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나치즘의 심리 앞 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심리적 타입, 즉 권위주의적 경격과 자동기계화에 주의를 집중했다. 나는 이러한 타입의 상세한 논의가 이 장과 다음 장에서 제시되는 문제, 즉 한편으로는 나치즘의,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치즘의 심리를 논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의 예비적인 문제 - 즉, 나치즘을 이해할 때의 심리적인 요소의 관련성 -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치즘에 대한 과학적 논의와 통속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자주 제기된다. 첫째는 심리학은 파시즘과 같은 경제적, 정치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견해이고, 둘째는 파시즘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라는 견해이다. 첫째의 견해는 나치즘을 모름지기 경제적 사회 운동 - 독일 제국주의의 팽창적인 경향 - 의 결과로 보거나, 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현상 - 실업가나 귀족들의 지원을 받는 한 정당에 의한 정복 - 이라고 보고 있다. 요컨데, 나치즘의 승리는 다수의 민중에 대한 소수자의 책략과 강압의 결과로 간주된다. 한편, 둘째 견해는 나치즘이 심리학에 의해서만, 혹은 더 나아가 정신병리학에 의해서만, 혹은 더 나아가 정신병리학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미치광이 혹은 '신경증 환자'로 간주되며, 그의 추종자는 같은 미치광이로 정신적인 균형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멈포드가 설명했듯이 파시즘의 진정한 근원은 '경제상태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한다. '무섭고도 강한 자존심, 잔인한 것을 즐기는 성격, 신경증적인 분열... 파시즘은 베르사이유 조약이나 독일 공화국의 무능력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을 강조하는 나머지 심리적 요인을 배제해 버리는 것과 같은 설명 - 혹은 그 반대도 - 모두가 옳지 않다. 나치즘은 심리적인 문제이기는 하나, 심리적 요인 그 자체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또 나치즘은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 것은 심리적 기반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장에서 거론하는 것은 나치즘의 이 심리적인 측면, 그 인간적인 기반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시사한다. 즉, 나치즘이 호소한 인간의 성격구조와, 그 사람들에게 그토록 유효한 도구가 된 그 이데올로기의 심리적 특징이라는 두 가지 문제이다. 나치즘의 성공에 있어서의 심리적 기반을 생각할 때, 우선 맨 먼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부 사람들은 어떤 강력한 저항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나치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실천의 찬미자가 되지도 않고 나치정권에 굴복했다.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깊이 끌려서 그 주장자들을 열광적으로 추종했다. 첫 번째 그룹은 주로 노동자 계급과 자유주의적 및 가톨릭적인 부르즈와지로 형성되었다. 이 그룹은 나치즘에 대해 그 당초부터 1933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나, 그 우수한 조직, 특히 노동자 계급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신념의 표현으로서 응당 기대해도 좋을 내적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의 의지는 당장 붕괴됐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나치 정권에 대해 거의 장해물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동안 줄곧 나치즘에 대해서 영웅적으로 싸운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 나치 정권에 대해 그와 같이 기꺼이 복종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주로 내적인 피로와 체념의 상태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상태는 다음 장에서 지적되듯이 현대에 있어서의 개인의 특징이며, 그것은 민주적인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에 있어서는 노동자 계급에 관한 한 또 하나의 조건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1918년 혁명에서의 최초의 승리 이후 노동자 계급이 맛본 패배이다.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의 실현, 혹은 적어도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명확한 향상에 대한 드높은 희망을 품고 전후의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어찌 됐든 노동자 계급은 패배의 부단한 연속에 직면하여 모든 희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1930년 초까지는 최초의 승리의 여러 성과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그 결과는 체념, 지도자에의 불신, 모든 정치적 조직과 정치적 활동의 가치에 대한 회의 등의 심각한 감정을 주었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자기들 정당의 구성원으로 머물러, 의식적으로 그 정치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행위의 유효성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쥐고부터는 또 하나의 유인이 더욱 힘을 얻어 대다수가 나치 정보에 대해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있어 히틀러의 정부는 '독일'과 똑같은 것이 되었다. 일단 히틀러가 권력을 쥔 이상,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독일인의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몰아내는 것을 뜻했다. 다른 여러 정당이 해산되고 나치당이 독일 그 자체가 되었고, 나치당에 대한 반대는 독일에 대한 반대를 뜻했다. 큰 집단과 합치되지 않았다는 감정처럼 일반사람에 있어 참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나치즘의 여러 원리에 대해 아무리 반대하고 있다손치더라도 만약 그가 고독하다는 것과 독일에 속해 있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 중 어느 편을 택해야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나치즘에 대한 공격은 독일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낌으로써 나치스가 아닌 사람들마저도 외국인의 비판에 대해서는 나치즘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찰할 수 있다. 어떤 정당이라도 일단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면, 고독의 공포와 도덕적 원리의 상대적인 약화가 대부분의 민중의 충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서 정치적 선전의 문제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공리가 생긴다. 즉, 독일 그 자체에 대한 공격, '독일인'에 대한 비방적 선전 - 제 1차 세계대전때 야만인(훈족)이라고 불린 것 같은 - 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더라도 나찌체제와 합치되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심까지도 증대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교묘한 선전에 의해 해결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근본적인 진리, 즉 윤리적 원리는 국가의 존재 이상의 것이며, 개인은 이러한 원리를 고수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진리가 모든 나라에 있어 승리를 얻었을 때 비로소 해결되는 일이다. 노동자 계급이나 자유주의적 및 가톨릭적인 부르주와지의 소극적인 체념의 태도와 대조적으로 나치의 이데올리기는 작은 상점주, 직공, 화이트 칼라 등으로 이루어진 하층 중산계급에 의해 열렬히 환영되었다. 이 계급의 구세대 사람들은 보다 소극적인 대중적 기반 위에 형성되었지만, 그들의 아들이나 딸들은 보다 적극적인 투사였다. 그들에게는 나치의 이데올로기 -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의 정신, 종복과 지배에 대한 갈망, 독일 민족과 '북구 인종' 의 찬미 - 는 놀랄만한 감정적 매력을 주었다. 그들을 장악하여 나치 운동의 열렬한 신자나 투사로 만든 것은 모름지기 이 매력이었다.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어째서 그토록 하층 중산계급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하층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사회적 성격은 노동자 계급이나 상층 중산계급이나 1914년의, 즉 전쟁 이전의 귀족사회의 성격과는 현저하게 달라져 있었다. 사실 하층 중산계급에는 그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특성이 있었다. 즉, 강자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혐오, 소심함, 적개심, 돈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해서도 인색하다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금욕주의자라는 것 등이다. 그들의 인생관은 좁고 타국인을 의심, 혐오하며,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억측하기를 좋아하고, 질투심이 강하며, 더욱이 그 질투를 도덕적인 분노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생활은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핍의 원칙에 따르고 있었다. 하층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이 노동자 계급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 성격구조가 노동자 계급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층 중산계급에 있어 '전형적'인 것이었던데 반해 노동자 계급에서는 이와 똑같이 명확하게 표시한 것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두가지 특성, 가령 권위라든가 절약에의 열렬한 존경같은 것은 (보다 온건한 형태이기는 했으나 ) 노동자 계급의 대부분의 성원 속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편, 봉급생활자들의 대부분 - 아마 거의 다 - 은 독점 자본주의의 발흥에 참여하지 않고, 본질적으로는 그것에 의해 위협을 당한 '구 중산계급'의 성격구조보다도 오히려 육체노동자 (특히 대공장에 있어서)의 성격구조와 보다 더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층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은 1914년의 전쟁 전부터 줄곧 동일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전쟁 후의 여러 사건에 의해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고 있던 바로 그 특성, 즉 복종의 추구와 권력의 욕구를 강화한 것도 분명하다. 1918년의 독일 혁명 이전의 시기에 이미 구 중산계급의 하층이나, 소규모의 독립상인이나, 직공의 경제적 지위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그 위치를 안정시킬 많은 요소가 있었다. 군주정치의 권위는 확고부동한 것이므로, 하층 중산계급의 성원은 그것에 의지하여 그것과 일체가 됨으로써 안정감과 자기 만족적인 자부심을 획득했다. 또한 종교나 전통적인 도덕의 권위가 아직도 굳건하게 뿌리박혀 있었다. 가정은 아직 동요되지 않아 적대적인 세계에 대한 안전한 피난처였다. 개인은 안정된 사회적, 문화적 조직에 속하여 거기서 자신의 명확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느꼈다. 현존하는 권위에의 복종과 충성은 그의 메저키즘적 충동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자기포기에까지는 가지 않고 자기의 퍼스낼리티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안정성과 공격성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자기가 복종하고 있는 여러 권위의 힘에 의해 보충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개인의 경제적인 지위에는 그 스스로의 자존심과 그에 따른 안정감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견고함이 있어서, 한 개인이 의지하고 있던 권위는 개인적 지위로서는 부여해 줄 수 없는 보다 더 강한 안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 후 이 상태는 크게 변화했다. 우선 첫째로, 구 중산계급의 경제적 쇠퇴는 한결 급속하게 진행됐다. 이 쇠퇴는 1933년에 절정에 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 인플레이션은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의 결과인 축재를 거의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다.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하층 중산계급에 경제적 향상과 새로운 희망이 깃들었으나, 이러한 수확도 1929년 이후의 불경기에 의해 일소되고 말았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으레 볼수 있는 경향이지만 특히 중산계급은 노동자와 상층계급의 중간에 낀 가장 무방비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요인 외에 이 상태에 더욱 박차를 가한 심리적 문제가 있었다. 그 하나는 패전과 군주제의 붕괴였다. 군주제와 국가는,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소시민의 존재를 지탱하는 단단한 암석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몰락과 패배는 이들 소시민이 생활기반을 죄다 무너뜨리고 말았다. 만일 황제가 공공연하게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장교가 공격당할 때, 또한 국가가 그 형태를 변경하여 '붉은 선동자'를 각료로 맞아들이고 마구업자를 대통령으로서 이정해야만 할 때, 소시민은 대체 누구를 신뢰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귀속적 태도로 이러한 모든 제도와 일체가 되어 있었는데, 바야흐로 그러한 것이 궤멸되고 만 이상 그는 어디로 가야할까. 인플레이션도 또한 경제적 및 심리적 쌍방의 역할을 다했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나 검약의 원리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수없이 많은 작은 쾌락을 희생시켜가며 여러 해 동안 모은 재산이 자기 자신의 과실이 아닌데도 상실되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저축의 목적은 무엇일까. 국가가 지폐나 공채에 인쇄된 약속을 파기 할 수 있다면, 도대체 누구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을까. 전후 급속히 쇠퇴된 것은 하층 중산계급의 경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위신도 또한 그러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중산계급 사람들은 자기네를 노동자보다도 우월하게 느낄수가 있었다. 그런데 혁명후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는 현저하게 향상되어, 그 결과 하층 중산계급의 위산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는 내려다볼 사람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은 상점 주인으로서나 그와 비슷한 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귀중한 재산의 하나가 되어 온 특권마저 상실되고 말았다. 이러한 요인에 덧붙여서 중산계급에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마지막 요새인 가족 또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전쟁 후의 발전은 - 아마도 다른 나라들보다도 독일에 있어서는 훨씬 강하게 - 아버지의 권위와 중산계급의 낡은 도덕적 권위를 뒤흔들었다. 젊은 세대는 제멋대로 행동했으며, 자기들의 행위가 부모의 눈에 드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미 개의치 않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너무도 복잡다단해서 여기서 상세하기 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대략 두세 가지만을 언급해 보려고 한다. 군주제와 국가와 같은 권위의 낡은 사회적 심볼의 쇠퇴는 개인적인 권위인 양친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로부터 양친을 존경하도록 배웠는데, 그 양친의 권위가 약함을 드러내게 되자 양친 또한 스스로의 위신과 권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변화된 조건, 특히 인플레이션 아래서 낡은 세대는 갈피를 못 잡고 어리둥절 하여 재치있는 젊은 세대들보다도 새로운 조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젊은 세대가 낡은 세대를 앞질러 나아가게 되자, 선배나, 그들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중산계급의 경제적 파탄은 양친으로부터 자식들의 경제적 장래를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하층 중산계급의 구세대는 더욱더 원한과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나, 그것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 반면, 젊은 세대는 부지런히 행동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지난날 양친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독립된 경제적 존재에 대한 기초가 상실되어 있었으므로 한층 더 악화된 상태에서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직업시장 역시 포화상태를 이루어 의사나 변호사로서 생계를 세울 기회는 극히 적었다.