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도피의 메카니즘 우리는 현대까지 더듬어 내려왔는데, 계속 파시즘의 심리학적인 의미와 더불어 독재제도 밑에서의 자유의 뜻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의 모든 논의가 정당한가의 여부는 우리의 심리학적 전제의 타당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사고 전체의 흐름을 여기서 중단하고, 이 장에서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또 이제부터 논의해 가려는 심리적 메카니즘에 대해 좀더 상세히,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하자. 왜 이런 전제를 상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 그 기초에는 많은 독자에게 전혀 낯선 것은 아니더라도 역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개념이 사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개념은 무의식적인 여러 가지 힘을, 그 힘이 합리화되어 성격적인 습성으로 나타나는 통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특히 개인심리학이나, 개인의 면밀한 정신 분석적 연구에 의한 갖가지 관찰을 취급해 보려고 한다. 물론 정신분석은 아카데믹한 심리학이 이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과학적인 실험방법에 의한 접근이라는 점에선 아직 이상에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완전히 경험적인 방법이다. 즉, 그것은 검열되지 않은 개인의 사고와 꿈과 공상에 대한 힘든 관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무의식적인 힘의 개념을 이용하는 심리학만이 개인과 문화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잘못 범하고 있는 합리화를 돌파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자신이 움직인다고 '믿고 있는' 그 동기와 실제로 그들을 행동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동기가 같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지금까지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많은 문제도 그 자리에서 해결될 것이다. 많은 독자는 개인을 관찰하여 얻은 발견이 과연 집단의 심리학적 이해에 적용될 수 있느냐에 대해 의심을 품을 지도 모른다. 이 물음에 우리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대답하는 바이다. 어떤 집단이든 모두 개인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집단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메카니즘은 개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사회심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심리학을 연구하는 일은 현미경으로 어떤 대상을 연구하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과정 속에서 대규모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심리적인 메카니즘을 상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사회심리적 현상의 분석이 개인적 행동의 상세한 연구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험적이 아닌 동시에 타당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에 관한 연구가 소중하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신경증 환자라는 명칭이 붙은 개인을 연구하는 일이 사회심리학 문제를 생각하는데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재차 긍정적인 대답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가 신경증적인 인간에 대해 관찰하고 있는 현상은 원칙적으로는 정상인에게서 관찰되는 현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런 현상은 한층 더 강조되어 뚜렷하게 드러나 있으며, 특히 정상인은 문제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 않는 데 대해 신경증적인 인간은 문제를 보다 더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점을 좀더 명백히하기 위해 신경증적이라든가, 정상적이라든가, 또는 건강이라든가 하는 말을 간단히 음미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정상 또는 건강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로는 활동하고 있는 사회의 입장에서이다. 즉, 어떤 사회 속에서 그가 이행해야 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는 정상적이며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특정한 사회 속에서 요구되고 있는 방법에 따라서 일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사회의 재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가족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개인의 입장에서이다. 이 경우에 있어 우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건강 또는 정상상태로 생각한다. 만일 어떤 사회의 구조가 개인의 행복에 대해 최상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면, 두 가지 견해는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포함한,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에선 적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도와주는 정도는 다르다 하더라도 사회의 원활한 기능이라는 목표와 개인의 완전한 발달이라는 목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로 인해 건강에 대한 두 개념 사이에도 필연적으로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나는 사회적 필요에 지배되고, 다른 것은 개인적인 존재의 목표에 대한 가치와 규범에 지배된다. 불행하게도 이 차이는 종종 무시되어 왔다. 대부분의 정신병 학자는 그들의 사회구조를 뚜렷이 긍정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보기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은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그 반면,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적 가치라는 척도로 보아도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정상적이라는 개념과 신경증 적이라는 개념을 분리시켜본다면 결론은 달라질 것이다. 즉,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에서의 정상적인 인간은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 종종 신경증 적인 인간보다 더 건강하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잘 적응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 자신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개성과 자연성은 모두 상실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신경증 적인 인간이란 자기를 위한 싸움에 결코 완전히 굴복하려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성공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생산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신경증 적 징후를 통해 또는 몽상 적인 생활에 들어박힘으로써 구원을 찾았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적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개성을 완전히 상실한 정상인보다 불구자는 아니다. 물론 신경증 적이 아니고, 또한 적응의 과정 속에서도 개성을 잃지 않은 인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신경증 적인 인간에게 찍혀진 낙인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능률이라는 관점에서 신경증 적인 사람을 생각할 때만 정당화될 뿐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신경증 적이라는 말을 이런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성원이 사회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성원이 인격 성장에 있어 불구자가 되게 하는 사회는 신경증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신경증이라는 말은 사회적인 기능의 결여를 표시하는데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리는 사회에 대해서는 신경증 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자기 실현에 반대되는 뜻의 말을 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우리가 문제로 삼는 것은 도피의 메카니즘이다. 그것은 고립화된 인간의 불안정성에서 유래한다. 개인에게 안정감을 부여해 주던 제 1차적인 인연이 일단 끊어지자마자, 그리고 그의 외부로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서의 외계와 직면하자마자 무력감과 고독감을 참을 수 없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개의 길이 열린다. 그중 하나의 길을 통해 그는 '적극적인 자유'로 전진해 갈 수 있다. 그는 애정과 일에 있어 감정적, 감각적 및 지적인 능력의 순수한 표현에 있어, 자발적으로 그 자신을 세계와 결부시킬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독립과 개인적 자아의 통일을 버리는 일 없이 다시 인간과 자연 및 그 자신과 일체가 될 수 있다. 그를 위해 열려 있는 또 하나의 길은 그를 후퇴시켜 자유를 포기하게 한다. 그리고 개인적 자아와 세계와의 사이에 생긴 분열을 소멸시킴으로써 고독감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이 두 번째 길이 그를 세계와 다시 결부시킨다 해도 개인으로서 해방되기 전에 그가 세계와 관계했던 상태로 돌아갈 수 는 없다. 왜냐하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길은, 만일 그것이 연장된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그런 참기 힘든 상태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도피방법은 무서운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경우처럼 강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또 그것은 다소간에 개성과 자기의 통일성의 완전한 굴복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행복과 적극적인 자유로 이끄는 해결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모든 신경증 적인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은 해결이다. 그것은 모든 신경증 적인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해결이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완화시켜 공포를 피함으로써 생활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동적이며 또 강요된 행동만으로 성립되는 생활을 통해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도피의 메카니즘 속에는 비교적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은 단지 정신적 및 감정적으로 혼란해진 개인에게서만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나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메카니즘만을,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 다음 장에서 취급하는 사회현상의 심리학적 분석에 대하여 필연적인 전제가 되는 메카니즘만을 문제로 삼기로 한다. 그것은 한편으론 파시즘 체제이고 또 한편으론 근대 민주주의이다. 제 1절 권위주의 여기서 취급하려고 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최초의 메카니즘에는 인간이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버리고 그 개인에게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켜 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면 상실한 제 1차적인 속박대신에 새로운 '제2차적' 인 속박을 구하는 일이다. 이 메카니즘은 복종과 지배를 둘러싼 노력이라는 형태로 뚜렷이 나타난다. 또는 오히려 정상적인 인간과 신경증 적인 인간 속에서 여러 가지 상태로 볼 수 있는 매저키즘적 및 사디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력 속에 나타난다. 우선 이런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이런 모든 것이 참을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을 해명하고자 한다. 매저키즘적인 노력으로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형태는 열등감, 무력감, 개인의 무의미함에 대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을 분석해 보면,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이 감정에 불만을 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들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어떤 힘에 자극되어 자기를 무력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실 자기는 무력하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들의 감정은 실제로 나타나는 결점과 약점의 인식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낮춰 보려고 하는가 하면 약화시키려고 하고, 사물을 지배하고자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외부의 힘, 즉 다른 사람들이나 제도에, 또는 자연에 명백히 의존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으며, 하고 싶은 일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외부의 힘이 지니는 현실적으로 또는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질서에 복종하고자 한다. 그들은 '나는 원한다'라든가 '나는 존재한다'라는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인생은 대체로 지배도 통제도 할 수 없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 더구나 자주 - 자기를 낮추고 외부의 힘에 복종하려는 경향 외에 자기를 해치고 괴롭히려는 경향까지 있음을 불수 있다. 이 경향은 갖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들의 최악의 적들에게까지도 적의를 품지 않고 자기비난과 자기비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또 강박 신경증 환자처럼 강박적인 의식과 사고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다. 신경증적 인격 속엔 육체적으로 병들고자 하는 경향, 즉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런 병을 마치 신께서 주신 선물인 것처럼 고대하는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는 흔히, 만일 그것을 일으키려는 무의식적인 경향만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를 일으키는 수가 있다. 자기 자신에게 향해지는 이런 경향은 덜 분명하고 동시에 덜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시험 때나 또는 그 후까지도 해답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또 그들이 사랑하며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언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상 그는 그 사람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런 말을 할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적의 충고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손해되는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런 매저키즘적인 경향은 단순히 병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그 경향은 빈번히 합리화되고 있다. 매저키즘적인 의존은 사랑이라든가 충성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열등감은 실제적인 결점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고, 괴로움은 모두 변화하지 않는 환경의 탓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매저키즘적인 경향과 아울러 그 정반대의 것, 즉 사디슴적 경향을 동일한 성격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강도도 다르고 의식되는 수도 있고 의식되지 않는 수도 있지만 결코 잘못 보는 수는 없다. 사디슴적 경향에는 서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로 타인을 자기에게 의존시켜서, 그들에게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힘을 가하여 마치 '도공의 손에 쥐어진 진흙' 처럼 그들을 완전히 도구화해 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타인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자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훔치고, 내장을 꺼내어, 말하자면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치우려는 충동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이 욕망은 물질적인 것에도 비물질적인 것에도, 이를테면 사람이 나타내는 감정적이거나 지적인 성질의 것에 대해서도 품을 수 있다. 사디슴적 경향의 세 번째 것은 타인을 괴롭히고, 또는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괴로움은 육체적인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괴로움일 때가 더 많다. 그 목적은 실제로 남을 해치고 망하게 하고, 곤란하게 하거나 또는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디슴 적인 경향은 명백한 이유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훨씬 해가 적은 매저키즘적 경향보다 흔히 의식되지 않고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선의와 지나친 배려의 결과로 은폐된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합리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 최선인가 알고 있기 때문에 너를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이익을 위해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 또는 '나는 이처럼 훌륭하고 뛰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타인이 나에게 의존할 것을 기대할 만한 권리를 갖고 있다.' 