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사랑, 헤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 이야기) 지은이:밀라드 풀러 출판사:홍성사 이 책은 1986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NO MORE SHACKS!를 번역한 것입니다. 1955년에 출간된 개정판이 있고 이 개정판에 헤비타트의 역사가 최근까지 잘 정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전 책을 출간한 것은, 개정판보다 는 이 책에 저자의 동기와 열정과 감격이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판단했 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헤비타트의 자세한 발전과정보다는 이 단체를 세우 고 이끌어온 밀라드 풀러 총재의 정신을 소개하고자 하는 편집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이 의도를 살리기 위해 불필요한 자료는 삭제하고 일부 내용을 편집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서문-토니 캄폴러 씀 '샬롬'은 옛날 유대인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쓰던 인사말입니다. 성경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샬롬'은 오늘날 우리가 '평화'라고 번역하는 말보 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지닌 말이었습니다. '샬롬'은 '총체적인 영적, 신체 적 안녕'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여호와께서 완벽하게 정 돈해 놓으신 사회, 사랑과 정의가 있는 사회를 떠올렸습니다. '샬롬'은 하 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그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욕구가 충족되며, 주님 앞에서 환희에 찬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충분 히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가까왔다'(마 4:17)는 말씀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는 샬롬 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실현되는 세상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나라 는 죄악에서 구원받아 자유롭게 서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사회제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정비될 것이며, 사회는 세 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정의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시민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의 손에 변화를 받아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꾸어 나가는 하나님의 대리인으 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이들입니다. 밀라드 풀러는 이 나라 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는 도구 로 사용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밀라드는 나이 서른에 모든 여피(고학력의 전문직 종사자로 도시근교에 사는 고소득층의 엘리트)들이 꿈꾸는 바를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백만장 자가 가질 만한 것은 모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거대한 저택, 아름다운 아내, 자동차, 옷가지, 그리고 '훌륭한 삶'에 어울리는 온갖 것이 있었습 니다. 그때도 밀라드는 교회를 존중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 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말 그대로 실천하고 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디트리히 본훼 퍼가 "예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하신다"고 말한 참뜻 을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밀라드와 린다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풀러 부부와 함께 그들의 비전을 실천하는 일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이 살 만한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 의 필요조건을 채우는 길입니다. 그들은 '헤비타트'라는 운동을 시작했고, 오늘날 이 운동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샬롬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 프리카의 마을, 아메리카의 도시, 아시아의 농촌, 그리고 라틴계 사회의 교외에 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도움의 손길을 받았고 희망을 찾았습니다. 이 책은 헤비타트 운동이 걸어온 길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책을 읽는 이들은 틀림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헤비타트는 겨자씨처럼 조그맣게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겨자씨처럼, 창 공을 나는 새들이 모두 날아와 둥지를 틀 만큼 커다랗게 자라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비타트 운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 한 복음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한 가지 표현이며 샬롬의 현현입니다. 볼 눈이 있는 자들은 보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풀 러 부부와 그들의 운동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행동하는 사 랑, 헤비타트)는 그들의 비전을 볼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이 비전에 동 참하라는 초청입니다. 1.판자집은 이제 그만!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의 1985년 4월 26일은 기분좋게 온화한 봄날씨의 토요일이었다. 부활절이 바로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아침 10시경, 최 근에 준공한 세 채의 집을 헌정하기 위해 400명의 인파가 헤비타트가에 모 여들었다.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헤비타트 운동에 동참하여 그 중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힘을 보탰고, 부인 로잘린 카터와 함께 축하행사에 참 석했다. 인도 위에 세운 단상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 중에는 기자들과 새 집 주인 들, 건축 자원봉사자들, 사무실 직원들, 코이노니아 농장 친구들, 지역 후 원자들, 그리고 기타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헤비타트 사람들이 있었다. 수 많은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최소한 다섯 주에서 대표자들이 왔을 뿐 아니라 조지아 주에서만도 10여 도시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즐거운 기대감이 감돌았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한눈에 보여 주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더 흥분되었다. 지척에 있는 처 치가에는 남부 조지아의 전형적인 판잣집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페인트칠도 안 되어 있고, 단열재도 없고, 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움푹 꺼진 지붕에, 현관문은 떨어져 나가기 일보직전인 집들이었다. 오늘 새 집을 헌정받게 된 두 가정이 그 판잣집에서 막 이사 를 나온 참이었다. 세 번째 가정은 가파른 둑 위에 세워진 낡은 집 뒤꼍의 손바닥만한 지하 셋집에서 이사했다. 그 집은 아메리쿠스의 다른 구역에 있었다. 우리가 모두 느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헤비타트 동역자 프랜시스 파크스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특별히 이 행사를 위해 '행동 하는 사랑'이라는 노래를 작곡해 왔다. 잠시 후 그녀의 낭랑하고 강한 소 프라노 목소리가 무반주로 울려퍼졌다. 기뻐하라, 형제 자매여! 여기 축하할 일 있네! 우리에겐 헤비타트가 있으니 이제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네. 다음 세상에 우리 들어가 예수님의 약속과 그 아름다운 선물을 누릴 때까지 우리에겐 행동하는 사랑이 있기에 행동하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이 마음을 어루만지고 영혼을 채워주니 더 바랄 것 없네. 헤비타트는 행동하는 사랑 부족함을 채워주고 욕심 없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네. 프랜시스가 "헤비타트는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후렴을 되풀이하자, 사람 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지었고 콧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노 래가 끝나자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잠시 후, 지미 카터가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프랜시스 파크스 바로 뒤 에 연설하게 되어 참으로 난처하다는 카터의 말에 나지막한 웃음이 번져나 왔다. 이윽고 그는 좀더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카터는 소박 하면서도 열정적인 태도로 헤비타트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뜻 깊은 일인지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기독교 사업이나 경영이나 국 정운영이나 정치 분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온 세계에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헤비타트 운동만큼 행동하는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헤비타트는 영감을 주는 운동인 동시에 현실적인 운동입니다. 헤비타트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유대감으로 묶어줍니다. 또한 함께 일하는 동안 매일매일 새 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해줍니다. 그리고 헤비타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 어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도전입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더 박진감 넘치는 일도 많 고 전세계적인 규모의 사업을 벌일 기회도 많은데, 그것들을 다 뿌리치면 서까지 부부가 함께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헤비타트를 선택했지요?' 글쎄요, 성급하게 대답할 만큼 간단한 질문은 아 닙니다만, 제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대개의 문제들은 연방정부나 주정부나 지방정부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정부가 팔짱만 끼고 있는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납 세자들이 생각하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다한 사업을 벌일 때도 있지 요. 헤비타트는 연방정부가 좋은 주택사업 계획을 수립하도록 격려합니다. 민간기업들은 집을 짓고 그것을 팔아 영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 비타트는 '케이크 위에 얹은 설탕크림' 같은 것입니다. 집 없는 가난한 이 들에게 더 빨리, 더 크게 영향력이 미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지요. 저는 헤비타트의 그런 점을 좋아합니다. 또 하나 제가 헤비타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운동이 넉넉한 사람들의 적선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헤비타트는 '나는 부자니까 너희 가난뱅이 들한테 조금 나눠주지 뭐' 하는 식의 태도로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 습니다. 이것은 동역의 관계입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밑바닥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손을 내밀며 '우리 함께 일합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가족들은 그들대로 아주 새로운 경험 을 하게 됩니다. 헌 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 것은 가슴벅찬 도전이니까요. 한 번도 집다운 집의 내부를 본 적이 없는 가난한 가족들에게 그 일은 생 애 최대의 과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긍심과 자존, 결단력의 감정들을 새삼 소중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콘크리 트를 어떻게 쏟아붓고, 벽돌을 어떻게 놓고, 지붕과 벽을 어떻게 쌓으며, 집 주위의 땅을 어떻게 고르느냐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자기 힘으로 해냈다는 긍지를 느끼며, 동역의 힘이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 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함께 일할 때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헤비타트의 그런 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헤비타트를 좋아하는 마지막 이유로는 그 국제적인 범위를 들 수 있습니다. 헤비타트의 목표는 미국에 집 한 채를 지을 때마다 해외 에서 적어도 한 채 이상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어려운 이들 을 위해 하루에 한 채 꼴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아내 로잘린과 저는 헤비 타트 해외 사업장을 딱 한 군데 보았는데, 티티카카 호수변에 인접한 페루 의 푸노라는 곳으로서 해발 13,000피트의 고지대였습니다. 그 곳에서 사람 들이 새로운 삶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현재 12개국(1997년 현재 60개국)에서 일어나고 있고, 헤비타트의 손길을 기다리는 다른 나라들의 신청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우 리는 모두 여기에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자, 이 정도면 제가 얼마나 헤 비타트를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저는 이번 주에 뉴욕에 갔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조깅하기를 즐기는 터 라, 거기에서도 조깅을 하려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차도 별로 없고, 다가 와서 귀찮게 하는 사람도 많지 않더군요. 그런데 그곳에는 아직도 길거리 나 콘크리트 보도 위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땅바닥에 닿지 않게 얼굴을 가려주는 것은 고작 수건 한 장, 코트 한 벌뿐이었고, 심지어 신문 한 장만 깔고 누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할머니들 도 있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잠잘 곳 하나 없어 길거리로 나온 할머니 들이지요. 이것이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장 부유한 도시의 모습입 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뜻에 따라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헤 비타트가 하고 있는 일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래 서 저는 헤비타트에 동참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카터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뜨거운 열정과 헌신적인 마음이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제 내가 단상으로 올라가 소감을 털어놓을 차례였다. 며칠 동안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헌정식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에야 비로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저는 아주 중요한 세 마디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 다. 그 세 마디 말은 이것입니다. 판잣집은 이제 그만! 이것이 헤비타트의 전부입니다. 판잣집은 이제 그만! 우리 다 함께 외칩시다! 판잣집은 이제 그만!" 나는 박자에 맞춰 이 세 마디를 반복해서 선창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곧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박수갈채와 환호성 속에 모두들 한 목소리로 "판잣집은 이제 그만! 판잣집은 이제 그만! 판잣집은 이제 그만!" 하고 외 쳤다. 우리는 구호를 여러번 반복했다. 점차 군중들의 외침이 잦아들었고, 나 는 내 가슴 속에서 샘솟아 오르는 감정들, 기쁨과 도전이 뒤섞인 그 감정 들을 표현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물이 새는 집에서 살면서도 기뻐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 적 이 없습니다. 단열재가 없는 집이라서 추운 날 따뜻하게 지낼 수 없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고양이를 집어 던 질 수 있을 만큼 마룻바닥에 큰 구멍이 뚫린 집이나 하늘의 별들이 다 쳐 다보일 만큼 천장에 큰 구멍이 뚫린 집에 살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곳 섬터 카운티에는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비타트는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지 아 주 섬터 카운티에서 극빈주택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판잣집 은 이제 그만! 우리는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주거환경에서 사는 것은 종 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기 시 작해야 합니다. 물이 새고 단열재가 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는 마음속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니까 무언 가 도움이 될 일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낡아빠진 판잣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웃이 그런 집에서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판잣집이 생기는 것입니다! 헤비타트는 여기 아메리쿠스와 애틀랜타와 시라큐즈와 툭선과 동부 세인 트루이스와 에번스빌과 탤러하스와 온 세계 방방곡곡에서 헌정식을 할 때 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 리가 살고 있는 개인적 공간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도시와 이웃 도시를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주와 이웃 주를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나라와 다른 나 라를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서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을 뻗어 하 나님이 주신 자원으로 무엇이든지 돕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참한 빈 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우리만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 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시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헤비타트입니다! 판잣집은 이제 그만! 우리는 판잣집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판잣집은 이 제 그만! 하지만 어떻게 판잣집을 모두 없앨 수 있을까요? 그저 집회에 모여 흥분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모이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저도 여기 서서 '판잣집은 이제 그만!' 하고 소리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다고 해서 집이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호를 다 외쳤 으면 곧장 망치를 집어들고 못을 박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오후,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이 거리 끝까지 못을 박게 될 겁 니다. 저기 매 펄 덴마크를 위해 아메리쿠스 헤비타트 위원회가 짓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긴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해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녀가 살 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 었습니다. 그런데 저 모퉁이 판잣집에서 살던 윌리와 도로시와 솔로몬 가 족이 오늘 우리가 헌정할 세 채의 집 중 한 집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매 펄 덴마크가 그 가족이 살던 낡은 판잣집으로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옛 날에 살던 곳보다 그 집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합시 다. 매 펄 덴마크와 그 아이들을 위해 지금 훌륭한 집을 신축하고 있습니 다. 이 모퉁이를 돌면 바로 있는 곳이지요. 오늘 여기 오신 여러분께서는 매 펄 덴마크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도 바로 이 자 리에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녀 역시 못을 박고, 목재를 톱질하고, 통 나무를 옮길 때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함께 집을 짓고 함께 일하는 것, 이것이 헤비타트입니다. 이것은 동역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역관계를 맺는 것이며, 땅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동 역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서 판잣집을 없애고 말 것이다. 2.아이디어가 폭발하다. 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KGO 라디오 방송국의 일요 일 아침 토크쇼에서 인터뷰를 할 때였다. 당시 나는 10일간의 강연 때문에 출장중이었는데, 일정에 따르면 서부지역 8개 도시에서 각기 몇 차례씩 방 송출연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때가 1981년 4월이었다. 이 주에서 저 주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나는 주위에 펼쳐진 한없이 다 채로운 봄날의 풍경에 찬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정거장 하나하나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꾸며 놓으셨고, 매년 그렇듯 4월의 색채들을 현란하 게 터뜨리고 계셨다. 하지만 바로 그 일요일 아침 폭발했던 것은 색채가 아니라 아이디어였다. 6시에서 9시까지 방송했던 그 라디오쇼는 당시 5년째에 접어든 '헤비타 트 운동'에 동참하는 모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식의 전형적인 인 터뷰로 시작되었다. 당시 헤비타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 군데, 미합중국 내에서만 열한 군데에서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집을 새로 짓거나 개축하고 있었다. 연합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인 탐 헌터가 매주 방송하는 그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고 있었다. 우리는 10여 분 동안 헤비타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 었다. 그런 뒤 헌터가 전화로 청취자들의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사 람은 우리가 짓는 집의 양식이 무엇인지 물었고, 대금상환 방법과 기본이 자를 궁금해 했다, 어떤 청취자는 정부지원금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렇게 많은 집을 지을 돈을 구하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믿음 으로 일하고 있으며, 모든 자금과 자원과 노동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꽤 시간을 들여 설명해야 했다. 다음 전화를 받자, 어떤 여자가 짤막한 질문을 던졌다. "헤비타트 운동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그때까지 이렇게 귀중한 질문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즉각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지구상에서 극빈주택을 완전히 추방하는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총체적 비전이다. 1969년 이래로 수 년 동안 우리는 '코이노니아 동지회'(Koinonia Partners)가 극빈세대를 위해 집을 짓는 운동을 꾸준히 계속해온 이 곳 조지아 주 섬터 카운티에서 극빈주택을 추방하겠다고 말해왔다. 헤비타트 운동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코이노니아'에서부터였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내 다른 지역과 전세계 곳곳에서 주창된 헤비타트 운동이 알려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여기에서 할 수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끝없이 늘어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붙드는 일이었다. 도움을 방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러 나선 사람들의 삶과 생활양식도 극적일 정도로 뿌리부터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광활하고 막막하기만 하던 풍경이 또렷한 초점으로 사진에 찍힌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조지아나 뉴햄프셔나 과테말 라나 자이레에 수백 채, 수천 채의 집은 짓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목적은 미합중국의 모든 주와 온 세계 모든 나라 에서 극빈주택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청취자는 여전히 전화선 저쪽 끝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극빈주택이 사라지게 되면," 나는 자신있게 말해줄 수 있었다. "다른 일을 시작할 겁니다!" 그는 다시 숨을 몰아 쉬었다.그러더니 들릴락말락하게 웃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곧 방송국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말 굉장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여할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오셨다구요? 주소를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우리 이웃에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요, 자세한 정 보를 우송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대담한 목표가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사람 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비전을 보았다. 궁지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두 손과 마음을 모으면,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비전을 말이다. 그 날 아침의 토크쇼 덕분에 기쁨에 들뜨고 새 힘이 솟는 기분으로 며칠 후 아메리쿠스에 있는 헤비타트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 다. 라디오에서 선언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 무나도 많았다! 나는 그 후 몇 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강연할 때마다 이 목표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제 온 세상에서 판잣집은 모두 없애버릴 때가 왔습니다!" 나는 헤비타트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자 하시는 지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지한 고민을 많이 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엄청난 목표를 이루려는 거지요?"와 같은 불가피한 질문에 튼실한 대답을 준비해야만 했다. 내게는 모든 대답이 명백했다. 하지만 재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눌 만한 새로운 기회를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이 책도 그러한 모색 중 하나이다. 극빈주택을 어떻게 추방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한마디로 그것을 양심의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적절한 은신 처를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일깨우고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조 치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동역관계의 정신으로 해낼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관계를 맺고 있다. 헤비타트가 개인들이 모 여 벌이는 운동에 불과하다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은 하나님의 운동이며, 그 무엇도 주님을 막을 수는 없다. 둘째, 우리는 서로 동역관계를 맺고 있다. 헤비타트 운동의 가장 근사한 점은 평소에 전혀 어울려 일하지 않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그 어디서 나 같은 명분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고등학 생과 노인,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로마카톨릭과 기독교, 인종과 민족 을 초월해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우러진다. 설교하는 방식, 옷입는 방식, 세 례와 성찬 방식, 하다 못 해 성찬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조차 다른 사 람들이 함께 망치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못을 박을 수 있 다. 못 한 개에 마음을 모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러한 이중의 동역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전세계의 개인과 조직 의 양심들을 일깨워 우리의 명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모두 함 께 힘을 모아, 우리는 판잣집을 없애버릴 것이다. 단 한 채도 남김없이! 헤비타트 운동 국제 이사회의 회장인 데이빗 로우는 매사추세츠 주 멜로 즈의 제일 침례교회 목사이다. 1985년 가을 데이빗과 부인 보니는 교회의 주말 봉사단을 이끌고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열리는 헤비타트 행사에 참석 했다. 이틀 동안 포틀랜드 최초의 헤비타트 주택의 지붕을 올리며 합심해 일한 사람들은 23명이었다. 가장 어린 아이는 열 살이었고, 가장 나이가 든 사람은 여든 살이었다. 포틀랜드의 헤비타트 사람들은 꼭 필요한 곳을 골라 사랑의 증거물을 쌓 기 시작했다. 다 낡아 쇠락해가는 동네 한가운데 쓰레기가 잔뜩 쌓인 모퉁 이 공터였다. 그들이 지은 첫 집은 복식주택이었다. 9월의 싸늘한 토요일 아침 매사추세츠에서 메인까지 자동차 다섯 대에 나누어 타고 온 자원봉사 자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에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장 앞에 차를 세우자 아마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깡통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휘갈겨 썼을 법한 글자들이 손님을 맞았다. 낙서 몇 개는 인용할 수도 있다. 데이빗은 그 낙서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는데, 나도 동감이다. 포틀랜드의 반쯤 지어진 건물 한쪽 벽에는 경멸조로 '완전히 미친 헤비타트'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 던 것이다. 만약 '미쳤다'라는 말이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뜻밖이고, 흔치 않으며, 심지어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뜻한다면, 헤비타 트는 그 수식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원봉사자들은 자기 생애의 몇 달, 또는 몇 년을 아낌없이 바치며, 후 원자들은 엄청난 돈뭉치를 아낌없이 내어 놓는다. 그리고 고 임금의 전문 직 종사자들은 시간과 기술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가난한 가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 몫의 땀방울'을 흘린다. 미합중국의 전직 대통령 부부고 작업복을 입고 몇 주 동안이나 육체노동을 한다. 참여한 보든 이들은 서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며 전세계 곳곳에서 집을 짓고 있다. 아무도 영리를 챙기지 않고, 주택 소유자들도 이자를 부담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 들에게는 모두가 미친 소리로 들리리라. 기원후 1세기에는, 이미 오래전 죽은 순회 랍비를 추종하는 일단의 사람 들을 조롱조로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이 고집 센 무리는 맡은 사명을 다하고자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조롱을 감내해 야 했으며, 그보다 훨씬 더한 고난도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을 바꾸겠다는 어리석은 목표를 흔들림 없이 지켰다. 역시 신앙심 깊은 그 리스도인들의 모임인 헤비타트 운동은 20세기에 도 하나의 엉터리 같은 목 표를 향해 믿음으로 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지구상에서 극빈주택의 자취를 지워버리겠다는 목표이다. 뉴욕 시에서 열린 1985년 가을 이사회에서 데이빗 로우는 포틀랜드의 낙 서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광기를 결코 버리지 말자"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는 "미친 이대로 바보천치가 되어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보이며, 엉뚱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세상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하자"고 했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의 눈을 바꿀 때까지" 말이다! 오래 전인 1976년 9월, 뜻을 함께 한 동역자들과 협동 주택건설의 개념 을 지지하는 후원자들 27명이 아메리쿠스 근처의 코이노니아 농장에 모였 다. 그들은 11개 주와 다양한 기독교 단체의 대표자들이었다. 3일동안 심 도 깊은 토론과 기도를 마친 결과, 헤비타트 운동이라는 아이디어가 형체 를 갖추게 되었다. 그 모임의 묵상시간에 나는 금세기초의 탁월한 미국 건 축가였던 대니얼 허드슨 번햄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함으로써 참석자들 의 의욕을 북돋았다. 작은 계획은 세우지 말라. 그 안에 사람의 피를 끓게 할 마법이 없다. 큰 계획을 세우라. 기억하라. 우아하고 논리적인 도표는 일단 기록되면 결코 죽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것은 살아, 끝없이 성장하는 생명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것이다.(Thomas S. Hines, Burnham of Chicago, Architect and Planner, 2nd ed.,(Chicago:University of Chicago Press,1974),401.) 헤비타트 운동은 그의 말대로 큰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3.코이노니아:헤비타트의 고향 영리를 좇지 말고 이자를 물리지 말라는 성경적 경제원리(출 22:25)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을 짓자는 생각은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시작 되었다. '코이노니아'는 아메리쿠스 남서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다. 조지아 주의 소도시 내에 자리잡고 잇는 헤비타트라는 이름의 거리와 코이노니아 농장 사이의 거리는 겨우 8마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두 장 소를 잇는 사람들과 그들이 공유하는 경험의 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 계로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다. 나는 1965년 처음 코이노니아에 갔는데,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깊은 시 련을 겪고 있었다. 아내 린다와 거의 남남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린다 는 그 해 11월 내 곁을 떠나 뉴욕 시로 가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겠다 고 했지만, 함께 할 미래가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우리는 앨러배머 주 몽고메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투스칼루사 에 있는 앨러배마 법대의 동기와 함께 시작한 우편판촉과 출판업이 꽤 잘 풀려 일에 푹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우리는 힘을 합쳐 회사를 키웠고 회 사가 성장을 거듭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둘 다 1년에 10만 달러의 연봉을 챙기게 되었다. 내가 얻은 순수익만 해도 100만 달러를 넘었다. 나는 아름 다운 집에 살면서 링컨 컨티넨탈을 몰았고, 근교 호숫가에는 별장과 모터 보트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승마용 말과 가축떼를 사육하는 2,000에이커 의 목장을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린다와 나는 젊은 부부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물질적 풍요를 한껏 누 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를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재산이 삶에 의미를 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괴로운 별거의 시간 끝에 나는 린다를 다라 뉴욕으로 갔다. 한동안 내 영혼을 살피고 회개하며 기도로 지새는 나날들을 보냈고, 기나긴 화해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빗나갔음을 깨닫고 다시 주님 곁 으로 돌아가 우리 앞에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계획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전에, 우리는 몽고메리에 있 는 사업을 모두 처분하고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이 무렵에 우리가 겪은 일들은 Love in the Motar Joints (Piscataway,NJ.:New Country Publishers,1980)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 해 12월 린다와 나는 한두 시간 정도 둘러보리라는 생각으로 코이노 니아 농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결국 한 달을 머무르고 말았다. 1942년 당 시 아내 플로렌스와 함께 코이노니아를 창건한 개척자 클래런스 조던이 그 때 막 시작되고 있던 우리 부부의 치유과정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기 때문 이다. 나는 이 사람에게 매료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만큼 그리스도를 헌신적 으로 섬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클래런스의 주도아래 코이노니아 는 초대 교회를 본받아 '함께 모여'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모임은 궁 핍한 지역 소작농들에게 선진 농업시술을 가르치겠다는 특수한 사명을 띠 고 출발했다. 비폭력, 공동재산, 그리고 인종불문이라는 원칙을 실천하던 초기 주민들은 백인 이웃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폭행을 당하 고 총을 맞았으며, 방화에 불매운동까지 겪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핍 박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흔들림 없이 증오를 사랑으로 되갚으며 분투했다.(Dallas Lee의 Cotton Patch Evidence(N.Y.:Harper & Row,1972)를 보라) 클래런스는 성경에 분명한 가르침이 있다고 말했다.(그는 성경을 속속들 이 알고 있었다. 조지아 대 농학 학위와 남부 침례신학교 그리스어 신약 박사 학위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클래런스는 196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 기 전까지, 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코튼패치 판 신약성서 집필작업을 마무 리했다.) 나라마다 무력에 의존하며 전세계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화력 을 갖고자 안달하고 있던 때에 클래런스만은 예수님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고 주장했다. 곧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 누가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같이 가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지요." 클래런스도 그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힘 을 주시고, 기회만 있다면 그를 도울 힘을 주십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복음을 따르는 클래런스의 신앙을 코이노니아의 이 웃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래런스는 2차대전 도중, 즉 코이노니 아가 막 건립되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즐겨 회상했다. 한 번은 어떤 농부 가 코이노니아에 들러 그 곳에 살던 얼마 안 되는 주민들에게 애국심이 없 다며 분노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클래런스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싸울 생각이 없잖소!" "아니오, 오히려 우리는 대단한 투사들이랍니다." "당신네들이?" 농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클래런스는 하나님의 갑옷과 무기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농부에게 그런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접근방식을 달리하기로 했다. "농장에 노새가 있으시지요?" "몇 마리 있지요."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시 농부 지역 농부들은 밭일을 할 때 이 끈기있는 동물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헛간을 지나가고 있는데, 노새가 갑자기 머리를 내밀고 당신의 엉덩이 를 꽉 물어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눈에 띄는 몽둥이를 집어다가 패대기를 치겠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럼 엉덩이를 물어뜯는 노새를 가만 둔단 말이오?" "제 말은 왜 똑같이 물어뜯지 않느냔 말입니다." "노새를 물어뜯어? 당신 미쳤소? 나는 노새 엉덩이 따윌 물어뜯진 않아. 도대체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클래런스는 그때 그 농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야기할 때마다 웃음 을 띠곤 했다. "물론 싸워야지요. 하지만 뭘로 싸우느냐가 문제입니다! 노새한테 무기 를 고르라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직접 무기를 고르잖습니 까? 그리스도인들도 악의 세력에게 우리의 무기를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폭탄과 총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사랑과 친절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세상과 말씀이 충동할 때마다 클래런스는 타협을 거부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노예도 자유민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 3:28)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남부 조지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흑인도 백인도 없다는 뜻입니다." 클래런스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켰다. "세상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 남남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 지만 성경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 씀을 따라야 합니다!" 한 번은 클래런스의 집요한 믿음에 이끌린 불행한 목사 한 사람이 조언 을 부탁해 왔다. 도무지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설교를 참고 듣지 못했다. 목사는 교인들이 바라는 대 로 말하고 행동해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배우가 된 느낌이라고 서글프게 털어놓았다. 클래런스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국 창녀가 된 기분이라는 말씀이군요?" 목사는 불쾌한 감정을 어렵게 누르며 말했다. "그런 셈입니다." "그럼 왜 그만두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배운 거라곤 목사노릇뿐입니다. 신학교육밖에 받지를 못했어 요. 그러니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클래런스는 계속 목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형제님, 몸 파는 재주밖에 없다는 사실이 창녀노릇을 계속 해도 좋다는 이유가 될까요?" 성경적 경제원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클래런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적하라. 그리하여 재정적으로 안정되 고 훌륭한 삶을 누리며, 은퇴해서도 넉넉한 연금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러나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리라'(마 6:19-2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나머지는 모 두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르치는 말에 깊이 감화를 받았다. 학자이자 재담가였던 클래런스는 박식하면서도 철저히 서민적이었다. 온 나라가 그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했지만, 클래런스는 거의 언제나 물빠진 작업복 을 입고서 '하나님 운동'의 이야기를 이웃들에게 널리 퍼뜨리며 코이노니 아에 머물렀다. 우리 가족이 코이노니아에서 지내던 한 달 동안, 클래런스 와 나는 몇 시간씩이나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내 영적 우 물이 말라버렸음을 알고, 기꺼이 스스로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물을 다시 채워 주시도록 도우려고 했다. 1968년, 린다와 내가 이런저런 기독교 봉사활동을 전업으로 삼고 일한 지 두 해 반이 다 되어가던 즈음에 우리는 코이노니아 농장으로 이사가기 로 결정했다. 수십 년간의 핍박과 투쟁의 세월이 공동체에 크나큰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사정에 따라 얼마 동안씩 일하겠다고 찾아오는 다양한 연 령층의 구도자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았지만, 그 해 여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일년 내내 상주하는 이들은 덩그러니 두 세대뿐이었다. 지방 상인들의 잦은 폭력행사와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코이노니아의 유일한 자산인 1,100평에 달하는 당만은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땅 전역에 걸쳐 살고 있던 가난한 소작농들은 강요에 못이겨 그 척 박하기 그지없는 농촌생활을 떠나서 훨씬 더 불안한 도시의 삶을 찾아가야 했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은 위험할 정도로 낡아빠진 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껴안고 살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살 만한 집을 마 련하리라는 희망따위는 애초에 품을 수조차 없었다. 1968년 가을, 클래런스와 나는 영적으로 깨어있고 사회적으로도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 15명을 코이노니아에 불러모았다. 나흘에 걸친 회의를 통 해 '코이노니아 동지회'라는 새로운 비전이 탄생했다. 이 단체의 주력 부 서는 협동주택 사업을 맡았다. 코이노니아가 박해의 세월을 견딜 수 있도 록 기부금을 헌납해주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던 전국의 수많은 후원자 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클래런스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 류의 주택공급 계획을 제시했다. 우리는 반 에이커짜리 택지 42구간을 마련하여, 강제퇴거당한 농촌 가족 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가운데 4에이커는 공원과 휴식공간으로 남겨둘 것입니다. 목욕탕, 부엌, 거실을 갖춘 방 네 개짜리 주택을 지을 것이며, 비용은 20년에 걸쳐 상환받을 것입니다. 이자는 전혀 없으며, 다만 매달 소정의 관리비를 받을 뿐입니다. 이 비용의 차이는 가난한 이들이 집을 가 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차이입니다. 이자를 부담할 경우 비용은 집 두 채에 해당하는 금액을 부담하면서도 수중에 들어오는 집은 단 한 채 뿐인 것입니다. 동역자가 되는 가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지으면서 조금씩 빚을 갚 아나가게 됩니다. 최소한 저축금의 일부분은 자기 집을 지을 때 사용된 기 금의 이자로 내어놓기를 권장합니다. 모두 이익을 얻는 만큼 책임도 함께 분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주는 기쁨의 한없는 복을 느 끼지 못한다면 안 될 말이지요. 클래런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건축사업에 쓰일 비용은 '인류를 위 한 사랑의 기금' 발족식을 통해 모금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자본이며, 사회복지사업 가가 아니라 함께 일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사용할 현명하고도 영예롭고 공정한 방법입니 다. '인류를 위한 사랑의 기금'은 이러한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기금은 자신에게 필요한 액수보다 돈을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 이 기꺼이 내어놓을 헌납금과 그 정도의 능력은 없으나 극빈자를 위한 운 영자금을 보태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무이자 대부금, 그리고 동역자로 참여 할 산업체, 농장, 그리고 주택들이 자원봉사로 내놓는 영리금으로 충당합 니다. 그 시작으로 코이노니아 농장의 전재산인 25만 달러를 기금으로 위 탁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다른 헌납금들도 벌써 들어오고 있습니다. 기금에서 현금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적선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동역자로서 참여하는 사업에만 자본을 제공할 것입니다. 클래런스는 이 위대한 노력이 시행된 지 1년 만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만의 '판잣집', 즉 농장에 딸린 단칸방 서재에 앉아 특 유의 힘이 넘치는 설교문을 작성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를 사랑했던 우리들은 모두 그의 죽음이 던져준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한참 전개되고 있던 협동주택사업에 더욱더 헌 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클래런스를 통해 우리를 엄청난 도전에 부 딪치게 하셨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새롭게 합류한 몇몇 가 족들의 도움과 각계각처의 친구들이 보내온 헌납금과 무이자 대부금에 힘 입어, 1972년 연말에는 최초로 시작한 27개 주택단지가 거의 다 완성되어 입주를 완료했다. 부지 일부분은 위락시설을 위해 남겨두었고, 2개 부지는 육아센터와 어린이 놀이방으로 활용했다.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이미 32개 세대를 위한 새로운 부지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듬해가 되자 또 다른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천 교회 의 찬조를 받고 연합 그리스도 교회와 결연을 맺어, 린다와 내가 코이노니 아를 떠나 특별한 선교의 사명을 띠고 아프리카 오지로 가게 된 것이다. 네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에 들러 언어훈련을 받고 곧 자이레로 떠났다. 우리는 제3세계 국가에서도 협동주택 사업의 개념을 시험해 보리라 마음먹 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6년 자이레 적도지역의 중심도시인 음반다카를 방문하고 나서, 이 도시가 출발점으로 적격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도 시는 자이레가 1960년 급작스럽게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밀림의 촌락에 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허가되는 바람에 서둘러 급조된 부실 건물들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곳이었다. 10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 음반다카의 인구는 30,000명에서 150,000명으로 폭증했다. 아주 잘 사는 사람들을 빼면 안락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었으며, 더 구나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한테 돌아갈 집은 아예 없었다. 3년간 린다와 나는 도둑질을 비롯해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관료주의와 변 덕스런 단속과 차압, 그리고 만성적인 기금 부족과 물자의 부족은 물론이 고 시간을 돌처럼 여기는 나라에서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는 법까지 배워야 만 했는데, 그 고초와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함 께 일하겠다고 나서준 놀라운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고, 수백 명에 달하는 고국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사는 지 역주민들이 정말로 그들에게 살 만한 집을 마련해 주고자 애쓰는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자, 정말 뜨거운 열성으로 성원해 주었다. 