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신에게 선택받은 게릴라 전사 다윗왕 반대유형 솔로몬 풍채가 좋았고, 예하 장교들에게 존경받았으며, 정치적으로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었던 조지 매클렐런 장군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육감도 날 카로웠고, 매사에 빈틈없는 치밀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카리스마'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 겠는가? 이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맥빠진 정치를 이은 존 케네디 가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 후부터였다. 이제 이 용어는 모든 유명인사들, 매력적인 사업가들, 강인한 운동선수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 다시 말해, '시선을 압도하는'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카리스마'란 용어를 좀더 엄격한 의미로 사용한다. 바로 사회학자 막 스 베서(Max Weber)가 카리스마를 적절하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카리스마란 용어를 사회적 권위구조의 세가지 주요 유형 중 하나로 설명했다. 카리스마적 질서는 전통적인 질 서나 법적인 질서와 구분된다. 즉 카리스마적 질서의 경우, 권위는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그가 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권위의 '위엄 '(카리스마)은 전체 사회를 규정하는 원칙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베버의 기준으로 보면 매 클렐런은 멋있는 인물일 수는 있으나 적어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아니다. 그의 말이 곧 법이다 카리스마에 대한 베버의 정의가 유용한 이유는, 우리가 지도자의 매력(혹은 여타 성품들) 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맥락에서 카리스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즉 추종자들 이 그들의 전체 사회 조직의 원칙으로서 '개일적인' 권위를 인식할 때 진정한 카리스마가 나타날 수 있다. 카리스마적 지배자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시조왕이다. 그왕의 후계자들은 그들이 그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권위는 어떤 개 인에게 특유한 게 아니며, 이미 '전통적인' 지배자의 권위가 된다. 다시 말해, 최초의 달라이 라마(티벳의 종교 지도자-옮긴이)는 카리스마적 지배자였지만, 그 후계자들은 전통적인 지 배자가 된다. 전통에 의문이 제기되고, 시험받을 때가 오면, 합의에 의한 권위가 수립되고, 베버의 세 번째 사회적 유형인 법적 지배가 시작된다. 세 가지 질서는 상이한 종류의 지도자들뿐 아니 라 상이한 종류의 추종자들을 요구한다. 경외는 카리스마적 권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본분에 따른 복종은 전통적 지배에 어울린다. 도전과 중재는 법적 지배에 대한 책임감 있는 시민들의 행동이다. 지도자의 스타일은 권위의 구조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카리스마적 지배자는 가장 근 본적인 의미에서 독창적인 인물로서, 그는 전체 사회질서를 만들어낸다. 전통적인 지배자의 스타일은 의식을 중요시하고, 과거에 부여받은 의무들을 계속 주지시킨다. 법적 지배자는 사 회계약을 만들어내는 모든 당사자와 대화를 진행하는 토론형 인물이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중 어느 질서일까? 그건 당연히 법적 질서이며, 다른 말로 '헌법적' 질서라고 불린다. 법적 질서에서 토론을 중시한다는 것은 대통령 기자회 견, 의회 청문회. 위원회 보고, 정당대회, 시민포럼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면 알 수있다. 따라서 아무리 개인적 매력이 풍부하다 힐지라도 어떤 미국 대통령도 베버적인 의미의 카리 스마적 지도자는 아니다. 예를 들어, 링컨은 자신의 재능으로 위대한 윤리적 권의를 확보했다. 하지만 추종자들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계약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가 일정 기간 공직을 차지하고 역시 그 계약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여타 실체들(의회와 법원)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당선되어야 했다.(우리 체제의 많은 지도자들처럼) 법률가였던 그는 타협 과 제휴에 능했다. 그는 종종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면 경멸할 만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희생하면서까지 공화당을 하나로 묶기 위해 애썼다. 대통령이 된 그는 하나의 헌법 아래 있 는 구질서의 체계인 연방을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만약 다른 종규의 사회에서라면 그의 재주는 쓸모없거나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시므온 스타일라이트 같은 신성한 권위를 경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링컨이 '유일 진리'를 대변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도자 개인의 권위를 중시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직 카리스마적 리더십만이 '진정한' 리 더십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것은 억압적 전통이나 타협적 법률 등의 장애를 완전히 제거한 '완벽한' 지배라는 말이다. 그런 주장들은 카리스마적 정권하에서 가장 순종적이고, 법적 지배를 하는 정권하에서 가장 참여적인 추종자라는 집단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법적 질서하에서는 추종자들의 참여도가 높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 은 위대한 정치 지도자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반대로 비키리스마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카리 스마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인물은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이는 추종자들이 당대의 사 회적 목표를 성취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그 목표들을 무시하려 할 때면 늘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상 베버가 묘사한 각 질서들은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잔인한 독재가 되기 쉽고, 전통적 지배는 구태의연해지기 쉬우며, 법적 지배는 혼란에 빠지기 쉽다. 각 정권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가 극적이라면, 두 번째는 의전적이며, 세 번째는 절차적이다. 그리고 각각의 강조점은 다음과 같은 표로 나타낼 수 있 다. 구분,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 근거,초자연적, 자연적(신성한), 자연적(세속적인) 불러일으키는 정서, 경외, 충직, 비평 강점, 독창성, 연속성, 적응성 스타일, 개인적, 의식적, 협상적 높이 평가받는 것, 극적 수행, 충성, 타협 발생가능한 위험, 이상변형, 정체, 답보 베버는 이 세 가지 사회가 차례차례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먼저 어떤 사회질서의 태동기 에는 종종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나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크의<영웅전>첫 페이지에 등장 하는 고대 입법자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솔론(Solon)이나 리쿠르고스(Lycourgos)가 신 들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볍률을 만들어 주었다면, 그들의 후계자들은 이미 확립된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렇게 확립된 전통이 의문시될 때, 그 의문 과정 자체가 새로운 '법적' 질서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베버는 이러한 변화에는 내적인 필연성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떤 국가 의 역사에서 카리스마적 인물은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다. 17세기의 크롬웰이 그러했고, 19 세기의 나폴레옹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여기서 대체로 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다른 형태 의 권위가 갑자기 무너질 때 카리스마적 리더쉽이 나타날 만한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크롬웰의 경우, 당시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군주제가 쇠퇴하고 있었던 반면, 새로 등장한 법적(의회주의적) 질서는 곧 무너질 듯 위태하기 그지 없었다. 크롬웰의 '성자들의' 지배가 바로 그 둘 사이를 메운 존재이다. 사실 현대의 카리스마적 인물들도 보통 실패한 혁명의 산물들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리는 혁명들이 요제프 스탈린(Joseph Stalin), 마오 쩌 둥,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등의 1인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현대의 카리스마적 인물들은 베버의 개념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는 원래 글자 그대로 '신성한 위엄' 에 기초한 종교적인 권위에서 나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를 프리드리히(Carl Friedrich)는 오직 종교적인 권위에 기 초한 권력만을 카리스마적이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크롬웰은 무장한 '성자 들'을 휘하에 두고 있었으므로 카리스마적이라 부를 수 있지만, 나폴레옹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식민지 '제3세계'에서 나타나는 카리스마를 연구한 사람 들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인격에 기초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때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권위에 기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은 마오 쩌둥 같은 인물에 대한 개인숭배가 사실상 유사 종교에 해당한다고 생 각한다. 사실 그가 쓴<홍서>는 성경이고, 그의 말은 오류불능으로 여겨지는 등 종교와의 유 사점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한 종교'와 '유사종교'를 따지는 신학적 논쟁을 오래 끌 필요는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란 전통이나 법적 합의라는 강제에서 벗 어나 자기 자신을 권력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 지도자는 어떻게 보면 초인 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속한 구조를 살펴보 면 된다.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 였다. 하지만 그는 왕과 의회에 복종했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 말 없이 공직을 물러났다. 그는 루스벨트처럼 하나의 확고한 현정 질서 내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경우에 는 '그 자신'이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스탈린은 마오 쩌둥처럼 자신은 공산당을 섬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탈린 자신이 공산당의 유일한 목소리였다. 마르크스주의 전문가들은 스탈린이 자신이 따르던 교리를 왜 곡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신학자들은 시므온 스타일라이트가 성경을 잘못 해 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종자들의 눈으로 볼 때 스탈린과 스타일라이트는 설득력 있는 유일한 권의를 체현하고 있었다. 즉 시므온의 입을 통해 신이 말을 했고, 스탈 린의 입을 통해 역사가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같은 고찰을 통해 우리는 흥미로운 역설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에서 '카리 스마적'이란 말은 일종의 칭찬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베버가 말한 진정한 카리스마적 권위란 자유주의적인 민주당원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스탈린에 서 시아누크까지, 마오에서 피델까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현대 사에서 일종의 악당들의 집합처럼 여겨지고 있다. 히틀러도 처음에는 선거를 통해 뽑힌 법적 지도자였지만. 나중에는 점점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변해가서, 독일 국가의 어떤 요소들도 그의 개인적 권위를 넘어 설 수 없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이와 같이 현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들을 보여준 반면, 좀더 공 감이 되는 사례들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베버가 말한 여러 카리스마적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을 들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다윗왕이다. 베버는 다윗왕의 카리스 마에 대해 직접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다윗은 누구보다도 베버의 개념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다. 물론 성경 속의 다윗왕이 부분적으로는 전설과 신화 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의 눈 속에서 신비의 광채를 띠는 존재들이며, 추종자들의 그러한 반응이야말로 카리스마적 지 도자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 궁정 역사가는 서구 역 사가의 원조격이라 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사무엘서의 최종 편집본보다)한참 전에 쓰여진 세부적인 부분과 핵심적인 부분 등을 보 자면, 저자는 상대적으로 직설직인 기술을 하고 있다. 그는 궁정이 돌아가는 상세한 내용과 인물들의 관계 등을 대단히 잘 알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이 장들의 견해를 나는 지지한다... 궁정의 인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는 솔로몬왕의 관장하에 쓰여졌거나. 나중에 상세한 기억에 의존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러 므로그는 헤로도토스(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옮긴이)보다도 훨씬 전에 존재했던 세 계 최초의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마치 로빈 후드 같은 행동으로 왕의 자리로 나아갔다.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고 내려 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지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 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카리스마적 인물들은 정산적인 형식의 권위를 전복하거나, 그런 권위를 밖에 존재하는 이 들이다. 사울왕이 다윗이 궁정의 불평분자 들의 중심이 되었다는(심지어 사울왕의 아들 요 나단까지도 그를 따른다는)사실을 발견하자, 다윗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다윗이 사울의 군대를 위해 싸울 때, 그는 거의 마술적인 강인성을 지닌 독립 게릴라 집단의 지도자였다. 베버가 말했듯이, 중무장한 팔레스타인(성경 속에서는 '블레셋'이란 이름으로 나온다-옮 긴이)군과 비무장한 농민 저항군이 군대와 싸운 것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핵심이다. 경무장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다윗은 골리앗의 갑옷 사이에 있는 빈틈, 즉 가릴 수 없는 두 눈을 공격했다. 