착취적인 경향을 은폐하기 위해 또 하나의 합리화 방법이 있다. '나는 너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너에게서 빼앗아도 될 것이다. ' 보다 더 공격적인 사디슴적 충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합리화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입어왔다. 따라서 그들을 해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단지 복수에 불과한 것이다.' 또는, '나는 나와 내 친구들이 상처를 입을까 봐 먼저 한 대 때린 것이다.' 사디슴적인 인간과 사디슴의 대상에 대한 관계에 있어 다음과 같은 일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여기서 특별히 강조해 두려고 한다. 그것은 사디슴의 대상에 대한 그의 의존이다. 매저키즘적인 인간의 경우에는 뚜렷한 의존이 나타나지만, 사디슴적인 인간의 경우에는 그것이 정반대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하기 쉽다. 그가 강하고 지배적인 반면, 그의 사디슴의 대상이 그처럼 약하고 복종적이라면, 강자가 그가 지배하는 약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면밀한 분석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디스트는 그가 지배할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도 강력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강자적인 의식은 그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의존은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어떤 남자는 자기 아내를 몹시 잔인하게 다루며, 언제든 집을 나가도 좋다, 아니 그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너무 겁에 질려 감히 집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아내가 용기를 내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게 되는 날이면, 그 두사람에게는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남자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가 하면,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느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라는 등의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통 여자는 자기 주장을 내세울 용기를 잃고 남편의 말을 믿으려 들며, 결심을 번복하여 그대로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 또 같은 일이 시작된다. 그 남자는 전과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곤란을 느껴 여자가 폭발하는 날이면 남자는 또 절망하고, 여자는 또 집에 머물게 된다. 이런 일이 몇 차례고 되풀이되는 것이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결혼과 그 밖의 인간관계가 이 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술적인 순환은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을 때, 남자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은 그 사랑이란 무엇을 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문자그대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여간 어디까지나 진심인 것이다. 그는 그녀 없이는, 또는 적어도 그의 수중에 들어 있는 무력한 존재로 느껴지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단지 이 관계가 깨어질 우려성이 있을 때만 사랑의 감정이 나타난다. 다른 경우에는, 사디슴적 인간은 그가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인간만을 극히 명백하게 '사랑하고 '있다. 아내이건, 자식이건, 조수이건 급사이건, 길을 가는 거지이건, 아무튼 지배의 대상에 대해 그는 사랑의 감정뿐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감정까지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으로, 칭찬으로, 사랑을 확신시키는 일로, 위트와 빛나는 재기로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타인을 매수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 단 한 가지, 즉 자유롭게 독립되는 권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상태는 특히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지배의 태도 - 및 소유의 태도 - 는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자연'스러운 배려와 감정처럼 보이는 것으로 곧잘 은폐되어 있다. 아이들은 황금 우리 속에 넣어진다. 그리고 그 우리 속에서 나가려 들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가질 수가 있다. 따라서 성장했을 때 종종 아이들은 사랑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갖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그가 추구하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많은 관찰자들이 보기에 사디슴은 매저키즘에 비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을 해치고 지배하려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극히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죽음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소망'의 존재를 '전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 적인 경향'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권력을 추구하는 소망은 악마적인 것이 아니라 쾌락과 안전을 추구하는 소망의 극히 합리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홉스로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지배의 소망을 생물적인 조건이 갖춰진 적자 생존을 위한 투쟁의 논리적 결과라고 설명하는 자에게는 권력에 대한 갈망은 아무런 설명도 필요치 않을 정도로 명백한 인간성의 일부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매저키즘적인 노력, 즉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경향은 수수께끼처럼 생각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고, 약하게 하고, 해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락하려고까지 하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것, 즉 고통과 고민에 매혹되어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뇌와 약함이 인간의 노력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현상이 존재한다. 즉, '매저키즘적 도착'이다. 극히 의식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즐기려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매저키즘적 도착의 형태는 아니다. 때때로 원하는 것은 현실적인 괴로움과 고통이 아니라 육체가 묶이거나 구제될 수 없는 약한 상태에 놓임으로써 일어나는 흥분과 만족이다. 매저키즘적 도착에서 종종 요구되는 것은, 작은 어린애 취급을 받고, 갖가지 방법으로 꾸지람을 듣고, 또 창피를 당함으로써 '정신적으로 ' 약화되는 것이다. 사디슴적 도착에 있어서는 이와 대응되는 방법으로써, 즉 남을 육체적으로 해치고, 밧줄이나 쇠사슬로 묶어 놓고 행동이나 말로 창피를 주어 만족감을 얻고 있다. 고통과 의욕을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향락한다는 매저키즘적 도착은 매저키즘적 성격 또는 정신적 매저키즘보다 먼저 심리학자나 작가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설명한 바와 같은 매저키즘적 경향이 어떻게 성적 도착과 유사한 것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 매저키즘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같은 현상이라는 인정을 차츰 받게 되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굴종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은 바로 이런 것을 목표로 하는 '본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어칸트와 같은 사회학자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보다 더 이론적인 설명을 시도해 보려던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그는 최초로 새도매저키즘은 본질적으로 성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새도매저키즘적 행위를 관찰하여, 그는 새도매저키즘을 성적 본능의 발달에 있어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적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인에게서 볼 수 있는 새도매저키즘적 경향은 그 인간라는 심리적이고 성적인 발달이 초기단계에서 고정화된 것이거나 또는 퇴화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 후에 프로이트는 그가 정신적 매저키즘이라고 부른 현상, 즉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으려는 경향의 중요성을 차차로 자각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매저키즘적 경향과 사디슴적 경향이란 모순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함께 발견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매저키즘적 경향에 대한 설명을 변경했다. 즉, 타인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파괴하려는 생물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생각하고, 매저키즘은 본질적으로 소위 죽음의 본능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직접적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이 죽음의 본능이 성적 본능과 융합하며, 그 융합 속에서 만일 그것이 자기에게 향해지면 매저키즘이, 타인에게 향해지면 사디슴이 나타남을 시사했다. 그는 성본능과의 이 혼합이야 말로 혼합되지 않은 죽음의 본능이 지닐지도 모르는 위험성에서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프로이트에 의하면 만일 인간이 파괴성과 성을 융합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든가 타인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론은 프로이트의 새도매저키즘에 관한 최초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최초의 프로이트의 견해에 있어서, 새도매저키즘은 근본적으로 성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에선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비성적 현상이며, 그 안의 성적 요소는 단지 죽음의 본능과 성적인 본능의 융합에 기인된 것뿐이다. 프로이트는 비성적인 공격성의 현상에 대해 몇 년 동안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만 알프레드 아들러는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 있는 경향을 그의 체계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새도매저키즘으로서가 아니라 열등감과 힘에 대한 소망으로서 취급했다. 아들러는 이 현상의 합리적인 면을 본데 불과하다. 우리는 자기를 비소화하는 비합리적인 경향을 취급하고 있지만, 그는 열등감을 사실적인 열등성, 즉 어린아이의 육체적인 열등성과 일반적인 무력에 대한 적절한 반작용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힘에 대한 소망을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비합리적인 충동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대해, 그는 그것도 전적으로 합리적이라 보고 있다. 즉, 힘에 대한 소망은 적절한 반작용이며, 불안정하고 열등한 사람들에게 몰아칠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러는, 항상 누구나 그랬듯이, 인간 행동의 합목적적이며 합리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이상의 것을 꿰뚫어볼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마구 얽힌 인간의 동기에 대해 가치 있는 통찰을 남겼다고는 하나, 프로이트가 이룩해 놓은 것과 같은 비합리적인 충동의 심연 속에는 내려가지 못했다.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는, 빌헬름 라이히, 카렌 호니, 그리고 나 자신의 정신분석 문헌 속에 제공되어 있다. 라이히의 견해는 프로이트의 최초의 개념인 리비도설에 입각해 있긴 하지만, 그는 매저키즘적 인간은 결국은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때 일어나는 고통은 부산물에 불과할 뿐 목표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호니는 신경증적 인격에 있어 매저키즘적 노력의 근본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매저키즘적 성격의 특질을 상세히 기술함과 아울러, 그것이 전체의 성격적 구조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매저키즘적 성격의 특성이 성적 도착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후자를 어떤 특수한 성격구조에 근거를 둔 심리적 경향의 성적 표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비로소 핵심적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매저키즘적 도착과 매저키즘적 성격의 특질의 양자에 걸친 공통된 근원은 무엇일까. 또 매저키즘적 및 사디슴적인 노력의 공통된 근원은 무엇일까. 그 대답의 방향은 이미 이 장 첫머리에 암시되어 있다. 매저키즘적 노력과 사디슴적 노력은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개인을 도피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적 인간을 정신 분석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관찰하면 많은 실례에 따라 그들이 고독감과 무력감의 공포에 가득 차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것을 상세히 말한다는 건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일이기 때문에 인용할 수 없다. 종종 이 감정은 의식되지 않고 또 우월성과 안전정의 보상적인 감정으로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무의식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깊숙이 파헤쳐 보면 반드시 이런 감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부정적인 뜻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즉, 그는 혼자 떨어져 있으며, 서먹서먹하고 적의에 찬 세계와 대립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뛰어난 서술을 인용해 본다면, '인간이라는 불쌍한 동물은 타고난 자유라는 선물을 가능한 한 빨리 양도해 줄 수 있는 상대방을 찾아내고자 하는 강한 염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위협을 받은 개인은 자기를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에 결부시키고자 한다. 이미 그는 자기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는 미친 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라는 무거운 짐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다시 안정감을 얻으려고 한다. 매저키즘은 이런 목표에 도달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매저키즘적인 노력이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는 결국 한 가지 일을 노리고 있다. '개인적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일, 다시 말해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이 목표는 개인이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느끼는 인물이나, 힘에 복종하고자 하는 매저키즘적인 노력 속에 명백히 나타난다(다른 사람이 우월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도 항상 상대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실제적인 힘에 기인하는 수도 있으며, 또 자기의 완전한 무주의성과 무력감을 믿는 데 기인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한 마리의 생쥐나 하나의 나뭇잎이라도 무서운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형태의 매저키즘적 노력도 본질적인 목표는 동일하다. 매저키즘적인 약소감의 경향 속에는 원래의 무의미감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불안을 더 악화시켜 불안을 없애려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매저키즘적인 인간이 하는 일이다. 만일 내가 독립해서 강하게 되고자 하는 소망과 무의미함과 무력한 감정과의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한은 나는 고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만일 내가 개인으로서의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모순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비소하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는 일은 이 목적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고통과 번뇌에 압도되는 일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술에 취해 그것을 극복해 가는 것 역시 방법이 될 수 있다. 만일 이 고독감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는 자살을 공상하는 일도 마지막 희망이다. 어떤 조건 밑에서는 이 매저키즘적 추구는 상대적으로 성공한다. 만일 개인이 이 같은 매저키즘적 노력을 만족시키는 문화적인 형식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를테면, 파시스트의 이데올로기에 있어서의 '지도자'에 대한 복종처럼), 그는 이 감정을 함께 가지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결부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 안전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매저키즘적 '해결'은 신경증적인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해결에 불과하다. 