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맥아더 저자:시드니 매이어 역자:이창록 박대련 출판사:이상사 차례 머릿말, 소박하고 순수한 무장 -시드니 매이어 1.무훈의 가문에 부끄럽지 않게 2.제1차대전서 훈장 산더미 같이 3.미군사상 최연소의 참모총장 4.건곤일척 결한 필립핀군 창설 5.일본을 과소 평가한 방위체제 6.시금석이 된 마닐라 함락 7.권토중래 위해 코데히돌 탈출 8.자기본위의 남서태평양 작전 9.일편단심으로 필립핀 탈환에 10.맥아더적 명언"나는 돌아왔다." 11.길고 먼 여로의 종착역 머릿말 소박하고 순수한 무장-시드니 매이어 내가 맥아더 장군(미육군원사)을 보기는 단 한번이었다.그것은 1951년의 일이다.마침 맥아더는 한국동란때 임명받았던 유엔군 총사령관과 극동 미군 총사령관 및 연합군 최고사령관(일본점령의 임무)직에서 해임되어 귀국,미국 전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있었다. 내가 맥아더 원수를 보기 전날 그는 시카고의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개선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자그마치 백만을 헤아리는 시카고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그리고 밤에는 미시간호와 마주 보는 옛 그리스 풍의 풋볼 스타디움인 '솔져스.필드' (병사의 황장)에서 10만 이상의 열광적인 시민들을 앞에 두고 감격에 넘치는 연설을 한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 살고 있었다. 에반스톤은 시카고의 바로 북쪽에 있는 교외도시이며 그당시 상업활동이 차츰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에반스톤의 중심부에 있는 분수 광장에서 맥아더 장군은 짤막한 연설을 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맥카시선풍의 연고지 에반스톤시민의 열광 우리들은 그를 크게 환영코자 손꼽아 고대하고 있었다. 에반스톤의 시민들도 나의 아버지도 열렬한 공화당 편이며 특히 이곳은 이른바 '적색 사냥'이란 구실아래 미국민의 여론을 들끓게한 '맥카시 선풍' (미국 정부내 공산주의자 및 그 동조자를 색출해 추방하는 정치운동)의 주인공인 죠셉.맥카시 상원 의원 '주참조'의 선거구로 이름나있었다. '주.맥카시 의원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당시 상원내 비미활동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이 (적색 사냥)을 전개했는데 그 활동이 너무 지나쳐 54년 상원의 문책결의로 실각당했다. 57년 사망으로 그의 선풍도 퇴색했다.' 이 때문에 맥아더장군이 에반스톤에서 대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며 시민 모두가 길가에 늘어서서 '승리의가도'를 지나가는 그를 마중해줄 것으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장군이 에반스톤에 도착하기 스케쥴을 짜 보았다. 나는 당시 13세의 어린이였으므로 계획을 세운 것은 거의 아버지였다. 분수 광장에는 수 많은 군중이 운집할 것이므로 그곳에 가보았자 헛 수고다. 맥아더 장군을 둘러싼 행렬이 시카고에서 미시간 호에 가까운 셰리단 가도를 거쳐 에반스톤으로 들어 올 것으로 예정할 때 그가 에반스톤에 들어오는 지점에서 얼마간 떨어진 길목에 서 있는다면 그 위대한 영웅의 옆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끝에 나는 그날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국기를 들고 셰리단 가도로 달려 갔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좀처럼 장군의 모습이 나타나질 않는다. 지루한 몇 시간이 지났을까.그때 "장군이 왔다!" "아니 아직도 멀었다!" "저기 온다!"하는 함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다. 드디어 그 위대한 장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이카와 경호차 몇대의 선도를 받는 장군의 차가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일제히 환성을 터뜨리며 장군이 탄 무개차를 향해 성조기를 힘껏 흔들었다. 제1번차의 좌석에 등을 대고 근엄한 표정이던 장군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지나갈 때 리무진(세단의 대형고급차)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중쪽으로 돌아선 그는 꼭 우리 쪽을 보는듯했으나 흥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성에 답례했다. 아버지도 나도 감격에 북받쳐 울었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트루만대통령은 어떻게 이 대인물을 해임할 수 있었을까? 그 작은 쓸개빠진 작자! 어디 두고 봐라 이번에는 우리가 트루만을 해임시키고 말테니!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면 왜 나쁘단 말인가. 맥아더 장군 같으면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맥아더 최후의 명언 "노병은 사라져갈 뿐" 맥아도 원수가 대통령이 되고자 꿈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일이었다. 그리고 트루만이 그다지 나쁜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맥아더 장군이 사회보장을 희생해서까지 (한국동란 중에) 북한과 중공의 국경선인 압록강 북쪽의 전략목표에 대한 전면적 폭격을 주장해 쏘련과의 전쟁도발을 빚을 위험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엇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기야 결국에 우리는 어느 한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니 맥아더 원수에 필적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훌륭한 아이젠하워 원수 그 사람이다. 대통령을 목표로한 맥아더 장군의 선거운동도 1952년에 거국적인 환성이 사라져 간뒤에는 끝내 시작되지도 않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살 뿐이다!" 일본에서 워싱톤으로 돌아온 그는 이 명언을 남기고 사라져 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 장근을 백악관으로 초대한 일이 있다. 그때 장군은 "나는 여기에 입주했어야 할 것이었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존슨 대통령도 그를 백악관으로 초치한바 있다. 웨스트포인트(미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후보생들에게 장군의 유명한 '고별 연설'이 베풀어지기는 그 후의 일이었다. 이 '고별 연설'은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에게 대한 마지막 기회의 연설이기도 했거니와 맥아더 장군으로선 그의 화려한 일생을 불사른 무관으로서의 최후의 귀거래사였다. 장군은 역사적 드라마의 주역이 되었는데 만일 정치가로세 입신했더라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꼭같이 생각하고 있는냐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제2차 세계대전중에 태평양 전선에서 보인 눈부신 활약을 통해 그 옛날 일본 막부의 장군처럼 존경과 권력을 한몸에 모으고 전후의 일본을 재건한 그의 노력은 일생을 통해 '가장 찬연한 최대의 업적'일 것이다. 한국동란 중에 감행한 인천상륙 작전은 그의 군공의 최후를 장식하는 금자탑이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선에서의 숱한 승리의 금상첨화격으로 또하나의 월계관을 쓴 것이었으니 말하자면 '제2'의 성공한 상륙작전이요 포위작전이며 그리고 교두보의 확보였다. 시시비비로 따져본 트루만의 맥아더 해임 트루만 대통령이 조처한 '맥아더 원수 해임'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장군은 미국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명령에 순복하여야 함에도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돌연 해임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날 에반스톤의 길목에서 한 위대한 장군을 칭송하며 환성을 올렸다. 그러나 나와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그 장군의 위대함의 바탕인 군사상의 공적에 관해서는 반드시 상세하게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항상 정치적으로는 아마츄어로 일관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언제나 어울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철두철미 무골의 군인이었다. 그가 성공하기는 군인으로서였다. 그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전장에서였고 전투에 앞선 전락회의에서였다. 따라서 그의 소년시절과 교육 그리고 군인으로서 받은 훈련을 되살려 본다는 것은 실로 의의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인간 맥아더'를 우수한 육군 전략가로 만들고 또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자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웨스트포인트에서 필립핀으로 개선하기까지의 멀고도 긴 여로. 그리고 패전 일본의 점령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기까지의 파란만장으로 얼룩진 그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자 한다. 1.무훈의 가문에 부끄럽지 않게 다그라스.맥아더의 소년시절의 이상은 보통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는 그밖에도 많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남북전쟁서 공훈세운 아버지 아버지 아더.맥아더의 군인으로서의 생애는 미국 육군사의 거의 반세기를 차지하는 장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남북전쟁(1861-65년)에서 시작하여 인디안과의 전투를 거쳐 미서전쟁(1898년에 시작된 스페인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치고 있다. 남북전쟁이 시작했을 때 아더.맥아더는 15세였는데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당시 아브라함.링컨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워싱톤으로 갔다. 그렇지만 사관학교 신입생의 공석이 추가로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이 소개장의 용도가 바뀌어져 그는 제34 위스콘신 지원병 연대에서 발급한 장교임관 사령을 받게 되었다. 이 연대는 당시 북군중에서도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부대의 하나로 유명했다. 아더.맥아더는 남군과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그는 테리빌(켄터키주의 중부)과 머프리스보로(테넷시주)에서의 전투에서 세운 빛나는 전공으로 사단장 셰리돈 장군으로부터 특별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후 아더는 장질부사에 걸려 한동안 군무에 종사할 수 없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금 셰리돈 장군 휘하에서 밋셰너리.릿지(테넛시주 동부에서 죠지아주 서부에 펼쳐진 구릉지대)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연대로 복귀했다. 이 치열했던 전투에서 블랙 장군 예하의 남군을 보기 좋게 격파했다.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한 이 전공에 보답하고자 연대는 투표에 의해 그를 소령으로 진급시켰으며 아울러 연대의 지휘관을 맡게 했다. 이때 아더.맥아더의 나이는 아직 19세의 약관이었다. 그후 두번이나 부상을 입은 그는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훈장인 의회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전쟁종결과 동시에 제대했다. 곧이어 1866년 겨우 5만5천명선으로까지 감축이 예정된 정규 군대의 장교 임관 사령장을 받게 되었다. 삼형제의 막내 육사에 톱합격 그의 소부대는 각처의 전투에서 인디안과 접전을 벌였는데 아더.맥아더는 서부 변경에 근부하고 있던 7년간 수많은 작전에 참가했다. 1875년에는 뉴올리언즈로 전속 명령을 받아 간 것이 계기가 되어 거기서 그는 매리.핑크니.하디와 사귀어 결혼했다. 이 여성은 버지니아 개척 이래의 전통있는 집안의 규수이며 그녀의 형제는 남군을 위해 싸운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 부부에게는 세아들이 출생했는데 장남인 아더는 1876년에 차남인 말콤은 1878년에 각각 출생했지만 말콤은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다그라스가 3남으로 태어난 것은 맏형의 네살 아래가 되는 1880년 1월26일 아칸소주리틀록의 아시날 병영에서였다. 다그라스가 4세이던 때 집안은 맥시코국경에 가까운 육군기지로 이사했다. 그가 퇴역후 출판한 '회고록'에 의하면 아직 읽기.쓰기도 잘못하는 어린 나이에 이미 승마와 사격의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회상으로는 어머니는 도덕의 기초를 다소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는 "책임감을 가지라는 교육이 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정당한 일은 꼭 해야 하며 국가의 일을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그라스는 1880년부터 악 10년간 아버지의 전속에 따라 각처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1897년 육군 대령인 아버지가 미네소타주 세트폴로 전근하게 되자 다그라스는 밀워키 출신 연방의회의원의 지명을 받아 웨스트포인트에 생긴 신입생 공석을 차지하기 위해 공부했다. 그 이듬해 5월에 실시된 선발시험에서 다그라스는 당당히 톱으로 합격 1899년 6월 대망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서전쟁 때 아버지는 필립핀 총독 그때까지 미서전쟁이 계속중이었는데 당시의 미국은 겨우 2만5천을 하회하는 축소된 병력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약세를 딛고 쿠바에서만도 몇갑절의 대병력을 보유한 스페인군을 격파 감격적인 대승을 거두고 있었다. 미국 의회가 육군 병력의 전시증강을 지지하는 결의를 했으나 때가 때니 만큼 준비가 불충분한채 여러번 시도한 상륙전의 결과로 얻은 승리였으므로 한결 더 감격에 벅찬 대승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듀이제독이 지휘하는 해군부대도 필립핀의 마닐리만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스페인군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전승에 이어 곧 미군 3개 여단이 필립핀에 상륙. 수도 마닐라와 그 주변 일대를 점령했다. 이가운데 1개 여단을 인솔한 지휘관이 아더.맥아더 준장이었다. 이로부터 미국과 맥아더가는 필립핀과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부자3대'를 걸친 맥아더가와 필립핀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이래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엮어 나가게된 것이다. 필립핀에 원정한 아더.맥아더 장군은 그곳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아귀날도(1872-1940)에 대한 소탕작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 작전은 미국이 필립핀을 스페인의 전제적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전쟁중에 미국의 필립핀정책이 일변하여 당초의 협력자이던 아귀날도와 미국이 맞서 일대 결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1899년 말경에는 다그라스가 이미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한지 반년이나 되었으며 필립핀의 민족주의자들(아귀날도군)과 싸우는 미군 장병의 수효는 벌써 5만을 넘고 있었다. 아버지 아더 장군은 미군 지휘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클로즈업 되었다. 그는 마침내 오티스 장군의 후임으로 1900년 6월까지 필립핀 파견군사 사령관겸 필립핀 총독으로 승임되는 영광을 안았다. 민족주의적인 반란분자에게는 더욱 가혹한 대책이 취해지게 되었다 반란 수괴 아귀날도가 곧 피체.마닐라로 압송 되었다.이것은 그의 동지들을 경악케 하는 동시에 원통하게했다. 그러나 그 이상 놀라게 한것은 아귀날도가 전향하여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이었다. 7월까지 필립핀 제도의 주도인 루손섬에서의 저항운동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귀날도 피체 후에도 게릴라전은 그로부터 약10년간에 걸쳐 산발적이나마 끈덕이게 계속되었지만 저항운동의 배경은 이미 없는거나 마찬가지로 붕괴된 것이다. 아더.맥아더의 후임 총독으로는 윌리암.태프트가 취임했는데, 그는 후일 미국 대통령(제27대)과 최고재판소 대법관등 미국에선 최고의 두 가지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또 필립핀 파견군 사령관의 후임에는 아드나.R.샤피 장군이 착임했다. 이리하여 아더.맥아더는 본국에서의 새로운 임무를 맡기위해 귀국했다. 육사 2년때 기합받고도 폭설안해 그동안 다그라스.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서의 1년간을 보내었는데 사괸생도로서의 훈련이 매우 고되고 엄격했다. 미서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쿠바의 반란분자에게 대한 스페인측의 진압작전을 시찰하기 위해 쿠바를 방분하는 도중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한 윈스톤.쳐칠(후일의 영국 수상)은 그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속에서 다음과 같이 탐방소감을 쓰고 있다. "사관생도들은 영국의 어느 사립학교의 학생들보다도 자유가 적다. 담배 피우기는 물론이거니돠 적은 용돈ㅇ르 지니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다. 19세부터 22세까지 4년간의 학업에 충실하기 위해 입학한 것이다." 쳐칠은 그토록 지나치게 엄격한 훈련은 개성을 공축시키며 오히려 훌륭한 군인으로도 선량한 시민으로도 되지 못할 것으로 느꼈던 것 같다. 쳐칠에게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훈련정도가 얼마나 엄격한가를 목격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목격한다 할지라도 하급생에 대한 상급생의 억압과 기합이 군사상의 훈련으로써 마땅히 있었아 할 위계질서의 한계를 넘어 웬만큼 지독했던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지금도 하나의 관행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당시에 비해 한결 완화된 이 기합이 20세기 초에 의회의 조사대상으로까지 말썽을 불러 일으킨바 있었다. 당시 2년생이던 다그라스.맥아더는 사문회의에 중요한 증인으로서 환문을 받았다.그는 한 기합사건에서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관계있는 상급생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실토하라는 추궁을 당했다. 진퇴양난의 괴로운 입장에 섰지만 그것만은 눈감아 달라고 끝끝내 이름 밝히기를 그는 거부했다. 이 진땀 나는 사문회의가 끝나 숙사로 돌아온 다그라스는 사실증언을 거부당했다는 이유 때문에 체포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초조하기 그지없던 그때를 그는 60년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체포하러 오는 부관의 무서운 발 소리를 마음 조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발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문제가 된 상급생들의 이름은 다른 방법에 의해 판명되었다..." 필립핀에서의 공적으로 아버지 아더.맥아더가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다그라스.맥아더는 가문의 영예에 관한 전통의 양감과 긍지를 깊이 느끼고 웨스트포인트에서의 남은3년간도 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맥아더는 드디어 최종 학년에서 전교1번의 놀라운 성적을 올려 그야말로 '수석입교'에 수석 졸업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육사수석졸업후 공병소위로 필립핀에 육사4년 동안 2넌 간은 야구를 즐겼다. 그는 핸섬한 생도였으며 사진으로 더 핸섬하게 돋보여 아가씨들 사이에는 인기가 단연 높았다. 물론 이러한 까닭에서 뿐만이 아니라 필립핀 총독을 역임한 아더.맥아더 장군의 아들이라는 선망적인 배경도 적지 아니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어느 전기작가는 맥아더가 한번은 눈매가 예쁜 처녀한테 정말 맥아더 장군의 아들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는 에피소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때 그는 "그렇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랑스러운 공적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라고 했었다. 웨스트포인트에는 맥아더의 클라스에서 가장 겸허한 사람이 누구였느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이 점에서는 그가 가장 겸허했다고는 아무래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1903년 맥아더가 임관된 것은 공병 소위였다. 공병은 당시의 미국 육군에서는 엘리트부대이며 필립핀이 그의 첫 부임지가 되었다. 정녕 '부전자전'의 필립핀 파견 근무였으니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버지는 이미 2년전에 귀국. 태평양 연안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1년간의 해외근무를 마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 온 맥아더는 노.일전쟁을 관전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는 아버지를 따라 부관으로서 수행하게 되었다. 뒤이어 부자 두 사람은 동남아세아와 인도에의 시찰 여행을 명받고 홍콩. 싱가폴. 화란영토인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실론(지금의 스리랑카)및 인도의 각지를 친선방문 하면서 그곳 지도자들과 격의없는 의견 교환을 가졌다. 맥아더는 그의 저인 '회고록'에서 그때의 체험을 되새기고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경험이였다. 나로서는 미국의 장래 그리고 바로 미국의 존재 그 자체가 아세아 대륙과 그 주변의 섬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통해 품고 있언 신념으로 굳어졌다. 1908년 맥아더는 응용공학 기술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학중에 데오돌.루즈벨트 대통령의 부관으로세 발탁되어 근무했다. 이에 비해 아버지의 군력은 아세아의 시찰여행에서 귀국한 후로는 화려하게 점철되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불화로 참모총장 못한 아더 이미 3성장군이던 아버지는 본래대로라면 참모총장으로 임명될 높은 서열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하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해당되고 게다가 전에 필립핀에서 의견대립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윌리암.태프트가 마침 육군장관으로 취임해 있었다. 결국 이런 불리한 여건은 아버지 아더 장군에게 승진의 기회가 막혀버린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 되었다. 상황은 급전직하로 불운을 몰고 왔다. 라이벌 의식을 지녔던 태프트가 데오돌.루즈벨트 대통령의 후임이 되어 취임선서를 한지 몇달후인 1909년 그러니까 '한일한방'이 되기 바로 전해의 6월에 아버지는 퇴역하고 말았으며 그로부터 3년후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날도 남북전쟁때 함께 싸웠던 위스콘신출신 제24연대 전우들의 50회째 재상봉회에서 연설 도중 갑자기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당초 아더.맥아더는 모임의 통지를 받았을 때 이미 병석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다는 회신을 띄웠으나 찌는듯한 그날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특별참석을 요청받고 있던 위스콘신 주지사와 이 주출신의 두 상원의원이 참석 약속을 취소해 버림으로써 특별요청이 아더.맥아더에게 집중 되었다. 그래서 과거 용명을 날리던 이 위스콘신출신 연대의 재상봉회 주최자들은 그전 연대장이던 아더.맥아더의 특별 참석을 거듭 간곡히 요청해 왔었다. 못내 불편한 몸으로 간신히 참석한 그에게 사회자가 기념연설을 청하자 그는 일어나 벅찬 감격을 되새기며 그 옛날의 숱한 승전보를 얘기하기 시작했으나 잠시후 그 자리에 쓰러졌다.연대 시절의 군의관이 황급히 달려 갔으나 그는 곧 청중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전우 여러분.장군께서는 운명하셨습니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오열했다. 회장의 한복판에서 종군복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90명을 헤아리는 참석 전우들은 옛 연대장 곁에모여 기도문을 창화했다. 유해에는 유서깊고 추억많은 연대기가 덮여졌다. 다그라스.맥아더의 흥행사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다소 과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세계는 그날 밤 일변해 버렸다.내 마음의 상처는 그후에도 아물지 않았다." 그의 감상적인 문장 역시 과장은 없지 않을 것이다. 부전자전의 성격 전통과 가문 중시 그러나 맥아더가 전통에 대한 관념이라든가 가문과 국가에 대한 책임감은 철저했으며 아버지를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아버지의 명성을 선망의 적으로 우러러 본 것도 사실이다. 인생을 이렇게 터득한 단계에 이른 그의 주된 소망은 어쨌든 아버지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누리고 가능하면 그것을 앞지르는 보다 훌륭한 생활관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더가 정치적인 타협을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앞서 태프트와 싸운 일로도 잘 알 수 있으나 이것도 하나의 성격적인 것이며 또 어느 의미에서는 용기있는 혹은 솔직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그라스는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마저 이어 받으려 했다. 널리 해외여행을 하여 풍부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캔사스주 포트.레븐워즈에서 잠시 중요한 임무에 종사했는데 여기에서 이곳에 있는 육군대학의 입학 시험에 합격한 죠지.C.마샬(후일의 육군 원수.참모총장)을 알게 되었고 얼마 후 공병과 위원회의 위원으로 취임하기 위해 워싱톤으로 떠났다. 이 위원으로서의 근무중 맥아더는 중미에 있는 파나마 운하지대의 시찰여행을 명령받았다.파나마 운하는 1903년의 파나마 공화국 독립직후 '미국.파나마 조약'에 의해 운하지대 영구조차권을 획득한 미국이 1904년에 착공하고 1914년에 완성한 세계 제2의 대운하(길이 81킬로 깊이 13.7미터이상 폭 30-90미터 최고수면 36미터)로 미국의 권리에 속해 있었는데 맥아더가 시찰했을 때는 건설공사의 최종단계에 있었으므로 그의 견식을 넓히는데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었다. 일촉즉발의 멕시고전쟁 모면힘써 1911년 맥아더는 레나드.우드 참모총장과 함께 텍사스 주에서의 야외연습에거 행동을 같이 할 기회를 가져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이 연습은 국경 건너 편에 있는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국 육군의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고 전시효과를 노리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니 그 까닭은 멕시코 사람들의 열띤 혁명운동의 여파로 멕시코의 지주계급과 미국 정부가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이 작전에서의 공적이 높은 평가를 받아 1913년 워싱톤의 참모본부 근무를 명령 받았다. 그후 불과 몇달 안에 미국이 멕시코 혁명에 개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실지의 전투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우드 장군의 지령을 받아 베라크루스(멕시코의 중부에 있고 멕시코만 연안의 항구)에 파견된 그는 이미 이곳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의 현지상황을 파악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임무의 주목적이었다. 맥아더에게 부여된 추가 지시는 만약 7천명을 넘는 미군 장병 및 해병대원과 멕시코의 육군사이에 전투가 개시되면 그가 우드 장군의 휘하에서 베라크루스를 중심으로 작전하고 있는 파견군의 참모로 취임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맥아더는 상부 지령에 따라 충실한 근무로 타에 모범이 되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마침내 멕시코와의 전쟁은 회피되고 맥아더는 1915년 워싱톤으로 돌아와 소령에 승진했다. 맥아더가 순탄한 출세가도를 줄달음치게 되기는 이 때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듬해에 육군장관의 부관겸 공보실장이 되었으며 다시 그 이듬해가 되는 1917년4월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된 직후 통칭 '레인보우 사단'-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윌슨 대통령의 임명-의 참모장으로 유럽 전선에 향할 때의 계급은 일약 2계급 특진된 대령이었다. 대위에서 소령으로 승진하기까지 소요된 4년을 포함함여 불과 6년만에 대령으로 4계급이나 약진하는 급템포를 보여준 사실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승진은 경이적이며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맥아더가 1913년 9월 그러니까 대위로 승임된지 약 2년 되던 해 워싱톤의 참모본부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당시의 요원 총수 38명 중 육군대학 출신 아닌 자는 맥아더 한 사람 뿐이었다. 후일 육군대학 원수가 되었을 때도 맥아더만이 육대출신 아니었던것이니 이 점은 그의급속한 승진과 더불어 "맥아더적인 경이"로 돋보여졌던 것이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함께 정평있는 '능변과 다변'은 제1차 세계대전(유럽 전선)에 원정 하면서부터 더욱 빛나게 되었다. 2.제 일차대전서 훈장 산더미 같이 미국은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에 적극 참전할 것을 예기했을 뿐 아니라 미군의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멕시코 변경의 정세에 따라 멕시코 혁명에의 개입도 고려하여 이른바 비상시에 대비하는 강력한 군사체제를 확장하고 있었다. 멕시코 변경에서는 멕시코 혁명이 한층 격렬해지고 판쵸.빌라가 미국의 뉴멕시코로 월경하여 공격해 왔지만 미국의 퍼싱 장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멕시코 북부지방을 진공해 격파했다. 1917년 2월 미국이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을 때 변경 근처의 긴장감을 한결 고조되었다. 윌슨 대통령의 배후에서 미국의 서부와 남서부의 여론을 규합하는데 크게 공헌한 이른바 '틴메르만 각서'는 미국이 두 방면의 작전에서 싸워야할 위험한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로 출병함으로써 일어나는 독일과의 해전이고 다른 하나는 멕시코와의 변경에서 벌어지는 국경전-이렇게 방면이 전혀 다른 양 지역에서 노리는 미국의 군사상의 성공은 자칫 자괴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는 것이다. 토끼 두 마리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게 되는 격이 될까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미국은 이처럼 유럽과 멕시코에서의 양면작전을 전개하는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 었다. '주=틴메르만 각서라 함은-독일 외상 틴메르만은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 앞으로 1917년 2월 1일부터 잠수한의 무제한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는 전문을 보낸 다음 멕시코 대통령에게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요구하라고 훈령했다. 그러나 이 무전은 미국측에 의해 탐지 해독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깡그리 공표돠ㅁ으로써 미국 국만들의 빗발치는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분노는 마침내 미국 국민의 반독일 감정을 자극 그해 4월 6일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계기로 발전했다.' 이와같은 국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윌슨 대통령은 재빨리 징병법안을 마련코 국회에 제출할 준비를 거두렀다. 이는 실로 남북전쟁 이래 시도하는 최초의 군비확장 계획이였다. 미국 대독 선전포고 원정군사령관 "퍼싱" 1917년 4월 미국의 대독 선전포고가 발하게 되는 동시 선발징병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률의 목적은 신속히 프랑스에 파견할 50만의 병사를 선발하는 한편 미국 국내에서 상당수의 예비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다. 미국은 이리하여 20개월을 계속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초기의 추정으로는 필요한 병력을 훨씬 초과하는 대병력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러하다손 치고 프랑스에 파견될 원정군의 지휘관에는 애당초 판스톤장군이 예정되었으나 대독선전이 포고되기 2개월전에 급하사고 알았다.이 비버를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일은 맥아더가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는 당시 '블랙.잭크'의 용명을 떨치던 죤.J.퍼싱 장군이다. 퍼싱 장군은 맥아더의 표한에 따르면 "현재에도 애착을 느껴 곧 잘 불려지고 있는 '옛날의 육군(미군군가)'정신의 화신"이었다. 일찌기 웨스트포인트 출신이며 늠름한 풍채를 자랑하는 그는 미서전쟁에 참가했으며 그후 필립핀 남부 제도에 있는 모로족과도 격전을 벌인 전력을 갖고 있었다.모로족이라면 다른 섬들의 게릴라 활동이 진압된 후에도 거의 10년간을 계속 한 줄기찬 대미 게릴라 전으로 이름난 종족이었다. 퍼싱은 이 임명이 있기까지 멕시코 원정에 올라 있었다.(참조.이때 퍼싱 장군의 부관이 본서의 씨리즈 '패튼'의 주인공인 패튼이었는데 그는 중위계급을 달고 수행 거기서 판쵸.빌라의 부하 2명을 사살한 바 있다. 퍼싱 장군은 어디가나 호방한 성격이어서 부인네들의 인기가 대단했다는일화는 새삼스러은 얘기가 아니다 퍼싱은 유럽 원정길에 올랐다. 만일 프랑스에 도착하면 미군병사들을 연합군의 각 부대로 분산 시켜서는 안된다고 방침을 굳혔다.이윽고 영국에 도착하자 사령부를 설치하고 50만을 셈하는 미군 병사들을 1918년의 가을에 빠르면 그해 봄에 유럽 전선으로 투입할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유럽전선으로 출동 맥아더 퍼싱존경해 연합군은 새로운 군대의 도착을 목마르게 고대하고 있었다. 이미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생을 결단하는 혈전을 벌이던 '서부전선'에서 그 사상자의 대부분을 내었다. 1917년의 여름철에는 연합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미군의 조기내원을 일각이 여삼추로 호소하고 있던 터였다. 이와같은 위급한 전황에 다소나마 대응키 위해 1917년말 유럽에 도착한 미군은 고작 17만5천이었고 그것도 퍼싱 장군이 약속했던 24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밖에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맥아더는 퍼싱 장군을 존경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직후 퍼싱 장군을 만나 그의 군인다운 풍모와 강인한 성격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으므로 유럽원정때는 그의 휘하에서 '레인보우 사단' 근무를 명령받았다. 이 사단은 한 지방 한 주에서가 아니라 미국 각지로부터 병사들을 모집했다는 뜻으로 레인보우(=무지개)라 이름을 붙었다. 이런 명명방식이 지금은 이 육군의 실질적인 전통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로 보아서는 개혁된 새로운 제도였다. 마치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채용했던 '외인부대'를 연상케 하는 이 레인보우 사단은 프랑스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최초의 미군 부대의 하나이며 또한 가장 위훈을 세운 사단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맥아더가 유럽 원정 길에 오른 것도 레인보우 사단의 일원으로서였다. 1917년 10월 상나제르(스케이만으로 흐르는 로아르강의 하구부시)에 상륙한 이 사단은 곧이어 뮤즈 계곡(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을 흐르는 뮤즈 강지구)에서 우선 기동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군부대의 장비가 빈약하고 인원도 부족하여 완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군과 다른 연합군의 장교들도 미군이 전투준비를 완료할 때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인보우 사단의 준비 완료는 가장 빨라서 1918년 2월 류네빌-바카라 지역을 따라 최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위기에 몰린 프랑스군의 일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레인보우 사단 소속돼 용명 떨쳐 훈장 받아 첫 전투에서 맥아더는 기습대를 인솔, 철조망을 돌파하고 수훈을 세웠다. 이 수훈으로 그는 미국의 은성장과 프랑스의 무훈십자장도 수여 받았는데 특히 후자의 훈장 수여식 때는 프랑스의 명장 드바즈레르 장군이 친히 맥아더의 군복에 훈장을 달아 주고 전공치하의 뜻으로 양쪽 볼에 감격적인 키스를 하였다. 레인보우 사단이 실전 1개월 만에 기대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맥아더의 활약이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아더는 다시 수훈십자장을 미국 정부로부터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그가 기습대를 진두 지휘하여 독일군 진지로 잠입했던 수 차례의 전공을 치하하는 것으로 전장에서의 활약에 대한 훈장으로선 의회 명예훈장 다음가는 영관이다. 한마디로 맥아더는 군인우로서 전형적인 인간이었다고 당시의 그를 말할 수 있다. 남달리 용기가 있었고 동시에 스스로 영웅적인 이메지를 형성하는 의욕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혀영심 또는 공명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명성에 어떻게든지 뒤지지 않으려는 심정도 간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 자기의 인상을 강력하게 아로 새겨 주려는 혈기가 뒤끓고 있었던 것임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속에서 이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후일 두번째의 수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을 때 이 영예는 "나의 무인으로서의 명예심을 충족시켜 주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맥아더를 단순히 허영심이 강한 사람으로 속단한다면 경솔하다는 논평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제1차 대전에서 전술을 배웠으며 그것을 몸에 익히고자 노력했다. 이 대전에서 특히 깊은 관심을 모은 것은 '종심 방어전술'이었다. 이것은-전위는 경장비의 경계선에서 수비시키고 주력을 배후에 비치해 두었다가 적의공격에 기습을 감행 이를 분쇄한다는 새로운 작전술이었다. 처절한 고전혈투끝에 후퇴해도 훈장 쇄도 7월에 접어 들자 연합군은 독일군 최후의 대공격에 의해 부득이 후퇴해야 했다. 맥아더는 치열한 공방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부하 병사들을 독려하며 용전분투를 계속했다. 줄기찬 독일군의 공세에 포위된 레인보우 사단은 19일 마침내 1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의 고배를 들이켜야 했다. 이때 맥아더에게 두번째의 은성 훈장이 수여되었다. 후퇴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독일군의 옹세가 일단 주춤하자 이를 놓치지 않는 언합근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으며 맥아더가 소속된 레인보우 사단도 5일간의 유식을 끝내기 바쁘게 다시 불꽃튀기는 전선으로 줄달음 쳤다. 고전을 면치 못하뎐 제26사단을 구출한 여세를 몰고 레인보우 사단(본칭은 제42사단)은 7월 25일 마르느돌출부로 진격 독일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후일 이 전투에서의 전술을 미극 서부 인디안과의 전투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적의 화포가 있는 강력한 거점들 하나 하나에 2,3명의 병사가 포복으로 접근하여 총검과 수류탄으로 파괴했다.그것은 잔인한 전법이며 비인간적인 처참한 사투였다.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흉폭을 극한 일진일퇴의 혈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 맥아더는 이 처절한 표현대로 행동했다. 4일간에 걸쳐 거의 휴식조차 없이 계속된 격전 이후에도 그는 과감한 전진을 강행했지만 마침내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했다. 레인보우 사단은 창단후 최고인 5천 여명의 사상자를 강요당한 끝에 8월 2일 다시금 후방으로 물러났다. 비록 후퇴의 고배를 마셨지만 맥아더에게는 프랑스 정부가 주는 레죵.드.누르 훈장과 두번째의 무훈십자장 그리고 본국 정부로부터는 세번째의 은성 훈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상미엘돌출부에서의 밀고 밀리는 대격전 완강한 독일군이라 해서 언제까지나 완강하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기진 맥진했으며 병기.탄약만이 아니라 병력도 극도로 부족하게 되어 '힌덴부르크 라인'으로까지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퍼싱 장군이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야심적인 작전을 전개키로 했다. 때마침 새로 편성되 미군 제1군을 지휘 프랑스 북동부쪽 베르당의 남방 40킬로에 위치한 상미엑 돌출부로 맹진격한다는 작전 계획이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먼저 주공격은 미국 제1군단(4개 사단)과 제4군단(맥아더가 소속한 레인보우 사단을 포함하는 3개 사단)이 맡기로 결정했다. 이 돌출부는 1914년 이래 알려 졌으며 폭 29킬로 깊이 21킬로에 달했다. 또 전선의 배후에는 제2진지가 있고 기지를 가로 질러서 제3진지가 뻗어 있었다. 이 진지는 '힌덴부르크 라인'의 일부이며 철조망과 수 많은 콘크리트제 초소로 견고한 방비를 증언해 주고 있었다. 독일군은 필요하다면 난공불락을 장담하는 이 진지대로까지 후퇴를 염두에 두고 치밀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배수진을 쳐놓은 독일군 진지를 향해 펴싱장군의 보병부대가 전진했다. 레인보우 사단(제42사단) 예하 제84보병 여단장인 맥아더도 선봉부대와 함께 전진했다. 격전 5일만에 목표이던 돌출부는 붕괴되고 패진의 독일군은 퍼싱 장군의 표현과 같이 '대단히 무질서한 상태'로 퇴각을 거듭했다. 이 전투에서 약 1만 6천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되고 소총 450정이 노획되는 전과가 맑혀졌다. 반면에 용명을 떨친 레인보우 사단은 1207명의 장병이 희생당했으며 제1군의 사상자수는 약 7천명을 헤아렸다. 