왕은 그런 자유로운 존재를 일종의 위협으로 트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군대에서 늘 해왔던 창던지기 연습을 가장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 요나단의 도움으로 달 아나는데 성공한 다윗은 산중에 저항군을 결성한다. 줄기차게 그를 추적하는 사울은 첩자들 과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 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 리라. 산중의 다윗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들과 함께 은거 하던 피델 카스트로와도 닮았다. 또한 그는 1934년 강서 소비에트를 잃고 대장정에 나섰던 마오 쩌둥처럼 이곳저곳 으로 옮겨다녔다. 다윗이 사울의 힘을 무력화시킨 사례들은 몇몇 상징적인 사건들로 표현된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 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 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의복을 훼손하는 행위는 위반 혹은 모욕의 상징이다. 그리고 사무엘서 26장 5-12절을 보 면, 이보다 더 선명한 상징적인 거세 장면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진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잠자는 왕 옆에 꽂힌 창을 들고 돌아온다.다윗은 역시 로빈 후드처럼 왕의 재 산을 재분배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사울은 (아들 요나단을 비롯한) 자기 부하들이 다윗의 편에 가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 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 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 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도적떼의 인기 있는 지도자인 다윗은 노획물들을 부하들과 공정하게 나눠 가졌다. 그는 어떤 공격이 끝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 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니라." 다윗은 마치 게릴라처럼 후미진 지역 들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는 헤렛(사무엘상 22:5)이나 에브라임(사무엘하 18:6)에서는 수풀에 숨어 싸우고, 하길라 산(사무엘상 23:19, 26:1)에서 싸우기도 한다. 마온(사무엘상 23:24)이나 엔게디(사무엘상 24:2)황무지에서, 아둘람(사무엘상 22:2)의 강변 곶에서, 들염소 바위의 동 굴(사무엘상 24:3)에서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다윗이 묵었다 달아난 곳들은 그 사실을 기념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사무엘상 23:28). 또한 다윗은 사울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적인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싸우게 하는 계교를 발 휘하기도 한다. 맨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윗을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미친 사람 흉내를내서 그들의 진영을 탈출해야만 했다(사무엘상 21:11-15). 하지만 그 후 그들은 다윗을 용병으로 채용했다. 다윗은 새로운 지배자들과 이중적인 게임을 벌였다. 그 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하는 척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외의 다른 이스라엘의 적들을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는 것을 막기 위 해, 적들 중에 한 사람의 목격자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사무엘상 17:9-12). 다윗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그의 삶은 로빈 후드에는 적용되지 않는 종교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글자 그대로 신의 총애를 받 은 사람이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사무엘상 13:14)"라고 기록 되어 있듯이, 사람들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했을 때 예언자 사무엘은 더욱 나은 왕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무엘이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 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사무엘상 16:13)." 다른 사람들은 시인이자 전사인 다윗의 유 능함을 보고 그것을 하느님의 총애를 보여주는 징조로 생각한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 새의 아들을 본즉(현금을)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 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사무엘상 16:18)." 이 문장이야말로 사실상 카리스마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신성한 은총이 다윗을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분해주었던 것이다. 그가 후에 이룩한 모든 업적들 역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사무엘상 18:14)."는 사실을 말해준다. (성경에서는) 다윗의 권력이 전적으로 카리스마적이라는 점을 강조 하면서, 그는 그 외의 어떤 형태의 인정도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부계 조상들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전통적인 지배자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 집안서도 천대받는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사무엘 은 다윗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모든 형제들을 물리쳐야 했다(사무엘상 16:8-13). 다윗의 권 위를 법적 지배와 대조하기 위해, 사울의 왕권이 인간으로부터 유래한 반면 다윗의 왕권은 신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으로 나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막아주길 바라던 사람들은 사 울을 왕으로 선택했지만, 사무엘은 이를 계약(법적) 관계라고 부르면서 내용이 충족되지 않 으면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너희와 너희 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 사람들이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고 사울을 선택했던 사건과는 달리. 신이 다윗을 선택했다 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신의 선택은 다윗의 특별한 능력이 행동으로 표현될 때만 유효 하게 될 것이었다. 맨 처음 다윗은 전사로서 주목을 끌었지만, 사울이 사망한 후 그는 정치 가가 되어 죽은 왕의 군대를 장악했다. 신성한 지도자 다윗은 사울이 실행하려던 숙청에서 (아비아달)를 구해냈고, 그를 안전하게 도피시켰다. 마침내 왕이 되자 그는 아비아달의 사 제직을 회복 시켰고,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윗에게 예루살렘은 완벽하게 카리스마적인 장소였다. 예루살렘은 태고적부터 여부스 사 람들의 땅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배가 행해진 적이 없었다. (수로관을 통해 도시에 침투하는 수법으로)예루살렘을 장악한 다윗은 그곳을 중심도시로 삼아 이스라엘의 여러 분리된 부족들을 통합해냈다. 이렇게 예수살렘에 새로운 종교시설 즉사원을 건립함으 로써 예배 장소들을 둘러싼 질시와 분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다윗은 여러 부녹들을 통합하기 위해 혼인이란 수단을 자주 적절하게 활용했다. 하 지만 그의 많은 후궁들은 그에게 난관을 안기도 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심지어 간디 같은 사람마저도) 성적 열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바세바와의 염 문은 다윗의 가장 유명한 연애담이지만, 그보다 수많은 다른 어머니들 밑에서 태어난 자식 들간의 경쟁은 카리스마적 권력이 늘상 봉착하는 난제를 만들어냈다. 즉 권력의 적절한 승 계가 쉽지 않은 것이다. 뛰어난 총잡이는 항상 이겨야 한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카리스마적 지배의 또 다른 위험을 잘 보여준다(압살 롬은 다윗의 통치가 중앙집권화 되면서 나타난 각 부족들의 정치적 불안을 이용했다). 카리 스마적 지도자가 경이로운 행적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그 반신적 권력을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정복활동 대신 안정이 찾아오고, 젊음이 노년으로 향해가며, 찬란한 무용담이 일상의 현실로 대체될 때, 카리스마 역시 '일상화'되지 않겠는가? 이런 중류의 지배자는 전통적 혹은 법적 합의가 아니라 경이로운 업적으로 떠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중단되면 권력의 누수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권위를 재 확 인할 전통적,법적 수단을 상실한 노년의 지도자는 첩자와 비밀경찰, 비밀재판과 처형 등 '카 리스마적이지 않은' 비상한 조치들에 기대게 된다, 이는 스탈린과 마오 등의 카리스마적 지 도자들이 노년에 행했던 일이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다윗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다윗이 인 구조사를 통해 행정적 재배를 강화하려 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여호와에 대한 카리스마적 인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행정관료, 그것도 억압적인 행정관료가 되 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아무도 쏘아 죽이지 않은 총잡이에게는 속도나 배짱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생기 기 마련이고, 따라서 도전자들이 나서게 된다. 압살롬은 다윗의 가장 자랑스러운 재산인 예 루살렘을 정별했고, 다윗은 할 수 없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다시 예전처럼 도망자가 된 그 는 과거에 써먹었던 계략과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불가능한일'을 해낸다. 그는 압살롬의 군대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후새(Hushai)라는 신하를 뒤에 남겨놓았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다윗왕의 군대에 대해 거짓 정보를 전해준다.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이제 어 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 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후새는 압살롬에게 다윗왕의 군대를 공격하기 전에 더욱 많은 군대를 모집 하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실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다윗에게 유리했던 것이다. 왜냐햐면 당 시 그는 후새가 말했던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히도벨(Achitophel)의 현명한 의견이 아니라 후새의 조언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카리스마가 압솔롬의 어 깨를 짓눌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 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군대를 에브라임 숲 속에 배치한 다윗은 다 시 한 번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했다.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 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광휘가 사라지고 더 이상 기적을 행할 수 없게 되면, 그가 지닌 전적으로 개인적인 마법적 권위를 '후계자'에게 허여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베버는 원래의 마법을 다른 이에게 넘기기 위해 사용된 방법들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즉 기름 붓는 축복, 신탁, 추첨, 경연 등인데 모두들 그리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다른 후계자들을 물리치려는 계획이 바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될 거 라는 나단(Nathan)의 예언과 맞물려 있었다. 솔로몬은 다윗의 카리스마를 체현할 수 있는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이새의 계보를 따라 권력을 승계하려 했으나 실해했다. 오랫동안 번 창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왕국을 후계자에게 물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왕국은 갈갈이 찢어졌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솔로몬의 시대에는 다윗의 카리스마적인 권력이 오래 전에 해소되었고, 카리스마적와는 거리가 아주 먼 관료적 기술이 그것을 대체 했다. 카리스마적 지배의 가장 우울한 교훈은 이런 것이다. 즉 그것은 항상 불안정하고 오래가 지 못하며, 기초 자체가 튼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성한 권위를 지닌 사람은 결코 실패해 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실패가 발생할 때마다 카리스마적 지배의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침식되는 것이다. 전통적 지배자나 법적 지배자의 경우라면 아무도 모든 일을 성공시키리라 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성은 실패할 수 없지 않은가? 카리스마에는 무오류성이란 암 묵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다. 총잡이는 '매번' 이겨야만 한다. 신이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 는 실패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만냑 신이 선택한 자가 실패한다면 신 자신이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고, 다시 혼돈이 찾아오는 것이다. 후일 다윗을 모델로 만들어진 미술작품들에서 작가는 지속적인 질서와 자연스러운 용맹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 신학은 그를 그리스도의 선조이자 '이새의 계 보' 속에서 가부장적 전통을 승계한 인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중세시대에 그는 선조의 이미 지에 맞게 흰머리의 왕으로 가장 자주 묘사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함에 따라 그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이 복원되었다. 피렌체에 있는 수많은 빼어난 동상들에서 그는 신의 보 호 이외에는 아무런 무구도 필요하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골리앗을 때려눕힌 전사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못쓰게 된 대리석으로 만 들어낸 '기적'으로, 여기서 다윗은 적의 약한 부분을 살피는 게릴라 전사의 모습으로 응고되 어 있다. [원래 좁은 벽감에 놓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은 동작으로 약간 휘감긴 그 의 자세는, 그가 곧 투석기를 휘두를 것임을 예고한다. 사나운 눈매를 한 다윗은 곧 적을 단숨에 물리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신성한 힘 에 기대어 확신에 찬 행동을 하는 바로 이 사람이 최고의 카리스마적 인물인 것이다. 유태의 랍비도 인정할 행정의 마술사 솔로몬카리스마의 반대말은 관료주의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관료주의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데, 카리스마를 이론화했던 막스 베 버는 관료주의도 함께 다루었다. 분석가들은 지금도 베버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들 대부분 은 관료주의를 현대 법적 제도의 합리화와 연결시켜 연구한다. 그들의 연구를 보고 있자면, 관료주의라는 것이 현대에 특유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베버는 관료주의가 모든 복합 사회들의 기원에께지 거슬러 올라는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 어, 그는 관료주의가 봉건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가 든 관료주의의 예들 중에는 솔 로몬의 통치에 관한 것도 있다. 