개인은 표면적인 괴로움을 없앨 수는 있지만 깊숙이 뿌리박힌 갈등과 침묵 속에 있는 불행을 움직일 수는 없다. 만일 매저키즘적인 노력을 표현하는 문화형식이 존재하지 않고 또 개인의 매저키즘적 추구가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집단 속의 매저키즘의 평균량을 능가할 때는 매저키즘적인 해결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생겨나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결국 개인을 새로운 번뇌 속에 남겨둔다. 만일 인간 행동이 항상 이성적이고 합목적적이라면 매저키즘은 신경증적 증상과 마찬가지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착란의 연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인간 행동은 불안이라든가 그 밖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추구가 그 동기가 되는 수가 있으며, 또 이 추구는 그 감정적 상태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가장 눈에 띄는 표현만을 은폐할 뿐이며, 그것마저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신경증적 표현은 공포상태에서의 비합리적인 행동과 흡사하다. 이를테면, 불길에 휩싸여 있는 남자가 그 방 창문 가에 서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는 자기 목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 없다는 것과 2,3분 안에 불타버릴지도 모르는 계단으로 아직도 충분히 도망쳐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살고 싶은 일념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이 외친다는 행동이 구제를 받기 위한 한 행동처럼 보이긴 하나 - 완전히 파멸로 끝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저키즘적인 노력은 그 단점, 갈등, 의혹, 또는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을 갖는 가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소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장 표면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데 성공할 뿐이고, 아니면 보다 큰 괴로움으로 이끌 뿐이다. 매저키즘의 비합리성은 다른 모든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할 수 없는 감정적인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궁극적으로는 비생산적이라는 데 있다. 이런 일은 신경증적 행위와 합리적 행위의 중대한 차이를 설명해 준다. 후자의 경우, '결과'는 행위의 '동기'에 대응한다. 사람은 강박으로 인해 행동한다. 그 강박은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노력은 다만 임시적인 해결방법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그 결과는 그가 원했던 것과 모순된다.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박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사람은 임시적이 아닌 해결을 가능케 하는 행위의 방법을 택할 수 없다. 매저키즘에 있어서의 이 사실은, 개인은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허무감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인 실체로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실체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 방법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괴롭혀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은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며 무턱대고 달성하려는 목적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이다. 그 대가는 비싼 것이다. 그는 한층 더 많이 지불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노예적인 채무자처럼 그가 그 때문에 지불한 것 - 즉,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지 못한 채 점점 더 큰 빚만 지게 될 뿐이다. 내가 미저키즘적인 도착에 대해 말한 것은 그것이 괴로움이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저키즘적인 도착은 정신적인 매저키즘과 마찬가지로 결코 진실한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나 그것은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도착과 매저키즘적인 성격의 차이는 본질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도착의 경우, 자기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은 육체를 통해 표현되어 성적 감정과 결부되고 있다. 정신적인 매저키즘에서의 매저키즘적 경향은 전인격을 지배하고 자아가 의식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목적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도착의 경우의 매저키즘의 추구는 다소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성과 융합됨으로써 성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해방에 참여하여 직접적인 해방을 찾아 내려고 한다. 개인적인 자아를 전멸시켜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매저키즘적인 노력의 일면에 불과할 뿐이다. 또 다른 한 면은 자기 외부에 있는 보다 크고, 보다 더 강한 전체의 일부분이 되어 그 속에 몰입함으로써 거기에 참가하려는 시도이다. 그 힘은 개인으로도, 제도로도, 신으로도, 국가로도, 양심으로도, 또는 육체적 강제로도 될 수 있다. 아주 강력하고, 영원하고, 매혹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힘의 일부분이 됨으로써 사람은 그 힘과 영광에 참가하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굴복시켜 모든 힘과 자부심을 내버림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전체성을 잃고 자유를 내버린다. 그러나 그는 그가 몰입한 힘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과 새로운 자부심을 획득한다. 또 그는 의혹이라는 고통에 저항하는 안전성도 획득한다. 매저키즘적인 인간은 외부적 권리이건, 내면화된 양심이건, 심리적 강제이건, 아무튼 그런 것을 주인으로 함으로써 결단을 내리는 일에서 해방된다. 즉, 자기 운명의 최후적인 책임을 갖는 일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즉, 자기 운명의 최후적인 책임을 갖는 일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그는 또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회의에서도 해방된다. 이 같은 문제는 그가 결부되고 있는 힘과의 관계에 의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삶의 의미와 그의 자아의 동일성은 자신이 굴복한 보다 큰 전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매저키즘적인 속박은 제 1차적인 속박과는 다르다. 후자는 개성화의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개인은 여전히 '그의'자연적 및 사회적 세계의 일부분이다. 그는 아직도 그의 환경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제 1차적인 속박은 진실된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의식을 부여해 준다. 매저키즘적인 속박은 도피이다. 개인적 자기는 해방되었으나 그의 자유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 의혹, 무력감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자기는 '제 2차적인 속박'속에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저키즘적인 속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도는 성공할 리가 없다. 개인의 해방이라는 것은 역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개인은 안전하며 그 무엇에 '속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자기상실에 괴로워하는 무력한 미소 분자에 불과하다. 그와 그가 달라붙어 있는 힘과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근본적인 대립이 남아 있는 동시에, 비록 의식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매저키즘적인 의존을 극복하여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충동이 남는다. 사디슴적인 충동의 본질은 무엇일까. 여기서도 또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소망이 그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갖가지 형태의 사디슴은 결국 하나의 본질적인 충동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즉,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것, 그를 우리의 의지에 대해 무력한 대상으로 삼는 것, 그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는, 그의 신이 되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다. 그를 절멸케 하여, 그를 노예로 삼은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그를 괴롭히는 일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힘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어,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자에게 고뇌를 참고 견디게 하는 일보다 더 커다란 힘은 없기 때문이다. 타인(또는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 쾌락, 이것이 사디슴적인 충동의 본질이다. 타인에 대해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는 이 경향은 매저키즘적인 경향과는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경향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물론 그 실제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하면, 의존하거나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욕구와 타인을 지배하고 괴롭히려는 욕구가 정반대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이 두 가지 경향은 하나의 근본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즉, 고독을 참을 수 없는 일과 자기 자신의 약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사디슴과 매저키즘의 양쪽 근저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목적을 '공서'라 부르기로 한다. 심리학적 의미에 있어서의 공서란 각자 자아의 전체성을 잃고 서로 완전히 의존할 수 있도록 타인과 (또는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힘과) 일체화하는 것을 뜻한다. 사디슴적 인간은 매저키즘적 인간이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단지 그는 말살당함으로써 안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말살하여 안전을 얻는다. 어느 경우에나 개인적 자아의 전체성은 상실된다. 한편에선 나는 나 이외의 어떤 힘 속으로 용해된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을 잃게 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는 자신을 확대하여 타인을 자기의 일부로 만들게 되는데, 그때 나는 독립된 개인으로서는 결여되어 있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타인과 공서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고독감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매저키즘적 경향과 사디슴적 경향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사디슴적 '또는'매저키즘적인 어느 한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서적인 복합체에서는 항상 시계추처럼 능동적인 측면과 수동적인 측면 사이를 왕복하고 있으므로, 그 순간에 어느 쪽을 움직이고 있는 가를 정하는 일은 곤란한 경우가 가끔 있다. 사디슴이라면 우리는 보통 파괴성과, 그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적의를 생각하기 쉽다. 파괴성이 다소나마 사디슴적 경향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매저키즘에 대해서도 진리가 된다. 매저키즘을 분석하면 반드시 이런 적의가 나타난다. 주요한 차이는 이러하다. 즉, 사디슴에 있어서는 대체로 적의가 보다 더 의식적이고, 행위에 직접 표현되나, 매저키즘에선 적의가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간접적 표현을 취한다는 것이다. 나는 뒤에서, 파괴성은 개인의 관능적, 감정적, 지적인 확장이 방해되었을 때의 결과임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 즉, 그것은 공서적 요구를 만들어내는 같은 조건의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디슴은 파괴성과 동일하지는 않으나 상당한 정도까지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파괴적 인간은 대상을 파괴하려고 한다. 즉, 그것을 해치우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사디스트는 그의 대상을 지배하고자 하기 때문에 대상이 없어져 버리면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디슴이란 말은 파괴성으로부터는 비교적 떨어져 있으며, 대상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혼합되어 있는 수도 있다. 이 '사랑하는' 사디슴'이란 종류는 발자크의 <환멸> 속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작품에는 우리가 공서에 대한 요구라고 부르는 특수한 성격이 표현되어 있다. 발자크는 젊은 루시앙과 사제를 가장한 탈옥수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젊은이가 자살을 기도한 직후, 그와 알게 된 자칭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젊은이는 지금 죽은 시안과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그대를 선택하여 생명을 부여했다. 그대는 피조자가 창조주에 속하고 있는 것처럼, 또 - 동양의 동화 속에 나오는 - 아프리가 정령에 속해 있는 것처럼,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억센 손으로 나는 그대를 권력의 길로 매진하게 할 것이다. 또 나는 그대에게 쾌락과 영광과,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축연의 생활을 약속하겠다. 그대는 돈에 곤란받는 일 없이 찬란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출세의 토대가 되는 진흙 속에 숨어서 그대의 성공에 훌륭한 전당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로지 힘을 위해 힘을 사랑한다. 나는 쾌락을 거부해야 할 것이지만, 그대의 쾌락을 향락하기로 하겠다. 머지않아 나는 그대와 하나가 되어 동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만든 자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나에게 봉사하게 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나의 자식이여, 나는 그대와 함께 이륜마차를 타고 가서, 여자들을 정복한 그대의 성공을 기뻐할 것이다.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아름다운 젊은이다. 내가 이 두 뤼방프레 후작을 만들어서 그를 귀족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의 성공은 내 덕이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무슨 일이든지 나의 충고를 따른다...' 가끔, 그것도 통속적인 사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새도매저키즘은 사랑과 혼동되는 수가 있다. 특히 매저키즘적 현상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인다. 타인을 위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태도와 타인에게 개인의 권리나 주장을 양보하는 일은 '위대한 애정'의 본보기로서 칭찬을 받고 있다. 희생 이상으로, 또한 사랑하는 자를 위해 자기를 포기해 버리는 일 이상으로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되고 있다. 사실상 그런 경우에 '사랑'이란 본질적으로는 매저키즘적인 사모이고, 그 인간의 공서적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만일 사랑이 어떤 특정 인물의 본질에 대한 열정적인 긍정이고 적극적인 교섭을 뜻하는 것이라면, 또 만일 사랑이 당사자 두 사람의 독립과 통일성에 입각한 인간끼리의 결합을 뜻하는 것이라면, 매저키즘과 사랑은 반대되는 것이다. 사랑은 평등과 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그것이 한쪽의 복종과 통일성의 상실에 입각해 있다면, 아무리 그 관계를 합리화하더라도 그것은 매저키즘적인 의존에 불과하다. 사디슴도 또 종종 사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만일 당사자를 위해 지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도 사랑의 표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요소는 지배의 향락에 불과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독자의 마음속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은 사디슴은 권력에 대한 추구와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즉, 타인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보다 파괴적인 형태의 사디슴은 힘에 대한 소망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힘에 대한 소망은 사디슴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 보다 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홉스 이래, 사람은 힘을 인간행위의 근본적 동기로 보아왔다. 그러나 그 후 수세기 동안은 힘을 억제하고자 하는 합법적이며 도덕적인 요인에 한층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파시즘이 대두되자, 힘에 대한 욕망과 그 권력에 대한 신념이 새로이 고조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힘의 승리에 감명을 받고 그것을 강함의 표시로 생각했다. 확실히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순수한 물질적인 뜻으로 보면 보다 훌륭한 힘의 표현이다. 