여기서 맥아더 준장은 또 두 개의 은성훈장을 수여받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이다. 레인보우 사단은 일단 후방으로 철수 뮤즈강-아르곤느 삼림지대에 대한 차기공세에 대비하게 되었다. 이 사단처럼 오래 최전선에 출전했던 사단은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퍼싱 장군은 다음 공세의 선봉으로 전선은 128킬로나 뻗쳐 꼬박 47일간을 소요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레인보우 사단이 다시 전투에 참가하기는 10월 11일이었다. 맥아더는 교묘한 포위작전을 써서 승전고를 울렸다. 작전이 성공리에 끝나자 그는 소장으로의 진급 추천을 받는 한편 또 하나의 수훈십자훈장을 추가하는 영예를 았았다. 레인보우 사단이 후방으로 다시 철수했다가 11월5일에 제 1선으로 복귀 했을 때에는 미군의 최좌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에 앞서 맥아더 부대는 전방을 가로 지르는 다른 군단의 미군부대에 의해 전진을 저지 당하는 기묘한 사건을 만났다. 이것은 다른 부대가 명령재용을 잘못 받은데서 빚어진 혼란인 것으로 밝혀져 해명되었다. 이 혼란상태가 수습되고 미군끼리의 접전이란 비극이 가까스로 피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프랑스의 양군 부대는 세단 공략을 목표로 독일군 진지를 속속 격파하며 질풍같이 진격했다. 목표 지점에 거의 접근했을 때 받은 적의 맹렬한 포화 앞에는 오히려 후퇴하는 쓰라림을 당해야 했다. 11월 9일의 밤부터 10일 아침에 걸쳐 레인보우사단은 전선에서 후방으로 교체.이동하고 맥아더 장군을 일곱번째의 은성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이 유종의 미를 장식하는 무슨 조짐이 되기나 한듯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바로 그 다음날에 있게 된 것이었다. 맥아더는 이지적인 지휘관-퍼싱 장군평 생각해 보면 맥아더는 유달리 수 많은 훈장을 수여 받았다. 복국 정부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여러 외국의 훈장과 수훈십자장도 받는 영광에 빛났다. 이러한 사실을 시샘하는 전우들이 적지 아니 있게 되었다. 또한 맥아더의 독특한 지휘관 태도에 관해 조사받게 하는 조치로까지 발전했지만 조사결과 이렇다한 아무런 걸점이 지적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철모도 쓰지 않고 방독 마스크도 휴대하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방독 마스크를 상시 휴대치 않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이 때문에 그는 전후 목구멍에 심한 통증을 느껴 입원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이 사실을 반증해 준다. 맥아더는 또 무기도 지니지 않았으며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마너 거부했다. 군인으로서는 극히 위험한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런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위 '맥아더적인 리더쉽'의 모든 자세가 앞서 말한 조사의 대상으로 올랐던 것임은 물론이다. 퍼싱 장군은 맥아더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에 언급하여 "이런 넌센스는 집어 치워라. 맥아더는 우리가 가진 가장 우수한 지휘관이며 나는 그를 장차 사단장으로 진급시킬 생각으로 있다."고 조사행위의 우를 비판했다. 그러나 퍼싱 장군의 생각은 곧 실현 되기가 어려웠다. 워싱톤으로부터 하달된 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동시에 미군 장성급의 승진은 일체 보류 되었으므로 맥아더의 소장 승진도 실현될 수가 없었다. 레인보우 사단은 숱한 사상자를 냈지만 그 활약면에서 혁혁한 공적을 남긴 것으로 높이 평가 되었다. 이 점은 맥아더도 마찬가지로 평가받는 입장이었다. 맥아더의 상관은 퍼싱 장군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맥아더는 우리 군의 어느 장교보다도 큰 부대를 이끌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전투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매일 주어진 의무를 충실하게 그리고 이지적으로 수행 했습니다. 그는 야전에 있어서는 실전에 참가했던 장교 가운데 단연 최고입니다." 겨우 34세의 맥아더가 군인으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발군의 무훈을 세워 부하들은 물론 상관들로부터도 한결같이 찬사를 받은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총사령부에 근무하는 장교들 중에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에 어느 역사가는 맥아더가 자신의 일을 과장하여 곧잘 술회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정정하려고까지 말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맥아더의 제1차 대전중의 기록은 추호의 의심도 허용치 않는 엄연한 것이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었으며 미국과 연합군이 바친 높은 찬사에 충분히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대기자도 심취한 맥아더의 인간미 소장 승진이 보류된 맥아더 준장은 1918년 11월 레인보우 사단장으로 임명받았으나 '휴전(아미스티스 11월 11일)으로 인해 모든 장성의 진급이 중지됨에 따라 다시 여단장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레인보우 사단은 휴전 후 다른 8개 사단과 함께 점령 지역인 라인린트를 책임지게 되었다. 1918년(한국의 거족적인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해)의 처음 몇달 동안 맥아더는 병 때문에 군무를 보지 못했는데 이것이 장기간 최전선에 있던 군인으로서는 오히려 다시 없는 휴식이며 위안의 시간이기도 했다. 독일 민족의 위대성과 그 질서 정연한 생활 그리고 검소한 정신과 따뜻한 인정에 맥아더는 깊은 감며을 받았다. 휴전될 때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부하들은 독일인에 대하여 승리자로서의 우월감을 눈에 띄게 품고 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위대한 독일 민족의 위엄과 재능을 존경하는 심정'으로 변해 갔다고 맥아더는 후일담으로 솔직히 털어 놓고 있다. 미국 캔자스 주 출신의 유명한 져널리스트인 윌리암.알렌.화이트가 1919년 1월 라인강을 굽어보는 맥아더 장군의 숙사를 방문했으며 거기서 장군의 인간적 매력에 심취해 버렸다. 화이트 기자로 말하면 다년간 워싱톤에서 근무하는 동안 각계의 저명 인사들을 대개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니 만큼 간단히 아무 사람에게나 심취될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한 화이트 기자가 맥아더에게 매혹 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사실로 손꼽힌다.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씩씩하고 대한는 사람을 사로잡아 매혹시키는 인물을 일찌기 만났던 일이 없다. 바리모어(미국의 명배우)나 죤.돌이 꼭 연출해 보고 싶어하는 인물의 성격을 전부 갖추고 있다... 참모들은 경모하고 있었으며 부하들도 숭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고만한 인상을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무도 환영하여 주지 않아' 1919년 4월에 본의 아니게 귀국했다. 맥아더는 귀국 도상에 여객선으로 만경창파를 헤쳐가는 항해를 실컷 즐겼다. 방이 넷 목욕탕이 셋이나 딸린 5000달러짜리 호화판인 큰 거실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5일에 도착한 뉴욕항의 환영은 숫제 기대에 어긋나는 씁씁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귀아프게 들었던 그 환영은 대관절 어디로 갔는가? 꿈 속에서 우리를 마냥 들뜨게 했던 그 맑은 눈동자와 예쁜 발목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 것은 눈을 부벼 보아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린 개구장이들이 대체 주구냐고 묻기에 저 유명한 제42사단(레인보우 사단)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럼 프랑스에 있었느냐는 무표정한 반문이다. 상심한 침묵을 지키며 누구하나 어린이들 조차도 반겨 마중해 주지 않는 선창에서 우리는 힘 없이 떠나 갔다.." 3.미군사상 최연소의 참모총장 수도 워싱톤에서의 환영은 열광적인 정도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다소 감격적인 것이었다. 뉴옥에 도착했을때의 그 쓸쓸한 환영에 비하면 천양지차를 이루는 실로 개선장군에 대한 감격적인 환영이 아닐 수 없었다. 맥아더가 육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받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단시의 참모총장 페이튼.C.마치 장군의 호출을 받은 자리에서였다. 그래서 귀국 2개월만인 그해 6월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부임했다. 39세에 육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맥아더의 발전적인 보직발령은 그실 타의 추종을 단연 뿌리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죠지.S.패튼(주.본서의 씨리즈 '패튼'참조) 죠지.C.마샬 또는 죠셉.W스튜웰 등 전공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승진은 고사하고 오히려 강등당한 자들도 있는 수 많은 무인 중에서 맥아더는 당당히 '전시 준장'의 지위를 유지했다. 더구나 전후에는 웨스트포인트의 역사 속에서 가장 젊은 교장의 한 사람으로 클로즈업 되었다. 전임 교장이 71세의 노령인데 비해 불과 39세였으니 그가 각광을 받을만 했다. 부임에 앞서 웨이스트포인트가 40년아나 시대에 낙후돼 있다는 것으로 들었기 때문에 맥아더는 착임하자 곧 교육제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대학의 학위를 가진 교수라고는 단 2명 여타는 모두 웨스트포인트 출신자이며 민간에서의 교육을 받았더라도 아주 조금 뿐이거나 전연 받은 사람들이 없었다. 보통 교관의 웨이스트포인트 재임기간은 4년인데 예비훈련도 받지않고 교육을 담당하다가 군사상의 발령 조치를 받아 사퇴하는 것이 예사였다. 맥아더는 근대전이 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수행된다는 점 직업군인에 의한 군대 만으로는 적과 싸우기 곤란하다는 점 그러기위해서는 전쟁 기술만의 훈련보다 광범한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장교가 필요하다는 점-이러한 관점들을 벌써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광범위한 교육과정을 도입하고 대학강사를 초빙하여 사관생도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사관학교 교관들도 일반 대학에 보내서 과학적인 연구를 쌓게 했다. 육사 근대화에 공헌 그러나 결혼에 실패 육군 사관학교를 근대화 시켜야 하겠다는 맥아더 교장의 의욕적인 경륜은 차츰 펼쳐지고 있었다. 맥아더와 같은 세대의 군인들은 사관학교 재학중에 상급생들에게 각가지 형식으로 억압당하거나 기합을 받았으므로 이런 고질적인 악습도 조만간에 일소되고 따라서 생도들 전체를 강제적으로 가입케하는 단체게임을 통해 철석같은 단결심을 배양하도록 조치했다. 더구나 이것은 모든 생도 특히 운동경기의 소질이 없는 생도들에게 장차 군무에 종사하는 경우 어떤 스포츠라도 감독할 수 있는 능력을 안겨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관생도들은 또 여름의 2개월 동안 일반 군대에 파견되어 웨스트포인트의 전통적인 교풍으로 되어 있는 다소 별스러운 분위기와 대조적인 군대 생활을 몸소 체험하게도 되었다. 맥아더의 이와같은 여러가지 개혁조치에 대해서 웨스트포인트의 교관들 및 졸업생들로부터 적지않은 비난 또는 반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그러나 자기와 친말한 다수의 장교들로부터 적극 지지를 받았으며 결국에 가서는 개교한지 몇해안되던 19세기 초에 1차 개혁을 단행한바 있는 실바나스 새이어 이래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서의 3년 동안에 국가 방위법(1920년 제정)의 뒷받침도 받아 20세기의 사관학교로서 근대화하는 대업에 의욕적으로 크게 공헌했다. 그렇지만 육군은 얼마후 황폐상태로 빠지는 뒷걸음질을 쳤다. 군대가 전시편성을 취업했을 때 하딩 대통령(윌슨 다음의 제29대 대통령)이 '정상화'라고 일컬은 평시체제로의 복귀를 국민이 원하고 있었다는 것도 벨사이유 조약의 비준과 국제연맹 가입에 의회가 동의하지 않고 그후의 유럽외교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국 국민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럽 전선으로부터 개선한 퍼싱 장군(1921년 참모총장 취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은 사병 17만 5천 및 장교 1만2천명으로 축소 되었다. 그래도 이 수준은 제 1차대전 전의 그것에 비하면 크다는 편이지만 대전에서의 승리에 의해 급격히 늘어난 서반구 이외 세계에서의 미국의 책임과 권익을 수호하기에는 부족한 규모였다. 육군 사관학교 교장으로서의 임기 말엽(1922년 2월)맥아더는 이혼 경험이 있는 부유한 여성 루이즈.크롬웰.브룩크스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행복하게 보이던 이 결혼에 실패. 17년 후인 1939년 '이혼 재판소'가 있기로 유명한 리노(네바다주 서부도시)에서 이혼하고 말았다. 마닐라 지구 사령부에 필립핀은 제 2 고향 육사교장의 임기가 끝나자 그는 마닐라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임명에 앞서 웨스트포인트의 생도수를 근 2배로 증원하는 계획에 확실한 전망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는 오랜만에 필립핀으로 새로운 직책을 띠고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했으며 이 나라가 많은 점에서 근대화되어 있는 놀라운 모습들을 직접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 한결 가슴이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필립핀이 제2의 고향이란 두터운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필립핀에는 마누엘.케존의 탁월한 지도아래 지방자치가 원활하게 운영되고 도로.병원.학교.도크. 그리고 모든 종류의 건물들이 하루하루가 다른 눈부신 발전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미서전쟁의 영웅이며 1930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하딩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신 우드 장군이 필립핀 총독으로 가 있었는데 이 총독은 하루 속히 독립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필립핀의 앞길을 막는 '바윗 돌'에 지나지 않게 생각되었다. 한편 맥아더는 필립핀인에 대해 우호적이며 그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소원 달성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기도 해서 호불호의 감정이 엇갈리고 있었다. 현지에 부임한 맥아더는 곧 마닐라에 가까운 바탄반도의 방위계획 작성을 명령받았다. 그는 이 반도의 준험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석까지 빠짐없이 답파한 충실성을 보였다. 3군관구사령관 전임 공군문제로 구우재판 대망의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맥아더는 1925년 본국의 볼티모어(워싱톤 서쪽 100킬로지점)에 자리한 제3군 관구 사령관으로 전임 거기서 빌리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옛친구 윌리암.밋첼을 재판하는 군법회의 재판관이 될 것을 명령받았다. 밋첼 준장은 제1차대전 중 미국에 공군의 기반이 마련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군력의 발전을 게을리 했다고 해서 그후 정부가 신랄한 비판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맥아더로선 옛 친구를 재판하는 군법회의의 재판관이 된다는 것은 생애를 통해 가장 유쾌하지 못한 경험의 하나였으나 좌우간 군법회의는 밋첼을 5년간의 군무 정지에 처하는 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참노.본서의 씨리즈 'B29'에 상기 되어 있다.) 맥아더는 결과적으로 친구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후일 입증되기는 했지만 그는 당시 기존의 주의주장에 찬성할 수 없는 경우 침묵을 지켜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밋첼을 차라리 변호하는 방향으로 발언한 것이 알려졌다. 맥아더는 또 밋첼이 미국의 장래 안전 확보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데 밋첼을 재판한 군법회의는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겅우 3분의 2의 가표만 있으면 충분했다. 여기서 맥아더는 꼭 유죄의 가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후일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밋첼이 난폭한 언사를 쓴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론이 정당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올림픽 위원장 역임 일본의 만주 진출 경고 1927년 맥아더는 군부로부터 벗어나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 이듬해 화란의 수도 암스텔담에서 개최된 제6회 올림픽대회(46개국이 참가)에 미국 선수단의 총감독이 되어 참가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데 견인차가 되었다. 그후 맥아더는 다시금 필립핀으로 파견 '필립핀 군관구'리고 불리우고 있던 주둔 미군의 총지휘를 맡았다.그는 극히 친밀한 친구이자 필립핀의 독립투사인 케존과의 구교를 돈독히 하는 한편 필립핀 총독으로 와있던 헨리.L. 스팀슨(후에 육군장관)과도 반겨 다시 만났다. 스팀슨은 필립핀의 독립 달성에 관한한 차라리 맥아더나 친필립핀파의 사람들보다도 더 동정적이었다. 맥아더는 케존 스팀슨의 두 사람과 더불어 일본 관계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교환을 가졌다. 일본은 중국 정세에 중대한 관심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장개석이 북벌(1926년부터 27년에 걸쳐 화남에서 상해.남경.무한을 공략했다.)에성공한 후 중원 대륙을 통일하면서부터 한결 두드러졌다.일본은 화북에 특수권익이 있다고 고집하면서 남만주철도 이른바 만철을 점유하고 이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군대를 이 지역에 파견 만주 일대에 유력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필립핀의 미다나오 섬에는 일본인 이민이 증가하고 있어 케존과 맥아더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이 아니 될수 없었다. 맥아더가 항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필립핀 제도 방위의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최대한의 대책을 강구해 보았다. 그런데 방위체제가 대폭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필립핀에 서태평양에서의 열국의 세력경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고 미국도 필연적으로 이에 끌려 들어갈 위험성이 농후해 졌다. 제1차대전후 '케록그.브리앙 부전 조약'이란 것이 체결된 바 있었다. 정식으로는 '전쟁방기에 관한 조약'이라고 이름하는 이 조약은 1929년 미국의 케록 그 국무장관 프랑스의 브리앙 외상등의 노력에 의해 일본을 포함하는 15개국이 참가하여 조인하게 된 일종의 부전조약이었다. 그후 조인국은 62개국으로 늘어났지만 제재가 없고 자위를 위한 전쟁을 인정했으므로 실제적인 효과는 바랄 수 없게되고 말았지만- 하여튼 이 부전조약의 조인이 있게되자당시 보든 조인국들은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전쟁을 일단 포기하는데 주저치 않았다. 그래서 이 조약에 대해 비판적인 당시의 어느 평론가는 '국제적인 입맞춤'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평화무드 속에서 제 아무리 맥아더가 미국과 필립핀의 위기에 관해 엄중히 경고해 본다 한들 한 결 묵살될 뿐이었다. 국제 정치사상으로 관찰할 때 앞서 말한 일본의 만주 진출(후에 만주사면)이 이 부전조약이 당면한 최초의 시금석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맥아더 같은 명석한 군인의 안식으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군사행동으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50세의 최연소로 육군 참모총장 취임 1929년 8월 맥아더는 후버 대통령이 공병감으로 임명하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지만 기술적인 전문지식을 갖지 않았으므로 임무수행에 확실한 자신을 지닐 수 없다는 이뮤를 내세워 그는 사양키로 했다. 이것은 맥아더가 결단한 일들 중에서 결과적으로 가장 현명한 조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곧이어 후버 대통령으로부터 그 이듬해 11월에 임기가 끝나는 사머롤 장군의 후임으로서 대장계급 승진과 동시 참모총장에 취임해 달라는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가능하면 야전군의 사령관이 되고싶다고 솔직히 원했다. 그런데 당시 워싱톤에 살고 계시던 어머님이 나의 심중을 짐작하시고서 참모 총장직을 수락하라고 전보를 보내셨다. 네가 여기서 망설이고 있으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면구스럽게 생각하실 거라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나의 결심은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맥아더가 참모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불경기가 차츰 미국은 물론 온 세계에 파급 되기 시작 그 여파로 인해 미국 육군도 미.서전쟁 이래 최저의 수준으로까지 위축되고 있었다. 그래서 육군에는 젊고도 박력있는 인물에 의한 강력한 리더쉽이 필료했다. 이에 지명된 맥아더야말로 바람직한 그 적임자로 환영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27년전에 초대 참모총장의 직위가 설치된 이래 맥아더는 50세의 연령으로 가장 젊은 참모총장이란 새 기록을 수립했다. 그느 웨스트포인트와 여러 전쟁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통해 막중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로 성장해 갔다. 그런데 맥아더에게 안겨진 큰 문제는 적어도 근대적인 육군으로서의 기반을 확립하고 또한 1918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병기만을 가진 육군에게 근대적인 병기를 대량 보급할 수 있는 자금을 해마다 확보하는 책임이었다. 미국의 육군은 약체 위험할 정도로 무력 말하자면 당시의 미국 육군은 약제이며 규모도 작고 낡아 빠진 무기만 보유하고 있을 뿐 정녕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1930년 참모총장 취임당시의 육군에는 사병이 12만 5천명 밖에 없었고 장교도 1만 2천명에 불과했다. 맥아더가 취임 5년후에 물러났을 때에도 이 장병숫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그의 재임기간은 육군에 대한 정부.예산이 매년 삭감되던 시대였으며 약간 증액되기는 마지막 해가 된 1935년 한해 뿐이었을 따름이다. 현실과 이론이 상극하는 현실 속에서도 의욕적인 맥아더로서는 웨스트포인트의 생도 수만은 증원하는데 성공했다. 전일 그가 교장직에 있었을때 처음 제안했던 그 증원수에 근사한 수준으로까지 증원시킬 수 있었는데 실수로 보면 1374명에서 1980명으로 약 7퍼센트의 생도수가 증가된 셈이다. 참고삼아 비교한다면 당시 영국의 상비 병력은 23만 쏘련은 62만 4천이었다. 독일은 힛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으로 벨사이유 조약에 의해 군비제한을 받고 있긴 했어도 1930년 초기에는 미국의 보유병력보다 더 큰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의 거의 3배요 독일에 2배 이상의 많은 인구를 갖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만일 근대전을 전개할 경우 위험할 정도로 미력하고 무기도 모두 노후되었을 뿐더러 그 수효도 소수였다. 당시의 국내를 휩쓸기 시작한 '대 불경기' 때문에 실업문제가 심각하게 되고 생활수준이 대폭 저하되던 시대였으니만치 군비 강화라는 큰 과제를 안고서 국만 대중의 주목을 모으기란 글자 그대로의 난삽한 일이었다. 장군으로 출세하려면 대통령에 잘 보여야 군대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면 여론이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맥아더는 이때에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전장에서의 일진일퇴에는 뛰어났다 하더라도 참모총장 취임을 주저했던 것처럼 그는 자기가 장군겸 정치가로서 종전과는 판이한 분위기 속에 있다는 처지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아더와 같이 높은 지위에 앉은 장군은 군부가 정부를 지배하고 있지않는 한문관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해 나가야 한다. 이런 상황은 민주국가에도 독재국가에도 존재한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체제 아래에서는 육군의 장군 특히 참모총장은 문관인 고의층 상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상 종종 군인의 입장에서 보아 행정부의 지도자들에게 전문지식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장군들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행한다면 호불호간에 자기들이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는 엄숙한 현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때문에 만약 장군들이 소망을 달성하고 싶으면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자기들의 상전(특히 대통령을 지칭)에게 지지해 줄 것을 청해야 한다. 연방의회 의원을 제쳐 놓고서 대중의 지지를 청하면 오로지 재난을 자초할 따름이다.공평한 안목으로 볼 때 쿠데타나 국가원수를 제쳐 놓고 일반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구상은 -나중에 그가 그렇게 하고자 했던 것은 별문제로 치고- 당시의 맥아더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맥아더가 참모총장에 위임했을 당시 육군의 비참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육군장관에 호흡을 맞춰서 갖가지 대책을 강구하는 임무수행이 중요했던 것임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군수체제 근대화 힘써 4군이 전미국 방호 후버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현재의 직슨 정권과 같은)도 1933년에 계승한 FDR(프랭클린.D.루즈벨트의 약칭으로 유명)의 민주당 정부도 모두가 맥아더 참모총장의 재임중에 육군에 대한 연방 예산지출의 대폭 증액을 인정할 징조마저 보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맥아더의 주요 업무는 무기의 개선과 육군의 지편성에 노력을 집중시키는데 목표 삼아야 했다. 맥아더는 근대적인 탱크가 미국의 방위에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적극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장차의 전쟁에 대비해서 미국에 근대적인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군수체제를 현실화시켜야 겠다고 작심했다. 이와같이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군비 체제의 확립에 안간힘을 쓰는 맥아더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너무나 냉담했으며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빚어지기만 했다. 육군의 예산을 삭감하기 위해 장교단 2천명의 감축계획이 제안된것도 그러한 일례였다. 맥아더는 참모총장으로서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투쟁했다. 하원에서의 표결 결과는 겨우 1표 차이라는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장교 감축안이 부결되었다. 실로 곡예를 하는 듯한 극적인 승리였지만 맥아더는 좌우지간에 이긴 것이다. 그는 또 육군 항공대의 근대화에도 눈을 돌려 노력했다. 이 항공대를 특정한 부대에 배속하기 보다는 참모총장의 직할아래 두어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책을 세우고 중점적으로 육성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육군도 재편성키로 했다. 이에 따라서 미국 4군(즉 육군, 해군, 해병대 및 육.해군 항공부대)이 미국 전영역을 방호할 수 있도록 체제화시켜 나갔다. 프랑스전의 기계화에 미군의 낙후상을 개탄 참모총장으로서 맥아더는 유럽에 두번 출장했다. 처음은 1931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정부의 특별초청으로 연례의 대연습을 참관했는데 특히 이 연습에서 말을 타는 기병 탱크가 등장. 그에게 감명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미국도 탱크의 재정비 강화를 서두러야 한다고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굳힌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첫번째의 유럽 등정에서 최신의 군사지식을 드넓힌 맥아더가 두번째로 프랑스를 다시 방문케 된 것은 그 이듬해 1932년의 일이다.이번 시찰 여행에서도 특히 프랑스가 군의 기계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점에 또 한번 깊은 검명을 받았다. 특히 프랑스가 미국과 같은 대불경기로 허덕이면서도 이를 극복하면서 군의 기계화에 경주하는 그 노력이 맥아더를 경탄시키는데 부족치 않았다. 한편 이미 재군비에 온갖 노력으로 착수했던 독일군의 장비는 미군의 그것을 훨씬 앞지르고 오히려 프랑스군에 가까운 우수한 수준에올라 섰으며 독일의 힌덴부르크 대통령도 만일 전쟁이 터진다면 밀집된 인구를 갖고 있는 산업의 중심지가 가장 약하고 노출된 전략적 목표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뮤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더 왕은 그 자신이 굴지의 정예부대로 부른 세르비아 사단이 고작 우마차에 의해 군용품을 보급받고 있는 실정을 보고서 비 근대화적인 낙후상을 개탄했다. 항가리에서는 홀티 제독이 폴란드의 요젭.피르스토스키 원수와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장차 닥쳐올 국제적인 위기에 관해 애써 경고를 벌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병시공장의 건설에 전례없는 노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유럽 제국의 심상치 않는 움직임은 도시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1933년에 정권을 탈취한 아돌프.힛틀러의 등장에 의해 멀지 않아 닥쳐 올 위기는 군사전문가나 경제 전문가라면 누구든지 쉽사리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미합중국의 성립 이래 밀접한 상관 관계를 맺어온 유럽과 미국의 장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관해서도 불길한 우려가 대두되고 있었다. 한데 문제의 힛틀러에 관해서는 적어도 처음에는 대부분의 미국인이 미치광이 정도로 생각하고만 있었다. 그리 주목할만한 인물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새야를 유럽에서 아ㅓ세아쪽으로 돌려 보면-1932년에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그 이듬해에는 대륙 깊이 내몽고로까지 일본군의 군화 소리가 울려 갔다. 이것은 국제 정치상 확실히 불행한 사건으로 간주 되긴 했지만 이를 주시하기에는 미국 내의 대불경기 문제가 너무나 시급한 당변과제로 착목하는 것이 미국으로서의 현명한 입장으로 되고 있었다. 맥아더의 재삼재사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당시의 장치 사회적 관계 기구에서 이렇다 할 아무런 대책이 당장 강구되지 않았다. '보너스행진'사건에 진압군 출동요청 받아 이 시대는 다가다난한 시대였다 1932년에는 노동인구의 4분의 1이상이 사실상의 실업자로 거리를 방황했다. 김지어 맥아더 참모총장까지도 군사적 수단으로 대불황에 대처하도록 간곡히 요청받는 판국이었다. 이때 유럽 원정군의 퇴역군인들은 종전후 보너스를 지급받게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복부한 병력에 따라 보험증서의 형식으로 보상을 받았는데 불황에 견디지 못하던 퇴역군인들은 보험의 만기를 기다리지 않고 보험증서의 액면 금액과 공연히 기다리게만 하는 보너스를 일시불로 모두 지불해 주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퇴역군인들은 직업이 없었고 그중의 더러는 집 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굶고 있는 실정에 있었다. 1932년의 여름 그들은 마침내 워싱톤으로의 행진을 전개하며 보너스 지불을 끈덕지게 요구했다. 이름하여 '보너스행진'-행진은 급기야 데모대로 변해 주류를 이루는 대다수는 국회의사당 부근의 아나코스티아 광장에 임시 캠프를 치며 데모의 장기화 태세로 들어 가는가 하면 다른 퇴역 군인들은 펜실바니아 가의 일부 파손된 건물을 점거한 후 농성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이 '보너스 행진자들'이 딱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긴 하지만 공산주의자에 선동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의 심정을 알게 된 맥아더는 그들에게 텐트와 캠프용구를 보내도록 예하부대에 명하고 다수의 급식차를 동원시켜 식사까지 제공하는 호의적인 편의를 베풀려 했다. 그러나 급식차의 제공조치는 의회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어떤 하원의원은 비난하기를 이 퇴역 군인들에게 정부가 하루 세번 급식한다면 배 고픈 몇 백만의 대중이 모두 워싱톤으로 몰려와 이들 '보너스 행진'에 참가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노기를 띠웠다. 이래서 급식차는 일단 중지되었다. 워싱톤의 찌는 듯한 폭서와 함께 후버 대통령의 반응이 없는 태도에 성난 행진자들은 차츰 불만을 폭발시켰다. 대통려ㄷ이 그들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워싱톤에서 물러 나간다면 버스값을 주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 아니었다. 뉴욕주의 프랭클린.D.루즈벨트(FDR) 지사도 그들 중의 뉴욕주 출신자에게 워싱톤에서 돌아온다면 기차값을 지불하겠다고 통고했다. 대통령과 뉴욕주 지사의 말을 '한대의 캄플주사'가 될지언정 만족할만한 해결책으론 받아들일수 없다고 생각한 행진자들은 워싱톤에서 좀처럼 물러 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드디어 국가권력이 동원된 것은 7월 28일의 일이다 경찰이 일거에 출동 국회의사당과 비지네스 지구사이에 농성하는 이 불법점거자들을 완력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경찰과 행진자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일대 소동이 잇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경관은 한 행진자를 사살하게 되고마는 슬픈 사태로까지 빚었다. 아이크와 패튼 대동 행진자들 소탕에 나서 맥아더는 후일 이 '보너스 행진자들'속에 진짜 퇴역군인은 거의 없으며 있었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자의 선동을 받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적중한 것이 못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들 속에는 몇명인가의 공산주의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개는 꾸밈없는 솔직한 고초를 실토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대중들도 제1차 대전의 퇴역군인들이 어떠한 처우를 받게 되는가에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키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맥아더는 패트릭.J.할리 육군장관으로부터 워싱톤DC=(컬럼비아 특별지구)가 정부에 의한 법과 질서 유지로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무질서 상태로 변한 현장'에 군대를 파견 그 부근을 포위하고 당장 행진자들을 철퇴시키라는 엄중한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덧붙여서 "명령의 정당한 행사를 위해 모든 인도적인 배려를 강구 하라"는 권고도 받았다. 약 600명의 보병과 기병 그밖에 탱크 1개 소대로 출동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부하인 드와이트.D.아이젠하워 소령(후일 유럽연 합군 최고 사령관을 거쳐 제34대 미국 대통령)과 죠지.S.패튼 소령(제2차 세계대전때 노르만디 상륙작전후 발지 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맹장 본서의 씨리즈 '패튼' 참조)을 대동 불법점거자들이 항거를 계속하는 지역으로 말을 타고 달려 갔다. 7월 28일의 저녁 행진자들은 아나코스티아강 건너 편에 있는 캠프로까지 밀려 나고 있었다. 탄환은 1발도 발사되지 않았고 중상을 입은 자도 없었다. 그날 방 9시 출동했던 군대는 아나코스티아 광장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아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이튿날 아침까지 행진자들은 그 부근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래도 끈덕지게 남아 병사에게 투석하던 자에게는 최루탄 가스가 사용되었다. 소탕전이 철야 계속 완전한 작전완료를 보게 된 것은 그 다음날의 저녁 때였다. 맥아더는 이리하여 여기서도 승리를 획득한 셈이지만 승리치고는 허무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이 '보너스 행진'이 끝내 공산주의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나 하듯 몇 명의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미국 공산당은 이 행진에 편승하여 전시효과를노린 것이 틀림 없으므로 이번 '보너스 행진'에 당으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했다. 물론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국민의 다수는 행진자들에게 동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평범한 미국인이며 정부가 그들에게 아무렇게나 계획성없이 약속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항의하고 동시에 자기들이 의당 받아야 할 반대급부를 강경하게 요구했을 뿐이다. 맥아더는 이 '보너스 행진'사건에 관련하여 전국의 신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유명한 좌익계 컬럼니스트 피어슨과 알렌 두 사람은 맥아더가 고만한 인물이며 말을 타고 가 옛 전우들을 유린했다고 자못 비판적인 글을 썼다. 이에 참고 있을 맥아더가 아니었다. 두 사람에 대해 명예훼손을 구실삼아 175먀ㄴ 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 하기까지 했으나 얼마 안가서 그는 반성하고 자중하는 뜻으로 고소를 취하하고 말았다. 빗발친 1무 비난이 정치적개안의 계기돼 사실상 맥아더가 취한 조치에는 세인의 반감을 살만한 대과는 없었다. 오직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도 피살되지 않았으며 중상자도 거의 없었다. 다만 지적할 수 있다면 화염에 싸인 캠프와 이 캠프에서 피어 올라 국회의사당을 뒤덮은 검은 연기 때문에 몇 천만의 미국 국민을 격분 시켰던 것이다. 일언이폐지해서 '보너스 행진자들'과 그 운명은 대불황의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공화당정부의 무능한 실태를 바로 상징하는 증좌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맥아더는 억압과 우익 광신주의의 화신으로 비쳤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을 그의 일생을 통해 완전히 말소시킬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맥아더는 군인으로선 추호도 그릇된 언동을 정녕 하고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너무 순박했다. 그래서 비판의 과녁이 되었을 때 홀로 고민을 삼키기만했다. 비록 장군이라도 정치적으로 너무 순박하면 억울하게 불미스러운 올가미마저 덮어 씌워진다는 엄숙한 현실을 맥아더가 뼈저리게 절감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뒤의 일이다. 이렇게 보면 '보너스 행진'사건은 새로운 차원에서의 정치적 개안을 맥아더에게 안겨 준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FDR의 뉴딜정책 실시에 맥아더1역 제1차 대전후 미국에 갑자기 휘몰아친 대불경기는 일종의 경제공황이었다. 이 공황을 수습함에 실패로 임기를 마친 후버의 뒤를 계승한 이가 'FDR'로 약칭되는 프랭클린.D.루즈벨트(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뉴욕주 지사) 그 취임식은 1933년 3월 4일이었다. 이때까지도 미국 경제는 바닥을 걷고 있었으니 이름하여 '심각한 대공황기'에 빨려들고 있었다. 새 대통령은 전임자와는 판이한 인물이다. 역량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 필사적인 절규를 드높여 온 미국 국민에게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구세주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가 제창한 '100일간의 개혁' 계획은 미국에 새로운 낙관주의의 정신을 도입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 새로운 지도자 밑에 다시금 점진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 후 초기에 실시하게된 철저한 개혁의 하나는 전국의 재식목 작업에 약 30만명을 고용하기 위한 예산지출 이었다. 이 사람들을 부대로 편성.필요한 도구를 주어 각각 고용계약지로 수송하는 책임은 육군이 암앙케 되었다. 현지에서는 각 행정당국이 캥프를 설치하고 각각의 주어진 작업을 감독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 담당관은 이 과업을 잘 수행치 못해 결국 육군이 송두리째 인계받아 그것을 능률적으로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른바 CCC(하천.삼림 등을 관리하는 민간인의 부대)로서 유명해진 이 사업은 실로 루즈벨트 정권이 초기에 기록한 대성공의 하나로 빛났으며 맥아더도 이때의 과업수행을 훌륭하게 본보였다. FDR의 육군 감축에 불경한 폭언쓰며 반대 그러나 루즈벡트와 맥아더늬 관계는 날이 갈수록 험악하게 펼쳐졌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정치 철학이 각각 다르기도 했으려니와 어차피 격돌할 강한 개성을 서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취약한 지반 위에서 싹튼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즈벨트의 신암 육군 장관인 죠지.H.단은 육군의 예산을 8000만달러(약 50퍼센트에 행당)나 삭감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 삭감안이 채택되자 3000내지4000명의 장교를 예편 시켜야 하고 또한 1만 2000내지 1만 5000명의 병력도 축소 시키고 아울러 주병군(연방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명주가 조직한다.)의 야전 및 훈련소에서의 훈련을 폐지 할 뿐만 아니라 육군의 기술면의 군무도 전면적으로 해체하기로 한다는 군축내용이 밝혀졌다. 