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은 실제로 받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특히 몇 년 동안 명령하는 일에 젖어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권력을 휘두르는 데만 익숙해 있었던 많은 젊은 장교들은 서기나 행상인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의 증대는 국가사회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즉, 구 중산계급의 경제적, 사회적 운명을 인식하는 대신에 그 성원들은 자기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국가와 연결해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의 패배와 베르사이유 조약은 현실적인 불만, 즉 사회적인 불만의 심볼이 되었던 것이다. 1918년 전승자들의 독일에 대한 대우가 나치즘 발흥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라고 자주 일컬어져 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그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대다수의 독일인은 평화조약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느꼈다. 중산계급은 격렬한 반발을 보인 반면에 노동자 계급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해서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제에 반대해 왔으며, 패전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구체제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용감하게 싸웠으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한편, 군주제의 패배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던 혁명의 승리는 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인간적인 여러 가지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베르사이유조약에 대한 분노는 하층 중산계급 속에 뿌리박고 있었는데, 그 국가적 공분은 사회적 열등감을 국가적 열등감에 투영하는 하나의 합리화였다. 이 투영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발전에 있어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하층 중산계급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며, 성공할 어떤 기회도 미래도 없었던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스스로 버림받은 인간이라는 입장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나의 투쟁>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청년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인간' '이름도 없는 인간' 이었다고 자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기인되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국가적 상징속에서 합리화시킬수 있었다. 그는 제국 밖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보다는 국가적으로 제외되어 있었다고 느낌으로써, 독일의 아들들 모두가 돌아올 수 있는 위대한 독일제국이야말로 그에게는 사회적인 위신과 안정의 상징이 되었다. 구 중산계급의 무력감, 불안, 사회 전체로부터의 고립, 거기서 발생되는 파괴성만이 나치즘의 유일한 심리적 원천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자기들이 빚지고 있던 도시의 채권자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또 한편 노동자들은 1918년 최초의 승리 이후 전략적인 주도권을 거의 상실한 지도자 밑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정치적 후퇴로 인해 깊은 실망과 낙담을 하게 되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우리가 독점자본주의의 전형적인 것으로 말한 바 있는 개인의 무의미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심리적 여러 조건이 나치즘의 직접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한 것은 나치즘의 발전에 불가결한 인간적 기초를 이루어주었을뿐이다. 그러나 나치즘의 발흥과 승리에 관한 현상 전체를 분석하려 한다면 심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엄밀한 의미의 경제적, 정치적 여러 조건을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이러한 면을 취급하고 있는 문헌과 이 책의 특수한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문제까지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은 대공업의 대표자들과 이미 파산해 버린 융커, 즉 프러시아 귀족들이 나치즘의 확립에 기여한 역할을 상기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나치즘 지지는 심리적 요인보다도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훨씬 잘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유산 계급은 현존하는 사회조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그룹을 대표하는 의원의 40퍼센트를 차지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과 또한 독일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대표들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계급을 대표하고 있던 증가해 가는 나치 의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의회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과반수 유산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졌던 의회는 그들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활동하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회는 오히려 독일 민중의 서로 다른 여러 계급의 저마다의 이익을 충분히 대표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의회제도는 대공업이나 반봉건적인 토지 소유자의 특권을 유지해 가고자 하는 욕구와는 이미 화해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특권계급의 대표자들은 나치즘이야말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감정적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주는 동시에 국가를 그들 특권계급의 경제적 이익에 봉사하게 해 줄것으로 기대했다. 대체로 그들은 실망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소한 점에서는 과오를 저질렀다. 히틀러와 그의 각료는 티센이나 크루프 등에 의해서 명령받는 도구는 아니었는데, 이들은 권력을 나치의 각료들과 나누어 가져야 했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굴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나치즘은 분명히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해서는 경제적으로 해로왔으나, 독일 공업을 가장 유력하게 이끈 그룹의 이익은 조장시켰다. 나치 조직은 전쟁 전의 독일제국주의를 '합리화한 변형'으로서, 군주제가 붕괴한 그 자리에 존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화국은 실제로 독일의 독점자본주의의 발달을 저지한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의 수단으로 그것을 조장한 것이었다. 여기서 많은 독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나치즘의 심리적 기반이 구 중산계급이었다는 진술과, 나치즘은 독일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서 일했다는 진술이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원칙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있어서의 도시 중산계급의 역할에 대한 문제에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전 후 족점자본주의에 의해 위협을 받은 것은 중산계급, 특히 하층 중산계급이었다. 그리하여 중산계급의 불안과 거기서 야기되는 증오가 나타나게 되었고, 마침내 중산계급은 공포의 상태에 빠져 무력한 인간을 지배하려는 갈망과 더불어 예속하려는 갈망으로 충만되었다. 이러한 감정은 서로 전혀 다른 계급에 의해 그 계급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정체에 이용되었다. 히틀러가 그와 같은 유효한 도구가 된 것은 그가 분노와 증오에 찬 소시민(하층 중산계급은 차츰 이들과 일체가 될 수 있었다)의 특징과 독일의 산업주의자들과 융커의 이익에 언제든 봉사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의 특징을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구 중산계급의 구세주로 가장하여 백화점의 파괴와 은행자본의 지배의 타파 등을 약속했다. 그 기록은 아주 명백하다. 이러한 약속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치즘은 순수한 정치적 및, 경제적인 원리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치즘의 원리는 바로 극단적인 기회주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보통의 발전과정에서는 돈이나 힘을 획득할 기회가 거의 없는 몇십만이라는 소시민들이 나치 관료기구의 구성원으로서 상층 계급으로부터 강제로 그 상당한 부와 위신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있었다. 나치 기구 구성원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정적으로부터 빼앗은 일자리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그들은 보다 많은 빵을 획득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가지 구경거리를 얻었다. 이러한 사디슴적인 광경과 다른 인류에 대한 우월감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적 만족은 적어도 한참 동안은 그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빈곤하다는 사실을 보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경제적인 변화, 특히 중산계급의 쇠퇴와 증대 일로를 달리는 독점자본의 권력의 중대한 심리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을 보아 왔다. 이러한 효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확대되고 조직화되었다. 마치 16세기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과 같이. 이렇게 해서 야기된 정신적인 힘은 그 계급이 본래부터 가진 경제적 이익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나치즘은 하층 중산계급의 낡은 사회경제적 지위의 파괴에 참가하면서 그들을 심리적으로 소생시켰다. 나치즘은 그 계급의 감정적인 에너지를 동원하여 이를 독일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목적의 투쟁에 있어서의 중요한 힘이 되게 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히틀러의 퍼스낼리티와 그의 교설 및 나치의 조직이 바로 우리가 '권위주의적' 이라고 부르는 성격구조의 하나의 극단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와 다소간 동일한 성격구조를 가진 민중에게 강력히 호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히틀러의 자서전을 권위주의적 성격의 예증으로서 가장 좋은 것이며, 또 나치의 문헌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것을 나치즘의 심리를 분석하기 위한 중요한 원천으로 삼으려고 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본질은 사디슴적 및 매저키즘적 충동의 동시적 존재로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사디슴은 타인에 대해 어느 정도 파괴성이 혼합된 절대적인 지배력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데 대하여 매저키즘은 자기를 하나의 압도적인 힘 속에 분해시켜서 그러한 힘의 강인성과 영광에 참가할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디슴적 경향과 매저키즘적 경향은 모두 고립된 개인이 홀로 설 수 없다는 무능력과 이러한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공서적 관계를 바라는 요구에서 발생된다. 권력을 바라는 사디슴적 갈망은 <나의투쟁>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히틀러의 정적에 대한 관계의 특징으로서, 그는 정적에 대해 그의 사디슴의 중요한 성분인 파괴적 요소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는데, 그거은 또 그의 독일 대중에 대한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대중을 전형적인 사디슴적 방법으로 경멸하면서 '사랑'한다고 한다. 그는 대중이 지배당하면서 느끼는 만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대중이 요구하는 것은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섬멸, 혹은 무조건 항복이다. 약한 남자를 지배하기 보다는 강한 남자에게 복종하려는 여자와 같이 대중은 탄원자보다도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를 부여받기보다도 어떠한 적대자도 용서치 않을 교리 쪽에 마음속으로는 훨씬 만족을 느끼고 있다. 대중은 수시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갈피를 못잡고, 쉽사리 자기들은 버림을 받았다고 느낀다. 대중은 잘못된 원리도 모르므로,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정신적 폭행의 파렴치함도, 자기들의 인간적 자유의 악랄한 삭감도 깨닫지 못한다.' 히틀러는 연설자의 탁월한 힘에 의해 청중의 의지를 파괴하는 거이 선전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사로 청중의 육체적 피로가 암시에 걸리는 환영할 만한 조건이라고 인정했다. 하루 중 어떤 시간이 정치적인 대중의 집회에 가장 적당한가라는 문제를 논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이나 대낮은 사람들의 의지의 힘이 가장 강한 에너지로써 자기와 다른 의지나 의견이 강제적인 시도에 반항하는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저녁때는 보다 강한 의지의 지배적인 힘에 쉽게 굴복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집회는 모두가 두 대립하는 힘의 레슬링 시합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엄이 있고 사도적인 탁월한 웅변은 자기 정신과 의지력의 에너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연적으로 저항력이 약하된 사람들을 새로운 의지로 끌어넣는데 성공할 것이다.' 히틀러 자신도 복종에의 절실한 동경을 자아내는 조건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대중집회에서의 개인의 상황을 예리하게 기술하고 있다. '새로운 운동의 추종자가 되려 할 때 개인은 외로운 느낌이 들어 자기 혼자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쉬우나, 그는 대중집회에서 비로소 보다 큰 공동체의 광경을 보고 대개의 사람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힘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만으로도 대중집회는 필요하다. 만약 개인이 자기의 작은 일터나 자기를 몹시 왜소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대기업에서 비로소 대중집회에 발을 들여놓고 같은 신념을 가진 몇천이라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면, 그는 우리가 대중암시라고 부르고 있는 마술적인 영향에 굴복한다.' 괴벨스도 같은 식으로 대중을 묘사하고 있다. '민중은 고상하게 지배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 그의 소설 <미카엘>속에 기술하고 있다. 대중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조각가에 있어서의 석재와 같은 존재이다. 또한 지도자와 대중이라는 문제도 화가와 색채의 문제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책 속에서 괴벨스는 사디슴적 인간이 자기의 대상에게 의존하는 모양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즉, 사디슴적 인간은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힘을 가지지 않는 한 얼마나 약하고 공허하게 느끼며, 또 이 지배력이 얼마나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인지를 그리고 있다. '사람은 가끔 심각하게 의시소침해질 때가 있다. 사람은 다시 대중 앞으로 나갈 때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데, 민중이야말로 우리들의 권력의 원천이다.' 나치스가 통솔력이라고 부르는 민중에 대한 특수한 권력에 대해서는 독일 노동전선의 지도자인 라이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 나치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지로가 지도자 교육의 목적을 논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지도하는 의지, 주인이 되려는 의지. 한마디로 말하면 지배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졌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한다. ...우리는 지배하며 그것을 향락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삶의 존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을 주기 위해 승마를 가르칠 것이다.' 권력에 관한 이와 같은 강조는 교육목적에 대한 히틀러의 공식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생도의 '모든 교육과 발전은 남에게 대해 절대적으로 월등하다는 확신을 주도록 지도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그가 소년은 반항하지 않고 부당함을 참을 수 있게 교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은 이미 독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모순은 권력을 바라는 욕망과 복종을 바라는 욕망 사이의 매저키즘적 갈등의 전형적인 것이다. 대중을 지배하는 권력을 얻고 싶다는 소망은 엘리트들, 즉 나치의 지도자들을 충동질한 요소이다. 앞서의 인용이 보여주듯이, 이 힘에의 소망은 때로는 거의 놀랄만한 솔직함으로 표현된다. 또한 때로는 지배되는 것이야말로 대중이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보다 온건한 형태로 표현된다. 