만일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보다 '강한'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뜻으로는, 힘에 대한 욕망은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 자아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힘이 결여되어 있을 때 2차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절망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힘'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어떤 자에 대한 힘의 소유이고, 타인을 지배하는 능력을 뜻한다. 둘째로는,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 힘을 소유하는 것, 능력이 있는 것, 잠재적 능력이 있는 것이다. 후자의 뜻은 지배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것은 능력이라는 뜻에 있어 숙달을 뜻한다. 무력이라 할 때도 우리는 이 뜻을 생각한다. 즉 타인을 지배할 수 없는 인간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힘이란 '지배'나 '능력'중 어느 하나를 뜻한다. 그것은 동일하기는커녕 서로 배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무능력이란 말은 단순히 성적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 능력의 모든 영역에 사용되지만, 그것은 지배에 대한 사디슴적 노력을 이끄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 정도에 따라, 즉 자아의 자유와 통일성과의 기초 위에서 그의 잠재적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그는 지배할 필요는 없어지고, 따라서 권력을 추구하는 끈질긴 욕망도 사라진다. 마치 성적 사디슴이 성적 애정의 반대이듯이, 지배하는 의미에서의 힘은 능력의 반대이다. 사디슴적 및 매저키즘적 성질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인격이 그런 성질에 지배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성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전자만을 새도매저키즘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격'이란 프로이트가 말하는 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 인간의 모든 행동양식의 특징이 아니라 행동을 하게 하는 주요한 충동이 문제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근본적인 추진력이 성적인 것이었으므로 '그는 구순적', '항문적', '생식기적' 성격등의 개념에 도달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성격의 형태를 고안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적인 개념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충동적인 힘으로 움직여지는 성격의 소유자라도 반드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철두철미하게 사디슴적인 노력에 지배되고 있는 인간도 의식적으로는 의무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는 노골적인 사디슴적 행위에는 관여치 않고, 그 사디슴적 충동을 억제하여 적어도 표면으로는 사디슴적인 인간이 아닌 것처럼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행동, 환상, 꿈, 몸짓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면 그의 퍼스낼리티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디슴적인 충동이 명백해질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적인 충동이 지배적인 사람의 성격을 새도매저키즘이라 특정 지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인간이 반드시 신경증적이라는 법은 없다. 어떤 특수한 성격구조가 '신경증적'이냐, 또는 '정상적'이냐 하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놓여 있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이행되어야 할 특정한 일과 그들의 문화 속에 현존하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형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사실 독일이나 기타 유럽 여러 나라의 하층 중산계급에서는 전반적으로 이 새도매저키즘적인 성격이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나치스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게 호소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종류의 성격구조였다. 이 '새도매저키즘적'이라는 말은 도착과 신경증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특히 신경증적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을 가리킬 경우에는 새도매저키즘적 성격이라는 말을 쓰는 대신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 용어의 사용방법은 새도매저키즘적인 인간의 특징은 권위에 대한 태도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권위를 칭찬하고, 그것에 복종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가 권위체가 되기를 원하여 다른 자를 복종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이 말을 사용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파쇼적인 조직은 권위가 사회적, 정치적 구조에 있어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권위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말로 파시즘의 인간적 기초가 되는 퍼스낼리티의 구조를 대표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권위'라는 말을 어느정도 명백히해 둘 필요가 있다. 권위란 어떤 자가 '가지고 있는'자질이 아니다. 권위는 어떤 자가 다른 자를 그보다 우월한 자로 우러러보는 인간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성적 권위라 부를 수 있는 우열관계와 금지적 권위라 부를 수 있는 우열관계와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 예를 들면 나의 생각이 명백해질 것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나, 노예 소유자와 노예의 관계도 모두 한편의 다른 편에 대한 우월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사는 학생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만족한다. 실패하면 그것은 교사의 실패이자 학생의 실패이다. 한편, 노예 소유자는 가능한 한 노예를 착취하려고 한다. 가능한 한 많이 착취할 수 있다면 그는 한층 더 만족한다. 동시에 노예는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가능한 한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한다. 양자의 이익은 확실히 대립하고 있으며, 한쪽의 이익은 다른 쪽의 손해가 된다. 그 어느 경우에나 우열성은 전적으로 판이한 기능을 갖게 된다. 첫째 경우는 권위에 복종하는 자를 돕는 조건이다. 둘째 경우는 착취를 위한 조건이다. 이 두 타입에 있어 권위의 역학도 또 다르다. 학생이 배울수록 그와 교사와의 간격은 그만큼 좁아진다. 학생은 한층 더 교사와 같아진다. 다시 말해, 권위적 관계가 해소된다. 그런데 만일 권위가 착취의 기초가 된다면, 그 거리는 관계가 연장될수록 확대되는 것이다. 심리적 상황도 이런 권위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의 경우에는 애정, 칭찬, 감사 등의 요소가 지배적이다. 권위는 동시에 사람이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자기를 동일화하고자 원하는 하나의 실례이다. 두 번째 상황에선 착취자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생긴다. 그에게 복종하는 일은 자기의 이익에 반한다. 그러나 노예의 경우에 증오는 거의 승리의 기회도 없이 단지 고통에 굴복하는 모순을 이끌어 갈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의 감정을 억제하고 때로는 맹목적인 존경심으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이 경향은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첫째로는 증오라는 고통에 찬 위험한 감정을 제거하고 둘째로는 굴욕의 감정을 완화시킨다. 만일 나를 지배하는 인간이 그토록 경탄할 만한 완전한 자라면 나는 그에게 복종하는 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현명하고, 보다 뛰어난 이상 나는 그와 동등하게 될 수는 없다. 결국 금지적 권위의 경우에는 증오라든가 또는 비합리적인 과대평가나 권위에 대한 아첨이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인 권위에 있어서는 권위에 복종하고 있는 인간이 한층 더 강해지고, 따라서 권위에 보다 더 흡사해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권위는 감소되어 간다. 이성적 및 금지적 권위의 차이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 있어서 노예에게 이익이 되는 요소가 있다. 그에게는 적어도 그의 주인을 위해 일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식량과 보호가 부여된다. 한편 전혀 이해관계의 대립이 없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극단적인 두 경우의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다. 공장노동자와 그의 주인, 농부의 자식과 그의 아버지, 가정의 주부와 남편 등의 관계처럼 차이가 많다. 더구나 현실적으로는 이 두 가지 권위가 섞여 있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권위의 상황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항상 권위의 어떤 종류가 중요한가를 결정지어야 한다. 권위는 항상 너는 이런 일을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는 그런 개인이나 제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종류의 권위는 외적 권위라 부를 수 있겠지만, 권위는 의무, 양심 또는 초자아라는 이름아래 내적 권위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으로부터 칸트철학까지의 근대사상의 발전은 외적 권위 대신 내적 권위를 대치하는 과정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발흥하는 중산계급의 정치적 승리에 의해 외적 권위의 특권은 상실되고, 전부터의 외적 권위가 있었던 위치에 인간의 내적 양심이 들어앉게 되었다. 이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승리처럼 보였다. 즉, 외부로부터의 질서에 굴하는 일(적어도 정신적인 일에 있어 )은 자유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경향을 극복하여 개인의 내부의 일면, 즉 그의 본성을 또 다른 면인 그의 이성, 의지, 양심 등에 의해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일이 자유의 본질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분석해보면, 양심은 외적 권위와 마찬가지로 냉혹한 지배자라는 사실, 또 인간의 양심에 의해 주어지는 질서의 내용은 결국 개인적인 자아의 요구에 의해서보다도 윤리적 규범이란 위엄을 가장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양심의 지배는 외적 권위의 지배보다 더 냉혹하다. 왜냐하면, 만일 개인이 그 질서를 그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반역할 수 있겠는가. 최근 들어 '양심'의 중요성은 상실되어 왔다. 개인생활에 있어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외적 권위도 아니고 내적 권위도 아닌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만일 그가 타인의 합법적인 주장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에 의하면, 권위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공공연한 권위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가 지배한다. 그것은 상식, 과학, 정신적 건강, 정상적 또는 여론으로 가장되어 있다. 그것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 조용히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명한 일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딸에게 '너는 그 청년과 함께 외출하는 게 싫겠지'라고 말하거나, 또는 광고에서 '이 담배를 피워보십시오, 그 상쾌함은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라고 암시한다 - 결국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뒤덮고 있는 것은 이런 미묘한 암시의 분위기이다. 익명의 권위는 공공연한 권위보다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곳에 자기가 복종할 질서가 있으리라곤 상상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외적 권위의 경우에는 질서가 있고, 명령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람은 권위와 싸울 수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개인의 독립성과 도덕적 용기가 발달할 수 있다. 또 내적 권위의 경우에도, 명령은 내적인 것이라도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익명의 권위의 경우에는 명령도, 명령하는 자도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포격을 받는 일과 흡사하다 .싸워야 할 사람도, 또 싸워야 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권위주의적 성격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은 힘에 대한 태도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 있어서는 모든 존재는 둘로 나뉜다. 즉,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갖지 않은 자로 나뉜다. 그것이 인물의 힘에 의하건 제도의 힘에 의하건 복종에 대한 사랑, 찬미, 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은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야기된다. 힘은 그 힘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힘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열광시킨다. 그의 '사랑'이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야기되듯이, 무력한 인간이나 제도는 자동적으로 그의 경멸을 불러 일으킨다. 무력한 인간을 보면 그를 공격하고, 지배하고, 절멸시켜 버리고 싶어진다. 이와 다른 성격의 소유자는 무력한 자를 공격한다는 생각만으로 간이 서늘해지지만 권위주의적 인간은 상대방이 무력해질수록 한층 더 분기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많은 관찰자들에게 잘못을 범하게 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즉, 권위에 도전하고, '위로부터'의 어떠한 영향에도 반감을 갖는 경향이다. 때로는 이 도전이 구석구석까지 퍼져 복종적 경향은 내면으로 물러날 때도 있다. 이런 타입의 인간은 항상 어떠한 권위에도 - 심지어는 그의 이익을 조장하고 억압의 요소를 갖지 않은 요소에도 반역한다. 때로는 권위에 대한 태도가 분열된다. 즉, 어떤 권위 - 특히 그 무력에 실망한 권위 - 에는 저항하지만, 이윽고 보다 큰 힘과 약속에 의해 매저키즘적인 동경을 충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권위에는 복종한다. 최후로, 반항적 경향이 완전히 억압되어 있으며, 오직 의식적인 억제가 약화되어 있을 때만 표면에 나타나는 그런 타입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권위가 약화되어 흔들리기 시작 할 때 권위에 대한 증오로 말미암아 '뒤늦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반항적 태도가 그 중심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최초의 타입의 인간일 때는 그 성격구조는 복종적 매저키즘적 타입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믿기 일쑤다. 그들은 대단히 강한 독립성에 입각하여 모든 권위와 대립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적인 강함과 통일성으로 자유와 독립을 방해하는 힘과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성격의 권위에 대한 싸움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도전에 불과하다. 그것은 권위와 싸움으로써 그 자신을 긍정하고, 그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복종에 대한 동경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혁명적'이 아니다. 나는 그를 '반역자'라 부르고 싶다. 표면만을 관찰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수많은 인물이나 정치운동이 있지만 그것은 '급진주의'로부터 극단적인 권위주의까지의 변화가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그들은 결국 반역자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그의 모든 철학은 그가 감정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숙명에 복종하는 일을 좋아한다. 숙명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그의 사회적 위치에 좌우된다. 병사들의 경우, 그것은 그가 자진하여 복종하는 상관의 의지와 채찍을 뜻한다. 소상인에게는 경제적 법칙이 그의 숙명이다. 그에게는 위기와 번영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변경되는 사회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복종해야할 우월한 힘의 표현이다. 피라밋 꼭대기에 서 있는 자에게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일이다. 다른 것은 다만 인간이 복종하는 힘의 크기와 일반성이며, 의존하려는 감정 그 자체는 아니다. 개인의 생활을 직접 결정하는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생 그 자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힘도 불변의 숙명으로 느껴진다.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인류의 일부가 다른 사람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도 숙명이다. 고뇌의 양이 언제까지나 감소되지 않는 것도 숙명이다. 숙명은 철학적으로는 '자연법'또는 '인간의 운명' 으로서, 종교적으로는 '신의 의지' 로서, 윤리적으로는 '의무' 로서 합리화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권위주의적 성격에 있어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외부의 보다 우월한 힘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과거를 숭배한다. 전부터 있었던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원하거나 그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죄악이고 광기이다. 