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움직인 16인의 리더 지은이: 게리윌스 출판사: 작가정신 봉사자: 서창원, 노상현, 모경필 01. 선거정치 지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VS (반대유형) 아들라이 스티븐슨 난롯가 대화로 국민들의 안방까지 파고든 장애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과거에 어떤 이들은 리더십이란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고 믿었다. 그들은 지도자가 추종자들 에게 의존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판단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인들에게 할 일을 일러준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민주주의라 불렸던 것이 실은 1인 지배였다." 실제로 아테네인들이 페리클 레스를 지배했어야만 아테네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지도자들은 유권자들에게 아부할 때조차도 자신들은 '편의적인 발상'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존 F.케네디는 상원의원 시절 다른 상원의원들에 관해 쓴 책 <용기 있는인물들>에서, 오로지 선거구민들의 의사에 도전한 사람들만이 용기를 지 녔다고 썼다. 물론 그들은 그 결과로 선거구민들의 지지를 잃는 것도 감수했다. 케네디는 그 들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내려오는 순간에 그들은 찬양했다. 그는 "나는 내 배를 내 뜻대로 몰고 갈 수 있었다."고 한 다니엘 웹스터의 말을 호의 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 그가 찬양한 자질은 외로운 천재, 진리를 위해 목숨바치는 순교자, 성실한 지식인, 다시 말해 주위의 말 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웅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사람이지만, 만약 그가 의회에 진출했다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인 의 기술이란 숭고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술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며, 어떤 지도자도 그 기술 없이는 잘 해나갈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정치지도자가 타협을 잘한다고 말은 보통 진짜 칭찬이라기 보다는 조롱에 가깝게 들린다. 그 예로, 명민한 저널리스트였던 월터배젓이 19세기 영국 정치가 로버트 필 경에게 보낸 찬사를 들어보자. 나름대로 지적인 사고를 한 결과겠지만, 그는 한번도 자신의 시대를 앞선 적이 없었다. 그 의 이름이 관련된 대부분의 파격적인 조치들에서, 그는 일단 반대자로 나서고 난 후에 다시 열렬한 찬성자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곡물조례, 통화문제, 일반신호체계 개정, 가톨릭 해방 등의 이슈에서 그는 최초의 기안자였던 적이 없었고, 재빠른 추종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려했고, 남들이 이루어놓은 변화를 추인했을 뿐이다. 그런 이 슈들이 일급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을 때, 혹은 박애주의자나 사상가들에게만 제한되었을 때, 혹은 오직 고집센 휘그당원들만이 지지했을 때, 우리의 로버트 필 경은 항상 반대 입 장을 취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비로소 이급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로버트 필 경의 마음 역시 변했다. 그는 평균치의 사람들이 변화했을 때 따라 변화했던 것이다. 그는 평범한 신조를 지니고 있었고, 비범한 능력을 자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슈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놓았 고, 그 이슈가 알려질 때는 그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평가가 마지못한 찬사이거나 심지어 일종의 조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나온 필 경에 대한 평가는 링컨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 역시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고귀한 사상을 일부나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유권자들이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잇 다. 우리는, 오래 전 황금시대에는 명철한 의식을 지닌 지도자들이 높은 곳에서 훌륭한 결 정을 내렸고, 미국인들은 단지 그 결정을 따르기만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심지어 18 세기의 영웅 워싱턴마저도 정적들로부터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루스벨트는 완벽한 통치자인가, 대중에 영합한 기회주의자인가 20세기 들어 미국 역사 에서 가장 중요한 서너 명의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영광을 누린 유일한 대통령이 있다면, 그가 바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많은 저자들이 그를 리더십의 모델로 간주했고, 특히 대통령의 권력에 대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를 쓴 리처드 뉴스타트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20세기 인물로서 그만큼 개인의 권력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날카롭게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단지 한두 사람만이 권력을 사용하는 능력에 대한 확산에 서 그를 따를 수 있었다. 지각과 야심 그리고 자기확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에 따른 보상을 얻어냈다. 백악관의 지배자로서 현대의 어떤 대통령도 그를 따를 자는 없었던 것이 다. 뉴스타트는 이 글에서 오직 지도자의 내면적 특질, 즉 지도자의 확신과 야심, 판단력 등만 을 강조하고 있다. `루스벨트는 권력과 사랑에 빠졌다... 루스벨트의 통치방법은 그의 통찰 력, 인센티브, 확신의 결과이다.' 루스벨트를 묘사하는 뉴스타트의 말투는 페리클레스를 묘사하는 투키디데스와도 닮았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지도력으로 자신의 의견을 다중에게 강제하는 인물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저명한 리처드 홉스타터를 비롯하여 또 다른 역사가들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 다, 그들은 루스벨트를 대중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들에 따 르면 "그는 여론을 따르는 데서 만족감을 느꼈다." 또한, "루스벨트 자신이 대중의 의견에 가장 잘 반응하는 공적 도구였기 때문에 유연성은 그의 장점이자 약점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계속 우왕좌왕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즉, "후버에게 행동이 결여되어 이었다면, 루스벨 트에게는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최근의 루스벨트에 대한 연구들은 - 그 중 특히 케네디 데이비스의 두꺼운 전기물이 유 명하다 - 홉스타터보다 더 혹독하게 루스벨트의 대중 영합성을 비판했다. 그리고 사실 루스 벨트시대의 기록을 보면, 뉴스타트가 말한 견고한 통제력이라는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다. 뉴욕의 정치무대에서 루스벨트는 처음에는 태머니 파벌에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협조했다. 그는 앨 스미스를 지지하다가 곧 반대했고, 국제연맹을 지원하다가 방치해버렸다 - "그는 국제연맹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 후보였다." 금주법에 대서는 그는 입장을 이리저리 바꿨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균형예산, 기업합병, 농업보조금, 노동 자보호, 유럽지원 등의 문제에서 입장을 계속 바꿨다. 그의 친구와 적 모두가 1932년의 친 기업적 `제1 뉴딜 정책' 이 1935년의 친노동자거인 `제2 뉴질'과 모순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가, 루스벨트가 당시 좌익 진영에서 인기를 끌던 휴이 롱 이 표를 빼앗아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떤 것일까? 루스벨트는 뉴스타트가 그리는 완벽한 통치자였을까, 아 니면 홉스타터가 말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기회주의자였을까?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이 조화될 수는 없을까? 아마도 우리가 대중을 압도하는 페리클레스적인 인물을 이상형으로 삼 는다면, 위의 두 해석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루스벨트에게 권력이 있었 다면, 그것은 여론에 부응하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39세 때 그의 다리 를 앗아간 치명적인 질병에서 간접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마마보이에서 강인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다 루스벨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921년 그에게 찾아온 척수성 소아마비가 그를 완전히 변 화시켰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는 그런 장애가 없었다 해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마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이 되기 전에 그는 온화하고 사교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안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대단치 않게 평가했다. 당시에 찍은 그의 사진을 보아도 루스 벨트는 겁먹은 듯한 모습이며, 빈정대길 좋아하는 사촌 앨리스 루스벨트 롱워스는 그를 가 리켜 `마마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쌀쌀한 귀족풍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고생이란 걸 모르고 특권 속에서 안락하게 자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병마가 닥친 후, 다시 걷기 위한 투쟁은 그를 단련 시켰다. 그의 다리는 사 라졌지만, 허리 위쪽은 연약한 애송이에서 강인한 남자로 변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가해 진 고난 덕분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신과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곳에 서는 경험하지 못한 동지의식을 느꼈으며,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재활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 다. 하지만 우리는 루스벨트의 소아마비를 둘러싼 감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그의 장애를 고난받은 자가 지진 `대속'의 표식처럼 다룬다. 그들은 낭만주의 학파의 용어로 그가 마치 저주받은 예술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바이런류의 영웅은 육체적 불 구나 약점으로 구분되며, 고독 속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비전을 개발하게 된다. 예술가란 고 통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존재이며, 그로 인해 우매한 대중과 구분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고난은 그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에게 다가가 게 했다. 자신들도 그처럼 소아마비를 겪은 적이 있는 두 사람, 제프리 워드와 휴 그레고리 갤러허는 루스벨트의 소아마비에 대해 가장 예리한 분석을 한 바 있다. 이들은 감상을 완전 히 배제한 채 루스벨트를 연구했다. 그들은 소아마비가 루스벨트에게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장애를 불편하 게 생각했고, 그는 그들의 주위를 자신이 선호하는 주제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가 첨예한 불안 속에서도 끊임없이 평안을 가장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한마디로 완벽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루스벨트는 사람들 앞에서 `걸을 때', 보행 보조기구를 단 다리를 움직이는 척했으나, 실 은 반대편의 팔로 수행원의 팔을 잡고 지팡이를 앞뒤로 움직인 것뿐이었다. 이때 그는 긴장 때문에 땀으로 흠뻑 젖었고, 아들의 팔은 그의 손아귀 힘 때문에 멍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동안 내내 기분좋은 듯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뼈를 깎는 고통의 순 간이 즐거운 산책처럼 비쳤던 것이다.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 강철로 된 보조기구를 단 나무토막 같은 다리는 언제라도 한순간 에 꺾일수 있었다. 그리고 한번 넘어지면 몇몇 힘센 장정들 없이는 다시 일어설 수조차 없 었다. 그가 법무부 건물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운전사는 혼자 힘으로 그를 일으킬 수 없어 서 다른 두 사람을 불러야 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루스벨트는 자신을 구 하러 온 사람들에게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즉 마침내 그들이 그를 일으켜세우자, "놀라울 정도로 균형을 상실한 다리를 하고도 여전히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자, 가자구.' 라 고 말하면서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는 장애가 자신이 가는 길을 막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스벨트가 사람들 앞에서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분적으로 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가 대중 앞에서 `걷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가 넘어질 때면, 그 순간 루스벨트가 얼마나 무력한 상태에 있는지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해지 곤 했다. 1936년 필라델피아에서 그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가 던 도중 쓰러졌다. 시인 에드윈 마컴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아들 제임스의 노력 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비틀어지면서 보조기구의 엉덩이 부분 조인트가 당겨졌고, 그 압력으로 무릎 부분의 연결쇠가 부서지고 말았다." 제임 스가 떨어뜨린 연설문 원고들이 바닥에 흩날렸다. 경호원들은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 지 않기 위해 루스벨트를 둘러쌌고, 그 중 두 명은 다시 그를 일으켜세웠다. 루스벨트는 당 시 자신이 아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빌어먹을 연설 같으니라구, 빨리 이 엉터리 같은 보조기구를 고쳐봐. 만약 이걸 못 고치면 연설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다행히도 기구는 금방 고쳐졌다. 연단에 선 루스벨트는 몸을 추스리고 조용히 원고를 정리하면서 군중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연설 중 하나인 `경제왕족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출마하던 즈음에는 이미 이런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반응을 강철같이 통제하는 능력을 개발한 상태였다. 1933년 그가 마이애미에서 오픈카를 타고 행진을 벌일 때,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암살범이 그에게 다섯 발의 총탄을 쏘았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않은 채 암살범을 쏘아보았다. 그때 차 옆에 서 있던 시키고 시장 앤턴 서먹이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자 비밀경호원들이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지만, 루 스벨트는 차를 세우고 서먹을 시트에 앉혔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루스벨트는 죽어가는 서먹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 했다. 10여 년 동안 루스벨트는 갑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본 사람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언제라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이렇게 상황 을 통제하는 냉철한 능력을 개발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버드대학에 다니면서, 군인으로서 작가로서 항상 사촌 시어도어 루 스벨트를 닮고 싶어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못지않은 침착성을 과시함으로써 그를 따라잡았다. 이날 프랭클린은, 1912년 시어도어가 유세 도중 암살범이 쏜 총탄에 부상당한 몸으로 예정된 연설을 감행했을 때와 비견되는 용기와 침착성을 보여준 것 이다. 이런 사건들보다는 덜 극적이지만, 평소 프랭클린은 수행원들의 도움을 받아 차에 타거나 계단을 올라갈 때 역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잘 통제했다. 