로코니 목사가 살던 음반다카 변두리의 다 쓰러져가는 진흙집은 두 내외 가 친자식처럼 기르려고 입양한 아홉 어린이들의 보금자리였다. 로코니 목 사는 이 계획의 열렬한 응원자였다. 언젠가 우리의 공사부지를 방문한 손 님들에게 했던 말이 그의 경외심과 흥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몇 년 전 선교사들이 왔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자기네가 살 안락한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께 근사한 집을 지어 드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집 짓는 일을 도우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린다와 자원봉사자들을 보내서 서민들의 집을 짓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집 마련이 제일 큰 고민이라고 할 겁니다. 교회가 도시 중심에 이렇게 새로운 주택단지를 짓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1976년 4월 7일 우리가 자이레를 떠나던 날, 80세대가 음반다카지역 '인 류를 위한 기금'에 매달 상환금을 내고 있었고, 벌써 새 집에 입주한 사람 들만도 수백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90마일 떨어져있는 응톤도 마을에서는 제2차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어느 정도 견실한 자재로 지은 집이 통틀어 세 채에 불과했다. 그 지역의 위원회는 그 세 채에서 사는 사 람들은 제외한 모든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집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 고, 우리들은 그에 따라 300채에 달하는 집을 지어야만 했다. 실로 광대한 기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한 돈을 어디서 구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지금가지 주님께서 내딛는 발자욱마다 함께 해 주셨으니, 이제 와서 우리 를 낙담시키지는 않으시리라 믿었다.(자이레에서 있었던 일들은 Bokotola(N.Y.:Accociation Press,1977)에 적어놓았다.) 1976년 린다와 내가 코이노니아 농장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제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 잡고 있었다. 그 해 가을 헤비타트 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그 방향은 분명 해졌다. 이 새 조직은 기금을 모으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며, 전세계에 걸쳐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나은 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 한 수속절차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해 줄 것이다. 우리의 꿈이 막 발사된 셈이었다. 그 꿈이 얼마나 빨리 창공으로 솟아오 를지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4.당면과제의 규모 1976년 코이노니아 농장에 모여 헤비타트 운동본부를 설립하고 극빈주택 의 문제에 좀더 폭넓게 접근하자는 결의를 다지던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미처 몰랐다. 그 후 지금까지, 전세계에 걸친 수 요는 그 어마어마한 규모를 증거하는 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적인 주거지를 위한 국제연합 센터'는 전인류의 4분의 1인 10억에 서 15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적절한 주택에 살지 못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이들 중 대략 1억 정도는 아예 집이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다. 또 제3세계 의 많은 도시에서 빈민가나 불법 가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는 그 도시 인구의 절반에 이른다. 총인구의 4분의 3 이상이 그렇게 살고 있는 도시들 도 있다. 남아메리카만 봐도, 2,000만 명의 아이들이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도 없이 길거리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가난에 찌든 이 사람들은 물조차 제한적으로 공급받을 때가 많다. 게다 가 대부분의 집에는 화장실 시설이 없다.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은 마분 지나 녹슨 금속으로 만든 벽이나 옥수수 줄기, 나뭇조각 따위가 막혀 있는 흙벽, 양철이나 종려나무 가지, 타르 종이, 너덜너덜해진 플라스틱 따위가 뒤범벅으로 얽혀 있는 지붕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산다. 더 운이 없는 사람 들은 남의 집 문간이나 다리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자거나, 아예 숙소를 찾 지 못하기도 한다. 선진국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나 아시아 대다수 지역처럼 참혹한 지경 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간에게 부적절한 생활환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뉴욕 시에는 대략 30,000명에서 60,000 명의 무주택자가 있으며, 당장 무주택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250,000명에 달한다. 뉴욕 주택 사업부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공영주택에 입주한 인원이 20,000세대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입주 순서를 기다리는 가족들도 170,000세대가 더 있다고 한다, 주지사 사무실의 통계 에 따르면, 500,000명에 이르는 뉴욕 시민들이 기준 이하의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 보스턴에서는 1985년 4월에 교파를 초월하는 세계교회주의 계열단체인 '도시 정의를 위한 기독교인의 모임'(CUJ,Christians for Urban Justice) 산하에서 진행될 새 헤비타트 계획을 인가해 주었다. 여기에도 집 없는 사 람들이 5,000명이 넘었고, 7,000가구가 공영주택 입주를 기다리고 있으며,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를 근근히 면하고 잇는 사람의 수는 그 두세 배에 달 했다. 그리고 대책없이 방치된 14,000가구가 재개발을 고대하고 있었다. CUJ위원회의 목사들은 도심 빈민가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주택문제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서해안의 로스엔젤레스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무려 30,000명을 넘어선 다. 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바람막이를 찾아 밀려들고 있다. 기준 이하의 주택은 미합중국 전역에 걸쳐서 심각한 문제 로 대두해 잇다. 그런데도 농촌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면 우선 사람들 은 내쫓기듯 도시로 이사하게 마련이다. 미시시피 델타 전역, 특히 동쪽 강둑을 따라 미시시피 주 북서부의 비옥한 평야로 뻗어있는 지역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제3세계 지역에 버금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미국 남부를 관장하는 헤비타트 지역본부인 남부 헤비타 트의 창건자인 레이 헌트는 델타 지역의 15,000세대가 수도관도, 화장실 시설도, 단열재도, 심지어 탄탄한 벽과 지붕조차 없는 비인간적인 환경에 서 살고 있다고 추산한다. 기독교 구제 발전 기구인 '선명회'(World Vision)와 합작하는 헤비타트 사업이 몇 군데에서 진행중이기는 하지만 우 리 앞에 놓여있는 숙제는 어마어마하기만 하다. 미합중국 전역에 걸쳐, 기준 이하의 주택에 살거나 아예 집이 없는 사람 들의 수가 2,00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인구대비 비율로 치 자면 그 숫자는 크지 않지만(10퍼센트가 못 된다)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 장 부유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이 다. 오늘날 이문제의 규모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앞 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유엔은 2000년까지 세계인구가 무려 12억 명이 나 증가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게다가 유엔의 관측에 따르면, 새로운 인구 의 80퍼센트가 도시에 거주할 것이고, 대부분의 인구증가는 개발도상국에 서 유발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 도시의 빈민가와 무허가 주택지구의 인구 는 세계인구증가율보다 네 배나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겨우 15년도 안 되 는 기간 동안 뉴욕만한 도시를 120군데에 세워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1970년 당시 아프리카 대륙 전체 인구는 1억 7,000만 명이었다. 10년이 지나자 3억 5,900만 명이 되었다. 예측컨대 이 숫자는 2000년까지 두 배 로, 2020년에는 세 배로 늘어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10억 명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다. 금세기말까 지 이 숫자는 두 배로 늘어날 것이며, 제3세계 인구 절반이 도시에 거주하 게 될 전망이다. 5억의 도시 거주자들이 겨우 60개의 도시에 어거지로 처 박힌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감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도시거주자들의 비참한 사정은 상상도 못할 만큼 악화될 것이다. 안 그래 도 궁핍한 자원의 배분은 훨씬 더 어려워지고 삶을 견뎌내기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끝없이 커져만 가는 문제에 해결책이 있겠는가? 1986년 연초에, 헤비타트 운동본부는 14개 개발도상국 24개 지역에서 사 업을 추진했다. 상당수 사업장은 도시지역에 있었다. 이러한 사업의 가치 는 단순히 완성된 집의 숫자로 다질 수 없는, 무한히 값진 것이다. 새로 지어지는 헤비타트 집들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횃불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헤비타트 운동의 힘만 가지고서는 이 거대한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미 카터는 게간 소식지인 '헤비타트 월드'에 게재된 한 인터뷰에서 헤비타트의 비전을 명백히 밝힌 바 있다. 전세계의 필요한 집들은 모두 헤비타트가 지을 재간은 없습니다. 일단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민간투자자들이나 스스로 집을 지을 능력이 있는 자립 가능한 가족들, 국내와 국외의 국가적 대책, 국제연합,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적 기구, 기타 자선단체 등의 기존 주택건설체제 내 에 헤비타트가 자리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아주 독창적이고 효율적이며 진취적인 헤비타트의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헤비타트와 직접 연 관을 맺지는 않더라도 전세계에 걸쳐 유사한 노력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헤비타트가 특정지역이나 특정국가에 지나치 게 노력을 편중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최대한 궁핍한 지역들을 찾아내서 헤비타트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헤비 타트 사업이 타의 모범이 되는 시범적 시도로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특정 지역에서 한정된 수의 헤비타트 사업을 벌인 뒤에 민간투자자들이나 정부 관료들, 기타 다른 이들이 우리의 모범을 따르도록 유도해야한다는 말입니 다. 이것이 헤비타트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전세계에 헤비타트 사업 을 뿌리내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가난한 이들이 자 신을 스스로 돕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격려하며, 부유한 이들의 양심을 깨우쳐서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자기들보다 불행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게 하고자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조력은 현재 두 가지 커다란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무심한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인구폭 발이다. 언젠가 자이레의 킨샤샤에서 음반다카까지 비행기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옆 좌석에 부유한 자이레 사업가가 앉아 있었다. 그도 나를 알았고, 나도 그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음반다카의 주택공급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 는지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풀러 시, 저한테도 집을 한 채 지어 주시지요." 나는 우리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상기시키고, 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시겠지만 제겐 이미 네 채의 집이 있습니다. 당신이 한 채를 더 지어 주시면 좋겠네요." "시 뚜와이엥." 나는 자이레에서 통용되는 존칭으로 그를 불렀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 난한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기 위해 돈을 부쳐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부유 하시니, 우리 사업에 기금을 기탁하셔서 가난한 동포들이 좀더 나은 집에 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놀랐는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난 쓸데없이 돈을 뿌리는 데는 관심 없습니다. 더 많이 벌고 싶을 뿐이 지요!" 불행한 일이지만, 서방세계의 부유층들도 개발도상국의 부유층과 똑같은 형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멀리하기 위해 주위에 담을 쌓 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누려 하지 않는다. 부자들 가운데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론을 세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라든가 "우리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이 정 도 재산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좀 사치스럽게 산다고 뭐가 잘못인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재산을 타인들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 끼지 못한다. 최근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지에 1년에 1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부유한 젊은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바로 얼마 전 호화스런 대저택을 지었 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주일학교 교사일도 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에 비추어 자신의 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돈을 버는 재주를 주셨으니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정당하다고 대답했다. 그 는 함께 나누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네브라스카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과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지역 유지가 갓 지은 650만 달러자리 대저택을 지 나가게 되었다. 넓디넓은 대저택 주위를 높은 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집 가족들은 서로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도록 집안에 초인종들을 장치했 다고 한다! 부자들에게 사치스런 저택들을 파는 거물 부동산 회사는 콜로라도 주 덴 버에 본부를 갖고 있으며 미국내 11개 사무소와 전세계 6대주에 걸쳐 가맹 점을 거느리고 있다. 이 회사에서 매년 펴내는 안내책자인 '프리뷰즈'는 부동산 업계의 모범답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자는 '포춘'지가 선정한 1,000개 대기업 이사들과 세계의 350대 은행 간부들에게 발송된다. 계간으 로 발행되는 증보판에는 새로 나온 매물들이 게재된다.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자매지 '홈즈 인터내셔널'은 풍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 회사가 거래하는 저택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 어, 로스엔젤레스 사무소에는 70만 달러 이하의 매물은 아예 받지도 않는 다. 상당수의 매물들이 수백만 달러 대에 거래된다. 최근에 팔린 한 저택 의 가격은 무려 1,900만 달러를 호가했다! '프리뷰즈'는 사람들이 점차 도시문제에서 탈출하기를 원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더구나 이 회사에 따르면 또 다른 유행이 형성되는 조짐이 뚜렷하 다고 한다. 한 개의 대저택을 소유하기보다는, 너댓 채의 집을 갖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거추장스러운 빈민들이 피하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는 방법 은 찾아냈다. '뉴욕 매거진'의 1985년 12월 9일자 호는 메트로폴리탄 타워 라는 이름의 도시형 초호화 아파트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65층짜리 블랙 글라스 건물의 홍보담당자는 "역사상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고 주장한 다. 그만한 높이에 사는 사람들 눈에 먼지며 가난이며 보도 위에서 잠을 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보일 리 없다. 메트로폴리탄 타워는 손님들에게 분홍빛 수건으로 몸을 감은 육감적인 모습으로 증기사우나를 즐기는 여인과 애완용 푸들 강아지를 보여준다. 기 사에 따르면 "이 광고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만끽하고 거침없 이 돈을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이 건물에서 가장 저렴한 아 파트는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단칸방으로 약 32만 달러이다. 디럭스 펜트하우스는 겨우 5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1968년 헤비타트는 볼리비아와 니카라과와 인도에서 1평방피트당 겨우 1 달러를 조금 넘는 가격으로 소박한 집들을 지었으며, 덕분에 수십여 가구 가 평생 처음으로 쾌적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뉴욕 시 에서는 최고로 비싼 호화 아파트들의 평균비용이 1평방피트당 무려 700달 러가 넘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문제에서 등돌리기에 안성맞춤인 이 드높 은 건물들이 기세좋게 팔려나가는 동안, 저 아래 밑바닥에서는 수천 명의 무주택자들이 도시의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 세상 부자들의 냉담한 마음도 가난한 이들의 곤경만큼이나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부유한 개신교 교파의 한 간부에게 헤비타트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더 니, 세상에 산적한 수많은 다른 문제들에 비하면 주택문제는 자신들의 우 선순위가 아니라며 일어지하에 거절했다. 우리는 부자들의 양심을 파고들 어 그들의 시각을 바꾸고 가난한 이들의 힘만으로는 엄청난 주택수요 문제 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덧붙여 '부유한 사람'이라 진짜 돈이 넘쳐나는 거부들을 지칭하는 게 아 니라는 점도 주지해야 한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개발도상국 국민 대부분 에 비해 엄청나게 부유하다. 북미의 결혼한 부부가 맞벌이로 1년에 연봉 10만 달러를 버는 일은 그리 유별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이 대단한 소득 을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며 가족들을 위한 집에 거금을 투자한다. 미 국에서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인구보다 주택의 숫자가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한 결과, 1985년 당시 주택 한 채당 거주자의 숫자는 겨우 2.8 명에 불과했다. 제3세계 주택상황은 이와 천양지차의 대비를 보인다. 헤비타트는 해외에 서 1,000달러에서 3,000달러 사이의 비용으로 400에서 1,000평방피트의 면 적에 집을 짓는데. 5명에서 15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집에 살게 된다. 볼리비아 북부 지역에 있는 헤비타트 사업 책임자 안젤리노 치파노는 대 나무 벽과 초가지붕, 진흙으로 만든 마루로 된 전통적 주택에서 사는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 년 중 7개월은 거의 매일 비가 옵니다. 벽이라고 세워놓은 대나무들 사이로 빗줄기가 집 안으로 곧장 들이칩니다. 모든 집기가 물에 흠뻑 젖는 데 건기가 올 때까지 그렇게 젖은 채 보냅니다. 가금씩 개미들이 몰려오지 요. 3,4일 전에 불개미들이 떼를 지어 우리 집을 습격했습니다 엄청난 개 미군단이 내 잠자리 속으로 들어왔지요. 한밤중에 온몸이 불개미로 뒤덮인 채 잠이 깼습니다. 이불과 머리 속과 옷 속에 개미들이 온통 들러붙어 있 었습니다. 풍요로운 서구에서 우리들은 내 몸 하나 편안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 이는 경향이 있다. 미국에는 9,000만 채에 가까운 집들이 있는데 그 중 절 반 가량이 에어컨 설비가 되어 있다. 온대지방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 사는 가난한 형제 자매들에게는 가끔씩 산들바람이 드나들 탁트인 창 하나가 아쉬운 실정이다. 자기 안위만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교회들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전국 을 돌며 강연을 하면서, 나는 사치스런 교회건물과 그 안의 인색한 사람들 을 보고 낙심한 적이 많았다. 언젠가 플로리다의 한 교회에서 헤비타트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날은 그 교회가 새로운 주일학교 건물을 완공해 헌정하는 날이었다. 그 건물은 80만 달러짜리였다. 예배가 끝난 뒤 목사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헤비타트의 봉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훌륭한 사업을 지원 하겠습니다. 다음주에 수표를 우송해 드리지요." 그는 약속을 지켰다. 3일 후 우리는 35달러를 받았다. 그 후 그 교회에 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다른 교회들도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수천 개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헤비타트 운동을 아낌없이 후원해 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치스런 건물을 지어놓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사업에는 쥐꼬리만한 액수를 내놓는 교회들 또한 수천에 달한다. "나는 감옥에 갇히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새로운 주일학교 건물을 짓고, 더 큰 오르간을 사고, 더 두툼한 카펫을 깔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의 예산을 한번 살펴보라, 목회 자체를 위해 쓰는 돈이 얼마나 되는가? 바로 당신의 교회가 이 문제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구증가 문제에 관해 말하자면, 주거환경이 향상될 때 가족계획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제3세계에서 자식을 많이 낳는 주된 이유는 노후를 보장할 필요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몇이라도 살아남아 나이든 부모를 돌봐줄 테니 말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에 다르면, 지난 1세기 동안 주거환경이 개선 된 것이 건강증진의 주된 요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도 전세계의 헤 비타트 사업장에서 이를 확인했다. 자이레의 응톤도에 있을 때, 한 영국 침례교 파견간호사가 내게 감탄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25년 동안 병원 일을 해준 것보다 당신이 이 집들을 지어준 게 이들의 건강을 위해 훨씬 더 좋은 일이에요. 수많은 질병의 원인을 미리 없애 버렸으니까요!" 유아사망률이 감소하고 자기 소유의 튼튼한 주택으로 이사하게 되면 사 람들은 자기 환경에 안정감은 갖게 된다. 따라서 자식을 되도록 많이 낳아 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인구증가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가족계획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 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나서서 빈민들과 함께 일하며 보금자리라는 기본적 문제의 해 결을 돕게 되면, 양측은 급속도로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꺼 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출산율을 줄이는 방법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빈민들에게서 멀리 물러나 주위에 높은 담장을 둘러치는 것은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 문제의 규모를 타진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마지막 요인은 제3세 계 발전을 전반적으로 계획할 때 주택문제의 중요성을 간과한 결정적인 잘 못이다. 1984년 세계은행이 펴낸 책자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의 지 속적인 발전을 향하여)은 교육, 건강, 인구, 농업연구, 임업관련 사업의 중요성을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주거문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프리카의 인력자원을 개발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도, 이 목표와 주택문제개선 사이의 관련성은 미처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이처럼 전세계적 주택수요의 어마어마한 규모라든가, 인구폭발, 부유층 들의 자기중심주의, 쾌적한 주거환경과 전반적인 발전의 관계를 꿰뚫어보 지 못한 실패 등은 다방면에서 복합적으로 닥쳐오는 시련을 말해준다. 그 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 시련에 대처해나갈 수 있다. 문제의 현실적 규모를 똑바로 파악하고도 물러서지 않고 헤비타트 사업 에 참여해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새삼 감동하곤 한다. 그 들은 오히려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대담한 발자욱을 내디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1978년, 잭 타카야나기라는 정력적인 목사가 (보코톨라)를 읽었다. 40년 대에 캘리포니아 론 파인에 세워졌던 만자나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에서 성 장기를 보낸 잭은 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코톨라)를 읽은 뒤 몇 주 후 잭은 자신이 이끄는 산호세의 알마덴 밸리 연합 그리스 도 교회의 모든 신도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나누어주고, 이 절박한 문제 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설교를 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헤비타트와 동맹을 맺은 교화가 하나도 없었다. 그 러나 산호세의 신도들은 아예 대담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알마덴 밸리 교회는 서부 헤비타트를 결성하고, 들어줄 사람이 있는 곳 이라면 어디든 가서 헤비타트의 개념을 전파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의 요지마다 찾아다니며 연설하고 기금을 모았으며, 자원봉사자 들을 보내고 해외 주택건설 비용으로 쓸 기부금을 정기적으로 아메리쿠스 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8년 후인 1986년 봄,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여섯 군데의 헤비타트 사업장 이 생겨났다. 그 중 한 군데가 프레즈노로서 바로 1년 전에 100번째로 결 연을 맺은 곳이었다. 프레즈노 사업의 주된 공로자는 바로 잭 타카야나기 목사로, 그는 당시 그 곳에서 칼리지 커뮤니티 조합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겠다는 그의 비전은 굉장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헤비타트의 동역자들이 영감을 받아 유사한 조 직들을 결성했는데, 이 조직들은 현재 '지역본부'(Regional Centers)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각각의 지역본부는 몇 개 주씩을 책임지며 연설자 라든가 길잡이가 될 정보 등 모든 자원을 해당 지역 헤비타트의 자매조직 들과 관심을 보이는 기타 단체들에 제공한다. 이들은 도한 헤비타트 운동 이 벌이는 전세계적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후원을 촉구한다. 1985년 12월 뉴저지 주 저지 시에서는 갓 태어난 헤비타트 자매조직이 아주 큰 성탄절 선물을 받았다. 스킵 돌런 회장이 "전쟁터"라고 표현한 지 역 한가운데 버려진 건물을 인수한 것이다. 판자로 둘러막아 놓은 이 5층 짜리 벽돌건물은 원래 47세대가 살 수 있는 아파트였다. 자이레의 음반다 카에서는 적도를 따라 500채의 집을 짓는 계획이 진행중이었지만, 미국 내 사업으로는 저지 시의 이 재개발이 헤비타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사업 이었다. 이 작은 위원회는 주님의 인도를 믿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시 장, 시의회, 그리고 그 지역 국회의원의 지지를 약속받았다. 영어와 스페 인어로 발간되는 지역 신문들, 교육위원회, 민간산업협회, 지역 부동산업 자, 노조들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1986년 2월까지 무려 100여 가구가 신청서를 냈는데, 저지 시 헤비타트는 1년 내로 대부분의 아 파트에 입주를 끝낸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그들의 믿음과 결의로 보 아 그들은 반드시 해내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쾌적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온 세상에서 판잣집을 없애버릴 수 있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의 규모가 아무 리 크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유엔총회는 1987년을 '무주택자들을 위한 보금자리 마련의 해'로 선포했 다. 이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책자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전세 계에 걸쳐 집중적 조직적인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바로 지금."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한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있으랴. 우리가 여기에 모아놓은 통계들과 문제의 규모는 가히 위압적이다. 그러 나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 고 타인들의 불행에 눈을 감게 만드는 끔찍한 유혹에 굴복한다면 우리 자 신이 이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가 되는 길을 찾아보 자. 5."린다, 우리 걸어갑시다" 공기는 싸늘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우중충하게 찌푸린 하늘에서 금방 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1983년 4월 초순의 일요일 오후, 나는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의 우리 집 현 관문 앞에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주 동안 아메리쿠스에서 700마일 떨어진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가는 게 어떨까 생각해왔다. 9월 셋째 주말에 헤 비타트의 일곱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하행사가 가을 이사회를 겸 해 인디애너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만일 행사장까지 도보로 여행한 다면, 주택문제의 필요성을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당면한 문제의 절박성 을 더 많은 사람들이 실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린다에게조차 이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계획이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그렇 게 먼 거리를 걸을 수 있을까부터가 의심스러웠다. 건강은 썩 좋았지만, 그렇다고 700마일을 걷는다니 그런 일은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다! 그래서 나는 좀더 소박한 목표를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 예배에 참석하 러 코이노니아 농장까지 갈 때 8마일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고 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될까. 예배는 오후 4시에 시작하는 데 벌써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했다. 날씨는 험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코이노니아까지는 적어도 두 시간이 걸릴 터였다. 나는 마침내 걸어가기로 했다. 집안으로 다시 뛰 어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쳤다. "코이노니아에 예배 드리러 가려고 하는데, 걸어가야겠어!" "뭐라구요?" "걸어간다구!" "왜요?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도대체 왜 굳이 이런 날씨에 걷겠다는 거 예요?" "나중에 말해줄게. 당신도 나갈거지?" "그러려고 해요." "좋아. 돌아올 땐 당신 차를 타면 되겠네. 그럼 거기서 봅시다." 나는 모자와 우산을 낚아채듯 거머쥐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배시간에 맞춰 코이노니아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하늘을 보니 낌새가 좋지 않았다. 4마일쯤 걸었을까, 비가 본격 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갈수록 걷기가 힘들었지만, 꿋꿋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4시 15분 나는 흠뻑 젖고 기진맥 진한 채 농장 진입로에 도착했다. 어차피 예배 시작 시간은 한참 전에 지 난 터라 곧장 예배당으로 가는 대신 첫 번째 건물에 들어가 쉬면서 숨을 골랐다. 의자에 앉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겨우 8마일밖에 안 걸었는데 이 모야 이 꼴이라니. 700마일을 걸을 생각이라는 얘길 안 하길 잘했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을거야!' 몇 분이 지나자 예배를 드리러 나설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 침에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나았다.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코이노니아까지 걸어감으로써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나는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린다와 걷기운동에 대해 의논 했다. 린다도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었다. 린다는 함께 걷고 싶어했지만, 그 먼 길을 전부 걷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둘이 교대로 걷는다면 몰라 도 말이다. 자기가 서너 마일쯤 걷는 동안 나는 지원차량을 타고 따라가 고, 반대로 내가 걷는 동안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는 것이 린다의 생각이었 다. 그 먼 거리를 전부 다 걷겠다는 건 과욕이라는 것이었다. 린다는 완고 하게 고집을 부렸다. 결국은 마음을 바꾸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날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인디애너폴리스 헤비타트 축제와 관련해 기금 100만 달러를 추가로 모금하기 위해 구성했던 특별조직 '7인 위원회'와 이런 걷기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 의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세계의 참혹한 주택문제에 사 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주 새로우면서도 극적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 다. 100만 달러의 성금을 창출하기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온 뒤에 나 는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걷기운동을 할 의향을 비쳤다. 헤 비타트 소식지로 홍보를 하고, 사람들에게 1마일당 얼마씩을 헌금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걷도록 장려할 수도 있 을 것이다. 전체를 다 걷든 그 중 일부구간만 걷든 자유의사에 맡기면 된 다. 걷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제각기 헌금약속을 받게 된다. 100,000달러 정도는 목표액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100만 달러의 십분의 일이 아닌가! 처음 이 아이디어를 들은 위원회는 놀라서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떤 위원 들은 과연 그렇게 엄청난 수고를 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따져 물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스케줄을 너무 많이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고속도로 갓길을 걷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요." "걷기운동이 돈을 모으려는 싸구려 쇼처럼 보이면 어쩌죠?" 걷기운동이 좋은 의견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당장 열띤 호응 을 기대하긴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의논을 거듭함에 따라 이 제안은 점점 더 그럴싸하게 생각되었다. 위원회는 심사숙고하고 기도를 드린 뒤 마지막 결단을 내게 맡김으로써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빗속을 뚫고 코이노니아까지 걷고 난 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긴 기도와 생각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았다. 나는 가기로 결정했다. 린다도 함께 걷 겠다고 나서주는 것이 정말 기뻤다. 축하행사에 대한 계획이 1년째 진행되고 있었다. 헤비타트 운동은 1983 년 9월이면 창설 7주년을 맞게 되어 있었다. 7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숫 자로서 '성스러움, 완전함, 안식'을 뜻했다.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뻐하는 대집회를 열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헤비타트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고, 우리는 이제껏 성취한 업적을 자축하고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영감을 고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이레, 우간다, 페루 등 다 른 나라에서도 탁월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석해 집다운 집이 없는 사람들 이 비참한 상황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전진하도록 우리 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예정이었다. 미합중국 방방곡곡에서 초청된 연사들도 격려연설을 하고, 국내의 주택수급상황을 설명하며, 헤비타트가 어떤 일을 해왔는가 소개할 것이다. 우리는 깃발과 풍선들로 가득찬 퍼레 이드도 벌일 예정이었다! 1,00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석함으로써, 역사 상 최대의 헤비타트 집회가 될 전망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 집회가 언론의 귀중한 관심을 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걷기운동은 훨씬 더 많은 이목을 헤비타트 사업에 집중시킬 것이다. 결심이 굳어지자 나는 곧 메모로 헤비타트 사업에 집중시킬 것이다. 결심 이 굳어지자 나는 곧 메모로 헤비타트 이사들과 고문들에게 이 사실을 알 렸다. 8월 3일 아메리쿠스를 떠나 9월 13일에 인디애너폴리스에 도착할 계 획이었다. 우리는 지역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과 친구들에게 동참을 호소 했다. 최초로 우리와 함께 걷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일랜드 베일리보로출신의 휴 오브라이언이었다. 건장한 66세의 독신남인 휴는 1982년 9월 아메리쿠 스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유콘에서 카톨릭 신부를 도와 성당을 짓는 일 에 자원봉사로 목수 일을 하던 휴는 아메리쿠스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그 는 우연히 캐나다에 있는 어떤 사람한테서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 한 권 을 받았다. 그 책에 감동을 받은 휴는 버스를 잡아타고 조지아까지 내려와 책에서 읽은 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한 경찰관이 새벽 3시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휴의 도착을 알려주었 다. "풀러씨, 헤비타트 본부 밖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는군요." "새벽 3시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콘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당장 내려가지요." 유콘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은 흔치 않았다! 난 첫눈에 휴가 마음에 들었다. 키가 작고 대머리인 휴는, 활짝 웃음을 띠었는데, 남은 이가 몇 개 되지 않았다. 옷차림은 헐렁한 셔츠와 바지가 전부였고, 머리에는 푹 꺼진 펑퍼짐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곧 그 가 단벌신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휴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 년 동안 그는 온타리오와 유콘과 인 도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홀홀단신의 아일랜드 기독교 평화봉사단이었다. 끈기있고 성실한 노동자인 휴는 건축일을 잘 알 았다. 언젠가 그는 단돈 20달러를 지니고 뉴욕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몇 달 후에 돌아올 때까지 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했다! 휴는 도착한 날부터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 건설 인부들과 어울려 자원 봉사를 시작했고, 몇 달 동안 충실하게 일해주었다. 그는 걷기운동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결단을 내렸다. 그는 여기 아메리쿠스에서도 어디든 걸어 서 가거나 자전거를 이용했고, 나 역시 그가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이들도 전부, 또는 일부 구간에서 우리의 동참하겠다는 신청하기 시작했다. 늦은 4월, 린다와 나는 몸을 단련하기 위해 오후마다 야외에 나가 3,4마 일을 걸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길은 5,6마일 가량의 도시순환로였다. 그 길이 아니면 우리는 근처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칼리지의 고즈넉한 소나 무숲 속 반 마일 가량의 조깅 순환로까지 걸어가 그 길을 몇 번쯤 돌고 집 으로 다시 걸어오곤 했다. 린다는 정기적으로 수영과 에어로빅 강습도 받 기 시작했다. 훈련으로 체력이 강해지면서 우리는 속도와 거리를 늘려나갔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10마일에서 15마일 밖까지 차를 타고 나갔다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아메리쿠스로 걸어들어오곤 했는데 샛길들을 탐험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마침내 린다도 700마일 전구간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 다. 그리고 나도 해낼수 있다는 것을 믿어주었다. '교대하자'는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전구간을 함께 걷기로 했다. 8월 3일 출발일을 일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이틀 연속해 15마일을 걸었 고 3일째 되는 날은 10마일을 걷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걷고 난 뒤에도 몸이 가뿐해서, 우리는 이제 대사를 치를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헤비타트 소식지 6-7월호에 이 계획에 대한 기사를 실어 걷기운동 이 갖는 삼중의 목적을 알렸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 에게 아담하고도 쾌적한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싶습 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엄청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의 손 말고는 다른 손이 없으며, 우리의 발 말고는 다른 발이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걷기운동을 통해 적어도 100,000달러를 모금하고자 합니다. 마일당 얼마씩의 현금을 1983년 연말이 되기 전에 납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나긴 걷기운동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가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 스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걷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관심이 있으면 편지를 주십시오. 전구간을 걸으 셔도 좋고, 일부 구간에서만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7월 16일,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새로 수리한 베시 무어의 집을 헌정하 는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서 베시의 열두 살난 아들 헨리는 함께 걷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전구간을 함께 걷고 싶어했지만, 개학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머니 베시와 상의했고, 그녀는 헨리 가 애틀랜타까지 걸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헨리는 한 번도 애틀랜타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헨리네는 차가 없었기 대문에 아메리쿠스 밖으로 나가본 적도 거의 없었다. 헨리는 우리 부부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기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헌금을 하겠다는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걷기운동을 실제로 떠나게 되었을 무렵, 그는 이웃 사람 모두의 서명을 받아 왔다. 그의 모금액은 모두 합해 2,000달러가 넘었다! 우리가 앤더슨빌에서 아메리쿠스로 연습 삼아 걸어 돌아오던 어느 날, 나는 헨리에게 새 집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헨리는 즉시 "제 방이요"하고 대답했다. 개조 전에는 헨리, 여동생, 그리고 엄마가 모두 좁 은 방 한 칸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헨리에게 왜 걷기운동을 하고 싶어하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돕고 싶어서요." 출발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열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출발 일주일 전, 인디애나 주 뉴 패리스에서 온 젊은 퇴직자 세실 밀러는 캠핑차를 몰고 아 메리쿠스에 도착했다. 세실은 우리와 함께 가면서 식사를 제공하고, 침낭 을 운반하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기로 했다. 그의 아내 쥬 넷은 켄터키 북부에서 우리와 합류하기로 했다. 월러스와 낸시 브로드 부 부, 그리고 클레어 윌리엄즈는 아메리쿠스 사무소의 자원봉사자로서, 먼저 전구간의 길을 답사하고 노상에서 참고가 될 만한 건물과 도시를 세심히 메모했으며 잠을 잘 만한 교회를 섭외했다. 헌금과 헌금 약속이 쇄도하고 있었다. 걷기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목표액의 절반 가량이 모금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벅찬 약속이 7 월 4일 아침에 전해졌다. 그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린다와 함께 부엌 에 서 있었다. "밀라드, 나 짐 핸들리요." "아, 짐! 안녕하신가!" 짐과 지니 핸들리는 미시간 주 하버 비치에서 온 특별한 헤비타트 동역 자이다. 1982년 내가 잠재적인 헤비타트 사업단지를 물색하고 현재 진행중 인 사업을 둘러보려고 파푸아뉴기니를 거쳐 세계를 일주하려 할 때, 핸들 리 부부는 린다가 동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 축하행사와 관련해 100만 달러 추가모금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역 시 아낌없는 헌금을 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소 식을 가져온 것이다. "밀라드, 방금 6-7월호 소식지를 받아 보고서 자네가 인디애너폴리스까 지 걸어가기로 했다는 걸 알았네. 정말 환상적인 생각이야. 지니와 나는 자네의 목표를 위해 20,000달러를 헌금하기로 했다네!" 나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짐, 그건 정말 엄청난 돈인데!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메리쿠스를 출발하기 얼마 전, 헤비타트 사무소의 직원들은 1마일당 44센트의 헌금을 약속하는 서명들이 적힌 거대한 카드와 꼭대기에 '축 인 디 700마일 걷기운동'이라고 쓰여진 케ㅇ을 린다와 나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날 밤, 린다와 내가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전화벨이 울렸다. 로잘린 카터의 비서였다. 그는 로 잘린과 딸 에이미가 다음날 아침 송별식에 참가해 시외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1983년 8월 3일 수요일 새벽6시, 거대한 군중이 웨스트 처치 가에 있는 헤비타트 사무소 앞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간단히 송별식을 했는데 식순의 마지막은 "헤비타트 오예!"라고 외치며 화답했다.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그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었다. 6시 30분이 되자 모든 참석자들이 하나의 깃발 뒤에 정렬했다. 700마일 걷기운동 아메리쿠스에서 인디애너폴리스까지 인류를 위한 헤비타트 운동 처음 몇 구간 동안 우리는 2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아메리쿠스 중심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우 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라고.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이 오랜 찬송은 린다와 내게 너무도 뜻 깊은 노래였다. 이 노래는 18년 전 뉴욕 시를 떠난 앨러배머로 돌아오 던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가슴 속에 불어넣어 주셨던 바로 그 곡이었다. 그때 우리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기독교 사업에 몸바 치며 살자고 갓 다짐한 터였다. 내 감정이 북받쳐오른 데에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거의 14년 전인 1969년 10월 29일, 나는 수의로 감싼 클래런스 조던의 시체는 뒤에 실은 채 쉬보레 스테이션 웨건을 몰고 이 똑같은 길을 달렸다. 그가 코이노니아 의 '판잣집 서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떴을 때, 나는 검사관을 불 러 시체를 해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검사관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부검할 의사조차 오기를 꺼렸다. 아메리쿠스와 섬터 카운티의 사람들은 클 래런스를 증오했다. 그가 흑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소위 '집단 공산주의 자 사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사랑하던 농장의 땅에 그를 묻기 전에, 부검을 받고 사망진단서를 떼기 위해 그의 시체를 싣고 병원까지 달려야만 했다. 나는 또한 이 거리에서 마지막으로 가두시위를 이끌었던 때를 회상했다. 1971년 8월, 아메리쿠스의 흑인 시민들은 경찰의 폭력행사사건으로 분노하 고 있었다. 도시 곳곳의 흑인교회에서 연이어 대집회가 열렸다. 법원청사 를 둘러싸고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코이노니아 농장의 몇몇 사람들은 시민 들의 불만을 검토한 뒤 그들의 명분에 동참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로 이 길을 따라 행진하며 '우리 승리하리라'와 '그 누가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으랴'를 불렀다. 그 후로 세상은 놀랄 만큼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고 항의를 하며 걷던 수많은 흑인관중과 몇몇 소수의 백인 들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가 된 그룹으로서 걷고 있었다. 시장도, 경 찰서장도, 전 여부인도, 그리고 흑인 시의원도 우리와 함께 길을 나서서 너로 돕기 위해 해낸 일을 축하했다. 참으로 벅차고 감격스러운 경험이 아 닐 수 없었다. 우리는 리 거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 왼쪽으로 한때 버드시 사료가게가 있던 건물이 보였다. 그 가게는 50년대에 다이너마이트로 폭격 을 당했는데, 지역상인들이 주도하던 불매운동중에 코이노니아에 몇 가지 물품을 팔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게는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 나 이제는 이 도시의 모든 가게들이 기꺼이 코이노니아 농장과 거래를 트 고 있다. 우리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헤비타트 오예!"를 외쳤다. 왼쪽으로는 일렬로 늘어선 말쑥한 집들이 스쳐갔고 오른쪽으로도 몇 채가 지나갔는데, 모두가 코이노니아의 협동주택 사업을 통해 지은 집들이었다. 