또 때로는 대중에게 아부하며, 따라서 대중에 대한 냉소적인 경멸을 숨겨야 할 필요에서 다음과 같은 트릭이 사용된다. 즉, 자기보존의 본능 - 그것은 나중에 보는 것과 같이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는 권력욕과 동일한 것이지만 - 에 대해 그는 '아리아 인종은 공동체의 생명을 위해 자아를 기꺼이 종속시키며, 때가 요구한다면 자아를 희생하기 때문에' 자기 보존의 본능을 아리아 인종에 있어서 가장 숭고한 형태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다. '지도자들'이란 첫째로 권력을 누리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도 결코 사디슴적 만족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 안의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 그리고 마침내는 약소하다든가 쇠망해 가고 있다는 취급을 받는 다른 여러 나라의 국민들도 대중을 만족시키는 사디슴의 대상이 된다. 물론 히틀러와 그의 각료는 독일의 대중을 지배하는 힘을 누리고 있지만, 이러한 대중은 다른 나라의 국민을 지배하는 힘을 누리도록, 또한 세계 제패의 야망을 불태우도록 교육되고 있다. 히틀러는 세계 제패의 야망을 자기의, 혹은 자기 당의 목표로서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는 평화주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 최고의 인간이 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공이 되도록 미리 세계를 정복하여 복종시켜 놓았을 경우에는 평화적이며 인도적인 사상도 완전히 최상의 것이 될 것이다.' 또 그는 '인종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그 인종의 최선의 요소를 보존하는데 헌신하는 국가는 언젠가는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다. 보통 히틀러는 그의 권력욕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요한 합리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가 다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곧 그 국민 자신의 이익과 세계 문화의 번영을 위해서라느니, 또한 권력욕은 영원한 자연법에 입각한 것인데 자기로서는 이 법칙을 인식하여 오직 그것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느니, 그리고 그 자신은 보다 높은 힘 - 신, 운명, 역사, 자연 - 의 명령 아래 행동하고 있으며, 또 그의 지배계획은 다른 민족이 그 또는 독일 국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기도에 대한 단순한 방위라느니 하는 따위이다. 그는 오직 평화와 자유만을 바라고 있다고 한다. 합리화의 첫번째예는 <나의 투쟁>속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만약 독일 국민이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타국민이 향수한 것과 같은 집단적 톨일을 가지고 있었다면, 독일 제국은 아마도 오늘날 이 지구상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독일의 세계제패는 '평화주의적이며 직업적이며 여성적인 나약한 애도자들의 종려나무 가지로 지탱되는 평화가 아니라, 세계를 보다 높은 문화에 봉사시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국민이 가진 승리의 칼에 의해 수립된 평화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히틀러는 가정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그의 목적은 독일의 번영뿐만 아니라 문명 전방의 최선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은 모든 신문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권력욕은 자연의 법칙에 입각하고 있다는 두 번째 합리화는 단순한 합리화 이상의 의미를갖고 있다. 즉, 그것은 진화에 대한 그의 조잡한 통속화 속에 묘사되어 있듯이 자기의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 복종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생되고 있다. 히틀러는 '종족 보존의 본능 속에 인간사회 형성의 제 1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자기보존의 본능은 약육강식의 싸움에로 이끌 뿐 아니라 또한 경제적으로는 적자생존을 야기시킨다. 자기보존의 본능과 타인에 대한 지배력의 동일시는 '인류의 최초의 문화는 분명히 가축보다 열등한 인간의 사역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말한 히틀러의 추정 속에 특히 충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사디슴을 '모든 지혜의 잔인한 여왕'인 자연에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연의 보존법칙은 '필연서의 철칙 및 이 세계에 있어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강한 사람이 승리의 권리를 가진다는 철칙에 결부되어 있다'고 했다. 이 조잡한 다윈주의와 관련하여 '사회주의자' 히틀러가 무제한적 투쟁의 자유원칙을 옹호하는 사실을 주의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서로 다른 국가주의적 그룹의 협동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합에 의해 에너지의 자유로운 활동은 구속당하게 되며, 최상의 것을 선택하기 위한 투쟁은 중지되고, 나아가서는 보다 건전하고 보다 강한 인간의 필연적이며 궁극적인 승리는 영원히 방해받는다.' 그는 다른 곳에서 에너지의 자유로운 활동이 생명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다윈의 이론 자체는 새도매저키즘적 성격이 가지는 감정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많은 지지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인류가 보다 나은 문화의 단계로 진화한다는 희망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에 있어서는 그것은 그 자신의 사디슴의 표현이며, 동시에 정당화였다. 그는 다윈의 이론이 그에게 준 심리적 의미를 아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가 아직 무명인사로서 뮌헨에 살고 있었을 때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는 '그 작은 방에서 놀고 있는 생쥐에게 빵조각이나 딱딱한 껍질을 던져주고는 이 익살스런 작은 동물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이 맛있는 먹이를 서로 배앗으려고 격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 격투야말로 소규모적인 다윈의 '생존경쟁'이었다.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로마 황제의 구경거리인 곡마장의 소시민적 대용품이었으며, 그가 뒷날에 만들어낸 역사적 구경거리의 예비행위였다. 그의 사디슴에 대한 마지막 합리화, 즉 남의 공격에 대한 방위로서의 정당화는 히틀러의 저서 속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와 독일 국민은 항상 결백한 사람들이었으나 적은 사디슴적인 짐승이다. 이에 대한 많은 선전은 신중하고도 의식적인 거짓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정신 분석적 비난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자기 자신의 사디슴이나 파괴성이 탄로날 것을 방비하는 기능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디슴적 의도를 가진 것은 바로 당신이며, 따라서 나는 결백하다는 방식에 따라 행해진다.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이 방어의 메카니즘은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솔직하게 자기의 목적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적이 행하면 이를 도리어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자신의 행동이 가장 정당한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가졌다고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나 프랑스 인을 비난하고 있다. 그는 이 모순을 합리화함으로써 숨기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 프랑스 령 아프리카 군대를 라인 지방으로 데리고 온 것을 비난했다. 그들의 의도는 필연적으로 생기는 사생아의 출산으로 백색 인종을 파괴하여 '자기들이 대신해서 주인의 지위에 오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다른 민족이 가졌다고 하여 이를 비난하는 모순을 깨닫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자기 보존의 본능은 지배를 바라는 아리아 인종의 충동 속에서 볼 수 있는 이상주의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여 그 모순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 그와 동일한 비난이 프랑스 인에게도 퍼부어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인이 독일인을 교살하여 그 힘을 빼앗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 비난은 '유럽의 패권을 지향하는 프랑스 인의 욕망'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지만, 자기도 클레망소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는 야만이라고 비난되고, 마르크스주의의 승리는 그 정치적 의지와 행동적 야만성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동시에 히틀러는 '독일에게 결핍된 것은 야만적인 힘과 교묘한 정치적 의도와의 긴밀한 협동이었다'고 언명했다. 1938년의 체코의 위기나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와 동일한 예를 많이 보여 주었다. 나치의 억압행위는 한결같이 다른 나라의 압박에 대한 방위라고 설명되었다. 이러한 비난은 단순한 속임수에 불과하며, 유대인이나 프랑스 인에게 돌려진 비난을 물들이고 있었던 편집병적 '진지함'마저도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일정한 선전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민중의 일부, 특히 그 성격 구조에 의해 이러한 편집병적 비난을 받아들이기 쉬운 하층 중산계급은 그러한 비난을 믿고 있었다. 힘없는 자에 대한 히틀러의 경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자칭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목적 - 즉, 국민적 자유를 위한 투쟁 -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 특히 명료해 진다. 국민적 자유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은 불성실함은 아마도 무력한 혁명가에 대한 그의 비웃음에 있어서 가장 노골적일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가 본래 뮌헨에서 가담한 국가사회주의의작은 그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와 경멸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아아,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최악의 종류, 최악의 형식의 그룹 결성이었다. 이 그룹이 내가 가담하려던 것이란 말인가! 그 뒤 새로운 당원의 자격이 논의되었다. 즉, 나는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첫 집회에 참석한 히틀러의 인상이었다. 그는 그 그룹을 '바보스럽고 째째한 단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단체의 유일한 장점은 '참된 개인적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히틀러는 자기는 결코 기존 대정당에 참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태도는 그로서는 아주 특징적인 것이었다. 그는 허약하다고 느껴지는 그룹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솔선력과 용기는 그가 기존권력과 싸우거나 혹은 동등한 것과 경쟁해야 할 상황에서는 고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도의 혁명가들에게 대해 쓴 글 가운데서 무력한 자신에 대해 동일한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국가적 자유의 슬로건을 자기의 목적에 이용한 그가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강력한 대영제국을 공격하려고 한 혁명가들에 대하여 경멸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몇몇 아시아의 탁발승, 혹은 몇몇 인도의 참된 <자유를 위한 투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유럽 가지를 돌아다니면서 인도를 그 초석으로 하는 대영제국이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해 있다는 고정관념을 - 그 밖의 점에서는 어떻든 간에 - 지적인 사람들에게 불어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의 반항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절름발이의 연합이 강력한 국가를 덮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인종적 열등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민족의 운명을 이러한 소위 <피압박 민족>의 운명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 ' 새도매저키즘적 성격에서 나타나는 매우 전형적인 현상인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자에 대한 증오는 히틀러나 추종자들의 숱한 정치적 행동을 설명해준다. 공화국 정부는 관대한 취급으로 나치스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나치스를 진정시키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바로 그들이 보여준 힘과 확신의 결여가 나치스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약체라는 이유로 증오하고, 공업 및 군대의 지도자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경했다. 그는 기존의 강한 권력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고, 그가 본질적으로 무력하다고 생각한 그룹과는 항상 싸웠다. 히틀러의 - 또한 이 점에 관해서는 무솔리니의 - '혁명'은 현존하는 권력의 비호 아래서 일어났으며, 그들의 마음에 드는 대상은 자기 자신을 방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에 대한 히틀러의 태도는 다른 요소보다도 훨씬 더 이러한 심리적인 복합성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감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 강력하다고 느꼈던 동안은, 그는 영국을 사랑하고 찬미했다. 그의 저서는 영국에 대한 이러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뭰헨 회담을 전후해서 영국의 지위가 허약하다고 인정되었을 때, 그의 사랑은 증오와 파괴욕으로 변했다. 이렇게 보면 '융화'는 히틀러와 같은 퍼스낼리티에 있어서는 굳이 우정이랄 수는 없고 오직 혐오를 일으키는 정책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의 사디슴적 측면을 말해왔다. 그러나 앞서 권위주의적 성격의 논의에서 본 것과 같이 사디슴적 측면과 아울러 매저키즘적 측면이 존재한다. 무력한 존재를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압도적으로 강한 힘에 복종하여 자기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나치의 이데올로기의 실천인 이러한 매저키즘적 측면은 대중을 보면 가장 명백하다. 대중은 개인의 존재는 보잘것없으므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해 듣게 된다. 개인은 이러한 자기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자기를 보다 높은 힘 속에 해소시켜서 이러한 보다 더 높고 굳센 힘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자랑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이상주의의 정의 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즉, '이상주의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굳센 힘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승인하게끔 하며, 또한 모든 사람들을 우주를 형성하는 그 질서 속의 한 점 티끌러 만든다.' 괴벨스는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똑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사회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개인을 희생시키고, 개인을 한점의 티끌, 하나의 원자로 떨어뜨리는 것은, 히틀러에 따르면 인간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이익과 행복을 주장하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러한 포기는 '개인이 스스로의 개인적 의견이나 이익의 주장을 포기하는 ' 정치적 조직의 본질이다. 히틀러는 이기적이 아닌 것'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을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더욱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다.' 고 가르쳤다.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개인을 교육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이미 국민학교 어린이는, '정당하게 꾸지람을 들었을 때 잠자코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부당함마저도 잠자코 견디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히틀러는 자기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민족국가에 있어서의 민족적 인생관은. 사람을 개나 말이나 고양이들보다 잘 사육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인류 그 자체의 향상에 신경을 쓰는 보다 고귀한 시대, 즉 어떤 자를 알면서도 잠자코 단념하며 또 다른 자는 즐거이 모든 것을 주면서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시대를 마침내 이룩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약간 뜻밖이다. 