그는 그런 순간에 끊임없이 말 을 걸고 농담을 건네며, 소위 `혀로 걷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다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주위에 그를 들고 올라갈 사람이 없을 때면, 그는 먼저 맨 아랫계단에 앉아서 강력한 팔을 사용하여 몸을 끌어 뒤로 올라갔는데, 그동안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 흥겨운 농담을 계속 지껄여댔다. 하지만 보통은 누군가 항상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루스벨트는 위급한 상황에 수행원이 없을까봐 아주 걱정했다. 그는 특히 집이나 배에 불이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 스벨트는 피로하기 짝이 없는 `대중 활동'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는 거의 불편하지 않은 듯 보이려고 애썼다. 이러한 `놀라운 기만'에는 주의 깊은 무대 관리 도 동원되었다. 충분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근처에 어떤 카메라도 오지 못하게 했고, 그가 있는 곳엔 완벽한 조명은 물론 이동을 위한 레일도 있었다. 1944년 선거 운동 기간에는 그 `기간'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병 때문에 쇠약하기 그지없던 그가 뉴욕에서 오픈카를 타고 거리 유세를 하던 중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그러자 경호팀은 거리 중간중간의 주차장을 징발해 그곳에서 대통령을 완전히 벗긴 다음 담요로 닦고 다시 따뜻한 옷을 입혀 거리에 내 보냈던 것이다. 관객의 반응을 민감하게 포착한 뛰어난 배우 루스벨트가 사고나 수치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능한 한 자주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했 다는 사실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는 장에 때문에 유권자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자마자 관례를 무시하고 시카고로 날아가 직접 그 영예를 수락함으로써 이미 대통령이 된 듯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면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일정은 인터 뷰, 여흥, 의원들과 기자들, 저명인사들과의 회의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기자회견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잦은 편이었는데, 매번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세심하게 연출되었다. 그럴 때면 루스벨트는 자신이 움직일 필요가 없도록 기자들을 자기 책상 주변으로 불러모았 다. 루스벨트는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그 들로부터는 많은 것을 알아냈다. 그의 보좌관들은 루스벨트가 얻어내는 정보들에 놀라곤 했 는데, 그는 정보원에 대해 함구하곤 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루스벨트는 다시 쓰러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난롯가 대화'를 개발해 세 계가 자기 책상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TV뉴스에서 정치가들이 큰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 을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바로 당신 앞에서 말하는'타입의 루스벨트를 보고 놀라울 정 도의 친밀가믕ㄹ 느껴다. 이는 대통령과 국민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준 것이다 다름 없었다. 사촌 시어도어는 열변가였고, 우드로윌슨은 유려한 스타일이었으며, 하버트 후버는 심각한 학자풍이었다. 반면 사람들은, 루스벨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신뢰하고 자신들과 직접 상담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몸이 불편한 루스벨트가 모든 이들의 안방까지 찾아간 것이다. 그는 말솜씨도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모든 동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연구했고, 사람 들의 시선이 자신의 상체에 쏠리도록 연극적인 소도구까지 사용했다. 길다란 담배파이프, 해군 망토, 구깃구깃한 모자 등을 착용한 것뿐 아니라, 높은 코가 강조되도록 턱을 내민 자 세로 몸짓을 크게 하는 등 모든 행동이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해군 망토는 몸이 불편 한 루스벨트로서도 입고 벗기가 편안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대통령을 배우라고 부르면 모 욕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로널드 레이건을 '배우'에 지나지 않는 다고 했을 때는 그런 뜻이다. 하지만 사실 정치가들에겐 배우의 자질이 필요하다. 그들은 마 음에 들지 않는 유권자들을 환영하고, 속으로 싫어도 동맹관계에 있는 다른 정당과 협력하 고, 필요하다면 밉지 않은 사람에게도 분노를 표시하는 척해야 한다. 이런 연기력은 저급한 정치인이 아니라 훌륭한 정치인이 지닌 자질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대통 령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도 모두 연기 자질이 뛰어났다. 그 중 루스벨트는 몸이 불편해서 극장에 잘 가지 못했지만, 워싱턴과 링컨은 둘 다 연극광이었다. 워싱턴이 가장 좋아하던 책 은 조지프 애디슨의 희곡<카토>였고, 링컨은 <맥베스>였다. 링컨은 주변 사람들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셰익스피어의 극들에 나오는 대사들을 읊어주곤 했다. 워싱턴은 연극적인 제스처를 쓰는 데 대가였다. 심지어 유명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트렌턴 공격도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조치라기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또한 자주 공 직에서 물러난 것 역시 세심하게 계산된 행동들이었다. 그는 관객들의 반응이 기대되지 않 을 때면 아예 행동하기를 주저했다. 자신의 모습에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던 링컨은 사직 찍기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루스벨트 못지않게 언제라도 흥겨운 농담들을 지어낼 수 있었다. 물론 배우가 다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관객들이 그 배우가 제시하는 목표에 공감해서 배우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팬은 추종자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대중적인 지도자는 배 우들의 재주로부터 배울 게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추종자들의 반응에 민감해 야 하고, '관객의지지' 를 잃는 순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루스벨트를 예로 들자면, 그가 1935년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판사들의 숫자를 늘리려고(그의 반대자들은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한다.'고 말했다) 한 것은 그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것이 추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런 호소 력을 이끌어내려면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루스벨트는 사람들의 반응 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육체적 상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를 항상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감수성은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는 동정과 공감, 묵인과 협조, 단순한 공감과 진정한지지 사이를 가르는 선을 적확히 알아야만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훌륭한 배우란 연기를 하면 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냉철한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연기가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지켜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배우는 관객들이 자신의 연기가 지나치게 '장황하다'고 느낄 때 그 사 실을 즉시 감지하고 적절하게 자신의 연기를 조정할 것이다. 그런 배우는 인식에서도 몇 개 의 단계를 거친다. 즉 철저하게 자신이 맡은 인물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다음 관객 들에게 미칠 효과를 감안하여 냉정하게 그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육체를 조정함으로써 사람들의 반응을 조정했고, 이는 그를 디드로적 인의미의 배우로 만들었다. 그는 동정을 존경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 에 침입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지없이 공격을 가해 스스로 방어하기에 바쁘도록 만들었다. 루 스벨트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줄 수도, 혹은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가 주변 사람들을 별명으로 부른 것도 일종의 통제수단이었다(하지만 그의 별명을 부르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의 아들 제임스에 따르면 그는 사람들의 감정을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완벽 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닥터 루스벨트 루스벨트가 다른 사람의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재능은 그가 설립한 윔 스프링스 병원에서 도 증명되었다. 사실상 병원책임자였던 그는 자신을 '닥터 루스벨트'라고 부르면서 환자들의 건강을 개선시키는 데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루스벨트는 당시 소아마비 환자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겪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아이를 밖에 내보내는 것조차 꺼려했다. 게다가 병원에서 하는 치료라는 것도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그 치료방법이 오히려 회복되려고 노 력하는 환자들의 정신을 망가뜨리기가 일쑤였다. 치료과정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겪었고, 당 시에도 겪는 중이었던 루스벨트 역시, 도움이 되는 만큼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진료를 계속 받으면서 헛된 희망을 좇고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만든 웜 스프링스는 사회가 소아마비 환자들에게 강요한 기준을 완전 히 거부했다는 점에서 다른 곳과 달랐다. "처음부터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환자의 갱생이 의 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문제임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결코 그전까지 미국 의사들이 생각한 것처럼, 사회적 측면을 조금 감안해야 하는 의학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다른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고 노력했던 그가, 웜 스프링 스에서만큼은 약점을 모두 드러냈다. 그는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함께 운동 하고, 함께 장애와 관련된 농담을 나누었다. 또한 그는 소아마비 환자들도 성적인 표현을 하 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때 어떤 방법으로 그런 환자들을 위로해 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웜 스르링스를 제외하고 그가 자신의 장애를 그대로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2차대전 중 병원에 있는 부상병들을 방문했을 때인데, 그는 휠체 어를 타고 병상 사이를 오가며 그들을 위로했다. 루스벨트는 진짜 '의사'자격이 있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선거는 끝났지만, 3월의 취임식이 거행되기 전까지는 오랜 공백 기간이 있었다. 불쌍한 하버트 후버 대통령은 4개월 동안 레임 덕 상태로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그는 은행규제, 농산물가격 조정, 통화관리 등 루스벨트도 고려했고, 실제로 나중에 시 행하게 될 여려 조치들에서 루스벨트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그 조치 들이 적절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 미국이 필요한 것은 과거와 확실히 결별하는 명백한 단절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루스벨트로서는 미국이 더욱 어 려운 질곡으로 나아가고, 이후 자신이 그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 로, r런 결정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을 갖고 절망적인 상황에 임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그는 은행문을 닫고 위헌이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온갖 종류의 규제를 시행했으며, 국민들을 분주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환자는 서서히 회복되었고, 침대에서 내려와 돌아다녔다. 지도력과 통제력이 거친 바다로 하 염없이 흘러가던 국민들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루스벨트는 자신의 부름에 응하는 지지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온갖 나쁜 조치 들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의회가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루스벨트는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인권법안을 폐기하고 민주당 정강에서 반린치 조항을 무효화시켰 다. 우익 진영은 루스벨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지만, 좌익 진영의 실망은 더욱 깊은 것 이었다. 사회보장제도 역시 노동자들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그것은 부자들이 누릴 혜택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프랑코가 우익 쿠데타를 통해 스페인 정부를 전복하자, 루스벨 트는 민주당 진영 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잃을까봐 합법정부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못했 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독재자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자, 루스벨트는 불간섭주의자들에게 선 심정책을 썼다. 이는 그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동안이 나마 그들을 중립 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루스벨트가 생각한 것은 우선순위였다. 그는 수많은 끈을 통해 관 객들을 조종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끈들이 헝클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이나 정책의 일관성을 원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루스벨트에게 분노했 다. 그는 매번 별 실효도 없이 자주 경제정책을 바꾸었다. 초기에 그를 보좌하던 '싱크탱크 ' 고문들 중에는, 그가 여론조사에서 인기를 잃어가면서도 자신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 자 실망하여 떠난 이들이 많았다. 대공황은 뉴딜에 의해 실제로 극복된 것이 아니었다. 부 담이 경감되고, 재건이 조금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뉴딜은 최소한 전쟁으로 세계가 완전히 변하기 전까지 국민들을 이끌고 가는 힘이 되었다. 대통령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고난 자체는 없애지 못했다. 할지라도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 자신이 의지의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2차대전 중 루스벨트가 잔해더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다리를 절단한 한 병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넨 훌륭한 외과 의사야, 그런데 난 정형외과 의사에 가깝지" 다리를 잃은 사람들끼리 하는 농담이었다. 대중 들은 루스벨트의 장애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장애에도 불구하고 유z 쾌하게 어려움을 해쳐간다면, 자신들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자 이제 다시 뉴스타트와 홉스타터로 돌아가자면, 어느 쪽이 옳다고 해야 할까? 루스벨트 는 대중을 압도하는 인물이었나, 아니면 대중을 뒤따라가는 인물이었나? 