다윗왕 치하에서 이미 히브리 군주제는 노역제도에 기초한 근동 정부들을 닮아가고 있었 고, 솔로몬왕 치하에서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수도, 궁중재보 축적, 징병제와 병행한 용병 수 입, 관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공공사업 등 그런 제도의 기본적인 양상들이 나타 나고 있었다. 이 모든 활동들은 노동과 보수의 표준화, 감독자의 전문화, 광범한 기록 보존 등을 요구했 다. 솔로몬은 엄청난 수의 전차와 말들을 보유했다(그가 고정된 도시 중심부들을 잇는 도로 망을 건설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는 종교의식을 사원 중심으로 표준화했고, 그 전까지 탈중심화되어 있었던 지식을 궁정이 독점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제 지혜는 공식적으로 왕의 소관사항이 되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그리하여 다윗이 모든 시편들을 쓴 것으로 간주되듯이, 모든 잠언은 솔로몬의 것이라 인 정된다. 그리고 그 잠언들의 내용은 보수적이고 비관적이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만물 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카리스마가 즉흥적이고 새로운 것에 민감한 반면, 관료주의는 모든 것을 체계화하고 반복 하게 한다. (다윗왕의 하렘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솔로몬의 하렘(첩들을 모아 놓은 궁전- 옮긴이)조차도 이집트 등 여러 나라와의 동맹을 반영하는 것으로 철저하게 체제를 위해 계 산된 것이었다. 대중적인 저널리즘에서와 마찬가지로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관료주의를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다윗의 치세하에서 여러 가지 혼란을 겪으면서 자란 솔로몬은 일상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관료주의는 각기 상이한 개인들의 성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정이 자동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관료주의는 한편으로는 신민들에게 부담을 주 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피고가 된다면 우리 대부분은 린치나 경찰의 즉결심판 혹은 지배자의 변덕 등의 '독창적인' 법의 실행보다 배심 원 재판이라는 성가신 절차쪽을 선호할 것이 틀림없다. 모두들 징세제도를 싫어하지만 임의 적인 몰수나 징발, 면제 등은 더욱 싫어할 것이다. 오늘날 출퇴근 시간 기록표를 찌근 것은 임금 지불의 기준이 된다. 마태복음(20:1-16)에 나오는 고용주는 자기 기준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데, 이는 어떤 노동조합도 수용하지 않을 조건이다. 카리스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치게도 한다. 관료주의는 예측가능한 스케줄에 따라 사람들 을 묶는 역할을 한다. 모두들 태양이 변덕스럽게 아무때나 뜨고 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카 리스마가 '진정한' 지도력의 원천이라고 과대평가되어온 반면, 관료주의는 일상의 원칙으로 서 과소평가되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관료주의적 리더십이란 게 존재할까? 아니면 이 용어 자체가 형용모순일까? 사 람들은 '관료주의적' 이란 말에 들어 있는 경멸적인 어감 때문에 그런 종류의 리더십이 가 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훌륭한 장교가 관료주의적 지도자가 아니면 뭐란 말 인가? 여러 조직 중에서도 군대는 가장 관료주의가 강한 곳이다. 군대 내에서(제복이 상징 하듯이)사람들은 모두 표준화된다. 또한 모두들 정시에 보고를 해야 하고, 시에 일어나며, 모든 활동을 감독당한다. 그들은 명령에 복종할 뿐 아니라, 상관을 만날 때마다 경례를 함으 로써 자신의 충성을 광고하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제복에 경례하는 것이지 개인에 대고 경례하는 것이 아니다(이야말로 카리스마적 규범과는 상반된 것이다) 군대의 목적은 사람들 이 자동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에서 한 장교가 기능을 상실하면 곧바 로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보충한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나폴레옹은 창조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부하장교들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의 계획 역시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명령선을 따라 모든 부하들이 그의 명령에 도전하지 않고 명령대로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대는 병사들의 인원을 관리하고(병사들은 소위 개목걸이를 찬다). 각 단위로 편 성하며, 정해진 형식에 따라 시험하고, 기준에 따라 철저하게 진급과 좌천을 결정한다. 군대 가 하는 일에 비하면, 보통의 공무원 업무는 대단히 유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테니슨 (Tennyson)이 '변할 수 없는 법의 군대'라는 표현을 쓴 것도 놀랄일이 아니다. 만약 군대에 도 낭만이 있다면, 그것은 관료주의에도 낭만적 측면있다는 말일 것이다. 솔로몬의 왕국 지 배는 다윗의 왕국 건설보다 훨씬 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태의 랍비들이라면(다윗의 카 리스마가 아니라) 솔로몬의 법적 권위에서 행정의 마술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07. 독수리 같은 기민성과 과단성으로 세일즈맨을 휘어잡은 최고경영자 로스페로 지금 당장 시내의 큰 서점에 가서 경영 분야에 있는 관리, 마케팅, 세일즈 등에 관한 책 들을 훑어보라. 그런 책들은 대체로 리더십에 큰 비중을 두고 독자들을 고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지도자가 되는 일에 관해 쓴 책들을 사는 독자들은 대부분 회사원들이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책들이 수천 종이나 나와 고, 대형 서점의 책꽂이에는 약 수백 권 정도가 꽂혀 있다. 이런 사정을 보노라면 지도자란 주로 재계에 있는 게 아닌가, 혹은 리더십 문제라는 것이 회사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지도자들이 재계 에 있다면, 왜 이렇게 많은 책들이 그들에게 남을 이끄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할까? 이 수많은 경영서들은 재계를 미국에 남은 마지막 개척 분야로 취급하면서, 사기업의 활동을 무기력한 정부사업과 비교하곤 한다. 그리고 사적 영역에는 아직 관료주의가 자리잡지 않았 기 때문에 지도자가 어떤 일을 성취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책들을 보면 ' 회사원' 이야말로 거대한 조직 속에서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라고 쓰여 있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사실 회사 자체가 하나의 관료제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작은 사업'만이 독립성과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작은 사업이 성공하면 '큰 사업' 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공 자체가 사업의 최초 존재조건을 침식하면서 곧 실패 로 변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선 관료주의가 모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료주 의적 조직체의 원칙들 - 표준화, 규격화, 검토등-을 실행해보면 해보다는 득이 많다(비록 모든 절차들이 점점 형식화되어가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다). 위대한 카레이서이자 선구적인 비행사였던 에디 리켄배커(Eddie Rickenbacker)는 자신의 차나 비행기의 엔진들을 끊임없 이 개조하고 수리하곤 했다. 그의 주머니는 항상 닦고 개비한 부품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남 는 시간이면 각 부품이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지 점검했다. 하지만 그가 이스턴 에어라인 항공사의 사장이 된후, 우리는 그 회사의 각 엔지니어가 배행기의 모든 부품을 매일 닦고 개비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맡은 일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 독창적인' 엔지니어들이 우리가 막 타고 갈 비행기의 부품들을 마음대로 교체한다면 여행 은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토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현대의 공장이 장인정신과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개별 종업원은 생산품에 자신만의 특징을 새겨 넣지 못한다. 사실 그는 종종 하나의 생산품 을 만드는 과정 중 일부에만 손을 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직공장은 제품이 생산되는 동 안 직공들의 '자기 표현'을 독려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반면 러스킨(Ruskin)이 주장 한 바와 같이, 고딕시대의 세공사들은 성당 세공을 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장 식을 할 수 있었다. 현대의 직공장은 측정 가능하게 표준화된 제품들이 생산되어 나오도록, 직공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법으로 각자에게 부과된 과정을 수행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화는 이런 압력을 더욱 배가 시킨다. 직공장 혹은 현장 감독 혹은 공장 감독은 개별 종업원의 난점과 사기를 고려하면서도 비 인격적인 과정을 감독한다. 일찍이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지적했듯이, 종업원들의 직속 상사는 군대의 하사관이나 소위와 유사하다. 훌륭한 하사관이나 훌륭한 직공장이 되기 위해서도 역시 실질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 하지 만 그 지도력은 대부분의 경영서들이 찬양하지 않는 '관료주의적' 지도력이다. 경영서들은 대부분 중역들, 특히 회사의 위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최고경영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최고경영자에게도 역시 그를 고용하거나 해 고할 수 있는 이사회라는 상사가 있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는 정확히 회사의 건강상태를 유 지하는 일상적인 결정을 하기 위해 고용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올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면 해고된다. 최고경영자로 고용된다는 것은 자신을 이사회에 (넓은 의미에서) '파는 것'을 포 함한다. (재계 사람들은 이 '판다'라는 용어를 아주 좋아한다. IBM의 토머스 윗슨은 "나 의 판매실적 중 가장 훌륭한 것은 아내에게 날 판 것이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많은 중 역들이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말을 했다.) 아무리 완벽한 상품도 팔지 못하면 소용없다 최고 경영자가 이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면 그가 지도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종업원들일 까?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으로 일했던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은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에 좋은 거라면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재계의 중역들은 제너럴 모터스에 좋은 것이라면 재너럴 모터스의 종업 원들에게도 좋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꼭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즉 고용주들이 이윤을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다. 고용주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라도 종업원들에게 잘해주어야 한다. 대우를 잘 받는 종업원들은 더욱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노예제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예들에게 잘해주어서 그들이 건 강하고 의욕적으로 일하면 반항하지 않는 것이 노예 주인에게도 이롭기 때문이다. 이런 경 우는 노예 입장에서도 상당한 행운이다. 비록 노예 소유주가 '좋은 주인'이 되는 것이 궁극 적으로 이득이 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모든 주인이 그렇지는 않기때문이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는 종업원들을 잘 다루는 중역들의 홀륭한 예를 들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 는 중역들도 발견했다. 최고경영자가 연구, 기획, 생산, 마케팅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훌륭한 제품 을 만들고 이윤을 얻는다는 궁극적인 목표하에서)단기 목표들을 설정한다. 마찬가지로 국방 장관 찰스 윌슨은 군비 지출, 모병, 훈련 등의 정책을 결정했다. 비록 그를 자신의 직속상 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병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갓 입대한 신병들이 국방장관 윌슨과 관심이 다르듯이, 최고경영자 역시 종업원들과는 다 른 관심사항을 지니고 있다. 윌슨과 징집병들은 국가를 방위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다. 사병들 역시 적절한 대우와 봉급을 바라고, 각자 개인적인 목표들을 지니고 있지만, 군대 의 지도자가 호소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시민과 대부분의 애국자들이 공유하는 목표인 것이 다. 하지만 종업원과 고용주의 관계는 이와 다르다. 사장은 "우리 모두는 제너럴 모터스의 차 들이 지구상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겠지만, 만약 종업원들이 포드(Ford)에 가 면 더욱 나은 급료와 업무조건, 의료 및 은퇴수당 등을 얻을 수 있다면 여건이 되는 사람 은 모두 직장을 옮길 것이다. 사실 포드의 중역이었던 리 아이아코카(Lee acocca)는 크라 이슬러(Chrysler)쪽의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옮겼다. 보통 종업원들 역시 여건이 된다면나은 쪽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군대와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미국의 하사관은 다른 나라의 대우가 좋다고 해서 그쪽으로 옮겨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회사의 종업원들은 군대의 관료보다는 국제시장에서 직업군인들이 거래되던 새대의 용병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는 하나의 공통 목표를 향해가는 협력의 관계가 아니라 물물교환의 관계이다.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거래를 통해 상이한 목표들을 성취한다. 종업원 은 시간과 기술을 제공하고 대신 다양한 종류의 보상을 획득한다. 종업원들이 계약조건에 따라 지속적으로 만족을 느낀다면 고용주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공통 목표를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종업원들은 품위와 보상, 동료와의 좋은 관계 등을 바라고 일한다. 고용주는 회사의 소유자들이나 주식 소유자들이게 이익을 줄 수 있도록 제품과 용 역을 만들고 팔기 위해 모든 일들이 잘 진행되기를 원한다. 리더십에 대한 우리의 정의-공통 목표를 향한(인력)동원-에 따르면, 최고경영자는 종업 원들의 직접적인 지도자가 아니다. 하지만 피고용인들의 노동을 유도하기 위해 이익을 교환 하는 데는 지도자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연기자나 유명인사,예술가 등과 같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지도자의 기술이다. 사실 많은 경우 고용주가 스스로 지도자라 칭하는 것이 종업원들에게 모욕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서 나온 것이다. 그런 말은 중역들이 미성숙한 종업원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 는 아버지라고 말하는것과 같다. 