사람들은 '알면서 잠자코 단념하는 ' 타입 뒤에 그 반대의, 즉 어쩌면 지도한다든가 책임을 진다든가 혹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개인이 기술 될 것으로 기대됐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대신에 '다른' 타입을 희생하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잠자코 단념한다'는 것과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이 상상한다면, 나는 히틀러가 실제로 마음속에서는 단념해야 할 대중과 지배해야 할 지도자를 구별할 생각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히틀러는 때로 아주 명백하게 자기와 '엘리트'의 권력욕을 승인하면서도 때로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그는 그렇게 명백하고 솔직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때문에 지배욕을 '즐거이 주고 희생한다'고 하는 욕망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히틀러는 그의 자기부정과 희생의 철학이 어떠한 행복도 용납될 수 없는 경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알맞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다. 그는 모든 개인에게 인간적 행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대중에게 그의 자기 소멸의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해 대중의 궁핍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너무도 가난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개인적 생활이 세계 치고의 운명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대군을 우리는 우리 편으로 한다....'라고 언명하고 있다. 이런 자기 희생의 설교 전체는 하나의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지도자나 '엘리트'들의 권력욕이 실현되다면, 대중은 자기를 포기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매저키즘적인 동경은 히틀러 자신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복종해야 할 월등한 힘은 신, 운명, 필연, 역사, 자연이다. 실제로 이러한 말은 그에게 있어 모두가 거의 같은 의미를, 즉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상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는 '운명이 나의 출생지로서 라인의 강변의 브라우나우를 지정한 것은 행운이었다' 라는 서술로 자서전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이 나라가 독일인 전체에 있어 너무 좁아졌을 때만 '필연'이 독일인에게 '토지와 영토를 획득하는 도덕적 권리'를 주게 될 것이니, 그때 전 독일인은 하나의 국가 안에서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에겐 '영원한 심판에 의한 당연한 처벌'이다. 타민족과 혼혈하는 민족은 '영원한 섭리의 의지에 대해' 혹은 그가 언젠가 말한것처럼 '영원한 창조자에 대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의 사명은 '우주의 창조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 하늘은 인간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다행하게도 우리들 인간은 인간을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매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섭리나 운명보다도 히틀러를 더욱 감동시킨 힘은 바로 자연이다. 인간에 대한 지배를 자연에 대한 지배로 바꾸어 놓는 일은 최근 4백년 동안의 역사적 발전의 동향이었는데, 히틀러는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지배해야 하지만 자연을 지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미 인류의 역사는 아마도 동물을 길들이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열등민족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그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고, '(관념)이외에는 자유로 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생물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라고 했다. 여기서도 또, 자연은 우리들이 복종해야 할 위대한 힘이지만 생물은 우리가 지배해야 한다는 동일한 생각이 엿보인다. 나는 우리가 이미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해 근본적인 것으로서 말해 온 두가지 경향, 즉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얻으려는 절실한 희망과, 압도적으로 강한 외부의 힘에 복종하려고 하는 동경을 히틀러의 저서 속에서 보여주려고 애써 왔다. 히틀러의 생각은 나치 당의 이념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의 저작에 표현되고 있는 생각들은 나치당에 대한 대중적 추종을 획득한 그의 수많은 연설 속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의 퍼스낼리티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의 퍼스낼리티는 열등감, 인생에 대한 혐오, 금욕주의, 인생을 향락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 같은 것 때문에 새도매저키즘적 충동의 토양이 되어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성격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교에 매력과 자극을 느끼고, 자기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을 열렬히 추종하려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하층 중산계급을 만족케 한 것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실천이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것을 실현해 갔다. 하나의 계층제도가 창설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위에 복종해야 할 어떤 지배자를 모시고 자기 밑에는 지배력을 느끼게 하는 어떤 추종자를 가지게 되었다. 정점의 인간, 즉 지도자는 자기 위에 복종해야 할 힘으로서 문명, 역사, 자연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민중의 어느 일부에 대해서는 그 성격구조에서 생겨난 욕망을 만족시키고, 또 지배나 복종을 즐기고 있지는 않지만, 인생이나 자기 자신의 결단이나 그밖의 모든 일에 신뢰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도와 방향을 부여했다. 이러한 고찰은 장래에 있어서의 나치즘의 안정성을 예언하고자 하는 사람에 애해 어떤 자료를 주게 될 것인가. 나로서는 무언가 예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점-우리가 논의해 온 심리적 여러 전제로부터 생기는 것-은 제기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심리적 조건이 부여되어 있다면, 나치즘은 민중의 감정적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심리적 작용은 나치즘의 증대되는 안정성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인자가 아닐까. 이제가지 말한 모든 것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개성이나 모든 '제 1차적 속박'의 파괴라는 사실은 역전시킬 수가 없다. 중세 세계의 파괴과정은 4백 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 완결되어 가고 있다. 전 산업조직 및 전 생산양식이 파괴되어 근대산업 이전의 수준으로 변화되는 일이 없는 한 인간은 주위 세계에서 완전히 해방된 개인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그 소극적 자유를 견디다 못해 이미 포기한 제 1차적 속박의 대신이 되는 새로운 속박으로 도피하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인연은 세계와의 참된 결합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는 자아의 완전성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안전성의 대가를 지불한다. 이러한 권위와 인간사이의 사실상의 분열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사 그가 의식적으로는 자진하여 복종하고자 해도 이러한 권위는 그의 삶을 방해하여 절름발이로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한 개의 '원자'로 만들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사람의 개인이 되는 모든 가능성을 부여해 준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근대의 산업조직은 본질적으로 보든 인간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장된 생활을 위한 수단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노동시간을 눈에 띄게 단축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의 지적, 감각적, 정서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실천의 기능은 신경증적 징조의 기능에 비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징조는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조건의 결과이며, 동시에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징조는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조건의 결과이며, 동시에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징조는 행복이나 퍼스낼리티의 성장을 가져오는 해결책은 아니다. 그것은 신경증적 해결을 부득이하게 하는 조건으로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동력은, 만약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면 보다 더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개인의 고독과 무력, 그 속에서 성장한 잠재력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 근대산업의 증대일로에 있는 생산력이라는 객관적 사실, 이러한 것은 동적인 요인이기보다는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공서적 삶으로의 도피는 잠시동안 그의 고통을 도피는 잠시동안 그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으나 그것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인류의 역사는 증대하는 개성화의 역사이며, 또한 증대되어 가는 자유의 역사이다. 자유의 추구는 형이상학적인 힘이 아니므로, 자연법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성화의 과정과 문화의 성장의 필연적 결과이다. 권위주의적 조직은 자유의 추구를 자아내는 근본적 조건을 제거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러한 조건에서 생기는 자유의 추구를 근절시킬 수도 없다. 제 7장 자유와 민주주의 제 1 절 개성의 환영 이제가지 내가 보이려고 시도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근대적 산업조직, 특수한 것으로는 특히 그 독점적 국면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요인이 무력감과 고독감, 불안과 동요를 느끼는 퍼스낼리티를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독일의 특수한 조건을 논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독일 인구의 일부분 속에 앞서 내가 권위주의적 성격으로서 설명한 그런 성격에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실천을 풍요하게 길러주는 토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대서양 저쪽의 파시즘이나 혹은 우리 자신의 계급 속의 '제 5열'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것뿐일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 상황은 중대하기는 해도 아직 위험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파시즘의 위협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어디서나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회 속에서도 개인의 무의미와 무력함이라는, 어디서나 파시즘이 머리를 쳐들 수 있는 온상이 될 만한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과오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모든 외적인 속박에서 개인을 해방시킴으로써 근대 민주주의가 참다운 개인주의를 완성했다는 통념과 대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을 표현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경우에만 뜻이 있다.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가 자기의 개성을 확립할 수 있는 내적 심리적 조건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했을까. 혹은 적어도 거기로 가까워지고 있을까. 이 책은 인간적인 요인을 다루기 때문에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그 과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가지의 여러 장에서 누락된 실마리를 풀 수 있다. 근대인에 있어서의 자유의 이면성을 논했을 때, 우리는 오늘날 개인의 고독과 무력감을 증대시키고 있는 경제적 조건들을 지적했다. 즉, 심리적 결과를 논하는 가운데 이러한 무력감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도피를 낳거나, 혹은 고독하게 된 개인이 자동인형이 되어 자아를 상실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의식적으로는 자가는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에게만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강박적인 획일성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주 뚜렷한 예는 두세 가지밖에 들 수 없지만, 우리의 문화가 이러한 획일성의 경향을 어떻게 촉진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자발적인 감정의 억압, 나아가서는 순수한 개성의 발달의 억압은 아주 빠른 시기에, 사실상 아이들의 초기 교육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참된 목표가 아이들의 내적인 독립과 개성, 또한 성장과 완전성을 촉진시키는 데 있다면, 교육은 어디까지나 자발성의 억압을 이끌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와 같은 교육에 의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속박도 실제로는 성장과 발전을 지탱하는 과도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는 교육의 결과위에서 주어진 감정이나 사상이나 소망 때문에 자발성이 배제되어, 자연의 정신적 활동이 폐기되는 일이 실제로 자주 일어나고 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되풀이해서 말하면 어떤 생각이 이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생각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개인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즉 그 생각이 자기 자신의 활동의 결과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약간 임의적인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가장 초기에 억압되는 감정의 하나는 적개심과 혐오에 관계된 것이다. 우선 첫째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발전을 방해하려고 하는 주위의 세계와 마찰을 일으켜 어느정도의 적개심과 반항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약한 적대자로서 그 세계에 복종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적대적인 반작용을 제거하는 것이 교육과정의 본질적인 목표의 하나이다. 그 방법은 갖가지인데, 즉 어린아이들을 위협하는 호통이나 형벌을 위시하여 그를 얼떨떨하게 하여 적개심을 버리게 하는 아첨이나 설득이라는 더욱 미묘한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린아이는 우선 자신의 감정 표현을 단념하고 끝내는 감정 그 자체마저 포기해 버린다. 그와 아울러 그는 다른 사람들의 적개심이나 불성실을 의식하는 것을 억압하게끔 교육받는다. 때로 그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어른처럼 쉽게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그와 같은 부정적인 성질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또한 그럴싸한 이유 없이도 어떤인간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단, 그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발산되는 적개심이나 불성실을 느낀다는 바로 그런 정당한 이유는 예외로 치고 이런 반작용은 얼마 못가서 약화된다. 즉, 어린아이는 보통 어른들처럼 성숙하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때 그는 무언가 뚜렷하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올바른 인간과 나쁜 인간을 구별하는 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어린아이는 교육의 초기에 전혀 '자기것'이 아닌 감정을 가지도록 교육된다. 특히 남을 좋아하는 일, 비판없이 친해지는일, 또 미소짓는 일등을 배우게 된다. 교육이 때로 이루지 못한 일은 보통 그후에 사회적 압력으로 행해진다. 만약 당신이 미소짓지 않고 있다면 '기분 좋은 퍼스낼리티'가 결핍된 것으로 판단된다. - 더욱이 여급이나 외판원이나 의사 등 자신의 노동력을 팔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상냥한 퍼스낼리티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만 사회적 피라밋의 밑바닥에 있어서 자신의 육체적 노동밖에 팔 것이 없는 사람과 피라밋의 정상에 있는 사람만이 특히 상냥하게 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친밀함과 명랑함과 상냥스러움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은 마치 전기의 스위치처럼 켰다 껐다. 할수 있는 기계적인 반응이 된다. 