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는 어떻게 갈퀴를 달게 되었나 머리말 하늘과 나무 몇 그루만 제외하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책상, 서적, 컴퓨터, 내 뒤편에 있는 의자, 융단, 문, 내 위에 있는 전등, 천장, 지붕, 창 밖에 있는 도로, 차량, 건물, 모두가 자연의 일부를 분해하고 조립해서 만든 것이다. 아니할 말로 하늘조차도 대기 오염에 찌들어 있으며 정원수 또한 도시 계획에 따라 할당된 공간에 맞추어 야릇한 모양으로 꾸며져 있다. 사실상 도시인이 감각으로 접하는 모든 대상은 인간의 손끝을 거친 것이며 우리들 대다수가 접하는 물리적 세계는 적어도 설계 과정을 통해 걸러진 대상이다. 우리 지각의 대부분이 그처럼 인공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물건들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가 자연히 궁금해진다. 어떤 기술의 산물이 저런 모양이 아니라 이런 모양을 취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 제작물의 독특한 디자인 혹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은 디자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게 되었는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쓰이는 도구들이 뚜렷이 구별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기능을 갖게 되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서양에서의 나이프와 포크의 발전은 동양의 젓가락을 설명하는 원리로도 설명이 가능한가? 밀면서 자르는 서양 톱과 당기면서 자르는 동양 톱의 형태를 설명하는 단일한 이론이 있을 수 있는가? 기능이 형태를 결정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인공 세계의 모양과 형태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러한 의문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내가 왜 인공물은 곧잘 부서지는가를 주로 해명하였던 '공학은 인간을 바탕으로'에서 시작하여,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역사의 거듭되는 부침 속에서 하나의 인공물이 발전되는 과정을 추적한 《연필》에서 진전시켰던 공학적 탐구를 좀더 확대시킨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어떤 물건의 물리적 실패라기보다는 그 실패`──`물리적이든 기능적이든 문화적이든 심리적이든`──`가 형태 전반에 대해 갖는 숨은 뜻이었다. 디자인 세계에서는 금과옥조로 받들어지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명제를 논박하는 내용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이 장문의 글은 물건 자체를 넘어서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 발명과 디자인의 창조적 과정의 뿌리에 대한 고찰로까지 이어졌다. 물건이 물건으로부터 나오듯 책 또한 책에서 나온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수많은 도서관과 사서들로부터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이번에도 듀크 대학교 베시치 공학도서관의 에릭 스미스 관장의 도움이 컸다. 그는 뜬구름 잡는 식이었던 나의 모호하기 짝이 없던 자료 요청에 대해서 한 번도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보의 보고를 한발 앞서 찾아내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듀크 대학교 퍼킨스 도서관의 공공기록과에 근무하는 스튜어트 바제프스키 씨는 이번 작업에서 큰몫을 한 특허 문서로 나의 관심을 이끌어주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D. C. 힐 도서관의 특허 문서실은 자료에 대한 나의 왕성한 욕구를 말끔히 채워주었다. 여러 기업체에서 선뜻 제공한 사사, 카탈로그, 팸플릿 덕분에 나는 도서관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물건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대한 윤색되지 않은 값진 자료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친구들과 독자, 수집가들도 소중히 보관하던 기록이나 수집품들을 흔쾌히 소개하여 나의 연구에 활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래전부터 발명가와 디자이너들하고 주고받았던 편지나 대화가 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발명과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의 기여는 대부분 익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작업 안에서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두드러져 보이더라도 한 올씩 뽑다보면 어정쩡한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공식적으로 쓰거나 말한 내용은 참고서적 목록에다 출전을 명기하였으며 나의 입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읽었던 것들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몇몇 작가와 공학자, 기술사가들도 적절한 사례와 격려를 보내주어 이번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프리먼 다이슨, 유진 퍼거슨, 멜빈 크랜츠버그, 월터 빈센티 씨 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한 권의 책을 쓰는 데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확보되어야 한다. 전자에 관해서는 나에게 연구비를 지원해준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재단측에 감사하며 후자에 관해서는 열람석을 마련해준 퍼킨스 도서관에 감사한다. 나의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편집자 애슈빌 그린 씨와 그 밖에 알프레드 A. 크노프 출판사의 다른 편집자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들은 저마다 빛깔이 다른 연필로 내 원고를 검토하면서 책으로 나올 때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 책에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마지막으로, 저녁마다 독서와 사색에 잠겨야 했던 나의 사정을 이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 책상 위에다 부서진 물건이나 희한하게 생긴 것들을 부지런히 날라 흥미있는 정보를 준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색인 작업을 맡아준 스티븐과 카렌, 특히 집필 과정에서 틈틈이 나를 위해 이 책을 읽어주었던 캐서린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듀크 대학교 퍼킨스 도서관에서 1992년 4월 헨리 페트로스키 1 포크는 어떻게 갈퀴를 달게 되었나 사도구에 대한 다양한 탐구 매일 우리가 사용하는 식사도구는 손만큼이나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리는 마치 손가락을 놀리듯이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파티장에서 오른손잡이나 왼손잡이의 팔꿈치가 우리의 팔꿈치를 자꾸 건드린다면 또 모를까, 우리는 이런 도구들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편리한 도구들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찌하여 마치 하나의 본능처럼 우리에게 뿌리내린 것일까? 그것은 목욕통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부력을 발견하고는 “유레카(알았다)!” 하고 고함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우리의 먼 조상님 한 분의 머리에 그렇게 기발한 착상으로 퍼뜩 떠오른 것일까? 아니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부분처럼 자연스럽게 조용히 진화해온 것일까? 서양의 식기는 동양 문화권에서 왜 그토록 낯설며 동양의 젓가락은 왜 서양인의 손에서 겉도는 것일까? 우리의 식사도구는 “완벽한”가, 아니면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인가? 밥상머리에서 주고받을 만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이런 물음들은 모든 인공물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질문의 전거로 삼을 만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 발전 일반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식사도구의 형태를 결정한 힘은 모든 인공품의 모양을 결정한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식사도구 하나하나의 다양한 기원을 이해할 때 병, 쇠망치, 클립에서 다리, 자동차, 핵발전소에 이르는 인공물 일반의 다양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프, 포크, 스푼의 진화를 파고들 때 우리는 기술이 이룩해낸 모든 물건의 발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매일 쓰면서도 정작 잘 모르는 식기류에 대한 탐구는 발명, 혁신, 디자인, 공학이 서로 본질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파악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물의 기원을 명쾌하게 단정짓기도 한다. 《그림으로 보는 발명의 역사》`라는 책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G. B. 초르촐리는 이렇게 딱 잘라 말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선사시대의 여명기에 만들어진 물건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기술의 진화》에서 조지 바살라는 “인공 세계에 등장하는 모든 새로운 물건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식기류를 놓고 볼 때 제법 들어맞는 듯하다. 우리의 먼 조상들도 틀림없이 음식을 먹었을 테니, 우리로서는 그들이 어떻게 먹었는가가 당연히 궁금해진다. 식탁 예절을 두고 말하자면 처음에 그들은 동물이나 다를 바 없었으리라.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동물들이 먹이를 먹는 모습에서 초기 인류 식문화의 기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빨과 손톱으로 과일이나 야채, 물고기, 고기를 조각조각 찢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빨과 손톱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먹이를 한 입에 쏙 들어갈 수 있게 찢으려면 그것보다 더 단단하고 뾰족한 도구가 있어야만 한다. 칼은 모양이 좋은 부싯돌이나 흑요석 조각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싯돌이나 흑요석은 무척이나 단단한 돌이다. 이런 돌이 부서진 모서리는 아주 날카로워서 식물이나 동물의 고기를 도려내고 뚫고 자르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부싯돌의 여러 쓰임새가 처음에 어떻게 발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초기의 인류가 산과 들에 나뒹구는 부서진 돌조각으로 손이나 손가락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그러한 발견을 한 주인공은 맨발로 들판을 걸어가다가 뾰족한 돌조각에 발을 베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일단 우연과 의지가 연결되었다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머리를 쓰면 얼마든지 뾰족한 돌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뾰족한 돌을 원없이 사용하고 싶었던 원시 인류의 혁신자들은 초보 수준의 돌깨기에 매진하였으리라. 바위가 떨어지면서 조각조각 나는 모습을 자연에서 보고 배운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선사시대의 인간은 부싯돌 칼을 찾아내고 만들어 쓰는 데 익숙해졌다. 그들은 다른 독창적인 도구 역시 발견하고 개발했을 것이다. 불을 가지고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긴 했지만 막상 해보니 아무리 먹기 좋게 자른 고깃조각이라도 불 위에서 익히기는커녕 제대로 데우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아이들이 감자를 구워 먹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꼬챙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으리라. 가까운 숲이나 덤불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뾰족한 가지 덕분에 인간은 손가락에 화상을 입지 않고도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통째로 굽지는 않더라도 고깃덩어리가 좀 클 경우에는 길다란 꼬챙이에 찔러서 구웠을 것이다. 일단 다 구워진 고기는 불에서 내린 다음에 고르게 나누게 되는데, 아마 부싯돌 칼로 먼저 눈금을 매겨놓았으리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살점을 뾰족한 꼬챙이로 뼈에서 발라내든가 손가락으로 찢어냈을 것이다. 자르는 데 쓰는 모서리가 뾰족한 부싯돌과 찌르는 데 쓰는 끝이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서로 다른 도구들에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나이프와 비슷한 도구가 발전되어 나왔다. 고대의 나이프는 청동이나 쇠로 만들었고 나무나 조개, 뿔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런 나이프들은 여러 용도로 쓰였다. 식사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연장이나 무기로도 쓰였으며, 앵글로색슨 인들은 “스크래머색스”라는 외날 나이프를 늘 품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빨이나 손가락을 동원하여 되는 대로 뼈에서 고기를 떼어냈지만 좀더 세련된 사람들은 점차 나이프를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가장 품위를 지켜야 할 상황에서는 딱딱한 빵 조각으로 그릇을 고정시킨 뒤에 잘라낸 고깃점을 다시 나이프로 찔러 입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하면 두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도 먹을 수 있었다. 이프 두 개를 휘두르는 세련된 식사법 내가 처음으로 나이프 하나만 가지고 음식을 먹어본 것은 몇 년 전 몬트리올에서였다. 주지사가 베푼 연회가 어느 고색창연한 성에서 열렸다. 1백여 명 남짓 되는 우리 내빈들은 자그마한 무대의 삼 면을 따라서 나란히 놓인 길다란 나무식탁에 앉게 되었다. 좌석마다 냅킨 한 장과 나이프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우리는 각자 그 나이프 하나로 닭구이, 감자, 당근, 롤빵을 먹어야 했다. 당근과 감자는 그런대로 먹기가 쉬웠다. 나이프로 일부를 잘라낸 다음 다시 나이프 끄트머리에 꽂아서 입에 쏘옥 집어넣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닭은 고깃점을 잘라내는 데만도 진땀을 흘려야 했다. 처음에는 롤빵으로 닭을 고정시키려 했지만 너무 말랑말랑해서 금세 기름기에 절어버렸다. 결국 손가락으로 닭을 뜯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식사 내내 손가락에 처발랐던 기름기뿐이다. 만일 그때 나이프 하나만 더 있었어도 얼마나 편하고 품위 있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을까. 나이프 하나만 갖고 먹었던 또 한 번의 경험은 텍사스 A&M 대학의 교수와 학생이 즐겨 찾았던 한 바베큐 식당에서였다. 당시 나는 그 대학에 잠시 들렀는데 노스캐롤라이나 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그곳의 교수 한 분이 간단히 요기라도 할 겸 진짜 바베큐 맛을 한번 보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돼지 바베큐라면 남동부 지방에서도 이것저것 맛본 적이 있다고 했더니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 텍사스 육우를 재료로 한 바베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자신하는 요리를 조금 시켰다. 종업원이 가져온 것은 얇게 썬 양지머리 고기와 통째로 익힌 양파 두 알, 통통한 오이 피클, 큼직한 체더 치즈 한 조각, 흰빵 두 조각 들이었다. 이 모두가 정육점에서 쓰는 커다란 하얀 방습지에 둘둘 말려 있었다. 펼친 종이는 그릇과 깔판 역할을 동시에 했다. 종이 위에는 푸줏간에서나 씀직한 끝이 뾰족한 커다란 칼이 놓여 있었다. 나는 함께 있던 애지 부부의 행동을 눈여겨보면서 칼 끝으로 양지머리 한 점을 찍어 빵조각 위에 얹어놓았다(“판자때기”라고 불리던 중세의 빵덩어리는 구워낸 지 나흘은 지나야 묵직하고 뻣뻣해지는데, 그제서야 고기나 소스를 제대로 얹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입에 들어갈 만큼씩 한쪽만 덮은 이 샌드위치를 잘라나갔다. 앞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가 꿀맛이었다. 비록 나이프 하나였지만 먹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날이 제대로 섰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을 눌러도 음식이 종이 위에서 옆으로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우리를 초대한 주인에게 신경이 쓰여 제대로 음식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주인이 워낙 조심성 없이 칼질을 하는 바람에 까딱하다가 입술이라도 베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은 또 우리가 칼을 막 입에 넣는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릴 리는 없겠지 하는 식의 농담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이프 두 개를 휘두르며 하는 식사는 곱절로 투박하고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옛날에는 이것이야말로 세련의 극치를 달리는 식사법이었다. 중세에는 단단히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양 손에 나이프를 하나씩 들고 식사했다. 오른손잡이인 경우 왼손에 쥔 나이프로 고기를 고정시키고 오른손에 쥔 나이프로 먹기 적당하게 고기를 썰었다. 잘라낸 고깃점은 나이프 끝으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이프 두 개로 하는 식사는 그 당시로서는 확실히 한발 앞선 식습관이었으며 능숙한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나이프와 포크를 쓰듯이 두 개의 나이프를 귀신처럼 다루었을 것이다. 나이프 하나로 식탁 한복판의 고기를 고정시키고 또 하나의 나이프로 썰면 손에 기름기를 묻히지 않고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나이프는 사실 썩 훌륭한 고정 수단은 아니다. 양 손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들고 T자형의 뼈가 달린 티본 스테이크를 썰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고정 나이프로 누를 때 스테이크가 움직이지 않게 하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진땀깨나 흘려야 한다. 고정 나이프가 스테이크를 찌르면 얼마 안 가서 스테이크는 마치 축에 달린 바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잘라야 할 음식을 고정시킬 때 손가락을 동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처럼 나이프만으로는 잘 안 되니까, 특히 고기를 자르기 위해 고정시킬 때 어려움이 속출하는 탓에 포크가 개발되었다. 제의용 포크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있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식사용 포크는 없었다.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 요리사는 “끓는 가마에서 고기를 꺼낼 때 쓰는…… 살코기 포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주방기구는 “손과 흡사하게 생겼는데 손가락이 화상을 입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포크처럼 생긴 고대의 도구 가운데 쇠스랑과 삼지창도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포크는 식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멋만 잔뜩 들어간 간들거리는 물건 최초로 식문화에 도입된 포크는 두 개의 갈퀴 내지는 갈래를 달고 있었는데 주로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 데 사용되었다. 고기를 찌른다는 점에서는 뾰족한 나이프와 다를 바 없었지만 갈퀴가 두 개라서 고기를 자를 때 고기가 움직이거나 밀려나지 않았다. 선사시대에도 그런 장점은 알려져 있었겠지만 그때는 지천에 널려 있던 곧은 막대기나 갈퀴 모양의 막대기는 모두 고기 구울 때 쓰는 꼬챙이로만 쓰였지 식사도구로 사용되기에는 아직 까마득했다. 포크는 빨라야 7세기 무렵에 중동의 왕실에서 처음 식사도구로 사용되었으며 11세기경 이탈리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포크의 진가를 제대로 몰랐다. 1364년에서 1380년까지 재위한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남긴 재산목록에는 금과 은으로 된 포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것들은 오디처럼 손가락에 묻기 쉬운 음식을 먹을 때만 사용한다.” 다양한 음식을 입으로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식사용 포크는 카테린 드 메디치가 나중에 왕으로 등극하는 앙리 2세와 결혼하게 된 1533년에 서쪽의 프랑스에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포크는 여전히 허례허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접시에서 입으로 가져가는 음식의 태반을 떨어뜨리게 만든다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새로운 도구가 프랑스에 정착되기까지는 한참이나 더 지나서였다. 영국에 포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이다. 1608년에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독일을 여행한 영국인 토머스 코리어트는 3년 뒤에 자신의 여행담을 《다섯 달 동안 허겁지겁 주워삼킨 이색 풍물》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식탁 위에 놓이면 식탁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각자 고깃덩어리를 한 손으로 잡고 그 일부를 베어내야 했다. 코리어트는 이탈리아에서 전혀 다른 풍습을 보았다. 나는 내가 거쳐간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와 읍내에서 그 동안 여행하면서 본 그 어떤 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지 않는,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기독교 국가 가운데 오직 이탈리아에서만 통용되고 있는 관습을 목격하였다. 이탈리아 사람과 이탈리아에 머무르고 있는 대다수의 외국인은 식탁에서 고기를 썰 때는 작은 포크를 이용한다. 그들은 한 손에 쥔 포크로 고기를 고정시킨 다음 다른 손에 쥔 나이프로 접시 위의 고기를 썩썩 자른다.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식사를 하는 사람이 그 누구이건간에 만일 그가 모든 사람이 함께 먹는 고기 접시에 경솔하게도 손가락을 댔을 경우 그는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공중도덕을 위반한 사람으로 찍혀서 노골적인 질책까지는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따가운 눈총만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식사법은 내가 본 바로는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들의 포크는 대개 쇠나 강철로 되어 있었는데 개중에는 은붙이도 있었다. 그러나 은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지체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런 색다른 식사 습관이 이탈리아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의 손이 한결같이 깨끗하지는 않다고 볼 때 더러운 손이 음식에 닿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 역시 이탈리아 사람을 본받아 포크로 고기를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이탈리아에 머물던 기간뿐 아니라 독일에서까지도 이어졌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가끔씩 포크로 식사를 한다. 코리어트에게는 이름하여 “퍼시퍼furcifer”,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포크잽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이 말은 교수형에 처해 마땅한 작자라는 뜻도 있었다. 발명사가인 존 베크먼에 따르면 포크는 영국에서 굼뜨게 보급되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간 간들거리는 물건”으로 조롱받았기 때문이었다. 베크먼은 당대의 한 극작가가 “포크잽이 여행가”가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쓴 대목을 인용하여 포크에 대한 최초의 반응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하다못해 벤 존슨 같은 이름난 극작가도 1616년에 초연된 ‘악마는 멍청이’라는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이런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본바닥 이탈리아에서처럼 여기서도 포크를 쓰겠다는 뜻은 가상하오나 그것은 다만 냅킨이 아까워서가 아니온지. 그러나 새로운 유행은 곧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벤 존슨 또한 ‘볼포네’에서 “그러니 당신은 식사 때 은 포크를 쓰고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어떻게 관습으로 정착되었든간에 포크가 제구실을 하는 것은 거기 달린 갈퀴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퀴가 몇 개나 달린 포크가 이상적인 포크이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갈퀴가 하나인 포크는 포크라고 할 수도 없다. 음식을 찌르고 올리는 뾰족한 나이프나 진배없다. 칵테일 파티에서는 이쑤시개를 뾰족한 꼬챙이처럼 포크의 대용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쑤시개를 새우에 꽂아 소스에 찍어 먹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들 있다. 외갈퀴 포크는 널리 사용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버터 집게는 실제로 외갈퀴 포크이다. 그러나 우리가 버터 집게를 쓰는 이유는 버터를 쉽게 떨구기 위해서이다. 달팽이 집게나 호두 집게도 외갈퀴 포크로 묶을 수 있지만 사실 아담한 달팽이 살이나 호두 껍데기의 틈새에는 두번째 갈퀴가 들어갈 수도 없다. 두 갈퀴 포크는 주방에서 고기를 썰고 그릇에 담는 데 제격이다. 칼로 고기를 썰 때 고기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포크는 손쉽게 고기를 찔렀다 빼냈다 할 수 있었다. 두 갈퀴 포크는 고기 위에서의 이동이 자유로웠고 잘라낸 고기 조각을 커다란 주방용 오븐에서 접시들로 옮기는 데도 요긴했다. 주방용 포크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몫을 다했으므로 고대 이후로 본질적인 변화 없이 지금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식탁용 포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포크가 점점 인기를 얻으면서 포크의 결함도 속속 드러나자 형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주방용 포크를 본따 만든 초기의 식탁용 포크는 두 개의 길다란 일직선 갈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고정시키기에 좋은 구조였다. 갈퀴가 길면 길수록 고기를 좀더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기는 하지만 식탁에서는 사실 길다란 갈퀴가 필요없었다. 더욱이 식기류는 주방용구와 다르게 생겨야 한다는 유행과 스타일상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7세기부터는 식탁용 포크의 갈퀴가 주방용 갈퀴보다 눈에 띄게 짧고 가늘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고정시킬 음식이 겉도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포크의 두 갈퀴 사이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했으므로 그 거리는 얼마간 규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작고 흐물거리는 음식은 나이프로 찌르지 않으면 갈퀴 사이로 빠져나가곤 했다. 더욱이 갈퀴가 두 개라서 주방에서 고기를 썬 다음 쉽게 뽑을 수 있다는 장점은 초기 식탁용 포크의 경우에 일단 찍은 음식물이 쉽사리 빠져버린다는 단점으로 이어졌다. 갈퀴를 하나 더 달자 이제 포크는 국자처럼 음식을 입까지 수월하게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많은 갈퀴로 찍힌 음식은 그릇에서 입으로 옮기는 도중에 여간해서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프로 이빨을 쑤시지 말라 세 개의 갈퀴가 일 보 전진이었다면 네 개의 갈퀴는 이 보 전진이었다. 18세기 초에 이미 독일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네 갈퀴 포크가 사용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면 네 갈퀴 포크는 식탁용 포크의 본보기로 영국에서도 뿌리내렸다. 갈퀴가 다섯 개 달린 포크도 나왔지만 네 개가 가장 무난해보였다. 네 개의 갈퀴는 비교적 표면적이 넓지만 입에 넣기 어려울 만큼 옆으로 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네 갈퀴 포크는 빗처럼 빗살이 많아 음식을 찌르고 빼기가 거북하지도 않았다. 독일의 은세공업자인 빌켄스는 현대식 다섯 갈퀴 식탁용 포크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기능보다는 멋에 주안점을 두고 디자인한 것으로 보인다. “에포카”로 불린 이 물건은 “전체와 부분의 획기적인 개성” “묵직한 중량감”을 앞세우며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이 포크의 판매 전략은 식사도구로서의 효율성보다는 독특한 외양을 강조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많은 은세공업자들은 비슷한 이유로 세 갈퀴 식탁용 포크를 만들었다. 갈퀴를 작고 둥글게 만들어 포크의 선을 부드럽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바람에 음식을 찍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사례도 있었다. 포크의 진화는 식탁용 나이프의 진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포크가 음식을 찍기에 좋은 도구로 부각되면서 나이프는 반드시 끝이 뾰족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인공물은 초기 형태의 비기능적인 흔적을 여전히 갖고 있다. 나이프의 경우는 왜 그것이 사라졌을까? 거기에는 기술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적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마다 오직 먹기 위한 도구로서뿐만 아니라 연장으로 또는 방어용 무기로 나이프를 하나씩 품에 지니고 다닐 때 그 나이프의 뾰족한 끝은 단지 음식을 찍는 데만 아니라 다른 목적에 이용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실제로 나이프를 지니고 다녔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나이프보다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1530년에 예의범절에 관해서 쓴 책을 보면 “손가락 세 개까지만 사용”하고 “손으로 고기나 생선을 휘젓지” 않는다면 냄비에서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이프의 사용과 관련하여 젊은이에게는 “나이프로 이빨을 쑤시지 말라”는 훈계가 내렸다. 학생들을 위해 씌어진 프랑스의 한 예절교본에서는 식탁에서 무기를 사용할 때의 잠재적인 위협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이프의 날카로운 날은 옆 사람이 아니라 자기 쪽으로 향하게 두어야 하며 나이프를 다른 사람에게 건넬 때는 칼날 끝 부분을 잡고 주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그런 관습은 오늘날 우리가 식탁에서 지키는 예의범절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령 이탈리아에서는 포크 하나만 가지고 식사를 할 때는 빈 손을 남들이 볼 수 있게 식탁 가장자리에 얹어두는 것이 예의이다. 미국 같은 데서는 배워먹지 못한 짓거리라고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지만 이 관습은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다른 한 손이 무릎 위에서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시대의 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일설에 따르면 리슐리외 추기경이 끝이 뾰족한 식탁용 나이프를 모두 폐기 처분하도록 지시한 것은 만찬석에서 나이프의 뾰족한 끝으로 이빨을 쑤시는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1669년에 루이 14세는 빈발하는 폭력 사태의 대응책으로 식탁에서건 거리에서건 끝이 뾰족한 나이프의 사용을 불법화시켰다. 그러한 조치와 포크의 대중화된 보급이 맞물리면서 식탁용 나이프는 지금처럼 끝이 뭉툭한 날로 변하였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날은 아라비아 언월도의 구부러진 칼날을 닮아가는데 이런 초승달 모양도 세월이 흐르면서 무기로서의 겉모습을 차츰 잃어갔다. 날 끝이 점점 뭉툭해진 것은 뭉툭함 그 자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나이프와 짝을 이루어 사용하게 된 포크가 아직 쌍갈퀴 포크라 수저의 기능을 맡기에는 미흡했으므로 나이프 날의 표면적을 넓게 하여 음식을 그 위에 안전하게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는 뜻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콩처럼 낱알로 된 작은 음식은 이전까지는 나이프 끝이나 포크의 갈퀴로 하나씩 찍어서 먹었지만 이제부터는 나이프의 날 위에 얹어 손쉽게 먹을 수가 있었다. 나이프의 날은 옆으로 부드럽게 휘어져 손목을 억지로 비틀지 않고도 음식을 쉽게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이 무렵에는 짝을 이룬 나이프와 포크의 손잡이가 권총 모양으로 생긴 것도 나와 나이프 날의 곡선을 보완하기도 했지만 그 바람에 포크는 오히려 균형미를 잃게 되었다. 19세기 초부터 영국제 식탁용 나이프의 날은 거의 평행선을 이루게 되었다. 음식을 뜨고 담는 기능은 진화된 포크가 떠맡게 되었으니 이제 나이프는 써는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저간의 사정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끝이 뭉툭하고 날이 일직선을 이룬 이런 나이프는 19세기 내내 변함없는 인기를 누렸지만 그것은 사실 써는 일보다는 바르는 일에 더 알맞은 식사도구였다. 음식을 써는 쪽의 날이 손가락으로 움켜쥐는 손잡이보다 약간 더 밑으로 내려오게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썰고 자르는 데 백 퍼센트 활용되는 부분은 날의 끄트머리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 때문에 나이프의 아랫날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형태로 볼록 튀어나오게 되었다. 나이프의 윗날은 휘어짐을 방지한다는 것말고는 아무런 기능이 없었고 또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2백 년 동안 나이프의 날은 그런 형태를 거개가 고수해오고 있다. 식탁용 나이프는 단점과 결함을 극복하면서 꾸준히 개량되어온 반면 주방용 나이프는 이렇다 할 변화를 겪지 않았다. 주방용 나이프는 예나 지금이나 끝이 뾰족한데 그것은 돌 부스러기로부터 꾸준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정착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두리뭉실한 식탁용 나이프가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릴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먹을 때 절감한다. 일반 나이프처럼 끝이 뭉툭해서는 뼈나 연골 사이에 촘촘히 붙은 살집을 제대로 공략할 수 없기 때문에 별도의 도구가 부득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테이크를 써는 일은 주방 일과 흡사하다. 따라서 식탁용 나이프에서 개량된 스테이크 나이프는 주방용 나이프와 비슷한 생김새를 갖게 되었다. 크로 콩을 먹는 것은 뜨개바늘로 수프를 먹는 격 식탁용 나이프와 포크가 일종의 공생 관계를 이루면서 진화해왔다면, 스푼의 일반적 형태는 비교적 독립적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식사도구는 스푼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단단한 음식은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을 테고, 나이프는 원래 식사도구가 아니라 무기나 연장으로 처음 쓰이기 시작했으리라는 것이다. 최초의 스푼은 아마도 오므린 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안다. 조개나 굴, 홍합의 껍질은 오므린 손보다는 확실히 스푼으로서의 기능적 장점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으리라. 조개류의 껍질은 오므린 손보다 액체를 더 오래 담을 수 있으며 게다가 손을 적시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함은 있다. 국물이 든 접시에서 손가락을 적시지 않고 조개껍질로 국물을 뜨기란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추가되었으리라. 나무를 재료로 하면 손잡이까지 달린 스푼을 한꺼번에 만들 수 있었다. 스푼이라는 말 자체가 나무토막을 뜻하는 앵글로색슨 어의 “스폰spon”에서 나왔다. 스푼 제작에 주물 방식이 도입되면서 스푼의 모양도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에서 점차 벗어나 사용하기에 불편했던 점들을 고쳐가면서 유행에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스푼의 모양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정삼각형(자루는 꼭지점에), 타원형, 긴 삼각형(자루는 밑변에), 계란형, 그리고 다시 타원형으로 차례차례 변해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개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에서 나이프, 포크, 스푼을 사용하던 방식이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 확인되는 식사법의 차이를 낳았다. 포크의 도입으로 식사도구의 균형이 깨졌으며, 이제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무엇을 쥐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급한 해결을 요구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두 손에 똑같이 나이프를 들고 있을 때 식사하는 사람은 아무 손으로나 음식을 썰고 또 썬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었지만 대개는 오른손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래서 오른손에 쥐어진 나이프는 접시 위의 고기를 고정시키는 일보다 훨씬 숙달된 솜씨가 필요한 고기 써는 일말고도 썬 고기를 입으로 나르는 일까지 도맡게 되었다. 왼손에 쥔 나이프는 반드시 뾰족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때로는 끝이 뭉툭한 것도 있었는데, 물렁한 음식이나 얇은 고깃점을 담는 데 쓸모가 있었다. 포크가 널리 사용되면서 점차로 포크는 고기를 자를 때말고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왼손의 나이프를 몰아냈고 얼마 안 가서 오른손 나이프의 기능에도 변화가 왔다. 오른손의 나이프는 끝이 뭉툭해지면서 단순히 썰고 뜨는 기능만 하고, 포크는 잘라야 할 고기를 고정시키고 잘라낸 고기를 찔러 입으로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후자의 역할은 비록 오른손잡이라 할지라도 왼손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동작이었다. 18세기로 접어들자 유럽식 식사법은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오른손의 나이프로 음식을 자르고 때로는 음식 조각을 밀어 포크 위에 얹어놓으면 포크는 그것을 입으로 전달했다. 최초의 포크는 갈퀴가 곧았기 때문에 앞뒤가 따로 없었는데, 이런 구조상의 결함은 곧 드러났다. 음식을 꽂았건 아니면 갈퀴 위에 얹어놓았건 먹을 때 갈퀴가 입천장을 찌르거나 음식이 떨어지는 것을 되도록 줄이려면 포크를 거의 수평으로 입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갈퀴를 약간 구부리고 오목한 데다 음식을 얹으면 포크를 높이 쳐들지 않고도 음식을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입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게다가 갈퀴가 굽어 있으면 고깃점을 직각으로 꽂은 상태에서도 자기가 자르는 부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사용한 포크는 모두 갈퀴가 부드럽게 휘어졌기 때문에 앞뒤가 뚜렷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미국에서 포크는 거의 보기 드물었다.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의 생활상을 그린 한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포크와 나이프는 상자에 곱게 담긴 채 1630년에 윈스롭 총독에 의해 반입되었다. 17세기의 미국에서는 “나이프, 스푼, 손가락, 풍성한 수건으로 그럭저럭 식사 예절을 이어나갔다.” 18세기로 접어들었어도 포크는 여전히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영국에서 수입되던 나이프는 더이상 끝이 뾰족하지 않았으므로 음식을 꽂아서 입으로 가져가기에는 부적당하였다. 미국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포크가 없었을 때 세련된 식민지인들은 나이프와 스푼으로 식사를 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끝이 뾰족한 구형의 나이프와 스푼 곧 “spike and spon”은 손가락으로 음식을 만지지 않아도 좋게 해주었으며, 아주 깔끔하다는 뜻인 “spic and span”은 그 말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뭉툭한 spike와 spon이 오늘날의 나이프와 포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초기 미국인의 생활을 그린 《잊혀져버린 작은 물건들》이라는 감동적인 책에서 고고학자 제임스 디츠가 소개한 바 있다(이 책의 제목은 식민지 유언 검인 재판소 기록에서 따왔는데, 하나하나의 고유한 값어치가 별도의 회계를 오히려 번거롭게 만들 만큼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한데 묶어서 죽은 사람의 재산 내역에 대한 회계 감사를 완결짓는 절차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포크는 “잊혀져버린 작은 물건들”에 섞여들어가지는 않았겠지만 나이프, 포크, 스푼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재판소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디츠에 따르면 포크가 없었을 때 식민지인들은 왼손에 쥔 스푼을 뒤집어 접시 위의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에 쥔 나이프로 한 조각씩 잘랐다. 그러고는 나이프를 식탁에 내려놓고 스푼을 다시 뒤집어(스푼의 볼록한 부분은 음식을 얹기에 나쁘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긴 다음 고깃점을 담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포크가 미국에서도 널리 사용되자 스푼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서 나이프와 스푼으로 이루어지던 전래의 식사법은 나이프와 포크로 하는 식사법으로 바뀌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나이프로 음식을 썬 다음 왼손에 있던 포크가 오른손으로 넘어갔고 마치 예전의 스푼처럼 그 위에 음식을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네 갈퀴 포크가 처음 미국에 선보였을 때 “쪼개진 스푼”으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사실이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 에밀리 포스트가 “지그재그”라 일컬으면서 유럽인의 “매끄러운 식사법”과 대비시켰던 양 손으로 포크를 주고받는 버릇은 지금까지도 미국적인 스타일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까지도 식사 방법이나 식사도구와 관련하여 일정한 틀이 없기로는 미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였다. “예절지침서는 밀물처럼 쏟아졌지만” 1864년에도 엘리자 레슬리는 《여성의 진정한 품위와 완벽한 매너를 위한 가이드》에서 “은 포크를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하였다. 프랜시스 트롤로프는 1828년 미시시피 강의 증기선에 타고 있던 일부 “장군, 대령, 중령”들이 “나이프가 입 속으로 몽땅 들어갈 만큼 무시무시한 칼질로 식사를 했다”고 썼다. 끝이 뭉툭한 나이프였기 때문에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주머니칼로 이빨을 쑤셔야 했다. 바로 한 세대 다음에 트롤로프의 아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1861년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식사를 하던 그는 장교가 아닌 “너절한” 일꾼들이 “같은 신분의…… 영국 사람보다…… 나이프와 포크를 능숙하게 다루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42년의 미국 여행에서 찰스 디킨스는 펜실베이니아의 운하선에 함께 탔던 승객들이 “날이 넓은 나이프와 쌍갈퀴 포크를 손재주가 좋은 노련한 마술사를 제외하고는 내가 이제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목구멍 깊숙이 밀어넣는 것을 보았다.” 포크의 사용이 늘면서 이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일도 나이프 대신 포크가 떠맡게 되었지만 새로운 유행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포크로 콩을 먹는 것은 “뜨개바늘로 수프를 먹는 격”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갈퀴의 수가 늘어나 쓰임새가 커지면서 포크는 점차 중요한 식사도구가 되었고, 19세기 말에 이르자 세련된 사람은 “오후에 드는 차만 빼놓고는 뭐든지 포크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식탁 위의 음식을 입까지 가져오는 문제에 대한 문명적인 해결이 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나이프와 포크라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제이콥 브로노스키가 지적하였듯이 “나이프와 포크가 유일한 식사도구는 아니다. 이것들은 식사를 나이프와 포크로 하는 사회에서 사용되는 식사도구이다. 그 사회는 특별한 종류의 사회이다.” 오늘날까지도 일부 에스키모 인과 아프리카 인, 아랍인, 인도인은 수천 년을 내려온 전통에 따라 맨손으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먹기 전과 후에 꼭 물로 손을 씻는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도 때로는 손으로 먹는다. 햄버거와 핫도그는 아무런 식기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 먹게 되어 있다. 이때 번들거리는 기름기가 손에 묻는 것을 빵이 막아준다. 저민 고기를 둥글넓적한 옥수수 빵에 얹어 먹는 멕시코 요리 타코는 먹기가 좀더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옥수수 빵이 기름기가 손에 닿는 것을 막아준다. 이런 음식들은 동일한 문화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기술적 대안들을 보여준다. 나긴 세월에 걸쳐 발전된 동양의 젓가락 동양에서는 약 5천 년 전부터 손가락의 대용으로 젓가락이 발전하였다. 젓가락의 기원을 설명하는 한 이론에 따르자면 옛날 사람들은 커다란 냄비에다 요리를 했는데, 이 냄비 덕분에 음식은 오래도록 열기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고픈 사람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부분을 성급하게 집으려다 손가락을 데곤 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궁리하다가 나온 것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방법이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밥을 먹을 때 칼을 써서는 안 된다는 유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한다. 칼은 부엌과 푸줏간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군자는 그런 곳을 멀리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통적으로 중국 음식은 아예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덩어리로 잘라져서 나오든가 젓가락만으로도 충분히 떼어 먹을 수 있도록 말랑말랑하게 요리되어 나온다. 서양의 식사도구가 현실로 드러난 결함에 대한 대응으로 진화하였듯이 음식물에 닿는 부분은 동그랗고 손가락으로 쥐는 부분은 각이 진 오늘날의 전형적인 젓가락 형태도 틀림없이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개선에 개선을 거듭한 결과일 것이다. 자연에서 그대로 주운 둥근 막대기만으로는 아쉬운 구석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도처에 널려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로도 냄비에 든 음식은 웬만큼 집을 수 있었겠지만 좀더 점잖은 자리에서 사용하기에는 투박해보였으리라. 그래서 나온 것이 원하는 크기대로 나무를 길고 동그랗게 다듬은 젓가락이었다. 그러나 전에 비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예전의 투박스러웠던 도구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결점이 드러났던 것 같다. 양쪽 끝의 굵기가 똑같은 젓가락은 어떤 음식을 찢기에는 너무 두꺼웠고 기름한 음식을 먹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서 끝 부분이 가늘어지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고 손으로 쥐기에 모두 불편하지 않게끔 양쪽 끝의 굵기에 차이가 정해졌으리라. 하지만 한쪽 끝이 가늘건 굵기가 균일하건 둥근 젓가락은 손가락 안에서 미끌어지기 쉽고 식탁 위에서도 떼구르르 굴러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쥐는 부분을 각이 지게 만들자 이런 문제점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나이프나 포크, 젓가락 같은 흔한 도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도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의 머리에서 완성된 형태로 불쑥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도구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맥락에서 사용자들의(대개는 부정적인) 경험을 통하여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걸러져 나온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화된 도구의 형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다시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식사도구처럼 언뜻 보기에 간단해보이는 물건의 형태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를 생각하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가 인공물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로서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알 수 있다. 나이프와 포크의 형태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되짚어보면, 나아가 음식을 어떻게 입으로 전하는가라는 동일한 문제를 동양과 서양에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는가를 되짚어보면, 너무 결정론에 치우친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하다못해 먹는다는 기본적인 문제에서도 단 하나의 해결 방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태는 애당초 부여받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물건에서 드러난 실패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 같으면 발명가나 디자이너, 엔지니어라고 불렸을 과거의 영리한 사람들은 어떤 물건의 기능이 원래 기대했던 수준에 못 미치는 실패 원인을 결코 대충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들은 결함에 주목하고 불완전함을 하나둘씩 제거하여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냈다. 성격적으로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지역과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실패의 사례에 저마다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개성이 깃들어 있는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유산을 사용할 때마다 먹는다고 하는 아주 원시적인 기능조차도 자신의 기능을 구현하는 도구를 하나의 형태로 속박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식사도구의 발전은 인공물 일반의 발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강력한 틀을 던져준다. 물론 기술적인 요소도 대충 지나칠 수는 없다. 하다못해 젓가락을 만드는 나무의 종류, 나이프와 포크를 만드는 금속의 종류도 식사도구들의 형태와 기능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는, 가령 스테인리스가 주방 용구에 도입되었을 당시처럼 식기류의 생산과 사용 방법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나이프와 포크, 스푼의 사례는 기술과 문화 일반이 내적으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모든 인공물의 형태와 그 본질,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단지 기술이라는 것뿐 아니라 정치, 관습, 개인적 취향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인공물의 발전은 다시 관습과 사회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기술과 문화는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식탁을 넘어서는 세계 자체의 틀을 만들어나가는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든 친숙하지 않은 것이든 온갖 종류의 물건이 모양과 크기와 체제를 발전시켜나가는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원리는 존재하는가? 식사도구가 아닌 좀더 첨단의 영역에서는 디자인이 출현하고 발전할 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원리가 적용되는가, 아니면 그런 명제는 표현이야 그럴 듯하지만 우리의 정신을 호도하는 달콤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가? 끝없는 신제품이 쏟아져나오는 주방용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공물의 무한한 증식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소비자에게 팔아먹으려는 자본가의 술책인가? 아니면 인공물은 사물의 폭넓은 공간에서 각자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면서 생명체처럼 자연스럽게 진화론적인 방식으로 늘어나고 다양해지는 것일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은 맞는가? 아니면 할 일 없는 아낙네들의 넋두리에 불과한가? 이것이 이 책을 쓰도록 자극한 물음들이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사례들의 집합을 넘어서서 규칙들을 살피고, 다시 잡다한 부문에서 새로운 사례들을 끌어다가 그 규칙들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책의 디자인을 그렇게 잡았다. 형태는 실패에 따라 결정된다 명의 어머니는 사치 돌과 막대기에서 지금의 나이프와 포크로 발전해오고, 태곳적의 조개껍질과 오므린 손에서 스푼이 발전해온 과정은 이처럼 그럴싸한 줄거리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력이 뛰어난 사회과학자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추측해낸 이야기이므로 단순한 줄거리 이상의 차원을 갖고 있다. 우리가 날마다 쓰는 식사도구가 지금의 형태로 발전하기까지 밟아온 과정에는 모든 인공물을 지금의 모습과 기능을 가질 수 있게끔 한 근본 원리가 숨어 있다. 그러한 원리는 기존의 물건들이 우리가 요구하거나 기대했던 것만큼 편리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을 맺고 있다. 요컨대 물건들의 개선되어야 할 측면이 먼저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왕에 있는 물건의 결함은 개선의 필요성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겠지만 사실 기술적 발전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은 ‘`필요`’라기보다는 ‘욕심’이다. 우리에게 물과 공기는 꼭 필요하지만, 에어컨이나 빙수가 없다고 해서 반드시 못 사리라는 법은 없다. 음식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반드시 포크로 먹어야 한다는 법 또한 없다.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가 아니라 사치이다. 모든 인공물은 기능면에서 아쉬운 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며 바로 이것이 발전을 낳는다. 모든 인공물의 형태는 그것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거나 혹은 현실적이거나 잠재적인 결함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이 원리는 모든 발명과 혁신, 창조에 적용되는 원칙이며 모든 발명가와 혁신가, 엔지니어를 자극하는 추동력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결론이 나온다. 완전한 물건이란 있을 수 없으며, 완전성이라는 우리의 관념 역시 실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귀결이다. “완벽한” 인공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의 완전함이라는 것은 시제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지 실체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이러한 가설이 보편타당하며, 모든 인공물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인공물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원리는 지퍼의 발전은 물론이고 핀의 발전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알루미늄 캔도 햄버거 포장용기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현수교도 스카치테이프도 마땅히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내실을 갖춘 가설은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쓰는 물건 가운데 명백한 결함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모양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물건은 어째서 개악이 되고 또 어떤 물건은 예전의 우수한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발명가와 디자이너가 쓴 글, 또 발명이나 디자인에 관한 심도 깊은 고찰을 하는 사람들이 쓴 글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사례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기로 하자. 유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이 고안하고 만들었던 수많은 물건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최근에 간행된 인공물의 발전과 디자인을 다룬 몇몇 저작에서이다. 도날드 노먼은 《일상용품의 디자인》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자기 주위에 널려 있는 특수한 물건들을 헤아리는 장면을 소개한다. 그 중에는 다양한 필기구(연필, 볼펜, 만년필, 플러스펜, 형광펜 들), 사무용품(클립, 테이프, 가위, 메모지, 서류철, 서표 들), 고정용구(단추, 똑딱단추, 지퍼, 구두끈 들)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노먼은 무려 1백여 가지를 헤아리다가 그만 지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일상용품은 약 2만 종에 이른다. 노먼은 또 심리학자 어빙 비더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마 “성인이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물건은 3만 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수효는 사전에 나오는 구체적 명사를 헤아려서 얻은 수치이다. 조지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에서 지난 2백 년 동안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낸 물건이 얼마나 엄청나게 다양한가”를 언급하면서 미국에서만 약 5백만 개의 특허가 나왔다고 지적한다(새로운 물건이라고 해서 모두 특허를 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 놀라울 뿐이다. 1957년에서 1990년까지 미국 화학회의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신종 화학물질의 수는 무려 1천만 종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바살라는 또 다윈의 진화론과 비교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생물학자들이 확인해서 이름을 붙인 생물은 동식물을 통털어 모두 150만 종이라고 소개하면서, 만일 미국에서 나온 특허 하나를 “생명을 가진 하나의 종이라고 본다면 기술은 지구상의 생명체에 비해 세 배가 넘는 다양성을 이루어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고 나서 바살라는 자기의 연구가 문제 삼는 근본적인 물음을 소개한다. 생명의 다양성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놀라움은 인공물의 다양성에서도 여지없이 확인된다. 돌도끼에서 마이크로칩, 물레방아에서 우주선, 압정에서 마천루에 이르는 그 광대한 영역을 생각해보라. 1867년에 마르크스는…… 잉글랜드 버밍엄의 공장이나 공방에서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특수한 기능에 맞게끔 개발해서 사용하는 망치가 무려 5백 종류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절초풍하였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누구나 써온 이 공구를 이토록 갖가지 모양으로 그 수효를 늘린 힘은 과연 무엇인가? 좀더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물건의 종류가 왜 이다지도 많은가? 바살라는 기술의 다양함을 필요한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거부하고 “특히 생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좀더 일반적인 가정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설명 방식을 찾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탐구가 “생물 진화론을 기술 세계에 적용함으로써 촉진될 수 있다”고 보지만 “진화론에 입각한 비유는 신중한 접근을 요구한다”고 인정한다. 인공 세계와 자연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살라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물이 예측을 불허하는 자연 환경 속에서 나오는 데 비해 인공물은 인간의 의도적인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심리적·경제적 요인, 그 밖에 사회적·문화적 요인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활동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공물들 속에서 새로운 물건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낸다. 완전성이야말로 모든 인공물의 공통점 애드리언 포티 역시 인공물의 다양성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에서 그는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디자인의 다양성을 두 가지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한다. 그 중 하나는 점점 복잡하고 치밀해지는 기계나 설비 같은 새로운 디자인의 개발이 새로운 필요의 지속적인 발전을 낳는다고 보는 조금은 순환론에 가까운 것이다. 새로운 디자인은 조립과 분해를 위한 새로운 공구를 요구하며 이 새로운 공구는 다시 또 다른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인공물의 다양성에 대한 두번째 설명에서는 “자신의 창조성과 예술적 재능을 표현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욕망”을 원인으로 본다. 지그프리드 기디온은 《기계화가 지배한다》에서 이 두 이론을 모두 활용하고 있지만, 포티가 시인한 대로, 다양성 가운데 몇몇 특수한 사례들은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둘 중의 어느 이론도 모든 사례를 포괄적으로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가령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등받이조절 의자가 새로운 형태의 가구로 개발되었다. 기디온 식으로 풀이하자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온 그런 식의 의자 디자인들은 “앉아 있다고도, 그렇다고 서 있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그런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포즈에서 확인되는” 느긋함에 기반을 둔 그 당시 사람들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디온은 새로운 특허 가구의 출현은 새로운 욕구에 따른 결과이며, 그 새로운 욕구는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의 응집된 창조력과 다행히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포티는 기디온의 논리가 너무 우연성에 기댄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시대에 비해 디자이너가 유난히 창조적이거나 독창적이지 않았던 19세기에” 들어와서 “인류가 수천 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느닷없이 새롭게 앉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보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포티는 최근의 사례까지 들먹이면서 “기능주의” 이론은 인공물의 다양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적당한 이론이라고 깎아내린다. “몽고메리 워드의 131가지나 되는 주머니칼 디자인이 자르는 방법의 혁신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디자이너가 개별 제품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포티도 동의하지만, 설령 뛰어난 독창성을 가지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19세기의 디자이너들에게 “어떤 유형의 제품을 얼마나 많이 만들 것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이나 자율성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등받이조절 의자 같은 물건이 다양하게 개발된 원인을 분석하는 포티의 이론은 “디자인 제품을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의 의식과 직접적으로 결부시킨다.” 특히 그는 다양성의 주체로 자본가를 꼽는다. “제조업자는 시장이 다양했기 때문에 디자인에도 차별성을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사전적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고, 제조업자는 제조만 하고, 다양한 소비자는 다양하게 소비만 하는 식으로. 이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보느냐 마느냐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이다. 세상이 다양해야 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아무리 갑론을박을 벌이더라도 세상이 다양하다는 것은 눈앞의 현실이며, 따라서 개개의 디자인이 어떻게 해서 유사한 디자인들과 변별되는 특성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은 그대로 남는다. 제조업자가 다양성을 낳는 일차적 원동력이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상품의 외양을 결정하는 배후의 생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몽고메리 워드가 만든 131종의 주머니칼들, 버밍엄의 공장들에서 만들어지던 5백 종류의 전문화된 망치들 가운데 하나를 다른 것들과 구별지어준 것은 경제적 계산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음이 분명하다. 분명한 구별점이 있다고 할 때 그 구별점을 낳은 힘은 과연 무엇인가? 노먼도 바살라도 포티도 형태와 기능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이 단어들은 그들이 쓴 책의 색인 어디를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저자가 포티가 “잠언”이라고 꼬집었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공식을 좇지 않는다는 전제를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다. 디자인에 관해서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던 데이빗 파이 역시 기능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사고의 매끄러운 열매만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그는 구덩이와 씨앗과 줄기까지 드러내며, 디자인 문제를 보는 자신의 핵심적 사유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주장을 “`독단”이라고 꼬집는 동시에 기능은 “물건의 고유한 활동”이라는 사전적 정의 역시 비웃는다. 파이에 따르자면 “기능은 환상”이다. “디자인된 물건의 형태는 선택이나 우연에 의해 결정되며 그 무엇에 의해서든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다”는 논리를 비웃으며, “순수한 기능성”을 자신이 경멸어로 사용하는 “싸구려”나 “늘씬한”이라는 용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파이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에 대한 자신의 거부감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디자인에서의 기능이라는 개념, 심지어는 기능주의라는 독단도, 만일 물건들이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야 굳이 관심을 갖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허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쓰잘데없는 일에 매달려 있는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는 기왕 제대로 된 물건을 못 만들 바에야 팔리게나 만들자는 발상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리가 디자인하거나 만드는 그 어떤 물건도 잘 돌아가는 물건은 아니다. 입으로야 맨날 그래야 한다고 떠들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말씀이다. 하늘에서 곤두박질친 비행기는 지상에 추락하여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이제는 비행기도 갓난아기처럼 살살 다루어야 할 판이다. 기름은 또 엄청 먹어댄다. 녀석의 수명은 시간 단위로 측정된다. 우리가 쓰는 식탁은 크기와 높이가 다양해야 하며, 자유자재로 넓이 조절이 되어야 하며, 긁힌 자국이 남지 않아야 하며, 자정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다리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하나같이 즉흥적으로 임시변통으로 디자인해서 만든 물건, 오래 못 버틸 한심스러운 그런 물건뿐이다. 파이는 과장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가 퍼붓는 독설의 뿌리에는 기존의 어느 것도 완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버티고 있다. 어떤 비행기가 고장으로 항공 사고가 날 확률이 1백만 분의 1밖에 안 된다 할지라도 엄격히 따지고 들면 비행기는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갓난아기처럼 극진히 보살핀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사고율을 조금 떨어뜨리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완벽한 비행기라면 관리할 필요가 없고, 기름도 거의 안 잡아먹으며, 몇천 년까지는 안 되더라도 적어도 몇백 년은 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식탁은 또 어떤가. 파티의 규모가 어떤가에 따라서 널빤지를 끼워넣었다가 빼냈다가 해야 하지 않는가. 꼬맹이들이라도 오면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밑에 받쳐주어야만 겨우 음식에 손이 닿는다. 식탁은 우리가 쓰지 않을 때는 멀뚱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걸핏하면 긁히며 때도 잘 탄다. 다리가 달려 있어 우리의 행동 반경을 제약한다. 요컨대 식탁에는 다른 모든 인공물과 마찬가지로 개선할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소리이다. 하기야 파이가 도처에서 끄집어내어 맹공을 퍼붓는 그 불완전성이야말로 모든 인공물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성인 셈이다. 물건이 발전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다. 파악된 문제점과 상상 속에서의 해결책이 우연히 맞아떨어질 때 디자인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공물의 발전을 그런 식으로 보는 시나리오는 우리에게 점점 나은 디자인을 제공해야 할 터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이 역설의 해답은 디자인의 필요조건들은 언제나 서로 어긋나기 마련이며 따라서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파이의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디자인은 크든 작든 실패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요구 사항 가운데 이것저것을 무시했거나 절충했거나`──`절충은 어느 정도의 실패를 전제하므로`──``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디자인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디자이너나 고객은 어떤 부분을 어느 만큼 실패로 처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모든 물건의 모양은 자의적인 선택의 산물이다. 당신이 절충 조건을 바꾸면`──`가령 안전성이 떨어지더라도 속도는 빠르게, 약간 불편은 하더라도 원가는 싸게 등등의 요구들`──`당신은 디자인되는 물건의 모양을 바꿀 수 있다. “요구 사항들의 논리적 귀결”이 디자인으로 나타나는 경우란 결코 없다. 요구 사항들 자체가 자기네끼리 모순을 빚고 있는 마당에 논리적 귀결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러므로 파이가 앞서 언급한 만찬 식탁은 실패로 보아야 한다. 두 명이건 열두 명이건 앉혀야 하고, 몸집이 작은 아이와 몸집이 큰 어른을 두루 앉혀야 하며, 긁히거나 때가 타는 일이 없도록 표면이 보기에 좋게 깔끔히 마무리되어야 하고, 발에 자꾸 걸리적거리는 다리는 없어야 한다는 그 모든 맞물린 조건들을 한꺼번에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심히 관찰하면 이런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일상용품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러나 파이의 의도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나 역시 트집이나 잡으려고 이 책을 쓰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만 이 불완전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기발한 일상용품들은 디자인의 앞에 가로놓여 있는 난관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서 떠받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전제가 깔려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벽한” 디자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하나의 물건이 다른 물건으로부터 나오면서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끝없는 변신을 이루어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추 찾기와 워드프로세서의 검색 원리 인공물의 발전 과정에서 실패가 맡는 역할을 누구보다도 명쾌히 분석한 사람은 《형식의 종합에 관한 단상》을 쓴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이다. 그는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실패를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금속의 표면이 “완벽하게” 매끄럽고 고른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반반한 것으로 확인된 기준이 되는 블록의 표면에 잉크를 바른 다음 검사해야 할 금속의 표면에다 그것을 문지른다. 금속의 표면이 고르지 않으면 다른 곳보다 튀어나온 자리에 잉크가 묻는다. 우리는 그 튀어나온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은 다음 다시 블록에 갖다 맞춘다. 블록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면 표면이 고르다는 뜻이다. 튀어나온 부분은 한 군데도 없어진다. 치과의사도 비슷한 방법으로 치관을 맞춘다. 여기서는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새로 해넣는 이빨의 표면이 주위의 이빨과 잘 맞물리느냐가 중요하다. 치과의사는 카본 지 같은 것을 이빨로 씹게 만든다. 그럼 치관이 잘 안 맞아서 위로 뜬 부분에 이빨 자국이 남는다. 알렉산더의 패러다임에 따르자면 인공물의 디자인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는 결국 형태를 맥락에 맞물리도록 하는 작업이다. 판단의 기준이 되는 대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더이상 우리가 지적할 수 없을 때만 우리는 성공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다. 알렉산더가 형태와 맥락의 훌륭한 맞물림이라고 표현하는 성공적인 디자인은 더이상의 틈이 발견되지 않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규준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확연히 자리잡은 규준에서 벗어난 것에 주목한다. 잘된 것보다는 잘못된 것이 먼저 눈에 띄는 법이다.” 알렉산더는 굳이 기계 공장이나 치과처럼 먼 동네의 사례가 아니라 좀더 일상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각종 단추를 모아놓은 단추통이 우리 눈앞에 있다고 치자. 여기 단추가 하나 있는데 우리는 단추통 안에서 이 단추와 짝이 맞는 단추를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우리는 통 안의 단추를 하나하나 살피지 덮어놓고 단추를 찾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추들을 훑으면서 차이점(이건 너무 크다, 이건 너무 진하다, 이건 구멍이 너무 많다 등등)이 발견되는 것은 하나씩 옆으로 제쳐놓는다. 원하는 단추와 차이점이 전혀 없는 단추가 나타날 때까지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여 마침내 짝이 맞는 단추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워드프로세서의 오자를 잡아내는 프로그램도 이와 똑같은 원리로 일을 처리한다. 컴퓨터는 문서 안의 단어를 하나씩 집어다가 내장된 사전 속의 단어들과 비교한다. 컴퓨터는 서로 맞지 않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마침내 합치되는 단어를 찾아낸다. 검토되는 단어와 길이가 다른 단어들은 우선적으로 제거된다. 철자의 수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검토되는 단어와 같은 철자로 시작되지 않는 단어들이 제거된다. 남은 단어들 가운데 이번에는 두번째 철자가 같지 않은 것들이 제거되며, 이런 식의 과정을 마지막 철자까지 밟아나간다.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들과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면 문제의 단어는 잘못 씌어진 것으로 판명된다.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실패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따른다. 이 논리를 과신할 경우 자칫하면 잘못 적힌 단어를 잡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쓰인 단어를 오자로 잡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프로그램은 “there” 대신 “their”가 적혀 있어도 오자임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두 단어가 모두 사전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을 일반화하여 알렉산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결론은 형태와 맥락 사이의 “균열을 낳는 부조화, 말썽, 힘을 해소하는 과정으로 [디자인을] 파악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물이 시간 속에서 변화해가고 사용을 통해 발전해나가는 이치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은 끝이 뾰족한 두 개의 나이프로 고기를 먹을 때 고정용 나이프에 찍힌 고기가 자꾸 빙빙 도는 바람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손가락을 고기에 대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거개가 나이프의 넓적한 면으로 고기를 눌러, 그러니까 나이프의 용도를 바꿈으로써 고민을 풀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날의 모양에도 차츰 어떤 변화가 왔을 것이다. 나이프를 만드는 사람들도 당연히 식사는 한다. 그 중에서 생각이 깊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하나가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렸을 것이다. 고기를 썰 때도 움직이지 않도록 두 개의 갈퀴가 달린 전혀 새로운 식사도구를 고안한 것이다. “부조화는 변화의 동기를 제공하지만 훌륭한 합치는 그렇지 못하다”고 알렉산더는 선언한다. 설령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이 안고 있는 문제를 없앤 새로운 인공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와 도구, 능력을 직접 갖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문제점을 부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장인이라고 부른다. 알렉산더는 장인이란 생명체가 무색하도록 발전을 거듭해온 인공물이 거쳐가는 “단순한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도 끝판에 가서는 잘 들어맞는 형태로 나아간다. 과정의 조직화에 내재된 평형 추구의 경향 때문이다. 대리인이 하는 일은 잘못이 생겼을 때 잘못을 인식하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아무리 단순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 명료한 형태를 발명할 수 있는 종합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비록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기존의 형태들을 비판하는 것쯤은 아무라도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대리인에게 창조력이 반드시 요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대리인은 형태를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잘못을 깨닫고 이런저런 변화를 주기만 하면 된다. 변화가 늘 더 나은 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다. 과정을 거치다보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개선된 변화들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는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지속해서 이루어져왔으며, 장인이 과학으로 무장한 엔지니어로 바뀌었고 인공물이 핵발전소, 우주선, 컴퓨터처럼 복잡성을 더해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더 나은 쪽으로만 변화시켜야 할 필요는 없었던 알렉산더의 대리인과는 달리 현대의 디자이너나 발명가는 어떤 인공물을 변화시킬 때 어떤 의미에서건 더 나은 쪽으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실패와 부조화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나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고는 인공물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꾸는 데 꼭 일가견이 있는 엔지니어, 정치인, 기업인 같은 사람들만이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각자는 누구나 적어도 세상사의 어느 일부분에서만큼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자이너, 제조업체, 판매업체, 인가업체에서 약속한 수준에 어떤 점들이 뒤떨어지는가를 판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이것은 “정책은 소수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을지 몰라도 그에 대한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설파한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시민들뿐 아니라 현재 인공물을 사용하고 있는 사용자들에게도 지켜져야 할 원칙이다. 