하나의 군인으로서 긍지를 가진 맥아더로서는 도저히 이러한 군축내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 육군장관의 조력을 얻어 이 군축안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맥아더는 단 장관과 상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호소 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군비 강화를 서두르고 있는 판국에 미국의 국방체제를 더욱 약체화 한다는 것은 세계정세하는 입장으로 보아 위험성이 너무 크다고 맥아더는 열변을 토했다. 르즈벨트는 맥아더의 열띤 발언에 오히려 야유를 퍼붓듯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화가 발끈 치밀게 된 맥아더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리만큼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만일 미국이 차기 전쟁에 지고 미국 장병이 진창 속에 쓰러져 죽어 갈 때에는 맥아더가 아니라 루즈벨트의 이름을 한껏 저주하면서 죽기를 원한다는 뜻의 불경한 언사마저 그만 입밖으로 튀어 나오고 말았다. 이에 노발대발한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거침없는 폭언과 쑈.맨 같은 태도를 질책하면서 "대통령 한테 그런 말투는 용서할 수 없소!"하고 펄쩍 뛰었다. 이윽고 냉정을 되찾은 맥아더는 겉잡을 수 없이 흥분되었던 자신을 지나친 결례를 정중히 사과드린 다음 참모총장직에서 사퇴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가 대통령의 집무실의 문을 역고 나가려고 했을때 대통령의 침착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렸다. "당치도 않는 소리 작작하시오. 다그라스 장군! 이 건에 관해서는 장군한테 예산을 일임하겠소." 백악관을 나올 때 단 장관의 표정은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처럼 밝아 있었다. 그라 먼저 맥아더에게 다가 서면서 "당신이 미국 육군을 건져 주었소!"하고 희색만면한 어조가 자못 감격적이었다. 그런데 '회고록'속에서 맥아더는 이때의 심정을 "백악관의 계단에서 마침내 구역질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있은 맥아더늬 열변은 확실히 그에 대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인상을 감명깊게 아로새겨 놓은 결과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루즈벨트는 육군에 호의를 가져 주었다고 맥아더는 말했다. 물론 맥아더의 자발적인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으며 수리되기는 커녕 1934년에는 참모총장으로서의 그의 임기가 다시 1년간 연장되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당시로서는 실로 예외적인 조치였다. 여기서 루즈벨트가 대정치가다운 폭넓은 도량을 가히 헤아리게 되거니와 맥아더 역시 순간적으로 격야된 흥분을 하다가도 곧 냉정을 되찾아 정중한 사과를 할수 있는 군인으로서의 솔직한 혈기와 반성 빠른 양식이 높은 평가를 살만하다고 할 것이다. 모든 노력 수포화돼 참모총장직을 사임 육군의 할당예산은 역시 삭감되었다. 그것도 의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 벙위 안에서 꾸려나가기고 하고 단기간에 못쓰게 되는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느니보다는 신무기의 개발에 국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미국과 같이 육지로부터 침략되지 않는 나라에서 자금이 부족한 당시의 전후 사정으로 보아 이 방침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력적인 저력을 갖고 있었다. 육군의 중강계획과 그 준비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쯤이댜 맥아더로서도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항상 군의 핵심체는 강력시 유지되어야하며 국가의 위험이 절박했을 때 또는 경제의 전망이 낙관시 될 때에는 군을 신속히 재건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맥아더는 힘주어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수포화 되었다. 그의 주장은 공념불이었다. 만사휴애인 것이다. 맥아더가 사임한 것은 1935년의 일이다. 루즈벡트는 그에게 육군 재편성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장이 수여되었고 육군항공대(AAC)의 핵심의 창설에 관해서는 두번째의 수훈장으로서 청동백엽장(측백나무 잎 넷과 도토리 셋으로 측백 나무가지를 만들어 동일한 훈장을 자주 수여하는 대신으로서 주어진 것이며 숫자는 늘어간다)이 수여되었다. 참모총장을 사임한 맥아더에게는 다음 보직이 당장 없었다. 루즈벨트는 그가 사임한 일을 오히려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의견에 영합할 수 있는 인물을 후임으로 임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측면에서는 맥아더에게도 당시 미국의 연방으로 되어 있던 필립핀에서 맥아더의 옛 친구 미누엘.케존(필립핀 연방 수립과 동시에 대통령)이 1934년 아직 참모총장에 재임중인 맥아더를 방문해 온 일이었다. 루즈벨트의 권유받아 필립핀 고등판무관에 미국에서는 연방의 지위는 어떤 종류의 명목적인 독립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관계와 국방군 및 기타 약간의 예비병력에 관한 권한은 워싱톤 정부에 위임 돼 있었다. 필립핀인들은 이러한 지위가 10년간 계속된 연후에 자주 독립을 이룩할 수가 있다는 굳은 약속을 받고 있었다. 케존이 맥아더를 방문한 목적은 무엇보다도 독립 달성 후에 당면할 필립핀의 국방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케존은 필립핀제도의 방위가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만일 충분한 자금과 병원 그리고 병력이 수중에 들어오고 또 부대 훈련 무기 공급 자금 조달 등을 할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면 필립핀의 어떤 지역도 방위하기 가능하다고 분명한 대답을 주었다. 그리고 케존은 맥아더가 참모총장 사임후에 이 과업을 맡아 주겠느냐고 의향을 타진해 보았는데 이것에도 승락하겠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이때 필립핀의 방위를 공고하게 다지려면 비록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더라도 10년은 소요될 것이라는 그 나름의 전망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요담이 있은지 얼마 후 루즈벨트는 맥아더를 불렀다. 필립핀의 연방제 발족에 의해 총독제가 페지되고 고등판무관을 신설하게 되는데 그 직책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루즈벨트가 말했다. 이 제의는 군대로부터 맥아더늬 퇴역을 의미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출발했으므로 끝내 군인으로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고 허심탄회하게 대답했다. 타협이 이루어졌다. 의기투합이라고 보기에는 뉘앙스가 달랐다. 루즈벨트의 제의를 수락한 맥아더는 필립핀정부에 봉사하는 미국인으로서 겸허하게 행동했다. 필립핀 군대를 일찌기 그가 사령관직을 수행했던 필립핀 주둔 미국 육군부대와는 별도로. 그러나 협력하면서 발전시키고 육성 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필립핀 주둔 미 육군부대의 지휘관은 루시어스.R.홀부룩 소장이었으며 그는 맥아더를 최대한 지원하라는 훈령을 받고 있었다. 부전자전의 인연 깊은 제 2의 조국 55세의 맥아더는 새로운 생애의 장을 펼치게 되었다. 필립핀 주차 고등 판무관이란 새 사명을 띠고 부전자전으로 깊은 인연을 맺어 온 필립핀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워싱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맥아더로서는 정치적 영향에 별반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 나쁘게 말해서 루즈벨트의 내심으로는 이 기회를 잡아 맥아더로 하여금 '섬 귀양살이'를 하게 하는 저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사실 맥아더에게는 필립핀을 두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필립핀의 문물에 정서면으로나 전통적으로든지 깊은 애착을 느껴 온 터였고 그래서 필경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가 맡은 새로운 임무는 필립핀의 독립이 달성될 때까지 바꾸어 말하면 그가 66세 될때까지의 골몰하기 비길데 없는 격무로 일관되었다. 그리고 만일 예측할 수 없는 사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66세로 은퇴할 맥아더는 그때 자신의 회고록이라도 쓰기 시작하고 있을 것으로 상상되었다. 루즈벨트는 태평양 건너의 한 변경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맥아더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극동에서의 일본과의 투쟁은 시간의 문제이며 동시에 필립핀 연방에 대한 충성심으로 방위체제의 개선에 전력을 겅주하는 과정이 곧 미국 자체의 방위를 위해서도 절대 불가결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즉 필립핀 연방의 방호는 미국 영역의 보위로도 직결된다는 것이다. 워싱톤을 출발하기에 앞서 그는 전상자에게 주는 훈장으로 과거 1세기 이상이나 수여된 적이 없을 뿐더러 세계 각국의 어떤 군공장 보다도 역사가 오랜 훈위자심장을 부활시켰다. 이 훈장은 맥아더가 그후 다시 필립핀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 받게되는 훈장이기도 했다. 필립핀으로 출발하기 직전 그에게 두번째의 수훈장이 안겨졌다. 1935년의 가을 샌프란시스고에서 '프레지던트.후버'호에 몸을 싣고 필립핀으로 향발했다. 그에게 있어서 5회째의 극동여행이며 또한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달성케 되는 여로이기도 한 것이다. 4. 건곤일척 결한 필립핀군 창설 필립핀 연방의 군사 고문으로 착임한 맥아더는 산하에 4명의 장교로 구성된 스탭(여기선 보좌관의 뜻을 가졌다.)을 두었는데 이중에는 드와이트.D.아이젠하워 소령과 제임스.B.오드 소령이 포함돼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보좌관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맥아더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와 오드가 실무자로 필립핀 국가 방위법을 기초하게 된 것도 그만큼 맥아더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위계획 난항 거듭 미국에 의존하라 요구 이 법안은 약 20만의 병력을 각각 7,500명 단위로 구성된 소규보위 사단으로 조직한 국민군 이외에 소규모의 항공대와 어뢰정을 가진 해병대를 편성하자는 것이다. 상비군을 합치면 10년 이내에 총계 약 40만명의 군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수립할 당초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필립핀 제도내에 독립을 목표하는 구상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져 국방은 미국에 전면적으로 의존토록 하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케존이나 맥아더는 이구동성으로 이 비애국적인 운동을 탄압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국민군 구상에 관해서는 많은 필립핀인들이 의혹을 품고 냉담한 반응이었다. 케존은 서태평양의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가능성이 곧 필립핀의 군비강화에 있다고 도민들에게 유세하면서 반대운동에 강력히 대항하고 나섰다. 케존은 이와같은 군사상의 요청에 대해서는 필립핀 정부가 연간 750만 내지100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맥아더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예산이 600만 달러로 삭감되고 또한 군비강화 계획에 줄기찬 반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함 투성이의 계획 미국도 담당능력 없어 이 군비강화 계획 그 자체에도 어떤 종류의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필립핀 제도를 지키는 해상 병력에 관한 배려가 없었다는 점도 그 한 예로 지적되었다. 이 점에 대한 맥아더의 설명은 자기의 사명이 방위적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굳이 수비해야 할 곳은 내해의 수로 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뢰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즉 어뢰정은 '적에게 병력과 보급물자를 필립핀 해안에 상륙시키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당초부터 결함 투성이로 드러났다. 몇 척의 어뢰정과 100대 정도의 폭격기만 있으면 필립핀 제도의 수십개에 미치는 섬으로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산만했고 지나치게 무책임했다. 그리고 필립핀 정부가 대형의 자위함정을 건조하거나 구입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는 것도 부정치 못할 사실이었다. 이보다 더욱 주목되어야 할 점은 장비가 불충분한 미국 해군에게 필립핀의 방어 임무를 담당케 할 실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필립핀 정부에게도 미국국민들에게도 극비로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나 필립핀 정부도 경제위기와 대중의 무관심 때문에 필립핀의 실질적 방위에 알찬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다만 맥아더와 케존의 의욕에 넘치는 성명만이 필립핀 국민의 사기를 드높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민일 이 빈약한 방위체제가 폭로될 경우 필립핀 국민의 환멸은 종전에 없던 큰 것으로 확대 된다. 더구나 케존이나 맥아더의 의욕적인 언질은 어떻게 보면 국민으로하여금 만사가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는 것으로 확신케 함으로써 방위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조장 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차어피 맥아더의 정책으로 최대의 업적이라고 지적한다면 필립핀의 방위에 다소나마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내막은 후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알고 보면 참으로 불안한 내용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필립핀의 해안선이 강력한 일본해군의 위협에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는 한심스러운 상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비전 없는 정책으로 맥아더.케존과 이관 맥아더의 정책은 현실적이 아니었다. 그 좋은 일례가 신병 훈련이다. 한 신병들의 집단을 훈련시킨 후 일단 집으로 돌려 보내고 다음 집단을 훈련 시킨다는 방식을 되풀이 해서는 강력한 군대는 양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기간요원들만으로 구성하는 연대와 사단을 처음부터 훈련 시키고 이것에 의해 효과적인 훈련이 모든 수준에서 항상 진행되는 형식을 취했더라면 보다 현명하지 않았을까 한다. 한데 이 훈련계획에서 맥아더에게는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이를테면 최초의 신병집단으로서 3000명을 소집하자고 제안했는데 비해 케존은 1937년의 정원총수 2만명을 그대로 소집하자고 엇갈리게 주장했다. 그 결과 군사 훈련의 교관은 크게 부족하게 되었고 또 처음의 수년간은 절약해 쓰다가 후에 사용키로 예정된 군사비도 모두 탕진해 버렸다. 전투에 적응성을 갖는 강력한 기간요원의 후련에는 다수의 미국 장교와 하사관을 필요로 했으나 워싱톤으로부터 파견돼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공백기간을 총당키위한 필립핀장교의 집중적 훈련마저 힐 수 없었다. 맥아더의 판단으로는 일본군이 동남아세아와 서태평양으로 전면적인 침공을 해올 경우 장기적인 게릴라전이 될 것이므로 이에 훈련도중인 기간요원 병력만으로도 일본의 전력을 둔화시킴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거 모든 군대에게 게릴라 전술을 철저히 습득시케 둔다면 병원 훈련계획의 효과는 가일층 증대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었다. 결국 이런 모든 훈련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상으로 침입해 온 대단히 강력하고도 장비가 우수한 일본군 앞에 필립핀군은 영낙없이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방위전의 방해가 되었을 따름이다. 루즈벨트와 불화심화 재혼하여 득남까지해 그런데 이 실책을 전혀 맥아더의 책임으로 전가 시킨다는 것은 정당치 않다. 맥아더는 케존과 루즈벨트 대통령 사이에 일종의 반목같은 냉랭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던 사실을 알았다. 바로 이 상황이 워싱톤에 대한 원조 요청을 한층 어려운 장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던 루즈벨트는 맥아더에게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을 포함하는 전 태평양지역의 사령관직을 맡아 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를 일단 사양했다. 그것은 케존의 필립핀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6년 임기가 1943년에 끝날때 까지는 군사 고문의 지위를 버리지 않겠다고 케존에게 철석같이 약속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심경을 헤아릴 길 없는 루즈벨트로서는 맥아더에 대한 노기만이 해가 갈수록 심화 되어 갔다. 두 사람의 정치 철학은 근본적으로 달라 양극으로 맞서 있었으며 품위도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현격한 대조상을 보였다. 취하고 싶은 것이라면 노회한 수단으로 때로는 간계를 동원해서라도 손안에 넣고마는 것이 루즈벨트였다. 이에 비해 맥아더의 방볍은 고만하고 냉정하게 대하는 태도가 특징적이었다.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에게는 젊은 시절의 인간적인 매력이 이미 퇴색해 있었다. 그와 함께 마닐라에 와 있던 어머니도 별세했으며 아버지도 형도 없는 지금 맥아더는 고독하기만 했다. 한가한 시간이 잇으면 매일밤같이 영화감상으로 보냈으며 남들과 함부로 융화하지 못하는 성벽은 점점 더해갔다. 1937년에 죤.매리.페어클로스와 결혼했으며 이 결혼은 그의 고독을 달래주는데 행복한 도움이 되었다. 다음 해에 아들 아더가 태어났다. 새로운 가정생활은 그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단란하고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루즈벨트관마저 이런 범주 속에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맥아더와 루즈벨트 사이에 벌어진 틈바구니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남진정책 경계 필립핀도 피침예상 페어클로스 부인과 결혼하던 해 맥아더는 해외 여행을 했다. 이때 케존도 동행했으며 일본을 비롯해 멕시코와 미국을 방문했다. 특히 일본 방문을 통해 그는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그의 두 눈으로 명확히 목격했으며 이것이 그의 골칫거리로 받아 들여졌다. 당시 중국분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려는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제국주의적인 확대정책을 강행하려고 하는 한 일본에게도 네델란드령 동인(현재의 인도네시다)의 석유와 고무 말레이(현 말레이지아 연방)의 주석과 닉켈이 불가결하게 필요한 것임은 명백하다. 버마와 태국의 풍부한 쌀이 요청되는 것도 물론이다. 필립핀 육군원사 취임 맥아더적 인상 돋보여 필립핀은 이러한 동남아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방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필립핀에는 일본이 군침 흘릴만한 탐스러운 전략 물자는 거의 없지만 맥아더는 일본이 남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조만간에 필립핀 점령을 시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워싱톤에 도착한 맥아더는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귀국하여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의 방위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지 않겠느냐"고 요청받았던 그 제의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의 회답은 루즈벨트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질 않았다. 당시 장성의 정수가 적은 것이었으므로 맥아더는 후진에게 승진의 문호를 열어주기 위해서라도 미국 육군에서 용퇴하는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필립핀 전부가 임명하는 자국군의 육군원수에 취임키로 결심을 굳혔다. 이 원수의 지위는 미국 육군에는 아직 없었으며 맥아더가 진심으로 취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비록 독립된 정부나 미국 정부는 물론 맥아더도 필립핀의 방위체제 강화에 실질적인 개선은 거의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맥아더는 필립핀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기폭제적인 역할만은 다 했다는 노력이 평가 되었다. 고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차라리 아세아 사람들에게는 감명을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애써 연기를 보여 온 맥아더는 절대적인 신이라고 일컬을 정도는 아니지만 권세있는 위엄을 과시하면서 필립핀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근부하는 집무실의 엄숙한 분위기와 호화찬란한 의식 다분히 연기조인 성격을 조작해 보이는 그태도며 손수 도안한 금줄로 장식한 인상적인 군보 -이것들은 모두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개성을 돋보이기에 실로 효과적 이었다. 이름하여 가위 '맥아더적인 인상'이었다. 이와같은 특징적인 그의 이메지가 돋보이게 되는데 반비례하여 그는 희미하게 남아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이메지를 무산시켜 버리는 걸과로도 나타났다. 마닐라에서의 맥아더는 워싱톤의 명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거나 냉소를 보여주는 그와 같은 태연자약한 인상으로 일관했다. 보다 중요한 일은 미국 정부와 군수뇌부의 다른 고급장교 그리고 대통령에 의해 채워져있던 옥새와 수갑이 필립핀에서 새로운 신분이 제공 되었으므로 모조리 벗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지조의 근엄성에 아이크도 참지못해 맥아더의 부하였던 참모장 리챠드.K.사더랜드 소장도 맥아더의 틀에 박힌 방식을 일일이 모방하려 했다. 사더랜드 소장은 다루기 까다로우며 거만하고 독단적이면서도 또한 성질이 조급하므로 참모장의 직책에는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이 참모장의 결점을 지탄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맥아더를 에워싸는 분위기는 사령부라기보다는 하나의 법정과 같은 그런 근엄한 것으로 변해갔다. 맥아더의 이러한 개성이 대중사이로 침투했다기 보다는 맥아더의 개성과 대중이 오히려 밀착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부하들에게는 이해 할 수 없는 분반할 현상이었다. 아이젠하워 중령(1936년에 승진)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떤 부인이 그에게 맥아더를 만나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때 "맥아더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워싱톤에서 5년 필립핀에서는 4년동안 철두철미하게 그의 '연기술'을 교육 받았습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즉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꼭둑각시 연기에 이젠 염증을 느꼈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휘하에서 마닐라에 근무하다가 명목상 다른 주요 임무를 맡기 위해 본국으로 전속되었다. 그렇지만 루이스.H.브레리튼 소장과 같은 사람에게는 인상이 퍽 좋았던 것 같았다. 그는 맥아더를 평하여 "지금까지 들어 왔던 중에서는 가장 깔끔한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며 품위는 다소 연극적이지만 그것은 그의 개성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언급한바 있다. 맥아더는 하옇튼 새로운 연기상의 역할을 발견한 셈이다. 그것은 그가 절대적 군주의 역할을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고 그 전형적인 실례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에서'재연'하게 된 역할이기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전의 마닐라 재근시절 맥아더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이 없었지만 이 만사태평에 젖은 완만한 생활관은 유럽에서의 전쟁(1939년 9월)과 곧이어 중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개입 등 일련의 전쟁에 영향을 받아 일변되어 버렸다. 군사증수 간청했으나 마이동풍격으로 시종 1939년 말까지 일본은 필립핀을 바다 건너 마주보는 중국의 동해안 전체를 점령했으며 유럽에서 프랑스와 저지대국(=네델란드.벨기에.룩셈불그)이 힛틀러에 정복당한 후에도 동남아로 마수를 뻗쳐 네델란드령 동인도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압력을 가중하고 다시 통킹은 현재의 북 베트남으로 당시는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일부였다. 일본의 이같은 제국주의적인 움직임에 대해 미국은 표면상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동남아에 있는 프랑스령 및 네델란드령 식민지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일련의 경제적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미국이 의도했던 바와 같은 억지책이 되지 못하고 동남아의 다른 지역으로 진출코자 호시탐탐하는 일본의 저의를 오히려 다져 주는 결과로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맥아더의 조언을 큰 영향력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필립핀 정부로서는 이 단계에서 필립핀 군대를 소집하거나 또는 그 조직을 검토할 목적아래 우선 실험적으로나마 동원해 보는 것도 적절했을지 모른다. 1940년 6월 필립핀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서 죠지.구르나트 소장이 부임했다. 구르나트 소장은 취임하기 바쁘게 더많은 병력과 무기를 요청했다. 워싱톤에서는 그의 요청에 아무 해답을 조속히 주지 않았다. 구르나트는 여러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제시하기로 하였다. 미국 정부에 대해 그는 필립핀제도 방위의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는 사실을 필립핀 정부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동시에 미국 육군부대가 필립핀 육군의 증강과 훈련을 책임지는 한편 강력한 항공부대와 잠수함부대를 배치해 주도록 권고했다. 케존도 이 요청을 지지하고 나서기까지 했지만 워싱톤에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FDR은 유럽 중시 맥아더는 이에 반발 알고보면 워싱톤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징병법안의 의회통과에 지지를 얻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법안은 1940년의 가을에서야 겨우 의회를 통과 했는데 이에 의거하여 15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고 주병군의 동원도 가능케 되었다.그러나 당대의 전통적인 전치사상으로 팽배하던 고립주의의영향이 너무 강대했으므로 위의 강군증병책을 채택하기 까지는 1년이란 긴 시간이 걸려야 했고 이것마저 그 후 다시 재검토하여 계속 확대하거나 중지하기로 한다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구르나트나 맥아더와 같은 현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군사 전문가들은 이 위기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점재된 커다란 위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루즈벨트도 같은 견해로 보았으며 또한 소수이긴 했지만 의회와 미국 국민들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급속히 퍼진 환멸감은 아직 후유증을 두드러지게 남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참전외교에 앞장서 반대하는 고립주의.국수주의 단체인 '미국 제1주의 위원회'를 비롯해 아직 초보적 단계인 '파시스트 그룹'이 고립주의의 불길을 계속 부채질 했다. 루즈벨트는 진정 필립핀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중점적인 관심은 유럽으로 향해 있었으며 그래서 아세아에는 손을 쓸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 미국의 국가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불령 인도지나 점령보다도 힛틀러에 의한 서유럽의 점령이라고 지적, 전쟁광의 재생같은 힛틀러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루즈벨트의 이같은 상황판단에 크게 의문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다소라도 의아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무기대여법이 허용하는 대부분의 원조가 영국으로 가고 태평양 지역에는 일부밖에 가지 않는 점을 지적하면서 적지아니 분개했다. 그리고 구축함 기지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도 미국 해군에 의한 증원이 북대서양과 북해 지역을 카버하는 영국 해군의 안전확보에 돌려지고 동남아의 싱가폴과 홍콩은 전혀 무시된 점에도 그들은 격분했다. 이른바 고립주의자들은 영국 배척을 노골정으로 드러내고 이를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치 독일에 지배되는 유럽대륙이 장차 가져올 이점을 인정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편 고립주의자들 중에는 퇴폐적이며 미국의 은공을 몰라 주는 유럽보다도 태평양 방면이야말로 미국의 직접적인 이권이 얽히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자들이 궐기했다. 맥아더가 속한데는 오히려 이 태평양 중시파이며 루즈벨트나 유럽 제1주의자의 그룹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서도 루즈벨트와 맥아더의 반목은 더욱 심각한 것이 되어 극동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냉담한 것으로 변해 갔다. 대통령이라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 있는 루즈벨트의 고답적인 주장은 외교정책적인 차원에서라기 보다 이제는 맥아더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라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더 굳어진 정책 노선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증수할 군비없던 미국 군비확장으로 호전돼 그러한데 공평한 안목으로 보아서 미국이 군비강화에 열기를 띠기 시작하기는 1940년으로 접어 들면서였다. 그것도 당시의 미국의 국력이 허용하는 극히 한정된 범위의 역랑과 수단에 의지하는 이외에 가능한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볼 때 루즈벨트가 취한 군비강화책의 단계적 순서는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올바르다고 보았다. 우선 미국 국내의 육군을 훈련시킨다. 군수물자를 양산한다. 그래서 영국에 최대한으로 원조하고 다음에 같은 조치를 취한다. 구식화된 해군과 실질적으로 유명무실했던 항공대의 병력과 장비를 확충시킨다. 그 뒤 필립핀에 병력.무기 이외에도 훈런과 함대를 제공한다. - 이러한 순위가 루즈벨트의 구상이었다. 이 우선순위로 보면 필립핀은 최종단계였다. 석유와 고무 및 주석이 풍보한 자원을 가진 네델란드령 동인도는 일본이 호시탐탐 하고 있음은 물론 미국도 군침을 흘릴 정도로 탐나는 보고였다. 하지만 미국이 보유한 현존의 병력과 함정만으로 이 지역을 지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왔다. 미국 정부는 이 동인도에 대해 일본으로부터의 물자 요구에는 쉽사리 순복치 말고 끝까지 저항하도록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방위조치는 해 주지 못했다. 전략적으로 보거나 또 천연자원이란 면에서도 동인도는 필립핀보다 훨씬 중요한 비중으로 중시되었다. 필립핀에 대한 군비증강을 호소하는 맥아더와 구르나트의 재삼요구에 대해 미국 정부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못 보여 준것은 바로 이때문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마닐라로부터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요청이 워싱톤으로 또 날아 들었다. 1940년 11월 워싱톤의 죠지.마샬 참모총장은 구르나트의 보고서를 통해 필립핀 육군이 12만명의 병력으로 편성되는 12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이들은 대부분 예비병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의 군무에는 복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등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장교의 태반은 훈련을 받고 있지 않으며 또한 야전훈련이 있었다해도 대대 규모 이상의 부대가 동원 되었던 일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로 만든 부대나 다름 없었다. '종이 호랑이'란 용어도 따지고 보면 이런 유속을 두고 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구르나트는 일단 공격을 받는 경우 필립핀 병사들은 각 중대를 지휘하는 미국인 장교가 포함되는 중대 및 대대로 편성되어야 한다고 역설 했다. 그는 또한 필립핀 부대를 즉시 동원하기 위해서는 당장 500명의 장교 파견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의 요청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좌우간 적극적이지 못했다. 요청인원의 7분의1선이 75명의 장교가 파견되었을 뿐 필립핀 육군 동원건에 관해서는 예산부족의 이유로 거부하는 비애를 당해야 했다. 그러한 워싱톤의 대 필립핀 정책이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초부터였다. 대포 60문과 구식 고사포 20문을 추가 제공키로 한다는 결정 소식을 전해왔다. 자위체제를 목표한 맥아더 구상 난망 반응은 아직 미약한 것이었지만 맥아더는 낙관적인 전망을 품고 있었다. 필립핀은 시간만 허용된다먼 자위체제를 완비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지론이었다. 이 목표는 그로부터 몇년,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해가 바뀌는 1946년에 달성될 예정이었다. 맥아드의 계산으로는 적군이 필립핀 침공에 성공하려면 최저 50만의 사상자를 강요당하는 동시 50억 달러 이상의 군사비가 소모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1941년 2월 그는 마샬 장군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기의 사명은 1946년 안으로 필립핀을 적 공격에 능히 저항할 수 있도록 육성시키는데 있다고 천명한 다음 1941년 말에는 25만명의 육군 부대가 전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고 전망했다. 이에 덧붙여서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의 항공대와 30척 내지 50척의 어뢰정을 출동시킨다면 "가장 강대한 가상적국의 제 1진 10만명의 원정부대에 의한 상륙작전을 해안에서 충분히 저지할 수가 있다."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맥아더는 필립핀의 내해로 들어가는 해협을 봉쇄하기만 하면 마닐라만과 루손 섬만이 아니라 비사야섬(필립핀 중앙부의 파나이,네그로스, 세브, 네이테,사마르섬 등) 마저 가히 방위할 수 있다고 자신에 넘쳐 있었다. 따라서 이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300밀리 포 7문, 155밀리 포 25문, 이동식 서치.라이트 33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했다. 이에 대해 워싱톤은 대구경포는 1943년까지 중구경포와 서치.라이트는 1942년까지 공급불능이라고 회답해왔다. 중장비를 갖추고 잘 훈련된 일본근을 격파 할수 있는 최소한도의 명기라고 생각되는 이 적은 요청마저도 결국 워싱톤은 원조해 주지 않았다. 시실대로의 직접 브리핑을 요구받은 구르나트는 변함없이 필립핀 육군이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야전훈련도 표적을 사용한 연습도 하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당시의 필립핀 방위군에는 비행기 42대와 어뢰정 2척이 있었을뿐 이것이 보유병기의 전부였다. 필립핀은 그래서 일본에게는 마치 갓난 애의 손을 비트는 격에 비할 싱겁기 짝이 없는 상대로 밖에 여겨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5. 일본을 과소 평가한 방위체제 1942년 4월 이젠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일본군의 침공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토의하기위해 싱가폴에서 영국.미국.네델란드 각군의 담당 장교가 외동하여 진지한 참모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전투력이 되는 병기.비행기.함선을 가장 많이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국은 일단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 아세아보다도 유럽에서의 승리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점에 대해서 영국과 네델란드는 마지 못해 승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 태평양에 관한 한 최대한으로 기대할 수 있는 바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위체제를 되도록 조속히 정비강화하는데 있을 뿐이었다. 싱가폴에서의 참모회의는 루손섬(즉 필립핀)의 방위체제를 상화하는 동시에 폭격기대도 창설하여 장차 일본 본토에 대해 폭격을 가할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성을 암시했다. 그러나 회의후 구르나트 장군은 "우리들의 현재의 사명과 한정된 수단으로는 이 암시에 합치된 방위체제는 형성할 수가 없다."고 언급했다. 일본은 적국시하고 자위체제강화 서둘러 당시 미국은 태평양함대의 함정 몇척을 대서양 방면으로 이동시킴으로서 대서양 함대와 비육울 6대4로 조정한 방침이었다. 그리고 싱가폴의 방위는 영국과 네델란드에 일임하기로 조처되었지만 두 나라에는 일본군의 우세한 공격의 기선을 꺾을만한 병기와 함정이 없었다. 한편 미국 함대도 대부분이 진주만(=하돠이의 펄.하버)으로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방위선을 설정키로 합의했으며, 이 선의 서쪽에 있는 연합국의 영유 지역은 각각 자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필립핀을 포함하는 이 지역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요행히 방위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구전의 성격을 지닐 수 없을 것이라고 실토하고 있었다. 따라소 연합군이 충분한 병력을 마련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할 힘이 생길때 까지는 적어도 하와이,미국 서해안,오스트라리아, 뉴질란드에 직접적인 위험을 끼치니 않도록 한다는 것이 방위체제의 중점으로 되었다. 일본 남진전책 준비 마샬은 필립핀 걱정 일본은 쏘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하여 배수진을 쳐놓고 동남아 진출을 목표로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층 험악한 것으로 변화해 갔다. 국제정치학상 하나의 '외교혁명'으로 일컫는 저 유명한 '독.쏘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을 체결하고 새로운 동맥국으로 쏘련을 맞이했던 힛틀러가 체결 2년도 채 못된 41년 6월 이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쏘 침공을 기도한 사태에 가장 충격적인 경악을 표명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의 히라누마내각(평소기일랑 수상의 정권)이 "복잡괴기한 국제정세"하는 표현을 내뱉으며 사직해 버린 유명한 일화는 이 무렵의 일이었다. 힛틀러의 부조리를 음미하던 일본은 미국과의 평화교섭과 네델란드령 동인도와의 경제교섭이 결렬되면 즉각 남방작전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수립했다. 1942년 7월 미국의 해군 작전부장 해롤드.R.스타크 제독과 육군 참모총장 마샬 장군은 싱가폴 참모회의의 결론-"미국은 다른 전략 지역으로부터의 중요한 요청에 따라 필립핀의 방위강화에 착수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보고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현재의 세계정세로 미루어 보아 일본이 필립핀에서 강력한 공세를 취하리라는 예측은 가능하다"고 언명했다. 극동미군 사령관으로 대일전에 방위구축 이미 5월에 맥아더는 마샬 참모총장으로부터의 친서를 받았는에 그 서한에는 "정세가 격변하여 위기가 임박하면"맥아더를 극동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스팀슨 육군장관의 시사도 포함되었는데 이 임명의 시기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지만 이 방침을 맥아더에게 미리 알려주고 시기가 오면 즉시 취임할 수 있도록 대령하기를 바란다는 점, 또한 대통령도 이 임명을 쾌히 승인할 것이라는 점을 비쳤다. 그로부터 한달후인 6월이 되자 맥아더는 필립핀 육군이 멀지않아 미국 육군에로 편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자신이 지휘해온 사령부를 폐쇄하고 싶다는 의사룰 워싱톤에 전달하는 동시 극동에 있는 미군의 사령관 사령을 받기로 했다. 맥아더의 제의가 받아 들여진 것은 7월의 일이다. 육군성은 그에게 정식 발령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더 확대된 방침을 결정했다. "필립핀 육군을 미국 육군에 편입하고 425명의 예비역 장교를 미국에서 필립핀으로 파견한다. 맥아더를 현역으로 복귀시켜서 육군과 항공대를 총괄하는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전 필립핀 총독이던 헨리.L.스팀슨 육군장관은 이 결정을 승인,7월 26일자로 맥아더를 극동지역 미군 사령관에 정식 임명했다. 여기서 지적해 둬야 할 사실은 이 임명이 있기에 앞서 일본군이 남 인도네시아에 상륙했으며 또한 몇 주일 전에는 네델란드령 동인도의 수도 바다비아에서 진행중이었던 일본과 네델란드간의 교섭이 마침내 결렬되었다는 점이다. 교섭은 처음 그럭저럭 타결에 접근하는 듯 했으나 일본이 전략물자를 대량으로 요구하자 응락할 수 없다는 네델란드의 거부가 팽팽히 맞서 결렬된 것이다. 맥아더가 새 임무를 맡게된 7월 26일에는 미국이, 곧 이어서 영국, 네델란드가 각각의 영역안에 있는 일본의 모든 자산들을 동결하는 비상조치를 취함으로써 일본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이 조치는 일종의 경제봉쇄였다. 이에 일본은 중국대륙에서의 전쟁을 계속하기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기 어렵게 되고 또 다른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에도 지장을 주는 것이므로 연합국의 이같은 조치가 던지는 의미는 실질적으론 선전포고와 동일한 결과로 나타났다. 