나는 웜 스프링스 에 있던 환자들에게 이런 질문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분명 루스벨트에게 지배당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루스벨트는 그들을 지배하 면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진 않았던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 요구들은 일관된 것도, 합 당한 것도, 심지어 건설적인 것도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그 요구들에 재빨리 부응했고 어떤 요구이든 자신의 계획에 반대된다고 해서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겸손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루스벨트는 테레사수녀 같은 사람을 본받지는 않았다. 그에겐 자신만의 길이 있었고 그 길은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의 그의 길을 따랐다. 루스벨트는 다른 사람들을 이기게 함으로써 스 스로 이기는 사람이었다. 위대한 리더십이란 결코 제로 섬 게임이 아니며, 지도자가 얻는 것 은 추종자들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니다. 지도자와 추종자는 모두 줌으로써 받는다. 이것이야 말로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중적 지도자들의 미스터리인 것이다. 마지막 미스터리는 이 신체장애자가 고난과 전쟁에 맞서야하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장애를 위안거리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도드라진 이마와 그가 물고 있는 담배파이프, 마치 희망의 신호와도 같은 트레이드마크인 사람 좋은 미소를 보고 힘을 얻었던 것이다. (반대유형) 아들라이 스티븐슨, 유권자보다 숙녀를 사로잡는 데 신경쓴 명문가의 아들 195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선망하며 자라온 자유주의자들은 아들라이 스티븐슨에게서 정당한 휴계자를 발견했다고 행각했다. 그들은 루스벨트가 올버니의 주지사 관저에서 워싱 턴으로 향했듯이, 스틴븐슨 역시 스프링필드의 주지사 관저에서 워싱턴으로 상승하기를 희 망했다. 루스벨트가와 딜라노가가 뉴욕의 저명한 가문이었다면, 스티븐슨가는 일리노이주에 서 이름난 가문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루스벨트는 항상 사촌 시어도어를 본보기로 마음에 도고 자랐다. 마찬가지로 스티븐슨은 클리블랜드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조부 아들라 이 E. 스티븐슨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루스벨트의 상사이기도 했던 해군장 관 조지프스 다니엘스 밑에서 일했다. 루스벨트와 스티븐슨 사이에는 섬뜩할 정도로 유사점이 많았다. 비록 그 유사점들이 스티 븐슨 생시에 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 가는 아들을 따라 거처 를 옮길 정도로 열성적이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라 델러노 루스벨트는 하버드에 있는 프 랭클린이 3학년과 4학년일 때 겨울 동안 보스턴에 머물렀으며, 헬렌 데이비스 스티븐슨은 아예 아들라이가 있는 프린스턴에 집을 얻었다. 하지만 두 학생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은 아 니었다. 루스벨트는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위를 얻지 못했고, 스티븐슨은 성적이 나빠 하버드 법대에서 쫓겨났다. 두 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어울리는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했고, 그들이 전국적인 경력을 쌓을 즈음에는 관계가 소원해졌다. 루스벨트는 루시 머서와의 연애가 탄로난 후 엘리노어와 의 부부관계를 제대로 지속하지 못했고, 스티븐슨은 아내와 사이가 나빠 이혼을 했던 것이 다. 두 사람 모두 헌신적인 여성보좌관을 두고 있었다. 루스벨트에게는 미시 리핸드라는 비 서,간호사,동료 역을 하는 보좌관이 있었고,, 스티븐슨에게는 195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스티 븐슨의 외교정책 자문을 맡았던 국무성의 도로시 포스딕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작가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 사귀기 를 좋아했고, 또 그들이 써준 훌륭한 연설문들을 읽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이데올로그는 아니었지만 좌익자유주의자로 불릴 만큼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주지사로서는 온 건한 개혁주의자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강력한 정치파벌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 루스벨트는 뉴욕의 태머니 홀, 스티븐슨은 일리노이주 제이콥 아비의 시카고 조직의 도움을 받았다(심 지어 아비는 스티븐슨이 상원의원에 입후보할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1952년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거의' 옳았다. 사실 스티븐슨은 루스벨트에 '거의' 가까 웠던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슨에게는 소아마비와 같은 고난이 없었고, 그것이 두 사람간의 차이를 만들었다. 아들라이는 평생 동안 딜레탕트이자 숙녀들이 좋아하는 타입의 인물로 살 았다. 프랭클린은 마마보이였지만 역경을 딛고 큰 사내가 되었다. 젊은 프랭클린이 그랬듯 이 스티븐슨도 고귀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스틴븐슨이 그 이상을 실현하는 방 법은 자신을 사려 깊은 이상주의자로 내세우고 세계가 자기를 따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다가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것은 어리석고 천한 일이라고 생 각했다. 루스벨트는 유권자들을 끌어당겼지만, 스티븐슨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어 떤 이들은 그가 권력을 열망하기에는 지나치게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탐한 것만은 사실이다. 1952년과 1956년 선거에서 그의 연설문을 작성했고 그 밑에 서 일했던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는, 그가 어린 시절 총을 갖고 놀다가 실수로 친구를 죽인 사건을 잊지 못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슨은 이른바 '페리클레스'적인 지도자상을 믿고 있었다. 즉 지도자란 다중의 압력을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 주는 존재란 것이다. 그를 흠모하던 보좌진들은 처음에는 그의 이상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지나치다고 느꼈다. 슐레진저가 말했듯이, "그 이상은 스티븐슨의 성품을 이루는 훌륭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지 나치게 밀고 나가는 건 실책이라 할 수 있다. 스티븐슨은 대중과 거리를 두고 몇몇 인텔리 들만이 알아채는 '심도 있는'코멘트를 하지 좋아했다. 이 또한 측근들을 거슬리게 했다. 스 티븐슨의 최고 참모였던 칼 맥고원은 다음과 같은 씁쓸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의 위트 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 해로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유머 감각이 좀 위태했던 건 사실이다. 어떤 때는 그의 유머가 전혀 웃기지도 않 았으니까 말이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스티븐슨에게 충실했다. 왜냐하 면 그들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반지성적인 면모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은 합리적인 유권자들이 아들라이보다 아이젠하워를 더 선호할 것이라곤 감히 생각지도 못 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얼마나 미국인들의 정서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또 스티븐슨이 루스벨트와 얼마나 다른 인물인지 말해주는 사실이다. 루스벨트를 추앙하던 참모였던 루이 스 하우라면 아이젠하워의 호소력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스티븐슨은 자기가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유권자들이 자기에게로 다가와야 한 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의 권력은 저절로 기능하는 거라고 생각했 다. 그는 그 직위를 가진 사람이 바르게 행동해야 진정한 추종자들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미국의 UN 대표가 되었을 때 자유주의적인 친구들은 쿠바, 라틴아메 리카,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미국이 벌이는 행동을 방어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사임하라고 계속 충고했다. 그러나 그는 매일같이(매일 밤 열리는 파티의 그를 따르는 수많은 숙녀들 앞에서) 특유의 매력을 뽐내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미국의 쿠바 침공(피그만 사건) 이후 자신이 전세계에 거짓정보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 게 된 스티븐슨은 대통령이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분노했다. 그는 뉴욕에 사는 친구인 영국의 저널리스트 앨리스테어 쿠크를 찾아가서 술을 마시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를 달래던 쿠크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임을 하는 것이 역사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조 언했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그가 사임이라는 말을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받았다. "사임 을 하면 난 끝장이야." 그가 말했다. 그때까지도 스티븐슨은 케네디 대통령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케네디는 그를 어수룩한 희생양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이 용했다. 그 후 좌파들이 존슨 대통령의 대외정책에 반대하며 떨어져나갔을 때, 그만은 완강하게 존슨을 옹호했다. 저널리스트인 머레이 캠턴은 예전에 그를 지지하던 사람임을 밝히면서 아 들라이에게 사임을 권하는 사적인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정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이 제 공직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할 때입니다... 제가 피곤하고 어려운 일을 부탁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자리에서 나와 우리를 이끌어주기 간절히 바랍니 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매일같이 대사관 파티에서 즐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주치의는 그에게 그런 방탕한 생활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경고했다. 친구들 역시 그에게 똑같 은 말을 하곤 했다. 그는 런던에서 외교관들과 점심식사를 끝낸 후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루스벨트 역시 63세 나이에 이른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오랫동안 힘든 대통령 직을 수행하고 2차대전이 진행되던 네 번째 임기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 능을 최대한으로 사용했고 그러면서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과 공통된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 다. 그리하여 그는 페리클레스적인 지도자가 아니라(최소한 투키디데스가 말하는 페리클레 스가 아니라), 페리클레스의 옹호자들이 '데마고그'(어원학적으로는 '민중지도자'이며 내용 적으로는 선동가의 뜻)라고 비난한 유형을 따름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02. 급진파 지도자 해리엇 터브먼 VS (반대유형) 스티븐 더글러스 죽음도 불사하고 흑인노예들을 탈출시킨 '신들린 모세' 해리엇 터브먼 선거로 뽑힌 지도 자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이란 연이은 위기를 맞아서, 전 사회를 하나의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지 도자들은 각각 상이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그런 포용성을 배제해야 한다. 즉 제한과 초점 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 경우 추종자의 수는 비록 적을지라도, 열성적인 사람을 얻을 수 있 다. 외골수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에겐 예언자로, 비판자들에겐 광인으로 비친다. 그러한 급진파 들은 당면한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동원하면서, 그 어떤 다른 이슈에 도 힘을 분산하려 하지 않는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활동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노동운 동가 마더 존스는 심지어 개혁법안이나 여성참정권운동 등의 비교적 쉬운 활동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광부들에 대한 착취가 '당장' 중단되기를 원했던 그녀는 파업과 행진, 저항 운동을 조직했다. 그녀는 쉴새없이 감옥을 들락거렸지만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하여 여러 조류의 급진파들에게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선거를 통한 개혁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마더 존스와 같은 확고한 급진파들의 특징이 다. 유권자들은 몇 년에 한 번씩 하루 중 일부를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는 데 쓰고, 그 결과 가 설사 자신의 뜻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그것에 승복한다. 투표 결과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노예제도는 계속될 것이다. 인종분리도 계속될 것이고, 전쟁도 계속될 것이며, 박해도 계속될 것이다. 소로는 이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온정적인 어투로 다음 과 같이 말했다. 모든 투표는 일종의 게임이다. 마치 체스나 서양 주사위놀이와도 같은 것이다. 다만 옳고 그름, 다시 말해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기 때문에 약간의 도덕적인 색채가 들 어 있을 뿐이다... 나는, 아마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투표를 던진다. 하지만 옳 은 쪽이 이기도록 온 힘을 다해 성원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나 아닌 다스에게 결정을 미루 고 싶을 정도이다. 따라서 꼭 투표를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옳은 것을 위해 투표한다 해도 투표 행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있다. 그것은 그저 투표지에 적 힌 생각이 우세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미약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표지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종잇조각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영향력 전체 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영향력이라곤 고작 그 정도인 것이다. 투표에 모든 인생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명분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자신의 돈과 영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 이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은 다른 사람 들이 기껏해야 그저 관심을 조금 두는 일에 정력과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종종 소수의 열성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소극적인 사람들을 이기는 것이 다. 물론 그런 일은 무관심한 사람들이 열성적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투표장에서는 일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위대한 (저항을 통한) 변화들 - 노예제도 폐지, 여성참정권 노동조합 인정, 인종차별 철폐 등 - 앞에는 시위와 시민불복종운동, 투옥, 벌금 형 등이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어제의 '광신자'들은 미래의 선지자와 순교자가 되 었다. 그 중에서 킹 목사는 감방에서 훌륭한 설교를 한 위대한 미국의 급진파들 중 한 사람 에 불과하다. 앨리스 폴과 동료 여성참정권론자들 역시 감옥을 통해 여성해방이라는 목표에 이르렀다. 일찍이 소로는 많은 급진파들에게 감옥이란 곳이 신념을 시험하는 장소라고 설파 했다. 아무나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직한 사람이 있을 곳은 역시 감옥뿐이다. 오늘날 매사추세츠주가 보다 자유롭고 양심적인 영혼들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장소는 감옥뿐이다. 국가가 이미 신념 때문에 따돌림당하는 선인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격리시킨 것이다. 