그래서 흔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그런 개념에 도전함으 로써 고용주들의 화를 돋우곤 한다. 피고용인들이 추종자와 다른 사람들이라면, 최고경영자를 따르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 까? 그 회사의 상품이나 용역을 사는 소비자들일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 헤르츠(Hertz)는 이분야의 리더이다." 물론 이 말은 헤르츠의 차를 렌트하는 사람들이 많다 는 뜻이다. 하지만 차를 렌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헤르츠의 최고경영자들을 추종하는 것 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상이한 목적을 가진 두 당사자간에 이루어지는 공통의 거 래, 즉 물물교환일 뿐이다. 렌트카를 찾는 사람들은 안정하고 믿을 수 있으며 가격이 적당한 차를 원하고, 회사는 적절한가격으로 그 요구에 부응하려한다. 회사쪽에서 고객들에게 서비 스를 잘하면 사업이 계속 잘될 확률이 높다. 이는마치 노예들에게 잘해주면 주인에게도 이 익이란 이야기와도 비슷해 보이지만,실은 이 관계가 고객든지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와는 아주 다르다. 그렇다면 최고경영자의 잠재적 추종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각 부서장들일까? 부서장들 이라면 비교적 잠재적 추종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최고경영자는 정책을 결정할 뿐 아니라, 그 결정을 수행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만 한다. 모든 사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관계들이 매우 가깝고 지도자의 능력도 직접적으로 발휘된다. 이를테면, 포드는 점원들과 함께 차를 만들었고, 에디슨 역시 부하들과 함께 발명했으며, 디 즈니는 동료 애니메이터들과 함께 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 중역 들은 직접 종업원들과 함께 일하기보다는 정책을 결정하거나 사원을 고용하는 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배경 즉 처음에는 회사 직영 훈련학교을 통해, 나중에는 주로 독립기관들(특히 대학)을 통해 사원들을 점점 더 많이 고용하게 된다. IBM은 자기 회 사에 박사학위 소유자가 많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런 재능이 있는 인물들은 더 좋 은 조건을 찾아 헤매던 용병들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리더십 대신 물물교환적 측면이 다시 중요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최고경영자가 지도할 사람이 전혀 없단 말인가? 물론 최고경영자는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을 지도 한다. 즉 비서들, 중요한 분과장들, 특히 회사의 상품이나 용역을 파는 마케팅 부서의 우두머리들이 그 대상이다.마케팅이야말로 회사를 소비자 지향적으로 만들고, 회사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토스타인 베블런은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설명했다. 어떤 의미에서, 세일즈맨십은 사업의 전체 목적이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윤을 남을 만한 거래를 끊임없이 살피면서 회사를 운영하지 않는다면, 상품의 생산이란 무가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상품을 제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팔지 못하면 당연히 실패한 것이 다. 그래서 최고경영자의 동원력은 그의 능력이 부서장을 통해 실제 노동자들 즉 실제 세일 즈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업부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공통의 목표, 즉 개인 적으로 또 집합적으로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고, 성공하는 사람들 사이 에 팀정신도 존재한다. 다른 부서에서 리더십이 실행될 때조차도 그것은 보통 영업부서의 슬로건과 가치, 행동에서 따온 것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한방 먹이는 기계를 만들어낸 세일즈의 천재 이런 측면을 생각해보면, 현대 재계에서 존 헨리 패터슨(John Henry Petterson)이 차지하는 전설적인 위치를 이해하기가 쉽다. 1844년에 태어난 패터슨은 1867년 다트머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한 후 20년 동안 한 가지 일에 매진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 던 중 데이턴에서 가게 점원을 하다가 어느 날 초보적인 금전등록기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 제임스 페티(James Retty)가 발명한 이 기계는 가게의 현금서랍이 열릴 때마다 거래 내역 을 기록하여 점원이 돈을 빼돌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1866년 패터슨은 이 원시적인 기계에 장래가 있다고 보고 이 기계를 생상하던 공장을 매입했다. 패터슨의 동생 이 기계의 생산을 담당하고, 패터슨 자신은 전국 현금등록기회사(NCR)의 세일즈맨들을 훈 련시켰다. 19세기의 '출장판매원' 들은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브랜드 지명도도 없고 보 증도 되지 않는 제품들을 들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알음알음으로 물건을 팔거 나, 속임수나 경품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이 직업에 종사했 기 때문에, 소위 농부들의 딸을 후리고 다니는 보따리장수에 관한 전설들이 생겨난 것이다. 사회적 위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출장판매원들은 유랑극단의 배우들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패터슨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세일즈맨들에게 (세탁 사정이 좋 지 않던 19세기에) 하얀 칼라가 달린 비싼 옷을 입혔다. 또한 그는 그들이 자신의 기계를 과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충분히 교육했다. 게다가 세일즈맨들에게 음주와 여성편 력을 엄하게 규제하는 청교도적인 규율을 강조했고, 늘 운동을 통해 체력을 유지하도록 했 다. 그는 그들이 윤리적 모범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가 보낸 세일 즈맨들이 가게 주인들로 하여금 금전등록기가 부정직한 점원들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게 할 것을 바랐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나가는 사람이 계속 남아 있을 점원보다도 더 믿을 만하게 보여야 했던 것이 다. 부친의 사업을 계승하여 IBM의 최고경영자가 된 토머스 윗슨 주니어는 존 패터슨을 자신 의 '정신적 조부'라고 부렀다. 그의 부친 윗슨이 패터슨의 세일즈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 다. 패터슨은 나의 부친 같은 거칠고, 교육수준이 중간 정도이고, 야심있는 출장판매원을 미 국 최초의 전국적 세일즈맨으로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었다...19세기 말 세일즈맨은 결코 고상한 직업이 아니었지만, 패터슨은 그것을 거 의 전문직에 가깝게 변모시켰다. 패터슨은 그 이상을 바랐다. 그는 자신이 세일즈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 다. 일반적으로 그는 현대 세일즈의 모든 기본 방법들을 고안하거나 제도화한 인물로 평가 된다. 즉 세일즈 매뉴얼, 표준화된 세일즈 화술, 인원당 할당, 독점지역, 훈련학교, 세일즈 상 황 모의연습(심지어 그는 금전등록기를 팔아야 하는 다양한 종류의 상점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만들기도 했다.) 성적에 따라 상을 주는 연례적인 세일즈대회 등이 모두 그가 고 안한 것들이다. 그리하여 그의 부하직원들은 회사 안팎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비록 패터슨이 세일즈가 하나의 과학이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의 천재성은 물건을 파는 이들의 심리적 요구들을 잘 이해한 것에서 발휘되었다. 세일즈맨은 제품을 생산하거나 작물 을 기르지 않는다. 거래할 때 그가 쓰는 무기는 개인적 설득력(혹은 매력)과 거절에도 실망하지 않고 노력하 는 인내력이다. 세일즈맨은 자신이 파는 제품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판매에 성공했을 때도 허탈감이 올수 있고(내가 기껏해야 이 냉장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실패했을 때는 아주 치명적이다(제품이 거절당하는 것은 그 자신이 거절당하는 것과 같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는 1949년에 발표한 희곡<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에서 이런 주제들을 변형하여 표현했다. 세일즈맨은 자신의 영업실적에 따 라 끊임없이 자질을 평가 받는다. 그래서 에일즈에 관해 쓴 수많은 책들이 자기확신을 기르고 유지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책들 중에는 '거절에 대한 승리자의 다섯 가지 태 도'에 한 부를 할애한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세일즈맨에게는 자신감의 개발이 그처럼 중 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많이 하기 마련이 다. (밀러의 희곡에서도 윌리 러먼은 자기가 말이 너무 많고, 인상이 좋지 않으며, 혼자서 일을 잘 못한다고 걱정한다.) 패터슨의 세일즈 학교는 세일즈맨들이 서로 거절당한 경험 을 이야기하고, 거절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계획하며 서로를 고무하게 함으로써 팀정신을 불어넣었다. 패터슨은 소위 '한솥밥 체계(buddy system)'를 통해 경험 많은 세일즈맨들이 신참이나 준군사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그 때문에 그와 수제자 윗슨이 심각한 법률 문제 에 말려들기도 했다. 패터슨의 지시하에 윗슨은 일부러 흠이 있는 타자기(만든 이들은 이 것을 '한방 먹이는 기계'라고 불렀다고 한다)를 만들어서 경쟁사의 이름을 박아 판매했던 것이다. 이는 경쟁 특허를 소유한 이들을 향한 전형적인 사보타주와 '역정보' 전략이었다. 하지만 1921년 NCR 종업원들 중 일부가 그 사실을 폭로했고, 그는 윗슨과 또 다른 세 명 과 함께 반트러스트법을 위반한 혐의로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1년형을 받았다. 패터슨의 회사는 사건을 항소심으로 끌고 갔지만, 그때는 이미 패터슨이 윗슨을 해고해버린 후였다 (패터슨의 제자들 중 많은 수가 다른 회사들에서 성공한 이유는 그가 제자들이 자신을 대체 할까봐 경계했기 때문이다). 다른 피고들로부터 이탈한 윗슨은 불법행위를 부인하는 문서 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는 자신을 해고한 회사를 위해 불법행위에 가담했을 리는 없지 않느냐고 대꾸하면서 서명을 거부했다. 윗슨은 패터슨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터슨의 방법만은 신뢰했다. 사실 IBM에서 윗슨이 이룬 성공적인 업적들은 거의 모두가 패터슨의 방법에 기초한 것들이었다. 하얀 칼 라, 음주 배격, 연례단합대회, 세일즈에 대한 강조(특히 세일즈맨들의 사기에 대한 강조)등은 모두 패터슨의 NCR에서 배운 것이다. 심지어 윗슨은 패터슨 왕국의 우연적 요소까지도 그 대로 모방했다. 한때 패터슨은 세일즈 학교를 세울 더 나은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자 텐트를 세워 학생들을 집어넣었다. 윗슨은 스승을 모방하여 연례 세링 즈회의를(호화롭게 장식된)텐트 속에서 개최했다. 윗슨은 그때까지도 반트러스트법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 로 법률을 피해가는 재주를 지녔던 뛰어난 스승 찰스 플린트(Charles Flint)를 만나는 행운 을 누릴 수 있었다. 군수품 중개상이었던 플린트는 당시의 테크놀로지 발전(무기,항공,통신 등)에 관심이 많은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감으로 계산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 의 회사 13개를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합작회사 컴퓨터-계산-기록 회사(C-T-R)의 회장이 된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무릎쓰고 기소상태에 있던 죄인 윗슨(그의 법적인 문제는 그후 1 년 동안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을 채용했다. C-R-T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은 바로 계산기계 회사라는 점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허먼 홀러리스가 1890년 인구조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기계의 특허권을 소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계는 카드에 뚫린 구멍의 유형에 따라 카드들을 신속하게 분류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 창립 후 처음 50년 동안 IBM의 기본 재산은 바로 처음에 는 핀으로 나중에는 전기 신호로 분류되는 펀치카드였다. 카드의 신속한 분류(시간당 2만장) 덕분에 수학적인 계산들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기 때문에, 윗슨은 대학과 군대에서 이 기계를 사용하게 했다. 예를 들면, 컬럼비아대학에서는 이 카드 분류기를 천문학에 필요한 긴 방정식을 푸는 데 사용했다. 정부, 특히 군부와의 협력은 IBM의 성장에서 더욱 핵심적인 것이었다. 1890년 인구조사 에서 홀러리스 기계가 사용된 후 관리들이 IBM의 확실한 고객이란 점이 밝혀졌고, 일부 사 업가들이 비난했던 뉴딜정책은 IBM에게는 은혜와도 같았다(그래서 윗슨은 루스벨트 대통령 을 아주 좋아했다). IBM 기계는 사회보장 정보와 사업계획의 자료들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 었다. 그리고 이어 찾아온 전쟁 역시 IBM 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맨해튼 계획에 필요 한 방정식의 계산과 적들의 암호를 푸는 데 IBM 기계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떼지어 날지 않는다 (크고 비싸고 과열되기 쉬운) 진공관 컴퓨터 시대에 이르러, 한국전쟁을 맞이한 정부는 그 기계에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아나폴리 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한 젊은 해군 중위가 자신이 타고 있던 배에서 IBM의 세일즈맨 을 만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IBM은 늘 찬송가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애프터서비스를 위해서 자신들이 컴퓨터를 판 곳이라면 어디든 사원을 파견하여 작동법을 가르쳤기 때문이 다. (IBM은 이런 서비스 정신과 더불어, IBM 부품의 비호환성과 카드 및 기타 소프트웨어 의 독점적 사용 등으로 시장을 장악했고, 그 때문에 증권거래위원회가 이 회사의 독점적 경 향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이 해군 중위의 이름은 바로 로스 페 로(Ross Perot:1930- )였고, 그는 현대적인 IBM 사원의 모습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 견했다. 패터슨이 촌뜨기들을 금전등록기 전문가로 길러냈다면, 윗슨은 자신의 세일즈팀을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외교관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패터슨이 수립했던 청교도적인 인력 관리 기준 - 검은 양복, 흰 넥타이, 수염과 장발의 금지 -은 여전히 확고하게 살아 있었 다. 그런 IBM 사원들의 모습을 싫어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규율과 질서, 정 돈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던 페로는 달랐다. 그가 보기에는 심지어 해군도 느슨하기 짝이 없 었다. 결국 그는 조기 전역을 신청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병사들이 방종한 생활이 자신 의 윤리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로는 체질적으로 IBM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군복을 벗고 IBM 옷으로 갈 아입었을 당시(1957년)는 합류하기에 적절한 시점이었다. 이 회사는 전후에 밀어닥친 컴퓨터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페로는 자신이 1962년에 할당받은 양 을 첫달에 해치웠노라고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런 호황기에는 그리 드문 일도 아니 었다. 