분명히 사람은 단순하게 제스처를 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는 그런 의식을 상실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거짓 감정과 자발적인 친절을 구별할 힘마저 상실한다. 직접적으로는 억압되는 것은 적개심뿐만이 아니며 또한 거짓 감정을 거듭 표현함으로써 말살되는 것은 단순히 친밀감만은 아니다. 자발적인 감정이 광범하게 억압되어 거짓 감정으로 바꾸어진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억압의 하나를 들어, 그의 전 사상체계의 중심으로 삼았다. 즉, 그것은 성의 억압이다. 나는 성적 쾌락의 부정은 자발적인 반응의 억압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억압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그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성적 쾌락의 부정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는 성적 금욕의 경우나, 또한 성이 강압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어 특별한 맛이 없는데도 자기 자신을 잊게 하는 술이나 마약과 같이 그것이 낭비될 경우에 분명해진다. 여러 가지 결과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그 억압은 격심한 성욕 때문에 단지 성적인 영역을 자극하는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용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 있어서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생기를 잃고 있다. 어떠한 창조적 생각도 - 다른 어떠한 창조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 감정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되어 버렸다. '감정적'이란 불건전하고 불균형하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가 되어 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몹시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가난해지고 무미건조해졌다. 한편 감정이 완전히 말살될 수는 없으므로 감정은 퍼스낼리티의 지적인 측면을 전적으로 떠나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결과, 영화나 유행가는 감정에 굶주린 몇백만의 대중을 흥겹게 해 주는 것과 같은 값싸고 불성실한 감상에 빠져 있다. 내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하나의 금지된 감정이 있다. 그것은 비극의 감각이다. 왜냐하면 그 억압은 퍼스낼리티의 근본에 깊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앞의 장에서 보았듯이 죽음의 의식과 삶의 비극적인 면의 자각은 막연한 것이거나 명료한 것이거나 모두 인간의 기본적 성격의 하나이다. 어떤 문화나 저마다 죽음의 문제와 대결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개성화의 과정이 거의 진보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존재에 대한 경험이 발달되지 못한 만큼 개인적 존재의 목적도 문제가 안 된다. 죽음은 아직 근본적으로 삶과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개성화가 보다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문화는 그 사회적, 심리적 구조에 따라서 죽음을 다루어 왔다. 그리스 인은 모름지기 생을 강조하고, 죽음음 생의 어둡고 침울한 연속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인은 육체의 불멸, 적어도 사는 동안에는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던 인간의 육체의 불멸을 믿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유대인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현실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람이 도달하게 될 행복과 정의의 나라를 그림으로써 개인적 생명의 파괴라는 생각과 화해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죽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하여 사후의 생활을 약속함으로써 불행한 개인을 달래려고 했다. 우리의 세대는 단순히 죽음을 부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생의 하나의 근본적인 면을 부정하고 있다. 죽음과 고뇌의 자각이 생애의 가장 강력한 자극의 하나가 되어 인류의 연대성의 기초가 되며, 또한 환희나 열정이 격렬함과 깊이를 가짐으로써 숨길 수 없는 경험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개인은 그것을 억제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그렇듯이, 억압된 요소는 시계에서 사라져도 존재하는 것을 그치지는 않는다. 이렇듯 죽음의 공포는 그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으나,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허약해졌다. 그것은 경험의 단조로움과 생활을 덮고있는 초조의 근원이다. 감히 말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 국민이 장례식에 지불하는 터무니 없이 많은 금액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감정을 금기로 하는 과정에 있어서 근대의 정신의학은 애매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역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대표자인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이 가지는 합목적적인 픽션을 밀어젖히고 사람의 감정의 심연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었다. 다른 한편에 있어서, 정신병학은 프로이트의 바로 이러한 업적으로 풍성해진 퍼스낼리티의 조작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경향의 도구가 되었다. 정신병학은 프로이트의 바로 이러한 업적으로 풍성해진 퍼스낼리티의 조작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경향의 도구가 되었다. 정신분석가도 포함한 많은 정신의학자는 지나친 슬픔이나 노여움이나 흥분을 가지지 않은 '정상적인' 퍼스낼리티의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정상적인' 개인의 전통적인 타입과 일치되지 않는 퍼스낼리티의 특성이나 유형을 비난할 때, '소아적' 이라든가 '신경증적'이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은 영향은 보기에 따라서는 종전의 개인은 적어도 자기를 비난하는 어떤 사람이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써 그것에 저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과학'에 저항할 수가 있겠는가. 똑같은 곡해는 감정이나 감동과 마찬가지로 독창적인 '사고'에도 일어난다. 교육이 실시되는 첫머리서부터 독창적인 사고는 저해되어 기성품인 사상이 사람들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이런 일이 어린아이의 경우에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쉽게 볼수 있다. 그들은 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어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미지의 강력한 세계속에서 자기에게 방향을 부여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 태도가 (어린이나 노인이나 환자 같은) 힘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가 되건 또는 교활한 겸양의 형태를 취하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취급은 그것만으로 독창적인 사고를 강력하게 방해하지만, 보다 더 큰 장애가 있다. 그것은 보통 어른들의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성실 - 그 대부분은 의식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 이다. 그러한 불성실은 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일이 어린아이들에게 부여되는 경우에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사하라 사막을 탐험하는 데는 어떠한 준비를 하면 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북극의 생활에 대한 지식이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 일반적인 그릇된 세계의 겉모습 외에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어린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숨기려는 특수한 거짓말도 많이 있다. 어린아이의 행동에 대한 불만을 정당화시킴으로써 합리화된 불쾌감에서 양친의 성적 행위나 싸움을 숨기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린아이는 '알기로 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어린아이는 질문을 하면 야단을 맞거나 혹은 상냥스럽게 문제에서 외면당하고 만다. 어린아이는 이와 같이 키워져 학교에, 그리고 대학에까지 가게 된다. 나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교육방법 중 실제로 독창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는 것 몇가지를 간단하게 들어보겠다. 그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의 강조, 혹은 오히려 정보의 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실제의 지식에 도달한다는 슬픈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산발적이며 서로 상관없는 사실들이 학생의 머리에 주입된다.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는 사실을 보다 더 많이 배우기 위해 소비되어 거의 생각할 틈이 없다. 분명히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구적이다. 그러나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사고에 있어서는 장애가 된다. 독창적인 사고를 저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이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모든 진리를 상대적으로 보는 일이다. 진리를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싶다고 말하면, 현대의 '진보적인' 사상가들로부터 뒤떨어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진리는 오직 주관적인 것, 거의 기호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과학적인 탐구는 주관적인 요소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감정이나 관심을 도외시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과학의 목표이다. 과학자는 마치 의사가 환자를 다루듯이 소독한 손으로 사실을 다루어야 한다. 때로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라는 명목 아래 나타나거나, 혹은 언어의 정확한 사용을 지향한다고 자랑하는 이러한 상대주의의 결과는 사고가 그 본질적인 자극 - 생각하는 인간의 소망과 관심 -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대신 그것은 사실을 등록하는 기계가 된다. 실제로 사고일반은 물질적 생활의 지배를 희구하는 요구에서 발달해 온 것처럼, 진리의 탐구도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관심이나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이와같은 관심이 없으면 진리를 희구하는 자극은 없어질 것이다. 진리에 의해 더 한층 이익을 얻는 집단이 항상 존재하는데, 그 대표자가 인류의 사상의 개척자이다. 또한 진리를 은폐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다른 집단이 있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만은 이해관계가 진리의 주장을 방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문제는 위험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이해관계가 위험한가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존재 속에 진리를 희구하는 어떤 소망이 있는 것은 모든 인간존재가 진리에 대해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점은 우선 첫째로 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태도 결정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사람은 누구나가 무력한 상태를 겪는다. 그리고 진리는 힘없는 사람의 가장 강한 무기의 하나이다. 그러나 진리가 개인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것은 단지 외계에 있어서의 그의 태도 결정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 자신의 힘은 대체로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진리를 알고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된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약함을 증대시킨다. 개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퍼스낼리티의 최대한의 완성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 최대량에도 기인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인간의 강한 힘과 행복을 지향하는 근본적인 명령의 하나이다. 지금 거론한 요소 외에 일반 성인에게 아직 남아있는 독창적인 사고능력을 적극적으로 혼란시키려는 다른 요소가 있다.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또한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거대한 우리의 문화는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논점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 연막의 하나는 문제가 너무도 복잡해서 보통 개인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은 그 반대로, 개인생활, 사회생활의 근본 문제는 대개 아주 단순해서 누구나 그것을 이해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그것이 몹시 복잡해서 '전문가'만이 그것도 한정된 영역에 있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실제로는 - 때로는 의도적으로 - 진정 문제가 되어 있는 일에 대한 자신의 사고능력에 대한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개인은 무질서한 데이터에 둘러싸이면서 무력을 한탄하고 전문가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를 찾아낼 때까지 애처로운 인내력을 가지고 줄곧 기다린다. 이와 같은 영향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즉, 하나는 듣는 것, 읽는 것 모두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되는 일은 무엇이건 어린아이처럼 믿어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냉소주의와 단순함의 결합은 근대의 개인에게는 지극히 전형적인 것이다. 그 본질적인 결과는 그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세계에 대해서 구성된 이미지를 모두 파괴하는 일이다. 여러 가지 사실은 구성적인 전체의 한 부분으로만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성질을 잃고 단지 추상적이며 양적인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모든 사실은 제각기 다른 사실이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뿐이다. 라디오, 영화, 신문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시의 폭격이나 몇천이라는 사람들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에 이어 아무런 부끄럼움 없이 비누나 술의 광고가 삽입된다. 암시적, 인상적인 권위있는 목소리로 정치적 상황의 중대함을 방송한 바로 똑같은 아나운서가 이번에는 뉴스 프로에 돈을 낸 어떤 비누의 품질이 좋다는 사실을 청중에게 선전하고 있다. 뉴스 영화에서는 수뢰정의 화면에 이어 패션쇼의 화면이 나온다. 신문은 고리타분한 생각이나 여배우의 아침식사 습관을 과학적 혹은 예술적인 중요사건을 보도하는 것과 똑같은 스페이스와 진실성으로 우리에게 보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모든 일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이 듣고 있는 일에 순수하게 관계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흥분되는 일이 없어지고, 우리의 감정이나 비판적인 판단을 저해되며, 드디어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우리의 태도는 평탄하고 무관심한 성질을 지니게 된다. '자유'의 명목 아래 생활은 모든 구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서로 분리되어 전체로서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은 마치 나무 쌓기 공작물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이러한 조각을 가지고 외톨박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은, 어린아이는 집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가지고 노는 작은 조각으로도 집의 여러 부분을 찾아낼 수 있는데 반하여 어른은 그 '조각'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전체'의 뜻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황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저 그 작고 무의미한 조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감정과 사고에 있어서의 '독창성'의 결여에 관해서 말한 것은 '의지적' 행위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확인하는 것은 특히 곤란하다. 