오 늘날 불의를 고쳐달라고 호소한 도망 노예, 보석 중인 멕시코 전쟁포로, 인디언 등이 모두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국가가 감옥에 부여한 이유와는 다른 명예로운 이유로, 감옥은 노예 국가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명예롭게 선택할 유일한 거처가 되었다. 자신의 자유, 그리고 때로는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추종자들은 분명 헌 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위대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해리엇 터브먼(1825-1913년)이야말 로 그런 지도자였다. 그녀는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가야 했던 것이 아니라, 감옥을 탈출해야 했다. 노예제도라는 감옥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지혜와 결단력을 겸비했던 해리엇은 자기 가 태어난 곳 메릴랜드에서 북쪽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다른 노예들을 구출하기 위해 끊임 없이 남쪽으로 되돌아왔다. 처음으로 해리엇을 추종한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북쪽으로 달아 날 용기를 얻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노예를 지키는 주인들의 눈을 피해 신출귀몰하는 그녀 의 위용이 소문으로 퍼져나가자, 그녀는 일종의 신화가 되었다. 그녀를 본 적이 없는 노예들 도 북부로 가서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키워나갔다. 터브먼은 일자무식이었지만, 노예 들은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의 일도 돌볼 줄 모른다고 말하던 노예사냥꾼들의 추적을 매번 따돌렸다. 출애굽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 터브먼이 있다 터브먼의 이름 해리엇은 그녀 자신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직접 지은 것이다. 그녀의 주 인은 아마린사(평소에는 '민티'라고 불렀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당시 남부인들은 노 예들에게 고전시대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노예제에는 깊은 역사가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려 고 했다. 해리엇의 주인은 어린 노예들을 옆집에 임대하곤 했는데, 해리엇은 가사일을 하러 간 집 의 여주인과 사이가 나빴다. 오히려 바깥일을 좋아하게 된 그녀는, 숲에서 나무를 베는 일을 하면서 저 멀리 자유로운 땅을 상상하곤 했다. 그때 벌목을 하며 기른 힘은 나중에 큰 도움 이 되었다. 10대 시절 그녀는 마을의 한 가게에서 다른 노동자가 맞는 것을 말리다가 오히 려 자신이 둔기에 맞는 사고를 당했다. 그 충격으로 두개골이 파손되고 머리에 움푹 파인 흉터가 생겼으며, 그녀는 몇 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야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포괄적인 인터뷰(사라 브래드포드가 진행)에서 해리엇은 이 사건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사고를 겪은 해리엇은 열에 들뜬 채 침대에 누워 주인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오랫동안 무의식 상태의 회복기를 거친 해리엇은 평생을 신경증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이 사고는 그녀를 해방시키 는 결과도 낳았다. 해리엇은 사고를 통해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터브 먼의 두개골을 부슨 둔기는 그녀의 심리적 사슬도 끊어주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은목숨 이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게 없는 몸이었다. 나는 이 경험을 해리엇이 후일 목격했다고 말한 모의장례식과 연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 라고 생각한다. 해리엇은 사라 브래드포드를 위해 그날 밤의 의식을 재연해주었다. 해리엇은 당시 누워 있던 남자 앞에서 설교를 하던 사제의 역할을 맡았다(브래드포드는 해리엇의 사 투리를 그다지 유려하게 옮기지 못했다). 여러분 중 죽음 옆에 나란히 누울 다음 사람은 누구인가? 내 친구와 형제들이여. 여러분 은 달아날 곳이 없다. 어딜 가든 죽음이 찾아낼 테니까. 땅을 깊이 파고 숨어도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신의 눈이 그대를 찾아낼 것이고, 곧 죽음이 그대를 쫓을 것이니라. 저 높은 성에 들어가 숨어도, 세시 버크라가 말하길 악마도 쫓아오지 못한다는 저 성에 숨어도, 죽음 은 그대를 찾아낼 것이니. 친구들은 그대를 잊을 수 있어도, 죽음은 결코 그대를 잊지 않으 리. 이제, 형제들이여, 죽음과 나란히 누울 준비를 하라. 설교에 이어 터브먼은 '영혼의 개조'라고 부른 춤으로 넘어가서, 집회에 참가한 모든 이들 이 서로 손을 잡고 모두의 이름을 차례차례로 언급하는 노래를 불렀다. 메리 자매가 떠나야 하네. 내니 자매가 떠나야 하네. 토니 형제가 떠나야 하네. 줄리 형제가 떠나야 하네. 그들은 이름을 모르는 터브먼의 옆을 지나갈 때는, '모두들 떠나야 하네.'라고 노래했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식이었고, 자신 역시 사고 이후의 무의식 상태에서 비슷한 경 험을 한 적이 있는 터브먼은, 이 의식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해리엇은 사라 브래드포드에 게 자신이 북부로 도망친 것 - 용기가 부족했던 그녀의 형제들은 함께 도망치지 못했다 -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머릿속에 무슨 '계시' 같은 게 떠올랐어요. 내 앞에는 오직 두 가지 선택만이 있었는 데, 그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었어요, 만약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 아 무도 날 산채로 잡을 순 없다는 말이죠. 난 있는 힘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만 하고, 언젠가 때가 오면 주님께서 절 데리고 갈 거란 생각이 떠올랐어요. 위의 글은 터브먼이 어쩌면 그리도 강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해방될 거라는 확신과, 그 해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녀 를 불굴의 투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유의 땅에 도착했을 때, 터브먼은 마치 이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듯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고 말한다. 난 자유로워지고 난 후에도 과연 내가 같은 사람인가 궁금해서 내 손을 들여다봤지요. 눈 앞의 모든 것이 영광으로 넘치는 듯했어요. 태양이 수풀 사이로 마치 황금처럼 빛났고, 난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난 드디어 자유의 경계를 넘은 거예요. 어쩌면 내가 터브먼의 혼수상태와 뒤이어 찾아온 '신들림(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 다)'의 효과를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그 신들림 상 태가 어느 정도 통했다는 증거가 있다. 우선 다른 노예들을 구해내는 힘들고 빈틈없는 작 업에서 그 신들림이 방해가 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꼭 필요할 때 그녀의 신들림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몇 번의 흑인노예 구조활동을 거친 후, 터브먼은 이제 부모들을 구해낼 때라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 서는 20달러의 자금이 필요했다. 터브먼은 한 노예폐지론자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그 돈을 요구했다. 그는 왜 자기를 찾아왔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주께서 나를 인도하셨습니 다.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아마 주께서 이번에는 실수하신 것 같군."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 말로 그녀를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주께서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십 니다. 하여뜬 전 여기 앉아서 돈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터브먼은 또 신들린 상태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며 하 루를 보냈다. 그 동안 그 사무실로 들어온 방문객들은 모두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터브먼이 깨어 났을 때, 그녀 앞에는 자그마치 60달러나 되는 돈이 모여 있었다. 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터브먼은 어떻게 하면 신의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터브먼의 신들림과 꿈. 신성한 영감들. 그녀가 부른 죽음과 자유에 대한 노래들은 모두 그 녀가 회복기 동안 일종의 종교적 체험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로 결합되었다. 역사를 살펴보 면 죽음과 마주치는 경험을 한 후 삶을 완전히 바꾼 사람들의 얘기는 많다. 이를테면, 아시 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성 이그나티우스가 유명한 예들이다. 그런 경험을 한 이는 이후 회복 이 가져온 해방감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친구들이 자꾸 위험한 남쪽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못하도록 말리자. 터브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요한은 성을 보았지?"(요한계시록 21장 12-3절을 인용하고 있다) "맞아. 요한은 성을 보 았지." "음, 그가 무얼 봤지? 그는 열두 개의 성문을 보았지. 그렇지? 그 중 세 개는 동쪽에, 세 개는 서쪽에 있었지. 그리고 문이 세 개 더 있었지. '남쪽'에 말이야. 만약 내가 남쪽에서 죽는다면, 난 그 문들 중 하나에 들어갈 거야. 그렇겠지?" 브래드포드의 설명을 듣자면, 터 브먼은 일종의 '영적인 지리학'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문맹의 터브먼이 설교와 흑인영가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경 속 인물의 삶처럼 꾸려나간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다. 내트 터너가 이미 노예저항운동을 통해 증명했듯이, 그녀의 성경구절 역시 결코 복종의 언어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터브먼이 '모 세'라 불린 이유는 그녀가 흑인노예 구출작업을 하면서 출애굽의 노래들을 비밀신호로 사용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래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고, 그녀는 그 신호체계를 개선하기 위 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남부 시골들에서 새로운 노래와 새로운 창법을 발견할 때 마다 기뻐했다. 그녀는 브래드포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이 그들의 노래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목소리는 정말 달콤하지요. 그들은 우리가 아는 노래들을 다 부를 줄 알고, 또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것도 부를 줄 알 아요. 죽은 검둥이는 말이 없다 터브먼의 불가사의한 측면들이 그녀의 실제적인 임무를 방해하진 않았다. 부지런한 사람 이었던 그녀는 노예구출 활동에서 대부분 직접 벌어들인 돈으로 일을 했고, 돈을 구하면 곧 남부로 돌아가서 조용하지만 효율적으로 작업을 해냈다. '지하철도'(지하철도란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만든 비밀조직이다. 그들은 도망노예를 숨겨주고, 무사히 북부까지 달아 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옮긴이)의 퀘이커교도들은 전적으로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 일 은 모든 관계자들에게 아주 위험했다. 설사 직접 그녀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녀의 활동을 알 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터브먼은 결코 배신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의식 중에라도 그녀를 배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은, 당시 노예들의 연 대감을 잘 말해준다. 터브먼은 결코 잡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가 이끈 도망자 집단에서 누구도 이탈하지 않았다. 터브먼이 자신의 가족을 다룬 방식을 부면, 규율이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처음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남부로 갔을 때(하지만 새장가를 든 남편은 그녀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가 무의식 중에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행동을 할 것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자신 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떠날 때도 모르게 떠났다. 그리고 형제들을 구하러 돌아왔 을 때는, 어머니를 어두운 곳에 있게 했고, 아버지의 눈을 가리기까지 했다. 나중에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철저한 규율은 그녀와 함께 일하는 사 람들까지도 비밀을 준수하게 만들었다. 터브먼은 군인들처럼 치밀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암호를 만들고 도망노예가 우연히 백인 들에게 발견되었을 때를 대비한 변명거리를 고안했으며, 변명이 통하지 않을 때를 위해 비 밀 루트들을 개발했다. 또한 항상 총을 휴대했던 그녀는 자신을 다시 사로잡으려는 백인들 에게 총을 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말을 듣지 않는 동료들에게도 총부리를 겨눌 수 있었 다. 맨 처음 형제들과 함께 북극성만 보고 미지의 땅을 향해 탈출했을 때, 형제들이 갑자기 두려움 때문에 돌아 가버리는 바람에 탈출이 더 위험해졌다. 이런 경험을 한 그녀는 다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후일 함께 도망 중이던 노예하나가 돌아가고 싶다 고 말하자, 그녀는 총을 꺼내 그에게 겨누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죽은 검둥이는 말이 없지. 함께 가든지 죽든지 선택하라구." 터브먼은 결코 자신의 활동을 비폭력적인 시민불복종운동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두개골이 파손되는 사고를 겪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폭력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던 그녀는, 백인 들이 자신의 재산인 노예를 순순히 빼앗기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폭력을 사용해 노예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내트 터너와 존 브라운, 제임스 몽고메리 등을 존경했다. 그녀 의 명성이 커감에 따라 브라운과 몽고메리는 직접 그녀를 만나보려고 했다. 1858년, 남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터브먼을 만난 브라운은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에 탄복하여 그녀를 '장군'이라 불렀다. 그는 말했다. "이 해리엇이란 남자(!)는 내가 만난 '남자'들 중 최고다." 브라운은 터브먼에게서 별 구체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다. 그는 좀더 큰 규모의 노예구출 작업을 기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터브먼은 지도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에게 많 은 정보를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에게 익숙한 시각적 표지들만을 알아볼 수 있 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부에서 그녀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르는 브라운도 도와 줄지는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그녀와 친해졌다는 사실을 최대한으로 이 용했다. 왜냐하면 터브먼의 구출활동은 나중에 좀 과장되긴 했지만 흑인운동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와의 친분은 실제로 그가 노예구출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노 예폐지론자들은 노예해방 이후에 흑인들이 스스로 자치를 행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인간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열성적 인 폐지론자인 시어도어 파커 같은 사람도 흑인들의 자치능력에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런 와중에 터브먼의 용감한 활동들은 흑인들의 지성, 규율, 자치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 가 되었다. 남북전쟁 중 북군들이 그녀에게 일을 맡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터브먼 말년에 남북전쟁 중 세운 공로로 그녀에게 연금을 주기 위해 기록된 증언들을 보 면, 그녀가 북군을 위해 흑인병사 모집과 스파이 활동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터브 먼이 사라 브래드포드에게 밝힌 바로는, 그녀가 전쟁 중에 활동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 힐튼 해드 지역에서는 지방 흑인들의 방언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그녀의 노예 구출 활동은 그녀에게 익숙한 메릴랜드 동쪽 해변에 한정되었다. 