하지만 1962년에 이르러 페로는 IBM에서 승승장구하는 데도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해군에서 조기 전역할 때도 이유가 있었듯이, IBM을 떠날 때도 그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 고 있었다. 즉 그가 보기에 당시 IBM은 컴퓨터 구입자들이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램으로 짜 는 것을 돕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해군이 규율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듯이, IBM 역시 회사의 모토인 '애프터서비스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해 그는 각 개 별 회사의 용도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페로는 텍사스의 법인세 1000달러를 내기 위해 아내의 예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정이 아주 어렵지만은 않았다. 1962년 IBM을 떠난 페로는 댈러스 블루 크로스 에 입사하여 1967년까지 근무했는데, 이 회사는 시작부터 대규모 컴퓨터를 팔아온 곳이었 다. 최초로 펀치카드 기계를 사용한 것은 정부와 보험회사, 철도회사 등이었다. 왜냐하면 그 들은 정기적인 재정리와 지루한 분류작업을 동반하는 엄청난 양의 기록을 다루어야 했기 때 문이다. 페로는 연봉 2만 달러를 받으며 블루 크로스에서 5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이 회 사가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작업을 도왔다. 그런데 그는 블루 크로스의 사내 조언자 역 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컴퓨터서비스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다. 결국 블루 크로스의 한 직원이 페로의 회사가 사실상 경쟁회사임을 폭로하자 그는 블루 크로스를 떠날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페로가 블루 크로스의 자기 사무실에서 지기 회사 일렉트로닉 데 이터 시스템(EDS)을 설립한 후였다. 또한 그때 이미 자신의 서비스를 경쟁자도 없이 자기 고용주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블루 크로스는 의료보험 프로그램 때문에 연방 정부의 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페로는 사실상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자신의 이익을 위 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그것을 다시 정부에 팔고 있었던 셈이다. 페로는 IBM에서 배운 기술을 블루 크로스에 팔았고, 블루 크로스에서 내부 정보를 이용 해 자신의 회사를 운영했으며,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컴퓨터에 의존해 사업을 했다. 그 는 자신만의 '하드웨어'가 없었으므로 쓰지 않는 컴퓨터들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의 팀은 밤에 건물들을 찾아가곤 했는데, 그 때문에 최최의 여자 직원이 잠긴 건물의 놀고 있는 컴퓨터에 접근하기 위해 높은 담장을 기어올라간 유명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 다. 이런 직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페로는 (주로) 군대 경험이 있는 남자들을 선발하여 '날씬 하고 뻔뻔스러운 팀'을 구성했다. 사실 페로는 토머스 윗슨 못지않게 헨리 패터슨을 '정신 적 조부'라고 부를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왜냐하면 윗슨에게 '한방 먹이는 기계'를 만들게 했던 패터슨의 준군사적인 자세를 페로가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IBM에서 글로건 중심의 열정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배운 페로 밑의 애프터서비스팀은 주말에도 기꺼이 일했고, 명 령만 떨어지면 즉시 출장에 임했으며, 복장을 단정히 하고 품행을 조심했다. 페로는 사업 을 벌이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비밀을 중시했던 IBM의 관행을 더욱 강화한 그는 심 지어 직원들이 서로에게 자신의 봉급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페로는 초기에 자신과 함께 일한 직원들에게는 회사의 주식을 나눠줌으로써 보상했다. 따라서 시장에서 주가가 상승하 자 그들은 부자가 되었다. 세일즈팀을 이끄는 대부분의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페로 역시 웅병가였고, 거창한 슬로건 을 내세우는 사람이었으며, 일종의 극작가, 그것도 특히 자신을 과장하는 극작가라고 할 수 있었다. 분필을 들고 일장연설을 해대기로 유명했던 존 헨리 패터슨(그는 주로 붉은색 분 필을 썼다)은 직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는데, 때때로 그는 분필을 뭉개서 마치 전쟁 때 하는 위장처럼 얼굴에 문지르곤 할 정도였다. 10대 때 남북전쟁에 지 원했던 패터슨 역시 페로처럼 군대의 규율과 절차를 좋아했다. 이른 아침이면 NCR 사원들 과 기마 연습을 하는가 하면, 중역 만찬장을 장교클럽이라 부르기도 했다. 페로의 리더십은 1979년 이란사태 때 특히 잘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당시 페로의 직원들 이 이란에 인질로 잡혀 있었는데, 페로와 동료직원들이 직접 이란으로 건너가 위험스러운 구출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페로가 예전에 자신의 회사를 만들 때 보여주었던 기민성과 과 단성은 이 작전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페로느 토머스 윗슨 주니어의 외교적 능력 을 모방하기도 했다. 윗슨은 IBM에서 은퇴한 후 미국의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페로 는 베트남 포로 석방문제를 협상하려 했고, TV 방송을 통해 닉슨 대통령의 베트남전 정책 을 지원하기도 했다.(여기서는 정치인으로서 페로의 행적을 더 이상 다루지 않으려 한다. 왜 냐하면 이 글은 사업가 페로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페로의 사례는 IBM 같은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업계에서 한 개인이 거인들의 틈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좀 아이러니컬한 측면은 그가 그런 성공을 거두면서 거인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더욱 큰 거인들로 성장하게 했다는 점이다. NCR-IBM-EDS, 즉 존 패터슨, 토머스 윗슨, 로스 페로로 이어지는 계보는 현대 세일즈 리더십의 전설들 중 하나이다. 경영서의 저자들은 보통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개인의 상상력과 독창성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성취한 것을 보면 사정은 좀 다르다. NCR은 '타락하지 않는 점원' 기계를 통해 이전까지의 미심쩍은 수동작업을 대체했 다. 현금등록기는 상품판매 분야에서 자동화의 시조로 간주된다. 윗슨은 IBM을 통해 뉴딜 정책과 정부 행정에 봉사했다. 페로의 컴퓨터들은 사회보장제도와 정부 의료보험 등과 연결 되어 있었다. 이들 업계 지도자들은 모두 개인적 리더십에 의존하지 않는 자동화 장치를 통 해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던 것이다. 1984년 EDS를 제너럴 모터스에 넘기고 그 회사에 합 류한 페로는 자신이 직접 뽑은 사원들이 없어서 그런지 별로 성공적인 경영을 하지 못했 다. 또한 1971년에서 1974년 사이 듀퐁 글로어 포건과 윗슨 앤 컴퍼니의 중계회사들을 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윌 스트리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페로는 자신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렸지만, 실은 전제적이고 비밀주의적이며 '영감에 많이 의존하는' 회사에서 발휘했던 그의 특유한 리더십을, 다른 맥락에서 그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페로의 EDS는 리더십의 승리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페로 지신의 허풍조차도 세일 즈에 도움이 되는 불가피한 신화 만들기의 일부였다.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상품을 생산하는 것 외에서 그 상품이 팔릴 만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 또한 중요한 법이다. 이는 '서비스' 를 파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신뢰감은 판매되는 상품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일즈맨의 능력이 제품 시장만큼이나 중요한 (라이트 밀스가 칭한) '개성 시장(Pwesonality market)' 이란 곳에서 거래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일즈맨의 능력은 페로를 지도자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세일즈맨은 구 매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하지만, 지도자는 전체 추종자들이 스스로 자진하여 세일즈 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페로는 독재적인 방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독 수리들'일라고 부른 사원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는 데 능숙했다. 내가 1988년에 페로를 인 터뷰했을 때, 그는"이제까지 내가 사용했던 것 중에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없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곤 했다-나중에 정치를 하게 된 그 가 자신을 유권자들의 하인이라 칭했을 때, 분명 그는 이 능력을 써먹고 있었다. 페로가 좋아하던 이미지이자 그가 뽑은 추종자들을 사로잡은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EDS의 모토 로 요약된다. "독수리는 떼지어 날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볼 수 있다." 생산을 판매로 연결시키지 못한 관리자 출신 경영자 로저 스미스로저 스미스는 총명한 재정 기획자로 제러럴 모터스의 여러 직책을 거쳐 1980년 최고경영자의 지위까지 오른 인 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관리하는 대신 이끌어야 하는 지위에 앉게 되자 그는 맥을 못 추 었다. 어떤 사람도 세일즈맨이 가장 나쁘게 생각하는짓을 하면서 세일즈맨들을 이끌 수는 없다. 즉 스미스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스미스가 제너럴 모터스(GM) 의 공장문들을 닫았을 때, 그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지 못했다-그래서 후일 다큐멘터리 영화<로저와 나(Roger and Me)>에서는 그 일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기도 했 다. 우리는 만약 그런일을 한 사람이 로스 페로나 리 아이아코카였다면 미리부터 방송이나 공청회 따위를 통해 선수를 쳐서 충격을 최소화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다. 스미스는 그저 자기가 맡은 생산량을 채우거나 올바른 정책 결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책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미스에게는 세일즈 지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정책 결정들조차도 잘못된 것이기 일쑤였다. GM의 자동차 생산을 자동화하기를 원했던 스미스는 기본적인 모델을 설 계하고, 그것을 조금씩 변형시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붙여 판매하려고 했다. 그 결과 거 의 구별하기 힘든 몇 종의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GM은 여전히 소비자들에 게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GM 자동차를 사라고 권하는 세일즈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생 동안 한 가족은 조그만 시보레(Cheverolet)에서 시작하여 폰티악(Pontic)으로, 다음 에 뷰익(Buick)으로, 올즈모빌(Oldsmobile)로, 그리고 결국에는 일이 잘 풀린다면 캐딜락 (Cadilliac)으로 차를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일생 동안 한 가지 차종에 충실한 사람들도 있 지요. "아빠는 항상 뷰익을 몰아요." 1985년 광고대행사인 영 앤 루비컴이 GM의 경쟁사인 포드를 위해 만든 광고는 어떤 주차 관리원이 캐딜락을 주차장에서 빼면서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GM을 효과적으 로 공격했다. 그 광고는 다음 장면에서도 역시 GM의 자동차들인 뷰익과 올즈모빌을 같은 식으로 공격한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디자인하고 생산한다 해도 그것을 팔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스미스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동료들에게서 제대로 된 세일즈맨십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바깥에서 재능을 끌어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맨 처 음 그는 성장하는 지주회사 IBH의 회장인 독일의 부유한 사업가 호르스트-디터 에슈와 손 을 잡았다. 스미스는 불도저 등을 생산하는 GM의 자회사 테렉스를 그에게 매각하려 했다. 하지만 당장 준비된 현금이 없었던 에슈는 IBH가 가진 지분으로 테렉스를 매입했다. 그 리고 일단 GM과 관계를 맺은 에슈는 스미스를 설득하여 다른 유망한 투자를 하도록 했 다. 하지만 그건 에슈가 사우디의 한 백만장자의 돈을 끌어오기 위해 스미스를 속인 것이 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마침내 IBH가 망하고 에슈가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가자, GM 은 4,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으며, 에슈의 일에 관여했던 스미슨는 독일법에 따라 기소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에슈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와 계속 관계를 맺었다. 왜냐 하면 그는 에슈의 스타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광적인 팬이 스타 운동선수를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스미스는 에슈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로스페로의 힘에 굴복했고,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심각한 경우였다. 에슈에게 테렉스를 팔려 했던 스미스는 페로에게서 는 새로운 회사를 사고자 했다. 증권 인수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살로몬 브라더스가GM에 EDS를 가장 유망한 회사로 제시했던 것이다 페로는 자신의 회사를 팔 생각이 별로 없었 지만, GM의 컴퓨터 수요를 검토하기 위해 협상을 질질 끌었다. 페로가 거절하면 할수록 스미스는 그의 과당성에 더욱 매료되었다. 그런 과단성이야말로 스미스가 자신도 가졌으면 하는 성격이었고, GM이 필요로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스미스는 더욱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 결과 페로는 GM의 이사가 되었고, 또한 그 자신이 GM에 흡수된 EDS를 GM 의 전체 운영을 개혁하는 정보센터로 이용했다. 페로는 바로 이런 조건하에서 EDS를 판 것 이다. 하지만 스미스를 요리한 페로는 GM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그 회사를 코끼리라고 부르 면서 모욕했으며, 현장의 컴퓨터 기술자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EDS팀만을 찬양했다. 이는 GM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GM의 이사회는 페로에게 지분에 해당하는 돈 을 주어 내쫓기로 했다. 그러자 페로는 다시 한번 아주 큰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그가 요구 한 금액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이사들이 그것을 수용한다면 주주들이 반대할 것이 틀림 없었다. 페로는 사실상 자기 대신 스미스를 쫓아내는 쿠데타를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 로로서는 놀랍게도 이사회는 스미스를 선택했다. 스미스가 훌륭한 지도자는 아닐지 몰라도, 페로 역시 그들이 보기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GM의 일부 사람들이 페로의 세일즈맨십을 스미스의 생산 지식과 결합하려 한 일은 비 현실적이지만 이해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두사람은 물과 기름보다 더 나쁜 화약 과 불 같은 사이였다. 