창조의 기적은 - 창조는 항상 기적이지만 - 그의 감정적 경험을 초월하고 있다. 실라이에르마헤르는 종교적 체험을 절대적 의존의 경험이라 정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매저키즘적 경험의 정의이다. 이 의존하고자 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죄가 특별한 역할을 떠맡는다. 원죄라는 생각은 미래의 모든 세대를 괴롭히겠지만, 그것은 권위주의적 경험의 특징이다. 모든 인간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도덕도 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한번 죄를 범한 자는 누구나 영원한 쇠사슬로 자기 죄에 얽매이게 된다. 자기 행동이 자기를 지배하는 힘이 되어 속박한다. 죄의 결과는 속죄로써 완화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죄를 다 없애버릴 수는 없다. '너희의 죄가 주홍같다 할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 라는 이사야의 말은 권위주의적 철학의 정반대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권위주의적 사고에 공통된 특질은 인생이 인간의 자아와 관심과 희망을 초월한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힘에 복종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의 무력감이 매저키즘 철학의 중심사상이다. 나치즘의 이념적 조상 중 한사람인 묄러 반 데르 브루크는 이런 감정을 매우 명백히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보수적인 인간은 오히려 파국이라든가, 파국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무력이라든가, 파국의 필연성이라든가, 타락된 낙관론자의 두려운 실망을 믿고 있다. ' 우리는 히틀러의 수기에서도 이 같은 정신의 예증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행동, 용기, 신념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러한 성질은, 복종을 원치 않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권위주의적 성격에 있어서의 행동은 - 물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기는 하지만 - 근본적 무력감에 뿌리박고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의 행동이란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어떤 자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신, 과거, 자연, 또는 의무라는 이름의 행동은 될 수 있어도, 결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것, 힘이 없는 것, 인생 그 자체의 이름으로서의 행동이 될 수는 없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우월한 권력에 의지하여 그의 행동력을 획득한다. 이 권력은 결코 공격도 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항상 죄나 열등감에 대한 분명한 표시이다. 그리고 만일 믿고 있는 권위가 약점을 드러내면 그의 사랑과 존경은 경멸과 증오로 변한다. 그는 다른 보다 더 강한 힘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한, 현존하는 권력을 공격할 수 있는 '공격정신'은 결핍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 성격이 가지는 용기란, 본질적으로는 숙명이나 그들의 대표자나 '지도자'등이 결정한 사항을 참아내는 용기이다. 불평하지 않고 견디어내는 것이 그의 최고의 미덕이다. 그것은 고뇌를 그치게 한다든가 고뇌를 감소시키고자 하는 용기는 아니다. 숙명을 바꾸지 않고 그것에 복종하는 일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영웅주의이다. 그는 권위가 강하고 명령적인 한 그것을 믿고 있다. 그의 신념은 결국 그의 의혹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 의혹을 보상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앙이 현재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실현된다는 확신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권위주의적 철학은 아무리 심하게 상대주의를 극복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적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절망과 완전한 신앙의 상실에 뿌리를 박고 있어, 허무주의와 생명의 부정으로 이끌어 간다. 권위주의적 철학에 있어서는 평등의 관념은 존재치 않는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때로는 평등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또는 그의 목적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사용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는 아무 현실적인 뜻도, 또 중요성도 없다. 그것은 그의 감정적 경험이 미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엔 이 세계는 힘을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 즉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이루어져 있다. 새도매저키즘적 추구에 입각하여 그는 다만 지배와 복종만을 경험할 뿐 결코 연대책임은 경험하지 못한다. 성의 차별이건 인종의 차별이건 결국 우월과 열등의 표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은 차별을 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새도 매저키즘적 추구와 권위주의적 성격은 무력감이 보다 더 극단적이 형태를 취하는 경우이며, 또한 숭배하거나 지배하거나 하는 대상과 공서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이와 같은 새도매저키즘적인 추구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다만 일부의 개인과 사회 집단만을 전형적으로 새도매저키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밖에도 보다 더 조용한 의존의 형식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는 극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결여되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이다. 이 의존은 새도매저키즘의 위험하고 정열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역시 중요한 뜻이 있으므로 여기서 그냥 지나쳐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모든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외부의 힘에 관련시키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 관해서이다. 그들이 하는 일, 느끼는 일, 생각하는 일중 이힘가 결부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들은 '그'로부터의 보호를 기대하고, '그'가 돌보아주기를 원하며, 자기들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도 다 '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또 그들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때도 흔히 있다. 비록 이와 같은 의존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인간이나 힘은 애매한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힘에 결부되는 뚜렷한 이미지는 없다. 그 본질적인 성질은 어떤 인간을 보호하고, 돕고, 발전시킴과 아울러, 함께 있어 그들을 고독하지 않게 하는 일을 하는 데 있다. 이런 성질을 갖는 'X'를 '마술적인 조력자'라고 부를 수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마술적인 조력자'는 인격화된 경우가 흔히 있다. 그는 신이라든가 하나의 원리로 생각되는 일도 있으며, 부모, 남편, 아내, 또는 손윗사람과 같은 현실적인 인간으로 생각되는 수도 있다. 주의할 점은, 현실적인 인간들이 마술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고 인정을 받으면, 그들 인간에게 마술적 성질이 부여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인간의 중요성은 마술적인 조력자로서의 인격화의 과정은 소위 '사랑에 빠진' 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로 마술적인 조력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은 육욕을 구한다. 즉,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종종 성욕에 의해 움직여지는데-어떤 인간을 마술적인 성질의 소유자라 생각하고, 그 인간에게 그의 모든 생활을 결부시켜 의존해 가려고 한다. 그 상대방도 한쪽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는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 관계가 '참된 사랑'의 하나라는 인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이 마술적인 조력자를 구하는 욕구는 정신분석적인 조작에 의해 실험적인 조건하에서 연구될 수 있다. 분석되는 인간은 정신분석자에게 깊은 애착을 느끼고, 그의 모든 생활과 모든 행동, 사상, 감정을 분석자에게 관련시키는 일이 곧잘 있다.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피분석자는 자문자답한다. '그(분석자)는 이런 일을 과연 기뻐할까, 기뻐하지 않을까, 이런 일에 동의할까, 아니면 나를 나무랄까'라고. 연애관계에 있어서 어떤 인간을 동반자로 택했다는 사실은, 이 특별히 선정된 인간이 단지 '그'라는 이유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상태에서는 이런 상상은 시인될 수 없다.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전혀 다른 종류의 정신분석자에 대해 동일한 검정을 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애정과 흡사해서 성적 욕망까지 수반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격화된 마술적인 조력자에 대한 관계이다. 정신분석자의 역할은 분명히 어떤 권위를 갖는 사람들(의사라든가 장관 또는 교사)과 마찬가지로 인격화된 마술적인 조력자를 구하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데 있다. 한 인간이 왜 마술적인 조력자에게 속박을 다하느냐 하면 그것은 원칙적으로는 공서적 충동의 근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혼자서 있을 수 없는 점과, 개인적 가능성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점 때문이다. 새도매저키즘적 추구에 있어서는 그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마술적인 조력자에 의존하여 자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지금 논하고 있는 보다 더 조용한 의존의 형식에서는, 무능력은 단지 지도받고 보호받고자 하는 소망을 풀게 할 뿐이다. 마술적인 조력자에게 관계하기는 원하는 정도는 개인의 지적, 감정적, 감각적 가능성을 자 발적으로 표현하는 능력과 반비례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술적 조력자에 의해 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원이 강해질수록 인생의 중심점이 한층 더 자기 자신으로부터 마술적인 조력자나 인격화된 그에게로 옮겨간다. 이때, 문제는 이미 자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상실치 않기 위해 '그'를 과연 어떻게 조종하느냐 하는 일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어떻게 그에게 시켜야 하며, 어떻게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가 하는 데에 있다. 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로는, 인생을 오로지 '그'를 조종하는 일로만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자는 '복종'을, 어떤 자는 '선량함'을 사용한다. 또 어떤 자는 조종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으로 고뇌를 사용하고 있다. 거기서는 결국 어떤 감각, 사고, 감정도 '그'를 조종하려는 욕구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적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발성을 방해하는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될 수 있는 이런 의존성은,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부여하는 한편, 약소감과 속박감을 이끌어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는 한, 마술적인 조력자에 의존하고 있는 자는,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그'에 의해 노예화되었다고 느껴 어느 정도 '그'에게 반항한다. 안전과 행복을 맡기고 있는 그 인간에 대한 반항은 새로운 모순을 야기한다. 이 새로운 모순은 '그'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닥에 깔려 있는 적대감은 이 관계 속에서 구하고자 하는 안전감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만일 마술적인 조력자가 어떤 현실적인 인간 속에서 인격화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인간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면 반드시 실망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는 환상적인 것이므로 어떠한 현실적인 인간이라도 반드시 실망하게 된다. 이 실망에는 그 인간에게 노예화된 데 대한 반감이 더해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키게 한다. 그 충돌은 때로는 단지 분리시킴으로써 끝나는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분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 마술적인 조력자에게 기대했던 모든 희망의 실현을 바랄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선택함으로써 생긴다. 그 관계도 실패라는 것이 판명되면 다시 그것을 파기해 버린다. 또는 그 사람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단정하고 체념해 버린다. 그가 실패한 것이 결코 올바른 마술적인 조력자를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마술적인 힘을 빌어 얻으려던 직접적인 결과이다. 자기 이외의 어떤 대상에게 일생을 통해 의존하고자 하는 현상은 프로이트에 의해 관찰되어 왔다. 그는 그것을 부모에 대한, (본질적으로는 성적인) 초기의 결속을 일생을 통해 계속하려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이 현상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므로, 그는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잘 처리하는 일이야말로 정상적인 정신 발달의 중심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심리학의 중심적인 현상으로 생각한 것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적당히 해석하는 일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물론 부모자식간에 성적 애착이란 현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또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순이 때로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하더라도, 성적 애착이나 모순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집착할 때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일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은 결코 아이들 자신의 자발성을 필연적으로 속박하는 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회의 대표자로 행동하고 아이들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억압하기 시작하면, 성장해 가는 아이들은 자립하기가 점점 곤란해진다. 그래서 마술적인 조력자가 필요해지며, 종종 부모를 '그'로 인격화해 버리는 것이다. 나중에는 개인은 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를테면 교사나 남편 또는 정신분석자에게로 전위하게 된다. 되풀이해서 말하면, 이와 같은 권위의 상징과 결부하고자 하는 욕구는 부모 중 어느 한쪽에 대해 최초의 성적 애착을 계속하려는 일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발전성과 자발성을 방해함으로써, 또한 거기서 일어나는 불안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에선, 모든 신경증의 핵심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유와 독립을 구하는 싸움에 있다. 수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싸움을 완전한 자아포기로 끝을 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잘 적응하여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신경증적인 인간은 완전한 굴복에 저항하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모습이나 형태를 꾸미고 있든 간에 마술적 조력자에게 구속된 채로 있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신경증은 기초적인 의존성과 자유의 탐구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본질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시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 2절 파괴성 우리는, 새도매저키즘적인 추구와 파괴성은 서로 깊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말했다. 파괴성이 새도매저키즘적인 추구와 다른 점은,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대상과의 공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제거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파괴성도 역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개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에 기인되고 있다. 외계에 대한 무력감은 그 외계를 파괴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 성공적으로 그것을 제거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고독하다. 그러나 그때의 고독은 화려한 것으로, 나는 이미 외계에 있는 사물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억압되는 일은 없다. 외계를 파괴하는 일은 외계의 압박에서 자기를 구제하는 거의 자포자기적인 최후의 시도이다. 사디슴은 대상과 결합하려고 하지만 파괴성은 대상을 제거하려고 한다. 