하여튼 터브먼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곳에서는 가이드로서 별 쓸모가 없었던 것 같다. 전쟁 전에 터브먼을 본 적이 있는 노예폐지론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다시 그녀와 만난 후, 터브먼이 `그저 보통의 간호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군대에서 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그녀에게 군대에서 일해줄 것을 부탁한 남자, 제임스 몽고메리에게서 찾아야 한다. 사실 몽고메리와 브라운은 1805년대 말 캔자스 지역의 라이벌 `제이호커'들이었다. 그 들은 모두 종교적인 열정으로 노예해방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서로 전술이 달랐다. 몽고메리 역시 브라운처럼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기를 사용하는 문제에서 브라운보다 신 중했다. 그는 전쟁 전에는 신앙부흥회 전도사로 활약했고, 전후에는 안식일재림파 교회의 설 교자가 되었다. 전쟁 중에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흑인부대를 조성했고, 이 때문에 그는 터브먼을 필요로 했다. 이전의 용감한 활동과 헌신적인 태도로 인해 그녀는 백인들의 편견 을 불식시키는 존재이자, 흑인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남부 백인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편이어서 승진에 장애를 겪었지만, 터브먼은 그의 방식을 비판하지 않았다. 터브먼은 흑인들을 해방하는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델라웨어의 비폭력 주의 퀘이커교도인 토머스 개럿이나 뉴욕의 온건한 노예폐지론자 게릿 스미스, 매사추세츠 의 급진파 노예폐지론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 등 누구하고라도 함께 일할 수 있었다. 터 브먼은 동족을 해방하고자 했고, 그 해방에는 아무런 이론도 없었다. 터브먼은 그들의 해방 을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협력하려 했다. 물론 온화한 토머스 개럿이나 불 같은 제임스 몽고메리처럼 종교적인 신념으로 구출활동을 벌이는 사람들과 가 장 잘 통하긴 했지만 말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트로이로 뛰어든 여장군 터브먼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말 대신 즉각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사림이었다. 그녀는 신앙에서 비롯한다고 믿었던 본능적인 감각으로 위험에 대처했다. 비록 남부에서 비 밀활동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에피소드인 1860년 4 월 26일 북부 뉴욕주 트로이에서 발생한 사건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재빨리 위험에 대처했 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하철도' 마을 중 하나인 트로이에서 도망노예 찰스 놀이 체포되자, 4월 26일에 그의 노 예신분을 검증하는 청문회에가 열렸다. 노예폐지론자들은 도망노예법에 따라 정부가 도망노 예를 돌려주기 위해 `납치'한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의견을 모의지 못하고 있었 다. 1854년 보스턴에서 있었던 유명한 구출작전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노예폐지론자들 이 납치당한 노예를 다시 납치하려다가 오히려 자기들끼리 내분만 일으켰고, 도망노예 안토 니 브라운은 남부로 `인도'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도망노예법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기도 했 으나, 1859년 가을 존 브라운이 체포되자 노예폐지론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뉴잉글랜 드 지역에서 브라운을 돕던 `비밀 6인 위원회'는 반역음모죄로 고발되었다. 프레더릭 더글러 스는 캐나다로 달아났고, 시어도어 파커 역시 미국을 떠났다. 게릿 스미스는 정신병에 걸렸 거나, 아니면 정신병을 가장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인 상태였다. 그리고 토머스 웬트워스 히 긴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사냥의 광풍이 밀어닥치던 그 시기에 도망노예를 구하 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터브먼은 달랐다. 마침 청문회가 열리던 때 트로이를 지나가던 그녀는 당시의 `투 쟁단계' 따위에는 아무 관신도 없었다. 그녀가 중요시한 것은 단순히 동료 흑인 한 사람 이 다시 남부로 돌려지기 직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청문회장에서 인도명령을 받은 찰스 놀이 거리로 걸어나오자, 터브먼은 그에게 달려가서 그를 얼싸안고 스스로 인질 역할 을 자처하면서 군중에게 소리쳤다. "우리를 끌고 가요! 강쪽으로 끌고 가줘요! 그를 돌려보 내려면 차라리 강물에 빠뜨려 죽여줘요!" 터브먼을 도망노예로부터 떼어내려다 실패한 경비 원들이 그녀에게 소나기 같은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격분한 군중이 경비원들을 제치고 그 녀를 강 쪽으로 밀어붙였고, 놀은 배를 구해 탈 수 있었다. 터브먼은 또 다른 배를 구해 강 을 건넜다. 하지만 그녀가 건너편에 도착할 무렵, 놀은 다시 체포되어 근처의 건물에 갇혔 다. 그러자 군중이 그 건물을 습격했고, 그 중 일부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터브먼은 쓰러진 사람들을 밟고 계단을 올라가서 반쯤 혼이 나간 놀을 붙잡고 내려왔다. 그녀는 군중이 빼 앗은 마차를 타고 멀리 마을외곽으로 달아났다. 결국 놀은 탈출에 성공했다. 이로서 터브먼 은 노예구출 작업에서 완벽한 기록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구해내기로 마음먹은 노예 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때쯤 정부에서는 그녀를 체포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 미 사라지고 없었다. 놀의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날 터브먼이 어떻게 트로이로 들 어왔는지는 시민들 중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그 구출이 있고 난 후 그녀가 어디에 숨었는 지도 역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부 주들은 터브먼의 목에 높은 현상금을 걸었지만, 터브먼은 자신의 얼굴이 이미 알려 진 곳에서 구출작업을 그만두지 않았다. 변장에 능숙했던 그녀는 초라한 할머니로 꾸미고 백인들의 주위를 피해 구출작업을 계속했다. 수영을 못하는 흑인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겠다 고 할 때면, 키가 152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자신도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앞장서서 헤엄쳤다. 그녀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존 브라운 이 그녀를 `장군'이라 불렀을 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인물이었다. 터브먼은 폭력적인 추적자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라 운이나 몽고메리와는 달리 폭력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적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시시한 언쟁을 일삼는 동지들과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출작업이 없을 때면 요리와 간호, 집안일 등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뉴욕에 집없는 흑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설 립했다. 그녀는 동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타고났고, 어떤 것도 그녀로 하여금 그 사명에서 손 떼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러 중요한 문제들을 제쳐두고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일 로 매진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급진파 지도자가 역설적으로 기능하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은 제한된 좁은 목표에 온 힘을 기울이기 때문에 `보다 균형 잡힌' 지도자들의 비효율성을 보충할 수 있다. 상식이란 `단독이슈정치' 에는 반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균형 잡힌' 지도자들은 때로 중 요한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수의 고통받는 개인들을 생각하는 지도자들은 구체적인 불의에 대해 `비균형적인' 집중을 함으로써 더욱 고귀한 이상을 이룬다. 터브먼의 업적은 자욱한 안개 속에 싸여 있다. 그것은 그녀가 은밀하게 활동했으며 찬양 자들이 과장한 탓도 있고, 그녀가 글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의 소문들이 그 녀가 노예국가에서 벌인 보이지 않는 활동에 뒤따랐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사 그년가 몸소 구해내지 않은 흑인들조차도, 그녀가 주인에게 대항하여 오직 북극성만을 보고 두려운 탈출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는 해방된 것이나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제이콥 로렌스는 터브먼을 기리며 그린 몇 점의 빼어난 템페라 패널화들(1939-1940년), 특히 19번 패널화에서 바로 그 여인의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노예사냥꾼들이 자신들을 혼 란시키기 위해 터브먼이 친구에게 부탁하여 남긴 편지를 보고 머리를 갸우뚱하는 동안, 터 브먼의 영혼은 동료를 데리고 멀리 달아나고 있다. 방금 구해낸 도망노예에게 외투를 씌어 준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뒤따라올 다른 이들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손을 내 밀고 있다. (반대유형) 스티븐 더글러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다 모든 사람의 화를 돋운 타협가 배타적인 집중과 반대되는 말은 폭넓은 수용이다. 배타적인 집중이 그 자체로 좋을 것이 없듯이, 폭넓은 수용 역시 나쁠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의 선악 여부는 개인적인 혹은 역사적 인 맥락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링컨의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는 모 든 것을 끌어안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고 만 잘못된 수용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 다. 특히 미국에서 타협은 정치술의 본질이다. 19세기, 분열 직전에 있던 나라를 뭉치게 하기 위해, 서부 새 영토의 노예제도 도입 여부를 놓고 타협을 계속할 때만큼 이 점이 더욱 절실 했던 적은 없다. 1820년과 1850년 두 번에 걸쳐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는 남부 주들 의 이탈을 막기 위해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더글러스는 자신을 대통령 자리까지 넘보았던 상원의 거물들인 클레이와 웹스터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더글러스는 술을 많이 마 시고, 몸짓이 크며, 끊임없이 연설을 하는 등 여러 모로 보아 당시의 전형적인 정치인이었 다. 그는 키는 작았지만 대신 머리가 커서 보다 정력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인상은 한 마디로 사자형, 즉 수염이 북실북실하고, 머리가 크고, 가슴이 넓고, 다리가 짧은 형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노예제를 둘러싼 미국 내의 깊은 갈등을 타협으로 진정시키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북부와 남부의 통일을 유지한 정치인은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정치인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어떤 위대한 저널리스트는 1856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된 제임 스 뷰캐넌을 가리켜 "얼버무림의 화신, 빠져나가기의 명수"라고 불렀다. 뷰캐넌보다는 뛰어난 정치인이었던 더글러스 역시 모두들 불신하는 타협의 길을 택함으로 써, 1856년 앞서 말한 저널리스트에게서 "백일하에 드러난 정치 돌팔이"라는 심한 말을 들 었다. 더글러스와 링컨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자리를 놓고 벌인 1858년의 논쟁에서 불같은 성 격의 땅딸보 대 비꼬기 잘하는 홀쭉이로 대조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과거 경력은 놀랍도록 유사했다. 두 사람 모두 고학으로 공부했고, 육체노동에서 시작하여 법률업 무를 맡았다. 두 사람 모두 클레이를 연상시켰고, 철도업계와 제휴하여 서부개발을 지원했 다. 더글러스는 링컨보다 네 살 어렸지만, 이 `작은 거인'은 그보다 더 빨리 성장했고 많은 요직을 거쳤다. 그는 민주당 전당대회의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세 번이나(1852년, 1856년, 1860년) 선전했다. 비록 링컨은 반잭슨파 휘그(민주당과 대립하여 1834년 결성된 정당)당원 으로 시작했고, 더글러스는 잭슨파 민주당원으로 시작했지만, 그들은 서로 똑같은 집단의 환 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으며, 신문편집자 호레이스 그릴리같은 후원자들을 끌어들이는 데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1854년 이 모든 것들이 끝나버렸다.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이 의회에 서 통과하도록 민 것이다. 이 법안은 바로 그 지역의 개발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역의 노예제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안(1820년)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 이었다. 더글러스는 인민자치권을 내세워서 어떤 형태의 사회를 만드는가는 정착민들이 결 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다만 인민들의 선택권을 존중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법안이 통과된 지 3년 후, 링컨은 한 연설에 서 더글러스를 무참하게 공격하게 된다. 당시 더글러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캔자스와 네브 라스카의 주법에서) 노예제 구절이 어떻게 되는가는 나의 소관사항이 아니다. 그 문제는 투 표로 결정될 것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당시 더글러스는 이런 입장을 밝힘으로써, 이제까지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데 장애 역할 을 했던 남부가 다소 자기편으로 돌아올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문제 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민주주의적인 제도를 진지하게 믿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어 떤 문제가 투표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 로는 민주주의가 어떤 결과를 내놓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아마 더 글러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들은 주저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청원도 하지만, 아무런 구체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약을 고쳐줄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정의가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들은 기껏해야 싸구려 투표지를 던지거나 얼굴을 내비치곤 행운을 빌어주 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보통 때라면 정치인들은 바로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그 제도자체를 믿고 지지해야 한 다. 크고 다양한 사회인 미국에서는 타협의 필요성 때문에 성격이 흐릿한 두 개의 정당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싸우는 비이데올로기적인 선거틀이 만들어졌다. 하 지만 단순한 실행자에 그치지 않는 정치의 천재들 즉 더글러스가 아니라 링컨 같은 사람들 은 더 이상 타협이 통하지 않는 때를 파악한다. 더글러스는 드레드 스코트 결의안(정착지에 서 노예 소유를 허락한 결의안)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프로포트 독트린'을 역설함으로써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조화시키려 했다. 