그들의 불화는 거대한 기업을 기초부터 흔들어놓았고, 페로로 하여금 그의 재능을 다른 곳에 써야 한다고 확신하게 했다. 그이 군대식 방식은 기업 중역들의 스 타일과는 달랐다. 페로가 자신의 완벽한 반대유형인 스미스 같은 사람을 매혹시킨 것은 운 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08. 전통을 버림으로써 전통을 지킨 베드로의 계승자 요한 23세 막스 베버가 기술한 세 가지 사회구조 중에서 '전통적 사회'는 오늘날 가장 적게 연구 되거나 가장 하찮게 간주되는 부분이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원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긴 하지만, 그 '이행적' 효과 때문에 찬양받는다. '법적' 리더 십은 이성과 자발적 동의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회질서의 가장 높은 형태로 보인다. 하지만 전통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어정쩡한 것이다 .그래서 전통은 내적 작동원리 없이, 마치 발사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날아가고 있는 대포알처럼 단지 관성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전통은 다른 두 가지 사회에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다윗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였 지만, 자신의 카리스마를 종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기존 유태교의 전통을 필요로 했다. 심 지어 미국 헌법 같은 계약체계도 전통을 보존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삼권분립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부분 중 사법부는 법률의 유지에 기여한다. 전통적 질서를 치장하는 모든 장 식들이 이러한 기능을 강조하는 데 쓰인다. 법정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의전을 이루는 수칙 들을 준수하게 되어있다. 관사들은 의식에 참여하는 듯한 복장을 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다. 법정 내에서 발언을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라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 변호사들은 의전 형식이나 판사의 명령에 따라 판사석에 접근한다. 정리는 항상 높은 목소리로 절차의 진행 을 알리는가 하면, 고대의 맹세의식이 준수된다. 옛날 법률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전통적 방법은 성가신 측면이 있다. 셰익스피어 는 그런 절차들을 '법률의 지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절차들에는 즉흥적인 결정이나 순 간의 재치 같은 것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 '카리스마적'법률 집행은 권위를 바탕으로 신속 하게 결정된다. 다시 말해 왕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처벌을 명령하고, 군중이 죄인을 구해내거나 죄인에게 린치를 가하는 식이다. 이 모든 것은 그 당시 순간적인 정서에 지배 당한다. 반면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좀 느리고 성가신 재판 절차를 선호한다. 하지만 법정은 계약 과정을 통해 설립된 일단의 법률들을 보존한다. 전통은 법적,합리적 사회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만약 전통이 권위의 '주요' 근원이 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 는 (우리가 보기에 퇴행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다. 17세기 존 로크(John Locke)가 왕들 의 부권적 전통을 옹호하면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 재판을 논박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사와 영주들, 그리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평민들이 살던 시 대를 그리워하는 것들은 오직 낭만주의자들뿐이다. 분명 그 시절에는 무언가 매력적인 구 석이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구석도 많았던 것이다. 오늘날 단 하나의 분야에서 전통적 리더십은 여전히 찬양받고 있다. '종교'가 전통적 구 조를 지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신학에서 신은 인간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며,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떤 거래도 없다. 신은 인간과 여러 가지 종교적 구조들을 통해 계약을 체결하지만, 이는 오직 신이 일방적 으로 제시한 것일뿐 어떤 타협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신은 마그나 카르 타에 동의하기로 양보한 존 왕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신을 섬기는 인간에게는 지배 자의 불의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란 인격화된 정의이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신의 뜻을 잘못 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보통 종교들은 일종의 계시의 기억을 보존한다. 토라, 신약, 코란, 모르몬경,<과학과 건강 (Science and Health)>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온 전통들이다. 따라서 20세기에 이른 오늘날에도 종교 단체들에서 전통적 지도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오랜 종교관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은 역시 로마에 있는 교황이다. 그는 예수의 첫 번 째 제자인 베드로의 권위를 직계 대표자들을 통해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수많은 교 황들 중 하 사람, 요한 23세(1881-1936년)를 통해 전통적 리더십의 원동력을 연구할 수 있 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교황의 자리에 봉직한 그는 전통을 쇄신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다. 요한 23세를 감동시킨 '고난의 연인들' 안젤로 론칼리(Angello Roncalli)는 1881년 오페라 작곡가 도니체티(Donizetti)의 고향인 베 르가모 외곽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이나 타고난 밝은 성격 등이 쌀쌀맞은 성격의 선임자 피우스 12세와는 너무 달랐다. 그래서 론칼리의 '평범성' 에 대해 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향땅 롬바르디아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애정 을 품고 있었다. 론칼리는 이 롬바르디아 땅의 정취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알레산 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의 <고난의 연인들(I Promessi Sposi)>을 통해 이해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농민 연인들은 두 명의 귀족적인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어려움 을 해결한다. 론칼리는 두 사제를 본받으려 했다. 지역 신학교를 다닌 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론칼리는, 베르가모로 돌아가 주교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교구 신 부가 아닌 교회 관료조직의 일원으로 일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때대로 교회법을 강의하긴 했지만, 끝까지 교회 관료로서 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역할 모델은 그와 같은 고향 출 신으로 시성된 밀라노 주교 카를로스 보로메오(Charles Borromeo:1538-1584년)였다. (하지 만 액턴 경은 이단에 대한 벌로 사형을 언도한 보로메오를 결코 용서 할 수 없었다.) 교 황 피우스 4세의 조카였던 보로메오는 바티칸의 국무장관으로 봉직하면서 교황을 도와 트 렌토 공의회 3차회의를 주관했다. 밀라노 주교가 된 그는 담당 영역을 공의회가 주창한 규율 개혁의 모델로 만들었다. 그는 회의를 통해 사제들과 상담했으며, 그가 관리하던 1,000 여 개의 교구들을 모두 사찰하기도 했다 - 그가 그 교구들 중 하나인 베르가모에 만든 신 학교에 훗날 론칼 리가 출석히게 된다. 안젤로는 보로메오의 현지 방문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는 다른 많은 일을 제쳐두고 30여 년 동안 그것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 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되기 한 해 전인 1957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을 출간하 는 데 성공했다. 성경을 제외한다면 론칼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도서는 보로메오와 만초니의 책이었 다. 론칼리는 여러 교회관료 자리를 거치면서 보로메오를 본받아 사제회의를 열었고, 자신 이 담당한 구역의 신앙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현지 방문을 하기도 했다. 론칼 리가 '총회'를 열어 교회 개혁의 도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보로메오가 트렌토 공의회에서 한 일 에 감화받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모델을 현대에 되살려내어 사용하는 그의 능력은 교황 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훈련의 일부였다 - 일흔의 나이에 이르러 교황이 된 그는 비판가들 (그리고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론칼 리가 종종 자료를 찾기 위해 들렀던 밀라노의 주교관은. 그의 인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그곳에서 그가 1960년대에 열었던 공의회에서 중요한 동맹군으로 활약한 추기경 조반니 바티스타 몬 티니(Goivanni Battista Montini)를 만났던 것이다. 밀라노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은 모두 만초니의 소설에 깊이 감화받고 있었다. 비록 만초 니가 소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판의 토스카나 방언을 다듬기 위해 피렌체로 떠나긴 했 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흥미로운 사건들은 밀라노 안이나 그 주변에서 일어났다. 내용을 보면, 17세기의 가상공간 속에서 폭동과 전염병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정을 위협하 는 와중에, 영웅적인 사제들이 공동체의 중요한 지주로 등장한다. 카를로스 보로메오의 친 척 페데리고 보로메오(Federigo Borromeo)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밀라노의 추기 경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보로메오가 용감하게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았듯이, 만초 니의 소설 속에서는 카푸친 수도사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 모든 아야 기들이 론칼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고난의 연인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돈 키호테>가 스페인 사람들에 게 주는 의미와 같다. 이 책은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하는<보봐리 부인>이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허클베리 핀>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베르디가 만초 니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작곡가는 만초니의 신앙시들을 음악으로 만 들면서 작곡을 시작했고, 그의 생애 최대의 명작은 만초니에게 바친 장례 미사곡이었다. 마 침내 이 부세토 출신의 음악가가 '성자' 만초니를 대면했을 때, 그는 어느 때보다 더 흥분했 다. 만초니는 전통과 현대를 묘하게 결합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민족국가 로 통합되어가는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기호화했다. 그는 소설을 순수한 토스카나어로 고쳐 쓰면서 평상어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세속의 애국자들과 신실한 신학생들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만초니가 어렸을 때, 위대한 계몽주의 사상가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의 딸인 모친은 한 프랑스인과 함께 파리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드 스탈 부 인(Mme. de Stael)의 살롱에서 일단의 '이데올로그'들과 교류했다. 이런 환경과 마주친 어린 만초니 는 곧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제네바에서 온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인 헨리에트 블론델(Henriette Blondel)과 결혼한 후 다시 카톨릭 신앙을 되찾았다. 그러나 만초니는 신앙심을 유지하면서도 교회 내의 타락한 구성원들을 예리하게 풍자하기 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예수회를 경멸하여, 이 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17세기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예수회를 빼버리는 역사적 왜곡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는 소설 속에서 겁쟁이 신부나 수녀원의 가학적인 원장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결 코 신앙심과 교회에 대한 순종을 혼동하지 않았다. 안젤로 론칼리는 바로 이 소설<고난의 연인들에 나오는 인간 만사를 평생 동안 궁구한 끝에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얻었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시골 베르가모 출신의 안젤로에게 에티켓 북 역할도 했다. 만초니는 헨리에트 블론델의 영향을 받아 교회주의를 떨쳐버린 '복음 기독교'를 생각했다. 그의 페데리고 보로메오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 미제라블>네 나오는 착한 주 교를 좀더 섬세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금세기 중엽 론칼 리가 보여준 세계 교회주의적 태도는 만초니의 범교회주위적 사상에 의해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 다. 론칼리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으로 베르가모에서 그가 비서로 있으면서 모셨던 주 교 자코모 라디니 - 테데시(Giacomo Radini Tedeschi)를 들 수 있다. 론칼리는 라디니-테 데시가 죽은 후 발표한<내가 모신 주교>라는 글에서 그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를 찬양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은 보수적인 바티칸 관료조직에 경고음을 울렸다. 그 때문에 당시 떠오르던 교회 외교관 론칼 리가 불가리아와 터키에서 궃은 일을 처리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관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4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까 지 이 두 나라에서 각각 10년씩을 보냈다. 