사디슴은 타인을 지배하여 약체화된 자기를 강화하려고 하지만 파괴성은 외계로부터의 위협을 모두 제거하여 자기를 강화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를 관찰하려는 사람은 파괴성이 도처에 대단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파괴성으로 의식되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사실상 무엇이든 파괴성을 호도하는 합리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 의무, 양심, 애국심 등이 지금까지 타인이나 자기를 파괴하기 위한 가면으로서 이용되어 왔으며, 현재도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파괴적인 경향도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특수한 상황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생명과 완전성, 또는 자기와 일체화되고 있는 관념에 대해 공격이 가해질 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기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파괴성은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히 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시하는 파괴성은 이 합리적인 - 또는 '반작용적'이라 불러도 좋다 - 적의가 아니라 인간 속에 계속 숨어 있어, 말하자면 기회만 있으면 언제라도 튀어나오려고 대기 상태에 있는 경향이다. 만일 파괴성을 나타내는 아무런 객관적인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사람도 어떤 종류의 합리화를 내세우겠지만). 그러나 파괴적인 충동의 합리화는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나 또는 사회집단 전체가 그 합리화에 참여하여, 그 집단의 성원에게는 그것이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파괴성의 대상이 무엇인가, 또 그 대상이 어떤 특수한 이유로 선정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즉, 파괴적인 충동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의 격정이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타인이 아무래도 파괴성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쉽게 그 대상이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때로는 신체적인 질병을 일으켜 자살까지도 불사한다. 파괴성은 참을 수 없는 무력감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개인이 자기와 비교해야 할 모든 대상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괴적인 경향이 인간의 행동에 있어 얼마나 놀라운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고독과 무력이라는 조건이 파괴성의 다른 두 원천인 불안과 삶의 장애에 달려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불안의 역할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물질적 또는 감정적인 중대한 이해관계에 대해 위협이 가해지면 불안이 생긴다. 그리고 파괴적인 경향이 이런 불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작용이 된다. 위협은 때에 따라서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파괴성은 그 특정한 사람들에게 향해진다. 또 위협은 끊임없는 불안 - 반드시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 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 당하고 있다는 기분에서 생긴다. 이런 종류의 끊임없는 불안은 고독하게 된 무력한 개인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내부에 파괴성을 축적시키는 또 하나의 원천이다. 이와 동일한 기본적인 상황에서 생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는 내가 방금 삶의 장애라고 부른 것이다. 고립되고 무력한 인간은 그 감각적, 감정적, 또 지적인 여러 가지 능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이런 능력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인 내적인 안전성과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내적인 장애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중산계급의 종교나 도덕 속에 일관해서 볼 수 있는 쾌락과 행복에 대한 문화적 금기에 의해 증대된다. 오늘날에 와서는 외적인 금기는 사실상 소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감각적인 쾌락을 의식적으로는 긍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장애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이 삶의 장애와 파괴성과의 관계라는 문제는 프로이트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의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견해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과 자기 보존의 추구가 인간행위의 두 가지 기본적인 동기라고 생각하고 있던 초기의 주장에서는 파괴적인 충동의 비중과 중요성을 경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에 파괴적인 경향이 성적인 경향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인간 속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적인 경향이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삶을 지향하며 다소나마 성의 리비도와 일치되는 충동과, 생명의 파괴 그 자체를 지양하는 파괴본능이다. 그는 후자가 성적인 에너지와 혼합하는 수도 있으며, 그런 때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 향해지는 수도 있고 외계의 사물에 향해지는 수도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또 파괴본능은 모든 생물체에 내제한 생물학적 성질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필연적이요, 불변적인 부분이라고 가정했다. 파괴본능의 가정은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에서 경시되었던 파괴적인 경향을 충분히 고려에 넣는 한 적당한 것이다. 그러나 파괴성의 정도가 개인에 의해, 또 사회집단에 의해 크게 변화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에 넣지 않고 오직 생물학적인 설명만으로 그치는 한 그것은 적당한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가정이 올바르다고 본다면, 파괴성의 정도는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펴본 바로는 그 반대이다. 파괴성의 비중은 우리와 같은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여러 개인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집단 사이에서도 결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예컨대, 유럽의 하층 중산계급 사람들이 그 성격 속에 지니고 있는 파괴성의 정도는 노동자 계급이나 상층계급에 있어서 보다도 훨씬 더 크다. 또 인류학적 연구는 타인에 대한 적의이건 자기 자신에 대한 적의이건, 특히 파괴성을 많이 가진 민족이 있는 반면에 파괴성이 눈에 띄게 결여된 민족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파괴성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하면 바로 이런 차이성을 관찰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며, 다음 올 변이의 원인이 파괴성의 정도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상세한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다루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나는 해답이 어느 방향에 있는 가를 암시해 두겠다. 개인 속에서 볼 수 있는 파괴성의 정도는 삶의 신장에 억압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저것 본능적 욕구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장애, 즉, 인간의 감각적, 감정적, 지적인 모든 능력의 자발적인 성장과 표현과 생존을 구한다. 만일 이 경향이 방해되면 삶을 구하는 에너지는 분해과정을 더듬어 파괴를 구하는 에너지로 변화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삶을 구하는 충동과 파괴를 구하는 충동은 독립된 요인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의존해 있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구하는 충동은 강해진다. 삶이 실현될수록 파괴적 충동은 약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폭발이다. ' 삶을 억압하는 이 개인적, 사회적 조건은 파괴에 대한 격정을 낳게 되며, 이 격정이 말하자면 저수지가 되어 특수한 적대적 경향 - 타인에 대해서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 -을 조장한다. 사회과정에 있어서 파괴성이 연출하는 동적인 역할을 이해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특수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종교개혁 시대의 중산계급에 널리 퍼져 있던 적의에 대해 말했다. 그 적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떤 종교적 사상, 특히 그 금욕적 정신 속에, 또 아무 죄도 없는 일부 사람들에게 즐겨 영원한 벌을 선고해 왔던 칼빈의 무자비한 신의 묘사 속에 나타나 있었다. 당시 또 그 후에도 중산계급은 그 적의를 주로 도덕적 의분을 가장하여 표현했다. 그것은 삶을 즐기는 힘이 있는 인간에 대한 강한 질투를 합리화한 것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하층 중산계급의 파괴성이 나치즘을 발흥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치즘은 이러한 파괴적인 추구에 호소하여 그것을 적에 대한 싸움에 이용했다. 하층 중산계급 속에서 볼 수 있는 파괴성의 근원은 지금까지 논해온 것처럼 개인의 고독과 성장의 억압이라는 일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상층계급이나 하층 계급보다 하층 중산계급에 있어 더 한층 절실한 것이었다. 제 3절 기계적 획일성 지금까지 논해 온 (도피의) 메카니즘에 있어서는, 개인이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 비교하여 느껴지는 무의미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의 개인적 전체성을 포기 하든가 또는 외계가 이미 위협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타인을 파괴하든가 하였다. 그밖에 도피의 메카니즘에는, 외계로부터 완전히 물러나 외계가 위협을 잃게 하는 방법 (어떤 정신병적인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자기를 심리적으로 확대하여 외계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는 방법) 이 있다. 이런 도피의 메카니즘은 개인적 심리에는 중요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다지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문제를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 대신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메카니즘을 논하기로 하겠다. 이러한 특수한 메카니즘은 현대사회에 있어 대부분의 정상인이 취하고 있는 해결방법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는 것이다. 즉,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퍼스낼리티를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가 된다. '나'와 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고독과 무력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이 메카니즘은 어떤 동물에서 볼 수 있는 보호색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런 동물들은 주위의 상태와 완전히 흡사해지므로 그 주위와의 구별이 힘들다.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의 수백만이라는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가 지불하는 대가는 비싼 것으로, 그것은 자기의 상실이다. 고독을 극복하는 '정상적인' 방법이 자동인형이 되는 것이라는 가정은 우리의 문화 속에 가장 널리 유포되고 있는 인간관과 모순된다. 우리의 대부분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뜻대로 행위하는 개인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틀림없이 이것은 근대의 개인주의의 주제에 대해 일반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각 개인도 가지는 '자기'이고, 자기의 사상, 감정, 소망은 '자기의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물론 우리들 중에는 진정한 개인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신념은 하나의 환상이다. 더구나 이 신념은 이런 사정의 원인인 여러 조건을 제거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위험한 환상이다. 우리가 여기서 취급하는 것은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을 통해 곧 명백해진다. 자기란 무엇인가? 단지 환상적으로만 자기 자신의 행위가 되는 행위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자발성이란 무엇인가? 독창적인 정신적 행위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것은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장에서는 감정과 사상이 외부로부터 초래되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감정과 사상처럼 경험되는가, 또 어떻게 감정과 사상이 억압되어 자기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가에 대해 해명하겠다. 여기서 취급한 문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장에서도 계속 논의될 것이다. 우선 먼저 '나는 느낀다'든가 '나는 생각한다' 든가 '나는 결정한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 경험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나는 생각한다'라고 할 때, 이것은 확실한 서술인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생각하는 가 안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하나의 구체적인 실험을 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최면술 실험을 주의해 보자. 여기에 피 실험자 A가 있다. 최면술사 B가 그를 최면 상태에 들게 하고는 온갖 암시를 준다. 즉, A가 최면에 깨었을 때 그가 이곳으로 가지고 왔다고 믿는 원고를 읽고 싶으리라는 것, 그 원고를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C가 그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할 것이며 C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리고 A는 이러한 모든 암시가 최면중 그에게 주어진 암시라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암시받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 A가 C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릴 하등의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A는 실제로 원고를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A는 눈을 뜨고 어떤 화제에 대해 잠시 말을 나누고 나서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원고를 썼던 일이 생각나는 구나. 읽어줄께'라고 말한다. 그는 찾아다녔으나 원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C가 가지고 갔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떠올라 C한테로 간다. C가 부정하자, 차츰 흥분하여 끝내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폭발시켜 원고를 훔쳤다면서 C을 직접 비난한다. 그러고는 C를 도둑이라고까지 몰아세운다. C가 평소 그 원고를 몹시 탐내고 있었으며, 그것을 가져가는데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다고까지 한다. 그는 단지 C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그 비난을 그럴 듯하게 하는 수많은 '합리화'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며, A는 그와 같은 것을 과거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때 그 방에 다른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하자. 그는 아무 의심도 없이 A가 지껄이고 있는 것은 A가 생각했거나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A의 비난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 즉 A가 생각하는 내용이 실제의 사건과 일치하는가 여부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보아온 오리는 A의 비난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A가 현재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는 일은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그의 머리에 주입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 도중에 들어온 사람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A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며, 그가 마하고 있는 것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A의 생각은 그에게 강제로 떠맡겨진 것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누가 옳은 지를 결정할 수가 없다. 모두 잘못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2대 1이니 다수 쪽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실험의 경위를 지켜본 우리로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새로 들어온 사람도 만약 다시 최면술 실험을 지켜본다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는 이 종류의 실험이 여러 사람에 대해 온갖 내용으로 수없이 되풀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최면술사는 날감자가 아주 맛있는 파인애플이라고 암시할 수있다. 그러면 피실험자는 파인애플을 먹을 때처럼 맛있게 날감자를 먹을 것이다. 