일본이 무리한 요구를 포기하든가-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혹은 전쟁을 개시하든가는 다만 시간문제로 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현역복귀후 처음 소장 계급을 받았는데 이튿날에는 중장으로 증진하고 다시 5개월 후에는 대장의 게급으로 환원되었다. (그가 육군에서 퇴역했을때 대장이었다.) 극동지역 미군 사령관으로서 맥아더는 새로 참모부를 설치 했는데 대개는 옛날의 참모들로 구성되었으며 이 진용은 종전시까지 거의 그대로 였다. 사더랜드 소장은 참모장으로서 유임하고 선임 정보참모는 챨스.A.윌로비 중령(주 참조)이었는데 그는 계속해 정보만을 담당했다. [주.윌로비 중령은 종전후조장으로 까지 진급,GHQ(일본점령을 책임진 맥아더 총사령관의 약칭)의G2(참모 제2부=정보.치안담당)부장 겸 CIS(민간정보국)국장으로 근무. 일찌기 북한 공산국의 6.25남침을 사전 정보 수집으로 탐지 경고했었으며, 그후 맥아더의 1대용단이라고 높이 평가되는 인천 상륙작전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막후인물이었다. '맥아더.브레인' 가운데 1급정통.] 미약한 해공군사력 맥아더는 아직 낙관 맥아더 사령관의 첫 계획은 중원부대가 도착 할 때까지 무엇보다도 먼저 마닐라만을 방위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싱가폴에서의 영국의 입장과 흡사했다. 맥아더는 필립핀의 방위체제를 활립하려면 앞으로도 5년이 걸리지만 나공불락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방공력이 약해 허점으로 지적돼 있었던 까닭에 민다나오섬(남부에서 루손섬 북부로 뻗은 일련의 비행장)에 보급선을 만들어 이것을 오스트리아,동인도(네델란드령),밀레이의 비행장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해 10월까지에는 새로운 B17폭격기 9대, 전투기 50대가 마닐가 교외에 있는 클라크 비행장에 오착했다. 그러나 12월까지 기다려도 필립핀에는 72대 밖에 증강되지 않았다. 이것은 맥아더가 필요로 하는 대수의 절반도 못되었다.물론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총대수도 실제로 전쟁으로 돌입했을 때의 필요 대수에 훨씬 미달하는 수준이었다. 맥아더가 직접적인 지휘권을 갖지 않는 해군의 전투력은 항공병력의 부족보다도 더 암담했다. 보유하는 함대 전부라야 고작 순양한 3척 구축함 13척, 잠수함18척,PT보트 6척에 불과했다. 일본근의 과소 평가 마샬친서로 힘얻어 믹아더는 목전의 위기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상황 분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이 10만의 병력으로 1941년 12월부터 41년 1월사이에 기습 상륙해 올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짐작에서 다음과 같은 방위구상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군의 상륙작전을 전력으로 저지하지만 만약 실패하는 경우에는 바탄 반도로 철수한다. 이 반도는 마닐라만 제압의 열쇠이며 미군 최후의 보루라는 것-. 이 계획에 의하면 필립핀내 미군의 방위력이 증강되면 일본군을 바탄 반도에 약 6개월간 묶어 둘수 있으나 만일 이 동안에 미군이 동원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는 항복하게 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군사작전상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은 이 계획은 곧 폐기되고 새로운 계획이 작성되었다. 새 계획은 '레인보우 5'라고 일컫는 워싱톤 계획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필립핀 사수를 내용의 골자로 하고 있다. ('레인보우 5'계획이라 함은 워싱톤이 필립핀의 항복을 전제로 삼고 모든 전력을 독일쪽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전략적 내용이다.) 11월 3일 루이스.E.브레리튼 소장이 맥아더 휘하의 항공부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띠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브레리튼은 마샬 참모총장의 친서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이 친서에는 맥아더에게 필립핀제도 전체를 방위하기 위한 권한을 부여한 모든 내용이 명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뉴스었다. 맥아더는 이 뉴스를 환영했으며 새로운 계획은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는 아직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칫하면 일본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의 판단력에는 일본이 중국에서의 벅찬 전쟁으로 피폐되어 있다는 상황을 전제로 얻은 정보라면 어떠한 것이든지 경청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험한낙관론 때문에 워싱톤 반응냉담 워싱톤 정부의 심경의 변화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 생겼을까. 그 이유의 하나는 맥아더가 워싱톤에 보낸 보고서 속에서 엿보게 되는 낙관론이었다. 필립핀의 상황에 관해서는 맥아더가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방위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상 워싱톤으로서는 굳이 그의 소신을 저상케 할 필요는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영국에 기지를 두고 대독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미군의 '하늘의 요새' B17폭격기의 경이할 만한 사상 초유의 성공이었다. 그런데 맥아더가 보고했던 바와같이 필립핀에는 12월까지에 35대의 폭격기밖에 업ㄱ었다. 10월에는 스팀슨 육군장관이 헐국부장관에게 필립핀에 방위태세를 완비하려면 3개월 소요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1개월 미만의 준비기간 밖에는 남지 않았다. 12개월이 되어서도 미국의 국외 미군기지에는 B17폭격기가 61대에 불과했고 미국 국내의 대수도 그 이상은 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에 만이 20대 가까이 있었다. 이리하여 맥아더는 그의 낙관론에 입각, 극히 적은 대수의 신형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물같은 노후한 비행기로 구성된 항공부대와 유명무실한채 명목뿐인 해군 그리고 장비가 나쁜 데다 전투 준비를 갖춘 병력이라야 2만 5천 미만이 그 전부인 육군-한마디로 빈약한 전력으로 막강한 일본제국의 막강한 병력을 상대하여 용전분투하려는 투지 넘치는 각오였다.말레이에 있는 영군도 당초의 임무에는 불충분한 약체병력이었는데 이와 비교해 보아도 필립핀의 미군은 확실히 열세였다. 필립핀의 대일방위 완도를 사분체제로 맥아더는 예비병의 동원을 결정했다. 그런데 10개 사단 7만 5천의 예비병을 일시에 수용할만한 병사가 없었으므로 9월부터 12월 15일까지 여러 차례에 나누어서 소집하기로 했다. 맥아더는 휘하의 부대를 4분하여 방위임무를 분담시켰다.북 루손 부대는 죠나단.웨이라이트 소장을 지휘관으로 임명 마닐라 북쪽의 루손에 전개한다. 남 루손부대는 파카 준장이 지휘하여 루손섬의 남부를 방위한다. 위리암.F.샤프 준장이 지휘하는 비사야.민다나오 부대는 제도의 여타 부분을 담당하여 방위임무에 임한다. 그리고 죠지.F.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부대는 마닐라만과 스피크만을 방위하는 임무에 충실케 한다는 계획이었다. 필립핀 주둔의 미국 육군과 필립핀 육군의 사단을 포함하는 전체 예비부대는 마닐라 주변에 배치 되었다. 따라서 웨인라이트 소장은 장비가 나쁘고 훈련정도가 낮은 4개 사단을 통솔, 적의 침공이 예상되는 길이 480킬로의 광대한 지역의 방위를 담당해야 했다. 맥아더는 웨인라이트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당하는 한이 있어도 해안진지를 사수하고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고 엄중한 명령을 하달했다. 무적의 용사에 도취 문제된 해군 지휘권 배치된 대포는 거의가 제1차 세계대전시대의 낡은 것이며, 포병에 의한 원호는 당시 일반적이던 원호법에 비하면 퍽 소규모였지만 그래도 전 필립핀 사단용으로 준비된 화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자동차량은 태무하고,병기.탄약도 부족했음은 에누리없는 사실이었다. 맥아더는 전투 상태로 돌입하기 직전에 임바갰어도 여전히 낙관적인 견해를 변함없이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사태의 진전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측근 참모가 맥아더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두려워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저서 '회고록'에 의하면 맥아더는 자재부족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군은 이 자재부족의 갭을 극복하고 결전을 계속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필립핀인들과 그의 예하부대들이 맹렬한 항전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라도 기필코 필립핀을 고수해 줄 것으로 맥아더는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예하부대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중대성을 익히 인식치 못했음은 부인못할 사실이다. 맥아더는 운이 억세게 좋으며 이와 아울러 1935년 이래 필리핀에서 다져진 '무적의 용장'이라는 이메지로써 반드시 적의 저돌적인 침공의 함부로 받지 않는 인물이란 신망을 얻을 자신에 도취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워싱톤이 자기를 영광의 자리로부터 끌어 내렸다는 비난을 말한바 있는 것도 이러한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워싱톤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이 독일을 주된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개전후 예정된 약간의 군사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제 아무리 필사적으로 혈투를 계속하는 그 결과가 필립핀을 수 삼개월동안도 방위하지 못하는 종말로 나타날 사실을 맥아더는 달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줄곧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 나쁘게는 필립핀인들마저 깡그리 기만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최후로 정치문제도 맥아더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이 지역에서의 해군부대를 지휘할 권한도 부여될 예정이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바 대로이다. 그런데 미극동함대 사령관인 토마스.C.하트 제독이 순양함 장수함 소형함정들로 편성되는 이 함대의 작전 지휘권을 직접 위임받고 싶다는 열띤 주장을 하고 나섰다. 맥아더가 맹렬히 반대했음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 때문에 그와 하트 제독과의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일본이 미국과의 열전을 피하기 위해 필립핀에 대한 공격방향을 영국 및 네델란드 영토의 점령작전으로 돌려 전력을 집중하리라는 전망을 아직껏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 견해가 급기야 일본의 어전회의에서까지 토의되고 군부가 이를 무시해 버렸다는 비화를 역사가들은 지금은 알고 있지만 당시 맥아더가 이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일본의 선공 대기 대일 개전 구실 삼으려 맥아더는 일본이 면저 전단을 열 때까지는 절대로 전투를 시작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받고 있었다. 최초의 전투 행위는 적군쪽에서 시작 되리라는 공산이 컸다. 그러나 필립핀이 첫 공격 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없지 낳으리라는 생각이 루즈벨트 대통령과 마샬 참모총장에게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미국이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여론을 환기 시키려면 미국 영토에 대한 적의 선제 공격이 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루즈벨트로서는 바로 필립핀 영토가 그 공격을 받는 곳으로 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마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때문에 미국 해군병력의 대부분은 고스란히 진주만(펄.하버)으로 되돌아 갔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는 안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적절한 공중엄호도 없이 필립핀에 정박시켜 두면 일본군 공격의 밥으로 고스란히 진상하는 셈이된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네델란드에 대해 만일 일본군이 필립핀을 공격하지 않고 난인에만 공격을 가한다면 미국이 네델란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맥아더는 알 턱이 없었다. 한편 일본이 맥아더의 방위계획에 관해 그 상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확한 일본의 접보활동은 그때까지 수년간 필립핀 안에서 보통의 경로를 거쳐 일계 시민들에 의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필립핀에 있는 미군의 병력도 거의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필립핀 작전을 담당한 일본군은 제14군이었다. 제14군은 필립핀 작전을 달성하기 위해 고작 2개 사단밖에 할당되어 있지 않았다. 사령관인 흔마 중장은 강력한 해군의 엄호와 약 500대의 항공지원을 받기로 약속돼 있었다. 흔마 중장에게 하달된 지시는 필립핀을 작전개시로부터 50일 이내에 제압하고 그후 제14군의 일부를 중요 공격목표의 하나인 자바섬 공격 지원을 위해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역시 서양인의 우월감 과시해 '12.8진주만 기습'이 있기 직전 극동에 있는 영국.네델란드.미국인들 사이에는 완고하며 비현실적이 낙관주의와 심한 인종차별적인 의 견으로 기묘하게 위범벅이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제 아무리 육.해군의 공격력이 강대 할지라도 왜소하고 눈매가 무서운 불가해한 동양인인 일본인이 감히 서양인을 압도할 수가 없다는 지배적인 중론이었다. 중론은 기묘하게도 대부분의 동남아 사람들도 품고 있던 의견에 일치하고 있었다. 천하 무적인 서양인이라는 평가는 1세기 이상이나 걸쳐 수천만의 동남아 사람들간에 젖어 왔으며 그러한 서양인의 한 사람인 맥아더 역시 전형적인 우월감을 앞세워 자신을 돋보이고자 애썼던 것이다. 일본은 일찌기 퇴폐적인 러시아 제국을 타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을 곧 패전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영국. 네델란드를 격파하기란 쉽사리 될 수 없다.-이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 견해가 불과 3개월 만에 뒤집히고 서양의 위신이 일본군의 우위 앞에 급전직하로 실추했다는 사실이 폭로 되었을 때 일본은 서양이 동양보다 월등하다는 고정관녑을 이미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히 타파해 버렸다. 맥아더 역시 서양의 위신을 믿고 그것을 자기의 지휘 아래에 있는 모든 지역에 심으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맥아더의 태도는 영국령 또는 네델란드령 지역의 사령관들 만큼의 경우는 아니었지만 글자 그대로 무책임 그것이었다. '절대 실수없다'는 맥아더적 자신의 오산 가장 그릇된 것이었다면 그가 참모들 사이에 조성한 "절대로 잘못이 없다"는 분뉘기에 취해 일본쯤은 격파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일본군의 공격을 장기간 견딜 수 있다는 자긴을 안이하게 가졌던 일이며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그릇된 자신을 가지게 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결과적으로 안이하게 품었던 자신이 한 사람의오류에 그치지 않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마저 오류의 함정으로 오도 했다는 점이다. 이름바 '맥아더 적 자신'의 오산이 지적된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이른 아침 일본 해군 항공대의 진주만 기습(주.존서의 씨리즈'펄. 하버' 참조)에 의해 이 '맥아더 적 자신'이라는 이름의 꿈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날 순간이 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6. 시금석이 된 마닐라 함락 1941년 12월 초 맥아더는 극동함대 사령관 하트 제독과 참모총장 마샬 장군에게서 일본과의 교섭 타결의 가망성이 희박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일본군이 선제공격을 가해 올 징후가 있다는데 관한 정보를 받았다. 이제야말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시각각으로 절박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맥아더는 먼저 공격해서는 안되다는 엄중한 격요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이 편에서 선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나쁘지만 일본군의 필립핀 침공에 대비하여 맥아더가 방위준비를 빈틈없이 하기까지 일체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맥아더의 방위체제는 타국에 대한 침공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다. 11월28일 미국 해군성으로부터태평양 함대와 극동함대의 두 사령관에게 내려진 봉일내에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맥아더에게도 전달 되었다. 일본군 공격 임박설에 사전경고 받고 있었다. 한편 맥아더는 마샬에게 '준비 완료'라고 전보를 쳤다. '일본 함선이 알레이 반도를 향해 이동중' 또한 '루손섬 상공에 미확인의 비행기 출현'이라는 불길한 보고를 받고 맥아더는 웨인라이트에게 명령했다. 그는 미국 영토에 대한 공격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곧 필립핀이라고 내다 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은 왔다. 12월 8일 새벽 3시 30분 사더랜드 참모장은 라디오로 일본 비행기의 진주만 기습이 감행되었다는 빠른 소식을 듣고 즉시 맥아더에게 전화했다. 맥아더가 이에 관한 전화 보고를 워싱톤으로부터 받은 것은 그로 부터 10분후인 3시 40분이었고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 갔다는 통보를 정식으로 받기는 약 2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처음에 맥아더는 일본이 진주만에서 통렬한 패배를 맛보리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는 필립핀에도 동시에 공격이 가해졌다는 보고가 들어 오지 않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진주만기습이 실패로 믿어 필립핀 제도에 있는 레이다 감시고는 한군데 뿐이었다. 오전 9시 30분 9대의 정찰기로부터 적의 폭격기대가 링가엔만(루손섬 중부 남지나해 쪽에 있음) 상공을 마닐라를 향해 비행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필립핀 항공부대 사령관인 브레리튼은 전투기에 즉각 출동 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군 폭격기는 방향을 바꾸어 미국기와의 접전을 회피하며 잽싸게 도주했다. 일본기는 북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피서지로 유명한 바기오 기타 목표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가태가 되어서도 맥아더는 일본군이 진주만에서 기습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추단 하고 있었다. 일본기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일본군이 기습 실패의 소식을 전달 받았기 때문인 줄로 풀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석이 전혀 상황판단의 잘못이었다는 진상을 그가 자각하기는 9시 30분부터 11시사이였다. 일본군을 이미 하와이에서 미군에게 철저한 타격을 주고 있었다. 미군은 미리 사전경고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근의 뼈아픈 기습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8일 11시 45분 맥아더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기 편대가 필립핀의 중요한 미군 항공기지 클라크 비행장으로 접근중이라는 긴급보고를 입수했다. 미군은 대형의 B17폭격기가 이 착륙 할수 있는 비행장이라곤 필립핀에 겨우 두군에 확보하고 있었다. 하나는 마닐라 북쪽인 클라크 비행장이며 다른 하나는 그곳에서 1300킬로 남쪽인 민다나오섬에 있는 데르몬테 비행장이었다. 이 비행장은 맥아더의 군사적 입장으로서는 사장 중요시되는 포카로 말하자면 '으뜸 패'였다. 일군에 뒤통수 맞은 맥아더의 우유부단 B17폭격기 4개 비행대 중 2개 비행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돌입 직전에 클라크 기지에서 데르몬테 기지로 이동시켜 놓았다. 나머지 2개 비행대가 아직 클라크 기지에 있었으므로 브레리튼 소장은 이 B17을 즉시 발진시켜 대만에 있는 일본군 비행기지를 즉각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2월 8일의 아침에도 브레리튼은 세번이나 제안을 되풀이 했었지만 맥아더는 번번이 각하해 버렸다. 아침 8시부터 폭격기는 계속 공중에 대기 비행을 명령받고 있었지만 폭탄은 탑재하고 있지 않았다. 맥아더가 오후에서야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으므로 폭격기는 11시 30분 지나서 클라크 기지에 귀환 공격용 폭탄을 신나게 탑재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간에 대만의 일본군 기지에서는 필립핀을 목표로 한 폭격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폭격기 108대와 전투기 84대로 편성되는 일본군의 대편대가 짙은 안개로 인해 출동이 늦어졌으나 10시 15분에 일제히 발진했다. 1시간 30분 후에는 클라크 기지와 이바필드 두 비행장 상공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습격해 온 일본군 항공부대는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폭탄을 싣고 출동하려던 B17편대가 이륙하지 못한채 고스란히 선제공습을 당하는 시간상 패자의 입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미군은 필립핀에 있던B17 35대 중 18대와 전투기 53대 기타의 항공기 35대 내지 30대가 희생을 강요 당해야 했다. 이런 막대한 미군측의 손실에 비해 일본군은 겨우 전투기 7대가 격추 당하는 적은 손실이었다. 맥아더가 개전한지 몇 시간도 못되어 필립핀 방위에 작전상 허점이 드러나고 또 실패한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가령 B17폭격기대가 재빨리 폭탄을 싣고 클라크 기지를 이미 이륙해 있더라면 주력부대를 포함하는 일본군 공격대가 이륙하기 전에 먼저 그곳을 공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맥아더가 브레리튼의 제안을 받고도 각하해 버린 태도가 문제시된다. 군색한 변명을 자신의 공명만 해쳐 후일 맥아더는 브레리튼이 대만 공격을 위해 즉시 발진시키자고 제안한 일을 전연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제안이 자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사더랜드 참모장에게 제출되었으며 이런 종류의 제안은 의당 자기에게 직접 품신 하여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을 나열한다고 해서 맥아더 자신의 실태를 대처할 수는 없다. 구차스런 변명은 단적으로 말해서 무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설령 브레리튼이 맥아더에게 제안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책임자의 위치에 앉아 있는 이상 이런 작전을 세워야 했으며 적어도 전과를 기대할 쓸모있는 폭격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 어떤 대책을 강구했어야만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또 맥아더는 B17폭격기에는 춤분한 전투기의 엄호가 없기 때문에 만일 폭격을 감행했더라면 오직 자살행위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만 상공의 안개가 개어 일본기가 이미 필립핀을 향해 출격한 연후에 B17폭격기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설사 B17폭격기에 의한 대만 폭격을 결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민다나오섬의 데르몬테 비행기지로 피난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했다면 뒤에 이 공군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거론된다. 이 폭격기들이 폭탄을 싣지 않은채 필립핀 상공을 날으고 또 클라크 기지로 폭탄을 싣기 위해 돌아오게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식밖의 일이다. 이것은 맥아더의 중대과실이며 그때문에 그도 미군도 뼈아픈 통격을 받게된 것이다. 맥아더의 입장을 굳이 변호하고자 한다면 워싱톤으로부터의 지령에 의해 일본군의 공격이 있기 전에는 가만히 있었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로서도 대만 공격을 먼저 하지 못했다고도 변명할 수 있는 소지는 있게 된다. 하지만 9시 30분에는 루손 상공에서 일본기가 틀림없다는 확인보고가 있었으므로 이 때에라도 공격명령은 즉각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진주만이 기습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이른 아침에 들어 온 이상 미국이 일본과 교전상태에 이미 들어 갔다는 상황판단은 가능한 것이다. 그렇거늘 맥아더가 작전행동을 개시하는데 그 이상의 어떤 자극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마 B17폭격기의 대만 공격이 단행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일본군의 진격을 잠시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 엄호없는 해전함대는 무의미해 루손도에 대한 최초의 폭격이 있은 후 일본군은 12월10일 북쪽의 아파리와 비간 이어서 12일에는 레가스피와 마닐라에서 떨어진 여러지점에 상륙했다. 맥아더의 견해로는 이 일본군들의 상륙은 비행장 건설을 목표한 것이며 조만간에 시작되리라고 예상되는 대 상륙작전을 전도 하기위한 선발부대일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군의 자신도 강했다. 북쪽에 상륙한 대만으로부터의 부대와 남쪽에 상륙한 파라오섬으로부터의 부대를 합친 소수의 병력으로써 과거 2년간 방비면에 대폭 강화된 필립핀제도를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에 넘쳐 있었다. 한편 맥아더는 필립핀의 방어능력이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라도 능히 지탱해 줄 것으로 확신 했었다. 워싱톤에서는 육군부대들이 진주만에서 날아든 비참한 소식에 심히 동요하고 있었다. 태평양함대의 대부분 세력이 단 한번의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로 괴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여파는 맥아더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스팀슨 육군장관도 맥아더를 지원 하기 위해 남은 미군부대를 전선기지에서 5000킬로 내지 6000킬로나 떨어진 서쪽으로 파견 압도적으로 강력한 일본군과 싸우게 할 의사는 없었다. 필립핀을 당시의 미군 병력면에서 고려한다면 방위는 불가능했다. 맥아더는 그래도 자신은 남아 있었다. 해군이 곧 반격할 수 잇으며 또 필연적으로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우선 독자적으로 최선의 반격계획을 제안했다. 항모 부대를 일본 본토로 진격 시킨다면 일본군이 현재 공격중인 모든 지역으로부터 부득이 철수하리라는 내용이었다. 이 작전은 필립핀과 미국 국내의 사기를 확실히 제고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을지의 여부는 별문제이다. 지도위에서 상상상의 함대를 이리 저리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은 사령부 안에 자기만족의분위기를 조성할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무기와 보급품을 적시에 보급치 못하면 이런 작전도 결국은 무의미하다. 탁상공론의 허실을 면치 못한다. 즉 함대는 비행기엄호를 수반해야 한다는 논법이다. 그 좋은 본보기가 있다. 연합군이 서태평양에 보유했던 단2척의 주력함-영국의 전함 '프린스.오브.웰스'호와 순양전함 '레팔스'호는 12월10일 말레이지아 앞바다에서 항공기의 엄호도 없이 그대로 격침 당했다. 이 주력함들은 일본군이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용이한 표적같았다. 목마르게 기대하던 증수는 호주행이돼 맥아더는 아직도 증원부대가 파견돼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실제로 순양함 펜사콜라호의 호위를 받는 7척의 수송선단이 개전 당시 마닐라를 향해 항해중이었다. 이 선단은 75밀리포 20문을 구비한 야포여단과 P40전투기 18대 A24급강하 폭격기 52대 그리고 기타 대량의 보급탄약을 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이 선단은 오스트라리아의 브리스베인으로 침로를 변경시켜 버렸다. 이 사실에 대해 화가치민 맥아더는 미국 극동함대 사령관인 하트 제독에게 강경히 항의했다. 이미 사후약방문격이 되고 말았지만 맥아더에 의하면 하트는 필립핀의 운명이 이 무렵에 벌써 끝장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다. 마침 그 무렵 맥아더는 급강하 폭격기 250대와 전투기 300대를 항공모함으로 보재달라고 워싱톤에 요청했으나 마샬 참모총장은 필립핀에 약간의 비행기를 파송하겠다고만 약속할 뿐 태반은 브리스베인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었다. 맥아더는 마샬에게 독일에 대한 전쟁 노력을 우선적으로 집중하는 방침을 바꾸어 12월 13일까지 증원해 준다면 일본에 대한 반격에 쓰겠다고 요청했다. 이 요청이 거부되었음은 물론이다. 펜사콜라가 오위하는 수송선단에 실린 장병도 보급품도 끝내 필립핀에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후 2척의 수송선이 브리스베인에서 전선으로 향발 했으나 어떤 계획에서인지 오스트라리아의 북부에 있는 포트.다윈(현재의 다윈)으로 도망쳐 몇 문의 야포는 쟈바에서 쓰게 되었다. 일본격멸 제1주의로 미국입장을 이해못해 맥아더는 당시 미국의 능력에 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분치 않았다. 그래서 종전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럽 제1주의'에 전혀 반대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우수한 전술가이며 병사들의 위대한 지휘관이었던 맥아더도 정치적으로는 정부와의 빈번한 접촉도 없었거니와 동료이지만 상급의 장군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의 여론은 진주만의 비극에 분격 크게 비등했다. 그렇지만 '일본격멸 제1주의'의 방침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고립주의에 가까운 견해를 가진 '미국 제1주의 위원회' 일파의 잔당이며 강경론을 몰고 가는 일단의 무리에 불과했다. 맥아더로서는 한동안 본국과의 밀접한 접촉이 없기는 했어도 이런 사실쯤은 파악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자기자신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에 미국의 '제 1의목적'이 무엇인가를 투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메지를 가장 손상케 한 것은 맥아더 자신의 전술상의 능력이 도리어 자신을 함전에 빠뜨린 점이었다. 그리고 현유 병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미국이 보유하고 있지도 않는 무기와 당초부터 지급할 의사도 없는 대량의 무기를 마샬에게 일방적으로 마구 요구했던 점이다. 바탄반도의 철퇴 늦어 심요이상 출혈케 돼 그러나 필립핀에서의 동원계획은 성공했다. 12월 8일까지에 이 계획은 거의 완료되었으며 약간의 부대는 예전병력을 초과했으며 초과된 병력으로 2개 연대와 포병 2개 대대를 포함하는 새로운 부대가 편성되기까지 했다. 병력수는 이와같이 강화 되었지만 아더는 12일 필립핀 전토를 방위하기 위한 최초의 계획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의식했다. 맥아더는 케존 대통령에게 일본군이 강력한 부대로 상륙해 오면 마닐라 근처의 바탄반도에 부대를 집결시키고 사령부와 정부를 반도 남단에 있는 코레히돌섬으로 철수시킨다는 비상계획을 알렸다. 월전에 이미 승인된 '오렌지 계획'이라는 것인데 즉 이러한 구상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마닐라는 '비무장 도시 선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당시 맥아더의 견해로는 전국은 이미 판가름난 것으로 판단하고 설혹 적극항전 할지라도 일본군의 승리를 지연시킬 따름이라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맥아더가 다음으로 직면한 문제는 농성에 대비하여 대량의 탄약과 식량을 바탄반도로 수송하는 한편 루손 부대를 반도로 후퇴시켜서 바탄의 지협부분에 방위태세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일본군 주력 부대의 상륙이 끝날 때까지 바탄으로의 철수결정을 늦추어 필요이상의 시간을 허비했으며 동시에 방위태세의 구축을 지연시키기게 되었다. 이러한 실책을 차지하고라도 타이밍이 적절하지 못해 미군과 필립핀군은 거듭 커다란 희생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제14군 북 루손에 강세로 상륙 데라우찌 대장이 통솔하는 일본의 남방군은 연합군이 지배하는 동남아 공격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공격에는 4개 군이 참가했는데 그중의 하나인 제14군은 2개 사단.1개 여단.1개 연대로 편성 필립핀 점령의 주 사명을 띠고 있었다. 혼마.마사하루 중장이 지휘하는 제14군은 대만에서 편입시킨 2개 연대를 포함한 제48사단과 제16사단으로 편성되어 잇었다. 대만연대의 하나는 북 루손에 최선봉으로 상륙하는 한편 제16사단의 2개 대대와 해군 육전대 1개 대대는 남 루손에 가장 먼저 상륙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첫눈에는 적어도 전투준비가 충실한 9개 사단을 보유한 필립핀 방위군에 비해 결코 강력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필립핀 방위군에게는 해군의 증원도 없고 항공병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정세는 일변해 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주력은 32킬로에 달하는 전선을 따라 상륙한 다음 부채꼴을 이루며 북쪽으로 전개 하면서 이미 상륙했던 선봉부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이 부근에서의 공격이 바탄으로의 철수가 결정된 이후 2주일 이내 즉 12월 28일께 시작될 것으로 점치고 있었다. 22일 이른 아침 휘몰아치는 폭풍속을 뚫으며 일본군은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이 폭궁으로 인해 다수의 상륙용주정이 손해를 입었다.뿐만 아니라 이 폭풍은 제 2진의 상륙마저 상당히 지연 시켰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듯이 상륙시에 큰 방해가 된 이 폭풍이 상륙 후에는 파죽지세를 한결 더하는 가속력으로 변해 일본군은 필립핀군을 격파함이 실로 간단했다. 미군은 일본군 상륙부대에 효과적인 포격을 가하지 않았으므로 일본군의 혼마 사령관은 참모의 조언을 뿌리치고 강력히 전진하도록 지령했다. 훈련부족이란 약점을 극복하고 필립핀 군대가 줄기찬 방위태세를 갖춰 줄 것으로 기대해온 맥아더의 희망은 이리하여 초장부터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맥아더에 의하면 이 필립핀 병사들은 적병이 모습을 조금 드러내기만 해도 공포에 떨며 퇴각하기에 정신 없었다고 한다. 제71사단은 상당히 증강된 병력인데도 남쪽과 마닐라에의 길을 차단할 수 있는 로자리오 도로의 진지에서 이튿날에는 퇴각하게 되는 약세였다. 같은 날 웨인라이트 소장은 마닐라로 진격하는 일본군의 진로와 엇갈리는 아구노강 배후의 진지로부터의 후퇴하는 허가를 받았다.만일 웨이라이트가 이 진지를 짧은 기간이나마 유지해 준다면 바탄 요새는 전투준비를 완료할 수 있으며 설사 오랫동안 쓰라린 농성을 계속하더라도 더 지구전을 벌일만큼의 보급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맥아더가 이 단계에서 훈련된 필립핀 사단의 거의 전부를 바탄으로 이동시킨 조치는 현명했다. 이 무렵에는 마샬 참모총장도 마닐라의 '비무장도시 선언'과 바탄반도에의 후퇴를 포함하는 맥아더의 비상계획을 승인한 뒤였다. 웨인라이트 방위선이 무너져 바탄반도로 크리스마스 당일 필립핀을 출발한 하트 제독은 그에 앞서 필립핀을 떠나 동인도(현인도네시아)에 이미 도착한 위하의 주력부대로 복귀했다. 브레리튼 장군도 휘하의 폭격기대와 함께 오스트라리아의 다윈에 이동했다. 남아 있는 해군부대라도는 6척의 어뢰정과 소수의 소형주정 그리고 몇척의 잠수함들 뿐이었는데 이들마저 조속한 시일안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개전 2주일도 채 못지나 맥아더가 필립핀 방위에 걸었던 희망은 일장춘몽인양 무산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맥아더와 웨인라이트는 일단의 용감무쌍한 미군부대와 유명무실한 필립핀 부대의 소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불가피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바탄반도에 잔류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12월 24일 남 루손에 침공한 일본군부대도 이미 상륙한 부대와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날 안으로 루손섬을 횡단한 후 마닐라를 향해 북쪽과 서쪽으로 진격할 준비가 완료 되었다. 웨인라이트 소장의 방위선이 유지되지 못하면 마닐라는 포위될 운명에 있었다. 크리스마스날 밤까지 사이에 웨인라이트는 아구노강의 선까지 밀려나 있었다. 미군의 방위선은 2일간 버티었는데 이것은 일본군이 포병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8일에는 방위군은 최전선의 두 진지를 포기하고 최후의 방위선으로 후퇴했다. 잠병들은 지쳐 있지만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고 받고있는 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민간 뻐스와 자동차를 징발해 보급활동을 계속했다. 군용자동차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웨인라이트는 가능한 한 오래 지구전을 펴가며 역진할 때 철퇴하라는 지령을 받았지만 사태가 여의치 않았다. 드디어 철퇴할 때에 공병대는 교량과 도로를 다이나마이트로 파괴했다. 추격해 오는 일본군이 이용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군 마닐라 무혈점령 이 여덕에 후퇴쉬워져 일본군의 전진은 실로 전격적이었다. 흔마 중장의 제14군은 바탄반도로 철수하는 미군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해 지름길을 질러서 미군을 혼란시켰으나 맥아더는 이미 코레히돌에 들어 가 있었다. 혼마 중장은 맥아더의 의향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마닐라 점령의 절대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탄반도로 이 이상의 명력을 투입하여 미군을 추격하는 작전은 중지하고 그의 휘하부대의 대부분은 마닐라로 전진 시키는 동시에 바탄반도에는 불과 1개 연대만의 병력으로 하여금 진격케 했다. 이런 작전의 여덕으로 미군은 계속 바탄반도에의 철수 작전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미군의 남 루손부대의 주요 분견대는 험준한 산길을 지나 겨우 7일동안에 북으로 224킬로나 철수했다. 철수 루트를 따라 도로를 수비하고 있던 후위부대는 일본군에 결사적으로 반격 일본군 탱크 8대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그후 전진을 일단 정지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신정 원단인 1월 1일까지 조직적으로 대부분의 미군부대는 바탄 또는 그 배후에 있는 산페르난도에 집결했다. 혼마중장 지휘에의 제 14군은 방비없는 마닐라를 향해 맹진격을 거듭 드디어 1월 2일 마닐라를 무혈로 점령하는 개가를 올렸다. 본국수차난망인 바탄 식량보급에도 급급해 미군의 후위는 일본군과의 공방전으로 시달리면서도 후퇴를 계속 다음의 5일 동안에로 불성공은 아니었다. 이 사이에 1만3천의 장병이 실종되긴 했으나 알고 보면 그것은 거의가 전의를 상실한 웨인라이트 부대의 필립핀인 탈주병들이었다. 바탄에 대한 보급은 생각대로 여의치 않았다. 전투 계획으로는 4만3천의 장병에세 6개월간 보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맥아더의 바탄으로의 철수명령 하달이 늦어 이 보급 목표는 차질을 가져 오고 만것이다. 코레히돌에는 1만명에 6개월간 보급이 사능한 식량이 비축된데 비해 바탄에는 10만명의 1개월분밖에 없었다. 적의 포위를 받게 된 바탄은 급기야 후퇴 장병들로 수라장을 이루어 훨씬 많은 식량이 있어야 했다. 추정했던 4만 3천명선을 거의 2배나 넘는 8만의 장병들이 뒤범벅이었고 그 밖에도 2만명을 상회하는 피난민들이 몰려와 붐비게 된 것이다. 마지막 후퇴 부대가 바탄 요새에 당도 할때까지 맥아더는 민간 피난민들과 군장병들에의 식량 배급량을 반감시켜 하루 2000칼로리로 급양했다. 훈마 중장은 휘하부대중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인 제48사단을 새로운 '자바작전'으로 차출하라는 상부지시를 받았다. 이 작전은 당초의 작전계획에서는 최소한 1개월 안에는 개시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 승승장구 하는 유리한 전세에 들뜬 일본군은 이 정예부대를 남쪽으로 수송 제65여단의 6개 대대와 교대하기로 조치했다. 그래도 전투수행에 자신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처럼 병력을 감소했지만 맥아더의 휘하에는 아직도 필립핀 육군의 2개 정규 사단과 7개 예비사단이 숫자상으로는 확보돼 있었다. 이 사단들은 증원 받는다거나 식량과 탄약을 보급받는다면 앞으로 상당한 기간 지구전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맥아더는 아직도 본국으로부터 보급물자를 보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 기대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념불이었다. 일본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고 또 네델란드령 동인도가 필사적인 대일 항전을 벌이고 있는 판국에 미국이 바탄에 대한 증원을 감행한다는 것은 불나비의 자살 행위와 다름 없는 위태로운 일이었다. 바탄은 점점 고립무원의 경지로 빠지고 있었다. 싱가폴이 함락당하는 위기가 눈앞에 임박(2월 15일 함락)했어도 바탄 원조를 서두르는 효과는 없었다. 난인의 전략가치 높아 필립핀은 경시당해 후일 맥아더는 마샬에게 약속된 보급품을 보내 주지 않는 처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워싱톤에 불이 나게 거듭 청원했으나 한결같이 마이동풍이기만 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필립핀에서의 패배를 워싱톤의 무성의로 전가시키고 있었다. 필립핀을 구출하겠다는 워싱톤의 전의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이것이 패배의 원인은 아니었다. 하트 제독은 필립핀보닫도 동인도(네델란드령)를 우선적으로 중시하고 있었다.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이 섬에는 석유를 비롯하여 일본이나 미국에도 공통으로 요구되는 주석과 고무가 풍부했다. 이와같이 전략적 가치면으로 보아 동인도에 아류하는 필립핀에서는 용감하지만 공허한 노력이 눈물겹게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으로서는 공급할 수 잇는 보급물자들이 거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이상 필립핀보다도 이와같은 동인도가 우선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상으로 볼 때 워싱톤 정부의 입장은 맥아더의 필립핀보다도 하트제독이 담당한 동인도 방면에 비중을 두고 편애한 셈이다. 