패라는 공통의 끈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이유로 지금의 모습과 기능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면 기술적 변화의 본질과 가장 복잡하다는 현대 기술의 운용 방식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게 된다. 바살라는 인공물을 “기술 연구의 근본 단위”로 파악하며 “인공물의 세계는 연속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펴나간다. 그가 쓴 《기술의 진화》의 표지 그림은 “투박스럽게 생긴 최초의 두들기는 돌망치에서 제임스 내스미스의 거대한 증기 해머에 이르는 망치의 진화사”를 묘사하고 있다. 내스미스의 망치는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강을 주조하는 데 한몫했다. 바살라는 모든 물건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참신한 인공물은 과거의 인공물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새로운 유형의 인공물은 순수한 이론이나 창조성, 공상의 산물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공물과 기술의 역사는 산업에 덧붙여진 문화적 부속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그 역사는 국가의 지적 자산이 생성되는 그 복잡하고 창조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수단이 된다. 나이프, 포크, 스푼 같은 일상용품의 모양을 만들었던 그 목적 지향적인 인간의 활동은 “돌도끼에서 반도체에 이르는” 온갖 기술적 도구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19세기 버밍엄에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망치로부터 식탁에 오르내리는 다종다양한 전문화된 식기에 이르기까지 물건이 다양한 것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발명, 디자인, 개발이라는 인간의 활동은 그 개별적인 단어들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구분점이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이 인공물의 모양과 형태를 결정짓는 연속된 공간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패라는 공통의 끈이 있기 때문이다. 모양과 형태는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려는 주제지만 물건의 미적 특성은 일차적 고려 사항이 아니다. 디자인되는 물건이 최종적인 형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 미적인 고려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전면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석이나 장신구를 제외하면 그것이 모양과 형태를 규정하는 일차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실용적인 물건을 매끄럽게 만들거나 보기 좋게 만들 수는 있지만 대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원숙한 단계에 이른 인공물을 그럴듯하게 치장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가령 식기류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식탁 앞에 어떤 디자인의 식기류가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나이프, 포크, 스푼을 혼동하는 일은 없다. 식기류를 새롭게 디자인할 때 미적인 고려를 지나치게 앞세울 경우 식탁 위에서는 아무리 멋있고 끼리끼리 어울려 보이더라도 막상 그것을 직접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운 점이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형태를 이루는 요건이 이미 오래전에 정착된 인공물의 또 다른 예로 체스의 말들을 들 수 있다. 체스에서 한쪽 말의 숫자는 모두 16개로 정해져 있다. 이것들은 자기네끼리, 또 상대방의 말과도 쉽게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철칙이다. 체스의 말을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지만 그것은 무게나 균형을 약간 조정하는 선에 그쳤으며 좀더 과감한 시도는 번번이 문제를 낳았다. 미의식을 앞세워 좀더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모습으로 체스의 말을 개조해보았지만 막상 체스를 하는 사람은 킹과 퀸을, 혹은 나이트와 비숍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식의 디자인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상품 디자인” 또는 “산업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산업 디자인은 미를 우선시한다고 대개들 생각하지만 훌륭한 산업 디자인은 초점을 그렇게 좁게 두지 않는다. 진정한 산업 디자이너는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조립과 분해, 유지와 사용이 간편한 물건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둔다. 뛰어난 산업 디자이너는 아무리 멋지고 훌륭해보이는 물건이라 해도 그것이 안고 있는 결정적인 결함을 통찰하여 미연에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공학적인 발상은 그런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공학자는 가장 단순한 주방용구에서 가장 복잡한 기술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상품이 다양한 사용자의 손끝에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천식으로 고생하는 노인들은 아이들이 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병원 약병의 디자인에 고칠 점이 많다고 너나없이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디자인은 약병을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공학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상적인 약병은 인간공학적으로도 완벽하고 식탁 위의 예쁜 과일 접시가 무색하리만큼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이 책의 의도는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물건 가운데 왜 아름답고 완벽한 물건이 없는가를 이해하는 데 조그만 실마리나마 제공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인공물을 실패로 이끄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실패로부터 올바른 형태가 나올 수 있는 길 또한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3 발명가는 비판가 미와 벌이를 위한 발명 물건의 결점이야말로 물건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면 발명가는 기술 세계의 가장 호된 비판가임이 분명하다. 사실이 그렇다. 지금 사용되는 물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헤아리고 그 문제를 바로잡아 좀더 정교한 도구와 장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은 발명가만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능력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인공물의 세계에다 질서를 부여하려는 한 이론가의 넋두리에 불과하다고 꼬집는 이들도 있지만 다채로운 인생길을 걸어왔으며 자기를 성찰할 줄 아는 발명가들의 입에서도 사실은 똑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야콥 라비노비치는 한 러시아 구두공의 아들이었다. 1914년 제1차대전이 터지자 그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시베리아로 이주하였다. 5년 뒤 야콥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 시에 정착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야콥은 수학반과 미술반 두 군데에서 활동하는 팔방미인의 학생이었다. 야콥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여 미술 교사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만 그 교사는 “자네의 그림에는 혼이 빠져 있다”며 공학을 공부해볼 것을 권하였다. 1920년대의 뉴욕 시립대학교는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아이들에게 기회와 희망으로 다가온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몸으로 공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도 만만치 않았다. 생각다못해 1928년에 교양학부로 들어갔지만 어느새 그는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평범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공황이 닥쳐오자 앞으로 어떤 분야의 공부를 하건 어차피 일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야콥은 전공을 처음부터 끌렸던 공학으로 바꾸었다. 1933년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면서 이름까지 “제이콥 래비노”라고 미국식으로 바꾸었다. 일년을 더 시립대에 남아 석사학위에 준하는 자격을 땄지만 직장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라디오 공장에서 주로 부품 조립 일을 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1935년에 토목기사 자격시험에 응시한 래비노는 전기공학과 기계공학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아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1938년에 미국 표준국의 기사로 채용되면서부터였다. 그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하천의 유속을 재는 일이었다. 처음 맡은 일이 래비노는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근무시간도 일정해서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유도 생겨났다. 그때까지 사용되던 장비는 낡고 오래된 것이라 이런저런 결함이 많았다. 그는 곧 장비의 작동과 정확성을 높힐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상사에게 찾아가서 의견을 물었더니 업무 시간 이후의 개인 시간을 쓴다는 원칙을 지키되 새로운 장비는 얼마든지 설계하고 만들어보라며 격려해주었다. 래비노는 얼마 안 가서 기능이 훨씬 좋아진 측정 장비를 만들어냈고 다른 부분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맡은 책임과 권한이 늘어났고 한때는 자기 회사를 가진 적도 있었다. 래비노는 시계의 자동조절장치에서 우체국에서 쓰이는 자동편지분류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225건의 특허를 따냈다. 엔지니어와 발명가의 일반적인 특성이지만 래비노 역시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발표한 경우는 드물었다. 은퇴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소상히 담은 책을 펴냈다. 《재미와 벌이를 위한 발명》이라는 제목이 조금 거부감을 줄지 모르지만 이 책은 발명가의 내면 세계에 대한 매우 독창적이며 의미 있는 통찰을 던지고 있다. 래비노가 한 많은 발명의 유래가 이 책에서 소개되는데 보통 그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비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선물로 받은 시계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자동으로 맞춰지는 시계를 발명했다든지, 일반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왜곡된 소리인가 아닌가(플레이어의 음관이 레코드의 홈을 따라 바늘이 움직이도록 규제하는 방식때문에)를 놓고 친구와 격론을 벌이다가 새로운 바늘 제어 장치를 개발했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친구들이 가져온 문제들은 특히 새로운 구상을 위한 풍부한 자극원이 되어주었다. 래비노 같은 정력적인 발명가에게는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 그리고 직업 활동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그의 작업실이 거실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래비노는 때로 자기 일의 본질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한다. “발명가들이란 욕만 하지 않고 못마땅한 부분을 어떻게 하면 나아질지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는 왜 발명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똑같은 생각을 피력하였다. 래비노는 말한다. “마음에 안 드는 게 나타나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다만 내가 좋아하는 장치를 디자인할 따름이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장치는 자신이 문제점을 찾아낸 장치의 결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 결함이야말로 변화를 낳는 원동력이라는 래비노의 지적에 많은 발명가들이 공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공적인 엔지니어링》이라는 저서를 제이콥 래비노(“나의 상사이며 스승이며 허물없는 친구이며 신랄한 비판가”)에게 바친 로렌스 캄은 젊은 기계설계학도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주위의 디자인들을 부지런히 뜯어보아라. 그것들은 왜 지금의 모습으로 설계되었는가? 그 디자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들의 개선 방안은 무엇인가?” 다른 불완전한 발명품 PET 병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열여섯 명과의 대담을 수록한 《일하는 발명가들》은 최종 학력이 고졸인 사람부터 박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교육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진솔한 인생 역정을 그리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대신 직업 전선에 나서야 했던 사람 가운데 나중에 이름 있는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학력이라기보다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발명을 상품화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쥐려고 몸부림쳤던 자수성가형이었든 아니면 거대한 기업에 몸담고 있으면서 조직체 안에서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려고 애썼던 샐러리맨이었든 기업가적 적극성이었다. 제이콥 래비노 같은 이민 노동자 가정 출신의 발명가가 있는가 하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발명가도 있다. 폴 매크리디는 1977년에 샌호아킨 계곡의 1마일 거리를 8자 비행으로 횡단하여 인간의 힘만으로도 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고사머 콘도르 호의 제작자이다. 영국의 기업인 헨리 크레머가 1959년에 내걸었던 5만 파운드의 상금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에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는 있지만 매크리디는 청소년 시절부터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데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이미 <모델 에어플레인 뉴스> 지의 편집자들로부터 낡은 원리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 늘 관심을 가졌던 “다재다능한 젊은이”로 인정받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장거리 비행 글라이더에 매료되어 전국 대회에서 세 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예일대를 졸업한 매크리디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항공공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눈부신 업적을 쌓은 공로로 미국 기계공학협회가 주는 “금세기의 엔지니어”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집념의 발명가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상금이나 상패가 아니었다. 다른 수많은 발명가들처럼 매크리디 역시 기존의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유일한 보람이었다. 고사머 콘도르 호를 개조한 그의 고사머 알바트로스 호는 사람이 밟는 페달의 힘만으로 1979년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한 발명가라도 물건을 개조하는 자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작업이 가장 어려웠는가라는 질문에 매크리디는 이렇게 답한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자전거. 따라가볼 만한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고 나도 몇 가지를 만들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의 답변은 기존의 자전거 디자인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질문하기는 쉬워도 확실하게 답하기는 어려운 그런 문제들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발명가는 문제 앞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지는 않으며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방안을 결국은 선택한다. 나다니엘 C. 와이어드는 화가인 N. C. 와이어드의 가족 농장이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채드포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 앤드루와 누이 헨리에트, 캐럴라인은 이름난 화가인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을 공부했지만 나다니엘은 시계를 분해하고 고철을 꿰어맞춰 희한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원래 이름은 아버지와 같은 뉴웰 컨버스 와이어드였지만 나중에 그의 부친은 이 나이 어린 기술자의 이름을 엔지니어였던 삼촌의 이름에서 따온 나다니엘로 바꾸었다. 유명한 화가의 이름과 헛갈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듀퐁 사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1975년에는 듀퐁 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영예인 선임 특별연구원에 위촉되었다. 와이어드는 섬유와 전자 부분에서 기막힌 발명품을 수없이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지금은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일 것이다. 그는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곧 우리에게 PET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물질을 놓고 수많은 실험과 처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970년대 중반에 원하던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플라스틱 병은 당시까지 주로 사용되어온 유리병에 비해서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유리병은 무겁고 깨지기 쉬웠던 것이다. 그러나 PET의 개발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와이어드는 초기 실험의 엉성한 결과물을 가지고 연구소장을 찾아갔을 때를 술회한다. 연구소장은 그런 “볼품없는 병”에 그 많은 돈을 처들이는 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병의 속은 비어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은 와이어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발명을 할 때도 그랬지만 “실패와 불량품에 대한 지식을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와이어드는 하나의 착상이 볼품없는 병에서 슈퍼마켓에 당당히 진열된 물건으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런 실패를 초석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PET 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PET는 유리병을 급속히 몰아낸다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와이어드의 발명품이 다른 발명가들에 의한 해결을 요구하는 환경 문제를 낳고 있다는 사실은 불완전한 물건들로 가득 찬 불완전한 세계에서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위와 종이 몇 장으로 백만장자가 된 남자 살아온 배경과 내적 동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발명가의 공통된 특성은 기존 제품이 갖는 결함이나 사용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이리라. 주위에 널려 있는 물건들에서 잘못을 발견하고 제작 과정의 비능률성에 눈뜨는 것이야말로 발명가와 엔지니어 일반의 공통된 특성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날마다 사용하는 물건에서 발견한 문제들, 또는 회사나 고객, 친구의 일을 돕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한껏 즐긴다. 발명가는 현재의 물건들에 만족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떻게 하면 물건을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를 자나깨나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모든 발명가가 비관주의자라는 소리는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발명가는 최고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적어도 인공의 세계만큼은 지금보다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혁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발명가의 사전에 적당이라는 말은 없다. 그는 어중간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발명가는 또한 가장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므로 개선하는 데에도 한계는 있으며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뢰할 만한 발명가들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성장의 법칙 같은 세계 자체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영구운동기관이나 불로의 샘물 같은 허황된 목표에 매달리느니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토대로,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최고의 단계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을 잘 깨닫고 있다. 시카고 토박이인 마빈 캄라스는 일리노이 공대를 졸업하고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하면서 전자통신 분야에서 무려 5백 개가 넘는 특허를 갖게 되었다. 발명가들에게 공통된 특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주변에 보이는 것들에 불만을 느끼는 버릇이 있다. 자기가 실제로 연구하는 대상 또는 일상용품에서 불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이런 방법은 아니야.” 적어도 내 경우에는 불편하거나 투박한 물건을 볼 때마다 왜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한다. 이렇게 처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발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눈에는 불편해보이는 물건이 너무나 많다. 나는 물건들을 단순화시키고 싶다. 캄라스는 개인주의자일지 모르지만`──`그는 발명가란 일반적으로 그러하다고 본다`──`발명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많은 발명가들이 공유하는 내용이다. 제롬 리멀슨은 1951년에 뉴욕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산업용 로봇과 공장자동화 설비를 설계하였으며 심지어는 콘플레이크 포장 뒷면의 오려내기 장난감 특허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 이름으로 된 특허만 해도 4백 개가 넘지만 리멀슨은 남들처럼 한두 가지 특허를 발판으로 삼아 회사를 차린다든가 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는 로열티를 지급받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가 하는 발명 역시 기존의 물건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문제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는 거다. 이 기능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가? 가능한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되고 있는가? 거기에 문제는 없는가? 어떻게 그것을 고칠 수 있는가? 특허란 열이면 열 지금까지 있었던 것을 개선한 데 지나지 않는다. 지금 있는 것을 개선하라. 발명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발명과 특허에 관한 입문서”라는 부제로 1950년에 포퓰러 머캐닉스 사에서 출간된 《아이디어로 버는 돈》에서도 같은 생각이 되풀이된다. 발명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확천금의 꿈을 굳이 숨기려들지 않으면서 리멀슨은 첫 장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위 하나와 종이 몇 장을 가지고 백만장자가 된 남자가 있었다(그는 출장이 잦은 세일즈맨이었는데 공공 장소에서 유리컵으로 음료수를 마시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다가 종이컵을 발명하였다).” 독립심이 강한 자신만만한 발명가들에게는 그런 입문서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책에 나타난 천재적인 창조력의 소유자, 국가적 영웅, 여유 있는 후원자로서의 발명가의 이미지는 발명가가 되고는 싶지만 재능보다는 욕심이 앞서는 예비 발명가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직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한 발명가 지망생들은 다른 발명가들로부터 독창적인 발상을 배워야 한다. 리멀슨은 예비 발명가들에게 아이디어를 하나둘 쌓아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언급하면서 집 안팎에 널려 있는 일상용품들에 관심을 돌릴 것을 촉구한다. 공구들! 그것이야말로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집집마다 공구는 어차피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리공이나 직공이라면 공구 몇 가지는 사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공구를 사용하면서 이렇게 고쳐졌으면 하고 느꼈던 불만도 한두 가지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눈만 뜨면 불평을 해대는 국민이 미국인이다. 모름지기 기계공이라면 그런 불만들을 관심 있는 사람의 귀에다 좌르르 쏟아부어야 한다. 남들한테서 자극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발명가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조언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다. 발명은 필요가 아니라 욕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기계공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존의 공구로 채워질 수 있다. 그는 망치, 드라이버, 펜치를 가지고 나날의 작업을 처리한다. 그러나 일의 내용이 매일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은 일이 잘 되고 어떤 날은 잘 안 된다. 나무 나사를 조여 작업장에서 쓸 연장통을 만들 때가 있는가 하면 고객의 수리 부탁을 받은 기계에다 정교한 금속판을 다시 붙여야 할 때도 있다(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기계공이 가지고 있는 공구는 가장 일반적인 드라이버 하나뿐이며, 나무 나사와 금속 나사도 나사머리에 홈이 일직선으로 파인 일반적인 나사라고 가정하자). 전자의 경우 드라이버가 나사머리에서 미끄러져나와 나무 상자에 흠집을 낼 수도 있다. 약간 맥빠지는 노릇이기는 해도 흠집이 났다고 해서 연장통으로서 쓸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만일 보기 흉한 흠집이 생기면 고객은 물건을 인수하지 못하겠다고 버틸지도 모를 일이다. 기계공은 나사를 조일 때 드라이브의 끝이 나사의 홈에 잘 걸렸는지, 또 드라이버가 기울어짐 없이 나사와 수직을 이루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드라이브 끝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사머리를 손가락으로 에워싸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심조심하면 여간해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공이 아직 미숙하거나 조심성이 부족하다면 금속판에 흠집을 내는 실수를 가끔 저지를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그저 조심하라고만 하지 새로운 드라이버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기계공에게는 새로운 드라이브가 주어진다. 늘 주변 사람들의 실패담에 귀기울이고 있는 발명가들이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연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끝에 탄화 텅스텐 입자가 붙은 신형 드라이버가 좋은 예이다. 단단한 입자가 나사의 상대적으로 무른 홈과 맞물리므로 드라이브가 미끄러질 가능성이 한결 줄어든다. 사와 드라이버에 대한 새로운 발상 제이콥 래비노는 직원들을 면접할 때 특히 나사와 드라이버에 관한 질문을 슬쩍 던지곤 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현실 지향의 발명가를 이론 지향의 과학자나 엔지니어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나사는 만들기는 쉬워도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걸핏하면 미끄러져서 작업을 망치기 일쑤라는 단점말고도 래비노에 따르면 동전이나 손톱 끝을 드라이버처럼 사용해서 빼서는 안 될 곳의 나사를 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 가운데는 이런 악취미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래서 요즘 이런 곳에 사용되는 나사는 박기는 쉬워도 초보자가 빼기는 어려운 그런 유별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일반 나사머리의 대안으로 나온 것 가운데 래비노는 “한결 맵시 있는” 필립스의 십자머리 나사를 예로 든다. 드라이버가 미끄러질 가능성을 한결 줄여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발전된 디자인이 그러하듯이 이 필립스 나사 역시 기존의 나사에 비해 장점을 지녔으면서도 그 자체의 결함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필립스머리 나사는 일반 나사머리에 비해 미적으로 더 우수할는지 모르지만 필립스머리 나사용 드라이버를 사용할 때는 다른 나사보다도 더 바짝 나사머리에 드라이버를 붙여서 써야 하며, 오래 사용하여 드라이버의 끝이 닳았을 때도 일반 드라이버에 비해 뾰족하게 갈기가 어렵다. 래비노는 이러한 필립스 나사의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 신형 나사머리를 어떻게 고안했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창조성을 과시한다. 먼저 그는 머리가 사각형 또는 육각형으로 움푹 파인 나사와 그에 맞물리는 드라이버를 검토한다. 둘을 비교하면 디자인상으로는 사각형이 낫다고 그는 본다. “드라이버를 깎기도 수월하고 잘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래비노는 “이런 나사의 경우에도 모양이 맞는 대용 드라이버로 나사를 불법적으로 빼가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나사가 안전하게 박혀 있게끔 해주는 그런 모양의 나사머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발명가는 이런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어떤 폭을 가진 드라이버로도 쉽게 빼낼 수 없는 모양으로 머리가 움푹 들어가거나 홈이 파인 그런 나사를 디자인할 수는 없을까?” 래비노는 자신의 해결책에 근접하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한 지원자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합격시켰으리라. 삼각형 모양으로 움푹 판다. 단 여기서 삼각형의 세 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각 꼭지점은 그 맞은편에 있는 곡선 변의 중심에 놓인다. 특수한 모양의 드라이버가 아니면 돌릴 수 없는 그런 삼각형 구멍을 만들자는 거다. 거기에다 일반 드라이버를 끼우면 드라이버의 날은 각 모서리에서 겉돌면서 맞은편의 휜 변으로 미끄러졌다가 다시 옆 모서리를 치면서 미끄러지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런 모양의 나사는 보기도 좋을 뿐더러 적절한 도구가 없으면 빼는 데 애를 먹을 것이다. 래비노는 아직 특허국의 기록을 조사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새로운 것인지 아닌지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교육의 장에서 혹은 평가의 장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특허국 기록을 뒤지는 과정에서 인공물은 결함의 점진적인 제거에 의해 발전한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를 수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데이빗 파이는 너트와 볼트를 예로 들어 인공물의 발전을 설명하는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육각 너트는 기존의 사각 너트를 쓰기가 곤란한 영역에서 사용자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사각 너트를 밀어냈다. 안 좋은 위치에서 사각 너트를 조이려면 종류가 다른 두 개의 스패너를 동원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육각 볼트는 ‘`현대 공학’의 총아로 자리잡았다. 19세기 초의 일반 시민은 육각 볼트만 보고도 신형 엔진과 와트 시대의 구형 엔진을 구별할 정도였다. 새로운 특성은 거의 예외없이 낡은 특성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자머리 나사가 십자머리 나사에 의해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각 볼트 역시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드라이버나 스패너를 사용하기가 까다로운 위치에만 너트를 조인다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사각 너트는 육각 나사에 비해 제작비가 싸게 먹힌다는 장점도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이렉터 장난감 조립 세트에는 어린 아이가 장난감 공구로 조이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각 볼트가 등장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메카노 세트(금속이나 플라스틱 조각을 볼트나 너트로 조립하여 노는 완구`─`옮긴이)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육각 너트는 시간이 지나면 각이 무뎌져서 둥근 너트처럼 변형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 한 발명가들은 부지런히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1849년 이후에 등장했던 특허들 가운데 단명으로 그쳤던 상품들의 목록을 소개한 한 책자의 머리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창간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그리고 당시의 수많은 대중 간행물을 보아도 발명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851년 영국에서 열렸던 만국산업대박람회의 카탈로그에서도 위대한 독창적 발명가들의 생생한 활동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50년 전과 100년 전”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인식이 얼마나 급격히 바뀌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적어도 1890년대 초반과 1940년대 초반의 잡지 내용에서는 그런 차이가 분명하다. 100년 전의 잡지에서는 기존의 장치나 도구를 개량한 신기한 물건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면, 50년 전의 잡지에서는 래비노 같은 발명가 겸 기업인은 흥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창조적인 발명을 하는 데는 별반 도움이 못 되는 과학 이론이나 발견을 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도구의 등장을 당연시하고, 광고를 보고서야 그 물건이 왜 새로운가를 배우게 되는 그런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의 증조할아버지들은 최신 만년필이나 자전거에 지적인 관심을 품을 줄 알았지만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고작 실용적인 상품이라는 관점에서만 다가간다. 그래서 요즘의 신문 잡지에 마련된 과학기술란은 의학과 물리학 분야의 전문용어만 번지르르 나열할 뿐 엔지니어나 발명가의 실제적인 생각이나 그들이 만든 물건은 거의 소개하지 않는다. 린 아이의 “왜”`가 만든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렇다고 해서 발명이 죽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발명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지난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인공물의 발전과 실천적 발명 행위를 잇는 연결고리는 비록 그것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점점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남아 있다. 오늘날의 발명가를 움직이는 힘은 지난 19세기의 발명가들로 하여금 우산 위에 피뢰침을 꽂고,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우산을 모자에 얹게끔 만들었던 힘과 매한가지이다. 자기 체험의 산물이건 아니면 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건, 백만불짜리 아이디어라는 천박한 용어와 함께 나왔건 아니면 계급 없는 사회의 유토피아적 희망 속에서 나왔건, 영미권 특유의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건 아니면 라틴계의 추상적인 다음절어로 표현되었건 모든 발명의 핵심에는, 즉 모든 인공물에서 볼 수 있는 변화의 밑바닥에는 기존의 물건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에드윈 랜드가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왜 방금 찍은 사진을 볼 수 없는 거냐는 세 살 난 딸아이의 질문을 받고서였다. 순진무구한 “왜?”라는 물음이 랜드가 개선하려고 한 기존 카메라의 결점을 명확히 드러냈던 것이다. 이 분야의 고전서로 자리잡은 《기계 발명의 역사》에서 애보트 페이슨 어셔는 동일한 발명의 과정을 좀더 학술적인 용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발명은 기존의 요소들을 새로운 종합, 새로운 패턴, 또는 새로운 행위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설적인 동화에서 자신의 뚜렷한 특징을 찾아낸다…… 따라서 발명은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를 새로이 만들어낸다. 아주 근본으로 파고들어가면, 발명의 요체는 행위의 불완전한 패턴을 완성하거나 불만족스럽거나 부적절했던 패턴을 개선하는 데 있다. 노련한 발명가들은 어셔의 발언에 함축된 보편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발명의 기회, 다시 말해서 새롭게 개선된 패턴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물건을 다루는 기존의 패턴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나 물건 자체의 문제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새로이 개선된 내용을 특허화할 것이냐의 여부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다. 가령 가장 정력적인 발명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와 그레이트 이스턴 증기선을 설계했던 이점바드 킹돔 브루넬은 앞으로의 발명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특허제에 대하여 줄기찬 반대 입장을 고수하였다. 1851년에 브루넬은 영국 상원 특허법 소위원회에 보낸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장 쓸모있고 혁신적인 발명과 개선은, 이제까지의 다른 진보들에 기대고 또 거기에서 시사를 받는 대단히 발전되고 정교한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발명품이 갖고 있는 가치와 응용 수단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나 과거의 다른 발명들의 성과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브루넬은 “진정으로 뛰어난 개선은 영감의 산물이 아니”며 “그때그때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예리한 관찰의 결과”라고 믿었으므로 “가장 뛰어난 물건이 동시에 여러 사람에 의해 고안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브루넬에 따르면 특허법은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는다. “자신이 무언가를 발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특허를 떠올리고 거기서 굴러들어올 돈을 꿈꾸기 때문이다.” 브루넬의 말은 계속된다. 만일 그 사람이 부자라면 돈을 날린다 하더라도 부작용이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직공이라면, 가난한 사람이라면, 그의 생각은 자기 혼자서 몰래 기계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 작업을 성사시킬 것인가, 이 둘 사이에서 망설이게 됩니다. 그는 동료 직공들이나 같은 물건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에 이런 물건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왜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어려움이 무엇인지, 또는(사실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더 좋은 방법이 벌써 개발되어 완제품이 나올 단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들을 놓고 자문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베서머처럼 돈에 관심 두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발명가는 특허법을 개탄하지 않고 오히려 잘 가려서 특허를 따낸다. 베서머는 자신이 개발한 유명한 제련, 강철주조 공정 방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평생 수많은 특허를 따냈지만, 청동 금분의 제조기법만은 일부러 특허출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수지 맞는 산업 기술을 무려 35년 동안이나 공개하지 않은 채 외딴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었고 요직에는 믿을 만한 친인척들만 앉혔다. 베서머의 변은 이러했다. 그 이익은 “연구개발진”의 “부단한 활동이 요구하는 기금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인공물의 발전을 다루는 이론을 자기 원리의 대상물이 특허를 땄느냐 따지 않았느냐에 구애받아서는 안 되지만,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자료는 확실히 가족 기업의 비밀에 싸인 공간보다는 공식화된 기술 문헌에서 찾아내기가 수월하다. 특허 서류가 인공물 발전의 모든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 자료와 사례 연구를 위한 보고인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는 특허와 특허출원의 절차를 소개한 이차 문헌도 발명과 기술적 진보의 본질에 대한 풍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특허 전문 변호사인 데이빗 프레스먼의 《혼자 내는 특허》는 전문가나 이론가보다는 “햇병아리 발명가”를 위한 책으로,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에서 발명과 특허 과정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는 경험 많은 발명가나 기업체에 소속된 발명가는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좋다고 한 “발명의 과학과 마술” 부분에서 발명의 과정을 두 단계, 즉 “첫째, `문제의 의식”과 “둘째, 해법의 강구”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정작 까다로운 것은 앞 단계인데 프레스먼에 따르면 “하나의 발명이 나오기까지 90퍼센트의 노력”은 여기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는 문제 영역을 발굴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초심자에게 충고하고 있다. 당신의 일상적인 활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혹은 다른 사람은 과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나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좀더 쉽게, 싸게, 간단하게, 또는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좀더 가볍게, 빠르게,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라. 책의 후반부에서 프레스먼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안된 발명픔의 상품성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모든 장단점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여 상품으로서의 잠재력에 대한 주도면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발명품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그는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평가 항목을 제시한다. 하나의 발명품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물건보다 정말로 뛰어난지의 여부는 이 평가를 거쳐서 비로소 확인된다. 말을 바꾸면 그 발명품이, 그것이 대체하리라고 기대되는 물건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더 우수한 기능을 수행하리라는 보장이 있겠는가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그런 평가를 내릴 때 나타나는 문제는 긍정적인 요인이건 부정적인 요인이건 어차피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가 많다는 것이다. 프레스먼의 평가표에는 가격, 무게, 크기에서 시장 규모, 보급 난이도, 서비스 필요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44개의 요인이 담겨 있다. 그러한 분석의 최종적인 결과는 이질적인 요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얼마나 정확하고 솔직하게 반영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냉정하지 못한 발명가가 자기 상상력의 열매를 정확하게 품평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질긴 사람이야말로 천재 하나의 발명품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나타났고 그것이 어떠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든간에, 만일 특허를 따려고 한다면 “선행 기술”의 문제를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선행 기술이라 함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영역을 가장 소상히 파악하고 사람들에게 분명한 행위로 여겨지는 모든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특허를 따내고자 하는 발명가의 머리 속에는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한 명백한 방법 이상의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제이콥 래비노도 자신의 책에서 발명에 얽힌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면서 “선행 기술”을 자주 거론하고 있다. 1950년대의 일이었다. 미국 표준국을 그만두고 회사를 차린 래비노에게 한 라디오 생산업체가 FM 라디오 수신기나 TV용으로 쓸 수 있도록 정교한 누름버튼식 튜너를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나온 지 비교적 얼마 안 된 최신 상품이었으므로 튜너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이 드러나 있었다. 래비노는 그전부터 라디오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그 분야에서 이루어져온 발전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초창기의 튜너들 몇 가지를 소개했는데, 그것들은 보통 수신기만큼이나 덩치가 큰데다가, 쓰다 보면 음량까지 들쭉날쭉 변하기 일쑤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적인 식견을 “나는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는 말로 요약한다. 이와 같이 래비노는 튜너를 연구하거나 사용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깨닫고 있던 기존 튜너의 장점과 단점을 꿰뚫고 있었으며, 그러한 단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문제점은 명백히 알았을지 몰라도 그것을 어떤 단계에서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 방식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선행 기술을 알고 있던 래비노는 개량 튜너를 개발하는 문제에 뛰어들면서 나중에 특허를 출원할 때 선행 기술과 자기 기술의 차이점을 뚜렷이 부각시키기 위하여 어떤 특성을 강조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기존의 누름버튼식 튜너에서 벗어나 당김버튼식 튜너를 고안하였다. 원뿔형 버튼을 당긴 다음 손잡이처럼 이리저리 돌려서 방송국에 정교하게 주파수를 맞출 수 있게 하자는 발상이었다. 래비노의 튜너는 특허를 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개발을 맡았던 회사는 다른 회사의 제품들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제품 개발을 망설였다. “아무도 당김버튼을 사용하지는 않으며, 열이면 열 누름버튼을 사용한다”는 것이 회사측의 이야기였다. 발명가는 선행 기술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정 누름단추를 사용하고 싶거든 시장에 나와 있는 물건을 사용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내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서, 래비노는 첨단 튜너의 결함을 알고 있었으며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런 결함을 제거할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래비노만큼 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발명가를 위해 프레스먼은 특허출원 과정에서 선행 기술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며 발명품의 장점을 특허심사관들에게 어떻게 부각시켜야 하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특허출원서류의 형식은 먼저 선행 기술을 논의하고, 다음으로 그 발명의 대상의 장점과 기능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그 발명에 대해 권리를 청구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 보통이다. 프레스먼은 특허출원서류에는 같은 말들이 여러 번 되풀이해서 나오지만 그런 방식이 의외로 먹혀들어간다고 얘기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먼저, 당신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를 그들에게 말하고 나서, 그들에게 그대로 말하고, 그런 다음 당신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다시 그들에게 말한다.” 특허출원서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기존 제품의 문제점이다. 특허 전문 변호사는 이렇게 강조한다. 당신의 발명이 초점을 두었던 문제점이 지금까지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를 논의하라…… 그러고 나서 기존 방식의 단점을 빠짐없이 나열하라. [대상 및 장점 항목에서는 다시] 당신의 발명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내용과 선행 기술에 대해서 갖는 모든 장점을 나열하라…… 당신 발명의 긍정적 요소를 모조리……. 선행 기술의 문제점을 모조리 부각시켜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다각적인 포석이 깔린 문장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 발명의 기타 적용 대상이나 장점들은 설계도와 부속 설명을 참조할 때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 [그리고] 특허설명서 항목의 결론부에서 응용이 가능한 대상들을 다시 한번 (세번째로!) 열거한다. 특허출원서를 작성하는 과정도 고생스럽기 짝이 없지만, 발명을 구체적인 결실로,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끌어내려면 이보다 더한 시련도 견뎌내야 한다.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냈으면 발명의 90퍼센트는 끝낸 셈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탄탄대로가 뚫려 있는 것은 아니다. 발명가가 문제점을 훌륭히 파악했다고 해서 낙승을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문제를 줄일 수 있는 실현 가능한 “해법의 강구”는 상상 밖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촛불과 호롱불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토머스 에디슨 혼자만이 아니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는 그전까지 시도되었던 수많은 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영국의 발명가들은 오래전부터 전등 실험을 해왔으며, 특히 조지프 스원은 1878년에 탄소 필라멘트 램프로 영국에서 특허를 따냈다. 에디슨은 뒤늦게 미국에서 특허를 땄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었건 뒤져 있었건 전구에 대한 에디슨의 착상은 “영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각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필라멘트를 발견하기 위해 수천 종류의 물질을 실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다음에도 특허를 따기 위한 복잡한 과정을 거쳤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퍼뜨리고 판매하기 위한 하부구조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 지루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전구는 진정으로 성공을 거둔 혁신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의 착상이 실용적인 제품으로 탈바꿈하는 기나긴 과정을 에디슨은 “땀”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발명은 10퍼센트의 영감과 90퍼센트의 땀이라는 에디슨의 말은 바로 하나의 발명을 성공으로 이끌기까지에는 머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에디슨은 땀이 난다고 해서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문제를 조금씩 해결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천재라고? 천만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 불로소득은 없다는 투철한 인식 아래, 희망을 잃지 않고 끈기 있게 버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실패가 있어야 더 나아질 것 아닌가! ……나는 실패를 거쳐 성공에 이르렀다. 발명과 혁신 가운데 영감과 땀이 각각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지만(폴 메크리디는 에디슨이 말한 비율을 2대 98로 본다. 심지어 1대 99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발명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속에서 문제를 식별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는 것 같다. 발명가는 못말리는 기술 비판가라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발전된 물건에서도 놓치지 않고 문제를 발견한다. “개선에 대한 열정”은 발명왕 헨리 베서머에 따르면 “한도 끝도 없다.” 따라서 기술적 진보의 과정은 끝이 없다. 인공물의 새로운 형태는 한 시대의 물건에서 부단히 결함을 찾아내고 끊임없이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발전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핀에서 클립까지 개 가운데 아홉 개 클립의 용도 원래 의도하였던 기능이 무엇이었건간에 한 대상의 형태는 흔히 새롭고 창조적인 형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막대기에서 포크가 나오고 조개껍질에서 스푼이 나왔듯이 말이다. 대량 생산되는 상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한 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인공물 가운데 클립처럼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가 그것이 변형되고 다시 수정되는 과정을 무수히 겪어온 물건도 드물다. 밑그림과 그에 딸린 후속 설계도들이 누구의 것인지는 클립 자체의 기원만큼이나 애매모호하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런던의 로이드 일가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뮌헨의 한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무지무지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독일인들”이라고도 하고, 그런가 하면 스틸 시티 젬 클립을 만든 피츠버그의 가족 기업을 이어받은 하워드 서프린도 후보자로 거론된다. 1958년에 독창적인 연구를 했다고 주장하는 서프린의 말에 따르면, 클립이 10개가 있으면 그 가운데 3개는 분실되며, 정작 종이에다 끼우는 데 사용되는 클립은 고작 하나밖에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 클립들의 용도를 살펴보면 이쑤시개로, 손톱이나 귓밥을 후비는 데, 스타킹이나 브래지어, 바지를 일시적으로 채우는 데, 넥타이 핀으로, 카드 놀이에서 점수패로, 아이들 놀이에서 득점 기록 수단으로, 치장용 목걸이로, 무기로 쓰이는 등 그 쓰임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아닌 게 아니라 1950년대 초반에 나를 비롯한 우리 반 아이들은 클립을 오직 무기로밖에는 사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구부리고 비틀어서 그 뾰족한 양 끝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팽팽히 걸린 고무줄에 쓸 탄환으로 사용하였다. 방과 후에 선생님은 반 전체를 집에 못 가게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선생님의 귀를 ‘피융’ 스치면서 칠판에 부딪치거나, 천장에 맞고 튕겨 나오거나, 교실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쓰레기통을 요란하게 울린 U자형 미사일을 발사한 범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뾰족한 클립 때문에 실명한 사람이 있다는 케케묵은 설교를 다시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도시판 고무총 쏘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불상사를 목격한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못말리는 망나니 녀석들은 맨 뒷줄에 앉아 전쟁을 벌이곤 했는데, 클립이 유리창에 ‘`핑’ 하고 부딪칠 때마다 반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숨을 죽였다. 클립은 또 전화 통화나 면담, 회의를 하는 동안 손가락으로 우그러뜨릴 수 있어 치밀어오르는 공격 욕구를 적절하게 분출시켜주는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다. 매년 생산되는 2백억 개의 클립 가운데 이처럼 손가락 운동에 쓰이는 클립의 수효는 아주 적은 것일 테지만, 아무튼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클립이 원래의 목적대로 쓰이느냐 쓰이지 않느냐와는 관계없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아주 천천히 발전의 길을 걸어왔으며, 때로 그 길은 구부러진 클립의 모습처럼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복잡하고 다양한 쓰임새를 갖는 이런 물건을 앞에 두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일 수가 있고, 1백 개가 들어 있는 상자 안에서 어느 특정한 클립 하나를 집어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마치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그 클립들이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꽁무니에 달면서 모두 하나로 얽혀질 수 있듯이, 인공물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실마리를 문화사와 사회사의 상자 안에서 끄집어내면 자연히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종이는 1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어, 얼마 후에는 서쪽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13세기에 이르면 아마 부스러기를 짓이긴 펄프에서 종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유럽에서도 뿌리를 내렸다. 양 가죽이나 송아지 가죽은 중요한 종교 의식에 쓰이는 문서나 아주 특별한 문서를 기록하는 데만 쓰였고, 그 나머지 분야에서는 종이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중요한 통계나 사상, 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종이들은 물론 일정한 크기로 책의 모양을 갖추어 제본해야 했다. 그러나 관료제와 상업이 발달하면서 내용상 반드시 튼튼한 영구적 제본을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임시 기록물이 늘어나게 되었다. 만일 두 장의 업무 서류를 마치 책처럼 정성스럽게 제본했다면,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돈대로 들면서도 허세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관계가 깊지만 제본되지 않은 낱장들은 흩어지기가 쉽다. 흩어지기 쉬운 종이들을 묶어두기 위해 처음 등장했던 방법의 하나가 포켓 나이프`──``깃펜을 뾰족하게 깎기 위해 늘 손 가까이에 있었다`──``와 노끈이나 리본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데 묶어야 할 종이들에다 서로 평행을 이루는 두 개의 작고 가느다란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노끈 같은 것을 통과시킨 다음, 밀랍으로 노끈의 끄트머리를 종이에다 봉인했는데, 이것은 원형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묶는 끈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문서의 중요성이 결정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방법으로 문서를 묶어두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은 나도 동유럽의 대학에서 고급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묶은 원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나라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정한 여러 장의 문서나 기록 사본을 받은 경험도 있다. 바로 핀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는 날이 정해져 있던 옷핀 핀은 BC 3천 년경 수메르 인이 쇠나 동물의 뼈로 만들었다. 이 핀은 옷가지를 여미는 데 사용되었다. 핀은 기계화 생산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부터 수공업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1772년에 완성된 드니 디드로의 기념비적인 《백과전서》에는 핀의 수공업 생산 공정이 그림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도입부의 유명한 대목에서 핀을 예로 들어 분업의 장점을 설명하였다. “한 사람은 철사를 뽑고, 한 사람은 그것을 곧게 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자르고, 네번째 사람은 끝을 뾰족하게 하고, 다섯번째 사람은 다른쪽 끝을 뭉툭하게 간다……” 윌리엄 쿠퍼는 같은 과정을 시로 읊어`──`“`한 사람은 불 위에서 쇠를 녹이며/또 한 사람은 그것을 늘여 철사로 만드네.”`──``요점 정리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철사는 1분에 18미터씩 뽑을 수 있었다. 숙련된 노동자 한 사람이 핀 하나를 자르는 데는 1초도 안 걸렸다. 그렇다면 한 시간에 핀 4천 개가 나오는 셈이었다. 그러나 핀의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공정은 카드나 종이에 다 만든 핀을 꽂는 단계였다. 이 가내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은 하루에 고작 1천 5백 개밖에는 꽂지 못했다. 애덤 스미스는 각자가 전문 공정을 맡아 분업을 하게 되면(하나의 핀은 17명의 손을 거칠 수도 있었다) 평균적으로 따졌을 때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핀 생산량은 4천 8백 개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반면에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맡아서 하게 되면, 한 사람이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핀의 양은 많으면 스무 개, 적으면 한 개였다. 핀 생산 과정에서 분업의 효율성이 인식되면서 역설적으로 기계화의 도입은 크게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핀의 생산에 관련된 손작업을 나눌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었듯이, 피대와 도르래, 캠(cam, 회전 운동을 왕복 운동으로 바꾸는 장치)과 기어, 전단기와 망치, 물림 클러치와 줄을 연결하여 핀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데도 역시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핀 산업에서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도 핀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음을 역설하는 스티븐 루바는 “[핀] 생산기가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기까지에는 어떤 결정적인 요소들의 작용이 있었다고, 혹은 핀 생산기의 외양과 작동방식을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이 있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1814년에 미국에서 처음 발명된 기계가 특허를 따냈다. 1824년에 영국에서 당시 영국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은 좀더 실용적인 기계로 역시 특허를 따냈다. 그러나 초창기의 핀 생산기 가운데 가장 성능이 뛰어난 기계를 발명한 사람은 뉴욕 구빈원에서 원생들이 손으로 핀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한 부지런한 의학도였다. 재봉틀을 발명한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 아일랜드 하우는 1793년에 코네티컷 주 리지필드에서 태어나, 1815년에 뉴욕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발명에 대한 솟구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화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밑천 삼아 합성 고무를 만들어냈다. 1829년에 특허를 따게 되자 하우는 병원 문을 닫고 본격적인 제품 생산에 나섰다. 그러나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구빈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핀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하우는 기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인쇄기를 설계하고 생산하던 로버트 호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1832년에 드디어 한 번의 조작으로 핀을 자동 생산할 수 있는 기계의 실용 모델이 호이의 공장에서 완성되었다. 특허는 바로 따낼 수 있었다. 비록 초창기에는 기계의 결함이 속속 드러나 매출이 지지부진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앉았지만, 하우는 꾸준히 나와 있는 모델들의 결함을 제거해나가 점차 나아진 제품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1835년에 하우 공작회사가 설립되어, 곧 다섯 대의 기계가 가동되었다. 핀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생산되었다. 처음에는 세 대의 기계로 하루에 7만 2천 개의 핀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생산된 핀을 종이에 꽂는 데 무려 60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진정한 기계화를 이룩하려면 핀을 꽂는 과정도 기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하우와 그의 회사 직원들은 종이에다 밭이랑처럼 주름을 잡아 거기에 핀을 꽂을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중세만 하더라도 핀은 아주 귀한 물건이어서 핀 생산업자들은 날을 정해놓고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영국에서는 법으로 명시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 소중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핀돈”을 챙겨놓아야 했다. 그러나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자 “핀돈”은 그야말로 “겨우 핀이나 살 수 있는” 푼돈을 뜻하게 되었다. 핀을 카드에 꽂아서 팔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핀의 품질은 한마디로 들쭉날쭉이었다. 어떤 것은 휘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끝이 뭉툭했고, 또 어떤 것은 사용하기 불편할 정도로 머리 부분이 크거나 작았다. 기계화가 된 다음에도 제조업체들은 핀을 가지런히 카드에 꽂음으로써 자기 제품의 “더할 나위 없는” 균질성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제품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핀을 카드에 꽂아두면 편리하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고, 솔기가 터졌다든지 해서 긴급히 핀을 사용해야 할 상황에서도 쉽게 빼 쓸 수 있어 좋았다. “핀 종이”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으며, 기계의 발달로 핀의 품질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좋아진 오늘날까지도 핀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방식으로 포장하여 판매되고 있다. 가격이 떨어지고 품질이 좋아지자 핀은 산업혁명과 함께 급속히 성장한 상업 부문에서도 대량으로 쓰이게 되었다. 업무용 핀과 가정용 핀은 제조 과정은 똑같았지만 포장의 차이로 값이 달라졌다. 업무용 핀은 반 파운드씩 뭉텅이로 팔 수 있었던 데 비해 가정용 핀은 여전히 낱낱이 종이나 카드에 가지런히 꿰어진 상태로 팔려나갔다. 종이나 카드의 한쪽 여백에는 제조업체의 이름과 제품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선전 문구가 박혀 있었다. 한 장의 “핀 종이”가, 가령 검은 옷에 쓰는 “검은 핀의 줄”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모양과 크기별로 다시 여러 종류의 핀으로 나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체에서는 그런 복잡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업무용 핀으로 서류들을 안전하게 묶어 신속히 처리할 수만 있으면 대만족이었다. 사람들은 적절한 신용 확인이나 회계 처리에 필요한 송장에 업무용 핀을 잠시 꽂아두었다가 나중에 빼내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서류 위에는 깨알 같은 구멍 두 개밖에 남지 않았으니 가는 구멍을 뚫어 리본으로 묶었던 옛날의 방식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업무용 핀 가운데 하나를 집어드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핀을 언제라도 쉽게 뺄 수 있도록 납작한 종이가 아니라 불룩한 바늘방석과 비슷하게 포장하는 방법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는 긴 종이띠를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아서는 그 옆에다 핀을 한 줄로 가지런히 꽂는 방법도 있었다. 이것이 사무원의 책상 위에 버티고 있는 모습은 피라밋을 닮았는데, 흔히 “데스크 핀”이라고 부른다. 책상 서랍이나 쟁반에서 핀을 집어드는 어려움은 또 다른 모양의 핀이 만들어지게 했다. 이것이 바로 “T”핀이다. 이 핀은 핀의 가닥을 옆으로 구부렸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꺾어 머리 부분이 크고 T자와 닮은 꼴을 하고 있다. 그 당시의 선전책자를 보면 “주로 주식을 매매하는 증권거래소에서 사용되었던” 이 T핀은 그것이 극복하였던 일자 핀의 결함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 핀은 손잡이가 있어 빠르게 집어 꽂고 뺄 수 있으며, 종이 사이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다.” 가락을 찌르지 않는 파스너 등장 19세기가 끝날 무렵 핀 제조업은 반 파운드 무게의 업무용 핀 한 상자가 40센트에 팔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양의 종이나 카드에 박힌 가정용 핀이 75센트에 팔릴 정도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초창기의 핀은 대부분 놋쇠로 만들었다. 놋쇠는 물렁한 금속이었으므로 강철만큼 좋은 재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으로 말미암아 강철의 부식을 피할 수 없었고, 차츰 니켈을 씌운 양질의 핀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아주 눅눅한 곳에서는 니켈이 벗겨져나가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생긴 녹이 핀이 고정시키고 있던 종이에까지 번져들었다. 강철 핀의 이러한 결함도 집에서 쓸 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에서는 대개 옷을 바느질하거나 가봉할 때 잠시 핀을 사용할 뿐이었다. 가정주부들은 오랫동안 치워둘 물건에다 핀을 꽂아두지 않을 정도의 배려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녹이 슨 핀은 빼내서 사포에 슥슥 문지르면 녹이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는 장기간에 걸쳐서 핀을 꽂아두어야 할 서류나 문서가 많으므로 핀에 녹이 슬까봐 걱정한다든지 녹슨 핀을 손질한다든지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웠다. 업무용 서류에 핀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핀을 꽂아둔 구멍 둘레에 동그랗게 배어든 보기 흉한 녹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류를 덧붙였다, 뺐다, 다시 덧붙이는 과정을 되풀이할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한결 더 두드러졌다. 핀에 자주 시달렸던 서류 귀퉁이는 아예 너덜너덜해졌다. 이러한 결함을 없앨 수 있는 대안이 모색되어야 했다. 핀으로 종이를 뚫는 데 따르는 이러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하여 일찌감치 19세기 중반에 발명가들은 이른바 “파스너(fastener, 서류철 여미개`─`옮긴이)”와 “클립”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클립은 우리가 오늘날 종이 집게가 달린 필기판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일종의 스프링 장치를 가리켰다. 특허를 따는 데 성공한 초창기의 좀더 작은 파스너 중에는 두 개의 작은 돌기가 서류를 꿰뚫고 나가 서류 뒷면의 또 다른 금속판 위에 포개지면서 서로 맞물리게끔 된 것도 있었다. 종이에 구멍이 뚫리는 문제점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이 방법은 뾰족한 핀 끝이 책상 위의 다른 서류들을 찢어버리곤 하는 결점을 줄여주었다. 이 새로운 파스너의 더 큰 장점은 서류를 정리할 때 손가락이 찔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1864년의 특허에 따르면 새로운 파스너는 “법률 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종이의 모서리가 뒤집히거나 ‘강아지 귀’ 모양으로 접히는 것을 깨끗이 막을 수 있었다.” 19세기의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종다양한 파스너가 속속 개발되었으며 그것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모든 인공물의 발전에서 확인되는 모습이지만, 한 파스너의 새로운 변종은 기존의 형태가 안고 있던 문제의 일부나 전부를 해결한다고 장담하였다. 프리미어 파스너라는 제품은 “모양이 비슷한 다른 파스너들과는 달리” 파스너 끝이 짜부러지지 않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종이를 뚫어야 하는 문제점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혀 새로운 모양의 파스너도 개발되었다. 1887년에 필라델피아의 에델버트 미들턴이 그런 장치의 하나로 특허를 따냈다. “그 종이 파스너의 장점은” 가전성을 가진 금속을 기이한 모양으로 찍어내서는 여러 날개를 서류 모퉁이에다 포갬으로써 “종이에 구멍을 뚫거나 종이를 자르지 않고도 많은 양의 문서를 튼튼히 묶어둘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구멍을 뚫는 파스너도, 접는 파스너도 여전히 만들어져 팔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낱장이 떨어져나가는 위험을 감수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서류 모서리에 구멍이 뚫리거나 너덜너덜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런 물건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미들턴의 개량품은 종이에 구멍을 뚫지 않고 아랫죽지의 도톨도톨한 날로 서류를 단단히 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스너를 조이기 위해 여러 개의 날개를 포개야 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불편하였다. 종이를 뚫어야 한다는 것, 조이고 풀기가 복잡하다는 것,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하나로 된 장치가 개발된다면 명백한 우위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19세기 중반까지 파스너가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강판에서 대량의 제품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찍어낼 수 있는 기계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로 접어들어서는 스프링용 강선으로 원하는 모양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었다. 기존 파스너의 문제점을 극복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파스너가 발명된 것은 이 핀 제조기의 후예 덕분이었다. 최초의 성공적인 클립은 구부리면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강선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런 복원력도 어느 정도라야 했다. 복원력이 지나치면 아예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가 없었다. 강철을 비롯한 모든 재료는 늘이거나 굽히거나 비틀었다가 힘을 놓으면 거기 들어간 힘에 비례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 이름하여 “탄성”을 확인할 수 있다. 후크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원리는 1660년에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발명가인 로버트 후크가 발견하였다. 그러나 후크는 1678년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학설을 공표하였다. 그 당시는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던 시대였으므로 후크는 철자를 바꾸어 놓은 라틴 어의 형태, 곧 ‘ceiiinosssttuu’라고만 발표하였다. 2년 뒤에 마음을 고쳐먹은 후크는 그 문자들을 ‘Ut tensio sic uis’라고 재배열하면서 “힘이 오르면 긴장도 오른다”고 풀이하였다. 스프링을 당기면 당길수록 그것에 맞서는 저항도 커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스프링을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형태가 부서지면서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종이 클립을 만들면서 엔지니어와 발명가는 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 물질이 쓸모있는 물건이 되게 해주는 바로 그러한 특성이 동시에 한계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쉽게 구부러지는 강선으로 클립을 만들 경우 그것은 탄성이 부족하여 종이를 꽉 조이지 못했다. 반면에 좀처럼 굽어지지 않는 강선을 쓰면 클립 자체를 만들기가 곤란했다. 클립처럼 얼추 보아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 이처럼 더딘 과정을 거쳐서 개발된 것은 물질의 기본적인 습성과 그것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이해가 뒤따르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강선은 19세기 후반부까지만 하더라도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은 재료였다. 초기의 강선 제조업자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부지런히 찾았다. 가령 존 뢰블링 같은 사람은 엄청난 양의 강선을 동원하여 현수교를 직접 설계하고 건설까지 했다(교통체증에 막혀 다리 중간에 멈추어본 적이 있는 운전자들은 커다란 다리가 얼마나 출렁거리는가를 생생하게 체험한다. 시공 과정이나 사용 과정에서 지나친 부하로 강철 케이블이 후크의 법칙의 한도를 넘어서서 늘어나면, 다리는 녹아 버린 플라스틱 모형처럼 축 처져서 다시는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현수교에 쓸 케이블을 뽑아내든 강선을 구부려 파스너를 만들든, 새로운 물질을 이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전문화된 기계가 있어야 했다. 클립을 일일이 손으로 만들다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기계식으로 만들어지는 기존의 일자 핀과는 도저히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클립이 대량 생산되어 널리 보급되기까지에는 적절한 강선의 등장뿐 아니라 강선을 한 상자에 몇십 센트면 살 수 있는 물건들로 순식간에, 부지런하면서도 빈틈없이 만들 수 있는 기계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데스크 핀에 대한 원성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다수 발명가와 발명 지망생들은 핀이 모양새도 좋지 않을 뿐더러 여미개로서는 부적절하며 조만간 더 나은 물건이 나와야 한다는 인식을 함께하고 있었다. 국심을 상징했던 노르웨이의 클립 대부분의 새로운 도구들, 특히 모양이 작고 수수한 물건들의 경우가 더욱 그렇지만, 최초로 강선을 굽혀 만든 클립의 유래도 불분명한 구석이 없지는 않다. 민족주의도 이런 불확실성에 일조를 하고 있다. 통설에 따르면 요한 발러라는 노르웨이 인이 1899년에 가장 먼저 종이 클립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 당시 노르웨이에는 특허법이란 게 없었다. 