코이노니아의 헤비타트의 건설 인부들은 이 지역 중학교를 중심으로 23채 의 새 집들을 지음으로써, 몇 년 전만 해도 그 곳에 늘어서 있던 다 쓰러 져가는 판잣집들을 바꾸어 놓았다. 이 견고한 집들을 훑어보면서,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마당에 나와 앉 아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것이 바로 걷기운동을 감행하는 이유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애틀랜타로 가는 19번 고속도로를 향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주택들의 모습 이 바뀌기 시작했다. 좀 나은 집들 사이에 수많은 판잣집들이 자리잡고 있 었다. 우리의 일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해 주는 풍경이었다. 이 서글픈 건물들이 우리의 걷기운동에 절절한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저쪽이 19번 고속도로입니다! 모두 우회전하세요! 고속도로에 올라서 면, 모두 함께 노래를 부릅시다!" 오라.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여 이 기쁨을 세상에 알리라 달콤한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라 달콤한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라 그리하여 보좌를 에워싸라 그리하여 보좌를 에워싸라 우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 아름다운, 아름다운 시온으로 우리 시온으로 올라간다네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시로 경찰 호위대가 선두에서 길을 인도해준 덕에, 우리는 몇 마일 동안 고속 도로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메리쿠스 시 경계선 바로 북쪽의 마 켓 유아원에서 길을 다시 비켜줄 때까지, 많은 자동차들이 수백 야드 거리 를 후진해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섰다. 우리 큰딸 킴은 그 곳까지만 우리와 동행했다. 킴은 린다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이들 과도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열심히 흔들어대는 작별의 손짓과 몇 번인 가 "오예!"를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북쪽을 향했다. 우리는 애틀랜타까지 걷는 기간을 열흘로 잡았다. 그보다 더 빨리 갈 수 도 있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것을 감안했다. 첫 번째 구 간에서는 안전을 위주로 하기로 했다. 한여름이었으므로, 우리는 대충 새 벽 동트기 직전부터 정오까지 걸을 수 있었다. 대략 오전 10시쯤 세실 밀 러가 캠핑차를 몰고 우리를 쫓아와, 과일이며 아이스티며 쿠키 등의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세실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반갑기 짝이 없었는 데, 그가 가져오는 선물도 물론 좋았지만 그의 기분좋은 유머감각과 아낌 없는 격려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참가자는 각자 물병 한 개와 여행필수품 일체, 그리고 예비용 양말 한 켤레가 든 배낭을 메고 걸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휴식을 취했다. 오 후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조금씩 더 걷기도 했다. 8월 6일 토요일 아침에, 우리는 '각다귀 선'이라고 이름난 플린트 강을 건넜다. 이 강의 남쪽에서는, 초여름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눈이든 코든 입이든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새카맣고 작은 곤충들이 극성을 부렸다. 그 러나 플린트 강 북부에서는 이 성가신 작은 괴물녀석들을 만나기 힘들었 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그 흐르는 물줄기를 건너게 되어 얼마 나 기뻤는지 모른다! 토마스튼 바로 남쪽에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클렘슨의 제일침례교 회에서 나온 노동수련캠프 회원들이 자동차 두 대에 가득 타고 와서 우리 와 함께 걷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몇 주간 아메리쿠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헤비타트 사무소에서 나온 톰 홀과 아내 다이앤도 비슷한 시기에 세 자녀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걸어서 토마스튼 시를 종단할 예정이었다. 샘의 아내 비키 롯은 며칠째 우리와 함께 걸으며 걷기운동 홍보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키는 다음 마을로 한발 앞서 가서 언론사와의 인터뷰, 종교계와 민간 지도자들과의 접견을 주선했다. 클렘슨 노동수련캠프 회원 들이 우리와 합류한 토마스튼에서 그녀는 아주 특별한 일을 벌였다. 한 호 위경찰이 도시 남쪽 경계선에서 우리를 맞아 전체 시를 횡단하는 동안 선 도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늘어난 집단을 한데 모아 이끌었다. "자, 모두들 힘을 냅시다! 우리는 경찰차 뒤를 따라 힘차게 걸을 겁니 다. 관심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헤비타트 자료를 건네주십 시오. 자, 갑시다!" 시내 한가운데를 행진하는 동안, 우리는 "헤비타트 오예!"라고 외쳤다. 다정한 표정을 짓는 자동차 운전수가 지나가며 차창으로 헤비타트 소식지 와 전단을 쑤셔넣었고, 인도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는 듯한 사람만 보면 소식지와 전단을 쥐어주었다. 몇 분마다 경찰이 사이렌을 울려댔기 때문 에, 아무도 우리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시의 북부지역에 도달했을 쯤에 비키가 무료 점심을 제공받기로 주선해 놓은 맥도날드에 들렀다. 점심을 먹는 도중 에이미 카터가 가게에 들어오 는 바람에 모드 깜짝 놀랐다. 그때 마침 나는 '토마스튼 타임즈'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기자는 나와 에이미의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면서 함께 서주기를 부탁해왔다. 그러더니 한참 동안이나 미적거리며, 사진기를 옆으로 들었다 위로 들었다 하는 것이었다. 여기자는 마침내 낙담한 표정 으로 말했다. "도대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네요, 에이미에 비해 밀라드 씨 키가 너무 커요." 5피트 3인치(약 158cm)의 에이미가 재빨리 대꾸했다. "제가 어떻게 해 볼께요." 에이미가 발끝으로 서고, 내가 6파트 4인치(약196cm)의 몸집을 약간 숙 인 끝에 기자는 우리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나는 지역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녹화했는데, 그 날 저녁 뉴스 에 방영할 분량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참가자들은 빠짐없이 장로 교회 의 강당에 모여 방송을 시청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는 인터뷰의 앞부분을 방송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툭 끊더니 그 지역 협동저축대부조합의 광고를 삽입했다. 어떤 이윤이나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택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내 말이 갑자기 부자들에게 열띠게 호 소하는 저축대부조합의 상업광고로 바뀌자 그 대조가 너무나 두드러져 모 두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알았다. 우리는 토마스튼의 여러 교인들의 가족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시내의 각기 다른 교회로 흩어져 예배를 드리고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오후에는 다시 제불론이라는 작은 도시를 향해 북쪽 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불론의 남쪽 경계선 바로 못미쳐 토마스튼 제일침례교회에서 파견나온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이 우리를 따라잡았다.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에 이 르는 50명 남짓한 청소년들이 큰 버스 한 대에 타고 있었다. 걷기운동 참 가자 중에서 제일침례교회 출신이 몇 명 있어서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도 걷기운동을 잘 알고 있었고, 얼마간 우리를 따라 걷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 헤비타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특히 걷기운동 의 목적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헤비타트 오예!"를 외치는 법을 가르쳐 주 었다. 어린아이들은 금방 요령을 익혔고, 우리는 제불론 시내를 60병이 넘 는 대군으로 질풍노도처럼 통과하며, "헤비타트 오예! 인디애너폴리스 오 예!"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고 나서 버스는 가던 길로 떠났고, 우리는 밤을 지내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이블린 베리 박사와 누이 도로시 던의 널찍한 마당을 야영지로 잡았다. 그들은 아름다운 언덕 꼭대기에 살았는데, 바로 옆에 골프장이 있 었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나서 골프장을 돌아다니며 산책도 하고, 호스로 샤워도 했지만 각다귀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우리는 북쪽 그리핀 시로 향했다. 제불론에서 몇 마일쯤인가 벗어났을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인 한 분이 자기 집에서 허겁지겁 뛰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신가요?" 부인이 물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전 애니 더든이라고 해요. 여기 잠깐 들어와서 앉으시지요." 부인은 야외용 의자 몇 개를 가리켜 손짓하며 말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게 있답니다." 부인은 집안에 다시 들어가더니 아름다운 딸기 케익과 차가운 물 한 주 전자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반 시간 동안 그 집에 앉아 부인과 이야기 를 나누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달기 케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시 떠 온 물주전자까지 바닥이 났다. 우리는 음식과 휴식뿐 아니라, 매력적인 부 인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상쾌하게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몇 마일쯤 더 걸어갔을 때, 이번에는 잔디를 깎고 있던 나이 지긋한 신 사분을 만났다. 그는 헤비타트와 걷기운동을 익히 알고 있다며, 그 곳에서 당장 헌금서약을 했다. 정오가 가까웠을 때, 우리는 길을 걷던 농부를 만났다. 그는 싱싱한 오 이 한 자루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리핀 바로 남쪽에 있는 모퉁이돌 교회에 묵게 되었다. 교회 현관문을 들어섰을 때 우리는 아 주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숙소로 쓸 주일학교 건물이 냉방중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우리의 목표지점은 20마일 떨어진 조너스보로의 보난자연합 그리 스도 교회였다. 우리는 새벽 6시에 출발해 정오가 지날 때까지 걸었다. 11 시쯤 되자 더위가 엄청나게 기승을 부렸다. 페이스는 오른발에 커다란 물 집들이 생겨서, 한쪽 신발을 아예 벗어버렸다. 그는 한발 한발 디딜 때마 다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 날 아침 출발할 때 선두에 섰던 휴 오브라이언은 오후에 뒤로 처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의 모습이 아예 봉지 않자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휴가 따라올 때가지 기다리라고 댄에게 부탁해놓고, 우리들은 계속 길을 걸었다. 마침내 우리는 죠너스보로 교회에 도착했다. 20분이 지났는데도 댄과 휴는 오지 않았다. 30분. 45분. 세실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두 사람이 무사한가 확인하러 되돌아갔다. 4 분의 1마일쯤 가자,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휴는 길 목 어디선가 낡은 천을 발견하고는 작열하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가리려고 머리 위에 덮어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허연 천을 뒤집어쓴 KKK(미국의 인종차별주의적 비밀조직)단원처럼 보였다! 우리가 모두 그랬듯이 그들도 기진맥진했지만 결국 교회까지 걸어오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다음 이틀 동안 우리는 애틀랜타까지 남은 20마일을 걸으며, 짬짬이 다 른 일들도 만끽했다. 하루는 보난자 교회의 배려로 오후에 애틀랜타 브레 이브즈의 야구경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메이저리그를 보지 못한 헨리 무어에게 그보다 큰 선물은 없었다. 8월 12일 금요일에 우리는 조지아 주 주청사 앞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주무장관 맥스 크릴랜드가 걷기운동에 관한 주지사의 성명을 발표할 예정 이어서 최소한 100여 명의 군중들이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원형의 주청사 건물로 몰려들 전망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기자들도 참석했다. 그러나 정작 맥스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자들이 동요하 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 보였다. 마침내 전갈이 왔다. 주무장 관이 엄청난 교통정체에 갇혀 언제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대리인이 성명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경건하게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명에서 내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밀드레드 풀러"라고 읽는 것이었다. 처음엔 여기저기서 쿡쿡 소리죽여 웃는 정도였 지만, 급기야 그가 "밀드레드"를 부를 때마다 폭소가 터져나오기 시작했 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들 배꼽을 쥐고 웃어대는지 끝까지 몰랐을 것 같다. 앤드루 영 시장 또한 이 도시를 대표해 선포할 일이 있었다. 8월 12일은 애틀랜타 시와 조지아 주 전역에서 '헤비타트의 날'로 선포되었다. 다음날 아침 새로운 동역자 샐리 윈터와 앤 네텀을 포함하여 모든 걷기 운동 참가자 전원이 트리니티 연합 감리교회에 집합해 다시 북쪽으로 발걸 음을 재촉했다. 새로 조직된 애틀랜타 헤비타트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 곳 에서 우리를 맞아 몇 마일 동안 함께 걸어주었다. 모두들 기분이 들떠 있 었다. 아메리쿠스에서 애틀랜타까지의 걷기운동은 훌륭한 경험이었다. 500 여 마일이 넘는 거리를 더 가야 했지만, 우리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테네시 주 경계선까지는 닷새가 걸렸다. 그때부터 우리는 자이레에서 갓 돌아온 자원봉사자 댄 로먼과 합류했다. 댄은 인디애너폴리스 목적까지 쭉 우리와 함께 걷기로 했다. 그는 조지아와 인디애너 주 사이 어딘가에서 샐 리 윈터와 사랑에 빠져 1년 후 그녀와 결혼했다! 조지아 주 댈튼에서 솔로몬 밴들과 열두 살난 아들 마크가 스테이션 웨 건을 몰로 나타났다. 거기에는 해바라기씨, 꿀, 계란, 여름소시지 등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헤비타트와 오랜 친분을 나누어 온 솔로몬은 이미 아메 리쿠스에서 몇 달 동안 자원봉사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앞으로 인디 애너폴리스까지 남은 길을 우리와 함께 가면서 그 동안 비키 롯이 해왔던 홍보 일을 도맡아줄 예정이었다. 테네시 주 경계선 못 미친 곳에서, 아들 크리스가 걷기운동 모습을 녹화하려고 온 헤비타트의 언론담당 이사인 월 러스 브로드의 차를 타고 나타났다. 크리스는 여름 내내 사우디 아라비아 에서 일을 했다. 겨우 하루 우리와 함께 묵고 떠났지만, 그 애의 얼굴을 보니 없던 힘이 갑자기 샘솟는 것 같았다. 테네시 주 경계선에 다가가며 우리는 캠핑차에서 길다란 현수막을 펼쳐 들고 '우리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크 프레이는 경계 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애팔래치아의 자원봉사자인 빌과 루스 언더힐, 기타 헤비타트 사람들, 대여섯 명의 언론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애팔래치 아 헤비타트 후원자들도 역시 따로 현수막을 준비해 왔다. 테네시 주로 건 너가는 순간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리는 곧장 9마일 떨어진 채터누 거리를 향했는데, 태양은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기온은 무려 화씨 10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채터 누 거리 중심가에서 시민공원의 폭포수를 본 우리들은 물에 뛰어들어가 행 복하게 온몸을 흠뻑 적셨다. 다음날도 우리는 성실하게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세쿠아치강을 건 너 크로스빌로 향했다. 오랫동안 헤비타트의 동역자였던 노스캐롤라이나의 프랭크 배슬러가 우 리를 찾아와 하루 동안 함께 걷기로 했던 것은 8월 22일 월요일 아침의 일 이었다. 그는 하필이면 걷기운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 무더운 날을 골랐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크로스빌 못미쳐 남쪽에 있는 셰이디 베일 하나님의 교회 진입로에 들어섰을 때, 우리 모두는 땀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고, 온도계는 화씨 11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크로스 빌은 걷기운동의 중간지점이었다. 프랭크 배슬러가 이 사실을 알고는 "야, 그건 축하할 만한 일인데!" 하고 외치더니, 100달러를 내놓고는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우리는 정말 포식을 했다. 컴벌랜드 주립 공원의 호반 식당에서 근사한 저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이다. 우리가 쓴 돈은 66불이었다. 그러고도 우리의 100만 달러 목표액을 채울 34달러가 남은 셈이다! 크로스빌 지역에서 보낸 첫날 밤에는, 컴벌랜드 주립공원 입구 편에 있 는 컴벌랜드 홈스테드 침례교회의 초청을 받았다. 우리가 교회의 친교 강 당에 짐을 풀고 있을 때, 그 교회 목사인 휴스턴 인먼 부부가 들어왔다. 나는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휴스턴은 기타를 가져왔다.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댄은 자기가 일하던 자이레 지방의 언어인 링갈라어로 노래를 불렀다. 앤과 나는 이중창을 했다. 린다와도 이중창을 했다. 휴 오브라이언은 아일랜드 민요를 힘차게 불렀다. 앤, 샐리, 그리고 댄은 특별히 그 날을 위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리들은 찬송가를 꺼내 몇 시간 동안이나 애창곡들을 불렀다. 영어를 막 배우던 참인 페루의 천주교인 제논 콜크 로하스는 이 곡들을 하나도 몰랐지만, 누구보다 열심 히 참여했다. 어느새 자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모두들 놀랐다. 이토록 즐 거운 친교의 시간이 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기쁨의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둥글게 손을 잡고 섰으며 휴스턴은 기도를 인도했다. 휴스턴은 그 특별한 밤을 주신 데 대해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아내 셜린과 함께 우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삶이 어려울 때 마침 우리가 와주었다는 것이었다. 휴스턴은 일평생 테네시 교도소의 교회사(교도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로 근무해 왔는데 그 전 해에 일 자리를 잃었고, 이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고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셜린 은 교사였는데 일자리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낙 담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이 두 사람을 격려하셨음을 깨닫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다음날 우리는 크로스빌 중심가로 계속 걸어갔다. 린다와 샐리는 물집 때문에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물집을 째고, 붕대를 감 은 뒤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 되자, 두 사람이 쓴 일회 용 밴드는 무려 15통에 달했고, 발가락 사이에 끼워 쓴 탈지면만도 몇 봉 지에, 거즈도 10여 통을 넘게 썼다. 나는 테네시의 교회들 앞에 있는 흥미로운 표어들을 공책에 적기 시작했 다. 그 중에는 "질투는 악마가 즐겨 타는 말이다"라는 것도 있고, "슬픔은 뒤를 돌아보고, 걱정은 주위를 돌아보며, 믿음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도 있었다. 교회들의 이름도 재미있었다. 리니 침례교회, 뉴 채리티 세퍼레이 드 침례교회, 예언하시는 하나님의 교회, 신앙 침례교회, 독립, 근본, 전 천년 교회 등등. 눈에 띈 것들은 교회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부쉬 왜커 미용실(머리를 망치는 미용실), 데드랫 태번(죽은 쥐 술집), 그리고 팻 랫 살롱(뚱뚱한 쥐 미용실)등도 보았다! 8월 26일 금요일, 우리는 차를 타고 우회해서 애팔래치아 헤비타트 사업 구역인 모건과 스캇 카운티를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잡았다. 로빈스의 바 튼 교회가 점심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 7시 30분 우리는 켄터키 주경계선에서 반 마일 남쪽에 위치 한 퍼킨스 크릭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자마자 일종의 나이트클럽이 있었 고, 거기서부터 주 경계선까지는 길 양편으로 술집과 댄스홀과 호프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지금 진입하고 있는 켄터키 지방은 음주를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알코올 생각이 나는 사람은 테네시가지 차를 몰고 나 와서 배를 채워야 했다. 정확히 오후8시 정각에 우리는 켄터키 주에 입성 했고, 모두들 곤죽이 될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목청껏 '우리는 시온으 로 행군한다네'를 불렀다. 다음날, 다니엘 분 국립삼림원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좁은 길 은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굽이굽이 휘어져 올라, 정오에는 정상에 있는 작은 매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목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가게에 서 빵과 과자 등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 우리는 4마일 정도를 더 걷고 그 날의 일과를 끝냈다. 다음날 아침, 솔로몬이 우리를 차에 태우고 인디애너폴리스로 가는 주요 경로인 127번 도로로 데려다 주었다. 우리가 진입한 테네시-켄터키 국경에 서 19마일 진행한 지점이었다. 일행은 이제 6명으로서, 린다, 제논, 댄, 샐리, 휴, 그리고 내가 남았다. 앤은 이틀 전에 아메리쿠스로 떠나야 했 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와 우중충한 하늘을 훑어보았다. 비가 오더라도 솔로 몬이 우리와 함께 있어줄까 걱정이었다.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천둥이 북소리처럼 울려댔다. 솔로몬이 활짝 웃으며 "주님께서 대답을 하시는군 요!" 하고 말했다. 그 다음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강행하기로 했고, 솔로몬이 먼저 길을 떠났다. 곧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순한 비였고 몇 분 되지 않아 그쳤다. 걷기운동 여정을 통틀어서 내린 비는 그 날 그렇게 잠깐 뿌 린 보슬비가 전부였다. 우리가 가는 길 앞으로도 비가 많이 내렸고, 우리 양편으로도, 우리 뒤로도 비가 내렸으며, 우리가 건물에 들어가 쉬는 동안 에도, 도 우리가 잠을 자던 한밤중에도 비가 내렸지만, 우리가 걷는 동안 에는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켄터키를 통과하는 내내 우리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 지 냈다. 고산지대의 날씨는 서늘했으며, 간간이 낙엽이 덜어지는 모습도 보 였다. 어떤 곳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계속 걸어가면서 나는 그 느낌을 적어보았다. 울프 크릭 댐을 건넜다. 풍광은 환상적이다. 길가의 암벽에서 삼나무들 이 쭉쭉 뻗어나와 잇다. 컴벌랜드 호수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안내명 판에는 호안선이 무려 1,200마일에 달한다고 적혀 있다. 매일 새벽 우리는 어둠 속에, 또는 달빛 아래 걸었다 결코 지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광경들은 막 동이 트는 새벽녘의 모습들이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동쪽 지평선에 깔 린 구름 뒤에서 빛나는 태양은 구름들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구름 의 윗부분은 아직 캄캄하다. 바람이 한 점도 없어서, 머리 위 하늘을 온통 뒤덮은 구름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정동향을 향하고 있기에, 태양은 우리의 정면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저 앞 새카만 산들에서 불타는 오렌지빛의 공이다. 늘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 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범사에 기 뻐했다. 어느 날, 컬럼비아 주 남쪽 교외에 버려진 교회를 지나치게 된 적 이 있다. 담쟁이 덩굴이 건물 왼편을 온통 덮고 자라나 현관문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창문유리는 모두 개지고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교회간 판은 낡고 우그러졌고, 칠도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교회 바로 앞을 지나 는 고속도로 위에는 커다란 주머니쥐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어 납작해져 있 었다. 썩어가는 살덩어리 밑으로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이 곳을 지나칠 때 우리 일행 여섯은 모두 함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훑어보고 서로를 쳐다본 뒤, 잠시 몸을 떨고나서는 거의 동시에 '우리는 시온으로 행군한다네'를 외쳤다. 켄터키의 날씨는 대체로 시원했지만, 남부를 지나치던 어느 날은 모두 초죽음이 되었다. 세실은 우리에게 오전 간식을 주고서 차를 몰고 떠나면 서 오후 1시쯤에 우리가 따라잡을 만한 자리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길이 너무 좁아서 세실이 차를 세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과 달리 훨씬 멀리까지 가야만 했다. 우리는 거의 3시가 다 되도 록 세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쯤 되자 20마일을 내리 걸은 피로에 한낮 의 열기가 합쳐져 가히 살인적인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벌써 두 시간째 우리 머리 위로 한 떼의 대머리독수리들이 빙빙 돌며 따라오고 있다는 사 실도 사기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침내 세실을 찾아냈을 때 그는 글렌스 포크라는 작은 마을에 차를 세 워놓고 있었다. 우리보다 약간 뒤처졌던 댄과 샐리는 아주 극적으로 풀썩 무릎을 꿇고는 캠핑차까지 무릎을 질질 끌며 간신히 기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위대한 고난을 겪어냈다는 듯한 표정이 장난스럽게 떠올라 있었 다. 세실은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참치 샐러드, 토마토, 과일 샐러드, 구운 감자, 호밀빵, 아이스티와 초콜렛칩 쿠키로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었다. 왕실의 만찬이라 해도 그만큼 반갑지는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며칠 뒤 정오에 우리는 켄터키 주에 있는 나자렛 대학 정문에 도착했다. 학교 진입로에 아름다운 나무그늘이 있는 것을 보고 걸어가 앉 으려는데 관리실의 직원 한 사람이 우리 바로 옆에 차를 세우더니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글쎄,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솔로몬이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 그늘에서 식사를 좀 하려 합니다."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이 곳에서 식사하시면 안 돼요." 그 여자는 완강하게 말했다. 내가 나서서 우리는 헤비타트 운동이라는 기독교 사업차 인디애너폴리스 까지 700마일 걷기운동을 강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껏해 야 30분 정도 머무르면서 점심을 먹고 가려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안 됩니다." 그녀는 고집했다. "여기서 드시면 안 돼요. 사유지에 침범해 소동을 피우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여기서는 안 됩니다." 그 여자직원은 길을 벗어난 곳에 식사할 만한 장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사진을 찍을 신문기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길을 따라 대학 구내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바로 다음 집에서, 한 젊은 이가 현관에 앉아 깡통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큰 소리 로 잠시 앉아 식사해도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물론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여기 바깥에서 먹겠어요." 그는 벌떡 일어나 뒷마당으로 가더니 커다란 피크닉 테이블을 질질 끌고 왔다. 점심을 먹는 동안, 젊은이의 동생이 찾아왔다. 근처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녀에게 헤비타트와 걷기운동에 대해 설명해 주었 더니 무척 흥미를 가졌다. 우리는 헤비타트 티셔츠를 선물했고, 그녀는 다 음 10마일을 우리와 함께 걸었다. 루이즈빌을 향해 걷던 9월 3일 토요일에는, 그 도시의 연합 그리스도 교 회 목사이자 헤비타트의 좋은 동역자인 존 로이머 목사가 우리 일행에 동 참했다. 그는 표어를 만들어 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헤비타트는 무기가 아니라 집을 만듭니다. 우리들은 교대로 이 표어를 들고 도시로 입성했다. 주일 아침, 우리는 서로 흩어져 도시 전역에 있는 교회에서 연설을 했 다. 월요일은 노동절이어서 우리 모두 휴식을 취했다. 나는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에 보내서 글로 옮길 테이프들을 녹음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나는 길을 걷는 중에도 사무실에서 보내 오는 소식들에 답할 편지와 메모 를 녹음하곤 했다. 이런 방식은 꽤나 효과가 좋아서, 본부에 두고 온 수많 은 일거리들에 따라잡지 못할 만큼 뒤처지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 주었다. 화요일 아침 우리는 다시 길에 올랐고, 오하이오 강을 넘어 인디애너 주 에 입성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리 저편에서는 교회와 정부 간 부들과 충실한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나와 긴긴 걷기운동의 마지막을 장식 하는 주에 입성하는 우리를 환영해 주기로 비리 섭외가 되어 있었다. 또한 인디애너 주지사인 로버트 오어 씨도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다리를 출발해 인디애너 주쪽에 있는 만남의 장소가 가까와지자, 나는 수많은 친숙한 얼굴들을 다시 볼 생각에 한껏 들떴다. 우리는 한참 동안 발길을 멈추고 포옹을 나누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주지사의 성명 을 들었다. 그러나 인디애너폴리스까지는 아직도 110마일이나 남아 있었 다. 우리는 오전 10시쯤 다시 여정에 올랐다. 이 마지막 구간 중 이틀 밤은 가가 세이무어와 콜럼부스에 있는 홀리데 이 인 호텔이 무료로 방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뜨거운 샤워, 수영장, 그리고 자쿠지 목욕탕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에 기쁨의 환성을 올렸 다. 9월 12일 월요일 아침, 우리는 인디애너폴리스의 세인트 존 연합 그리스 도 교회의 주차장에 집합했다. 헤비타트 축하행사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로버트 파크 연합 감리교회까지는 이제 겨우 8.1마일밖에 남지 않았다. 인 디애너 주를 가로질러 걷는 동안 헤비타트의 도보여행자의 숫자는 점차 불 어나 이제 마지막 구간을 걷는 참가자는 24명이 되었다.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걷기운동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우 리는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서서, 걷기운동과 안전한 도착을 감사 드리며 기도를 올렸다. 9시경, 우리는 열띤 합창을 하며 로버트 파크 교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두 개의 새로운 푯말을 들고 있었다. 헤비타트 운동 하나님의 사랑이 깃드는 보금자리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 주님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는 한 아무리 집을 지은들 헛수고일 뿐입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 덕에 기온이 아주 쾌적했다. 며칠 전 합류한 오레 곤 출신의 진 크럼리는 땅바닥에서 1달러 지폐를 주웠는데, 벌써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모두들 "진 오예! 헤비타트 오예!"를 외쳐댔다. 우리는 모 두 길에서 돈을 주웠는데, 전부 우리의 10만달러 목표액을 채우는 데 쓰기 로 했다. 보통은 1센트짜리, 5센트짜리, 10센트짜리 동전들이었지만 합치 니까 그럭저럭 5달러가 넘었다. 아메리쿠스에서는 걷기운동에 보내온 헌금 과 헌금서약이 벌써 70,000달러를 넘어섰다는 소실을 보내왔다. 오전 10시 30분, 우간다 굴루의 헤비타트 사업장 대표인 오구왈주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축하행사에서 주요연설자로 인디애너폴리스를 방문 했었지만, 최후의 몇 마일 동안 우리와 함께 걸어주었다. 11시가 되자 눈앞에 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현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 여 있었다. 축하행사 준비위원회장인 그로버 하트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아메리쿠스 주에서 린다를 위해 보내온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몇몇 기자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우리가 여기 왔 다는 것이었다! 부분적으로 걷기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무려 400명이 넘었다. 한 사 람도 다치지 않았다. 물집 위에 또 물집이 생겼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냈 다. 건강하게, 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 나와 린다는 가장 기쁜 사람들이었다. 그로버가 우리의 열한 살짜리 딸 조지아의 편지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조지아는 우리를 위해 특별한 시를 써서 보내주었다. 바로 오늘 저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그 먼 길을 걸어내셨다고! 차도, 버스도, 지프도 타지 않고 두 분의 다리만으로! 어떻게 해내셨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라면 할 수 없었을 텐데. 아, 2마일만 걸어도 전 피곤해지거든요. 그 먼 길을 걸어내신 두 분을 저는 존경합니다! 먼 거리를 걷거나 뛰지는 못할 것 같지만 아주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해요! 엄마 그리고 아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오늘 저는 두 분을 정말로 사랑한답니다! 나중에 조지아는 축하행사에 모인 청중 앞에서 이 시를 낭송했다. 40일 만에 인디애너폴리스에 갓 도착한 린다와 내게 이 시는 얼마나 큰 건물이 었는지! 잊을 수 없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길을 걷는 동안 몇 천 명 의 사람들에게 직접 헤비타트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으며, 광범한 홍 보를 통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헤비타트 사업으로 끌어들였다. 최소한 이 걷기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 하나를 시작할 수 있은 정도 였다. 그리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표했던 100,000달러를 채울 수 있었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우리 모두 그만큼 수고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매혹 시켰고, 그 절박한 필요에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어떤 잣대로 보아 도 걷기운동은 성공이었다. 잇달아 열린 축하행사는 장관이었다. 3일 동안 30여개 주, 컬럼비아 지 역, 그리고 해외의 12개국에서 몰려든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로버트 파크 교회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자이레의 그리스도 교회 회장인 보클레알레 주교가 목요일 저녁 개회식 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집을 짓는 이 급 박한 사명을 끊임없이 추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난 에 허덕이는 조국 자이레에서의 헤비타트 사업에 박차를 가해줄 것을 특별 히 부탁했다. 금요일에는, 국제적인 교회지도자들이 번갈아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점 심식사 후 모든 참석자들은 도시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행군을 했다. 사업장 대표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깃발을 들었고, 나머지 참 석자들은 헬륨을 채운 풍선을 들었다. 광대들이 사방에서 춤을 추었다. 우 리는 기쁨에 겨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금요일 밤에 열릴 대규모 '헤비테이션'(Habitation,헤비타트 축하행사) 을 앞두고 우리의 언론담당 부서는 서둘러 인디애너폴리스까지의 걷기운동 을 기록한 슬라이드 쇼를 마무리했고, 햇빛에 그을리고 피곤에 지친 위엄 있는 사진으로 청중들을 아주 즐겁게 해주었다. 전세계에 걸친 주택건축현 황을 보여준 슬라이드쇼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토요일에는 해외 사업현장으로 떠나게 되어 있는 8명의 새로운 자원봉사 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한 '이별' 예배가 열렸다. 그리고 데이빗 로우 는 '비전을 가지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는데 청중들은 마술에 홀린 듯 그 의 메시지에 사로잡혔다. "사회변혁에 관해 탁상공론만 하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서 말하고 계획하며 이론을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또 그 정반대 편에는 새로운 질서가 일어나길 바라며 집단적인 공포를 조성하 는 테러리스트 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가들과 테러집단들 사이 에는 헤비타트 운동처럼 소박하게나마 행동하고, 부족한 힘이나마 봉사하 며, 초라하게나마 실천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짓고, 또 짓고, 또 짓습니다. 우리는 집을 짓고, 지역공 동체를 지으며, 우정을 짓고, 편지로 교류하는 집단을 지으며, 또한 공감 을 짓습니다. 우리는 초석 하나 하나마다 퍼부어지는, 벽돌 하나 하나에서 타오르는, 널짱 하나마다 못박히는, 열쇠 하나 하나마다 돌려주시는 하나 님의 사랑으로 집을 짓습니다. 우리는 태산처럼 쌓인 관료주의의 공문서 속에서 좌절과 문화충격과 언어장벽과 성격차이와 경제난과 향수와 질투 속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음새 하나하나에 예수님의 사랑 을 방울방울 짜넣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한다면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천국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살짝 엿보는 것 이라고 믿기 대문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집은 하나님의 사랑 과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함께 어우러져 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 의 상징입니다. 천국은 고난과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비전입니다. 헤비타트는 지금 당장 우리의 작업에 의미 를 부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비전입니다." 데이빗의 열렬한 연설이 우리 모두에게 비전을 고취시켰다. 우리는 새로 운 다짐으로 충전되어 인디애너폴리스를 떠났다. 그리고 열기에 들떴던 이 주말이 지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1986년 헤비타트의 10주년 행사를 축 하하기 위해 아메리쿠스에서 캔사스 시티까지 1,000마일을 걸어갈 생각 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린다에게 당장 털어놓지는 않았다. 6.대통령과 손잡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밀라드 풀러 씨를 연사로 모시게 왼 것을 무한 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풀러씨는 헤비타트 운동의 창설자이신 전직 대통 령 지미 카터 씨를 측근에서 돕고 계십니다!" 사회자는 플로리다 탤러하스의 시의원이었다. 1984년 8월 탤러하스 헤비 타트가 갓 준공한 복식 아파트를 헌정하는 식장에서 나를 소개하던 참이었 다. 헤비타트에 지미 카터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틀림없이 어디선가 들었 던 모양이다. 그의 소개는 실제와는 영 달랐지만 적어도 이제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헤비타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헤비타트의 창립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립자는 하 나님이시다. 이 아이디어는 천국에서 내려왔다. 이것을 클래런스 조던을 통해 처음 이 땅에 표현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해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1969년 10월, 클래런스가 그의 영원한 헤비타트인 천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말고 따르라는 분명한 부르심 을 받았다. 그 부르심으로 1976년 헤비타트가 창설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헤비타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 두 소중하다. 쓰여지는 글자 하나 하나, 슬라이드쇼 하나 하나, 노동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나 페인트 한 깡통이나 헌금이나 어떤 형태의 봉사라도 우 리에게는 정말로 소중하기 그지없다. 전세계에 걸친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새로 짓고, 개축하고, 수리하는 집들 한 채 한 채가 모두 판잣집을 추방하 고 그 자리에 튼튼한 가정을 건설하도록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영감 을 고취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전직 미합중국 대통령이 우리와 힘을 합쳐 일했을 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헤비타트 운동을 알게 되었 다. 헤비타트의 신용도가 한층 높아졌고, 갑자기 새로운 길이 열려서 기금 을 모으거나 자원봉사자를 확보하거나 택지며 연장이며 자재들을 기탁받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린다와 내가 자이레에서 빈민을 위한 집을 짓느라 3년의 세월을 악전고 투하던 1976년 당시에, 지미 카터는 미합중국 대통령 후보로서 기나긴 유 세 끝에 귀향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백악관에서 보 낼 4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 린다와 나는 조지아로 돌아와 헤비타트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지미 카터와 안면이 없었다. 그는 재직중에도 가끔씩 우리 가족이 예배를 드리는 아메리쿠스의 교회에 참석하곤 했다. 우리는 그때 악수를 하며 몇 마디인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지만, 그것이 전부였 다. 카터 대통령은 고향 플레인즈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랠프와 제인 낸을 통 해 처음 헤비타트 운동을 알게 외었다. 낸 부부는 자이레의 헤비타트를 위 해 2년간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980년 9워, 아프리카로 출발 하기 직전 카터 대통령 부부는 낸 부부와 두 아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이 틀 정도 묵게 했다. 카터 대통령은 몇 년 전부터 코이노니아 농장의 활동을 들어 알고 있었 지만,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적은 없었다. 코이노니아 지역사회와 여 러 번 의견을 교환한 일은 있었지만 말이다. 야심 있는 정치인인 그로서 는, 코이노니아와 공개적으로 손을 잡았다가는 단칼에 정치생명이 끝날 수 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코이노니아는 '공산주의자' 조직이라는 혐 의를 받고 있었고, 대부분의 백인들은 1950년대와 60년대 남부 조지아의 통합집단이라면 무조건 끔찍하게 싫어했다. 카터 대통령이 1981년 1월 백악관을 떠난 뒤, 지미와 로잘린 카터 부부 는 플레인즈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는 플레인즈 침례교회의 종신신도였 지만, 이 교회는 카터가 워싱턴에 있는 동안 흑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 양분되고 말았다. 교회가 인종을 불 문하고 신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1마일 쯤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교회를 지었다. 그들 부부는 마리나타 침례교회 로 명명된 새 교회에 합류했고, 카터는 성인 주일학교의 교사직을 맡았다. 이 무렵, 헤비타트 운동은 상당한 거듭해 아메리쿠스로 찾아오는 자원봉 사자들과 봉사수련회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이들 중 수많 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의 주일학교에 참석했고, 이들로부터 마터는 확장일 로에 있는 헤비타트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에 아메리쿠스에서 개최될 헤비타트 가을 이사회의 계획을 짜던 중, 데이빗 로우가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야말로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카터가 기꺼이 와줄지는 의문 이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바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우리는 이사회 회장인 데이빗이 초청장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훗일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데이빗은 최종적으로 플레인즈에 보낸 편지문안을 작성하느 라 헤아릴 수 없는 초안을 폐기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아메리쿠스의 집회가 열리기 바로 직전, 헤비타트 사무국은 전 화 한 통을 받았다. 초청이 수락된 것이다.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1982 년 10월 16일 토요일 아침에 제일침례교회를 방문해 인사를 하고 헤비타트 이사, 고문, 사업장 대표들이 모인 연례행사장에서 짤막한 연설을 하게 되 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사람들이 발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카터가 방에 들어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랫동안 열렬히 박수갈 채를 보냈다. 대통령은 인권, 천연자원관리, 인류평화와 같은 절대절명의 문제를 다룰 때 이론과 실천을 양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하는 말로 서두를 꺼 냈다. 그는 헤비타트 운동이 빈민 주택보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로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개인적으로 인도 차이나, 아이티, 기타국가들의 망명자와 빈민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힘주 어 강조하면서, 코이노니아와 클래런스 조던을 아끼는 마음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저는 코이노니아의 이웃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먼 곳에서 지켜보기만 한 방관자일 뿐이지만 클래런스 조던이 이 나라에 끼친 영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구 현했던 이 과묵한 사람의 친구였음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에게도 인간의 약 점은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클래런스 조 던과 코이노니아, 그리스도 헤비타트 덕분에 저는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여생 동안 더 크게 성장하고 싶습니다." 카터의 연설은 대략 10분이 걸렷다. 그는 집에 가서 주일학교 강의를 미 리 공부해야 되기 때문에 긴 연설은 못한다고 농담을 했다. 폭소가 조금 잦아들자 그는 우리 모두를 다음날 있을 마라나타 침례교회의 예배에 초대 했다. 연단에서 내려 서는 순간, 또다시 참석자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당이 떠나갈 정도로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곳을 방문해 격려의 말씀을 해준 데 대해 한결같이 감사하고 있었다. 헤비타트 동역자들의 모 습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관심과 헌신적 태도에 카터 역시 깊은 감명을 받 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82년, 헤비타트는 전직대통령과 영부인으로부터 후한 헌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영부인 로잘린과 에이미가 인디 애너폴리스까지의 긴긴 여정의 첫 아침에 동참함으로써 카터 가족들이 개 인적으로 헤비타트에 관여하는 폭이 더욱 넓어졌다. 아메리쿠스에서 시경 계까지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동안 나와 로잘린은 깊이 있는 대 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주제는 단지 걷기운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헤비 타트 운동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로잘린은 진심에서 우러난 관심을 표시 했다. 1983년 12월, 아메리쿠스의 사무국 건물을 확장해 헌정식을 가질 채비를 마쳤을 때 우리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연사로 초빙했다. 그들은 이를 수락했고, 참석한 250여 명의 청중들에게 헤비타트를 극찬하는 연설을 선 물했다. 그 날 저녁, 나는 린다에게 어쩌면 카터 부부가 정말로 헤비타트에 관심 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한두 주 후에 나는 플레인즈에 있는 카터 대통령의 비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 녀는 1984년 1월 23일 오전 10시에 카터 대통령이 면담을 수락했다고 전화 로 답해주었다. 카터의 저택은 단정한 풍광을 배경으로 한 매혹적인 벽돌건물이었으나 겉치레만 번드레하게 화려한 집은 아니었다. 나는 현관문으로 걸어가 초인 종을 누르고 한 발 물러섰다. 카터 대통령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 유명한 미소를 얼굴 가득 지어 보이더니 나를 현관 오른편의 대기실로 안내했다. 몇 마디 안부인사를 건 네는 사이 로잘린이 들어왔다. 지체없이 나는 방문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저는 여기에 이웃으로 왔습니다. 두 분께서 헤비타트 운동에 관심을 보 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간략하게 카터 부부가 헤비타트와 맺어온 인연을 요약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까지 해주신 일들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그러나 이제까 지보다 더 큰 성의를 보여주실 의사가 있으신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 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께서 헤비타트 운동에 단순히 관심이 있으실 뿐인가요, 아니면 정 말로 관심이 많으신 건가요?" 카터 대통령은 싱긋 웃더니 로잘린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조용히 대답 했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이 많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심을 저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는 내게 사무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을 적절히 이용할 구체적인 방안들 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편지를 한 장 보내 주십시오. 그 편지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활동하면 좋을지 아이디어의 윤곽을 대충 잡아서 써주세요." 카터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모두 목록에 적어 주십 시오. 편지를 받고 나서 이 문제를 좀더 생각해본 뒤에, 정확히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헤비타트 사업에 대해 2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 어났다. 헤비타트 운동을 위해 미합중국의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하는 아이디어들이 머리 속에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 람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당장 데이빗 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 고 전직 대통령 부부가 참여할 방법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일에 착수하도록 했다. 다른 헤비타트 이사들 몇몇에게도 전화연락을 해서 아이디어를 구했 다. 그리고 사무국직원들을 소집해 이 일에 총력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며 칠 동안 기도하면서 아주 오랜 시간을 깊이 묵상하고 숙고했다. 서둘러 편 지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철저히 검토해 변변치 못한 제안은 모두 삭제 해야 했다. 16일 후에야 마침내 나는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친애하는 대통령 내외분께 무엇보다 먼저 두 분이 자택에서 저를 만나주시고, 헤비타트 운동을 논할 시간을 내어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의 격려와 칭찬의 말씀은 개인적으로 제게, 또 나날이 성장하는 이 사업을 위해 일해온 모든 이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특히 두 분께 서 헤비타트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게 되어 얼 마나 큰 희망과 기쁨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일전에 요청하신 대로, 저는 사무국에 돌아와 모든 이들과 함께 기도하 고 토론하면서 호의를 어떻게 헤비타트 운동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의견을 모았습니다. 