이러한 편애를 질시하고 필립핀 쪽으로 워싱톤의 관심을 전향시키려한 맥아더의 끊임없는 노력은 실로 피를 토하는 혼신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7.권토중래 위해 코레히돌 탈출 1942년 1월 10일 맥아더는 일본 제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항복권고문이었다. "귀관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종말은 가까와졌다. 문제는 귀관이 얼마나 더 저항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귀관은 식량의 배급이 이미 반으로 줄었다. 이제까지 용감히 싸워온 귀관과 부하 장병의 감투 정신은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귀관의 위신과 명예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 이상 무모한 유혈을 피하고 귀관의 사단과 보조부대의 잔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항복을 권고한다." 일군의 항복권고에 맥아더는 일축해버려 맥아더는 아예 회답을 하지 않았다. 이를 항복거부의 뜻으로 해석한 일본군은 바탄반도에 수많은 삐라를 뿌려 맥아더의 항복 거부를 '어리석은 거부'라고 욕하면서 병사들에게 직접 항복하도록 선동했다. 일본군은 필립핀 병사에게 즉각 항복하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필립핀인을 위한 필립핀인에 의한 신생 필립핀의 건국'을 호소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독립을 부여하겠다는 미국 편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필립핀인들에게는 이런 교활한 권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맥아더가 항복을 거부하는 입장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는 한바탕 결전도 치르어 보지 않고 항복하는 비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로 그는 미국으로부터 약속된 보급품이 도착할 것으로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로 하여금 보급지원의 기대를 가지게 약속을 한 것은 분명히 마샬 참모총장의 실태였다. 때문에 맥아더의 소신은 이뤄질 조짐이 보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FDR의 대치방병이 맥아더에의 회답이 돼 이에 앞서 1941년의 12월 28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필립핀으로 보내는 방송에서 미국의 해군이 "일본군에 대해 집중적이면서도 충분히 계획된 반격을 개시하고자 준비중이며 그 결과는 필립핀제도의 방위를 구원하게 될 것이다."는 필립핀에게 막연한 꿈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래서 필립핀인들은 맥아더와 루즈벨트의 언약을 굳게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즈벨트의 방송까지 청취했던 만큼 이들의 기대가 컸으나 그후에 보여 준 사태의 진전은 기대 이상으로 환멸이 컸다. 아더가 루즈베트에 덧붙여 밝혀 두어야 할 점은 맥아더가 루즈벨트에게 대해 필립핀인이 전의를 계속 가질 수 있도록 그 무엇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던 간청 그리고 그 어떤 격려의 말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루즈벨트가 모두 라디오 방송으로 대답했다는 사실을 맥아더는 터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찌기 장성급으로진급한 아이젠하워 준장의 견해로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맥아더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입장을 바꾸는 것이 현명한 조치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12월 10일 그러니까 루손섬에 일본군이 첫 상륙하던날 마샬 참모총장에게 "필립핀에 증원부대를 보내려면 시간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미국의 중요기지는 오스트라리아로 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마샬은 이 의견에 전폭 찬동했다. 이러한 사리로 보아 바탄반도에 있는 맥아더의 군대에 미국이 아무런 증원도 하지 않게 되었던 조치는 조금도 이상할 까닭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상대방 병력에 관해 양측 사령관 모두 오단 정확성을 기하지 못한 정보 때문에 피아 양군의 사령관이 서로가 정세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다 맥아더의 상황 판단도 석연치 않았다는 점으로써 필립핀에 상륙한 일본군을 실제의 2개 사단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3배나 되는 6개 사단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이런 그릇된 정보를 워싱톤에 보고했던 소치로 본국의 수뇌부가 필립핀 제도에서의 전투를 숫제 단념해 버린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의 혼마 중장도 공교롭게 사실과 틀린 정보를 받고 있었다. 바탄반도에 미군이 2만 5천명밖에 있지 않다고 상정했는데 실을 그 3배수의 대병력이 농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그릇된 판단에 입각하여 혼마 중장은 바탄 공격에 무경험한 제65여단과 제16사단의 1개 연대(별도의 해군육전대 1개 대대)만을 투입했다. 전부 합쳐 겨우 9개 대대병력이며 이에 포병과 탱크 각 1개 연대를 추가했을 정도였다. 작전계획에 의하면 반도의 양쪽을 종대를 이뤄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군의 집결병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의외로 맹렬한 반격에 부딪치게 되었다. 1월 9일에 시작된 일제공격은 처음부터 순조로울 수가 없었다. 11월 '필립핀.스카웃츠'하는 이름의 특수 임무부대 1개 연대에 의해 일본군부대는 보기좋게 격파 당했으며 이때 제65여단장인 나라 소장으로서는 앞으로도 예상보다 분명히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게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필립핀 병사와 미군 병사들의 전의를 상실시키기 위해 저 유명한 '도오꾜.로즈'(일본군의 대미선전방송의 여주인공의 별명.본명은 호요다끼노 부인)에 의한 모략방송이 밤마다 간드러지게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그들의 투지있는 항전은 줄기찼다. 필립핀 최후의 방위로 코레히돌에 사령관 그러자 죠지.파카준자의 남 루손부대는 이름모를 고지에서 격퇴되어 맥아더의 내륙부 측면은 노출되고 말았다. 15일 맥아더는 예하 각 부대에 멧세지를 보내어 전투 계속을 엄명했다. "미국에서 증원이 온다. 수십만의 장병과 수백의 비행기들이 파견될 예정이다...이들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 부대는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지상명령이다. 이이상의 퇴각은 할 수 없다." 맥아더가 이렇게 자신이 한 말은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 생각해 보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몰아 넣었던 것 같다. 파카 준장의 휘하부대는 치역한 전투 이후 서서히 후퇴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웨인라이트 소장이 바이하는 내륙부 측면에서 동일한 작전을 전개했다. 22일까지에 맥아더는 사더랜드 참모장에게 새로운 방위선으로 후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16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1400명 이상의 장병이 실종 되었는데 이제 또 바가크에서 오리온에 걸쳐 짧지만 종전보다 벅찬 미군의 방위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군이 다소의 곤란을 무릅쓰고 반도의 남서쪽 해안에서 해상으로부터 상륙을 기도한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했기 때문이었다. 바가크-오리온에 대한 일본군의 첫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그후 14일간 맹렬한 포격을 집중시킨 일본군은 끝내 이 방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코레히돌에 맹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여기 코레히돌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는데 그의 집무실과 막사는 턴넬안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마린다.턴넬'이라고 이름하는 이 턴넬안에서 총지휘하고 있었다. '다그아웃트.다그'는 병사들의 맥아더송 옥수수 대로 만든 담뱃대를 '콘.파이프'라했다. 맥아더는 이 콘.파이프를 입에 빨며 컨넬안을 큰 걸음으로 걸으면서 스스로 패기만만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단장과 육군 원수의 군모 이외는 간단한 복장이었다. 여러 부하들 특히 측근 참모들은 비참한 운명을 목전에 두고서도 태연자약한 침착성있는 태도를 돋보이는 맥아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야전에서 전투중인 장병들에게는 반더ㅡ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바탄에서는 사생을 결단하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여러 주일 동안이나 코레히돌에서 나오지 않는 맥아더를 전선의 장병들은 '다그.아웃트.다그'(참호안의 다그라스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해학적인 노래가 유행되었다. [다그아웃트.다그 맥아더는 누워서 록크(바위)위에서 떨고 있네 폭격기로 부터는 안전하여 어떠한 충격도 무섭지 않네.] 그러나 이 노래는 불공평한 것이었다. 지하의 사령부는 항상 심한 폭격을 받고 있었으며 맥아더는 이따금 턴넬안의 사령부에서 지상으로 나와 닥치는대로 보조리 파괴해 버리는 소름 끼칠 위험과 위협에 태연히 맞서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머리를 보호하는 철모 쓰기를 외면하여 일본군의 유산탄이나 포탄이 바로 곁에서 작렬해 죽을뻔 했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영웅주의라는 면에서는 그 전과 다름없이 맥아더는 부하들의 모범이 될 그 이상의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최전선에 있는 장병은 이 사령관의 모습을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이런 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맥아더는 이미 예날의 그 맥아더가 아니었다. 바탄의 마지막 최후인 몇 주일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잘 표현하는 노래로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 미국 님도 있지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다. 사촌도 없고 조카딸도 없다. 탄약 비행기까지도 없다. 대포1문마저 없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루즈벨트의 격려사와 항복교섭권까지 받아 맥아더의 의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젠 필립핀인들의 사기는 두드러지게 저하되었다. 미서 전쟁의 영웅이자 필립핀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아귀날도는 맥아더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 '아무런 보답도 없는 일에 이 이상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전투를 단념하도록 간청했다. 맥아더는 이 편지를 받고 마음이 적지아니 동요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월 8일 케존 대통령은 마샬 참모총장을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한 공한에서 미국이 당장 필립핀을 독립시켜 중립화하는 동시 미.일 양군이 철수해 주도록 호소했다. 맥아더도 이에 곁들여 멧세지를 보내면서 부하 장병들이 기진해 있다는 사실과 금명간 '완전붕괴'의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대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즉각적인 원조를 할 수 없으나 "미국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모든 선박이 침략자를 궁극적으로 분쇄할 병력을 싣고서 남서태평양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요지의 회신을 보내 왔다. 그리고 이 회신속에서 맥아더에게 대해서는 최후까지 감투하라는 격려사도 잊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또 케존과 그 각료들이 오스트라리아 경유로 미국에 비랭기편으로 올 수 있는지의 가능성 여부를 물어 왔다. 루즈벨트의 회신에 용기가 솟구친 케존 대통령은 곧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필립핀인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는 격려의 연설을 했다. 전투는 사기가 충천하는 필립핀인들의 반격전으로 계속하게 되었다. 한편 루즈벨트는 맥아더에게 필요하다면 항복에 관해 교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시기는 맥아더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최종 결심은 '아내와 함께 남겠다.' 이에 관해 맥아더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필립핀군을 항복 또는 무장해제 시킬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본인은 바탄이 괴멸당할 때까지 항전할 의사이며 또한 코레히돌의 경우에 관해서도 동일한 의사를 갖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마샬은 맥아더에게 그의 부인과 어린 아들을 잠수함으로 탈출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케존은 이 의견을 받아 들이라고 간곡히 권했다. 마지 못해 부인과 상의한 맥아더는 "아내는 최후까지 나와 함께 남을 생각이오. 우리들은 한 솥의 밥을 먹는 사이이므로..."하고 사양했다. 그리고 마샬에게는 "본인과 본인의 가족들은 필립핀 방위군과 함께 사명을 완수하겠오."라고 회신을 띠웠다. 감격한 케존은 얼마후 가족들과 함께 탈출하기 직전 인장을 조각한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서 뽑아 맥아더의 손가라에 끼어 주면서 "당신의 시체가 발견되었을때 당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어 갔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 전체에게 알려주고 싶소."하고 가슴에 벅찬 말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있다. 2월 26일 바탄의 위기가 절박했다. 맥아더는 전군에 대한 반격을 한번 더 전개하라고 비장한 각오로 명령했다. 그러나 22일 일본군의 착실한 공격이 위기 일발의 폭풍을 몰고 오던 때 맥아더는 민다나오 섬으로 약 1주간 출장하라는 본국으로 부터의 명령을 받았다. 그후 사령부를 오스트라리아로 이동시키고 남태평양에 있는 연합군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나중에 맥아더는 이때의 임명에 관해 처음에는 사양하고 하나의 병사로 백의종군 하겠다는 고집을 보이며 바탄의 방위부대와 함께 남고 싶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2월 24일 이 명령에 따르라는 참모들의 끈덕진 설득에 고집을 부린 맥아더는 "단 오스트라리아로 가기는 하되 지금 저하되어 있는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를 택하기로 하겠다"면서 시기선택의 재량을 조건으로 내세웠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그 적절한 시기는 약 3주일 후인 3월 15일이었다. 맥아더 PT보트로 코레히돌 탈출에 성공 그런데 혼마 중장의 일본 제 14군은 바탄공략을 3주일이나 중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그 부서운 '보쯔게끼' 전법마저 잊어버린듯 전진을 멈추었다는 것이 의아했다. 맥아더는 이 때야 말로 코레히돌을 떠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팼다. 15일에 그를 수송하기 위해 도착할 예정인 잠수함을 기다리지 않고 맥아더와 몇명의 참모들은 어뢰정[주]에 분승하여 민다나오섬으로 향했다. 코네히돌을 떠나기는 3월 12일 이틀 뒤인 14일 민다나오에 도착했다. [주. 어뢰정을 미군은 PT보트라 했다. 맥아더가 이때 탔던 PT보트는 전투에 참가한 미군최초의 것으로 죤.발케리 대위가 조종하는 'PT41'정이었다.본서의 씨리즈참조] 맥아더가 떠난 코레히돌에서는 그의 탈출을 억측하는 비난이 파다했다. 그는 축음기와 장서 및 기탸 값싼 개인 재산을 까그리 옮겨 갔는데 반하여 데리고 갈 수 있는 부하들은 매정하게도 남기고 갔다는 불미스러운 까십이 널리 메아리쳐 갔다. 맥아더는 이것을 명확히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뒷 소문들을 적어도 다소곳이 긍정할 수 있는 증거사 있었다. 그의 부하들의 대부분이 이것은 진실이라고 아직도 확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발설된 그 자체부터가 코레히돌에서의 맥아더와 부하들간에있는 모종의 석연치 않은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에게 가장 친근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위기에 직면했을때의 용기와 부하들에 대한 자애가 맥아더에게서 찾을 수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야전에서 싸운 장병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반드시 이와 동일하지가 않는다. 맥아더의 모토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최전선에 나가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평판은 후방에서 안전하게 지휘하다가 막상 적이 공격해 오면 잽싸게 도주하는것-이라는 극히 불미스러운 평판이었다. 미군의 최고 사령관이기도 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오스트라리아로 떠나라고 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에 그가 코레히돌에서 물러났었다는 것인데 이 평판은 그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상당한 부분이 부당하며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가지 필립핀 함락의 결과 다년한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던 숱한 병사들ㅇ 더구나 코레히돌 함락후 이 수용소로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주 참조>을 강요당했던 불행한 병사들의 항의를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적에겐 수 천명 미군과 필립핀인들에겐 이보다 수천명이나 많은 희생자를 낸 지루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끝에 5월 웨인라이트 소장은 드디어 일본군의 군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필립핀제도 전체에서 14만명이 일본군의 포로로 억류당하게 되었다. [주=이 '죽음의 행진'이 가는 종착역은 마닐아 부근에 설치된 칸루방 포로수용소였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포로들의 도보행진은 6.25 사변때 공산군에 피포된 유엔군측 포로들의 연행에 적용했던 그런 비극에서 연상할 수도 있지만 실로 잔인무도 그것이었다. 가장 악명높은 대표적인 사례가 바탄반도에서 항복한 미.비군 포로들의 연행 때였다. 즉 혼마 중장이 바탄반도에서 항복받은 7만5천명의 미.비군 포로들을 칸루방 수용소에 소용하기 위해 무리한 행진을 강요하여 행진중 많은 사망자가 어이없이 속출했다. 필설로도 참혹한 아니 차라리 죽어가기를 강요하는 도주행진이었다. 여기서 '죽음의 행진'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한가지 덧붙여 부기해 둘 것은 한국인으로 서 잊을 수 없는 비화가 얽혀 있다. 이 '죽음의 행진'끝에 생잔한 포로들을 포함하는 십여만명의 포로들을 수용한 칸루방 수용소는 당시 일본의 남방군 사령부가 갖고 있던 최대규모의 포로 수용소였다. 일제패망 당시의 소장이 우리 한국사람인 홍사익 중장은 이 수용소장 당시 '죽음의 행진'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일본군이 범한 포로학대 사실의 책임을 홀로 지고 전후 맥아더총사령관(GHQ)에 의해 체포되어 필립핀인들의 현지재판에 회부된 결과 수뇌급 전범으로 낙인찍혀 마침내 46년 9월 16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죽음의 행진'을 강요했던 문제의 주인공인 본문아청 중장도 그보다 5개월 앞선 4월 3일 역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국인의 입장으로 볼때 홍사익 중장의 처형은 실로 억울했다. 그 억울했던 사연은 타일에 미루기로 하려니와 요컨대 부하들인 일군 포로감시병들의 야만적인 잔학행위가 깡그리 소장에게 문소된 셈이다. 그에게 사형선고(46년 2월 초)의 소식을 전해 들은 한국국내에선 정당 및 각사회전체들의 주동으로 구명운동을 전개 그의 구출진정서를 맥아더 완사에게 제출까지 했지만 끝내 퇴각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일본육사 동기생인 한국인으론 이청천장군(광복군 총사령관) 류승렬장군(현 국방부장관인 류재흥 장군의 선친) 그리고 생존하는 이응준장군(전 반공연맹 이사장)등모두 13명.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일제육군 계급을 가졌던 홍사익 중장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 1890년 7월생.] 상황판단 그릇치게된 맥아더 배신했을까 맥아더의 필립핀 방위에 관해서는 그의 참모들로부터 이구동성의 극구찬사가 터져 나왔지만 엄밀한 뜻에서 보면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것이 못된다. 하기야 당시의 필립핀 사정으로선 재원도 바닥났고 군수자재도 부족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의 6년간 필립핀 방위를 위해 세울만한 대책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군대는 비참할 정도로 준비부족이었는데 맥아더는 그것이 어느 정도 비참한지 자세히는 파악치 못했다. 진주만 기습사건이 있은 12월 8일의 아침에 그가 범한 실수는 필립핀 상실의 별반 큰 원인은 아닌 것으로 보았을지 모른다. 조만간 필립핀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갓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군과 항공력의 우의는 물론 동등한 병력조차도 확보되지 못한 상태로는 일본군에게 이길 공산도 없거니와 일본군이 우위에 올라서는 세력을 저지할 기회도 없는 것임을 맥아더는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자기의 부하들과 필립핀의 대중에게 증원부대가 온다. 그것도 금방 돈다고 구수한 약속을 되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고 있던 사람들을 결국은 배신하는 결과가 되고 만것이다. 바탄과 코레히돌에 있을 동안에 그의 휘하에 있는 제1선 장병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룩하지 못했던 것도 사기가 도저히 앙양되지 않는 한 원인이었다. 일본군은 바탄반도 공략을 위해 장기에 걸친 전투를 각오해야 했는데 이것 마저도 맥아더의 작전 지휘가 우수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혼마 중장의 제14군이 작전도중에 최강부대임을 자랑하던 제46사단을 차출당해 약체화된 것은 맥아더의 그 어떤 노력보다도 코레히돌의 함락이 지연된 커다란 원인이었다. 물론 이 반도의 방위를 담당했던 장병들의 용감성에 의문을 품을 여지는 조금도 없다. 바탄 농성에 의해 수많은 일본병사들의 생명을 빼앗고 또는 약간의 일본군부대를 요지 부동의 함정으로 몰아 넣을 수는 있었지만 미국은 더많은 전투부대를 투입하여 미군병사와 필립핀 병사에게 그만큼 더많은 희생을 낳게 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본국서 인기 드높아 FDR도 어리둥절 3월 17일의 아침 맥아더가 오스트라리아에 도착할 때까지에 자바 앞바다의 해전에서 이미 일본군은 승리를 차지하고 동인도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동남아는 일본의 속지가 되고 바탄에서의 전투는 이미 일본군에게 있어서 한낱 소탕작전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쟈바와 싱가폴을 이 지역에서의 가장 우선적인 작전목표로 삼고 있지 않았더라면 바탄과 코레히돌은 더 일찌기 실함당했을 것이다. 영국의 정치가 에드워드.그레이경(외상 역임. 1862-1933)의 상투어에 "뭐라고 말하더라도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맥아더는 이 무렵 구차하게 기기묘묘한 변명들을 늘어 놓았지만 좌우간 미국의 필립핀과 서태평양에서 대패배를 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얼버무리거나 상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국에서의 맥아더 평판은 그가 즐겨 구사하는 세련된 말솜씨로 해서 한층 높았다. 맥아더가 미국사에 있어서 가장 통렬한 패배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한 영웅의 상으로 등장해 오는 사실을 루즈벨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더구나 바탄에서 포위된 미군부대의 처량한 운명은 애국적인 미국인의 심금을 크게 울려 주었고 진주만에서의 피습과 이 해(1942년)의 처음 수개월 동안에 미국과 연합국이 입은 막대한 손해에 돌려진 미국인의 격노와도 결부되어서 한층 비장감을 조성해갔다. 이러한 공기를 직감한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선전가치가 미국의 전쟁노력에 크나큰 구실을 했다고 바람직한 뜻으로 판단했다. 대일전의 표어는 '다시 돌아간다' 오스트라리아에 도착한 맥아더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여행끝이라 피로했으므로 무심코 "미국 대통령은 나에게 일본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코레히돌로부터 오스트라리아로 건너 가도록 명령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것은 미국의 반격체제를 조직화하는 것이 그 목적이며 이 반격의 제 1목표는 필립핀의 탈환이다 나는 여기에 왔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언명하고 말았다. "아이.읠.리턴"-나는 다시 돌아간다는 이 맨끝 말이 필립핀과 미국의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계속 추진되는 미국의 대일항전의 표어가 되었다. 아니 필립핀 탈환을 목표로한 대일 반격전의 상징으로써 너무나 유명한 일화를 남기게 되었다. 맥아더는 필립핀에서의 활약에 대해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8.자기본위의 남서태평양 작전 맥아더가 오스트라리아에 도착한 후 참모들은 멜보른으로 비행했다. 맥아더만은 내륙지방에 있는 패트릭.J.헐리를 만났다. 전일의 육군장관 이었으며 현재 당지에서 특수 임무에 임하고 있던 헐리는 "미국의 각 세대는 각각 영웅을 가졌다. 펴싱(본서 제 2장 참조) 듀이(1898년 미서 전쟁에서 스페인 함대를 마닐라만에서 격파했다.) 린드버그(1927년 뉴욕-런던문의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했다.)등이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인은 마음속에 맥아더라는 새로운 영웅을 가졌다."고 장광설의 일가견을 개진했다. 맥아더의 귀에는 정녕 흐뭇한 음악처럼 들리는 칭찬의 소리였지만 이 칭찬의 소리도 이무렵 자주 들어 왔고 해서 새삼스럽지 않았기에 이젠 싫어질 지경이었다.오스트라리아에는 미군이 2만 5천 밖에 없으며 비행기도 260대가 그 전부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이 쓸모없는 종이 비행기 같은 것이었다. 일본군의 침공을 겁내던 오스트라리아인들은 연합군이 브리스베인의 선까지 후퇴하면 오스트라리아 대륙 북부의 해안선 전부를 일본군에 점령당해도 무방하다는 안을 제기했다. 오늘의 역사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은 이미 획득했던 방대한 자원을 활용하여 멀지않아 오스트라리아를 요리하기 시작할 속셈이었으나 당시 일본군의 의도는 오리무중이었다. 맥아더는 방위준비가 너무도 빈약한데 놀랐지만 노동당출신인 오스트라리아 수상 죤.카틴에게 대해 만일 수상이 후방을 책입져 준다면 자기는 확고히 전선을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다. 이에 카틴은 맥아더의 언명을 신뢰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맥아더는 미국의 명예훈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격려도 되었거지와 마샬과 맥아더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항간의 소문이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하기에도 적지않은 보탬이 되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가 기계처럼 원활할리가 만무했다. 반드시 불화라곤 단정하기 어렵지만 석연치 않은 이 상태의 계기는 그해 말의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이후 포로신세로 억류된 딱한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같은 명예훈장을 주어야 한다는 마샬의 제안을 맥아더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3월 말께 맥아더는 캔버러에서 개최된 전쟁 자문평의회에 참석했다. 평의회는 오스트라리아 정부의 각료와 야당의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맥아더는 일본군이 곧 오스트라리아를 침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을 피력했다. 일본군은 전선을 너무 광대하게 전개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껏해야 북부의 항만을 폭격으로 점령하려 할 정도이지 그 이상의 강력한 병력으로 침입해 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는데 이 추측은 정확했다. "독일 보다는 일본을 격파하라" 연합군을 브리스베인의 후방선으로까지 후퇴시키는 구상에는 반대한 셈이 되지만 맥아더는 독일을 타도하기 보다는 일본을 먼저 타도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곧 연합군으로서의 급선무라는 종래의 의견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례에 따라 일반에게 납득돼 있는 의견에는 배치되는 것이며 따라서 워싱톤의 찬성을 얻기는 어려웠다. 태평양에 보급품을 보내느냐 않느냐를 결정하는 최종 권한을 가진 편이 워싱톤 정부이니 만큼 맥아더의 입장은 괴로운 것이었다. 맥아더는 전쟁 종말까지 이 주장을 끈덕지게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의 고위층이 그에게 품고 있던 숙년의 증오를 공연히 부채질할 뿐이었다.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작전에 보급품을 보내는데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해군 작전부장인 킹 제독은 대통령 앞에서 맥아더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래도영국에 대한 원조를 제1의로 삼는 정책은 여전히 최고의 우선순위를 유지했다. 어떤 단계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도 맥아더가 요구하고 있던 10만명의 전투 부대와 1000대의 비행기를 보내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가 았더라도 영국에서의 군비강화를 지연시킬 수는 없다는 확고부동한 대원칙이 서 있었으므로 맥아더는 루즈벨트의 설득에 습복하고 말았다. 오스트라리아에 도착한 후 처음의 몇달 동안은 맥아더의 표정은 참통했다. 필립핀에서 얼마전에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으며 그렇다고해서 필립핀으로 "나는 돌아간다"의 실현 가능성도 밝아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희박해져 가는 듯 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고뇌는 병력증강에 미국은 병력과 군수물자의 증강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는 있었지만 1942년 중간까지에는 완전한 전시체제로 들어서 있지 않았다. 이때까지 미국 산엽계는 대부분의 소비재 생산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의 기계들을 바꾸거나 공장 자체를 군수 공장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일조일석에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는 미국 국내에서 군대와 병기를 만들어 내는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으며 또한 작업의 지연과 관료들의 무능력이라고 생각되는 점에도 그의 노기가 대단했다. 맥아더가 필립핀에 있을 동안 태평양 전선을 증강하는 단안이 내려지고 다수의 장병이 인도와 자바 등지로 파견되었다. 1942년 중간까지는 오스트라리아에 5만 7천명 태평양 전역에는 통털어서 7만 9천명이 파견된 기록을 보였다. 남서태평양 지역의 연합군 사령관으로 맥아더가 오스트라리아에 도착하기 2,3일 전에 이미 여러 차례의 재편성이 실시 되었던 연합군의 지위계통이 다시 개편되었다. 작전지역을 크게 셋으로 구분했으며 태평양 전역은 미국 통합 참모장 회의가 담당하고 인도양과 중동전역은 영국 참모본부가 분담 그리고 유럽.대서양 전역이 미국과 영국의 공동 책임으로 한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다시 태평양 전역은 크게 양분해서 하나는 중부.남부마ㅊ 북부 태평앙지역을 포함하는 태평양 전역과 다른 하나는 오스트라리아 뉴기니아 필립핀 및 동인도 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제도)의 태평양 전역으로 하여 통괄 되었다. 4월 1일 맥아더는 오스트라리아에 있는 주요 군사기지를 '장차 공격 작전용의 기지'로서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라고 금후의 명령은 미국 통합참모장 회의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편조치가 있는 다음 4월 18일에 맥아더는 남서태평양에서의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아 대일 반격전의 새 장을 열기 시작했다. 육군장교 1변도의 브레인.트러스트 맥아더가 브레인.트러스트를 구성하는데는 한결같이 수구적이었다. 이튿날 임명된 그의 선임참모들 가운데 3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필립핀에서 맥아더와 함께 오스트라리아까지 온 참모들이었다. 마샬 참모총장은 네델란드 및 오스트라리아군의 장교를 선임참모로서 포함하도록 강력히 권고했지만 맥아더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이 참모들의 대부분을 미국의 3군에서가 아니라 육군에서 발탁했다. 그의 사령부 요원을 모두 육군의 장교이며 해군.해병대. 항공부대의 사령부는 각각 별개의 건물에 설치되었다.이 때문에 맥아더는 항공부대와 해군의 전문가와는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없게 되었다. 그의 직속 지휘관인 써.토마스.브레이미 호주 육군대장(육군담당) 죠지.H.브렛트 육군 소장(항공부대 담당) 허버트.F.리발리 해군 중장(해군 담당)등은 각각 연합군 장병 전체를 대표하는 참모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맥아더가 장악해야 할 지휘권을 오히려 그들이 행사하는 격이 되었다. 고독하고 경원되고 있다는 피해망상으로 고민하고 있던 맥아더는 자기 주위에 헌신적인 참모들의 소그룹을 만들 작정이었다. 그들은 모두 맥아더를 오랫동안 섬겨 온 장교들이며 생소한 외부 장교들을 영입함으로써 결속을 약화기키고 싶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의 지휘하에 있던 해군과 항공부대는 빈약했다. 해군에는 몇 척의 순양함과 잠수함 그 이외에 오스트라리아 해군의 수효는 많지만 소형의 함정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당장에라도 반격을 개시해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총합적인 전투계획에 관련하여 맥아더는 4월 25일 '지령 제1호'를 발했다. 오스트라리아의 북동부 해안 또는 오스트라리아령 뉴기니아의 남서부 해안에 일본군의 상륙을 일체 허용치 않는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뉴기니아에 대한 전면공세까지는 몰라도 뉴기니아 전체를 일본군에 넘겨 주지 않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이었다. 무전방수로 대비한 뉴기니아 방위작전 이때까지의 사이에 코레히돌은 함락되고 쥬기니아의 수도 포트.모레스비의 방위는 비행기로 강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세인 파푸아대대를 지원하기 위한 민병 1개 여단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오스트라리아 본토의 다윈(북부 도시)에서는 미군의 전투기 3개 비행대가 방위지원을 위해 배치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약 1만 5천명의 오스트라리아 부대가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이 다음의 공세를 취하고자 결단하기는 이 무렵이었다. 뉴기니아의 동쪽 쥬브리텐섬에 있는 라바울에 부대를 상륙시켜 포트.모레스비 공략을 노리는 작전이다. 일본군의 부전을 방수 해독하여 이미 이 공세에 대비중이던 미군은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해군부대를 솔로몬해에 집결시켰다. 5월 5일부터 8일까지에 걸친 산호해에서의 해전에서 연합군은 항공모함 '렉신톤'과 함선 2척을 격침당했지만 일본의 소형 항공모함 '쇼호'가 미군 함재기에 의해 격침된 최초의 일본 항모(항공모함의 약어)로서 기록되었으며 더 중대한 사태는 이 공세를 취한 일본군의 좌절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연합군측의 승리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포트.모레스비에 있던 연합군부대는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더라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태평양을 무대로 삼던 쓸만한 미국의 항공보함은 겨우 2척-'호넷트'와 '엔터프라이즈'였으며 일본군이 불원 하와이를 공격할 위험성이 춤분히 있었다. 5월 12일 맥아더는 카틴 오스트라리아 수상에게 전황이 악화되었다고 전갈하는 동시에 마샬 참모총장에게는 항모 2척 3개 사단 그 밖에도 항공부대의 증강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맥아더로부터 연이어 발하는 멧세지도 "먼저 힛틀러를!"(유럽전선을 보다 중시한 전쟁수행의 구호)이라는 워싱톤의 정책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힘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성가신 존재로만 여겨졌던 실정이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에 포상을 적극반대 이 단계에서 맥아더가 할수 있는 조치라고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코레히돌 요새가 함락당할 때까지 웨인라이트를 위문하는 친서를 보내거나 신문발표용의 뉴스를 내보내는 일이었는데 이 뉴스들이 미국 국민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유용한 흥분제 구실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뉴스를 내보냈던 경우가 있었다. "코레히돌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말 할 것은 없다. 코레히돌은 그 대포의 입을 빌어 자신이 격은 일들을 이야기해 왔다.그라고 코레히돌은 적의 묘비에 비문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친지를 진동하는 마지만 포탄의 피비린내 나는 초연을 통해서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수척하여 마치 유귀처럼 앙상해진 병사들 그렇지만 아직도 공포를 모르는 그 병사들의 모습을 나는 언제까지나 응시할 것이다." 이 얼마나 화려하며 풍부한 표현인가. 이런 표현을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유귀처럼 앙사애진 병사들'을 지휘하며 코레히돌을 사수하고 있던 웨인라이트를 맥아더는 명에훈장 수장 대상자로서 추천하는데 인색했다. 그가 마샬 참모총장의 제의마저 거절하고 웨인라이트에 대한 훈장수여를 끝내 반대했던 처사는 무엇으로 해석해야 좋을지.. 육군 밖에 모르는 연합군 사령관 5월 25일 맥아더는 포트.모레스비에 대해 일본군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할 기미가 짙다고 경고하면서 방비를 강화하는 동시 호주 북동부 퀸즈랜드주에 있는 전진기지에 부대를 파견했다. 전부터 예상되어 오던 중부 태평양에서의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것은 이 방비강화가 있는 얼마후의 일이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중요시되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모 부대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거둔 최초의 대승리였다. 이 해전은 태평양에 있어서 승패의 전환점이 된 결정적 전투였으며 이후 일본의 선제적 공세의 종막을 고하는 전략적인 의미가 컸던 해전이었다. 이 승리로 용기 백배한 맥아더는 다시 마샬 참모총장에게 더 많은 병력과 무기의 증강을 간청하고 라바울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약 1000킬로 북쪽의 트럭섬 기지쪽으로 격퇴시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병대 1개 사단과 적어도 2척의 항모 그 뒤에 상당한 해군부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는 심한 반대가 없었다. 첫째로 항공모함은 육상 기지에서 비래하는 일본기의 제일 공격대상이 되며 동시에 연합군의 육상 기지로부터 발진하는 항공기는 함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가 없다. 육군밖에 모르는 군인인 맥아더는 항공병력의 중요성과 해군의 이용도에 관해 좀더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단계에 이르러서 마샬은 태평양에 주요 병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국내의 생산체제가 비로소 정비되고 징병제도도 본궤도에 오르게 됨에 따라 맥아더가 갈망하던 태평양 전선에의 증강조처가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니밋츠와 일본본토 선공을 두고 경쟁 당시 대일 반격계획에 관해서는 태평양의 두방면에서 작전을 지도하는 두 지휘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맥아더와 니밋츠-. 체스터.W.니밋츠 제독은 해군 부대가 육군군인인 맥아더의 지휘아래 놓이게 되는 것을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기의 작전을 하와이로부터 서쪽으로 개시하고자 결심했다. 한편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방면의 지휘관으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북서쪽으로 반공 작전을 전개하고자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맥아더가 자신의 휘하에 실질적인 해군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니밋츠와 맥아더가 어느 편이 먼저 일본을 굴복 시키는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정부 내에서도 정치의 무대에서도 일의 능률적인 진척을 위해서는 이 종류의 대결이 바람직한 것으로 항상 중요시하뎐 루즈벨트는 두 사람의 대결에 의한 경쟁을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육군과 해군의 필엽적인 경쟁의식은 연합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을 항복케 하는 것이 연합군의 최대의 관심사인 이상 어느 누구에 공적이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군은 맥아더를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해군의 제독들은 이 종류의 대결을 환영하면서 니밋츠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스팀슨 육군장관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맥아더는 늘 '불화의 씨'였다. 