특허의 설계도는 정부의 특별위원회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발러가 실제로 특허를 딴 곳은 독일이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제2차대전 중 “애국심을 드높이고 독일인을 약올리기 위해 양복 옷깃에다 클립을 끼움으로써” 이 초라한 물건의 기원이 자기네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고 한다. 클립을 끼우고 다니면 체포당할 수도 있었지만, “결합시키는” 클립의 기능은 “민족의 항독 대열에 동참한다”는 강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기말에 이루어진 발러의 발명품은 1901년에 미국에서도 특허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관련 문서는 “종이 클립 또는 홀더”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프링 재료와 동일한 강선을 네모, 세모, 또는 그 밖의 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만든다. 클립의 양 끄트머리는 나란히 반대 방향을 향하게 된다. 종이 클립은 특별한 모양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듯 발러의 특허출원서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소개되어 있다(특허출원서에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는 형태들이 이처럼 다양하게 소개되는 경우가 흔한데, 바로 이런 사실에서도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주장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러의 클립은 얼추 보기에는 요즘의 클립과 비슷해보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강선이 고리 안에서 또 하나의 고리를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종이들은 물론 클립의 팔에다 끼우지만 그렇게 하려면 숙련된 솜씨가 필요했다. 그렇게 간단한 형태인데도 희한한 것은 발러뿐 아니라 그 당시의 다른 클립 특허출원자들이 모두 모델 없이 설계도만 달랑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발러는 자기 발명품의 또 한 가지 장점을 짚고 넘어갔다. “상자 안에 쌓아둘 때 클립들이 서로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쪽 단락의 끝부분은…… 다른쪽 단락의 시작 부분에 될 수 있는 대로 접근시킨다.” 바꾸어 말하면, 돌출되지 않게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클립들이 “서로 걸리는” 것 같은 불편을 예기한 것은 발명가에게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발러가 이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갔다는 데서 우리는 다른 클립들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지금도 우리가 가끔씩 경험하는 불편함을 사용자들에게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실제로 발러가 미국에서 특허를 따냈을 당시에도 이미 다른 클립들이 있었다. 발러가 특허를 딴 것은 어떤 근본적인 기여를 했다기보다는 몇몇 공통된 문제점들에 대한 참신한 변형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매튜 스쿨리는 1896년에 “구조가 간단하고 사용이 간편하며 우수한 성능을 갖는 종이 클립 또는 홀더”에 대한 특허출원을 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결함은 이미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1898년에 취득된 스쿨리의 특허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나의 발명품 이전에도 종이 클립들이 대체적으로 내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져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것들은 자기가 물고 있는 종이에서 삐죽 튀어나오는 단점에서 하나같이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발러류의 디자인과는 달리 스쿨리의 클립은 “자신이 물고 있는 종이를 구부리거나 주름지게 만들지 않고 수평으로 종이 위에 또는 종이를 등지고” 누워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강선을 나선형으로 포갰기 때문이었다. 비록 고리 안의 또 다른 고리는 없지만 이 클립은 발러의 클립처럼 오늘날의 클립과 거의 비슷하다. 결국 종이 클립의 기원이라든가 특허사를 규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수고로 끝날지 모른다. 클립에는 수없이 많은 변종이 있었고 그것들은 대단히 다채로운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획기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것들은 애당초 특허출원을 내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클립처럼 작은 물건은 그런 일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원은 불분명하다손 치더라도 잇따라 등장한 클립의 형태들은 기존 형태의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클립 같은 아주 사소한 물건의 예에서도 우리는 실패야말로 새로운 형태를 낳는다는 보편적 원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1900년에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코널리우스 브로즈넌에게 “종이 클립”에 대한 특허가 떨어졌다. 이 클립은 업계에서 “강선을 구부려 만든 최초의 성공적인 종이 클립”으로 평가되었다. 이번에도 모델은 제출되지 않고 특허출원 설계도에 두 종류의 클립이 도면상으로만 제시되었다. 이 설계도들은 내가 어린 시절에 매료당했던 모형 기차 선로를 연상시킨다. 특허출원서류의 전형적인 절차에 따라 브로즈넌의 “종이 클립에 구현된 새롭고 유용한 개선점들”에 대한 묘사는 이 새로운 클립이 극복할 것으로 보이는 기존 방식의 문제점들을 암시하고 있다. 이 발명품은 종이들을 한데 묶어두는 개선된 클립, 또는 바인더와 관련이 있다. 목적은 스프링강으로 값싸고 신속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고 여러 장의 종이도 거뜬히 완전무결하게 고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원할 때는 얼마든지 손쉽게 뺄 수 있는 그런 형태의 파스너를 제공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적어도 브로즈넌과 특허심사관의 눈에는 새로운 클립이 기존의 클립들에 비해 나아보였다. 이 클립의 독특한 형태에 대한 권리는 세 개의 항목으로 나뉘어 주장되는데, 그 항목들은 하나같이 다음 구절로 시작된다. 구부려진 하나의 길다란 강선으로 되어 있으며, 강선의 한쪽 단락이 다른쪽 단락의 종결부 가까이에서 안으로 꺾여들어가서 길게 뻗어가다가…… 이 권리 주장들은 강선이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한쪽 단락의 끝에서 작은 고리를 이룬다”고 못박고 있다. 이 작은 고리는 스쿨리와 발러의 클립이 맞닥뜨렸던 문제, 다시 말해서 클립을 끼울 때 종이가 곧잘 긁히거나 찢어진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였다. 브로즈넌의 클립은 또 다른 특성이 있었다. 코나클립이라고 불렸던 그의 클립은 강선의 각도를 급격히 꺾을 수 있는 최신 기술의 도움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까지 특허를 받았던 다른 클립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다른 제품들에 비하여 확실히 사용이 편리했다. 하지만 코나클립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종이가 빠지지 않는다는 장담과는 달리 툭하면 종이가 빠졌던 것이다. 특히 가운데 종이들이 잘 빠져나갔다. 브로즈넌은 다른 많은 발명가들처럼 한 조각의 강선을 구부려 “완벽한” 종이 클립이 되도록 모든 실용적인 방법을 아우를 수 있는 내용으로 자신의 권리를 명명백백히 밝혔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흔해빠진 물건처럼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는 통설을 철저히 뒤엎은 예도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코나클립의 한끝에 만들어진 작은 고리는 처음에는 결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클립의 안쪽이 직선으로 끝나면 클립을 끼울 때 종이가 찢겨나가기 쉽고 그렇게 되면 핀에 비해서 이렇다 할 장점을 내세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발전의 최종적 결과물로서 자신의 클립이 “서류를 챙겨둘 수 있는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방법”을 제공해줄 거라는 브로즈넌의 호언장담과 “핀이나 파스너를 사용하여 서류를 못 쓰게 만들지 말라”는 그의 기업인들에 대한 훈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립으로 끼운 종이는 쑥쑥 빠져나갔다. 게다가 브로즈넌의 클립들은 상자 안에서 자기네끼리 엇걸리기 일쑤였다. 1905년에 브로즈넌은 “스프링강으로 만들었으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 늘이면 종이들의 가장자리를 감싸고 무는 반응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부분들을” 가진 “참신한 형태”의 종이 클립에 대한 새로운 특허를 따냈다. 이 클립의 무는 힘은 포개진 강선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코나클립처럼 이것도 단일한 평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종이들은 강선의 서로 맞닿은 안쪽 고리와 바깥쪽 고리를 분리시키는 데서 나오는 반발력에 의해 맞물렸다. 브로즈넌의 특허출원서에 따르면 그의 새로운 클립은 “만들기 쉽고, 다루기 쉽고…… 물고 누르는 능력이 뛰어나며…… 원래의 자리에서 미끄러지거나 빠져나가는 법이 없고…… 자기네끼리 얽히고 설켜서 상자에서 한두 개 꺼내려면 애를 먹어야 하는 일도 없으며…… 함께 포개져 있는 다른 서류를 물지도 않는” 장점들이 있었다. 이나 파스너로 서류를 망치시렵니까 브로즈넌을 비롯하여 창조적인 강선 기술자들이 내놓은 종이 클립의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일부가 《웹스터 새 국제사전》에 실려 있다. 클립의 형태적 중요성과, 그것을 말로만 정의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그림이 첨가되어 있다. 1909년에 나온 제1판은 “클립”을 “편지나 지폐, 신문 쪼가리 들에 쓰이는 죔쇠 또는 버팀쇠”로 정의하면서, 꺾쇠처럼 생긴 앞선 형태의 장치와 함께, 브로즈넌의 코나클립은 물론 그가 특허출원서에서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구부린 강선의 새로운 형태를 소개하였다. 각각 나이애가라클립, 린클립이라고 불렸던 이들 새로운 클립은 이를테면 가는 고리가 반드시 클립 안에서 끝나야만 제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34년에 나온 《웹스터 새 국제사전》 제2판에서 “종이 클립”은 “약간의 힘을 주어 떼어놓으면 여러 장의 종이를 물 수 있도록 납작한 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일정한 길이의 강선으로 만들어진 장치”로 정의되어 있다. 이 사전에서 다시 “클립” 항목을 찾아보면, 금속판을 찍어낸 형태의 클립이나 브로즈넌의 코나클립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제1판에 실리지 않았던, 두 개의 “눈”이 클립 본체의 바깥에 놓이는 새로운 형태의 클립이 선보인다. 이 클립은 상자 안에서 자기네끼리 엇걸리지 않도록 두 개의 눈이 본체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다시 발전해나가는데, 이것이 바로 올빼미 클립이었다. 초창기의 선전 문구에서 외눈박이 코나클립과 비교된 올빼미 클립의 우수성은 시로도 읊어졌다. 외눈으로 사업을 하다니, 하나는 너무 적죠 이 클립을 보세요 눈이 둘이랍니다. 올빼미 클립의 장점으로는`──``종류가 같은 다른 클립들과 엉키지 않는다는 점말고도`──``끝이 뾰족하지 않아서 다른 서류를 긁을 염려가 없고 뺄 때도 종이가 찢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코나클립을 몰아낸 주인공은 올빼미 클립이 아니었다. 웹스터 사전 제2판에 실린 클립들의 그림 가운데 젬이라고 알려진 클립이 결국 오늘날에도 가장 인기 있는 상품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클립 하면 대부분 이 젬을 연상할 정도로, 사실상 젬은 클립의 동의어가 되었다. 젬 클립은 웹스터 사전의 1판과 2판 사이에서 그저 조용히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발러는 자기가 원조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발러가 특허를 낼 당시에 이미 젬 클립은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1899년 4월 27일 당시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 코네티컷 주`──``기계식 핀 제조업체들이 모여 있던`──``워터베리의 윌리엄 미들브룩이 낸 “종이 클립 제조기” 특허출원서에는 완벽한 형태의 젬이 그 기계의 생산품으로서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들브룩이 기계에만 특허출원을 냈지 클립 자체에 대해서는 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젬 스타일의 클립은 진작부터 있었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물건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발러가 1901년에 미국 특허를 따낸 클립은 미들브룩의 기계 옆에 그려져 있던 것만큼 충분히 발전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미국의 제조업자들은 자기네 선배들이 젬을 발명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일은 삼가했다. 1975년판 《사무용품》 편람에서는 브로즈넌이 1900년에 특허를 딴 코나클립을 “잼 패턴의 직계 조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미들턴이 1899년에 딴 특허는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순서만큼은 뒤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73년에 스미소니언 협회의 한 간부가 쓴 글에 따르면, 특허를 따낸 어떤 클립도 “20세기 초반 젬 형태의 클립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젬의 특허권자가 누구이고 그 사람의 국적이 어디였는가에 대해서 이 글이 모호하게 남겨 두는 사정은 이해되지만, 바로 이러한 사례들은 인공물의 발전을 역추적하면서 특허 자료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였을 때 부딪히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클립에 대한 미국의 특허 기록만 줄기차게 뒤져본다고 해서 순도 높은 젬이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니며, 젬 클립을 만드는 기계에 대한 미들브룩의 특허는 거기서 만들어지는 인공물의 형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젬 클립의 진정한 뿌리는 영국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도 한 국제적 기업의 “젬 주식회사라는 모기업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907년에 육해군협동조합에서 펴낸 “영국 최고의 상품” 목록에 최신식 클립이 딱 한 종류 소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그것은 “편지나 문서, 송장을 다시 그것들이 필요해질 때까지 구멍이나 훼손 없이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부드러운” 클립으로 묘사된 완벽한 형태의 젬이었다. 1908년에는 미국에서도 이 클립이 “가장 인기 높은 클립”으로, “서류를 잠시 모아두기 위한 최선의 도구”로서 선전되기에 이른다. 광고문은 한술 더 떠서 사용자들에게 당연히 젬이 극복해낸 결점들을 지니고 있는 기존의 도구들은 사용하지 말라고 넌지시 훈계를 한다. “핀이나 파스너로 서류를 망치시렵니까?”라고. 젬 그 자체의 고전적 형태는 특허로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발명가들이 개선을 시도하지 않을 만큼 클립으로서의 기능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젬 클립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이를 한데 엮어두는 도구를 설계할 때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해결책들이 집약된 축도로서 디자이너와 비평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가령 오언 에드워즈는 “사용자에게 친절한 세계를 안내하는 핵심 기술”이란 부제가 달린 자신의 저서 《멋진 해법》에서 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문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초라한 클립이라면, 아주 멀고 먼 은하계에서 온 고고학자들은 우리에게 과분한 칭송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물질적 혁신의 광범위한 목록 가운데 그 이상 완벽하게 구현된 물건은 없다…… 고리 안에 고리가 들어가게끔 대담무쌍하게 설계된 클립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종이를 후크의 법칙 안에 얌전히 가두어놓는다…… 적어도 그것이 사용된 다음부터, 그리고 그 고리들이 롤러 코스터처럼 특이한 모양으로 빗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젬의 매력적인 형태도 호소력을 잃어갔지만, 처음의 그 청순한 형태만 보고서 산업 디자이너와 비평가들은 젬의 실제 기능을 과대 평가할 정도로 거기에 현혹되었던 듯하다. 가령 폴 골드버거는 몇 가지 일상용품의 설계에 찬사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클립이 하는 일을 클립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물건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클립은 가볍고, 값싸고, 강하고, 사용이 간편하고, 모양도 좋다. 결벽주의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곡선미 또한 갖추고 있다. 클립을 더이상 개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헛된 시도들`──`형형색색의 큼직하고 엉뚱하게 생긴 플라스틱 클립, 끝이 둥글지 않고 네모지게 만들어진 클립 따위`──``은 이 진짜 물건의 품질을 돋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골드버거가 “진짜 물건”이라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젬이었으리라. 그의 글에 실려 있는 삽화가 그 점을 뒷받침한다. 몇몇의 발명가를 제외하고는 이 클립이 갖고 있는 특질들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며, 새로운 플라스틱 클립은 모양만 엉뚱한 것이 아니라 쓰임새도 신통치 않다는 사실을 너도나도 지적하였으리라(자성을 띠고 있지 않아서 컴퓨터 사용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만). 그러나 많은 발명가들과 적지 않은 수효의 사용자들은 “클립을 더이상 개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끝이 둥글지 않고 네모진 클립”은 1934년 12월 25일에 특허를 따낸 뉴저지 주 버로나의 발명가 헨리 랜커나우에 의해 기능이 확실히 한 단계 더 좋아진 물건으로 여겨졌다. 통례에 따라, 그러나 통례와는 달리 경쟁 제품을 적시해가면서, 그는 자기의 발명품이 기존 제품의 결점과 비교했을 때 갖는 우수성을 자신 있게 밝혔다. 이 발명의 목적은…… 한쪽 끝은 사각형 고리로 되어 있고 다른쪽 끝은 길이 방향으로 V자형의 이중 고리로 되어 있는 클립을 만드는 데 있다. 이 발명의 또 다른 목적은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V자형 고리로 한쪽 끝이 되어 있어 이것이 쐐기 작용을 하므로 일반적으로 업계에서 “젬” 클립으로 알려져 있으며 U자형의 고리를 갖고 있는 클립에 비해 두 장 이상의 종이를 좀더 편리하게 끼울 수 있는 스프링강 클립을 만드는 데 있다. 이 발명의 또 다른 목적은 한쪽 끝부분이 네모나고 스프링강의 두 끝이 앞서 말한 네모난 끝부분과 바싹 붙어 있어서 조이는 표면적을 최대화하고 클립이 물고 있는 종이로 스프링강의 뾰족한 끝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스프링강 클립을 만드는 데 있다. 랜커나우는 자기가 만든 끝이 네모난 클립의 다양한 변형들을 묘사하는 그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장점을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클립 끝까지 뻗은 스프링강의 자유로운 끝이, “클립의 끝까지 뻗어 있지 못한 짧은 다리를 갖고 있는 ‘`젬’ 형태의 클립을 뺄 때 자주 일어나듯이 종이를 파고들거나 긁지 못한다”는 점이다. 젬 클립에 대한 랜커나우의 비판은 옳은 지적이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종이를 파고들거나 긁지 못하도록 스프링강의 끝을 연장하게 되면 젬의 고전적인 선이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젬을 표방하는 것으로 보이는 랜커나우의 클립은 퍼펙트 젬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딕적인 형태를 가진 이 클립은 로마네스크적인 외양을 한 젬과 대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책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겉표지에다 참조 자료를 덧붙여야 하는 도서관 사서처럼 민감한 일부 사용자들은 뺄 때 고딕 모양의 클립이 책에 훨씬 적은 손상을 준다고 랜커나우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랜커나우의 고딕 모양 클립 특허는 당시 뉴욕 주 마운트 버논에 있었던 노스팅 핀 티켓 사에게 양도되었다. 이 회사는 새로운 종류의 핀 티켓`──``옷에 달 수 있도록 핀이 부착되어 있는 치수 꼬리표`──`을 만들기 위하여 1913년에 설립된 회사였다. 끝이 뾰족한 기존의 핀 티켓은 옷에다 손상을 줄 뿐만 아니라 고객이나 판매원의 손가락을 콕콕 찌르기로 악명이 높았다. 노스팅이라는 회사의 이름도 새로운 핀 티켓이 강선을 둥글게 구부려 만들었기 때문에 “no sting” 곧 “찌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회사는 강선을 굽히는 기술로 새로운 핀 티켓의 제조 특허를 따냈으므로 비슷한 공정을 요구하는 다른 상품이 없겠는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클립이었다. 현재 노스팅 사는 “지난 75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클립”을 만들어왔다고 자랑하고 있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은 박람회장이 있는 플러싱 메도즈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브롱크스의 노스팅 사 본사와 공장을 견학할 수 있었다. 자사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목록을 수록한 1989년판 노스팅 사 카탈로그의 클립 항목을 보면, 재주 좋게 구부린 강선 조각처럼 일견 단순해보이는 인공물마저도 형태와 기능`──`또는 기능들`──``간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클립은 다른 것들에 비해 저마다 부분적인 장점을 갖고 있지만,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종이들을 단칼에 쓸어 가두는 능력을 가진 형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개발된 연대순이 아니라 인기순으로 배열된 카탈로그에 있는 클립들은 각각의 상대적인 장점이 나열되어 있어, 다른 클립의 단점, 결함, 문제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에게 친숙한 젬 클립이 세 가지 크기로 맨 먼저 등장하지만 특별한 설명은 없다(그만큼 명성이 자자한 탓이리라!). 젬의 뒤를 이어 “마찰 젬”이 나오는데, 이것은 길이를 따라서 자잘한 홈 또는 눈금이 나 있어 “일반 젬에 비해 우수한 장악력”을 보여준다. 그 다음이 “특허를 따낸 디자인 덕분에 종이에 끼우기가 한결 간편해진” 퍼펙트 젬이다. 이어 “주름진 표면이 최대한의 장악력을 제공하는” 마르셀 젬이 소개된다. 이들 인기 있는 클립들이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장점만을 모아서 만든 것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모양의 유니버설 클립(또는 임피리얼 클립이라고도 한다)으로, “그 독특한 디자인은…… 종이를 아주 잘 물뿐만 아니라 사용하기에도 편하다.” 알다시피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긴 클립이라 하더라도 두꺼운 카드들을 끼울 때는 애를 먹기 마련이다. 끼우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불룩한 것이 과히 보기가 좋지 않다. 그래서 나온 멋쟁이 클립은 “카드나 색인지처럼 두꺼운 종이를 끼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둥근 두 눈이 걸리거나 찢기는 것을 막아주는” 피어리스 클립은 “젬보다 더 많이 끼울” 뿐만 아니라 “젬보다 변형력이 뛰어나다.” 예전의 클립을 조금 변형시킨 링 클립은 “소량의 종이를 끼우는 데 사용”되며, 크기가 다섯 종류로 “젬보다 두껍지 않고” “파일에서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것이 “소량의 종이를 끼울 때는 젬 클립보다 훨씬 잘 물리는” 글라이드온 클립이다. 젬은 다른 클립들의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런 비교가 가능한 것은 젬이 “완벽함”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젬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이다. 노스팅 사의 카탈로그에는 또한 “사무실 분위기”에 맞게 선정된 사무용품을 통해 “격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안목 있는 중역들을 위해 제작된” 클립으로 이루어진 “귀금속품”도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이 클립들은 “일반 제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특별한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가령 금박을 입힌 클립은 “절대로 빛이 바래거나 녹이 스는 일이 없으며” “중요한 고객과의 좋은 화젯거리”를 제공한다. 이런 클립은 “중역회의실이나 마호가니 책상과 잘 어울리며 검소한 사무실에도 품위와 격조를 살려준다.” 좀더 수수한 사무실에는 스테인리스 클립을 권할 만하다. 스테인리스는 자성이 없고(“디스켓과 함께 써도 안심”) 대단히 강하며(“죄는 힘이 최고”) 녹슬 염려가 없다(“문서실, 법률회사, 도서관에서 쓰기에 안성맞춤”). 놋쇠로 막을 입힌 클립도 있었는데, 이것은 “좀더 부담 없는 가격에 금빛의 클립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상적”이다. 젬, 마르셀 젬, 멋쟁이 클립을 모두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상적인 클립으로 호평받는 멋쟁이 클립은 “꺾쇠”라고도 불렸다. 종이를 접은 것처럼 생긴 이 클립은 크기가 여러 가지 종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두께가 5센티미터도 넘는 두툼한 서류 뭉치도 비교적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아무리 큰 젬 클립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라스틱 컬러 클립의 인기 강선을 굽히는 기술과 기계를 갖고 있는 다른 회사들에서도 이런저런 모양의 클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다양성을 보면 클립에 고정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며 특정한 형태가 기능적으로 우수한 다른 형태들에 비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미감 같은 비기능적이며 주관적인 요소도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클립이 핀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강선을 구부려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클립이 속속 쏟아져나온 것도 바로 그런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떤 형태들이 살아남아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간 것은 부분적으로는 강선을 효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퀸 시티 클립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클립의 하나로 여겨지지만, 젬처럼 깔끔하지 못하고 기능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젬이 산업 디자이너들의 바람처럼 기능적으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외관과 생산원가와 기능을 형태상으로 적절하게 조화시킨 것이기에 만인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기능적으로 우월한 형태를 갖고 있는 클립이라 해도 젬의 아성을 좀처럼 쉽게 허물지는 못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든 고딕 양식이든 클립의 궁극적인 형태는 1930년대에 이르면 굳게 확립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반세기가 흘렀지만 시장에서의 판도는 사실상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발명가들이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2년만 하더라도 스틸시티 젬을 만들던 기업을 두고 하워드 서프린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제품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한 달에 평균 열 통씩 편지가 온다.” 크기, 빛깔, 모양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보라는 그 모든 권유는 지금에 와서 보면 말짱 헛된 시도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젬은 이미 오래전에 부동의 위치에 올라섰고, 그것이 종이들을 묶는 것보다 훨씬 더 굳건하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로운 스타일의 클립들이 하나둘 선보이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새로운 클립 가운데는 강선에 플라스틱 코팅을 하여 다양한 색상을 낼 수 있게 한 제품이 있다. 새로운 컬러 클립은 플라스틱 피막을 입힌다는 목적말고도 칙칙한 사무실과 메마른 서류에 화사한 기운을 보탠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클립의 일부를 내가 직접 써본 바로는, 적어도 기능적으로는 썩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플라스틱 피막은 금속보다 마찰 계수가 훨씬 높기 때문에 종이에다 끼우려면 마치 고무를 끼울 때처럼 뻑뻑해서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종이가 구겨지기 일쑤였다. 더욱이 플라스틱 피막의 두께를 감안하다보니 강선 자체의 굵기가 훨씬 가늘어져야 했으므로 순수한 금속 클립에 비해 모양이 더 잘 바뀌었다. 이런 클립이 왜 그토록 인기를 모으고 있는지, 기능적인 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노릇이지만, 인공물의 발전 과정에서는 미감과 스타일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오래된 형태는 실패가 따른다는 원칙을 입증하는 예이기도 하다. 새롭고 화사한 모델이 잘 팔리는 것은 낡은 모델들이 사용자들의 시선을 끄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으로만 된 컬러 클립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삼각형이나 화살 모양으로 된 이런 클립들은 강선을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틀로 찍어서 만든다. 플라스틱 클립은 많은 양의 종이를 보관하는 데는 대체로 쓸모가 없으며, 자꾸만 종이를 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화살 모양의 클립은 차츰 사무실에서 애용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제품으로서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리라. 컴퓨터의 데이터가 날아가 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복사기가 잘못 될까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플라스틱 클립은 또 얼마든지 화려한 색상을 낼 수 있고 만드는 데 드는 비용도 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별로 신통치 않은 그 물건이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과거의 안정된 금속 클립의 영역을 침투해들어오는, 기능은 별로지만 색상만큼은 사용자들의 마음을 끄는 이 플라스틱 클립은, 발명가와 기업인이 심각한 기능적 결함을 제거하여 플라스틱 클립 또는 플라스틱 피막을 입힌 클립의 기능을 개선하는 데 성공하지 않고는 시장 점유율을 늘려나가는 데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반드시 젬 류의 클립들에 버금가는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비용이나 미적인 차원에서 갖는 장점이 기능면에서의 불리함을 웬만큼 상쇄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 한다. 클립의 세계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 주자들이 제품으로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경쟁은 말할 수 없이 치열하며, 젬 클립은 굳건한 발판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공물이 그렇듯이 클립의 경우에도, 시장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제품에 도전장을 내밀려면 먼저 그 제품의 결함에 주목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새로운 클립의 발명은, 굽은 강선이나 성형된 플라스틱의 모양에 대해서 그저 머리 속으로 상상한 내용만 들어 있을 뿐 모든 구체적 인공물은 빠져 있는 그런 무정형의 몽환적인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새로운 클립은, 찢기고 구겨진 종이가 난무하고 젬을 무너뜨리려다 실패한 무수한 시도들로 점철된 그런 현실의 어수선한 과거사로부터 등장한다. 새로운 도전자가 좀더 가늘고 제작비도 싸게 먹히면서도 젬처럼 생긴 클립이건, 아니면 젬을 조금 손보아 “완벽”을 기한 것이건, 그것이 만인에게 인정받는 원형을 왕좌에서 몰아내려면 먼저 “새롭게 개선된” 클립이라는 찬사를 들어야 한다. 엔지니어링은 제도화된 발명이며, 디자인에 관여하는 엔지니어는 기존의 것이 최고의 수준으로, 또는 바라는 만큼 기능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매일매일 문제와 씨름하는 발명가이다. 컴퓨터, 다리, 클립의 개선된 디자인이 특허를 따는 데 성공을 거두건, 아니면 이름 없이 스러져가건, 그것은 늘 기술이 발전해나갈 수 있는 가능한 경로를 탐색하려는 시도임에 틀림없다. 작은 물건에 큰 뜻이 숨어 있다 대한 집단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신개발품 많은 기술 평론가들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또는 문단과 문단 사이에서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일상용품의 엄청남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는 충격을 받곤 한다. 버튼식 전화기, 전자계산기, 어려운 단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컴퓨터 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중에서도 복잡한 축에 들어가는데, 전자공학에 문외한인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물건을 유심히 지켜볼 때마다 사실은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올 정도이다. 반면에 핀, 이쑤시개, 클립처럼 기술 수준이 낮은 물건들은 많은 쓰임새와 선의 아름다움으로 곧잘 아낌없는 칭송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소품들은 어떻게 하면 잘 팔 수 있을까를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고는 연구의 주제가 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일 기술과 인공물의 발전을 지배하는 일반 원리가 있다면, 그 원리는 가장 흔해빠진 물건에도, 가장 그럴듯한 물건에도 두루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연구진이 몇 년에 걸쳐서 겨우 개발할 수 있는 그런 거대한 시스템보다는 덜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어떤 물건을 중심으로 하여 기술의 발전 과정을 고찰한다면, 그것이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아닐까? 슈퍼컴퓨터, 마천루, 핵발전소, 우주왕복선의 상상을 뛰어넘는 복잡성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언뜻 간단해보이는 것에서 분명히 복잡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기술적 발전의 공통된 기본 요소들을 잊게 만든다.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데 관여하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한 사람 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차들의 늪 속으로 종적을 감추기 일쑤이며, 최종 개발품은 전문가이지만 익명으로 남아 있는 수천 명의 연구원들을 거느린 거대한 집단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아무개’ 디자이너, ‘`아무개’ 엔지니어라고 지칭되는 법은 결코 없다. 우리가 쓰는 간단한 일상용품의 발전과 디자인을 둘러싼 수많은 소극장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아마추어 배우들도 수많은 소비자와 비교하면 역시 익명으로 남아 있는 셈이지만, 그래도 그 편이 쫓아가기는 훨씬 쉬우리라. 얄궂게도 가장 규모가 크고 익명성이 강한 건물이나 구조물`──`다리, 고층건물, 항공기, 발전소 들`──``은 흔히 사람의 이름을 따온 기업에 의해서 지어지는 수가 많다. 번스 앤 로스, 브라운 앤 루츠, 벡텔을 위시하여 창업자의 이름을 기업명으로 삼은 수많은 건설업체들은 우리의 사회적 공간을 많은 부분 차지하면서 시민적 자부심과 성취감을 안겨주고 있다. 커티스라이트, 맥도널더글러스 같은 항공기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처럼 뛰어난 발명가들의 혁신적인 노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여 오늘날과 같은 우주왕복선과 슈퍼제트기를 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만들어주는 발전소와 송배전망을 제공해준 웨스팅하우스와 에디슨 사가 있다. 오래전에 타계한 기업인의 이름을 떠올리는 포드, 크라이슬러, 메르세데스 벤츠, 롤스로이스 같은 자동차 회사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소중한 물건과 관련된 이름들은 설령 알려져 있다손 치더라도 오리무중에 싸여 있다. 확실히 핀이나 클립에서는 그 제작자를 기념하기 위한 이름판이나 얼굴그림을 찾아볼 수 없다. 클립이 담겨 있는 상자를 유심히 뜯어보면 제조원이 아코 또는 노스팅임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왠지 발명가의 이름처럼, 심지어는 사람의 이름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스태플러(stapler, 우리 나라에서는 호치키스라고도 한다`─`옮긴이)에는 보스티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것은 사람 이름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일상용품들은 발명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는 바가 없지만, 제품명이나 제조업체의 이름에서 우리는 그 물건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대한 단서는 얻어낼 수 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물건의 발전에 대한 심오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을 터이다. 편지 겉봉에서 냉장고 문짝에 이르기까지 척척 달라붙지 않는 곳이 없는 그 작은 노란 쪽지, 이름하여 포스트p 용지의 포장을 보면, “스카치”라는 상표가 붙어 있고 시원스럽게 “3M”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다. 지긋한 연배의 호사가들은 3M이 한때는 미네소타 채광가공회사로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아 그토록 분명한 업종을 가지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할 것 같은 회사에서 대체 어떤 연유로 조그만 접착 용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게다가 미네소타 하면 원래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니라 북유럽 출신들이 모여 살던 곳이 아닌가. 1902년에 미네소타 주 투 하버즈 출신의 기업인 다섯 명이 인근에 묻혀 있는 강옥석을 캐내기 위하여 미네소타 채광가공회사를 설립하였다. 다이아몬드에 견줄 만한 강도를 가진 강옥은 절삭공구를 생산하는 업체에서 연마제로 쓰일 수 있는 무한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써본 결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05년부터 이 신생 기업은 사포 생산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엄청난 시련이 뒤따랐다. 부도 위기를 간신히 넘기기를 몇 차례, 그러나 사포 생산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우선 제품의 품질이 정상급이어야 했다. 1916년에 이 회사의 영업국장이 불량품의 속출로 영업사원들이 골탕을 먹는 일이 없으려면 고른 품질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실험 기관을 갖추어야 한다며 연구소 설립을 주장했다. 연구소가 설립되자 사포 사용자들이 호소한 문제점을 바탕으로 좀더 새롭게 개선된 제품들을 만들기 위한 연구 개발 노력이 활발해졌다. 영업사원의 입장에서는 기업체에 부설된 연구소의 존재 이유가 품질 관리 다음으로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는 신제품 개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엔지니어가 보는 연구소는 영업사원들이 들려주는 제품의 짜증나는 결함과 불량품 때문에 생기는 가슴 철렁한 사고를 처리해야 하는 고충처리방일 수도 있다. 결국 고충을 처리한다는 것은 기존 제품의 문제점을 건드린다는 말이며, 그것은 신제품의 개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랭이 사장 때문에 붙여진 스카치 테이프 사포를 만들 때는 연마재를 바탕 종이에다 붙여야 하는데, 사포의 품질은 모래 알갱이와 종이라는 원재료의 질뿐 아니라 그것들이 얼마나 균일하게 잘 달라붙어 있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래서 사포를 잘 만들려면 종이에 연마재를 입히는 기술부터 제대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무리 좋은 접착제를 썼다고 하더라도 초창기의 사포에 쓰이던 종이는 젖으면 죽죽 찢어지는 바람에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싹 마른 곳이 아니면 사포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192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자동차산업에서는 차체의 칠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사포가 사용되었고 이때 생기는 먼지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방수 사포를 만들 수 있다면 젖은 상태에서도 작업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먼지를 크게 줄일 수 있으므로 엄청난 발전인 셈이었다. 기존 사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미네소타 채광가공회사는 방수 사포를 개발하였다. 젊은 실험기사인 리처드 드루가 세인트폴 자동차 공장으로 신제품을 갖고 가서 시험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드루는 새로운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1925년에는 자동차를 두 가지 색으로 칠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자동차업체와 차체 생산업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기란 이만저만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두번째 색깔을 칠할 때 경계선을 매끄럽고 깨끗하게 처리하려면, 당연히 처음 칠한 부분은 가려야 했다. 이때 주로 신문지나 정육점에서 사용하던 방습지를 차체에 붙여놓았다. 아교를 쓰는 방법도 있었지만 진득진득 달라붙어서 지우는 데 애를 먹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칠도 벗겨지기 일쑤였다. 수술용 접착 테이프도 이따금씩 사용되었지만, 천으로 된 바탕면이 방금 뿌려진 페인트에서 솔벤트 성분을 흡수하여, 페인트를 보호하려던 것이 오히려 페인트에 달라붙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의 차폐 방식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 사포 작업을 하고 있던 드루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들이 칠 작업을 하다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엿들었다. 통신교육학교 과정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한 이 젊은 기술자는 자기가 그 문제를 한번 해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대부분의 설계도 마찬가지지만, 드루의 목표도 일단은 부정적인 용어로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잘 달라붙지 않는 테이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렇게 하면 둥글게 말린 상태에서 테이프를 쉽사리 척척 떼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먼저 칠한 차체에서도 쉽게 떼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를 짚어낸다는 것과 접착제와 종이의 정확한 배합을 알아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이야기이다. 전자의 경우는 공장에서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착상을 포착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기름과 합성수지를 비롯하여 이것들을 부착시킬 적당한 종이를 물색하고 실험하는 데 무려 2년이라는 세월을 잡아먹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드루는 다른 실험에서 쓰다 남은 주름종이로 시도해본 결과, 그 주름진 표면이 바탕지로서는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회사의 선임연구원이 신제품 샘플을 가지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공장으로 갔다. 그는 드루가 만든 차단 테이프의 트럭 석 대분 주문을 받아가지고 미네소타로 돌아왔다. 이 회사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테이프에 스카치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원래 폭이 5센티미터 정도로 만들어졌던 첫 테이프에는 접착제가 양쪽 가장자리에만 발라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뿐 아니라 차단 용도로 사용하는 데는 오히려 그 편이 나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테이프의 한쪽 가장자리는 종이를 고정시키고, 다른쪽 가장자리는 차체에 달라붙으며, 가운데 부분은 접착제가 칠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접착성이 약하다 보니 무거운 종이가 차체에서 떨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칠 작업을 하던 한 노동자가 열이 뻗쳐서 영업사원한테 이렇게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신네 노랭이 스카치(스코틀랜드 사람) 사장한테 당장 이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접착제를 더 바르라고 하시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출처가 의심스러운 이야기라고 깎아내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일화가 오늘날 팔리고 있는 압력에 민감한 접착 테이프의 “이름을 짓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카치 테이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제조업체가 노랭이처럼 접착제를 적게 썼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이 테이프를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경제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셀로판은 1920년대 말에 등장한 또 하나의 신상품이었다. 투명한데다 방수성을 갖고 있어 빵에서부터 껌에 이르기까지 포장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차단 테이프를 셀로판으로 포장하는 방안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고 그쪽으로 실험도 하고 있었다. 한편 드루는 또 다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방수가 안 돼서 습기가 아주 많은 곳에서는 쓸 수 없다는 자기가 개발한 테이프의 결점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는 셀로판에다 접착제를 입히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확실한 방수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해볼 만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주름종이에 잘 달라붙던 접착제를 셀로판에 붙인다는 것은 말은 쉬워도 실제로 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리고 기존의 기계를 사용하여 새로운 재료로 신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면 보통 수많은 실험과 준비가 필요한 터였다. 스카치 셀로판 테이프의 경우, 방수로 만들려던 드루의 첫 시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점착성, 응집성, 신축성, 탄력성간의 적절한 균형이 모자랐다. 더욱이 이것은 고온과 저온, 다습과 저습 상황에서 두루 사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성격을 파악했다는 소득은 있었다. 일년의 연구 끝에 드루는 얼마간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반질거리는 셀로판 테이프는 몇 년간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했다. 그것은 물건을 수선하거나 접착하는 온갖 일에 두루 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노랗게 변하고, 오래되면 말려 올라가거나 떨어져나가며, 저번에 끊어 썼던 끝 부분을 찾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고, 테이프를 끊을 때 비스듬히 찢겨나가곤 하는 문제점들이 속출했지만, 사용자들은 테이프란 으레 그런 것이려니 여겼다. 무엇보다 더 좋은 테이프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루 같은 발명가와 수선공은 결함을 볼 때마다 그것을 새로운 개선을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기술자나 그를 고용한 사장은 경쟁업체들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카치 테이프를 둥근 타래에서 떼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톱니 모양으로 되어 있어 테이프 조각을 쉽게 끊을 수 있고, 끊겨 나간 뒤에도 테이프의 끝 부분은 톱니에 달라붙어 있어 다음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절단장치를 붙였다(이것은 상품을 적절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고도의 전문화된 하부구조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테이프에 변화가 일어나 새롭게 개선된 제품들을 접하면서 사용자들은 도대체 예전의 제품을 어떻게 참고 사용했었는지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어 했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스카치 매직 투명 테이프에 대한 3M측의 자랑은 셀로판 테이프에 대한 고발로도 읽을 수 있으리라. “이것은 매끄럽게 풀려나온다. 위에다 글씨를 쓸 수도 있다. 복사를 해도 테이프 밑의 글씨가 그대로 나온다.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이전의 테이프와는 달리 시간이 흘러도 변색되지 않고 접착제가 묻어나오지도 않는다.” “이전의 테이프”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 슬쩍 비추는 이런 결함들은 예전의 스카치 테이프가 그야말로 몹쓸 물건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제법 쓸 만한 물건이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술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높아지는 법이다. 디나 척척 달라붙는 노란 종이 좋은 사포를 만드는 데서 출발한 기업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자기가 만들어낼 그 엄청난 물건들을 미리 예견했을 리는 없겠지만, 이런저런 종류의 접착제를 종이나 그 밖의 재질 위에 바르는 경험이 하나둘 쌓이면서, 그리고 그런 기술의 새로운 응용물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이 높아지면서, 미네소타 채광가공회사는 결국 수만 종에 이르는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예전의 이름은 이 거대한 기업의 다종다양한 생산품을 설명하기에 더이상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이 회사는 차츰 머릿글자만 따서 “3M”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주들을 위한 최근의 연말 결산 보고서를 보아도 회사의 정식 이름은 회계란에만 등장한다. 3M이 그런 다양한 품목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소사장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독특한 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이것의 기본 발상은 대기업에 근무하는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마치 독립된 사장처럼 처신하게 하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트 프라이라는 화학 엔지니어였다. 그는 1974년에 3M의 상품개발부에서 근무했는데, 일요일에는 교회 성가대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프라이는 찬송집에다 종이 쪽지를 끼워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야 합창을 하기로 되어 있는 두 번의 예배 시간 동안에, 불러야 할 노래를 그때그때 재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첫 예배 시간에는 그 방법이 그런대로 먹혀들었지만 다음 예배 때는 툭하면 종이 쪽지가 갈피 사이로 빠져나가곤 했다. 마음을 푹놓고 있다가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자연히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종이 쪽지는 오래전부터 서표로 사용되어왔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유명한 동판화에도 서표가 뚜렷이 보인다. 그러나 이 동판화가 만들어졌던 1526년에서 프라이가 기대한 만큼 제구실도 못하는 서표의 무능함에 눈떴던 그때까지 4세기 반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에 틀림없이 제자리에서 벗어난 서표의 수는 부지기수로 있었으리라. 프라이는 이상한 접착제를 떠올렸다. 그것은 강하면서도 쉽게 떨어지는 “분리성” 물질로, 3M에 근무하는 또 한 명의 연구자였던 스펜서 실버가 아주 강력하고 점착성이 좋은 접착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몇 년 전에 우연히 발견한 성분이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었지만 실버는 이 기이한 성질을 갖는 접착제가 상품적인 가치를 지닐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프라이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 접착제를 어디에 쓸지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이 특수한 물질을 만드는 방법이 적힌 종이는 서류함 한 구석에 처박아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직장에 출근하던 프라이의 머리에 책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쉽게 떼어낼 수 있도록 약간의 점착성을 갖는 물질로 서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책에 접착제가 일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프라이의 술회에 따르면 “내가 처음으로 접착지를 붙였던 찬송집의 일부 페이지들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러나 3M을 비롯하여 한발 앞선 기업들은 소속 엔지니어들로 하여금 근무 시간의 일부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연구 주제에 쏟아부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이것을 “몰래바이트”라고 불렀다`──`있었으므로, 프라이는 필요한 기계와 재료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고, “임시적으로 항구적인” 서표나 메모지로 사용할 수 있는 끈끈하기는 하지만 너무 끈끈하지는 않은 종이 쪽지에 관한 자기의 생각을 가다듬고 실험을 하는 데 거의 일년 반이라는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프라이는 서표가 책에 붙기를 원했지만 서표의 튀어나온 부분들이 자기네끼리 엉겨붙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므로, 점착성은 종이의 한쪽 끝에만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메모지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바탕에 온통 접착제가 발라져 있다면 마치 상표처럼 떼는 데 애를 먹어야 할 것이다.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서표를 완성한 프라이는 샘플을 들고 회사의 마케팅 부서로 찾아갔다. “그들이 그 생각을 상업적으로 가능성이 있고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회사의 자금과 시간을 아낌없이 그 제품을 개발하는 데 쏟아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측은 일반 서표에 비하여 비싼 값에 판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물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차라리 서표보다는 메모지로서의 기능이 상품으로서 더 큰 잠재력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어쨌든 프라이는 자기의 발명품에 헌신하여 마침내 3M의 사무용품 개발부로 하여금 “요구가 확인되지 않은” 제품의 시장성을 확인해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처음에는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샘플이 뿌려진 곳에서는 소비자들이 걸려들었다. 이 작은 접착 종이의 필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일단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손에 이것이 들어가자 별의별 용도가 다 발견되기 시작했고, 갑자기 그들은 이 물건 없이는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포스트p 메모지는 1980년대 중반까지 널리 보급되어 지금은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세로로도 글을 쓰는 일본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서 가늘고 긴 모양으로도 생산되었다. 메모지나 서표로 재활용되던 파지의 양을 줄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포스트p 용지는 보기 흉하고 흠집을 남기는 테이프나 스태플러를 쓰지 않고도 공공 장소에 메모를 남기거나 공지 사항을 손쉽게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러 해 전에 내가 재직하던 대학의 학장을 만나서 함께 교정을 가로질러 기계공학동으로 걸어갈 때 건물 입구에 가면 학장은 늘 그가 마지막으로 나온 다음에 문 앞에 테이프나 압정으로 붙여져 있던, 모임이나 파티, 고양이 새끼 분양을 알리는 각종 공지문을 떼어내곤 하였다. 공지문을 붙이는 데는 요긴하지만 건물 입구를 영 볼품없이 만드는 테이프를 학장은 아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붙인 지 여러 날이 되는 테이프는 떼어내는 데 진짜 애를 먹게 되고 새로 칠한 벽을 망쳐놓아서 다시 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학장이 나에게 하소연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게시문을 붙이는 데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임으로써 건물 정문에 가해지는 손상을 우려했을 따름이었다. 그분은 포스트p이 나왔을 때 속으로 얼마나 반가웠을까. 포스트p은 기존의 인공물이 사용하기에 영 불편하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새로운 인공물이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형태는 기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물건의 형태는 우리가 기대한 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른 물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리에 붙어 있지 못하고 빠지는 서표이든, 원래는 멀쩡하던 표면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번번이 실패하는 테이프이든, 그런 실패에 대한 깨달음은 인공물의 진정한 발전으로 이어진다. 서표의 경우에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데 무려 몇 세기나 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공 세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그런 원리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엇이건 쉽게 빠져나가는 바늘 정치에서 학문에 이르기까지 글로 된 모든 자료는 원래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두루마리는 라틴 어로 ‘볼루멘’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둘둘 말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었다. 볼루멘의 길이는 파피루스 한 장을 그 끝을 표시하는 막대까지 얼마만큼 말 수 있는가에 따라 사실상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파피루스 지는 속을 파낸 파피루스 껍질을 엇갈리게 포갠 다음 방망이로 두드리거나 눌러서 압착시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종이들을 이번에는 다시 끝과 끝을 이어서 둘둘 말 수 있는 길고 좁다란 연속된 종이로 만들었다. 파피루스를 접으면 쉽게 부서졌으므로 실용적인 이유에서라도 접지 않고 둘둘 말아서 써야 했다. 두루마리에 적힌 글씨가 설령 잘 남아 있다고 해도, 긴 원고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읽으려면 두루마리를 펼쳤다 접었다 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루마리의 이러한 불편을 없애주는 한편, 필기 대상이 되는 종이를 길게 이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한 가지 방법은 종이를 균일한 낱장들로 만들거나 접은 다음 그것들의 한쪽 가장자리를 단단히 동여매는 것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양이나 염소, 송아지의 가죽을 벗겨 만든 양피지나 송아지피지는 아무리 접어도 부숴지지 않았으므로 더이상 두루마리에만 써서 보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종이와 인쇄기가 등장하면서 책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접힌 부분을 실과 바늘로 꿰맴으로써 제책 기술은 점차 효율적으로 되어갔다. 바늘 역시 가장 오래된 인공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늘의 쓰임새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가끔은 바늘을 써서 더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질긴 재료를 바늘로 뚫다보면 오히려 손가락을 찔리곤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무가 등장했다. 비스듬히 뚫린 구멍으로 실을 꿰느라 애를 먹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강철 바늘은 구세주였다. 바늘은 우리가 관련성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20세기의 수많은 다른 인공물들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늘은 옷단으로부터 낙타 가죽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이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 핀과 다른 점은 머리가 없고 대신 구멍이 뚫려 있다는 사실이다. 바늘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은 실뿐이다. 바늘과 실은 우리 선조들이 입고 다니던 옷을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인쇄된 종이들을 접지로, 그것을 다시 책으로 묶어주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독자의 눈에 비록 실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늘이 지나간 흔적은 책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옛날 책등이 대부분 둥그렇게 되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같은 접지라 하여도 실이 지나간 부분은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제본된 책등이 다른 가장자리들에 비해 훨씬 두꺼워지는 것을 막고, 책 모양이 쐐기처럼 불균형하게 되어 책을 쌓아두거나 꽂아둘 때 애를 먹는 일이 없게 하려면, 실들이 같은 자리에 오도록 겹쳐 놓여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하려면 천상 제본을 하기 전에 등 부분이 둥그런 부채꼴 모양을 이루도록 접지들을 포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책의 앞표지와 뒷표지를 이루는 판자는 책등의 가장 두꺼운 부분보다 더 두꺼웠으며, 앞뒤 표지를 이어주는 일종의 돌쩌귀에 해당하는 가죽은 내용물의 둥그스름한 모양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었다. 그 전형적인 책의 모습이 뒤러의 ‘에라스무스의 초상화’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책의 앞부분이 책등과 어울리는 곡선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제본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종이들의 위치를 조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책들도 얼핏 보면 책등이 둥글게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책 그 자체는 사각형이며, 앞부분이나 뒷부분이 어느 한쪽이 튀어나오거나 들어감이 없이 가지런하다. 책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접지들을 책으로 묶는 재래의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방법들에 비해 비경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책은 “무선철” 방식으로 제본된다. 이것은 예전처럼 종이를 접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로 꿰지는 않고 접착제로 붙인다는 뜻이다. 접지들은 차곡차곡 쌓여져서 상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잘라진다. 실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접은 종이를 쌓아놓아도 등 부분이 부풀어오르지 않으며, 따라서 책등을 둥글게 할 필요도 없다. 그 대신 접착제가 골고루 잘 묻을 수 있도록 등 부분을 거칠게 깎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값싼 문고판에만 사용되었지만 작가나 독자, 애서가에게는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될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주 고급스러운 양장본까지 이런 방법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무선철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제본된 책은 한번 읽은 다음에는 모양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서가는, 둥글고 깔끔한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던 예전의 서가와는 달리, 책등의 표면이 들쭉날쭉하고 주름이 간 그런 책들로 채워져 있다. 따지고 보면 한번 읽힌 무선철 책은 형태가 얼마나 덧없는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서글픈 예인지도 모른다. 책을 만드는 사람의 근시안적 시각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옛날의 책 모양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적이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만 탁월한 스태플러 등장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잡지들은 철사로 꿰어져 제본되었다. 철사는 바늘과 실의 역할을 동시에 하였다. 철사로 한번 철하는 것이 실로 한 바늘 꿰매는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안정감도 높았다. 결국 소책자나 잡지는 하나로 접혀진 뒤 “중철”이라는 방식으로 단 한 번에 제본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인쇄 및 제본업계에서 중철법은 널리 쓰였다. 다양한 굵기의 책자에 맞추어 작업을 하다보면 기계 조작이 성가셨고 시간도 적잖이 들었지만, 출판량이 클 경우에는 그런 불리함을 어느 정도 감수해도 손해는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작업량이 적을 때는 기계 조작에 들어가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약간의 나사 조절로 필요한 작업 준비를 끝낼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한다면 소책자의 소량 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듯싶었다. 1896년에 보스턴 근교의 알링턴에 살고 있던 토머스 브릭스라는 발명가가 그런 기계를 만들었다. 그는 회사명을 보스턴 와이어 스티처 사라고 정하였다. 그것은 그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이름이기도 했다. 두 채의 주택에서 출발한 회사는 나날이 번창하여 1904년에는 로드 아일랜드 주의 이스트 그리니치에 커다란 공장을 새로 짓기도 했다. 브릭스가 처음 만든 기계는 철하려는 대상과 평행을 이루도록 철사를 헤드로 물어들이고 그것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U자형으로 구부려서 종이를 찌른 다음 조이는 작업을 차례차례 해냈다. 그러나 철사를 물어들이는 헤드의 크기 때문에 한번 작업에서 적어도 30센티미터 이상의 거리는 되야 두 번의 철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얇은 팸플릿을 제본하려면 최소한 두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스트 그리니치에서 브릭스는 철사를 대상과 수직되는 방향으로 물어들인 다음 일정한 크기로 자른 뒤 다시 구부려서 제본하는 기계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하면 불과 5센티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개의 철작업을 한 번에 해치울 수 있었고, 따라서 제본 속도가 이전에 비해 적어도 두 배는 빨라졌다. 철사제본기가 복잡하고 값비쌀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철사를 자르고, 돌리고, 구부리는 과정이 모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본되어야 할 대상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낱낱의 철사 조각으로 작업을 하는 기계가 개발되었다. 이 낱낱의 철사 조각을 스태플이라고 불렀다. U자 모양을 한 이 철사 조각을 나무로 된 문이나 벽, 기둥에 박아두면 고리나 걸쇠 따위를 고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초보적 형태의 스태플러는 이미 1877년에 등장하지만 처음에는 스태플을 일일이 손으로 물려주어야 했으므로 한없이 굼뜬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94년에 낱개의 스태플을 가지런히 줄지어 담을 수 있게 보급 공간이 달린 스태플러가 선보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용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박아넣어야 할 자리 위로 스태플을 밀어서 올려놓아야 했는데 이것이 무척 까다롭고 복잡했다. 걸핏하면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이러한 결점은 나중에 사용할 때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도록 스태플들을 종이로 감싸는 방법이 등장하면서 해결되었다. 스태플러는 한 줄 당길 때마다 스태플 하나를 척척 잘라낼 수 있었다. 밀고 조이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고 하기 쉬웠다. 스태플을 종이들 위에 대고 힘을 줘서 뚫은 다음에 맞은편의 모루에 대고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스태플러의 가격은 점차 낮아졌고 소규모 인쇄소나 제본소에서도 부담없이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브릭스가 처음에 만든 팸플릿과 잡지의 제본을 위한 스태플러는 작업실 한 구석을 차지하는 덩치가 큰 기계였으며 발로 조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서류 몇 장을 철할 때는 사실 그런 엄청난 기계는 부담스러웠으므로, 그런 일에는 여전히 핀이나 클립을 사용하였다. 보스턴 와이어 스티처 사는 가벼운 스태플러를 개발할 경우 새로운 사무용품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다는 데 착안하였다. 1914년에 적정한 가격으로 최초의 모델이 시중에 선보였다. 그러나 이 스태플러는 스태플을 낱개로 쓰거나 종이로 감싸도록 되어 있어 아직은 구조가 복잡했고 따라서 고장도 잘 나는 편이었다. 사무효율화 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23년에야 비로소 간편한 탁상용 스태플러가 개발되어 “서로 관련된 종이들을 묶어두는 데 스태플러를 사용하는 최초의 붐이 조성되었다.” 얼마 안 가서 회사측은 스태플들에 아교를 발라 긴 띠로 만들었다. 덕분에 스태플을 낱개로 쓸 때 사용자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한꺼번에 사라졌으며, 이것은 특허출원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사들도 재빨리 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였다. 스태플러의 판매 비중이 보스턴 와이어 스티처 사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점점 커지면서 회사측은 좀더 뚜렷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상품의 이름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본사도 보스턴 이외의 지역으로 옮겨간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긴 회사 이름을 줄여서 그냥 보스턴 스티처라고 부르고 있던 터였으므로 이것을 다시 줄여서 보스티치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상표로 등록되어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모든 스태플러에 찍혀 나왔다. 그 상표가 하도 유명해져서 1948년에는 아예 회사 이름을 보스티치로 바꾸었다. 1930년까지 스태플러는 작은 사무용기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외관을 매끄럽게 손질한 것말고는 형태면에서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모델들은 스태플을 공급하는 좀더 효율적인 장치를 붙이고 나와, 이제는 납작못까지 박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에 고리를 달거나 울타리 기둥에 철망을 거는 데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U자형의 납작못에서 적어도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스태플러는 게시판에나 복도, 문 등에 공고사항이나 통지문을 부착하는 도구로도 쓰이게 되었다(비록 그 과정에서 통지문을 붙이는 자리에 손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한 회사에서 만들어낸 파스너들의 수백 가지 변종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회사의 역사는 “새로운 모델들은, 때로는 그전까지 못 하던 일을 해내기 위하여, 때로는 그전까지 해오고 있던 일을 좀더 빠르게 혹은 잘해내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개발하고 있다”는 원칙을 잘 보여준다. 스태플러의 형태가 변화하고 모든 인공물이 발전하는 것은 이처럼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안전핀에서 지퍼까지 구리 단추의 수수께끼 추운 겨울날이면 나는 길다란 목도리를 목에 두르느라 애를 먹곤 한다. 목도리는 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고 바람이 매워질수록 걸음은 자연히 빨라지기 마련이어서 팔랑거리는 목도리의 한쪽 끝을 자꾸만 어깨 너머로 걷어넘겨야 하는 것이다. 내 몸의 앞과 뒤에 드리워지는 목도리의 길이에 변화를 주면서 어떨 때 목도리가 가장 덜 흘러내리는지를 실험해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목도리로 목을 몇 번이나 감았는지, 목도리 끝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따라서도 결과는 달라졌다. 바람이 가장 매섭게 휘몰아치는 날이면 극심한 추위 속에서 자꾸 목도리에 손을 가져가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아예 목도리를 질끈 동여매었다. 목도리가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는 바람에 별의별 실험을 다 해보았던 셈이다. 겨울철에 그렇게 하고 길을 걷다보면, 우리의 아득한 선조들도 혹심한 자연의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 가죽을 몸에 두르면서 나처럼 애를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물론 동물 가죽을 손이나 팔로 단단히 여밀 수 없지야 않았겠지만, 마치 내가 목도리를 누르기 위하여 한 손을 어깨 위에 내내 얹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나 같은 사람이야 남은 한 손으로 책가방을 들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냥감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사냥할 태세를 갖추어야 했으며, 또 성난 짐승에게 쫓길 때에는 번개처럼 내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동물 가죽은 워낙 부피가 컸으므로 몸에 두르고 다니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히 옷을 잘 여밀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물고기뼈, 뾰족한 나뭇조각, 동물뼈, 뿔은 우리 선조들이 살던 시절에는 어디를 가도 사방에 널려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뾰족한 물체로 두 개의 겹쳐 놓인 털가죽이나 껍질을 처음으로 뚫어본 행위는 위대한 발명이었다. 그런 영감을 받았던 아득한 원시시대의 천재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어디서부터인가, 끝이 뾰족한 뿔이나 뼈가 옷을 여미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일자 핀으로 옷을 여밀 때의 한 가지 중요한 단점은, 여미는 옷의 재질이 무엇이건간에 옷을 입거나 벗는 과정에서 핀이 떨어지거나 없어질 수 있고, 걸어가거나 달려갈 때 차츰 느슨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핀을 날마다 꽂았다 빼었다 하면 옷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고, 옷은 금세 못 쓰게 된다. 동물 가죽을 대신하여 실을 자아내 만든 옷감이 등장했어도, 핀의 이런 단점은 개선되지 않았다. 만일 쉽게 떨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옷에 구멍을 잘 내지 않는 핀이 등장한다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핀을 옷에 단단히 박아 쉽사리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 핀을 거듭 꽂다보면 자연히 그곳이 닳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한 가지 대안으로 나온 것이 개구리 단추(끈 등을 꽃 모양으로 꼬아 만든 가슴 장식의 일종으로 중국 옷에 많이 쓰인다`─`옮긴이)이다. 올챙이가 자라서 개구리가 되는 과정이 신비로운 것처럼 이 장치가 어떤 발전 경로를 거쳐서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지만, 어쨌든 이것은 부착된 핀과 그 핀을 자유롭게 찔러 넣었다가 뺄 수 있는 촘촘한 고정점이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 고대에는 금속 브로치와 버클도 옷을 여미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옷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자 핀보다 컸으므로 분실될 가능성은 그만큼 적었다. 브로치와 버클로 고정시키면 활발히 움직여도 옷이 느슨해지지는 않았다. 안전핀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로마 인이 처음 발명하였지만, 19세기 중반에 재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1842년에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던 토머스 우드워드는 “숄과 기저귀 같은 것을 단단히 묶어주는 방패가 달린 핀의 제작 방법”을 특허로 출원하였다. 뾰족한 핀이 오목하게 파인 금속 방패에 연결되어 있는 그의 발명품은 오늘날의 안전핀과 닮은 구석이 많다. 우드워드의 특허에 따르면, 그 방패 핀은 방패가 없는 핀에 비해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옷을 입은 사람이 아무리 움직여도 빠지지 않고…… 어떤 사고가 생기더라도 핀의 침이 사람을 찌르거나 긁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핀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지 않았으므로 여미는 옷이 두툼해야 그 두께에 대한 반발력으로 핀을 단단히 방패에 끼울 수 있었다. 그런 결함을 제거한 것이 뉴욕의 월터 헌트가 발명했으며, 1849년에 특허를 따낸 “옷핀”이다. 옷핀은 “강선을 스프링으로 만든…… 걸출한 물건이었다. 핀의 침을 고리에 걸면 스프링 작용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되어 있었다.” 내가 본 각종 특허의 마이크로 필름 가운데 헌트의 안전핀 특허처럼 닳고 닳은 문서는 없었다. 원문서의 가장자리가 헤지고 떨어져나갈 정도로 수없이 복사되었다는 것은 이 백만불짜리 아이디어에 쏠린 특허심사관, 조사관, 발명가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헌트가 새로운 안전핀을 발명하기까지 얽혀 있는 뒷이야기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헌트는 대단히 많은 발명을 하였다. 연발 소총과 재봉틀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 사람도 다름아닌 헌트였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재봉틀을 만든 사람은 헌트였지만 그는 특허를 내지 않았다.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트는 여타의 수많은 물건에 대해서는 특허를 냈고, 그렇게 하려면 자연히 설계도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헌트는 자신의 제도공에게 빚을 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빚을 탕감받고 4백 달러를 지급받는 대신, 낡은 강선으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의 권리를 제도공에게 넘겨주기로 했던 것이다. 안전핀은 그가 세 시간 동안의 궁리 끝에 고안한 발명품이었다. 그 특허에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와는 상관없이, 발명가는 자신이 기존의 걸쇠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극복하였다고 확신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안전핀이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그 어떤 걸쇠보다도 안전하고 튼튼하므로 부러지거나 빠질 염려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스스로가 탄력성을 갖고 있어서 “휘거나…… 손가락에 상처를 입힐 염려도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전의 물건이 갖고 있던 결함을 적잖이 제거해주었다. 갑에 넣어 다니는 단추걸이 수메르 인이 처음에 만든 것이건, 또는 그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이건, 안전핀이라든지 그와 비슷한 장치들은 중세에 유행했던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여미는 데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몸에 꽉 끼는 옷은 후크와 고리, 그리고 끈 같은 것들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안심하고 입을 수 있었다. 후크는 쉽게 여밀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옷에 달기에는 큰 편이었고, 후크에 걸려 간혹 옷이 찢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묶는 끈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고 옷을 찢지도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제대로 묶으려면 시간이 꽤 걸렸다. 