또한 피실험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암시를 받게 되면 소경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는 평평하며 둥글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암시를 받으면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최면술, 특히 최면술을 건 후의 실험에서 증명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실험에서 밝혀지는 것은 우리가 사상이나 감정이나 소망, 그리고 또한 관능적 감각마저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느끼면서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사상이나 감정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근본적으로는 우리와는 무관하며 우리가 생각하거나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특수한 최면술 실험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로 피실험자는 무언가를 '결정'하고 있다. 즉, 원고를 읽고 싶어한다. 둘째로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즉, C가 원고를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셋째로 그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 즉, C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의 정신적 행위 - 의지. 사고, 감정의 충동 - 는 그 스스로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라는 것,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으로서, 오직 주관적으로만 '마치'자기의 것인 양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최면술에 걸려 있는 사이에 주어지지 않았던 생각도 표현한다. 즉, C가 원고를 훔쳤다는 그의 주장을 '설명하기'위한 '합리화'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은 단지 형식적인 뜻 이외에는 그 자신의 것은 아니다. 합리화는 의혹을 설명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선 의혹은 맨 처음에 있고, 합리화를 위한 생각은 단지 그 의혹의 감정을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 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즉, 그것은 참된 설명이 아니라 행위의 뒤에다 덧붙인 것이다. 우리가 최면술의 실험으로 시작한 것은 최면술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의 정신적 행위의 자발성을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행위는 어떤 특수한 상황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결코 최면술적인 상황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사고나 감정이나 의지의 내용이 외부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현저해서, 오히려 순수하고 고유한 정신적 행위가 예외이고 거짓 행위가 원칙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사고'의 위장된 성격은 의지나 감정에 있어서보다도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선, 순수한 사고와 거짓 사고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섬에 있다고 가정하자. 거기에는 어부들이 있고 도시에서 피서 온 사람들이 있다. 날씨가 어떻게 될 지 우리는 어부 중 한사람과 두 피서객에게 물어본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라디오의 일기예보를 이미 들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어볼 때까지 어부의 생각이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는 날씨에 대한 오랜 경험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부는 바람결이나 온도, 습기 같은 것이 일기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온갖 요인을 저마다의 의미에 따라 측정해서 확실한 판단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라디오의 일기예보를 상기하여 그것을 참고로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자기 자신의 의견이 앞서고, 거기에 라디오의 일기예보가 일치되는지 어떤지를 말할 것이다. 만일 틀린다면, 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근거를 특히 신중하기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점은, 그가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이 그의 의견이며 그의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 두 피서객 중의 한 사람은 날씨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고 또한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나로서는 모르겠군요, 라디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라고 대답한다. 둘째 사람은 그와는 다른 타입이다. 그는 실제로는 날씨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의'의견을 말해 주었다. 그의 의견은 라디오의 예보와 일치되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바람결이나 온도 등에 의해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람의 언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부의 언동과 똑같다. 그러나 좀더 파고들어가서 분석해 보면, 그는 라디오의 예보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는 날씨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가져야겠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다른 권위 있는 의견을 그저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 의견은 그 자신의 생각에서 도달된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제시한 이유가 그 자신의 의견의 전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를 음미해 보면, 만일 그가 미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그것은 실은 거짓 이유에 불과하며, 오직 그의 의견을 그 자신의 사고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는 스스로의 의견에 도달한 것같이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권위 있는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불과하다. 물론 날씨에 대해서 그가 옳고 어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은 것은 '그'의 의견은 아닌데 반해 어부는 실제로 '그 자신의' 의견에 있어서 실수한 것일 뿐이다. 동일한 현상은 어떤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 가령 정치에 대한 의견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일반 신문독자에게 어떤 정치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라. 그는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정확도가 높거나 낮거나 그것을 '그'의 의견으로서 대답할 것이다. 더우기-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인 점이지만-그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작은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거기서는 정치적 의견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엄격한 아버지가 항상 지니고 있는 권위에 의해 지배된 것일 것이다. 또 다른 독자의 의견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생각'은 본질적으로 겉핥기식으로서의 경험, 욕구 및 지식의 자연적인 결합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미적 판단에서도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박물관에 가서 렘브란트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분석해 보면, 그는 그 그림에 대해 아무런 특별한 내적 반응도 느끼고 있지 않으며, 그가 그 그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그림이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악의 평가에 있어서도, 또한 지각의 작용 그 자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많은 사람들은 유명한 풍경을 보면서, 실제로는 그림엽서에서 여러 번 본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 '그들'은 풍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은 그림 엽서의 그림이다. 혹은 눈앞에서 직접 겪은 어떤 사건에 있어서도 그들이 기대하는 신문기사의 말로 그 상황을 보거나 듣곤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직면한 경험 또는 그들이 참석한 예술적인 모임 및 정치적 회합이 그 신문기사를 다시 읽음으로써 비로소 현실이 된다.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보통 어린 시절에 시작된다. 가령 어느 다섯 살짜리 소녀는 어머니가 입으로는 애정이니 상냥스러움이니 하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냉혹하고 이기적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간파함으로써, 더욱 심한 경우로는 어머니가 늘 높은 도덕적인 기준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아챔으로써 어머니의 불성실을 의식할 것이다. 소녀는 모순을 느낀다. 그녀의 정의감과 진리감은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소녀는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아버지가 몸이 약해서 그녀가 의지할 상대가 더 이상 없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비판의 눈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소녀는 어머니의 불성실이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될 것이다. 비판적인 사고력을 계속 가질 가망이 없고 사뭇 위험한 것으로 보임으로써 소녀는 그러한 능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마침내 소녀는 어느 사이에 어머니는 성실하고 정숙한 여성이며 양친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마치 그녀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쉽게 받아들이려고 할 것이다. 거짓 사고에 대하여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었거니와, 어느 경우에나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자기의 사고의 결과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지 그 생각이 정당한가 부당한가는 아니다. 일기예보를 말하는 어부의 경우에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그의'생각은 때로는 잘못일 때도 있을 것이며, 외부로부터 주어진 생각을 그저 되풀이하는 데 불과한 사람의 의견이 정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거짓 사고가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거짓 성격은 비논리적 요소 속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어떤 행위나 감정이 실제로는 비합리적, 현실적인 기반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합리화를 연구하면 알게 된다. 합리화는 그 자신 논리적, 합리적인 일도 흔히 있다. 그리고 그런 때, 비합리성은 행위의 참된 동기처럼 위장된 동기가 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 속에 나타난다. 비합리적인 합리화의 예는 흔히 알려져 있는 농담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이웃 사람으로부터 유리병을 빈 사람이 그것을 깨고 만다. 그리고 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째로 이미 당신에게 돌려주었소. 둘째로 빈 기억이 없소. 셋째로 빌었을 때 이미 깨어져 있었소'라고. '합리적'인 합리화의 예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다. 즉, 경제적으로 곤란한 A가 친척인 B에게 돈을 조금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B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돈을 빌려주는 것은 A의 무책임한 의타성의 버릇을 조장할 뿐이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논리는 건전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A는 어떠한 사정이건 B에게 돈을 주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는 자기가 B의 번영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인색한 까닭이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는 일의 논리성을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한 인간 속에 작용하고 있는 심리적인 동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한 점은 무엇이 생각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되고 있는 가라는 점이다. 능동적인 사고에서 생겨나는 사상이 항상 새로우며 독창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전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의 바깥 세계이건 안의 세계이건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수단으로서 사고를 이용했다는 의미에서이다. 합리화에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발견과 통하는 성질이 결여되어 있다. 즉, 그것은 오직 자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적 편견을 굳히는 것뿐이다.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소망을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이다. 사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 속에 발생되는 순순한 감정과, 자기로서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자기의 것이 아닌 거짓 감정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 우리의 감정이 거짓이 되는 전형적인 한 예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보자. 어떤 회합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을 관찰해 보자. 그는 명랑하게 웃으면서 친숙한 듯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녕 행복스럽고 즐거워 보인다. 작별할 때 친숙하게 웃음 띤 얼굴을 보이며 유쾌한 저녁시간을 보냈다고 인사한다. 문이 뒤로 닫힌다-바로 이때야말로 그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때이다. 그의 얼굴에 갑작스레 변화가 나타난다. 웃음은 어디론지 사라진다. 물론 그것은 웃기는 상대도 없이 혼자가 되었으므로 당연하다. 지금 내가 문제삼고 있는 변화는 오직 웃음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그의 얼굴에는 거의 절망이라고 할 만한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러한 슬픈 표정은 잠시 동안밖에는 계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평소의 가면을 쓴 평정이 나타난다. 그는 차를 타고, 그 날 밤의 일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좋은 인상을 주었는지의 여부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성공이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모임 동안 '그'는 과연 행복하고 즐거웠을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슬픔과 절망의 희미한 그림자는 별로 의미 없는, 아주 일시적인 반작용에 불과했을까.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명랑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던가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있다. 그 날 밤, 그는 군대로 끌려가서 전쟁터에 있는 꿈을 꾼다. 그는 적의 배후로 해서 적의 사령부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독일인과 구별할 수 없는 장교복을 입고 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독일 장교들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사령부가 매우 아늑하고 누구나 자기에게 친절한 데 놀란다. 그러나 그는 스파이임이 탄로나지나 않을까 하여 전전긍긍한다. 그가 특히 호감을 느끼고 있는 한 젊은 사관이 그에게 다가와서 '당신이 누군지 나는 알고 있소. 달아날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소. 농담을 하면서 장교들을 많이 웃겨서 그들이 당신을 주목하지 않게 하는 일이오'라고 말한다. 그는 이 충고를 몹시 고맙게 생각하여 농담을 하고는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은 농담의 도가 지나쳐 다른 장교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 그들의 의심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의 농담은 점점 더 엉망이 된다. 이윽고 공포의 감정으로 가득 하서 이제 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모두 그의 뒤를 쫓아온다. 그 때 장면이 바뀐다. 그는 전차 속에 앉아 있었으며, 그 전차는 마침내 그의 집 앞에 멈춘다. 그는 사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 꿈의 개개의 요소와 관련하여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음날 아침에 듣는다고 가정하자. 여기서는 오직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 특히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아주 미미한 연상밖에는 말하지 않는다. 독일군의 제복은 전 날밤의 모임에 딱딱한 독일어 악센트로 이야기하는 한 손님이 있었던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때문에 불쾌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그를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일을 두루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 모임에서 독일어 악센트로 말하던 사람이 자기를 바보 취급했다는 것, 버릇없이 자기의 말을 비웃은 것처럼 느낀 것을 다시 생각한다. 