두 분께서는 가능한 참여방법을 거리낌없이 나열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나긴 목록을 보면 아시겠 지만, 저희는 두 분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했답니다! 1)두 분 중 한 분이 인류를 위한 헤비타트 운동의 이사나 고문으로 일하 실 수 있습니다. 별도로 우송한 우편물을 보시면 이사, 고문, 그리고 헤비 타트 사업장 대표들의 전체 명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자체 규약에 따라 이사를 25명까지 허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사는 22명입니 다. 가을 이사회 때마다 신임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이사들은 매년 다른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1년에 두 먼, 즉 봄과 가을에 이사회를 갖게 됩니다. 고분은 1년에 한 번, 가을 이사회 때에만 이사들을 만납니다. 고문은 1년에 한 번, 가을 이사회 때에만 이사들을 만납니다. 이사들은 집회에 꼭 참석하게 되어 있고 고문들에게는 참석을 권장하고 있 습니다. 대부분의 이사는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고문들은 여행경비를 각자 부담합니다. 고문과 이사 모두 헤비타트의 관리경비를 분담하게 됩니 다. 대부분 이러한 비용들을 아주 흔쾌하게 넉넉히 지불하고 있습니다. 2)언론에 홍보해 주십시오. 구세군, CARE, 적십자사, 보이스카우트, 기 타 등등의 조직들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헤비타트는 그렇 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대통령께 서는 짧은 시간 내에 '지미 카터'를 세계적으로 친숙한 이름으로 만드셨습 니다. 대통령께서는 적당한 언론관계자들과 접촉하시고 그들을 움직여 헤 비타트 운동을 도와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3)도움을 줄 수 있는 핵심재단이나 법인 관계자들과 저희를 연결해 주십 시오. 1983년 우리들은 헤비타트가 벌이는 모든 사업의 비용으로 각계각처 에서 240만 달러를 모금했습니다. 이 돈은 전적으로 개인과 교회가 헌납해 온 것입니다. 재단과 법인에서 들어온 돈은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알라져야 합니다. 장비-트럭, 건축장비, 사무실 컴퓨터, 미디어 장비-를 기부받거나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 다. 4)대통령의 친지분들께 편지를 써서 헤비타트 운동을 알리고 대통령께서 후원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5)헤비타트 후원을 호소하는 안내편지 캠페인에 대통령의 지지를 표명하 는 서한을 작성해 주십시오. 6)헤비타트를 도와줄 만한 유명인사들이 있다면 저희와 연결해 주십시 오. 7)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배포할 만한, 헤비타트를 위한 공적 성명을 작성 해 주십시오. 8)저와 함께 헤비타트 운동을 소개하는 30분짜리 인터뷰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 주십시오. 이 테이프는 향후 전국에 배포되어 주일학교나 강의나 토론모임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9)남부 침례교인이시니 이 지역의 핵심 인사들께 편지를 써 주시면 특별 히 많은 후원자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헤비타트 는 교파를 초월한 단체입니다. 우리는 남부 침례교에서도 많은 지원을 받 고 있지만, 다른 교파들의 활동에는 아직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이 점도 앞으로는 개선되어야 합니다. 10)미합중국의 몇 군데 주요지역에서 연설회를 주선했으면 합니다. 대통 령이시라면 수많은 청중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적절한 사전조율 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정해 우리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이벤트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11)해외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몇 군데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3세계 에서 헤비타트가 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 시에 대통령의 방문으로 헤비타트가 국제적인 명성과 신망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12)미국 내의 헤비타트 사업장도 들러 주십시오. 13)자원봉사자로 일해 주십시오. 하루 동안 아메리쿠스의 건축현장에서 노동을 해주신다면, 아주 훌륭한 모범적 사례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과 영 부인께서는 사무국에서 일하셔도 좋고 건축현장에서 일하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니까요! 대통령께서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카 메라에 담아 대통령의 솔선수범이 여러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도록 하겠습 니다. 14)개인적으로 성금을 기부해 주십시오. 대통령께서는 이미 헌금을 해주 셨고, 저희는 그 선물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정기적으로 성금 을 기부해 주신다면, 그 사실 자체가 실제 돈의 액수보다는 훨씬 더 의미 깊을 것입니다. 15)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정기적으 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면 이 기나긴 목록에 나열된 어떤 일보다 값 진 선물이 될 것입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목록은 아주 깁니다. 그리고 저는 대통령께서 이 제안들 중 몇 가지에만 긍정적인 답변을 주실 수 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을 보시고 대통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다 른 방법을 생각해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귀한 우정과 격려와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존경을 담아, 밀라드 풀러 며칠 후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카터 대통령이 나를 자택에서 한번 더 만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메리쿠스의 헤비타트 사무국에서 플레인 즈의 카터 저택까지 또다시 9마일을 알려가면서 나는 흥분에 들떠 어쩔 줄 몰랐다. 카터는 이번에도 현관에서 직접 나를 맞아 대기실로 안내했다. "편지를 훌륭하게 쓰셨더군요, 로잘린과 의논을 해보았는데, 풀러 씨가 제안한 것들을 대체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의자 옆의 램프 스탠드에서 내 편지를 집어들더니 각각의 항목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의견을 말해주었다. "성금모으기 부분은, 내가 지금 대통령 전용 도서관 설립기금조성에 참 여하고 있기 때문에 한동안 그 쪽에 전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조만간 이 방면에도 신경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될겁니다." 아메리쿠스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서와 정확한 날짜 를 의논해 보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하자 는 뜻이었다. 카터는 이사회에 참석하고 로잘린은 고문을 맡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힘닿는 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열리는 집회에도 참석하기로 했다. 나는 기쁨에 들떠 카터 저택을 나섰다. 카터 부부는 진심으로 헤비 타트 운동을 의해 뜻깊은 실천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카터 부부의 참여가 가져올 여파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한 달 뒤, 지미 카터가 아메리쿠스 건설현장에서 1일 인부로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 그는 아침 기도회가 열리기 10분 전에 도착해서 하루 종일 성 실하게 일을 했다. 나 역시 전직 대통령이 자기집과 친구들을 위해 아름다 운 가구들을 만들어주는 솜씨좋은 목수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러나 바로 이 곳에서 헤비타트 사업장의 인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헤 비타트가에 세워질 도로시와 윌리 솔로몬의 새 집 골조를 올리는 그의 모 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날의 행사에 잊지 못할 사건이 없었을 리 없다. 작업자들이 다함께 골조를 들어 제자리로 세우던 중, 갑자기 골조가 손에서 미끄러져 카터 대 통령 쪽으로 정통으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몸을 나 려 무너지는 벽과 카터 사이를 막고 제때 붙잡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중 상을 입을 뻔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소동이 또 한 차례 일어났다. 한 일 꾼이 목조골재를 콘크리트 바닥에 고정시키기 위해 콘크리트 못을 발사하 는 소형총을 쏘았기 때문이었다. '빵!'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자 경호원이 또한번 혼비백산했다. 모두들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서는 어색하게 웃 을 수밖에 없었다. 정오에 우리는 '평화의 집'에 모여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먹었다. (사무 실 공간과 자원봉사자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개축한 14채의 집에는 '평화', '정의', '아미고'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건축인부들과 지 원팀 몇몇도 자리를 함께 해 한가로운 나눔과 우정의 시간을 가졌다. 식사 시간 동안, 나는 편지에 언급한 바 있는 비디오 인터뷰 제작에 관해 카터 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런 기획에는 제3자를 참여시키는 게 더 좋겠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몇 가지 가능성을 토론했다. 그러다가 앤드루 영의 이름이 나왔다. 카터 대통령이 물었다. "전화기가 어디 있지요?" "옆집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영한테 전화를 걸어보지요." 우리는 '아가페의 집'으로 갔고, 카터 대통령은 애틀랜타의 영 시장 사 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우리가 700마일 걷기운동을 하면서 애틀랜 타를 관통한 데다가 애틀랜타 시에서 한창 헤비타트 운동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도 헤비타트 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호의를 표시했 고 헤비타트 사업에 관한 시청각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참여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우리의 언론담당 이사인 월러스 브로드가 소소하고 현실적인 절차들을 처리하는 데 당장 착수했다. 녹화장소는 애틀랜타 시의 영 시장 저택 뒷마 당으로 결정했다. 날짜는 다음달인 1984년 4월로 잡았다. 카터 전직 대통령과 나는 화창하게 아름다운 봄날 영 시장의 자택에서 만났다. 영 시장의 중재로, 위 세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의 백성들이 살 집을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가에 대해, 그리고 세상 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하라는 복음의 요청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리고 애틀랜타, 아메리쿠스, 미합중국 전역, 나아가 전세계에서 헤비타트 가 벌이는 확장일로의 사업을 특히 힘주어 강조했다. 그 결과로 '도움의 손길을 갈구하는 세계-나눔의 기회'라는 25분짜리 비디오 프로그램이 탄생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백 개의 비디오가 미국, 캐나다, 나아가 유럽 전역 으로 배포되어 교회, 지역단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활용되었다. 그 프로 그램은 지금도 광범위하게 방영되고 있으며,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녹화가 끝난 후, 우리는 영의 집에 초대되어 간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했 다. 대화 도중 영 시장의 아내 진은 딸 폴라가 헤비타트에서 자원봉사를 할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폴라는 듀크 대학을 갓 졸업했 는데, 한동안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주소를 적어주며, 폴라에게 편지하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 다. 몇 주 후, 나는 진심으로 헤비타트와 일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폴라의 전갈을 받았다. 1984년 7월 8일 폴라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아메리쿠스 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우간다로 날아가 굴루의 헤비타트 사업장 에 일을 했으며, 그 지역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미와 로잘린 카터의 도움은 기금조성과 홍보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간접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일해줄 최고급 인력을 또 하나 얻게 해준 것이 다. 이러한 그들의 참여는 시작에 불과했다. 7.2주간의 중노동 1984년 봄, 아메리쿠스에서 노동한 지 몇 주 뒤에 카터 대통령은 강연차 뉴욕을 방문했다. 헤비타트의 초청으로 그는 이스트 6번가의 헤비타트 사 업장을 답사했는데, 그 곳에서는 개축 준비단계로 6층짜리 아파트 철거작 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뉴욕 사업의 이사인 롭 데로커는 바로 이틀 전 완성된 임시나무 계단으 로 카터를 5층까지 조심스럽게 모셨다. 버려진 건물 꼭대기에 서서 발 아 래 펼쳐진 황량한 도시풍경을 바라보던 카터는 불쑥 말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할 일이 엄청나게 많겠군요. 롭, 내가 도와줄 일이 있 으면 밀라드한테 얘기를 하세요. 그 친구가 내 상관이니까." 롭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대답했다. "다니시는 교회에서 수련회원을 모아서 여기서 일주일쯤 노동수련캠프를 하면 어떨까요?" "생각해 보지요." 롭이 내게 전화를 걸어 카터 대통령의 답사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나 는 롭의 제안에 대한 대통령의 대답에 놀랐고 또 힘을 얻었다. 참으로 훌 륭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대통령이 플레인즈로 돌아오자 곧 연락을 취했 다. 뉴욕 시에서 노동수련캠프를 인솔하는 데 정말로 관심이 있는 걸까? 대답은 신속하고 긍정적이었다. 자, 이제 카터 대통령이 나를 '상관'으로 임명해 주었으니, 당연히 이 멋진 아이디어를 빨리 실행에 옮기라고 다그 쳐야지! 우리는 이 특별한 노동의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미국 헤비타트 사 업을 도맡아 진행하는 테드 스위셔와 나는 자택에서 카터 대통령을 만나 9 월 첫주로 날짜를 잡았다. 버스 한 대를 전세내서 9월 1일 토요일 정오에 아메리쿠스를 출발하면 밤새도록 달려야 일요일 오후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동수련캠프는 월요일 아침에 시작해 그 주 금요일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는 플레인즈의 마라나타 교회 신도들에 국한하지 않고 조지아 주 다른 지방의 자원봉사자들과 다른 주 출신까지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9월 1일이 다가옴에 따라 뉴욕과 조지아 주 양편에서 기대감이 한껏 고 조되었다. 전국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이 문의전화를 걸어오는 통에 아메리쿠스 헤비타트 사무국의 전화벨이 쉴새 없이 울려댔다. "카터 대통령께서 정말로 버스를 타고 뉴욕까지 가실 예정입니까?" "대통령께서 메트로 침례교회의 침상에서 주무실 계획이라는데 정말입니 까?" "실제로 대통령께서 건축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하게 됩니까?" 언론의 반응은 회의적이거나 놀라거나 진심으로 감명을 받은 경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출발하는 당일 아침, 헤비타트 사무국 정면에는 캠프 참가자들을 환영하 며 좋은 캠프가 되기를 빈다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100여 명 가까운 군중들이 나와 우리를 전송했다. 간결하게 가진 송별식에서 린다는 손수 헤비타트 로고를 아플리케한 작업복을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부부에 게 헤비타트 티셔츠를 선물했다. 접견실에서 작별을 아쉬워하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18명의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고 "헤비타트 오예!"라는 외침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애틀랜 타를 향해 북쪽으로 출발했다. 두 시간 반 후 우리는 칼리지 파크에 있는 제일침례교회 주차장에 정차 해 18명을 더 태웠다. 이제 우리는 36명의 막강대군이 되었다. 한껏 기대 에 부풀어 우리는 북으로 향했고, 어스름이 질 무렵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우리는 컬럼비아 주에서 가장 유서깊은 흑인교회인 래드슨 장로교회 앞에 차를 세웠다. 진입로는 카터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 려고 혈안이 된 기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잠시 안부를 묻고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교회 안으로 안내받았다. 주 민들이 준비한 훌륭한 성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닭튀김, 그린 빈 스, 버섯덮밥, 아이스티, 블루베리 파이, 피칸 파이, 조그만 레몬 케이크 까지, 정말 잊지 못할 송별만찬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엔 양편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내가 카터 대통령을 소개하자 대통령은 헤비타트와 갈 수록 돈독해져 가는 친분에 대해 감동적으로 연설했다. 백악관을 떠난 후 쏟아져 들어온 열두 건의 제안 중에서 유일하게 받아들인 직책이 헤비타트 이사직이라고 밝힌 대통령은 헤비타트 운동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헤비타트 운동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제가 그 일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고 말을 맺었 다. 컬럼비아를 떠나던 토요일 저녁 9시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뉴욕에서의 긴 여정을 거뜬히 치러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벨머라는 작은 도시에서 예배에 참석했다. 경호원이 먼저 교회를 물색하고 담임목사에게 우리의 참석을 미리 귀띔해 주었다. 버스가 조그마한 컨서버티브 침례교회 주차장에 정차하자 나는 카 터 대통령을 대동하고 차에서 내렸다. 교회쪽으로 걸어가자 담임목사가 나 와서 맞아주었다. 전직 대통령의 방문에 황송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 력했다. 그는 어색한 투로 외쳤다.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에 귀중한 손님이 두 분 오셨군요! 바로 '대통령 각하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순서로 이야기했는지 나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 다. 예배를 마친 뒤, 우리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40번가의 메트로 침례교 회를 향했다. 수많은 헤비타트 동역자들과 언론인들로 이루어진 환영인파가 교회정문 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짐을 풀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일하게 될 건물로 갔다. 맨해튼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이스트 6번가 742 번지였다. 전국 네트워크 방송사에서 파견나온 텔레비전 방송팀들이 월요 일 아침 이 곳에 모여 사업장을 취재하고 지미 카터를 인터뷰할 예정이었 다. 우리의 자그마한 헤비타트 군대는 버스를 함께 타고 온 36명의 일행에 몇 명의 원군을 더 충원했다. 10여 명 남짓한 자원봉사자들이 우리와 1주 일 동안 함께 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메릴랜드, 콜로라도, 뉴저지, 매사추 세츠, 그리고 뉴욕 북부에서 날아왔다. 월요일 아침, 우리는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여 섯 개 층에서 각자 맡은 일에 착수했다. 기자들이 사방에 진을 치고 경쟁 적으로 취재를 해댔다. 그런데 잠시 후 1층에서 낡은 널장을 뜯던 린다가 한 무더기의 뼈다귀를 발견했다. "어서 쉴리 게이트를 불러줘요!" 린다가 소리쳤다. "이게 사람 뼈면 어쩌죠?" 아메리쿠스 출신의 의사인 쉴리는 몇 층을 뛰어내려와 몇 분간 낡은 뼈 다귀와 뼛조각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람의 뼈가 아니라는 진 단을 내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잡혀 있는 기자회견 일정 때문에 건물 정면의 6번가에 쳐진 경찰보호선 뒤로 수많은 기자와 사진기자가 몰려들었다. 나는 롭 데 로커, 지미 카터와 함께 내려가 기자들을 맞았다. 카터 대통령은 헤비타트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참여에 대해 간략한 연설 을 했다. 특히 이 건물의 개축계획을 자세히 설명한 뒤 질문을 받았다. 바 로 두 달 뒤에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정치에 관 한 소견을 묻고 싶어했지만, 지미 카터는 이런 질문들을 살짝 비켜나가 헤 비타트를 강조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이런 기획이 바로 레이건 대통령께서 자구라고 말씀하신 바 있는 그런 활동이 아닙니까? 민간인들이 나서서 나라를 살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행동하자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에 옮 기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전직 부통령께서 이런 일에 관여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요?" "글쎄요, 부통령 노릇을 못해봐서 그 질문에 대답해드릴 수가 없겠는데 요." 와락 폭소가 터졌다. 대통령은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으니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 이 드는군요!" 또다시 폭소. 그 기자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일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카터 부인께서도 일주일 동안 일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오후 늦게 도착해서 남은 시간 동안 함께 있을 겁니 다." "정말로 메트로 침례교회의 임시침상에서 주무시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꼭대기 침상이지요." "버진 아일랜드 방문을 포기하고 여기 와서 일주일을 희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희생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왔고, 목수 일도 처음 해 보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서 동시에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담겨 있었다. 회의적이었던 기자들도 정치적 언급의 유도를 포기하고 헤비타트의 훌륭한 자원봉사자와 대화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굿모닝 아메리카'의 사회자인 데이빗 하트만이 다가왔다. 카터는 아침 일찍 뉴욕 한복판에 있는 ABC방송국 스튜디오와 원 격연결해 생방송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데이빗 하트만을 비롯한 대담자 모두에게 이 곳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우리는 하 트만에게 건물의 1,2층을 보여주었다. 카터는 2층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다시 시작했고, 내가 남은 4개층을 안내했다. 결국 데이빗 하트만을 설득 해서 망치를 들고 일하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같은 월요일 아침 '투 데이쇼'에서 카터 대통령을 인터뷰한 NBC의 존 파머는 우리의 초대를 기꺼 이 수락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현장에 남아 함께 일하면서 많은 땀을 쏟 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점차 건물 전체로 퍼져 일을 하는 동안 아래쪽 거리에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간간이 "지미, 지미, 지미!"를 외쳐댔다. 대 통령이 2층 창문에 모습을 보일 대마다 요란한 환성이 터져나왔다. 구경꾼 들은 매일 그 곳에 와서 카터 대통령이나 로잘린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환호성을 올렸다.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혹은 일을 마치고 나서 카터 부 부가 건물을 나설 때면, 예외없이 엄청난 인파가 몰려 대통령과 악수를 하 거나 사인을 받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뉴욕 헤비타트 사무국에는 문의전화가 쇄도해 급기야 캠프 참가자들 중 한두 명을 파견해 일손을 거들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 들은 대부분 카터 부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었 지만, 헤비타트 사업을 도울 방법을 문의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임금 노동, 건축 자재 공급, 기타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서약과 함께 기부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요일에는, 전미 목공 노동조합의 뉴욕 지부장인 파스칼 맥귄즈가 건물 에 들러 500달러 수표를 기부하고 카터에게 특별 노조회원증을 수여했다. 그는 또한 건축용 석고판을 비롯한 건축자재와 함께 도제수업중인 목공 몇 명을 보내 일을 도와주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남은 봉사기간 동안 노조 에서 파견나온 4명의 젊은이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맥귄즈 씨는 또한 노동 수련캠프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노조의 모자와 목공용 앞치마를 선물했 다. 하청업자협회에서는 전화로 2,000달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서약했다. 히트너 트럭 렌트 회사는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트럭이든 무료로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카라디오에서 사업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는 뉴저 지 출신의 한 남자는 곧장 차를 몰고 현장으로 달려와 못 한 상자와 연장 한 상자를 헌납했다. 브롱크스에서 온 한 숙녀는 지하철을 타고 로우어 이 스트사이드까지 직접 찾아와서 대통령에게 꽃화분을 선물했다. 화분은 황 폐한 지역에 꽃 핀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도록 건물 정면의 비상구 위에 놓 아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75년 전 당시 아름다웠던 이 건물에 직접 살았던 적이 있는 한 노인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 낡아빠 진 건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사실의 너무나 기뻐서 1,000달러를 기탁했다. 화요일 저녁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뉴욕에 있는 동안 하루는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을 하자고 정해놓고 있었다. 그래 서 기나긴 하루의 일을 끝내고 정리를 한 뒤, 비좁은 버스에 몸을 싣고 차 이나타운의 실버 팰리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굉장한 여섯 코스 정식이 나왔다. 음식은 나무랄 데 없었고, 우리들의 동지애 또한 티 한 점 없이 완벽했다. 어찌나 웃고 장난을 쳤는지 음식을 먹기가 힘들 정도였다. 식사가 끝난 뒤 각기 17달러씩을 모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배인이 돈 뭉치를 높이 치켜들더니 그 돈을 고스란히 헤비타트에 기탁하겠으니 건물 을 보수하는 데 보태달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실버 팰리스 오예!" 5일 동안, 건물 공사는 급속도로 진척되었다. 오래된 석고판을 철거했 고, 불에 그을리고 썩은 들보는 모두 교체했다. 창문으로 버려지는 목재 부스러기가 하도 많아서 건물 뒷쪽에 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날리고 있었 다. 많은 캠프 참가자들은 보호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다. 주말이 되자. 산산조각난 널장들, 부러진 들보, 부서져 내리는 석고 등의 쓰레기더미가 2층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하루 일과는 언제나 아침식사 시간에 메트로 교회에서 짤막한 예배를 드 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조지아에서 우리를 태워주웠던 버스를 타고 오전 8시 전에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보통 노동은 오후 5시에 마쳤 으며, 중간에 한 시간 동안의 점심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일의 진척 정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기도 했다. 가금은 8시도 되기 전에 도착해 30 분 동안 점심식사를 마친 뒤 5시 30분이나 6시까지 내리 일하기도 했다. 일과가 끝나도 일손을 놓기를 아쉬워했던 일꾼이 바로 지미 카터였다. 카터는 하루 이틀 정도 교회에서 현장까지 3마일 거리를 조깅해서 간 적도 있었는데, 그러고도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먼저 일을 시작하곤 했다. 속을 다 들어내서 껍데기에 불과한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일하는 것 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새 지붕을 올리는 동안에는 6층 아래 밑바닥까지 뻥 뚫려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자원봉사자들 중 에는 경험 없는 사람들도 많았기 대문에, 일주일 동안 부상자가 단 한 사 람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웠다. 엘리제이 제일침례교회의 담당 목사인 제임스 홀트 목사는 널장을 지고 계단을 오르다 임시계단에 난 구 멍에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 정강이 뼈에서 살점이 찢겨나갔 다. 다행히 부러진 뼈도 없고 동맥도 끊어지지 않았지만 상처를 40바늘이 나 꿰매야 했고, 하는 수 없이 귀가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통스런 경 험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겼 다고 한다. 오른쪽 다리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그는 몇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서 헤비타트 사업을 발족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1985년 10월, 그들은 북중부 조지아 헤비타트의 정식 지회 승인을 받았다.) 수요일 저녁에는 메트로 침례교회에서 열린 정규 수요 예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전직 대통령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우리 근로봉사자들 을 비롯한 100여 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같이했으니, 보통 때의 '정규' 예 배와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한 주를 기념하는 명판을 교회에 헌정했다. 담임목사인 진 볼린 목사는 캠프 참가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물의 낡은 들보를 단정하게 깎아 만든 명패를 수여했는데, 명패에는 '빈 민을 위한 주택 보급에 앞장 선 귀하의 자원봉사를 치하하며' 라고 쓰여 있었다. 명판 위의 받침대 위에는 새 망치가 세워져 있었다. 그 주의 화려한 피날레는 금요일 밤에 열렸다. '헤비테이션'이라고 이름 붙인 헤비타트의 특별축하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인파가 성 바 솔로뮤 성공회를 가득 메웠던 것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 오랜 여운을 남기는 연설들, 다함께 주님을 찬양 하던 그 저녁의 잊지 못할 행사가 끝날 무렵 헌금을 걷는 딱딱한 모자들이 신도석 사이로 돌았다. 모인 헌금은 손수레에 한데 모아서 전면의 단상으 로 운반했다. 그 날 밤에만 10,000달러 이상의 헌금이 모였다. 일주일 동 안 모인 헌금액은 현금과 물자를 통틀어 20,000달러를 넘어섰다. 토요일의 귀향일정을 준비하던 우리는 우리의 방문이 뉴욕 시 사업 자체 에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전국에 있는 수백만 명이 헤비타트 운동이 벌이는 사업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일주일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캠프 참가자들은 녹초가 되어 기나긴 귀향길에 오르면 서도 기뻐했고, 웃음을 터뜨리며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나 주일 새벽 4시 30분에 버스가 애틀랜타에 정차했을 때쯤엔, 모두들 잠에 곯아떨어져 아무 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뉴욕 노동수련캠프 이후, 카터 부부는 아예 헤비타트의 장기 자원봉사자 로 등록했다. 두 사람에게 더 많은 일감을 찾아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1984년 가을, 카터 부부는 개인적으로 남미 몇 개 국가를 여행했는데 마 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페루 푸노의 헤비타트 사업장이었다. 체재기간 동안의 행적을 언론이 다루어준 데다가 카터가 페루의 지도자들을 만나 방 문의 목적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카터 부부가 페루를 떠날 때쯤에는 온 국민이 헤비타트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1984년 10월 11일, 카터 부부는 페루에서 곧장 텍사스 주 아마릴로로 날 아가 첫 헤비타트 이사회에 참석했다. 카터는 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빠짐 없이 참석했으며, 결코 좌중을 좌지우지하려는 법이 없었다. 동료 이사들 은 거리낌없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아는 주제가 나오면 언제나 의견을 제시하며, 주제가 익숙치 않을 때는 열심히 듣는 카터의 태도를 높 이 평가했다. 로잘린 역시 고문단 회의 및 미국 내 사업장 대표들의 회의를 열심히 쫓 아다니며 성실히 참여했다. 어느 날 오후에는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전파할 구체적 방안들과 선거캠페인에서 터득한 홍보전략을 가르치는 두 시간짜리 워크샵을 인솔하기도 했다. 아마릴로 이사회가 끝나자마자, 로잘린은 텔레 비전 방송출연과 신문 인터뷰를 통해 헤비타트를 홍보했다. 그리고 전국 몇 개 사업장에서 기금을 연출하고 주택을 헌정함으로써 큰 힘을 보태주었 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뒤, 카터와 나는 함께 뉴욕으로 가 케미칼 뱅크 주관의 오찬석상에서 연설을 함으로써, 1986년 헤비타트의 10주년 행사를 위한 기금 1,000만 달러 모으기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000만 달러 모으기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방향을 제대로 잡 기 위해서는, 별도의 기획위원회가 필요했다. 나는 또다시 카터와 접촉했 고, 카터는 내의견에 따라 회장직을 맡아주었다. 1985년 2월 21일 카터의 애틀랜타 집무실에서 첫 회의가 열릴 때쯤 위원회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위 력을 발휘할 초강력 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위원회 회의 결과 개인과 교회로부터 기금을 연출할 아이디어가 엄청나 게 쏟아져 나왔으며, 위원들 자신도 사재를 털어 돕기로 했다. 누구보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기금조성가는 바로 지미 카터였다. 애틀랜타 회의가 열린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한 스포츠 용품회사가 허락도 없이 광고에 자신의 사진을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 에게 그 회사에 전화해서 광고에 사진사용을 허락한 사람이 누구냐고 따끔 하게 물으라고 했다. "아, 이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가 그들의 대답이었다. "대통령께서 개인적인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렇지만 헤비타트 운동에 10,000달러 정도의 기부금을 기탁하신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군요." 며칠 내로 우리는 그 수표를 받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주식회사 퓨리나에서 카터 부부의 애완고양이인 미 스터 말라키를 1986년도 달력에 싣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사진게재는 허락되었지만, 당연히 헤비타트에 5,000달러를 기부한다는 조 건이 따라붙었다. 대학에서, 공식회의석상에서, 가지각색의 단체들에서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이 날마다 카터의 집무실에 쇄도했다. 그는 그 중에서 극소수의 요청 만 승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연요청을 수락할 때는 헤비타트에 후한 기 부금을 기탁해 달라는 조건을 종종 붙이곤 했다. 전직 대통령을 아군으로 거느리고 잇다는 점은 기금 마련이라는 측면에 서뿐 아니라 여러 모로 값진 자산이었다. 1984년에 미시간 주 질랜드 출신 의 자원봉사자 로저와 바바라 스넬러 부부는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인도 행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 카맘에서 새로 진척되고 있는 헤 비타트 사업을 위해 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 없이 비자발 급이 거부되었다. 스넬러 부부는 재차 모든 서류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또 다시 거부였다. 이 시점에서 나는 카터 대통령을 만났고, 대통령은 신속히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 친필로 서한을 보내 중재를 부탁했다. 며칠 내로 우 리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1985년 1월 우간다 굴루에서 느닷없이 우간다군이 헤비타트의 덤프트럭 을 압류조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트럭을 되찾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한 달쯤 지난 뒤에도 사업장에 덤프트럭이 없어서나는 다시 한 번 카터 대통령의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또한번의 친필서한이 날아갔는데, 이번에는 밀튼 오보테 우간다 대통령 앞으로 갔다. 우리는 곧 바로 트럭을 되돌려 받았는데, 그 트럭을 친히 몰고 온 바실리오 오켈로 장군은 그로부터 6개월 뒤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 대통령 정권을 전복시 켰다! 카터 대통령은 뉴욕 사업장의 진척상황을 점검하느라 1985년 봄을 다 보 냈다. 껍데기만 남은 아파트를 개조하는 초대형 공사는 진척이 무척 더뎠 고, 일손을 대부분 주말의 자원봉사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헤비타트의 1985년 이사회는 뉴욕 시 지회에서 개최하게 되어 있었고, 그들이 지은 첫 건물의 헌정이 이사회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게 되어 있었다. 사업에 새로운 힘을 북돋아주기위해 카터 대통령은 1985년 여름에 뉴욕으로 돌아 가 두 번째 노동수련캠프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7월 29일 우리는 바 로 그렇게 했다. 두 번째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1984년의 참가자들이 상당수 다시 등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나머지 자리는 다른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합 류해 채워주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토요일 밤새도록 버스를 타고 뉴욕 시로 향했다. 7월 30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우리는 뉴저지 유료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예배 드릴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호원을 미리 파견해 사전답사를 하지 않았다. 카터는 어떤 교회든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고 싶 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뉴욕 시에서 몇 마일 남쪽에 있는 뉴저지 주 에디 슨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예배 드릴 교회를 찾는 데 약간의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 지역 교회들은 여름에 평상시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예배를 드렸 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르는 교회들은 한창 예배가 진행중이거나 아니면 이미 끝나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소방서에 들러 11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 다. 소방관들은 몇 블록 떨어진 곳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작은 루터파 교 회를 가르쳐 주었다. 버스가 건물 앞에 정차했을 때 교회게시판을 볼 수 있었다. 게시판에는 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한다고 쓰여 있었는데, 시계 를 보니 11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카터 대통령이 물었다. "다른 곳을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설교 시간에 맞춰서 들어갈 수 있겠군요."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들어갑시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33명이 한꺼번에 예배당 정문으로 발맞추어 걸어갔 다. 아무리 조용히 들어간다고 해도, 예배중에 소란을 피우지 않을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커다란 문을 열어제쳤을 때,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배당 안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옆 건물 앞에 있는 한두 명의 아이들을 발견했고,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다가가자 한 여자분이 문을 열어주었다. 교 인들은 거기에서 양로원에서 도로 모셔온 한 신도의 85번째 생일을 축하하 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사람들은 카터 대통령을 알아보았다.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교회는 9시 30분에 이미 예배를 끝마친 뒤였다. 바깥의 게시는 가을 의 일정을 미리 고시한 것일 뿐, 여기도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 지로 여름에는 한 시간 일찍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담임복사인 E.월터 클레클리 주니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앞으로 나서 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카터 대통령이 자기 교회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한 것 같았다. (후에 한 기자는 "파티를 여니까 정말 축하할 일이 생기더군요!"라는 담임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는 무례하 게 끼여들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잠시 예배당을 써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담임 목사에게 일행중에 목사님이 여러 분 계시고 그 중에는 신학교 교장선생님도 계시니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예배당을 쓰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가 여러 분을 위해 한 번 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몇 분 동안 상의를 한 끝에 예배를 한 번 드리기로 했다. 오르간 연주자 도 아직 있었고, 목사님도 설교문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예배당으로 되돌아왔고 대부분의 교인들도 함께 그 자리로 돌아왔다. 에베소서 2장 말씀에 근거한 설교문은 그렇게 시기적절할 수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그 장을 마무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모퉁잇돌'과 '터'와 '건물'이라니! 게다가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외인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인 것이다! 우리는 경외심에 차 귀를 기울였다. 감정이 북받쳐오른 젊은 목사가 튼 튼한 기반 위에 하나님의 권속이 살 집을 지으라고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 서, 그가 이토록 자신의 설교에 몰입하는 청중을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모두들 따뜻한 감사의 말을 나누었고 우리는 기쁨에 차 뉴욕으로 길을 떠났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우리를 위한 설교를 예비해 주신 것이다. 점차 위용을 갖춰가는 이스트 6번가의 건물로 돌아와서, 우리는 힘든 노 동과 풍요로운 동지애로 가득 찬 일주일을 다시 한 번 보냈다. 이번에는 19개 아파트에 입주할 세대들이 대체로 결정된 뒤였는데, 입주자들도 일주 일 내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일했다. 이번에는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 덕분에 사업기금 마련이 두 배로 늘어났 다. 뉴욕 헤비타트 이사회 위원인 엘렌 베어는 그 지역 교회들과 접촉해 카터 대통령의 시간당 노동량을 후원할 교인이 있는지 타진해 보았다. 많 은 사람들이 호응했는데, 아마 대통령을 목수로 고용할 수 있는 기회에 마 음이 끌렸던 것 같다. 금요일 저녁 롱아일랜드의 리차드와 펙 앨핀 부부는 시간당 25달러를 서약하고는, 직접 현장을 보고 싶어 우리를 찾아왔다. 카 터 대통령이 일주일에 55시간을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치는 당장 이렇게 외쳤다. "이런, 그러면 그 금액의 절반을 더 내겠어요!" 누군가 재빠르게 계산을 해보더니 총계가 1,421달러 50센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리치는 "그럼 말끔하게 1,500달러로 합시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졌고, 우리들도 활짝 웃었다. 그는 약속 한 금액의 수표를 기탁했고, 자기 교회에서 노동수련캠프 참가자들을 인솔 해 건물로 다시 돌아와서 계속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카터 부부가 함께 해준 덕분에, 두 번째로 로우러 이스트사이드 노동수 련캠프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전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뉴욕 지구의 사 업체, 교회, 재단 등에서 더 많은 방문객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번 활동 이 끝나자마자 대통령은 1986년 2월 니카라과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시카고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또한번의 노동수련캠프를 인솔했다. 이 가장 유명한 자원봉사자 두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헤비타트에 기여한 엄청난 금액의 현금과 물자와 호의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있다. 지미 카터와 로잘린 카터 오예! 8 자원 봉사자들의 양어깨 위에 헤비타트는 항상 자원 봉사자들의 양어깨 위에서 움직인다. 지미와 로잘린 카터는 전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힘껏 발휘해 정력적으로 일을 해왔던 연령 불문 의 수많은 동역자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 다. 듣는 사람을 모두 놀라게 하는 헤비타트의 특징 중 하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그 다 채로운 면면이다. 우리는 우리 활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꺼이 받아들 인다. 자원 봉사자의 고향에서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로 절충하든 간에 봉사의 기회는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자원 봉사'라는 단어를 처음 들으면, 더구나 노동 봉사와 연결지어 생각하면 많은 사람 들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을 떠올리기 쉽다. 각 곳의 헤비타트 프로그램은 실제로 방 학 동안 일주일, 또는 한 달 정도 근로 봉사를 하는 청소년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을 받아 왔다. 이들은 각 지역의 공사 현장에서도 튼튼한 뒷받침이 되었다. 뉴저지 우즈타운의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세일럼 카운티 헤비타트의 이사인 하워드 테일러는 자기 교회에서 2개조의 근로봉사대를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존스 아일랜 드의 헤비타트 프로젝트 모임에 찾아왔다. 하워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만한 체험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리 세심하게 계획만 짜 둔다면, 노동 수련 캠프는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뿌듯한 느낌 을 줍니다. 아무리 기술이 없어도 좋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그리스도 안 에서 친교를 나누며 집을 짓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은 참으로 값진 경험입니다. 우정이 깊어지고 세대간의 이해도 놀라울 정도로 폭넓고 깊어집니다. 어른들은 10대들이 진지하 게 일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놀라고, 청소년들도 어른들이 단순히 이래라 저래 라 간섭하는 권위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놀랍니다. 노동 수련 캠프에 참가하고 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새삼 더 민감하게 의식 하고 반응하게 되지요. 꼭 참가자들에 국한된 얘기는 아닙니다. 교인들도 더한층 참여 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금을 모으고, 새벽 기도회를 하고, 새벽녘에 함께 아침을 먹고 나둥에 환영식을 하면서, 교인 전체가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교 인들은 그때의 수련캠프 이야기를 합니다. 수고스럽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 가끔씩 젊은 청년들은 취업을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장기간의 봉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곤 한다. 우리는 이런 범주에 속하는 재능 있는 청년들을 이미 수십 명 맞아들였 고, 사업장에서도 언제나 대환영이다. 아리조나 주 메사의 댄 로먼도 그런 청년이다. 1981년 자이레 응톤도에 사는 모반다 모 펜게는 자기 마을에서 벌어지는 헤비타트 사업을 격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특히 당시 22세였던 댄을 보내주어서 고맙다고 썼다. 댄은 꼭 여기서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와 함께 있으니 달리 필요 한 것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댄에게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자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엘롬베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일꾼 중의 일 꾼, 신자 중의 신자, 사업의 힘센 추진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그를 골라 이 곳에 보 내주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냅니다. 케냐의 응조이아 헤비타트 사업장 대표인 제레마이어 와마치오 역시 비슷한 편지를 내게 보냈는데, 이번엔 캐나다의 자원 봉사 폴 해더드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폴은 하나님 께서 내려주신 선물이랍니다!" 기독교 봉사단의 후원을 받는 폴은 튼튼한 집을 짓는 일 뿐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인간관계를 쌓는 일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은 모든 연령층에게 열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헤비타트에서 가장 귀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퇴직자들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흔들의자 에 앉아 편안히 쉬고 싶어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헤비타트와 함께 이랗는 노인들은 어 떤 장애물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업에 정열과 의욕을 가득 불어넣어 주며, 그 과 정 속에서 무척이나 젊게 살고 있다. 이 활동적인 노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엘렌 스터들리이다. 1924년에서 1951년까지 중 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연합 감리교 목사를 지낸 바 있는 그녀는 1981년 헤비타트 운동 을 알게 되었을 때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버스를 잡아 타고 3일 동안 전국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그녀는 그 해 11월 중순 아메리쿠스에 도착했 고 6개월 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82세였다. 드포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유니온 신학교 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 엘렌은 정력적인 저술가였다. 아메리쿠스에서는 당장 그녀의 재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매일 새로운 자원 봉사들을 면접하고, 그들의 고향 언론에 창의력 넘치는 홍보자료를 제작해 넘겨주었다. 