단추와 단춧구멍은 이전의 여미개들이 갖고 있었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획기적인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로마 시대에도 이미 단추는 있었다. 그때는 단추를 옷 한쪽 편의 가장자리에 바느질로 단 작은 고리에 끼워넣었을 뿐이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단춧구멍이 처음 나타난 것은 13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단추와 고리만으로는, 가령 날씨가 아주 추울 때 옷을 단단히 여미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또는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섰을 때 시원치 않은 고리가 이따금 툭툭 끊어지곤 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단춧구멍이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최초의 단춧구멍은, 중요한 자리에서 고리가 끊어졌을 때 임기응변으로 칼이나 가위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춧구멍을 보강하지 않으면 사용이 거듭될수록 구멍은 점점 넓어지고 급기야는 단추가 헐겁게 빠져나오는 사태가 빚어진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구멍 주변의 시침질이 그런 보강의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후크에 비해 옷에 손상을 입히는 경우가 줄어든다는 장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우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그래도 유럽에서는 옷에 주렁주렁 단추를 매다는 것이 14세기와 15세기에 유행했다. 그 당시 지체 높은 귀족과 귀부인이 옷을 입는 방식은 크게 차이가 났는데, 오늘날 남자 옷과 여자 옷에 단추 달린 위치가 다른 것은 그런 관습의 유산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더 많이 쓴다고 볼 때, 옷을 입는 남자는 모르긴 몰라도 오른손을 이용하여 단춧구멍에다 단추를 끼우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체 높은 귀부인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가며 옷을 입었다. 하녀는 귀부인과 마주 서서 후크나 단추를 채웠을 것이다. 마주 선 하녀가 오른손으로 편하게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단추가 불가피하게 반대편으로 옮겨져야 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옷을 입히기가 영 불편했을 것이다. 방향의 유래야 어찌되었건, 일반적으로 옷에 달린 단추는 비교적 빨리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단추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몸에 꼭 달라붙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추를 촘촘하게 박아넣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발의 경우는 특히 단추가 중요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단추를 작은 구멍에 손가락으로 일일이 끼우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단추걸이`──``갈고리 모양의 작은 금속`──``였다. 단추걸이는 단춧구멍을 통하여 단추를 걸었다가 다시 단춧구멍으로 당겨들이는 도구였다. 손에 익으면 단추걸이로 단추들을 빨리 채울 수 있었다. 구두 끈에 비해서는 분명히 진일보한 방법이었다(19세기에 발명된 똑딱단추 덕분에 단추걸이 같은 특별한 도구의 도움 없이도 한결 빠르게 단추를 채우고 끄를 수 있게 되었지만, 똑딱단추는 일반 단추나 끈처럼 튼튼하지 못했고, 따라서 구두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똑딱단추는 많이 사용하면 금세 닳아버렸다). 19세기에 유행한 단추 달린 장화는 보기에 멋이 있었을 뿐 아니라 흙먼지와 진창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말똥이 널려 있는 흙길을 걸어가는 데 더없이 유용하였다. 그러나 이런 신발의 가장 큰 결함은 단추를 채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단추걸이를 놀리는 솜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스무 개가 넘는 단추를 일일이 구멍에다 채운 다음 단추걸이를 교묘하게 비틀어서 다시 새 단추를 걸어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데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다. 겨우 신발 한 짝을 신는 데 그런 땀과 정성을 들여야 했다. 아주 특수한 용도를 갖는 이 단추걸이의 디자인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손잡이의 다양한 모양은 없어서는 안 될 이 유익한 도구가 귀부인의 옷을 입히는 사람에게는 식탁 위의 포크처럼 아주 흔하면서도 개성이 반영되는 일상용품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낮에 신발의 단추를 끌러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려면 단추걸이를 늘 가지고 다녀야 했고, 자연히 지갑에 넣고 다닐 수 있게끔 다양한 디자인의 단추걸이가 나왔다. 구두의 단추를 채우는 것은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특히 창조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에게는 꼭 풀어야 할 숙제로 떠올랐다. 구두를 조일 수 있는 최상의 장치는 별다른 수고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채웠다 풀 수 있는 그런 것이라야 했다. 구두를 죄는 기존의 도구가 갖고 있는 결함에 대한 반응으로 그런 장치가 발명된 것처럼, 어떤 발명품이나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조금씩 개선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완벽한 물건이 되어 나오게 된다. 거기에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엄청난 연구비를 대준 후원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지퍼의 꼴을 제대로 갖춘 물건은 재봉틀을 발명한 엘리어스 하우에 의해 1851년에 특허가 취득되었다. 그러나 “갈빗대를 따라 흐르는 또는 미끄러지는 연결끈에 의해 이어진 일련의 걸쇠”로 이루어지는 하우의 “자동연속 의상봉합장치”는 상품화되지 못했고 거의 반세기 가까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지퍼는 1890년대에 들어서야 생산적인 발전 단계에 접어들었다. 발명가를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일상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구두를 조일 때 불편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지퍼를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정작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단추가 채워지면 발은 구두 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십 개의 단추를 다시 끌러야 했는데, 아무리 단추걸이로 풀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간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하나의 고리에 후크를 걸 때 그 속도를 향상시키는 데 한계가 있듯이, 단추 채우는 과정도 어느 일정한 한계에 다다르면 더이상 빠르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나하나의 후크를 고리에 거는 일이나 단추를 그것과 짝을 이루는 단춧구멍에다 집어넣는 일이나, 둘 다 손을 수평으로 움직여 틈을 없애면서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기만 하세요! 봉합선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 이끔쇠의 단일한 움직임을 통해 자동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끔 일련의 걸쇠를 나란히 배열한다는 착상을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미국 중서부 출신의 엔지니어 휘트컴 저드슨이었다. 저드슨은 한때는 일년에 두 개꼴로 특허를 따낼 정도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는데, 대개는 엔진과 변속장치에 관한 발명이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동차의 속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저드슨은 자신의 미끄럼 장치를 이용하면 한 번의 빠른 움직임으로 장화를 재빨리 조였다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초창기의 지퍼를 위한 저드슨의 특허 설계도를 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이끔쇠에 의하여 당겨져서 맞물리는 강철 후크들이 나타난다. 1893년의 두번째 특허에서는 디자인이 약간 달라지는데, 여기서는 “구두 등을 위한 걸쇠식 닫개와 열개 부분의 새롭고 유용한 개선점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퍼”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30년 뒤의 일이다. 아무리 참신한 이름이 미리 지어졌다손 치더라도 발명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890년대 당시에도 발명가가 자신의 착상을 구체화하여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자본이 수중에 없는 한 특허는 휴지쪼가리나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 저드슨은 그 전에 서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루이스 워커라는 젊은 법률가를 알고 있었다. 워커는 압축 공기로 움직이는 수송 기차를 만들자는 저드슨의 생각에 관심을 나타낸 바 있었다. 워커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은행을 경영하는 그의 처남도 틀림없이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처남의 집안은 1859년에 집 뒷마당에서 원유가 발견되면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잘만 하면 원유와 석탄을 운송하는 데 그 기차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후원금 덕분에 저드슨은 워싱턴과 뉴욕 시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철로 부설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기가 점차 널리 쓰이면서 저드슨의 방식은 설 땅을 잃었고, 워커의 처남은 경제적으로 곤경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워커는 아버지에게서 얻은 돈으로 저드슨의 좀더 가능성 있는 새로운 도구에 관심을 보였다. 저드슨이 처음으로 자신의 발명품을 선보인 것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장화에다 시제품을 달았다. 워커는 그것을 보자마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읽었다. 그는 자기 장화에도 그 물건을 달아본 뒤, 1894년에 저드슨, 그리고 압축공기 기차 사업에서 알게 된 또 한 명의 동업자와 함께 유니버설 파스너 사를 세웠다. 저드슨은 연구를 계속하여 1896년에는 더욱 발전된 모델을 개발하여 특허까지 따냈다. 그러나 아직은 덩치가 너무 커서 구두 제조업체들은 시들한 반응을 나타낼 뿐이었다. 저드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우편 행낭에도 달아보았지만, 정부는 1897년이 끝날 때까지 그것이 달린 우편 행낭을 고작 열두 개 주문하는 데 그쳤다. 새로운 응용 분야를 다각도로 모색하던 끝에 각반에도 달아보았다. 주 방위군에 오래 복무하였으므로 대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워커는 그 물건에 아주 흡족해했다. 전부터 군인 제복을 좀더 산뜻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었기 때문이었다. 자금을 대는 동업자들이 여미개의 새로운 응용 분야를 개척하여 수지 타산을 맞출 궁리에 여념이 없는 동안에도, 발명가 저드슨은 “세부 결함들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새로운 여미개로 제대로 돈을 벌어들이려면 대량 생산을 할 필요가 있었다. 가령 여미개를 코르셋에 이용하려면 양 끝이 벌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저드슨은 시작 부분을 새롭게 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래의 설계에서는 양 끝이 벌어지지 않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낙심한 워커 대령은 한때 “저드슨처럼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것은 끝없이 발명만 하고 있자는 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저드슨뿐 아니라 워커 자신도 새로운 분야에 응용하면 할수록 기존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좀더 명확히 부각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불행한 것은 발명가가 점점 원대한 문제와 씨름을 하면 할수록 연구가 끝날 전망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저드슨이 일을 벌일 때마다 돈이 들어갔다. 해결되는 문제보다는 새롭게 부각되는 문제점이 더 많았다.” 1901년에 저드슨은 새로운 발명품을 선보였다. 그것은 “일련의 잠금 단위물`──``후크와 고리`──`을 체인 같은 것으로 자동 연결”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실용화하기에는 구조가 너무 복잡했다. 투자가들은 실망하고 회사는 파리만 날리게 되었다. 새로운 장치의 특허를 따내기도 전에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은 ‘파스너 매뉴팩처링 머신 사’였다. 새로운 회사에서도 여미개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마침내 “잠금 단위물을 바로 체인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이 구슬처럼 꿰어진 가장자리를 따라 맞물리게 되어 있는 장치가 개발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한결 단순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완성품은 재봉틀을 이용하여 옷에 직접 달 수 있게 되었다. 체인식 여미개의 고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손으로 옷에다 꿰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덜어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점이 제거된 셈이었다. 1904년에는 회사 이름을 ‘오토매틱 후크 고리’로 바꾸었다. 저드슨이 마침내 시장에 내놓아도 되겠다고 자신한 물건이 과거의 후크와 고리를 연상시키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드슨의 후크는 봉합선을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새로운 자동 여미개에는 C큐러티(curity, 안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일일이 달아야 하고, 일일이 채웠다 풀어야 하며`──``따라서 자동하고는 거리가 멀었다`──``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터지기 일쑤였던 과거의 후크와 고리에 비해 이것이 갖는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C큐러티의 선전 문구는 그러한 장점을 자신있게 앞세웠다. “당기기만 하세요! 치마가 열리는 일은 더이상 없답니다…… 당신의 치마를 언제나 안전하고 산뜻하게 지켜드립니다.” 이 물건은 “플래킷 파스너”라는 별칭도 가지게 되었다. 회사측의 설명에 따르면 “플래킷이라는 말은 원래 여자를 뜻했다. 나중에 이 말은 입을 때 간편하라고 옷에 만들어 놓은 터진 부분을 의미하게 되었다. 아직도 업계에서는 이런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자신감을 반영한 이름을 달고 대대적인 선전을 등에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C큐러티는 “가장 곤란한 상황에서 터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더욱 고약한 것은 그런 사고가 나면 도입 부분이 체인 끝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옷을 벗는 유일한 방법은 옷을 자르거나 여미개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회사측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기기만 하면 된다”는 선전문구처럼 이 장치를 쓰기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1906년 3월에 찍힌 한 전단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 여미개의 사용 지침이 장황하고 복잡했다. C큐러티의 후원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써 안전성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여미개를 사용하다가 어려움에 부딪히신 분은 바로 저희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좀더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장황한 차원을 넘어서 그것은 모종의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느 인공물과 마찬가지로 잇따라 개발되어 나온 자동 여미개의 후속 모델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어려움은 다시 그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디자인의 개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경우의 수정은 여미개의 형태를, 애당초 그것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후크, 고리와 아주 흡사한 형태로 복귀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저드슨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후크와 고리를 마치 구슬처럼 꿰어진 테이프를 따라서 배열시켰다. 자기 머리에서 나온 발명품에 익숙한 대다수의 조급한 발명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연구실에서는 새로운 여미개의 성능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발명가의 창안품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광고 문안에 적힌 대로 되지 않는 물건에 대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 제작사측에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회사는 저드슨이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인식하지 못했거나 간과하고 넘어간 문제점이나 어려움을 발견하는 대로 알려달라고 소비자들에게 요청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후크와 고리를 이용한 방식은 끝없이 문제를 낳았다.” 만일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가 성공을 거두려면 이 물건에 대해 퍼부어진 비판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크와 고리를 좀더 개선하여 신뢰할 만한 자동 여미개를 만들든가, 아니면 후크와 고리 대신 전혀 다른 기계적 원리를 도입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명가가 넘어야 할 산 저드슨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낸 사람은 1880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오토 프레데릭 기데온 순드바크였다. 그의 부모는 비옥한 농장과 벌목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공학 방면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독일로 유학 보낼 수 있었다. 순드바크는 1903년에 독일에서 전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군 복무를 마친 다음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공과 대학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급속히 산업화되는 경제로 말미암아 많은 엔지니어들이 필요했다. 순드바크는 자신의 이름에서 유럽적인 장식물을 모조리 걷어내고 남들에게 자신을 그저 G. 선드백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피츠버그 부근에 자리한 웨스팅하우스 사에 들어갔다. 그는 이 회사에서 나이애가라 폭포 수력발전소에 쓰일 거대한 터보 발전기 설계를 맡게 되었다. 피츠버그는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의 주요 자금주들이 살고 있던 펜실베이니아 미드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선드백은 자연히 그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마침 웨스팅하우스에서는 상사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는 뉴저지 주의 호보켄에 있는 오토매틱 사의 공장에 와서 면접을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거기서 그는 “저드슨이 발명한 물건이 오래도록 안전하게 쓰일 수 있도록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업무를 맡고 있던 P. A. 애론슨과 만났다. 호보켄에 있으면서 선드백은 애론슨의 딸 엘비라와도 알게 되어 나중에 백년 가약을 맺었다. 사랑 때문이었건, 돈을 벌겠다는 야심 때문이었건, 아니면 자동 여미개라는 복잡한 과제가 주는 단순한 매력에 끌렸기 때문이었건, 어쨌든 선드백은 1908년부터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에 합류하게 된다. 공식적인 기록은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매서운 눈은 제품이 안고 있는 결함을 잡아냈으며, 그의 내부에 가득 찬 기술적 식견은 그 결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새로운 기회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입사했다.” 선드백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여미개의 문제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한밤중에도 “묘안을 떠올리려고”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처음 씨름한 것은 C큐러티가 걸핏하면 터진다는 문제점이었다. 선드백은 후크를 완전히 에워쌀 수 있도록 고리를 확장해보았다. “C큐러티가 회사의 자부심에 먹칠을 해놓았으므로” 개선된 여미개는 미처 특허출원도 내놓기 전에 “완벽한 C큐러티”라는 대대적인 선전 아래 플라코라는 이름으로 곧바로 시중에 깔렸다(1913년에 취득된 미국 특허 1,060,378번은 지퍼의 도입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특허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광고문은 “플라코 앞에서 단추, 후크, 걸쇠는 종적을 감춘다”고 자신하였지만, 회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선드백 자신도 “회사의 비서가 어느 날 저녁 플라코가 달린 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안전핀을 가지러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씁쓸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바 있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엔지니어의 책상 위에는 소비자들이 보낸 불만의 편지들이 수북이 쌓여갔다.”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는 회사측이 미국에서의 특허권을 갖는 대신, 나머지 해외 특허권은 선드백이 가져도 좋다고 동의하였다. 1910년에 선드백의 장인은 파리에 머물다가 “미제 만능 잠금기”의 프랑스 생산 공장에 자금을 지원할 물주를 찾아냈지만, 제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미국의 사정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철강 1파운드에 5센트, 노동자 한 사람의 주급이 6달러 하던 호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의 직원은 선드백과 또 한 사람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선드백은 중역, 엔지니어, 공장장, 사환 등 일인다역을 맡아야 했다. 이미 수천 달러의 빚을 지고 있던 상태에서 원자재를 추가로 공급해달라고 존 A. 로블링즈 선즈 철강회사의 영업사원에게 매달리는 일도 선드백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 회사는 실패한 여미개로부터 성공한 현수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회사들을 상대로 철강을 납품하고 있었다. 광고전단의 인쇄비용을 갚는 대신 선드백은 한 인쇄업자의 기계를 고쳐주기도 했으며, 클립 생산기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물주가 나타난 것이다. 유명한 희곡작가 유진 오닐의 아버지인 제임스 오닐은 변신에 능한 예술가로서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다. 오닐은 플라코가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이 회사의 주식을 매입한 다음 상품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한 후원과는 대조적으로 선드백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다. 아내 엘비라가 아기를 낳다가 죽어버리자 그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슬픔을 달래는 유일한 길은 여미개의 연구에 전력을 쏟아붓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여미개가 취했던 기존의 모든 형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늘 말썽거리로 드러났던 후크를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로운 모델의 한쪽 가장자리에 그는 휜 클립이나 집게를 놓았다. 이것은 맞은편 가장자리의 역시 클립이 꿰어진 부분과 맞물렸다. 이끔쇠를 내리면 이 클립들이 갈라져서 턱이 벌어졌다. 이끔쇠를 올리면 턱이 맞물렸다…… 후크는 이제 필요 없었다. 아마 선드백은 클립 만드는 기계를 연구하면서 그런 착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영감을 얻었든지간에 이 새로운 미끄럼 여미개에 대한 특허는 1912년에 출원 신청을 낸 뒤 1917년에 가서야 나왔다. 워커 대령은 손으로 만든 초기의 샘플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 새로운 기구를 “숨은 후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선드백 본인은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금 압박으로 공장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제가 생각하기로도 이 새로운 숨은 후크는 틀림없이 플라코를 대체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주문에 응하려면 숨은 후크를 생산하기 위한 원료와 시설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몇 달 안에 그런 준비를 과연 할 수 있을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주 뒤 그는 다시 편지를 썼다. 양질의 강철과 납작끈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숨은 후크를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로 보입니다. 몇 가지 미비점이 있더군요. 걸리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기 때문에 외부에다 별도의 장치를 보완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자니 모양이 영 말이 아닙니다. 성능에서 외양에 이르기까지 설계자의 머리 속에서는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워커 대령은 실망하지 않았다. 1913년, 초기에 발급받은 특허의 일부에 대한 만료 시한이 다가오자 재정 지원자들은 회사를 재편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토매틱 후크 고리 사의 주주들은 연례 총회에서 마침내 회사의 모든 자산을 매각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곧이어 후크리스 파스너 사가 설립되었다(후크리스 파스너는 후크 안 달린 여미개란 뜻이다`─`옮긴이). 선드백은 공장을 호보켄에서 미드빌의 조그만 헛간으로 옮겼다. 미드빌 주민들은 “묘한 물건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정체 불명의 회사가 마을로 들어온” 사실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후크 안 달린 여미개와 그 비슷한 물건들에 대한 워커 대령의 집착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대령이 길을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수군거리곤 했다. “빨리 건너게. 대령이 오고 있잖아. 잘못 붙들리는 날에는 자기네 회사 주식을 사달라는 성화에 시달려야 하거든.” 그러는 동안 선드백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험을 하면서 미끄럼 여미개를 새롭게 디자인해나갔다.” 선드백은 미드빌로 옮겨온 뒤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후크리스 1호로 이름붙인 클립 장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로 새로운 후크리스 2호를 개발하였다. 후크리스 2호 역시 “기존의 미끄럼 여미개 디자인 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물건이었다. 그는 이것을 “컵 모양의 요소들이 포개져 있는 모양”이라고 묘사했다. 더욱이 선드백은 여미개의 사용법 못지않게 조작이 간편한 여미개 생산 기계까지 개발하였다. “서로 맞물린 요소들을 단 한 번의 과정으로 금속에서 찍어낼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돌파구를 1913년 12월에 후원자들에게 보고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토록 담담한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선드백은 뒤에 술회하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워커 대령이야말로 언젠가 훌륭한 상품이 나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그 물건이 완성되자 예상했던 대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와 양복을 위한 완벽한 여미개 미끄럼식 여미개의 역사와 구조는 언젠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지의 표지 기사로 다루어진 적이 있다. 오늘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장치를 수십억 개씩 만들어내고 있는 기계에 대한 설명이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기사 안의 사진을 보면 1913년에 선드백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면서 제시한 디자인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여미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이빨은 바닥이 깊은 스푼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실제로 국자처럼 그려지고 또 그렇게 불리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위는 약간 볼록한 반면 아래는 오목하게 찍혀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미개를 닫을 때 미끄럼쇠는 안내원 역할을 한다. 미끄럼쇠는 이동하면서 국자들을 잡아당겨 그것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포개질 수 있도록 만든다. 국자들이 모두 맞물리게 되면 터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 미끄럼쇠를 반대편 방향으로 당기면 다시 열리게 된다. 이 새로운 원리에 바탕을 둔 장치의 발명을 선언한 지 여섯 달 뒤에 선드백은 필요한 모든 기계를 정밀하게 가다듬고 대량 생산에 나설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고 생각하였다. 대령은 그날을 맞아 대대적인 파티를 벌일 계획까지 짜놓았다. 그러나 막상 전원을 넣자 “바보 같은 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계는 5센티미터 가량의 여미개를 토해낸 뒤 멈춰버렸다. 물론 나중에는 작동을 해서, 후크리스 2호의 대량 판매는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선행 모델인 플라코가 “도붓장수의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진기한 물건처럼 선을 보인” 반면 “후크리스 2호는 이것을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업체들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워커는 주주들에게 아직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먼저 요구가 있어야 한다. 의류와 기타 일상용품을 만드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이 여미개가 그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시켜야 한다. 자꾸만 떨어지는 단추, 금방 닳아버리는 똑딱단추, 거추장스러운 버클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는 그러한 요구가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습관과 타성 아래 묻혀 있었다. 기업들은 단연코 적대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디자인을 새롭게 하고 제조 공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며 무엇보다도 생산 원가를 높이는 숱한 난제들을 떠맡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발명의 어머니”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없이 개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던 발명가들의 입장과 기업가들의 입장은 같을 수 없었다. 워커는 휘트컴 저드슨이 구두에 달고 나타난 걸쇠 잠금장치를 처음 본 이후로 지난 20년 동안 그 분야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단추와 똑딱단추, 버클에 문제점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후크 없는 여미개를 비롯하여 다른 발명품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발명가가 기존의 문제점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전도 유망하고 참신하여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 따위는 묻혀질 수 있는 그런 물건을 갖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필요”라는 말이 실감되기에는 아직도 까마득한 실정이었다. 워커는 또한 선드백이 모든 기술적 난관을 돌파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중요한 걸림돌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업사원이 기업체들을 찾아다니면서 당신들의 상품과 기계를 다시 설계하고 예산 구조를 재편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워커 대령의 두 아들, 곧 루이스 워커 주니어와 월러스 딜러메이터 워커가 사절 역할을 맡았다. 월러스는 1914년 10월 28일에 후크리스 2호 다섯 개를 처음으로 파는 데 성공했다. 그 수익으로 들어온 1달러는 봉투 안에 넣어졌고 거기다가 선드백이 서명을 했다. 선드백 개인으로서는 8년 동안의 각고의 노력이 처음으로 결실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물론 20년 전에 저드슨이 했던 생각을 발전시키려고 시도한 사람은 선드백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 일에 뛰어든 사람 중에는 남자말고 여자도 섞여 있었다. 플로리다 주 탐파에 살던 조세핀 캘룬은 1907년에 C큐러티의 한 변종으로 특허를 따냈다. 같은 해에 콜로라도 주 덴버의 프랭크 캔필드는 둥근 손잡이에서 닫히도록 되어 있는 갈고리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발명가들이 바쁘게 돌아다닌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선드백의 최종 해결 방안과 흡사한 생각으로 1912년에 스위스 취리히의 카타리나 쿤-무스와 앙리 포르스테가 특허를 발급받았다. 그러나 후크리스 2호같이 상품화에 성공한 사람은 이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기업체의 입장에서는 창고에 여미개를 가득 채워놓는다는 것은 주문이 잔뜩 밀려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후크 없는 여미개에 대한 주문은 가물에 콩 나듯이 드물었다. 피츠버그 부근에 있는 매크리리 백화점의 한 구매자가 후크리스를 시착실에서 판매원과 손님 모두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치마와 양복을 위한 완벽한 여미개”라고 격찬하였다. 그는 매크리리 백화점에 치마를 납품하는 모든 의류업체들이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뜻 따라나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드백의 검증받지 않은 기술에다 자기 회사의 명성을 거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는 완벽하게 기능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일반인들의 꾸준한 사용을 통해 검증을 받아야 했다.” 선드백은 업계의 부정적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고 거기에 대처해나갔다. 미끄럼쇠가 너무 약하다는 지적이 일자 그는 그것을 보강하였다. 활용 가능한 새로운 분야가 나타나면 거기에 맞게 제품을 고쳤다. 그러나 1915년까지도 후크리스 파스너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본 적이 없고 꿈도 꾸어보지 못한 물건에 대한…… 수요를 어떻게 하면 창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었다. 퍼를 단 마법 구두 생산 기술은 완전히 궤도에 올라 있었다. 미드빌 공장은 하루에 1,630개의 여미개를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설을 갖추었다. 불량품 발생 비율도 매우 낮았다. 그러나 슬슬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제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생산 원료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때 도입을 적극 검토했던 업체들도 주문한 기일에 제대로 납품이 안 되자 점차로 관심을 잃어갔다. 그러나 전쟁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혁대 안의 주머니를 후크 없는 여미개로 닫는 데 성공하면서 유잉 공업사에서 혁대 생산을 늘인 만큼 후크리스의 주문도 급격히 늘어났던 것이다. 1918년 중반에 접어들자 유잉 사는 한 번에 여미개를 무려 7천 개 넘게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군수품에 대한 여미개의 응용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공군에서 쓰는 낙하복에도 이것이 사용되었다. 단추에 비해 옷감을 줄일 수 있으면서도 방풍 효과는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해군에서도 전투복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후크 없는 여미개만이 유일하게 합격하였다. 얼마 안 가서 이것은 구명 조끼에도 사용되었으며 정부는 후크 없는 여미개를 만들기 위한 원료를 우선적으로 공급해주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여미개에 대한 수요도 줄어들었다. 군용 혁대와 구명 조끼를 위한 시장이 사라졌고, 의류업계에서는 아직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후크리스가 경쟁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입증되었지만 기존의 여미개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가격을 좀더 내릴 필요가 있었다. 선드백은 생산 과정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특수한 모양의 강선과 자신이 S-L이라고 이름붙인 기계를 이용하는 공정을 개발하였다. S-L은 ‘scrapless’ 곧 자투리가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S-L기는 “연속 동작으로 가느다란 강선을 Y자 모양으로 잘라나가면서, 국자의 한쪽은 오목하게 다른쪽은 볼록하게 만들고, Y자 모양의 안쪽 부분이 기계로 물려 들어가면서 테이프의 꼬인 가장자리와 만날 수 있게끔 했다. 그 결과, 부스러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여태까지 들어갔던 금속의 41퍼센트만 가지고도 같은 양의 후크리스를 만들 수 있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후크리스로 맨 먼저 덕을 본 제품은 록타이트 담배 주머니였다. 이 담배 주머니는 “끈도 안 달리고 단추도 안 달린” 가장 편리한 담배 주머니로 광고되었다. 1921년 말이 되면, 이 담배 주머니 회사로 납품되는 여미개의 양은 매주 7천 개가 넘었다. 후크리스 파스너 사는 벌써 오래전에 후크리스 2호보다 한 단계 개선된 팩토리 3호를 생산하고 있었다. 1921년에 오하이오 주 에이크론에 있는 B. F. 굿리치 사가 소량의 주문을 냈다. 주문한 물건을 납품받은 며칠 뒤 굿리치 사는 후크리스 사가 “가까운 시일 안에” 17만 개의 여미개를 납품할 수 있겠는지를 타진해왔다. 그 정도의 양이라면 그 전해의 총생산량을 능가하는 규모였으므로 후크리스 사로서는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납품을 할 능력이 못 되었다. 후크리스 측은 자사 공장의 생산 역량이 그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고 고백했다. 굿리치 사는 그 많은 양의 여미개를 어디다 쓸 작정인지 통 밝히기를 꺼렸다. 굿리치 사는 그럼 소량이라도 좋으니 납품을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소량의 물건들은 뜨거운 여름날 사무실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무원들이 신는 고무로 된 덧신에 달아서 내구력을 한번 시험해볼 작정이라고 밝혔다. 1922년에 겨울 굿리치의 영업사원들은 좀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덧신을 신고 성능을 시험하였다. 거기서 발견된 결함은 후크리스의 엔지니어들에게 시정하도록 보고되었다. 굿리치의 신상품은 그런 산고를 거쳐 마침내 탄생하였다. “특허 획득에 빛나는 후크 없는 여미개를 단 마법 구두. 당기면 열리고, 당기면 잠깁니다.” 그러나 영업사원들은 “마법”이라는 구두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단히 실용적인 물건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프’는 19세기 후반부에 “총알이나 그 밖의 작거나 혹은 가느다란 물건이 허공이나 어떤 장애물 속을 아주 빠른 속도로 뚫고 지나갈 때 나는 가볍고도 날카로운 소리…… 또는 그런 소리와 결부된 운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 단어였다. 일설에 따르면, 굿리치의 영업사원들이 판매전략회의에서 “마법”이라는 이름이 너무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고 불평하자, 새로운 덧신을 잠글 때 나는 소리를 잘 알고 있었던 버트램 G. 워크 사장이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행동적인 단어가 좋겠는데…… 치익 하는 날쌘 움직임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그런 말이 없을까.” 그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래, ‘지퍼’라고 하는 거야!” 1923년에 지퍼는 “오직 굿리치만이 만드는” 것으로 광고되었다. 굿리치는 이 단어를 지퍼 구두의 상표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회사의 권리를 의식하면서 단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얼마 안 가서 “지퍼”는 원래 “미끄럼식 여미개”라고 불러야 할 물건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그해 겨울 굿리치는 50만 켤레 가까운 지퍼 구두를 팔았다. 1920년대 중반 굿리치는 후크리스로부터 매년 최소 1백만 개의 여미개를 구입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지퍼”를 수식하는 “후크리스 파스너”라는 말은 가만히 보면 케케묵은 느낌을 주고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 후크리스 측의 고민거리였다. “지퍼”는 굿리치의 상표였으므로 ‘긍정적인 특성’을 갖는 새로운 상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유틸로크” “보보링크” 같은 류의 후보작을 잇달아 퇴짜놓은 끝에 후크리스는 마침내 “탤런(talon, 발톱)”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럴싸했다. 여미개의 요소요소는 독수리의 발톱처럼 야무지게 움켜쥐니까.” 1937년에는 회사 이름을 아예 탤런으로 바꾸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필통에서 모터보트의 엔진 커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로 쓰임새가 확장되면서 탤런은 한 해에 2천만 개가 넘게 팔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 드레스나 남자 바지에는 여전히 쓰이지 않고 있었다. 의류업계는 1930년대 말까지 내내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탤런을 대대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디자이너는 엘사 스키아파렐리였다. 그녀의 1935년 춘계 의상발표회는 <뉴요커> 지의 표현을 빌리면 “지퍼로 넘쳐났다.” 얼마 안 가서 지퍼를 선전하기 위해 대단히 공격적인 광고를 퍼부었는데 그것이 들어맞았다. 그 광고는 때로는 유머를 이용했지만, 때로는 똑딱단추와 단추를 쓰면 “틈새”로 살갗과 속옷이 보일지도 모른다고 공갈을 때리기도 했다. 지퍼가 어느 옷에나 널리 쓰이게 되면서 탤런 사의 미래가 환히 열렸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졌다. 만일 형태가 기능에 좌우된다면, 미끄럼식 여미개의 발전은 대단히 낭비가 심한 우회로를 따라 이루어진 셈이다. 오늘날의 지퍼가 갖고 있는 기능은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엘리어스 하우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쓸 만한 “자동연속 의상봉합장치”를 만들려고 안간힘을 썼던 후대의 많은 발명가들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능을 담아낼 수 있는 형태는 그렇게 자명해보이지 않았다. 저드슨의 걸쇠식 여미개, 선드백의 후크 없는 여미개와 국자 모양의 이가 달린 미끄럼식 여미개, 그리고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금속 이빨 대신에 플라스틱 나선을 갖고 있으며 아무리 보아도 걸쇠, 후크, 국자 따위와는 닮은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는 지퍼가 그 점을 잘 나타낸다. 만약에 또 다른 형태의 지퍼를 창안하여 특허를 받은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가 선드백처럼 그 망할 놈의 물건이 안고 있는 조작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개선 방안을 찾느라 불면의 밤을 수없이 지새운다면, 그리고 워커 대령처럼 지칠 줄 모르고 돈을 대주는 천사 같은 후원자가 그 뒤를 밀어준다면, 오늘의 지퍼가 내일 어떻게 변할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런 혜택이 있었건 없었건간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인공물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오늘날 우리 앞에 지퍼로 등장한 물건의 형태도 기능에서 곧바로 나온 것은 분명코 아니다. 형태는 실패와 그 실패의 부단한 개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연장이 연장을 만든다 수라고 불린 외다리 걸상 각종 수공업 분야에서 쓰이는 연장처럼 다양하고 전문화된 형태로 발전해온 인공물도 정말 드물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듯이 연장은 문명에서 맨 처음에 등장한 인공물이며, 따라서 가장 긴 발전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장이란 그것을 가지고 다른 모든 인공물을 만드는 것이므로, 인공물의 세계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대대로 연장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바깥 세상에다 자기들이 쓰는 도구에 대해서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럴 만한 능력도, 또 그래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그들이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면 그것은 연장 자체가 다른 연장을 만드는 데 쓰이는데다 사용자가 낡은 연장을 가지고 새로운 연장을 만드는 일이 아주 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사용자들은 대개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새로운 연장을 위한 착상이 어디서 어떻게 유래했는가를 설명할 만큼 말주변도 신통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장을 고안하는 창조적인 과정은 흔히 말을 수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마지막으로, 장인들은 자기가 쓰는 특수한 연장을 남에게 공개하기를 꺼렸다. 자기의 경쟁력과 바깥 세상에서 누리는 희소 가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조지 스터트는 19세기에 살았던 영국의 농부이며 도공이었던 윌리엄 스미스에 관한 회상록에서 그러한 장인의 심리와 연장의 발전 과정을 실감케 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장인이 앉아서 작업하는 의자는 통념상 연장으로 간주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 의자의 구조는 칼과 망치처럼 작업이 얼마나 탈없이 매끄럽게 진행되느냐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스터트는 도공의 작업장에 놓여 있던 세간의 일부에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자연히 그의 관심은 그리로 쏠렸다. 한 걸상은 “절구통”이라고 불렸다. 이 걸상이 작업장 안에 보이지 않으면 도공은 “절구통 가져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영감태기”라는 이름이 붙은 걸상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쓸모 있었던 것은, 앞의 두 걸상 못지않게 우스꽝스러운 “푼수”라는 외다리 걸상이었다. “푼수”는 판버로 도기 공방에서 나인티 해리스라는 사람이 처음 발명했다…… 작업장을 한참 확장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청년이었던 나인티는 널빤지 하나가 나뒹구는 것을 보고 목수에게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그 자리에 다리 하나를 박도록 시켰다. 이것이 “푼수”의 유래이다. 나인티 해리스는 이 걸상을 타고 앉아 진흙 반죽을 둥글게 말아서 물레 위에 올리기 전에 진흙 반죽을 마무리하는 작업을 했다. 걸상에 앉아 진흙을 꼼꼼하게 뭉개는 일이었다. 이미 발로 충분히 밟기는 했지만 아직 마른 흙덩어리가 자잘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없애야 했다. 가마 안에서 구워지는 동안 그 마른 덩어리들이 곧잘 터지곤 했기 때문이다. 도공은 앉아서 그것들을 골라낸 뒤 옆에 놓인 부스러기통에다 던져놓는 한편으로, 마치 “버터를 만들 때처럼” 앞뒤로 몸을 움직이면서 물레에 올려놓기 위하여 진흙 덩어리를 가지런히 쌓아올려야 했다. 고정된 의자에 앉아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외다리 “푼수”는 앉은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주면서도 몸을 충분히 받쳐주었다. 작업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나인티 해리스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시범을 보여준 뒤로는 모두들 앞다투어 그 의자를 쓰게 되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 “푼수”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종래의 걸상은 나인티 해리스를 비롯한 도공들에게 자유로운 운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리라. 외다리 걸상 덕분에 진흙을 개는 과정의 지루함이 한결 덜어졌고 작업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어쩌면 얼마간의 재미마저도 느꼈을지 모른다. 특수 걸상에 붙여진 이름들은 도공들이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반영하여 갖다붙인 애칭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자기 자동차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동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걸상에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특정한 걸상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손쉽게 내릴 수 있었다. 스터트는 연장을 걸상, 부스러기통(사실은 물통인데 대개는 진흙 부스러기를 버린다) 같은 가구나 기구와 구별하면서, 도공의 연장은 “가짓수가 매우 적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도공은 필요한 연장은 갖추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빗개”는 도자기에 가지런한 줄무늬를 내는 데 쓰였다. 빗개를 쓰면 손가락으로 하는 것보다 균일한 고랑을 팔 수 있었다. 도공들은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의 빗개를 만들어 썼다. 도공은 빗개 같은 연장을 무척 애지중지하였기 때문에 다른 공방으로 옮겨갈 때도 “그것을 두고 가는 법은 없었고 악착같이 거두어갔다.” 기구로 간주되건 연장으로 간주되건 도공이 쓰는 장비의 형태는 크고 작은 그의 행동을 좀더 편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개발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연장이 자신의 불완전한 선행 형태로부터 변화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풍부한 사진과 그림이 곁들여진 연장에 관한 백과사전의 서문에서 W. L. 굿맨은 우리의 “진보는 크게 보면 새로운 연장을 발명하고 낡은 연장을 개선하는 문제였다”고 주장하면서, 연장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커다란 이유는 “제대로 알고 있으며 관심도 갖고 있을 법한” 장인들이 그 연장들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한다. 중세의 수공업은 그 중에서도 특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그때 만연했던 비밀주의의 잔재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공방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은 연장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장에 관한 어떤 질문을 받아도 그냥 묵살해버리든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기 일쑤였다. 일반적으로 학식 있는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만한 현장 경험이 없었으므로, 답변이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이 받는 감동은 커졌다. 어쨌든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불과 몇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흔히 쓰이던 연장의 정확한 용도가 지금은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아 설득력 있는 논증에 의한 분석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의 《금속론》(1556년), 조지프 목슨의 《기계 운전》(1678--84년),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1751--72년)가 유명하다. 그러나 하다못해 지난 세기에 쓰였던 연장들 대부분도 그 기능이나 사용 설명서,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물건만 덜렁 남아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수집가들이 모아놓은 생전 처음 보는 낡은 연장들은 그 기이한 생김새 때문에 용도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집가들이 그런 시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골동품 거래상과 수집가는 과묵한 연장 사용자와는 대조적으로 진기한 물건의 쓰임새를 알아내고 설명하는 데서 남모를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광적인 연장 수집가들의 단체인 초기 아메리카 산업 협회는 탐구위원회를 산하에 두고 있다. 이 협회는 <크로니클>이라는 계간지도 발행하고 있는데, 이 잡지에 실린 “탐구”라는 제목의 고정란에서는 국자에서 너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 와서는 그 쓰임새를 확인하기조차 힘든 온갖 물건을 늘어놓고서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오래된 상품 목록에 실려 있는 비슷하게 생긴 물건들이, 한때 사용되었던 어떤 물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베일에 싸여 있는 모든 인공물에 대하여 만장일치의 합의를 볼 수 있는 수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한 모양의 칼과 전단기의 용도는 끝없는 억측을 낳고 있다. 아주 희한한 모양을 하고는 있지만 그 쓰임새가 명쾌하게 밝혀진 몇몇 연장들과 우리가 지금도 쓰고 있는 연장은 인공물의 발전에 관한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아무리 별나게 생겼더라도 하나하나의 연장은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발전의 원리는 진기한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승의 턱뼈에서 유래한 톱니 금속에 관한 연구서인 아그리콜라의 《금속론》에는 수공업이나 공예의 작업 형태와 거기서 쓰이는 연장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책으로 특히 삽화를 과감히 도입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어느 그림을 보면 은세공업자가 작업을 하고 있고, 부근의 나무 그루터기에 전단기처럼 생긴 연장이 박혀 있다. 전단기의 손잡이 한쪽은 L자 모양으로 굽어 있다. 이 연장이 그 당시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여타의 전단기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 굽은 손잡이 때문이다. 아그리콜라는 그 기이한 생김새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 연장은 “전단기와 비슷한 쇠붙이 연장이다. 이 전단기의 한쪽 날은 길이가 90센티미터이며 나무 그루터기에 단단히 박혀 있다. 금속을 자르는 또 하나의 날은 길이가 180센티미터다.” 여기서 말하는 “`날”은 손잡이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분명히 이 연장은 지레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형태는 기존의 전단기가 제대로 떠맡지 못한 또 하나의 기능을 해낸다. 아그리콜라의 그림에 나타난 상황에서 전단기를 사용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은세공인의 손이 두 개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작업중에 금속 조각을 자르려면 은 조각을 나무 등걸 가장자리에 놓고서 전단기로 싹둑 자르든가, 아니면 은을 전단기 사이에 끼우고서 손잡이를 눌러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둘 중에서 어떤 방법을 쓰건간에 매끄럽고 정확히 자르려면 곡예하듯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운이 많이 좌우하였다. 따라서 일반 전단기는 이런 상황에서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연장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약간의 변형을 주어서 손잡이 하나를 L자 모양으로 구부리고 그 L자 손잡이의 끝부분을 끌처럼 날카롭게 깎으면 손잡이를 나무 등걸에 박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한 손으로 금속 조각을 단단히 붙든 상태에서 다른 한 손으로 전단기를 너끈히 다룰 수 있었다. 그런 고정식 전단기를 쓰면 훨씬 능률적이고도 정확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물어보나마나한 사실이었다. 이렇듯 고정식 전단기는 종래의 전단기로는 은세공이 혼자서 작업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연장이었다. 고정식 전단기 같은 특수한 연장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나기 마련인데 그 이유의 하나는 장인들이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연장을 가지고 똑같은 작업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작업은 판에 박힌 과정이 되어버리고 장인은 능란한 손놀림으로 일을 처리한다. 가장 뛰어난 장인은 판에 박힌 작업 과정에서 작업의 세세한 측면과 그 작업을 가능케 하는 연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이렇게 돌이켜 사고할 줄 아는 장인은 작업의 완성도와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여겨지는 연장으로 일하는 과정에서 좀더 개량된 새로운 연장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텔리비전에서 목공을 지도하는 로이 언더힐 같은 학자풍의 현대적 장인이나 식민지 시대의 문화 중심지였던 버지니아 주의 윌리엄즈버그에서 활동했던 많은 재능 있는 명장들은 새로운 연장을 고안하는 일보다는 낡은 연장에 관한 지식과 그것으로 발휘할 수 있는 솜씨를 재발견하고 보존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작업을 하면서 쓰는 연장들에 대한 그들의 설명과 실연을 보면 인공물 일반의 발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데, 윌리엄즈버그에 보존되어 있는 수많은 연장들, 그 중에서도 특히 톱은 오늘날 철물점에서 팔고 있는 톱의 모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식민지 당시에도 이 연장들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에 이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수많은 톱의 형태가 지난 몇 세기 동안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톱을 써 본 경험을 토대로 과거에는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자신있게 추론할 수 있다. 최초의 금속 톱은 약 4천 년 전 근동 지방에서 구리가 발견되었을 무렵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낡은 재료가 새로운 재료한테 밀리면서 구리는 청동으로 바뀌고, 청동은 다시 쇠로 바뀌었다. 폭이 넓은 강판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힘 있고 튼튼한 톱날은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활톱이 널리 쓰인 것도 마치 사냥활이 시위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시켜 주듯이 나무틀이 톱날을 팽팽히 당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톱이 아직도 유럽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다. 반면에 영미권에서는 대부분 활톱이 폭이 넓은 강철 톱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 그리고(밀면 썰리도록 되어 있는 서양 톱과는 달리) 당기면 썰리도록 되어 있는 동양에서 쓰는 손톱의 특색 있는 구조는 나무를 자른다는 하나의 기능이 단일한 형태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톱이 작동하는 근본 원리는 홈을 파내려가면서 나뭇조각을 두 부분으로 가르는 것이다. 톱니는 이빨이 박혀 있는 짐승의 턱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초창기의 톱니는 단순했다. 그러나 톱니의 스타일, 간격, 배열은 점차로 다양하게 세분화되었다. 나뭇결을 따라서 자르느냐 나뭇결을 가로질러서 자르느냐에 따라 톱니에 걸리는 부담이 달라지므로 균일한 간격으로 톱니가 박힌 단조로운 톱날을 가지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해낸다는 것은 무리이다. 나뭇결을 가로질러 자를 때는 나무의 섬유가 한올 한올 잘리는 셈이다. 따라서 가로켜기 톱의 톱니는 칼 같은 모양의 이빨들이 톱날을 따라서 박혀 있는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나뭇결을 따라 자르는 세로켜기 톱은 끌의 기능이 강해야 하기 때문에 톱니도 그런 모양에 걸맞게 발전해왔고 자연히 작은 끌들이 촘촘히 박힌 모양이 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이 썼던 톱은 톱니가 톱날 양 옆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톱으로 톱질을 하면 파인 홈에 톱밥이 끼어 톱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애를 먹게 된다. 쇠스랑의 갈퀴처럼 톱니를 구부려 나무를 자르는 동시에 톱밥을 끌어당기게 함으로써 톱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부분적으로는 해결하였지만, 톱니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톱날에서 미끄러져나오게 하여 톱질로 생긴 홈의 폭이 톱날의 폭보다 크게 만들었을 때 비로소 톱날이 막히는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른 나무인가 딱딱한 나무인가에 따라서 톱날의 모양은 또 달라져야 했다. 무른 나무를 자를 때는 톱밥이 빠른 시간 안에 수북이 쌓이므로 무른 나무에 적합한 톱은 엇갈린 톱니들의 좌우 간격이 넓고 톱니와 톱니 사이도 듬성듬성하였다. 그래야만 비교적 많은 양의 톱밥을 홈의 끝까지 무리 없이 끌어낼 수 있었다. 반면에 딱딱한 나무를 자르는 톱은 톱밥이 훨씬 더디게 쌓이므로 톱니의 좌우 폭도 좁고 톱니와 톱니 사이의 간격도 더 촘촘하다. 커다란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려면 활톱처럼 자르려고 하는 나무의 두께에 상관하지 않는 톱이 필요하였다. 두 사람의 벌목공이 힘을 모아 일할 수 있도록 양 끝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다른 것보다 톱날이 넓고 긴 톱이 고안되었다. 이때 한 사람이 당길 때 나무가 베어지고(톱날이 넓어서 긴장도가 덜하므로 밀면서 자르면 톱날이 휘어진다), 또 한 사람은 다음번의 자르기 동작을 위해 톱날을 원래의 위치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양쪽 방향으로 자르는 톱날이 달려 있을 경우). 일단 베어진 나무는 같은 톱으로 여러 개의 통나무로 잘라야 한다. 이어서 굵은 통나무를 길이 방향으로 켜서 판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나무를 벨 때 쓴 톱으로 이 작업을 하려면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통나무를 숲의 바닥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작업에 들어가면 톱을 수평 방향으로 켜야 했고 톱질하는 사람들은 구부정하게 몸을 바싹 낮추어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작업이었다. 톱날의 폭이 넓고 길다보니 중력의 영향으로 쉽게 휘어졌고 이런 톱날의 변형과 톱날이 자꾸만 나무에 끼는 현상은 매끄러운 톱질을 아주 힘겹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력 때문에 톱밥이 잘 빠지지가 않았다. 땅바닥에 놓인 통나무를 수평으로 잘라 판자를 만드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구덩이 톱질, 내릴톱, 그리고 구덩이꾼의 등장을 낳았다. 질꾼의 심오한 작업 톱날을 휘게 하고 홈에 톱밥이 쌓이게 하는 중력의 영향을 없애기 위해서`──``나아가서는 중력을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기 위해서`──톱질꾼들은 각자 통나무의 위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려면 자연히 통나무 밑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때로는 통나무를 비스듬히 기대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괼 나무 위에 얹어보기도 했지만, 둘 다 무거운 통나무를 꽤 높이 들어올려야 할 뿐만 아니라 톱질을 하는 동안 위치를 바꾸어주어야만 했다. 또다시 중력과 씨름해야 했던 것이다. 톱질을 잘하기 위해서는 통나무 전체를 거의 톱의 길이만큼 들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밑에 있는 사람도 서 있어야만 온몸에 체중을 실어 톱을 당길 수 있었다. 디드로의 《백과전서》에 이런 작업 광경이 자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무거운 통나무를 공중으로 2미터 이상 들어올린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톱질을 할 때 나무가 흔들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괼 나무나 발판 같은 것이 있어야 했다. 건축공사장 같은 데서 일시적으로 그런 작업을 할 때는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한 자리에서 많은 양의 나무를 켜야 하는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위로 통나무를 굴려 걸쳐 놓은 다음 이리저리 옮겨가며 작업을 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기술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로이 언더힐은 구덩이 톱질의 현장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발목은 싱싱한 톱밥에 깊숙이 파묻히고 팔꿈치는 구덩이의 타르 바른 나무벽을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 들리는 그 기막힌 울림이라니. 톱날이 밑으로 내려갈 때마다 일곱 자 길이의 강철 톱날에 달려 있는 톱니들은 통나무를 가르며 반 치 앞으로 나아간다. 머리 위에 있는 한 자 두께의 통나무와 구덩이의 사방 벽은 읍내의 소음과 어수선함을 막아준다. 숯으로 그어놓은 선을 따라 인정사정 없이 나아가는 톱날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위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 가운데 연장자요, 톱의 주인으로 톱날을 예리하게 갈아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실제로 나무를 자르는 사람은 밑에서 톱을 당기는 구덩이꾼이었지만 그는 톱에 자기의 체중을 실을 수 있었다. 톱날이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일은 주로 위에서 일하는 사람의 몫인데 그는 팔과 어깨만으로 톱을 위로 당겨올려야 한다. 언더힐이 톱질 구덩이의 작업 현장을 소개한 것에 1백 년 가량 앞서 목공소를 운영하면서 톱질꾼들을 부렸던 조지 스터트는 “톱질꾼의 좀더 심오한 작업을…… 대개는 목수의 관점에서” 색다르게 묘사한다. 스터트의 묘사에 나타난 톱질꾼과 구덩이꾼의 작업은 각박하기 짝없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다. 톱밥이 땀투성이의 얼굴과 맨팔, 등짝으로 내리퍼부었다. 잡념이 들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의 시야는 톱질 구덩이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몸통과 팔을 부지런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몇 시간이고 일했다. 그러나 짧은 휴식은 있었다. 이제 그의 동료가 톱에 기름칠을 하라고 위에서 소리친다. 그 일을 위해서 구덩이 틈새에다 아마씨 기름이 든 깡통을 두었고, 그 안에는 헝겊을 돌돌 만 막대기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렇게 한가할 틈이 없었다. 톱 주인인 그는 밀고 당기는 상대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야(내 생각에는 이게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하는데다가 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작업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직선에서 조금만 옆으로 삐끗하면 일을 멈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나무를 버리기 십상이었다. 톱날이 예리하지 못하면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 톱날을 가는 시간은 밑의 사람에게도 고역이었다. 휴식 시간으로 주어진 약 한 시간 동안 멀뚱거리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가 따뜻한 불도 쪼이고 말동무도 찾을 겸 술 한잔을 걸치러 갔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하러 돌아오는 것을 잊고 눌러붙어 있을 때가 간혹 있어서 탈이었지만, 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고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술집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기는 일에 손발이 묶인 채 돈도 못 벌면서 싸구려 줄로 톱날만 죽어라고 갈아대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톱날을 간다는 게 너무나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톱질꾼 가운데는 워낙 막되먹은 자들이 많아서 이만저만 애를 먹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로 어려웠던 것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목재의 생산 단가를 좀더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는 점이다. 런던에 가면 당장 쓸 수 있는 널빤지를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누가 미쳤다고 나무를 사서 톱질을 하고 목재가 마를 때까지 몇 년씩 자기 돈을 잠겨놓겠는가. 톱질꾼들을 쓰느냐 증기톱을 쓰느냐, 목재상들은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증기력이 톱을 새로운 발전의 길로 끌어올리기 한참 전에 톱질꾼들은 톱질 구덩이에서 일을 하다가 톱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톱날과 같은 평면 위에 손잡이가 달려 있으면 나무를 벨 때는 편리할지 모르나 통나무 위에서 균형을 맞추거나 구덩이 속에 쪼그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만일 손잡이가 톱날과 수직으로 달려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럼 위에 있는 톱질꾼이나 밑에 있는 톱질꾼이 목을 비틀지 않고도 통나무를 따라가면서 작업이 제대로 되어가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위 톱질꾼이 발끝까지 닿도록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마지막 톱니까지 통나무로 파고들 수 있게끔 두 자 정도 톱날에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위 손잡이가 붙게 되었다. 아래 톱질꾼의 손잡이는 톱날을 갈기 위해 톱을 구덩이 밖으로 꺼내야 할 때 쉽게 톱날에서 분리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어찌 되었든 나무 베는 톱에서 내릴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톱질꾼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능과 불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톱은 다른 연장에 비해 힘이 많이 들어가는 연장이라서 쓰임새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뉘어 발전해왔다. 나무 베는 톱과 내릴톱은 훌륭한 작업 수단이었지만 가구공이나 목수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작은 손톱들이 제각각 발전하였다. 그 중의 어떤 것은 커다란 널빤지나 판자를 자르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이음새 같은 정교한 데를 자르기에는 아직도 톱날이 너무 두껍고 길었다. 그래서 정교한 작업을 할 때 얇은 톱날이 휘어지지 않도록 등에 보강판을 댄 등대기톱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톱으로는 곡선 모양으로 자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실톱이었다. 실톱은 톱날이 가느다랗기 때문에 곡선 작업에 조금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실톱의 날은 워낙 얇아서 세게 밀면 휘어지기 쉬우므로 동양에서 쓰는 톱과 마찬가지로 당길 때 나무가 썰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톱으로도 판자나 널빤지의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곡선의 기울기가 아주 심한 모양을 도려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도림질용 실톱이었다. 이것은 톱날이 마치 화살의 시위처럼 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서 비스듬히 기울이지 않고도 곡선으로 자를 수 있었다. 이것들은 물론 특수 톱 가운데 일부분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러나 나무를 베거나 목재를 자르는 데 이러저러한 불편을 주었던 기존 톱들의 결함으로 인해 연장이 발전해온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발전의 원동력이 실패라고 해서 새로운 형태가 무조건 이전 것보다 나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옛날 서적이나 특허철을 살피면 잘못된 착상들의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톱이 점점 세분화되면서 나타난 문제점의 하나는 사용자들이 갖추어놓아야 할 도구의 종류가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들어가는 돈도 돈이지만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가 않았다. 가로 켜는 톱과 세로 켜는 톱을 별도로 갖추어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 한 발명가가 톱날의 한쪽은 가로 켜는 톱날로 한쪽은 세로 켜는 톱날로 만들자는 착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이중톱의 손잡이는 자연히 양쪽 톱날과 대칭을 이루는 자리에 붙여지게 되었다. 그래야 어떤 톱날을 쓰든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톱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다. 대개 톱의 손잡이는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톱날의 등쪽에 달려 있으며, 균형을 맞추고 손의 힘이 썰리는 면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게끔 약간 구부러져 있다. 이러한 용도에 알맞게 만들어진 톱의 손잡이가 갖는 역할을 무시함으로써 그 발명가는 이중톱의 기능을 오히려 약화시킨 셈이었다. 그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착상이었다. 백 종류의 망치에 놀란 마르크스 형태의 발전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예가 바로 도끼이다. 데이빗 파이는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는 대표적인 예로 이것을 든다. 파이에 따르면 이것은 나무를 조각내는 데는 제격이지만 나무를 잘라내기에는 여간 불편한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도 도끼는 인공물의 디자인과 발전을 다루는 이론에서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연장이다. 석기시대부터 있었던 도끼는 새로운 도끼용 자루가 발견되고 그것을 다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면서 형태와 기능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이 식민지였을 무렵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유럽형 도끼는 이미 완성된 틀을 갖춘데다가 뿌리깊은 전통까지 있었다. 기술과는 상관없는 문화적 타성은 비효율적이며 기능적으로 결함을 안고 있는 인공물의 형태를 본고장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할 수도 있다. 결국 효율성을 갖게 하는 힘은 기술 자체라기보다는 연장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과 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오래전부터 쇠로는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끼 머리에다 강철을 달고 숫돌에 예리하게 갈아 사용하면 쇠처럼 날이 쉽게 무디어지지 않았다. 이럭저럭 날의 문제는 해결되었어도 유럽식 도끼는 휘두를 때 단단히 붙들지 않으면 자꾸만 빗나가기 일쑤였다. 도끼의 금속 부분이 자루의 앞부분에 쏠려 있는 탓에, 조준을 잘해서 막바로 내려치지 않으면 도끼질이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고 개활지에다 하루라도 빨리 집과 목조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여 있던 미국인들은 유럽식 도끼의 불편함을 그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1700년대까지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도끼가 유럽식 도끼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도끼 머리의 뭉툭한 끝부분이 도끼날 반대편 쪽으로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런 특징이 덧붙여지면서 도끼 머리는 더욱 무거워졌고 파괴력도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무게 중심이 도끼날에서 자루 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더 안정감 있게 도끼를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미국 도끼는 더욱 갈고 다듬어져서 도끼날도 유럽 도끼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러나 모든 과제를 척척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으로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인공물은 별로 없다. 어떤 벌목꾼에게는 한 도끼의 디자인이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불만을 품는 벌목꾼이 어디에건 있게 마련이었다. 가령 무디어진 도끼날을 가는 것쯤은 회전 숫돌이 있는 헛간에서 작업할 수 있는 농부에게는 별일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도구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일할 수밖에 없는 벌목꾼에게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두날 도끼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해야 하는 벌목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두 번 걸음 할 것을 한 번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마다 특색 있는 도끼 머리가 개발된 것은 그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도구를 비롯한 각종 인공물을 쓰는 데는 주관적인 면도 강하게 작용했다. 전통 탓이건 습관 탓이건 혹은 느낌 때문이건 우리는 벌목꾼이 자기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도끼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이 도끼는 저 도끼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도끼의 종류가 부쩍 늘어났다. 그것들은 모양이 조금씩 다 달랐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도끼들은 흔히 그것이 많이 사용되는 지방의 이름으로 구분되었는데, 사람들이 도끼를 선택하는 데는 기술적인 요인보다는 국수적인 의식이 더 많이 작용했다. 조지 바살라는 “켄터키, 오하이오, 메인, 미시건, 뉴저지,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스페인, 이중날, 소방 펌프, 어린이용” 등등 한 기업인이 1863년에 작성한 나무 자르는 도끼의 목록을 인용하여 그 형태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망치도 기술의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연장이다. 그것은 버밍엄 한 곳에서만 수백 종류의 망치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던 마르크스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망치가 그렇게 세분화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톱처럼 망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연장이며, 그래서 망치를 손에 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많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망치를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연장의 결함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반면, 소수의 창조적인 사람들은 완전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도구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줄곧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바친다(주의력 깊고 창조적인 연장제작자도 자기 물건을 개량하는 데 한몫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런 물건이 나오면 아무리 게으른 기술자라도 기존의 도구가 갖고 있는 익숙하면서도 아리송한 결함을 그 혁신적인 특성으로 극복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면 망설이지 않고 그 물건을 사려고 할 것이다). 지붕을 다시 이는 집에서 살았거나 그런 집 바로 옆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망치를 쓰는 사람이 하루에 망치를 골천 번도 더 휘두른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으리라. 