이리하여 더글러스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왕이 꿈꾼 것보다 더 심한 불가능한 것들을 믿으라고 말한 것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는 타고난 타협가가 꾸는 가장 지독한 악몽은, 어느 날 자신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화를 돋우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후, 더글러스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가 본 것은 바로 이런 광 경이었다. "내 인형을 태우는 장작불빛을 따라 보스턴에서 시카고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오 하이오의 서부 변경을 따라가면서 모든 나무에 나를 저주하기 위해 만든 인형들이 걸려 있 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립된 제도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용적인 결과를 낳지 못하는 실용주의자이다. 오히려 광신자들이 그들보다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 다. 03. 개량주의 지도자 엘리노이 루스벨트 VS (반대유형) 낸시 레이건 보수와 급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감행한 박애주의자 엘리노어 루스벨트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지만, 사실 그녀 는 원칙상으로 전혀 급진적인 구석이 없었다. 시민 불복종을 철저하게 법을 준수하는 사람 이었다. 그녀와 해리엇 터브먼 사이에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두 사람 다 권총 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노어의 경우 남편이 대통령이었을 당시 비밀경호 원들이 우겨서 들고 다녔을 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외출할 때 비밀경호원들이 따라 다니 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대신 권총이라도 가지고 다니라고 그들이 요청했던 것이다. 그녀는 권총을 쏘는 법까지 배웠지만, 사실은 장전하지 않은 상태로 자동차 앞좌석에 넣고 다녔다. 설사 그 총이 장전된 채로 자동차 시트에 놓여 있었다 할지라도, 그녀가 사람에게 총을 쏘지는 않았을 거란 점은 명백하다. 그녀는 해래엇 터브먼과는 다른 종류의 지도자였 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종류의 지도자였을까? 간단히 말해. "과격한 행동이 무슨 소용 있 을까?"라고 말하는 지도자였다. 이런 말을 들은 마더 존스가 경멸적인 미소를 띠는 것이 눈 앞에 떠오르지 않는가. 루스벨트 여사는 바로 그렇게, 마더 존스 같은 급진적인 운동가라면 도저히 참아내지 못할 유연하고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은 흔히 보수와 급진 양쪽에서 비난받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보수주의 작가 톰 울프는 개량에 힘을 쏟는 부자들을 가리켜 "유행을 따라하듯이 급진주의를 추종한다."고 조롱했다. 울프의 반대 편에 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자들이 자선을 가장하여 가난한 이들을 매수한다고 비난했 다. 그들 생각은 가난한 이들 자신들만이 '진정한' 저항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사회를 바 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빈자들은 스스로를 도울 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북부 노예폐지론자에게, 남부 흑인노예문제는 오직 이해 당사자들인 노예들이 해결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키게 놔두라고 말한다면, 그는 꽤나 잔인한 사 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이해 당 사자들만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이론은 인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축소시킨다. 그런 이론은, (엘리노어 루스벨트 같은) 선량한 사람들은 옳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선량하다고 말 한다. 온건 개량주의자 혹은 박애주의자의 편을 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드물게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지식인만이, 자신이 이름붙인 소위 '일하는 부자'가 '게으른 부자'와 오직 돈만을 위 해 일하는 부자에 비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지 말할 뿐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 만 그녀는 크리미아 전쟁에서 간호원 일을 하면서 병상에서 온갖 구역질나는 일들을 도맡아 했고, 군대 의료진의 머리에 생각이라는 것을 불어넣었다. 존 러스킨은 자신이 노동한 내용 과 수입 내역을 기록한 장부를 출판함으로써, 자신이 최소한 정직한 노동자이자 국가 전체 소득 중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충실하게 관리한 사람임을 보여주려 했다. 예술 강사에서 사회비평가로 변신한 러스킨의 이러한 생각은 꽤나 효과적이어서, 그는 19 세기 말경 영국에서 많은 자유주의 정치가들에게 카를 마르크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빅 넬을 나무라는 리틀 넬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나이팅게일이나 러스킨과 같은 반열의 박애주의자였다. 그녀는 소유 나 부유함을 비난하지 않고 그것들을 좋은 목적에 '사용'했다. 그녀는 대통령의 아내라는 신 분 덕분에 더욱 많은 곳에 갈 수 있고 더욱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성이 남편의 지위에 기대는 것을 금기시하던 페미니스트들의 눈에 넬리노어는 '비 정통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내가 앞서 말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회적 강자의 힘을 빌리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엘리노어는 처음에 자신이 얻게 된 사회적 지위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지위를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빅토리아시대의 ' 합당한' 숙녀 교육이 만들어낸 수인과도 같았다. 당연히 이 '수인'에게는 여러 가지 현실 적인 제약이 가해졌다. 어린 시절 그녀는 '숙녀다운' 자세를 만들기 위해 옷 속에 강철로 된 보조기구를 걸쳐야 했고 샤프롱(숙녀가 외출할 때 시중드는 여성 - 옮긴이) 없이는 아무 곳 에도 갈 수 없었다. 한번은 잉글랜드에 있는 학교에 가는데 가족 중 아무도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임시로 샤프롱을 고용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사정이 그러했으니 후일 백악관에서 비밀경호 대의 '샤프롱' 역할을 거절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 오픈카를 몰고 다녔 다. 감독관들이 항상 주변에서 감시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엘리노어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냉담한 성격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상처는 그녀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버지 때문에 생겼다. 아버지 엘리엇 루스벨 트는 생기 발랄한 동생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그늘 밑에서 자랐다. 엘리엇은 명민한 동생과 경쟁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가 열다섯 살 때 부친에게 쓴 편지를 보자. 경애하는 우리 지사님 공개석상에서는 이렇게 부르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부 르고 싶어요, 왜냐하면 아버님한테는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아버님은 열성적으 로 정부를 운영하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형의 남자랍니다. 그러니 전 '지사님'을 애칭삼아 부르겠어요.... 오 아버님, 저도 '귀한 아이'(아버지가 시어도어를 가리켜 부르던 말)라고 불 러주세요. 물론 테디는 실수 없고 똑똑한 아이예요. 하지만 저도 그렇게 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답니다. 만약 아버님이 절 테디와 비교하지 않고 보신다면 제가 완전히 달라졌 다는 걸 아실 거예요. 처음에는 형 엘리엇이 더 건강하고 운동도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약해 보이던 동생 이 어느새 튼튼해져서 같이 하던 운동에서 엘리엇을 꺾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폴로 경기 를 할 때면 거의 목숨을 걸고 경쟁했다. 엘리엇은 점차 시어도어의 그늘에 갇혀 뒤로 물러 나게 되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술과 여자들에 기대기 시작했다. 딸 엘리노어의 헌신적 인 사랑 역시 엘리엇의 기쁨 중 하나였다. 엘리엇은 잠시 동안 안나 홀의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젊은 남편역을 소화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오랜 탈선의 나날을 보내다가, 엘리노어가 일곱 살 먹던 해에 마침내 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와 정신 병원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시어도어는 엘리엇을 계속 통제해야 한다고 가족들을 설득했 다. 그는 엘리엇의 행동이 만들어낸 추문들이 아내(그녀 역시 병약해했다)와 딸 엘리노어(후 일 시어도어는 그녀에게 특히 신경을 썼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했다. 사실 1892년 안나는 사망했고 엘리노어는 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냈다. (할머니는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허 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1894년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엘리노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리틀 넬'이라고 불렀다. 사실 소년 시절 엘리엇도 '넬'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가족들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그를 디킨스의 소설 <골동품 상점>에 나오는, 가족들을 걱정하는 조그만 소녀 넬에 빗대었 다. 엘리노어는 아버지(엘리노어:엘리엇의 여성형)와 어머니(안나)의 이름을 모두 물려받았 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이름만 남기고 어머니의 이름은 버렸다. 엘리엇은 어린 딸에게 디 킨스의 소설을 읽어주면서 자신의 별명까지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동안에는 어린 엘리노어의 시중을 받으려 했다. 엘리노어는 그를 보살피고 타이르는 등 마 치 엄마 같은 역할을 했다. 엘리노어가 가장 좋아했던 어린시절의 사진을 보면, 그녀가 마치 아버지를 '훈계'하듯이 손가락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다(글자 그대로 '리틀 넬'이 ' 빅 넬'을 나무라는 모습이었다). 별거 기간에 엘리엇은 편지나 드문 방문 기회를 통해, 언젠가는 엘리노어가 아빠와 함께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훗날 나는 다시 아빠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아빠와 내가 함께[ 산다는 것 이었다. 남자 형제들도 함께 지낼지 아니면 기숙학교에 보낼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가정을 가지게 될 거라는 약속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별명을 사용하지 않았 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혼자 프랭클린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에서 '리틀 넬'이라고 서명했다. 훗날 엘리노어는 자신의 딸 안나에게 여성에게 섹스란 즐거움이 아니라 의무에 불과하다 고 가르쳤다. 엘리노어가 빅토리아풍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일생 동안 요조숙녀 스타일을 유지했다. 심지어 딸이 아직 아기였을 때 마 스터베이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딸을 쇠창살 안에 가둬두기도 했다. 나중에 안나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일에 대해 묻자, 엘리노어는 여전히 묵시적으로 대답해줄 뿐이었다. 안나의 말 을 빌자면, "그 때 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꼭 고쳐야 할 나쁜 버릇이 있었다." 는 것이다. 엘리노어가 뉴욕의 토드헌터 스쿨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칠 때(당시 그녀의 남편 은 주지사였다), 동료 선생이 그녀에R 앙드레 지드의 <위조범들>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 책이 금서라도 되는 양했다. 그년는 동성에 대해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빅토리아풍 가정환경뿐 아니라 프랭클린의 '리틀 넬'이란 생각이 그녀의 성을 억압 했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오손도손 살아가는 꿈을 꾸었던 그녀는, 무의식중에 라도 프랭클린과 자신과의 관계를 자신이 생각한 부녀간의 이상적인 관계로 치환했는 지 모 른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근친상간을 연상시키는 성관계를 피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남편이 집 밖에서 성욕을 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어린 엘리노어가 아빠에게 연인이 있다는 시살을 알고 그것을 용서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녀는 프랭클린이 루시 머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1928년), 그때만큼 은 결혼을 끝내자고 위협했다. (상대적으로 남편의 육체적 방종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그녀 는 정신적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매우 상처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관계 없는 결혼생활을 하기로 합의한 것은 그녀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주었으며, 그것은 의심할 여 지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돌보듯이 남편을 돌보았다. 이후 남편이 소아마비에 감염되 자(1921년), 그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소아마비를 기화로 프랭클린을 다 시 자신의 '아이'로 다루려는 것을 막는 데 일조했다. 루시 머서 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녀를 해방시켰다. 우선 그녀는 더 이상 임신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베닝턴 스트릿 스쿨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 치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다), 자신이 낳은 다섯 명의 아이들 에게는 잘해주지 못했고, 스스로를 어머니로서는 실격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다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이 엘리노어에게 구애하기 전에 사 귀던 여성 앨리스 소여는 그가 가지고 싶어하던 아이들의 숫자에 놀라 교제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암소가 되고 싶지 않았다."엘리노어와 프랭클린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사 라 델러노 루스벨트가 끼어들어 아이들을 채갔다. 사라는 프랭클린을 그렇게 키웠듯이 엘리 노어의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훈육과 방종을 가르쳤다. 때때로 엘리노어가 항의할 때면, 사라 는 아이들을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엘리노어가 '그 아이들의'즐거움을 빼앗아가려 한다고 비난했다. 아이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엘리노어가 통제할 수 없는 간호사의 손으로 넘어 갔다. 심지어 엘리노어가 보기에 간호사가 아이들을 잘못 다룬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프랭클린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해 못마땅할 때도 엘리노어는 사라의 보복이 두려워 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녀는 소위 '참을성 많은 그리젤다'가 되었다. 나중에서야 깨달 았지만 이런 태도는 그녀 자신에게 건강하지 못한 것이었고, 남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었다. 마침내 한 친구가 그녀에게 "그런 순교자 같은 침묵은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이라고 말해 주었다. 잘못을 참고 있으면 잘못이 당연한 것이 되는 법이다. 그 잘못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극이 필요했다. 프랭클린이 소아마비에 걸리기 전, 루스벨트 부부는 표면상 아 무 노력 없이 성공한 이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엘리노어가 사라의 전횡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소아마비 이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격렬한 투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이 부부는 새로운 조화와 상호 지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프랭클린이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라는 소아마비를 이유로 아 들이 정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랭클린은 다시 걷기 위한 노력과 함께 정 치적 미래에 대한 희망도 품었다. 