근대인은 너무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알아도 그것을 획득하지는 못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정력은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쓰여진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행위의 전제, 즉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그들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그들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따려고 하며,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더 성공하여, 보다 많은 돈, 보다 많은 특권, 보다 좋은 자동차를 구해서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히 광적인 행위를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만약 이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된다면... 그 다음엔?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진정 나 자신일까? 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것으로 예상되며 더욱이 그것에 도달한 순간 교묘하게 나를 속이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일단 생기면 놀랄 만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탱하는 기초 그 자체, 즉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해 알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되도록 빨리, 이러한 귀찮은 생각에서 빠져 나가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에 피곤함과 억압을 느낌으로써 그것을 귀찮게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목표를 쫓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로서 진실 - 즉, 근대인은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라도록 '되어있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불과하다는 진실 -을 막역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결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목표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여 무조건 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근대인은 '자신의 것'으로 예상되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큰 위험마저도 무릅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목표를 부여하는 위험과 책임은 몹시 두려워하여 이를 행하지 않으려 한다. 격렬한 행동은 때때로 자신이 결정한 행동의 증거라고 오해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배우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의 행동가 마찬가지로 자발적ㅇ니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연극의 일반적인 줄거리가 교부되면 모든 배우는 그에게 배정된 역할을 열심히 연기할 수 있으며, 자신있는 부분이나 연기의 세세한 부분은 자기가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는데 불과하다. 우리의 소망 -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 - 이 어느 정도까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부여된 것인가를 아는 데 있어서의 특수한 난점은 권위와 자유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근대사가 전개되는 동안에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로,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로 교체되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양심의 권위는 순응의 도구로서의 상식이나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바뀌어졌다. 우리는 공공연한 낡은 형태의 권위에서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권위의 희생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사를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속에 사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환상에 의해 개인은 스스로의 불안을 의식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환상이 도움이 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자아는 약체화되고 그 때문에 그는 무력감과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그는 순수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 도구화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만든 기계의 일부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순수한 안정의 기초가 되어야 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자아 상실의 결과 순응의 필요가 증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깊은 의혹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것으로 믿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개인이 고정된 질서 속에서 요지부동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중세적 질서의 붕괴와 더불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개인의 동일성은 데카르트 이래로 근대철학의 주요한 문제였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는 당연한 일로서 자기는 자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는 존재하여 더욱더 증대하기까지 했다. 피란델로는 그의 희곡에서 근대인의 이러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육체적 자아의 지속 외에 나 자신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의 대답은 데카르트의 생각 - 개인적 자아의 확증 - 과는 달리 그 부정이다. 즉, 나는 아무런 동일성도 가지지 않았다. 남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의 반영을 빼고는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그대로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상실은 훨씬 더 순응을 강요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은 남의 기대에 따라서 행동할 때에만 자아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정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난과 증대되는 고독의 위험을 무릅쓰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동일성을 상실하는 위험마저도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광증에 빠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별나게 되지 않고 남의 기대에 순응함으로써 자기의 동일성에 대한 회의는 가라앉고 일종의 안정감이 주어진다. 그러나 지불되는 대가는 비싸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력의 방해가 된다. 심리적으로 자동인형인 것은 설사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더라도 감정적, 정신적으로는 죽어 있음을 의미한다. 설사 삶의 운동을 하고 있다 해도 그의 생명은 그의 손에서 모래알처럼 흘러버린다. 근대인은 겉으로는 만족과 낙천주의를 가장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서는 심각한 불행에 빠져있다. 사실 절망의 벼랑에 서있다. 그는 개성이라는 관념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려 하고 있다. 즉, 그는 남과 '달라지기를' 원한다. 또한 '다르다'는 것만큼 그가 찬양할 만한 것은 없다. 우리는 사람이나 물건에 붙여진 이름의 첫글자를 대함으로써 철도 매표원의 이름까지 알고 있으며, 핸드백, 트럼프, 휴대용 라디오는 '인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모두가 '다른 것'을 희구하는 절실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성에 남겨진 최후의 발자국이다. 근대인은 삶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그는 자동인형이 되었으므로 자발적으로 인생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대용품으로서 어떤 종류의 흥분이나 드릴이라도 취하게 된다. 즉, 음주, 스포츠, 또한 영화에 나오는 가공인물의 흥분을 대신 경험하며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근대인에 있어서의 자유의 의미는 무엇일까. 근대인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형,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만일 자기가 바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자기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른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협조하여 자기의 것이 아닌 자기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일을 할수록 그는 무력함을 느껴서 더욱더 순응을 강요당한다. 낙천주의와 창의의 겉치레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압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마치 마비된 것처럼 다가오는 파국을 바라보고만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은 경제생활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 순조로운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이한 겉치장의 배후에 숨어 있는 뿌리 깊은 불행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만약 생을 향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상실된다면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육체적인 굶주림 때문에 조용하게 죽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을 때도 조용하게 죽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소위 '정상적인' 사람의 경제적 요구만을 본다면, 또 만일 일반적으로 자동인형이 된 사람의 무의식적인 고민을 통찰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그 인간적 기반에서부터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꿰뚫어보는 데 실패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험이란 만약에 자극을 약속하고 개인생활에 의미와 질서를 확실히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정치적 기구나 심볼이 제공된다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자동인형화가 가져오는 절망은 파시즘의 정치적 목적을 육성하는 풍요한 토양인 것이다. 제 2절 자유와 자발성 이 책은 지금까지 자유의 한 측면만을 취급했다. 즉, 지난날 생활에 의미와 안정을 부여했던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고독하게 된 근대인의 무력함과 불안함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개인이 이러한 고독에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고독한 존재로서 외계와 비교해 철저하게 무력하며, 따라서 외계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고독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통일성이 깨어지고 그는 방향을 설정할 힘을 상실해버렸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이나 인생의 의미, 또한 끝내는 그의 행동을 이끌 수 있는 모든 원리에 대한 회의에 짓눌리고 만다. 무력도 회의도 다같이 인생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유, 즉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달아나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속박으로 몰리게 된다. 이러한 속박은 권위나 사회 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 제 1차적인 속박과는 다른 것이다. 도피는 그의 상실된 안정을 회복시키지는 않고 다만 분열된 존재로서의 자아를 망각하려 하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는 그러한 개인적 자아의 완전성을 희생시켜 결국 또 하나의 유약한 안정을 발견하단. 그는 고독에 견디다 못해 자아를 상실하는 길을 택한다. 이렇듯 자유 - ...으로부터의 자유 - 는 새로운 속박을 이끌어간다. 우리의 분석이, 자유가 불가피하게 순환하여 새로운 의존으로 이끌어 간다는 결론에 유용한가? 모든 제 1차적인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개인을 몹시 고독하게 고립시키게 되어 그는 어쩔수 없이 새로운 속박으로 도피해야만 할 것인가? 독립과 자유는 고독과 공포와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재하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세계나 타인이나 자연과 새로 결부되어 있는 것 같은 적극적인 상태의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의 긍정적인 해답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 즉,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은 자유이면서 고독하지 않고 비판적이면서도 회의로 가득 차지 않고 독립적이면서도 인류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이와 같은 자유는 자아를 실현하여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획득하게 된다.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일까. 관념적인 철학자는 자아의 실현은 지적 통찰만으로 성취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퍼스낼리티를 분할할 것을 주장하고 인간의 본성이 이성에 의해 억제되고 인도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의 결과, 인간의 감정적 생활 뿐만 아니라 지적인 능력도 불구가 되었다. 이성은 그 죄수인 인간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스스로 죄수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퍼스낼리티의 양면, 즉 이성과 감정은 다같이 불구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아의 실현은 단순히 사고의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퍼스낼리티 전체의 실현, 그의 감정적, 지적인 여러 능력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성취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구비되어 있다. 그러한 것은 표현됨으로써 비로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퍼스낼리티의 자발적인 행위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심리학의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인 자발성의 문제로 다가간다.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려면 또 하나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을 바탕으로 대조적으로 자발적 행위의 본질적인 성질을 이해할 수가 있다. 자발적인 행위는 개인의 고독이나 무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그런 강박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외부에서 시사되는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하는 자동인형의 행위도 아니다. 자발적인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며, 심리적으로는 'Sponte'라는 라틴어의 어원의 글자 그대로의 뜻, 즉 스스로의 자유 의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활동이라는 것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적, 지적, 감각적인 여러 경험속에,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사 속에서 작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발성의 하나의 전체는, 퍼스낼리티 전체를 받아들여 '이성'과 '자연'과의 분열을 제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을 억압하지 않을 때에만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명료한 것이 되었을 때에만, 또한 생활의 여러 가지 영역이 근본적인 통일에 도달되었을 때에만 자발적인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는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독자에게 자발성의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몇가지 예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발적이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고, 감정, 행위는 그들 자신의 표현이지, 자동인형의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가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사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예술가의 정의라고 한다면 - 발자크는 그 자신을 바로 그렇게 정의했었지만 - 특정한 철학자나 과학자 또한 예술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반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구식 사진사와 창조적인 화가가 서로 다르듯이 그들과는 다르다. 