장군으로서의 그의 영특함은 반드시 여재함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해군에서 그를 경멸한 것도 자못 치졸하게 보였다." 필립핀 탈환위해 '디딤돌작전'개시 7월이 되자 태평양에서의 승리를 목표하는 통합참모장의의 방침이 드디어 겨정되었다. 발표된 바에 의하면 그 목적은 뉴브리텐-뉴아일란드-뉴기니아를 연결하는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7월 2일자로 된 이 지령에 의해 니밋츠 제독이 임명하는 지휘관은 산타크루즈제도 과달카날에 가까운 쓰라기섬 이에 근접한 제도를 점령한다. 한편 맥아더의 부대는 솔로몬제도의 나머지와 뉴기니아의 북동쪽 해안 라바울 뉴기니아 제도와 뉴아일란드 제도의 내부 및 주변의 진지를 점령한다.-는 것이다. 섬따라 옮겨 뛰며 직격한다는 소위 '디딤돌 작전'은 이리하여 시작되었다. 이 지령에 대한 회답에서 맥아더는 쓰라기-산타크루즈 작전을 늦추고 계획의 다른 부분을 선행 시키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해군 작전부장 킹 제독은 당초의 지령대로 작전하기를 주장했다. 맥아더는 이에 생각을 고쳐 처음의 요청을 취소했다. 맥아더에게는 그가 구상한 작전을 전개할만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킹 제독은 맥아더로부터 지령대로 작전하겠다는 멧세지를 여러번 받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생각을 고쳤는지 그 까닭을 몰랐다. 맥아더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낙관이 많았다. 그러나 맥아더가 워싱톤과 통합참모장회의를 끝끝내 신뢰하지 않고 또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태도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 맥아더는 유럽의 제2전선을 넌센스 라고 비웃으면서 쏘련에 가중되고 있는 압력(힛틀러의 쏘련침공)을 제거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군의 총력을 기울여 집요한 대일 공격을 계속하는 작전이라고 고집했다. 이런 발언은 워싱톤에 대한 맥아더의 입장을 악화시켰을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아주 유치한 발언이었다. 쏘련은 아직 일본과 전쟁중에 있지 않았으며 쏘련의 입장에서 보아도 구적이요 금후 또 적이 될 수도 있는 일본을 멸망시키는 결과로는 되지만 이것이 현재 당장 쏘련을 돕는 셈은 되지 않는다. 당시 쏘련이나 미국도 독일을 타도하는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쏘련은 국내 깊숙이 침공해 온 독일군의 위협에 허덕이고 있으며 미국의 동맥국들도 한 둘을 제외하고는 이미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미국이 '타도 독일'직전을 최우선 시킨다는 것은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뉴기니아의 병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수단을 강구 라바울 공격의 준비를 서두렀다. 일본군은 뉴기니아에서 전진을 계속하고 오스트라리아군 부대는 점점 후퇴하는 대조상을 보였다. 8월 25일 일본군은 미룬만의 비행장 부근에 약 2000명의 해군육전대를상륙시켜 포트.모레스비에 대한 두번째의공격을 개시했다. 오스트라리아군은 10일 동안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곧 이어 격파하기 시작했다. 이 패배는 일본 해군육전대가 태평양에서 당한 최초의 패배로 기록되었다. 맥아더는 이 미룬만 작전은 물론 트럭섬에 대한 공격이 그 전지 기지에 깁착하는 결과만으로 끝난데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동남아의 산악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거니와 뉴기니아를 시찰한 것도 10월이나 되어서였다. 그의 낙관적인 견해는 그의 최대의 결점이기도 했다. 일본군에 의해 부득이 오스트라리아로까지 후퇴한 이상 연합군의 전투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는 지체없이 수정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부하들과의 단절 해소 어려워 그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않는 자세도 문제였다.이것은 그의 결점이기도 했다. 사람을 위압하는 듯한 근접하기 어려운 그의 근엄한 태도는 다년간의 군인생활로 굳어 버린 것이지만 이것이 수많은 부하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지 못하는 큰 원인으로 되어 있었다. 부하인 항공부대 사령관 죠지.브랫트 소장은 맥아더로부터 흑심한 비판을 받았는데 브렛트는 맥아더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약 4개월 동안에 맥아더와 회동한 것은 단 여덟번이었다. 브렛트는 얼마후 죠지.C.케니 집무실에 빈번하게 그것도 기회가 있는대로 과다하게 출입했다. 빈번한 대면이 맥아더와 친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케니는 명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 사람 사이에 움튼 신뢰감은 장차 연합군에게 유리한 전력으로써 꽃을 피워 갔다. 케니의 재치있는 명랑성은 필립핀에서의 패배를 되새기며 아직도 침통한 심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맥아더를 마냥 기쁘게 해주었다. 케니가 취임한 이후 다른 부하들에 대한 맥아더의 태도는 다소 온유해지고 접촉도 많아져서 정보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현상이다. 어떤 부하의 경우에도 맥아더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이 중요한 열쇠였다. 이런 자세를 못 갖추거나 충성심을 돋보이게 하는 태도가 없는한 그의 측근 그룹에는 끼일 수도 없었고 필경은 그의 일방적인 질책을 받기가 관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마닐라의 사령부에게 볼 수 있던 그런 법정과 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오스트라리아에 와서는 다소 완화된 수정을 보여 주었지만 아직 뿌리깊게 남은 그 고질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디딤돌 작전 1호는 과달카날 공격으로 통합 참모장회의의 공세작전 제1탄은 8월 8일 제1해병사단에 의한 쓰라기 및 과달카날섬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디딤돌 작전'의 발단이 된 것이다. 미군은 이 상륙전에서 항모 1척을 잃고 다른 군함 2척에 손실을 당했지만 다수의 사상자를 빚기는 오히려 일본군이었다. 그리고 9월까지에는 2만명의 연합군 장병이 잇따라 상륙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맥아더는 뉴기니아의 일본군에 대해서는 신중한 공세를 전개했다. 맥아더가 니밋츠 제독에게 더많은 지원을 요청했지만 니밋츠는 이를 묵살했다. 후일 맥아더가 뉴기니아에 대대적인 육상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던 책임을 니밋츠에게 전가시킨 것은 이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데 맥아더는 의당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했으며 그에게는 사실상 그만한 병럭은 확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호주군이 일본군을 미룬만으로부터 완전히 구축하지 못했던 작전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마샬 참모총장과 카틴 호주 수상에게 미군부대를 증원군으로 즉각 파견할 뜻이 있음을 명백해 통보했다. 호주병사보다 미군병사가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것으로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이런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에 일본군 당국은 현지부대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보급이 두절된 상태에서 더이상의 계속적인 공세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부대가 활기있는 진격을 계속하는 반면 일본군의 의기소침한 후퇴가 거듭되는 희망적인 전황에 자극을 받아 이 논란은 어느 틈에 가시고 새로운 작전계획에 중론을 모았다. 그때까지 뉴기니아에서의 작전은 실패였는데 그 이유는 맥아더가 파푸아(남동 뉴기니다)의 소탕작전보다도 과달카날섬 탈환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만일 솔로몬제도가 점령되면 뉴기니아의 일본군은 분단되어 더 용이하게 격멸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사태는 호전되어 갔다. 병력과 물자의 증강은 착실히 진척되었다. 준비완료와 동시에 맥아더는 뉴기니아에서 전면적 공세로 나갈 의도였다. 11월 1일 마침내 명령이 하달되었다. 연합군은 뉴기니아에서 두 갈래의 진격로를 따라 전진했다. 한편 다른 부대는 미룬만의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이렇게 의욕적인 뉴기니아 반공 작전을 전개 했으면서도 맥아더의 의중에는 의연 과달카날섬 탈환을 중시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섬 공략 늦어져 루즈벨트와 맥아더는 과달카날 탈환이 자꾸 지연되는데 같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12월 31일이 되자 맥아더는 만약 과달카날의 전황이 더 악화될 경우 파푸아 북부해안의 연합군 주둔지역에 있는 병력을 과달카날의 증원군으로 전용한다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오웬,스탄리 산맥(뉴기니아)에 작전중인 장병들에게 보급물자를 공수했지만 이들 부대의 기동력은 당장 기대하기 어려웠다. 11월중에 작전 성공을 본 다음 부나로 향하는 협격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때를 같이하여 과달카날 탈환 작전에서는 일본군이 막대한 손해를 당하고 있었다. (본서의 씨리즈<과달카날>참조) 연합군은 대결하고 있는 일본군이 숫적으론 우세하나 보급과 전력면에서 이미 동이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본군의 상태는 마치 바탄과 코레히돌에서 포위당했던 미군이 농성하던 때와 같은 경우를 연상케 했다. 그래도 파푸아 북쪽의 부나 교두보 탈환은 용이치가 않았다. 이 고전에 맥아더 역시 골치가 아팠다. 11월의 약 2주간에 걸친 연합군의 전면적인 공격도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군병사들이 말라리아와 이질에 시달려야 했는데 반해 일본군의 방비는 결사적인 것이어서 간단히 붕괴되질 않았다. 연합군의 보급은 아직 전반적으로 충분치 못한 실정인데다 과달카날 탈환작전에 집중되고 있었던 관계로 부나를 포위중인 연합군 부대에게는 거의 보급품이 도착되지 않았다. 파푸아섬의 부나 교두보 겨우 점령 맥아더는 비판의 화살을 받았다. 휘하 미군장병들이 부나를 아직 점령치 못하고 일본군에 부딪쳐 겁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로버트.아이켈버거 중장을 현지에 파견 이 원인을 조사하게 했다.추ㅍ발직전 아이켈버거에게 부나를 점령하기까지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고 엄명을 전달했다. 그러나 부나에 접근한 아이켈버거는 현지 사정이 심각한데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의 현황도 말이 아니었지만 병사들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이 지휘관에게 결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이 견해는 맥아더의 의견과 일치했다. 아이켈버거는 이 전선의 하딩 사령관을 월드론 소장으로 경질시켰지만 부나의 탈환에는 부대의 증원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얼마후 호주군 1개 여단이 현지에 파견돼 총공격을 가한 결과 부나에는 43년 1월 2일에서야 비로소 돌입했다. 맥아더는 미군부대에 대한 호주인들의 비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한편 이 비판 가운데 약간의 진리가 없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과달카날을 점령할 때까지 증원을 받지 못했던 맥아더는 호주군 전투 부대를 차출해 출동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당시 그 유명한 '엘.알라메인 전투'(북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군의 몽고메리가 독일 룸멜 전차군전을 격파한 사막전. 본서의 씨리즈 <롬멜 전차군전>참조)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이 동원은 불가능했다. 연합군의 공격은 이처럼 갖가지 형태의 곤란에 직면했지만 부나에 있던 일본군 거점은 1월 22일 드디어 함락되었다. 뉴기니아에 있던 약 2만명의 일본군 가운데 1만 3천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연합군의 손해도 막심했다. 3천명 이상의 연합군 장병이 전사했으며 이외에 2만 8천명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이 연합군의 인적 손해는 약 1만 6천의 미군 장병이 전사한 과달카날 보다도 많은 계수였다. 파푸아의 공략도 불꽃 튀기는 치열한 격전이었음을 말해 준다. 케니 장군의 항공부대는 뉴기니아 남부에서 포위된 일본군부대의 보급활동을 봉쇄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국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1942년말에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 온 제공권과 제해권이었다. 남서태평양은 연합군의 반격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보급태세가 정비된 시점에서 공세를 취하려고 서두렀는데 이 판단은 정당했다. 쑈맨처럼 승리를 과대하게 발표해 그런데 연합군이 사실 승세를 굳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맥아더는 연합군의 승리를 과대하게 표현한 성명서를 곧잘 발표했다. 미국 본국에서의 전의를 고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기록을 왜곡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성명서는 모두 연합군이 이러이러한 지역을 점령했다고 과장해 본국의 미국인들에게 적어도 미군이 준부시게 활약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어느 종군기자들은 그의 성명대로 미군이 점령한 것으로 믿었던 지역이 막상 현지로 취재차 출장 가보았더니 호주군의 점령 사실로 밝혀져 어리둥절 했다는 사례가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이처럼 허장성세로 과장 또는 왜곡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한마디로 워싱톤에 대한 불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전과 칭찬을 마음속으로부터 크게 바라는 그의 성품이 아마 최대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태평양 전국을 결정적으로 역전시킨 대해전으로 '미드웨이 해전'이 유명한데 맥아더는 이 해전에 아무런 역할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함에도 미국의 대중들은 전국역전이 맥아더의 압도적인 승리와 군인으로서의 천재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장수로서의 맥아더의 명예에 구태어 오점을 남기게 할 필요는 없으러니와 설혹 그가 과오를 범했다 할지라도 군인으로서 그에게 맞설만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가 원했던 바는 승리 이상의 것-영광이었다. 남북전쟁사 즐기는 제2의 맥크레란 이런 성명서와 실제 업적에 의해 맥아더는 미국 대중들의 위대한 영웅으로 크로즈업되고 있었다. 심지어 미쉬간주 출신의 반덴버그 상원의원은 1944년의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고까지 했다. 이것은 바로 맥아더가 열망하고 있던꿈이었다. 남북전쟁사를 연구하고 있던 맥아더는 링컨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았던 북군의 맥크레란 장군에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맥크레란은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 전 최고사령관(대통령)에 맞서 출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유한다고 해서 맥아더는 칭찬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맥아더는 '비스말크 해전'이후 대통령으로부터 세번째의 수훈훈장과 아울러 영국으로부터는 바스 훈위대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첫해에 좌절당한 초반을 제외하고는 미룬만과 중부 파푸아 및 남부 뉴기니아등 세 지역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영광에 보람찼다. 여느때와 같이 맥아더가 광범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장병들은 생병을 도한 혈전을 전개해었건만 결국 맥아더만이 공훈자로 우뚝 솟을 뿐이었다. 이것은 휘하의 장병들이 그를 경모하지 않은 중대한 원인이 되긴 했지만 군사상의 천재로서 미국 본국에서의 명성을 드높이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편이었다. 맥아더의 소신에 의하면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것은 "좋은 매네져인 동시에 부하가 항상 관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우러러 보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요감무쌍한 부하의 전공은 따지고 보면 결국 그 부하를 통솔한 지휘관의 우수한 리더쉽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훌륭한 부하에게는 보다 훌륭한 지휘관의 리더쉽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자신의 공명심을 드높이기 위해 부하의 전공을 의리없이 가로 채는 비열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가 능변이며 다변이란 정평있는 성격을 이해한다면 그의 제스츄어를 오해할 까닭이 없다. 맥아더는 부하를 사랑했으며 이 사랑을 바탕으로하는 지휘관으로 발군의 이메지를 부각시키려 한 것이었다. 9.일편단심으로 필립핀 탈환에 1943년 봄까지에 승패의 전망은 명백히 연합군에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쏘련에 전격전으로 진공했던 독일군은 쏘련 남부의 스타린그라드(현재는 볼고그라드)에서 격퇴되었으며 (본서의 씨리즈<스타린 르가드>참조) 한편 연합군은 엘.알라메인에서의 승리 이후 북아프리카의 사막을 넘어 남쪽으로부터 이탈리아에 진격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독일군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멀지않아 3대 추축국의 하나이던 이탈리아가 전선에서 탈락할 단계에 놓여 있었다. 태평양전역에서의 전황은 쏘련전역이나 지중해 전역만큼 결정적인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을 포기하고 뉴기니아에서도 패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철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승리를 확실하게 굳히는데 필요한 군수보급을 거절당했다고 여전히 불평을 실토하고 있었다. 항공부대를 분란한 실책을 자각 킹.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 할제 제독으리 제3함대 제13항공군과 케니 장군의 제5항공군은 이때야말로 막강하게 성장했지만 맥아더 지휘하의 부대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맥아더는 이때가 되어서 항공부대를 별도로 편성했던 조치가 잘못된 것임을 의식하고 이점을 케니에게 솔직히 토로했다. 케니는 벌써 육상부대와 항공부대에 의한 입체적인 협동작전을 통해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요컨대 연합군의 장기적인 전투계획은 여전히 '힛틀러 타도 제1주의'를 표방한 기본적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유럽에서 연합군이 최종적인 승리를 차지할 때까지는 맥아더를 비롯한 각 사령관은 태평양 전역에서 지구전을 호불호간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야말로 태평양의 승리자 미국이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의 약 30퍼센트가 태평양 전역에 투입되어 있었으며 마샬 참모총장도 이 수준을 유지하고자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프랑스(독일 점령하에 있는)에 대한 반공이 1942년 안에 시작되지 않을 경우 태평양 방면에 더 많은 보급품을 증원함에 찬성했다. 계획에 의하면 라바울을 점령하여 알류산을 확보한 후 마샬제도 및 길버트제도를 거쳐 트럭섬과 마리아나 제도를 진격하기로 예정되었다. 태평양에서의 작전은 CBI(중국.버마.인도)전역과 더불어 전쟁수행 순위상 최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해군은 태평양에서의 승리를 해군의 명예를 갖고 독점하려는 계획이었다. 해군이 이런 좁은 소견에 사로잡혀 있고 전쟁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시기에 어째서 육해 양군간의 경쟁이 허용되고 있었는지 도대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작전부장 킹 제독이 맥아더와 니밋츠의 지휘권 분리를 주장한데 대해 맥아더는 지휘권 통일을 고집했다. 워싱톤 정부도 지휘권 분류의 비능률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육군과 해군)는 종전대로 각각의 지휘권을 행사했다. 미군 군부 안에서 공적을 독점하고자 했던 인물은 맥아더만이 아니었다. 킹도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영예를 자기와 해군이 독점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다만 킹이 맥아더 만큼 자기 선전에 능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통수계통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1943년 3월 중순 남서태평양.남태평양 및 중부태평양 각 전역의 대표자들이 소집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맥아더의 대리로 참석한 사더랜드 참모장은 '엘크톤'이라는 암호를 가진 계획을 제출했다. '엘크톤 수정계획'에 할제제독도 일역 일본군 병력에 대한 당시의 추정으로는 북부뉴기니아와 솔로몬제도에 7만 9000-9만4000명의 병력과 비행기 383대 전함 4척 항모 2척 및 순양함 4척이었다. 이 전력은 필요에따라 보강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망되었다. '엘크톤 계획'은 이러한 일본군의 전력에 감안하면서 5단계의 공세작전을 제안했다. 즉 뉴브리텐섬에의 상륙을 지원하기 위한 폰 반도의 비행장 탈환 뉴브리텐과 부겐빌의 비행장 탈환 카비안 점령 그리고 라바울을 고립화시켜서 점령한다는 것이 그 중요 골자였다.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할제와 맥아더는 5개 사단 .4개 비행연대와 해군부대의 증파를 요청하는 단서를 곁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더랜드 참모장은 이 회의에 늦게 임석한 맥아더에게 이 증원 부대의 파견이 용이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시간 의논은 계속되었다. 결국 이 계획에 대동소이한 새로운 계획이 채택되었다. 이름하여 '엘크톤 수정계획'-. 할제는 브리스베인에 가서 이 계획을 맥아더와 상의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맥아더는 "만난 순간부터 호감을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할제의 맥아더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맥아더에게 뉴죠지아섬을 공격하도록 즉시 진언했으며 맥아더 자신도 종래 품어 온 욕구의 일부를 할제가 맡아 주는데 환영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의기투합한 것이다. 워싱톤에서는 두 갈래작전 한편 뉴기니아에서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판국에 킹 해군 작전부장은 조급히 작전개시를 서두르고 있었다. 워싱톤에서는 '트러아댄트'(1943년 5월 루즈벨트와 쳐칠의 회담0라고 불리우는 회답이 개최되었는데 그 결과 태평양에서 두 방향으로부터 대일 반공작전을 전개하며 맥아더가 전부터'엘크톤 계획'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 7개 사단의 증원 확보가 결정되었다. 통합참모장회의는 맥아더에게 마샬제도에 대한 공격개시를 명령하도록 촉구하고 이에 소요되는 일정을 문의했다. 맥아더는 연합군이 남으로부터 북으로 뻗은 공격선을 따라 뉴기니아에서 민다나오를 향해 전진하도록 제안했다. 맥아더에게는 아직도 필립핀을 하루라도 빨리 탈환하고 그리고 통합참모장회의에 애해서는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전선으로부터 해병 2개 사단을 차출한다면 라바울의 점령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드디어 타협이 성립 맥아더는 9월 1일 까지에 뉴기니아 북동부의 해안을 점령하고 12월 1일 또는 그 때까지에 뉴브리텐을 공략하게 되었다. 마샬 참모총장은 맥아더의 휘하로부터 폭격기 2개 연대를 차출하고자 했으나 여의케 되지 않았다. 맥아더의 증수 요구는 당연해 맥아더가 기회있을 때마다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점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전쟁수행의 우선순위에 대한 그의 불만의 반영이었다. 마샬과 킹이 항상 병력과 무기를 맥아더에게 보급하기를 회피하고 있다는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다. 맥아더가 오스트라리아로 옮겨 남서태평양 전역에서의 작전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에는 전쟁의 초기단계였으며 또한 별로 활동할 수 없는 지역의 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하와이는 일본에 보다 가까우며 전쟁의 목적 자체도 일본을 타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을 점령하는데 있는 것이지 필립핀의 탈환에 두고 있지 않았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 및 북해 방면에 비교하면 태평양 전역의 우선순위는 뒤떨어지는 것이며 맥아더늬 입장도 이 우선순위에서 보아 별로 중시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여러사지 사정이 고려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령부는 재삼재사 거듭하여 태평양 전역에 대한 병력증강을 거의 절규하다시피 요구했던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은 천편일률 냉담일편도 였지만-. 그러나 맥아더는 자기의 입장을 강화하고 바탄의 설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부하 장병들을 지키고 부하들에게 퐁죽히 보급해 주고 싶다는 강인한 충동에 복바치고 있었다. 이것은 양심적인 지휘관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목적이며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맥아더가 과욕해서 무턱대고 병력과 무기를 요청했었다는 논평은 진상을 모르는 험담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지휘관으로서의 신념에서 오로지 그렇게 했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라바울은 고립 시켰으나 불낙 6월 말까지에 뉴죠지아섬의 남단을 할제 휘하의 부대가 점령했다. 그후 수개월 동안 솔로몬 제도에거 격전이 계속되어 부나와 과달카날에서의 전투에 필적하는 커다란 손해를 당해야 했다. 이처럼 해서 솔로몬 제도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 오기는 10월이나 되어서였다. 해군의 전투기도 부겐빌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이 근처는 라바울에 가장 가까운 '디딤돌'이었다. 한편 케니장군의 제5항공군도 전투력이 크게 증강되었으며 뉴기니아에서의 연합군 육군부대가 쟈바로 전진함에 따라 일본군의 저항도 날로 약화되었다. 9월 뉴기니아의 나도자브를 공습하며 제503공정 연대를 과감히 강화시킨 영단이 인정되어 맥아더는 항공군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수장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면서 그는 자못 감격했다고 한다. 연합군의 뉴기니아 작전은 차츰 활기를 보여 리에를 9월 11일 함락했다. 이러서 맥아더는 일본군의 배후에 상륙부대를 투입하는 결단을 내렸는데 이 상륙작전은 태평양에서의 그의 작전상 성공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핀슈하펜에 대한 공격명령이 내려지고 10월 2일에는 이곳을 점령했다. 마샬 참모총장으로부터 라바울의 고립화와 동일한 전술을 쓰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이 점은 맥아더도 같은 의견이어서 라바울이야 말로 금후의 작전에 보급활동의 해군기지로 없어선 안되는 요충지라고 한결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라바울은 점령되지 않았으며 또한 맥아더가 처음에 예상했던만큼이나 작전계획에 필요한 요지도 아니었다. 맥아더는 연합군 부대의 진격과 더불어 새로운 작전계획을 모색하고 있었다. 니밋츠의 중부 반공이 우선해 8월에 접어들자 맥아더는 '리노'란 암호를 가진 계획의 개요를 워싱톤에 보냈다. 이것은 필립핀 탕횐을 목표하는 것으로 하바울을 점령한후(당시는 점령할 예정이었다.) 뉴기니아의 북부해안을 따라 전진하여 셀레베스섬을 거쳐 민다나오에 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민다나오에의 도달은 1945년이 되리라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그러나 워싱톤의 통합참모장회의는 맥아더가 1944년 2월 1일까지 라바울을 점령 내지 초토화한 후 그해 8월 1일 이전에 네델란드령인 뉴기니아의 수도 홀란디아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라바울 점령을 선행한다는 맥아더의 의견과는 달리 라바울은 그냥 우회하라는 것이었다. 통합참모장회의에서는 중부 태평양에서의 니밋츠의 작전이 맥아더의 작전에 우선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니밋츠의 작전계획에 의해 태평양 함대가 전진하여 파라오섬에 도달한다고 보면 니밋츠 편이 맥아더 보다 필립핀에 더가까운 거리에 접근하게 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전반적인 계획에 따르면 필립핀은 1945년과 46년에 대만 오끼나와 및 말레이와 더불어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작전은 1947년 이후이며 완전히 공략하기는 1948년으로 예정했다. 1943년 카나다의 퀘벡에서 열린 미.영합동회의에서 영국은 두 방면으로부터 일본에 가하는 공격이 현명한지의 여부에 관해 질의했다. 니밋츠가 중부 태평양에서 주요한 전진행동을 계속하고 있고 맥아더는 점령한 곳을 지키고만 있지 않느냐 하는 뜻을 포함한 질문이었다. 이래서는 1944년에 예정된 유럽 반공 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자재가 이 방면으로 나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마샬 참모총장도 킹 작전부장도 맥아더를 지지하면서 예정대로 계획을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도 이 회의에서 맥아더에게는 증강부대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하여 이 계획도 일관성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이 무렵 맥아더는 통합참모장회의에 '리노 계획'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내용은 라바울 문제에 관해 타협한 것이었다. 라바울은 처음에는 그냥 우회하지만 나중에 점령한다는 골자가 명시되었다. 또한 라바울은 2월 1일까지에 고립화시킬 뉴기니아에서의 작전이 끝난 후인 1945년 2월에 민다나오를 공격하겠다고 제안의 요점을 집약해 주었다. 이런 수정안을 갖고 워싱톤에 출장한 사더랜드 참모장을 맥아더를 위해 집요한 설득을 펴 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맥아더의 계획에는 새로운 부대를 증원할 수 없다는 매정한 결론이 내려질 뿐이었다. 맥아더가 통합참모장회의에 대해 의식적으로 도입시킨 '마찰을 일으킨다'는 방침이 여기서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 필립핀에? 태평양 전역에서는 미국 육군의 13개 사단이 대일 반격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수가 적은 것 같지만 대독일 작전에 투입한 사단수와 같았다. 그런데 육군의 항공부대는 75개 비행연대가 유럽에서 싸우고 있는데 대해 태평양에는 그것의 반도 안되는 35개 연대 밖에 없었다. 비록 적긴 했어도 이 항공력은 당시 비교적 많은 해군력이 집중된 태평양에서의 항공력의 열세를 족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총합전력으로 돼 있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격렬해졌지만 할제의 함대는 예상보다 빨리 행동하고 있었다. 라바울에 대한 폭격이 케니의 제5항공군에 의해 한층 강화된데 힘입어 뉴질란드군의 트레저리제도를 점령할 수가 있었다. 맥아더는 핀슈하펜을 점령한 후 일본군의 퇴로를 횡단하여 휘하의 몇 부대를 배치할 각오아래 1944년 1월 2일 사이돌(북동 뉴기니아)에 상륙을 감행케했다. 북 뉴기니아를 횡단하는 일본군의 철퇴는 1944년 3월에 끝났으며 한편 지난 해의 9월에 전투를 시작했던 웨와크의 일본군 부대는 처음의 9만명에서 5만 4천으로 줄어 들었다. 이제야 제공권과 제해권을 손안에 장악했다고 볼 수 있는 맥아더는 필립핀으로 돌아 가는 길이 눈앞에 훤히 트인것 같게만 느껴져 가슴이 벅찼다. 코레히돌을 물러난 이래 하루 속해 성수 시켜야겠다고 오매불망하던 임무(필립핀 탈환)를 바야흐로 구현할 수 있게 된데 한결 흥분하고 있었다. 한편 중부 태평양의 작전도 1943년 11월에 일본군 수비대 5천명이 옥쇄한 1평방마일의 소도인 타라와(주=이때 한국인 징용자 129명이 미군에 투항했다. 본서의 씨리즈<타라와>참조)및 길버트제도를 점령한 이래 순조로웠다. 순풍에 돛단배 처럼 전진은 가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태평양 전역 총사령관 니밋츠는 트럭섬에 대해 항모에 의한 전면적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니밋츠와 맥아더는 필립핀이라는 이름의 고지를 향해 토끼와 거북의 경주 같은 혼신의 경쟁이 암암리에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니밋츠의 작전은 워싱톤의 우선순위에서는 상위에 놓여 있었는데 비해 맥아더는 1944년 4월까지 현재보다 더많은 자재와 병력의 지원을 받기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니밋츠는 트럭섬을 점령한 후 서 마샬 제도를 공격하고 만일 이에 실패할 경우 파라오 제도를 점령키로 계획했다. 특히 파라오 제도는 트럭섬을 지나 필립핀을 공격하기 위한 좋은 도약판으로 여겨져 있었다. 주역의 자리를 빼앗긴 분풀이 니밋츠의 이러한 구상은 맥아더의 입자에서는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필립핀을 점령할 사람은 자기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구상은 맥아더를 매장해기 위한 음모라는 소리가 맥아더의 사령부에서 고조되었다. 태평양에서의 대일 반격 작전에서 맥아더가 니밋츠에게 주역의 자리를 빼앗기고 뒤로 물러난 사실에 참모들은 절치비분 하면서 불평 불만을 터뜨렸다. 더러는 국부성이 배신했다고 비방하는가 하면 더러는 통합참모장회의를 혹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난함에 서슴지 않았다. 모두가 야심적인 그룹의 책모라고 쏘아 붙이어 영국의 제국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까지 거침없이 지탄할 정도였다.'맥아더 일가'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들의 사고로는 이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의미하는 '그누구'인가의 중대한 실책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맥아더는 기자회견에서 곧잘 완곡적인 대사를 늘어 놓았다. 기자회견은 맥아더라는 이름의 명배우가 멋지게 연기를 보이는 무대였으며 여기서 그는 자기에게 현혹된듯한 표정을 짓는 온 세계의 기자들에게 전승을 보고하거나 미국으로부터의 보급부족을 개탄하는 동시 장군으로서의 비범한 자기자신을 과시했다. 기자들은 현혹된듯한 표정이라해서 이 근사한 원맨.쑈에 쉽사리 매료되진 않았다. 기자 회견장소에 충만한 공기-'맥아더가 하는 밀에 틀립 없다'는 그러한 분위기는 회견 내용을 고스란히 미국 본국에 전달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맥아더의 승리와 영광을 부정하려 도전하는 비애국자들이 미국 국내에도 있다는 생각을 착실한 대중의 마음에 심어 주었으며 이러한 반향을 충분히 계산한 그의 연기력이 곁들여 미국의 여론은 그에게 자못 호의적인 것으로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공화당계통 신문들이 무조건 칭찬 미국내 대부분의 신문들 특히 서부와 중서부의 신분들은 1932년의 대통령 선거이래 루즈벨트(민주당)가 공화당을 누르고 3회나 연거푸 득승(더구나 4선까지 노리고 있지만)한 사실을 불쾌하게 받아들인 철저한 친공화당 언론지였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 신문들은 공화당 일변도의 장군(즉 맥아더)을 격한하는 기사를 호의적인 입장에서 게재하는 한편 민주당의 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하루 속히 전쟁종결을 이룩 미국의 젊은이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보다 더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 재통령의 입장을 비판적인 기사로 다루었다. 맥아더는 미국 본국의 공화당계 유력인사들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정치활동은 워싱톤의 사람들 즉 그가 하는 일에 정당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기 잘하는 통합참모장회의 국무성 그리고 백악관의 간섭을 개의치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치적으로 상관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맥아더는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직접 깊이 그리고 서서히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작전 맥아더의 참모장 사더랜드는 그의 대리로서 하와이로 파견돼 태평양의 3개 작전지역에서 온 대표자들과 희동했다. 1944년 1월 말의 일이다. 이 회의는 B29의 발진기지로서 마리아나제도는 목표지인 일본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일본 출격에는 중국의 기지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 이 회의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에 따르면 결국 트럭섬을 지나 니밋츠의 공격은 파라오제도에 직접 가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이러한 결정에 경악했던 것은 분명하다. 2월에는 통합참모장회의에 대해 더많은 병력을 준다면 -거듭 되풀이되는 맥아더적 대사이지만- 연말까지 필립핀에 상륙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 상당히 민속한 속도로 전진하려먼 뉴기니아-민다나오 공격선에 따라서 방대한 병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 무렵에는 맥아더의 작전은 더욱 현실을 외면한 계획으로 수립되었다. 해군 작전부장 킹 제독으로서도 할말은 있었다. 맥아더가 자신의 작전책임지역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개가를 올리고 있는 중부 태평양 전역에서의 전진 속도를 이제 새삼스레 늦출수는 없다고 했다. 니밋츠는 일본군의 공격을 뿌리치며 일본 방위선의 주변 도서들에 대한 점령작전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한편 맥아더는 북 뉴기니아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남뉴기니아 방위전에도 성공한 다음 솔로몬 제도를 탈환하기 위해 벌써 뉴브리텐섬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가 되자 통합참모장회의도 맥아더의 선전을 조금은 신용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맥아더의 주장은 과장되어 있었지만 그 때까지 이룩한 공적이 괄목할만한 것이었음은 사실이다. 마누스섬 지배 할제와 언쟁벌여 통합참모장회의와 하와이회의의 결론은 맥아더가 라바울 폭격을 계속할 것 그리고 견고한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카비안(애드미랄티제도 동쪽)의 일본군 기지를 할제가 주장했던 대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케니 잔군에 의하면 애드미랄티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며 좋은 항구인 마누스는 이 지역에서의 '가장 좋은 부동산'이며 단숨에 이 항구를 점령하게 되면 비스말크해 전체가 연합군 수중에 들어 온다는 것이다. 슬리의 통쾌감을 만끽히기 위해 맥아더는 마누스섬 동쪽의 로스네그로섬 상륙부대를 뒤따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 해역에는 구축함을 배치하여 부하들을 엄호하는 동시 승리를 하루 속히 손 안에 장악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2월 28일 맥아더는 순양함 '피닉스'호로 뉴기니아 동부의 크레틴곶에 상륙했다. 정찰부대와 함께 모모테섬의 모모테 비행장까지 갈 계획이었다.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맥아더는 이때 해안에 가장 먼저 도달한 병사에게 수훈십자장을 안겨 주었다. 해안에서 하루를 지낸 맥아더는 '피닉스'호로 귀함앴다. 모모테 배행장과 마누스항이 점령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장거였지만 이 전략지점을 둘러싸고 육.해군부대의 어느 측이 그 기지를 사용하느냐에 관해 맥아더는 양군간의 논쟁에 휘말려 버렸다. 니밋츠는 마누스를 자기의 직접 지휘하에 할제의 관라로 맡겨야 한다고 제안하여 맥아더를 분노케했다. 맥아더는 이 기지의 점령을 자기의 지휘로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할제는 이 문제를 심의하는 회의에 소환된 석상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맥아더의 권위를 유린하는 악의에 찬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받는 궁지에 몰렸다. 이리하여 마누스 기지는 맥아더의 지휘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방위선 후퇴 마누스의 점령으로써 라바울은 완전히 고립도었으며 이전 라바울의 점령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 무렵(1944년 3월) 니밋츠는 중부 태평양에서 5만명의 강력한 일본군 부대와 대결하고있었다. 그리고 파라오제도의 일본군도 증강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 함대도 재편성되어 항공보한 중심의 함대로 강화되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사령관의 일본식 호칭) 고가.미네이찌(고하봉일.해군대장)제독은 트럭섬을 포기하고 파리오섬 기지에서 작전 지휘에 임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산호해 해전'이후 막심한 손해가 회복되지 않았을 뿐더러 함상기(항공보함 탑재기)의 파일롯트들도 철저한 훈련을 받지 못해 날로 숙련된 전법을 발휘하는 미군기 파일롯트와 대항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일본군의 주된 방위선은 호주 북서쪽에 가까이 한 티모르섬에서 사르미.파라오.마리아나제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뉴기니아의 부대는 방위선의 외곽에 배치하게 되었다. 주요한 일본군 기지를 그냥 통과 시키려던 맥아더의 작전방침은 이 상황 아래서 예상밖의 놀라운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예켄대 연합군이 라바울을 목표로 공격했더라면 연합군은 그때까지 태평양에서 전개한 어느 작전보다도 격심한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바울을 고립화 시킴으로써 연합군은 수천발의 폭탄을 아끼고서도 장병 10만명이라는 일본군의 대병력을 고스란히 고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설령 라바울 점령을 목표하고 있었더라면 필립핀으로 기어코 돌아가겠다는 맥아더의 꿈은 수개월이나 천연되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이러한 전망을 예지하고 있었다. 