프랭클린이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그의 자문역 인 루이스 하우가 집안으로 들어와 살게 되자, 사라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녀 는 하우를 너저분하고 줄담배를 피우는 `못생긴 난쟁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우가 손 녀 안나의 방을 차지하자 사라는 아이들을 내세워서 그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프랭클린 은 이제 인생을 걸고 사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번도 엘리노어를 위해 싸우지 않았던 그가 이제 하우를 지키기 위해 사라에게 맞섰던 것이다. 맨 처음에는 엘리노어도 사라처럼 `난쟁이' 하우를 싫어했지만, 이번에는 프랭클린을 구하 고 사라를 물리치기 위해 구와 밀접한 동맹을 이루었다. 이제 처음으로 엘리노어는, 이전가 지 집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이용하던 사라에 맞서서, 집안에 자신의 사람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집안에 긴장이 고조되자 프랭클린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을 나가기로 했다. 결국 그는 웜 스프링스에 좋은 곳을 발견했다. 사라는 그곳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프랭클린은 다른 사람들도 올 수 잇는 치료센터를 만들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 접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되었고, 엘리노어가 항상 경험하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엘리노어가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후에, 그 부부가 나머지 인생 동안 그렇게 서로 잘 협조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부부는 그때까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닮았었나를 깨달으면서 더욱 서로를 존중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까다로운 부모를 만나 정석 불구 상태를 겪었다. 두 사람 모두 운명을 떨쳐내고 가문의 간섭과 제한에서 자유로워졌으며, 새로운 인생을 전개해나갔다. 엘리노어는 토드헌터 스쿨을 매입하여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가르쳤다. 프랭클린은 웜 스프링스에 치료 센터를 세웠다. 엘리노어는 루스벨트가의 고향인 하이드 파크에 외딴 통나무집을 세운 후 자신만의 공간에서 안주인 노릇을 했고, 프랭클린은 이와 비슷한 `탈출구'를 언덕 위에 장만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정치에 투신했다. 엘리노어는 대중연설가가 되었고, 프랭클린은 짐짝처럼 운반되고 부축되면서도 대중 앞에 나서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강인함과 헌신의 모델이 되었다. 이 결혼은 모든 것이 잘못된 다음에서야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똑똑한 루스벨트 여사는 시몬스 침대를 광고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지성과 에너지, 동정심이 본격적으로 발휘되 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하던 것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 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엘리노어는 하우의 도움을 받아 민주당 내에서 활발한 정치활동 을 펼쳤다. 또한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0대 시절 영국의 여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잠 깐 동안 자유를 경험한 그녀는, 여성들의 동지의식을 고양하는 여러 동아리를 결성했다. 그 녀는 낸시 쿡과 함께 하이드 파크의 통나무집과 연결된 가구 공장을 만들었고, 매리언 디커 먼과 함께 여학생을 위한 토드헌터 스쿨을 매입하고 그곳에서 강의했다. 에스더 레이프와 엘리자베스 리드와 함께 페미니즘의 깃발을 들었고, 캐롤라인 오데이와 함께 세계평화를 주 창했다. 대통령의 아내가 되자 그녀는 정기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오직 여성 저널리스트 만 참석할 수 있게 했다. 그 중 몇몇 기자들은 특히 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의 로레나 히콕 은 그녀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엘리노어의 일거리가 갑자기 많아졌다. 첫째, 프랭클린이 그녀를 필 요로 했다. 단지 소아마비에 걸린 그를 지원하는 일뿐 아니라 업무상 전화와 그가 가기 어 려운 지방 출장까지 그녀가 맡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전국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면 서 그를 도와줄 남성 자문팀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엘리노어의 도움은 점점 덜 중요하게 되 었다. 1928년이 되자 프랭클린은 올버니에 있는 뉴욕 지사 관저로 이사갔고, 다시 한번 자신 만의 정치 네트워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노어는 몇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지워진 부담은 꽤 큰 편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올버니시 리핸드에게 집안을 모두 맡기고 싶지 않았지 만, 자신에게 큰 기쁨을 주는 학교 강의를 그만둘 수 없었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여 러 포럼에서 글을 쓰고 연설을 했고, 심지어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하나 맡았다. 그리고 버나 맥패든의 잡지들 중 하나인 <베이비즈, 저스트 베이비즈>를 편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눈부신 활동들은 모두 끝나버릴 듯이 보였다. 그녀는 일단 학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엘리노어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잡지 일은 계속하 고 싶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재개했고, 강의를 나가는 대신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백안관의 감옥 같은 벽들이 그녀를 둘러쌀 때만 해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엘리노어가 워싱턴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여자들의 기분에 민감한 로레나 히 콕이 그녀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챈 것은 당연했다. 그 당시 대통령들은 선거 후 넉 달 이상 지나서야 정신적으로 백안관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뉴욕 생활에서 얻은 여성 친구들과 관계가 모두 끊어진 엘리노어는, 새 친구 히콕에게 기대어 워싱턴 생활 의 부담감을 털어놓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백안관 기자회견을 비롯해서 엘리노어의 새 일거 리를 찾아준 것도 바로 히콕이었다. 히콕은 나중에 신문 칼럼도 제안했다. 엘리노어는 그런 일들을 통해 자신의 저널리스트적 자질을 발견하고 힘을 얻었다. 프랭클린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날, 소란스런 와중에 홀로 불란해하던 엘리노어는 히콕 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록 크릭 파크 묘지에 있는 헨리 아담 스의 아내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곳은 오거스투스 세인트 고든이 조각한 슬픔에 찬 거대한 두건상이 있는 곳이자, 엘리노어가 해군장관의 아내였을 때 프랭클린과 루시 머서와의 관계 를 알고 찾아가서 스스로 영혼을 위로했던 곳이다. 백악관에서 보낸 첫 며칠 동안 엘리노어는 마치 아이가 담요에 매달리듯이 힉에게 의지했 다. 하지만 히콕은 엘리노어의 그런 태도가 자신의 기자윤리에 흠집을 남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노어를 떠나 뉴욕으로 가서 책을 한권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필 작업이 한계에 부딪치자, 뉴딜 정책이 어떻게 현장에서 적용되는지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전미구 제기구의 해리 홉킨스를 만났다. 그동안 엘리노어는 절망적으로 외로웠다. 당시 그녀가 쓴 편지들에는 예전에 멀리 떨어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만큼 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펜을 들기 전 힉의 사진에 키스하곤 했다고 한다. 백악관에 홀로 남겨 진 그녀는 이렇게 썼다. "오늘밤 당신을 품에 안고 눕고 싶답니다." 그리고 당시 황량한 미 네소타를 여행하던 히콕은 이렇게 답장했다.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군요. 저는 당신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분명히 기억한답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닿을 때면 부드럽게 느껴지던 당신의 입술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힉에 대한 엘리노어의 간절한 희구는 백악관 생활이 1년이 되어가면서 서서히 약해졌다. 1933년 크리스마스 때 힉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들의 우정이 중년 여인들의 안정 된 우정이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썼다. 이제 엘리노어는 백악관에서 예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 활력에 넘쳤을 뿐 아니라, 스스로 돈 을 버는 기쁨을 느꼈다. 비록 그 돈을 대부분 자선에 쓰였지만 말이다. 또한 광고주가 후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오늘날 `리버럴한' 힐러리 클린턴도 감히 그런 일 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34년 콜 포터의 히트쇼에서는, 그녀의 방송을 후원하는 매트리 스 회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똑똑한 루스벨트 여사는 시몬스 침대을 공하지. 왜냐하면 프랭클린은 `워든지 된다.'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그녀가 새로 벌인 활동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민권운동과 가난한이들을 위한 운동 이었다. 엘리노어는, 예전에 조그만 가구공장을 열어서 하이드 파크 주변 노동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뉴딜정책 기구를 통해 웨스트버지니아주 아서데일정착 프로젝 트의 핵심 인물이 되어, 실업자들이 새 직장과 새 토지를 얻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게다가 그녀는 뉴딜정책의 커다란 구멍 하나를 메웠다. 즉 흑인 민권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민주당 남부 출신 의원들과 함께 일해야만 했던 프랭클린은 연방에서 마련 한 직장에서 일하거나 구제 프로그램에 참여한 흑인들에게 백인들과 똑같은 급료를 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외 흑인에 대한 많은 불의들 즉 린치, 인종분리, 투표권 제한 등은 여 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백악관 내부의 많은 반대에도 불 구하고 이러한 불의들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프랭클린을 졸라서 전미유색인종발전 협회 대표들을 백악관에 초청하도록 했다. 미국혁명의 딸들이 흑인 성악가 매리언 앤더슨의 DAR 강당 공연을 거부하자, 엘리노어는 DAR 회원증을 반납했다. 한번은 그녀가 앨라배마 주의 한 극장에서 흑인석에 앉아 있는데, 경찰이 주법 때문에 백인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 다. 그러나 엘리노어는 의자를 가져와서 복도에 낮아서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남부에서 발생하고 있던 자인한 린치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1945년 남편 프랭클린이 사망하자, 엘리노어는 자신이 몸바쳐온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대통령의 아내라는 지위를 잃었고, 다시 한번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는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두어온 세계평화라는 대의에 봉 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부통령 선거를 의식해서 국제연맹을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 해 유감을 지니고 있었다. 엘리노어는 이제 국제연합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트루먼 대 통령의 임명을 받아 미국 대표로 파견되었다. 거기서 엘리노어는 소비에트 블록의 망명자 재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안드레이 비신스키와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이 문제를 두고 한 투 표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자,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그녀가 충분히 강경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켰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지프 래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하여, 난관을 헤치고 일이 조금씩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싸움을 하기에는 조금늙었다고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그녀는 1948년에 통과된 세계인권선언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트루먼 대통 령을 제치고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혔다. 한편 엘리노어는 스스로 인기를 포기하고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과 싸우려 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정치인들이 이 빨갱이 사냥꾼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그를 비판하지 못할 때였 다. 또한 그녀는 뉴욕이 강력한 가톨릭 추기경 프랜시스 스펠먼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정치 공식을 깨뜨리기도 했다. 추기경은 <네이션> 지가 폴 블랜셔드가 쓴 교회 비판을 게 재했다는 이유로, 그 잡지를 시내 학교 도서관에서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루스벨트 여 사는 추기경에게 미국 헌법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러자 추기경은 다시는 그녀와 어떤 이야기 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공개서한을 보냈다. "당신의 기록을 보면 당신이 반가톨릭 적인 인물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당신은 당신 손으로 직접 그 기록을 역사의 페이지마 다 써넣었고 이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기록들은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무가치한 차별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결국 뒤로 물러서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키자고 한 사람은 추기경이 었다. 그리고 19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엘리노어가 케네디 대신 아들라이 스티븐슨을 밀 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그녀에게 대통령 직속 여성지위향상위원회 의장직을 맡겼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한 줄타기의 명수 엘리노어는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이나 남편의 연줄을 이용하는데 대해 한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연줄이 자신의 고등교육 결핍이나 선천적인 수줍음 등의 결점들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 이지만 그녀가 도와준 사람들이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엘리노어가 자신을 한 사람의 직업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점이었다. 그녀는 어떤 생산직인 작가라도 자랑스러워할 만한 스케줄을 짜놓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고 연설 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녀는 이 활동들에 대해 보수를 확실하게 받으려고 했다. 이는 의존적으로 살아온 젊은 시절과 결혼 초기 생활을 뒤집으려는 노력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그녀와 프랭클린은 모두 돈을 벌었지만, 프랭클린이 고집한 방식의 부유 한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모자랐기 때문에 늘 사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라 는 그들의 의존을 가능한 최대로 이용하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정치가들은 대필 작가들을 고용했고, 정치가의 아내들은 남편의 참모가 써준 대로 성명을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자기 책과 칼럼을 직접 썼고, 자기 생 각을 담은 연설을 했다. 