또, 전국에 걸쳐 있 는 동역자들과 지회에 보낼 수십 통의 편지를 써서, 헤비타트를 널리 알리고 새로운 후 원자들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가끔씩 엘렌은 아침기도회를 이끌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어느 날 엘렌은 2차대전 발발 당시 중국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모두들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의자 끝에 엉덩이를 겨우 붙이고 앉아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웨이시엔 에 강제억류를 당했지만 살아남았다. 그 숨막히는 몇달을 회고한 회상록에서 엘렌은 이 렇게 쓰고 있다. "살아남을 확률은 영적인 문제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배려와 격려를 보여줄 때 희망과 믿음과 자비가 자라나 고 생존의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엘렌은 평생 그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다. 67세에 그 녀는 "앞으로 다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리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엘렌은 인디애너 주에서 두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아 일했 고, 국제교류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4년에는 엣 친구들을 만나러 중국을 다시 찾았 다. 게다가 처음 아메리쿠스에서 여섯 달 동안 봉사활동을 끝마친 뒤로로 두 번이나 돌 아와서 단기간 동안 일을 하고 갔다. 헤비타트 자원 봉사들에게 정년이란 말은 사전에 없는 것이다! 가족이 함께 자원 봉사하러 오는 경우도 많다. 엘렌이 사는 곳에서 정반대편 끝에 있는 뉴햄프셔 주 라코니아에는 뒤퐁 가족이 살고 있었다. 폴과 케이시 부부는 딸 리사와 제 니퍼, 그리고 조카 메리를 대동하고 1981년 8월 처음으로 아메리쿠스를 찾아왔다. 그들 은 아홉 달 동안 묵었는데, 폴은 건축인부 십장으로 일하고 케이시는 사무실에서 타이핑 을 하고 편지를 봉투에 넣고 소식지 교정을 보았다. 케이시는 또 다른 일거리들도 찾아 내서 떠맡았는데, 예컨대 헤비타트의 수혜를 받는 해당지역 가족들과의 중간연락책으로 일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뒤퐁 가족의 경비는 라코니아의 조합교회가 전적으 로 부담했다. 아메리쿠스에서 봉사기간이 끝난 뒤, 폴과 케이시는 고향으로 돌아가 뉴햄프셔 주 라코 니아의 헤비타트 지회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업 부는 워너와 플리머스에도 새로운 지회를 발족시켰다. 1985년 뒤퐁 가족은 아메리쿠스로 다시 돌아와 6개월 동안 자원 봉사를 재개했다. 이번 에는 어린 아들 케빈도 함께였다. 폴은 또다시 건축 인부 십장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아 메리쿠스와 뉴햄프셔 양쪽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케이시는 테드 스위셔의 보좌역을 맡 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사업장들을 조정하는 일을 도왔다. 어떤 자원 봉사들은 장년기를 맞아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 1982년 노스캐 롤라이나 주 채플힐의 건축업자이자 신학교 졸업생인 R. 딘 드보어 씨는 마흔의 나이에 자이레로 가서 봉긴다 이코코 마을의 새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 지 않아 딘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고향으로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딘은 "드디어 저에게 맞는 곳을 찾았습니다!" 라고 썼다. 그리고 그 후 딘에게서 오는 편지에서는 하나같이 "자이레에서 환하게 웃으며, R. 딘" 이라는 서명 을 볼 수 있었다. 3년 뒤 미합중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딘은 계속해서 헤비타트 사업을 위해 일했다. 그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채플힐에서도 헤비타트 사업이 발족되었던 것이다. 딘은 아프리카 에서 예수님의 약속이 생생히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양속의 말씀 말이 다. 딘의 설명은 이러했다. 미국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나라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 은 채 나 자신을 던졌을 때, 나에게 돌아온 보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는 몰랐지만 자이레의 킨샤샤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저는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한 달 에 300달러의 자원 봉사 경비로 나는 봉긴다 이코코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 도 충분했고, 입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저택보다 훨씬 더 넓은 집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저와 함께 살게 해준 '아들'도 있었습니 다. 그 아이는 영광스럽게도 저를 '아버지'라고 불저 주었지요. 주민들은 커다란 배도 혼자 쓰게 해주고 '전용기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마을의 귀빈으로 대접 했고, 그들의 우두머리로 받들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선물은 제가 받은 것입니다. 하나 님의 사람이 얼마나 자비롭고 풍성한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직 하나, 헐벗은 주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영적인 부요 힘입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기간을 마친 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딘은 그 곳에서도 주님께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에서 쓸 물건들을 사려고 쇼핑목록을 적었습니다. 침대시트니 베갯잇이니 부엌 살림살 이 등이었지요. 엣날에 두고간 토스터오븐이 찾아도 없길래 어떻게 됐나 생각했는데, 바 로 다음날 집에 돌아와보니 탁자 위에 누군가 꾸러미를 놓고 갔더군요. 열어보니 침대시 트 두 벌, 베갯잇과 수건 한 장, 바나나빵 한 덩이, 그리고 토스터오븐이 들어 있었습니 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다른 것은 전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적으로 이하는 헤비타트 직원들 중 상당수는 예전에 자원 봉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 는 사람들이다. 펜실베이니아 마운트조이의 켄 소더는 1974년 자이레 음반다카에서 우리 부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자이레 응톤도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 작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대학을 마치고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도시계획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켄은 헤비타트 운동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비전을 보았고, 1984년 아메리쿠스로 돌아와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 사업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7년 클라이브 레이니라는 젊은 학교 선생이 아메리쿠스에서 소정의 기간 동안 자원 봉사를 시작했다. 그 뒤 그는 자이레 킨샤샤, 우간다 굴루, 부룬디 기테가, 말라위 링롱 웨에서의 활동을 거쳐 아프리카 사업장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크라이브는 특히 연합 감리교의 응도르심파 주교가 이끄는 부룬디 사업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부룬디 현지 자원봉사자들의 힘만으로 건설되는 이 공사는 1986년말까지 준공할 예정이었다. 밥과 캐시 가이어, 그리고 그 아들들인 스캇과 매튜는 뉴욕 버팔로 출신으로 1982년 자 원 봉사로 아메리쿠스를 찾아왔다. 캐시는 우편국에서 일을 하고, 타이핑을 하고, 회계 부에서 보조로 일했다. 밥은 건물을 짓는 인부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헤비타트 사무국 시 설들을 디자인하고 새로 짓는 일을 도왔다. 1985년 회계학 학위를 가진 밥은 망치와 청 사진을 손에서 놓고 재정관리 책임자로 취임했다. 월러스 브로드는 1982년 당시 애틀랜타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 재단의 일원으로 일하다 가 헤비타트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처음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그 는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헤비타트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형제가 일해주시면 우리도 정말 좋겠습니다. 하지만 넉넉히 월급을 드릴 수가 없습니 다. 헤비타트에는 팜플렛이며 슬라이드쇼, 홍보영화 등등 홍보물을 제작할 미디어 부서 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사람을 고용할 만한 돈이 없어요." 월러스의 대답은 신속했다. "무급으로 일하겠습니다. 아내 낸시와 둘이 먹고 살 만한 돈만 있으면 됩니다." 헤비타트 사업에 남편만큼이나 열심이었던 아내 낸시는 몇 주 안되어 아메리쿠스에서 일 자리를 찾았고, 월러스는 우리의 언론담당 이사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도 2년 동안 자원 봉사로서 일해주었다. 월러스가 봉급을 받게 되자, 낸시가 직장 에서 사퇴하고 헤비타트의 자원봉사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낸시는 처음에는 내 일을 옆 에서 도와주다가 나중에 우리의 소식지인 '헤비타트 월드'의 편집장이 되었다. 1985년 2월 1일, 한나 브로드가 태어나 최연소 헤비타트 자원 봉사가 되었다. 한나는 모 델과 친선대사 역할을 했다. 우리는 21세기에 한나를 새로운 스탭으로 맞이할 작정이다. 그러나 자원 봉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헤비타트 가족들은 바로 집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부금을 기탁하고, 모금운동에 참여하며,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에 서 튼튼한 주택의 비전을 함께 공유한다. 그들은 모두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미시간 주 레이크 오데사의 프랭크 타운젠드는 은퇴한 목수다. 몇 년째 그는 헛간을 개 조해 '헤비타트 작업실'이라 이름붙이고, 아름다운 수공예 가구들을 제작했다. 이런 식 으로 그가 헐벗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모금한 돈은 무려 수천 달러에 달한다. 프랭 크와 윌마 타운젠드 부부와 그 가족들은 다른 헤비타트 모금운동에도 동참했으며, 그들 이 다니는 교회 교인 전체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미시간 주 프리포트 근처의 호프 교회는 매년 가을에 축제를 여는데, 프랭크는 축제의 회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모든 수익금을 헤비타트에 기부하고 있다. 축제에서는 집에서 기른 야채와 수공예품들을 전시판매하는 일 외에도, 야외의 가마솥에서 저어 만든 애플 버터를 몇 갤런씩 준비하며, 교회마당에서 속을 채워 훈제한 소시지, 거대한 항아리에 가득찬 양배추절임등의 별식을 제공한다. 호프 교회는 1979년 이후 해외에 해마다 집 한 채씩을 지을 돈을 모금해왔다. 1982년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의 사업이 한창 준비단계에 있을 때에도 프랭크는 물심양 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타운젠드 가족처럼 자택에서 일하는 자원 봉 사들이 수천 명 더 필요하다! 베키 코프는 딜리야드라는 북부 조지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벨리스 크릭 로드에서 남편 과 함께 수퀘어댄스(남녀 네 쌍이 한 단위로 추는 춤)휴양지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전미 각처에서 정보를 모아 <스퀘어댄서들이 공개하는 사연 많은 요리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한 권이 팔릴 때마다 50센트씩 인도와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헤 비타트 건설 프로그램에 자동적으로 기부된다. 베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스 퀘어댄스 클럽들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베키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이 사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헤비타 트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만 그보다 이에 참여할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변화할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로우즈와 로이스 톰슨 부부는 1981년 남편인 로우즈가 필립스 대학 신학대학원의 설교와 실천신학 조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오클라호마 주 에니드로 이사했다. 톰슨 부부는 이 미 헤비타트의 후원자로서 로우즈가 맡고 있던 교회 교인들을 독려해 과테말라와 우간다 에 각각 한채씩의 집을 이미 지은 바 있었다. 일본에서도 선교사로 4년 동안 봉사한 적 이 있는 로우즈와 오리스는 이제 평생 처음으로 소박한 그들만의 집을 갖게 된 것이었 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집다운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개인적으로 캠페인을 시작 했다. 로우즈는 교회와 수련회 등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곤 했다. 그들 부부는 이 기회들을 제3세계의 기독교 사업에 바쳐서, 모든 사례금을 여기에 기탁했다. 1986년 까지 헤비타트에 돌아온 몫은 열두 채의 집을 지을 정도였다. 우리는 과테말라에 한 채, 아이티에 한 채, 페루에 한 채, 인도에 한 채, 니카라과에 네 채를 지었다. 로우즈와 로 이스는 이 외에도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을 300권 이상 사서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 었다. 그래서 나는 1985년 봄에 오클라호마 에니드 시에 새로운 헤비타트 지회가 조직되 었다는소식을 듣고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한편, 톰슨 부부의 딸인 조디는 에니드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을 헤비 타트에 보내왔는데, 그 총액은 과테말라에 집 한 채를 지을 비용의 절반을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캘리포니아 가데니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톰스낙의 딸 린도 역시 헤비 타트의 후원자이다. '소박하게 살아라, 그러면 다른 사람도 소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모토를 실천하며 린은 5년 동안 두 번이나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해외의 헤비타 트 집 한 채씩을 헌정했고, 그 사이사이에 다섯 채의 비용을 부담했다. 1985년 10월, 나는 로우즈에게 뉴욕 시 가을 헤비타트 이사회에서 워크샵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청지기 정신: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정말이지 로우즈 톰슨보다 그 주제에 적합한 연사가 또 있을까. 분명한 것은 헤비타트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해서 머나먼 길을 떠날 필요는 없다는 사실 이다. 미국 내에서 지회가 발족될 때에는 대개 눈앞에서 집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 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지역주민들의 힘이 배후의 추동력이 되 곤 했다. 밥 윗포드는 네 개의 직업을 거쳤다. 17년 동안 민간산업부문에서 일하다가 연방정부와 손잡고 8년을 일했으며, 1981년 부터는 인디애너 주 라파이에트에서 퍼듀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3년 그는 헤비타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헤비타트가 제4의 직업이라 고 말하고 있다. 1982년 봄, 밥은 베델 성경 공부 시리즈를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던 중 희년 축제의 무한 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공공정책 교수였던 밥은 레위기에서 생산의 3요소인 토 지, 노동, 자본을 다루는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이 문제를 신학적, 성경학적으로 깊이 연구했다. 다음해, 밥은 센트럴 장로교회의 주일학교 성인반에서 '여호와 경제학'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개설했다. 대략 스무명이 이 강의를 들었다. 이들은 구약성경과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희년과 안식년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공부하고자 했다. 때맞추어 창립 7주년을 맞은 헤비타트가 가까운 인디애너폴리스시에서 '안식년' 기념행 사를 개회했다. 이 행사 개최준비위원회 위원인 존과 수 영 부부는 '여호와 경제학' 수 강생들이었다. 영 부부는 라파이에트로 이사오기 전에 샌 앤토니오 헤비타트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샌 앤토니오 헤비타트 사업의 창립자인 페이스 라이틀을 연사로 초청했다. 밥의 머리에 갑자기 '헤비타트야말로 20세기에 희년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몹시 흥분했다. 밥은 곧 그 흥분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초교파적 위원회를 구 성했고, 결국 1984년 6월에 라파이에트 헤비타트를 조직했다. 그들의 첫 집은 1985년 11 월에 헌정되었다. 밥은 지금도 퍼듀 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이지만, 그가 헤비타트에 쏟아 붓는 자원봉사기간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마도 그는 이 네 번쩨 직장이 나머지 셋을 합한 것보다 더 큰 보람을 준다고 말할 것이다. 헤비타트를 도와주는 또 다른 종류의 봉사자들이 있다. 이런 자원 봉사들을 '헤비타트의 집시들'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다. 잭과 로이스 월터스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트라이언에 근거지를 둔 명예퇴직자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가까운 헤비타트 지회인 헤비타트 운동 온대지방 지회를 위해 성실히 일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매년 몇 달 동안 커다란 개 한마리를 끌고 전국의 헤비 타트 사업장을 누빈다. 정차할 때마다 트레일러를 작업현장 근처에 주차하고, 일주일이 나 한 달 정도 묵다가 다음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세라믹 타일을 깔거나 차고를 팔거나 새로 입주할 가족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 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로이스는 "재주란 재주는 모두 써봤어요. 갖 고 있는지도 몰랐던 재주까지 긁어내서 말이죠!"라고 말했다. 1986년이 되자 잭과 로이 스가 일해본 사업장이 적어도 스물세 군데가 넘었는데도, 그들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 다. 미시간 주 오네카마 출신의 데이빗과 메어리 조세프 부부는 1982년에 처음으로 자원 봉 사 위해 아메리쿠스를 찾았다. 그 후 그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를로리다, 미시 건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했으며, 아메리쿠스에도 몇 번인가 더 왔다. 조세프 부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특히 헤비타트 가족들과 나란히 일할 때 생기는 끈끈한 우정을 좋 아한다고 한다. 새로운 주인이 입주한 뒤 다시 그 곳을 찾아가서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 이 몹시도 기쁘다는 것이다. 사업장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데이빗과 메어리가 방문할 장 소의 목록도 길어질 것이다. 조세프 부부가 헤비타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1981년 뉴 햄프셔 주 라코니아의 리타와 앨 라플램은 50년 동안 가업으로 내려오던 제과 점 사업을 처분했다. 여생을 아둥바둥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면서 살기로 결정했던 것이 다. 그들은 이동주택을 끌고 길을 떠나 니타의 남동생인 폴 뒤퐁을 만나러 아메리쿠스에 들렀다. 폴은 당시 우리 건축인부의 십장을 맡고 있었다. 평생 못 한 번 막아본 적이 없 다고 실토한 앨은 폴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앨 과 리타는 현재 짓고 있는 집에 들어가 살 가족들이 옛날에 살던 끔찍한 판잣집들을 둘 러보고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라플램 부부는 결국 한 달 동안이나 아메리쿠스에 머물 렀고, 그 후 12개 주의 헤비타트 사업장을 누비며 시간이 나는 대로 일을 했다. 이 훌륭한 동역자들 하나 하나는 로저와 바바라 크로스 부부의 표현대로 '헤비티티스'의 사례들이다. 로저와 바바라는 로체스터, 뉴욕, 이모칼리, 프로리다를 돌아다니는 헤비타 트 집시들로서, 오랫동안 어느 곳에서나 그 진가를 발휘해왔다. 로저는 '헤비티티스들은 더 많은 모르타르에 더 많은 사랑을 퍼부어야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떠돌이 헤비타트 자원 봉사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집을 지 으며 함께 나눈 경험들과 그 사이 사귄 수많은 친구들에게 빛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다. 로이스는 그 심정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헤비타트는 제가 가져본 직업 중 최고의 보람을 주는 직업입니다!" 로이스의 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잇다 .빈부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나 우리 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비전'이라는 것이다. 자원 봉사들과 새 집 주인을 포함한 헤비타트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비전을 간직하게 도니다 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리와 린다 버그는 1982년에 북부 뉴욕 주에서 담당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 기로 했다. 그들은 두 자녀와 함께 1년 동안 자원 봉사 하기 위해 아메리쿠스로 내려왔 다. 버그 부부는 그 사이에 끊임없는 성장을 거듭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꿈과 노력이 한데 합치면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되는가'를 발견했다. 우리와 함 께 하던 나날들이 끝나갈 무렵, 게리는 캐나다 국경 근처인 뉴욕 주 멀론에서 연합 감리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제의받았다. 버그 부부는 그 곳으로 떠날 때 그들의 꿈도 가지고 갔다. 2년 후 헤비타트 북부지역 지회가 뉴욕 주 멀론에서 발족했고, 이 사업에 대한 후 원이 늘어나자 게리와 린다는 "헤비타트 사업고 ㅏ그 정신은 뉴욕 북부에서 사람들의 삶 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게 호언장담했다. 미시간 주 캘러마주의 캐티 올포드는 1986년 2월에 헤비타트의 입주자가 되었다. 공장에 서 야간근무를 하던 캐티는 낮 시간 동안 자신의 집이 지어지는 한 단계 한 단계를 빠짐 없이 지켜본 충실한 헤비타트의 동료 일꾼이었다. 그녀는 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 면 데리고 와서 청소와 페인트칠을 돕게 하기도 했다. 입주한 뒤에도 캐티는 이 일을 그 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 역시 비너에 사로잡힌 것이다. 케티는 자신이 만난 모든 이들과 나눈 기쁨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했고, 입주하기 오래 전부터 다음 건물을 짓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앞으로 헤비타트가 짓는 집이 있으면 무조건 힘을 보탤 거 예요!" 헤비타트인들이 일단 비전을 갖게 되면, 곧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비전을 전파하는 일에 착수하게 된다. 인디애너 주 프리랜드빌 출신의 오스카와 리디아 버거 부부, 그리고 오 하이오 주 아이언턴 출신의 데일과 잰 크리스터 부부는 이 일을 충실하게 실행했다. 몇 년간 이 두 부부는 자기네들끼리 조직한 10여 개 남짓의 근로봉사대를 이끌고 아메리쿠 스를 방문했다. 그들이 올 때면 새 참가자는 물론 몇명의 경력자들도 다시 돌아오곤 했 다.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1985년 데일과 잰은 켄터키와 오하이오 주의 이웃 도시들을 맡게 될 애쉴랜드 - 아이언 튼 지구 헤비타트 운동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곧바로 잰은 1986년 캔사 스까지 1,000마일 걷기운동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에 들어갔다. 캐나다의 '실천하는 신앙회'의 이사인 조지 앤더슨은 1984년 헤비타트 건축을 돕기 위해 아이티로 아이티로 날아갔다. 집에 돌아올 때 그는 자신이 체험한 봉사의 기회 자체에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그 비전으로 국가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지는 기금을 연출하고 캐나다 전역에서 아이티로 갈 근로봉사대를 모집했다. 1986년도 가 되자 이미 일곱 그룹이 근로봉사에 참여해 아이티를 다녀왔고, 미국 국내는 물론 아 이티와 중남미로 갈 노동 수련 캠프를 기획했다. 그는 또한 1985년 카터 대통령이 인솔 한 로우어 이스트사이드 노동수련캠프에 4명의 참가자들을 소개했다. 조지는 전국 10여 군데에서 설명회를 가지면서, 청중들에게 그의 꿈을 털어놓았다. 캐나다가 서방에서는 두 번째로 헤비타트 운동ㅇ르 대규모로 전개하는 국가가 되도록 하자는 꿈이었다. 그 꿈 은 1985년 가을 이사회에서 실체를 갖추게 되어, 미합중국 ㅂ에서는 최초로 헤비타트 국 가본부가 인가되었다. 캐나다 헤비타트 운동본부가 발족한 것이다. 미주리 주 캔사스 시티의 존 프리차드는 이사회의 재정담당이자 캔사스 시티 사업을 처 음 주창한 장본인이다. 프린스턴과 하바드에서 학위를 받은 성공적 사업가인 존은 1979 년 반쯤 은퇴하다시피 하고 모든 정력을 헤비타트에 바치기 시작했다. 1982년 존과 그의 아내 메어리는 우리 부부와 함께 헤비타트 사업장과 파푸아뉴기니, 파키스탄, 케냐, 우 간다, 그리고 자이레 등지에 현재 컴토중인 부지를 돌아보았다.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 나고, 비참ㅅ한 참상을 목격한 우리들은 헤비타트 사업을 계속 확대해 나가야겠다는 결 의를 새삼 다지게 되었다. 오랜 여정을 마치고 귀향하던 길에 마지막 들른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미국 프러테스 탄트 교회에서 연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에 존은 북받치는 열 정에 가득찬 짤막한 연설을 했다. 그는 그들 부부가 지금 방금 평생 가장 잊지 못할 연 설을 했다. 연설을 끝내던 그의 힘찬 말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제껏 부자들을 위해 별장을 지으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 여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을 지으며 살려고 합니다." 크기와 연령과 인종과 재능의 유무를 떠나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헤비타트를 찾아오고 있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소박한 집을 지어주기 위해 시간과 능력을 바칠 결심만 한다 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꺼이 당신에게 밭길 일거리가 있다. 그러나 정말로 참여하고 싶다면 조심해야 한다. 이 참여는 당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 이기 때문이다. 9 망치의 신학 여러 모로 따져볼 ㄸ 지금 있는 자원으로도 충분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 게 집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건축자재가 풍부하게 널려있다. 물론 필요한 물품이 특정현장에 당장 조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보다 집을 지을 때 창의성이 더 필요 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필요한 물자는 조달 가능하다. 더구나 세상에는 모든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도 남는 돈이 있다. 대저택을 짓자는 이야 기가 아니다. 사우나와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딸린 부유한 빌라를 짓자는 이야기도 아니 다. 그저 모든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작지만 쾌적한 집 한 채씩을 짓자는 말이다. 그럴 만한 돈은 충분히 있다. 인력 또한 풍부하다. 지구상에 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미 널빤지를 톱질하고, 모르타 르를 섞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고, 못을 박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집 짓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집을 짓는 데 꼭 능수능란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는 땅에서 솟아올라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서 달까지 닿을 만한, 아니 달 보다 더 높은 고층 건물을 지을 줄 아는 사람들도 있다. 아예 터를 닦을 필요도 없이 공 중에 둥둥 떠다니는 구조물을 짓기도 한다. 그러니 옛날처럼 터를 닦고 단순한 집을 한 채 올리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인구를 수용할 새로운 종 류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수요에 따라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다. 물론 독창성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간적인 주거지를 위한 국제연합 센터'에서 후원하는 '부주택자를 위한 보금자리 마련 의 해' 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는 존 E. 콕스는 <에키스틱스>(Ekistics, '인간적인 주거 지 문제와 과학'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따 제목을 정한 이 잡지는 주택공급의 전세계적 수요와 경향을 연구한다. 아테네 기술기구가 그리스에서 발행하고 있다)의 1984년 7-8월 호에 논문을 한 편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콕스는 세계 전역의 빈민들에게 주택을 공급 하는 일의 어려움을 힘주어 강조하고 이 어려움을 해결할 일곱 가지 전략의 핵심을 열거 한 후, 다음과 같이 놀랄 만큼 낙관적인 발언으로 끝을 맺었다. "빈민을 위한 주택공급 은 단순히 해결가능한 문제일 뿐 아니라 20세기가 가기 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솔직히 나는 콕스의 시간표에 휘의적이다. 아무리 노력을 쏟아붓는다 해도, 2000년에도 여전히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엄청난 진전 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빈민을 대하는 태 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인류의 천재적 창의성을 한데 모아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주택건설에 대한 창의적인 연구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세키수이 헤임 회사에는 도요타가 자동차를 뽑아내듯 주택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여섯 개나 있다. 컴퓨터로 개별 주택을 설계하고, 공장에서는 각 방의 크기에 맞는 부품을 제 공한다. 이 부품은 로봇의 손으로 제작되어 주택부지로 운반도니다. 이 회사는 45분마다 한 채씩 집을 짓는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조립주택 건설회사는 미사와 주택이다. 이 회사의 회장인 치요지 미사와는 미래의 주택건설 자재는 실리콘과 세라믹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 리콘은 평범한 모래에서 추출하고, 세라믹은 모래와 진흙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세계 최 초의 세라믹 주택을 마케팅하고 있는 미사와 주택은 외벽을 PALC(미리 주물을 뜰 수 있 도록 고압처리한 경량 세라믹)라는 건축자재를 사용해 주형해낸다. PALC는 규토와 석회 암으로 만드는데, 원료는 모두 공장 근처에 이쓴ㄴ 언덕을 파서 충당한다. 빈민을 위한 조립주택은 남아메리카 콜럼비아의 '세르비비엔다'('저비용 주택공급 재단' 으로 번역할 수 있다)라는 기구에서 시범적으로 차용한 적이 있다. 나는 1978년에 이 단 체의 주요 생산 시설을 답사했다. 수도인 보고타에 본부를 둔 세르비비엔다는 천주교 신 부인 히메네즈 카데나가 창설했다. 본부에서 얇은 콘크리트 패널을 대량을 생산해서 트 럭에 싣고 각 건설부지로 운반한다. 수혜자 가족은 그 전에 부지를 준비하고 콘크리트 슬라브 바닥을 깔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몇 시간 뒤 집 한 채가 뚝딱 지어지는 것이다. 대규모로 건축을 한다 해도 자원과 기술력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너무 약하기 때문일 뿐' 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적인 주거지를 위한 국제연합 센터'의 부사무총장이자 실무이사인 아콧 라마찬드란 박사는 1984년 11월 2일 워싱턴 D.C. 에서 개최된 국제 주택공급회의에서 한 연설을 통 해 부동산업계가 나서서 세게의 주택공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그들 만큼 상황을 이해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어놓을 만한 세력은 없다고 만한 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했다. 무엇보다 부동산중개업자들은 개발할 만한 땅을 알아보고 집계하고 예비하는 일에 경험 이 많지 않습니까? 또 부지를 거래하고 법적 문제들도 도맡아 처리하지 않습니까? 게다 가 온갖 종류의 개발계획에 투자지원과 재정적 후원을 물색하는 것도 이들의 일이 아닙 니까? 수많은 국가에서 정부가 항시 증가하는 도시인구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토지 시장에 대거 개입하려 할 때 마다,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고문역을 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빈민들의 토지소유권 문제에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요? 저 임금층에게 주택부지를 공급할 수 있도록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대규모 조치를 취할 수는 없을까요? 부동산 중개업자뿐 아니라 사회의 다른 단체나 개인들도 최소한 빈민들이 먹고 살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소박하고 쾌적한 집ㅇ르 마련해주는 일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정말 의지와 욕구의 문제이다. 미합중국에서는 헤비타트 외에도 많은 민간기구들이 주택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뜻깊은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 단체는 '앤터프라이즈 재단'과 '느헤미아 플랜'이 다. 전자는 워싱턴D.C. 의 '구세주 교회'가 펼친 '쥬빌리 주택공급계획'을 모체로 탄생 했다. 전국저긍로 유명한 개발사업가 제임스 라우즈가 설립하고 메릴랜드 주 컬럼비아에 본부를 두고 있는 엔터프라이즈 재단은 1986년 당시 25개 도시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 었다. 그 중 가장 야심찬 기획은 테네시 주 차타누가에서 진행중이던 프로그램으로, 이 단체는 1995년까지 이 지역에서 기준미달의 주택을 완전히 추방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두 고 있었다. 라우즈에 따르면 엔터프라이즈 재단의 목적은 "단순히 극빈자들의 주택공급문제에만 매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들과 발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며, 한 세대 안으로 빈민들에게 적당한 집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한다. 느헤미야 플랜은 1980년 이스트 브루클린 지역의 50개 교회가 합동으로 설립한 단체로 서, 브루클린에 있는 폐허가 다 된 인접지역들을 회생시키고자 일해왔다. 이들의 사업은 브루클린 동부에서 만 5,000채 이상의 주택을 짓는다는 비전과 함께 출범했다. 창립후 6 년 만에, 이 단체는 시에서 기부한 부지에 300채 이상의 집을 이미 준공했다. 이 주택들 은 수익금 없이 건축비용(대략 50,000달러를 약간 넘는다)만 부담하면 되고, 뉴욕 시에 서 10,000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해주며 세금감면 혜택도 받을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되팔 때는 모두 즉시 반납해야만 한다. 구입자들은 계약금5,000달러만 지급하면 된다. 잔액은 집을 담보로 삼아 뉴욕 주로부터 시중보다 낮은 금리의 대부를 받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극빈자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자금조달방식으로는 적절한 집을 마련할 처지가 못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교회 세계 봉사기구', '메노파 중앙위원회', '연합 감리교 구제 위원회' 등등 수많은 기독교관련단체 역시 전세계적인 주택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루지 주 컬럼비아에 본부를 둔 '창조적 사역'은 연합 감리교회의 기구로서 특히 제3세 계의 빈민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망명자들을 위해 작은 이동주택을 개 발했다. 많은 비종교단체들도 역시 저비용주택의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활동하고 있다. '협동주택 재단'은 원싱턴 D.C.를 본거지로 삼고 1952년부터 미국과 해외에서 저소득층의 주택문제 를 위한 개발게획을 기획, 추진하고 있으며, 전 미국인에기 적절한 집을 마련해주기 위 해 전국적인 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재 어도비 벽돌, 즉 태양건조 벽돌을 시험하고 있는 이 단체는 토건의 기술적 방법을 개선하여 저렴하면서도 내구성 있는 저 가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게에서 현재 진행중인 민간단체와 정부의 모든 기획과 사업을 전부 합쳐도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이러한 단체들의 노력은 일회용 밴드 노릇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수백만의 백성들이 이토록 참혹한 상태에서 허덕이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안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는 질병의 외부적 증후 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적 자아를 깊이 살표보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 치유할 때에야 비로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재능과 능력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런한 선물들을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사야의 강력한 말씀을 다시금 곱씹을 필요가 있다. 장차 말하기르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 라"하리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르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를 인동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가" 하셨느니나(사 57:14-19). 성경을 넘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생명의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사야가 잊지 못할 웅변 으로 말했듯이, 빈민과 압제받는 자들을 도울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나 님은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하셨다. 성경은 어려운 이들을 도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 는지 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모세는 부를 누리는 사람들을 경고했며(신8:11-14,17-19),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부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예언을 남겼다(얌 6:4-8). 또 세례요한 은 세레를 받고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 나무라고 소리높여 외쳤 다(눅 3:7-11). 이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가난한 이들이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주는것, 회개하는 마음으로 행사는 것. 그럴 대 세상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죄많 은 삶에서 돌이겼다는 사실을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성경 전체에 걸쳐, 주님을 섬기는 일과 가난한 이를 돔는 일은 서로 한데 얽혀 있다. 인 색한 부자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성경말씀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무서운 이 야기는 바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 고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였다'고 하셨다. 이 부자가 누구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마을에서 잘 알려진 유지였음이 분명하다. 여러 개의 사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일 수도 있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일 수도 있고, 인기 있는 연예인일 수도 있다. 또 '여자를 잘 만난'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부자의 문 앞에는 어떤 거지가 있었다. 아무도 그를 모를 뿐 아니라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 그 대로 이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이야기의 특별한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름 없는 쪽은 오히려 부자였던 것이다. 부자는 '부자'일 뿐이다. 그러나 가난한 거 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다. 그는 주님이 알아주시며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언뜻 스쳐 지나가기 쉽지만 깝짝 놀랄 만한 측면이 하나 더 있다. 부자는 사실 꽤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기적으로 나사로에게 식탁에서 남는 음식들을 주어 배를 채우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사실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다시 찾아 오지 않는 법이다. 부자는 남은 쓰레기들을 마당에 파 묻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 다면 불쌍한 거지가 계속 돌아와 아름다운 풍경을 망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부자는 실제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관심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한 것이 문제 였다. 그의 관심은 남는 부스러기 몇 조각을 던져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배려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아 주셨을까? 누가복음의 설명은 적나라하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눅 16:23). 최근에 이 강력한 이야기의 신랄함을 상기시켜주는 일이 있었다. 얼마 전 아메리쿠스의 부유한 유지인 한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밑고 끝도 없 이 돼 도로시의 집을 지어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어떤 도로시 말입니까?" "아시잖아요, 도로시 말이에요." 나는 내가 아는 도로시가 여러 명 된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 8년이나 있던 하녀 도로시 말이에요!"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혹시 성을 아시나요?" 여자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당신 사무실 근처에 사는 도로시를 모른단 말인가요?" "아, 그 도로시!" "자, 그럼 왜 도로시 집을 짓다가 말았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도로시의 집 건축은 잠정적으로 연기되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집을 짓 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 기부금을 주시면 도로시의 집 공사가 한층 빨리 진척되리가고 넌 지시 이야기했더니 마구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이 여자의 배려는 하녀의 집공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정도를 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만큼의 관심은 없었던 것 이다. 당신은 빈민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름을 아실 만큼 깊은 배 려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보통의 부자로서 이 세상에서는 잘 살아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려 하는가? 당신은 실질적으로 희생을 감수하면서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모두 채운 뒤에야 남을 생각하기 시작하 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깨워 주신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 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 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사로와 도로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은 쉽게 한두 마디 하고 남는 것을 좀 던져주는 정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실질적인 선 물을 주고 의미 있는 행동을 통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재산의 절반을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눅 19:8). 또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젊은이에게 재산을 전부 가난한 이에게 주고 그를 따르 라고 말씀하셨다(눅 18:22). 또한 늘어나는 재산을 쌓아두기 위해 점점 더 큰 헛간을 지었던 부유한 지주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종류의 탐심에도 미혹되지 않도록 경고하셨다(눅 12:15-20). 초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했다(행 4:34-35). 사도 바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문제에 대해 특별히 자세히 설명했다(고후 8:13-15).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내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즐거움을 누릴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이 땅과 이 땅의 즐거움은 모두 주님의 것 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어야 한다.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이 웃의 어려움을 내 것처럼 알고 우리 스스로에게 하듯이 이웃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말씀과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 록 가르치셨다(마 6:10). 이 말씀을 재산 문제에 적용해보라. 천국에 과연 빈부가 있을 까? 어떤 사람은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비만이 될까봐 매일 걱정하고, 다른 사람은 목숨 을 부지하기 위해 허접쓰레기를 주워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어떤 사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난의 지옥구덩이에서 허덕이는데, 한쪽에서는 특권을 누리는 소수층이 영 원히 부를 만끽하는 그런 천국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오 ㅏ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천국에서 우리가 살 곳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나는 장례식에서 이 성경말씀을 경건하게 읽는 것을 많이 들었고, 사실 이 말씀은 그런 자리에 참 잘 어울린다. 하나님께서는 저세상에 그 백성들의 자리를 예비해 두셨다. 사 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에게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을 그런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들려주신 핵심적인 이유 를 놓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사도들에게 저편에 준비된 자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은 남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천국의 헤비타트 운 동을 맡으신 것이다. 이것은 '이제 완벽한 집이 지어지고 있으니, 이 문제를 걱정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주님게서는 사도들이-또한 우리들이-이 땅에서 하나 님의 충실한 대리인이 되는 데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를 바라셨다. 천국의 집을 약속하신 뒤 곧바로 이어지는 놀라운 약속들을 들어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이 약속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두 번 더 반복된다. 예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이 약속은 당신에게도 적용된다. 당신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 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너무나 믿기지 않는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은 그의 말씀대로 끊임없이 구하고, 주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넓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과실이 항상 있게 하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맺을 과실 중 하나는 집을 갖지 못한 자에게 집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 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이나 금식은 '낯선 이를 초대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 서는 이 가르침ㅇ르 거듭 말씀하시며, 남을 초청하는 것은 곧 주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 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헤비타트 운동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낯선 이를 '초청'한다. 우 리는 낯선 이를 위한 집을 지어 그들도 다른 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기쁜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삶은 신비로 가득차 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다. 그러나 삶에는 목적이 있 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부르셨듯이 나를 부르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나누고 섬기는 기쁨에 동참하게 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받은 무르심은(나는 이 것이 당신의 부르심이 되기를 바란다) 전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집 을 지어주고 다시 짓고 고쳐주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다. 헤비타트에서는 가난한사람들에 관한 성경의 이 모든 가르침을 '망치의 신학'으로 집약 했다. 이것은 우리가 망치를 도구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세례나 성 찬의 방식이나 기도회를 갖는 요일이나 목사의 복장은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주님 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복음의 절대명제에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 다. 우리는 가난에 허덕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집을 짓는다는 생각에 동의하며, 이 윤도 이자도 없는 성경적 경제원리에 다르자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했던 설교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교황은 '인간적 주 거지를 위한 국제연합 센터'의 활동을 거론하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나서 가 난한 이들에게 음식과 살 곳을 제공하기 위한 국제적 원조와 협력을 당부하였다. 우리는 집 없는 이의 얼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께서 보여주신 너그러운 희생정신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인간 이하의 환경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동시에 좋은 뜻을 가진 모든 이들과 기쁘게 손을 잡고, 오늘날 절대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수백만의 인구에게 적 당한 주거지를 제공 해 주어야 한다는 이 뜻깊은 움직임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오로6 세는 "개발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다"고 했습니다…. 음식과 주택을 마련해주기 위한 프로그램은 평화를 도모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평화는 호의와 신뢰와 끊임없는 노력 을 통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국제 기구와 정부, 민간단체가 어려운 이들 에게 음식과 살 집을 마련해주기 위한 상식적인 노력에 매진할 때, 그리고 환경을 개선 하기 위해 함께 힘을 합쳐 일할 때, 그들의 노력을 통해 평화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재산과 시간과 생각을 나누라는 성경의 명령은 선택조건이 아니라 필수조 건이다. 철학적 신착적 차이를 떠나 오직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돕는 것은 의로 운 일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신학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데 동의했다고 믿는다. 자, 이제 가서 망치를 들자. 10 이런, 미친 생각이 효과 있잖아! 