신의 추종자들을 유지 했다. 교회학은 권위를 구조적으로 세우고, 예배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 러한 조직에 대한 노력으로 그녀는 마크 트웨인조차 인정했던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그 녀가 큄비의 체계를 넘겨받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게 트웨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 다. 그녀가 넘겨받았건 고안해냈건 간에 그녀가 그 체계를 받았을 때는 물질적으로는 거의 톱밥 광산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금광으로, 관습과는 거리가 먼 영적인 부두로 바꾸었다. 그 부두에서 그녀는 하나의 세계종교를 출발시킨 것이다. 한번은 보스턴에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를 만들면서, 그녀는 여러 인쇄매체를 통해(<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같은 유력한 세속적인 잡지를 포함하여) 감독위원회를 만들고, 모든 것을 그녀의 확고한 통제 아래 놓으려 했다. 그러고서 그녀는 현명하게도 교 회의 감독직 활동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독자들, 학급들, 학생들, 전문직들, 정치가들, 과학 시대의 성직자들이 평신도와 문자와 책 중심으로 묶인 전체 체계를 창안했다. 유복한 중산 층으로 구성된 신자들은 설교나 감성적인 노래들을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음으로써 더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 교회는 구성에서부터 바로 미국이란 나라처럼 개인적인 노력과 성공, 지속적인 발전을 강조했다. 이제 번잡스러운 일에서 물러난 에디는 성가신 개인적인 다툼을 그만두었다. 그녀 는 교회의 구조가 그녀 없이도 그 자체로 운영도록 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죽었을 때 혼란 은 거의 없었다. 에디의 조직은 제임스가 묘사한 '건강한 정신'의 이념을 아마도 가장 잘 표현했을 것이 다. 그녀는 19세기 말엽 미국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하나의 조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신 자들을 조직하려는 영적인 전도자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조직이었다. 그녀의 작업은 '병든 생각'의 문화심리적 불구 상태를 극복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모든 의술을 반대하는 않았다. 에디는 노년에 통증 때문에 모르핀을 맞았다. 에디가 반대했던 당시의 의학적 시술, 특히 여성 치 료법은 탄핵하거나 반대할 만한 것이었다.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메리 에디는 현대 페미 니스트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한 강인한 여자였으며, 그녀의 '어머니 교회'에서는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신에게 기도를 드렸 다. 그녀는 단일신을 믿었지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 즉 오직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며 그 신은 남성이자 여성이었다.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어머니 '로 바뀌었다. "우리의 아버지-어머니인 모든 조화로운 하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할지니." 그녀의 모성적인 위풍당당한 본성이 -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눈과 함께 - 사진으로 포착 된 것은 그녀가 50세 때이다. 이 사진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아이를 안고서 카메라를 응시 하고 있다. 이 사진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아이를 안고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에게 는 첫 번째 남편에게서 태어난 아이만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여섯 살 때 양자가 되었다. 그녀의 참된 지식은 그녀의 교회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그 교회를 빼앗아가려고 했을 때 그녀는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호랑이와도 같았다. 치료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던 정신 치료의 대가 피니어스 파커스트 큄비크리스천 사 이언스의 역사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큄비의 사람이거나 에디의 사람이었다. 큄비의 사람들 은 에디가 큄비의 조직을 훔쳐서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한다고 생각했다. 에디의 사람들은 큄비주의자가 에디가 성취한 모든 것을 단지 표절이라고 깎아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 실 그 두 사람은 너무나 달라서 그들이 일하는 조직도 목표와 방법에서 크게 달라져야 했 다. 그들의 이야기에 유사점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대부분의 정신 치료사들처 럼 그들도 처음에는 병약했고, 여러 가지 부적절한 치료를 받고 나서부터 25년 동안이나 결 핵으로 고생했다. 에디의 경우와는 달리, 의사들은 그에게 모르핀을 처방하지는 않았다. 하 지만 큄비의 말에 따르면, 의사가 너무나 많은 수은을 투약해서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실용 적인 사람이자 실험을 좋아하는 발명가였던 큄비는 직접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일 례로 그는 전차를 끌며 달리는 말을 조종하면서 흥분이 통증을 막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권투선수들이 아는 것처럼, 격투를 벌일 때는 자신의 손이나 코, 턱의 뼈가 부러져도 알지 못한다). 그는 정신력이 육체적인 감각에 영햔을 미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찰 스 포언(Charles Poyen)이 논증했던 최면상태의 위력에 즉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37년 포언과 만난 이후 큄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1843년에 아주 빨리 최면에 걸리는 어린 소년(루치오 버트마)을 만났는데, 그는 큄비의 암시에 너무 나 개방적이었기에 아예 큄비의 마음을 읽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정 신과 신체의 내면을 읽어내는 버크마의 능력을 실증하는 여행을 떠났다. 물론 큄비는 버크 마를 통해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 했다. 버크마는 큄비에게 자신의 신체에서 붕괴된 기관 들을 '볼 수' 있 으며, 촉진법으로 그 기관들을 짜맞출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시술'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큄비는 그런 것을 믿기에는 너무나 이성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아프지 않았으며, 버크마는 그 저 그가 자신을 '생각'할 수 있게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론은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었다. "치료 자체가 원래부터 불필요한 것임을 자각한 순간 병은 사라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버크만 없이 생각만으로 건강해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이러한 일을 진행했다. 다른 이들을 치료하면서 큄비는 그들을 너무나 동정한 나머지 때때로 그들의 증상을 겪기 도 했으며,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자신과 환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 글들은 마치 실험 과정을 기록하는 실험일지와도 같았다. 에디에 비해 그는 정규 교육을 적게 받았고 폭넓은 독서를 하지도 않았기에, 헌신적인 환자 엠마 웨어가 교정한 후에도 그의 노트는 난삽하고 오자투성이었다. 큄비는 성공적인 치료사였지만 어떤 학설을 만들지도 신학적인 체계를 구성하지도 않았 다. 이 점에서 그는 부유한 개업의와 닮았다. '연역적인 자기 암시'를 주장한 20세기의 프랑 스인 에밀 쿠에()는 큄비가 했던 것 같은 원리에 입각해서 사람들을 치료했다(프랭클린 루 스벨트도 소아마비를 치료하려고 쿠에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치료의 대가들은 그들의 주의를 실천하는 어떠한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 큄비는 환자 지향적이었고,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르게 치료했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실 험적 특징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바로 그러한 방식이 그가 주장하는 과학이었다. 하지 만 에디는 치료사였을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사람이었다. 사실 치료만 가지고 본다면 그녀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환자가 치료되었을 때 큄비는 그들과의 관계를 끝냈 지만, 에디는 그들의 인생 전반에,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적용되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녀는 추종자들의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훈련시키고 훈육할 뿐 아니라, 파문하고 처벌하기도 했다. 이는 큄비의 시술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지만 사도 바울과는 아주 비슷했다. 그의 다른 정점에도 불구하고 큄비는 지도자, 최소한 교회 지도자는 아니었다. 에디는 어머 니 에디였다. 그러나 큄비는 결코 아버지 큄비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