예술가와 같이 자기 자신을 어떤 객관적인 수단으로 표현하는 능력 혹은 훈련은 결핍되어 있지만 예술가와 똑같은 자발성을 가진 다른 개인도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지위는 상처입기 쉬운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개성이나 자발성을 존경받는 사람들은 성공한 예술가들뿐이기 때문에, 만일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괴짜나 '신경증 환자'로 보여진다. 예술가의 이와같은 사정은 역사상의 혁명가의 사정과 비슷하다. 성공한 혁명가는 경세가가 되고, 실패한 혁명가는 죄인이 된다. 어린아이들은 또다른 자발성의 예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발성은 그들이 이야기 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또한 그들의 얼굴에 표현되는 감정 속에서 볼 수 있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을 사로잡는 어린아이의 매력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감상적인 속된 이유는 제외하고 나는 바로 이 자발성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자발성은 스스로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각할 능력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호소한다. 실제로 어린이에 있어서건 예술가에 있어서건, 혹은 연령이나 직업으로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에 있어서건 자발성 이상으로 매혹적이고 설득적인 것은 없다. 우리의 대부분은 적어도 어떤 순간에는 우리들 자신의 자발성을 인정할 수가 있다. 그것은 동시에 순수한 행복의 순간이다. 하나의 풍경을 신선하게 자발적으로 지각할 때,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어떤 진리가 부딪쳐올 때, 형식에 맞지 않는 어떤 감각적인 쾌락을 느꼈을 때, 또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솟아날 때 - 이와 같은 순간에 우리는 모두 자발적인 활동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경험이 그렇게 희귀하거나 거친 사건들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서 소극적인 자유는 그것만으로는 개인을 고독하게 한다는 것,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는 멀고 신뢰할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 그들의 자아는 약화되어 줄곧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의 통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아의 자발적인 실현에 있어서 그 자신을 새롭게 외계와 - 인간이나 자연이나 자기자신과 - 결부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자아를 상대 속에 용해시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고유하는 것도 아니며,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개인적 자아의 보존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러한 양극성 속에 있다. 즉,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며, 일체로 이끄는 것이고, 더욱이 개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일 또한 하나의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독을 피하기 위한 강박적인 활동으로서의 일이 아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지배를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산물에 의해 숭배하거나 노예화하는 자연에 대한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며 창조적 행위에 있어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의 진실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관능적 쾌락의 실현 또는 공동체의 정치적 생활에의 참가 등 모든 자발적인 행위에 있어서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의 개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자아를 인간이나 자연에 결부시킨다. 자유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근본적인 분열 - 개성과 탄생과 고독의 고통 - 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해결된다. 모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하여 개인은 세계를 품에 안는다. 그의 개인적 자아는 손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공고해진다. 왜냐하면, 자아는 활동적일수록 강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재산의 소유든 감정이나 사상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의 소유든 소유 그 자체에는 아무런 순수한 힘이 없다. 또한 사물의 사용이나 조작 속에도 함이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것이란 사람이건 무생물이건 우리가 창조적인 활동에 의해 순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활동에서 생기는 이러한 성질만이 자아에 힘을 주고, 나아가서는 자아의 통일성의 기초가 된다.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거나, 순수하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거나, 또 그 결과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짓 자아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거나 하는 일이 열등감이나 약소감의 근원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있건 그렇지 않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부심과 행복을 부여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활동 그 자체, 즉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는 바로 그 반대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는 바로 그 반대가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품을 판다는 추상적인 목적 때문에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이건 비물질적이건 사물은 모두 사는 것으로서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듯 사물은 그에 대한 우리 자신의 창조적인 노력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인격적인 성질이나 노력의 결과를 돈이나 특권이나 권력을 위해 팔 수 잇는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잇다. 그리하여 창조적 행위가 가지는 현재의 만족을 강조하는 것은 완성된 생산품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참된 행복을 부여해 주는 또하나의 만족감-현재의 활동의 경험-을 놓치고,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실망하게 되는 하나의 환상-성공이라는 행복의 환상-을 추구한다. 만일 개인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여 자기 자신을 외계에 관련시킨다면, 그는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즉, 그와 외계는 하나로 구성된 전체의 부분이 된다. 그는 정당한 지위를 획득하여, 그것으로 자기 자신이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혹은 사라진다. 이러한 의혹은 분리와 새의 좌절에서 생긴 것이지만, 강박적이거나 자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이 의혹은 사라진다. 그는 자기 자신을 활동적, 창조적인 개인으로 느끼며, 인생의 의미는 단한 가지, 즉 사는 행위 그 자체뿐임을 알게 된다. 만일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인생에 있어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극복한다면, 그리고 또 만일 그가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외계에 대해 그것을 포용하는 것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개인으로서 힘을 획득하여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이 안정은 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제 1차적 속박이 되듯이 전 개인적 단계에 있어서 특징적인 안정과는 다른 것이다. 새로운 안정은 개인이 외부의 보다 높은 힘으로부터 부여되는 것 같은 보호에 기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생의 비극적인 성질이 배제되는 것과 같은 안정도 아니다. 새로운 안정은 동적이다. 즉,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에 기인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순간마다 획득되는 안정이다. 그것은 자유만이 줄 수 있는 것이며, 환상을 필요로 하는 여러 조건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환상을 필요로 하는 여러 조건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안정이다. 자아 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독자성을 충분히 긍정한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차별이 생긴다. 이 차이의 근거는 인생을 출발할 때 가지고 있는 생리적, 정신적인 타고난 소질인데, 거기에 또한 그들이 직면하는 특수한 환경이나 경험의 상황이 덧붙여진다. 퍼스낼리티의 이러한 개인적 기반은 두 유기체가 육체적으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어떠한 사람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자아의 순수한 성장은 항상 이러한 특수한 기반 위에 선 성장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기적인 성장이며, 그 한 사람에게 있어서만, 그리고 오직 그에게만 있는 하나의 핵심의 전개다. 이에 반하여 자동적인 자아의 전개는 유기적인 성장은 아니다. 자아의 기반의 성장이 방해를 받아 거짓 자아가 이러한 자아를 억누르게 된다. 거짓 자아란-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본질적으로 사고나 감정의 외부적인 형식을 받아들인 데 불과하다. 유기적인 성장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자아의 특수성에 대해서 최고의 경의를 표시할 때에만 가능하다. 자아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존경과 그 계발은 인간 문화의 가장 가치있는 성과다. 그리고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이 성과인 것이다. 자아의 독자성은 결코 평등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명제의 의미는, 인간은 모두가 동일한 근본적인 인간성을 부여받았고, 인간 존재의 근본적 운명을 나누어 가지며, 모두가 독같이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양도할 수 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관계는 지배,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연대성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의 개념은 모든 인간이 비슷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평등개념은 오늘날 개인이 그 경제적 활동에서 행하고 있는 역할에서 유래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퍼스낼리티의 구체적인 차이는 배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단 하나만이 중요하다. 즉, 전자가 파는 것을 가지고 있고 후자가 살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에 있어서는 인간의 차별은 없다. 현실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그 독자성을 배양하는 것이 개성의 본질인 것이다. 적극적인 자유는 또한 다음과 같은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즉, 이러한 독자적인 개인의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 생활의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것, 또 개체성의 성장과 실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설사 보다 큰 존엄을 가지는 것같이 여겨지는 목표에도 결코 종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심각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것은 방자한 자기중심주의를 요구하지 않을까? 그것은 이상을 위한 희생이라는 관념의 부정이 아닐까? 그것의 용납은 무정부상태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이러한 문제는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일부는 명백하기 또한 일부는 암시적으로 대답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한번 더 그 대답을 명백히 하여 오해를 피하기로 하자.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높은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이상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이상을 가장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인하여 우리는 인상이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의 이상이란 일반적으로 그 달성이 물질적 획득을 포함하지 않는 목표, 인간이 자기 중심주의적인 목적을 자진해서 희생하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이상에 대한 단순히 심리적인 - 또한 그러한 점에서 상대주의적인 -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는, 자기를 보다 높은 힘에 종속시키는동시에 타인을 제압하려는 욕구에 쏠려 있는 파시스트도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과 똑같이 하나의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논거에서는 이상의 문제는 결코 해결 될 수 없다. 우리는 참된 이상과 가상적인 이상과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진실과 허위의 차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다. 모든 참된 이상에는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 즉, 그러한 것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목표에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모를 수도 있으며, 또한 이상의 자각이 인간의 발전에 대해 어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무엇이 삶을 촉진하고 무엇이 방해하는가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음식이 위생적이며, 어느것이 그렇지 않은가를 언제나 잘 알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독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고는 결론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바란다면 정신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해로운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가난, 협박, 고독이 삶에 해로우며, 또한 자유에 도움이 되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용기와 힘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은 삶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에 있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분석과 어떤 조건이 가져다 주는 결과에 입각해서 대답할 수 있는 경험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파시스트의 '이상'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참된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열성으로 거짓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심리적 고찰에 의해서 얻어진다. 매저키즘의 현상을 보면 인간이 고통이나 종속을 체험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민이나 복종이나 자살이 삶의 적극적인 목표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데는 의심이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목표는, 주관적으로는 만족할 만하고 매력적인 것으로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삶에 해로운 것에 대한 이러한 유혹은 병리학적인 도착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다. 많은 심리학자는 쾌락의 경험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 행위를 이끄는 단 하나의 정당한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적인 심리학에 의해, 쾌락의 주관적 경험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면에서 보면 어떤 행위의 가치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매저키즘적인 현상의 분석이 그 좋은 예다. 이와 같은 분석에 의해 쾌락감은 병리학적인 도착의 결과로서 경험의 객관적인 의미에 관해 거의 실증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독의 달콤한 맛이 그 유기체에 미치는 작용을 실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우리는 참된 이상이란 자아의 성장, 자유, 행복을 촉진하는 모든 목표이며, 가상적인 이상이란 주관적으로는 매혹적인 경험 (복종에의 충동과 같이) 이면서도 실제로는 삶에 해로운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목표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 일단 이와 같은 정의를 인정해 버리면, 참된 이상이란 개인보다 우월한 어떤 가면을 쓴 힘이 아니라, 자아의 철저한 긍정의 분명한 표현이 된다. 