어느 날 나는 지붕 이는 사람이 두고 간 망치를 보고 망치 머리가 너무 닳고 손잡이가 반질반질하여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나마 반질반질한 부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테이프가 감겨져 있지 않아서였다. 《연장의 왕 망치》라는 책의 “수집가를 위한 편람” 부분을 보면 별별 희한한 모양의 망치와 망치 머리를 찍은 사진들이 종류별로 페이지마다 열 장에서 열두 장씩 1백 페이지 이상에 걸쳐서 소개되어 있다. 그 책의 나머지 2백 페이지는 1845년에서 1983년까지 망치 또는 망치와 비슷하게 생긴 연장을 개량하고 변형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따낸 바 있는 발명품들의 설계도를(한 페이지에 네 장씩) 싣고 이것들 하나하나는 다른 망치들이 갖지 못했던 기능을 저마다 한두 가지씩`──`적어도 그것을 만든 발명가의 머리 속에서는`──``갖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연장들의 변형 가운데 상당수가 그저 독특한 모양만 앞세워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기능적인 개선점이 딱히 없을 때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외양”을 한 인공물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마련인 것이다. 망치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도 영국 빅토리아 왕조 후기의 상인들은 한 가지 모델의 망치가 가질 수 있는 사용의 폭을 망설임없이 넓혀나갔던 것 같다. 1895년도 카탈로그에서 몽고메리 워드 사는 사용하는 사람들을 참신하게 분류하여 각각에 맞는 망치를 권유하는 한편으로 머리가 가벼우며 못뽑이가 크고 꺾인 각도도 큰 망치 하나를 다른 모델들보다 부각시켜 선전하고 있다. 그 망치는 표면에 흠집을 남기지 않으며 아무리 단단히 박힌 납작못도 거뜬히 빼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통신 판매용 카탈로그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다. 시판되는 망치 가운데 납작못을 가장 잘 뽑습니다. 표면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고 아무리 꼼짝 않는 납작못이라도 거뜬히 뽑지요. 인테리어 전문가, 마차 수리공, 벽보 붙이는 사람, 카펫 까는 사람, 장의사, 사진사, 치과의사, 표구사, 담배상이 가장 애용하는 망치. 가정용으로도 그만이랍니다. 사실상 만능 망치인 셈이다. 이를테면 장의사와 치과의사가 같은 종류의 망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버밍엄의 망치가 아무리 많다손 치더라도 몽고메리 워드 사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망치를 끝없이 만들어내야 했으리라. 하나의 망치를 다양한 전문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쓸 수 있다는 것은 세분화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러한 한계는 실용적이며 경제적인 수단과 목적 사이의 갈등보다는 균형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어나는 양상 러드 포크가 존재하는 이유 골동품 전시회에서 가장 열띤 논란의 대상이 되는 품목은, 손잡이를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식기류를 연상하게 되지만 정작 그것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아리송한, 아주 보기 드물고 묘한 생김새를 가진 옛날 식사도구이다. 골동품상과 수집가는 하나같이 값어치보다는 기능을 두고 열띤 공방을 벌이며, 가격보다는 용도를 두고 서로 입씨름을 한다. 이 분야에 문외한이 아닌 사람이라면 멋들어지게 생긴 물건 하나가 토마토를 먹는 데 쓰였는지 오이를 먹는 데 쓰였는지, 또 다른 신기한 골동품 하나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 쓰였는지 생선을 먹는 데 쓰였는지, 아니면 빵가루를 뜨는 국자였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그리 오래 엿듣지 않고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정을 전혀 모르고 우연히 그 자리에 끼여든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들이 자기가 하는 이야기의 뜻이나 알고 지껄이는 건지 의문에 싸일 만하다. 수전 매클러클런은 유독 인터내셔널 실버 사의 한 파트가 1904년부터 1918년까지 “1847년 로저스 브라더스”라는 상표로 만들어낸 우수한 은식기만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이는 수집가이다. 이 은식기의 특징은 손잡이에 포도 송이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한때는 이런 은식기를 1천 1백 점이나 소장하기도 했던 매클러클런 같은 전문 수집가는 스스로를 포도광이라고 부르는데 딴은 그럴 만도 하다. 보험회사로부터 수집한 물건들의 목록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매클러클런은 부득이 소장품의 목록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간행된 것이 결정판 《포도광을 위한 수집가 편람》이다. 이 책에는 그녀가 직접 보았고 손에 넣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60점의 식사도구가 들어 있고, 그 밖에 옛날의 식기상이나 보석상의 상품 목록에서 확인한 약 80점의 사진이 실려 있다. 우리에게 낯익은 샐러드 포크에서부터 호박 국자, 치즈 국자처럼 덜 알려진 식사도구에 이르기까지 수록 품목이 매우 광범위하다. 나이프와 포크, 스푼 사이의 구분이 애매모호할 때도 있어 간혹 가다 “멜론 나이프 또는 포크” “올리브 포크 또는 스푼” 같은 묘한 잡탕 이름도 등장한다. 후자는 음식을 담는 부분에 퇴화한 갈퀴가 달려 있고 가운데가 커다랗게 타원형으로 파여 있어서 이것으로 올리브를 가볍게 떠먹을 수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카탈로그에서 이것을 분류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것을 그저 올리브 스푼이라고만 했다가 나중에는 포크 항목에 집어넣었다.” 어떤 제조업자들은 애매모호함을 아예 노골적으로 내세워 “이상적인 올리브 포크 겸 스푼”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따내기도 했다. 매클러클런은 서문에서 자기가 수집한 물건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고 있다. “2년에 걸쳐 원고를 준비하는 동안 나의 경험을 토대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난 뒤에도 번번이 그것을 뒤집는 추가 정보가 곧바로 나타나곤 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어려움의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을 내린다. “포도의 수집을 헛갈리게 만드는`──``하지만 그 점이야말로 매력이다`──`요인들은 수없이 많다. 1904년에서 1918년까지 제품들의 디자인이 바뀌었고 이름도 다시 붙여졌으며 심지어는 크기에까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식사도구의 장점을 합친 것을 요구하는 특별 주문이 떨어지면 제조업자들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부담없이 빼고 끼워넣고 이름을 바꾸었다.” 갈퀴의 형태로 보면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상품 목록상의 상품번호는 동일한 샐러드 포크의 경우를 보면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초기 제품에서 갈퀴는 굽어 있었고 끝이 비교적 뾰족했다. 뒤의 제품은 갈퀴가 곧고 짧고 땅딸하고 뭉툭해졌다. 매클러클런에 따르면 똑같은 이 포크가 “개성 있는 피클 포크” “개성 있는 샐러드 포크” “짧은 피클 포크” “개성 있는 양념 포크”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상품 목록에 등장한다. 그녀의 설명은 계속된다. 초기 제품의 갈퀴는 대부분 몹시 휘어 있다. 나중 제품의 갈퀴는 더 무겁고 곧다. 로저스 1847 계열은 평생 사용을 보장하였으며, 회사측은 수선이 계속 필요한 식사도구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품질 개선에 들어갔다. 초기 제품의 결함을 없애기 위해 휘어지지 않게끔 포크의 디자인이 발전해온 것은 실패가 형태를 낳는다는 원칙을 확인시키는 고전적인 사례이다. 제품이 생산되던 고작 14년이라는 기간 안에 그런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기업들이 예상했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기네 제품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토록 짧은 기간 안에 상품의 이름이 샐러드 포크에서 피클 포크로, 다시 양념 포크로 바뀐 것은 형태 발전의 또 한 가지 좀더 미묘한 측면을 엿보게 해준다. 굽은 갈퀴는 객관적인 관찰로 판단하는 것이지만, 형태 발전의 또 다른 측면은 기능적 실패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제품 자체보다는 그 제품이 대체하리라고 예상되었던 관련 제품들이 어떻게 주관에 의해 받아들여졌는가가 중요하다. 샐러드 포크가 존재하는 이유는 일반 정찬용 포크가 이를테면 가벼운 음식을 먹기에는 너무 무겁거나 부피가 크다는 점 때문에 샐러드 포크만큼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매클러클런의 식사도구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식기도구들이 강점을 갖는 부문에서 그만큼 여러 용도로 쓰이게끔 제품을 만들었음을 뜻한다. 포도광들이 부딪혔던 문제들은 19세기 식사도구의 수집가들이 맞닥뜨렸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빅토리아 왕조 초기의 식기 제조업자들이 만든 상품 목록에는 아예 그림도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품 목록에 그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림이 없으면 비슷한 제품들을 구별하거나 양식은 달라도 같은 제품들을 골라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였다. 1880년과 1900년 사이에 로저스 브라더스는 스물일곱 종의 새 은식기류를 내놓았는데 그 중에는 새로운 종류의 식사도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은식기류에 대한 글을 폭넓게 써온 도로시 레인워터의 글을 인용해본다. 1898년에 나온 타월 사의 “조지”풍 세트는 131가지의 식기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스푼만 하더라도 열아홉 종이었으며, 음식을 나누는 것이 열일곱 종, 담고 써는 것이 열 종, 국자가 여섯 종, 국자나 포크, 스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식사도구가 스물일곱 종이었다. 그 당시의 마나님은 크로켓 요리에다 파이 먹을 때 쓰는 포크를 내놓지 않느라, 또는 오이에다 토마토 포크를 내놓지 않느라 진땀깨나 흘려야 했으리라. 1926년에 이르러서도 어떤 세트들은 아직 146가지나 되는 식기류를 거느리고 있었다.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당시 상무부 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스털링 은식기 제조 협회의 명예 회원이기도 했다`──`는 앞으로 하나의 식기 세트에 들어가는 품목 수가 최대 55종을 넘지 않게 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 스무 종 이상으로 이루어진 식기 세트를 구경하기도 힘든 오늘날의 실정과 비교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최고급 은식기를 생산하는 업체들의 카탈로그를 보면 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품목을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 이러한 세분화된 식사도구들의 명칭은 아직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비슷해보이는 식사도구가 어떤 데서는 “찬 고기용 포크”로, “케이크 포크”로, 또 다른 데서는 “생선 포크” “샐러드 포크”로 둔갑한다. 같은 세트 안에 들어가는 서로 다른 포크들 사이의 형태상의 차이점이, 가령 서로 다른 두 세트의 “정찬 포크”들 사이의 차이점보다 두드러지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 이러한 헛갈림을 더욱 부채질한다. 로운 디자인보다는 복제품을 골라라 이처럼 형태가 다양해지는 까닭은 일반 포크를, 가령 피클 포크와 같은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변형한다고 할 때 그 모양이 사람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피클 포크는 미끌미끌한 음식을 항아리에서 개별 접시로 옮길 때 사용한다고 본다면, 좀더 힘든 조건에서는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소지가 많다. 항아리에서 피클을 덜어내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일반 정찬용 포크로 이 작업을 하려다간 애를 먹기 마련이다. 질기고 미끌미끌한 피클을 찍어내기란 제아무리 뾰족한 갈퀴라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찍는 데 성공한 피클을 항아리 밖으로 꺼내는 것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접시까지 무사히 옮길 수 있도록 피클을 포크로 단단히 찍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접시에 떨구려니까 피클이 포크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완벽한 피클 포크의 갈퀴는, 피클을 단단히 찍어 안전하게 옮길 수 있도록 끝을 뾰족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접시에다 피클을 잘 떨굴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하는가. 사실상 모든 디자이너들이 맞닥뜨리는 이런 갈등 앞에서는 결국 절충하는 것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러한 절충에는 판단과 선택이 뒤따르므로 같은 문제라도 디자이너에 따라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혹은 새로운 세트에 기발하고 새로운 식사도구를 포함시키려는 미적인 열망 또한 포크의 갈퀴 모양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트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여야 할 경우에는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하나의 식사도구에 다양한 기능을 부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 가운데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식사도구들은 어차피 저마다 특화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딱히 어떤 기능에는 어떤 형태가 어울린다는 모범답안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에티켓에 관한 책을 쓴 대부분의 저자들은(수집에 관한 책을 쓴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런 시도를 하는 대신 사람은 꼭 필요한 식사도구의 쓰임새만 제대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밀리 포스트는 1920년대에 그런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올바른 식사도구를 선택할 때, 익숙하지 않은 식사도구를 사용하면서 실수할까봐 두렵다고 편지로 호소해오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만든 디자이너쯤 되어야만 그 쓰임새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별나게 생긴 식사도구는 점잖은 식탁에는 감히 끼여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설령 원래 용도와는 다르게 그 식사도구를 사용했다고 해도 그것이 에티켓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니다. 에티켓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괴벽스러운 것하고는 애당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식사도구의 선택은 그야말로 하찮은 문제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질구레한 문제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점잖은 사람들이 식사도구를 아무 거리낌없이 선택한다는 말에는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정찬용 포크로 굴 요리를 먹을 수는 없고, 티 스푼으로 수프를 떠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음식에 어떤 도구를 써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생선 요리를 먹기 위해 쓰는 중간 크기의 갈퀴 달린 식사도구가 원래는 샐러드나 비스킷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에밀리 포스트와 좀더 최근의 에티켓 관련 저술가들이 충고하는 것은 아무리 진수성찬으로 차린 식탁이라 할지라도 몇 가지 기본적인 식사도구만 있으면 먹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기본적인 식사도구들은 다음과 같다. “테이블 스푼, 디저트 스푼, 티 스푼, 식사 뒤의 커피 스푼…… 큰 포크(흔히 정찬용 포크라고 불린다), 작은 포크(샐러드 포크 또는 디저트 포크라고도 불린다), 큰 나이프(날이 강철로 된 정찬용 나이프), 작은 나이프(날이 은으로 된)……” 중간에 생략되어 있는 것은 “완벽한 주방 시설을 갖춘 가정에서 구비할 수 있는 모든 식사도구의 목록”에 포함되지만 “쓸 데가 없어서 뺄 수도 있는” 스푼, 포크, 나이프 들이다. 그러나 한때는 누군가에 의해 “필요한” 것으로 주장되었던 “불필요한” 식사도구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생소한 구석이 있는 인공물들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식 식사도구는 모양도 그럴듯하고 쥐기에도 편하다. 그러나 식당이나 파티에서 음식을 먹다보면 특정한 식사도구에서 아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가령 정찬용 포크는 일반적으로 크게 만들어지며 상당히 뾰족한 네 개의 갈퀴가 펑퍼짐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어떤 포크를 보면 뭉툭한 갈퀴가 듬성듬성 세 개밖에 박혀 있지 않아 차라리 나무 막대기로 떠 먹는 것이 나아보일 정도이다. 어떤 식기 세트의 정찬용 포크는 전체적인 비율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세트 안의 다른 포크들은 갈퀴가 짧고 뭉툭하여 상추 같은 것을 찍거나 담기에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포크는 포크라기보다는 끝이 티 스푼처럼 좁게 오무라져 있어 갈퀴의 표면적이 작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대했던 것만큼 음식을 제대로 실어나르지 못한다. 그런 포크들은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지 먹기에 편하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다. 요컨대 기능만으로 보면 포크로서는 낙제점이지만 그런데도 많은 가정과 식당에서는 앞다투어 이런 포크를 사들인다. 은식기는 보통은 큰마음 먹고 사들이는 물건이라서 기능보다는 모양에 더 치중해서 고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일단 사들인 물건에는 싫든 좋든 적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은식기는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팔리던 고급 은식기는 잘만 간수하면 25년은 은도금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필요하면 다시 도금을 할 수도 있었다. 다시 도금을 하는 경우 고객들은 특정한 식사도구의 쓰임새에 대하여 불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의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발빠른 식기 제조업자들은 다음번 세트를 만들 때 거기서 모아진 문제점들을 고칠 수 있었으리라.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때문이건 과도한 기능적 세분화에 대한 무언의 거부감 때문이건 에밀리 포스트가 활동한 격동의 1920년대에는 꽤나 보수적인 기준으로 식기를 골랐다. 세련된 식탁을 꾸미고 싶어하는 새색시나 가장은 식기를 고를 때 매우 보수적이라야 한다. 괴상하게 뒤틀려 있는 스푼은 홍합 껍질처럼 푹 파여 있건 장미 꽃잎처럼 펑퍼짐하건 모두 스푼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다…… 진짜로 완벽한 물건은…… 18세기 또는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은식기이다. 원숙미가 넘치는 그 은식기를 모방한다는 것은 전문가가 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눈은 전문가의 눈처럼 예리하지 못하므로 최고의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 현대의 복제품을 가지고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새로운 디자인보다는 복제품을 고르도록 하라. 그러나 하나의 포크가 만능인 것은 아니다. 가령 작은 포크와 큰 포크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고기 요리에 맞도록 개발된 큰 포크는 샐러드나 디저트 같은 섬세한 요리를 다루기에는 너무나 굵고 무겁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벼운 식사에 알맞은 작은 포크는 고기 요리를 감당할 만큼 튼튼하고 묵직하지 못하다. 에밀리 포스트가 “황홀할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에 극찬하는” 작은 포크는 사실은 정찬용 포크를 조그맣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포크는 길이만 한 치 가량 짧다 뿐이지 나머지는 정찬용 포크와 기하학적으로 동일하며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포크의 기준에 들어맞는다. “모서리는…… 둥그스름하고 갈퀴는 날씬하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에밀리 포스트의 말에 따르면, 작은 포크는 가장 중요한 포크이다. 큰 포크를 써야 하는 고기 요리만 빼놓고는 아침, 점심, 저녁에 어떤 요리가 나오든지 이것으로 너끈히 처리할 수 있다. 작은 포크는 문자 그대로 ‘만능’이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작은 포크를 소홀히 여기는 법이 없다. 좋은 투자로 여기건 아니면 그저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해하건 은식기는 식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목공 분야에서 기존의 연장이 새로운 과제를 수행할 때 드러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특수한 연장들이 속속 개발되었던 것처럼 기존의 식사도구가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바라던 대로 식탁에서 음식 나르는 일과 먹는 일을 매끄럽고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식사도구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왔다. 사용자들의 불만이 기존의 포크로 굴을 먹을 때 생기는 문제였건, 갈퀴가 구부러진 포크를 수선하러 가져와서 늘어놓은 푸념이었건, 또는 식기 만드는 사람 자신이 저녁을 먹다가 기존의 식사도구가 안고 있는 문제를 발견하였건,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종류의 식사도구가 부쩍 늘어났다. 식기제조업자들이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 정교한 식사도구에 쏟았던 정성과 노력도 새로운 식기의 발전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 시중을 위해 집 안에 깐 레일 에밀리 포스트가 디자인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식기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이 서유럽에서 특권 계층의 기본적인 식사도구로 자리잡아 가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이프와 포크의 크기는 음식과 식사도구에 대한 취향이 달라짐에 따라 커지고 작아지는 과정을 되풀이하였다. 초창기의 포크들은 특히 갈퀴의 모양과 개수와 관련하여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였고 나이프의 날 또한 처음에 갖고 있었던 기능의 일부를 포크에게 내주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식사도구는 크기는 몰라도 형태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수공업이 기계화되고 마케팅이 발달하고 판매망이 넓어지면서 그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나이프, 포크, 스푼에 결함이 있다는 인식이 점차로 확산되었다. 에밀리 포스트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일반 스푼을 가지고 포도를 먹기란 쉽지 않았고, 큰 포크나 작은 포크로 가재를 먹을 때도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더구나 그 어떤 식사도구를 쓰더라도 아스파라거스를 먹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련한 사람은 간단한 기본적인 식사도구를 가지고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운송과 냉장 기술의 발달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요리의 종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 제아무리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몇 가지 간단한 식사도구만으로는 마음껏 식사를 즐길 수 없게 된다. 목공소에서 몇 가지 간단한 연장만으로 모든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간단한 나이프, 스푼, 포크만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즙이 뿜어나오는 포도, 뻣뻣한 가재, 축 늘어진 아스파라거스 따위를 어떻게 하면 편히 먹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전문적인 식사도구가 나왔을 것이다. 전문화가 진행되면 자연히 식사도구의 수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것을 구입하는 데 따르는 금전적인 부담, 깨끗이 씻고 보관하는 데 따르는 부담,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이고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널리 알려야 하는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부담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에밀리 포스트도 그런 분위기가 자리잡는 데 한몫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간단한 식사도구로도 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도 몇 가지 기본적인 식사도구만으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19세기는 기계의 시대였으며 식탁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환상적인 발명품들을 소개한 어느 글에 따르면 흥청망청 노는 것을 즐길 뿐 아니라 그렇게 노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구비하고 간수할 만큼 살림 규모가 크고 복잡했던 중산층 가정에서는 놀이의 “일차적인 목적이 예외 없이 이웃이나 친지보다 얼마나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내느냐”에 있었다. 공식적인 만찬은 그 점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파티에 기름진 요리와 맛난 술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한 농장주는 노는 것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하인들이 자꾸만 걸리적거리는 것이 그 사람은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볼품없는 자기의 저택 안에다 레일을 깔아 식당과 주방, 식료품 창고를 연결하여 그리로 음식과 술을 운반하도록 했다. 주방 문을 통해 빠져나와 소형 철로를 타고 식탁까지 도착한 전기 차는 손님 한 사람 앞에 멈추어 섰고 그러면 손님은 필요한 음식이나 술을 손수 덜어 먹었다. 주인이 버튼을 누르면 차는 다음번 손님 앞에 가서 멈추었다.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후 또 다른 문을 통과하여 식료품 창고로 사라졌고 거기서 다음번 코스를 위한 보급품을 실었다. 기계식 서비스 인형도 비슷한 동기로 생겨났다. 요리사 옷을 입은 키가 약 45센티미터 가량 되는 에나멜 칠을 한 이 인형은 양 손에 음식이 담긴 냄비나 접시를 들고 손님 앞에 섰다. 손님이 인형의 발치에 있는 단추를 누르면 인형이 자동으로 음식을 덜어주었다. 식사 시중 문제를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해결하려던 이 방법이 그것을 발명한 사람들에게 떼돈을 벌어주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식사 시중을 드는 데 뒤따르는 거추장스러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그런 기계 장치가 실재로 존재했었다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좀더 나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갈 데까지 가보려는 만반의 자세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정성스러운 해결책은 음식 자체에 쏟아부었던 극진한 정성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처럼 자존심이 걸려 있었던 만찬의 메뉴를 보면 최소한 수프 두 종류, 생선 요리 두 종류, 네 가지 앙트레(생선과 고기 요리 사이에 나오는 음식`─`옮긴이), 고기 요리 두 종류, 입가심 두 종류, 사잇 요리 여섯 종류는 기본이었다.” 그러니까 고기 요리 다음에도 두 종류의 요리가 더 나왔고 메인 코스 사이사이에 무려 여섯 종류의 요리가 등장하였다는 소리다. 전에 같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려니 생각했을 테지만 얼마전에 영국에서 나는 그처럼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식사 문화의 유습을 경험한 적이 있다. 강의를 앞두고 점심을 먹었는데 미국 같으면 아주 격식을 차린 만찬이 아니면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산해진미가 끝없이 나오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평범한 저녁 식탁에서 나는 미국의 어떤 대학 교수 식당보다도 더 많은 식사도구를 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십이야’ 초연인가 그 다음번 공연인가가 올려졌었다는(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들은 것 같다) 영국 법학원 강당에서 열린 건축법학회 연례 총회 만찬에서는 길다란 식탁 위에 도열한 수없이 많은 종류의 유리잔을 보았다. 유리잔의 모양도 식기만큼이나 다양하게 발전해온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미국인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영국인에 비해 식탁에서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1887년에 보스턴에서 간행된 사회 규범에 관한 책은 지나치게 먹자판으로 흐르는 풍조에 대한 조심스러운 우려를 덧붙이고는 있지만 미국인 역시 먹는 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접시 하나마다 그 옆에 술잔이 일곱 개, 심지어는 아홉 개까지 놓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창 술을 퍼마시는 것을 용인할 사람은 우리 가운데는 별로 없으리라. 어떤 테이블에는 그와는 별도로 두 개의 술잔이`──``하나는 셰리주나 마데이라(디저트용 백포도주)를 마시는 술잔, 또 하나는 클라레(보르도산 적포도주)나 버건디(부르고뉴산 포도주)를 마시는 술잔`──``디저트와 함께 나왔다…… 생굴 다음에는 수프가 나온다. 격조 있는 자리에서는 보통 수프를 두 종류 내놓는다. 흰 수프와 갈색 수프, 아니면 흰 수프와 맑은 수프…… 다음 코스는 생선이고, 그 다음이 앙트레, 또는 “첫번째 코스에서 생선 다음에 나오는 요리”이다. 아주 공을 들인 만찬에서는 두 가지 앙트레가 동시에 나와 시간을 절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이 고기 요리, 그 다음이 로만 펀치(레몬즙, 설탕, 럼주, 거품을 낸 계란 흰자위가 들어간 얼음물`─`옮긴이), 다음으로는 새요리와 샐러드이다…… 치즈는 대개 독립된 코스로 여겨진다. 실제로도 요즘은 각각의 요리를 “고립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는 추세에 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이 너무 지나친 면도 있다. 기껏해야 야채 하나에서 많아야 두어 가지가 오르고는 한 코스가 끝나버린다. 아스파라거스, 사탕수수, 마카로니 같은 야채는 그 자체가 한 코스이다. 이런 지나친 허례허식은 물론 제대로 된 만찬에서나 볼 수 있는 행태이며, 저자는 같은 책에서 “소규모 만찬에서는 술잔 두세 개면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금세기 초에 접어들었을 때 식문화는 적어도 <오늘의 뉴욕 에티켓>의 저자가 보기에는 아주 간소화되어 있었다. 짧은 만찬은 현대의 추세이다. 메뉴는 일반적으로 그레이프프루트(북미 특산의 감귤류 과일), 카나페(얇은 빵에 캐비아 등을 바른 전채), 수프, 생선, 앙트레, 야채 둘과 고기, 샐러드, 디저트, 과일로 이루어진다. 치즈는 때로 샐러드에 앞서 나온다. 아티초크(솜엉겅퀴)나 아스파라거스는 별도의 코스로 잡는다. 그런 음식들을 뒷받침하느라고 19세기에 전문화된 식사도구가 발전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도구의 구조적 기원이 속시원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식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팔아먹어야 한다는 기업가적 동기도 하나하나의 식기가 왜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못한다. 식기는 다채로운 음식들을 먹기 위해 필요했던 베기, 썰기, 찌르기, 담기 등의 과정을 기존의 식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매끄럽게 처리해주지 못한다는 데서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게 되었다. 코스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충분한 식사도구를 식탁 위에 놓거나 아니면 새로운 코스가 시작될 때마다 깨끗한 식사도구를 내놓아야 했다. 사용한 식기를 식사 중간중간에 치워야 하는 것은 당연했을 테고, 그날 저녁의 만찬이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사태를 미리 막기 위해서는 레일이라도 깔아서 그것을 매끄럽게 옮길 필요마저 있었으리라. 격조 있는 만찬을 벌이기 위해서는 접시와 그릇이 아주 많아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그릇을 씻느라 요리 나오는 것이 늦어지기 십상이었다…… 코스 말미에 접시 하나가 치워지면 바로 새 접시가 놓인다. 접시 위에 나이프와 포크가 놓여 있으면 손님은 재빨리 그것을 들어야 음식을 지체 없이 다시 나눠줄 수 있다. 코스와 코스 사이에 그릇을 씻는 것은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따라서 만찬을 품위 있게 하고 싶으면 식기를 넉넉히 준비해야 했다. 그러자면 표준적인 디자인의 나이프, 포크, 스푼을 다량으로 확보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일반 포크나 나이프는 가령 생선이나 조개를 고기 먹을 때처럼 사람들이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굴 포크는 일반 포크나 심지어는 작은 포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언뜻 보면 작은 포크로도 충분히 굴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작은 포크의 길고 약간 휘어 있는 갈퀴는 깊숙한 껍질 안에 들어가 있는 굴을 통째로 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작은 포크를 지레처럼 써서 굴을 떼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다가는 굴이 식탁 위로 날아갈 위험이 있었다. 굴 포크는 갈퀴가 짧았기 때문에 맨 왼쪽에 달린 갈퀴를 칼날처럼 써서 굴을 껍질에서 잘라낼 수 있었다. 또 갈퀴가 약간 곡선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굴 껍질의 모양에 맞추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손잡이도 짧아서 섬세한 동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굴 포크의 끝 갈퀴는 바닷가재 같은 껍질에서 살을 파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굴을 잘라내는 것뿐 아니라 이런 작업까지 하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칼날 역할을 하는 갈퀴는 갈수록 휘어지고 폭도 넓어졌다. 반면에 얇은 두께(칼날 역할을 해야 했으므로)와 뾰족함(살을 찍어내야 했으므로)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두께나 뾰족함과는 상관 없이, 갈퀴가 촘촘히 박혀 있으면 바닷가재의 집게발로 파고들어가 살을 발라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많은 해산물용 포크는 갈퀴 사이의 간격이 넓고 심지어는 끝으로 갈수록 부채처럼 벌어지기도 한다. 작업의 효율성에 대한 배려가 그런 모양의 갈퀴를 낳았다. 유행과 취향이 달라지면서 디자이너들은 미적인 요소를 고려하면서도 사용하기에 가장 편리한 형태를 꾸준히 모색하였다. 선 나이프는 헛된 물건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특화된 식기들이 수없이 생겨났지만 포크의 일반적인 형태는 어느 정도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표준적인 포크를 쓰는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포크에 네번째 갈퀴가 달리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고, 점점 많이 보급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새로운 식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887년에 간행된 예의범절에 관한 책은 포크가 등장하기까지의 간략한 역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있다. 모든 영어 사용권 국가는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이제 나이프는 써는 데말고는 일절 사용을 금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은 “나이프 사용 범위”로 사회를 두부 모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령 독일에서만 하더라도 나이프 쓰는 방법을 보고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것은 믿을 만한 방법이 못 된다…… 이제 포크는 음식을 입으로 실어 나르는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도구가 되었다. 먼저 나이프를 밀어낸 포크는 이제 한때는 난공불락이었던 스푼의 영역까지 자신 있게 밀고 들어가고 있다. 스푼이 크게 퇴조한 반면 승리를 구가하는 오만한 포크는 사치를 엄금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유행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제 차를 휘휘 젓는 데나 수프를 떠먹는 데만 스푼을 사용하며, 포크로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의 예절”에 대한 책을 쓴 또 한 명의 저술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나이프를 사용하는 데 대한 거부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으며” 교양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의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미국에서는 “나이프 사용 범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프랑스 문화에 젖어 있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폴란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에서는 나이프를 입 안에 넣어도 아무도 그것을 몰상식하다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또 다른 저술가는 “완자, 만두 같은 요리는 무조건 ‘포크로만’ 먹어야지 나이프를 써서는 안 된다. 나이프는 불필요하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나이프를 사용하는 사람은 야만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포크는 사람들에게 애용되면서 식탁에서 처리해야 할 작업의 양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무리 전문화된 포크들이 있다고 해도 모든 요리에 빈틈없이 대처하는 것은 힘에 부쳤다. 설상가상으로 포크는 “나이프보다 다루기가 훨씬 어렵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새로운 도구를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다양한 포크가 개발된 것은 음식 종류가 늘어나고 스푼과 나이프의 사용이 시들해지면서 기존의 포크가 나타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유행의 흐름을 타고 등장한 파이 포크를 엘리자 레슬리는 1864년에 쓴 에티켓에 관한 책에서 “어리석지만 인기를 얻고 있는” 물건이라고 묘사한다. 포크로 파이를 먹는 것은 유행의 첨단을 걸으려는 허영심에서 나온다. 무척이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나이프와 포크로 먼저 파이를 잘라낸 다음, 오른손에 든 포크로 그것을 조심조심 가져가서 먹어야 한다니 말이다. 에밀리 포스트가 “지그재그”라고 이름지은 바 있는 그런 손동작은 19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얼마 안 가서 나이프는 파이가 놓여 있는 식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포크 하나로 썰고 찌르는 기능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자르는 갈퀴가 도입되었다. “써는 포크”는 1869년에 리드 앤 바턴 사가 특허를 따냈다. 처음에는 정찬용 포크나 디저트 포크 정도의 크기로 나왔지만 곧 디자인이 파이 포크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차가운 고기용으로 만들어진 좀더 큰 포크도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1882년에 윌리엄 딘 호웰스가 쓴 소설 <현대의 사례>에는 메인 주 외진 산골의 여관 주인이 “다른 사람이 나이프를 쓰듯이 능숙하게 포크로” 파이를 써는 어느 손님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파이 조각까지 포크로 처리하는 그 현란한 솜씨”에 탄복을 금치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손놀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880년대에 접어들어 특수한 써는 갈퀴(오른손잡이용으로)가 달린 파이 포크가 널리 보급된 데 힘입었으리라. 이 포크는 쉽게 구부러지는 것을 방지하느라 폭이 넓을 뿐 아니라 예전의 나이프처럼 음식을 찍고 담을 수 있도록 끝이 뾰족하고 전체적으로 모양이 납작했다. 이 밖에도 샐러드 포크, 레몬 포크, 피클 포크, 아스파라거스 포크, 정어리 포크 같은 것들이 속속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그 기능에 따라 갈퀴가 넓어지거나 두꺼워지거나 날카로워지거나 퍼지거나 또는 기존의 포크가 아주 특수한 음식을 다룰 때 나타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로건 변형되었다. 그러나 모든 포크의 형태가 이처럼 곧바로 발전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며, 나이프는 19세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위기를 맞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다목적 식사도구로는 먹기가 불편한 특별 음식들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었다. 생선과 고기는 살집의 결 자체가 다른 만큼 나이프와 포크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적당히 요리된 생선은 살점이 쉽게 떨어져 나오지만 고기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이프와 포크에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고기와 생선뿐만은 아니므로, 표준적인 나이프와 포크가 왜 생선 요리에 쓰이지 않게 되었는지, 왜 특수한 식사도구가 새롭게 개발되었는지는 이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어쨌든 19세기에 나온 에티켓 교본들은 무엇보다도 생선만큼은 나이프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지만, 그런 분야의 책들이 으레 그렇듯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생선 요리를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포크와 나이프가 널리 쓰이게 되지만 그 당시의 일반 나이프로는 왜 생선 요리를 먹기 어려운지 그 설명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에티켓에 일가견이 있다는 저술가들은 희한하게 생긴 생선 나이프의 정확한 쓰임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는 눈치이다. 에밀리 포스트 같은 사람은 “겨우 생선이나 먹으려고 사들여서 닦는 데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헛된” 물건이라고 혹평하였다. 에밀리 포스트가 이 말을 했던 1920년대의 사정은 그랬을지 모르나, 생선 나이프와 포크가 그 나름의 모양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나이프와 포크가 안고 있던 결함들이 제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여건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헛된” 물건이 왜 지금과 같은 모양과 쓰임새를 갖게 되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능을 깡그리 무시한 디자인 식탁 문화에 변화가 나타나고 마침내는 새로운 형태의 식기까지 등장한 것은 생선이 산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몬즙은 생선의 그런 문제점을 더욱 악화시켰다. 산성을 띤 생선에서 나온 즙은 19세기 말까지 강철로 만들어지고 있던 나이프의 날을 녹슬게 했다. 강철을 써야만 했던 불가피한 이유는 은이 너무 약해서 날카로운 날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익명의 “귀족인”이 집필하였으며 1911년까지 33판이 나왔던 《좋은 사회의 예절과 규칙》이라는 책은 오래전부터 일반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먹어 왔지만 산성의 공격에 취약한 나이프의 강철 날 때문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강철 나이프가 생선의 맛을 망친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나이프가 빵 조각으로 대치되었다. 손가락을 접시 가까이에 두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도 이러한 방식은 오랫동안 유행하였으며 지금도 나이든 사람들은 빵 조각을 선호한다. 어느 날 외식을 하던 사람이 빵 조각을 집어던지고 은제 포크 두 개로 생선을 먹었다. 이것은 삽시간에 인기를 얻어 사람들은 빵 조각 대신 제2의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이것도 잠시 유행했지만, 무거운 포크 두 개로 생선을 먹기란 너무 불편했다. 결국에 가서는 오늘날처럼 앙증맞고 편리한 작은 은제 생선 나이프와 포크로 또다시 바뀌었다. 생선을 나이프로 먹는 데 대한 규제는 “특히 청어 같은 요리를 먹을 때 너무나 불편하다”고 지적하는 또 한 사람의 저술가에 따르면, 생선 나이프와 포크는 1880년대에 이르면 “모든 공식 만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새로운 나이프는 생선의 산 때문에 녹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은으로 만들었다. 생선 나이프는 “모양이 특이했고 크기도 작았으며 그 점은 생선 포크도 마찬가지였다.” 톱니등을 한 초승달 모양의 언월도라고나 묘사할 수 있을 생선 나이프의 특이한 모양은 부분적으로는 접시에 오른 생선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기존 포크의 문제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생선의 머리와 꼬리는 잘라낸다기보다는 잡아찢어야 한다. 등뼈에서 살점을 발라내기 위해서는 그전에 껍질을 찢어내야 한다. 찢어내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선 가시도 많이 생긴다. 은제 나이프는 강철 나이프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생선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적당히 요리된 생선을 등뼈를 따라 토막쳐서 썰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예리하다. 생선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등뼈에서 살점을 발라내는 데는 날이 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생선살이 조각조각 부서지거나 가시에 박히는 것을 막기 위해 날의 폭이 약간 넓어질 필요가 있었다. 나이프 끄트머리 부근의 이상한 톱니는 이제까지 이런 작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포크의 갈퀴 흔적으로, 등뼈를 붙들어 생선에서 떼어낸 다음 접시 위의 빈 자리로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고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은제 생선 나이프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강철 나이프와 구분하기 위하여 장식적인 요소를 더 많이 가미하게 되었다. 생선 나이프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생선 포크도 일반 포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편이다. 그래야 가시를 발라내는 과정에서 생선이 부스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에밀리 포스트는 “특수한 생선 포크는 낭비적”이라고 여겼으며 “갈퀴의 세공 장식을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입장을 취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납작한 첫째 갈퀴를 가진 수수한 [생선] 포크, 끝이 뾰족하고 톱니를 가진 은제 나이프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금기시하지 않는다”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식기들의 형태와 존재는 불과 수십 년밖에 안 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기술에 대한 적응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4년에 스테인리스 나이프가 나오면서 은제 생선 나이프도 어느 정도는 “퇴물”이 되었을지 모르나, 아주 특수한 기능을 갖는 그 기이한 형태는 생선 요리에 관한 한 일반 포크를 완전히 몰아낸 상태였다. 다만, 재료로서는 은이 스테인리스에 의해 “전통”의 세계로 밀려나게 되었다. 꼭 필요한 식기의 명단에 왜 어떤 식기는 포함시키고 어떤 식기는 빼버리는지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은 없지만, 에밀리 포스트는 생선 포크와 나이프를 써서 요리를 먹는 과정에서 이것들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몸소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통”이라는 두리뭉실한 표현에 담긴 했지만 말이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건 그렇지 않건, 보통 쓰는 식기로 특이한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불편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개발된 특수한 식기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끝이 뾰족하고 날이 선 과일 나이프와 날카로운 갈퀴가 셋 달린 과일 포크는 과일즙이 식탁보 위에 튀는 횟수를 줄여주었고 과일을 찢고 써는 일을 훨씬 간편하게 해주었다. 과일 조각의 모양에 맞게 개발되었으며 과육을 쉽게 자를 수 있도록 끝이나 한쪽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 있는 과일 스푼은 티 스푼에 비해 눈에 띄는 장점을 갖고 있다. 티 스푼으로 과일을 먹다가 과일즙이 뿜어나와 애를 먹거나 남의 애를 먹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장점에 공감하리라. 아이스티 스푼은 레모네이드 스푼 또는 아이스크림 소다 스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 역시 차가운 음료수가 들어 있는 목이 긴 잔에서는 티 스푼보다 한결 유리하다. 금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아이스티 스푼은 손잡이 부분이 뻥 뚫려 있어 빨대 역할까지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스푼과 빨대가 컵 안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두 개가 동시에 들어갔고, 스푼에 눈을 찔리지 않으려고 혹은 젖은 빨대가 스푼에 닿지 않게끔 신경을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새로운 발명품이 얼마나 편리한가를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고전적 형태의 식기에서 가지를 쳐서 나온 수많은 특수한 식기들이 사실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한 에밀리 포스트의 말에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되밟지 않겠다는 지혜가 깃들어 있을지 모르나, 그녀의 논리는 얼마간 편향되어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식기들도 사실은 나름대로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식기들은 세기말 사람들로 하여금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우리도 부러워할 만한 우아하고 격조 있는 식사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포도광들이 수집한 20세기 초반의 다양한 식기 세트들은 속도와 능률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또 주택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점차 매력을 잃어갔다. 가령 1965년에 리드 앤 바턴 사가 내놓은 “프랜시스 1세” 세트만 하더라도 1907년에 처음 나왔을 때의 일흔일곱 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열 개의 식기”로 축소되었다. 요즘의 식기 세트는 한 세기 전에 들어갔던 양의 극히 일부분만으로 채워지며, 하나하나의 식기가 다양한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식기의 기능과 이름에 대한 합의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세트에서는 생선 포크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세트에서는 샐러드 포크로 불리운다. 어떤 세트에는 버터 나이프로 나오는 것이 어떤 세트에서는 크기는 좀 작아도 생선 포크처럼 보인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에 나오는 일부 식기 세트는 카탈로그가 없으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현대의 식기 세트들은 대부분 그것이 얼마나 쓸 만한가보다는 얼마나 매끄럽게 잘 빠졌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디자인되는 것 같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모든 합리적 기대들과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능을 깡그리 무시한 디자인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모순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그것은 “형태는 기능을 피한다”는 원리를 추구하는 디자인 학파라고나 할까. 이 학파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참신함, 스타일을 앞세운다. 새로운 식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기존의 식기에서 늘 불균형과 진부함과 투박스러움을 읽어내기 마련이다. 그 점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나이프와 포크는 날과 갈퀴가 손잡이에서 자연스럽게 뻗어나온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식기와 식기의 조화는 여기서 비롯되고 영감 또한 여기서 샘솟는 것이다. 하지만 식기 손잡이에다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경솔한 처사이다. 요는 하나하나의 식기가 얼마나 상품성을 갖느냐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밀리 포스트는 전통이 실패를 최대한 줄여나감으로써 비로소 정착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디자이너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정용품과 산업 디자인 신의 작업에 딱 맞는 연장 주방장의 칼과 가구공의 톱은 유사한 맥락에서 엇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들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많은 요리사가 식탁에 내놓을 근사한 요리든 가구공이 식당에 들여놓을 우아한 찬장이든 그들이 자신의 거창한 작품을 준비할 때 쓰는 도구이다. 요리와 목공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자르는 연장도 일찍부터 매우 전문적으로 상품화되어 왔으며, 작업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칼과 톱이 쓰였다. 그러나 주방장이 갖고 있는 식칼이라든지 목공이 모아놓은 톱의 자루가 얼마나 그럴싸하게 생겼는가에 따라 그 도구가 선택되거나 그 기술자의 역량이나 작업이 평가받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장인은 자루가 군데군데 흠집이 나고 여기저기 부서진 낡은 식칼이나 톱을 보물처럼 여긴다. 견습생이라면 그런 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새 것만 찾을 텐데 말이다. 손때가 묻고 볼품없는 자루를 달고 있는 그런 연장들은 강물에 침식당한 협곡처럼 일평생 주인의 손끝에 닳고 닳아 주인만이 그 진가를 알아본다. 식탁 위의 나이프도 주방용 식칼이나 나무 써는 톱과 기능적인 특성은 비슷하지만 식기로 사용되는 까닭에 전혀 다른 범주에 들어간다. 식탁에서는 사교적 대화가 오가며 음식을 먹는 데 관련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행위를 한다. 그러나 주방이나 목공소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곳에서 장인은 어지럽게 흩어진 부품과 연장 틈바귀에서 대부분 혼자 묵묵히 일만 한다. 반면에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연방 입을 놀리면서 배우 노릇과 관객 노릇을 겸한다. 따라서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며, 사람들은 흔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예절이나 에티켓, 그리고 유행 따위의 원칙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하는 일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음식을 먹고 옷을 입을 때도 스타일보다는 내실을 더 중시했으리라.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여 계층간의 뚜렷한 분화가 생기고 대량 생산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온갖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그런 물건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소비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두 개의 축이 되었다. 하나의 인공물이 쓰이는 사회적 맥락은 그 인공물 형태의 장식적이며 비본질적인 변화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기능적인 세부사항의 발전을 낳는 원동력은 역시 크든 작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결함들이다. 1860년대에 버밍엄에서만 5백 가지나 되는 각양각색의 망치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르크스는 경악했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가의 책략은 아니었다. 만약에 책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분간은 새로운 망치는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으리라. 망치의 종류가 불어나게 된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망치의 쓰임새가 워낙 다양하고 사용자는 고립된 작업공간에서 하루에도 몇천 번씩 두드리는 작업에 딱 들어맞는 망치를 저마다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구통에서 평범한 망치 두 개를 꺼내 사용할 때마다 특수한 망치의 값어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쓰는 망치는 목수들이 흔히 쓰는 못뽑이가 달린 망치와 큰 망치를 쓰기가 곤란한 경우에 쓰는 그보다 조금 작은 망치이다. 못을 박거나 뽑을 때도 당연히 망치를 사용하지만, 페인트통을 따거나 닫을 때도, 끌질을 할 때도, 양탄자를 고정시킬 때도, 자전거의 굽은 흙받이를 펼 때도, 벽돌을 깰 때도, 쐐기를 박을 때도 망치를 쓴다. 못을 박거나 뽑을 때말고는 내가 가진 평범한 망치로는 원하는 작업을 잘해내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내가 망치로 두드리다 물건에 낸 생채기는 내가 쓴 망치를 그런 용도에 맞게끔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페인트통을 닫을 때도 조심해서 두드려야지 까딱하면 뚜껑이 움푹 들어가버려서 페인트통을 제대로 닫을 수 없게 된다. 이럴 때는 대가리가 널찍하고 납작한 망치가 필요하다. 끌질을 할 때는 망치가 자꾸 헛맞거나 미끄러지는데, 이럴 때는 메가 아주 큼직한 망치가 아쉽다. 양탄자를 벽에 고정시킬 때는 벽을 움푹 들어가게 하거나 못을 구부러뜨리거나 손가락을 때리기 일쑤였다. 이때에는 대가리가 길다랗고 좁으며 못을 제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자성을 가진 망치가 좋을 것이다. 일그러진 자전거 흙받이를 펴려고 씨름하다가 내 작은 망치로 그 일을 하기엔 대가리가 너무 크고 넓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대가리가 작고 동그란 망치가 아쉬웠다. 망치 못뽑이로 벽돌을 때려 두 부분으로 쪼개려고 해보았지만 그나마 쪼개진 것들의 가장자리가 모두 삐뚤빼뚤했다. 자루와 수직 방향으로 끌 모양의 갈고리가 달린 망치라야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땅바닥에 나무 말뚝을 박다가 말뚝 끝이 쪼개지기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럴 때는 대가리가 넓고 부드러운 망치가 이상적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어쩌다가 주말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이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이 일에 꼭 맞는 망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려고 들 것이다. 하나의 망치로 5백 가지의 서로 다른 작업을 하게 된다면 나는 적어도 5백 가지의 실수를 저지를 것이며, 5백 가지가 넘는 그 망치의 변형물을 발명할는지도 모른다. 망치뿐 아니라 톱이나 다른 연장도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된 연장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엔 내가 하는 작업의 질과 명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내 직업이 무엇이든간에 나라는 사람의 사회적 평판은 내가 어떻게 망치를 쓰느냐보다는 내가 식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 조목조목 세분화되어 만들어진 식기들은 이제 유행의 뒷전으로 밀려나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식기로 음식을 먹기란 망치를 휘두르는 일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기의 나이프와 포크를 손수 가지고 다니면서 음식을 먹던 시대는 오래전에 마감했기에 이제는 아무리 희한하게 생긴 식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을 다루기에 적당한가 안 한가, 그 손잡이가 우리 손에 꼭 맞는가 안 맞는가를 따지기 전에 말이다. 그것은 식기의 형태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해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관습과 스타일, 유행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경제적 요인이나 변덕스럽고 자의적인 유행의 흐름이 도구의 합리적인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능보다 유행에 더 민감한 물건 에밀리 포스트가 1920년대의 독자들에게 전통에 충실한 식기가 아니면 피하라고 권유했을 때 그녀는 18세기와 19세기 초반의 고전적인 세트를 좋은 식기의 전형으로 내세운 셈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녀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식기야말로 식사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고전적인 식기 이후에 나타난 수많은 전문화된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효과적으로 싸잡아 비난한 셈이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골동품 식기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물론 극소수였겠지만 그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현대식 식기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밀리 포스트가 《사회 관습 청서》에서 골동품 식기야말로 진짜 식기라는 선언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극단적인 소비자 중심의 사고였다. 1920년대에는 돈많은 사람들만이 진짜 골동품 식기를 구할 수 있었지만 사회적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원작을 충실하게 모사한 현대식 복제품을 사서 쓰면서 대단히 흡족하게 여겼다.” 그러나 에밀리 포스트의 말이 모든 사람에게 먹혀들 수는 없었다. 지갑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은 식기 세트를 고를 때 에티켓 서적을 펼친 것이 아니라 우편주문 카탈로그를 뒤졌을 것이다. 1907년에 나온 “영국 최고의 명품” 카탈로그에는 올드 잉글리시, 퀸 앤, 프렌치 피들, 킹 같은 여러 종류의 식기 세트가 소개되어 있는데, 손잡이의 장식을 보지 않고는 이쪽 세트의 포크와 저쪽 세트의 포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포크들의 갈퀴만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을 가리면 읽는 사람은 이것들이 같은 세트에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나란히 늘어놓은 여섯 종류의 생선 요리용 세트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빚어졌다. 손잡이가 아니면 갈퀴가 다섯 달린 생선용 포크들간의 차이점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두 단에 걸쳐 소개된 나이프들은 날의 모양에서 얼마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끝을 다시 뾰족하게 한 것은 기능을 고려했다기보다는 멋을 부린 것으로 보인다. 이 날들은 전체적인 모양보다는 세부적인 장식에서 차이가 난다. 피클 포크와 버터 나이프는 그나마 사진조차 실려 있지 않다. 다양한 크기의 포크와 스푼, 그리고 몇몇 식기들에 가격이 매겨져 있다뿐이지 사진은 실려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이 식기들이 크기만 다를 뿐 일반적인 포크나 스푼과 생김새가 별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세트를 내놓은 데 어떤 음흉한 책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비자는 어차피 그 중에서 한 개밖에 고르지 않는다는 것을 제조업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조업체와 상인 입장에서는 다양한 품목을 개발하는 데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불리했다. 상인들은 소비자가 식기의 기능적인 특성보다는 세부 장식이 화려한 식기 세트를 구하러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세트를 구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26년 이후로 식기 세트의 구성에 어느 정도 고정된 틀이 마련되었지만 에밀리 포스트가 새로운 디자인보다는 복제품을 고르라고 역설했던 바로 그 시기에 미국 소비자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카탈로그를 보면 아직도 다양한 세트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다. 그녀가 “안 좋은 식기는 포크 가장자리가 쓸데없이 날카롭고 갈퀴가 두꺼우며 수수한 디자인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무언가가 덧붙여져 있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두었을 법한 식기들이었다. 가장자리가 날카롭고 갈퀴가 두꺼운 포크는 식사중에 덜 휘어진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두꺼운 갈퀴로 음식을 찌르기에는 곤란했다. 이런 역설적인 결과가 나타난 것은 여러 가지 음식을 입까지 안전하게 옮기는 데 실패한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조금씩 개선을 거쳐 발전해온 고전적인 디자인을 소비자들이 선택하지 않고, 기능보다는 손잡이의 우아한 장식에 치중한 식기를 고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퀴의 모양이야 어떻든간에, 포크를 브리타니아(주석, 구리, 안티모니의 합금으로 광택과 강도가 양은보다 낫다) 같은 좀더 흔한 금속으로 만든 그 위에 은을 덧씌워서 식기의 값은 더욱 싸졌다. 갈퀴가 두꺼워지고 손잡이의 장식이 정교해져서 표면적이 늘어나면 은을 그만큼 얇게 씌우면 그만이었다. 한 식기 세트를 다른 식기 세트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손잡이 부분이었으며, 자연히 우편주문 카탈로그에도 손잡이 부분의 그림이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스푼만 하더라도 어차피 음식을 뜨는 부분이 같으니까 여러 벌을 포개놓고 손잡이 부분만 부채살처럼 펼쳐놓아 비슷한 가격대에서 고를 수 있도록 했다. 어떤 경우에는 “질”과 “매력”을 강조하며 구매자에게 “철저하고 개성적이고 매력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구와 함께 식기의 손잡이 부분만 소개하기도 했다. 개성은 판매의 중요한 관건이었다. 손잡이 장식은 공짜나 헐값에 제공되었다. 잘만 쓰면 평생을 쓸 수 있다는 선전문구는 식기가 더이상 후손들에게까지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매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구입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음을 나타냈다. 정부가 주도한 식기 간소화 정책의 여파로 상품 목록의 내용도 굴 포크나 생선 나이프처럼 특화된 식기를 강조하던 데서 설탕그릇이나 국물을 뜨는 국자처럼 보조 식기를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가장 현대적인 식기를 선전하는 어떤 카탈로그를 보면 여전히 손잡이는 나이프의 날이나 스푼의 주둥이나 포크의 갈퀴에 비해 그림에서 빠지는 일이 드물다. 수집가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식기 카탈로그만 하더라도, 아무리 전문가의 눈으로 보아도 한 세트의 나이프, 스푼, 포크를 다른 세트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라도 하듯이 오로지 손잡이들만 보여주고 있다. 나이프의 날, 스푼의 주둥이, 포크의 갈퀴가 완전한 수준까지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식기 디자이너들마다 견해가 엇갈린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 디자이너들은 기존의 식기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약간씩 다른 해결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계가 지배했던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금세기에 들어와서 식기는 기능보다 유행에 더 민감한 물건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행이 형태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경우에는 도구의 실용적인 측면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망치 수집가를 위한 편람을 보면 최소한 1천 점에 이르는 독특한 연장들의 사진에서 손잡이는 죄다 빠져 있다. 그리고 시골에서 쓰던 도구들을 소개한 책을 보아도 갖가지 종류의 망치를 소개한 그림에서도 망치 자루는 대부분 빠져 있다. 자루가 그나마 제대로 남아 있는 망치들도 대가리만 차이가 나지 자루만 보아서는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다. 이런 그림은 왜 자루는 망치 대가리처럼 세분화되어 발전해오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그것은 장인이 자신의 연장이 얼마나 손에 맞는가보다는 일처리를 얼마나 잘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망치 자루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고작해야 길이의 길고 짧음이었다. 이것은 쥐기 편하게 만들려는 배려라기보다는 망치의 파괴력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국립 아메리카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망치 소개 사진만 보아도 대가리의 생김새가 여러 모양인 반면 자루의 변화 폭은 제한되어 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루처럼 예외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자루를 개성 있게 바꿔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리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손은 하나같이 다르기 마련이어서 망치 자루를 개성 있게 만들려고 하면 사람의 머리수만큼이나 다양한 자루를 개발해야 할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들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장인의 손은 마치 우리가 앞에 놓여 있는 식기에 바로 적응하듯이 자신이 다루는 연장 자루에 곧 익숙해졌을 것이다. 작업대에서는 스타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으로 승부를 거는 20세기 디자이너들 유행과 형태의 관계`──``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행이 형태에 끼치는 영향`──``는 18세기 스태포드셔의 도공들의 작업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도공의 한 사람이었던 조지어 웨지우드는 전통 도자기 값이 너무 낮게 매겨져 있어 “도공들은 많은 돈을 들일 수가 없고, 그러다보니 만족스러운 작품도 만들지 못한다. 우아한 형태미 따위에는 신경쓸 여유가 별로 없다”고 자신의 실험을 기록한 책에서 털어놓았다. 거북등을 모방한 도자기의 경우에는 특히 그런 현상이 두드러져서, “이 부분은 이렇다 할 발전 없이 기나긴 답보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소비자는 여기에 점점 싫증을 냈다. 매상을 늘리기 위해 이따금 가격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 부문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뭔가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했다.” 하지만 도자기를 한 점이라도 더 팔아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고 해서, 도자기의 형태에 일어난 변화가 종잡을 수 없는 유행의 물결에 따라 멋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웨지우드는 새로움이나 개성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유행을 고려하되 기존의 도자기가 갖고 있는 결함을 함께 제거해나감으로써 자신의 사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기존 제품에 “사람들이 싫증을 내므로” 웨지우드는 “우리가 만드는 도자기에 광택이나 빛깔, 형태뿐 아니라 바탕 자체도 확실하게 개선하는” 변화를 주고자 했다. 기존의 형태와 스타일에 대한 웨지우드의 끊임없는 실험은 마케팅 전략과 결함 제거에 초점을 둔 과학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웨지우드는 가마에 대한 중요한 연구로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리버풀의 상인 토머스 벤틀리와 손발을 맞추어 오랫동안 꽃병이나 항아리 같은 장식용 도자기를 디자인하고 생산해서 보급해온 웨지우드는 중대한 기술적 혁신을 광고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 기술적 혁신이 지금은 널리 알려진 신고전주의적 디자인을 가능케 했지만 말이다. 지배적인 조류가 신고전주의라는 점에 힘입어 수용된 측면이 강한 신고전주의 풍의 도자기와는 달리 그 전 단계 도자기들은 유감스럽게도 소비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터라 광고를 하든 안 하든 투자한 자본을 건지려면 먼저 결함부터 고쳐야만 했다. 19세기의 이론가 비올레-르-n은 “양식은 뚜렷한 형식미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보다 동물이 오히려 이 원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이 “건축가의 설계에 양식을 부여해주는 이 근본적이고 소박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명히 정의내림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 양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거창하나 무의미한 미사여구를 신중하게 피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그는 이론이란 실례를 통해서만 뚜렷해진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려면 그것을 피부에 와닿도록 만들어야 한다. 형태에 관해서도 우리가 만일 그런 양식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가장 단순하게 표현된 형태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비올레-르-n은 “가장 원시적인 기술의 하나”인 구리세공을 예로 든다. 그에 따르면 초기의 구리 단지는 오로지 장인의 눈썰미와 모루, 망치에만 의존하여 만들어졌다. 먼저 단지의 바닥을 둥글고 넓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안이 가득 차 있어도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단지를 옮길 때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구멍 윗부분을 오무리며, 따라 부을 때 편하라고 가장자리에서는 다시 그것을 확 펼친다. [이것이] 주어진 제작법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단지의 모양이다. 단지를 쉽게 들어올릴 수 있도록 장인은 리벳(대가리가 둥글고 두툼한 버섯 모양의 굵은 못)으로 손잡이를 달았다. 그런데 단지가 비어 있을 때는 말리기 위해 엎어두어야 했으므로 손잡이는 단지의 몸통 위로 솟아오르지 않게 만들었다. 비올레-르-n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단지가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보지만, 단지가 처음부터 구리세공인의 합리적인 의도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그의 견해에는 현실성이 없다. 더욱이 이 이론가가 기능으로부터 끄집어내는 형태의 몇 가지 세부사항은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령 휘어지지 않도록 좀더 굵게만 만든다면 손잡이를 몸통 위로 솟아오르게 만드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수도 있다. 뒤집어놓은 단지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야 단지가 더 잘 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비올레-르-n이 묘사한 단지는 그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형태의 발전 과정에서 중간 단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물”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형태가 처음에는 개선되었다가 다시 또 나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구리세공인들은 좀더 잘하려는 욕심에서 혹은 선배들을 뛰어넘으려는 조바심에서 진리와 절도의 끈을 놓아버린다. 참신함을 앞세워 구매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시적인 단지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리세공인이 조만간 나타난다. 그런 목적을 위해 그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망치를 좀더 두드려 단지의 몸통을 둥그스름하게 다듬어나간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형태는 참신하여 인기를 모으고 읍내 사람들은 누구나 이 사람이 만든 단지를 하나씩 갖기에 이른다. 구리세공인은 이러한 성공에 고무받아 윤곽을 더욱 둥글게 하여 구매자를 유혹한다. 원칙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그는 제멋대로 공상의 세계로 치닫는다. 그는 손잡이를 솟아오르게 만들고는 이것이 새로운 유행이라고 단언한다. 물을 빼기 위해 뒤집다보면 나중에는 손잡이가 휘어지기 마련인데도 사람들은 이 새로운 단지에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며 그것을 만든 구리세공인은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장인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한 일이라고는 원작으로부터 모든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추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올레-르-n의 주장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비평가나 디자이너마다 단지의 문제점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그 형태에 대한 처방도 당연히 다르게 마련이다. “읍내의 모든 사람이 갖게 될 만큼” 인기 있는 물건이 되었다고 해서 단지의 발전이 이로써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번째 단지의 모양에 흡족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네번째 구리세공인이 나타나 가령 손잡이가 쉽게 휘어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른 단지들처럼 손잡이를 무겁게 만들겠다고 나설 수도 있는 노릇이다. 또는 어떤 특성을 강화시키려던 것이 오히려 또 다른 특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디자인이 실패작으로 끝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 디자인은 다섯번째 구리세공인에 의해 수정되어야 하리라. 또 여섯번째 디자이너는 손잡이가 너무 묵직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먼저대로 가볍게 만들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이런 변형들은 비올레-르-n 같은 사람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이렇게 변형된 물건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쓰이는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모든 단지가 본받아야 할 이상형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취향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그러나 20세기의 새로운 디자이너들은 개인의 취향조차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늘 디자인보다 싼 트랙터 디자인 비용 산업 디자인이 수많은 공장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 한 모퉁이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저 일상적인 작업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공식적인 마케팅 도구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경우에는 적어도 대공황으로 접어들면서였다. 이 분야를 스스로 개척했다고 자부하는 레이먼드 로이는 1919년에 프랑스 해군 대령 제복 차림으로 뉴욕에 도착하였다. 1920년대에 그는 패션 잡지와 작스, 본위트 텔러 같은 대형 백화점을 상대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였다. 한 친구를 통해 알곤퀸 호텔의 사교 모임에 들어간 그는 뒤에 뉴잉글랜드 해변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세련된 뉴욕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1927년에 뉴욕 34번가에 있는 작스 백화점 본점을 위한 광고 작업을 하던 로이는 백화점 사장이었던 호레이스 작스의 초대를 받고 개장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한 주택가의 지점을 찾게 되었다. 로이는 이 백화점의 운영 방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관 체제를 갖추라는 충고였다. 종업원들은 “용모와 친절할 수 있는 자질”을 기준으로 선발되어야 하며 수수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제복을 입어야 했다. 손님이 한창 몰릴 시간에는 쇼핑객들과 “살을 맞대야 하는” 엘리베이터 안내원들은 “예의바르고 정중하고 깔끔하며” 제복을 입어야 했다. 백화점의 포장지, 상자, 비닐백 같은 물품은 공들여 세련되게 디자인해야 하며 새로 개장하는 백화점을 위한 일관된 홍보 정책이 필요했다. 이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로이의 주가도 단숨에 뛰어올랐다. 대공황은 그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했지만 로이는 어쨌든 단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만은 만족할 수 없었다. 로이는 사회를 관찰했을 뿐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상품들도 유심히 보았다. 