라바울의 고립화로써 할제는 포위작전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필립핀에 대한 진공작전의 템포마저 가속되었다. 루손섬 점령을 명령받아 3월 25일 맥아더는 마샬 참모총장에게 일본군기지아 있는 웨와크(북동 뉴기니아)의 서쪽 320킬로에 위치한 네델란드령 뉴기니아의 수도 홀란디아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이미 마샬에게 12월까지는 필립핀에 상륙하고 싶다고 제안했으며 따라서 이 약속을 기필코 수행하고 말겠다는 의욕과 정열이 넘쳐 있었다. 그것은 마샬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개인적인 의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했다. 3월 8일 워싱톤에서 소집된 통합참모장회의에 참석한 사더랜드 참모장은 그때까지 여러면 거부당한 바 있는 맥아더의 구상 즉 남북의 축을 따라 필립핀에 단독 진격한다는 계획을 다시금 설득 시키는데 열을 올렸다. 맥아더는 이 회의에서 지난번 의견을 모았던 '두 방면으로부터의 대일반공 계획'을 아직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론으로서는 맥아더에게는 홀란디아로 전진하여 라바울의 고립화를 지속시키고 11월까지는 민다나오로 진격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와같은 결론이 맥아더의 귀에는 감미롭게 들려오는 음악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니밋츠는 6월 말까지 남마리아나를 9월 15일까지는 파라오를 각각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육.해 양군의 경쟁은 여기서 다시 연합군에 유리하게 원용되었다. 니밋츠와 맥아더가 대일 승리를 목표삼아 서로 경쟁하면 전쟁 종결은 그만큼 앞당겨질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만은 니밋츠의 최종목표가 되었는데 이를 1945년 2월까지 점령하라는 명령이 그에게 하달되는 한편 맥아더는 그때까지 루손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바울은 고립되고 뉴기니아의 일본군 부대는 실향민처럼 방향감각을 잃은채 패주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회심의 육군부대가 같은 휘하의 해군부대와 항공부대의 적극지원을 받으며 이른바 입체 작전으로 공세를 취한다면 필립핀 상륙작전이 예상외로 성공적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4월에는 웨와크에 있는 5만명의 강력한일본군을 간과하며 계속 진격끝에 홀란디아를 점령했다. 겨우 600명 정도의 희생자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필립핀 점령을 마샬이 무시해 유럽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만디 상륙전에 성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전황은 승리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른바 'VIG데이'(대독일 승리념일)의 서광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가 낙관시되던 결코 우울한 것이 아니었다. 이쿠렵 맥아더는 네델란드령 뉴기니아에 속한 비아크섬을 점령하고 7월에는 그 여세를 몰아 눔포르섬을 제압한 다음 모로타이섬을 9월에 점령했다. 뉴기니아 전체가 이제는 연합군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옴으로써 맥아더는 근소한 희생을 무릅쓰고 필립핀을 목표로 한 '디딤돌 작전'을 본 궤도에 올려 놓았다. 이와같은 무렵에 니밋츠의 부대는 마리아나제도와 파라오제도까지 전진 사실상 오까나와 까지의 거리로는 맥아더의 휘하 부대보다 가까운 위치에 놓였다. 일본 본토에 대한 진공을 최종목표로 삼은 '디딤돌 작전'의 최후의 부대이기도 했다. 사이판 섬 공격은 연합군에게 막대한 희생을 안겨 주었지만 결국은 함락당하는 운명이 되었고 7월이는 괌섬에서 1500명의 연합군 희생자를 강요당했지만 이 섬 역시 탈환하고 말았다. 파라오제도의 점령도 니밋츠에게는 손쉬운 승리가 아니라 많은 출혈과 희생자를 내게 했던 힘겨운 전과였다. 유럽에선 아이젠하워의 신중한 지휘아래 독일에 대한 협동작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었지만 태평양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서로 전공에 집착 시샘하는 끝없는 쟁론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전선에서처럼 하나로 통합된 공격태세의 확립은 바랄 수도 없었다. 사령부를 브리스베인(호주)에서 홀란디아로 북진시킨 9월에는 맥아더는 대망하던 필립핀에 대한 최종공세를 개시하고자 부심하고 있었다. 소로몬제도의 부겐빌섬 공략에서 미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필립핀으로 향하는 진격을 사기충천한 투지로써 뚜렷이 하고 있었다. 니밋츠와 맥아더는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작전의 일정을 앞달길 사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 본국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 두 지휘관은 병경의 증강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공통된 회답을 각각 보냈다. 통합참모총장회의는 일본을 조속히 점령하여 전쟁종결의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노력에 급급했을뿐 일본본토에의 상륙작전을 가능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진 기지로서 어떤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하느냐에 관해서는 니밋츠나 맥아더의 생각만큼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기 나름의 관견을 펴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최종적인 작전에만 집착된 나머지 요충지가 되는 필립핀제도를 점령치 않은채 우회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않다는 의견을 그는 통함참모장회의에 내놓았다. 이에 대해 아샬 참모총장은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고려'를 장차 착수할 중대한 과업에 결부시켜서는 안된다는 요지로 회답했다. 마샬은 대만과 오끼나와를 점령하기만 하면 필립핀의 궁극적인 해방에 연결된다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었다. 앞서 라바울의 경우처럽 필립핀 탈환은 혹시 전쟁 종결 때에나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필립핀이 해방되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마샬은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4년 봄의 전국을 냉정하게 관찰해 본다면 대일 승리를 급선무로 쟁취함에 반드시 핀립핀을 탈환할 필요는 없었다. 궁극의 목적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여 항복케 하는데 있으니만큼 중국도 네델란드령 동인도 싱가폴이나 인도지나도 그리고 기타 어떠한 동남아지역도 연합군에게 있어서는 당장 절대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전황에서도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일찌기 스타린을 포함한 여러 지도자들에 의해 응변적으로 거론되어 왔던 바와 같이 나치.독일을 패배시키는 방법은 먼저 이탈리아를 공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중점적으로 독일 본국에 대해 직접적이고 되도록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는데서 그 방법이 주효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법은 일본에 대해서도 같은 귀결이라는 얘기다. 일편단심으로 필립핀 탈환에 좌우지간 맥아더의 입장에서 본 필립핀 탈환은 승리 이상으로 명예에 관계되는 중대한 과제였다. 그는 필립핀에서 참패당해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부하 장병들의 신뢰감을 저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지못할 일이었다. 그의 자신을 위해서도 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립핀 탈환을 목표하는 자신의 역할을 기어코 달성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일본의 점령 그 자체는 그 자신의 '멀고도 긴 모함의 여로'에 종지부를 찍는 종착역에 지나지 않았다. 견해의 차이는 완전히 대각을 이루는 상반된 것이었다. 루즈벨트 역시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좌우간 이 이견을 조정하기 위한 회의 개최가 요청되었다. 1944년 7월 28일 기습의 악몽이 되새김질되는 펄.하버에서 열리는 회의에 니밋츠와 맥아더가 호출받아 최고사령관인 루즈벨트 대통령과 자리를 같이 했다.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자리에 마주친 니밋츠와 맥아더의 회동은 마치 오월동주의 분위기였을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 회의의 핵심을 이룬 문제는 요컨대 전쟁에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언제 어떤 형식으로 이기느냐-가 문제였다. 10. 맥아더적 명언 "나는 돌아왔다." 상기 '하와이3자 회담'(루즈벨트.맥아더.니밋츠)애 있기에 앞서 맥아더는 전쟁을 종결시캐기위한 몇가지 계획안을 제출한바 있었다. 이 안에 의하면 민다나오섬에는 12월 25일까지 레이테섬에는 11월 15일 그리고 6개 사단의 증원을 얻어 루손섬에는 1945년 4월까지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육.해군간의 토의 결과 이 작전목표에 관해서는 즉시 상세한 조정을 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군부가 강력히 대두하여 1941년 말경부터는 완전히 군부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군벌 정치라 했다. 44년 7월 18일 '일본의 힛틀러'라는 악명 높던 도오죠.히데끼 수강이 사이판섬 실함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나 그 체제는 여전히 변치 않았다. 일본 군부내에서도 빚었던 육.해군 간의 대립은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그것 이상으로 격심해 군 내부를 좀먹는 분열상을 노출하고 있었다. 대세는 기울어지고 이미 패색이 짙은 일본의 일각에서는 전쟁종결을 촉구하는 계획안이 제기 되었다. 아직 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쏘련의 중재를 빌어 평화를 실현하려는 계획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거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역사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전쟁을 종결시켜서 평화를 구현한다는 것은 실로 전쟁을 하기보다 대단히 복잡하고 난삽한 과정이다. 전략 결정의 하와이 합의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승리를 눈앞에 보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최종적인 적극 공세를 집중하기에 앞서 전쟁수행에 참여하고 있는 관계 수뇌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토의할 구상을 했다. 이 최종적인 공세가 미구에 도래할 평화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와이 3차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였다. 맥아더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횐의에 직접 임석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아 대통령이 임석할 것으로 생각했다. 맥아더는 개인적으로 참석하도록 초청받았는데 이같은 고차원의 회의에는 그때까지 한번도 참석했던 일이 없었다는 -후일 술회했듯이 이후로 다시는 초청받은 일이 없다.-전례를 미루어 볼때 모종의 중요한 문제가 결정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본 이 회의에는 마샬 참모총장이나 킹 해군 작전부장의 모습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단독 참석이었다. 그래서 정계의 일부 호사가들중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때마침 민주당으로부터 미국 역사상 초유인 네번째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아 그해(44년) 11월의 대통령 선거를 약 4개월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 회의주재는 곧 최고 사령관(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계획적인 정치포석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측은 빗나간 억측이었다. 회의가 단순히 정치 운동이 아니었음이 명백해졌으며 맥아더도 그렇게 느꼈다. 그는 부관 이외는 참모를 대동하지 않았으나 니밋츠는 참모를 거느리고 더구나 지도와 중요한 서류 일체를 휴대해 온 것을 보고 놀랐다. 니밋츠 역시 자기만큼의 준비를 전혀 해 오지 않은 맥아더를 보고 의아했다. 7월 28일의 회의 당일이 되어서 맥아더는 니밋츠로부터 회의 목적에 관해 사전통지를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런 통지도 받은 바 없었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후일 맥아더는 이때 니밋츠는 "의외라는 표정이었으며 다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여하튼 맥아더는 이 회의에서 '고군분투'해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있었다. 공명을 다투는 니밋츠안에 반대 역사적인 3자 회담이 진행되었다. 니밋츠가 먼저 계획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킹이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맥아더는 느꼈다. 이 계획은 필립핀을 측근으로 우회하며 남서 태평양전역에 있는 미군부대 중 2개 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깡그리 니밋츠의 직접 지휘하에 이관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중부 태평양전역을 전진하는 연합군은 1945년 초에 대만으로 진공한다는 내용의 제안이었다. 이 계획에 대해 맥아더는 군사와 정치의 두가지 면에서 반대했다. 그는 필립핀을 탈환하면 남방에서 일본 본토로 보내는 물자 보급을 차단할 수 있고 따라서 중요 자원의 부족으로 허덕이게 될 일본을 조기 항복으로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이오지마와 오끼나와를 정면에서 공격한다는 것은 니밋츠의 지금까지 작전으로 보아 공연한 희생자를 다수 강요당할 뿐이며 반미적인 주민이 않은 대만에서 일본을 공격하는 편보다 연합국에 호감을 가진 필립핀에서 공격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맥아더는 역설했다. 이를 경청하던 루즈벨트는 오히려 필립핀에 대한 정면 탈환작전이야말로 더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맥아더의 발언은 다시 열기를 뿜었다. 미국에는 필립핀을 하루 속히 해방시킬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고 "고립된 섬들을 무시해 버리는 전술도 한 방법이긴 합니다. 그러나 필립핀과 같이 일본군의 대부대가 집중 배치된 지역을 후방에 남긴채 전진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위험을 자초할 따름입니다."고 힘주어 지론을 폈다. 루즈벨트가 필립핀 공격에서 다수의 인적 손해를 낼 것이라고 말한 점에 대해서는 맥아더는 자신에 넘치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대통령 각하. 제가 내는 손실은 지금까지 이상의 엄청난 출혈이 되지는 않습니다. 정면 공격의 전볍을 구사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현대의 보병용 병기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면 공격을 전개한다는 것은 평범한 사령관이 함부로 사용하는 전술입니다. 우수한 사령관이라면 다대한 손실을 낼리가 만무합니다." 대통령 후보 의사는 없어 맥아더는 루즈벨트의 소견을 이렇게 논박하고 나서 자기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구상에는 먼저 제1군으로 하여금 화란령인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를 탈환한다는 계획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통합참모장회의의 장인 레이히 제독도 찬성하고, 마침내는 루즈벨트도 승인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때의 루즈벨트에 대해 맥아더는 "루즈벨트는 나의 육안으로 볼 때 전부터 알고 있었던 비 껍찔만의 사람으로만 생각되었다. 대통령의 여명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루즈벨트와 맥아더는 그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부대를 열병했는데 그때 루즈벨트는 가을(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맥아더에게 질의했다. 맥아더는 신중한 표현으로 미국 국내의 정치 정세에 관해서는 장님과 다를바 없다고 대답한 다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지명을 수락할 의사는 없다고 천명했다. 이 말이 루즈벨트로서는 바람직한 언질이 되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여러 달 동안 루즈벨트는 몇 명의 공화당원으로부터 대통령으로 입후보하라는 끈질긴 권유를 받고 있던 맥아더가 이 권유를 혹시 수락하지나 않을까 심히 우러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대통령 후보로서 루즈벨트의 강력한 정적이 될 공산이 반드시 없지도 않았다. 개선한 전쟁의 영웅이라는 후광을 업고서-. 이보다 얼마 앞서 오스트라리아의 카틴 수상은 루즈벨트를 만난 자리에서 맥아더를 지휘관 지위에 더 오래 유임시켜 달라고 사견을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 루즈벨트는 "정말 기뻐했다."는 것이다. 카틴은 후일 맥아더에게 "루즈벨트는 밤마다 침대 밑에 당신이 있나 없나를 확인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맥아더가 대통령과 만난 결과로 해서 두 사람 사이에는 화기가 감도는 새로운 신뢰관계가 생겼다. 전황을 역전시킨 레이테섬 탈환전 필립핀 탈환문제는 9월에 통합참모장회의가 열릴 때까지 최종 단안을 보지 못했지만 12월 20일에 레이테섬(루손섬과 민다나오섬 사이에 있다.)을 공격한다는 맥아더의 작전계획은 승인 되었다. 이것이 역사상 최대의 대해전으로 기록된 '레이테만의 해전'을 포함하는 레이테심 공략전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그때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제 제독 휘하의 항공부대는 민다나오와 비사야제도에 공격을 가하고 이 지역에서는 공격이 "만사 순조로움!"이라는 보고가 있었으나 필립핀에서 수시로 입수되는 보고는 레이테섬에 일본군이 없음을 알려왔다. 니밋츠는 이런 상황이면 민다나오를 가까이 우회하여 레이테섬을 즉각 공격해야 한다는 안을 제출했다. 이때 맥아더는 모로타이섬으로 가는 도중이었으며 사더랜드 참모장은 마샬 참모총장의 문의에 대해 레이테섬에 일본군이 없다는 보고는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필립핀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니밋츠나 워싱톤 당국자들보다 한결 소상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필립핀제도에서 활약하는 반일 게릴라 조직과 끓임없이 접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정보망으로는 레이테에는 적어도 2만의 일본군이 있으며 더구나 일본군이 즉시 증원할 수 있는 만전의 태세마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맥아더는 확신하고 있었다. 통합참모장회의는 레이테섬으로의 진격에 호응하여 파라오제도에 있는 니밋츠 휘하 함정에서 호위항모와 다른 함정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맥아더의 계획에 의하면 10월 17일의 레이테만 돌입에 레인저부대(미육군의 기습돌격 부대)1개 대대로 공격을 시작 10월 20일에 제 1진의 상륙을 감행하기로 작정되었다. 할제의 제3함대는 해상에서 지원하고 케니의 제5항공군과 호주 공군이 긴밀하게 엄호 임무를 책임졌다. 이 작전에는 약 17만 4천명의 장병이 동원될 예정이었는데 이것은 태평양 전선에서 실시 되는 최대의 작전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다수의 병력을 전선의 배후에 배치해 두어야 했다. 그것은 일본군 부대가 수비하고 있는 섬들을 공격하지 않고 주마간등 식으로 전진했으므로 소탕하기 위해 남겨 두었으며 이와 동시에 부겐빌 뉴브리텐 호주령 뉴기니아 등지에 있는 기지 방위를 담당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 먼저 뛰어 내려서 상륙 영국의 쳐칠 수상은 유럽전선이 최종 단계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맥아더와 태평양의전국에 중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일 영국의 승인만 있으면 호주군과 미군을 유럽 전선에서 맥아더의 휘하로 이동 전용시키는 조처까지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물실호기라 이때를 포착한 맥아더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보강받는데 성공했다. 아이켈버거 중장 휘하에 새로 편성된 미 제8군은 뉴기니아와 모로타이섬에 출동 쿠루커장군이 현지에서 지휘하는 제6군의 임무를 지원하는데 임했다. 10월 중순에는 케니와 할제의 명령을 받는 항공부대가 대만과 필립핀 전도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에 맹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레이테섬 공략전'이 태평양 전쟁의 일대 결전이 될 것으로 신념을 굳히고 자그마치 700척이나 되는 호위선단을 레이테 섬방변으로 항진 시켰다. 곡격이 시작된 것은 10월 20일 새벽 -제1진의 선봉부에 몸을 싣고 해안으로 치닫던 맥아더는 아직 해안에 닿기도 전에 얕은 바닷물 속에 뛰어 내려서 해안쪽으로 늠름한 걸음을 옮겼다. 기고만장한 패기를 과시하며 걸어가는 맥아더의 용자는 한결 감격적인 흥분의 빛이 역연했다.8월 맥아더를 슬프게 만든 장년의 친구이던 케존의 사망후 필립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불과 4개월도 채 못된 오스메니아가 맥아더를 수행 그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 본 유력한 증인이 되었다. 필립핀상륙 제1성 "나는 돌아왔다." 상륙후 맥아더는 비를 맞으면 서도 마이크를 잡고 필립핀의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방송했다. "필립핀의 여러분. 나는 돌아 왔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들 부대는 다시 필립핀의땅-미국과 필립핀 두 국민의 피로 깨끗해진 이 땅위에 섰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맥아더가 오랫동안 고대해 온 감격적인 순간이었다.와싱상담 3년만의 극적인 권토중래였다. 맥아더는 더 계속하여 오스메니아 대통령도 옆에 있다는 사실과 필립핀 정부가 이제야 '필립핀의 땅 위에 굳건히 수립된 사실'을 흥분한 어조로 알렸다. 그는 필립핀의 온 국민에게 호소했다. "나의 주위에 모여 주십시요. 저 바탄과 코레히돌에서 보인 불굴의 정신으로 진격합시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전사자의 이름으로 적을 타도합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잃지 맙시다. 강철같은 억센 팔로 싸웁시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성배를 받는 그날까지 하느님의 이름아래 전진합시다." 와싱상담 3년만에 피를 토하는듯한 절규였고 필립핀 국민들의 심금에 호소하는 맥아더의 독전사였다. 오늘날 이런 표현을 그 누구가 어떻게 생각하든 맥아더의 이 정열적인 명언은 필립핀 국민에게는 압도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맥아더는 해안에서 급히 쓴 편지를 통해 곧 해방작전이 성공하면 필립핀에 즉각 독립을 부여하도록 품의하는 동시 독립식전에는 꼭 참석해 줄 것을 간청한 다음 "이 조치가 온 세계에 선풍적인 반향을 부어 금후 1천년에 걸쳐 미국의 신용과 명예를 절대적인 것으로 해 줄 것임을 확신합니다."고 끝을 맺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반응은 막무가내였다. 맥아더의 우람한 이 말에도 맥아더군의 위무당당한 상륙성공에도 일본군의 반응은 항전일변도였다. 연합군의 레이테 상륙작전을 사전 탐지했던 일본군은 이미 10우러 17일에 거대한 함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도요다.소에무 '쇼'호작전명령을 받고 경계태세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공전의 '레이테만 대해전'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연합함대 예하 제1유격부대의 좀더 과감한 점법이 있었더라면 이 해전의 승세는 일본군에게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구리다.다께오(율전건부.해군중장)제독이 지휘한 제1유격부대가 킹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 소속 함정4척을 격침한 후 할제 제독의 항공부대에 의한 맹렬한 공격을 받고는 주춤했는데 이때 과감한 전진을 주저치 않았더라면 연합군은 통렬한 타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일본함대는 결국 레이테만에는 오지 않았다. 맥아더의 공격은 그의 계획대로 성공했던 것이다.(본서의 씨리즈<레이테>참조) "물 위를 걸었더라면..." 맥아더는 매일 해안에 가서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다. 케니에 의하면 맥아더는 필립핀 육군 원수의 군모를 쓰고 콘.파이프를 입에 빨며 지휘에 여념이 없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어떤 병사는 동료의 팔꿈치를 툭 치면서 "야, 맥아더 장군이다"하고 말했더니 이 병사는 고개를 들지않고 "아 그래. 아마 에리노아.루즈벨트(대통령 부인)와 함께겠지"하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맥아더는 배신자로서 체포된 국가에 불충분한 필립핀인들의 재판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언명하고 루즈벨트의 적극 지지를 받으면서 레이테의 점령 상황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맥아더와 함께 필립핀까지 온 부하들 중에는 악의에 찬 험담을 일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맥아더가 필립핀으로의 귀환을 기화로 대중의 호감을 사려는 엉뚱한 생각이라느니 맥아더가 카메라의 포열속을 필립핀의 해안을 향해 늠름한 걸음으로 걸으면서 전공을 독점하고자 책모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악담하는 사람들도 물론 적다고는 볼 수 없었다. 심지어는 맥아더가 물 속을 걷지 않고 '물위를 걸었더라면...' 그야말로 그 전공에 금상첨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등속의 부질없는 소리로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코 그의 행동과 처신에는 연극조의 '과장'이라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뉴기니아를 시발점으로 하여 수많은 섬에서의 장기간 전투를 지겹도록 지휘하였거늘 제스츄어로 일장의 연극을 벌일 자격도 없다고 감히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레이테를 공격하기 위해 민다나오를 그냥 우회한 덕분에 맥아더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물며 그 전략은 되려 작전수행을 위해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만전의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즈벨트에 대해 맥아더의 설득력은 약했다. 승리 직후 그의 품의에 따라 필립핀에 독립을 허용했더라면 세계의 여론을 일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소인극'을 연출하기 즐겨했던 FDR(루즈벨트의 애칭)에게는 필립핀을 독립시켜 줄 기회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급서(45년 4월 12일)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실천할 수가 없었다. 상륙작전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완전한 필립핀 탈환의 전투는 아직도 언제 대미를 보게 될지 예측 불허였다. 1944년 12월 육군원사로 승진 전진에 숨통을 트이기는 44년 12월 초순 거북걸음이긴 했으나 다소 전진할 수가 있었다. 레이테섬 서쪽 해안에도 한명의 피해도 없이 무사히 상륙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말레이의 호랑이'로 용명을 떨친 야마시다(산하봉문.육군대장)장군 휘하의 일본군이 항전하지 않고 레이테섬과 해석될 수 없었다. 다라그와 타크로반(모두 레이테섬에 있음)에 있는 비행장으로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일본군은 8개 사단의 연합군과 대결하고 있었다. 이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이때까지 직면했던 가운데 최대의 연합군 세력이었다. 12월 18일 맥아더는 대망의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필립핀의 육군 원수이긴 했지만 미국의 육군 원수로 정식 임명받게된 맥아더는 감개무량했다. 이 원수는 일본.쏘련 등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이 무렵 원수로 승진한 장군으로선 맥아더 외에 아이젠하워 아놀드(육군 항공군 총사령관) 마샬 등이 있었고 맥아더의 라이벌인 니밋츠 유럽전선에서 '발지 전투'로 패튼 대장과 함께 알려진 브랫드리가 각각 원수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 얼마 후의 일이었다. 한가지 유모어이긴 하지만 이 계급이 신설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음이 전해진다. 당초 생각되었던 원수의 용어로는 '필드.마샬'이었다. 그런데 원수 제1호에는 공교롭게도 같은 마샬의 이름을 가진 죠지.C.마샬(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를 부를 때 '필드 .마샬'이면 다소 우습다고 마샬 참모총장이 농담조의 가벼운 항의를 제기했다. 마침내 고심끝에 변경 결정을 본 명칭으로 '제너럴.오브.디.아미'가 된 것이다. 레이테의 소탕작전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이 12월 26일 크루거의 제6군에서 아이켈버거의 제8군에 인계되었는데 당초에 예상했던바 보다 낙관이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군에는 약 6만 내지 7만의 병력으로 추정되는데 비해 연합군은 거의 4배나 되는 25만 이상의 대병력을 이 작전에 대거 투입했다. 격전의 결과는 열세이던 일본군이 14배의 대손실이었다. 일본군의 손해는 대략 4만 8천명인데 반해 연합군은 약 3천 5백명 선에 그쳤다. 맥아더는 연합군 장병들의 용전분투를 극구 칭찬했지만 열대지방에서의 미군의 전투 능력 특히 정글에서의 전투 능력은 저하되어 있었다. 미군은 전투부대를 상륙시키기고 이에 대한 보급능력은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했다. 그렇지만 기계회된 군대는 역시 기계화된 나라 예컨대 독일 영토에서 싸우는 것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군은 적지에 진격했을 때 우군 항공기의 폭격에 의지하고 또 우군의 대포가 위력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확실히 이러한 전법으로는 전진의 속도는 둔화된다. 그런 반면에 인명의 손실은 비교적 근소하다는 이점이 있다. 해병대나 해군과는 달리 대부분이 소집병으로 구성된 미.육군은 유럽제국의 육군 또는 일본 육군과 같은 투지와 예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단결심이 부족한 점도 지적되었다. 미국육군의 지휘관들은 이런 여러가지 부족점을 화력이나 압도적인 병력으로 대충시켜야만 했다. 말하자면 기동력 제1주의의 물량작전이 당시 미군의 특징적인 강점인 동시에 전술상 약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후까지 주장하는 루손섬공성안 맥아더는 루손에 하루라도 빨리 상륙하고 싶다는 결심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톤 특히 킹 해군 작전부장은 여전히 반대했다. 킹은 일본본토 공격을 위해서는 루손섬을 주마간등식으로 우회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가 하면 할제 제3함대 사령관은 루손을 공격하기 위해 대만을 우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태평양전역 총사령관인 니밋츠는 적어도 9월 말까지에 루손보다는 대만공격 안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처럼 태평양 전역에 있는 육,해군의 상급 지휘관들은 대부분이 대만점령에 반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대만에 대한 상륙전은 위험이 많고 니밋츠가 제안했던 것처럼 작전이후 중국 대륙의 아모이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날에는 1937년이래 중국에서 진구렁에 빠져 있는 일본군의 재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대륙에 대한 공격에는 충칭주둔 클레러.센노트 장군휘하 제14항공군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9월 중순에는 통합참모장회의 의장 레이히도.마샬 참모총장도 그리고 해군의 선임 지휘관까지도 니밋츠안에 찬성하게 되었다. 단 한사람 킹만이 아직 태도를 변치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통합참모장회의에서 12월 20일에는 루손을 공격할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결국 10월 3일 "12월 20일에 공격하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다. 한편 니밋츠는 45년 1월에 이오지마를 3월에 오끼나와 섬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통합참모장회의는 연합국측인 종국을 공격하느니 보다는 적국인 일본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마침내 태도를 결정했다. 맥아더는 마치 해묵은 체증이 떨어진듯 거뜬한 기분이었다. 전부터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우려해 왔던대로 필립핀제도 전체를 탈환하지 않은채 다음 작전으로 옮기게 되는 상황이 완전히 해소되기 때문이었다. 신풍특공기 재출현 루손상륙을 방해해 맥아더는 3년 전에 일본군이 기대한 바와 같이 링가엔만에 상륙할 결의를 굳혔다. 일본군은 최후의 한 병사까지 사투할 것이며 1941년 말에 거의 무방비인 채로 두고 온 루손 북부의 카가얀강과 마드레산맥을 사수 하리라고 추측되었다. 맥아더의 최종 계획에 의하면 방비가 약한 민도로섬을 12월 5일에 공격하고 루선에는 20일에 상륙하기로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이테에서의 피비린내나는 격전이 예상외의 시간을 소요했던 까닭에 이 작전은 12월 15일과 1월 9일로 각각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15일 민도로섬에 상륙한 2개 연대는 전연 저항을 받지 않고 삽시간에 비행장을 확보했지만 전육할 '가미가제' 특공대와 결사적인 일본군의 야습을 받아 대손해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루손에 대한 진공작전 개시때 민도로섬에는 전투기 3개 연대와 중형 폭격기 2개 연대가 건재해 있었다. 동시에 루손섬에서는 반일 게릴라부대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필립핀 전반의 전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왔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맥아더는 루손에 대한 공격부대를 증강했다. 계획에 의하면 링가엔만에 진입하여 두 측면을 따라 진격해서 아구노강의 양쪽 강변을 확보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마닐라를 목표하기로 작성되었다. 할제 제독의 제3함대가 대만과 루손섬 사이의 범위 안에서 이 진공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가마가제 특공대는 연합군측 소해정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고 또 전함 2척과 순양함 2척에 손해를 안겼다. 악전고투를 무릅쓰고 제3함대가 루손곶에 도착하기는 1월 3일이었다. 맥아더가 탑승하고 있었던 것은 순양함 '보이스'였다. 일본군은 잠수함과 특공대로 줄기찬 공격을 속행 또 11척의 연합군 함선을 격파했다. 루손에의 상륙에 앞선 며칠 사이에 또 다른 몇척이 대파되었다. 전번 레이테만의 대해전때 전사상 최초로 등장했던 가미가제 특공기가 이번에도 출현해 할제 함대를 괴롭혔던 것이다. 즉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행기와 함께 함선 갑판위에 돔을 던져 옥쇄하는 자살적인 특공대는 당시 연합군 함대의 공포의 적이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에 대하여 종전후의 조사와 증언에 의하면 필립핀 방면의 전선에서 무모하게 과시했던 특공기는 650회에 달했다. 일본식 표현으로 이른바 육탄공격을 결행함으로써 연합군측 함대에 명중 또는 대손해로 성과를 올린 것이 174에 달해 그 결과는 26.8퍼센트라는 놀라운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이것은 당시 미군이 추정한 것보다 분명히 명중률이 높았다. 할제 제독은 휘하 장병에 대해 가미가제 특공기는 불과 1퍼센트의 명중률이 있을 뿐이니 조금도 두려워 할 것 없다고 호언하고 있었다.(본서의 씨리즈<신풍특공대>참조) 하옇든 가미가제 특공기는 할제 제3함대를 루손곶 앞바다에서 맞아 타격을 주었지만 이러한 전과의 이면에는 일본군 항공병력의 자동 약화란 현상을 낳고 있었다. 야마시다 장군은 이번 작전에 앞서 맥아더가 3넌전에 고재를 마셨던 것과 같이 제공권을 잃으면 작전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 상도하고 특공기를 발진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막상 특공기습의 결과는 할제 함대에 통격을 가하는데 그쳤을뿐 끝내 연합군의 루손섬 상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필립핀의 일본군을 총지휘하던 야마시다 장군은 그래서 맥아더가 바탄반도에서 했던 것처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에 농성하여 저항을 계속키로 했다. 맥아더의 대감격의 순문 마침내 루손섬에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감행했던 것은 1945년 1월 9일 맥아더도 부대의 뒤를 따라 바닷물 속을 헤치며 걸어서 상륙했다. 오스메니아 필립핀 대통령은 맥아더가 루손에 도착한 사실을 라디오로 필립핀 전 국민에게 방송했다. 이 상륙에는 일본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지만 일본군의 지진한 퇴각전 때문에 양군에서 숱한 인명이 희생당했다. 필립핀제도의 주요한 항공기지 클라크.필드 주변에서 벌어진 접전은 특히 치열했다. 맥아더는 휘하 부대와 함께 마닐라로 향했다. 이때 그는 세번째의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맥아더에게 있어 이 순간은 순전히 감격의 순간이었다. 필립핀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조국이었다. 제2의 조국이라 하기에는 오히려 미국보다 더 애착을 느끼는 조국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생중 가장 화려한 시기를 필립핀에서 보냈으며 맥아더도 군인으로서 긴 세월을 이땅에서 보냈다. 맥아더는 최악의 패배를 당했지만 필립핀 국민으로부터는 신처럼 숭배받고 있었다. 케니 장군은 어느 날 밤 맥아더를 예방한 자리에서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때 맥아더는 피로가 겹쳐 식사를 들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케니는 새벽에 출동해야 하므로 전령장교를 보고 맥아더에게 자기의 작별 인사를 전해 달라고 말했더니 이 장교는 맥아더가 이미 2시간 전에 출발했다고 대답했다. "정말 지독한 영감이군. 그렇게 초과근무를 하면 조합원증을 빼앗기지!"케니는 반 농담투로 빈정댔다. 맥아더의 열성에 필립핀 국민도 같은 열성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게릴라부대는 루손 상륙의 소식을 듣는 즉시 일제히 행동을 시작 퇴각하는 일본군 장병으로서는 목숨을 보전하기 점점어렵게만 되어갔다. 매군의 맹진격과 더불어 맥아더는 포로 수용소로 직행했다. 세인트.토마스 포로 수용소-당시 일본군은 마닐라에 있는 세인트.토마스 대학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후퇴후 필립핀에 잔류했던 전투요원과 시민이 전쟁기간중 줄곧 억류되고 있었다. 수용소를 찾아 든 그는 다 낡아 누더기가 된 군복을 입은 기아상태의 GI(미군 병사)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앞을 다투며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병사들은 맥아더를 보기만 하고서도 감격에 복받친 울음을 터뜨렸다.맥아더도 목이 메어 감동했다. 생지옥에서 생환하게 된 그들 '돌아온 자'의 기쁨도 형언하지 못할만큼 컸으려니와 그들의 해방자로서의 맥아더가 느낀 감개는 전쟁영웅으로서 느낀 만족감 그것이었을 것이다. 미군은 2월 3일 마닐라에 돌입했다. 상륙한지 4주일이 지났다. 이 기간은 일본군이 3넌전(1942년)에 마닐라를 점령했을 때와 거의 같았다. 일본군은 미군이 마닐라를 완전히 수중에 장악할 때까지 또 2주일이나 소요하게 만든 산발적인 전투로 항전했다. 마닐라에서 맥아더는 필립핀인들의 열광적인 감격속에 파묻혔다. 그들은 맥아더의 주위에 몰려 그에게 닿거나 손에 키스하려고 야단하면서 눈물과 감사로 환영했다. 감개 무량한 마닐라 입성 맥아더의 승리는 압도적인 전승이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마닐라 호텔의 가장 상층에 있는 특별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 곳은 개전 전에 그가 사령부를 두었던 추억의 건물이었다. 옛 모습 그대로인 줄로 알았으나 일본군의 폭격으로 내부는 폐허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특별실에는 그가 다년간 모은 군사관계 서적이며 개인 소유물하며 기타 비품들을 고스란히 남긴채 떠났던 것인데 이 모두가 그 동안 깡그리 재로 변해 있었다. 전쟁의 비정함을 절감케 하는 증좌였다. 1울 말에는 그리즈월드 소장의 제14군단이 클라크.필드 비행장을 확보한 다음 참패의 악몽이 서린 바탄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29일에는 챨스.P.홀 소장이 지휘하는 제 11군단이 루손섬의 주요 해군기지를 감싸고 있는 스비크만의 연안에 3개 연대를 상륙시켰다. 이 작전은 바탄을 봉쇄하는 동시에 일본군이 링가엔만의 미군을 기습하개 위해 대만에그 달려 올 증원부대의 투입로를 차단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마닐라로 통하는 남쪽으로부터의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맥아더는 아이켈버거 장군(제8군사령과)에게 명하여 마닐리 교외 남쪽에 공정 1개 연대를 강하시키도록 했다. 2월 3일 강하작전이 감행되었지만 전연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한편 마닐라 시내 어느 곳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일본군의 잔존부대를 격멸하는 적전도 아울러 전개했다. 이 잔존부대는 마닐라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 지역의 인트람로스에서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1주간 이상의 우람찬 포화를 집중시킨 후 2월 23일 보병부대가 마닐라에 돌입했다. 아직도 최후의 일명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은 3월 3일까지 끈덕지게 항복하지 않았다. 자욱한 포연이 말끔히 사라질 때까지 피아 양군측이 과다수의 사상자를 서로 강요당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립핀의 백악관 마라카니안 궁전 맥아더는 마닐라 해방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필립핀 정부의 재건을 지연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닐라시는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삽시간에 초연이 자욱한 황폐된 도시로 탈바꿈하고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인트람로스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없이 맥아더는 필립핀의 화이트.