이러한 긍정의 대조적인 이상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의해 이상이 아니라 병적인 목표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 즉 희생의 문제에 도달한다. 우리의 정의에 의하면 자유란 보다 더 높은 어떠한 힘에도 복종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것이 생명의 희생까지도 포함해서 희생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점은, 파시즘이 자기희생을 가장 높은 덕으로 요구하며 많은 사람들을 그러한 이상주의적인 성격으로 감명시키고 있는 오늘날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지금까지 말 해 온 것에서 논리적으로 유도된다. 희생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우리의 육체적인 자아의 요구와 우리의 정신적 자아의 목표가 항쟁하는 일이 있다는 것, 즉 실제로 우리는 정신적 자아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육체적 자아를 때로는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생의 비극적인 사실의 하나이다. 이러한 희생은 결코 그 비극적인 성질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결코 감미로운 것이 아니다. 설사 최고의 이상을 위해서 참고 견디는 경우가 있더라도 죽음은 달콤한 것이 아니다. 죽음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나, 한편으로는 우리 개성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희생은 파시즘이 가르치는 '희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파시즘에 있어서의 희생은 인간이 자아를 확보하기 위해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최고의 대가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희생은 삶의 달성을 바로 삶의 부정, 자아의 소멸 속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이 그 모든 면에 걸쳐서 지향하는 것 - 개인적 자아의 소멸과, 그보다 더 높은 힘에의 철저한 복종 - 의 최고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살이 삶의 최대의 전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희생의 전도이다. 참된 희생은 정신적인 통일성을 희구하는 비타협적인 소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상실한 인간의 희생은 단지 그 정신적인 파탄을 숨기고 있는 데 불과하다. 마지막 하나의 반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일 개인이 자발성의 의미에 있어서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 허락된다면, 그리고 그들이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정부상태가 불가피한 결과일까? 무정부상태라는 말이 경솔한 자기중심주의나 파괴성을 의미하는 이상 그것을 결정하는 요소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 나는 도피의 메카니즘을 취급한 장에서 지적한 것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 삶은 성장하고 신장하여 여러 능력을 표현하려는 내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일 삶이 방해되면 또 개인이 회의나 고독감이나 무력감에 의해 고립되고 압도당하게 되면 그때 그는 파괴성이나 권력, 혹은 복종을 희구하는 충동으로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자유가 '...에로'의 자유로서 확립된다면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아를 충분한 타협 없이 실현할 수 있다면, 그의 사회적인 충동의 근본적인 위험성은 소멸되고, 오직 병자와 비정상적인 사람만이 위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는 일찍이 실현될 일이 없다. 또 그것이 때때로 미묘하게 비합리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류가 고집해온 하나의 이상이었다. 역사의 기록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잔인성과 파괴성을 보이고 있는가 의아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일 놀랄 만한 - 또 힘을 북돋아주는 -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온갖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인류가 역사의 모든 과정에 걸쳐 또한 오늘날 무수한 개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엄, 용기, 품위, 친절과 같은 성질을 보존하였다는 - 그리고 사실상 발전시켰다는 - 사실이다. 만일 무정부상태를 개인이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의 차이에 관해서 이야기한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 권위는 - 참된 이상과도 같이 -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원칙적으로는 개인이나 그의 현실적인 목적과는 대립하는 일이 없이 그의 병적인 목표와 충돌하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주제였다. 즉,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고립되고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재적인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 더욱이 이러한 상태는 그의 자아를 뿌리에서부터 위태롭게 하고 그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운 속박으로 자진해서 복종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적극적인 자유는 능동적, 자발적으로 생존하는 능력을 포함해서 개인의 여러 능력의 충분한 실현과 일치된다. 자유는 그 자체의 다이내믹한 운동법칙에 따라서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전환하려는 위협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사상의 이데올로기적 목표였던 개인주의의 실현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 정치적 위기는 개인주의의 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가 공허한 껍질이 되고 말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이며 목적인 것 같은 사회, 또 삶이 성공이나 그밖의 어떤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또 개인이 국가이건 경제기구이건 자기의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고 또한 그러한 것에 조종되지 않는 사회로 발달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결국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의 외부적 요구의 내재화가 아닌 정녕 그의 것으로서, 그의 자아의 특수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표현하는 사회로 발전함을 말한다. 이러한 목표는 근대사의 어떠한 초기에 있어서는 충분히 실현될 수 없었다. 즉, 그러한 것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순수한 개인주의의 발전을 약속하는 물질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전제를 창조해 냈다. 생산의 문제는 -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인 특권을 요구하는 투쟁이 더 이상 경제적 빈곤으로 재촉받지 않는 풍부한 미래를 상상할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인간 - 조직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 이 사회적, 경제적인 힘의 주인공이 되어 그 노예상태를 종결시키 수 있는 그러한 힘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나는 자유의 심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또한 심리적 문제는 인간존재의 물질적 기반이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러한 전제에서 적극적인 자유나 개인주의의 실현 역시 개인의 자아의 실현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경제적, 사회적 변혁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전제로부터 생기는 경제적 문제를 취급하거나, 미래를 위한 경제계획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해답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방향에 대해 사소한 의문도 남기고 싶지 않다. 우선 첫째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성과 - 대의정치, 즉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어 국민에게 보답하는 정치라는 근본적인 성과이거나 권리장전이 모든 시민에게 보장하는 어떠한 권리이거나 -를 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보다 더 새로운 민주주의의 원리, 즉 어떠한 사람도 기아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 사회가 그 모든 구성원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또 어떠한 사람도 실업이나 기아의 공포로 말미암아 복종하게 되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기본적 성과는 단지 유지될 뿐 아니라 강화되고 발전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기준은 실현되어 오기는 했지만 - 완전에서는 훨씬 멀지만 - 그래도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는 단순히 어떤 개인적, 정신적인 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존재에게 근본적인 활동인 '일'에 있어서 개인의 실제적인 자유, 창의, 자발성을 강화시켜주는 데 있다. 그에 대한 일반적인 조건은 무엇일까? 사회의 비합리적이고 무계획적인 성격은 사회 그 자체의 계획되고 합의된 노력을 뜻하는 계획경제로 대치되어야 한다. 사회는 자연을 지배한 것과 같이 합리적으로 사회문제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위한 하나의 조건은 소수이기는 하나 큰 경제력을 휘두르며 그 결정으로 민중의 운명을 죄우하며, 민중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숨은 지배력을 제거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명칭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목적에 봉사하는 합리적 경제조직을 확립하는 데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기구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특수한 일에 있어서도 순수한 창의나 자발성을 발전시킬 기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고용되어' 있어, 명령대로 움직이는 일 이외에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국가 전체가 경제적, 사회적인 힘을 합리적으로 지배하는 계획경제에 있어서만 개인은 그런 일 속에서 책임을 가질 수 있고, 창조적인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순수한 활동의 기회가 개인이게 회복되는 것, 사회의 목적과 그 자신의 목적이 관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일치될 것, 또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인간적 이상이라는 관점에서 뜻과 목적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 일에 책임을 느껴서 적극적으로 노력과 이성을 쓷는 일이다. 우리는 사람의 조종을 능동적이고 지적인 협동으로 대치하여 형식적인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원리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 인간의 자유를 촉진시키는가의 여부는 정치적, 경제적 관점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다. 자유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기준은 개인이 자신의 생활 및 사회의 생활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 어떤지, 그것이 단지 투표라는 형식적인 행동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과 일에 있어서, 또는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지 어떤지 하는 일이다. 근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만일 순수한 정치적인 영역에 제한시킨다면, 일반적인 개인의 경제적 무력이 빚는 결과를 충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것과 같은 순수한 경제적인 개념 또한 충분치 않다. 나는 여기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국가 사회주의에 있어 - 전략적인 방편을 위해 - 쓰여진 것 같은 기만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사회주의가 기만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러시아를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이미 실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관료제가 거대한 국민 대중을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설사 정부의 지배가 대다수 민중의 경제적 이익에 유효하다 하더라도, 자유나 개인주의의 발달을 방해한다. 오늘날처럼 진리를 은폐하기 위해 언어가 오용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동맹의 위반은 유화정책으로 불리고, 군사적 침략은 공격에 대한 방어로 위장되고, 약소국가의 정복은 우호조약의 명목으로 행해지며, 전체 인민에 대한 잔인한 억압은 국가사회주의의 명목 아래 행해진다. 민주주의, 자유, 개인주의라는 말 또한 이러한 악용의 대상이 된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차이에 대한 참된 뜻을 명백히 하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공헌하는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을 창조해 내는 조직이다. 파시즘은 어떠한 명목에서이건 개인을 외적인 목적에 종속시켜 순수한 개성의 발전을 약화시키는 조직이다. 민주주의 실현의 조건을 확립하는 가장 큰 난관의 하나가 계획경제와 각 개인의 적극적인 협동과의 모순 속에 있음은 분명하다. 대공업조직과 같은 큰 범위의 계획경제는 대규모의 중앙집권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이러한 집중화된 기구를 관리하는 관료제를 필요로 한다. 또 한편, 각 개인이나 모든 조직의 최소단위에 의한 적극적인 관리와 협동은 대대적인 분권을 요구한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계획이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참여와 융합되지 않는 한, 또 사회생활의 흐름이 아래로부터 위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는 한 계획경제는 다시 새로운 민중조종으로 변할 것이다. 집중과 분리와의 결합이라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의 중심적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이미 해결했고, 또한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거의 완전한 지배를 가져다 준 기술적 문제와 같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를 확실히 인식할 경우에만 또한 우리가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존재로서의 참된 이익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들의 능력을 믿을 때에만 해결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또다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개인적 창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자본주의 밑에 있어서의 경제적 조직과 개인적 발전의 하나의 큰 자극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의 제한이 있다. 즉 개인적 창의의 다른 면에서는 인간을 경제적 목적에 종속시키면서, 인간의 선택된 일부의 성질인 의지와 합리성만을 발달시켰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독립된 경제적 단위에 활동의 여지를 부여한, 자본주의의 고도로 개체화되고 경쟁적인 형태에 있어서 가장 잘 작용한 원리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영역이 좁아졌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개인적 창의를 행사할 수 있다. 만일 오늘날 이러한 원리를 실현시켜 퍼스낼리티 전체가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그것을 확대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체로서의 사회의 합리적, 협조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해서, 그리고 조직의 최소단위에 의한 참되고 순수한 적극적 협동과 관리를 보장할 수 있는 분권화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여 경제기구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회과정에 참여할 때에만, 지금 그를 절망 - 고독과 무력감 -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이 오늘날 고민하고 있는 것은 빈곤보다도 오히려 그가 큰 기계의 톱니바퀴, 즉 자동인형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 그의 생활이 공허하게 되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승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격태세를 취하여, 지난날 자유를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현실화하는 데까지 전진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신념, 즉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및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을 때에만 니힐리즘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