대공황 이전에도 그는 상품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능적으로 엇비슷한 상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상품은 서로를 차별화시키는 데 실패했는데 그것이 경쟁력 강화의 중요한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품질면에서 차별화시키기는 어려웠으므로 그들은 겉모양으로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피상적인 특성과 외양에서만 조금 차이가 나는 토스터들이 서로 다른 상표를 달고 선을 보였다. 제조업체들은 새로운 토스터를 원하는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로이가 보기에는 “한두 가지만 빼면 상품들은 괜찮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는 “상품의 조악한 외양과 투박스러움…… 그 무식한 디자인에 깜짝 놀랐고 실망했다.” “우수한 질과 추악함이 결합”되어 있어 “그런 형편없는 결합”이 그에게는 신기하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어쩌다가 디자인이 그런대로 어울리는 상품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지나친 “기교”가 물건을 망쳐놓는다. 어지러운 줄무늬, 소용돌이 장식은 구제불능의 싸구려로 물건의 격을 떨어뜨린다. 흔히 말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이다(빛 좋은 개살구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거기다가 값은 또 오죽 비싼가. 자연스러운 맛은 조금도 없다. 바르고 새기고 찍고 굴리고 밀고 들어올린다. 굽고 뿌리고 돌리고 박는다. 쓸데없는 과정이 덧붙여지는 바람에 소비자의 부담만 더욱 커진다. 나는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로이는 또한 “이름난 엔지니어, 경영의 귀재, 금융계의 거물들 대다수한테서 미의식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이 분야에 뭔가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예상한 바였지만 로이가 만나본 사람들은 “퉁명스럽고 적대적이었으며 버럭 화를 내기 일쑤였다.” 본인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자면 로이의 프랑스 억양의 영어도 패션업계 외부의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구매욕을 창출하는 것이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상상력이 풍부한 상품과 발전된 제조기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기업가들의 두려움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로이는 “재계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비전 없이 소심하게 기업을 이끌어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 수 있었던 역량 있고 적극적인 소수의 선구적인 산업 디자이너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몇몇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잘 만들어야 물건이 팔린다, 그렇게 되면 원가도 내려가고 상품의 격은 올라가며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고 소비자에게도 득이 되며 고용이 늘어난다는 점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 때 마침내 성공이 찾아왔다.” 맨 먼저 설복당한 사람은 영국에서 복사기 생산업체를 운영하고 있던 시그먼드 게스터트너였다. 그는 미국 방문길에 로이를 만났다. 1929년 당시에 게스터트너가 만들던 기계는 공장 설비처럼 볼품없어 보였다. 도르래와 동력 피대, 버티고 고정시키는 기능말고는 별로 쓸모가 없는 관처럼 생긴 네 개의 툭 튀어나온 다리가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이 기계의 외양을 개선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그 자리에서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보수에 합의한 뒤 로이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1백 파운드의 점토를 집 안으로 날라들인 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로이의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게스터트너는 처음에는 새로 디자인된 기계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다가 속기사가 복사기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서류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장면을 로이가 스케치해서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승낙했다고 한다. 그런 의뢰가 어떻게 시작되었건간에 로이는 기계의 결함을 제거하여 마침내 전혀 새로운 복사기를 디자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투박스러운 선을 매끄럽게 가다듬고 동체를 차가운 금속에서 따뜻한 목재로 바꾸었으며, 보기 흉한 도르래와 피대를 가리고 다리를 복사기의 동체와 같은 높이로 만들어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를 막았다. 1929년 말에 선을 보인 새로운 모델은 로이에 따르면 “산업 디자인이 의식적인 활동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산업 디자인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게스터트너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생판 모르는 낯선 인물에게 복사기를 새롭게 디자인하도록 결정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기계의 문제점을 툭 튀어나온 다리에 걸려 비서가 넘어지는 그림으로 생생히 보았기 때문이다. 게스터트너는 해결할 문제가 있으며, 그 해결책이 기계의 복사 기능에 나쁜 영향을 끼칠리는 없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다른 기업가들도 비슷한 방식의 설득 과정을 거쳐서 산업 디자이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로이는 1930년대 기업가들의 전형적인 반응을 이렇게 묘사한다. “품질이 양호하고 판매도 호조를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로이는 기업인에게 그 기업인 자신의 눈앞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하나둘 설득해나갔다. 현재 귀하의 모델들은 경쟁품 가운데에서 단연 돋보일 만큼 독특한 외부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문 광고를 한다 해도 그런 게 있어야 우선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현재의 모델들은 맹숭맹숭해서 번득이는 맛과 도드라지는 점이 부족합니다. 상상력으로 무장된 외부의 디자인 팀이 귀사의 엔지니어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일해나간다면 귀사의 문제점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문제의 성격에 따라서 새롭고 독창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쉬운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로이는 그 점이 개발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시인한다. 트랙터 같은 대형물을 다시 디자인하는 값은 비교적 저렴했다. “그것을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늘 같은 물건을 다시 디자인할 때는 엄청나게 높은 값을 불렀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바늘처럼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발전한 물건에도 손가락이 곧잘 찔린다든지 실을 꿰기가 어렵다든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골무를 끼거나 보조 도구를 이용해 실을 뀀으로써 바느질이라는 일차적인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구조, 곧 바늘 끝이 뾰족하고 바늘 구멍이 작아야 한다는 원래의 특성은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인 도움을 얻지 않는 획기적인 새로운 해결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바느질하는 사람들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10만 달러나 되는 큰돈을 기꺼이 내놓을 만한 바늘 제조업체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로운 디자인의 조건 MAYA 재단사와 재봉사는 핀과 바늘이 특정한 방식으로 포장되는 데 익숙해 있으므로 별다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로이 같은 산업 디자이너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포장을 즐겨 새롭게 디자인하면서 기존의 포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새로운 포장과 비교하여 드러낸다. 로이는 회고록에서 1940년대에 자신이 새롭게 디자인한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의 사진을 이전의 것과 함께 실었다. 이전의 담뱃갑은 짙은 녹색이 주조를 이루었고 낯익은 상표명은 눈에 잘 띄는 앞면에, 여러 종류의 담배잎을 섞어 만든 혼합 담배임을 선전하는 문구는 뒷면에 박혀 있었다. 로이에 따르면 녹색 잉크는 값이 비싼데다 냄새가 났다. 그의 새로운 디자인은 담뱃갑의 주조를 흰색으로 하고 선전문구를 옆으로 가져감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없앴다. “담배”라는 말은 눈에 보일락말락 훨씬 작게 박기로 하였다. 상표명과 갑의 모양만 가지고도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붉은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 모두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어 길에 내팽개친 담뱃갑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에게도 충분한 광고 효과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로이의 야심은 작은 포장재를 디자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철로와 기관차에 매료되어 있었다. 소개장을 하나 얻어서 펜실베이니어 철도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던 로이는 처음 만났을 때 철도 장비를 디자인해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다음에 연락하겠소”라는 정중한 거절의 말밖에 듣지 못하자 크게 낙담하였다. 로이는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사장에게 애원하였다. “지금 당장 저한테 디자인 과제를 하나 던져주실 수 없겠습니까?” 생각해둔 대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로이는 망설이지 않고 “기관차”라고 대답했다. 젊은 디자이너의 오만한 태도에 사장은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그는 로이에게 펜실베이니어 역에서 쓰는 재떨이를 새롭게 디자인해보라고 했다. 로이는 비록 사소하나마 철도에 관련된 일을 맡게 되어서 뛸 듯이 기뻤다. 기존 재떨이의 문제점들을 요모조모 꼼꼼히 조사한 끝에 마침내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하였다. 여러 종의 시작품이 만들어져서 역 구내에 비치되었다. 얼마 뒤 로이는 사장실로 불려들어갔다. “재떨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사장은 재떨이가 아닌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로이가 거듭 의견을 묻자 그제서야 사장이 반응을 보였다. “우리 철도회사에서는 이미 끝난 일은 두번 다시 논하지 않소이다.” 사장은 이어서 기관차 개발 담당자를 불러서 곧 대량 생산에 들어갈 예정으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실험 기관차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여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오?” 당연히 문제점이 눈에 띄었다. ‘따로따로 노는 느낌. 부분들이 하나로 녹아들지 못하다. 강철 차체만 하더라도 땜질로 엮어놓은 것 같다. 뒷마무리가 엉성하고 투박하다.’ 그러나 문제의 화차를 설계한 사람이 방 안에 있었으므로 로이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힘차고 억세 보이는군요.” 하지만 속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그려서는 리벳 연결을 용접으로 바꾸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몇백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날렵한 기관차가 등장했다. 그러나 로이 같은 디자이너의 손길이 토스터에서 연필깎이까지 모든 인공물에 닿으면서 형태가 기능보다는 멋에 의해 점점 좌우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가 게스터트너의 복사기를 다시 디자인한 지 20년도 채 못 가서 산업 디자인은 굳건하게 뿌리내렸다. 제2차대전 후의 산업계를 되돌아보면서 로이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장난감 회사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업가도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지 않고 물건을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건 그렇지 않으면 독립적으로 활동하건 산업 디자이너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롭게 개척된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가장 각광을 받았던 사람은 로이였지만 기존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 방식은 그만의 전매특허는 아니었다. 1929년 뉴욕 5번가에 산업 디자인 사무실을 열기 전까지 헨리 드레퓌스는 뉴욕에서 무대 장치를 꾸미고 있었다. 존 디어 사의 트랙터에서 벨 시스템의 전화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김이 닿은 물건들로 그는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으며 야심을 품은 디자이너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한 질문자에게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자질과 적성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실습을 소개했다. 그것은 기존의 디자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백화점 매장을 거닐거나 우편주문 카탈로그를 주의깊게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그저 집 주위를 거닐어라.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십여 개 골라서 그것들을 빈틈없이 꼼꼼히 분석하여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해보라. 드레퓌스는 디자이너로 성공하려는 사람은 건축과 미술, 공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과 함께 어느 정도의 자신감, 그리고 대가가 던지는 객관적인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외양은 기존의 디자인에서 가장 분명하고 또 가장 쉽게 비판할 수 있는 특성이긴 하지만, 드레퓌스는 요즘 이야기되는 인간공학적인 면을 디자인에 반영해야 한다고 일찍부터 역설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책에서 좋은 산업 디자인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모든 디자이너가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드레퓌스는 자신의 다섯 가지 원칙이 산업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을 요약해놓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내용은 첫째 유용성과 안전, 둘째 유지, 셋째 비용, 넷째 상품성, 다섯째 외양이었다. 뒤로 갈수록 기본적인 기능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기존 제품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다시 디자인할 때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가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산업 디자인이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새롭게 개선된” “더 빠른” “더 경제적인” “더 안전한” “더 청소하기 쉬운” “가장 최신의” 등등 과거의 제품이나 경쟁 제품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수 있는 형용어를 있는 대로 동원하면서 상품과 상품 사이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튀는 디자인은 오히려 소비자들이 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이 쓰던 물건의 디자인이 너무 급격하게 달라지면 그것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드레퓌스는 새로운 디자인의 조건을 “MAYA” 곧 “가장 앞서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most advanced yet acceptable)”이라는 말로 집약하였다. 그는 “생존 가능한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혀 새롭고 급격하게 달라진 형태 속에서도 낯익은 패턴”을 볼 수 있어야 “사람들은 그 기발한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산업 디자이너들은 변화를 추구하되 아무리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더라도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멀리 앞질러 가지 않는 지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산업 디자인을 연구한 존 헤스킷에 따르면 일선에서 뛰는 디자이너들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혁신과 안도감을 주는 낯익은 요소간의 섬세한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어렵게 터득하고 있다. 어떤 물건이든지 그것에 기대되는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일종의 멋이다. 그리고 기능보다는 멋이 고속도로든 작업대든 식탁이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현대적 인공물들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식기든 철교든 근시안적으로 지나치게 멋에만 집착하면 지금은 각광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반짝 유행을 타는 설익은 형태로 끝나버린다. 유행이란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바로 제품의 실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선례의 힘 꾼을 골탕 먹이는 퍼즐 조끼 같은 기능적 문제를 여러 가지 형태로 해결한 흥미로운 예가 17세기 말에 도자기를 만드는 데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는 몰라도 “퍼즐 조끼”라는 특이하게 생긴 잔이 이 무렵부터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잔은 튀어나온 관과 속이 텅 빈 손잡이, 그리고 잔을 입에 갖다 대면 예기치 못한 교묘한 방법으로 액체를 실어나르는 숨겨진 도관에서 술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 잔을 쓸 줄 모르는 술꾼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에서도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이런 잔을 꽤 많이 만들었다. 조지어 웨지우드의 전기를 쓴 19세기의 한 작가에 따르면 이런 맥주 잔에 다양한 디자인으로 기본적인 퍼즐 또는 문제에 변형을 주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술을 흘리지 않고는 마실 수 없도록 일부러 까다롭게 만든 잔이었던 것이다. 그 잔은 술꾼들에게 엄청나게 내기를 부추겼다. 대부분의 선술집에서는 손님들을 위해 한두 가지 이상의 다른 잔들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손잡이는 잔의 바닥 가까이에서 시작되어 “배꼽”께까지 올라간 뒤 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다가 꼭대기의 테두리에 가서 붙었다. 손잡이와 테두리는 속이 비어 있고 바닥 가까이에서 잔의 안쪽과 통해 있었으며 테두리를 따라서 몇 개의 작은 주둥이가 달려 있었다. 주둥이의 위치는 만든 사람에 따라 달랐다. 따라서 하나만 남겨 놓고 나머지 주둥이들은 손가락으로 단단히 막아야만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막지 않은 주둥이를 쪼옥 빨면 맥주가 빨려올라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잡이 밑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잘 막지 않으면 그리로 맥주가 흘러나와 술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맥주가 흘러나오면 술꾼은 내기에서 졌다. 조끼에는 술꾼의 약을 살살 올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 새겨진 조끼도 있었다. 어머니 흙의 품에서 태어난 이 몸은 사람의 손을 거쳐서 조끼가 되었도다. 이제 맛난 술을 배불리 담고 이렇게 버티고 있노니 어디, 마실 테면 얼마든지 마셔 보시라. 이런 글귀도 있었다. 자, 와서 실력 발휘 좀 해보시지. 댁하고 내기를 해도 좋은데 쏟거나 뚝뚝 흘리지 않고 마실 수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심지어는 이런 구절까지 있었다. 여보, 실력 발휘 좀 해보슈. 은화 한 닢을 걸어도 좋은데 흘리지 않고는 아마 못 마실 거외다. 사람 약올리는 글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조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도전해보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똑같은 의도를 전달하는 데 이처럼 갖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들 역시 매우 다채로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정작 조끼 자체의 다양함은 퍼즐 조끼에 새겨져 있는 표현의 다양함을 훨씬 뛰어넘는다. 관이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조끼말고도 가운데가 뚫린 조끼나 안쪽 관이 손잡이에서 밑바닥까지 이어진 조끼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모양의 조끼가 있는 것은 술꾼을 골탕먹이는 노릇을 가장 잘해내는 오직 한 가지 형태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도구들의 기능은 사람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속이느냐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목적이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디자이너들에게 열려 있는 다양한 선택 가능성과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상품을 디자인할 때는 보통 여러 해결 방안을 찾지 않지만, 퍼즐 조끼의 경우에는 형태가 다채로우면 다채로울수록 유리했다. 퍼즐 조끼를 만든 디자이너들은 술꾼들이 술을 흘리도록 만든다는 하나의 문제를 엄청나게 많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공물이 사용자를 속이는 데만 중점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생김새에 대한 사용자의 기대는 디자이너에게 실제적인 구속으로 작용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일반 자전거의 구조는 오늘날의 오토바이처럼 비교적 완성된 형태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로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세기말의 자전거는 비교적 탈없이 움직였으며 그 동안에 이루어진 변화라고 해야 브레이크, 기어, 타이어 같은 기계에 대한 개량에 그쳤지 몸통, 바퀴, 핸들, 안장 들에 근본적인 혁신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전거가 기술적으로 이미 정해진 형태로 발전해왔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전거 애용자나 디자이너들은 낡은 일반 저압 타이어 자전거가 속도와 효율성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뒤로 벌렁 드러눕게도 만들어보고 앞으로 수그리게도 만들었다). 자전거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보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두 바퀴 자전거는 자전거가 줄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곧 부담없는 가격, 속도, 안전성, 걷기보다 빠르고 달리기보다 지루하지 않은 상대적으로 쾌적한 운송 수단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이 맞물려서 나온 형태이다. 그러나 완전한 물건이란 없는 법이다. 자전거가 갖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타는 사람이 힘을 써야만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험하지 않은 길로 갈 때라든지, 운송 수단이라는 역할 못지않게, 아니 운송 수단보다는 운동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더 중시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다리 힘이 아닌 다른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전거가 절실히 요구되는 그러한 상황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전거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동력 자전거 곧 오토바이의 출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토바이를 디자인하는 문제는 자전거에 모터를 달아 예전보다 나아진 새로운 운송 수단을 만든다는 긍정적인 말로도 묘사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문제는 기존 장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자전거가 지닌 결함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디자인이 보이는 결함을 없앤다는 목표를 짜임새 있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에 다름아니다. 가령 더 빠르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전거에 모터를 단다”고 하는 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해결 방안을 강하게 나타낸다. 실제로 발명가로 하여금 반성과 함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발명가의 창조적인 정신 속에 떠오르는 비언어적인 착상이다. 그러한 비합리적인 창조성의 도약을 언어로 합리화시킨 다음에 남는 숙제는 부작용을 되도록 줄이면서 그 해결 방안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풀어갈 것이냐이다. 드 윙에 남아 있는 가짜 연료 탱크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비언어적 사고에 대한 유진 퍼거슨의 통찰력 있는 논문이 실려 있는 <사이언스> 지의 표지 그림을 보면 세기말에 이루어졌던 자전거에 모터를 다는 여덟 가지의 시도를 알 수 있다. 모터는 구동 메커니즘을 통하여 어떤 식으로든 바퀴에 연결되어야 했을 뿐 아니라 연료 탱크와 나아가서는 배터리까지도 자전거의 몸통에 달아야 했다. 이런 아이디어들은 순간적인 착상으로 떠오른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표지 그림에 생생히 나타나 있듯이 오토바이의 외양은 그 부품들이 어떤 식으로 설치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여덟 가지의 구조는 기술적으로 모두 문제가 없다고 가정하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갖는 장점과 단점을 확인할 때 가장 잘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형태는 어차피 동전을 던지면 앞면 아니면 뒷면 둘 중의 하나는 나오기 마련이라는 의미에서만 기능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박의 비유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마지막에 던진 동전에 의해서 승패가 갈리는 도박사와는 달리 디자이너는 여러 번 던진 결과물 가운데 어떤 것에 승부를 걸어 시장에 내놓을지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를 구성하는 부품들의 수없이 많은 조합과 순열 가운데 어떤 것은 다리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모터를 운전자로부터 멀찍이 떼어놓았다. 그러나 모터를 오토바이 뒤편에 달려면 몸통이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자연히 제작비가 올라가고 무게 중심에도 변화가 온다. 여러 가지의 후보 가운데 어느 것이 “최선의” 방안인가는 결국 취향과 절충의 문제이다. 끝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오토바이의 세부적인 형태는 그 기능에 의해 미리 결정되기보다는 어떤 것이 가장 적은 문제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선택으로 귀결된다. 가령 연료 탱크의 위치를 보면 이 점이 명확히 입증되는데, 우열을 판가름하기 힘든 엇비슷한 구조들 가운데 임의로 선택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토바이의 본질로 굳어져 새로운(개량된) 디자인에서 오토바이의 구조가 기능적으로 재편성되더라도 탱크의 흔적(생존 가능한 형태)은 예전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디자인 평론가 존 헤스킷은 여기에 적절한 예를 들고 있다. 1957년에 영국에서 생산된…… 아리엘 “리더” 오토바이는 연료 탱크가 몸통 뒤편에 달려 있었지만 기존의 형태와 비슷한 가짜 탱크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 가짜 탱크는 나중에 일제 혼다 “골드 윙 1000”에도 여지없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가짜 탱크를 절반 가량 열면 전자 제어장치가 나타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제작사들은 그 형태가 기능적으로는 중복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의 전통적인 이미지가 갖는 강력한 힘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꼈던 것이다. 디자인 문제의 세부적 특성이 형태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한 모터(이제는 “엔진”)가 너무 커져서 그것 자체가 바퀴, 안장, 그 밖의 장치를 직접 거느리는 틀이 되어버린 최근의 오토바이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혁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초창기의 동력 트랙터를 연상시킨다. 거기에서는 엔진과 변속장치가 차축, 핸들, 그 밖의 주변 장치들을 거느리는 중추 역할을 했다. 간단한 쇠안장이 변속장치 위에 얹혀지고 운전자의 발은 등자 같은 돌출물 위에 놓이게 되어 영락없이 말을 타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최초의 트랙터는 실제로 말 뒤에 묶었다. 말의 힘을 동력으로 쓴 것은 아니었지만,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기계적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이먼드 로이에게 처음 떨어진 과제의 하나는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트랙터의 디자인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194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이 트랙터는 바퀴 위에 엔진을 하나 덜렁 얹어놓고 철판으로 엉성하게 가려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핸들 연결장치는 마치 말고삐를 연상시켰다. 트랙터의 좌석이 너무 높아서 한쪽 다리를 번쩍 쳐들어야 겨우 앉을까 말까 했으며, 쇠살이 박힌 바퀴는 진흙을 운전자에게 날리든지 아니면 진흙이 잔뜩 껴서 움직이지 않기 일쑤였다. 또 세발 자전거 모양의 구조는 방향을 급히 튼다든지 할 때면 트랙터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로이는 고무바퀴를 넷으로 하고 바퀴살을 없앴으며 흙받이를 추가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제 트랙터는 말보다는 자동차에 가까운 형태로 서서히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로이가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의 트랙터를 위해 했던 작업을 헨리 드레퓌스도 존 디어 사의 트랙터를 위해서 했다. 두 사람은 “트랙터다운” 전형을 나타내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각자 뚜렷한 개성을 보이고 있다. 디자인되는 모든 물건은 그 형태 안에 자의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로이는 자신이 이끄는 디자이너 팀들이 새로운 모델의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어떤 식으로 작업해나갔는지를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이를테면 이 팀은 차량의 앞부분, 저 팀은 차량의 뒷부분 하는 식으로 서로 다른 팀들에게 각각 다른 과제를 주었다. 그리고 기본틀 곧 컨셉트를 잡아나가는 작업이 시작된다. 처음에 설정된 기한에 맞춰 각 팀은 그전까지 작업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얼마 뒤에 “개략적인 스케치들의 더미”가 쌓이면 그때부터 로이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제 ‘중요한’ 제거 과정이 시작된다. 나는 스케치한 것들 가운데 싹수가 보이는 디자인을 골라낸다.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이것들을 다시 서로와의 관련 속에서 조합하고 배치한다. 예를 들면 측면을 약간 들어올린 스케치와 그럴싸한 앞부분의 스케치를 결합시켜본다. 여기서 새로운 디자인의 조합이 나타난다. 이것을 다시 정밀하게 스케치한다. 이런 꼼꼼한 분석 과정을 거치다보면 디자인이 너댓 개로 모아진다. 디자인의 최종 형태는 실물 크기의 석고나 나무 모형으로 재현되어야 하는데 이 단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의적인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여러 모델을 동시에 제시할 경우에는 색채에 대한 선호가 선택 과정에 부당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모두 같은 색으로 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연구 개발에 쏟아부은 돈을 거두어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디자인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이다. 변화의 필요성은 계속해서 제기되기 마련이며 그런 변화가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나타내기 위해 또 하나의 완전한 스케치가 그려져야 한다. 생산에 들어가도 좋다는 마지막 승인이 떨어짐으로써 디자인 작업은 일단락지어진다. 그것을 설계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설계 및 생산 부서의 몫이다. 하나의 디자인을 구체화한다는 것은 경영자의 최종 결정을 제품 생산이 가능하도록 정교한 설계명세도로 옮기는 작업을 뜻한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는 하나의 디자인 문제를 놓고 수많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 디자인이 저 디자인보다 왜 더 나은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나 경제성을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제품의 외양이 기술진의 판단에만 맡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 사람이 엔지니어로서의 역할과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겸해야 할 경우 그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각각 다른 사고의 패턴을 따를 수밖에 없다. 로이는 자신의 한 고객이 다른 업체를 상대로 낸 특허권 침해 소송에 연루되었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디자인에는 운명처럼 결정된 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실감나는 사례를 보여준다. 로이에 따르면 그것은 “명백한 사건”이었다. 로이가 디자인한 제품의 외양을 경쟁업체가 슬쩍 도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측은 이 디자인 특허는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제대로 기능하는 물건을 만들려면 부득이 이런 디자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변이었다. 재판은 몇 주를 질질 끌었고 마침내 로이도 원고측 증인으로 불려나가게 되었다. 변호사는 로이에게 문제의 상품이 “다른 식으로 디자인되더라도 여전히 그 실용성과 기능을 잃지 않겠는지,” 또 본인이 직접 증명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변호사는 다른 디자인의 예들을 보여달라고 요청했고 로이는 스케치로 얼마든지 그려줄 용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로이의 술회는 이어진다. 나는 이젤을 펴고 그 위에 제도판을 얹었다. 그리고 뒤에 앉은 사람한테도 잘 보이도록 큼직한 스케치를 재빨리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십 분 만에 스물다섯 가지의 디자인을 그려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럴듯하고 실용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각각 달랐다. 그러한 형태가 자의적일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성공을 강조한 것은 로이가 자부심에 넘쳐 있었고 사업 감각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된 디자인도 디자이너와 고객을 모두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는 절충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 내놓을 수 있는 답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그러므로 결함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디자인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트 형제의 남다른 업적 로이만큼 집단 작업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들, 기관차처럼 거창한 기계를 다루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디자이너보다는 발명가로 즐겨 부른다. 회로 차단기, 전기 스위치, 프라이팬이나 커피메이커 같은 가전제품을 물에 담가도 될 수 있게끔 만들어준 방수 자동온도조절장치를 발명한 린든 버치는 뉴저지 주의 한 자동온도조절장치 생산업체에 설계 엔지니어로 취직한 뒤 회사측의 기대에 따라서 발군의 실력을 처음으로 발휘하였다. 그는 자신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모양과 얼개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내가 하는 일의 태반은 기하학이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간단한 기하학적 구조의 창출이 나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머리 속으로 기하학적 얼개를 떠올리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런 얼개가 떠오르면 나는 그것의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는데 이 과정에서 열에 아홉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그럼 나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제대로 된 얼개를 떠올렸을 때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버치는 같은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해결안을 거듭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떠올린 아이디어의 90퍼센트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아이디어 하나하나는 나름대로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버치의 눈에는 미흡해보였고 성에 안 찼을 따름이다. 가령 그가 1940년대 말에 했던 중요한 발명품의 하나로 자동온도조절장치에 쓰는 금속 개폐기가 있다. 기존의 개폐기는 원반 모양의 금속이 온도 변화에 반응하여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갑작스럽게 움직인다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반응하는 금속 경보기나 손목을 순간적으로 죄는 수갑도 이와 거의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버치는 기존의 낯익은 제품들에 대한 변형을 과감히 거부하고 납작한 금속판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르면 이것이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해 비틀린 형태로 반응하면서 아주 작은 영향을 받아도 큰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겠다는 착상을 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영향에 큰 반응을 나타낸다는 동일한 기능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으며, 덕분에 생산업자들은 다른 이들의 특허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원반 금속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새로운 개폐기와 자동온도조절장치를 만들어 특허까지 받게 되었다. 모든 특허는 명시된 “권리”를 주장한다. 그 권리는 흔히 “여기서 권리로서 인정받는 것은” “우리의 권리는” “나의 권리는” 같은 표현 다음에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일쑤이다. 권리의 명기는 특허의 말미에 가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권리 내용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담는다. 특허 전문 변호사 데이빗 프레스먼에 따르면 그런 권리는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다음은 이 발명품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이 요소들을 모두 갖고 있는 물건, 또는 이 요소들 모두에 추가 요소를 덧붙인 물건, 또는 이 설명과 같은 물건을 제작하고 사용하고 판매하는 사람은 특허권 침해로 인해 생기는 법적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프레스먼은 특허신청서를 직접 작성하기를 원하는 독립적인 발명가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문장으로 구성하는 기본 원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권리문을 잘 쓰는 그 밖의 비결”이라는 제목 아래 “될 수 있는 대로 ‘실질적으로’ ‘대체적으로’ ‘대략’ 같은 약아빠진 단어들을 쓰라고” 충고한다. 프레스먼은 또 왜 “대다수의 특허 변호사들이 권리 주장이 너무 짧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권리 주장이 너무 짧으면 알맹이가 얼마나 되는가와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심사관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고) 오히려 깎아내릴 것이다. 그래서 많은 특허 변호사들은 주저리주저리 짧은 문장들을 덧붙여서 될 수 있는 대로 서론을 길게 만들고 기능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너무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사설을 길게 늘어놓는 것,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특허가 안고 있는 법적인 함의로 말미암아 기술 문서의 작성이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제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다. 1906년에 라이트 형제 곧 오빌과 윌버 라이트는 변호사를 통하여 자신들이 만든 비행기에 대해 자그마치 열여덟 건의 특허를 출원하였다. 이 가운데 첫번째 특허는 오늘날 우리가 복엽 비행기의 날개 가운데 하나로 부를 만한 것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비행기 전체를 뜻하는 에어로플레인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었다. 비행기계에서 대개 평평한 에어로플레인은 측면 가장자리 부분이 에어로플레인 몸통의 표준적인 수평면 위아래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움직임은 비행 방향과 수직을 이루는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측면 가장자리 부분은 에어로플레인 몸통의 표준적인 수평면과 비교적 다양한 각도를 이루면서 움직일 수 있다. 대기에서 서로 다른 입사각을 제공하면서 측면 가장자리 부분을 실질적으로 위에서 묘사한 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에서 애매모호하지 않은 몇 가지 표현 가운데의 하나는 라이트 형제가 처음 구상한 비행기에서 에어로플레인 곧 날개는 “대개 평평”`──`그러니까 플레인은 곧 평면이다`──`하다는 구절이다. 라이트 형제는 물론 다른 이들도 가운데가 볼록 솟아오른 날개가 양력이 뛰어나고, 따라서 복엽 비행기의 이중 날개는 불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에어로플레인”이라는 말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결국에 가서는 깨닫게 되었다. 스텔스 폭격기는 온통 날개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에어쇼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비행기에는 날개라고는 흔적이 겨우 남아 있을까말까 하다. 그러한 권리 표현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형제는 다른 발명가들처럼 남들이 비행기계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낼 새로운 디자인과 개량을 어떻게 해서든지 한발 앞서 차지하려는 시도를 했던 셈이었다. 라이트 형제만 하더라도 기존의 에어로플레인과 그 밖의 부품들이 갖고 있는 결함을 발견하고 분석한 뒤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안정된 유인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독보적이고 유일무이한 해결책으로 여겨져 한몸에 칭송을 받았던 부품들도 나중에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그것들은 분명히 유일무이한 형태가 아니었다. 라이트 형제는 남다른 업적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으로 성공적인 비행을 완수했던 디자인은 그 밖에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마치 헨리 크레머가 상금을 내걸었던 비행 대회에서 우승자 고사머 콘도르 호만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잊혀져갔다. 그 중에는 “두 사람이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면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게 되어 있던 전통 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발명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1마일 거리를 8자 비행으로 횡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도 보여주지 못했다(우승자가 가려진 뒤 실패한 디자인에 대한 개선 노력이 계속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기술적 차원에서건 그 어떤 차원에서건 눈부신 업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목표는 있어도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서로 각축을 벌이는 설계안과 디자인들 사이에서 판단을 내릴 때 준거가 될 만한 참다운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목표에 이르면, 그 목표를 이룩한 형태나 원칙에 따른 후속 시도들이 그것을 잣대로 경쟁을 벌이거나 혹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다 보니 인공물의 형태가 특허권에 대한 주장과 그 반대 주장들이 엮어내는 애매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발전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참혹한 실패 성능에 대한 경쟁 못지않게 디자인을 놓고 벌어지는 뜨거운 각축도 형태가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지만 우리는 이것을 쉽게 잊곤 한다. 1851년 일군의 정책입안자들은 그해에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만국산업대박람회를 열기로 결정한 뒤 하이드 파크 안의 16에이커에 이르는 부지에다 한 동짜리 거대한 국제관을 임시로 짓기로 뜻을 모으고 설계 공모에 나섰다. 모두 245가지의 설계안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공모위원회에서는 마땅한 안이 없다는 판단 아래 스스로 만든 현실성이 희박한 잡탕 설계도를 들고 나왔다. 이것이 여론의 빈축을 사게 되자 원예가이며 온실 설계가였던 조지프 팩스턴은 자신의 독창적인 안을 위원회에 제출하면서 <런던 화보> 지에도 이 정보를 흘렸다. 결국 팩스턴의 안이 채택되고 그렇게 해서 지어진 수정궁은 그 뒤 수십 년 동안 박람회 건물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박람회가 끝나갈 무렵 수정궁에서 나오는 철재와 유리를 재활용하는 방안을 놓고 또 한 차례 공모가 있었다. 출품작 가운데는 수천 피트 높이의 유리탑을 짓자는 안도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팅커 토이 레고를 가지고 다리나 기중기를 만들 듯이 일정한 단위의 건축 부품들로 높고 날씬한 건물에서 낮은 정사각형 건물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건축물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고층건물의 디자인 공모에 쏟아진 응모작들을 보면 제출 요건에 명시된 기준은 하나더라도 그것을 살리는 형태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카고의 트리뷴 타워 설계는 공모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그 응모작들은 고전주의 양식의 웅대한 기둥 모양을 한 기발한 건물에서 당선작이 된 무게 있는 고딕품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시카고 중앙도서관의 신축 건물 설계안에 대한 공모의 역사를 추적한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보아도 하나의 목표를 놓고도 참으로 여러 가지 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 또 미적 균형이나 상징성에 대한 배려, 최종 선택에 곧잘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고려 따위가 기능을 뒷전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디자인의 뜨거운 경쟁 역사와 대형 사업이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이다. 시드니 항에 들어설 이 종합공연장의 설계 공모에 모두 223점이 출품되었고 그 중에서 덴마크의 건축가 이외른 우트존이 기구 없이 맨손으로 그린 스케치가 당선되었다. 그의 설계도는 커다란 조가비를 엮어놓은 듯한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마치 범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지만 공학적인 요소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었고, 그러다보니 설계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건물을 짓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1973년에 완공되었을 때 오페라 하우스는 건축과 공학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건축물로 아낌없는 칭송을 받았지만 사실은 원래 예정보다 9년이나 늦게 문을 열었고 당초 건설비의 1,400퍼센트가 이 건물에 들어갔다. 건축가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의적인) 형태의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임시변통의 공학적 결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건물의 관리 유지를 어떻게 해나갈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89년에 수백 건의 건물 보수 사업이 늦춰지고 오페라 하우스의 균열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장장 10년에 걸쳐 모두 7천 5백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되는 복원 사업이 시행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의 명물로 자리잡은 지 오래지만 기능면에서는 이만저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오페라 하우스의 형태가 안고 있는 결함은 오토바이나 트랙터, 식기의 형태에서 나타나는 결함처럼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형태가 공학을 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따르는 드문 예를 우리는 특정한 대형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바라는 기능에서 단 한 가지의 형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형 교량은 가장 순수한 건축공학적 구조물로 꼽을 수 있다. 교량의 형태는 그 밑에 놓여 있는 공학적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량들의 일부는 공모를 거쳐 치열한 경쟁 끝에 설계도가 마련되었으며 그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유럽이었다. 유럽에서는 로베르 메야르, 외젠 프레시네 같은 선구적인 건축가들이 신종 형태를 콘크리트 공법 등의 새로운 기술에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자연과 맞부딪히게 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미학과 교량 건축에 대한 무게 있는 글을 써오고 있는 데이빗 빌링턴은 디자인 공모는 일반 대중과 설계 공모를 주관하는 공공기관 사이의 건설적인 교류를 낳을 수 있으며 그러한 교류가 더 우수한 공공건물의 건설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빌링턴에 따르면 설계 과정에 대중이 참여함으로써 실제로 얻어지는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의 공공사업을 두고 잘잘못을 판정하기는 비교적 쉽다. 그러나 동일한 장소에 들어설 건축물을 위해 정성껏 마련된 여러 개의 설계도를 빈틈 없이 검토하여 순위를 매기고 기본구상, 세부사항, 비용, 외양 들로 나누어 그 순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이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은 경쟁자뿐 아니라 심사위원회에게 부담을 주며 심사위윈회로 하여금 삼척동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정확한 보고서로 교량 설계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대중에게 설명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교량이나 건축물도 다른 기계처럼 먼저 기능을 정의내리는 데서 작업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와 그 해결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무엇인지 비로소 뚜렷해진다. 그러나 설계의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그 해결을 저절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의 공모에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설계안들에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다리를 해협이나 골짜기에 건설할 때 외부 조건에 따라 아치 교에서 현수교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다양한 설계가 있다. 아치 교와 현수교는 구조적인 면에서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다. 아치 교가 압축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현수교는 인장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설계자가 어떤 방안을 선호하는가는 재료(가령 단철이냐 주철이냐, 강철이냐 콘크리트냐)뿐 아니라 공법(위에서 아래로 짓느냐, 아래에서 위로 짓느냐)에 의해서도 크게 달라졌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돛대가 높은 배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치 교가 선호되었다. 반면에 20세기에 들어와 뉴멕시코 주에서 다리 중간중간에 탑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현수교 대신 반듯한 다리를 선호한 까닭은 폭주하는 교통량에 대응하여 차량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을 한 차선이라도 더 뽑아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공식적으로 엄격하게 시행되는 제도이건 그렇지 않으면 한 건축사무소 내의 여러 팀들간에 이루어지는 비공식적인 각축이건 설계에서의 경쟁은 기능이 형태를 유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초창기 구상 단계에서의 자유로운 작업은 당사자 모두에게 커다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건축물의 궁극적인 성패는 다양한 형태와 세부사항을 얼마나 신중하게 검토하였는가에 달려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닫으면 열리리 치로 때려 부숴야 열리는 깡통 1795년에 음식물을 저장하는 방법을 두고 1만 2천 프랑의 현상금이 내걸렸지만 이 상금은 14년째 금고에서 썩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 사는 니콜라스 아페르라는 사람이 조리된 과일과 야채, 고기를 병에 담은 다음 그 병을 끓는 물 속에 오래 담가두어 이전까지 음식물 보관 방법을 개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끝끝내 못 해냈던 박테리아를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1810년에 발표한 <저장술>이라는 글에서 이 방법을 공개했고, 이 글은 삽시간에 영어를 포함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아무리 밀폐가 잘 되었다 하더라도 병은 깨지기 쉬웠다. 그리고 유리병은 저장된 음식을 군인들이 격전을 벌이는 전장까지, 혹은 탐험가들이 헤쳐나가는 험난한 미개지까지 갖고 가는 데 적잖은 걸림돌이 되었다. 1810년에 런던의 상인 피터 뒤런드는 “양철 깡통”에 음식을 저장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없앴다. 돈킨 앤 홀 사는 런던에 “식품저장고”를 지었고 단철에 양철 피막을 입힌 깡통은 영국 육군과 해군 병사들에게 집에서 만든 것과 같은 음식을 날라다 먹일 수 있는 훌륭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처음에는 음식이 변질되지 않도록 잘 보존한다는 목적(또는 기능)에만 관심이 쏠렸지 깡통에서 음식을 어떻게 꺼내 먹느냐 하는 문제는 소홀하게 생각하였다. 자고로 어떤 인공물이 개발되면 거기에 따르는 보조 인공물의 개발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음식을 저장하는 데 따르는 복잡한 문제들이 깡통 발명가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했던 사안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게 보존된 음식을 부담없이(일일이 대장간에 가서 망치로 때려 부숴야 할 필요 없이)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깡통을 만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깡통이 처음 개발될 무렵에는 보존 기능에만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전해지는 말로는 군인들이 칼이나 총검, 심지어는 반세기 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이 그랬듯이 총으로 통조림을 격파해야 했다고 한다. 돈킨 앤 홀 사는 제품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통조림 안에 있는 내용물을 어떻게 하면 점잖게 꺼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을 터인데도, 1824년에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가 극지방 탐험에 싣고 갔던 쇠고기 통조림에는 “끌과 망치로 뚜껑을 따시오”라는 안내문이 아직도 적혀 있었다. 쇠붙이 용기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1830년대에 이르면 영국 상점에서 일반인을 위한 통조림을 팔았다. 1920년대 초반 미국에 최초의 통조림 공장을 지었던 영국인 윌리엄 언더우드가 집 안에 나뒹구는 연장을 있는 대로 동원하여 수단껏 깡통을 열라고 권한 것은 동시대인들의 고충을 대변하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적절한 연장이 절실한 상황이었음에도 당장은 어떤 변화도 오지 않았다. 두꺼운 쇠로 만들어지던 초창기의 깡통은 “때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식물보다 더 무거웠다.” 가령 극지방 탐사에 싣고 가는 송아지 통조림은 깡통 무게만 자그마치 5백 그램이었으며 두께도 5밀리미터나 되는 양철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먼 거리까지 통조림을 운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 안 가서 끌과 망치 대신 통조림을 열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되었다. “최초의 깡통따개는 상점 주인이 카운터에서 손님에게 깡통을 따주던 정교한 기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초창기의 깡통은 음식을 저장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무게와 음식을 꺼내기 어렵다는 두 가지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상점 주인이 물건을 팔 때마다 일일이 통조림을 따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내용물을 곧바로 먹어야 한다는 소리이고, 그렇게 되면 식품저장고에 음식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이런 걸림돌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발명가는 깡통을 좀더 얇고 가볍고 쉽게 조립했다 분해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였고, 어떤 발명가는 깡통을 따는 특수한 도구를 개발하는 문제와 씨름하였다. 1850년대 말에 놋쇠가 강철로 바뀌면서 깡통은 전보다 얇아졌지만 강철이 가벼운 만큼 유연성도 늘어나 딱딱한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둥근 테두리를 덧붙여야만 했다. 테두리는 여태까지 깡통의 튼튼한 옆구리에 겹쳐놓았던 윗뚜껑과 아랫뚜껑을 고정시키는 역할도 하였다(요즘도 강철 깡통들을 보면 종이 레이블 밑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물결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유통 과정에서 온도 변화에 따라 통 모양이 변형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1858년에 코네티컷 주 워터베리의 에즈라 워너는 획기적인 깡통따개로 특허를 따냈다. 일상용품의 기원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 “절반은 총검 절반은 낫”처럼 생겼다고 묘사한 이 커다란 굽은 날은 깡통 가장자리에다 누르며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후배 발명가들처럼 워너 역시 자기 두뇌의 소산을 좀더 원시적인 형태들과 비교함으로써 그것들이 안고 있었던 단점이나 눈에 띄는 결함을 슬그머니 드러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다른 도구들에 비해 내가 만든 물건이 갖고 있는 장점은 빠르고 부드럽게 자를 수 있을 뿐더러 어린아이가 써도 그다지 위험하거나 어렵지 않을 만큼 사용이 간편하다는 것, 그리고 곡선 커터를 떼어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만약에 곡선 커터가 망가지면 다른 부분은 모두 그대로 두고 그것만 바꿔 달 수 있기 때문에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무엇으로든지 쾅 하고 충격을 주어 구멍을 뚫을 때와는 달리 송곳으로 뚜껑에 구멍을 뚫어도 액체가 밖으로 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도구들은 남북전쟁 기간중에도 쓰였지만 군인과 가정주부는 오래전부터 좀더 손에 익은 도구로 통조림을 따 버릇했으므로 전문적인 따개의 보급은 더디기만 했다. 1885년에 가서야 영국 육해군 협동조합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각종 장치와 제품을 있는 대로 쓸어담은 상품 목록에 처음으로 깡통따개를 소개한다. 협동조합의 1907년 상품 목록에는 깡통을 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나이프”를 선보였는데 그 중에는 황소머리라고 하는 도구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것을 널리 보급된 최초의 가정용 따개로 보기도 한다. 이 따개는 실제로 작업을 하는 부분이 황소머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반대편의 황소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기 좋게 말려서 우아한 손잡이를 이루었다. 황소의 목에 박힌 나사로 L자형 날이 고정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동물의 아래턱에 해당했고 실제로 깡통을 잘라나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L자형 날은 사실상 이와 비슷한 종류의 모든 따개와 마찬가지로 쐐기와 지레의 원리에 따라 작업을 해나갔다. L자형 날의 반대편 끝은 황소의 어깨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것은 길다란 날이 쓸데없이 휘거나 부러지지 않게 하고 통조림을 따기 전에 뚜껑에 먼저 작은 구멍을 뚫는 데 더없이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그 모양이 반드시 힘센 황소의 모습을 연상시키지는 않더라도 낡은 깡통따개를 써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쓰기에 불편한가를 잘 안다. 움직임이 연속적이 아니라 툭툭 끊기듯 진행되므로 들쭉날쭉한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좀더 연속적이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통조림을 딸 수 있도록 바퀴를 단 최초의 깡통따개는 1870년에 코네티컷 주 웨스트 메리든의 윌리엄 라이먼이 미국에서 처음 특허를 따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발명한 깡통따개의 한쪽 끝은 통조림 윗뚜껑 중앙에 구멍을 뚫고 버티게 되며 이것을 버팀목으로 하여 따개의 손잡이가 깡통 자르는 바퀴를 당기도록 되어 있었다. 이 도구는 깡통 크기가 달라질 때마다 조정해야 했는데, 그 작업의 효율성은 송곳으로 구멍을 얼마나 정확히 뚫느냐에 달려 있었다. 1925년에 기존의 바퀴식 깡통따개를 발전시켜 기능이 더욱 좋아진 물건에 대한 특허가 발급되었다. 이 깡통따개는 통조림 테두리를 물면서 타고 가게 되어 있었다. 톱니가 달린 바퀴를 써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1928--29년의 시어즈와 로벅 백화점 상품 목록을 보면 심플렉스라고 불리는 “최신 깡통따개”가 있었다. 심플렉스는 톱니가 달린 무는 바퀴와 자르는 바퀴를 달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깡통 옆면을 따라 움직이면서 테두리를 포함한 “윗뚜껑 전체”를 제거하였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여러 종류의 깡통따개가 나타나 경쟁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전기로 움직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런 깡통따개들은 하나같이 다 그 자체의 결함, 불편함, 번거로움을 가지고 있다. 손잡이를 꽉 쥐고 손목을 비틀어 사용하는 깡통따개는 통조림이 클 경우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바퀴가 미끄러지거나 통조림을 무는 데 실패하면 이만저만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반면에 전기 깡통따개는 지나치게 덩치가 크고 틈새에 끼인 이물질을 깨끗이 청소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깡통따개가 처음으로 등장한 지 2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깡통으로 뚫고 들어가서 내용물을 덜어낼 수 있게 해주는 기본 도구는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고, 새로운 깡통따개로 특허를 출원할 발명가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오리라 예상된다. 그런가 하면 깡통따개의 도움 없이도 윗뚜껑을 그냥 당겨서 열 수 있게 된 “원 터치” 방식도 점차 많은 캔에 도입되고 있어 깡통따개가 표방해온 “뚫고 들어간다”는 표현을 무색하게 한다. 앞으로 추이가 어떨지는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은 포도주를 목이 긴 병에 담은 이유 보관과 새로운 것으로의 접근이라는 서로 갈등을 빚기 쉬운 두 가지 목표를 절충시키는 문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먼 옛날에 목이 말라서 코코넛 과즙을 먹고 싶었던 열대의 섬 사람들은 자연이 단단한 껍질로 포장한 코코넛 앞에서 막막한 좌절감을 맛보았으리라. 그 경우에는 내용물에 접근하는 방안을 떠올리는 것은 이용자의 몫이었지 포장자의 책임이 아니었다. 문화적인 색채가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인공음료 용기로는 뭐니뭐니해도 술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술병은 전통에 워낙 깊은 뿌리를 두고 있어 모양과 색깔에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술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줄로 안다. 특정한 술병이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게 된 것은 처음부터 그 술병의 기능이 그런 형태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후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샴페인 병의 특징`──``두껍고, 바닥이 높으며, 병부리가 두터워서 버섯 모양의 코르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은 강하게 압축된 샴페인을 담고 있는 술병이 깨지거나 폭발하거나 저절로 마개가 따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애초부터 샴페인 병이 가진 특성이라기보다는 샴페인을 담았던 보통의 술병이 보관 도중에 터지거나 폭발하고, 제대로 병을 따도 너무 이르게 볼품없이 터지는 문제가 생기자 그것들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하나둘 발전해온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라인 산 포도주와 부르고뉴 산 포도주를 담는 병의 모양이 각각 다른 것은 목이 길거나 짧은 데서 오는 기능적인 이점이 섬세하게 반영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한 풍토적 변이, 병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발전적 변화의 결과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병의 목 부분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따라 포도주를 따를 때 앙금이 함께 따라나오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이것이 순전히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면 병의 그러한 특성은 붉은 포도주에 딸려나오는 앙금이 적어도 한 창조적인 인간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불편을 안겨주었을 때 비로소 발전의 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앙금이 생기는 붉은 포도주를 어깨로 앙금을 막을 수 있는 목이 긴 병에다 담게 된 것은 어느 전지전능한 포도주 상인의 선견지명이 아니라 포도주 잔에 뿌연 앙금을 남겼던 이전의 포도주 병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앙금이 생기지 않는 백포도주를 목이 긴 병에 담았더라면 포도주를 다 비우기 위해 병을 수직으로 뒤집는 어색함을 연출해야 했으리라. 목이 가늘고 긴 병은 그만큼 우아하게 따를 필요가 있다. 병 모양의 중요성은 최근 정부와 시스코라는 도수 높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한 업체 사이에 오갔던 열띤 공방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회사는 알코올 도수가 10도나 되는 독한 포도주를 겨우 2도밖에 되지 않는 와인쿨러 병과 비슷한 모양의 병에 담아 시판하였다. 겉포장이 비슷했으므로 상점에서는 시스코를 와인쿨러와 같은 선반에 진열하였고 이 독한 술로 인하여 십대의 과음과 폭력이 늘어났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 포도주가 아예 “액체 코카인”으로 공공연히 불릴 정도였다. 회사측에서는 독주와 와인쿨러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시스코를 “성숙하고 남성적이며…… 시판중인 어떤 와인쿨러와도 닮지 않은” 새롭게 디자인한 병에 담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술병의 색깔 또한 어떤 확실한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가는 경향이 짙은 것으로 해석된다. 포도주를 담는 녹색과 갈색 병은 투명한 병에 들어 있는 포도주가 햇볕에 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결함의 인식이 곧바로 형태의 변화를 낳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햇볕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도 여전히 투명한 유리병에 넣기를 고집하는 포도주도 있기 때문이다. 모양도 색깔도 중요하지만 포도주는 뭐니뭐니해도 내용물을 잘 보호하기 위해 단단히 밀봉해야 한다. 그 일에 코르크처럼 딱 맞는 물건도 달리 없다. 하지만 코르크가 아무리 밀봉 기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병에서 코르크를 빼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질이 나쁜 코르크를 쓰면 포도주가 상하고, 푸석푸석한 코르크를 쓰면 포도주가 더러워지며, 너무 단단한 코르크를 쓰면 빼내기가 힘들다. 제아무리 적당한 코르크가 박혀 있더라도 압력이 가해지지 않은 병에서 그것을 빼내려면 보조장비의 도움을 얻지 않을 도리가 없다. 코르크를 빼는 타래송곳도 깡통따개처럼 기존의 도구가 갖고 있는 결점이 새로운 개량 모델들을 만들어내어 수많은 종류가 선을 보였다. 이 중에서 몇 가지는 확실한 기능을 보장하지만 제아무리 믿을 만한 타래송곳도 골치 아픈 코르크를 만나면 맥을 못 춘다. 일부 주류 제조업자들은 진짜 코르크는 플라스틱이 판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불필요한 낭비요 부담이며, 심지어는 유리병도 포도주를 담기에는 너무 투박스럽고 돈만 많이 잡아먹는다고 은근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주류업계에서 전통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아주 싸구려 포도주나 비틀어 여는 마개를 단 병에 담든지 아니면 꼭지 달린 자루에 넣어서 팔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럴 엄두도 못낸다. 맥주 병의 경우에도 물론 그 나름대로의 전통과 선입관을 찾아볼 수 있다. 맥주 병도 포도주 병만큼이나 신성불가침한 영역이긴 하지만 병을 딴다는 것과 코르크를 뽑는다는 것은 성격이 아주 다르다. 그러나 마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듯이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맥주 병 뚜껑에는 안에 코르크가 끼워져 있어 병의 주둥이를 단단히 밀봉하는 데 톡톡히 한몫했다. 내용물을 마시기 위해 병 뚜껑을 여는 것은 별로 까다로운 동작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독특한 전략은 필요했다. 언젠가 병따개가 없이 맥주 병을 앞에 놓고 멍청히 앉아 있었을 때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병따개가 아직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 병 뚜껑을 열어야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난감했을까를 상상해보았다. 나는 이빨로 병을 딸 만큼 목이 마르거나 무모하지는 않았지만 문틈이나 서랍 사이, 또는 후미진 틈바구니를 대용 병따개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손톱줄이나 포크 갈퀴로 병 뚜껑의 주름 하나하나를 헐겁게 만들어 엄지손가락으로 툭 밀어내는 방법도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비상대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렛대라는 기계적 원리를 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모든 병따개는 이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리병을 대신한 일회용 캔 통조림따개가 통조림보다 뒤늦게 개발되었던 것처럼 병따개도 병뚜껑이 나온 다음에야 개발되었다. 통조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병을 막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지 병을 어떻게 여느냐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금세기 초만 하더라도 병따개 특허가 발급되기 전에도 이미 병뚜껑과 병뚜껑을 만드는 기계에 대한 특허가 수두룩하게 쏟아져나왔으며, 1910년대에 나온 병뚜껑에 관련된 특허는 병따개에 관련된 특허보다 열 배 가까이 많았다. 확실히 생산업체들의 당면 과제는 자신들이 만든 음료를 안전한 용기에 담아 소비자에게 싱싱하게 전달하는 일이었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듯이 소비자가 맥주 병을 못 따면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뚜껑을 열기 위해 따로 병따개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요즘 생수 병이나 음료수 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비틀어 여는 뚜껑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형태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진보되었고 사용하기에 편한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널리 쓰이느냐의 여부는 결국 전통과 선입관이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에 달려 있다. 병따개의 단점 가운데 하나는 맥주 회사들이 병따개를 담배 회사가 라이터나 성냥을 무료로 주듯이 공짜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이 맥주 병을 따는 데 어려움을 겪도록 그냥 놔둘 경우엔 장사는 그날로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병따개가 없어도 맥주 병을 딸 수 있게 만든다면 맥주를 판매하는 비용이 그만큼 줄어들므로 회사측으로서는 명백한 이득이 있었다. 맥주 회사 매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값싼 맥주의 경우에는 특히 원가 절감이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뚜껑은 싸구려 맥주에 맨 처음으로 쓰였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비틀어 여는 뚜껑이 달린 맥주는 곧 싸구려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어 주로 고급 맥주나 수입 맥주를 취급하는 업자들은 이런 뚜껑을 기피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음료수 역시 맥주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병에 넣어 판매되어왔다. 음료수를 파는 상점이나 자판기에는 대부분 고정 병따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맥주와는 달리 음료수는 거개 그 자리에서 마셨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음료수 병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류에 들어가는 비용과 병을 수거하고 다시 채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재활용이 되도록 하려면 음료수를 안전하게 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었고 수송과 세척 과정에서도 사람과 기계에 의해 거칠게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너끈히 버틸 수 있도록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초창기에는 금이나 흠집, 긁힌 자국은 유리창과 마찬가지로 유리병을 약하게 하므로 병을 무겁게 만들었다. 몽고메리 워드 사가 1922년에 가정용으로 시판하던 720cc들이 병은 자체 무게만 자그마치 1킬로그램이나 나갔다. 통조림 깡통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음료수 용기를 쓰는 것은 맥주 회사나 음료수 회사 입장으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더없이 유리한 방법이었다. 만일 소비자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용기 값을 치를 용의만 있다면 말이다. 사실 소비자나 상인의 입장에서도 빈 병을 모아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유리한 점도 작용하였고 운반과 위생면에서도 확실히 병보다는 더 나왔다. 나다니엘 와이어드가 처음 발명한 플라스틱 용기는 음료수를 유리병에 담는 데 따르는 불편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플라스틱 병의 비틀어 여는 뚜껑 역시 주름진 병뚜껑이 갖고 있는 문제점, 곧 병따개가 있어야 딸 수 있다는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플라스틱 용기에 음료수를 담으면 가벼워서 부담없이 들고 다닐 수 있었고 병이 깨지거나 병균이 침입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진보가 혁명적인 속도로 빠르게 진행될 때 곧잘 그런 현상이 빚어지지만,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기술에도 결점은 있었다. 플라스틱 병은 가볍기 때문에 과거의 유리병보다 용량이 크게 만들어졌다. 단위 용기의 용량이 커질수록 생산원가는 내려간다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큰 병은 컵에 따라 마시기가 불편했고 음료수를 다 먹기도 전에 김이 새어버린다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용된 플라스틱 병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이것은 오늘날 일회용 용기나 포장재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라고 할 수 있다. 유리병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나온 것이 일회용 캔이다. 그러나 처음에 음료수 캔은 음식을 담은 통조림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양철을 입힌 세 개의 강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네모난 강철 조각 하나를 원통 모양으로 구부린 다음 양 끝을 녹여 붙이고 두 개의 둥근 강철판으로 위아래를 막았다. 물론 이 캔도 따개가 있어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에 든 것이 액체였으므로 따라부을 수 있을 만큼만 구멍을 조금 뚫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황소머리 따개로 맥주 캔을 따다가는 맥주가 사방으로 튀고 손가락이나 입을 베기 쉬었다. 그래서 음료수 캔을 전문적으로 따기 위해 개발된 것이 끄트머리가 삼각형으로 뾰족한 처치키라고 하는 물건이었다. 이것으로 캔을 살짝 누르면 쐐기 모양의 구멍이 빠꼼 뚫렸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파이조각처럼 큼직하게`──``뚜껑 한복판까지 이르도록`──``구멍을 내면 긴 구멍을 통해 공기가 들어가서 액체가 좀더 부드럽게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의 맥주 캔 뚜껑은 두꺼운 강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렇게 커다란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자연히 뚜껑 가장자리에 작은 쐐기 구멍을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처치키는 받침점이 캔 윗뚜껑 가장자리 밑에 걸리는 간단한 지레라고 생각하면 된다. 캔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있는 손잡이는 지레의 팔 노릇을 하고 캔 위로 뻗어 있는 뾰족한 날이 또 하나의 팔 노릇을 했다. 모든 지레가 그렇듯이 자루의 길이가 커지면 끄트머리에 가해지는 힘도 늘어난다. 같은 이치로 받침점에서 날 끝까지의 거리가 늘어나면 뚫는 힘은 약해진다. 그래서 처치키를 너무 길지 않으면서도(사용되는 재료의 양이 많아질수록 원가 부담도 커진다) 캔 뚜껑에 구멍을 뚫으며 모양이 일그러지지 않게 만들려고 캔 가장자리에 비교적 작은 구멍을 뚫는 절충형 처치키가 개발되었다. 이런 구멍을 통해 맥주를 마시는 것은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며 컵에다 따라 부으려고 해도 한없이 더디기만 했다. 그래서 캔 윗뚜껑 맞은편에다 대개 숨구멍을 뚫었다(주부들은 진작부터 캔 뚜껑에 구멍을 두 개 뚫어 버릇하고 있었다. 깡통에 넣어 파는 농축 우유는 예전부터 구식 깡통따개 끝으로 깡통 뚜껑에다 구멍을 두 군데 뚫어서 부어 마시도록 되어 있었다). 