헤비타트 운동은 미친 생각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상당수의 회의론자들은 이윤 도 챙기지 않고 저소득층에게 집을 팔며, 이자도 물리지 않고, 정부기급 없이 전세계적 으로 건설사업을 벌이고, 거의 무급으로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몇 주일, 몇 달, 몇 년씩을 할애해 일을 한다는 것들이 모두 미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의 계명와 약속에 튼튼한 기반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다. 그리고 노아, 여 호수아, 다윗, 기드온에게 하신 말씀처럼 아무리 그 당시에는 황당하고 미친 소리처럼 들려도 결국은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회의론자들을 더욱더 헷갈리게 하는 것은 헤비타트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전세 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사실이다. 문화와 언어와 경제체제의 차이가 보편적인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그 진실은 바로 모든 사람은 쾌적한 보금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지역이 어디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함께 뭉쳐 집을 짓고자 하면 그 노력은 언제나 헛되지 않았다. 몇 가지 예를 짤막하게 소개하겠다. 우리와 함께 인디애너폴리스까지 걷기 운동에 참가했던 페루 엔지니어인 제논 콜크 로하 스는 1981년 태양열 에너지 프로젝트 때문에 뉴 멕시코로 갔다. 그때 어떤 친구가 헤비 타트 운동을 이야기해 주었고 제논은 조국의 동포들을 위한 협동주택 사업의 비전에 감 화되었다. 그 이후 그 비전은 점점 더 커졌다. 티티카카 호수(세계에서 수심이 가장 길 어서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인 이 호수는 해발 2마일이 넘는다고 한다)변 남부 페루의 안데스 산맥 위헤 있는 푸노시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 뒤로 이 운동은 인접한 마나조 마 을로 확산되었으며, 후에는 역시 인접도시인 훌리아카로 이어졌다. 이 지역에 사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평생 처음으로 쾌적한 집을 갖게 되었고, 사업은 아직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1984년에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출신의 자원봉사자 켄 밴 다이크는 푸노 시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일을 다음과 같이 편지로 써보내 주었다. 키가 작고 탄력이 넘치는 어거스틴 랑크는 꼭 춤추는 곰을 연상케 합니다. 어느 날 그가 꼭 뭔가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제 책상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창고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스터 케니, 오늘 우리 집에 지붕을 올린대요!" 그는 누군가에게 그 흥분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던 겁니다. 푸노 헤비타트 지회에는 약 100여 세대가 있스빈다.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헤비타트 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습니다만, 자주 봐서 그런지 제게는 어거스틴의 가족들이 아주 특 별합니다. 5년 동안 아내와 5명의 자식을 거느린 어거스틴은 물도, 배변시설도 없는 방 두 칸짜리 어도비벽돌집의 단칸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가끔씩 어거스틴은 집을 떠나 다 른 지방에 가서 일을 찾기도 했습니다. 1983년 그들은 헤비타트에 가입했고, 어거스틴은 우리와 함께 일하러 이 곳으로 왔습니 다. 여섯 달 동안 어거스틴과 가족들은 건설현장에 있는 어도비 오두막에 살면서 건축자 재와 집을 지켰습니다. 우기 중에는 마루에 물이 가득 찹니다. 임시 창고건물로 쓰고 있 는 그들의 집 골조를 올릴 때, 랑크 가족은 뒤편 침실로 이사를 했습니다. 11월 하순 영 원히 자기 집이 될 집으로 이사하면, 그들은 이 단지에서 헤비타트 집을 수혜받는 열일 곱 번째 가족이 됩니다. 랑크의 집은 470평방인치 넓이로, 침실이 둘 딸려 있고, 식당겸 거실공간이 있으며, 부 엌과 목욕탕이 있습니다. 목욕탕은 한동안 창고로 쓸 계획입니다. 아직 집에는 하수도와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샘물을 받아 쓰는 20,000갤런짜리 물탱크가 있어서 거리와 공동화장실에 파이프로 물을 댑니다. 푸노의 빈민지역치고는 환경이 엄청 나게 개선된 셈이지요. 언젠가는 상수도, 하수도, 전기, 학교와 놀이터, 상업지구까지 건설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15에이커에 달하는 이 단지의 언덕들을 고르고, 거리를 구획하고, 어린 가로수 묘목을 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가족은 자명종 시계를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매일 아침 동틀 때면 손수 레 소리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헤비타트 가족들이 벌써 새로운 공동체를 지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업에 참가하는 사람 중에는 게으름뱅이가 없습니다. 당신처럼 헤비 타트의 비전을 믿고 실현하려는 수많은형제 자매가 있을 뿐입니다. '망치의 신학'이 엉터리처럼 들리는가? 그러나 효과는 훌륭하다. 뉴 멕시코 주 글렌우드의 아트 러셀이 지역 헤비타트 본부를 발족하러 1982년 아이티 듀 메이에 갔을 때, 그가 처음으로 고향에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사전을 뒤져야 했다. 그 는 그 지역 주민들이 사는 딱한 집들을 "연주창에 걸린" 집들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그 말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1)임파선의 결핵질병과 유사한 2)도덕적으로 타락한'이 라고 쓰여 있었다. 몇 달 뒤 듀메이를 방문했을 때, 나는 아트의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집들은 끔찍스러웠다. 사실 듀메이 주변지역의 가난은 너무 지독해서, 새 집에 맞 는 자격조건을 갖춘 사람을 거의 한 명도 찾을 수 가 없었다. 따라서 입주할 가족들을 제비 뽑아야 했다.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휘저었다. 그리고 첫 50가구에 입주할 가족 들을 호명했다. 자원봉사와 지원물자가 추가로 아이티에 도착하면서 이 소박한 집들은 1 주일에 한 채꼴로 꾸준히 늘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2차로 다른 50세대의 입주가족을 한 번 더 뽑았다. 입주한 가족들의 평균소득은 1년에 500달러에 불과했다. 회의론자들은 그런 소득 수준으 로 집을 산다는 건 얼토당토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듀메이에서는 수십 세대가 자 기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의 집은 건축비용 1500달러에 야외 배변시설로 100달러의 배 용이 더 들었다. 그들은 20년 할부로 1년에 약 80달러씩만 부담하면 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비용부담조차 이들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성공적으 로 해내고 있다. 연주창 같은 곳에서 튼튼하고 안전한 집으로 옮길 때마다 듀메이의 새 로운 입주자들은 수많은 감사기도를 올렸다. 로저와 바바라 스넬러 부부, 그리고 그들의 어린 딸들은 인디아 남부 카맘에서 코라반다 아자리아 라자네코라라오(다행히도 우리들은 그냥 '아자리아'라고 부르면 되었다)와 한 팀이 되어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을 시작했다. 예전에 평화봉사단의 급수, 위생, 보건 프 로그램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로저와 바바라는 1983년 인디아의 첫 헤비타트 사업에서 2 년간 자원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자리아는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남부 인디아 교회의 복음주의자로서 마을 목사들, 병원환자들, 그리고 양로원과 힘을 합쳐 일했다. 그는 헤비타트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고향에도 기독교 주택보급사업을 도입해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카맘에는 2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헤비타트가 집을 짓기 시작한 지역에서, 주민들은 연평균 300달러의 소득을 올렸다. 가족들은 소득액에 따라 방 두 칸에 차양이 달린 현관이 있는 830달러짜리 집이나, 방 세 칸에 차양이 달린 현관이 있는 1450달러짜 리 집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바위를 운반하고 벽돌을 만드는 일에는 비단 입주예정 자들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이 새로운 모험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다른 공동체와 동역관계가 형성되었다. 남부 인디아의 세인트 메리 교회 주일학교 10대 학생들이 와서 터를 닦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8명의 대학생들이 나타나 더 깊이 터를 팠다. 또 하루는 일단의 카맘 보이스카웃들이 나타나 트럭이 갈 수 없는 언덕 위까지 50 야드에 달하는 인간 사슬을 형성해 모르타르를 나르기도 했다. 필요가 너무나 절실한 이 땅에서 비전이 날로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가슴이 뛴다. 데이빗 로우가 첫 16채 헌정식을 위해 1985년 카맘을 방문했을 때, 그 역시 흥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새로 지은 집들은 아름다웠고, 튼튼해 보였다. 헌정식에서 한 정부관료가 데이빗에게 다가와 헤비타트는 어떻게 그렇게 저비용으로 좋 은 집을 짓는지 비결을 물어왔다. 데이빗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모르타르에 사랑을 섞는답니다." 이 말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인이 힌두국가의 이슬람 교도에게 예수 경제 학을 설명하려면 말을 아주 잘 골라서 써야 했다. 데이빗이 설명을 끝내자 그 관료는 카 맘에서 단순히 집을 짓는 것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고 한 다.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으로 집을 짓고 기도를 계속한다면, 그는 언젠가 우리의 미친생각 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 이유를 정말로 깨닫게 될 것이다. 헤비타트는 세상사람들이 완전히 돌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뜻깊은 성경말씀을 실천 에 옮기고 있다. 그것은 십일조이다. 구약시대부터 성경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서 나그네들과 이웃에 사는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나누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 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레 27:30-32, 신 14:22, 28-29). 헤비 타트 사람들은 십일조가 실제로 풍요로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십일조의 가장 좋은 점은 끊임없이 주게 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헤비타트의 후원자들은 매달 받는 상환금이나 월세의 십분의 일을 내놓아 가난한 가족이 집 한 채를 얻을 수 있 도록 돕는다. 새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집세를 내면 그 돈은 즉각 또 다른 집으로 순환된 다. 매국 내 헤비타트 지회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기꺼이 내놓아 돈이 훨씬 모자라는 해 외 사업장으로 보낸다. 그리고 해외 사업장들은 종종 특별헌금을 내서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에비타트 프로그램을 돕는다. 예수님게서는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분명히 말씀하 셨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귀중한 기회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에서 헤비타트가 짓는 집 한 채의 평균비용은 미국에서 짓는 집 한 채 값의 약 10% 정도이다. 그러니까 미국에 한 채의 집을 준공할 때마다 적어도 해외에 한 채꼴 의 집을 지으면 된다는 말이다. 가끔씩 미국 내 지회에서는 아예 자신들의 십일조를 받 는 제3세계 사업장에 사람을 파견해 '그들의' 집을 짓는 일을 거들기도 한다. 이런 체험 을 통해 축복은 점점 더 커져간다. 1985년, 코이노니아 동지회는 협동주택 사업을 통해 얻은 집세의 십일조를 모두 니카라 과와 우간다의 세비타트 사업에 기부하기로 표결했다. 당시 코이노니아는 16년간 견실하 게 집을 지어온 결과 섬터 카운티에만 155채의 집을 준공했다. 십일조는 매당 1,000달러 에 달했고, 새로운 가족이 입주할 때마다 금액은 계속 증가했다. 뉴욕 시에서 열린 1985 년 가을 이사회 때 개최했던 성대한'헤비테이션'에서 사업대표들은 각자의 십일조를 헌 금했다. 총 4만 달러의 금엑이 모아졌다. 저녁 예배가 되기도 전에 말이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돌리고자 애써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십일조가 언제나 생각지 도 못한 기쁨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약속한 대로이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그 힘을 잘 알고 있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위한 중재자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 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미친소리로 들리는 주님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기류가 불안한 과테말 라, 우간다, 티카라과, 아이티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내란으로 찢긴 나라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려는 노력은 수많은 애로사항과 장애물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가끔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1985년 9월, 우간다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대하 헤비타트의 필수품인 리랜드 덤 프트럭을 압류해 버렸다. 이 쿠데타 기간중에, 굴루의 사업장에서 일하언 우간다 사람들 은 기발한 꾀를 내서 몇 번인가 트럭을 숨기곤 했다. 심지어 무거운 마호가니 목재를 등 에 지거나 서까래를 머리에[ 이고 8,9마일을 걸어다니면서까지 공사를 중지하지 않으려 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자재를 운반해야만 했기 때문에 사업장 대표들은 숨겨진 장 소에서 트럭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고, 꺼내자마자 압류당했다. 헤비타트 위원회는 운전사 조지 오콧에게 군대차ㄹ량 집결지에서 트럭을 떠나지 말고 곁 에서 지키면서 군대의 운전병들이 트럭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라고 일러ㅆ. 3일 후, 군인들을 잔뜩 실은 조지의 트럭은 캄팔라로 가는 길에 게릴라의 총격을 받았다. 앞뒤 유리창은 총알에 산산조각이 났고, 히터 앞바퀴 한 개, 헤드라이트가 총격에 부서졌다. 두 발의 철갑탄이 트럭 뒷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지는 총알이 지나가는 순간 가속페달에서 발을 데어 천만다행으로 다치지 않았다. 어 쨌든 조지는 병력을 싣고 굴루로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헤비타트의 용감한 우간다 직원 제프리 라팀은 군 수비대에 단신으로 찾아가 트 럭 본환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그는 군대의 거물급 인사에게서 앞으로는 헤비타트 사업 장에서 쓰는 트럭을 절대 압류하지 않겠다는 공식문건을 받았다. 이틀 뒤 헤비타트 트럭 은 운반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86년 1월, 우간다에는 또 다른 쿠데타가 발발했다. 우리는 굴루에서 자원봉사중인 윌 과 헐른 브라운 부부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축출된 정부의 고위간부들이 굴루 출신이었 고 당연히 본거지로 도망가리라 추측되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월 1일에 우리는 굳은 신념과 꺾 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 윌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잘 지냅니다! 우간다에서 계속 일을 해나가다 보면 로마서 8장 35절 부터 39절 말씀과 디모데후서 1장 7절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 목수장님과 함 께 문틀 열 개와 창틀 여섯 개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일꾼들은 국민저항군이 굴루로 온 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자기 마을로 돌아갔습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헐 른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전화해서 우리가 무사하다고 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총구 앞에 서서 하나님의 헐젓은 백성들을 위해 집을 짓는 일은 참으로 강력 한 싱앙고백이다. 그리고 동시에 화평케 하는 사역의 빛나는 사례이다. 니카라과의 저먼 포메어즈는 대략 400세대의 빈민가족들이 모여사는 농촌공동체다. 그들 은 흙으로 된 마루에 종려나무 이엉으로 만든 비좁고 벌레가 들끓는 집에 살고 있다. 끊 입없는 정치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몇 명 되지 않는 니카라과의 헤비타트 자원봉사 자들은 커다란 가마를 짓고, 기와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이동제재소를 세웠고, 수제 진흙시멘트 벽돌들을 비축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와 격려'라는 다리를 놓는 일을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자원봉 사자인 수잔 베일리는 편지에서 "이곳 사람들은 너무나 세파에 지쳐 있어요. 그러나 헤 비타트 때문에 무엇인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와 자원과 인내심, 그리고 사랑을 얻 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또 다른 자원봉사자인 짐 혼스비는 헤비타트 건설 일꾼들과 매일 함께 하는 새벽 6시 30 분의 셩경공부와 기도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사람들 중에는 산디니스타(1979년 소모사 정권을 전복한 니카라과 민족해방전선-역자 주)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고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굶주린 사람처럼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습니다. 정치지도자와 군인들, 카톨릭 신자와 복음주의자들, 농부와 선생들이 우리의 설교를 듣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헤비타트 사 업 자체가 하나늬 간증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업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고 믿고 있 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업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유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을 갖게 되 었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는 집터만 닦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리더십도 자라 나고 있는 것입니다. 1986년 2월 8일, 니카라과 사업장은 카트 부부가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과 기타 정부고 관을 대동하고 시찰함으로써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헤비타트 입주자들은 벽돌과 기와 의 제작과정과 이동제재소 시범을 보였다. 카터 대통령과 오르테가 대통령이 각각 벽돌 하나씩을 올렸고, 두 사람이 함께 앙리케 토레스의 집 현관을 올라섰다. 지미 카터는 헤비타트 사업은"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눈에 보이게 나 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니카라과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정의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일하는 기독교 신앙을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가톨릭사제인 외무부장관 미구엘 데스코토가 기도를 인도했으며 오르테가 대통령은 처음으로 헤비타트 집의 주인이 된 두 세대에게 성경을 선물했다. 니카라과에서 우리의 노력이 이 시련으로 점철된 땅에 조금이나마 평화를 증진할 수 있 기를 기도한다. 가끔은 지역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원봉사자들을 일시적으로 철수시키도 한다. 1981년, 아이오와 주 맨슨의 메논파 자원봉사자 로웰과 다이안 버키 부부는 현지의 정치 불안이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과테말라 아과탄에서 철수하고 귀국해 야만 했다. 1984년이 되어서야 콜로라도 주 포트 콜린즈의 데이빗과 베키 쉴 부부가 새 로운 자원봉사자로 아과탄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 작업을 지연하고 심지어 중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이 되자 무려 100여 세대가 옥수숫대와 진흙으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튼튼한 가옥으로 이사했고, 한달에 두세 채꼴로 새 집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과테말라에서 우리의 활동은 성경말씀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의 역할을 잘 보여준 예였다. 헤비타트는 집을 지을 만하지 못한 곳에서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집을 짓고 있으며, 공동 체를 건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참으로 훌륭하다. 아무리 미친 생각 같아도 하나님이 영 감을 주셨다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법칙이 근사하게 실현된 사례를 켄트키 주 파두카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일하는 랜 달 듀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파두카 지역의 어떤 중고차 거래상은 어디를 가든지 애 견 스펜서를 데리고 다녔으며, 대리점 광고에 정기적으로 출연시켰다. 어느 날 랜달은 스펜서에게 트럭 한 대를 기부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스펜서의 주인은 흥미를 느꼈다. 얼마 후, 파두카 헤비타트는 두개의 선물으 받았다. 하나는 중고 픽업트 럭이었고, 다른 하나는 1,000달러의 조건부 양도증서였다. 헤비타트 사람들에게는 남들과 다르게 쓰는 말들이 있다. '휴가'란 보통 일년에 한 번 정도 직장업무를 놓고 쉬면서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 멀리 떨러진 사업장을 찾아가 1,2주 일 동안 건설인부들과 함께 노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무급으로. 또 헤비타트말로 '충분하다'는 말은 풍부하다는 뜻이 아니라,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의미한다. 우 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과 별 볼 일 없어 보 이는 그들의 자원을 몇 배로 불려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주택개발 회사의 영업사원이라면 새로 지은 집에 '숲 속의 빈터'(눈에 띄는 나무가 한 그루 없더라도)라 든가 '휴식처' 따위의 근사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레곤 주 포틀랜드의 헤비 타트 위원회는 그들이 처음으로 지은 집 세 채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틀랜드 동지들은 1983년에 '믿음'으로 처음 낡은 집 한 채를 샀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개축된 집에 꼭 어울릴 가족을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기를 '소망' 했으며, 세 번째 집을 '사랑'으로 지었다. 서부에서 '휴사'온 일꾼들의 힘으로 지어진 이 세번째 집은 특별히 수족절단 수술을 받은 한 할머니를 위해 설계되었다. 할머니는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린다와 나는 딸 조지아에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1985년 10 월, 조지아는 열네 번째 생일선물로 특별한 반지를 받고 싶어했다. 당시 그 애는 우리와 함께 헤비타트 가을 총회에 참석하러 뉴욕 시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가 2주일 동안 로우어 이스트사이드의 아파트 건물에서 일을 하느라 파김치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조지아는 어느 날 뜻밖의 선언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 생일 선물 살 돈을 뉴욕 헤비타트 사업에 주세요." 1985년 10월 11일, 그레이스 감독파 교회에서 열린 대규모의 '헤비테이션' 예배 당일에 나는 딸이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지아가 생일선물로 받을 반지 대신 50달 러 수표를 기부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예배가 끝난 뒤, 예전에 아메리쿠스에서 자원봉 사를 했던 줄리아 맥크레이가 내게 다가왔다. "이걸 조지아에게 주고 싶어요." 그녀의 손에는 돌고래 모양의 아름다운 금반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열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줄리아는 자기가 10년 동안이나 끼었으니 이제 다른 사람에 게 주고 싶다고 했다. 돌고래를 좋아하는 조지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 오후, 헤비타트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브루클린 다리는 건너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헌정식장으로 행진할 때, 녹스빌에서 온 헤비타트 후원자 케이 벤슨이 내 게 다가와 아주 아름다운 석류석 반지를 건네주었다. "이걸 조지아에게 주고 싶어요." 조지아는 깜짝 놀랐지만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두 주일이 지난 후, 나는 앤드루 영과 함께 애틀랜타에 있었다. "지난 주에 홍콩에 갔는데, 내 딸 폴라한테 줄 반지를 사면서 조지아 것도 하나 샀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비취가 박힌 예쁜 금반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밥다고 인사를 한 뒤 조지아가 뉴욕 시 헤비타트에 생일선물을 헌넙한뒤 일어났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앤드루는 알겠다는 듯 킥킥 웃었다. "글쎄, 자네도 알겠지만 성경말씀에 주님께 드린 것은 100배로 돌려받을 거라 하지 않았 나. 조지아가 나머지 반지 아흔 일곱 개를 다 받으면 잊지 말고 나한테 알려주게!" 조지아의 헌금 때문에 조지아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축복을 얼 마나 많이 받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처음에 조지아의 이야기를 듣 고 '미친 생각'이라고 비웃었던 학교 친구들이 다시는 조지아를 비웃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 이 새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한없이 위험하게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헤비타트 사람들은 믿음이 유일한 수단임을 안다. 믿음 은 역사한다. 11 '적절한 기술'을 개발한다 헤비타트의 자원봉사자들은 민첩하고 유능해야 한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최대 한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익힐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특히 전혀 다른 언 어와 문화를 사용하는 해외에서 일하게 되면,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흔히 생기게 마련 이다. 1979년 11월, 뉴저지 세일럼 카운티의 팻 클락은 자이레의 응톤도로 파견되어 공동체 개 발을 돕게 되었다. 팻은 바로 그 해 초 스미스 칼리지에서 정치경제학 전공으로 학부과 정을 마친 참이었다. 처음 몇 달 간, 팻은 그 지역 목수들과 함께 일하면서 헤비타트 집 에 달 문과 창문과 골조 등을 만들었다. 다른 자원봉자가 아파서 자리에 눕자, 팻은 임 시로 자이레 음반다카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사업을 지휘했는데, 여기에서 이 젊고 정력 적인 흑인 처녀는 무려 35명에 달하는 남자 노동력을 지휘해야만 했다. 그 중에 그녀의 학부전공과 연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응톤도로 돌아오자 그 마을 여성들이 문맹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업을 시작하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응톤도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여성들은 손에 꼽을 정도 였다.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작업장에서 일하고 집안일까지 책임지다보니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강의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얼마 되지 않아 불 어, 영어, 그리고 영양학 과정까지 개설되었다. 바느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팻 은 집에서 바느질 강좌를 시작해 마침내 100여 명의 여자들을 불러모으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헤비타트 사업을 후원하기 위한 자그마한 바느질 가게까지 열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모임이 너무 커져서 응톤도에서는 더 이상 모임을 가질 만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 었다. 팻과 12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는 회의를 했다. 그들은 강의 프로그램의 성격 에 꼭 맞게 특별히 설계된 건물을 짓기 위해 엄청난 일을 떠맡기로 했다. 건축에 필요한 40,000개의 벽돌을 직접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팻이 응톤도에 처음 소개한 열처리 벽돌은 그 지방의 진흙으로 빚어 한꺼번에 쌓아서 5,000개씩 구워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자 첫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여자들의 열성이 사그라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그들은 벅차도록 빡빡한 일과에 시달 리고 있었으며, 게다가 여자의 일은 농사일이었고 집을 짓는 것은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처음 두 주일 동안 팻은 매일 아침 혼자서 작업현장에 가서 벽돌들을 '던져넣곤' 했다. 팻이 다른 일들을 하러 작업장에서 내려올 때면, 깔끔하게 빚어진 사각 벽돌이 또 한 줄 정갈하게 늘어서 햇볕에 건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여성 위원회의 위원 한 사람이 팻에게 다가와 정말 놀랐다는 표정 으로 외쳤다. "당신, 진심으로 벽돌을 만들겠다는 거군요!" 처음으로 그녀의 일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어느 벽돌제조업자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들 몇 사람이 정기적으로 작업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성 위원회는 벽돌을 만드는 일을 돕지 않는 사람들은 인기가 좋은 오후 강좌에서 배제하겠다는 방침 을 세웠다. 그때부터 벽돌을 만드는 사람들이 대거 현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벽돌을 던지는 일은 힘든 노동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작업현장 주변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진흙반죽은 세계 어디에서나 인기 좋은 놀잇감이다-엄마 들은 쉬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며 수다를 떨었다. 마을 남자들도 줄기차게 찾아 와 구경을 하면서, 여자들은 벽돌 따위를 만들 수 없다는 굳은 믿음을 내심 확인하고 싶 어했다. 특히 몇 번인가 작업을 지켜본 한 남자는 인상이 깊었던지, 팻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를 걱정한다는 걸 알겠군요. 이렇게 우리와 함께 일하니 말입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같이 일한 적이 없습니다." 1982년 4월 25일, 응톤도에서 여성센터 건물의 헌정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하행사가 열렸 다. 방문객들이 비행기로, 트럭으로, 마상이 카누로, 또 걸어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수도 킨샤샤에서부터 330마일 이상의 거리를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네 시간에 걸친 의 식은 흥겨운 춤과 노래, 감격에 찬 연설과 발표로 장식되었다. 팻은 또 하나의 특별한 선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여성 위원회 위원 12명은 식장 을 떠나면서 자랑스럽게 새 티셔츠를 치켜들었다. 앞면에는 헤비타트 로고가 그려져 있 었고, 뒷면에는 링갈라어로 '바시 나 톤도'(응톤도의 여성들)라는 단어가 꼼꼼하게 수놓 여 있었다. 그 지역의 토산자원을 이용해 벽돌을 만든 팻의 노력은 제3세계의 물적, 사회적 개발에 의미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새롭게 접근한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것이 보통 우리 가 '적절한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헤비타트는 서구세계에서 개발도니 것처럼 노동을 아끼는 자본집약적 기술을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그 반대로 일하려고 신경을 쓴다. 즉 노동은 아낌없이 투자하되 자본을 아끼 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수세대 전의 테크닉으로 돌아가거나, 20세기 후반의 지 식으로 오래 전의 기술을 보강한다. 이것은 또한 팻 클락이 응톤도에서 이룩한 업적처 럼, 그 지역에서 사용가능한 인력과 천연자원을 최대한 철저하게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 다. 헤비타트가 일하고 있는 수많은 나라의 물가인상률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1985년 과 테말라에서는 물가가 300%나 올랐다. 1980년 볼리비아에서 1달러는 20페소였지만, 1985 년이 되었을 때는 무려 30만 페소로 치솟았다! 이러한 경제체제에서 빈민들을 위해 저렴 한 건물을 짓는 유일한 방법은 진흙이나 나무처럼 물가인상요인과 관련되지 않은 토착재 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건척에서 '적절한 기술'이 사용된 좋은 예로 수동 CINVA-Ram벽돌제조기를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컬럼비아에서 개발된 이 기계는 제3세계 전역에서 흙을 가압해 건축용별 돌로 만드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이 기계는 긴 손잡이를 이용해서 진흙반죽에 더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벽돌의 품질을 향상시켰다. 반죽에 소량의 시멘트를 섞 으면 훨씬 더 내구성이 강한 벽돌을 생산할 수 있다. 첫 해외 사업장이 세워진 자이레의 음반다카에서, 우리는 낡고 헐었지만 노동집약적인 전동 벽돌제조기를 복구했다. 그리고 이 기계를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수 년이 지 났지만 그 벽돌제조기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으며, 수천 개의 견고한 건축용 벽돌들을 쏟 아내면서 적도지역의 중심도시에 빈민을 위한 주택의 수를 꾸준히 증가시키고 있다. 동 시에 이 기계는 실업과 불완전고용인구가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지역경제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CINVA-Ram 벽돌제조기는 점차 자이레 지역의 다른 사업장에 도입되었으 며, 현지주민들도 급속히 이 기계를 받아들이고 있다. 1979년 자원봉사자 밥 스티븐즈는 과테말라에서 처음으로 헤비타트 사업을 시작하면서 CETA-Ram 벽돌제조기를 차용했다. 이 기계는 CINVA-Ram을 과테말라 사정에 맞게 개량한 것이었다. 벽돌제조기술은 다트머스 공대생었던 해리 생그리가 1979년 <보코톨라>를 읽고 자이레에 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무렵 또한번 개량의 전기를 맞게 된다. 해리는 귀국한 뒤 몇 년 동안 DART-Ram을 개발하는 데 바쳤다. DART-Ram은 효율적인 노동집약적 기계로서 한 시 간 동안 다른 유사공정보다 훨씬 더 많은 벽돌을 생산할 수 있다. 헤비타트와 몇몇 교회 들이 지원해준 소정의 연구보조비로 해리는 자신의 기계를 충분히 개량, 보완할 수 있었 다. DART-Ram은 헤비타트의 해외 사업장에서 가동실험을 할 수 있었고, 1983년에는 미합중국 특허를 따냈다. 초기 헤비타트 프로그램에서 건축은 시멘트 활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멘트는 가장 널리 보급된 '현대적' 건축자재이지만, 생산과 운반은 석유에 의존한다. 만일 대안을 찾 을 수만 있다면, 시멘트의 의존도를 낮추어서 건축비용을 전반적으로 대폭 인하할 수 있 다. 그래서 헤비타트는 나무땔감을 쓰는 작은 가마에서 소박한 진흙벽돌을 구워내는 기술을 다시 배워보겠다는 시도를 몇몇 군데에서 해보았다. 다만 이 방법에는 훌륭한 진흙과 땔 감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땔감을 구하기 어렵거나 값이 비싼 지역에서는 벽을 올리는 데 가압성형한 진흙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든든한 터에 건물을 제대로 세워서 빗물을 피할 수 있게만 한다면 진흙벽은 몇백 년도 견딜 수 있다! 또한 헤비타트는 제3국가에서 너나없이 차용하고 있는 주름진 슬레이트 지붕을 대신할 만한 자재를 찾고 있다. ('양철'지붕이라고 불리는 이 자재 속에는 양철 성분이 전혀 없 다.) 심각한 화재위험이 있고 벌레, 쥐, 뱀의 온상이 되는 이엉을 제외하면 슬레이트 지 붕은 제3국가에서 가장 선호하며 흔히 볼 수 있는 자재이다. 서구인들이라면 열대지방에서 금속지붕을 올리려는 생각을 선뜻하지 못할 것이다. 맑은 날에는 열기에 숨이 막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다. 그러나 개발 도상국의 저임금 세대에는 이상적인 지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가볍고, 오래 가며, 짓기 쉽고,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최근에 '영구성'의 기준은 계속 내려가고 있다.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원 자재와 운반비용이 하늘 높이 치솟는 바람에, 철지붕의 표준함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ㅅ한 지역에서는 3,4년만 지나면 새 지붕에 녹이 슬기 시작한다. 헤비타 트 임대기간920년)동안 견딜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더구나 금속지붕을 사용하려면 서구에서 공장생산하는 수입원자재에 의존해야 한다. 이 러한 수입 비용과 운반 비용 때문에 집 한 채를 지으려면 지붕값이 절반을 차지하는 경 우도 생긴다. 아프리카의 도시를 걷다 보면 벽은 세워져 있지만 지붕이 없는 집을 수백 채 만날 수 있 다. 가난한 시민이 허리를 졸라매고 절약하면 집 한 채를 지을 벽돌을 살 만한 돈이 생 길지 모르지만, 지붕을 올릴 만한 목돈을 한꺼번에 마련한다는 것을 꿈 같은 일이다! 대안적 지붕자재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시 멘트와 유황을 함유한 천연섬유, 아스팔트를 주입한 나무섬유, 하드우드 슁글, 개량이엉 등이 있다. 니카라과에서는 현지의 노인을 강사로 새워서 젊은 세대들에게 토산진흙으로 스페인식 기와지붕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아이티의 자원봉사자들은 함철시멘 트(철사조각들 위로 진한 시멘트 반죽을 부은 것)로 아치를 지어, 새롭고 저렴한 돔 모 양의 지붕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헤비타트는 전세계의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저렴하고 쾌적한 집을 짓기 위해 노 력하는 한편 '부적절한' 기술이 사용되는 두 가지 주요 영역을 피하고 있다. 첫째, 현지의 참여와 지도가 없이는 사람들이 개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가난한 가구들은 현대적이고 부유해 보이는 가옥에 살고 싶어하게 마련이 다. 만일 특정 자재나 디자인이 유행에 뒤떨어져 보이거나 초라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소득수준을 불문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택보급에 접근하는 헤비타트의 방식은 단순히 적절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상을 의미 한다.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은 '후원'이 아니라'동역관계'이다. 자원봉사자 들은 집을 지음과 동시에 인간관계를 쌓고자 노력한다. 사용가능한 새로운 자재가 있다 면 소개하겠지만 건축형태의 최종적 결정은 현지주민들에게 맡겨야 한다. 만약 어떤 특 정 자재를 사용하라고 명령한다면 가부장적인 태도를 풍길 뿐 아니라, 또 다른 현태의 식민주의가 되고 말것이다. 몇 년 전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한 장로교회에서 연설했던 적이 있다. 그때 동행했던 사 람은 자이레 응톤도의 고향마을에서 사업대표를 맡고 있던 샘 몸퐁고였다. 워싱턴 주립 대학을 졸업한 샘은 외국에서 살아보고 일급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조국으로 돌아와 어 려운 동포들을 돕고자 결심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우리가 애틀랜타의 교회를 방문하던 날, 아프리카 주택보급사업에 대한 강연을 들으려는 조지아텍 건축과 학생들이 꽤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샘과 내가 각기 체험담을 들려준 뒤에 자유질문 시간이 이어졌다. 학생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 짓고 있는 집에 양철지붕을 올리시는 겁니까? 열대지방에서는 건초나 종려가지 처럼 토착적인 재료를 써야 합니다." "자이레 사람들이 양철을 좋아합니다." 샘은 한 마디로 대꾸했다. "하지만 양철은 자이레 문화에 이질적인데요." "저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다른 나라의 아이디어나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많이 봤 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식 건축물을 세우고, 일본 차를 타고 다니며, 피자를 먹지 않습 니까? 이 곳 바닥을 보니 카펫이 깔려 있군요. 카펫은 애틀랜타에서는 쓸 만하지만 열대 지역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양철지붕은 자이레 사람들에게 유용합니다. 그 곳에서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리기 때문에 물이 새지 않는 지붕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샘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어도 젊은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자이레 사람들 이 사는 집을 짓는 데 수입원자재를 쓰는 것은 영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질문을 좀더 받은 뒤 강연은 끝이 났고, 가벼운 다과회가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둘 러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샘이 갑자기 내게로 달려왔다. 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젊은 친구가 왜 그렇게 양철지붕을 반대했는지 알아냈어요. 프랑스 출신이더군 요. 식민주의자였어요!" 두 번째로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영역은 바로 실험이다. 어떤 시 도는 불가피하게 실패 하게 마련이다. 가난한 가족들은 이런 실패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헤비타트 동역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새로운 기술을 설명해 주면서, 인도나 파푸아뉴기니 같은 곳에서 한번 실험해 보 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대답은 똑같다. "철저히 실험을 거친 뒤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요." 대부분의 직업학교들은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교육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개발해놓은 최고의 기술을 찾아내어 이 기술이 제대로 작동되고 문화적으로도 수용될 만한 곳에서 활용하고 자 노력한다. 자원봉사자 루앤 구달은 자이레에 로레나 화덕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는데, 이것은 원래 과테말라에서 CIDA가 처음 개발한 장치였다. 어도비 벽돌을 쌓아만드는 이 화덕의 꼭대 기에는 냄비에 꼭맞도록 구멍을 뚫게 되어 있었다. 로레나 화덕을 쓰면 보통 모닥불을 쓸 때보다 40%의 땔감을 절약할 수 있다. 또한 이 화덕은 여성들이 매일 몇 시간씩 연기 를 들이마시지 않아도 되게 해주기 때문에 결핵과 같은 호흡게질환에 걸릴 위험성을 상 당히 줄여준다. 아이티에서는 주조성형한 콘크니트 벽체를 사용함으로써 건축비용을 파격적으로 감축할 수 있었다. '옛날 방식'의 콘크리트 벽돌로 반든 헤비타트 집 한 채는 1984년 당시 1,692달러의 배욧ㅇ이 들었다. 그런데 주조성형 벽체로 바꾼 뒤에는 총비용이 1,360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숙련된 기술이 없는 가족들도 일을 할 수 가 있어서 협동과 참여라는 중요한 측면들이 한층 강화되었다. 헤비타트는 기존의 건축법을 좀더 참신한 시각으로 해석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 는 비용을 인상하지 않고도 지진과 태풍을 견딜 수 있는 집을 짓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내고자 한다. 우리는 아메리쿠스에 개발도상국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형태의 모델하우스 를 실제 크기로 몇 채씩 지어두고 자원봉사자들이 해외로 나가기 전에 좀더 직접적인 체 험을 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비전문가들이 비전문가들과 함께 일할 때를 위한 소박한 단행본인 <기초건축 참고자료짐>의 간행도 진행중인데, 이 책에는 전세계에서 모은 실행 가능한 기술의 아이디어와 전문적 지식들을 한데 모을 예정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지역에서나 다 통하는 만병통치의 기술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기 술이 적절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1) 현지사회가 이해하고 수렴해야 한다. 2) 현지주민의 능동적 참여를 통해 개발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3) 그 지역에서 저비용으로 사용가능해야 한다. 4) 가능한 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착자원을 활용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5) 현지에서 일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한다. 6)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7)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단순해야 한다. 8) 현지노동자들이 자기 상황에 맞게끔 융통성 있게 개조할 수 있는 구조라야 한다. 9) 로열티, 특허세, 관세 등의 부담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힘겨운 주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극빈주택을 추방하겠다는 엄청난 꿈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꿈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모든 아이디어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 길을 고집할 것이다. 헤비타트에는 결코 변치 않을 건축비법이 하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르타르의 종ㄹ 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속에는 언제나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2 기도와 실천의 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헤비타트 동역자들은 이 말씀을 믿는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함이니라"(요 15:16)와 "너희 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는 말씀은 헤비타 트가 서 있는 믿음의 토대에 놓인 초석이다. 우리는 주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빠짐없이 아침마다 자원봉사자, 방문객, 헤비타트 사무 국 직원들과 함께 기도회를 갖는다. 전세계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임 을 갖는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약속한 축복들을 몇 배로 경험하고 있다. 애팔래치아 헤비타트 지회에서 보내온 1985년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지회 동역자들이 어 떻게 시련을 극복했는지에 대한 짐 빌링턴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올해 3월, 우리는 아주 걱정이 많았습니다. 지원자들의 신청은 시골길만큼이나 끊없이 늘어서 있었고, 지불해야 할 청구서 목록은 그보다 더 길었으니까요! 그 후 열린 위원회에서 우리는 매일 아침 주님께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마다 우리의 사업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을 찬양하는 사업으로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습니 다. 모든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만 2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로빈스로 몰려왔습 니다. 제각가 다양하고 독창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끈질기게 기부금을 위해 기도했고, 마침내 기부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건축기술의 전문적 지식을 요청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이 나 타났습니다. 8월 초순에 우리는 막 공사에 착수한 통나무집의 토대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축고문 은 이미 떠난 뒤였고, 아마추어 장기자원봉사자들만 남아서 일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차타누가에서 일단의 봉사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인 밥 맥클레니는 전 문건축가였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아멘! 주님의 능력이 없이는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없다. 정기적으로 충실하게 믿음으로 기도하며 인도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또한 실천을 믿는다. 우리의 요구와 문제와 좌절을 주님께 맡기고 주 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감사드린 후, 우리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먹여햐 할 사람은 5,000명인데 수중에는 빵 다섯 조각과 생선 두 마리밖에 없으셨던 예수님이 그렇 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1981년 개최된 여름 헤비타트 이사회에서, 대여섯 명의 헤비타트 고문들이 자유토의 시 간을 가졌다. 그들은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헤비타트 사업이 본부의 통솔력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도록 할 방안을 연구하는 동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더 많이 기도로 이 끌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 작은 만남을 통해 훌륭한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매년 하루를 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전세계의 주택문제를 위해 특별히 집중적으로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매년 3월 첫째 주 금요일에 지키는 세계 기도의 날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날을 준수하며 그 취지도 존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악한 주거지라는 절박한 문제에 전적으로 집중해서 기도할 별도의 기념일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날 짜를 제정하는 것 이상이어야만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헤비타트 성경 구절을 인용하자 면 "발과 혀로만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요일 3:18) 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는 기도하며 실천하는 날이 필요했다. 1982년, 아메리쿠스에서 개최된 가을 이사회에서 우리는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을 '헤비 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로 제정하라는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7주년 기년행사가 이듬해 가을 인디애너폴리스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행사 마지 막 날이 바로 9월 셋째 주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행사에 참가하는 교회지도자들에게 탄 원서를 전달해 이 아이디어를 널리 홍보하기로 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주말에 '헤비타 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을 처음으로 지키기로 했다. 헤비타트 소식지의 1982년 11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동봉했다. 이하 서명한 우리들은 선의의 관심을 가진 여러분께, 특히 교회 종파를 막론한 신앙인 여러분들께 앞으로 9월 셋째 주 일요일을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로 기념해 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이 요청은 소박하고 봬적한 보금자리 하나 없는 수백만 동포들 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 큰 문제 를 나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기 원하십니다. 자신의 편안한 보금자리에 만족하면서 네 이 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입으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전세계적인 부실주거의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여러분의 동참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의식을 일깨우는 작업인 동시에 실천의 촉구였다.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 들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서명한 사람들은 제각기 나서서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수백 명의 헤비타트 후원자들이 자기 지역의 교회를 통해 서명을 받고 참여를 호소하는 운동에 나섰다.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우리는 수천 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 었지만, 이 운동을 급속도로 진전시킨 공로자는 바로 다름아닌 헤비타트 기구였다. 