그동안 론칼리는 자신이 맡은 갖가지 궃은 일에 화를 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두 나라에 머문 것이 새옹지마가 되었다. 1930년대에 불가리아에 체류했기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사제들처럼 파시스트 와 연관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터키에서 수천 명의 유태인들에게 바티칸 비자를 제공하여 중에는 터키에서 수천 명의 유태인들에게 바티칸 비자를 제공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귀족적인 터키 주재 독일대사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은 바티칸에서 온 론칼리와 함께 유태인들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그 두사람 은 후일 서로를 위해 증언했다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론칼리는 파펜을 위해 증언했고, 파 펜은 론칼리의 시복과정에서 그를 위해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성지를 장악할까 꺼려했던 교황청이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반대할 때, 론칼리는 교황 피우스 12세의 정책에 협조하여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교황 피우스 12세는 마침내 론칼리를 유럽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가 된 론칼리는, 샤를드골이 전쟁 동안 비시 괴뢰정부에 협조한 주교들을 숙청할 때,그 숙청작업을 완화시키는 데 (내키지 않았지만) 일조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지성계에 카톨릭 예술과 철학이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라는 훈령을 받고 그에 따랐 다 - 이를테면 그는 드골이 자유주위적인 신학자인 자크 마르탱(Jacques Martain)을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영어로 가장 잘 쓰여진 론칼리 전기의 저자는, 그가 전후 실존주의와 현상학이 유행하던 당시 프랑스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예수회의 일원인 고생 물학자 텔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은 다른 경 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는 교회의 교리문답이나 여 타 사회적 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런 문제들을 일으킬까?" 기질상 억압적인 인물은 아니었 던 론칼리는, 로마가 가혹한 조치를 실행했을 때 그 일에 관여혀지 않을 수 있었다. 피우스 12세는 론칼리의 후임을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전임자처럼 되지 마시오. 그는 한 번도 자기 자리에 있었던 적이 없소." 중용의 입장 에 서 있었던 론칼리는 로마와 프랑스의 교회와 정부 지도자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힐 만큼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 두툼한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놓여 있는 함정들 을 잽싸게 피해 다녔던 것이다. 파리의 대주교 모리스 펠탱(Mauris Feltin)은 이렇게 말했 다. "그는 섬세하고, 현명하고, 멀리 볼 줄 알았다. 나는 그가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의 손 아귀를 잽싸게 피해간 사례를 수없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파리 생활을 끝내고 1953년 베네치아의 추기경으로 취임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30년 동안이나 외국 임지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와 (아마 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네통 언저리에 있는 베르가모는<고난의 연인들>의 배경인 17세기에는 성 마가(Saint Mark) 공화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 추기경이 된 론칼리는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렌 초(Renzo)처럼 "성 마가 만세!"를 외치며 베네치아에서 맞은 새로운 임무를 경축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론칼리는 교회의 의식이나 절차들을 좋아했다. 또한 베네 치아가 지닌 연극적인 분위기도 좋아했다. 그는 곤돌라에 축복을 주었고, 예수 승천일에는 시가지와 바다에서 녘어지는 축제 행진을 주재했다. 그리고 카톨릭 신자들의 비인날레와 영화제 참가금지령을 폐지했으며, 베네통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던 사회주의자들과 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보로메오 형제들처럼 현지 방문과 사제회의를 즐겼다. 그 리고 이곳에서 평생을 바친 작업이었던 카를로스 보로메오의 사찰 여행에 대한 책을 끝냈 다.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하느님만을 믿고 역사와 도박을 벌이다 82세에 이른 피우스 12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1958년 막상 그가 사망하자 교계 는 충격에 빠졌다 - 워낙 교황 피우스 12 세의 통치가 엄격하여 그 어떤 것도 그의 강력 한 통제력을 약화시킬수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죽기 전 4년 동안 그는 어느 스위스 의 노화 전문가가 '살아 있는 세포 요법' 이라고 부른 치료법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는 데, 그것은 양의 조직을 직접 체내에 주사하는 방법이었다. 그가 여름 관저인 카스텔 곤돌 포(Castel Gondolfo)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내장을 적출하던 관행은 로마로 시체를 운반한 다음으로 미뤄졌다. 그런데 로마 대성당의 교황석으로 관을 옮긴 후, 교황의 수행원들이 다 가가자 갑자기 관 속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교황의 사체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안과의사였던 교황의 시의가 사용한 '실험적인' 방부제가 그날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하 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더욱 곤혹스러운 일들이 이어졌다. 관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교황의 얼굴이 녹색으로 변해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시커먼 검버섯이 늘어났으며, 마침내 관에서 썩는 악취가 진동했던 것이다. 만약 중세시대였다면 이러한 일들은 악마가 이 불행한 사체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증명하 는 표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로마도 미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피우스의 정책을 잇는 보수적 인 후계자(아마도 도메니코 타르디니(Domenico Tardeni))를 임명함으로써 그를 축복하려 했던 교회의 고위 사제들은, 이런 불길한 사건들로 인해 행보를 달리힐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 시대를 마감했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그들로 하여금 피우스 12세 가 지배했던 한정된 로마 인맥 밖에서 교황 후보를 찾게 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탈 리아인이 아닌 사제를 교황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바로 아르메니아 출신 그레고리 페 테르 아가기아니안(Gregory Peter Agagianian)이 그 사람이다.. 후일 론칼리는 일단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당시 교황 투표에서 자신의 이름과 아가기아니 안 이름이 마치 끓는 물 속의 병아리콩 처럼 차례로 오르락내리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열 한번째 투표에서 론칼 리가 당선되었다. 그 배경에는 아무래도 풍채 좋고 인상 좋은 사람 이 미래에 좀더 젊은 후계자가 나타나 진짜 리더십을 발휘하기 전까지 '임시 교황' 역을 하 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교회의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77세였던 론칼 리는 (늘 다이어트하겠다고 맹세하긴 했지만) 체중과다였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다들 그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이단심판소라 불렸던) 성무소(Holy Office)의 수장이었던 추기경 알프 레도 오타비아니(Alfredo Ottaviani'일급의' 조정자라고는 볼 수 없는 베르가모 출신의 늙 은이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를 지원했다. 한동안 오타비아니가 옳은 것처럼 보였다. 새로 들어온 미국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에드거후버의 권력을 인정한 것처럼, 요한 이 관례에 따라 교구 방문과 사제회의를 거쳐 로마 주교단의 구성원을 바꾸었지만, 바티칸 의 국제적인 행동들은 한동안 피우스 교황이 남긴 전통에 따라 이루어졌다. 텔라르 드 샤르 댕은 또 '경고'를 받았고, 프랑스의 노동자, 사제 운동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 교황 선출 전 론칼 리가 프랑스 추기경들에게 이같은 조치를 약속했다는 믿을 만한 보고가 있다. 바티 칸에서는 새 교황이 곧 조롱감이 되어 다음과 같은 경구가 돌아다녔다. 안젤로는 주재하고, 카를로는 스파이짓을 하며, 알프레도는 보고만 있고, 도메니코는 다스리고, 그리고 요한은? - 그는 모두에게 축복을 준다네. 안젤로 델라쿠아는 바티칸의 부국장관이었다. 카를로 콘팔로니에리는 신학교 교장이었다. 알프레도 오타비아니는 성무소장이었다. 도메니코 타르디니는 국무장관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는 이런 소리들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요한 23세는 사회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교황청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았다. 대신 칙서와 공의회라는 두 가지 옛 방법을 동원하는 우호적인 대응책을 세 웠다. 칙서는 원래 교부시대의 도구로서, 주교들이 교리와 관련된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해 편지 로 하는 회의였다. 이 방법은 중세시대에 한참 동안 무시되었지만, 18세기 베네딕트 14세 (Benedict XIV)가 교황이 주교들에게 보내는 공문에서 이 형식을 부활시켰다. 19세기와 20 세기에 들어서 칙서는 종종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될 만한 더욱 중요해졌다. 교황 요한 은 몇몇 일상적인 칙서를 발송한 후, (첫문장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어머니와 교모 >(1961년)와 <지상의 평화>(1963년)에서 칙서의 초점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이 칙서들은 오로지 주교들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카톨릭 신자들 그리고 넓게는 모든 '선의의 인류'를 향한 것이었다. 그 칙서들은 교황의 권리나 교리들을 옹호하기보다는, 인류가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다 - 첫 번째 칙서는 경제정의의 필요를, 두 번째 칙서 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세계인들의 협조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속 자유시장의 자 율성이라는 명제에 도전?한 첫 번째 칙서는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가 쓴 <어머 니, 예스, 교모, 노>(당시 카스트로주의자들의 구호 "쿠바, 예스, 양키, 노"에서 따온 것)라는 글에게 반격을 받았다. 두 번째 칙서는 냉전을 종식시키려는 것이었다. 교황 요한은 이 문서들을 준비하면서 교황청 내에 있는 전문가들외에 다른 사람들고 손을 잡았다. 예를 들면 밀라노의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같은 사람이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좌 익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려 했던 기독교민주당 출신의 정치가 알도 모로(Aldo Moro)와 교류 함으로써, 전임교황의 측근들에게 미움받던 인물이었다. 또한 요한은 비카톨릭 교회들과 좋 은 관계를 유지하던 예수회 추기경 아우구스틴 베아(Augustin Bea)와도 상담을 했다. 후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적인 순간에 요한은 이 사제들을 지원하게 된다. 전세계의 주교들을 불러모으는 공의회 자체에 꼭 해방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의회는 정통을 결정하고 강제하는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황 제가 니케아에 소집한 공의회(325년)처럼 세속의 지배자들에게 교황 일에 간섭하는 권력을 주었다. 어떤 공의회는 교황에 반대하는 운동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한 이전의 두 공의회 - 반개혁적 훈령을 승인한 트렌토 공의회(1545-1563년)와, 바티칸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던 교황 피우스 9세의 바람대로 교황의 무오류성이 선언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869년-1870년) - 는 교황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쓰였다. 특히나 교황 청이 각 안건에 대해 '토론 주제서'를 준비하는 와중에, 교황 요한의 공의회가 그에게 불리 하게만 전개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공의회를 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에서 헌법제정회의를 여는 것과 비슷했다. 예견되지 않은 질문과 맞닥뜨리고, 때로는 회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폭 주' 할 수도 있었다. 교황청은 그러한 돌발 상황을 피아기 위해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했다. 진심으로 설령을 믿는 요한은 자신에게 미리 영감이 와서 일탈자들을 물리차고 회의를 바 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건 '자유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 의식들을 좋아했고, 그것들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수세기를 가로질 러 영웅 카를로스 보로메오와 교통할 수 있게 해준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를 사랑했다. 그가 생각한 좋은 공의회는 보로메오의 반개혁 공의회였고, 이는 현대 자유주의자들이 싫어 하는 것이었다. 그는 금욕주의 문제에서는 결코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 그는 피임을 공의회 의제에서 빼버렸으며, 기혼 성직자라는 개념에 적대감을 표시했다(노동자 사제라는 개념도 그가 보기 에는 성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교황청 내의 전통주의자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나누었다(타르디니 추기경이 만초니 소설의 모든 구절을 암송하고 있던 것도 그들의 친분에 한 이유가 되었다). 요한이 그들과 달랐다면 단지 그가 그들보다 더 깊이 전통적 교리들을 신봉했다는 점일 것이다. 세습 지배자가 권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가 지닌 정당성을 확신 해야만 했다. 요한은 하느님이 항상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역사와 도박했다. 이 인물의 성스러운 무모함에 비춘다면 계산이 빨랐던 교황 피우스 12세는 아예 불신자처럼 보일 정도이다. 세습지배권을 오직 안정만을 위해 사용하려 하는자는 오히려 그 권력을 약 화시키게 된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폭주' 했다. 그 자리에 모인 주교들은 교황청이 그들에게 입 힌 구속복을 거부했다. 피우스 9세의 공의회에서도 그런일이 벌어졌지만, 교황은 저항을 진압했다. 상당수 사제들 이 성서와 전통의 상대적 권위라는 첫 번째 교리의 엄격한 형식화에 반대한자, 요한은 이 의제를 재고하기 위해 순서를 뒤로 미뤘다. 그리고 원래는 나중으로 예정되어 있던 전례 개 혁 문제를 토론하게 했다. 교회 의식에서 라틴어 대신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자는 제안은 묘 한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그저 교회의 관습 문제로 보였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니지고 있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교황청 팀이 자신들이 주창한 교 리들을 승인시킬 때, 교회 라틴어(혹은 라틴어의 이탈리아식 발음)에 익숙지 못한 비교황청 주교들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에 고전학자를 불러 라틴어 공부를 새로 한 요한은 자국어 미사를 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였다(하지만 그가 스스 로 그 같은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바티칸 밖의 사람들은 몰랐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번째 회기 중 요한은 자신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 회기를 볼 때까지 살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주교들을 불러 그들을 '소떼처럼 몰고 다니지' 않았다. 