정어리는 일찍부터 강철 캔이 아니라 양철 캔에 넣어 저장해왔는데, 포장하기도 골치 아프고 뜯기도 골치 아픈 그런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 정어리는 통째로 음식상에 내놓아야 하는데 포크로 찌를 때 캔의 들쭉날쭉한 가장자리에 걸려 부스러지거나 떨어져나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재래식 따개로 정어리 통조림을 따려면 따개의 뾰족한 끝이 통 안에 든 정어리를 망가뜨리는데, 깡통 바닥에 특수한 키를 붙여놓고 그 키를 뜯어낸 다음 뚜껑에 걸고 돌돌 말아나가면 안에 들어 있던 생선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뚜껑을 깔끔하고 완벽하게 떼낼 수 있었다. 지금도 독일의 빌켄스 사에서 만드는 정어리 전문 포크는 정어리를 들어올릴 때 충분한 받침판 구실을 하도록 갈퀴와 갈퀴 사이를 널찍이 잡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크가 정어리를 찔러 살점이 떨어져나가지 않게 포크의 뾰족한 끝부분들을 가로막대로 이어놓았다. 정어리용 캔의 기본 착상은 커피, 땅콩, 테니스공 들을 넣는 캔에도 다양하게 응용되었다. 이 캔들은 더이상 밑바닥에 키가 부착되어 있지 않고 뚜껑에 당김고리가 붙어 있다. 뚜껑을 여는 과정에서 캔 옆면이 우그러지거나 따라 당겨지는 일이 없도록 튼튼한 버팀목을 마련하기 위해 뚜껑 밑에 약간 여유있는 폭으로 눈금을 내놓아 고리를 당길 때 이 눈금이 터지면서 뚜껑이 서서히 벗겨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별도의 따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안의 내용물이 손상되거나, 그것을 꺼내는 과정에서 사람 손이 긁히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한발 앞선 방법이었다. 철 캔에 얽힌 추억 캔도 과거에 비하면 참 많이 달라졌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맥주 캔을 자기 이마에 대고 짓이기는 텔레비전 광고를 볼 때마다 나는 기겁을 한다. 요즘 나오는 맥주 캔은 워낙에 야들야들해서 그것을 아무리 이마에 대고 짓눌러 보아야 맥주 캔만 우그러지지 이마는 끄떡도 없다는 것쯤이야 나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양철 캔에 대한 생생한 기억 때문에 나의 합리적인 이성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나의 공학적 이성의 판단이 옳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 역시 캔을 이마에 대고 우그러뜨려보지만 그러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물리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반응은 대개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다. 아마 어릴 때는 주위에 널려 있는 사물을 꼼꼼하게 뜯어보고 그것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고 그런 일을 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적기 때문일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음료수 캔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일곱 살 무렵에 알았던 것 같다. 그때는 아이들의 정신이 온통 텔리비전에만 가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친구들과 나는 장난칠 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쏘다녔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빈 깡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누구든지 깡통을 맨 처음에 발견한 사람이 깡통 옆구리를 발로 팍 누르면 깡통의 위아래가 신발을 둥글게 감싸듯이 오그라지면서 롤러스케이트의 죔쇠처럼 발을 꽉 조였다. 우리는 그렇게 깡통을 나막신처럼 만들어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딱딱한 인도를 활보하고 다녔다. 빈 깡통을 여러 개 발견하면 너도나도 깡통을 하나씩 발에 꿰차고 누가 이 깡통 나막신을 가장 오래 신나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깡통을 신발에 꼭 맞게 짓밟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한테 깡통은 너무 단단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방향이 빗나가 깡통 옆구리가 아닌 단단한 모서리를 밟게 되면 발바닥이 얼얼해서 며칠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뿐인가, 깡통 양끝이 신발을 조금씩 감싸오더라도 그 가짜 덧신이 발을 너무 꽉 조이지 않게 만들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깡통을 밟는 데는 밑창이 단단한 구두가 최고였지만, 우리는 대부분 두꺼운 천으로 만든 즈크화를 신고 다녔으므로 딱딱한 깡통을 갖고 놀려면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에 지겹도록 깡통을 갖고 놀아서인지 커서는 맥주 캔을 보아도 그저 그런 게 있나보다 할 뿐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사실 나도 캔 맥주를 신물이 나도록 마신 사람이지만 깡통 자체는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깡통은 그저 깡통일 뿐이었다. 아이들이 깡통 신발처럼 갖고 노는 거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다. 나의 대학 동료들 가운데는 아무리 농담이라도 캔을 이마에 대고 짓이겨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만일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우리들은 아마 적어도 이마가 크게 찢어지든가 최악의 경우 뇌 수술까지 받아야 할지 모른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으리라. 텔리비전 광고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음료수 캔의 발전은 캔에 대한 구세대의 이해를 뛰어넘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는 동안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머리를 찢어놓기 딱 좋았던 1950년대의 물건이 1990년대에는 크림처럼 말랑말랑하게 변했단 말인가. 모든 기술적 변화가 그러하듯이 음료수 캔이 변화를 겪는 과정에도 공학적 요인뿐 아니라 사회적 요인이 함께 맞물려 영향을 끼쳤는데, 그 사회적 요인 중에는 적잖은 부분이 경제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였다.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음료수 캔에 대해서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쓰레기 양이 조금 늘어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캔은 그저 편리한 도구로 여겨졌을 뿐 세인의 불만을 일으킬 만한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좀 길쭉한 캔을 제외하면 캔 맥주는 보통 음식을 담은 통조림과 모양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깡통따개가 아니라 처치키로 여는 정도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별다른 불만 없이 맥주를 열심히 마셔대는 동안 주류업체들은 강철 캔 표면에 입히는 양철의 가격 상승으로 인한 원가 상승 압력을 놓고 슬슬 고민을 시작하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남보다 한발 앞서 연구 개발 노력에 나섰던 카이저 알루미늄이 드디어 1958년에 가볍고 경제적인 알루미늄 캔을 만들어냈다. 때 맞추어 아돌프 쿠어스 사와 베어트리스 푸즈 사도 이 방면에 독자적인 연구 개발을 하기 시작했다. 1959년 초 역사상 처음으로 쿠어스 맥주가 자체 제작된 소형 알루미늄 캔에 담겨 판매되기 시작했다(햄즈, 버드와이저는 그보다 4년 늦게 각각 레이놀즈 메탈, 알코아로부터 알루미늄 캔을 공급받기 시작하면서 알루미늄 캔 맥주를 시판했다). 새로운 캔은 원료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방법에 있어서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비교적 무거웠던 과거의 양철 캔이 세 조각의 철판으로 만들어지는 데 비해 알루미냄 캔은 참치 캔처럼 생긴 컵 안으로 금속판을 밀어넣은 다음 그것을 길게 잡아늘여 만든다. 캔이 채워지면 그 위에 윗뚜껑을 달았다. 오늘날의 알루미늄 캔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지만 지난 30년 동안 정말로 많이 달라졌다. 특히 사용되는 금속판의 양을 줄이는 데는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처음에는 1파운드의 알루미늄으로 고작 20개 남짓한 캔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지금은 같은 양을 가지고 무려 30개를 만들어낸다. 캔의 두께도 0.05밀리미터가 채 안 될 정도로 얇다. 이것은 거의 잡지의 표지와 맞먹는 두께이다. 캔 맥주의 벽을 얇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내용물이 벽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축 늘어진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 팽팽히 부풀어오르듯이 캔 안의 탄산가스가 벽면을 탱탱하게 지탱해준다. 그러나 캔의 바닥이 편평하다면 그곳도 풍선처럼 솟아오를 테고, 그렇게 되면 캔 맥주가 가게의 선반이나 식탁 위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만다. 밑바닥을 움푹 들어가도록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표면은 마치 물의 압력을 이겨내는 아치 댐 같은 역할을 한다. 반면에 캔 뚜껑까지 그렇게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다른 데보다는 두껍게 만들 수밖에 없다(뚜껑을 두껍게 만들면 알루미늄이 많이 들어가므로 필요한 재료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뚜껑을 턱이 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뚜껑 표면의 지름이 줄어들었다. 뚜껑의 지름을 6밀리미터만 줄여도 알루미늄을 20퍼센트나 줄일 수 있다). 경을 오염시키는 알루미늄 캔 최초의 알루미늄 캔은 강철로 된 다른 용기들에 비해 훨씬 쉽게 뚜껑을 딸 수는 있었지만 따개는 여전히 따로 필요했다. 그것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불편한 것이었다. 가족끼리 소풍이라도 갔을 때에 맥주는 많은데 따개가 없으면 그 난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 살던 에멀 프레이즈도 1959년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자동차 범퍼에 대고 캔을 땄다. 겨우 따기야 했지만 맥주의 싱싱한 맛은 거품으로 다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래 가지고서야 되겠는가.” 프레이즈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그 다음날 밤이었다. 낮에 커피를 여러 잔 마셔서인지 그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기에 따개를 캔에 직접 붙여보자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갔다. 일을 하다보면 곧 피로가 엄습하여 잠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프레이즈에 따르면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거기 있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프레이즈가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데이튼 릴라이어블 툴 앤 매뉴팩처링 사의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금속을 깎고 다듬는 데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고리로 잡아 따는 캔을 만들려면 뛰어난 금속 가공술로 무장되어 있어야 했다. 마침내 프레이즈는 1963년에 특허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쉽게 열리는 깡통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나중에 시인했다. “사람들은 1800년대부터 이미 그런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캔 뚜껑에다 꼭지를 붙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었다.” 결국 지레 역할을 하는 고리가 미리 금이 그어진 따개띠에 고정되었고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고리의 꼭지는 밀봉된 캔을 뜯을 수 있었다. 고리를 당기면 마치 잡지에 점선으로 부착된 우대권이 매끄럽게 뜯겨져 나오듯이 금속 띠가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뚫린 구멍은 캔 가장자리에서 상당히 안쪽까지(심지어는 중앙 너머까지) 뻗었고, 그래서 캔을 기울여서 맥주를 마시거나 컵에 부을 때 그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서 맥주가 쫄쫄거리지 않고 시원하게 콸콸 쏟아져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맥주 캔은 처치키 같은 보조도구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깡통 뚜껑 위에다 두 개의 구멍을 별도로 뚫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한번의 연속된 동작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따개띠를 당겨 뜯어내기 쉬우면서도 캔의 압력에 너끈히 견딜 만큼 튼튼하려면 금속 가공에 까다로운 기술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 초창기의 당김꼭지는 소비자가 처음에 캔을 잘못 건드리면 탄산가스의 강한 압력을 못 이기고 뻥 떨어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프레이저 같은 발명가들은 폭발적으로 뿜어나오는 가스가 꼭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유도하는 방안을 개발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이 당김꼭지에 관련된 특허가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다름아닌 환경오염 문제였다. 19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자 캔 뚜껑에서 완전히 떨어져나온 꼭지가 환경보호론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환경보호자들의 비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신호등에 걸려 서 있다가 길가에 널려 있던 꽁초들 사이에서 무심코 캔 꼭지(열쇠 고리에 달려 있는 말아올린 혀처럼 보이는)들을 헤아려본 적이 있었다. 나는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도 그 수효를 미처 다 세지 못했다. 유원지나 해변에 가면 특히 이 날카로운 꼭지들이 수두룩했다. 그건 청소하기도 힘들었다. 꼭지가 워낙 작다보니 환경미화원이나 해변청소원이 비로 쓸어도 빗자루 사이사이로 빠져나가곤 했다(<뉴욕타임스> 지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어느 소년이 기네스북에 오르기 위해 2만 7천 개의 캔 꼭지를 모았다고 한다). 어린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동물과 물고기까지 꼭지를 멋모르고 삼켰다. 해수욕을 하러온 사람들도 잘못하다간 발을 베었다.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은 꼭지를 딴 뒤 버리지 않고 캔 안에 넣었지만 그렇게 되면 내용물을 마실 때 꼭지가 딸려서 입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당김꼭지에 대한 사람들의 원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꼭지를 떼내지 않고 캔을 쉽게 딸 수 있게 만드는 특허들이 또 한 차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떨어져나오는 꼭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묘안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선두주자는 쿠어스 맥주였다. 이것은 두 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압력 봉인을 부수기 위해 금이 가 있는 금속의 튀어나온 버튼을 눌렀다. 다음에는 마시는 구멍을 뚫기 위해 좀더 큰 단추를 캔 안으로 눌렀다. 그러나 두 단계 방식으로 캔을 따는 방법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캔을 따기 위해서는 꽤 많은 힘을 들여야 하고 버튼을 날카로운 구멍으로 밀어넣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발명가들은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그들의 특허출원서에는 기존의 방식들은 “쉽게 따지면서도 생태학적으로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 음료수 캔을 만들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결론지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엄청난 양의 특허가 발급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존의 당김고리 방식을 약간 변형한 데 지나지 않았다. 1975년 오하이오 주 케터링의 오마 브라운이 “분리되지 않는 따개띠를 가진 캔”으로 특허를 따냈다. 이 특허는 쉽게 따지는 캔과 관련된 특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에멀 프레이즈에게 양도되었다. 이 발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따개띠를 단순히 캔 뚜껑 위에 겹쳐놓는 것과 관련된 골치 아픈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캔을 따서 바로 그 자리에서 내용물을 마시므로 사용자의 코가 캔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따개띠에 닿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따개띠의 가장자리가 날카로우면 그는 코를 베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마시는 구멍 부근에 날카로운 띠가 붙어 있으면 입술을 베이게 된다. 브라운의 해결 방안 가운데에는 마시는 구멍을 후퇴시켜 그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입술이 닿지 않게 만드는 방법, 열려진 따개띠를 캔 뚜껑에 납작하게 눌러놓아 그것이 마시는 사람의 코에 닿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있었다. 또 다른 오하이오 주 출신의 발명가 프랜시스 실버`──``역시 특허권을 에멀 프레이즈에게 양도했다`──``는 따개띠를 캔 뚜껑과 당김꼭지 사이에 접어놓을 수 있게 함으로써 맥주 마시는 사람을 보호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해결 방안은 하나도 없었으며 다들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끈끈하고 날카로운 금속이 열려진 캔 위에 그대로 매달려 있다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음료수 캔에서 볼 수 있는 분리되지 않는 따개띠는 1980년에 쿠어스의 누름 버튼 방식을 약간 변형시킨 형태로 처음 등장하였지만 이것 역시 부착된 꼭지를 이용하는 지레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개띠가 캔 뚜껑 안으로 밀려 들어가되 그대로 붙어 있었으므로 쓰레기 문제, 꼭지가 입 안으로 딸려 들어가는 문제, 금속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코를 베이는 문제가 사실상 모두 해결되었다. 따개가 필요 없는 맥주 병 당김꼭지에서 비롯된 환경 문제가 뚜렷이 부각되기 전부터 음료업체들은 이미 자신들의 음료를 알루미늄 캔에 넣어 팔고 있었다. 강철 캔은 청량 음료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처치키 같은 별도의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원하지 않았다. 당김꼭지가 따개를 소용없는 물건이 되도록 하면서 처음에 맥주를 위해 개발되었던 알루미늄 캔은 가벼운 음료에도 도입되었다. 1965년에 로열 크라운(지금은 RC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콜라가 처음으로 가벼운 알루미늄 캔을 사용했고 1967년에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도 그 뒤를 따랐다. 새로운 캔에는 밑바닥과 옆구리 부분에 이음매가 없기 때문에 예전의 양철 캔에 비해 훨씬 정교한 방법으로 도안을 그려넣을 수 있었으므로 콜라업계에서는 너도나도 앞다투어 알루미늄 캔을 받아들였다. 알루미늄 캔의 또 다른 장점은 운송비가 싸게 먹히고 부피가 작으며 더 안전하게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고 빈 병 처리로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일회용 캔이 차츰 말썽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만도 한 해에 쏟아지는 빈 캔의 양이 무려 3백억 개에 이르렀다. 캔 사용을 금지하자는 법안이 여당에 의해 심각하게 검토될 정도였다. 그 당시까지도 많이 사용되고 있던 양철을 입힌 강철 캔은 매립지에서 부식이라도 되지만 그때 점차 일반화되어 가던 알루미늄 캔은 그렇지도 못했다. 쿠어스 맥주가 가장 먼저 깨달았듯이 알루미늄 캔의 재활용은 환경 보호 차원의 책임이었을 뿐 아니라, 이 새로운 기술이 장기적으로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다. 캔의 처리 문제로 환경단체와 의회가 신경을 곤두세우자 업계에서는 스스로 재활용 비율을 높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75년에 네 개에 한 개꼴로 회수되던 알루미늄 캔이 1990년에는 60퍼센트가 넘게 회수되었다. 알루미늄협회, 캔제작사연합회, 폐품재활용기업연합회는 이 수치를 1995년에는 75퍼센트까지 높이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정해놓고 있다. 이것은 환경에도 좋을 뿐 아니라 경영에도 도움이 된다. 재활용 캔이 알루미늄의 중요한 공급원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이며, 그 동안 수거체계가 상당히 효율화되어 이제는 한번 사용된 캔이 새로운 캔으로 등장하는 데 6주도 안 걸린다. 1990년에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맥주와 음료수 캔의 97퍼센트는 알루미늄이었고 미제 맥주의 70퍼센트, 미제 음료수의 50퍼센트가 알루미늄으로 포장되었다. 반면에 모든 음식 통조림의 95퍼센트(매년 3백억 개)는 여전히 강철로 만들어지고 있다. 경제성을 고려할 경우 알루미늄 캔을 포화 가스의 압력에 변형되지 않고 버틸 만큼 두껍게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알루미늄의 성능을 강화시키기 위한 연구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음식류도 차츰 알루미늄 캔에 담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강철 캔을 만드는 업체에서도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연구 개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강철 캔의 수지 타산을 맞추기가 어려운 이유의 하나로 쉽게 열 수 있도록 윗뚜껑만큼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으리라. 강철 캔은 자석으로 당길 수 있으므로 자원 회수면에서 유리하지만 알루미늄이 포함되어 있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강철 뚜껑을 알루미늄 뚜껑처럼 쉽게 열리게 하고, 딸 때에 드러난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이런 결함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강철캔재활용협회는 강철캔의 재활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88년에 결성되었는데 통조림 캔의 활발한 재수거 활동이 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전략으로 강철 캔 제조업체들은 전자레인지에서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캔도 개발하고 있다. 편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들 지난 몇십 년 동안 무려 1조 개에 가까운 알루미늄 캔이 생산되고 그에 맞먹는 양의 내용물이 소비되었으며, 알루미늄 캔의 성능을 개선시키려고 수백 아니 수천 건의 특허가 발급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알루미늄 캔의 형태에는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다. 새로운 캔의 따개띠는 타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캔 가장자리까지 완전히 뻗어 있지도, 그렇다고 고리가 달려 있는 중앙까지 뻗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내용물을 따르고 마시기에는 조금 불편하다. 내용물이 잘 흘러나오게 하려면 캔을 많이 기울여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공기가 그 안으로 잘 들어가지 못한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다 먹기 위해서는 캔을 수직이 될 정도로 끝까지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캔을 깨끗이 비우기란 힘들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의 기술 수준에 적응할 줄 안다. 그래서 내용물의 수위에 맞는 각도로 캔을 기울여 마치 병에 든 음료수를 마실 때처럼 그렇게 마신다. 하지만 길다란 목이 어느 정도의 여유 공간을 주는 병과는 달리 따개가 붙은 캔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코와 닿기 쉽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의 코를 베지는 않지만 캔을 끝까지 기울이는 데는 분명히 걸림돌이다. 자연히 우리는 목을 한껏 뒤로 젖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명가들의 관심은 신체적인 불편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음료수 캔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불편한 기능으로는 내용물을 다 마시지 못해도 뚜껑을 다시 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커피나 땅콩, 테니스공을 담는 통은 보통 플라스틱 뚜껑이 달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데 비해 음료수 캔은 그렇지 못하다. 맥주와 음료수를 판매하는 업체, 심지어는 소비자들까지도 이것을 별다른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많은 발명가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콜로라도 주 스팀보트 빌리지 출신의 로버트 웰스는 땄다가 도로 닫을 수 있는 캔으로 1987년에 특허를 따냈다. 자신이 한 발명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기존의 음료수 캔에서 발견한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뚜껑을 비틀어 여는 용기에서는 뚜껑을 다시 닫는 것이 비교적 쉽지만 음료수 캔은 그러기가 어렵다. 일반 캔에서 뜯어지는 알루미늄 부분은 캔을 따는 과정에서 변형된 채 캔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 구멍을 도로 막는 데는 쓸모가 없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여태까지 시도된 방법들을 보면 대개 별도의 마개를 동원하여 뚫린 구멍을 임시로 막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 별도의 마개는 비교적 작기 때문에 엉뚱한 데 두면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이미 뚜껑을 따낸 음료수 용기를 다시 막으려고 막상 찾으려 들면 어디로 숨었는지 온데간데 없어져 사용자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업체마다 캔의 구멍 크기가 조금씩 달라서 소비자들이 흔히 먹는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 캔에 두루 쓸 수 있는 마개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웰스의 특허는 캔을 따고 닫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한 대부분의 특허가 그러하듯이 내용이 장황하기 그지없다. 자그만치 열다섯 가지의 세부 권리를 마흔일곱 장의 설계도를 동원해가면서 캔 뚜껑에 생긴 구멍 안으로 매끄럽게 박을 수 있는 장치의 숱한 변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착상 가운데 상당수는 단순한 음료수 용기에 쓰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웰스가 처음에 느꼈던 문제의식은 백번 옳지만 그가 만든 장치가 다양한 맥주 캔 뚜껑을 막는 표준으로 자리잡기는 어렵다. 우리는 김 빠진 맥주나 사이다를 캔 안에 남긴 적이 누구나 한두 번은 있지만 차라리 마저 마시든가 아니면 그냥 버리지 까다로운 장치를 써서 캔을 도로 닫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불완전한 물건이 눈앞에 있더라도 그 쓰임새를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속 편하게 거기에 적응하는 편이다. 이와는 달리 발명가들은 물건의 결함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그 물건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적어도 결함을 없애기 위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때는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일단 복잡한 해결방안이 채택되면 또 다른 발명가들이 나타나 소비자를 편하게 하려고 그것을 좀더 간편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캔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결점은 뚜껑에 바짝 붙어 있는 당김고리 또는 당김꼭지의 문제이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이것을 손가락 끝에 걸어서 위로 당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도 손톱이 무른 사람은 연필이나 볼펜 끝을 당김고리 밑으로 밀어넣어 살짝 들어올려야 비로소 손가락으로 당김고리를 잡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발명가 로버트 드머스와 스펜서 매케이도 그런 문제점을 깨닫고 있었다. 1990년에 그들은 음료수 용기를 열었다 닫을 수 있는 새로운 장치로 특허를 따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장치가 캔을 도로 밀봉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열린 용기 안에 들어 있는 음료수의 김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에너지를 보존해준다는 점을 자랑했다. 드머스와 매케이는 캔을 다시 밀봉하는 기존의 발명품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런 것들이 “시장에서 호응도가 낮았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이 갖고 있는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장에서 호응도가 낮은 이유는 비용이 크게 올라간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장치들은 사용하기도 만만치 않아서 노인이나 관절염 같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적잖은 불편을 주었다. 새로운 장치를 발명한 이 두 사람이 독창적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캔 뚜껑 위에 솟아오른 작은 언덕 곧 “돌기”이다. 캔을 따려면 꼭지를 이 언덕 위로 돌려 꼭지의 한 끝이 솟아오르게 만든다. 이렇게 하면 꼭지의 다른쪽 끝이 캔의 띠 부분을 내리눌러 서서히 구멍을 낼 뿐 아니라 돌기의 꼭지가 쳐들리기 때문에 아무리 뭉툭한 손가락이라 할지라도 꼭지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열린 캔을 다시 막고 싶으면 이제는 드러난 꼭지의 안쪽 면으로부터 보호 피막을 벗겨내어 접착면이 드러나면 이것을 잘 펴서 구멍에 맞춘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특허출원서에는 다섯 개의 그림이 등장한다. 다른 장치들 못지않게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구멍을 닫는 부분만 제외한다면 “돌기”를 가진 이런 음료수 캔은 손놀림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독립적인 발명가들은 기존의 캔 따는 방식을 크게 바꿔놓는 독창적인 기술을 앞으로도 계속 개발하겠지만 캔을 만들고 채우는 기업들은 내용물을 가장 효과적이고도 다른 기업들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보관하는 데 먼저 관심을 둘 것이다. 최근에는 구입의 용이성, 가공성, 인쇄 적성의 측면에서 강철과 알루미늄이 갖는 장단점을 둘러싼 기술적 논쟁이 디자인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음료수 캔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소비자가 궁극적으로 느끼는 만족감과 사용의 편리함은 발명가의 생각으로는 안 그렇다고 해도 기업인의 사고에서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감이 있다. 소비자는 흔히 접하게 되는 캔에 쉽게 적응하는 편이므로 기업들은 지금의 캔을 당장 뜯어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캔이 개선되고 그렇게 개선된 음료수 캔이 다른 캔에 비해 광고나 마케팅 측면에서 장점을 갖는다면 기업들은 변화를 생각해볼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혁신이 형태나 기능면에서 너무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할지 모른다는 위험 부담도 따른다. 그러나 따개를 분리했던 캔이 쓰레기 문제로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듯이 환경단체나 소비자단체가 기존의 캔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면, 기업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어떻게 용기에 잘 담아 소비자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눈앞의 과제에 못지않게 그것이 소비자에게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기업의 관심사가 소비자에게는 알기 어렵고 이기적으로만 보일지 모르지만 그 관심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가격이나 기능면에서 기존 제품이 안고 있는 결함에 대한 깨달음이다. 아무리 사소한 인공물일지라도 그 형태는 새로운 디자인을 끝없이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전해나간다. 작은 변화로 큰돈을 번다 리시즈의 침대 지금으로부터 2천 3백 년 전 일련의 “기계적 문제들”과 그 해결방안을 책으로 엮었다. 많은 고전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개인이 아니라 소요학파의 집단적 저작물로 여기는 이 《기계론》은 유명한 철학자의 다른 소소한 저작들과 함께 묶여 거론되기는 하지만 정작 학문적 연구의 대상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모두 서른다섯 개의 질문은 무릇 물질적 성취, 만족, 편의, 안전, 경제성에 준하는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자 했던 다른 모든 문명이 그러하였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공학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기계론》의 첫 문장은 공학의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원인은 잘 몰라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을 때 생겨나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는 시인으로 첫머리를 끊은 뒤 곧이어 “인간의 솜씨로 인간에게는 득이 되게끔 자연과 맞부딪혀서 생기는 것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솜씨”는 요샛말로 하면 바로 공학인데, 1828년에 나온 영국 토목공학자협의회의 강령을 보면 공학의 형식적 정의에 군사적 기술을 제외한 모든 분야를 포함시키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토목공학은 자연에 있는 위대한 힘의 원천들을 인간에게 유익하고 편리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기술을 말하며…… 이러한 정의는 《기계론》에서 언급된 내용을 놀라우리만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이름이야 제각각 다르게 불렀을지 몰라도 모든 문명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공학을 추구해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미국 토목공학자협회에 의해 채택된 공식적인 정의도 이러한 목표의 연속성을 다시금 거론하고 있다. 토목공학은 연구·경험·실천에 의해 얻어진 수리과학과 물리과학 부문의 지식이, 환경의 창조·개선·보호, 공동생활·산업·수송을 위한 시설 제공, 인류에게 유익한 구조물의 마련 등 인류의 점진적인 복리 증진을 위해 자연의 물질과 힘을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한 판단과 결합되는 활동이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모든 부문을 자기 안에 뭉뚱그리려고 한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인간에게 득이 되는 솜씨를 역설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산업혁명의 격랑 속에서 공학은 전문 분야로 잘게 쪼개졌지만, 자연자원을 이용하고 물리현상을 활용하여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기본 입장은 그 앞에 토목 자가 붙건, 전기 자가 붙건, 기계 자가 붙건, 혹은 사회적으로 통용되지만 본질과는 거리가 먼 그 어떤 형용사가 붙건간에 모든 공학의 으뜸가는 목표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질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고대 공학이나 현대 공학 모두 경제적 요인을 모른체할 수는 없다. 경제적 요인은 모든 인공물의 형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 《기계론》에 나오는 질문 가운데 공학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의 형태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스물다섯째 물음으로 그 내용은 이렇다. 사람들은 왜 침대를 길이가 폭의 두 배가 되게끔, 다시 말해서 여섯 자를 웃도는 길이에 석 자 가량의 폭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왜 대각선으로 밧줄을 엮지 않는가? 앞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것은 보통의 체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차원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답변이 곧바로 내려질 수 있다. 만일 사람의 체구가 달랐으면 침대의 길이 비율도 사람의 키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질문은 형태의 발전과 관련하여 좀더 흥미롭고 복잡미묘한 측면을 암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밧줄을 비스듬히 엮지 않고 나란히 엮는 이유는 목재에 걸리는 하중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이다. 목재는 결을 따라 쪼갤 때 가장 잘 갈라지며 결을 따라 당길 때 가장 약하다. 밧줄도 하중을 이겨내야 하는데, 비스듬하게 뻗은 밧줄보다는 십자형으로 엇갈린 밧줄에 걸리는 하중이 훨씬 적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면 밧줄의 양도 적게 쓸 수 있다. 목재와 밧줄에 걸리는 하중에 관한 이러한 답변은 사실은 단지 주장으로 그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에 인용한 대목을 좀더 상세히 해명하지 않고 있다. 그의 답변은 각을 이루었을 때 작용하는 힘에 대한 오늘날의 분석적인 연구 결과와 들어맞는 것이지만 그 점이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술과 공학의 발전은 과학적 설명이 빠진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 또 실제로 그래왔다. 마찬가지로 침대에 대해 무슨 전문적인 이론이 있어서 나무틀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밧줄을 끼워서 매트리스 역할을 하게 하자는 착상이 바로 나왔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착상의 뿌리는 이미 3천 년 전의 호머 시대에도 있었다. 《오디세이》에서 율리시즈는 천신만고 끝에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왔으나 페넬로페는 그가 진짜 남편인지 확인하기 위해 율리시즈가 옛날에 직접 만들었던 침대의 구조를 기억하는지 슬쩍 캐본다. 그러자 그는 올리브 나무로 틀을 짜고 그 나무에 구멍을 뚫은 다음 구멍으로 가죽 끝을 넣어 두 사람이 잘 침대를 만들었다. 그 침대는 올리브 나무 뿌리로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또 오랜 고초를 겪어온 두 남녀에게 감정적으로 깊은 뜻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들에게 이 침대는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침대를 만드는 과정을 잊어버리지 않은 덕분에 율리시즈는 연인의 의심을 풀 수 있었다. 게 만들어도 질은 좋아야 고대의 영웅이 아닌 평범한 장인이 만든 좀더 평이한 침대는 털끝만한 변화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신성불가침한 영역은 아니었다. 비용, 쾌적성, 안전성, 내구성이 침대가 발전해가야 하는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목재나 밧줄이 지나치게 처지거나 잘라질 경우 좀더 바짝 당기거나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다. 가죽끈이나 밧줄을 꿰어서 침대를 만드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침대를 좀더 효율적이고 기능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왔을 것이다. 잘 망가지지 않는 침대를 만드는 장인한테로 사람들의 발길이 쏠리는 것을 보고 다른 장인들은 자신의 침대도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밧줄을 십자형으로 잇는 것이 더 나은가 비스듬하게 잇는 것이 더 나은가 하는 비교 우위의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기계론》에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재료가 얼마나 들어가고 품이 얼마나 들어가는가, 곧 경제적인 문제가 예나 지금이나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미국식 밧줄 침대를 주제로 씌어진 최근의 한 논문에는 밧줄을 엮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한 것처럼 밧줄을 구멍으로 넣는다. 또 한 방법에서는 밧줄을 걸이못에다 건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 모두 밧줄을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연결하여 나무가 쪼개질 가능성을 되도록 줄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밧줄은 처질 수밖에 없어 특수한 침대 죔 장치로 그때그때 침대를 죄도록 되어 있다. 탄력이 좋은 침대에서 하룻밤 숙면을 취하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밧줄을 풀었다 조이는 행동을 자주 하게 될 터이고 아무래도 그런 경우에는 못걸이식 침대가 편했다. 설사 밧줄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멍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빠른 속도로 밧줄을 다시 묶은 다음 걸이에 간편하게 걸 수 있기 때문이다. 밧줄을 엮는 방식이 경제적(재료든 시간이든)인 면에서 뒤떨어지는 다른 방식들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것은 실패가 인공물 일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발전을 조장하거나 가로막는 힘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물건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음료수 용기가 강철에서 알루미늄으로 바뀐 것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경제적 요인, 곧 하루에 백만 개도 넘게 캔이 만들어지는 공장에서 캔 하나를 몇백 분의 1밀리미터라도 얇게 만들었을 때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얻어지는 그 어마어마한 비용 절감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재료나 공정에 변화를 주었을 때 거기서 얻어지는, 또는 얻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 절감 효과로 많든 적든 영향을 받는 대량 생산 제품의 예를 더 들자면 끝이 없다. 디자인은 끊임없는 비교의 활동이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그 장단점을 늘 견주어보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자기가 내세우는 기준을 가장 많이 만족시키는 디자인을 채택한다. 이 점은 대형 건축물이나 시스템처럼 발전이 주로 대중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제도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세기, 철로가 나라 곳곳에 한창 깔리고 있었을 때에는 끊임없이 변하는 지형에 맞게 긴 철로 구간을 어떤 식으로 깔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심각한 과제로 떠올랐다. 황량한 자연에다 어떤 방향으로 철로를 깔 것인가에 따라 기관차가 올라가야 하는 언덕의 기울기, 교량으로 이어야 하는 골짜기와 강물의 숫자가 달라진다.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철로가 자연 경관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졌다. 유럽과 차이가 나는 미국 철로의 특색`──``기울기의 차이, 철교보다는 목교가 많다는 점`──``은 유럽과는 서로 다른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철로를 어디에 부설하는지가 왜 중요한가는 이 방면에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A. M. 웰링턴의 《철로 부설의 원리》`라는 책에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다. 공학을 건축술로 간주하지 않거나 그렇게 정의내리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공학은 건축술이 아니다. 다소 거칠지라도 결코 부적절하다고는 볼 수 없는 예로써 공학을 정의하자면, 얼치기가 2달러 갖고 하는 일을 1달러로 해치우는 기술이 바로 공학인 것이다. 더 적은 양의 밧줄이 들어가는 고대의 침대이건, 밑바닥과 양 옆을 하나로 이어 만드는 음료수 캔이건, 교량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만드는 철도 노선이건, 재료와 에너지의 경제성이라는 문제는 엇비슷한 여러 개의 대안 가운데에서 선택할 때 비교적 객관적인 지표를 제공하며, 그만큼 공학과 모든 디자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용되지 않고 남은 밧줄의 길이, 얇아지는 금속의 두께, 건설되지 않는 교량의 수효는 경제적 절감 효과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항목들이다. 그러나 예술가를 얼치기로부터 구별해주는 것은 이런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좋은 디자인에서 말하는 경제성의 원리는 단순히 자본가의 차원만이 아닌 인류가 궁극적으로 누리는 이득을 고려한 것이라야 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일지라도 수지타산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산 또는 건설에 들어가는 돈의 액수만으로 수지가 평가될 수는 없다. “질”이라는 비수량적인 표현은 더 비싼 물건이 얼마든지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고 더 잘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자동차의 경우 강판을 두껍게 하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유리하다. 두꺼운 강판으로 만든 차는 튼튼할 뿐만 아니라 고급스러워 보인다. 생산업체는 이 점을 부각시키면서 좀더 비싼 가격을 매겨도 당당하게 물건을 팔 수 있다. 구매자는 내구성이 길고 품위를 높여주는 물건이라면 지출이 좀더 늘더라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같은 제품에 서로 다른 가격이 매겨져 있다 하더라도 값 하나만 갖고 물건을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식품이 좋은 예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매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A매장에서 파는 물건이 B매장에서 파는 물건보다 무조건 비싼 것은 아니다. 물론 쇼핑을 하는 사람은 쇼핑할 목록을 좌악 적어서 A매장이 싼 품목은 A매장에서, B매장이 싼 품목은 B매장에서 사들여야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슈퍼마켓도 사실상 그런 방식으로 선전을 한다. 야채 한 꾸러미가 자기네 슈퍼에서는 얼마인데 다른 슈퍼는 얼마라는 식으로 싼값을 강조한다. 야채의 경우는 분명히 쌀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품목은 그 슈퍼가 오히려 비쌀 수도 있다. 그렇게 시시콜콜히 따져가면서 쇼핑을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시간을 잡아먹고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쇼핑을 할 때보다 서너 곱절의 시간을 더 빼앗긴다. 누군가가 슈퍼마켓의 점장을 맡고 있다면 경쟁업체를 어떻게 해서든 따돌려야 할 입장이므로 그런 데 충분히 시간 투자를 할 만하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의 입장에서 과연 그렇게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특허가 갖는 자신감과 불안 물건에 가격표를 다는 작업이 전산화되기 전에는, 드물기는 했지만 똑같은 물건이 서로 다른 상자 안에 넣어져 다른 가격표를 붙이고 매장 선반 위에 놓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점원이 오래된 물건에다 새 가격표를 붙이는 일을 잊어버렸거나 지배인이 가격이 낮을 때 사들인 재고품에 대해서 그 동안에 오른 가격을 받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가격이 낮은 상자 안의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사람은 그야말로 바보 취급 당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의 질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똑같다고 하기 힘들다. 신선함은 둘째치고라도 낡은 포장은 새 포장에 비해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기 쉬우며, 뜯기에도 훨씬 불편할 수 있다. 손님이 어떤 상자를 고를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른 복잡한 기준에 달려 있다. 사람마다 무엇을 중요시하는지가 다르고(결국은 경제성으로 귀착되기는 하지만), 제품 생산업자나 유통업자는 바로 소비자의 이런 측면을 활용하기도 하며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업체는 경쟁 대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만 이러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별 볼일 없는 엇비슷한 물건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이 줄에 설 것인지 저 줄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식료품 구매의 역학은 인공물에 대한 일반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틀을 보여준다. 제품과 제품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 무엇보다도 가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격만이 유일한 결정요인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의 여유를 갖고 슈퍼마켓 선반을 살피면서 “새롭게 개선된” 물건들의 제품 설명문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비누 한 장을 소비자에게 팔 때도, 하나의 발명품을 특허심사관에게 설명할 때도 중요한 것은 이전의 기술과 비교하는 일이다. 새로운 제품이 기존의 제품과 오직 가격에서만 차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물건을 좀더 싼 가격에 제공하려면 새로운 원료나 성분을 쓰든지 아니면 좀더 효율적인 공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라인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은 생산 과정에서 절감된 돈을 그만큼 더 생산된 물건을 팔기 위한 광고비로 돌리지 않는 한 기업의 이윤을 늘린다. 어떤 제품은 수요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공장을 지어야 하되 광고도 필요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공장이 서면(늘 그렇지야 않지만) 새로운 원료를 쓰는 새로운(개량된) 공정이 아울러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그 성공으로 이끈 모든 특성들을 언제나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물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후속 모델은 그전 모델의 결함을 극복했거나 잘못된 계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결함이 담겨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발명가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자신이 새로 만든 물건에 대해 폭주하는 주문에 맞추기 위해 새 공장을 짓게 될 날을 꿈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특허를 따내기 위해 노력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장밋빛 미래보다는 과거의 경쟁자들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몬타나 주에 사는 발명가 네이던 에덜슨은 컴퓨터 워크 스테이션과 시작품을 결합하는 디자인 작업에 몰두해왔다. 자신이 한 발명의 배경을 특허출원서에 쓰기 위해 워싱턴의 미국 특허청을 찾은 그는 자신의 조절 책상 인 “액티브” 책상과 비슷한 계열의 특허가 없는지를 조사하였다. 발상이 비슷한 선행 특허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들에 비해서 자신의 발명품이 경쟁력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는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기존의 특허를 탐색할 때는 자신의 발명품과 같은 “목표”를 이루려고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선행 기술”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발명에 들어 있는 잠재적 이점이 부각되며 목표를 이루려면 중요한 기능 개선이나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액티브 책상 특허 탐색 작업은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의도하였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앉는 사람의 자세가 고정되어 사용자의 근육과 뼈에 무리한 부담이 가해지지 않도록 그때그때 책상의 높낮이를 손쉽고 빠르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절 책상을 개발한 발명가들이 나말고도 여럿 있었지만 내가 검토한 그 특허들은 하나같이 작동 메커니즘이 느리고 복잡한데다 비싸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나의 책상은 이런 결함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조절 메커니즘을 채택하고 있었다. 자신의 책상 높이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기존의 특허들에 비해 더 빠르고 조작이 간편하며 생산비도 저렴하다는 사실에 특허심사관이 동의할지의 여부는 특허심사의 추이를 지켜보고 판단할 문제이다. 그러나 에덜슨은 자신의 책상이 “그 밖에도 참신하고 유용한 특성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특허를 취득할 가능성이 높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나의 특허가 갖고 있는 잠재적 가치에 대한 자신감과 불안감은 발명가의 머리를 늘 맴돌고 있지만 그는 돈 걱정도 해야 한다. 특허청이 있는 워싱턴까지 출장을 가서 선행 기술 탐색 작업을 도와주는 특허대리인을 고용하는 데도 돈이 들지만 기타 부대 비용과 특허심사료도 만만치 않다. 특허심사료는 개인일 경우 5백 달러이며 대기업의 경우에는 그 두 배가 든다. 비단 조절 책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특허 탐색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 각종 인공물 및 공정과 관련된 부분적인 개량은 1990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만 5백만 건의 특허를 낳았다. 특허 자료를 전산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이 아무리 전산화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7만 개에 이르는 범주와 그 하위범주까지 일일이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특허 정보를 탐색하는 작업은 점차 간편해지고 있지만 1990년 말의 한 주일 동안 발급된 특허를 수록하는 데만도 컴팩트 디스크 두 장이 필요하였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발급된 모든 특허의 개요만 수록하는 데 컴팩트 디스크 아홉 장이 들어갔다. 미국 특허청은 미국의 모든 특허를 광디스크에 수록하는 사업을 추진중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완성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설사 전산화 작업이 완료된다 하더라도 특허 자료의 탐색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의 하위범주만도 무려 1천 장의 컴팩트 디스크를 잡아먹을 터이기 때문이다. 네이던 에덜슨이 “액티브 책상”으로 특허를 따낸다 하더라도 앞으로 비슷한 조절 책상이 생겨나지 않을 리가 없다. 발명가와 기업이 지루하게 특허를 탐색하고 특허출원서를 작성하느라 번거로운 절차를 끝까지 밟아나가는 이유는 권리 침해를 받았을 때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단순한 경험의 차원에서, 또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만끽하기 위하여 특허 과정에 매달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특허를 따내려는 주된 동기는 지적인 가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가치에서 비롯된다. 가령 에덜슨의 책상이 언젠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다면 비슷한 책상들이 더 낮은 가격으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질 것이다. 가격이 낮게 책정될 수 있는 이유는 연구개발비에 돈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실팍하고 두꺼운 나무를 쓰지 않을 수도 있고, 뒷마무리에 공을 들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울기는 조금 다를 수 있을지 몰라도 전반적으로는 에덜슨 책상과 비슷해보여 시장을 상당 부분 잠식할 수 있는 타회사 제품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에덜슨은 공장을 막 새로 지어 완공했는데 물건이 팔리지 않아 낭패를 볼 수도 있다. 훌륭한 조절 책상을 발명하고 생산하기 위하여 열과 성을 기울였는데도 어쩌면 에덜슨은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추가로 자본을 투입하고 디자인을 바꾸는 과정에서 빈털털이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법정에서 자신의 특허권이 침해받았음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가 쏟은 노력의 일부분일지라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경쟁사가 에덜슨의 책상보다 더 저렴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끝에 기능적으로 에덜슨의 책상에 앞서고 더 참신한 디자인을 내놓는다면 에덜슨은 싸움에서 지게 되며 새로운 책상이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랑비를 닦아내는 와이퍼로 버는 돈 특허를 딴 발명이 갖는 잠재적인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1990년 말에 일어났다. 한 발명가가 앞유리 와이퍼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몇 해 전에 접촉을 가졌던 자동차 회사로부터 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웨인 주립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던 로버트 컨스는 기존의 자동차 앞유리 와이퍼가 가랑비나 보슬비 앞에서는 제구실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주목하였다. 겨우 몇 방울의 빗물이 앞유리창에 묻은 것을 닦아내기 위하여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와이퍼에 운전자의 신경은 곤두서기 마련이었고, 와이퍼를 켰다 껐다 하는 것 또한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리가 거슬렸고 어떤 사람은 와이퍼가 쓸데없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물론 아예 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사람도 있었고 조금 번거롭지만 와이퍼를 켰다 껐다 반복하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컨스는 기존의 와이퍼가 모든 상황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그 해결책까지도 마련하였다. 컨스는 여러 상황에 맞추어 와이퍼를 간헐적으로 가동시키는 메커니즘을 발명하였다. 빗방울이 어느 정도 뿌려야 가동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 운행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빗방울을 방치하지도 않는 그런 메커니즘이었다. 컨스는 자신의 포드 승용차에 이 장치를 달고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찾아갔다. 그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이 장치가 갖고 있는 장점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컨스는 그들이 나타낸 관심을 포드 사가 자신의 발명품을 사들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곧 응분의 보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 측이 컨스에게는 한마디 사전 통지도 없이 간헐 작동 와이퍼를 장착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그는 곧바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일으켰다. 포드 사는 컨스가 특허를 따내기 이전부터 그런 와이퍼에 대한 착상을 해왔으며 따라서 특허권 침해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장장 12년 동안의 법정 소송 끝에 포드는 결국 소송비용과는 별도로 간헐 작동 와이퍼를 장착하여 그 동안 생산된 2천만 대의 차량 한 대당 33센트씩의 로열티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컨스는 다른 19개 자동차 회사와의 소송에서도 승소할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앞유리 와이퍼가 자동차 가격을 떨어뜨린 것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것은 기존의 연속 작동 와이퍼가 안고 있던 결함을 없애고 전체적으로 차량 운행을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하는 데 기여했다. 보슬비 속에서 자동차를 몰 때 운전자가 느끼는 시각과 청각적 경험에 분명한 변화가 왔으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동차 자체와 운행 방식도 더욱 효율적으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와이퍼 자체의 수명도 전보다 길어졌다는 이점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최고가 만능은 아니다 도날드 햄버거의 대합 껍질 포장 투자가가 원유라든지 기타 여느 현물에 대한 향후 가격을 점치는 것처럼 경영자나 모험투자가, 기업은 새로운 디자인의 앞날을 점친다. 그리고 원유 가격이 언뜻 보기에도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문화와 정치적 요인에 따라 달라지듯이 새로운 인공물이나 수정된 인공물에 대한 수용이나 거부는 그 인공물의 형태가 기능에 얼마나 적합한 것인가의 차원을 넘어서는 요인들에 따라 달라진다. 기술적인 지표만을 가지고 시장성을 예측하는 근시안적 시야를 가진 고문의 조언만 받아들이는 디자인 투자가는 일을 그르치기 쉽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씩 따지고 들어갈 때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결코 신성불가침한 디자인이란 없으며, 형태의 가능성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알루미늄 캔이나 플라스틱 병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품 그 자체만이 아니라 상품의 포장 디자인도 변한다. 1970년대 초반 맥도날드 사는 빅 맥을 종이 받침으로 돌돌 만 다음 다시 은박지와 종이로 잘 싸서 이것을 붉은 상자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이런 정교한 포장은 어떤 기능에서 유기적으로 발전되어나온 형태는 아니었지만 햄버거가 카운터에서 소비자의 입까지 가는 동안 적어도 한 입 베어물기 전까지는 산뜻한 인상을 내내 전달하려고 개발된 방식이었다. 종이 받침은 두툼한 빅 맥이 포장이나 운반 과정에서 짜부라지거나 짓이겨지는 것을 막아주었고, 종이는 배어나오는 기름기를 흡수하여 보기 흉하게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해주었으며, 은박지는 햄버거가 식거나 버석버석하게 말라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종이에 묻은 기름기를 또 한번 막아주어 빅 맥을 산 사람이 식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상자는 포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주었으며 빅 맥을 아주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나무랄 데 없는 방법이기는 했으나 포장할 때나 포장을 푸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마디로 패스트푸드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요란한 포장이었던 것이다. 1975년에 맥도날드는 기존의 단점을 모두 제거한 것으로 여겨졌던 새로운 포장 디자인을 도입하였다. 이제부터는 하나의 빅 맥을 폴리스티렌 “대합 껍질”에 집어넣었다. 원유에서 추출한 기포 화학물질을 이용한 이 포장 덕분에 햄버거를 단번에 포장 용기에 집어넣을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소비자도 쉽게 포장을 풀 수 있었다. 대합조개의 윗껍질은 수저로도 쓰일 수 있었으며, 감자튀김을 먹는 데는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이 상자는 맥도날드 건물의 꼭대기 지붕을 연상하게 만들어져 있어 맥도날드 체인점의 완벽한 상징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햄버거 포장이 아주 새롭게 등장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미 슈퍼마켓에서는 골판지로 만든 비슷한 포장에 달걀을 넣어서 팔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햄버거에 응용한 것은 참으로 뛰어난 발상이었다. 단단한 플라스틱 용기는 그 안의 온도와 습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고 기름기를 흡수하면서도 그 자신은 보기 흉하게 기름으로 얼룩지지 않아 빅 맥에 딱 어울리는 산뜻하고 화사하며 개성 있는 포장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종이를 포장지로 남용하는 데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폴리스티렌 용기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빅 맥을 넣는 대합조개는 디자이너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찬사를 받았고, 얼마 안 가서 맥도날드의 다른 제품들도 비슷한 포장에 넣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테면 보통 버거와 치즈 버거를 구별하기 위해서 포장에 색깔을 넣고 도안을 다르게 했다. 이 기본 디자인은 입을 벌린 대합조개를 또 하나의 대합조개가 덮고 있는 듯한 새로운 디자인을 낳았다. 이 분할 포장 용기는 맥디엘티라는 새로운 샌드위치를 넣기에 적합했다. 한쪽에는 따끈따끈한 햄버거를, 또 한쪽에는 차가운 양상추와 토마토를 따로 보관하다가 나중에 먹을 때 이 둘을 합칠 수 있어 더욱 싱싱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맥치킨 샌드위치는 새롭게 변형된 대합조개 안에 포장되었다. 그것은 플라스틱 박스의 도입과 수용에 따른 야단법석 속에서 묻혀 지나갔던 원래 디자인의 결점을 개선한 포장이었다. 그 결점은 다름아닌 빅 맥을 그것이 담겨 있는 깊은 조개로부터 꺼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용기를 너무 크게 만들면 햄버거 양이 턱없이 적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하도 빡빡해서 손가락을 햄버거 밑으로 집어넣기도 어려울 정도여서 용기를 비스듬히 기울여야만 간신히 햄버거가 빠져나왔다. 새로운 맥치킨의 용기는 바닥만 좁게 해서 뚜껑을 열면 햄버거의 한쪽에 손가락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그만큼 먹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기본 디자인을 변형시킨 것은 불편을 끼쳤던 지난번의 용기에 비해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었지만 맥도날드의 다른 햄버거들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눈에 익은 “고전적”인 디자인에만 손을 대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눈에 익었다손 치더라도 어떤 기능에서는 뛰어나보이는 디자인이 머지않아 다른 기능과 관련해서 새로운 결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도입된 지 10년 만에 대합조개는 과대 포장의 상징물로, 환경에 위협을 가하는 물건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종이에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지만 플라스틱은 더 안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클로로플루오로카본CFC은 지구를 보호하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맥도날드 측은 CFC가 포함되지 않은 플라스틱 용기로 바꿈으로써 환경 단체의 압력에 발빠른 대처를 했고, 1988년에 용기 대체 작업을 마쳤다. 맥도날드는 1990년 기업 광고에서 이 결정을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여러 환경 단체와 환경보호청이 이번 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존층을 보호하기 위한 맥도날드의 노력은 환경 단체들한테는 인정받았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자인 발전에 미치는 정치 바람 폴리스티렌 용기가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카운터에서 식탁까지 햄버거를 실어 나르는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이 용기는 쓰레기 문제와 오염 문제를 일으키는 두통거리로 영원히 남았다. 환경주의자들은 대합조개가 자연 상태에서 분해가 안 될 뿐더러 매립장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자 환경보호론자들의 끈질긴 공세에 시달리던 맥도날드는 마침내 플라스틱 용기를 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노력으로 경제적인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시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폴리스티렌 용기는 환경을 무시하는 낭비적인 소비 행태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처리 공정이 각각 다른 폴리스티렌 샐러드 접시와 덮개, 폴리에틸렌 막을 씌운 종이컵, 폴리프로필렌 빨대, 그리고 그 밖의 부수적인 소모품들을 한 군데 섞어놓다 보니 재활용하기 위해 그것들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만도 여간 번거롭지가 않았다. 게다가 쓰레기를 치우고 묶고 씻지 않은 상태에서 보관해두는 것은 냄새도 냄새지만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했다. 결국 1990년 맥도날드 측은 그해 말까지 플라스틱 용기를 다시 종이로 완전히 바꿔놓겠다고 발표하였다. 맥도날드 사에서 쓰는 플라스틱 용기는 아모코 정유의 자회사인 플라스틱 전문 생산업체 매출액의 10퍼센트를 차지하였으며, 미국에서 한 해에 생산되는 10억 파운드에 이르는 플라스틱 용기 가운데 7 내지 8퍼센트가 되는 양이었다. 맥도날드가 하루 아침에 방침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환경 단체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동안 내부적으로 종이 포장과 플라스틱 포장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사장은 용기 변경 방침을 공표하면서 환경방어기금의 이사장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책상 위에는 산더미처럼 올라간 플라스틱 용기와 그것을 대체하기로 된 훨씬 적은 양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환경주의자들이 맥도날드의 결정에 일제히 박수를 보낸 것만은 아니었다. 환경활동재단 측은 “폴리스티렌 생산 과정에서 오염 물질이 배출되며 스티렌 단량체가 발암 물질”이라며 다행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야생조류의 보존 활동을 펴는 국립 오더번 협회에 소속된 한 과학자는 맥도날드의 결정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종이 역시 오염물질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밝혔다. 포장 디자인 변경 방침을 다른 식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었다. 맥도날드의 선전 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맥도날드의 강력한 경쟁 상대 가운데 하나인 버거킹은 “버거킹은 새로운 환경의식에 눈뜬 맥도날드에게 찬사를 보낸다”는 문구로 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실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내용이 가관이었다.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만, 1955년에 진작 들어왔더라면 지구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1955년은 막 생겨난 버거킹이 주로 종이로만 포장을 하기 시작하던 해였다. 예외로 남아 있었던 폴리스티렌 커피컵도 1990년부터는 두꺼운 종이컵으로 모두 바꾸었다. 이 모든 결정들은 분명히 기술적인 고려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인공물의 발전을 낳는 요인들은 이렇듯 복잡다단하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기술은 거스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랄프 월도 에머슨도 그의 시에서 이런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물건들이 안장에 올라 사람을 타고 가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짐이 너무 무겁거나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에는 물건을 떨구어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점까지도 고려해 넣어야 할 것이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햄버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공물의 형태를 밀고 당기는 힘들은 수없이 많지만 형태에 미치는 이 모든 영향력의 배후에는 근본적인 하나의 원칙이 도사리고 있다. 그 원칙은 실패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이 햄버거를 신선하고 따뜻하게 보관하는 기술적 기능이든 깨끗하고 건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적 기능이든 말이다. 특정한 포장이 이러한 기능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변화의 바람이 일게 된다. 그러나 햄버거 포장의 예가 15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뚜렷하게 보여주었듯이 오늘 실패로 규정되었던 것이 15년 뒤에 가서 새롭게 각광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의 집단적인 정치적 기억은 고작해야 대통령의 임기인 4년을 못 넘는다. 비록 객관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기술에 대한 우리의 기억도 그에 못지않게 짧으며 내용보다는 구호에, 증거보다는 호언장담에 따라 왔다갔다 한다. 빅 맥과 맥디엘티에게는 플라스틱 용기가 종이 포장은 감히 뒤꿈치에도 못 따라올 정도로 요긴했다는 것은 어쨌든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환경의식에 투철하겠다는 맥도날드의 방침을 천명하는 자리에서 맥도날드 사장은 새로운 종이 포장은 플라스틱만큼 햄버거의 온기를 유지시켜주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가 종이 포장을 마지막으로 썼던 1970년대 초반 이후로 발전시켜온 조리법이 포장지의 단점을 벌충해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또 “조리기술이 종이의 결점을 따라잡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결국 맛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두 칸으로 분리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팔던 맥디엘티의 경우 그것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문제”였다. 실제로 새로운 포장법이 개발되는 동안에는 맥디엘티는 판매되지 않았다. 잉 사 비행기 설계에 도입된 눈물방울 디자인에는 까다로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그 해결 방안은 디자이너가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못지않게, 앞으로 전개될 길을 얼마나 똑똑히 내다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수레를 끄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앞을 보면서 가게 되어 있다. 초창기의 짐수레는 마치 쟁기를 끌듯이 앞에 장애물이 없나를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밀지 않고 끌게끔 되어 있었다. 말 뒤에 수레를 달아본 사람이나 자동차 뒤에 트레일러를 연결해본 사람은 이러한 구조의 장점을 잘 안다. 얼마 안 가서 수레는 사람이 아닌 짐승이 끌게 되었고, 사람이 끄는 유일한 수레는 앞에서 끄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밀면서 가는 구조로 바뀌었다. 오래전부터 효율적인 수로망이 갖추어져 있던 중국에서는 서양처럼 도로나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천 8백 년 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육상 운송수단인 중국식 외바퀴 수레는 비교적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중국식 외바퀴 수레는 지름이 석 자에서 넉 자쯤 되는 아주 커다란 바퀴가 수레의 한가운데에 고정되어 있다. 바퀴의 상단부는 나무로 된 몸통 안에 들어가 있고 운전자는 이 위에 엄청난 양의 짐을 양 옆과 앞뒤가 균형을 이루게끔 잘 싣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이렇게 하면 수레의 방향에만 신경을 쓰면서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외바퀴 수레는 논두렁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던 두바퀴 수레에서 발전해나왔다고 한다. 수레는 마른 땅에서 잘 굴러가는데, 논에는 마른 땅이라고 해봐야 비좁은 논두렁밖에 없으니 불편했던 것이다. 두 바퀴 수레가 굴러다니지 못하는 논두렁 위로 외바퀴 수레는 잘도 굴러다녔다. 하지만 신경 써서 끌지 않으면 외바퀴 수레도 논두렁 옆으로 미끌어지기 일쑤였으므로 수레꾼은 늘 어깨 너머로 뒤를 보면서 바퀴의 방향을 살펴야 했다. 서양식 외바퀴 수레는 바퀴가 하나 달려 있다는 점말고는 중국의 것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서양식 외바퀴 수레는 들것처럼 생긴 바퀴 안 달린 들통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통로가 비좁고 임시로 설치된 다리가 광산이나 건설 현장에서 많이 쓰이던 이 들통은 앞뒤에 각각 손잡이가 달린 상자처럼 생겼다. 들통은 짧은 거리로 짐을 운반할 때는 더없이 효과적이었지만 혼자서는 들 수 없다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결함을 없애려고 한쪽 손잡이의 자루 사이에 커다란 바퀴를 하나 달자 혼자서도 자유롭게 짐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드는 들통은 앞사람이 이끌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서양식 외바퀴 수레는 밀지 않고 끌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논두렁도 마찬가지지만 비좁은 널빤지 위에서 수레를 끌 때의 불편함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래서 다소 어정쩡해보이기는 했지만 외바퀴 수레는 점차 미는 구조로 바뀌어갔고, 수레꾼은 바퀴가 움직이는 선을 시원스럽게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앞을 바라본다는 것과 디자인의 핵심이 맞닿아 있어 이 인공물은 길고 울퉁불퉁하고 위험물이 곳곳에 도사린 험난한 길 위에서 자신의 형태를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말이 안 끄는 마차 곧 자동차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그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와 관련하여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자전거 틀에 오토바이의 부품을 달 때의 다양함만큼이나 넓었다. 처음 자동차를 설계한 사람들은 동력을 어떻게 혁신적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었지 방향 조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따위의 문제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기본 뼈대는 여전히 마차와 다를 바 없었다. 운전자가 손으로 당길 수 있는 레버가 고삐 역할을 하는 식이었다. 자동차의 기본 틀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도로도 자동차에 맞게`──`자동차를 도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가다듬어지자 설계자의 관심은 자동차의 좀더 세부적인 구조와 기능에 쏠렸다. 핀에서 권총에 이르기까지 만들었다 하면 무조건 기계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생산하고 조립하려는 미국 특유의 생산 방식에 걸맞게 헨리 포드도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디자인의 문제는 결국 정부에서 자동차가 지나다닐 길의 방향을 얼마나 정확히 예견하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혁신가들은 나름대로 그 길을 뚜렷이 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디자인이 쫓아가는 길은 끝없이 갈라지고 또 갈라지다가 끝판에 가서는 덤불숲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어떤 길이 더 많이 이용될 것인가를 예상하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할지가 불분명한 상태에서는 그 길을 달리게 될 차의 모양도 불분명한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비행기가 유선형으로 된 것은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였지만, 처음에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는 당연히 스타일보다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 곧 기체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설계되었다. 그 방면의 기술이 하나둘 축적되면서 비행 속도가 빨라졌고 비행 속도가 빨라질수록 공기 저항이 커졌다. 1930년대에 이르자 가장 공기 저항이 적은 형태로 진작부터 알려져 왔던 눈물방울 모양이 보잉과 더글러스 사의 비행기 설계에 도입되었다. 미래를 가장 잘 상징하는 인공물의 자리에 올라선 비행기는 인공물 일반의 스타일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흔해빠진 물건들도 그런 기능적인 이유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유선형으로 만들어졌다. 둥그스름한 스태플러, 연필깎이, 토스터가 디자인의 새로운 기준 모델로 갈채를 받았다. 미국 자동차의 유선형화는 1920년대에 도입된 어떤 미묘한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는 각이 진 사각형의 포드 자동차가 자동차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35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버크민스터 풀러가 자신의 다이맥스터 자동차에서 시도한 파격적인 유선형 차체 모델은 틀림없이 “미래적”이기는 했지만, 현실의 자동차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다. 역시 유선형으로 빠진 1934년도 크라이슬러의 에어플로는 각이 진 윤곽을 부드럽게 다듬어 현대식 디자인의 차창을 달았지만 역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제2차대전 후에는 1947년도의 스터드베이커가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이것을 설계한 사람은 레이먼드 로이지만 로이는 스터드베이커 사의 사장의 과감한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구상은 현실화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제트기와 원자탄으로 상징되는 미래가 도래하면서 자동차는 더이상 원래의 뿌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1948년에 나온 캐딜락의 꼬리 부분에 로켓 지느러미를 처음 붙이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를 통하여 지느러미는 그저 새로운 스타일의 자동차를 판다는 목적말고는 아무런 기능적 이유도 없이 매년 엄청난 비율로 커졌다. 1957년에 인공위성 스푸트닉 호가 지구 궤도로 쏘아올려지면서 새로운 디자인 미학이 자리잡았다. 