그녀는 절대로 마감 기한을 어기지 않았다. 한번은 그녀의 몸이 좋 지 않을 때 대통령이 직접 그녀 대신 칼럼을 써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하고 자신이 썼 다. 2차대전 중 비서 없이 여행할 때 그녀는 직접 타이핑하는 법을 배웠다. 일하는 여성에게 많은 임금을 주자는 것은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지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직장여성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저 `그들 중 하나'인 척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박혀 잇는 상류계급의 표식은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신 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사실 자체가 그녀의 지위가 지닌 권력을 말해 주었 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노력했다. 그랬다가는 남편을 다 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힘도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엘리노어가 항상 온건한 개량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녀는 급진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섞여 그들의 견해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코 스 스로 급진주의자가된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많은 `체제 비판자'들이 화를 내기도 했다. 마 더 존스라면 인종분리 공연장에서 흑인석에 앉을 수 없다는 법률 같은 것은 숩게 무시해버 렸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법률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법률을 효과적으 로 조롱했다. 엘리노어는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지만, 남편의 입법활동과 관련 해서는 중요한 순간에 그 문제에 관해 침묵했다. 심지어 1940년대 전쟁 기간에 흑인 지도자 들에게 전쟁 승리를 위해 운동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 소비에트 지지자 폴 로 버슨이 자신의 TV토크쇼에 출연하는 것이 냉전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말을 듣자, 프로듀서를 시켜 폴의 출연을 취소하도록 했다, 또한 그녀가 가난한 이들의 관심가를 대통령에게 전달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케인스 경이 루스벨트에 게 지나치게 대기업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도록 조언할 수 있도록 메신저 역할을 했 다. 그녀는 기존 경제구조를 무너뜨리기보다는 그것이 인간의 필요에 보다 잘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온건한 지도자는 양쪽 진영 모두를 의식하면서 가는 줄을 타야만 한다. 만약 엘리노어가 기존 정치체제의 적으로 간주되었다면, 그녀는 약자들을 돕기 위해 그 체제를 이용할 수 없 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사람들이 그녀를 그저 남편의 행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마 하기 위한 바람막이 정도로 생각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일에 필요한 사람들의 신뢰와 협조 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그리고 1950년대를 통해 그 누구도 엘리노어만큼 날렵하게 줄타기를 해낸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조지프 래시가 청년 시절에 그녀가 일하는 방식을 눈여겨 보고 그것을 책으로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줄타기 감각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다. 엘리노어는 1935년 전미청년기구의 창설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NTA가 제 공하던 직업훈련과 교육 보조금에 대해 전미청년회의 측에서 그것이 형편없이 부족한 사탕 발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대신 더욱 포괄적이고 전국청년법안을 제안했다. 엘리노어는 원칙적으로 그 법안을 지지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경제적 요구가 비현실 적이라고 보았다. 1933년에서 1939년 사이 그녀는 다양한 청년모임에서 연설했다. 그 시기는 아마도 당시의 인민전선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의 뉴딜 분위기가 많이 수그러든 때였다. 하 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청년 운동의 수호천사"로 간주되었다. 소비에트연합이 히틀러와 동맹을 맺자 청년회의는 위기에 봉착했다. 하원의원 마틴 디스 는 청년회의의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의회의 빨갱이 사냥 기구인 비미활동위원회에서 증언 하도록 했다. 일부는 청문회에 출석하지 말자고 주장했지만, 엘리노어는 그들에게 출석해서 상대편의 무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좋은 작전이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청년 지도자들과 함께 청문회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널리 알렸다. 질문이 점점 날카로워지자 그녀는 기자석으로 옮겨가서 노트를 꺼내들고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는 양쪽 모두가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온건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온건하 게 만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점심 휴식시간이 되자 그녀는 래시를 포함한 여섯 명의 청년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데리 고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오후 청문회가 끝나자 이번에는 그들을 대통령에게 데려가서 식 사를 함께 하게 했다. 다음날 조지프 래시가 증언했다. 그는 인민전선의 노선을 따르는 청년 회의 지부 비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 때문에 청년회의를 떠나려는 참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디스의 위원회에서 고자질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을 피하거나, 혼란스럽고 때로는 뻔뻔스러운 증언을 했다." 그의 고민을 알고 있 던 엘리노어는, 그에게 샹그릴라 호텔에 있는 대통령 숙소를 제공하여 그가 생각하면서 쉴 수 잇도록 했다. 후일 그녀는 래시와 그의 애인 트루드 프랫을 위해 하이드 파크에 있는 오 두막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녀는 열두 살이나 어린 그를 마치 어머니처럼 보살폈다. 그래서 에드거 후버는 래시를 남성, 여성, 백인, 흑인의 이름이 무수히 적혀 있는 엘리노어의 애인 명단에 올려놓았다. 심지어 프랭클린인 엘리노어의 초대를 받고 백악관에 온 4,000명의 청년 대표들에게 공개 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노출한 후에도, 엘리노어는 대통령과 면담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계 속 불러들였다. 그녀는 그 당시 청년운동에 참가한 과격한 공산주의자들과도 상대하면서 더 욱 강해졌고, 나중에 UN에서 지신스키와 맞설 때고 꿋꿋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는 심지 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은 학 생들의 문제가 실재하며,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그 문제를 보고 그들에게 접근한다면, 그녀도 그 문제를 들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접근이 급진주의자들을 `매 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노어는 `그들'이 아니라 래시 같은 `개인'들을 상대했다. 만약 뉴딜정책이 여러 가지 부적절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면, 그것은 부분 적으로는 엘리노어와 연방정부에 있던 다른 여러 헌신적인 사람들 덕분이었다. 정부 안팎 에서 그녀와 같은 사회적 위치뿐 아나라 여러 다른 계급 출신 사람들이 그녀를 따랐다. 많 은 사람이 그녀의 성실성에 홀려, 항상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의 일을 도왔다. 급진적 저항만이 `진정한 것'이라는 이류로 온건한 지도자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보통사람 들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문제를 해결해줄 필요를 결코 이해랄 수 없을 것이다. 또 그들은 온건주의자들이 권력의 독재를 막고 그것을 보다 책임감 있게 바꿔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할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그들의 눈에는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지나치게 `나이브' 하여 별 영향을 기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대분분의 미국인들은 로버트 데이 가 <뉴요커>지에 그린 유명한 만화에 나오는 광부들처럼,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엘리노어 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유형) 낸시 레이건, 대책 없는 캠페인만을 벌인 `인심 좋은' 여사 플로렌스 나이 팅게일이나 엘리노어 루스벨트처럼 강인하고 효과적인 리더십을 지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심 좋은' 여사들처럼 동기와 효과가 의심스러운 자선활동을 벌이는 사람도 있다. 경제학 자 토스타인 베블런은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그런 일을 과시적 소비의 한 측면인 과시적 유한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그런 일은 여사께서 `손보면 좋아질 멋진 일'에 슬 자유로운 오후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적은 진정한 사회 변화를 위 한 것이라기보다는 여사의 개인적 성취를 시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술관에서 열리는 자 선바자는, 그 자체로 전시해도 될 만큼 잘 다듬어진 볼거리인 후원자들의 마음을 끈다. 대통령의 아내들이 벌이는 `프로젝트'들은 대체로 이런 종류의 박애주의의 완벽한 표본들 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백악관 미화사업으로 이런 일을 처음 시작했고, 버드 존슨여사가 고 속도로 미화사업으로 그 뒤를 따랐다. 패트 닉슨은 일종의 비밀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했는 데, `자발주의'라고 알려진 그 프로젝트는 어찌된 일인지 지금 와서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 다. 베티 포드는 장애 아동을 돌보았고, 바버러 부시는 문맹 아동에 집중했다. 로절린 카터 는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조력자 피터 번이 남편에게 정치적 장애가 된 후부터 그 일은 유야무야되어버렸다. 이제 그런 종류의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는 것은 정치가의 아내들에게 너무 중요해졌기 때문에, 심지어 부통령의 아내들도 팔을 걷고 나서기 시작했다. 조안 먼데일은 공식적으로 예술진흥에 관심을 보였고, 마릴린 퀘일은 재난 구조에, 티퍼 고어는 정신 건강에 집중했다. 바버러 부시는 부통령의 아내일 때 문병퇴치운동을 주창하여 그것을 백악관까지 들고 갔다. 이런 대부분의 활동들은 전혀 무해한 것이다. 아내들은 이런 일들을 기화로 거리로 나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딘가 갈 곳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 속에는 일종의 `뭐하는 척해볼까' 하는 즐거운 분위기도 있다. 마릴린 퀘일은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작업복을 입 고 재난 지역을 돌아다녔다. 바버러 부시는 자신의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낸시 레이건의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무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비교적 늦게 프 로젝트에 착수했다. 맨 처음 그녀는 백악관 만찬에 사용되는 도자기들을 교체하는 데만 관 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대통령 보좌관 마이클 디버가 개입하여 그녀를 위한 `프 로젝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마약 사용을 거 부하도록 하는 캠페인이었고, 그 이름은 "저스트 세이 노"였다. 낸시는 20대에도 어머니 역 할을 주로 맡았던 배우로 이 프로젝트를 위한 언론 홍보용으로 딱 어울렸다. 그래서 돈이 모아졌고 또 어딘가 쓰여졌다. 아마 대부분 홍보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는 좋은 영향보다는 오히려 간접적인 해약을 끼쳤다. 그 해약은 바로 슬로건인 "무조건 `노'라고 말하라."에 함축된 가정으로부터 발생했다. 이 슬로건은 문제를 오직 개인의 선택으로 치환시켰다. 다시 말해 이 슬로건은 은연중에 마약 문제가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젊은 여성들에게 섹스를 거부하라고 말하면서 사생아을 줄이려고 했던 운동 과 비슷하다. 또한 에이즈를 방지하기 위해 동성애를 거부하라고 했던 운동과도 닮았다. 그것은 완벽한 우익 캠페인이었다. 악을 정의하고 난 다음, 슬럼가의 젊은이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완벽한 합리성이 있다고 가정한 후, 희생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라 가자면, 만약 어떤 젊은이가 마약 앞에서 `예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의지가 약한 개인 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는 마약중독자들을 돌볼 의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판매상'은 어떻게 하냐고? 그건 또 다른 문제이다. 에드미스의 법무부가 그들을 감옥에 가두면 된다. 하지만 마약 사용자들은 레이건 여사의 정신개조원에 들어가 `노'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아야 한다. 이 슬로건은 은연중에 `아이들아, 까불리 마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낸시 레이건의 프로그램은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가 만들어내기 쉬운 위험을 단적으로 보 여준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여성들의 남편이 맡고 있는 정부의 심각한 문제들과는 동떨어진 일로 바친다. 다시 말해 어떤 귀부인이 남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로 보이는 것이다. 그 리고 그것은 공동체의 다양한 요구들을 반영하는 사회세력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 인다. 사실 케네디 여사가 백악관의 가구들을 교체했을 때나, 멘데일 여사가 부통령 관저의 만찬에 일부 예술가들을 초청했을 때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 건강이나 마약 중독 같은 문제들은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입법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성깔 있는 칼럼니스트 웨스트브룩 펠저가 루스벨트 여사를 일러 `세계를 상대로 사 회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빈정거리긴 했지만, 영부인들의 `프로젝트'라는 것들은 그녀가 한 일의 반만큼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가난과 인종차별이 구조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사회 내에 깊이 뿌리 박힌 잘못들은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위 에서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로 토드헌터 스 쿨에서 강의를 했고, 발-킬에서 가구점을 경영했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보조하기 위 해 전문적으로 글을 쓰던 직업인이었다. 그녀는 월급쟁이 홍보요원도 없이 가장 도움이 필 요한 곳을 찾아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엘리노어에게 악담을 하던 공화당원들이 낸시 레이건의 프로젝트에 반한 것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박애주의적이었 다. 하지만 레이건 여사가 생각한 `개량'은 좀 부드러운 방식의 훈계였다. 두 사람 모두 추 종자들이 따랐고, 그 점데서는 둘 모두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효과성, 포괄성, 영 향력의 지속성 측면에서 보자면,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진정한 개량주의자를 표상하는 반면, 낸시 레이건은 마치 반대로 그린 만화처럼 반대 유형을 대표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민 권운동, 여성운동, 복지제도 등에서 루스벨트 여사가 선도한 길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오 늘날 레이건 여사의 슬로건에 따라 행진하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