제논 콜크 로하스의 공격적인 통솔력 아래, 이들은 1983년 9월에 개최된 인디애너 축하행사 때까지 무려 20,000명의 서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 해 9월 7주년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돌로레스 밴 룩스가 서로 다른 교파의 지도자 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는 순서였다. 우리는 총 60,000명의 서명을 받았고, 이 이름들은 단상위에 무려 2피트에 달하는 높이로 쌓여 있었다. 최소한 우리는 60,000명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00만 명의 서명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는 기도와 실천의 날을 지원하기 위해, 9월 셋째 주 일요일마다 사용할 교회광고 삽 입전단을 만들었다. 이 문건의 한 면에는 전세계 주거문제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있었 고, 다른 쪽에는 목사와 신도들이 함께 읽을 교독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1984년의 문건 에는 다음과 같은 교독문이 실렸다. 헤비타트를 위한 교독문 목회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십니다! 신도: 집이 없으시다지! 언제 말입니까? 목회자: 아직 어린 소년일 때, 과테말라에서 쓰레기더미 옆에 서 계실 때입니다. 기억하 십니까? 여러분은 TV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남부 조지아의 임대 판잣집 현관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에어컨이 달린 새 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던 길에 말입니다. 신도: 그 어린 소년과 노인이 예수님이시라고요? 목회자: 그렇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아이티의 빈민가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잡지에서 본 끔찍스런 빈민촌과 슬픈 표정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인도에서, 아프리 카에서, 뉴욕과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그리고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서 주님을 보았습니 다. 신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목회자: 무엇보다 먼저, 아프고 집 없는 사람들 모두가 허름하게 변장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십시요. 그리고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행동합시다. 신도: 그렇지만 이렇게 엄청난 문제 앞에 우리는 이렇게 작고 힘이 없습니다. 목회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태산을 움직이고 성을 세울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생선으로 5,000명이 배불리 먹었는데, 우리 손 안에 있는 널장과 벽돌로 수백만의 집을 지을 수 없겠습니까? 신도: 먼저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예배당 몇 채와 이 문제를 연구할 대학을 몇 군데 더 짓고 싶습니다. 목회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교회의 신도석은 텅비어도 집들은 넘 쳐날 것입니다. 연구는 벌써 끝났습니다. 이제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입니다. 예배 는 봉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도: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전세계에서 비인간적인 집들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도합니 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며, 우리가 신앙 속 에서 베풀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해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 함께: 저희에게 살 곳을 주시고, 함께 살 사람들을 주시고, 집을 지을 세상을 주신 우리 주 하나님, 저희의 눈을 밝히사 다른 사람들의 궁핍함을 보게 하소서. 관심으로 그들을 돕고 위로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이 주님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아멘. 매년 9월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이 되면 우리는 목회자들에게 전세계에 걸 친 주택문제에 관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헤비타트 운동을 위한 특별헌금을 하거 나 좀더 나은 주거환경을 위한 활동을 하는 다른 단체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걷을 수 도 있다. 예배 전체를 할애하지 않더라도, 이 특별한 주일에는 '소명을 위한 시간'을 두 어 극빈주택의 문제를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이 날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한 보고서를 전세계에서 받고, 참으로 기뻤다. 페루의 푸노에서는 무려 6개월에 걸쳐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을 준비했다. 이 행사의 준비과정에는 곡괭이와 가래를 사용해 화산석을 파서 2.5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랑을 파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목적지인 깨끗한 샘물에 다다른 헤비타트 일 꾼들은 도랑을 따라 파이프라인을 설치했다.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 특별 예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파이프라인이 개통되었다. 귀중한 물이 방금 완성된 물탱 크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1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개울에 가서 물을 직접 날라 올 필요는 멸코 없을 것이다. 입주자, 자원봉사자, 방문객들은 한데 어울려 기뻐하며 이 날을 축하했다. 1982년 끔찍스러운 빈민가에서 출발한 아이티의 듀메이 사업장 또한 기도와 실천의 날에 충실하게 참여했다. 1985년 당시 텍사스 휴스턴의 자원봉사자 팸 핸슨은 남편인 칼, 아 기 이안과 함께 아이티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편지에는 아주 중요한 통 찰이 담겨 있었다. "이곳 듀메이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많은 교회들이 기도한다는 사실이 특별히 뜻 깊에 느껴집니다. 기도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머지않아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와 실천의 날'이 지상의 모든 나라에서 매년 지 켜지기를 뜨겁게 소망한다. 이것은 빈부를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여 러분이 진정 부자라면, 훨씬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서방국가에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나머지 나라들과 비교하면 정말 부자들이다. 헤비타트 는 빈부와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를 초청한다.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에 우리와 함께 기도 하자. 그리고 함께 실천하자. 13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들 종종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을 벌여 보겠다는 단체를 만나게 된다.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은 바로 "이 일을 시작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요?"이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1달러입니다. 수중의 돈이 1달러도 안 되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 지요." 그리고 나서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말해준다. "예수님의 경제학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자녀들에게 쾌적하게 살 곳을 마련 해주는 일에 진지하게 매달릴 핵심멤버가 몇명 필요합니다. 만일 수중에 1달러가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믿음을 갖고 전진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체사피크 헤비타트의 스티브 앤더슨은 종종 나를 일깨워주곤 한다. "믿음을 갖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주님의 인도를 따르게.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 면 종종걸음을 쳐야 할걸세!" 헤비타트의 활동이 성장을 거듭함에 따라 놀라운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사업의 진 행을 돕곤 한다. 1980년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을 출간했을 때, 한 장을 온통 이 러한 에피소드로 채웠던 적이 이는데 그 장의 제목은 '하나님의 우연'이어ㅆ. 1985년,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재를 모으던 중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에서 코스털 엠파이어 헤비타트 지회를 맡고 이쓴ㄴ 카톨릭 신도 탐 맥래플린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시비를 거는 투로 서두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우연'이라는 말은 좀 꼬투리를 잡아야겠군요. 우리는 그 문제를 좀 다르게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시며, 우리 일에 직접 개입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신 사례들을 모아 솔직하게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탐 자신의 체험으로 시작하기로 하겠다. 이 일은 사바나 사업의 초기 단계에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는 첫 번째 집 토대를 박을 구덩이를 이미 파두었습니다. 강철 레버는 제자리 에 잘 박혀 있었고 루 카스틸리온과 나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콘크리트 트럭이 도 착하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트럭은 도착했지만 자원봉사자들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똑같이 65세였던 루와 나는 숨을 깊이 들이 쉬고 큰크리트를 구멍에 펴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군분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일 할 사람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루는 그 젊은이에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무보수 노동으로 빈민들을 위한 집을 짓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 다. 젊은이는 루의 이야기를 잠시 곱씹어 보더니 웃옷을 벗어던지며 트럭 운전사쪽 을 보고 "빨리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한테서 삽을 받아들면서 "저는 이런 일을 8년동안이나 했다구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콘크리트를 전부 요령있게 제자 리에 퍼넣더니, 웃옷을 집어들고 가던 길로 갔습니다. 우리는 그 청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 후로도 한 번도 보기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멤피스에 위치하고 있는 중남부 지회에는 프랜 콜리어라는 이름의 여장부가 있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에는, 극빈주거 상황이 심각한 테네시 주 로스빌에서 땅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던 중 겪었던 일련의 좌절이 생생히 적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랄 만한 역사가 시작되었고, 부지와 그 부지를 살 수 있는 돈이 한꺼번에 나타났 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지를 사고,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집은 안나 스팬서와 가족들에게 헌정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안나는 아들다섯에 딸 하나, 그리고 세 명의 손주들을 거느 리고 있담니다. 그들이 살던 판잣집은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열 식 구가 방 세칸에 살았으니까요. 수도도, 우물도 없었고 별도의 배변시설도 없었습니 다. 그들은 덤불숲 속에 들어가 볼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형편없는 판잣 집 대힌 약 1,000평방피트 남짓한 넓이로 방 네 칸에 화장신 한 칸, 콘크리트 벽돌 벽을 갖춘 견고한 집을 설계했습니다 .스펜서 가족들은 기쁨에 들떴고, 공사를 최 대한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돕고 싶어했지요. 그러나 스펜서 가족 은 물론이고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 중에서도 벽돌을 어떻게 쌓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숙련된 벽돌공들을 몇 사람 데려와야겠는데요."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 찾아와요?" "벽돌공 노조에 한번 가보시죠." 노조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자원봉사를 해줄 사람이 있나 알아보러 한 번 찾 아오는 거야 흔쾌히 승락하겠지만, 일이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하더군요. 아니나다를까, 노조 강당으로 몰려든 남자들이 나를 보는 표정은 희한하기 짝이 없 었지요. 게다가 휴일인 토요일에, 그것도 무급으로 일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혹시 이 여자가 미쳤다나 하는 빛들이 역력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 은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고, 이 집은 영리를 취하 지 않으며 할부이자도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 취 급을 하더군요. 하지만 지원자가 세 사람 나왔어요. 세 사람이면 충분했습니다. 하 나님, 감사합니다! 1985년 1월 3일에 스펜서 가족은 아름다운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2월 16일에 헌 정식을 했습니다. 친구와 가족과 헤비타트 동역자들이 앞마당에 모여 이 경사르런 일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했지요. 현지 신문은 헌정식에 대해 훌륭한 기사를 게재했 는데, 이로 인해 주님의 기적이 또 하나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 신사 한 분이 관심을 가지고 전화를 했더군요. 그는 포스터 오토 월드 의 지미 포스터라고 자기를 소개하더니, 헤비타트에 대해서 이것저것 꼼꼼하게 캐 물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한숨을 돌리길래, 이번엔 제가 물어봤지요. 혹시 포스터 오토 월드에 헤비타트에 기탁할 만한 픽업트럭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픽업트럭은 아주 비싸다고 대답하길래, 중고라고 기쁘게 받겠다고 말했지요. 다음주에 다시 전 화하라더군요. 그래서 다음주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 마디에 저는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헤비타트에 중고트럭을 주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새 트럭을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베풂은 또 다른 베풂을 낳는다'는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지미 포스터 는 10대인 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다며, 아들을 보내 헤비타트의 건축을 돕겠 다고 하더군요. 신문에서 포스터의 기부에 대한 기사를 읽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트럭을 주었다지만, 나는 내 시간을 내어줄 수 있지!"라고요. 그래서 우리 는 또 한 사람의 재능있는 자원봉사자를 얻었답니다! 피킨스 카운티의 헤비타트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활동을 돕고 계심을 똑똑히 보았다. 현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단체의 일원 산드라 그레이엄은 그 한 가 지 예를 이렇게 들고 있다. 바이올라 앤더슨의 집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수중의 돈은 금방이라도 바닥날 것처 럼 아슬아슬하기만 했지요. 그렇지만 매달 어찌어찌해서 청구된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어요. 완공시기가 가까와올 무렵, 우리에게는 바닥재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단 바닥재를 구입한 뒤에 돈이 들어오기만 기다렸어요. 청구서가 도착한 바로 그 날, 다른 쪽지 한 장이 함께 도착했습니다. 클렘슨의 성 앤드루스 성당의 빌 브림리 신부님께서 보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우리 성당 교우들의 특별헌금입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봉한 수표는 600달러였지요. 바닥재 청구액은 정확히 592달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양탄자를 고 정할 압정값으로 덤으로 주신 겁니다! 1983년 봄 버몬트 주 벌링턴에서, 재기넘치는 젊은 부부가 깝짝 놀랄 만한 결정을 내렸다. 오하이오 대학 동문인 샐리와 카티 홀 부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믿음으로 1 년 동안 헤비타트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경제학 학위를 지닌 카티는 목수 노릇을 아주 즐겼다. 초등학교 사서인 샐리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기로 했다. 홀 부부가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세일럼 카운티에 갓 생긴 헤비타트 사업장으로 떠 난 것은 1983년 10월의 일이었다. 샐리와 카티가 세일럼 카운티에 도착했을 때, 한 가족은 환영만찬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적당한 아파트를 찾을 때까지 자기 농장집 3층을 무기한 써도 좋다고 했다. 한 목사님과 사모님은 홀 부부의 짐을 자기네 집 차고에다 보관하라고 제안했다. 목사님의 교인 한 사람 은 홀 부부가 데려온 고양이 두 마리를 잠정적으로 입양했는데, 고양이들이 농장 주위의 견공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샐리는 이 시기에는 보통 교직원 채용이 마무리된 후였기 때문에 자기 분야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흘 안에 초등학교 사서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직장 에서 면접을 하고 나서 샐리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뉴저지 펜스 빌이라는 자그마한 지역의 학교들을 관장하는 교육감은 예전에 샐리가 일했던 버몬 트 주 벌링턴의 교육감과 절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짤막한 통화를 했고, 샐리는 합격했다는 걸 알았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오후, 카티는 세일럼 카운티의 첫 헤비타트 집에서 하루의 일을 끝마친 뒤 그지역의 역사연구회를 찾았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 카 티가 세일럼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카티는 윌리엄 홀이라는 자기 선조가 목수였으며, 1677년에 영국에 서 세일럼 카운티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1820년에 그의 5대부이 자 역시 목수였던 에드워드 홀이 신시내티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카 티의 가족은 아직도 신시내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세일럼 카운티 에는 홀ㅌ운이라고 알려진 아주 작은 마을이 있으며, 그의 숙소에서 겨우 농장 몇 채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버몬트를 떠날 때, 샐리와 카티 홀은 오나전히 낯선 곳으로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지도에서 찾아보기 전까지 세일럼 카운티라는 지명은 들어본 적오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이사를 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카티를 원래의 뿌리로 다시 데리고 가셨다. 홀 부부는 자원봉사기간을 마치고, 가족사정으로 다시 오하이오로 이사했다. 이번 에는 두 마리 개와 두 마리 고양이,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인 갓 태 어난 어린 아들을 챙겨야 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사랑도 함께 챙겨 떠났다. 헤비타트는 1976년 아메리쿠스에서 처음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의 첫 본부건물은 4,000달러짜리 낡은 건물이었는데, 내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이 건물을 사게 된 과정에도 주님이 역사하셨고, 이 이야기 는 이미 <모르타르에 깃든 사랑>에서 자세히 쓴 바 있다. 시간이 흘러 헤비타트는 성장을 계속했고, 우리는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낡은 건물 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건물들은 사무실 공간이나 자원봉사 숙소로 개조되 었고, 어떤 것들은 개보수를 거쳐 저소득 세대에게 매매되었다. 어떤 건물들은 뜯 어서 땔감으로 쓰고, 그 터는 새 헤비타트 집을 지을 부지로 썼다. 한 번은 헤비타트 사무국 근처에 있는 판잣집 세 채를 사들이려 했던 적이 있었다. 알아보니 집주인은 아메리쿠스에서 아주 큰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었다. 나는 그에 게 연락해서 혹시 판잣집ㅇ르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며칠 후 그가 우리 사무실에 들러, 판잣집을 팔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격 을 물었더니 판잣집 가치의 두 배도 넘는 액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 에는 너무 비싸다고 말했더니, 이 도시에 다른 판잣집들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보 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차를 타고 아메리쿠스 시 전역을 누비며 스물다 섯 채쯤의 판잣집을 더 보았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앞에 차가 멈출 때마다 집값 을 물어보았지만 매번 그는 터무니없는 액수를 부르곤 했다. 도저히 거래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부터 1년이 흘렀다. 하루는 전화벨이 울리길래 받아 보았더니 바로 그 판잣집 주인이었다. "사무실에서 한 블럭 거리에 있는 판잣집들을 아직도 살 생각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부르는 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절반으로 깎아드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거래할 수 있지요. 그 정도가 적당한 가격선인 것 같습니다. 한번 사무국 에 들러주시지않겠습니까?"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한 사람이 현관문을 들어섰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 었고, 나는 이 사람의 심경이 변화를 일으킨 데 모종의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펜실베니아에 시집간 딸이 살고 있는데, 얼마전 그 애를 보러 갔다가 그 애가 다 니는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 내내 헤비타트 운동 이야기 만 하더군요! 거기서 슬라이드를 보고 어쩌ㅕ 내가 문제를 악화시킨 주범이었는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걱을 절반으로 깎아서 집 세 채를 내 놓 은 겁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헤비타트는 판잣집을 샀고, 차례대로 철거해서 새 헤비타트 집들을 지었다. 주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조지아의 쾌적한 집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펜실베니아로 직접 가서 일하신 것이다. 1984년 4월 워싱턴 주 멀키티오의 존과 앤 프랭큰 부부는 파푸아뉴기니의 포느 모 레즈비로 가서 새로운 헤비타트 사업장을 출범시켰다. 존은 30년 동안 사무실에서 행정업무를 보다가 최근에 은퇴했는데, 양손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 했다. 존과 앤에게는 이 일이 주님께서 특별히 두 사람에게 맡긴 소명이라는 확신 이 있었다. 그들이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존은 그의 체험담을 다음 과 같이 편지에 적어보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하십니까? 너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 기 때문에, 매번 주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아무 것도 몰라서야 사 업을 성공으로 이끌기는커녕 시작조차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좌절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이 진행되자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나 저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했 습니다. 이론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현실적인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 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생활필수품을 구할 수 이쓴ㄴ 길부터 익혀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언어를 공부했고, 정부의 주택정책을 알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고, 빈민들이 어떤 주택을 원하며, 어느 정도의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재공급자를 찾아나섰고, 빈민들을 위한 주택을 지을 때 자재값을 깎아서 공급해줄 회사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득했습니다. 노동부에 전화를 걸어서 임금관련법을 알아보았고, 건설부에 전화를 걸어 건설관련 규정과 인가조건을 문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설계도구들을 사다가 초안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설계일 에 관련된 일을 했지만, 실제로 건물의 세밀한 구조까지 그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 다. 다시금 저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세 번째 세도에서 저는 현실적 가 능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저렴한 집의 설계도를 뽑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축인가를 받기 위해 도면을 들고 건축설계사를 찾아 갔습니다. 제가 직업적 인 토목사나 건축가가 아니니 직접 도면을 살펴본 뒤에 손봐야 할 곳에 빨간 줄을 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제가 제출한 상태 그대로 인가를 받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두 사람의 미숙련공을 고용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그 지방에서 나느 진흙을 시멘트와 섞어서 벽돌을 만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토대를 부어 굳힐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에겐 미숙련공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메리쿠스 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콘크리트를 붓는 일을 거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럭저럭 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집의 내벽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쌓으려고 보니, 이번에는 별돌공이 없는 겁니다. 물론 저도 오리엔테이션때 벽돌을 쌓은 적이 있습 니다만, 그때는 주위에 그 일을 잘 아는 사람들이 늘 함께 있었습니다. 벽돌공은 아직 못 찾았는데,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어김없이 다가왔습니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 마음이 심란했지만, 저는 주님께서 제가 직접 일하길 바라신다는 확신 을 얻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 손이 하는 일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래서 두 사람의 일꾼들에게 벽돌 쌓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소 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었지요! 그러나 별 문제없이 토대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 고, 놀랍게도 완성된 건물은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벽을 쌓기 시작할 때가 되자, 주님께서 벽돌공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집을 지어서 헌정했습니다. 그 집은 참으로 벽돌과 모르타 르로 만들어진 한 편의 설교였습니다. 그 집은 인간답게 살 집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는 빈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설교인 동시에 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설교이기도 했습니다. 종종 저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대장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 헌정식 식순의 앞표지에는 "하나님께 영광 있으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내인 앤조차 제가 이 첫번재 집을 짓는데 거의 한 일이 없다는 사실 을 잘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말입니다. 평생 저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왼손이 두 개 달린 사람'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투덜거렸습니다. 글쎄요, 주님께서는 제 이런 태도를 보고 웃으시 며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존, 나는 네게 왼손을 두 개 달아주지는 않았단다. 그 증거를 보여주마"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그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헤비타트 사업에는 언제나 기금이 필요 한데, 우리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원하던 것을 얻곤 한다. 1982년 텍사스 주 아미릴로에 새로 출법한 헤비타트 지회는 집을 지을 부지를 찾고 있었는데, 이 부지는 세 가지 조건에 맞아야 했다. 사업을 출법 할 부지는 첫재, 저렴해야 했으며 둘째, 서로 다른 인종들이 공존하는 지역이어야 했고, 셋째, 학교와 대중교통수단이 가까워야 했다. 오랜 기간의 탐색 끝에, 위원회는 35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공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 한 채의 부지 가격은 1,500달러로 매겨져 있었고, 백인, 흑인, 히 스패닉, 라오스인이라는 네 집단이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땅은 주요 버스노 선을 따라 늘어서 있었으며, 길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헤비타트 사람들은 진행계획을 논의하고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5,000달러에 4개의 부지를 살 것을 제안해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며칠 후 대답이 왔다. 주인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지만, 아마릴로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었다. 땅주인은 젊었을 때 신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지만, 신앙생활 대 신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었다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사업이 성공을 했으니 이 제는 자신이 누린 행운과 재산을조금이나마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이야 기였다. 그는 아마릴로 헤비타트가 제의한 5,000달러의 가격에 35개 부지를 모두 내놓았다! 흥분한 위원회는 즉시 새로 획득한 단지를 '헤비타트 언덕'이라고 명명하고, 하나 님의 백성들을 위한 집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릴로 시에서 무료로 도로와 상하수도를 놓아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고, 이쯤 되 자 헤비타트 사람들은 건축자금 역시 어떻게든 충당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 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자금도 해결이 되었다. 지금도 아마릴로에는 튼튼한 새집 들이 시시각각 세워지고 이쏙, 헤비타트 언덕은 주님의 축복을 증거하며 확장을 거 듭하고 있다. 물론 모든 헤비타트 사업이 수중에 단 1달러만 달랑 들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뉴저지에서는, 10,000달러의 기부금 덕분에 1986년 글로스터 카운티 사업이 출범하 게 되었다. 이 기금들은 핏맨 침례교회의 여자교인들이 중고옷가지를 팔아 한 번에 동전 얼마씩을 벌어들여 조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알뜰가게에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 즉 '무화가 나뭇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헤비타트가 건축 시작 자금을 마련하게 된 유별난 사연들 중에서 특히 나는 플로리 다 주 탤러하스 지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1983년은 탤러하스 제일장로교회가 150주년을 맞는해였습니다. 교인들은 1838년에 지어져 개보수가 불가피했던 예배처를 새로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 서만 공사를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걱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모금운동을 벌이는 동안 개보수비용의 25%를 더 모아서 남는 돈을 탤러하스 지역의 복지사업을 위해 기탁하기로 했습니다. 보수비용이 325,000달러로 추정되었으니, 지역사업을 위한 기부금도 상당액에 달할 터였습니다. 신중한 고려 를 거쳐 교회는 이 돈을 지역 헤비타트 사업이 구체화되는 대로 헤비타트에 기탁하 기로 했습니다. 헤비타트 지회를 구성하는 일에는 다른 교회들도 초청해 동참 하도록 했습니다. 탤러하스의 헤비타트 운동이 윤곽이 잡혔을 때쯤, 제일장로교회 에서 제공한 건축 시작 자금은 무려 90,000달러에 달했습니다! 조직의 형태를 잡은 지 일곱 달, 플로리다 주로부터 인가를 받은 지 넉달 만에 탤 러하스 헤비타트는 이제 제일장로교회에서 약속한 자금으로 건설을 시작할 때가 되 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꼭 필요치 않은 곳에 돈을 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 다. 탤러하스 재단(주택보수를 맡는 단체)을 이끄는 미셸 아케인절리는 헤비타트에 호의적인 친구로서, 우리를 탤러하스 시 지역개발부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미셸은 이 부서가 비슷한 사업에 착수했지만 4%의 이자를 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 군데의 부지를 사들여 곧 철거당할 집 세 채를 그 곳 에 옮겨놓고 있었지요. 우리는 곧 그 부지의 집을 개축하고 신축해 6세대가 살 수 있는 집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시 당국은 이 생각을 마음에 들어했고, 우리는 단 1달러로 최초의 여섯 가구를 위한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직접 건축자재를 구입하는 데 쓰기 위해서, 헤비타트에 호의 적인 세무사에게 자문을 구해 혹시 주에서 부과하는 세금을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 이 있는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 세무사는 우리 시가 주청사 소재지니 이런 일을 관 장하는 주 공무원을 찾아가 보라며 이름을 가르쳐 주더군요. 공무원은 친절하고 호 의적이었지만, 우리가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서류작업만 적어도 석 달이 걸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부지런한 회계 론 쉐퍼는 그래도 한 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서류를 작성해서, 우송하는 대신 직접 찾아가 제출하 기로 했습니다. 주청사 건물로 가는 길에 론은 그만 담당자의 이름과 서류를 제출할 사무실을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비에서 기나긴 사무실 안내문을 살펴보던 론은 헤비타트의 동역자인 베베 블라운트의 이름을 발견했지요. 베베의 부서는 론이 찾는 부서와 달 랐지만, 그래도 혹시 베베의 사무실 전화를 쓸 수 있는 지를 알아보고, 어디로 가 서 누구를 만나야 할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베베는 그 부서의 책임자와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베베는 직접 론을 데리고 가서 그 사람을 소개시 켜 주었지요. 그는 자신이 도울 길이 있을 거라 고 말했습니다. 20분쯤이 지난 뒤 에, 론은 세금면제증명서를 손에 들고 유유히 건물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론은 즉시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소에는 영적인 문제에 아주 합리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날 아침만큼은 아주 흥분해 있었습니다. 무언가 아주 색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은 아주 색다른 일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는 주님의 인도에 보 조를 맞추어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 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 다. 14 감사합니다, 예수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슴벅찬 경험은 한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오는 것을 보는 일이다. 아마도 나는 이런 잊지 못할 순간을 그 누구보다 많이 체험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헤비타트에 취해' 새삼스러운 열 정과 강력한 의지로 재무장하고 빈민주택의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 하곤 한다. 생전 처음 집다운 집을 장만하게 되었을 때 가난한 가족들이 느끼는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81년 7월, 신디와 애런 미들브룩스 부부와 세 아이들은 미주리주 캔사스 시티의 첫 번째 헤비타트 집에 입주했다. 저는 집을 구하느라 사방팔방을 헤맸지요. 우리 아파트에서는 세 아이들이 전부 한 방에서 자야만 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을 만한 집을 갖고 싶었답 니다! 어머니는 제가 늘 갖고 싶던 집 근처의 아파트를 사는 데 실패했을 때 "하나 님께서 네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별로 가망이 없었습 니다. 그래도 저는 기도를 계속했지요. 어느 날 헤비타트의 간판을 보고,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지요. 전화를 받은 여 자분이 대기자 목록이 아주 길지만 그래도 신청서를 보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저 는 속으로 '우리는 집을 살 수 없을 거야. 별로 돈이 없으니까. 집을 살 만큼 저금 을 할 수가 없는 걸'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저는 하늘을 올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신청서를 받아서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 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도시 전체를 빨강, 초 록, 파랑, 노랑으로 색칠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어찌나 흥분했는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요. 헤비타트에서 전화를 걸어서 조건이 좋은 것 같다며, 한번 찬아와 상담을 하자고 했던 겁ㄴ다 .저는 달려가 친구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지요. 어머 니께도 전화를 드렸습니다. 직장동료들에게도 전화했구요. 모두들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헤비타트 분들이 찾아왔는데, 남편의 귀가가 늦었습니다. 일이 다 틀어져 버릴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상담이 끝날 무렵 맥기 목사님께서 "원하는 집의 설계 도면을 고르시지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 저는 임신 8개월이었어요. 그 날 밤에 저는 울고 싶었어요. 이제야 진짜 우리의 재산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집은 아름다웠습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죠. 아직 커튼을 달지 않아서, 창문에는 그냥 천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래도 이 집은 우리 것이었지요.꼭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같은 느낌이었어요. 말 로 표현할 수 는 없지만,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요. 미들브룩스 가족이 집을 마련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 기만 하다. 캔사스 시티의 복잡한 길가에서 빛나는 이 깜끔한 집은 이 길을 지나는 방문객들에게 훌륭한 간증 역할을 하고 있다. 애론과 신디는 새로운 입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헤비타트의 자원봉사자들이다. 미들브룩스 가족 들도 헤비타트의 비전에 사로잡힌 것이다. 1984년 봄 우리는 아메리쿠스에서 다이앤 엘리스를 위한 집을 헌정했다. 다이앤과 그녀의 가족이 살던 판잣집은 칠도 안 되어 있고, 단열재도 없었으며, 다이앤의 말 로는 겨울이 되면 오히려 몸을 녹이려고 밖으로나가야 할 정도의 집이었다. 물을 쓸 수 있는 수도꼭지가 뒷문 근처에 딱 하나 있었다. 헤비타트 사람들과 다이앤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헌정식을 위해 그녀의 집 앞마당에 모였다. 다이앤은 앞으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새 집을 보는 제 기분이 어떨까 모두들 궁금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이앤은 조용히 말했다. "제사 말씀드리죠." 그녀는 갑자기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위아래로 팔짝팔작 뛰기 시작했다. "야호!" 라고 소리치면서. "야호! 야호! 이야호!" 다이앤의 두 팔이 멋대로 흔들렸고, 다이앤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이야호! 야호!" 마침내 외침이 멎었을 때,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허리를 잡고 웃어대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이앤은 더 격력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리도 더 크게 질렀다. "야호! 야호! 야호!" 다이앤이 세 번째 뛰기를 멈추었을 때, 그녀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울ㅇ을 터뜨리기 시작 했고, 우리는 몇분이 지난 뒤에야 식순을 다시 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강력하면서도 불가사의한 경험이었다. 가족들이 새로운 집에 대해 그토록 격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옛날에 살던 집이 비좁았다거나 살기에 불편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헤비타트의 사람들 때문에 알게 된 사랑과 배려의 마음에 감동하는 것이다. 로니와 셀마 슬레이븐 부부가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을 당시, 이들이 살던 집은 포 장되지 않은 길가에 있는 12평방피트 넓이의 통나무집이었다. 집이 위치한 분지는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황량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곳이었다. 셀마는 난방배관시설 도 없이 한살에서 열세 살에 이르는 여섯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끌 어온 전선 한 줄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전구 한 알과 낡은 냉장고에 전원을 공급했 다. 통나무들 사이의 틈새는 고르지 못해서, 낡은 천과 마분지로 벌어진 틈을 막아 야 했다. 아이들이 전부 침대 하나에 뭉쳐 잤지만, 항상 담요를 걷어차곤 했던 막 내는 거의 얼어죽을 뻔했다. 로니 슬레이븐은 근처의 공장에서 오후 3시 30분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그는 보 험이나 수당도 없이 일주일에 125달러를 벌었다. 그러나 아무튼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도 고밥게 생각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가족은 한 달에 371달러의 식량카드 배당을 받았지만, 이것으로는 생필품을 겨 우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씩 셀마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소다를 사다주곤 했 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1985년 11월 2일, 애팔래치아 헤비타트 지회는 슬레이븐 가족의 새 집을 헌정하기 위한 집회를 가졌다. 방 네 칸에 단단하게 단열처리가 된 골조를 갖춘 이 집은 무 려 6개 주에서 몰려온 자원봉사자들과 수련회 참가자들의 손으로 지어졌는데, 넓이 가 무려 820평방피느에 달했다. 공사비를 맞추기 위해 온수배관시설은 하지 않았지 만, 부엌에는 싱크대와 조리대가 있었고 목욕탕으로 쓸 만한 방도 있었다. 언젠가 는 이 방이 목욕탕이 될 날이 올것이다. 선불 250달러를 부담한 슬레이ㅂ 가족은 한동안 매월 25달러의 상환금을 18년 동안 지불해야 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아이들은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촛 불로도 난방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밤에 비가 새는 일도 더는 없겠죠. 집을 가지 게 되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셀마의 소감이었다. 존세계에 새로운 헤비타트 집이 한 채씩 지어져 헌정식을 가질 때마다, 새로운 입 주자는 성경을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 양한다. 이 감사의 의식은 그날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씩 테네시 주 멤피스의 첫 헤비타트 집으로 입주한 사바나 시몬즈의 말을 생각하곤 한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 큰 방에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그때마다 이 집을 주신 하 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방을 하나씩 돌아보며, 다시금 내 집을 주 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가끔씩 사람들은 헌정식장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아무 말도 못할 때가 있다. 1983년 부활절 전날, 우리는 아메리쿠스에 지어진 줄리아 배틀의 새 집에서 모였다. 남편과 사별한 줄리아는 두 아이와 96세 된 노조모를 모시고, 보기에도 흉 측한 헛간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헛간 바로 앞에 새 집을 지어주었다. 헌정 식을 한 뒤 며칠 후, 낡은 판잣집은 헐렸고 줄릴아는 그 자리에 정원을 가꾸었다. 헌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줄리아는 앞으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몇 분간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마 침내 그녀는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헌정식이 끝날 때까지 줄리아는 한 마 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곳에 참석하는 행운을 누렸던 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 어떤 말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했다.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의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페니 하이드의 가족 들을 위한 개보수공사를 끝냈을 때, 페니 하이드는 그 벅찬 감사의 마음을 감동적 인 한 통의 편지로 전했다. 친애하는 헤비타트 여러분, 저는 연설문을 작성하거나 편지를 쓰는 데엔 재주가 별로 없어서,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만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저 역시 어린 자 식일 둘 딸린 홀어미로 기댈 곳 없이 살았습니다. 지난 2년간, 제 삶은 영적인 영 양실조 상태에 있었지요. 제 삶에는 '죽음'의 느낌이 들어와 있었고, 우리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만도 바빴습니다. 우리집에는 바로 이 죽음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습니다. 기술도, 돈도 없는 저로서는 집을 건강하고 행복한 보금자리로 가꿀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건네준 안내문에서 저는 헤비타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 후로, 우리의 삶은 변했습니다. 면접을 거쳐 합격한 뒤부터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는 자물쇠가 달 린 현과이 있고, 깨진 유리창이 있던 곳에는 추위를 막아줄 유리가 있습니다. 지붕 도 고쳤고, 집 안에도 문이 있습니다. 먼지로 뒤덮였던 벽에는 기부 받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바닥에는 역시 기부받은 아름다운 깔개가 깔려 있으며, 수도꼭지를 틀면 깨끗하게 목욕을 할 수 있고, 겨울 내내 고장난 채로 버려져 있던 파이프도 고쳤습니다. 손으로 만든 수납장으로 우리 부엌은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해주신 수많은 일들 중 아주 적은 부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으로 내주신 시간과 배려의 마음이 우리 가족을 다시 뭉치게 해주었 습니다. 헤비타트는 저희 가슴 속에 다시금 존재의 목적을 심어 주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거듭, 거듭, 또 거듭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 또한 기꺼이 여러분과 함께 다른 사 람들을 도와 제 '사랑의 봉사'를 바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저희 가족들에게 소망 과 사랑을 심어 주셨듯이 말입니다. 1985년 1월의 어느 눈오는 날, 나는 박스 엘더 헤비타트 사람들이 첫 집을 헌정하 는 현장에서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레이와 잔미드 부부와 세 아이들은 3년간 참을 성 있게 기다린 끝에 몇 주 전 이사를 끝냈다. 레이는 지독한 최행성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내장도 대부분 수술 로 들어낸 상태였 다. 항상 추위를 느껴 셔츠를 몇 개씩이나 껴입고도 조끼를 덧입어야 했다. 매일매 일야위고 한층 더 허리가 굽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헤비타트가 좋은 가격으로 사들인 부지고아고를 신문에서 발견한 그 순간, 레이는 원기를 회복했다. 너무나 바빠서 조끼조차 입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는 현장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해서, 일꾼들에게 집에서 만든 바나나빵과 커피를 날라주었고, 자신의 픽업트 럭을 몰고 물품들을 실어 날랐다. 레이와 잔과 아이들은 터에 돌을 고를 때부터 마 무리 칠을 하고 카펫을 깔 때까지 모든 과정을 거들었다. 집의 헌정식을 할 무렵에, 레이는 체중도 많이 불어 있었고 허리도 곧게 퍼졌다. 미드 교구성당의 사제인 댄 찰튼 신부가 공식적인 축사를 하자 레이가 짤막하게 답 사를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빛나고 있었다. 식이 끝난 뒤 간단한 다과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집 안에 어ㄲ를 맞대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떤 연세 지긋하신 분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내 쪽으로 걸 어왔다. 그는 가까스로 내 앞에 자리를 잡고는, 내 손을 잡고 힘을 꽉 주었다. "내가 잔의 애비요."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했지만,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 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내 손을 그렇게 잡고 놓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 지만, 마음을 추스릴 수 없는 표시가 역력했다. 마침내 그는 내 손을 놓더니 그냥 가벼렸다. 그가 한 말은 "내가 잔의 애비요"라는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미드 가족의 상환금은 예전에 살던 허술한 판잣집의 임대료보다 훨씬 저렴했다. 레 이는 상환금을 내는 일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레이와 잔은 박스 엘더 헤비타트의 가정선정위원회와 가정지원위원회에서 봉사를 하며, 후에 입주한 네 가족과 자신의 체험담을 나무면서 사려 깊은 도움을 주었다. 미드 가족은 헤비타트 바자회가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빵과 수공예품을 기부했고, 주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상환금에 대한 십일조를 헌금으로 냈다. 미드 가족 역 시 비전에 사로잡힌 것이다. 갑작스럽게 격려와 소망을 찾은 입주자의 건강이 극적으로 좋아지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1985년에 나는 헤비타트 동역자인 노스캐롤라이 주 트라이언의 프랭크 배 슬러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새로운 헤비타트 집에 살고 있는 그웬돌린 밀러를 보고 있으면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 고, 안색도 좋아졌습니다. 열여섯 달 전,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자기 집이 다 지어질 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걱정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새 집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하더군요. "저는 헤비타트를 사랑해요! 저는 복 받았어요!