위성을 쏘아올리는 로켓에는 지느러미가 필요했지만 위성 그 자체는 지구 대기 위의 진공에 가까운 허공을 선회하므로 유선형으로 만들 이유도 꼬리날개를 달 이유도 없었다. 스푸트닉의 출현은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자동차 설계자들은 이것을 곧바로 다음 모델에 반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디자인의 중심부에 달과 우주라는 외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달 착륙선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지구의 대기를 뚫고 귀환하는 우주선 캡슐을 유선형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행성간 우주비행선의 디자인은 다시 네모난 모양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 우주왕복선은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향후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짓는 좌표가 되었다. 1980년대에 선보인 자동차들은 우주왕복선의 앞머리와 닮아보였다. 포드 사의 에어로스타 같은 차종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자동차도 햄버거와 비슷한 방식으로 마케팅되고 있다. 디자인이 너무도 많은 기능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이유로 하나의 새로운 디자인 형태를 만들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상품 그 자체에서건 상품의 포장에서건 소비자가 앞으로 무엇을 꿈꾸고 무엇에 싫증을 낼 것인지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제품의 성패가 왔다갔다 한다. 이 14세 호텔의 자물쇠 없는 욕실 모든 디자인은 앞을 내다보기 마련이지만 변덕스러운 유행의 흐름에 모든 디자인이 휘말리는 것은 아니다. 가장 뛰어난 디자인은 멋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며, 단발성 재치보다는 지속성 있는 내용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기존의 물건, 시스템, 과정이 예상했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디자인의 문제가 발생한다. 랄프 카플란이 쓴 《디자인으로》에는 ‘루이 14세 호텔의 욕실 문에는 왜 자물쇠가 없는가’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달려 있다. 카플란은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늘 앞을 내다보고 있어야 하며 자기의 물건이 쓰이게 될 미래의 상황을 어떻게 예견하고 있어야 하는가를 한 호텔의 욕실 문을 예로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캐나다 퀘벡 주의 선창가에 자리잡고 있던 루이 14세 호텔은 개인 욕실이 방마다 딸려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개인 욕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두 개의 객실 사이에 욕실 하나가 끼여 있고 욕실로 통하는 문이 두 객실 모두에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일반 주택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여러 개의 침실이 하나의 욕실을 공유한다든지 욕실 하나가 침실로도 복도로도 통할 수 있게 된 그런 구조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설계의 기본 목표는 욕실을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데 있다. 그 목표를 이루는 방식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확실하고 일반화된 방법은 문마다 자물쇠를 달아 욕실 사용자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욕실 사용을 마친 사람이 옆 방으로 통하는 문을 도로 따놓는 것을 깜빡 했을 경우 옆 방 사람은 욕실로 들어갈 수가 없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자매가 함께 쓰는 욕실이라면야 잠긴 문 틈새로 소리를 지를 수 있을 테고, 그래도 감감 무소식이면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가든가 집 안의 다른 욕실을 사용하는 불편을 잠시 겪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집에서는 아예 자물쇠를 모두 없애버리고 문을 열기 전에 노크하는 버릇을 식구 모두가 갖고 있다는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보는 사람들이 함께 쓰는 욕실은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전에 나는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 맞은편에 자리잡은 예스러운 훌륭한 저택에 묵은 적이 있다. 그 저택은 두 방이 한 욕실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라도 자유롭게 집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고 슬라이드나 원고처럼 중요한 물건은 방 안에 두고 다니곤 했다. 그래서 복도나 욕실을 통해 엉뚱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자물쇠를 달아야 했고 동시에 욕실 안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두 방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잠글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구조는 불가피하게 많은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쓰지 않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욕실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겼던 것이다. 근처에 가정부마저 없을 때는 그야말로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머리를 짜내어 간신히 생각해낸 것이 욕실 문 옆에 있는 화장대 위에다 큼직한 글씨로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잠가놓았던 맞은편 문을 열어둡시다”라는 내용의 주의판을 놓아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의 부적절함을 피부로 느꼈던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자물쇠 따놓는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손님들의 건망증 때문이었건, 비어 있는 욕실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자물쇠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었건 어쨌든 호텔 측은 기발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각 욕실 문은 객실 쪽에서는 물론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동으로 쓰는 욕실을 통해 제삼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욕실 문 안쪽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았다. 욕실을 이용하는 손님이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면 각각의 문손잡이에 달려 있는 1미터 남짓 되는 두 개의 가죽끈을 욕실 한복판에서 연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욕실을 가로지르는 팽팽한 가죽끈이 조금은 거추장스러웠지만 그 가죽끈은 욕실을 사용하고 있을 때 절대로 남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주었다. 그리고 욕실을 나서려고 문을 열 때에는 연결해두었던 가죽끈을 풀어야 했고, 그러면 두 문이 자유롭게 열렸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욕실 문에 자물쇠를 다는 문제도 그렇고, 음식을 깡통에 넣어 보관하는 문제도 그렇고, 너무 눈앞의 문제에만 연연하다 보면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나중에 가서 새로운 문제를 낳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가는 곳마다 플라스틱이 사용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쓰레기통은 주로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커다란 쓰레기 수거함에다 내용물을 비우도록 되어 있었다. 바나나 껍질이나 수박 껍질을 쓰레기통 안에 버리면 그 일부가 바닥에 배어들어 며칠씩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빈 사이다 캔을 버려도 안에 남은 몇 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끈끈한 흔적을 남기곤 했다. 얼마 안 가서 쓰레기통은 엉망이 되었고 그것을 물로 닦아낸다고 해봐야 벌써 긁히고 움푹 들어가고 군데군데 삭아 있어서 오히려 녹만 더 슬고 볼품없어지는 결과만 불러왔다. 비닐 주머니를 쓰레기통 안에 씌우기 시작하면서 비위생적이고 보기 흉했던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고 환경미화원이나 청소부도 쓰레기통을 비울 때 한결 일손을 덜 수 있었다. 쓰레기가 가득 든 비닐 주머니를 들어올린 다음 새 비닐 주머니를 깔면 되었던 것이다. 공공장소에 놓인 대형 쓰레기통도 같은 방법으로 비우게 되어 쓰레기를 처리하는 사람이나 수거하는 사람의 작업이 한결 편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닐 주머니는 사람들이 물건을 쓰고 버리는 행동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심지어는 공중 위생 수준이 오히려 퇴보하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비닐 주머니는 어디가 Z어지거나 찢어지지 않은 한 새는 법이 없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은 쓰레기통 안에 아무것이나 마구 집어던졌다. 전 같으면 반쯤 먹다 남긴 요구르트 병, 반쯤 남은 사이다 캔, 점심 때 먹다 남은 음식을 별도로 처리한 다음 쓰레기통에 버렸겠지만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버렸다. 곰팡이가 슬거나 파리가 꾀기 전에 어차피 비닐 주머니를 비우지 않겠느냐는 배짱인지도 몰랐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도 그에 뒤질세라 편리한 처리 방법을 개발한 것 같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쓰레기통을 그대로 뒤집어서 비웠다.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비닐 주머니를 갈아 끼우는 데`──`그나마 대충대충 끼우면서도`──`들어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남아도는 시간을 엉뚱한 데 쓰려고 그랬는지 비닐 주머니를 제때제때 갈아 끼우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그 결과 찌꺼기들이 비닐 주머니 바닥에 고여`──`그나마 구멍이 나 있지 않다면`──``사무실 안에는 퀴퀴한 냄새가 감돌았다. 위생 상태가 오히려 악화된 것이다. 공공장소에 놓인 쓰레기통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었다. 간편한 포장식이 늘어나면서 음식 쓰레기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음식과 음료수가 모두 입에 맞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이 다 먹지 않고 버리는 양도 그만큼 불어나는 것이다. 다람쥐들은 이런 쓰레기 깡통을 공략하여 어두운 은신처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통행인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기어나와 더욱 기겁을 하게 만든다. 또 다람쥐가 뚫어놓은 비닐 주머니를 몇 주씩 그대로 놔둬서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가 그 틈새로 흘러나왔다. 꽉 찬 비닐 주머니는 새 것으로 바뀌기는 하지만 이른 아침 쓰레기 수거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끈적끈적한 오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음식 쓰레기는 대개 부피만 크고 가볍기 때문에 쓰레기 수거차는 비닐 주머니를 압축하여 전체적인 부피를 줄이려고 한다. 그러나 쓰레기가 든 비닐 주머니를 압축하는 것은 포도송이를 으스러뜨리는 것과 같아서 자연히 구정물이 뿜어나오고 그것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청소차가 이런 구정물까지 담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밑바닥을 통해 땅 위로 떨어졌다. 청소차 운전수는 차를 하수구 옆에 주차시켜 구정물이 하수관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했지만 불볕 더위가 이어질 때면 구정물이 그대로 고여 썩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만 지나면 아무리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그 악취를 견딜 수 없게 되고 만다. 분명히 우리 생활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비닐 쓰레기 주머니는 우리의 행동과 환경을 바꾸어놓았다. 쓰레기를 치울 때 생기는 악취와 불결함은 접어두고라도 우리의 집과 공공건물은 넘쳐나는 비닐 주머니로 몸살을 앓는다. 쓰레기를 잘 담으려면 비닐 주머니를 쓰레기통 옆에 겹질러놓아야 하는데 이것이 미관상으로도 과히 보기 좋지 않다. 마치 나이든 아주머니가 둘둘 말려 내려간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그런 모습이다. 깔끔하고 수수한 사무실이나 법정 분위기에 맞게 잘 만들어진 쓰레기통, 정원이나 가로수 길에서 되도록이면 너무 요란하지 않게 신경을 써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 나중에는 포장을 뜯다 만 물건처럼 어정쩡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관습의 힘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이제는 그것이 꼭 필요한지 여부를 떠나 쓰레기통에는 덮어놓고 비닐 주머니를 씌우고 본다. 내가 자주 드나드는 도서관은 음식이나 음료수의 반입이 일절 금지되어 있으므로 쓰레기라야 종이밖에 없는데도 쓰레기통이란 쓰레기통에는 모두 비닐 주머니가 씌워져 있다. 성공이 실패로 바뀐 대표적인 디자인의 예로 나는 아직도 기고만장하게 버티고 있는 비닐 주머니를 들고 싶다. 햄버거를 포장할 때건 쓰레기통을 비울 때건 디자인은 당장의 쓰임새를 넘어서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 물건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등장한 인공물 하나하나는 사람과 물건의 행태에도 다시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디자이너가 눈앞의 필요성을 넘어서서 좀더 멀리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갖고 있다면 어느 정도의 예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디자인은 미래에도 살아남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미래적인 디자인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재료나 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변화된 환경 안에서 더 심각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보게 된다. 섣부른 판단이 미래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으므로 디자이너는 겉모습과 단기적인 목표를 넘어서서 내실 있는 디자인과 그것의 장기적인 결과를 세심하고 신중하게 따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 경영의 비유를 들자면 단기간의 손익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그 기업의 굳건한 기틀을 마련하는 데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작업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개선의 여지는 늘 있다 리한 물건이 처음에 주는 거부감 “엔지니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의 고정 칼럼에서 해학적인 글을 쓰는 작가 러셀 베이커는 자기 사무실에 들여놓은 새 전화기가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다고 투덜거린다. 사용법을 배우려면 몇 시간씩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통화 전송 같은 기능을 덧붙인 것은 베이커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과학도 좋지만 해도 너무 하는 짓거리이다. 자신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지만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전화가 자기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베이커는 자신의 새로운 전화기를 “평지풍파를 일으켜야 직성이 풀리는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삭막한 공포 사례”로 정의 내리면서 글을 마무리짓고 있다. 모든 기술적 변화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갖고 있다. 어떤 평론가에게는 “평지풍파”로 보이는 것이 어떤 평론가에게는 구세주로 보인다. 그리고 평론가의 역할이라는 것도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뒤바뀔 수 있다. 심지어는 한 개인에게조차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 통화 전송을 다시 예로 들면, 마감시간이 임박한 상태에서 기사의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추적해야 하는 사건 기자에게 통화 전송 기능은 천군만마에 못지않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시대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전화기 앞에서 한숨짓는 사람은 러셀 베이커만이 아니다. 《일상용품의 디자인》에서 도널드 노먼은 “새로운 전화기는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의 뛰어난 또 한 가지 사례임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 정교한 버튼식 전화기는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늘리는” 현대식 기기에 대한 노먼의 문제 의식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대상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도 최근에 새로운 복잡한 전화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나의 첫 반응은 베이커나 노먼의 반응과 비슷했다. 나는 문득 회전식 다이얼이 달려 있었던 옛날의 그 까만 전화기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더이상 향수에만 젖어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옛날 전화기를 썼을 무렵의 불편했던 기억을 하나둘 떠올렸다. 옛날 까만 전화기는 수십 대의 전화기가 겨우 세 가닥의 외부선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나마 장거리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한 가닥 선뿐이었다. 전화를 걸고 싶으면 먼저 단추에 들어온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빛이 꺼져 수화기를 들어도 다른 사람이 먼저 수화기를 들었으면 통화 신호음이 울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다이얼을 잘못 돌리거나 애써 걸었는데 상대가 통화중이면 통화권을 금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새로운 전화기가 보급되면서 나는 더이상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화를 다시 걸어주는 자동 다이얼 기능, 버튼 하나만 더 누르면 상대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신호음을 울려주는 자동 재통화 기능의 편리함도 알게 된 것이다. 통화 전송 기능은 내 전화기에도 있지만 나는 8월의 해변에서까지 그 기능의 도움을 얻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내가 그 기능을 사용하는 것은 전화로 응답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러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과 조교에게 꼭 필요한 연락을 보내거나 업무를 처리해야 할 때뿐이다. 내 전화기에는 또 음성 녹음 기능도 있어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내 전화기의 신호음이 그침과 동시에 자동 응답 시스템이 작동된다. 그럼 나는 거기에 녹음되는 내용을 들을 수 있고, 듣고 있다가 필요하다면 응답을 할 수도 있다. 베이커가 구입한 새 전화기에는 더욱 복잡한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어디까지나 그에게 주어진 자유이다. 나도 엔지니어들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베이커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결국 내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전화기가 처음에는 약간 두렵게 느껴진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버튼 자체가 너무 낯설고 기능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다. 전화기를 판매한 회사에서 나온 직원이 자기만 아는 전문 용어로 이 기능은 어떻고 저 기능은 어떻고 하며 따발총처럼 정신없이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차마 체면이 있어 물어보지도 못하고 동료 교수들과 함께 망연자실해서 서 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동료 교수들은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애매모호하게, 또 때로는 모순된 내용으로 가득 찬 메뉴얼을 몇 시간씩 뒤적이면서 전화기의 기능을 하나씩 익혀나가지 않았는가 싶다.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새로운 비장의 기능을 알아낸 사람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것을 슬쩍 내비치고 나서 자기가 맨 먼저 그런 기능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흐뭇함에 젖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속으로 나 혼자만 뒤떨어져 있구나 하는 자괴감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처음 버튼식 전화기가 나왔을 때 그것을 비웃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어리석게도 버튼식 전화기의 유일한 목적은 전화를 더 빠른 시간 안에 걸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고 단정짓고는, 기계식 전화기의 다이얼을 겨우 7번 돌리면 그만인데 그 정도의 여유도 없이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참으로 딱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여유로웠고 전화번호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아직 다이얼을 몇 번 돌리면 멀리 떨어진 주에서 전화벨이 따르릉 울린다는 사실에 경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관절염을 앓기 전까지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이얼 돌리는 게 귀찮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고, 전화를 다른 식으로 혹은 좀더 빨리 걸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버튼식 전화기의 맛을 한번 본 뒤로는 기계식 전화기로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9”를 한번 돌려 다이얼이 270도를 돌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가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편리한 물건이 처음에는 왜 그토록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만큼 옛날 물건에 우리가 익숙해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적어도 우리의 손때가 묻은 물건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형태가 새로운 기능까지 동반하고 나타났을 때 본능적으로 우리는 방어의식과 위기의식에 빠진다. 어쨌든 기계식 다이얼 전화기도 우리 문화에서 우상처럼 떠받들어지던 물건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기계식 전화기를 쓸 수 있었고 또 남이 쓰는 것을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배우가 다이얼을 다섯 번밖에 돌리지 않고 그것도 다섯 번 모두 같은 구멍만 돌릴 경우 그 장면의 리얼리티는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적어도 그의 실수가 영화 줄거리에 의도적으로 끼워넣어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버튼식 전화기는 이 모든 것을 크게 변화시켰다. 버튼식 전화기가 가져온 혜택을 우리가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제 버튼을 누를 때 나는 전자음은 다이얼을 돌릴 때 나던 차르르 소리처럼 우리 귀에 익숙해졌다. 어떨 때는 마치 그 소리가 노래의 한 소절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버튼을 스타카토로 짧게 끊어서 누르는 데 재미를 붙였다. 속도가 빨라지면 더욱 신이 났다. 전화번호에 대한 기억도 점차 시각화되어 번호는 떠오르지 않는데 손가락이 저 혼자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며 다니는 그런 경험도 해보았다. 나의 현금카드 비밀번호는 번호판 위에서 수평선을 이루고 있으며 음성우송 확인 비밀번호는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런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기억수단의 도움이 없다면 나는 현금을 인출하고 메시지를 받는 데 애를 먹을지도 모른다. 아 있는 사람을 위한 디자인 새로운 전화 시스템이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완벽한 물건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인공물과 그것을 쓸 수 있게 해주는 하부구조`──``컴퓨터 용어를 쓰자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양호” “탁월” “최고”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는 길을 따라 펼쳐지지만, 설령 “최고”의 지점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면 더 높은 언덕이 바로 앞에 버티고 있다. 그리로 가는 길은 우회로, 도중하차, 막다른 골목, 헛걸음질, 사고로 얼룩진 길이다. 특히 기술이 복잡하고 그 기술이 추구하는 목표가 원대할 경우에는 완벽한 성능과 완벽한 수용에 이르기까지는 끝없는 의심과 수정, 고장과 파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낸 디자이너도, 그것을 쓰는 사용자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여 발전이 지체되고 교통 체증이 빚어지기도 한다. 베이커가 전화기에 대하여 상세히 언급한 불만 사항들이 최근 수많은 가전품들에 대해서도 쏟아져나왔다. <디자인 뉴스>에 실린 한 사설에서 소비자들에게 판매되는 제품들에 대한 불만을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다. 이 사설에 자극을 받은 수많은 독자들`──``그들은 대개가 디자이너 아니면 엔지니어였다`──``이 자신들이 파악한 “형편 없는 제품들”의 목록을 보내왔다. 독자들이 주로 문제로 삼은 것은 포장이었다. 지나치게 효율성만을 앞세워 도무지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로잡은 먹이를 앞에 놓은 맹수, 또는 땅 위에 떨어진 야자 열매와 씨름을 해야 했던 원주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태곳적부터 있었던 문제였다. 우리는 효과적인 깡통따개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깡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날 플라스틱 포장을 따고 내용물을 들어낸다는 것은 여간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다른 일은 귀신처럼 해내는 사람들이 막상 포장을 벗길 때에는 진땀깨나 흘리는 것이다. 디자이너 입장에서야 물건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철통 같은 포장을 했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어떻든 소비자의 입에서 계속 불만이 터져나온다면 그것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제품의 조절부위도 일종의 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꿰뚫고 있지 못하면 블랙박스 안의 상품을 제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 뉴스>의 독자 가운데에는 “디지털 시계나 비디오의 수많은 조절 기능”에 대해서 불만을 호소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해가 갈 법도 한 노릇이다. 새로운 전자제품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복잡하게 뒤엉킨 전선과 코드를 헤집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내 경험으로 말하면, 나는 새로 산 시계를 맞추거나 비디오를 녹음하고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작법만 익힌 다음에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새로운 기능을 익히느라고 골머리를 앓을 엄두조차 나지 않더라는 말이다. 결국 나는 그 밖의 기능들이 들어 있는 포장은 뜯어보지도 않은 셈이었다. 전자제품에 대한 우리의 불만과 조작 미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부지런히 그것들을 사들이고 있다. 1990년 현재 미국 가정의 4분의 3이 전자레인지를 갖고 있으며 60퍼센트 이상이 비디오를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광고 세례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전자회사들도 자기들이 만든 전자제품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금성사는 자신의 제품이 사용자에게 친숙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다수 소비자의 중론은 시판되고 있는 복잡한 전자제품이 사용하기에 너무 어렵다”는 것이라고 시인한 뒤 자신의 제품은 “살아 있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한다. 아이러니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전자산업의 추세가 점점 복잡한 물건을 내놓는 것과는 반대로 금성사는 자신의 물건이 사용하기 간편한 “덜 복잡한 제품”임을 강조하여 다른 유수한 회사의 제품들과 차별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소비자가 가전제품의 기본 성능, 나아가 특수한 기능들을 의심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디지털 시계는 시간과 날짜뿐만 아니라 원하는 약속 시간까지도 알려주는 등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 비디오는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비디오테이프를 틀면 원하는 프로를 시청하면서 다른 채널에서 방영하는 쇼를 녹화할 수 있게 해주고, 식사를 하면서 녹화할 수도 있다. 그러한 목표들은 디자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일찌감치 주어졌고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상품 카탈로그나 전자제품 매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물건들이 발전해나왔다. 그러나 거기 소개되어 있는 전자제품의 다양성, 특히 조절장치의 다양성은 형태가 기능에서 나온다는 원리를 반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가 거듭 확인하였듯이 인공물을 “완성”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은 당초에 기대했던 성능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 인공물 안에 있는 결함이다. 그러나 그 결함은 어느 정도 상대적이기는 하다. 우리 사용자들은 우리가 쓰는 물건의 불완전성에 적응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것을 쓰는 사용자로부터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그 물건의 발전 과정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원칙인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왜 처음부터 물건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까. 이것은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변명의 여지는 없는 문제이다. 전자제품 디자이너들이 자기들의 물건이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서이건, 또는 자기들의 앙증맞은 작은 악마의 전자 회로 내부를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탓에 그 악마의 겉표정에는 관심이 쏠리지 않아서이건, 소비자 일반과 도널드 노먼 같은 비판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물건들이 애당초 약속된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노먼은 “쓸모 있는 디자인”이야말로 “미래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관건”이라고까지 말한다. 노먼의 입장은 단호하다. “주의사항과 두툼한 사용설명서는 실패의 증거이다. 제대로 된 디자인으로 처음부터 극복했어야 할 문제를 땜질 처방하려는 시도이다.” 노먼의 지적은 옳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은 어찌하여 너나 할 것 없이 그토록 근시안적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을까. 클립에서 전자레인지, 현수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의 으뜸 가는 목표는 종이를 묶든, 요리를 하든, 강을 건너든 그 대상의 일차적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히 디자이너들은 일차적인 기능에 관심을 쏟기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디자인에 들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필요하지 않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을 측면에 익숙해지게 된다. 가령 처음에 클립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철선이 굽어지는 것을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그 다음에는 종이 위에서, 마지막으로는 기계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철선은 너무 구부리면 부러진다는 사실, 또 어떤 철선은 웬만큼 구부려도 탄력성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적당한 철선을 적당한 각도로 구부려서 스스로 설정한`──`대개는 명확히 정의 내리지 않은`──`목표에 맞춘다. 하지만 수없이 쏟아지는 특허가 단적으로 입증하듯이 갖가지 모양으로 구부러진 각양각색의 철선들이 나오게 된다. 이 클립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상대적인 장단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기업가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여 제품으로 만들어 팔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디자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물건에 익숙해지고 친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보자는 잘 못 다룰지라도 그들은 그 물건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새로운 형태의 클립을 종이에 끼우는 일처럼 언뜻 단순해보이는 작업도 그 클립을 만든 사람에게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처음 그 클립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상품을 조금이라도 사용자에게 친숙하게 변형시키는 것을 과업으로 삼고 있는 인간공학 전문가에게 신상품 개발을 위촉하려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그런 노력이 성공을 거두려면 그 상품이 어떤 경우에 실패할지를 미리 내다볼 만한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령 엔지니어들이 모든 사용자가 오른손잡이일 거라는 암묵적인 가정 아래 작업한다면 그 상품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왼손잡이들에게는 외면당할 것이다. 성공은 그런 실책을 얼마나 예견하고 피해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 상품이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 직접 쓰여지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유용하고 얼마만큼이나 불편한지를 미리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새로운 상품은 더군다나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물건을 사고 적응하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하나마 우리에게 쓸모 있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기술 시스템이 받아들여지건 아니면 거부되건 그 발전 과정은 크게 보면 상대적이다. 러셀 베이커는 엔지니어들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투덜거렸지만, 평지가 늘 같은 모습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선사시대의 생활은 그 시대를 살았던 남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인공물과 기술은 그 시대의 본질적인 모습을 정의 내리는 데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정의 내린 대로 보자면 선사시대의 도구와 생활방식은 선사시대를 살아가는 데는(완벽에 가까울 만큼?) 어울리는 것이었다. 기술적 진보가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좋게 말해서 동어반복이고 나쁘게 말해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신화처럼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울이 작은 저울보다 정확한 이유 기술이 발전되어 나가는 참다운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란 자연의 진화 과정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고 어떤 변화의 원동력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기술의 발전 과정도 생명과 생활의 과정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을 따름이다. 기술과 그 기술이 낳는 인공물들은 인간의 생존에 직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뿐 아니라 비록 불완전하고 미흡하더라도 그 기술과 인공물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이해는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서 태어나듯이 한 물건이 다른 물건으로 이어지는 미시적인 수준, 미세한 시간 단위 속에서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이처럼 인공물들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아울러 같은 맥락에서 그것들이 성취하는 수준의 다양성을 설명함으로써 유명해진 것과 묻혀진 것, 거대한 것과 사소한 것, 수용된 것과 거부된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사례 분석을 통해 우리가 일관되게 알아본 실패의 여러 가지 유형들은 인공물들의 발전 형태와 그 인공물들이 불가피하게 얽혀들어가는 기술의 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확실히 발명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또는 적어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변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기존의 기술이 부딪힌 한계에 대한 자각이다.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개선인지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기능적인 기준에서 미적인 기준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인 기준에서 윤리적인 기준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기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각의 기준은 실패라는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실패는 성공보다는 양적인 표현이 훨씬 쉽긴 하지만, 그래도 주관적인 측면은 늘 지니고 있다. 원칙을 둘러싼 논의의 공간 안에서는 주관성의 스펙트럼이 객관성의 주파수대로 좁혀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모여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경우에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여간 어렵지 않다. 자연히 인공물이 단순하고, 그것을 평가하기 위해 적용되는 기준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인공물의 형태를 둘러싼 논란도 비교적 쉽게 가라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클립은 워낙에 대수롭지 않고 만만해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클립에 호감을 느끼며 그것을 앙증맞다고 생각한다. 발명가를 제외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낮은 등급에 속하는 이 인공물을 자세히 뜯어보면 가장 복잡한 인공물들이 발전하는 원리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핵발전소처럼 복잡한 시스템은 모든 수준에서 엄청난 양의 세부 특성들을 제시하고 수없이 많은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므로 기술의 발전을 소개할 만한 표본으로는 알맞지 않다. 전화기 같은 물건은 그 복잡함과 부담도에서 중간쯤에 해당한다. 기술의 수준과는 관계 없이 동일한 발전 원리가 이들 인공물과 그 사이에 위치한 인공물들을 지배하는 것이라면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제대로 이해해도 인공물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술이 적어도 사회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가? 얼른 아니라는 답변이 나와야 할 것 같다. 남을 이용해먹듯이 기술을 이용해먹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않기 때문이다. 마술사들이 술수와 책략을 써서 청중을 속이듯이 몰염치한 상인과 그보다 더 질이 나쁜 작자들은 기술의 객관성을 믿는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면서 자기 잇속을 차리곤 한다. 고기를 다는 저울을 자기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누르는 정육점 주인이 아마 그런 사기꾼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 사기꾼은 옛날에도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큰 저울이 작은 저울보다 정확한지를 물었다. 원형 운동의 특성에 관한 정교한 기하학적 설명으로 자기 스스로 제기한 물음에 답변을 한 뒤 그는 부정직한 염료 상인들은 더 쉽게 사기를 칠 수 있으므로 큰 저울보다 작은 저울을 선호한다고 지적하였다. “자주색 물감을 파는 상인들은 노끈을 저울 중앙에 오지 않게 두거나 저울의 한쪽 편에 납가루를 붓거나 더 많이 기울어지게 하려는 쪽을 무거운 나무로 만들거나 하는 교묘한 조작으로 사람의 눈을 속인다.” 저울의 팔이 길면 조그만 차이도 크게 확대되었으므로 상인은 눈가림을 위해 가급적 작은 저울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범죄자가 있다고 해서 인간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 되듯이 기술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술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디자이너나 엔지니어가 못된 상인이나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인간에게 이용당하여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판단 착오를 범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들은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그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만하게 걸어가지만 그 길이 잘못된 길일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는 재빨리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길가로 비켜서서 지도를 펴들고 바른 길을 찾아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특히나 여럿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잘못을 시인하거나 시정하기보다는 무턱대고 가던 길을 고집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도 사람이므로 똑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특히나 그들이 근시안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하나의 디자인 형태에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수준의 문제들을 못 보고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대중들도 기술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이런 잘못된 디자인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비록 입으로는 욕을 해도 쓰는 데 불편한 물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며, 어쩌면 이런 적응이야말로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물건의 형태를 궁극적으로 결정지었는지도 모른다. 러셀 베이커는 새로운 전화기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 전화기에 적응했고, 심지어 한때는 이해할 수 없고 터무니 없다고 여겼던 특성들까지도(비록 그의 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높이 평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술은 무자비하게 앞으로만 전진하므로 까딱 잘못하다간 낙오하기 십상이라는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물의 대다수는 그 형태면에서건 기능면에서건 근본적으로는 좋은 의도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인공적, 기술적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그만큼 그 환경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나이를 먹어 우리의 손에 익은 물건이 많아질수록 그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옛날 전화기에는 통화 전송 기능이나 음성 녹음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과 통화를 못하게 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정 통화를 하고 싶을 때는 사전에 꼼꼼한 준비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기자처럼 전화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 동료나 비서, 가족, 또는 자동응답장치가 전화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했다. 그 밖의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전화기가 등장하자 우리 가운데 그것의 장점을 재빨리 알아차린 사람들이 나타났다. 새로운 전화기 한 대에 부착된 자동 기능들 덕분에 집에서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비서를 거느리고 여러 대의 전화를 쓰는 사람이나 누릴 수 있는 각종 편의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을 가장 앞서 받아들이는 층은 낡은 물건에 익숙해져 있을 만큼 늙지도 않았고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리지도 않은 젊은 세대이다. 우리의 취향이 세상을 관조하는 기성 세대와 일치하건, 아니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와 일치하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또 거기에 영향을 끼치는 인공물들의 형태는 기존의 인공물에 대해 누군가가 느꼈던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기술비평가의 특이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엔지니어, 디자이너, 발명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 기술비평가가 만일 개선된 인공물의 기본형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거나 기업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도록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기존 제품과 새로운 제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기업가는 무엇이 성공이고 실패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스스로의 기준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그 기준은 바로 수지타산을 의미한다. 소비자가 아무리 개선을 요구하는 물건이라도 기업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우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형태의 발전은 실패의 자각에서 출발하며 비교급의 언어로 묘사된다. “더 가벼운” “더 얇은” “더 값싼”은 개선을 반영하는 비교의 언어이며 새로운 제품에 그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느냐의 여부가 그 제품의 형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경쟁은 본질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먼저 이르려는 싸움이며 “가장 가벼운” “가장 얇은” “가장 값싼” 같은 최상급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제품 개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모든 디자인 문제가 그렇듯이 목표가 단 하나밖에 없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조화되기 어려운 여러 개의 목표가 공존한다. 따라서 가장 가볍고 얇은 크리스털 잔은 가장 비싸기 마련이다. 비용은 접어두고라도 가장 가볍고 얇은 잔이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난 물건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그것은 가장 깨지기 쉬운 물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저녁 식사 때 어린 아이가 부모가 건네준 오리포스 크리스털 컵을 깨뜨린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아마 두꺼운 플라스틱 컵으로만 물을 마셨을 그 아이는 섬세한 크리스털 컵을 무심코 움켜잡았다가 그만 산산조각낸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라서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아이의 벌린 입에서 깨진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덕분에 우리는 크리스털 컵 하나를 잃게 되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물론 깨진 컵을 변상하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새 컵을 주문했다. 주문한 물건이 도착했을 때 아내는 새 컵이 깨진 컵보다 무거워졌음을 당장에 알아차렸다. 값은 예전처럼 비쌌지만 처음 결혼 선물로 받았던 그 깨진 컵처럼 가볍고 얇지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결혼 선물로 받은 컵은 오리포스 사가 되도록이면 컵을 얇게 만드는 데 치중하던 시기에 생산된 제품이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깨지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소비자들의 항의가 잇따랐을 것이다. 더 가볍고 얇은 컵을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어른들도 컵에 든 물을 마시면서 진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고 잔을 씻는 일만도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으리라. 그런 크리스털 잔은 너무 약해서 딱딱한 식탁 위에 조금만 삐딱하게 내려놓아도 쨍 하고 금이 가기 쉬웠다. 크리스털 잔을 더 얇게 만들면 영롱한 빛의 무늬가 유리와 내용물에 더 아름답게 비췄을 테지만 그것은 실용적인 잔으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어서 더 인간적이고 튼튼한 술잔과 물잔이 사람들이 부담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있는 동안 처량하게 찬장 안에나 처박혀 있어야 했으리라. 손잡이를 위한 만물상 만일 디자인의 세계를 우리가 손에 쥐고 다루는 물건뿐 아니라 그 물건을 생산하고 보급하는 조직이나 체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인공물이나 기술 시스템이 바뀌어가는 모든 과정을 앞 단계의 인공물이나 기술이 내보인 결함에 대한 반응으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속으로만 지각된 결함뿐 아니라 실제적인 결함도 사실은 각자가 정의 내리기 나름이고 정도 나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유익한 개선으로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나빠진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발명가 본인이나 특허심사관만이 새롭고 유익하다고 평가할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특허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특허가 염두에 두는 물건들은 몇몇 사람의 마음속에, 설계도 위에, 혹은 견본품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물건들은 성공한 제품과 마찬가지로 기존 제품의 결함에 대한 자각에서 나왔다. 제이콥 래비노는 도둑 방지용 자물쇠의 개발과 관련된 일화를 들려준다. 그 자물쇠는 확실히 기존 자물쇠의 결함을 극복한 발명품이었다. 그는 열쇠를 아주 가느다란 금속띠로 만들어 자물쇠의 회전판을 정해진 위치까지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으로 구부렸다. 헤어핀처럼 일반적으로 열쇠 대용으로 자물쇠를 따는 도구는 이런 자물쇠에는 먹혀들지 않았다. 너무 두껍다보니 자물쇠의 회전판을 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래비노는 이 자물쇠와 열쇠로 두 개의 특허를 따냈지만 정작 이것을 상품화하려는 기업은 나서지 않았다. 열쇠가 너무 특이하게 생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더 잘 만들되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기업가의 생리를 터득하면서, 레이먼드 로이가 말한 “앞서 나가되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물건의 형태가 너무 갑작스럽게 바뀌지 않도록 저지하는 힘은 기업들의 그러한 타성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구불변한 형태는 있을 수 없고 시정되지 않는 결함도 있을 수 없다. 기업가가 아니면 독립적인 발명가가, 발명가가 아니면 소비자가 어떤 물건이 무겁거나 가볍지 못해서, 얇거나 두껍지 못해서, 값싸거나 화려하지 못해서 안고 있는 결함을 알아차리기 마련이고, 그러한 깨달음은 아무리 사소한 방식일지언정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공 세계의 모습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무려 1,093건의 특허를 따냈고 그의 특허들 가운데 상당수를 현대인의 생활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로 자리잡게 한 토머스 에디슨 같은 사람도 기술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올 수는 없었다. 에디슨은 축음기의 통을 원통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실제로 그런 모양은 초창기의 회전식 축음기 형태와 어울렸다. 이와는 반대로 경쟁사들은 납작한 원반 모양의 레코드를 시중에 내놓았다. 레코드는 턴테이블을 필요로 했고 음관이 레코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홈을 따라 이동하면서 음을 바꾸는 구조였다. 처음에 에디슨은 이런 형태를 거부했다. 그러나 차곡차곡 모아놓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이 레코드를 선호하자, 백전노장이었던 에디슨은 한술 더 떠서 양면 레코드를 개발하여 음을 더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경쟁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에디슨은 결함이 있는 물건을 보면 못 참는 성미였다. 에디슨이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지런해야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생겨야 뜯어고치려는 마음이 든다. 만족에 겨워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보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당장에 보여줄 테니.”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막대한 양의 물건은 앞으로도 더 많은 물건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적당히 물러서는 법이 없는 완벽주의자의 예리한 시선은 어떤 물건의 사소한 결함도 용납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라는 반동적인 구호는 설득력이 없다. 문명의 진보는 잘못, 실수, 결함을 끊임없이 고쳐나가는(때로는 그것이 지나치기도 했지만)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큰 문젯거리일 수 있다. 왼손잡이들은 문 손잡이, 학교 책상, 책, 타래송곳, 그 밖의 숱한 일상용품이 자신들과 맞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왼손잡이는 집에다 글러브를 놓고 왔을 경우에는 별 수 없이 오른손에 끼는 글러브를 빌려 써야 한다. 외야수의 글러브나 극히 드물게 있는 학교 책상말고는 왼손잡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배려한 흔적이 있는 물건은 거의 없다. 그들은 오른손잡이 중심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왼손잡이를 위한 특수한 도구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자기네 입으로 말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특수한 인공물은 보통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기존의 물건이 갖고 있는 결함에 대한 남다른 자각에서 나온다. 실제로 발명가와 제조업체들은 왼손잡이를 위한 생활용품을 개발하였다. 런던의 브루어 가에 있는 ‘왼손잡이 만물상’이라는 가게에서는 바로 그런 물건들을 판다. 심지어 이 가게의 카탈로그조차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도록 되어 있고 페이지 표시도 그에 맞게 달려 있어 왼손잡이를 위한 세심한 배려를 짐작케 한다. 편리함보다는 재미를 의식한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물건도 있지만 왼손잡이를 위한 정원 가위나 국자는 가히 구세주라 할 만하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이와 비슷한 가게가 한 군데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의 부인이 여기서 왼손잡이용 다용도 나이프를 사서 남편에게 선물했다. 그 사람은 그런 물건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 정도로 기존의 오른손잡이용 나이프에 적응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나이프의 각종 날을 왼손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잡아빼는 솜씨, 그리고 타래송곳을 귀신처럼 거꾸로 돌리는 솜씨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다. ‘왼손잡이 만물상’에서 파는 물건 가운데에는 왼손에 맞는 자루가 달려 있고 톱니 역시 그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나 있는 주방용 나이프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왼손잡이를 위한 식탁용 나이프도 있으며 왼손잡이에게 요긴한 방향으로 써는 갈퀴가 달려 있는 피자 포크도 있다. ‘왼손잡이 만물상’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는 의도적이었건 그렇지 않았건 오른손잡이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하면서 왼손잡이가 느꼈던 문제점이나 불편함을 시정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공물이 다양화되고 기술이 발전하는 방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모름지기 물건이라는 것은 사용함에 따라서 자신의 결함을 적어도 몇몇 사람에게는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그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에서 문제점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항상 발명가, 디자이너, 엔지니어라는 법은 없지만 해결책을 갖고 나타나는 것은 역시 그들이다.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술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소한 불편은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인공물의 경이로운 성능에 빠져들기 전까지는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용 식기에 적응해왔듯이 그 불완전한 기술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책명 찾아보기 ≪국부론≫ 90 Smith, Adam.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Oxford: Clarendon Press, 1880. ≪그림으로 보는 발명의 역사≫ 16 Eco, Umberto, and Zorzoli, G. B. The Picture History of Inventions : From Plough to Polaris. New York: Macmillan, 1963. ≪금속론≫ 182--184 Agricola, Georgius. De Re Metallica.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50. ≪기계론≫ 319, 322 Aristotle. Minor Work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기계 발명의 역사≫ 75 Usher, Abbott Payson. A History of Mechanical Inventions. New York: McGraw-Hill, 1929. ≪기계 운전≫ 182 Moxon, Joseph. Mechanick Exercises, or the Doctrine of Handy-works. Morristown, N. J.: Astragal Press, 1989. ≪기계화가 지배한다≫ 46 Giedion, Siegfried. Mechanization Takes Command : A Contribution to Anonymous History. New York: W. W. Norton, 1969. ≪기술의 진화≫ 16, 45, 56 Basalla, George. The Evolution of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디자인으로≫ 348 Caplan, Ralph. By Design: Why There Are No Locks on the Bathroom Doors in the Hotel Louis ⅩⅣ and Other Object Lessons.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2. ≪멋진 해법≫ 111 Edwards, Owen. Elegant Solutions: Quintessential Technology for a Userfriendly World. New York: Crown, 1989. ≪백과전서≫ 90, 182, 189 Diderot, Denis. A Diderot Pictorial Encyclopedia of Trades and Industry….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59. ≪사람을 위한 디자인≫ 257 Dreyfuss, Henry. Designing for People. New York: Paragraphic Books, 1967. ≪사회 관습 청서≫ 241 Post, Emily. Etiquette:“The Blue Book of Social Usage.” New and enlarged ed. New York: Funk & Wagnalls, 1927. ≪산업 기술의 성장≫ 198 Butterworth, Benjamin. The Growth of Industrial Art. Washington, D. 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888. ≪성공적인 엔지니어링≫ 63 Kamm, Lawrence J. Sucessful Engineering: A Guide to Achieving Your Career Goals. New York: McGraw-Hill, 1989. ≪욕망의 대상≫ 46 Forty, Adrian. Objects of Desire. New York: Pantheon, 1986. ≪일상용품의 디자인≫ 44, 357 Norman, Donald A.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New York: Doubleday, 1989. ≪일하는 발명가들≫ 63 Brown, Kenneth A. Inventors at Work: Interviews with 16 Notable American Inventors. Redmond, Wash.: Tempus Books, 1988. ≪잊혀져버린 작은 물건들≫ 32 Deetz, James. In Small Things Forgotten : The Archaeology of Early American Life. Garden City, N. Y.: Anchor Press/Doubleday, 1977. ≪재미와 벌이를 위한 발명≫ 62 Rabinow, Jacob. Inventing for Fun and Profit. San Francisco: San Francisco Press, 1990. ≪포도광을 위한 수집가 편람≫ 203 MacLachlan, Suzanne. A Collectors' Handbook for Grape Nuts. Privately printed, 1971. ≪형식의 종합에 관한 단상≫ 51 Alexander, Christopher. Notes on the Synthesis of Form.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혼자 내는 특허≫ 77 Pressman, David. Patent It yourself. Berkeley, Calif.: Nolo Press, 1985. 기타 ≪다섯 달 동안 허겁지겁 주워삼킨 이색 풍물≫ 22Coryate, Thomas. Crudities Hastily Gobbled up in Five Months. ≪아이디어로 버는 돈≫ 68 Lemelson, Jerome. Money from Idea ≪여성의 진정한 품위와 완벽한 매너를 위한 가이드≫ 34Leslie, Eliza. Ladie's Guide to True Politeness and Perfect Manners. <저장술> 285 Appert, Nicolas. L'Art de Conserver. ≪철로 부설의 원리≫ 325 Wellington, A. M. Art of Railway Location. <현대의 사례> 226 Howells, William Dean. A Modern Instance. ㄱ 게스터트너 Gestetner, Sigmund 252--253, 256 골드버거 Goldberger, Paul 112 굿맨 Goodman, W. L. 181 기디온 Giedion, Siegfried 46 ㄴ 내스미스 Nasmyth, James 56 노먼 Norman, Donald 44, 357 ㄷ 다 빈치 daVinci, Leonardo 276 다윈 Darwin, Charles 45 뒤러 D er, Albrecht 133, 138 뒤런드 Durand, Peter 285 드레퓌스 Dreyfuss, Henry 257--258, 270 드루 Drew, Richard 128 드머스 Demars, Robert 313 디드로 Diderot, Denis 90, 182, 189 디츠 Deetz, James 35 디킨스 Dickens, Charles 34 ㄹ 라비노비치 Rabinovich, Jacob 61 라이먼 Lyman, William 289 라이트 Wright, Orville and Wilbur 275--276, 345 래비노 Rabinow, Jabob 61, 79, 372 랜드 Land, Edwin 74 랜커나우 Lankenau, Henry 112 레슬리 Leslie, Eliza 34, 225 레인워터 Rainwater, Dorothy 207 로이 Loewy, Raymond 250--256, 269--272, 347, 372 뢰블링 Roebling, John 98 루바 Lubar, Steven 91 루이`14세 Louis ⅩⅣ 27 리멀슨 Lemelson, Jerome 68 리슐리외 Richelieu 27 ㅁ 마르크스 Marx, Karl 45, 238 매케이 Mackay, Spencer 313 매크리디 MacCready, Paul 64, 82 매클러클런 MacLachlan, Susan 203 메디치 Medicis, Catherine de 22 메야르 Mailart, Robert 279 목슨 Moxon, Joseph 182 미들브룩 Middlebrook, William 109 미들턴 Middleton, Ethelbert 96, 109 ㅂ 바살라 Basalla, George 16, 45, 196 발러 Vaaler, Johan 99, 103 버치 Burch, Lyndon 273 버터워스 Butterworth, Benjamin 198 베서머 Bessemer, Henry 77, 83 베이커 Baker, Russel 357, 365, 369 베크먼 Beckmann, John 24 벤틀리 Bentley, Thomas 246 브라운 Brown, Omar 306 브로노스키 Bronowski, Jacob 35 브로즈넌 Brosnan, Cornelius 102--107 브루넬 Brunel, Isambard Kingdom 75 브릭스 Briggs, Thomas 140 비더만 Biederman, Irving 44 비올레-르-n Viollet-le-Duc 246--249 빌링턴 Billington, David 279 빌켄스 Wilkens 26 ㅅ 샤를 5세 Charles Ⅴ 22 서프린 Sufrin, Howard 87, 118 선드백 Sundback, G 162 순드바크 Sundback, Otto Frederick Gideon 161 스미스 Smith, Adam 90 스미스 Smith, William 179 스원 Swan, Joseph 81 스쿨리 Schooley, Mettew 101--102 스키아파렐리 Schiaparelli, Elsa 173 스터트 Sturt, George 179, 191 실버 Silver, Francis 308 실버 Silver, Spencer 133 ㅇ 아그리콜라 Agricola, Georgius 182--185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15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319, 323, 368 아페르 Appert, Nicolas 285 알렉산더 Alexander, Christopher 51 앙리 2세 Henry Ⅱ 22 애론슨 Aronson, P. A. 162 어셔 Usher, Abbott Payson 75 언더우드 Underwood, William 286 언더힐 Underhill, Roy 186, 189--190 에덜슨 Edelson, Nathan 328--330 에드워즈 Edwards, Owen 111 에디슨 Edison, Thomas 81, 373 에라스무스 Erasmus 27, 133 에머슨 Emerson, Ralph Waldo 340 에코 Eco, Umberto 16 오닐 O'Neill, James 163 와이어드 Wyeth, Nathaniel C. 65, 296 와이어드 Wyeth. Newell Convers 65 우드워드 Woodward, Thomas 149 우트존 Utzon, Jorn 278 워드 Word, Montgomery 47 워커 Walker, Wallace Delamater 161 워커 Walker, Lewis 156, 169 워크 Work, Bertram G. 172 웨지우드 Wedgwood, Josiah 245--246, 263 웰링턴 Wellington, A. M. 325 웰스 Wells, Robert 311 윈스롭 Winthrop 32 워너 Warner, Ezra 287 워커 주니어 Waker Jr., Lewis 169 ㅈ 작스 Saks, Horace 250 저드슨 Judson, Whitcomb 155, 168 존슨 Jonson, Ben 24 ㅊ 초르촐리 Zorzoli, G. B. 16 ㅋ 카플란 Caplan, Ralph 348 캄 Kamm, Lawrence 63 캄라스 Camras, Marvin 67 캔필드 Canfield, Frank 169 캘룬 Calhoun, Josephine 169 컨스 Kearn, Robert 331 코리어트 Coryate, Thomas 22 콜레트 Collette, Clarence 119 쿠퍼 Cowper, William 90 쿤-무스 Kuhn-Moos, Katharina 169 크래머 Kremer, Henry 64, 276 ㅌ 트롤로프 Trollope, Frances 34 ㅍ 파이 Pye, David 48, 72, 194 패리 Parry, William Edward 286 팩스턴 Paxton, Joseph 277 퍼거슨 Ferguson, ugene 267 페리클레스 Pericles 55 포드 Ford, Henny 344 포르스테 Forster, Henri 169 포스트 Post, Emily 34, 212, 227, 229--231, 233, 241--242 포티 Forty, Adrian 46 풀러 Fuller, Buckminster 347 프라이 Fry, Art 133 프레스먼 Pressman, David 77, 274 프레시네 Freyssinet, Eug ne 279 프레이즈 Fraze, Ermal 303, 306, 308 ㅎ 하우 Howe, John Ireland 91 하우 Howe, Elias 154, 174 해리스 Harris, Ninety 180 헌트 Hunt, Walter 149 헤스킷 Heskett, John 258, 268 호머 Homer(Homeros) 321 호웰스 Howells, William Dean 226 호이 Hoe, Robert 92 후버 Hoover, Herbert 208 후크 Hooke, Robert 97 ㄱ 갈고리 시스템 169 갈퀴 tines 24 강선 97 강철 톱 186 개구리 단추 frog-and loop fastener 148 걸쇠 잠금장치 168 고딕 클립 Gothic clip 115 고리 151, 160 고사머 알바트로스 호 Gossamer Albatross 64 고사머 콘도르 호 Gossamer Condor 64, 276 곡선 28 골드윙`1000 269 골무 138 공구 69 공학 319 구덩이꾼 188 구동 메커니즘 267 구두를 위한 걸쇠식 닫개와 열개 157 국립 오더번 협회 National Audubon Society 340 굴 포크 223 굿리치 사 B. F. Goodrich Company 172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75 그레이트 이스턴 증기선 75 글라이드온 클립 glide-on clip 116 금성사 362 기계식 서비스 인형 218 기술 평론가 125 깡통따개 290 꺾쇠 clamps 117 ㄴ 나이애가라클립 Niagara clip 108 나이프 사용 범위 knife line 224--225 내릴톱 188, 193 네 갈퀴 포크 four-tined forks 26 노스팅 핀 티켓 사 Noesting Pin Ticket Company 115누름버튼식 튜너 push-button tuner 79--80 눈물방울 345 <뉴요커> The New Yorker 173 <뉴욕타임스> 305 ㄷ 다이맥스터 자동차 Dymaxion Car 347 단추 152--155 단추걸이 buttonhook 153 단추 달린 장화 153 단춧구멍 152--155 달팽이 집게 25 당김고리 313 당김꼭지 305, 308 당김버튼식 튜너 pull-button tuner 80 대합 껍질 336 데스크 핀 desk pin 94 데이튼 릴라이어블 툴 앤드 매뉴팩처링 사 Dayton Reliable Tool and Manufacturing Company 303 도끼 194 도끼날 195 도끼 머리 195 도림질용 실톱 193 돈킨 앤 홀 사 Donkin and Hall Company 285 돌기 314 돌쩌귀 138 두루마리 137 듀퐁 사 Du Pont Corporation 65 등대기톱 193 등받이조절 의자 47 <디자인 뉴스> Design News 361--362 따개띠 304, 308 똑딱단추 153 ㄹ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Lucky Strike cigarette 255<런던 화보> Illustrated London News 277 레이놀즈 메탈 Reynolds Metals 301 로만 펀치 Roman Punch 221 로벅 Roebuck 290 로열 크라운 Royal Crown 309 로저스 브라더스 Rogers Bros. 203 록타이트 담배 Locktite tobacco 171 롤러 코스터 112 롤스로이스 Rolls Royces 126 리드 앤 바턴 사 Reed & Barton 226 리벳 247 린클립 Rinklip 108 링크 link 159 링 클립 ring clip 116 ㅁ 마데이라 Madeira 221 마르셀 젬 marcel gem 116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 258 마이크로 필름 150 마찰 젬 116 마케팅 의식 217 맥도날드 사 McDonald's Corporation 335 맥도널더글러스 McDonnell-Douglases 126 맥디엘티 McDLT 336 멋쟁이 클립 116 메르세데스 벤츠 Mercedes-Benzes 126 메카노 세트 British Meccano Sets 73 <모델 에어플라인 뉴스> Model Airplane News 64 모험투자가 Venture Capitalist 335 몰래바이트 bootlegging 134 못뽑이 199 몽고메리 워드 사 Montgomery Ward 199 ‘몽테 크리스토 백작’ 163 무선철 139 미국 도끼 195 미국식 밧줄 침대 322 미끄럼쇠 167 미끄럼 장치 155 미제 만능 잠금기 163 ㅂ 바늘 137 바늘 제어 장치 63 바인더 105 밧줄 321 방수 사포 128 방수 자동온도조절장치 273 버건디 Burgundy 221 버드와이저 Budweiser 301 버커킹 Burger King 340 버클 148 버터 집게 24 버튼식 전화기 360 버팀쇠 holder 108 번스 앤 로스 Burns and Roes 126 베어트리스 푸즈 사 Beatrice Foods 301 벡텔 Bechtels 126 벨 시스템 Bell System 257 병따개 294 보보링크 Bobolink 173 보스턴 와이어 스티처 사 Boston Wire Stitcher Company 140보스티치 Bostitch 126 보잉과 더글러스 Boeing and Douglars 346 복엽 비행기 275 본위트 텔러 백화점 Bonwit Teller 250 볼루멘 volumen 137 ‘볼포네’ 24 부싯돌 16 브라운 앤 루츠 Brown and Roots 126 브로치 148 브리타니아 243 비닐 주머니 351--354 빅 맥 Big Mac 335 빗개 ribber 181 ㅅ 사각 너트 72 ≪사무용품≫ 편람 109 사무효율화 운동 142 <사이언스> Science 267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Scientific American 73, 167산업 디자인 57 살코기 포크 flesh-fork 20 삼지창 21 상품 디자인 57 샐러드 포크 206--208 생선 포크 208 서양식 외바퀴 수레 344 서표 133 선행 기술 prior art 79--81 셀로판 130 셰리주 Sherry 221 소사장제 132 쇠스랑 21 숄 핀 149 수메르 인 89, 151 수술용 접착 테이프 129 수정궁 277 숨은 후크 164, 165 3M 127, 132--134 S-L 'scrapless' 171 스카치 Scotch 127, 130 스카치 매직 투명 테이프 132 스카치 셀로판 테이프 131 스크래머색스 scramasax 17 스태포드셔 Staffordshire 245 스태플 staple 141 스태플러 stapler 126 스터드베이커 studebaker 347 스테이크 나이프 20 스테인리스 38 스테인리스 클립 117 스텔스 폭격기 Stealth bomber 276 스티렌 단량체 styrene monomer 340 스틸 시티 젬 Steel City Gems 118 스틸 시티 젬 클립 Steel City Gem Paper Clips 87스폰 spon 30 스푸트닉 Sputnik 347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278 시스코 Cisco 292 시어즈 Sears 290 시제품 156 C큐러티 curity 160 식사용 포크 20, 25 식탁용 포크 25--26 식품저장고 285 신고전주의적 디자인 246 실톱 193 심플렉스 Simplex 290 ‘십이야’ 220 ㅇ 아돌프 쿠어스 사 Adolph Coors Company 301 아리엘 “리더” 오토바이 Ariel "Leader" motor-cycle 268아메리카 산업 협회 American I ndustries Association 183아모코 정유 Amoco Foam Products Company 339 아코 Acco 126 아티초크 artichokes 222 ‘악마는 멍청이’ 24 안전핀 149 알코아 Alcoa 301 알루미늄 캔 301 앙트레 entrees 220 액티브 책상 328, 330 양념 포크 206 양장본 139 에너지 보존의 법칙 67 에디슨 사 Edisons 126 ‘에라스무스의 초상화’ 135, 138 에어로스타 Aerostar 348 에어로플레인 aeroplane 275 에어플로 Airflow 347 에포카 Epoca 26 엔트로피 성장의 법칙 67 여미개 152, 158 연속성 56 연장 179 ≪연장의 왕 망치≫ 197 영구운동 기관 67 <오늘의 뉴욕 에티켓> The Etiquette of New York To-day 221≪오디세이≫ 321 오리포스 Orrefors 370--371 오토매틱 후크 고리 Automatic Hook and Eye Company 159올드 잉글리시 Old English 242 올빼미 클립 Owl-style Clip 108 옷핀 dress-pin 150 와인쿨러 wine cooler 292 외갈퀴 포크 24 외다리 걸상 180 왼손잡이 만물상 374--375 워드프로세서 53 웨스팅하우스 사 Westinghouses 126 웨지우드 가 Wedgwood family 263 ≪웹스터 새 국제사전≫ Webster's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107--108 유니버설(임피리얼) 클립 116 유니버설 파스너 사 Universal Fastener Company 156유럽식 도끼 195 유레카 Eureka 15 유선형 346--347 유잉 공업사 Ewing Manufacturing Company 170 유틸로크 Utilok 173 육각 너트 hexagon nuts 72 은식기 214--215 음식 시중 219 이끔쇠 movable guide 155 이렉터 장난감 조립세트 Erector Sets 73 이스트 그리니치 East Greenwich 140 이중톱 194 인간공학 ergonomics 58 인공물 artificial 15, 26 인공품 made things 15 인장력 280 인터내셔널 실버 사 International Silver Company 203인터내셔널 하비스터 International Harvester 269<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Illustrated London News 73일반 나사머리 the conventional screw head 71 일자 핀 148 ㅈ 자동 여미개 162 자동연속 의상봉합장치 154, 174 자동 응답 시스템 358 작스 백화점 Saks 250 장인 54 점착성 133 젓가락 36--38 정어리 포크 226, 298 정찬용 포크 206 제너럴 모터스 General Motors 256 제의용 포크 20 제책 기술 137 젬 gem 109 젬 클립 109 존 디어 사 John Deere's 270 종이컵 68, 340 종이 클립 98 ≪좋은 사회의 예절과 규칙≫ 228 죔쇠 clasp 108 주름종이 129 주물 방식 30 중국식 외바퀴 수레 343 중철 140 증기톱 192 증기 해머 56 지그재그 34, 226 지퍼 zipper 154--155 지퍼 구두 174 지프 zip 172 쪼개진 스푼 split spoon 34 ㅊ 차단 테이프 129 찬 고기용 포크 208 책등 138 처치키 church key 297 철사제본기 141 체스 57 체인식 여미개 159 축음기 373 ㅋ 카나페 canapes 222 캔 꼭지 305 캠 cam 90 커티스라이트 Curtiss-Wrights 126 컬러 클립 118, 120 케이크 포크 208 코나클립 Kona clip 105 코르크 291--294 코카콜라 309 쿠어스 맥주 301 퀸 시티 클립 Queen City clip 118 퀸 앤 Queen Anne 242 크라이슬러 Chryslers 126 <크로니클> The Chronicle 183 클라레 claret 221 클로로플루오로카본CFC 338 클립 96--121 킹 242 ㅌ 타래송곳 293, 374 타월 사 The Towle Company 208 타코 tacos 35 탁상용 스태플러 142 탄성 97 탄소 필라멘트 램프 81 탤런 talon 173 토마토 포크 208 토목공학 319 토스터 toaster 251 톱질꾼 192--193 통조림 따개 294 트리뷴 타워 Tribune Tower 278 T핀 94 팅커 토이 레고 Tinker Toy Lego 278 ㅍ 파스너 fastener 96--111 파스너 매뉴팩처링 머신 사 Fastener Manufacturing and Machine Company 159파이 포크 225 파피루스 137 판버로 도기 공방 180 판자때기 trencher 19 8자 비행 64 패러다임 52 팩토리 3호 171 퍼시퍼 furcifer 23 퍼즐 조끼 puzzle jug 263 퍼팩트 젬 Perfect Gem 114 페넬로페 Penelope 321 펩시콜라 309 포드 Fords 126, 332 포스트p post-it 127--136 포켓 나이프 89 포크잽이 fork bearer 23 포퓰러 머캐닉스 사 Popular Mechanics Press 68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 75 폴리스티렌 336, 339 폴리스티렌 거품 상자 337 폴리에틸렌 339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 65 폴리프로필렌 339 프랜시스 1세 세트 231 프렌치 피들 French Fiddle 242 프리미어 파스너 Primier Fastener 96 플라스틱 캔 310 플라스틱 클립 119--120 플라코 Plako 163 플래킷 파스너 placket fastener 160 플러싱 메도즈 Flushing Meadows 115 피어리스 클립 peerless clip 116 피클 포크 206 핀 89 핀돈 92 핀 종이 93 필립스 십자머리 나사 71 ㅎ 해산물용 포크 223 햄즈 Hamm's 301 헤드 140 호두 집게 24 환경오염 문제 305 활톱 186 황소머리 Bull's Head 289 후크 151 후크리스 1호 166 후크리스 2호 166 후크리스 파스너 사 Hookless Fastener Company 166후크 없는 여미개 165, 168 후크의 법칙 97 흑요석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