그가 가진 성 베드로 의 이미지는 권좌에 앉은 지배자가 아니라. 주인의 부름을 받았을 때 배를 버리고 그를 따 라가는 믿음 깊은 사람(마태복음 13:28-33)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핵심적인 기본 정책들마저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사람 들은 그가 신선한 공기를 보충하기 위한 교회의 '창을 열었다'고 말하곤 했다 - 하지만 그 의 비서에 따르면, 요한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요한은 바깥에서 바람이 들어오 는 것을 싫어했으며, 더운 로마의 여름 날씨에도 정장차림으로 지내는 사람이었다. 대신 그 는 아지오르나멘토(Aggiornamento) 즉 '업데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베네치아를 방문할 때 자신의 목적이 바로 아오르나멘토라고 말했고, 이는 보로메오가 말한 정신적 토 신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스승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흰 말뚝을 하얗게 유지하려면 정기적으로 칠해야 한다사실상 공의회는 다음 회기에서 요한이 예견한 것보다 더욱 멀리까지 나아갔다. 공의회는 양심의 자유, 이민의 자치권, 타종 교 신자(그리고 불신자)들과 카톨릭의 관계 등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각각의 사례들에는 요한의 정신과 태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교회 내에 있던 그의 비판 자들은 요한이 지나치게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가 원좌에 충분한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요한은 누구나 감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신뢰한다고 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존 케네디뿐 아니 라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에게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그의 메시지에 반응 사람은 흐루시초프였다. 당시 물러설 곳을 찾고 있던 소련의 지도자는 교황의 메시지 를 <프라우다>지의 1면에 실었다. 그 후에도'좌익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은 지속되었 다. 교황은 흐루시초프의 딸과 외손자의 방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이 이룬 가정은 하느 님이 모든 이들을 위해 창조한 선과 인간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의 사위, 알렉 시스 아주베이(Alexis Adzhubei)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저널리스트이지요,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알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 길,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특히 첫쨋날에는 빛을 창조하셨답니다. 그리고 6일 동안 계속 창조하셨지요. 하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는 실제로는 매우 긴 시간이지요. 우리가 서로의 눈을 볼 때 우리는 거기서 빛을 봅니다. 오늘은 창조의 첫 번째 날, 빛의 날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다시 말해 봅시다. 빛은 내 눈에도 있고, 당신 눈에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눈에도, 불신자의 눈에도 빛이 있다는 말이다. 대죄인 무명씨가 만초니의 소 설 속에서 페데리고 보로메오를 만나러 왔을 때, 그는 비난이나 설교를 들을 줄 알았다. ?지 만 추기경은 그를 껴안으면서 진작에 '그를' 찾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한다. 옆에 서 있 던 불운한 신부는 요한이 크렘린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때 교황청 사제단이 보인 반응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잘 듣게나. 성자와 악당은 모두 가슴속에 소용돌이를 하나씩 품고 있다네. 그래서 가만 있 을 수가 없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함께 춤추게 하는 거라네. 요한은 흐루시초프의 딸에 게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지요. 전 그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인 이 직접 그 이름을 제게 말해주시면 좋겠군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니까요. 그녀는 그 이름들을 말했다. 각각 니키타, 알렉세이, 이반이었다. 요한은 세 이름에 축복 하면서 이반의 차례를 맨 마지막으로 돌렸다. 왜냐하면 이반은 요한의 러시아식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은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자, 제가 교황직을 맡으면서 선택한 이름이고, 제 고향땅에 있는 언덕에 붙여진 이름이며, 제가 주교로 있는 성정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집 으로 돌아가시면 부인은 아이들을 안아주세요. 하지만 이반은 좀더 꼭 껴안아주세요. 그런다 고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는 이렇게 먼 곳에 있는 한 러시아 소년과 자신이 어렸을 적 바라보던 언덕을 연결시켰 다. 마치 외교관 같은 말솜씨였다. 하지만 떄로는 외교적인 말이 진심을 담고 있을 수도 있 다. 이제까지 교활한 교황, 신중한 교황, 비방받은 교황, 오해받은 교황, 사악한 교황 등 많 은 종류의 교황들이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 있건 멀리 있건 간에, 교황 제도 자체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만은 선한 교황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 교 황을 부르는 새로운 이름, 선한 교황 요한(Good Pope John)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내 글을 곧이곧대로만 읽으면 교황 요한이 전통을 버림으로써 성공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전통적 지도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분명 로마 교황청의 보수주의 자들은 그가 전통을 수호하기보다는 배반했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그들 의 후계자들은 지금도 론칼리 교황을 시성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은 모든 전통 적 리더십의 패러독스를 체현한 인물이다. 만약 전통적 리더십이 '오로지' 전통에만 의지한 다면, 그것은 아래로 전해져 내려가면서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체스터 턴(G.K. Chesterton)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보수주의는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그것 은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가 길에다 흰 말뚝을 하나 세워놓으면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럽혀져서 검은 말뚝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 말뚝을 계속 희게 하려면 정기 적으로 폐인트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오래된 흰 말뚝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흰 말뚝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통'이라 부르는 것은 보통 시간에 의해 검어지는 것이다. 교황청이 '변함없다 '고 찬양한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변화들이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기독교회의 출 발은 자국어 의전과 실험적인 사제, 종말의 기대 등이 어우러진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고수하고자 하는 라틴어 의전과 금욕 사제 등 여러 가지 전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덧 붙여진 것들이다. 교황 요한은 교회가 근본적인 영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쇄신 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수도회가 창건 당시의 열정에서 벗어나 관습과 형식에만 치우치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 래서 '개혁 베네딕? 수도회'가 수세기를 거치면서 가장 오래된 수도회를 가장 새롭게 혁신 하는 수도회가 된 것이다. 개신교의 여러 종파들은 종교개혁을 다시 개혁해야 한다는 필요 에 직면해 있다. 관성에 기대는 이들은 관성운동이 언젠가는 쇠잔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항상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기업은 추기 에너지 를 회복해야 한다. 변화에 저항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저항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방 식으로 변화한다. 전통이 만약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 전통은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전통적 리더십 중에서도 교황이라는 자리는 항상유지에서 그 힘이 나오는 것 으로 착각하기 쉽다. 교황직은 그가 앉는 자리 즉 사도의 자리로 정의된다-교황 성 베드로 가 바로 그 자리에 맨 처음 앉은 사람이다. 하지만 오직 죽은 것들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다. 교황 요한은 종종 요한복음(21:18)의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을 생각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느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 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성 베드로는 라틴어라곤 전혀 모르던 기혼자였다-그래서 교황 피우스 12세는 그 사실을 생각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현대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온 요한은 기독교 전통의 '본질'로 돌 아갔다. 그가 평생을 통해 보여준 한결같은 곧음은(워싱턴 국립박물관에 걸려 있는 틴토레 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배 밖으로 뒤뚱거리며 걸어나오는 성 베드로처럼). 그가 모든 것 이 진리에 반하여 기울고 흔들리는 곳에서 꼿꼿이 서 있는 예수의 형상에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엄청난 권력을 감당하지 못한 허수아비 교황 켈레스티누스 5세요한23세의 분명한 반대 유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되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던 피우스 12세이다. 하지만 좀더 정확한 반대유형을 고르자면 본질적 영감에 대한 '완전한'신뢰가 없었기 때문 에 지도자가 되지 못한 전통주의자를 들어야 한다. 그 믿음이 부족하여 권력을 내던진 인물 도 있다.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교황 켈레스티누스 5세(Celestine V:1215-1296년)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1294년 해변의 성채도시 나폴리에서 한 번도 원한적이 없었던 명예를 벗 어던졌다-이 비범한 행동은 그가 성자로 시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마태복음(10:16)에서 예수는 비둘기의 단순함과 독사의 교활함을 결합하라고 말한다. 피우 스는 교활성에서 교황 요한 23세와 대조되는 인물이지만, 켈레스티누스는 비둘기 같은 단순 성으로 그와 대조된다. 그를 보면 성스러움이 그 자체로 '리더십'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리더십은 요한이 가졌던 여러 장점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켈레스티누스를 성자라 불렀지만, 단테는 그를 일러 겁쟁이라고 말했다. 베 르길리우스를 안내인 삼아 지옥을 여행하던 단테는, 너무나 무기력하여 이승에 살아 있기조 차 힘들어했던 인물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는 이 사람도 있었다. 영혼이 작았던 그는 엄청난 권력을 버렸다. 켈레스티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동료 사제이기도 한 또 다른 이탈리아 시인 야코포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는 그가 교황직을 버린 것보다 그것을 수락한 것이 더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그 치명적 요청을 수락했을 때,나는 당신이 느낀 고통에 짓눌렸답니다. 야코포네는 당시 은둔자 피에트로 델 모로네(Pietro del Morrone:그가 바로 교황 켈레스 티누스 5세가 된다)를 예언자로 간주하던 성령 프란체스코파의 일원이었다. 13세기의 묵시 록적 분위기 속에서 피에트로는 마치 성 프란체스코처럼 교회를 재건하고 수도회를 세운 유 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식하면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했고, 때때로 도덕적인 메시지를 세상에 내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예언으로 간주했다. 그가 교황권이라는 재난 을 얻게 된 것도 그런 식으로 곡해된 '예언'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자리를 좌지우지하던 콜 로나가와 오르시니가가 반목하면서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2년 동안이나 비어 있었다. 피에트로는 이런 상황을 한탄하는 메시지르 내보냈는데, 마침 교계의 소란을 피해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열두 명의 추기경단이 그 소식을 듣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성자를 산에서 끌어내려 교황의 자리에 앉히기로 결심했다. (그들도 당시 피에트로가 85세의 나이 에 병약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리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피에트로 는 그 제안을 거부했지만, 민중은 곤란에 처한 악한들이 선인에게 보상한다는 식의 동화처 럼 된 그 모양새를 좋아했다. 피에트로가 교황직을 수락하자마자 서로들 앞다투어 이 어리 둥절한 성자에게 아첨하고 그를 조종하려 들었다. 게다가 새 교황은 라틴어에 전혀 무지했 기 때문에 그를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추기경들은 그를 로마로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앙주 가문 출신의 왕 샤를 2세(Charles II)는 그를 나폴리에 묶어놓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게 했다. 켈레스티누스는 자신이 이 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가 행한 좋은 일들조차 더 큰 재앙 을 불러왔다. 그는 성령 프란체스코파를 합법적인 수도회로 인정했는데, 이 때문에 그가 교 황직을 사임한 후 잔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야코포네 다 토디는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켈레스티누스의 어리석을을 한탄했다.) 그는 몬테카시노에 있는 역사적인 수도원에 자신의 수도회(셀세스틴파)를 설립했는데, 이 때문에 창건자의 무덤이 있는 성소를 빼앗기게 된 베 네틱티파는 분노했다. 마침내 켈레스티누스가 톨로나가와 오르시니가를 방해하는 데 사용되자, 추기경 베네 데토 카에타니(Benedetto Caetani)는 샤를왕과 손잡고 허수아비 교황을 폐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켈레스티누스가 스스로 사임하자 곧 카에타니가 교황에 즉위하여 보니 파키우스 8 세(Bonifacius)가 되었다. 단테는 켈레스티누스가 카에타니에게 굴복한 두고 악마에게 굴복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니파키우스를 성령파들이 설교하던 종말을 선구하는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부패가 만들어낸 모든 해악들이 지나간 후, 켈레스티누 스는 성성도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