하우스(백악관)라고 불리우던 '마리카니안 궁전'에서 필립핀에게 입헌정치를 회복시키는 신전을 베풀었다. 2월 27일의 이 식전은 글자 그대로 장엄한 성전이었다. 맥아더는 이때의 인상을 후일 잊지 않고 회상한 바 있다. 전에는 아름다운 사로수가 줄지어 있던 길이 이제는 보기 흉한 폭격의 흔적과 시체의 고약한 악취로 휩싸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궁전으로 향했을 때의 추억을 잊지 않았다. 마라카니안 궁전에 도착한 그는 이 궁전이 조금도 파괴되지 않고 유리창도 수정제 샨데리아며 커텐이 모두 그 전에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음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오스메니아 대통령과 미군의 상급 지휘관 그리고 필립핀 정부의 각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있었던 갖가지 사건들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그는 재혼한 아내와 살고 아들도 태어났었다. 아버지는 일찌기 이 도시에서 군무에 종사했었으며 맥아더 그 자신도 전투와 희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조용해진 청중을 향해 맥아더는 자기의 부대가 마닐라와 필립핀 탈환을 위해 그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내면서 싸웠는가를 이야기했다. 벅찬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해 이따금 끊어지다가 마침내는 목이 메이고 말았다. 맥아더는 위싱톤의 최종 결정을 고대하고 있는 필립핀의 독립에 관해서는 전과 같은 정도로 회복되어야 마땅하다고 강변했다. 당시에는 금방이라도 완전한 자주 독립이 부여되지나 않을까 하고 기대되었지만 실제의 완전 독립이 달성되기는 종전 이듬해인 1946년 7월 4일이 되어서였다. 코레히돌에 다시 성조기를 올리고 한편 침패의 오명을 씻을 길 없던 바탄반도의 소탕작전은 홀 소장의 제11군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맥아더 자신이 지휘한 작전이었다. 몇 주간에 걸친 맹폭격이 있은 후 천연의 요새도인 코레히돌도 마침내 미군의 수중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 섬에서 일본군은 5000명의 수비대가 거의 최후의 일명이 남을 때까지 죽음을 초월한 결전을 전개했다. 대부분은 이 섬에서 전사하고 포로가된 병사는 가까스로 26명의 헤아렸다. 3월 2일 맥아더는 4척의 PT보트(고속 어뢰정)로 코레히돌을 방문했다. 3년 전인 1942년 그와 함께 오스트라리아로 동행했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 섬에 남겨졌던 구 사령부를 보고자 그와 함께 돌아 온 것이다. 감회어린 게양탑의 꼭대기에 맥아더는 성조기를 친히 게양했다. 이때까지에 루손섬의 주요한 전략목표는 전부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아직도 잔존했지만 미군이 앞으로 해야 할 대업은 루손의 북부 산악지대로 퇴각한 야마시다 장군의 휘하 잔존부대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필립핀 방방곡곡에 패잔한 일본군을 섬멸코자 결심하고 또한 화란령 동인도의 일본군도 소탕해 버리려고 강구했다. 그러나 워싱톤은 이 최후의 제안을 거부했으며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이 일본의 항복 후에 집권하도록 인정했다. 그 까닭은 화란영토인 뉴기니아를 제외하고서는 일본의 항복 당시에 화잔 영토인 동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옥의 교두보' 이오지마도 점령 4월까지에는 비사야제도의 해로도 소탕되고 6월 말에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지역이라고는 바기오 근방의 약 64평방킬로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로 좁혀졌다. 미군은 루손섬을 탈환에 8500명의 장병을 상실했다. 일본군은 항복 당새에만해도 무려 5만명규모의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의 4만명 가까이는 야마시다 장군의 휘하 장병들이었다. 바기오는 4월 26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기오 북동쪽의 작은 상 속으로 퇴피했다. 이 무렵 미군은 다수의 병사를 희생시키면서도 격전지로 알려진 이오지마를 공략하고 있었다. 전쟁영화<이오지마의모래>로도 이때의 처절한 격전을 되새기게 해 주거니와 그것은 제 109사단장 구리바야시.다다미찌 육군중장이 지휘하는 23000명의 일본군 수비대와 이를 공격하는 해병대의 정예 3개 사단 약 7만병력인 미군과의 사이에 전개된 일대 공방전이었다. 미군의 상륙 후 혈전사투 26일간으로 끝나 이 대 결전에서 일본군은 투항한 수백명을 제외한 전월이 옥쇄했으며 미군의 사상자는 전사 5563명 부상 17343명에 달했다. 섬의 크기라 한들 기껏해야 폭이 가장 넓은 지점은 2마일 그 길이가 5마일도 안되는 콩알만한 소도에서 빚은 사상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일본군의 단말마적인 소위 '반자이(만세의 일본어)돌격'이 귀신도 잡는다는 미 해병대를 궁지에 몰아 넣었던 무용담은 영겁을 두고 이오지마 격전을 증언해 줄 것이다. '지옥의 교두보'란 낱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에서였다. 이오지마를 이토록 중시하게 된 전략적 가치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한 중폭격기 내지 장거리 전투기의 전진기지로서 필요했다. 특히 일본 본토 폭격전에서 귀환 비행중에 대공포화를 맞아 손상되었다거나 또는 연료가 결핍되었을 때의 경우를 만난 B29폭격기의 불시착지로서 크게 평가된 곳이다. 이오지마 공략후 종전시까지 실로 이 거대한 중폭격기의 2251대가 이 섬에 불시착했던 통계로 보아 이오지마의 당시 전략적 진가를 가히 가늠하게 한다. (주. 본서의 씨리즈참조) 맥아더의 견해로서도 필립핀의 방위에 대한 일본군 장병들의 전투는 훌륭했다. 일본군은 수만의 미군 장병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셈이었는데 이것은 이오지마에서 미군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전법과 꼭 같은 용감성에 의해서였다. 뭇소리니의 이태리 패망에 이어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 유럽 전선에 종지부를 찍고 세계의 관심이 태평양 전쟁으로 쏠리고 있던 1945년의 초여름도 얼마 안남았던 때 군국주의 일본의 운명도 쇠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안목으로는 완전 승리의 날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생각되었다. 앞으로도 1년 반은 걸리지 않을까 하고 예측될 정도였다. 1945년의 처음 몇 달 동안 일본군 특유의 한가지 '옥쇄전법'인 가니가제 특공대의 활약은 더욱 맹렬했었다. 필립핀과 이오지마의 공략전이 지연되는 바람에 4월 1일 개시된 오끼나와 공략전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밋츠 원수의 책임이었다. 비록 맥아더의 전술권외이긴 했지만 태평양 전쟁 중에서 '최대의 수륙양용 작전'으로 시종한 이 공략전에서 일본군이 발진시킨 연 1900대의 특공기로 14.7퍼센트의 전과를 올렸던 것은 오끼나와 결전의 규모를 상상케 하는 바 있다. 당시 세계최대를 자랑하는 초노급 전함 '야마또'(대화.64000톤)를 주축으로 하는 일본해군 최후의 해상 부대가 이또.세이이찌(제2함대 사령관)해군 중장의 지휘아래 오끼나와 결전에 참가하고자 항진중 미군기의 영격을 받아 격멸당했던 사실은 히 오끼나와 공략전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화제를 남겨 준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고위층은 오끼나와가 공함된 이후에도 일본이 본토를 포함하는 4개 섬에서 시산혈하의 격전을 벌이지 않고는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11. 멀고도 긴 여로의 종착역 맥아더의 부대가 마닐라에 돌입했을때 지구의 반대 편에서는 태평양 전쟁의 장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회의가 열렸다. 1945년 2월 4일-11일의 얄타회담이 그것이다. 소연의 대일참전 결정한 얄타회담 루즈벨트.쳐칠.스타린의 세 거두가 모여서 쏘련이 독일의 항복 2,3개월 후에 일본을 상대로 하는 군사행동 즉 대일 참전키로 결정했다. 그리고 쏘련은 1905년 일본에 약취당했던 남 가라후또 남만주의 따렌과 뤼순및 예날의 판도이던 대한반도의 북부 그리고 찌기마 열도의 영유를 약속받았다. 이 회담에서 쏘련이 보장받은 대일참전의 대가 치고는 너무나 푸짐한 반대 급무였다. 이 문제에 관한 루즈벨트의 의견은 맥아더의 보고도 포함하는 극동으로 부터의 여러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된 결정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정말 골치 아핀 존재이며 더구나 만주에는 아직 월기 왕성한 대 예비군(즉 관동군)이 건재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쏘련이 참전해 주면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가져 올 수가 있다고 연합군은 내다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만주의 가또오군이 당시 대폭 감축되었었고 예상했던 만큼이나 강력하지 않았음이 판명 되었지만 당시의 입장으로서는 비록 맥아더와 여러 군사 전문가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루즈벨트의 대쏘청원 결정이 결코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4월 1`일에 시작된 오끼나와 공략전도 미국과 연합국의 이 의견을 변경시키지 못했다. 일본군이 점차 증강되는 연합군을 맞아 맹렬하고도 용감하게 대적했기 때문이다. 영군의 동인도 개입에 반대해 5월 1일 맥아더 지휘하의 호주군 부대는 화란령 동인도를 탈환하기 위한 장기 작전계획의 제 1단계에 착수했다. 루즈벨트는 이 작전에 맥아더가 미군을 투입하는 조치를 인정하지 않았다.그런가 하면 영국군을 신용하지 않고 있던 맥아더로서는 영국군이 동인도의 소탕작전에 파견되는 조치를 환영하지 않았다. 만일 영국군이 이 지역을 일단 점령하면 그들을 거기서 철수시키기는 매우 어렵게 된다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옛날 나폴제옹 전쟁 당시 자바섬에서 활동했던 래플즈(당시 부총독.주참조)의 문제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의 전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맥아더는 우려했는데 그런 사태는 쉽사리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영국은 화란과 동맹관계에 있었고 영국 수상 쳐칠은 동인도를 종전후에 화란에 반환하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래플즈 즉 토마스.스탠포드 .래플즈경은 나폴레옹 전쟁때인 1811년 영국이 쟈바섬을 점령하자 부총독으로서 이 섬에 부임하여 종래의 화란무 중상주의적 식민지 정책을 개혁했다. 동인도의 이관을 싸고 영.화간에의 항쟁은 끊임없었는데 특히 래플즈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삼아 1819년 싱가폴을 발견하고 19세기에서의 영국의 극동진출에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된 싱가폴의 기초를 확립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감스럽게도 전쟁 종결을 보지 못한채 서거했다. 1945년 4월 12일 그러니까 일본패망 4개월 앞서의 급서였다. 후임에는 미조리주 출신의 전상원이며 1945년 초부터 부통령이던 트루만이었다. 죽음 앞에는 누구나 감정을 초월해서 엄숙하다. 맥아더는 생전에 자기의 비위와 곧잘 거슬리던 상전인 루즈벨트에게 그래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고 후일 술회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트루만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이 없었고 또 극동의 정세에 관해 신임 최고 사령관(대통령) 보다는 자기 편이 매우 상세하다고 맥아더는 자부했다. 좌우간 영국군과 별다름 없긴 하지만 호주군이 그의 지휘아래 동인도를 공격하면 이곳을 계속 점유허려던 '래플즈의 실책'을 되풀이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맥아더는 판단했다. 호주군은 이 작전의 제1단계로서 동 보르네오에 가까운 타라칸섬을 점령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맥아더는 마운트밧텐 장군의 영국군 부대의 사용을 또 하나의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것은 자기 영역으로 알고 있는 지역에 영국군이 개입 동인도에 관한 한 아무 공격이 없었던 과거를 뒤엎고 일조일석에 승리의 영광을 가로 챌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에 관해서는 버마전선에서의 전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맥아더로서는 보르네오의 석유를 작전수행에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호주 육군의 토마스.브레이미 대장은 호주군을 믿을 수 없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울화통이 터졌다. 그는 자기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고 싶은 의욕에 북받쳐 호주 국방성에 비난섞인 울분으로 호소했다. 오스트라리아군 브레이미대장의 반감 브레이미와 맥아더가 회견했을 때 호주 제1군단은 브레이미 통솔하에 두어 모로타이섬에 있는 브레이미의 전방사령부에 의해 호주 군대로서 관할받지만 부대 그 자체는 맥아더의 총괄적인 지휘아래 둔다는 것으로 타협이 성립되었다. 브레이미에게는 호주령 뉴기니아로부터 호주군을 철퇴시킬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이 아직도 연합군 전선의 배후에 산재해 하루살이 같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으로서는 후방부대를 동원시켜 화란령 동인도에 날아서 저항하고 있는 일본군을 한 병사라도 남김없이 섬멸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레이미는 맥아더가 필립핀을 주시하고 있던 바와 동일한 심정으로 호주령 뉴기니아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는 조국의 명예를 지키며 동시에 개인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측면으로는 극히 당연했다고 할것이다. 보르네오섬에 대한 작전계획이 미.영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작전계획은 타라칸섬을 5월에 브루네이만을 6월에 그리고 바릭파판을 7월에 각각 점령하도록 수정되었다. 영국군은 맥아더가 기대했던 정도로 이작전에 정열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립핀에 있는 다수의 연합군 병력으로서는 일본이 공격의 주 목표이며 문제시되는 보르네오는 일본과는 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영국군의 견해는 별반 영향력이 없었지만 맥아더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권이 동남아에서 다시 활개치는 것을 적어도 표면상으로나마 저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한 바와는 정반대로 영국의 이뤄ㄴ을 미국의 이권으로 탈바꿈시키려는 타산을 했던 맥아더의 저의는 어느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해학이었다. 동인도는 네델란드에 맥아더는 그의 저 <회고록>속에서 화란이 동인도에 지배권을 부활하면 이 지역의 통치는 더 질서정연하게 되리라는 점 동인도의 완전 탈환에 관해 그가 수립했던 계획이 워싱톤의 판단착오로 기각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 후 '겉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가 야기된 점을 탄식하면서 인상 깊에 지적하고 있다. 이 혼란상태란 수카르노의 지도아래 인도네시아 정부가 수립되어 1954년 8월 17일 복립선언이 있게 된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추측왼다. 전후의 인도네시아에 정치 및 군사적인 투쟁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말하자면 맥아더의 계획대로 였다면 인도네시아는 필립핀 같은 위치에서 자못 미국의 영향력을 환영하게 되었을 것이 아니었겠나 하는 아쉬움이 맥아더의 탄식이 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맥아더가 전후의 동남아지역에 화란의 제국주의적 이권을 재건하고자 고심했던 흔적을 생각한다면 맥아더 자신애 반제국주의자라고는 떳떳이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오스트라리아군은 보르네오 소탕전에 5월 1일 호주군 1개여단이 타라칸에 상륙했다. 얼마 안되어서 유럽 전선의 독일이 항복했던 무렵이다. 호주 정부는 브레이미 장군의 요청에 따라 맥아더에 대해 호주군을 미군과 함께 일본에의 반공 작전에 파견하기 보다는 차라리 바릭파판으로 계속 진격시키코자 하는 계획의 재고를 촉구했다. 호주 국민은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난 이 마당에 태평양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다른 연합국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염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보르네오 지구에서의 작전속행과 호주군의 바릭파판으로서의 진격계속을 주장했다. 호주는 싫다 해도 맥아더의 계획을 수행해야 했다. 맥아더는 6월에 호주군이 브루네이만을 확보했을 때 그들과 함께 상륙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7월 1일에 3만 3천명의 부대로 바락파판에 수륙양면에서의 공격을 감행했을 때도 맥아더는 함께 상륙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맥아더의 남서 태평양 사령부로서는 최후의 작전이 되었으며 그 후의 소탕작전을 도외시 한다면 이 작전은 3주일만에 끝마친 셈이었다. 한편 루손에서의 전투는 1945년 7월까지에도 끝내지 못했다.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의 지상전투로 기록되었는데 미군 15개 사단과 다수의 필립핀군이 참가한 대규모의 결전이었다. 이 규모는 연합군이 유럽의 시칠리아섬과 동남아의 버마 및 오끼나와에 보유하고 있던 병력을 상회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항전은 완강했다. 필립핀제도안에 패잔했던 일본군의 악착같은 저항을 격차한후 일본 본토 공략에 그의 휘하 부대를 투입하고 싶다는 맥아더의 의욕으로도 태평양 전쟁을 단축되지 않았다. 동인도를 탈환하고자 하던 그의 계획도 만약 실행되었더라면 전쟁의 조속한 종결에는 이렇다 할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디딤돌 작전'에 의해 되도록 일본군 부대를 상관치 않고 뛰어 넘어 가자는 맥아더의 당초 계획은 뉴기니아에선 성공했으므로 끝까지 이 방침을 굳게 밀고 나가야만 했었다. 대국적인 사리는 이러 함이 마땅했으나 맥아더는 자기와 미국의 영예를 구하려는 의욕이 강했으므로 매양 이 방침을 견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이 앞으로도 상당히 계속되리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트루만에 대해 일본을 본토에서 패배시키려면 적어도 1년 내지 그 이상의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트루만이 이 전쟁을 극적으로 종결시키고자 일본 히로시만에의 원자폭탄 투하를 결심한 사실을 맥아더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광섬에 원폭투하 소연은 대일개전 오끼나와의 점령으로써 1945년 7월까지에 일본 본토에 대한 집중 폭격과 이에 따르는 본토 진공작전이 가능하게 비쳐졌다. 커티스.르메이 소장에 의해 제창된 일본국내 주요 도시에의 소이탄 폭격은 파멸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그 중에서도 수도 도오꾜에 대한 '융단 폭격'은 일본 전쟁지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맥아더와 니밋츠는 이미 규우슈우에서부터 시작되는 '일본 본토 진공작전'의 예비계획을 작성하고 있었으며 종전에 볼 숭 없었던 대대적인 규모로 전개할 예정이었다. 연합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약 200만의 천문학적 병력을 동원키로 예정했지만 우선 최초의 상륙에는 약 10개 사단과 3개 예비사단이 지정되었다. 다음 단계로는 도오꾜 부근의 상륙작전인데 여기에는 14개 사단과 약 2개 예비사단이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7월 17일 전시 중으로서는 마지막 거두회의가 점령도시인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개외되었다. 트루만,스타린 및 쳐어칠의 3국 수뇌가 회동했다는 사실은 익히 아는 바다. 이 회의는 전후 연합국에 의한 유럽에서의 질서 수립과 대일 전쟁의 종결단계를 의논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쳐칠 수상을 약 2주간 속행된 이 회의 도중에서 클레멘트.애틀리와 교체되었는데 이는 포츠담회담 개최중에 실시된 영국의 총선거 결과 노동당이 새로 집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시작된 후 트루만 대통령은 미국 뉴멕시코에서의 원자폭탄 실험이 송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에 접했다. 연합군의 일본 본토 진공작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우리만큼 수 많은 미군 장병의 희생이 예측(마샬 참모총장은 약 1백만으로 추산)되었으므로 이 엄청나는 희생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이 원자폭탄 투하문제가 이 회의에서 승인 되었다. 운명의 날은 왔다. 1945년 8월 6일 오전 9시 15분 일본 히로시마-마리아나 제도의 작은 섬 티니안 비행기지(괌성의 정북)를 출발한 B29 '에노라.게이'호가 단독비행 인류가 아는 한에서는 가장 파괴적인 병기를 투하했다. 삽시간에 시내를 완전히 초토화 시키고 말았다. 결과는 7만 8000명의 사망자와 약 5만1000명의 부상자가 집계되었다. 여기에 약 4만 8천호의 건물이 완전 파괴되고 2만 2178호가 반괴 당했다. 그래서 17만 6000명 이상의 시민이 집을 잃고 아비규환속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들 원폭 피해자 가운데는 한국인도 다수 포함되었음이 뒤 늦게 밝혀졌는데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6만 1천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본서의 씨리즈 참조) 트루만 대통령은 이 경이적인 사실을 몇 시간후 미국 국민에게 알렸다. 이 폭탄이 TNT화약 2만톤 보다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일본의 전쟁능력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미국은 이와같은 원폭공격을 계속할 결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8월 8일에는 앞서의 얄타회담에서 독일 항복후 2,3개월 이내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을 음흉하게 지킨 쏘련이 만주의 일본 간또군에 공격을 개시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지 3개월이 지난 시기였다. 이 날짜로 쏘련은 일본에 대해 정식 선전포고를 발했다. 일본은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어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8월 9일 또 하나의원자폭탄이 규우슈우에 있는 나가사끼에 투하되었다. 그러니까 '히로시마 비극'이 있은지 3일만에 나가사끼에서 원폭은 약 10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것이다. 8월 10일까지 일본은 2개의 원폭 이외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의 폭탄세례에 시달렸다. 트루만이 일본에 대한 연속적인 폭격의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은 이틀 후인 12일의 일이었다. 일본은 마침내 8월 15일 연합군의 군문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패망 일본의 최고동치자로 맥아더는 일본을 항복으로 이끄는 교섭에 참여 하지 않았으나 일본이 항복한 날에 일본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이것은 항복조인식을 준비하는 동시에 전후 일본의 점령과 재편성에 책임을 지는 중요한 최고직위였다.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 대해 당장 마닐라로 군사를 파견하여 항복조인식에 관한 지시를 받으라고 훈령했다. 마닐하에서는 사더랜드 참모장이 일본과의 접촉을 담당했다. 일본의 군사는 매우 협조적인 저자세였지만 오직 한가지 점에는 반대했다. 그것은 요꼬하마에 가까운 아쯔끼 비행장을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준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준비해야 할 조건은 그때까지 모든 일본군용기지의 프로펠러를 분해 하고 도오꾜 지구로 부터 무장부대를 철수시키는 동시에 연합군이 진주시 사용할 차량을 준비하라는 지령이었다. 맥아더는 요꼬하마의 뉴그랜드.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맥아더의 고문들은 그에게 아쯔끼비행장에 가지 말도록 권유했는데 그 이유는 항복에 응하지 않는 비행디원들이 비행장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 국민에게 삐라를 살포 항복에 반대하는 동시 항복조인식이 거행되는 미군 전함 '미조리'호에 폭탄공격을 가하겠다고 농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22개 사단 30만의 장병이 도오꾜와 요꼬하마에 가까운 간또평야에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일본이 정복자인 연합군에 어떤 태도로 나올지 자못 불안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일본 천황에 의한 전재미문의 소위 일본 천황의 '육성방송'은 과연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흥분을 조용히 침잠케하는 힘이 있었다. 일본 천황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 궁성에 있었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천황의 신성이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목하고 있었다. 한편 또 천황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처사는 또그릇된다는 점과 천황을 향한 일본인의 절대적인 신앙심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8월 29일 맥아더는 미 국무성과 육.히군 양성에서 작성된 미국의 초기 점령정책을 요약한 문서를 받았다. 이 문서는 맥아더에게 '천황을 포함하는 일본 정부의 기구와 기관을 통해서' 일본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천황이 가질 대권의 성격은 크게 변했지만 일본 천황은 그 지위를 고수하게 되었다. 천황은 평화유지를 위해 그대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맥아더의 의견은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 문서에 의해서 맥아더는 일본에서 자유로운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연합군의 선발부대가 도착한 것은 8월 25일 이낳부터 아이켈버거 장군의 지휘하에 항공부대와 소규모의 보병부대가 일본에 도착했다. 트루만을 기쁘게 만든 '미조리' 기 므렵 350척을 넘는 미.영 양국의 태평양 함대가 도꾜오만으로 하ㅓㅇ진중이었다. 항복조인식의 장소문제로 육.해군 사이에 의견대립이 노출되었으나 논쟁은 종처럼 합의에 도달할 것같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가 할제의 제 7함대기함 '미조리'호 함상에서 하자고 말했으므로 다소곶이 타협은 돌파구를 찾았다. 맥아더의 이 조치는 미조리주 출신의 트루만을 매우 기쁘게 했다. 일본의 초기 점령은 육.해 양군이 분담하기로 했다. 제 8군과 제3함대는 고오베 이동의 혼슈우를 제 6군과 제5함대는 고오베이서와 규우슈우, 시고꾸를 점령. 각각 관할하에 두기로 조치했다. 그리고 북 태평양함대가 혹가이도를 점령하게 됨에 따라 제7함대와 제14군단이 북위 38도선이 남의 한반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쏘련은 만주와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제3함대의 함정은 8월 28일 도도꾜만으로 들어 가고 30일에는 요꾜스까에 부대가 상륙했다. 30일 이른 아침 전용기 '바탄'호에 몸을 맡긴 맥아더는 도오꾜에까지 장장 7시간의 원정에 올랐다. 기상에서는 금후 6년간에 걸치는 군사통치자로서의 정책적 개략을 메모하고 있었다. 문제의 아쯔끼 비행장 상공을 선회한 '바탄'호가 이 비행장에 착륙한 것은 하오 2시였다. '바탄'호가 선회 비행할때 시야에 들어온 일본의 상징 후지산을 바라보던 맥아더의 심정은 그 어떠 했으랴! 생애를 두고 최대의 패배를 일본군에 의해 당해야 했던 바탄반도(필립핀)에서의 그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전용기를 '바탄'으로 명명까지 했던 맥아더, 이제 만감이 교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깃이 늦은 셔츠에 애용하는 콘.파이프(옥수수대의 담뱃대)를 피워 물며 조용히 지상에 발을 내디디었다. 아이켈버거 장군이 마중하여 인사했더니 맥아더는 이렇게 첫 발언을 했다. "멜보른에서 도오꾜까지는 멀고 긴 여로였네. 이것이 아무래도 이 여로의 끝인 모양일세." 맥아더는 아쯔끼에서 줄곧 요꾜하마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유령도시나 다름이 없었다. 상점의 창문은 널판지로 봉해져 있었고 가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는 도오꾜로 정식 향발하기까지 이곳 뉴그랜드.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특별실에 자리한 그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수용소에서 일체의 연합군 포로들을 해방하게 되자 맥아더는 직계부하인 웨인라이트 장군(바탄반도에서 포로)과 영국의 퍼시발 장군(싱가폴 전선에서 포로) 두 사람을 일본으로 동행해 와서 '미조리' 함상에서의 항복조인식에 참석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31일의 밤 두 장군은 맥아더의 호텔에 도착했는데 수용소에서의 억류 생활이 장시일이었던 탓인지 피골이 상접할정도로 수척돼 있었다. 여기서 맥아더의 폭넓은 부하애를 짐작케하는 바 있다. 전공을 잊지 않고 영광의 식전을 참관하게 할애해 준 그의 세신한 배려야말로 다시금 '군인 맥아더'의 위대한 진면목에 머리가 숙여진다. 평소 제복으로 항복조인식에 '미조리'함상에서의 역사적인 조인식이 거행된 것은 1945년 9월 2일 이었다. 모든 참석자를 탑승시킴 구축함이 맑게 개인 푸른하늘을 이고 '미조리'호에 다가갔다. 약 100년전에 도오꾜만에서 페리 제독이 사용했던 그 미국 성조기가 미풍에 나부끼는 가운데 식전은 새역사의 한 페이지를 엮기 시작했다. 일본의 항복 전권단 일행은 모두 정장했다. 일본 육군 참모장인 우메즈.요시지로 육군 대장은 올리브 생이 깃든 갈생의 장성복을 입었으며 반들거리는 장화를 신고 있엇다. 시게이쯔.마모루 외상은 정식으로 실크.햇트(남자용 높은 모자)에 모닝.코트를 걸치고 얼룩무늬의 하의를 입고 있었다. 자기의 기함이 식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할제 제독이 호스트로서 일본항복전권단의 인사를 받았다. 전 연합국의 대표들은 광채가 나는 유니폼으로 함상에 도열했다. 함상에는 군인들과 카메라맨이며 신문기자로 메워졌다. 맥아더의 차림은 예외로 간소했다. 모두들과는 대조적으로 간단한 제복을 입고 오픈.넥크인채 훈장도 달지 않고 평소의 군모를 쓰고 있었다. 일본인들 중에는 그의 군장이 고의로 일본 대표를 모욕하는 제스츄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맥아더가 즐기는 '소인극'이며 그를 둘러싼 제복들의 호화찬란함과 위세당당함과는 대조적으로 도리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효과를 노렸던 것만 같았다. 오전 9시. 갑판에 모습을 드러 낸 맥아더는 일본항복전군단을 향해 놓여 있는 테이블 뒤에서서 손에 든 문서를 읽시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짧았다. 그는 연합군의 대표가 일본과의 평화회복을 위해 여기 모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신과 악의및 증오의 심정을 가지고 여기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승자와 패자를 포함해거 이제부터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어울리는 존엄을 향해 일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엄한 의식이후 과거의 유혁과 학살로부터 보다 좋은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고원이며 또한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이 세계는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삼는 세계이며 인간의 존엄과 인간이 품어 온 자유와 관용 및 정의의 완성을 위해 바쳐 온 세계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일본측 전권 대표인 시게미쯔 외상이 먼저 테이블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테이블에 몸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이며 신경질적인 느낌으로 서명하려고 망설일 때 사더랜드 참모장이 서명하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서명한 것이다. 그에이어 우메즈 참모총장이 일본 '대본영 해군'을 대표해서 서명했다. 맥아더가 이 문서에 서명한 때가 9시 8분 뒤이어 연합국 대표가 차례로 서명했다. 일본군 포로였던 웨인라이트오 이 감격적인 광경을 지켜 보았으며 맥아더와 공명을 다투던 니밋츠도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브루스.프레이저 경 (해군 대장)이 영국 연방을 대표해서 데레비얀코 육군중장은 쏘련을 대표해서 각각 서명했다. 기타 연합국-중국,카나다,프랑스 및 뉴질란드등국의 대표가 서명을 끝내자 맥아더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세계 평화가 회복되고 하느님이 항상 그것을 지켜 주시도록 기원합시다. 식은 끝났습니다." 조인식이 끝났을 때 미군의 B29 폭격기 400대와 항공모함의 함재기 1500대가 우람찬 폭음을 울리며 머리 위를 편대비행으로 축의 표했다. 역사적인 식은 막을 내린 것이다.잠시 후 맥아더는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방송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아니 제2차 세계대전은 드디어 종막을 고한 것이다. 9월 8일 맥아더는 총사령부를 도오꾜에 설치하고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관-사실상의 일본의 지배자로서 다년간에 걸치는 통치가 시작되었다. 욕구불만의 20년 맥아더의 군인적 면모 맥아더는 위대한 군인이었다. 그의 강렬하고 위압적인 성격은 제1차 대전중의 체험을 통해 더욱 굳어졌으나 이번 대전에서는 타에 견줄 바 없는 용기와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평화시절의 무인은 미묘하게 변모하기 마련이다. 두 대전 사이의 약 20년은 맥아더에게 있어 더없이 욕구불만의 세월로 전철되었다. 필립핀의 방위체제 확립에 소요되는 자금도 없었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자기가 못하는 일을 워싱톤의 책임으로 돌려 비난했으며 재혼할 때까지는 냉정히 판단하기 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앞섰던 것이다. 맥아더는 위엄을 보이며 연극의 환상에 열중하기 위해 마닐라 사령부의 법정과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의 성격에 오점을 남기게 되어 후일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맥아더가 제 아무리 집요한 호소를 되풀이 해보았다 하나 필립핀 방위체제의 정비를 위해 적절한 조처가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워싱톤에만 실책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었다. 바탄과 코레히돌로부터의 탈출방법도 좋지 않았으며 포위당한 부대의 사기가 저상되었다는 사실은 거의가 그의 실패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양심의 가책 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가를 추측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맥아더의 저서 <회고록>은 이따금 사믈을 정확히 비취주는 거울로서보다는 그것을 변호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오스트라리아에서 황량한 기분으로 보낸 처음의 몇달동안 맥아더가 자신의 실책을 터득했다고 촌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맥아더가 필립핀으로의 조속한 귀환을 이루기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일단 귀환하게 되는 날이면 대일반공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일본병사를 한명도 남김없이 필립핀밖으로 축출하기를 주장한 소이는 대일 보복이라는 복수심보다 자신의 양심적 가책을 감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뉴기니아에서 보인 행동과 필립핀 탈환에서 발휘한 수완은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명에를 훼손시키려는 호사가들의 입에서는 이 작전들을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은 할제 제독이며 또한 통합참모장회의의 공적도 크다고 운운하지만 맥아더가 그 임무를 맡은 최고책임자인 한 훌륭한 전공을 수립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병사를 개죽음 시키지 않았다. 맥아더는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면에서이 욕구도 컸다. 그러나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성은 치졸했다. 이 점에서 그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항간에서 맥아더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정치사상으로는 그는 극우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군사를 다루고 있는 한 이것은 별로 중요시 되지 않는다. 무릇 장군은 권위주의의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없으면 의연한 장군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맥아더는 이 권위주의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했던 것이다. 오스트라리아 시절의 초기는 자신의 실책을 남의 책임으로 전가 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보다는 먼저 힛틀러를 타도 해야 한다는 워싱톤의 결정을 이해도 하지 않었거니와 이를 수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가 워싱톤에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불평을 되풀이 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무망했던 병력과 보급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집착성을 훌륭히 활용한 결과였다. 그는 병사를 사랑했다. 저속한 표현을 빌리면 그는 병사를 개죽음 시키지는 않았다. 그의휘하부대가 기록한 사상자율은 비교적 낮았다. 귀중한 인명을 무모하게 희생시키지 않고 태평양에서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요구한 것이라면 그가 대량의 병기와 비행기 및 함선을 요구 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핀 작전에서 일본의 정복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었는데 필립핀 탈환에 병력을 과도하게 투입한 조치는 그의 고집이 완강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최대의 약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대로 실수가 없다,"는 그의 자신은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를 둘러싸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측근 참모들이 조작해 낸 커다란 결점이었다. 맥아더는 어떤 장군이라도 범하기 쉬운 군사상의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때의 비판을 못내 감수하지를 못했다. 오스트라리아에 있을 동안에 그가 궁지로 몰리던 상황 속에서 진격할 결의를 굳히고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하는 벅찬 작전에 착수하고자 했던 짓은 자기비판을 과감히 하려고 했던 때였다. 그의 최대의 한가지 결점 '연극풍'도 아이로니칼하게 태평양 전쟁에서는 그를 돕고 그의 행동을 뒷받침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문을 통한 과장된 성명도 미국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것은 미국의 참전후 몇달 동안 국내의 전시체제가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던 때에 온국민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는데 실로 효과적이었다. 천재적 군인이지만 정치에는 소박했다. 대개의 장군이라면 맥아더가 바탄과 코레히돌에서 범했던 괴멸상태의 패전을 초래할 경우 대개의 장군이 당장 파면될 것이 상례이다. 맥아더늬 독특한 능변술은 그의 군인으로서의 명운을 살렸다. 그는 해임되기에는 인기가 너무나 높았다. 그가 복귀함으로써 대부분의 미국 국민이 그의 승리에 힘입으면서 살 수가 있었다. 부하들은 맥아더의언사에 분개하개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개는 60대가 되어서도 젊은 병사들과 함께 물속을 헤치며 상륙의 발걸음을 재촉해 가는 장군의 모습을 일견 질시하면서도 칭송하는 태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때의 맥아더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 그 동기로 되어 있었지만 자신의 영웅주의를 널리 인정받으려는 동기도 있었음은 부인못할 사실이며 장병들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상의 이유로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은 맥아더의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전쟁을 시작할 때에 장군으로서 자신의 군사상 상관의 지혜에 대해 일단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군인의 의무이다. 그러나 정치상의 이유로해서 대통령과 군사수뇌부를 공박한다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정치분야는 군인의 가장 약한 부면이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약점중에서도 이것은 최악의 것이었다. 맥아더는 대전 후 일본의 새로운 '장군'으로서 빛나는 면모도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동란 이래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던중 '돌연해임'을 당함으로써 이른바 '정치적 무식'을 폭로한 사실은 통탄할 일이거니와 이는 바로 이 최악의 약점이 표면에 노출된 소치였다. 그렇지만 이 약점도 그의 최대의 자질 -애국심.용기.우수성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발언하고 실천한 모든 것-을 상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요컨대 그의 약점에 비하면 그의 자질은 위대한 장군으로서 맥아더의 상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의 영특한 결단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 준 그의 군인정신을 한국의 인천시내 만국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은 오늘도 증언해 줄 것이다. 영원 세세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