사령부였던 아늑한 방을 생각하니, 그것은 그가 전날 밤의 모임에 앉아 있었던 방과 비슷하다는 것, 그러나 그곳의 창문은 그가 지난날 시험에 실패한 일이 있는 방의 창문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연상에 놀라서 더욱 기억을 되살리니, 그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자기가 어떤 인상을 줄 것인가 하고 걱정했던 일이 생각난다. 왜냐하면, 손님 가운데 그가 관심을 끌려고 생각하는 소녀의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주인은 어떤 유력한 사람과 통하는 사람이며, 그 유력한 사람의 의견에 그의 사업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는 유력한 사람을 몹시 혐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력한 사람에게 친애의 정을 표시하는 것을 몹시 굴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집의 주인에게도 거의 의식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역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연상은, 때마침 대머리에 관계된 우스운 사건을 이야기했을 때, 공교롭게도 그 집 주인이 대머리에 가까웠으므로 기분이 상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전차는 이상하게 아무데도 궤도가 없었다.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전차는 어릴 때 학교 가는 길에 탔었다는 생각이 나서 더욱 사소한 일까지 알게 된다. 즉, 그는 전차의 운전대에 타고 있었으며, 전차를 운전하는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차는 집으로 돌아갈 때 탄 자동차의 대신이며, 집으로 돌아간 것은 학교에서 돌아온 것을 생각게 한 것이 분명했다. 꿈을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꿈이나 거기에 따르는 연상의 극히 일부로서, 그 사람의 인격구조나 과거 및 재현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 의해서 전날 밤 모임에서 가졌던 그의 실제 기분이 명백해진다. 그는 자기가 만들려고 한 인상을 주는데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또한 자기를 비웃거나 충분히 호감을 갖지 않았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꿈에 의해서 그의 명랑성은 불안과 노여움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며, 동시에 그가 분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유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명랑성은 모두 가면이었다. 그 명랑성은 그 자신 속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일, 즉 공포와 분노를 숨겨버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상태는 모두 불안해졌다. 그는 적의 진영에 잠입하여 줄곧 탄로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는 스파이처럼 느끼고 있었다. 모임 장소를 떠날 때 그에게서 보였던 슬픔과 절망의 표정이 이제야 뚜렷하게 설명된다. 그때의 그의 얼굴은 실제로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꿈속에서는 그 감정이 그의 기분이 향해지는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대하는 일은 없으나, 극적으로 또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 사람은 신경증 환자도 아니고 최면술의 주문에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다. 인정받고 싶다는 그의 불안과 욕구는 현대인이 광범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랑성이 '자기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예상했던 대로 느끼는 일에 익숙해 있으므로, 어떤 것을 '잘못'느끼는 일 같은 것은 오히려 예외가 된다. 사고나 감정에 대해서 타당한 것은 또한 의지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외적인 힘에 의해 뚜렷하게 강제되지 않는 한, 그들의 결단은 그들의 것이며, 무엇인가를 바랄 때 그것을 바라는 것은 자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하나의 큰 환상이다. 우리의 결단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시사되는 것이다. 결단을 내린 것이 자기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고독의 두려움이나 우리의 생명, 자유, 안락에 대한 보다 더 직접적인 위협에 몰려서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데 불과하다. 아이들에게 매일 학교에 가고 싶으냐 어떠냐 하고 물어보면 '물론 가고싶다'라고 대답하지만, 과연 그 대답은 진실일까. 대부분의 경우, 결코 그렇지는 않다. 아이들은 때로는 정말 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교에 가는 대신 뛰어놀거나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한다. '매일 학교에 가고 싶다'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규칙적인 학교의 수업에 대한 혐오를 억압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은 몹시 강해서 어쩔 수 없이 가고 있다는 기분을 눌러버리고 만다. 어떤 때는 정말 학교에 가고 싶고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의식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훨씬 행복한 편일 것이다. 그러나 의무감의 압박이 보다 더 강하면, 남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는 그대로를 '자신'도 바라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의무나 구속력에 얽매여 의식적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자신'이 정말 원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 남자가 (혹은 이런 처지의 한 여자가 ) 어떤 여자와 결혼할 때, 실제로는 싫더라도 결혼으로 끌고 가는 일련의 사태에 묶여서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을 스스로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결혼하기까지는 '자신'이 결혼을 바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최초의 - 오히려 뒤늦은 - 징표는 결혼 당일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혀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몰린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분은 극히 잠시 동안밖에는 계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결혼하는 것이 그의 의사냐 아니냐는 질문에 확실히 그의 의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더욱 많은 예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결단을 내리거나 무언가를 바라거나 할 때, 실제로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내적, 외적 압력에 따르고 있는 데 불과하다. 사실 인간의 결단이라는 현상을 관찰하면, 그것은 습관이나 의무 또는 단순한 압력에 따르고 있는데 불과한데도 그것을 '스스로의'결단이라고 보는 잘못이 얼마나 광범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독창적인' 결단이 개인적인 결단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다. 나는 또 하나의 거짓 의사의 경우에 대해 상세한 예를 덧붙이려 한다. 그것은 전혀 신경증적인 징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분석에서 때때로 관찰되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예를 다시 덧붙이는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경우는 이 책에서 주로 문제삼고 있는 넓은 문화적인 산물과는 관계가 없으나, 무의식적인 힘의 작용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는 물론 이미 막연하게 제시되고는 있으나, 좀더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억압이 거짓 행위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다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억압은 대개 신경증적인 행동이나 꿈 같은 것에 있어 억압된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 하는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모든 억압은 자아의 참다운 부분을 제거하고, 억압되어 있는 감정을 거짓 감정으로 대치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제시하려고 하는 예는 22세의 의학도의 경우이다. 그는 자기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들과의 관계도 정상이다. 그는 가끔 가벼운 권태를 느껴 인생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은 안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유독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이유는 이론적인 것으로, 그는 정신병 의사가 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단 하나의 고민은 의학적인 분야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장애이다. 그는 책에서 읽은 것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며, 강의시간에 심한 피로를 느껴 시험성적이 별로 좋지 않다. 다른 주제에서는 뛰어나게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더욱 고민하고 있다. 자신이 의학 공부를 원한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의학을 수학할 만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때때로 아주 강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몇 주일에 걸친 분석이 끝난 뒤, 그는 그가 꾼 한 꿈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기가 세운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약간 우월한 기분으로 다른 빌딩을 돌아보고 있다. 갑자기 마천루가 무너져 그는 그 밑에 깔린다. 그를 구출하려고 사람들이 붕괴된 건물을 치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가 중상을 입고 있으며, 의사가 곧 올 것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의사가 올 때까지 몹시 오랜 기간을 기다리게 된다. 이윽고 의사가 왔을 때, 의사는 도구를 잊어버리고 온 것을 깨닫게 되어 그를 구할 수가 없다. 순간, 의사에 대해 심한 노여움을 느낀다. 별안간 그는 벌떡 일어서서, 자기가 조금도 부상당하지 않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의사를 비웃는다. 그때 눈이 떠진다. 그는 이 꿈에 대해 많이 연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런 만큼 더욱더 중요한 연상이 있다. 즉, 자기가 세운 마천루에 관련하여 자기가 언제나 건축에 비상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문득 생각해 낸다. 어렸을 때, 그는 꽤 오랫동안 집짓기 놀이를 즐겨했다. 그리고 17세때 건축가가 되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아버지한테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친절하게 '물론 너의 직업은 네가 자유로이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건축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어린애같은 희망의 잔재처럼 생각되므로, 나는 의학공부를 하기 바란다.' 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여 그 뒤로 이 문제는 두 번 다시 이야기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연상은 의사에 대해서는 희미해서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꿈의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분석의 시간을 여느 때의 시간에서 변경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겼다. 그는 반대하지 않고 동의했으나, 실제로는 몹시 성이 나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분석자가 제멋대로라고 비난하고, 끝내는 '네, 결국 나는 내가 바라는 일은 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분노와, 이 말에 스스로 놀랐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는 분석적인 일에 대해 조금의 적대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에 그는 또 꿈을 꾸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밖에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당한다. 그는 의사가 되어 아버지를 돌본다. 그는 아버지를 진찰하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히 마비된 듯하여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그는 공포에 질려서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이 몇 년 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생각이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키지 않는 투로 이야기했다. 때로는 자기에게 남겨질 재산, 심지어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는 이러한 망상이 나타나면 곧 그것을 억압했으므로 더 이상 진전되는 일은 없었다. 이 꿈과 앞에서 말한 꿈을 비교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의사는 충분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한다. 최초의 꿈에서 의사의 무능에 대한 뚜렷한 분노와 조소의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자, 그는 의사가 환자를 구하지 못한 경우를 듣거나 책에서 읽었을 때, 그 당시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어떤 우월감을 느꼈던 것을 상기했다. 분석을 더욱 진행시키자, 이제까지 억압되어 온 다른 일들이 나타났다. 그는 놀랍게도 아버지에 대해서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일, 더욱이 의사로서의 그의 무력감은 그의 생활 전체에 걸쳐져 있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무력감의 일부인 것을 의식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질서정연하게 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심층에는 체념의 감정이 차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기가 자신의 바라는 일을 할 수 없는 인간이며, 남의 기대대로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의식한다. 그는 더욱이 보다 더 뚜렷하게 실제로는 결코 의사가 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자기에게 무능감을 준 것은 수동적인 저항의 표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은 현실적 욕구의 억압에 대해, 또한 자신의 욕구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행해지는 타인의 기대의 수용에 대한 전형적인 예다. 여기서도 본래의 욕구가 거짓 욕구로 대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나 감정이나 의사에 대한 본래의 행위가 거짓 행위로 대치되는 것은 드디어는 본래의 자아가 거짓자아로 대치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본래의 자아란 정신적인 여러 활동의 창조자인 자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짓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는 역할을 대표하여, 자기 이름 아래 그것을 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많은 역할을 다하고, 주관적으로는 저마다의 역할에 있어서 자기는 '자기'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러한 모든 역할에 있어서 타인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체이며,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더라도) 본래의 자기는 거짓 자아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어 있는 것이다. 가끔 꿈이나 환상에서, 혹은 술을 마셨을 때에 어떤 본래적인 자기가 나타나서 그가 몇 해나 경험하지 않았던 것 같은 감정이나 부끄럽게 생각하곤 해서 억압해 온 좋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그것이 그의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이지만,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조소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억압해 온 것이다. 자아의 상실과 거짓자아의 대치는 개인을 심한 불안상태로 내던진다. 본질적으로는 타인의 기대의 반영이며, 어느 정도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회의가 따라다닌다. 이와 같은 동일성의 상실에서 생기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순응을 강요당하고, 타인에 의해서 줄곧 인정받고 승인됨으로써 자기의 동일성을 구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만일 타인의 기대대로 행동한다면 적어도 타인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타인이 알고있다면, 그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도 알게 될 것이다. 근대사회에 있어서 개인의 자동기계화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무력함과 불안정을 증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안전을 부여해주고 또 그 의혹에서 그를 구해 주는 새로운 권위에 쉽사리 복종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권위가 독일에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진 특수한 조건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자, 즉, 나치 운동의 핵심 - 하층 중산계급 - 에 있어서 권위주의의 메카니즘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 고유의 데모크라시에 있어서의 문화상태를 고려하면서 자동기계화의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자.