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젠 비도 새지 않아요! 오래 전에 헤비타트가 생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프랭크 배슬러의 편지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인디애나주 파라이에트에서 헤비타트 사업을 조직하는 일을 거들었던 퍼듀대학의 정력적인 표수 밥 윗포드로부 터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는 들뜬 어조로 사업을 진척시켜 주었던 수많 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벅찬 일은 바로 헤비타트의 동역관계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구원을 목격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첫 입주자 가족(슬하에 3명의 10대 아들을 둔 홀어머니)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엄마인 제니는 새사람 같습니다. 더 밝아졌고 퇘활해졌고 옷매무새나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젠 파이프가 얼었다고 4마일이나 걸어가서 물을 길어올 필요 도 없고, 다 쓰러져가는 농장의 방 두칸에 몸을 웅크리고 잘 필요도 없습니다. 10 대인 세 아들도 행동거지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맏이인 토미는 방과 후에 설계선생 님과 함께 직접 집의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학교공부에 관심이 거의 없던 아이가 말이지요. 가족이 모두 현장에 나와 일을 하는데, 이들의 열심은 다른 자원봉사자 들에게도 큰 감화를 줍니다. 혹시 내가 지금, 기금부족이나 자우너봉사자의 부족, 산더미처럼 쌓이는 공문서 더 미와 기타 장애물들을 뚫고 마침내 헤비타트 가족이 입주를 하게 되면 그 후에는 모두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면, 그것은 별로 정 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집을 한 채 짓는다고 해서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헤비타트 단체가 해야 하는 후속작업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당연히 매달 상환 금을 받는 일이다. 상환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따라서 몇몇 현장에서는 입주자들이 충실히 상환금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 되기도 한다. 케냐에서는 스물 한 번째 헤비타트 집 앞에 거대한 간판이 나붙었다. 이 집은 전적으로 월부 상환금에 의존해 건축되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역의 사람들은 상환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 집의 공사가 중 단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가족들이 상환금을 떼먹는 사례가 빈발했던 아이티에서, 자원봉사자 아트 러셀은 집회를 소집해 기금부족으로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두 달 뒤, 자기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다른 이 들도 다시 예정대로 상환금을 내기 시작했고 공사도 재개되었다. 자이레의 음반다카에서도 헤비타트 위원회는 효과적인 수금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상환금을 상습적으로 연체하는 입주자들의 명단을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공개했던 것이다! 물론 정기적인 상환금을 제대로 수금하는 최선의 방법은 교육을 통해 헤비타트의 철학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헤비타트 가족들은 집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수반되는 복잡한 요구들을 체험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또한 정부주택보급사업의 경우 빈발하는 비슷한 문제를 막기 위해-모든 헤비타트 사업에는 새로 집을 갖게 도니 입주자들과 지속적으로 일하는 위원회가 있다. 현지 사업의 각 부문 대표들로 구성도니 이 단체는 각각의 가족들과 강한 개인적 유대관 계를 맺고 필요한 만큼 최대한 오랜 세월 도안 함께 일한다. 시카고 헤비타트 위원회는 회의를 거듭하고, 가정방문을 하고, 워크샵을 개최하고 수없이 기도한 결과 당면한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그럭저럭 해결하는 동시에, 가족들이 성공적으로 집주인역할을 하도록 돕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냈다. 시카고 헤비타트는 세 부문을 특히 강조했다. 1. 재정관리 헤비타트는 입주 가족의 재정관리를 떠맡어르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예산관리 원 칙은 제공할 수 있다. 새로 집주인이 된 사람들은 복잡한 서류작업과 청구서, 보험 과 재산세 등 예기치 못한 부담 속에서 헤매게 되므로 도움이 필요하다. 2. 대인관계 헤비타트는 입주자들이 함께 살며, 갈등을 해결하고, 한 건물을 공동소유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다. 3. 집주인의 역할 자기 집을 가져보 못한 사람들은 흔히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고, 저우언도 가꿀 줄 모르며, 물이 새는 파이프를 고칠 줄도 모르며, 충문틈을 바를 줄도 모른다. 이 제 그들은 집을 유지보수하는 일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고 자문을 구 하는 일이 점차 줄어들면서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얻게 된다. 동역관계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까지는 양측 모두 수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 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고 나면 이번에는 지을 얻은 가족 쪽에서 상환금을 꼬박꼬 박 내고 시간과 기술과 돈을 기부해 줌으로써 다시금 어려운 가족들에게 이 가슴벅 찬 새 집을 마련해주는데 뜻깊은 역할ㅇ르 할 수 있게 된다. 새 집이라는 것은 서방세계에 사는 우리 대다수에게는 그저 하나의 튼튼한 중산층 구조물에서 또 다른 견고한 건물-아마도 다른 장소에 위치한 더 호화스러운 건물- 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온 세상의 헤비타트 가족들에게, 새 집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추위와 비바람과 해충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그것은 임대료가 갑자기 올라서 느닷없이 이사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뜻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올해 다니던 학교를 내년에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불어 그것은 언젠가 한 입주자가 감격하며 말한 것처럼"자기가 어디 사는지 친구 들이 알게 될까봐 아이들이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무 엇보다도 그것은 희망을 뜻한다. 1969년 코이노니아 동지회가 처음으로 지었던 집은 보와 에마 존슨의 집이었다. 그 들 가족은 코이노니아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판잣집에서 살았다. 다 드러난 전선 줄에 전구 몇 알이 달려 있었다. 소작농이었던 보는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었 다. 에마는 10학년(고등하교 1학년)까지 다닌 것이 끝이었다. 그들 가족을 위해 6,000달러의 비용으로 견고한 콘크리트 벽돌집이 지어졌다. 아주 소박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옛날 판잣집에 비하면 궁궐 같았다. 보와 에마는 아들 주니어의 생일인 1969년 11월 11일에 이사를 했는데, 딸 매티 펄은 당시 열 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애를 '쿠키'라고 불렀다. 쿠키는 총명하 고 열의가 있었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미시시피 투갈루 칼리지에 장학금을 주선했다.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정확히 15년 뒤, 쿠키가 아메리쿠스의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맞춰보세요, 밀라드 아저씨." "뭐지, 쿠키?" "드디어 법대를 졸업했어요!" 쿠키는 지금 워싱턴D.C.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코이노니아 동지회 이 사회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동생 샐리는 조지아 주 메이콘의 머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D.C.에서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동생은 자격증을 딴 정 식 간호사이다. 이 오랜 세우러 동안 헤비타트 기금에 충실히 상환금을 납부해온 보와 에마는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집 역시 밝고 아름 다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헤비타트와 함께 해온 오랜 세월을 통틀어 보아도, 뒤 애니 월포드만큼 가슴저린 반응을 보인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1980년 3월 나는 당시 조지아 주 플레인즈에서 신문편집장을 맡고 있던 메리 루 브 라운을 대동하고, 아메리쿠스 퀸시 앨리 1105번지의 판잣집에 사는 애니를 방문했 다. 애니의 남편은 가출한 지 벌서 몇년째였다. 천장과 마루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집에는 물도, 목욕탕도, 별도의 배변시설도 없었다. 벽난로 하나가 유일한 난 방시설이었다. "비가 오면 있을 데가 없어요." 애니는 무심하게 말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옷이며 물건들이 날아 다니지요. 전엔 벽난로가 두 개였지만 굴뚝 하나가 무너져 내렸어요. 추우면 퀼트 담요를 덮고 한데 뭉쳐 앉 아 있지요." 애니는 바로 얼마 전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이 그녀에게 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집이 있는 땅에 새 건물을 짓고, 현재의 판잣집은 철 거해서 유일하게 쓸모있는 일, 즉 새집을 따뜻하게 만들 땔감으로 쓰기로 했다. "우리 집에 목욕탕과 부엌이 생긴대요. 진짜 물이 나온대요!" 애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애니가 다섯 살에서 열한 살에 걸친 다섯 아들들을 키우려고 고군분투했던 이 몰골 사나운 판잣집을 나서면서, 메리 루 브라운은 흐느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애니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그 신문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1980년 4월 4일자 신문에 게재되었다. 나는 그 편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 다. 친애하는 예수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예 전의 사악한 저를 고쳐 놓으셨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를 잡아주시고 인도 해 주니시 감사합니다. 가끔은 저와 제 자식들이 한 끼니를 또 어떻게 때울까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올 때 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당신 집에 오라고 불러 주셨지만, 목사님께도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었지요. 예수님, 애들 아빠가 돌보지 않는 제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이들 아버지는 무엇 하나 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요 어 머니로 항상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서 저희에게 새 집의 축복을 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오직 당신께서 하신일임을 잘 압니다. 헤비 타트를 보내주셔서 정말 갑사합니다… 이 편지를 귀하의 신문에 실어주시겠습니까?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으 리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께 미쳤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애니, 감사할 사람은 우리랍니다. 15 세상의 양심이 되어 1985년 1월, 나는 캘리포니아 주를 가로지르는 빡빡한 일정의 강연회로 한창 바 쁘던 중이었다. 이미 8개 도시에서 연설을 끝낸 나는 은퇴한 장로교 목사인 번 로 버트슨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스탁턴에서 산타 로사로 달리고 있었다. 번은 건 강이 나빠 일찍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지금은 상당히 회복해서 헤비타트에서 자원 봉사를 할 수 있을지 의논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풍성한 포도원이 띄엄띄엄 수 놓인 아름다운 시골길을 달려 북쪽으로 향하며, 번은 속사포처럼 빠른 말투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 가운데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밀라드, 몇 년 뒤에 헤비타트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4년 전에도 나는 이와 비슷한 중대한 질문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역시 캘리포니아 사람으로부터였다. 그러나 그 질문은 헤비타트의 '목표'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 는 좀 달랐다. 번은 헤비타트가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그의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답이 떠올랐다. "헤비타트가 보금자리 문제에 관한 한 인류의 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헤비타트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생각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행동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양심을 일 깨워야 했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목표를 촉구하고, 수많은 방면 에서 변화의 기회를 주어 극빈주택을 용납하지 않게 만들며, 주택 보급의 문제를 양심의 문제로 만들어야 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나는 앨러배머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 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우리는 기독교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교회에 갔다. 일요일 아침, 일요일 밤, 수요일 밤 기도회까지.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들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셨다. 그러나 나는 빈민 문제에 대한 양심을 교육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성장기에 배운 바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신앙인의 조건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목사가 교회 앞에서 일어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오"라고 말 하면 결심을 하고 교회복도를 걸어나가 죄를 지어서 유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 다. 그러고 나면, 감리교냐 침례교냐에 따라 물을 조금, 또는 와창 뒤집어쓴 다음, 일요일 낚시와 이별을 고하면 된다. 만약 결혼을 했다면, 다른 여자들과 공개적으 로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술주정을 해서도 안 되며, 일 요일에 야구를 하거나 야구경기 구경을 가도 안 된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 자동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모두 포기해야 하며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교회에 나가야 했다. 또 이것 저것 사소한 문제가 끼어들지만, 결국 진정 경건한 그리스도 인이 되기 위해서는 목사님 같은 말투로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것들만 잘 되 면, 참된 신앙인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과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빈민 문제와 결부시켜 양심의 일깨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양심의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품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시 저편에는 머리를 가려줄 튼튼한 지붕 하나 없이, 발 밑에 견고한 마루 하나 없이, 단열재 하나 없이 사는 이웃들이 있는데, 이편에서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 서 살고 있다면, 그런데도 나아가 헐벗은 이웃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양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헤비타트 노동수련캠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캠프를 마치 고 돌아갈 때쯤엔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양심을 교육하는 우리의 동역관계는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우리는 기도와 실천의 날을 위한 탄원서와 전단,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 안 내 소책자, 슬라이드 등을 제공하며, 헤비타트 관련서적을 배포한다. 우리는 기금 을 조성하고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걷기운동을 개최한다. 1983년에는 인디애너폴리 스, 1986년에는 캔사스 시티, 그리소 1988년에는 애틀랜타가 목적지다. 당신은 우 리와 합류할 수도 있고, 독자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기회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일년에 수십 편의 항공기를 탄다. 내 옆자리에 누가 앉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 만은 확신할 수 있다. 비행기 바퀴가 다음 공항에 닿을 때쯤, 내 옆 자리의 승 객은 헤비타트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전세계의 주택보급 문제가 주요화제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집으로 가는 길에 예전에 눈여겨 보지 않던 것들이 자꾸만 눈에 뜨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나는 미시시피 주 투펠로로 강연을 떠났다. 아직 그 곳에는 헤비타트가 없었다. 당시 나를 초청한 사람은 연합 감리교 목사 커티스 페트리였다. 투펠로 근 처에는 알고마, 폰토톡,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작은 마을들이 있 었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이 마을들을 두루 돌며 강연을 했다. 월요일 아침 내가 커티스 부부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커티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밀라드, 무슨 전화인지 말씀드릴까요? 어제 교회에서 당신 강연을 들었다는 어떤 남자분의 전화예요.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데 맞은 편에 있는 집이 딱한 몰골을 하 고 있더래요. 그런데 전에는 한번도 눈여겨 보지 못했다는 군요. 그는 너무나 기분 이 상해서 옆집의 이웃을 찾아가서는-그 사람도 어제 교회에 같이 갔었답니다-길거 리 맞은 편의 집이 저런 몰골인 줄 전부터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이웃 사람은 흘낏 그 집을 보더니 자기도 지금껏 몰랐다고 하더래요. 두 사람은 당장 그 집을 찾아갔답니다. 그 집에는 허꼬리만한 돈으로 살아가는 미망인이 살고 있었대 요. 집은 물이 새고, 벽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고, 마루는 다 떨어져 ?린Т囑遮? 군요. 그래서 오늘 하루는 일을 쉬고 그 부인의 집을 고치겠다고 전화했다고 하네 요!" 양심을 깨우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헤비타트는 무엇보다 보금자리를 제 공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헤비타트 사람들은 항상 사람 자체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관련사업들이 아울러 발전해왔다. 그 각가의 사례는 과연 우리의 일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생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어준다. 조지아 주 밀리지빌에서, 조와 스테파니 토마스 부부는 장애인을 위한 헤비타트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가맹사업장들이 장애인을 위한 집을 지을 때마다 기금을 제공 하고 특별자문을 도맡는다. 뉴욕 시에서는 사업장 책임자 롭 드로커가 지역방송국에서 지나치는 말처럼 언급한 것이 '침낭 작전'이라는 전면적 운동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집이 없거나 난방이 안 되는 방에서 사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헤비타트에서 예수 경제학 에 따라 '판매'하는 따뜻한 침낭을 구입했다. 침낭은 결코 집다운 집의 대용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겨울밤에는 삶과 죽음(혹은 동상)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의 결과로, 집 없는 이들 중 몇 사람은 감화를 받아 뉴 욕 사업장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했다. 아메리쿠스에서는 중고안경들이 하루에도 몇 상자씩 사무실도 배달된다. 이 안경들 은 분류와 포장을 거쳐 55갤런들이 드럼통에 담겨 안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아프 리카, 남아메리카, 파푸아뉴기니 등의 헤비타트 현장으로 운반된다. 기껏해야 쓰레 기통에 버려질 운명의 이 안경들은 이렇게 최저가격으로 판매됨으로써 안경이 절실 히 필요한 사람들의 수요를 채워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 수익금은 또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보탬이 된다! 주택문제에 관해 양심을 일깨우는 작업을 하는 조직들은 헤비타트 외에도 많이 있 다. 1987년부터, 유엔은 '무주택자를 위한 국제 보금자리 마련의 해'를 후원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강조는 금세기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 문제를 국제적인 규모에서 조명하고 퇴치하기 위해서, 전세게에 걸친 사업게획과 프로그램들이 진행 되어 왔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들을 전적으 로 지지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서 그들의 행동을 촉구해야 한다. 전세계인의 양심을 교육하려는 캠페인은 끝없이 확장되는 동지애를 필요로 한다. 헤비타트는 다른 단체들과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언제나 기꺼이 그렇게 한다 선명 회는 헤비타트 해외현장에 꼭 필요한 이동식 제재소를 몇 대 제공해 주었다. 선명 회는 미국에서도 미시시피 델타 지역개발에 공동참여했을 뿐 아니라, '교도소선교 회'와 힘을 합쳐 전국에 걸친 헤비타트 사업장에 연방 감옥죄수들로 이루어진 노동 수련캠프를 조직해 보내주었다. 찰스 콜슨이 설립한 세계적 명성을 가진 교도소선 교회의 관장 하에서, 예수를 믿는 수인들은 그룹을 형성해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가석방 되어 헤비타트 사업장에서 건설 일을 돕고 지역주민들의 가정에 머물렀다. 1985년 '미국 유대인 봉사회'의 자원봉사자들은 텍사스 주 아마릴로의 현장에서 7 주동안 일했다. 부페르탈에 본부를 둔 서독 교회기구인 '통일 복음주의 선교회'는 자이레 헤비타트 사업장에 기금과 자원봉사자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게속해서, 함께 일해줄 기구와 단체들을 찾고 있다. 우리는 헤비타트와 동역하는 단체들이 이토록 늘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어떤 때는 지회가 너무 늘어나다 보니 새로운 후원자들이 헤비타트의 본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한 번은 아메리쿠스 헤비타트의 동지인 존과 해리엇 베이츠 부부가 밀워키로 휴가여행을 갔다가 내미있는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어느날 저녁, 위스콘신에서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헤비타트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밀워키에 새로 생긴 지회의 일을 얼마 전부터 돕기 시작한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아메리쿠스에도 헤비타트가 있단 말인가요?" 베이츠의 친구가 헤비타트의 원조를 알건 모르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양심이 깨어났고, 그 결과 극빈주택 문제를 돕기 위해 일하 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이 전세계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짓는 집 한채 한 채, 우리가 개축하는 낡은 건물 하나 하나, 우리가 개보수하는 주택 한 채 한채가 모두 한 편의 설교이다. 이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또 그 곳을 지나치 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이 집들 한 채 한 채 는 각각 하나의 양심이 되어, 그 집을 짓는 사람과 그 집에서 사는 사람 모두에게 비인간적인 주거지가 지상에서 사라질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헤비타트 운동은 놀랍도록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어서, 이 곳 아메리쿠스의 국제 사무국에서조차 전체적인 발전상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1980년 <모르타르에 깃 든 사랑>이 출간되었을 당시에 미합중국 전역에 있던 사업장의수(11개 곳)보다 5년 뒤 1개 주에 생겨난 사업장의 수가 더 많을 정도이다. 1995년까지 우리는 미국 전 역에 걸쳐 1,000여 군데에 헤비타트 사업을 시작하고 최소한 해외 50개국에 헤비타 트 사업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이든 해외든 그 어디서나 새로운 입주자가 그 지역에 있는 인류를 위한 기금에 상환금을 납입하면, 그 돈은 순환된다. 각각의 가족은 상환금을 미리 납부하거나 시간과 노동을 무료로 제공합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권유받는다. 헤비타트의 프로그램은 '적선'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새 힘 을 주고자 하며, 절대 의존심리를 부추겨 인간의 품위를 짓밟지 않는다. 헤비타트의 개념은 어느 곳에서나 통한다. 다만 세 가지 핵심적인 기준을 꼭 준수 해야 한다. 첫째, 각각의 사업현장에는 헌신적인 기독교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핵심집단, 즉 마 음을 합쳐 어려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는 일에 예수 경제학을 충실히 적용할 동역 자들이 꼭 있어야 한다. 둘째로, 선정도니 가족들은 자기 집을 짓고 다른 사람들의 집을 짓는 과정에 동참해야만 한다. 셋째로, 집을 짓는 데 사용하는 모르타르에는 집을 받을 가족들을 향한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담겨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축하할 일이 많다. 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헤비타트 운동 으로 일구어낸 기적도 감사하지만, 린다와 내가 함께 누린 보람찬 삶도 감사하기만 하다. 오랜 옛날 뉴욕 시에서 화해한 뒤 우리는 줄곧 주님의 축복과 인도를 느껴왔 다. 그리고 1985년 8월의 어느 날 뉴욕에서 카터 대통령과 두 번째 노동수련캠프를 끝마칠 무렵, 린다와 나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신 길로 계속 나아가라는 계시가 분명했다. 우리는 메트로 교회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영화를 보러 타임즈 스퀘어까지 걸어가 기로 했다. <백 투 더 퓨처> 가 브로드웨이의 한극장에서 상영중이었다. 이 SF코미 디에서는 한 10대 소년이 갑자기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미래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영화를 아주 감명깊게 보았다. 내 용도 재미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차원에서 상징하는 바가 컸다. 극장문을 나서 면서 우리들은 '과거로 돌아가' 20년 전 뉴욕 시에서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1965년의 그 날 밤은 11월이었고 추웠다. 우리 두사람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린다 는 그 ㅂ 주 전 나를 떠나 별거를 시작했다. 이혼할 생각도 했다. 린다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마치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듯 대규모 정전이 있었다. 나는 마 침내 앨러배머 주 몽고메리의 우리 집을 떠나 뉴욕으로 린다를 찾아갔다. 어느 날 저녁, 린다와 나는 영화<결코 늦지 않으리>를 보러 갔다. 그 제목은 예언 적이었다. 몇 시간 후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는지 고백하는 가운데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렸고, 화해가 싹텄다. 그렇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 날 밤 우리는 사업을 정리하고, 재산을 헌납하고, 우리의 살에 예비해두신 하나 님의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20년이 흐른 뒤 우리는 잃게 뜻 깊은 장소로 되돌아온 것이다. 영화가 끝나 고 나서, 우리는 5번가로 걸어가 성 패트릭 성당에 들렀다. 우리는 1965년의 그 날 밤에 이 차가운 계단에 앉아 우리의 삶을 온통 봐꿔놓는 결심을 했다. 20년의 간격 을 두고 다시금 55번가에서 5번가를 건너가는데, 린다가 갑자기 외쳤다. "그때랑 똑같은 달이 떴어요!" 나는 경외심에 가득차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보름달이 정확히 55번가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길모퉁이에 서서 물 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참 후에야 우리는 천천히 성당의 계단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우리는 거기에 앉아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함께 앉았던 때와 그 후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가마히 돌이켜 보았다. 그 곳을 떠나며 우리는 20년 뒤 이 계단으로 다시 돌아와 또한번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했다. 코이노니아 농장에 몇 사람이 모여 어려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집을 짓자는 야 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 20년이 약간 못 되었다. 1968년 조지아 주 섬터 카운티에서 는 극빈주택을 추방하려는 우리의 꿈이 그저 엄청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1986년 이 책이 조판에 들어갈 때쯤이면, 헤비타트와 코이노니아 동지회의 일꾼들은 섬터 카운티에만도 200채의 새 집을 완공하고 수많은 집들의 개보수를 완 료할 것이다. 우리의 꿈은 더 이상 엉터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훨씬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극빈주택의 자취를 없앨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만일 선의를 가진 전세계 사람들이 이 엄청난 일을 극복하 는 데 힘을 모은다면 말이다. 양심이 일깨워진 사람들이 또 다른 이의 양심을 일깨 운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작지만 살 만한 집을 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 을 해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기를. 헤비타트 운동의 깃발 아래, 아니 어느 깃발 아래에서든 우리와 함께 힘을 합치자. 주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 그 길로 따라 가자. 무너져 내리는 혐흙집에서, 썩어가는 도시 빈민가에서, 혹은 마분지로 만든 집에서, 심지어 맨땅바닥이나 시멘 트 보도 위에서 자는 사람들을 구출해내자. 우리는 이제 서로 서로, 그리고 하나님 과 더불어 위대한 동역관계를 맺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자이레 응톤도의 정력적인 헤비타트 사업장 이사 샘 몸퐁고는 언젠가 우리의 현상 황을 한마디로 완벽하게 요약했다. "전세계 주택문제는 물질이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판잣집은 이제 그만! 이제 전세계의 극빈주택은 사라질 때가 되었다! 우스꽝스럽다 고? 황당무게하다고? 불가능하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부록: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1. 겨자씨 같은 시작 한국 헤비타트는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서 1980년도 후반에 시작되었다. 예수원 원장인 대천덕 신부가 그의 저서 <산골짜 기에서 온 편지>에서 처음으로 '헤비타트'라는 아이디어를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실행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는 고왕인 박사(남서울교회 장로)가 이 글에 소개된 헤비타트 사업이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 회복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필 요하다고 판단하여 헌신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에 정근모 전 과기처장관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공식기구로 발족한 한 국 헤비타트는 1994년 5월, 다섯 명의 자원봉사자가 필리핀 마닐라의 로타리빌 헤 비타트 현장에 단기자원봉사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본격화되었다. 필리핀 에서 헤비타트의 가능성을 본 의정부 지역 지도자(김종열 장로, 한응수 목사, 김영 재 집사 등)들은 지회를 결성하고 의정부 두레공동체가 기증한 경기도 양주군 백석 면의 부지 220평에 3세대의 주택을 건설했다. 지난 한 건축과정이었지만 준공 때 모든 헤비타트 가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북한을 포함해 한반도 전역에 예수님의 이 름으로 집들이 지어지리라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의정부 지회의 건축사업은 매년 지속되어 1997년말 현재 11채가 건설되었다. 1995년 5월, 24명의 자원봉사단이 국제 헤비타트가 주관하는 '지미 카터 프로젝트' 에 참여하여 1주일 안에 21채의 집이 흑인 빈민가 안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뜻 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자원봉사자들은 의정부 제2차 사업에 밑거름이 되었고 1996년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해외지원사업의 기폭제가 되었다. 2. 은혜의 문이 열리다 1996년 초반부터 시작된 한국 헤비타트의 제2지회 설립을 위한 노력은 태백에서 결실하였다. 남한의 2대 강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는 태백지역은 근대화를 위한 희생 이후에 피폐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1996년 8월, 여섯 명의 태백지 역 자원봉사자가 필리핀 바콜로드에 가서 헤비타트 자원봉사를 하고 온 후 태백지 회 설립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97년 1월 실행위원회 인선이 마무리되고 그 해 4 월 연합회 이사회로부터 정식으로 지회 설립 승인을 얻었다. 7월부터 시작된 제1차 건축사업에는 태백시뿐 아니라 전국에서 7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였다. 1997년 10월에는 진주지회와 서울지회가 정식설립인가를 받아 공식적인 지회가 네 개로 늘어났다. 1997년 연말, 연합회는 전국 6개 지역에서 12,079평의 토지를 확 보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의정부지회, 태백지회, 진주지회, 청주지회의 사업이 활 기를 띠게 되고 한국 헤비타트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 헤비타트는 1997년 말까지 국내에서 13채의 집을 건축했지만 필리핀에는 55채 의 건설을 지원했다. 자원봉사자들은 필리핀 마닐라, 바콜로드, 두마게티, 제너럴 산토스, 탈락, 카가얀벨리 등의 지역으로 흩어져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건축에 참여하였다. 55채의 집을 짓는 동안 필리핀인들의 가슴에는 웃음을 머금고 예수님 의 사랑을 나누며 땀을 흘리던 수백 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새겨졌다. 자원봉사자들은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었고 선교의 열정을 훈련받았다. 1997년 에는 한국국제협력단의 공식 비정부조직으로 선정되어 필리핀 시업을 위한 정부지 원을 받게 되었다. 3. 새롭게 만나는 예수님에 대한 사연들 태백 박영대 씨의 경우 태백지회의 1차사업을 통해서 태백에서 처음 헤비타트 가정이 된 박영대씨는 1997 년 9월 6일 입주식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광산노동자였습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사업의 실패와 사고로 모두 탕진 하고 목발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죽으려 고 했습니다. 돈 못 벌어도 좋으니 제발 살아 있어만 달라는 아들의 부탁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삶을 이제까지 살아왔는데 여러분의 도움으로...... 감사합니다." 처음 공사가 시작될 때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현장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수백 명 의 자원봉사자가 옹벽을 만들고 기초가 완성되자 그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공사 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벽체가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 석고보드를 내부에 다 붙여 놓은 상탱서 갑자기 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붕이 없기 때문에 혹 비가 오면 석 고보드를 몽땅 못쓰게 될 상황이었다. 대책없는(?) 헤비타트 자원봉사자들은 비닐 을 덮어두고 기도를 했다. 그 날 태백 전역에 비가 왔는데 계산동 절골에만 비가 안 왔다. 다음날 박영대 씨는,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 나도 한 번 믿어봅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교회에 충 실히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기를 '아버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던 700명의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편지함을 집 앞에 걸어 두고 있다. 한 대학생이 필리핀에서 만난 예수님-삼촌 구름이 웃고 있네 충현교회 대학부 서한설 형제는 전도사로 시무하시는 어머니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 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던 그는 하나님을 항상 화가 난 모습으로 상상했다. 1997년 1월, 대학부 친구들의 권유로 억지로 참여한 필리핀 바콜로드 헤 비타트 건축선교현장에서 그는 새로운 예수님을 만났다. 일주일 동안 그는 모든 것 을 잊어버리고 노동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극성스러우리만큼 주위를 맴돌던 필리핀 아이들과도 날이 갈수록 정이 들어갔다. 마지막 날 헤비타트 입주가정들이 마련한 송별회를 마치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고 있던 때였다. 함께 걸어 오 고 있던 요한(10살)이가 "삼촌! 하늘에 구름 사람이 웃고 있어"라는 말을 했다. 하 늘을 보니 예수님 형상을 한 구름이 오랫동안 한설 형제를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현재 군복무를 하고 있는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4. 헤비타트 사업의 성경적인 기초 1)기적을 신뢰하는 믿음-예수님의 경제학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다 는(히 1:3) 사실을 믿는다. 무주택 서민들의 아픔은 예수님의 고통이며 이들을 위 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물질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할 때 기적을 베 푸실 수 있다. 한국에서 한 채 한 채의 집이 지어져가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과 같 은 일ㅇ.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기적이 우리의 앞에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 는다. 2) 행동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망치의 신학 현대교회는 수많은 사항에 대해서 불일치를 보이지만 헤비타트는 행동하는 사랑으 로 일치를 이룬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사랑으로 집을 지어주는 일에는 교파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헤비타트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 교회가 일치할 수 있는 한 가지 가 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망치로 함께 집을 짓고 땀을 훌리면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교회는 하나가 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조직적인 일치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현장에서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를 섬기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현대에 유용한 하나님의 법 가난한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이자를 취하지 못한다는 구약의 율법은 헤비 타트가 입주가정들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 율법의 근본적인 취지들이 현대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5. 헤비타트가 꿈꾸는 비젼 1) 200개 이상의 지역에 헤비타트 지회를 설립한다. 헤비타트는 지회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건축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수 많은 지역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헤비타트는 향후 수 년 동안 지회설립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5년 이내에 전국 약 200개의 지회를 설립 해서 모든 지역에 있는 무주택 서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할 것이 다. 2) 모든 교단과 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며, 교회는 건설적인 공동체로 훈련을 받 는다. 모든 주요 교단이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하고, 모든 교회들이 헤비타트에 대한 소실 을 들으며, 매년 사업계획 수립과정에서 헤비타트와 연계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헤비타트는 교회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 헤비타트는 교회가 지역사 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좋은 동역자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함께 치수를 재고 집을 견고하게 건축하는 실력 있는 공동체로 훈련받을 것이다. 3) 해외의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연합회는 매년 해외 선교자원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개인이나 단체로 참 여하는 것을 연합회가 도울 것이다. 혹 여러분이 직·간접적으로 우리기업의 해외 현지법인이나 교회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이 현지 사회를 헤비타트 운동을 통해 서 도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의논해 주기 바란다. 4) 당신의 학원에 헤비타트 운동을 심을 수 있다. 학생은 헤비타트 사역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고 미래의 헤비타트 지도자들이다. 헤비타트는 학원에서 기독학생들이 주축이 된 헤비타트 동아리의 설립에 대해서 매 우 긍정적이다. 미국의 경우 주요대학들에 '캠퍼스 쳅터'라는 이름을 가진 헤비타 트 학생조직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학 내에서 학생들에게 헤비타트 활동을 홍보하 고 국내와 해외에서 진행되는 건축현장과 지회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헤비타트 의 리더십을 훈련한다. 별도의 헤비타트 조직 외에도 대학의 선교단체들과 헤비타 트는 매우 우호적이며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5) 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으로 헤비타트에 동참할 수 있다. 단순한 기금의 지원이나 기 술, 자재의 지원단계에서부터 전직원들을 건축현장에 동참시키는 단계까지 있다. 일시적으로 후원하는 회사도 있고 매년 정지적으로 참여하는 회사도 있다. 이러한 단계까지 이르는 경우에는 대부분 헤비타트에 대한 열정을 가진 직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여러분의 회사가 어떠한 형태로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지 생각하고 방법을 모색해보라. 6) 개인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경제적후원-헤비타트사업 전반을 위해서 정기후원회원이 될 수 있다. 액수에는 제한이 없다. ·기술적후원-건축설계,건축시공관련 각종 기술, 컴퓨터, 디자인, 작문, 번역, 통 역, 기금모금, 이벤트 관련 기술 등 각종 기능을 가지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영적인 후원-개인기도 시간에 헤비타트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그룹기도와 새벽기 도회에서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제목을 공유하라. 우리는 여러분들이 헤비타트를 통해서 더 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2)모든 교단과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며, 교회는 건설적인 공동체로 훈련을 받는 다. 모든 주요 교단이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하고, 모든 교회들이 헤비타트에 대한 소식 을 들으며 매년 사업계획 수림과정에서 헤비타트외 연계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헤비타트는 교회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 헤비타트는 교회가 지역사 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좋은 동역자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함께 치수를 재고 집을 견고하게 건축하는 실력 있는 공동체로 훈련받을 것이다. 3)통일 이후에 북한의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통일 이후르 감당할 수 있는 사회역량을 준비할 것이다. 100개의 지회에서 매년 10 채의 주택을 건설한다면 1년에 1,000채의 주택이 건설된다. 이러한 사업을 수행하 는 과정에서 헤비타트는 사회의 선한 세력들이 매우 세밀하고 따스하게 사회를 섬 길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훈련하게 된다. 이렇게 훈련된 사회역량은 통일 이 후 북한의 부담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남한보다 매우 심각 한 북한의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헤비타트가 제시할 수 있다. 4)선교에 새로운 장을 열고 가난한 아시아인들의 눈물을 씻는다. 헤비타트가 짓는 집은 지역사회 속에 세워지는 사랑의 설교이며,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들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메시지다. 온전한 선교는 개인의 영혼뿐만 아 니라 그 개인이 처한 상황을 회복시킬 수 있는 는력을 포함한다. 오늘날의 선교는 교회개척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접근을 요청하고 있다.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헤비 타트 운동에 참여하는 개인은 입체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선교훈련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신을 낯추고 동역하는 법을 배우로, 지역사회개발의 원리들을 훈련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시아의 어려운 이웃들 을 위해 건축하는 사업에 다양한 형태로 기여할 것이다. 이제껏 해오던 것처럼 한 국 헤비타트는 해외에 장단기 자원봉사단 파견을 계속할 것이며, 해외에 헤비타트 선교사를 파송할 것이다. 이들은 국제 헤비타트와 연계해서 해당국가에서 헤비타트 운동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담당할 것이다. 5)민족의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성을 훈련한다. 경쟁에 익숙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회를 품고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 사는 법 을 훈련하려고 한다. 대규모의 자원봉사활동에 젊은이들이 참여하면서 땀의 의미와 이웃사랑의 의미를 깨달아 훈훈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가정선정, 설계, 시고 등 많 은 의사결정과정을 민주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수행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적인 지도력 을 훈련한다. 6.참여하는 방법 1)여러분의 지역에서 헤비타트 사역이 시작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헤비타트는 한 지역의 성도가 헤비타트를 그 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사업 으로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이 사는 지역에서 어려운 무 주택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사업이 시작될 수도 있다. 먼저 연합회에 연락하고 안내를 받으라-연합회는 지역의 다른 동역자와 연결해 주 거나 가장 가까운 지회의 활동이나 연합회의 활동에 여러분이 참여하도록 하여 헤 비타트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를 도울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헤비타트에 대해서 알리라-이를 통해 지역에서 여러 번의 소규모 설며외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을 대표할 인원구성이 준비될 때 연합회와 구체적인 지회설립을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지회설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 준비위원회는 지회설립의 제반준비를 갖추고 연합회와의 협의 아래 지회설립신청을 하며, 연합회 이사회는 그 지역 조직에 대한 세빌한 분석을 통해 지회 승인을 결정 하게 된다. 2)여러분의 교회가 헤비타트의 동역자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헤비타트 운동의 중심은 교회이다. 처음에는 여러분의 교회의 소수의 사람에게 헤 비타트 운동에 대해서 소개하고 국내외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라. 여러분의 교회에 헤비타트에 대한 메시지나 간증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라. 궁극적으로는 여 러분의 교회가 정기적으로 헤비타트 사역에 동참하도록 '언약교회'의 관계가 형성 되도록 하라. 여러분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웃에 있는 아른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 거나 동일 교단의 다른 교회들과 연합해서 매년 한 채의 주택을 건설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많은 교회들의 경우에는 헤비타트 사업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교단 내의 다른 교회 및 다른 교단의 지역교회들과 하나가 되는 기회로 삼 고 있다. 대학부, 청년부의 하계수련회를 건축현장에서 갖는 방안을 계획해보라. 3) 해외의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연합회는 매년 해외 선교자원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개인이나 단체로 참여하는 것을 연합회가 도울 것이다. 혹 여러분이 직, 간접적으로 우리기업의 해외현지법인이나 교회들고 연결 되어 있다면 그들이 현지 사회를 헤비타트 운동을 통해서 도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의노해 주 기 바란다. 4) 당신의 학원에 헤비타트 운동을 심을 수 있다., 학생은 헤비타트 사역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고 미래의 헤비타트 지도자들이다, 헤비타트는 학원에서 기독학생들이 주축이 된 헤비타트 동아리의 설립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다. 미국의 경 우 주요대학들에 '캠퍼스 쳅터'(Campus Chapter)라는 이름을 가진 헤비타트 학생조직이 존재한 다. 이들은 대학 내에서 학생들에게 헤비타트 활동을 홍보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진행되는 건축현 장과 지회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헤비타트의 리더십을 훈련한다. 별도의 헤비타트 조직 외에 도 대학의 선교단체들과 헤비타트는 매우 우호적이며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5) 기업이 참여할 수 있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으로 헤비타트에 동참할 수있다. 단순한 기금의 지원이나 기술, 자재의 지원 단계에서부터 전직원들을 건축현장에 동참시키는 단계까지 있다. 일시적으로 후원하는 회사도 있 고 매년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회사도 있다. 이러한 단계까지 이르는 경우에는 대부분 헤비타트에 대한 열정을 가진 직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여러분의 회사가 어떠한 형태로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방법을 모색해보라. 6) 개인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가) 경제적후원: 헤비타트사업 전반을 위해서 정기후원회원이 될 수 있다. 액수에는 제한이 업 다. 나) 기술적 후원: 건축설계, 건축시공관련 각종 기술, 컴퓨터, 디자인, 작문, 번역, 통역, 기금모 금, 이벤트 관련 기술 등 각종 기능을 가지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다) 영적인 후원: 개이기도 시간에 헤비타트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그룹기도와 새벽기도회에서 헤비타트를 위한 기도제목을 공유하라. 우리는 여러분들이 헤비타트를 통해서 더 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한국 헤비타트 연락처: 02-261-37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